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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총서 현대신학개설 2004-03-05
개혁주의 신학총서 현대신학개설 2004-03-05 11:19:27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57년 1월에 한국 개혁주의 신행협회가 탄생하였다. 근 30여 년 동안 이 신행협회가 자라오는 어간 약 100종의 책을 출판하였고, 학술 강연과,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급여하며, 멀리 인도에까지도 개혁주의 문서 출판 을 위해서 기금을 보내 주기도 하였다. 1978년도에는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와 선교사 등 59명을 동원해서 `신학사전`을 출판하여 개혁주의 신학 운동에 이바지하였다. 이 책이 호 평리에 널리 보급되는 결과를 보고 힘을 얻어, 본 신행협회에서는 한국 신 학계에 신학 교재의 빈곤을 뼈저리게 느끼고 신학 교재 출판을 위해서 노 력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신학 교재들이 많이 출판되었으나 주로 번역물 이어서 우리의 실정에 맞는 신학 교재의 출판이 크게 요청되었다. 신학 교재 편집위원 3인(오병세, 차영배, 전호진)이 여러 방면으로 검토 한 결과 제목, 집필자, 출판에 관한 제반 사항을 확정지어 21명의 한국 신 학자들로 하여금 21개 교재에 대해서 집필하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들리는 소리가 `개혁주의 신행협회`에서 출판되는 책들은 안 심하고 읽을 수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책들은 신학 교재로 출판되 었으나 표현을 비교적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신 학생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성경학교, 그리고 각 교회의 교회학교의 교재 로서도 사용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 교재의 제6권으로 김의환 박사님의 `현대신학개설` 책 이 출판된 것을 독자들과 함께 기뻐한다. 고신대학에서, 편집 위원장 오병세 예수 지상주의적 성격이 특히 Moravian 경건주의 운동에 두드러지게 나 타났다. 예수 체험이 지나치게 강조되었기 때문에 이 운동을 H. Richard Niebuhr는 `삼위일체 중의 제2위에 대한 Unitarianism`으로까지 불렀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구속의 적용자로서의 성령님은 거의 도외시된 채 구 주 예수에 대한 관심 일변도의 신앙 체계를 확립되었다. `성경은 사람의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다. 인간의 미덕이 아니요 우리를 어둠에서 영광스런 빛으로 인도하신 그 분의 미덕을 예찬하는 책이 다.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을 담은 책이다.` Barth는 이러한 신본주의적 입장(신본주의적입장)을 점차 성경 연구와 설교를 통하여 발언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유럽을 지배하던 인간 중심적인 자유주의 신학에 일대 폭탄적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로부터 Barth의 신학은 `말씀의 신학`이 되었 다. 자유주의 신학의 주관주의적 계시관에 반하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 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성경 자체가 계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 한 증거이다`라고 한바, `예수의 부활을 신문 기자가 취재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믿느냐?` 고 물을 때 Barth는 부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로서는 예수의 부활이 Historie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역사성의 강조는 Barth로 하여금 노스틱주의 (Gnosticsm)의 문제점이었던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를 위험하게 만드는 결과 를 초래하였다. Barth는 하나님의 초월과 자유를 강조함으로 직접 계시를 부인하였다. 그 결과 그는 자연 계시의 타당성이나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성경은 계시 자체가 아니라 계시에 대한 증거요, 지표에불과하며, 하나 님은 절대자이시요, 자유로우시므로 성경에 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정통 주의가 성경을 계시와 동일시함으로 성경을 Paper Pope로 모시는 성경 우 상주의(Bibli- cism)에 빠져 있다고 비난한다. 그가 자연 계시를 인정한 Brunner는 비판하면서도 비신화화론을 주장한 Bultmann에게 관용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신학적 천재성이 인정되어 1930년 그가 24 세때 Berlin 대학 조직 신학 교수로 발탁되었다. 옥중 서신에 부각된 Bonhoeffer 상은 인본주의적 신학자, 그외에 아무것도 아님이 분명하다. 자유주의가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고 부흥회 운동이 인간의 감정을 강조 하는 주관적인 신앙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양자는 일치한다. 그러나 교리 적 확신이 없는 체험만의 강조가 위험한 신앙임을 깨달은 후에 신앙적 체 험을 척도로 바로잡아 주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Hodge는 신학의 합리성을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조직 신학을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진리를 주셨다. 그 진리는 합당하게 이해되고 체계화되면 신학의 과학(the science of theology)을 성립시킨다. 자연 사물이 물리적 법칙에 의하여 서로 연관되고 결정되는 것처럼 성경도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본성에 의 하여 서로 연관되고 결정된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된 만물을 연구하여 그 들의 놀라운 유기적 관계와 조화를 발견하도록 원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배워서 진리란 끝없는 조화와 장엄함 속에 엮어 지는 조직이요 체계란 사실을 깨달을 것을 원하신다.` 예수의 초자연성만이 한 인간의 자연성보다 믿기는 어려워도 반드시 믿 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자연인 그리스도에게서는 구원의 복음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는 항상 순결(Purity)과 연합(Unity)의 긴장 속에 발전되어 왔 을진대 양자의 조화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 전자를 택한 Machen을 분열주의자로 정죄하는 교회사적 무분별은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Machen은 자기의 소속 교회였던 미국 장로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축출 되어 나갔을 뿐이다. 그리고 축출된 이유는 오직 교회 내의 자유주의 신 학에 대한 그의 비판적 입장 때문이었다. Berkhof의 20여권의 신학 서적 중에서 특히 `조직 신학`은 미국 복음주 의 신학교에서 가장 널리 쓰여지고 있다. Francis Schaeffer의 저서들은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2백만권 이상이 지난 10 년간에 팔릴 만큼 선풍적 인기를 모은 이 시대의 선지자로 알려지고 있다. John A. T. Robinson의 `Honest to God`는 Harvey Cox의 `The Secular City`와 함께 세속화 신학을 대중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들은 교회와 세속의 구별을 거절하고 초월적인 신 존재를 믿는 신앙을 경멸한 다. 먼저 기독교는 초자연주의를 배제하는 체질 개선을 통해 이 시대에 적응 하는 작업을 하여야 된다고 한다. 거룩한 소재는 지성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 속의 한복판에 있으며,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이웃을 위한 봉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크리스챤의 생활은 세속적 성결(Worldly Holiness)의 삶이요 그러므로 우리 때에 할 일은 과거의 신화적인 미신 신앙을 버리고 과감하게 생활 속에서 신과 만 나는 신앙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생활 전체가 신을 만나는 생활 신학이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천국의 실재성을 일괄적으로 부인하고 이 모든 것을 다만 상징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만 이해하여야 된다고 한다. 개관해 볼 때 신에 대한 솔직한 신앙으로 동기된 `Honest to god`는 `솔 직한 불신앙`으로 일관된 세속화 신학의 한 장을 이루고 말았다. 급진신학은 현세주의적이며 합리적이다. 신학에는 반드시 성경적 전제 가 선행되어야 하며 거기에 대한 신앙 다음에 오는 이성을 통한 사색은 어 디까지나 계시 의존 사색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급진신학은 역사적 기독 교의 삼위일체 신관을 경험적인 기독관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이웃을 향 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노래하면서 그 사랑의 주체인 그리스도의 주체성 (Identity)은 불문에 붙인다. 급진신학은 낙관주의로서 Teilhard의 진화적 비전에는 죄악의 뿌리가 경 시되고 있다. 과학적 발달에서 오는 인간 가능성의 과신이 죄로 말미암아 입고 있는 인간의 근본적 문제점을 외면케 하고 있다. 좋은 침대에 누웠 다는 사실이 결코 병자를 저절로 낫게는 할 수 없다. 급진 신학의 결정적 약점은 죄의 문제를 지나치게 가볍게 취급한데 있다. 창조계의 조화와 완 성은 죄에 대한 심판 다음에 올 것을 알아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주 님이 가지고 올 것을 약속하였다. 성경은 하늘나라의 현재성과 내세성을 동시에 가르치며 구원과 심판을 가르친다. 성경과 교회사는 지상 유토피 어의 약속이 없다. 신복음주의 비판 신복음주의는 어느 극단의 보수 신학자가 말한대로 이단에 가까운 것인 가? 아니면 이단은 아닐지라도 길을 잘못 든 탈선된 복음주의 운동인가? 오늘날 신복음주의 운동은 일부 보수 교회에서 거의 타부시되고 있는 실정 이나 그 운동의 성격과 한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따르고 있다. 미국의 Bob Jones 대학교에서는, 그 대학교가 소재하여 있는 Greenvile 도시에서 1966년에 Billy Graham 박사의 전도 집회가 개최되었을 때 대학 생들에게 전도 집회 참석은 물론 그 전도 운동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엄 금하였다. 그 대학교 총장인 Bob Jones 박사는 반대의 변을 `Billy Graham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대하여 생존한 어느 사람보다도 더 손해를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Graham and Greenville`, Christianity Today, Vol. X. No.13, April, 1966, p.44.) Ashbrook은 신복음주의의 네가지 죄를 지적하고 있다. 그 잘못이란 첫 째로 자유주의(자유주의)와 협력, 둘째로 지적(지적)인 교만, 세째로 죄 (죄)에 대한 관용, 네째로 말씀에 의한 심판을 자초(자초) 등이라고 한다. 근본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은 오늘의 근본주의의 정신 구조에서 소아병 적(소아병적)인 부정주의(부정주의)를 염려하고,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부정`을 위한 `긍정`의 철학을 모색하기에 힘썼다. 지난날 자유 주의의 탈선과 더불어 싸워 온 가운데 이러한 부정주의가 하나의 `멘탈리 티`로 체질화 되어버린 것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Ockenga는 이와 같은 오늘의 근본주의가 근본적인 자체 개혁이 없는 한 미국 교회에서 승리할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빌리 그래함적인 협력 전도가 성경적 방법인지에 대하여 학자들에게 크 게 의심과 도전을 받고 있다.(Gary G. Cohen, Biblical Separation Defended, Cohen은 본서에서 협력 전도에 대한 10가지 반론을 펴고 있다. 한글 번역판 `신복음주의 비판`, 김효성 역, 성광문화사, 요약자) 신복음주의는 성경관에 있어서 근본주의가 믿어 온 축자 영감설(축자영 감설)에 동의하기를 주저한다. 그리고 유신적인 진화론을 주저없이 따름 으로써 과학적인 결론 앞에 성경적 창조설을 쉽사리 던져 버리고 만다. Westminster 신학교의 대부분의 교수들이 종말론에 있어서 무천년설을 주장하고 주초(주초)와 극장 출입 문제에 자유로 규범화하는 것에 반대하 므로 1939년에 Carl McIntire, A.Mac Rae등이 중심이 되어 성경 장로 교회 를 세워 따로 분리하여 가면서 Faith 신학교를 세웠다. 20년이 채 못가서 Faith 신학교는 행정 문제로 분리되어 Saint Louis에 Covenant 신학교가 세워지면서 복음장로교회가 따로 생겼다. 남북 장로교회의 총회 합동을 계기로 남장로 교회에서 분리한 미국 장로 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와 합동하여 Covenant 신학교는 P.C.A. 직영신학교가 되었다. 장로 교회의 경우보다 침례 교회의 경우, 근본주의를 따르는 목사들은 침례 교회의 독립주의적 정치 원리에 따라 더 많은 분리 현상을 빚었다. 그 대표적인 교단으로 The General Association of Regular Baptist Church는 1932년에 세워졌고, The Conservative Baptist Association of America는 1947년에 세워졌다. 이렇게 하여 `싸움과 분리`가 1930년대 이후의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처 럼 되어버렸다. 이러한 분리로 이루어진 `분산된 힘`의 결속을 위하여 조 직적 연합체의 구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1941년에 America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조직되었다. C. MacIntire 의 주도 아래 W.C.C.를 대항하기 위하여 I.C.C.C.(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1948년 Amsterdam에서 조직되었다. McIntire가 지도자로 부상된 근본주의 운동은 Bob Jones University와 Faith 신학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양상의 근본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여 갔 다. 그들은 완전 분리주의를 주장하여 W.C.C.계에 속하여 있는 목사들이 관 계한 어떠한 회의나 프로그램에 동참하는 것은 그들의 완전 분리 원칙에 위배되므로 Billy Graham 전도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뿐아 니라 Billy Graham의 모교인 Wheaton 대학이나 Graham을 지원하는 Fuller 신학교 및 Christianity Today 등의 모든 기관을 정죄하였다. 1974년에 Billy Graham이 주최한 Lausanne 대회에 Mc Intire는 몇 사람과 함께 직접 피켜을 들고 반대 시위하였다. 완전 분리를 최대의 미덕으로 내세운 전기 신근본주의와 달리 1970년대 에 들어와서 정치 참여에 적극성을 띠고 분리와 함께 참여를 강조하는 운 동이 일어났다. 배도 교회(배도교회)에서 분리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 라 세속 사회에 기독교 원리를 적극적으로 반영시키기 위하여 조직과 매시 미디어를 동원하여 공격의 고지를 점령하자는 선교 전략을 활용하는 운동 이다. Jerry Falwell의 Moral Majority 등. 근본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전체 미국의 사분의 일이 넘는 실정에서 이들의 사회적 공헌은 기대하여 볼만하다. 그러나 정교 분리가 헌법으로 규정된 미국 사회에서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는 낙관을 불 허한다. 신근본주의 운동의 약점은 부정적 사고 방식으로 오늘날 I.C.C.C. 운동 이 현기증이 나리만큼 자체 분열을 거듭하는 현실에서 신근본주의의 파선 현장을 보게 된다. `신학적인 깡패, 연합운동의 방해자, 문화의 낙후자, 반과학, 반지식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지을 수 없게 한다. 항상 성경을 자기편에 두고 상대방을 비성경적인 이유로 비판한 습성이 어느덧 체질화 되어 자신의 비성경성을 돌아보는 자기반성의 결핍을 가져 오게 하였다. 자기반성의 결핍은 자기편에 속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수정 과 개혁의 대상이 되지만 자기편에 속하면 그것으로 벌써 자기 수정의 필 요성을 상실하여 버린 것이다. 자유 신학 자체를 신학 발전의 결과로 보고 신학 연구를 멀리 하거나 아 예 신학 교육을 포기한 채 성경학교(Bible Institute)를 많이 세워 전도 자 양성에만 더 주력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20세기 후반기의 싸움터에서 제1차 대전의 무기만을 가지고 싸우려 는 자기 어리석음에 비유할 만하다.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적이 누구인지 를 아는 것도 중요하나 적이 쓰는 무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박형룡의 신학과 사상 이성의 한계성은 인간의 피조성 때문이다. 계시는 마음에게 진리의 시 달이다. 그러나 그 진리의 시달은 그것을받을 재량을 추상한다. 계시는 짐승에게나 백치에게 주어지기는 불가능하다. 진리들은 신앙의 대상들로 수납되기 위하여 반드시 지성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은 상당한 이유에 의하여 진리를 이지적으로 수납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도무지 `상당한 이유 없이` 신앙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의 증언에 의하여서만 이러한 이성의 인식 작용이 가능한 사실을 지적한 다. 오늘날 신학자의 병(병)은 자신의 학적 우위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교회 와 상관없는 신학자들만을 상대로 하는 신학 운동을 하는데 있다. 자기의 신학적 주장이 교회에 미치는 해독을 전혀 생각지 않고 창의성(창의성)<신 학은 발명해 내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발견해 내는 것이다>의 이름으로 교회에 함부로 소개될 때 결국 신학의 이질적 타락이 교회의 쇠퇴를 가져 오고 만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독일 교회에서, 그리고 미국의 기성 교단에 서 뼈아프게 보고 있다. 교회는 신학자들의 신학적 실험(실험)대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생명체이다. 그러기에 신학자의 사명은 오직 주어진 Text를 가지 고 교회의 유지와 성장을 위하여 바로 가르칠 것밖에 없다. Context가 Text를 고치게 <로마서 1장의 동성애 문제 등>할 아무런 권리도 주어 있지 않다. 신학자들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위한 신학자이어야 한다. 이종성에 게 취약점으로 보인 박형룡의 신학은 바로 그의 강점이었을 뿐이다. 박박 사가 기독교 변증을 위한 설교를 할 때는 조국 교회의 장래를 걱정하며 우 시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현재 합동측 교단이 민족 복음화라는 전도적 차원에서 WCC계의 교회들 과 조직적이 아닌 기능적 연합 사업을 찬송가 공회나 `여의도 전도 집회` 나 장로교 협의회 등의 이름으로 함께하는 것은 박형룡의 척도대로 하면 다 정리받을 일들이다. 박형룡은 그의 `현대 신학 비평` 하권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 운동의 비 참한 결과들`이란 제하에 Billy Graham 운동은 1)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 이의 역사적 분계선을 파괴하려는 고의적, 조직적 시도이다. 이 전도 운 동은 헤겔의 정(정), 반(반), 합(합)의 원리에 따라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의 종합의 상징이다. 2) 빌리 그래함의 정책은 모든 분리 운동에 직접적 반항이 되어 왔다라고 비판하였다. 교회사는 항상 교회의 순결(Purity)과 연합(Unity)의 사이에서 움직이는 진자(진자)의 움직임을 목격하여 왔다. 순결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연합 이 깨지고 연합을 너무 강조할 때 순결에 오염이 온다. 민중 신학 비판 민중 신학과 해방 신학은 신학이 계시에 의하여 출발하지 아니하고 어떤 정치적, 사회적 상황하에서 출발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민중 운동의 요구에 부응하여 전통적 기독교를 수정하여 재 해석하려는 노력 속에서 완전히 탈기독교적 인본주의의 신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중 신학은 비신학화(비신학화)를 주장하여 모든 신학적 전제를 부인한 다. 기독교의 수직성이나 초자연성을 부인하고 모든 기독교 진리를 정치 적 차원에서 평면화(평면화)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 아 니라 정치적 동기에서 살해 되었다고 보고 그의 부활도 민중의 인권 회복 과 관련시켜 해석되어지고 있다. 성경을 전체적, 구속사적 조명 아래 보려하지 않고 민중 신학 확립을 위 하여 필요한 부분만 선택적으로 사용하여 콘텍스트(Context)를 위하여 텍 스트(Text)를 끌어들이려는 오류를 범한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동향 김의환 편저 생명의 말씀사, 1990년 10월 30일 발행 장로교 총회는 1922년 교회당 34개처, 목사 5인, 장로 8인, 소학교 6처, 야학교 35처, 주일학교 15처, 등록 교인 1,935명이 넘는 교세를 얻게 되 어 드디어 시베리아 노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장로교 총회는 1912년 총회 조직을 기념하여 중국 선교를 결의하고 그 다음해에 김영훈(1877-1939, 평북 의주) 사병순(1878- ?, 평남) 박태로 (1870- ?, 황해도 황주) 세목사를 선교사로 중국 산동 지방에 파송하였다. 선교 30년이 지난 1942년 통계에 의하면 교회 36처, 세례 교인 1,716명으 로 증가하여 중국 선교 사상 큰 기적을 낳았다. 1917년엔 방효원 (1886-1953, 평북 철산, 산동성 선천 부산서 목회) 홍승한(1881-1958, 평 북 철산, 대구 산동성 철산 만주 부산 목회) 두 목사를 증파하고 1918년에 는 박상순 목사(1887- ?평양, 해방후 기독교도연맹 위원장)를 다시 파송하 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 목사(1887-1968, 1956년 예장 총회장, 나중 합 동측에 가담)를, 1931년에는 김순효 여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였다. 부정적인 면은 소명감만 있고, 선교 지원만 하면 받아서 지원비만 마련 되면 파송을 하므로 선교지에 가서 많은 시행 착오가 있었다. 미국 최대의 영향력을 가진 두 개의 교파가 그들의 선교 예산을 1971년 이후 매년 25% 이상씩 삭감시킨 것이다. 미국 연합장로 교회 총회는 선교 부 자체를 없애 버렸고 하트포드에 있는 케네디 선교 대학원은 문을 닫은 지 벌써 몇 년이 된다. 미국 N.C.C. 산하의 선교 인원은 지난 5년 동안에 9,298명의 선교 인원 중 그 절반 이상을 철수시켰다. 서울의 교회는 지난 29년 동안에(1973년 기준) 120배로 성장했다. 16개 교회에서 2,000 교회가 넘었다. 서울 교회의 자연 증가율은 일년에 13%를 넘는다. 그것은 3일만에 교회가 두개씩 늘어 간다는 말이 된다. 한국의 신학자 수는 아시아 전체의 신학자 수보다 많다. 1957년 미국 연합 장로교 총회 선교부가 한국에 송금한 선교비 총액은 636,923불이었는데 그 중 465,243불(73.0%)이 선교사의 생활비와 그들의 한국 사무실 경비로 사용되었으며, 대학교와 고등학교를 60,175불, 신학교 를 위하여 24,900불, 의료 사업을 위하여 23,000불이 지불되었다. 그리고 전도를 위한 지출은 총예산의 0.8%인 단 4,800불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 지 선교비의 운영 실태는 우리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 정책 수립에 커다란 경종을 울려 주는 부정적 실례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교회 성장률은 인구 성장률을 600% 앞지른다. 한국의 신학생 수 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신학생 수를 전부 합한 것보다 많다. 대형화 치닫는 한국교회 교인수 세계50위에 26개 올라 1890년 불과 265명의 교인으로 출발한 한국개신교는 이제 1천만명을 헤 아리는 엄청난 교세로 성장해 있다. 대개 10년단위로 배가되던 교인수는 70년대 와서는 220만명에서 7백20만명으로 무려 세배를 웃도는 폭발적 증 가세를 보였다. 1984년 통계의 교인수기준 세계20대교회에는 1위인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비롯해 한국교회가 6개나 포함돼 있었다. 교단을 무시한 개교회의 독주, 물량주의, 신비주의에의 함몰, 기업화, 목회자와 교인간의 인격적 만남이 결여되는데서 오는 교육훈련의 부실화등 을 대형교회가 부를수 있는 치명적 약점으로 지적했다.
미(美)를 가진 자가 부(富)도 갖는다/ 매력 자본/ 2013-02-14
미(美)를 가진 자가 부(富)도 갖는다/ 매력 자본 비만인 사람들의 연봉, 평균의 86%에 불과 취업·승진에도 영향 미쳐 사교술·유머도 매력에 포함 이사벨과 파멜라는 두 살 터울의 자매다. 둘은 대학에서 각자의 길을 갈 때까지 비슷한 환경에서 생활했다. 둘은 공학과 자연과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 둘의 삶은 판이하다. 이사벨은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돈을 잘 벌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닌다. 남자친구도 끊이지 않는다. 파멜라는 직장을 계속 옮겨 다녔고, 주로 전문직의 보조 역할이나 단기 프로젝트에서 일했다. 영국의 사회학자 캐서린 하킴(런던 정책연구센터 연구위원)은 이를 ‘매력자본’의 차이로 설명한다. 둘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지적 능력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이사벨은 영리해서 빨리 공부를 마쳤으나 파멜라는 여러 해가 걸려서야 학위를 땄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금발 곱슬머리에 백옥 같은 살결과 푸른 눈을 가진 이사벨은 어릴 때부터 예뻤다. 성격도 활달했고, 외모를 가꾸는 데 공을 들였다. 이에 비해 파멜라는 진한 밤색 직모에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파멜라는 덩치가 크고 평범했으며 때로는 뚱뚱하게 보였다. 성격도 소심했다. 이사벨은 뛰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발랄한 성격과 외모, 사교 스타일을 형성한 반면 파멜라는 일찌감치 그런 노력을 포기해 직업적·사회적인 성취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킴은 분석한다. 그가 말하는 ‘매력자본’은 아름다운 용모와 성적 매력, 자기표현 기술과 사회적 기술 등을 합친 개념으로 하킴이 2010년 옥스퍼드대 저널 ‘유럽사회연구’에 발표했던 논문의 제목이다. 하킴은 이 논문을 바탕으로 출간한 책 《매력자본》에서 매력자본을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에 이어 제4의 개인자산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에는 외모, 건강하고 섹시한 몸, 능수능란한 사교술과 유머, 패션 스타일, 이성을 다루는 테크닉 등 사람을 매력적인 존재로 만드는 모든 자원이 포함된다. 하킴은 “매력자본은 회의실에서 침실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부문에서 지능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매력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친구 연인 동료 고객 의뢰인 추종자 유권자 지지자 후원자로 만들고, 사생활은 물론 정치 스포츠 예술 비즈니스에서도 더 성공을 거둔다는 것. 매력도 자본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먼저 상상할 수 있는 건 아름답고 섹시한 배우와 모델, 가수 등이 등장하는 연예산업이다. 기본적으로는 섹스산업도 매력자본에 기초한다. 하지만 매력자본의 유용성은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매력자본은 직장생활도 좌우한다.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평균적인 사람들이 100만원을 벌 때 비만한 사람은 86만원을 번다. 또 북미에서는 매력적인 남성이 14~28%를 더 벌고 매력적인 여성은 12~20%를 더 번다. 영국과 미국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매력적인 사람들의 소득이 15%가량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킴은 설명한다. 1991년 영국에서 실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매력적인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에 비해 소득이 20% 많았고 여성은 13% 많았다. 키가 클수록 남성은 23%, 여성은 26% 소득이 높았다. 소득뿐만 아니다. 매력자본은 취업과 승진에도 영향을 미친다. 매력적인 사람들의 취직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10% 정도 높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만난 지 60초 만에 상대방의 인상을 평가한다. 매력자본의 일종인 옷이나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자기표현 방식 등이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책의 서문 격인 ‘매력자본이 왜 중요한가’에 소개된 애나의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애나는 보수가 두둑한 금융업체에서 일하다 실직했다. 다이어트와 꾸준한 운동으로 체중을 줄인 그는 10년은 젊어보였다. 젊고 생기 있어 보이도록 헤어스타일도 짧게 바꿔 면접을 봤더니 3개월 뒤 컨설턴트 업종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잡았다. 연봉은 50%나 올랐다. 관리자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됐다. 응답자의 43%가 옷차림 때문에 직원을 승진에서 제외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20%는 그 이유 때문에 직원을 해고하기까지 했다. 타고난 외모가 볼품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희망적인 것은 매력자본에는 키나 피부색처럼 고정된 특징뿐만 아니라 활력, 사교술, 유머, 예의범절, 춤 실력, 자기표현 기술처럼 배우고 키울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참고: 캐서린 하킴/ "매력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432쪽 서화동 기자
배우 김태희 간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2012-07-18
배우 김태희 간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간증/ 배우 김태희 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국민 여배우 김태희의 신앙고백이 화제다.(63호 6면 참조) 가톨릭 신자 김태희 세례명은 베르다이다. 그녀의 겸허한 신앙고백이 지난 5월 6, 13, 21, 27일 4회에 걸쳐 천주교 소식지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란에 실렸다. 본지는 자료를 입수, 입력․정리하여 게재한다.(편집자 주) 2.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다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입니다. 여름방학에 남동생과 교리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아 첫영성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더 어릴 때에는 조부모님의 종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가끔 절에 따라다니기도 했는데, 어린 내 눈에는 왠지 모르게 성당 다니는 다른 친구들이 예쁜 미사보를 쓰고 기도하는 모습이 부럽고 멋져 보였습니다. 중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땅을 보고 하늘도 보며 걷다 불현 듯 신비스런 기운이 휩싸면서 가슴이 벅차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늘 너와 함께 있다.’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며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나의 경험이 그 날의 기분 탓에 겪은 단순한 감정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증명해 보여줄 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난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놀라운 체험들을 꽤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사롭고 막무가내인 수많은 기도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응답해 주시며 당신의 존재를 늘 내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내가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 하나님 말씀을 모른 척하며 살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 많은 말씀 가운데, 유독 여러 번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난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모자라고 부끄러운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날 사랑하실 거야. 영원히….’라고. 3. 하나님의 훈육방법 삶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절실히 찾게 될 때가 있습니다. 기쁜 일이 생겨 한없이 감사를 드릴 때, 그리고 힘든 일이 생겨 마음이 너무나 괴로울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게 될 때는, 역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뭔가 큰일이 생겼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과연 아무 이유 없이 오로지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이신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고, 마냥 피하고만 싶은 일들도 시간이 흐르면, 그로 인해 내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훈육방법이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예상치 못했던 사건 하나하나가 사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 누구도 원망이나 불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더욱 노력하면서 그 분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우리가 늘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사는 것, 그것 하나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연기’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이 주관하시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연기자로 이끄신 것은 아마도 그것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4.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제대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일주일 단 한 번, 고작 한 시간일 뿐인 미사 시간에 딴 생각을 하고, 자기 전에 달랑 한두 구절의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바라는 것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말로는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말이 얼마만큼 내 진심과 맞닿아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두 달 전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본당의 한 신자로서 청년활동에 권유를 많이 받아왔지만 내가 다른 청년들과 어울리며 신앙생활을 서로 나누고 돕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정기적으로 신부님과 내 또래 자매들과 너무나 즐거운 성서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하나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하나님이란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면서 성서모임은 점점 더 신이 나고 흥미로운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지금까지 나의 신앙생활은, 20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내가 그린 상대방의 이미지만을 보며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한 가짜 연애처럼 해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영적으로 새롭게 내어나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고, 특히 나는 지난 일을 너무나 쉽게 잘 잊어버리는 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주시고, 놀라운 체험으로 나를 깨닫게 해주셔도 또 금세 잊어버리고 제자리걸음만을 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3:8)는 말씀이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바람과 같이 자유롭다는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그 말씀대로 어떠한 제약 없이 눈앞의 일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나를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살면 행복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간절히 원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5.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나는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때로는 남들보다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는 우월감까지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과시하고 자랑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고, 나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봐 혼자서만 조용히 하나님 사랑을 맛보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를 잊고 살았다는 것과 내가 그동안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죄책감입니다. 내 성격은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마음이 내키는 쪽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남에게도 쉽사리 무엇인가를 권유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종교나 믿음 같은 문제는 누가 말로써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님이 쓰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읽으면서 선교 활동에 대해 가졌던 회의적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선교 활동을 할 때, ‘구원’이라는 단어를 꼭 씁니다. 우리 인간이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질문 몇 가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답변을 알아봅니다. 1) 누가 구원되는가?/ 인간이 2) 누가 구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3) 무엇으로부터 구원되는가?/ 죄에 의해 배가(倍加)된 인간의 유한함으로부터 4)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 구원되는가?/ 더욱 정의롭고 보다 형제애적이며 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와 교회에 매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일까요? 솔직히 나는 그리스도교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수없이 많은데, 그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교회에 다니면서도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교회에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교회에 속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목소리인 ‘양심’에 따라 도덕적, 인격적으로 사는 그들의 행위 안에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모른 사람에게 그분을 알게 해주고 싶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마치, 정말 사랑한다면 좋은 것을 서로 나누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려 하시며, 그때 취하시는 길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전부터 나는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잊지 말자!”라고 답해왔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여, 감히 나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내가 느끼는 이 기쁨을 모두가 느낄 수 있게 되는, 나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출처] 배우 김태희 간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천주교 소식지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
행복한 아침/ 3분/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7-28
행복한 아침/ 3분 세상에서 가장 못난 변명이 있다.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둘러대는 변명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고 못난 변명이다. 시간은 우리 삶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이며 인간이 가장 원하고 있는 삶의 길이이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시간을 방목하고 있는 자들의 변명이다. 시간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이 쓴 시에 ‘3분간’이란 시가 있다.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중략)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도장을 찍고/ 악수를 청하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지”(최정례의 ‘3분간’ 중에서)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3분간에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다.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고, 아기도 낳고 전쟁도 일으키고, 죽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하며,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도 하며 3분간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하며 3분간에도 인간은 사건, 현상의 지독한 프로세스를 가질 수 있다. 하루는 24시간 1440분이다. 3분씩 나눈다면 3분간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하루에 480번씩 해낼 수 있다. 정말 ‘시간이 없어서’ 어떤 일을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시간이라는 막연한 존재가 자신의 분신임을 부인하고 있다. 급박하게 다가오는 불행과 걱정 근심들은 사실 오래 전부터 우리가 이끌고 온 잘못된 시간들의 부유물인 것을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시간은 아무런 징후가 없다. 사용하는 자에게 전권을 준다. 또 어느 시인이 쓴 시의 구절에는 이런 질문과 대답이 있다.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시인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해 가고 있다’고 답하고 있다. 소멸을 향해 가면 자기 자신의 소멸로, 죽음만 생각하고 시간을 보낸다면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시간은 자신과 분리된 개념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자가 있다. 그는 분명 신에게로 가까이 가고 있을 것이다. TV와 스마트폰에 온통 시간을 빼앗기는 젊은이들의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알코올과 마약과 쾌락에 시간을 빼앗기는 자들의 시간은 자신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시간의 근저를 따진다면 분명 시간은 구속적이긴 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가고 있는 가장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재료가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자신의 시간을 찾아서 이 뜨거운 여름 단 3분간 시간을 내서…. 시간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
행복한 아침/ 가정교육/ 이원영/ 중앙대 유아교육과 명예교수/ 2010-08-12
행복한 아침/ 가정교육 잠언 10장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1∼2절)는 솔로몬의 가르침이 있다. 이 말씀을 “지혜로운 청년은 나라의 기쁨이나 판단력이 없고 책임감이 없는 청년은 미래 조국의 근심이다”라고 바꾸어보자. 지금 잘못 길러진 아이들은 장래 가족의 불행, 타락한 사회, 부실한 나라의 원인이 됨을 알 수 있다. 요즘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우리나라의 가정교육이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중·고교에서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난다고 한다. 학생들이 친구들의 학용품이나 돈을 훔치는 일은 다반사이고 교사의 물건에 손을 대는 어린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한 초등학교 6학년 반에서는 교사가 교무실에 잠깐 다녀온 직후 핸드백이 없어졌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없어 단념하고 있는데 그 반 남자아이의 어머니가 “아니 선생님 가방이 왜 우리 아이 가방에 들어있어요? 간수 좀 잘하세요”라며 전화를 걸어왔단다. 2학년생을 둔 어머니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아니 방학숙제를 그렇게 어렵게 내면 어떻게 해요. 아동발달에 적합한 교육도 모르는 이 교사에게 우리 아이를 맡길 수 없어요. 담임을 바꿔주세요”라고 하였단다. 사회 전체에 퍼진 ‘네 탓’ 신드롬이 여기도 나타나는 것이다. 학부모, 교사, 이웃집 어른, 사회가 모두 협력해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도 모자랄 판에 아이들에게 학과 공부만 가르치고 도덕성, 인성, 사회적 책임감, 판단력, 배려 등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엄마 아빠는 직장일로 바빠 밤늦게 귀가하면서 인성교육과 도덕교육은 선생님 몫으로 미루고, 교사는 교권이 약해져 아이들에게 훈육과 관련해서 한마디 말도 못할 지경으로 위축되었으며, 옆집 어른들은 다른 집 아이에게 관심이 없어졌다. 정부도 기업도 경제에는 관심이 있지만 미래의 국민을 바르게 기르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목에 건 채 게임기에 빠져 있고 학원을 전전하며 혼자서 자라고 있다. 가정교육을 회복해야만 한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를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아이들에게 돌려주어 가정교육을 하게 하자. 그런 의미에서 한 준정부기관이 매주 수요일을 가정의 날로 정하고 전 직원이 5시30분 이후에는 반드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과로로 병에 걸리는 직원들이 많아지자 노동조합이 요구하여 시작됐다는데 직원들, 특히 아빠들의 말에 의하면 가족관계가 회복됐다고 한다. 자녀들의 고민도 들어줄 수 있고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으며 자녀의 인성교육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모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 자녀들은 건전한 시민으로 자란다. 가정교육이 인성 및 도덕 교육의 근본이며 이 교육은 아이가 출생한 그 순간부터 부모인 내가 해야만 효과가 있고 어릴수록 그 효과가 크다.
행복한 아침/ 개방/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8-04
행복한 아침/ 개방 모든 길은 문을 열어 놓았을 때 통할 수 있다. 문이 닫히면 편리하게 닦아놓은 길도 다닐 수 없는 길이 되고 만다. 문을 연다는 것, 마음을 연다는 것, 가슴이 열려 있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로마가 열악한 환경, 조건, 상황 속에서도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개방성에 있었다. 지적 수용은 그리스인에게서, 국민의 체력 강화는 겔트족과 게르만족에게서, 기술에 있어서는 에트루리아인에게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카르타고인에게서 국익에 필요한 것들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로마인의 뛰어난 점은 바로 주변 민족들을 향해서 열려 있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나 50년대 이후 분단국가의 의사 불통으로 인해 한반도의 발전 속도는 50년 이상 늦춰졌다고 한다. 각 세대는 자기 세대만의 고유한 사유형식을 갖는다. 그러나 세대와 세대는 늘 의사소통적 통일을 염원해야 한다. 오랫동안 이 땅의 문화를 지배해온 것은 유교정신이었다. 유교의 정신은 여전히 다른 가치체계를 용납하지 않는 배타적 독단적 사유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많은 부분에서 허례와 허식의 문화, 단절의 문화를 가져왔다. 가끔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관계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더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지가 않다. 용감한 자는 비판의 문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비판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비판의 문을 개방하면 따가운 비판을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개선과 변화를 얻을 수 있다. 김영현 소설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 해방, 자기 구원의 문을 열었다. 예전에 나는 어떤 정신과 의사로부터(그는 내 친구의 담당 의사였다) “말해 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충고가 사실이라면 나는 적어도 이 불쾌한 느낌, 혼자 어두운 방에 누워 있으면 영락없이 찾아드는 이 막연한 어둠의 기억으로부터 조금은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을 닫아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절박할수록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천들은 절대적 출구가 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이것은 소통의 완성일 수 있다.
행복한 아침/ 검과 칼/ 김성일 장로/ 작가/ 2010-07-12
행복한 아침/ 검과 칼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의 뜰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증한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긴 칼의 끝을 땅에 대고 눌러서 활처럼 휘게 해 놓은 작품이 있다. 구 소련에서 기증하여 더 인상적인 이 조각상의 기단에는 이사야서 말씀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사 2:4) 지금은 대포를 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시대지만 칼의 이미지는 여전히 전쟁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칼의 유래를 잘 몰라서 어휘의 선택에 자주 혼동이 있는데, 이 날카로운 도구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히브리어로 헤렙, 즉 양면에 날이 있는 검(劍)이며 본래 제사장들이 소나 양을 잡아 뼈와 살과 기름을 분리할 때 쓰던 것이다. 또 하나는 히브리어로 마아켈렛 즉 날이 한쪽에만 있는 칼(刀)인데 주방에서 요리할 재료를 썰거나 다질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언제부터 무기로 사용되었던 것일까?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창 4:23) 제사장들의 검은 권력을 놓고 다툴 때 무기가 되었고 주방에서 쓰던 칼은 형제 또는 이웃 간의 감정싸움이나 복수를 할 때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모두 단검, 단도처럼 짧은 형태였으나 집단적인 싸움 즉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면서 그 길이가 더 길어진 것이다. 주도권 장악을 위한 전쟁이 많았던 중동이나 유럽에서는 검을 많이 썼고 복수의 개념이 앞섰던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주로 칼을 사용했다.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제사용으로 사용하던 비파형 동검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중국에서도 천단에 제사를 드리던 고대에는 검을 많이 사용했다. 대륙에서는 혼란한 시기에 비적들이 횡행하면서 환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삼국통일 이후로 원한과 분노가 늘어났는지 검이 칼로 바뀌었다. 우리가 본국검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일본 검도에서 사용하는 것도 실은 모두가 칼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예수께서 주겠다던 이 검은 전쟁의 검이 아니라 말씀의 검이었다. 헬라어로 마카이라, 즉 양면에 날선 검으로 수술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그러므로 우리가 심판의 날에 대비하려면 전쟁의 검을 제사의 검으로 되돌려 혼과 영과 몸의 모든 마디를 찌르고 쪼개어 거룩한 제물로 거듭나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복수를 위해 품어왔던 칼도 다시 주방으로 되돌려 우리의 이웃과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정성이 깃든 음식으로 대접하는 도구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 12:20)
행복한 아침/ 고통/ 김성일 작가/ 2010-07-19
행복한 아침/ 고통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로 사람에게 내려진 첫 번째 조치는 임신의 아픔이었다.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 3:16) 전후의 상황으로 보아 이는 금단의 열매를 먼저 따서 먹은 여자에게 내린 형벌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람이 징계를 당하는 모든 장면 속에는 하나님 자신도 함께 겪는 아픔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탄식하며 새 시대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아픔이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그래서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실 때에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남겨 다음 시대를 이어가게 하셨다. 그러나 노아의 자손들 역시 반역의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사람이 더 이상 자멸의 길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온 지면에 흩으셨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문화를 만들어가며 하나님에 관한 기억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하여 광야로 끌어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려 했으나 그들이 거부하여 그분을 아프게 했다.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민 14:31∼32) 그러나 그 다음 세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삿 2:10) 이렇게 성경의 역사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과 다시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는 그분의 아픔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아픔을 감내하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9)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보낸 독생자가 세상에 와서 새로운 시대를 선언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마 9:17) 그가 감당했던 잉태의 고통을 다시 성령이 이어받는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그토록 깊은 실망과 혹독한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시는데 사람은 미리 겁을 먹고 그 고통을 피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으나 사람은 그분의 영을 피해 불임의 길을 간다. 성령의 권고를 따라 부지런히 새 것을 잉태하지 않으면 낡은 가죽 부대는 곧 터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행복한 아침/ 관심/ 용혜원 시인/ 유머자신감 연구원 원장/ 2010-08-15
행복한 아침/ 관심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파트에 갇혀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사람들은 어울려 살아야 행복하다. 저 들판의 나무 한 그루가 아무리 멋있어도 그 한 그루의 나무를 아무도 숲이라 하지 않는다. 외로움을 느낀다면 서로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한다. 삶이란 울고 쥐고 발버둥치며 태어난다. 혼자 울고 태어나 몇 번 웃다가 남아있는 사람들을 울게 만들고 떠난다. 결국 떠나는 인생살이 관심도 주고받지 못하면 얼마나 쓸쓸한 삶인가. 알프레드 아들러는 관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인간은 고난 속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에게도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의 모든 실패는 그러한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자기주장만 펼치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관심이 아니다. 고집불통이고 편견과 아집으로 고통스러운 결과만 낳는다. 어떤 남자가 사업에 실패해서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지냈다. 어느 날 혼자라는 생각이 심장 끝까지 밀려와 자살을 결심하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파트를 들어오던 아내가 남편을 보았다. 그렇게 쌀쌀하게 대하던 아내가 그날까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보! 나예요. 사랑해요!” 남자는 아내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갑자기 살고픈 욕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남자는 그대로 뛰어가서 아내를 꼭 안고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때로는 눈빛 하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가 사람을 살리고 죽게 만든다. 관심이란 상대방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생각해 주는 것이다. 간섭은 내 마음으로 상대방을 생각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섭은 내 마음 속에 상대방을 가두는 것이다. 사람들은 관심을 원하지 간섭을 원하지 않는다. 어느 사이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핏대를 올리고 주먹을 쥐고 고함을 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상대방과 대화도 하지 않고 무조건적이다. 우리는 로렌스 굴드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남이 당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싶거든 당신 자신이 귀와 눈을 닫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표시하라. 이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리 재간이 있고 능력이 있더라도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불가능하다.” 관심이라는 시를 써 보았다. 제목 ‘관심’. “늘 지켜보며,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네가 울면 같이 울고, 네가 웃으면 같이 웃고 싶었다. 깊게 보는 눈으로, 넓게 보는 눈으로, 널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모든 것을 잃더라도, 다 해주고 싶었다.”
행복한 아침/ 관심/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7-14
행복한 아침/ 관심 최문자 시인 ‘우리 사랑할까요’ 참 좋은 인사법이 있다. 안부를 묻는 인사로 아프리카에서는 “당신이 보여요”라고 아침인사를 한다고 한다. 사랑하면 보인다. 몽골의 허허벌판 풀밭에서 양 치는 목동의 눈은 수㎞ 밖 산 밑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의 마릿수까지 정확히 알아맞힌다고 한다. 시력이 뛰어나기보다는 양떼에 대한 관심과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같은 시력을 가지고 같은 지점에 서 있어도 보이는 것이 다른 것은 그동안 사랑해왔던 시간의 길이와 더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우리는 늘 보고 싶은 것, 눈에 확 뜨이는 것, 보기에 좋은 것, 필요한 것만 보려고 한다. 잘 보이지 않는 것, 차마 볼 수 없는 것, 보고 싶지 않은 것, 보면 해가 될 것 같은 것에 대해서는 최대한 피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거리를 걸을 때 우리를 스쳐간, 우리가 본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관심 없이 보면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대상이 없어도 눈만 감으면 보이는 사람이 있다. 보려는 마음이 가슴에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시인들은 보는 법이 남다르다. 남이 보지 않는 것,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집착한다. 시 한 구절을 예로 들어보자. “모래 속으로 천천히 감겨들어간 손을 보면/부드러움이 얼마나 공포일 수 있는지…(중략)/모래는 순장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김경주 ‘모래의 순장’ 일부) 누구나 볼 수 있는 모래지만 시인은 모래를 그냥 모래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모래를 무덤으로, 모래를 공포의 대상으로, 더 나가서 순장의 형태로까지 본다. 이는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통찰력 때문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창조물에 대하여 갖는 깊은 관심과 사랑에 대하여 간과할 수 없다. 예수의 옷자락 작은 부분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 같은 여인을 사랑했으므로 예수는 보지 않고도 여인의 고통이 충분히 보였고 이미 보고 있었다. 어느 날 지하철 입구에서 좌판을 벌이고 야채와 콩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에게 콩나물 1000원어치를 사면서 자꾸 덤을 더 달라고 하더니 콩나물을 한 움큼 집어가는 어느 아주머니를 목격한 적이 있다. 손에 성경책은 들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 할머니의 고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모든 대상을 바라보기만 해도 고통과 상처와 눈물이 한꺼번에 클로즈업 되면서 잘 보여야 할 것이 아닐까? 나 자신부터 부끄러워지던 그날이었다. 아침에 만나면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보다 “당신이 보여요”라고 첫 인사를 한다면 약간 어색하지만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이 아침, 하루 종일 흐뭇하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프리카식이지만 참 좋은 인사법이다.
행복한 아침/ 그리스도의 예표/ 김성일 장로 작가/ 2010-08-30
행복한 아침/ 그리스도의 예표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이미 많은 징조와 예표로 그 일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그런 예표적인 사건과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그래서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그 생애의 일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모형으로 살았다. 하늘의 본을 따라 성막을 지은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 가사의 성문짝을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을 오른 삼손,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인 엘리사 등 많은 모형 가운데 특히 이삭은 가장 뚜렷한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창 22: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였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자였다. 예수는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고, 이삭은 자신을 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125세쯤이었으리라는 학자들의 추정을 따르면 이삭의 나이는 25세였다. 즉 자신을 결박하려는 아버지를 뿌리칠 수 있는 나이였으나 그는 아버지의 결단에 순종했다. 원주민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우물을 파서 아비멜렉을 승복시킨 것도 그리스도의 예표적 모습이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창 26:28) 이삭을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크리스천은 이삭의 신부인 리브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물동이의 물을 아브라함의 종에게 주어 물을 마시게 했을 뿐 아니라, 그의 낙타 10마리에게도 물을 길어 마시게 했다. 낙타 10마리가 마시는 데 필요한 물은 1000ℓ, 즉 5드럼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브두엘이 청혼을 받아들여 혼사를 결정한 후에 딸을 며칠 더 머물다 가게 하려고 딸에게 당장 가려는지 여부를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가겠나이다”(창 24:58)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떠나 주인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신랑 될 이삭이 브엘라해로이를 떠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삭은 리브가를 그의 장막에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다. 신랑 되실 예수께서 구원받은 자들을 마중하여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인다는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예표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행복한 아침/ 깨끗한 손/ 2010-07-06
행복한 아침/ 깨끗한 손 지난해 우리나라에선 이변이 있었다. 매년 사회적 문제까지 일으켰던 아폴로 눈병 환자가 줄어 안과 병원이 한산했으며, 젊은이들에게 심각한 질환인 A형 간염도 3분의 1이나 줄었다. 뿐만 아니라 연중행사로 일어나던 대형 식중독 사고도 보도된 적이 없다. 이와 같이 전염병이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은 신종 인플루엔자로 우리나라에 손 씻기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이 신종 플루 유행 당시 필자를 ‘손 씻기 전도사’로 소개했고, 이로 인해 최근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의료진의 손 씻기가 일상화되고 있다. 필자가 25년 전 미국 브라운대학 연수 시절, 병원 감염 강의 때 있었던 일이다. 미국 교수가 모자, 마스크, 발싸개, 수술복까지 입은 채 중무장을 하고 강의실에 등장했다. 그 다음에는 걸쳤던 것들을 하나하나 벗어던지고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신생아실을 출입할 때 이렇게 많은 것을 입었지만, 지금은 이 손 하나만 잘 닦으면 병원 감염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병원 감염 예방에서 ‘손 씻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렇게 각인시켜주었다. 미국 연수 후 필자는 손 씻기 전도사가 됐다. 세브란스 새 병원을 지을 당시에도 모든 병실마다 세면기를 설치해 손을 쉽게 씻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세브란스병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하이파이브(High-Five)’라는 대대적인 손 씻기 운동을 시작했고 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신종 플루 덕분에 병원 내 손 씻기가 쉽게 습관화되었다. 사실 기본일수록 사람들에게 그 중요성을 인식시켜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기본이 중요하지만 기본을 하찮은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감염 관리에 우수 병원이 되었고 국제환자안전지침에 가장 중요한 병원 감염 관리에 만전을 기하면서 JCI(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 재인증도 획득했다. JCI 회장 일행은 신종 플루 유행 시 우리나라를 방문해 버스마다 붙어 있는 손 씻기 포스터를 보고 우리나라를 극찬하기도 했다. 씻기 행위는 성경에선 정결을 의미한다. 레위기 8장 6절에 보면 레위인들에게 여호와를 섬기는 자격을 위한 준비 행위로 물로 씻는 정결 절차가 진행된다. 요한복음 13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행위로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다. 의료인의 손 씻기는 정결과 환자 섬김의 본이 된다고 생각한다. 손 씻기를 통해 정결해진 의사와 간호사의 손은 환자를 감염으로부터 보호받게 하는 가장 훌륭한 섬김이 되기 때문이다. 올 들어 손 씻기가 다시 주춤하고 있는 듯하다. 손 씻기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싱가포르의 국립병원 외벽에는 30m 초대형 포스터가 있다. ‘Clean Hands Save Lives’(깨끗한 손이 생명을 살린다). 그렇다. 손 씻기는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확실한 방법이다. 이철(연세대 의대 교수(소아과학), 대한신생아학회 회장, 의료산업경쟁력포럼 공동대표 역임, 현 세브란스병원장)
행복한 아침/ 나눔의 건강학/ 2010-08-24
행복한 아침/ 나눔의 건강학 최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중 하나인 뉴스위크지는 우리나라를 세계 ‘베스트 국가’ 순위에서 15위로 보고했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서는 일본에 이어 2위다. 희망적이며 긍정적인 사항은 평가 항목 중에서 교육과 경제적 경쟁력 부문이 각각 세계 2위와 3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로 살아가던 1950년대의 우리나라 1인당 GDP는 100달러에도 못 미쳤다. 북한이나 필리핀보다 못 사는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세계은행이 발표한 2009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1만7175달러라고 하니 실로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한강의 경제 기적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부분이 있다. 뉴스위크의 평가에서 교육, 경제성장력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삶의 질 부문은 29위, 평균기대수명 등을 감안한 건강 부문은 23위 등으로 많이 뒤처져 있다. 또한 다른 나라를 돕는 원조 비율은 국민총소득의 0.0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인 0.3%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성과지향주의로 달려온 우리 사회는 나눔보다는 소유, 사람보다는 물질을 우선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요로움을 간구하는 대신 내가 투쟁해 얻으려는 탐욕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열왕기하 5장 20∼27절에서 엘리사의 종인 게하시가 어리석은 물질적 탐욕으로 인해 풍요로운 미래를 잃어버리고 문둥병까지 걸린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 몸의 건강에서도 이런 진리는 그대로 반영된다. 오늘날 비만,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간장병 등 우리를 괴롭히는 많은 질병들이 현대인의 지나친 탐욕과 방탕함, 술 취함,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풍요는 곳간을 채우고 개인의 배를 부르게 하는 풍요가 아니다. 하나님의 풍요는 40년간 황량한 광야에서 300만 이스라엘 민족을 양육하셨던 것이다. 항상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이웃과 나누면서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순종의 풍요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고 결코 그분의 공급하심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즉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의 무리를 충분히 먹이신 것과 같이 우리 인간의 방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들을 언제나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부터라도 우리네 넘치는 식탁의 음식을 줄이고, TV를 보며 소파에서 낭비하는 시간을 가난하고 배고픈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봉사하도록 해보자. 그러면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우리 가정에 건강과 평화가 넘치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진정한 하나님의 풍요가 깃들 것이다. 이철(세브란스병원장, 의사)
행복한 아침/ 놀이/ 이원영/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 명예교수/ 2010-07-22
행복한 아침/ 놀이 아기 때부터 요즘 ‘영어유치원’이라고 잘못 알려진 영어학원 유치부에 다니던 아이가 만 4세에 유치원으로 왔다. 그 엄마가 어떤 소신으로 결정한 것인지 부정적 증상을 고치려고 온 것인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이는 잘 적응했다. 아이는 유치원에 온 후로 책은 전혀 손에 들지 않고 열심히 놀기만 했다. 쌓기 놀이 영역에서 나무토막을 쌓아 여러 가지 구조물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역할 놀이 영역에서 헌 넥타이를 목에 걸고 아버지처럼 놀아보기도 했다. 특히 좋아하는 것은 유치원 마당 이곳저곳의 놀이기구를 타며 노는 것이었다. 맘껏 놀면서도 내심 걱정스러웠는지 아이는 “엄마가요, 유치원은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한대요”라고 시무룩하게 말하곤 했다. 엄마가 다시 학원으로 보낼까봐 은근히 걱정도 했다. 유치원에서 아이가 즐겁게 노는 자체가 바로 공부라는 생각을 아이나 엄마는 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 날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이 아이는 마당에 세워 둔 통나무 하나를 넘어뜨렸다. 통나무 밑에 있던 애벌레,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낀 아이는 마당에 있는 통나무를 모두 뒤집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원장님은 아이 옆에 앉아 “와. 지렁이가 있네. 애벌레도 있고. 너 정말 굉장한 공부를 하고 있구나” 했다. 아이는 “이게 공부라고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장님은 “그럼, 이게 바로 살아 있는 공부지” 하며 “그런데 이 애벌레는 어떤 종류인지 알아?” 했다. 아이가 모르겠다고 하자 다시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물었다. 아이는 “책을 봐요” 했다. 그리고 유치원에 있는 곤충 서적이나 과학 백과사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들은 아이가 통나무를 뒤집는 모습부터 이 활동에 대한 아이의 흥미가 만족될 때까지 모습을 모두 사진으로 찍었고, 책의 내용을 읽어 주었으며, 유아가 관찰한 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도록 종이와 그림도구를 줬다. 인터넷을 찾아 자신이 더 알고 싶은 내용을 검색하게도 하였다. 아이의 호기심이 어느 정도 만족되었을 때 선생님들은 그 과정의 사진과 그림들을 전시했다. 이 유아의 호기심과 탐구 과정은 다른 유아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이 유치원에서는 통나무 밑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유아들이 늘었다고 한다. 40분 단위로 시간표를 정해 놓고 교과 내용을 습득하게 하는 것만이 공부는 아니다. 놀이는 유아기의 공부 방식이다. 1840년 유치원(어린이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든 독일의 프뢰벨은 “놀이는 유아기에 나타나는 가장 최고의 모습이다. 놀이를 통해 유아는 전인으로 발달할 뿐 아니라 가장 예민한 마음 속 깊은 곳의 성향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했다. 유아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신성(神性)이 놀이 중에 피어나기 때문이다.
행복한 아침/ 디지털 시대의 삶/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9-01
행복한 아침/ 디지털 시대의 삶 4세대를 위한 스마트폰이 곧 출시된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출시되는 스마트폰은 크기가 지금 휴대전화보다 훨씬 크지만 매우 가볍고 용량의 확대는 물론, 기능의 다양성이 기존 것에 비해 실로 놀랄 만하다는 것이다. 기능 소개 기사를 읽으면서 놀랍고 신기하기보다는 어쩐지 씁쓸하고 개운치 않았다. 처음 휴대전화가 출시되었을 때는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기기가 되겠다는 생각만으로 반갑고 신기했었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부터 나의 정신세계는 점차 메말라가고, 사유가 삭제되며, 삶의 여유가 좁아지는 듯했다. 요즘 언론환경이 변하고 있다. 휴대전화(인터넷 포함)를 통해 여러 신문을 찾아가며 그 가운데 자기가 읽고 싶은 기사만 집중 선정해서 읽어버린다는 것이다. 신문의 심장부위라고 볼 수 있는 사설, 논설, 시론 따위는 관심 밖의 내용이 되고 말았다. 2박3일 여행하는 일이 있었는데,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간 적이 있었다. 여행 가면서부터 첫날은 안정감이 없었다. 모든 정보가 다 그 속에 있었고, 여행 중에도 연락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조금씩 불안했었다. 그런데 수목 사이를 오래 걷는 동안 그 불안은 점차 사라졌다. 그 이튿날부터 귀가할 때까지는 정말 편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전화불통인 여행이 이렇게 명쾌할 줄은 몰랐다. 가끔 휴대전화를 꺼서 집에 놓아두고 기도원으로 간다. 휴대전화를 가져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기도가 너무 잘 된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기계에 노예가 되어 시달려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휴대전화가 인터넷 기능까지 하므로 휴대전화 하나로 만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휴대전화 하나로 무엇이고 다 해결하고 있다. 연락은 물론, 구매, 계약, 기계시동, 사기, 모함, 모략, 치료, 처방, 사랑, 이별, 심지어 상담이나 예배까지도 다 휴대전화 하나로 할 수 있다. 정말 번잡스럽고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휴대전화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꼭 있다고 본다. 서로 마주보고 표정을 읽어 내거나 배려하는 일, 고통을 같이 나누는 일, 사랑스런 교감을 나누는 일, 이런 중요한 사실들을 교환하는 일들을 어떻게 휴대전화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연인이 헤어질 때 흘리는 눈물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면 정말 그 눈물의 참 의미가 전달될까? 얼마나 생애에서 기억되며 남을 것인가? 얼마 전 ‘현대문학’에 ‘잠적’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나는 맨 처음 순한 흙으로 된 자였네/ 그런데 정말 내가 끝까지 흙이었는가? …중략… 나는 내가 켤 수 있는 모든 전원을 다 끄고 충전 배터리를 빼버린 후/ 오늘, 나는 없겠네.” 흙으로 된 자가 끝까지 흙이 되지 못하고 이질적인 것에 길들여지는 것을 참지 못해 잠적해버리는 한 시인의 연민이 될 것이다. 가끔 휴대전화 없이 지내보라. 삭제되었던 사유와 담론이 회복되며 깊고 좋은 생각에 푹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진짜 충전이 아닐까?
행복한 아침/ 떡잎/ 이원영/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 명예교수/ 2010-07-08
행복한 아침/ 떡잎 유럽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으로 기독교도였던 보헤미아의 모라비아인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유럽 여러 나라로 흩어져 학대와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당시 기독교도는 보헤미아 인구의 90%에 해당할 정도로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가톨릭 정권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박해를 받았고 헐벗고 굶주렸다. 종교 지도자였던 코메니우스(1592∼1670)는 자기 민족이 신앙심을 지키고, 나라를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었던 코메니우스와 그의 신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곧 그들은 교육이 유일한 대안임을 깨달았다. 코메니우스는 청년들을 교육해 보았는데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청년들의 신앙심을 유지시키는 것도 어렵고 애국심을 갖게 하기도 힘들었다. 고심 끝에 코메니우스는 어머니들을 교육하여 갓 태어난 아기부터 올바른 방향으로 양육하도록 해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만 6세 이전에 어머니들로부터 신앙을 배운 유아들은 청년이 되어서도 그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고 지식을 습득하여 유능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어머니들을 위한 교육서로 ‘유아학교’(무릎학교라고도 번역함)를 썼고 어머니들이 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다 자란 나무의 보기 싫은 가지들은 어린 묘목일 때부터 잘못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람 또한 처음 형성된 육체와 정신의 조합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면서 어머니들이 ‘유아학교’의 가르침대로 유아들을 성심껏 가르칠 것을 부탁하였다. 믿음을 간직하면서 자란 이 모라비아인들은 세계 전역으로 퍼졌지만 대대로 신앙을 지키고 있다가 훗날 자신들의 교회를 곳곳에 세웠다. 칼럼을 시작하며 모라비아인들에 대해 장황히 쓴 것은 가정이건 나라건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유아들이 올바른 신앙심을 갖고, 도덕적인 행동을 하며,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우며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다. 현재 우리나라 청년들은 신앙심을 이야기하거나 도덕적 행동을 말하면 구태의연한 노인 세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앙심과 건전한 도덕이 빠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허무감, 우울증, 자살 충동, 물질만능주의는 아닐까? 코메니우스는 유아학교에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경건함, 도덕심, 지식의 순서여야 한다고 했다. 이 순서를 바꾸어 지식을 먼저 가르치면 그 아이는 분명 버릇없고, 배려심 없으며, 머리를 써서 나쁜 일을 하는 어른으로 자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모든 기독교 가정에서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건전한 가정이 건전한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원영 약력=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유아교육학 석사, 이화여대 유아교육학 박사, 중앙대 유아교육과 교수(1975∼2008.6), 현 환태평양유아교육연구학회(PECERA) 회장
행복한 아침/ 말과 행동/ 이원영/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 2010-08-05
행복한 아침/ 말과 행동 20개월 된 외손녀 정인이의 말이 아주 급속도로 늘고 있다. 주변 어른들은 모두 이 아이가 35개월 된 오빠 정연이보다 말을 빨리 배운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 오빠가 선생님이다. 정인이는 오빠한테 맞거나 밀려 넘어지면서도 계속 오빠 주위를 맴돌면서 말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들리는 말을 실제로 사용해 보려고 정인이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반대로 하기 시작한 오빠가 “안 먹을 거야” “내거 아니야” 하는 것을 들은 후에는 밥 먹을 시간이 될 때마다 “안 먹어” 하며 도리질을 하곤 한다. 아이 엄마는 “엄마, 이 애는 이상해. 안 먹는다면서 다 먹어” 했다. 그렇다. 정인이는 새로 들은 말을 실험해 보기 위해 ‘안’ ‘아니야’를 여기저기 붙여보면서 실험하고 있는 것이지 그 말과 연결된 행동의 의미까지 연결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배운 말과 연결되는 행동의 의미까지 파악하려면 수십 번의 실험과 시행착오가 있어야 하고 이런 상황을 유심히 관찰한 후 친절하게 도와주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어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내가 정인이를 안고 물 마시는 것을 도와줄 때였다. 나는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물높이가 아이의 입과 수평이 되도록 붙잡아주고 있었는데 정인이는 내 손을 계속 아래로 밀며 “빼, 빼” 하였다. “정인아. 뭐를 뺄까?” 해도 아이는 계속 힘을 힘껏 주어 내 손을 아래로 밀며 “이거 빼” 했다. 순간적으로 난 판단을 해야 했다. 계속 컵을 잡고 있으면서 옷을 적시지 않게 할지, 정인이 혼자 물을 마시며 옷을 적시게 할지를 말이다. 난 후자를 택했다. 아주 좋은 교육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정인아. 할머니 손뗀다. 네가 컵을 꼭 잡아” 하며 아이의 두 손이 컵을 잘 감싸 잡도록 도와주며 손을 뗐다. 물론 정인이는 컵을 위로 쳐들어 옷을 다 적셨다. 하지만 “빼”라는 말 대신 “손을 뗀다”는 말을 행동과 연결해 배울 기회를 가진 것이다. 하루 종일 아이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모든 어른이 아이가 새로 배우는 말을 도와주기보다는 그 아이가 쏟은 물, 그 물로 적셔진 옷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법석을 떨곤 한다는 것이었다. “아유 쏟아졌잖아. 누가 너보고 컵으로 물마시라고 했어?” “빨리 와 옷 갈아입자” 등의 말은 하지만 그 아이가 왜 컵을 자기 힘으로 움직이려 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를 불완전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태에서 지으신 존재로서,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고, 양육에 따라 신성이 피어날 존재로 본다면 어른들의 대응은 달라질 것이다. 아이에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그 아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동기를 파악해서 알맞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야 말의 의미까지 파악하며 배울 수 있다. 조기교육이 중요하다고 해서 어린 시기부터 학습지를 시키고 어른이 하는 말을 따라하게 하며 주입식으로 시키는 것은 공부도 아니다. 도리어 학습을 두려워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행복한 아침/ 무지개/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7-21
행복한 아침/ 무지개 무지개는 약속과 열정과 비전의 상징이다. 유년시절 소나기 온 뒤 이 산에 뿌리박고 저 산을 향해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뜬 것을 보고 수많은 상상력 속에 빠졌었다. 나뿐 아니라 동네 아이들도 ‘무지개 떴다’라고 외치며 무지개를 보러 마당에 나와 서성거리거나 산을 향해 달려가던 것을 기억한다. 무지개가 뜨는 것이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영향이나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지개의 출현은 상큼하고 가슴 후련하며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이 들고 나서 가끔 무지개에 대하여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유년시절과 같은 막연한 흥분 상태로서가 아니라 무지개를 이루고 있는 컬러의 아름다운 공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일곱 가지 색깔을 가졌음에도 어느 색깔 하나 자기의 힘을 과시하거나 영역을 넓히려 하거나 다른 색깔을 제압하려고 하지 않는다. 무지개는 자기 외의 다른 색깔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자기 색깔을 눈부시게 빛내면서 같이 아름답게 둥근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하나가 되자’라고 구호처럼 외칠 때가 많다. 나는 그때마다 내 마음속에선 다른 생각을 한다. 이 세상 어느 사물도 사건도 현실도 상태도 모습이나 속성에 있어서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꽃과 돌이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나무나 사람이 하나가 되어 나무가 사람이 되든지 사람이 나무가 되는 일은 창조의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무섭고 흉측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일에 대한 의견을 모을 때마다 ‘하나가 되자’라고 마치 윽박지르듯 몰아붙인다. 정말 절대적인 한 모습으로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일까? 모습과 생각은 다르지만 훌륭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공존하며 목표를 위해서 가장 훌륭한 무지개를 떠올리려 애쓰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총장으로 대학의 일을 집무할 때 안건을 진행하는 회의는 적지 않다. 그때마다 생각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욕구가 다르지만 모두 자기 모습대로 자기 생각대로 회의가 진행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총장은 어느 한 색깔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모두 생각과 주장은 다르지만 자연의 조화로움 같은 거대한 대학 발전의 목표를 위해서는 그 모습 그대로 공존하면서 둥근 무지개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라고 생각해 왔다. 색깔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잠재력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카리스마라는 리더십이라는 미명 아래 많은 리더들은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하여 한 가지 색깔의 무지개를 떠올리고 싶어한다. 쉽고 속도감 있는 결과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컬러가 삭제된다. 글로벌 시대, 다양한 욕구가 존중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 상상력이 이 시대의 중심을 가고 있다. 그 수많은 상상력을 하나로 묶을 필요가 정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창조주가 그걸 기뻐하고 계실까? 무지개의 파괴가 진정 변화일까? 가끔 깊은 생각에 빠진다.
행복한 아침/ 부부/ 용혜원 시인/ 유머자신감연구원 원장/ 2010-07-04
행복한 아침/ 부부 부부의 삶은 행복해야 한다. 신혼 시절부터 황혼이 물들어갈 때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이란 처음부터 풍덩 빠져버리는 건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줄은 몰랐다!” 부부 사랑도 마찬가지다. 행복하게 살다보면 얼굴도 닮아가고 생각도 닮아가고 서로의 사랑에 물들어가게 된다. 이 지상에서 내가 사랑할 사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집에 살아 신발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게 행복하다. 내 곁에 있어주고, 기다려주고,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나누며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은 동행하는 기쁨을 준다. 짐 콜린스가 이렇게 말했다. “성공이란 나이가 들수록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점점 더 나를 좋아하는 것이다.” 아무리 출세를 하고 돈이 많고 대단한 인물일지라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살다보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고 좋을 때도 많지만, 힘들고 벅차고 어려울 때도 많다. 그러므로 부부가 가장 힘들 때 하면 좋은 말이 있다. “여보! 나 있잖아!” 아주 짧은 표현이지만 정감이 있고 신뢰를 주는 말이다. 영국 속담에 “성공할 사람은 먼저 아내에게 묻는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부부가 서로 신뢰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 중의 축복이다. 무더운 여름날 강의를 하고 오면 아내가 “여보! 덥지요? 잠깐만 기다려요! 열무국수 해드릴 게요!” 하며 큰 양푼에 열무국수를 해줘 시원하게 먹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된 기분이다. 먹고 나서 시원한 냉커피까지 타주면 ‘아내와 결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 사이도 아주 작은 일들 속에 행복을 느낀다. 서로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배려해주면 싫어할 사람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정을 듬뿍 주며 살아야 행복하다. 부부 생활은 산맥과 같다. 높은 곳도 있고 낮은 곳도 있다.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다. 결혼 생활의 행복은 어느 순간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익어가는 과일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마음이 바짝 마르게 살지 말고 마음에 살이 통통 쪄서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북미 인디언 가족의 전통적인 인사말이 있다. “당신이 있어서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가족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해주면 참 좋은 말이다. “당신이 있어서 고맙습니다.”
행복한 아침/ 사랑과 자유/ 호6:6/ 김성일 작가 / 2010-08-09
행복한 아침/ 사랑과 자유 호6:6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하셨을까?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고 그를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우주와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수상한 일들이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까다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환상과 기쁨이 있는가 하면 눈물과 한숨도 있고, 터질 듯 벅차오르다가 처절하게 무너지기도 하고, 화사하게 피어나는가 하면 아파서 몸부림을 치기도 한다. 사랑은 논리적으로 따질 수도 없고, 수학으로 계산되지도 않고, 지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0) 그런데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그 사랑을 시작하신 것이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사 5:1) 사랑하는 이의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듯 사람이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사랑에 빠진 하나님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랑은 일방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듯 그도 나를 선택해 주어야 한다. 사랑은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프러포즈를 받은 자가 자유로운 입장에서 상대방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 곧 자유의지를 주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그것이 하나님의 프러포즈였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고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곧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신의 판단대로 살겠다는 쪽을 선택했다. 내 말을 받아들여 나와 함께 살자는 하나님의 구애는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모처럼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비극으로 막을 열었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미 1:8)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호소하고 계신다. 나의 이 간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알아달라고 애원하신다. 구약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이 그렇게 울며불며 사람을 쫓아다니시는 슬픔의 역사이고 아픔의 역사였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