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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독일의 사회적 개신교에 관한 연구/ 2002-03-20
19세기 독일의 사회적 개신교에 관한 연구 들어가는 말 신학의 직무 중 중요한 것은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는 일이다. 특히 역사의 미래의 방향과 삶의 가치관이 불확실할 때 신학은 그 시대 자기 존재의 의의를 분명히 들어내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 보다 넓게 말해서 전 지구적으로 퍼져있는 신자유주의 삶의 질서는 과연 우리에게 보다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하며, 더불어 사는 인류 공동체를 담보해 주고 있는가? 역사 속의 어떠한 경험적 사실도 도대체 오늘 우리들에게 새로운 활로에 암시를 주지 못하는가? 교회와 신학의 어떠한 가르침도 미래의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 소위 신자유주의적인 삶의 원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한 사회 체제의 원리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 이 삶의 원리는 성서와 교회가 가르쳐온 인간 삶의 질서에 가장 근접한 것인가? 만일 이러한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신학과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사 경험 속에서, 그리고 성서의 가르침과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서 새로운 삶의 가치질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현 상황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본 논문은 독일의 19세기 사회와 기독교의 역사적 경험을 분석하여, 한국 기독교의 과제의 전망에 도움을 제공하고자 한다. 독일의 사회적 기독교는 기독교와 교회가 어떠한 시대적 과제를 짊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이러한 과제를 신학적으로 해명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기독교는 자율성과 평등의 기치 아래 함께 사는 세상을 목표로 하며,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 노력하였다. 오늘날 사회적 기독교의 전통은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으며, 사회적 공간의 확장 속에서 망명자를 위한 활동, 부패에 대한 투쟁, 외국인 노동자의 지원, 제3세계의 원조, 왜곡된 사회구조, 불공평한 세계질서, 독재와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저항운동, 민주주의와 책임적인 복지 활동, 소득분배와 자유 등,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개척하고 있다. 사실 사회적 기독교는 초대교회 이후에 망각되었던 이웃 세계에 대한 관심의 재생이다. 1. 산업화 과정과 사회문제 1. 1. 산업화 과정 근대의 사회 경제적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소위 "산업 혁명"이다.(Brakelmann, soziale Frage, 13) 이 혁명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의 초에 걸쳐있기 때문에 산업혁명의 과정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시기에 많은 농민들이 도시의 부랑노동자로 전락하였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를 방황하기 시작하였으며, 산업혁명에 의한 공업화는 노동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Greschat, Das Zeitalter, 27) 이런 초기 산업혁명의 특징인 공장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은 빈민이나 고아원 출신, 또는 강제 노동소나 교도소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사회는 인간의 노동을 교육하는 학교로 보았다. 이 시기의 노동관계는 긴 노동시간과 낮은 임금이 특징인데, 이 사실 뒤에 부지런함을 칭찬하며 태만한 생활을 비난하는 개신교적-청교도적인 견해가 숨겨져 있다. 이 새로운 정신의 분위기는 공공 생활의 전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고, 개인의 이해를 신성시하였으며, 이것은 곧 낡은 사회적 결합을 파괴하였다. 새로운 경제 정서를 담지한 계층은 의회의 입법을 통해서 그들의 관심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자유주의적인 입법화의 시대이다. 이 새로운 경제 정서와 경제 실천을 추진하는 자들은 경제적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며, 절약과 강력한 경제 활동을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형태로 파악하는 개신교적 자유교회에 소속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혁명에 앞서 정신적인 방향의 전환이 없이는 기계가 발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계몽과 자유주의이다. 이 정신은 경제적 자유의 의미인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와 연결되며, 이 정신은 정치적 중상주의와 반대된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국가의 규제반대, 개인의 경제적 자유, 경쟁의 자유, 계약자유의 원리 등의 사고구조를 갖는다.(Brakelmann, soziale Frage, 20 이하) 그러나 후발 산업국가로서의 독일은 자유주의적인 정서가 지극히 나약하였는데, 이것은 자유주의가 이념적으로 개인에 대한 사회적 보호의 정신이 강하기 때문이며, 또한 여기에 기독교 사회사상과 전통적인 독일의 가부장적인 가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Rimlinger, 107 이하) 그러나 독일 자유주의는 19세기의 50년대 말에서 70년대 중반기에 만개되었다. 이것은 급격한 경제성장에 대한 낙관과 프러시아 중심의 독일통일에 의해서 고양되었으며, 자유방임과 자유무역은 독일을 경제적 보호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Rimlinger, 120 이하) 독일의 산업은 70년대와 80년대에 처음으로 영국의 발전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증가와 함께 집중화 과정이 연결되어, 밀접한 공간에 거대한 공장이 집중하였다. 여기에는 교통, 특히 철로와 배의 길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또한 금융기관을 통해 산업국가에 필요한 거대한 자본이 조달되었다.(Seraphim, 122 이하) 1. 2. 사회문제 사회 문제는 이 시기에 넓은 의미로 "산업화를 통해서 일어난 인간 실존의 모든 위기"이며, 좁은 의미로는 이러한 위기에서 임금노동자들이 심하게 겪는 계급의 사회문제이며, 19세기 노동자의 문제이며, 제4 신분의 현존 사회체계로의 통합이며, 그리고 이것과는 분리될 수 없는데, 이러한 노동자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이념과 조치들이며, 제국 탄생 10년 전에 이것에 대한 상위개념 "사회정책"이 형성되었다.(Schick, 4) 초기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자들의 사회적 상황은 극히 비인간적이었다. 공장 내의 위생시설은 전혀 없었으며, 육체적 상태는 파멸이었고, 45세가 되면 쓸모가 없었다. 노동시간은 12시간에서 16시간이며 여성과 아동도 힘겹게 공장에서 학대되었다. 대부분 노동자는 방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거상태는 엉망이었다. 노동자들의 비참함은 가정과 고향의 옛날 관계가 파괴됨으로써 심화되고 사회로부터 배제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사회적 퇴화의 감정은 노동자들의 정신에 빈곤 그 자체처럼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기에 완전한 무산화가 이루어졌으며, 이제 처음으로 옛 사회 질서에 위협을 주는 새로운 계급에 관해서 말해 진다. 경영의 집중과 대 경영으로의 발전은 의존된 임금 노동 계급을 출현하는 전제가 되었다. 이제 처음으로 노동자들은 주변 인물이었던 사회에서 자신의 경제적 중요성에 따라서 점점 사회적-정치적인 삶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전의 경영자들이 오랜 노동시간과 낮은 임금을 통해서 이익을 얻었다면, 이제 경영은 기계화를 통해서 보다 높은 임금과 노동시간의 단축을 가져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어떠한 법적 보호도 아직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병들거나 노후에는 대부분 빈민 구호소로 보내진다. 노동자들은 완전히 불안한 실존에 놓여 있으며, 그들의 단순한 노동력과 일반적인 경제적인 시장 상황에 의존되어 있다. 사고와 실업이 항상 그들을 덮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로 자신을 누르는 낯선 힘들을 느끼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경영의 한 구성요소지만, 사회적으로는 시민 사회의 주변부의 최하층에 속하며, 정치적인 책임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배제되었다는 감정과 절망감이 무산자를 지배하였다. 이제 시민-자본적인 체계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력이 탄생되었으며, 경제적인 의존성과 사회적인 중요성의 상실 그리고 정치적인 미성년 의식에서 무산자의 해방 투쟁에 들어섰다.(Brakelmann, soziale Frage, 40 이하) 1. 3. 노동운동 독일의 초기 사회주의는 1848년의 혁명기간과 그 이전에 적지 않는 정치적 역할을 한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와 반대로 그 시대의 정치적 사건에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단지 이념으로써만 존재하며, 재단공인 바이트링(Wilhelm Weitling: 1808-1871)과 유대출신 지식인 헤스(Moses Hess: 1812-1875)를 통해서 대변된다. 바이트링은 독일 하녀와 프랑스 장교의 결혼하지 않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서 독일의 비밀 단체인 "의인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현대적인 선동가와 직업 혁명가의 타입이다. 그는 엄격한 도덕적인 척도에 의해서 사는 공산주의적인 노동자 교육연맹을 세웠다. 그에 의하면 화폐가 사회를 탈 도덕화 시킨다. 타락한 사회에 대한 피의 심판으로써 재난이 있으며, 이후에 무산자의 독재가 뒤따르고, 그 다음에 조화, 사랑과 자유로 가득찬 새로운 공산주의적인 인류의 왕국이 열린다. 공산주의적인 인류의 원형은 바이트링에 의하면 나자렛의 예수다. 그의 책 "가난한 죄인들의 복음"(1844)에서 그는 예수의 삶의 원칙을 자유와 평등의 것으로 보았다. 그는 가정을 부정하였으며, 사회적 전쟁을 설교하였으며 그리고 소유에 대하여 어떠한 고려도 하지 않았다. 바이트링은 매우 강력하게 사랑과 기독교적인 신앙을 얻고자 노력하였다.(Grebing, 26 이하) 맑스(Karl Heinrich Marx)는 1818년 유대 출신의 변호사의 아들로 트리어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1817년 직업 때문에 개신교로 옮겼으며, 자녀들도 세례를 받게 하였다. 고등학교 자격을 마친 후 그는 1835년 본 대학에 법학도로서 입학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 베를린에서 역사와 철학에 몰두하였다. 1841년 그는 철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맑스는 본 대학 교수직 응시에서 반동시기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탈락한 후, 1842년 자유주의적인 좌파 신문인 쾰른의 라인 신문의 주필이 되었으나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날카로운 비판 때문에 퇴직당하였다. 그는 결혼을 한 후, 파리에서 푸르동을 알게 되었으며, 시인 하이네와 만났고 무엇보다 여기서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삶에 대한 우정을 쌓았다. 그는 금지된 노동자 모임의 참석 때문에 파리에서 추방당해 브뤼셀에 정착하여,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런던에서 "공산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였다. 이 연맹의 위임을 받아 공산당 선언을 1848년 2월에 출판했다. 같은 해에 푸르동에 대항하여 "철학의 빈곤"을 저술하였다. 공산당 선언은 젊은 맑스와 엥겔스의 모든 철학적 국민경제사상의 요약이며, 여기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결과를 끌어내었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 생애 마지막까지 역사적이고 국민경제적인 연구에 헌신하였다. 그는 중단없이 박물관에서 일하였으나, 그의 가족은 엥겔스의 도움에 의지하여 가난한 상태로 살았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 런던에서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맑스가 이미 40년대 초부터 생각해온 것이었다. 공산당 선언의 첫머리에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시작한다. 사회적 상황의 발전을 맑스는 계급투쟁의 결과로 보았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과 국민경제학 비판에서 무산자의 인간상실을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상실로 전개시켜 나간다. 공산주의는 이러한 인간소외를 가져오는 사유재산을 파기하고 인간을 통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존재를 현실적으로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자체가 역사의 긍극적 목표가 아니라고 한다. 공산주의는 단지 현상황을 파기하는 현실적 운동일 뿐이다. 새로운 미래는 비밀로 남겨져 있다.(Grebing, 28)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라살레(Ferdinand Johann Gottlieb Lassalle: 1825-1864)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825년 부유한 유대출신의 비단 장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마친 후 베를린에서 철학과 언어학을 공부하였으며, 파리 여행 중에 시인 하이네를 만났으며, 중요한 정치적 희망을 갖게 되었다. 1848년에 맑스를 사귀었고, 혁명 후 그는 체포되어 베를린에 1857년까지 수용되었다. 그후 개인교사로서 조용하게 보내는 동안 철학적이고 법률적인 논문을 서술하였다. 맑스와 그의 관계는 유지되었으나 성격 차이로 결코 더욱 가까워질 수 없었다. 1862년 초부터 1864년까지 그는 독일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Grebing, 50 이하) 라살레는 당시 독일의 공공 삶과 사고를 지배하는 자유주의에 공격의 화살을 당겼다. 진보 정당과 다른 "사회적 개혁"에 대립해서 임금노동자의 정치적 정당결성을 통하여 노동자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였다. 노동자 계급의 조직된 정치적 힘을 통해서만 자유와 모든 평등의 이념이 실현되어야 한다. 정치적 해방의 첫 수단은 보통 선거권과 평등 선거권이며, 이 선거권의 도움으로 국민은 국가를 세울 수 있다. 국가에 의해서 노동자 계급을 지배하는 잔인한 노임철칙으로부터 해방시킨다. 한 민족 안에서 생존을 연맹하고 번식에 필수적인 생활필수품에 대한 평균노동임금으로의 제한은 잔인한 법칙이며, 이것에서 해방되는 길은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고유한 경영으로 나아갈 때에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의 자발적인 회사를 유일한 대안으로 보았다. 그는 합리적 정치의 힘으로 시민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였다.(Brakelmann, soziale Frage, 87 이하) 모든 노동 운동의 시작들은 50년대의 반동기의 경찰조치에 의해서 거의 완전히 파멸되었다. 60년대 처음으로 사회주의 노동당 출현과 관련해서 역시 노동조합 운동이 새로운 부흥을 하였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작센 주정부는 1861년 노동자들에게 동맹의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1869년 북부 독일 연맹을 통해서 일반 영업자유의 허가와 관련해서 역시 노동자들에게 동맹권을 인정되었다. 사회 지배계층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노조운동은 진보하였다. 그것은 이제 지역 연맹을 넘어서 국가 영역의 거대한 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사회주의자 법을 통해서 갑자기 정지되어, 중앙연맹은 해체되고, 문헌은 금지되었으며,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혹은 추방당했다. 그래서 노조 역시 지하에서 작업하도록 강요받았다. 1890년 사회주의법 폐지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시작이며, 자유 노조의 전체운동을 위한 "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가 창립되었다. 본래의 노조운동을 노동계급의 대중 조직으로써 가능하게 하는 이 조직은, 현존하는 국가와 경제의 중앙 중심주의에 대해 강력히 대항하는 데 필수적이 되었다. 노조는 직업에 따라서 조직되었고, 전 제국 위에 중심적으로 조직되었다. 모든 개별 연맹은 총위원회 안에 집중되었다.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중앙연맹이 그들의 행동에서 완전한 주권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그 지도부는 노조의 전체 이해를 위해 연대적인 공동작업을 한다. 자유 노조는 90년대에서 제1차 대전까지 강력한 부흥을 이루었다. 노동조합은 1890년에서 1914년까지 큰 업적을 이루었는데, 임금수준이 증가하고, 사회 안전망이 건설되고, 국가의 입법에서 노동계급의 중요성이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덕분이다. 노조는 실질적으로 여러 방법으로 노동하는 국민을 변호하였다.(Brakelmann, soziale Frage, 100 이하) 2. 사회적 개신교 운동 기독교 교회는 모든 시대에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그들의 과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돌보는 행위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 이웃사랑에 놓여 있다. 동시에 사람들은 이러한 가난을 개인적 운명(불행이나 개인적 죄, 질병)이거나, 혹은 구원받지 못한 시대의 불완전의 표지라고 보았다. 또 이러한 기독교적인 사랑을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상태와 결합시키고, 또 나아가서 이 결합을 신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더욱 먼일이었다. 여하튼 19세기초에 활동한 자선적인 노력들이 새로운 과제를 이해하기 시작하였으며, 강력한 목회적인 추동력은 경건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Kupisch, 95)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사회적 개혁 행동의 필연성은 빌헬름 시대와 함께 증가하였다. 이미 본질적으로 교회 안에서, 정치 그리고 사회에서 초기에 존재한 사회적 실험들과는 달리, 빌헬름 2세의 정부 진입과 비스마르크 시대의 종말과 함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다는 감정이 보다 확대되었다.(Kaiser, 94) 사실 빌헬름 2세의 정부 진입 이전에 그의 새로운 사회정치적 입장이 보였는데, 빌헬름 1세가 궁중설교가 아돌프 스퇴커의 정치적 선동에 화를 내며 갈라지고자 했을 때, 빌헬름 왕자는 스퇴커를 위해서 개입하였고, 궁중설교가로 그렇게 지내도록 그의 할아버지를 움직였었다.(Besier, 111) 2. 1. 사회적 개신교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의 개신교를 일반적으로 신개신교라 칭한다. 이 시대 개신교의 배경이 되는 사상적 흐름은 르네상스, 인문주의, 계몽주의, 독일 관념론 등이며, 특히 자유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특성이 강하다.(백용기, 106) 이 근대 이후를 특징짓는 개신교를 소위 "문화 개신교"라고도 하는데, 이 용어의 창시자는 알 수가 없다. 신개신교 또는 문화적 개신교 시대의 신학적 그리고 교회 정치적인 모든 종류의 모든 방향에 대한 표지는 세상과 기독교적인 고백,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 사이의 통합이 중요한 문제였다.(Schick, 1-2) 문화적 개신교는 자유주의 신학의 각인을 묘사한다. 계몽주의 유산의 상황 속에서 그리고 거기에서 출발한 시민적인 해방운동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와 현대문화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은 문화 개신교와 자유주의를 하나로 연결하였다. 신학사적인 연구에서 그라프(Friedrich Wilhelm Graf)는 "문화 개신교"의 개념을 세 가지 방법으로 사용하였다.(Langner, 227) 첫째는 쉴라이엘마허에서 트뢸취까지, 두 번째는 내용적으로 마틴 라데의 잡지 "기독교세계""의 영향 아래서 리츨과 리츨학파에 제한하여, 세 번째는 황제 통치하의 독일에서 개신교 교양 시민층의 가치세계의 표시로 사용하였다. 아무리 늦어도 1904년 이후에 사용되어진 개념인 "문화개신교"는 비판적으로 평가 절하된 낯선 표현으로써 개신교 자체로부터 나왔다.(Graf, 230) 문화 개신교의 근본적인 관심은 한편에서는 기독교 사이의 간격을, 다른 한편에서는 현대 문화와 종교적인 세계경험 차이를 극복하고자 하며, 그리고 세상의 도덕화의 새로운 시도를 통해서 기독교적 가치가 전체 사회에서의 중요성을 상실하는 것을 극복하고자 한다.(Langner, 228) 자유주의 신학의 그리고 동시에 문화개신교의 근본문제는, 한편에서는 현대의 신학적 그리고 정치적 형상의 토대에 대한 자율성의 원칙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동시에 이러한 기본원칙을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제한하려는 노력 속에서 보여진다. 그러한 제한은 문화 개신교 안에서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설정된 윤리가 개인을 넘는 구조, 즉 구조적 제도 윤리가 없는 곳에서는 문제성 있게 드러난다. 근대의 이 문화적 개신교와 함께 이 시대의 운명적인 문제인 "사회적 문제"를 근대 개신교인 신프로테스탄트는 필수적인 과제로 취급하였다.(Langner, 229) 2. 2. 각성운동의 사회봉사 19세기 전반기는 개신교의 사회 운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경건주의 운동 속에 내포된 각성운동은 개인의 신앙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요구하였다. 각성운동을 통해서 새롭게 변화된 경건한 개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개신교적 사회운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들, 고아들, 병자들을 돕는 자선에 뛰어 들었다. 1813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전쟁 고아들이 발생하였을 때, 청소년 보호운동의 첫 주자이며, 괴테의 친구인 팔크(Johannes Falk: 1768-1826)는 "기근 속의 우정회"를 세웠다. 이 회는 독일의 고아를 위한 첫 구제기관인 바이마르의 루터의 집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비슷한 일들을 베스트팔렌의 젊은 귀족인 폰 데어 렉케(Graf von der Recke von Volmarstein: 1791-1878)가 수행하였으며, 1820년 슈바벤의 법률가이며 교육가인 쩰러(Christian Heinrich Zeller: 1779-1860)는 "빈민학생을 위한 자원교사기관과 빈민아동자원기구"를 세웠다. 이 기구는 슈바벤 지역의 경건주의가 바탕이 된 독일 남부 구호소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시대의 중요한 인물인 남작 코트비츠(Ernst von Kottwitz: 1757-1843)는 쉴레지엔 주에서 형제단을 통하여 활동적인 기독교 신앙인이 되어 자선 활동을 하였다. 그는 쉴레지엔에 특별한 직물 공장을 세웠으나, 곧 모든 재산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베를린에서 초라한 형편으로 살았지만, 베를린 각성운동의 중심이었으며, 실업자들을 위해 "취업 자원기구"를 세웠다. 개신교 사랑을 실천한 이 네 명의 대변자는 모두 각성운동에 깨우쳐진 평신도들이었다. 비록 이들이 개인적인 봉사차원에 머무르지마는, 이들은 기독교의 삶의 현장에서 제자도를 증명한 예이다. 이들의 시대는 개인주의적이며, "사회적 봉사"의 단계는 다음 세대를 기다려야 했다.(Brakelmann, soziale Frage, 116 이하) 2. 3. 비헤른 사회적 개신교 운동의 중요한 주창자는 비헤른(J. H. Wichern)이며 그의 내방선교는 교회의 사랑을 조직된 활동으로 전개하였다. 비헤른은 함부르크에서 소시민 계층의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미 무산자적인 삶을 체험하였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15살 때부터 가정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함부르크의 각성운동 친구들이 고등학교와 대학공부를 가능하게 해 주었으며, 학창시절에 낭만주의적 예술과 문학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신학공부를 한 후, 자기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할레의 플랑켄 고아원을 방문했다. 함부르크에서 시험을 마친 후,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호른에 "광야의 집"을 세웠다. 이 기구는 공동체 원칙이 지배하며, 기도와 노동이 생활의 두 축이었다. 민속음악, 교회음악, 그리고 후일의 직업활동을 위한 교육과 휴식을 위한 체조, 놀이 등이 이루어졌다. 비헤른의 교육목적은 자유로운 기독교적인 인격을 함양하여 국가와 교회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이 광야의 집은 어려웠지만 해마다 성장하였다. 1844년에는 광야의 집 형제 기관인 구호협회가 설립되어 내방선교의 모든 일을 위해 교육되었다. 이와 더불어 비헤른은 남성 봉사기구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 해에 내방선교의 기관지인 "광야의 집 소책자"가 출판되어, 시대의 문제와 내방선교의 과제에 대한 베헤른의 중요한 모든 논문들이 발간되었다. "내방선교"라는 표지 그 자체도 비헤른에게서 유례하며, 이 말을 그는 "구원하는 사랑의 행위를 통한 신앙고백"으로 결정하였다. 내방선교는 신약성서에 모든 그리스도교적인 공동체가 행하는 봉사를 지칭하며, 외부의 파멸의 힘의 지배에 떨어진 기독교 대중들을 내적 외적으로 새롭게 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행동을 강요하는 사랑의 실천이 중요한데, 신앙으로부터 곤궁과 어려움에 대항하는 사랑이 내방선교 출발의 시작이다. 비헤른은 베를린에서 1848년 3월 혁명을 체험하였다. 그는 또한 독일 통일이 주요한 문제가 된 9월의 비텐베르크 교회의 날에 참석하여, 유명한 즉석연설에서 내방선교의 실천적 문제를 언급하였다. "사랑은 나에게 신앙처럼 속한다"라는 문장은 정점이다. 그의 연설에 참석한 500명은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곧 상설 중앙위원회 결성을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프로그램을 작성해야 했는데, 이것이 곧 "독일 개신교의 내방선교"이다. 그는 중앙위원회의 위임을 받아 작성한 독일민족에 대한 "백서"이며, 자신의 생각을 1849년까지 정리하였다. 1872년부터 보델슈빈(Bodelschwinh)이 이 기구의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비헤른은 7년간의 병고 끝에 1881년에 사망했다.(Brakelmann, soziale Frage, 119 이하) 비헤른은 19세기 개신교의 뛰어난 인물이며, 현대 개신교 사회적 사상의 한 선구자다. 그는 대량 빈곤의 뿌리가 경제적인 구조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는데, 자연적인 빈곤 이외에 인위적인 가난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가난, 무산계급의 운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해결도 역시 개인적인 도움이나 자력으로 극복될 수 없으며, 체계적인 대량 구호사업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호소에만 머물렀을 뿐, 사회개혁에 대한 실제적인 제안들을 하지 못했다. 혁명과 혁명정신에 대항한 투쟁은 그에게 있어서 무신앙에 대한 신앙의 투쟁이었다. 그의 혁명에 대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는 단순화는 어둠(=공산주의 등등)에 대한 빛(=교회와 내방선교)의 투쟁의 형식 속에서 내방선교를 사회적 복고세력과 결합하게 하였다. 이 결과 내방선교는 빠르게 반혁명적인 기구가 되었으며, 국가의 적은 "자동적으로" 내방선교의 적이 되었다. 비헤른과 내방선교는 낭만주의적이고 이상적이며 기독교적인 국가를 꿈꾸는 빌헬름 4세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의 문제는 항상 새로운 현상을 낡은 사회적 구조 속에 끼어 넣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세속화의 과정에 대항하여 단지 복음화 만을 요청하였으며, 또한 기독교적인 사회 이념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정신적이고 신학적인 반동으로 옮겼다. 한편 그에게는 낭만주의적인 국가학으로부터 전수받은 유기체적 사고 외에 국가와 교회의 모호한 병렬, 하나님 나라 사상 그리고 현재와의 실제적 대화를 방해하는 그의 하나님 사상과 연결된 역사 이해 등이 있다. 기독교와 사회주의, 교회와 노동자층의 관련하여 세속운동의 세계를 비헤른은 신학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Brakelmann, soziale Frage, 138 이하) 2. 4. 내방선교 비헤른의 백서를 통해서 내방선교(Innere Mission)의 프로그램과 기본 사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 백서는 혁명의 해 1848년에 탄생하였는데, 내방선교의 과제는 분명히 혁명의 탈질서에 있다. 내방선교는 개별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탄생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전체적인 일이다. 이러한 일의 뿌리는 그리스도이며, 내적, 외적인 곤궁을 없애는 것이 기독교적이고 구원하는 사랑이 된다. 내방선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습득되고 파괴될 수 없는 삶의 통일성을 다음과 같은 곳에서 파악하는 데, 이것은 국가와 교회 안에서, 민족과 가정에서, 기독교 사회의 모든 지체들 속에서 필요한 삶의 구원하는 힘을 영향력 있게 한다. 내방선교의 활동의 중심점은 가정, 국가 그리고 교회이다. 세 가지 모두 내방선교에 무조건적으로 신적이며 살아서 서로서로 영향을 준다. 가정은 사회적 문제의 출발점이 되며, 여기서의 교육, 소유, 일 그리고 이것들을 통한 신분관계의 변화 및 중생은 내방선교의 주된 과제다. 또한 내방선교는 국가의 과제에서 자신의 과제를 구별하며, "세속권세의 이러한 신적인 추진"을 다시금 대중들 속에 인정하도록 한다. 내방선교는 "국가가 자기의 영역에서 이러한 기독교의 자비, 지혜 그리고 힘의 증명을 언제 그리고 어디서 요구할 때에" 국가에 자유스럽게 봉사하고자 한다. 국가로부터 내방선교는 자유로운 협회의 권리를 자신의 편에서 기대한다. 내방선교의 국가적 영역에서 과제는 백성들의 도덕적인 삶과 본질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혁명은 신실함의 붕괴이며 경외의 무덤이다". 따라서 이러한 혁명과 함께 도덕성이 붕괴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혁명으로부터 백성을 구원해야 하며, 무신론의 선포와 사탄주의의 혁명에 대한 투쟁이 내방선교의 과제이다. 내방선교는 교회 자체의 삶의 한 면을 계시하며, 잃어버린 보호받지 못한 대중을 찾는 신앙적인 사랑이다. 이런 대중들은 반그리스도적이고 사탄적인 시대 정신에 빠져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에 대한 투쟁이 내방선교의 과제다. 그러나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많은 공동체가 있으며, 또한 너무 거대해서 정상적으로 돌볼 수 없는 공동체들도 있다. 이런 교회들은 국민 생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죽어 가는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을 살리는 것이, 즉 성서의 보급과 사용, 가정 예배, 성서연구, 도서관 설립, 종교서적 출판 등이 내방선교의 과제이다. 빈곤이 더 이상 개인적이 아니며, 사회전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내방선교는 개별 공동체를 넘어서 백성과 국가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자신들의 내적인 빈곤에, 즉 대중의 도덕적이고 기독교적인 변질에 대해 영향을 미쳐야 한다. 내방 선교의 우선적인 과제는 "대중의 도덕적인 몰락을 제거"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일반 도덕적인 일만이 아니라, 사회적 영역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대도시에서의 교회적-사회적 일은 긴급하다. 내방선교는 이런 도시들에서 가정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교회적-사회적 단체들은 교회의 공무에 포함되어 "도시선교로서의 내방선교 연맹"을 결성했다. 비헤른은 이러한 도시선교의 모델을 제시하여, 팜프레트 출판, 국민도서관 설립, 수공업 동맹의 기구, 봉사제공, 학교 설립 등의 과제를 세분하였다. 가정은 계속 해체되고 어지러워 졌다. 황폐화된 결혼, 경솔하게 헤어지는 부부 그리고 미혼모를 통한 자녀들은 보호자 없는 어린이들이었다. 어른들과 어린이들은 타락하였으며, "기독교뿐만 아니라, 일반 도덕에 대한 감각이 여기서 몰락되었다." 악덕과 범죄가 여기에 있으며, 특히 대도시들 안에 심하다. 비헤른은 여기서 빈곤의 원인과 악순환이 도덕의 타락에 원인이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국가 경제를 통해서 제거되어야 하는 다른 부적절한 산업의 상태가 또 다른 곳에서 대량빈곤의 생산에 공헌한다. 이러한 경우가 생기는 곳에 도덕적으로 선한 가정이 빈곤화의 비참함에 마침내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탈도덕적인 군중의 거대한 위험과 비슷한 외형적인 상황의 몰락으로 내 던져져, 이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비슷한 수준이 된다."(Brakelmann, soziale Frage, 122 이하) 비헤른은 흔들리는 가정의 재생이 (빈민자를 위한) 임산부 연맹, 유치원, 일요학교, 어린이 예배, 어린이를 위한 구호기관 등등을 통해서 도달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빈민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시민적인 빈민 구호 활동에는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단지 법률과 기록된 도식에 의해서만 빈민구호를 하며, 가난한 자들의 도덕성을 위험하게 하며 부분적으로 이를 파괴하며 그리고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의 요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며], 빈자들은 국가의 자선 기구를 통해서 사랑을 믿도록 배우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방선교의 빈민 구호 활동을 통해 국가의 자선 기구를 관철시켜 나가는 것이 내방선교의 과제다. 비헤른의 사회 문제에 대한 극복의 원리는 "혁명의 원리"가 아니라, "기독교적인 재생원리"이며, 이것을 그는 실천을 통해서 발전시켰다. 수공업단체를 공산주의 교육으로부터, 노동자들을 자조로 이끌어 내어, 모든 백성을 "기독교적-사회적인 것"(Christlich-Soziale)으로 이끌어 내어야 했다." 비헤른의 사회개념은 근본적으로 유기체적이다. 개개의 기독교 백성들, 국가, 교회, 가정 그리고 신분은 특별한 방법으로 질서 지어wu 있는 하나의 거대한 기독교적인 사회 유기체이며, 이것의 창시자는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살아있는, 인격적인 원리"이다. 가장 상위의 유기체인 기독교계로부터 가장 가까운 유기체인 백성으로 이루어진다. 국가, 교회 그리고 사회는 모든 질서의 주인인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는다. 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이 그리스도가 세 가지 제도의 공동의 주인이며 중심이 된다. 또한 국가는 외형적인 복지와 질서를 유지하며, 경제를 최종 결정한다. 세상적인 재산이 국가에게 책임지어지는데 이는 인간의 공동 삶을 파괴하려는 죄 때문이다. 교회는 기독교 정신의 망대며, 전체 백성의 삶에 대한 영원한 토대이며 구원의 샘물을 제공한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며 믿는 자의 공동체다. 이 교회의 최상의 존재는 성령, 자유이다. 비헤른의 기독교적 국민 유기체는 "국가와 교회, 국민과 가정, 기독교적 사회의 이 모든 지체들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지고 부서질 수 없는 삶의 통일체다." 이 이념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역사관과 결합한다, 즉 역사 발전의 최고의 통일점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관련되며,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발전한다. 반기독교적인 힘에 대한 투쟁 속에서 이것은 결국 역사적 과정 속에서 관철된다.(Brakelmann, soziale Frage, 133 이하) 2. 5. 토트 루돌프 토트(Rudolf Todt)는 1839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브란데부르크의 지방목사로, 1880년부터는 감독(Superintendent)으로 일하였으며, 1887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시골 목사 시절부터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하여, 사회민주주의 언론과 문헌을 추적하였다. 1872년 말에 "기독교 국민일보"에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립프트네히트의 사회주의에 대한 논문을 기고하였다. 스퇴커의 자극으로 1877년 "급진적 독일 사회주의와 기독교 사회"라는 책을 출판하여 곧 유명하여졌다. 이 책은 70년대의 개신교 신학자와 독일 사회민주주의 노동당의 급진적 사회주의와의 최초의 학문적 논쟁이었다. 그러나 토트는 사실 개신교-사회운동에서 망각되어온 인물이다.(Brakelmann, Kirche, 111 이하) 그는 사회의 경제적인 삶 속에서 이중의 경향을, 소수가 부를 집중하는 것과 가난한 자가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가난한 자와 부자의 사회적 분열은 커지며, 중간층이 무너져서, 결국 자본가와 의존 임금 노동자만이 남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비인간적인 삶을 야기하며, 임금은 최저생계만을 보장할 뿐이다. 그는 맑스의 계급투쟁 이론이나 라살레의 임금 철칙설에 동의하였다. 그가 분석한 사회 퇴화의 정신적 원인은 소위 만체스타 자본주의인 경제적 자유주의에 있다. 이런 지나친 개인주의는 사회를 도덕적으로 붕괴시키며, 이 결과가 현대의 혁명적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급진적-사회주의적 사회비판은 그 시대 교회적-신학적 영역에서 토트가 유일회적이다. 그의 독특성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있다, 즉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자는 우편에 국민경제를, 좌편에 사회주의자들의 학문적 문헌을 그리고 앞에는 신약 성경을 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하나가 결핍되면 해결은 벗어나게 된다. 이 세 가지는 밀접하게 속한다." 이 문장을 통해 최초로 사회주의와 기독교 관계의 대화의 원리가 요약되었다.(Brakelmann, Kirche, 113 이하) 토트에게 기독교 윤리는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윤리적인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사회주의적인 원리들과 대결하기 위해 신약성서를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적인 개념을 분석한 후 그것을 신약성서에 대립시켰다. 그런 후에 오늘의 사회 형태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를 묻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경제와 정치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역사적 운동이며, 역사적인 권리이며, 역사적 필연성이며, 또한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이념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 교회에서 전혀 받아들이기 힘든 견해였다. 동시대인에게 공산주의는 인간 이하의 활동산물이었으나, 토트는 공산주의가 생산수단의 개인소유 폐지를 통해서 인간의 이기심을 지양한다고 인식하였다. 토트에 의하면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공동의 토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하다. 이 필요성은 세계의 파괴와 인류의 소외,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재통합 때문이다. 그는 비교적 간단히 무신론에 대해서 설명하였는데, 무신론은 사회주의의 본질이 아니며, 시민적-자유주의적 종교 적대성과 철학적 유물론의 시대에 대중 선동을 위한 하나의 부과물일뿐이다. 기독교적 정신만이 사회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관철할 수 있으며, 단지 기독교 사회주의만이 참된 사회주의의 유일한 형상이다. 그는 기독교적인 노동이론과 가치론을 전개하였다. 산업사회 체제의 인간에게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과제다. 기독교의 과제는 인격과 가치를 다시 얻게 하는 것이며, 이것은 현대 사회에 대한 교회와 기독교의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은 인간적인 사회성에 대한 휴머니즘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며, 이러한 과제의 완성은 진보적인 인간화가 최고의 과제인 기독교 사회주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적 개신교의 역사에서 토트의 중요성은 그가 대중적인 국민경제이론을 묘사하였고 그리고 학생들에게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것을 의무로 신학적 연구의 개혁을 요구한 것이다. 신학과 국민경제의 대화를 수행하기 기독교 사회과학 과목의 개설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대화를 위해 스스로 "신학연구와 사회과학 연구 사이에 내적 관련과 필연적인 결합"이라는 제목의 작은 팜프렛을 저술하였는데, 이 작품은 이제까지 잊혀졌던 개신교-사회적 운동의 유일한 자료이다. 토트는 국가의 개입을 신학적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회정치적인 요구의 중심점에 세웠다. 그는 고유한 기독교적-사회적 정당창설을 호소하였으며, 사회문제를 체계적으로 관계하는 연맹을 설립하였다.(Brakelmann, soziale Frage, 153 이하) 2. 6. 스퇴커 아돌프 스퇴커(Adolf Stoecker: 1835-1909)는 하급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학 학업을 마친 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그는 일찍이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1874년 황제에 의해서 궁중과 성당의 목사로 베를린에 갔을 때, 여기서 그는 교회와 기독교로부터의 계속된 하층민 몰락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자가 되었다. 그는 내방선교와 도시선교의 과제에 헌신하였지만, 이러한 상황이 내방선교에 의해서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였다.(Kupisch, 103) 스퇴커는 종교적으로 각성운동을 통해 결정되며, 신학적으로 정통주의에 속한다. 이는 성서에 대해 역사-비판적인 연구, 기독교와 현대 문화 그리고 학문성의 통합이 중요한 신학적 자유주의에 반대를 의미하며,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왕권과 재단의 분리를 선전하는 교회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설교가의 한사람이었다. 첫 번째 개신교-사회적 정당인 "기독교-사회 노동당"이 스퇴커에 의해서 1878년 1월 3일 베를린에 창립되었다. 이 정당과 함께 개별 봉사의 의미인 내방선교로부터 사회개혁 의미의 사회정책으로 단계를 실행하였다. 이 정당의 창당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와 함께 정치적 삶으로의 첫 단계가 시작되었다. 스퇴커의 기독교 사회 노동당의 기본강령은 다음과 같다. 1. 기독교-사회 노동당은 기독교 신앙과 왕과 조국에 대한 사랑의 토대 위에 있다. 2. 이 정당은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를 비실제적, 비기독교적 그리고 비애국적인 것으로 비난한다. 3. 이 정당은 국가 생활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필연적인 실제적인 개혁을 건설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평화로운 조직을 추구한다. 4. 이 정당은 목적으로써 부자와 가난한자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거대한 경제적 안정을 가져오도록 추구한다. 한편 스퇴커 운동의 특징적 사건은 황제생일의 축하다: "베를린의 거대한 강당에서 축제가 거행되었다; 그러한 힘든 시대에 거대한 현상인 가난한 노동자에게 저녁식사가 주어졌다; 역시 그들의 위엄인 황후가 거기에 풍부한 은총을 제공하였다. 애국적인 연설에 환호, 황제에 대한 만세가 끊이지 않았다..."(Brakelmann, soziale Frage, 167 이하) 그러나 이 새 정당에 어떤 여론의 호의도 없었으며,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자 이외에 자유주의, 민족자유주의, 보수주의 그리고 교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스퇴커는 개인적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궁정 설교가와 정치인의 일, 신학과 호민관의 개인적 연합이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과제는 사회민주주의 무신론적 조직에 기독교 노동자 연합을 대립시키는 것이었다. 노동자층으로의 진입이 실패함과 더불어 스퇴커의 반셈족 과정과 중상층 중심으로의 정책 전환은 이미 1880년 기독교-사회 정당이 더 이상 기독교-사회 노동자당이 아니라는 것이 표명되었다. 창립 당시의 무산계급 성향은 포기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점점 보수화 되어 갔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후 기독교-사회적이라는 것은 반셈주의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보수적인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구 보수적인 정당을 기독교-사회적 정당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기독교-보수적 정당으로 변화시켰으며, 사회적 보수주의를 선전하기 위해서 활동하였다. 그의 세 가지 중심은 기독교-군주제-사회개혁이었다. 그는 개신교의 모든 진영을 하나의 통일연맹으로 조직하여 시대와 투쟁하고자 하여, 1890년 개신교-사회 회의(Evangelisch-Soziale Kongress)를 세웠다. 그는 이 기구를 통해서 개신교에 사회정치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교회의 다양한 적들과 정치적 적들이 상존하였으며, 특히 빌헬름 2세는 스퇴커의 기독교-사회적 사상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겼으며, 잘란트의 남작 폰 스툼(Freiherr von Stumm)은 개신교 사회적 운동을 사회민주주의 보다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Brakelmann, soziale Frage, 170) 그는 무산자를 낡은, 그러나 개혁된 체제에 화해시키기를 원했으며 그리고 제4 신분을 기독교 사회의 전체 사회 안에 자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는 노동자를 얻기 위한 투쟁을 하였으나 이 투쟁에서 졌다. 세속화는 스퇴커에게 기독교적 세계의 종말이었으며, 세속화 속에서 인간 중심점의 인식을,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책임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궁중설교가 스퇴커는 투쟁적인 개신교 보수주의자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독교 사회주의자다. "단지 기독교 노동조합만이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 단지 기독교-사회 정당만이 비기독교적 사회주의적 정당을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거기에 당연히 강력한 지칠 줄 모르는 사회개혁이 속한다." 2. 7. 나우만 프리드리히 나우만(Friedrich Naumann: 1860-1919)은 1860년 작센의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족의 전통에 따라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883년 함부르크 호른의 광야의 집에서 상급보조자로 일하였으며, 당시 비헤른의 기구는 비헤른의 아들이 이끌고 있었다. 광야의 집에서 2년 활동한 후에 작센의 첫 목회지에서 노동자의 고통을 인식하였으며, 노동자의 문제가 그 시대의 중심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우만은 이제 "가난한 자들의 목사"로서의 활동 이외에 사회문제 문헌연구에 몰두하였으며, 특히 맑스적-사회민주주의 저술들, 맑스, 엥겔스, 라살레, 베벨 그리고 립프크네히트를 철저히 연구하였다. 나우만은 비헤른과 스퇴커의 사회정치적 사고의 중요한 영향 아래에 있었으나, 이들과는 일찍부터 독자적인 사고발전의 과정을 겪었다. 이것은 내방선교의 방법이나 스퇴커의 정치적 입장을 훨씬 넘어가는 것이었다. 스승들처럼 나우만은 맑스주의는 거절하였으나 사회민주주의를 현재의 과제로써 인정했다. 그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무산자적인 성격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여기에 이미 스퇴커와 결별의 성향이 있었다.(Kupisch, 107) 나우만은 반동과 혁명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것을 기독교 사회주의라 하였으며, 이것은 사랑과 정의의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활동적인 개혁 작업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논쟁하였다. 그는 역시 사회주의적인 원리인 자유, 평등 그리고 형제애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물질관이 국민의 영혼에 큰 위험을 준다는 것을 제시하며, -정치적 프로그램에 위험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빈곤 제거를 통하여 기독교 사상세계를 위해 노동자를 다시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위해 내방선교의 확장이 필요하였으며, 비헤른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기독교 사회적 운동의 기본원칙은 다음과 같다, 즉 "성서적인 프로그램은 없다, 그러나 사회정치적 문제를 다루기 위한 성서적 동기가 있다." 그는 제 2세대로서 기독교-사회적인 사회정책을 계속 이끌어갔다. 그는 내방선교의 자선활동을 통해선 극복될 수 없는 빈곤의 사회적 관계를 점점 더 인식하였다. 그는 기독교적 사회정책, 사회개혁으로 들어갔으며, 정치적, 사회정치적으로 거의 모두가 보수적인 정당에 가입되어 있는 내방선교의 "옛 사람"과 대립하게 되었다. 나우만의 기독교 사회적 활동은 "개신교-사회적 회의"의 활동 속에서 드러나는데, 스퇴커 주변의 "옛 사람"과 나우만 주변의 "젊음"의 이러한 투쟁은 이제 "개신교 사회적 회의"의 차원과 영역으로 옮겨졌다.(Brakelmann, soziale Frage, 174 이하) 나우만이 1896년 민족사회 연맹을 창설함으로써 그의 개신교 사회적 운동은 끝났다. 그 스스로 1897년 목사직을 포기하고 직업정치가가 되었으며, 점점 민족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정치가가 되었다. 그는 세계와 교회, 정치와 종교, 힘과 선교라는 이원론으로 떨어졌다. 그는 기독교 사회적 입장에서 급진적으로 민족적 사회적 방향으로 움직였다. "군사주의는 모든 국가 질서와 유럽시민 복지의 기본토대다... 기독교의 미래는 주민들의 군사적 의미의 유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옛 독일의 영웅심의 마지막 나머지를 물리치지 말자." 2. 8. 개신교 사회 회의 1890년은 독일제국의 사회정치적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한 면을 표시한다. 빌헬름의 2월 칙령은 노동자 친화정책과 입법화를 계속 추진하였으며, 사회문제에 있어서 교회의 특별한 책임을 강조하였다. 곧바로 4월에 개신교 교회 최고위원회(EOK)는 교회 정치적 방향을 180도 회전시켜 성직자들이 노동자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노동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도록 하였다. 이는 기독교 사회적인 작은 단체에게 강력한 추동력을 주었다. 스퇴커는 강당사회자들인 바그너(Adolf Wagner), 개신교 노동연맹의 지도자인 베버(Ludwig Weber), 보수적인 신문인 "십자가신문" 편집장인 크로파체크(Friedrich Kropatschek: 1875-1917)와 함께 새로운 사회적 교회정치적 출발을, 모든 기독교적 사회적인 자들을 하나의 중립적인 작업포럼에 연합하고자 시도하여, 1890년 오순절에 "개신교 사회 회의"를 베를린에 창립하였다. 다양한 교회정치적 그리고 신학적 흐름들을 하나의 사회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토론으로 결합시켰다. 780명의 회의 참석자들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항한 선동이 거의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자기 국민의 사회적 상황을 편견없이 연구하고, 그것을 복음이 요구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척도에 의해서 계산하고 이것을 오늘날의 경제적 삶을 생산력 있게 만들고 영향력 있게 만드는데 그들의 과제를 삼았다.(Besier, 116) 이 모임에서 여섯 가지의 제안이 이루어졌다.(Brakelmann, soziale Frage, 178) a) 교회의 사회적 의미 안에서의 교회 공동체 b) 노동자 보호법제정 c) 노동하는 계급의 주택곤궁과 그들의 구제법 d) 개신교 노동자연맹과 그들의 중요성 그리고 계속적인 발전 e) 사회정책의 영역에서 현재의 노력 f)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입장 이제 해마다 개최되는 주요회의에서 실제적인 사회정책의 문제들과 기독교 윤리의 문제가 다루어졌다. 이 회의는 모든 정치적 그리고 교회정치적 정당의 대표로 구성된 의장단을 선출하였으며, 1891년부터 1902년 동안의 첫 의장은 중재적인 농업고문관인 놉베(Nobbe)였다. 1891년부터 1894년까지 첫 번째 총무는 신학 후보자인 젊은 목사 괴레(Goehre)였는데, 그는 그가 쓴 "3개월간의 공장노동자"라는 책 안에서 묘사한 공장활동을 통해서 잘 알려졌다.(Brakelmann/Traugott, 142) "개신교 사회 회의"에 참여한 회원들의 공동 견해는 다음과 같다.(Brakelmann, soziale Frage, 179 이하) 1. 복음에 서 있는 종교개혁의 교회는 신앙 고백자와 봉사자가 시대를 배우며,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피해의 원인을 추적하며 그것을 극복하는데 협력할 때만이 국민의 양심을 인도하는 정신적 힘을 전개시키고, 특히 사회적 영역에서 화해하는 영향을 실행할 수 있다. 2.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공명심에 사로잡힌 교리이며 악마적인 혁명의 힘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종교적 타락의 자연적인 결과이다. 3.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법에 의해서 극복될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오류이다. 4. 고용된 노동력에 의거한 계급의 경제적 노력과 자주성은 정당하다. 5. 사회적 개선을 목표하는 헌법과 법률, 조국과 국왕의 토대 위해서 현명하게 지도하며 개입하여 소외된 국민의 진영을 데려오는 것이 중요한 시대적 과제의 하나다. 그 사이에 개신교 사회 회의 내부에서 스퇴커-나우만의 대립이 점점 커졌으며, 나우만의 진영은 스퇴커로부터 벗어나 점점 발전하였다. "젊은이"들은 사회개혁을 위하여 보수진영을 얻고자하는 스퇴커의 노력이 좌절되었으며, 본질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점점 프로그램 과정이 보수적인 방향에서 자유주의로 변화되어 갔다: 1) 특별히 기독교적인 동기근거로부터 나우만적인 사회정치적 개혁 개념이 분리되었으며, 2) 기독교적인 근거에서 국민정치적 근거로 대치되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회원으로 가입하였다.(Pollamnn, 65 이하) 그러나 여전히 개신교적 정서, 확고한 황제에 대한 신뢰 그리고 합법적인 사회 개혁의 세 가지 위에 서 있는 개신교 사회 회의는 사회민주주적인 내지는 모든 사회혁명적인 추진하는 모든 것에 한계를 두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모든 측면에서 공격이 쏟아졌으며, 경영자에 친근한 언론, 농업보수주의자, 궁중 그리고 교회지도부, 우익들이 개신교 사회 회의에서 떨어져 나갔다.(Brakelmann, soziale Frage, 182) 개신교 사회 회의 그 자체에 위기가 왔으며, 스퇴커는 탈퇴하였다. 그는 나우만-진영과 더 이상 성공적인 협력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단지 작은 무리만이, 그 가운데 교사 베버도, 스퇴커와 함께 개신교 사회 회의를 떠나서, 1897년 교회-사회 회의(Kirchlich-soziale Konferenz)를 세웠으며, 이 단체는 내방선교와 개신교 노동자연맹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교회의 사회사업을 위해서 교회의 "적극적인 자"(Positiven)들을 모았으며, 반면에 개신교 사회 회의에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자유주의자들이 넘쳤다. 나가는 말 이미 산업혁명 이후 인간들의 삶의 현장이 과거와는 180도 방향 전환한 이후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삶의 현장에 대한 철저한 인식없이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 서양의 기독교 및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철저한 역사적 연구가 필수적이다. 오늘날 독일의 사회적 국가의 성격은 다양한 이념과 사회사적인 상황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개신교의 영역으로부터 "동기와 방향"을 얻었다. 국가를 권력과 문화국가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국가로서 보충하여 이해하며, 그리고 이 국가를 통해서 약자를 돌보는 것이 기독교인의 책임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들의 국가 이해는 본질적으로 개신교 전통으로 각인 되어졌고, 국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넘겨진 하나의 기구로써 이해된다. 사회적 개신교의 전통은 특별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오늘날 제3의 대안인 사회적 시장경제(Alfred Mueller-Armack)의 틀을 낳게 되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인 맘몬의 정신을 집단주의적인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개인의 인격적 존엄을 인정하며, 개인의 도덕에 대해서 적지 않게 그러나 채워질 수 있는 요구들을 담는 경제제도를 찬성하였다.(Traugott, 6 이하) 이와 같이 사회적 기독교는 각 시대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복음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현 상황에 대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통과 말씀 속에서 새 길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따라서 각 시대에 큰 역할을 하였던 사회적 기독교의 연구는 더욱 중요하다. 참고문헌 Karl Janssen, Johann Hinrich Wichern, Ausgewaehlte Schriften Bd. I, II, III, Berlin 1956. Dietrich von Gertzen, Adolf Stoecker, Lebenslauf und Zeitgeschichte, Schwerin 1912 Guenter Brakelmann, Die soziale Frage des 19. Jahrhunderts, Bielefeld 1981. Guenter Brakelmann, Kirche und Sozialismus im 19. Jahrhundert, Witten 1966. Guenter Brakelmann/Traugott Jaehnichen, Die protestantischen Wurzeln der Sozialen Marktwirtschaft(Ein Quellenband), Guetersloh 1944. Traugott Jaehnichen, Sozialer Protestantismus und moderne Wirtschaftskultur, Muenster 1997. Karl Kupisch, Zwischen Idealismus und Massendemokratie, Berlin 1955. Manfred Schick, Kulturprotestantismus und soziale Frage, Tuebingen 1970. Gerhard Besier, Religion, Nation, Kultur, Neukirchener 1992. Albrecht Langner, Katholische und evangelische Sozialethik im 19. und 20. Jahrhundert Parderborn etc. 1998. Friedrich Wilhelm Graf, Kulturprotestantismus, in: TRe, Bd.20 Martin Greschat, Das Zeitalter der Industriellen Revolution, Stuttgart etc. 1980. Martin Greschat, Protestanten in der Zeit, Stuttgart 1994. Jochen-Christoph Kaiser, Protestantismus und Sozialpolitik, in: Soziale Reform im Kaiserreich, Stuttgart etc. 1997. Klaus Erich Pollamnn, Weltanschauungskampf an zwei Fronten, Der Sozialprotestantismus 1890-1914, in: Soziale Reform im Kaiserreich, Stuttgart etc. 1997. Theodor Strohm, Innere Mission, Volksmission, Apologetik, in: Sozialer Protestantismus und Sozialstaat, Stuttgart, etc. 1996, Helga Grebing, Geschichte der deutschen Arbeiterbewegung, dtv 1970, S.26-27. Peter-Heinz Seraphim, Deutsche Wirtschafts- und Sozialgeschichte, Wiesbaden 1966. Gaston V. Rimlinger, Welfare Policy and Industrialization in Europe, New York etc. 1971, 한국사회복지학 연구회 역, 한울 1991. 백용기, 독일의 기독교 사회복지, in: 기독교와 사회복지, 홍익재, 2001. Eine Studie ueber den sozialen Protestantismus Deutschlands in 19. Jahrhundert Paik, Young-Gi Pull-time Lecturer Kang-Nam Unisersity Kyongki-doSeoul, Korea Der vorliegende Aufsatz beschaeftigt sich mit dem sozialem Protestantismus in deutschland. Sie versucht, die soziale Frage und christliche Erfahrungen in 19 Jahrhundert zu analysieren und auch einen Ueberblick ueber christliche Aufgabe in Korea zu habe. Der soziale Protestantismus zeigt, welche Aufgabe das Christentum und die Kirche zeitlich haben. Er erklaert sowohl theologisch diese Aufgabe und beweist die als auch durch das soziale Handeln praktisch. Der soziale Protestantismus erzielt mit der Autonomie und Gleichheit mitlebende Gesellschaft und bestrebt sich eifrig, die Lebensqualitaet des Menschen zu entwickeln. Heuzutage folgt die Tradition des sozialen Protestantismus in Verschiedenheit. Tatsaechlich ist der sozialer Protestantismus Regeneration der Naechtsnliebe, die seit dem Fruehchristentum verliert werde. Fuer den Aufsatz ergibt sich folgende Aufgabenstellung: 1. Die industrielle Revolution und die soziale Frage behandlet werden, weil man den sozialen Protestantismus nicht verstehen kann, ohne die beiden zu erwaehnen. Besonders stellt der Aufsatz die Arbeiterbewegung von Marx und Lassalle ausfuehrlich dar, weil sie eine grosse Rolle in 19. Jahrhundert gespielt hat. 2. Die Arbeit untersucht die evangelischen sozialen Bewegungen. Die Grosse Gestaltungen zur sozialen Frage, aber noch nicht bekannt wird im Kreis der theologischen Geschichte, werden besonders beschaeftigt. Dadurch kann man die gute Impulse des christlichen sozialen Bewegung kriegen. 백용기 교수(강남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1세기의 눈으로 본 동성 연애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 2002-11-11
1세기의 눈으로 본 동성 연애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 현대 사회속에서 동성 문제에 대하여 논의가 각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 신앙인들도 이에 대한 답을 구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동성연애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찾고자 노력을 할 것이다. 오늘날 특히 미국 교회안에서 동성연애에 대한 크게 세가지의 견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동성 연애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그룹이 있다. 둘째는 성경에 대한 해석을 하면서 당시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 신구약에 언급되어 있는 동성 연애에 대하여 오늘날 잘못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동성 연애에 대하여 죄악시하지 아니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그룹은 이 두 견해의 사이에서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 연애는 죄악인가 아니면 병으로 취급되어질 수 있는 문제인가에 대하여 연구를 하여 볼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고는 동성 연애와 연계되어 있는 구약 성경 구절에 대하여 언급을 할 것이지만 초점은 신약의 바울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더욱이 당시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고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바울이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는가를 연구하고 이 토대 위에서 오늘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신약 배경은 당시 헬라 문화와 로마의 문화에 대하여 연구하고, 이러한 문화 속에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동성 연애를 해석하고 있는가를 중간사의 입장에서 연구하여 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의 견해를 연구하고자 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배경 연구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연구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전과 이후의 시대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연구를 하는데 먼저 그리스의 배경을 연구하고 나서 로마의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고자 한다. 그리스 배경 그리스의 배경을 연구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그리스 고전에 동성 연애가 어떻게 언급되어 있는가를 연구하여야 한다. 이 고대의 그리스 문화의 시대에 대하여 Tannahill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한다. "Homer, Hesiod, Plutarch, Pausanias --the professional my preservers and myth-improvers--created a vivid, adventurous, amoral world in which gods and heroes spent as much of their time bedding and brawling as they did in performing deeds of valor. . ." 이 당시 그리스인들의 성에 대한 관점이 모든 신들, 여신들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성들에 대한 다양한 현대의 용어들이 당시 그리스 사회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예로 androgyny, aphrodisiac, eroticism, hermaphroditism, homosexuality, narcissism, nymphomania, pederasty, satyriasis, 그리고 zoophilia이다. 이러한 다양한 용어가 그리스 사회 속에서부터 나온 것을 볼 때 당시 그리스 사회의 성에 대해 얼마나 개방적이었는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에 대하여 개방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또한 동성 연애에 대하여서도 상당히 일반적이었음을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Smith는 "On all levels of society, homoerotic activity pervaded the Greco-Roman period." 더욱이 이러한 현상은 여성에서보다도 남성에서 일반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남성들이 주도하고 있던 그리스 사회 속에서는 주로 남성들의 활동 영역 속에서 동성 연애들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사회에서 동성 연애가 이루어지던 곳은 교육기관 과 정치집단 혹은 군대 속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동성 연애는 첫 번째 이루어 진 곳이 사회적인 기관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동성 연애를 당시는 이러한 사회적 집단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어른 남성이 어린 소년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던 남색이 주를 이루고 있었던 사회였다. 그래서 Tannahill은 남색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the word pederasty is generally used to describe the sexual attraction of an adult to an immature child, but to the Greeks it signified the love of a man for a boy who had passed the age of puberty but not yet reached maturity." 어떠한 사회적 단체에서 이러한 남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말은 사회적 계급의 차이에 의하여 동성 연애가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반적으로 동성연애는 당시 사회 속에서 나이든 남자들이 젊은 남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 기원전 6-4세기에 일반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관계에 대하여 학자들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Boswell 같은 학자들로 이들은 나이든 사람들이 당시 소년들의 정신적 도덕적 지적 발전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돌아보고 또한 이들의 목적은 그 사랑하는 소년의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이끌기 위한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Keuls와 같은 학자들은 남색은 이러한 순수한 의미이기보다는 남창과 연계되어있다고 주장을 한다. "this pattern became compromised and led to male prostitution by citizens and to adult male love affairs; both of these practices were consistently stigmatized as socially unacceptable. Anal sex, generally associated with obscenity and coarse behavior, was the common form of these discredited types of homosexual contact." 그녀에 따르면 남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480 BC에 이미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금지를 시키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당시 예술품들과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들은 분명히 남색이 아니라 남자들간의 사랑이고 또한 동성 연애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주장을 한다. 당시의 동성연애는 학생동료들 사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나아가서 이러한 젊은 사람들이 남창으로 변하여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법령들이 통과 도기까지 하였다. 어찌하였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사회 속에서 남성들의 동성 연애를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보면서 또한 당시 사회의 예술 작품을 보면서 동성 연애와 남색이 만연되어 있던 사회였음을 확신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동성 연애나 남색을 당시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가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동성 연애나 남색이 당시 사회에 만연되어 있으면서 또한 당시 사람들은 청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겪는 하나의 과정정도로 생각을 하였던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동성 연애나 남색의 문제점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이 있었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Garland는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한다. " . . . homosexual attachments were believed to facilitate the transition from child to adult, thought it must be stressed that this view seems to have been more prevalent among the aristocrats. . . In Aristophanes' plays . . . there is clear evidence of revulsion against homosexual practices on the part of the Attenian middle class." 로마 그리스 사회에서 동성연애와 남색이 보편적이었지만 이를 막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고 있었지만 로마에서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음을 볼 수 있다. 1세기 전후의 로마 사회에서는 동성연애와 이에 대한 언급이 사회 전반에 걸쳐서 만연되어 있었고 또한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공화정 시대나 황제 시대에 이르러서 동성 연애나 남색이 불법으로 인식되어지지 아니하였고 또한 로마 안의 어떠한 종교나 법이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시 로마 사회 속에서는 동성 연애로 남색이 불법으로 혹은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적인 관계는 능동적인 역할과 수동적인 역할로 이루어진다. 능동적인 역할은 남성이 하고 수동적인 역할은 여성이 하는 것이다. 당시 사회는 명예와 수치를 중시 여기던 사회였기 때문에 남자가 여성의 역할인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명예가 손상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인인 남자가 수동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 속에서는 동성연애는 같은 사회적 신분 속에서는 이루어 질 수 없었다. 1세기 당시의 로마 사회속에서 명예의 중요성에 대하여 멜리나는 "명예는 원래 사회적으로 인정된 가치에 대한 주장이다." 이러한 정의 하에서 그는 명예는 권력과 성과 그리고 종교라는 세 분야에 의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계속하여 권력과 성과 종교를 설명한다. 그는 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한다. "성적 신분 또는 역할은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을 상징화하는 일련의 의무와 권리들 --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또는 당신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하는 것 -- 에 관해서 말한다. 남성의 '의무'는 여성의 '의무'와 동일한가? 남성에 대하는 방식은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동일한가? 성적 신분은 한 사회집단에서 인정된 남성과 여성의 '의무'에 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정보는 "1세기 로마 사회는 명예를 가장 주요하게 여기던 사회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멜리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1세기의 사람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신의 명예의 등급이다. 가치에 대한 권리와 자격은 신분에 대한 권리이며, 그 신분 (그가 가진 일단의 권리와 의무)은 자신의 사회적인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따라서 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은 그의 명예 등급에 의존하여, 그것은 그 공동체의 신분 서열에서 그 사람의 위치를 결정해 준다." 이렇게 명예에 의하여 신분이 결정되어지던 사회였기 때문에 명예에 의하여 사람의 행동이 결정되어졌던 사회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유자인 남성은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는 일을 하지 아니하였다. 성적인 관계에서 남성은 능동적인 역할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은 곧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 성적인 관계에서 남성은 남성의 역할을 하여야 하는 것이지 남성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여성의 역할인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명예에 손상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 관계는 능동적인 위치에 있는 남성과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여성의 관계이고 동성 연예는 능동적인 위치에 있는 자유인 남성과 수동적인 위치에 설 수 있었던 종들과 혹은 젊은 남성들과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하여 Steggemann은 이렇게 말을 한다. "The view taken on sexual activity or passivity, then, corresponds to social hierarchy. And it is an established fact that Medterranean women were confined to passivity and had to act accordingly. How, then, is this represented in homosexuality? Well, it should be no surprise within this framework that homosexuality mainly means pederasty and that the object of homosexual desire had specific female characteristics; long hair, some sort of makeup, a tender face. In a word, he was effeminate (malakos). The prevailing form of homosexuality was pederasty. A secondary form was sexual intercourse between a master and his male slave. . . . Under these circumstances, obviously homosexual practice among free males regarded with contempt, because in this relationship a free adult male had to take on himself a role befitting women and slaves." Steggmann의 견해에서 우리는 1세기 로마 사회에서 동성 연애가 없었다고 할 수 없으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 안에서의 동성 연애는 경멸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동성 연애보다는 사회적 구조 때문에 남색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남색은 당시 사회적 관습에서 볼 때 결코 죄악시되지 아니하였고, 또한 정죄되었던 것도 아닌 일반적으로 1세기의 로마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졌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성 연애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 1세기 당시 사회에서 동성 연애가 얼마나 성행을 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의하여 받아들여졌을지라도 Hellenistic Judaism을 연구해 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실제적으로 1세기 전후의 헬라화 되어 있는 유대문헌들을 연구하여 보면 이들은 동성 연애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를 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는 받아들이고 또한 일반화되어 있는 세계 속에서 왜 어떻게 유대인들은 동성 연애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를 하였을까? 하는 것이 의문점인 것이다. 이러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던 경전에 어떻게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가를 연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지면관계상 구약의 중요한 성경구절만 인용하여 연구하고 한다. 먼저 레위기 18:22절과 20:13절에서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시에 이집트의 풍속을 따르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주어진 명령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Eron은 이렇게 말을 한다. ". . . an ancient body of Israelite legal materail . . . (which) holds the Canaanite and Egyptians guilty of a wide variety of sexual sins that include incest, adultery, male sexuality, bestiality, and child sacrifice . . . The Israelites are warned not to follow any of these practices lest the Land of Israel spew them out . . . (Lev. 18:24-30; 20:22-26)." 이 두 성경 구절은 랍비들의 동성 연애에 대한 강한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와 사사기에 나온 두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9장에 소돔의 멸망 사건이 언급이 되어 있는데 당시 소돔과 고모라 성의 타락상에 대하여 잘 언급이 되어 있은 것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이 소돔과 고모라성의 이야기와 사사기 19장에서 21장에 나와 있는 그들의 직접적인 죄는 동성 연애의 문제가 아니라 남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지 아니하고 또한 불의를 행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을 한다. 예로 Eron은 그의 논고, "Homosexuality and Judaism"에서 이 두 본문을 선지서들의 견지에서 해석을 하고자 했다. 그는 이사야서 1:10절과 3:9절 그리고 예례미아 23:14절과 에스겔 16:48-49절에 근거하여 소돔, 고모라성과 기브온의 죄는 의가 부족하고 도덕과 윤리의 가치를 무시하고 또한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돌아보지 아니한 죄에 대하여 심판을 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처럼 현대 학자들 사이에 이 4개의 구절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본문이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고 또한 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반면 일부에서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고는 구약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구약 신학자들에게 남겨 놓을 생각이다. 다만 이러한 구약의 성경 구절을 중간사 시대에 어떻게 이해를 하였고 동성 연애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도 바울은 동성 연애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Eron이 내린 결론은 결국 동성 연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고 있으나 중간사시대의 유대인들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간 시대의 문헌을 살펴보면 동성 연애에 대하여 분명하게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먼저 12 족장 이야기 (Testament of the Twelve Patriarchs)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이 레위의 이야기(The Testament of Levi)는 레위가 하늘을 여행하면서 그의 자손들이 행했던 일과 심판의 날에 이루어 질 일들에 대하여 언급을 한다. 17:11에서 악한 제사장들의 죄악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In the seventh week there will come priest; idolaters, adulterers, money lovers, arrogant, lawless, voluptuaries, pederasts, those who practice bestiality." 납달리의 이야기(The Testament of Naphtali)에서 소돔의 죄악을 따르지 말 것을 권하면서 소돔 성의 죄가 무엇인가 언급이 되어 있다. "But you, my children, shall not be like that: In the firmament, in the earth, and in the sea, in all the products of his workmanship which departed from the order of nature. 'Likewise the Watchers departed from nature's order; the Lord pronounced a curse on them at the Flood. On their account he ordered that the earth be without dweller or produce (TNaph 3:4-5). 또한 Sibylline Oracles의 저자도 동성 연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지에서 언급을 하고 있다. "Male will have intercourse with male and they will set up boys in houses in ill-fame and in those days there will be a great affliction among men and it will throw everything into confusion. It will cut up everything and fill everything with evils with disgraceful love of gain, ill-gotten wealth, in many places, but especially in Macedonia (SibOr 3:185-188). 이러한 동성 연애와 남색에 대하여 Sibylline Oracles의 저자는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언급을 하고 또한 그의 독자들에게 이러한 행위를 피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저자는 당시 동성 연애와 또한 남색이 주변 지역에서 만연되어 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결국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따르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또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경에 기록된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또 다른 책 Pseudo-Phocylides의 저자도 동성 연애와 남색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반대의 입장을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Neither commit adultery nor homosexual passion(Ps-Phoc 3)." 그는 계속해서 비정상적인 비율법적인 성 관계를 가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Do not transgress with unlawful sex the limits set by nature. For even animals are not pleased by intercourse of male with male. And let women not imitate the sexual role of men (Ps-Phoc 190-192)." 또한 Enoch의 저자도 역시 동성 연애를 소돔 성의 죄악과 연계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God convicts the persons who are idol worshipers and sodomite fornicators, and for this reason he brings down the flood upon them. . . . And all the world will be reduced to confusion by iniquities and wickednesses and /abominable/ fornications/ that is, friend with friend in the anus, and every other kind of wicked uncleanness which it is disgusting to report/, and the worship of (the) evil (one) (2 Enoch 34)." 위에 언급된 모든 글들에서 중간사 시대에는 소돔의 죄를 동성 연애와 연결시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저자들의 견해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그리스 문화권의 사회에서 만연되어 있던 동성 연애나 남색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이들은 레위기에 근거하여 동성 연애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또한 Philo와 Josephus와 역시 동성 연애를 소돔의 죄악과 연계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hilo는 그이 책에서 소돔의 죄악을 동성 연애와 연계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 관계를 가지는 행위를 자연의 순리에 위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 . . not only did they go mad after women, and defile the marriage bed of others, but also those who were men lusted after one another, doing unseemly things, and not regarding or respecting their common nature; . . . by degrees, the men became accustomed to be treated like women, and in this way engendered among themselves the disease of females, and intolerable evil; for they not only, as to effeminacy and delicacy, became like women in their persons, but they made also their souls most ignoble, corrupting in this was the whole race of man, as far as depended on them (On Abraham 135-36). 이러한 언급은 요세프스에게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Josephus는 그의 글 Antiquities과 Against Apion에서 천사들의 소돔 방문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And when God had replied that there was no good man among the Sodomites; for if there were but ten such men among them, he would not punish any of them for their sins, . . . Now when the Sodomites saw the young men [the angels] to be of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is to an extraordinary degree, and that they took up their lodgings with Lot, they resolved themselves to enjoy these beautiful boys by forces and violence (Anti 1, 11. 3)." "But then, what are our laws about marriage? That law owns no other mixture of sexes but that which nature hath appointed, of a man with his wife, and that this be used only for the procreation of Children. but it abhors the mixture of a male with a male; and if anyone do that, death is his punishment (Anainst Apion 2, 25)." 필로나 요세프스는 그들의 견해를 당시 유행하고 있던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동성 연애나 남색이 옳지 못한 행동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동성 연애는 순리(nature)에 적합하지 못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1세기 전후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당시 사회는 동성 연애나 남색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또한 이를 불법시 하거나 죄악시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 사회에서나 혹은 Diaspora의 유대 사회에서는 이를 죄악으로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동성 연애는 소돔 성의 멸망과 연계시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한 행위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은 동성 연애나 남색을 취급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생각하여 볼 필요성이 있다. 동성 연애에 대한 바울의 견해 사도 바울은 동성 연애와 연계된 일련의 용어들을 로마서 1:26, 27절과 고린도 전서 6:9, 10절 그리고 디모데 전서 1:10에서 취급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대 학자들 사이 속에서 이 구절을 동성 연애를 지지하는 구절로 해석하고 자 하는 학자로부터 동성 연애를 반대하고자 하는 학자들까지 다양하다. 어떤 학자들은 신약에서는 동성 연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반강제적으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남색을 반대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다시금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당시에 사도 바울은 만연되어 있던 동성 연애와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혹은 Diaspora에 있었던 유대 저자들과 같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9-10 여기서 동성 연애와 관련이 있는 용어는 9절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이다. 이 용어들은 헬라어로 ` 와 ' ~ 이다. 이 두 용어는 당시 사회속에서 유행하고 있던 동성 연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Witherington은 "Malakoi in its root meaning means 'smooth' or 'effeminate.' Dionysius of Halicarnassus (7.2.4) uses his term to refer to a young male prostitute. Pederasty, molestation of minors by adult males, was the most common form of homosexuality in antiquity. 여기서 ' ~ 가 본문과 디모데 전서 1:10절에 밖에 쓰여지고 있지 아니한 하팍스 레고메나인데 우리는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을 하는 것이 타당한가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이 단어는 Bauer의 사전에는 "남성간의 동성 연애," "남색," "비역장이 (sodomite)"로 번역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단어 하나를 연구하여 사도바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단어의 Context 와 연계하여 사도 바울이 어떠한 의도 속에서 쓰고 있는가를 우리는 연구를 하여 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남색이라는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일까를 연구하여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어떤 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윤리적 차원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해석되어져야 하느냐 혹은 동성 연애로 해석할 것인가를 연구하여 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Wright는 이 단어가 레위기 18:22절과 20:13절에 근거하여 나왔다고 주장을 한다. 그래서 그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the ones who lie/sleep with men" 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는 강력하게 사도 바울은 당시 사회에서 만연되어 있던 남색이 오늘의 동성 연애의 개념임을 강조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Fee 역시 이 견해에 동의를 하면서 이 단어는 양면적으로 해석이 되어질 수는 있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보면 동성 연애를 사도 바울이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불평등한 관계에서의 이루어지는 인권적 차원의 성 관계에 대하여 언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 연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Malick 역시 정의에 동의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고 있다. "The significance of this derivation is that these passages in Leviticus have nothing to do with pederasty. They refer to the act of homosexuality -- man with man. It is significant that of all terms avaliable in the Greek language, Pual chose a compound from the Septuagint that in the broadest sense described men lying with men as they would lie with women. This is broad denotation that could include pederasty but need not be limited to it. 이 또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남색이라는 단어를 당시 사회 속에서 볼 때 불평등한 관계 안에서 성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당시에는 평등한 관계에서는 동성 연애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는 동성 연애에 대한 비판으로 보아야 타당한 것이다. 또한 디모데 전서 1:10절에서 이러한 남색이 악의 종류의 하나임을 나타내고 있어 사도 바울은 당시 남색이 동성 연애인데 비록 사회적으로 만연되어서 일반화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할 지라도 성경적으로 볼 때는 죄악이었음을 성도들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배경과 당시 성도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은 이미 구약 성경에 익숙하여 있었고 또한 중간사 시대의 문헌들에 익숙하였던 결과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마서 1:26-27 이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가 두 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어의 의미에 따라서 본문의 이해가 달라 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단어는 우리말로 "바꾸어" 라는 과 "순리" 라는 ` 이라는 용어이다. Hays는 "바꾸어"라는 단어가 강조를 위한 수사학적 기교로 쓰였다고 주장을 한다. ". . . the direct parallelism between the rejection of God and the rejection of created sexual roles." 본문에서의 "바꾸다"라는 개념은 23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타락한 인간들은 창조주 대신에 창조되어진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창조되어진 것을 더 좋아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25절에서 인간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보다도 피조물 섬기기에 열심을 내었고 이는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된 것으로 바꾸어 놓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6절과 27절에서도 비슷한 의미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순리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성을 더 좋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 본문에서 "바꾸다"라는 의미는 인간들이 타락함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을 섬기기 아니하고 인간들이 순리를 따라서 살지 아니하고 역리로 써서 남성이 남성을 향하여 음욕을 품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Dunn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The third appearance of the word 'changed' . . . seems to imply that the action described ('changing the natural use to that which is contrary to nature') is of a piece with and direct result of the basic corruption of the glory and truth of God in idolatry. . . Homosexuality is seen as a passion which is 'worthy of no respect.' Homosexual practice is characterized with the emphasis of repetition as 'unnatural. . .'" 여기서 순리와 역리라는 단어를 대칭하여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용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중간사 시대의 문헌의 작가들에 의하여 사용되어진 언어이다. 또한 이러한 "순리"와 "역리"라는 단어는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철학적인 용어들이었다. 순리는 당시 사회에서는 이성간의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을 하였고 역리라는 단어는 동성 연애를 표현할 때 사용하고 있었다. 그 예로 Plutarch는 그의 책 Dialogue on Love, 751 C. E.에서 남성들 간에 의도적인 성 관계를 가지는 것을 악한 행동이라고 하면서 이는 순리를 대항하는 역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두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성간의 사랑과 동성간의 사랑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도 바울은 순리와 역리라는 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동성 연애를 반대하게 되는 배경에는 당시 사회는 중간사 문헌에 익숙하여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중간사 문헌의 저자들의 견해와 같은 견해 속에서 동성 연애가 만연되어 있는 사회속에서 동성 연애를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앞에서 1세기 당시 사회에서 동성 연애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당시 사회에서는 동성 연애가 일반적이었으며 또한 죄악시 여겨지지 아니하던 사회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더욱이 고린도 교회나 로마 교회는 그리스-로마의 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에 동성 연애가 죄악으로 인식되어지지 아니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도 바울은 중간사 시대의 문헌들의 저자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강력히 반대를 하고 있다. 중간사 시대에도 동성 연애가 만연하고 있었지만 이 시대의 저자들은 구약의 성경 말씀이 당시 이집트의 문화를 배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말씀이 아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고 또한 소돔에서 벌어진 일들은 인간들의 무자비한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동성 연애에 대한 심판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와 같이 사도 바울 역시 동성 연애는 하나님의 섭리를 역행하는 행동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중간사 시대의 문헌들의 저자들과 같은 견해속에서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의 동성 연애에 대한 비판이 인권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동성 연애 행위에 대한 비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당시 문화적 사회적 배경 하에서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면서 오해를 만드는 해석을 하여서는 안된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동성 연애 행위를 반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오늘날 서서히 만연되어가고 또한 공론화 되어가고 있는 동성 연애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분명히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조심하여야 할 것은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동성연애자들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거나 혹은 그들을 정죄하는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참고 문헌 책 Andersen,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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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도 목회와 교회 성장을 위한 제언 2004-01-27 10:47:24 read : 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담임목사님께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1-9를 보내드립니다. 담임목사님과 교역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1, 6번은 지난번 수양관 방문시 원문으로 드린 것을 다시 올렸습니다) ---2000년도 목회와 교회 성장을 위한 제언 1 -pp.50-56--- 영혼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2000년대 목회(
2000년도 목회와 교회 성장을 위한 제언 2004-01-27 10:47:24 read : 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담임목사님께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1-9를 보내드립니다. 담임목사님과 교역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1, 6번은 지난번 수양관 방문시 원문으로 드린 것을 다시 올렸습니다) ---2000년도 목회와 교회 성장을 위한 제언 1 -pp.50-56--- 영혼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2000년대 목회( 홍정길 목사와의 대담) 2000년대다, 21세기다 하면 많은 사람들이 뭔가 달라질 것으로 막연하고도 피상적인 기대와 불안을 가지고 있는데, 목사님께서는 21세기 사회적 현상이 심화될수록 어떤 목회적 문제들이 교회안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사실 어떤 때든지 어떤 사실이나 일들이 완전히 낙관적이거나, 또는 비관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다가오는 21세기에 예상되는 큰 문제중의 하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또 컴퓨터 자판만 보고 있으면 모든 일이 되어지는 세상이 펼쳐짐으로, 인간 소외와 같은 인간 어려움이 한층 더 깊어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동안 대개 가족이 함께 사는 동양권의 경우, 예를 들어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우울증이 질병처럼 발생하는 비율이 나라 인구의 한 5~6%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미국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독립을 하게 되어 있어 가족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구조가 개인화 되어있고, 핵가족화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사람들에게 질병처럼 찾아오는 우울증의 비율이 동양권의 약 3배정도인 15~16%가 넘습니다. 사실 지금 총 들고 나와서 아무나 쏘는 사람들의 경우, 전부 그 행동의 뿌리를 살펴보면 깊은 인간소외에서 나오는 일종의 사회적 발악들이고 분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 소외가 어디에서 심화되었는가 하면, 최근의 정보 문화에서 가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컴퓨터 자판만 보고 감정의 교류 없이 정보만 주고받는 때가 전세계적으로 도래하게되면, 아마 인구의 30%이상이 우울증으로 질병을 앓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21세기 최대의 질병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는 병이 우울증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울증의 피해를 잘 몰라서 한국 사람들이 그러는데, 우울중은 정신질환의 가장 첫 단계로 암 못지 않게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가 올 때 교회가 그 사람들을 향해서 무슨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이제는 생각하고 바로 대처해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세상은 21세기를 정보통신혁명의 시대로 낙관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인간소외의 현상을 더 심화시키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후유증인 ‘우울증’은 더 심각해 질 것이라는 말씀이네요. 그렇습니다. 정보통신이라는 것이 생활의 편리와 많은 객관적인 자료와 정보들은 수집할 수 있게 해 주겠지만, 인간 내면의 깊은 영적인 공허는 오히려 더 깊어지게 할 것입니다. 만약 영적인 온전한 인격을 참된 믿음으로 채워 놓은 사람은 그런 시대가 올 때 그 많은 정보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영적 공허를 이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는 그 정보들에 의해서 수많은 희생자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 재벌 2세들 중에는 일종의 성격적 미숙아 내지 정신적 파탄자가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인격적 성장이나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부모가 가진 돈과 힘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능력 없이 그런 것들을 부여받았고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격성장이 멈춰버린 거죠. 그러니까 한국재벌 가문들이 어떻게 보면 인격적으로 불쌍한 분들이에요. 아마 앞으로도 재벌가의 이런 비극은 계속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데 정작 그분들의 영혼의 삭막함은 더 심화될 것이분명합니다. 지금 21세기의 정신적인 암으로서의 우울증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사실 한국교회의 경우 교인들이 잘 변화되지 않는 원인 중에 이 우울증이 있다는 점과 문제를 너무 영적으로 해석해 버리고 바로 진단하지 못하는데 있지 않은가 생각되는데, 어쨌든 목사님께서는 이런 우울증적인 증상을 가진 교인들을 과연 어떤 식으로 목회를 해야 하며 어떻게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영혼에 대한 열린 마음’이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다시 뒤집어 말하면,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추구한 목회는 성공주의였어요. 성장하는 교회가 옳은 교회처럼 인식이 됐습니다. 내가 처음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할 때였죠. 그 70년대에 한국교회가 모델을 삼고 계속 좇아 다녔던 교회들이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였고, 척 스미스 목사의 갈보리채플이었습니다. 80년대는 존 윔버, 존 맥아더, 챨스 스윈돌을 좇아 다녔고, 교회가 마치 그렇게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릭 워렌이나 빌 하이벨스를 그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목회를 평가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한국교회가 그렇게 70년대 80년대 90년대 동안 추구하던 그 목회 흐름들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정말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닌, ‘바른 교회’되는 것에 있는 지를 심각하게 다시 짚어봐야 됩니다. 뭐 때문에 그런 미국의 교회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그렇게 많이 얘기되어져야 합니까? 물론 그 분들의 개인적인 구령의 열정과 그래서 수많은 영혼들이 크게 모아지는 것에 대한 시비를 삼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 크게 모아지면 한 영혼을 향한 섬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인을 관리합니다. 관리와 섬김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장이시지만, 그분은 관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84년도에 London Bible Institute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처음 안식년으로 가서 석 달 동안 있었는데, 그때 저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말레이지아, 인도, 그리고 네덜란드 등에서 온 분들과 일곱 명 한 조가 되어 석 달 동안 존 스타트 목사님께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모임 중에 돌아가면서 자기 교회를 소개하고 목회적 고민들을 이야기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여러 고민 중에 저도 내 고민을 얘기했지요. 84년 당시 내 고민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83년까지 남서울교회가 한 2,700명 모이는데 있었습니다. 제가 교인들이 500명 될 때까지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새벽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정말 그들의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제가 지금도 그 집 아이들까지 그 500가정은 입에서 거의 외워져요. 하루를 시작할 때 목사의 기도 없이 하루를 시작시켜서는 안되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500명을 넘어가니까 그것이 불가능해지더라구요. 그래서 처음에 하나님께 “하나님 나는 평생 이렇게 목회하겠습니다” 했던 것이 무너졌어요. 그렇게 많이 모일 줄도 몰랐고요. 여러 목사님들이 모여서 자기교회와 자기나라 얘기를 할 때 제가 그 고민을 얘기하니까, 말레이지아에 있는 중국인 목사가 “너는 어떻게 그렇게 문제도 아닌 걸 문제라고 생각하느냐? 너 너무 행복하다고 과시하는 것 아니야!”라고 그렇게 까지 얘기하더라구요. 그런데 존 스타트 목사님이 다른 모든 사람의 반응을 듣고 난 후에, 사실 브라더 홍이 하는 얘기가 참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우리 목회의 원천은 예수님이시고 그분이 우리의 목자장이신 데 그분이 목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목회의 원본이 요한복음 10장입니다.” 그러시면서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데, 이것이 깨지면 그것은 목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존 스타트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가 천 명이 넘게 오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래서 물었죠.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자기는 그 교인들을 다 안대요. 새로 온 사람이 누구인지도 다 안대요. 사실 그분이 그 교회에 30여 년 동안 계셨다고 하기는 하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일날이 되어서야 이해가 되더군요. 교인들이 주일 예배가 끝났는데도 급한 일로 바쁜 사람 외에는 집에 가지 않고 전부 한 줄로서는 거예요. 그리고는 목사님과 일일이 마지막 악수를 하고 헤어지는 것입니다. 그때 존 스토트는 그분들과 “벨기에 공부하러 간 아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스코틀랜드로 결혼해서 간 애들은 잘 있는지…” 간단한 메시지이지만 하나하나 악수하면서 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의 안부를 물어보는 거예요. 그 인사하는 시간이 예배 시간만큼이나 길었어요. 그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 영혼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공지향주의적인 목회자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물론 숫자가 많이 모이니까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그 대신 모두 피상적이 되었어요. 우리 한국교회가 대형교회의 모델을 따라간 결과라고 봐요. 그렇다면 혹시 목사님께서는 한 영혼에 대한 섬김이 피상적이 되게 하는 교인수의 적정선을 어디까지라고 보십니까? 솔직히 교회의 적정규모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정규모의 숫자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의 의지’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목회자의 의지, 하나님이 어떤 사명을 주셨는가에 대한 분명한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이런 목사의 의지를 희석시키는 함정이 성장주의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교회에 파워가 형성이 됩니다. 그 영광과 파워에 편승하면 절대로 한 영혼이 안보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부단히 싸워야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본래 주신 그 영혼에 대한 관심을 내가 날마다 새롭게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최고의 문제는 30명에서 300명 교회가 93%라는 점입니다. 제가 저번에도 그런 글을 썼었는데, 이 사람들이 성공주의에 짓눌려 가지고 실패자라는 자괴감 때문에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않고 자기 교회 영혼들에 대해서도 만족치 못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목사가 자기들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는 걸 교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기게 됩니다. 목사는 큰 교회일 수록 원하지 않아도 슈퍼스타가 되기 때문에, 큰 교회일수록 목사가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섬긴다는 개념은 없어지고 제왕에 가깝게 된다고 봐요. 그럼 앞으로 점점 개인주의화되는 사회에서 한 영혼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진 목회자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을 ‘목회자 자신의 바른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저는 헨리 나우웬 같은 분이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스탠포드를 거쳐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의 종교철학 교수였는데, 어느날 그렇게 자신에게 질문을 하게됩니다. “장애를 가진 몇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나의 멋있는 논리가 장애로 고통받고 있는 저 사람들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그 영혼의 소중성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좋은 교수직을 과감히 포기하고 장애인 일에 뛰어들게 됩니다. 정말 어떤 것이 소중하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헨리 나우웬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손양원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그분이 해방되어 감옥 속에서 나오게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담임목회자로 청빙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나는 나의 형제에게 가야 됩니다. 그러고서 나환자촌으로 들어갔지요. 저희 교회가 몇 달 전에 순교자 네 사람의 자제분들을 모시고 간증을 들었어요. 그분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과연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한국교회의 목회가 ‘성공이 목적인가 주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이 목적인가’를 생각하며, 정말 가슴 쳤던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주위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한 영혼에 자신의 삶을 투자하는 목회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성공주의 목회상’을 말씀하셨는데, 목회자 자신의 원인들은 없다고 보십니까? 내적인 원인으로 목회자가 말씀으로 자라지 못하고 주님과 깊은 인격적 대화가 없기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작은 교회가 꼭 좋고, 큰 교회가 무조건 나쁘다 라고 말 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작은 교회는 꼭 아름답고 옳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심스런 표현이지만 오히려 영적으로 게을러서 교회가 늘 지지부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명백한 목회자의 범죄일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우리는 이 두 가지 면에서 다 실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목사가 되려고 할 때만 해도 목사라는 타이틀 자체가 참 부끄러운 때였습니다. 제가 67년에 신학교를 갔는데, 그때 당시 이화여대에서 결혼대상자 후보 리스트에 목사 앞에 푸줏간이 있었던지 이발소가 있었던지 그랬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신학교를 가니까 내 친구가 그 신문을 가지고 와서는 “야, 너 장가가기는 틀렸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요즘은 통합측 경우에는 7:1인지 10:1인지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대학 졸업한 사람들이. 물론 결혼 인기 순위도 엄청나게 높아졌구요. 하지만 이 길은 절대로 이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회적 소명부터 철저히 다시 점검해야 될 겁니다. 저는 신학교 경쟁률이 10대 1이라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20대 1이 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말 주님을 위해서 죽기 위해 10대 1이냐는 것이에요. 하지만 어려운 일 있으면 다 흩어져요. 심지어 요즘 목사들은 ‘나 월급 얼마 줄래요’부터 시작한다구요. 목사가 희생하려 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교인들 가운데도 진정한 희생을 못 배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지금 실제와 허상사이에 큰 간격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전부 왕과 같은 사람만 있어요. 목사 옆에 가까이 가는 것을 무슨 충성으로 알아요. 그것은 진짜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섬기는 목사부터 없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너무 목사들이 대접을 많이 받아요. 정말 목회자부터 말씀가운데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큰 약점입니다.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큰 소리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좀 손해보더라도 하나님을 기다리고 희생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옷로비 사건의 추태로 드러났다고 봐요. 사실 그분들 다 성경공부 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절망한 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기를’ 하고 설교를 해왔는데 성경에 손을 얹고 거짓말을 하면 이거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예수 믿고 나서 CCC에서 일하며 이 나라가 이런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적어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백만 크리스천, 백만 크리스천 그랬거든요. 그래서 믿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해결된다고 믿고 민족복음화를 위해 CCC에서 죽어라고 뛰었어요. 정말 목숨을 걸고 했어요. 얼마 있으니까 천만 크리스천 하는데 아무 것도 안 달라지더라구요. 교회만 나왔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본질이 안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교회에서는 참 열심인데 자기 회사 생활이나 사업하는 곳에서는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못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박태준씨에게 누가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니까, 당시 포철의 누구라고 하면 다 아는 어떤 사람이 크리스천이었는 가봐요 그 사람을 박태준씨가 가리키며 “그놈이 믿는 예수를 나보고 믿으란 말이냐?” 하고 화를 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는 참 순종하고 그렇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교회는 전혀 열심히 아니에요. 마누라 때문에 억지로 나와요. 체면 때문에. 그런데 사회에서는 좋은 사람이 있어요. 사회에서는 “아, 그 사람”하며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 유형은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칭찬을 듣고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는데, 자기 집 안 식구들은 치를 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한국교회 안에 있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봐요. 결국 아무 것도 안 변하더라구요. 아무 것도 안 변했어요. 교회만 다니고 교회에만 충성했지. 저는 그래서 이제 그 다음은 이들이 성경을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성경공부를 75년 남서울교회 개척해서 처음으로 성경공부를 시켰습니다. 평신도를 가르쳐서 평신도 성경공부를 가르친 것은 남서울교회가 처음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매진해 왔는데, 그 강남 지역 성경공부하는 교회 다니는 사람, 성경공부에 관심이 있어서 이곳 저곳 좇아 다녔던 그 사람들에 의해서 옷 로비 사건이 났어요. 그러니 이게 뭐냔 말이에요. 정말 주일에 설교를 못하겠더라구요. 그럼 어떻게 해야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삶을 살게 될까요? 머리가 아니라 말씀에 전 생애를 헌신하여 주님을 따르는 한 사람의 모델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세계를 사랑하며, 우리 민족도 사랑한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내 옆에 있는 우리 아이들을 입양하는 사람이 있는가?” 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달 뒤에 우리 교회 장로님이 입양을 한 거예요.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또 그때 설교를 듣고 우리 교회 젊은 사람들이 아이 하나만 낳고 입양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것을 나중에서야 발견했지만,사실은 나도 입양을 못했는데, 참 이게 목회의 영광이고 즐거움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는 2000년대를 맞이한 지금 한국교회가 나가야 될 방향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지금 한국교회의 나갈 방향보다 치료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봐요. 이것 없이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93%나 되는 그 적은 풀뿌리 같은 교회들이 다시 건강해지고 참된 부흥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그 풀뿌리같은 교회들이 지금처럼 계속 고사되어간다면 지금 있는 큰 나무들도 결국 다 무너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교회가 다시 힘을 얻어야 진짜 부흥이 올 수 있습니다. 몇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300명 이하의 93% 교회들과 그 목사님들이 다시 하나님이 부르셨던 그 부르심을 발견하고 참된 목자상을 회복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 진정한 부흥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히 한국교회의 90%이상을 차지하는 그 교회들에 한국교회의 2000년대가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거기가 변화되어야 변화되는 것이지, 큰 교회 몇을 모델로 삼아 몰려갔다 몰려오는 것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제는 300명 돌파작전,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그 영혼에 대해서 밤을 새워 기도하는 마음의 회복이 정말 필요합니다. 온 천하보다 한 영혼이 정말 귀하다면, 왜 30명 모이는 교회에 생애를 걸만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왜 실패입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저는 이게 목회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가장 큰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9절부터 21절까지 보면 너희 속에 어떤 능력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알아라. 그렇게 말해놓고 그 큰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그들 가운데 …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죽지 않다는 거죠. 안 죽는데 무슨 부활론이 필요있습니까? 아픈 사람에게라야 치료의 능력이 필요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라야 부요의 능력이 필요하지. 죽지 않은 사람에게 부활의 능력이 왜 필요합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 안에는 부활능력이 필요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결국 교회가 정말 교회답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는 목회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사실 우리가 날마다 죽고 있어요. 그런데도 죽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자기애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영원히 보전되리라.” 죽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애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를 죽여야 해요. 그런데 그것은 누가 모델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나를 섬기는 자는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자에게 나도 늘 그와 함께 있을 것이요.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시리라.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프란시스 예배당에 갔더니 참 재미있는 그림이 있어요. 프란시스 카톨릭에 가보면 치마부에나 지에또라는 유명한 르네상스 이전의 화가들의 그림이 꽉 차 있거든요. 벽화로 프란스시 생애, 예수님의 생애가 짝 그려져 있어요. 그런데 제일 마지막 뒷면에 나가는 위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요. 그런데 그 뒤에 프란시스가 따라가는데 예수님이 말씀을 하세요. 그런데 저를 안내했던 분이 ‘당신 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을 것 같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힘드냐? 고 주님이 그러시지 않았겠느냐?’했더니 그런게 아니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사람은 저 두 분이 무슨 말을 했을 줄 안다’고 하는 거예요. 아주 의미있는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러니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기독교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런데 내가 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다 보면 주께서 프란시스에게 무슨 말을 했을 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 걸음이 우리한테는 없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사실 참 우스운 것들입니다. 축복을 받는다고 하면 전부 물질적인 것이고 또 성령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건강축복, 물질축복 이것만을 강조해요. 그 신령한 성령님이 가장 물질적인 것으로 축복해주신다는 것이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2 --- 제목: 21세기 교회상을 제시해 본다. (김동호/동안교회 담임목사)--pp.57-61 70-80년대 무섭게 성장한 한국교회는 정체를 거듭하더니 바탈길에 서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한국교회는 더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정확한 이유를 찾아보고 그에 대한대책도 강구해야한다. 이러한 이유로는 첫째. '원로'교회가 되면 쇠퇴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문화는 유교문화이다. 유교문화는 원로문화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화는 원로들을 공경하는 것에 출발하였지만 결국 원로와 어른이 통치하고 지배하는,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는 그리고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인 문화로 발전하여 그것이 사회를 점점 쇠퇴하게 하고 잇다. 원로들이 존경받는 사회는 좋지만, 원로들이 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젊은이들과 청년들은 무조건 원로들의 주장과 가르침에 순종하여야만 하는 것을 가르치는 사회는 절대로 발전할 수 없고 원로와 함께 쇠퇴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원로가 치리하는 교회가 되어 쇠퇴해 가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 영향으로 목사와 장로가 교인의 심부름꾼일기 보다는 교인들의 어른이 되어 저들을 섬기는 종이라기 보다는 저들에게 명령하는 지배자가 된 것이다. 둘째로 개발독재, 성장은 있지만 성숙은 없다. 한국교회는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중앙집권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발독재를 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재는 성장과 개발에 어느 정도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성숙에 아주 취약하다. 어느 정도 성장을 하면 그 다음에는 성숙이 따라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시 계속 성장이 이어질 수 있는데, 독재적인 구조때문에 성숙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것처럼 한국교회도 쇠퇴의 비탈로 내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셋째로 당회의 민주화, 감독권을 회복하자. 일빈제직과 교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더 이상 우민화를 하여서는 안된다. 그렇게 될 때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구조조정이 필요하며, 당회와 제직회가 서로 견제보다는 협조하는 분위기라면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다. 넷째로 목회의 민주화, 전문목회를 지향한다. 교회가 성장을 하게 되면 담임목사 혼자서 목회전반을 담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다 주시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셨다. 이들이 합력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하신다. 물론 담임목사 가 교회의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하고 처리하는 것이 일사분란하고 빠를 것이다. 그리고 쉬울 것이다. 그러나 빠르고 쉽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좀 힘들고 늦어도 불편해도 전임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협동목회를 하는 것이 먼 미래를 내다 볼 때 건강한 목회가 될 것이다. 담임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는 목회는 한 사람의 목회자가 은퇴를 하거나 시험에 들면 교회전체가 큰 몸살을 앓게 되는 것이다. 당회가 민주화 되아야 하듯, 목회도 민주화가 되어야한다. 한국교회는 협동목회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해야한다. 독재자 한 사람에 의하여 나라가 성장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는 전문적인 목회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목회를 하는 전문시대가 열릴 것이다. 다섯째로 새 부대를 준비하는 교회가 살아남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할 것 없이 세상이 변하고 있다. 그 변화와 흐름에는 일정한 식이 있고 틀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민주화와 전문화이다. 교회도 빨리 그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 흐름을 일기지 못한다면 교회는 담음 세기에 쇠퇴하게 될 것이고 드디어 몰락하게 될 것이다. 새 부대를 준비하지 못하면 새 포도주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정치도 중앙집권에서 지방자치로 넘어가야만 한다. 목회도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하여 움직이던 시대에서 전문적인 목회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시대로 넘어가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냥 미끄러져 내려 갈 수밖에 없다.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3---- 주님이 원하시는 새 천년 교회사역(오정현/남가주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pp.62-67 새 천년 교회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역동력있는 교회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의 제 2의 성육신이다. 몸은 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는 일(使役)을 못할 정도로 너무나 아픈 곳이 많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33년 생애를 사시는 동안 몸을 입고 계셨는데 그 이유는 이하기 위해서 이다. 몸을 입고, 제자를 삼으시고, 죄인을 섬기셨고, 마귀의 세력을 포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으로 승천하신 이후 바로 다른 몸을 보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지상교회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를 흔히 예수님의 제 2의 성육신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몸을 입고 계시는 동안 아프셔서 일을 못하신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제 2의 성육신인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 백성을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건강해야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 천년 교회는 교회 성장보다 균형집힌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한다. 동시에 모든 성도는 서로 붙어 있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지체처럼 교회와 생명의 관계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 죽는다는 건강한 교회론을 가르치고 적용하게 해야한다. 다음으로 교회론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란 예배하는 공동체, 훈련받는 공동체, 증거한은 공동체라는 것을 가르치고 확인해야 한다. 한 번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삶으로 확이되고, 뿌리를 내릴 때까지 목회자는 땀과 눈물, 피를 쏟아야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21세기 교회의 미래는 성령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2. 새천년 교회의 흐름 교회론에 있어서 탁월한 통찰력을 지닌 하워드 슈나이더는 21세기의 교회의 전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핵심적인 부분을 예견했다. 1)지역교회에서 세계교회화로 2)부분적인 성장에서 전반적인 부흥으로 3)지역교회의 대형화로 4)제도적 전통신학에서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5)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에서 사역자 공동체로 6) 남성 중심의 지도력에서 남,녀 협력의 지도력으로 7)핵가족에서 다양한 가족형태로 8)정교분리에서 정치적인 행동주의로 오정현 목사는 21세기 변화의 능력과 확신을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1)팽배한 개인주의와 다양성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영적인 구심점과 피난처사역, 즉 듣는 복음의 정도가 아니라, 보는 복음, 능력과 치유의 복음이 힘있게 선포되어야 한다. 2)사람들은 어디에 좋은 설교가 있느냐보다는 어디에 좋은 예배가 있느냐를 찾게 되기 때문에 영감 있는 예배,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예배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잘 준비된 다양한 예배형식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3)컴퓨터나 휴대폰에 익숙해진 세대를 복음으로 붙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 사역이 최고의 수준이 되어야 새로운 세대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시간과 공간, 재정적인 여건의 제한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수준에 대한 긴장감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4)역동력 있는 소그룹의 활용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은사대로 봉사하는 주역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영적 굶주림을 주일 예배 뿐 아니라, 일상의 생활 예배에서도 해결해 줘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새 천년 사역은 과거보다 정신적으로 압박이 클 것이며, 이제는 더 이상 화석처럼 굳어진 전통주의로는 안된다. 그것은 새 시대를 보는 안목을 흐리게 하며 형식주의에 얽매이게 하여 영혼을 섬기고 변화시키는데 무력하게 할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생각과 사역의 구조에 창조력이 추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계속 고민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사역이 정체되지 않고 변화의 능력을 얻어보려고 몸부림을 쳐야 새 시대를 감당할 수 있다. 3.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 새 천년 변화하는 교회의 가장 큰 화두로는 어떻게 하면 독불장군식으로 혼자 일하지 않고 서로 함께 팀웍을 이루어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팀사역, 또는 네트웍 사역(엮는 사역)을 하려면 몇 가지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1)집중된 사역방향: 지난 시대에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용어는 사역의 목표, 그 목표에 맞는 비전과 전략,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가치였다. 그러나 새 시대에는 이세단어가 구호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눈에 보이는 실체로 드러나는 분명한 방향이 있는 교회들만이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목적, 비전, 가치를 교회의 직원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2)21세기 급변하는 정보화 시대에, 엄청나게 변화되는 환경 속에서 진리에 바탕을 두고 적용과 유연성을 높이기 위하여 교회 직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계속 배울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한다. 3)도전을 받을 수 있는 사역환경, 직원들이 자부심을 갖고 헌신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해 주어야한다. 4)존중받는 다는 느낌: 21세기에는 아무리 영향력이 큰 사람이라도 모든 지혜와 지식과 도구를 가지고 친히 모든 것을 다 관리하기는 어렵다. 반드시 서로 의존하는 팀 사역을 해야 한다. 교회가 21세기에도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생명력 있는 공동체로 계속 살아 남기 위한 제일 중요한 자원은 부교역자, 평신도 지도자들이다.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정당한 감사와 인정, 존중받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삶은 누구나 공정한 보상, 인정받는 환경 좋은 반응을 받길 원한다. 이것이 있으면 그들에게 거리낌없이 높은 수준의 동행능력, 노력, 탁월함을 요구할 수 있다. 좋은 지도자는 사람을 키우기 위해 좋은 정보를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시대가 온 것을 알고 언제나 팀이 자라도록 격려하는 법을 생활화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늘 관심을 가지고 제자들을 추스르시면 본을 보이셨으며 제자들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보지 않고 격려하여 성장시키고, 영감을 불어 넣어주어 훈련시켜야할 대상으로 보셨다. 4. 새 천년을 믿음으로 기대하라 이제 새 천년에 발맞춰 변화하는 교회의 역사에 새 물꼬를 함께 터 보도록 하자. 우리의 삶과 사역의 눈 높이를 조금만 더 멋있게 새 천년에 세계교회와 주님을 섬기는데 창조적으로 맞추어보자.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는 기적의 사역을 감당케 하실 것이다.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4----pp68-85 설교중심의 교회성장(김서택/제자들교회 담임목사) 교회는 사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나라의 대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권면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조직이요, 단체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그 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많은 목회자의 고민은 교회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1. 하나님나라 운동의 축으로서의 교회 예수님께서 사복음서를 통틀어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은 마16:18과 18:17에 단 두 번만 나온다.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서 거의 말씀하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바로 예수님이 생각한 교회는 하나의 안정된 단체나 집단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설교하고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의 축으로서 교회를 생각하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의 모델로 '노아의 방주'를 많이 생각해 왔다. 할 수 있는 대로 노아의 방주처럼 교회 안으로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 자체를 하나님 나라 확장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교회가 부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만으로 교회의 부흥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다른 두 가지 즉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선포되고 있는가'와 '그리스도인들이나 사회인들의 삶 가운데 부정과 부패가 물러가고 창조질서가 회복되며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어야 한다. 2. 한국교회의 성장사 우리나라는 전 세계가 놀랄만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루어 왔다. 그것은 세 단계로 나누게 된다. 첫째는 선교초기는 순수한 단계로 교회가 없는 곳에 전도와 교회 설립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교회를 초대형으로 성장시킨다는 개념은 없었다. 둘째 단계는 산업화로 인하여 인구가 이동하면서 이루어진 교회성장이다. 이러한 도시화 현상으로 인구가 대대적으로 도시로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면서 시골교회는 노령화되는 동시에 도시 교회가 비대해지는 교회성장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셋째는 서울 강남지역을 개발과 함께의 교회성장이다. 이 때부터 목회자의 관심은 변하게 된다. 지금까지 교회는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에서 '가진 자들'의 종교가 되기 시작했으며, 지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교회가 아니라 교인들의 필요와 편의를 위한 교회로 변질되게 할 환경을 만들고 말았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수, 교인수는 많아 졌을 지는 몰라도 말씀의 질이나 사회의 윤리적인 수준은 오히려 추락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목회자가 대부분이 교회성장의 열병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를 확인 해야한다. 많은 목자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교회에 오게 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을 많이 병원에 데려오기만 하면 저절로 병이 치료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의사와 같다. 하지만 오히려 병의 치료는 환자가 병원에 온 후부터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기능은 사람의 죄를 치료해서 새사람을 만드는 데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규모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반드시 종합병원이라고 해서 사람을 잘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개인병원에서도 의사만 훌륭하면 병을 잘 고칠 수 있다. 3. 말씀중심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꿈꾸며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사용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온다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말씀을 들어야하고 과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던 옛 삶을 완전히 청산해야만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교회라고 하는 집단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예수를 알아야 하고 나의 주로 영접하는 과정을 걸쳐야한다. 김서택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정체 현상을 다른데서 찾지 않고 바로 교회 안에서의 복음선포가 상실 된데서 찾고 있다. 교회 안에 많은 프로그램이 개설된다고 해도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예배이고 예배의 중심은 설교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바로 설교를 통하여 거의 모든 일을 다하여야 한다. 설교를 통해 기본적인 복음을 선포하고, 이로써 불신자를 회개하기도 하고 죄를 책망하여 나쁜 길로 빠진 자를 돌아서게 하기도 하고, 혹은 어려운 문제를 상담하거나 낙심한 자를 격려하는 일을 해야한다. 따라서 설교라는 것은 단순히 예배순서 중의 하나로서 유익한 말씀을 듣는 시간 정도가 아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설교 순서는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는 시간에 비유할 수 있다. 설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복음설교와 교리설교,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이다. 4. 참된 말씀선포와 교회됨의 비밀 강해설교를 잘하거나 혹은 설교중심으로 목회를 한다고 반드시 교회가 급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대로 충실하게 가르치다 보면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나온다. 복음을 제대로 선포한다면 사실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의 진정한 성장 혹은 부흥이란 무엇일까? 교회의 진정한 부흥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때 중단되었던 은혜가 회복되며 성령의 부으시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교회의 부흥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 w속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하고 그 결과로 교인이 늘어야 한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을 듣고 중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되는데는 이 길밖에는 없다. 이러한 교회는 꾸준한 성장이 있기 마련이며, 말씀 선포로 인한 회중의 증가는 확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가지 때문에 교회의 맴버십이 튼튼해지며,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난 체험 때문에 변화된 삶의 증거가 있고 헌신하는 자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성경연구와 설교준비가 목회자를 늘 깨어 있게 한다. 목회자가 늘 깨어 있도록 자극해 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지속적인 성경연구 외에는 그럴만한 것이 없다. 목회자에게 목표가 없을 때는 본연의 임무를 떠나 다른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다라서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있도록 하고, 또 목회자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설교가 목회의 목표가 되어야한다. 다른 사람도 살려야 하겠지만 자신도 살기 위해서, 건강한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씀 밖에 없다. 5. 필자(김서택 목사) 자신의 경험: 제자들 교회 개척했을 당시 말씀 증거에 대한 열정으로 목회는 철저하게 설교 중심이 되었던 사례. 1)개척 당시 가졌던 교회에 대한 생각 첫째, 교회의 사명-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밝히는 것을 가장 중요시함. 그래서 목회는 자연히 설교중심의 목회가 됨. 둘째, 복음설교, 교리설교, 영성을 위한 설교를 주일오전, 오후, 그리고 수요일에 했을 때균형 있는 설교가 되어 교인들이 상당히 균형 있게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셋째, 제자훈련-대학생 선교단체를 통하여 도입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으로 교회의 근본 체질을 바꾸어 놓음. 개인 중심의 제자훈련은 지나치게 지적인 성장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진리를 들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다. 넷째, 설교와 다른 은사와의 관계-말씀이 먼저 공동체를 만들고 거기서부터 여러 가지 은사가 창출된다. 그리고 은사를 세울수 있다. 2)제자들 성장을 어렵게 한 요인들 첫째, 청년중심의 개척을 하다보니까 교회가 정상적으로 자라는데 오랜 시간이 걸림. 둘째, 설교중심의 목회를 하다 보니까 새로운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답답할 수밖에 없었고 적응하기 힘들었다. 셋째, 설교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목사는 심방할 시간을 많이 줄일 것이라는 생각과 약한자들이 스스로 설교를 듣고 자기 힘으로 일어설 것이라는 생각에 심방을 소홀히 하였다. 넷째, 개척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서 하나의 공동체 형성하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림. 다섯째, 재정적인 문제로 장소를 임대하는데 어려웠다. 여섯째, 공동체 구성원이 워낙 교회 생활에 경험이 없는 자들 이어서 전도를 통한 지역화에 소극적이었다. 3)제자들 교회의 성장원인: 목회자 자신이 설교 중심의 목회를 하다 보니까 설교하는 중에 목회자 자신이 놀랐게 성장한 것이다. 본문 중심의 강해설교를 하다보니까 목회자가 자라게 되며, 교인들도 함께 자라게 되어서 성장하게 되었다. 첫째, 제자들교회의 예배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 선포로 인해 말씀을 듣고 기쁨과 감동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다. 둘째, 성경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면 대상에 관계 없이 두려움 없이 선포했다. 설사 청중들을 다 잃는 한이 있어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 설교하리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셋째, 삶 전체를 치유하는 목회를 했다. 전인적인 치유였는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영혼이 치료되고, 그 다음은 생활습관이나 삶이 치료되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며,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비전이 치료되는 식이었다. 넷째, 학생 집회에서 설교를 하다보니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제자들교회에 찾아 오게됨. 다섯째,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배우자를 찾아 결혼하면서 부부성경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소그룹을 통하여 교회에 완전히 뿌리내렸다. 6. 바르게 자라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맥가브란 박사가 교회 성장론을 주장한 이후 교회성장은 목회의 아주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었다. 이 교회 성장론은 교회가 밖에 있는 영혼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맞다. 그래서 교회는 밖에 있는 영혼을 교회로 이끄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 그리고 전도의 공략대상을 어느 특정 계층을 특화함으로써 교회 공동체성을 약화시킨 문제점. 사람을 교회 안으로 인도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에 소홀히 하면서 처음 온 사람에게 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음으로서 생긴 문제점. 교회는 단순히 회원만 늘여 가는 집단이 아니다. 바로 사람들이 죄를 치료받기 위해서 오는 곳이며 이것은 처음부터 분명히 해야한다. 말씀이 이끄는 교회 성장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 자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회성장이다. 다시 말해 교회의 성장은 개인적으로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설교해 나가는 계획을 세우라. 지속적으로 말씀을 설교 해 나갈 때 설교자가 말씀으로 은혜 받고 자라며, 목회자가 자라면 교인들은 반드시 자라게 되어 있다. 둘째, 소그룹 성경공부 활성화를 통해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동역자로 만들어라. 이 때 교호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셋째, 교회에 대한 공동체의 개념을 가져야 한다. 넷째,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이다.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5----pp86-93 관계중심의 셀교회 성장(목산침례교회 김현철 목사와의 대담/편집장 장병두 목사 진행) 1. 목회철학으로 삼았던 교회관: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성경에 예시된 관계중심의 목회. 여기서 '관계'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상대방과 내가 진짜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관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를 과감히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의 요기를 통해 진짜 '나'가 노출되어야만 '관계'가 일어날 수 있다. 둘째는 서로가 얼마나 솔직히 자신들의 느낌을 나누면서 살고 있는가에 따라 관계의 핵심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나 아퍼, 슬퍼, 외로워, 사실은 나 예수 믿는 게 무서워'라는 식의 느낌이 나누어질 때 관계형성의 고리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느낌들이 나누어지고 공적인 자아가 드러나려면 예배당 밖에서라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성경공부 시간은 성경공부가 목표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낼 수 없고 예배시간도 공적인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자신의 느낌을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배당 말고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공식적인 프로그램 이외에서 이루어 지게되지요. 그래서 아래 세 가지에서 관계가 형성된다고 본다. 첫째는 주일 이외의 시간에, 둘째는 교회당 밖에서, 셋째는 교회 프로그램 이외의 일상 생활의 현장에서 서로 만나면서 이야기 나누고 활동하는 것을 통해 관계가 형성된다. 셀모임은 관계의 열매로 교회의 풍토가 형성되고 나서 그 결과로 셀모임이 나타나야 한다. 교회의 풍토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구원관이 분명해야합니다. 즉 교인들이 예수님하고 분명한 관계가 있어야한다. 둘째로 교인들 개개인이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갖고 있어야한다. 성경에 의하면 교회를 새로운 '영적인 가족'이라고 소개한다. 우리가 정말로 영적인 가족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갖고 있어야한다. 바로 가족같은 교회관을 갖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가족 같은 교회관은 이웃이(교인이) 죽어 갈 때 정말 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사명으로 붙어 있어야될 나의 몸이고 목숨을 나누는 '혈맹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2. 주일 밖에서 가족으로서의 관계가 실제화 되기 위해서 실제로 목산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들을 소개하면, 교인들은 주일 아침에 자기가 원하는 훈련 프로그램에 한 시간 정도 참여하고 그 후 예배를 두 시간 정도 드린 후 교실이나 집으로 이동을 한다. 그렇게 이동하고 난 후에 교회나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또 성경공부를 한다. 성경공부는 프로그램이 따로 있고 보통교회의 두 배 이상의 교육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집에 가기 싫어 소모임을 갖는다 . 어떤 때는 연합으로 모이기도 한다. 보통 화, 목은 셀 모임이 오전이나 오후에 있는데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정도 모임을 갖는다. ---200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을 위한 제언 6----pp94-99 21세기 교회 성정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오태균/자연적교회성장연구원 원장): 원문 들어가는 말 필자가 처음으로 ‘자연적교회성장’(Natural Church Development, 이하 NCD)을 접했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출발이 그렇듯이 바른 목회, 사도행전적인 교회, 건강하게 균형잡힌 교회를 꿈꾸던 중 NCD와의 만남은 메마른 심령에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지난 일 년 간 한국과 미국에서 개인적으로 혹은 세미나등을 통해서 만난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필자와 동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보면서 필자는 많은 목회자들의 심령속에는 무엇인가 공통적으로 갈망하던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무력감을 드러내는 한국 교회의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고 초대교회의 바른 교회상을 재정립하자는 간절함이었다. 양적 교회 성장에 대한 반성 맥가브란의 교회성장이론이 소개된 이후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나라의 교회들이 그의 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이론은 1971년 당시 볼리비아 선교사였던 피터 와그너가 풀러신학교에 합류한후 한층 더 실제적으로 교회성장에 적용되는 황금기를 맞는다. 피터 와그너외에도 라일살러, 칼 조지등을 비롯한 굵직한 교회성장전문가들이 탄생하고 그들의 이론은 여전히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영향력있는 이론과 아이디어들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 교회 역시 이들의 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난 40년간 교회성장학의 메카라고 불리우는 풀러신학교를 통해서 나온 교회성장학 이론등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맥가브란의 세계 교회성장에 대한 공헌은 지대하다. 하지만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의 교회성장이론에 의지해서 교회 성장에 매진해온 이면에는 많은 그늘과 상처들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왜 교회성장을 추구하는데 많은 문제가 생기는가? 맥가브란 박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 성장운동은 “열매”에 초점을 두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건지려는 구령정신은 자연히 그리고 우선적으로 좋은 열매에 대한 관심보다는 많은 열매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교회 성장에 대한 이같은 패러다임은 지역교회로 연결되었고, 수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무리한 방법론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실제로 그는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대해 ‘교회가 자라지 않는 사람들의 방어기제‘(a defense mechanism, used by those not getting growth)라고 규정한다. 이런 이론에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은 그들의 목회 방법론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검토없이 모든 목회의 에너지를 쏟게되고, 그렇게 해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신축 아파트 단지내에서의 교인 쟁탈전(?)은 세상 사람들이 좋은 가십거리가 되었고, 이제 개척을 시작한 목회자들에는 생존문제가 걸려있기에 얼마간의 순수함은 곧 머나먼 추억으로만 남게된 것이다. 다행히 90년대에 들어와서 교회성장은 열매보다는 뿌리, 양보다는 질, 성장보다는 건강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그런 교회들이 아직까지는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원화시대의 물결을 타면서 교회성장이론 역시 어느 한 패러다임에 의지하고 않고 다양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빈야드교회, 윌로우크릭교회, 새들백교회등의 다양한 모델등이 교회성장학의 새로운 모델들로 세계교회에 소개되고 있다. 윌로우크릭교회 같은 곳은 한번 세미나가 열릴때마다 5천명이 등록을 하는데, 그런 세미나가 다른 주제를 가지고 일년에 5~6회 이상 개최된다. 한국은 물론 유럽, 아프리카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하고 도전을 받는 것을 보면 분명히 배울 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런 교회들은 우리 목회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니고, 모델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미국에 살면서 불편했던 것 중 하나는 옷을 고르는 문제였다. 미국의 기성복은 미국인의 체형에 맞게 나오기 때문에 옷을 사면 대체로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마음에 드는 남방을 한 벌 발견해도 어깨가 맞으면 팔이 길고, 팔길이가 맞으면 품이 작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결국 포기하고 팔길이가 길어도 어깨가 맞는 옷을 택해, 팔을 한번 접어서 입고 다녔다.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윌로우크릭의 모델은 같은 시카고 지역에서도 따라하기 힘든 케이스이다. 하물며 전통적인 한국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굳이 적용하자면 그 사역속에 있는 목회 철학과 원리를 찾아내 한국교회의 문화와 정서에 맞게 리모델링하는 작업이 필요로 할 것이다. 크리스찬 슈바르츠의 자연적 교회성장 이론 90년대 중반 크리스찬 슈바르츠는 세계실천신학계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름대로 연구하던 과제를 독일 정부의 보조를 얻어 1994년에서 1996년까지 세계 32개국의 1000교회들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교회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폭넓고 깊이있게 연구했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와 그 교회를 가장 대표할 수 있는 30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사회과학적 조사 방법(Social Science Reserch Method)에 근거한 설문지를 만들어 교회들의 성장 원리에 대해서 조사했다. 18개의 다른 언어로 4백 20만개라는 천문학적인 각 자료들을 사회과학자 크리스토퍼 슈크와 함께 연구조사한 결과 8가지 핵심적인 원리들이 교회성장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 것이다. 현재 성장하는 교회의 여덟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Empowering Leadership) (2) 은사중심적 사역 (Gift-oriented Ministry) (3) 열정적 영성 (Passionate Spirituality) (4) 기능적 조직 (Functional Structure) (5) 영감있는 예배 (Inspiring Worship) (6) 전인적 소그룹 (Holistic Small Groups) (7) 필요중심적 전도 (Need-oriented Evan- gelism) (8) 사랑의 관계 (Loving Relationship) 대부분의 교회들의 평균 질적 수치는 35~65사이에 걸려 있었지만, 이 8가지 분야에서 골고루 질적 수치가 65가 넘은 교회들의 99.4%는 반드시 양적으로도 성장했다. 예를 들어 슈바르츠에 의해 고안된 설문조사 방식을 분석한 결과 사람을 세우는 리더십분야에서 70점을 받았다면, 적어도 교회의 리더십분야에서는 건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기능적으로 잘 조직이 되었고 그에 따라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묻는 기능적 구조에 대한 분야에서 30이라는 점수가 나왔다면, 그 교회는 그 분야가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다른 분야보다 특별히 그 분야의 점수가 제일 낮으면 그것을 ‘최소 요소’(minimum factor)라고 부르며, 특별히 그 분야를 계속적으로 보완하고 강화시킴으로서, 교회의 정상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8가지의 질적 특성을 얼핏보면 이미 많은 교회들이 실천하고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뒷부분의 명사가 아니라, 앞부분의 형용사라는 사실이다. 교회에서 리더십은 있지만, 사람을 세우는, 권한을 부여하는 리더십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미 세상의 경영학도 여러 가지 이론들을 거쳐서 21세기는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 혹은 ‘변혁적인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는데, 유독 교회만은 이미 세상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의 대기업들의 중역들을 교육할때 성경적인 원리를 가르치는 강사들이 유명인들의 대열에 올라있다. 몰몬교도이기는 하지만 스티븐 코비가 그렇고 존 맥스웰목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2002-02-02 09:00:45 read : 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정 훈 택 (총신대학교 교수 / 신약학) 신약성경에 사용된 용어 "화해"와 "평화"는 그 기본적인 의미가 우리말의 "화해"나 "평화"와 같다. 평화는 평온하고 화목함을 의미한다. 대립, 분열, 반목, 질시, 다툼, 적대감, 박해, 비난, 전쟁 등이 없이 잘 살아가는 상태가 "평화"다. 한글 신약성경에는 평온, 평안, 평강, 화평 등 다양한
2002-02-02 09:00:45 read : 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정 훈 택 (총신대학교 교수 / 신약학) 신약성경에 사용된 용어 "화해"와 "평화"는 그 기본적인 의미가 우리말의 "화해"나 "평화"와 같다. 평화는 평온하고 화목함을 의미한다. 대립, 분열, 반목, 질시, 다툼, 적대감, 박해, 비난, 전쟁 등이 없이 잘 살아가는 상태가 "평화"다. 한글 신약성경에는 평온, 평안, 평강, 화평 등 다양한 번역어가 채택되었지만, 헬라어 신약성경에는 한 단어 "에이레네"가 사용되었다. "평화"가 상황을 지시하는 데 비해, "화해"는 그 평화로운 상황에 도달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화해에는 불화, 다툼, 대립, 박해, 전쟁 등 부정적인 관계가 앞서 전제되어 있다. 이것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화해이다. 한글 신약성경에는 화목, 화해, 화합, 사화 등의 다른 용어들이 사용되었지만 이는 헬라어 신약성경의 같은 단어를 다양하게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화해"나 "평화"가 순수하게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의 사회적, 정치­군사적인 상황을 지시하는 경우, 신약성경의 용어와 우리말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 화해는 불화의 극복을, 평화는 개인적 혹은 사회적으로 평화로운 삶을 의미한다(눅 19:42; 행 7:26; 9:31; 12:20; 15:33; 16:36; 24:2; 고전 16:11; 히 7:2; 11:31 등).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행동이나 삶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역, '세상을 다스리심'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평화, 그런 화해를 신약성경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화해나 평화는 신약성경에서 우리말과는 다른 여러 가지 신학적, 교리적 색채를 내포하고 있다. 즉 화해/평화는 신약성경에서 윤리적인 용어(화해)나 삶의 상황에 대한 묘사(평화)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화해)과 그 결과(평화)를 지시하는 용어들이다.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화해"와 그 결과인 "평화"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고, 영원한 신적 평화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과의 화해, 신적 평화는 사람들 사이, 종족과 민족들 사이의 화해와 평화의 기초가 된다. 신약성경의 화해, 평화는 이렇게 한편으로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구성하는 용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용어이다. 이 특수한 기독교적 의미들은 화해, 평화가 가진 언어의 일반적인 의미에 부가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전제: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심판 신약성경의 "화해"와 "평화" 개념은 인간의 타락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적대 내지 불화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는 모든 인간관계와 사회관계에 온갖 불화가 끊임없이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며, 힘들게 만든 화해와 비싼 값을 치른 평화가 항상 일시적인 것으로 머물게 하는 깊은 뿌리이다. 만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관계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이 세상의 비평화적인 현상들을 전제하지 않으면 "화해", "화목제물"이란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와 신약성경의 특성을 놓치게 된다. 아니 신약성경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하늘과 땅의 "평화" 신약성경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사역을 "평화"와 연결한 말씀이 있다. 세례 요한의 출생에 즈음하여 사가랴는 성령에 충만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9)라고 예언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을, "땅에는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눅 2:14; 천군의 노래에서).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눅 19:38). '하늘의 평화와 땅의 평화'란 이색적인 표현은 '평화로운 삶'이나 '평화로운 사회' 등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평화를 선포하시거나,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생애는 이 세상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 자신도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다툼, 분쟁, 분리를 의미하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 10:34; 눅 12:51).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초래하는 '하늘과 땅의 평화'는 최우선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적대관계에 있던 하나님과 죄인을 화해시키는 것이며, 그 결과로 땅에, 그리고 하늘에 진정한 평화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가져오는 신적 내지 신앙적 평화를 이렇게 화해 개념으로 설명한 것은 바울 사도였다. 그리스도의 화해사역 바울을 따르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평화를 가지고 있다"(롬 5:1).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0절). 이 모든 일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신적 화해를 성사시킨 사건으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소개한다(롬 3:25). 죄용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구원을 화해와 평화 개념으로 재설명한 것이다. 비슷한 내용이 골로새서 1장 20절에도 수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셨다." 이 화해의 결과, 신자들은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22절)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믿음 안에 거하는 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불화관계가 끝났다. 진정한 영적 평화가 시작된 것이다. 영적 평화란 죄/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끝났음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불안, 죄책이 끝났음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들 내지 왕과 백성의 친밀하고 평화로운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평화에 관한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이 평화의 소식을 사람들에게 직접 전하신 것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죄인들을 하나님에게로 계속 부르셨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래서 "평화의 복음"으로 기억되기도 했다(행 10:36; 엡 6:15).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라는 부름,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의존하라는 부름은 예수님 자신의 화해 사역에 근거하여 평화의 소식을 전하신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8-2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 사역을 제자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설명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자들이 하나님과 화해케 하신 그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화해의 직분"(18절)을 주셨다는 것이다. "화해의 직분"이란 그리스도에 의해 성립된 평화의 소식, 즉 "화해의 말씀"(19절)을 전하여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화해하도록 만드는 직분을 말한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권했다(20절).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미 마음을 여신 평화의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믿고 의지하라는 그런 부름이었다. 에베소서 2장 11-2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사이의 모든 벽도 허무시고 믿는 사람들이 서로 화해토록 하셨다고 설명한다:"그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해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4-18). 믿음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적대관계, 경쟁관계는 다 해소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 내지 가족으로 서로 관계한다. 진정한 영적 평화가 주어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란 이렇게 근본적으로 신앙적 차원의 개념이다. 그리고 평화는 더 이상 희망 사항이나 미래의 꿈이 아니라 영적 실재가 되었다. 평화를 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이 바울의 설명처럼­십자가로 상징되는­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평화와 사람들 사이의 화해/평화로 요약될 수 있다면, 또 예수님의 죽음이 이런 화해의 제물이었다면, 예수님의 사역 중 평화와 관련된 몇 말씀들을 특별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기며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 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네 죄 사함을 얻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와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에게 하신 말씀:"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눅 8:48)가 이런 말씀이다. 이 두 경우 "평화롭게 가라"는 말씀은 언뜻 인사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여인들의 병을 고쳐주셨거나 죄를 용서해 주셨고, 더욱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선언하셨음을 감안하면 "평화롭게 가라"는 말씀은 인사치레 이상, 즉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의 평화를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여인들에게 주신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평화란 그리스도께서 이들에게 주신 영적 실재였다. 요한복음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신 것을 예수님의 주요 사역으로 소개한다:"평화를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는 물질의 풍요, 힘, 권력, 미래의 안전에 대한 보장 등에 근거하여 가지게 되는 세상의 평화와 같지 않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평화이며, 사람들과의 영적 평화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바울의 화해 개념을 따라 설명하자면 자신의 죽음으로 화해의 사역을 모두 끝내신 그리스도께서는 같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반복하셨다:"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눅 24:36; 요 20:19, 21, 26). 이 말씀을 단순히 인사말로 돌릴 수 있을까? 자신의 죽음이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화목제물로서의 죽음이었음을 아셨고,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고 사람들의 굳은 마음이 풀려 영적 평화가 수립된다는 것을 아셨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영적 실재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인사 이상, 즉 그렇게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룩하신 화해, 평화를 주신 것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영적인 복인 하나님의 평화 그리스도의 화해로 확립된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들과의 평화는 예수님의 생애로 막이 오른 신약 시대의 주요한 영적인 복의 하나이다:"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희락이라"(롬 14:17. 2:10; 8:6; 15:13도 비교하라). 하나님의 평화가 신자들과 함께 한다거나(빌 4:7), 평화의 하나님이 신자들과 함께 한다는 표현도(빌 4:8; 고후 13:11; 롬 15:33; 16:20; 살전 5:23; 히 13:20 등)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이 영적인 복을 사람들이 소유한다는,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표현이다. 서신서에는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원하는 기록자의 기원이 약 30번 수록되어 있다. 그 중 15번은 다음과 같은 거의 같은 형식구로 되어 있다:"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고전 1:3; 빌 1:2; 고후 1:2 등). "평화와 사랑과 믿음", "은혜와 평화와 긍휼", "은혜와 평화와 사랑", 혹은 "평화"를 기원한 구절들도 있다. 이 기원 형식구는 평화의 출처를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서신서들의 저자가 기원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 사람과의 화해 사역에 근거한 영적 평화임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들의 기원은 막연한 기대나 인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직분자로서 그들은 수신자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평화가 나타나고 경험될 수 있도록 축복하였을 것이다. 평화의 기원이나 인사가 허공을 울리고 공중에 흩어져버리는 소리가 아니라는 충분한 암시가 예수님의 몇 말씀에 들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적당한 집에 들어가 계속 머물 것을 부탁하시면서 그 집에 들어갈 때 "(평안하기를) 인사하라"고 명령하셨다(마 10:12; 눅 10:5-6). 만약 그 집이 이 인사에 합당하면 제자들이 빈 평안은 그 집에 임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집이 평화를 받아 들이기에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화가 제자들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원이나 인사가 마력과 같은 힘을 발휘함을 의미하지 않으셨다. 화해와 평화의 길을 마련하신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며 성령으로 그들의 기원이나 인사가 꼭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약속 내지 예수님의 천상사역을 이렇게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화해 사역이 모두 끝나고 그 적용의 길만 남아 있는 때에 평화를 기원하고 그 기원대로 평화가 이루어지는 일은 사람들이 경험하게 되는 실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다른 여러 기독교적인 복과 함께 이 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하나님의 영적인 복이다. 윤리적 의미의 화해와 평화 처음에 언급한 대로 화해나 평화가 사람들 사이의 문제로 순수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의미로 사용된 예도 신약성경에 들어 있다. 그 구절들은 평화로운 삶, 전쟁이나 다툼이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약적 특징을 거의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윤리적, 사회적 평화/화해 개념이 처음에 설명한 하나님과의 영적 화해/평화나 사람들과의 영적 화해/평화와 뗄 수 없이 결합된 것으로 말해지는 구절도 있다. 이런 구절들은 기독교적 의미의 화해/평화 개념이 전제되거나 그 기초로 작용하고 있을 때에 비로소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그런 말씀들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교회를 유지해 갈 것을 명령하신 구절을 먼저 살펴보자. 마가복음 9장 50절에서 예수님은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해하라"고 권하셨다. 소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하여는 신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의 평화로운 삶과 질서정연한 사역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무엇인가를­소금이 녹아 없어지듯이­희생할 것을 권하신 말씀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교회 안에서 특히 지도자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지도에 따라 성도들이 평화를 유지할 것을 명령한 구절이 있다(살전 5:13). 화해 혹은 화목과 평화가 교회에 필요함은 교회는 다름 아닌 사랑으로 뭉치고, 예수님의 화해 사역에 기초를 두고 조직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4:33). "화평의 일"을 도모하는 것(롬 14:19)이나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엡 4:3)은 교회의 의무이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 싸움과 다툼이 일어서는 안된다. 이는 정욕의 결과지 교회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열매는 아니다(약 3:18). 마태복음 5장 24-26절에서 예수님은 - 당시의 관점에서 -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야 할" 정도로 사람들과의 화해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무수히 등장하는 고소자들, 불평자들, 불화관계에 있는 사람들과의 화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화해/평화 사역을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마지막 하나까지 다 해결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이 점을 "옥에 갇힌다"(마 5:26//눅 12:58)거나 "마지막 하나까지 다 갚지 않으면 결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마 5:26)고까지 말씀하셨다. 윤리적인 화해/평화는 영적인 화해/평화의 열매로 필수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에 비교적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음 두 구절을 더 인용해 본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8절에서 평화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명령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와 거룩함을 좇음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해 놓았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는 평화가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열거되어 있다. 디모데후서 2장 22절은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명령한다. 야고보서 3장 17절은 평화를 "위로부터", 즉 하나님께로부터 "난 지혜"로 소개한다. 악을 버리고 사랑으로 악을 이기며 선을 행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벧전 3:11; 벧후 3:14). 불신자들과 섞여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에 신자들이 화해와 평화를 기준으로 삼아 신중하고 지혜롭게 판단해야 한다는 교훈이 고린도전서 7장 11,15절에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 신자들이 이혼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평화 중에 너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도록 권했다 .이 모두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 남아 있다:"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 5:9). 화해와 평화는 하나님의 사역이었다. 그리스도의 목적이었다. 이제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즉 신적 화해와 평화를 소유한 사람들의 의무로 남겨져 있다.
2002년 디이트리히 본회퍼를 다시 생각한다?/ 디트리히 본회퍼와 풀뿌리 민주주의/ 2002-08-05
2002년 디이트리히 본회퍼를 다시 생각한다?/ 디트리히 본회퍼와 풀뿌리 민주주의 6·13 지방선거가 국민의 시선을 잡지 못한 채 막이 올랐다. 월드컵 대회와 대통령선거에 밀려버린 이유가 있다. 그러나 실제 영향력을 가진 것은 지방자치다. 민생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풀뿌리가 건강해야 민주주의 나무는 자라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의 위임으로 “교회, 결혼(가정), 노동, 정부(정치적 권위)”를 말하고 있다. 물론 후에 본회퍼가 옥중서간에서는 정부를 문화로 대신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디까지나 세상속에 있는 삶, 세상적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위임들을 수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번에 실시되는 지방선거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위임이란 말은 성경에 의해서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하나의 계명에 달려 있다. 세상 권력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탁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결혼이 무엇인가? 문화 또는 정부가 무엇인가? 노동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임을 수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하나의 대리자로서 행동한다. 하나님께서 이 네가지를 다 모든 사람위에 부과했다. 이것은 세속적 영역으로부터 정신적 영역으로의 도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교회의 위임이다. 교회위임은 두가지로 수행된다. 첫째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선포의 도구이고 수단이다. 둘째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선포의 도구가 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모든 행위의 목적점과 중심점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위임은 모든 인류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위임들 안에서이다. 두번째는 노동의 위임이다. 성경에 노동의 위임은 첫 사람 아담에게서 볼 수 있다. 아담은 에던 정원을 가꾸고 지켜야 했다. 타락 이후에도 노동은 하나님의 훈련과 은혜의 위임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마에 땀을 흘려서 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복권 천국처럼 땀흘리지 않고 대박을 노리는 것은 범죄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노동은 경제활동 뿐 아니라 과학 예술에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세번째는 결혼의 위임이다. 본회퍼는 노동의 위임과 마찬가지로 결혼의 위임도 창조 뒤의 첫째 사람에게서 본다. 결혼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결합 위에 번성하는 축복 새로운 탄생을 준다. 결혼을 통해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봉사를 위한 존재, 그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존재가 된다. 단순히 아이를 출산하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으로 양육(교육)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대해서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네번째는 정부의 위임이다. 정부의 신적 위임은 노동과 가정의 신적 위임을 전제하고 그것들에 의존한다. 정부는 직접생명이나 가치들을 생산할 수 없다. 그것은 창조적이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그에게 주어진 질서 안에서 피조된 것을 지탱한다. 법과 칼의 권력을 통해 정부는 예수그리스도의 현실을 위해 세상을 보존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정부에 복종할 책무가 있다. 본회퍼의 위임론은 철저히 그리스도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위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한다.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위임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을 부정과 비리와 혼탁으로 더럽히는 일은 더 이상 해서는 안될 것이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잘 자랄수 있도록 관심과 기도는 월드컵 16강 못지 않게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0세기 서구 신약학에 대한 반성(反省)과 제언(提言)/ 역사적 예수 연구와 관련하여(Retrospect and Proposal of New Testament Studies of the 20th Century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Jesus Quest)/ 2002-11-09
20세기 서구 신약학에 대한 반성(反省)과 제언(提言)/ 역사적 예수 연구와 관련하여(Retrospect and Proposal of New Testament Studies of the 20th Century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Jesus Quest) I.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는 지난 1세기 동안 서구 신약학의 가장 중심적이며, 지속적인 주제중의 하나가 되어왔던 "역사적 예수연구"를 중심으로 그 동안 서구 신약학이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추적해 보려고 한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학문적 反省을 위해서이며, 둘째는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방향과 과제를 모색해 보기 위해서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일찍이 신학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시작되고, 교회에 의해 발전되었다. 기독교 초기의 위대한 신학자로 불리어지는 사도 바울이 그랬고, 누가와 요한이 그랬다. 그들의 뒤를 이은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도들이 교회를 위하여 썼고,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보존되어온 성경을 또한 교회를 위하여 해석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지난 몇 십년 동안 서구 신학은 주로 교회 안에서보다도 교회밖에 있는 대학교 안에서, 교회 목회자와 신자들을 위해서라기보다도 그들과 관계없이, 때때로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주로 신학대학원이나 대학교의 종교학부에 소속된 학자들을 위하여 논의되고 발전되었다. 그 결과 신학과 교회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생기게 되었고, 이러한 괴리는, 마치 호수를 떠난 고기나 고기 없는 호수처럼, 결국 신학과 교회 쌍방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신학은 그 생명력을 상실한 종교학이나 인문학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생명력 있는 신학을 잃어버린 많은 교회들은 교인들을 점점 잃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한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인 우리는 서구신학의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면책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첫째, 인터넷을 통해 국경과 인종의 장벽이 무너진 같은 지구촌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과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서구신학과 서구교회의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교회는 서구교회의 선교사들을 통해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우리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대다수 서구신학의 산실에서 신학적 훈련을 받아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지난 세기 서구 신약학 분야에 대한 우리의 반성작업은 어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반성일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오늘과 내일을 대비하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방향과 과제의 준비이기도 하다. II. 지난 세기의 "역사적 예수연구"에 대한 회고 신약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20세기의 "역사적 예수연구"의 두 가지 방향의 길을 연 사람은 Adolf von Harnack(1851-1930)과 Albert Schweitzer(1875-1965)이다. 전자는 非終末論적, 비유대적 예수연구의 길을 연 사람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終末論적, 유대적 예수연구의 길을 연 사람이다. Harnack은 1901년에 출판된 책, What is Christianity?에서 새로운 다음 세기를 위하여 교회의 전통과 교리 및 철학 등에 의해 채색되지 않은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것("das Wesen")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은 바로 무시간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父性과 윤리적 교훈을 제시한 예수의 메시지라는 주장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Harnack의 주장은 새로운 주장이기보다도 H.S. Reimarus(1694-1768)에 의해 시작되어 D.F. Strauss(1808-74), E. Renan(1823-92), H.J. Holtzmann(1832-1910) 등에 의해 滿開된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연구, 곧 역사적 예수를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인류의 죄를 代贖하신 구원자로 보기보다 단지 인류에게 普遍妥當한 윤리적 교훈을 준 모범적 교사로 보려고 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총체적인 결론이기도 하였다. Harnack의 예수연구가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면, Schweitzer의 예수연구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과의 단절과 함께 새로운 유대적, 종말론적인 예수연구의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Schweitzer는 1906년에 출판된 Von Reimarus zu Wrede에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시도, 곧 근대적인 역사적 비평방법에 의해 교회의 전통적인 도그마에 의해 채색되어지지 않은 순수한 역사의 예수를 찾으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시도를 철저히 재조사한 다음 결론 내리기를, 그들이 재구성한 예수는 주후 1세기 유대교 안에서 실제로 살았던 예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 당대의 사상적 이념이나 윤리적인 체계에 의해 창조되거나 재구성된 예수이다라고 단언하였다. 그 대신 그는 1892년 J. Weiss가 Die Predigt Jesu vom Reiche Gottes에서 제시한 종말론적인 예수상, 곧 '예수는 후기 유대교 종말 사상에 심취하여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선포한 유대 묵시적 예언자이다'라는 주장을 발전시켜,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 제시한 비유대적, 비종말론적, 비초월적인 예수가 아닌 주후 1세기의 유대적, 종말론적, 초월적인 예수를 제시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Schweitzer가 제시한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위해 스스로 인자가 되어 십자가의 죽음을 자처한 한 영웅적 유대인 예언자에 지나지 않았다. R. Bultmann은 Schweitzer의 역사적 예수 無用論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던 나아가 아예 역사적 예수연구의 不可能을 천명하였다. 일찍이 Martin K hler가 Der sogenannte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biblische Christus에서 역사적 비평방법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에 제시되고 있는 신앙의 그리스도는 구분된다는 주장을 하였을 때, K hler의 본래 의도는 양자 사이의 연속선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Bultmann은 양자를 완전히 서로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비평 방법의 대상이 되는 복음서 그 자체가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전승이 아니라 신앙의 산물이라는 전제 아래, 복음서를 역사적 예수연구의 자료로 사용하는 그 자체를 아예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양식비평의 집대성인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을 통하여, 복음서에 수록되어있는 예수에 관한 전승들이 주후 28년에서 30년까지 활동을 하셨던 역사적 예수 자신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후부터 기록된 복음서가 나타나기 시작한 주후 60년 때까지 예수를 추종하는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마치 고대의 희랍 사람들과 이스라엘 주변의 근동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과 자기 이해의 표현으로써 여러 가지 형태의 신화를 만들었던 것처럼, 저들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와 교훈, 선교를 위하여 공동체 자체의 신앙적 자기이해의 표현으로써 만든 일종의 창조적인 산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Jesus and the Word라는 책에서 "나는 참으로 우리가 예수의 삶과 인격에 관하여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초대 기독교 자료는 예수의 인격과 삶에 관하여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 자료는 너무나 단편적이며, 종종 신화적이며, 그리고 그밖에 예수에 관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복음서에 대한 非神話的 접근, 곧 복음서의 역사적 접근 아닌 實存主義的 접근을 시도하였다. 복음서의 모든 역사적 信任性을 거부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의 배격과 함께 결국 기독교를 일종의 가현설(Docetism)에 빠뜨리게 하였다고 볼 수 있는 Bultmann의 주장은 1960년대 이후에 와서 그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즉, 역사와 신앙[케류그마]을 철저히 분리시킨 Bultmann의 주장은 역사와 신앙[케류그마] 사이에 다시 다리를 놓으려는 E. K semann, E. Fuchs, G. Bornkamm, H. Conzelmann등의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New Quest)와 복음서의 예수 전승과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선을 회복시키려는 J. Jeremias, B. Gerhardsson, R. Riesner, H. Sch rmann등의 유대 문맥에서의 복음 전승사 연구 등에 의해 허물어졌다. K semann을 위시한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그들의 스승에 반대하여, 복음서 안에는 역사와 케류그마가 서로 함께 얽혀져 있다는 전제 아래, 교회의 그리스도, 혹은 복음서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 연속선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복음서를 다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자료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Jeremias는 C.H. Dodd와 함께 복음서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의 비유들은 예수 그 자신의 말씀(ipsissima verba Jesu)을 보존하고 있다고 보고, 그의 Gleichnisse Jesu를 통해서 독창적인 진정성의 기준을 따라 순수한 역사적 예수의 비유 말씀을 회복시키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New Testament Theology: The Proclamation of Jesus에서 예수의 메시지와 인격을, 단순히 신약신학의 전제로 삼은 Bultmann과는 달리, 신약신학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삼았다. Gerhardsson은 그의 Memory and Manuscript, The Origin of the Gospel Tradition에서 본래 유대적 문맥 안에서 시작되고 전승되었던 예수 전승들을, Bultmann이 유대교 문맥에서 보지 않고 오히려 희랍적 배경에서 본 그 자체가 잘못이며, 그리고 Bultmann이 예수 전승들이 그토록 짧은 기간동안에 초대교회 안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고 보는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구체적인 역사적 실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의 방법론 자체가 이미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Sch rmann도 그의 논문, "Die vor sterlichen Anf nge der Logientradition"에서, 복음전승이 부활절이후 초대교회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주장한 Bultmann에 반대하여,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제자 선택과 교육, 선교파송 등의 구체적인 실례에 근거하여, 복음전승은 이미 부활절이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1960대의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는 1980년대 이후에 와서 소위 역사적 예수가 살았던 유대적 문맥에서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는 "제 삼의 예수 연구"(The Third Quest)를 주도하는 학자들(B.F. Meyer, E.P. Sanders, J.H. Charlesworth, N.T. Wright, G. Vermes, J.P. Meier, B.D. Chilton, M. de Jonge, P. Stuhlmacher, J. Becker, J. Gnilka, B. Witherington III)과, 예수의 사건보다 예수의 진정성 있는 말씀에 의해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소위 "예수 세미나"(The Jesus Seminar) 학자들(R.W. Funk, J.M. Robinson, M. Borg, B. Mack, J.D. Crossan)에 의해 계승 발전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Schweitzer의 종말론적 예수 연구를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제 삼의 예수연구"는 역사적 예수연구에 관한 획기적인 새로운 자료의 발견에 연유하고 있다기보다도 오히려 불투만이 허물었던 복음서에 대한 역사적 신임성의 재회복과,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를 헬라문맥에서 보지 않고 예수 당대의 유대교 문맥에서 보려는 강한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제 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19세기와 20세기초의 "옛 역사적 예수연구"(Old Quest)나 1960년대의 "새로운 역사적 예수연구"(New Quest)보다도 역사의 예수를 찾는데 있어서 훨씬 더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리는 이점을 Sanders가 1985년에 출판한 그의 책 Jesus and Judaism에서 "오늘날 지배적인 견해는, 예수가 무엇을 성취하려 하셨느냐에 관하여 우리가 매우 잘 알 수 있으며, 그가 무엇을 말하였느냐에 관하여 상당하게 많이 알 수 있으며, 그리고 이들 두 가지가 1세기 유대교 사회의 문맥에서 볼 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유대적 문맥에 한정시키는 제 삼의 예수 연구가들이 Old Quest나, New Quest와 달리 진정한 역사의 예수 회복에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이점을 제 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는 E.P. Sanders, N.T. Wright, J.P. Meier, J. Becker등이 제시하는 예수가 한결같이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985년부터 주로 北美의 서부 California에서 모이는 "예수 세미나" 운동은 일찍이 복음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예수의 초월적인 인격과 그의 사역을 철저히 거부하고 그 대신 예수의 윤리적인 교훈의 말씀에서 역사적 예수의 참 모습을 찾으려고 시도한 Harnack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The Jesus Seminar를 주도하고 있는 R.W. Funk, J.M. Robinson, B.L. Mack, J.D. Crossan등은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 예수가 과연 무엇을 행하셨는가?라는 질문보다도, 예수가 정말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주 의제로 삼아 복음서로부터 역사적 예수 자신의 믿을 수 있는 말씀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진정성 있는 말씀을 찾는데 있어서 자주 비정경복음서인 도마나 베드로의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어떤 비유들과 어록들이 정경복음서보다 더 고대의 것이고 더 信任性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아래, 도마복음서나 베드로 복음서를 정경복음서로부터 진정한 예수 말씀을 찾는 잣대로 활용함으로써 복음서의 정경성과 역사적 신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예수 세미나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The Jesus Seminar 모임의 학자들은 복음서 전승들의 진정성과 그 가능성 여부를 참가한 학자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하였는데 그 결과 놀랍게도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여러 예수 말씀 어록 중 실제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간주되는 말씀은 18%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결과를 토대로 하여 새로운 형태의 복음서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예수, 곧 갈릴리 출신의 비종말론적인 지혜 선생 예수를 제안하고 있다. III. 제기된 문제점과 反省 우리는 지금까지 지난 100년 동안 서구 신약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가 되어왔고, 사실상 모든 신약학의 방향을 좌우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고 볼 수 있는 역사적 예수연구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Old Quest든, New Quest든, Third Quest든, 혹은 The Jesus Seminar든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학자들이 제시한 예수는 서로 동일하지 않고, 때로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 주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예수 자신이 수많은 얼굴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자신을 탐색하려고 하는 질문자들에게 자신을 그때 그때 각각 다르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역사의 예수와는 관계없이 서구의 신학자들이 제각기 그들 자신의 예수를 만들고 있기 때문일까? 무엇 때문에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가? 아마도 그 주된 이유는 대상과 자료에 대한 적합하지 못한 전제와 방법론 문제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추구함에 있어서 그 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어떤 자료와 함께 방법론을 사용할 것인가는 패러다임의 문제, 곧 방법론의 문제는 연구하고자하는 대상이나 내용 못지 않게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패러다임으로 그 문제를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도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동안 예수에 대한 수많은 서구신학자들의 그림이 제각기 달랐던 주된 이유는, 학자들이 찾으려고 한 예수 자신이 수많은 얼굴을 가지고 학자들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었거나, 혹은 예수에 관한 자료들이 학자들마다 달랐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예수에 대한 접근 방법론이 학자들마다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의 예수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자신의 방법론이 역사의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인지를 철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지난날에도 그래왔고, 오늘날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탐색함에 있어서 먼저 자신의 방법론이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 없이 자신의 방법론에 의존하여 어떤 문제를 접근하고, 그리고 그 방법론에 의해 제각기 다른 그림들을 산출하고 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방법론에 의해 만들어진 그 그림이 마치 그가 애초에 그리고자했던 실제 인물이나 대상과 동일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연구에 있어서 역사의 예수에게 접근하는 가장 정당한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먼저 규명하고, 그런 다음 자신의 방법론을 거기에 일치시키지 않는 한, 역사의 예수는 그에게 숨어 있거나 혹은 그 스스로 참된 역사의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를 만들 놓고, 그리고 자신이 창작한 예수가 마치 역사의 예수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위험을 벗어나기 힘들다. 패러다임의 문제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자료에 대한 규정과 그 사용에 대한 문제이다. 고대 역사의 어떤 인물에 관한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우리가 사용하는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설사 고대 세계의 어떤 인물이 자기 당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현존하는 자료가 없다면, 혹은 자료가 있다 할지라도 그 자료의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지식을 확립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역사적 예수 연구도 이 점에 있어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에 관한 한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어떠한 자료를 우리가 가지고 있으며, 그 자료가 얼마나 역사적 信任性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역사 비판학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에 관한 자료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 자신이 직접 썼다고 보이는 그 어떤 自書傳的인 기록물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예수의 言行을 옆에서 목도하면서 찍은 그 어떤 비디오 테이프나 예수의 육성을 담은 그 어떤 녹음 테이프도, 예수 당대의 사람들이 직접 썼다고 보아지는 그 어떤 傳記物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역사의 예수에 관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 현존하는 주후 1세기 자료들로서는 예수의 사후 약 30년 뒤에 쓰여졌다고 보아지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와, 50-60년대에 쓰여졌다고 보이지는 바울서신, 복음서와 거의 동시대에 쓰여졌다고 보여지는 그 밖의 신약성경과 유대 역사가 Josephus의 [유대고대사]외에는 없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니다. 1947년부터 수년간에 걸쳐 팔레스틴 유대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엄청난 양의 쿰란문서는 최근의 구약과 신약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는 2000년만에 발굴된 쿰란 문헌을 통해서 현존하는 우리의 구약성경과 예수님 당대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구약성경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다라는 사실과,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중심적인 종교적, 문화적 사상 배경이, 그 동안 R. Bultmann을 위시하여 적지 않은 학자들이 추측한 것과는 달리, 헬라사상(Hellenism)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교(Judaism)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가 초대교회가 형성된 이후인 주후 67년경 멸망되었기 때문에, 쿰란 문서로부터 역사의 예수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기대감은 사실상 채워지지 않고 있다. 1945년 이집트의 낙 하마디 지역에서 도마복음서를 위시하여 많은 위경복음서들이 발견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학자들이 낙 하마디 문서들로부터 역사의 예수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었다. 물론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예를 들면 The Jesus Seminar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은, 도마나 베드로의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어떤 비유들과 어록들로부터 진정한 예수 말씀을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나 베드로 복음서의 역사적 기원이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그 연대도 정경복음서보다 훨씬 후대의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도마복음서나 베드로 복음서가 실제로 정경복음서와 독립적으로 역사의 예수 연구에 결정적인 새로운 빛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도마복음서나 베드로 복음서가, 주후 2-3세기에 익명의 여러 크리스챤들이 당시 비기독교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널리 읽혀지고 있었던 고대 헬라의 文人인 호머의 작품들의 영향을 받아썼던 많은 위경복음서들, 이를테면, [도마의 유년복음서], [나사렛인의 복음서], [히브리인의 복음서], [마가의 비밀 복음서], [에집트인의 복음서]들처럼, 2세기이후 고대교회안에서 큰 영향을 끼쳤던 영지주의(Gnosticism)의 영향을 받아 정경복음서의 예수 말씀이나 사건들을 재구성하였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대 역사가 Josephus의 [유대 고대사]는 어떠한가? 非크리스챤인 Josephus는 그의 [유대 고대사] 18권 3장 3절에서 예수에 관한 다음과 같은 짤막한 증언을 남기고 있다: "이때에, 실로 우리가 그를 한 인간으로 볼 수 있을찐데, 예수라는 한 현자가 출현하였다.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한 자였고,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드린 사람들의 선생이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 중에는 유대인들과 헬라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는 메시야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이전부터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에 대한 추종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한 헤아릴 수 없는 경이로운 일들에 대하여 말한바 그대로, 제 삼일에 다시 살아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크리스챤이란 종족들은 소멸되지 않고 존속하고 있다." 이 글이 참으로 Josephus자신의 글인가, 아니면 후대의 크리스챤들이 첨부한 것인가 하는 진정성에 대한 논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John P. Meier의 글에서 여실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의 경향은 적어도 이 글의 상당한 부분이 Josephus자신의 것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설사 우리가 이 글을 Josephus자신의 글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Josephus의 이 단편적인 증언으로부터 우리의 예수 연구에 핵심적인 질문들인, 이를테면, 예수는 어떤 메시야였으며, 예수는 자신에 대한 어떤 자기 의식을 가졌으며, 자신의 생애에 대한 어떤 프로그램을 가졌으며,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이었으며, 왜 그가 자신의 유대 종족들로부터 메시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고소를 받아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의 죽음 및 부활과 초대 기독교회의 태동 사이에는 어떤 연결점을 가지고 있느냐 등등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소위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있는 非마가적인 공통자료로 간주되고 있는 Q자료는 어떠한가? 우리는 Q자료를 통해서 믿을 수 있는 역사적 예수를 찾을 수 있는가? 오늘 날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Q자료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믿을 수 있으며, 따라서 Q로부터 순수한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B.L. Mack은 Q자료를 통해서 기독교 신학에 의해 채색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 예수, 곧 非메시야적이고, 非신적이고, 非구원사적이고, 非종말론적인 예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John Kloppenborg는 심지어 Q를 Q¹, Q², Q³로 분류하여 Q신학의 흐름 및 Q를 발전시킨 공동체를 추적하려고 한다. 그러나 설사 마태와 누가가 저들의 복음서 구성에 있어서 非마가적인 자료를 활용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무슨 기준으로, 무슨 근거에서 마태와 누가에 의해 사용되기 이전의 수수한 Q자료를 재구성할 수 있으며, Q의 신학과 공동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가? 소위 Q 주창자들이 재구성한 Q와 예수가 일치하지 못하고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데 누구의 Q와 예수를 믿어야 할 것인가? 따라서 적지 않은 학자들은 Q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고 하는 시도 자체를 여전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감안한다면, 역사적 예수연구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주후 1세기의 역사적인 자료로는 신약성경, 특별히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중점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정경 복음서 외에는 전혀 없다고 해도 결코 과장되거나 잘못된 주장은 아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예수연구는 결국 우리가 신약 성경, 그 중에서도 신약성경의 전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네 복음서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드리고,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해석하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역사적 예수를 찾는데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복음서의 역사적 진정성과 신임성을 거부하고, 복음서와 역사적 예수와의 연관성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정경 복음서를 역사적 예수를 찾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뢰할만한 자료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의 역사적 예수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물론 우리가 복음서의 신뢰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려 복음서를 예수 연구의 결정적인 자료로 삼는다고 해서 우리의 모든 예수 연구를 자동적으로 보장해 준다거나 통일된 결론에 도달해 주도록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첫째는, 복음서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 특성에 따른 복음서의 해석에 관한 문제 때문이며, 둘째는 역사적 예수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문맥이 되고 있는 주후 1세기 유대교의 재구성에 관한 문제 때문이다. 먼저 첫 번째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복음서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예수에 관한 傳記로 보기는 어렵다. 마태와 누가 복음서만이 예수의 출생과 소년 시절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너무나 단편적이다. 그리고 네 복음서 모두 예수의 마지막 생애 3년간의 행적, 그것도 주로 최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복음서가 예수의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에 하셨던 말씀들과 행위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서가 역사적 예수가 3년 동안 이 땅에서 하셨던 모든 말씀들과 행위들을 정확하게 그대로 보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움을 복음서 자체가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모든 복음서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5천명 이상을 먹이신 이적(마 14:15-21; 막 6:34-44; 눅 9:10-17; 요 6:1-15), 공관복음서와 바울의 고린도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의 성만찬 말씀(마 26:26-29; 막 14:22-25; 눅 22:15-20; 고전 11:23-27),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에만 수록되어 있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 막 4:3-9; 눅 8:5-8), 마태와 누가 복음서에만 수록되어 있는 주기도문(마 6:9-13; 눅 11:2-4)등등의 본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공통점도 있지만 또한 서로간에 적지 않은 차이점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복음서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조금씩 조금씩 다르게 반복하여 말씀하셨거나 행동하셨으며, 그리고 각 복음서 저자들이 이 들 중 하나를 보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물론 이론적으로 각 복음서간의 차이점은 예수 자신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말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만찬말씀의 경우 예수께서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조금씩 다르게 네번 반복하여 말씀하셨다고 보기는 극히 어렵다. 따라서 이와 같은 복음서 자체의 현상을 볼 때, 설사 우리가 복음서가 수록하고 있는 예수 전승들이 초대교회나 복음서 저자들의 창작물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역사적 예수 자신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확신한다 할지라도, 예수 전승들이 그 전승과정과 기록과정에 있어서 사도들이나 초대교회나 혹은 각 복음서 저자 자신의 선교적, 목회적, 신학적, 문학적인 필요성과 강조점의 차이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에게 어느 정도 편집상의 자유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복음서 자체가, 주후 28-30년에 있었던 예수의 언행에 관한 전승들이 예수 자신으로부터 예수 전승의 첫 전파자와 관리자가 되었던 사도들과 초대교회를 거쳐 주후 60년 이후의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예수에 대한 傳記가 아닌 예수를 증거하는 福音이라는 문학적 장르로 기록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자유로운 편집이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하여 학자들이 복음서의 자료들을 사용할 때, 때때로 그 자료들이 예수 자신의 역사적인 언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지, 아니면 편집과 해석의 과정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위하여 복음서를 접근 할 때, 문학적 접근이든, 편집사적 접근이든, 수사학적 접근이든, 사회.경제적학적 접근이든, 우리의 역사 과학적 비평 방법 자체를 지나치게 맹신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가장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를 다루는 순수과학이라고 할지라도 탐구자 자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절대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과학적인 비평적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복음서의 자료자체를 비판적인 안목에서 보는 것과 똑같이, 복음서 그 자체가 또한 탐구자 자신과 그의 방법론 자체를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두는 것을 말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탐구자는 자신의 방법론이나 전제를 우상화하는 반면에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복음서 자체를 상대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다음으로 둘째 문제인 주후 1세기의 유대교(Judaism)의 재구성(Reconstruction) 문제를 생각해 보자. 주후 1세기의 유대교의 정확한 복원 문제는 우리의 역사적 예수연구는 물론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위시하여 그 밖의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고 또한 긴요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 당시의 유대교의 모습을 정확하게 復元한다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점은 최근에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복원 문제를 둘러싸고 신약학자들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점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이후 전통적으로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은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인간 자신의 율법적 행위나 공로를 통하여 의나 구원 혹은 메시야 왕국에 참여하려는 일종의 "율법주의"(Legalism)였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1977년 E.P. Sanders가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믿어 온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의를 추구하는 일종의 율법주의적 종교나 행위 구원적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축복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적 백성 가운데에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Not getting in),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적 공동체 가운데 머물러 있기 위해서 (But staying in) 율법을 지키려고 힘썼던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였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였다. J.D.G. Dunn, H. R is nen, F. Watson, J.M.G. Barclay등은 기본적으로 Sanders의 주후 1세기의 새로운 유대교 구성에 찬동하면서 신약성경을 이와 같은 새로운 전망에서 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반면에 C.E.B. Cranfield, G. Klein, D.J. Moo, S. Westerholm, F. Thielmann, C.G. Kruse, Brendan Byrne, S.J., T.R. Schreiner, D.A. Hagner, M.A. Seifrid, T. Laato, I.H. Marshall등은 전통적인 입장에 서서 오히려 이와 같은 새로운 전망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둘 중 어느 입장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느냐에 관하여 우리가 쉽게 단언을 내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관련하여 복음서 등 신약의 자료들을 해석하기 위해 주후 1세기 유대교를 재구성할 때는, 적어도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이 충분하게 고려되어야할 것이다. 주후 70년 이전의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거나 혹은 최근의 새로운 전망을 주창하는 학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결코 획일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설사 우리가 저명한 유대교 학자 J. Neusner의 충고를 따라 주후 70년 이전의 유대교 상황을 정확하게 재구성하기 위해서 주후 2세기 이후의 규범적인 유대교 랍비 자료보다 현존하는 주후 70년 이전의 자료들을 우선적으로 사용한다 할지라도, 현존하는 이들 자료에 의존하여 당시의 다양한 유대교 상황을 정확하게 구성한다는 것은 극도로 어렵고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우선 자료가 너무나 제한되어 있고, 그 제한된 자료도 참으로 당시의 다양한 유대교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느냐는 문제는 항상 남아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 연구를 위해서 당시의 유대교 자료가 진지하게 사용되어야하는 것과 꼭 같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재구성하는데 있어서도 유대교 문헌 못지 않게 복음서를 위시한 신약성경의 자료가 진지하게 사용되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순환적인 접근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역사의 예수는 물론 예수 당대의 유대교에 대한 보다 정확한 상황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오늘 우리 중에 그 누가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알지 않고 어떻게 유대인인 예수와 바울을 알 수 있겠으며, 오늘 우리 중에 그 누가 감히 바울 자신보다 주후 1세기 유대교를 잘 알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으며, 그리고 오늘 우리 중에 그 누가 복음서의 예수보다 예수 당대 유대교의 상황을 더 잘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와 똑같이 오늘 우리 중에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보다 역사의 예수를 더 잘 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IV. 제안: 나사렛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의 身分과 그의 죽음 理解 그렇다면 나사렛 예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한편으로 역사-과학적인 안목을 가지고, 또 다른 한편으로 복음서의 역사적 신임성의 확신을 가지고 정직하게 복음서를 접근한다면 복음서를 통해서 어떤 예수를 만날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 이해를 중심으로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나사렛 예수가 33살이 되던 기원 후 30년 4월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기 중에 예루살렘 근교에서 로마제국 당국자에 의해 그 당시 가장 처참하고, 잔인하고, 또한 모욕적인 사형제도인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다는 것은, 그가 기원전 4년경 유대나라의 왕인 헤롯이 사망한 해에 팔레스틴 유대지역에서 출생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는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예수의 십자가처형이 예수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인가? 아니면 예수 자신의 독특한 신분과 그의 사명에서 나온 필수적인 사건인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기독교의 시작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대답은, 예수는 주후 1세기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유대사회에서 유대나라의 독립을 가져오는 유대인의 왕으로 자처하다가, 당시 유대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간주되어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예수 당대에 있어서 주로 로마제국의 반역자들에게 십자가처형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복음서의 자료도 우리에게 이점을 시사해 주는 듯 하다. 복음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는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너가 그리스도, 곧 유대인의 왕이냐?"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요한복음 18:33), 예수는 빌라도에게 "내가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고,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요한복음 18:37)라고 하면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다"라는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23:2,5절에 따르면, 예수를 재판한 산해드린 공의회원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소할 때 그들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라는 제목으로 고소하였고, 빌라도는 결국 이러한 고소장에 의거하여 예수를 십자가 처형하도록 판결을 내렸고, 그리고 예수의 처형 때에 "유대인의 왕"이란 명패가 붙여졌다(참고 막 15:12-15).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참으로 유대인의 왕으로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일을 하였는가? 혹은 예수 그 자신은 의도적으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언행과 그의 언행의 여파가 실제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일로 비추어졌기 때문에, 그는 결국 로마제국에 의해 실제 반역자로서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되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예수가 당시 유대지역의 치안을 위해 주둔하고 있던 로마제국의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그들에 의해 먼저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복음서와 유대 역사가 Josephus의 글에 따르면, 예수를 실제로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한 자들은 로마제국 당국자들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정치, 종교 지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먼저 예수를 체포하고, 재판하고, 처형하기로 결정한 다음, 예수를 빌라도 법정에 넘겼다. 둘째, 예수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예수의 그 어떤 추종자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처형을 받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예수 당시 로마제국에 반역하는 자는 본인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도 함께 붙잡아 처형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복음서는 물론 신약성경의 그 어떤 외적인 자료에서도 예수의 제자들이나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남아 예루살렘 교회를 형성하고 예수 운동 확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 우리가 복음서로부터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 실제로 로마제국에 반역하였다고 할 만한 일들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고 하는 점이다. 우리는 복음서로부터 예수가 그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을 무장시켜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펼쳤다는 단 한 줄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예수 자신은 후일 유대 독립 전쟁을 주도한 열심당의 근거지인 갈릴리 출신이었지만, 예수가 열심당에 동조하였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을 우리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처럼 나사렛 예수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반역행위자에게 부과되는 십자가처형을 당하였다면, 예수가 왜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였는가? 예수는 그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기 전에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셨으며, 그리고 자신이 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여만 하는지를,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어떤 의미와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아셨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분명한 자기이해를 가졌었는가? 예수의 사후 기독교 운동을 최초로 일으킨 초대 기독교 교회가 선포하고 가르친 교훈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나타나 있는 내용, "예수는 우리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혹은 예수는 우리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라고 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예수 자신이 죽기 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하셨으며, 그래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자기 이해와 해석이 초대교회가 믿고 선포하는 핵심적인 교훈의 근간이 되었으며, 그 결과 후대 기독교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전승되었는가? 기독교의 가장 초창기 문서를 남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 고린도전서 15: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로마서 4:25절에서는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라고 말하면서, 예수는 자신의 허물 때문에 처형당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죽으셨다고 말하고 있다(역시 고후 5:21; 갈 2:20; 로마서 3:25-26; 8:3-4절 등).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 서신을 위시하여 초대교회 메시지 가운데 나타나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예수 자신이 죽기 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을 하셨으며, 그래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그와 같은 자기 이해와 해석이 초대교회 메시지의 근간이 되었는가? 예수의 죽음 사건과 관련하여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몇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복음서가 예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일들이 중요하고, 그리고 그 마지막 한 주간에 있었던 일들이 예수 처형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또한 예수와 당대 유대인들, 특별히 그 당대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과의 반목관계는 마지막 한 주간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예수의 행동 중 특별히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반목을 불러일으킨 몇 몇 실례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죄용서 사건(막 2:1-12; 마 9:1-8; 눅 5:17-26);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먹은 사건(막 2:13-17; 마 9:9-13; 눅 5:27-32);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은 일(2:18-22; 마 9:14-17; 눅 5:33-39)과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일(2:23-28; 마 12:1-8; 눅 6:1-5);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고, 예수에게 찾아와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하고 불평한 일(7:1-23; 마 15:1-20; 눅 11:37-4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는 그의 마지막 생애 한 주간 전에 이미 그 자신의 사역 중에 죄 용서문제로 인한 신성 모독죄, 안식일 날 병고친 일과 밀 이삭 잘라먹은 일로 인한 모세의 토오라 위반,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음으로써 장로들의 전통 위반,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로 인한 귀신의 왕의 힘을 얻는다는 모함 등을 받았다. 특별히 그는 바리새인들과 많은 대립을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예수와의 갈등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있어서 실제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 보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다고 하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데 예수의 처형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공관복음서에 발견하는 특이한 현상은, 예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 이전에는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언, 악한 농부들의 비유를 통한 당대 정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 등등과 같은 예수가 처형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자신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3번이나 알려주고, 그리고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마가복음 8:31-33절(역시 마 16:21-23; 눅 9:22)에 따르면, 예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처음으로 "인자가(마태복음에는 '그가') 예루살렘에 마땅히 가서(마가와 누가 복음에는 '예루살렘에 마땅히 가서'라는 말은 생략)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제 삼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가르치셨다. 둘째, 마가복음 9:30-32절(마 17:22-23; 눅 9:43-45)에 따르면, 예수는 두 번째 제자들에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지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들이 그를 죽일 것이요, 그런 다음 그가 삼일에 살아나게 될 것"을 말하였다. 셋째, 마가복음 10:32-34절(마 20: 17-19; 눅 18:31-34)에 따르면, 예수는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3번째 제자들에게, "인자가 기록된 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어지게 될 것이요, 그리고 그들은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선고하고, 이방인들에게 그를 넘길 것이요, 이방인들은 그를 능욕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요, 그리고 삼일 후 그는 부활할 것이다"라고 예고하였다. 우리가 이와 같은 예수 자신의 죽음 예고를 초대교회의 신앙적인 산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최근의 적지 않는 독일의 신학자들, 이를테면, O. Betz, M. Hengel, J. Jeremias, L. Goppelt, H.W. Wolf, P. Stuhlmacher, W. Grim-m등도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역사적 진정성을 가진 것으로 받아드릴 수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예수자신에게 있어서 그의 독특한 죽음 인식은 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마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3번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한 다음 제자들에게 "인자(예수 자신의 자기 호칭)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라고 하면서,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유대당국자들과의 결정적인 대립과 갈등을 갖기 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의 이유와 그 의미를 명백하게 밝히셨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은 그의 사명 수행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라는 사실도 밝히셨다. 심지어 제자 베드로가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을 방해하였을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막 8:33)라는 말로 강하게 베드로의 말을 반박하고 자신의 죽음은 이미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하였다. 이점은 예수께서 자신의 게셋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 중에 자신의 죽음을 자기가 반드시 마셔야할 아버지께서 주신 잔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되어 진다. 예수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으로, 많은 사람의 대속을 위하여 희생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는가? 우리는 예수가 자기 당대의 메시야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 당대의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은 민족 해방적이었으며, 메시야가 민족의 속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대단히 낯선 사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을 받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신분과 사명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로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또한 인자(단 7:13-14)와, 메시야와 야훼의 종으로 불리어지는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사 42, 43, 53장) 하나님의 백성의 죄사함과 회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속건제물로 희생하여야할 자이다라는 자기 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Hartmut Gese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는 이사야 53장 및 구약의 희생제사제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화해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화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한 댓가의 지불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아셨음이 분명하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그리스도와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변하고 있는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죽음을 능동적으로 수용하였을 것이다. 모든 공관복음서와 바울의 고린도전서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의 말씀은 예수 자신의 이와 같은 자발적인 희생적 죽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예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 도래와, 이 나라에 참여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앞당기기 위하여서는 그 자신을 통하여 그들을 대신하는 종말론적인 죽음과 부활 사건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내다 보셨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방해하는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이 정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셨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과 그의 성전 파멸과 새성전 회복에 대한 예언, 악한 농부의 비유를 통한 예루살렘 당국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선언, 산해드린 공의회 석상에서의 메시야, 인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공개적인 시인등이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할찌라도, 이들이 예수 자신의 죽음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예수 자신의 독특한 인격과 그의 사명이 그로 하여금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자발적으로 걸어가도록 하였고, 그러한 예수의 자발적인 죽음의 행로를 위해, 예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중에 있었던 그와 같은 모든 언행들이 있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상과 같은 우리의 주장이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바울의 서신은 물론 전 신약서신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속죄적, 구속적 설명은 단순히 예수의 참흑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초대교회 자신의 신학적 해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더 궁극적으로 예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기이해에서 유래되었다고 단언 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가 예수 자신의 메시아적 죽음이해를 거부하게 될 경우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모든 행위와 말씀은 물론 예수에 대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그렇게 빠른 기독교적 고백의 형성과 선교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예수 자신이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독특한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역사의 예수와 복음서의 예수, 복음서의 예수와 교회가 고백하여 온 예수가 각각 다른 사람이 아니라 동일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다. V. 나가는 말 그 어떤 분야의 학문이든 전제나 목적 없이 시작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약성경 연구에 종사하는 신약학 학자들도,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런 것처럼, 앞으로도 자기 나름대로 어떤 전제 아래 신약성경을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전제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위해 신약성경을 연구하여야 할 것인가? 우리는 신약성경이 단순히 삼위 하나님(아버지, 예수, 성령)에 대한 인간/초대기독교 공동체의 종교적 경험이나 탐구 혹은 역사나 서술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신약성경을 접근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오히려 신약성경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삼위 하나님 자신의 구원 계시와 역사의 규범적 서술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세기 동안 서구의 많은 신약학자들은, 그가 신약성경의 가치 기준을 윤리적 이상에 둔 19세기의 Ritschl과 Harnack의 舊자유주의 노선에 속해있었던지, 아니면 살아있는 종교경험에 둔 W. Wrede, H. Gunkel, W. Bousset의 종교사학파의 노선에 속해 있었던지, 아니면 인간의 실존적 결단에 둔 20세기의 R. Bultmann의 양식사학파의 노선에 속해 있었던지 상관없이, 신약성경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경험이나 사색, 혹은 역사나 서술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신약성경을 접근하였다. 따라서 지난 세기 동안 서구의 많은 신약학자들은 신약성경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는 물론 신약성경이 전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 곧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적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와 그리스도로서의 메시야적 자기의식, 그의 代贖的 죽음과 3일만의 육체적 부활, 오순절의 성령강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 교회를 통한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들의 역사적 眞正性을 거부하였다. 이처럼 많은 서구신약학자들이 신약성경의 규범적 계시성과 구원역사성과 초월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신약성경의 내용을 단순히 고대 사람들의 종교적 경험으로 간주하면서부터 신약성경은 서구 사회에서 교회와 세상을 향해 선포되어야 하는 規範性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역사-과학적 비평방법에 의해 얼마든지 비판되어야하고, 재해석되어야하는 상대성을 지닌 사람들의 말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서구신학자들에 의한 신약성경의 상대화와 비역사화는 신약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신약성경을 역사적 信任性을 가진 규범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접근할 때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역사의 예수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상대화시키면서부터 학자들은 신약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와 역사에 살았던 실제 예수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고,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와 다른 역사의 예수를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떠나서,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을 떠나서, 그들의 증언을 불신하고서는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은, 마치 21세기에 사는 자신이 역사적 예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보다도 역사적 예수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오만이며,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수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을 떠나서 역사적 예수를 찾는 것은 결국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고 싶은 예수를 찾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가 아닌 학자들이 만들어낸 예수는 예수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다.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예수는 교회의 유익도, 구원과 생명도 가져오지 못한다. 사도 바울이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나사렛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음을 믿는 복음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3-4, 16; 고전 15:1-8).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 사도들이 선포하는 그 복음만이, 우리의 신학과 역사적 예수연구의 시금석이다. 최갑종 교수(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장, 신약학, Ph.D.)
21세기 변화와 청소년 선교 2002-11-12 11:42:57 read : 3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앞으로 21세기는 지금의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 청소년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세계가 급변하고 있다. 위성방송, 위성전화, 그리고 급격한 인터넷 및 컴퓨터 문화 등등의 발달로 인해 전세계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이어지고 있다. 21세기는 더욱 빠르고 다양하게 변
21세기 변화와 청소년 선교 2002-11-12 11:42:57 read : 3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앞으로 21세기는 지금의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 청소년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세계가 급변하고 있다. 위성방송, 위성전화, 그리고 급격한 인터넷 및 컴퓨터 문화 등등의 발달로 인해 전세계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이어지고 있다. 21세기는 더욱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미래가 없다. 21세기의 변화를 인식하고 예견하며, 이를 선교적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많은 변화를 바라보며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21세기에 어떠한 Vision을 품을 것인가? 21세기의 변화로 인해 우리가 맞게될 세계적 정황을 바라보면서, 이를 선교적 차원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금 당신의 마음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뜨거운 열정만 있다면 21세기는 선교를 위한 기회의 세기가 될 것이다. 1. 문제 제기 (다음세대를 위한 사역의 중요성) 한국의 선교사역에,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부흥의 역사는 큰 은혜와 축복이다. 실로 우리의 세대에 역사하셨던 이 부흥의 불길이 과연 우리 다음의 세대에도 가능할 것인가? 그 동안 우리 한국교회의 숫자의 증가는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그 중에도 장년성도들의 증가는 가히 자랑할만하다. 그러나 청소년은 어떠한가? 교인 수천 명을 자랑하는 교회들이 중·고등부는 기껏 몇 백 명을 넘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나마 개척교회는 학생회가 없어지는 추세이다.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이다. 미래가 없는 민족은 소망이 없다. 우리는 성경 상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다음세대의 신앙을 위해 무엇을 해 왔는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부정적인 측면 1) 여호수아 시대의 예 (사사기 2장 7절-17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당시 여호수아 뿐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에 역사 하셨는가를 볼 수 있었고 그들은 그 결과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다(삿2:7). 그러나 정작 여호수아가 죽고 그 세대의 사람들도 다 열조에게로 돌아가자 큰 문제가 발생했다(삿2:9-10). 여호수아 이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은 ①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고(삿2:10) ②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으며 ③ 그 사람들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으니,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으며, 다른 신 곧 백성들의 신을 좇아 섬겼으며...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돌이켜 다른 신을 좇아 섬기며 음란하게 그들에게 절을 하였다.(삿2:11-17) 2) 기드온 시대의 예 (사사기 8장 32절-35절) 기드온은 300명의 적은 군사의 수로 미디안과 아말렉의 수다하고 중다한 군사를 무찌른 믿음의 용사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 기드온과 당시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믿음으로 가능했다. 그런데 기드온이 나이 많아 죽고 나자 문제가 생겼다. 그 다음세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을 음란하게 섬기며, 대적의 손에서 자기를 건져내신 여호와를 기억하지 아니했으며, 기드온의 집도 후대치 아니했다. 그들은 믿음을 저버리고 음란하게 세상의 신들을 섬긴 것이다. 어찌 이런 일들이 우리의 다음세대에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 동안 수십년 동안 우리는 여호수아 그리고 기드온 시대의 믿음의 역사를 몸소 체험했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세대인 청소년들은 어떠한가? 우리의 청소년들은 당시의 다음세대들이 바알을 섬기듯 세상의 쾌락과 섹스를 섬기고 있다. 물질주의에 중독 되어 있다. 그리고 폭력, 마약, 술과 담배들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이들은 무차별적인 정보화의 발달로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 우리 다음세대들인 지금의 청소년들은 정작 그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될 그때에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세상의 물질, 쾌락, 인기를 우상 삼아 그들을 섬기고 있는 세대로 바뀔지도 모른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정보화의 발달로 기성세대와 청소년 세대의 이해 관계는 점점 더 멀어 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경 상에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실 예도 있다. 긍정적인 측면 1) 다윗의 예 (역대상 12장 32절) 성경은 다윗 왕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많은 단점을 가진 사람이었고, 실수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후대의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대상 12장 32에 다윗 왕을 따르는 여러 족속들 중에 잇사갈이라는 족속이 있었는데, 그중 200명의 두목들을 뽑았는데 그들은 ① 시세를 알고 ②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에, 그 시대를 이해하고 이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아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변화의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라고 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21세기는 어떻게 변화 될 것이며 그에 따른 우리의 사역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인구 통계학적 변화들 세계 인구는 19세기가 시작할 때 10억에 도달하였다. 1950년까지 지구상에는 25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 인구는 2배 이상인 60억이 되었다. 연구에 의하면 2025년에는 85억의 인구가 살게 될 것이며, 그 숫자는 지금 인구의 약 2배인 116억에 달하게 되는 220년까지 계속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연구 상으로는 27억의 인구가 지금부터 2025년 사이에 증가하는 데, 그 증가의 93%인 25억은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서 있을 것이다. 증가분의 50%인 13억 5천은 아시아에서 예상된다. 인구가 두 배가되면서 도시인구는 세배가 된다. 세계의 미개발지역 중 가장 도시화된 지역인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도시거주자들의 비율이 1950년에 42%에서 현재 73%로 증가하였다. 세계인구의 반이 넘는 수가 20세 이하이다. 그 대다수가 빈곤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10에서 19세 청소년 연령층의 수는 다음 30년 동안 25%가 넘게 성장할 것이며 그 성장의 대부분은 개발도상국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이러한 지역 청소년의 순 숫자는 그 곳 특히 중국에서 청소년 사역을 하라는 마케도니아의 부르심이다. 시골 지역에서 도시로의 현상적인 이주가 있다. 2025년까지 도시 인구는 45%에서 60%까지 증가할 것이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청소년들)을 도시로 이주시켜 복음에 접촉하기 더 쉽게 하고 계시는 듯하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20세 이하이며 이러한 청소년들은 더 나빠질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청소년 인구의 다수가 빈곤과 실직상태에 있으며 그 숫자는 증가하고 있는데, 이들은 또한 청소년 사역자 들을 통한 소망의 메시지에 개방되어 있다. 3. 기술적인 변화 세계는 유선화 되어 가고 있다. 전 세계 네트웍의 개인 기계들은 점점 서로서로 섬유 광학장치와 위성의 고리들로 연결되어서 거의 동시에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네트웍들 중의 인터넷은 매달 20%가 넘는 비율로 성장하고 있다. 텔레비전은 지구상 가장 외떨어진 곳으 사람들에게 세상(대부분 서구사회)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수백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처지에 대하여 깨닫게 만들었으며 다른 이들이 그 상태에 대해 알도록 만들었다. 또한 미래의 교통수단은 중요한 변화를 경험할 것 같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당 300마일을 달리는 공중으로 뜨는 기차, 초음속 항공기, 배기가 없는 자동차 수소력 자동차들을 포함한다. 또한 20년 이내에 지능장치 고속 시스템은 사람들이 차에 타서 어디를 가고 싶은지를 이야기하고, 앉아서 차가 거기로 데려다 주게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줄지도 모른다. 또한 많은 과학자들이 앞으로 몇 년 안에 인간 생명의 기간이 약 30%까지 연장될 수 있다고 믿는다. 생명의 연장이라는 비약적 발전은 일련의 새롭고 강력하게 논쟁이 될 사회적 이슈를 불러올 것이 확실하다. 컴퓨터의 능력은 지수적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그 가격은 극적으로 하락하고 있어서 세계적으로 이용 가능한 기술을 점점 더 많이 만들어 내고있다. 동시에 세계는 인터넷과 섬유광학 케이블, 상호작용 TV와, 그 이상의 것들을 통하여 유선화 되고 있다. 청소년 사역을 통한 이러한 기술의 이용은 커뮤니케이션을 증대시키고, 우리에게 세기의 전환점에서 새롭고 역동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제공한다. 청소년들은 컴퓨터, CD-ROM, 상호작용 TV등을 편하게 느낀다.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이 부상하고 있는 기술들을 더 많이 사용한다-유선화 되어서 그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준비가 된 사역이 가져올 기회들에 대하여 생각 해 보라. 4. 개념의 변동 매 18개월마다 지식은 두 배가 되고, 오늘날의 개념은 오래가지 않는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기술은 새롭고 변화하는 개념을 만들어 내고 이 개념은 더 많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야기 시킨다. 지식은 매 몇 년마다 구식이 되어가며, 변화가 꾸준한 복잡한 세계에서 교육은 더 이상 사람이 전생애동안 요긴하게 쓰기 위해 청소년기에 획득하는 어떤 것일 수는 없다. 그보다 교육은 생애 내내 학습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을 주입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상호작용 다중매체 시스템은 우리가 교육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식을 혁신하고 있다. CD-ROM과 비디오 디스크 등등을 통한 '원거리 학습'이 가정 학교와 공립, 사립 학교, 대학, 협회 등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 청소년 사역자들은 이러한 교육의 혁명적인 방법을 수많은 사역자들과 자원 봉사자들, 이사회 이사들과 청소년들을, 그곳에 있지 않고도 멀리서 효과적으로 훈련하는 데 사용 할 수 있다. 회사와 기관들은 옛 패러다임이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을 때에도 추정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 미래를 예상하는 방식을 향상시키고 있다. 이런 변화들을 예상하지 않는 집단들은 자신들의 사명에 뒤쳐지게 되고 마침내는 사멸한다. 우리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우리의 사역을 생동감 있게 할뿐만 아니라 21세기 속에서 급격히 발전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최근 몇 해 동안 있었던 몇 가지 가장 큰 진보는 경영에서 품질관리와 개방 경영 철학을 이용하는 회사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이것은 이익을 상당히 증대시켰을 뿐 만 아니라 이전의 '고용된 노동자'들을 회사의 '부분 소요자'로 바꾸었다. 청소년 사역의 모든 부분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여러 그룹의 사람들을 전략을 세우고 함께 일하는 데 포함시키도록, 이제 자신을 '재 공작'하는 기회를 갖는다-그래서 사역자들과 자원봉사자들, 이사회 이사들에게 더 주인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신정범 목사 <한국YFC(십대선교회) 회장> 기사제공 세계선교협의회 - CDN에서(http://www.cdn.net) 발췌 -
21세기 한국교회와 성서학, 회고와 전망 2002-02-02 08:19:04 read : 1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정 우(총신대학교 교수 / 구약학) 20세기 성서학은 역사비평학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비평학은 문서설로부터 시작하여 양식비평과 편집비평, 전승사와 문학비평과 정경비평에 이르기까지 온갖 변화와 발전을 시도하면서, 20세기 성서 학계를 중심적으로 이끌어 왔다. 물론 역사비평학은 어디에서나
21세기 한국교회와 성서학, 회고와 전망 2002-02-02 08:19:04 read : 1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정 우(총신대학교 교수 / 구약학) 20세기 성서학은 역사비평학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비평학은 문서설로부터 시작하여 양식비평과 편집비평, 전승사와 문학비평과 정경비평에 이르기까지 온갖 변화와 발전을 시도하면서, 20세기 성서 학계를 중심적으로 이끌어 왔다. 물론 역사비평학은 어디에서나 "십볼렛"이 되어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나누는 기준이 되었으며, 학계와 교계는 찬비평학파와 반비평학파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학문적인 논쟁 뿐 아니라 개인적인 적대감과 나아가 교회 및 교단의 분열까지 만들어 온 것도 사실이다. 찬비평학파는 역사비평학을 참되고 유일한 학문적 방법론으로 보았고,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 혹은 '성서 신봉주의자'(biblicist)로 폄하하거나 조롱하였으며, 반비평학파는 역사비평학의 학문적 허구성만을 주로 드러내면서, 비평학 속에 담긴 반초자연적이고 불신앙적인 전제를 드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여 온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역사비평학의 공과를 여기에서 다 말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이 방법론은 성서의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성격에 새롭게 눈뜨게 하였고, 성서학이 단지 교리를 뒷받침해주는 '시녀' 역할을 하는 데서 벗어나 독자적인 고유영역을 찾도록 만들었으며, 고대의 문헌과 현대의 세계 사이에 있는 역사적 거리감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비평학은 지난 2000년 동안의 성서학 연구사에 있어서 가장 혁명적인 해석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비평학은 그 신학적 뿌리를 계몽주의 시대의 초연신론(이신론, deism) 속에 두었으며, 성서가 담고 있는 역사성을 20세기의 "역사적 진실성"이란 기준으로 부인하거나 약화시키고, 역사와 문학을 서로 대치시켜 '문학적인 것'은 '역사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보며, 하나님의 계시로서 스스로를 증거하고 있는 성서의 증언을 외면하고, 나아가 믿음의 공동체의 경전으로서 성서의 권위를 처음부터 충분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계는 신앙공동체로부터 멀어졌으며, 교회는 비평학을 외면하였고, 신학과 신앙은 괴리되었으며, 교회의 믿음과 학자의 확신 사이에는 깊은 갈등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19세기 말에 출생하였고, 20세기로 접어들며 신학적인 작업을 비로소 시작하였기 때문에, 세계의 학계를 지배한 역사비평학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비평학을 둘러싼 논쟁 속에 지난 100년을 보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역사비평학은 한국초대 교회부터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반비평학적인 <신학지남>과 친비평학적인 <신학세계>의 대립을 비롯하여 계속적으로 갈등의 핵을 이루어 왔다. 이리하여 역사비평학을 둘러싸고 한국교회에는,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인 서고도(William Scott) 사건(1926년),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저작권 문제건" (1934년), <어빙돈 단권 성경주석> 번역 문제건(채필근,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박형룡과 김재준의 신학논쟁(1933년 <신학지남>), 김기수(K. R. Crim) 선교사의 "요나서 해석건"(1966년), 문희석 교수의 <하나님의 구속역사>건 등을 중심으로 논쟁과 갈등이 끊임 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역사비평학은 한 개인의 신학적 입장과 연관된 문제로 제한된 것이 아니었으며, 결국 1947년 4월 10일 조선신학교는 "서양 선교사들의 지배와 보수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치 아래에 "성경연구에 있어서 비평학을 소개하되 그것은 성경 연구의 예비 지식으로 이를 채택함"을 교육이념으로 채택하고, 역사비평학을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결국 장로교회는 역사비평학을 중심으로 교단이 둘로 나누어지는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비평학자들은 서양의 역사비평학에 대해 보다 신중한 입장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스스로 이 방법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작업들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와 발맞추어 1980년대로부터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역사비평학을 전제론적인 관점에서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보다는 그 문제점들을 올바로 비판할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좋은 관점들을 복음주의적인 테두리 안에서 수용하여 보다 풍부한 성서 이해를 도모하게 되었다. 지난 해 (1999년)에 김세윤은 <목회와 신학>과의 인터뷰에서 역사비평학을 둘러싸고 양극화 되어온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갈등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통합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가 볼 때, 우리나라 교회 안에서 "좀 과격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복음과 기독교 신앙 전통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복음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리하여 복음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과 적용 보다는 사회적 문제, 문화적 현상, 그리고 이런 것들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토론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복음의 핵심을 회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보수신학 쪽에서는 역사비평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습득하지 못함으로써 성경해석에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그것에 대해 아예 두려워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성경을 아주 문자적,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게 되었고 결국 성경과 무관한 스콜라식 신학에 빠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학이 복음과 유리되어 버렸다"고 보았다(문체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필자가 어휘를 약간 수정하였음). 사실 역사비평학을 중심으로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진 지난 100년의 해석사를 돌아보면, 이 학문적 방법론이 부인되던 시기(1900-1927), 양극화되던 시기(1928-1956), 묵시적으로 인정된 시기(1957-1972), 학술적인 정립기(1973-1989)를 거쳐 여과 및 선별 수용기(1990-1999)로 지나왔음을 보게된다. 우리의 성서학은 이런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큰 나무로 성장하고 마침내 다양한 결실을 이루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1900년에 창간된 <신학월보>를 필두로 200여 종의 신학관련 정기 간행물들이 만들어졌으며, 1901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로부터 시작하여 수십 개에 이르는 신학교육 기관들이 세워지고, 수천명의 신학자들이 신학의 모든 영역에서 기여하게 되었다. 19세기말에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 그 어느 피선교국에서도 볼 수 없었던 왕성한 신학 작업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은 20세기의 교회사의 기적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한국 신학의 발전에 있어서 성서학은 다른 어떤 분야 보다 더 괄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을 해온 영역으로 여겨진다. 특히 시대가 갈수록 성서학 분야에 대한 연구는 심화되고 확장되었으며, 점점 방법론적인 정립과 함께 신학과 사회를 잇는 작업이 뚜렷해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성서연구는 구미 학자들의 연구와 비교해 볼 때, 그 방법론이나, 전체적인 방향이나, 연구의 영역들이나 주제들에 있어서 별차이가 없다. 또한 소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에 있었던 학문적인 격차는 줄어들었고, 성서학 연구는 어떤 지도적인 사람들이나 특정한 학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보다 다원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성서학을 다른 어떤 분야 보다 더욱 중요시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우리의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 김양선에 따르면, 한국 개신 교회는 "순교자의 피로 개척된 교회, 선교 이전에 창설된 교회, 성서에 기초된 교회"라는 3대 특징을 갖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성서적 교회"로 불릴 정도로 성서는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한국교회 만큼 성서를 사랑하면서 많이 읽는 교회도 드물 것이다." 이런 성서에 대한 사랑이 한국교회의 신학 발전에 큰 원동력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20세기를 마무리하고 21세기 속으로 들어가면서, 성서학의 과제를 새롭게 설정해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1. 성서학의 세계적인 동향을 살펴볼 때, 역사비평학의 시대는 분명히 저물어 가고 있다. 이 방법론은 분명히 21세기까지 학계와 교계를 끌고 가지 못할 것이며 그 "날은 이미 정한 바"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비평학계 안에서 한없는 수정 작업이 이루어지겠지만, 21세기의 해석학적인 파라다임은 통시적인 연구(diachronic approach)에서 동시적인 연구로(synchronic approach), 본문 단위를 양식이나 편집이나 전승으로 단편화하는 작업(fragmentation of the text)에서 문학적인 총체성 (literary whole)을 찾는 작업으로, 저자 중심(author centered)에서 다양한 독자 중심(reader centered)의 해석으로 넘어가리라고 생각된다. 2.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해석학적인 모델인 역사비평학을 두고 만들어 왔던 이념적 해석(ideological interpretation)의 한계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며 맹목적인 이념 대립과 분열과 반목을 지양하고 보다 본문에 충실한 해석을 지향하며, 나아가 보다 객관적이고 통합적인 해석의 원리와 방법을 새롭게 형성하는 데 더욱 힘써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3.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서, 성경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을 바쳐, 이제 우리의 성서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본 토양과 준비를 끝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더욱 수준 높은 신학을 하기 위한 기초 준비는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 성서학의 기초가 되는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 성경의 한국판 비평본을 준비하며, 우리의 원어 사전과 문법책을 만들고, 고대 근동과 그리스-로마 세계의 역사와 문헌의 기초적인 비평본들을 집대성하는 작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100년 동안 쌓아온 우리 성서 및 신학의 모든 유산을 데이타베이스화 하여, 학문의 모든 영역들과 교류할 수 있는(inter- disciplinary) 연구 작업의 초석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4. 이제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우리 가운데서 격렬하게 논의되었던 수많은 신학적인 쟁점들을 보다 성경적이고, 한국적인 해석의 모델 속에서 모두 수렴해 갈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과 해석적 원리와 방법론을 배태할 준비를 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새 시대를 열어갈 방법론이 어떤 것이 되든 간에 이제 우리의 해석 모델은 복음의 참된 정신을 따라 더욱 인격적이며, 학문과 신앙의 괴리감을 극복하고, 기독교적인 덕과 살아 움직이는 영성을 추구하며, 모든 이념적 차별을 극복하고, 환경친화적이며 우주의 모든 생명을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보전하는 신학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5. 21세기는 다매체(multi-media) 시대로서 다문화적이며 다원화된 사회가 될 것이며, 의사소통은 더 이상 "언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온갖 다양한 전통 및 현대적 형태의 예술과 문학의 장르를 사용하여, 성서의 메시지를 첨단의 현대성으로 전할 수 있는 해석적 틀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6. 끝으로 다가오는 21세기는 그동안 신학연구에 있어서 세계의 빚을 많이 진 한국교회가 진정한 기독교적 신학과, 성서적 신학과, 한국적 신학과 현대적 신학으로 세계 학계에 기여하며,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을 추구하는 종교개혁의 견고한 전통 위에서 새로운 기독교 변증을 시도하여 세계 교회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일을 위해 현재 기독교 지도자들이 더욱 고뇌하며 우리의 기독교를 한층 더 높은 정신적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고 무거운 역사적 책임을 진지하게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21세기 한국교회와 신약신학, 회고와 전망 2002-02-02 08:19:57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영 봉 (협성대학교 교수 / 신약학) 이제 1백년을 갓 넘은 한국 교회의 역사는 성서와 함께 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땅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가 들어와 있었다. 성서의 번역과 보급을 바탕으로 성장한 한국 교회는 또한 성서로 인하여 분열되는
21세기 한국교회와 신약신학, 회고와 전망 2002-02-02 08:19:57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 영 봉 (협성대학교 교수 / 신약학) 이제 1백년을 갓 넘은 한국 교회의 역사는 성서와 함께 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땅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가 들어와 있었다. 성서의 번역과 보급을 바탕으로 성장한 한국 교회는 또한 성서로 인하여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제 이 짧은 글에서 필자는 1) 교회와 신약신학의 관계와 2) 한국의 신약학의 발전 과정과 과제에 대하여 논의하기로 하겠다. 교회와 신약학의 관계 먼저, 필자가 경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려 한다. 1992년에 귀국하여 처음으로 강단에 섰을 때, 성서해석학에 대한 강의를 맡았다. 우리말로 읽을만한 좋은 교과서가 있는가 찾아보니, 필자가 미국에서 교과서로 사용했던 Hays와 Holladay의 책이 번역되어 있어, 그것을 교과서로 채택하였다. 학기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어떤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 학생은 "교수님의 신학이 보수적이라는데, 그 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무슨 근거로 그런 평가를 하던가?"라고 물었더니, "교수님께서 채택하신 교과서가 보수주의 학자에 의해서 번역된 것이라고들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는 당시에 보수적 경향과 자유적 경향이 서로 대립하면서 제 자리를 찾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연히 신임 교수의 신학적 경향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것이고, 보수적인 신학교 교수가 번역한 책을 교과서로 선택한 것을 보고는 필자의 신학적 경향을 보수주의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 책의 원저자는 자유주의적 신학의 중심지인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ersity)의 신구약 교수들이다. 그 질문을 받고 보니,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이미 벌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과거 같으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책을 보수 측의 학자가 번역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경우, 그 학자는 학교나 교단 측으로부터 심각한 압력을 받아야 했다. 다른 한편, 보수 측의 학자가 번역한 책을 자유주의 계열의 신학교에서 교재로 쓴다는 것도 과거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것인가, 번역자나 저자의 신학적 경향이 어떤가, 그 사람이 어느 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는가… 이런 문제들이 교재를 선택하는데 더 우선되는 관심사였다. 책의 내용은 그 이후의 관심사였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촌극이 벌어질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한국 성서학계에 보혁 갈등이 얼마나 심했으며, 1990년 어간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한국의 신약학은 선교사들을 통해서 소개되었다. 우리 학자들이 외국에 가서 학위를 받고 돌아와 가르치기 시작하는 1930년대까지 국내의 신학 교육은 주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서구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활개를 치고 있었지만, 선교사들은 이러한 신학적 조류를 소개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어느 정도 변화가 온 것은 30년대 이후였다. 양주삼, 변홍규, 박형룡, 김재준 등과 같은 인물들이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성서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보수계열과 자유계열의 빈번한 충돌이었다. 보수계열의 중심은 박형룡 목사였고, 자유계열의 중심은 김재준 목사였다. 감리교회는 이미 특유의 유연성을 발휘하여 자유주의적인 흐름을 수용하고 있었지만, 가장 큰 교단이었던 장로교회는 성서 신학에 대한 논쟁으로 분열을 거듭해 갔다. 이러한 갈등이 외적으로 표출된 전형적인 사건이 소위 <아빙돈 주석> 사건이다. 1935년에 감리교회의 류형기 박사는 미국의 애빙던(Abingdon) 출판사에서 발간한 주석을 발췌하여 단권 주석을 출판했다. 당시로서는 한국 교회의 강단의 질을 높여 주었던 아주 획기적인 기획이었다. 하지만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보수적 교단에서는 이 책이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유포한다는 이유로 정죄하였다. 아울러, 이 책의 번역에 참여했던 채필근,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목사 등이 장로회 노회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 때 시작된 보혁(保革)간의 투쟁은 신학교의 분열과 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해방 후에는 신사참배 문제와 사회 참여 문제가 함께 결합되어, 보혁의 구도가 더욱 선명하게 그어졌으며, 양진영의 학자들은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었다. 이 시기에도 중요한 논쟁의 중심은 성서 해석이었다. 신학자들은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비난하는 양상을 만들어 갔다. 60년대 이후에는 아예 상대 진영의 책들을 금서 목록에 올려놓을 정도로 분열 양상이 심하였다. 이 시기의 큰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가 활발히 시도되었던 반면, 보수 측의 학자와 자유 측의 학자 사이에는 전혀 대화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시기에 보혁 사이의 장벽은 종교 사이의 장벽보다도 뛰어 넘기가 더 어려웠다는 뜻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는 성서학에 대하여 갈수록 강한 의심을 품어 왔다. 원래 신학과 교회 현장은 '창조적인 긴장 관계'에 있어야 한다. 신학은 언제나 교회 현장에 대하여 건전한 비판자의 역할을 해야 하고, 교회는 또한 신학으로 하여금 현장을 잊지 않도록 견제해야 한다. 그럴 때 양자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교회는 신학자들에게 교회의 시녀가 될 것을 요구하였고, 신학은 교회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했다. 교회의 시녀 역할을 거부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은 교회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 이러는 동안, 보수주의 신학은 교회의 보호자를 자임하면서 교회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보수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정직하게 평가해 본다면, 보수주의 신학은 교회에 대한 비판과 견제 역할에 소홀하였다. 오히려 교회가 성장 욕구에 부응하여 그에 필요한 신학적 도구들을 제공해 줌으로써 "유용한 학문"으로서 스스로를 인식시켰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지나치게 궤도를 이탈하여 때로는 교회 현장에 불필요한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지난 10여년 간의 일이다. 이 시기에 성서학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들이 생겼다. 그 중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것이 보수계열의 신약학자들과 자유계열의 신약학자들이 서로 만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최근에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젊은 학자들의 열려진 자세 때문이다. 보혁을 막론하고 대개의 소장 학자들이 서로에 대하여 열려진 마음을 가지게 된 원인은 그들이 서구에서 공부한 대학들의 분위기 때문이다. 현재 서구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려면 좋든 싫든 과거의 자유주의적 연구 결과를 뛰어 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보수와 자유 계열의 신학도들이 함께 어울려 연구하며 인간적인 교분을 나누면서 학문에 대한 선입견도 극복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 들어와서 그들은 서로의 신앙고백을 존중하면서도 학문적으로 대화를 해 가며 성장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괄목할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의 괄목할만한 변화는 성서학자들이 교회에 대한 섬김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떠맡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주로 자유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에게서 나타난 변화였다. 지난 수 십년 동안, 자유주의 계열의 신학자들은 교회 혹은 교권으로부터 독립하여 신학의 자유를 찾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자유를 찾아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 신학은 때로 교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갔다. 지금의 중진 신학자들은 70-80년대에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로부터 이러한 불만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가르치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교회의 불만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교회를 위해서 성서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비슷한 시기에 성서학자들이 유사한 노력을 시작했다. 장신대의 김지철 교수는 <한국 성서학 연구소>를 시작했는가 하면, 한일 장신대의 박창환 교수는 <한국 성경 연구원>을 열었다. 감신대의 왕대일 교수와 협성대의 김영봉 교수는 <21세기 설교 가이드>를 기획하여 출판을 시작하였고, 총신대의 김정우 교수는 <한국 신학 정보 연구원>을 열었다. 이 네 가지 프로젝트는 각기 성격을 달리 하지만, 성서학의 연구 결과들을 한국 교회 현장에 도움이 되도록 소개한다는 목적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여러 교파에서 그리고 여러 신학대학에서 이러한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중진 성서학자들이 교회에 대한 자신의 소명을 자각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신학자들의 노력에 발맞추어, 성서학에 대한 교회의 태도 역시 변화되어 가고 있다. 특히,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학문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학문에 대한 경계심이 점차로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 있다. 지금 막 형성되고 있는 이러한 밀월 관계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교회를 섬기겠다는 신학자들의 노력이 교회에 대한 건전한 비판의 기능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되어있다. 이런 점에 대하여 교회,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충분히 납득하고 있어야 한다. 신학자들의 비판을 공격으로 오인하여 교권을 사용하여 축출하려는 조급함을 버리고, 그 비판을 입에 쓴 약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교회와 신학은 서로의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학의 성장 과정과 나아갈 방향 이제는 신약학 자체의 성장 과정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하여 논의해 보려 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의 신약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무래도 해방 이후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신약학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아직 학문적인 체계나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학생들이 그러한 수준을 따를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러한 고차원의 학문을 소화할 독자도 별로 없었다. 더욱이, 교권주의자들은 학자들을 감시하면서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신약학 연구는 해방 이후로 잡아야 한다.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신약신학을 연구한 탁월한 학자들이 서구에서 돌아와 신학대학 강단에 서면서 신약신학은 본궤도에 올랐다. 기껏해야 성경학교 수준의 성서학 강의에 머물렀던 과거에 비해, 내용과 질에 있어서 많은 발전을 하였다. 주로 자유주의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서구의 신약학의 연구 결과들을 대담하게 소개함으로써 신학도들의 학구열을 자극시켰다. 60년대 이후에는 단순히 서구 신학을 소개하는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독창적인 연구를 시도하여 좋은 책들이 속속 출판되기도 하였다.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적인 성서 해석은, 비록 전폭적인 인정을 받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서구 신학의 틀을 벗어나 우리의 현장에서, 우리의 시각과 영성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실천해 보려는 진지한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창조적인 시도가 보수와 자유를 막론하여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80년대 이후에 소장 학자들이 공부를 마치고 대거 귀국하면서, 신약신학의 수준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였다. 이들은 신학의 본고장인 서구에서 외국 학자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충분한 역량을 키웠다. 또 하나의 변화는 이들의 학위 논문들이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일이 점차로 빈번해 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신약학자들의 학문적 수준이 서구 학문의 표준으로 보아도 높이 인정받을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러한 역량을 가지고 귀국하여 활발하게 연구 논문들을 발표하고 책을 써내고 있다. 필자가 신학을 할 때만 해도,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신약학 관계 연구서나 논문들이 아주 드물었다. 그러므로 그 시기에는 영어나 독일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지 않고는 만족스럽게 연구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말로 되어 있는 연구서들만 하더라도 웬만한 연구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연구물들이 축적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신약학계는 중요한 몇 가지의 과제를 안고 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의 신학적 작업이 세계의 신약학계에 진정한 공헌을 할 수 있도록 성숙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의 학자들은 서구의 신학자들과 함께 토론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들의 신학의 틀에 어렵게 맞추어 냄으로써 이루어진 결실이다. 과연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한 공헌인가? 그런 일은 우리가 하지 않아도 서구 신학자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들은 "동양의 현자들의 새로운 깨달음"을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서구인들이 그들의 문화와 상황 때문에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점들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해석해 주는 데까지 성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2천년이 지난 지금에야 우리 한국 신약학자들을 육성해 내신 뜻은 그 동안 서구인들이 그들의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보지 못했던 진리들을 우리의 시각에서 밝혀 내라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과제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부수적인 과제를 요청한다. 하나는 우리 신약학자들이 서구에서 받은 교육의 틀을 뛰어 넘어, 우리만의 영성과 직관력으로 성서를 새롭게 보고 해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위험도 따른다. 하지만 위험이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만 서구 신학의 우산 아래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교회의 지도자들도 이러한 시도를 '이단의 논리'로 정죄하려고 하지말고, 참을성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한다. 가말리엘의 지혜(행 5:34-39)를 배워서 포용성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한다. 또 하나의 부수적 과제는 우리의 신약학자들이 더욱 활발히 국제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 현재 한국 신약학자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학자는 김세윤 박사다. 김찬희 박사의 논문도 가끔 인용되기는 하지만, 빈도에서는 김세윤 박사가 월등하다. 그 이외에는 딱히 외국 학자들이 기억하는 우리 신약학자가 없다. 우리 신약학자가 펴낸 영문 연구서들의 경우도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것이 대부분이다. 다 알다시피, 박사학위 논문은 한 사람의 학문 여정의 출발에 불과하다. 따라서 박사학위 논문이 크게 주목을 받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 신약학자들은 꾸준히 신학을 성숙시켜 나가면서 그 결과를 외국에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학교의 여건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능력이 있는 교회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신학 연구 기금을 마련하여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한국 신약학계는 비로소 세계 신약학계에 진정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의 과제를 더 지적하겠다. 우리의 신약학계가 너무 지나치게 교회 중심적, 신학교 중심적으로 발전된 결과, 교회나 신앙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연구가 도외시되어 왔다. 신약학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수행되기 위해서는 그에 관계되는 기초 연구 자료들이 충분히 번역되어 있어야 하고, 그것들에 대한 연구 결과들도 많이 축적되어야 한다. 예컨대, 신약학 연구를 위한 배경사적 문헌들이 속히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최근에 사해사본이 조철수 박사에 의해서 번역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나그 함마디 문서, 요세푸스의 저작집, 필로의 저작집도 원문에서 직접 번역되어야 한다. 기타 그리스-로마 관계 문헌들도 번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기초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신약학이 굳건하게 설 수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어느 단체에서든지 거대한 기금을 마련하여 시작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이상과 같이, 필자의 부족한 시각에서 한국 신약학과 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회고하고 전망해 보았다. 지금 현재 한국의 신약학은 활짝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신약학회>에 속한 회원들만 해도 150명이 넘는다. 이 많은 인재들이 곳곳에서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으니, 그 결실은 갈수록 더 커질 것이다. 바라기는 이러한 노력들이 한국 교회에 도움이 되도록 이바지할 수 있게 되고, 신약학 자체도 더욱 튼튼하고 창조적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21세기는 왜 공동체를 요구하나 2002-01-30 09:42:22 read : 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1세기는 왜 공동체를 요구하나 하용조목사 8세기 사회 사상의 핵심이 ‘사회 계약’이었다면, 19세기 사회학 창건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공동체’였다. 이 시기에 콩트, 퇴니스, 베버 등이 공동체 연구에 앞장섰다. 20세기 전반에는 두 차례의 전쟁에 휘말려 인류의 내일을 조망할 여유가 없었고, 1950년대 이후 현대
21세기는 왜 공동체를 요구하나 2002-01-30 09:42:22 read : 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1세기는 왜 공동체를 요구하나 하용조목사 8세기 사회 사상의 핵심이 ‘사회 계약’이었다면, 19세기 사회학 창건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공동체’였다. 이 시기에 콩트, 퇴니스, 베버 등이 공동체 연구에 앞장섰다. 20세기 전반에는 두 차례의 전쟁에 휘말려 인류의 내일을 조망할 여유가 없었고, 1950년대 이후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 됨에 따라 소외된 집단이 늘어가면서 공동체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교회는 공동체 운동의 핵심 역량 공동체의 사상적 맥락은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흐름에서 보아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한 가지는 공동체주의적 전통으로, 산업 혁명과 민족 혁명이 일어나고 도시화, 조직화, 전문화 등이 진행되어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찾을 수 있었던 안정감과 공동체 이해, 박애와 공동체 정신이 파괴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헤르더, 쉴러, 헤겔, 루소, 마르크스, 퇴니스를 거쳐 니스벳을 비롯한 많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개인주의적 전통으로, 근대화를 전통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해방 과정으로 파악하여 인간의 자유와 이성 및 자유로운 의지를 주장하는 흐름이다. 홉즈, 흄, 벤담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의 이론 가운데 퇴니스의 공동체 개념의 유형론적 분석은 공동체적 중세 유럽이 산업화된 근대적 형태로 역사를 이행하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다. 그는 유럽 사회의 발전은 ‘합일적 공동 사회’로부터 ‘결합적 공동 사회’로, 그 다음에는 ‘결합적 이익 사회’로부터 ‘합일적 이익 사회’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합일적 공동 사회는 혈연, 지연, 친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를 말한다. 결합적 공동 사회는 공통된 일과 소명, 신념에 따라 모인 길드, 동업 조합, 교회, 성직 등을 말한다. 결합적 이익 사회에 이르면 비인격적 경쟁인 이기주의가 점점 지배하는 현상과 함께 인간 관계의 개인화가 심화된다. 그러나 마지막 합일적 이익 사회가 되면 이익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과거 사회의 공동체적 안전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려는 사회적인 노력이 사회보장제도 등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다소 흔들리는 감은 있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잘 짜여진 유럽 사회를 보면 퇴니스의 사회적 전망 네 단계를 이미 거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에 비해 미국적 신자유주의 노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합일적 이익 사회로의 전망이 불투명한 것처럼 보인다. 19세기 사회 사상가들은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을 통하여 얻은 것은 개인 자유와 기계 생산이었고, 잃은 것은 공동체적 삶과 형제애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공동체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 역시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21세기 사회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우리는 공동체적 삶이야말로 억압적(공동체주의가 아닌)현대인과 인류가 절실하게 추구하는 미래 사회의 이상적 삶이라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있다. 그러나 퇴니스가 결합적 공동 사회로 분류한 교회마저 경쟁과 이기심이 난무하는 이익 사회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회복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이상향을 이 땅에 심어 가야 할 인류 공동체의 유일한 핵심 역량인 교회가 본분을 잊어버리고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공동체 운동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철저한 물질 문명의 사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철저한 경쟁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개인은 늘 희생될 수밖에 없는 사회이다. 여기서 인간의 소외가 발생하고 이로 인한 병리 현상이 나타난다. 전세계적으로 최강국인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성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그와 동일한 정책 기조에 편승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앞날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소수의 자본주의 승리자들 뒤에는 다수의 땀, 눈물, 고통이 그늘진 채로 고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쟁의 원리를 협동의 원리로 대체하고, 나눔과 연대의 사회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일, 이것만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와 같은 인식 아래 공동체 운동을 펼쳐가는 다양한 그룹들이 있다. 공동체의 성격과 관련해 가드너라는 학자는 1960년대 이후 미국 공동체 운동을 예로 들어 두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무정부주의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구조화되지 않은 공동체이다. 히피운동이 그 예이다. 둘째는 종교적 지향이 강하며 질서가 잡혀 있고 권위주의적이며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공동체이다. 부르도프나 후터 공동체가 그 예이다. 캔터라는 학자는 이를 다른 표현으로 은둔 공동체와 봉사 공동체로 표현한다. 은둔 공동체는 외부 사회의 압력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며 성원들 사이에 가족 같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는 통제 방법을 발전시키기 어렵고 구성원의 헌신도 얻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봉사 공동체는 특정한 범위의 인구에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물론 이 두 가지가 혼합된 경우도 많기에 이 분류 방법은 한계를 갖지만, 공동체의 주요 기조를 분류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우리 나라에서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공동체 운동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시골로 이주하여 생태 마을을 만들어 가는 생태 공동체 운동이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삶의 형태로서 공동 소유, 공동 생산, 공동 소비를 추구하는 소공동체 운동들이 농촌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편 도시에서는 지역 현안에 대응하는 지역 공동체 운동과 아파트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주거지 중심의 공동체 운동도 크게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역 현안에 대응하는 공동체 운동으로는 댐 건설 반대 운동과 공해 공장 이전 운동 등 지역 주민이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함께 대응해 나가는 운동이다.동강댐의 경우는 운동 초기부터 교회가 참여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역 이기주의가 스며들 위험이 있고 일시적 목표를 위해 모이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로서의 미래상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협동조합운동으로서의 공동체 운동은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점들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비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운동이다. 유기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거래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운동은 도시와 농촌간에 상부상조하는 새로운 관계 설정과 농촌 지역의 자립성 강화 등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교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강한 의식성을 바탕으로 좁은 지역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자급 자족적인 공동체 운동들이 있다. 기독교 운동인 두레마을과 비종교 운동인 무주 생태마을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와 생산 관계에서 인간 소외 그리고 자연 소외의 문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대안을 찾고자 하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폐쇄적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교회가 아파트 공동체 운동을 일으키자 한편 우리 시대의 주된 주거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 운동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우리 사회에 아파트가 들어선 지는 35년이 지났고, 그 동안 정부의 주택 공급 정책에 의해 도시 지역에서의 아파트 주거는 50%를 넘고 있으며 대도시의 경우는 70%를 넘고 있다. 지금까지의 아파트 공동체 운동은 주로 건축 하자 문제에 대한 대응이나 관리비 부정 문제와 절감 방법 등에 대한 감시와 관리 차원의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98년 2월 참여연대 아파트공동체연구소가 창립된 것을 비롯하여, 경실련, 녹색 소비자 연대, 녹색연합, 여성 민우회, YMCA 등 시민 단체들은 ‘녹색아파트 만들기’ 등의 명칭으로 아파트 관련 운동들을 펼치면서 이웃 알기, 공동체 마을 만들기, 환경 교육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정부도 ’99년 3월에 제2건국위원회에서 지역 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자원봉사자 운동과 함께 아파트 공동체 운동을 선정하여 아파트 공동체 운동 관련 사업에 정부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시작된 운동이 동아일보와 주거문화21이 펼치고 있는 공동체네트웍국민운동이다. 이 운동의 의의에 대해 양주모 사무처장은 “아파트는 주거 생활의 편리성이라는 큰 혜택을 입주민에게 제공하고 있지만 고밀도 집합형, 폐쇄성의 특성으로 인해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관심도 없어 공동체 문화 해체라는 중대한 문제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운동의 목적은 아파트 단지마다 홈페이지를 통해 서로를 알고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이웃과 함께하는 따뜻한 마을 문화를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이 운동에는 250개의 홈페이지가 운영되고 있고 운영도 주민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에는 6개 광역시를 대상으로 하여 1,000개의 홈페이지가 제작, 운영될 예정이다. 이 운동은 아파트를 비리 감시의 대상이 아니라 격려와 축복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공동체 이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가 새로 조성되면 인근의 교회들은 경쟁적으로 전도에 열을 올린다. 한 집에 여러 교회의 안내지와 선물이 전달된다. 이같은 전도의 열정도 귀한 것이지만 아파트 주민의 가장 약점인 서로를 알게 해주는 다리의 역할과 소원한 관계에 따뜻한 사랑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공동체네트웍국민운동에 이같은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교회 안으로 사람을 데려올 생각에만 매몰되어 있지 말고 세상에 나아가 자신이 사는 지역 주민을 돕는 네트웍 봉사자로 나선다면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 사도로서의 한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21세기 문턱에서 1세기를 되돌아 보는 까닭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은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동체 운동의 흐름이다. 이처럼 경쟁과 효율을 시대의 중심축으로 하여 몰아치는 자본주의 격류 속에서도 하나됨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공동체로의 구심력은 계속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통해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공동체 소명은 무엇인가? 우선 첫 번째는 회개일 것이다. 공동체성서연구원장 김영운 목사는 오늘날 제도 교회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콘스탄틴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교회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부터는 특히 힘의 우위와 물질적 풍요만이 미덕이요, 축복인양 여기며 살아왔다. 더욱이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물질적 자기 이익과 물질적 생존에 관심이 쏠리면서 세상의 가치관이 여과되지 않은 채 교회의 가치관을 압도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성공의 신화’와 ‘성장의 모형’과 ‘힘의 논리’와 더불어 ‘물질적 축복’이 교회 안에서조차 공동체성의 의미와 의의를 거의 퇴색시키고 말았다.” 성공과 돈과 교인 숫자의 위력 앞에서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순결한 신앙 양심과 내면의 신앙 논리마저, 세상적인 성공 논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크리스천 리더십들의 힘 앞에서 굴복한다면 한국 교회의 희망은 없다. 경쟁보다는 협력과 연대, 섬김과 하나됨을 강조해야 할 리더십들이 경쟁을 부추기는 성공, 고지 점령, 파워 크리스천 등의 구호를 앞세우며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은,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기다려 부축하고 나가야 할 목자의 마음을 저버린 논리가 아닐까? 세상은 남을 밟고 앞서가는 논리로 앞서가더라도, 우리는 세상에서 넘어진 자를 일으켜 더디 가더라도 함께가는 하나됨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할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과 똑같은 논리로 경쟁하는 교회를 세상은 구원의 방주로 생각할 것인가? 지금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우리의 탐욕을 한껏 부풀려온 종교적 껍데기를 벗어놓고 회개의 무릎을 꿇어야 할 때이다. 두 번째는 교회 구조를 ‘목사의 교회’에서 ‘공동체 모두의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목회는 전체 그리스도인의 사역이라기보다 안수 받은 목사나 교육받은 전문인이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을 돌보는 사역으로 고착되어가고 있다.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서로 돌아보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적 공동체이다. 이러한 구조는 네트워크 시대인 21세기가 요구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공동체를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화해야 한다. 대형 교회를 관리하는 수단으로서 셀 그룹이나 공동체를 일시 도용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제자 훈련도 지상명령의 성취 이전에 공동체의 완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도시 공동체 쉴터 대표 석금호 목사는 “예수님이 의도한 작은 제자 공동체의 본질은 제자 훈련이 아니라 ‘관계성’이었다. 이것이 예수님 공동체의 본질이었다. 예수님의 바람은 스스로 택한 방식인 공동체를 통해서 영원히 희석되거나 약화되지 않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21세기의 문턱에서 1세기의 사도적 공동체를 되살피고 또 살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많아도 정말 교회가 무엇인지, 참 예수 공동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 아닐까? 유종성/ 「소금과빛」 기자.
21세기를 대비한 목회전략 2004-02-03 15:56:59 read : 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21세기를 앞두고 매우 중대한 목회적 결단을 해야할 시점에 놓여 있다. 21세기를 시작하는 목회자들이 어떻게 목회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 세기의 선교역사가 가늠질 될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는 21세기로 넘어가는 기로에서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전반적인 부분에서
21세기를 대비한 목회전략 2004-02-03 15:56:59 read : 5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21세기를 앞두고 매우 중대한 목회적 결단을 해야할 시점에 놓여 있다. 21세기를 시작하는 목회자들이 어떻게 목회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 세기의 선교역사가 가늠질 될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는 21세기로 넘어가는 기로에서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전반적인 부분에서 근본적인 변화와 도전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현재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교회성장의 침체 위기, 세기말적 전환이 가져다 주는 정신적인 혼란과 두려움, 세속문화의 영적 타락으로 인한 교회의 영적 혼란, 갈수록 깊어지는 올바른 영성에 대한 갈증과 요구 앞에 서 있다. 어떻게 한국 교회가 이러한 문제들을 풀어나갈 것인가? 이러한 영적, 정신적, 문화적 도전 앞에서 필자는 목회 현장에 있는 자로서 21세기를 대비한 목회전략을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많은 것을 생각하고 구상도 하였지만, 본질적으로 필자는 세 가지 핵심적 목회철학과 더불어 다섯 가지 목회형태론을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나갈 것을 권하고 싶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세 가지 목회철학은 ① 영성목회(기도목회) ② 전도목회(훈련목회) ③ 피의 목회(희생목회)이다. 이 목회철학과 더불어 필자가 주력하는 다섯 가지 목회형태론은 ① 영성목회론 ② 매일교회론 ③ 다양한 형태의 설교론 ④ 역동적 예배론 ⑤ 네트워크식소그룹 목회론이다. II. 교회사 동향 분석을 통한 21세기 목회 전망 1. 세계 교회사의 동향 1) 2) 감성/영성 강조의 시대 지성/이성 강조의 시대 2세기 몬타니즘 -금욕을 지나치게 강조한 성령운동 -그리스도의 재림 기대 -초자연적 은사 추구 2-3세기 영지주의 -지나친 영육 분리 사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 불가능하게 함 -구세주는 신도 인간도 아닌 존재 -십자가 사건 부인 3-10세기 모나스티시즘 스콜라주의 -신앙을 잘 규명해 보려는 시도에서 시작 -계시와 이성의 우위성 논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인용 -안셀름,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옥캄 11-14세기 14-15세기 신비주의 -골치아픈 스콜라신학에 회의 -스스로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해 보려는 무리 발생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경건생활 강조 -토마스 아 켐피스 : 그리스도를 본받아 16-17세기 종교개혁 정통주의 -성서지상주의, 성경본문회복운동 -마틴 루터 : 성경번역작업 -존 칼빈 : 기독교강요, 체계화작업 17-18세기 경건주의와 감리교운동 -독일 루터교회의 침체에 따른 운동 -1648년에 끝난 30년전쟁으로 종교적 열정 식음 -경건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경험을 실제 적인 윤리 생활에 나타내려함 -필립 야곱 스페너의 경건주의 운동 -웨슬레, 애즈베리의 복음주의 운동 -조나단 에드워드의 대각성운동 -조지 휫필드의 부흥운동 19-20세기 자유주의 -철학이 신학을 대신함 -성경은 유치한 사고를 하는 이들의 책 취급 -성경의 기적이 부정됨, 이성적 관점에서 설명 -랑케의 과학적,객관적 역사방법론 -다윈의 진화론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하르낙의 자유주의 신학 20-21세기 오순절성령운동과 은사운동 -찰스 파함 목사가 시작한 벧엘성서대학에서의 말 씀,기도,전도운동 -찰스 피니의 신자의 완전 교리 --> 오벌린 신학 -A.B. 심프슨의 성결운동 -메노나이트, 그리스도의 형제단, 퀘이커, 구세군 2. 최근 30년간 한국 교회 성장 동향 3) (1) 1970년대의 동향 ① 개인 전도 운동 : 노방전도, 축호전도, 전도여행 ② 교회 부흥 운동 : 부흥성회, 대형집회, 연합집회 (EXPO '74) ③ 교회 확장 운동 :교회당 건축, 교육관 건축, 기도원 건축, 확장, 이전 ④ 성령 은사 운동 : 은사집회, 신유집회, 특별성회, 축복성회, 기도원집회 (2) 1980년대의 동향 ① 제자화 훈련 : 소그룹 제자훈련(옥한흠, 평신도를 깨운다), 선교단체의 성경공부 ② 교회 갱신 운동 : 교회체질 개선 운동 ③ 선교, 구제 활동 : 농어촌교회 개척, 해외선교 확장 및 사회구제 활동 ④ 상황 신학의 붐 : 민중신학, 해방신학, 토착화신학 (80년대 정치상황 반영) (3) 1990년대의 동향 ① 성경 연구 개발 : 성경본문 공부로 전환, 귀납법적 성경공부, 강해설교 ② 성령 운동 : 성령체험운동, 신학계에서 성령론 부각, ③ 영성 신학 : 영성목회, 영성훈련, 영성신학 (헨리나우웬, 토마스머튼, 수도원영성) ④ 문화 사역 : 대중문화 비판, 기독교 문화 만들기, CCM, 기독교 문화 행사 활발 3. 분석 : 21세기 목회 방향 전망 (1) 교회사 분석 : 교회사에서 지성과 영성의 강조는 몇 세기씩에 걸쳐 교체되면서 발전 (2) 교체 원인 : 다른 한쪽에 대한 결핍과 한계 상황시 발생 (3) 세계 교회사 동향에서 알 수 있는 21세기 목회 방향 ① 21세기는 영성강조, 감성강조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② 21세기는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오순절 성령운동이 영성신학의 토대위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③ 21세기 목회자는 지성적인 목회와 영성있는 목회를 조화시켜 나가는 균형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4) 최근 30년간 한국 교회 동향에서 알 수 있는 21세기 목회 방향 ① 21세기 성경 연구는 본문 자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② 21세기 목회는 오순절 성령운동의 능력과 영성신학의 체계를 균형있게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III. 21세기 목회 패러다임의 변화 4) 1. 프로그램목회에서 영성목회로 ① 20세기는 정보 사회이다. 정보사회는 곧 기술사회이다. 이것은 과학기술이 최고의 가치로 각광받는 시대를 의미한다. 기술이 보편화되어 있고 기술이 가치를 동반하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들은 목회 기술을 요청하고, 기술 목회에 익숙해져간다. 수많은 목회 프로그램과 자료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성경공부 자료들, 설교집과 예화들, 인터넷을 통한 목회자료들과 CD롬에 저장된 목회기술들이 목회자에게 제공되고 있다. 갖가지 기계며 자료들이 목회자가 목회의 본질보다는 기술에 의존하게 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게 한다. ② 1900년에서부터 2000년까지의 100년은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류는 비영성적 세기(Nonspiritual century)를 살아왔다. 1960년대의 히피 문화, 1970년대의 로큰롤 마약 문화, 1980년대의 탈근대주의의 급진적 스타일이 자리하게 되었으나, 1990년대에 와서 다시 영성적 방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1세기에 진입하게 되면 이러한 영성적 추세는 더욱 발달할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 물질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교회만이라도 영성적이기를 기대하며 교회까지 물질적이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영성적인 교회가 부흥할 것이다. ③ 현재 세계 추세로 볼 때 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의 성장하는 교회는 대부분이 카리스마적 교회이며, 쇠퇴하는 유럽 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인 영국 교회도 지난 10년 동안 카리스마적 교회는 9%의 성장을 이룬 반면, 다른 교회는 5%이상의 감소현상을 보였다. ④ 1981년 피터 와그너 교수는 전세계에 약 9000만 명의 은사 중심의 카리스마적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그 수를 약 4억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2년에는 2억 700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카리스마적 그리스도인이고, 2억 400만 명이 카리스마적 교단에 가입되어 있었다. 이러한 숫자는 전세계 그리스도인의 24%에 해당되는 놀라운 수이다. 2. 주일 교회에서 매일 교회로 ① 산업사회 구조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개미형의 사람들이 잘 살았는데, 정보사회 구조로 변화하면서 개미형보다 거미형의 사람이 증가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생산성이 높은 기계나 방식을 도입하여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일을 하고 여가를 이용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②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본질은 결코 변해서는 안되지만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시대에 적응할 수 있고 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기본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는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사회 여건이 날로 다양하게 늘어나면서 교회에 새로운 주일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③ Sunday Morning Church ---> Seven-day-a-week Church / Program Church / Full-Service Church ④ 매일교회에 가능한 요일별 프로그램 : 월요 치유사역, 화요 성령사역, 수요 말씀사역, 목요 찬양사역, 금요 기도사역, 토요 열린예배 3. 제목 설교에서 다양한 형태의 설교로 (1) 제목설교 ---> 강해설교 ---> 다양한 형태의 설교 ① 강해설교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설교의 방법이다. 느헤미야 8:8에는 "하나님의 율법첵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여"라고 하는데, 이것이 강해설교의 원리이다. 즉 강해 설교란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고, 깨닫게 한다." ②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는 설교할 본문을 몇 번이나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새벽 5시부터 9시까지 본문을 읽으라는 대답을 했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본문이며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설교가 강해설교이다. ③ 그렇다고 해서 21세기의 설교 형태로 강해설교만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청중의 수준과 기호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설교형태는 청중의 지적 수준, 연령, 출신, 영적 상태 등에 따라 다양한 설교의 형태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 형태로는 제목설교, 강해설교, 내러티브설교, 방송설교, 인터넷설교, 선포설교, 설득설교, 영상설교, 논리설교, 초청 설교 등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2) 메시지 중심, 음성 언어 ---> 이미지 중심, 미디어 언어 ① 1950년대에 라디오에 이어 TV가 등장한 이후, TV는 지난 40년 동안 대중의 커뮤니케이션의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독서하고 신문보고 잡지를 읽는 시간보다, TV와 같은 영상매체 앞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 TV등의 영상매체는 보는 것(Seeing)과 듣는 것(Hearing)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매체이다. 한마디로 영상매체는 개념(Terminology)이 아닌 그림(Image)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5) ② 성경이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이미지, 상징, 비유 같은 그림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그림언어가 설득의 효과에 있어서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림언어는 추상언어와는 달리 오감, 정서, 상상력의 수준에서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미지는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성경기자의 가장 강력한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이미저리(Imagery)는 감각에 직접 호소하는 언어이다. 우리가 말해진 것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6) ③ 21세기의 설교는 이야기와 예화를 사용하는 이야기체의 설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길고 지루한 교리적 설교가 아니라 짧고 흥미로운 공감적 설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일방적으로 외쳐대는, 청중의 삶과 동떨어진 설교가 아니라 강단 위와 아래가 쌍방적으로 연결되어 청중의 삶을 치유하는 설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7) ④ 이어령 교수는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미디어 발전을 흥미있게 관찰하여 예수님은 멀티미디어로 오셨다고 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음성으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토탈 미디어로 오신 미디어의 전환이다. ⑤ 서정우 교수가 정의한 미디어의 특징 a. 간단한 정보의 기억은 눈 보다 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더 효과적이다. b. 귀와 눈을 합친 커뮤니케이션은 기억을 더 향상시킨다. c. 교육수준이 높은 수용자의 경우 인쇄매체가 설득에 효과적이고 교육수준이 낮은 수용 자의 경우는 방송매체가 효과적이다. 4. 예전적 예배에서 역동적 예배로 8) ① 현재 구미의 많은 교회들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축제적 예배를 강조하는 교회들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은 "모이면 축제적 예배, 흩어지면 소그룹을 통한 성숙"을 표어로 내걸고 성장하고 있다. ② 한국교회의 전통적 예배는 경건과 회개는 강조했지만, 기쁨과 성결한 삶을 퇴조시켰다. 한국을 방문했던 몰트만 박사는 "한국교회에는 십자가의 신학은 있으나 부활의 신학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한국교회가 고통과 아픔은 강조하지만,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③ 하비 콕스는 교회를 세 가지 유형으로 설명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기의 교회, 감사와 축제가 있는 시편의 교회, 그리고 새하늘과 새땅을 지향하는 계시록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예배에는 구원의 감격, 감사와 축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함을 언급한 그는 나아가서 "예배에서 축제성이 상실된 다음부터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死神神學)이 나왔다"고 했다. ④ 김명혁 교수가 밝힌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있어야 할 요소들 a.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과 교제가 있는 예배 b. 기쁨의 찬양, 뜨거운 기도, 영감이 있는 설교,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선포 및 성만찬의 조화가 있는 예배 c. 회중들이 모두 참여하는 공동체적 예배 d. 은사 또는 축복 추구보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 e. 사회적 책임과 문화적 변혁에 대한 확인이 있는 예배 f. 주일이 성수되는 예배 g. 성령의 임재와 영감이 있는 예배 ⑤ 21세기는 예배가 길어진다. a. 헝가리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히트교회 (샌도르 목사) : 오전 10시-오후3시30분 예배 b. 중국의 지하교회들 : 99절짜리 찬송가 / 6시간 예배 5. 대중 목회에서 네트워크를 통한 소그룹 목회로 ① 소그룹의 특징 a. 대형교회에서 소그룹은 친밀한 교제를 가능케 해준다. b. 설교는 질문이나 토의가 불가능하지만, 소그룹을 통한 훈련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c. 소그룹목회는 개인에게 목회적 관심을 기울일 수 있고 양질의 목회를 제공할 수 있다. d. 소그룹은 상호격려와 후원을 통하여 교인 상호 간의 신앙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e. 소그룹은 목회자 자신이 개인의 신앙성장을 관찰할 수 있다. f. 소그룹을 통하여 피전도자를 빠른 시간에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한다. g. 소그룹에 참여한 교인들이 예배에만 참석하는 교인들보다 성장이 훨씬 빠르다. h. 소그룹은 모든 교인들을 목회자의 목회 지침대로 양육할 수 있다. ② 일반목회와 소그룹목회 비교 일반목회 소그룹목회 교제결여 질문,토의 불가 소외되는 교인 발생 협력 부족 적응에 오랜 시간 소요 목회 지침 전달에 장애 친밀한 교제 가능 질문이 가능해서 말씀 실현 도움 개개인에 관심 가능 격려와 후원으로 교인간 신앙성장에 도움 정착 및 성장이 훨씬 빠름 목회자의 목회 지침대로 양육 가능 ③ 미국의 윌로우 크릭 교회는 대표적 소그룹 교회인데 2,000개의 소그룹을 가지고 있다. 윌로우 크릭 교회의 훈련 책임을 담당한 도나휴 목사는 "소그룹 모델을 교회에 도입하는 이유는 교회의 중요한 이유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소그룹 훈련 대상과 훈련 내용에 따라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는데 윌로우 크릭 교회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a. 제자양성 그룹 : 영성훈련, 성경외우기, 다른 사람들을 제자로 삼기 강조 b. 공동체 그룹 :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공동체 형성, 새 그룹원 초청을 강조 c. 봉사 그룹 :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사역의 완수, 새 그룹원의 초청을 강조 d. 구도자 그룹 : 신자와 비신자로 구성되며, 전도, 새신자 훈련을 강조 e. 후원 그룹 : 그룹원들이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을 강조 ④ 새소망교회(New Hope Community Church)의 창립목사인 겔로웨이의 목회전략의 하나인 소그룹 목회의 세 가지 운영 원리 a. 나눔의 공동체 b. 합심기도 c. 철저한 말씀의 적용 ⑤ 소그룹 목회의 운영과 관리를 위하여 목회자는 혼자가 아니라 여러 명의 목회자들과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사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른바 네트워크 목회를 통한 소그룹 운영 방식이다. 이제는 혼자서 독불장군 식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시대는 지났다. 특히 소그룹 목회를 위해서는 교역자들이 하나의 팀이 되어 목회적 전문성과 기술을 공유하면서 세밀하게 운영할 수 있는 네트워크 목회가 필요하다. ⑥ 성경에서의 네트워크 사역의 사례들 a. 모세와 아론의 팀 사역 b. 여호수아와 갈렙의 팀 사역 c. 바울과 누가의 팀 사역 d. 베드로와 마가의 팀 사역 ⑦ 네트워크가 가능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a. 목회자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제한적인 목회경험이나 시간, 능력에 비해 세상의 변화는 목회자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b. 기업의 전략적 제휴가 그러하듯이 교회의 전략적 제휴인 네트워크나 목회의 전략적 제휴인 팀목회도 상호 신뢰가 우선되어야 한다. c. 상호 제공할 수 있는 목회적 기술이 있어야 한다. [참고 I ] Win Arn Growth Report에 발표된 Old Paradigm과 New Paradigm 9) Old Paradigm 항목 New Paradigm 직접적 무리 일반적인 사람들 단일한 설명 단일한 방법 목표 : 결심 주된 전도 방법 관계적 개인 특별한 "사람들의 그룹" 복합적 제시 다양한 방법 목표 : 제자 가능자 활동지향적 자격과 교단역사에 따른 선택 신학교 출신의 일군들 목사와 부교역자들 시도자 성취지향적 능력에 근거한 선택 그 교회 출신의 일군들 주일학교 연령별 등급 매주 한번씩의 모임 언어지향적 보수를 받는 젊은이 사역자 기독교 교육 소그룹 삶의 양식에 따른 등급 많은 모임 시간과 장소 시각지향적 다른 직업을 갖고있는 사역자 적당히 고려함 시설들 규칙적으로 새롭게 함 보는 것 지적임 그리스도인들에게 초점 예배 참여하는 것 경험적임 비그리스도인둘에게 초점 자기를 죽임 교인들이 제도를 섬김 무보수 자원자들 자원자들 자기를 극대화시킴 제도가 교인들을 섬김 보수를 지불함 변화를 지향함 중앙집권적임 관료성 교회에 의해 섬김을 받음 교단의 제도 변화를 지속시킴 분권적임 책임성 교회를 섬김 IV. 21세기를 대비한 목회 전략 1. 영성 목회 (기도목회) 10) ① 헨리 나우웬이 말하는 영성과 목회의 관계 "목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목회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주님의 은혜의 해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영성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 관심을 집중하며,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 우리는 가끔 영성과 목회를 분리하고, 기도에서 봉사를 분리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기도와 봉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영성과 목회는 중국의 음양설의 음과 양과 같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미래학자들은 미래 사회의 한 특징을 이단과 사이비의 출현이라고 단정한다. 이러한 미래 현상은 과학기술과 조직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사람들이 기계와 더불어 살고 조직사회에 살게 되면 자연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가 건전한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지 못하면 사회는 잘못된 영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단과 사이비가 나서서 혼란스럽게 된다. ③ 90년대 말 한 기독교 잡지에서는 크리스쳔의 점복에 관한 견해를 설문조사로 알아보았다. 기독교인 가운데 46.6%가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이들 중 15.2%가 과학적 근거가 있다. 19%는 통계과학이다 라고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고, 12.4%가 가끔 점을 보았다고 답했다. 이러한 응답의 결과는 한국교회의 교인들 속에 있는 혼합주의적 영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④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산업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제공하게 될 것이고, 인간의 과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방향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이며 인간의 삶의 질은 하락하게 될 것이다. 이런 미래의 세계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할뿐더러 인간은 오히려 더 심한 갈증과 고독을 느끼게 되고 동시에 욕구 충족을 위한 기능적 대행물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개인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종교를 찾게 되고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⑤ 잘못된 영성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교회가 제시할 수 있는 영성목회의 대표적인 모델은 "기도목회"이다. 헨리 나우웬은 기도를 가리켜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목회란 목회자가 성도들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훈련시켜 그들의 삶이 기도하는 삶으로 변화되도록 이끌어가는 목회방법론이다. ⑥ 우리 교회의 기도 프로그램 : 새벽기도회, 4시간동안 진행되는 금요심야기도회, 모든 예배후에 진행되는 기도회, 매일저녁기도회, 21일간 매일 4시간 동안 진행되는 세이레영시기도회, 21세기를 준비하는 1,000일간 진행되는 일천번제기도회, 담임목사와 교회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수요중보기도회 [ 참고 II ] 한국에서의 "영성"에 대한 오해 ① 한국 교회는 영성에 대하여 많은 오해가 있다. 신비적 은사를 강조하는 편에서는 신비적 체험을 영성과 일치하며, 영성적 체험은 은사를 통하여 가능하다고 본다. 반면에 카톨릭적 영성을 추구하는 편에서는 기도와 공동체 생활에서의 대화 등 내적 생활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한국 교인들은 '영성'이라 하면 신비주의나 부흥사들의 전유물과 같이 요란함이나 카톨릭의 탈현실적 이상 신앙의 형태로 오인하였다. 왜 이런 오해를 낳았는가? ② 90년대 말 현재 목회자 세계에서는 영성신학, 영성목회, 영성훈련이라는 말이 등장하여, 모든 부분에서 영성이란 말이 빠지면 어색할 정도로 유행어가 되다시피 하고 있다. 심지어 예전에는 능력있는 목회자나 교회를 일컬어 "영력있는 목회자", "성령충만한 교회"로 표현했는데, 요즈음에는 "영성이 있는 목회자", "영성훈련이 있는 교회"라는 말로 대체되고 있다. 예전에는 "성령 세미나", "성령 집회"라는 말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영성훈련 세미나", "영성 집회"라는 말이 더 많이 쓰여지고 있다. ③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목회계와 신학계에 등장한 것이 성령론, 성령운동, 성령세미나였다. 세계적으로 성령운동으로 목회하는 교회가 급성장하는 사례들이 보고되면서 오순절 성령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세속도시]로 유명한 하버드의 신학 교수인 하비 콕스는 현대 교회에서 신은 죽은 존재와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성령 운동을 하는 교회에 초청을 받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그의 생각이 180도도 바뀌게 되었다. 그는 신은 이 현대 교회의 삶 속에서 죽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성령 운동을 하는 교회 속에 살아 있다고 생각되었고, 앞으로 21세기를 바라보았을 때 세계 기독교회의 유일한 희망은 성령운동이라고 했다. 이 발표 후 미국의 모든 신문들이 앞으로 미국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성령 운동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글들을 싣기 시작하였고 뉴욕 타임즈에서도 이런 부분을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11) ④ 그러던 것이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성신학, 영성훈련, 영성목회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21세기에 떠오를 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는 헨리 나우웬의 "영적 발돋움","영혼의 양식"과 같은 책들, 달라스 윌라드의 "영성훈련신학", 은성출판사에서 나오는 영성신학에 관련된 책들, 강준민 목사의 "뿌리깊은 영성" 등이 있다. 이들의 영성은 중세 수도원적 영성의 전통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⑤ 여기서 한국 목회자들은 오순절 성령운동과 영성훈련의 개념을 혼용하여 사용함으로써, 내용은 오순절 성령운동인데 표현은 영성신학, 영성운동, 영성훈련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⑥ 성경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영성이란 성령충만과 관련되어 있다. 성령충만은 두가지 뜻을 담고 있는데, 바로 품성변화와 성령세례이다. 즉 성령충만에는 품성변화와 같은 카톨릭적 영성의 측면과 성령세례와 같은 오순절 성령운동의 측면을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진정한 영성목회란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목회 현장에서 균형있게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균형이 중요하다. 2. 전도 목회 (훈련 목회) (1) 목회자부터 전도하라 12) ① 예수님은 친히 전도의 본을 보여 주셨다. 전도의 본은 1세기 사도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또 얼마나 개척 전도에 힘썼는가? 대부분의 성장하는 교회를 보면 목회자가 전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경우에는 목사가 직접 전도를 한다. 그러나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이와 반대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직접 전도를 하든지, 아니면 성도들로 하여금 전도를 하게 하든지 해야 한다. ② 안산동산교회의 김인중 목사는 1천명이 출석할 때까지 매일 10명씩 전도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전도했는지 아는 사람만 2-3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③ 대전순복음교회는 개척한 지 8년만에 3천 명의 성도로 성장하였는데, 그 성장의 비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전도하는 성도들로 만든 데 있다고 한다. (2) 말씀, 기도, 전도 운동 ① 20세기 오순절 운동이 일어났던 벧엘성서대학에서 강조한 것이 말씀운동과 기도운동과 전도운동이었다. 그곳에서는 3시간 말씀 공부하고, 3시간 기도하고, 3시간 전도하였다. ② 오늘날 한국 교회를 보면 말씀을 많이 강조한다. 제자훈련, Q.T. 성경공부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기도와 전도가 거의 빠져 있다. 그래서 교인들의 머리만 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는 이 세 운동이 같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③ 한국교회가 25%에서 그 성장을 멈춘 이유가 바로 목회자 자신의 전도열정이 식었고, 교인들에게 전도를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전도 훈련 전략 13) ① 전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설교와 교육 우리나라의 가독교인의 수가 전체 인구의 25%인 1,300만명에 이른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인 수는 다르다. 우리나라에 있는 3만 8천개의 교회 가운데 장년이 평균 20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가 10%도 채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전체 그리스도인의 수가 청장년 및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6백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처럼 아직도 절대 다수가 교회를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절대 가치를 전도에 두어야 한다. 교회의 자화상을 전도하는 교회로 바꿔야 한다. ② 여러 가지 전도프로그램을 자기 교회에 적용 여러 가지 전도 프로그램 중에 어떤 것이 우리교회에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전도폭발훈련, CCC의 사영리, 네비게이토 전도법, 생활전도법, 쉬운 전도법, 그물전도법, 외침전도법 등 다양한 전도방법들을 교회에 적용해 본다. ③ 교회 내에서 전도 훈련 실시 교회내 전도학교를 통해서 전도훈련, 여러 가지 전도훈련반을 개설하여 성도들의 성격과 기호에 맞도록 훈련시킨다. ④ 전도특공대 운영 매주 한 날을 잡아서 전도훈련과 더불어 직접 현장으로 나가 전도하도록 한다. 오전에는 교역자에게 전도이론을 배우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오후에는 거리와 이웃에게 나아가 직접 전도하고 보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⑤ 교회홍보와 중보기도를 통해 전도활동을 최대한 지원 교회와 음식점과 병원은 소문이 잘 나야 잘된다는 말이 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이미지를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짜임새 있게 기획되어야 한다. 전도지 하나를 만들어도 불신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제작한다. 한편, 전도에 참여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중보기도와 물질적 지원을 통해서 간접적인 전도자로 참여시키도록 한다. 3. 피의 목회 (희생 목회) 14) (1) 목회자 리더십의 중요성 : 목회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리더십이다. ① 폴 비즐리 머레이(Paul Beasley-Murray) "교회의 한 프로그램을 잘 이끌기 위하여 필요한 요소가 세가지 있다. 그 첫째가 리더십이요, 둘째도 리더십이요, 셋째도 리더십이다. 리더십의 부재는 아마도 매일 8명의 기독교인이 사라지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교회들은 더 많은 교인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② 존 맥스웰(John C. Maxwell) "열 사람 몫의 일을 하는 것보다 열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더 낫다." ③ 조선일보 논설고문 홍사중이 말한 "리더와 보스"의 차이 Leader Boss 지도자는 선의에 의존한다. 보스는 권위에 의존한다 지도자는 희망을 준다. 보스는 겁을 준다. 지도자는 '가자'고 권한다. 보스는 '가라'고 명령한다. 지도자는 공개적으로 일한다. 보스는 등 뒤에서 일한다. 지도자는 귀가 여러 개 있다. 보스는 귀가 없다. 지도자는 약점을 숨기지 않는다. 보스는 약점을 숨긴다. 지도자는 앞에서 이끈다. 보스는 뒤에서 호령한다. 지도자는 존경을 모은다. 보스는 복종을 요구한다. 지도자는 남을 믿는다. 보스는 남을 믿지 않는다. 지도자는 사람을 이끌고 간다. 보스는 그들을 몰고 간다. 지도자는 '우리'라고 말한다. 보스는 '나'라고 말한다. (2) 목회자 리더십의 자세 : 희생적 리더십과 인격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① Albert Schweitzer가 아프리카에서 펠리칸이라는 새를 보았다. 그 어미 새는 자기가 죽을 때가 되니까, 그 날카로운 부리로 자기 가슴을 다 파헤쳐 피를 쏟아 새끼들을 먹이고 죽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곧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슈바이쳐는 여기서 "Pelicanism"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② 릭 워렌 "희생이 없이는 성공도 없다"(There is no success without sacrifice) ③ 우리에게 축복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 If there is to be any "blessing", there must be some "bleeding" = "No Bleeding, No Blessing." ④ John Henry Jowett "가슴이 부서지는 고통을 치른 후에야 들을 가치가 있는 설교를 하 게 된다." ⑤ 성장하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대부분 한 교회에서 장기 목회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성도 수 3,000명 이상의 대형 교회 79곳을 조사하여 통계를 낸 결과, 이들 대형교회의 목회자 평균 시무 연한이 21년 4개월이었으며, 이 중 개척 목사가 28명, 부임 목사가 51명이었다. ==> 하나.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한 교회를 오래 섬길 수 있어야 한다. 둘. 장기목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인격이 필수적이다. 셋. 기성 교회에 부임해서도 얼마든지 인격을 통해 교회를 갱신할 수 있다. V. 21세기 목회형태론 1. 현대인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는 「영성목회론」 ① 21세기 목회는 프로그램 위주의 목회가 아니라 영성 위주의 목회가 되어야 한다. ② 21세기 목회자는 기술적, 기능적 사역자가 아니라 영성있는 사역자로 세워져야 한다. ③ 영성목회의 구체적인 모습은 기도목회로 나타나야 한다. ④ 영성목회는 기도목회를 통한 은사개발과, 은사별 사역을 통하여 성령충만한 성도들을 만들며, 나아가 능력있는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도록 한다. 2. 현대인의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고려한 「매일교회론」 ① 매일교회는 새로운 시대에 따른 새로운 주일관에서 출발한다. ② 매일교회는 기존의 주일 개념으로는 교회생활을 할 수 없는 교인들을 위한 하나의 개 방적 목회의 한 형태이다. ③ 매일교회에서는 치유사역, 성령사역, 말씀사역, 찬양사역, 기도사역, 열린예배가 요일마 다 계속됨으로써 교인들의 다양한 영적 요구를 채워준다. 3. 다양한 청중을 고려한 「다양한 패턴의 설교론」 ① 21세기 설교 형태는 하나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② 21세기 설교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③ 21세기 설교는 메시지 언어에서 미디어 언어로 전환될 것이다. ④ 21세기 설교 형태로는 제목설교, 강해설교, 내러티브설교, 영상설교, 방송설교, 인터넷 설교, 문서설교 등 다양하게 전개될 것이다. 4. 영적인 교제와 기쁨과 응답이 있는 「역동적 예배론」 ⓛ 21세기 예배는 형식이나 명분보다는 내용과 실제적인 유익을 중시할 것이다. ② 21세기 예배는 경건성과 회개와 더불어 기쁨과 즐거움, 감격과 교제를 중시할 것이다. ③ 21세기 예배는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교제가 실제적인 예배 요소로 부각될 것이다. ④ 21세기 예배는 성령의 임재와 영감을 체험하는 살아있는 예배로 발전해야 한다. 5. 전도, 양육, 재생산을 위한 「네트워크식 소그룹 목회론」 ① 21세기 교회 조직은 은사별로 구성된 소그룹 목회가 적절하다. ② 소그룹 목회를 통하여 목회자는 교인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고, 실제적인 양육을 가 능케 한다. ③ 소그룹 목회는 전도와 양육을 소그룹을 통해서 운영함으로써, 새신자 등록 뿐만 아니 라 정착 및 성장을 빠르게 할 수 있다. ④ 합리적이고 세부적인 소그룹 운영을 위하여 교역자 그룹을 철저한 네트워크 방식을 취 한다. 참고 도서 목록 (가나다순) 강준민, 『뿌리깊은 영성으로 세워지는 교회』 (서울 : 두란노, 1999) 『뿌리깊은 영성』 (서울 : 두란노, 1998) 국제신학연구원 편, 『21세기 교회의 전도와 양육전략』 (서울 : 서울말씀사, 1996) 그레그 옥덴, 『새로운 교회 개혁 이야기』 송광택 역, (서울 : 미션월드라이브러리, 1998) 길자연, 『왕성교회 태신자 전도운동』 (서울 : 도서출판 왕성) 김기제, 『21세기 리더십을 계발하라』 (서울 : 도서출판 횃불, 1998) 김기홍, 『이야기 교회사 상, 하』 (서울 : 두란노, 1998) 낼슨 타이어, 『영성과 현대목회』 이윤복 역, (서울 : 성광문화사, 1992) 리드 앤더슨, 『21세기를 위한 교회』 황성철 역, (서울 : 도서출판 솔로몬, 1997) 명성훈, 『부흥 뱅크』 (서울 : 규장, 1999) 박영재, 『설교자가 꼭 명심할 9가지 설득의 법칙』 (서울 : 규장, 1997) 오성춘, 『신학. 영성. 목회』 (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7) 이종윤 편, 『한국교회 진단과 그 처방』 (서울 : 요단출판사, 1996) 조봉희, 『벤쳐목회』 (서울 : 나침반, 1998) 헨리 나우웬, 『영적 발돋움』 이상미 역, (서울 : 두란노, 1998) 홍성주, 『21세기 영성신학』 (서울 : 은성, 1995) 『그말씀』 1998년 6월호 (서울 : 두란노, 1998) 『목회와 신학』 1993년 7월호 (서울 : 두란노, 1993) 「목회와 신학」 1997년 11월호 (서울 : 두란노, 1997) 『목회와 신학』 1998년 10월호 (서울 : 두란노, 1998) 『목회와 신학』 1998년 9월호 (서울 : 두란노, 1998) 『목회와 신학』 1999년 1월호 (서울 : 두란노, 1999) 1) Robert C. Walton, 『Charts of Church History』 2) 김기홍, 『이야기 교회사 상, 하』 (서울 : 두란노, 1998) 3) 조봉희, 『신길교회 목회자 특강 강의안』 (1999. 3. 4) 4) 이성희 『미래목회 대예언』 (서울 : 규장, 1998) 『미래사회와 미래목회』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7) 5) 주승중, "설교의 패러다임 변화와 문자이후시대 설교" 『그말씀』 1998년 6월호 (서울 :두란노) 6) 김지찬, "보이는 설교를 하라" 『그말씀』 1998년 6월호 7) 이성희, 『미래목회 대예언』 (서울 : 규장, 1998) 8) 명성훈, 『부흥뱅크』 (서울 : 규장, 1999) 9) 리드 앤더슨, 『21세기를 위한 교회』 황성철 역 (서울 : 도서출판 솔로몬, 1997) 10) 이성희, 『미래목회 대예언』 (서울 : 규장 , 1998) 이태웅, "목회자의 바른 영성에 달렸습니다" 『목회와 신학』 1999년 1월호 이영훈, "초대교회에 나타난 부흥의 역사" 『전도와 양육전략』 (서울 : 서울말씀사) 11) 이영훈, "초대교회에 나타난 부흥의 역사" 『전도와 양육전략』 (서울 :서울말씀사, 1996) 12) 조봉희, 『벤쳐목회』 (서울 : 나침반, 1998) 13) 명성훈,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 및 새신자 목회개발" 『전도와 양육전략』 (서울 : 서울말씀사, 1996) 14) 김기제, 『21세기 리더십을 계발하라』 (서울 : 횃불, 1998) 조봉희, 『벤쳐목회』 (서울 : 나침반, 1998)
21세기를 향한 성경해석과 설교  2002-02-02 08:27:18 read : 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심상법 교수 1세기를 향한 성경해석과 설교   이십일세기를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움(millennium)이 다가온다.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기 위해 국가와 사회와 기업들은 어떻게 변신해야 할 지 모두들 야단이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국가는 국가대로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국가경영의 전략을 다시 짜 보고
21세기를 향한 성경해석과 설교  2002-02-02 08:27:18 read : 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심상법 교수 1세기를 향한 성경해석과 설교   이십일세기를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움(millennium)이 다가온다.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기 위해 국가와 사회와 기업들은 어떻게 변신해야 할 지 모두들 야단이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국가는 국가대로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국가경영의 전략을 다시 짜 보고, 기업은 기업대로 기업경영을 혁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세계는 무한경쟁의 보이지 않는 싸움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한 몸부림이 안쓰러울 정도다. 탈냉전 후의 이념의 공백 속에서 자국의 경제적 발전과 번영을 위한 몸부림이 지구곳곳에서 과열되고 있다. 이러한 과열과 함께 지구는 환경의 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신음하고 있다. 최근 세계환경기구는 지구의 온난화 현상을 경계하여 닥쳐올 대재난을 예고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는 지금 통합과 번영의 지구촌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유엔과 인접된 동질국가들간의 공동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구축된 집단체제의 블록공동체(유럽연합; 북미연합; 아세안연합; 아셈연합; 환태평양연합; 아프리카연합; 아랍연합; 등등)가 존재하면서도, 신토불이식 민족주의가 새롭게 발흥하여 지구곳곳에서는 국가와 민족과 종교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그 외에도 세계는 고도의 첨단기술의 발전 속에서 비인간화가 심화되고 마약과 음란과 폭력과 방탕의 세속적 파고가 한층 더 세어져 가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가운데 최근의 성경해석학과 설교학은 다가오는 새로운 밀레니움 앞에서 바른 전망을 갖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자유와 변화와 개혁과 개방과 통합과 번영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변신하려는 세계 속에서 교회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과연 교회는 이렇게 급변하는 세대 가운데서 잘못된 세속적 가치와 조류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올바르게 정화하며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더욱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 세대 속에서 바로 분별하고 실행하기 위해서 교회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 특히 이 일에 선봉장이 되는 목회자의 설교는 어떤 전망과 모습을 가져야 할까? 여기에 해석학적 안목은 우리의 설교에 바른 전망을 줄 뿐 아니라 역동적인 설교를 추구하는데 큰 힘이 된다.   ♧해석학과 설교   성경학자와 설교자(목회자) 사이의 단절과 괴리현상은 마치 계몽주의 이후로 교회와 대학사이의 분리된 관계만큼이나 소원한 느낌이다. 이 점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이러한 관계형성에는 양편 다 책임이 있다. 성경학자들은 지나치게 사변적인 용어사용과 함께 이론적 관심에만 집착된 책들과 논문들을 출판함으로써 그들의 학문활동이 교회(목회자들)의 사역에 실제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지적할 수 있다. 여기에 목회자들은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또는 그것들을 적절히 소화하지 못한 채 신학교를 졸업함으로써 그 동안 배운 주해와 설교이론들을 자신의 설교에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근본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지나치게(?) 바쁜 스케줄로 인하여 본문에 대한 연구 없이 시간에 쫓겨 설교를 준비하느라 그러한 것들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이점은 목회자들이 통감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사랑방 잡지는 이러한 소원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목회자와 성경(신)학자 사이에 적절한 대화와 토론의 장(場)을 마련하려고 한다. 특히 논단과 강해를 통해 목회자들로 하여금 해석과 설교에 바른 전망을 갖게 함으로써 급변하는 세대 속에서 올바른 말씀, 적절한 말씀, 효과적인 말씀의 사역자가 되도록 도울 것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교회)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의의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한 일환으로 봉사하는 역할을 감당하고자 할 것이다.   1.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학의 필요성   "왜 까다로운 해석이 필요해?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되지." 이것이 소위 열심(?)있는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이 내뱉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주의하여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해석이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쉽게 발견한다. 우리의 까다로운 인간관계(부부관계; 고부관계; 부자관계; 노사관계; 등등)에서도 상대방의 행동과 말을 잘못 이해(해석)함으로써 생각지도 않는 결과를 가질 때가 다반사다. 그리고 신문을 봐도 온통 특정 사건들에 대한 해석들로 가득하다. 신문사마다 해석적 견해가 다르고 글(기사)을 쓰는 기자들마다 해석적 차이가 있다. 비자금 정국도, 기아사태도, 북한과의 문제도, 자동차 협상도 이제는 신문도 해석하며 읽어야 한다(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셨던 자형이 자주 나에게 한 말이다). 교회에 가도 별 다를 바가 없다. 설교를 들어도 "과연 저렇게 설교(해석)해도 되나?"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올바른 해석, 올바른 이해의 필요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더없이 요구된다. 특별히 우리와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고대의 문서인 성경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설교하는 데에는 `주의 깊고 진지한 해석'의 필요성은 더없이 요구된다.   신약학 교수이며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 학장을 지냈던 린더 켁(Leander Keck)은 설교강단에서의 성경: 성경적 설교의 갱신(Bible in the Pulpit: The Renewal of Biblical Preaching) 이라는 자신의 책(1978)에서, 성서비평의 남용(濫用)과 불용(不用) 모두가 성경적 설교를 하는데 불안과 병폐를 초래해 온 것이라면, 그것의 적절한 사용은 오히려 설교자로 하여금 성경본문 자체에 귀 기울이도록 해줌으로써 참된 성경적 설교를 구성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설교에서의 성경해석학의 필요성을 잘 주지하였다. 확실히 성경해석학에서 논의되는 많은 점들은 소위 `성경적 설교'를 실행하는데 커다란 통찰을 줄 수 있음은 최근의 많은 책들을 통해 입증되어왔다.   물론 여기서 Keck이 말하는 `성경적 설교'란 성경이 설교의 내용을 결정하고 설교의 기능이 성경본문의 기능과 유사할 때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한마디로 `설교가 성경적인 방법 가운데서 성경적인 말씀을 전할 때(when it imparts a Bible-shaped word in a Bible-like way)'를 말한다(Keck 1978:106). 결론적으로 그는 설교가 성경자체의 본질과 일치할 때 성경적 설교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해석학적(또는 비평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성경적 설교'란 성경본문에 대한 `주의 깊고 진지한 해석'을 통해서 발견되어진 성경적 내용을 성경본문의 원래 의도와 일치하는 방법가운데서 그것의 의미를 오늘의 상황에 `재조정(redirection)'하고 `재진술함(restatement)'으로써 되어지는 설교를 말한다. 여기서 `재조정'이란 설교자가 성경본문의 청중과 오늘의 청중을 유비(analogy)에 의해서 동일시하는 것을 말하며, `재진술'이란 성경본문을 오늘의 청중에게 맞는 신학적 이해(의미)로 진술함을 말한다. 이 과정에 해석자로서 설교자는 성경원어들(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대한 적절한 (문법적) 이해와 더불어 성경이 형성된 시대의 `사회-문화적 세계(socio-cultural world)'에 대한 이해를 우선적으로 한다. 그리고 연이어 성경 본문이 가진 언어사용과 구조와 작품세계를 살핌으로써 본문이 의미하는 것을 재구성한 다음 이것들을 오늘의 청중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real world) 가운데 적절하게 적용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성경적 설교를 추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의 해석(주석을 포함)에 대한 전체적 조망이 필요하다. 아래의 도표는 해석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준다:   2. 해석에 대한 조망    해석이란 `의미의 자리(the locus of meaning)' 즉 `의미가 어디에 위치하는가'를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특정한 본문(작품)'의 해석이란 그 본문이 지시(언급)하고 형성된 세계 뿐만 아니라 그것의 구조와 작품세계, 그리고 그 본문이 의미 전달되는 전 과정을 모두 고려하는 일이다. 위의 도표에 나타난 대로 본문의 의미란 `특정한 본문(작품)'에 관여된 모든 요소들을 해석 과정에서 적절히 고려함을 말한다(Hernadi 1976; Lategan 1988): 세계(world); 저자(author/speaker); 작품(work)과 본문(text); 그리고 독자(reader/audience). 지금까지의 해석역사는 - 본문이 성경이든 문학작품이든 간에 - 위의 요소들을 단계적으로 강조하면서 발전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cf. Abrams 1953:6이하; Hernadi 1976; Lategan 1988).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지시된 역사적 세계(historical world)에 대한 이해 성경을 포함하여 어떤 작품이건 그 작품은 그 작품이 `지시(指示)하는 세계' 즉 실제 역사적 세계가 있다. 본문의 이 지시적(referential) 혹은 모방적(mimetic) 본질은 소설 역시도 그 정도에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예외일 수가 없다. 물론 역사성의 문제는 각각의 장르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순수 사실적이냐? 혹은 순수 허구적이냐? 는 논란이 바로 이러한 문제이다. 그중 특히 성경(신약)은 우리의 믿는 바대로, 주로 그 내용이 지중해를 중심(복음서의 경우는 주로 팔레스타인이며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의 경우는 지중해 연안의 지역들임)으로 일어난 구원역사의 사건들의 기록으로 이해한다. 이 경우 성경이 지시(언급)하는 세계의 역사성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해석과정에서 전제되고 고려되어야 한다. 이 역사성에 대한 문제는 전통적-역사적 해석에 있어서는 `사실 그 자체'로 이해되었고 역사비평적 해석에 있어서는 그것의 사실성이 비평적으로 - 때로는 매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시각에서 - 논의되었다. 지금까지의 전통적 신앙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셨던 일의 기록이고 그것의 역사성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앙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물론 우리는 (신약)성경을 이러한 사실들의 기록으로 받아들일 때 (신약)성경의 저술과정을 또한 고려한다. 특히 이러한 저술과정의 고려는 편집비평의 논의에서 보는 대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적절한 도움이 된다. 이 점은 최근 <성서해석학>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김 득중교수의 논문(1997)에서 잘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성의 논의는 성경이 지시(언급)하는 역사적 세계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수반한다. `지시(언급)된 세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본문자체에 기초하여 할 뿐 아니라 또한 본문이 지시하는 그 당시 세계의 역사적 문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Kingsbury 1991). 구약에서는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이고 신약에서는 1세기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그라코-로망 세계의 역사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이다. 물론 그 중 성경이해의 가장 핵심된 사상인 유대주의와 헬라주의에 대한 이해(Hengel [1976]1981)는 오늘의 우리에게 낯선 책인 성경을 이해하는 근간이 된다. 결과적으로 역사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특정본문을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와 배경이 된다. 이러한 배경적 이해는 우리가 신학교를 통해 배운 구약서론과 신약서론의 과목에서 약간의 맛을 보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서론(맛)에 불과하며 여기에 대한 계속적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최근 문화 인류학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과학적 해석은 이 점에 많은 통찰을 제공해 준다. 신약의 사회-문화적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책들로서는 Malina의 책(1991)인 New Testament World 와 Pilch와 Malina가 편집한 책(1993)인 Biblical Social Values and Their Meaning 와 Rohrbaugh가 편집한 책(1996)인 The Social Sciences and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와 Neyrey가 편집한 책(1991)인 The Social World of Luke-Acts , 그리고 최근 Meeks교수의 63세 생일을 기념하는 논문집으로 White와 Yarbrough가 편집한 책(1995)인 The Social World of the First Christians 은 좋은 지침서가 된다. 이러한 책들은 앞으로 본 잡지의 서평의 지면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소개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시적 세계'는 때로는 본문 안에서 구약 세계의 인물들과 기관들과 사건들을 가리킬 때가 있다. 이 경우 그것들이 언급하는 구약의 세계에 대한 이해는 본문에 나오는 어떤 특정한 인물들과 사건들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해석적 단서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즉 복음서에서 세례요한과 엘리야와의 연관성에 대한 언급이나 예수님의 사역과 출애굽과 광야의 사건들과의 관련성에 대한 언급, 요나의 표적에 대한 언급, 그리고 야고보서에서의 아브라함과 라합과 엘리야와 욥에 대한 언급들은 비근한 예가 된다.   2) 언어의 구조물로서 본문(text)에 대한 이해 모든 작품은 특정한 언어의 구조물로 되어졌기 때문에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이 쓰여진 언어와 그것의 언어적 특징을 알아야 한다. 특히 성경과 같은 고대 본문은 이와 같은 언어적 이해가 매우 요구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할 때 성경언어들(기본적으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이 언어적 지식은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문법에 대한 이해(음운론; 형태론; 문장론; 의미론)와 함께 문장의 스타일(style)과 그것의 수사학적 표현들(rhetorical features)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다. 특히 주해와 설교를 위한 원어성경본문의 형태론적 분석은 컴퓨터 프로그램인 Bible works(3.5 version)를 통해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본 연구원은 설교자의 주석작업을 위해서 이 프로그램의 사용에 대한 세미나를 준비 중에 있다). 그리고 단락의 중심의미를 추구하는 신약의 문장분석은 최근 GRAMCORD에서 개발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최근 둘로스 성경연구원에서는 이 프로그램의 번역을 시도하여 출판한 바 있다). 그리고 신약연구에 있어서 이러한 시도들을 한 책들로서는 Nida와 그 외 몇 사람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Style and Discourse 의 책(1983)과 Louw의 Semantics of New Testament Greek 의 책(1982)과 그리고 Nida와 Louw에 의해 최근 집필된 Lexical Semantics of the Greek New Testament 의 책(1992)이 있다. 위의 책들은 언어의 구조물로서 신약의 어휘와 구조분석(혹은 강화분석), 그리고 문체와 표현양식의 의미론적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최근 본 연구원의 상임 연구원 중의 한 사람인 김 지찬 교수의 언어의 직공이 되라 라는 책(1996: 생명의 말씀사)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언어사용(언어선택과 배열) 즉 수사적 표현들 혹은 은유적 표현들에 대한 연구로 성경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많은 빛을 던져준다.   3) 작품세계(narrative world)에 대한 이해 특정본문은 그 자체가 가진 고유한 `작품세계'가 있다. 비록 특정본문은 그것이 지시하는 세계(역사적 세계)에 기초한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저자에 의해 건설된 언어의 구조물로서 이 언어의 구조물은 그 나름대로 저자에 의해서 사건들이 선택되고 배열되고 묘사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특정본문의 `작품세계(narrative world)'라고 부른다. 특히 복음서는 이러한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요구한다. 가령 복음서는 비록 그것이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저자에 의해서 네 복음서들로 달리 묘사되었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예수의 생애의 사건들 중에 특정한 것들을 선별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의도에 따라 배열하고 묘사하는 방식이 누가나 혹은 마태, 요한의 것들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때로는 동일한 역사적 인물들을 기술하지만 그 인물들이 참여한 사건들에 대한 자료의 선택에서뿐 아니라 그것의 강조점에서 누가가 서술하는 인물묘사와는 다르다. 비록 사도들로 이어진 신앙공동체의 동일한 신학적 유산에 의해 전해 받은 전승들(oral traditions)이지만 최종적으로 저자에 의해 묘사된 사건진술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청중들에 대한, 청중들을 위한 메시지이기 때문에 저자가 기술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사실성의 차이가 아니라 보는 시각과 의미의 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청중의 상황에 따른 메시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각각의 복음서는 저자의 의도에 따라 그것이 가지는 줄거리 혹은 구성(plot)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이들 복음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가지는 각각의 플롯 혹은 중심주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이 플롯 혹은 중심주제에 따라 우리는 각각의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배경들, 그리고 사건들의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각 복음서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설자의 사건기술(narration)과 해설(commentary)을 이해함이 또한 요구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의 특정본문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지시적 세계(역사적 세계)'에 대한 이해와 함께 `언어의 구조물로서 본문'이 지닌 문법적이고 구조적이며 수사적인 표현방법들에 대한 이해가 추구되어야 한다. 그리고 본문이 가진 독특한 자충적(自充的) 세계인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결국 이것은 위의 도표에서 보는 대로 본문이 언급하는 세계(world)와 언어의 구조물로서의 본문(text)과 그것이 가지는 고유한 작품(work)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이러한 삼중적인 이해를 우리는 통상적으로 주석(exegesis)이라고 부른다.   이와 함께 우리는 주석에 있어서 의미결정의 두 축을 보는데 하나는 이미 논의한 지시적 혹은 모방적인 축인 세계 <- 작품 -> 본문(언어의 구조물)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사소통의 수사학적 축인 저자 -> 작품 -> 독자(청중)로 이어지는 수평적 축을 말한다. 특히 의사소통의 이 수평적 축은 본문이 갖는 정황(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원청중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이 청중의 사회적 상황 혹은 본문의 수사학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물론 청중에 대한 이해에 있어 성경의 청중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성경본문의 원 청중에 대한 것으로 그것은 이 청중이 신앙공동체임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또한 그들이 들어야 할 본문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점은 성경의 신앙적이고 신학적 해석의 중요성을 주지한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본문이란 특정한 상황에 주어진 본문임을 다시 한번 주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양식비평이 남긴 공헌중의 하나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대한 이해와 최근의 수사학 비평이 남긴 공헌인 본문의 `수사학적 상황(rhetorical situation)'에 대한 이해는 정황적 본문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여기까지를 우리는 주석작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해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의미의 지평을 오늘에까지 확장하여 독자(해석자)의 현실세계를 고려함을 요구한다.   4) 독자와 독자의 `현실세계'에 대한 이해 해석이란 단순히 `본문이 가진 원래의 의미(What the text meant)'를 결정하는 주석작업에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재구성된 이 본문의 의미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what the text means)'를 추구하기 때문에, 결코 오늘의 독자(해석자)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의 의미(현재의 정황적 의미)를 간과할 수가 없다. 아니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미 해석학에서 논의된 대로 독자(해석자)는 특정한 본문을 대할 때 완전한 백지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본문 앞에 자신의 관심(흥미)과 의문 - 그것이 교리적이든 사회적이든 심리적이든 간에 - 을 가지고 나아간다. 그러므로 본문을 대하는 해석자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social location)와 관심을 완전히 벗어나서 순수하게 본문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아니 해석은 그것을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직하고 정확하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QT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결국 해석자는 언제나 자신의 `선이해(先理解)'에 해당하는 특정한 관심과 질문을 가지고 본문에 접근하여 그것을 본문을 통해 대답을 얻는다. 그러므로 해석이란 본문의 의미와 해석자의 의미(관심/질문)가 만나는 "두 지평의 융합(Thiselton 1980)"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본문의 의미'란 본문이 언급하는 세계(역사적 세계와 그것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본문 자체의 구조(structure)와 작품세계(narrative world)에 대한 이해를 말하며 그리고 `해석자의 의미'란 해석자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대한, 또는 현실세계를 고려한 이해를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을 해석한다고 하였을 때 본문이 가진 오늘의 의미를 추구함이 없이 단순히 과거의 의미만 추구하는 것은 공허하거나 무의미한 탁상공론일 수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은 엄밀한 의미에서 주해라기 보다는 해석에 가깝다.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에서 보는 대로 그는 서신에 나오는 바울의 대적자와 자신의 대적자(공적주의와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로마카톨릭 주교들)를 동일시하여 그의 해석을 구성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점에서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은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 주석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시대에 부응하는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사용할 때 이점을 잘 고려하여 갈라디아 본문이 가진 원래의 의미를 갈라디아서의 원 독자(청중) - 바울의 대적자를 포함하여 - 의 상황 속에서 바르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해석자의 상황과 루터의 상황사이의 유사점과 차이를 잘 주지하며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고전적 주석들을 사용할 때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성경의 특정본문의 해석에 있어 그 동안 이 본문이 교회역사(특히 역사적 해석자들)를 통해서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 지에 대한 수용역사(reception history)에 대한 이해는 이 본문의 해석적 지평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의 주석책들(크리소스톰; 오리겐;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의 주석들)은 해석 당시의 사회적 정황 속에서 특정본문이 어떻게 이해되어왔는 지를 깨닫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지금까지 나온 주석책들을 살펴보면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하였던 해석역사의 발전들을 보게되는데, 특정한 주석책들은 이러한 해석적 방법들 중 하나를 극명하게 적용하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된다. 역사적-문법적인 해석을 다룬 주석책(NICNT나 NICOT에 나온 주석들)이 있고 역사-비평적 입장을 다룬 주석책(ICC주석)이 있고 그리고 최근의 구조적 해석을 가미한 주석책(WBC주석)과 문학적 해석을 다룬 주석책(많은 학자들이 준비중에 있음)과 사회-과학적 해석을 다룬 주석책들(Malina와 Rohbraugh가 쓴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1992: Fortress)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의미의 위치에 대한 다양한 해석적 전망들(세계; 본문; 작품; 저자; 독자)은 우리로 하여금 본문의 의미를 추구할 때 혹은 본문을 해석한다고 할 때 해석자의 필요(세계에 대한 이해; 언어의 구조물로서의 본문에 대한 이해; 작품에 대한 이해; 저자에 대한 이해; 독자에 대한 이해; 등등)에 따라 다양한 주석책들과 그에 따른 연구서들을 선택하여 참고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의미의 위치에 대한) 해석의 다양한 전망들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에 우리가 본문에 대해 가졌던 질문들(old questions)에 대하여 새로운 통찰과 안목을 가지고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대답들을 얻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 본문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새로운 질문들(new questions)을 던짐으로써 그것의 의미를 찾게 도와준다.   3. 설교: `청중의 정황'의 중요성과 담화기법들(telling techniques)의 사용   이제 우리는 주석에서 해석을 지나 설교로 그 논의를 전환하고자 한다. 이처럼 정황에 대한 강조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가 아는 대로 바르트의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이라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점을 잘 입증해 준다. 특히 특정한 청중(회중)에게 전해야 할 설교는 이러한 상황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회중이 살고 있는 세계와 그들의 삶의 자리를 이해함이 없는 설교란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지루한 설교이다. 이 경우 설교자는 철저히 자신이 목표로 하는 청중(회중)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에모리대학교의 설교학자인 크래독의 `최고의 설교자는 목사이다(The best preacher is the pastor)'라는 말은 설교에서 회중의 중요성을 가장 잘 지적하였다고 본다. 오늘 우리가 설교해야 할 청중은 21세기를 바라보는 후기-현대주의의 첨예한 기술문명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의 인간성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과거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러나 그들의 행동과 삶의 양식에 대한 이해는 그들이 살고 있는 문화와 세계 속에서 형성되어 반응하기 때문에 우리의 설교는 우리의 청중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문화적 코드를 이해함이 없이는 설교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최근 교회성장학과 설교학에 있어서 청중에 대한 연구가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설교는 설교가 지향하는 청중과 청중이 살고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강하게 요구된다. 왜냐하면 설교(말씀의 선포)란 하나님에 대한 선포이지만, 그러나 그 방향과 목표는 `청중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고 그것은 결국 `청중을 위한' 설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해석과정과 설교에는 세 가지 종류의 세계가 고려되고 만난다(cf. Tate 1991): 본문 배후에 있는 본문이 언급하는 과거의 역사적 세계(the world behind the text); 본문이 그리고 있는 본문내의 작품세계(the world in the text); 그리고 본문 앞에 있는 독자(청중)의 현실세계(the world in front of the text) 즉 성경을 읽는(듣는) 독자(청중)는 저자가 묘사한 성경의 `작품세계'로 저자(와 설교자)의 인도(서사기법/담화기법 혹은 설교기법)를 따라 그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성경의 역사적 인물들이 살았던 세계를 만난다.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신 세계다. 이제 독자(청중)는 저자(와 설교자)의 안내와 평가를 따라 이 세계를 적절히 이해하면서 이것이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 지를 신앙을 통해 깨닫게 된다. 여기서 신앙은 성경에 묘사된 과거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신앙공동체를 통해서 전달된 과거 이스라엘과 (초대)교회의 구원역사는 지금 이 본문을 읽는(듣는) 독자(청중)에게도 신앙이라고 하는 공통된 매개체를 통해 적절하게 그 의미가 전달된다. 그러나 본문의 작품세계를 통해서 이 역사적 세계와의 만남은 이것을 읽는(듣는) 오늘의 독자(청중)가 단순히 역사에 대한 정보를 얻는 지식적인 만남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현재의 독자(청중)가 이것을 읽는(듣는) 과정에서 신앙으로 반응할 것을 촉구(cf. 요 20:31)하기 때문에 독자(청중)의 현실세계와의 조우와 그것으로 인한 신앙적 `가치전환' 혹은 `가치거래'는 피할 수가 없다. 이 촉구는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성령의 역사(役事)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役事)는 과거의 구원 역사의 세계가 영감받은 저자(또는 설교자)의 탁월한 서사기법 혹은 담화기법(설교기법)을 통하여 독자(청중)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들의 현실 세계와 만나도록 해주며, 이 만남(조우) 가운데 독자(청중)는 두 세계를 왕래하면서 신앙적인 가치전도 혹은 가치거래(삶의 변화)를 갖게 한다. 즉 성경저자(와 설교자)의 서사기법(narrative techniques)과 담화기법(telling techniques)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役事)를 통해서, 독자(청중)는 신앙적 독서(경청)를 추구함으로써 저자(궁극적으로는 하나님)가 원하는 관점을 따라 자신의 현실 세계를 적절히 이해하고 평가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변화를 얻게된다.   결국 이와 같은 적절한 해석과정을 통해 분석되고 작성된 설교는 설교자의 탁월한 설교기법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스토리를 잘 조화하여 조우(遭遇)시켜 사용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설교의 효과를 갖게 된다. Fackre(1983)는 이 세 종류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THE STORY);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들(stories of faith community); 나의 이야기(my story)"로 언급하였는데 이 세 스토리들이 설교에 잘 병합되어 독특한 설교구성(Lowry 1980)이 되어지고 여기에 상상력이 동원된 탁월한 언어사용과 설교기법이 나타날 때 역동적인 설교효과가 발생한다. 특히 상상력이 동원된 언어사용과 설교기법에 대해서는 본 잡지의 서평에서 소개한 워렌 워어스비 목사님의 책(1997:요단출판사)인 상상이 담긴 설교/이미지에 담긴 설교 를 참조하라. 지금까지의 주석(주해)과 해석과 설교에 대한 논의들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   <주석과 해석[학]과 설교[학]의 관계>   1. 주석(exegesis): "본문의 세계" 본문자체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작업으로서 여기에는 본문이 형성된 `사회-문화적 세계'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본문자체의 언어적 특징과 구조와 작품세계를 분석함으로써 저자의 근본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주석은 `본문의 원의미'를 찾는 것을 말한다.   2. 해석학(hermeneutics): "의미의 세계" `의미의 위치'와 그에 따른 해석원리에 대한 과학적 연구로서 여기에는 `본문해석학(textual hermeneutics)'과 함께 `철학적 해석학(philosophical hermeneutics)'이 반드시 고려된다. 왜냐하면 해석에는 언제나 해석자의 선이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해석자의 선이해는 인간의 죄성과 함께 그가 처한 역사, 문화, 성, 피부, 인종, 지역성, 그리고 기질과 성향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철학적 해석학에서 다루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3. 설교학(homiletics): "회중의 세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본문)을 오늘날의 신앙공동체(청중)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로 청중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강조된다.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올바른 해석적 전망이 우리의 설교준비에 얼마나 필요한 것임을 주지하였다. 이미 켁(Keck)이 말한 것처럼 `주의 깊고 진지한 해석'은 성경적 설교를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이고 이러한 `주의 깊고 진지한 해석'은 본문의 의미와 관련된 다양한 요소들(세계; 언어의 구조물로서의 본문; 작품; 저자; 독자)을 주의 깊게 고려하여,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의 정황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적 전망들은 그 동안 우리가 본문에 대해 가졌던 여러 가지 질문들(인종차별; 정부에 대한 태도; 사회참여; 유대인 경멸주의; 인권과 여성의 역할; 등등)에 대하여 새로운 통찰과 안목을 줌으로써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대답들을 얻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 본문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도출되는 새로운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그것에 대한 오늘의 의미를 찾게 해준다. 특히 설교는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적 전망들을 통해 얻어진 성경본문의 해석(의미산출)이 급변하는 세상 가운에 살고 있는 청중(회중)의 상황에 무엇을 말해야 하며 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다룸으로써 성경본문의 의미효과를 극대화한다. 특히 설교에 있어서 `주의깊고 진지한 해석'의 요구는 마치 사진작가가 아름다운 사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애쓰는 암실작업과 같은 요구이고, 요리사가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주방에서 요리책과 함께 씨름하는 일이며, 의사가 더 좋은 치료를 위해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과 견줄 수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영혼구령과 사회변혁을 위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의 삶이 어찌 이러한 삶보다 못할 수 있겠는가? 그 보다 더 훈련된 말씀의 사역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바른 해석적 전망을 가진 설교자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의 제자된 유능한 서기관'이 취할 모습이 아닌가 여겨진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설교자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참고문헌> Abrams, M H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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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03-12-25 10:29:08 read : 3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 덕 휴 목 차 제1장 들어가는 글/ 2 제1절 작품에 대하여/ 2 제2절 저자의 생애와 사상/ 4 제2장 기독교의 본질/ 7 제1절 서문/ 7 1. 제1판의 서문/ 7 2. 제2판의 서문/ 8 제2절 서론/ 10 1. 인간의 본질/ 10 2. 종교의 본질/ 12 (1) 제1부 종교의 진실한 본질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03-12-25 10:29:08 read : 3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 덕 휴 목 차 제1장 들어가는 글/ 2 제1절 작품에 대하여/ 2 제2절 저자의 생애와 사상/ 4 제2장 기독교의 본질/ 7 제1절 서문/ 7 1. 제1판의 서문/ 7 2. 제2판의 서문/ 8 제2절 서론/ 10 1. 인간의 본질/ 10 2. 종교의 본질/ 12 (1) 제1부 종교의 진실한 본질/ 14 1) 본질론/ 14 2) 신 또는 종교의 비밀/ 17 3) 소결/ 22 (2) 제2부 종교의 허위의 본질/ 24 1) 종교의 본질적 입장/ 24 2) 신의 본질/ 26 3) 사변적 신학비판/ 29 4) 모순의 변증법/ 30 5) 결론/ 32 제3장 나가는 글/ 34 제1절 비판/ 34 제2절 평가/ 38 제3절 비판에 대한 반성/ 41 * 참고문헌/ 45 ** 필자와 이 논문에 대하여/ 46 제1장 들어가는 글 제1절 작품에 대하여 본서『기독교의 본질』은 포이에르바하(L.A. Feuerbach, 1804-1872)가 1841년에 출간한 책으로서, 서론(1-2장)과 본문, 즉 제1부(3-19장) 및 제2부(20-28장)로 구성되었다. 서론부 제1장에서는 "인간 일반의 본질"을 서술하고. 제2장은 "종교 일반의 본질"을 도출해 내고 있다. 여기서 그가 종교와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소위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를 시도하는 데, 그 결정적 테제는 다음과 같다. "종교는 무한성의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의 자기 의식, 다시 말해서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존재로서의 자기 의식이며 그것 이외의 어떤 것일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러한 인식론적 가치의 전도를 해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대상이 철저히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신학의 비밀이 인간학이고 신적 본질의 비밀이 인간적인 본질임을 증명했다." 여기서 포이에르바하가 '증명'이라고 한 것은 학문에 있어서 한 가지 주장을 각양각색의 문제에 대하여 일관되게 해석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적용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일관성 때문에 그의 저서가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계속되는 것이다. 서론부의 제1장과 제2장은 사실상 제1부와 제2부의 총론부 라고 할 수 있다. 제1부와 제2부의 관계는 저자 자신이 붙인 제2판의 서문에서 엿볼 수 있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나의 저서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단지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일 뿐, 종교의 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2부로 나누어진다. 그 중 제1부는 요점에 관해서는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2부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그러나 양 부분에서는 동일한 것이 증명되고 있으며 단지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즉 제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 즉 종교의 진리로 인도하며, 제2부는 논박이다. 따라서 제1부는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것의 직접의 증명이며 제2부는 간접의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제2부는 필연적으로 제1부로 환원된다. 제2부는 전혀 독립된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제2부는 단지 제1부에서 말하는 의미와 반대되는 의미의 종교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제1부에서 말하는 의미의 종교가 정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제1부에서는 주로 종교를 취급하고 제2부에서는 신학을 취급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이 책을 칸트(Immanuel Kant, 1729-1804)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구상했으며, 본서의 구성도 칸트의『순수이성비판』과 유사한 서문과 제1부, 제2부 등으로 집필하였다. 1841년 3월 30일 에어랑겐 대학의 사강사 포이에르바하가 바이에른 내무성으로부터 파직통고를 받았을 때, 그를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기독교의 본질』제1판이 인쇄되고 있었다.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제목은 발행인 비간트(Otto Wigant)가 붙인 것이며, 이는 종종 있는 일로서 상업성을 위하여 적당하고 인기 있는 제목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신의 책을 모든 것을 압도하는 칸트의 저작『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2)의 모델을 따르면서 그 대칭물이 되도록 구상했다. 이에 따라 그는 본서의 제목을『순수비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Unvernunft)이라 명명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책을 포이에르바하가 당초 제시했던 제목으로 불러도 좋다. 왜냐하면, 이념 정책적일 뿐만 아니라 순수이성비판과의 형식적 유사성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서론은 칸트의 서문처럼 본론을 두 개의 주요부분으로 구획짓고 있으며,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코페르니쿠스처럼 회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미학과 분석론(순수이성비판의 제1부문)은 본서의 제1부인 "종교의 진실한 본질, 즉 종교의 인간학적 본질"(인간의 본질과 모순되는 종교)에 대응한다. 여기서는 신적인 제 가치의 형성에 작용하는 한편, 인간지성의 유한한 능력도 동시에 서술하고 있다. 선험적 변증론과 방법론(순수이성비판의 제2부문)은 본서의 제2부인 "종교의 허위의 본질"(인간의 본질과 모순되는 종교)에 대응한다. 여기서 교리의 체계는 이미 발전시켰던 방법에 따라 파괴되고 종교적 투사(投射)가 갖는 병적인 지적 성격이 폭로된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종교현상은 그 자체가 비판의 목적은 아니었다. 종교란 단지 그가 새로운 학문을 정초 시키는데 사용되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였다. 제2절 저자의 생애와 사상 포이에르바하(Feuer: 불, Bach: 시냇물)라는 문자적 의미는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대립이다. 전통적으로 그의 가계는 알려진 바대로 유명한 신학자. 법률가. 예술사가. 수학자·화가 그리고 근대 형법학의 아버지이자 그의 부친 안젤름 포이에르바하(Paul Johan Anselm Ritter von Feuerbach, 1775-1833)를 배출한 '불의 강'의 집안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확신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자와 철학자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신들 사변적인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만일 당신들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다시 말하여 진리에 접근하려 한다면 종래의 사변철학과 철학과 편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당신들의 진리와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불의 강'을 통과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불의 강은 현대의 연옥(purgkatoium)이다. 철학자인 동시에 법률가인 아버지 안젤름 포이에르바하(Paul Johann Anselm Ritter von Feuerbach, 1775-1833)는 원래 타당한 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인간에 의해 입법되는 것이며, 법과 도덕은 분리되는 것이라는 소위 법률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재판관이란, 엄격한 결과를 자의나 주관적 가치의식으로 완화시키거나 변경시킬 수 없으며, 오직 법 아래에서만 존재한다는 법치주의자였다. 1808년 작위를 받은 안젤름 포이에르바하는 형법의 형벌기능에 대한 위하설(威 說)을 주장하여 이른바, 심리강제설에 의한 일반예방이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여 상대적 형벌이론을 주장하였으며, 오늘날 형법학의 최고의 이념인 "법률 없으면 형벌도 없다"(nulla poena sine lege)라는 명제 하에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수립하는데 공헌하였다. 당시까지의 형법학계는 소위 칸트와 헤겔(G.W.F. Hegel, 1770-1831)이 주장한 형법의 자기목적성에만 의지하는 절대적 형벌이론에 근거한 응보형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1798년에 트레스터(wi1helmine Tr ster)와 결혼하여 위로 세 아들을 낳고 이어서 1804년 7월 28일 란쯔후르트에서 네 번째로 태어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카톨릭 의식에 따라 바이에른의 시 교구에서 Jodocu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아버지 안젤름과 어머니 트레스터는, 비록 아버지가 정부와 지냈을지라도 다섯 아들을 낳은 후에도 딸 을 셋이나 더 두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스스로 쓴 익명의 사전에서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1804년 7월 28일생. 형제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저술가로서 가장 활동적임.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할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분야에서 즉 훈장도 작위도 얻을 수 없는 분야에서 활동함. 그는 먼저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에어랑겐에서 몇 년간 강의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학문 외에는 단지 경건한 양(羊)의 사육만이 번창하고 있는 대학'이 자신에게 적합한 곳이 아님을 깨닫고 '독자적이고 조용한 생활에서만 성숙될 수 있는 사상을 잉태하고 있음을 느끼고' 안스바하 부근의 시골로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저술활동을 1830년 아직 체계를 갖추지도 않았고 저자의 이름도 없는 저술인 -그러나 위대한 천재성과 풍부한 표현으로 가득찬-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고찰』(Gedanken ber Tod und unsterblichkeit, 1830)로 시작했다. 그는 용암의 흐름과 같은 이 저술에서 젊음의 불꽃을 태우고 자신의 후기의 철학적 발전을 선취하여 풍자시의 형태로 대담하게 표현하고는 이를 더욱 전진시켜 나가는 대신 자신의 주관성을 순수하게 객관적인 요소 안에서 극복하고 또 형성하기 위해 철학사로 후퇴한다. 이렇게 자신의 본질을 억제하고 포기했던 시절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편견이 생기게 되었다. 그 편견이란 그가 이미 타인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재생하고 발전시키는 사상가이기를 그치고 비판자의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헤겔 학파에 귀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의 시기는 『기독교의 본질』이후 종막을 내린다. 왜냐하면 이 저술에서 비판의 과제는 단순히 대상을 분석하여 모순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대상을 하나의 포괄적 원리로부터 발생적으로 산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출의 근거는 '자연이라는 근거 위에서의 인간'이다. 이시기를 우리는 이전의 역사적 시기나 비판적 시기와 구별하여 실증적 또는 생산적 시기라고 명명할 수 있는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의 세 번째 시기라고 한다. 포이에르바하의 의미 다시 말하여 그의 철학적 의미를 전개시킨다는 것은, 이는 이미 그가 애초부터 역사와 경험 일반을 그의 사상의 초석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제2장. 기독교의 본질 제1절 서문 1. 제1판의 서문 저자는 지금까지 여러 저작에서 종교와 기독교, 신학과 사변적인 종교철학에 관하여 자신의 사상을 잠언(箴言)이나 논쟁의 형식으로 다루었다. 이 책의 특징은 한정된 주제에 대한 원리를 포함한다. 그것은 적극종교(positiven Religion)의 철학 또는 계시의 철학을 위한 원리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신화학(神話學)이 가지는 유치할 만큼 공상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철학 또는 사변철학을 위한 원리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기독교 신화학은 이야기로서 전해지는 허황 된 이야기를 그럴싸한 사실로서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일찍이 스콜라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신앙개조(Articulus fidei)를 논리학적, 형이상학적 진리로서 논증한다.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철학을 위해 종교를 희생하며, 기독교적 신화학은 종교를 위해 철학을 희생한다.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종교를 제멋대로 사변적인 장난감으로 삼으며, 기독교적인 신화학은 이성을 공상적인 종교적 유물론의 장난감으로 삼는다. 확실히 철학과 종교가 일반적으로 양자의 種差를 제외하면 동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유하는 존재자와 신앙하는 존재자는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종교의 심상은 동시에 사상과 사실을 표현한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사이의 본질적 구별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책에서 종교의 형상은 사변적인 종교철학으로 고찰되지 않고 사실로서 고찰되지도 않으며 다만, 형상으로 고찰된다. 즉 신학은 기독교적 신화학에서 처럼 신비적 실용학으로서 취급되지 않고 사변적 종교철학에서처럼 본체론으로서 취급되지도 않으며 정신병리학으로으로 취급된다. 이 책의 목적은 정신적 수치료학(Pneumatishe Wasserheilkunde)을 촉진하고 자연적 이성이라는 冷水의 용법과 효용을 가르치며 고대 이오니아인의 단순한 수문학(hydrologie)을 사변적인 종교철학의 영역에서 부흥시키는 것이다. 탈레스(Thales, B.C. 640/24-546경)에 의하면, 물은 모든 사물 및 존재자의 근원이며 신들의 근원이기도 하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에 따르면. 만물이 탄생할 때에 특수한 존재자로서 물을 돕는 정신 또는 신은 명백히 훗날의 이교적인 유신론을 생각해낸 덤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의 놀라운 치유능력이 있는 것이다. 수문학에서의 물은 단지 물질적인 생식수단이었지만, 포이에르바하의 물은 정신적 치료학으로서의 물이라는 것이다. 2. 제2판의 서문 나는 정신적인 자연과학자일뿐이다. 자연과학자는 물질적 수단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정신적인 자연과학자로서 이 책을 썼다. 이 새로운 철학은 지금까지의 철학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원리로서 초인간적, 초자연적, 곧 반인간적, 반 자연적인 종교나 사변에 의해 부패하고 불구가 된 모든 인간에게 반항하는 철학이다. 단지 사유되었을 뿐인 추상적 존재자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자, 가장 실재적인 참된 실재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철학은 실재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철학은 사상을 그 반대물로부터, 곧 물질(Stoff)로부터, 실재(Wesen)로부터, 감각(Sinn)으로부터 산출하며, 자신의 대상을 사유에 의해 규정하기 전에 먼저 감각적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종교의 현존재를 폭로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설사 종교 또는 오히려 신학이 그것을 거부하려고 할지라도 인간을 숭배한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이다. 나만 "신이 인간이며 인간이 신이다"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종교 그 자체도 그렇게 외친다. 인간이 아니라 단지 합리적인 존재일 뿐인 그러한 신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우선 신을 인간으로 만들고 그리고 다음 지금 비로소 인간적으로 형성되고, 느끼고, 생각하는 신을 자신의 숭배와 존경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의 모순에 가득 찬 거짓덩어리와 속임수 덩어리를 제거했을 뿐이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일 뿐, 종교의 인간학적인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2부로 나누어진다. 그중 제1부는 요점에 관해서는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2부는 종교를 종교의 모순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양 부분에서 동일한 것이 증명되고 있으며 단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제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로 인도하고 제2부는 종교를 종교의 모순으로 인도한다. 제1부는 발전이고 제2부는 논박이다. 따라서 나는 제1부에서 신학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학이라는 것, 신학의 본질(신적 존재)의 술어와 인간의 본질(인간 존재)의 술어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것, 따라서 신적인 주어(주체) 또는 본질(존재자)과 인간적인 주어(주체) 또는 본질(존재자) 사이에도 아무 구별이 없이 양자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정신의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꿈속에서도 무 또는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현실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종교에 대해서 행하는 작업은 오직 종교에 눈을 뜨게 하는 것, 안쪽에 향하여 있는 종교의 눈을 바깥쪽으로 돌려주는 것, 바꿔 말하면 표상 또는 상상 속의 대상을 현실 속의 대상으로 전화시키는 것만이 내가 종교에 대해 행하는 작업의 전부이다. 제2절 서론 1. 인간의 본질 종교는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점에 기초한다.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구별짓는 것은 의식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은 자기의 유(Gattung), 자기의 본질성(wesenheit)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본질(존재자, 있는 것)에게 있을 뿐이다. 의식이 개체와 관계하며, 학문에서는 유와 관계한다. 그러한 오직 자신의 유, 자신의 본질성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본질만이 다른 사물 또는 다른 본질을 그들의 본질적인 본성에 따라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종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교한 무한자(Unendlich, infinite)의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 즉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는 본질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실제로 유한한 존재자는 무한한 존재자에 대해 극히 미미한 예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물론이다. 무한자에 관한 의식에서는 주체가 그 자신의 본질의 무한성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의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 의지, 그리고 심성이 그것이다. 완전한 인간에게는 사유하는 힘, 의지하는 힘, 심정의 힘이 필요하다. 사유의 힘은 인식의 빛이고 의지의 힘은 성격의 에너지이며 심정의 힘은 사랑이다. 이성과 사랑과 의지의 힘이란 완전성이고 최고의 힘이며 인간 그 자체의 절대적 본질이며 인간의 현존재의 목적이다. 인간은 인식하고 사랑하고 의욕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참된 존재자는 사유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는 존재자이다. 인간 안에 있고 개개의 인간 위에 있는 신적인 삼위일체란 이성과 사랑과 의지의 통일이다. 이성, 의지, 사랑 그리고 심정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며, 인간은 오직 그것들에 의해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인간에게 혼을 불어넣어 주고 인간을 규정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힘으로서, 그리고 신적이고 절대적인 힘이다. 인간은 그들 힘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인간은 대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대상에서 자기자신을 의식한다. 대상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우리는 대상에 의해서 인간을 의식한다. 대상에서 인간의 본질이 나타난다. 이것은 정신을 물론이고 감성에서도 나타난다. 대상은 인간의 노출된 본질이며 인간의 진실하고 객관적인 자아이다. 의식이란 자기 확증이며 자기긍정이며 자기사랑이며 자기자신의 완전성에 대한 기쁨이다. 의식은 어떤 완전한 존재자를 특색 짓는 표징이다. 의식은 어떤 만족하고 완전한 존재자 속에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한자를 사유한다면,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고 또 확증하는 것이다. 또한 무한자를 느낀다면,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고 또 확증하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이란 자기자신에게 대상적인 이성이며 감정의 대상이란 자기자신에게 대상적인 감정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초월적인 사변이나 종교의 견지에서는 단지 희생적인 것, 주관적인 것 또는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 본질, 대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 감정이 지각하는 신적 본질은 감정의 본질이 자기자신에게 황홀해지고 도취된 것, 즉 환희에 취해 자기 안에서 행복에 잠기는 감정이다. 이것은 감정이 무한자의 기관, 종교의 주관적 본질로 될 때에는 종교의 외적 표현들이 그 객관적인 가치를 잃는다는 것을 보아도 이미 명백해진다. 인간은 확실히 공상의 힘에 의해 자기보다 더 높은 다른 종류의 개인을 표상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자기의 유, 즉 자기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2. 종교의 본질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대상, 즉 감성적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의 관계에 관해 주장한 것은 특히 종교적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적용된다. 감성적 대상에 대한 의식은 자기의식과 구별된다. 그런데 종교적 대상의 경우에는 의식은 자기의식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종교적 대상은 인간 안에 있으며 그것 자체로서 내면적인 대상이다. 때문에 종교적 대상은 인간의 자기의식, 인간의 양심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끊을 라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해 취하는 태도, 또는 인간이 자기의 본질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다. 신적 본질이란 인간적인 본질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인간의 본질이 개개의 인간의 제한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화 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신적 본질이란 인간의 본질이 개인으로부터 구별되어 다른 독자적 본질로서 직관되고 숭배된 것이다. 그 때문에 신적 본질의 모든 규정은 인간 본질의 규정이다. 이것은 신의 술어, 즉 특성 또는 규정에 대한 관계에서는 실제로 주저 없이 인정되지만 주어, 즉 그들 술어의 기체(근본, 본질)에 대한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어를 부인하는 것은 무신앙, 무신론으로 간주되지만, 술어를 부인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신의 술어를 부인하는 방법도 있다. 사람들은 신적 본질의 술어가 유한한 인간적 규정임을 인정한다. 인간은 자기가 진실한 것으로서 표상하는 것을 곧바로 현실적인 것으로서 표상 한다. 인간에게는 현실적인 것만이 진실한 것이며 상상된 것과는 대립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개념, 즉 실존의 개념은 진리의 첫째가는 개념이며 근원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신이란 인간의 본질이 최고의 진리로서 직관된 것이다. 그러나 신 또는 종교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파악하여 최고의 본질로서 직관할 때의 규정성이 각양각색인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하다. 인간이 신을 사유할 때의 이러한 규정성은 인간에게는 진리성이며 동시에 최고의 실존 또는 실존자체이다. 따라서 신이 규정된 본질임과 같은 이유로 신은 실존하는 현실적 본질이다. 왜냐하면 신의 질 또는 규정성은 인간 자신의 본질적인 질 바로 그 자체이지만, 특정한 인간은 자기의 본성, 자기의 실존, 자기의 현실성을 오직 자기의 규정성 안에서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의 술어와 인간의 술어의 동일성을 망각하고 그와 함께 신적 존재자와 인간적 존재자의 동일함을 망각하기 위해 신은 무한한 존재자로서 무한히 풍부하고 다양한 술어들이라는 표상에 구원을 청한다. 그 술어들 가운데서 우리가 현세에서 인식하는 것은 약간 닮았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적인 존재자와 약간 다른 것은 그것 이외의 술어, 즉 피안에서의 일이다. 무한히 풍부한 신의 술어들의 비밀은 다양하고 무한하게 규정될 수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감성적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적인 존재자가 가지는 비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대상화하며 그런 다음에 다시 자기를 이와 같이 대상화되고 주체는 인격으로 전화된 본질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이 종교의 비밀이다. 여기서의 인간은 신의 대상이다. 따라서 믿음이 깊은 인간은 지가의 심성과 행위를 신의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을 신의 목적, 즉 정신에서 대상인 것은 행동에서는 목적이므로 신의 활동을 인간의 구원수단으로 삼은 것에 의해서 인간의 활동의 허무성을 다시 취소한다. 인간이 선해지고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따라서 인간은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을 통해서 오로지 자기자신을 목적으로 한다. 분명히 인간은 신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영원한 도덕적 구원 이외의 어떤 것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 안에서 인간은 단지 인간자신의 활동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나는 종교의 발전과정을 일반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므로 종교의 발전과정은 인간이 점점 신을 거부하고 자기자신을 승인하는 일이 많아지다는 것 속에서 성립한다. 애초에 인간은 만물을 구별 없이 자기 외부에 두었다. 이것은 계시신앙에 나타난다. 이스라엘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직 극히 자연적인 충동도 적극적인 신적 명령으로 생각하였다. 이 예로부터 인간은 자기를 거부하면 할수록 신은 그만큼 저급해지고 또 그만큼 더 보통의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인간의 충동이나 격정을 그것의 특성이나 내용에 따라 구별지었다. 기독교는 오직 선한 격정, 선한 기질, 선한 사상만을 신의 계시, 신의 작용, 즉 신의 심성, 신의 격정, 신의 사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 자신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내면적인 도덕적 깨끗함을 외면적인 육체적인 깨끗함과 구별하지만, 이스라엘의 종교는 양자를 동일시했다.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와는 반대로 비판과 자유의 종교이다. 이스라엘은 외면적인 것조차 자기의 의지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외면적인 것은 자율에 두었다. 즉 기독교는 이스라엘이 자기 외부에, 신 안에 두었던 것을 인간 안에 두었던 것이다. 이 적극주의의 가장 완결된 발로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인에게 기독교도는 교의를 믿지 않는 사람(Esprit fort, 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며 자유사상가이다. 사물은 이와 같이 변한다. 어제의 종교는 오늘은 이미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오늘 무신론으로 인정되는 것이 내일은 종교로 인정된다. (1) 제1부 종교의 진실한 본질, 즉 종교의 인간적인 본질 1) 본질론 종교는 인간이 자기자신과 분열한 것이다. 즉 인간은 종교에서 신을 자기와 대립한 존재자로서 설정한다. 신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인간의 본성은 신이 아니다. 신은 무한자이고 인간은 유한자이다. 신은 영원하고 인간은 일시적이다. 신은 완전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 신과 인간은 양극이다. 신은 단적으로 긍정적인 것이자 모든 실체성의 총체이며, 인간은 단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자 모든 허무성의 총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자신의 감추어진 본질을 대상화한다. 따라서 종교는 신과 인간의 대립·갈등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 갈등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본질과의 갈등이다. 만일 종교의 대상인 신적 본질(존재자)이 실제로 인간의 본질 이외의 본질이었다면 분열이라든가 같등은 일어날 수 없었다. 분열은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하나이어야 하고 또 하나일 수 있는 본질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이 본질은 지성과 이성 또는 오성(Verstant, understanding)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인간의 대극(對極)으로서의 신은 인간적인 본질, 즉 인격적으로 인간적인 본질이 아니라면 오성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이다. 신의 본질은 오성의 자기의식이며 오성이 자기자신의 완전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오성은 심장과는 달리 욕망이나 열정이나 욕구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결함이나 약점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순수한 오성인은 일면적이지만 특징적 규정성에서 오성의 본질을 상징화하고 인격화하는 인간이다. 이러한 순수한 오성인은 감정인이 갖는 고뇌나 열정이나 탐닉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오성은 본원적·원초적인 존재자이다. 오성은 만물을 제1원인인 신으로부터 끌어낸다, 오성은 오직 자기 안에서만 세계의 근거와 목적을 발견한다. 당신이 신 안에서 긍정하고 대상화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오성이다. 신이란 당신의 최고 개념인 오성이며 당신의 최고의 사유능력이다. 오성은 따라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 즉 옛날의 존재론적 신학(Ontotheologie)에서 말하는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인 존재자이다. 또한 오성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자이며 절대적 주체이다. 오성의 통일성은 신의 통일성이다. 그 자체 절대적 통일성으로서의 자기자신(오성자신)을 의식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오성은 무한한 존재자이다. 따라서 오성은 통일성과 조정되며 유한성은 다수성과 함께 조정된다. 마지막으로 오성 또는 이성은 필연적인 존재자이다. 그것은 오직 이성의 실존만이 이성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성도 어떤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무이며, 존재는 비존재와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으로서의 신, 즉 오성의 무한한 본질, 일반적인 본질, 의인화하지 않은 본질이 종교에 대해 가지는 의의는 특수과학의 출발점인 일반적인 근본명제가 특수과학에 대해 가지는 의의 이상의 것은 아니다. 종교의 대상적인 본질이 인간과 다른 본질이라는 것은 그 본질의 본질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를 만족시키기를 바란다. 종교는 인간의 최고의 선이다. 그러나 오성의 본질을 표현할 뿐인 신이 어떻게 종교를 만족시킬 것인가? 신은 종교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종교는 신이 아니다. 오성은 단지 인간에 관해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본질인 자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기독교도는 오직 자기만을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오성은 보편적이고 범신론적인 본질이며 우주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특히 기독교는 전적으로 인신론(anthropotheistisch)적인 본질, 즉 인간의 자기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관적으로 인간적인 존재자의 배타적인 자기긍정이라는 것이다. 오성은 전적으로 율법의 엄격함에 따라 판단한다. 심정은 자신에 순응하며 공평, 관대하며 동정심이 많고 인간적이다. 율법은 인간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며 사랑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사랑은 율법과 심정,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매개한다. 사랑은 신 그 자체이며 사랑 이외에는 어떤 신도 없다. 사랑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고 신은 인간을 만든다. 사랑은 신과 인간의 참된 통일이며 정신과 자연의 참된 통일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신의 눈 속에서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피만이 신을 자비롭게 만들고 신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즉 우리의 가 용서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추상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의 의식을 통해서 신 또는 자기와 화해한다. 신의 사랑의 의식, 즉 신을 그 자체 인간적인 본질로서 직관하는 것은 신의 성육신, 육화 또는 인간화의 비밀이다. 성육신이란, 신의 인간적인 성질이 감정적인 사실로서 드러나는 것이고, 인간화된 신이란 단지 신격화된 인간의 현상에 불과하다. 신이 인간에게로 내려온다는 것은 반드시 인간이 신에게로 올라간다는 것이 선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신성의 제1인격이 성육신 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제2인격이 성육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2인격은 종교의 진실하고 전체적인 제1인격이다. 성육신이 신비적이고 불가해하고 사변적으로 보이는 것은 성육신의 출발점인 이 매개개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학이 사변철학과 어떻게 다른가는 다음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즉 인간학은 신비적인 가상(假像)에 의해 속고있는 특수한 경탄할 만한 비밀로는 보지 않는 것이다. 인간학은 신의 인간화라는 교의들 사랑으로 환원한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더욱이 신은 자기 안에 아들을 가지고 있다. 신은 아버지이다. 인간성의 모든 관계는 신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은 신과 소원하지 않으며 미지의 것도 아니다. 성육신에서 종교는 자기자신에 대해 반성함에 있어서 신학으로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즉 신은 철두철미하게 인간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고백 할 뿐이다. 인간은 종교에서 자기를 신적인 활동의 대상이나 신적인 목적으로서 직관한다. 2) 신 또는 종교의 비밀 인간화된 신, 즉 그리스도의 본질규정의 하나는 열정(Passion, 그리스도의 수난)이다. 사랑은 수난을 통해서 확실해 진다. 그리스도에 관련된 모든 사상과 감정은 수난이라는 개념에 집중한다. 사랑은 수난을 통해서 확실해 진다. 우선 그리스도에 관련되는 모든 사상과 감정은 수난이라는 개념에 집중된다. 신으로서의 신은 인간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그리스도로서의 신은 모든 인간적인 비참함의 총체이다. 고뇌(수난)는 기독교의 최고의 명령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 자체가 수난사이다. 이교도에게는 감성적인 쾌락의 환상이 신들에 대한 예배 안에 혼합되어 있다면 기독교도 당연한 것이지만, 고대의 기독교도에게는 혼이나 심정의 눈물과 한숨이 신에 대한 봉사에 필요한 것이다. 신의 가장 내적인 혼, 즉 기독교에서는 신에 대한 내면적인 본질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예배에서 나타나는 신이 참된 신이지 궤변적인 신학의 신이 인간의 참된 신은 아니다.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이다. 우리가 오늘도 여전히 모든 교회 안에서 마주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초상은 우리에게 결코 구제자를 보여주지 않으며 단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수난자를 보여 줄 뿐이다. 신이 고뇌하는 것은 그러나 실은 신은 심정이다 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심정은 모든 고뇌의 원천이며 총체이다. 고뇌를 가지지 않은 존재자는 심정을 가지지 않은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수난의 신의 비밀은 감정의 비밀이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이 자기자신 안에 반성되고 반영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자신이 마음에 들고 자기자신에게 기쁨을 느끼며 자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은 인간의 거울이다. 인간에 대해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인간에 의해 완전한 것이나 우수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인간에게 신이다. 감정이나 고뇌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는 신은 느끼고 고뇌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에 만족을 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 오성과 의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자 또한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오직 전인을 자기 안에 포괄하는 존재자만이 전인을 만족시킬 수 있다. 인간이 자기의 전체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 삼위일체의 의식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오성의 일반적 본질, 즉 신으로서의 신을 하나의 특수한 본질, 하나의 특수한 본질, 하나의 특수한 능력으로 끌어내린다. 우리는 단지 신학에 의해 삼위일체의 복제, 형상, 비유로서 특색 지어지고 있는 것을 사물 그 자체, 본질, 원형, 원물로서 이해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수수께끼를 푼 셈이다.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구상화하여 알기 쉽게 하고자 사용한 공식적인 형상을 주로 정신(Geist, mens), 오성(Verstant, intellectus), 기억(Ged chtnis, memoria), 의지(Wille, voluntas), 사랑(Liebe, amor 또는 caritas)이었다. 신은 사유하고 사랑한다. 사유된 것, 인식된 것, 사랑 받는 것은 신 자신이다. 자기의식의 대상화는 우리가 삼위일체 안에서 마주치는 최초의 것이다. 신의 자기의식이란 절대적 본질성 또는 본질성으로서의 의식에 관한 의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신 그 자체, 단순한 존재자로서의 신은 단적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고독한 존재자, 즉 절대적 고독과 독립성이다. 사람은 혼자서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것은 오직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랑할 때, 우리는 타자에게 의존한다. 사랑이란 자기와는 다른 존재자를 욕구하기 때문이다. 신적 존재자의 고독 속에 인격성에서는 신과 구별되지만, 본질에서는 신과 일치하는 존재자가 조정(措定)됨으로써 충족된다. 다시 말하여 아버지 신과 구별되는 아들 신이 조정됨으로써 만족된다. 아버지인 신은 나이며, 아들 신은 너이다. 나는 오성이고 너는 사랑이다. 그런데 오성을 동반하는 사랑 및 사랑을 동반하는 오성이 비로소 정신, 즉 성령이며 전인이다. 삼위일체에서의 제3인격은 두 개의 신적 인격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 이상의 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다. 제3인격이란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이며 연대성이 전혀 불합리하게 조정된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분석의 특수한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다만 성령이란 주관적 측면으로 보아서 종교적 심성의 자기 표현, 종교적 감정의 표현, 종교적 영감의 표현이며 종교 안에서의 종교의 인격화, 대상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가족,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사랑의 유대를 보완하기 위해서 제3의 인격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여성적인 인격이 천국에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참으로 안성맞춤이다. 당초 마리아가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놓였던 것은 아버지가 마리아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뜻이 아니었다. 모성적인 원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리아는 오히려 삼위일체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범주에 적합하다. 아들, 즉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아들은 그 자체에서 아버지의 남성적인 본질과 어머니의 여성적인 본질사이에 있는 중간본질이다.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서 가지는 사랑은 남성적인 본질이 여성적인 본질에 대해서 가지는 최초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신의 아들을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과 결부되어 왔다. 신의 어머니에 대한 신앙이 쇠퇴하는 곳에서는 신의 아들과 아버지인 신에 대한 신앙 또한 쇠퇴한다. 아버지가 진리인 것은 오직 어머니가 진리일 때뿐이다. 사랑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여성적이다. 신의 사랑에 대한 신앙은 신적 존재자로서의 여성적 존재자에 대한 신앙이다. 프로테스탄트교는 신의 어머니를 한쪽으로 밀쳐버렸다. 그러나 냉대 받은 여성은 그 대신 프로테스탄트교에 가혹하게 보복했다. 프로테스탄트교가 신의 어머니를 향해 삼위일체 전체에 향해졌다. 일단 신의 어머니를 오성을 위해 제물로 바치는 사람은 어느새 다시 신의 아들의 신비를 의인적(인격적) 표현으로서의 제물로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적 존재자가 배제된다면 확실히 의인적 표현이 은폐된다. 삼위일체의 신은 카톨릭교의 신이다. 삼위일체의 신은 내용이 풍부한 신이다. 이 때문에 신은 실제생활의 내용이 사상(捨象)되는 곳에서 요구된다. 생활이 공허할수록 신은 그만큼 더 풍부해지고 더 구체적이 된다. 신은 결핍의 감정으로부터 발생한다. 인간이 상실한 것이야말로 신이다. 따라서 공허함이나 고독함과 같은 허전한 감정은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존재자의 사회나 교제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종교 속에서 차지하는 본질적인 의의는 항상 제2인격의 본질 안에 집중되어 있다.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 동질, 동일한 본질)와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 유질, 비슷한 본질)에 관한 격렬한 싸움은 비록 글자 한자의 차이에 불과 하였지만 공허한 싸움은 아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제2인격과 신의 동격성이었다. 교의학적 사변은 신의 형상인 신의 아들의 내적인 생성을 완전히 간과하면서 아들은 바로 신성의 형이상학적 관념으로부터 일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인격의 또 하나의 규정이며 형상의 본질과 관련된 것은 제2인격은 신의 말(Wort, Logos)이라는 규정이다. 말은 추상적인 형상, 상상 속의 사물이다. 또는 모든 사물이 항상 최후에는 사유력의 대상인 한, 말은 상상된 사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물의 말, 이름을 알면 사물 그 자체를 아는 것처럼 상상한다. 말은 구제하는 힘 행복하게 하는 힘, 해방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신의 말이란 종교의 내부에서 인간에게 대상이 되는 신성이며 말의 참된 본질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말의 참된 본질을 인간의 말과는 구별된 특수한 본질로서 표상 한다. 자기를 계시하고 발현하고 표현하는 신인 제2인격은 신 안에 있는 세계창조의 원리이다. 세계가 신은 아니다(기독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싹은 이미 도래하고 있었다). 세계는 신과는 별개의 것이며 신의 대립물이다. 이 표현은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은 아들을 확실히 아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세계는 적어도 신과 구별된다. 세계 창조의 과정은 심리학적(정신논리학적, psychologisch) 과정의 신비적인 표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의식과 자기의식의 통일화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신은 자기를 사유한다. 따라서 신은 자기를 사유함으로써 또한 자신과는 다른 것을 사유한다. 따라서 자기를 의식한다. 신이란 자기의식이 대상이나 본질(존재자)로서 조정(措定)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사유함으로써 또한 자신과는 다른 것을 사유한다. 나는 너의 의식의 매개에 의해 세계의 의식을 획득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인간의 신이다. 인간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연에 신세지고 있으며 타인이 없으면 물리적, 정신적인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추상적인 논리학적 범주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계창조의 원리는, 다른 것은 오직 차이성의 원리로부터 나올 수 있을 뿐이며 단순한 본질 자체로부터는 나올 수 없다. 기독교적 철학자나 신학자가 애써 무로부터의 창조를 변호하려 하지만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근본명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적인 오성을 모든 사물을 자체 안에 총괄하는 정신적 물질로서 현실적인 물질의 근거로 삼았다. 사물(Ding)은 존재(existiren)하기 전에도 존재(sein)하고 있었다. 그 사물은 감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세계는 오직 세계 그 자체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세계와 창조주로서의 신 사이의 구별은 단지 형식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본질적인 구별은 아니다. 따라서 신의 본질이란 세계의 본질이 추상화되고 분리되어 사유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신의 본질이란 세계의 본질이 현실화되고 구체화되고 감성적으로 직관된 것이다. 신 안에 있는 자연의 교리는 자연주의를 통해서 유신론, 특히 최고의 존재자를 인격적 존재자로서 고찰하는 유신론을 확립하고자 한다. 인격적 유신론은 신을 모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인적적 존재자로 생각한다. 신이란 신의 존재이다. 신이란 신 자신의 본질이다. 이 점에서 유신론은 종교의 본질과 일치한다. 인격성은 신의 추상적인 신이다. 그러나 신이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신의 개념 안에 들어 있다. 인간은 신의 인격성 안에서 자기자신의 인격성의 초자연성, 불사성, 독립성, 비제한성을 찬미한다. 인격신이 하나의 진리성, 유일한 진리성인 곳에서는 자연은 아무런 실재적인 의의를 가지지 않으며, 실재적인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본래의 무로부터의 창조가 단 하나의 설명 근거이다. 왜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자연은 무라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자연이 절대적 인격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의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오직 섭리나 기적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섭리는 인간에 관계한다. 섭리는 인간을 위해 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능한 법칙의 효력을 폐기한다. 자연의 섭리에 경탄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종교적 자연주의일지라도 자연주의에 속한다. 종교적 섭리는 오직 기적 안에서만 계시된다. 섭리는 인간의 특권이다. 섭리는 다른 자연적인 존재자나 사물과는 다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섭리는 인간을 세계의 연관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오직 특수한 섭리만이 종교적 의미에서의 섭리이다. 섭리에 대한 신앙은 자기자신의 가치에 대한 신앙이다. 섭리가 믿어지는 곳에서는 신에 대한 신앙은 섭리에 대한 신앙에 의존한다. 섭리가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신이 신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종교적 섭리에 대한 신앙은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신앙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자연과 구분한다. 자연과 인간의 구별이 인간의 신이다. 범신론과 인격신론의 구별은 다음의 질문으로 해소된다. 즉 인간의 본질은 세계의 밖에 있는 본질인가 아니면 세계의 안에 있는 본질인가, 초자연적인 본질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본질인가 하는 질문이다. 범신론은 인간을 자연과 동일시한다. 인격신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독립시키며, 인간을 부분에서 전체로 바꾸어 독립된 절대적 존재자로 만든다. 이것이 범신론과 인격신론의 구별이다. 따라서 세계의 창조자란 다음과 같은 인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세계는 창조된 것이며 의지의 산물, 다시 말하여 자기를 가지지 않는 실존, 위력이 없는 실존, 허무적인 실존이라는 증명 또는 의식에 의해서 자기자신의 중요성, 진리성, 무한성의 확실성을 자기에게 주는 인간이다. 따라서 세계는 무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무는 세계 자신의 무이다. 이상에서 말한 창조의 비밀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오직 다음의 것을 명심하라. 즉 창조에서는 결코 흙, 풀, 짐승, 물 -이것들에게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창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자나 영혼의 창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은 그 자체가 인격으로서의 인격성의 개념 또는 이념이며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 틀어박혀 있는 주관성이며 절대적 존재 및 본질로서 조정된 무욕구의 자기 충족태이며, 너를 가지지 않는 나이다. 3) 소결 그리스도는 주관성의 전능이며 자연의 온갖 속박과 법칙으로부터 구출된 심정이며 세계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기 혼자에만 집중된 심정이며, 심정의 모든 소망의 심정이며, 공상의 승천이며, 심정의 부활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구별이 필요하다. 인간은 기독교에서 자기를 오직 자기자신에게로 집중시켰고 자기를 세계 전체의 연관으로부터 떼어놓았으며 자기를 자기자신에게 만족하는 전체로 만들고 세계의 밖에 있고 또 세계를 초월하는 절대적 본질로 만들었다. 인간은 더 이상 자기를 세계에 속하는 존재자로 간주하지 않고 세계와의 연관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이교도는 단지 인간을 우주와 연관시켜 고찰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교도는 인간을 오직 타인과 연관시켜, 공동체와 결합해서 고찰했다. 이교도는 적어도 철학자로서는 개체(인간 또는 개인)를 유와 엄밀히 구별했고 부분으로서의 개체를 인류라는 전체와 구별했으며 그리고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켰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유를 방치하고 개체만을 안중에, 심중에 새겨두었다. 기독교는 이교에 대한 직접의 대립물이다. 기독교는 이교의 대립물로서 이해될 때에만 진실로 이해되고 독단적인 사변적 억지에 의해 불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의 대립물이 허위인 한, 기독교는 진실하지만 기독교의 대립물이 진실인 한 기독교가 허위이다. 기독교는 개체를 위해 유를 희생시켰다. 이교는 개체를 유라는 전체와 구별해서 오로지 부분으로서 이해했으며 그에 반해 기독교는 개체를 유와 직접적이고 무차별한 통일성 안에서 이해하였다. 기독교에서 개체는 직접적인 섭리의 대상이다. 즉 신적 존재자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다. 이교도는 개인의 섭리를 유, 법칙 그리고 세계질서를 매개로 해서 믿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별적 존재자를 일반적 존재자와 동일시했다. 신은 하나의 개체로서 유라는 개념이다. 신은 유라는 개념 또는 본질이다. 더구나 신으로서의 "유의 본질"은 유로서 일반적 본질로서, 모든 완전성의 총체로서, 실제의 제한이든 가공의 제한이든 개별적인 본질이다. "신의 본질과 실존은 동일하다"는 것은 신은 하나의 실존, 개별적 본질이며 동시에 유개념(Gattungsbegriff)또는 유의 본질(Gattungswesen)말고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의 유와 개체성의 이러한 직접적인 통일성을 명확하게 상징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실제의 신인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원상이며 인류의 실존하는 개념이며 신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순수한 천상의 인간, 유적 인간이며 시조 아담(Adam Kadmon)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서의 시조 아담은 하나의 인격으로서 직관된다. 그리스도, 즉 종교적인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간이 아니라 역사의 끝이다. 인간의 유로서의 개념 및 생활의 의미는 기독교가 지배함과 동시에 소멸해 버렸다. 거기서는 또한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며 신은 그 자체 이 목표가 달성된 것이며 인류의 이 최고 목적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신은 각 개인에게 따로따로 나타난다. 오직 신만이 기독교가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도는 반드시 타인이나 인류나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들의 자기 편집에 가까울 정도의 편협한 신앙적 배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즉 기독교도에게는 타인에 대한 내적 욕구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이것으로써 수행되었다. 우리는 신이 세계의 밖에 가지고 있는 자기의 본질, 신의 초자연적인 본질, 신의 초인간적인 본질을 인간적 본질의 성분으로 환원시켰다. 인간적 본질의 성분은 신의 본질의 근본성분이다. 우리는 결론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인간은 종교의 시작이자 중간이며 끝이다. (2) 제2부 종교의 허위의 본질, 즉 종교의 신학적 본질 1) 종교의 본질적 입장 종교의 본질적 입장은 실천적(praktisch)인 입장이다. 즉 여기서는 주관적인 입장이다. 종교의 목적은 인간의 복지, 구원, 행복이며,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인간의 관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신이란, 영원의 구원이 실현된 것 또는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실현하는 무제한적인 위력이다. 기독교만큼 강하게 인간의 구원을 강조한 종교도 없다. 기독교는 특히 이점에서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스스로를 신의 교리라고 부르지 않고 구원의 교리라고 부른다. 신은 본질적으로 종교의 대상이지 철학의 대상이 아니며, 심정의 대상이지 이성의 대상이 아니며 심정의 필요의 대상이지 정신의 자유의 대상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신은 이론적 입장의 본질이 아니라 실천척 입장의 본질을 표현하는 대상이며 존재자 이다. 신과 인간사이에 세계라는 표상, 즉 제2원인이라는 표상이 끼어 드는 곳에는 일반적으로 종교는 폐기된다. 종교는 신과 인간사이에 있는 사물의 현존재에 관한 예감을 단순히 감성적 자연적인 직관으로부터 받을 뿐이다. 그리고 종교는 일반적으로 혼자서는 제2원인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제2원인의 존재는 종교에서 보면 오히려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게2원인은 인간을 신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의 본질로서 특색 지은 것을, 종교 자신이 확증하는 종교의 본질적인 작용은 기도이다. 기도는 전능하다. 경건한 사람이 기도할 때 간절히 바라는 것을 신은 충족시켜준다. 그는 자연의 위력을 다름 아닌 기도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기도할 때 경건한 사람은 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의 초자연적인 수단을 택한다. 신은 그에게서 동떨어진 제1원인이 아니라 모든 자연적인 결과의 가장 가까운 동력인 이다. 기도의 직접 작용은 기적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본질적으로 종교의 사고방식 안에 포함되어 있다. 종교는 모든 것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종교의 본질과 무관하며 단지 경험적인 또는 감성적인 사고방식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그러나 종교가 시작되는 곳에서는 기적이 시작된다. 참된 기도는 하나 하나가 기적이며 기적을 일으키는 힘의 작용이다. 종교적인 기적은 자연적인 기적과 절대로 다르다. 다만 사람들은 이성을 귀머거리로 만들거나 자연과학이라는 가상아래 종교적인 기적을 합리성과 현실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기적과 자연적인 기적을 항상 혼동하는 것이다. 2) 신의 본질 종교란 인간이 자기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에 종교의 진실성과 도덕적 치유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자신의 본질로 관계하는 것 아니라 자기와는 대립된 다른 존재자로서의 자기의 본질에 대해서 관계한다. 여기에 종교의 비진실성, 종교의 한계, 이성이나 도덕과 종교의 모순이 있으며 또한 여기에 종교적 광신의 유해한 원천이 있으며 나아가 피비린내 나는 인간 희생의 최상의 형이상학적 원리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사라는 비극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잔학과 소름끼치는 장면의 시원적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하여 종교가 신학이 된다면, 인간과 신의 통일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종교의 근원에는 신과 인간사이의 질적인 구별 또는 본질적인 구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대 유대교에서 여호와는 실존 측면에서 보아 인간적인 개체와 구별된 본질에 불과했다. 그러나 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호와는 온전히 인간과 똑같았다. 후기 유대교에서 비로소 여호와는 인간으로부터 매우 날카롭게 분리되었으며 신인동감동정설(Anthropopathismus), 인간의 감정을 신에게 이입시키는 것에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비유 안으로 도피했다. 기독교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문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직 나중처럼 그렇게 결정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특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는 아직도 하늘과 땅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불명확한 존재였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천사 중에 첫 번째 천사였으며, 최초로 창조되기는 했지만 창조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은 천사나 인간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신과 동일시하고 그리스도를 신의 외아들로 만들고, 그리스도가 인간이나 천사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에게 피조물이 아닌 영원한 존재자라는 독점권을 주었던 것이다. 종교에 대한 반성, 즉 신학은 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과 다른 본질로 만들고 그것을 인간의 외부로 끌어낸다. 이러한 방식 중에서 개념상 최초의 것은 정식의 증명 대상이 되는 신의 실존이다. 신의 현존재에 관한 증명은 내적인 것을 이적인 것으로 전화시켜 인간에게서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신은 실존을 통해서 사물 그 자체가 된다. 내가 신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나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의 하나가 무신론이다. 신의 실존은 경험적인 또는 감성적인 실존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주지하듯이 칸트는 신의 현존재에 관한 증명을 비판하면서 신의 현존재는 이성으로부터 증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칸트는 헤겔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칸트는 적절하다. 즉 개념에서 실존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성은 자신의 객체를 자신의 감관의 대상으로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경험론과 유물론이 성행한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의 경험적 실존이라는 개념이 완전하게 발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의 실존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실존, 자연의 실존과 구별된 하나의 특수한 실존에 대한 신앙이다. 신의 실존에는 계시의 개념이 연관되어 있다. 신의 실존의 자기증명, 신이 실존한다는 것의 진실한 증언은 계시이다. 신의 현존재에 관한 단순히 주관적 증명은 이성의 증명이며, 신의 현존재에 관한 객관적인 증명은 신의 계시이다. 신은 인간에게 이야기한다. 계시는 신의 말이다. 계시에 대한 신앙은 종교적 심성이 신앙하는 것, 소망하는 것, 표상 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에 관해서 종교적 심성이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확실성이다. 또한 계시에 대한 신앙은 종교적 의식에 특징적인 환상을 가장 분명하게 폭로한다. 그런데 신은 초인간적 존재자이다. 신은 오직 신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 진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계시한 것 이외에는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이 계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신이 인간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오는 것은, 단지 신 안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계시와 이른바 인간적 이성 또는 인간성 사이에는 환상적인 구별 이외의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신의 계시의 내용 또한 인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확증된다. 기독교적인 궤변의 최상의 원리, 중심점은 신의 개념이다. 신은 인간적 본질(존재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인간적인 다른 본질의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격적, 개체적 본질이어야 한다. 또는 신은 인격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본질로서 신이어야 한다.
Q 연구의 최근 동향/ 2002-11-11
Q 연구의 최근 동향 1."Q"란 표지(標識) 19세기 초부터 유럽과 신약학계(新約學界)에서 중심적인 연구주제로서 그 자리를 굳혀 온 "Q" 연구는, 오늘날 "Q" 본문이 확정되기까지 많은 신약학자(新約學者)들 사이에 관심을 불러 일으켜 왔다.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연구는 "Q" 연구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Q"를 통하지 않고서는 공관복음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다. "Q"는 독일의 단어 Quelle에서 온 것으로, "자료"란 뜻이 있으며, 신약학자들이 편의상 그 첫 철자를 따서 일반적으로 "Q"라고 부른다. "Q"가 독일어 단어에서 왔지만, 그러나 누가 언제 어떤 책에서 그 용어를 사용하였는지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바이써(C. H. Weisse)가 Q에 관한 연구를 학문적으로 시작한 때가 1838년으로써 그때가 "Q"란 표지의 시작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수는 있지만, 현재 "Q"란 표지가 어디서 기원하였는지 하는 문제는 학자들마다 주장이 너무나도 다르다. 바이쓰(Bernhard Weiss)는 1889년에 "Q"란 표지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Q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자신의 책 Lehrbuch der Einleitung in das Neue Testament(Berlin: Verlag von Wilhelm Hertz), 486-500에서 "최초의 자료"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Q의 실체를 확고하게 제시하였다. 베른러(Paul Wernle)는 그의 책 Die synoptische Frage, 1899를 통해서, 공관복음서 연구에 있어서 "Q"의 불가피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Q"를 마태복음의 자료적 측면에서 "QMt", 누가복음의 자료적 측면에서 "QLc", 그리고 유대적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서 "QJ"라고 구분 지었고, 그들의 배후에 "Q1", "Q2", "Q3"가 서 있다고 시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Q"란 표지는 사용하였지만, 그가 주장한 "Q1", "Q2", "Q3"는 클로펜보그(John S. Kloppenborg)의 개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디벨리우스(M. Dibelius,1953)는 우리에게, "Q"가 독일에서 1898년에서 1901년 사이에 이미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디벨리우스는 그 예로써 베른러의 책 Die synoptische Frage, 1899을 거론한다. 슐츠(S. Schulz, 1972)도 의심 없이 "베른러가 이들 자료들을 처음으로 Q라고 명명하였다"고 평가한다. 슈미탈스(W. Schmithals, 1985)도 베른러에게 우선권을 주고 있다. 네이륑크(F. Neirynck, 1978)도 이 문제를 간결하나마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그에 의하면, "Q"란 표지를 제일 먼저 사용한 학자는 바이쓰(J. Weiss)로서 그의 논문 "Die Verteidigung Jesus den Vorwurf des Buendnisses mit Beelzebul(1890)"란 논문을 예로 들고 있다. 1987년에 합본(合本)으로 재(再) 인쇄된 벨하우젠의 도서들 Einleitung in die ersten drei Evangelien, 1911; Das Evangelium Mattaei, 1914; Das Evangelium Marci, 1909; Das Evangelium Lucae, 1904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가 "Q"란 표지에 별표(*)를 붙여서 "Q*"로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그 자신은 "Q"란 표지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다. 단지 벨하우젠은 "Q"가 공관복음서의 배후에서 비(非) 마가자료를 나타내면서도 마태와 누가가 공통으로 사용한 자료의 의미로써 사용하였다고 간주함으로써, 오늘날 Q 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Q"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실버맨(Lou H. Silberman, 1979)은 좀더 소급하여 벨하우젠의 Geschichte Israels, Erster Band(1878)와 Jahrbuch fu¨r Deutsche Theologie 21(1876) 등을 들어서 또 다시 벨하우젠이 "Q"란 표지의 최초 사용자란 제안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하여, 네이륑크(1979)는 다시 간략한 논문을 발표하여, 벨하우젠이 1876년에 사용한 "Q"란 표지는 구약성서에 있는 "제4의 책"을 시사하면서 사용한 라틴어 "Quattuor"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벨하우젠이 "Q"란 표지를 처음으로 사용한 학자가 아니라고 논박하였다. 이상의 논의들을 종합해 보면, 바이써(C. H. Weisse), 베른러(Paul Wernle), 벨하우젠(J. Wellhausen) 혹은 바이쓰(J. Weiss)가 거명된다. 그러면, 누가 정말 "Q"란 표지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을까? 비록 "Q"란 표지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약 한세기 반 전부터 "Q"의 분명한 실재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일치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2. Q란 무엇인가? 공관복음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를 지칭하는 많은 용어들 이를테면 독일어로 Logienquelle의 철자를 줄여서 "L"로, Redenquelle의 철자를 줄여서 "R"로, Sprachquelle의 철자를 줄여서 "S" 등 다양한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영어식으로 표현할 때에도 "Sayings Source", "Sayings Material" 등 다양한데, 왜 단순히 독일어 Quelle의 철자를 단 한 자(字)로 줄여서 Q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Q의 연구역사에 있어서 Q란 표지(標識)가 사용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예수 말씀"에 대한 초기 기독교 시대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비록 Q란 표지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도마복음서」의 서문(incipit) 즉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또 디두모란 유다 곧 도마가 기록하였던 비밀스런 말씀들이 있다"와 「파피루스 옥시린쿠스」(P.Oxy 645:1)의 서언 즉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또 유다 곧 도마가 기록하였던 비밀스런 말씀들이 있다"에 이미 예수 말씀에 관한 높은 관심이 표명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 말씀을 기억하는 일련의 관심들이 계속적으로 초기 기독교의 여러 문서들 속에서 다량으로 그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들면, 사도행전 11:16, 20:35과 클레멘트전서 13:1, 46:7 그리고 야고보의 외경 2:7 등을 그 중요한 문건(文件)으로 간주 할 수 있다. 또한 서기 100년경에 파피아스의 작품 즉 Λογ?ων Κυριακ?ν 'Εξηγ?σεω?(「주의 말씀들에 대한 해석」)에 이미 예수 말씀들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초기 교회의 역사에서부터 현존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 유세비우스의 증언은 아주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신약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는 "Q"란 용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 중시되어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Q에 대한 개념이 분명히 정립되어야 한다. 지난 150년간 학계의 논쟁 속에 있었던 공관복음서 연구의 방향은 Q를 가설의 영역에서 다루어왔다.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은 1931년에 양식비평적 접근 방법에 입각하여 그 이전에 있었던 공관복음서에 관한 논의들을 총망라하면서 과거에 Q 연구가 마태와 누가의 재구성(再構成)에 의존해 왔지만, 그러나 예수 말씀에 대한 끝없는 관심이 이미 마가와 Q로 확정되기 이전의 전승자료(傳承資料)에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해 줌으로써 Q 연구의 폭을 문서(文書) 이전의 전승단계에로 까지 확장시켰다. 이것은 현대적 Q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은 중대한 변화라고 평가 받을 수 있다. 그 후에 맨슨(T. W. Manson)은 1937년에 Q 문서(The Q document)의 원시적 의미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맨슨은 엄격한 의미에서 오늘날 IQP(International Q Project)가 성취한 것과 같이 Q 본문에 대한 현대적 의미의 복원(reconstruction)을 시도(試圖)한 것은 아니였다. 단지 마태와 누가에 보존되어 있는 Q를 드러내기 위하여 단순히 그 평행구절들을 제안하는 정도의 복원(restoration)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Q 본문을 위한 복원 작업은, 그 후에 폴락(A. Polag, 1979)에 의해 보다 진일보(進一步)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1979년에 보다 최신의 Q 자료에 관한 목록(目錄)들을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공관복음서 연구의 결과들을 바탕으로 눈부신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이상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들을 종합해 볼 때에, 1970년대 말까지 줄기차게 Q의 연구상황은 가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라고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1983년에 클레어몬트 대학원(The Claremont Graduate School)의 로빈슨 교수(James M. Robinson)를 중심으로 범세계적 Q 학자들로 구성된 IQP의 출범 후에 Q 본문의 복원을 위한 활발한 연구 작업은 단순히 Q를 가설의 영역에서 파악하였던 기존의 개념을 뛰어 넘어서게 하였다. 클로펜보그(John S. Kloppenborg, 1987)는 IQP의 연구를 토대로 The Formation of Q란 책을 통하여 Q를 하나의 독립된 문서로 간주하고서, "단층 분석법(stratigraphic analysis)"을 통해서 Q의 편집층(즉 Q1, Q2, Q3)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 후에 Q는 더 이상 가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이미 하나의 독립적인 문서로서 마태와 누가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문서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1994년 시카고에서 열렸던 SBL(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의 연례모임에서, 클레어몬트 대학원의 부설기관인 IAC(Institute for Antiquity and Christianity)의 IQP에 의해서 주도되었던 Q 본문을 위한 복원작업이 마무리 되었다. 이로써 Q 본문은 더 이상 가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독립적인 문서로서 세상에 그 얼굴을 내밀게 되었다. Q는 더 이상 마태나 누가의 공통 자료를 뜻하는 문서 자료로서 가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러면 이제 Q는 무엇인가? Q는 예수 말씀 복음서(福音書)이다. 예수 말씀 복음서로서 Q는 현존하는 모든 복음서들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오래된 최초의 복음서이다. 로빈슨(1964)에 의하면, Q는 순수히 예수의 말씀들을 보존하고 있는 점에서 도마 복음서와 함께 "지혜자들의 말씀들(Λ?γοι Σοφ?ν)"이란 특수한 형태의 가퉁(Gattung)에 속한다. 로빈슨은 Q와 도마 복음서 이외에도 "지혜자들의 말씀들(Λ?γοι Σοφ?ν)"이란 가퉁에 속하는 문서들로서 디다케(The Didache), 마가복음 4장, 랍비 문서들인 m'Abot, 고대 애굽 및 초기 유대 지혜 문서들, 그리고 콥틱어(Coptic)로 된 문헌들 등 다수 그 예들로서 제시하고 있다. 3. 구전이냐, 문서냐? Q가 문서(文書)로 기록되어 전해졌는가 하는 문제는 초기 Q 연구의 논쟁거리였다. 이 논쟁에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학자들, 즉 바이쓰(B. Weiss), 베른러(Paul Wernle), 바이쓰(J. Weiss), 맨슨(T. W. Manson) 등 여러 학자들이 관련이 되어 있다. 이들은 Q가 구전(口傳) 보다는 문서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학자들이다. 그러나, 예레미아스(J. Jerernias,1930)와 브레게(H. T. Wrege, 1968)는 Q 자료 자체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Q가 문서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구전(口傳) 전승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클로펜보그(1987)는 과거에 있었던 Q의 구전전승에 관한 주장들을 일축(一蹴)하면서, "언어일치"를 Q의 문서전승에 관한 강력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클로펜보그에 의하면 마태와 누가 사이의 "언어일치"는 그 정도(程度)에 있어서 결코 미약하지 않다. 과거에 알렌(W. C. Allen, 1899-1900)과 라이트(A. Wright, 1899-1900)는 마태와 누가 사이의 어떤 언어적 일치점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고 일찌기 결론을 지었지만, 클로펜보그는 Q에 나타난 구절들 중에서 "Q 3:7-9; 4:1-13; 7:24-28, 31-35; 9:57-60; 10:21-22, 23-24; 11:31-32; 13:34-35" 등을 마태와 누가 사이의 언어일치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귀절들로 제시하고 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클로펜보그가 예를 든것 외에도 많은 귀절들 중에서 한 가지를 더 들어보면, Q 11:24은 누가와 마태 사이의 언어일치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 마태 12:43-44a ?ταν δ? τ? ?κ?θαρτον πνε?μα ?ξ?λθ? ?π? το? ?νθρ?που, δι?ρχεται δι' ?ν?δρων τ?πων ζητο?ν ?ν?παυσιν: κα? ο?κ ε?ρ?σκει: τ?τε λ?γει? ε?? τ?ν ο?κ?ν μου ?πιστρ?ψω ?θεν ?ξ?λθον 누가 11:24 ?ταν τ? ?κ?θαρτον πνε?μα ?ξ?λθ? ?π? το? ?νθρ?που, δι?ρχεται δι' ?ν?δρων τ?πων ζητο?ν ?ν?παυσιν: κα? μ? ε?ρ?σκον: [τ?τε] λ?γει ε?? τ?ν ο?κ?ν μου ?πιστρ?ψω ?θεν ?ξ?λθον Q 11:24 ?ταν τ? ?κ?θαρτον πνε?μα ?ξ?λθ? ?π? το? ?νθρ?που, δι?ρχεται δι' ?ν?δρων τ?πων ζητο?ν ?ν?παυσιν κα? ο?κ ε?ρ?σκει: [τ?τε] λ?γει. ε?? τ?ν ο?κ?ν μου ?πιστρ?ψω ?θεν ?ξ?λθον 이상의 헬라어 본문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언어 일치에 관한 논의들을 중시할 때, Q의 구전 전승에 관한 가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Q 본문의 복원 작업을 통해서 Q 문서를 확실히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Q가 구전 전승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Q 본문의 복원 작업은 시작조차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4. Q의 언어 Q가 처음에 아람어로 기록되었다가 후에 헬라어로 번역되고 회람(回覽)되었다는 가설이 일찌기 서기 100년경에 파피아스(Papias)에 의해 제기된 후에, 근래에 이르기까지 공관복음서 연구에 통용되어 왔다. 그 이유는 쉴라이에르마허(1832) 이후, 파피아스에 의해 제기된 가설 즉, 아람어 Q 가설이 신약 학계에서 정식으로 통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이 가설은 하르낙(A. von Harnack, 1907)과 맨슨(T. W. Manson, 1937)에 의해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85년에 슈미탈스(W. Schmithals)도 Q가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많은 학자들을 거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Q가 처음에 아람어로 기록되었고 후에 헬라어로 번역되었을 것이란 가설은 고대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아왔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는 블랙(Matthew Black, 1954)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블랙은 아람어 가설에 대하여 보다 광범위한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누가 6:23과 마태 5:12의 비교에서, 블랙은 누가의 "그들의 조상들(ο? πατ?ρε? α?τ?ν)"과 마태의 "너희들 전에 [있었던] 자들(το?? πρ? ?μ?ν)"은 비슷한 아람어 ????[??]??????????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즉 ο? πατ?ρε? α?τ?ν은 주어로서 사용된 아람어 ??????????????에서 온 것이며, το?? πρ? ?μ?ν은 "예언자들"과 동격으로 사용된 아람어 ??????????????에서 왔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는 두 귀절의 복원을 시도하면서, 누가 귀절의 복원을 위해서 누가 6:22a과 23b를 묶었고, 마태 귀절의 복원을 위해서 마태 5:10a, 12b, 그리고 11a을 묶어 주었다. 그러나 클로펜보그(1987)에 의하면, 특히 Q 본문의 복원에 있어서 블랙의 이와 같은 제안은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의 ο? πατ?ρε? α?τ?ν은 "전형적인 누가적 표현"이기 때문에 Q 본문의 복원에서 제외되는 기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Q 본문의 복원을 위해서 마태의 귀절과 누가의 귀절 사이에서 어느 것이 아람어 Q인지 선택을 해야하는 문제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블랙은 마태와 누가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서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현재 Q 학계에서는, Q가 처음에 아람어로 기록되었고 후에 헬라어로 번역되었을 것이란 가설 보다는 오히려 처음부터 헬라어로서 Q가 편찬(編纂)되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 위에서 Q 본문이 헬라어로 복원되었다. 클로펜보그에 의하면, Q의 많은 부분들이 이미 "셈족어로 화(化)한 헬라어 문체(a Semitizing Greek style)"를 나타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Q의 기원이 아람어를 말하는 사회적 환경속에서 가능하였지만, 그렇다고해서 처음부터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는 문학적 증거를 확신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Q가 아람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제안을 중시해야 한다. 여기서 헬라어 Q에 대한 제안은 이미 블랙(1954) 자신에게도 인식되어 있었던 중심 주제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다. 블랙은 Q에 나타난 원래 헬라적 표현 방식을 중시하여,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non-translation Greek)"가 곧 Q의 번역 사실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간주하면서, "Q 전승의 형성에 관계된 최종 언어가 헬라어의 문화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고 결론 짓는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 즉 원래 헬라어에 있는 고유한 표현 방식이다. 클로펜보그는 Q에 나타난 전형적인 헬라어 특징들을 검토한 후에, "Q는 원래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결론 짓는다. 다시말해서, Q는 셈족어를 말하는 인근 지역, 즉 70인역 성서(LXX)가 셈족어 화(化)한 헬라어의 영향권 하에서 기록되었다. 예를들면, Q에 나타난 헬라어의 관용적 표현들(μ?ν… δ?, γ?ρ, ο?ν 등)은 결코 아람어에서 올 수 없는 것들이다. Q 11:20, 48과 12:42에 사용된 ?ρα는 오히려 70인역(LXX) 성서의 사용을 뒷받침하는 것이지, 아람어 Q에서 온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특별히 Q에 빈번히 나타나고 있는 속격 독립구문들은 그 어순에 있어서, 본래 헬라어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Q 4:3, 9의 "ε? υ??? ε? το? θεο?"와 Q 7:25의 "ο? ?ν ?ματισμ? ?νδ?ξ? κα? τρυφ? ?π?ρχοντε?"는 결코 아람어에서 올 수 없는 전형적인 헬라적 관용 표현들이다. 과거에 많은 학자들이, 예수와 그의 첫 추종자들인 제자들이 모국어로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이 헬라어를 말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Q가 빈번하게 "언어적 일치(word-for-word agreements)"를 보이고 있는 점을 중시할 때, 이는 결코 아람어의 번역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Q에 나타나 있는 구약성서 구절들에 대한 인용귀나 표현들도 헬라어로된 70인역 성서에 의존해 있다. 이같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Q는 아람어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원래 헬라어로 기록된 사실을 알 수 있다. 5. 결론 Q의 정의와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공관복음서 문제에 비견(比肩)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하다. 그러나, 이미 IQP에 의해서 예수 말씀 복음서 Q가 복원이 된 작금(昨今)의 상황에서, 더이상 Q의 정의와 기원은 문제시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앞으로 Q는 예수 말씀 복음서와 동의어로 사용될 것이고, 예수가 하신 말씀들 가운데 복원과정을 통하여 현존하게 된 가장 오래된 문서이자 최초의 복음서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Q는 더이상 가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인 문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된 것이다. 참고로 Q 연구에 보다 더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1996년부터 향후 8년동안 유럽의 PEETERS 출판사로부터 발간되는 Documenta Q : Reconstructions of Q Through Two Centuries of Gospel Research Excerpted, Sorted and Evaluated 를 구입하시기를 바란다. 소기천(미국 The Claremont Graduate School, Ph.D. 과정)
Renewal Theology 요약/ 2002-08-05
Renewal Theology 요약 제1장 중생 Ⅰ. 중생이란? 구원을 얻게 된 자에게 일어나는 내적인 변화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본질적으로 의미한다. 성령을 통해서 영적인 중생이 가능하다. 중생에 대하여 묘사한 세 구절은 요 3:7, 벧전 1:23, 딛 3:5 이다. Ⅱ. 중요성 중생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영적으로 죽은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유일한 희망은 영적인 중생뿐이다. Ⅲ. 수단 중생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러한 이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가능하다. A. 성령의 역할 중생은 일차적으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거듭남은 영적인 태어남으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 예수님조차도 성령으로 태어나셨다(마 1:20). 중생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또한 생각해야 할 것은 "물", "씻음"과 같은 말이다. 요 3:5에서 물은 "물세례"를 가리킨다. "물"은 깨끗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생된자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물은 성령에 앞서 있고 성령의 활동을 예비하는 것으로 물세례는 중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중생이나 갱신은 성령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B. 심기운 말씀 중생은 성령의 직접접인 사역이나 심기운 말씀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그 말씀은 (벧전 1:23, 1:25, 약 4:3-9, 1:18). 그러므로 성령이 중생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심기운 말씀, 복음의 말씀, 즉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Ⅳ. 발생 중생은 인간의 마음과 지성과 의지의 모든 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사랑하라"는 큰 계명을 이루려면 생활의 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A. 조명 죄악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사람의 마음은 내적 조명에 의해서만 구원의 복음을 깨달을 수 있다. 조명의 빛이 비추어진 실례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행 2:23, 2:36, 26:17-18). 하나님의 의로움을 훨씬 더 초월하여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명령이 절망적인 자신을 깨달을 때, 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깨달을 때 성령의 힘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눈이 열려야만 사람들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B. 뉘우침 중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뉘우침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죄악에 대한 깊은 뉘우침을 뜻한다. 뉘우침에 대한 성경에 언급은 (행 2:37) 여기서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죄를 깊이 깨닫는 것만이 아니라 심오한 내적 변화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일들은 성령이 말씀을 적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깊은 뉘우침이 일어날 때 가능해진다. C. 회개 중생으로 나아가는 절정의 순간은 회개하는 순간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종종 언급하셨다(대하 6:36-39, 대하 7:14). 그러나 완벽하게 돌이킨 경우는 없었다. 반면에 복음의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야 삶을 변화시키는 참된 회개가 가능케 되었다.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쳤고 예수께서 계속해서 회개할 것을 외치셨다 하더라도 순수하고도 전적인 회개가 이루어진 것은 예수께서 죽으셨다 부활하신 이후였다. 회개는 전 인격이 전적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생에 있어서 정점의 순간을 이루는 것이다. 옛 생활에서 새로운 생활로의 180도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과거와는 철저하게 간격을 두는 것과 그리스도가 구세주와 주가 되시는 영광스러운 개 세계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회심이라 할 수 있다. 회개한다는 말 그 자체가 회심의 의미를 담고 있다. 행 15:3에서 회심이란 조명과 뉘우침에 뒤이어 중생에 이르는 정점의 순간이 일어나는 회개의 행위뿐만 아니라 구원 전체를 총칭해서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회심은 구원과 중생 모두를 나타낼 수도 있다. 회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회개가 잘 표현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해주고, 의자가 수반되어야 하므로 행동이 요구된다(롬 10:9).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5:31, 11:18). 회개란 인간의 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행 2:38, 고전 6:19, 고후 13:8). Ⅴ. 결과 : 새로운 피조물 A. 새로운 존재 1. 변화된 마음 중생은 일차적으로 사람의 존재의 중심 되는 부분 즉, 마음이나 영에서 먼저 일어난다. 마음을 깨끗케 하라는 말씀은 (겔 36:26, 마 15:19, 딛 3:5, 행 15:9) 중생의 한 놀라운 측면이다. 또한 마음의 변화는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짐을 의미한다(렘 31:33, 히 8:10). 그리고 마음의 변화는 마음이 하나되는 역사가 있다(겔 11:19, 32:39, 시 86:11). 진실로 중생의 기적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마음, 즉 하나의 단일한 마음을 얻게 되고 우리의 모든 존재를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새로워진 생각 중생은 또한 생각의 문제라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중생은 생각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엡 4:22-23, 롬 1:21).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렘 331:34, 히 8:11). 그들은 마음이 새로워지고 진실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관점에서 삶의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옛 자아가 물러가고 마음이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생각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게 됨으로 모든 것이 새롭게 되고 달라지게 된 것이다. 3. 자유롭게 된 의지 중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지는 죄악의 속박에서 자유함을 얻게 된다(딛 3:4-5, 고전 6:9-10). 이러한 자유는 사람을 속박하는 모든 것(어두움의 세력을 포함)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중생한 사람은 결국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제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지를 근본적으로 본받게 되고, 순종하는 이지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쁨에 찬 의지이기도 하다. B. 새로운 성품 1. 거룩함 새로운 성품은 먼저 거룩함과 의로움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말한다. 중생한 사람은 그 내적 깊은 곳에서 의로움과 거룩함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의로움이 지배하는 삶이요, 근본적으로 의로움과 거룩함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열에 사로잡히게 된다. 의를 행함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의 성품이다(요 1서 2:29). 2. 사랑 새로운 성품을 특징 짓는 것은 또한 사랑이다.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포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신다"(고후 5:14)라고 말씀하였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1서 4:19)고 말씀하였다. 따라서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의 이웃을 전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3. 진실함 새 성품을 특징 짓는 것은 진실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기 때문에(약 1:18) 거짓과 속임수는 이전 날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에게 새로운 사실은 그의 성품 안에 진실함이 있다는 것이다. C. 새로운 생활 결국 중생을 통하여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이제 영적인 삶에서 세 가지의 생활이 새롭게 된다.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된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다(롬 6:11).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인간 존재의 목적이 결국 완성되어짐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다시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새로운 생활이 진정한 행복임을 깨닫게 된다. 참된 행복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는 풍성한 삶이 있다(요 10:10). 풍성하다는 것은 행복을 가능케 해 주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한 예수 안에는 심오하고도 영속적인 기쁨이 있다(요 15:11, 눅 2:10).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주님의 기쁨을 알게 되며 이것이 바로 참된 행복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가 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1서 5:4). 그리스도가 승리하셨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승리를 나누는 것이 참된 행복이다. 끝으로, 새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거듭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궁극적인 행복이다. 이러한 삶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그 궁극적인 영광이 있다. 제3장 칭 의 Ⅰ. 배경 칭의의 교리는 의롭지 못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신다. 이에 대하여 죄악된 성품 때문에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의까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순수하신 현존 앞에서는 불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서 볼 때 사람은 실로 절망적이다. 사람편에서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로움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Ⅱ. 의미 칭의의 통상적인 의미는 의롭다고 말하거나 선포하는 것이다. 「칭의」라는 뚜렷한 특징은 선언적인 측면에 있다. 의롭게 혹은 정의롭게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롭게 된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다고 선포된 사람이다. Ⅲ. 양상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심에는 두 가지 혹은 이중의 양상이 있다. A. 죄를 인정치 아니함 죄를 인정치 아니한다는 것은 죄를 산정하지 않는 것 또는 죄를 계산하지 않는 것으로 불릴 수도 있다. 이는 죄가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책잡지 아니하신다는 의미다. 죄를 인정치 아니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 그 한가운데 있다. 죄를 인정치 않는다는 것은 또한 죄를 사해준다는 의미이다(시 130:3-4, 사43:25, 미 7:18-19). 완전한 죄사함은 복음의 핵심이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옮기심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전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옮기시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의는 나 자신의 혹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의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는 당신의 아들의 의로움으로 옷 입혀진 우리를 바라보신다. 우리 각자는 예수안에서 완전함을 입는다. 그러므로 칭의란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로와졌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Ⅳ. 근거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 사역이다(롬 3:23-25). 칭의는 값진 구속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칭의의 교리에 대하여(롬 3:23-24) 살펴보면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기초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러한 구속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은 속죄로써 일어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에 있다. Ⅴ. 수단 - 믿음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언적인 의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그 의가 근거한다는 것에 관하여 언급된 모든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 효력이 발생된다. 칭의의 수단은 믿음인 것이다. 롬 3:25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배경으로 하는 칭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엡 2:8에서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든가 구원의 원천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은 구원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수단이요 방법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창세기를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고 했다. 바울이 의로 여기신 바 된 것이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했다. 따라서 믿음은 "신뢰하며 믿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을 얻기 위해 그 구원을 이루신 분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신뢰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신뢰이다. 이 신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대한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감사의 응답이다. 이 신뢰하는 믿음이 우리의 칭의에 대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칭의의 수단이 된다. Ⅵ. 행위의 지위 우리의 행위는 죄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어떤 공헌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주된 요점이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롬 3:20). 율법의 행위, 즉 모든 행위는 의롭다함을 얻는데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한다. 믿음과 행위에 대하여 살펴보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었지만 믿음 단독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이란 즉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고 했다. 아주 적합한 말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관하여 바울은 행위란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행위란 우리를 구원하는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구원을 입증해 주는 가치를 지닌다. 실로 구원 즉 다름 아닌 칭의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바로 선한 열매요 선행이다. 선행이야말로 진실하고도 살아있는 믿음의 열매인 것이다. Ⅶ. 칭의의 결과 칭의의 일차적인 결과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칭의로 말미암아 새로운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가 기쁘게도 생겨난 것이다. A. 자유 칭의의 두드러진 결과 가운데 하나가 자유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 자유는 세속적인 모든 제도로부터의 자유이다. 가장 큰 구원은 간단히 말해서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결국 칭의에는 걱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칭의를 올바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범하는 어떠한 범죄든 간에 이미 용서받았다고 하는 걱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자유를 얻은 것이다. B. 평화 칭의가 가져오는 또 하나의 결과는 평화이다. 이 평화는 세가지가 있다.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를 보면,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고(롬 5:9) 하나님의 대적자였으나(롬 5:10)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과 불화 관계에 있지 않으며 더 이상 당신의 진노 아래에 있지 않으며 절망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것이다. 다음에 이웃과의 평화를 보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가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서로 용서해 주고 용납하도록 요구받는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강이다. 마지막으로 내 자신 속의 평화로 요 14:27에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는 내적 평화를 말한다. 이 평화는 걱정으로부터의 자유 그 이상이다. 이러한 평화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생겨나는 평화이다. C. 상속 칭의의 마지막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다. 갈 3:26, 29에 분명히 영원한 상속에 대한 약속이 있다. 갈 4:7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상속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풍부한 상속물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상속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롬 8:17)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속은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다(고전 3:21-23).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딛 3:5,7). 이 장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이며 그 절정에 이른 결과로서 우리가 영생을 바라보는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4장 성화(sanctification) Ⅰ. 의미 성화를 시킨다는 것은 거룩하게 하는 것이나, 거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화란 신성화하거나 거룩하게 하는 행동 그리고 성화되거나 거룩하게 된 상황 또는 상태를 말한다. 거룩함이란 ①"분리" 혹은 "따로 떨어져 있음"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속했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인 것이다. ②순결함과 깨끗함을 의미한다. 깨끗하게 해야할 것은 육과 영이며 이는 거룩함 혹은 성화를 온전히 이룸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도덕적으로 온전함을 의미한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는 악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길과 행위, 즉 의, 사랑, 진리에 있어서 완전하심을 의미하는 말이다. 모든 방면에서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Ⅱ. 발생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인 것이다. 1. 시작 성화 혹은 거룩함이란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즉,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에서 기초적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성화란 단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멀리하고 정결케함으로 인하여 이루어 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하는 것은 그저 죄와 떨어져 있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 정화와 청결을 도모하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즉 성화에는 분리와 깨끗함의 두요소가 있다. 성화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아야 하며, 이 성화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일로 말미암아 실제로 성취된 실제이다. 따라서 성화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그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받아드려 지는 것이다. 온전케 된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온전히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생겨난 것이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성화란 그리스도께 속한 모두에게 주어진 실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부터 성화된 것이다. 2. 지속 성화란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것이다. 성화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존재에 있어서 처음부터 체험하는 실체인 것만 아니라 계속되어 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신자들은 비록 성화되었다 해도 그들의 삶속에 죄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즉 옛 생활의 죄악된 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정화와 청결케함은 계속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성화란 점진적인 변화이다. 이는 거룩함으로 행하는 운동이 아니라(왜냐하면 신자는 이미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함 안에서 커가는 것을 의미하며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 변화는 우리가 영광의 주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그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도 영광에서 영광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3. 목표 결국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이다. 즉, 전적인 거룩함이다. 이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완성되어 질 것이다. 순결함과 온전함과 완전함과 거룩함은, 그 어법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목표인 것이다. 우리는 기도로써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성서의 전반적인 경향은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화에 도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 이유로서 ①우리의 삶을 통하여 죄가 계속 살아있어 온전함으로 계속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증거하는 성구가 많이 있다.(빌3:12,14-15, 히5:14,12:3-13, 요일3:2-3, 창6:9, 욥1:1, 겔14:14,20, 눅1:6, 엡4:13-14, 고전14:20, 골1:28 등) ②우리가 죽을 때나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건 간에, 이생의 끝날에는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생에서는 정결케함이 계속되는 반면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게 되는 것은 당신께서 최후로 강림하실 때 이루어진다. ③우리의 완전함을 향한 목표와 완전함의 성취를 서로 구분해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았으며, 이것은 점진적인 성화를 의미한다. Ⅲ. 범위 (SCOPE) 성화란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전인을 갱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1. 갱신(Renewal) 성화의 전 영역을 반영하는데 "갱신"이란 말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갱신이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등과 같은 성구에서 보듯 성화의 시작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중생이란 새로운 탄생을 가리키며, 갱신(새롭게 함)이란 그리스도인이 생활을 시작할 때 주어진 성화를 가리킨다. 새롭게 된다는 것은 새 삶을 가리키며 의와 거륵함의 새 품성을 말한다. 또한 계속적인 성화를 의미하며 계속적인 진행의 의미를 내포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요구되는 계속적인 새로워짐이 또는 계속적인 회복은 성도를 더욱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이다. 2. 온전한 사람(The Whole Person) 온전한 사람에 관한 핵심적인 성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의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특별히 "온전히"라는 말과 그리고 "영"과 "혼"과 "몸"이라는 말에 대해 고찰해 나갈 것이다. 1) 영(The Spirit) 사람의 영은 인간 본질의 가장 깊은 차원이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특히 인간 존재의 중심이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과 직접적으로 만나시는 인간 자신의 영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 있는 의로움을 인하여 인간의 영은 다시 살아있는 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영이 다시 살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성령은 우리의 영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한다.(롬8:16) "영"과 "마음"은 서로 바꾸어 사용될 수 있는 용어들이다. 영과 마음의 거룩은 서로 병행한다. 로마서 2장 15절에서 양심은 마음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양심은 특별히 마음의 최고의 도덕을 반영하는 것으로 "양심의 가책"과 "마음의 고통"은 서로 바꾸어 표현될 수있다. 이 두 표현에 대한 가장 인접한 표현은 청결한 마음과 청결한 양심이라는 성경적 관심 속에서 더욱 나타나 있다. "영" "마음" "양심" 이 세 가지 성서적 용어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 있는 성품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구원 안에는 영의 소생, 마음의 변화, 양심의 정화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근본적으로 이루어졌다해도 여기에는 더 나아가 성화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2) 혼(The Soul) 혼은 이를 통해 영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인간의 내적인 생명이라고 말할 수있다. 인간은 지적, 감정적, 의지적인 행위의 폭넓은 영역으로 증거되는 자아, 또는 의식하는 살아 있는 생령이다. 따라서 지성, 감정, 의지는 활동중인 혼의 제 국면들이다. 죄의 침투가 있자 인간의 혼은 어두워졌고 인간의 이같은 모든 활동적인 영역 속에서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구원 받음으로 인하여 인간의 지성은 다시 하나님의 일들을 성찰할 수 있고, 감정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기뻐하며, 의지는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하여 행하도록 활동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혼은 계속 정결함과 강건함을 필요로 한다. (1) 마음 성화는 마음의 계속적인 새로움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즉 이미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마음도 진실로 계속적인 새로워짐과 더 나아가서 변화를 필요로 한다. 마음은 악한 생각들, 부정한 생각들, 세상적인 계획들로 지배될 수 있다. 지성은 영적인 관심사들로부터 멀어지고 육신에 속한 일에 휩쓸려 내려갈 수 있다. 지성은 그리스도의 본을 좆아 겸손함을 추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관하여 바울은 빌립보 교회 신자들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고 한 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종의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겸손하여 죽기까지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성도는 필연적으로 이와 같은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향한 성도의 생각의 변화와 생각의 재구성이 요구된다. (2) 감정들(정서, 소욕, 정욕) 성화는 또한 내적인 감동들과 소욕을 처리함으로 이루어 가게 된다. "육체의 소욕"이 자리하고 있는 영역이 성화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이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성도들을 끊임 없이 유혹하지만 성도는 거기에 빠져서는 안된다. 즉 이는 거룩한 가운데 날마다 성장하는 성도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감정과 욕구의 영역에는 성화되어야 할 많은 부분들이 있다. 거룩한 온전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소욕과 정욕을 깊이 있게 처리해야 한다. (3) 의지 성화는 또한 의지와 관련이 있다. 구원받기 전의 의지는 죄에 매어 있었다. 사람은 늘 하나님께로부터 죄악으로 돌아서서 죄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된 의지로 인해 자유의 새 길이 마련되었다. 그러함에도 거기에는 항상 우리를 죄의 습관에로 되돌아 가도록 끌어 당기는 세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이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되어지게 하소서"라고 간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몸(The Body) 마지막으로 성도의 몸은 성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 이전에 몸은 실제로 죄에 바쳐졌다. 그러나 우리의 옛 본성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말미암아 죄지은 상태는 멸망되었다. 몸의 죄가 발견되는 곳마다 그 죄를 씻고 정화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으심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다. 죄가 생겨나면 우리 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다시 영화롭게 하기 위해 "몸의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또한 성도의 몸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이므로 성적인 부도덕은 진실로 거룩한 영이신 성령을 거스리는 가증한 죄인 것이다. 모든 성적인 부도덕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망령되게 하는 죄이다. 오늘날 이에 대한 심각성은 첫째로, 성에 대한 관습적 기준이 퇴락해 가고 있는 문화 속에서 정욕에 대한 끊임 없는 유혹이다. 둘째로, 우리의 사회는 더욱더 쾌락 추구의 사회로 변해 가고 있기 때문에 외적인 부도덕한 형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가 하는 점, 즉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우리 몸은 성생활과 먹고 마시는 생활을 포함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형상(The Like of God)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 위한 성화의 목적은 하나님 형상으로 새로워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성화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형상으로의 변화이다. 이는 또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과 함께 시작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이라는 목표를 향해 계속 성장되어 가는 것이다.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Ⅳ. 방법(METHOD) 1. 하나님의 사역(The Work of God) 성화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즉 하나님 안에 성화의 능력이 있다. 성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의롭다 함을 얻은 인간이 그 후에 성화하도록 요구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게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성화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화의 대행자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집단적으로는 교회)에 대한 성화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마지막으로 성화의 원동력은 성령이다. 성화를 위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성령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준비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활동은 ①성령은 그리스도의 몽을 이루는 성도들의 공동체 내에 거하신다. 믿음의 공동체는 멸망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때문이다. ②성령은 또한 각 성도들의 몸 안에 거하신다. 성화의 사역을 깊이 있게 수행하시는 이는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거룩하신 영으로 성도의 삶의 어두운 면을 끊임 없이 조명하시며 그리고 인간성의 모든 국면(영,혼,육)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려 애쓰신다. 성령은 성결케 하시는 영이시다.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점차로 이루시는 것이 성령의 주요 직임이다. 2. 사람의 과업(The Humon Task) 성화는 또한 사람의 과업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에 우리의 개입이 없이는 역사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행하시되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의미이다. 인간적인 온전함과 거룩함의 좆음이 사람의 과업인 것이다. 사람의 과업에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부정적 측면이란 사람이 끊임 없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고, 긍정적인 측면이란 의에 대한 확고 부동한 삶이다. 1) 죄에 대하여 죽음(Dying to Sin) 이 말은 첫째, 죄에 대한 거부로 이해할 수 있다. 딛2:11-12에서 "경건치 않은 것"이란 성도의 삶속에서 하나님께 반대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이 세상 정욕"이란 하나님의 일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 세상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욕망을 말한다. 이러한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는 포기되어야 한다. 마치 금욕으로 어떠한 덕을 쌓으려는 것과 같은 자신과 자기의 인격의 포기를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자신안에서 계속되는 죄에서 거부, 즉 죄많은 자아의 거부를 의미한다. 성령은 죄많은 자아와 대립하여 거하시기 때문에 성도편에서 행하는 죄에 대한 모든 거부의 행동은 성령에 의해 강하게 뒷바침될 것이다. 죄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욕심의 제어로 이해할 수 있는데, ①성도들은 악한 몸의 행실들을 제어하는 심각한 일을 행하도록 권고받았다는 것, ②이 일은 성도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여져야한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악한 몸의 행실을 제어해야할 자는 성도 자신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은 육신에 반대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계속해서 죄를 거부하는데 힘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늘에 속한 관점에서 자신의 죄를 더 확실하게 지각하여 이를 더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는 자신 안에 구체적으로 죄로 알고 보고 있는 것(죄라고 이름지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죽음에 처해야 한다. 죄를 죽이는 또 하나의 심층적 방법은 죄를 벗어 버리는 것이다. 즉 그것은 죄를 벗어버리기 위해서 그것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는 곧 분과 악의와 훼방 같은 죄에 사로잡혔던 성도가 그 죄를 던져버리는 그의 의지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성도가 죄를 죽이는 일에 있어 한가지 성령의 심층적 역할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①그것은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반복해서 죄를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가 성령의 빛으로 가까이 나오면 나올수록 이전에는 거의 알 수 없었던 자신의 죄들이 더 많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이 성도들의 생활이 죄에 의해 눌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근본적이고도 기쁜 사실은 죄가 성도들의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성도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②성도는 죄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있는 성도의 관점에서 보아 죄들은 진실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의 새 생명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③때때로 성도가 죄에 대한 죽음을 통하여 어떤 죄들은 더 이상 성도에게 존재하지 않게 되는 기쁨의 실현이 있다. ④주님의 임재를 계속 확신할 수 있는 안락함이 있다. 마침내 죄와의 모든 투쟁이 끝났을 때 주님은 영광 중에 우리의 성화를 완성하실 것이다. 2) 의로운 생활(Living for Righteousness)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과업의 다른 측면은 의로운 생활이다. 이말은 성도의 생활은 근본적으로 의에 대한 강한 열망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룩함 가운데 자라가는 성도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어야 하며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우선 순위는 의로움이어야 한다. 사람은 어떻게 의에 대하여 살 수 있는가?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의 예로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만약 성도가 거룩함 가운데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①성도는 성경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이 그의 일상적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②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읽어나가는 일에는 말씀대로 실천하는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다. (2)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께 끊임없이 관심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성도는 자신의 죄를 점차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그를 적극적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따르는 것은 분명히 예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일이므로 예수에 대한 헌신은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최우선되어야 한다. 실제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를 바라 보는 일은 날마다 예수를 증거하는 성경 말씀에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가 폭넓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바라보고 진실로 그리스도의 본을 좆으려 할 때 성도의 전 인격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갈 것이다. 이것이 거룩함안에서 자라가는 방법이다. 가장 높은 것을 추구하는 일은 또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곳으로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성화는 정결한 마음을 갖는 생활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다. 즉 성화는 겸손과 사랑과 자기 희생의 생활이다. 성화는 옷입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은 그리스도께 우리의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는 강한 힘과 비젼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거하다"는 말은 특히 성도가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도 안에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3) 성령으로 행하는 일 의로운 생활은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다. 이는 ① 자유함 가운데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성령 안에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새 생활에는 무엇보다도 참된 거룩함이 있다. 성도가 의를 추구하기를 열망할 때 이는 단순히 성도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의를 이루도록 그에게 능력을 공급하시는 성령의 문제이다. ②성도는 성령으로 행하므로 율법을 성취할 수 있다. 이제 율법은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마음판에 기록되었으므로 성도는 그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은혜는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다. 율법은 성도가 지니고 있는 죄지을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필요한 억제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성도는 성령의 자유함 가운데 행하고 이로 인해 성도는 처음으로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그는 여기서 새로운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것은 성화가 계속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도가 성령으로 행하므로 그는 더욱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율법과 자유, 이 두가지를 연합시키는 실체는 사랑이다. 사랑 가운데 행한 최고의 모범은 그리스도셨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하여 기꺼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다. 이 사랑은 율법의 어떠한 요구도 훨씬 능가한 사랑이었고 값없이 전적으로 당신을 완전히 내어주신 사랑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와 동일한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하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율법이 값없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사랑하는 성도는 진실로 성령으로 행하는 자이다. 제6장 성령(THE HOLY SPIRIT) Ⅰ. 명칭 1. 성령 성령 즉, 거룩한 영(The Holy Spirit)이란 단어를 역순으로 생각해 보자. 1) 영(Spirit) "영"이란 단어는 ①촉감할 수 없고, 무형이어서 비물질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영은 혼과 육을 통해서 활동하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실재를 나타낸다. 영은 사물처럼 위치하거나 인지되거나 무게가 있거나 절개되지 않는다. 그것은 비물질적이다. ②역시 "움직임의 자유함"을 나타낸다. 영은 물질적인 제한이 없기 때문에 규정된 행동양식을 따르지 않는다. 성령안에는 자발성과 자유함이 있다. ③영은 "에너지"와 "기력"과 "역동적인 움직임"을 나타낸다. 2) 거룩한(Holy) 성령의 명칭에 있는 "거룩한"이란 단어는 신성함을 강조한다. 거룩하다는 것은 ①통속적이고 평범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거룩한 것은 성스럽고 신성한 것이다. ②거룩함은 또한 전적으로 정결하고 의로운 것을 함의한다. ③거룩함은 존엄과 영광의 특징을 강하게 나타낸다. 3) 정관사(The) 정관사 "the"는 성령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아주 간명하게 말한다. 많은 영들이 있지만, 오직 "한 성령"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성화된 영을 가지고 있는데 언젠가는 완전히 거룩해진 영(곧 거룩한 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성령"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2. 성령의 여러 명칭들 1) 신약성경 많은 곳에서 성령과 영은 서로 바뀌어 동의어로써 사용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은 "성령"과 연합하여 사용되고 있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구분되어 지는 실체이기는 하나 분리되어 질 수는 없는 것이 틀림없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다. 그러나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 당신의 실재와 동일하시다. 2) 구약성경 구약에서는 영, 하나님의 영, 나의 영, 너의 영 등의 이 표현들은 성령과 하나님의 사이에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말해준다. 그러나 구약에서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주의 신"이다. Ⅱ. 성령의 칭호와 상징 1. 성령의 칭호 1) 진리의 성령(The Spirit df Truth) "진리의 성령"은 ①세상이 "받을 수 없는" 것(육에 속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을 나타낸다. ②일반적이거나 전체적인 진리를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관련된 진리를 언급하시는 것이다. ③성령은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한 진리에 대해 증거할 것이다. 2) 성결의 영(The Sprit of Holiness) 서신서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호칭은 ①성결의 성령 :바울은 예수께서"성결의 영으로는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쓰고 있다.(롬1:4) 그러므로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이다. "성결의 영"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가장 심오한 실재였다. 이는 성결케 하는 영인 동시에 부활의 영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 앞에서 순결하게 살아가도록 성화시키는 영이다. 3) 생명의 성령(The Sprit of Life) 성령은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 더 이상 죄나 사망이나 율법의 속박이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위하여 생명과 자유를 가져 오셨다. 4) 양자의 영(The Sprit of Adoption)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표현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절) 여기서는 두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①양자 결연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이고, ②이 양자 결연에 수반되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양자의 영"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가정 안으로 우리를 입양하는 것을 보증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성령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아빠"와 같은 단어가 전해 주는 그런 인격적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5) 은혜의 성령(The Sprit of God) "은혜의 성령"은 구원의 사역에 자비롭게 참여해 오신 분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과 새 생명을 가져오시기 위해 행하신 모든 것들을 쓸모 있게 하신다.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로운 일이다. 6) 영광의 영(The Sprit of Glory) 영광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 위에 특별히 머무신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영광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위에 머물러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된다. 7) 영원하신 성령(The Eternal Sprit) 그리스도의 희생은 일시적인 사건 훨씬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가져 오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역이었다. 2. 성령의 상징(Symbols) 성령은 형체가 없고 만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징들(형상들, 묘사들, 모양들)은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더 깊은 통찰력을 준다. 1) 바람(Wind) 히브리어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는 이 두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바람 혹은 생기(숨)은 움직이는 힘과 신성한 에너지의 일종으로써 하나님의 성령을 묘사하는 언어의 생생한 모습이다. 2) 불(Fire) 성령에 의한 세례는 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불은 악을 소멸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3) 물(Water) 예수께서 주시고 영생하도록 솟아 나는 "생수"는 그것이 흘러 나올 떄의 성령의 활동이다. 4) 비둘기(Dove) 사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내려 오셨다. 비둘기가 상징하는 바의 온전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비들기는 흔히 온유하고 순결하 것을 나타낸다. 같은 방식으로 예수 사역의 초창기에 비둘기에 대한 묘사는 구속 사역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으심을 나타낸다. 5) 인치심(Seal) 성령을 하나님의 소유권과 보호에 대한 호칭의 의미에서 인침으로 묘사한다. ①인침은 소유권의 표시이며 정체의 증거이다. ②인치심은 또한 안전을 보장한다. 그것은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보호의 표시이다. 이 인치심은 대환난 중에 그들을 보호한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도 "구속의 날까지" 사람을 인치신다. ③성령은 또한 보증 혹은 서약의 의미에서의 인치심이다. 인치심은 이미 받은 어떤 물건에 대한 서약이 아니라 장래에 받을 소유물에 대한 보증이다. ④인치심은 또한 확증과 헌신의 표시이다. 6) 기름(Oil) 성령은 하늘의 기름 부으심, 즉 높은 곳으로부터 내리는 성유인 기름으로 볼 수 있다. 기름 부음에 대한 관념은 예수께서 부여받은 전 사역에 대해서 예수 자신이 신성케 됨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늘의 기름이고(성유), 따라서 성도는 기름부음 받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받는다. Ⅲ. 성령의 품성(NATURE) 성령은 누구신가 혹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가고자 한다. 1. 하나님(God) 성령은 하나님보다 못한, 혹은 하나님 아닌 다른 실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1) 신적 인식과 신적 신분(Divine Reconignition and Identification) 성령은 하나님으로 인식된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은 하나님과 동일하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 구석 구석에 이르기까지 오직을 의미하는 언어로 성령을 언급하셨다. 구약 성경에서는 성령이 하나님으로 분명하게 불리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 "하나님의 신", 그리고, "성신"에 대한 수많은 언급은 하나님으로서의 성령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은 분명 당시의 백성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게다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적 임재를 개인적으로 즐기며,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속에 내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2) 신적인 완전성(Divine Perfections) 성령은 또한 하나님의 완전성을 갖고 계신다. 완전성에 대한 고찰을 차례대로 해보자. ① 성령은 편재하신다. 하나님의 신(성령)은 어디에나 계시고 영원히 계신다. 성령께선 특별히 당신을 영접한 성도들과 계속적으로 함께하신다. ② 성령은 전지하시다.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고 모든 것을 헤아리기 때문에 진실로 전지하시다. 또한 지식의 부족이 전혀 없으시다. 성령은 곧 하나님 자신의 전지하심을 갖고 계신다. ③성령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의 신은 전능하시고 이에 대한 증거가 창조에 있어서의 당신의 사역이다. 3) 신적인 사역(Divine Work)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성령은 하나님 자신임이 틀림없다. 성령은 운행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2. 인격체(Person) 성령은 신적인 영향력이나 능력일 뿐만 아니라 본래 한 인격체시다. 1)인격적 명칭(Personal Designation) 성령은 "보혜사(Paraclete)로 여러번 언급된다. 그러나 이 용어는 "위로자", "상담자". '조력자', '옹호자'등과 같은 말로 번역되는데 이로써 한 인격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부으심, 성령의 강림하심, 성령으로 세례받음, 성령으로 충만함과 같은 말은 비인격적인 어떤 능력과 힘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께서 오시는 방법을 언급하는 것이다. 2) 인격적 특징(Personal Characteristics) 성령의 인격적 특징의 하나로 지성이 있다. 성령은 교회의 으뜸가는 안내자와 감독자로서 활동하시는 한 인격체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에 따라서 간구한다. 다음으로 성령의 인격적 특징은 의지이다. 2차 선교 여행 중에 바울과 디모데는 성령에 의해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려는 것을 포기해야했다. 이처럼 성령은 의지를 가지고 계셔서 그들을 막으셨던 것이다. 또한 성령은 감정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구약 성경에서 공히 성령은 근심하시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하고 있다.(롬8:26) "탄식"이란 말은 성령의 감정이 매우 깊으심을 나타낸다. 3) 인격적인 관계(Personal Relationships) 성령은 타자와 인격적으로 관계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장 중요한 예는 확실히 예수와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과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이 아름다운 축도는 성령과 기독교 공동체 사이의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말해 주고 있다. 3. 독특성(Distinct)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반면 성령은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창세기는 역사하시는 중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이라'(1:1) 그리고 그 다음 단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 행하시니라"(2절)이다. 따라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신은 둘다 하나님이다. 하지만 두분의 역할은 동일하지 않다. 즉 그분들 사이에는 분리가 아닌 구분이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서 그들에게 보내질 보혜사 "진리의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다.(요15:26). 마찬가지로 그는 보혜사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그래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 의해서 보내심을 입게 되었다. 성령의 보내심은 성령께서 성자를 통해 성부의 보내심을 입는다는 의미에서 성부와 성자께로서 나오시지만, 결국 성령은 오직 성부께로만 나오시는 것이다. 즉 성부는 성령의 영원한 근원이다. 성령은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발현하거나 퍼져나간다. 하나님 안에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다. 이는 성령의 보내심 같이 성부의 의지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고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움직임이다. 성령은 성육신 후에 오시고 당신의 오심은 성부와 성자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흔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로서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의 어떤 종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도 영원한 신격으로서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문제는 성령의 영원한 독특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7장 능력을 주시는 성령(THE ENABLING SPIRIT) 신앙 공동체안에서의 성령의 활동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목적 성취를 위해 개인의 다양한 역할에 따라 지헤와 힘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 특수한 역할과 기능 구약시대의 선민의 삶과 선교를 위해 권능을 주고 방향을 제시하셨다. 1) 성막과 성전 설계 성막의 설계와 건축을 위해 지명된 장인 브살렐에 관하여 성경은 "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고" (출31;3-5) 라고 하여 , 브살렐이 성령의 조명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구상하신 성막이 실재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성전의 식양 역시도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에 의해 다윗에게 주어졌고 , 솔로몬에 의해 완성되었다. (대하 28:12) 그리고 성막과 성전 건축 사엄의 완료에 대한 인정을 표하신 때는 구름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과 성전에 가득하였다고 하였다. (출 40:34) (대하 5:13-14) 2) 백성의 인도 성령은 사람들에게 지도력을 부여하시는 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을 지도하며 그들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모세와, 칠십 인의 장로들과,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지혜와 힘을 부여하셨다. 칠십 인 장로들을 소집할 것을 명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민 11:17) 또, 모세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백성을 위해 또 하나의 지도자를 세워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그에게 안수하고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 결과, "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순종하였더라" 고 하고 있다. 3) 재판 가나안 땅 입성 후, 하나님은 "사사(士師)"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치리하고 재판을 담당하고 적들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도록 하셨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 웃니엘, 기드온, 입다, 삼손 등에 대해서 모두 "여호와의 신이 임하셨으므로 " (삿3:10)-웃니엘-,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삿6:34) -기드온- 에서 볼수 있듯이 사사들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지혜와 힘을 받아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입다...삿11:29 참조 삼손...삿13:25 참조 4) 통치 사사시대 이후 왕정시대에서 사울, 다윗 왕은 모두 성령에 감동되어 전쟁과 통치를 감당하고 있다. (삼상11:6) (삼상16:13) 특히 다윗은 그의 행위의 선악 간에 지속적으로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통치자로 남아 있었다. (삼상16:13) 다윗 이후에는 성령에 의한다기보다는 자연적 상속인에게 왕위가 계승되어 왕에대한 영적 기름부음의 보증이 없었다. 5) 예언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예언적 말씀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다. 모세가 선택한 칠십 인의 장로들이 성막에 인도되었을 때, 여호와의 신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예언이 순간적으로 터져나왔다. 진 중에있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신이 임하여 그들도 예언하였다.(민11:25-26) 메소포타미아인 발람에게 성령이 임하여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은(민24:2-3,9) 예언이 이스라엘신앙공동체와의 연관 속에서 행해지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외 예언이 나타났던 예는 삼상 10:5-6에서 왕으로서 기름부음받은 직후의 사울이고, 19:20 에서 다윗을 잡으려고 보낸 사신에게도 일시적으로 있었다. 예언의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고 사울은 사실상 예정된 선지자가 아니었지만 그 발언들이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으로 터져나온 발언이라는 암시는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울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고 나온다. 다윗에게는 성령의 지속적 기름부음이 "이 날 이후로(삼상16:13)" 있었고, 이것은 예언자적 기름부음을 함축한다. (삼하23:1-2) 다윗과 함께 한 용사 아마새(대상12:18), 여호사밧왕 시대 제사장 야하시엘(대하21:14), 요아스왕 시대 제사장 스가랴(대하24:20)에게도 여호와의 신이 감동하여 선민의 앞날에 대한 축복, 격려, 질책의 예언을 하게 한다. 그외에도 미가(미3:8), 바벨론 유수기 선지자 스가랴(슥7:12) 등에 의해서도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오신 것임을 밝히 알게해준다. 6) 능력부여 구약성경에서는 능력을 부여하는 역동적인 힘으로서의 하나님의 성령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슥4:6-7)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전 재건축은 오직 성령께서 부여하는 능력에 의해서 완수될 것임을 증명한다. 이와 유사한 예언이 학개에게도 선포된다.(학2:4-7)
가난 2002-02-01 11:33:05 read : 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출 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출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출 23: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출 23:11 제칠년에는 갈지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하라 그
가 난 2002-02-01 11:33:05 read : 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출 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출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출 23: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출 23:11 제칠년에는 갈지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출 30:15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레 14:21 그가 가난하여 이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그는 흔들어 자기를 속할 속건제를 위하여 어린 숫양 하나와 소제를 위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에 기름 섞은 것과 기름 한 록을 취하고 레 19:10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레 23:22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25:25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레 27:8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신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 24:12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삼상 18:23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의 귀에 고하매 다윗이 가로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경한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로라 한지라 삼하 12: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삼하 12:3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삼하 12: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에 9:22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욥 5:16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 욥 20:10 그의 자녀들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욥 20:19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림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욥 24:4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 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욥 24:9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욥 24:14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욥 31: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욥 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욥 34:28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케하며 환난 받는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시 9: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시 9: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시 10: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시 14: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 35:10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시 37:14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시 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 68:10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시 69:29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시 70:5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 시 72:2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시 72:4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시 72:12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시 72:13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시 74:19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 시 74:21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시 82:3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시 82: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 109:16 저가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한 연고니이다 시 109:22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시 113:7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잠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 10:15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 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잠 13:7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잠 13:8 사람의 재물이 그 생명을 속할 수는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잠 13:23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하므로 양식이 많아지거늘 혹 불의로 인하여 가산을 탕패하는 자가 있느니라 잠 14:20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잠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잠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잠 18:23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잠 19:1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잠 19:4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잠 19:7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 19:22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21:13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잠 21:17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잠 22: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잠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잠 22:16 이를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잠 23:21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잠 28:3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가난한 자는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 잠 28:6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 잠 28:8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많아지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잠 28:11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겨도 명철한 가난한 자는 그를 살펴 아느니라 잠 28: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잠 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잠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잠 29:13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잠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잠 30: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잠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14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전 4: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전 4:14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전 6:8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전 9:15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전 9:16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사 3:1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사 3:15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사 14:30 가난한 자의 장자는 먹겠고 빈핍한 자는 평안히 누우려니와 내가 너의 뿌리를 기근으로 죽일 것이요 너의 남은 자는 살륙을 당하리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렘 2:34 또 네 옷단에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음을 인함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로 너를 책망함을 인함이니라 렘 20: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렘 22: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6:49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겔 18:12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억탈하거나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도로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겔 18:17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이나 이식을 취하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 아비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지 아니하고 정녕 살겠고 겔 22:29 이 땅 백성은 강포하며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단 4:27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였느니라 암 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암 4:1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암 5:11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암 8: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암 8:6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합 3:14 그들이 회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습 3: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 26:9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막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7: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14: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눅 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눅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눅 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눅 21: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요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요 12: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 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롬 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9:9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약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약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약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가난한 자 2002-02-04 16:39:20 read : 4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심/ 레19: 9∼10 여호와는 가난케도, 부유케도 하심/삼상 2: 7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음 / 욥 5:16 게으르면 가난해짐 / 잠 10: 4 가난한 듯 한 부자 / 잠 13: 7 가난해도 도적질 말라 / 잠 30: 9 가난해도 지혜 있는 소년 / 전 4:13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함 / 마 11: 5
가난한 자 2002-02-04 16:39:20 read : 4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심/ 레19: 9∼10 여호와는 가난케도, 부유케도 하심/삼상 2: 7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음 / 욥 5:16 게으르면 가난해짐 / 잠 10: 4 가난한 듯 한 부자 / 잠 13: 7 가난해도 도적질 말라 / 잠 30: 9 가난해도 지혜 있는 소년 / 전 4:13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함 / 마 11: 5 가난한 자들을 초대하라 / 눅 14:13, 21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 / 롬 15:26
가뭄 2002-02-01 11:33:31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욥 24: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 렘 14: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렘 50:38 가뭄이 물 위에 임하여 그것을 말리우리니 이는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요 그들은 우상에 미쳤음이니라
가 뭄 2002-02-01 11:33:31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욥 24: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 렘 14: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렘 50:38 가뭄이 물 위에 임하여 그것을 말리우리니 이는 그 땅이 조각한 신상의 땅이요 그들은 우상에 미쳤음이니라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2002-01-30 09:52:51 read : 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Ⅰ. 들어가는 말 어떤 건장한 남자가 문앞에 서서 카드키( card key)를 가지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본 다음 책상 위에 놓인 헬멧과 특이하게 생긴 장갑을 낀다. 그리고 잠시후 그는 발차기를 비롯해 찌르기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는 마치 실제로 싸움을 하는 듯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2002-01-30 09:52:51 read : 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Ⅰ. 들어가는 말 어떤 건장한 남자가 문앞에 서서 카드키( card key)를 가지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본 다음 책상 위에 놓인 헬멧과 특이하게 생긴 장갑을 낀다. 그리고 잠시후 그는 발차기를 비롯해 찌르기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는 마치 실제로 싸움을 하는 듯 하다. 미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가상 현실 프로그램을 이용해 무술을 수련중 이었다. 이런 내용은 어느 영화에서 상영되었다. 요즈음 들어 부쩍 컴퓨터의 관심이 높아지고 생활이 고도의 정보를 통한 세계화 추세에 들다보니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은 '컴맹'으로 불리우며 무시 당하는 세태이다. 특히 컴퓨터의 발달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제 컴퓨터는 기계를 떠나 생활이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요즘들어 가장 관심을 끄는 컴퓨터 프로그램 가장 널리 쓰이는 게임등은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만도 대기업에서 조차 가상 현실 게임산업에 손을 댔다고 하니 가상 현실이 우리 생활에 얼마큼 영향을 주며 얼마나 널리 쓰이게 될지 환하게 알 일이다. 가상 현실이 각광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상 현실은 구성이 복잡한 만큼 광범위한 응용 분야를 창출할 수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커다란 변혁과 전환을 몰고 올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분야의 관련 기술을 하나로 집약시키는 한편 그 결과를 실생활에 접목 시킬수 있다는 점이 단지 컴퓨터 기술의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파급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Ⅱ가상현실과 미래 1.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란 무엇인가 요즘 신문에서 "가상 현실을 이용한 xx 개발"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상'과 '현실' 이라는 이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진 새로운 기술의 이름은 이미 그 실체 보다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이미 실제로도 군사분야와 교육, 인텔리어, 분야에서는 초보적인 실용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다 수년 전 나온 '토탈리콜' 이나 '론머맨' 같은 미국의 공상 영화에[ 등장해 흥미를 끌었던 이 기술은 사람들에게 "머리로 떠올릴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실현이 가능한" 놀라운 기술로 이해되고 있다. 실제로 가상 현실이란 개념은 정의 자체부터 매우 모호하다. 단어 자체가 가상(Virtual)과 현실(Reality) 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하난로 묶었을 뿐 아니라 가상 현실을 구현하는 기술도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를 포함하는 컴퓨터 기술 뿐 아니라 심리학 생리학 인간공학등의 다양한 분야가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상 현실이란 "컴퓨터를 이용하여 가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그 환경내에서 3차원의 의사체험(擬似體驗)을 가능하게 하는 첨단 기술"로 정의될 수 있다. 즉 가상 현실은 실제 물체는 없지만 이를 시뮬레이션해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2. 가상 현실의 역사 가상현실이라는 말이 일반인에게 거부감없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이 용어가 정착되기 전에는 가상 환경(Virtual environment) 인공현실(Artficial reality) 인공 두되공간(Cyber space) 등으로 이름이 불리웠는데 이 같은 용어의 흔재는 그 개념을 확실히 설정하는데 적 잖은 장애 요소로 작용했다. 가상 현실에 대한 연구는 60년대 중반 CAD의 원조로 불리우는 MIT의 이반 서덜랜드 교수에 의해 시작 된다. 넓은 의미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인 CAD가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의 모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컴퓨터 그래픽은 대상물을 수치화시켜 실시간 내에 표현하고자 하는데 3차원의 실세계를 평면으로 표현하는 데는 어딘지 답답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상 현실은 3차원 공간을 표현하는데데이타를 컴퓨터에 기억시켜 그 가상공간에서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디스플레이에 기억시키고 표시하는 것이다. 이 때 가상 공간에 있는 인간의 위치는 마우스 등의 입력기에 의해 이동 시킬수 있고 그에 따라 보이는 장면의 변화를 계산해 낸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인공 지능이나 산업공학, 등의 연관 과학 학문이 어우러지면서 가상 현실(Virtual Reality)기술이 본격화 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였다. 특히 멀티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음성 인식과 화상처리 기술의 진보는 이를 통합한 기술의 하나로 가상현실의 출현을 예고 하고 있었다.85년 미항공 우주국(NASA)은 좁은 우주선의 복잡한 작업을 단순화 하기 위하여 3차원 데이터 공간을 비행하며 몇 개의 컴퓨터 조작 패널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며 우주선 외부에서도 우주복을 입은채 조작할 수 있는 VIEW(Vitual Intreface Environment Workstation)을 만들었다. 사진이 최초로 발명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고 텔베비젼이나 영화관이 등장한 것도 20세기 초에 불과하다. 이들 매체는 모두 사물을 2차원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발명 당시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2차원의 한계를 넘어서 3차원의 표현방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이들 발명품보다 앞서 일어났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동안 좀더 현실감 있는 입체 이미지에 접근하고자 수 많은 입체경에 발명되어 왔으며 그 맥은 오늘날 가상현실시스템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입체화 발견에 대한 연구는 1백 50년 전에 휘트스톤 이란 인물이 프리즘과 거울을 사용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최초의 입체경을 발명해 명성을 얻은바 있는 그는 사람의 양쪽 눈이 보는 이미지 차이가 입체적인 깊이를 지각 시킨다는 사실을 영국학술원에 보고했다. 그는 마주 향하는 이미지들을 반사시키기 위해 45°각도의 거울을 사용해 두 개의 사진이 보는 사람의 눈을 향해 반사되도록 측면에 배치했다. 이 거울 입체경은 비교적 간단한 장치로 눈에 하나씩 2개의 2차원 그림을 제공함으로써 기술적으로 망막의 불일치를 만들었다. 렌즈없이 보는 유일한 입체경인 이 발명품은 이 후 관찰자의 눈 사이 거리와 이미지의 크기를 조절하는 렌즈가 부착돼 정교함을 더했다. 한편 무작위 점 입체화(random - dot stereogram)라 불리우는 입체 기술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베라 유레즈라는 사람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얼마전 관심을 끌었던 '매직아이(magic eye)'라는 것은 바로 이 무작위 점 입체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난수표에서 힌트를 얻어 흑백의 점으로 그려낸 두장의 그림을 일정한 방법을 통해 보면 입체적인 도형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인간의 두눈이 양안 시각을 갖는 다는 것과 대상인식은 항상 입체시 (立體視)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레즈의 발견 이전까지 사람들은 한눈의 대상물 인식은 입체시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는 두눈의 영상은 두뇌의 중간 지점에서 합쳐지고 깊이가 인식되기 때문에 편시야 시각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시초로 그 후 입체 환경을 통해 보는 입체 영화와 3-D 영상기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부르스터라는 인물은 양쪽 눈이 정확히 다른 그림을 보는데 도움이 되는 렌즈를 사용한 입체경을 발명했는데 오늘 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이 발명품은 두눈이 같은 광경을 보는 것을 막기위해 두 개의 렌즈 사이에 경계 분리기가 동시에 놓여 있다. 이것은 후에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뷰마스터(View Master) 라는 간단한 입체 그림을 보는 도구로 발전하게 된다. 3. 인간과 가상 현실 1)생활속에 파고드는 가상현실 우리 주변에도 가상 현실 기술을 응용한 예가 적지 않다. 가장 구체적으로 가까운 예가 가상 현실 게임관인 어뮤즈21관이다(이 곳은 HMD를 착용하고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채 게임하는 곳이다.) 가상 현실의 응용 분야는 비단 흥미 위주의 오락만은 아니다. 산업용으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한새퍼시스가 시도한 가상 부엌 시스템이 있다. 부엌용 가구를 일일이 설치하지 않아도 입체 영상을 통해 위치를 바꿀 수 있으며 냉장고나 싱크대 등을 가상 세계안에서 사용할 수 있다. 동아 건설도 가상 모델 하우스 계획을 발표해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모델 하우스를 찾아다닐 필요없이 아파트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원하는 스타일의 아파트를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이다, 특히 아파트 실내에 들어가 걸어다닌다거나 베란다에서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벽제나 바닥제의 촉감을 느낄수 있다. 2)컴퓨터 문화를 새롭게 정의 가상 현실이 컴퓨터 관련업계에 일으키는 파장은 단순히 활용 분야가 많다는 이유외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가상현실의 인터페이스이다. 실제로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 가상 현실을 대표하는 장비로 알려져 있는 HMD(Head Mounted Display)를 단순히 영상을 입체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HMD는 출력 장치로서 역할외에 사용자의 머리 움직임이나 이동을 컴퓨터 시스템에 전달하는 입력장치로서의 역할도 겸한다. 이런 면에서는 촉각 디스플레이 장치인 데이터 글러브(장갑형태)와 바디 슈트( 옷과 같은 형태)도 마찬가지 이다. 특수 장비를 통해 감지된 인간의 동적은 컴퓨터가 처리하고 결과는 디스 플레이 장치로 보내진다. 보내진 결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다시 컴퓨터로 보내지는 일련의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 HMD는 인간의 동작을 감지함은 물론 그 동작에 대한 처리 결과를 나타내 주기 때문에 입력장치와 출력 장치의 기능을 모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과 컴퓨터 간 상호작용의 연결 고리인 셈이다. 이런 일련의 개발과정은 키보드로 시작해서 마우스로 이어져 온 컴퓨터와 인간간의 인터페이스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우선은 인간이 컴퓨터가 할 일을 하나 하나 지시해야 하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말이나 손짓 등 일상적인 행동만으로 원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컴퓨터를 단순한 작업도구가 아닌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3)인간 연구가 기초 가상 현실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매우 광범위하다. 컴퓨터와 관련된 하드웨아 소프트웨어 외에도 인간의 감각 기관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심리학 생리학 인간공학 등의 바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역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이다. 3차원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시각 장치로는 HMD외에도 레이저 광선을 이용한 홀로그래피 등이 있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소프트 웨어는 일반 3차원 그래픽보다 빠른 속도로 랜더링해야 함은 물론 사용자의 시점(view point) 변화에 따라 물체의 모든 면을 연출해 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컴퓨터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자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면 가상 현실 시스템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감각이 어디에서 어떻게 감지되어 대뇌에 전달되는 지 알아야 인간 감각 기관의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서 전달할 것인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여주는 주체인 가상 현실 시스템과 그것을 즐기는 인간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또한 이에 걸맞게 진보된 것이어야 한다. 4) 가상 현실과 오감 가상 현실의 작용을 살펴보면 가상 현실을 이루는 요소들을 알 수 있다. 우선 가상 현실 시스템은 실체 세계에 있는 인간의 동작을 측정하고 입력할 수 있는 기기를 사용한다. 그 다음 입력받은 동작을 컴퓨터가 관장하는 가상 공간에 전달해 작용과 반응을 일으킨다. 이때 가상공간은 인간의 동작에 대응해 영상과 소리 체감등 다양한 감각 정보를 합성한 후 이를 특수한 하드웨어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한다. 이런 일련이 과정들을 통해서 사용자는 실제 세계에서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상 현실 시스템의 주요 임무는 인간의 오감을 통한 체험의 전달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정확한 감성공학을 필요로 한다. 가상 현실의 공학적인 명제는 다름아닌 경험의 전달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또한 가상 현실의 효과를 충분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감각 전달 방법의 개발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가상 현실은 기술적 차원의 진보뿐 아니라 인간적 요소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1) 시각 디스플레이 (Display)장치 인간이 감각을 받아들이는 상당 부분은 시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상 현실 시스템에서 각각 디스플레이 장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눈앞에 소형 컬러 액정 디스플레이를 고정시켜 3차원 영상을 보게 하는 HMD는 시각 디스플레이 장치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머리에 착용하는 헬멧 형식으로 머리의 움직임을 측정한는 센서를 함께 장착하고 있다. 또한 헬멧의 각도와 높이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시스템을 관리하며 약 135°의 넓은 시야에 걸친 화상을 비춰준다. HMD의 성능중 하나 중요한 것은 넓은 시야를 확보해 가상 세계에 몰입과 존재의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실재로 인간은 수평으로 155°의 시야를 갖기 때문에 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HMD일수록 보다 사실감 있는 가상 활경을 즐기는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HMD에도 문제점이 있다. HMD는 형태나 외양 및 기능에 있어서 다양하지만 모두 불편하다는 공통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며 시야의 크기와 직결되는 액정의 크기, 해상도, 새로운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걸리는 시간(Frame refresh rate), 머리에 장착함으로 해서 야기되는 위생상의 문제, 중량, 누의 피로감, 화면과 동작의 불일치로 인한 감각 기관의 혼란등이다. 또한 많은 케이블로 인해 이동에 제한이 있다는 결점도 가상 현실 시스템의 사용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첫 번째 난제는 낮은 해상도롤 인해 눈의 피로와 현실감 감쇄의 원인이 된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직 그래픽 처리속도가 사람의 반응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직 그래픽 처리속도가 사람의 반응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시점 이동에 대한 실시간 화상처리가 약간 높다. 센서에서의 시간 자체는 시스템과 그래픽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시간 지체와 함쳐져 시스템이 반응하기 ¼-⅓초 이전의 위치가 HMD에 의해 전달된다. 따라서 사용자가 고개를 돌릴 때 가상의 그래픽 세계가 시야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현저한 시간 지연이 생기게 된다. 이런 현상은 사용자에게 방향감각의 혼란을 야기하는 등 후유증을 남기기도한다. 세 번째 머리에 장착함으로써 야기되는 위생상은 문제, 중량, 피로감, 장시간 착용시의 멀미 증상 등이다. 현재 발표된 상업용 HMD의 경우 무게가 보통 2㎏인데 현실감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무겁다. 그리고 HMD의 특성상 눈앞의 무게 비중이 커서 HMD가 앞으로 처지지 않게 손으로 잡고 머리를 회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초당 프레임수인데 TV정도의 화면에서는 매초 30프레임 이하면 보이는 것이 불안정해 눈이 피로해 진다. 현제의 가상 현실 기술은 10-20프레임 정도가 한계이다. 이 종도의 화상을 10분이상 계속 사용한다면 모니터를 10시간 사용한 것과 같다는 보고 결과도 있다. 다섯째로 HMD를 착용한고 있는 동안은 오직 한 장소로 활동이 제한도며 가상 세곙 이외의 환경에서 작업이 필요할 때마다 장치를 벗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HMD의 문제점은 현실재적응이라는 문제로 집중된다. 감각궤한의 지연 실세계의 경험과 가속 운동으로 인한 시각 및 전정기관 체성감각기관에서 대뇌로 전달되는 감각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뇌가 혼란을 일으키게 되고 어지럼증 피로감 구토 땀흘림 방향감각의 상실 복부팽만감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이를 전문 용어로 사이버 병(Cybersickness) 이라고 부르는 데 보통 가상현실을 체험한 후 장시간 쉬었다가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청각디스플레이 장치 가상 현실에 사용되는 음향은 HMD에 연결돼 시각과 동시에 작동한다. 현재 사용되는 이 분야의 기술수준은 스테레오로 입체음향을 재생하는 정도지만 홀로포닉스라는 신기술의 접목이 시도하고 있다. 홀로포닉스는 3차원 공간내에서 눈을 감고도 소리가 나는 곳을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임에 따라 그 감지도가 변화해 생생한 소리를 제공하는 음향기술이다. 귀는 눈과 마찬가지로 입체적인 음향을 들을 수 있는 데 사물의 위치와 얼마나 먼곳에 있는지를 뇌가 판단하도록 해준다. 중이(中耳)에는 서로 연결된 세 개의 뼈가 있어 소리 에너지를 고막으로부터 액체가 차 있는 내이 (內耳)로 보낸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이 뼈를 고정하는 근육이 음향반사작용을 일으켜 조여지고 이 때문에 내이에 도달하는 에너지의 양을 최고 100분의 1정도로 감소시켜 준다. 이 근육은 지속적인 큰소리에 대해 10분이상 버틸수 없다. 귀는 또 어떤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주파수를 여과함으로써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맹인이나 눈을 가린 어른이 반사되어 돌아오는 휘파람 소리로 최고 3미터 까지 떨어진 곳에 물체가 있는 지 없는 지를 알수 있다. 강한 오디오 이미지는 사물에 대한 공간적 정보를 제공하며 체험자에게 가려진 가상존재를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공간적 단서는 귀와 귀사이에 이르는 소리의 세기와 귀에 도달하는 소리의 시간 지연에 차이가 있다. 가상 현실 시스템에서 소리의 역할은 현장감을 증가시키는 데 있다. 일반 스테레오 사운드는 2개의 채널을 통해 소리가 머리 중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만든다. 입체 음향은 외이를 통해서 고막으로 전달되는 음향신호를 좌우로 따로따로 생성해 임의의 장소에서 음원이 재생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 가상현실 시스템에서 청각디스플레이 장치는HMD에 연결 돤 헤드폰이나 이어폰이 주로 이용된다. 3차원 공간에서 현실적인 소리의 구현은 다수의 스피커를 사람 주위에 배치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 3차원 음향을 출력하기 위해서는 3차원 사운드 프로세서와 소리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는 음원이 필요하다. 이 분야의 성과 중 하나가 NASA가 개발한 컨볼보트론(Convol- votron)이다. 컴볼보트론은 아주 강력한 오디오 전용 DSP로서 HRTF로 만들어진 아날로그형 소리를 통해 3차원 사운드 효과를 내는 데 HRTF라 불리우는 일련의 계산법을 이용해 음원이 마치 소리가 특정 위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만든다. 이 시스템은 방음 장치가 되어 있고 소리의 반사가 없는 방에 설치된 144개의 스피커에서 출력되는 다양한 소리의 주파수에 의해 귀에 충격이 가해질 때 음향의 변화를 그려낸다. 최근에는 인간의 청각 특성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어 음성 신호의 실시간 처리로 일반적인 헤드폰을 사용해 3D 공간 임의의 위치에 음원을 높은 정밀도로 정립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3) 촉각 디스플레이 장치 촉각과 포스 피드백은 가상현실의 완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이다. 실제에서 촉감으 통해 사물의 존재를 인지하듯 물리적 저항 감각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개발된 장치들은 피부에 맞닿는 표면의 질감과 작은 압력을 시뮬레이트하는 데 사용된다. 전기적 촉각 및 진동 촉각 장치들이 전류나 작은 진동으로 피부의 자극 수용체들을 자극함으로써 사용자의 손가락 끝에 표면적 착각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가상의 터치 동작은 특히 텔레로보틱스 분야나 수술 시물레에션과같은 고도의 정확성을 요하는 분야에서 매우 중요하다. 가상 촉감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것이 촉각과 포스 피드백 시스템이다. 실제생활에서 감촉이나 포스피드백에 의존하는 수많은 체험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촉각은 물리적 자극에 대한 수용기를 통해 일어난다. 반면 포스피드백은 손가락이나 손에 작용하는 실제적인 힘을 의미한다. 이 감각은 근육이나 관절에 적용된다. 생리학에서는 촉각과 압각의 분류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만약 모발에 가볍게 접촉을 하면 모근의 신경말단망에 의해 촉각이 발생하고 페치니소체를 가볍게 누르면 압각이 발생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촉각은 피부표면에서 느끼는 피부감각과 피부 밑의 근육에서 느끼는 시부감각을 통한다. 피부에는 압각, 온각, 냉각, 통각을 만드는 점들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피부 전체에 이들 감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감각적음 압점, 온점, 냉점, 통점으로 불리며 각각 그 종류가 다른 감각을 만들어 낸다, 심부 감각은 근육,관절기 등 수용기의 충격에 의해 발생하는 감각이며 물체를 움직일 때의 저항감과 중량감등 운동이나 위치에 대한 감각과 심부통각으로 나누어지며 피부감각과 심부감각을 합쳐서 체성 감각이라고 한다. 가상현실에서도 체성 감각에 대한 제시는 아직 모색 단계인데 몸 전체에 분포돼 있는 촉각을 공학적으로 모방해 실시간으로 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실현의 범위를 손에 한정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촉각의 피드백은 피부에 가해지는 힘을 말하고 포스 피드백은 근육이나 관절에 가해지는 힘의 되먹임을 말한다. 어떤 물체를 형성하고 손가락 끝으로 뭔가를 조종하고나 특정 방향에서 물체를 잡기 위해서는 손가락과 손의 움직임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범용적인 피드백 장치들은 비용,효율, 유용성에 있어서 충분치 못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장치들은 더욱 가벼워지고 더욱 더 나은 성능을 갖게 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 장치는 센서와 액튜에이터(ACTUAYOR)가 집적된 얇고 유연성 있는 형태로 발전할 것이며 새롭게 개발된 기술이 효과적 경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적용될 것이다. 현재 연구되어지고 있는 포스 피드백 방식으로는 마스터암, 조이스틱. 조이스트링, 데이터 글러브의 네가지를 들수 있다. 이들 장치는 현재 가상 현실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4) 후각과 미각 디스플레이어 장치 현재 실현되고 있는 가상 현실은 시각과 청각 및 촉각이 중심이지만 사용 목적에 따라 언젠가는 미각과 후각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오감은 2000년 전 아리스토 텔레스가 처음 알아낸 것이지만 과학자 들이 인간 감각의 깊은 비밀을 풀어내고 그 케카니즘을 규명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이다. 가상현실에서 후각과 미각은 아직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맛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후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콧속에 들어 있는 후각세포로 4천가지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고 향수업계의 전문가는 약 1만가지의 향내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맛에 대한 감각의 대부분은 후각을 구성하고 있는 100만개의 세포에서 나온다. 후각은 뇌가 가장 원시적인 부분인 변연계와 연결되어 있는 데 이곳은 정서 식욕, 성욕을 관장하는 부분이다. 이 후각 세포들은 다양한 수용기를 갖고 있어서 특정한 화학물질만이 들어갈 수 있고 수용기는 화학 물질의 냄새가 들어오면 신경신호를 일으킨다. 가장 중요한 후각 신경 조직과 후각 세포는 코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이 3차 신경조직 세포는 각기 다른 신경을 통해 뇌로 신호를 보낸다. 이들 두감각은 물리 세계에서 화학적인 인터페이스를 갖는데 컴퓨터는 아직 적합한 인테페이스를 갖고 있지 못하다. 현재 나와 있는 가상 현실 시스템의 전조인 모턴 헤이리그(Morton Heilig)는 센서라마(sensorama)라는 시각 청각 진동외에 배기 가스 꽃의 향수 행수 등 냄새의 감각까지 제공하는 개인용 오락기구를 발명하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가상현실의 오감 제어에 관한 선구자적인 고안의 발상이었다. 센서라마 기구는 일종의 1인용 극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상요자가 의자에 앉아 오토바이를 타고 뉴육시내를 다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영상과 음향은 물론 바람 냄새 진동까지 제공한다. 오토바이 시뮬레이터와 비슷한 체감을 갖도록 설계된 시스템이지만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에 진정한 가상현실 시스템은 아니었다. 결국 오늘날 진정한 가상현실시스템의 원형으로써 앞날을 예견하는 선구자적인 고안인 셈이었다. 또 다른 실례로써 미국 플로리다 주의 디즈니 랜드에 있는 미래도시는 선사시대의 광경, 습기를 느낄수 있는 모의 향기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후각 입력 장치로서 개발된 방향 디스플레이가 있으나 아직까지는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후각 디스플레이는 냄새의 가각이 잔존하기 때문에 급작스런 환겨의 변화에 빠르게 적용하기 힘들다. 가상 현실속에서 사용자가 갑자기 다른 환경속으로 들어가거나 다른 행동을 취할 때 이에 따른 냄새의 변화를 빠를게 바꿀 수 없는점이 후각 디스플레이의 가장 큰 단점이다. 냄새와 맛의 감각은 실제적인 분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수신기 역할을 하는 코와 입을 통해 특정 신호를 뇌에 보내게 된다. 따라서 후각과 미각 디스플에이의 개발은 매우 어렵지만 궁극에 가서는 뇌파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냄새나 맛을 강제로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5) 가상 현실의 응용 모니터와 같이 평면에 나타난 이미지를 입체영상으로 나타내려는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기술의 미숙으로 오늘날과 같이 폭넓게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근래들어 입체시를 지원하는 각종 장치나 소프트웨어의 성능이 대폭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광고나 예술, 분자구조 모델링, 사진측량법, 모의 비행 시뮬레이터, CAD나 CAM, 방사선 수술, 컴퓨터 단층촬영, 3차원 비디오 게임, 3D TV, 다차원 데이터이 시각화에서부터 가상 현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입체영상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은 앞으로 군사과학 의학 산업 교육 오락등 실제적인 모든 분야에 확대될수 있다. 가상 현실이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이것이 기존의 기술을 능가하는 무엇이 바탕이 되서라기 보다는 그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는 게 더 클 것이다. 가상 현실의 응용분야는 쉽게 설명해 가상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공간 내에 존재하면서 안가고도 체험하는 것인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저자를 가상현실의 연습(Virtual Reality walkthrough)이라 하고 후자를 원격존재(Tele-presence)라 부른다 원격존재는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자신의 분신인 로봇의행동을 손에 잡힐 듯이 알게 되고 필요한 경우 로봇을 자신의 수족처럼 조작해 마치 자신이 그 장소에 있는 듯한 감각을 가질수 있는 기술이다. 원격존재와 가상현실의 관계는 하나를 거꾸로 말하는 것과 같다. 가상현실은 자신의 주변에 현실과는 다른 자연스런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원격존재는 자신이 현재의 자리에 있으면서 별도의 환경으로 가는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원격 존재가 한쪽이 다른편을 조작한다는 것 외에는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로봇뿐만 아니라 원격으로 조작되는 기계 전체를 일컬어 털레오페레(Teleoperator)라 부르는데 이 부분의 본격적인 연구개발이 진전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원자력이 본격적으로 연구되면서부터 이다. 최초의 연구는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를 중심으로 개발된 '매직핸드'라는 이름의 마스터 슬레이브 매니플레이터(manipulator) 였다, 1960년대의 텔레오퍼레이션 연구는 엑조스켈톤형 인력증폭기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1950년대 후반에 행해진 GE(Generak Electric)사의 모셔박사의 연구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는 다시 미국 정부와 GE사의 공동프로젝트인 '하디만( Hardymann)'으로 진전했다. 이들 연구는 사람이 장치 속에 들어가 힘을 증대시켜 무거운 것을 드는 일 등에 쓰이도록 고안됐는 데 만일 장치에 고장이 생기면 인간의 생명도 위험해지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상영화의 '에어리언'을 본 사람이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기계옷'을 입고 괴물과 싸우는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1)의학분야 3차원 입체영상이 적용돼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의학분야이다. 3차원의 비디오 영상은 의사로 하여금 수술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시행착오를 방지하게 하며 수술경로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외과 의사들의 사전수술 시뮬레이션 계획에 3D영상기술은 매우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실례로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임상협회는 외과의사들이 아주 미세한 범위의 뇌에서 위치를 지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 뇌수술을 위한 3D의 응용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기술은 동시에 뼈의 재봉합기술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전자적인 3차원 입체영상은 의사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주게 되고 뼈가 어떻게 구성되고 재위치 되어야 하는지 에 대한 계획을 제대로 세울수 있게 한다. 현미경으로 봐야 움직임을 알 수 있는 미소대상의 수술을 마이크로수술(microsugery)라고 하는데 이 수술은 현재 미소한 혐관유합 신경이나 정관 난관의 재생수술 등 다방면에서 이용되고 있다. 마이크로 수술은 대단히 미묘한 손의 동작을 필요로 하기에 고도의 숙련을 요구한다. 여기에 원격존재 기술을 도입해 보통의 수술과 같은 감각으로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가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은 현재 급속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마이크로 머신 기술의 진보에 바탕한 것이다. 손의 동작을 미소한 매니플레이터에 전달하고 환부의 영상을 확대해 관찰하면서 원격조작으로 수술한다는 것이 골자 최근에는 마이크로머신을 캡슐의 형태로 체내에 넣고 체외에서 원격존재기술을 이용해 진단이나 수술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각되고 있다. 가상 현실이 의료계에 대비되면서 의술혁명의 서곡을 울렸다. 병든 부위를 절개하지 않고도 가상현실 장비를 이용하여 인체 내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보면서 수술을 할 수 있는데 정확성도 있고 수술의 성공률도 높다고 한다. 원격지에 있는 환자에게 이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시술할 수 있는 장이 열릴 경우 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를 찾아 비행기로 몇시간씩 나아가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음은 물론 의료 해택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지역의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해부 실습용 시신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실제로 시신을 해부하지 않고도 모의 해부 실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오락 최근 우리 주변에 가상현실 기술을 응용한 예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가상 현실 게임관인 어뮤즈21에 가보면 HMD를 착용하고 일반 게임과 달리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채 게임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현재 가상 현실 기술이 가장 많이 응용되고 있는 분야이며 가상 현실 산업이 발전하는 초기에 각광받을 분야가 오락분야이다. 가정용 게임기 분야에서는 3D를 이용한 입체게임기가 일본 세가사에서 개발돼 특수 LCD 안경과 함께 판매되기도 했다. 이 안경은 LCD셔터 방식을 채용한 특수안경으로 사용자에게 실감있는 입체그래픽영상을 제공해 준다. 최근 이 회사는 가상현실기술을 응용한 3차원의 비디오 게임기와 입체안경보다 더 몰입감을 주는 영상을 제공하는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개발해 제품화시켰다. (3) 가상건물 세우고 이상을 점검 아마도 가상 현실의 응용 중 가상 현실 연습 분야는 건축가들에게 큰 경제적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미국 노스케롤라이나 대학에 설치된 가상건축의 내부를 살펴보면 건물 구조의 청사진을 CAD프로그램으로 그래 놓고 이를 컴퓨터 그래픽 워크스테이션으로 보내 이미지에 입체감을 입혀 2차원 데이터를 3차원 이미지로 만든다. 이 이미지는 엔지니어나 건축가가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쓰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학 연구진은 이와 함께 가상의 빌딩 공간을 자연스럽게 돌아다니기 위해 핸들이 달린 러닝머신 시스템을 개발했다. 가상 환경에서 앞으로 움직이고자 하면 사용자는 러닝머신에서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코너를 돌거나 방을 보고 싶으면 걸으면서 원하는 방향에 있는 핸들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빌딩 주변을 걸을 때 걸음속도를 조절해 움직임의 비율을 제어할 수 있다. 이것은 실세계와 매우 비슷하다. 걷고있는 동안 머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고 주위를 둘러본면 물체는 실세계에서와 같이 원근감을 갖고 보여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단순히 재미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축설계에 있어서도 기존의 설계방식에 비해 실제적 장점을 지니고 있다. 기존이 설계방식으로는 3차원적인 공간감을 2차원적인 모니터에서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을 뿐 아니라 3차원 모델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지 않고는 디자인의 잘못된 점을 알 수가 없었다. 가상 현실 기술은 이러한 점들을 개선시켜 줄 것이다. 건축도면을 입력해 설계단계에서 컴퓨터 속에 미리 건축물을 만들어보고 그 안을 둘러본다면 도면상에 나타나지 않는 문제점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가상 박물관을 들수 있다.현재 박물관들은 유적물을 컴퓨터 그랙픽 작업을 통해 복원하고 있다. 시스템 공학 연구소에서는 미륵사지탑 복원을 계기로 문화재 연구소와 계속적으로 이 작업을 진행중인데 이는 원형고증 작업에 신속성고 정밀도를 향상시켜 문화재 보존 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입체영상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가상박물관이 만들어지면 멀리 떨어져 있는 유적지까지 가지 않고서도 인파에 방해받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마치 그곳에 들어가서 살펴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설계분야에서도 기계적 설계환경의 연구에 입체시각이 2배에서 4배까지 정확도를 증진시키며 설계오류와 변경을 덜 초래 한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CAD나 CAM등 모든 설계응용분야에서 적용될 수 있다. 입체 영상은 자동화된 도구생산을 위한 설계도를 만들며 CAD프로그램에 그대로 공급될 수 있다. 가상의 움직임으로 사용자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시험과 오류에 의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건축설계의 경우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3차원의 모델을 만들며 HMD를 이용하여 그 내부를 돌아다니며 관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하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건축물의 완공을 미리 시뮬레이션할 수 있어 정확한 내부설계까지도 상세하게 설계할 수 있다. 또한 3차원을 통한 분석은 동시에 건축기사들이 잠재적인 문제점을 예견하는 것을 돕는다. 건축가는 3차원 공간을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탐험할 수 있으며 여러각도에서 건물을 바라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설계가 활용되는 모든 분야는 3D의적용이 매우 긴요하게 쓰일 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과 노력을 절감시켜 줄 수 있다. (4) 인테리어 응용분야 VR연습이 실제 생활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분야는 인테리어 응용이다. 그 한예로 작년 시스템 공학연구소가 연구한 부엌 인테리어의 세계를 보면 이 장치는 미국의 VPL사가 개발한 데이터 글러브와 디스플레이 기술을 이용한 시스템으로 이용한 시스템으로 컴퓨터로 부엌의 CAD모델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머리에 아이폰을 쓰고 가상 부엌을 돌아 다닐수 있다. 식탁의 의자도 옮겨보고 냉장고의 색을 바꾸어도 보고 전자레인지를 즉석에서 배치하는 등 사람이 원하는 것은 어느것이나 변경 추가할 수 있다. 이 기술의 핵심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것과 동일한 3차원 입체 영상을 제작하고 제작된 입체영상을 실제와 동일한 느낌을 갖도록 실제감을 표현하며 실제와 동일하게 재작된 물체를 3차원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동시킨다는 데 있다. 이 시스템은 주방가구를 대상으로 개발되었으니 실제로는 전시장에 전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제품에 응용이 간으하다. 특히 무게가 무겁고 부피가 커서 배치가 용이하지 않고 표준품의 종류와 숫자는 많지만 전시될 물품의 수가 제한되는 제품이라면 더욱 유리하다. 가상 현실을 이용한 CAD는 디자이너가 제품을 디자인 할 때부터 사용자를 함께 참여시켜 디자인 할 수 있다. 즉 디자인 상태의 물품을 가상의 세계에서 사용자에게 이용토록 함으로써 사용상에 문제점은 없는 지를 체크해 가면서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제품개발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디자인 경비를 절약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개인별로 차이가 있는 부품은 각자에 맞는 개별 디자인이 가능해 진다. 음향설계 분야에서 콘서트 홀이나 집을 디자인 할 때 건축가는 청각적인 문제에 시달려 왔다. 건축되기 전에 건축물의 청각을 결정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콘서트 홀에 청중이 가득찼을 때 음향의 반향 등 예견되는 많은 경우를 생각해서 건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상현실을 이용해 가상의 건축물에 가상의 청중을 앉도록 하고 연주되는 음향을 가상의 청중을 통해 느끼도록 하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5)비행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교육 교육은 가상 현실연습이 적용될 수 있는 관심 분야의 하나이다. 현재 가장 높은 수준을 이루고 있는 응용분야로 꼽히는 비행기 조종사의 시뮬레이터는 바로 어떤 방식으로 VR이 교육에 접합되는 가를 잘 보여준다.신형기의 시범 비행은 위험이 따르는게 보통이다. 개발된 비행기가 안전한지의 여부는 그 비행기의 동적 요소를 조합해 제작된 플리이트 시뮬레이터로 모의 비행을 실시함으로써 미리 알아보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음주나 약물 복용후의 운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실제 운전자에게 술과 약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를 대신하는 장치가 바로 운전 시뮬레이터다. 또한 체험이나 오락용 시뮬레이터의 한 종류인 '스페이스 월드'는 체험형 레저시설이라 고도 불리우는데 이곳에서는 미리 프로그램된 과정을 시뮬레이터로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객의 의지에 따라 대상의 운동이나 상활이 변하도록 하는 피드백 장치가 시도되고 있다. 이는 마치 컴퓨터가 이해되는 데 컴퓨터 오락이 큰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VR이 보통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도 오락과 레제 분야에서는 VR을 구체화 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연구비가 투입되고 있는데 아직까지 VR오락이 흡인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는 그동안 등장했던 첨단의 오락기 들이나 레저용 디스플레이에 익숙해진 일반인들이 이제 막 초보적인 단계에 들어선 VR게임이 어설픈 화면에 쉽게 설득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6) 사실감을 추구 목표로 한 기술 별도의 장소에 있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이 원격지 화상 회의의 큰 목표다. 종래 텔레비젼 회의 모습을 표시할 뿐 이고 배경이 달라 한자리에서 회의한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이 기술이 보편화 된다면 현재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재택 근무는 좀더 본격화될 수 있다. 우선 가상의 회의실을 만들어 실공간과 같은 조명조건을 주고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을 이용, 실제공간에 있는 책상이나 의자 등의 연속성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인물을 영사한다. 또 인물도 같은 조명조건 내에서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을 구사해 표시한다. 실제 공간에서의 인물은 입체적으로 존재하고 파악되지만 지금까지의 디스플레이는 이를 평면으로만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을 응용한 원격지 화상회의에서는 실제와 같은 입체감이 표현되도록 한다, 이것은 수신자측에 3차원 모델을 준비하고 상대의 얼굴 크기나 복장색 등을 합해 모델을 변형시킨 후 가상 회의실에 영사하도록 해 시각적 상호작용을 만든다. 예를 들어 A라는 인물이 B라는 인물을 볼 때 B는 상대방의 시선을 느끼고 A의 방향을 향하며 또 제3자 C도 이 시선의 오고 감을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가상 현실의 응용에 있어 사실감의 추구를 목표로 한 것이다. (7) 군사분야 군사분야에서는 입체영상 활용도가 눈여겨 볼만하다. 근래에는 항공 촬영된 3D입체 사진을 이용해 적 지역의 정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형의 구조물과 형태를 3차원 정보로 저장함으로써 지질 형태를 보다 더 생생한 이미지로 관찰할 수 있다. 최근 미국방성은 스테레오 그래픽스사의 크리스탈아이즈 가상 현실시스템으로 성공적인 군사작전과 모의 전쟁 실험을 시행했다. 이 모의 훈련은 항공모함이 작전을 위해 가고 있는 동안에도 항공모함안에서 원격으로 할 수 있다, 이 기술이 좀 더 본격화된다면 가상 환경에서 실시간에 필요한 모든 훈련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8) 로봇 원격 조정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리모콘 사용에 익숙하다. 텔레비젼이나 오디오 등과 같이 가까이 있고 정지한 상태의 제어는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먼 거리에 있는 움직이는 기계라면 사정이 다르다 이같은 기계를 조종하기위해서는 간단한지 않은 원격조작(teleperation) 기술이 필요하다. 인간이 직접 들어가거나 다룰수 없는 환경의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자로 내의 냉각로를 교환하거나 해양의 바닥에 파이프 라인을 세우는 작업 또는 극히 위험한 폭발성 물질을 다루는 작업에 사람이 직접 투입된다는 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가진 유연성과 판단력, 정밀함 등이 반드시 요구된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느 도저히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술이 가상현실의 한 분야로 연구되고 있다. 미래에는 모든일을 자동으로 처리해 주는 로봇이 등장하겠지만 현 상태에서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로봇을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대안으로 개발중이다. 이 시스템이 바로 로봇에게 지능을 부여해 인간과 비슷하게 움직일 수 있는 팔을 가진 원격로봇(Telerobot) 이다. 이러한 로봇을 먼 거리에서 조종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직접 작업을 하는 듯한 착각이나 자신이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것을 원견 임장, 혹은 원격 존재라고 부른다. (9) 우주항공 및 과학분야 우중항공 및 원격응용 등의 과학 분야에서도 입체 영상은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우주과학에서의 3D입체 사진은 행성의 탐사나 분화구의 관찰에 이용된다. 미국 항공우주국에서는 달탐험 임무수행시 달표면에 첫발을 내디디는 장면과 무중력 상태에서의 골프 스윙과 같은 입체사진을 촬영해 왔으며 최근에는 목성과 해왕성의 근접통과 때도 입체영상을 시도했다. 이러한 형태의 연구는 한 행성 내의 분화구와 다른 표면의 깊이를 측정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행성표면에 대한 입체사진 촬영법 기술은 보다 생생한 지도를 그릴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그곳을 직접 탐험하기 전까지 표면 상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NASA의 제트 추진연구소에서는 마젤란이 지구로 보내오는 금성의 사진을 정확히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스테레오그래픽스사의 입체시각시스템을 사용한다. 이 응용에서 둥근 돔이나 단층처럼 점진적으로 변하는 형상의 지리학적 모양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한 추가 정보가 제공된다. 예를 들어 화산의 2차원 영상을 보는 과학자는 2차원 영상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동심원에서 색깔차이에 대한 이유를 해석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3차원에서 같은 영성을 보면 내부의 원이 원추형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화산 핵심 구조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미국 항공사인 록히드사는 우주 시스템부의 태양판넬에 대한 검사응용에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기술 응용전까지 검사자는 각 태양판넬의면에 있는 많은 수의 회로가 단절됐는지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미경을 통해 판넬의 앞뒤로 움직여야 했다. 이로 인해 검사자의 피곤과 잦은 오류가 발생했었으나 이제는 현미경 대신에 입체 비디오시스템을 대치시켜 작업자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앚아 편안히 검사할 수 있게 되었다. 6) 가상현실의 문제점 이러한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가상현실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되어진다. 특히 가상 현실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줄수도 있다. 며칠전 쯤 논문에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볼려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채널69'라는 제목의 테잎을 빌려주었다. 내용은 뉴스에 식상해 있던 전직 PD가 조작된 뉴스에 대해 반감으로 9시 뉴스시간에 컴퓨터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이동 방송국을 만들고 해적전파를 띄워 성인용 프로그램을 보내어 이 사회를 비꼰다는 조금은 황당무개 하지만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바로 "나는 나의 동정을 사이버 섹스를 통해 샤론스톤에게 줄거야" 하는 대사이다. 그런데 현재 인터넷이라든가 아니면 가까이에 용산에 가더라도 CD-ROM을 통한 2차원적 음란물들이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아무런 제재 없이 10대들에게 파는 것 또한 목격하였다. 그렇다면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실용화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가상 현실은 의학분야라든지 학문 과학 분야에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이버 섹스라든지 폭력성이 다분히 있는 게임등을 통해 청소년들의 정서는 망가질 대로 망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에는 텔레비젼이나 비디오, 영화 잡지 게임등을 통해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는데 가상현실이 바로 이것을 더욱 부추길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상현실 게임이 폭력용 주제로 다루는 내용이 많아 이들의 범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학부에 있을 때 미션스쿨에서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성적인 행위를 하고 싶을 때가 음란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 라고 대답한 경우가 60%이상이 된다는 것이며 폭력에 대해서는 폭력용 게임을 하고있을 때 이와 같은 폭력을 하고 싶다는 아이들도 절반 정도는 되었고 심하면 자기와 그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느낌까지도 받는다고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가상현실은 또한 중독성이 강해 중독될 경우 마치 마약처럼 인간의 정서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한다. 가상 현실이 사이버시크니스(가상질병, Cybersickness)를 유발시키고 있다. 가상 현실 시스템이 많이 보급되는 만큼 그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사이버 시크니스의 증세는 다양하다. 가벼운 현기증에서 두통 구토 시력장애 방향감각 상실 등이다. 특히 현실감각의 적응이 빨리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며 전문가들은 "가상현실 시스템을 사용한 뒤 현실세계에 적응 못해 몇시간 동안 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Ⅲ. 21C와 목회(멀티미디어 중심으로) 1). 21C의 목회 멀티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멀티미디어는 하나의 사회적 강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삶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멀티미디어를 모르면 세계를 모르고 멀티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마치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처럼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정보와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상식에 뒤지는 사람이 되는것이며 삶의 다양한 기능에 있어서 후진성을 면할 수 없다는 위기감까지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신학적, 종교적, 처학적 상상력의 빈곤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자동화, 기계화된 정보사회에서는 그것을 다룰 수 있는 테크닉만 알면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성찰 사색 명상의 중요성 신존재를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될 수 있다. 멀티미디어의 보편화는 인간을 도덕적 인격적으로 보다는 기계적 기능적으로 평가하는 풍조를 조성할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기계가 인간을 조작하는 비극이 초래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일상의 윤리와 도덕적 자질에 대한 가르침도 멀티미디어로부터 제공받게 된다. 과거의 종교적 견해를 대신하는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새로운 종교로 멀티미디어가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멀티미디어는 더 이상 인간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역할가지 대신하는 메신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오늘의 목회현장을 향한 하나의 문화적 도전이다, 이 도전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서 극복해 내려면 목회적 차원에서 현대문명에 대한 건전한 비판적 시각이 형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스스로의자기 갱신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목회는 멀티미디어를 바르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멀티미디어의 세계가 이루어나가는 기술의 자동적 증대성에 대한 비판 능력도 필요로 한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목회는 더욱 강한 인격성,공동체성, 진실성, 거룩의 체험, 등을 나누는 신앙 공동체 형성에 목회적 역량이 모아져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바르게 수행하기 하려면 오늘의 목회현장 속에서 문화 비판적인 통찰력이 운용됨은 물론 기존의 목회에 대한 냉철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멀티미디어 시대의 인간들도 여전히 인간이며 여전히 구원의 복음과 복음을 통한 해방적 사역을 필요로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우리는 과거에 체험하던 신앙세게보다 더욱 폭 넓은 의미에서 새로운 신앙세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더욱 강한 신앙적 체험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2) 가상 현실과 목회 (1)교회에서의 활용 가상 현실이 우리 생활속에 파고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의 되어진 과학 기술의 진보에 의하며 빠르면 5년안에 실생활속에 깊숙히 파묻힘 것이고 컴퓨터 역시 커다란 것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컴퓨터가 실용화 될것이고 음성을 인지하는 컴퓨터 시스템이 우리생활과 관련이 되며 우리는 컴퓨터와 대화하며 살아갈지 모른다. 개인화가 이루어지고 공동체 생활이 약해 지며 가족이라는 최소 사회집단의 개념까지도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인해 인간의 손과 발은 점점 퇴화될 수 있고 또 신을 생각하는 사고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컴퓨터 즉 멀티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속에서 가능한 일이며 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 가상현실 즉 VR기술이 한몫을 하리라 생각이 된다. 우리는 다가오는 21세기 목회에 있어서 한발 앞서가야 한다. 즉 가상현실을 무조건 비판한다기 보다는 장단점을 골고루 알아내고 목회에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컴퓨터 특히 본인이 다루는 가상현실부분에 있어서 많은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야말 할 것이다. 특히 지금의 신세대들을 위한 선교방향이라든지 아니면 시대에 뒤지지 않는 교회가 되기위해서는 교회에서 자체로 그것들은 준비해 나아가야 한다. 먼저 나는 교회에서 가상현실의 프로그램을 교회에서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애배당이나 교육관을 건축할 때, 혹은 교회의 조경사업, 기동원시설의 장단기 계획을 세울 때 가상현실은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즉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프로그램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가상현실을 실용화하고 전도의 도구로서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게임기의 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게임은 청소년들이 쉽게 친해지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시기에 중요한 청소년 선교의 한 도구가 되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성경의 내용을 게임화한다든지 (예를 들면 다윗과 골리앗 게임,노아의 방주등)해서 성서의 내용에 친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또한 가상 현실을 통한 예배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에 대한 찬반 양론이 펼쳐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장애인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은 예배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서 이용될 수 있다. 즉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어떤 예배도 시행할 수 있고 또한 예배 참석자에게 여러 가지 선택의 폭을 주어 예배에 흥미를 준다는 점도 있다. 또한 개발되어야 할 프로그램이 있다면 바로 성경에 바탕을 가상현실의 프로그램화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 하기를 원하고 아픔을 같이 나누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상상해 보라. 만약 우리가 엑소도스를 경험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그 커다란 대열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길을 떠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는 데 내가 가서 옆에서 있다면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레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는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내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 개발되어야 할 것이 성지에 대한 가상현실 프로그램화이다. 실상 신학도로서 성지에 가보고 싶지만 시간도 없을뿐더러 경제적이 어려움에 봉착하는 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완성이 된다면 우리는 멀리까지 시간을 허비하며 다녀올 필요가 없다.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 성가대원이 찬양을 개별적으로 연습할 때도 유익할 것이다. 가상현실을 통하여 오케스트라를 연주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파트만을 연주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은 교회 교육에도 유익을 줄수 있다. 다윗과 골리앗이 나오는 성경을 말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가상 현실로 제공하면 실제로 옆에서 구경하는 듯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다윗이 되어 골리앗과 겨루어 본다면 그 느낌이 어떨까? 가상현실은 새신자 양육에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말로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에게 가상현실을 통하여 경험하게 함으로써 좀더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도록 이끌수 있다. (2)문제점 교회에서도 이처럼 많은 부분에서 많은 유익함을 주고 있으나 반면에 단점들도 내비친다. 먼저 가상현실을 통한 예배로 인해 코이노니아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즉 가상 현실을 에배로 제공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예배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앙의 개인화가 이루어 지고 이러한 개인화현상으로 교회 공동의 친교의 기능인 코이노니아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혼자서 가상현실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습관이 몸에 배면 오히려 사람과 만나서 교제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교회라는 개념이 사라질 것이고 목회자들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한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대면하는 기회가 적어져서 결속과 연대의식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됨으로 목회자 고유의 권한인 설교의 권한이 약화되고 치유목회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것이라는 우려도 된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히 목사님과 성도들 사이에 대면하는 기회가 적어져서 결속과 연대의식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이야기 한 부분과 겹쳐지겠지만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는 재택예배로 인한 에배당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들수 있다. 한 때 미국의 빌게이츠는 사람들이 TV나 비디오가 생기면 극장이 모두 없어질 것으로 전망하였으나 그것은 기우였으며 아직도 극장은 건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멀티미디어가 본격적으로 생활하되면 재택근무가 늘어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