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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교회를 향한 발전 ( 바울신학 4 ) 2004-03-05
고대 교회를 향한 발전 ( 바울신학 4 ) 2004-03-05 11:18:01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 3 부 ; 고대 교회를 향한 발전 I.교회 질서의 성립과 첫 발전 단계 51) 종말론적 공동체와 교회의 질서 1. 솜과 하르낙의 토론 인간의 공동사회가 공동사회생활의 질서들이 없이 유지된 일은 역사에 없 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서서히 질서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자 명하다. 솜에 의하면 교회의 법은 교회의 본질에 상충된다. 이 법은 카리 스마적인 인물들의 권위가 직책의 권위로서 이해됨과 함께 교회에 침투되었 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타락이다. 하르낙은 이에 대해 초대 그리스도교에 처음부터 법의 성격을 지니고 필연적으로 법 질서들로 발전될 질서들이 있 었다는 것과 그러한 질서들이 교회의 본질에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2. 공동체의 자명성 서로 상충되는 두 견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 위해 역사적 현상 으로서의 교회와 영의 지배에 의해 이끌어지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르낙은 교회를 역사적 현상 으로 파악하고 솜은 그것을 그 자체의 자기이해에서 출발한다. 교회의 자 기 이해가 실제상 결정적으로 중요한 동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를 헬레니즘 밀의종교 공동체들로부터 구별하는 공 교회와의 개체 공동체들에 대한 관계가 그 본래의 근거를 경험적 소유성들 및 교류와 상호 부조들 또는 권력 주장등의 필연성들 중에 두지 않고 에클 레시아의 자기이해, 즉 이에 따라 공교회가 개체 공동체에 우선한다는 자기 이해에 두고 있다는데서 가장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개체 공동 체들의 질서성립도 종말론적인 영으로 치리되는 공동성으로서의 공동체의 자기 이해에 의해 규정되었다. 첫째로 이 자기이해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배타성이 결과로 따르는 데 이것은 밀의 종교들과 다른 특별한 성격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게 제 공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 배타성이 세상에서의 탈피성을 뜻하는데도 그 삶의 훈련의 근원은 이 세상에 두고 결국 참회율의 완성을 보게 한다는 점 이다. 제일 권위가 있는 인물은 카리스마를 받은 자이다. 이들은 말을 선 포하는 자들이었다. 3. 영과 법 이 의미에서 법이 아니라 영의 지배로 구성되는 공동사회로서의 교회에 관한 솜의 파악은 타당하다. 법이 규제하는 것에서 구성하는 것으로 변하는 경우, 법질서가 그 공동체의 본질에 대립된다는 점에서도 솜은 옳다. 그러 나 그는 규제하는 법질서가 영에 대립될 수 없고 영으로 만들어질 수도 없 다는 사실을 잘못알고 있다. 영은 말의 선포 뿐 아니라 공동체들 안에서도 역사한다. 영은 교회 공동체 - 민주체제를 세운다. 그러므로 질서및 직책 의 성립과 완성이 영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정당치 못하다. 교회법 자체의 성립은 다음 문제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1. 질서들의 유지가 언제부터 어떻게 형벌 규정들에 의해 보존되었는가? 2. 그 질서들을 세우고 그것들의 준수를 감시하는 법원들은 어떤 것이었는 가? 그것은 공동체들이었는가? 또는 공동체의 위임에 의해서든지, 그의 권 위에 근거를 주는 다른 권위에 의해서든지 그것은 개인이었는가? 질서들의 권위가 개인들에 의해 대표된다면 교회의 직책은 그렇게 성립된다. 52) 교회의 직책들 1. 장로들과 감독 팔레스틴 초대교회에서도 헬레니즘계의 초대 기독교에서도 처음에는 교회 의 질서들과 직책들의 제한에 관한 반성이 없었다. 이것은 교회들의 종말론 적인 의식에 근거한다. 그러나 두 공동체에 어떤 질서와 지도력이 필요했 을 때 이것들은 아직 직책의 성격을 지니지 않은 권위적인 인물들에 의해 제공되었었다. 팔레스틴계의 공동체에는 베드로와 요한 주의 형제 야고보가 있었고 헬레 니즘계의 공동체에는 물론 공동체들의 설립자들인 사도들이 있었다. 그러 나 장로의 직책이 얼마안가서 팔레스틴 겨회에 나타났다. 또한 발전된 헬 레니즘 세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에도 장로들이 공동체를 이끌었다는 사 료들이 등장한다. 직책이 등장했다는 사실보다는 성립되는 직책의 성격을 분명히하는 것이 논할 가치가 있다. 2. 공동체의 직책자들과 카리스마를 받은 자들 공동체의 직책자들과 카리스마를 받은 인물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선 카리스마를 받은 이들은 말의 선포자는 아니었다. 실제로 교회를 구 성하는 말 선포의 활동이 처음에는 직책에 결부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교회가 처음에는 교회를 구성하는 직책과 법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 하다. 즉 장로들과 감독들, 공동체 직책들의 기구는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의 실천을 규제하는 것이다. 3. 사도직에서 교회의 직책으로 발전이 개속되어 카리스마를 받은 자들이 말의 선포자인 한 에서 점점 직 책자들로 반면 말의 선포는 직채 또는 직책 의무로서 공동체 직책자들에게 위임되는데 이르렀다. 사도들은 부활한 주를 선포한다. 아니 그에게서 주 자신이 해후된다. 그러므로 부활한 주에 의해 파견된 선포자로서의 사도라 는 개념은 권한 부여라는 사상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와함께 서서히 전통 사상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원래 모든 선교 자들에게 적용되던 사도라는 칭호가 12인에게 한정된 것은 사도들이 교회전 통의 보증인들에 해당했다는데 대한 분명한 표지이다. 그리고 사도직은 전 체 교회 조직의 관점에서 보여지고 한 직책으로서 파악되었다. 어쨋든 직 책 - 카리스마는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일에서 역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4. 사제직과 신의 법 공동체 직제의 완성에 작용한 것은 감독들이 예배의 집행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말과 나란히 또는 말 대신에 성례가 교회를 구성하는것에 해당할 수록 더 중요했다. 종말론적 의식이 성례주의에 의해 빛을 잃었고 예배를 주도하고 성례를 관장하는 감독은 사제가 되었는데 그의 직책의 성격은 그 에게 평민 단체로서의 일반적인 공동체에서 그를 분리시키는 자격을 제공하 였다. 이것은 교회의 질서들이 전적으로 신의 법의 질서들이 되게 하고 교회는 구원의 기구가 되게 하는데까지 이끌어 갔다. 교회는 전체성을 주장하고 세속 법적 요구에 지배될 수 있는 세속적 생활 영역은 있을 수 없다. 몇 가지 더 숙고할 문제는 1. 법질서에 의한 생활의 규제가 형법들의 제정을 필요하게 했다는 점, 2. 강제성을 요구하는 법 질서의 성격상 교회는 국가 와의 경쟁에 휩싸이고 교회의 강제권의 집행을 위해 국가를 대표로 파견한 다는 이론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53) 교회의 자기 이해의 변천 1. 미래와의 관련성과 성례전주의 이 발전은 결국 교회의 자기이해의 변천이다. 기대된 도래의 인기 때문 에 교회의 초월적 성격은 차츰 미래에 대한 교회의 연결에서보다 피안의 능 력들을 이미 지금 중개하는 기구들에서 교회의 현재적 소유를 꾀하게 되었 다. 물론 미래에 대한 관련성이 상실된 것은 아니나 그것도 특유하게 변형 되었다. 우주적 종말극에 관한 전통적인 상은 계속 전승되었으나 그것은 개인의 미래의 생명에의 관심으로 전환됴갔다. 이에 일치하여 성례들의 의미는 그 것들이 개인에게 미래의 삶을 위한 힘들을 중개한다는 점에서 보여졌다. 영은 이미 믿는 자들의 카리스마에서, 말과 행위에서, 행실과 수시로 사건 을 일으키는 능력이 아니라, 제도중에, 특별히 제의 중에 입주해 있는 힘이 다. 영은 직책을 받은 자들이 가지는 장비이며 평신도들은 그들의 중개에 의해서만 간접적으로 작용을 받게 되었다. 2. 종말론적 긴장의 연기 종말론적인 긴장이 중단되는 다른방식으로도 미래에 대한 관련성은 변형 되었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의 대망이 철저히 포기되지는 않았지만 그 희망의 실현을 무한정 멀리있는 시대로 미루어 놓은 것이다. 3.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한 새로운 종교로 이해된 것은 당연하다.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 필자의 서술은 그리스도교를 세계사적 산물로 파악 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사도행전을 그의 복음서에 뒤따르게 한 것도 물론 그가 예수 전승에 대한 원래의 케리그마적 의미를 포기하고 그것을 역사화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말론적 신앙의 경우 바울에게서도 세계의 역사는 끝에 도달했었다면 지금 사도행전의 파악에 따르면 구원사는 계속 진행된 다. 그리스도는 우주적 사유에 의해 역사의 중심점과 전환점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54) 전승과 역사적 전통 1. 종교들 내부에서의 전통의 의미 그리스도교 교회는 말에 의해 부름을 받고 언제나 새롭게 구성되는 교회 로서의 전통을 필요로 한다. 모든 종교가 전승을 필요로 한다면 전승은 역 시 그리스도교에서도 특수한 역할을 할 뿐아니라 그것으로 특유한 성격도 얻었다. 이스라엘 유대 종교도 제의적 의식행위들과 예전의 전승과 생활을 규제하는 법조문들의 전승을 필요로 하였다. 이들에게 신은 역사의 신이고 그의 계시는 그 백성의 역사에서 완수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교 전승의 특수성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에 제사 격식 언어들의 전승이 있었다는 것은 주 의 만찬에 대한 기사가 보여준다. 그 전승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구원 사건, 그의 죽음과 부활이 짧은 문장으로 종합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격 식문이 말하는 구원사건은 특유하게도 세계사적 사건들과 결합되어 있다. 역사적 전승은 지금은 이미 구약성서와 유대교에서 가졌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예수의 사건은 새로운 것이었고 종말적인 것이다. 그리 스도는 사실 역사의 마지막이고 그가 이와 함께 구원사의 성취이기도 하다 는 점에서 구약성서는 그의 역사 보도와 함게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의해 받 아들여졌다. 그때 예수의 역사와 종말론적 공동체의 부름은 예언들의 성취 로 나타났다. 3. 전승과 역사의 결합 역사적 사실들을 지칭하지 않고도 전승의 문장을 만드는 것은 가능했었 다. 그러나 성서의 기록들은 그럼에도불구하고 한 역사적 인물 예수에 대 해 말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의 선재자로서 의 자기비하와 희생의 면에서 그랬다면, 마태는 역사속에서 세계사를 마감 한 신적인 임물로, 마가는 인간에게는 숨겨진 신의 아들로 그러나 부활을 통해 신의 아들로 현현된다는 신앙의 인식으로서 역사적 예수를 증언하고 있다. 4. 결합의 문제성 이러한 결합에는 문제성이 있다. 즉 종말론적 공동체로 자처하는 그리스 도교 공동체이나 피안에서 오는 계시에 의하지 않고 예수의 역사적 모습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는 데에서 문제성이 있는 것이다. 전승은 종말론적 사 건과 역사적 사건을 동시에 말한다는 특별한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누가 문서는 이 역설을 오로지 세계사로서만 진행되는 구원사를 아는 역사신학으 로 해소되었다면 다른데서는 케리그마로 인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련이 포기됨으로서 해서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는 구원자의 역사적 실재성을 포기하되 신의 아들 과 역사적 예수와의 동일시를 거부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성과 신성을 결합하 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역설의 의미를 종말론적 사건의 역사 화에 대해 신앙에 대한 정당한 관심으로 표현함으로 명쾌한 결합을 시도, 성공하였다. 그러므로 전통은 역사적 사건의 연속성에 근거를 제공하는 역 사적 전승이 아니라 예수가 영으로 현재하는 공동체의 설교이다. 55) 바른 가르침과 신약성서 정경의 성립에 관한 문제 1. 신앙과 인식 그리스도교의 선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신의 행위에 관해 보도하 면서 동시에 듣는 자에게 그 자신에 관한 새로은 인식을 제공한다. 이때의 인식은 신앙 안에 포함된 인식의 구조적 계기를 부각시켜준다. 믿는 자는 신과 그리스도에 관해 선포되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으로 자신의 상황이 어 떻게 규정되는가를 이해해야 하며 신앙은 믿는 자가 그때마다 자신에게 요 구된 것에 관한 바른 판단을 얻는다는 점에서 산 신앙으로 보존되어야 한 다. 2. 그리스도교의 신학 케리그마적 격식문들에 기록된 구원사건인 하나의 지식과 지혜가 구별된 다. 전승의 격식 언어들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 개념들과 문장들은 신 학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이고, 우주론적이며 인간학적인 어떤 결과들이 필요 하며 어떠한 것들이 정당하냐는 질문을 유발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원 은 여기에 있다. 이때 쓰이는 지혜는 그 근원을 신앙 안에 두고 있다. 이것은 카리스마이 고 받은 자는 다른 자들과 나눠야 하는 것이다. 신학발전을 위한 결정적 문제는 신학이 신앙에 포함된 인식의 전개임을 어느정도 고수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어느정도 케리그마와 그것으로 규정된 그리스도교적 실존의 설명인가를 뜻한다. 3. 인식의 문제 이 지식은 올바른 가르침의 문제를 유발시켰다. 영지주의화한 기독교가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교사들의 영지를 소유하라는 가르침을 거 부하지 않았을 때 위험이 야기될 수 있었다. 많은 성서 기자들은 이러한 영지주의와의 싸움을 반영하였으며 나름대로의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4. 바른 신앙성과 거짓 가르침 신학적인 관심들과 사상들의 차이는 크다. 초기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것과 구별하는 신앙의 개념이었고 상관개념인 거 짓 가르침이라는 개념과 함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내부에서 형성된 각양성 에서 비로서 생긴 바른 신앙성의 개념이 아니었다. 거짓 가르침 즉 이단의 표시로는 처음에는 다른것을 가르치다, 다른 것을 나타내다, 다른 교훈등이 제시되었다. 처음에는 학파를 표시하던 말이 다음에는 당파를 표시하게 되 었다. 새로운 방향 설정의 모든 시도들은 이단들에 근원을 두었다. 5. 정경의 성립 바른 가르침에 근거를 제공하는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이 상황에서 권 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의 말들 뿐이었고 그것들의 신뢰성은 전승의 담당자들에게 있었다. 즉 사도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 들이 죽자 사도들의 말은 구전전승을 근거로 삼았으며 후에는 문서적 전승 으로도 계속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서가 증가하자 사도적인 것에 해당될 수 있는 문헌들을 가려내 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고 결국 이 일의 역사적 과정이 새로운 정경을 형성 하게 했는 데 이 정경은 구약성서의 문헌들의 정경과 병립되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교회의 권위적이며 사도적인 전승에 해당해야 하는가를 확정할 때 감독직책과 문서전통의 무게가 함께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 최종적인 결 정은 직책의 권위였다(405. 인노센츠 1세 법황의 인준). 가르침의 통일성은 정경에 의해 확정된거은 아니다. 이것은 정경의 통일 성이 하나의 상대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신약성서 정경 자체가 교회의 통일성에 근거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그것 자체 즉 역사가 에게 파악되는 피상성에서의 그것은 교단들의 다수성에 근거를 제공한다. 56) 동기들과 유형들 1. 바울의 전통 : 바울의 편지들이 특별한 영향력을 제공하였다. 많은 문 서들이 그의 서신을 모방하여 기록되었다. 2. 유대교의 전통 : 바울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계의 회당 전통 은 목회서신들에게 더 심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많은 영향을 미친것은 유 대교의 묵시문헌이다. 이 영향은 신약성서의 전반에서 볼 수 있다. 3. 통속 철학 : 헬레니즘계의 통속철학, 특히 토론법은 바울과 목회서신들 에 영향을 미쳤다. 4. 영지주의 : 바울과 요한은 영지주의 신화와 그 개념상의 전통을 계속 드러내고 있다. 이 영향이 제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57) 신학과 우주론 서언 : 신학적 사유가 사도 후기에도 교의학적 체계를 위한 노력으로 유도되지 않고 구체적인 동기들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것은 특징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상들 배후에는 신 사상이 들어 있기 때문에 좁은 의미에서의 신학의 논술 을 앞세우는 것은 타당하다. 1. 신과 천사, 악마 신에 대한 말에서 주도적인 것은 구약성서와 유대교의 전통, 즉 신은 세 계의 창조자이고 주라는 것이다. 신과 세계를 일반적으로 관련시키는데 대 한 이론적 관심은 아직 없었다. 이것은 이른바 구약성서 -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신의 국가를 이루는 천사들에게도 해당한다. 이와 함께 영지주의적 인 우주론적 천사형태의 천사를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표상은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구원사적 이해에 이용되었다. 2. 우주적 세력들과 그리스도의 승리 우주적 천사들 중에는 타락한 자로 등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이들, 즉 우주적 세력들에 대한 승리는 개념으로 바울에게 나타 나기도 한다. 골로새서에 등장하는 거짓 교사들은 천사의 세력을 존경함으 로서 모든 의례적이고 금욕적인 요구를 의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 구한다. 즉 그들은 우주적 세력들을 숭배하는 자이다. 58) 그리스도론과 구속론 1. 구원을 가져온 자로서의 그리스도(칭호, 인물됨, 구원의 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공동체들에서 구원을 가져온 자로 숭배되었다. 그 에게 붙여진 이름은 다양하여 주, 궤주, 심판자, 신의 아들등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인물됨에 대한 것은 신에 대한 그의 관계의 반성들이다. 선재 자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과 부활한 자로서 다시 영광중에 승천하여 신의 우 편에 않아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만족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수난 과 죽음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얻어진 믿는 자의 구원은 철저히 죄의 용서, 해방, 의인, 성화, 정화로서 표시된다. 2. 구원의 개념 구원의 개념은 오로지 생명과 죽음에서의 구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만 일 의적이다. 그러나 그 표상들과 견해들은 다르게 나타난다. 많은 진술들은 구원을 미래의 것으로 생각한다.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반대로 현재 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존재한다. 3.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 이러한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부름에 의해 세례로 중개된 현재의 죄사유를 통해 미 래의 구원의 가능성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또 현재는 명령하에 있고 그 실 천이 미래의 구원을 얻는 주건이라는 것이다. a. 헤르마스 서 : 구원한 세례는 미래의 구원도 준비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깨끗한 생활영위라는 조건에 결부되었다. 이 때는 수세후의 죄가 문제가 된다. 헤르마스에게 있어 신앙은 다른 덕목중 의 한 덕목, 아니 주된 덕목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그러나 이 신앙은 유일 신에 대한 신앙일 뿐이다. b. 야고보서 :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따른 생활과 미래의 보복과 심판에 대 한 지시를 바탕에 두고 있다. 회당전통의 도덕주의가 당당히 자리를 차지 하고 있어 유대교 문헌을 받아들여 쉽게 편수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감지 하게 한다. c. 디다헤서 : 이 글도 유대교의 도덕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d. 바나바서 : 이 글도 유대교의 교리문답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적 실존에 대한 이해는 제 2바울서신의 이해에 육박한다. 그는 신 앙과 지식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구약성서에 의해 선 사된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미래의 것에 관한 인식으로 법조문들에 관한 인식도 제공한다. 여하간 이 서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이해는 율법적이 아니 다. e. 히브리서 : 히브리서는 바나바서와 유사하다. 그리스도인은 책임을 의 식하면서 하늘의 심판자 앞에서 산다. 이때 주어진 역설은 옛 죄들에서 해 방된 후에 새로운 행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현재성의 새로운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율법성의 문제가 필요를 움직이 지 못하는 것도 득특한 것으로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오로지 그가 알레고리 적으로 해석한 제사법 뿐이다. f. 베드로후서 : 베드로후서에서는 회당 전통의 영향도 거의 감지되지 않 는다. 또한 그가 기대하는 구원은 미래에 가 있다. 이 기록의 목적은 그 리스도의 도래에 대한 회의를 물리치고 임박한 심판의 진지성, 깨끗한 생활 영위에 대한 책임을 날카롭게 하는데 있다. g. 클레멘스 제 2서 : 이 문서는 도래와 미래의 심판, 갸가건한 자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지시하는바, 권구및 회개의 설교이다. 이 심판은 업적들에 의해 베풍러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실존의 중간은 여기서는 내용상의 규 정이 아니라 연대기적 규정에 불가하다. 이 서신은 율법성이 회당전통에 의해 더 적게 표현되고 세계도피와 금욕의 어떤 헬레니즘적 경향을 더 강하 게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h. 폴리갑의 서신 : 윤리적 권유들을 싣고있는 이 서신은 미래에 대한 희 망으로 규정된 그리스도교의 증서이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게명들 의 실천으로, 세상에서 멀리하는 행실로 미래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는 것으 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자유의 개념이 전혀 없다. i. 요한게시록 : 6 - 18장에서 선포하는 위협적인 심판은 반신적인 세계에 대한 심판이다. 이는 공동체들을 위협하므로 깨어있어 신앙에 충성할 것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공동체들이 가지는 희망의 확실성은 그리스도의 죽음 에 근거를 둔다. 계시록의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화된 유대교로 표시되 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존재의 특유한 중간 성격은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는 잠정적인 기다림의 시대와는 다르다. j.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 바울의 전통이 드러나는 서신으로 중간 - 상황 의 내용적 의미가 파악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현재가 우주적인 세력들 이 거세되었다는 점에서 신의 행위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구원의 시대로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적 존재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인식이라는 것과 그 때문에 항상 자랄 수 밖에 없다는 사상은 이 서신의 특 징이라 할 것이다. 구원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교리주의와 도 덕화를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부인할 수 없다. 그 결과 믿음도 철저하 게 이해되지 못하였고 언어도 계속 관례적이다. 그러나 바울 신학의 본질 적 주제들은 남아있다. k. 베드로 전서 :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와 유사하다. 그러나 여기에 미래 에 대한 연관성은 더 강하게 각인된다. 그리고 구원의 현재성은 그들이 바 라고 있는 자라는 점에서 표시되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과 죽 음에 대한 바울의 사상이 특유하게 개편되었다. 또한 종말론적 의식과 세 상에 대한 거리가 강조되었다. 그 결과 참으라는 권고가 서신 전반을 관통 하고 있다. l. 목회서신들 : 이 서신들은 미래의 대망이 그 긴장을 더 많이 상실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상과 거리를 두되 시민생활의 영역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경건으로 화했다. 그리스도교적 자세의 특징적 표시는 경 건, 신 - 호의적인 행동, 경외심이다. 새로운 존재가 낡은 세대중에 있다 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존재의 역설과 함께 중간시의 내용상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목회서신의 그리스도교는 다소 퇴색된 바울사상이다. m. 클레멘스 제 1서 : 이 서신은 목회서신에 가깝다. 종말론적 긴장은 사 라졌고 바울 사상의 전통보다는 헬레니즘적 회당 전통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구원은 현재적인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로 인해 얻은 구원은 신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율법성의 문제는 필자에게는 없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것은 공동체의 자기 의식의 강화 및 확인에 불 가하고 그가 보호자, 우리의 약함의조력자로 표시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적합한 것이었다. n. 이그나티우스서 : 그는 바울신학의 영향을 받은 마지막 성격적 유형에 속한다. 그도 요한과 같이 구원을 생명, 진리라고 표한하는 것은 특이하 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종말론적 사건은 성만찬에서 현재화 된다. 경건의 개인주의화는 교회의 경건성에 결 합되었다. 즉 구원은 교회 안에서 개인을 위해 제공되었다는 주장으로 이그나티우스 의 교회의 통일성과 개체 공동체의 통일성에의 관심을 읽을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영 개념에 의해 표시하였다. 육이 죽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해 가능케 된 육과 영의 통일은 죽음과 생명 의 통이로도 이해될 수 있다. 이그나타우스가 그리스도와의 죽음 및 삶의 공동성이 성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인 고난과 죽음의 각오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실현된다. 믿음과 사랑은 언제나 그리스도교의 특수성들로 지칭되었다. 이 결합은 바른 가르침의 받아들임 또는 고수를 의미한다. 그에게 있어 바 른 신앙은 교리적인 명제들에 대한 찬성이 아니라 실존적 태도이다. 이그 나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실제로 실존적인 태도로서 이해하는 것을 바울에게서 배웠다. 그는 이미 아니다와 아직 아니다 사이의 한 존재로서 그리스도교적 존재 의 역설적 성격을 파악한다. 그에게 율법성이 문제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다는 태도가 그에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리 스도교적 상황의 새로운 것은 존재의 변화에 있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 를 종말적인 사건으로 이해했음을 지시하는 것이다. 4. 현재에 관한 이해 중간기의 연대적 의미가 부각되거나 또는 유일한 것이 되면 구원의 현재 성은 과거의 죄들이 세례에 의해 소유된 구원의 일에서만 보여졌다. 율법 성의 변형이 초래되었고 이로서 구약성서의 경건한 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사 이의 다른 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5. 그리스도론을 위한 결과 제사에서 현재하는 주로서 예배된 그리스도는 현재가 그를 통해 새롭게 된것으로 이해될 때만 현재의 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의 현재는 특별한 성례, 세례와 성만찬을 받는데서 경험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 활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어던 방식으로든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현재화시킨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이 율법성으로 퇴색할 수록 그만틈 그리 스도의 의미가 교회의 성례들 중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소급된다. 그리스 도론은 그리스도의 성례적 의미에 근거를 제공하는 데서 그 과제를 발견해 야 할 것이다. 59) 명령에 관한 이해 1. 명령과 서술 그리스도교적 생활실천의 문제는 역설적인 입장에 있는 공동체에 처음부 터 그리스도교적 자기 이해의 문제로서 주어졌다. 구원론과 윤리의 주제는 그리스도교적 구원 이해의 특수성으로 인해 분리될 수 없고, 구원의 현재와 구원의 미래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서술과 명령의 관계에 대한 물음과 밀접 하게 결부되어 있다. 전어 지은 죄책에서 벗어난 인간은 이제 새로운 시작 의 기회를 얻었으나 자신의 순종으로 미래의 구원을 얻으려면 지금 인간은 스스로 힘써야 되게 되었다. 은혜 또는 신의 사랑의 선사가 인간을 철저히 갱생시켰다는 인식은 사라진 것이다. 2. 죄에 대한 이해 죽음에서의 구원은 죄들의 용서에서 일어나는데 이 용서는 그리스도의 죽 음에 의해 준비되고 세례에 의해 소유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돌아옴은 결코 옛 인간의 철저한 변화로서 이해되지는 않았다. 서술과 명령에 대한 바울의 이해의 의미에서 인간의 갱생을 파악하 사상 과정은 극히 희소하다. 바울과 요한이 죄라고 부른 것을 위한 의미들은 도덕적 - 율법적 사유에서 사라졌다. 이는 회당 전통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육에 대해서도 바울의 의미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육 - 영의 대립도 오로지 지상의 것 과 신적인 것을 표시할 뿐이다. 지금의 세대와 오는 세대의 대립 명제도 몇 문헌들 중에서 계속된다. 이 것과 관련된 것은 옛 죄의 용서에 한정되어 있다. 죄의 세력에서 벗어난 자유와 영의 능력에 의한 지탱됨에 대한 인식은 상실되었다. 죄에서의 자 유는 도덕적 의미에서 무죄성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제가 실천 불 가능한 것으로 또는 실천되지 않은 것으로 증명될 때, 사람들은 회개와 신 의 용서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3. 은혜에 관한 이해 죄의 진지성이 철저히 파악되지 않았다는 것은 신의 은혜에 대해서도 마 찬가지임을 보여준다. 일과 은혜의 대립 명제가 사라지면서 선한 일들의 요구가 가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의의 개념도 상실되었 다. 이 용어에서 제시되는 것은 종말론적인 인식과 카리스마주의 대신 도 덕적인 경건의 이상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계속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두려움과 신을 두려워함의 용법은 특별하다. 이와 함께 신및 그 리스도의 종들로서 경건한 자들에 대한 표지는 점점 더 자주 사용된다. 4. 작용한 기능들과 발전 바울과 요한의 신학을 축소시킨 영향력은 회당의 것과 예수의 선포 전통 이다. 도덕주의에 대한 현실적인 제동력은 오직 큐리오스 - 예배와 성례전 주의 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표지이다. 이 공동체는 신의 은혜에 의해 부름을 받고 영이 그에게 주어져 있다는 의식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진술은 구원의 획득을 자신의 노력에 에속시키는 명령들과 통 일되는데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그 진술들은 피지탱성의 의식을 확인시킨다. 은헤와 영의 작용이 개인에게 선사된 기능에서 공동체를 위해 활동하면서 증명된다는 지식도 상실되지 않았다. 영의 능력으로 채워진 공동사회에 속 한다는 의식은 이 능력이 교회의 기구에 의해 관장될 때에도 계속 살아있 다. 이 두 계기의 유기적 통일성은 회개의 성례가 완성됨과 함께 비로서 도달될 것이다. 60) 여러 다른 생활 영역에 대한 요구의 내용과 위치 1. 생활률의 양식들 교회에 속하고 그것의 본질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식, 배타성과 세상에 대한 제한성 의식은 대체로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이것에는 소극적 인 윤리적 요구의 기본성격이 일치한다. 각 윤리적 덕목들은 교리문답식으 로 열거되어 나타난다. 즉 상론된 생활률이 목록 또는 교리문답식으로 제시 된 생활률이 되었다. 2. 성화와 사랑의 계명 모든 개체 게명들은 성화라는 한 요구로 종합된다. 이것은 세상과 옛 생 활태도, 육체적인 욕심들에 대한 거부를 뜻한다. 성화의 요구에는 공동사 회를 지향하고 그 안에서 무사무욕적으로 착한 일을 하게 하는 요구로서의 적극적인 의미와 개인적인 성결만을 이상으로 하는 요구로서의 소극적인 의 미의 두 경향이 함께 존재하며 서로 경쟁적이었다. 이 두 경향은 나름대로 발전해 왔으나 그 경계가 확연하게 그어지지 않았다. 3. 성과 완전주의 인간의 인격의 이상상에 대한 표상은 완전주의와 개인의 인품으로서의 성 의 이상이다. 사랑의 계명으로 요구된 자깊포기는 이미 이웃과 공동사회에 대한 관심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자신의 구원에 대한 관심에 의해 규정된 다. 완전주의와 성에 대한 노력은 한편 금욕주의의 요구가 유혹적으로 되 는데까지 인도한다. 금욕의 요구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타당한 것으로는 관철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개체적인 일을 부과하는 게명으로서 거부되지 않 았다. 이와 같은 방향에는 완성으로서의 완전주의도 함께 하고 있다. 4. 시민적 도덕 그리스도의 생활실천이 특별한 도덕적 요구들과 그것들에 근거를 둔 완전 또는 성의 이념으로 그리스도교적 특성을 성취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나 알려 진 단순한 윤리적 요구들을 추종함으로 이룰 수 있다는 이해가 나타났다. 즉 그리스도교의 생활률을 통속 철학적 윤리와 시민적 도덕의 개념 재료로 부터 거리낌없이 그 도식과 개념들을 받아들인다. 5. 각이한 생활영역 그러나 이 범위는 아직 상당히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을 평가하고 결혼생활을 다스림에 있어서 그약성서 - 유대교적 전통및 헬레니즘계의 회 당의 영향이 작용한 것은 의심이 없다. 좀더 광범위한 공동사회에서의 공 동생활도 비슷한 가부장적인 성격을 지닌다. 소유문제에 관한 견해로는 초 대 공동체의 사랑의 공산주의에 대한 상이 전통에서 고립되어 있고 그것은 사랑의 모범상인 한에서만 대표적이다. 즉 이 사랑은 균등에 관한 것이다. 국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질서로서의 국가에 굴복해야 한다. 이 질서는 신에 의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7 61) 계율 1. 공동체의 순수성을 위한 책임 공동체의 순수성을 위한 염려는 각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에 그 근거를 두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관심사이다. 이 염려는 전체로서 성도들의 공동 체이어야 하고 또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 순수성을 위 한 책임은 우선적으로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있다. 그러나 가르치고 권면하는 특별한 과제는 책임적인 인물들, 특히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부 과된 것으로 그들의 의무는 권유하는 것인데 이것은 목회서신들에서 점점 더 예리하게 드러난다. 2. 죄인들의 배제와 재허입 특별히 악한 경우에는 죄인이 공동체에서 출교당해야 했다. 잠정적으로 배제된 공동체 성원의 재허입을 위해서도 특정한 규율들은 제정되어야 했 다. 처음에는 이것을 공동체가 결정했을 수 있다. 재허입이 의심없이 허락에 의해 공동체 예배와 주의 만찬에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했기에 이때에 회개 의 고백이 행해졌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자료는 아무것 도 발견할 수 없다. 3. 경한 죄들과 중한 죄들의 구분 죄들 사이의 구분은 죽음에 이르는 죄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라는 표현 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경한 죄와 중한 죄의 구별은 처음부터 예수와 바울 요한에 의해 파악된 것과 같은 죄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어렵게 했다. 특 히 어려운 것은 공적인 교회적 회개가 요구되었을 때이다. 그리고 율법성의 침투와 함께 은혜에 대한 순수한 이해가 상실되었기 때 문에 교회의 공동사회에서 제거된 죄인은 이미 죄를 용서하는 신의 은혜 아 래 서 있지 않는 그런자에 해당해야 했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를 통해 공 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졌다면 세례가 성례이기 때문에 회개라는 교회의 기구 도 반드시 성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으로서 구원 기구로서의 교회의 성격은 빈틈없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교회 내의 성인아이 회복운동/ 2011-04-30
교회 내의 성인아이 회복운동 "아직도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생활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방해한다. 역기능가정에서의 성장경험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머리로는 은혜를 믿고 아는데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 "부모와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서, 성인들은 종종 그들이 인생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 불신과 자기정죄, 긴장, 소외라는 흐려진 안경을 통해서 - 하나님에게 반응한다. 여러해 동안 이와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다보니,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실망시킬 때에도 용서하기를 즐겨하신다는 성서적 진리를 믿기가 어렵게 된다"(Grayson & Johnson). [상한 감정의 치유]를 통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는 데이빗 씨맨즈(Seamands) 목사도 과거의 상처받은 기억이 어떻게 우리의 하나님상을 흐려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인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순기능 가정에서처럼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며"(엡 4:15) 정서적 친밀감과 소속감을 경험하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치유상담자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내적치유(inner healing)라 하고, 성인아이치유사역을 하는 이들은 이를 회복(recovery)이라 부른다. 우리 부모가 아무리 역기능적이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내적치유는 내 속사람을 치유하는 것이다. 즉 마음과 감정, 고통스런 기억, 그리고 꿈을 치유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증오심과 거부감, 자기연민, 우울증, 죄책감, 두려움, 슬픔, 열등감, 정죄 또는 무가치감 등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다. 내적치유와 성인아이의 회복은 그리스도안에서 온전케 되는 성장과 성화의 과정으로 사실상 동일한 경험을 일컫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양육과정에서 받았던 부정적 영향을 극복하는 과정을 회복이라 부른다. 교회내의 성인아이 회복운동. 일찍이 어거스틴은 교회를 아픈 사람으로 가득차 있는 병원에 비유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침을 받기 위해 의사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에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만 과거의 모든 정서적 고통이 일시에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정서적 상처가 치유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치유전문가들은 회복이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경험중의 하나이며, 동시에 가장 힘든 경험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회복은 우리 생활을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하게 만들어 주지만, 이것은 우리가 통과해야 할 고통스런 골짜기"임을 상기시키면서 대개 건강한 태도와 문제해결기술이 우리 삶 속에 통합되려면 2-3년이 걸린다고 충고하고 있다. 현대의 기독교는 오랫동안 알코올중독, 도박, 근친상간, 음식중독, 이혼, 종교중독과 같은 문제를 외면한 채 " 성자들의 박물관"과 같은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교회는 마땅히 "아픈 사람들을 위한 병원"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죄인을 위한 병원이어야지, 성자들을 위한 박물관처럼 기능해서는 안된다.
교회력과 음악목회 / 부활절
교회력과 음악목회 / 부활절 (정소영) -------------------------------------------------------------------------------- 부활절 (Easter) 고난기간의 슬픔과 비탄 후에, 복음의 완성인 부활의 사건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기쁨과 환희는 1년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은 크리스챤의 새 생활의 시작이 되고, 말씀의 완성이며, 물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세례가 시작되는 날이다. 그동안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던 것을 이때 부터기독교는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의 첫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하여 주의 부활을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예배와 성찬을 계속함으로써 부활의 신비를 늘 새롭게 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한때 부활주일 부터 성령강림 주일 까지 50일을 매일 주님의 날, 즉 부활의 날로 지키면서 할렐루야를 부르며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50일을 지냈다. 오늘날 대개의 개신교회에서 부활절의 기쁨과 행사가 그날로 끝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 한다. 승천일과 성령강림 주일까지 부활절의 기쁨은 계속되야 한다고 본다. 의식 예배극 (Liturgical Drama)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무덤을 방문하는 의식이 새벽에 행해 졌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제일 먼저 만난 두 여인으로 분장한 사제가 무덤에 가고, 거기에서 찬란한 천사의 옷으로 분장한 사제가 두 여인을 향하여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다!"고 말하여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면 처음 두 사제는 찬양대와 그 옆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분장한 다른 두 사제에게 와서 함께 다시 무덤으로 달려간다. 거기에서 이들은 빈무덤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예수의 몸을 감쌌던 흰 수의를 들고 나와 사 람들에게 보여준다. 이때 찬양대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와 "유월절의 제물이 되신 주를 찬양합니다"를 노래 한다. 이와 같은 의식이 계속 발전하여 10세기 경에는 의식예배 연극이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의식 예배극은 부활절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에도 있었다. 이와같은 의식 예배극을 부활절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갖는다면 그 예배는 더욱 극적일 뿐만 아니라 더욱 의미있는 부활절 예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 새벽예배 부활절의 새벽예배가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그 근원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복음서의 부활에 대한 기사에 근거를 둔 듯하다. 즉 요한복음 20장 1절에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라고 기록된 것을 재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부활절 새벽 예배는 우리가 이미 위에서 밝힌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과, 해(그리스도의 빛)가 솟음으로 밤(죽음의 권세)을 이기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의미가 덧 붙여진다고 본다. 대개의 경우 부활절 새벽예배는 각 교파의 목사와 모든 교회의 교인들이 함께 모여 연합으로 드린다. 이때 성가대도 연합성가대가 조직되어 거대한 새벽예배를 갖는 것이 한국이나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부활절의 제단은 백합화와 흰색으로 장식하고, 목사와 성가대의 스톨(stole)도 사순절과 고난주간의 보라색에서 흰색으로 바뀐다. 그리고 제단의 촛불을 킴으로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임재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알렐루야를 반복해서 부르고 대영광송도 불려진다. Te Deum과 같은 승리적인 대 합창곡이 연주되고, 특별히 승리의 상징이 되는 나팔과 브라스 앙상불(brass ensemble)로 찬송가를 반주하게 한다든가, 또는 성가대의 합창과 함께 연주하게 하면 부활절 예배의 분위기가 훨씬 더 고무 될 것이다. 이날 대체로 찬양대 특송으로 Handel의 할렐루야를 많이 부르는데 크리스마스 때 이를 많이 부르기 때문에 부활절에는 Beethoven의 할렐루야를 부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회력에 관한 고찰 - 부활절
교회력에 관한 고찰 - 부활절 호남신학교 김충환 교수 -------------------------------------------------------------------------------- 부활절은 초기 3세기를 통해 모든 교회가 지켰던 유일한 절기이다. 또한 이 부활절은 교회력의 모든 절기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교회력의 근원을 제공하고 있다. Josef Andreas Jungmann, Der Gottesdienst der Kirche, 201. 이 부활절(독: Ostern, 영: Easter) 명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부활절 명칭의 어원적 근원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그 근원을 앵글로색슨의 봄의 여신인 Eoster 혹은 Ostare에 두고 있다. 이 축일은 해마다 춘분에 행하였다. 둘째로, 이 기원을 고대 게르만 단어인 austrovon (aust=Ost)의 파생으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상징화시켰다고 보고 있다. D. William Nagel, Geschichte des christlichen Gottesdienstes, 234. , 부활절과 그 기쁨과 승리의 기분은 원시 교회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이 부활절은 초대 설교자들의 전도 활동의 원동력이었으며 동시에 설교의 핵심이 되었다. 2세기 후기에는 이 부활절을 언제 지키느냐가 논쟁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세상의 구원이 유대의 절기인 유월절과 연결된 후에, 이것은 기독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지켜지게 되었다. 즉 오늘날까지 이 부활절은 달력으로는 유대교의 유월절과 연결되어있다. 서아시아에서는 부활절을 유대교의 유월절인 Nisan 유대인들은 월력을 지키고 있다. 이에 따라 매 달은 초승달로 시작된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새해를 Nisan월로 시작하고 있다. 이 Nisan월 14일 즉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에 이들은 유월절을 지키고 있다. 월 14일에 시작하였다. 이에 반해 로마에서는 Nisan월 14일이 지난 후 주일을 부활절로 지켰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날을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부활절이 음력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부활절은 주중의 날에 관계없이 3일 후에 지켜졌다. 이들은 성금요일을 Nisan월 14일이라 믿었다. 이에 따르면 한 예로서 성금요일(Nisan월 14일)이 당해 화요일로 되면 부활절은 목요일에 지켜졌다.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Quartodecimans(열 넷째 날장이)"라 불리었다. 이에 반해 서방에서는 부활절이 언제나 일요일 즉 부활일에 지켜져야 하며 십자가 처형은 언제나 금요일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여기어졌다.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중(週中)의 날이 중요하였고, 동방교회에는 달(月)이 중요시되었다. 이 분쟁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해결되었다. 여기서는 달과 주중의 날이 다 인정되도록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부활절을 춘분 다음 첫 만월 후 첫째 주일에 지키기로 하였다. 부활절은 언제나 유월절 때에 온다는 것과 또 언제나 주일에 온다함을 양측에 확증시켜주었다. 그러나 춘분을 정하는 데에도 난점이 생김에 따라 3월 18일부터 25일 사이의 여러 날자가 사용되어 상이한 부활절을 지켜왔다. 5세기에 이르러 천문학과 수학 연구가 활발하였던 알렉산드리아 감독에게 해마다 부활절 일자를 정하는 책임이 주어지게 되었다 A. J. Wegman, Liturgie in der Geschichte des Christentums, 74-76. Josef Andreas Jungmann, Der Gottesdienst der Kirche, 201; Edward T. Horn, {교회력}, 161-162. 이러한 날짜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부활절에 주님께서 고난 가운데서 역사 하시고 또한 부활하심으로 완성하신 그 주님의 구원하심을 감사하며 또한 기리고 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주님의 부활은 그들 생활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 부활절은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까지 지켜졌다. 이와 함께 주님의 부활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도록 7주간 동안 부활 주간이 계속되었다. 부활절은 토요일저녁 예배로 시작하였다. 이 예배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을 감사하며 밤새 진행되었고, 성서낭독이 있었으며, 세례식과 성찬 성례전이 거행되었고, 아마도 촛불예배로 진행되었다. Horace T. Allen, A Handbook for the Lectionary, 28. 이러한 초대교회의 부활절에 대해 딕스(Dom Gregory Dix)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부활절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을 단순히 기억하고 기념하기보다는 구원에 관한 예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은 물론 이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는 방법이었다. '그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간과 죄,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고난, 부활, 그리고 승천의 사건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사고 속에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Dom Gregory Dix, The Shape of the Liturgy (New York: Seabury Press, 1983), 338-339. 4세기에 이르러 부활절이 성금요일과 연관되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고난과 무덤에 묻힘,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3일(Triduum)의 연속성이 부각되었다. 이 오래된 3일(tridumm passionis)은 현재 고난 주간에 지켜지는 3일(tridumm sacrum) 성 목요일(Gr ndonnerstag), 성 금요일(Karfreitag), 부활절 전 토요일(Karsamstag)과는 구분되어 이해되어져야한다. Josef Andreas Jungmann, Der Gottesdienst der Kirche, 201. 이 시기에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다수의 시편들이 예배에 사용되었고, 목요일에는 시편 68-76편만이 사용되었다. 이는 목요일은 당시의 부활절 3일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부활절과 관련되어 많은 관습들이 생겨났다. 어떤 것은 기독교적인 것이고, 다른 어떤 것은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일부 동방교회에서는 사제들이 부활절 전날에 교인들의 각 가정들을 찾아가 부활절 음식에 축복하여 주는 관례가 남아 있다. 이는 원래 오랜 수난절 금식 기간 동안에 금지되었던 음식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일부 중세기 교회에서는 수난절 초에 강단에 묻어 놓았던 관에서 알렐루야를 다시 꺼내거나 혹은 성 금요일에 안치한 관에서 그리스도의 초상이나 십자가 등을 꺼내는 관습이 행하여졌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부활절에 달걀 염색과 달걀 굴리기가 행해졌다. 이 달걀 굴리기는 백악관에서 매디슨(Madison)대통령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잘 준비된 부활절 연극이 부활절 이브에 상연되었다. 스위스 고올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된 14세기의 한 대본에 따르면 부활절 극이 9막 35장에 이르고 있다. 이 대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부활까지 다루고 있다. 또한 홀란드에서는 여기에 창조, 루시퍼의 타락, 인간의 타락, 발람, 이사야 그리고 구세주를 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dward T. Horn, {교회력}, 169. 한 주간의 첫날에 이루어진 부활의 역사는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큰 생명이다. 그러므로 매 주일은 주님의 날로서 기독교 교회력에서는 또한 이를 작은 부활절로 강조하고 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과 영광을 함께 하는 새로운 존재를 경험하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 (신학용어) -------------------------------------------------------------------------------- 그리스도의 부활 (희)avaoraois (영)resurrection (독)Anferstehung 초대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승천하게 하여 "아버지의 우편에" 앉게 하셧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확신은 신약성서 신앙의 중심적인 내용이 되었다. 또한 기독교 사상사에서도 중심이 되었고, 특히 불사성(immortality) 신앙의 기초가 되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정적인 계시와 창조자 하나님의 주권의 입증으로 그리고 죄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한 승리로 간주되었다. 이 "권세"는 매우 분명하게, 즉 사탄은 "이 세상 신"(고후4:4)이며, "이 세상 임금"이며 "공중의 권세잡은 자"라고 기록되어있다. 사탄은 혼자 있지 않으며 마귀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 그리고 "이세상초등 학문"을 데리고 있다. 다른 한편 하나님 주권의 세계 정복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말론적 상징주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많은 이적 중에 있는 단순한 하나의 이적이 아니라 "시대의 표적" 이며 창조행위와 비교가 되는 우주적 행위였다. 이 부활은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 믿는 신앙의 기초가 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세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한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신앙은 현재의 생활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정통신앙에서는 영생을 믿는 신앙의 기초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직분의 하나로 간주했다. 신앙의 본질상 성서비평은 부활신앙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수긍보다는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반어 들은 다음과 같다. 성서 비평은 자유주의 개신교에서 시작되어 성장했기 때문에 부활은 소망의 소산으로 간주되었고, 역사적 조회는 신약성서의 확고하고 기적이 아닌 신앙, 즉 예수의 인격과 교훈을 확증했다. 그리고 부활의 구심성(centrality), 특히 예수의 설교 안에 종말론적 요소가 결정적으로 들어있는 것을 발표한 것은 바로 이 성서비평 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Christ)
그리스도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Christ) (성서 교리학) -------------------------------------------------------------------------------- (a) 부활의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독특한 이적이다. 이 부활의 실재성을 한 번 기정사실로 설정하고 나면 복음서에 기로되어 있는 여타의 이적에 대하여는 왈가 왈부 토론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더욱이 이 이적을 믿느냐 안믿느냐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설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기독교는 천 구백여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있었던 확실한 사건에 그 가르침의 기초를두고 있는 역사적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그의 탄생과 그의 전도와 죽음과 장사 지냄과 부활이다. 이 여러 가지 사건 중에서도 그의 부활은 가장 중요한 관석이 된다. 왜 그러냐하면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의죽음이 대속의 죽음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기독 교인들은 여러 세기를 두고 내려 오면서 속은 것이요 설교자들은 거짓을 설교한 것이 되며 신도들은 헛된 구원의 소망에 기만을 당해 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부활의 교리에다 의문 부호를 부치지 않고 감탄 부호를 붙일 수 있게 된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b) 부활의 증거 "기독 교인들은 빈 무덤의 냄새를 맡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어떤 불란서의 회의주의자는 말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아침에 예수의 시체에 향을 바르러 왔던사람들이 그의 무덤이 텅 비여 있었던 것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다. 무덤이 텅비어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의 부화르이 사실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설명될 길이 없다. 만일 유대인들이 우리 주님의 시체를 어디서든지 발견해 낼 수만 있었다면부활을 전하는 최초의 설교자들의 증거를 논박하기는 매우 용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면 기독교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확실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매장된 채로 그대로 있을것이 분명하다. 오순절날 생명있고 빛나는 교회가 어떻게 죽은 지도자로부터 탄생할 수 있었으랴! 그러면 부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본 사람들의 증언을 어떻게 취급해야할 것인가? 부활 수에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 본 사람 중에 그와 더불어 말한자도 있고 그의 몸을 만져 본 자도 있고 그와 더불어 같이 식사한 자들도 있었다. 바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본 자들이 아직도 많이 살아 있다고 바울은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영감된 증언을전해 주고 있지 않는가? 너무나 정직하고 성실하여 거짓된 멧세지를 전하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증언을 어떻게 받다 드려야만 옳은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만일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보지 못했다더라면 어떻게 그가 위대한 전도자의 한 사람으로 개종할 수 있었을가?위에 열거한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게 위하여 온갖 노력을 해왔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잃고 실망 낙담한 그의 제자들이 감히무장을 하고 시체를 기티고 있는 로마 병정들로부터 그 시체를 빼앗아 올 용기가 있었을까! 그런데 현대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제자들은 다만 환상을 보는 체험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수백명의 사람들이 동일한 환상을 보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상상할 수 있었을가!또 그렇게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수께서 실제로 죽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졸도했던 것에 불과하였는데 십자가에서 그 시체를 내렸을 때에 그는 아직도 생명이 붙어있었다." 그렇다면 창백하고 피기 없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예수가어떻게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 특별히 회으심을 품고 있던 도마에게 자기가 부활하신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 있었을가! 위에 열거한 현대 학자들이 설명은 너무나 빈약한 것이기 때문에 논박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재 확인하는 바이다. 자유주의 신학잗 드웨테 (De Wette)씨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씨자가 암살당한 것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인 것과 꼭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부활의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바 아니다. (c) 부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가 되신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장에 대한 세상의 대답은 십자가이며 하나님의 대답은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속죄의 죽음이 하나의 실재라는 것을 뜻한다. 곧 인간은 자기의 과거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과 화목할수 있게 되었다. (롬4:25). 부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평범한 하나의 죽음이아니며 또한 죄를 제거할 수 있는가?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때문이다. 동정 많은 우리들의 대제사장은 하늘에 계신데 그는 우리들의 생명을 위하여사셨고 우리들의 슬픔과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매일 매일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또한 우리를 위하여 사셨다 (롬8:34,히7:25).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죽었다 살아나서 내세에 대하여 말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로 보톤 사람들은 내세를 부인하려고 한다. 그러나 죽었다 살아 난 사람이 있다즉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 부활하였다."만일 사람이 죽었다 다시 살수 있느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과학은 다만 "알 수 없다"고 대답할 뿐이다. 또한 철학은"내세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죽었다가 사신 것처럼 우리들도 죽었다가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 불멸의 사실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원불멸을 보증한다 (살전4:14,고후4:14,요14: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미래에 있을 심판에 확실성을 의미한다. 영감 받은 사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1). 예수께서 분명히 죽음에서 부활하여 인간의 심판자가 된 것처럼 인간들도 분명히 죽음에서 부활하여 예수님에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령과 부활
그리스도의 성령과 부활 (성서 교리학) -------------------------------------------------------------------------------- 성령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어서 살리시는 영의 구실을 하였다.(롬1:48:11)부활하신지 몇 일 후에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숨을 내쉬면서"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20:22,행1:2 참조). 이 말씀은 능력의 부여를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받기 위하여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어떤 성서 학자들은 여기서예수께서 숨을 내쉰 것은 그로부터 오십일 수에 일어날 사건을 상징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창2:7 을 비교해 볼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는 행위는 창조적 행위를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후에 그리스도는 살려주시는 영 또는 생명을주시는 영으로 기술되었다. (고전15:45). 이와 같은 경우에 생명의 주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 함으로 알 수 있게 할 수는 없었을가? 열 한 제자들은 새로운 임무를 수 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파송되기로 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승하여실천해야만 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승하여 실천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명을 자기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었다. 이는 마치 생명 없는 육체가 산 사람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음과 같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생명을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옛 사람에게 숨을 불어 넣으신 것과꼭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사람에게 숨을 불어 넣으신다. 만일 우리들이 이 경우에 있어서 성령의 참다운 부여를 인정한다고 하드래도그러나 이는 보혜사의 인격 자체가 아니라 전달된 그의 생명을 영감이라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위스콜 (Wescott) 감독은 "부활절의 선물"(TheGift-of Easter)과 "오순절의 선물" (Gift of Pentecost)이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활절 선물은 부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요 오순절의 선물은 승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 된다." 즉 다시 말하면 전자는 살려주시는 은혜요 후자는 부여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약개론:바울의 신학) -------------------------------------------------------------------------------- 구원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1. 구원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및 受肉 신의 은혜 행위는 신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주어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음과 함께 구원 사건을 이룬다. 바울은 이것을 전승으로 받았다. 그러나 수육에는 독자적인 의미가 부가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행위의 통일성을 이룬다. 이 죽음에서 증명된 된것은 그의 순종이다. 바울에게는 예수가 교사도 예언자도 아니다. 인간적인 규범에 의해 예수를 평가하는 것은 육에 따라 그를 평가하는 것이다. 2. 문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 사건이 선행된 신의 은혜의 행위라는 것과 인간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그것의 능력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순수히 신에 의해 제기된 사건이다. 문제는 이 사건이 어떻게 은혜의 행위로서 인간에게 경험될 수 있는가이다. 3. 개념성들 a) 속죄제물 : 이 개념은 유대교적 제사 사상과 법언어적 사유의 개념성을 사용하여 표현한 것이다. b) 대속 제물 : 속죄제물과 유사한 것으로 제사 - 법정 용어 사유의 영역에서 생긴 것이다. c) 속량 : 율법의 저주에서 죄에 대한 벌에서 속량하는 수단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한다. 속량에 의해 얻어진 자유는 율법 자체에 대한 자유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책 즉 범죄함으로 정해진 형벌을 도말하는 제물이며 율법과 죄, 죽음에서 자유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d) 밀의 종교적인 죽음 : 예수의 죽음으로 야기되는 그 작용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묘사된 것이다. 이것은 세례와 주의 만찬을 통한신성에의 합일로 나타나 있다. e) 영지주의적 신화 : 이 사상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구세주와의 통일 즉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신자들은 반신적 세력에서의 해방을 경험한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주적인 사건으로 묘사한다. 4. 두 신앙 개념 바울이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유대교적 제사 및 법 사유의 범주들로 논술 하는데 한정시키지 않고 밀의종교적인 그리고 영지주의적인 신화의 규범을따라 기술하였다면 그것은 구원사건이 실제로 인간에서 수행되는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의 행위와 동시에 신앙 개념을 둘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선재적인 신의 아들을 통한 신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이고, 신의 은혜에 대한 신뢰로 지금까지의 인간의 자랑을 철저히 포기하는 신앙을 말한다. 5. 그리스도 승인과 새로운 자기 이해에서의 신앙의 통일성 어쨋든 바울은 신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신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 그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그의 자아를 죽음에 던지자로서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구원 사건이 어디서도 선포하고 말을 걸고 요구하고 약속하는 말에서 현재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도 확실하다. 즉 구원 사건은 말로서 수행되고 항상 현실에서 수행뙤므로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이는 믿는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결합된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선포의 말에서 결단을 내려아 할 실존의 가능성으로 되고 신앙이 그것들을 이해하고 믿는 자의 실존을 규정하는 세력들로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 先在 및 受肉, 復活 a) 구원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사건으로 인식되는 것은 십자가의 말이 듣는 자 앞에 세우는 결단의 물음에서 유래한다. 이 사건은 언제나 현재에서, 선포되는 말에서, 성례전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들 속에서 수행된다. b) 선재와 수육 : 그리스도의 선재와 수육은 그것이 신의 종말론적 행위라는 사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수육은 그 자신의 순종과 사랑의 행위로 앞서오는 신의 은혜와 사랑에 관한 신의 인정을 받은 선포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선제에 관한 말에서 신화적 표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선재성이 믿어지면서 동시에 듣는 자에게 적중되는 신의 말의 있음이 수긍된다. 선재자를 창조의 중개자로서 말할 때 신앙은 창조와 구속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 케리그마의 말에서 만나는 신의 사랑이 그 근원을 영원 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한다. c) 부활 : 이는 객관적으로 증명,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부활한 자를 주로 승인하는 신앙 이전에 통찰될 수 없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아버지에게 반환할 때 까지 소유하는 왕좌에 그가 올라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그리스도는 부활한 자로 현재한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통해 자신을 보인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바울신학/ 2015-06-29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A. 바울의 회심의 사건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있는 사울은 예수가 바로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행2:25-28; 시16:8-11 (참고 눅24:27).) 선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하였으며, 더욱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 즉 메시야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삼일만에 다시 부활케 하셨다 하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말에 분노하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한다하고 특히 스데반을 신문할 때 증인으로 섰고, 돌에 맞을 때에는 그가 사형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행 7:55-58, 8:1.) 주장하였으며, 또한 다메섹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넣기 위해 산헤드린에서 발급한 정식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강한빛을 보매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 이때 그는 눈을 뜰수 없었으며 홀연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나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하셨다. 동행인들은 그소리만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였다.(행 9:6-9)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야를 만나 아나니야의 인도에 따라 시력을 회복하였으며, 그에게 세례받고 모든 사람 앞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보고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증인이 될 것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바울의 다메섹 도사에서 회심의 사건은 사도행전에 삼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회심의 표현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9장 7절에는 동행인이 소리는 들었으나 보지는 못하고, 사도행전 22장 9절에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고, 사도행전 26장 13절과 14절에는 밝은 빛이 내려와 함께 가던 사람들은 두루 비추었다 하였다. 문제는 표현하는 글에 뜻있는 것은 아닌 줄로 안다.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맨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자였던 사울은 그를 복음전하는 사도로 부르시는 소명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B. 회심의 신학적 의의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의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기록과 바울 자신이 쓴 서신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전설적이고 객관적인데 비해, 바울 자신이 쓴 서신( 갈1:15-16; 고전9:1-2; 고후4:5-6.)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실상 바울의 회개의 계기는 바로 바울 자신의 주관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이방에 복음을 전파할 주의 사도로 쓰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였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행22:21; 고전15:8-10; 엡3:7; 갈1:1; 엡1:1; 딤후1:1.) 그리고 바울의 신앙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기의 잘못된 신앙관을 깨닫고 회심한후 그의 신앙은 180도로 변한 철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믿었다.(빌 3:7-9) 바울은 회심 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율법적인 신앙관을 바꾸어 복음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됨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을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하셨다고 하였다.(갈 1:15-16) 하나님은 바울의 전 생애를 영광가운데 인도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자기의 성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 했다.(엡 3:7-9) 바울의 이같은 확실한 신앙은 마침내 자신을 이방인들을 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불같은 사명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골 1:25)(딤후 1:9-11) C. 부활에 대한 바울의 확신 바울 자신도 회심 이전에는 일반 유대인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유포한 한낱 유언비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 들이야말로 기존 유대 종교를 혼란시키는 이단자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다는 확증을 얻게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에 보면 그가 극적인 내적 각성을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가 전환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요 또한 바울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전경연, [신학성서 신학서설]. 서울:사상계사. 1955, p.132.)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에서 여러번 언급하고 ( 고전15:1-21; 롬1:4; 고후5:15; 빌3:10-11; 롬6:5-10.) 있으며, 고린도후서 5장1절에서 21절에는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을 다루고 있고 기독론의 기초가 되어 있다. 예수 부활의 사상이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만큼 '핵심적인 것' 이었는지는 데살로니가 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다.( 롬6:47:4; 고전6:14; 고후13:4; 갈1:12:20; 고전15:21-22; 엡1:20; 빌3:10-11; 골3:1-3; 살전1:105:10; 딤전2:5-6; 딤후2:8; 딛2:14.) 바울은 부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단호하게 선언한 것은 고린도전서 15장 15절에서 19절에 잘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도 신학적인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얻은 최대의 사건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그의 모든 생활의 초점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 안에서의 삶에 맞추었다.( 갈2:19-20; 고후5:13-15; 빌1:20-213:7-9,10-14.)
바울 신학으로 본 부활
바울 신학으로 본 부활 고전15장은 이른바 `부활장`으로서 사도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 전파 곧 (케그리마)도, 거기에 따른 믿음, 곧(피스티스)도 헛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힘있게 증거한 예수 부활사건은, 오늘 우리 모두 경건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 죽어 장사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확실히 믿으며 또 고백? 한다. 과연 기독교는 확신으로 넘치는바 생명의 종교요, 또한 부활의 종교이다. 예수께서는 그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1:25)고 하셨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부활하심 에 대해 확신하기 바란다. 그림설명 / 그리스도의 부활 : 이 유화의 초기 형식을 묘사한 것을 보면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전에는 생략되었고 이미 텅빈 무덤의 뚜껑을 여는 천사를 보고 수직하던 자들이 놀라 떤다고 하는 마태의 기술을 충분히 지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부활의 광경을 그려달라는 주문에 따라 후에 그는 그리스도의 자태를 화면에 첨가하였던 것이다. 또한 세사람의 여 자들(눅 16:1-8) 이 아니고 두 사람만 묘사한 점도 마태복음에 따라 묘사했기 때문이다. 패널 위의 캔버스.유화. 상부원형.92*67cm 1639년 제작. 뮌헨 회화관 소장. 바울이 쓴 서신과 사상에서 그의 강조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희생적인 죽으심과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 부활사상이 어떻게 바울 사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는가는, 그가 데살로니가 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한 그의 모든 서신 서에서 부활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고 또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했다.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는 그의 말 첫마디도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였다. 또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롬6:4, 7:4, 고전6:14, 고후13:4, 갈1:1, 엡1:20.) 바울은 또한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이와 같이 전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골2:12) 이라고 했으며,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가장 풍부한 교훈을 하고 있다. 그는 우선 무엇보다 부활에 관한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그의 첫마디 말은 이러하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노니,"(고전 15:3)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그는 교회의 표준이 되는 가르침에 관해서 전했다. 이는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의 터무니없는 전개나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초창기부터 교회 안에 구체적으로 있었던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전승에 대한 증거와 관련해서 바울은 몇 가지 사실을 더욱 첨가해서 전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내놓은 증거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이신 실례들을 명단으로 나열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 느니라"(고전15:4-8)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간접적으로 전해듣고 받아드려야 했던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 사건이었으며, 또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할 수 있는 사건이었으며, 또한 그의 증거는 직접적인 것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였다 한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산물이었으며, 하나님이 친히 하신 행위였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4절에서 "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불멸의 능력에 대한 완벽한 증거였다. 또한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최종적인 증거였다. 그는 로마서 1장 4절에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말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은 오실 메시야는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왕으로 오실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메시야와 마주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 관과는 모든 면에서 거리가 먼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그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역사가 필요했다. 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시키는 한 가지 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들이 꿈꾸던 사상을 초월한 승리요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부활하신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강조하였다. 실례를 보면 사도행전 13장 14-43절에 바울이 바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 회랑에서 설교한 내용에 대해서 누군가 진술하고 있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 바울이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들면서 예수의 메시야 되심에 관해서 유대인들을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쓴 서신이 바로 히브리서이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온전한 대제사장으로 여기는 사상은 히브리서의 특징이 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는 그 사상을 최소한 한번 사용했다. 로마서 8장 27절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중재 곧 중보의 기도를 하시는 것에 대해서 기록했다. 또한 로마서 8장 34절에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했다. 바울 사상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사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재판장으로 보는 사상이라 하겠다. 그 사상은 로마서 14장 9, 10절에서 볼 수 있 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 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한때 인간들이 재판 석에 앉아서 신문을 하고 또 인간들에게 정죄를 받으신 바 있는 바로 그 예수님이 모든 사람이 나아가 그의 심판석 앞에서야 할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라 했다. 바울의 사상중에 매우 깊게 뿌리 박혀 있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사상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부활의 능력이라는 사상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자신의 삶의 최종 목표들 가운데 하나를 밝히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에베소서 1장 19-20절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에 관해 말하기를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사 하신 그 능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인이 영위할 새 생활과 연관시키며 또 그리스도인을 옷입히는 새로운 선행과 연관시켰다. 로마서 6장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로마서 7장 4절에서도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하였으며,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그리 스도께서 약하심으로(인간적인 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희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현존하는 능력이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철저한 필연성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14-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 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이와 같이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그리스도인을 보증하고 보호하는 위대한 진리로 믿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위대한 진리들의 보증이 된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이르렀다. 인간들은 그 진리를 무시하고, 말살하고 파괴하려고 했지만 그러 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할 수 없는 것임을 증거 하는 최종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2) 또 그것은 선이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 하신 선이 셨다. 인간의 죄는 그 선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선이 결국에는 그것을 대항하고 있는 모든 악을 반드시 정복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3) 또 그것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단지 한번만에 멸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생명을 멸할 수 없는 것임을 증거 하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4) 또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함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영원토록 파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의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들의 모든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미움에 대항을 모두 좌절시킨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 아니며, 하나의 신학적 교리도 아니다. 그 사건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사실이다. 이 사실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체험한 사실을 입증한다. 바울의 이러한 윤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살아 계셔서 현존하는 주님의 역사인 성령을 통해서 입증되어 있다(롬6:1-9,8:1-2).
바울신학(1)/ 제1장 서론/ 2010-12-15
바울신학(1)/ 제1장 서론 제 1 장 : 서 론 본서는 늘 푸른 초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과 함께 초대교회에 나타난 신학적인 사상을 논하면서 유대교의 간판을 내리고 어떻게 기독교를 세웠는가에 대한 기원과 과정을 논 할 때 바울의 증언을 통해서 접근해 보려고 한다. 유일한 길은 첫 째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에 관한 기록에 의해서 제공되고 있다. 복음서의 연대, 저자, 문서들의 상호 관련 등의 문제로부터 아주 독립해서 복음서가 제공하고 있는 모든 초상화는 예수님 이라는 한 사람의 실재의 역사적 인물의 초상화라는 것을 어김 없이 확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을 질책하고 있는 장면이나 비유를 통하여 교훈을 말씀하시는 장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역사의 한 시점에서 생활하신 역사적 인물이심을 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복음서와 같이 신실성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둘 째로는 바울의 증언을 통해서 기독교의 기원을 접근할 수 있는데, 사실 바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서 예수님 사후에 제자의 무리에 합류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무리의 지도자와 일찍부터 접촉을 가졌고 유대교인 예루살렘 교회의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회심 전에도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아는데 충분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회심과 회심 후의 모든 체험을 증거하고 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창설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복음서의 예수님이 실제적 인물이라면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이면서 초자연적 인물로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어 세계의 심판을 행하는 자가 되도록 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선민 사상이나 메시야 사상과 율법주의와 의식들의 문제들과 같은 요소들을 잘라내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려다가 사도행전 9장에서 부르심을 받아 사도의 직책을 가지고 그의 신앙고백과 체험들을 동원하여 난해한 문제들을 풀어갔다. 첫 째는 생존 중에 생애와 설교 사역에서 풀어 주었다. 두 번째는 서신들을 통하여 기독교의 사상과 실천에 대한 규범적인 것으로 평가 되어 왔고 정경 체택이 되어서 바울서신은 신약 성경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바울 신학을 하면서 개종이전의 환경과 사상을 살펴보아야 겠지만 참고도서들을 소개하면서 접어두고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와 비교해서 새로운 점은 천상적 메시야가 이미 지상에 와서 구원 사역을 수행했다는 신앙이다. 이 설명은 바울의 종교의 기원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메시야로 고백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교 메시야관이 아니고 오히려 동시대의 이교적인 사상에 기초를 둔 것이다.(이방인들은 사람들의 훌륭한 인물을 신격화 시켰음) 우리는 이번 학기를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 가려면 나를 본받으라고 한 바울을 통하여 다메섹의 소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순교까지의 삶에 나타난 고백들을 살피면서 바울과 같은 변화를 받아 충성된 종들로 주어진 사명을 복되게 감당하자.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려다가 사도행전 9장에서 부르심을 받아 사도의 직책을 가지고 그의 신앙고백과 체험들을 동원하여 난해한 문제들을 풀어갔다. 두 번째는 서신들을 통하여 기독교의 사상과 실천에 대한 규범적인 것으로 평가 되어 왔고 정경 체택이 되어서 바울서신은 신약 성경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바울 신학을 하면서 개종이전의 환경과 사상을 살펴보아야 겠지만 참고도서들을 소개하면서 접어두고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와 비교해서 새로운 점은 천상적 메시야가 이미 지상에 와서 구원 사역을 수행했다는 신앙이다. 이 설명은 바울의 종교의 기원을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메시야로 고백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교 메시야관이 아니고 오히려 동시대의 이교적인 사상에 기초를 둔 것이다.(이방인들은 사람들의 훌륭한 인물을 신격화 시켰음) 우리는 이번 학기를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 가려면 나를 본받으라고 한 바울을 통하여 다메섹의 소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순교까지의 삶에 나타난 고백들을 살피면서 바울과 같은 변화를 받아 충성된 종들로 주어진 사명을 복되게 감당하자.
바울신학(10)/ 제10장 은사들의 다양성/ 2010-12-15
바울신학(10)/ 제10장 은사들의 다양성 제 10 장 : 은사들의 다양성 몇 가지 은사들과 직분에 관한 한, 바울은 그것을 조직화 시키지 않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들과 직분들의 커다란 다양성에 강조점을 둔 것을 볼 수 있다.(롬12:6 ; 고전12:4) 그렇지만 그 다양성은 몸의 통일 성과 그 공통선(고전 12:7)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롬12:6~8 ; 고전12:8~10, 28~30 ; 엡4:11에 언급된 목록들은 우리가 연구 조사해 볼 때, 바울은 반복하여 은사와 사역을 언급한다. 그들 중 다수는 동일하지만 다수는 다른점이 있다. 그것들을 성경에 나타난 18가지를 분류해 보자. (1) 사도들(롬12:6~8 ; 고전12:8~10, 28~30 ; 엡4:11) (2) 선지자들(롬12:6 ; 고전 12;10, 28 ; 엡4:11) (3) 교사들(롬12:7 ; 고전12:28 ; 엡4:11) (4) 복음 전하는 자들(엡 4:11 ; 딤후4:5) (5) 섬기는 일(롬11:7) (6) 구제하는 일(롬12;8) (7) 다스리는 자(롬12:8) (8) 권위하는 자(롬12:8) (9) 지혜의 말씀(고전12:8) (10) 지식의 말씀(고전12:8) (11) 능력을 행함(고전12:10, 28) (12) 병고치는 은사(고전12:10, 28) (13) 각종 방언 말함(고전12:10, 28) (14) 방언 통역(고전12:10, 28) (15) 영들 분별함(고전12:10) (16) 감독들(빌1:1 ; 딤전3:2 ; 딛1:7) (17) 장로들(딤전5:17, 19 ; 딛1:5) (18) 집사들(빌1:1 ; 딤전3:,8,12) 1. 사도들 사도직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의 부활의 증인된 자들에게 수여하신 은혜이며 그들은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권위를 부여핫니 구원의 전파자들이다. 그리스도를 교회로 발전케 하는 특수한 관계에 있는 이 사도직은 그 성격상 반복 될 수 없고 계승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교회에 주신 첫 은사로서 종결된 그룹을 구성한다. 사도라는 말의 개념은 무엇보다 임명과 권위부터 개념으로 규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들의 말은 교회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 그리고 그들은 순종을 요구한다.(롬1:5 ; 고후2:9 ; 빌2:12) 그들은 유전의 전수자요 전달자이며 복음의 근본(살전2:13 ; 고전15:3~7, 11:23)이요 신앙의 보증인들이요 신앙의 초석을 놓은 자들이다. 그들의 행동은 교회의 예배이며 작품들은 교회의 정경이 되었다. 우리들은 교회로 소속되어 있고 교회로 통하여 주님께 직분을 받았으나 사도들은 교회로부터 직분이 나지 않고 교회가 오히려 그 기원을 사도들에게서 갖는다. 사도들은 교회의 창설자들일 뿐 아니라 그들은 전체 교회에게 권위를 행사한다. 우주적인 기능과 계승하고 본 받아야 할 사실들이 바울에게서 밝혀진다. 2. 선지자들 사도들과 함께 선지자들도 바울이 제시한 목록에서 보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은 예언하는 자들이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신약의 사도들이 받을 수 있도록 사역을 하였고 주님께서 사도들로 하여금 완전케 하신 것이다. 바울은 선지자으 ㅣ사역이 신약의 교회 안에 있음을 보여 줄 때 고린도전서에서 예언을 방언하는 것 위에다 둔다.(고전14:1)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만 의사 전달이 가능한 반면 선지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하고 격려하는데에 관련된다.(고전14:3,31) 바울이 이 예언을 성령의 사역으로 보았고 따라서 그는 교회에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살전5:19,20) 예언은 교회에 주어지고 교회 안에서 사역하시는 성령의 특수한 하나의 형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예언을 말함도 계시라 불릴 수가 있다.(고전14:30 ; 엡3:15)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과 함께 언급되었다.(엡3:5) 예언의 이 계시적 성격을 성령의 직접적인 감동하게 말하는 것 및 그 말해진 바의 내용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전14:30) 예언자는 하나님의 비밀들에 대한 통찰력을 받는다(고전13:2) 그는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의 의미와 진전을 설명도 한다.(엡3:5) 롬11:25 ; 고전 15:51 ; 살전4:13에서 바울이 교회가 아직도 기대해야 할 하나님의 구속적사역을 선포하고 해석 할 때 그는 또한 예언적 은사와 능력으로 말한다. 3. 교사들 교사는 "세째"로 고전12:28에 언급되고 엡4:11에서 목사들과 함께 언급되었다. 바울이 예언적 은사를 자기에게 부여하듯이(고전14:6) 가르침의 은사도 부여한다.(고전4:17 ; 살후2:15 ; 골1:28 ; 딤전 2장 ; 딤후1:11) 고린도 전서 14장(롬12)에서 "가르침" 은 교회에서 자유로이 나타내는 하나의 은사로 나타난다.(고전 14:26) 그렇지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경우처럼 교사도 어떤 영적 자질을 갖춘 분명히 한정된 일단의 그룹이다.(고전12:28 ; 엡4:11) 이것은 지속적이고도 규칙적인 활동을 가리킨다. 우리는 교사의 뚜렷한 직분을 곧 교회 안에서 교회가 교사로 어떤 사람을 지명하는 것을 볼 수는 없다. 감독들 같은 교회의 지도자적인 인물들에게 가르침의 은사가 필요하다.(딤전3:2 ; 딤후2:24) 그리고 장로님들에게도 가르침의 은사가 필요한데, 그들은 그 때문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딤전5;17 ; 살전5:12 ; 딤후2:2) 이 교사들의 활동을 정확하게 다른 은사들, 예컨대, 예언자들의 활동과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예언자들과 같이 성령의 직접적 영감과 감동에 의거치 않고 사도적 전승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일로 구성된다. 사도적 전승이란 거대한 구속사적 내용과 관련되는 것이며, 그것에서 일어나는 훈계에 관련되는 것들이다. "가르침"과 "전승"이 바울에게 매우 긴밀한 관계 이념이듯이(롬6:17 ; 갈1:12 ; 살후2:15 ;골2:6,7) 마찬가지로 기독교 전승과 교훈은 다른이들을 가르치기에 유능한 "교사들"이 맡아야 할 일들이다.(고전4:17 ; 딤후2:2) 따라서 이러한 교사들의 활동을 교훈과 같은 기독교 교리의 어떤 부분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선포의 전체 내용까지 확장 포함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번은 전체 포괄적인 의미에서 "그 복음"이라 지칭 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그 복음을 ㅗ살아야 할 방식, 곧 이 "교리"의 내용으로 진칭되기도 했다.(갈1:11,12 ; 골 1:23 ; 3:16) 그러므로 구전이 아직도 기독교 신앙의 지식에 원천이었던 그 때에 교사들은 그 전승의 전파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공관 복음에서 언급된 교사의 명칭, 예컨데 유대교 교사들의 칭호같은, 상응하는 관례를 살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정된 전승 자료를 전달할 임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구약에 관한 전승은 큰 역할을 차지했다. "전승"과 "교리"의 밀접한 관계에서 나타나듯이, 기독교 교사들의 명칭은 유대교 교사직에 유추하여 유래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교사들의 활동도 더 상세히 이해 되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교사들의 활동은 요리문답 참여자들과, 세례 지원자에 대하여 큰 중요성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엡4:11에서 "목사와 교사들"의 밀접한 관계에서 나타나듯이 그들의 가르치는 활동도 더 광범위한 범위를 가졌다고 본다. 그러나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양식은 다른데가 있었다. 전자는 좀 더 현재적인 면을 나타내었고 후자는 복음의 설교의 좀더 전통적인 양상을 띠었다. 두 가지 모두의 기능은 교회를 세우고, 위로하며, 영적인 지도를 주는 일이었다. 그 결과로서 경계선을 정확히 설정하기는 어렵다. 예컨데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것들이 정확하게 예언적 혹은 교훈적 성질을 갖는 것인지 구분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우리가 골2:1~8을 읽을 때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지식과 지혜의 보고들은 예언적 국면 뿐만 아니라 교훈적 양상도 나타내 주고 있다. 둘 다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은사가 주어진 사람에 의한 해석이 필요하다 4. 복음 전하는 자들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의 목록에서 복음 전하는 자들은 단지 에베소서 4장에만 언급되어 있다. 딤후4;5에서 바울이 이 자격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하길 "전도인의 일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 행21:8에서 또 나타난다.(여기서는 전도자 빌립을 가르치고 있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빌립같이(행8:4,12,35,40) 복음을 선포하긱 시작한 자들 혹은 사도들을 돕는 자들로 생각한다. 바울은 이처럼 디모데를 그리스도 복음의 동역자(살전3:2)라 칭한다.(골4:11 ; 고후8:18 ; 빌4:3) 그런데 이 직무를 규칙적인 임명의 의미에서 특수한 직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겠다. 이 직무네 규정적으로 채용된 어떤 사람들은 확실한 자격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선교사로 뿐만 아니라 이미 설립된 교회의 지도자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딤후 4:5에 근거한 가정은 신빙성이 크지 못하다. 확실히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 선포에만 국한하지 않고 교회조직의 설립을 지시하고 세례를 주었을 것으로 본다.(딤전2:2 ; 행8:12) 그렇지만 그들의 고유한 일은 분명히 우리가 몇 가지 예로부터 결론지을 수 있는 한에서는 교회의 다스림 보다 지속적인 복음 선포에 있었다고 할 수가 있다. 초기에 그들은 자주 사도들과 교회의 지도적 인물 사이의 교량 역할도 담당했다. 사도들이 하나 둘 사라짐과 함께 복음 전도자들도 사라져 갔다. 5. 목사들 엡4:11에 목사는 교사들과 함께 언급되었다. 이것은 둘 사이의 동일성을 의미한다기 보다,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가리키는 듯 하다. 우리는 이 목사들의 사역의 성격을 은유적 표현 양식에 따라 추론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교회를 돌보고 지도하는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겠다. 벧전2:28에서는 에베소의 장로들은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주의하라)고 명을 받고 있다.(벧전5:1,2) 따라서 목사들은 장로들과 감독들에게 위탁된 일과 같은 일을 한다. 엡4:11에서는 비록 감독의 직무가 언급 된 것일 수도 있지만(빌1:1) 목사와 교사의 직무보다는 활동의 면을 언급하고 있다. "목사와 교사"가 그처럼 밀접히 연결된 것은 그들이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공통적 직무를 갖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 지도자로서 특히 교사들은 자기들을 가르치고, 목사들은 교회에서 일반적인 지도를 한다.(딤전5:17) 목사의 직분과 관련해서, 우리는 교회 내의 지도적 은사를 가리키는 다른 칭호들을 또한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롬12:8은 지도하는 자가 열심으로 이 은사를 행사토록 권한다. 동일한 문맥에서 "너희를 권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딤전 3장에서 다시 동일한 말로 감독들에게 명하기를 그들은 자신의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그는 말하길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그리고 딤전 5:17에서 동일한 특성이 장로들에게 부여되었다. 비록 로마서의 디모데전서에서는 관점이 다르긴 해도(한쪽에서는 은사로 다른 쪽에서는 직임으로 간주되었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제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롬12장에서 지도하는 자들로서 바울은 장로들 혹은 감독들을 언급했다. 동일한 것이 고전 12:28~30에 언급된 목록들에도 적용된다. 거기서 바울은 동일한 의미에서 "다스림의 자질"을 언급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확실히 교회 안에서 특정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주어진 능력 때문에 지도적 위치를 점유하며 다른이들은 그들에게 순종해야만 한다.(고전16:16) 다시 한 번 더 여기에서는 자질들과 직부상의 능력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교회들 안에서 장로직과 같은 직분들이 아직 제도화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빌1:1) 6. 상호 봉사 교회 내의 상호 봉사를 지칭하는 은사들은 다소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신자들이 롬12장에서 권고 받길, 모든 성도는 자기에게 수여된 은사를 올바른 방식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혹 그것이 섬김의 은사이면 '그것이' 섬기는 일로 '나나타게'하라" =>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는 자가 그것을 성실함으로 하라. =>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그것을 하라(롬12:8) 그리고 고전12:28의 "서로 돕는 것" 혹은 "봉사하는 능력"도 동일한 범주로 분류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모든 서술들의 분명한 개념을 구성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전자는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고, 후자는 좀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비의 행위를 지칭 할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12:28의 서로 돕는 것은 그렇다면 이것과 저것 모두를 포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더욱 어려운 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는(롬15:31 ; 고전16:15 ; 고후8:4) 롬12:7의 문맥에서 "섬기다"라는 일반적 명칭을 해석하는 일이다. 아마도 일반적으로 말해 모든 섬김의 행위를 지칭할 수 있는 그 말은 롬12:7에서는 좀 더 특수한 면을 가리키는 용례이다. 사랑의 돕는 행위, 봉사의 실제적 시행의 뜻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롬12:7에서도 우리가 고전 12:28에서 "봉사 행위"로 취한 의미와 동일한 뜻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다른 여러 은사들 중에서 사도는 서로 돕는 것의 실제적 시행의 영역에 놓여있는 은사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7. 장로들, 감독들 지금까지는 주로 특히 전면에 나타난 직분들의 질적 성격을 가졌던 은사들을 살펴 보았고 교회를 위해 있어야 할 여러 직분들과 직무들 사이의 경계가 분명치 않았던 점도 살펴 보았다. 그러나 빌1:1과 목회 서신들에 언급된 장로, 집사, 감독의 직은 다른데에 있다. 무엇보다 장로들과 감독들에 관한 한,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동일 직분과 관계하고 있음을 제시해야 하겠다. 물론 그 명칭들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장로, 영장자는 확실히 유대교에서 유래한 족장적 배경을 갖고 있다. 유대교에서 장로는 어떤 지위를 가르치는 명칭이다. 목회 서신들에서 그것은 "직무에 대한 명제가 아니라 연령을 지칭한다."는 것은 디도서 1장 5절에 비추어 볼 때 그 신빙성이 약하다. 에피스코포스는 그것이 유대교 배경에서 왔든, 헬라적 배경에서 유래 되었든지 간에 기독교 이전 형태의 어떤 대응과 쉽사리 동일시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할지라도 두 말은 다른 관점에서 동일한 종류의 직무 책임자를 가리킴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딛1:5~9에서 선한 장로가 되길 요구하는 것은 딤전 3:2에서 에피소코포스에 대해 언급하 바와 아주 유사할 뿐 아니라 또한 그 명칭들은 딛1:7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전 됨이 없이 교차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장로 혹은 감독직의 의미는 목회 서신들에서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은 잘 알려진 것으로 가정되었다. 딤전3:1~7과 딛1장에 각기 언급된 장로 혹은 감독에 필요한 선행 조건들은 대부분 일반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며 그 직부이 어떤 성격의 것들을 나타낸다. 예컨데 딤전3:4,5에서 "의 머리가 되며", "규율을 세우다" 등이 직부의 어떤 성격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것으로부터 장로, 감독의 직무는 딤전5:17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딛1:7에서 감독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불리운것과 꼭 같이 특히 지도하고 교회 안에서 일이 잘 되어 가도록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우기 특별한 점은 그들은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 해야먄 한다.(딤전3:2) 이 말을 우리는 "가르치는 자질이 있는"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딛1:9에 따르면 감독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데,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다. 유사하게 딤전 5:17에는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특별히 말씀(말씀 전파)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추론해 볼 때 장로들은 행정과 교회 질서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영적이고 본질적 의미에서도 지도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안팎으로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원래적 의미를 옹호하고 변호해야만 했다. 이 점에서 부분적으로 그들의 사역은 교사들의 그것과도 일치된다. 그렇지만 딤전 5;17로부터 분명한데가 있는데 모든 장로들이 모두 동일하게 직접적으로 특별하게 "말씀과 가르침의 사역"에 관계한 것이 아니었다. 몇몇은 좀더 일반적인 지도직에 치중했고 다른 이들은 선포와 가르침에 더욱 비중을 두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도권과 가르치는 국면을 따로 생각 할 수는 없겠다. 따라서 직무적 은사와 비전문적 은사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임도 나타난다. 다스림과 지도권의 은사(롬12:9 ; 고전12:28)는 불가분리의 관계이며 그런 의미에서 바로 장로, 감독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더우기 가르치는 재능이 결여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지도직에 부름받은 자들은 그러한 특별 은사를 가진 자들이었다. 은사는 직분화 되기 쉬우나 직분이 은사를 결여시킬 수는 없다. 더우기 직분으로의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은사적 측면에서 고려하든지 직무적 측면에서 고려하든지 모두 사실이다. 은사적 측면에서 보면 성령께서 부여하신 어떤 재능은 그 자질을 자동적으로 전면에 나타나게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직무상의 지도자인 장로, 감독들로 승인하고 임명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러한 것은 교회는 순전하고 덕을 세우는 것과 겉치레적이고 덕을 파괴하는 것 사이를구분해야 했다는 사실에의해 촉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직무적 의미에서 일반적인 지도자들을 임명함은 기독 교회에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유대교회의 회당적 배경과 및 교회의 실제적인 요구와 조화가 된다. 그러나 모든 개인적 은사들이 직무로 되었던 것은 아니다. 장로, 감독직이 비전문적 은사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고안 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들 직분의 의미와 구조는 좀더 일반적인 의미를 가졌으며 그것은 곧 교회의 조직적 삶과 영적 삶을 지도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사실상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모집되었으나, 후자에게서 비 직무적 의미에서 교회를 계속 세우는 자유와 여지를 빼앗지는 않았다. 지도하는 장로직무의 일반적 성격은 어떤 은사들(예컨데 병고침과 방언의 은사 같은 것) 보다 더욱 추천에 있어서 본질적이고도 유용하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직무상의 국면이 좀 더 전면에 부각되는 부분, 예컨데 목회 서신들에서는 어떤 은사들은 언급이 되어 있으나 어떤 은사는 빠져 있는 사실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발전은 직무가 은사를 밀어 제쳤다거나 혹은 직무가 은사를 가리키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일방적으로 요구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회중의 삶이 사도적 전승과 교리(전경의 형성)에 근거해서 견고화 되었던 것처럶 교회는 바울이 장로, 감독직무의 기초로 또는 그 직무에 필수적이라 칭하는 그러한 은사들이 절대로 필요했다. 즉 다스림의 은사, 가르치는 재능, 바른 교리와 상충되는 바를 올바로 식별해 내는 분별력, 외인들을 향한 바른 자세 등은 꼭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과 사도들의 직속 후계자들이 교회를 다스리던 시대가 점점 종언을 고하는 때가 다가왔을 때 바울은 장로, 감독직무에게 교회의 세움과 발전을 위탁하게 되었다. 8. 집사들 장로, 감독직과 밀접히 연관해서 바울은 집사를 언급하고 있다.(빌1:1 ;딤전2:1,8 ; 딛1장에서는 전자만을 언급한다.) 딤전3:8~13의 "집사의 모범"에서 의도된 직무의 성격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집사들이 요청받은 사항들은 보다 더 일반적인 종류의 것이다.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부터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바는 집사직은 특히 교회에서 상호 도움을 제공했으며, 또한 바울이 롬12:6~8에서 기술한 섬기고, 구제하고, 긍휼을 베푸는 은사와 고전12:28에서 언급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돕는 능력"의 은사와 관련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이러한 은사들을 말하는 방법에서 분명히 나타난 것은 이 모든 활동은 전체로서의 은사에 종속적이고 의존적 의미를 갖는 다기 보다는 그들의 특수하고도 독자적인 성격이 현저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할 수가 있다. 즉, 집사직은 이 상호적 도움을 통상적으로 관리하도록 하기 위해 제정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실로부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점은 집사는 단순히 장로를 돕는 직이 아니다. 혹은 감독에 종속하는 직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적 삶의 고유한 기능에 상응하는 특수한 직무가 집사들에게 부여된 점이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의 독립된 직무가 생겨난 사실은 장로직이 생겨난 것과 동일한 관점에서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직무가 은사적 직임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집사직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사직은 규칙적이고 확실한 질서에 필요한 것임이 입증된다. 그리고 직무로 채용되지 않고 있었던 성령의 은사들을 위해 여지가 남겨져 있었고 남겨져 있어야 했던 것은 우리가 장로, 감독의 직무처럼 집사직을 그 자체의 존재 이유로서 구분할 수 있을 때,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와 능력들을 바로 관리하며 그 지시된 방식으로 교회에 지시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로 생각하게 될 대 더욱 분명해 진다. 이는 교회의 계속적이고 정상적인 세움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9. 여자들 교회를 세우고 정비함에 있어서 여자의 위치도 독자적 문제로 등장한다. 우리가 할 것은 가장 중요한 것만을 살펴 보는 일이 되겠다. 일반적으로 바울이 언급한 교회 내에서의 여자의 위치에 관한 진술은 이미 우리가 그의 결혼에 관한 훈계에서 고찰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동일한 두 관점들을 드러내어 주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여자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에 완전히 참여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남녀는 완전히 평등성을 갖는다. 이 평등성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주자나 모두에게 차별이 있을 수는 없다.(갈3:28 ; 골3:11 ; 고전 11:11,12)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라 할 지라도 남,녀 관계의 사이에서 그 자연적 구분을 없이 할 수는 없으며, 남자는 여자에 대해 지도적 위치에 있다. 바울의 시대, 즉 일반적으로 말하면 고대에서의 특수하게 말한다면 유대교 내에서의 여자들의 지위를 고려해 볼 때, 교회내에서의 여자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확실히 하나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바울 서신들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남,녀 평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형제들" 앞으로 교회에 서신을 보내지만 그럼에도 여자들을 향해 명령한다.(회당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또한 다른 방식으로, 즉 롬 16장에 언급된 인사 목록에서도 여자들의 이름이 많은 것을 볼 수가 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한 예언의 은사는 바울이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부여하고 있다.(고전11:5) 또한 "기도함"이 문맥에서는 확실히 개인적, 사적 기도 뿐만 아니라 공중 앞에서와 남의 덕을 세우기 위한 기도도 포함하여 이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 부여된 것으로 본다. 그것과 함께 브리스길라 같은 여인들도 지적되어야 하겠다. 바울은 비단 그녀의 남편 뿐만 아니라 그 여인도 자기의 동역자라고 소개한다.(행18:2) 그리고 마리아(롬16:6)도 언급 되었는데, 바울은 복음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사역을 특히 지칭하는 말로 그녀를 증거하길 많이 "수고했다."라고 하고 있다. 동일한 사상이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와 버시에게도 해당된다.(롬16:12) 그리고 롬16:1에서 바울은 뵈뵈에게 특별한 직무와 자질을 자신과 교회를 위해 부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롬12:7과 고전 12:28에 언급 된 돕고 섬기는 은사들로 분류 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뵈뵈가 "직무상으로"는 여집사가 아니었으나, 우리가 거듭 주장한 바와 같이 뵈뵈의 직무는 교회가 임명한 그러한 직무와 어떤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바울 서신들로부터, 여자가 가질 수 있었던 직무는 통상적인 직무가 아니라 비직무상의 은사 뿐이었다라는 점을 추론할 수 없다.딤전5:9 이하에 보면 교회 내에서 과부에게 할당된 과업이 있었고 그들 중 누구는 허용되고 다른 이는 허용되지 않는 직분에 대한 언급이다. 다른 한편, 바울도 역시 여자들에 대한 어떤 제한을 부과하고 있다. 특히 교회의 회합에서 여자들은 제약을 받는다고 언급되었다. 고전 14:34에 언급된 대로는 여자들은 교회(모임)에서 잠잠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잠하라는 명령과 고전 11장에서 허용된 기도 혹은 예언의 은사와 자유와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하는 것은 난제가 된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고전 14:34에서 여자들은 다른 이들의 예언을 판단하는 데서 조용하라고 요청되었다고 한다. 복음 전파와 주의 사역에 잠잠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34,25절을 보다 후기의 첨가어로 간주한다. 또 다른 이들은 만족 할 만한 어떤 해결책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고전14:28의 말씀은 교회의 모임에서 잠잠 하라는 뜻임을 회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은 공적 모임 밖에서의 영적 언사들에 한정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공석에서 말하는 것을 삼가하도록 여자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바울은 여러 방식으로 조용하라고 명령한다. 고전 14:34에서 그는 말하기를 여자들의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에 그 처럼 이른 것"과 "같이", 그는 이것을 첨가한다. "오직 복종해야 함"은 그들에게 정해진 혹은 규율에 순응해야 함을 가리킨다. 명백히 나타나는 바는 여자가 남자와 관련하여 갖는 위치에 관한 규칙 혹은 규율이다. 따라서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지니 라고 한 말이 뒤 따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계속해서 "여자가 교회(모임)에서 말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유사한 선언을 딥전 2:11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 여자는 교회 모임에서(여기서는 교회 모임에 관한 지시를 한다.) 일체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따라서 여자가 가르치고 "남자 위에" 주관함을 허용치 않고 여자는 조용해야 하고 잠잠해야 한다. 여기서 다시 고린도전서14장에서 율법이라 지칭된 바에 대한 호소가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최초의 역사, 즉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브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받아 죄에 빠졌음이라는 사실에 호소한다. 이 논거에서 다른 두 개의 동기들이 매우 긴밀하게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1) "율법"이 말하는 바, 혹은 태초의 역사로부터 추론된 것, 바울 당대에 통요되던 권위(표준)에 따라 여자에게 부적당하다고 생각한 것 (2) 그가 고전11;5~13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이 "합당한가"와 "부끄러운 일"인가에 대해 말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은 부끄러운 일임이라"고 {후자를 가르침 - 역자주}를 언급한다. 이 마지막 경우의(우리가 더 상세한 의미를 고찰하기 곤란한) 의도는 남녀 사이의 구분과 아마도 여자는 남자에 종속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더 깊은 동기, 즉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남자와 관련해서 여자에게 부여하시기로 의도하신 지위는 여자가 공적인데서 자신을 처신해야 할 방식과 여자가 남자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만 되는 합당한 방식에서 그 구체적 형태를 찾고자 한다. 바울은 여기서 이것을 분명히 포괄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똑 같은 방식으로 그는 그 새 자유를 의식함으로 교회가 남을 실족치 않게 되도록 권하며, 이 점에서 분명히 다른 교회들 보다 자유에 방임하고 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행위의 일반적 한계를 지키도록(고전14:33) 또한 권고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습과 "공통 표준"에 대힌 이러한 호소 안에 종속적 위치가 어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적절히 고려되고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점에더 더욱 그러하다.
바울신학(11)/ 제11장 특별한 권능과 방언/ 2010-12-15
바울신학(11)/ 제11장 특별한 권능과 방언 제 11 장 : 특별한 권능과 방언 지금까지 우리가 다루어 온 교회내의 은사들과 직분들과 보다 후기의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직분들 사이에 명백한 관계가 있는 반면에 사도는 더욱 여러 점들에서 그들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다른 몇개의 은사들을 특히 고전12장과 14장에서 언급한다. 여기서는 상기 목록의 11~15장에 언급된 은사들은 "권능", "믿음", 병고침의 은사, 방언과 그 통역 등이 주요 문제들로 나타난다. 처음 나오는 "권능"(고전 12:10,28)에 관해서는 고전12:9에 언급 된 "믿음"(고전13:2)과 똑 같이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부여하신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이적행함, 비범한 행위를 행하는 은사(고전13:2)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병 고침의 은사가 매우 현저한 부분을 구성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울은 이 특수한 권능들을 단지 이 은사들의 목록에서만 말하고 있지 않다. 한 곳 이상에서 그는 증거하길 자신의 나타남은 이러한 이적들을 동반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롬15:18,19에서 그는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통해 하신 일을 말한다.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했다." 고후12:12에서 그는 고린도 교회에서 행한 "표적과 기사와 능력"들을 "사도의 표"로서 제시하고 있다.(갈3:5 ; 살전1:5) 행13:11 ;14:3,10등에서 우리가 읽은 바 바울의 행위 보고에 관한 확증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막16:17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증거로 약속하신 것에 확증이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이러한 권능들을 고전12장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즉 모두에게 주신 것이 아니요 몇몇에게 주신 은사들로 언급한다.(고전12:29,30) 그가 여기서 믿음에 대한 동일한 효과를 말할 때, 이는 성령께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적적인 도움에 대한 확인이라는 특별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져야 할것이다. 이것이 이적 행함을 가능케 한다.(막4:40 ; 9:23 ; 11:22 ; 마17:20 ; 눅17:6) 이적 행함은 다른 것들로 부터도 구분되어지는 은사요 모든 신자에게 다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고전 13:2 "만일 내가...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마지막 것 때문에 이 은사의 성격에 관한 문제가 더욱 강력하게 우리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뢰로서의 믿음은 몇 몇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 롬4:17~20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신자를 아브라함의 자녀로 불신자에게서 구분하는 그러한 것의 본질을 정의해 주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때에 자기 방식으로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확실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특정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적을 이루시게 하시는 것에 대한 확실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제자들이 그러한 위대한 일을 행하지 못함을 보고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불신앙과 믿음을 책망하셨다.(마17:20) 바울은 이것들을 "사도의 표"(고후12:12)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은사를 복음 선포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긴밀히 연관시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이 은사는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시고 자기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임으로 누구에게 이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거나 이적을 행하도록 권능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비록 고전 12:9에서는 "믿음"과 구분되어 있긴 하나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병고침의 은사"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은사를 모두 받은 것도 아니며(30절) 교회내에서 그러한 은사들의 다양성 때문에 서로 시기, 경멸해서도 안 될 것을 말씀하셨다.(고전12:14 ; 롬12:4) 그러나 여기서 다시 성령은 비범한 권능을 역사하신다. 바울 서신들에게서 이러한 병고침에 대해 달리 상세히 언급하는 곳은 없다. 병고침의 은사는 이 세상에서 병과 고통과 사망이 끝나버린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순히 모든 믿는 자가 잠정적인 고통에서 놓임을 받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롬8:22,23 ; 고후12:7 ; 딤후4:20) 이것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권능의 표며, 그의 왕국의 전체적 포괄적 의미의 표인 것이다. 복음 선포 사역중에는 성령께서 역사하는 일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비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바울 서신들에서는 이 은사의 어떤 직무상의 형태가 결핍된 것으로부터 추론이 가능한 것처럼 교회의 지속적인 삶과 교회의 세움에서 영구적인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하고 있다. 더우기 바울이 고전12:14에서 방언을 말하는 방식은 부분적으로는 예언과 관련해 비교해 볼 때, 이미 우리가 살펴 본 바 처럼 아주 현저하고 더욱 상세하게 나타난다. 병고침과 이적적인 권능들처럼, 방언의 은사들은 바울에서 고전12장의 목록에서 그리고 고전 14장의 방언의 가치를 논함으로 그 속에서 단지 하나의 은사로만 나타난다. 방언 현상이 다른 교회들에서는 없었다는 것을 그 사실이 말하지는 않고 있으나 고린도 교회는 더욱 방언이 현저한 현상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바울은 방언을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 혹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은사를 가진 자들은 하나님게 영광을 돌린다고 했다.(고전14:2) 그리고 고전13:1에서 방언에 대한 분명한 암시로 사람의 말과 천사의 말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방언은 "하늘의 언어"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이처럼 방언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방언에서 그는 교회 내에서의 성령의 역사 하심을 인정한다. 자신도 이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고린도의 모든 성도보다 더 많이 방언을 말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예언을 더 높이 평가하면서 거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가하고 있다. 그는 실로 모두가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말한다.(고전14:5) 그의 독특한 진술로 보아 자신의 토의를 결론 짓는데, 곧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다. 예언과 방언이 고전 14장에서 서로 대치하여 있는 방식으로부터 우리는 다소 더 분명히 거기에 의도된 바를 볼 수 있게 된다. 방언은 다른 사람이 알아 듣지 못하는 언어로 하나님께 이야기 하는 것이다.(고전14:2,28) 그러할 때 14장에서 언급 되었듯이 기도, 찬미, 감사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감추어진 것을 이처럼 말하는 자는 자신의 언행을 의식치 못하고(무의식 중에 있다는 뜻에서 제 정신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에게 말한다.(28절) 더우기 바울은 구분하길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는 자는 실로 그의 영으로 하며, 자기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14절) 이는 확실히 통상적이 아닌 의식의 상태임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의식을 갖고 확실히 활동하고 있으나 말하고 기도하고 찬미하는 바는 마음에 의해 통제되거나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에 대하여 말하길 방언으로 기도하면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14절) 즉 마음은 그 기도에 참여치 않고 그리고 다른이들의 대표기도로 참여토록 중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방언이 내는 소리 자체에 관해서 바울은 논증하길 악기들이 그 음으 ㅣ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알아 들을 수 없음 같이 방언도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예증하길, 소리가 구분되지 않으면 플루트부는 것인지 하프를 타는 것인지 혹은 나팔 소리가 무슨 의도로 울리는지 아무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방언은 분명한 뜻을 결핍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소리의 뜻을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방언을 말하는 것은 "허공에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무도 그것을 이해 할 수 없다. 다른이들은 모르는 외국어를 듣는 것처럼 깨닫지 못하고 만다.(9~11) 실로 이 방언을 모르는 자들은 저들을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기까지 한다.(23절) 바울이 방언을 언급하면서 통역하는 자가 없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을 때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명하며 예언을 방언보다 높게 평하는 이유는 바로 의사소통의 결핍을 방언이 갖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해석되지 않는 방언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식한 시청자는 그것에 "아멘"을 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 다른 방언하는 것은 그들의 완고함의 한 표이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이사야 28장 11에서의 독특한 예를 들어 설명했듯이,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러한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하도록 허락하신다. 그 때문에 바울은 마지막으로 규정하기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말라고 한다. 만일 통역이 없으면 잠잠해야 한다. 더우기 누가 벙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야 한다.(27,28절)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해야 된다는 것이 여기에 해당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별개의 은사로도 열거된(고전12:10) 방언 해석에 관해 좀더 언급을 해야만 한다. 방언을 통역하는 자는 방언을 말하는 자신 일 수도 있고(고전14:5,13) 다른 사람 일 수도 있다.(28) 해석의 은사는 그렇지만 방언의 은사와 함께 주어지지는 않는다. 방언 은사를 가진 자는 하나님께 통역 은사 받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14:13) 그래야만 그의 은사가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을 비추어 볼 때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났던 바와 관련하여)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자신들의 종교적 감정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심리적 현상 혹은 초심리학적 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은사의 비범한 성격은 바울이 분명히 지적한 것처럼, 몇 몇 성도들이 받는 부수적 현상이지 구원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은 더욱 분명한 사실이다. 바울이 그것을 판단하고 분명하게 주의를 주고 상술하는 것은 은사가 고도로 개인적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바울신학(2)/ 제2장 바울의 소명/ 2010-12-15
바울신학(2)/ 제2장 바울의 소명 제 2 장 : 바울의 소명 바울의 소명 사상이 독특하고 신비 그 자체이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하늘의 어전회의를 열어 부르시고 그들에게 소명의식을 주셨는데, 바울이 바로 구약적인 선지자 소명의 의식을 통하여 부르신 것은 주께서 유대교의 틀을 벋기시는 것 같다. 신약에서 어전회의 성격이 구약적으로 나타남은 변화산과 다메섹에서 였다. 이 바울의 독특한 소명 사상은 그리스도인의 구원론과 윤리적인 면까지 포함한다. 이는 중세에 와서 루터와 칼빈이 재 발견 하였던 소명사상인데,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는 복음이다. 이 소명 사상이 중세에 대 변혁을 일으킬 때 바울의 소명 사상을 50% 밖에 이해하지 못했다고 신학자들이 말한다. 만일 100%를 알았다면 오늘날 천주교는 물론이요, 이방 종교가 없어질 정도로 변혁이 일어 났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중세에 로마교에서는 성과 속을 엄격히 구별했다. 성에 속한 성직자는 수도원에 부름을 받고 속된 사람들은 버려두는 식이었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것이요, 그 외에는 하나님의 소명과 무관하다고 보았으며, 신도들은 중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 때에 루터는 고린도전서 7장의 해석에서(7:18~22) 선민 사상이 할례로 내려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혈통으로 자리를 옮기고 여기서 얻은 통찰력은 그리스도인의 모두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복음이 선포 될 때에 믿음과 구원에 이르는 소명이다. 고전7:21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하셨다. 노예의 소명은 그 자리에서 그 자의 소명이요, 농부 때에 부르시면 농부대로, 목수이면 목수로 부름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믿음과 구원이라는 복음의 때가 임박하였으니 직업을 바꾸지 말라는 바울의 말을 빌리면 현 위치에서 그 직업으로 소명을 받은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직업이 곧 소명의 장소요 그 곳에서 소명이 임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은 직업의 활동에서 최선을 다하여 먼저는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고 현장과 모두에게 드려져야 한다. 이는 곧 우리의 직업이 의식주를 해결하며 살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직업이라는 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직업이 귀천이 없다는 것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으로 구원을 확인해야 한다는 칼빈의 사상이 나오기도 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예정을 보는 눈은 직업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21절 하반적은 직업을 바꿀 수 있음을 말하고 있지만 일시에 모두가 직업을 버리고 성경만 보거나 설교만 한다면 이는 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과 다양한 은사를 주시지 못 하신 분으로 오해하기 쉽다. 바울은 자기가 부름 받은 사실을 두가지로 말하였다. (1) 믿음과 구원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며 핑계치도 못한다고 말한다.(롬1:19~20) (2) 사명으로 부름 받은 것을 말 한다.(사도의 직분과 사역을 행 할 대상도 받았다.) 이어서 바울은 은혜도 두 가지로 구분 할 때에 첫 째는 사도의 직분이 은혜이고 은혜가 사도의 직분이라고 한다. 그는 롬1:5에서 말하기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갈1:15~16에서도 모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주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셨는데, 혈육과 의논 없이 했고, 17절에서는 먼저 된 사도들과 만나서 복음을 확인해 볼 필요없이 순종했음을 강조한다. 둘째로 부르심의 목적은 구원하심인데 바울은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대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복음 곧 아들에 대하여 선포하라고 불렸다. 물론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강조하지 않고 신적인 목적인 복음 증거를 강조함은 사명의 부름을 강조함이다. 이는 과격한 신본주의 사상이요 우리의 사고방식은 중생, 은혜의 체험은 의미는 있으나 강조 할 수록 인본주의로 가기마련이다. \\\"내가 구원 받았다.\\\"라고만 하였다면, 이는 모든 것이 끝나는 느낌이다. 하나님께서 구원 하셨다고 말해야 하며, 왜 구원 하셨는가를 생각 할 때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생각하게 된다. 인본주의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계신 것처럼, 내가 앉아 있어도 하나님께서 소방관 처럼 출동준비를 하시다가 기도대로 움직이시는 분 처럼 생각하게 되기 쉽다. 이는 이기주의로서 창조주와 피조물이 자리 바꿈을 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체험은 중생, 구원이 주된 것이지만 부름받은 사실을 사도직의 소명으로 소개하고 그것도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음을 강조한다. 바울 신학의 특성 중에 하나가 구원 받았다로 말하지 않고 항상 소명을 말 할 때 사도직으로 그리고 이방인에게로 소개한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심이(사도, 구원) 이방인 때문이라는 것이요, 이방인들을 위한 구원 사역에 그 신적인 목적으로 쓰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구원을 받게 된 이유가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자기는 보너스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이방인이 구원받지 못하면 큰일 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미친듯이 이방인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방인을 볼 때에 뜨거운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주의 일 때문에 감사가 넘치는 종들이 되자. 주의 일이 없으면 편안하고, 평안하면 시험이 오고, 시험중에는 상이 없다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 때문에 빚진 자라고 롬1:14에서 밝힌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화가 임한다고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어도 너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빚진 자로 여긴 바울의 신학이 위대하며, 정통 유대인들이 개처럼 여기는 사람인 이방인을 위대하게 보는 안복이 우리에게도 있어서 바울의 마음으로 성도가 있음을 감사하고, 일이 있음을 감사하고, 불신자가 있음을 감사하면서 살아가자.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일터가 생기고 종으로 쓰임을 받고 구원을 받는 다는 사실이 감사한 일이다. 바울처럼 이방인들이 없으면 버림 받음 같이 생각하며 사는 것이 전도자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된 소명이 곧 우리의 사명이다. 고전 9:16에 \\\"내가 복음을 전할 찌라도 자랑 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절에서는 임의로 행하면 상을 받는다고 말하고 임의로 하기 싫어도 이미 직분을(사도)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으나 사나 주의 것으로서 해야하고 하기 싫어도 꼭 해야 된다는 것이다. 바울에게만 숙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숙명처럼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 때문에 권세도 쓰지 않았다고 18절에서 말한다. 고전 9:19~23의 말씀을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 같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들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저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이처럼 구원의 잔치인 복음이 베푸는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든 고난을 당한다. 고전9:24~16까지를 보면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선수같이 하라고 명하신다. 이 복음이 소명을 저버리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마음으로 충실히 감당하여 구원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27절은 자기를 쳐 복조케 함이 남을 구원하고 자기가 구원을 받지 못할까(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을 말함) 두려워해야 될 것을 명하였다. 여기서 자기를 쳐 복종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심이 우리들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무엇에 쓰시기 위한 신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곧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부르시는 부름에 합당하게 생활을 하자. 의사는 환자를 위해서 있고 교수는 가르치기 위해서 왔고 목사는 성도들 때문에 있는 것이다. 우리 학우들은 하나님께서 왜 부르셨나? 누구를 위하여 부르셨나? 우리를 기다리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에게 진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하는가? 이는 우리들의 소명따라 그 무엇에 쓰시려고 주께서 부르셨나 우리 학우들은 모두가 우리들의 구원의 목적이 사명따라 잘 감당하기 위해 카리스마로 구체화 되어야 한다.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목적에 따라서 은사로 개별화 되고 구체화 된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사명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힘으로 감당하고 빚을 갚을 채무자의 심정으로 잘 감당해야 한다. 사도 바울의복음의 진수는 은혜로만이 아니다. 믿음으로만도 아니다. 구원은 값없이 받는다고 말하였던 바울이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고 말함은 바울의 구원론이다. 화 받을 믿음이 있고 복 받을 믿음이 있고 구원을 받을 믿음이 있다는 것이 바울의 구원론에 대한 양면성이다. 여기 행함은 율법을 믿고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행하는 행함을 말한다. 한국 교회의 구원과 윤리의 분리는 모순이다. 믿음과 윤리는 같아야 한다. 믿음을 가진 우리가 의인이 되어 구원을 받는 다는 뜻이 무엇인지 저오학히 모르는 처사이다. 예수 믿는 데는 죄가 있어도 방해가 안 된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나면 죄는 없어져야 하고 의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로 의인이 되고 범죄치 않으므로 날마다 성화되어야 한다. 칭의는 법정에서 재판적인 의미로만 표현된다. 이 의라는 칭의는 구약의 아브라함에게서 왔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의무를 다 할 때 믿음의 조상으로 주어진 의이다. 아들은 순종할 의무가 있는데, 순종할 때 의이다. 서로의 관계가 이루어진 원만한 관계, 창조주와 인간도 서로의 관계가 있고 약속으로 언약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의무를 다 해야 한다. 우리는 못해도 하나님은 하신다.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시기 가지 하신다. 이것이 바로 의이다. 어느 공간에 의가 있다면 그 의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때 의가 되고 의인이다. 이러한 관계가 의인이라면 우리의 의는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고 마지막에 가서 완성 될 것이다.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았기에 이제 우리의 의로움과 의를 천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무한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무한을 공급받아 무한을 누리며 사는 신적인 삶이 구원이다. 이것을 성경은 영생이라고 한다.(하나님과 관계 속에 들어감)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어떻게 체험하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할 때 체험하게 된다. 마치 감기의 증상이 나타나면 감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바이러스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증상이 나타나면 감기라고 말한다. 또한 사망도 보이지는 않지만 유한 됨이 곧 죽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의 풍요로움은 구원이요 영생인데, 이는 의인의 관계라는 빚진 자로 섬기는 과정을 주장한다. 루터와 칼빈은 직업의 장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는데, 더 깊은 뜻은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화가 있다는 것이다. 감히 내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 할 수가 없는 것은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으로 하실 몫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주장하기 위하여 사투를 벌인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과 화를 면하기 위해서 사투를 벌여야 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울신학(3)/ 제3장 바울의 사상과 유대교적 환경/ 2010-12-15
바울신학(3)/ 제3장 바울의 사상과 유대교적 환경 제 3 장 : 바울의 사상과 유대교적 환경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한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다. 그러나 나도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3;1~6) 바울은 헬라 대학의 도시인 다소에서의 탄생과 로마 시민권은 바울을 동시대의 광범위 한 이방인 세계와 일찍부터 연결 시키는 두 가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훌륭하게 증명한 다른 모든 사실은 그를 마치 같은 정도로 분명하게 이방인 세계에서 분리시켜서 어릴 때 부터 줄곧 엄격한 유대인이라는 인물로 나타난다. 유대교는 성전 중심한 종교요, 지성소 중심으로부터 멀리 떠날 수록 거룩이 멀어진다고 보았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이방으로 나아가면 점점 불결해 진다고 보았다. 가장 멀리 있는 곳이 아닐지라도 이방의 지역에 속하면 인간을 개로 보았다.(빌3:2) 이는 한국 사람들도 상대방과 다투다가 흥분하면 인간을 개로 보거나 개의 속에서 나왔다는 자들이 있다. 바울이 빌3;5에서 히브리인이고 이방인이나 반쪽 유대인도 아니라는 변호를 한다. 태어나기는 다소 출신이요, 혈통으로는 완전한 유대인이요, 헬라어에도 능한자이다. 그러나 개종하는 바울을 많은 사람들이 의심하였고 이에 대하여 유대인의 방법대로 자기를 소개한다.{어디에서 낳고 어디에서 자랐고 어디에서 배웠다(행22:3) 바울의 부모는 이주하여(장막 기능보유 자로 로마의 부름을 받은 상류층이다.) 예루살렘 성에서 자랐다고 말하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다고 한다.(행22:3) 그렇다면 바울은 다소라는 헬라의 사상적 배경인지 아니면 유대교적이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사상적 배경이 유대교적이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유대를 점령하고 멀리는 인도에서부터 이집트까지 정복하였다. 이 때 헬라어는 공용어가 되었으나 질적으로는 떨어지게 되었는데(영어도 영국에서는 좋았지만 세계로 뻗어가면서 질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바울을 통해서 더 찬란해졌다고 한다. 고후11:1과 6절을 보면 고린도인들이 바울이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가볍게 보았으나 편지는 잘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하다가 다소로 가는 것은 헬라적인 사상의 배경이 무시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유대교적인 사상을 전하기 위해서 복음을 가지고 갔으니 유대교 배경이 더욱 강조 된다. 빌립보 3장의 내용은 바울이 율법에 의하면 바리새인이요 열심의 기준으로 말하면 교회의 핍박자 이었음을 통하여 자기의 신학적 노선을 확실히 밝힌다. 바울의 뿌리는 바리새적인 십일조의 열심과 율법으로 특정지어진 사람이요, 하스딘의 후예로서 B.C. 587년 느브갓네살 왕에게 멸망을 당할 때 노예로 잡혀 60~70년에 고레스(바사국 초대 왕으로 주전 546~529년 재위)가 귀환하게 하여(대하36:22,23 ; 단1:21,6 ; 6:28 ; 10:1) 성전을 짓고 성전 국가로 살아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선민들은 회당을 발달시킨 자들이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되는데, 율법으로 특정지어진 사람들이 성전을 지은 자들이다. 포로 전에는 성전을 중심하였지만 포로가 된 후에는 회당 중심이나 율법 중심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전을 지은 것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바리새인 운동이 일어났다. 그중의 한 줄기가 엣센파(QUMRAN 공동체 : 사독과 관계 없이 제사장을 세워서 성전에서 봉사케 함을 반대한 자들)이다. 이 때에 성전을 지키려는 보수파들은 세력을 잃게 되고 사두개인들에게 성전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사두개인들은 귀족이었고 QUMRAN공동체는 사독의 제사장 전통이 지켜저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방의 왕이 세운 제사장은 사단과 같이 보았고 자기들의 단체를 성전이라고 주장하고 제사 방법을 바꾸어서 찬양과 율법을 강조하였다. 이 때에 바리새인은 엣센파의 영향으로 힘이 분산되어 성전의 주도권을 사두개인들에게 빼앗겼으나 바리새인은 매우 비판적으로 제사에 참여 하였는데, 레위인의 제사장 법규를 문자적으로 참여하였다.(여당은 사두개인, 야당은 바리새인 이었다.) 바리새인의 율법관은 쓰여진 율법으로 구약만 보고 그 중에서 모세오경을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구전으로 내려온 율법이 있다고 보았다. 물론 구전으로 내려왔다는 율법은 쓰여진 율법에 대한 해석들이다. 모세와 장로의 관계도 이런 의미가 있다. 모세가 지도자를 세울 때 둘씩 둘씩 세웠는데, 기록된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과 구전의 율법을 가르치는 두 선생을 세워서 가르쳤다. 바울도 이 두가지 교육을 받았다. 기록된 율법은 가말리엘의 문화에서 배웠고 구전으로는 조상들의 율법에 엄한 교육을 받았다고 사도행전 22장 3절에서 고백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열심은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건들이 비느하스 교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임이다. 민25:8에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하였고 민25:1~13에서 그 비느하스는 평화의 언약을 받았는데, 13절과 같이 \\\"그의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하였다. 또한 시편에서도 106편 30,31절에 보면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칭하였으니 대대로 무궁하리로다.\\\"라고 하였다. 열성은 피흘림으로 나타나고 하나님께서는 제사로 받았다고 본다. 바울의 지식은 구약을 통달하였고 성전을 중심한 신앙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요2:19)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 없이 무너지게 된다고 말씀하시니(요2:17)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예수님을 죽이게 된 것이고 따르는 제자들을 핍박하게 되었다. 핍박의 명분은 율법과 성전과 하나님의 명예와 이스라엘의 순결을 위해서는 누구든지 죽이는 폭력적이었다. 이들의 투쟁의 대상은 이방 정복자들이지만 막강한 군대의 조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1차적으로 로마의 교류자와 율법을 어기는 자(요16:2,3)로 알아 너희를 죽인 자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하는 열혈당을 예언하신 것이다.(신21:23) 나무에 달린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저주 받아 죽은 예수님을 따른 그 제자를 죽여서 피를 흘림이 속죄의 제사로 알기 때문에 요16:2~3에 예언하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비느하스 신앙의 열심을 가지고(유대교적 배경) 피흘리기 까지(갈1:13~14) 열심이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바울의 입장을 알게 되었다. 오직 유대교 율법과 하나님의 명예와 선민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핍박하고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율법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율법을 어기는 자로 알았다.(성전 중심 사상은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하기 때문에 성전의 주변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멀리 떠나지를 못했다. 멀어질 수록 거룩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포로로 잡혀 갔지만 순례 절기 때마다 참여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의 신앙은(스데반) 히브리파 유대인과 신앙이 다르다. 그러므로 같은 예수를 믿지만 분쟁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6장 1절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이 원망은 음식 배급은 증상이요 언어상 문제요 관습의 문제이다. 헬라파는 흩어졌고 누가는 스데반의 설교를 기록하여 헬라파의 신학을(행6;11~13) 소개 하였다. 헬라파는 성전을 공격한다. 예수님의 피로 끝이 났다고 주장하고 제사를 무시하며 율법대로 행하는 것은 타락 성전 제사이니 무효라고 주장한다.(스데반 설교) * 그들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이 3가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 째 기둥은 율법이요(하나님의 계시) 둘 째 기둥은 성전이요(하나님께만 숭배) 셋 째 기둥은 선행이라고 한다.(창조의 질서가 유지 된다.) 위의 3가지 기둥이 없으면 뒤죽박죽이 된다. 사람끼리도 사랑이 없으면 동물들이 먹고 먹히는 관계와 같이 치열한 경쟁이 되고 만다. 헬라파가 공격하는 것은 예수님이 성전의 제사를 완성했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므로 고백하였다. 이는 사도 바울이 개종전 사울의 마음을 격동케 했다.(신21:23 ; 23:21 ; 갈3:13 ; 고전 12:3 ; 딤전 1:13) 그렇지만 종교 지도자들이 신명기 법으로 죽으면 참 선지자로 인정받게 되므로 법집행은 빌라도에게 맡겨 정치범으로 몰아서 죽이게 한 것이다. 이러한 유대교적 환경 속에 있는 사울이 개종하여 다메섹 도상 체험으로 사울의 사상을 깨뜨리고 바울이 된 것이다. 단 한번의 은혜로 광야에서 초원으로 옮기웠던 것이다.
바울신학(4)/ 제4장 사도가 된 바울/ 2010-12-15
바울신학(4)/ 제4장 사도가 된 바울 제 4 장 : 사도가 된 바울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흭 ㅏ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각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1~17)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이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깨뜨리고 있다는 유대인의 주장에 변명한 후 변론한다.(아나니아와 사도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함) 유대인의 말에 갈1:13,14에 왜 반대 입장에 있었나를 말하고 15,16절에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17절은 사도로부터 사도권을 전수받지 않았다고 말하며, 20절에서 하나님 앞에 맹세까지 한다.(거짓이 아니라는) 갈 2:1,2 => 14년 후 바나바와 디도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갈 2:1~10 => 예루살렘의 여행 중 사도들과 만나고 교류하며 베드로도 면책했다.(11) 바울의 소명은 갈라디아 1:15과 같이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택정하신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하고 그 목적이 이방인에게 복으을 전하기 위하여 사도로 부르셔서 누구와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선포하였음을 밝힌다. 그리고 그의 사역 중에 하난미의 아들이라는 말은 아껴서 사용하였고 신학적인 정의를 할 때에만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정의하여 요약하였다.(롬1:3~4) 1. 다메섹 사건(행9:1~18) 복음의 계시 사건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건이다.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주의 부르심으로 이해하여 자기의 방식으로(언약의 지식으로 알게 된 종의 부르심) 부르셨음을 강조한다. 이는 곧 사49:1~6과 렘2:5에서 부르신 것과 같이 자기를 부르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자기가 경험한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난 그리스도께서 계시와 소명을 주시되 구약의 선지자들의 선택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2. 구약의 선지자들의 부름 받음의 종류 (1) 하늘이 열림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을 보고 어전 회의 석상에서 구원의 계획에 대한 의논이 개회되어 결의 된 후에 그 일을 위하여 누가 해야 될 그 때에 방청석에 참석한 자가 선지자로 부름의 소명을 받았다.(사6:8) 에스겔도 1:1~4에서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다. (2) 환상이 아닌 말씀으로 받았다. 이는 모세가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을 모세와 같은 부름을 받은 자로 알고 있다. 행22:14~15과 다메섹의 사건은 전자의 소명을 받았다고 한다.(행22:9) 그 증거로 육안을 잃었고(11) 사명자들과 화합을 위하여 행22:10을 주셨다. 예레미야도 말로만 받지 아니하고 어전회의에 참여 하였다. 예레미야 13장 21~22절을 보면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 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 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고 하셨다. 여기 나의 회의는 어전의 회의로서 거기서 받은 것을 전하였지만 참석치 않은 선지자들은 집권자들이 듣기 좋은 평화를 예언했다. 아모스 선지자도 3장 7절에서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하셨다. 사6:1~8에서도 방청으로 참예 하여(내가 여기 있나이다.)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보내심을 받았다. 이렇게 어전회의의 부르심이 선지서와 시편에서도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행위는 어전회의를 통해서 부르시고 알리시고 쓰신다.(징조, 비밀, 계시, 부름) 그러나 선지자들이 어전회의를 말하는 것을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아끼면서 사용한 것이 사실이다. 오직 자기의 역할을 할 뿐이요 이미 계획된 일을 보고 그들을 위로하고 패역자는 경고함이다. 다메섹 사건을 체험한 바울은 복음의 계시와 소명의 사건을 소개하면서 구약의 종 이사야 49장 1절과 같은 분위기로 자기의 부름을 다메섹에서 그리스도께서 현현하심을 선지자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즉 선지자로 부르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신학이 새롭게 정립된다. 그리고 다메섹 사건을 하나님의 어전회의로 고백한다. 하지만 구약적인 유대교 전승이 아니요 종말의 구원을 약속받아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똑 같은 복음임을 확실히 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유대인이 아니요 이방인의 종들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 뿐이었다.(갈1:16 ; 살전 2:4 ; 2:7 ; 롬1:1~5 ; 15:16 ; 고전 1:17)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이 땅의 어전회의에 참예함이요, 바울은 맛만 보는 구약의 어전회의(변화산 같은 회의) 이었다. 바울에게는 엄청난 다메섹의 체험과 사도직을 받아 아라비아로 떠날 때에 다른 사도들과 의논하지 아니하고(성경대로 오신 분인지 아닌지, 확인의 절차가 필요가 없었다. 성경을 주셨던 분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의 사역을 하였다. 그 시대의 아라비아는 지금의 아라미아와 똑 같지만 그 시대는 다메섹 밖의 지역을 아라비아라고 하였다. 아라비아는 아라타스 4세가 다스렸는데 그는 바울을 체포하기 위하여 명을 내렸다. 부흥사들의 말과 같이 가만히 있는(기도의 준비) 바울을 체포함이 아니요 사도로 부름을 받고 복음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다.(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함) 사도행전 20장에서 광주리를 타고 내려와 시리아로, 길리기아로, 다소로 도망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 하였다. 그때 아라비아 왕 아라타스는 자기들의 국교를 어지럽게 한다고 하여 체포의 명령을 내렸고 갈라디아에서는 유대인들이 핍박한 종교를 선포했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증거이다. 바울이 정착없이 수고를 한다는 소문을 들은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당회장으로 수고하였는데 바울을 부목사로 청빙하여 동역을 하였으며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알렸다. 이는 복음을 받는 자들이 신학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 폭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국수주의 유대인들은 주님의 재림은 온 백성이 회개 할 때에 재림하신다고 보았다. 회개 운동이 일어난 후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만 이바인들은 자기들을 섬기기 위하여 우상들을 치우고 하나님께 모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왕이 되고 이방인은 종이 되지만 구원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이방인들이 시온에 순례 여행을 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요즘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자들의 여행을 말세의 현상으로 본다.(현제 이방인들이 성지 순례하며 소비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의 유대교들은 자기들의(이방인이 들어오지 않은) 종말론이 가까움으로 보고 있다. 바울은 개종 전에 이 영향을 받아 헬라파 유대인이 자기들의 연고지로 쫓겨가서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러한 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추적하여 결박하려고 가다가 다메섹에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유대교는 지금도 선교하는 것이나 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사울적에는 유대교 신학자로 선교는 우리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러나 개종하여 다메섹 체험과 예수의 복음을 전하니 속이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전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 같이 복음을 전했다. 어떤 학자들은 유대인에게 상대를 못하니 자연적으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바울을 모르는 처사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회당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유 대교의 정족수는 남자로서 장년 10명이요 기독교는 남여 관계나 나이에 상관 없이 2~3명이면 된다.) 바울이 회당에 간 이유는 복음에 우선권이 유대인에게 있기 때문이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함이었다.(롬15:8, 9 ; 마10:6 ; 눅19:10)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유대인에게 전하고 유대인만 섬기셨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성취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포괄적이시요 대표적인 사역이셨다. 이 때에 바울은 9,13절의 말씀을 붙잡고 복음을 전했다.(이방인 사도의 직분을 받음) 회당은 예배드리는 장소와 교육의 장소로 이용하였으며 여행자들에게 여관이나 직업의 알선을 하였다. 예배를 드릴 때 좌석의 순위로는 첫째가 유대인이요 다음은 경외자와 할례를 받지 못한 자와 믿음에 관심이 있는 자와 구경꾼의 순서대로 종교 행위를 하였는데 자유주의 자들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 것이라고 설교를 하였으며, 율법주의자들은 절대적으로 구원이 없다고 설교를 하였다. 이방인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들으면 병아리 눈물 만큼 무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면 전혀 소망이 없어서 가슴이 답답한 중에 집으로 가는데, 나타나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선포하니 맨 뒤에서 아멘이 터지게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성경을 읽고나서 이 말씀이 나사렛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다고 확실하게 복음을 전하였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게 되어서 차별이 없게 되었다.
바울신학(5)/ 제5장 이방인의 사도직/ 2010-12-15
바울신학(5)/ 제5장 이방인의 사도직 제 5 장 : 이방인의 사도직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3:1~6) * 이제는 사도 바울이 소명받아 사도직을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하였는가를 살피며 학우들과 함께 바울의 직분과 구원의 관계를 상고해 보자. 유대인들이 알지 못한 비밀은(고전2:7) 이방인들에게도 그리스도가 선포되어 유대인과 더불어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경륜이었다.(고전1:23,24 ; 2:7 ; 4:1) 그 구원의 계획이 앞으로 성취될 것을 미리 알게 하심이요 고전 2:2에서는 기독론 적으로 말 할 때 \\\"내가 너희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라고 하셨다. 골 1:21~29 과 롬 11:25~26에서는 공동체로서 유대인과 같이 하나가 되는 교회론으로 옮겨 간다. 먼저 계시의 형식에 있어서 바울이 사도직으로 소명을 받을 때에 이방인의 사도로 받았다고 하는데 다메섹의 엄청난 체험의 현장에서 그 비밀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항상 구원의 계획을 말할 때에 사도직을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비밀이라는 말은 게시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바울의 시대에 유대 신학은 이방인에 대한 구원이 아니요 시온에 대한 순례의 사상이다. 이는 사탄과 죄악과 고난의 싸움이 끝나면 하나님이 시온에 임하시고 시온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온 세상에 환한 빛을 발하게 하면 온 세상의 사람들은 그 빛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는데 그 지식이 온 세상을 덮는다는 것이다. 이 때에 비로서 이방인들이 우상 등 잘못된 신앙을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데 모든 값진 것들을 다 가지고 돌아와 함께 산다는 것이다. 이는 이사야 60장 1~9절의 내용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이다.(마8:11,12 ; 슥14:16 ; 습3:9~11) 이렇게 천국의 풍요로운 잔치에 동서로부터 찾아와 대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 신학은 중간사를 통과 할 때 영적인 어둠으로 본질에서 변질하여 식민통치에 시달린 이스라엘이 민족주의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러한 잘못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종드는 것으로 알았고 뿐만 아니라 은, 금 보화를 가지고 와서 스스로 선민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지금도 선교가 필요없다고 본다. 이유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자기들이 찾아 와야 성경이 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독교는 온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상을 유대교의 랍비들이 받아들여 전승하였고(이방인들이 찾아 와도 구원이 없다고 믿음) 이 사상을 사도들이 옳게 생각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며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하였다.(예수님께서 조상에게 약속한 성취로 오셨기 때문에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을 제자들이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천하 만민에게 전하는 복음이요 포괄적인 복음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심오한 복음의 비밀을 알았다. 곧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종으로서의 소명을 받았다고 한다. 롬11:25에서는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26절) 여기서 들어오기까지의 들어 간다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없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전문 용어로 쓰인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모든 백성이 다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이 복음은 유대인들이 받기에는 참으로 놀라운 복음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복음인 것이다. 얼마 전에는 열혈당의 유대교 학자였던 바울이 잃게 변한다는 것이 깜짝 놀랄 일이다. 바울은 더 나아가 이 일을 위하여 다메섹 도상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사도직을 주셨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그래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논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사야 6장, 예레미야 23장, 아모스 3장) 즉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아야 한다.(선지자들은 보내심을 직접 받았고 바울은 사람을 통하여 알리시겠다고 하셨다.) 내용적으로는 앞으로 되어질 일을 보이시고 적임자로 선지자들을 불러서 보내시는데, 바울은 자기의 부르심이 이사야 6장과 사도행전 9장의 내용과 같이 해석하며 어전회의를 소개한다.(변화산의 어전회의는 지상의 회의이다. 바울은 구약적인 공중의 어전회의를 강조한다.) 그리고 어전회의 에서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복음이 이방인의 모든 지역이 일루리곤까지 편만하게(롬15:19) 전해지고 일할 곳이 없어서(롬15:23) 로마에 가기를 원했다.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곳에 일하기 싫었다.(롬15:20)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자기의 여행계획에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한다는 소식을 밝히고 지금 못가는 이유를 몇 가지로 요약하면 자기 문제와 헌금 문제이다. 고린도에서는 반란 때문에 못가고 지금은 헌금 때문에 못가게 되었으니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1. 로마에 가기를 원하는 바울(롬15:14~33) 로마는 이방인의 심장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지고 로마를 강타하려고 했다. 사도 바울은 늘 이방인에게 빚진 것으로 생각하며 사역을 감당했는데, 이방인의 심장인 로마를 그대로 두고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 번이나 로마 여행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고 가는 곳마다 사도 직에 대한 의심을 받았는데, 로마에도 오가는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퍼져있는 자기 소문을 잠재우기 위하여 로마서를 기록했다. 로마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청문회 비슷한 대 토론이 있고 민족주의자들이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밥 먹기를 거절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대 토론이 열리게 되는데 아무렇게나 답변하다가는 살아서 돌아오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믿는 복음을 교리적으로 정리하였고 문서로 남긴 것을 로마에 보내니 이를 로마서라고 오늘날 불리우게 되었다. 롬11:13에서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라고 말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세 가지 기도 부탁을 하고 있다. (1) 유대인들의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들은 열혈 당원으로서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특수 목적에 사명을 띠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다. (2) 헌금을 가지고 가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받아 주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헌금을안 받으면 사기꾼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바울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헌금 단원들을 이방인으로 조직하였다. 이처럼 예루살렘 여행은 목숨을 걸고 갔던 것이다. (3) 로마의 전도 여행을 기쁨으로 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였다.(롬15:30~33)
바울신학(6)/ 제6장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 2010-12-15
바울신학(6)/ 제6장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 제 6 장 :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2~4) 바울은 개종하기 전에 믿었던 신앙 고백을 발전시켜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교훈과 행하신 행적들과 구원의 성취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시고 그의 죽으심이 곧 구원의 사건이라는 새로운 신앙 고백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바울의 신앙고백은 사도 요한과 함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으로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바울은 33~34년 사이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메시야라는 신앙 고백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의 체험으로 우편에 높이신 것을 보고 그들의 선포가 옳은 것을 깨닫고 복음의 선포에 선두자로 나섰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유대교 신앙고백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는 역사적인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아브라함과 모세로부터 이어온 신앙 고백의 비틀어진 것을 옳바르게 접목을 시켜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이 갑자기 나타난 이단 종교가 아니라 메시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선포한다. 바울은 노골적으로(고전 11:23~34 => 성찬의 교훈을 받고, 고전15:3~8에서 성경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구속주이신데 부활 후에 여러 사람과 자기에게 보여 주셨다고 주장한다.) 자기가 직접적으로 받은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밝힌다. 또한 바울은 초대 교회에 형성된 복음을 수용하여 증거하였고(롬1:3~4 ; 3:24~26 ; 4:25 ; 8:3~4 ; 빌 2:6~11) 아울러 초대교회 밖에 있는 신학적인 사상과 함께 바울의 독특한 신앙 고백이 초대 교회의 틀을 재 구성하였다. 1. 기독교는 유대교와 상관 없는 이상한 종교가 아니라 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성취로서 새로운 메시야 시대가 열리게 되어 구원이 우리들의 앞에 있다는 엄청난 사실로 메시야 시대가 도래 되었다는 것이다.(그 메시야가 예수님으로 성취) 2. 이 성취는 구약에 약속하신 그대로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에서 확실하게 증명 되었다.(성경을 성취한 것이요 성경을 주신 분이 성경대로 죽으신 것이다.) 3.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종말에 오실 그 메시야요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높임을 받았다. 4. 성령님이 교회 안에 오셔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 표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요 주로서 힘을 발휘하시고 영광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성령님이 교회에 임하셨다. 5. 메시야의 시대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완성하게 된다. 6.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용서를 받아 성령충만하여 재림때 구원의 축복을 받으라는 호소이다. * 이러한 내용들은 사도들의 공통된 선포인데, 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수용하고(바울 전의 복음 선포) 어떻게 발전시켰는가? 먼저 고전 15:1~11까지를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여기 1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처음에 고린도에 가서 전한 복음을 말하고(너희가 주님께 받은 것, 유대교와 상관 없게 보이는 것이다.) 3, 4절에서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곧 성경대로는 내가 사울 때에 받은 것이요, 초대교회와 개종 전에 있던 것을 말함이며, 구약에서 전승되어 온 신실한 약속을 강조하고 메시야의 신실성을 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전 15:11에서는 "그러므로 내나(바울) 저희나(사도들)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하였으니 이는 전승을 받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체험하고 받은 신앙고백과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똑 같다는 것이요, 구약과(그 때의 성경은 전부 구약을 말한다.) 신약의 접목을 하므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고전15:10에서 밝힌다. 바울은 이렇게 선포된 복음이야말로 온 세상에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신앙고백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동일한 것이 사도신경이다. 사도 신경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지기 전의 신앙고백이요 서방교회가 천주교와 개신교로 갈라지기 전의 신앙고백이다. 사도신경은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눈을 똑바로 뜨고 고백함이 좋다. 사도 바울이 고전15;1~11에 내용과 똑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자기가 믿고 전하여 같이 구원을 받을 복음을 소개한다고 다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는 사도들이 자기들의 반열의 문을 안 열어 주니까 열심을 내어서 쏙 들어가고 끝이라고 말하는 뜻이 맨 나중인 것이다. 이어서 8절 하반절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했는데, 이는 조금 빨리 나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나라 개념으로는 유산된 것 같은 자라는 것이다. 곧 만삭되지 못해야 유산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의 표현은 핍박자이기에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으로 바울은 사도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으로서 죽고 부활하신 것을 복음이라고 증거하였다. 지금부터는 처절하게 죽고 부활하심이 왜 기쁜 소식인가를 살펴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1,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주심이 복음이 된 것은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해서 오시고 죄 문제를 위하여 죽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선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물론 구약의 말씀에서도 모든 인류에게 구원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신 기쁜 소식이다. 이때에 쓰이는 메시야의 칭호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바울의 편지에서 메시야의 칭호로서 점점 희미해 진다 이는 3가지 직분에 기름을 붙는다. 이름은 너무 흔하게 불렀으며 고레스도 메시야라고 불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라고 부를 때에 행적을 통하여 증거한 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헬라인들에게는 바울이 사용한 칭호는 의미가 없었다. 기름부은 자라는 뜻인데 헬라어나 우리나라의 개념으로도 뜻이 없다. 히브리인의 개념으로는 종말에 오실 구원자에게 쓰는 고유명사인데 헬라인들은 유대교적 배경이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바울신학(7)/ 제7장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 2010-12-15
바울신학(7)/ 제7장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 * 고린도 전서 15장 1~11절의 내용 분해 1.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성경대로 죽어 주심 2. 죽으신 주께서 장사 되었다는 것 3. 성경대로 사흘만에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 4. 그리스도께서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 5. 12사도들에게 나타났다는 것 6. 오백여 형제에게 나타났다는 것 7. 야고보에게 보이신 것 8. 맨 나중에 자기에게도 보이셨다는 것이다. 여기 맨 나중은 우리들에게 보여주실 주님을 부인함이 아니요 사도로서 맨 나중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사도인양 끼어들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는 것이다. 이는 사도들이 자기들의 반열의 문을 안 열어 주니까 열심을 내어서 쏙 들어가고 끝이라고 말하는 뜻이 맨 나중인 것이다. 이어서 8절 하반절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 했는데, 이는 조금 빨리 나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나라 개념으로는 유산된 것 같은 자라는 것이다. 곧 만삭되지 못해야 유산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의 표현은 핍박자이기에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으로 바울은 사도 베드로와 쌍벽을 이루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으로서 죽고 부활하신 것을 복음이라고 증거하였다. 지금부터는 처절하게 죽고 부활하심이 왜 기쁜 소식인가를 살펴보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1,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주심이 복음이 된 것은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해서 오시고 죄 문제를 위하여 죽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선포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물론 구약의 말씀에서도 모든 인류에게 구원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신 기쁜 소식이다. 이때에 쓰이는 메시야의 칭호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바울의 편지에서 메시야의 칭호로서 점점 희미해 진다 이는 3가지 직분에 기름을 붙는다. 이름은 너무 흔하게 불렀으며 고레스도 메시야라고 불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라고 부를 때에 행적을 통하여 증거한 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헬라인들에게는 바울이 사용한 칭호는 의미가 없었다. 기름부은 자라는 뜻인데 헬라어나 우리나라의 개념으로도 뜻이 없다. 히브리인의 개념으로는 종말에 오실 구원자에게 쓰는 고유명사인데 헬라인들은 유대교적 배경이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는 무엇인가? 성경대로 이루신 분이며, 우리의 구주가 되신 행위인데,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서 성취하신 것이다. 이렇게 초대 교회가 신앙을 고백한 것인데, 학자들이 이것을 믿음의 형식이라고 한다. 복음은 죽고 부활하심이며 믿음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구원은 복음과 믿음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주관적인 사건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구원이다. 이 구원의 법칙은 우리들의 참여는 없었으나 2,000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를 통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사건이요 누구든지 받아들이고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 (1) 복음 :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하신 것을 선포하는 것 (2) 믿음 :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3) 구원 : 효과적으로 끝까지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오늘 나에게 구원의 사건이다. 이 믿음의 형식이 그리스도는 예수의 별칭이 된다. 예수의 메시야적인 면과 그리스도 직분의 행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하여 대속의 죽으심과 영원한 소망을 주시는 자로 살아나셔서 성경대로 성취하신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칭호 로마서 1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말은 존귀와 비천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헬라 시대의 종은 아주 비천한 자이다. 바울은 영광을 드러내고 싶을 때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종이지만 신적인 것이요, 초월의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다. 바울은 헬라의 문화권에서도 종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였으며 종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냥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므로서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였다. 종이라는 신분이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며 4가지의 신학적인 입장을 정의한다. (1)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 : 신적인 초월의 복음이요 성경도 하나님이 저자이시다. (2) 구원사적인 정의 : 하나님께서 성경에 나타난 것처럼 선지자들의 약속의 성취이다.(고전 15:3,4) (3) 내용적인 정의 :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갈1:16 ; 행9:20) (4) 구원론적인 정의 :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능력이다.(요3:16) *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 바울이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그의 신관이 삼위일체를 정립한 것으로서 육적으로는 다윗의 씨로 성경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였다고 말하였다.(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행사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나단의 전승을 이야기 하는데, 내용은 너의 씨 하나를 일으켜서 네 위에 앉게 하고 그를 나의 아들로 삼겠다는 것은 곧 부활을 통하여 권세를 행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단의 전승 중에 또 하나는 성전을 세우겠다는 것이다.(교회를 세우시는 분) 바울이 확인하여 힘차게 강조하기를 등극의 과정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자기 아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시켜서 세움을 받으실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직은 만 왕의 왕이신 권세를 행사하지 않으신 왕이시다.(재림의 통치를 기다리시는 왕이시다.) 이는 바울의 고백이요 우리들의 고백이다. 하나님이요 인간이신 그리스도에 인격의 양성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육신은 나단의 신탁까지 끌어 올리고 아브라함까지 좇아 가서 둘째 아담으로 여자의 후손으로서 약속의 성취로 오신 메시야요 성경에 기록한 기독론을 증거한다.
바울신학(8)/ 제8장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2010-12-15
바울신학(8)/ 제8장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제 8 장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 우리 주 옛 ㅜ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1:1~5) 바울의 서신에서 이미 형성된 신앙 고백들은 칭호와 칭호 사이에 예수와 우리 주를 삽입한다. 두 칭호들끼리만 연결하면 정리가 안 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주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누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란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성경대로 죽고 장사되었다가 성경대로 부활하셨다. 이 때에 쓰이는 칭호가 있으니 곧 그리스도이다. 원래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이란 것이나 로마의 4대 황제 클라디오스의 궁중역사 기록에 45년에 로마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다 밖으로 끌어 내었다. 이는 어떤 유대인들 중에 폭동이 일어 났는데(브리스길라와 아굴라 : 사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인정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분쟁) 로마인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역사에 기록을 할 때 종들의 폭도라고 클라디오스의 전기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에 귀하게 쓰실 일꾼으로 세우실 때 그 의식으로 기름을 부어서 3가지의 직무를 주셨다. 하나님이 종말에 일으킬 구우너자가 누구냐? 다윗의 씨이며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칭호이다. 우리나라의 표현으로도 그리스도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히브리적인 개념에서는 심오한 뜻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초대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다. 즉 대속의 제사로 새 언약을 성취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새 언약으로 작정하시고 죽으셨으며 새 언약은 그의 부활하심으로 성취하신 것이다. 유대교는 메시야적 행위가 모세와 같고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으나, 사도 바울은 고후5:11~17에서 유명한 설교를 하는데,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외쳤다. 신약시대에서 유대인의 메시야 사상은 삼하7:12 이하의 전승이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성취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사이에서도 메시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쿰란 공동체에서는 제사장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으며(이론적인 메시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열심에 만족을 주시는 정치적인 군사적 메시야(다윗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세와 같은 자로 제 2 출애굽을 일으킬 자,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는 통치자로 보았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자기 선포이고 방법은 약속과 초대를 하셨으며 성취는 대속과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단번에 드림으로서 성취를 완성하셨다. 여기서 언약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심을 위한 언약이다.(출애굽기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확인하신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명한 시내 언약의 성취요 자기 죽음의 대속을 통하여 의로운 아들들이 되게 하심이다. 이 구속사적인 사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신 증거가 부활이요 부활을 통하여 중생한 백성에게 환희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생명의 관계요 구원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스도는 언제나 같이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시다는 확실한 칭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구속사적인 행위의 사실을 몰랐으며 이 축복의 사실을 지금 까지도 모르는 중에 있으니 영적인 지식이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바울과 같은 대학자도(현재의 수준으로 박사학위 7개는 받을 수 있다.) 깨닫지 못했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의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사건을 확인하고, 초등학문으로 알 수 없는 비밀의 진리를 자신있게 선포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후5:17에서 밝히면서 16절에서는 자기의 무지함을 들어내어 말 할 때 육체대로 알고 핍박하였으나 다메섹에서 영안이 열려 메시야로 받아드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대한 사도직의 시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므로 역사가 일어났고 시비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바울이 어떻게 변증하였는가를 살펴보자. (1) 천거사가 없다고 사도직을 비판하며 불신하게 되었다.(고후3:1)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요즈음의 말로는 목사 안수증이 없다는 것이다. (2) 교회를 핍박하였다는 것이다. (3) 할례를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4) 이방인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위의 4가지 사실을 무기로 삼아 바울이 개척한 교회를 찾아다니며 핍박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더욱 열심을 내며, 강하게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나는 거짓 선지자가 아니다. 참 선지자가 아님을 가리기 위하여 천거서가 있는 것이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듯이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 나의 천거서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은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요, 다메섹 후 우리들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심을 고백한 것이다.(고후5:16~17) 18절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으로 사도직을 주셨는데 주실 때에 천지를 지으신 말씀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주장이요, 완전하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터득한 것이었고, 화목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들 같으면 받은 자외에는 모른다고 대화를 끈어버렸을 것이다. 화평이나 화목의 그림은 구원을 보여 주었고, 구원의 그림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그림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원수 관계인데, 그 죄라는 뒷 모습은 곧 원수이다. 로마서 5장은 원수가 나오고 화목이(11절) 나온다. 바울은 고후 5장과 골 1장과 엡 2장에서 교회론적으로 하나님과 유대인을 그리고 이방인이 화해함을 선포하는 이 용어는 바울만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화해라고 기록하는가?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 원수와 같았으며, 그리스도가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게 자비롭게 화해하셨고, 바울은 화해하신 이 사실의 복음을 선포하였던 것이다.(고후5:16) 바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할 때 마다 어김 없이 다메섹의 체험을 들고 나와서 그가 깨달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죄를 지고서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속죄의 제물이 되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요 곧 그 크신 사랑이 바울을 강권적으로 복음을 선포토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 화목의 용어는 핍박자가 말 할 때 설득력이 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우리가 더 이상 유대교 메시야 사상을 끌어와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메시야가 어떤 분이셨고 에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메시야이심을 채우는 것이다.(유대교 사상과는 다르다) 구약의 메시야 사상은 삼하7:12에 나단의 전성을 받아서 새 성전인 교회를 세우는 자로 알았다. 새 언약의 제사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고 하나님이 되시어서 무한에 들어가게 하심이다. 두 가지 메시야 사상은 구약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유대교 사상은 아래 세상에 기준을 두고 우리는 윗 세상에 기준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부활의 사건에 사용하고 구원과 관계있는 곳에 사용하였으며 또 부활은 죽었다는 역사적인 사건에 사용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칭호를 사용할 때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로 호칭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신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은 메시야 칭호들과 곧 바로 연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