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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The Advent) 달력/ 2011-11-27
대림절(The Advent) 달력 대강절을 영어로는 advent (라틴어로는 adventus로 영어의 \\\"coming\\\")로 \\\"온다\\\"란 뜻이다. 대강절은 특히 동방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지켜서, 이 때 부터 마리아의 수태 고지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동방교회의 전통은 이태리의 Ravenna라고하는 지방으로부터 서방교회로 흘러 들어 왔다. 대강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대강절 기간은 12월 25일 성탄절 4주전에 시작된다. 11월 30일에 가까운 주일부터 시작 되는데 이 날은 11월 27일보다 빠를 수 없고 또 12월 3일보다 늦을 수도 없다. 대강절로 부터 교회력이 시작된다. 4세기에서 7세기까지는 이 대강절의 기간은 다양하게 지켜졌다. 즉 3주간에서 7주간까지 여러 가지로 지켰다. 고올 지방에서는 11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이 절기는 6세기 중엽까지도 로마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6세기 후반에야 성탄절 전 4주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레고리 대제 하에 비로소 오늘날에 잘 알려진 대강절 예전이 확고하게 되어졌다. 처음에 대강절은 참회의 절기로는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또한 수난절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래에 와서 대강절을 엄격히 지키지 않는데 한때는 교회에서 사순절을 엄격히 지키듯 대강절을 아주 엄격하게 지킨 적이 있었다.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대강절 기간에 결혼식도 금지 했었고, 금식을 하도록 하였다. 대강절 주일 예배에서는 대강절 촛불 점화식을 갖게 된다. 촛대는 모두 네개가 준비 되어 있고, 가운데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왕 촛대가 있다. 매 주일 하나씩 점화하고, 왕 촛불은 크리스마스 날 점화 한다. 주일마다 촛불을 증가하는 것은 \\\"빛\\\"되신 그리스도가 오고 있다는 상징적 표시이다. 그곳에 성 크리쏠로구스 (St. Peter Chrysologus; c. 450 사망)라는 신부가 수태고지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대강절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페르페투스라고하는 투어스 교구 주교(Bishop Perpetuus of Trours; 461-490)가 대강절을 선포하여 11월 1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 까지 금식을 선언한 것이 처음이다. 11월 11일이 성 마틴(St. Martin)의 축일이기 때문에 이를 성 마틴의 사순절이라고 했다. 그후 메이콘 공의회(Council of Macon, 581)에서 공인되어 유럽 전역에 퍼졌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강절에는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중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이 땅위에 탄생함을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대단히 반갑고 기쁜 날을 고대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대강절은 마지막 날에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대림절/ 딛2:13/ 2005-12-02
대림절 딛2:13 대강절을 영어로는 advent (라틴어로는 adventus로 영어의 \"coming\")로 \"온다\"란 뜻이다. 대강절은 특히 동방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지켜서, 이 때 부터 마리아의 수태 고지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동방교회의 전통은 이태리의 Ravenna라고하는 지방으로부터 서방교회로 흘러 들어 왔다. 대강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대강절 기간은 12월 25일 성탄절 4주전에 시작된다. 11월 30일에 가까운 주일부터 시작 되는데 이 날은 11월 27일보다 빠를 수 없고 또 12월 3일보다 늦을 수도 없다. 대강절로 부터 교회력이 시작된다. 4세기에서 7세기까지는 이 대강절의 기간은 다양하게 지켜졌다. 즉 3주간에서 7주간까지 여러 가지로 지켰다. 고올 지방에서는 11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이 절기는 6세기 중엽까지도 로마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6세기 후반에야 성탄절 전 4주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레고리 대제 하에 비로소 오늘날에 잘 알려진 대강절 예전이 확고하게 되어졌다. 처음에 대강절은 참회의 절기로는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또한 수난절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래에 와서 대강절을 엄격히 지키지 않는데 한때는 교회에서 사순절을 엄격히 지키듯 대강절을 아주 엄격하게 지킨 적이 있었다.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대강절 기간에 결혼식도 금지 했었고, 금식을 하도록 하였다. 대강절 주일 예배에서는 대강절 촛불 점화식을 갖게 된다. 촛대는 모두 네개가 준비 되어 있고, 가운데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왕 촛대가 있다. 매 주일 하나씩 점화하고, 왕 촛불은 크리스마스 날 점화 한다. 주일마다 촛불을 증가하는 것은 \"빛\"되신 그리스도가 오고 있다는 상징적 표시이다. 그곳에 성 크리쏠로구스 (St. Peter Chrysologus; c. 450 사망)라는 신부가 수태고지에 대한 주제로 설교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대강절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페르페투스라고하는 투어스 교구 주교(Bishop Perpetuus of Trours; 461-490)가 대강절을 선포하여 11월 1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 까지 금식을 선언한 것이 처음이다. 11월 11일이 성 마틴(St. Martin)의 축일이기 때문에 이를 성 마틴의 사순절이라고 했다. 그후 메이콘 공의회(Council of Macon, 581)에서 공인되어 유럽 전역에 퍼졌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강절에는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중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가 이 땅위에 탄생함을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대단히 반갑고 기쁜 날을 고대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대강절은 마지막 날에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대림절의 설교
대림절의 설교 1. 대림절 설교 대림절로 시작되는 크리스마스 절기는 근본적으로 부활절 신비의 잔치와 연결된다.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는 구속과 신성의 사건의 초석이 된다. 이 기간 행해지는 많은 예배들은 탄생을 통해 부활을 통한 구속의 관계 대한 언급을 간과할 수 없다. 대림절 신학과 맥을 같이하는 대림절 기간의 설교들의 주제들은 첫째,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종말적 신앙 둘째,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한 예언의 성취 및 구속사의 실현, 셋째, 온 인류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은 선교적 대선언, 넷째, 과거에도 오셨고, 또 지금도 현존하시며,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 하실 임마누엘 신앙이다. 대림절 기간의 설교에 대해 정장복은 다음과 같은 방향성 제시한다. 현대인들이 성탄절을 앞두고 들뜬 감정으로 그리스도가 인간의 축하 행사와 상업주의 현장에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다음과 같이 메시지의 방향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속에 관한 뜨거운 사랑을 맞아들일 수 있는 우리 자신들의 마음과 몸가짐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교회를 새롭게 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주님의 영접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일이다. 이러한 준비의 터전은 아기 예수님의 영접보다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영적인 준비를 촉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방향성은 재림신앙을 새롭게 일구는데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대림절기 설교는 대림절 기간이 각각의 4개의 주로 나누어서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Carl은 'Breaking the Word'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대림절 첫째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준비한다. 대림절 둘째 주는 심판 날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며, 이와 맞추어 세례요한의 출현과 그의 핵심 사역인 회개의 요청에 초점을 맞추어서 종말적 신앙안에서의 속죄와 회개에 대하여 말씀의 초점을 맞춘다. 셋째 주는 세례요한의 사역과 그의 사역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데 초점을 두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오심에 대한 참된 준비에 대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림절 둘째와 셋째 주는 세례요한의 메시아의 나심과 성육신에 대한 준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축하와 다시 오실 심판의 재림의 주에 대한 회개에 중심을 두도록 한다. 넷째 주는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참여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한 마리아와 그의 헌신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할 수 있다. 대림절의 성경 본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림절 첫째주 구약의 예언서 : 이사야 2장 1절-5절, 이사야 64장 1절-9절, 예레미야 2장 14절-16절 신약의 서신서 : 로마서 13장 11절-14절, 고린도전서 1장 3절-9절, 데살로니가전서 3장 9절-13절 신약의 복음서 : 마태복음 24장 36절-44절, 마가복음 13장 24절-37절, 누가복음 21장 25절-36절 대림절 둘째주 구약의 예언서 : 이사야 11장 1절-10절, 이사야 40장 1절-11절, 말라기 3장 1절-4절 신약의 서신서 : 로마서 15장 4절-13절, 베드로후서 3장 8절-15a절, 빌립보서 1장 3절-11절 신약의 복음서 : 마태복음 3장 1절-12절, 마가복음 1장 1절-8절, 누가복음 3장 1절-6절 대림절 셋째주 구약의 예언서 : 이사야 35장 1절-10절, 이사야 61장 1절-4절,8절-14절, 스바냐 3장 14절-20절 신약의 서신서 : 야고보서 5장 7절-10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24절, 빌립보서 4장 4절-7절 신약의 복음서 : 마태복음 11장 2절-11절, 요한복음 1장 6절-8절, 19절-28절, 누가복음 3장 7절-18절 대림절 넷째주 구약의 예언서 : 이사야 7장 10절-16절, 사무엘하 7장 1절-11,16절, 미가 5장 2절-5a절 신약의 서신서 : 로마서 1장 1절-7절, 로마서 16장 25절-27절, 히브리서 10장 5절-10절 신약의 복음서 : 마태복음 1장 18절-25절, 누가복음 1장 26절-38절 누가복음 1장 39절-55절 2. 대림절과 크리스마스 기독교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이다. 이 말씀은 인류 구원의 위대한 사명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심에 대한 명백한 선언이다. 그리고 또한 이 말씀은 먼저 듣고, 보고, 믿은 자들이 지구상의 남은 자들을 향하여 받들고 선포하며 전해야 할 말씀이다. 아직까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사건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매년 기억하고 회상하지만 이 진리는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한다. 인류를 구원하실 위대한 구세주가 연약한 아기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셨다는 성탄절 이야기는 회복과 구원이 필요한 인간들의 두려움을 제거해주고 미래를 향한 무한한 소망과 기쁨을 제공해 준다. 매년 12월 초가 되면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된다. 부활절을 기점으로 형성된 교회력은 대강절로 부터 시작된다. 대강절은 성안드레의 날인 11월 30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부터 시작하여 4주간 계속된다. 과거 이 기간은 4주부터 7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나 6세기 로마주교가 4주로 확정하였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대강절을 엄격히 지켰으며 모든 신자들은 날마다 금식하고 교회 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성탄절은 부활절(Pascha) 날짜의 결정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차이와 상황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또 부활절은 날짜가 주일에 확정되어 해마다 날짜가 변하는데 비하여, 성탄절은 날짜가 고정되어 있고 해마다 요일이 변한다. 특히 전통적으로 성탄절은 교회가 아닌 가정 중심으로 모여 축일을 보내는 잔치 날로 인식되어 왔다. 교회력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있어서 성탄절의 중요성은 대단하다. 성탄절은 부활절과 더불어 교회력을 이루는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성탄절 절기는 교회력에서 새로운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며, 본 소고는 성탄절의 기원 및 제정의 유래와 역사를 중점적으로 고찰하면서, 주현절, 대강절의 관계를 살피고 성탄절의 신학적 의의를 집어보며, 현대교회가 지켜야 할 성탄절 예배 그리고 말씀 선포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성탄절기는 부활절기와 함께 교회력의 두 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주기이다. 대림절은 교회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이 초대교회와 같이 이미 오신 그 분을 맞이하고, 다시 오실 그 분을 기다리는 영적성장의 기간이다. 대림절에 우리들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비 속에 사로잡힌다. 예수의 오심은 인간에게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새로운 생명에로의 연합이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평화의 소식이며, 온 천하를 향한 기쁨과 화해의 선포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전 우주적으로 그 분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종말적 사건을 기대하고 선포하는 기간이 바로 대림절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속된 정의를 예견한다. 평화의 주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를 감사하고 예배하려는 수고가 이 기간에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다시 오심을 재현하고 준비하는 대림절을 통하여 과거 베들레헴에 나셨던, 현재 나와 우리 삶에 살아 계시는, 그리고 앞으로 이 땅에 재림의 심판주로 다시 오실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된다.
대림절의 의미와 교회교육/ 1995-11-01
대림절의 의미와 교회교육 교육은 형식적 장소에서 짜여진 교과과정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비형식적 장에서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와 같은 비형식적 교과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특별히 종교교육은 많은 부분이 비형식적 교과과정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가장 크게 차지한 비형식적 교과과정이 바로 절기를 통한, 교회력을 통한 교육이다. 온 신앙의 공동체가 함께 지키는 절기 명절은 가장 자연스러운 교육 환경 속에서 신앙공동체의 일체감을 가져오고 가치와 전통을 심을 수 있는 삶을 통한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의 명절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보편화되고 교회공동체에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쳐온 명절은 바로 성탄절이다. 매해 한해의 마지막인 12월이 되면 이땅위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들이나 신앙하지 않는 자들이거나에 상관없이 한해의 마지막을 정리하려는 생각과 함께 성탄절,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고 마음이 설레게 된다. 특별히 근래의 성탄절은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에서보다는 백화점이나 상가를 증심으로 상업적인 전략과 함께 의미보다는 서구적인 화려한 상흔으로 오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아직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추수감사절도 지키지 않았는데, 세속도시에서는 장사하는 크리스마스로 바쁘게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함께 편승하여 사고 파는데 바쁜, 장사하는데 바쁜 성탄 준비로 바삐 움직이고 있다. 이 기간 마저도 내가 무엇을 가질 것인가의 관심 속에서 나의 탐욕을 채우는데 바쁘다. 이러한 사회현상 속에서 어떻게 성탄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해 갈 수 있을까가 교회의 교육의 과제이다. 교회교육 속에서 단지 하나의 행사를 치루는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정말 놀라운 비밀이 담긴 기독교의 본래적 의미를 부여하는 교육이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 성탄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성탄으로 이어지는 대강절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중요하게 되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대강절의 의미를 찾아보자. 대강절(ADVENT)은 대림절 또는 강림절이라고 불리는 성탄일 전 4주일로 '오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절기에는 2000년전 베들레헴 구유에 성육신하신 아기 예수에 대한 기억 속에서 그 의미를 되살리며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소망가운데 구체적인 성육신의 삶을 사는 기간이다. 그럼 오늘 우리는 베들레헴 구유에 성육신 하신 아기 예수님의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 글에서는 단지 누가복음 2장에 나타난 탄생 이야기에 기초해서 구유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아기예수가 주는 의미 속에서 대강절의 현대적 의미를 찾고자 한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본문에서 보여 주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구유에 뉘었다는 데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물론 본문은 사관에 있을 곳이 없는 합리적인 이유를 호적하러 온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인 것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이는 누구에게나 이해되어질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오늘날도 이러한 당연한 것 같은 사실 때문에 인간의 악한 본성이 정당화 되어지는 경우는 허다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즉 '나'편리주의와 이기주의 때문에 '너'의 형편과 처지가 전혀 무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산모가 헛간에 있는데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서 첫 울음을 터뜨린 사람의 아들이 구유에 뉘어졌는데도 자신의 방으로 옮겨 줄 너그러움이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구유에 누워 있는 사람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 너그러움이 없었기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뜻의 실현은 구유에 누인 사람의 아들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너'에 무관심한 결과는, '너'에 장님이 된 결과는 큰 기쁨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복음에 귀머거리를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 기쁨의 소식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에게 보여졌고, 들을 귀 있는 자들, 들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들려졌다. 그래서 그 기쁨의 소식을 받은 그들이 또한 평화의 소유자들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이 구유의 사람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기뜸을 간직한 자들이 된 것이다. 나는 가끔 성탄절 전야에 또는 대강절기간에 어수선한 마음으로 성탄절 준비를 하구 행사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상념에 빠질 때가 있다. 우리끼리 모여서 별 성탄의 의미가 없는 커다란 츄리를 세우고 아름다운 전구로 환한 아름다운 불을 밝히고 우리끼리 모여 산타의 선물을 주고 받고 우리끼리 모여 구유의 첫번째 크리스마스를 재현하고 우리끼리 모여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춤추고 찬양하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을 때 아기 예수는 여전히 구유에 누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다. 아기 예수는 여전히 오늘도 구유에 누어 있는데 예수 없는 예수 생일 축하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성탄절은 축제로 즐거운 명절로 지켜져야 한다. 물론 베들레헴의 첫번째 크리스마스를 재현하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며 축하하는 성탄의 전통도 경시되어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성탄 축하의 형식들마져 사라져 버리면 우리는 그 의미를 찾을 기회 조차 잃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성탄 축하의 경험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형식을 갖추는데만 너두 바빠서 진정한 의미를 놓쳐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아기예수를 세상 속에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셨다. 하나님은 구유에 누이신 아기예수를 통해 세상과 화해를 이루신 것이다. 그 당시 삶의 여건에서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자들, 목자들을 먼저 부르셔서 그들 중에 평화가 임하도록 하셨다. 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는 가운데 오늘도 구유에 누인 사람의 아기를 찾는 것은 또 그 아기를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세상을 하나님께로 화해하게 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성육신의 뜻의 성취인 것이다. 그럼 대강절에 성육신하신 뜻의 성취를 위한 교회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첫째는 오늘 우리 주변에 구유에 누어 있는 사람의 딸이나 아들을 찾는 것이다. 올해는 유달리 우리를 놀라게 한 사건들이 많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은 대형참사이다. 국내적으로는 대구 가스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그치고 남과 북에 같이 찾아온 너무나도 큰 대형홍수이다. 물론 북에서 당한 피해는 더할 수 없이 처참한 듯하다. 밖으로도 가까운 일본의 독가스사고 대지진, 미국의 주정부 건물의 폭발사건, 극심한 살인 폭염. 세계 여러나라의 대형 홍수들, 여러 종류의 전염병, 여러나라에서 발생한 대지진 참사... 참으로 세기도 어려울 만큼의 사고 참사들, 천재지변들이 발생했다. 이 모든 참사들이나 천재지변들은 물론 셀 수 없이 많은 인명을 빼앗아 갔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혹 이들 중에 구유에 누인 자들은 없는가? 또 이러한 참사의 피해자가 아니라도 우리 주변에 철저하게 소외되어진 자들로 병들고 아픈 고통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은 자로 즉 구유에 누인자로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은 없는가? 혹 교회밖에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는 이러한 자가 없는가? 둘째는 대강절 의미를 찾도록 하는 교육과정의 구성이다. 여기서는 이를 5단계로 구상해 본다. 첫째, 주님의 재림과 그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다림과 소망의 단계, 둘째, '나'에 사로잡혀 '너'를 보지 못하므로 성육신의 실현을 방해해 온 자신에 대한 회개의 단계, 셋째는 성육신의 사랑을 나누는 사랑과 나눔의 단계, 넷째는 성육신의 은혜로 말미암은 너와 나의 만남과 하나님과 화해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너'와 '나'가 하나님과 세상이 하나되도록 이끈 구유의 사람이된 아기 예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축제이다. 세째는 오늘 구유에 누인 사람의 아들 딸과 함께 하는 교회교육을 구체적으로 실시해 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위에서 말한 대강절 교육과정을 대강절 예배의식에 맞춰 제시해 본다. 먼저 교회교육의 대상이 어린이에 극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대강절 교육 프로그램은 전 신앙의 공동체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비록 한시간대에 같은 자리에 모일 수는 없어도 같은 프로그랠을 추진함이 바람직하다. 먼저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대강적에 사용하는 대강절 푸른 나무로 둥글게 엮어 만든 화환과 5개의 초를 사용하여 현대적 의미에서 대강절을 지켜보자. 대강적 화관은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한다. 원래 초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낸다. 이는 대강절 기간 동안 전 세대가 함께 하는 전체예배를 통해서도 되어질 수 있고 또 교회의 각 기관의 예배에서도 실시할 수 있다. 예배에서 시작하여 공과공부를 통해 더 구체화하여 가도록 하자. 대강절 첫째 주일 : 기다림과 소망의 촛불 임마누엘의 메시아 오심을 대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함을 나타내는 첫 번째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을 낭독한다. 이는 이 세상에서 지치고 곤고한 자들에게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소망이 되는 것이다. 활동을 통해 그분이 오시므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그려본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이야기 해 본다. (참고 성경본문 이사아 11:1-10) 대강절 둘째 주일: 회개와 빛의 촛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도록 한 나의 모습을 회개하고 잘못된 제도를 비판하고 구유에 누인 사람을 찾아 나서는 의미로 회개와 빛의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을 읽는다. 교회 전 신앙의 공동체가 하나로 또는 각 기관별로 또는 개인별로 구체적인 대상을 정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에게 무엇으로 화해를 이를 것인지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섬김의 봉사, 물질의 공급, 병든자의 치유, 필요로 하는 물건 제공, 사랑의 선물 등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다음 주일 크리스마스 츄리 밑에 '아기예수께 선물' 이란 이름으로 드리도록 한다. (참고 성경본문 마태 25:41-45, 마태 5:13, 요한 8:12) 대강절 셋째 주일: 사랑과 나눔의 촛불 구유에 누인 사람을 찾아가(찾아갈 수 있는 대상일 때) 같이 사랑을 나누고 나의 몫을 나누는 실천의 의미의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 말씀을 읽는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상처 입은 자들, 굶주린 자들, 외롭고 쓸쓸한 자들과 같은 우리를 필요고 하는 자들을 외면해 온 것을, 또 그러한 이기적인 나를 방어해 온 것을, 약한 자들에게 불리하게 된 잘못된 제도나 관습을 정당화 해 온 것을 회개하는 회개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다음 우리 주변의 구유의 사람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요청되어지는 것은 나는 하나님 나라 궁궐의 왕자나 공주로서가 아니라 나도 철저하게 구유의 아기가 되어서 아니면 철저하게 한 밤중 들밖의 목자가 되어서 찾아가야 한다. 어떤면으로도 나의 우월의식은 배제되어야 하고 진정한 의미로 구유의 아기를 섬기는 자세의 중요함이다.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먹다 남은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동정을 베풀고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주어진 몫을 형제자매와 나누는 것이다. (참고 성경본문 마태 25:34-40, 누가 1:46-56) 대강절 넷째 주일: 만남과 화해의 촛불 먼저는 '너'와 '나'의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와의 만남과 화해를, 그리고 '너' 꼭 '나'의 만남과 화해를 의미하는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을 읽는다. 이 주일에는 만약 우리가 찾은 구유의 '너'가 같이 교회에 참석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같이 참여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강제적으로 보다는 자원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교회에 데려 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므로 그가 하나님과 화해를, 그리고 세상과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참고 성경말씀 이사야 7:14, 누가 2:1-20,엡 2:13-14) 성탄절 : 감사와 환희의 축제의 촛불 구유께 누어 있던 '너',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던 '너' 가 화해를 이루고 사람의 아들 딸의 인격이 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감사, 구유의 아기를 통해 세상과 화해를 이를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환희와 축제의 촛불을 켠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말씀을 읽는다. 이 촛불은 구유가 변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을 축하하는 촛불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사건은 소외되어진 목자와 같은 인간들에게 또 이 세상에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 점에서 성탄절은 구유의 잔치, 축제가 되어야 한다. 적은 곳에서이지만 사람이 된아기 예수의 사랑으로 본질적인 정의가 실현된 기쁨을 나누는 잔치이다. (참고 성경말씀 누가 2:14, 요한 3:16) (구체적으로 예배에 이 교육과정을 사용할 때는 개강절 예배' 자료집 안에 나와 있는 전반적인 진행을 참고하여 개개인 교회의 형편에 맞게 다시 작성 한다. 참고:대강절에서 성탄절까지, 장로회신학대학기독교교육연구원편 pp. 54-57) 구유의 진정한 의미가 찾아질 때 대강절과 성탄은 일년을 마무리 하는 교회의 절기라기 보다는 교회력을 새로이 시작하는 절기가 될 것이다. 이는 교회 안의 절기로 교회에 갇혀 있는 절기라기 보다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하는 기쁘고 의미있는 절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고 고대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리와 어린양이 같이 살 수 있는 나라, 독사굴에 어린이가 장난칠 수 있는 나라,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있는 나라가 임할 것이다. 월간「교육교회」95.11월호(기독교교육연구원) 송남순 교수(한일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
배우 김태희 간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2012-07-18
배우 김태희 간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간증/ 배우 김태희 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국민 여배우 김태희의 신앙고백이 화제다.(63호 6면 참조) 가톨릭 신자 김태희 세례명은 베르다이다. 그녀의 겸허한 신앙고백이 지난 5월 6, 13, 21, 27일 4회에 걸쳐 천주교 소식지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란에 실렸다. 본지는 자료를 입수, 입력․정리하여 게재한다.(편집자 주) 2.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다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입니다. 여름방학에 남동생과 교리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아 첫영성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더 어릴 때에는 조부모님의 종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가끔 절에 따라다니기도 했는데, 어린 내 눈에는 왠지 모르게 성당 다니는 다른 친구들이 예쁜 미사보를 쓰고 기도하는 모습이 부럽고 멋져 보였습니다. 중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땅을 보고 하늘도 보며 걷다 불현 듯 신비스런 기운이 휩싸면서 가슴이 벅차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늘 너와 함께 있다.’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며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나의 경험이 그 날의 기분 탓에 겪은 단순한 감정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증명해 보여줄 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난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놀라운 체험들을 꽤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사롭고 막무가내인 수많은 기도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응답해 주시며 당신의 존재를 늘 내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내가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 하나님 말씀을 모른 척하며 살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 많은 말씀 가운데, 유독 여러 번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난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모자라고 부끄러운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날 사랑하실 거야. 영원히….’라고. 3. 하나님의 훈육방법 삶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절실히 찾게 될 때가 있습니다. 기쁜 일이 생겨 한없이 감사를 드릴 때, 그리고 힘든 일이 생겨 마음이 너무나 괴로울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게 될 때는, 역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뭔가 큰일이 생겼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과연 아무 이유 없이 오로지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이신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고, 마냥 피하고만 싶은 일들도 시간이 흐르면, 그로 인해 내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훈육방법이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예상치 못했던 사건 하나하나가 사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 누구도 원망이나 불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더욱 노력하면서 그 분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우리가 늘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사는 것, 그것 하나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연기’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이 주관하시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연기자로 이끄신 것은 아마도 그것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4.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제대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일주일 단 한 번, 고작 한 시간일 뿐인 미사 시간에 딴 생각을 하고, 자기 전에 달랑 한두 구절의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바라는 것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말로는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말이 얼마만큼 내 진심과 맞닿아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두 달 전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본당의 한 신자로서 청년활동에 권유를 많이 받아왔지만 내가 다른 청년들과 어울리며 신앙생활을 서로 나누고 돕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정기적으로 신부님과 내 또래 자매들과 너무나 즐거운 성서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하나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하나님이란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면서 성서모임은 점점 더 신이 나고 흥미로운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지금까지 나의 신앙생활은, 20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내가 그린 상대방의 이미지만을 보며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한 가짜 연애처럼 해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영적으로 새롭게 내어나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고, 특히 나는 지난 일을 너무나 쉽게 잘 잊어버리는 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주시고, 놀라운 체험으로 나를 깨닫게 해주셔도 또 금세 잊어버리고 제자리걸음만을 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3:8)는 말씀이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바람과 같이 자유롭다는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그 말씀대로 어떠한 제약 없이 눈앞의 일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나를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살면 행복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간절히 원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5.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나는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때로는 남들보다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는 우월감까지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과시하고 자랑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고, 나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봐 혼자서만 조용히 하나님 사랑을 맛보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를 잊고 살았다는 것과 내가 그동안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죄책감입니다. 내 성격은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마음이 내키는 쪽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남에게도 쉽사리 무엇인가를 권유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종교나 믿음 같은 문제는 누가 말로써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님이 쓰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읽으면서 선교 활동에 대해 가졌던 회의적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선교 활동을 할 때, ‘구원’이라는 단어를 꼭 씁니다. 우리 인간이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질문 몇 가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답변을 알아봅니다. 1) 누가 구원되는가?/ 인간이 2) 누가 구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3) 무엇으로부터 구원되는가?/ 죄에 의해 배가(倍加)된 인간의 유한함으로부터 4)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 구원되는가?/ 더욱 정의롭고 보다 형제애적이며 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와 교회에 매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일까요? 솔직히 나는 그리스도교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수없이 많은데, 그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교회에 다니면서도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교회에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교회에 속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목소리인 ‘양심’에 따라 도덕적, 인격적으로 사는 그들의 행위 안에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모른 사람에게 그분을 알게 해주고 싶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마치, 정말 사랑한다면 좋은 것을 서로 나누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려 하시며, 그때 취하시는 길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전부터 나는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잊지 말자!”라고 답해왔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여, 감히 나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내가 느끼는 이 기쁨을 모두가 느낄 수 있게 되는, 나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출처] 배우 김태희 간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천주교 소식지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
배우 김태희 간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2012-07-18
배우 김태희 간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간증/ 배우 김태희 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국민 여배우 김태희의 신앙고백이 화제다.(63호 6면 참조) 가톨릭 신자 김태희 세례명은 베르다이다. 그녀의 겸허한 신앙고백이 지난 5월 6, 13, 21, 27일 4회에 걸쳐 천주교 소식지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란에 실렸다. 본지는 자료를 입수, 입력․정리하여 게재한다.(편집자 주) 2.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다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입니다. 여름방학에 남동생과 교리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아 첫영성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더 어릴 때에는 조부모님의 종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가끔 절에 따라다니기도 했는데, 어린 내 눈에는 왠지 모르게 성당 다니는 다른 친구들이 예쁜 미사보를 쓰고 기도하는 모습이 부럽고 멋져 보였습니다. 중학교 몇 학년 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아침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땅을 보고 하늘도 보며 걷다 불현 듯 신비스런 기운이 휩싸면서 가슴이 벅차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내 딸아, 내가 늘 너와 함께 있다.’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며 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나의 경험이 그 날의 기분 탓에 겪은 단순한 감정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증명해 보여줄 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난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놀라운 체험들을 꽤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사롭고 막무가내인 수많은 기도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응답해 주시며 당신의 존재를 늘 내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내가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 하나님 말씀을 모른 척하며 살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친절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 많은 말씀 가운데, 유독 여러 번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난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모자라고 부끄러운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날 사랑하실 거야. 영원히….’라고. 3. 하나님의 훈육방법 삶 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절실히 찾게 될 때가 있습니다. 기쁜 일이 생겨 한없이 감사를 드릴 때, 그리고 힘든 일이 생겨 마음이 너무나 괴로울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더 다가가려고 노력하게 될 때는, 역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뭔가 큰일이 생겼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과연 아무 이유 없이 오로지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벌이신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 가고, 마냥 피하고만 싶은 일들도 시간이 흐르면, 그로 인해 내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훈육방법이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예상치 못했던 사건 하나하나가 사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 누구도 원망이나 불만을 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더욱 노력하면서 그 분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우리가 늘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사는 것, 그것 하나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연기’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이 주관하시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연기자로 이끄신 것은 아마도 그것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4.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는 성경을 처음부터 제대로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일주일 단 한 번, 고작 한 시간일 뿐인 미사 시간에 딴 생각을 하고, 자기 전에 달랑 한두 구절의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바라는 것만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말로는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말이 얼마만큼 내 진심과 맞닿아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두 달 전부터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본당의 한 신자로서 청년활동에 권유를 많이 받아왔지만 내가 다른 청년들과 어울리며 신앙생활을 서로 나누고 돕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정기적으로 신부님과 내 또래 자매들과 너무나 즐거운 성서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하나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하나님이란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면서 성서모임은 점점 더 신이 나고 흥미로운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지금까지 나의 신앙생활은, 20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내가 그린 상대방의 이미지만을 보며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한 가짜 연애처럼 해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영적으로 새롭게 내어나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고, 특히 나는 지난 일을 너무나 쉽게 잘 잊어버리는 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주시고, 놀라운 체험으로 나를 깨닫게 해주셔도 또 금세 잊어버리고 제자리걸음만을 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3:8)는 말씀이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바람과 같이 자유롭다는 의미로 느껴졌습니다. 그 말씀대로 어떠한 제약 없이 눈앞의 일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나를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살면 행복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세상에서 가장 간절히 원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5.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나는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때로는 남들보다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는 우월감까지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과시하고 자랑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고, 나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봐 혼자서만 조용히 하나님 사랑을 맛보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를 잊고 살았다는 것과 내가 그동안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죄책감입니다. 내 성격은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마음이 내키는 쪽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남에게도 쉽사리 무엇인가를 권유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특히, 종교나 믿음 같은 문제는 누가 말로써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님이 쓰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읽으면서 선교 활동에 대해 가졌던 회의적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선교 활동을 할 때, ‘구원’이라는 단어를 꼭 씁니다. 우리 인간이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질문 몇 가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답변을 알아봅니다. 1) 누가 구원되는가?/ 인간이 2) 누가 구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3) 무엇으로부터 구원되는가?/ 죄에 의해 배가(倍加)된 인간의 유한함으로부터 4)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 구원되는가?/ 더욱 정의롭고 보다 형제애적이며 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와 교회에 매주 다니느냐, 다니지 않느냐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일까요? 솔직히 나는 그리스도교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하고 죽는 이들도 수없이 많은데, 그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교회에 다니면서도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교회에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교회에 속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목소리인 ‘양심’에 따라 도덕적, 인격적으로 사는 그들의 행위 안에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모른 사람에게 그분을 알게 해주고 싶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마치, 정말 사랑한다면 좋은 것을 서로 나누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려 하시며, 그때 취하시는 길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전부터 나는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잊지 말자!”라고 답해왔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여, 감히 나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내가 느끼는 이 기쁨을 모두가 느낄 수 있게 되는, 나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출처] 배우 김태희 간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로 쓰이고파 -천주교 소식지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