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나우웬(헨리 나우웬, Henri Nouwen) 목사설교(14) 라이드헤드(패리스 라이드헤드, Paris Reidhead) 목사설교(5) 램버트(스티븐 램버트, Steven Lambert) 목사설교(3) 레이븐힐(레너드 레이븐힐, Leonard Ravenhill) 목사설교(16)
루케이도(맥스 루케이도, Max Lucado) 목사설교(30) 맥그래스(앨리스터 맥그래스, Alister McGrath) 목사설교(4) 머레이(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목사설교(5) 무디(D. L. 무디, Dwight L Moody) 목사설교(6)
뮬러(조지 뮬러, George Muller) 목사설교(6) 맥도웰(조쉬 맥도웰, Josh McDowell) 목사설교(4) 번연(존 번연, John Bunyan) 목사설교(6) 비클(마이크 비클, Mike Bickle) 목사설교(11)
셔먼(딘 셔먼, Dean Sherman) 목사설교(4) 스팍스(오스틴 스팍스, T. Austin Sparks) 목사설교(4) 스펄전(찰스 스펄전, Charles Spurgeon) 목사설교(37) 얀시(필립 얀시, Philip Yancey) 목사설교(4)
워렌(릭 워렌, Rick Warren) 목사설교(3) 워셔(폴 워셔, Paul Washer) 목사설교(39) 웨슬리(요한 웨슬리, John Wesley) 목사설교(6) 윌라드(달라스 윌라드, Dallas Willard) 목사설교(5)
윌리엄스(로드만 윌리엄스, Rodman Williams) 목사설교(6) 윌커슨(데이빗 윌커슨, David Wilkerson) 목사설교(58) 존스(마틴 로이드 존스, Martin Lloyd Jones) 목사설교(8) 캐리(윌리엄 캐리, William Carey) 목사설교(3)
콘웨이(팀 콘웨이, Tim Conway) 목사설교(5) 테니(토미 테니, Tommy Tenney) 목사설교(8) 토저(A. W. Tozer) 목사설교(6) 파슨(데이빗 파슨, David Pawson) 목사설교(19)
파이퍼(존 파이퍼, John Piper) 목사설교(15) 푸닌(잭 푸닌, Zac Poonen) 목사설교(55) 프라이스(찰스 프라이스, Charles Price) 목사설교(17) 프란시스(성 프란시스, St. Francis) 설교(7)
프랜지페인(프랜시스 프랜지페인, Francis Frangipane) 목사설교(4) 프린스(데렉 프린스, Derek Prince) 목사설교(12) 피니(찰스 피니, Charles Finney) 목사설교(4) 피터슨(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 목사설교(15)
핑크(아더 핑크, Arthur W. Pink) 목사설교(4) 하이머즈(로버트 하이머즈, Robert L. Hymers) 목사설교(16) 하이벨즈(빌 하이벨즈, Bill Hybels) 목사설교(3) 휫필드(조지 휫필드, George Whitfield) 목사설교(6)
기타 외국 목사 설교(107) 로버츠(밥 로버츠, Bob Roberts) 목사설교(3) 솔로몬(론 솔로몬, Lon Solomon) 목사설교(11) 프랭클린(젠센 프랭클린, Jentezen Franklin) 목사설교(15)
페더스(데이빗 페더스, David Feddes) 목사설교(10)
1. 가난한 지도자 성 프란시스 /성 프란시스 St. Francis of Assisi 2015-07-16 00:40:34 read : 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가난한 지도자 성 프란시스 ▲13세기에 앗시시의 프란시스는 마10:8~10절에 큰 충격을 받았다. “가면서 전파하며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1. 가난한 지도자 성 프란시스 /성 프란시스 St. Francis of Assisi 2015-07-16 00:40:34 read : 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가난한 지도자 성 프란시스 ▲13세기에 앗시시의 프란시스는 마10:8~10절에 큰 충격을 받았다. “가면서 전파하며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 말씀이 프랜시스의 맘을 흔들 때, 청빈, 봉사, 사랑, 순명, 노동을 서원덕목으로 하는 13세기 성 프랜시스 탁발수도회가 탄생하였다. 이 수도회는 당시 부자로 치닫던 교계에 신선한 개혁과 부흥을 가져왔다. ▲부유한 중세교회를 구한 프란시스의 가난 중세의 찬란한 황금시대에서 가난이 다시 그 탁월한 위치를 회복하게 된 것이 바로 성 프랜시스를 위시한 탁발 수도회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12-13세기의 이러한 개혁운동 안에서 가난이 그 탁월한 평가를 받게 된 것도 불과 몇 세기를 가지 못하였다. 이른바 종교개혁에서 프랑스 혁명이라는 일련의 큰 대가를 치루고서야 세속적인 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가 가난으로의 길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자발적이지 않으면 외압에 의해서 된다는 뜻) 그러나 이러한 큰 충격하에서도 또 다시 물질문명의 발달과 황금만능주의의 팽배로 인하여 가난과는 멀어진 교회가 되어 갔으며,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시 가난에로의 길로 그 쇄신의지를 명백히 하게 된 것이다. ▲프랜시스는, “시장 입구에서 거지 옆에 서서 같이 구걸해 보기 전에는 결코 거지의 심정을 이해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거지가 되어 본 사람이, 거지를 깊이 이해해 줄 수 있고, 아파서 수술을 받아 본 사람일수록, 병든 사람 마음을 깊이 있게 이해한다. 그래서 ‘영혼의 인도자’는 고난을 많이 당할수록 좋다. 사람이 더 깊어지고, 고난받는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위로하게 된다. ▲이태리에 가면 성 프랜시스 기념관이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망토가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것은 그의 유일한 재산 목록으로서, 비가 오면 우비였고, 밤에 잘 때는 덮는 이불이었다. 프랜시스의 남루한 그 망토를 직접 보는 순간, 그것은, 뭘 많이 갖고 싶어 하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해 줬는지 모른다. 그의 남루한 망토에서, 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2. 기도의 지도자 성 프란시스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 중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첫째,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의 맛을 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주어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몸으로 깨닫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당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그처럼 참으셨던 일, 그 불타는 듯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 뜨거운 불타는 사랑이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하셨던 거거든요. 우리를 사랑하는 그 불타는 사랑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는데 나도 그 같은 불타는 사랑을 가지게 해 주세요. 얼마나 위대한 기도입니까! ▲성 프란시스는 종종 동굴 속에 들어가서 기도했는데, 그 분이 종종 눈에 안 보여서, 하루는 제자들이 프란시스를 몰래 뒤따라가 봤다. 그는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있더라는 것이다. 무슨 기도를 하는지 들어봤더니 ‘하나님, 부디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게 하시고, 저의 죄악됨을 절대로 잊지 말게 하시고, 나의 이 비통한 죄악이 내 속에서 계속해서 깨달아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주님의 빛 앞으로 가면 갈수록, 진리 앞에 정직하게 서면 설수록,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있지만, 동시에 자기 연약함, 추함, 더러움을 깨달으면서 비탄함도 동시에 있더라는 것이다. ▲세 종류의 기도, 세 종류의 사람 \"레오 형제, 마음을 활짝 열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깊이 새겨 들어봐요. 인간의 육신은 마치 활과 같고 하나님은 그 활을 당기는 사람이며 영혼은 화살입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네요, 프란체스코.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당신의 생각을 좀 더 세상 가까이로 끌어내릴 수는 없어요? 내 머리로는 쉽게 이해가 안 되네요.\" \"레오 형제, 우리의 기도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주님, 저를 구부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녹이 슬고 말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 저를 너무 구부리지 마세요. 그러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셋째는, 레오 형제, 이것은 바로 우리가 늘 해야 하는 기도예요. ‘주님, 저를 있는 힘껏 구부리십시오. 제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세 종류의 기도가 있듯이, 신자도 세 부류가 있어요..\" ▲프란체스코 생애의 절정을 이룬 십자가의 신비체험은 1224년 9월 라 베르나 산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와 명상에 몰두하던 중 일어났다. 9월14일 그는 하늘이 열리며 십자가의 형태로 된,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천사의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 찬란한 환상을 보는 중에 그의 손발과 옆구리에 십자가의 못자국과 창자국이 생겼는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의 상처 흔적이 그에게 각인된 것이었다. ◑3. 겸손한(연약한) 지도자 성 프란시스 ▲진정 가정, 사회, 나라, 역사를 바꾸는 힘은.. 사실은 ‘약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암흑시대 중세교회를 살린 힘은, 약하고 가난했던 성자 프란시스였고, 그것은 매 시대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가장 큰 특징은 겸손이었습니다. 다른 성자들도 마찬가지.. 그들 성자들의 특징은 다 겸손이었습니다. 단순히 의로움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 프랜시스에게, 당신이 쓰임 받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 땅 모서리 한 구석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보다 더 낮고 미련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눈동자는 머무셨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프랜시스를 선택해서 사용하시는 비결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저는 부족합니다!\' 라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지, \'저는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다. ▲겸손의 옷 아시시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마세오 형제가 진지하게 물었다; 당신은 용모가 뛰어나지도 않고 학식도 별로 없는데, 어찌하여 모든 이들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에게 순종하기 원합니까? 프랜시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장 못난 인간인 나를 지명해서 놀라운 일을 성취하고자 하신 거지요.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은 미천한 나를 택하셨고 그런 나를 통해 이 세상의 모든 고귀한 신분과 부자와 잘난 사람과 그리고 높은 학식을 깨뜨리고자 하셨던 게 아닐까요? 맞다. 프랜시스는 겸손으로 옷 입은 사람이었다.(골 3:12)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부자와 잘난 사람이 되기 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겸손으로 옷 입기를 원하신다. ◑4. 그리스도를 닮은 성자 프란시스 ▲아씨시의 성자인 프란시스는,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전기(傳記) 작가 한 사람은 프란시스의 생애를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달이 태양의 거울이듯, 그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반사하는 거울이었다. 그가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꼈다. 그의 심장은 그리스도의 심장이었고, 그의 언어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였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주께서는 지금도 자신의 빛을 발하고 계십니다. ▲성 프란시스가 구한 영광 그는 처음에 기사가 되어, 자기 영광을 얻으려 했으나, 후에 성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다. 기독교의 성자 프랜시스는 기독교 세계가 모두 정죄한 모슬렘들과 심지어는 이단들까지 찾아가서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과 가난과 청빈의 복음을 온 몸으로 전한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구차한 평안을 떨치고 구도의 길에 나서다』라는 성 프란시스의 전기에 보면, 레오라는 형제가 진눈깨비를 맞으며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본 프란시스가 그에게 말합니다. “레오 형제, 우리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한다고 해도,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신학자들의 학설을 모두 통달했다고 해도, 그 안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별들의 길을 모두 알고 온갖 생물의 특성을 전부 안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온전한 기쁨의 근원이 아닙니다.” 길을 걸으면서 계속되는 프란시스의 말에 레오 형제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이때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을 때, 집주인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해도, 우리를 도둑이나 부랑아 취급하며 모욕할 때도, 우리가 이런 일들까지 인내와 친절과 사랑으로 모두 참는다면 그제야 우리는 온전한 기쁨 언저리에 도달한 셈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정복하는 데 온전한 기쁨이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1~12 즉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빼앗기거나 흔들릴 수 없으며 그 기쁨은 마음속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프란시스는 말합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군주나 전쟁영웅에 의해 ‘만들어져’ 내려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사람의 성자에 의해서 ‘변화되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진정 가정, 사회, 나라, 역사를 바꾸는 힘은.. 사실은 ‘약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암흑시대 중세교회를 살린 힘은, 약하고 가난했던 성자 프란시스였고, 그것은 매 시대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은 주기철, 손양원, 한경직, 김용기, 장기려 등 약하고 가난한 분들이었습니다. ▲자기가 죽고, 예수가 부활한 프랜시스 1207년 봄에 앗시시의 프랜시스는 진정한 회심을 경험합니다. 말을 타고 시골 길을 지나가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다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정말 나의 뜻을 알게 된다면 지금 네게 달콤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쓴 것이 될 것이고, 혐오하던 모든 것이 달콤하고 더 없는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 순간 갑자기 타고 가던 말이 놀라서 움직이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몇 발짝 앞에 심한 나환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문드러진 손에 돈을 쥐어주고 악취가 나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감정에 북받쳐 울었습니다. 자신이 변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가 사랑했던 것을 경멸하고, 자기가 멸시했던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앗시시의 프랜시스는 그 날,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승리, 곧 자신에 대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안에 계신 주님이, 그를 이기고 최고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체험을 처음 하게 된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새들에게 항상 말했다고 한다; “새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고, 먹을 것과 샘물을 주시고, 둥지를 주셨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항상 하나님을 찬미해라!” 우리도 수많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고 항상 우리의 입술에 항상 찬송이 넘치도록 하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일은 곧 주님께 한 일이다. 천년 전 일이다. 이태리 아시시에 프란시스가 살았다. 그는 부자 집 아들로 방탕하게 살다가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었다. 아버지는 변화된 아들을 기뻐하며 좋은 모피 외투를 아들에게 선사했다. 프란시스는 길을 걷다가,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오는 노 병사를 보았다. 그는 다 헤어진 남루한 옷에 뼈만 앙상한 말을 이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자기 모피 외투를 그 병사에게 주면서 추위를 피하라고 했다. 그 날 밤 프란시스는 꿈에서 예수님을 뵈었다. 그런데 주님은, 낮에 자기가 벗어준 그 모피 외투를 입고 찾아 오셨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그는 집을 나가 맨발로 다니면서, 평생 가난한 자의 친구로 살았다. 인자가 올 때 모든 민족을 모아놓고, 양과 염소를 나누실 것이다. ‘구원의 신앙고백’뿐만 아니라 다른 신앙고백과 아울러 ‘헌신의 신앙고백’이 드려질 때, 양 편에 속하게 될 것이다. ◑5. 그 외 ▲은사자 vs 교권의 조화를 이루었던 성 프란시스 성령의 은사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 특히 악령을 치유하거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은사를 받은 사람과 교권church authority은 자주 충돌을 합니다. 그러나 교권은 성령의 은사를 존중해야 하고 개인(은사자)도 교권의 판단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로서는 할 수 없는 설교의 허락을 교황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교권의 허락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교권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복음을 선포하던 이단과는 다른 태도였습니다. 교황님으로부터 설교의 허락을 받았지만 그는 어느 교구를 가던지, 그 교구장의 허락을 또 받았습니다. 하루는 어느 교구에 들어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 교구장께 설교의 허락을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교님은, 자기가 설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며 프란치스코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라고 내치셨습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쪽 문으로 나가더니, 저쪽 문으로 다시 돌아와 주교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왜 다시 돌아왔냐는 주교님의 물음에 프란치스코는 자식이 어떻게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있느냐고 여전히 주교님께 대한 애정과 존경을 보였습니다. 이를 보고 주교는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주었습니다. 교권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보고 교권은 그의 복음 선포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고 허락을 준 것입니다. 개인 과vs 교권, 카리스마 와vs 제도. 이것은 끊임없는 갈등의 관계이지만, 서로 존중해야 할 영원한 상대입니다. 성경에도 좋은 예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당시 유다교의 충돌을 얘기하며 올바른 교권 행사의 한 예를 소개합니다.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이 사도들의 말과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면 인간, 즉 교권이 막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버려 두어도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성장과 발전의 시기가 5시대가 있었습니다. 1) 그 첫 시기가 사도행전과 바울이 살았던 1세기이고, 2) 두 번째가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이 활동했던 4세기, 3) 세 번째가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가 활동했던 13세기이며, 4) 네 번째가 루터와 칼빈의 활동하던 16세기, 5) 다섯 번째가 스펄젼과 휫필드의 18~19세기입니다. ▲성 프란시스의 임종 성 프란시스의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의사로부터 자기 삶이 몇 달 안 남은 것을 알게 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전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프란시스는 하나님을 향하듯 두 손을 치켜들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쁜 표정으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라. 오, 나의 잠의 죽음이여, 나의 잠의 죽음이여> 그는 육체의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죽음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육체의 죽음에 의해서 당신은 찬송을 받으소서. 이 땅에서 한번 삶을 누린 자라면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 죄 중에 죽는 자는 재앙이로다. 그러나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며 세상을 떠나는 이, 그는 행복한 자가 아닌가!” 죽음의 날이 드디어 그를 찾아왔습니다. 프란시스는 조용히 시편 142편에 자신의 곡조를 붙여서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프란시스는 완전히 실명(失明)한 상태입니다. 전기 작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니 볼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마지막 한 번 더 보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의 영혼은 단 한 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조용히 움직이면서 계속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다. <내 주여, 나의 전부여, 내 주여, 나의 사랑이여!> 프란시스는 회개한 지 20년이 되던 해인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저녁에 찬송하면서 죽어 갔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 다섯 이었다.” ▶한국 교회가 보여주었던 예수 형상 여러 모습의 예수의 이미지 중에서, 그래도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보편적으로 서구와 한국에 영향을 미쳤던 예수 상은 중세 ‘성 프랜시스의 형상’이며, 청교도적 신앙의 유산으로서 ‘청빈한 예수의 형상’이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타난 색다른 예수상이 있는데 이른바 CEO(최고경영자) 예수 상입니다. 모든 일에 유능하고, 탁월한 경영 능력이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지도하는 ‘리더쉽 예수’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탁월한 경영자를 찾아서 그 속에서 예수와 일치되는 점을 분석해 내려 합니다. 보십시오. 조금 부흥하고 뜬다는 (일부) 교회는 한 도시를 여러 교구로 나누어 전 지역을 복음전파할 계획을 세우고, 나아가 전국을 단위로 쪼개어 확장할 계획을 세웁니다. 더 나아가 전 세계를, 무슨 대기업 진출하듯이, 조직적으로 진출하려고 합니다... ▲성 프랜시스의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 불의가 있는 곳에 진리를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끝 부분에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더 자세히 번역하면, “우리가 죽음으로써 영원한 세계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직접 손으로 책을 쓴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주변 인물들이, 프랜시스에 관한 기록을 남겼고, 그것 때문에 지난 7세기 동안 그의 후대들이, 그의 인격에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1. 믿음으로 당신의 시련을 견디십시오 /고후4:17/ 데이빗 윌크슨 2015-06-22 09:56:55 read : 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만약 우리에게 갈등, 중압감, 시련이나 전쟁이 없다면 우리는 수동적이고 미온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퇴락하고 폐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쟁취한 영토를, 계속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그는 영적 전쟁에서, 우리를 빼어
1. 믿음으로 당신의 시련을 견디십시오 /고후4:17/ 데이빗 윌크슨 2015-06-22 09:56:55 read : 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만약 우리에게 갈등, 중압감, 시련이나 전쟁이 없다면 우리는 수동적이고 미온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퇴락하고 폐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쟁취한 영토를, 계속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그는 영적 전쟁에서, 우리를 빼어내고자 합니다. 그의 목표는, 우리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모든 싸움을,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할 힘과, 원수를 압도하는 능력 등과 같이 영적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 얻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그분은 우리에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지난번에 겪은 일을 기억하느냐? 또 그 지독한 전투에서 겪은 일도? 그 모든 일을 통해서 네가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아라. 모두 네가 승리했던 전투를 통해서 확보했던 것이다.” 사실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보물을 인간의 몸속에 두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그분의 영이 거하시는 집, 즉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성전을 유지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이 게으르고 무관심해져서, 정기적인 기도, 하나님의 말씀 먹기, 성도들과의 친교와 같이.. 필요한 보수 작업을 방치해두면 점점 퇴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성전은, 결국 완전히 폐허로 남게 되고 말 것입니다. ▲나 자신의 50년간에 걸친 사역을 돌이켜 볼 때,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 라고 생각했던 때가, 여러번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었습니다. “주님, 이번 공격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언제 끝날 것 입니까?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러한 시련들의 열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자원, 성령의 능력, 영적 부요와 같은 그 시련의 열매들은 그 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었고, 오직 그런 시련을 통해서만, 나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촉구합니다. 믿음으로 당신의 시련을 인내로 통과하십시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사탄으로부터 노획물을 탈취하는데, 당신을 쓰기 위해... 또한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분께 영광이 되도록 성화시키기 위해 당신의 그 시련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7-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2. 절대 위축되지 않기 행13:9-12 ▲당신이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지속적으로 마귀의 권세들에게 훼방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때든지, 어떤 마귀 권세에게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마귀의 권세들에게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가 바보섬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귀신들이 방해하려 했습니다.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행13:6-8).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 또는 “빛의 천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은 대적하는 마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 안에 성령이 충만해 졌습니다.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 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행13:9-12).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흑암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이 당신을 훼방하려는 시도에 대해 마음 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방해를 받다, 괴롭힘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여러 날을 그대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바울 안에 성령이 충만해 졌고 마귀 권세에게 외쳤습니다. “이제 그만하라. 그만하면 충분하다!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행16:16-18 참조). ▲여러분, 우리는 마귀로부터 지나치게 많이 수용합니다. 허용합니다. 우리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만 됐다.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떠나가라!”고 대적해야만 할 때가 옵니다. 우리가 권위를 행사하여 마귀에게 떠나라고 명령할 때, 사탄은 그의 무기고에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당신을 치러올 것입니다. 사도행전 16:16-18에서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마자 사탄이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군중들을 자극하여 바울과 실라를 대적하게 함으로써 일순간에 그들은 엄청난 위기에 빠졌습니다! 관리들이 그들에게 매를 치고 투옥시켰습니다. 회초리가 그들의 등을 내려칠 때마다 나는 마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 네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니? 나의 부하들을 쫓아내고 내 권위 위에 서겠다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종에게 매를 치면 칠수록 그에게서 더 한층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자아내게 됨을 마귀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바울 일행)을 위기 가운데 던져 넣고 문제꺼리들과 괴로움으로 결박해 놓으면 그들은 더욱 노래하고 외치고 예배드릴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려고 한다면, 사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키셔야만 해도 상관없습니다. 바울을 위해 정확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6). ▲사탄은 당신이 이제까지 직면했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두려운 유혹이나 시련을 쏟아 부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죄의식, 정죄와 자기 성찰의 수렁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일어나서 당신의 주변 상황과 속박으로부터 눈을 떼어야만 합니다. 그 모든 것의 해결책을 생각해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찬양하고, 노래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1. 베드로의 평안 /벧전1:5/ 데이빗 윌커슨 2015-07-17 15:24:44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베드로가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1:5 여기서 헬라어로 ‘보호하심’이란 단어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군사적 전초기지를 세우다. *헬, 프류레오 영, kept -수비대로 경비하다, 에워싸
1. 베드로의 평안 /벧전1:5/ 데이빗 윌커슨 2015-07-17 15:24:44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베드로가 이렇게 편지했습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1:5 여기서 헬라어로 ‘보호하심’이란 단어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군사적 전초기지를 세우다. *헬, 프류레오 영, kept -수비대로 경비하다, 에워싸다, 보호하다. -전 군사 체제와 전 군사 장비를 동원하여 요새를 구축하다. -훨씬 앞서 적을 분별하여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다. 주님은 견고한 망대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완전 무장한 군대가 배치된 군사적 전초기지를 구축하십니다. 우리는 실제로 임전 태세를 갖춘 군인들과 말과 병거가 있고, 훨씬 앞서 다가오는 적을 포착하는 보초가 있는 강력한 군사적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 예언에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이 말세에 보호하시는 능력을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내실 것이라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 관하여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guard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요17:12 제자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도록 지킨 것이 아니라 그들 외부에서 강력한 능력으로 보호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키시는 능력 없이는, 그들은 하루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영광스러운 기도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17:15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keep)하시기를...” 여기서 ‘보전한다’는 말을 풀어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호한다는 뜻인데, -무엇이든지 나쁘고, 악하고, 비통하게하고, 해롭고, -음란하고, 악의가 있고, 사악한 일의 결과나, 그 영향력... 으로부터의 보호. -사탄 자신과 그리고 모든 부패하고 병든 것들로부터의 보호. ▶종합해 보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훌륭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적 전초기지로서 전투 대열을 이룬 헤아릴 수 없는 말과 병거와 군인들로 구성되고 모든 적의 계획과 전술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가진 완전 무장한 영적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사탄과 온 우주의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전적인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말씀,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일4:4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윌커슨 목사님이 체험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쓰신 글이라는 느낌이 옵니다. *관련글 견고한 망대 ◑2. 다윗의, 예수님의 평안 행2:25~28 출처 *원제목 : 다가오는 폭풍 가운데 희망 갖기, HOPE IN THE COMING STORM ▶다윗은 시16편에서, 다가오는 폭풍을 직면한 위기 가운데서도 평온함을 노래하며 찬양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다가오는 폭풍을 직면하실 예수님의 평온하신 태도에 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평안의 비결이며, 다윗이 누린 폭풍 속 평안의 비결입니다. 오늘 나에게도, 폭풍 속 평안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행2:25, 시16:8 직역하면 “내가 그분의 얼굴을 보며, 항상 그분의 임재 안에 있었도다”입니다. 다윗은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행2:26, 시16:9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다윗은/예수님은 아버지를, 항상 자신의 얼굴 앞에 두셨습니다! 다윗은/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있기 위해, 지속적으로 은밀한 세상과 잠시 단절된 장소를 찾았습니다. 다윗은/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간 후에야 자신의 아버지가 항상 자신과 함께 하신다고 확신하시고, 담대하게 사역하시러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나의 우편에 계시므로, 이 지구상 어느 것도 나를 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다짐하시면서, 사역의 장으로 나가셨던 것입니다. 행2:25에서 ‘요동하다’의 헬라어는 *헬, 살류오 영, move “폭풍 속에서 파도가 동요하는, 흔들리는, 불안한”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 악한 것들, 닥쳐오는 사건들, 그 어느 것도 나를 낙심하게 하거나 내 확신을 흔들 수 없다. 내 아버지께서 완전히 통제하고 계신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다가오는 폭풍을 직면해야 한다면,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영혼을 훼방하지 않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다윗처럼/예수님처럼,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 세상과 잠시 단절된 골방에 있어야만 합니다. (공예배는 형식이 너무 많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임재를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우편에 계시다는 것이, 내 마음에 온전히 확신될 때까지 우리의 무릎을 꿇고, 그분의 임재를 초청하며, 그분을 찾으십시다. 하나님은 명백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든지 요동하거나 동요하지 말라. 눈을 나에게 고정하라. 그러면 너는 네 기쁨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예수님은 이렇게 증거 하셨습니다.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행2:28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너희가 종말의 때(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직면하게 될 모든 것을 미리 직면했다. 다가오는 폭풍을 보았고, 나도 동일하게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내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달려갔고 그분이 나의 모든 염려를 거두어 가셨다. 그분이 이 일의 결과를 모두 나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나는 마지막 날 끝까지 내게 필요한 모든 기쁨, 소망과 안식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분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평강과 기쁨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도 이렇게 평안을 찾고, 누리라!”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행2:26, 시16:9 ◑3. 마르틴 루터의 평안 출처 *원제목 : 뜻대로 제게 행하시옵소서 “DO WITH ME AS YOU PLEASE” 마틴 루터는 그의 시련이 극에 달했을 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주님, 이제 저를 완전히 용서하셨으니 뜻대로 제게 행하시옵소서.” 루터는 자신의 모든 죄를 씻어내실 수 있고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면 자신의 육체와 물질적 필요도 확실히 돌보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루터의 말을 요약하면, “사람이 나에게 무슨 일을 행할지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나는 나의 불의를 깨끗케 하시고, 내 영혼에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섬긴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해도 상관없다. 나의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토록 내 영혼을 보전하신다면 왜 내가 이 지구상에 사는 동안, 내 육체를 돌보아 주실 수 없겠는가?” “오, 주님, 저는 이제 죄 사함 받고 용서받아 심판의 날에 넘치는 큰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으니 이 세상에서 되어 지는 모든 일은 당신 뜻대로 제게 행하시옵소서.” ※큰 문제를 해결했으니, 사소하고 작은 문제는.. 어떻게 되든지 크게 상관 없으며, 그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긴다는 뜻. 큰 문제(영생, 구원)를 해결해 주신 주님께서, 사소하고 작은 문제(생활의 염려)도 능히 해결해 주실 줄 믿으면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이 현재의 삶은 실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실제는 우리의 복된 주님의 임재가운데 있는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십시오! 만물은 서서히 종말로 가고 있지만, 우리는 점점 천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영어 원문 보기> 번역해서 올려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1. KEPT BY THE POWER OF GOD Peter said, "[We] are kept by the power of God through faith unto salvation ready to be revealed in the last time" (1 Peter 1:5). I see in this a prophecy that in these last days, God is once more going to reveal his keeping power to his people. Christ prayed to the Father concerning his disciples: "While I was with them in the world, I kept them in thy name: those that thou gavest me I have kept, and none of them is lost" (John 17:12). The disciples did not keep themselves in the will of God, they were kept by a mighty power outside of themselves. They could not have made it a single day without Christ's keeping power. What a glorious prayer Christ prayed on our behalf: "I pray not that thou shouldest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hat thou shouldest keep them from the evil" (John 17:15). In the Greek, the work kept is very expressive. As used in 1 Peter 1:5, it means: To establish a military outpost. To guard, hem in, protect with a garrison. To establish a fortress with a full military line, with full military apparatus. To discern the enemy far in advance and protect from danger. Not only is the Lord a strong tower, but he establishes in us a military outpost, manned by a fully-equipped army. We actually become a powerful military outpost with armies of soldiers, horses, and chariots ready for combat, and with a sentinel that sees the oncoming enemy far in advance. Jesus prayed, "Keep them from the evil...." The Greek word for keep means: Deliverance from the effect or influence of anything bad, evil, grievous, harmful, lewd, malicious, or wicked. Deliverance from Satan himself and all that is corrupt or diseased. Put it all together and it seems almost too good to believe. We are God's military outpost, protected by a fully-equipped spiritual army of innumerable horses, chariots, and soldiers in full battle array completely informed of every enemy plan and device —wholly defended against Satan and all the evil powers in the universe. Now maybe we can understand what the Scripture means when it says, "Greater is he that is in you, than he that is in the world" (1 John 4:4). ........................... 2. HOPE IN THE COMING STORM David gives us a clear picture of Jesus’ attitude in the face of the coming storm. He speaks prophetically of Christ, saying, “I foresaw the Lord always before my face, for he is on my right hand, that I should not be moved” (Acts 2:25). The literal meaning here is, “I was always in his presence, beholding his face.” David quoted Jesus as saying, “Therefore did my heart rejoice, and my tongue was glad; moreover also my flesh shall rest in hope” (2:26). Here is the secret: Jesus kept the Father always before his face! Jesus continually sought out secret places to be shut in with his Father. And it was only after being in God’s presence that Christ came forth to minister, fully persuaded that his Father was always with him. “He’s at my right hand—and nothing on this earth can move me.” The Greek word for move here means “agitated or shaken, disturbed.” Jesus was saying, “None of these problems, evils or coming events can cast me down or shake my confidence. My Father is in complete control.” Beloved, if we’re going to face the coming storm, then we need to be prepared so nothing disturbs our spirit. And the only way to do that is to spend time in the Father’s presence beholding his face. We have to be shut in with him—on our knees, practicing his presence, seeking him —until we’re thoroughly persuaded he’s at our right hand. God is clearly telling us, “Don’t be moved or agitated by anything you see. Keep your eyes focused on me and you’ll retain your joy.” And, according to David, Jesus testified, “Thou shalt make me full of joy with thy countenance” (Acts 2:28). It’s as if Christ is telling us, “I faced everything you’re going to face in the closing days of time. I had the same foreboding feelings, because I saw the coming storm. But I ran into the presence of my Father, and he lifted all my concerns. He showed me the outcome to it all. And in his presence I found all the joy, hope and rest I would ever need —to the very end. I have peace and joy because I’ve been with him.” “My flesh shall rest in hope” (2:26). .......................... 3. DO WITH ME AS YOU PLEASE Martin Luther, at the height of all his trials, testified, “Lord, now that you have forgiven me all, do with me as you please.” Luther was convinced that God who could wipe away all his sins and save his soul could certainly care for his physical body and material needs. In essence, Luther was saying, “Why should I fear what man can do to me? I serve a God who can cleanse me of my iniquity and bring peace to my soul. It doesn’t matter if everything around me collapses. If my God is able to save me and keep my soul for eternity, why wouldn’t he be able to care for my physical body while I’m on this earth?” “Oh, Lord, now that I’m pardoned, forgiven and able to stand before you on Judgment Day with exceeding great joy—do with me as you please.” Brother, sister—rejoice! This present life is not reality. Our reality is eternal life in the presence of our blessed Lord. So keep the faith! Things are winding down—but we are going up!
1. 혼란과 환란을 통해 일하신다 /마26:31-32/ David Wilkerson 2015-06-22 17:14:52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은 고난과 혼란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펼쳐 나가십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극심한 혼돈과 아픔,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방식으로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 나가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1. 혼란과 환란을 통해 일하신다 /마26:31-32/ David Wilkerson 2015-06-22 17:14:52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은 고난과 혼란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펼쳐 나가십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극심한 혼돈과 아픔,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방식으로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 나가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은, 오직 '그분만 아시는' 마스터플랜을 펼쳐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그 마스트플랜을 전혀 모르니까, 혼란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그분은 일하십니다. 그 고난의 혼란 뒤에는, 곧 승리가 뒤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사람은, ‘극심한 삶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해 보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이와 동일한 패턴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사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이행하시기 시작할 때, 먼저 ‘지붕부터 붕괴되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환란과 혼란이 생깁니다. ▶1. 먼저 다니엘과 세 친구를 살펴보십시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거룩한 삶, 세상의 모든 쾌락과 단절된 삶에, 자신들을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 세 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큰 축복과 승리가 왔습니까? 오기는 왔는데, 좀 이상한 방식으로 왔습니다. 그들의 승리는, 혼란과 환란을 통과한 후의 승리였습니다. 용광로의 혼란과 환란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승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눈물을 흘리며 중보기도 하는 삶에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기도의 골방에서,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은총이 어떤 것입니까? 어떤 승리의 산꼭대기로 간 것이 아닙니다. 사자 굴로 갔습니다. 헌신함으로써 오직 안락하고 축복받는 삶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 친구들은 불붙는 용광로로 갔고, 다니엘은 사자굴로 갔습니다. 이런 성경을 읽으면, ‘기도와 헌신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혼란과 환란을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끝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자들을 만나고, 붉게 타오르는 용광로를 통과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으로 결판 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자굴, 용광로.. 그것이 하나님의 perfect will(완전한 뜻)이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혼란과 환란이..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섭리를 펼쳐나가시는, God's way(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풍에 돛 달고서, 뱃놀이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2. 선지자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그 땅에 영적 각성을 주시고, 풍부한 비를 내리시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타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업적을 성취한 후에, 발생한 모든 혼란과 환란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큰 축복과 환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세벨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고 그를 추격하여, 엘리야는 산속에 숨어야 했습니다.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려 하고 그 땅에는 여전히 사악함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속임수’처럼 보였습니다. *렘15:18 ‘속이는 시내’ 참조 엘리야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응답받은 기도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온전히 홀로 남겨졌다. 주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분의 언약은 실패한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혼란과 환란의 와중에 그분이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정확히 실행하고 계셨습니다. 왕상19:14~18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정확히 이루어 가시는데, 혼란과 환란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혼동에 빠지지 말고, 이런 패턴을 읽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의 12제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닌 결과, 그들은, 나라의 좌, 우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혼란과 환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닥칠 혼란과 환란을 대비할 약속을 남겨주셨으나 제자들은 슬픔과 두려움에 잠겨서,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 ‘약속’의 예를 한 가지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26:31~32 저 Wilkerson 목사는, 이 구절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이 혼란을 모두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그것은 너희들의 전투가 아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 그러나 이 일이 모두 끝난 후, 나는 너희 앞서 갈 것이다. 너희의 목자는 여전히 그곳 갈릴리에 있을 것이다.’ 참으로 힘을 북돋아 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모든 혼란과 환란의 .. 결과와 답을 미리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니,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십니다. ▶정리하면, 1) 혼란과 환란을 만날 때.. 당황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혼란과 환란을 통해.. 주님의 뜻과 역사가 성취되어짐을 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혼란과 환란을 통해’ 일하시는 방식 말입니다. 2) 그 주님의 마스트플랜은 우리가 다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주님은 미리, 답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일례로,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또는 우리들은, 현실을 살고 있으니까, 지극히 현실적이니까,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미래와 답’을 듣고도.. 우리는 혼란에서 확실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현실의 환경은 여전히 혼란과 환란이니까요. 그러나 이런 패턴을 알 때, 그 혼란과 환란 중에, 믿음의 길을, 조금 더 쉽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 영문 편역.> JUST BEFORE VICTORY If you are experiencing confusion, pain, and suffering, it may be that God is working things out for you in his own way. It is most often the sovereign work of our God unfolding a master plan known only to him. Through all the suffering of God's people, he is at work. The miracle soon follows the confusion. Study your Bible and you will discover these same patterns in the lives of all of God's people. In case after case, when God began to fulfill his promise, the roof seemed to cave in first! Think of Daniel and the three Hebrew children. They gave themselves to a life of holiness and separation from the world and all its pleasures. Daniel pledged himself to a life of prayer, tears, and intercession, but what did that get him and his three Hebrew friends? Testing just before victory! You don't go from the prayer closet to some mountaintop victory—you go to the lions' den. You don't go from consecration to a life of ease and blessing only—you go to the fiery furnace. These men were not afraid to face pain and suffering, because they knew it always ended in God having his way. Through lions and red-hot furnaces to God's perfect will! Think of Elijah. God gave him a glorious promise of a spiritual awakening in the land; of an outpouring of abundant rain; of a new day of victory for God's people; and the overthrow of Ahab and Jezebel. But look at all the confusion that broke out after the promise was given. Jezebel threatened his life, chasing him into hiding in the mountains. Wicked forces killed the prophets of God and the land continued in wickedness and drought. In fact, the Word of God seemed like a hoax. Can you imagine how confused Elijah must have been? “What kind of answered prayer is this? I'm left all on my own. Where is the Lord? Has his promise failed?" And all the while God was doing exactly what he said he would do. The confusion would soon pass and the answer would be forthcoming. Christ left his disciples a promise that could have seen them through all the confusion and pain, but they were too broken up in sorrow to remember. He had told them: "After I am risen, I will go before you into Galilee" (Matthew 26:32). In other words, "Don't try to figure it all out. Don't question the time of confusion. It's not your battle. God is at work! When this is all over, I will still be going before you. Your shepherd will still be there." What an encouraging word! ◈2. 부흥을 위한 나쁜 소식 눅2:34~35 스크랩 글 ▶미국의 부흥을 섬겼던 조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G. 피니 그리고 잠자던 영국 교회를 깨웠던 요한 웨슬리와 영국 웨일즈 부흥의 주역 이반 로버츠는 당시에 부흥보다, 먼저 비방과 핍박이 찾아 왔었다. 요나단 에드워즈의 생애를 보면, 그가 교회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요한 웨슬리의 일기를 읽어보면, 그가 설교를 마친 후 자주 돌과 계란이 날아오고 그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체포되었고 매 맞아야 했다. 이반 로버츠는 십자가만 설교했는데도, 당시의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부흥의 전조로, 성령의 기쁨과 희락으로 인한, 사람들의 인정과 칭송만을 추구하는 것 같다. 예수님이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값으로 주시려는 성령의 역사도 십자가를 통한 성령의 역사보다는 사람들이 호응할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회에는 치유가 일어나서 기쁘고 감격스러운 예배가 늘어나는데도 그 교회 근처의 세상에서는 죄로부터의 각성과 진지한 회심이 일어나는 일이, 매우 드물다. 예배에 성령의 나타남이 있어서, 예배자들이 은사들을 누리고 기뻐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기쁨에 비해서 우리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부족한 것 같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로부터 돌이킴은 있으나, 이웃을 위해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는 자아로부터의 돌이킴은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베들레헴 들녘에서 밤중에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모든 백성에게 미칠 부흥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2:11~12 예수님의 탄생은, 직접 관계가 없는 목자들에게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들려졌었다. 그런데 그 부흥을 직접 품어야 했던 마리아에게는 베들레헴 들녘의 목자들이 하늘의 천사로부터 들었던 소식과는 좀 다른 소식이 어떤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부터 전해졌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2:34~35 그 부흥의 주인공을 낳아야 하는 마리아에게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니라 아픈 소식이었다. 그녀의 태중에 자라는 아이는 이스라엘 중에 많은 사람이 패하고 흥함을 일으키며 또한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이라는 나쁜 소식이었다. 그래서 마리아의 마음은 칼이 그녀의 마음을 찌르는 것처럼 될 것이라는 아픈 소식이었다. ▶사실 마리아가 그 부흥의 아기를 잉태했을 때부터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요셉으로부터 오해받고 버림받을 뻔 했었다. 온 백성에게 미칠 부흥은, 그녀를 먼저 그렇게 외롭고 아프게 했다. 축복이 아니라.. 그 아기가 태어날 때도 마리아를 받아줄 여관이 없었고 태중의 아기와 함께 마리아는 출산의 위기를 겪어야 했었다. 이미 여관의 방을 잡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서 결국 짐승들의 안식처인 마구간의 구유에서 출산을 해야 했었다.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겪은 그 거절은, 이미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던 나사렛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 아기를 가진 여인을 누가 받아줄 수 있었을까. 그 아이가 태어나서 장성하여 사역을 함으로 시작될 바리새인의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전에 이미 마리아는 ‘이웃의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우물가 여인처럼 그녀의 마음을 찌르는 수많은 수군거림과 눈흘기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었다. 베들레헴에서 양치던 목자들이 들었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부흥을 품어야만 했던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아픈 소식이었다. 오늘날 부흥을 구하는 많은 이들이 마리아가 들었던 아픈 소식은 품으려 하지 않으면서, 목자들이 들었던 큰 기쁨의 좋은 소식만을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전하려는 것은 아닐까?
11장, 영적 침체 /사53:1-3/ 찰스 스펄전 2015-06-21 07:22:06 read : 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무리 탁월하게 쓰임 받는 자들이라도 인생의 한 때, 어두운 침체의 시기를 경험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전기에 보면, 잘 나타납니다. 루터의 생애만 보아도, 그런 경우가 수없이 나타납니다. 그는 환희의 7층천까지 올라가 있는 때도 많았고, 반대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때도 많았습니다. 그는 임종 시에도, 심하게 몰아
11장, 영적 침체 /사53:1-3/ 찰스 스펄전 2015-06-21 07:22:06 read : 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무리 탁월하게 쓰임 받는 자들이라도 인생의 한 때, 어두운 침체의 시기를 경험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전기에 보면, 잘 나타납니다. 루터의 생애만 보아도, 그런 경우가 수없이 나타납니다. 그는 환희의 7층천까지 올라가 있는 때도 많았고, 반대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때도 많았습니다. 그는 임종 시에도, 심하게 몰아치는 광풍을 겪었고 마치 대단히 지친 어린아이처럼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째서 빛의 자녀들이, 때때로 캄캄한 어둠 속을 걷게 되는지, 한번 살펴보십시다. ▲1. 사람은,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는 게 일종의 숙명입니다. 사람인 이상, 환란과 고통 가운데, 때때로 어두운 영적 침체의 시기를 통과하게 됩니다. 구속의 경륜 아래서조차도, 연약함을 견뎌야 하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께서 도우신다’는 약속이 주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환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아니 의인일수록, 환란과 핍박을 오히려 더 받는 측면도 반드시 있습니다. 이래 저래 사람은 영적 침체를 겪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없어서.. 영적으로 실족하거나 파산해서.. 영적 침체를 겪게 됩니다. 반대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귀가 주는 환란과 핍박이 커집니다. 모든 때에 그렇지는 않지만, 인생의 여정 가운데 그런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이래 저래 사람은 영적 침체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더 심한 영적 침체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당하는 주의 백성들을 동정하기 위해서 주님은 그에게, 다른 이들보다 더 큰 환란의 몫을 주십니다. 그래야 침체를 겪는 양떼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그들을 잘 위로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떠난 영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도록 명하시지 않습니다. 죽은 영혼이 나타나서, 말씀을 선포하거나, 신자들을 말씀으로 위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도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역은, 오로지 사람에게만, 맡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만이, 육체를 지고, 탄식하는 자들의 심정을,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영적 침체가.. 오히려 신자를 강하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사람인 이상, 육신이 병들면서, 그로 인해 영적 침체까지 겪게 됩니다. -소화 기관이 늘 병들어서, 몇 해 동안 제대로 식사를 못 하는 사람.. -신장이 약해서, 늘 고통을 당하는 사람.. 젊어서는 아직 몰라도, 나이가 들면, 자기 몸에 한 두 가지 이상 사람은 지병을 달고 살게 됩니다. 물론 젊어서부터, 그런 건강의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별히 정신적 연약함이라든지, 육신적 장애를 타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건강상 문제로.. 영적 침체에 일정 기간 빠지기도 합니다만, 그런데 오히려 이런 이유로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는 역사도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식물은, 늪지에서 자라기 때문에, 오히려 약에 쓰이는 특별한 성분을 지니기도 합니다. 어떤 식물은, 음지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특별한 성분을 지니기도 합니다. *인삼이 그렇지요? 배에는, 돛이 있어서, 돛이 바람을 타고 배를 빨리 항해하도록 도와줍니다만, 만약에 배에, 밑바닥에 깔린 무거운 쇠, 즉 밸러스트가 없다면, 그 배는 빨리 가면 갈수록, 균형을 못 잡고 침몰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극심한 고통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천재성을 일깨워 줍니다. 만약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잠자는 사자’처럼, 나태해져 버렸을 것입니다. 거기서 무슨 천재성이 발휘되겠습니까? 어쨌거나 고통, 그것으로 인한 영적 침체를 겪는 일은, 힘들고 지치는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 고통을 통해서, 내 속에 감춰졌던 잠재성, 천재성도 계발될 수 있으니, 하나님이 다 알아서, 신자에게 적절한 고통당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 가운데 사역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나 요나의 경우가, 그 대표적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하나님께 대한 한탄, 하소연, 자기 신세타령, 그 울먹임이 예레미야서의 전반부의 거의 줄거리입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의 사역이나 이사야의 사역이나.. 똑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똑같이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바로 길을 가지만, 어떤 사람은 비틀거리며 길을 갈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뚝거리지만, 계속 길을 갈수도 있습니다. 그 방향만 올바르다면, 비록 오랜 침체 가운데서도, 계속 사역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시력이 좋았던 라헬과, 시력이 좋지 못했던 레아 사이에서 시력이 좋지 못해서 우울한 삶을 살았던 레아가, 더 많은 족장을 낳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자녀를 술술 잘 낳았던 브닌나보다, 자녀를 낳지 못해, 하나님 전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한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큰 역사를 이루었던 것도, 좋은 예입니다. 혹자는 주님을 ‘슬픔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실 때부터 ‘볼품이 없었고, 사람에게 멸시를 받았으며, 일평생 고난을 많이 겪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2~3 더욱이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지, 우리 자체가 무슨 찬란한 보배는 아닙니다. 그 질그릇에, 여기 저기에 흠이 있는 것이.. 뭐가 그리 큰 대수이겠습니까. 어차피 질그릇인데요! ▲3. 사역을 진실하게 감당할수록.. 마귀의 공격에 노출되어.. 침체가 심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53:1 메시아에 대해서 전했건만, 믿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팔(즉 능력)이, 예수께 분명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사역자는 침체와 우울을 겪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전해도 안 믿으니까요! 진리를 전하면.. 더 뜨거운 반응이 나타나야 되는데 진리를 전할수록.. 더 냉담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를, 모두가 칭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저 스펄전은, 흙으로 구운 사기 인형을 보면, 그 속이 텅 비어 있는데, 꼭 사역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자기 영혼을 다 쏟아 부어서, 설교를 하고 나면, 사역을 하고 나면 마치 속이 텅 비는 것 같은, 그런 피로감이 오는 것입니다. 진이 다 빠진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사도바울처럼, 진력을 다 쏟아서 사역하게 되면 큰 칭송과 박수가 따라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쩌면 반대의 반응도 나타납니다. 오히려 바울처럼, 어디를 가든지 핍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4. 최고봉에 오른 사람일수록, 외로움은 더 심합니다. 세상에는,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인간적 외로움이 커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 병사들은 숫자가 많지만, 대위, 대령, 장성으로 갈수록.. 숫자가 희소해집니다. 그러니까 장성급이 되면, 더 외로운 것입니다. 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으니까요. 높다고 다 불편해 하고, 피해 버립니다. 조직적 관계는 형성되겠지만, ‘인간적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지도자의 위치로 높이신 사람은, 그가 높은 위치에 있는 만큼, 외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가 자기 외로움을 해소하는 길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산꼭대기 정상에 홀로 장엄하게 서 있으면, 산꼭대기까지 올라오지 못한 사람들과는, 자연적으로 거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 고독함을 만약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서만 이야기 나누는 기회입니다. 물론 주위의 다른 ‘최고봉’들을 만나서 교제하면서 그 외로움을 해소할 수도 있겠지만, 먼저는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더 깊이 가지면서, 그 외로움을 해소해야 하는 법입니다. 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십시오. 홀로 외롭게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곁에 제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다 잠들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영적 수준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때는 주님이 홀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과 대화로, 자기 외로움을 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둘씩 짝 지워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본질이 어떠한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를 돕는 짝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바나바, 실라, 누가, 디모데가 있었지만, 히말라야 산맥의 정상과 같은 그 사도에 비하면, 바울의 주변 인물들은, 주변의 낮은 봉우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당신이, 어떤 분야의 최고봉이라면, 그 위치에서 오는 외로움은, 그냥 달게 받으십시오. 그리고 같이 교제할 수 있는 다른 최고봉을 찾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최고봉이신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외로움을 달래고,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 ▲5. 밧줄을 너무 세게 당기면 끊어집니다. 너무 세게 당기지는 마십시오. 육체를 너무 혹사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화가는 자기의 붓을 늘 씻습니다. 붓을 아낍니다. 대장장이는 자기 연장을 늘 잘 관리합니다. 날을 수리하고, 잘 갈아둡니다. 사냥꾼은, 자기의 매나 사냥개를 늘 잘 관리합니다. 음악가는, 자기의 악기나 활을 얼마나 정성스레 관리합니까. 그런데 유독 학자들, 목회자들은, 자기 몸을 소홀히 다루는 것 같습니다. 저는 Lucan이 말한 격언을 늘 기억하면서 삽니다. “밧줄을 너무 세게 당기지 마십시오. 그러면 툭 끊어져 버립니다.” 목회자들이, 어떤 연구에 몰두하다보면, 한 자리에서 몇 시간동안 꼼짝하지 않고, 펜을 움직입니다. (요즘은 타자를 칩니다.) 그러면 눈, 몸, 다리 등.. 여러 기관에 무리가 가게 됩니다. 중간 중간 쉬면서 연구해야 하는데... 전혀 집중을 못해서.. 문제인 사람들이 많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너무 집중한 가운데.. 결국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은 시간을 맞춰놓으면, 한 시간 지나면 때르릉 울려주는 타이머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산길을 걷는다고 해서, 자기 영혼이 은혜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육체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 다음으로 좋은 것입니다. 밧줄이 끊어져서, 오래 일을 못하는 것보다는 밧줄이 끊어질 정도로는, 무리해서 당기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영적 침체가 찾아오는 시기 ▲1. 큰 성공, 업적을 이룬 후에, 영적 침체가 쉽게 찾아옵니다. 특별히 그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큰 성공을 이루고, 큰 업적을 성취한 후에는 더 기뻐하고, 더 즐거워하며, 영적으로 더 상승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방심하면, 교만해져서, 영적으로 침체를 겪게 되기도 합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승리에 취하여, 필요 이상으로 기뻐 날뛰는 것을 그런 교만의 위험에 빠지도록,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도 갈멜산에서 큰 업적을 이룬 후에, 영적 침체에 빠져버렸습니다. 오죽 심했으면, 그는 ‘죽기를 갈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사람은, 크나큰 기쁨과 흥분의 순간이 있으면, 그 후에는 반드시 침체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면서.. 스스로 미리 대처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크나큰 승리 후에, 큰 영적 침체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침체는 ‘내가 나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깨달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 하면서, 결국 새벽이 되어서, 씨름이 끝나자, 다리를 절뚝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사와 싸움과 그 승리를.. 자랑할 수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들었지만 그의 육체에 가시가 생겨서, 사탄의 사자 역할을 하는 것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부흥으로 말미암아 자기 발이 공중에 떠오르게 되고 대중적인 인기로 말미암아 높이 치켜세움을 받고 영혼을 구하는 일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헛된 영광을 받게 될 때 반대로 우리가 크게 파선하는 일을, 주님은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시 벌거벗은 몸으로, 만세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만 간절히 의지하는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리는 ‘바람에 나는 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하십니다. ▲2. 큰 성취를 앞두고도, 영적 침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취가 너무 크고 위대한 일이라서, 마치 여리고성 앞에 선 것처럼 우리 영혼이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말입니다. 여리고 성이,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그 거인 같은 아낙 자손들 앞에서, 자신이 메뚜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당연한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이기에, 그 성들을 함락시키고, 그 거인들을 정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다시스로 도망가 버린 것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니느웨가 어떤 성입니까. 앗수르가 얼마나 잔인한 민족입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이방 신인 여호와를 가서 전파하라고요? 그 큰 임무 앞에서, 잠시라도 침체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습니까! 제 스펄전이 런던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 그랬습니다. 이제 대도시 런던으로 청빙을 받아서, 제 목회의 장래가 활짝 열려있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었지만, 저는 반대로, 깊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부름 받은 모세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이기에, 이 엄청난 무리들을 계속해서 인도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제 나이도 약관 20대이었습니다.) 그러나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으면, 그 후에는 은혜의 단비가 내리는 셈입니다. 거친 옷을 입은 선지자 세례요한 후에는, 주님이 등장하시는 법입니다. 목동이 양을 치며 홀로 두려움 가운데 지낼 동안에, 여호와께서 그 목동에게 나타나 주시는 법입니다. 먼저 광야를 지나야, 마침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법입니다. 비둘기에 앞서, 까마귀가 먼저 보냄을 받는 법입니다. (우리에게도 까마귀가 먼저 찾아옵니다.) 영적 침체를 겪은 이후에는, 더 크고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법입니다. ▲3. 목회를 하는 중에, 침체가 오기도 합니다. 가장 믿고 의지하던 형제가, 등을 돌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자의 마음이 한동안 괴로움과 비통한 마음에 빠집니다. 그 외에도, 평소에 신앙생활 잘 하던 신자가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목회자는, 그게 다 자기 책임인 것 같아서, 멀리 광야로 들어가서, 영원히 그곳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거기에다 불신자들, 세상의 조롱, 폄하하는 발언들, 교회를 향한 비방을 들을 때 목회를 관두고, 다시는 그런 비방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목회를 10년 한 고생보다, 아히도벨 같은 배반자, 데마 같은 사람에 의해서 단 몇 시간 충격 받는 것이, 아마 더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공격을 받아도,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덤덤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내면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입니다. 저는 서리 음악당의 그 처참한 사건 이후에 극심한 어두움의 공포를 겪었습니다. *Surrey 뮤직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 몇 명이 깔려죽는 압사 사건이 일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저는 그 당시 엄청난 압박을 받았고, 그 처참한 불행의 무게 때문에 한없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소요와 공포, 사람들이 죽는 (가상의) 일들이 밤낮으로 제게 엄습했고, 제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짐으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예수)를 높이시니” 라는 본문이 제 영혼에 은혜로 다가오는 순간, 저는 그 공포의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의 종들이 이렇게 저렇게 고통을 당하나 예수께서는 여전히 위대하시다는 사실이 저를 일깨워서 이성과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여러분, 무서운 영적 침체가 닥칠 때에, 오로지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구원만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만, 침체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12장, 목회자의 언어 생활 /눅9:57-62/딤후4:2-/ 찰스 스펄전 2015-06-20 23:36:50 read : 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목회자는, 스스로 목사임을 나타내려는, 우쭐하는 모습을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라고 칭하셨습니다. (그 호칭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는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일단 그 호칭은 ‘사람의 아들’ 즉 겸손한 호칭입니다. 보통 사람과 똑같다는 뜻입니다.
12장, 목회자의 언어 생활 /눅9:57-62/딤후4:2-/ 찰스 스펄전 2015-06-20 23:36:50 read : 2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목회자는, 스스로 목사임을 나타내려는, 우쭐하는 모습을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라고 칭하셨습니다. (그 호칭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는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일단 그 호칭은 ‘사람의 아들’ 즉 겸손한 호칭입니다. 보통 사람과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 크시고 높으신 주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면, 그 종들인 목회자들은, 그 ‘인자’ 이상으로, 자신을 높여 불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투, 복장, 몸가짐 등으로.. 더욱 목사답게 보이려고 하는데요.. 저 스펄전은, 반대로 그냥 ‘보통 사람’으로 지내는 것이, 가장 목사답게 보이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목사의 권위는 오직 영적으로만 나타내는 것입니다. 대학교수와 목회자의 비슷한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그들만의 특유한 모습이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일반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홍학이 우아하게 성큼성큼 걷는 모습이나, 황새가 근엄한 척, 깊은 생각에 잡혀 있는 모습을 보면, 모든 목회자가 그렇지는 않지만, 저는 자꾸 일부 목회자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2.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저 스펄전은, 목회자는, 그냥 보통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풍기는 것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빈틈없는 목회자의 티를 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 인간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목사의 가운을 입고, 너무 목사 티를 내는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천하게 지내신 예수님의 모습을, 거꾸로 따르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목회자를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의 근엄하고 인간답지 못한 태도 때문이라고 봅니다. 진정으로 권고하거니와, 그런 분들은, 요단강으로 가서, 자기 몸을 일곱 번 씻어서 그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처럼 말입니다. 목회자는 신성함과 더불어, 인간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은, 줄타기와 같이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성을 유지한다고 하면서, 너무 인간적으로만 되어서 신성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신성함은, 고상한 목소리, 권위 있는 복장 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 감화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권위를 내세우다가는, 외식에 빠질 수 있음을, 늘 주의해야 합니다. ▲3. 목회자는, 어디에 있든지 목사이며, 따라서 자신이 항상 임무 중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임무에서 벗어나 있을 때가 있더라도, 즉각 복귀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쉬는 시간이나, 여가 시간에라도, 항상 선을 행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부득불 해야 할 일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임무를 담당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4:2 목회자는 주님으로부터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음성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왕상19:9 (개역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론 활은 때때로 줄을 풀어놓아야 합니다. 항상 팽팽하게 조여져 있으면, 탄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활의 줄을 끊어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줄은 언제나 팽팽하게 다시 조여질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기타, 바이올린 등의 악기도 마찬가지지요. 줄이 팽팽하게 탄력이 있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휴식을 가지더라도, 거룩한 휴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뉴 포레스트’에 가서 어느 옛날 집을 보았는데, 신기하게 그 방에는 거미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 번도 빗자루로 쓸지 않았는데도, 거미가 줄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거미들이 그 방들로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목회자는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거미줄이 쳐지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에서, 게으르고 한가한 습관들이, 말끔히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거미줄이 쳐지지 않은, 항상 말끔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4. 목사는 강단 바깥에서, 사교성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소금이 그릇 속에 담겨 있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릇 밖으로 나가서, 소금이나 음식에 뿌려져야, 비로소 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목회자는, 자기의 거룩한 영향력이, 어두운 사회 속으로 (영적으로) 침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혼자 동떨어져서 자기가 ‘맛을 가진 소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혼인잔치에도 참석하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하는 식사자리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과 동떨어져서 스스로 거룩한 체 했던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셨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구별됨(=거룩함)을 지키려 한다면, 그건 바리새인의 태도가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5. 사람들이, 목사라고 해서, 무조건 다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 시간을 특별히 할애하여, 다가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그런 목사들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회자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자기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해야 합니다. 꿀통 주위에는, 꿀벌들이 몰려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예이지만, “개조심”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사는 것 같은, 그런 삶의 태도는, 좋지 않습니다. (아무나 오지 말라는 뜻이지요.) 랍비들의 말에 따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방문해서, 그 지혜를 시험했다고 하지요? 진짜 꽃과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화를 보여주면서 멀리서 어느 것이 진짜 꽃인지, 알아 맞춰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은, 즉시로 신하들에게 ‘창문을 열어라’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진짜 꽃에는, 벌들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가짜 꽃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꿀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까? 꿀벌들은, 그가 진짜 향기로운 꽃인지, 아니면 가짜 꽃인지.. 금방 압니다. ▲6. 여러분, 교회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나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목회하려는 목회자는, 그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모든 죄인들을 다 품어줄 수 있는, 드넓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 영국의 항구들은, 크고 넓어서, 어떤 선단(배의 무리)이 들어와도, 다 정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조그만 배들은, 아무데나 정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법 큰 배들은, 항구가 넓은 곳으로 골라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항구에서는, 그 배를 정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심이 얕든지, 접안시설이 부족하든지.. 하거든요. 목회자가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 항구에 정박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에게로 가서, 그와 교제하면서, 평안과 안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치 벽난로 가에 앉은 것처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7. 목회자는 언제나 활기가 있어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때때로 피골이 상접한 수도사가 경건한 신자로 추앙 받기도 하는데요, 그가 얼마나 금식과 기도를 많이 했으면, 피골이 상접했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 스펄전은, 그가 금식기도를 많이 해서 야위었을 수도 있지만, 위장병이 나서, 바짝 야위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피골(뼈와 가죽)이 상접한(서로 달라붙은) 것을 은혜의 증거로 말하는 성경 구절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해골’을 경건의 증거로 제시하는 구절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로 ‘활기찬 것이, 경건의 표식이다’ 라고 봅니다. 사람을 만나서 교제하면, 송이꿀처럼 맛이 나는 사람, 만발한 꽃처럼 향기를 발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벌들이 모여들지, 바짝 야위고, 늘 ‘죽음을 바라봅시다’라고만 말하는 사람 주위에는, 벌떼들이 모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죽은 후를 바라보자는 말은 신앙적이지만, 늘 음울하게 그 말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8. 특히 젊은 목회자들에게, 제 스펄전이 부탁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있을 때, 대화를 혼자서 독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입니다. 항상 설교를 하거나, 가르치는 목회자는 사석에서도, 대화를 혼자서 독점하며,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 말 많은 사람이 득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저는 어떤 분과 한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그분은 제게 ‘당신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대화에서 큰 교훈을 받았다’고 말하고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사실은 제가 한 말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 스스로 이야기 하도록 하고, 잘 들어주었을 뿐입니다. 사람이 대화를 혼자서 다 하는 것은, 마치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자기 혼자 다 먹어치우는 것과 똑같은 잘못입니다. 그 자리가 설교석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들이 함께, 대화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들은 나중에, 그 목회자가 하는 설교에, 더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사석에서 목회자가, 혼자서 말을 다 해 버리면 설교 시간에도 ‘저 말장이!’ 라고서, 회중은 귀를 닫아 버릴 것입니다. ▲9. 목회자가, 사석에서,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말을 많이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도 목회자의 역할은 <대화의 주제를 잘 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쓸데 없는 말, 또는 뒷담화를 하는 것을 그대로 다 듣고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째서 쓸데없이 시간과 기회를 허비하겠습니까. 목회자는 어디를 가든지, 존경 받는 위치에 있으므로, 대화의 키잡이 역할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키잡이가 어디로 키를 돌리는가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탄 배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 아니라, 위트와 재치로 대화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10. 우리 주님은, 꼭 강대상에서만 설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주님의 설교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대화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식탁에서나 -길을 가다가 만난 우물가에서 -해변에서나 -식사 초대를 받은 집에서, -혹은 길을 지나던 중에 근처의 밭에서 그러니 우리 주님의 모든 대화는, 다름 아닌 설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의 대화가, 설교가 되기는커녕 얼마나 파괴적인 뒷담화, 또는 시간낭비가 되는 쓸모없는 대화일 때가 많습니까. 물론 언제나 설교같은 대화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점심 뭐 먹었니?’ 같은 일상의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의 대화’로만, 두 시간, 세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거룩한 대화를 하는 것도, 신실한 설교 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을, 설교자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11. 그리고 설교를 신실하게 잘 하기 위해서도, 신실한 일상의 거룩한 대화가 꼭 필요합니다. 어떤 대화들은, 우리의 그나마 남은 영성도, 갉아먹어버리는 대화가 많거든요. 그래서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나서, 설교단에 오르면, 그날 설교는 들어보나마나 입니다. 죽 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설교하기 전에, 긴밀히 나누어야 하는 대화는, 필답을 한다고 합니다. 종이에 써서 물어보고, 종이에 써서 답하는 방식 말입니다. 종이에 쓰게 되니까, 말을 아주 간략히 줄이게 됩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의 쓸데없는 대화를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은, 우리 경건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목회자가 파티나 모임에 너무 자주 나가는 것도, 절제할 필요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경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절제해야 합니다. 위에서, 예수님은, 우물가, 잔칫집도 다니셨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내게 전도의 기회가 되고, 내 경건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다녀야 하지만, 그것이 내게 도리어 경건에 방해가 되는 모임이라면..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재에서 있어야 할 시간, 기도실에서 있어야 할 시간을, 그런 쓸데없는 모임으로 다 갉아먹는 일은, 스스로 절제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막에 가 보면, 죽은 낙타 주위로 독수리가 몰려듭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그 말씀이 나오지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고요! 여러분, 영혼이 죽어 있는 목회자, 성도들이 있는 곳으로, 모이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거기서 뜯어먹을 수 있는 것은 ‘죽은 사체’뿐입니다. 대신에 생명의 떡, 생명수가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모든 모임이 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모임에는, 죽은 고기를 얻는 것 말고, 또 뭘 더 할 수 있겠습니까. ▲12. 여러분, 이것은 예수회 사람들이 성공했던 방식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강단’으로만 공략하지 않고, ‘응접실’로 공략했다고 합니다. 즉 새로 이사 온 사람이나, 도시의 유력한 인사를 전도할 때, 교회로 초청해서 설교로 감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를 방문해서, 응접실에서 그들을 감화시킨 것입니다. 즉 일상적인 대화 가운데서 마치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그 사람의 영혼의 갈급함을 직시하면서, 그들에게 생명수를 공급했던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의 대화가, 그런 식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강단에서가 아니라, 응접실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사람들에게 뭔가 생명의 떡, 생명수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강박관념을 갖고서 억지로 하면, 오히려 역효과 납니다. 자기가 평소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평소에 기도와 경건의 삶을 자기가 먼저 살면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경건으로, 사람들을 감화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14장, 사역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고후12:1-/사55:10-11/ 찰스 스펄전 2015-06-20 23:33:41 read : 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령을 믿사오며..”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의 일부로서, 이 문장을 믿고 고백합니다만 실제로 우리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정말 얼마나 ‘성령을 믿으며’ 살고 있습니까? 정말 사도신경을 신앙 고백할 때, 성령님께, 나의 체험적 신앙고백이 드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14장, 사역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고후12:1-/사55:10-11/ 찰스 스펄전 2015-06-20 23:33:41 read : 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령을 믿사오며..”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의 일부로서, 이 문장을 믿고 고백합니다만 실제로 우리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정말 얼마나 ‘성령을 믿으며’ 살고 있습니까? 정말 사도신경을 신앙 고백할 때, 성령님께, 나의 체험적 신앙고백이 드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일평생 나에게 지혜와 열매와 은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인정하듯이, 성령님의 존재도 우리가, 내 삶속에서 순간순간 인정해 드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무 의미 없이 신앙고백만 되뇌이지 말고요. 예를 들면, 형제 A는, B와 교제하는 중에, B의 친구인 C에 관해서 늘 좋은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C와는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냥 귀로써 말로 들어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A는, 드디어 C를 만나게 되었고, 이제는 눈으로 대면했고, 서로 친교의 시간을 가지면서, C와 복된 교제의 영향력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친구 C의 존재를, 귀로 들어서만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동행하시는 친구되신 성령님을, 귀로써 들어서만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제 삶에서 체험하며, 그분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며 교제하게 되면, 한 가지 나타나는 특징은 ‘민감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귀로써 들어서만 알고 지낼 때는.. 성령님께 민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동행하며 교제한 이후로는.. 성령님께 민감하게 됩니다. 바로 내 옆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님과 교제하지 않는다면, 사역자로서 아주 부적격합니다. 아니 어쩌면 교회의 회원으로 남아 있을 자격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진짜 새 피조물이 된 사람은, 반드시 성령님과 교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 각자를, 거룩한(구별된) 삶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번 장Chapter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목회 사역에는 성령의 사역이 반드시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입니다. 만약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증거가 없다면, 목회자의 직분은, 그저 이름뿐인 것이 되고 맙니다. 구약의 제도권적 제사장처럼, 그저 주기적으로 형식적인 제사나 집례하는, 그런 역할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영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종으로서, 길을 못 찾아 헤매는 ‘맹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여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백성의 죄를 책망하여, 회개하며 죄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자로서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필수적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증언에는 언제나 성령님이 임재 해 계셨습니다. 만약 우리 위에, 성령님이 (계속, 오래도록) 임재 해 계시지 않으신다면, ‘나는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 어쩌면 정확할 것입니다. 행2장의 오순절의 역사를 통해, 성령님은 이제 우리 사람들에게 부어졌습니다.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 성령의 시대를 사는 사람이 맞습니까? ◑내가 성령과 동행, 교제한다는 실제적 증거 8가지 ▲1. 성령님은 진리의 영 (말씀의 영)이십니다.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요16:13 신약성경에 종종 ‘비밀’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성경말씀을, 그저 세상 학문 공부하듯이 공부해서는,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비밀’이라서, 성령의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말씀을 잘 깨닫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말씀을 잘 깨닫고 가르치려면..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며, 이것은 일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서재에서 연구하는 시간에서부터 ‘성령의 역사’가 당연히 나타나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서재에서 준비한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될 때, 회중들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서재에서.. 성령의 교제, 인도를 받지 못했는데, 강단에서.. 성령의 교제, 인도를 받을 수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서재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을 때는 서재에서 즉시 기도하면서,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셔서, 제 눈을 열어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라고요. 성경을 원어로 공부하고, 주석서를 방대하게 참고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은 더욱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없다면, 책상에서의 연구는, 그야말로 탁상공론이 되고 맙니다. 둘 다 필요하지만, 만약 딱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성령의 도우심’이, 차라리 ‘학문적 연구’보다는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성령의 역사’가 만약 없다면.. 남의 소중한 (설교 듣는)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은 수 백 번 들어서 다 알고, 그래서 지루하니까’ 설교에, 귀에 솔깃한 다른 주제를 말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그의 사역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임할 때.. 그 복음은 수 천 번을 들어도.. 늘 새롭습니다. 지루할 수 없습니다. ▲2.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는 것과 함께, 그 깨달은 말씀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도.. 역시 중요합니다. 일례로, 복음의 일부분을 분명히 이해한 사람이, 그 일부분을 지나치게 부각시켜서, 그 부분만 집중/ 강조해서 가르친다면.. 그것은 결국 복음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의 코가, 얼굴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이지만, 코를 너무 크게 그려서, 눈과 입과 그밖의 것들이 거의 드러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초상화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전하는 ‘복음’이, 얼굴이 일그러진 풍자만화처럼 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복음의 특정한 일부 교리들을 과도하게 선포하면서 나머지 진리들은 그 그늘 속에 가려진다면, 그것은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복음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다. 이런 ‘지혜’도, 성령님이 허락해 주십니다. 진리의 복음의 말씀을, 잘 사용하고, 잘 다룰 수 있는 균형잡힌 감각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가르쳐야지, 성도들이 좋아하는 ‘향신료’만 골라서 넣는다면, 결국 그 요리는 망쳐버리고 맙니다. 좋아하는 ‘향신료’란.. 위로, 사랑, 은혜.. 이런 것들이지요. 싫어하는 ‘향신료’는.. 거룩, 순종, 심판.. 이런 것들이고요. 이렇게 성경을 골고루, 하나님의 복음과 경륜 전체를 균형있게 가르치려면, ‘성령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편파적인 사고와 균형을 잃어버린 치우침 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설교본문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편파적으로 치우쳐서, 본문을 선택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성령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는 목회자는.. 그것을 피하고, ‘균형’을 추구합니다. ▲3. 입술에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사6:7 제단에서 취한 핀 숯이 내 입술에 대어져서, 입술이 잘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내 입술이, 성령의 숯불로 지져진다면, 그 얼마나 영광스럽게 말씀을 전하겠습니까. 성령의 불타오르는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종종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교자가, 설교를 망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쓸데없는 말을 발설하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그 말만 하지 않았으면, 다 좋았을 것을..’ 하는 말, 말입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합니다. 유머의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 유머조차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면 오히려 설교를 망치는 ‘쓸데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또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상스러운 말, 말실수.. 이런 것을 범하기 쉽습니다. 성령에 의해, 내 입술이 사로잡혀 있어야, 그런 말실수를 안 하게 됩니다. 나아가, 설교를 너무 단조롭고 평범한 어조로 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흥분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흥분으로.. 어조와 어감이 흥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냥 평상시 대화하는 것처럼 평범하게만 말하면, 좋은 설교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고함을 지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목소리를 발성하는 것입니다. 제 스펄전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함을 강하게 받지 못할 때는 목소리도 원활하게 나가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날은, 마치 바퀴 빠진 병거처럼, 말이 무겁기가 한이 없고, 반대로 어떤 날은, 마치 암사슴이 초원을 달리듯이, 말이 시원하게 나올 때가 있습니다. 내 입술에, ‘성령의 역사’의 차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는 회중들이 속으로 ‘아, 저건 성령의 역사로 하는 말(설교)이야!’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4. 성령은 또한 ‘기름부으시는 역사’를 행하십니다. 저 스펄전도 그런 때가 있는데, 그 때는 정말 설교 시작부터 끝까지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12:1 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늘 그렇지는 못 하더라도, 가끔은 그런 상태로 인도함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그 설교(예배) 현장에 임재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높이며 회중의 모든 생각이, 오직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데 집중되어 있고, 그때는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간절히 토로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저 허공을 치며 설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경험한 신자들은, 반드시 삶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예배와 설교를, 자기가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의심 많고, 조롱하던 불신자가 참석했다 하더라도, 그도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비판하는 자, 조롱하는 자가 많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예배를, 그가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도 됩니다.) 이때는, 설교를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똑같이 어떤 전율함을 느낍니다. 혹은 독수리가 공중으로 날듯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촉촉이 이슬같이 성령이 내리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메마른 심령, 갈한 심령들이.. 다 은혜롭고 부드러운 밭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이슬, 성령의 단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머리 깎인 삼손이 비참한 신세가 되었듯이, 성령이 떠난 목회자도, 그렇게 비참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강단이 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간절한 심령으로 내가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을 깜빡 깜빡 잊기 쉽습니다만, 성령님이 종종 역사하시는 사역자의 비결은, 그가 늘 성령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깜빡 깜빡 잊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내가 설교를 열심히 준비해서 선포해도, 성도들이 곧 다 듣고 잊어버릴 터이니, 뭐 그렇게 힘들게 설교할 필요 없다’면서, 아예 기대감조차 전혀 없습니다. 설교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지는 시간이며,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 설교시간이 얼마나 복된 시간인지.. 전혀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사55:10~11 위 말씀을 보십시오. 목회자들은 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강단에서 전하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사람들이 까먹지 않습니다.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언제 그 말씀이 잊어버려집니까? 그 말씀이 열매를 풍성히 맺고, 그 정한 목적을 다 이룬 다음에야 비로소 하늘에서 내린 비가, 다시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증발하듯이, 하늘에서 떨어진 말씀이,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전파한 설교말씀을, 성도들이 다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내 입에서 나온 내 말이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 말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하늘에서 떨어진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설교해도 다 잊어버리니, 소용없다’는 생각은 이제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즉 ‘대언자의 대언의 음성’은, 결코 헛되게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5. 복음전파의 실제적 효과를 내려면.. 성령님을 간절히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사역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데.. 실질적인 열매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역은,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하지만.. 실제적으로 열매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강단에 올라가서 보여주는 것은, 화려하고 현란한 ‘칼 쑈’가 아닙니다. 무슨 서커스 단원처럼, 칼로 화려한 묘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은, 실제로 ‘말씀의 검’을 휘두르는, 실질적인 영적 전투입니다. 강단이 실제적인 <영적 전투>가 일어나는 장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전투하는 전장’에 들어갔으니까요! (오페라 가수는, 흰손수건을 들고 노래를 부를 때가 간혹 있지만) 강단에서 목회자는, 흰손수건을 들고서, 어떤 쑈를 연출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면 자기의 어투를, 마치 연기자의 대사처럼, 연기하듯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독교 사역도, 얼마든지 겉포장을 그럴듯하게 꾸밀 수 있습니다. 그 속 본질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그 결과, 화려하기는 한데.. 또 매우 세련되고 나이스하기도 한데.. 회중들은 아무 은혜도 못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거의 소멸된 것이지요. 그것은 ‘성령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교회의 외모가 어떻든지 간에,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의 검’에 찔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되고.. 또는 영혼에 감동을 받고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주님과 멀어진 영혼이, 주님께로 돌이키게 되는.. 그런 실제적 역사가 나타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화려한 공연에 불과하고, 아무런 실제적 열매가 없다면, 그건 우리가 성령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물론 평소에, 생활에서부터, 성령님을 간절히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평소에는 제멋대로 살다가, 예배시간에만 의지한다고 해서.. 그게 되겠습니까. 성경에 ‘성령의 인(도장)’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런 의미도 될 수 있습니다. 사역이나 예배가운데, 성령의 은혜가 흐르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역이나 예배를.. 성령의 인을 쳐 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사역, 그 예배, 그 사역자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또는 그 사역과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좀 끔찍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을, 우리 예배를, 우리 자신을.. 받아주고 계십니까? ‘성령의 인’을 쳐 주십니까? 즉, 성령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흐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바짝 메말라 있습니까? 장기간 계속되는 가뭄은 아닙니까? 그냥 감정적인 은혜.. 그런 것 말고요, ‘내가 새 사람으로 살겠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 하는 그런 결단과, 회개와, 회심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 그런 것들이 일어나는 척.. 연기만 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그런 역사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을, 늘 간절히 의지하고, 동행해야 합니다. 평소에, 성령님과 동떨어진 삶을 늘 사는 사람에게서 그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주 무리수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서, 목회자나 지도자가, 자기 자신의 능력과 힘을 써서, 어떤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다가 실패를 맛본 사람들은, 강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날마다 성령님을 간절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성령님이 소멸되었는지를 파악해서, 진실로 회개하고, 나로부터 멀찍이 떠나신 성령님을, 내 가까이로 친밀하게 다시 모셔 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론’에 관해서, 논쟁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봅시다. 내 사역에, 성령의 은혜, 성령의 감동, 성령의 임재 Presence, 성령의 회심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저 내가 하는 모든 수고는.. 무용지물인 셈입니다. ‘성령론’을 따지면서.. 무용지물인 사역을 해 서는 안 됩니다. 성령론을 좀 몰라도.. 자기에게 성령의 역사가 실제로 나타나는 사람이.. 참 사역자입니다. ▲6.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성도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성령님’을 우리는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언제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있을 수는 없습니다만, 내 영혼은 절대로 경배의 자세를 떠나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습관’은 좋습니다. (아마 개인기도를 뜻하는 듯) 그러나 ‘기도의 영’은, 그보다 더 좋습니다. (아마 일상에서 마음의 기도를 뜻하는 듯. 비록 눈을 감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기도를 계속 하는 것을 뜻하는 듯) 정기적으로 기도하며 홀로 있는 것은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개인기도)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우리의 목표여야 합니다. (기도의 영) ※바울은 ‘무시로 always 기도한다’고 말씀했는데, 아마 이 마음의 기도, ‘영의 기도’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풍성한 기도가, 신실한 설교와 함께 가는 법입니다. 늘 무시로 기도하는 사람만, 신실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7. 성령님은 ‘성결의 영, 거룩하게 하는 영’이 되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령님의 책망, 근심을 느낍니다. 그래서 곧바로 회개하므로, 성령의 소멸까지는 좀처럼 가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와 아울러, 그의 삶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정에서 모범적인 가장인지, 대인관계에서 정직하고 겸손한지, 늘 예의주시합니다. 율법적으로, 또는 외식적으로 자신이 성결하게 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녕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그를 늘 책망하시고, 교정하셔서.. 그는 점점 성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벽주의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년보다, 또는 3년 전보다는.. 성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무시하고 사는 신자, 지도자는, 어쩌면 3년, 5년이 지나면, 상태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의 책망, 교정을 듣지 못하여, 평소에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에게 어울리도록 모든 거룩함과 성결함으로 행하고자 한다면, 날마다 하나님의 영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7장, 옥외 노천 설교의 역사1 /눅19:40/ 찰스 스펄전 2015-06-20 23:30:51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독교에는, 노천 설교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옥외 노천 설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노천 설교가 불가피했습니다만.. 어쨌든, 창세기의 에녹은, 강단이 별도로 없이 언덕에서 예언하였고, 의를 전파한 노아는, 그의 방주를 짓는 현장에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모
17장, 옥외 노천 설교의 역사1 /눅19:40/ 찰스 스펄전 2015-06-20 23:30:51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기독교에는, 노천 설교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옥외 노천 설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노천 설교가 불가피했습니다만.. 어쨌든, 창세기의 에녹은, 강단이 별도로 없이 언덕에서 예언하였고, 의를 전파한 노아는, 그의 방주를 짓는 현장에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역시, 노천에서 무수한 무리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사무엘은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 길갈의 들판에서 설교하였고, 주께서는 그 설교를 통하여 백성들을 책망하시사, 그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 서서,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고 외쳤습니다. 요나 역시 니느웨의 거리(노천)에서 경고의 말씀을 외쳤고, 곳곳마다 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하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같이 수문 water gate 앞에 있는 거리로 몰려들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 도처에서, 이처럼 옥외 노천 설교의 예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옥외 노천 설교 우리 주님도 주로 산기슭이나 해변가나 거리에서 설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야말로 그 의도와 목적으로 볼 때, 과연 노천 설교자이셨습니다. 그는 회당에서도 잠잠히 계시지 않았습니다만, 들판에서도 똑같이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록된 설교들 중에, 교회당 안에서 행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 대신 산상 설교와 평지 설교가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최초의, 가장 신성한 설교 양식은, 주로 주님 자신이 행하신 노천 설교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옥외 노천 설교 주님이 떠나신 후, 그의 제자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실내에서, 특히 다락방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도 설교가 가장 흔하게 행해진 곳은 성전 뜰(노천)이었고, 또한 그와 같은 탁 트인 공간이었습니다. 거룩한 곳이라거나 성별된 교회당 개념은, 그들에게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들이 성전 뜰에서 설교한 것은, 그곳이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집집마다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였습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집을 빌려서, 혹은 회당에서도 긍휼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동시에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어느 곳에서나 설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초대교부들도, 옥외설교를 행하였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역사가 유세비우스(265?~339?)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사도들의 그 거룩하고 고귀한 제자(교부)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복음을 전하였고,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의 씨앗들을 뿌렸다. 당시 많은 제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기 나라를 떠나 기독교 신앙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게로 가서, 전도자의 일을 행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복음의 기록들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 믿음을 심어 인도자와 목회자들을 세워 그들에게 이 새로운 밭(교회)을 보살필 임무를 부여하고 나면, 그 즉시 성령의 은혜와 강력한 역사하심의 도우심을 받아 다른 나라로 옮겨갔다. ◑중세 교황주의 때는, 노천설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중세의 암흑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쇠락해 가는 교회 가운데서 당시 탁월한 설교자들도 역시 옥외 노천설교를 행했는데, 그들은 순회 수도사들로서, 기독교 신앙과 경건을 생생하게 보존했으며, 또한 그 신앙 단체들의 위대한 창설자들이었습니다. ▲라티스본 Ratisbon地名 의 베르톨드 (Berthold 1210~1272)는 보헤미아의 글라츠 근처의 들판에서 6만 명 혹은 10만 명의 청중들 앞에서 설교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베르나르 (Bernard 1090~1153)와 파도바地名의 안토니우스 (Anthony 1195~1231), 그리고 토마스 등 유명한 순회 설교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시간이 지금 없습니다. 액서터의 주교 라빙턴 Lavington 박사는, 초기의 수도사들이 노천에서 사람을 끄는 일에 능했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투로 말했는데, 그것은 감리교도들이 노천설교에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한 것입니다. 그는 베로나의 피터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는 설교에 신적인 재능이 있었는데, 교회당이나 거리나 장터에서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유식한 주교는 그 이외에도 수많은 예를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들이 선한 의도이든 악한 의도이든 “옥외 노천 설교가 굉장한 힘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 것입니다. ▲중세시대 교황주의가 온 세상을 휩쓸기 시작하였을 때,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은 모두가 옥외 노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브레시아의 아놀드는, 바티칸 교황청 정문 앞에서 교황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탈하였음을 외치기도 했습니다. 신앙 부흥 사건들이 대개 빈번한 옥외 노천 설교와 혹은 이례적인 장소에서 설교들이 있은 후에 이어졌다는 사실은 입증하기가 너무나도 쉽습니다. 최초의 개신교 교리에 대한 단호한 설교는, 거의가 옥외에서나 혹은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닌 장소에서 행해졌습니다. 예배를 위한 장소들은 교황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 시작 초기에는 위클리프가 한동안 리터워스의 교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존 후스 와 제롬, 그리고 사보나롤라 등도 한동안 교회 체제 내에서 복음적 성향을 띤 설교들을 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더 충실하게 깨닫고 전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타락한 교회를 떠나, 다른 장소(옥외, 노천)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시작 단계에 있어서 개혁자들은 아직 그 머리 둘 곳조차 없었을 당시에, 천군과도 같은 일단의 무리들이 노천에서 복음을 선포했고, 목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들판과 거리에서, 복음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영국 전역에는 아직도 “가스펠 오크”라 불리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저 스펄전은, Surrey地名의 오래된 오크 나무 가지들이 널리 퍼져 있는 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옛날 존 녹스가 잉글랜드에 잠시 머물 때에 바로 그 나무 아래에서 설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친 광야와 외로운 언덕, 그리고 숲 속의 은밀한 곳들이 설교를 위하여 구별되었고, 동굴들과 협곡, 그리고 산꼭대기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아직도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 옛날 그런 곳들에서, 신실한 무리들이 모여서 주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옛날 그런 외딴 곳에서만 설교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순회 설교자들의 강단으로 쓰이지 않은 시장, 장터가 거의 없었습니다. 위클리프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 휘하의 전도자들이 온 나라를 누비며,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했습니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의회 포고령(1382)은, 두터운 겉옷을 걸친 사람들이 마을마다 다니면서 교회 당국의 면허도 없이 교회당이나 교회의 뜰 혹은 장터나 장날 거리에서 설교를 행하고 있고, 그것이 당시 성직자들에게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신들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군인들이 일반 백성들과 섞여서, 혹시 그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자들이 있을 때에는 칼로 그 설교자들을 지켜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위클리프가 사망한 후, 그의 추종자들도 똑같은 방식(옥외 노천 설교)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스윈더비 Swinderby 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파문당하여 교회나 교회 뜰에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교의 멸시를 받는 가운데’ (옥외에서) 설교하였다. 도시에서나 시골 각처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는데, 그의 설교를 합법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때보다 오히려 그 숫자가 배나 증가했다.” ▲독일을 비롯한 기타 유럽 나라들에서도 종교개혁은, 옥외에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전한 설교들을 통해서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루터파 설교자들은 나라를 순회하면서 장터에서나 무덤 가에서는 물론, 산과 들에서도 무리들에게 새로운 도리를 선포하였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고슬라 Goslar 에서는 한 비텐베르크 의 신학생이 라임 나무가 심어진 들에서 설교했는데, 그의 청중들을 가리켜 ‘라임 나무 형제들 Lime Tree Brothren’ 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도비네 (D'Aubigne 프랑스 개신교 역사가)는, 개혁자들이, 아펜젤地名에서는, 교회당을 쓸 수 없어서 들판과 공공 광장에서 설교가 행해졌는데, 아주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과 들과 언덕들이 구원의 복된 소식으로 메아리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개혁자 파렐의 생애에서도 우리는 옥외 설교와 관련된 사건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로 그가 메츠에서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교회당 뜰에서 처음 설교했을 때, 그를 반대하던 자들이 교회의 종을 모조리 울려서 시끄럽게 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아서, 종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뇌샤텔 에서는 “온 마을이 그의 교회당이 되었다. 그는 장터에서, 거리에서, 문앞에서, 집들 앞에서, 광장에서 설교했는데, 그의 설교는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돌아오게 했다.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들었고, 위협으로도, 회유로도, 그들을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와일리 Wylie 박사의 <개신교의 역사>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첫 야외 설교가 1566년 6월 14일에 겐트 근방에서 행해졌다고 전한다. 설교자는 헤르만 모데트 였는데, 그는 과거 수도사였던 사람으로서, 당시 우데나드 (地名)의 개혁파 목회자가 된 사람이었다. 교황주의의 한 역사가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공중 앞에서 설교를 감행한 최초의 인물인데, 그가 처음 설교할 때 7천명이 모여서 들었다’고 한다... 두 번째 큰 야외 설교는 이듬해 7월 23일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겐트 근방의 큰 들판에 모였다. 그 당시에는 (기름부음이 있는) 말씀이 희귀했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기를 정말로 사모하여 이틀 동안이나 계속해서 땅 위에 서 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은 예배를 위하여 운집한 평화로운 무리라기보다는 캠프를 치는 군대의 모습과 비슷했다. 예배자들 주위로 마차들을 따라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입구마다 보초들이 지키고 있었다. 마차 위에 두터운 판자로 된 즉석 강단이 세워졌다. 모데트가 설교자였고, 그의 주위에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설교를 들었는데, 그들은 창과 손도끼와 각종 무기들을 옆에 놓고 있었다. 집회장 주변에서 망을 보고 있는 보초들이 신호만 하면, 즉시 무기들을 잡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입구 앞에는 좌판들이 마련되어 있어서,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거기서 금서禁書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시골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사람들이 지켜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권유하여 복음을 듣게 만드는 일을 하였다. .. 집회가 끝나면 그 무리들이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서 거기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캠프를 치고, 똑같은 기간 동안 머물렀고, 그리하여 서부 플랑드로 전역을 두루 다녔다. 이 집회들에는 언제나 클레몽 마로(人物) 와 테오도어 베자(人物)의 책에서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다윗의 시편”을 노래로 불렀다. 오천 명에서 만 명의 목소리로 히브리 왕의 찬송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나무와 들판을 지나, 먼 거리에서도 들려서, 밭 가는 사람들과 지나는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정리하면, 종교 개혁에 속한 위대한 설교자들이, 교회당과 집회소에서만 설교했더라면, 과연 종교개혁이 성공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곳 저곳을 다니는 순회전도자들과 서적 행상인들과 사람들이 사는 곳 가까이에 넓은 공간만 있으면 어디든 강단을 삼아 말씀을 전했던 그 담대한 사역자들이 없었더라면, 과연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복음을 접하고, 신앙의 도리를 배웠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의 옥외 노천 설교자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옥외 노천 설교자들은, 매 시대마다 있었고, 오늘은 당신의 차례입니다.
18세기 영국 영적대각성운동의 3흐름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2015-06-18 15:32:51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의 모자이크 아래 글은, 18세기 영국의 영적대각성 운동에 3흐름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①성령체험과 조직력을 강조하는 웨슬리식 부흥과, ②칼빈주의적 바른 신학의 대중화를 시도한 휫필드식 부흥과 ③영국 국교회 내의 사회참여를 강조한 복음주의자들, 대표적으로 윌리엄 윌버포스 의 부흥의
18세기 영국 영적대각성운동의 3흐름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2015-06-18 15:32:51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의 모자이크 아래 글은, 18세기 영국의 영적대각성 운동에 3흐름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①성령체험과 조직력을 강조하는 웨슬리식 부흥과, ②칼빈주의적 바른 신학의 대중화를 시도한 휫필드식 부흥과 ③영국 국교회 내의 사회참여를 강조한 복음주의자들, 대표적으로 윌리엄 윌버포스 의 부흥의 3부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연대적으로 보면, 웨슬리와 휫필드, 윌버포스는 동시대인입니다. 존 웨슬리 1703-1791 조지 휫필드 1714~1770 윌버포스 1759~1833 결국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다양하게 모자이크로 조합해서 쓰신다는 뜻입니다. 2세기 전에, 16세기 종교개혁 때에도 루터의 대중운동 식 개혁운동은... 웨슬리가 루터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고 칼빈은 바울,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했는데... 휫필드가 칼빈주의를 계승했습니다. 16세기 때도 가톨릭에 그대로 남아서 개혁운동을 펼친 사람들이 있었는데, 18세기 때도 영국 국교회에 그대로 남아서 개혁운동을 펼친 윌버포스가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칼라가 달랐고, 사복음서의 칼라도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을 불러서, 다양하게 쓰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체험이지만, <나는 모자이크의 일부분> 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적어도 과거 역사에 구교와 신교가 서로 싸운 것처럼, 알미니안과 칼빈주의자들이 서로 싸운 것처럼, 오늘날 그렇게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만 통해서, 우리 교회만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증거는 어느 시대에도 그런 경우는 없었다고 봅니다. 절대 오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경로로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 모자이크에 내가 감당해야 될 부분만 성실하게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자이크에 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보기 싫겠습니까! <편집자 ◑18세기 영국의 영적대각성 운동... ▶아래는 월간목회 06년 9월호, 피영민 목사님의 글 中 발췌 [출처보기] (매우 전문적이므로, 전공자들만 읽으세요) ▲1. 웨슬리와 감리교도의 부흥 존 웨슬리(1703~1791)의 부흥운동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생애에 나타난 부흥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①가정적인 영적분위기가 큰 영향을 끼쳤다. 영국 국교회 사제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 사이에서 태어난 19남매 중 15번째였으므로, 가정 자체가 큰 교회였고, 가정교육이 곧 신앙교육이었다. ②좋은 신앙서적의 영향이 컸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재학 중 기독교신비주의자들의 저서를 탐독했을 뿐만 아니라, 이신론에 반대하는 윌리암 로우(William Law)교수의 영향을 크게 받고 경건, 실천, 체험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러한 체험을 소유하지는 못하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③모라비안 신자들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도전이 큰 영향을 주었다. 웨슬리는 모라비안 신자들과 몇 번에 걸친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는 미국의 새 식민지 조오지아 주에 목회하러 갔다가 Spangenbery라는 모라비안 지도자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당혹하게 되었다. 선교의 실패를 체험하고 귀국하여 738년 런던 올더스게이트 가의 모라비안 교도 모임에 참석했다가 루터의「로마서강해서문」을 듣는 중 구원의 확신을 체험케 되고, 모라비안 지도자 피터 뵐러(Peter Bohler)와 교제하며 신본주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 후 1738년 여름 모라비안 파의 지도자 진젠돌프를 방문하였으나 교회운영 방식에 차이를 보임으로 웨슬리는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④기도 중에 임하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 체험은 웨슬리로 하여금 담대한 설교자로서 능력을 구비케 하였다. 이성으로만 말하는 이신론자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런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1738년 밤에 철야기도를 하던 웨슬리는 성령의 강한 임재를 체험하고 이후로 성령에 이끌린 설교자가 되었다. ⑤강력한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전도방법과 조직력을 창안했다는 점이다. 1739년 4월부터 조지 휫필드의 제안으로 옥외설교를 시작하여 52년간 4만 번에 해당하는 설교를 한 웨슬리는 -회원12명으로 구성된 속회 제도, -평신도 설교자 제도, -전국을 순회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관리사(Superintendent) 제도 등을 통해 결국은 국교회로부터 독립하며 사역자를 직접 안수할 수 있는 대교단으로 성장케 된 것이다. 웨슬리의 신학은 감리교 내에서도 휫필드와 갈등을 일으켰고, 그의 구원론이나 완전론은 신학적인 검토가 필요하나 그는 신학자라기보다는 목회자요, 부흥사였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2. 휫필드와 칼빈주의 (감리교도)의 부흥 칼빈주의 감리교도의 부흥은 웨슬리와 함께 옥스퍼드 대학의 신성클럽 소속이던 조지 휫필드가 주도하였다. 그는 웨슬리보다 조직력은 떨어졌으나 쉽고 대중적인 언어로 회중들에게 접근했으며, 칼빈주의 신학을 열정적으로 마음에 호소한 인물이었다. 휫필드는 영국뿐만이 아니라 미국 뉴잉글랜드와 남부 식민지를 두루 다니며 순회설교자로 사역함으로써 조나단 에드워드와 함께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의 공동주역이 되었다. 휫필드는 매튜헨리의 주석을 즐겨 읽었고 자기의 설교준비는 매튜헨리가 다 해 놓았다고 말했다. 그의 사후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들은 셋으로 분리되어 계속 발전하였다. 하나는 헌팅돈(Huntingdon) 백작부인이 주도하는 그룹, 둘째는 장막문도(Tafernacle Connection), 셋째는 웨일즈의 칼빈주의 감리교도(Welsh Calvinistic Methodists)들이다. 헌팅돈 백작부인인 셀리나 셜리(Selina Shirley)는 1739년부터 감리교 운동에 가담하여 휫필드와 관련을 맺고 칼빈주의 감리교 운동을 주도 하였다. 영국전역에 감리교 군목을 파송하고, 남웨일즈에 감리교 신학교를 운영하였다. 웨일즈의 칼빈주의 감리교도 강력한 부흥운동을 지향하는 칼빈주의 교회를 세워 현재도 1,500개 이상의 교회가 존속하고 있다. ▲3. 영국 국교회 內의 복음주의자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은 로마 가톨릭적인 요소를 회귀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옥스포드 운동’이라고 하면 ‘고(高)교회운동’으로서 구교적 요소를 회복하려는 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캠브리지 대학은 청교도의 산실로서 영국 국교회내의 ‘귀(歸)교회운동’ 즉 복음주의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칼빈주의를 취하면서, 청교도윤리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성령운동가라기 보다는 교육 운동, 선교 운동, 노예폐지 운동, 성경유포 운동을 핵심으로 하면서 하나님의 부흥을 체험하였다. 사이몬은 성삼위일체교회에서 50년간 사역하면서 ‘교회 선교사협회’(Church Missionary Society)와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를 강력하게 후원하였다. 특히 19세기 초 노예 폐지 운동을 했던 클라팜 당(Clapham Sect)은 선교에 앞장서는 헨리 벤(Henry Venn), 존 벤(John Venn)과 같은 인물을 배출했고, 노예폐지의 주도자였던 윌리암 윌버포스 같은 인물을 배출했다.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창시하여 가난한 근로자들의 자녀 교육을 강조했던 한나 모어(Hannah More)도 클라팜 당과 관련 있는 인물이다. ▲결론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①성령체험과 조직력을 강조하는 웨슬리식 부흥과, ②바른 신학의 대중화를 시도한 휫필드식 부흥과 ③교육, 선교, 사회정화를 강조한 복음주의자들의 부흥의 세 부류가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웨슬리식 성령체험과 조직력을 강조하여 부흥을 이루어 왔다. (성령운동이 너무 한쪽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므로 조지 휫필드 식의 바른 신학에 근거한 성령체험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웨슬리와 휫필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휫필드의 신학과 열정, 대중화한 복음에 웨슬리식의 참된 성령체험 성결을 지향하는 성령체험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또한 (영국국교회의 윌버포스 같은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한) 즉 선교교육, 사회교화, 성경교육 등이 우리 시대에 균형 있게 강조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후략)
18장. 진지함을 유지하기 1 /갈1:9/왕상18:24/출27:21/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8:13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목회자가 소중한 영혼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출하고,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다시 찾는, 즉 구령 사업의 목회적 성공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덕목은 무엇일까요? 만약 누가 제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저 스펄전은 주저 없이 “그것은 진지함 earnestness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18장. 진지함을 유지하기 1 /갈1:9/왕상18:24/출27:21/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8:13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목회자가 소중한 영혼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출하고,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다시 찾는, 즉 구령 사업의 목회적 성공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덕목은 무엇일까요? 만약 누가 제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저 스펄전은 주저 없이 “그것은 진지함 earnestness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질문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물어도, 제 대답은 똑같이 “그것은 영혼구원에 대한, 목회자의 진지함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오래 관찰해온 결과, 대체로 영혼구원에 성공하는 목회자는, 평소에, 영혼구원에 대단히 진지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의 성공은, 무슨 큰 직함을 가지거나, 큰 건축의 업적을 남기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가 널리 알려진 유명한 목회자이든지, 아니면 작은 교회의 무명의 목회자이든지 각 목사의 성공과 실패는, 그가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들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실하게 그들을 영혼구원의 자리로 이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큰 교회의 유명한 목회자이든지, 작은 교회의 무명의 목회자이든지, 성도들의 영혼구원, 불신자들의 영혼구원에 진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은, 고민이 없는 사람은, 고뇌의 기도와, 말씀의 연구가 없는 사람은, 죄송하지만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높은 명성을 얻고, 수많은 청중들을 이끄는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 영혼을 구원하는 면에는 매우 빈약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은, 위대한 재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큰 모습이다.” 라는 로버트 맥체인의 말을 좋아합니다. 그냥 자기 성품이,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진지함과 관심, 따뜻함과 온유함을 늘 가지셨던, 그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 경우들을 보면, 목회의 성공은 거의 전부, 영혼을 위하여 강렬하고도 불타는 열정, 그 하나님의 크신 뜻을 위한.. 목회자의 진지한 열심! 거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는 말씀처럼, 왕상18:24 영혼 구령에 대한 진지함이 있는 목회자는, 불의 혀를 지니게 됩니다. 그냥 크게 고함치는 목청이 아니라, 불같이 타오르는 열정을 뜻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큰 음성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영혼 구령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지닌 목회자는, 그 진지함이, 강단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 스펄전은, 우리 형제(신학생)들에게, “강단이야 말로 기독교계의 테르모필레이다”라는 말을 자주 해 왔습니다. *Thermopylae : 주전480년, 스파르타 군이 페르시아 군에게 패한 그리스의 산길 영적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바로 강단에서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영혼 구령에 대한 진지한 설교를 들은 신자들은, 모두가 강한 십자가의 군병으로 무장되는가 하면,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잡동사니 같은 설교를 들은 신자들은, 그저 오합지졸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쟁은, 강단에서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단에서 진지한 설교가 흘러나오려면, 평소에 목회자가 자기 일상의 삶에 있어서, 영혼 구령에 대한 진지함이 늘 배어있어야 합니다. 요즘 쓰는 말로, 도배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목회자도 사람인지라, 늘 깨어있을 수 만은 없습니다. 종종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고, 구령에 대한 진지함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는 것이고, 성경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마음과 정신이 일깨워지고, 영적인 파수꾼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구령의 열정에 대한 진지함을 잃어버렸다.. 고 할 때, 즉 설교하기도 싫어지고, 설교를 억지로라도 하기는 해야 되는데.. 뭘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이럴 때는, 자기 컨디션이 저하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기도와 말씀과 회개로, 자기의 진지함을, 다시 회복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지휘관의 주요 임무는, 자기의 부대를 이끄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휘관 자기와 같은, 그런 열정과 진지함을 가진 회중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작업은, 가장 먼저는, 강단의 설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그만큼 설교가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여러분, 동물농장에 가보면, 개들이 서로 으르릉거리며 살벌하게 싸웁니다. 왜냐하면 뼈다귀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회중이, 충족한 영적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면, 그로 인하여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불만족의 원인이 다른 표면적인 이유를 말하겠지만, 회중들 간에 소요와 분쟁의 그 밑바닥에는, 영적 양식의 결핍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관대하고 너그러워지는 법입니다. 청중들이 하나님의 집에 나아와 풍성한 양식을 취하면, 잔치의 즐거움 속에서, 수많은 삶의 번민들을 잊게 됩니다. 그러나 배고픈 상태로, 돌려보내게 되면, 자기 어미 곰이 자기 새끼를 빼앗긴 것처럼(성질이 극도로 포악해진다는 뜻) 아주 기분이 상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원만하게 유지되려면, 마치 심장의 피가, 온 몸의 세포와 기관들을 돌아다니며 양분을 공급하듯이 목회자의 설교가,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의 그의 메시지가, 진정 진지한 영혼구령의 메시지가 되려면, 그 설교의 깊이있는 내용, 지적인 통찰력.. 이런 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결정적 요소는 아닙니다. 결정적 요소란, <설교자의 심령과 태도>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메시지,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을 전했는데도, 거기에 설교자의 진지함이 묻어있고, 구령의 열정이 배어 나온다면, 성도들은, 거기서 영적인 양분을 섭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발하게 성경을 쪼개고, 아무도 듣지 못한 새로운 예화와, 삶을 통찰력을 말한다 해도, 설교자의 마음 바탕에, 진지함과 열정이 식어 있다면, 그야 말로 <정보 전달>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아예 ‘신자들이 다 구원받았다’고 가정하고, 이 현세적 삶에 적절하게 필요한 자기계발적 메시지를 전하는데.. 그런 한때 유행했던 분위기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목회자가, 축 늘어진 노인처럼, 맥 빠진 자세로 강단에 올라가서, 강단 의자에, 그 위의 방석에 쉬는 자세로 기대어 있다면.. 거기에다 하품까지 한다면, 그것처럼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이 없습니다. 엘리 제사장처럼 되는 것이지요. ▲강물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릅니다. 하류에서 상류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진지함에서 우러나오는 구령의 열정을 내지 않는다면, (자기 교회 부흥/성장의 열정이 아니라요) 즉 상류에서 물이 마르면, 하류에서도 물이 마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정 안 되면, 신자들, 회중들을 위해서라도 목회자는, 지휘관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통감하면서, 언제나 깨어있고, 영혼구령의 진지함을 늘 회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따르는 회중들이, 그런 열정과 진지함을 가지게 될 터이니까요. 만약 회중들이, 그런 진지함과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있다면, 다른데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강의 상류 근원이 말라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목회자의 설교를 듣는 회중들은, 일주일 내내 다른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정 내에 시험이 있는 사람도 있고, 직업적으로 감당해야할 무거운 개개인의 짐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교회에 나올 때는, 무기력한 상태로, 싸늘하게 식은 상태로, 산만하게 흐트러진 가운데 나옵니다. 그런 흐트러짐과 싸늘함과 무기력함을 모두 성령의 용광로에 집어넣어서, 다시 재련하여 뜨겁고, 거룩하고, 강렬한 도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강단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회중이 집으로 돌아갈 때는, 모두 새 그릇, 쌩쌩한 그릇, 뜨거운 그릇들이 되어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풀무불이 식어버린 대장간의 대장장이는, 할 일이 없습니다. 대장장이의 임무는, 풀무불이 식지 않도록, 늘 활활 타오르도록, 불을 지키는 일입니다. ▲바깥 세상의 모든 등불들이 꺼지더라도, 성전 안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밝게 타올라야 합니다. 그 등불은 결코 꺼지는 법이 없어야 합니다. 구약의 성막에도, 제단의 불, 또한 성소안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았습니다. 출27;21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사정이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교회로서, 불을 꺼트리지 말아야 하는데, 생활의 염려, 죄의 유혹을 받아서, 그만 불이 꺼져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올 때, 그들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상태로, 또는 물에 적셔진 장작이나 제물처럼 되어서.. 겨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는 말씀처럼, 왕상18:24 싸늘하게 식어버린 장작, 물에 적셔진 제물까지도 완전히 태울 수 있는 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성령의 불입니다. 목회자는, 마치 증기기관차처럼, 스팀 엔진(불 붙은)과 같은 열정과 파워로 자기 회중의 객차를 끌고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불 꺼진 목회자는 마치 달구지를 끌고 가는 것에 비교됩니다. 소, 말이 끄는 달구지가 과연 몇 명이나 태우고, 달구지를 끌겠습니까. ▲이렇게 설교자, 목회자에게 진지한 열정이 없으면, 교회 회중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상까지도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요.. 여러분, 교회가 전도하지 않으면요, 교회가 영혼구령 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결국 사회는 죄/범죄/사회악이 만연하게 되어서, 왜냐하면 죄인이 가득하니까요, 결국은 성도들까지, 그런 사회 현상의 고통을 입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는 이유 중에는, 세상이 전도를 받지 못해서, 신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근본 원인은, 교회가 세상을 전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자기 식구들을 전도하지 않고, 그런데 관심조차 아예 없는 사람은, 나중에 반드시, 그 불신 식구가 찌르는 화살에, 맞아서 자기가 부상을 당할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거나, 빛이 밝히는 사명을 감당치 못하고 꺼져있다면, 결국 그 소금은, 사람들 발에 밟히든지, 빛이 사라져서, 어두운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신도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악이 만연해지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해져가는 그 원인의 정점에, 가장 근원에 설교자의 설교가 열정을 잃어버리고, 영혼 구령에 대한 진지함을 잃어버린데, 그 근본적 이유가 있습니다... (계속) ....................... ▲목회자들 중에 저주받는 사람들이 많아요. 다른 복음을 전하다가..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갈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여러분들, 눈을 뜨고 주변을 보세요. 진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되요. '회개의 복음'을 전해야 되요.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음을 전해야 되요. 여러분 교회에 사람 많이 오게 하려면 그 사람들이 원하는 설교 하면 되요. 그 사람들 듣기에 기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옵니다. 아이고 목사님 이민 생활 힘든데 교회 와서도 회개하라고 하고 그러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근본적인 것을 해결하려는 생각이 없어요. 그저 그냥 듣고 재미있는 이야기. 예화들, 아주 재미있는 예화, 그런 것을 들으면 기분 좋잖아요. 마치 영화 한 편 보는 것처럼. 사람을 좋게 하면 그게 바로 <다른 복음>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너무 사람하고 가까우면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성도를 너무 잘 아니까, 설교를 대놓고 못해요. 상대방을 너무 잘 아니까 이 설교를 하면 그 분을 지목해서 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목사는 하나님하고 가까워야 되요. 할렐루야. 그래야지 정말 진짜 목사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단락 펀글)
19장. 진지함을 유지하기2 /욥39:14-17/민3:4/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6:24 read : 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목회자는, 강단에서의 구령에 대한 관심, 진지함이.. 진실해야 합니다. 꾸며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진지함을 일부러 꾸며내는 것을, 가끔씩 볼 수 있습니다. 음성을 변해서 흐느끼거나, 아니면 열정이 결여된 고함을 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
19장. 진지함을 유지하기2 /욥39:14-17/민3:4/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6:24 read : 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목회자는, 강단에서의 구령에 대한 관심, 진지함이.. 진실해야 합니다. 꾸며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진지함을 일부러 꾸며내는 것을, 가끔씩 볼 수 있습니다. 음성을 변해서 흐느끼거나, 아니면 열정이 결여된 고함을 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가짜로 꾸며낸 사실을, 즉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기 발을 구르고, 강단을 내리치고, 힘주어 소리치고 또는 일부러 감정적인 이야기를 시의적절 하게 연출합니다. 그러나 이런 꾸며냄과 연기로.. 영혼을 감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연기가 아무리 좋아도, 연기는 연기일 뿐입니다. 자기에게 열정이 식었다면, 차라리 식은 그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최소한 역겨움은 주지 않습니다. 뻔뻔스럽다는 비난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강단에서 연기를 일삼는 자들은,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그 훌륭한 연기로, 성령님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자가 되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진지해야 하고, 또한 평소에 자기 삶이 진지한 사람은, 강단에서 그것이 배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강단에서 불길 속에 치솟기 원하는 사람은, 평소의 삶에서, 불길 속에 휩싸여 살면 됩니다. 평소에는, 싸늘하거나 무디게 지내다가 갑자기 강단에만 올라가면, 음성이 뜨거워지는 사람은..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드리다가, 하나님께 진노를 받았는데, 민3:4 이런 ‘꾸며냄’이.. 오늘날의 ‘다른 불’인 것입니다. 즉 ‘성령의 불’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마음이 무뎌져 있으면, 그 무뎌짐을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지쳐 있으면, 말도 천천히 하고, 목소리도 힘없이 단조롭게 구사하십시오. 그게 좋은 모범은 아니지만, 차라리 ‘연기자/ 가면’보다는 낫습니다. ▶구령의 열정에 진지한 설교자는, 설교 후에도 계속 기도합니다. 성실한 농부는, 밭에 씨를 뿌려놓은 후에, 방치하지 않습니다. 계속 물을 주고, 계속 밭을 관리합니다. 그런 농부만, 영혼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이작 와츠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674~1748 ‘여러분이 강단에서 들인 수고가 과연 성공을 거두기 위하여 큰 갈망을 가지십시오. 뿌린 씨에, 계속해서 물을 주십시오. 공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은밀한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끈질기게 간구하십시오. 타조는, 모래 위에 알을 낳고서, 그것이 살든 죽든 그냥 내버려두는데, 욥39:14~17 그런 어리석은 타조를 닮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연구와 설교가, 영혼들에게 열매로 나타나도록, 끊임없이 수고하고, 살피고, 기도하십시오. 리처드 백스터(1615~1691) 목사의 책의 어디에선가 읽은 내용입니다. ‘아무리 명석하고 훌륭한 재능 있는 사람들도, 지극히 탁월한 설교가들도, 심지어 설교자 자신이 진정 신앙이 깊을 때라도, 구령 사역의 성공을 사모하며 열심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괄목할만한 목회의 성공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 영혼들이 구원받기도 하고, 또한 우리의 소홀함 때문에 영혼들이 지옥에서 정죄를 받게 된다는 이 끔찍스럽고도 중요한 생각이,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집의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다가오는 위험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소홀함 때문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멸망한 영혼들의 피 값이, 우리 파수꾼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겔3장)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있고, 싱싱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설교자의 상징으로 아주 적절합니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나를 떠올릴 때,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나요? 우리의 목회사역은, 구령의 열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기둥 구름기둥 같은 영적인 파워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이 시대에, 복음으로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습관이, 평소에 늘 열정적이어야 하며, 자기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관리해 나가야 합니다. 불이 식었으면, 자기 스스로를 빨리 다시 불붙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불을 식게 만드는 잡다한 대화, 자기 정신을 분산시키는 불필요한 일들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멀리 떨어져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한 번 거룩한 진지함을 얻었다가도 쉽게 식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혹자는 자기 책에서 이렇게 말했는데, 저는 참 명언이라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는 가난한 시골 목사의 생각은, 알렉산더 대제가 가졌던 생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고 그는 간파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가, 세계를 정복하는 일도 쉽지 않았고,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군대도 있었고, 참모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시골 목사는, 자기 혼자 동떨어져 있고, 주위에 거의 아무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자기가 스스로 마귀와 대적하며 싸우면서 자기 마음과 생각을 지켜 나간다는 것은.. 어쩌면 알렉산더의 세계정복보다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 저 스펄전은, 그 책에, 이런 말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목사가, 자기의 거룩한 싸움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알렉산더보다 더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그럼 외로운 시골 목사만, 영적 나태에 노출되어 있고, 도시 목사는 안전할까요? 아닙니다. 도시의 목회자들도, 형태는 다르지만, 똑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온갖 잡다한 일’의 위험입니다. 불타는 장작을 한데 모아놓지 않고, 이리 저리 흩어 놓으면, 금방 불이 꺼져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도시 목회자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이.. 그의 열정을 차츰 식게 만듭니다. 잡다한 일로 인하여, 열정이 분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면, 도시에는, 한가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목회자를 찾아옵니다. 그런 잦은 방문, 쉴 새 없는 만남이.. 목회자의 구령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기도 합니다. 모종의 조치를 취해서라도, 목회자는 자기가 방해 받지 않는 개인 경건의 시간, 묵상의 시간을 꼭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불을 당겨 와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열정을 계속 뜨겁게 유지하는 길 한 가지가 <연구>입니다. 연구를 소홀히 하는 목회자는.. 반드시 식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저서를 읽거나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연구’함으로써.. 목회자는 계속 뜨거운 열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도 그런 말이 있는데) 영국군대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영국 군대가 전투에 진지하게 임하느냐 하는 것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느냐에 달려 있다.’ 성도들은 마찬가지고, 목회자 자신부터가 ‘굶주린’ 상태에서는, 전투에 성실히 임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 자신부터가, 서재에서 복음의 양식을 잘 받아먹어야 합니다. 그 배부른 용사가, 전투에서도 왕성하게 활기 있게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할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부르지 못한 군대에게서, 최상의 전투력을 이끌어 낼 수는 없습니다. 군대의 용맹성과 용기는.. 충분한 양식을 공급받은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미 이루어졌고,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반드시 예정되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승리는, ‘배불리 먹은’ 건강한 군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른 뼈다귀 같은 군대로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절대 동참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경박스런 대화를 조심하십시다. 특별히 동료 목회자들 간의 잡담, 오랜 시간의 쓸데없는 한담(한가한 담화).. 이런 것을 통해서도, 목회자의 진지함이, 크게 손상 받을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보통 친한 친구 목회자를 만날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한 만남과 교제가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될 때 그 공허한 대화는, 오히려 목회자의 영성에 해를 입힙니다. 대화는 유쾌해야 하지만.. 경박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을 하든.. 그 대화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져야 합니다. 고전10:31 이것은 마치 노련한 항해와 같습니다. 한쪽은 ‘경박함’의 모래톱이요, 다른 한 쪽은 ‘우울함’의 암초입니다. 그 둘 사이 좁은 틈을, 사고내지 않고 노련하게 헤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목회자가, 자기 열정을 식게 만들 때가 있는데.. 아주 차가운 사람과 만날 때입니다. 자기가 크리스천이라 하면서도, 사실은 ‘젓은 담요’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설교 후에, 이 ‘젓은 담요’들이 몇 마디 싸늘한 논평을 날리면, 일부 목회자는, 그만 자기 열정이 확 식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경박함’과 ‘우울함/싸늘함’사이의 그 비좁은 해협을 잘 헤쳐 나가야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정직하고 진실하다 하더라도, 남에게 약간 남은 불씨마저 확 꺼트려버리는 ‘젖은 담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하찮은 것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하찮은 말 한 마디에, 상대방은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진 진지한 구령의 열정, 성령충만의 애절한 마음도, 큰 공격에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니라, (큰 공격에는 자기가 각성해서, 오히려 강하게 반응합니다) 하찮은 말 한 마디에.. 쓸데없는 말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 직원이 ‘젖은 담요’인 경우에는, 정말 목회자가 지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천사가, 빙산 속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메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오지요?) 소처럼 열심히 일하는 짐승과, 나귀처럼 게으르게 움직이는 짐승을 한 멍에에 메우면.. 쟁기질이 매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1장, 목회자의 자기 관리1 /딤전4:16/유1:12/벧후1:10/단12:3/ Charles Spurgeon 2015-06-21 09:32:34 read : 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설교자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또한 교리에도 주의를 기울여라” 딤전4:16 한글성경은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라. 또는 살피라.’로 나옵니다. 모든 노동자들은, 자기 농기구나 작업도
1장, 목회자의 자기 관리1 /딤전4:16/유1:12/벧후1:10/단12:3/ Charles Spurgeon 2015-06-21 09:32:34 read : 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 설교자는, 먼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또한 교리에도 주의를 기울여라” 딤전4:16 한글성경은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라. 또는 살피라.’로 나옵니다. 모든 노동자들은, 자기 농기구나 작업도구를 항상 최상의 상태로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도구의 날이 무디거나, 또는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 도구로 일을 할 때, 힘이 배로 더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이 무딘 도구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애를 써서 결국 일을 마쳐 놓았다 하더라도, 그 결과물이 또한 좋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화가 마이클 안젤로는, 작품 그림을 그릴 때, 붓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미술도구인 붓을, 자기가 직접 제작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자신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들은, 항상 상태가 좋도록, 다듬어 놓으십니다. 좋은 도구로 먼저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강권적으로 어떤 역사를 우리 인간의 상태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혼자서 다 이루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우리 가운데 드러나는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그들과 동역을 하시는데, 그때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는데, 가장 영적으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종(도구)들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하게, 또한 가장 빈번하게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우리 각자 자신도, 스스로 자신을 잘 다듬어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서 사는데요.. 그리고 만약 우리 각자의 상태가 좋지 않은데, 즉, 연장이 잘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설교를 한다든지, 다른 사역으로 쓰임을 받게 된다면, 그 결과는 당연히 좋지 않을 것입니다. 1% 예외적인 경우로, 사역자가 잘 다듬어 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주님은 그를 통해, 강권적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수도 있습니다만, 대개의 경우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귀한 사역의 열매들이 나타나려면, 먼저 ‘연장’이 잘 다듬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사도바울은,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 ‘네 자신을 돌아보라, 즉 네 연장부터 잘 갈고 닦아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사역자들은, 자신을 항상 ‘도구’로 여깁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자신을, 최선의 컨디션으로 유지할 줄 압니다. 만약 자기 영적 컨디션을, 아직도 조절할 줄 모르는 사역자가 있다면, ① 그는, 최고 수준의 사역자는, 아직은 아닌 것입니다. 세상 책을 읽든지, 다른 사람과 교제를 하든지, 자기 언어생활이나, 자기 경건생활이 자기 영적 컨디션을 해치지 않고, 도리어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그는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또한 설교자가 되려면, 지적인 훈련도 해야 합니다. ② 그런데 무조건 책만 많이 사 모으는 것, 서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책을 열심히 읽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훈련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자기 감정을 관리 하는 훈련도 스스로 해야 합니다. ③ 지적으로 날카로운 사람만 되어서는 안 되고, 마음도 뜨거워야 합니다. 세상에 구원 받지 못하고, 멸망당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울 수 있어야 하고, 비통한 마음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심령이, 항상 좋은 옥토처럼, 상태가 부드러워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웅변적인 목소리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살던 당시는 마이크가 아직 없었던 시대입니다.) 이게 다 자기 도구, 자기 그릇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개인적 관리에는 등한시하고, 조직적 관리에만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조직을 구성하고 또한 관리하며,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나타내며, 자기 시간을 거기에 대거 투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개인적 관리에 시간을 내지 않고, 공을 들이지 않고, 그저 책이나 사서 모으면서 서재나 꾸미고, 또한 여러 기관을 조직해서, 교회를 조직이나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데만 힘쓴다면, 그는 큰 도끼를 가지고 있으나, 날이 무뎌진 도끼인 셈입니다. 아무리 큰 도끼라도, 날이 무디면, 나무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지적인 관리, 감정적 관리도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영적인 관리입니다. 자기 영혼이, 은혜와 성령과 말씀과 권위로, 항상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날카로운 도끼로, 자기를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도구를 사용하셔서 세상에서 마귀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는 일을 오늘도 계속 해 나가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사역적 은사가, 남달리 많게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요인은 은사, 즉 자기가 가진 탤런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쓰시고, 안 쓰시고 하시는.. 결정적 요인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을 닮은 사람입니다. 성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무시무시한 병기’가 됩니다. 마귀의 나라가, 그 앞에서, 무수히 쓰러지고 패배해서, 뒤로 물러갈 것입니다. ◑2. 설교자가,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약초가, 약효를 잃어버린다면.. 그건 큰 재앙입니다. 약사나 치료사는, 또한 환자는, 그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약초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심한 경우, (과거에 영국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수원이 오염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마을 공동 우물물이나, 상수원에서 공급되는 물을 마셨는데, 그 물 자체가 오염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게 되는 경우입니다. 설교자가, 자기 자신의 상태를 최상으로, 또는 최적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그런 불행과, 불상사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복음을, 참 복음이라고 들은 회중들은, 나중에 그 영적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칼빈주의자들도 대단히 주의해야 합니다. ※참고로 침례교에 속한 스펄전도,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자였습니다. 예정론, 선택, 주권 등 (극단적) 칼빈주의적 설교와 가르침이, 만약에 성도들로 하여금 불경건한 삶을 살게 하는 근거가 된다면, 그건 ‘오염된 물’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극단으로, 자기 공로와 자기 선택으로 구원 받는다는 (극단적) 알미니안주의의 가르침도, ‘오염된 물’이 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설교자나 사역자들은, 자기 목회적 성공이, 주님의 은혜임을 망각하고, 자기가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큰 잘못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그의 큰 목회로) 많은 씨앗을 뿌려도, 실제로 거두는 것은, 아주 적을 것입니다. 여러분, 간혹 전쟁에서 화약이 승패를 가르는 것을 봅니다. 그 군대에 조달된 화약중에, 많은 분량이 불량품이어서, 군인들의 총탄이 제대로 발사되지 않고, 대포가 불발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불량 포탄을 갖고는,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역자들이, 자신의 장비(자기 자신)를, 최선의 상태로 유지 하지 않으면, 영적인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주위를 돌아보십시다. 많은 사역자들에 의해서, 많은 사역들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목표를 잃어버렸습니다. 대포를 쏘았는데, 포탄이 다른 데 가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전투는..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코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숫자에 연련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불량품, 불발탄으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좀 조심스런 말이지만, 목회자 자신이 먼저 구원 받아야 합니다. 회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회자의 자기 관리’는 먼저, 자신이 회개하고, 회심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물론 회개하고, 회심을 체험한 목회자라고..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가장 먼저 우선순위를 두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가 바로 <자기 자신의 영적상태 관리>라는 점입니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 받은> 사역자입니까? 그 증거는.. 그가 소명 받은 종이라면, <사역>에 그의 제1 우선순위를 두지 않습니다. 그의 제1 우선순위는, <자기의 영적 관리, 자기 성결>이 됩니다. 만약 여러분의 제1 우선순위가, 자기의 영적 관리, 자기 성결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받은 소명이.. 그게 무엇이든지.. 그건 올바른 소명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하나님의 소명과 부르심은, 그의 종들에게,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라’는 것이, 1차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친밀한 관계는.. ‘성결한 그릇’에게 이루어집니다. 물론 성결하게 살겠다는 자기 노력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기가 쓰실 종들을, 성결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다만 그 종들이, 그런 주님의 섭리에, 응답하고 부응해 가야 합니다. 그 섭리에 자기가 응답하지 않으면.. 도끼가 아무리 크고 웅장해도, 날이 무딘 도끼가 되는 셈입니다. ◑3. 사역자는.. 자신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십시오.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하는 것’은, 아이들 장난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로서, 목회자나 사역자들은, 자신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그저 아이들 장난처럼 은근슬쩍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분명히, 철저히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주검이 널린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역자에겐.. 독수리(마귀)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역자는, 그저 표면적인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우물물을 길어내듯이, 깊은 영적 진리들을 퍼 올릴 줄 압니다. 오늘날, 그저 표면적인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자기의 택하심과 부르심부터 굳게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한 후에, 자기가 버림 받을 수 있음’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늘 자신의 그릇을 최상의 상태로 준비하는 사람은,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꼭 그렇게 ‘버림받는 수준’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우리 각자는 ‘복음을 전하되, 아무 능력도 없는 복음을 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 혹시 내가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영적으로 소경은 아닌지.. -나는 복음을,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는 않는지.. -나는 복음의 밝은 면만 강조하지는 않는지.. 그는 밝은 면만 설교하면서도, 스스로는 지금 어두움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청중 앞에 노래를 열심히 부르면서도, 소리 못 내는 벙어리는 아닌지.. -나는 오케스트라 음악을 들으면서도, 귀가 먹지는 않았는지.. 이게 다, 부름 받지 못한 사역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세상에 가끔, 그 직업에 소명 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잘못 해서, 그 직종에 종사하는 일이 있습니다만, 세상 직업은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목회와 사역은.. 다른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회중에게.. 영원히 불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목회자가 되기에 적합한 육적인 은사를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났다 하더라도, 그런 은사나 재능이 중요하지 않고, 기독교 사역에는.. 부르심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종은, 그 증거는, 자기 자신을 먼저 갈고 닦습니다.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우선으로 합니다. ※이것은,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는, 죄를 안 짓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지 않은 종은, 자기 스스로 잘 압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즉 사역)이 자기 스스로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발에 맞지 않는 신을 신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그 맞지도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야 합니다. 마치 갤리선의 노예가 노를 쳐다보기도 싫어하듯이, 그는 스스로, 자기가 맞지도 않은 설교단에서, 속히 내려와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내려오지 않고, 자신의 직업을 계속 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가 보지도 않은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입니다. 혹은 암초가 어디 있는지도 전혀 모르면서도, 뱃길을 안내하는 항해사 navigator 입니다. 그는 가르치지만, 사실은 자기도 모르는 것들을 가르치는 셈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비 없는 구름’이라 표현합니다. 잠25:14, 유1:12.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라는 표현도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게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이, 물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저 멀리에 우물 같은 것이 보입니다. 대상들은,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그 우물로 가 봅니다. 그랬더니, 우물은 있는데... 그 속에 물이 없습니다. 말라버린 것입니다. 그건 얼마나 절망적이며, 얼마나 목숨이 위태로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현실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물인줄 알고 찾아가 봤더니, 거기에 생명수가 없어서, 목마른 영혼들이 고갈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수가 말라버린 사역자, 또는 교회는, 거기에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스스로 만족하기 보다는, 차라리 문을 닫아놓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수가 다시 나올 때까지... 그래야 목마른 심령들이 다른 곳을 찾아가서 그들의 영혼이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스펄전 시대에) 제가 보니까 구원 받지 못한 (강력한 회심을 체험하지 못한) 설교자가 있고, 거기에 헌금이 모이고, 비싼 오르간을 구입하고, 그래서 귀족층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드는.. 그런 교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제 스펄전의 생각인데, 사실 이것은 크나큰 재앙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데, 오페라 극장 가듯이.. 다니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에 가서, 그들의 음악, 그들의 세련된 모션, 그들의 웅변.. 그것들을 청중들이 오페라 공연을 즐기듯이 하면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그게 왜 재앙인가 하면.. 그게 눈과 귀에는 즐거울지 몰라도, 그게 천국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사실 오페라처럼, 잘 하지도 못합니다.) 평소에는 전혀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지 못하고, 전혀 경건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는, 무슨 경건한 신자인 척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게 다 회심을 체험하지 못한, 아직 중생하지 못한 신자들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강대상 앞에서 세련된 매너로 예배를 인도하더라도 그의 평소의 삶이, 경건하지 못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마귀의 종에 더 가깝습니다. 물론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나, 성도나 구분할 것없이,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벧후1:10 ▲이사야14:9~10에 ‘너도 우리와 같이 되었느냐?’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정복자 바벨론 왕에 의해, 죽은 영웅과 열왕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환영하며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도다’라며, 바벨론 왕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지하세계에서 바벨론 왕을 환영하는 축하 잔치를 준비하느라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바벨론 왕들이 죽였던 모든 왕들이 지하의 세계에 들어오는, 바벨론 왕을 환영하기 위하여 부산을 떨고 열국의 왕들이 그의 보좌에서 일어나서 합창을 부릅니다.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사14:10. 중생하지 못한 설교자는, 지하의 세계(지옥)에서, 그런 똑같은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설교하던 너도, 우리와 같이 되었느냐?” “의사야, 네 병은 고칠 수 없었더냐?” ※스펄전 목사님의 성경실력이 대단합니다. 이사야서를 꿰뚫고 있습니다/주. ▲저 스펄전은, 존 번연의 <지옥에서 들려오는 신음, Sighs from Hell> 이란 책을 읽고서, 종종 경각심을 되새깁니다. 제 두 귀를 울리는, 그 책의 내용을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어떤 설교는, 영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쥐약 rats-bane이 되는 설교도 있습니다. 나중에 여러분의 교회 식구들이, 지옥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것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우리 죄에 대해서 설교해 주기를.. 꺼려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그렇게 후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했습니다.” 이게 지옥에 간 신자들의 탄식인데.. 그걸 듣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장차 그걸 듣는 설교자가 만약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을 의의 길로 돌아서게 한 자는, 별과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단12:3)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자신이 먼저 ‘의의 길’로 반드시 돌아서야 합니다. 진짜 소명 받은 목회자, 진정 회심한 설교자는, 회중들에게 계속 지옥에 가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자신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둡니다. 만약 그런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설교자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테일러는 많은 사람들의 옷을 만들어주지만, 자기는 그 옷을 입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요리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지만, 자기는 그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교자는 다른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증거한 말씀으로, 자기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남들은 풍성하게 먹이고, 자기는 전혀 먹지 못해서 고갈되어 죽는..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먹지 못하면.. 남도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2%의 예외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요. ▲여러분, 그런 사람이 아마 없겠지만, ‘내가 목사가 되었으니, 나는 구원 받은 것이 틀림없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라’고 하신 권면은, 딤전4:16. 디모데가 이미 목회자인데, 그에게 주신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되었다고.. 안심하지 마시고 자기 자신을 먼저 주의 깊게 돌아볼 때, 결국 다른 사람도 잘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전제 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반대로 무시하고 경멸하는데,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했다가는.. 큰일 나지요. 지금 먼저 자기 자신을 잘 돌아보는 것이, 결국은 이웃을, 즉 목회를 잘 돌아보는 것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1장, 목회자의 자기 관리2 /딤후3:5/슥13:7/삿16:21/ Charles Spurgeon 2015-06-21 09:26:58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1. 목회자는, 선택된 자들 중에서 또 선택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일반 크리스천과 비슷한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비천하고, 세상에서 약한 자들을 택하여 쓰
1장, 목회자의 자기 관리2 /딤후3:5/슥13:7/삿16:21/ Charles Spurgeon 2015-06-21 09:26:58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1. 목회자는, 선택된 자들 중에서 또 선택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일반 크리스천과 비슷한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비천하고, 세상에서 약한 자들을 택하여 쓰시지만, 바울은 새로 입교한 자를, 지도자로 세우지 말라고 권면했듯이 세상에서 약하고 비천한 자들이 교회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들의 믿음과 신앙생활을 오래 지켜 본 후에, 신자들 중에서.. 가장 믿음생활이 뛰어난 신자,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믿음이 성숙한 자를.. 목회자로 추천하고, 세워야 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목회자는 그 중에서도, 또 한 번 더 ‘선택되고, 부르심을 받는’ 최고 수준의 신자만.. 목회자가 되는 길을 밟아야 합니다. (자기가 원한다고, 회중의 동의 없이, 아무나 목회자로 자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아닌, 일반신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일반적인 은총만 받으면 족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일반적 은총과 부르심에 더하여, 목회자로서의 특별한 은총과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저 일반적 은총과 부르심만 받고서는.. 목회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목회자는, 일반 신자들이 겪지 못하는 엄청난 목회적 스트레스와 위험을 겪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일반 은총, 일반적 부르심’만 갖고는, 그 스트레스와 위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만, 그 장애물들을 기꺼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부르심’은, 목회자에게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회자로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맥박부터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경건하게 살겠다는.. 그 맥박이 일반 신자들보다 더 강하게 뛰고, 또한 규칙적으로 일정하게 뜁니다. 뛰었다, 안 뛰었다 .. 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빛은, 남달리 반짝거리며 빛납니다. 그의 걸음걸이는, 단호하며 힘찹니다. 그가 일을 할 때는, 손놀림도 민첩합니다. 항상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내면과 속사람이, 보통 신자들보다는 고상한 인격이며, 항상 경건합니다. 자기 마음을 지킬 줄 압니다. 이것이 부름 받은 종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애굽의 제사장들을 뽑을 때, 아무나 뽑지 않는다고 합니다. 학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를 선발합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들을 가장 존경한다고 합니다. 나중에 왕을 뽑을 때도, 그 제사장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사장을.. 왕으로 뽑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목회자를 뽑을 때, 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우수한 믿음의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저 아무나, 자기가 원한다고.. 세워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은, 그 당시에는 뜨거우나, 얼마 지나면 또 식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만한 인물을, 비록 처음에는, 그가 낮고, 비천하고, 세상에서 뒤떨어지는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오랜 교회 생활을 통해, 철저히 그의 믿음생활과 그의 경건성이 검증된 그런 인물이, 목회자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 겁쟁이, 세속적인 사람, 균형 잡히지 못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그저 한 때 믿음이 좋다고.. 그를 목회자 후보자로 천거해서는 안 됩니다. (장애우를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종류의 직무는, 신체적 장애우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또한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 높은 빌딩 위에서 일하는 직업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보통 일반 직종을 찾아야지, 뭐 하러 높은 곳에서 일하는 직종을 가져서,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꼭 사람들 눈에 잘 띄는, 또는 높은 자리에서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심성, 그의 마음이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목회자로서 약간 성공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쉽게 타락해 버릴 수 있습니다. 자기 자리로 인해, 쉽게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나라가 위급하다 해도,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학도병에게, 무기를 줘서 전장에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치열한 영적인 전쟁에, 나이 어린 학생이, 그저 한 때 조금 열심을 낸다고, 경험도 없는 그에게, 영적 전쟁의 최 일선에.. 내보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 학생을 목회자의 길로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어린 신자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머물러, 목회를 잘 할 수도 있으며, 또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좀 헤매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를 받고서, 성숙해져서,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2. 경건의 능력은.. 목회자의 생명입니다.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높은 도덕적 성품이, 끈기 있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저 일반 성도나 되면 좋았을 (도덕적) 수준의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려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한 때 큰 죄악에 빠졌던 적이 있는 신자들에 대해서 저 스펄전은, 좀 엄격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물론,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들이 주의 종이 되는 데는, 좀 조심스런 마음이 있습니다. (반대가 아니라, 조심입니다.) 한 때 과거에, 큰 죄악에 빠졌던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데 있어서는 남들보다 ‘더 철저한 회개’의 증거가 있었던 사람만.. 목회자로 자원해야 합니다. 다윗이 암몬에 사신을 보냈는데, 암몬 족속은, 그들의 수염을 잘라버렸습니다. 수염은.. 당시 문화에, 존귀와 위엄을 상징했습니다. 수염을 잘랐다는 것은.. 아주 철저히 모욕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다윗은, 사신들의 수염이 다시 자랄 때까지, 여리고 성에 머물다가, 다윗 성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신들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놀림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큰 죄를 지어서, 수욕을 당한 사람에게, 적당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수염(명예)이 다시 자랄 때까지, 좀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수염이라는 것이, 아주 더디게 자랍니다. 그런데 ‘시저(로마 황제)의 아내는, 의심조차 받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예 의심이나 루머를 받지 않도록, 자기 몸과 마음을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세상에 타고난 완벽한 목회자는 있을 수 없으므로 목회자는 자기 최선을 다하면서도, 언제나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항상 주님의 지근거리에 거해야 합니다. 목회는, 자기 능력과 자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주님이 주시는 자질로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회자가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그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다 아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머리 깎인 삼손처럼 되고 맙니다. 기도를 인도해도, 설교 말씀을 전달해도.. 거기에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날이 무딘 도끼’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서재에서도, 열심히 연구하지 않습니다. 개인기도시간도.. 집중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합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도, 그런 이상한 느낌을 감지하고, 의아해 합니다. 차츰 성도들도, 의아해 합니다. 목회자 자신이, 자기 심령에 메마름을 느낍니다. 그러니 그를 통해서, 누가 은혜의 생수를 공급받을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는, 분위기를 쇄신해 보려고, 아무리 수사력과 웅변력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설교가 예배당 저 뒤쪽까지 미치지 못하고, 바로 강대상 앞에 떨어지고 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결국, 삼손처럼, 자기에게 능력이 고갈되었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평소에 항상 자기 도끼날을 다듬어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잘못해서, 자기 영적 권위와 능력이 소진되었을 때에는, 다른 업무, 만남, 오락, 관계를 대폭 축소하고, 오직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개선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최선을 다해 그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영적 침체가, 조기 진단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암처럼,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가 어렵지 않은데, 나중에 온 몸에 퍼진 후에 발견하면, 치료도 겉잡을 수 없이 어렵게 됩니다. 특히 목회자는 영적 침체의 프로세스로 들어갔는데, 목회는, 별 탈 없이 잘 굴러갈 때.. 더욱 그 진단과 조기발견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항상 자기 주위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기에게 정직한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어야 하고, 그는 그들의 말을, 경청해서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흰 머리카락은, 자기 눈에는 잘 띄지 않아도, 가까운 사람이 보면, 금방 보이거든요. 목회자의 영적 침체는, 자기 자신의 침체도 문제이지만, 그것이 온 회중의 영적 침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목회자의 영적 충만은, 그것이 온 회중의 영적 충만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개중에는, 성도가 스스로 영적으로 충만해서, 목회자가 영적 침체에 빠져있어도, 자기는 뜨거운 성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도는, 소수, 일부이고요, 대부분 신자들은, 목회자가 침체되면, 동반 침체합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갖고 다니는 시계가, 고장 나서 시간을 엉터리로 가리키면, 여러분과 주위의 몇 사람만 그 피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리니치 천문대의 표준시계가 고장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런던 시민의 절반이, 그 피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의 위치가, 그 교구 사람들에게는, 시계탑과 같습니다. 목회자의 영적 기준, 도덕적 기준, 신앙적 기준에 따라서.. 회중이 기준을 잡습니다. 마치 런던탑 시계를 보면서, 사람들이 자기 시계를 고치듯이 말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늘 자기 시계를 고치는 습관이 있었는데, 요즘은 전자시계라서 그런 풍습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작은 죄라도 짓기 전에, 항상 회중을 생각해야 합니다. 회중들이 ‘그래도 되나 보다..’ 하게 된다면, 그건 목회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본을 잘못 보인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기 자녀를 생각해서, 함부로 살 수 없듯이 목회자는, 자기 교구 식구들을 생각하면서, 절대로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그 지역교구의 ‘시계탑’이기 때문입니다. ◑3. 목회자가 받는 유혹 ▲그런데 그저 수동적으로 조심 조심해서 살다가는, 그만 유혹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적극적으로, 날마다 그의 경건과 신앙심이 뜨거워야 합니다. 그 뜨거운 곳에, 유혹의 날파리가 달라붙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는, 목회자만 무너뜨리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목회자에 대해서는, 배로 더 유혹의 화살을 날립니다. 혹자는, 목회자는 그래도 일반 신자들보다는 신앙심이 더 경건할 터이니, 그래서 유혹에 더 강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면도 절반 맞겠지만, 절반은 틀린 말입니다. 목회자를 무너뜨리면, 큰 패배를 안기는 것이기 때문에, 마귀는, 일반 신자들보다는, 더 강하고 끈질기고 교묘하게 목회자를 공략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일반적인 것 말고도, (일반적인 것들은, 여러분이 다 잘 알기 때문에, 길게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저는 지금, 목회자이기에, 특별히 더 받는 유혹이나 시험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그건 목회자가, 성경을 읽을 때, 또한 기도를 할 때,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지 않고, 항상 목회를 위해서, 회중을 위해서..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이, 진실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런 관점은 잃어버리고, 항상 성도를 가르치고 훈계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그야 말로 ‘목회병’입니다. - 이것이 마귀의 은밀한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설교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설교하는 것은, 훌륭한 설교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달리기 선수가 발이 질질 끌리는 가운을 입고 달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잘 달릴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옷자락에 자기 발이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목회자 여러분의 그 가운이, 여러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목회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가 목회자라는 자기 직임을, 벗어던지기 힘듭니다. 그런데 그게 마치 ‘가운’과 같이, 자기 몸을 칭칭 감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운'은, 목사직이 꼭 필요할 때만 입으십시오. ('가운'은 상징적인 의미임) 그리고 평소에는, 목회자이지만, 먼저 하나님 앞에서, 한 크리스천으로 서는 연습을 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리새인같은 종교지도자의 길로 빠지는, 유혹을 피하는 길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자신을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지리라.. 는 말씀이 있지요. 슥13:7. 그래서 바울은 “네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딤전4:16 여러분, 마귀가 그리스도를 가장 심하게 괴롭힌 것을 기억 하십시오. 십자가에 매달아버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가장 큰 악독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구원을 이루셨지만요. 마귀의 궤계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지도자에게, 가장 큰 유혹과, 가장 큰 악독을 가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군대로 치면, 장군이요, 사령관과 같기 때문입니다. 전쟁할 때, 상대편의 지휘관을 먼저 무너뜨리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 시험이 끝났다고, 방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살아서 존재하는 이상, 그 시험은.. 끈질기고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마치 시험(유혹)이 아닌 것처럼, 가장 미묘하게 접근할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실제적 억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조롱을 당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십시다. 당신이 똑똑하고 많이 아십니까? .. 마귀는 더 지식적입니다. 당신이 깨끗하고 의로우십니까? .. 마귀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 자기의 자랑과 교만을 내세우는 동안에, 그 틈을 타서, 우리의 발뒤꿈치를 물어뜯을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미끼를 던질 때는, 그 낚시줄도 보이지 않고, 그 낚시바늘도 보이지 않고, 오직 미끼만 보입니다. 그리고 그 미끼도, 항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 내게 가장 약한 부분을 마귀는 골라서 사용합니다. 맞춤형 미끼를 던집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그 의로 인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를 게으르게 만드는 것도.. 마귀의 시험을 수 있으며 목회자가 스캔들에 휘말리게 하는 것도.. 마귀의 시험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거짓 증언자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귀의 목적은, 그렇게 주의 종들을 무너뜨림으로써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데 있습니다. 그 무너뜨리는 일에, 배신자의 모욕과 거짓 증언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에 져서,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마십시오. 블레셋인들이, 머리 깎인 삼손을 잡아서, 맷돌을 돌리게 했듯이, 삿16:21 사탄이 여러분을 노략하지 않도록.. 사전에 미리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삼손을, 눈을 뽑아버렸습니다. 맷돌을 돌리게 한 것은, 두 가지 목적입니다. -삼손의 힘을 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조롱거리로 삼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사탄은 미끼를 던집니다. 거기에 걸려들면, 결국은 마귀가 주는 맷돌을 돌리게 됩니다. -목회자는 힘이 다 빠지게 됩니다. -또한 조롱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자신의 경건성godliness을 유지하고 가꾸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도끼날을 다듬는 일입니다. 기독교 사역은, 개인적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도 아니요, 무슨 물질 등 다른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요, 바로 자신의 경건성을 통에서 나오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도 파이프에서 물이 졸졸 나오면, 일이 잘 안되지요. 생수가 힘차게 뿜어져 나와야,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만 척 보면, 일이 될지 안 될지.. 다 아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만 척 보면.. 사역이 될지 안 될지.. 다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훼파하는 마귀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고, 슬픈 자를 위로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세워나가는 일은, 자기 심령이 연약한 자나, 비틀거리는 자.. 이런 지도자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명과 은혜를 공급 받는, 굳센 지도자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을 잘 다듬고, 자신의 도끼날을 잘 다듬는다고 해서,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그게 자기 능력으로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잘 준비해서,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목회,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만 잘 다듬어진 그 ‘도구’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지혜를, 능력을, 은혜를, 사랑을 공급해서.. 목회가 되게 하십니다.
1장, 목회자의 자기 관리3 /행7:22/사52:11/출28:33-34/ Charles Spurgeon 2015-06-21 09:22:03 read : 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도자는 말에도 능하지만, 행동에도 능해야 합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행7:22 And Moses was learned in all the wisdom of the Egyptians, and was mighty
1장, 목회자의 자기 관리3 /행7:22/사52:11/출28:33-34/ Charles Spurgeon 2015-06-21 09:22:03 read : 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도자는 말에도 능하지만, 행동에도 능해야 합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행7:22 And Moses was learned in all the wisdom of the Egyptians, and was mighty in words and in deeds. 모세는, 말로만 잘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 그의 행동, 삶을 통해서도.. 힘 있게 잘 가르쳤으므로 목회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통해서,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주제입니다. ▲1. 말은 잘 하는데, 삶이 엉망인 설교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를 두고서 ‘저가 설교단에서 제발 내려오지 말았으면..’ 하고 핀잔합니다. 내용인즉, ‘당신은 설교는 잘 하니까, 계속 설교만 잘 하세요. 괜히 당신의 삶을 보고서, 사람들이 시험에 들게 하지 말고요..’ 라는 뜻입니다. 그런 그가, 설교단에서 내려오면.. 사람들은 ‘이왕 내려왔으니, 다시 올라가지 말았으면..’하고 생각합니다.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와 자기 삶이 일치하지 않는 목회자를 보고서.. 사람들은 그렇게 냉소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누구도, 야누스와 같이 두 얼굴이 될 수 있으므로, 오직 주님이 우리를 그 위선에서 건져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바실은 ‘설교할 때는 천둥과 같고, 대화할 때는 번개와 같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나, 대화할 때나.. 똑같은 영적 권위로 행한 사람이요, 그야말로 모세처럼 말과 행사에 다 능한 지도자이었습니다. 잠언에는, ‘행동이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성숙한 행동이, 삶이, 우리의 유창한 설교를 갉아먹지 않도록.. 조심하십시다. 여러분,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며,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역은, 설교자의 말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으로 세워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사실 신자들은, 설교자의 말보다, 설교자의 삶과 인격을 보고서, 더 많은 것을 배웁니다. 설득됩니다. ▲2. 일부 사역자는, 자기 업무 시간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자기 업무 시간이 끝나면.. ‘나는 자유다’ 라고 생각하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단에서 내려오면 ‘모든 게 끝났다. 나는 이제부터 자유다’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런 사역자는 초보자이지, 전문가는 아닙니다. ‘말에만 능한 사람이지, 행사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인 셈입니다. 늘 도끼날을 다듬는 사역자는, 설교시간이 끝나고, 목회시간이 끝나도, 누가 지켜보나 안 보나, 자신이 설교한 대로, 강단 바깥에서도, 교회 바깥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자기 삶을 삽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의 설교를 듣고서는 ‘깨달음’만 받겠지만, 그의 경건한 삶을 보고서는, 설득(감동)을 당해서, 자기 삶이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정말 소명 받은 목회자’인가, 아닌가... 그걸 분변할 수 있는 ‘테스트’가 있습니다. -딱 정해진 업무 시간, 그 시간에만 목회자처럼 행동하고, 그 시간이 끝나면.. ‘나는 자유다.’ 하며 무한정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앞으로 성숙되어 달라질 수 있겠지만) 현재는 참 소명 받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참 소명 받은 목회자는, 업무시간 안에서도..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고, 업무 시간이 끝나서도.. 집에 돌아가서도, 휴가지에서도.. 목회자로서 삽니다. 그는 사람 앞에서 외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사명자’로 자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업무 시간이 딱 마치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사는 사람, 그는 가증한 사역자입니다. 태엽을 감아주면 움직이고, 태엽이 다 풀리면 정지해 버리는 그런 인형이 있지요? 옛날에 아이들이게 장난감으로 사 주었습니다. 마치 그것처럼, 자기 업무시간, 자기 사례 받는 동안만 딱 일하고, 그것이 다 떨어지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자기 ‘소명의식’을 재점검 해봐야 합니다. 소명 받은 사역자는, 그런 것에 관계없이, 자기 사명에 따라 일합니다. (물론 쉬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3. 우리 사역자들은, 모세처럼 말에도 능하지만, 행실(삶)에도 능한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a prophet mighty in word and in deed.” 행7:22. 우리가 본 받아야할 모델입니다. 물론 모세만 아니라, 우리 주님도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능하셨고, 또한 그렇게 살 것을 명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9 그리고 여러분 ‘사도행전’이라는 성경의 제목이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사도들의 설교는, 성령으로 충만했고, 정말 뛰어난 설교였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사도言전, 사도敎전’이라 부르지 않고 ‘사도行전’으로 부릅니다. 사도들이 ‘행한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들의 ‘설교나 가르침’ 보다요! 영어로는 “The Acts of the apostles.”입니다. sermons가 아니라, Acts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회의를 할 때, ‘결의 사항’을 기록해 둡니다.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자. 또는 하겠다..’ 하는 결의 사항을 기록해 둡니다만,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는 ‘그들의 행한 일’을 기록했습니다. 즉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도 ‘나의 행전, 우리 교회 행전’을 사도행전과 똑같이 쓰고 있습니다. 성경에, 생명책에, 또 다른 책에,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다 기록되어져 있고, 거기에 따라 심판을 받고, 거기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성경의 곳곳에 나옵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각자의 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가 아니라, 삶이 남습니다.) ▲4. 거룩함과 성별됨은, 사역자의 가장 아름다운 (면류관 같은) 장식품입니다. 그저 타고난 성품이 남들보다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런 수준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의해 적셔진 온화하고 거룩한 성품, 그가 바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향기로운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곳곳에, 사역자들이 성결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웃사는 함부로 하나님의 법궤에 손을 댔다가, 즉사했습니다. -벳세메스 사람들도, 함부로 법궤 안을 들여다보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삼상6:19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산으로는, 짐승도 가까이 오면 죽임을 당할 수 있으므로 함부로 가까이 오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사람들도,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고, 함부로 가까이 가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서 그렇지, 임재만 나타나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거룩하고 경건하게 됩니다. 스스로 임재에 함부로 가까이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는 제사장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에 선포하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말방울에도 성결이라 새겨질 것이고, 슥14:20 -제사장의 옷도 거룩, 제단의 모든 기구들도 다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하는데, -심지어 대제사장의 의복 위의 흉패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 넣었는데, 이렇게 모든 의복과 기구가 다 성결한데, 그 속에 있는 제사장만 성결하지 못하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선민과 사역자들은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 굽이 갈라진 짐승만 먹어야 했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라는 뜻입니다. 그런 구별된 사역자, 거룩한 목회자를 통해서만.. 영향력이 나타납니다. 반대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역자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 나타나는, 거룩과 성별에 대한 가르침을, 무시하고 간과하는 사역자는.. 결코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자신을 파견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도리어 부끄럽게 만들 뿐입니다. ▲5. 설교자의 삶은, 자석처럼 되어서, 사람들을 이끌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반대로, 설교자가 도리어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다가가는데, 방해물이 된다면.. 슬픈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마23:13 사람들이 꼭 설교만 듣고서..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의 성별된 삶을 보면서.. 죄인들이 회개의 삶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근엄하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거룩하면서도, 얼마든지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겠습니까. 여러분, 동방박사를 인도하였던 별이, 박사들보다 앞서 갔던 것을 유의하십시오. 누구든지 빛을 비추고, 앞길을 인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연히 그 길을 먼저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광야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불기둥도, 그저 빛만 비추지 않았습니다. 별이, 불기둥이.. 단순히 빛만 비춘다면,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그것들은 빛을 비추면서도, 반드시 백성들을 앞서 갔습니다. 출13:21 이와 같이, 설교를 통해, 영혼에 빛을 비추는 사람도, ‘반드시 백성들의 갈 길을, 앞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빛만 비추는 것은, 참된 별, 참된 불기둥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되, 팔은 에서의 팔이로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소리는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팔은 털복숭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에도, 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의 직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레21:17~20 그래서 목회자들은, 항상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사람인이상, 완벽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의복을 보면, 그 겉옷 끝자락에 방울도 달고, 석류도 달았습니다. (출28:33~34↓)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한 금 방울, 한 석류, 한 금 방울, 한 석류가 있게 하라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러 성소에 들어갈 때와 성소에서 나갈 때에 그 소리가 들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저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방울’은.. 건전한 교리, 설교를 뜻합니다. ‘석류’는.. 그에 따르는 열매를 뜻합니다. 우리는 ‘방울’만 달고, ‘석류’는 달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너희는 떠날찌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사52:11. 제사장의 죄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삼상2:17. 아무리 건전한 교리를 수호한다 자처하더라도, 그들의 삶을 통해서, 자기들의 교리를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자기는 진탕 먹고 마시면서.. 사람들에게 금식하라고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도가.. 탐심을 가진 자를, 고소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항상, 자기 말과, 자기 마음과, 자기 행실이 그 세 가지가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6. 설교자는, 사소한 것까지 챙겨서, 자기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정직과 작은 약속은 물론이요, 특별히 사역에 있어서, 설교한 대로 살아야 하고, 자기 입으로 말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합니다. 물론 신경과민으로 살라는 뜻은 아니고요, 설교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신자가 실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소천하셔서, 천국에 계시는데, 과거에 런던에 유명한 목회자요, 신학박사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은, 하루는 주일 설교 시간에, ‘자기가 일 년에 한번은, 성도의 모든 가정을 다 심방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확인하기 쉽도록, 예배당 좌석도 가족별로 지정해서 앉게 했습니다. 그러자 한 가난한 성도는,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 존귀하고 유명한 목회자를, 자기 집에 모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모셔야지요.. 어쨌거나) 그래서 교회 의자를 쳐다보니, 이제 약 1~2주간쯤 지나면, 자기 집의 심방 차례가 될 것으로 계산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아내는, 집을 늘 청소하고 정리하며, 심방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늘 서둘러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오늘에나 오실까, 내일이나 오실까.. 간절히 신학박사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매일같이 간절히 기다렸는데도.. 분명히 자기 집 차례가 되었는데도.. 박사님은 심방을 오시지 않았습니다. 아마 박사님은, 약속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피곤해서 못 오는지.. 어쨌든 자기가 설교시간에 선포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 신자는, 그 실망을 계기로, 모든 목회자들을 싸잡아 다 실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부자들만 신경 써. 우리 같은 빈자들은 안중에도 없어” 라는 말을 퍼트렸습니다. 그리고 그 신자는, 몇 년 동안 실족해서, 교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습니다. 나중에 결국, 신앙을 되찾는 데는, 몇 년이나 걸렸습니다. 물론 목회자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자기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저 목회자는 정직해, 그의 말은 믿을 수 있어’ 라는 신용을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 목회자는 부자나 빈자나,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해!’ 라는 인정을 받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서, 믿음에 실족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건 목회자의 잘못입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자기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항상 자기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려고요! 사소한 것에까지.. 말입니다. ▲7. 목회자는.. ‘천 개의 독수리 눈’의 감시 아래서 사는 사람입니다. 안 보는 척 하면서도.. 다 쳐다보고,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항상 지켜봄을 당하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공개적 장소에서, 대놓고 잘못을 저지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들만 쳐다봅니까? 하늘에서 앞서간 성도들이 쳐다보고 있고, 천사들이 쳐다보고 있고, 아마 지옥에 간 사람들도, 쳐다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다’ 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놓고 잘못을 저지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스트레스가 아니라, 도리어 전도와 간증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 거룩하게 살면, 그를 쳐다보고 있는 ‘천 개의 독수리 눈’들이, 감화를 받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 전도의 기회를, 놓쳐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앞서간 성도님들이 우리를 염려하지 않도록, ‘그분들이 나를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실제로 항상 하면서 사십시다. ▲8. ‘큰 것은 조심하지만, 작은 것은 괜찮겠지..’ 하지 마십시오. 작은 것도, 목회와 사역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영혼들을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작은 돈이라도, 반드시 정확하게 갚으십시오. -시간은 반드시 지키십시오. -험담, 가십은 피하십시오. -놀리기, 작은 말다툼,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비싼 향수에 파리 한 마리만 빠져도, 사람들은 그것을 버리고, 쓰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쾌락적인 삶에 빠져드는 것, self-indulgences 그것은 많은 지도자들의 명성을 먹칠시켰는데, 당신은 그것을 용납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살만한 일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너무 거칠게 말과 행동을 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경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소한 것을 방치했기 때문에, 거기에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나 크다는 것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목회에, 복음전파에 걸림과 방해가 되는 일은, 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하지 않겠다’ 라는 원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9. 이런 사소한 것에까지 신경을 써서 챙긴다면, 도덕성, 정직성 등, 큰 항목들은 당연히 더 큰 신경을 써서 챙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서 말씀드렸듯이, 목회자는, 휴식시간에도, 영적지도자답게 쉴 줄 압니다. 이걸 억지로 그렇게 율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진짜 소명 받은 종은, 스스로 그렇게 살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스스로 자기를 그렇게 만듭니다. 억압이나 강제가 아니라, 자발입니다. 이런 사역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습니다. 자기 사생활과 자기 사역은.. 서로 화음을 이룹니다. 서로 불협화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자기 사생활과 자기 사역이 서로 불일치하고, 불협화음을 이룰 때, 그의 목회는 길지 못하고, 곧 중단될 것입니다. 그리고 차라리 빨리 퇴직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런 사람이, 계속 사역하는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께 불명예를 안겨드리는 것이 되며, 자기 자신에게도 스스로 파멸을 더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장. 진지함을 유지하기3 /약5:7/사56:10/히13:8/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4:19 read : 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랫동안 계속해서 수고했으나, 눈에 보이는 성공이 없을 경우에, 목회적 열정이 식어지기가 쉽습니다. 올바른 시각에서 보면, 그때야말로 7배나 더 부지런히 수고해야 할 때인데도 말입니다. 토머스 풀러는 “하나님께서 열심히 수고하는 많은 목회자들을, 모래와 돌이 가득한 아라비아 사막에, 비
20장. 진지함을 유지하기3 /약5:7/사56:10/히13:8/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4:19 read : 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랫동안 계속해서 수고했으나, 눈에 보이는 성공이 없을 경우에, 목회적 열정이 식어지기가 쉽습니다. 올바른 시각에서 보면, 그때야말로 7배나 더 부지런히 수고해야 할 때인데도 말입니다. 토머스 풀러는 “하나님께서 열심히 수고하는 많은 목회자들을, 모래와 돌이 가득한 아라비아 사막에, 비를 내리기위한 구름으로 만드심으로써 그들을 낮추셨다”고 간파했습니다. 목회적 토양이라는 것은, 대체로 보면, 비옥하고 기름진 형편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대단히 척박하며, 농사짓기 어려운 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축 쳐지게 되는 데요.. 성공이 없는 것 때문에, 우리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된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에 빠져버리거나, 특히 성공을 거둔 형제들에 대해 시기심을 품게 된다면, 우리 자신을 심각한 걱정으로 바라보아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사역에 임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사역이 외적으로 꼭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도록 성공하지 못하면, 마음이 무거워 사역을 계속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자기의 진지함을 배가시킨다면 언젠가는 더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의 기나긴 기다림이, 풍성하게 갚아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분명히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기다리나니” 약5:7 우리는 열심에서 나오는 거룩한 인내로써 계속해서 기다려야 하고, 또한 시온이 은혜를 입을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란 본래 연약한 존재요, 본성적으로 침체 상태로 기우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이끄사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계속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셔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활시위를 당긴 힘에 의해서만 (타력에 의해서만) 계속해서 목표물을 향해서 날아가는, 화살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스스로 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 (자력으로 나는) 새들과 같은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의 바람의 힘에 의해서 계속해서 전진해 나아가는 바다의 배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바람의 힘이 없다면, 앞을 향하여 항해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설교자들은 한 번 태엽을 감아 놓으면 정해진 곡조를 계속 울리는 노래 상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숨을 불어넣어야만 소리를 내고, 숨을 불어넣지 않으면 전혀 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팔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전혀 짖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는 ‘벙어리 개’에 대한 일야기를 읽습니다만 이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사56:10 하나님의 은혜가, 미리 예방시켜 주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벙어리 개’들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관심한 심령이 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곧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뜻뜨미지근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영혼구령 사역에) 진지해야 하고, 가짜 진지함을 보여서도 안 되고, 또한 진지함을 잃어버리기가 매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제는 우리의 모든 열정을 지속시키고 또한 그것을 배가시키는 방법과 수단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꺼지지 않는 불꽃에서, 진지함의 불을 지펴야만, 목회적 열정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란, 오직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꽃입니다. 그 불꽃은 물을 아무리 퍼부어도, 절대로 꺼지지 않습니다. 하늘의 태양에서 지펴진 불꽃은, 그 근원이 되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영구하게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불을 가진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무리 괴로움을 당해도, 아무리 실망스런 일들을 당해도, 언제나 충만한 열정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위한 열정이 지속되려면, 처음부터 하늘의 생명의 열정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과연 이 불꽃이 있습니까? 우리의 심령 속에서 진리가 불타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입술에서도 불타오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은혜의 진리들이 우리의 일부분이 되어 있어야 하고, 우리 존재의 근본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래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만이, 그렇게 만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영혼들을 향한 사랑을 주셨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히 그저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생명의 원리가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과연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여 계십니까? 아니면 지금 우리에게 있는 열정이, 그저 인간적인 느낌에 불과합니까?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심각하게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목회 소명에서 나오는 그런 거룩한 불길이, 우리 속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런 거룩한 불길이 없다면, 대체 우리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설교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설교하지 않고 살도록 하십시오. 영혼을 구원하는 자가 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사역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까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멸망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측은히 여기게 되도록, 자기 마음 밭에서, 자갈과 돌을 제거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영혼 구원의 복된 일에 성공을 거두어야 할 그 자리를 차지하고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여, 실패를 자초하고 말 것입니다. ▲진지함의 불길이 믿음의 화로에서 타올라야 합니다. 여러분, 불이 올바른 곳에서 나와서 올바른 곳으로 전해진다면, 시작을 잘 하고 있는 것이며, 영광스럽게 종결지을 수 있는 기본 요소를 갖추었다 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숯에서 지펴져서, 날개 치는 스랍들에 의해서 제단에서부터 우리의 입술로 옮겨갈 때, 그 불은, 우리의 가장 은밀한 영혼의 양식이 되며, 사탄이 아무리 그 불을 끄트리려고 애를 쓴다 할지라도, 거기서 계속 타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불길이라도, 계속 새롭게 연료를 주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들 같은 불멸의 영들은 그들을 위해 하늘에 예배된 더 고귀한 만나 같은 것을, 날개를 접고 먹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들은 어떤 공급이 필요 없을 수 있습니다만) 하지만 창조된 존재는, 그 어떠한 사람도, 불멸하는 것까지도, 그 힘의 유지를 위해서 무언가를 받아야 할, 먹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정의 불길이 자기 마음속에서 항상 새롭게 타오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연료를 계속해서 공급받아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소 안에 있는 등대조차도, 지성소 바로 가까이 있던 등대도, 날마다 기름의 공급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 불길에 연료를 자주 공급하십시오. 거룩한 생각과 묵상으로, 특히 여러분의 사역과 그 사역을 감당하는 여러분의 동기와 계획, 그리고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그 도움들을, 또한 주께서 함께 하실 때에 이루어질, 그 위대한 결과들에 대한.. 거룩한 생각과 묵상을.. 연료로 공급하시기 바랍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대해서.. 많이 묵상하십시오. 사람이 구원 받기 전에, 그 마음에 어떤 역사(회개?)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보내심을 받은 것은, 무덤을 하얗게 치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무덤을 열기 위함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심령의 안타까운 탄식과 눈물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고 그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탄식이 있더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잃어버린 죄인의 운명에 대해서, 깊이 엄숙하게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아침 일찍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장소로 올라갈 때에, 소돔을 향하여 눈을 들고, 마치 풀무불의 연기처럼, 거기서 올라오는 연기를 바라보십시오. 장차 임할 형벌을 끔찍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그런 생각들을 모두 버리시고, 그리하여 꺼지지 않는 불길에서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일깨우십시오. 만일 사람이 원숭이보다 약간 고상할 뿐, 그것과 같은 종류라서 짐승들과 똑같이 그저 사라질 뿐이라면, 그들이 용서받지 못하고 죽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고, 영원불멸의 미래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불신앙이 그들에게 끝없는 화를 자초하고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고민거리가 안 되며, 또한 그것에 대해, 여러분이 무관심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사역자로서 심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삯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로 불꽃을 계속 유지하십시오. 그 옛날 요한과 마리아처럼, 예수님과 함께 산 사람은, 절대로 마음이 차가워지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불타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과 교제를 긴밀히 유지하는 설교자 치고, 마음이 냉랭한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심히, 우리 주님을 삼켰습니다. 요2:17 (예수님이, 그 열심이 자신을 삼킬 듯이 불 타 올라서, 성전을 정결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과 접촉을 가지면, 그런 똑같은 열심이 우리도 삼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진정으로 그것들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열정적으로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25년 동안 똑같은 주제를, 똑같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강단에서 전하는, 똑같은 일을 계속해 온 사람들은, 단조롭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곧 지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25년 동안 똑같은 주제를, 똑같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강단에서 전하는, 똑같은 일을 지치지 않고 계속 한다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구주께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똑같은 은혜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5년 전이 아니라, 50년 전과도 똑같은 열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13:8 목회의 지루함, 타성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타성에 빠지기 쉽지만요) ▲그 분의 임재 속에서, 우리는 새 포도주를 마시며, 새 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영적인) 젊음을 새롭게 합니다. 그분은 시원하고 신선한 생명수가 영원토록 흘러내리는 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지고 끊임없이 힘을 얻습니다. 그분의 미소 아래 있으면, 오랜 습관처럼 되어 버린 우리의 사역이, 언제나 즐거움이 되며, 그 어떤 진기한 것도 가질 수 없는 찬란한 매력을 풍기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교인들을 위하여 새로운 만나를 거두며, 또한 그것을 나누어 주러 나가면서, 신선한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40:31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그분의 임재로부터 새롭게 (들어갔다) 나아올 때, 우리는 오직 그 분만이 주시는 능력으로 교회들을 항하여 글을 쓰고, 말씀을 전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된 여러분, 여러분의 대장 되신 주님과 교제 속에 거하여야 하고, 또한 여호수아가 요단강 가에 서서 “내 주께서 그의 종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고?” 라고 물었던 것처럼,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그분에게 합당한 존재들이 될 수 있습니다. (계속)
21세기 교회의 전망 /하워드 스나이더 박사 2015-06-26 15:20:12 read : 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현대 세계의 성격이 무엇인가? 미래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세계의 동향, 즉 사회가 움직여나가는 어떤 길을 찾아내어 소개하는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급변하는 세계의 동향들은 교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어떠한 세력들이 교회를 주도해나갈 것
21세기 교회의 전망 /하워드 스나이더 박사 2015-06-26 15:20:12 read : 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현대 세계의 성격이 무엇인가? 미래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세계의 동향, 즉 사회가 움직여나가는 어떤 길을 찾아내어 소개하는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급변하는 세계의 동향들은 교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어떠한 세력들이 교회를 주도해나갈 것인가? 그리고 교회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저자는 세계적 지식인 50명의 견해와 개별 응답자들, 그리고 연구 조사와 인터뷰를 통하여 이에 대해 답하고 있다. 현대의 가장 중요한 동향은 교회의 세계화와 교회 중심의 이동이라는 대전제 아래 저자는 다음과 같은 10가지 영역에서 세계의 동향을 소개하고 있다. ①지역 교회에서 → 세계교회로의 변화이다. 20세기에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종교가 되었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제3세계에서 기독교는 큰 성장을 보이고 있다. 세계선교는 더 이상 북미중심이 아니며, 오히려 북미인들이 선교대상으로 여겨왔던 (한국 같은) 지역들에서 활발하게 세계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회의 무게중심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 제3세계로 이동하고 있다. ② (일부 교파적인) 부분적인 성장에서 →(전 교파의) 전반적인 부흥으로의 변화이다. 20세기의 마지막 20년은 우리 사회에서 뜻 깊은 신앙부흥의 시기이며, 이 흐름은 21세기에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특히 오순절 교회의 성장과, 전례적인 예배를 따르는 복음주의자들의 부흥, 주류교파와 가톨릭의 부흥을 저자는 주목하고 있다.(모든 교파의 전반적 부흥)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전 세계적인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저자는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③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 기독교 국가로의 변화이다. 저자는 금세기의 중국 교회에서 감지되고 있는 부흥의 열기를 소개하며, 21세기에는 중국 기독교가 세계 교회에 생동감 넘치는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즉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교회의 성장률을 결정할 것이며, 중국 교회는 중국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할 것이다. 또한 중국 교회는 세계 교회의 새로운 활력과 리더쉽, 그리고 조직 구조의 출원지가 될 것이며, 중국 교회는 세계 교회의 신학과 자기 이해에 주된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④ 제도적 전통으로부터 →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의 변화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신학 혹은 하나님의 다스림 신학이다. 이 신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사용하시든/거스르는 행위를 무시하시든 세계 역사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가 이루어진다는 인식을 다시금 확언한다. 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에서 → 사역자의 공동체로의 변화이다. 저자는 복수리더쉽과 준비시키기식 모델이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교 교과과정의 주요 개혁에 관한 지적은 특히 주목할 부분이다. ⑥남성 지도자 제도에서 → 남녀 동반자 제도로의 변화이다. 1970년에 미국 목회자 중 단 2%가 여성이었으나, 1984년에는 7%가 되었다. 미국의 평신도들은, 일반적으로 여성 목회자가 남성 목회자보다 열매를 더 많이 거둔다고 평가했다. 여성 사역자의 증가와 괄목할만한 사역의 열매는 전세계적으로 감지되고 있으며, 새로운 세기에는 여성들의 장점이 더욱더 절실히 필요하게 될 것이다. ⑦ 세속화로부터 → 종교적 상대주의로의 변화이다. 물질주의와 번영의 세대와 맞물려 교회도 세속화되고 있고, 이러한 세속화는 종교적 상대주의(절대적인 것은 없다?)로 발전한다. ⑧ 핵가족에서 → 가족의 다양화로의 변화이다. 가정의 몰락은 북아메리카와 서구 유럽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 구조의 몰락과 일반 사회의 와해에 직면하고 있다. ⑨ 정교 분리로부터 →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행동주의로의 변화이다.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우익의 태도가 보여주듯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사회에 정의나 공의를 이루려는 활동에 역점을 두는 사회적 행동주의를 향한 동향이 펼쳐지고 있다. ⑩위태로운 국가들에서 → 위태로운 지구로의 변화이다. 빈부간의 격차 심화, 위태로운 환경, 핵공포 등으로 세계는 위기에 처해있다. 과거에는 몇몇 국가들이 위태로웠으나, 이제는 지구적으로 위태롭다. 이제 구속의 손길이 창조 세계의 오지로 미치는 일까지를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계만방에 복음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보여줄 시기가 왔다. 이상과 같이 저자는 세계의 동향에 대해 10가지로 정리해주고 있다. 나는 저자의 치밀한 연구와 통계, 자료 사용의 광대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책은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며, 이정표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세계화란 말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보편화되었지만, 유독 교회만이 이러한 흐름에 둔감한 것을 자각하며, 나는 21세기의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국제 감각을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워드 스나이더 교수의 교회관 *출처: http://news.godpia.com/sub_con.asp?page=7&db_idx=11138&division=A001 ‘성장침체’라는 깊은 병에 걸려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성장의 성경적 의미’를 되새기고, ‘진정한 성장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를 되묻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독교 미래학자이자 신학자인 하워드 스나이더 박사다. 그는 06.10.23. 양재횃불회관에서 개최된 ‘미래 대안 교회가 온다’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유기체적 교회론’ 등에 대해 강의했다. ◑반쪽짜리 ‘전통적 교회론’에서 성경적인 ‘종합적 교회론’으로 ▲교회의 4가지 고전적 특성 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교회는 ①하나이고, ②거룩하며, ③보편적이고, ④사도적이라고 공표했다. 이후 교회의 특성에 대한 수많은 의견이 있었고,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통일성 △거룩함 △보편성 △사도성 이상 네 가지 특성에 대한 의견은 논의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를 ‘교회의 4가지 고전적 특성’이라고 한다. 다만 사도신경을 통해 ‘성도의 교통’이 5번째 고전적 특성으로 추가됐을 뿐이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이러한 4가지 고전적 특성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의 특성을 절반 밖에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스나이더 교수의 지적이다. ▲하워드 스나이더 교수의 종합적 교회론 이에 그는, 이러한 이해는 ‘반쪽짜리 이해’라며 전통적 교회론에 대한 성경적ㆍ선교학적 관점에서의 재고가 있어야 한다면서 통합적으로 이해된 ‘성경적인 종합적 교회관’을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하나(one)이면서도 다양한(diverse), △거룩(holy)하면서도 은사적인(charismatic), △보편적(universal/catholic 세계교회는 하나)이면서도 지역적인(local 개교회적), △사도적(apostolic)이면서도 선지자적인(prophetic)인 교회 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적’이란 제도권에서 엄격히 허락/안수 받은 데만 정식 교회/성직자라는 개념이고 ‘선지자적’이란 스스로 특별한 은혜가 임한 사람도 누구나 자유롭게 공동체를 형성하고 성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며, 이런 파라처치들과 교제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 또한 평신도들도 얼마든지 성직자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함. 이런 뜻도 포함함. 이것은 사도적 교회에 대한 보완적인 운동임. 사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대부분 교단들은 처음에 법적으로 사도적 교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적인 정통성을 주장하며 정체성을 고수한 것이... 오늘날 사도적 교회로 인정받고 있다. 전통적 교회의 특성 4가지와 결합된 다른 한 쌍의 4가지 특성은 ‘대조적인 그러나 상호 배타적이지 않은 것들’로서 ‘이렇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때 온전한 교회론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1장. 진지함을 유지하기4 /겔3:18/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2:20 read : 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불길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은 물론, 바람을 불어넣으세요. *직전 회에서 ‘연료’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 또는 말씀과의 깊은 만남을 의미했습니다. ▲많은 기도와 간구로, 불길에 바람을 불어넣으십시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목사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리
21장. 진지함을 유지하기4 /겔3:18/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2:20 read : 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불길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은 물론, 바람을 불어넣으세요. *직전 회에서 ‘연료’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 또는 말씀과의 깊은 만남을 의미했습니다. ▲많은 기도와 간구로, 불길에 바람을 불어넣으십시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목사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리 격한 언어를 사용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형제들과 우리들에게는 기도해야 할 절대적인 ‘필연성’이 있습니다. ‘필연성’이라고 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의 분위기 속에서 사는 영혼에게는, 놀라운 포근함과 신적인 환희가 옵니다. 이에 대해, 존 폭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은밀하게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포근한 시간이요, 가장 좋은 시간이다. 그러니, 그대의 삶을 사랑한다면, 기도로 사랑 안에 거하라” 경건한 허비는 병들어 누워 있을 때, *Hervey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살려 주시면, 읽는 것은 줄이고, 기도를 더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존 쿠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John Cooke “기도의 일과 즐거움과 존귀함과 유익이, 날마다 더욱더 강력하게 내 영혼을 압박하고 있다” 한 작고한 목사는, 임종이 가까워올 때에 “기도를 더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그런 탄식이, 건강할 때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경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고, 그 시간들을 규칙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기도의 습관’이 있는 것보다는, ‘기도의 정신’이 있는 것이 더 좋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경건한 형제들과 함께 자주 무릎을 맞대고 머리를 숙일 수 있으면, 정말 복된 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 목사들은 절대로 기도와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철칙으로 삼는다면, 훨씬 더 많은 간구가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친구들끼리 함께 만날 때마다, 기도와 찬양으로, 그 만남이 거룩해지도록 하십시오. 예배시간 전 목회실에서, 마음이 뜨거운 집사들이나, 다른 형제들을 서너 명 불러서 함께 몇 분 동안 기도한다면, 새로운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제 경우는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나 영적 싸움을 위하여 큰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진지함에 격렬한 불꽃이 피도록,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서재에서든, 목사실에서든, 강단에서든,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도록, 끊임없이 기도의 정신을 갖기를 구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강단에 앉을 때든, 찬송을 부르기 위해 일어설 때든, 성경 본문을 봉독할 때든, 설교를 할 때든, 언제든 한 손을 하나님께로 들어올려서, 위로부터 축복을 받아서, 다른 손으로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설교에 임할 때에는 마치 수도관처럼, 하늘의 영원하고도 무한한 공급과 사람들의 한정 없는 필요 사이를 연결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평소에 하늘에 닿아 있어야 하고, 하늘과의 교통이 끊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동안에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동안,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과 이야기하십시오. 그렇게 해야만, 여러분이 계속해서 진지함(설교 제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고 일어나면서, 진지한 상태가 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과거에는 보통 한 쪽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기도했습니다. 영화에 나오지요. 만일 그런데도 진지함이 없다면, 거룩한 불길이 영혼 속에 생기기까지 다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담 클라크는 언젠가 말하기를 “죽도록 스스로 연구하며, 그 다음에는 스스로 기도하여 다시 살아나라”고 했습니다. 아주 지혜로운 말입니다. 후자(기도)가 없는, 전자(연구)를 시도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연구가 없이도, 기도를 이룰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연구하면서 기도하고, 살피면서 기도하십시오. 연구를 하더라도, 기도는 항상 있어야 합니다. ◑봉사에 참여하면서, 그 불길을 휘저으십시오. ▲친숙한 봉사의 현장에서 물러나서, 새로운 땅을 경작함으로써 (새로운 봉사에 참여하면서) 여러분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일과를, 흔들어 놓으십시오. 물론 부수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마음을 새롭게 유지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방법으로서 저는, 여러분의 일상적인 일과에 새로운 봉사에, 자주 참여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평소에 안 가보던 봉사의 자리에, 한 번이라도, 가보는 것입니다. 곧 신학교를 떠나게 될 형제들에게 말씀드립니다만, 사역지에서 정착하는 동안, 몇몇 탁월한 분들과 접촉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홀로 있는 상태에 있게 될지도 모르는데, 여러분이 스스로 무뎌지고 정체되고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잘 돌보아야 하고, 진취적인 정신을 항상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담당해야 할 일이 주어질 것이고, 그 일을 함께 돕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고,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무겁게 그 일이 짓누를 것입니다. 이것을 잘 살피고,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여러분이 무뎌지고 지루해지지 않도록 스스로 막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 경험에 비추어서 지금 여러분께 권하는데, 언제나 무언가 새로운 봉사를 손에 잡고 있는 것이, 제 자신에게는 참 유익이 되었습니다. 평소에 행하는 일상적인 사역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만, 동시에 거기에 새로운 사역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밭이나 정원을, 매년 한 두 자 정도 넓혀가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그래야 합니다. 절대로 ‘이 정도면 됐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제 됐다. 쉬면서 감사하자’라는 태도를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그 다음에 조금씩 더 넓혀 가십시오. 인구가 2천명 정도 되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어느 정도 사역하고 나면, 이제 4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부락이 있습니다. 그곳에 집회소를 개설하십시오. 한 부락이 끝나면 다른 부락으로 가서, 땅을 살피고 여러분 앞에 놓은 그곳의 영적 핍절의 상태를 해갈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삼으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임무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분을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성도들과, 경건한 교제권을 계속 유지하십시오. 휫필드는, 어느 젊은 청년이, 하나님의 임재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의식한 나머지 길을 걸을 때에 보통 모자를 벗고 걸었다는 이야기를, 예화로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그런 자세 속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영적인 진지함을 유지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영혼의 진지함을 유지하려면, 여러분에게 맡겨진 영혼들과, 지극히 친숙하게 지내기를 힘써야 합니다. 물속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서 있으십시오. 자기 혼자, 물밖에 나와 있는 고기가 되지 마십시오. 죽습니다. 설교자들 중에 일반 교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책과 함께는 편안히 지내지만, 사람들과 함께는 아주 어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진짜 꽃들을 거의 본 일이 없는 식물학자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별을 보느라 밤을 지새워 본 일이 없는 천문학자는.. 어떻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과연 과학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직접 그들의 상태를 아는 일이 없다면, 복음 사역자로서는, 돌팔이 의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공부란.. 삶의 현장에서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설교에서 인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해서 풍부하게 알아야 합니다. ‘책’들은 물론, ‘사람’들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생각’보다는 사람들을 만나서 사랑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설교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고뇌 가운데 있는 자들을 긴밀하게 찾으십시오. 그들의 어려움과, 그들의 고뇌와 양심의 아픔을 살피십시오. 평화를 찾고자 애쓰는 그들의 열심을 보는 것이, 여러분을 진지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적 진지함이 없는지를 보면, 그들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열심이, 여러분에게서 더 크게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주를 찾은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부흥이 일어나는 위대한 수단입니다. 슬퍼하는 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되면, 여러분이 정말 영적으로 다시 젊어졌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슬피 울며 회개하는 자가 ‘이제 내 짐이 모두 사라졌고, 나는 구원을 받았도다!’ 라며 탄성을 지르는 것을 들으면, 그것이 여러분의 뼈에 윤활유와 같은 작용을 할 것입니다. 때로는 거듭난 영혼의 황홀해하는 모습이, 여러분을 사도적인 열정 속으로 몰아넣기도 할 것입니다. 영혼이 회심하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어떻게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잃어버린 양을 사로잡는 그 현장에 있으십시오. 그리하여 큰 목자장의 기쁨에 함께 동참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젊음이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과 더불어 죽음의 현장에 함께 있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수개월, 혹은 수년을 따라온 그 수고가 보상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든든히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이 영혼들을 정말로 얻었구나”하고 외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진지한 열정이 새로이 불길처럼 솟아오를 것입니다. ▲큰 도시에서 사역할 경우에는, 여러분의 교회당이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그곳의 가난한 자들과 무식한 자들과 술주정뱅이들과 친숙하게 알고 지내십시오. 할 수 있으면 ‘도시 빈민 사역자’들과 함께,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거기서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처참한 질병의 상태를 친히 목격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치유책을 찾을 열정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대도시의 ‘가장 좋은 거리’에서조차도 악을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빈민가’는 그야말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악행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의사가 병원 속을 샅샅이 걸어 다니듯이, 여러분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죄가 만들어 놓은 그 악행들을 보아야 합니다. 죄가.. 이 땅에서 만들어 놓은 그 황폐를 눈으로 똑똑히 보고, 피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게 되셔야 합니다. 헌신된 빈민사역자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그 현장을 본다면, 여러분의 신학교 과정을 잘 마치는 것이 될 것이고, 여러분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도, 매우 적절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무수한 무리들이 죄 가운데서 살며, 술취함과, 주일 거부와, 폭력과, 신성모독으로 더렵혀져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완악함에 젖은 상태로, 두려움과 절망에 가득하여 죽어가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목회적 열정을 되살려 줄 것입니다. 세상은.. 극심한 빈곤과 처절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수치와 죽음이.. 무수한 사람(죄인)들이 받는 삯입니다. 이런 인간 영혼의 절박한 현실에 대한 치유책은, 위대한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도시 뒷골목 힘든 현장에서, 여러분은 절실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사역과 혼인하여, 절대로 그것을 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임종 역시, 우리에게는 위대한 학교가 됩니다. 임종과 장례는, 우리의 사역을 진지하게 대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약과 같습니다. 저는 죽어가는 사람의 임종을 대하고 내려오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미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포함해서요. 사람들이 이 땅의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애착을 가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급하게 다니고 있는가? 저 여인은 어째서 저렇게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죽게 될 것이니,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치가 없는데 말이다..’ 사람이 죽는 현장에 자주 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사는 법과, 죽는 법을 가르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맥체인은 토요일 오후에는, 언제나 병든 자들과 죽어 가는 교인들을 찾아다니곤 했습니다. 제임스 해밀턴 박사가 말한 대로, “설교하기 전에, 저 마지막 경계 너머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더 나아가서, 여러분의 일을 하나님의 빛 속에서 가늠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의 종이라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차가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께서 그의 사랑을 선포하시고, 그의 상하심(상처)의 상급을, 사람들이 얻으라고 보내신 존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축 늘어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계십니까? 주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도록,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까? 기름 부음 받은 일이 없다면, 기름 부음 받은 체하지 마십시오. 정말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면, 힘을 다하여 그 일에 진력하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임무는 직업이 아닙니다. 직업인의 잣대로 재면, 여러분의 일이야 말로, 이 땅에서 가장 초라한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황금을 벌어들이는 것이나, 세상의 명예를 쌓는 면에서 따지면, 목회를 버리고 다른 일을 찾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여러분이 초자연의 시계에 거하며, 시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이라면, 여러분은 정말 고귀한 임무를 지닌 사람이요, 이 땅에서 나서, 유한한 시간 아래서 사는 자들보다, 월등한 사명을 지닌 자들입니다. 여러분의 임무를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주님처럼, 지금 비천한 상태에 있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처럼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한다면, 주님의 첫 제자들처럼, 세상에서 무명한 자로 멸시를 받는 것이야말로 영광된 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아는 것이야말로 영생인데, 여러분이 바로 그분을 알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여러분의 뇌리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일을 올바른 잣대로 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진지함(설교 제목)이, 결코 상처를 입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심판 날에 비추어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진지함에 대한, 영원한 상급의 견지에서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한 영혼을 구원한 지금의 즐거움은 그야말로 기쁜 일입니다. 멸망으로 향하여 내려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우리를 이 땅에서, 작은 천국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하물며 심판 날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그 무수한 영혼들을 만나,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그들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 그 기쁨이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우리 주님과 영원한 교제 속에 있을, 그 천국의 복락을 바라보며 기뻐합시다. 십자가를 지는 데서 오는, 모든 부끄러움을 멸시하십시다. 영혼을 구원하는 놀라운 기쁨을, 예수께서 우리 앞에 제시해 놓으셨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진지함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한 가지 생각을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소홀히 할 때, 우리와 우리의 교인들에게 임하게 될 그 큰 악을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자기 죄 가운데서 망하려니와” 그 말씀이 끔찍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더 끔찍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 겔3:18. 불성실한 목사가 당할 최후를, 어떻게 말로 설명하겠습니까. 영혼 구령의 진지함이 없는 목사는, 모두가 불성실한 목사입니다. 저는, 사람의 육체를 죽이는 살인자에게는, 설령 천 번 만 번 제 자신을 내어줄지언정,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목회)자에게는, 절대로 제 자신을 내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복음을 믿지도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전혀 간절한 열심도 없이 목회자가 되어서사람들의 영혼을 맡은 사람처럼, 그렇게 처절한 종말을 맞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성실하며 영원토록 성실한 자들이 되도록 힘쓰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고, 그렇게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22장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으십시오 /전7:21/시38:13/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0:42 read : 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론. 저 스펄전은, ‘목사는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아야 한다’는 말을 평소에 자주 합니다. 남의 쓸데없는 말에, 너무 마음을 쓸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22장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으십시오 /전7:21/시38:13/ 찰스 스펄전 2015-06-20 23:20:42 read : 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론. 저 스펄전은, ‘목사는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아야 한다’는 말을 평소에 자주 합니다. 남의 쓸데없는 말에, 너무 마음을 쓸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전7:21 사람들의 혀를 붙잡아 둘 수는 없으니, 가장 좋은 것은, 사람들이 하는 하찮은 말에 내 귀를 닫아버리고, 전혀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한가하게 떠드는 말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다 귀담아 듣다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 사는 자들조차도, 항상 자기를 칭송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측근의 사람도, 기분이 나빠지면 자기 화를 폭발시키는데, 그럴 때는 ‘한쪽 귀를 닫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전7:21절을 암송하면서요.↑ ▲1. 분란이 일어나면, 일단 뒷걸음질 치십시오. 듣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화가 나 있을 때에는, 그 사람에게서 물러서 주고, 함께 뒤엉키기 전에 논쟁을 중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런 성급한 언사를 들었다면, 그것을 내 마음에 고이 담아두지 말고, 속히 지워야 합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시38:13 우리는 이렇게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당신의 혀의 주인은 당신이지만, 내 귀의 주인은 바로 나요” 이사야 33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 말이나 다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잘 가려서 듣겠다는 뜻입니다. ▲2. 그러므로 목회지에 처음 부임할 때는, 그 교회에 남아있는 오래된 문제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기로 결심하십시오. 목회지에 처음 부임하면, 일부 성도들 중에 교회의 논란거리를 거론하면서, 목회자를 자기편으로 삼으려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눈과 귀를 닫으시고, 과거사는 과거사일 뿐임을 주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전임자의 식탁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그가 남은 식어빠진 고기를 자신은 입에 대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알리시기 바랍니다. 한 쪽이 부당하고, 한 쪽이 정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의 문제에 새로 부임한 목사가 개입하면..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멀찍이 지켜보면 됩니다. 행18:13~15참조. 안 그러면, 결국은 편파적인 목회가 되어서, 교인들과 자신의 목회를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부임하고 난 다음에도, 교인들 사이에 서로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도 목회자는, 지혜롭게 처신해야 하는데.. 그냥 멀찍이 지켜보면서, 분쟁 당사자 자기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두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안 그러고 목회자가 개입되면, 본의 아니게 연료를 끼얹거나,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자는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으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못 본 척 하고, 못 들은 척 하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시시콜콜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 해서는 안 됩니다!’ ▲3. 또한 교회 내에 떠도는 풍문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것이 좋습니다. 목회자가 그런 풍문을 거론하면, 자기는 들은 말을 전했을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그 풍문이 증폭되고, 커지기 십상입니다. 목회자로서 그의 말은, 일반 사람보다 비교할 수 없는 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나간 넬슨 제독은,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전투를 지휘하는 일에만 신경썼다고 합니다. 눈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고, 주위에 흘러 다니는 풍문을 다 듣고 하면 결국 중요한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결과는 패배입니다. 어디를 가나, 말이 많은 사람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고 떠들기를 계속하고, 권고를 받고도 중지하지 않으면, ‘당신이 주장하는 바를, 글로 종이에 써서 주시오. 그러면 내가 심사숙고 해 보겠소.’ 이렇게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조용해집니다. 정작 자기 말에 진짜 책임을 질 경우에는, 말을 못 꺼내는 것이지요.(종이에 못 쓰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정작 정확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자기가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사실을 입으로는, 함부로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종이에 적으려고 하면.. 가물가물 하고, 자기 말이 확실치 않은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약3:7~8 현실이 그러하니, 그걸 치료할 수 없다면, 그것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귀담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의 아내는, 오리와 거위의 깃털이 탐이 난 나머지 애꿎게 오리와 거위를 잡아 죽여서, 그 깃털을 취했습니다. 가십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가십하는 그 재미, ‘씹는 맛’ 그 작은 것을 즐기기 위해서 그 말의 대상인 인격이 죽어가는 상태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소문을 퍼트리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남에 대한 험담은, 자기 배우자에게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4. 그리고 저 스펄전의 경험인데, <의심>도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면, 하나에서 열 가지, 모든 것이 이상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결국에는 공정하지 못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그 출발이 ‘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정죄’하지 않더라도, ‘의심’하는 것 그 자체가 벌써, 서로 간에 불신을 조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가 승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가급적 ‘눈과 귀를 닫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의심’이 가져다주는 파괴적인 손해보다는, 차라리 ‘속는’편이 손해가 적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속는 셈치고’ 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입니다. 안 그러면, 벼룩 잡으려다가, 초가집 태우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밤 중에 잠을 자다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만 나도 벌떡 일어나서 ‘도둑이 들었다’고 난리를 치는 수전노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흠잡는 사람이 있다’고 믿는 (의심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수전노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차라리 속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 낌새가 보여도, 아무런 일이 없는 듯 넘어가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5. 물론 교회는 ‘권징’이 있어야 하고, 밝힐 것은 밝혀야 하지만, 괜히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까지, 모조리 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보다는, ‘목회자는 한쪽 눈은 감고, 한쪽 귀를 닫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여러분, ‘격려’와 ‘아첨’의 차이를 아십니까? 둘 다 상대방이 듣기에 기분 좋은 칭찬의 말을 해 주는 것이지만, ‘격려’는.. 자기 이익과 관련 없이, 중립적 입장에서 칭찬을 해 주는 말이고, ‘아부’는.. 자기 이익을 염두에 두고서, 칭찬을 해 주는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어떤 ‘가십의 말’을 할 때는.. 자기 손익과 관련이 될 때입니다. 자기 라이벌이거나, 평소에 미워하던 사람에게.. 가십성 험담을 해대는 것입니다.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의 험담하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 자체가 없으니까요. ‘정의’를 밝히고, ‘질서’를 세울 때에도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정말 중립적 입장에서 뭘 파헤쳐야 합니다. 즉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만, 그런 심판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조금이라도 자기와 손익이 걸린 일에 대해서는, 판단과 심판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내가 필요 이상으로 나설 때는 불의한 판단이 되기 쉽고 (자기 손익과 관련되다 보니) 그 결과, 더 높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판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판단은 내 권한이요, 내 자유라고 말할지 모르나, 아닙니다. 그 위에 더 높은, 완벽하게 정의로운 재판장이 계시고, 우리는 자기의 모든 판단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가급적 판단을 안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판단, 심판 받는다니까요! ▲6. 또한 ‘내가 판단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 자체를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내 설교에 대해서, 내 외모에 대해서, 내 업적에 대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해 주나?’ .. 거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 귀를 활짝 열어 놓고, 내 눈을 크게 뜨고, 남들의 나에 대한 평가를 듣기를 원합니다. 깨놓고 말하면, ‘좋은 평을 듣기를 원합니다.’ 남의 평가를 겸허히 듣기 바란다지만.. 그 속마음은 ‘좋은 평’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원래 죄성을 타고 난지라, 남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평을, 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혹평, 냉혹한 평가’는 잘 해 줍니다. 자기는 ‘칭찬’ 듣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혹평’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면서, 같이 맞받아치게 됩니다. 이 시간의 주제는,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닫아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돌아다니는 헛소문에 대해서도 .. 내가 차단해야 하고, -나에 대한 근거 없는 혹평에 대해서도.. 내가 스스로 눈을 감아야 하고, -나에 대한 좋은 평가에 대해서도.. 내가 귀를 닫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분란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한 가지가, ‘내가 좋은 평가를 듣고 싶어서, 내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었다가..’ 오히려 혹평을 듣고, 내 스스로, 내가 판 올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7. 더 나아가, 지도자는 <비판을 참고 견디는 사람>입니다. 비판을 참고 견디지 못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요. 사람들 중에는, 특별히 악한 사람도 일부 있습니다만, 처음에는 자신이 미숙한 관계로, 처음 보는 지도자에 대해서, 함부로 혹평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그걸 묵묵히 듣고, 감수하고,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반대자, 비판자가 점점 자기 마음을 열고, 그 지도자 편이 되어 갑니다. 목회자로 존경하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판을 참고 견디지 못하는 지도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는, 교인들의 자기에 대한 비판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결국 자기가, 교회의 분란과 소용돌이의 중심에 처하게 되고, 그런 지도자에게는, 결코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한 명씩, 소리 소문 없이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정당하고, 그 비판이 근거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지도자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 98%인 제 삼자들은, 부담을 갖게 됩니다. 목회자가 막 자기 변호를 하니까요.. 또 상대방을 헐뜯기도 하니까요.. 결국은 목회자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한쪽 귀를 닫고, 한쪽 눈을 감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저 스펄전도, 제게 대해 어느 정도의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어쩔 수 없이 거론해야 될 상황이 되기 전에는, 그것을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는 더욱더 예의 바르고 친근하게 대했습니다. 그랬더니 시간이 지나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상황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혹시 제게는 지금 친구가 아니더라도, 주님께는 저가 친구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제 마음을 다독거렸습니다. 그에게 저는, 이런 저런 일을 맡겨서, 제가 그를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었고,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점점 저와 가까워졌고, 신실한 동역자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8. 너무 중요하니까, <의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왕이 의심을 품게 되면, (왕은 정말 의심을 많이 품게 되는 위치입니다) 폭정으로 이어지고, 실패한 왕으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성공한 왕으로 마치려면, 의심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할 상황이야, 주위에 수 백 가지가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 쪽 눈을 감고, 한 쪽 귀를 닫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의심을 품어보십시오. 하나에서 열 가지.. 모두가 의심스럽습니다. 의심스럽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의심을 품도록 만든 상대방도 책임이 있지만, 가급적 ‘한 쪽 눈을 감고’ 넘어가는 것이.. 자신에게 지혜로운 처신이 됩니다. 한 번 <의심>에 빠지면, 자꾸 의심하다보면 ‘의심 강박증’에 걸리게 되지요. 남을 파멸시키기 이전에, 자기가 스스로 파멸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나를 어떻게 평한다..’ 라는 의심이 들어오면, 밑도 끝도 없이 깊은 나락으로 스스로 추락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귀를 열어두지 말고, 눈과 귀를 닫고서 무조건 자기가 받은 사명을 향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범인을 잡는 형사의 눈으로 성도들을 쳐다본다면, 어떻게 그 목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보면, 목회자가 의심의 정신병에 걸리면, 정보를 수집하느라, 돈을 써서 스파이를 고용하게 됩니다. (책의 521쪽 첫째 줄) ※그리고 그 스파이가 전달해주는 정보가,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 정도 수준까지 가면.. 끝장 난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 목회자의 품격을 떨어뜨린 것입니다. ▲9. 마치는 말.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16:28 이간질을 잘 하는 역할은, 배우자나 측근이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역할이나 위치가, 이간질에 아주 적절한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불을 끄는 사람이 되어야지, 불을 더 붙이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도둑놈도 죄인이지만, 장물을 중개해서 사고파는 사람도 똑같은 도둑놈입니다. 마찬가지로 험담을 지어내는 사람도 죄인이지만, 그 험담을 옮기는 사람도, 결코 결백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살아서 역사하는데 그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을 통해서, 그는 얼마나 많은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지요. 다만 우리가 거기에 동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한쪽 귀를 닫고, 내 한쪽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칭찬이든, 혹평이든 목회자는, 양떼들의 평가에.. 멀찍이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삶의 지혜’입니다. 큰 거짓말은, 마치 육지로 나온 큰 물고기 같아서 자기 혼자 지느러미와 몸통을 꿈틀거리다가, 곧 죽어버리고 맙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과민하게 반응/변호하다가는.. 오히려 사탄이 승리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변호하다가, 자기 스스로 문제를 만들지 마십시오! -자기 스스로 교정자 The Corrector 로 자처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지도자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정말 개입할 상황이 이르기 전에는 그저 눈과 귀를 닫으십시오. 못 본 척 하고, 못 들은 척 하십시오. 그러면 왠만한 문제는, 분쟁 당사자 자기들끼리 해결되거나 또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님도 사사건건 다 끼어드신 것은 아닙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면서 만왕의 왕으로서 모든 것을 판단할 자격이 있으셨지만,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지도자로서, 꼭 무슨 말을 해야 될 때는, 반드시 양쪽 말을 다 들어보고 난 후에 하십시오. 한쪽 말만 들어보고서는, 절대 말 하지 마십시오.
2장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살기 /마11:29/벧전2:20-23/마26:38/ Zac Poonen 2015-07-15 20:28:34 read : 2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님의 겸손, 마귀의 교만 ▶하나님의 위대하심 greatness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랍습니다. 우주를 보시고, 세상을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1 라는 말씀처럼,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2장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살기 /마11:29/벧전2:20-23/마26:38/ Zac Poonen 2015-07-15 20:28:34 read : 2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님의 겸손, 마귀의 교만 ▶하나님의 위대하심 greatness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랍습니다. 우주를 보시고, 세상을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1 라는 말씀처럼,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우리 인간의 머리로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은하계 galaxy 하나만 해도, 정말 너무나 큰데, 그게 수없이 많이 온 우주에 늘려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는 것만 해도, 빛의 속도로 달려도, 수 십 억년을 가야할 거리입니다. 그와 반대로 ‘마이크로 세계’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솜씨가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작은 물체 속에도, 원자, 전자 세계로 들어가 보면.. 거의 한 우주가 통째로 들어있다고 할 만큼, 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그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정말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요! ▶그런데 어쩌면, 이런 우주의 위대함보다, 더 크고 놀라운 위대함이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나타나 보여집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을 비워서, 사람의 형체를 입으시고, 자신을 이 타락한 인간들과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요1;14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겸손의 영광’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그 영광은, 정말 우주의 위대함보다, 피조세계의 그 어떤 영광보다, 더 찬란한 영광임을.. 볼 줄 알고, 아는, 그런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왕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마지 못해 억지로 자기를 낮추거나, 이 세상 사람들이 불쌍하니까 거만하게 돌봐주는 식의 행차가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겸손의 영광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보면서, ‘영광’이라 생각하는데, 거기에도 물론 영광이 나타났지만, 그 보다 더 큰 영광은, 예수님의 성육신 자체가, 예수님의 기적보다 더 큰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참된 영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오신 그 겸손의 영광, 그것이 더 큰 영광임을 보는 눈을 만약 우리가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헛된 세상 영광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그런 영광스런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예수님께 나타난 진정한 영광을 보는 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실 때, 정말 순수하고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벌써, 자신을 낮추어, 연약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겸손이 - 예수님의 첫 번째 발걸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첫 번째 발걸음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수 만 년 전에, 하늘에서 떨어져서 세상에 온, 소위 루시퍼라 불리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지혜에 있어서나, 외모에 있어서 완전한 존재였습니다. 루시퍼는 원래 천사장(천사들 중의 우두머리)으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해서 자신을 높였고, 천사장이란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높였다고, 성경에 말씀합니다. 겔28:11~17, 사14:12~15 그렇게 높아지려고 하고, 스스로 교만했던 그 피조물은 (천사도 피조물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천국에서 내던져졌는데.. 바로 사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만의 죄는, 이 우주에서, 모든 죄의 뿌리요, 그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의 근원은 아담이지만, 이 우주에서 죄의 근원은 사탄입니다. 아담이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것도, 앞서 그러했던,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그랬던 것입니다. ▶문제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도, 그런 교만의 죄의 뿌리/유전을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이 교만의 독소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대표로서, 자신을 스스로 겸손케 하신 것입니다. 모든 죄가, 근본적으로 루시퍼의 교만으로부터 기원한다면, 그 죄의 구속도,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겸손으로부터 기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는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에게서, 영적인 성장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거나 높아지게 되면, 반드시 넘어집니다. 그래서 모든 영적 성숙의 척도는, 그의 외모가 아니라, 겸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떠나서 이 세상에 오심도, 교만한 마귀에게, 그 겸손의 시위가 되는 셈이지요. 그렇게 오실 때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계실 때도, 내내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셨습니다’ 히2:17 KJV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들과 똑같은 존재로, 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지내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높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겸손하신 선택 세상 영광과 위대함은, 그 사람의 지위, 재산, 업적, 가정 배경 등으로 매겨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얼마나 다른지요! ▶1. 산골마을 나사렛을 선택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실 것인지.. 아마 조금은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결정권이 없지만, 예수님은 누구 가정을 빌려서 태어나실지, 결정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하신 가정이, 누구의 가정이었습니까? 정말 저 산골 마을 나사렛에, 그 때도 대도시가 있었거든요 그것도 랍비나 군인이나 관리의 집안이 아닌 목수(석수 포함 당시 노동자의 통칭)의 가정에 정말 겸손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출생배경부터가 겸손하셨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그 동네는, 별 볼일 없는 산간마을이었습니다. 요1:46 요셉과 마리아는, 너무 가난해서, 예수님이 태어난지 8일 만에 번제를 드릴 때, 그 예물로 양을 드릴 경제력이 안 되어서, 대신에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비둘기를 드리셨습니다. 눅2:22~24, 레12:8 ▶2.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소도, 예수님은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짐승들이 먹는 마굿간 여물통(말구유)에, 자기 요람을 만드셨습니다.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자기의 낮은 처지를 비관할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처지가 낮아도, 적어도 예수님보다는 높게 태어났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의 혈통, 족보를 살펴보더라도, 그걸 아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들 것입니다. 그 조상 중에, 네 여인이 나오는데, 마1:3~6 -다말은, 자기 시부 유다와 관계해서 자녀를 낳은 사람, -라합은, 여리고 성의 몸 파는 사람, -룻은, 모압 자손. 이방인 -밧세바, 다윗과 간음한 여인. 왜 예수님은, 하필 이런 수치스런 족보를 가진 가정을 선택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정말, 죄의 본성을 유전한, ‘사람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저 멀리 떨어진 천국에서 오신 분이 아니라, 이 타락한 죄인들의 세계 한 가운데, 그 후손으로 태어나셨다는 말입니다. (그 두 번째 아담으로서, 예수님은 순종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신, 겸손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면에서도, 교만과 자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자기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하는 소원도 다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최악의 가정에서 태어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위/재물/가정배경을 자기 위대함(교만)으로 삼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 하나도 가지지 않으시고도, ‘겸손의 위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위/재물/가정배경이 좋아서, 자기 자화상이 건강한 것은 좋지만, 그것이 교만으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반대로 오늘날 우리가 지위/재물/가정배경이 없어서, 고민인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묵상하시면서 ‘약할 때 강한 은혜’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아무리 가난하고, 가정배경이 나빠도, 예수님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얼마든지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높이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그렇게 아래로 내려가고, 낮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섬기되, ‘왕’이 되어서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이 되셔서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그 '겸손의 영광'을, 깊이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겸손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십니다. 롬12:2 우리의 내면속에, 우리가 구원 받을 때, ‘그리스도를 닮는 씨’가 심겨졌습니다. ‘예수 믿고 속사람이 변화되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자마자 하루아침에, 완전히 성자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실제 삶과 행동의 열매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우리 내면에 ‘씨’가 뿌려졌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그 씨가 자라서 싹이 트고, 나중에는 결국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로, 결국 성도는, 그리스도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깁니다. 빌2:3 그리고 자신을 ‘모든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엡3:8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아버지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광이 충만하게,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는데요..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이 ‘아무것도 아님’을 취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시키신 그 어떤 사명도, 군말 없이, 진심으로 순종하실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빌2:8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것은, 진정 겸손한 표입니다. 이것보다 더 정확한 테스트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보십시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불평 없이 순종하지 못합니다. 불만이 많고, 군소리가 많습니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게 다 아직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아버지의 뜻에, 잔소리/군소리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30년간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님께도, 군소리 없이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육신의 부모들보다, 더 죄가 없으시고, 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부모를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인간의 질서도, 존중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겸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보면, 자기보다 지적 수준이 떨어지고, 영적인 믿음도 떨어지는 사람에게 그가 나의 선임자라고 해서, 그에게 복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은 사람은, 그를, 하나님이 내 윗 권위자로 세우셨다고 할 때, 내가 그에게 복종하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4. 그리고 예수님이 ‘목수’란 직업을 선택하신 것도 보십시오. 정말 아무도 눈여겨 봐 주지 않는 직업입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사실 때에도, 예수님의 명함에 붙는, 무슨 직함이 없으셨습니다. 박사/ 교수/ 장군/ 회장 .. 이런 타이틀 말입니다. 오늘날 목사를, ‘목사’호칭을 떼고 부르면,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예수님은 ‘예수 목사’, ‘존경하는 목사님 예수’, ‘예수 신학박사’ 이렇게 불리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에게 ‘랍비’라 불리긴 했지만,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높이는 호칭을, 스스로 단 한 번도 만드신 적이 없으시고, 사용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그 세상 영광을 원하신 적도 없습니다. 철저히 ‘겸손의 영광’만 일평생 추구하신 것입니다. 귀 있는 분들은, 들으십시오! 예수님이, 무리들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 했을 때, 산으로 물러가신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저 ‘인자 son of man'로서 충실히 사셨습니다. ※관련글/ 나를 그냥 ‘예수’라고 불러 다오 ◑예수님의 평소 삶의 겸손 ▶예수님은, 사람으로부터의 영광을, 구하지도 않으시고, 관심조차도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살기 어려운데, 어떻게 그렇게 사실 수 있었을까요? 그건 예수님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대면하고 있으셨기 때문이라 봅니다.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칭찬, 성령의 감동.. 이런 만족이 늘 있으셨으니까, 사람의 무관심, 사람의 경멸..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실 수 있었던 거지요.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실 때나, 기적을 행하실 때 예수님은, 그 기적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종종 주의 시키셨습니다.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해서, 그를 고쳐주었지만, 그 기적으로 인해, 예수님 자신이 높아지시고, 소문이 날까봐 염려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방해되는 것이었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셨을 때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막5:43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야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도, 그건 예수님의 전 공생애의 겸손하신 삶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의 종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발 씻김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보니까, 제자들이 발이 더러운 것입니다. 그 즉시로 예수님은 대야로 물을 떠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할까?’ 하며, 예수님은 두리번거리거나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의 필요가 눈에 보일 때는, 그냥 즉각적으로 그 섬김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회의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셨습니다. 그들과 동등됨으로 여겨지는 낮은 일 행함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으시고, 정말 도덕적으로 완전한 분이셨지만, 그런 사회의 낮은 죄인들을 대하실 때, 그들이 조금도 자신의 추함으로 인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그렇게 편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도우실 때, 뭔가 ‘내가 너희들을 도와주는 후견인이다’라는 식의, 교만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권위가 없었던지 (잘 섬기셨던지) 한 번은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충고한다면서, 예수님을 꾸짖을 정도였습니다. 마16:22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신 것을 보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정말 겸손하십니다. 마26:38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연약한 육체를 가지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승이라고, 제자들 위에 언제나 군림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연약하실 때는, 겸손히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급적 자기 연약함, 무능함을 나타내 보이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시 받기 싫다는 얘긴데.. 사실은 그게 다 교만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겸손히 기도를 요청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늘 겸손히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물 위에 높이셨습니다. 빌2;9 지금 자신을 그렇게 낮춘 사람도, 장차 그렇게 높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춘 사람은, 장차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좌우편에 앉을 것입니다. 지금 이 현실 세상에는, 두 가지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계속 높아지고, 또 높아지고, 끊임없이 높아지려는 것인데, 이것은 사탄에게서 나온 생각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생각은, 자기를 낮춥니다. 계속 낮아지고, 또 더 낮아지고, 죽을 때까지 낮은 자리를 찾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높입니다. 오늘 나는, 누구의 편에 섰습니까? ◑예수님의 겸손의 극치.. 십자가를 수용하심 ▶예수님의 겸손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부당한 재판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부당함, 그 모욕, 그 不정의, 그 모욕과 조롱을 다 감당해 내셨습니다. 바로 겸손함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당한 일을 당하실 때, 그들을 향하여 저주 한 마디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들은 보복 당하리라고, 그들을 겁주지도 않으셨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지만, 천사들을 동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모든 권리를, 다 기권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대신에 자기 주먹을 꽉 쥐지요. 자기도 힘과 권세가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가해자인 너희들을, 응징하고 보복하겠다는 표시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먹을 꽉 쥐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손바닥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병정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손바닥을 힘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주먹 대신에, 손바닥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엔, 자기 목숨까지도 다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겸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를 본받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본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은, 그 형상을 우리 속에 회복시키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성품을, 자신도 나타낸다는 것이며, 이것은 특별히, 부당한 대우와 불의 injustice한 일을 당할 때, 예수님처럼, 불평하거나 불만하지 않으시고, 꿋꿋이 참는 일입니다. 벧전 2:20-23절을 읽어보십시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그 부당하고 수치스런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아버지의 뜻이라며,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음모로 자신을 죽이는 것임을, 뻔히 다 아셨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의 뜻이 감춰져 있음을 아시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그 잔을 기꺼이 마시신 것입니다. 요18:11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8 예수님의 겸손은, 그래서 자기를 죽이는 아무도, 판단치 않으셨습니다. 모든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으로 돌리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재판장이신 아버지의 자리를 넘보는 교만이 됩니다.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노라’ 요8:15 하나님은 그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마치는 말/ 오늘날 세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배우고 묵상해야 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오늘날 목회자들도 이름이 나게 되면, 마치 세상의 유명인사, 혹은 연예인처럼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예수님을, 잘못 배운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시며, 싫어버린바 되셨습니다. 당시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제거해 버렸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큼은 아니지만, 그 제자들도 비슷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일부 기독교는, 점점 더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그래서 세상의 인기를 끄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연예인들처럼요.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길이 아니라, 사탄이 주는 모조품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태어나실 때부터 죽으실 때까지 통 털어서 다 보더라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기를 받으시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니라’ 눅16:15 라는 말씀에 합당하게 사셨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서 배우라’ 마11;29 예수님은, 제자들이 많은 것을 배우기 원하셨지만, 특별히 자신으로부터 겸손을 배우기 원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가 유명해지고, 높아지는 것을 배우려고 합니다. 은근히 또 그렇게 가르쳐주려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니고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기 원하셨던 겸손을, 그 겸손의 영광을 오늘날의 제자인 우리들도,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장, 목회자의 소명의식 /롬10:15/겔3:4/ 찰스 스펄전 2015-06-21 07:52:30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특별히 목회자로 소명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모든 신자>가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받은 사명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소명 받은, <목회자>가 소수 있다는 것입니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
2장, 목회자의 소명의식 /롬10:15/겔3:4/ 찰스 스펄전 2015-06-21 07:52:30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특별히 목회자로 소명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모든 신자>가 예외 없이 공통적으로 받은 사명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소명 받은, <목회자>가 소수 있다는 것입니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위 구절은, 교회의 모든 신자가 다 ‘양 무리를 치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은 교인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양 무리를 치는 자’로 사명을 받은 사람, 곧 목회자의 사명을 받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양 떼들을 돌보고, 다스리도록 세우신 ‘사명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행20:28. 그리고 양떼를 돌보는데 필수적인 ‘말씀 전파 사명’은 하나님이 양떼를 돌보는 목회자에게, 특별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일반적 사명이 있지만, 그 말도 맞지만, 목회자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목회적 사명이나 은사가 주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 성도들에겐, 그런 은사나 사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양떼를 돌봐야 할 목회자에겐, 그런 사명과 은사가 필요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사명과 은사를 주십니다. 바울이 말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고후4: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위 구절에서, 바울은 이 직분을 주님께 “받았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자기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회적 은사와 사명을 받은 사람은, 언제나 목자장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 분의 손짓이나, 명령을 기다리며, 그것에 따라서 목회할 줄 압니다. 그분으로부터, 목회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늘나라의 대사 ambassador 들로 부름 받은 사명자들은, 한 나라의 대사가 그러하듯이, 언제나 본국의 왕의 지시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제 멋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소명”을 반드시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래 예레미야의 말씀이 자기에게 응하게 될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23:32. ◑주의 종은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구약을 보십시오. 구약의 메신저(대언자, 선지자)들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분들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스랍 천사가 불타는 숯불을 제단에서 가져와 자기 입술을 태우는 환상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사6:8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주님의 소명을 받기 전에, 이사야가 성급하게, 자기가 선지자라고 자처하고, 뛰쳐나온 적은 없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누가 전파하겠습니까? 롬10:15” 그럴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부르심을 살펴봅니다. 렘1: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에스겔의 부르심을 살펴봅니다. 부르심의 외형은 사람마다 제각기 달라도, 본질은 똑같습니다. 겔2: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2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겔3:1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다니엘의 부르심을 살펴봅니다. 다니엘의 부르심은, 위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처럼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만, 그가 다니엘서에 기록한 수많은 환상과 비전들을 볼 때, 또한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섬기다가, 핍박을 받고, 결국 승리한 것을 보면, 다니엘도, 분명히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선지자였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 외 다른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분명히 자기가 들은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참고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보내심’에 관한 구절들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마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눅1: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눅1:26 참조) 눅4: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요1:5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3:28 나의 말한 바 나(세례요한)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 행13:4 두 사람(바나바와 바울)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롬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고전1:17 그리스도께서 나(바울)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구약의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신약의 예수님도, 사도들도.. 보내심을 받아서 갔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보내심이 없으면.. 전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낸 자가 없이, 어찌 전파하리요?” 롬10:15. 이 말씀을, 목회자 후보생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구절도 나옵니다. 벧전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스펄전은, 그런 개념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양 무리를 치는 자’, 하나님께서 특별히 말씀을 주시는 자.. 그래서 그 말씀으로 양떼를 돌보는, 즉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특별히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명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되어, 말씀이나, 예언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반드시 소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크리스천으로서 일반적으로,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 사명도.. 맞는 말이지만, 그와 동시에, 특별히 성령께서, 말씀으로 양육하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우신 소수의 소명자, 사명자들이 있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그들은, 말씀의 대언자 prophet 으로서 자기 위치와 정체성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처럼 특별히 소명 받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또는 남들이 그를 보면서 ‘미혹 받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의 분위기는, 그런 ‘특별한 부르심’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 사도바울은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한 대사들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고후5:20. 그 말은, 그저 아무렇게나 일반적인 소명을 갖고서, 복음을 전파하러 나갔다기 보다는, 뭔가 ‘대사 ambassador’라고 자처할 만큼, 특별한 부르심을 자기들이 받았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대사’라는 말은, 자기가 파송을 받았다는 말을 강력하게 암시합니다. 만약 자기가 파송 받지도 않았는데, 즉 대사로서 위임되지도 않았는데, 자기 스스로 ‘나는 그리스도의 대사다’ 라고 자처하고 나선다면, 그건 아주 우스운 일입니다. 반대로, ‘대사’로 위임 받은 사람은, 자기가 ‘화해의 직무’를 맡았다는.. 거룩한 사명감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대사는, 보통 두 나라사이에, 화해와 중재의 목적으로 보내집니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대사’ 말고도, ‘청지기’ 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저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그저 일반적인 크리스천 모두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비밀’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뜻하는데, 그 일을 위해서, 특별히 택하신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위 본문에는 ‘맡은 자 steward’로 나옵니다. 모든 일반 신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의무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처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steward’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 스스로 그렇게 자기를, 특별한 사명자로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교만이나 특권의식이 아니라, 목회자는 그런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의식이 없는 사람은, 그런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무조건 ‘복음 전파가 좋은 일이니까, 내가 발 벗고 뛰어들어야지..’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등을 떠밀어서.. 이 길로 들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동의는 필요하지만, 먼저는 자기가 분명한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맡은 자 steward’를, 디도서에서는 ‘감독’이라고 설명하는데요...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딛1:7 이 구절은 감독은 청지기라고 말씀합니다. steward가 곧 bishop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감독이 즉, 청지기가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어떤 이유로도 남에게 비난을 받을 만한 꺼리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디도서에는 목회자로서 세워질 사람은, 검증을 받아야 했습니다. 딛1:7~9. ◑당신의 ‘소명’을 확인 하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딤후2:21. 주인이 쓰시는 그릇이라고, 최고로 좋은 그릇이란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소의 사울이 쓰임 받았던 것처럼, 반드시 뽑혀져야, 즉 부름을 받아야 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9:15. 행20:28절에는 “성령이 너희를 택하여 감독자로 삼았다”고 말씀합니다. 목회자(감독자)는 아무나 자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성령이 택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갈1:1절에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이렇게 바울은, 자기가 분명한 소명을 받아서, 사도가 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자’에 관한 예레미야의 어떤 예언들은, 일차적으로 장차 오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었지만, 부차적으로 예수님같이, 양떼를 칠 참 목회자들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께 응하기를 바랍니다. 렘3: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렘23: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5: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그래서 이런 부름 받은 목회자에게는, 향기가 나게 됩니다. 고후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마치 흔한 토기 그릇에,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귀한 보배를 담을 수 있듯이, 부름 받은 목회자는, 신적인 능력이 그 속에 머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20:26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3:13~14. 예수님이 12사도를 세우셔서, 전도하러 보내시기 전에,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라는 구절에 주의하십시오. 복음의 전파자는, 먼저 주님과 친밀한 교제 관계를 갖습니다. 그 다음에 나가서, 전파하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자기가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소명 받지 않은 목회자는.. 그 목회가 잘 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데.. 어떻게 그 일이 잘 되겠습니까. 소명 받지 않은 목회자는.. 그 목회에 열매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많이 타락해 간다면..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소명감이 불확실한 사람이, 목회를 자원하고, 몸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로 자원하는 사람은, 자기 소명감, 부르심부터 확실히 해야 합니다. ‘부르심을 확실히 한다’는 것은, 그것을 확인하는데, 어쩌면 몇 년이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부르심을 확인한 사람은, 그 뒤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폭풍이 휘몰아쳐도, 그는 자기 길을 꿋꿋이 걸어갑니다. 목회자로, 또는 말씀의 전파자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고, 자원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자기 자신에게도 재앙이고, 또한 그가 돌볼 교회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로, 말씀의 전파자로 부름을 받지 못했으나 그 부르심을 확인하지도 않고, 스스로 자원해서 목회에 뛰어든 사람도, 자기 자신에게도 재앙이고, 또한 그가 돌볼 교회에게도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목회자가 되지 않은, 후보생 여러분들은, ‘자기 부르심’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 자기 부르심을 확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고통의 시간, 오랜 집중적 기도가 필요하더라도, 반드시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동물들은 다 자기 소명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고래나 코끼리나, 자기 소명을 벗어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소는, 하늘을 날려고 하지 않으며, 목초지를 벗어나 고기를 잡아 자기 양식을 삼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은.. 자기 소명을 벗어나서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소명을 제대로 분변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물들도, 본능적으로 자기 소명을 분변할 수 있다면, 사람이 왜 못 분변하겠습니까. 기도하면서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