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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의 혁명 2011-07-19
0.5㎝의 혁명 2011-07-19 15:41:52 read : 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설교 전에 기분 상한 일이 있었을 때에는 어김없이 얼굴에 나타난다. 얼굴은 얼의 꼴, 즉 정신의 모양새이다. 그러므로 얼굴은 그냥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인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간판이다. 현대인들은 얼이 아닌 꼴만 바꾸려고 한다. 먼저 얼이 바뀌어야 꼴도 바뀐다. 미국 목사들의 설교에는 반드시 한두 가지의 조크가 들어간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한국 목사들의 경우 나를 비롯해서 너무 경직되고 근엄한 편이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유머가 신앙으로 인도하는 서곡이요, 웃음은 기도의 시작이라고 했다. 웃을 때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이 녹으며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마음의 문이 열려진다. 양쪽 입술꼬리가 0.5㎝만 살짝 올라가도 얼굴이 달라진다. 진정한 혁명은 영혼이 체화된 얼굴에서부터 시작된다.
1%의 확률 2011-05-13
1%의 확률 2011-05-13 15:41:48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세상에서는 1%의 확률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기적은 그 1%에서 일어납니다. 수술에서 회복 확률을 10%라고 볼 때 사람들은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그 10% 확률은 굉장한 확률입니다. 물은 1도만 부족해도 끊지 않습니다. 불과 1도 차이인데도 물은 그저 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때 1도만 높이면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고 에너지로 변합니다. 1도 차이로 증기가 만들어져 터빈을 돌려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1%의 확률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1% 안에서 행동하십니다. 제자의 삶은 그 1%에 목숨 걸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를 믿고 기도할 때 응답이 주어집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103살 할머니 25년 노인수발 2001-11-24 12:10:01 read : 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33) 지난 25년 간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돌보아 온 올해 103살의 할머니가 최근 뉴욕의 한 지역방송이 뽑는 '이번 주의 뉴욕인'으로 선정되어 눈
103살 할머니 25년 노인수발 2001-11-24 12:10:01 read : 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33) 지난 25년 간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돌보아 온 올해 103살의 할머니가 최근 뉴욕의 한 지역방송이 뽑는 '이번 주의 뉴욕인'으로 선정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틸리 와이즈버그라는 이름을 가진 이 할머니는 뉴욕 브래너 양로원에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보행과 식사를 돕는 육체적인 봉사 외에도 틈틈이 이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등 외로운 노인들의 벗이 되어왔다. 특히 틸리 할머니가 돌보고 있는 노인 중에는 자신보다 많게는 몇십 살 어린 노인들도 포함되어 있어 틸리 할머니의 노익장이 돋보인다. 양로원에 거주하는 레나 할머니는 틸리 할머니에게 "내일도 날 돌보러 나올 수 있겠느냐?"며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해 보지만 틸리 할머니는 "당연히 나와야지."라며 자신 있게 말한다. 건강 비결에 대해 틸리 할머니는 "장수의 비밀은 마음에 있다. 성내거나 시기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욕심을 버리라고 권고한다. 틸리 할머니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정도로 건강하다. 지난 5년 간 '이번 주의 뉴욕인'을 선정하고 있는 뉴욕의 지역방송은 "틸리 할머니의 지속적인 봉사활동과 희망찬 웃음이 뉴욕인들의 귀감이 됐다."고 선정 사유를 밝혔다. 적 용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사랑과 함께 이웃 사랑을 큰 계명으로 지켜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계명이다. 우리 자신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 돕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겠다. 출 처 한겨레신문, 2000. 4. 12.
10년 후 미래의 모습 2001-11-24 11:56:56 read : 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정보통신의 혁명이 가져올 10년 후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지금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이동통신의 미래상을 살펴보자.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자료에
10년 후 미래의 모습 2001-11-24 11:56:56 read : 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정보통신의 혁명이 가져올 10년 후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지금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이동통신의 미래상을 살펴보자.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서비스가 시작될 IMT@2000은 2010년 전세계 인구 14명 중 한 명에 해당하는 5억의 인구가 이 서비스를 이용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지난 1876년 벨이 전화를 발명한 뒤 100여 년 간 쌓아온 통신기술의 결정판으로 볼 수 있는 IMT@2000은 사막이나 바다 한가운데서도 서로 얼굴을 보면서 통화를 가능하게 한다. 초당 데이터 전송속도가 2MB(한글 12만 5천자)에 달해 지금의 휴대폰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각종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외국에서 실시간으로 국내 증권사를 통해 증권거래를 할 수 있고, 바다 한가운데서 조난을 당하더라도 더 이상 통신두절이라는 단어는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인터넷의 발전상도 이에 못지않다. 컴퓨터가 이뤄낸 인터넷 세상은 지금 '시공의 벽'을 점차 없애버리고 있다. 구리선을 대체하게 될 레이저 기술은 다른 컴퓨터에 저장된 수천 권 분량의 그림과 글을 모두 가져오는 데 1초도 채 걸리지 않게 할 수 있다. 적 용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도구로서의 기능으로만 유효하다. 그것이 인간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아직은 이르다. 더구나 인간을 정신적 혹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자로 간주할 때,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 존재로 환원될 수 없다. 도구적인 것은 항상 중립적인 가치를 갖는다. 즉, 그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에 의하여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정보혁명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출 처 스포츠조선, 2000. 3. 20.
10분 동안의 묵상 2002-05-14 11:23:16 read : 1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언젠가 놀란드 헤이즈라고 하는 흑인 가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독창회에 모여든 사 람은 모두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이즈가 노래를 부르려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흑인의 노래는 들을 수 없다 ! 검둥이 노래를 집어치워라 !"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왔습니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 까 ? 가수 자신
10분 동안의 묵상 2002-05-14 11:23:16 read : 1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언젠가 놀란드 헤이즈라고 하는 흑인 가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독창회에 모여든 사 람은 모두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이즈가 노래를 부르려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흑인의 노래는 들을 수 없다 ! 검둥이 노래를 집어치워라 !"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왔습니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 까 ? 가수 자신도 이에 맞서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그렇게 맞받아 욕을 하고 돌아서는데 그의 앞을 가로막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모욕을 다 당 하시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헤이즈는 그 환상을 보고 청중 쪽을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고개를 숙이 고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소란스럽던 청중 도 그 모습을 보고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렇게 10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헤이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청중을 뜨겁게 사로잡는 훌륭한 독창회가 되었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박수소리가 우뢰처럼 터져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습 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흑인 가수가 가졌던 10분 동안의 묵상은 말할수 없이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습니다.
10분 동안의 묵상 2002-05-14 11:23:16 read : 10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언젠가 놀란드 헤이즈라고 하는 흑인 가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독창회에 모여든 사 람은 모두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이즈가 노래를 부르려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흑인의 노래는 들을 수 없다 ! 검둥이 노래를 집어치워라 !"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왔습니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 까 ? 가수 자신
10분 동안의 묵상 2002-05-14 11:23:16 read : 10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언젠가 놀란드 헤이즈라고 하는 흑인 가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독창회에 모여든 사 람은 모두 백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이즈가 노래를 부르려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흑인의 노래는 들을 수 없다 ! 검둥이 노래를 집어치워라 !"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왔습니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입니 까 ? 가수 자신도 이에 맞서 욕설을 내뱉었습니다. 그렇게 맞받아 욕을 하고 돌아서는데 그의 앞을 가로막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모욕을 다 당 하시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헤이즈는 그 환상을 보고 청중 쪽을 향하여 돌아섰습니다. 고개를 숙이 고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소란스럽던 청중 도 그 모습을 보고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렇게 10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헤이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청중을 뜨겁게 사로잡는 훌륭한 독창회가 되었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박수소리가 우뢰처럼 터져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습 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흑인 가수가 가졌던 10분 동안의 묵상은 말할수 없이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습니다.
10세 부부 2001-09-14 13:22:18 read : 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작년 가을 미국에서 결혼한 10세 신랑 11세 신부의 꼬마 부부가 반 년도 못살고 이혼 법정으로까지 비화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열살 안팎 의 최연소 부부로서 현대 생활에 그들 금슬의 유지 가부, 결혼의 최저 한계 연령이 몇살이냐의 시금석으로 주목을 끌어왔던 백년해로인데 반년 배필로 종을 친 것이다.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가 목수
10세 부부 2001-09-14 13:22:18 read : 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작년 가을 미국에서 결혼한 10세 신랑 11세 신부의 꼬마 부부가 반 년도 못살고 이혼 법정으로까지 비화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열살 안팎 의 최연소 부부로서 현대 생활에 그들 금슬의 유지 가부, 결혼의 최저 한계 연령이 몇살이냐의 시금석으로 주목을 끌어왔던 백년해로인데 반년 배필로 종을 친 것이다.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가 목수 요셉과 결혼한 것은 14세 때였다. 17세기만 해도 유태인 신랑은 10세 미만이 대부분이요 신 부는 그보다 어렸다. 힌두 문화권에서도 장가나 시집을 못가고 죽으면 3세 조상까지 소급하여 지옥에 떨어진다 하였다. 결혼 안하고 15세를 넘긴 여자란 15명에 1명꼴이라는 20세기 초의 통계가 있다. 간디 부인도 13세에 결혼했다. 유럽의 관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로마법에도 여자의 결혼 하한 연령은 12세였다. 프랑스 혁명때 처형 당한 마리 앙트와넷 왕비도 14세에 시집갔었다. 한국의 조혼 역사도 유구하다. 남다여과의 고구려에서는 10세 미만 에 데릴사위로 처갓집 뒤켠에 지어놓은 서옥(사위의 집)에 들어가 아들 딸 낳을 때까지 반드시 노동을 제공하고서야 겨우 아내를 얻을 수 있었 다. 고려시대의 조혼은 송나라나 원나라로부터의 혹심한 공녀요구가 원 흉이다. 공녀로 요구하는 나이는 13세에서 16세 사이였다. 그에 해당된 딸 들은 시집을 갈 수 없게끔 나라에서 금혼령이 내리기에 그 나이가 되기 전에 여의려든다. 10세 신부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조선조 세종때 고약해의 상소에 의하면 중국 황제는 10세 소녀만을 구하니 나어린 철부지들이 부모의 슬하를 떠나 이역만리 중국땅에서 원 한에 사무쳐 그 원풍으로 날씨가 가문다고 했다. 그런데다 왕실결혼을 앞둔 규수간택으로 금혼령이 겹치기도 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왕실에서는 12세에 결혼하고 있고 세종도 12세때 후궁을 맞아 들이고 있다. 그래서 그 이전에 여의려든다. 부모가 늙었 다는 등의 조건부로 10세 미만의 결혼이 허락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강보혼이라 하여 가문 사이에 강보에 싸인 젖아기적에 혼인을 약속하기 도 한다. 지복혼이라 하여 뱃속 아이의 아버지들끼리 혼약하여 그 약속에 얽 매인 인생 유전이 고전 소설의 소재로 곧잘 다루어져 왔다. 동서고금의 조혼은 사회적 결혼이지 인간적 결혼은 아니었다. 한데 사회적 강요가 배제된 이번의 조혼 실험도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119 구급대 2001-11-29 19:19:53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 사람이 나를 섬길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요한복음 12 : 26) 중풍으로 손조차 쓸 수 없는 할머니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목욕을 씻기는 119 구급대원이 있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이곳에서 '사랑의 목욕'
119 구급대 2001-11-29 19:19:53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 사람이 나를 섬길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요한복음 12 : 26) 중풍으로 손조차 쓸 수 없는 할머니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목욕을 씻기는 119 구급대원이 있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이곳에서 '사랑의 목욕'봉사를 하고 있는 도봉구 주민과 도봉 소방서 소방대원들이 그들이다. '사랑의 목욕'을 하는 날이면 소방대원들은 아침부터 거동이 불편한 장애 노인들과 어린이 등 27명을 집에서 복지관까지 데려오고 자원봉사자들은 목욕까지 시켜준다. 2년 가까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정'씨는 누구보다 장애인들의 고충을 안다고 말하며 자신도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10년동안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119구급대원들과 함께 도봉구에 사는 자원봉사 주부 6명은 따뜻한 손길로 몸을 가누지 못한 장애인들을 씻겨주며 이웃에게 섬김을 실천하고 있다. 도봉소방서 구급대장인 이창식씨는 "주변에는 이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이 많이 있다고 말하면서 사회전체의 관심이 필요하다" 고 주장했다. 소방대원들은 장애인들의 혈압과 혈당점검, 재활운동, 이미용도 돕고 있다. 또 장난감인형, 도서 등을 모아서 장애 아동이나 소년소녀 가장에게 빌려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적 용 우리 사회에서 섬김을 필요로 하는 많은 곳이 있고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인생의 문제가 생겼을 때 영혼을 구하는 119대원은 과연 누가 되어야 하겠는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생기는 위급한 일은 119구급대에게 연락을 해야 하지만, 내적인 영혼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중재로 영혼의 119하나님에게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음을 알고 다이얼을 돌려야 하겠다. 출 처 대한매일신문, 1999. 3. 3.
1440만원 2002-05-15 17:40:02 read : 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440만원 어떤 사람이 은행으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당신 앞으로 어떤 분이 1440만원을 예금해놓았습니다.그 돈은 반 드시 오늘 다 쓰실 수 있으나 유익하게 쓰셔야 합니다” 이 사람은 어리둥절하며 그 돈을 쓰지 못했다.그런데 이튿날 또 전화가 걸려왔다. “1440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그 돈을 쓰시면 당신 것입니다.그런데 어제 예금
1440만원 2002-05-15 17:40:02 read : 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440만원 어떤 사람이 은행으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당신 앞으로 어떤 분이 1440만원을 예금해놓았습니다.그 돈은 반 드시 오늘 다 쓰실 수 있으나 유익하게 쓰셔야 합니다” 이 사람은 어리둥절하며 그 돈을 쓰지 못했다.그런데 이튿날 또 전화가 걸려왔다. “1440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그 돈을 쓰시면 당신 것입니다.그런데 어제 예금된 돈은 쓰지 않았으므로 주인이 도로 찾아 갔습니다” 그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 돈을 찾아 ‘기분이나 한번 내보자’며 기분좋게 써버렸다.그 이튿날 아침에도 전화가 걸려왔 고 이 일은 매일 반복됐다.이 사람은 매일 이 돈을 쓰면서 기분은 좋았지만 마음속에 자꾸만 불안감이 싹텄다.“어느 날 갑자기 이 일이 멈추어지거나 혹시 무엇을 요구하면 어쩌지?” 공평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루 24시간 1440분을 주셨다.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에게 주신 시간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다.“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마 25:19)
17살 순교 여고생 미 전역 추모 물결 2001-11-29 07:28:38 read : 1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찌니라. " (출애굽기22:20)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때 종교적 신념을 지키다 숨진 캐시 버널 양을 추모하는 물결이 미국 전역에 일고 있다. 버널 양은 지난 4월 20일 콜럼바인 고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이 학교 학생 두 명이 총
17살 순교 여고생 미 전역 추모 물결 2001-11-29 07:28:38 read : 14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찌니라. " (출애굽기22:20)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때 종교적 신념을 지키다 숨진 캐시 버널 양을 추모하는 물결이 미국 전역에 일고 있다. 버널 양은 지난 4월 20일 콜럼바인 고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이 학교 학생 두 명이 총기를 난사, 교우와 교사 13명을 살해할 때 희생됐다. 그녀는 범인 중 한 명이 "하나님을 믿느냐" 고 물은데 대해 "그렇다" 고 대답한 직후 총격에 숨졌다. 지난달 31일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서 열린 집회에는 10대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250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그녀가 최후로 남긴 말 '그래요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를 연호 했다. 이같은 집회는 미국 전역에서 열리기로 돼 있다. 버널 양이 숨진 뒤 기독교 방송과 교회의 설교에서는 그녀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녀를 추모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생겼다. 그녀의 사이트엔 그녀의 생애와 함께 좋아했던 노래, 추모곡, 헌시 등이 올려져 있다. 플로리다 집회를 조직한 제임스 콕스 목사는 "요즘 젊은이들은 신앙의 대상을 갈구하고 있다"며 "버널 양의 희생이 던진 메시지가 이렇게 확산될 줄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고 말했다. 적 용 콜로라도에서 발생한 학생에 의한 총격 사건은 미국과 전 세계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귀감이 될 만한 일이 그 총격 사건속에서 벌어졌다. 범인 중 한 명이 버널 양에게 "하나님을 믿느냐"는 질문에 담대하게 '예스'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런 대답이 나온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다는 증거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범인이 듣고 싶어하는 답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까지 믿음을 지킨 이 여학생에게서 진정 신앙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발견한다. 그녀에게 돌려지는 찬사의 대가는 그녀의 고결한 희생 때문이다. 출 처 국민일보. 1999.6.2.
17세 아들의 '통곡의 효심' 2001-11-26 19:12:27 read : 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의 길리라 (출애굽기 20:12) 효상군의 아버지 아하주 씨(44)가 경기도 안산시에서 벌이던 스포츠용품사업이 IMF파고에 떠밀려 끝내 부도를 맞은 것은 98년. 집마저 경매에 들어가 월세 집을 전전하며 어머니(45)의 공공근로로 어려운 생활을
17세 아들의 '통곡의 효심' 2001-11-26 19:12:27 read : 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의 길리라 (출애굽기 20:12) 효상군의 아버지 아하주 씨(44)가 경기도 안산시에서 벌이던 스포츠용품사업이 IMF파고에 떠밀려 끝내 부도를 맞은 것은 98년. 집마저 경매에 들어가 월세 집을 전전하며 어머니(45)의 공공근로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 야 했지만 이들에게 더 큰 걱정은 사업이 실패하면서 급속히 악화된 아버지의 간경화증이었다. 급기야 지난해 말 입원한 이씨에게 병원 측은 누군가의 간을 이식받지 못하면 6개월을 넘기기 힘들다는 진단을 내렸다. 일하러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학교를 빠져가면서까지 아버지를 간호하던 효상군은 의사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내 간을 이식해 달라." 고 호소했다. 형소에도 남다른 효성으로 부모님이 아플때마다 병간호를 도맡아 학교에서 주는 효행상만 3번이나 탈 정도로 효심이 깊었던 그였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달 18일 12시간이 넘는 대수술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다 결국 10여일 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적 용 부모님을 향한 자녀의 사랑,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며 부모님께 순종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또한 이를 행했을 때 우리에게 주실 복까지 마련해 놓으셨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시대는 철저히 개인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기적인 문화 속으로 말려 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속히 하나님의 명령이며, 고유의 훌륭한 문화유산인 효문화를 다시 일으켜야하겠다. 출 처 동아일보 2000. 2. 3
18살 천사 2001-12-05 01:29:05 read : 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마태복음 5 : 16) 한 소녀의 '큰 사랑'이 어른들을 감동시켰다. 3년째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대소변을 치우는 등 궂은 일을 해온 충남 홍성군 홍주 고교 3년 유정아양은 매주 요일을 정해 이들을 돌아가
18살 천사 2001-12-05 01:29:05 read : 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마태복음 5 : 16) 한 소녀의 '큰 사랑'이 어른들을 감동시켰다. 3년째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대소변을 치우는 등 궂은 일을 해온 충남 홍성군 홍주 고교 3년 유정아양은 매주 요일을 정해 이들을 돌아가며 찾아가 빨래, 청소, 대소변 받아내기 등을 하고 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어머 니와 두 동생을 데리고 인천으로 떠난 뒤 할머니를 모시고 단 둘이 살고 있는 유양이 이같은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고교 1년 때부터였다. 지난 설날에는 자신이 돌보던 김씨 할머니가 눈앞에서 숨을 거두자 '외롭게 숨진 할머니가 편히 가실 수 있도록' 하는 마음에서 시신을 닦는 등 소녀로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을 했다. 이 '여고생 천사'는 올해 선행 모법학생으로 뽑혀 11일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았는데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라며 겸손해 했다. 적 용 IMF시대를 맞아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웃들이 많이 있다. 교회가 실직자, 걸식노인, 버려진 아이들을 나의 형제, 자매, 자식처럼 돌보고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으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 마음으로부터 공감되는 복음전파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하는 자세야말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가 바라는 이웃사랑의 시발이 될 것이다. 출 처 경향신문, 1998. 5. 12.
19세기 독일의 사회적 개신교에 관한 연구/ 2002-03-20
19세기 독일의 사회적 개신교에 관한 연구 들어가는 말 신학의 직무 중 중요한 것은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는 일이다. 특히 역사의 미래의 방향과 삶의 가치관이 불확실할 때 신학은 그 시대 자기 존재의 의의를 분명히 들어내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 보다 넓게 말해서 전 지구적으로 퍼져있는 신자유주의 삶의 질서는 과연 우리에게 보다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하며, 더불어 사는 인류 공동체를 담보해 주고 있는가? 역사 속의 어떠한 경험적 사실도 도대체 오늘 우리들에게 새로운 활로에 암시를 주지 못하는가? 교회와 신학의 어떠한 가르침도 미래의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 소위 신자유주의적인 삶의 원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사회 체제의 원리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 이 삶의 원리는 성서와 교회가 가르쳐온 인간 삶의 질서에 가장 근접한 것인가? 만일 이러한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신학과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 경험 속에서, 그리고 성서의 가르침과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서 새로운 삶의 가치질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현 상황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본 논문은 독일의 19세기 사회와 기독교의 역사적 경험을 분석하여, 한국 기독교의 과제의 전망에 도움을 제공하고자 한다. 독일의 사회적 기독교는 기독교와 교회가 어떠한 시대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이러한 과제를 신학적으로 해명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기독교는 자율성과 평등의 기치 아래 함께 사는 세상을 목표로 하며,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노력하였다. 오늘날 사회적 기독교의 전통은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으며, 사회적 공간의 확장 속에서 망명자를 위한 활동, 부패에 대한 투쟁, 외국인 노동자의 지원, 제3세계의 원조, 왜곡된 사회구조, 불공평한 세계질서, 독재와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저항운동, 민주주의와 책임적인 복지 활동, 소득분배와 자유 등,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개척하고 있다. 사실 사회적 기독교는 초대교회 이후에 망각되었던 이웃 세계에 대한 관심의 재생이다. 1. 산업화 과정과 사회문제 1. 1. 산업화 과정 근대의 사회 경제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소위 "산업 혁명"이다.(Brakelmann, soziale Frage, 13) 이 혁명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의 초에 걸쳐있기 때문에 산업혁명의 과정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시기에 많은 농민들이 도시의 부랑노동자로 전락하였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를 방황하기 시작하였으며, 산업혁명에 의한 공업화는 노동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Greschat, Das Zeitalter, 27) 이런 초기 산업혁명의 특징인 공장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은 빈민이나 고아원 출신, 또는 강제 노동소나 교도소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사회는 인간의 노동을 교육하는 학교로 보았다. 이 시기의 노동관계는 긴 노동시간과 낮은 임금이 특징인데, 이 사실 뒤에 부지런함을 칭찬하며 태만한 생활을 비난하는 개신교적-청교도적인 견해가 숨겨져 있다. 이 새로운 정신의 분위기는 공공 생활의 전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고, 개인의 이해를 신성시하였으며, 이것은 곧 낡은 사회적 결합을 파괴하였다. 새로운 경제 정서를 담지한 계층은 의회의 입법을 통해서 그들의 관심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자유주의적인 입법화의 시대이다. 이 새로운 경제 정서와 경제 실천을 추진하는 자들은 경제적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며, 절약과 강력한 경제 활동을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형태로 파악하는 개신교적 자유교회에 소속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혁명에 앞서 정신적인 방향의 전환이 없이는 기계가 발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계몽과 자유주의이다. 이 정신은 경제적 자유의 의미인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와 연결되며, 이 정신은 정치적 중상주의와 반대된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국가의 규제반대, 개인의 경제적 자유, 경쟁의 자유, 계약자유의 원리 등의 사고구조를 갖는다.(Brakelmann, soziale Frage, 20 이하) 그러나 후발 산업국가로서의 독일은 자유주의적인 정서가 지극히 나약하였는데, 이것은 자유주의가 이념적으로 개인에 대한 사회적 보호의 정신이 강하기 때문이며, 또한 여기에 기독교 사회사상과 전통적인 독일의 가부장적인 가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Rimlinger, 107 이하) 그러나 독일 자유주의는 19세기의 50년대 말에서 70년대 중반기에 만개되었다. 이것은 급격한 경제성장에 대한 낙관과 프러시아 중심의 독일통일에 의해서 고양되었으며, 자유방임과 자유무역은 독일을 경제적 보호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Rimlinger, 120 이하) 독일의 산업은 70년대와 80년대에 처음으로 영국의 발전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증가와 함께 집중화 과정이 연결되어, 밀접한 공간에 거대한 공장이 집중하였다. 여기에는 교통, 특히 철로와 배의 길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또한 금융기관을 통해 산업국가에 필요한 거대한 자본이 조달되었다.(Seraphim, 122 이하) 1. 2. 사회문제 사회 문제는 이 시기에 넓은 의미로 "산업화를 통해서 일어난 인간 실존의 모든 위기"이며, 좁은 의미로는 이러한 위기에서 임금노동자들이 심하게 겪는 계급의 사회문제이며, 19세기 노동자의 문제이며, 제4 신분의 현존 사회체계로의 통합이며, 그리고 이것과는 분리될 수 없는데, 이러한 노동자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이념과 조치들이며, 제국 탄생 10년 전에 이것에 대한 상위개념 "사회정책"이 형성되었다.(Schick, 4) 초기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자들의 사회적 상황은 극히 비인간적이었다. 공장 내의 위생시설은 전혀 없었으며, 육체적 상태는 파멸이었고, 45세가 되면 쓸모가 없었다. 노동시간은 12시간에서 16시간이며 여성과 아동도 힘겹게 공장에서 학대되었다. 대부분 노동자는 방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거상태는 엉망이었다. 노동자들의 비참함은 가정과 고향의 옛날 관계가 파괴됨으로써 심화되고 사회로부터 배제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사회적 퇴화의 감정은 노동자들의 정신에 빈곤 그 자체처럼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기에 완전한 무산화가 이루어졌으며, 이제 처음으로 옛 사회 질서에 위협을 주는 새로운 계급에 관해서 말해 진다. 경영의 집중과 대 경영으로의 발전은 의존된 임금 노동 계급을 출현하는 전제가 되었다. 이제 처음으로 노동자들은 주변 인물이었던 사회에서 자신의 경제적 중요성에 따라서 점점 사회적-정치적인 삶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전의 경영자들이 오랜 노동시간과 낮은 임금을 통해서 이익을 얻었다면, 이제 경영은 기계화를 통해서 보다 높은 임금과 노동시간의 단축을 가져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어떠한 법적 보호도 아직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병들거나 노후에는 대부분 빈민 구호소로 보내진다. 노동자들은 완전히 불안한 실존에 놓여 있으며, 그들의 단순한 노동력과 일반적인 경제적인 시장 상황에 의존되어 있다. 사고와 실업이 항상 그들을 덮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로 자신을 누르는 낯선 힘들을 느끼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경영의 한 구성요소지만, 사회적으로는 시민 사회의 주변부의 최하층에 속하며, 정치적인 책임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배제되었다는 감정과 절망감이 무산자를 지배하였다. 이제 시민-자본적인 체계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력이 탄생되었으며, 경제적인 의존성과 사회적인 중요성의 상실 그리고 정치적인 미성년 의식에서 무산자의 해방 투쟁에 들어섰다.(Brakelmann, soziale Frage, 40 이하) 1. 3. 노동운동 독일의 초기 사회주의는 1848년의 혁명기간과 그 이전에 적지 않는 정치적 역할을 한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와 반대로 그 시대의 정치적 사건에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단지 이념으로써만 존재하며, 재단공인 바이트링(Wilhelm Weitling: 1808-1871)과 유대출신 지식인 헤스(Moses Hess: 1812-1875)를 통해서 대변된다. 바이트링은 독일 하녀와 프랑스 장교의 결혼하지 않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서 독일의 비밀 단체인 "의인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현대적인 선동가와 직업 혁명가의 타입이다. 그는 엄격한 도덕적인 척도에 의해서 사는 공산주의적인 노동자 교육연맹을 세웠다. 그에 의하면 화폐가 사회를 탈 도덕화 시킨다. 타락한 사회에 대한 피의 심판으로써 재난이 있으며, 이후에 무산자의 독재가 뒤따르고, 그 다음에 조화, 사랑과 자유로 가득찬 새로운 공산주의적인 인류의 왕국이 열린다. 공산주의적인 인류의 원형은 바이트링에 의하면 나자렛의 예수다. 그의 책 "가난한 죄인들의 복음"(1844)에서 그는 예수의 삶의 원칙을 자유와 평등의 것으로 보았다. 그는 가정을 부정하였으며, 사회적 전쟁을 설교하였으며 그리고 소유에 대하여 어떠한 고려도 하지 않았다. 바이트링은 매우 강력하게 사랑과 기독교적인 신앙을 얻고자 노력하였다.(Grebing, 26 이하) 맑스(Karl Heinrich Marx)는 1818년 유대 출신의 변호사의 아들로 트리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1817년 직업 때문에 개신교로 옮겼으며, 자녀들도 세례를 받게 하였다. 고등학교 자격을 마친 후 그는 1835년 본 대학에 법학도로서 입학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 베를린에서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1841년 그는 철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맑스는 본 대학 교수직 응시에서 반동시기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탈락한 후, 1842년 자유주의적인 좌파 신문인 쾰른의 라인 신문의 주필이 되었으나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날카로운 비판 때문에 퇴직당하였다. 그는 결혼을 한 후, 파리에서 푸르동을 알게 되었으며, 시인 하이네와 만났고 무엇보다 여기서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삶에 대한 우정을 쌓았다. 그는 금지된 노동자 모임의 참석 때문에 파리에서 추방당해 브뤼셀에 정착하여,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런던에서 "공산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였다. 이 연맹의 위임을 받아 공산당 선언을 1848년 2월에 출판했다. 같은 해에 푸르동에 대항하여 "철학의 빈곤"을 저술하였다. 공산당 선언은 젊은 맑스와 엥겔스의 모든 철학적 국민경제사상의 요약이며, 여기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결과를 끌어내었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 생애 마지막까지 역사적이고 국민경제적인 연구에 헌신하였다. 그는 중단없이 박물관에서 일하였으나, 그의 가족은 엥겔스의 도움에 의지하여 가난한 상태로 살았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 런던에서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맑스가 이미 40년대 초부터 생각해온 것이었다. 공산당 선언의 첫머리에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시작한다. 사회적 상황의 발전을 맑스는 계급투쟁의 결과로 보았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과 국민경제학 비판에서 무산자의 인간상실을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상실로 전개시켜 나간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인간소외를 가져오는 사유재산을 파기하고 인간을 통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존재를 현실적으로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자체가 역사의 긍극적 목표가 아니라고 한다. 공산주의는 단지 현상황을 파기하는 현실적 운동일 뿐이다. 새로운 미래는 비밀로 남겨져 있다.(Grebing, 28)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라살레(Ferdinand Johann Gottlieb Lassalle: 1825-1864)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825년 부유한 유대출신의 비단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마친 후 베를린에서 철학과 언어학을 공부하였으며, 파리 여행 중에 시인 하이네를 만났으며, 중요한 정치적 희망을 갖게 되었다. 1848년에 맑스를 사귀었고, 혁명 후 그는 체포되어 베를린에 1857년까지 수용되었다. 그후 개인교사로서 조용하게 보내는 동안 철학적이고 법률적인 논문을 서술하였다. 맑스와 그의 관계는 유지되었으나 성격 차이로 결코 더욱 가까워질 수 없었다. 1862년 초부터 1864년까지 그는 독일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Grebing, 50 이하) 라살레는 당시 독일의 공공 삶과 사고를 지배하는 자유주의에 공격의 화살을 당겼다. 진보 정당과 다른 "사회적 개혁"에 대립해서 임금노동자의 정치적 정당결성을 통하여 노동자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였다. 노동자 계급의 조직된 정치적 힘을 통해서만 자유와 모든 평등의 이념이 실현되어야 한다. 정치적 해방의 첫 수단은 보통 선거권과 평등 선거권이며, 이 선거권의 도움으로 국민은 국가를 세울 수 있다. 국가에 의해서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는 잔인한 노임철칙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한 민족 안에서 생존을 연맹하고 번식에 필수적인 생활필수품에 대한 평균노동임금으로의 제한은 잔인한 법칙이며, 이것에서 해방되는 길은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고유한 경영으로 나아갈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의 자발적인 회사를 유일한 대안으로 보았다. 그는 합리적 정치의 힘으로 시민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였다.(Brakelmann, soziale Frage, 87 이하) 모든 노동 운동의 시작들은 50년대의 반동기의 경찰조치에 의해서 거의 완전히 파멸되었다. 60년대 처음으로 사회주의 노동당 출현과 관련해서 역시 노동조합 운동이 새로운 부흥을 하였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작센 주정부는 1861년 노동자들에게 동맹의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1869년 북부 독일 연맹을 통해서 일반 영업자유의 허가와 관련해서 역시 노동자들에게 동맹권을 인정되었다. 사회 지배계층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노조운동은 진보하였다. 그것은 이제 지역 연맹을 넘어서 국가 영역의 거대한 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사회주의자 법을 통해서 갑자기 정지되어, 중앙연맹은 해체되고, 문헌은 금지되었으며,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혹은 추방당했다. 그래서 노조 역시 지하에서 작업하도록 강요받았다. 1890년 사회주의법 폐지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시작이며, 자유 노조의 전체운동을 위한 "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가 창립되었다. 본래의 노조운동을 노동계급의 대중 조직으로써 가능하게 하는 이 조직은, 현존하는 국가와 경제의 중앙 중심주의에 대해 강력히 대항하는 데 필수적이 되었다. 노조는 직업에 따라서 조직되었고, 전 제국 위에 중심적으로 조직되었다. 모든 개별 연맹은 총위원회 안에 집중되었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중앙연맹이 그들의 행동에서 완전한 주권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그 지도부는 노조의 전체 이해를 위해 연대적인 공동작업을 한다. 자유 노조는 90년대에서 제1차 대전까지 강력한 부흥을 이루었다. 노동조합은 1890년에서 1914년까지 큰 업적을 이루었는데, 임금수준이 증가하고, 사회 안전망이 건설되고, 국가의 입법에서 노동계급의 중요성이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덕분이다. 노조는 실질적으로 여러 방법으로 노동하는 국민을 변호하였다.(Brakelmann, soziale Frage, 100 이하) 2. 사회적 개신교 운동 기독교 교회는 모든 시대에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그들의 과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돌보는 행위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 이웃사랑에 놓여 있다. 동시에 사람들은 이러한 가난을 개인적 운명(불행이나 개인적 죄, 질병)이거나, 혹은 구원받지 못한 시대의 불완전의 표지라고 보았다. 또 이러한 기독교적인 사랑을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상태와 결합시키고, 또 나아가서 이 결합을 신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더욱 먼일이었다. 여하튼 19세기초에 활동한 자선적인 노력들이 새로운 과제를 이해하기 시작하였으며, 강력한 목회적인 추동력은 경건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Kupisch, 95)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사회적 개혁 행동의 필연성은 빌헬름 시대와 함께 증가하였다. 이미 본질적으로 교회 안에서, 정치 그리고 사회에서 초기에 존재한 사회적 실험들과는 달리, 빌헬름 2세의 정부 진입과 비스마르크 시대의 종말과 함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다는 감정이 보다 확대되었다.(Kaiser, 94) 사실 빌헬름 2세의 정부 진입 이전에 그의 새로운 사회정치적 입장이 보였는데, 빌헬름 1세가 궁중설교가 아돌프 스퇴커의 정치적 선동에 화를 내며 갈라지고자 했을 때, 빌헬름 왕자는 스퇴커를 위해서 개입하였고, 궁중설교가로 그렇게 지내도록 그의 할아버지를 움직였었다.(Besier, 111) 2. 1. 사회적 개신교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의 개신교를 일반적으로 신개신교라 칭한다. 이 시대 개신교의 배경이 되는 사상적 흐름은 르네상스, 인문주의, 계몽주의, 독일 관념론 등이며, 특히 자유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특성이 강하다.(백용기, 106) 이 근대 이후를 특징짓는 개신교를 소위 "문화 개신교"라고도 하는데, 이 용어의 창시자는 알 수가 없다. 신개신교 또는 문화적 개신교 시대의 신학적 그리고 교회 정치적인 모든 종류의 모든 방향에 대한 표지는 세상과 기독교적인 고백,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통합이 중요한 문제였다.(Schick, 1-2) 문화적 개신교는 자유주의 신학의 각인을 묘사한다. 계몽주의 유산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거기에서 출발한 시민적인 해방운동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와 현대문화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은 문화 개신교와 자유주의를 하나로 연결하였다. 신학사적인 연구에서 그라프(Friedrich Wilhelm Graf)는 "문화 개신교"의 개념을 세 가지 방법으로 사용하였다.(Langner, 227) 첫째는 쉴라이엘마허에서 트뢸취까지, 두 번째는 내용적으로 마틴 라데의 잡지 "기독교세계""의 영향 아래서 리츨과 리츨학파에 제한하여, 세 번째는 황제 통치하의 독일에서 개신교 교양 시민층의 가치세계의 표시로 사용하였다. 아무리 늦어도 1904년 이후에 사용되어진 개념인 "문화개신교"는 비판적으로 평가 절하된 낯선 표현으로써 개신교 자체로부터 나왔다.(Graf, 230) 문화 개신교의 근본적인 관심은 한편에서는 기독교 사이의 간격을, 다른 한편에서는 현대 문화와 종교적인 세계경험 차이를 극복하고자 하며, 그리고 세상의 도덕화의 새로운 시도를 통해서 기독교적 가치가 전체 사회에서의 중요성을 상실하는 것을 극복하고자 한다.(Langner, 228) 자유주의 신학의 그리고 동시에 문화개신교의 근본문제는, 한편에서는 현대의 신학적 그리고 정치적 형상의 토대에 대한 자율성의 원칙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동시에 이러한 기본원칙을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제한하려는 노력 속에서 보여진다. 그러한 제한은 문화 개신교 안에서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설정된 윤리가 개인을 넘는 구조, 즉 구조적 제도 윤리가 없는 곳에서는 문제성 있게 드러난다. 근대의 이 문화적 개신교와 함께 이 시대의 운명적인 문제인 "사회적 문제"를 근대 개신교인 신프로테스탄트는 필수적인 과제로 취급하였다.(Langner, 229) 2. 2. 각성운동의 사회봉사 19세기 전반기는 개신교의 사회 운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경건주의 운동 속에 내포된 각성운동은 개인의 신앙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요구하였다. 각성운동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된 경건한 개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개신교적 사회운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들, 고아들, 병자들을 돕는 자선에 뛰어 들었다. 1813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전쟁 고아들이 발생하였을 때, 청소년 보호운동의 첫 주자이며, 괴테의 친구인 팔크(Johannes Falk: 1768-1826)는 "기근 속의 우정회"를 세웠다. 이 회는 독일의 고아를 위한 첫 구제기관인 바이마르의 루터의 집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비슷한 일들을 베스트팔렌의 젊은 귀족인 폰 데어 렉케(Graf von der Recke von Volmarstein: 1791-1878)가 수행하였으며, 1820년 슈바벤의 법률가이며 교육가인 쩰러(Christian Heinrich Zeller: 1779-1860)는 "빈민학생을 위한 자원교사기관과 빈민아동자원기구"를 세웠다. 이 기구는 슈바벤 지역의 경건주의가 바탕이 된 독일 남부 구호소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시대의 중요한 인물인 남작 코트비츠(Ernst von Kottwitz: 1757-1843)는 쉴레지엔 주에서 형제단을 통하여 활동적인 기독교 신앙인이 되어 자선 활동을 하였다. 그는 쉴레지엔에 특별한 직물 공장을 세웠으나, 곧 모든 재산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베를린에서 초라한 형편으로 살았지만, 베를린 각성운동의 중심이었으며, 실업자들을 위해 "취업 자원기구"를 세웠다. 개신교 사랑을 실천한 이 네 명의 대변자는 모두 각성운동에 깨우쳐진 평신도들이었다. 비록 이들이 개인적인 봉사차원에 머무르지마는, 이들은 기독교의 삶의 현장에서 제자도를 증명한 예이다. 이들의 시대는 개인주의적이며, "사회적 봉사"의 단계는 다음 세대를 기다려야 했다.(Brakelmann, soziale Frage, 116 이하) 2. 3. 비헤른 사회적 개신교 운동의 중요한 주창자는 비헤른(J. H. Wichern)이며 그의 내방선교는 교회의 사랑을 조직된 활동으로 전개하였다. 비헤른은 함부르크에서 소시민 계층의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미 무산자적인 삶을 체험하였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15살 때부터 가정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함부르크의 각성운동 친구들이 고등학교와 대학공부를 가능하게 해 주었으며, 학창시절에 낭만주의적 예술과 문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신학공부를 한 후, 자기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할레의 플랑켄 고아원을 방문했다. 함부르크에서 시험을 마친 후,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호른에 "광야의 집"을 세웠다. 이 기구는 공동체 원칙이 지배하며, 기도와 노동이 생활의 두 축이었다. 민속음악, 교회음악, 그리고 후일의 직업활동을 위한 교육과 휴식을 위한 체조, 놀이 등이 이루어졌다. 비헤른의 교육목적은 자유로운 기독교적인 인격을 함양하여 국가와 교회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이 광야의 집은 어려웠지만 해마다 성장하였다. 1844년에는 광야의 집 형제 기관인 구호협회가 설립되어 내방선교의 모든 일을 위해 교육되었다. 이와 더불어 비헤른은 남성 봉사기구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 해에 내방선교의 기관지인 "광야의 집 소책자"가 출판되어, 시대의 문제와 내방선교의 과제에 대한 베헤른의 중요한 모든 논문들이 발간되었다. "내방선교"라는 표지 그 자체도 비헤른에게서 유례하며, 이 말을 그는 "구원하는 사랑의 행위를 통한 신앙고백"으로 결정하였다. 내방선교는 신약성서에 모든 그리스도교적인 공동체가 행하는 봉사를 지칭하며, 외부의 파멸의 힘의 지배에 떨어진 기독교 대중들을 내적 외적으로 새롭게 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행동을 강요하는 사랑의 실천이 중요한데, 신앙으로부터 곤궁과 어려움에 대항하는 사랑이 내방선교 출발의 시작이다. 비헤른은 베를린에서 1848년 3월 혁명을 체험하였다. 그는 또한 독일 통일이 주요한 문제가 된 9월의 비텐베르크 교회의 날에 참석하여, 유명한 즉석연설에서 내방선교의 실천적 문제를 언급하였다. "사랑은 나에게 신앙처럼 속한다"라는 문장은 정점이다. 그의 연설에 참석한 500명은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곧 상설 중앙위원회 결성을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했는데, 이것이 곧 "독일 개신교의 내방선교"이다. 그는 중앙위원회의 위임을 받아 작성한 독일민족에 대한 "백서"이며, 자신의 생각을 1849년까지 정리하였다. 1872년부터 보델슈빈(Bodelschwinh)이 이 기구의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비헤른은 7년간의 병고 끝에 1881년에 사망했다.(Brakelmann, soziale Frage, 119 이하) 비헤른은 19세기 개신교의 뛰어난 인물이며, 현대 개신교 사회적 사상의 한 선구자다. 그는 대량 빈곤의 뿌리가 경제적인 구조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는데, 자연적인 빈곤 이외에 인위적인 가난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난, 무산계급의 운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해결도 역시 개인적인 도움이나 자력으로 극복될 수 없으며, 체계적인 대량 구호사업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호소에만 머물렀을 뿐, 사회개혁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들을 하지 못했다. 혁명과 혁명정신에 대항한 투쟁은 그에게 있어서 무신앙에 대한 신앙의 투쟁이었다. 그의 혁명에 대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는 단순화는 어둠(=공산주의 등등)에 대한 빛(=교회와 내방선교)의 투쟁의 형식 속에서 내방선교를 사회적 복고세력과 결합하게 하였다. 이 결과 내방선교는 빠르게 반혁명적인 기구가 되었으며, 국가의 적은 "자동적으로" 내방선교의 적이 되었다. 비헤른과 내방선교는 낭만주의적이고 이상적이며 기독교적인 국가를 꿈꾸는 빌헬름 4세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의 문제는 항상 새로운 현상을 낡은 사회적 구조 속에 끼어 넣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세속화의 과정에 대항하여 단지 복음화 만을 요청하였으며, 또한 기독교적인 사회 이념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정신적이고 신학적인 반동으로 옮겼다. 한편 그에게는 낭만주의적인 국가학으로부터 전수받은 유기체적 사고 외에 국가와 교회의 모호한 병렬, 하나님 나라 사상 그리고 현재와의 실제적 대화를 방해하는 그의 하나님 사상과 연결된 역사 이해 등이 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교회와 노동자층의 관련하여 세속운동의 세계를 비헤른은 신학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Brakelmann, soziale Frage, 138 이하) 2. 4. 내방선교 비헤른의 백서를 통해서 내방선교(Innere Mission)의 프로그램과 기본 사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 백서는 혁명의 해 1848년에 탄생하였는데, 내방선교의 과제는 분명히 혁명의 탈질서에 있다. 내방선교는 개별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탄생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전체적인 일이다. 이러한 일의 뿌리는 그리스도이며, 내적, 외적인 곤궁을 없애는 것이 기독교적이고 구원하는 사랑이 된다. 내방선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습득되고 파괴될 수 없는 삶의 통일성을 다음과 같은 곳에서 파악하는 데, 이것은 국가와 교회 안에서, 민족과 가정에서, 기독교 사회의 모든 지체들 속에서 필요한 삶의 구원하는 힘을 영향력 있게 한다. 내방선교의 활동의 중심점은 가정, 국가 그리고 교회이다. 세 가지 모두 내방선교에 무조건적으로 신적이며 살아서 서로서로 영향을 준다. 가정은 사회적 문제의 출발점이 되며, 여기서의 교육, 소유, 일 그리고 이것들을 통한 신분관계의 변화 및 중생은 내방선교의 주된 과제다. 또한 내방선교는 국가의 과제에서 자신의 과제를 구별하며, "세속권세의 이러한 신적인 추진"을 다시금 대중들 속에 인정하도록 한다. 내방선교는 "국가가 자기의 영역에서 이러한 기독교의 자비, 지혜 그리고 힘의 증명을 언제 그리고 어디서 요구할 때에" 국가에 자유스럽게 봉사하고자 한다. 국가로부터 내방선교는 자유로운 협회의 권리를 자신의 편에서 기대한다. 내방선교의 국가적 영역에서 과제는 백성들의 도덕적인 삶과 본질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혁명은 신실함의 붕괴이며 경외의 무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혁명과 함께 도덕성이 붕괴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혁명으로부터 백성을 구원해야 하며, 무신론의 선포와 사탄주의의 혁명에 대한 투쟁이 내방선교의 과제이다. 내방선교는 교회 자체의 삶의 한 면을 계시하며, 잃어버린 보호받지 못한 대중을 찾는 신앙적인 사랑이다. 이런 대중들은 반그리스도적이고 사탄적인 시대 정신에 빠져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에 대한 투쟁이 내방선교의 과제다. 그러나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또한 너무 거대해서 정상적으로 돌볼 수 없는 공동체들도 있다. 이런 교회들은 국민 생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죽어 가는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을 살리는 것이, 즉 성서의 보급과 사용, 가정 예배, 성서연구, 도서관 설립, 종교서적 출판 등이 내방선교의 과제이다. 빈곤이 더 이상 개인적이 아니며, 사회전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내방선교는 개별 공동체를 넘어서 백성과 국가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자신들의 내적인 빈곤에, 즉 대중의 도덕적이고 기독교적인 변질에 대해 영향을 미쳐야 한다. 내방 선교의 우선적인 과제는 "대중의 도덕적인 몰락을 제거"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일반 도덕적인 일만이 아니라, 사회적 영역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대도시에서의 교회적-사회적 일은 긴급하다. 내방선교는 이런 도시들에서 가정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교회적-사회적 단체들은 교회의 공무에 포함되어 "도시선교로서의 내방선교 연맹"을 결성했다. 비헤른은 이러한 도시선교의 모델을 제시하여, 팜프레트 출판, 국민도서관 설립, 수공업 동맹의 기구, 봉사제공, 학교 설립 등의 과제를 세분하였다. 가정은 계속 해체되고 어지러워 졌다. 황폐화된 결혼, 경솔하게 헤어지는 부부 그리고 미혼모를 통한 자녀들은 보호자 없는 어린이들이었다. 어른들과 어린이들은 타락하였으며, "기독교뿐만 아니라, 일반 도덕에 대한 감각이 여기서 몰락되었다." 악덕과 범죄가 여기에 있으며, 특히 대도시들 안에 심하다. 비헤른은 여기서 빈곤의 원인과 악순환이 도덕의 타락에 원인이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국가 경제를 통해서 제거되어야 하는 다른 부적절한 산업의 상태가 또 다른 곳에서 대량빈곤의 생산에 공헌한다. 이러한 경우가 생기는 곳에 도덕적으로 선한 가정이 빈곤화의 비참함에 마침내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탈도덕적인 군중의 거대한 위험과 비슷한 외형적인 상황의 몰락으로 내 던져져, 이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비슷한 수준이 된다."(Brakelmann, soziale Frage, 122 이하) 비헤른은 흔들리는 가정의 재생이 (빈민자를 위한) 임산부 연맹, 유치원, 일요학교, 어린이 예배, 어린이를 위한 구호기관 등등을 통해서 도달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빈민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시민적인 빈민 구호 활동에는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단지 법률과 기록된 도식에 의해서만 빈민구호를 하며, 가난한 자들의 도덕성을 위험하게 하며 부분적으로 이를 파괴하며 그리고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의 요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며], 빈자들은 국가의 자선 기구를 통해서 사랑을 믿도록 배우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방선교의 빈민 구호 활동을 통해 국가의 자선 기구를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 내방선교의 과제다. 비헤른의 사회 문제에 대한 극복의 원리는 "혁명의 원리"가 아니라, "기독교적인 재생원리"이며, 이것을 그는 실천을 통해서 발전시켰다. 수공업단체를 공산주의 교육으로부터, 노동자들을 자조로 이끌어 내어, 모든 백성을 "기독교적-사회적인 것"(Christlich-Soziale)으로 이끌어 내어야 했다." 비헤른의 사회개념은 근본적으로 유기체적이다. 개개의 기독교 백성들, 국가, 교회, 가정 그리고 신분은 특별한 방법으로 질서 지어wu 있는 하나의 거대한 기독교적인 사회 유기체이며, 이것의 창시자는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원리"이다. 가장 상위의 유기체인 기독교계로부터 가장 가까운 유기체인 백성으로 이루어진다. 국가, 교회 그리고 사회는 모든 질서의 주인인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이 그리스도가 세 가지 제도의 공동의 주인이며 중심이 된다. 또한 국가는 외형적인 복지와 질서를 유지하며, 경제를 최종 결정한다. 세상적인 재산이 국가에게 책임지어지는데 이는 인간의 공동 삶을 파괴하려는 죄 때문이다. 교회는 기독교 정신의 망대며, 전체 백성의 삶에 대한 영원한 토대이며 구원의 샘물을 제공한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며 믿는 자의 공동체다. 이 교회의 최상의 존재는 성령, 자유이다. 비헤른의 기독교적 국민 유기체는 "국가와 교회, 국민과 가정, 기독교적 사회의 이 모든 지체들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지고 부서질 수 없는 삶의 통일체다." 이 이념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역사관과 결합한다, 즉 역사 발전의 최고의 통일점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관련되며,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발전한다. 반기독교적인 힘에 대한 투쟁 속에서 이것은 결국 역사적 과정 속에서 관철된다.(Brakelmann, soziale Frage, 133 이하) 2. 5. 토트 루돌프 토트(Rudolf Todt)는 1839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브란데부르크의 지방목사로, 1880년부터는 감독(Superintendent)으로 일하였으며, 1887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시골 목사 시절부터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하여, 사회민주주의 언론과 문헌을 추적하였다. 1872년 말에 "기독교 국민일보"에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립프트네히트의 사회주의에 대한 논문을 기고하였다. 스퇴커의 자극으로 1877년 "급진적 독일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회"라는 책을 출판하여 곧 유명하여졌다. 이 책은 70년대의 개신교 신학자와 독일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의 급진적 사회주의와의 최초의 학문적 논쟁이었다. 그러나 토트는 사실 개신교-사회운동에서 망각되어온 인물이다.(Brakelmann, Kirche, 111 이하) 그는 사회의 경제적인 삶 속에서 이중의 경향을, 소수가 부를 집중하는 것과 가난한 자가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가난한 자와 부자의 사회적 분열은 커지며, 중간층이 무너져서, 결국 자본가와 의존 임금 노동자만이 남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비인간적인 삶을 야기하며, 임금은 최저생계만을 보장할 뿐이다. 그는 맑스의 계급투쟁 이론이나 라살레의 임금 철칙설에 동의하였다. 그가 분석한 사회 퇴화의 정신적 원인은 소위 만체스타 자본주의인 경제적 자유주의에 있다. 이런 지나친 개인주의는 사회를 도덕적으로 붕괴시키며, 이 결과가 현대의 혁명적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급진적-사회주의적 사회비판은 그 시대 교회적-신학적 영역에서 토트가 유일회적이다. 그의 독특성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있다, 즉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자는 우편에 국민경제를, 좌편에 사회주의자들의 학문적 문헌을 그리고 앞에는 신약 성경을 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하나가 결핍되면 해결은 벗어나게 된다.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속한다." 이 문장을 통해 최초로 사회주의와 기독교 관계의 대화의 원리가 요약되었다.(Brakelmann, Kirche, 113 이하) 토트에게 기독교 윤리는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윤리적인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사회주의적인 원리들과 대결하기 위해 신약성서를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적인 개념을 분석한 후 그것을 신약성서에 대립시켰다. 그런 후에 오늘의 사회 형태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를 묻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경제와 정치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역사적 운동이며, 역사적인 권리이며, 역사적 필연성이며, 또한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이념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 교회에서 전혀 받아들이기 힘든 견해였다. 동시대인에게 공산주의는 인간 이하의 활동산물이었으나, 토트는 공산주의가 생산수단의 개인소유 폐지를 통해서 인간의 이기심을 지양한다고 인식하였다. 토트에 의하면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공동의 토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하다. 이 필요성은 세계의 파괴와 인류의 소외,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재통합 때문이다. 그는 비교적 간단히 무신론에 대해서 설명하였는데, 무신론은 사회주의의 본질이 아니며, 시민적-자유주의적 종교 적대성과 철학적 유물론의 시대에 대중 선동을 위한 하나의 부과물일뿐이다. 기독교적 정신만이 사회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관철할 수 있으며, 단지 기독교 사회주의만이 참된 사회주의의 유일한 형상이다. 그는 기독교적인 노동이론과 가치론을 전개하였다. 산업사회 체제의 인간에게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과제다. 기독교의 과제는 인격과 가치를 다시 얻게 하는 것이며, 이것은 현대 사회에 대한 교회와 기독교의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은 인간적인 사회성에 대한 휴머니즘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며, 이러한 과제의 완성은 진보적인 인간화가 최고의 과제인 기독교 사회주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적 개신교의 역사에서 토트의 중요성은 그가 대중적인 국민경제이론을 묘사하였고 그리고 학생들에게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것을 의무로 신학적 연구의 개혁을 요구한 것이다. 신학과 국민경제의 대화를 수행하기 기독교 사회과학 과목의 개설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대화를 위해 스스로 "신학연구와 사회과학 연구 사이에 내적 관련과 필연적인 결합"이라는 제목의 작은 팜프렛을 저술하였는데, 이 작품은 이제까지 잊혀졌던 개신교-사회적 운동의 유일한 자료이다. 토트는 국가의 개입을 신학적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회정치적인 요구의 중심점에 세웠다. 그는 고유한 기독교적-사회적 정당창설을 호소하였으며, 사회문제를 체계적으로 관계하는 연맹을 설립하였다.(Brakelmann, soziale Frage, 153 이하) 2. 6. 스퇴커 아돌프 스퇴커(Adolf Stoecker: 1835-1909)는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학 학업을 마친 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그는 일찍이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1874년 황제에 의해서 궁중과 성당의 목사로 베를린에 갔을 때, 여기서 그는 교회와 기독교로부터의 계속된 하층민 몰락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자가 되었다. 그는 내방선교와 도시선교의 과제에 헌신하였지만, 이러한 상황이 내방선교에 의해서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였다.(Kupisch, 103) 스퇴커는 종교적으로 각성운동을 통해 결정되며, 신학적으로 정통주의에 속한다. 이는 성서에 대해 역사-비판적인 연구, 기독교와 현대 문화 그리고 학문성의 통합이 중요한 신학적 자유주의에 반대를 의미하며,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왕권과 재단의 분리를 선전하는 교회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설교가의 한사람이었다. 첫 번째 개신교-사회적 정당인 "기독교-사회 노동당"이 스퇴커에 의해서 1878년 1월 3일 베를린에 창립되었다. 이 정당과 함께 개별 봉사의 의미인 내방선교로부터 사회개혁 의미의 사회정책으로 단계를 실행하였다. 이 정당의 창당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와 함께 정치적 삶으로의 첫 단계가 시작되었다. 스퇴커의 기독교 사회 노동당의 기본강령은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사회 노동당은 기독교 신앙과 왕과 조국에 대한 사랑의 토대 위에 있다. 2. 이 정당은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를 비실제적, 비기독교적 그리고 비애국적인 것으로 비난한다. 3. 이 정당은 국가 생활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필연적인 실제적인 개혁을 건설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평화로운 조직을 추구한다. 4. 이 정당은 목적으로써 부자와 가난한자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거대한 경제적 안정을 가져오도록 추구한다. 한편 스퇴커 운동의 특징적 사건은 황제생일의 축하다: "베를린의 거대한 강당에서 축제가 거행되었다; 그러한 힘든 시대에 거대한 현상인 가난한 노동자에게 저녁식사가 주어졌다; 역시 그들의 위엄인 황후가 거기에 풍부한 은총을 제공하였다. 애국적인 연설에 환호, 황제에 대한 만세가 끊이지 않았다..."(Brakelmann, soziale Frage, 167 이하) 그러나 이 새 정당에 어떤 여론의 호의도 없었으며,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자 이외에 자유주의, 민족자유주의, 보수주의 그리고 교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스퇴커는 개인적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궁정 설교가와 정치인의 일, 신학과 호민관의 개인적 연합이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과제는 사회민주주의 무신론적 조직에 기독교 노동자 연합을 대립시키는 것이었다. 노동자층으로의 진입이 실패함과 더불어 스퇴커의 반셈족 과정과 중상층 중심으로의 정책 전환은 이미 1880년 기독교-사회 정당이 더 이상 기독교-사회 노동자당이 아니라는 것이 표명되었다. 창립 당시의 무산계급 성향은 포기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점점 보수화 되어 갔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후 기독교-사회적이라는 것은 반셈주의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보수적인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구 보수적인 정당을 기독교-사회적 정당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기독교-보수적 정당으로 변화시켰으며, 사회적 보수주의를 선전하기 위해서 활동하였다. 그의 세 가지 중심은 기독교-군주제-사회개혁이었다. 그는 개신교의 모든 진영을 하나의 통일연맹으로 조직하여 시대와 투쟁하고자 하여, 1890년 개신교-사회 회의(Evangelisch-Soziale Kongress)를 세웠다. 그는 이 기구를 통해서 개신교에 사회정치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교회의 다양한 적들과 정치적 적들이 상존하였으며, 특히 빌헬름 2세는 스퇴커의 기독교-사회적 사상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겼으며, 잘란트의 남작 폰 스툼(Freiherr von Stumm)은 개신교 사회적 운동을 사회민주주의 보다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Brakelmann, soziale Frage, 170) 그는 무산자를 낡은, 그러나 개혁된 체제에 화해시키기를 원했으며 그리고 제4 신분을 기독교 사회의 전체 사회 안에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는 노동자를 얻기 위한 투쟁을 하였으나 이 투쟁에서 졌다. 세속화는 스퇴커에게 기독교적 세계의 종말이었으며, 세속화 속에서 인간 중심점의 인식을,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책임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궁중설교가 스퇴커는 투쟁적인 개신교 보수주의자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독교 사회주의자다. "단지 기독교 노동조합만이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 단지 기독교-사회 정당만이 비기독교적 사회주의적 정당을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거기에 당연히 강력한 지칠 줄 모르는 사회개혁이 속한다." 2. 7. 나우만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 Naumann: 1860-1919)은 1860년 작센의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족의 전통에 따라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883년 함부르크 호른의 광야의 집에서 상급보조자로 일하였으며, 당시 비헤른의 기구는 비헤른의 아들이 이끌고 있었다. 광야의 집에서 2년 활동한 후에 작센의 첫 목회지에서 노동자의 고통을 인식하였으며, 노동자의 문제가 그 시대의 중심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우만은 이제 "가난한 자들의 목사"로서의 활동 이외에 사회문제 문헌연구에 몰두하였으며, 특히 맑스적-사회민주주의 저술들, 맑스, 엥겔스, 라살레, 베벨 그리고 립프크네히트를 철저히 연구하였다. 나우만은 비헤른과 스퇴커의 사회정치적 사고의 중요한 영향 아래에 있었으나, 이들과는 일찍부터 독자적인 사고발전의 과정을 겪었다. 이것은 내방선교의 방법이나 스퇴커의 정치적 입장을 훨씬 넘어가는 것이었다. 스승들처럼 나우만은 맑스주의는 거절하였으나 사회민주주의를 현재의 과제로써 인정했다.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무산자적인 성격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여기에 이미 스퇴커와 결별의 성향이 있었다.(Kupisch, 107) 나우만은 반동과 혁명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것을 기독교 사회주의라 하였으며, 이것은 사랑과 정의의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활동적인 개혁 작업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논쟁하였다. 그는 역시 사회주의적인 원리인 자유, 평등 그리고 형제애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물질관이 국민의 영혼에 큰 위험을 준다는 것을 제시하며, -정치적 프로그램에 위험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빈곤 제거를 통하여 기독교 사상세계를 위해 노동자를 다시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위해 내방선교의 확장이 필요하였으며, 비헤른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기독교 사회적 운동의 기본원칙은 다음과 같다, 즉 "성서적인 프로그램은 없다, 그러나 사회정치적 문제를 다루기 위한 성서적 동기가 있다." 그는 제 2세대로서 기독교-사회적인 사회정책을 계속 이끌어갔다. 그는 내방선교의 자선활동을 통해선 극복될 수 없는 빈곤의 사회적 관계를 점점 더 인식하였다. 그는 기독교적 사회정책, 사회개혁으로 들어갔으며, 정치적, 사회정치적으로 거의 모두가 보수적인 정당에 가입되어 있는 내방선교의 "옛 사람"과 대립하게 되었다. 나우만의 기독교 사회적 활동은 "개신교-사회적 회의"의 활동 속에서 드러나는데, 스퇴커 주변의 "옛 사람"과 나우만 주변의 "젊음"의 이러한 투쟁은 이제 "개신교 사회적 회의"의 차원과 영역으로 옮겨졌다.(Brakelmann, soziale Frage, 174 이하) 나우만이 1896년 민족사회 연맹을 창설함으로써 그의 개신교 사회적 운동은 끝났다. 그 스스로 1897년 목사직을 포기하고 직업정치가가 되었으며, 점점 민족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세계와 교회, 정치와 종교, 힘과 선교라는 이원론으로 떨어졌다. 그는 기독교 사회적 입장에서 급진적으로 민족적 사회적 방향으로 움직였다. "군사주의는 모든 국가 질서와 유럽시민 복지의 기본토대다... 기독교의 미래는 주민들의 군사적 의미의 유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옛 독일의 영웅심의 마지막 나머지를 물리치지 말자." 2. 8. 개신교 사회 회의 1890년은 독일제국의 사회정치적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한 면을 표시한다. 빌헬름의 2월 칙령은 노동자 친화정책과 입법화를 계속 추진하였으며, 사회문제에 있어서 교회의 특별한 책임을 강조하였다. 곧바로 4월에 개신교 교회 최고위원회(EOK)는 교회 정치적 방향을 180도 회전시켜 성직자들이 노동자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노동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도록 하였다. 이는 기독교 사회적인 작은 단체에게 강력한 추동력을 주었다. 스퇴커는 강당사회자들인 바그너(Adolf Wagner), 개신교 노동연맹의 지도자인 베버(Ludwig Weber), 보수적인 신문인 "십자가신문" 편집장인 크로파체크(Friedrich Kropatschek: 1875-1917)와 함께 새로운 사회적 교회정치적 출발을, 모든 기독교적 사회적인 자들을 하나의 중립적인 작업포럼에 연합하고자 시도하여, 1890년 오순절에 "개신교 사회 회의"를 베를린에 창립하였다. 다양한 교회정치적 그리고 신학적 흐름들을 하나의 사회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토론으로 결합시켰다. 780명의 회의 참석자들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한 선동이 거의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자기 국민의 사회적 상황을 편견없이 연구하고, 그것을 복음이 요구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척도에 의해서 계산하고 이것을 오늘날의 경제적 삶을 생산력 있게 만들고 영향력 있게 만드는데 그들의 과제를 삼았다.(Besier, 116) 이 모임에서 여섯 가지의 제안이 이루어졌다.(Brakelmann, soziale Frage, 178) a) 교회의 사회적 의미 안에서의 교회 공동체 b) 노동자 보호법제정 c) 노동하는 계급의 주택곤궁과 그들의 구제법 d) 개신교 노동자연맹과 그들의 중요성 그리고 계속적인 발전 e) 사회정책의 영역에서 현재의 노력 f)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입장 이제 해마다 개최되는 주요회의에서 실제적인 사회정책의 문제들과 기독교 윤리의 문제가 다루어졌다. 이 회의는 모든 정치적 그리고 교회정치적 정당의 대표로 구성된 의장단을 선출하였으며, 1891년부터 1902년 동안의 첫 의장은 중재적인 농업고문관인 놉베(Nobbe)였다. 1891년부터 1894년까지 첫 번째 총무는 신학 후보자인 젊은 목사 괴레(Goehre)였는데, 그는 그가 쓴 "3개월간의 공장노동자"라는 책 안에서 묘사한 공장활동을 통해서 잘 알려졌다.(Brakelmann/Traugott, 142) "개신교 사회 회의"에 참여한 회원들의 공동 견해는 다음과 같다.(Brakelmann, soziale Frage, 179 이하) 1. 복음에 서 있는 종교개혁의 교회는 신앙 고백자와 봉사자가 시대를 배우며,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피해의 원인을 추적하며 그것을 극복하는데 협력할 때만이 국민의 양심을 인도하는 정신적 힘을 전개시키고, 특히 사회적 영역에서 화해하는 영향을 실행할 수 있다. 2.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공명심에 사로잡힌 교리이며 악마적인 혁명의 힘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종교적 타락의 자연적인 결과이다. 3.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법에 의해서 극복될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오류이다. 4. 고용된 노동력에 의거한 계급의 경제적 노력과 자주성은 정당하다. 5. 사회적 개선을 목표하는 헌법과 법률, 조국과 국왕의 토대 위해서 현명하게 지도하며 개입하여 소외된 국민의 진영을 데려오는 것이 중요한 시대적 과제의 하나다. 그 사이에 개신교 사회 회의 내부에서 스퇴커-나우만의 대립이 점점 커졌으며, 나우만의 진영은 스퇴커로부터 벗어나 점점 발전하였다. "젊은이"들은 사회개혁을 위하여 보수진영을 얻고자하는 스퇴커의 노력이 좌절되었으며, 본질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점점 프로그램 과정이 보수적인 방향에서 자유주의로 변화되어 갔다: 1) 특별히 기독교적인 동기근거로부터 나우만적인 사회정치적 개혁 개념이 분리되었으며, 2) 기독교적인 근거에서 국민정치적 근거로 대치되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Pollamnn, 65 이하) 그러나 여전히 개신교적 정서, 확고한 황제에 대한 신뢰 그리고 합법적인 사회 개혁의 세 가지 위에 서 있는 개신교 사회 회의는 사회민주주적인 내지는 모든 사회혁명적인 추진하는 모든 것에 한계를 두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모든 측면에서 공격이 쏟아졌으며, 경영자에 친근한 언론, 농업보수주의자, 궁중 그리고 교회지도부, 우익들이 개신교 사회 회의에서 떨어져 나갔다.(Brakelmann, soziale Frage, 182) 개신교 사회 회의 그 자체에 위기가 왔으며, 스퇴커는 탈퇴하였다. 그는 나우만-진영과 더 이상 성공적인 협력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단지 작은 무리만이, 그 가운데 교사 베버도, 스퇴커와 함께 개신교 사회 회의를 떠나서, 1897년 교회-사회 회의(Kirchlich-soziale Konferenz)를 세웠으며, 이 단체는 내방선교와 개신교 노동자연맹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교회의 사회사업을 위해서 교회의 "적극적인 자"(Positiven)들을 모았으며, 반면에 개신교 사회 회의에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자유주의자들이 넘쳤다. 나가는 말 이미 산업혁명 이후 인간들의 삶의 현장이 과거와는 180도 방향 전환한 이후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삶의 현장에 대한 철저한 인식없이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 서양의 기독교 및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철저한 역사적 연구가 필수적이다. 오늘날 독일의 사회적 국가의 성격은 다양한 이념과 사회사적인 상황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개신교의 영역으로부터 "동기와 방향"을 얻었다. 국가를 권력과 문화국가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국가로서 보충하여 이해하며, 그리고 이 국가를 통해서 약자를 돌보는 것이 기독교인의 책임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들의 국가 이해는 본질적으로 개신교 전통으로 각인 되어졌고,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넘겨진 하나의 기구로써 이해된다. 사회적 개신교의 전통은 특별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오늘날 제3의 대안인 사회적 시장경제(Alfred Mueller-Armack)의 틀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인 맘몬의 정신을 집단주의적인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개인의 인격적 존엄을 인정하며, 개인의 도덕에 대해서 적지 않게 그러나 채워질 수 있는 요구들을 담는 경제제도를 찬성하였다.(Traugott, 6 이하) 이와 같이 사회적 기독교는 각 시대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복음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현 상황에 대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통과 말씀 속에서 새 길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따라서 각 시대에 큰 역할을 하였던 사회적 기독교의 연구는 더욱 중요하다. 참고문헌 Karl Janssen, Johann Hinrich Wichern, Ausgewaehlte Schriften Bd. I, II, III, Berlin 1956. Dietrich von Gertzen, Adolf Stoecker, Lebenslauf und Zeitgeschichte, Schwerin 1912 Guenter Brakelmann, Die soziale Frage des 19. Jahrhunderts, Bielefeld 1981. Guenter Brakelmann, Kirche und Sozialismus im 19. Jahrhundert, Witten 1966. Guenter Brakelmann/Traugott Jaehnichen, Die protestantischen Wurzeln der Sozialen Marktwirtschaft(Ein Quellenband), Guetersloh 1944. Traugott Jaehnichen, Sozialer Protestantismus und moderne Wirtschaftskultur, Muenster 1997. Karl Kupisch, Zwischen Idealismus und Massendemokratie, Berlin 1955. Manfred Schick, Kulturprotestantismus und soziale Frage, Tuebingen 1970. Gerhard Besier, Religion, Nation, Kultur, Neukirchener 1992. Albrecht Langner, Katholische und evangelische Sozialethik im 19. und 20. Jahrhundert Parderborn etc. 1998. Friedrich Wilhelm Graf, Kulturprotestantismus, in: TRe, Bd.20 Martin Greschat, Das Zeitalter der Industriellen Revolution, Stuttgart etc. 1980. Martin Greschat, Protestanten in der Zeit, Stuttgart 1994. Jochen-Christoph Kaiser, Protestantismus und Sozialpolitik, in: Soziale Reform im Kaiserreich, Stuttgart etc. 1997. Klaus Erich Pollamnn, Weltanschauungskampf an zwei Fronten, Der Sozialprotestantismus 1890-1914, in: Soziale Reform im Kaiserreich, Stuttgart etc. 1997. Theodor Strohm, Innere Mission, Volksmission, Apologetik, in: Sozialer Protestantismus und Sozialstaat, Stuttgart, etc. 1996, Helga Grebing, Geschichte der deutschen Arbeiterbewegung, dtv 1970, S.26-27. Peter-Heinz Seraphim, Deutsche Wirtschafts- und Sozialgeschichte, Wiesbaden 1966. Gaston V. Rimlinger, Welfare Policy and Industrialization in Europe, New York etc. 1971, 한국사회복지학 연구회 역, 한울 1991. 백용기, 독일의 기독교 사회복지, in: 기독교와 사회복지, 홍익재, 2001. Eine Studie ueber den sozialen Protestantismus Deutschlands in 19. Jahrhundert Paik, Young-Gi Pull-time Lecturer Kang-Nam Unisersity Kyongki-doSeoul, Korea Der vorliegende Aufsatz beschaeftigt sich mit dem sozialem Protestantismus in deutschland. Sie versucht, die soziale Frage und christliche Erfahrungen in 19 Jahrhundert zu analysieren und auch einen Ueberblick ueber christliche Aufgabe in Korea zu habe. Der soziale Protestantismus zeigt, welche Aufgabe das Christentum und die Kirche zeitlich haben. Er erklaert sowohl theologisch diese Aufgabe und beweist die als auch durch das soziale Handeln praktisch. Der soziale Protestantismus erzielt mit der Autonomie und Gleichheit mitlebende Gesellschaft und bestrebt sich eifrig, die Lebensqualitaet des Menschen zu entwickeln. Heuzutage folgt die Tradition des sozialen Protestantismus in Verschiedenheit. Tatsaechlich ist der sozialer Protestantismus Regeneration der Naechtsnliebe, die seit dem Fruehchristentum verliert werde. Fuer den Aufsatz ergibt sich folgende Aufgabenstellung: 1. Die industrielle Revolution und die soziale Frage behandlet werden, weil man den sozialen Protestantismus nicht verstehen kann, ohne die beiden zu erwaehnen. Besonders stellt der Aufsatz die Arbeiterbewegung von Marx und Lassalle ausfuehrlich dar, weil sie eine grosse Rolle in 19. Jahrhundert gespielt hat. 2. Die Arbeit untersucht die evangelischen sozialen Bewegungen. Die Grosse Gestaltungen zur sozialen Frage, aber noch nicht bekannt wird im Kreis der theologischen Geschichte, werden besonders beschaeftigt. Dadurch kann man die gute Impulse des christlichen sozialen Bewegung kriegen. 백용기 교수(강남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1백만달러를 거부한 양심 2002-05-17 18:18:18 read : 9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한 대학교 총장이 학교 건물을 한창 짓고 있었다.하지만 건물을 완성하는데 1백만달러가 모자랐다.어려운 사정으로 고민 하던 그는 어느 날 정부 고위관리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그의 말은 2장의 서류에 사인을 해주면 1백만달러를 희사하겠다는 것이었다.즉 그가 사인을 하게 되면 고위관리에게는 3 백만달러가 생기고 총장에게는 건축에 필요한
1백만달러를 거부한 양심 2002-05-17 18:18:18 read : 9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한 대학교 총장이 학교 건물을 한창 짓고 있었다.하지만 건물을 완성하는데 1백만달러가 모자랐다.어려운 사정으로 고민 하던 그는 어느 날 정부 고위관리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그의 말은 2장의 서류에 사인을 해주면 1백만달러를 희사하겠다는 것이었다.즉 그가 사인을 하게 되면 고위관리에게는 3 백만달러가 생기고 총장에게는 건축에 필요한 1백만달러가 생기는 일이었다.그런데 총장이 그 서류를 자세히 검토해보 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만든 위조서류였다.총장은 고민에 빠졌다.‘눈을 감고 사인을 두번만 하면 경제적으 로 유익하고 아무에게도 손해를 주지 않고도 학교 건물을 완성할 수 있는데…’ 그러자 그 고위관리는 사인을 해도 두 사 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그냥 해달라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총장은 결국 거절했다.이 사실은 그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이었다.몇초만에 1백만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양심에 의해 어리석은 자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경건은 우리가 혼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사 는 모습이다.“자족하는 마음과 경건이 있으면 큰 유익이라”(디모데전서 6:6)
1세기의 눈으로 본 동성 연애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 2002-11-11
1세기의 눈으로 본 동성 연애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 현대 사회속에서 동성 문제에 대하여 논의가 각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 신앙인들도 이에 대한 답을 구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동성연애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찾고자 노력을 할 것이다. 오늘날 특히 미국 교회안에서 동성연애에 대한 크게 세가지의 견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동성 연애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그룹이 있다. 둘째는 성경에 대한 해석을 하면서 당시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 신구약에 언급되어 있는 동성 연애에 대하여 오늘날 잘못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동성 연애에 대하여 죄악시하지 아니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그룹은 이 두 견해의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 연애는 죄악인가 아니면 병으로 취급되어질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하여 연구를 하여 볼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고는 동성 연애와 연계되어 있는 구약 성경 구절에 대하여 언급을 할 것이지만 초점은 신약의 바울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더욱이 당시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바울이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는가를 연구하고 이 토대 위에서 오늘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신약 배경은 당시 헬라 문화와 로마의 문화에 대하여 연구하고, 이러한 문화 속에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동성 연애를 해석하고 있는가를 중간사의 입장에서 연구하여 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의 견해를 연구하고자 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배경 연구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연구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전과 이후의 시대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연구를 하는데 먼저 그리스의 배경을 연구하고 나서 로마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고자 한다. 그리스 배경 그리스의 배경을 연구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그리스 고전에 동성 연애가 어떻게 언급되어 있는가를 연구하여야 한다. 이 고대의 그리스 문화의 시대에 대하여 Tannahill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한다. "Homer, Hesiod, Plutarch, Pausanias --the professional my preservers and myth-improvers--created a vivid, adventurous, amoral world in which gods and heroes spent as much of their time bedding and brawling as they did in performing deeds of valor. . ." 이 당시 그리스인들의 성에 대한 관점이 모든 신들, 여신들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성들에 대한 다양한 현대의 용어들이 당시 그리스 사회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예로 androgyny, aphrodisiac, eroticism, hermaphroditism, homosexuality, narcissism, nymphomania, pederasty, satyriasis, 그리고 zoophilia이다. 이러한 다양한 용어가 그리스 사회 속에서부터 나온 것을 볼 때 당시 그리스 사회의 성에 대해 얼마나 개방적이었는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에 대하여 개방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또한 동성 연애에 대하여서도 상당히 일반적이었음을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Smith는 "On all levels of society, homoerotic activity pervaded the Greco-Roman period." 더욱이 이러한 현상은 여성에서보다도 남성에서 일반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남성들이 주도하고 있던 그리스 사회 속에서는 주로 남성들의 활동 영역 속에서 동성 연애들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사회에서 동성 연애가 이루어지던 곳은 교육기관 과 정치집단 혹은 군대 속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동성 연애는 첫 번째 이루어 진 곳이 사회적인 기관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동성 연애를 당시는 이러한 사회적 집단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어른 남성이 어린 소년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던 남색이 주를 이루고 있었던 사회였다. 그래서 Tannahill은 남색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the word pederasty is generally used to describe the sexual attraction of an adult to an immature child, but to the Greeks it signified the love of a man for a boy who had passed the age of puberty but not yet reached maturity." 어떠한 사회적 단체에서 이러한 남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말은 사회적 계급의 차이에 의하여 동성 연애가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반적으로 동성연애는 당시 사회 속에서 나이든 남자들이 젊은 남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 기원전 6-4세기에 일반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관계에 대하여 학자들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Boswell 같은 학자들로 이들은 나이든 사람들이 당시 소년들의 정신적 도덕적 지적 발전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돌아보고 또한 이들의 목적은 그 사랑하는 소년의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이끌기 위한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Keuls와 같은 학자들은 남색은 이러한 순수한 의미이기보다는 남창과 연계되어있다고 주장을 한다. "this pattern became compromised and led to male prostitution by citizens and to adult male love affairs; both of these practices were consistently stigmatized as socially unacceptable. Anal sex, generally associated with obscenity and coarse behavior, was the common form of these discredited types of homosexual contact." 그녀에 따르면 남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480 BC에 이미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금지를 시키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당시 예술품들과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들은 분명히 남색이 아니라 남자들간의 사랑이고 또한 동성 연애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주장을 한다. 당시의 동성연애는 학생동료들 사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나아가서 이러한 젊은 사람들이 남창으로 변하여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법령들이 통과 도기까지 하였다. 어찌하였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사회 속에서 남성들의 동성 연애를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보면서 또한 당시 사회의 예술 작품을 보면서 동성 연애와 남색이 만연되어 있던 사회였음을 확신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동성 연애나 남색을 당시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가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동성 연애나 남색이 당시 사회에 만연되어 있으면서 또한 당시 사람들은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겪는 하나의 과정정도로 생각을 하였던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동성 연애나 남색의 문제점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이 있었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Garland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한다. " . . . homosexual attachments were believed to facilitate the transition from child to adult, thought it must be stressed that this view seems to have been more prevalent among the aristocrats. . . In Aristophanes' plays . . . there is clear evidence of revulsion against homosexual practices on the part of the Attenian middle class." 로마 그리스 사회에서 동성연애와 남색이 보편적이었지만 이를 막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고 있었지만 로마에서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음을 볼 수 있다. 1세기 전후의 로마 사회에서는 동성연애와 이에 대한 언급이 사회 전반에 걸쳐서 만연되어 있었고 또한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공화정 시대나 황제 시대에 이르러서 동성 연애나 남색이 불법으로 인식되어지지 아니하였고 또한 로마 안의 어떠한 종교나 법이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시 로마 사회 속에서는 동성 연애로 남색이 불법으로 혹은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적인 관계는 능동적인 역할과 수동적인 역할로 이루어진다. 능동적인 역할은 남성이 하고 수동적인 역할은 여성이 하는 것이다. 당시 사회는 명예와 수치를 중시 여기던 사회였기 때문에 남자가 여성의 역할인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명예가 손상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인인 남자가 수동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 속에서는 동성연애는 같은 사회적 신분 속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었다. 1세기 당시의 로마 사회속에서 명예의 중요성에 대하여 멜리나는 "명예는 원래 사회적으로 인정된 가치에 대한 주장이다." 이러한 정의 하에서 그는 명예는 권력과 성과 그리고 종교라는 세 분야에 의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계속하여 권력과 성과 종교를 설명한다. 그는 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한다. "성적 신분 또는 역할은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을 상징화하는 일련의 의무와 권리들 --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또는 당신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하는 것 -- 에 관해서 말한다. 남성의 '의무'는 여성의 '의무'와 동일한가? 남성에 대하는 방식은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동일한가? 성적 신분은 한 사회집단에서 인정된 남성과 여성의 '의무'에 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정보는 "1세기 로마 사회는 명예를 가장 주요하게 여기던 사회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멜리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1세기의 사람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신의 명예의 등급이다. 가치에 대한 권리와 자격은 신분에 대한 권리이며, 그 신분 (그가 가진 일단의 권리와 의무)은 자신의 사회적인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따라서 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은 그의 명예 등급에 의존하여, 그것은 그 공동체의 신분 서열에서 그 사람의 위치를 결정해 준다." 이렇게 명예에 의하여 신분이 결정되어지던 사회였기 때문에 명예에 의하여 사람의 행동이 결정되어졌던 사회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유자인 남성은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는 일을 하지 아니하였다. 성적인 관계에서 남성은 능동적인 역할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은 곧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 성적인 관계에서 남성은 남성의 역할을 하여야 하는 것이지 남성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여성의 역할인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명예에 손상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 관계는 능동적인 위치에 있는 남성과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여성의 관계이고 동성 연예는 능동적인 위치에 있는 자유인 남성과 수동적인 위치에 설 수 있었던 종들과 혹은 젊은 남성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Steggemann은 이렇게 말을 한다. "The view taken on sexual activity or passivity, then, corresponds to social hierarchy. And it is an established fact that Medterranean women were confined to passivity and had to act accordingly. How, then, is this represented in homosexuality? Well, it should be no surprise within this framework that homosexuality mainly means pederasty and that the object of homosexual desire had specific female characteristics; long hair, some sort of makeup, a tender face. In a word, he was effeminate (malakos). The prevailing form of homosexuality was pederasty. A secondary form was sexual intercourse between a master and his male slave. . . . Under these circumstances, obviously homosexual practice among free males regarded with contempt, because in this relationship a free adult male had to take on himself a role befitting women and slaves." Steggmann의 견해에서 우리는 1세기 로마 사회에서 동성 연애가 없었다고 할 수 없으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 안에서의 동성 연애는 경멸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동성 연애보다는 사회적 구조 때문에 남색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남색은 당시 사회적 관습에서 볼 때 결코 죄악시되지 아니하였고, 또한 정죄되었던 것도 아닌 일반적으로 1세기의 로마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졌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성 연애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 1세기 당시 사회에서 동성 연애가 얼마나 성행을 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의하여 받아들여졌을지라도 Hellenistic Judaism을 연구해 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실제적으로 1세기 전후의 헬라화 되어 있는 유대문헌들을 연구하여 보면 이들은 동성 연애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를 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는 받아들이고 또한 일반화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 왜 어떻게 유대인들은 동성 연애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를 하였을까? 하는 것이 의문점인 것이다. 이러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던 경전에 어떻게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가를 연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지면관계상 구약의 중요한 성경구절만 인용하여 연구하고 한다. 먼저 레위기 18:22절과 20:13절에서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시에 이집트의 풍속을 따르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주어진 명령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Eron은 이렇게 말을 한다. ". . . an ancient body of Israelite legal materail . . . (which) holds the Canaanite and Egyptians guilty of a wide variety of sexual sins that include incest, adultery, male sexuality, bestiality, and child sacrifice . . . The Israelites are warned not to follow any of these practices lest the Land of Israel spew them out . . . (Lev. 18:24-30; 20:22-26)." 이 두 성경 구절은 랍비들의 동성 연애에 대한 강한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와 사사기에 나온 두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9장에 소돔의 멸망 사건이 언급이 되어 있는데 당시 소돔과 고모라 성의 타락상에 대하여 잘 언급이 되어 있은 것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이 소돔과 고모라성의 이야기와 사사기 19장에서 21장에 나와 있는 그들의 직접적인 죄는 동성 연애의 문제가 아니라 남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지 아니하고 또한 불의를 행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을 한다. 예로 Eron은 그의 논고, "Homosexuality and Judaism"에서 이 두 본문을 선지서들의 견지에서 해석을 하고자 했다. 그는 이사야서 1:10절과 3:9절 그리고 예례미아 23:14절과 에스겔 16:48-49절에 근거하여 소돔, 고모라성과 기브온의 죄는 의가 부족하고 도덕과 윤리의 가치를 무시하고 또한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돌아보지 아니한 죄에 대하여 심판을 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처럼 현대 학자들 사이에 이 4개의 구절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본문이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고 또한 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반면 일부에서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고는 구약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구약 신학자들에게 남겨 놓을 생각이다. 다만 이러한 구약의 성경 구절을 중간사 시대에 어떻게 이해를 하였고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도 바울은 동성 연애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Eron이 내린 결론은 결국 동성 연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고 있으나 중간사시대의 유대인들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간 시대의 문헌을 살펴보면 동성 연애에 대하여 분명하게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먼저 12 족장 이야기 (Testament of the Twelve Patriarchs)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이 레위의 이야기(The Testament of Levi)는 레위가 하늘을 여행하면서 그의 자손들이 행했던 일과 심판의 날에 이루어 질 일들에 대하여 언급을 한다. 17:11에서 악한 제사장들의 죄악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In the seventh week there will come priest; idolaters, adulterers, money lovers, arrogant, lawless, voluptuaries, pederasts, those who practice bestiality." 납달리의 이야기(The Testament of Naphtali)에서 소돔의 죄악을 따르지 말 것을 권하면서 소돔 성의 죄가 무엇인가 언급이 되어 있다. "But you, my children, shall not be like that: In the firmament, in the earth, and in the sea, in all the products of his workmanship which departed from the order of nature. 'Likewise the Watchers departed from nature's order; the Lord pronounced a curse on them at the Flood. On their account he ordered that the earth be without dweller or produce (TNaph 3:4-5). 또한 Sibylline Oracles의 저자도 동성 연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지에서 언급을 하고 있다. "Male will have intercourse with male and they will set up boys in houses in ill-fame and in those days there will be a great affliction among men and it will throw everything into confusion. It will cut up everything and fill everything with evils with disgraceful love of gain, ill-gotten wealth, in many places, but especially in Macedonia (SibOr 3:185-188). 이러한 동성 연애와 남색에 대하여 Sibylline Oracles의 저자는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언급을 하고 또한 그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행위를 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저자는 당시 동성 연애와 또한 남색이 주변 지역에서 만연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결국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따르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또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경에 기록된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또 다른 책 Pseudo-Phocylides의 저자도 동성 연애와 남색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반대의 입장을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Neither commit adultery nor homosexual passion(Ps-Phoc 3)." 그는 계속해서 비정상적인 비율법적인 성 관계를 가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Do not transgress with unlawful sex the limits set by nature. For even animals are not pleased by intercourse of male with male. And let women not imitate the sexual role of men (Ps-Phoc 190-192)." 또한 Enoch의 저자도 역시 동성 연애를 소돔 성의 죄악과 연계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God convicts the persons who are idol worshipers and sodomite fornicators, and for this reason he brings down the flood upon them. . . . And all the world will be reduced to confusion by iniquities and wickednesses and /abominable/ fornications/ that is, friend with friend in the anus, and every other kind of wicked uncleanness which it is disgusting to report/, and the worship of (the) evil (one) (2 Enoch 34)." 위에 언급된 모든 글들에서 중간사 시대에는 소돔의 죄를 동성 연애와 연결시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저자들의 견해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그리스 문화권의 사회에서 만연되어 있던 동성 연애나 남색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이들은 레위기에 근거하여 동성 연애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또한 Philo와 Josephus와 역시 동성 연애를 소돔의 죄악과 연계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hilo는 그이 책에서 소돔의 죄악을 동성 연애와 연계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 관계를 가지는 행위를 자연의 순리에 위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 . . not only did they go mad after women, and defile the marriage bed of others, but also those who were men lusted after one another, doing unseemly things, and not regarding or respecting their common nature; . . . by degrees, the men became accustomed to be treated like women, and in this way engendered among themselves the disease of females, and intolerable evil; for they not only, as to effeminacy and delicacy, became like women in their persons, but they made also their souls most ignoble, corrupting in this was the whole race of man, as far as depended on them (On Abraham 135-36). 이러한 언급은 요세프스에게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Josephus는 그의 글 Antiquities과 Against Apion에서 천사들의 소돔 방문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And when God had replied that there was no good man among the Sodomites; for if there were but ten such men among them, he would not punish any of them for their sins, . . . Now when the Sodomites saw the young men [the angels] to be of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is to an extraordinary degree, and that they took up their lodgings with Lot, they resolved themselves to enjoy these beautiful boys by forces and violence (Anti 1, 11. 3)." "But then, what are our laws about marriage? That law owns no other mixture of sexes but that which nature hath appointed, of a man with his wife, and that this be used only for the procreation of Children. but it abhors the mixture of a male with a male; and if anyone do that, death is his punishment (Anainst Apion 2, 25)." 필로나 요세프스는 그들의 견해를 당시 유행하고 있던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동성 연애나 남색이 옳지 못한 행동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동성 연애는 순리(nature)에 적합하지 못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1세기 전후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당시 사회는 동성 연애나 남색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또한 이를 불법시 하거나 죄악시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 사회에서나 혹은 Diaspora의 유대 사회에서는 이를 죄악으로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동성 연애는 소돔 성의 멸망과 연계시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한 행위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은 동성 연애나 남색을 취급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생각하여 볼 필요성이 있다. 동성 연애에 대한 바울의 견해 사도 바울은 동성 연애와 연계된 일련의 용어들을 로마서 1:26, 27절과 고린도 전서 6:9, 10절 그리고 디모데 전서 1:10에서 취급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대 학자들 사이 속에서 이 구절을 동성 연애를 지지하는 구절로 해석하고 자 하는 학자로부터 동성 연애를 반대하고자 하는 학자들까지 다양하다. 어떤 학자들은 신약에서는 동성 연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반강제적으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남색을 반대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다시금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당시에 사도 바울은 만연되어 있던 동성 연애와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혹은 Diaspora에 있었던 유대 저자들과 같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9-10 여기서 동성 연애와 관련이 있는 용어는 9절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이다. 이 용어들은 헬라어로 ` 와 ' ~ 이다. 이 두 용어는 당시 사회속에서 유행하고 있던 동성 연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Witherington은 "Malakoi in its root meaning means 'smooth' or 'effeminate.' Dionysius of Halicarnassus (7.2.4) uses his term to refer to a young male prostitute. Pederasty, molestation of minors by adult males, was the most common form of homosexuality in antiquity. 여기서 ' ~ 가 본문과 디모데 전서 1:10절에 밖에 쓰여지고 있지 아니한 하팍스 레고메나인데 우리는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을 하는 것이 타당한가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이 단어는 Bauer의 사전에는 "남성간의 동성 연애," "남색," "비역장이 (sodomite)"로 번역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단어 하나를 연구하여 사도바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단어의 Context 와 연계하여 사도 바울이 어떠한 의도 속에서 쓰고 있는가를 우리는 연구를 하여 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남색이라는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일까를 연구하여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어떤 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윤리적 차원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해석되어져야 하느냐 혹은 동성 연애로 해석할 것인가를 연구하여 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Wright는 이 단어가 레위기 18:22절과 20:13절에 근거하여 나왔다고 주장을 한다. 그래서 그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the ones who lie/sleep with men" 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는 강력하게 사도 바울은 당시 사회에서 만연되어 있던 남색이 오늘의 동성 연애의 개념임을 강조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Fee 역시 이 견해에 동의를 하면서 이 단어는 양면적으로 해석이 되어질 수는 있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보면 동성 연애를 사도 바울이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불평등한 관계에서의 이루어지는 인권적 차원의 성 관계에 대하여 언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 연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Malick 역시 정의에 동의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고 있다. "The significance of this derivation is that these passages in Leviticus have nothing to do with pederasty. They refer to the act of homosexuality -- man with man. It is significant that of all terms avaliable in the Greek language, Pual chose a compound from the Septuagint that in the broadest sense described men lying with men as they would lie with women. This is broad denotation that could include pederasty but need not be limited to it. 이 또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남색이라는 단어를 당시 사회 속에서 볼 때 불평등한 관계 안에서 성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당시에는 평등한 관계에서는 동성 연애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동성 연애에 대한 비판으로 보아야 타당한 것이다. 또한 디모데 전서 1:10절에서 이러한 남색이 악의 종류의 하나임을 나타내고 있어 사도 바울은 당시 남색이 동성 연애인데 비록 사회적으로 만연되어서 일반화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할 지라도 성경적으로 볼 때는 죄악이었음을 성도들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배경과 당시 성도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은 이미 구약 성경에 익숙하여 있었고 또한 중간사 시대의 문헌들에 익숙하였던 결과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마서 1:26-27 이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가 두 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어의 의미에 따라서 본문의 이해가 달라 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단어는 우리말로 "바꾸어" 라는 과 "순리" 라는 ` 이라는 용어이다. Hays는 "바꾸어"라는 단어가 강조를 위한 수사학적 기교로 쓰였다고 주장을 한다. ". . . the direct parallelism between the rejection of God and the rejection of created sexual roles." 본문에서의 "바꾸다"라는 개념은 23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타락한 인간들은 창조주 대신에 창조되어진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창조되어진 것을 더 좋아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25절에서 인간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보다도 피조물 섬기기에 열심을 내었고 이는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된 것으로 바꾸어 놓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6절과 27절에서도 비슷한 의미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순리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성을 더 좋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 본문에서 "바꾸다"라는 의미는 인간들이 타락함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을 섬기기 아니하고 인간들이 순리를 따라서 살지 아니하고 역리로 써서 남성이 남성을 향하여 음욕을 품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Dunn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The third appearance of the word 'changed' . . . seems to imply that the action described ('changing the natural use to that which is contrary to nature') is of a piece with and direct result of the basic corruption of the glory and truth of God in idolatry. . . Homosexuality is seen as a passion which is 'worthy of no respect.' Homosexual practice is characterized with the emphasis of repetition as 'unnatural. . .'" 여기서 순리와 역리라는 단어를 대칭하여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용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중간사 시대의 문헌의 작가들에 의하여 사용되어진 언어이다. 또한 이러한 "순리"와 "역리"라는 단어는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철학적인 용어들이었다. 순리는 당시 사회에서는 이성간의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을 하였고 역리라는 단어는 동성 연애를 표현할 때 사용하고 있었다. 그 예로 Plutarch는 그의 책 Dialogue on Love, 751 C. E.에서 남성들 간에 의도적인 성 관계를 가지는 것을 악한 행동이라고 하면서 이는 순리를 대항하는 역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두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성간의 사랑과 동성간의 사랑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도 바울은 순리와 역리라는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동성 연애를 반대하게 되는 배경에는 당시 사회는 중간사 문헌에 익숙하여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중간사 문헌의 저자들의 견해와 같은 견해 속에서 동성 연애가 만연되어 있는 사회속에서 동성 연애를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앞에서 1세기 당시 사회에서 동성 연애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당시 사회에서는 동성 연애가 일반적이었으며 또한 죄악시 여겨지지 아니하던 사회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더욱이 고린도 교회나 로마 교회는 그리스-로마의 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에 동성 연애가 죄악으로 인식되어지지 아니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도 바울은 중간사 시대의 문헌들의 저자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강력히 반대를 하고 있다. 중간사 시대에도 동성 연애가 만연하고 있었지만 이 시대의 저자들은 구약의 성경 말씀이 당시 이집트의 문화를 배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말씀이 아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고 또한 소돔에서 벌어진 일들은 인간들의 무자비한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동성 연애에 대한 심판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와 같이 사도 바울 역시 동성 연애는 하나님의 섭리를 역행하는 행동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중간사 시대의 문헌들의 저자들과 같은 견해속에서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의 동성 연애에 대한 비판이 인권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동성 연애 행위에 대한 비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당시 문화적 사회적 배경 하에서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면서 오해를 만드는 해석을 하여서는 안된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동성 연애 행위를 반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오늘날 서서히 만연되어가고 또한 공론화 되어가고 있는 동성 연애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분명히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조심하여야 할 것은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동성연애자들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거나 혹은 그들을 정죄하는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참고 문헌 책 Andersen, F. I. "2 (Slavonic Apocalypse of) Enoc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1 편집 James H. Charlesworth. New York: Doubleday, 1983. Boswell, John,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Christianity.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Collins, J. J. "Sibylline Oracles."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1 편집 James H. Charlesworth. New York: Doubleday, 1983. Dunn, James D. G. Romans 1-8.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8a. Dallas: Word Books, 1988. Fee, Gordon D.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1987. Garland, Robert. The Greek Way of Life. Ithaca: Cornell Universisy Press, 1990. Josephus. The Antiquities of the Jews. The Works of Josephus. 번역, William Whiston.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87. , Against Apion. The Works of Josephus. 번역, William Whiston.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87. Kee, H. C.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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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경제정의 기업상 부문별 수상업체 2001-11-26 19:19:25 read : 4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마태복음 25:21) "이렇게 큰 상을 수상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송구할 따름입니다만,앞으로도 경제정의 실천에 더욱 노력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2000 경제정의 기업상 부문별 수상업체 2001-11-26 19:19:25 read : 4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마태복음 25:21) "이렇게 큰 상을 수상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송구할 따름입니다만,앞으로도 경제정의 실천에 더욱 노력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한 번도 받기 어려운 경제정의 상을 두 번씩 받게 된 '비결'에 대해 한국유리 김성만(53) 사장은 "세 분 창업자의 기독교적 기업관과 청지기 정신을 따르고자 노력했기 때문일 것" 이라고 설명했다. 기업의 건전성을 따지는 항목에서 두루 좋은 점수를 받았고, 특히 공해산업의 하나인 유리생산업체로 '환경보호 만족도'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기업이미지통합(CI) 전략에 따라 89년부터 '한글라스'라는 브랜드로 생산하는 한국유리는 84년에 인천에 기술연구소를 세워, 세계 최초로 건축용·자동차용 투과도 가변유리(SPD) 개발에 성공할 만큼 기술투자에도 각별한 노력을 쏟고 있다. 95년 남들보다 한발 앞서 구조조정에 착수해,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전에 끝냄으로써 99년에는 320억 원의 순이익(매출액 2,700억 원)을 올렸다. 김 사장은 "40여 년 '유리 외길'을 걸어온 기업답게 세계적 수준의 제품생산이 목표" 라며 "건축,주거문화 발전에 따라 수요가 늘고 있는 고기능성 유리제품 생산에도 주력해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할 계획" 이라고 밝혔다. 적 용 청지기 정신이란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요 나는 단지 그것을 잠시 맡은 일군, 하인, 봉사자일 뿐이라는 자세, 자기인식이다. 사유인 기업의 주인도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데 오늘날 많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교회와 성도를 자기 소유인양 생각하며 기업처럼 경영하고 심지어 대물림하는 일까지 한다는 소식이 있다. 이것이 어찌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목회하고 교회를 돌보는 사람들이 할 일인가? 출 처 「한겨레신문」 경제면, 2000. 5. 7.
2000 경제정의 기업상 부문별 수상업체 2001-11-26 19:19:25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마태복음 25:21) "이렇게 큰 상을 수상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송구할 따름입니다만,앞으로도 경제정의 실천에 더욱 노력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2000 경제정의 기업상 부문별 수상업체 2001-11-26 19:19:25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 구 "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마태복음 25:21) "이렇게 큰 상을 수상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송구할 따름입니다만,앞으로도 경제정의 실천에 더욱 노력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한 번도 받기 어려운 경제정의 상을 두 번씩 받게 된 '비결'에 대해 한국유리 김성만(53) 사장은 "세 분 창업자의 기독교적 기업관과 청지기 정신을 따르고자 노력했기 때문일 것" 이라고 설명했다. 기업의 건전성을 따지는 항목에서 두루 좋은 점수를 받았고, 특히 공해산업의 하나인 유리생산업체로 '환경보호 만족도'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기업이미지통합(CI) 전략에 따라 89년부터 '한글라스'라는 브랜드로 생산하는 한국유리는 84년에 인천에 기술연구소를 세워, 세계 최초로 건축용·자동차용 투과도 가변유리(SPD) 개발에 성공할 만큼 기술투자에도 각별한 노력을 쏟고 있다. 95년 남들보다 한발 앞서 구조조정에 착수해,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전에 끝냄으로써 99년에는 320억 원의 순이익(매출액 2,700억 원)을 올렸다. 김 사장은 "40여 년 '유리 외길'을 걸어온 기업답게 세계적 수준의 제품생산이 목표" 라며 "건축,주거문화 발전에 따라 수요가 늘고 있는 고기능성 유리제품 생산에도 주력해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할 계획" 이라고 밝혔다. 적 용 청지기 정신이란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요 나는 단지 그것을 잠시 맡은 일군, 하인, 봉사자일 뿐이라는 자세, 자기인식이다. 사유인 기업의 주인도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데 오늘날 많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교회와 성도를 자기 소유인양 생각하며 기업처럼 경영하고 심지어 대물림하는 일까지 한다는 소식이 있다. 이것이 어찌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목회하고 교회를 돌보는 사람들이 할 일인가? 출 처 「한겨레신문」 경제면, 2000. 5. 7.
2000년도 목회와 교회 성장을 위한 제언/ 2004-01-27
2000년도 목회와 교회 성장을 위한 제언 2004-01-27 10:47:24 read : 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담임목사님께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1-9를 보내드립니다. 담임목사님과 교역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1, 6번은 지난번 수양관 방문시 원문으로 드린 것을 다시 올렸습니다) ---2000년도 목회와 교회 성장을 위한 제언 1 -pp.50-56--- 영혼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2000년대 목회( 홍정길 목사와의 대담) 2000년대다, 21세기다 하면 많은 사람들이 뭔가 달라질 것으로 막연하고도 피상적인 기대와 불안을 가지고 있는데, 목사님께서는 21세기 사회적 현상이 심화될수록 어떤 목회적 문제들이 교회안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사실 어떤 때든지 어떤 사실이나 일들이 완전히 낙관적이거나, 또는 비관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다가오는 21세기에 예상되는 큰 문제중의 하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또 컴퓨터 자판만 보고 있으면 모든 일이 되어지는 세상이 펼쳐짐으로, 인간 소외와 같은 인간 어려움이 한층 더 깊어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동안 대개 가족이 함께 사는 동양권의 경우, 예를 들어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우울증이 질병처럼 발생하는 비율이 나라 인구의 한 5~6%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미국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독립을 하게 되어 있어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구조가 개인화 되어있고, 핵가족화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사람들에게 질병처럼 찾아오는 우울증의 비율이 동양권의 약 3배정도인 15~16%가 넘습니다. 사실 지금 총 들고 나와서 아무나 쏘는 사람들의 경우, 전부 그 행동의 뿌리를 살펴보면 깊은 인간소외에서 나오는 일종의 사회적 발악들이고 분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 소외가 어디에서 심화되었는가 하면, 최근의 정보 문화에서 가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컴퓨터 자판만 보고 감정의 교류 없이 정보만 주고받는 때가 전세계적으로 도래하게되면, 아마 인구의 30%이상이 우울증으로 질병을 앓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21세기 최대의 질병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는 병이 우울증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울증의 피해를 잘 몰라서 한국 사람들이 그러는데, 우울중은 정신질환의 가장 첫 단계로 암 못지 않게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가 올 때 교회가 그 사람들을 향해서 무슨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이제는 생각하고 바로 대처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세상은 21세기를 정보통신혁명의 시대로 낙관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인간소외의 현상을 더 심화시키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후유증인 ‘우울증’은 더 심각해 질 것이라는 말씀이네요. 그렇습니다. 정보통신이라는 것이 생활의 편리와 많은 객관적인 자료와 정보들은 수집할 수 있게 해 주겠지만, 인간 내면의 깊은 영적인 공허는 오히려 더 깊어지게 할 것입니다. 만약 영적인 온전한 인격을 참된 믿음으로 채워 놓은 사람은 그런 시대가 올 때 그 많은 정보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영적 공허를 이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는 그 정보들에 의해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재벌 2세들 중에는 일종의 성격적 미숙아 내지 정신적 파탄자가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인격적 성장이나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부모가 가진 돈과 힘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능력 없이 그런 것들을 부여받았고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격성장이 멈춰버린 거죠. 그러니까 한국재벌 가문들이 어떻게 보면 인격적으로 불쌍한 분들이에요. 아마 앞으로도 재벌가의 이런 비극은 계속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데 정작 그분들의 영혼의 삭막함은 더 심화될 것이분명합니다. 지금 21세기의 정신적인 암으로서의 우울증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사실 한국교회의 경우 교인들이 잘 변화되지 않는 원인 중에 이 우울증이 있다는 점과 문제를 너무 영적으로 해석해 버리고 바로 진단하지 못하는데 있지 않은가 생각되는데, 어쨌든 목사님께서는 이런 우울증적인 증상을 가진 교인들을 과연 어떤 식으로 목회를 해야 하며 어떻게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영혼에 대한 열린 마음’이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다시 뒤집어 말하면,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추구한 목회는 성공주의였어요. 성장하는 교회가 옳은 교회처럼 인식이 됐습니다. 내가 처음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할 때였죠. 그 70년대에 한국교회가 모델을 삼고 계속 좇아 다녔던 교회들이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였고, 척 스미스 목사의 갈보리채플이었습니다. 80년대는 존 윔버, 존 맥아더, 챨스 스윈돌을 좇아 다녔고, 교회가 마치 그렇게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릭 워렌이나 빌 하이벨스를 그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목회를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한국교회가 그렇게 70년대 80년대 90년대 동안 추구하던 그 목회 흐름들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정말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닌, ‘바른 교회’되는 것에 있는 지를 심각하게 다시 짚어봐야 됩니다. 뭐 때문에 그런 미국의 교회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그렇게 많이 얘기되어져야 합니까? 물론 그 분들의 개인적인 구령의 열정과 그래서 수많은 영혼들이 크게 모아지는 것에 대한 시비를 삼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 크게 모아지면 한 영혼을 향한 섬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인을 관리합니다. 관리와 섬김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장이시지만, 그분은 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84년도에 London Bible Institute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처음 안식년으로 가서 석 달 동안 있었는데, 그때 저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말레이지아, 인도, 그리고 네덜란드 등에서 온 분들과 일곱 명 한 조가 되어 석 달 동안 존 스타트 목사님께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모임 중에 돌아가면서 자기 교회를 소개하고 목회적 고민들을 이야기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 고민 중에 저도 내 고민을 얘기했지요. 84년 당시 내 고민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83년까지 남서울교회가 한 2,700명 모이는데 있었습니다. 제가 교인들이 500명 될 때까지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새벽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정말 그들의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제가 지금도 그 집 아이들까지 그 500가정은 입에서 거의 외워져요. 하루를 시작할 때 목사의 기도 없이 하루를 시작시켜서는 안되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500명을 넘어가니까 그것이 불가능해지더라구요. 그래서 처음에 하나님께 “하나님 나는 평생 이렇게 목회하겠습니다” 했던 것이 무너졌어요. 그렇게 많이 모일 줄도 몰랐고요. 여러 목사님들이 모여서 자기교회와 자기나라 얘기를 할 때 제가 그 고민을 얘기하니까, 말레이지아에 있는 중국인 목사가 “너는 어떻게 그렇게 문제도 아닌 걸 문제라고 생각하느냐? 너 너무 행복하다고 과시하는 것 아니야!”라고 그렇게 까지 얘기하더라구요. 그런데 존 스타트 목사님이 다른 모든 사람의 반응을 듣고 난 후에, 사실 브라더 홍이 하는 얘기가 참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우리 목회의 원천은 예수님이시고 그분이 우리의 목자장이신 데 그분이 목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목회의 원본이 요한복음 10장입니다.” 그러시면서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데, 이것이 깨지면 그것은 목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존 스타트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가 천 명이 넘게 오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물었죠.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자기는 그 교인들을 다 안대요. 새로 온 사람이 누구인지도 다 안대요. 사실 그분이 그 교회에 30여 년 동안 계셨다고 하기는 하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일날이 되어서야 이해가 되더군요. 교인들이 주일 예배가 끝났는데도 급한 일로 바쁜 사람 외에는 집에 가지 않고 전부 한 줄로서는 거예요. 그리고는 목사님과 일일이 마지막 악수를 하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존 스토트는 그분들과 “벨기에 공부하러 간 아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스코틀랜드로 결혼해서 간 애들은 잘 있는지…” 간단한 메시지이지만 하나하나 악수하면서 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의 안부를 물어보는 거예요. 그 인사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만큼이나 길었어요. 그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 영혼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공지향주의적인 목회자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물론 숫자가 많이 모이니까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그 대신 모두 피상적이 되었어요. 우리 한국교회가 대형교회의 모델을 따라간 결과라고 봐요. 그렇다면 혹시 목사님께서는 한 영혼에 대한 섬김이 피상적이 되게 하는 교인수의 적정선을 어디까지라고 보십니까? 솔직히 교회의 적정규모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정규모의 숫자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의 의지’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목회자의 의지, 하나님이 어떤 사명을 주셨는가에 대한 분명한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이런 목사의 의지를 희석시키는 함정이 성장주의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교회에 파워가 형성이 됩니다. 그 영광과 파워에 편승하면 절대로 한 영혼이 안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부단히 싸워야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본래 주신 그 영혼에 대한 관심을 내가 날마다 새롭게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최고의 문제는 30명에서 300명 교회가 93%라는 점입니다. 제가 저번에도 그런 글을 썼었는데, 이 사람들이 성공주의에 짓눌려 가지고 실패자라는 자괴감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않고 자기 교회 영혼들에 대해서도 만족치 못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목사가 자기들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는 걸 교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기게 됩니다. 목사는 큰 교회일 수록 원하지 않아도 슈퍼스타가 되기 때문에, 큰 교회일수록 목사가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섬긴다는 개념은 없어지고 제왕에 가깝게 된다고 봐요. 그럼 앞으로 점점 개인주의화되는 사회에서 한 영혼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진 목회자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목회자 자신의 바른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저는 헨리 나우웬 같은 분이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스탠포드를 거쳐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의 종교철학 교수였는데, 어느날 그렇게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됩니다. “장애를 가진 몇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나의 멋있는 논리가 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저 사람들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그 영혼의 소중성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교수직을 과감히 포기하고 장애인 일에 뛰어들게 됩니다. 정말 어떤 것이 소중하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헨리 나우웬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손양원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그분이 해방되어 감옥 속에서 나오게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담임목회자로 청빙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는 나의 형제에게 가야 됩니다. 그러고서 나환자촌으로 들어갔지요. 저희 교회가 몇 달 전에 순교자 네 사람의 자제분들을 모시고 간증을 들었어요. 그분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과연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한국교회의 목회가 ‘성공이 목적인가 주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이 목적인가’를 생각하며, 정말 가슴 쳤던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주위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한 영혼에 자신의 삶을 투자하는 목회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성공주의 목회상’을 말씀하셨는데, 목회자 자신의 원인들은 없다고 보십니까? 내적인 원인으로 목회자가 말씀으로 자라지 못하고 주님과 깊은 인격적 대화가 없기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작은 교회가 꼭 좋고, 큰 교회가 무조건 나쁘다 라고 말 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작은 교회는 꼭 아름답고 옳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심스런 표현이지만 오히려 영적으로 게을러서 교회가 늘 지지부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명백한 목회자의 범죄일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우리는 이 두 가지 면에서 다 실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목사가 되려고 할 때만 해도 목사라는 타이틀 자체가 참 부끄러운 때였습니다. 제가 67년에 신학교를 갔는데, 그때 당시 이화여대에서 결혼대상자 후보 리스트에 목사 앞에 푸줏간이 있었던지 이발소가 있었던지 그랬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신학교를 가니까 내 친구가 그 신문을 가지고 와서는 “야, 너 장가가기는 틀렸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요즘은 통합측 경우에는 7:1인지 10:1인지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대학 졸업한 사람들이. 물론 결혼 인기 순위도 엄청나게 높아졌구요. 하지만 이 길은 절대로 이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회적 소명부터 철저히 다시 점검해야 될 겁니다. 저는 신학교 경쟁률이 10대 1이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20대 1이 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말 주님을 위해서 죽기 위해 10대 1이냐는 것이에요. 하지만 어려운 일 있으면 다 흩어져요. 심지어 요즘 목사들은 ‘나 월급 얼마 줄래요’부터 시작한다구요. 목사가 희생하려 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교인들 가운데도 진정한 희생을 못 배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지금 실제와 허상사이에 큰 간격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전부 왕과 같은 사람만 있어요. 목사 옆에 가까이 가는 것을 무슨 충성으로 알아요. 그것은 진짜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섬기는 목사부터 없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너무 목사들이 대접을 많이 받아요. 정말 목회자부터 말씀가운데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큰 약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큰 소리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좀 손해보더라도 하나님을 기다리고 희생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옷로비 사건의 추태로 드러났다고 봐요. 사실 그분들 다 성경공부 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절망한 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기를’ 하고 설교를 해왔는데 성경에 손을 얹고 거짓말을 하면 이거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예수 믿고 나서 CCC에서 일하며 이 나라가 이런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적어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백만 크리스천, 백만 크리스천 그랬거든요. 그래서 믿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해결된다고 믿고 민족복음화를 위해 CCC에서 죽어라고 뛰었어요. 정말 목숨을 걸고 했어요. 얼마 있으니까 천만 크리스천 하는데 아무 것도 안 달라지더라구요. 교회만 나왔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본질이 안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교회에서는 참 열심인데 자기 회사 생활이나 사업하는 곳에서는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못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박태준씨에게 누가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니까, 당시 포철의 누구라고 하면 다 아는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이었는 가봐요 그 사람을 박태준씨가 가리키며 “그놈이 믿는 예수를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하고 화를 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는 참 순종하고 그렇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교회는 전혀 열심히 아니에요. 마누라 때문에 억지로 나와요. 체면 때문에. 그런데 사회에서는 좋은 사람이 있어요. 사회에서는 “아, 그 사람”하며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 유형은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칭찬을 듣고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는데, 자기 집 안 식구들은 치를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한국교회 안에 있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봐요. 결국 아무 것도 안 변하더라구요. 아무 것도 안 변했어요. 교회만 다니고 교회에만 충성했지. 저는 그래서 이제 그 다음은 이들이 성경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성경공부를 75년 남서울교회 개척해서 처음으로 성경공부를 시켰습니다. 평신도를 가르쳐서 평신도 성경공부를 가르친 것은 남서울교회가 처음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매진해 왔는데, 그 강남 지역 성경공부하는 교회 다니는 사람, 성경공부에 관심이 있어서 이곳 저곳 좇아 다녔던 그 사람들에 의해서 옷 로비 사건이 났어요. 그러니 이게 뭐냔 말이에요. 정말 주일에 설교를 못하겠더라구요. 그럼 어떻게 해야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될까요? 머리가 아니라 말씀에 전 생애를 헌신하여 주님을 따르는 한 사람의 모델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세계를 사랑하며, 우리 민족도 사랑한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내 옆에 있는 우리 아이들을 입양하는 사람이 있는가?” 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달 뒤에 우리 교회 장로님이 입양을 한 거예요.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또 그때 설교를 듣고 우리 교회 젊은 사람들이 아이 하나만 낳고 입양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것을 나중에서야 발견했지만,사실은 나도 입양을 못했는데, 참 이게 목회의 영광이고 즐거움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는 2000년대를 맞이한 지금 한국교회가 나가야 될 방향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지금 한국교회의 나갈 방향보다 치료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봐요. 이것 없이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93%나 되는 그 적은 풀뿌리 같은 교회들이 다시 건강해지고 참된 부흥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그 풀뿌리같은 교회들이 지금처럼 계속 고사되어간다면 지금 있는 큰 나무들도 결국 다 무너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교회가 다시 힘을 얻어야 진짜 부흥이 올 수 있습니다. 몇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300명 이하의 93% 교회들과 그 목사님들이 다시 하나님이 부르셨던 그 부르심을 발견하고 참된 목자상을 회복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진정한 부흥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히 한국교회의 90%이상을 차지하는 그 교회들에 한국교회의 2000년대가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거기가 변화되어야 변화되는 것이지, 큰 교회 몇을 모델로 삼아 몰려갔다 몰려오는 것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는 300명 돌파작전,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그 영혼에 대해서 밤을 새워 기도하는 마음의 회복이 정말 필요합니다. 온 천하보다 한 영혼이 정말 귀하다면, 왜 30명 모이는 교회에 생애를 걸만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왜 실패입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저는 이게 목회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가장 큰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9절부터 21절까지 보면 너희 속에 어떤 능력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알아라. 그렇게 말해놓고 그 큰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그들 가운데 …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죽지 않다는 거죠. 안 죽는데 무슨 부활론이 필요있습니까? 아픈 사람에게라야 치료의 능력이 필요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라야 부요의 능력이 필요하지. 죽지 않은 사람에게 부활의 능력이 왜 필요합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안에는 부활능력이 필요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결국 교회가 정말 교회답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는 목회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사실 우리가 날마다 죽고 있어요. 그런데도 죽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자기애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영원히 보전되리라.” 죽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애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를 죽여야 해요. 그런데 그것은 누가 모델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나를 섬기는 자는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자에게 나도 늘 그와 함께 있을 것이요.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시리라.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프란시스 예배당에 갔더니 참 재미있는 그림이 있어요. 프란시스 카톨릭에 가보면 치마부에나 지에또라는 유명한 르네상스 이전의 화가들의 그림이 꽉 차 있거든요. 벽화로 프란스시 생애, 예수님의 생애가 짝 그려져 있어요. 그런데 제일 마지막 뒷면에 나가는 위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요. 그런데 그 뒤에 프란시스가 따라가는데 예수님이 말씀을 하세요. 그런데 저를 안내했던 분이 ‘당신 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을 것 같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힘드냐? 고 주님이 그러시지 않았겠느냐?’했더니 그런게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사람은 저 두 분이 무슨 말을 했을 줄 안다’고 하는 거예요. 아주 의미있는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러니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기독교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런데 내가 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다 보면 주께서 프란시스에게 무슨 말을 했을 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걸음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사실 참 우스운 것들입니다. 축복을 받는다고 하면 전부 물질적인 것이고 또 성령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건강축복, 물질축복 이것만을 강조해요. 그 신령한 성령님이 가장 물질적인 것으로 축복해주신다는 것이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2 --- 제목: 21세기 교회상을 제시해 본다. (김동호/동안교회 담임목사)--pp.57-61 70-80년대 무섭게 성장한 한국교회는 정체를 거듭하더니 바탈길에 서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는 더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정확한 이유를 찾아보고 그에 대한대책도 강구해야한다. 이러한 이유로는 첫째. '원로'교회가 되면 쇠퇴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문화는 유교문화이다. 유교문화는 원로문화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화는 원로들을 공경하는 것에 출발하였지만 결국 원로와 어른이 통치하고 지배하는,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는 그리고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인 문화로 발전하여 그것이 사회를 점점 쇠퇴하게 하고 잇다. 원로들이 존경받는 사회는 좋지만, 원로들이 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젊은이들과 청년들은 무조건 원로들의 주장과 가르침에 순종하여야만 하는 것을 가르치는 사회는 절대로 발전할 수 없고 원로와 함께 쇠퇴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원로가 치리하는 교회가 되어 쇠퇴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 영향으로 목사와 장로가 교인의 심부름꾼일기 보다는 교인들의 어른이 되어 저들을 섬기는 종이라기 보다는 저들에게 명령하는 지배자가 된 것이다. 둘째로 개발독재, 성장은 있지만 성숙은 없다. 한국교회는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중앙집권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발독재를 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재는 성장과 개발에 어느 정도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성숙에 아주 취약하다. 어느 정도 성장을 하면 그 다음에는 성숙이 따라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시 계속 성장이 이어질 수 있는데, 독재적인 구조때문에 성숙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것처럼 한국교회도 쇠퇴의 비탈로 내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셋째로 당회의 민주화, 감독권을 회복하자. 일빈제직과 교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더 이상 우민화를 하여서는 안된다. 그렇게 될 때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구조조정이 필요하며, 당회와 제직회가 서로 견제보다는 협조하는 분위기라면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다. 넷째로 목회의 민주화, 전문목회를 지향한다. 교회가 성장을 하게 되면 담임목사 혼자서 목회전반을 담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다 주시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셨다. 이들이 합력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하신다. 물론 담임목사 가 교회의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하고 처리하는 것이 일사분란하고 빠를 것이다. 그리고 쉬울 것이다. 그러나 빠르고 쉽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좀 힘들고 늦어도 불편해도 전임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협동목회를 하는 것이 먼 미래를 내다 볼 때 건강한 목회가 될 것이다. 담임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는 목회는 한 사람의 목회자가 은퇴를 하거나 시험에 들면 교회전체가 큰 몸살을 앓게 되는 것이다. 당회가 민주화 되아야 하듯, 목회도 민주화가 되어야한다. 한국교회는 협동목회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해야한다. 독재자 한 사람에 의하여 나라가 성장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는 전문적인 목회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목회를 하는 전문시대가 열릴 것이다. 다섯째로 새 부대를 준비하는 교회가 살아남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할 것 없이 세상이 변하고 있다. 그 변화와 흐름에는 일정한 식이 있고 틀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민주화와 전문화이다. 교회도 빨리 그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 흐름을 일기지 못한다면 교회는 담음 세기에 쇠퇴하게 될 것이고 드디어 몰락하게 될 것이다. 새 부대를 준비하지 못하면 새 포도주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정치도 중앙집권에서 지방자치로 넘어가야만 한다. 목회도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하여 움직이던 시대에서 전문적인 목회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시대로 넘어가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냥 미끄러져 내려 갈 수밖에 없다.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3---- 주님이 원하시는 새 천년 교회사역(오정현/남가주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pp.62-67 새 천년 교회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역동력있는 교회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의 제 2의 성육신이다. 몸은 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일(使役)을 못할 정도로 너무나 아픈 곳이 많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33년 생애를 사시는 동안 몸을 입고 계셨는데 그 이유는 이하기 위해서 이다. 몸을 입고, 제자를 삼으시고, 죄인을 섬기셨고, 마귀의 세력을 포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으로 승천하신 이후 바로 다른 몸을 보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지상교회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를 흔히 예수님의 제 2의 성육신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몸을 입고 계시는 동안 아프셔서 일을 못하신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제 2의 성육신인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 백성을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건강해야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 천년 교회는 교회 성장보다 균형집힌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한다. 동시에 모든 성도는 서로 붙어 있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지체처럼 교회와 생명의 관계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 죽는다는 건강한 교회론을 가르치고 적용하게 해야한다. 다음으로 교회론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란 예배하는 공동체, 훈련받는 공동체, 증거한은 공동체라는 것을 가르치고 확인해야 한다. 한 번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삶으로 확이되고, 뿌리를 내릴 때까지 목회자는 땀과 눈물, 피를 쏟아야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21세기 교회의 미래는 성령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2. 새천년 교회의 흐름 교회론에 있어서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하워드 슈나이더는 21세기의 교회의 전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핵심적인 부분을 예견했다. 1)지역교회에서 세계교회화로 2)부분적인 성장에서 전반적인 부흥으로 3)지역교회의 대형화로 4)제도적 전통신학에서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5)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에서 사역자 공동체로 6) 남성 중심의 지도력에서 남,녀 협력의 지도력으로 7)핵가족에서 다양한 가족형태로 8)정교분리에서 정치적인 행동주의로 오정현 목사는 21세기 변화의 능력과 확신을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팽배한 개인주의와 다양성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영적인 구심점과 피난처사역, 즉 듣는 복음의 정도가 아니라, 보는 복음, 능력과 치유의 복음이 힘있게 선포되어야 한다. 2)사람들은 어디에 좋은 설교가 있느냐보다는 어디에 좋은 예배가 있느냐를 찾게 되기 때문에 영감 있는 예배,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예배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잘 준비된 다양한 예배형식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3)컴퓨터나 휴대폰에 익숙해진 세대를 복음으로 붙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 사역이 최고의 수준이 되어야 새로운 세대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시간과 공간, 재정적인 여건의 제한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수준에 대한 긴장감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4)역동력 있는 소그룹의 활용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은사대로 봉사하는 주역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영적 굶주림을 주일 예배 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 예배에서도 해결해 줘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새 천년 사역은 과거보다 정신적으로 압박이 클 것이며, 이제는 더 이상 화석처럼 굳어진 전통주의로는 안된다. 그것은 새 시대를 보는 안목을 흐리게 하며 형식주의에 얽매이게 하여 영혼을 섬기고 변화시키는데 무력하게 할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생각과 사역의 구조에 창조력이 추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계속 고민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사역이 정체되지 않고 변화의 능력을 얻어보려고 몸부림을 쳐야 새 시대를 감당할 수 있다. 3.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 새 천년 변화하는 교회의 가장 큰 화두로는 어떻게 하면 독불장군식으로 혼자 일하지 않고 서로 함께 팀웍을 이루어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팀사역, 또는 네트웍 사역(엮는 사역)을 하려면 몇 가지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1)집중된 사역방향: 지난 시대에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용어는 사역의 목표, 그 목표에 맞는 비전과 전략,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가치였다. 그러나 새 시대에는 이세단어가 구호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눈에 보이는 실체로 드러나는 분명한 방향이 있는 교회들만이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목적, 비전, 가치를 교회의 직원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2)21세기 급변하는 정보화 시대에, 엄청나게 변화되는 환경 속에서 진리에 바탕을 두고 적용과 유연성을 높이기 위하여 교회 직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계속 배울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한다. 3)도전을 받을 수 있는 사역환경, 직원들이 자부심을 갖고 헌신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해 주어야한다. 4)존중받는 다는 느낌: 21세기에는 아무리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도 모든 지혜와 지식과 도구를 가지고 친히 모든 것을 다 관리하기는 어렵다. 반드시 서로 의존하는 팀 사역을 해야 한다. 교회가 21세기에도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생명력 있는 공동체로 계속 살아 남기 위한 제일 중요한 자원은 부교역자, 평신도 지도자들이다.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정당한 감사와 인정, 존중받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삶은 누구나 공정한 보상, 인정받는 환경 좋은 반응을 받길 원한다. 이것이 있으면 그들에게 거리낌없이 높은 수준의 동행능력, 노력, 탁월함을 요구할 수 있다. 좋은 지도자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 좋은 정보를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시대가 온 것을 알고 언제나 팀이 자라도록 격려하는 법을 생활화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늘 관심을 가지고 제자들을 추스르시면 본을 보이셨으며 제자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보지 않고 격려하여 성장시키고, 영감을 불어 넣어주어 훈련시켜야할 대상으로 보셨다. 4. 새 천년을 믿음으로 기대하라 이제 새 천년에 발맞춰 변화하는 교회의 역사에 새 물꼬를 함께 터 보도록 하자. 우리의 삶과 사역의 눈 높이를 조금만 더 멋있게 새 천년에 세계교회와 주님을 섬기는데 창조적으로 맞추어보자.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는 기적의 사역을 감당케 하실 것이다.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4----pp68-85 설교중심의 교회성장(김서택/제자들교회 담임목사) 교회는 사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나라의 대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권면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조직이요, 단체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그 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많은 목회자의 고민은 교회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1. 하나님나라 운동의 축으로서의 교회 예수님께서 사복음서를 통틀어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마16:18과 18:17에 단 두 번만 나온다.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서 거의 말씀하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바로 예수님이 생각한 교회는 하나의 안정된 단체나 집단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설교하고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축으로서 교회를 생각하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의 모델로 '노아의 방주'를 많이 생각해 왔다. 할 수 있는 대로 노아의 방주처럼 교회 안으로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 자체를 하나님 나라 확장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교회가 부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만으로 교회의 부흥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다른 두 가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선포되고 있는가'와 '그리스도인들이나 사회인들의 삶 가운데 부정과 부패가 물러가고 창조질서가 회복되며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어야 한다. 2. 한국교회의 성장사 우리나라는 전 세계가 놀랄만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루어 왔다. 그것은 세 단계로 나누게 된다. 첫째는 선교초기는 순수한 단계로 교회가 없는 곳에 전도와 교회 설립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교회를 초대형으로 성장시킨다는 개념은 없었다. 둘째 단계는 산업화로 인하여 인구가 이동하면서 이루어진 교회성장이다. 이러한 도시화 현상으로 인구가 대대적으로 도시로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면서 시골교회는 노령화되는 동시에 도시 교회가 비대해지는 교회성장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셋째는 서울 강남지역을 개발과 함께의 교회성장이다. 이 때부터 목회자의 관심은 변하게 된다. 지금까지 교회는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에서 '가진 자들'의 종교가 되기 시작했으며, 지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교회가 아니라 교인들의 필요와 편의를 위한 교회로 변질되게 할 환경을 만들고 말았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수, 교인수는 많아 졌을 지는 몰라도 말씀의 질이나 사회의 윤리적인 수준은 오히려 추락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목회자가 대부분이 교회성장의 열병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를 확인 해야한다. 많은 목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교회에 오게 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을 많이 병원에 데려오기만 하면 저절로 병이 치료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의사와 같다. 하지만 오히려 병의 치료는 환자가 병원에 온 후부터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기능은 사람의 죄를 치료해서 새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규모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반드시 종합병원이라고 해서 사람을 잘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개인병원에서도 의사만 훌륭하면 병을 잘 고칠 수 있다. 3. 말씀중심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꿈꾸며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사용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온다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말씀을 들어야하고 과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던 옛 삶을 완전히 청산해야만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교회라고 하는 집단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예수를 알아야 하고 나의 주로 영접하는 과정을 걸쳐야한다. 김서택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정체 현상을 다른데서 찾지 않고 바로 교회 안에서의 복음선포가 상실 된데서 찾고 있다. 교회 안에 많은 프로그램이 개설된다고 해도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예배이고 예배의 중심은 설교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바로 설교를 통하여 거의 모든 일을 다하여야 한다. 설교를 통해 기본적인 복음을 선포하고, 이로써 불신자를 회개하기도 하고 죄를 책망하여 나쁜 길로 빠진 자를 돌아서게 하기도 하고, 혹은 어려운 문제를 상담하거나 낙심한 자를 격려하는 일을 해야한다. 따라서 설교라는 것은 단순히 예배순서 중의 하나로서 유익한 말씀을 듣는 시간 정도가 아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설교 순서는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는 시간에 비유할 수 있다. 설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복음설교와 교리설교,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이다. 4. 참된 말씀선포와 교회됨의 비밀 강해설교를 잘하거나 혹은 설교중심으로 목회를 한다고 반드시 교회가 급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대로 충실하게 가르치다 보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나온다. 복음을 제대로 선포한다면 사실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의 진정한 성장 혹은 부흥이란 무엇일까? 교회의 진정한 부흥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때 중단되었던 은혜가 회복되며 성령의 부으시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교회의 부흥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 w속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하고 그 결과로 교인이 늘어야 한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을 듣고 중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되는데는 이 길밖에는 없다. 이러한 교회는 꾸준한 성장이 있기 마련이며, 말씀 선포로 인한 회중의 증가는 확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가지 때문에 교회의 맴버십이 튼튼해지며,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난 체험 때문에 변화된 삶의 증거가 있고 헌신하는 자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성경연구와 설교준비가 목회자를 늘 깨어 있게 한다. 목회자가 늘 깨어 있도록 자극해 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지속적인 성경연구 외에는 그럴만한 것이 없다. 목회자에게 목표가 없을 때는 본연의 임무를 떠나 다른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다라서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있도록 하고, 또 목회자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설교가 목회의 목표가 되어야한다. 다른 사람도 살려야 하겠지만 자신도 살기 위해서, 건강한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씀 밖에 없다. 5. 필자(김서택 목사) 자신의 경험: 제자들 교회 개척했을 당시 말씀 증거에 대한 열정으로 목회는 철저하게 설교 중심이 되었던 사례. 1)개척 당시 가졌던 교회에 대한 생각 첫째, 교회의 사명-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밝히는 것을 가장 중요시함. 그래서 목회는 자연히 설교중심의 목회가 됨. 둘째, 복음설교, 교리설교, 영성을 위한 설교를 주일오전, 오후, 그리고 수요일에 했을 때균형 있는 설교가 되어 교인들이 상당히 균형 있게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셋째, 제자훈련-대학생 선교단체를 통하여 도입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교회의 근본 체질을 바꾸어 놓음. 개인 중심의 제자훈련은 지나치게 지적인 성장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진리를 들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다. 넷째, 설교와 다른 은사와의 관계-말씀이 먼저 공동체를 만들고 거기서부터 여러 가지 은사가 창출된다. 그리고 은사를 세울수 있다. 2)제자들 성장을 어렵게 한 요인들 첫째, 청년중심의 개척을 하다보니까 교회가 정상적으로 자라는데 오랜 시간이 걸림. 둘째, 설교중심의 목회를 하다 보니까 새로운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답답할 수밖에 없었고 적응하기 힘들었다. 셋째, 설교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목사는 심방할 시간을 많이 줄일 것이라는 생각과 약한자들이 스스로 설교를 듣고 자기 힘으로 일어설 것이라는 생각에 심방을 소홀히 하였다. 넷째, 개척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하나의 공동체 형성하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림. 다섯째, 재정적인 문제로 장소를 임대하는데 어려웠다. 여섯째, 공동체 구성원이 워낙 교회 생활에 경험이 없는 자들 이어서 전도를 통한 지역화에 소극적이었다. 3)제자들 교회의 성장원인: 목회자 자신이 설교 중심의 목회를 하다 보니까 설교하는 중에 목회자 자신이 놀랐게 성장한 것이다. 본문 중심의 강해설교를 하다보니까 목회자가 자라게 되며, 교인들도 함께 자라게 되어서 성장하게 되었다. 첫째, 제자들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 선포로 인해 말씀을 듣고 기쁨과 감동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둘째, 성경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면 대상에 관계 없이 두려움 없이 선포했다. 설사 청중들을 다 잃는 한이 있어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 설교하리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셋째, 삶 전체를 치유하는 목회를 했다. 전인적인 치유였는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영혼이 치료되고, 그 다음은 생활습관이나 삶이 치료되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며,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비전이 치료되는 식이었다. 넷째, 학생 집회에서 설교를 하다보니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제자들교회에 찾아 오게됨. 다섯째,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배우자를 찾아 결혼하면서 부부성경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소그룹을 통하여 교회에 완전히 뿌리내렸다. 6. 바르게 자라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맥가브란 박사가 교회 성장론을 주장한 이후 교회성장은 목회의 아주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었다. 이 교회 성장론은 교회가 밖에 있는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맞다. 그래서 교회는 밖에 있는 영혼을 교회로 이끄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 그리고 전도의 공략대상을 어느 특정 계층을 특화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성을 약화시킨 문제점. 사람을 교회 안으로 인도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에 소홀히 하면서 처음 온 사람에게 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음으로서 생긴 문제점. 교회는 단순히 회원만 늘여 가는 집단이 아니다. 바로 사람들이 죄를 치료받기 위해서 오는 곳이며 이것은 처음부터 분명히 해야한다. 말씀이 이끄는 교회 성장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 자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회성장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성장은 개인적으로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설교해 나가는 계획을 세우라. 지속적으로 말씀을 설교 해 나갈 때 설교자가 말씀으로 은혜 받고 자라며, 목회자가 자라면 교인들은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다. 둘째, 소그룹 성경공부 활성화를 통해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동역자로 만들어라. 이 때 교호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셋째, 교회에 대한 공동체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 넷째,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다.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5----pp86-93 관계중심의 셀교회 성장(목산침례교회 김현철 목사와의 대담/편집장 장병두 목사 진행) 1. 목회철학으로 삼았던 교회관: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성경에 예시된 관계중심의 목회. 여기서 '관계'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상대방과 내가 진짜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관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를 과감히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의 요기를 통해 진짜 '나'가 노출되어야만 '관계'가 일어날 수 있다. 둘째는 서로가 얼마나 솔직히 자신들의 느낌을 나누면서 살고 있는가에 따라 관계의 핵심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나 아퍼, 슬퍼, 외로워, 사실은 나 예수 믿는 게 무서워'라는 식의 느낌이 나누어질 때 관계형성의 고리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느낌들이 나누어지고 공적인 자아가 드러나려면 예배당 밖에서라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성경공부 시간은 성경공부가 목표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고 예배시간도 공적인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을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배당 말고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공식적인 프로그램 이외에서 이루어 지게되지요. 그래서 아래 세 가지에서 관계가 형성된다고 본다. 첫째는 주일 이외의 시간에, 둘째는 교회당 밖에서, 셋째는 교회 프로그램 이외의 일상 생활의 현장에서 서로 만나면서 이야기 나누고 활동하는 것을 통해 관계가 형성된다. 셀모임은 관계의 열매로 교회의 풍토가 형성되고 나서 그 결과로 셀모임이 나타나야 한다. 교회의 풍토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구원관이 분명해야합니다. 즉 교인들이 예수님하고 분명한 관계가 있어야한다. 둘째로 교인들 개개인이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갖고 있어야한다. 성경에 의하면 교회를 새로운 '영적인 가족'이라고 소개한다. 우리가 정말로 영적인 가족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갖고 있어야한다. 바로 가족같은 교회관을 갖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가족 같은 교회관은 이웃이(교인이) 죽어 갈 때 정말 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사명으로 붙어 있어야될 나의 몸이고 목숨을 나누는 '혈맹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2. 주일 밖에서 가족으로서의 관계가 실제화 되기 위해서 실제로 목산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소개하면, 교인들은 주일 아침에 자기가 원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한 시간 정도 참여하고 그 후 예배를 두 시간 정도 드린 후 교실이나 집으로 이동을 한다. 그렇게 이동하고 난 후에 교회나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또 성경공부를 한다. 성경공부는 프로그램이 따로 있고 보통교회의 두 배 이상의 교육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집에 가기 싫어 소모임을 갖는다 . 어떤 때는 연합으로 모이기도 한다. 보통 화, 목은 셀 모임이 오전이나 오후에 있는데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정도 모임을 갖는다.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6----pp94-99 21세기 교회 성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오태균/자연적교회성장연구원 원장): 원문 들어가는 말 필자가 처음으로 ‘자연적교회성장’(Natural Church Development, 이하 NCD)을 접했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출발이 그렇듯이 바른 목회, 사도행전적인 교회, 건강하게 균형잡힌 교회를 꿈꾸던 중 NCD와의 만남은 메마른 심령에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지난 일 년 간 한국과 미국에서 개인적으로 혹은 세미나등을 통해서 만난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필자와 동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보면서 필자는 많은 목회자들의 심령속에는 무엇인가 공통적으로 갈망하던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무력감을 드러내는 한국 교회의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고 초대교회의 바른 교회상을 재정립하자는 간절함이었다. 양적 교회 성장에 대한 반성 맥가브란의 교회성장이론이 소개된 이후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나라의 교회들이 그의 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이론은 1971년 당시 볼리비아 선교사였던 피터 와그너가 풀러신학교에 합류한후 한층 더 실제적으로 교회성장에 적용되는 황금기를 맞는다. 피터 와그너외에도 라일살러, 칼 조지등을 비롯한 굵직한 교회성장전문가들이 탄생하고 그들의 이론은 여전히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영향력있는 이론과 아이디어들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 교회 역시 이들의 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난 40년간 교회성장학의 메카라고 불리우는 풀러신학교를 통해서 나온 교회성장학 이론등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맥가브란의 세계 교회성장에 대한 공헌은 지대하다. 하지만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의 교회성장이론에 의지해서 교회 성장에 매진해온 이면에는 많은 그늘과 상처들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왜 교회성장을 추구하는데 많은 문제가 생기는가? 맥가브란 박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 성장운동은 “열매”에 초점을 두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건지려는 구령정신은 자연히 그리고 우선적으로 좋은 열매에 대한 관심보다는 많은 열매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교회 성장에 대한 이같은 패러다임은 지역교회로 연결되었고, 수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무리한 방법론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실제로 그는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대해 ‘교회가 자라지 않는 사람들의 방어기제‘(a defense mechanism, used by those not getting growth)라고 규정한다. 이런 이론에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은 그들의 목회 방법론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검토없이 모든 목회의 에너지를 쏟게되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신축 아파트 단지내에서의 교인 쟁탈전(?)은 세상 사람들이 좋은 가십거리가 되었고, 이제 개척을 시작한 목회자들에는 생존문제가 걸려있기에 얼마간의 순수함은 곧 머나먼 추억으로만 남게된 것이다. 다행히 90년대에 들어와서 교회성장은 열매보다는 뿌리, 양보다는 질, 성장보다는 건강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그런 교회들이 아직까지는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원화시대의 물결을 타면서 교회성장이론 역시 어느 한 패러다임에 의지하고 않고 다양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빈야드교회, 윌로우크릭교회, 새들백교회등의 다양한 모델등이 교회성장학의 새로운 모델들로 세계교회에 소개되고 있다. 윌로우크릭교회 같은 곳은 한번 세미나가 열릴때마다 5천명이 등록을 하는데, 그런 세미나가 다른 주제를 가지고 일년에 5~6회 이상 개최된다. 한국은 물론 유럽, 아프리카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하고 도전을 받는 것을 보면 분명히 배울 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런 교회들은 우리 목회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니고, 모델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미국에 살면서 불편했던 것 중 하나는 옷을 고르는 문제였다. 미국의 기성복은 미국인의 체형에 맞게 나오기 때문에 옷을 사면 대체로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마음에 드는 남방을 한 벌 발견해도 어깨가 맞으면 팔이 길고, 팔길이가 맞으면 품이 작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결국 포기하고 팔길이가 길어도 어깨가 맞는 옷을 택해, 팔을 한번 접어서 입고 다녔다.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윌로우크릭의 모델은 같은 시카고 지역에서도 따라하기 힘든 케이스이다. 하물며 전통적인 한국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굳이 적용하자면 그 사역속에 있는 목회 철학과 원리를 찾아내 한국교회의 문화와 정서에 맞게 리모델링하는 작업이 필요로 할 것이다. 크리스찬 슈바르츠의 자연적 교회성장 이론 90년대 중반 크리스찬 슈바르츠는 세계실천신학계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름대로 연구하던 과제를 독일 정부의 보조를 얻어 1994년에서 1996년까지 세계 32개국의 1000교회들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교회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폭넓고 깊이있게 연구했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와 그 교회를 가장 대표할 수 있는 30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사회과학적 조사 방법(Social Science Reserch Method)에 근거한 설문지를 만들어 교회들의 성장 원리에 대해서 조사했다. 18개의 다른 언어로 4백 20만개라는 천문학적인 각 자료들을 사회과학자 크리스토퍼 슈크와 함께 연구조사한 결과 8가지 핵심적인 원리들이 교회성장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현재 성장하는 교회의 여덟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Empowering Leadership) (2) 은사중심적 사역 (Gift-oriented Ministry) (3) 열정적 영성 (Passionate Spirituality) (4) 기능적 조직 (Functional Structure) (5) 영감있는 예배 (Inspiring Worship) (6) 전인적 소그룹 (Holistic Small Groups) (7) 필요중심적 전도 (Need-oriented Evan- gelism) (8) 사랑의 관계 (Loving Relationship) 대부분의 교회들의 평균 질적 수치는 35~65사이에 걸려 있었지만, 이 8가지 분야에서 골고루 질적 수치가 65가 넘은 교회들의 99.4%는 반드시 양적으로도 성장했다. 예를 들어 슈바르츠에 의해 고안된 설문조사 방식을 분석한 결과 사람을 세우는 리더십분야에서 70점을 받았다면, 적어도 교회의 리더십분야에서는 건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기능적으로 잘 조직이 되었고 그에 따라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묻는 기능적 구조에 대한 분야에서 30이라는 점수가 나왔다면, 그 교회는 그 분야가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다른 분야보다 특별히 그 분야의 점수가 제일 낮으면 그것을 ‘최소 요소’(minimum factor)라고 부르며, 특별히 그 분야를 계속적으로 보완하고 강화시킴으로서, 교회의 정상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8가지의 질적 특성을 얼핏보면 이미 많은 교회들이 실천하고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뒷부분의 명사가 아니라, 앞부분의 형용사라는 사실이다. 교회에서 리더십은 있지만, 사람을 세우는, 권한을 부여하는 리더십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미 세상의 경영학도 여러 가지 이론들을 거쳐서 21세기는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 혹은 ‘변혁적인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는데, 유독 교회만은 이미 세상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의 대기업들의 중역들을 교육할때 성경적인 원리를 가르치는 강사들이 유명인들의 대열에 올라있다. 몰몬교도이기는 하지만 스티븐 코비가 그렇고 존 맥스웰목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002년 디이트리히 본회퍼를 다시 생각한다?/ 디트리히 본회퍼와 풀뿌리 민주주의/ 2002-08-05
2002년 디이트리히 본회퍼를 다시 생각한다?/ 디트리히 본회퍼와 풀뿌리 민주주의 6·13 지방선거가 국민의 시선을 잡지 못한 채 막이 올랐다. 월드컵 대회와 대통령선거에 밀려버린 이유가 있다. 그러나 실제 영향력을 가진 것은 지방자치다. 민생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풀뿌리가 건강해야 민주주의 나무는 자라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의 위임으로 “교회, 결혼(가정), 노동, 정부(정치적 권위)”를 말하고 있다. 물론 후에 본회퍼가 옥중서간에서는 정부를 문화로 대신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디까지나 세상속에 있는 삶, 세상적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위임들을 수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번에 실시되는 지방선거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위임이란 말은 성경에 의해서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하나의 계명에 달려 있다. 세상 권력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탁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결혼이 무엇인가? 문화 또는 정부가 무엇인가? 노동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임을 수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의 대리자로서 행동한다. 하나님께서 이 네가지를 다 모든 사람위에 부과했다. 이것은 세속적 영역으로부터 정신적 영역으로의 도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교회의 위임이다. 교회위임은 두가지로 수행된다. 첫째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선포의 도구이고 수단이다. 둘째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선포의 도구가 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모든 행위의 목적점과 중심점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위임은 모든 인류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위임들 안에서이다. 두번째는 노동의 위임이다. 성경에 노동의 위임은 첫 사람 아담에게서 볼 수 있다. 아담은 에던 정원을 가꾸고 지켜야 했다. 타락 이후에도 노동은 하나님의 훈련과 은혜의 위임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마에 땀을 흘려서 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복권 천국처럼 땀흘리지 않고 대박을 노리는 것은 범죄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노동은 경제활동 뿐 아니라 과학 예술에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세번째는 결혼의 위임이다. 본회퍼는 노동의 위임과 마찬가지로 결혼의 위임도 창조 뒤의 첫째 사람에게서 본다. 결혼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결합 위에 번성하는 축복 새로운 탄생을 준다. 결혼을 통해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봉사를 위한 존재, 그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존재가 된다. 단순히 아이를 출산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으로 양육(교육)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대해서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네번째는 정부의 위임이다. 정부의 신적 위임은 노동과 가정의 신적 위임을 전제하고 그것들에 의존한다. 정부는 직접생명이나 가치들을 생산할 수 없다. 그것은 창조적이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그에게 주어진 질서 안에서 피조된 것을 지탱한다. 법과 칼의 권력을 통해 정부는 예수그리스도의 현실을 위해 세상을 보존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정부에 복종할 책무가 있다. 본회퍼의 위임론은 철저히 그리스도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위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한다.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위임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을 부정과 비리와 혼탁으로 더럽히는 일은 더 이상 해서는 안될 것이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잘 자랄수 있도록 관심과 기도는 월드컵 16강 못지 않게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0대 57%가 "이땅 떠나고 싶다" 2002-02-20 11:13:27 read : 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사회불안 반영... 한때 선진국 진입의 꿈에 부풀었던 우리 국민의 요즘 희망지수는 평균 61.5점. 낙제를 겨우 면할 정도의 우울한 수치다. 그 중에서도 이 사회의 중추세력인 40대의 희망지수는 56.9점으로 한참 더 낮다. 불안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를 껴안고 살아야하는 이들은 잿빛의 중년을 맞고 있는 것이다.
20대 57%가 "이땅 떠나고 싶다" 2002-02-20 11:13:27 read : 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사회불안 반영... 한때 선진국 진입의 꿈에 부풀었던 우리 국민의 요즘 희망지수는 평균 61.5점. 낙제를 겨우 면할 정도의 우울한 수치다. 그 중에서도 이 사회의 중추세력인 40대의 희망지수는 56.9점으로 한참 더 낮다. 불안한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를 껴안고 살아야하는 이들은 잿빛의 중년을 맞고 있는 것이다. 나라의 장래를 책임질 20대 젊은 층의 57%가 "기회만 있으면 고국을 떠나겠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무너지는 20대와 떠나고싶은 20대."이것이 오늘의 한국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지난 22일 디지틀 조선일보가 한국갤럽과 공동으로 서울거주 만20~49세 남녀 3백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들의 희망에 대한 의식조사" 결과는 사회전반에 만연된 절망감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자신의 현재 희망지수를 1백점 만점에 몇점으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20대가 65.2점, 30대 60.2점, 40대 56.9점으로 답해 연장자 일수록 희망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들은 같은 사회구성원의 삶에 대해서도 비관적으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희망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다지 갖고 있지 않다"(40.7%)와 "전혀 갖고 있지 않다"(7.3%)가 전체응답자중 절반정도인 48%를 차지했다. 특히이같은 비관적 견해는 40대(52.8%), 대졸이상(52.6%), 자영업(57.8%), 화이트칼라 (52.6%)등 사회 주도 세력에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이처럼 우리 국민이 희망을 상실한 이유는 역시 명예퇴직과 불경기, 한보사태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경제적 불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희망이 없다고 응답한 1백52명중 51.3%가 "경제 불안"을 첫번째 이유로 꼽아 최근의 부도 사태와 불황이 사람들의 희망을 짓누르는 주요인으로 드러났고 "정치불안"(23.7%)"사회 불안"(11.2%)"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부조리"(7.9%)가 그 뒤를 이었다. 연령별로 보면 공동체의 희망에 대한 비관적 인식은 명예퇴직, 임금동결 등으로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40대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희망이 있다고 답한 사람에게 인생의 꿈을 물어본 결과 "가정의 화목/ 가정 대사(대사)의 성취"가 37.2%로 가장 많았고, "경제적 안정추구"(14.2%) "개인사업"(9.1%) "인간다운 삶"(7.3%) "자기분야에서의 성공"(7.3%) 순으로 응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이 현재 잘 실천되고 있다"는 응답자는 55.5%에 지나지 않았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전체의 절반정도이며 그 중에서 희망이 제대로 실천되고 있다는 사람은 또다시 절반에 불과한 셈이다. 여기서도 40대의 44.4%가 현재 자신의 꿈을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현재 자신의 꿈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1백8명에게 "꿈을 실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를 물어본 결과, "경제적 능력부족""노력 부족"과 같은 개인적 요인(54.5%)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았으나 "정치 경제불안""사회적 여건 미흡"등 사회구조적 요인(41.6%)을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와관련 "우리나라가 개인의 꿈을 실천하는데 좋은 여건을 제공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잘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9.7%에 불과한 반면, 부정적인 응답이 70%로 국민 대부분이 국가가 개인의 꿈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나라에 태어나기를 희망하 는가"라는 설문이 던져졌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를 선택한 응답자는 절반이 약간 넘는 52.7%, 다른 나라에 태어나길 희망하는 응답자가 40.1%에 달해 20~40대 성인 10명중 4명이 다른 나라를 심정적으로 선호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여자(49.7%), 20대 (53.1%)일수록 그 선호도가 높게 나왔다. 반면 40대는 다른 나라를 선택하겠다는비율이 23.6%에 그쳤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민을 갈 의향은 있는가"라는 설문에 대해서도 45.8%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여자(52.9%), 20대(57.7%), 대졸이상 학력자(51.8%), 월3백만원이상을 버는 상위계층(55.6%)일수록 그비율이 높았다. 특히 20대 여자의 경우, 무려 71.4%가 이민을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번 조사는 전화 면접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표본오차는 5.5(95% 신뢰수준)이다. 전체응답자중 남자 50.5%, 여자 49.5%이며, 성별로는 20대41.0%, 30대 36.3%, 40대 22.7%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