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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교회 모범정관 /교회개혁실천연대 2014-08-05
(00교회) 모범정관 /교회개혁실천연대 2014-08-05 11:39:10 read : 4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전문 본 교회는 00지역의 복음화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하는 뜻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가 살아서 역사하심을 믿으며 이것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원천임을 고백한다. 본 교회는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존중하며 이와 함께 한국과 세계 교회사의 교훈에도 귀를 기울인다. 본 교회는 00교단에 속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일에 주님의 신실한 모든 교회들과 겸손한 자세로 협력하고자 한다. 제1장 총칙 제1조(명칭) 본 교회는 00교회라 칭한다. 제2조(위치) 본 교회는 00번지에 둔다. 제3조(목적과 비전) 본 교회는 예배와 선교, 구제, 교육 및 성도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특히, 000을 교회의 비전으로 삼는다. 제2장 교회 정치의 원리 제4조(근거) 본 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를 신앙고백의 근거로 삼는다. 제5조(정신) 본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및 로잔언약과 같이 현대 교회사에서 복음적인 선언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선언에 공감한다. 제6조(양심의 자유) 주님만이 양심을 주재하시므로 우리 중 누구든지 신앙에 관계되는 사건에 대하여 각자의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고 아무도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제7조(교회의 주권) 우리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주권은 그의 부르심을 입어 주님의 교회를 구성한 교인들에게 있다. 제8조(복음적 분업) 모든 교인은 다 그리스도의 사역자이며 그의 부르심에 따라 각기 하나님의 나라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자의 지위는 동등하며 서로의 맡은 바를 존중해야 한다. 제3장 교인 제9조(자격) 누구든지 본 교회에 등록함으로써 교인의 자격을 획득한다. 본인이 이적을 요청하였거나 출교의 처분을 받았을 경우에는 교인의 자격을 상실한다. 제10조(책임) 교인은 정기예배에 성실히 참여하고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며 헌금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의무를 진다. 제11조(권리) 교인은 교회의 주체로서 교회 회무에 참여하며 교회 정관이 규정한 바에 따라 각종 회의의 의결권과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 제4장 사역자와 부서 제12조(편성) 본 교회에는 목사, 장로, 집사, 그리고 기타 교회가 정한 직책을 둔다. 또한 예배부, 선교부, 구제부, 교육부, 재정부, 봉사부 및 사무관리부를 둘 수 있다. 제13조(목사) 1. 목사는 본 교회의 목회활동에 종사한다. 2. 목회활동이라 함은 설교, 교육, 심방, 성례식 집전 등의 활동을 의미한다. 3. 본 교회의 목회활동은 전문적인 협력 사역 형태를 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전문적인 활동 분야에 따라 ‘○○담당목사’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4. 목사의 임기는 3년으로 교회가 인정하는 자격을 얻은 자로서 공동의회 참석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초빙되며 공동의회 참석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연임할 수 있다. 제14조(장로) 1. 장로는 교인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일과 권징하는 일에 종사한다. 2. 장로는 35세 이상의 세례교인 중에서 공동의회 참석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은 자로 한다. 3. 장로의 임기는 3년으로 하며 공동의회 참석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연임할 수 있다. 제15조(집사) 1. 집사는 교회 운영과 구제 활동에 종사한다. 2. 집사는 30세 이상의 세례교인 중에서 공동의회 참석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로 한다. 3. 집사의 임기는 3년이며 공동의회 참석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연임할 수 있다. 제16조(부장) 1. 부장은 교회에 속한 각 부서의 운영 책임을 맡는다. 2. 부장은 집사회 내에서 선출한다. 3. 부장의 임기는 1년이며 집사회 참석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연임할 수 있다. 제17조(감사) 1. 감사는 교회의 재정과 사무 일체에 관한 감사활동에 종사한다. 2. 감사의 임기는 1년이며 공동의회 참석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선출되고 연임할 수 있다. 3. 감사는 상반기와 하반기의 연 2회 실시하며 결산을 다루는 공동의회에서 그 결과를 연 1회 보고한다. 제18조(전도사) 1. 목사의 목회 활동을 돕기 위해 전도사를 둘 수 있다. 2. 전도사는 사역자회의 과반수의 찬성으로 초빙하며 사역자회의 과반수의 의결로 연임할 수 있다. 3. 임기 및 보수 등의 청빙 조건은 청빙 시에 결정한다. 제19조(사무직원) 1. 교회의 관리 및 사무를 위해 유급 사무직원을 둘 수 있다. 2. 사무직원은 사역자회의의 다수결에 의해 채용되며 사무관리부에 소속한다. 3. 임기 및 보수 등의 채용 조건은 채용 시에 결정한다. 제20조(각종 부서) 각 부서는 본 교회 행정을 의결하고 집행하는 기본 단위로서 그 운영의 자율성은 최대한 보장되며 각 부서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1. 예배부 : 예배 및 성례에 관한 일체 사항의 의결과 집행. 2. 선교부 : 국내외 전도에 관한 일체 사항의 의결과 집행. 3. 구제부 : 국내외 구제에 관한 일체 사항의 의결과 집행. 4. 교육부 ; 교회 내와 교회 밖의 교육에 관한 일체 사항의 의결과 집행. 5. 재정부 : 교회 재정에 관한 일체 사항의 의결과 집행. 6. 봉사부 : 교회 내와 교회 밖의 봉사에 관한 일체 사항의 의결과 집행. 7. 사무관리부 : 교회의 사무와 관리에 관한 일체 사항의 의결과 집행. 제21조(통합 부서의 설치) 교회는 경우에 따라 통합부서를 설치할 수 있다. 제5장 회의 제22조(공동의회) 1. 회원 공동의회 회원은 00교회에 등록된 18세 이상의 교인으로 한다. 2. 소집 및 회기 공동의회는 정기회와 임시회를 둔다. 정기회는 매년 1월과 11월에 두 차례 개최하며 각종 예?결산 및 감사보고는 1월 정기회에서, 그리고 공동의회 의장, 공동의회 서기 및 각종 사역자의 선출은 11월 정기회에서 한다. 임시회는 의장, 사역자회의, 혹은 등록교인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 있을 때에 소집하되 의장은 시일, 장소, 안건 등을 1주일 이전에 공고하여야 한다. 3. 공동의회의 업무 (1) 목사와 장로 중에서 교회를 대표하는 공동의회 의장 선출과 해임 (2) 각종 사역자의 선출과 위임 및 해임 (3) 각종 예산과 결산의 확정 (4) 재산의 취득과 처분 (5) 감사의 보고사항 인준 (6) 교회 정관 및 시행세칙의 제정과 개정 (7) 교인의 권징안 확정 (8) 광대회의체의 가입과 탈퇴 (7) 기타 안건 제23조(사역자회의) 1. 회원 사역자회의는 목양회장, 장로회장, 집사회장 그리고 각부 부장으로 구성된다. 단 목양회와 장로회에서 추천한 각각 2인 이내의 회원을 공동의회의 결의에 따라 사역자회의의 회원으로 추가할 수 있다. 2. 소집 및 회기 사역자회의는 매월 마지막 주에 정기적으로 열리며 사역자회의 의장이나 목양회장, 장로회장, 집사회장 혹은 회원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임시로 소집된다. 3. 사역자회의의 업무 (1) 사역자회의 의장과 서기의 선출 및 해임. 단, 사역자회의 의장의 임기는 1년으로 1회 연임할 수 있고 임기 종료 후 1년이 경과해야 재선될 수 있다. 공동의회 의장은 사역자회의 의장을 겸임할 수 없고 사역자회의 서기는 사무관리부장이 겸임한다. (2) 각종 부서에서 제출한 정책적 사안의 심의와 의결 (3) 교회 정관과 시행세칙의 개정안 심의 (4) 교회 예결산의 심의와 정관이 정한 범위의 예산안 의결 (5) 장로회에서 제기한 권징안 심의 (6) 전도사와 사무직원의 청빙 등 교회 운영의 실무적 사안에 관한 협의 조정과 의결 (7) 광대회의체와 관련된 업무 (8) 기타 사항 4. 확대사역자회의 사역자회의의 의결에 따라 목양회, 장로회, 집사회의 전원이 참여하는 확대사역회의를 개최할 수 있다. 제24조(목양회) 1. 목사와 전도사로 구성되며 목회에 관한 일체의 사항들을 의논한다. 2. 목양회장은 목사 중에서 1년씩 윤번제로 하며 그 순서는 목양회에서 정한다. 제25조(장로회) 1. 장로들로 구성되며 교인들에 대한 심방과 권징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의논한다. 2. 장로회장은 장로 가운데 1년씩 윤번제로 하며 그 순서는 장로회에서 정한다. 제26조(집사회) 1. 집사들로 구성되며 교회행정과 재정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고 각 부서의 장들을 선출한다. 2. 집사회장의 임기는 1년이며 임기 종료 후 1년이 지나면 다시 선출될 수 있다. 제27조(회의 성립과 의결 정족수) 위 모든 회의는 구성원 과반수의 참석으로 성립되며 의결정족수는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다수결이다. 제28조(제척 사유) 회의의 안건 중에서 의장 자신에 관한 회무를 다루게 될 경우 각 회의체는 다수결로 임시의장을 선택하여 해당 회무를 진행한다. 제6장 재정 제29조(원칙) 교회의 재정은 다음과 같은 원칙 하에서 운영한다. 1. 교회의 재정에서 차지하는 전도/교육, 구제/봉사 및 교회 운영의 몫은 서로 균형이 잡히도록 한다. 2. 재정의 사용은 항상 투명해야 하며 결산은 내부 감사와 더불어 외부기관의 감사를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3. 차입경영은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4. 교회의 재정은 최대한 공개되어야 한다. 재정부는 매월 정기 사역자회의에 익월의 회계보고서를 제출하고 이 보고서를 교회의 홈페이지에 등재한다. 제30조(예결산) 예결산의 처리는 다음과 같다. 1. 예산은 재정부에서 작성하여 사역자회의의 심의를 거친 후 공동의회에서 확정한다. 2. 결산은 재정부가 작성하고 사역자회의에서 심의한 내용을 감사의 보고서와 함께 공동의회에 회부하여 확정한다. 제31조(재정지출) 1. 모든 재정지출은 예산의 범위 안에서 공동의회 의장의 동의를 얻어 재정부장이 시행한다. 2. 예산항목의 변경 및 총액 기준 20% 미만의 초과지출은 사역자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3. 당초 예산액 대비 20% 이상의 총 예산 증액이 요청될 때에는 재정부가 이를 편성하고 이 편성안은 사역자회의와 임시공동의회의 의결을 거쳐 확정된다. 제32조(재산의 관리) 교회의 재산은 다음과 같이 관리한다. 1. 교회의 재산은 교인 총유의 것이므로 어느 개인도 따로 권리를 주장할 수 없으며 교인의 지위가 상실한 경우에는 교회 재산에 대한 공유의 권리도 포기한 것으로 한다. 2. 교회 재산의 취득, 매도, 증여, 교환 혹은 용도 변경 등 제반 사항은 재정부의 동의와 사역자회의의 의결을 거쳐 공동의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단 단위 당 1천만 원 이하의 범위 내에서 발생하는 재산관리 사항에 대해서는 사역자회의의 의결로 집행할 수 있다. 3. 모든 재산의 등기는 00교회 명의이어야 하나 행정상의 편의 혹은 법적 요건에 따라 공동의회의장이 주체가 될 수 있다. 4. 사무관리부는 재산관리대장을 비치하고 정기감사에서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열람 요청이 있을 때 이에 응해야 한다. 제33조(전임사역자의 보수) 전임사역자의 보수는 다음과 같이 책정한다. 1. 연봉제를 원칙으로 하며 구체적인 지급방식은 처음 청빙할 때 제시된 조건을 따른다. 2. 전임사역자에게는 퇴직금과 더불어 법률이 정한 의료보험 및 국민연금의 사업자측 부담금을 지급한다. 3. 기타 자세한 사항은 시행세칙에서 따로 정한다. 제34조(회계연도) 본 교회의 회계연도는 매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로 한다. 제7장 권징 제35조(권징의 원칙) 교회의 질서와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권징은 필요하다. 모든 권징은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뜻에 근거해야 한다. 제36조(권징의 과정) 교인 중에 반성경적 행위로 그리스도의 뜻을 훼방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 장로는 이를 심방하고 수차 권면해야 한다. 본인이 끝내 돌이키지 않는다는 점이 확인될 때 장로회는 이를 기록한 후 기록을 첨부하여 권징안을 사역자회의에 회부하고 사역자회의와 공동의회의 의결을 거쳐 이를 확정한다. 제37조(권징의 종류) 권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근신 : 교인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일시적 정지. 2. 해직 : 사역자의 경우 해당 직위의 해지. 3. 출교 : 교인으로서의 자격 박탈. 제8장 광대회의 제38조(광대회의에의 참여) 권징의 조화를 이룩하고, 교리의 순전함을 지키고, 교회의 일치를 달성하기 위해 교회는 광대회의체들과 적극 협력하여야 한다. 본 교회는 00노회와 00총회에 참여한다. 제39조(광대회의의 역할) 교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광대회의체들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1. 광대회의들은 교회의 권징에 불복하는 교인들을 위한 재심의 장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권징 결과에 대해 광대회의의 권고가 있는 경우에 교회는 이를 재심하여야 한다. 2. 교리의 순전함을 지키기 위해 교회는 광대회의의 신앙적 판단을 존중해야하며 전임사역자들을 육성하는 00신학교와 000연구소의 재정을 적극 지원하여야 한다. 3. 보편적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는 00노회와 00총회의 결의를 존중하고 이 회의에서 결정되는 선교와 구제를 위한 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여야 한다. 제40조(광대회의에서의 탈퇴) 교회는 본 교회가 소속한 광대회의체들이 복음의 전파에 도리어 장애가 된다고 판단할 때는 공동의회의 결의로 탈퇴할 수 있다. 제9장 부칙 제41조(개정) 본 정관은 사역자회의의 심의를 거친 후 공동의회에서 참석자 3분의 2의 동의로 개정할 수 있다. 제42조(시행세칙) 본 정관을 보완하는 시행세칙을 따로 정할 수 있다. 제43조(교리와 예배모범) 본 정관이나 시행세칙에서 명시되지 않은 교리나 예배모범에 관한 사항은 00총회에서 제정한 바에 따른다. 제44조(효력) 본 정관은 공동의회를 통과함과 동시에 그 효력을 발생한다. 제45조(경과조치) 본 정관이 제정된 직후 선출된 첫 선출직의 임기는 임기완료 후 소집되는 첫 정기공동의회 때까지로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당시의 반박론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당시의 반박론 (루터는 당시에 비덴베르크의 신부였다.)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 1517. (Weimarer Ausgabe, I, S. 233-238.) Die 95 Thesen. (Buchwald, Georg. Doktor Matin LUTHER Ein Lebensbild fuer das deutsche Haus. Leipzig und Berlin: Druck u. Verlag von B. G. Tuebner, 1914. s. 103-110.) An English Translation of the Ninety-five Theses. (Luther`s Ninety-five Theses. St. Louis, Mo. : concordia Publishing Houres, n.d. pp.17-35) 루터의 \\\"95개조 논제\\\" 본문 (지원용 옮김) (지원용 저, 말틴 루터, 컨콜디아사, 1987.) 1. Dominus et magister noster Iesus Christus dicendo `Penitentiam(Matth. 4, 17) agite &c.\\\' omnem vitam fidelium penitentiam esse voluit. 1. Da unser Herr und Meister Jesus Christus spricht : Tut Busse usw.(Matth. 4, 17), hat er gowollt, dass alles Leben der Glaeubigen Busse sein soll. 1. Our Lord and Master Jesus Christ, in saying : \\\"Repent ye,\\\" etc., intended that the whole life of believers should be penitence. 1.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깊이 뉘우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Quod verbum de penitentia sacramentali (id est confessionis et satisfactionis, que sacerdotum ministerio celebratur) non potest intelligi. 2. Dies Wort kann nicht von der sakramentlichen Busse verstanden werden,d.h.von dem Akt der Beichte und Genugtuung, der durchs Amt der Priester begangen wird. 2. This word cannot be understood of sacramental penance, that is, of the confession and satisfaction which care performed under the ministry of priests. 2.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로서 이해할 수는 없다. 3. Non tamen solam intendit interiorem,immo interior nulla est, nisi foris operetur varias carnis mortificationes. 3. Doch meint es auch nicht nur die innerliche Busse, vielmehr ist keine innerliche Busse denkbar, die nicht zugleich nach aussen wirke allerlei Ertoetung des Fleisches. 3. It does not, however, refer solely to inward penitence; nay, such inward penitence is naught unless it outwardly produces various mortifications of the flesh. 3. 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내적인 회개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만일 그 같은 내적 회개가 육신의 정욕의 여러 가지 억제를 외부로 나오지 않게 한다면 그 회개는 무가치한 것이다. 4. Manet itaque pena, donec manet odium sui (id est penitentia vera intus), scilicet usque ad introitum regni celorum. 4. Daher waehrt auch die goettliche Strafe so lange, als der Mensch an sich selbst Gericht uebt (das ist die waher innere Busse), naemlich bis zum Eingang ins Himmelreich. 4. The penalty thus continues as long as the hatred of self - that is, true inward penitence - continues, namely, till our entrance into the kingdom of heaven. 4. 그런 고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한에는(참 내적 참회) 형벌이 계속할 것이다. 즉 우리들이 하 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5. Papa non vult nec potest ullas penas remittere preter eas, quas arbitrio vel suo vel canonum imposuit. 5. Der Papst will und kann keine andern Suendenstrafen erlassen als die, welche er nach seinem oder nach der kirchlichen Satzungen Besinden aufgelegt hat. 5. The Pope has neither the will nor the power to remit any penalties except those which he has imposed by his own authority or by that of the canons. 5. 교황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된 형벌 이외의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힘이나 뜻 (意志)을 가지지 못한다. 6. Papa non potest remittere ullam culpam nisi declarando et approbando remissam a deo Aut certe remittendo casus reservatos sibi, quibus contemptis culpa prorsus remaneret. 6. Der Papst kann keine Suendenschuld anders erlassen, als indem er erklaert und bestaetigt, dass sie von Gott erlassen sei; ausserdem kann er erlassen in den ihm vorbehaltenen Faellen; denn wollte man in diesen ihn verachten, so bliebe die Schuld voellig unvergeben. 6. The Pope has no power to remit any guilt except by declaring or warranting it to have been remitted by God or, at most, by remitting cases reserved for himself; in which cases, if his power were despised, guilt would certainly remain. 6.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 기 껏해야 그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을 그가 사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만일 그의 사죄하는 기능이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때 사람 받았다는 죄는 확실히 그대로 잔재(殘在)한 것이다. 7. Nulli prorsus remittit deus culpam, quin simul eum subiiciat humiliatum in omnibus sacerdoti suo vicario. 7. Gott vergibt durchaus keinem die Schult, den er nicht zugleich dahin bringt, sich demuetig Gottes Stellvertreter, dem Priester, zu unterwerfen. 7. God never remits any man\\\'s guilt without at the same time subjecting him, humbled in all things, to the authority of His representative, the priest. 7.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행자인 사제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 밖에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 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시지 않으신다. 8. Canones penitentiales solum viventibus sunt impositi nihilque morituris secundum eosdem debet imponi. 8. Die kirchlichen Bestimmungen betreffs aufzulegender Bussen sind allerin den Lebenden gegeben; nichts darf laut derselben den Sterbenden aufgelegt werden. 8. The penitential canons are imposed only on the living, and according to them no burden ought to be imposed on the dying. 8. 참회에 관한 교회 법은 산(生存)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임종에 처한 사람에게는 어떤 부담이든 지 그 법(諸罰에 對한 敎會의 規定)에 의하여 부과되어져서는 안된다. 9. Inde bene nobis facit spiritussanctus in papa excipiendo in suis decretis semper articulum mortis et necessitatis. 9. Daher tut uns der heilige Geist im Papste darin wohl, dass er in seinen Dekreten stets den Fall des Todes und der aeussersten Not ausnimmt. 9. Hence the Holy Spirit acting in the Pope does well for us, in that, in his decrees, he always makes exception of the article of death and necessity. 9. 그러므로 교황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성령께서는 죽음과 곤궁의 경우를 예외로 취급하는 교황의 법령 에서 우리들에게 자비를 행하신다. 10. Indocte et male faciunt sacerdotes ii, qui morituris penitentias canonicas in purgatorium reservant. 10. Ohne Verstaendnis und uebel handeln daher diejenigen Priester, welche Sterbenden kirchliche Bussen noch fuers Fegefeuer vorbehalten. 10. Those priests act wrongly and unlearnedly who, in the case of the dying, reserve the canonical penances for purgatory. 10. 임종에 처한 자에게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종교상의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11. Zizania illa de mutanda pena Canonica in penam purgatorii videatur certe dormientibus episcopis seminata. 11. Dies Unkraut, dass man kanonische Bussen in Fegefeuerstrafen verwandelt, ist augenscheinlich gesaet worden, da die Bischoefe schliefen. 11. Those tares about changing the canonical penalties into the penalty of purgatory surely seem to have been sown while the bishops were asleep. 11. 종교상의 벌을 연옥의 벌로 변경시키는 \\\'가라지\\\'는 확실히 감독들이 잠자는 동안에 심겨진 것이라고 보인다(마13,25). 12. Olim pene canonice non post, sed ante absolutionem imponebantur tanquam tentamenta vere contritionis. 12. Dorzeiten wurden kanonische Bussen nicht nach, sondorn vor der Absolution aufgelegt, um die Aufrichtigkeit der Reue daran zu pruefen. 12. Formerly the canonical penalties were imposed not after, but before absolution, as tests of true contrition. 12. 종전의 예로서 종교상의 벌은 진실한 회오(悔悟)의 증거로서 사면(赦免)의 뒤(後)가 아니라 전에 부과 되었던 것이다. 13. Morituri per mortem omnia solvunt et legibus canonum mortui iam sunt, habentes iure earum relaxationem. 13. Die Sterbenden werden durch ihren Tod von alle dem frei und sind den Forderungen der kirchlichen Satzungen alsbald abgestorben, indem ihnen von Rechtswegen diese Strafen erlassen sind. 13. The dying pay all penalties by death and already dead to the cannon laws and are by right relieved from them. 13. 임종에 처한 자는 죽음으로써 자유롭게 되며 교회 법령의 여러 요구에 대하여 이미 죽은 것이 되고 그 법령의 형벌에서 정당하게 자유 해방된다. 14. Imperfecta sanitas seu charitas morituri necessario secum fermagnum timorem, tantoque maiorem, quanto minor fuerit ipsa. 14. Ist ein Sterbender von seinen Suenden nur unvollkommen genesen oder ist seine Liebe nur unvollkommen, so empfindet er notwendigerwiese grosse Furcht, und zwar um so groessere, je geringer jene ist. 14. The imperfect soundness or charity of a dying person necessarily brings with it great fear, and the less it is, the greater the fear it brings. 14.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사람의 심령의 불완전한 건강과 사랑은 반드시 큰 공포를 초래할 것인데 그 불완전성이 크면 클수록 더 큰 공포가 따를 것이다. 15. Hic timor et horror satis est se solo (ut alia taceam) facere penam purgatorii, cum sit proximus desperationis horrori. 15. Diese Furcht und dieses Grauen sind an sich selbst hinreichend (um von anderem zu schweigen), um die Pein des Fegefeuers zu bereiten, da sie dem Grauen der Verzweiflung ganz nahe kommen. 15. This fear and horror are sufficient by themselves, to say nothing of other things, to constitute the pains of purgatory, since it is very near to the horror of despair. 15. 이 불안 공포만으로도(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다 치고라도) 연옥의 고통을 구성한다. 그 고통은 절망의 공포에 매우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16. Videntur infernus, purgatorium, celum differre, sicut desperatio prope desperatio, securitas differunt. 16. Wie mich duenkt,unterscheiden sich Hoelle, Fegefeuer, Himmel genau so wie verzweifeln, und des Heiles gewiss sein. 16. Hell, purgatory, and heaven appear to differ as despair, near-despair, and peace of mind differ. 16.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다른 점은 절망의 상태와 절망에 이르는 상태와 구원의 확실성과의 차이와 같다 고 볼 수 있다. 17. Necessarium videtur animabus in purgatorio sicut minui hoarorem ita augeri charitatem. 17. Augenscheinlich buduerfen die Seelen im Fegefeuer Minderung des Grauens und Mehrung der Liebe. 17. With souls in purgatory, seemingly, it must needs be so, that, as horror diminishes, charity increases. 17. 연옥에 가 있는 영들은 공포의 감소와 사랑의 증가를 확실히 체험할 것이다. 18. Nec probatum videtur ullis aut rationibus aut scripturis, quod sim extra statum meriti seu augende charitatis. 18. Auch scheint mir weder durch Vernunft noch durch Schriftgruende erwiesen zu sein, dass sie sich ausserhalb des Standes des Verdiestes und der Zunahme an Liebe befinden. 18. Nor does it seemes to be proved, by any reasoning or any Scriptures, that they are outside of the state of merit or of the increase of charity. 18. 이상의 영들이 공적의 상태나 사랑의 증가 상태 밖(外)에 있다는 것은 이성으로나 성서적 근거로 증명 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19. Nec hoc probatum esse videtur, quod sint de sua beatitudine certe et secure, saltem omnes, licet nos certissimi si nus. 19. Aber ebenso scheint mir auch das unerwiesen zu sein, dass sie oder wenigstens sie alle, ihrer Seligkeit gewiss und versichert seien, ob wir schon an derselben keinen Zweifel haben. 19. Nor does this appear tobe proved, that they are sure and confident of their own blessedness, at least not all of them, though we may be very sure of it. 19. 구원의 축복의 정확성과 확실성에 관하여서 우리들은 아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로되 연옥 에 있는 영들의 대부분을 위하여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인다. 20. Igitur papa per remissionem plenariam omnium penarum non simpliciter omnium intelligit, sed a seipso tantummodo impositarum. 20. Wenn der Papst daher \\\"vollkommenen Erlass aller Strafen\\\" verleiht, so meint er damit nicht schlechthin alle, sondern nur die, die er selber auferlegt hat. 20. Therefore the Pope, when he speaks of the plenary remission of all penalties, does not mean simply of all, but only of those imposed by himself. 20. 그런고로 교황이 \\\"모든 죄의 완전한 사면\\\"을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모든 죄의 용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 며 다만 그 자신에 의해서 부과된 죄의 사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21. Errant itaque indulgentiarum predicatores ii, qui dicunt per pape indulgentias hominem ab omni pena solvi et salvari. 21. Daher irren alle die Ablassprediger, welche verkuendigen, dass durch des Papstes Ublass der Mensch von aller Strafe los und selig werde. 21. Thus those preachers of indulgences are in error who say that by the indulgences of the Pope a man is loosed and saved from all punishment. 21. 그러므로 교화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 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2. Quin nullam remittit animabus in purgatorio, quam in hac vita debuissent secundum Canones solvere. 22. Vielmehr erlaesst er keine einzige Strafe den Seelen im Fegefeuer, die sie in diesem Leben nach den kirchlichen Satzungen haetten buessen muessen. 22. For in fact he remits to souls in purgatory no penalty which, according to the canons, they would have had to pay in this life.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 법에 의하여 현 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3. Si remissio ulla omnium omnino penarum potest alicui dari, certum est eam non nisi perfectissimis, i. e. paucissimis, dari. 23. Wenn ein Erlass absolut aller und jeglicher Strafen einem gegeben werden kann, dann sicherlich nur denen, welche ganz vollkommen sind d. h. den allerwenigsten. 23. If any entire remission of all penalties can be granted to anyone, it is certain that it is granted to none but the most perfect, that is, to very few. 23. 만일 누구에게든지 모든 형벌의 전적 사면이 허락된다면, 그러한 사면은 확실히 가장 완전한 사람 즉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24. Falli ob id necesse est maiorem partem populi per indifferentem illam et magnificam pene solute promissionem. 24. Darum muss der groesste Teil des Volkes betrogen werden durch jenes unterschiedslose und vollkommende Versprechen, dass sie ihrer Strafe ledig geworden seinen. 24. Hence the greater part of the people must needs be deceived by this indiscriminate and high-sounding promise of release from penalties. 24.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제한 되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의하여 드러 내놓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Qualem potestatem habet papa in purgatorium generaliter, talem habet quilibet Episcopus et Curatus in sua diocesi et parochia specialiter. 25. Dieselbe Gewalt, die der Papst uebers Fegefeuer insgemein hat, hat jeder Bischof und Seelsorger fuer seinen Sprengel oder seine Pfarre insonderheit. 25. The same powers which the Pope has over purgatory in general, every bishop has in his own diocese, and, in particular, every curate in his own parish. 25. 교황이 연옥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가진 것과 같은 권위를 모든 감독과 특히 교구 목사는 자기의 감독 구나 교구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26. Optime facit papa, quod non potestate clavis(quam nullam habet) sed per modum suffragii dat animabus remissionem. 26. Der Papst tut sehr wohl daran, dass er nicht in Kraft seiner Schluesselgewalt(die sich nicht so weit erstreckt), sondern nur fuerbittweise den Seelen Nachlass gewaehrt. 26. The Pope acts most rightly in granting remission to souls, not by the power of the keys(which is of no avail in this case), but by way of suffrage. 26. 교황은 열쇠(천국)의 힘으로서가 아니고(사실 그와 같은 힘이란 것이 당치도 않지만), 대도(代禱)의 방 법으로 영혼들에게 사죄를 허락한다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27. Hominem predicant, qui statim ut iactus nummus in cistam tinnierit evolare dicunt animam. 27. Menschenlehre predigen die, welche sagen, sobald der Groschen im Kasten klingt, die Seele aus dem Fegefeuer auffahre. 27. They preach human doctrine who say that the soul flies out of purgatory as soon as the money thrown into the chest rattles. 27.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 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Certum est, nummo in cistam tinniente augeri questum et avariciam posse : suffragium autem ecclesie est in arbitrio dei solius. 28. Das ist gewiss, dass, wenn der Groschen im Kasten klingt, Gewinn und Geiz zunehmen koennen; der Erfolg der Fuerbitte der Kirche aber steht in Gottes Wohlgefallen. 28. It is certain that when the money rattles in the chest, avarice and gain may be increased, but the suffrage of the Church depends on the will of God alone. 28.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利得)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동시에 성직자 의 대도(代禱)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29. Quis scit, si omnes anime in purgatorio velint redimi, sicut de s. Severino et Paschali factum narratur. 29. Wer weiss denn auch, ob alle Seelen im Fegefeuer von uns losgekauft werden wollen, wie es nach der Legende mit St. Severin und Paschalis sich zugetragen hat. 29. Who knows whether all the souls in purgatory desire to be redeemed from it, according to the story told of Saints Severinus and Paschal? 29. 마치 성 세베린(St. Severin)과 파스칼리스(Paschalis)에 관한 전설에 있는 것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그 곳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어떠한지를 그 누가 알 것인가! 30. Nullus securus est de veritate sue contritionis, multominus de consecutione plenarie remissionis. 30. Niemand ist sicher, ob seine Reue wahrhaftig sei, wie viel weniger, ob er vollkommenen Ablass erlangt hat. 30. No man is sure of the reality of his own contrition, much less of the attainment of plenary remission.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못 가지는데 하물며 남의 죄가 완전한 사면을 받았는 지를 어떻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31. Quam rarus est vere penitens, tam rarus est vere indulgentias redimens, i. e. rarissimus. 31. Wie selten die sind, die wahrhaftig reuig sind, so selten sind auch die, welche wahrhaftig Ablass erwerben, d. h. ihrer sind sehr wenige. 31. Rare as is a true penitent, so rare is one who truly buys indulgences, that is to say, most rare. 31.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드문 것 같이 면죄증을 진심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람 은 거의 없는 것이다. 32. Damnabuntur ineternum cum suis magistris, qui per literas veniarum securos sese credunt de sua salute. 32. Wer durch Ablassbriefe meint seiner Seligkeit gewiss zu sein, der wird ewiglich verdammt sein samt seinen Lehrmeistern. 32. Those who believe that through letters of pardon they are made sure of their own salvation will be eternally damned along with their teachers. 32.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 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Cavendi sunt nimis, qui decunt venias illas Pape donum esse illud dei inestimabile, quo reconciliatur homo deo. 33. Vor denen wolle man sich wohl hueten, die da sagen, der Ablass des Papstes sie jene unschaetzbare Gabe Gottes, durch welche der Mensch Gott versoehnt werde. 33. We must especially beware of those who say that these pardons from the Pope are that inestimable gift of God by which man reconciled to God. 33. 교황의 사면을 가르쳐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 들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34. Gratie enim ille veniales tantum respiciunt penas satisfactionis sacramentalis ab homine constitutas. 34. Denn jene Ablassgnaden beziehen sich nur auf die von Menschen aufgesetzten Strafen sakramentlicher Genugtung. 34. For the grace conveyed by these pardons has respect only to the penalties of sacramental satisfaction, which are of human appointment. 34. 왜냐하면 이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전적인 사죄 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35. Non christiana predicant, qui docent, quod redempturis animas vel confessionalia non sit necessaria contritio. 35. Die fuehren unchristliche Predigt, welche lehren, dass denen, welche Seelen aus dem Fegefeuer loskaufen oder Konfessionalien (d.i. die Genehmigung, sich nach eigenem Belieben einen Beichtvater zu waehlen) kaufen wollen, Reue nicht noetig sei. 35. They preach no Christian doctrine who teach that contrition is not necessary for those who buy souls out of purgatory or buy confessional licenses. 35.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한다거나 고백장(즉 참회師-고백을 받는 신부-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허가)을 사는 사람은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비 기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 이다. 36. Quilibet christianus vere compunctus habet remissionem plenariam a pena et culpa etiam sine literis veniarum sibi debitam. 36. Jeglicher Christ hat, wenn er in aufrichtiger Reue steht, vollkommenen Erlass von Strafe und Schuld, der ihm auch ohne Ablassbriefe gebuehrt. 36. Every Christian who feels true compunction over his sins has plenary remission of pain and guilt, even without letters of indulgence. 36. 어떠한 그리스도인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37. Quilibet verus christianus, sive vivus sive mortuus, habet participationem omnium bonorum Christi et Ecclesie etiam sine literis veniarum a deo sibi datam. 37. Jeder wahre Christ, ob lebend oder tot, hat Anteil an allen geistlichen Guetern Christi und der Kirche; Gott hat ihm diesen auch ohne Ablassbriefe gegeben. 37. Every true Christian, whether living or dead, has a share in all the benefits of Christ and of the Church, given him by God, even without letters of indulgence. 37.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면죄증이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38. Remissio tamen et participatio Pape nullo modo est contemnenda, quia (ut dixi) est declaratio remissionis divine. 38. Doch soll man darum den Erlass und den Anteil, den der Papst verleiht, keineswegs verachten, weil es (wie gesagt) die Erklaerung der goettlichen Vergebung ist. 38. The remission, however, imparted by the Pope is by no means to be despised, since it is, as I have said, a declaration of divine remission. 38. 그러나 교황이 주는 면죄와 그의 관여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제6논제 참 조) 그것은 하나님의 사면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39. Difficillimum est etiam doctissimis Thoelogis simul extollere veniarum largitatem et contritionis veritatem coram populo. 39. Es ist ueber die Massen schwer auch fuer die gelehrtesten Theologen, gleichzeitig vor dem Volke die reiche Fuelle des Ablasses und die Pflicht wahraftiger Reue zu ruehmen. 39. It is a most difficult thing, even for the most learned theologians, to exalt before the people the great riches of indulgences and, at the same time, the necessity of true contrition. 39. 면죄증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박식한 신 학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40. Contritionis veritas penas querit et amat, Veniarum autem largitas relaxat et odisse facit, saltem occasione. 40. Wahrhaftige Reue begehrt und liebt die Strafen, dagegen erlaesst die Ablassfuelle Strafen und schafft Widerwillen gegen dieselben, bietet wenigstens Gelegenheit dazu. 40. True contrition seeks and loves punishment, while the ampleness of pardon relaxes it and causes men to hate it or at least gives them occasion for them to do so. 40. 참다운 회개는 형벌을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증에 대하여 관대한 것은 형벌을 등한시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며 혹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41. Caute sunt venie apostolice predicande, ne populus false intelligat eas preferri ceteris bonis operibus charitatis. 41. Vorsichtig soll man den apostolischen Ablass predigen, damit das Volk nicht die falsche Meinung fasse, als wenn derselbe den andern guten Werken christlicher Liebe vorzuziehen sei. 41. Apostolic pardons ought to be purchased with caution, lest the people falsely suppose that they are to be preferred to other good works of charity. 41. 사도 계승의 면죄(교황의 사면을 의미함)는 사람들이 결코 그것을 사람의 다른 선한 일(선행)보다 더 중요한 것 같이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42. Docendi sunt christiani, quod Pape mens non est, redemptionem veniarum ulla ex parte comparandam esse operibus misericordie. 42. Man lehre die Christen, dass des Papstes Meinung nicht sei, das Ablassloesen irgendwie den Werken der Barmherzigkeit gleichzustellen. 42.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it is not the mind of the Pope that the buying of indulgences is to be in any way compared with works of mercy. 42. 면죄증의 속죄를 자선사업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교화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43. Docendi sunt christiani, quod dans pauperi aut mutuans egenti melius facit quam si venias redimeret. 43. Man lehre die Christen, dass, wer dem Armen gibt oder dem Beduerftigen leiht, besser tut, als wenn er Ablass loesen wollte. 43.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he who gives to a poor man or lends to a needy man does better than if he buys indulgences.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증을 하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 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4. Quia per opus charitatis crescit charitas et fit homo melior, sed per venias non fit melior sed tantummodo a pena liberior. 44. Denn durch Leibeswerk waechst die Liebe, und der Mensch wird besser, aber durch Ablass wird er nicht besser, sondern nur freier von Strafen. 44. For by a work of charity, charity increases, and man becomes better, while by means of indulgences he does not become better, but only freer from punishment. 44.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을 베푸는 일로써 성장하고 그 인간은 선을 행하는 사람보다 선하게 되지만, 면 죄증으로써는 인간이 보다 선하게 되지 못하고 다만 형벌로부터 보다 자유롭게 되는 것뿐이다. 45. Docendi sunt christiani, quod, qui videt egenum et neglecto eo dat pro veniis, non indulgentias Pape sed indignationem dei sibi vendicat. 45. Man lehre die Christen, dass, wer einen Beduerftigen sieht und des ungeachtet kein Geld fuer Ablass hingibt, nicht Papstes Ablass, wohl aber Gottes Zorn sich damit erwirbt. 45.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he who sees anyone in need and, passing him by, gives money for indulgences is not purchasing the indulgence of the Pope, but calls down upon himself the wrath of God. 45.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 체 만 체 지나버리고(요3,17 참조)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자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Docendi sunt christiani, quod nisi superfluis abundent necessaria tenentur domui sue retinere et nequaquam propter venias effundere. 46. Man lehre die Christen, dass, wenn sie nicht ueberfluessiges Gut reichlich besitzen, sie verpflichtet sind, das, was zur Notdurft gehoert, fuer ihr Haus zu behalten und mit nichten fuer Ablass zu verschwenden. 46.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unless they have superfluous wealth, they are bound to keep what is necessary for the use of their own households and by no means to lavish it on indulgences. 46. 풍부한 재산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자라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으며(딤 전5,8)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Docendi sunt christiani, quod redemptio veniarum est libera, non precepta. 47. Man leher die Christen, dass das Kaufen von Ablass eine freie, nicht aber eine gebotene Sache ist. 47.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while they are free to buy indulgences, they are not commanded to do so. 47. 면죄증을 사는 것은(사고 안 사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렇게 하라고 강요되어진 것이 아니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8. Docendi sunt christiani, quod Papa sicut magis eget ita magis optat in veniis dandis pro se devotam orationem quam promptam pecuniam. 48. Man lehre die Christen, dass der Papst bei der Gewaehrung von Ablass mehr bedarf und daher auch mehr Verlangen traegt nach ihrem andaechtigen Gebet als nach dem Gelde, das sie herbeibringen. 48.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the Pope, in granting indulgences, has both more need and more desire that devout prayer should be made for him than that money should be freely paid. 48. 교황은 면죄증을 주는 일에 있어서 가져오는 돈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위해 경오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필요로 하고 바란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9. Docendi sunt christiani, quod venie Pape sunt utiles, si non in eas confidant, Sed nocentissime, si timorem dei per eas amittant. 49. Man lehre die Christen, dass des Papstes Ablass nuetzlich ist, wenn man kein Vertrauen auf ihn setzt, aber hoechst schaedlich wird, wenn man um seinetwillen die Furcht Gottes verliert. 49.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the Pope\\\'s indulgences are useful if they do not put their trust in them, but most hurtful if through them they lose the fear of God. 49. 교황의 면죄증은 사람들이 만일 그것에게 신뢰를 두지 않는다면,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사람들 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는 일이 있다면 매우 해로운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Docendi sunt christiani, quod, si Papa nosset exactiones venialium predicatorum, mallet Basilicam s. Petri in cineres ire quam edificari cute, carne et ossibus ovium suarum. 50. Man lehre die Christen, dass, wenn der Papst den Schacher der Ablassprediger wuesste, er lieber den Dom St. Petri wuerde zu Asche verbrennen lassen, als dass derselbe von Haut, Fleisch und Knochen keiner Schafe sollte erbaut werden. 50.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if the Pope knew of the exactions of the preachers of indulgences, he would rather see the Basilica of St. Peter burned to ashes than that it should be built up with the skin, flesh, and bones of his sheep. 50.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안다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써 성 베드로 교회당 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 게 가르쳐야 한다. 51. Docendi sunt christiani, quod Papa sicut debet ita vellet, etiam vendita (si opus sit) Basilica s. Petri, de suis pecuniis dare illis, a quorum plurimis quidam concionatores veniarum pecuniam eliciunt. 51. Man lehre die Christen, dass der Papst, wir es ihm gebuehrt, gern bereit waere, selbst wenn er dazu St. Peters Do mverkaufen muesste, von seinem eigenen Gelde mitzuteilen, deren vielen jetzt etliche Ablassprediger ihr Geld ablocken. 51. Christians should be taught that the Pope, as is his duty, would rather, if necessary, sell the Basilica of St. Peter and give of his own money to those from whom the preachers of indulgences, extract money. 51.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의 교회당을 팔 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 주려고(당연하기는 하나) 한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 쳐야 한다. 52. Vana est fiducia salutis per literas veniarum, etiam si Commissarius, immo Papa ipse suam animam pro illis impigneraret. 52. Das Vertrauen durch Ablassbriefe selig zu werden, ist eitel, wenn auch schon der Ablasskommissar, ja der Papst selbst fuer solche seine Seele zum Pfande setzen wollte. 52. Vain is the hope of salvation through letters of indulgence, even if a commissary--nay,the Pope himself--were to pledge his own soul for them. 52. 면죄증서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비록 판매위탁자가, 아니, 교황 자신이 그 증 서에 대해서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53. Hostes Christi et Pape sunt ii, qui propter venias predicandas verbum dei in aliis ecclesiis penitus silere iubent. 53. Das sind Feinde Christi und des Papstes, die um der Ablasspredigt willen das Wort Gottes in anderen Kirchen gaenzlich verstummen machen. 53. They are enemies of Christ and of the Pope who, in order that indulgences may be preached, condemn the Word of God to utter silence in their churches. 53. 면죄증 설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아주 잠잠하여지도록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54. Iniuria fit verbo dei, dum in eodem sermone equale vel longius tempus impenditur veniis quam illi. 54. Dem Worte Gottes geschieht Unrecht, wenn in derselben Predigt ebensoviel oder gar noch mehr Zeit auf den Ablass als auf jenes verwendet wird. 54. Worng is done to the Word of God when in a sermon as much time is spent on indulgences as on God\\\'s Word, or even more. 54. 설교하는 데 있어서 면죄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시간 또는 보다 더 긴 시간을 쓰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하여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55. Mens Pape necessario est, quod, si venie(quod minimum est) una campana, unis pompis et ceremoniis celebrantur, Euangelium (quod maximum est) centum campanis, centum pompis, centum ceremoniis predicetur. 55. Des Papstes Meinung ist selbsverstaendlich, dass, wenn man den Ablass, als der nur geringen Wert hat, mit einer Glocke, mit einfachem Gepraenge und Feierlichkeit begeht, man das Evangelium, als welches den hoechsten Wert hat, mit hundert Glocken, hundertfachem Gepraenge und Feierlichkeit ruehmen soll. 55. The mind of the Pope cannot but be that if indulgences, which are a very small matter, are celebrated with single bells, single processions, and single ceremonies, the Gospel, which is a very great matter, should be preached with a hundred bells, a hundred processions, and a hundred ceremonies. 55. 만일 매우 적은 가치만을 지닌 면죄증이 하나의 \\\'방울\\\'과 행렬과 의식으로써 축하하게 된다면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복음은 백개의 방울과 백의 행렬과 의식으로써 찬양해야 된다는 것이 교황의 의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56. Thesauri, ecclesie, unde Papa dat indulgentias, neque satis nominati sunt neque cogniti apud populum Christi. 56. Der \\\"Schatz\\\" der Kirche, aus dem der Papst Ablass austeilt, ist dem christlichen Volke nicht genau genug bezeichnet und bekannt gemacht. 56. The treasures of the Church, whence the Pope grants indulgences, are neither sufficiently named or known among the people of Christ. 56. 그것으로써 교황이 면죄를 주는 교회의 장보(藏寶)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충분히 표시되어지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57. Temporales certe non esse patet, quod non tam facile eos profundunt, sed tantummodo colligunt multi concionatorum. 57. Dass es sich hier nicht um zeitliche Schaetze handelt, ist klar; denn man weiss von vielen Predigern, dass sie diese Art Schaetze nicht so leicht austeilen sondern nur zu sammeln lieben. 57. It is clear that they are at least not temporal treasures; for these are not so readily lavished, but only accumulated by many of the preachers. 57. 그것이 현세적인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설교자(면죄증 판매인)들이 이와 같은 보화를 쉽사리 분여(分與)하지 않고 도리어 쌓아 두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58. Nec sunt merita Christi et sanctorum, quia hec semper sine Papa operantur gratiam hominis interioris et crucem, mortem infernumque exterioris. 58. Aber es sind auch nicht Christi und der Heiligen Verdienste; denn diese wirken bestaendig, auch ohne Zutun des Papstes, Gnade fuer den innerlichen Menschen, Kreuz, Tod und Hoelle fuer den aeusserlichen Menschen. 58. Nor are they the merits of Christ and of the saints; for these, idependently of the Pope, are always working grace to the inner man and the cross, death, and hell to the outer man. 58. 또 그 장보(藏寶)는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교황의 고움과 전혀 독립 적으로 항상 속 사람에게는 은총을 주고 겉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59. Thesauros ecclesie s. Laurentius dixit esse pauperes ecclesie, sed locutus est usu vocabuli suo tempore. 59. St Laurentius nannte die Armen in der Gemeinde die Schaetze der Kirche, aber da hat er das Wort genommen, wie er zu seiner Zeit braeuchlich war. 59. St Lawrence said that the treasures of the Church are the poor of the Church; but he spoke according to the use of the word in his time. 59. 성 로렌티어스(St. Laurentius)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시대 그 당시에 사용된 어의에 따라 말한 것이다. 60. Sine temeritate dicimus claves ecclesie (merito Christi donatas) esse thesaurum istum. 60. Mit gutem Grunde sagen wir, dass die Schluessel der Kirche (die uns Christi Verdienst geschenkt hat) jenen Schatz bilden. 60. We are not speaking rashly when we say that the keys of the Church, bestowed through the merits of Christ, are that treasure. 6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바로 그 장보(藏寶)라고 우리가 말해도 합당할 것이다. 61. Clarum est enim, quod ad remissionem penarum et casuum sola sufficit potestas Pape. 61. Denn es ist klar, dass zum Nachlass von Strafen und zur Absolvierung in vorbehaltenen Faellen des Papstes Gewalt an sich ausreichend ist. 61. For it is clear that the power of the Pope alone is sufficient for the remission of penalties and of reserved cases. 61. 왜냐하면 형벌의 면죄와 교황 관리의 보유사건을 위해서는 교황의 권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명백 한 일이기 때문이다. 62. Verus thesaurus ecclesie est sacrosanctum euangelium glorie et gratie dei. 62. Der wahre Schatz der Kirche ist das allerheiligste Evangelium der Herrlichkeit und Gnade Gottes. 62. The true treasure of the Church is the holy Gospel of the glory and grace of God. 62. 교회의 참 장보(藏寶)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Hic autem est merito odiosissimus, quia ex primis facit novissimos. 63. Dieser Schatz steht aber naturgmaess in geringem Ansehen; denn er macht ja, dass Erste Letzte werden. 63. This treasure, however, is deservedly most hateful because it causes the first to be the last. 63. 그렇지만 이 장보(藏寶)가 먼저 된 것을 나중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증오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마19,30 20,16 눅13,30). 64. Thesaurus autem indulgentiarum merito est gratissimus, quia ex novissimis facit primos. 64. Dagegen steht der Schatz der Ablaesse naturgemaess in hoechstem Ansehen; denn er macht ja, dass Letzte Erste werden. 64. But the treasure of indulgences is deservedly the most acceptable because it causes the last to be the first. 64. 그와 반대로 면죄증의 장보(藏寶)가 나중된 것을 먼저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애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5. Igitur thesauri Euangelici rhetia sunt, quibus olim piscabantur viros divitiarum. 65. Darum sind die Schaetze des Evangeliums die Netze, mit denen man vorzeiten die reichen Leute gefischt hat. 65. Hence the treasures of the Gospel are nets wherewith of old they have fished for men of means. 65. 그러므로 옛날에 있어서 복음의 장보(藏寶)는 돈 많은 사람들을 낚던 그물이었다. 66. Thesauri indulgentiarum rhetia sunt, quibus nunc piscantur divitias virorum. 66. Die Schaetze der Ablaesse sind dagegen die Netze, mit denen man jetzt den Reichtum der Leute fischt. 66. The treasures of indulgences are nets wherewith they now fish for the means of men. 66. 면죄증의 장보(藏寶)는 오늘날도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재산을 낚는 그물이다. 67. Indulgentie, quas concionatores vociferantur maximas, gratias, intelliguntur vere tales quoad questum promovendum. 67. Die Ablaesse, welche die Ablassprediger als \\\"groesste Gnaden\\\" ausrufen, sind freilich dafuer zu erachten, insofern sie ihnen viel Geld einbringen. 67. Those indulgences which the preachers loudly proclaim to be the greatest graces are seen to be truly such as regard the promotion of gain. 67. 면죄증 설교자들이 \\\'가장 큰 은총\\\'이라고 소리 높이 부르짖는 면죄증은 이익을 증가시키는 한에서는 사 실인 것처럼 보인다. 68. Sunt tamen re vera minime ad gratiam dei et crucis pietatem comparate. 68. In Wahrheit jedoch sind sie die allergeringsten Gnaden, verglichen mit Gottes Gnade und der Gottseligkeit des Kreuzes. 68. Yet they are in reality in no degree to be compared with the grace of God and the piety of the Cross. 68.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경건에 비하면 그것(면죄증)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69. Tenentur Episcopi et Curati veniarum apostolicarum Commissarios cum omni reverentia admittere. 69. Bischoefe und Seelsorger sind verpflichtet, die Kommissare des apostolischen Ablasses mit aller Ehrerbietug zuzulassen. 69. Bishops and curates ought to receive the commissaries of apostolic pardons with all reverence. 69. 감독들과 교구 교사들은 사도계승의 면죄의 대리자들을 전적인 경의를 가지고 받아들일 의무를 가지 고 있다. 70. Sed magis tenentur omnibus oculis intendere, omnibus auribus advertere, ne pro commissione Pape sua illi somnia predicent. 70. Aber noch viel mehr sind sie verpflichtet, Augen und Ohren offen zu halten unD aufzupassen, dass jene nicht statt des Auftrags des Papstes ihre eigenen Traeume predigen. 70. But they are still more bound to open their eyes and ears lest these men preach their own dreams in place of the Pope\\\'s commission. 70. 그러나 일층 더 큰 의무는 눈을 활짝 뜨고 귀를 바짝 기울여서 교황의 위임한 것 대신에 자기들의 꿈 을 설교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71. Contra veniarum apostovicarum veritatem qui loquitur, sit ille anathema et maledictus. 71. Wer gegen die Wahrheit des apostolischen Ablasses redet, der sei verbannt und verflucht. 71. He who speaks against the truth of apostolic pardons, let him be anathema and accursed. 71. 사도계승의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는 자는 추방과 저주를 받을지어다. 72. Qui vero contra libidinem ac licentiam verborum Concionatoris veniarum curam agit, sit ille benedictus. 72. Wer aber gegen die mutwilligen und frechen Reden der Ablassprediger auf der Wacht steht, der sei gesegnet ! 72. But he, on the other hand, who is seriously concerned about the wantonness and licenses of speech of the preachers of pardons, let him be blessed. 72. 그러나 다른 한편 면죄증 설교자들의 해롭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이 있을 지어다. 73. Sicut Papa iuste fulminat eos, qui in fraudem negocii Veniarum quacunque arte machinantur. 73. Wie der Papst diejenigen billing mit dem Bannstrahl trifft, die zum Nachteil des Ablasshandels allerlei listige Kunst truegerisch handhaben. 73. As the Pope justly thunders against those who use any kind of contrivance to the injury of the traffic in pardons. 73. 어떤 방법으로든지 면죄증 판매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 교황이 책망할 것은 당연하다고 하 지만! 74. Multomagis fulminare intendit eos, qui per veniarum pretextum in fraudem sancte charitatis et veritatis machinantur. 74. So will er die noch viel mehr mit dem Banne treffen, die unter dem Deckmantel des Ablasses zum Nachteil der heiligen Liebe und Wahrhaftigkeit ihre Kunst brauchen. 74. Thus, indeed, much more, it is his intention to thunder against those who, under the pretext of granting induigences use contrivances to the injury of holy charity and of truth. 74. 면죄증을 구실 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방해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교황은 한층 더 심한 분노로 임할 것이다. 75. Opinari venias papales tantas esse, ut solvere possint hominem, etiam si quis per impossibie dei genitricem violasset, Est insanire. 75. Des Papstes Ablass so gross achten, dass er auch einen Menschen absolvieren koenne, selbst wenn er--was doch unmoeglich ist--die Mutter Gottes geschaendet haette, das heisst unsinnig sein. 75. To think that papal indulgences have such power that they could absolve a man even if--to mention an impossibility--he had violated the Mother of God, is madness. 75. 교황의 면죄증에도 굉장한 능력이 있어 -불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한 인간까 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 빠진 생각이다. 76. Dicimus contra, quod venie papales nec mimimum venialium peccatorum tollere possint quo ad culpam. 76. Dagegen behaupten wir, dass paepstlicher Ablass auch nicht die kleinste laessliche Suende aufheben kann, soweit es die Schuld derselben belangt. 76. We affirm, on the contrary, that papal indulgences cannot take away even the least of venial sins as regards its guilt. 76. 그와 반대로 교황의 면죄증이 가장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책에 관하여서는 없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주장한다. 77. Quod dicitur, nec si s. Petrus modo Papa esset maiores gratias donare posset, est blasphemia in sanctum Petrum et Papam. 77. Dass man sagt, auch St. Petrus koenne, wenn er jetzt Papst waere, keine groesseren Gnaden verleihen, das ist Laesterung gegen St. Petrus und gegen den Papst. 77. The saying that, even if St. Peter were now Pope, he could grant no greater graces, is blasphemy against St. Peter and the Pope. 77. 만일 성 베드로가 교황이었다 할지라도 면죄 이상의 큰 은총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나 교황에 대한 모독이다. 78. Dicimus contra, quod etiam iste et quilibet papa maiores habet, scilicet Euangelium, virtutes, gratias curationum &c. ut 1. Co. xii. 78. Wir behaupten dagegen, dass auch der jetzige Papst gleich jedem andern Papste noch ueber weit groessere Gnaden als den Ablass verfuegt, naemlich ueber das Evangelium, ueber die charismatischen Kraefte, die Gabe gesund zu machen usw, wie 1. Kor. 12 lehret. 78. We affirm, on the contrary, that both he and any other Pope has greater graces to grant, namely, the Gospel, powers, gifts fo healing, etc. 1 Cor.12:6,9. 78. 그와 반대로 현 교황이나 또는 다른 어떤 교황이라도 면죄보다 큰 은총 죽 고린도전서 12장에 가르치 는 복음과 여러 가지 능력 또는 병 고치는 은사 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은 주장한다. 79. Dicere, Crucem armis papalibus insigniter erectam cruci Christi equivalere blasphemia est. 79. Zu sagen, dass das Ablasskreuz, weiches mit des Papstes Wappen geschmueckt und in den Kirchen aufgerichtet wird, gleichen Wert wie Christi Kreuz habe, ist Gotteslaesterung. 79. To say that the cross set up among the insignia of the papal arms is of equal power with the Cross of Christ is blasphemy. 79. 교황은 팔로 장식된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80. Rationem reddent Episcopi, Curati et Theologi, Qui tales sermones in populum licere sinunt. 80. Die Bischoefe, Seelsorger und Theologen, die da zulassen, dass man solche Reden vor den Gemeinden fuehrt, werden dafuer einmal Rechenschaft geben muessen. 80. Those bishops, curates, and theologians who allow such discourses to have currency among the people will have to render an account for this. 80. 이와 같은 가르침이 사람들 가운데서 선포되는 것을 묵인하는 감독과 교구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81. Facit hec licentiosa veniarum predicatio, ut nec reverentiam Pape facile sit etiam doctis viris redimere a calummis aut certe argutis questionibus laicorum. 81. Solche freche Ablasspredigt macht, dass es auch gelehrten Maennern schwer faellt, die dem Papste schuldige Ehrfurcht zu verteidigen gegen die boese Nachrede oder gegen die unzweifelhaft scharfen Einwendungen der Laien. 81. This license in the preaching of pardons makes it no esay thing, even for learned men, to protect the reverence due to the Pope the calumnies or, at all events, the keen questioning of the laity. 81. 이와 같은 뻔뻔스런 면죄 설교로 비방과 또는 일반 세인의 의심 없는 날카로운 반대로부터 교황에 대 한 존경을 수호하기란 제아무리 박식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82. Scilicet. Cur Papa non evacuat purgatorium propter sanctissimam charitatem et summam animarum necessitatem ut causam omnium iustissimam, Si infinitas animas redimit propter pecuniam funestissimam ad structuram Basilice ut causam livissimam? 82. Zum Beispiel: Warum befreit denn der Papst nicht aus dem Fegefeuer rein aus dem Drange heiliger Liebe und bewogen von der hoechsten Not der Seelen--das waere doch billig Ursache genug fuer ihn!--, wenn er doch unzaehlige Seelen erloest um elenden Geldes willen zum Bau der Peterskirche gegeben, also um einer so leichtwiegenden Ursache willen ? 82. For instance : Why does not the Pope empty purgatory for the sake of most holy charity and of the supreme necessity of souls--this being the most just of all reasons--if he redeems an infinite number of souls for the sake of that most perishable thing, money, to be spent on building a basilica--this being a very slight reason ? 82. 예로서 만일 교황이 베드로 교회당에 소비될 썩어질 금전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이것도 구실에 불과하지만) 어찌하여 가장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즉 거룩한 사랑과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하여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83. Item. Cur permanent exequie et anniversaria defunctorum et non reddit aut recipi permittit beneficia pro illis instituta, cum iam sit iniuria pro redemptisorare ? 83. Desgleichen : Warum haelt man denn noch Exequien und Jahrestage der Verstorbenen, und warum gibt der Papst nicht alles gestiftete Geld zurueck oder laesst es zuruecknehmen, das fuer jene an Kirchen uebergeben ist, da es doch Unrecht ist, fuer schon aus dem Fegefeuer Erloeste noch weit er Gebete zu sprechen ? 83. Again : Why do funeral masses and anniversary masses for the deceased continue, and why does not the Pope return, or permit the withdrawal of, funds bequeathed for this purpose, since it is wrong to pray for those who are already redeemed ? 83. 또한 이미 구속받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부당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연기제 (年忌祭)를 계속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교황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바친 기부금을 돌려주지 않으며 혹은 그것(기부금)의 취소를 허락하지 않는가? 84. Item. Que illa nova pietas Dei et Pape, quod impio et inimico propter pecuniam concedunt animam piam et amicam dei redimere, Et tamen propter necessitatem ipsius met pie et dilecte anime non redimunt eam gratuita charitate ? 84. Desgleichen : Was ist das fuer eine neue Froemmigkeit Gottes und des Papstes, dass sie dem Gottlosen und Feinde um Geld gestatten eine fromme und von Gott geliebte Seele zu erloesen und doch dieselbe nicht um der grossen Not derselben frommen und geliebten Seele willen aus Liebe ohne Entgelt erloesen ? 84. Again : What new kind of holiness of God and the Pope is it to permit an impious man and an enemy of God, for money\\\'s sake, to redeem a pious soul, which is loved by God, and not rather to redeem this pious. soul, which is loved by God, out of free charity, for the sake of its own need ? 84. 또한 돈 때문에 불 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을 받는 경건한 영혼을 구하도록 허락하면서, 그 경건한 영혼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구해내지 않는다는 것 은 하나님과 교황의 어떤 새로운 신성함인가? 85. Item. Cur Canones penitentiales re ipsa et non usu iam diu in semet abrogati et mortui adhuctamen pecuniis redimuntur per concessionem indulgentiarum tanquam vivacissimi ? 85. Desgleichen : Warum werden die alten Bussassungen, die doch tatsaechlich und durch Nichtgebrauch schon laengst abgeschafft und tot sind, dennoch wieder mit Geldzahlungen abgeloest aus Gunst des Ablasses, als wenn sie noch vollstaendig in Kraft waeren ? 85. Again : Why is it that the penitential canons, long since abrogated and dead in themselves, in very fact and because of nonuse, are still redeemed with money, through the granting of indulgences, as if they were still valid. 85. 또한 참회에 관한 교회의 법규는 사실상 오랫동안 사용치 않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사문화되었는데 왜 아직 돈으로 인한 면죄증 부여를 통하여 구속해 내는 것 같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86. Item, Cur Papa, cuius opes hodie sunt opulentissimis Crassis crassiores, non de suis pecuniis magis quam pauperum fidelium struit unam tantummodo Basilican sancti Petri ? 86. Desgleichen : Warum erbaut der Papst, dessen Vermoegen heutigen Tages fuerstlicher ist als das der reichsten Geldfuersten, nicht lieber von esinen eigenen Geldern, als vondenen armer Glaeubigen, wenigstens diese eine St. Peterskirche ? 86. Again : Why does not the Pope, whose riches are at this day more ample than those of the wealthiest of the wealthy, build the one Basilica of St. Peter with his own money rather than with that of poor believers ? 86.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베드로 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87. Item. Quid remittit aut participat Papa iis, qui per contritionem perfectam ius habent plenarie rimissionis et participationis ? 87. Desgleichen : Was gibt der Papst denen Ablass und Anteil an geistlichen Guetern, die durch ihre vollkommene Reue ein Anrecht haben auf vollkommenen Erlass und Anteil ? 87. Again : Why does the Pope grant indulgences to those who, through perfect contrition, have a right to plenary remissions and indulgences ? 87. 또한 완전한 참회로 충분한 사면과 속죄에 대한 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사하려 하고 무슨 영 적 은혜에 참여를 주려는가? 88. Item. Quid adderetur ecclesie boni maioris, Si Papa, sicut semel facit, ita centies in die cuilibet fidelium has remissiones et participationes tribueret ? 88. Desgleichen: Was koennte der Kirche groesseres Gut widerfahren, als wenn der Papst, wie er\\\'s nun einmal tut, so taeglich hundertmal jedem Glaeubigen solchen Erlass und Anteil zuwenden wollte ? 88. Again: How much greater would be the benefit accruing to the Church if the Pope, instead of once, as he does now, would bestow these remissions and indulgences a hundred times a day on any one of the faithful ? 88. 또한 교황이 각 신자에게 사면과 은총의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번 주는 것을 만일 하루에 백번 준다고 한다면 교회는 얼마나 더 큰 축복을 얻게 되겠는가? (면죄증에는 그것으로써 한 번만 사죄된다는 것 이 표시되어 있다) 89. Ex quo Papa salutem querit animarum per venias magis quam pecunias, Cur suspendit literas et venias iam olim concessas, cum sint eque efficaces ? 89. Da es doch dem Papste beim Ablass mehr um der Seelen Heil als ums Geld zu tun ist, warum hat er denn jetzt die frueher bewilligten Briefe und Ablaesse ausser Kraft gesetzt, da diese doch ebenso wirksam sind ? 89. Since it is the salvation of souls, rather than money, that the Pope seeks by granting indulgences, why does he suspend the letters and indulgences granted long ago, since they are equally efficacious ? 89. 만일 교황이 면죄증으로써 돈보다도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였다고 본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오래 전부 터 주어 오던 증거나 면죄증을 정지하는가? 똑 같은 효력을 가졌음에 틀림없지 않는가? 90. Hec scrupulosissima laicorum argumenta sola potestate compescere nec reddita ratione diluere, Est ecclesiam et Papam hostibus ridendos exponere et infelices christianos facere. 90. Derartige bedenkliche Gegengruende der Laien nur mit Gewalt daempfen und nicht vielmehr durch Angabe von Gruenden heben zu wollen, heisst die Kirche und den Papst dem Gespoett der Feinde preisgeben und die Christen ungluecklich machen. 90. Repressing these scruples and arguments of the laity by force along and not solving them by giving reasons for so do ingis to expose the Church and the Pope to the ridicule of their enemies and to make Christian men unhappy. 90. 일반 세인이 열거한 반론에 대하여 떳떳한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다만 권력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이요 또 그리스도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91. Si ergo venie secundum spiritum et mentem Pape perdicarentur, facile illa omnia solverentur, immo non essent. 91. Wenn also Ablass nach dem Geist und Sinn des Papstes gepredigt wuerde, wuerden leicht alle jene Bedenken gehoben, ja sie wuerden gar nicht vorhanden sein. 91. If, then, indulgences were preached according to the spirit and mind of the Pope, all these questions would be resolved with ease; nay, they would not exist. 91. 그러므로 만일 면죄증이 교황의 정신과 의도에 따라 선전된다면, 이 모든 문제(Bedenken)는 쉽사리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92. Valeant itaque omnes illi prophete qui dicunt populo Chisti \\\'Pax pax\\\', et non est pax. 92. Hinweg also mit alle den Propheten, die dem Volke Christi sagen : Friede, Friede, und ist kein Friede (Hesek. 13: 10, 16). 92. Away, then, with all those prophets who say to the people of Christ, \\\"Peace, peace,\\\" though there is no peace. 92.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 (겔13,10 16 렘6,14 8,11 살전5,3) 93. Bene agant omnes illi prophete, qui dicunt populo Christi \\\'Crux crux\\\', et non est crux. 93. Alle den Propheten aber muesse es wohlergehen, die Christi Volk sagen : Kreuz, Kreuz und ist kein Kreuz. 93. Blessed be all those prophets who say to the people of Christ, \\\"The cross, the cross,\\\" and there is no cross. 93.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사실) 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94. Exhortandi sunt Christiani, ut caput suum Christum per penas, mortes infernosque sequi studeant. 94. Man ermahne die Christen, dass sie ihrem Haupt Christus durch Strafen, Todund Hoelle nachzufolgen sich befleissigen. 94. Christians should be exhorted to strive to follow Christ, their Head, through pain, death, and hell; 94. 그리스도인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 야 한다. 95. Ac sic magis per multas tribulationes intrare celum quam per securitatem pacis confidant. 95. Und also mehr ihr Vertrauen darauf setzen, durch viele Truebsal ins Himmelreich einzugehen, als durch die Vertroestung : \\\"Es hat keine Gefahr.\\\" 95. And thus to enter heaven through many tribulations rather than in the security of peace. 95.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14,22).
2009년 아시아 주일 예배서식/ Hope S. Antone/2009-05-24
2009년 아시아 주일 예배서식 NCCK 제공 올해의 국가 : 스리랑카 주제: 눈물 방울 일시: 2009년 5월 24일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목 차 2009 아시아주일에의 초대 2009 아시아주일 주제 해설 스리랑카 기독교협의회 소개 아시아주일 연합예배 설교와 성서연구를 위한 자료 노래와 찬양 어린이를 위한 페이지 알림,,,,,,,,,0 표지그림 해설: 스리랑카는 인도양에 위치한 아시아의 눈물 한 방울과도 같다. 실로 스리랑카는 엄청난 고통을 가져온 정치적 폭행들로 점철된 나라이다. 그러나 고통은, 마치 갈보리의 십자가가 마지막 메시지가 아니듯이, 마지막 메시지가 아니다. 2009년 아시아주일 예배에의 초대 1974년부터 성령강림절 직전 주일에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 에큐메니칼 기관들이 아시아주일을 지켜왔습니다. 이 날은 현재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th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의 전신인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 the East Asian Christian Conference) 창립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올 해 아시아 주일은 2009년 5월 24일입니다. 그러나 이 날짜가 여러분의 교회력 사정 때문에 적절치 못하다면, 다른 적절한 날을 선택하여 아시아 주일을 지키십시오. 이 예배 자료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와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가 공동 작업한 것입니다. 여기 제시된 예배안 혹 그 일부를, 그리고 설교와 성서연구안, 기도문 등을 여러분의 상황에 맞추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예배안을 자국어나 지역 말로 번역하여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올 해 아시아 주일의 주제는 “눈물 방울(Tear Drop)”입니다. 이는 올 해 초점이 되고 있는 스리랑카를 상징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이 나라의 기독교 형제 자매들은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전쟁 상태”에서 자신들이 신앙을 몸으로 살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스리랑카 사람들을 기억합시다. 또한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애쓰는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와 그 회원 교회들의 에큐메니칼 여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CCA는 회원교회와 지역 교회협의회들이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가 사랑하는 자기 나라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애쓰며 진행하고 있는 평화프로그램을 위해 특별 헌금을 해 주실 것을 권합니다. 여러분의 귀한 재정적 지원은 아시아기독교협의회를 통해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로 보낼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prawate@cca.org.hk)에게로 연락 주십시오. 서로가 연합하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 상대방을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상대방을 찾아 가 만나야 합니다. (머셔 추기경의 어록: A Testament of Cardinal Mercier) 스리랑카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싱할리인들과 타밀인 모두가 공포에 쌓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부군과 타밀 타이거(the Tamil Tigers:LTTE) 사이의 충돌이 북동쪽의 수천의 사람들을 내쫒았습니다. 유괴와 실종사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몸값 때문에 유괴를 당하는 반면, 반대자의 소리를 침묵시키려는 목적으로 유괴를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인 교회는 평화와 화해의 도구로 부름을 받아왔으며, 고통당하고 투쟁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교회가 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번 2009년 아시아 주일이 우리들에게 고통당하는 나라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힘과 용기와 헌신의 기회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 프라왓 키드안 총무 2009년 아시아 주일 주제 해설 인도양에 위치한 스리랑카는 인도 바로 아래에 있는 하나의 물방울과 같습니다. 예전에 이곳은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인도양의 진주였습니다. 문화적으로 아주 풍부한 다양성을 지녔으며 모든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1505년부터 1948년까지 스리랑카는 포루투칼, 화란, 영국 세 나라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습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주민들이 믿는 종교입니다. 이 나라의 기독교 인구는 7% 정도입니다. 이 나라에는 싱할리, 타밀, 무슬림과 버거족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관용의 정신인 아힘사(ahimsa: 비폭력)로 이 나라에 널리 퍼져있던 공존의식은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로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고, 최근 주민들 사이에 불신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신은 역사적으로 쌓인 불만과 또한 편견들에서 오는 것입니다. 식민지화로부터 이어받은 바와 다른 신앙, 종교, 사상을 지닌 사람들을 복음화하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무감각한 선교방식들이 스리랑카의 어떤 지역에서는 기독교인을 향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스리랑카는 폭력으로 많은 인명을 잃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종족간 폭력은 거의 3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70,000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2004년 12월 26일 덮친 쯔나미 지진해일은 또 다른 40,000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현재도 진행 중인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싱할리 출신과 타밀 출신이 둘 다 함께 하는 유일한 종교 공동체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종족 갈등에 관련돼 있는 양 쪽 모두에게 전쟁을 끝내고 상호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때로, 이것이 스리랑카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타밀지지자이며 매국노라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보통 주민들은 전쟁에 진저리를 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전쟁 미망인들, 고아들, 절름발이들, 국내 추방자들은 스리랑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스리랑카 곳곳으로부터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이처럼, 인도양의 아주 작은 이 섬은 더 이상 인도양의 진주가 아니라, 인도양의 눈물 방울과 같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이 예배안을 준비했습니다. 눈물은 고통과 번민을 묘사하지만, 동시에 그 상황을 변화시킬 희망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예배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의존하여 하느님과 함께 더 이상 눈물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일을 위한 작은 영감을 받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예배로 우리가 서로 간에 더 가까워지고, 또한 아시아라는 연대로 묶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우리 모두가 이 예배를 통하여 축복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자야시리 티. 페이리스(Jayasiri T. Peiris) 스리랑카 기독교협의회 총무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National Christian Council of Sri Lanka) 소개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는 1945년에 창립되었다(1912년 실론 협의회; 1920년 실론 선교협의회; 그리고 1923년에 인도 미얀마 실론 기독교협의회가 그 전신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우리 구주로 확신하고 고백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부름받고 함께 모였다. 에큐메니칼 연대와 증언을 통하여 여기 이 땅 위에 하느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함께 일하고자 한다. 회원 교단: 실론 교회 - 콜롬보 교구 실론 교회 - 쿠루네갈라 교루 남인도 교회 - 야프나 교구 기독교 개혁교회(전 화란개혁교회) 감리교회 랑카 장로교회 구세군 스리랑카 침례교 쌍가마야 에큐메니칼 기관들: 실론 성서공회(Ceylon Bible Society) 기독교서회(Christian Literature Society) 기독학생연맹(Student Christian Association) YMCA YWCA 아시아 주일 연합예배 주제: “눈물 방울” 경 배 인도자: 성부 성자 성령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다같이:성부 성자 성령이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아멘. (모두 무릎을 꿇고 영광송을 낭송합니다.) 창조주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해방자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신성하신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삼위일체이신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사랑과 성심을 다하여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하느님, 당신께 찬양을 드립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평화 가운데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이 우주를 만드신 이, 하느님이시여 우리에게 자유의 기쁨을 맛보게 하신 성자 예수여 교회를 보호 감찰하시는 성령이시여 우리 하느님 우리 가운데 임하소서 찬송 : “창조주 하느님,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CCA가 발행한 찬송가 Sound the Bamboo 9쪽을 참고하시거나, 관련 찬송을 선택하여 부르십시요) 불 밝히기 (다음 낭송이 천천히 이어지는 동안 목회자는 불을 밝히십시오.) 인도자: 세상은 흑암과 혼돈으로 가득합니다. 아시아는 폭력과 분노로 가득합니다. 우리 나라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한 방울의 눈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시고 희망이 되셨습니다. (축하의 표시로 북과 같은 전통 악기를 연주하십시오) 여는 찬송 “구세주 예수여, 당신께 날아갑니다”(Sound the Bamboo, 59쪽 참조하거나 여러분의 찬송가에서 선택할 수 있다) 고백의 기도 (침묵 가운데 우리의 죄와, 우리 나라의 죄, 세상의 죄를 고백한다.) 인도자: 우리로 끊임없이 하느님 당신께로 향하게 하시며, 우리 삶 가운데서 당신과 경쟁하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응 답: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 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회중 1: 하느님, 분노로 우리를 벌하지 마옵소서 우리의 죄는 우리가 감당하기에 벅차나이다. 응 답: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회중 2: 우리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며, 부패와 폭력에 직면하여 침묵했습니다. 우리 안의 빛은 어둠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응 답: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회중 3: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예루살렘을 위한 눈물 대신에 세상적 욕망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응 답: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회중 4:개인적으로, 또 한 나라로서, 한 대륙으로서 인간성을 짓밟고 저지른 죄를 고백하오니 하느님, 우리를 포기하지 마옵시고, 우리를 떠나지 마옵소서. 오셔서 우리를 도우소서. 응 답: 내 눈은 눈물로 가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며 내 베게는 눈물로 젖었나이다. 다같이: 신실하신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목회자: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하시고자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총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의 죄가 사해졌다.’ 다같이:아멘. 하느님, 감사드리나이다. 찬 양 인도자:우리 죄를 사함받았으니 일어나 하느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느님께서 하신 그 위대한 일들로 주께 영광을 드립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시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를 찬양하라, 주를 찬양하라 땅이여 그의 목소리를 들을찌어다. 주를 찬양하라, 주를 찬양하라, 사람들이여 함께 즐거워하라.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라. 그가 행하신 그 위대하신 일들로 주께 영광 돌리세. 인도자:전능하신 하느님, 당신 외에 다른 신이 없으며, 당신은 백성들을 평화 가운데 살도록 부르시어 당신의 평화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눈물 한 방울로 아시아의 문제 지역들, 특별히 이 땅을 굽어 보시옵소서. 아시아기독교협의회에 속한 모든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알게 하시어, 그들이 교활한 박해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의와,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며 당신을 섬기도록 힘주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평화로 안녕과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어린이들을 위한 시간 (모두 앉는다. 어린이들에게 피흘리는 아시아와 하느님의 관심과 사랑, 또는 부활의 희망을 표현하는 아이들의 생각을 단막극이나 작품으로 만들어 가져오게 합니다.) 낭 독 구약성서의 한 구절을 읽거나, 아시아 작가가 쓴 글, 또는 종교적 문학작품에서 발췌한다. 낭독자: (예. 예레미아 8:22-9:1, 23-24을 봉독하고) 이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는 시인 타고르의 ‘내 마음 속 두려움 없는 곳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을 낭송한다. 낭독자: 아시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기탄잘리(Gitanjalee)에서 발췌한 시 한편을 낭송합니다. 마음 속에는 아무런 두려움 없고, 머리를 높이 들어 올릴 수 있는 곳; 모든 인식이 자유로운 곳; 세계가 좁은 벽들로 조각이 나지 않은 곳; 말이 진리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곳;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이 완전을 향하여 팔을 내 뻗는 곳; 맑은 이성의 흐름이 무의미한 관습의 거친 사막에서 그 길을 잃지 않는 곳; 내 마음이 당신 때문에 폭넓은 생각과 행동으로 나아가며, 그래서 자유의 하늘로 나아가는 곳, 나의 아버지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깨어나게 하옵소서. 낭독자: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하느님을 찬양하라. 낭독자2: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히브리서 5:5-10까지의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다같이: 하느님, 감사를 드립니다. 찬송: (알맞은 것으로 선택하십시오)- 낭독자 3은 성서를 들고 나오는데, 이때 등불과 꽃과 춤추는 어린이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온다.) 다같이 찬송: (적절한 영광송을 선택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낭독자3: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도다(시편 126:5) 누가복음 19:41-48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다같이 찬송: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낭독자3: 누가복음 19:41-48 (봉독한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복된 말씀이십니다. 다같이 찬송: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설 교 신앙고백: 니케아 신조 (모두 일어선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드신 창조자이십니다. 그리고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신 자이시며 독생자이십니다.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신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오신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만들어 진 자가 아니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를 통해서 모든 만물이 존재케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또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셔서 성령님과 성모 마리아를 통해 성육신하셨고 완전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한 후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세 번째 날 그는 부활하셨으며 성서의 말씀대로 하늘로 승천하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고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 생명의 주인 되시는 우리 구주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셨으며 성부와 성자와 함께 우리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바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으며 우리는 죄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의식을 받아들이며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믿으며 다가오는 새 세상을 믿습니다. 아멘 기 원 중보의 기도: 이제 선교와 사회적 참여에 대한 생각으로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신도들을 모으는 일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피조물들이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여, 당신의 교회들로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의 평안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지도자들로 정의롭고 사랑으로 가득 찬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우리로 지혜롭고 올바른 말들을 하게 하옵소서.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들(각자 자신의 관심문제를 말하게 한다) 앞에서 교회를 대변하여 말하게 하옵소서. 우리로 깊이 숙고할 시간을 갖게 하시고,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게 하시고, 오로지 당신에게서 통찰력을 구하게 하옵소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다같이:우리 기도를 들으소서. 주여, 여기 이 교회에 모인 우리들에게, 그리고 아시아 전 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와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그 말씀대로 살아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학교와 선생님들의 안녕과, 우리 지역과 지역 의회의 올바른 번창과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여기서는 특별히 우리가 속한 지역 공동체에 관한 문제의식을 갖고 기도한다) 주여, 자비 베푸소서. 다같이: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중보의 기도: 주여, 우리의 신앙을 우리 내적 삶이나, 우리 가정, 우리 교회에만 연관시키는 것은 매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당신의 비전은 훨씬 더 크십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가 절망에 빠져있는데 안락한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생각과 마음을 열어 정의로 어두움에 직면하고, 사랑으로 상처받은 자들을 감싸 안게 하옵소서. 우리가 기도해야 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 밤에는 집 밖을 나갈 엄두도 못내는 소수그룹에 속한 가족,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 거짓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무자비한 공격을 당하는 인권운동가이자 잡지기자,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 어릴 적 성폭행을 당하여 이제 남자와의 관계를 할 수 없게 된 젊은 여인, 그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 지난 크리스마스 때 단지 두 개의 카드만을 받고 아직까지 벽난로 위에 놓아 둔 외로운 노인이 있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 자신의 확신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당한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다같이: 우리 기도를 들으소서. 중보의 기도: 오 주여,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소서. 아시아를 위한 사랑의 눈물 한 방울, 사랑과 연민의 은총을 내리소서. 축복이 이슬처럼 내려 당신의 영광과 은총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봉헌 찬송 봉헌 기도 인도자:모든 것이 우리 주 당신께로부터 왔으며, 그 가운데서 우리가 당신께 드립니다(역대기상 29:14). 우리를 당신께 드리오니, 아시아에서의 주의 사역을 위해 우리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를 도구로 삼아 주옵소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의 눈물 한 방울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이 땅에서 우리로 정의를 위해 일하게 하시며, 자비를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 하느님, 당신과 함께 겸손히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 사 (큰 나라 지도나 혹은 아시아지도 앞에 등불을 밝힌다) 회중 1: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흑암으로 덮개를 만드시고, 그 컴컴한 창고에서 보석을 끄집어내시고 눈물 한 방울로 우리에게 빛나는 보석을 보이셨습니다. 다같이: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과 땅이 당신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회중 2: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께서는 아시아에 아름다운 땅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음식과 마실 물을 주시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을 주셨습니다. 흑암이 사람들을 덮칠지라도 당신은 눈물 한 방울로 흑암 속에서 빛을 비추십니다. 다같이: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과 땅이 당신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회중 3; 우리의 힘이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께서는 우리 선조들에게 영감을 주시어 아시아기독교협의회를 만들게 하시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봉사하게 하셨으며, 당신의 교회로 하여금 하나의 등불이 되어, 더 이상 등불과 태양이 필요 없게 되는 그 날이 오기까지 당신의 백성들로 세상을 향한 빛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날엔 주의 영광이 하느님의 백성위에 비추일 것이며, 하느님의 등불이 단지 눈물 한 방울로 그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실 것입니다. 다같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과 땅에 당신의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인도자: 우리의 모든 간구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마치겠습니다. 다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침묵 후에 다음의 구절을 노래하거나 읊는다. 혹은 관련 찬송을 선택할 수 있다) 성부여, 당신이 나의 안식처이십니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습니다. 성자여, 당신이 나의 안식처이십니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습니다. 성령이시여, 당신이 나의 안식처이십니다.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습니다. 삼위일체이신 당신이 나의 안식처이십니다. 당신은 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의 거룩한 교회가 제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제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고귀한 말씀이 제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이 공동체가 제 안식처입니다. 평화의 인사(모두 일어선다.) 인도자: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평화가 있기를 간구합니다. 항상 서로 간에 그리고 모두에게 선하게 행하십시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에게 인사하십시오.(데살로니가 전서5:12, 13, 16-17, 26) 다같이: 민족들 간에 평화를 사람들 간에 평화를 교회들 간에 평화를 이웃들 간에 평화를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구하나이다. (모두가 서로를 향해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성가대 찬양:땅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강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대양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진정한 평화가 여러분에게 임하며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 속에 자라기를. 축 도 인도자: (가능하다면 나무 십자가 하나를 들고- 민수기 21:9) 모든 악의 세력보다 강하고, 하늘의 어느 천사보다도 영광스러우신 분, 하느님께서 낳은 자의 십자가가 여러분들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하기를 간구합니다! 저녁때나 밤이나 낮이나 항상 그리고 모든 곳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막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죄로 가득 찬 사람들의 분노나 그 영향으로부터,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알려지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적들로부터, 영혼과 육체와 정신을 미혹시키는 인간적 약점으로부터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마지막 찬송 (여러분이 사용하는 찬송 중에서 고른다) 설교와 성서연구를 위한 자료 이번에 선택한 주제는 인도양에 위치한 스리랑카를 아시아의 눈물로 상징화한 것이다. 스리랑카는 이제 고통 밖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정치적 난제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끝이 아니고 경험의 마지막도 아니다. 십자가의 신학이 이를 확고히 해 주며, 십자가는 고통과 승리 이 둘 모두를 경험하게 하는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십자가의 신학은 십자가가 형상적으로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되어 있듯이, 두 끝을 지닌다. 그 두 개의 끝은 고통과 기쁨이며, 잃는 것이면서 얻는 것을 상징한다. 십자가 위에서 만나는 이 두 끝은 실패와 승리, 과거와 미래, 하느님과 인간, 슬픔과 기쁨이다. ‘눈물 방울’은 십자가로 묘사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신학을 지닌다. 시편 42:3 -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 이것이 나의 양식입니다. 삶은 항상 두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삶이란 바퀴는 인간이 체험하는 고통과 기쁨, 이 둘로 돌아간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눈물을 삶의 부정적 요소로 보지 않고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매일의 양식처럼, 눈물은 삶에서 힘을 키워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시편 39:12 -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 울부짖는 소리에 귀 기울이소서: 나의 눈물에서 당신의 평화를 거두지 마옵소서. 평화와 갈등은 인간의 삶에서 또 다른 두 끝이라 할 수 있다. 삶 속에서 평화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시편기자는 자신의 삶에서 눈물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하느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 당신의 평화를 거두시지 않으신다. 눈물은 하느님의 권세의 장애물까지도 무너뜨릴 수 있다. 신학적으로 눈물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에 주신 자연스런 무기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감정적 체험을 할 때 슬픔과 동시에 기쁨을 느끼게 되는 이유이다. 요한복음 11:35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짧은 절이다. 바로 이 구절이 기독교 신앙의 로고라 말할 수 있다. 요한은 다음 순간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눈물을 흘리시는 것으로 묘사했다. 여기서 예수는 나사로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징표가 일어나리라는 것 때문이었다. 여기서 십자가의 전 과정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사랑, 죽음, 부활, 희망 등이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신 예수라 불리는 이 사람에게 모두 나타나있다. 눈물은 단지 인간적인 것만이 아니라, 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누가복음 7:38 - (죄많은 여자)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드렸다. 이 구절에 묘사되고 있는 눈물은 단지 여성적 상징일 뿐만 아니라 여성을 메시야적 사상 속에서 목회자로 그려내고 있다. 예수는 다음 이어지는 구절에서 빚진 사람 두 명에 대한 예화를 들어 용서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용서와 받아들임은 메시야 시대에 있어서 두 가지 실체이고, 여성성은 이런 효과를 위한 주요 도구이다. 여성은 여성만이 지닌 모든 특별한 기능들을 활용하여 교회에서 안수받은 사역으로서 강력한 역할을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7:44 -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 주었다.’ 이 구절에서는 물과 눈물을 유사하게 그리면서 비교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물과 눈물의 의미를 성체로 묘사하고 있다. 성체는 보통 물, 포도주, 빵으로 상징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인간의 눈물과 땀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물이 아닌 눈물을 통한 세례는 눈물이 밖으로부터가 취한 것이 아닌 인간의 몸의 산물이기 때문에 훨씬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성체는 단순이 물과 포도주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이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성례전 신학, 즉 밖으로 드러나는 상징만으로는 묘사될 수 없는 인간의 내적 변화임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9:41-42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구절에서 보면 평화와 눈물이 함께 간다.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도시를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하고 있다. 평화가 없고 사람들에 대한 관심 없음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이다. 이 구절은 또한 폭력을 언급한다. 예수께서는 이 도시에 평화가 없는고로 눈물을 흘리셨다. 하느님은 온 우주, 창조된 모든 것들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만들어진 모든 것이 선하다고 여기셨다. 권력과 욕심으로 하느님의 창조를 파괴시키고 사람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져온 것은 바로 인간이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이를 죄라 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도시에 이러한 상황을 불러온 사람들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다. 희망은 바랄 것이 없는 처절한 상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희망은 일치감, 연대, 동정, 그리고 새로운 창조에 대한 갈망과 함께 오는 것이다. Pon Anandarajah --------- 자료집을 위해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 2009 아시아주일 위원회: Rev. Joshua Ratnam( 콜롬보 교구) Rev. Pon Anandarajah(감리교) Dr. Narmasena Wickremasinghe (콜롬보 교구) Ms. Lakshini Fernando, 실론 성서공회 총무 Rev. Willie Ranasinghe (침례교 상가마야) 초대되었으나 참석치 못했음 표지 디자인 - Rev. Ranjana Karunarathene (쿠루나갈라 교구)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찬송 및 노래집 Sound the Bamboo CCA Hymnal 2000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가 추천해 주신 다른 노래집들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출판 일정에 맞추어 갖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아시아주일 준비위원회 Dr. Hope S. Antone, 코디네이터 Rev. Freddy de Alwis Mr. Adam Row 특별히 감사드려야 할 분: - Rev. Dr. Jayasiri T. Peiris 스리랑카기독교협의회 총무로 이번 자료집 준비를 위해 함께 해 주시고, 이번 주제에 관한 해설을 써 주셨습니다. - Dr. Prawate Khid-arn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총무로 2009년 아시아주일에의 초대글을 써주셨습니다. - Geoff Alves, CCA의 자원봉사자로 이번 아시아주일 자료집 표지와 포스터 레이아웃 디자인 편집자로 수고하셨습니다. 의미 있는 아시아 주일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Hope S. Antone Joint Executive Secretary Faith, Mission and Unity
21세기 선교전략 인터넷 방송국/ 2002-09-09
21세기 선교전략 인터넷 방송국 '저희는 인터넷 방송을 21세기에 아주 중요한 선교 전략이라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온 땅에 전파하라는 목적 있는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경향교회 인터넷 방송국 경향교회 홈페이지(http://www.ghpc.or.kr)는 2001년 6월에 본격적인 서비스를 하였습니다. 저희 인터넷 방송국은 현재 상주근무 팀장 외 정회원10명이 주일에 사역 및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주일과 수요일마다 생방송을 하고 있으며 각각 200k와 56k로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인터넷 방송을 21세기에 아주 중요한 선교전략이라 생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온 땅에 전파하라는 목적 있는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2평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5~6명이 모여 땀을 흘리며 작업을 하였습니다. 인터넷 교육도 하면서 대학부, 미혼 청년들과 기혼 청년들까지 참여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당회장 목사님(석원태 목사)이 인터넷 선교의 비젼을 가지고, 서버룸과 컴퓨터실이 각각 배정되어 인터넷 방송을 하는데 가장 좋은 여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3개월간의 준비과정과 인터넷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지금의 서비스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고등부까지 참여하여 또 다른 변화와 개혁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저희 홈페이지에서는 석원태 목사님의 설교뿐 아니라 부목사님과 강도사님 그리고 외부 강사들의 모든 설교자료를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 참여할 수 없는 성도들을 위해 구역공과 성경공부도 인터넷 방송으로 매 주일 올리고 있어서 다음날에는 확인하고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각각의 사역과 기관에서의 간증내용과 강의 및 수련회 내용 등도 항상 볼 수 있도록 내용들을 편집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송 뿐 아니라 경향교회는 늘 선교에 대한 관심과 중요도가 높은 만큼 선교정보와 칼럼이 매주 올라오고 있습니다. 특히 나눔터에서는 목사님이 신앙상담을 하는데 매일 체크하고 답변을 하기 때문에 많은 성도와 네티즌들이 자신의 고민과 문제들을 성경말씀을 가지고 도움 받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 주보가 PDF 서비스로 매주 올라가기 때문에 다른 타 지역이나 선교지역에서도 주보를 언제라도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점차 이용자와 참여자가 늘어나고 있는 경향교회는 앞으로 메일 전도 카드서비스와 더 다양한 컨텐츠를 올리기 위해 새로운 홈페이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인터넷 방송국의 의의는 1).정보와 통신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21세기 멀티미디어 시대에 우리 교회가 이 모든 문화매체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선진하고 2).앞으로 진리가 배척을 당하고 참 진리의 종들이 일반적인 매스컴으로부터 배척을 당할 때를 위하여 독자적 선교를 하기 위한 방송이나 여러 문화매체가 필요한데, 이런 의미에서 경향인터넷 방송국이 개혁주의 복음 전선의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할 것 3).이러한 문화매체의 여러 부문에 경향화된 독자적 전문가를 기르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1세기 중요한 선교의 역할을 감당할 경향 인터넷 바송국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세현(경향교회)
21세기 지구의 상황과 희년의 성취/ 민중신학의 Paradigm Shift를 위하여/ 김용복 박사/ 2002-02-01
21세기 지구의 상황과 희년의 성취/ - 민중신학의 Paradigm Shift를 위하여 - 김용복 박사 <머리말> 1. 지구는 하나의 커다란 시장으로 개편되고 있다. 세계가 하나의 커다란 시장으로 개편되어 지구적 상황이 지역, 민족사회 그리고 세계사회의 지평이 접속되고 정치계, 경제계, 사회계, 문화계, 종교계, 생명계에서 인간과 생명이 다중 적인 희생의 제물이 되는 현실이 압도하여 오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는 (1) 지정학적인 재구성과 (2) 모든 차원의 상호연관성이다. 지정학적 재구성이란 지역적 지평과 민족 사회적 지평과 지구적지평이 동시적으로 결합 되여 있는 지정학적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또 상호연관성이란 자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종교적 차원은 총체적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인간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시장화된 지구적 상황에서 인간의 다중적 희생은 새로운 신학적 과제와 접근을 요청하고 있다. 미국의 한 전략가의 관찰에 의하면 앞으로 인류는 문명의 충돌(Civilizational Clash)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1.1 지구시장은 초국적 기업에 의하여 장악된다. 초국적 기업은 지구적 조직망과 통신망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시장을 장악하여 사회주의권 내지는 구 사회주의권을 비롯하여 소위 제3세게권은 물론 산업선진국과 신흥공업국의 걍제시장도 장악하려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세계적 기업들이 세계경제성장을 주도하는 가운데 지역적 빈부의 격차는 물론 지구전역에 있어서 경제적 약자는 희생을 당하게 된다. 기아, 가난, 실업 등의 경제적 불안은 그 강도에 있어서나 그 범위에 있어서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될 전망이다. 세계무역기구의 출범은 이러한 세계시장경제질서의 개편을 가속화할 전망이다. 여기소 소위 국가경제체제라는 근대국가의 고정적 개념은 와해되고 오직 세계시장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경제생활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치열한 경제적 경쟁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1.2.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개편됨에 따라 근대국민국가(Nation State)의 체제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초국적 기업의 세계시장의 장악은 국가권력의 약화를 초래하고 국가사회는 세계경제의 운동방식에 적응하도록 강요되고 국가사회의 개방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민주권의 개념은 절대적인 개념으로 될 수 없으며 지구시장적 역학관계에 노출될 것이며 국민의 주권은 상대적으로 약화라는 현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소위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체제는 심각한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고 세계시장에 개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3.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개편됨에 따라 세계적 경제경쟁의 격화는 물론 모든 사회관계의 대립, 갈등, 모순은 심화될 것이며 격화되고 심지어는 폭력화 될 전망이다. 이 경쟁관계를 무한 경쟁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정글의 현상으로도 비유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경험해 왔던 민족간의 갈등, 계급간의 대립은 물론 모든 사회관계가 다차원적으로 대립, 강등, 모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4.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개편되는 상황에서 인간의 정신생활과 문화생활에 대한 충격은 가장 심각하다. 세계시장은 세계적인 통신망을 구축하고 정부를 유통하며, 세계는 지구적 다중매체에 위하여 지배될 것이며 따라서 모든 민족 또는 공동체 문화의 정체성, 문화적 도덕적 정신적 가치 그리고 삶의 양식은 시장의 소용돌이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지구시장의 경쟁적 논리는 문화적 차원에서는 문화전쟁으로 까지 치닫게 될 것이며 이런 차원에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교와 종교의 관계도 치열한 시장적 경쟁관계에 종속되게 될 것이다. 1.5.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개편됨에 따라 지구의 생명은 더 커다란 회생을 당하게 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생태계의 위기는 서구형 산업경계체제와 산업발전의 모순 즉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관계에서 인식되어 왔다. 이제 시장의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시민의 정치적 압력을 초월하여 군림함으로 그 사회 정책적으로나 생명계에 대한 정책이 파괴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전망이 더욱 커 졌다. 생명의 환경은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의지의 결집이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되어 가고 있다. 2. 민중과 생명은 공히 희생되고 있다. 2.1. 지금까지 전통신학은 물론 민중신학은 민중의 희생은 생명의 파괴와 연대관계 없이 이해되었었다. 민중신학에서 조차 생명의 파괴는 별도의 문제로 취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민중의 생명은 자연의 생명과 일체적인 것이다. 민중의 생명은 민중의 삶과 구분되지 않으며 민중의 삶은 생명 그 자체와 구별될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일반의 파괴를 민중의 생명파괴에서 체험한다. 따라서 일반 생명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생명은 차별없이 지구시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고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민중신학의 共生的 또는 相生的 생명론(Minjung Ecology)을 말할 수 있다. 2.2. 일반생명과 민중의 생명과 민중의 삶은 일체적인 실체이다. 생명과 삶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이다. 민중의 살림살이(삶)가 민중의 생명을 좌우한다. 민중의 생명은 민중의 졍제적 살림살이(Minjung Political Economy)에 의하여 크게 좌우된다. 민중신학은 생태계(Ecology)와 정치경제(Political Economy)를 유기적으로 이해한다. 로마서 8장 21절(우주의 신음) 2.3. 생명체의 파괴와 민중의 희생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기반에 의한 계급적 모순과 갈등구조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의 파괴는 생명의 자생성의 붕괴이며(토지훼손) 민중의 생산적 주체성(노동과 경영)의 종속이다. 생명체의 파괴는 계급적 모순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산업조직과 거대기업의 현대과학기술(Technocracy)을 기반으로한 총체적인 경쟁적 통제적 경영논리에도 기인한다. 이 과정은 생명의 자생성과 민중의 노동과 생산적 주체성이 부정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경제적 가치(화페등과 같은 금융경제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가치)가 생명이나 공동체의 삶에서 유리된 채 창출되어 경제적 힘이 생명 희생적 주체 억압적 실재로 작용한다. 이러한 경제적 희생은 단순한 재화의 결여나 빈부의 구조적 격차에 의한 에 의한 빈곤이나 기아에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2.4. 생명체와 민중은 살림살이를 결정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성과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억압당하고 있다. 생명체와 민중의 삶은 생명과 삶의 공동체의 민주적 형성이 독재체제(예 개발독재)에서는 물론 자유주의체제 또는 신 자유주의어려워 짐에 따라 그 주체성이 억압된다. 2.5. 민중의 삶과 생명은 정보산업과 문화산업에 의하여 더 희생당할 전망이며 다중매체에 의하여 그들의 생명과 삶이 문화적 폐허와 정신적 억압으로 고난 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3.. 민중은 포괄적이고 상호연관성을 가진 모순관계에 의하여 수난을 당하고 있다. 3.1. 민중신학은 지금까지 정치적 억압 즉 힘이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의 모순과 갈등과 계급적 모순과 갈등을 축으로 하여 민중의 고난을 이해하여 왔다. 민중의 생명과 삶을 파괴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 경제적인 모순과 갈등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산업문명과 생태계의 모순, 문화적 피폐와 억압, 폭력, 생명의 정신적 기반의 붕괴라는 종속적이 아닌 독자적인 요인과 모순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3.2. 그리고 민중의 삶에 있어서 대립과 갈등은 상호연관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모순관계로 이해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상호연관성을 간과하고 분석적 차원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였다. 따라서 민중의 생명과 삶은 분석적 모순관계로 축소되고 환원되었다. 3.3. 민중신학은 80년대에 들어와서는 또 이 모순의 위계질서를 물질 우선적으로 정하였다. 물질을 기반으로한 계급갈등이나 민족갈등을 우선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다른 차원의 모순과 갈등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또 1980년 이전에는 민중의 고난과 투쟁을 명확한 모순의 분석이전의 상태에서 인식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중신학이 모순과 갈등과 대립을 다차원적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각차원의 상대적 독자성과 고유성 그리고 각 차원간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와 민중은 다차원적 희생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3.4. 민중의 생명과 삶에 있어서 폭력과 평화의 문제를 정의의 문제보다 우선순위를 낮게 정하였다. 정의는 평화의 기본조건이고 평화는 정의의 충분조건이다. 모든 모순과 갈등과 대립은 폭력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평화적으로 모순과 대립을 극복하는 것도 민중의 생명과 삶을 일으켜 세우는 데 중요한 요건이다. 지금까지 민중신학은 폭력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폭력의 다양한 실체를 소홀히 파악하였으며 폭력극복을 위한 노력을 미온적으로 하여 왔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폭력의 실체를 단순히 수단적인 차원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민중의 희생은 결국 폭력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은 폭력문제를 물리적인 수단의 차원을 넘어서 다차원적인 생명파괴의 실체로 인식하여야 한다. 3.5. 민중의 생명은 자연적 조건, 정치 경제적 조건만으로는 지탱될 수 없다. 민중의 생명과 삶은 문화적, 예술적, 심미적, 정신(영)적 차원에도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런 조건은 물질이나 자연에 종속된 요건이 아니라 독립되어 물질적 요건과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민중의 생명과 삶에 있어서 감성의 풍성함과 운율의 다채로움도 본질적인 활력의 일부이다. 민중의 생명과 삶은 그 정신과 혼백의 활력을 중심에 지녀야 살아있게 된다. #4. 민중의 주체성의 재구성 4.1. 민중신학은 민중의 역사적 주체성을 정치 경제적 차원을 중심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리고 민중의 주체성을 정치 경제적인 소유와 권력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민중의 주체성인식에 있어서 정치 경제적 축소주의에 빠져 비 정치 경제적 요소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었다. 4.2. 그러나 민중의 주체성은 그 모순관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다차원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민중과 생명체는 생명의 주체이며, 삶전체의 주체이다. 그럼으로 민중의 사회전기는 정치 경제적 차원에 국한될 수 없고 종교적, 정신적, 정신적 차원이 상호연관성안에서 공히 인식되어야 한다. 민중의 주체성은 同活體로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다차원적 주체성간에 공생관계와 협동관계를 내포한다., 이것은 마치 다양한 주체들이 원탁에 공히 지리를 같이하는 조합적 또는 집합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4.3. 민중신학은 권력이나 소유의 문제에 있어서 그 실체를 표면적으로 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고 따라서 민중의 소유, 민중의 권력을 낭만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4.4. 그러나 민중의 생명과 삶은 소유의 문제나 권력을 획득하고 장악하는 데서 해결되지 않고 소유관계나 권력관계를 원적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민중이 소유나 권력관계에서 종속되고 억압당하고 있을 지라도 그 생명과 삶은 간헐적으로 소유와 권력관계의 쇠사슬에서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체험을 가지게 된다. 민중의 주체는 권력과 소유이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4.5. 민중의 생명과 삶은 소유와 권력을 장악하는 데서 성립되지 않고 소유와 권력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소유와 권력관계자체에서 \\\"초월(Kenosis and Diakonia)\\\"됨으로 이루어 진다. 민중신학은 소유와 권력관계의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차단하여야 했다. 5. 민중과 연대관계 5.1. 민중신학은 연대관계를 너무 단순차원에서 인식하였다. 민중의 연대를 정치 경제적 소유나 지배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경향은 민중의 주체의 배타성과 파당성을 강조한 나머지 민중의 고립을 자초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5.2. 민중의 연대관계는 민중주체성의 포괄성을 전제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민중생명과 삶은 소유와 권력관계에서 중요하게 이루어지지만 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독자적이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5.3. 생명체와 민중의 삶의 연대관계는 전통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던 계급간의 연대(Inter-class Solidarity), 문화적 차별을 넘어서는 연대 (Inter-gender Solidarity), 정치적 지배관계를 넘어서는 연대(Inter-political Solidarity)등 모순과 갈등 등의 대립관계속에서도 연대의 다리를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체과 민중의 삶이 이러한 연대망을 구축하는 것은 모순을 애매하게 인식하거나 억압세력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와 민중의 삶이 포괄적인 주체로 성립하고 포괄적인 연대를 수립하여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5.4. 따라서 민중신학이 주창하여오던 절대적 적대관계란 논리적으는 있을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 5.5. 주체로서의 생명체외 민중은 포괄적인 주체성을 토대로 다양한 연대관계 그리고 모든 적대관계를 뛰어 넘는 연대관계(공생, 협동, 연대)를 형성하여야 할 것이며, 항상 유동적이고 열려있는 연대운동을 벌려가야 할 것이다. 6. 종의 형체와 Diakonia의 살림살이 생명공동체(Oikonomia Tou Theou) 우리는 성경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민중적 사회전기 즉 예수의 형체를 통하여 민중의 주체를 재구성하려한다. 희년은 노예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노예적 생산관계에서 해방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노예가 그 주체성을 항구적으로 확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빌립보서 2장에 종의 형체를 입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기까지한 하나님을 영광의 주로 고백하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자화상 즉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십자가의 수난을 받으러 왔다\\\"는 선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시에 이는 이사야서에 표출된 \\\"고난의 종\\\"즉 메시아라는 신앙적 체험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나아가서 초대교회는 종(Diakonos)을 공동체의 직분으로까지 세웠다. 여기서 역설적으로 이야기되는 종의 형체, 종의 사역, 고난의 종은 민중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종의 실체 안에 주체적 실체를 역설적으로 함유함을 의미한다. 이 종의 형체를 공동체(교회론)적으로 표현하면 이는 \\\"섬김의 공동체\\\"로 이해된다. 여기서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주체로 일으켜 세운다. 섬김이란 모든 사람은 일으켜 세운다. 실로 DIAKONIA운동은 모든 생명체와 민중을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운동을 의미한다. 예수를 따르는 민중은 이미 종속적 관계에서 종의 \\\"사역\\\"에 강요되었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안에서는 모든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메시아적 DIAKONOS의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중의 주체성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민중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아적 종의 형체\\\"를 입게 된다. 이 섬김의 공동체 안에서는 민족적 주체성, 사회경제적 주체성, 문화적 주체성, 정치적 주체성, 종교적 주체성, 생명적 주체성의 기적을 일으키는 섬김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갈라디아서 3장, 예배소서 4장>에서 이 역설적 同活體의 실체가 이야기되고 있다. 7. 희년과 민중신학 7.1 땅은 생명의 그루터기이다. 땅의 회복이란 생명의 회복을 의미한다. 생명과 땅은 공생동활의 연대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1995년 민족희년의 선포는 삼천리금수강산을 민족의 생명의 정원으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7.2. 희년은 민족의 삶을 보장하고 안전하게 하는 경제적 살림살이를 의미한다. 즉 민중이 경제적 살림살이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금 펼쳐지고 있는 세계시장에서 민중의 살림살이공동체는 지역적 지평과 민족적 지평과 세계적 지평에서 그 주체성을 공히 확보하여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소유관계만을 의미하지 않고 살림살이 전반의 경영(DIAKONIA)적 주체를 의미한다. 이것이 민중신학이 말하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우리는 희년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을 근거로 한 경제행위에서 \\\"경제적 주체의 형체\\\"를 발견한다. 레위기 25장과 마태복음 6장에서 이 실체가 들어 나고 있다. 한국민족의 성원들이 복된 살림살이를 꾸미는 일이 민족경제의 과제 일 것이다. 기독인과 민중교회는 경제적 주체로서 민족경제의 요체를 실현하여야 한다. 7.3. 희년에서 선포되는 해방은 노예의 사회경제적인 주체회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민중의 포괄적인 삶의 주체형성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삶에 대한 주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억압체제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억압체제를 변혁하고 새로운 살림살이의 주역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에스겔서 37장(전반부)은 생명과 삶의 주역을 일으켜 세우는 비전을 그린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희년이 부과하는 정치적 과제를 지역 사회적 차원에서, 민족 사회적 차원에서 그리고 세계 정치적 차원에서 민주시민을 일으켜 세우는 일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7.4. 희년의 선포는 샬롬(화평)의 계약을 의미한다. 이는 총괄적인 생명과 인간의 사회안전보장체제를 민중이 주체적으로 이루고 가꾸어 가는 운동을 의미한다. 사회적 DIAKONIA는 사회적 평화의 내용이다. 사회적으로 모든 생명과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사회복지와 안전의 주역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사야 11장이 이런 희년의 표상이다. 그리고 에스겔서 37장 후반부의 \\\"화평의 계약\\\"은 민족DIAKONIA와 민족통일과의 관계를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의 비전은 민족DIAKONIA의 과제로 설정될 수 있다고 본다. 7.5. 희년은 생명과 삶의 축제이다. 축제 없는 곳에 생명도 삶도 있을 수 없고 생명과 삶을 이룰 수도 없다. 시와 노래와 춤이 어울려 생명체와 민중의 문화적 영적 주체가 날개를 펴고 땅과 하늘에 생명과 삶의 향연을 이루는 축제가 희년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22장이 이런 희년의 표상이다. 우리한국교회는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천시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민중신학은이에 대한 회개운동을 전개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에제 주신 시와 노래와 춤과 아름다움과 신선도와 같은 그림을 활성화하여 희년의 나팔을 불면서 생명과 삶의 축제마당을 열어야 할 것이다.
21세기성장 교회의 모델들?
21세기성장 교회의 모델들? 2002-03-09 11:13:20 read : 1078 21세기를 맞이하여 지상 명령(마 28:18-20)에 충실한 교회들은 번성하고 있지만 또 다른 교회들은 비록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계 3:1을 보라) 솔직히 말해 죽은 교회들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만 교회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마 13:24-30, 36-43을 보라). 알곡과 가라지가 동시에 같은 비율로 자라고 있다.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감에 따라 교회는 점점 더 빛을 내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는 외견상으로는 서로 상충되는 경향과 강조점이 서로 공존한다. l 회중들의 연령층이 점점 높아지고 (베이비 붐 세대들) 또 다른 곳에서는 점점 더 젊어진다 (부스터 또는 X 세대). l 회중들이 점점 대형화되어 가는 동시에 (대형 교회들), 또 점점 더 작아져 간다 (메타 교회들). 교파의 구분이 점점 희미해진다. l 혁신과 전통 모두가 핵심적 가치가 된다. l 개인과 공동체 모두가 다 중요하게 보인다. l 리더는 마음과 머리, 형식과 자유, 축제와 묵상, 신학과 경험 모두의 통합을 추구한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 적어도 6개의 모델이 부상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l 전통적교회 모델 (주류, 복음적 및 카리스마적 교단) l 새들백교회 모델 (목적 지향적) l 윌로우크릭교회 모델 (불신자 전도 중심) l 사도적교회 모델 (사도적 지도자들) l 토론토공항교회 모델 부흥 중심) l 메타교회 모델 (셀 중심) 각 모델의 장점들 대부분의 갱신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주류 교단 및 복음적 기독교와 친근하다. 교회사학자인 빈슨 사이난이 잘 보여준 바와 같이, 오순절/카리스마적 흐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카리스마]나 [미니스트리 투데이] 등과 같은 잡지의 성공이나 영향력이 미국 기독교에서 오순절/카리스마적 전통이 확립되고 번성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전통적인 부대는 낡을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부대는 낡았고 현재의 부흥이나 갱신에 대해 적대적이다 (눅 5:37-39를 보라). 이전의 갱신가들은 "그것들은 우리가 행한 방식이 아니고 우리가 본 징조들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갱신을 무자비하게 비판한다. 한편 누가 복음 5장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의 최전선에 있는사람들에게 필요한 경고를 준다. 미국의 기독교는 아직 전체적으로 성령이 지구의 다른 부분에 가져오신 폭풍 같은 변화를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령의 부어주심이 미국 교회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새들백교회 모델. 새들백교회 모델의 예들은 거의 모든 교회 구조 속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중 가장 빨리 성장하고 영향력있는 모델일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레이크 포레스트에 소재하는 [새들백 밸리 컴뮤니티 교회]의 목사인 릭 워렌은 그와 자신의 동료들이 발견한 것을, 하나님의 성회 교단을 포함하여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비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눈다. 워렌 목사는 우리들에게 성경에 의한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꾸준히 상기시키며,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교회로서 목적을 가지고 하도록 권면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것을 그분의 방법대로 하기 위해 시작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분이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심을 발견하게 된다 (행 5:32를 보라). 윌로우크릭교회 모델. 일리노이 주 사우스 베링톤에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의 목사인 빌 하이벨스 목사와 윌로우크릭교회 모델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람을 낚기 위해 부르셨다는 것에 대한 국가적인 수준에서 경고를 울리는 첫 사람들이 될 것이다 (막 1:17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를 만드라는 명령에 대해 눈이 멀고 피상적인 “숫자 놀음”에 빠져 단지 고기를 장사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닥아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이땅에 남기셨다. 하이벨스 목사는 고기를 낚기 위해서라면 효과적인 어떤 미끼라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비도덕적, 비윤리적, 불법적 또는 비성서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이것에 대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사도적교회 모델. 목회자들의 지도자인 피터 와그너는 이러한 열정을 수십 년 동안 가져 왔다. 그는 지구의 기독교를 관찰한 후, 가장 극적인 성장은 사도적 목사가 인도하는 대형 교회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들 중의 대부분이 수많은 회의와 정치적 책략 등으로 분주한 반면 오늘날의 사도적 목회자들과 교회 설립자들은 수 천의 제자들을 만들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대원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따른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효율적으로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들 역동적인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비전을 고양시키고 마지막 때의 추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훈련하기 위해 트레이닝 센터를 설립한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 시대의 흥분할 만한 현상이다. 토론토공항교회모델. 존 아노트 목사가 섬기는 토론토 공항교회에 리바이벌의 불이 떨어졌을 때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 솔직히 말해서, 메마르고 열매 없는 오늘날의 크리스천의 삶과 사역 속에 있는 우리들 카리스마적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가 더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랜디 클라크와 같은 빈야드 목사들은 새로운 기름부음을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들을 내려놓음으로써 우리들에게 선두에 서서 모범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각성의 가장 궁극적인 결과는 교회를 위한 새로운 모델이었다. 나는 그것을 '토론토교회 모델'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마도 거룩한 웃음, 영적인 “취함”, 몸의 떨림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다른 현상 등과 같은 놀라운 영적인 현상들로 인해 다른 모든 모델보다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곳 오클라호마 주, 털사 시에 있는 죠엘 버드 목사의 경우, 비록 이러한 이상야릇한 현상들에 걸림돌이 된 진실한 신자들이 대거 교회를 떠났지만 동시에 극적인 체험을 경험한 수많은 새로운 신자들이 괄목할만하게 몰려들어와서 교인 수는 헌금액도 증가하였다! 오늘날 토론토 타입의 교회들을 방문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비슷한 간증을 듣고 비슷한 영적 건강과 성장을 목격할 것이다. 메타 교회(셀 교회) 모델. 마지막으로 미국의 교회들은 남한의 서울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조용기 목사로부터 소그룹 또는 셀그룹이 주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많은 영적 훈련과 제자 훈련 작업을 성취하기 위한 최선의 장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바톤 루지에 소재하고 [셀 교회](The Cell Church))를 집필한 래리 스탁스틸 목사는 대중 모임보다 셀그룹을 교회의 초점으로 만든 후 패러다임 쉬프트와 흡족한 결과를 경험하였다. 또한 미국 콜로라도 주의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소재하는 [뉴 라이프 교회]의 테드 헤가드 목사는 모든 종류의 (영적 전쟁으로부터 썰매에 이르기까지) 소그룹을 통해, 효과적인 아웃리치(전도)와 제자훈련 기회를 제공하였다. 다양함의 중요성 점점 더 확실해 지는 것은 건강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위에서 말한 각 모델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포스트 모던(후기 현대주의) 문화가 그러하듯 다양성 속에 자신을 드러내신다 (고전 12장을 보라). 우리는 우리의 방법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TV가 출현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라디오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라디오는 어느 때보다 더 중요이다. 인터넷이 지구상에 폭발할 때 모든 사람은 TV가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조급한 판단이었다. 전자 미디어가 프린트 미디어를 대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이 테크(Hi-Tech)와 하이 터치(Hi-Touch) 둘 다를 귀하게 여긴다. 기본 선은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는 혼자 있고 싶어하고 또 때로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 그들은 독서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며 인터넷을 서핑하기도 한다. 우리 문화의 장은 선택의 여지를 요구한다. 결국 역동성이 교회의 사역 모델을 결정지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전통이 다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빨리 배우고 있다. 사실전통은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의 신조와 고백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기 보다는 오히려 발달시켰다. 우리의 기본적인 삼위일체 교리는 이러한 역동성에 기인하고 있다.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오직 한 가지 복음만이 존재할 것이다. 새로운 세대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전파하고 축하할 새롭고 타당성 있는 방법들을 발견해야 한다. 찬양가 경배는 지난 이십 년 동안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소위 찬양과경배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은 일반적으로 이전 어느 때보다 찬양과 경배의 중요성을 높이 인식하고 있다. 혁신적인 아웃리치(전도 및 선교) 방법들이 쏟아져 나오고 참된 교제와 영성이 점점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흔히 우리가 보기 전에 세상 사람들이 먼저 신자들의 교제와 영성의 피상성을 꿰뚫어본다. 종교란, 용어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생명을 잃은 것이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이고, 신인 상호작용적인 동시에 정직하고 자연스러우며 인간의 상호작용적인 실재적인 것을 원한다. 위에 제시한 모델 중 어떠한 모델이라도 교회의 갱신과 역동성을 제공해 준다면 유익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전통적인 것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류교단이나 전통적인 교단과 마찬가지로 이미 전통이 확립된 오순절이나 카리스마적 교회 중에도 살아있는 교회가 있고 죽은 교회가 있다. 어떤 한 모델이 다른 전부를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년 동안 내가 출석하는 교회 (남침례 교회)는 불신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대형 교회와 소교회의 형태를 취하였다. 대형 교회가 모든 능력을 다해 일하는 것을 보는 이상으로 흥분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작은 교회들이 하고 있는 역동적인 역할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내가 거주하는 털사 시에는 대형 교회들이 많다. 이들 중 대부분이 독립 적인 카리스마 교회들이다. 그러나 나는 수많은 소형 침례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그들 모두의 신자를 합한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회중의 평균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약 75 명이다! 우리는 젊은 사도들을 훈련하여 성령이 분명히 우리 시대에 기름 붓고 계시는 대형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이 이 마지막 시대에 일으키시는 다른 모든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계속해서 무장시키고 인정하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 건설보다 더 흥분되는 때가 언제 있을 것인가? 당신의 사역 모델이 무엇이든 왕과 그분의 왕국을 위해 전진하라. (래리 하트는 오클라호마 주 털사 시에 있는 오랄 로버츠 대학교의 신학교수이다).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1)/ 2018-10-15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1) 20세기를 회고하고 21세기의 한국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30대 교회 리서치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 한국 교회 성장의 현장 김재헌목사 지음 글을 열면서 21세기 한국교회의 성장, 희망은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지금까지 경이적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구미교회들의 부러움을 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정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교회의 성장에 비해서 사회적인 신인도가 너무나 낮은 것이다. 21세기에 관한 진단 중 많은 부분에서 한국 교회도 40-50년 후가 되면 유럽 교회와 같이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미래를 예견한다. 하지만 아무런 처방 없이 쇠퇴론 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 곧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21세기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세상에 살고 있다.(“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밖에서 따로 떨어져 살 수 없다. 세상의 변화는 교회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는 신앙의 방법과 세계관과 가치관을 많은 부분 바꾸어 놓고 있다. 목회자는 변치 않는 성경의 복음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해 가는 세상에 증거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바로 읽지 못한다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거나, 그 시대에 풍속에 빠져서 무력한 종교 지도자로 전략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시대의 징조를 바로 알아 깨어 있어서 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미래의 세계와 한국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를 예측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워낙 돌발적인 사건, 사고가 많기에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단적으로 결론 짓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대안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에 이바지하므로 미래의 연구는 불완전하다고 해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처럼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과학기술 적인 변화가 가속화되고,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 기대와 불안이 교차되고 있는 시대의 변화에 추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세계사의 흐름에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는 보다 다양하고 다변화될 다음 세기에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미래를 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과거를 살피는 일이다. 우리가 과거의 교회사를 돌이켜보면 앞으로의 교회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사명감으로 필자는 한국교회의 성장의 현장을 담기를 원했다. 특히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20세기를 마감하고 그 지도력이나 영향력이 21세기에까지 이어질 교회들을 기록으로 남겨놓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100개의 교회를 선정해서 이들의 교회들에 대한 탐방에 들어갔다. 모두 11개의 질문에 대해 인텨뷰를 신청하고 그리고 면담방식을 통하여 자료를 수집해 나갔다. 총 3년 반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정말 지루하고도 힘든 작업이었다. 10개의 교회를 선정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각 교회의 목사님들을 만나 개별적으로 인텨뷰를 요청하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방법으로 접촉을 시도했고 나중에는 서면이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하여 자료를 보충하면서 드디어 한국의 100대교회를 CD-ROM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알짜배기만 골라 이제 한국의 30대 교회를 책으로 엮게 된 것이다. 한국 교회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10년마다 수 적 배가를 이룰 만큼 급성장 한 교회이다. 이러한 성장은 세계 교회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한국 교회만이 자랑이다. 1992년 8월 [뉴욕 타임즈]의 발표에 의하면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한국 교회가 22개가 있다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성장요인에도 불구하고 성숙하지 못한 병리 현상을 동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은 한국 교회가 있는 자리이며, 목회자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를 기대하면서 한국 교회의 목회는 새로운 구조적 개혁이 필수적이며, 다가오는 미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지난 세기의 성장한 교회들을 살펴보면서 새로운 전망을 가지도록 하는데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교회들은 세상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고 구원시키는 일에 매우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적으로 매우 앞서 있다. 놀라운 것은 한결 같이 그들이 다른 교회들보다 한 걸음씩 앞서 있다는 것이다. 미래 세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형태에 의하여 효율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최근의 한국 교회는 젊은이들을 잃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신세대들의 사고 전환으로 교회는 더 이상 그들의 흥미의 대상이 아니며 케케묵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 그들은 재미있는 프로그램, 새롭고 낙관적인 예배 분위기, 넓은 주차공간, 부담감이 없는 교회생활을 원하고 있다. 이런 '잃어버린 세대'를 얻기 위하여 교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터인데, 오늘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교회들이 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에 이르러서 패러다임이 바뀌고 교회의 구조도 상당 부분 바꾸리 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21세기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오늘 이 책에 소개하는 교회들은 이처럼 사람을 키우는 일에 아주 탁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래 사회의 또 다른 변화의 하나는 다양성의 극대화이다. 그러므로 미래 교회는 다양성을 포용해야 하며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중성을 가지게 된다. 다양한 목회구조 속에서 일치와 통일성을 이루기 위하여 연구 시도되고 있는 것이 팀 목회이다. 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목회에 참여하는 총체적 개념을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에 소개되는 교회들은 팀목회를 지향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의 사고 구조는 정보로 변화하고, 지역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의 사고는 지역화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는 교회의 구조를 블록화하고 정보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말 놀랍게도 이 책에 소개되는 교회들은 이미 이러한 정보화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들 교회는 성장할 수 밖에 없는 구조와 사람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 책에서 바로 이러한 점을 읽어야 한다. 단순히 프로그램을 베끼고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관심을 갖기보다는 시대적 흐름, 즉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라는 것이다. 제네바의 칼빈은 그 당시로서는 첨단을 걷는 사람이었다. 우리도 이 시대를 꿰뚫어보는 영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그릇과 그릇에 담겨있는 보물의 차이를 인식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성장하는 교회들을 리서치하는 동안 협조해주신 각 교회 목사님들과 스텝들 그리고 자료를 모으느라고 수고해준 김용주, 최형준 전도사 또 이 책의 출판을 허락해주신 나침반사의 김용호 사장님과 김응국 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저는 이 책을 낼 수 없었을는지 모릅니다. 1999년 7월1일 시화에서 김재헌 목사 1.분당중앙교회 “한발 앞서고 목숨을 건 목회로 분당을 복음화 한다” 최종천 목사 ●총신대학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한 발만 앞서라 분당중앙교회의 성장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는 한 발 앞서간다는 것이다. 단순한 말 같지만 이것은 많은 대가를 치룰 것을 전제로 한다. 그는 남들이 분당을 생각지도 않을 때 이미 그곳을 내다보았다. 대개 분당의 대형교회들이 서울의 강남지역에서 이사 온 교회들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맨주먹으로 시작해 오늘날 대형교회를 이루어 낸 장본인이다. 분당에서 죽으리라 “분당 개척교회 제 1호”, “죽기 살기로 목회 하는 목회자”, “개척 5년만에 3000명 교회로 성장” 이러한 수식어가 붙어 있는 목회자가 최종천 목사이다. 일년에 걸친 인터뷰 요청에도 번번이 바쁜 일정 때문에 만날 수 없었던 최종천 목사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것은 1997년 한해가 저물어가던 겨울 아침이었다. 필자의 사무실로 급하게 걸려온 전화는 분당 중앙교회의 비서실이었다. “목사님께서 오늘 아침 잠시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괜찮으시면 지금 오실 수 있으신 지요.” 전화를 받고 나서 몇 가지의 도구만 챙겨서 그 길로 분당으로 향했다. 마침 이른 아침이어서 제 2 경인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필자가 살고 있는 시화에서 분당까지 30여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전에 한국 강해 설교학교의 일로 잠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그를 만나고 그와 일대일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저으기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뛰었다. 1층 로비 뒤편에 마련된 목양실로 안내되어 차와 함께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로 각오하고 합니다. 175cm 이상이 되는 훤칠한 키, 깡마른 체구, 크지 않은 눈이지만 빛이 나는 눈에서 예사롭지 않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100여명이 넘는 목사님들을 만나고 그분들과 인터뷰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성공한 목회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투철한 소명의식” 이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예레미야 주석을 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대하고 그 안에 평안이 있으라. 네가 솔로몬과 다니엘 보다 지혜가 많을지라도 부르심이 아니면 지옥을 피하는 것같이 전도사업에 임하라”고 하였고, 휫필드는 “어떤 목사든지 주의 성신이 내게 임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말할 수 없으면 반드시 설교직을 중지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 말씀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 분당 중앙교회의 최종천 목사라고 한다면 필자의 억측일까(?) “그 때가 1991년 10월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지역을 달라고 기도하는 증거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닌 늦깍이 신자였습니다. 6학년 때 홍릉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해서 분당에서 개척할 때까지 23년간 한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다른 분이 목회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홍릉 교회에서 은혜 받아 총신대로 신학 했고 그 교회에서 교육 전도사, 강도사, 부 목사로 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분당 신도시 계획을 신문에서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분당을 돌아다니며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일면은 제가 기도하고 개척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분당 중앙교회를 개척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담히 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목회철학은 대충 대충 하는 것이 아니다. 대충 대충 하였더라면 개척한지 8년만에 5000명을 넘는 대 교회가 될 수 있었겠는가? “목사님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사생 결단의 각오이지요. 열심히 하는 정도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이든지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항상 죽기 살기로 각오하고 한다는 생각으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면 즉각적으로 최 목사는 사실 신학대학에 다니면서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재학 중 40일 철야기도를 작정한다. 이 때부터 죽기 살기로 기도하는 습관이 붙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기도하는 첫날밤에 “복음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 때부터 39일간 이 말씀만을 붙들고 기도할 때에 교회를 담당하는 목회의 꿈을 굳혔고, 기왕 목회를 할 바에야 개척 목회를 하리라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개척 교회의 은사가 있고, 개척교회 스타일의 목사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저는 개척 정신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곳 분당에서 개척하리라 마음먹고는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 말은 듣지도 않았습니다. 재정적인 문제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리라 믿고 친구 두 가정과 제자 한 가정 전도사님 한 분과 처음 개척을 했습니다. 당시 이곳은 허허벌판이었고, 길조차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분당 전 지역을 다니면서 먼 미래를 보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곳에서도 주의 백성이 구원받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데 실제 그 기도대로 지금 분당 전 지역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골고루 교우들이 출석하고 있습니다”. 인텨뷰를 하는 도중인데도 최목사는 죄송하다는 소리를 연발하면서 교역자실로 왔다갔다하였다. 그 사이 글을 또 정리하고 한참을 있으니 또 그가 다시 들어와 인텨뷰를 한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지금 사실은 부목사 이하 부교역자들 시험치는 날입니다. 자신의 담당하는 교구와 기관의 성도들 이름을 외우게 해서 기록하게 하는 시험인데요 저는 한 달에 한번씩 꼭 이 시험을 칩니다. 그래서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필자는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몇 명씩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는 것인가를 묻자. “예! 수석 부목사는 1000명정도의 성도들 가정의 이름을 외우게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목사님들도 대개 80명 정도씩은 항상 외우도록 강조합니다. 전도사님들도 적어도 자신의 기관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외우게 합니다. 저는 목회란 곧 양떼를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목자가 자기 양떼의 이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시험을 친 뒤에 성적이 좋지 않으면 반드시 인사상의 불이익을 줍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이 아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양떼들에 섬김의 철저한 자세라고 생각이 들었다. 최종천 목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가슴에 많이 남았다. 그 뿐 아니다. 부 목사에 대한 그의 교육은 철저하다고 소문이 나있다. 호텔의 과장을 데려다가 매너 교육을 시키는가 하면 교역자들이 일단 교회에 부임해오면 생명보험부터 들어놓게 한다는 것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전도하고 심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각오하라고 생명보험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그의 지론은 이렇다. 신학교에서 배출되어 나오는 목사는 기본적인 이론밖에 배워 나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첫 번째 담임목사를 잘못 만나면 평생 잘못된 방법으로 목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한국교회에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당중앙교회를 거쳐가는 목사에게는 목회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게 해서 부 목사들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갱신하겠다는 당찬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분당을 한국의 표본으로 분당중앙교회를 거쳐간 목회자들은 이미 각 교회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그는 자랑했다. 실제로 그는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이요. 행동하는 목회자였다. 그렇다고 그가 과격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현재 교단의 신학교인 총신대학에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학과 전학생들이 모두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는 일차로 100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석좌교수제를 실천하고 있는데 지금도 3명의 교수가 총신대학교 석좌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저는 새벽 4시 30분 새벽기도 가는 것을 출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6시부터 9시까지는 어김없이 심방을 다닙니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이렇게 많이 모이게 되고 소문이 좋게 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여드릴 것이 없으니 보신 그대로 솔직하게 적어 주십시오” 인텨뷰를 끝내면서 최 목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분당중앙교회를 나서면서 그가 한 말이 귀를 떠나지 않았다. “목사님 저는 분당을 복음화 할 것입니다” 그렇다 누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다고 하는가? 아직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하여 일군을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영광을 받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시간이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분당중앙교회를 통하여 분당이 한국의 표본적인 복음화 도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2.안산제일교회 “십자가 목회로 안산을 깨치는 고훈 목사 (장로회신학대학원, 시인, 현안산제일교회 담임) 안산고잔벌의 십자가 서울에서 광명을 거쳐 수인산업도로를 타고 20여분간 달리다 보면 안산의 중심가라고 할수 있는 고잔동에 도착한다. 지하철 4호선이 거의 종점에 이르는 곳 안산 중앙역에 내려도 된다. 전원공업도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에서 경남 창원 다음에 조성되어진 공업도시 안산, 이제 2단계로 고잔벌 200여만평에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 중이다. 그곳 고잔 2동에 안산제일교회는 자리잡고 있다. 37년전 포구가 가까운 허허 벌판에 불과하던 이곳에서 청년 전도사로 부임해와 이제 안산제일의 교회로 성장한 안산제일교회는 그야말로 고훈 목사의 십자가의 목회의 결과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 이교회는 해외에 30여곳 그리고 10군데의 직접적인 선교지원 국내 특수 선교 30여곳등 나아가서 150여군데의 미자립 농.어촌 교회에 지원을 하는 십자가를 지는 교회로 소문나게 되었다. 어느듯 3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되었지만 그 세월동안 고훈 목사는 한순간 한눈 팔지 않고 묵묵히 한자리를 지키면서 십자가를 지는 신앙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왔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이 교회성장은 고훈 목사의 이러한 십자가 목회의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산제일교회는 일찍부터 선교와 구제 봉사에 남다르게 헌신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이러한 선교와 구제 봉사는 교회의 제도적 측면 보다는 각기관 혹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다른 교회와 다르다. 이렇게 해서 매년 거두어 지는 선교비가 10억에 육박한다고 한다. 십자가를 경험하는 예배 안산제일교회는 현재 주일 낮예배는 모두 4부로 나누어서 드리고 있다. 그러니까 1부가 오전8시, 2부는 9시30분, 3부가 11시. 4부는 오후 1시로 모이고 있다. 현재 연건평 1000평의 교육관 건립을 마치고 제2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교육의 기틀을 확실히 다지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안산제일 교회의 예배의 특징은 겉으로 보아서는 장로교의 다른 예배와 같이 평범하게 보인다. 그러나 고훈 목사의 십자가 목회철학에 의해 구성되어진 치밀한 구성이 엿보인다. 그것은 에배가 십자가를 체험케 한다는 것이다. 첫째 십자가의 체험은 회개의 기도를 통한 갈보리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다. 우리가 갈보리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그 참혹한 십자가를 경험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에서는 언제나 이 갈보리의 십자가 생각나야 하는데 안산제일교회의 예배에는 이것이 느껴 지는 것이다. 성결교회나 감리교회의 예배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장로교 예배에서는 이것이 자주 생략되는 수가 많다. 그런데 안산제일 교회는 담임목사인 자신의 대표기도에서부터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오 하나님 자비로우신 주님, 지나간 한주간을 우리가 주님과 무관하게 살며 주님과 동행하지 않은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구원 받은 ㅈ로서 마땅히 주님의 닮아 주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닮고 세상의 말을 쓰고 세상방법으로 살았읍니다. ------ 해서는 안될 일을 행하므로 지은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알면서도 지은 고범죄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성령을 거스린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렇게 목사 자신의 죄부터 솔직히 드러낸 다음 성도들에게 회개 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함께 통성 기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도들은 갈보리의 십자가를 경험케 되는 것이다. 통성기도가 끝난 후 고훈 목사는 참회의 선언을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하사고 그 땅을 고칠지라.’ 그 다음 경험케 되는 십자가는 우리 대신 질고를 지시는 예수님의 한 없는 사랑에 대한 십자가이다. 이는 곧 우리를 부하게 하시려고 가난학 되신 예수님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가 져야할 십자가이다. 우리 각자에게도 주님은 십자가 있다고 말씀 하셨는데 인생은 이러한 자기의 십자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주님을 쫓아가야 하는 삶인 것이다. 고훈 목사는 이러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아무 말없이 37년을 져 왔기 때문에 교인들도 스스로 제십자글 지는 일을 기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러한 십자를 경험케 되는 예배가 오늘의 안산제일교회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십자가를 경험케 되는 예배는 다른 곳에 있는 것 아니라 단위에서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과 단밑에서 그대로 살고자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일치 시킬 때에 그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고훈목사의 설교와 삶은 십자가 그 자체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큰 부흥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고 생각 되어진다. 그는 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예배라고 말한다. 창세가 8장 20정에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순결한 짐승들을 종류별로 잡아서 번제 드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순결할 짐승은 축복의 씨앗이라고 할 수있는데 그것을 잡아서 드렸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축복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예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창세기 22장 5월 이하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는 장면이 나온다. ‘번제’는 오늘날 ‘예배’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독자(独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예배라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았었는데 사탄이 나에게 경배 하면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 시험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물리치시면서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그것을 오나전히 물리치셨다. 이것을 보건대 하나님이 얼마나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받고 싶어하시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예수님의 삶을 연결시켜 보면 예배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출애굽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단순히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를 허락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예배에 있음도 우리는 잘알고 있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에서요 또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도 히13:14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고훈 목사는 말하길 요사이 교회마다 성경공부 운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성경공부도 예배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고 고훈 목사는 두 번 세 번 힘주어말한다. 모이는 교회 서구 교회가 흩어지는 교회의 기능은 발전했어도 모이는 교회의 기능을 읽어 버렸는데 이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날이 가까옴을 볼수록 더욱그렇게 하자’는 히브리서의 말씀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서구의 전철을 발지 않기 위해서는 끝임없이 에배를 개혁해얗 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안산제일교회는 21세기의 예배 위원회를 마들었다고 한다. 레저 문화의 발달은 주일 예배에 위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는데. 요사이는 I. M. F 때문에 상당히 수그러 들었지만 이러한 위기를 한국교회는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들을 통하여 어두움을 밝히고 새벽을 열어가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모든 예배에서 평신도 참여를 극대화 하는 것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예배에서의 구경꾼이 아니라 자기 역할, 자기 드림의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라고 늘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작은 그리스도’가 많아질 떄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고 그것이 생활 속에서 삶 전체로 그리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십자가를 만남으로 고훈목사가 오늘의 이 자리에 오기 까지 그는 젊은 시절 한창 떄 누워만 있어야 했던 투병생활의 깊은 곤고가 있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시금도 기억하기 싫은 고통의 시간 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쓴 시에서 병을 고치는데 10여년의 세월이 걸리고 다시 자신의 못난 자아와 자존심을 고치는데 무려 1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말한다. 그는 늘 말하기를, 그 시절 그 아픔의 계절을 얘기하지 않는 다면 저의 신앙과 목회, 인생과 시의 진정한 생명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삶과 죽음의 기로를 넘나들던 저는 무엇이 존재의 의미이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잊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라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약하면 약할수록 하나님은 그만큼 더 강하게 역사하시며, 내가 강해지면 하나님의 손길은 그만큼 작아진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폐결핵으로 10년 동안 외딴 섬에서 요양하게 하시고 낮추셨을떄,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의 실존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으며, 비교적 축복 가운데 안정된 목회를 하고 있는 지금도 그 삶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목회나 글, 시는 이러한 자기자신의 깊은 고뇌와 하나님의 연단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전 안산에 이웃해 있는 시화지역에 안산쪽의 대형교회들이 지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안산제일교회내에서도 시화쪽 교인들을 위하여 지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쪽으로 중지가 모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화지역의 개척교회 목사들이 이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아직 자립단계에 있는 시화에 대형교회들이 지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하면 개척교회 목사들은 어떻게 하는냐고 말을 하자 전격적으로 그것을 철회 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시화에 있는 목사들이 고 훈 목사에게 많은 감도을 받았다. 이처럼 고훈 목사는 자신의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고 그것을 당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동하는 목회자 인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목회 그것이 고훈목사의 철학 인 것이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설교 고훈목사는 주일 예배의 설교뿐아니라 평소에서 많은 설교를 하게 되는데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할까? 그는 무엇보다 먼저 설교는 첫째, 하나님 말씀자체를 선포하는 것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즉 종교개혁자들의 전통 가감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목회자의 삶을 통하여 선포되는 설교 즉 설교하는 목회자 자신의 삶의 고백이 있고 실천속에서 볼여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성도들의 삶의 고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서의 말씀대로 설교의 목회자가 살고 그리고 그 경험을 교인들에게 전달하게 되면 듣는 교인들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설교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가 어렵다고 말한다. 고훈 목사의 이러한 설교관은 그의 십자가신학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십자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헤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살리고 영을 살리는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그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고 자신도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고훈 목사 자신이 그러한 삶을 상아왔고 또 그것을 선포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그는 설교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살기 어려운 것이지. 그 만큼 고훈 목사는 설교를 목회의 비중있는 부분으로 생각한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 안산제일 교회에서 그 다음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축호전도’이다. 교인들이 1,000명이 넘어갈 때도 담임목사가 직접 나가서 축호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장년 출석이 3,000명이넘어가면서부터 외부의 부흥회나 세미나 인도 횟수가 잦아져 부교역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시작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안산제일교회의 표어가 ‘나도 한사람의 공동체’라는 것인데 그 의미는 나도 한사람을 전도해서 공동체를 키워가고 소속력을 키워가자는 것이란다. 그의 목회 방침이 ‘십자가를 지고 말씀으로 산다’인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세가지 교회가 있다. 첫째는 ‘헬라파 교회’로 시직을 추구하는 교회이고. 둘째는 ‘유대파 교회’로 능력을 구한다. 그러나 세 번째 교회인 ‘복음주의 교회’는 바울이 주장하는것처럼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안산제일교회는 십지가를 통한 자기 헌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교회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 말씀이 뒷받침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보듯이 복음을 증거하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은 교회의 일상사 였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그것이 하나의,프로그램이나 단발성 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실제 고훈 목사의 말처럼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안산제일교회는 이제 21세기를 앞두고 새로운 비전을 세워두고 기도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잔벌에 신도시가 세워지면 한번 더 옮길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그 것보다 다시금 현재의 위치에서 재 도약의 기회를 잡기로 하고 다가오는 21세기 서해안 시대의 기수가 되기 위해서 원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청소년과 노인들을 위한 수련관과 요양원을 세우는 일이다. 이일로 얼마전 위원회가 구성되고 제부도에 필요한 대지를 구입 이미 등기 절차를 마쳤단다. 이제 설계가 끝나면 곧 착공할 터인데 그곳을 통하여 청소년 선교와 노인복지의 새로운 장을 열게될 것이라고 한다. 선교에 있어서 만큼은 한국제일의 교회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꿈을 추진하고 있다고 고훈 목사는 이야기 한다. 3.경향교회 “불꽃 같은 절개로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담임목사 석원태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개혁주의 신앙으로 강서로 시대를 연다 “선지와 사도의 터 위에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그 중심사상으로 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고려)에 속한 교회로서 예수를 믿는 것이 삶의 목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된 사명을 감당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드리는 교회입니다” 이 말은 경향교회가 인터넷에서 자신들을 알리는 교회의 머리 글이다. 이 글에서도 나와 있듯이 경향교회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국교회에 대단히 큰 영향을 준 교회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먼자 간략하나마 경향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을지로에서의 경향 경향교회는 당회장 석원태 목사에 의해서 개척되어진 교회였다. 당회장 석원태 목사는 1973년 3월 25일 서울시 중구 을지로 3가 110의 1번지 건물 3,4층을 전세금 200만원에 계약하고, 부산에서 6명의 가족들이 그해 4월 10일 이사하여 4월 15일 가족 포함 13명이 첫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경향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해 4월말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기노회(고신측)로부터 교회설립허가를 받고 그해 11월 초대장로로 박을생 장로가 취임하여 11월 13일 당회를 조직하여 조직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동자동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다. 1974년 2월 16일 서울역 앞 중구 동자동에 소재한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관 건물2층을 임대하여 교회를 옮기면서 경향의 이동시대가 시작되었다. 개척 1년만에 교인수의 빠른 증가로 인한 것이다. 이해 5월 26일 석원태 목사 위임식을 거행하였으며 그해 우종선 장로가 장립을 받았다. 동자동에서는 2년 8개월 15일간 머물면서 여러가지 축복의 징조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본격저그올 경향교회가 발전하게된 것은 여의도에서이다. 1976년 10월 3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당시 주부생활빌딩(현 LG금융빌딩) 3층 100평을 임대하여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실로 대단한 모험이었고 결단이었다. 교회적으로는 이 결단을 '한강도하작전'이라 부를 정도로 비장함이 있었다. 이 시기는 교회적으로 참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로 기억된다고 교인들은 입을 모은다. 반고소의 대명사 고려교단 태동 1977년 12월 18일 주부생활건물 맞은 편의 여의도동 53번지 우정빌딩 4층 117평을 임대가 아닌 분양을 받아 교회를 옮기었다. 이 무렵 부산고신총회가 신자간의 불신법정 고소가 가하다고 의결하므로 빚어진 신학적인 변질과 생활의 불순에 대한 항의가 발단이 되어 경향교회는 이에 항거하고 총회를 향한 행정보류를 선언한 것이 이른바 고려신학교 복교운동과 반고소 고려측 운동의 산실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경향교회가 받은 3중 개척의 과제였으니, 곧, 교회개척, 신학교 복교, 교단형성이었다. 결코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섭리적 역사였다. 1977년 12월 19일 주일 우정빌딩 4층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우리는 이 시기를 교회의 정착기라 부른다. 교회 설립 이후 을지로에서 동자동으로, 여의도 우정빌딩으로 옮기면서 임대가 아닌 분양을 받아 비록 상가 건물이지만 교회소유의 예배당을 갖게 됨으로 안정된 교회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경향선교회의 발족과 더불어 세계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1980년 4월에 경향선교회를 설립하고 82년에 이태리 선교사로 한평우 목사를 파송, 83년에 인도인 선교사를 파송한 후 미주, 구라파 지역에 계속적인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89년부터는 제3지역 선교를 위하여 남미의 브라질, 러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에 선교사를 집중적으로 파송하여 선교의 방향을 교포선고에서 원주민 선교를 집중적으로 하였다. 또한 선교 정책도 교회 개척에 중점을 두어 현재 오대양 육대주에 74개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8,277명의 성도들이 출석하고 있다. 매스컴 선교에 있어서도 초창기 단순한 문서선교에서 라디오 방송선교, 카세트테이프 제작, TV방송선교 등으로 확대하여 선교의 효과성을 극대화 해나가고 있다. 이때부터 경향교회는 주는 교회로서의 로운 발걸읆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개척교회운동 전개로 350여 교회 해산의 산실 경향교회 개척으로 시작된 교회개척운동은 개혁주의 신앙의 고려교단을 형성하는 350여 국내의 교회설림의 모체가 되었으며 바른 교회운동으로 발전시켜 계속적인 교회 개척운동에 앞장서가고 있다. 기독교 사회복지운동의 전개를 위한 한국성민회 설립은 또 다른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기독교적인 사회복지 사업을 위하여 사회복지법인 한국성민회를 설립하고 신림동 지역의 주민들을 위하여 1995년 12월 종합사회복지관을 건축하였다. 한국성민회에서는 다양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복음과 접목시켜 영육간의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힘쓰고 있다. 또 하나 경향문화사 설립하여 100여권 서적 출판했는데 가장 최근에 한국교회를 위하여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에서 제일먼저 이단성을 문제삼아 이를 책으로 출판하여 개교회의 피해를 막는 일을 했다. 경향문화사는 본격적인 문서선교사업을 위해 1983년에 설립한 것이다. 지금까지 석원태 목사의 설교집, 강해집, 평신도문고, 교리집 등 다양한 서적들을 출판하여 보급함으로 문서선교의 폭을 확대해 가고 있다. 경향수양관 건립및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건립은 기독교 역사에 남을 일로서 1976년 동자동 경향교회서 복교된 고려신학교는 날로 늘어나는 선지생도들을 수용하고자 삼각산 기도원, 청량리 동도교회, 강남구 신사동의 상아탑 학원에서 다시 여의도 경향교회로 옮겨가며 수업을 하던 중 관악구 신림동에 2층 교사를 신축하고 안정된 학사일정을 수행하던 중 다시 하나님의 뜻이 있어 1989년 7월 17일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 산 2번지 6만 5백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1,500여평의 경향수양관 및 신학교 건축 기공예배를 드렸다. 다음해 12월 공사를 완료하고 1991년 6월 20일 준공감사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로 성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강서시대의 경향 경향학원의 인수 및 새성전 건축의 결의는 하나님이 경향에 주신 큰 축복이었다. 1994년은 경향교회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해였다. 하나님께서는 학교법인 경복학원을 인수케하시고 새 성전 신축을 결의하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경향교회 설립 20여 년이 지나도록 몇 차례의 새성전 건축을 시도하였지만, 때가 이르지 아니하여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세계선교운동, 개척교회운동, 신학교 운동에 전력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보다 큰 축복으로 경향 새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것이다. 1995년 7월 17일 역사적인 경향교회 새 성전 건립 기공예배를 학교법인 경향학원 현장에서 드렸다. 새 성전 건축공사를 시작으로 새로운 강서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1997년4월 16일 주일에 새성전 건축공정 50% 진척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그해 9월 28일 주일에는 새성전 상량감사예배를 드림으로 새성전의 위용을 실감하게 된다. 1998년 3월 1일 주일에는 새성전 실내 체육관을 완공하고 개관기념예배 에벤에셀 감사예배를 드렸다. I.M.F. 경제난의 여파는 여러가지로 새성전 건축에 어려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경향의 성도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대 역사를 이루어 오늘 입당감사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을지로와 동자동시대는 경향의 출발이었다. 여의도 22년은 사실상 21세기를 대비하는 준비기간이었다. 개척교회운동, 신학교 운동, 세계선교운동은 새로운 강서시대 도래와 함께 예기되는 21세기를 향한 준비 시기였다. 바야흐로 도래하는 21세기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세기이다. 마지막 세계종말의 선교시기이다. 모든 민족에게 땅 끝까지 예수의 복음이 증거도리 시대이다. 그래서 경향교회는 바로 세계를 받은 교회로 세계선교의 활주로가 될 것이다. 현재 경향교회에서 전개하고 있는 7대복음화 운동은 앞으로 이러한 비젼을 엿보게 한다. 첫째, 개인 구령운동- 교회부흥운동(3.3.3. 운동) 둘째. 개척교회 운동- 500교회 이상의 교회 설립 운동(개혁주의 한국 교회 건설 운동), 셋째, 신학교 운동-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운동(개혁주의 신학운동) 넷째. 세계선교운동-100명 이상 선교사 파송 운동(세계원주민 선교 운동) 다섯째. 학원복음화 운동-학원전도운동(기독교 학교 경영 운동) 여섯째. 기독교 사회 복지 운동- 이웃 사랑 실천 운동(시회 복지를 통한 전도 운동) 일곱째. 기독교 문화 운동-비기독적 문화 선용운동(빛과 소금의 역할 운동)등이다. 참으로 한국교회의 영성을 일깨워주는 불꽃같은 영성의 교회가 되기를 필자는 기대해본다. 4.갈보리교회 “한국교회에 새 좌표를 주는 박조준 목사 성장과정은 세상적으로 말해서 가정이 불우했습니다. 아버지가 16세 때 결혼하셔서 21세 때 저를 낳고 2년 후에 저의 여동생을 낳고 23세 때, 즉 제가 3살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 믿어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렀지 육신적으로는 아버지라 불러 볼 기회가 없어서 지금도 아버지의 감회가 남다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가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고 우리 가정이 풍유(?)가 있어서 우리 동네에 예배당을 짓는 터를 네 놓았는데 시골이었지만 예배당이 꽤 컸습니다. 그 당시에 평양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그것과 못지않게 큰 교회로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은 천명 모이는 것이 별거 아니지만 당시에 5~600명 모이는 교회(어른들이)가 상당히 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교회에 대한 애착이 컸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남에서 태어나 자라서 거기서 자랐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부터 믿는 가정이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고 교회만 다니다가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삼촌이 계셨는데 삼촌도 26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만 둘 낳고, 그래서 남자라곤 그렇게 두 분이 계셨는데 남자 둘이 모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까 내 마음이 ‘우리 집안은 이렇게 20대에 세상을 떠나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져서 ‘나는 어릴 때 뭐할까?’라는 생각을 자연히 가지게 되었는데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남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나도 잘하면 하나님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고 교회 출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6․25동란이 나고 1․4후퇴 때 피난 나오면서 애국심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군대에 들어가게 됐는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면서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하나님 살려만 주시면 내가 하나님 위해서 전적으로 일하겠습니다.’라는 결심을 하게 됐죠. 신학을 하려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대학에 다니고, 사실 같이 공부하고 같은 실력에 있던 사람이 연세대학 의과대학을 갔는데 나도 의과대학 갈 수 있지만 ‘의사가 되는 것보다 목사가 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의사보다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 신대원(장로회 신학교)에 갔죠.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 첫째는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하고 사람이 똑같이 일해야 하잖아요. 고린도서에 보게 되면 우리는 심고 가꾸고 물주지만 비를 주고 햇빛을 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니까 하나님과 우리는 동역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축복도 하고 우리가 그만큼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철학을 물어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 시대에 사람에게 이미 주어진 말씀인데 이 말씀을 어떻게 주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성경말씀을 가지고 주시는데 그래서 오늘 이 시대 사람과 이미 주어진 말씀을 연결해서 이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이 시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 사명이라 생각하고 성도들을 양육시키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시키는 것이 바른 목회라고 확신합니다. 사도바울도 폐역한 시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그랬는데 이처럼 방향감각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먹이고 바로 훈련시켜서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무엇인가를 지도할 책임이 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성장을 위한 조언 “성장이라는 것은 질적인 성장과 양적인 성장이 있는데 이 두가지가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수적으로 성장을 말한다면 콘츠탄 대제때가 제일 성장 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나 그 시대을 가르켜 기독교 역사상 ‘암흑의 시대’라 말하는 데 수가 성장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바른 기독교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워내는 것이 교회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많이 성장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만 과거에 교회스럽지 못하고 복음에서 떠난, 말하자면 샤머니즘적인, 기복적인 그런 것에 탈피해야 바른 성도들이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 기대도 많이 있는데 자기들이나 믿고 하는제 복이나 받고자하는 그런 교인들은 아무리 많아봐야 그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제가 왜 샤머니즘적인 것을 말했냐 하면 과거에 한국이 무속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굿하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본 뜻은 ‘이렇게 굿을 해서 어려움을 모면하고 복받고 편하게 살겠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사람이 천명이고 어떻고, 이천명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문자적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해야 하는데 빛이 발하려면 자신이 타야하고 소금이 맛을 내려면 자신이 녹아져야하는 것 처럼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섞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섞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그런 정신이 한국교회에 있어야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문자적으로 빛을 바라고 맛을 내는 교회로써 존재 의미를 갖을 수 있다고 봅니다”. 비젼이 있어야 하나님이 쓰신다. “목회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vision이 있어야 하는데 옛날 모세도 하나님이 보여주신데로 vision을 가지고 일했고 이 vision이 있을 때에야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치 않고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vision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vision이 있어야 Vital 생명력이 있고, venture가 있어서 모험이 있고 victor가 있어서 승리가 있다’ 라고 하는데 목회에 있어서 이런 vision이 꼭 필요하고 저는 복잡한게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교회가 되나’하는 게 저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크고 작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만 들면 바로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선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회가 교회다워야겠다’라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힘쓰고 있고, 지금 한국이 경제적으로 만불시대가 됐다고 해서 선진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말도 하고 그러는데, 만불, 이만불, 삼만불 GNP시대가 된다고 해서 국민의식 자체가 선진국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이 되려면 국민들이 특히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의식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애인을 어떻게 대하나’인데 옛날에도 장애인이라하면 벌 받아서 그렇게 됐다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그 사람이 범한 것도 아니요 그 부모가 범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안 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 마저도 육체적 어려움을 당하면 꼭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렇게 됐고, 벌 받았다하는 것은 성경 사상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고 세속적인 생각, 미신적인 생각이고 무속적인 생각인데 이걸 답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교회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좀더 발전시킬 계획인데) 시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 지체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금년부터 분당에 새로 짓는데 공간이 넓어지게 되면 그것을 확대해서 많이 돕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걸 앞장서는데 사회가 앞장설 수 없습니다. 가령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점자를 찍어 보급하는데 현재로는 우리가 제일 큽니다. 다른데에서 하다가 힘들어서 포기하지만 국가에서 갖고 있는 점자 도서관이 13개가 있지만 이름뿐이지 잘 운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안 만들어 놓을 수 없으니까 해 놓은 정도인데, 실제적으로 할 수 있어서 교회가 앞장 서가지고 사회가 이 방면에 따라와서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는 곳이 교회다’라고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확장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장애인 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그곳을 후원하는 분이 여러분이 있어서 거기서 모아지는 것으로 녹음봉사회와 점자 봉사회를 운영하고, 사랑부라고 해서 주일 날은 장애인들을 모아서 따로 예배 드리는 일을 합니다.” 한때 영락교회에서의 일로 전 정권의 박해를 받았던 적이 있는 박목사님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위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시면서 묵묵히 목회에만 전념해와서 오늘날 갈보리교회를 이만큼이나 성장시키셨다. 참으로 어려운 순간들이었노라고 회고 하시면서도 결코 흔들림이 없으신 목사님을 보면서 우리는 목회자의 한 표상을 보게되는 것 같아 마음 뿌듯하다. 5.한신교회 “별세목회 별세의 삶으로 목회한다.” 이중표 목사 한신대학원, 미국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D.Min) 교회성장은 진정 멈추었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성장한 뒤안길에서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성장을 추구하던 열정이 식어가고 있으며 또한 성장의 결과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주님의 교회라면 그 목표가 주님의 교회라면 그 목표가 주님의 기대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만약에 주님의 뜻에 일치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교회가 되지 못한다. 목회자가 목표를 세운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20)고 하셨다. 그러므로 목회의 최대 목표는 제자를 삼는 데 있어야 한다. 목회를 하면서 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에 목표를 세우면 세운 대로 이루어지고, 기도하면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때 그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에 스스로 성찰하는 일이다. 필자는 개척하고 3년 되던 해에 이런 목표를 세웠다. “전교인 성령 충만, 출석 교인 천명 돌파, 성전부지 300평” 이 제목을 보던 전도사님께서 필자에게 말하길, “목사님, 없는 것은 마찬가진데 1,000평으로 하시죠”라고 하여 그 말을 듣고 1,000평을 기도했더니, 1,000평을 주셨다. 참 신기했다. 그때 ‘기도라는 것이 참 중요하고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느끼는 것이 있었다. 목표를 세우고 기도한 대로 주신다는 것이다. 하루는 교인 한 분이 오셔서 필자에게 “목사님은 ‘0’을 치는 대로 잘되니 한번 더 쳐보시죠”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말에 ‘0’을 한번 더 치면 10,000평이 되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주께 여쭤보았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후 ‘0’을 하나 더 치고 기도하였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분당에 성전 대지 6,500평을 주셨다. 성전 대지 6,500평을 사놓고 자동차로 달려보니 너무 큰 땅이었다. “나도 한을 풀었구나! 이제 큰 교회의 목사가 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가슴이 부풀었다. 그리고 평소에 하지 않던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바람 불던 어느 날 배드민턴을 치다가 공이 날아가는 것을 쫓다 그만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그래서 두 달 동안 붕대를 감고 갖은 고생을 하여야 했다. 어느 날 누워서 빌 헐이 쓴 [목회자가 제자 삼아야 교회가 산다]라는 책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너는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많은 교인들을 모으고 목회를 해서 네 욕망과 꿈을 성취하려고 달려온 것이지 주님께서 세우신 목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넘어져야 한다. 지금 네 목표는 넘어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성령의 감동이 전해져 왔다. “네 목표는 나의 뜻이 아니다. 내가 네 기도대로 교회당을 세울 수 있는 넓은 땅도 준다마는 그것으로는 내 제자가 되지는 못한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상은 이중표 목사가 한 세미나에서 밝힌 간증이다. 먼저가 제자가 되겠다는 심정으로 먼저 목회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궁금해서 이를 먼저 살펴보았다.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 때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처음 읽고 성경을 접근하였으며 고등학교 2학년때 폐결핵 3기로 사경을 헤매다가 부흥회에 참석하고 예수를 영접하여 다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민족 복음화에 헌신을 결심,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이 한국신학대학을 지원케 하였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사역으로 목회철학을 삼게 된 경우는 무엇일까?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전북 정읍군 고부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하였다. 신앙적인 가정 배경도 없이 선배의 목회 지도를 받지 못한 채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1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시작된 목회였으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를 받게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여 날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밤이면 산에 올라가 이슬에 젖도록 기도했고 구원받지 못한 내 형제들의 영혼을 위하여 통곡하며 울었다. 가난한 형제들의 영혼을 위하여 나의 것은 저들의 것이 되었다. 살아있는 삶 전체가 빚진 자의 심정이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음성이 나를 사로잡았기에 사는 것 전체가 주님의 사랑에 미친 사람 같았다. 그곳에서의 5년의 목회는 하늘과 땅을 안고 살아가는 감격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곳에서 살기가 힘들었기에 아내의 떠나자는 호소에 다른 농촌교회(군산 옥구교회)에서 6년의 행복한 목회가 계속되었다. 전 지역은 나의 교구가 되었고, 불신자 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섬기며 돌보는 대상이었기에 지역 사회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보다 지역 사회 전 주민을 사랑하고 섬기는 목민의 목회자가 되려고 했다. 그 후 친구의 간절한 소개로 서울에 올라와 관악구 난곡동의 가난한 달동네에서 1년 3개월동안 교회를 섬기고 사임했다. 이러한 목회 과정속에서 목회 철학은 형성되어갔다. 나의 목회는 다시 사는 심정으로 일관되었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라”는 철저한 신앙고백이었으며 별세를 사는 심정으로 목회하여 별세목회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중표 목사의 목회의 중요 특징은 첫째 민족교회 목회라고 하겠는데, 그의 목회는 한국 민족을 위한 목회자가 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특징이 있다면 순교자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 한국 민족을 사랑하게 된 동기는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이 있다고 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국사를 공부하는 시간에 담임 선생이 이 민족의 비극의 역사와 망국의 한을 가르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자신의 눈물이 되었고 한국은 가슴에 새겨져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으면서 눈물로 몇 번이고 적시어 책을 얼룩지게 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비록 작은 농촌교회 목회자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목회자로 순교자의 삶을 살고 싶은 심정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신학대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단 한가지였는데. 한국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한국신학대학을 지망했다는 것이다. 한신교회를 개척할 때 그 이름도 ‘한국 민족을 신자화한다’는 뜻으로 ‘한신교회’라 이름을 지었다고 밝혔다. 이중표 목사의 목회철학은 한 마디로 공동체 교회로서 나눔의 목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한 교회의 성장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주님의 교회가 함께 성장하는 것이 소원이다. 그러므로 내 교회가 성장한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히려 내 교회 하나의 성장으로 많은 작은 교회가 어려움을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2)/ 2018-10-15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2) 15.성덕중앙교회 “세대를 허무는 예배로 성장하는” 김준수 목사 (총신대학 신학 대학원) 예배형태의 갱신은 가장 신나는 싸움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아직도 '예배 형식'의 갱신에 대해 '신앙적'인 열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은 말 그대로 '형식'일 뿐이다. 어떤 '본질'이나 '내용'을 '형식'의 목에 잡아맬 때, '의식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때의 '의식'들은 '내용'이나 '본질'들을 압도하고 변질시킨다.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그런 '의식주의자'들로 부터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태어났다. "개혁은 계속 개혁되야 한다"란 우리의 구호는 분명 그런 '형식'의 지속적인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형식'의 계속적인 갱신을 통해서 자꾸만 가려지려는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고 또 그것을 확장, 강화시켜 나간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교회 예배는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그렇게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의 모든 문화를 주권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하거나 버리거나 갱신해 나간다. 특별히 교회는 계속적인 예배갱신을 통해 세상 문화를 평가하고 영향을 주고 개량하면서 정복해 나간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하고 또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갱신은 '편견의 장애물' 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다. 성경은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한다? 로마카톨릭이 한 때 신앙처럼 고집했던 것이다.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했다. 그들에게는 라틴어만이 거룩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라틴어 성경을 자기네 나라 언어로 번역하려다가 잡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들의 죄목은 '불경죄'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종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자기 평생을 바치려는 선교사들이 구름떼처럼 일어나고 있다. 라틴어외의 언어(형식)로 성경(본질)을 번역하면 성경 파괴인가? 이젠 더 이상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조차 않는다. 이미 성경언어의 '형식' 파괴(?)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가 옛날에 번역된 한글개역 성경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 번역만 거룩해서가 아니다. 아직 새롭게 번역할 여건과 실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곧 '현대화'된 번역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지만, 때늦은 감이 많다. 시대에 뒤 떨어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지고 돌아서버린 새 세대의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찬송가에 없는 노래는 부를 수 없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교회들 안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예배 중에는 절대 '복음성가'를 부를 수 없었다. '복음성가'는 거룩한 예배에 어울리지 않는 '불경건한 찬송'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졸지에 '복음'까지 불경건해진 것이다. 조금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찬송가 중에서도 앞부분에 있는 예배용 '찬양곡'들만 부른다. 그리고 그보다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아예 찬송가를 버리고 시편만을 새로 작곡해서 부른다. 하나님을 더 아름답게 섬기려는 것은 아주 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들이 선택한 '표현방식'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을 '본질화'하고 '교리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면 불필요한 분쟁만 낳을 뿐이다. 어떤 교회가 어떤 형식의 곡으로 된 노래를 부를 것이냐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서 있는 시대와 지역과 삶의 정황 속에서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또 지금까지 그래 왔다. 따라서 그런 결정은 또한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음악가로서도 하나님은 얼마나 탁월하시고 풍성하신가! 그러나 인간의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음악은 제한 받으신다. '찬송'의 대상과 내용 등은 바꿀 것이 없다. 그러나 예배의 '찬송가'는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부르는 사람들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찬송'은 불변하나 '찬송가'는 늘 변한다. 이렇게 교회는 예배용 찬송가를 통해 세상 음악을 평가하고 승화시키고 선도한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현대화는 세속화이다? 예배의 형태를 현대화한다는 것은 곧 세속화를 의미하는가? 나는 현대화와 세속화를 이렇게 구별하고 싶다. 즉 현대화는 교회가 주권적으로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는 것이고, 세속화는 교회가 피동적으로 세상의 문화에 정복당하는 것이다. 현대화는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세상 문화로 옷입는 것이고, 세속화는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이 교회의 문화로 옷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현대화에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 문화를 충분히 평가하고 심판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는 말도 된다. 이러한 교회의 현대화를 말씀의 성육화에 비유해 설명할 수 있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그 말씀은 '육신'(지금, 여기의 문화)을 입을 때 비로소 '복음'이 된다. 그리고 '복음'이 되어야 사람들이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 교회의 현대화는 그 말씀이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지는 '복음'이 되기 위해 '성육화'(문화화)하는 한 과정이다. 모든 '표현방식'은 그렇게 '시대성'과 '공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현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현대화하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화된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당대의 문화를 평가, 검증하고, 그 방향을 지시해주는 최종,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땅위에 임한 천국 군대로서 세상 문화를 그렇게 정복한다. 예배의 갱신은 예배의 파괴이다? 예배는 한번 '복음화'하느라고 진통을 겪은 적이 있다. 신약교회가 율법의 성전제사에서 다락방 예배로 거듭날 때이다. 그 때 당시 사회와 교계에 이것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아마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율법 파괴, 성전 파괴, 제사(예배)파괴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예배가 복음화되는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1500여년 뒤 다시 한번 '복음화'를 위한 진통을 겪는다. 교회가 로마카톨릭의 의식주의화된 예배에서 믿음의 예배로 돌이킬 때였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오직 믿음으로!"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와, 예식의 공로를 내세우던 로마교회의 심장을 말씀의 검으로 찔러 버렸다. 당시 개혁자들의 갱신 행위들이 로마교회에서 볼 때는 분명 파괴행위에 불과했다. 그렇다! 항상 '복음화'는 '파괴 행위'이다. 그러나 예배의 갱신은 예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비복음적이고 비신앙적인 사상과 예식 행위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뒤로 교회의 예배는 거듭 거듭 '복음화'해 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에 따라, 또 교회가 세워지는 시대에 따라 교회 예배는 계속 옷을 갈아 입었다. 그것은 철을 따라 자연이 옷을 갈아 입듯,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듯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만약 그런 '형식들'에 우리의 믿음을 실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경건한 죄이다. 초대교회의 예배갱신이 그리스도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고, 중세 개혁교회의 예배갱신이 성경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현대 교회의 예배갱신은 삶의 정황들을 새롭게 인식하는데서 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예배갱신은 본질과의 싸움이 아니라, 본질을 더 강화 시키고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형식들과 벌이는 싸움이다. 전통적 예배가 성경적이고 현대화된 예배는 유행적이다? '전통적'이란 말 자체가 곧 '문화적'이란 말이다. 예배 형식을 전통적으로 고수하겠다는 말은 옛 문화옷을 그대로 입겠다는 뜻이고, 예배 형식을 현대화하겠다는 말은 새 문화로 갈아 입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배를 현대화하려 할 때 '유행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전통주의라는 것도 역시 큰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의 유행적이다. 역사 속에서의 보수와 개혁은 두고두고 갈등하는 존재다.그러나 전통이 되지 않으려는 유행이 없고, 변하지 않으려는 전통은 없다. 사실은 전통이든 유행이든 그 변화에 있어서 '속도'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 옛 문화와 새 문화의 경계선은 멀리서 보면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사라져 버린다. 엄밀히 말한다면 전통적이란 것은 현대화되어 가는 속도가 '유행적'인 것 보다 조금 늦은 것이고, 유행적이란 말은 그 속도가 '전통적'인 것보다 조금 빠르다는 것일 뿐이다. 그 둘의 차이는 시간과 정도의 차이다. 그러므로 같은 개혁 교회들 안에서의 다양한 예배 형태의 차이는 신학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차이다. 그런 갈등과 혼란들은 자유에서 오는 것이기에 교회를 쇠퇴 시키지 않고 오히려 신선하게 하고 강화시키고 성장시킨다. 그러므로 예배의 갱신을 두려워하거나 소극적으로 대하기 보다는 적극적 긍정적 자세로 그 작업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시작한 것은 교회안에 들어오면 안된다? 민감하지만 너무나 상식적인 문제이다. 만약 교회 안에서 이교도나 불신자들이 먼저 사용한 문화(언어, 옷, 예식, 습관등)들을 다 골라내 버려야 한다면 어쩌면 건물도 안남을지 모른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약속을 담기 위해 취하고 있는 '언약형태'도 고대 근동지역 여러 나라들이 사용하던 '계약방식'이 아니던가? 또 그것은 당시대 사람들의 '종교예식'이기도 했다. 할례도 그렇고, 제사들도 그렇다. 구약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들이 사실은 대부분 이방인 중에 이미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문화들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것들에 새 이름을 주시고 새 의미를 부여하시고, 그리고 새 형태로 갱신해 주신다. 하나님의 그일은 세상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해 계속 시행되고 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의 어느 것이든 주권적으로 평가 혹, 취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신다. 무엇이든 하나님 손안에 잡히면 새 것이 되며 특별한 것이 된다. 십자가는 저주의 사형 '틀'에 불과했지만, 보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 안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신 최고의 예배 '틀'이 되었다. 교회가 예배의 '틀'을 갱신한다는 것은 세상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교회의 사명이라는 맥락속에서 이해되고 또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신앙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기위해 세상의 모든 문화를 평가하고, 취하거나, 버리거나, 새로 바꿀 수 있는 권세와 의무를 갖는다. 예배는 오직 드리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는 것일까? 물론 '드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예배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예배의 의미를 좁게 이해한 것이 아닐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도 하고, 예배자끼리 서로 나누기도 하고,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증거하기도 한다. 쉽게 성찬식은 모든 예배 예식의 정점이다. 그런데 성찬식은 드리는 것과 받는 것, 그리고 서로 나누고 증거 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성찬예식의 중요한 목적은 네가지이다.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감사 기념하고, 그 회복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된 은사들을 서로 나누고, 그리고 증거하는 것이다. 예배는 찬미의 기능과, 연합과 교제, 그리고 세상 문화와 영혼들에 대한 복음선포라는 '선교적 기능'을 갖는다. 실제로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의 예배를 '보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외쳐야 한다면 교회에서 저들에게 보여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광스런 예배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예배에 초청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배에 처음 참석한 불신자도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다. 누가 감히 '당신은 예배자가 될 수 없어!'라고 하면서 저들을 가로 막아 서고 되돌려 보낼 수 있는가? 성덕중앙교회는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즐긴다. 본인이 섬기고 있는 성덕중앙교회에서 매주일 밤마다 3년째 드리고 있는 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간단히 소개한다. 첫째, 온 가족이 드리는 '세대통합'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세대차이가 극복된다. 예배의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앉아서 함께 춤을 추며 노래부르고 함께 설교 듣고 함께 기도 드린다. 둘째, 찬양의 강물에 순서들을 꽃잎처럼 띄운다. 경쾌하고 쉬운 곡조의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윈도우즈라는 중창단이 전체 노래를 진행하고, 매주일 돌아가면서 부서별 성가대가 특별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한달에 한번씩은 미리암, 마스길등 성인 남녀 중창단이 특송을 부른다. 드럼, 키보드, 피아노, 호른, 클라리넷 ㅆ서폰, 나팔, 기타등 가능한 많은 악기가 동원된다. 그리고 율동으로 찬양한다. 할아버지부터 유치부 아이까지 온 몸으로 찬양한다. 강대상을 치워 무대로 준비된 강단에는 담임목사와 율동 팀이 선다. 그 아래 강단에는 윈도우즈 노래 팀이 선다. 셋째 단막극을 무대에 올린다. 매주 새로운 주제로 10여분짜리의 단막극을 한다. 생활 주변에서 부딪치는 갈등들을 다룬다. 단막극을 보면서 온 회중의 마음이 강단 위로 다 올라오고, 활짝 열린다. 재미가 있고 공감대가 있다. 삽시간에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회중석에서 박수와 함성과 웃음과 응원 등이 터져 나온다. 단막극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두가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한다.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 누구 하나 마다하질 않는다. 넷째, 현실의 문제를 치료하는 복음을 설교한다. 단막극이 끝나자 마자 설교가 시작된다. 주제는 단막극이 다룬 것과 똑같다. 단막극을 통해 잘 갈린 밭고랑에 이제 씨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이 설교는 쉬워야 하고, 또 짧은 시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15분). 일단 말씀이 선포되면 그 이전의 모든 순서(단막극 등)들을 깨끗이 잊을 정도로, 순식간에 회중을 설교에 몰입시켜야 한다. 설교에 실패하고 예배에 성공할 수 없다. 다섯째, 뜨거운 통성기도가 있다. 아이들이 자기 부모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며 함께 기도한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 드린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가정과 학업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온 가족이 함께 기도 드리는 것이다. 현실의 여러 문제를 직접 하나님께 내놓은 연습을 부모자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여섯째, 수십 명이 예배를 준비한다. 성가대나 안내위원등 일반적인 봉사자들을 빼고도 최소한 50여명이 열심히 뛰어야 예배가 준비되고 진행된다. 그만큼 온 교우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예배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만큼 열의가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우리 자녀들이다. 열심히 예배 준비하는 저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일곱째, 철저히 준비한다. 예배의 진행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워 보인다. 모든 순서가 거의 자동으로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방송 콘티를 짜듯 예배 진행표를 계획하고 연습해서 진행한다. 전체 진행 시간은 70분 정도이다. 다양한 순서이지만 진행속도는 무척 빠른 편이다.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끝내고 나면 잔치를 치른 기분이다. 마음에 예배의 감흥이 강물처럼 남아 출렁거린다. 온 가족이 매주일에 한번씩 이런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닌가? 요즘 '열린 예배'란 말을 많이 한다. 열린 예배가 되려면 우선 하나님을 향해 열려야 하고, 예배자(세대간에)끼리 서로를 향해 열려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세상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열려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도 세상 문화와 영혼들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창조명령(문화명령)을 수행해 나간다. 예배 형식의 갱신은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문제이다. 16.광명교회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는 교회” 함기룡 목사 (그리스도의 신학대학, 신학 대학원) 오직 말씀으로 개척 10년, 복음을 전하기가 수도권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광명시 본 동에서 인근교회의 부러움을 사며 매일매일 새롭게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광명교회, 담임목사 함기룡, 아직 매스컴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씀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를 "말씀에 사로 잡힌 목사"로 기억한다. 광명시청을 못가서 광명 1동 후미진 골목 안쪽에 위치한 광명교회는 개척후 2년만에 지어져 연건평 400평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겉모습과는 달리 사치스럽지도 않고 그저 소박한 예배당에서는 매주일마다 3부예배가 드려져 일주일내내 천여명의 성도가 몰려와 은혜받고 새로워져서 돌아간다. 광명교회 함목사의 목회사역은 한마디로 말해 살아있는 운동력을 믿고 그 말씀을 높이며 자랑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광명교회에는 보통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프로그램이 없다. 전도운동도, 총동원 주일같은 것도 없다. 오직 성경읽기와 성경공부 그리고 예배와 찬양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00%이상의 성장을 해온 것이다. 인근의 교회들이 힘들어서 들어서고 나가고 하는 가운데서도 광명교회는 소문없이 성장해온 것이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함목사를 붙들고 기자는 몇가지만 대답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앙의 배경 먼저 함목사 자신의 신앙배경부터 물어 보았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믿음이 싹텄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도 어렸을 때부터 성경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도와야겠다고 느끼게 된 것은 '상주심에 대한 믿음'이 생길때부터였습니다. 즉 주님을 믿는 신앙에서 더 성숙하여 내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섬김의 믿음은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은사가 나타나서 기도해주고 심방해서 위로해주는 정도였지 내가 받은 은사로 사람을 섬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지요. 그러다가 목회를 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분이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나를 섬겨 주신 것처럼 나도 사람을 섬겨야 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 제 믿음이 자라게 된 결정적인 계기인 것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참석해 들어본 목회자를 위한 성경공부 모임(매주 목요일 5시부터 광명교회에서 모이고 있다)에서 함목사는 유달리 "십자가의 도"를 강조했다. "십자가의 도"란 한마디로 주님의 고난당하시고 죽으심 즉 섬김의 도를 믿고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부활과 영생과 섬김과 고난을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축복을 강조하고 은사와 신유를 강조하면 사람들이 모이지만 "십자가의 도" 즉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일"에는 모두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비단 오늘의 신자들만 그러한가? 아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들도 십자가의 도를 배우기 전에 모두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함목사는 주님을 믿는 진정한 맛은 섬기면서 내짐을 질 뿐 아니라 남의 짐까지 져주는 말씀을 실천을 할 때에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직 불혹의 나이에도 이르지 않는 함목사에게 신학을 하게 된 동기를 물어 보았다. 그가 굳이 신학의 길을 택하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되기까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신학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고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중에 곁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을 보게 되니까 목사님의 사역중에 비성경적인 것 같은 부분도 많아 보이고, 또 목회를 너무 어렵게 하시는 것도 같고, 교회마다 문제 없는 곳도 없고, 그 뿐 아니라 장로님들의 알력은 어떻게 그렇게 많을까요? 그래서 제 어린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믿되 목회는 절대 안해야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3때 진로를 결정하려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한다는 마음보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 때문에 하지 말아야 겠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거부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그 후에 복막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3년정도 복막염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은 두 번을 다녔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하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아버렸지요. 그런 후에야 '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징계였구나'하고 생각게 된 것이지요. 그후 하나님이 저를 구체적으로 인도하셔서 졸업때까지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대로 주신 은사를 따라 전도하고, 심방하고 또 환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나음을 입었고 그 일로 인해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신학교 졸업반때 였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다져진 영성 올해 39세, 아직은 원숙한 중년의 모습보다는 청년의 기개가 더 느껴지는 함목사, 어디서부터 그런 믿음과 말씀이 샘솟듯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새벽기도 한 번 빠진적이 없는 신앙, 그리고 성경은 100독이상 했고, 시편과 잠언은 도대체 얼마나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없다는 함목사, 우리는 그에게서 인간적인 모든 요소를 배제한 채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그 말씀에만 의지하는 참 목자를 보게된다. 특히 광명교회는 시간시간마다 칠판 설교를 한다. 거의 두시간 정도 진행되는 설교동안 한 번도 성경책을 펴들지 않고 오직 기억에만 의지한채 설교 한편당 100여구절의 성경을 구슬꿰듯이 꿰어 나가며 설교한다. 듣는 이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비밀이 풀려나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필자는 다시한번 교회개척때의 이야기와 목회철학을 물어보았다. "교회 개척도 하나님의 강권하심 때문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의 허물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차츰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주님의 심정을 깨닫게 된것이지요. 영광의 보좌에 계셨던 주님도 나를 위하여 섬기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어 주셨는데 내가 섬기고 고난당하고 죽음에 넘기우는 것을 무서워하고 싫어한다면 그것이 어찌 믿음일까 보냐 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왜냐면 사실 은사로 사람고쳐주고 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가르치면 대접은 더 잘받거든요. 그러나 목회는 인내하지 않거나 섬기지 않으면 열매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처음 병고침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청 건너편에서 개척되었고, 개봉동으로 잠시 이전했다가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따라 지금 이곳에 와서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10년이 되었는데 정말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10년을 돌이켜 보면서 왜 이렇게 우리교회가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해답을 주의법을 사랑해서 읽는것과 가르치는 것과 짐을 지는 순종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광명교회의 새신자 교육은 특이하다. 새신자로 등록하면 특별한 새신자 공부를 시키는 것 아니라 시편과 잠언부터 읽게 한다. 이는 시편 19편에 있는데로 하나님의 법이 영혼을 소생케하고,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교육의 방법상으로도 거부감이 없으며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잇점외에 말씀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게 해준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기도를 너무 강조해왔다. 그결과 신비주의와 기복주의가 속출하게 되었는데 이를 치료하고 교정하는 일은 성경읽기를 시작하는 일이라고 함기룡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할 때 비가오고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는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 읽기는 기본적이며 쉬운 영성운동 필자는 함목사에게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질문해 보았다. "제 자신부터 은사만 강조하고 그것을 사용할 때는 조금 교만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외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한 신앙은 믿음의 초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의 역사보다 사랑의 수고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실 성경중심으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어디있겠습니까마는 저는 더더욱이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교회에서 은사받고 교만하다가 넘어진 사람도 우리교회에 오면 안정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에 이미 모두 다 말씀해 놓으셨기 때문이지요. 유혹도 이기고 자신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말씀을 두기보다는 세상의 철학,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게 다 속는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주일동안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앞에서는 신앙을 잘 시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원수앞에서도 시인하라고 했는데 이 입술의 고백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라고 했는데 이게 잘 안되거든요, 저도 옛날에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자주 읽고, 또 마음 그대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나타나는 것은 말씀의 경륜대로 하자면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 이거든요. 그러니까 감당해야 할 고난이나 짐이 내게 오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뒤에 영광과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엔 이 비밀을 몰라서 성도들을 때로는 미워하고 고난을 비켜 갈려고 꾀를 많이 부렸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그 비밀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목회가 참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함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고, 또 그것이 능력이라고 재삼 강조한다. 끝으로 광명교회의 향후 비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저는 우리교회의 비젼은 마태복음 28:19-20에서 찾고져 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 성경책은 여러 종류가 많이 나와 있지만 그것을 매일매일 읽고 낭독하는 신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먼저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라고 말씀하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 가운데 기록한 데로 다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여리고성을 7일동안 도는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기도가 먼저냐 말씀이 먼저냐고 묻는다면 성경은 기도보다 말씀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매자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지혜자는 듣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듣는 가운데에 내마음에 그 말씀이 부딪히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길을 이미 성경에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즐겨 읽는자가 평강을 얻고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광명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미국이든 중국이든 가리지 않고 가서 가르칠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 때를 위해 가르치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이시대의 잣대로 보면 광명교회는 좀 별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의 잣대로 본다면 성경의 원리에 더 충실하게 가까운 교회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광명교회가 더욱 부흥성장하여 앞으로 한국교회의 말씀 사역에 더 큰 도전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 흔하디 흔한 교회성장 프로그램 하나 없이 오직 성경읽기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개척10년만에 600여명이 회집하는 기적을 일으킨 광명교회 위에 하나님의 더큰 축복이 넘치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17.분당 샘물교회 “순교자의 믿음과 영성으로 현대에 도전하는” 박은조 목사 (고려신학대-대학원-영국 런던바이블칼리지 졸업. 서울 영동교회 담임목사 현재 분당샘물교회 담임목사 고신목회자협의회 공동회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운영위원) 도덕적인 본모습으로...고신교단 새신앙 추구 장로교 고신교단은 개신교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으로 꼽힌다. 일제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인사들에 의해 해방 후 만들어진 고신교단은 '하나님 앞에 살자'는 모토처럼 대외적 활동보다 성경 정신 에 충실한 복음적 삶을 추구한다. 사진설명 : "땅 사서 예배당 짓는 교회가 아니고 지역사 회에 봉사하는 교회를 만들 고 싶다"고 말하는 박은조 목사. 그러나 80년대 이후 고신교단 내부에서는 무엇이 복음적인 삶인가 에 대한 성찰이 제기되고 새로운 신앙 형태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 나고 있다. 분당샘물교회 박은조(47) 목사는 그런 흐름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박은조 목사는 지난해말까지 17년간 봉직했던 서울영동교회 담임목 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박 목사는 70년대 후반 손봉호 서울대교수가 주도해서 평신도교회로 출범한 서울영동교회의 첫번째 담임목사로 시 무하며 고신교단 교회에 대한 외부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고신 교단 역시 종교개혁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은 세상을 섬기고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이 그동안 폐 쇄적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교회가 사회의 도덕성을 담보하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산의 절반을 지역을 위해 서울영동교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헌금의 절반 이상을 교회 가 아니라 외부를 위해서 쓴다는 점. 지난 97년의 경우 20억원의 헌금 중 11억원을 선교, 구제, 장학 등에 사용했다. 또 교인들은 혼자 사는 노인을 돌보는 등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에 열심이고 기독교윤리실천운 동, 밀알선교단 등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운동 단체에도 적극 참 여했다. 서울영동교회는 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전북 장수에 장애 인을 위한 11만평의 농장을 조성하는 등 장애인들에게도 관심을 쏟았 다. 또 북한돕기에도 적극 나서 평양의 병원 건립, 나진-선봉지구의 제약공장 건립에 적극 참여했고 탈북자들의 정착을 위해 강원도 홍천 에 '고향마을'이란 농장을 조성 중이다. 샘물교회의 분당시대 박은조 목사는 지난해 10월 스스로 서울영동교회를 떠나 분당에 샘물교회를 개척했다. 상가 건물을 빌어 서울영동교회 분당지역 교인 200 여명과 함께 시작한 샘물교회는 6개월만에 1000명이 출석하는 중형 교회로 자리잡았다. "한 교회에 너무 오래 있으니까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이 50이 넘기 전에 변화를 시도해 보고 싶었습니다."박은조 목사는 "학교를 세워서 기독교적 교육을 실시하고 지역주민에 시설도 개방하는 새로운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필자는 향후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성장은 목회자가 평신도를 얼마나 잘 동원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에 평신도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역조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로건박사는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는 「구역교회」(thecellgrou pchu -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이 말에 동의 한다. 여기서 구역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에서 모이는 구역예배이상의 것이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소그룹, 혹은 자석집 단(magneticgroup)을 의미한다. 새 시대의 새 교회는 감옥과 같이 사람들을 교회당에 가두어두는 교회가 되지말고 중앙집권에 서 탈피하여 현장목회로 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당샘물교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교회도 이러한 교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구역은 인간적 조직이상의 영적 생명체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구역교회는 바로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사도행전 2장42절에서 47절에 나오는 신약교회는 건강한 구역의 7대 기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① 교육---가르침을 배우고 적용했다(42절) ② 교제---다 함께 떡을 떼며 나누었다(42,46절) ③예배---성찬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 광을 돌렸다(42,47절) ④ 기도---기도하기에 힘썼다(42절) ⑤ 능력---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43절) ⑥ 봉사---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45절) ⑦ 전도---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47절) ● "고삐를 풀어라" 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효과적인 구역 혹은 소그룹을 가지려면 소그룹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분당과 같은 문화률이 높은 신흥도시는 상대적으로 개인주의 가 강하므로 소그룹을 통하여 교인들간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해놓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대인들은 익명성을 원하며 대형교회를 찾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를 위헤서는 소그룸은 필수적이다. 소그룹은 「교회 속의 교회」이다. 소우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소그룹만 잘 활용하면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체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소그룹은 또한 자석집단으로서 다양성과 수용성을 살려 모든 종류의 사람을 다 끌어들일 수 있고 포함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성별 나이 학력 경제 경험 직업 등에 따라서 얼마든지 독특한 자아정체를 가진 소그룹을 확장시켜 나 갈 수 있다. 살아있는 소그룹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포분열과 신진대사 가 원할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 다중리더십 필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당 샘물교회를 보며 생각하는 것은 다중리더쉽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그룹 혹은 구역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다중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즉 전체를 관장하는 구역장(leader)외에도 회원들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목양자(shepherd)가 있어야 하고, 비신자들을 끌어오는 은사를 가진 전도자(evangelist)가 있어야 하며, 장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초청자(host)가 필요하고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인도자(teacher)가 함께 있어 일종의 팀 사역이 가능해야 건강한 구역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맡게되면 항상 탈진하고 지쳐서 할 수 없이 일하는 형식적 리더십밖에 남지 않게 된다. 구역 활성화의 열쇠는 올바른 지도자의 선발과 훈련에 있다. 구역지도자를 위한 교육은 이른바 도제식 양육(appre -nticeship)이 성서적이다. 목회자가 생활과 사역가운데에서 함께 거하고 부딪치며 가르치는 교육이 실제적이고 효과적이다. 구역 지도자를 선발할 때에는 세 가지 자격, 곧 성품 경험 기술을 살펴야 한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영적 성품이 가장 중요하다. 경험과 소질도 중요하지만 우 선하는 것은 성품이 되어야 한다. 경험과 소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충될 수 있지만 좋은 성품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면 쉽게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역은 말 그대로 세포단위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복제되고 재생산되어야 그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성도 수 1백명 당 6개 이상의 소그룹이 형성되고 가급적 모든 성도가 다 참 여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전체성도 의 25-30% 정도만이 구역 혹은 소그룹에 가입되어 있는데 이 수치를 70-8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성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구역을 성도들의 동질성, 예를 들어 직업이나 나 이,혹은 은사에 따라 구분하는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 이러한 일련의 보충이 있을 때 분당샘물교회는 한국사회와 교계가 요구하는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2001년! 새로운 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이 불과 수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격동과 변화의 20세기를 살아왔습니다.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을 시작으로 하여 20세기는 이상 사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이 이 지구촌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20세기를 살았던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그 공산주의자들의 이념 전쟁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산주의의 망령이 걷히자 마자 옛날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는 인종과 종교가 얽힌 대 살육 전쟁이 몸부림치도록 처절하게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심슨 재판의 판결 결과가 보여주듯이 흑백간에 그리고 소수 민족과 주류 민족 사이에 심각한 인종간의 갈등에 시달릴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인종과 종교 문제는 인류에게 심각한 갈등과 문제를 던져 줄 것입니다. 또 처처에서 기근과 홍수로 인한 죽음의 소식이 들려 오고, 이상 기온이 전 지구촌에 엄습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구촌의 위기는 이러한 외부적 환경에만 감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적으로 현대인들은 전통적 가치 체계의 붕괴라는 정신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별히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으며 공공연히 교회를 비난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나태하고 게으르며, 일부는 교회를 떠나가기도 하는 배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치와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거짓 선생들, 거짓 교훈들, 거짓 가치관과 사상들이 만연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모습은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구촌의 마지막 날이 가까이 다가올 때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는 21세기에는 과연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어떠한 변화들이 우리 지구촌에 일어날 것이며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크리스천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21세기의 전망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이하는 이 지구촌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 서 있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지구촌에는 창조로부터의 변화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쳐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오는 21세기의 것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이러한 변화의 폭이나 속도가 줄어들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과학 문명 (Technology) 입니다. 현대인들은 누군가가 하나의 이념(Ideology)이라고 까지 불렀던 이 과학문명을 통하여---플라톤이 철학자들의 지배를 통하여, 모어가 유토피아를 통해서,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공산 사회를 통하여 꿈꾸었던 이상 사회를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학 문명은 지구촌과 인간의 생활을 빠르고, 편하며, 안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작고, 간편하며, 편리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도달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고, 단축시켜 왔습니다. 모든 것들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 창조하였지만 지금은 기계가 만들어 내고, 인간은 기계를 조작하거나 기계를 감리, 감독하는 일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하나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집채만한 컴퓨터를 가지고 일을 했지만 지금은 노트북이라고 하는 작은 컴퓨터로 대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 문명에 의해 주도되는 엄청난 변화 앞에서 인간의 생활 구조와 사회구조 역시도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 속에 있었습니다. 정보 시대의 기계문명과 서비스 산업의 비대화 엘빈 토플러는 이 시대가 제3의 물결이라는 정보 시대 속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보 시대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지식들을 축적해 놓았다가 그것을 필요할 때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정보 시대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옛날 컴퓨터 앞에서 책의 목록이나 찾던 시대에서 이제는 CD- ROM에 저장된 정보를 빼내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보 혁명의 큰 발전 중에 하나가 Internet이라는 정보망입니다. 이를 통하여 세계가 하나의 Commu -nication-net로 묶여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쉽게 말해 기계가 무엇을 인지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컴퓨터를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을 발전시키고 있는 기계문명은 인간의 노동 형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과거 땀을 흘리며 일하던 노동자들은 점점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 왔고 인간은 이 기계들을 감독하고 감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계 의존도는 나날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기계만 작동시키면, 그 기계가 알아서 모든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에 의한 노동은 기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함께 인간의 기능상실이나, 혹은 인간의 정신적인 쇠퇴를 불러올 위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계로 대체된 후 인간의 노동인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현재로는 대부분 서비스 직종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21세기에 산업 구조는 1차 산업(농업과 어업등)과 2차 산업(기계 산업) 인구가 축소되는 반면, 3차 산업 (금융, 세일즈, 가게 점원등 서비스 업) 종사자가 비대해 질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 보십시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엔지니어나 아니면 철강 노동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화이트칼라 종사자들이거나, 세일즈맨이거나, 아니면 서비스를 판매하는 자그마한 업체 종사자들입니다. 이러한 서비스 산업의 비대는 인간들을 더욱 첨예한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뿐 만 아닙니다. 인간의 실수나 아니면 파괴된 인공지능에 의해 기계가 인간을 공격하거나, 인간에게 엄청난 위해들 가져올 수 있는 일들이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도시화 및 인구의 도시 집중 20세기 우리는 이미 농촌의 붕괴를 경험하였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문화생활을 즐기기를 원하는 인간들은 이제 농촌이나 어촌을 떠나서 도시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농촌은 이제 농촌이라 불릴 만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2백년 전에는 95%의 인구가 농촌에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 때만 하더라도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가 많지 않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약 1백년 전에는 농촌 인구가 44%로 감소하더니 현재는 약 2%의 사람만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2025년이 되면 약 90%의 사람이 도시에 살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화 현상과 농촌의 도시화는 다양한 삶의 변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동시에 많은 도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인구의 도시 집중은 오히려 이웃과의 경쟁심과 경계심을 유발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이 주변인 (Secondary person)으로 전락하고, 이 주변인들의 소외감과 상실감, 그리고 범죄가 날로 증가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경계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집을 폐쇄시키고, 고립시킴으로 말미암아 점차 이웃이란 개념이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알고 있지 못하며, 그러한 지역적인 공동체 의식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집중은 도시의 거주 환경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공해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앞으로 20년 내에 남극의 오존층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인구가 모여 살다보니 사회는 복잡하고 다원화되어 인간에게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역 침범 21세기 노인 인구는 23%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가 있듯이 다가오는 세대에 인간의 생명은 연장될 것이고 어쩌면 22세기에 인간의 수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 될는지 모릅니다. 이제 하나님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이제는 인간의 것이 되었습니다. 낙태로 인한 생명의 단절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낙태를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유전 공학의 발전은 생명의 기원과 생명의 존재 방식에 대한 유전자 코드를 발견해 내 가고 있습니다. 이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어쩌면 인간은 생명의 비밀을 밝혀 내기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생명을 마음대로 연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생명을 언제 끝내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안락사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생명에 대한 권리가 점차로 인간에 의하여 조절되어 가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시 현상은 20세기와 21세기에 중요한 흐름이 될 것입니다. 변화가 던져 준 문제들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이 변화의 회오리는 인간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 많은 문제를 던져 준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전통 가치의 상실과 질병들 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많은 혜택 속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기계문명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폭과 깊이, 그리고 그 속도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나아가 인간의 정신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잡고 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변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기에 급급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조절에 대하여 어떠한 윤리를 적용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분분하며, 낙태 문제를 놓고 찬반 여론이 갈라져 있습니다. 앞으로 인간이 기계를 지배할 것인가 기계에 의해서 인간이 주도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미 컴퓨터가 인간을 주도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빠른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인간은 그 변해 가는 세상의 여러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변화를 충분하게 소화하고, 그 변화된 세상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그리고 그 현상에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나 명분들을 축적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류는 전통 가치들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 상실돼서는 안될 귀한 가치들---진정한 사랑이라든지, 우정이라든지 하는 고귀한 정신적 가치들---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상실 속에서 미래를 지배하고 이끌어 나갈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지 못합니다. 기계문명은 사회를 복잡하게, 그리고 다원화 사회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서비스 산업이 비대해 지면 비대해 질 수록 서비스 업종이 분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다양한 가치들이 새로이 창출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원화된 사회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인간을 자제시킬 수 있는 전통 가치들이 그 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인간은 가치를 상실하고 표류하는 혼돈과 혼란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이 혼란과 혼돈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21세기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가치 상실에서 오는 심각한 범죄의 양상들, 심각한 스트레스에서 오는 각종 질병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고, 땀흘리는 노동의 상실과 과다한 칼로리 흡수 때문에 야기되는 각종 질병들 앞에 인간은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병들은 기계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고 고칠 수 없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계문명의 한계입니다. 기계문명은 인간의 물질적 생활은 조정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을 조정함으로써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병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을 조정하고, 그 물질을 통하여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오염시킴으로서 발생한 인간의 정신적 질병과 문제들은 이 기계가 치료할 수 없습니다. 둘째, 서비스 산업과 오락의 지나친 비대 입니다. 1차 산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점점 그들의 직장을 떠나서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형화를 추구하는 기계문명 속에서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편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노동에 빼앗겼던 인간은 기계가 그일을 대신하여 줌으로 인하여 상당한 시간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하게 변화된 구조에서 인간은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남아 있는 시간의 여가를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기는 것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여가 선용과 스트레스 해소 욕구는 점차 거대한 힘으로 미국의 오락 산업(Entertainment)을 주도하여 가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요구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이들은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직접 스포츠를 즐기는 방법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레저를 즐기기 위하여 바닷가나 호수나 아니면 캠핑을 하면서, 조금 더 극단적인 사람들은 알코올이나, 마약의 남용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도박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걷잡을 수 없는 성 관계를 통해서 그들의 쾌락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들은 텔레비전에 의존하여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기거나 음탕한 심야 토크쇼를 즐기거나, 아니면 이상한 성적 주제들을 설정하고 상대방과 치열한 입싸움을 바라다보거나, 아니면 영화를 통해서, 다시 말하면 이러한 미디어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통해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그들의 여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여러 다양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 철학과 종교에서 일파를 형성했던 쾌락 주의자 에피쿠로스가 다시 살아나 이 시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쾌락주의 (Hedonism)의 공격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셋째, 물질의 인간 지배 입니다. 이러한 오락을 통한 즐거움의 추구 속에서, 그리고 물질과 기계에 의하여 주도되는 현대인들이 겪어야 할 가장 무서운 도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성의 몰락입니다.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 물질과 정신의 배합 속에 있다면, 인간이 다른 짐승과 물질 세계와 다른 점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성을 가진 생각하는 동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영성의 상실이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타락후 인간의 노동은 무엇을 창조하기 위한 노동보다는 자기의 먹을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노동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타락 후에 인간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문제가 상당히 해소된 21세기에도 인간은 먹기 위해서 노동을 할 뿐 아니라, 좀더 가지기 위해서,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하여 타락된 노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지금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구촌의 인류들은 물질의 지배라는 이상기류 속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적이거나 도덕적인 일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도덕적인 힘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조절하고 억제시켜 주는 여러 도덕적 가치나 표준이 그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현대인을 지배하는 것은 편하고 안락한 삶이요, 남에게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이것을 행복이라고 오해하고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주는 돈을 벌어들입니다. 사람들은 그 돈을 획득하기 위하여 남과 경쟁하고, 직장 생활을 합니다. 자기의 삶을 편하게 하는 이 돈을 획득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최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돈의 획득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최우선적 가치가 되어 버렸다는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이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 고려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의 일과 영적인 일의 우선성 (Priority)를 따질 때 영적인 일을 우위에 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물질이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돈을 버는 일을 최우선에다 두고 살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물신숭배(Mammonism) 혹은 물질의 인간 지 배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덕적 동물이요, 영적 동물입니다. 만약 도덕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이라는 사실들이 인간에게서 배제된다면 결국 인간은 포유류 동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동물적 본능을 억제하고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도덕성, 혹은 영성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물질과 본능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것이 바로 파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이러한 물질 추구에 대하여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 1:15). 인간은 "영성의 상실"과 "물신숭배"( Mammonism), 그리고 "쾌락주의" (Hedonism) 의 엄청난 영향력 속에서 점차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21세기에 예측되는 문제들을 정리하면 결국 사람들이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가치(Value)와 표준 (Norm)을 형성하고 정립하지 못한 채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자기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사사기 17:6; 21:25)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전통의 가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현대인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전통적 가치와 표준을 상실하고 자기 욕심이나, 자기 만족이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이자 표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와 표준의 상실은 인간에게 물신숭배라는 우상 숭배와 쾌락주의라는 부도덕성을 더욱 심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21세기 인간은 영성의 상실, 물신숭배, 그리고 쾌락주의 공격 앞에 대책 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공격 속에서 교회마저도 그 빛을 잃어 가고 그 맛을 잃어 가며, 세속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이 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적으로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살았는가? 2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는 목수 일을 하다가 30세에 공적인 사역에 뛰어들어 3년의 사역을 통하여 수제자 12명과 핵심적인 제자 120명 (예수의 승천 후에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며 미래를 대비했던 사람들), 추종자 5백명(예수의 죽음 후에도 40여일 동안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 그들은 감람산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승천을 바라다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엄청난 무리에게 강한 감화력과 영향을 미치고 사형수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그분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살았고, 그들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역을 통하여 모든 민족,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3)/ 2018-10-15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3) 27.수원서부교회 “개척부터 성장까지 오직 한마음” 손수호목사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수원의 성자 22년전 황량한 수원의 서부외곽지대,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개척해 이제는 수원복음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수원서부교회를 탐방하기로 한 것은 지난번에 소개되었던 안산의 선배 목사님의 추천을 받고서였다. 20여년 전 논과 밭뿐이었던 그곳에 대단위 택지개발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지금은 대도시의 아파트 빌딩 숲에 둘러싸인 그야말로 대형교회가 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경기 지역에서도 그 역할되어버린 수원서부교회를 탐방하여 손수호 목사와 인터뷰하게 되었다. 아직은 주위에 논과 밭이 어우러진 전원도시의 분위기가 더 강한 지역 수원역에서 안산방향으로 가다가 우회전하면 요즈음 한츰 개발열기가 뜨거운 지역이 나온다. 필자는 당회장실에 안내되어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궁금한 것은 그의 경륜에서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진단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해 달라는 주문을 해보았다. "저는 한국교회의 재 부흥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욥기서 22:23에 "내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고 하는 말씀에서 그 진단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침체기를 벗어나서 다시 부흥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전능자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즉 불의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침체의 원인을 무엇보다 먼저 교역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즉 교역자들이 이 말씀을 따라서 불의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면 다시 부흥의 축복이 온다고 봅니다. 특히 저는 개인적으로 고전3:16의 말씀을 좋아해서 늘 암송하고 다닙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고 계신데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멸망당함을 받은 것은 자명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금. 은 그릇이라도 더러워지면 주인은 쓰지 않습니다. 철 그릇, 돌그릇이라도 깨끗하기만 하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는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모두 세속의 물결을 따라 타락했습니다. 롬12:1-2에서도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하는데, 이러한 영적 예배 없이 형식과 외식에 치우친 예배만 일삼고 있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빛과 소금이 그 빛과 맛을 잃어버렸으니 오늘날 이런 침체가 온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침체를 지나 위기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이 무엇보다 앞서서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준비된 그릇이 되려고 이제 고희의 연세에 접어드신 경륜있는 한 목회자의 입에서 필자는 정곡를 찌르는 음성을 들었다. 그 말씀을 듣는 필자도 그 말씀의 정확함에 손이 떨리고 있었다. 과연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그분은 그렇게 22년을 한 교회에서 초지일관 성도들을 말씀으로 바로세우며 거대하게 밀려오는 세 속의 파도를 이기도록 성도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저 말뿐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러한 이해와 영성을 가짐에 있어 어떤 특별하게 영향을 받은 선배나 목사가 있는지 물어 보았다. "누구에게 영향 받았다고 하기 보다 내가 살아보니까 그렇게 해야겠더라는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느껴보니까 그것이 제일 중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 자신이 사는 길이고 아울러 교회가 사는 길이며 나아가 세상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너가 있고 내가 있는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예를 들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지난 22년동안 다방이나 이발소에 간적이 없습니다. 친구 목사 만날때에도 다방에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당회장실이라던지 제과점에서 만났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영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자신도 무지하게 애를 씁니다. 그 결심중 하나가 새벽기도회의 인도는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회생활 22년중 미국이나 외국에 나갈때를 제외하곤 일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나가 먼저 말씀앞에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저는 이일이 주님 집의 일을 맡은 머슴이다 생각하고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영성으로 손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필자는 1920년대 한국교회 부흥의 기수였던 길선주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주님 앞에 우리는 머슴이요 청지기"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 말씀이었다. 하지만 거룩하게 살고 싶은 우리 속 사람의 열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겉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가 탄식하며 사는데, 오늘 우리 성도들이 주님 앞에 거룩하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육신의 죄된 삶을 이기고 거룩하게 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예수 믿은 뒤의 삶은 한마디로 죄와의 싸움입니다. 성경은 말씀과 기도로써 거룩하여 지라고 하셨는데 이는 곧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서 자기의 명철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산다는 것은 곧 범사에 그를 인정하며 자기의 명철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 잠언 3장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면 죄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그 말씀의 신비에 놀라게 되고, 그 말씀에 사로 잡혀 순종하면 능력을 경험하게 되니까 하나님을 당연히 경외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저는 주님을 경외하며 섬김으로 얻은 축복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이러한 부흥이 어디 제가 잘나서 된것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말씀을 입에 두고 마음에 두면 곧 하나님이 내 마음에 있는 것이고 또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니까 내가 겸손하게 엎드려 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새로운 영성을 찾고 가꾸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하지만 손목사처럼 오로지 성경에 의지하여 초지일관 주님을 따르고 그분의 거룩함을 닮으려고 따르는 목회자는 흔하지 않다. 보화는 감추어져 있나 보다. 인기에 영합하고 정치적인 시류에 흔들리는 목회자보다 이런분들이 빛이 나야 하는데 너무 깊이 감추어져 있는 듯 하여 가슴이 아프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던가? 오히려 손목사같은 분은 이시대에 배척을 더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손목사의 목회를 축복하심으로 그의 손을 들어 주는듯하다. 수원서부교회가 있기까지 필자는 수원서부교회의 지나온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22년간 장기 목회하면서 단 한발 짝의 외도도하지 않은 성실한 목자의 개척 초기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교회는 1975년 6월 23일 설립되었습니다. 수원시라고 하지만 산간벽지와 같은 곳이 이곳이었습니다. 콩밭, 딸기밭이 있던 곳입니다. 저는 직업군인으로 육군대위로 있다가 예편되었습니다. 기독청년장교였던 저는 그 당시에도 골치 아픈 인물이었습니다. 중대장으로 복무하면서 느낀 문제점 51가지를 가지고 군사령관에게 갔습니다. 그것은 제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 부대 대장은 한신 장군이었는데 그분이 그것을 보고는 시정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저도 지휘계통을 문란케 했다고 구속되어 처벌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그일로 수십명의 장교들이 연루되어 처벌을 받았습니다. 어느정도 문제점들이 시정되었습니다. 비록 구속된 일은 고통이었지만 기뻤습니다. 그 이후 예편할 때까지 전군신자화운동을 벌이다가 사령관과 많이 가까워졌고 그일로 인해 저는 목회의 소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대하자 말자 신학대학원에 들어갔고 1학기가 마치기 전에 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입니다. 개척된 것도 참 신기합니다. 그때 총회에서 1만교회 운동의 일환으로 노회마다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는데 조준상목사의 추천으로 수원노회에서 교회를 개척해 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전세집 방한칸을 빌려 개척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개척 자금이라야 제가 살고 있던 집 전세금 70만원, 노회보조 1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교인이라고 우리식구가 전부였으니 황량하게 짝이 없었어지요, 남의 가정집 전세낸 주제에 그 집 굴뚝에다가 십자가를 붙이니까 주인이 당장 나가라고 했습니다. 결국 5개월 만에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땅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동네에서 목이 좋다 싶은 파밭에 앉아 이 땅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밤 12시만 되면 나가서 어김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인근의 할머님 한 분이 믿는지도 얼마되지 않았는데 임종하면서 헌금을 200만원 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총신대학원 1학년 때의 일인데 학교에서도 사당동 뒷산에 올라가 점심 한끼를 굶으면서 기도하곤 했는데 그 기도에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매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땅에다가 전세금 80만원을 빼서 첫교회 건축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수원서부교회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던 개척초기의 이야기를 할 때면 콧날이 빨개지고 눈에는 얼핏 물기가 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손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서 전력으로 기도했고 또 응답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도 개척을 하고 또 건축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선배 목사님들의 눈물어린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필자는 연이어서 교회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고 했다. 그런 과정속에서 어떻게 오늘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는지 직접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는 개척하면서 기도의 능력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도목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후로 어려울때마다 금식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기적들이 정말 거짓말 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장하는 교회의 그래프가 완만해 지더니 급기야 수평선을 그리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내가 40일 금식을 했는데도 하나님의 응답이 더딘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응답을 찾기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까이 하는자를 사용하시더라구요, 점차로 땅을 더 구입하고 또 243평의 땅을 더 사들여서 지금의 교회를 건축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재적은 1000명이 넘고 주일낮 예배 회집인원은 600명 정도입니다." 초지일관의 믿음과 순종으로 필자는 22년의 세월동안 초지일관 주님을 본받는 거룩한 삶을 살며 목회 해 온 손 목사를 보면서 그가 겼었을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생각해본다. 특별히 후배목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어려움과 축복의 사례를 들려주실 것을 부탁했다. "목회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물질이나 환경이 아니라 목자로서 양떼들을 바라볼 때 그들이 훈련이 안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즉 그들이 말씀은 많이 들으나 말씀의 생활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때 목자로서 한없는 실망감과 좌절 그리고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질적으로 양육되지 않는 성도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목회란 결국 이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데 이점이 가장 어려웠던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지 않았는데(딤후3:16) 선한 일, 즉 직분들을 맡겨 놓은 것입니다. 이때 돌파구를 찾는 것이 교육입니다. 다시 재교육을 한 것이지요. 기신자는 제자훈련으로, 초신자는 기초훈련으로 저들을 다시 교육시켰습니다. 설교만 듣고 있던 사람들을 다시 제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돌파구를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 프로그램에서 찾았습니다. 저부터 먼저 훈련받고 그리고 1기 2기로 훈련시켜 나가 지금은 제직 300여명중 150명이 저에게 직접 교육을 받았습니다. 손목사 때문에 운명과 인생이 바뀌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으니 제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리고 최근에는 전교인을 사명의 반, 전도폭발반으로 나누어 전도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저는 목회상의 가장 큰 위기를 오히려 축복으로 바꾸었습니다" 필자는 손목사와 인터뷰하면서 빈틈이 없이 말씀하시고 또 목회하시는 큰 거목과도 같은 목사님 앞에서 자신이 성장해가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28.일산벧엘교회 “바른 목회, 능력있는 메시지로 성장한다 ” 박광석 목사 (고신대학 신학대학원) 일산의 영적 보루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볼 만한 교회가 하나 있다. 바로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경기도 일산구 강선마을에 위치한 '벧엘교회'이다. 이 교회는 한국교회 성장이 멈췄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 시기에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는 초고속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교회로 장년 수만 단 1년 6개월만에 1,500명 이상이 증가하는 기적적인 성장의 길을 걷고 있다. 우선 벧엘교회의 출발부터 현재까지 그 과정을 박광석 담임목사로부터 직접 들어보자 말씀과 체험을 겸비한 신앙의 힘 박목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박 목사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신 나름대로의 뜻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대강 살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사람도 '하나님은 당신을 반드시 사용하실 것'이라고 자주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박목사는 어릴적 부터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체험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신학의 길로 돌아선 동기가 있다. 즉 이제는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야 되겠다고 다짐하게 된 때는 군생활에서 운동 중 발생한 특별한 사고 때문이었다. 갑자기 닥쳐왔던 사고로 육체적인 불편을 안고 제대를 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은 박목사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갖고 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냥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곧 건강의 회복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 위에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이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한때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편 생활에 뛰어든 적도 있었다. 그리고 학원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 앞에 빚진 것이 너무 많음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또 한 번 새로운 계기가 왔다. 박목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세상적인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서는 더 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 박목사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된다. 시험에 당연히 합격을 하리라 예측했지만 막상 합격을 하는 순간 성령의 사로잡힘을 경험하였다. 그 순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감동이 일어났다. '너는 내것이다' 그 후 박목사는 한 번도 소명의 길에 흔들려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도우시는 기적의 은총으로 꾸준히 한길로만 달려갈 수 있었다. 이는 배후에서 돕고 계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신 손길이 작용한 때문이다. 박목사의 선조들은 초창기 한국에 복음이 들어올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박목사 집안에서 목회자가 여러명이 배출되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부분이다. 고신 교단의 원로이신 한명동목사님이 이모부이시고, 전에 총신에 계셨던 이상근 목사님이 고모부되신다. 또 형님도 부산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박목사는 어릴때부터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신앙의 좋은 영향을 받은 부분도 상당수 있지만 반발감을 가졌던 부분도 있었다. 왜냐하면 어린 눈에 교회의 어두운 면이 비쳤는데, 목회자의 부정직성, 이율배반적인 삶, 지난친 물질추구 등이 보인 것이다. 또 교회안에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해롭게 하려는 일들까지 서슴없이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소들로 갈등하며 신앙의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회의와 번민을 거듭하다가 그가 얻게된 결론은 결국 세가지의 목회철학을 세우게 되었는데 첫째는 절대로 목회자는 이율배반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목회자 자신은 정직해야 한다는 것, 세째는 교인들을 진정한 신앙과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척에서 이전 성장까지 "일산벧엘교회는 초창기 1988년 2월 20일 서울 목동 6단지에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사실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울산 온산공단에 있는 교회에서 담임으로 봉사하던 중이었습니다. 특별한 동기보다도 갑자기 우리 장로님이 한 번 개척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당시 저는 유학가려고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제 심정에 물으셨지요. '너 유학 가서 무엇하려느냐?' 그래서 저는 '제가 유학 가서 잘 배워오면 이땅에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지금 바로 그렇게 시켜주겠다'고 하셨지요. 이것을 계기로 저는 별 준비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개척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박목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울산에서 목회하다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땅 서울 목동 지역에서 개척하게 된 것이다. 개척 당시 세가정 8명(장로님부부, 집사님부부 두가정, 연로하신 부모님)으로 시작되었다. 그후 하나님께서 꾸준히 성장시켜 주셨다. 옮겨 오기전 교인수는 150여명 정도였다. 좋은 교회로 소개되다 벧엘교회는 부흥회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목동에서 한 번 한 후 이곳에 이사와서 옥한흠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한 번 한 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으니 이는 담임목사가 평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얼마나 충실하게 잘 먹이고 있는지를 충분히 반영해 주고 있다. 전도에 대해서는 미흡한 점이 많다고 하지만 박목사는 전도를 체계화해서 훈련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벧엘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홍보 뿐 아니라 수요예배 1, 2부 중 오전에 1부 예배를 마치고 나가서 주로 아파트를 중심으로 전도를 하고 토요일은 시장이나 지하철로 가서 전도하고 있다. 하지만 박목사는 항구적으로 발전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중에 있다. 보이지 않는데서 나타난 교회 행정력 행정부분에 대해서도 박목사 스스로 취약분야라고 했다. 하지만 교인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아주 조직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박목사는 교인들의 눈으로 보면 아주 강하게 보여지고 있다. 행정적으로 잘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교역자들이 각 파트별로 분담하고 있다. 주로 3파트로 나누어서 하나는 행정적인 측면, 그 다음은 교육, 그리고 교구를 맡아서 관리하게 한다. 박목사의 행정력은 보이지 않는데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것은 교회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역의 전문성 개발에 주력을 벧엘교회는 현재 목사7명, 전도사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목사는 교회의 내적인 성숙을 위해서 우선 교역자들의 은사개발 및 전문화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또 하나의 성장 열쇠가 되며 오히려 성숙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부교역자들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성도요, 디모데같은 동역자라고 생각합니다. 잘 이끌어 주어야겠고 또 하나는 나를 위해서 저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재능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을 빨리 파악하고 개발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개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이 큰 몸집을 어떻게 잘 운영할 것인가 연구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몸이 가벼워도 힘 못쓰는 부분은 가치가 적습니다만, 몸집이 커도 힘을 쓸 수 있다면 큰 덩치만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방향에 어느정도 개발된 사람을 불러들여 전문화 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중등부를 맡았다면 중등부를 내 교회로 생각하며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해야 합니다." 장로님이 적은데 교인들은 여전히 불평이 없고 교회는 성장해 왔다. 장로를 아직까지 한 사람만 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담임목사의 엄격한 신앙기준 때문이다. 준비된 사람을 세우기 위함이다. 박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저희 교회도 앞으로 장로님들을 세울 준비는 있습니다만, 개인의 자질면에서의 약간의 부족한 것은 채워 나갈 수 있으나 약간 준비된 사람을 직분 주어 채워나간 다는 것은 많은 진통을 예비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훈련을 받아 준비된 사람을 통해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순수한 목회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영혼구령에 대한 뜨거운 열정 박목사는 지역 상황에 대하여 언급할 때 경제수준은 중류 정도임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는 것은 이 지역에 구원받아야 될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고 또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아직까지 구원에 대하여 확신이 분명치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는 영혼구령에 얼마나 뜨거운 열정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전도받아 오는 경우, 소문으로 오는 겨우 등이 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결코 등록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발적이 되도록 한다. 가끔 예배를 드리고 나가면서 처음 온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담임목사에게 한다. "저는 오늘 처음 나왔습니다. 참 좋습니다. 계속해서 나오겠습니다." 이말은 담임목사에게 한층 위로와 힘을 주고 있다. 한 시간반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예배드리는데도 잘 참고 은혜 받는 모습을 보고 담임목사는 하나님 앞에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여자보다 남자들이 등록을 하자고 해서 출석하는 경우가 상당한 비율이라는 것이다. 벧엘교회는 주일이 되면 남자들의 출석이 괴장히 많음을 볼 수 있다. 과제와 전망 벧엘교회가 성장하게 된 동기를 요약해 보고자 한다. 신도시라는 이점이 있지만 요즈음 신도시에는 교회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문을 닫는 교회등이 늘어가고 있다는 실정에서 보면 성장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외에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박 목사의 설교(메시지)가 성장의 주된 요인으로 결론짓고 있다. 물론 담임목사 자신은 설교를 잘 못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겸손의 표현일 뿐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그리고 좋은 교회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빛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분석된다. 우리는 교회의 외적인 성장만 보려하지 말고 박목사가 생각하고 있는 부분을 함께 주시해 보아야 한다. "제가 갖고 있는 목회관은 두가지입니다. 즉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과 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중에 우선 순위를 둔다면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일단 해놓고 보자는 것은 제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을 일이 있으니까요." 박목사는 교회의 수적인 성장 자체보다 바르게 목회하는 것을 최우선시 하고 있다. 이 자세는 모든 목회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박목사는 이 바른 목회의 자세 아래 세가지의 중점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겠다는 것이다. 어느 한 영혼이 주님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둘째는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도록 하고 있다. 이 새로움은 각종 행사 프로그램으로써가 아닌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새로워져 가야 한다는 것이 박목사의 생각이다. 마지막 세째는 미래지향적인 교회로 하나님 앞에서 "나 이렇게 살다 왔습니다"라고 보고하겠다는 각오하에 결코 오늘에 머물러 있는 교회가 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벧엘교회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오늘도 바른 목회로 바른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기교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우선시하는 교회, 형식이나 과시보다 진실한 내용을 중시하는 교회, 오늘에 머물지 아니하고 내일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교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29.부산새중앙교회 “전통과 제자훈련의 조화 이뤄가는 목회현장” 최홍준 목사 (동아대학교, 합동신학원) 에덴공원 옆의 새중앙교회 “그 시대를 아는 사람만이 그 시대를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소나기가 오겠다고 하면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날씨가 덥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그렇게 된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눅 12:54-56) 우리 선조들은 개구리가 울 때나 제비가 땅을 가까이 날 때에는 비가 올 것을 알아 미리 준비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내일을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우리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혼돈속에서 온갖 범죄와 타락이 만연하여 우리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시대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롬 12:2)하며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부산 새중앙교회는 여러분에게 꿈과 미래와 소망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될 것입니다. 담임목사 최홍준 드림” 이상은 새중앙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담임 목사의 인사말이다.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를 원하는 교회와 목사의 친근함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인사이다. 최홍준 목사(부산새중앙교회)합동신학교를 1회로 졸업한 이래로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시무중 부산새중앙교회에 87년도에 부임하여 당신 약 400여명이던 성도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철저한 제자훈련을 기초로 하여 97년 현재 2000여명 이상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부산새중앙교회는 특히 2세 신앙교육을 위해 주일학교 부서의 사역자를 전임배치, 장애아 선교를 위해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으며 열린 예배를 위해 찬양과 말씀이 어우러진 살아있는 예배를 지향하고 있다. 제자훈련을 뿌리내리게 하는 10가지 원리 경험담을 자연스럽게 말하라면 부담이 없겠으나 무슨 원리를 말한다는 것은 무척 조심스럽다. 지난 10년,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전통 기성교회 일반 목회에서 제자훈련을 통하여 체질개선에 성공한 교회로 알려지다 보니 이와 같은 주제의 글까지 부탁받게 도된 것같다. 마음에 부담이 있 지만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마음을 나누고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간의 경험 들을 토대로 몇 가지 원리를 기술해 보려고 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상을 그리며 또한 오늘 이 시대에 꼭 있어야 할 교회를 만들어 보고자 하 는 목회자의 거룩한 욕망은 목회자라면 다 있을 줄 안다. 이 거룩한 욕망(?)을 충족시키기를 원한 다면 제자훈련 목회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길러내고 변화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 목회 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선택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역이 뿌리를 든든히 내리기 위해서는 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작이 순조롭게 되면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마음에 소원으로만 품고 있을 것이 아니라 첫걸음을 내 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성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하고 성공적으로 정착시 킨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앞을 가로막고 나설 것이다. 그렇 다면 이런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기성교회에 제자훈련을 든든히 뿌리내리게 할 방법은 없을까? 다음의 열가지 원리들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목회철학을 정립하라 한 마디로 보호목회를 할 것인가 훈련목회를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훈련목 회를 선택했다면 목회철학에 일치하는 전략이 제자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고 자연 히 제자훈련이라는 방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를 온전케 하여 궁극적으 로 세상을 변화시킬 제자를 만드는 길만이 목회의 생명인 동시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이며 오늘의 교회를 갱신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위해서 목회철학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확립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철학이 결여 된 행동은 언제 중단될 지 모른다. 특히 제자훈련 사역은 지금까지 우리가 해오던 일반목회의 방 향에서 그 강조점이 상당히 수정되어야만 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전통기 성교회의 목회 토양에서 잘 자라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대해 미리 겁을 먹을 것은 없으나 단단히 각오는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는 목회자의 목회철확 부재라는 사실 은 그간의 경험과 사례들을 통해 확인하는 바다. 그러므로 목회철학이 든든히 정립되어 있으면 어 떤 장애물이라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으리 믿는다. 목회 토양을 올바로 진단하고 처방하라.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지? 성도들의 지적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성도들의 경제적 형편 은 어떠한지? 등등 교회의 상황과 토양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위로를 해야 할 것이고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하며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할 것이 다. 권면과 책망은 언제나 뒤로 미루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기다리시며 인내하 심같이 그들 수준에 내려가서 가족도, 자식도, 부모도 이해해 주지 않지만 목사님은 이해해 주시 리라는 확신을 성도들에게 심어 줄 수 있어야 마음을 열 것이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목회자가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회철학은 동일하지만 우리가 사역하는 목회 토양, 교회 의 체질은 매우 다양하다.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체질과 영적 상태등을 정확히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은 치명적인 실수를 방지하며 시행착오를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목회철학에 입각한 교회론을 증거하라 위로와 격려가 선행되었다면 도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 격려를 했을 때 반드시 도전이 따랐다.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성도 자신의 자아 정립이 필요하다. 그 리고 교회를 천국가는 대기소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 않는가? 교회가 왜 존재하는가?라고 하는 교 회의 존재 이유를 성도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수준에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고 세상을 위해 존재하려 한다면 교회는 건강해야 할 것 이 아닌가? 우리 교회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가?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보는가? 거기에 얼마나 가까운가? 이런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준비 되었는가?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하라. 왜 교회가 힘을 상실하고 있는가? 성도들이 세상에서 왜 능력을 잃어 버렸는가?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대부분 논술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나타내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것은 훈련 부족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과 운동선수들의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의 NBA농구, US OPEN 테니스나 미식 축구 선수들이 우승하고 방송 인터뷰 할 때 비교해 본 일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 의 소감과 감정을 너무나 잘 표현한다. 아나운서가 질문하기 바쁘게 답변을 유창하게 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자라면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줄 아는 훈련을 생활화하면서 자란 아이들이다. 이만큼 훈련받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교육은 훈련과는 다르다. 그 차이는 보이스카웃 훈련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도전하라. 훈련 의 필요성을 도전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훈련을 받아야하겠다는 동기를 부여해야한다. 장로 그룹부터 제자훈련 하라. 교회 생활이 오래되고 익숙한 중직자 그룹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훈련이 뿌리 내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분들을 설득하는데 지혜를 모아야한다. 본인의 경우 연세나 신앙경륜이 훨씬 많은 장로님들에 게 함께 성장을 위해 같이 말씀을 중심으로 공부하자고 한 것이 장로님들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당신들을 훈련시키겠다는 의도가 비쳐진다면 어느 누가 동참하겠는가? 사실인즉 목사도 성장해야 하지 않는가? 주님을 모시고 말씀을 공부하며 지켜 행하는 적용을 함께 할 때에 목사와 성도가 같이 성장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회원들을 비롯한 교회의 핵심 중직자들부터 제자훈련을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작했다면 첫 그룹에 사활을 걸어라. 첫 단추를 바로 끼어야 한다고 했다. 첫 번이 실패하면 다시 회복하기란 너무나 힘들 것이다. 설교식의 소그룹을 운영해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귀납적인 방법을 적극 활용하여야한 다. 정석을 도입하라. 시험적으로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으로는 안된다. 1기 제자반이 흐지부지 열매없이 끝나버린다면 성도들은 제자훈련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기 훈련생들 이 변화되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 2기를 시작하기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는 첫 그룹을 중요히 여기고 거기에 사활을 걸어야한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목회자 자신부터 체질을 빠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끄는 힘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데 힘쓰도록 재미가 있어야 하고 영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목회 철학에 입각한 비젼을 제시하라. 성도를 훈련시켜 교회를 든든히 하려고 한다면 분명한 목적이 나타나야 한다. 교회의 기본 사명 인 예배를 갱신하고 세상을 향하여 선교와 미래의 일꾼을 키우는 일 , 그들(성도)의 자녀들에게 꿈을 제시하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선교 일변도가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교육과 훈련을 병행하여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이 보여져야 할 것이다.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되어갈 때 제자훈련은 뿌리를 내려 갈 것이다. 아울러 제자훈련 제도권밖의 성도들을 포용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자훈련은 소그룹으로 운영되는 특성상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없다. 또 마음에 원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제자훈련에 임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가 있다. 목회자는 그들로 하여금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들 역시 동일한 목회철학을 가지고 자신들의 다양 한 은사를 따라 배우고 또 일할 수 있는 사역의 장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오늘날 네트워크 은사배치 사역이 관심을 끌고 있다. 학력이나 연령 때문에 제자훈련을 받지 못 한 성도들을 포용하는 것은 제자훈련을 뿌리내리게 하는데 큰 비중을 갖는다고 본다. 60세 이상 남녀 성도들을 위해서 마리아, 갈렙반을 운영하는 것, 예수 사랑 실천부의 활용 등이 있겠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 교회안에 지도자들이 훈련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즉, 동질감과 목회철학 면에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이 있다 없다를 떠나서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 그리고 교역자 중심의 교회 운영을 해야 하는데 많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자훈련을 받아야 주일학교 부감, 부장, 성가대 총무, 각분과 총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자훈련, 사역훈련, 순장을 하지 않으면 안수집사 공천도 받을 수 없는 분위기가 우리 부산 새 중앙교회 정서이다. 자연히 제자훈련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5년만 지나면 이 교회 에서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할 것이냐 떠날 것인가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교회의 중직자의 미련을 버리고 조용히 신앙생활해야 할 것이다. 이런 분들도 많이 계신다. 목회 자는 직분 중심으로 교회의 질서가 서는 것이 아니라 훈련에 의한 변화와 삶의 열매들로 교회의 영적인 질서가 재편되도록 유도해야한다. 감동을 주어라. 목사가 언제나 성령이 충만하고 언제나 은혜가 충만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평생 주님을 의지하여 구해야 할 기도제목이며 목회자의 염원인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목회철학을 강조하고 목 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을 할 때 성도들은 감동을 받을 것이다. 자신 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삶은 결코 감동이 없다. 언제나 신선한 충격을 주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 는 마음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가꾸고 다듬어 나가라. 한국에는 전통있는 기성교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이 한국교회사에 기여하고 또 지 역 사회에 이바지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전통"이라는 것이 교회가 변화와 갱신에 있어서 장애가 되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 "전통"은 놀라운 잠재력일 수도 있 다. 기로에 서 있는 기성교회들이 어디로 갈 것인지는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회자들에게 많은 부분 달려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제자훈련" 이야말로 시대를 넘어서서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살아있고 영향력 있는 교회로 만드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믿는다. 분명한 목회철학을 가지고 먼저 제자훈련 사역을 경험한 동역자들과 정보를 나누면 훨씬 효과적으로 동 역자들의 교회에 제자훈련이 뿌리 내릴 수 있을 줄로 믿는다. 평신도 훈련 “부산새중앙교회는 평신도를 깨우는 교회입니다. 평신도가 살아있는 교회만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평신도를 통한 전문사역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만이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철저히 제자훈련하는 교회요, 교육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목표는 성도 각자가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부산 새중앙교회는 몇가지 교육과 훈련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락방 다락방이란 부산새중앙교회의 지역별 소그룹 모임을 일컫는 말입니다. 다락방은 잘 훈련되고 성숙한 순장에 의해 인도되며 교회가 우리 상황에 맞게 특별 제작한 소그룹 성경연구교재를 가지고 말씀을 함께 나누는 모임입니다. 이 모임을 통해 신앙성장에 필수적인 공동체에의 소속감과 인격적인 관계형성이 이루어집니다. 생각과 삶을 진솔하게 나누므로 그 구성원인 순원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헌신하게 하는 아름다운 모임입니다. 제자반 제자훈련은 한 교역자가 10명 정도의 훈련생과 함께 신앙훈련을 하는 소수정예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편신도 지도자가 되기 위한 제자도를 함양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는 등록한 세례교인으로서 신청을 하고 각 교역자가 상담 후 입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역반 사역훈련반은 제자훈련반을 성실히 이수한 자들에게 평신도 지도자로서 교회와 이웃을 능력있게 섬길 수 있도록 마련된 일년간의 훈련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마친 분들에게는 다락방 순장이나 또는 다양한 영역에서 평신도 지도자로서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순장반 순장반은 현재 다락방의 순장들을 담임목사님이 훈련시키는 과정입니다. 훈련시간 중 순장들 자체적인 웍샵시간도 있습니다. 순장들이 돌아가며 인도하고 토론함으로 다락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을 미리 점검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전도폭발훈련 전도폭발훈련은 기존의 많은 성도들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도록 도우는 훈련입니다. 전후반기를 나누어 16주의 과정으로 실시되며 훈련자와 훈련생의 관계를 두어 서로 도우며 배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크로스웨이 교회가 정하는 소정의 자격에 따라 지원할 수 있으며 1년간의 과정으로 신구약 성경의 전체개요를 배우게 됩니다. 주간반과 야간반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2시간 남짓 잘 분비된 교역자의 강의와 교재를 통해 교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30.아름다운교회 “새로운 말씀의 영성으로 거듭난 목회” 김기홍 목사 (연세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미국 풀러신학교) 목사의 개인신상 필자는 1947년 7월 25일에 태어났다. 용산고등학교를 나와 성균관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방황을 했고, 대학 2학년에 군대를 갔다왔으며 대학 3학년 여름방학, 그것도 생일에 중생을 경험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장로회 신학대학에 입학, 신학을 시작했다. 졸업후 1년반 가량을 전도사 훈련을 하고, ‘77년 텍사스크리스천대학 신학부에 가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드류대학 대학원에서 ’83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 교회사 교수로 부임해 교무처장, 대학원장, 박사원장 등을 역임했다. 도중에 사카고에서 공부하던 아내와 함께 시카고대학 신학부에 박사 이후 과정을 하였고, 휘튼대학의 빌리 그래함 세터에 초방교수로 있었다. 또한 풀러신학교 객원교수, 맥코믹신학교 연구교수를 지냈다. 월 평균도서량은 일반 서적이 10여 권 정도이고 전문서적은 논문을 쓸 때나, 강의 준비할 때 해당량 만큼 읽는다. 특별히 추천할 만한 한국어로 된 책 몇 권은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워치만 니의 [좌행참](니의 다른 책은 추천할 수 없다)으로 율법과 복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또 노만 빈센트 필의 [행동과 신념의 사람](보이스사간)은 자신의 목표를 영상화하는 훈련을 시켜주고, [마켓팅 불변의 법칙](십일월출판사)은 판매하는 데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준다. 어떻게 보면 전도도 세일즈와 같기 때문에 교회와 목회를 위한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성경은 장로회신학대학 다닐 때 하루에 30장씩 읽었고 방학 때는 아예 들어앉아 일주일에 한번 씩 읽었다. 하루 8시간이면 구약은 5일, 신약은 하루면 읽는다. 처음에는 몇번 읽는지 표시하는 재미로 읽었으나 열번 넘어가면서부터 신비한 깨달음과 경험을 많이 하게되었다. 그래서 30번 정도를 읽고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에는 그만큼 열정적으로 읽을만한 시간을 얻지 못해 고작 10번 가량 더 읽었을까 싶다. 하지만 수요성경공부와 토요성경공부를 위해서 해당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오고 있다. 성경연구 방법이란 그저 소설보듯 읽는 것이다. 성경의 유기적인 연결을 믿기 때문에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그냥 읽는다. 그러면 전체의 흐름이 잡히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분명하게 잡힌다. 그 맥락에서 부분 부분을 읽어야 바른 이해가 온다. 강해설교 한다고 전체 흐름과 상관없이 그냥 읽으면 별로 유익이 없다. 무조건 많이 읽는 게 좋은 방법이다. 성경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전체를 통해 그분을 잘 아는 게 중요하며, 그 다음에야 부분 부분에 제대로 보아지는 것이다. 설교는 쪼개는 게 아니라 모으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도시간은 아침에 일어나서 30분 가량 하는데, 명상을 곁들인다. 명상이란 하나님이 새롭게 만들어주신 자신의 모습과 사명, 할일들을 생각하고 영상화하는 것이다. 저녁에도 15분 가량 같은 일을 한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잠시 쉴때는 다시 명상을 한다. 이것이 대단히 큰 힘을 제공하며 필자의 자아형성을 도와준다. 기도에 부담을 갖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분이 주시는 능력이 평안 속에 흘러들어옴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 목회연구 목회를 하게 된 동기로 필자는 두 과정을 말하고 싶다. 하나는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신학교수로서 목회일선에 뛰어든 것이다. 대학 3학년은 혼란기였다. 대학입시에 1차 불합격하고, 2차에 대학을 들어갔다. 그래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하다가 군대에 갔다. 그러나 군대에서 더욱 헤매다 제대하고 복학했다. 그러던 중 지금의 봉천동 은천교회 조우방 목사님을 통해서 중생을 경험하였다. 마음이 뜨거워서 기동원에서 20일을 금식하고 학교에 가서 대학생선교회(CCC)활동을 하며 전도에 열중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목사의 길을 결정하였다. 그 당시 소명을 느끼기보다는 목사의 길이 가장 보람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렇게 했다. 성경비판을 피해서 택한 전공이 교회사였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방법 역시 신앙의 눈을 감아야 했다. 여하간 드루대학의 러슬 리치 교숨(지금은 듀크대학)는 학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유일한 스승이었다. 공부방법을 위해서 쓴 책이 [논문작성 이렇게 하라]인데, 설교작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신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실 박사학위가 끝나면서 몇 달 동안 말할 수 없는 방황을 했다. “내가 선생하려고 이렇게 오랜 동안 공부를 했던가?” 학문은 얻었지만 동시에 잃은 것은 영성이었다. 결국 목회의 심정으로 목회자들을 돕는 일을 하자고 마음을 달랬다. 신학교에서는 한철하 박사를 통해서 학문과 신앙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배웠다. 서구의 신학방법은 곧 철학이요 인문과학이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성의 한계 안에서 자명한 공리를 세우고 그 위에 모든 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초자연이나 영적인 세상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으며, 하나님은 계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고 있으며 보이는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것은 영적 세상과 그의 법칙이었다. 성경에는 자연과 초자연이 동시에 역사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르고 참된 과학적 관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책들을 그 관점에서 기술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쓴 [이야기교회사], [천국의 기둥]등이 그것이다. 특히 [역사와 신앙]은 신본주의적인 역사관에 서서 기술한 책이다. 아마도 필자가 기술한 책 가운데서 가장 안 팔리는 책 가운데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박사논문 다음으로 공을 많이 들였고 필자가 사랑하는 책이다. 교수로 사역하면서 다시 목회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목사로서의 동경 때문이었다. 전도사 시절의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그리워져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옛날의 감각이 나오지 않아서 대단히 고민했지만 몇 년이 지나면서 목회의 감각을 찾게 되었다. 신학교 강의는 거의 반복적으로 학기마다 같은 것을 가르친다. 학생은 자꾸 바뀌지만 교회 신자는 그렇지 않고 같은 사람들이 계속 온다. 또 자꾸 바뀌면 안된다. 그러다 보니 계속 생수를 퍼올릴 수 있는 샘을 파야만 한다. 이것이 목사의 고충이면서 동시에 즐거운 영적 작업이 된다. 요즘 우리나라 목회는 100년 동안 해오던 것들을 쌓아놓은 것과 같은 생각이 든다. 이 교파에서 하는 것, 저 교파에서 하는 것을 서로 교환하면서 더해간다. 하나의 예르 들면 장로교의 장로제도가 모든 교파가 도입되었다. 성경공부, 제자훈련, 새벽기도, 철야, 전도, 금식, 건축, 총동원 등 남이 하는 것은 서로 한다. 줄이지 않고 계속 더하다보니 목회자나 신자들이 모두 교회 일에 중압감을 느끼게 되었다. 즉 자유함이 아니라 교회 일에 억압이 되는 상태이다.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 하는 것을 우리 교회에서 안하면 이상하게 여긴다. 신앙적인 원리보다는 외형적인 방법론에 매달린 결과이다. 현재 필자 목회의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것을 그대로 하면서도 전통적인 목회 한계를 넘어보자는 것이다. 신도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강하고 아름답게 살며 빛을 발하게 도우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적인 사고를 하도록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복음적인 설교를 해야 하고, 복음적으로 성경을 보도록 공부시켜야 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훈련받은 신자들이 처음에는 갈등할지 모르나 차츰 깨달음과 능력을 경험하면서 자유함과 확신을 누리게 된다. 복음적인 설교란 다른 게 아니다. 성경을 통해서 반드시 발견해야 할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둘째, 그래서 내가 어떤 존재로 변했는지를 깨닫는다. 셋째,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일을 꿈꿀 수 있는지 발견한다. 이 세 가지 또는 그 가운데 한두 가지가 들어가야 복음적인 설교가 된다. 성경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한 대답이 나타나야만 한다. 그래서 원리를 깨닫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 두 구절만 보아도 주가 어떤 일을 해주셨고 우리가 어떤 존재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선명하게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짓눌려 악한 경험을 한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그대로 맏지 않는다. 설교자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말씀으로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신자들을 설득해서 그대로 믿게 만들고 그 믿음을 유지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놀라운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사실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반드시 준다. 그러나 마음이 화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명상하고 자기 마음에 반복해서 설득시킬 필요가 있다. 그대로 행동한다면 신기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또한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교회 전체가 다 믿음을 얻어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도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만 난무하게 된다. 필자는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목회가 즐거운지 물어본다. 지금까지의 경험적 통계로는 목회를 즐기는 이들은 1할이 안되는 것 같고, 목회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교인들과의 관계라든지, 건강이나 능력의 한계, 환경적인 요소 등등으로 인해 오랜 세월 짓눌린 마음의 결과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는 어떤 새로운 방법을 찾는다든지 어떤 계기가 오기만을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마음에서는 절대로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설교를 만들어낼 수도, 전달할 수도 없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이것이 설교 작성에 가장 중요한 노하우이기 때문이다. 설교의 논지와 정신은 영적 상태에서 나온다. 설교자가 마음이 뜨겁고 감사하며 삶이 즐겁고 기뻐야 정상적인 설교가 나온다. 앞에 말한 복음의 내용으로 명상해보라. 자신의 마음을 복음으로 설득하라. 시편에 보면 다윗도 여러번 자기 영혼을 격려하는 장면이 보인다. 영적인 활성을 유지하는 것은 복음적인 깨달음과 자기 확인에서 나온다. 평안한 마으의 상태에서 성경을 읽으면 영적인 깨달음이 솟아나온다. 그것을 논지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면 자연스러운 예화들이 주어진다.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나눌 정도로 구분이 된다. 겉사람은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이성을 움직이므로 항상 변하고 불안하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걱정스러운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영혼을 위한 것으로 마음의 깊은 부분에 주어진다. 이성이 이 부분의 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재미있고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을 무시하면 안된다.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도달하게 하려면 먼저 그들의 감각기관에 닿는 설교가 들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설교의 목표는 그들의 깊은 마음이다. 그들의 무의식 곧 영혼의 좌소까지 들어갈 설교는 복음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본성이 변한다. 필자가 몇 해 동안 목회를 하면서 얻은 분명한 결론이다. 복음적 설교는 사람들을 반드시 변화시키고 성장시킨다. 교회의 성장 분석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동안 주일에는 안양에 있는 개척교회 협동목사로 있었다. 그러던 중 성경공부를 인도하게 되었다. 진태옥, 설윤형, 루비나 등 대표적인 디자이너들이 디자이너선교회를 구성하고 최복희 전도사를 중심으로 여러 해 동안 전도활동을 벌여왔었다. 그러다가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고 필자는 자연스럽게 이 그룹과 연결되었다. 그리하여 설윤형 부띠끄 지하에서 성경공부가 진행되었고 자연스럽게 1990년 11월 4일 교회로 시작하게 되었다. 시작한 멤버는 약 20여 명으로 몇몇 디자이너와 가족 및 친지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함해노회 소속인 우리 교회에는 5년이 지난 지금 3백여 명의 교우가 있으며, 교회 조직은 일반적인 것에서 별다른 게 없다. 교우들의 대부분이 초신자들이라서 조직을 짜서 일을 맡겨도 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지만 3-4년이 지나면서 자기 교회라는 마음을 가지고 적응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봉사하는 방법도 각자 알아서들 하는 수밖에 없었고, 담임목사인 필자도 교회생활을 잘 몰랐기 때문에 지도하기도 힘들었다. 교회의 성장추이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처음 몇 년은 상당히 헤매면서 보낸 것 같다. 구성원 색깔이 너무도 분명하니까 아무나 마음 놓고 나오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100명 가량이 되는데, 2년 이상 걸렸으나 이제는 150평 가량의 지하공간이 두 번 예배에도 너무 좁아졌다. 각 선교부, 교회학교, 성가대, 기관들이 모여서 움직일 장소도 없다. 그래서 불편한 대로 여기 저기 주위의 장소를 빌려서 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금년에는 장소를 옮기자고 합의를 보았다. 강남에 마땅한 건물을 하나 사기 위해 건축위원회가 작년에 결성되었고 올해에는 온 교인이 정오에 5분간 합심기도하고 있다. 기도제목은 건축과 복음적인 삶이다. 필자는 교회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두가지 말하고 싶다. 하나는 목회자의 지도력이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지도력을 말하는 게 아니고 복음적인 사고와 그의 적용이다. 이 점은 두어달 뒤에 나올 필자가 쓴 설교에 관한 책에 자세히 논하고 있다. 앞 부분에서 조금 언급한 내용을 잘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자신의 정체는 세상적인 비교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대하여 말씀하신 그대로를 믿을 때 정확하게 보여진다. 그것은 너무도 훌륭한 것이다. 다음은 외형적인 방법으로 교인들의 마음과 힘을 하나로 규합하는 것이다. 성장한 교회 목회자들은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요령을 알고 있다. 일년에 두어 차례 전교우가 움직이는 이벤트를 만드는 것이다. 30명이건 1,000명이건 따로 움직이면 아무런 힘이 없다. 반드시 전체가 참여해서 일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수개월 전부터 홍보하고 설득하고 기도하며 훈련해 하나의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친 뒤에는 평가하고 상주고 격려하며 자부심을 북돋우면서 밀물 썰물처럼 복음적인 운동을 펴나가면 교회는 산다. 교인들은 함께 움직이며 배우고 성장하며 참여의식이 늘어난다. 우리교회의 재무상황은 풍족한 편이다. 교우들이 기꺼이 헌금하기에 재정면에서 잘 움직인다. 처음에는 반 이상을 선교비로 사용했다. 지금은 해외에 몇 군데 지원하며 특히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외국인 학생 훈련을 위해서 매년 일정액을 보낸다. 그리고 네팔에 한 교회의건축을 지원해서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다. 매년 8월 첫 주에는 벽지의 한 교회에 온 교우가 함께 가서 의료와 미용봉사를 통해 전도하는 기회를 갖는다. 이렇게 해서 건물까지 세워준 교회도 몇 개 된다. 지금은 약 35퍼센트 가량을 국내외 선교비로 사용하고 있다. 2천년대를 바라보면서 온 교우가 합심해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이 삶에 그대로 나타나는 복음적 신앙의 실천이다. 그리고 이 엄청난 생명의 삶을 다른 모든 신자들이 누리도록 돕는 일을 하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삶을 모르는 불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4)/ 2018-10-15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4) 20세기를 회고하고 21세기의 한국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30대 교회 리서치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 한국 교회 성장의 현장 김재헌목사 지음 글을 열면서 21세기 한국교회의 성장, 희망은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지금까지 경이적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구미교회들의 부러움을 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정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교회의 성장에 비해서 사회적인 신인도가 너무나 낮은 것이다. 21세기에 관한 진단 중 많은 부분에서 한국 교회도 40-50년 후가 되면 유럽 교회와 같이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미래를 예견한다. 하지만 아무런 처방 없이 쇠퇴론 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 곧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21세기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세상에 살고 있다.(“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밖에서 따로 떨어져 살 수 없다. 세상의 변화는 교회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는 신앙의 방법과 세계관과 가치관을 많은 부분 바꾸어 놓고 있다. 목회자는 변치 않는 성경의 복음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해 가는 세상에 증거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바로 읽지 못한다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거나, 그 시대에 풍속에 빠져서 무력한 종교 지도자로 전략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시대의 징조를 바로 알아 깨어 있어서 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미래의 세계와 한국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를 예측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워낙 돌발적인 사건, 사고가 많기에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단적으로 결론 짓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대안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에 이바지하므로 미래의 연구는 불완전하다고 해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처럼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과학기술 적인 변화가 가속화되고,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 기대와 불안이 교차되고 있는 시대의 변화에 추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세계사의 흐름에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는 보다 다양하고 다변화될 다음 세기에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미래를 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과거를 살피는 일이다. 우리가 과거의 교회사를 돌이켜보면 앞으로의 교회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사명감으로 필자는 한국교회의 성장의 현장을 담기를 원했다. 특히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20세기를 마감하고 그 지도력이나 영향력이 21세기에까지 이어질 교회들을 기록으로 남겨놓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100개의 교회를 선정해서 이들의 교회들에 대한 탐방에 들어갔다. 모두 11개의 질문에 대해 인텨뷰를 신청하고 그리고 면담방식을 통하여 자료를 수집해 나갔다. 총 3년 반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정말 지루하고도 힘든 작업이었다. 10개의 교회를 선정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각 교회의 목사님들을 만나 개별적으로 인텨뷰를 요청하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방법으로 접촉을 시도했고 나중에는 서면이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하여 자료를 보충하면서 드디어 한국의 100대교회를 CD-ROM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알짜배기만 골라 이제 한국의 30대 교회를 책으로 엮게 된 것이다. 한국 교회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10년마다 수 적 배가를 이룰 만큼 급성장 한 교회이다. 이러한 성장은 세계 교회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한국 교회만이 자랑이다. 1992년 8월 [뉴욕 타임즈]의 발표에 의하면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한국 교회가 22개가 있다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성장요인에도 불구하고 성숙하지 못한 병리 현상을 동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은 한국 교회가 있는 자리이며, 목회자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를 기대하면서 한국 교회의 목회는 새로운 구조적 개혁이 필수적이며, 다가오는 미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지난 세기의 성장한 교회들을 살펴보면서 새로운 전망을 가지도록 하는데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교회들은 세상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고 구원시키는 일에 매우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적으로 매우 앞서 있다. 놀라운 것은 한결 같이 그들이 다른 교회들보다 한 걸음씩 앞서 있다는 것이다. 미래 세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형태에 의하여 효율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최근의 한국 교회는 젊은이들을 잃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신세대들의 사고 전환으로 교회는 더 이상 그들의 흥미의 대상이 아니며 케케묵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 그들은 재미있는 프로그램, 새롭고 낙관적인 예배 분위기, 넓은 주차공간, 부담감이 없는 교회생활을 원하고 있다. 이런 '잃어버린 세대'를 얻기 위하여 교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터인데, 오늘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교회들이 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에 이르러서 패러다임이 바뀌고 교회의 구조도 상당 부분 바꾸리 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21세기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오늘 이 책에 소개하는 교회들은 이처럼 사람을 키우는 일에 아주 탁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래 사회의 또 다른 변화의 하나는 다양성의 극대화이다. 그러므로 미래 교회는 다양성을 포용해야 하며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중성을 가지게 된다. 다양한 목회구조 속에서 일치와 통일성을 이루기 위하여 연구 시도되고 있는 것이 팀 목회이다. 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목회에 참여하는 총체적 개념을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에 소개되는 교회들은 팀목회를 지향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의 사고 구조는 정보로 변화하고, 지역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의 사고는 지역화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는 교회의 구조를 블록화하고 정보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말 놀랍게도 이 책에 소개되는 교회들은 이미 이러한 정보화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들 교회는 성장할 수 밖에 없는 구조와 사람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 책에서 바로 이러한 점을 읽어야 한다. 단순히 프로그램을 베끼고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관심을 갖기보다는 시대적 흐름, 즉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라는 것이다. 제네바의 칼빈은 그 당시로서는 첨단을 걷는 사람이었다. 우리도 이 시대를 꿰뚫어보는 영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그릇과 그릇에 담겨있는 보물의 차이를 인식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성장하는 교회들을 리서치하는 동안 협조해주신 각 교회 목사님들과 스텝들 그리고 자료를 모으느라고 수고해준 김용주, 최형준 전도사 또 이 책의 출판을 허락해주신 나침반사의 김용호 사장님과 김응국 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저는 이 책을 낼 수 없었을는지 모릅니다. 1999년 7월1일 시화에서 김재헌 목사
500명씩 모이는 주말 전원교회 새빛전원교회
500명씩 모이는 주말 전원교회 새빛전원교회 2002-06-26 23:39:59 read : 2772 주5일 근무] 토요일 놀고 일요일 쉰다 경기도 광주 능평리 숲속에 위치한 새빛전원교회. 보통 교회는 인구밀집지역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새빛전원교회 주변의 인가라고는 전원주택 10여채 정도가 전부다. 그래도 이 교회 성도(聖徒)는 500여명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교회 신도는 인근 주민이지만 이 교회는 다르다. 주말이면 서울, 분당, 인천, 천안 등에서 신도들이 몰려 온다. 이 교회 양경훈 목사는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전도를 어부가 고기를 잡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며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많은 곳에 그물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 도시가 아니라 숲속에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 목사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교회에 가야 할 주말에 도시를 떠나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더구나 최근 주5일 근무제가 퍼지면서 주말이면 도시를 떠나 자연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고 있다. 주5일 근무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다. 외국인 회사 직원들은 대부분 금요일 업무를 마감하고 토요일과 일요일 휴식을 취한다. 증권업계 관계자들도 증권시장이 열리지 않는 토요일과 일요일 출근하지 않는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텔레콤, LG전자 등 많은 대기업과 대부분의 광고업체가 한주 걸러 한번씩 토요일마다 쉬는 격주 휴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각 공사도 대부분 격주 휴무제다. 곧 은행원과 공무원들이 주 5일 근무를 실시한다. 주말 휴식이 점차 길어지자 사회가 변하고 있다. 가장 먼저 변하고 있는 곳은 가장 변하지 않는 곳으로 유명한 종교계다. 교회측은 최근 ‘주 5일 근무에 대한 교회의 대처’라는 세미나를 열었다.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는 세미나에서 ‘매일 예배로의 조심스런 전환’을 제안했다. 주말 교회 대신 여행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주말 대신 평일 예배를 드리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말예배 대신 평일예배 늘어 또 주말 도심을 떠나는 신도들을 붙잡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등장하고 있다. 새빛전원교회는 95년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전원교회다. 양 목사는 “현재 10여개의 전원교회가 생겼다”며 “주 5일 근무제 이후에는 더 많은 전원교회가 생길 것”으로 예측했다. 이준석 목사는 “도심 교회와 시골 교회가 자매 결연을 맺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교통 흐름은 이미 주5일 근무제를 반영하고 있는 추세다. 시정개발연구원 이신해 박사는 “본격적인 주 5일 근무제 도입 전이지만 최근 격주휴무와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하는 기업이 늘었기 때문에 교통 흐름이 이미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요일 오후 정체가 생기고, 토요일 정체는 더 심각해졌다. 최근 주5일 근무 이후 교통 변화에 관한 정책 과제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이미 교통 흐름이 주 5일 근무제를 절반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도로공사가 매년 실시하는 고속도로 교통량 조사에 따르면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영동선의 경우 금요일 이용자 수가 점차 늘고 있다. 주5일 근무제에 따른 생활의 변화는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윤성씨는 주6일 근무하는 국내 기업에서 일하다가 다섯달 전 주5일 근무하는 한국IBM으로 직장을 옮겼다. 그때부터 그의 생활은 달라졌다. 과거 주말 휴일은 집에서 자는 날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주말 휴일도 구분해서 쓴다. 그는 “토요일은 몸을 쓰는 날”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일요일은 “우아하게 쉬는 날”이다. 그는 토요일 주로 친구들과 모여 농구를 한다. 격한 운동을 한 다음날은 집에서 쉬거나 여자친구를 만난다. 생활도 변했다. 우선 금요일날 술을 먹는 일이 줄었다. 과거 토요일은 사실 반 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다.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숙취가 있어도 그냥 반나절을 버틸 수 있었다. 주5일 근무제로 이씨 주변 사람들도 변하고 있다. 그는 “요즘 동창모임이 평일에 열리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했다. 주말은 여행을 가거나 가족이나 연인을 위해 비워두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농구보다는 야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래도 농구를 선택한 이유는 토요일 쉬는 친구들이 아직 5~6명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는 곧 “야구팀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광고기획사인 금강기획은 작년 8월부터 주5일 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 회사 B대리는 주5일 근무제 실시를 대비해 많은 준비를 했다. 우선 산악자전거를 구입했다. 그러나 “실제로 자전거를 자주 타지는 못한다”고 한다. ●“월급 줄어” 반대도 만만찮아 그는 휴일에 주로 집에서 쉬고 있다. 주5일 근무제 이후 여행이나 레저 활동을 하겠다는 계획은 그냥 계획으로 끝났다. 그 대신 DVD를 구입했다. 또 100개 이상 채널이 나오는 디지털위성방송을 신청해 보고 있다. 격주 휴무제를 둘러 싼 찬반 양론도 치열하다. 삼성전자는 격주 휴무제를 도입한 지 1년이 지났다. 이 회사 C 대리는 토요일 근무할 때가 더 나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월급이 줄었다는 점이다. 토요일을 월차휴가로 처리하기 때문에 월급이 조금씩 축이 난다. C 대리는 “결국 6일 동안 하던 일을 5일 동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의 절대적인 양은 줄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가로운 토요일이 그립다”고 말했다. 물론 찬성하는 사람도 많다. 김지연씨 부부는 모두 주5일 근무하는 회사에 다닌다. 두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금요일 저녁 5살짜리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과거 토요일도 근무하는 회사에 다녔던 김씨는 “지금 다시 토요일도 출근하라고 한다면 회사와 가정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백강녕 주간조선 기자young100@chosun.com)
70주년 공덕중앙교회 전도특공대 등 열기 후끈/ 2003-10-06
70주년 공덕중앙교회 ‘전도특공대’ 등 열기 후끈 김제 공덕중앙교회(권용국 목사)에는 ‘전원교회’의 꿈이 무럭무럭 익어간다. 도시로 떠난 이들이 맑은 공기와 쉼이 있는 고향 교회로 되돌아오는 미래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다. 공덕중앙교회는 성도 대다수가 65세 이상 노인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농촌교회이다. IMF 직후 귀농을 택했던 젊은이들까지도 자녀들의 교육환경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떠나는 보통의 시골 동네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는 부흥의 열기가 한창 타오르는 중이다. 나이 지긋한 권사님들까지 참여한 ‘전도특공대’는 인근 부락은 물론 익산 시내까지 찾아가 아파트 전도, 병원 심방 등을 펼치며 지친 영혼들을 복음으로 사로잡는다. 지난해 말 건축된 130여평의 종합관은 주말과 주일에는 도시에서 찾아오는 성도들을 위한 쉼터로, 평상시에는 마을의 독거노인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과 문화의 공간으로 활용되며 전도사역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인근 동네마다 책임자들 두고 주민들의 애경사를 일일이 챙기며 인심을 얻는 전략도 동원된다. 6년 전 군산개복교회에서 이 교회로 부임한 권용국 목사는 공장 하나 없이 한적한 동네에서 오히려 청정한 자연환경을 활용한 ‘전원교회’의 가능성을 읽었다. 교육관으로 사용하던 구예배당을 화재로 잃은 것은 오히려 온 교우를 하나로 단결시키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종합관 건립, 전도특공대 조직 등으로 도시의 잃은 양들을 농촌교회로 끌어들인다는 전략은 어떻게 보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무모한 발상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새로운 목회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의했고, 여러 변화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전주 익산 김제등 인근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새 국도가 개설돼 이 지역이 교통의 요충지로 부각된 것도 성도들의 자신감을 북돋웠다. 그 결과 공덕중앙교회는 농촌교회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지역사회 복음화, 주일학교 활성화라는 결실을 맺고 있다. 특히 이 교회 출신 이재환 선교사(컴선교회 대표)를 모델로 삼아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자라도록 비전을 심어주는 작업이 한창이다. 내년에는 교회설립 70주년 기념식과 임직식, 이재환 선교사 초청집회 등을 열면서 부흥의 열기를 계속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비전이 있을 때 교회는 생동감을 유지하며 역동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의미이지요. 지금은 시작일 뿐입니다. 쉼과 꿈이 있는 교회를 향하는 길 위에서 우리는 더욱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권용국 목사의 말이다. 정재영 기자
77% 개척교육 없이 교회개척에 뛰어들어/ 2003-05-30
77% 개척교육 없이 교회개척에 뛰어들어 ■ 한국교회개척 심층연구 보고서 개척교육이 교회성장 및 개척에 있어 중요한 변수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다수의 목회자가 개척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개척에 뛰어들고 있는 것으로 조사결과 나타났다. 교회성장연구소는 교회개척이 한국교회성장의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교회개척 전문 서적을 찾기가 어려운 점을 안타깝게 여겨 2002년, 국내 6개 주요 교단의 1,700여 개척교회에게 의뢰, 98년 이후 설립된 250개 교회를 대상으로 교회개척에 대한 대대적인 연구조사를 벌였다. 교회성장연구소가 설문을 통해 개척교육에 대한 조사를 한 결과 250여 목회자 중 개척교육을 받은 목회자는 23%에 지나지 않았고 77%에 달하는 다수가 개척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교회개척에 뛰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개척교육을 받은 목회자와 그렇지 않은 경우, 자립도 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는 것으로 드러나 개척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개척교육의 보급문제와 개척 목회자 스스로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이 당면한 과제임을 알려줬다. 개척교육과 더불어 교회개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지역조사다. 246명 응답자 중 개척하기 전 지역을 조사한 목회자는 169명, 하지 않은 목회자는 77명으로 많은 목회자가 개척하기 전에 지역조사를 하고 있었다. 조사항목으로는 △근처에 교회가 있는지 여부△지역주민의 종교현황△지역주민의 사회경제적 수준△비종교 인구조사△인구증가 전망△지역개발 전망△지역의 교통 편이성 등을 조사하고 있었으며 이중 ‘지역개발 전망’과 ‘지역주민의 사회경제적 수준’을 가장 고려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조사를 통해 이외에도 한국교회 개척의 다양한 내용들이 파악됐다. 개척 4년 미만의 교회 중 자립한 경우는 25%에 불과했으며 한국 개척교회의 성장 고비는 개척 2년부터 3년 사이였다. 개척교회의 44%가 개척 후 한달 동안 아무도 전도돼지 않았으며 평신도 개척교인은 개척 초기 성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척교회 목회자가 하루 평균 성경 읽는 시간’은 1-2시간이 45%로 가장 높았으며 1시간이하를 읽는 목회자도 31%로 높은 수를 나타냈다. 목회자들이 개척을 하게 된 주요 동기는 소명감이며 개척교회 목회자 평균연령의 30-40대가 가장 많았다. 남성 목회자는 88.8%, 여성이 11.2%를 차지했으며 최종학력으로는 정규 신학대학원(M. Div)출신이 가장 많았다. 교파별로는 기하성, 기감, 기성, 예장 통합 순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번조사에서 교인들의 헌금으로 교회 재정의 50%를 충당하지 못하는 교회가 48%에 달해 개척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이 조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 재정적 곤란함을 개척교회들은 ‘타교회의 보조’를 통해 48%해결하고 있었으며 모교회의 보조를 받는 경우는 19%에 불과했다. 이에 개척교회들은 교단들이 ‘개척지원금 및 생활비 보조’ 및 ‘개척 교인을 교회에서 파견’ 등으로 보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번 조사결과 개척 자금과 교회성장과는 별 연관성이 없으며 목회자의 기도시간이나 설교준비 시간, 자기 개발 등도 교회성장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 재정적 준비보다 영적인 준비와 인적 자원의 준비가 더 중요하며 전도, 새신자, 기도사역등에서 충분한 경험을 준비한 후, 가급적이면 다수의 개척 멤버와 함께 개척하는 것이 성장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 이번 조사의 결론이다. 최초로 전국적 규모로 실시된 이 교회개척 조사는 기초분석과 심층분석을 병행, 2003년 1월에 ‘교회개척포럼’을 통해 발표됐고 포럼을 근거로 여러 사람이 접할 수 있도록 ‘Church Planting 한국의 교회개척에 대한 심층 연구보고서’라는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Church Planting’은 교회개척을 위해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재생산식 개척방안을 제안하고 있으며 △신학교에서 좀더 개척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이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한국 교단에서 개척을 준비하는 목회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것과 △대형교회들이 상호 교류를 확대하는 등 개척교회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확대할 것 △개척교회간에 필요한 정보를 나누며 서로 협조할 수 있는 연결망을 구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한편, 이 책에는 교회개척 전문가들의 개척에 대한 연구 논문, 박창현 교수(감신대)의 ‘교회 개척의 방식의 문제점과 대안’, 노치준 목사(광주다일교회)의 ‘교회개척의 사회적 의미’등 개척교회 목회자와 기관의 사례가 담겨 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김종포 목사(아름다운 교회)는 ‘개척교회와 멘토링 사역’을, 이일성 목사(새시대순복음교회)는 ‘하나님이 하시는 개척’을 교회개척의 중점으로 강조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교회개척국에 대한 취재기사도 실려 있어 이 책은 교회개척의 이론과 실제를 모두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교회개척 조사 및 관련 전문도서발간은 앞으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교단차원의 정책수립과 목회 방향 설정이 가능토록 만들 전망이다. 황선영 기자
A History of Israel(1)<이스라엘의 역사(1)>/2009-12-03
A History of Israel(1) 이스라엘의 역사(1) [1] 앗수르의 확장과 사마리아 함락 디글랏빌레셀 3세는 왕권을 찬탈한 후 B.C.745년부터 727년까지 다스렸다. 신 앗수르 시대는 B.C.745년부터 612년까지를 말한다. 디글랏빌레셀 3세는 북서쪽 아람 국가인 아르밧, 북쪽의 알레포, 운키를 상대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럼으로써 북부 수리아와 지중해 북부 팔레스타인 연안에 대한 통제권이 확고해졌다. 이와 같이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수르 제국을 확대하고 세력을 확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 왕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앗수르의 살만에셀은 호세아를 감금하고 3년 동안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호세아 왕은 앗수르에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애굽 왕 소(So)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의 애굽은 자체내의 사정이 어려워 호세와 왕을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B.C 752년 살룸은 스가랴 왕을 암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으나 므나헴에게 암살되었다. 므나헴은 디글랏빌레셀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앗수르의 다음 목표는 블레셋이었다. 앗수르의 블레셋 진격은 애굽에서 시작되는 무역로를 통제하고 이스라엘이나 시리아가 애굽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한 통로를 차단하려는 목적을 지녔다. B.C.733년 이스라엘의 베가를 포함한 아람의 작은 나라들은 앗수르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였다. 이 동맹이 바로 유다왕 아하스가 가담하지 않으려고 했던 동맹이며, 그로 인해 다마섹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B.C. 732년 디글랏빌레셀은 다메섹으로 진격하여 그곳 왕 르신을 처형하고 다메섹이 다스리던 지역을 한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다(왕하 15:29).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영토는 에브라임 산의 중앙산지로 축소되었다. 디글랏빌레셀 3세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베가 왕을 퇴임시키도록 모종의 조치를 취하였으며(왕하 15:30) 호세아를 새로운 후임 왕으로 인정하였다. 이스라엘은 그 나라의 19번째이며 마지막 왕으로 엘라의 아들 호세아를 맞이하게 되었다. 호세아는 불과 두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왕국의 아홉 번째 왕조를 출범시키며 이스라엘의 마지막 9년을 다스렸다(B.C 732-722). 그는 과거 이스라엘이 영토 가운데 그때까지 남아 있던 사마리아 도성 및 그 주변의 일부 에브라임 산지를 다스렸다. 호세아 왕은 디글랏빌레셀 3세의 후계자인 살만에셀 5세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의 소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살만에셀 5세는 호세아 왕의 이와 같은 반란에 대해 사라미를 3년간 포위하여 마침내 함락시켰다. 사마리아 포위공격은 B.C.724년부터 722년까지 계속되었다. 사마리아 성이 함락된 B.C 722년 27,290명이 포로로 잡혔다. B.C 734년부터 B.C 669년까지 65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강제이주가 진행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왜 사마리아에 필요하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왕하 17:7~18). 여호와께서 도와 줄 수 없거나 이스라엘을 구원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주권에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의 법에 이미 경고되었던 심판이 결국 성취된 것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포로 유배생활이 B.C 734년부터 약 65년에 걸쳐 진행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B.C. 734년부터 669년까지 이사야의 예언대로 정확히 65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강제이주가 진행되었다. 이주 정책은 사르곤 2세의 손자인 앗수르 왕 에살핫돈 시대에 와서야 완료되었다.
A History of Israel(2)<이스라엘의 역사(2)>/2009-12-03
A History of Israel (2) 이스라엘의 역사(2) [2] 앗수르의 지배 원래 앗수르는 유다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주로 다메섹과 이스라엘을 최종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B.C 740년 이후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아하스는 친앗수르 정책을 채택하여 권력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유다는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애굽은 국내의 정치적 혼란과 왕권 경쟁으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유다는 앗수르의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이 되면서 주변에 팔레스타인의 다른 반자치국가들과 함께 외로운 변방으로 남게 되었다. 유다는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지 않았다. 요담은 에루살렘 성전의 문과 오벨 성벽을 건설하고 성읍들을 확장하였으며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요새와 망대를 세우는 등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하였다. 히스기야 왕은 B.C 729년에서 B.C 686년까지 42년간 통치하였다. 그후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55년간 통치하였다. 반앗수르 동맹에 대한 동참을 거부해 온 아하스(B.C. 743~715)는 사면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다메섹의 르신과 사마리아의 베가의 침입을 받았다. 아하스에게 가장 큰 전쟁은 수리아 - 에브라임 동맹과의 전쟁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에게 두 왕의 협박에 굴하지 말고 독자적인 노선을 유지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아하스는 하나님의 언약적 개입에 관한 선지자의 권고를 거절하고 대신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B.C 727년 디글랏빌레셀이 죽자 사마리아의 호세아가 반란을 일으켜 조공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살만에셀 왕이 즉각적인 공격을 가해오자 이스라엘 왕은 다시 조공을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살만에셀 왕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B.C 724년 사마리아를 포위하였다. 히스기야 왕은 B.C. 729년부터 686년까지 42년간 통치하였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기 시작했다(왕하 18:3~7). 그는 성전을 다시 열고 수리하였다. 그리고 모든 이방 종교들을 파괴하였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바벨론을 선점한 틈을 다서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B.C 701SUS 산헤립이 유다와 애굽을 향해 서쪽으로 진군을 하였다. 산헤립은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성은 포위되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에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다. 히스기야가 죽과 나서 그의 아들 므낫세는 B.C 696년부터 642년까지 55년간 통치하였다. 므낫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전혀 없었다. 므낫세는 앗술바니팔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에살핫돈은 B.C. 648년경 그의 부친 산헤립이 파괴한 바벨론을 다시 재건하여 앗수르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므낫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4~5년 정도 더 통치를 했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은 B.C 642년부터 640년까지 2년간 통치했다. 므낫세는 왕궁 대신들의 음모에 의해 죽었다. 이 무렵 앗수르가 지배하던 한 세기는 끝나가고 있었다. 바벨론이 빠른 속도로 부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A History of Israel(3)<이스라엘의 역사(3)>/2009-12-03
A History of Israel(3) 이스라엘의 역사(3) [3] 바벨론 패권시대(B.C.640~539) 고대 근동의 맹주로 부상했던 앗수르는 B.C 627년 앗술바니팔의 사망과 함께 극적이면서도 빠른 속도로 퇴보하기 시작했다. 유다 지역을 관할하던 앗수르의 통치는 애굽의 지배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흥세력 바벨론의 부상은 애굽으로 하여금 앗수르와 연합하게 만들었다. 유다가 멸망하기 전 100년의 역사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수르, 바벨론, 애굽 세 나라와의 상황에 따라 위기와 안정을 되풀이하였다. 유다는 B.C.621년 요시아 개혁의 결과로 왕국의 회복과 재통일을 위한 희미한 희망과 기대를 가졌으나, 주변 국제정세의 불안과 대혼란으로 그 이후 B.C.587년까지 25년의 기간은 유대에게 아주 가혹한 시련이었다. 유다를 다스렸던 5명의 왕 중 2명은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3명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앗수르는 새롭게 등장한 바벨론과 싸워야했고, 바벨론은 애굽과 싸움을 벌였다. B.C.610년 앗수르는 하란성까지 밀려 있다가 바벨론과 스키타이 동맹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요시아가 통치했던 B.C 640~609년 사이의 31년 동안 유다는 외부의 적과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으며 나라의 재건과 신앙과 관련된 영적 문제에 몰두할 수 있었다. 요시아는 우상을 몰아내고 예루살렘 성전을 청소하고 보수하였다. 유다 쇠퇴기에는 스바냐(B.C. 640~609년), 하박국(B.C.615~598년), 나훔(B.C.663~612년), 예레미야(B.C.627~562년) 등이 선지자로 활동하였다. 요시아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대를 이었다.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와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 틈을 타서 애굽의 느고 왕은 여호아하스를 감금하고 그의 형인 여호와김을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애굽은 유대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B.C.605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내자 유다는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바벨론은 애굽을 상대로 계속해서 공격을 했다. 바벨론과 애굽의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유다는 애굽의 도움을 받으려고 기대하면서 바벨론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그 때문에 B.C.598년 여호와김은 죽고 말았다. B.C.597년 느부갓네살은 요시아의 셋째 아들인 맛다니야를 유다 왕으로 삼았다. 맛다니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B.C.587년까지 통치하였다. 맛다니야의 이름은 나중에 시드기야로 바뀌었다. 시드기야는 애굽의 도움을 받아 바벨론에게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게 되고, B.C.586년 7월 예루살렘은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두 아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살해하였고, 시드기야도 두 눈이 뽑혔다. 유다가 멸망한 후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그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다랴도 왕손 이스마엘에 의해 살해된다.
A History of Israel(4)<이스라엘의 역사(4)>/2009-12-03
A History of Israel(4) 이스라엘의 역사(4) [4] 포로생활과 제1차 귀환 바벨론이 임명한 새 총독 그다랴는 두 달간 총독으로 지내다가 이스마엘에의해 갑자기 살해당했다. 첫 포로들이 바벨론으로 간 것은 B.C. 605년이었으며 이때 다니엘과 그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다른 왕족 및 귀족들과 더불어 포로로 끌려갔다.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부를 누렸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니엘처럼 고위관직에도 오르기도 하였다. 신 바벨론 제국은 느부갓네살 왕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건축학적인 업적을 남겼으나 정치적인 안정은 별로 누리지 못했다. 베벨론 제국은 느부갓네살의 카리스마와 개성으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그가 죽자 제국은 곧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느부갓네살이 죽고 23년이 지나자 수도 바벨론은 메대 - 바사 제국을 건설한 고레스의 손에 넘어갔다. B.C.539년 바벨론은 고레스에 의해 정복되었다. 고레스는 메대와 소아시아, 바벨론을 정복한 후 피지배백성들의 종교를 허용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일부 귀환하게 되었고, 성전을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A History of Israel(5)<이스라엘의 역사(5)>/2009-12-03
A History of Israel(5) 이스라엘의 역사(5) [5] 에스라와 느헤미야 인도하의 귀환 바벨론은 70년 포로기간 동안 언약백성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헬라는 B.C.487년 델로스 동맹을 체결하고 아테네로 하여금 그 동맹을 이끌도록 하였다. 다리오 통치 초기에 중단되었던 성전건축이 다시 재개되었다.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재건을 주도한 사람은 여호수아였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성전재건에 반대하고 나섰다. 사마리아 함락 당시 북쪽 지역에 남았던 이들은 속국 백성들에 대한 앗수르의 이주정책으로 들어온 많은 이방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왔다. 바벨론을 정복하고 메대 바사 전역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고레스 대왕은 B.C.538년 유명한 조서를 반포하였다. 그것은 유대인들과 같은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이었다. 세스바살은 1차 귀환을 이끌었고, 더 나아가 성전재건으로 이어졌다. 그 후 에스라와 느헤미야 인도 하에 두 차례의 귀환이 더 있었다.
A History of Israel(6)<이스라엘의 역사(6)>/2009-12-03
A History of Israel(6) 이스라엘의 역사(6) [6] 헬라시대(B.C.332~167) 바사 시대의 전성기는 B.C.550년경부터 B.C 167년경까지였다. 후기 아케메니아 시대는 전반적으로 음모와 부패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 무렵 헬라라는 새로운 세력이 점차 힘을 얻고 있었다. 바사는 스파르타와 싸우는 아테네를 지원했다. 그럼으로써 소아시아의 헬라 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갔다. B.C.338년 아테네에게 대승을 거둔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바사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했다. B.C. 332년 마게도냐의 알렉산더는 바사제국을 초토화시켰다. 알렉산더는 마게도냐 태생이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헬라인이었고, 개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교육을 받았다. 헬라어는 공식 언어가 되었고, 헬라의 사고방식은 고대 사상과 맞서기 위한 새로운 틀을 제공하였다. 유다는 이 모든 변화의 물결로부터 차단되어 있지 않았다. 100년간 계속된 애굽의 포톨레마이오스의 통치와 그 후 수리아의 셀류쿠스의 통치를 받으면서 유다 역시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깊이 잠기게 되었다. 세 강대국들이 알렉산더의 제국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마게도냐에는 안티고누스 왕조, 애굽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수리아에는 셀류쿠스 왕조가 차지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정 이후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3세의 유화정책을 반겼다. 안티오쿠스는 토라를 국법으로 인정하고 백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들은 3년간 세금을 면제받았고, 그 이후 모든 세금은 종전보다 1/3 감면되었다. 이 시대의 헬라화가 기여한 기념비적인 업적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 방언으로 번역한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72명의 번역자들이 헬라어 번역본을 72일 만에 완성했는데 각 번역자들의 역본이 모두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 번역본을 70인경이라고 한다.
A History of Israel(7)<이스라엘의 역사(7)>/2009-12-03
A History of Israel(7) 이스라엘의 역사(7) [7] 마카비 반란(B.C.167~134년) 샐류쿠수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처음 시작된 곳은 모딘이었다. 안티오쿠스이 사자는 셀류쿠스 정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모딘에 이방신 제단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였다. 맛다디아는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며 즉시 거부했다. 수리아의 억압정책은 여호와에게 드리는 모든 성전 예배를 중지시키고 할례를 금지시켰으며 토라 연구를 금지시켰다. 맛다디아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었고, 그의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대를 이어 반란을 계속했다. [8] 하스몬 왕국(B.C.135~63) 셀류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점차로 쇠퇴해지고 있었고, 두 왕조 모두 내부적인 문제로 멸망에 다가가고 있었다. 로마 역시 B.C.133년 그라치 가문이 일으킨 내란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내전은 B.C.33년 아우구스투스가 원수정치를 수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로마는 동쪽의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정사에 개입할 여유가 없었다. 데미트리우스는 셀류쿠스이 통치 170년째 되던 해인 B.C.142년 시몬 마카비에게 독립과 아울러 조공을 면제해 주었다. 당시 유대 문화 속으로 점차 침투해 들어오는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에 대한 반발로 많은 분파가 새로 생겨났다. 그중에서 경건파 하시딤은 가장 보수적인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종교적 자유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주장하고 모든 형태의 헬라적 문화와 사상을 배척하였다. 이 하시딤은 나중에 바리새파가 된다. B.C.63년부터 로마는 예루살렘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유대는 로마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히루카누스 2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서 제한적인 구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의 포로로 압송되었고, B.C.61년 폼페이의 개설행렬 때 전시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스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로마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옛땅으로 입성하여 이 지역이 수리아주로 편성됨으로써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모두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