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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 주기철 목사의 생애/ 2014-11-15
소양 주기철 목사의 생애 마치 첫 3세기 동안 초대교회가 이단과 박해라는 두가지 도전을 받았듯이 개신교 선교 50주년을 맞는 1930년대 한국교회는 자유주의와 신사참배 두가지 큰 도전에 직면했다. 하나는 내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다. 성경의 권위를 평가절하시키고 신학과 신앙을 시대의 조류에 조정하려는 유럽과 북미의 자유주의 세력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로교 내 진보주의자들은 구학파 전통에 선 복음주의 선교사들이 과거 50여년 동안 의 한국교회를 “정통주의로 통조림된 교회”라고 매도하며 장로교 구학파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1930년대 한국교회가 직면한 외부로부터의 도전은 신사참배 강요였다. 획일화시키긴 한계가 있지만, 기독교 2천년의 역사, 특히 초대교회 박해사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유일신 신앙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황제숭배의 도전 앞에서 교회는 황제숭배를 한 사람, 마지 못해 타협한 사람들, 끝까지 숭배를 거부한 사람들 세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 한국교회를 소용돌이로 몰아 넣어 한국의 교회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똑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일제가 조직적으로 신사참배거부를 방해하고, 친일세력들을 침투시켜 회유와 압력으로 신사참배운동을 전개하자 처음,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사람들도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제국에 대한 예의에 불과하다는 일제의 입장을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1930년대, 자유주의 도전과 신사참배라는 두가지 도전으로 기로에 선 한국교회의 신앙을 지켜주고 삶을 통해 그 진실을 전달한 인물이 바로 소양 주기철 목사였다. 소양의 가장 활기찬 목회사역은 1930년대에 이루어졌고, 이쩌면 그는 이 1930년대 암훌한 조국의 기독교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인물이다. 그는 실로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충정을 삶으로 진실되게 밝혀준 살아 있는 믿음의 표상이었고, 진리가 결국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시대를 바라 본 선각자였다. 우리는 소양 주기철 목사의 긴 생애 속에서 일관된 신앙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주기철목사의 경우 그의 생애는 그가 일관되게 지켜왔던 신앙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추구해 온 신앙의 형태를 동시에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본 소고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생애를 성장배경, 회심과 준비, 목회사역, 순교, 그리고 역사적 교훈으로 대별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I. 성장배경 주기철의 신앙과 생애는 그가 성장했던 가정의 배경, 그가 처해있던 시대적 배경, 그가 받았던 신학교육의 배경, 그리고 그가 헌신했던 목회사역 속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소양, 주기철은 1897년, 한국 찬탈이 노골화되던 19세기 말, 경상남도 창원군 웅읍면 북부리에서 주현성장로와 조재선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일제의 패망을 1년여 앞둔 1944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전 생애(1897-1944)는 우연히도 일제의 한국지배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기철의 어린 시절의 이름은 기복이었다. 그는 어릴때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버지 주현성은 훗날 보수주의로 정평이 난 경남노회 소속 웅천 북부리 교회의 장로였으며, 자녀들을 철저하게 신앙으로 교육시켰다. 엄격한 경남노회의 신학적 분위기와 아버지 주현성 장로의 신앙교육은 어린시절 소양의 신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소양은 9살 나던해 자신의 일가 주기효가 1906년에 설립한 7년제 개통학교에 입학해 김창환, 유수성, 이규설 같은 이들에게서 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애와 반일사상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통학교 5학년때인 1910년 12월 25일 웅천교회에 입교했다.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이시기는 암흑이 엇갈리는 시대였다. 종교적으로는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과 독노회설립으로 한국교회가 성장과 교회의 틀을 동시에 다져가던 시대였으나 정치적으로는 한일합방으로 우리 민족이 엄청난 수난을 겪었던 해이기도 하다. 소양은 전국교회를 휩쓸었던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애가 강한 개통학교의 교사로부터 민족주의를 접하면서 감수성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런 반일감정과 민족애가 소양의 사고 속에서 하나의 체계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오산학교에서였다. 그가 오산학교로의 진학을 결정하게 된데는 오산학교의 학문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개통학교를 졸업하던 1912년, 당시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춘원 이광수가 전국 순회강연차 마산으로 가는 길에 웅천에 들려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애국과 민족주의의 교육 이념으로 민족의 내일을 설계하는 대망의 열혈 청년들이 운집해 온다”며 오산학교를 소개하자 마침 상급학교 진학을 결정하지 못한 소양은 오산학교의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소양은 자신의 이름을 기복에서 기철로 바꾸고 자신의 호를 여강(麗崗)이라 불렀다. 1913년에 종형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한 소양은 오산의 민족주의 분위기, 특히 남강 이승훈 선생, 유영모선생, 조만식선생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민족주의에 기초한 진정한 민족교육, 밀어 닥치는 일본자본에 맞서 거대 민족재벌을 육성해야 한다는 민족 산업 육성책과 더불어 신민회를 통한 민족 에너지의 결집을 주창해온 이승훈선생, 민족애을 철저한 극기와 금욕기상으로 소화시킨 유영모선생, 그리고 “기독교와 경제, 이 두 동력에 의한 민족갱생”을 꿈꾸며 통시적인 역사 안목에 근거한 민족사를 제시한 조만식선생은 의식 있는 오산의 젊은이들이게 강한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주기철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양과 같은 반에는 미국에 건너가 농장을 한 김주항, 고려대학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박동진, 남강의 둘째 아들 이택호가 있었고, 한학년 위에는 외과의사 백인제가 있었다. 소양이 오산에서 교육받던 1913년 봄부터 1916년 3월까지는 일제가 합일합방의 원래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던 시기인지라 오산에서의 민족주의 교육은 소양에게 더욱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일본의 국내 개입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예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이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그리고 급기야는 1910년의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비운으로 이어지고, 그 여파로 이렇게까지 이 민족이 신음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일제의 한국지배는 소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그의 생애의 한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급작스럽게 달라지는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 일제의 노골적인 조선의 침략, 그리고 국내의 경제적 파탄을 목도하면서 소양은 어떤 형태로던 이 시대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II. 회심과 준비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도 더 결정적으로 소양의 생애와 신앙을 지배하게 된 원동력은 그의 회심과 평양신학교에서의 보수주의 신학교육이었다. 소양은 1916년 3월 23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채 1년도 되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투철한 산업정신과 경제입국의 이상에 민족구원이 있다”고 확신한 오산의 이승훈선생과 조만식 선생의 영향을 받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던 소양은 1년도 채되지 않아 연희를 떠나고 말았다. 이유는 지병인 안질 로 알려졌으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희 상과가 그에게 적성이 맞았던 것도, 그렇다고 연희에서의 교육이 소양에게 그렇게 호소력이 있거나 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1916년 말 고향에 돌아온 소양은 평양신학교 입학할때까지 4년반을 곰내에서 보냈다. 그가 곰내에 머물고 있는 그기간 동안 국내는 일본자본의 침투와 반사회적 정책으로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자본의 침투는 한국의 전근대적 경제구조의 몰락을 재촉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상품의 홍수에 눈뜬 전에 없던 소비자세, 그런 데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의 충족되지 못한 반 사회적 발산 등이 팽배하였다. 또한 물가고에 따른 아녀자들의 직장 진출, 그로 인한 전통적 한국 가족제도의 동요, 취업지망 청년남녀의 수평이동, 농촌인구의 계속적 격감, 이런 여러 현상은 근대산업사회에로의 변신을 이 사회에 강요하면서 사회혼란을 가속화시키고 있었다. ... 더구나 450만명에 이르는 소작인들의 생활은 기아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무직과 기아, 추위, 고물가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생활의 빈핍화로 해외로 나가는 이민의 수도 1918년 간도에만 1만 5000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거기다 일제의 반사회적 정책 강행도 우리 민족에게는 전례없는 비참을 안겨다 주었다. 1916년 조선 총독부는 ‘유곽업 창기취제’ 규정을 발표하여 공창제를 실시, 서울에만도 50만불을 들여 홍등가를 설치하여 한국 청소년들의 도덕적 해체작업을 시작하였다. 더구나 1918년에는 총독부의 공식 예산 18만 2000불을 아편재배 항목으로 배정해서 이를 전매하게 하는 범죄적 행위를 불사하였다. 주초의 총독 세입은 한때 전 세입의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총독부가 공금으로 공창, 마약, 주초를 확대공급 전매하여 이사회의 병폐화를 가속화시켰으니 식민정치의 죄악성치고 이 이상의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 이런 암울한 조국의 현실, 그로인한 미래에 대한 불확실, 더구나 일생동안 괴롭혔고, 학업마저 중단하게 만들었던 안질로 인한 육체적 고통으로 소양은 연희를 떠난 후 긴 세월을 좌절의 늪 속에 헤매야 했다. 결단과 변화가 요청되는 그런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기위해 오상근과 함께 고향청년들의 교육을 위해 교남학회를 만들었으나 그가 직면한 시대상과 그가 만난 육체적 고통으로 별반 결실을 거둘 수 없었다. 자신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방황하고 있으면서도 교회 생활만은 충실하였다. 1918년부터 웅천읍교회 집사가 된 소양은 종종 주일 날에 설교도 하고, 교회를 청소하고, 주일학교 중책도 맡아 교회 일을 담당하며 이기선 목사의 목회를 도왔다. 이 기간이 한편으로는 방황의 기간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단과 훈련의 기간이었다. 바로 그시절, 3.1.운동을 1년 앞둔 1918년 21살의 소양은 서울정신학교를 졸업한 3살 연하의 김해의 규수 안갑수(1900-1933)와 결혼했다. “모범적인 신앙의 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정열적인 여인” 안갑수는 한 남편의 출실한 내조자요, 한국교회 목회자 아내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 한 가정의 충실한 아내였다. 민경배 교수에 따르면 안갑수는 “조용히 아이들을 키우고 뒤에 숨어 전면에 나타나기를 삼가면서 여인으로서의 환회도 당시 여성들의 한계보다 더 깊이 제한하고 은폐시키며, 그러다가 병약에 시달리고 말없이 조용히 무대에서 사라져 간 목사 부인의 생애, 그것을 그대로 한편의 시처럼 남기고 간” 당대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은 사모가 “성격이 활달하고, 외향적이며, 말수가 굉장히 빠르고” “인정과 감정이 풍부”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등에 엎고 심방”하는가 하면, 설교후에 강평도 주저하지 않는 깨어 있는 목회자 아내, 그러면서도 여필종부에 출실했던 한 지아비의 아내였다. 때문에 활달하면서도 희생적인 한 아내 안갑수와의 결혼으로 소양은 적지 않은 심리적 안정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 성직에로의 결심 수년 동안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시절부터 받은 가정의 엄격한 신앙교육과 북부리 교회의 보수적인 분위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신앙의 색갈은 일생동안 소양의 삶을 특징지워주었다. 1918년 김장호가 지금까지 구학파 전통의 한국 보수주의 전통에 반기를 들며 성경에 나타난 이적과 기적들을 모두 부인하고 심지어 부활과 재림마저 부인하는 극단의 현상을 보이자 이를 목격한 한국교회는 이제 서구에서 진행된 현대주의 도전이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국내의 신학적 흐름을 소양이 모르고 있을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조국의 변천과 도전을 보면서 그는 신앙의 순수성 보존이야 말로 한국교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자연히 소양에게 영향을 준 인물도 그런 전통에 선 장로교 지도자들이었다. 그중에서 성서중심의 보수주의 신앙을 외쳤던 이기선과 성령의 놀라운 각성과 체험을 통한 치유의 사역의 주인공 김익두는 소양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익두는 1920년 전국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니며 하늘로부터 내리우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 전국을 성령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앉은 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말을 알아듣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불치의 병이 치유받는 놀라운 이적이 집회때 마다 비일 비재하게 일어났다. 이것을 체험하고 목격한 황해노회가 1923년 총회에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란 장로회 헌법 제 3장 1조의 수정을 건의할 정도였으니 김익두의 집회에 얼마나 이적이 일어났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한국의 진보주의 신학을 대변하는 김재준과 한국 정통신학의 대부 박형룡이 예수를 영접한 것도 김익두 집회에 참석하고서였다. 소양은 김재준이 김익두로부터 은혜를 받은 1920년, 그해 5월 27일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 참석해 깊은 영적 각성을 체험했다. 친구 지수광, 배익조, 이약신과 함께 참석한 이집회에서 소양은 김익두목사의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가 있은후 과거의 죄에 대한 통회, “성령의 강력한 임재,”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영적” 각성을 체험한 것이다. 그해 11월 1일부터 웅천읍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또 다시 “큰 은혜”를 받은 후 소양의 인생관은 완전히 달라졌다.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가에 한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해 영적 각성을 체험한후 그의 일생이 완전히 바뀐것처럼, 소양도 김익두의 집회에 참석해 놀라운 영적 각성 체험 후 주의 종으로 일생을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으로 연희에서의 학업 중단후 소양의 “4년반의 긴 좌절과 방황”은 완전히 끝이 났다. 이듬해 1921년 12월 13일 문창교회에서 회집된 경남노회 제 12회 정기노회때 소양은 주정택, 홍수원, 강상은과 나란히 신학교 입학 시취를 통과하고, 1922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2. 평양신학교 시절 애초 연희로 진학하겠다던 소양의 결심은 소양의 신앙적 성향이나 영적 배경과는 맞지 않았다. 연희에서의 갈등과는 달리 평양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은 소양에게 만족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그가 입학하던 1922년 평양신학교는 국내의 가장 크고 훌륭한 교수진을 갖춘 신학교로 새롭게 단장하고, 교과과정도 재편했다. 1901년에 시작된 평양신학교는 1922년부터 신학과정을 3년과정으로 개편하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신학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구태여 “평양신학교는 주목사 재학시대가 황금시대”였다는 김인서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고 당시 평양신학교는 단일신학교로는 국내에서 가장 훌륭한 교수진을 갖추고 있었고, 재학생수도 제법 “세계적 수준”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평신은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그리고 카나다 장로교등 4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신학교였고, 따라서 교수진이 각 선교회에서 파송한 우수한 선교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가히 수준급이었다. 공관복음을 강의한 나부열박사, 구약학을 강의한 어도만박사, 역사신학을 강의한 부두일박사와 업아력박사, 고전어를 강의한 왕길지박사, 교장 마포삼열 박사, 조직신학을 강의한 이눌서박사, 실천신학을 강의한 곽안련박사등 교수진 모두가 학문과 인격에 있어서 작금의 어느 신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계적 수준”이었다. 평양신학교는 “일종의 성경훈련학교”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성경과 실천신학 중심의 커리큘럼으로 짜여져 있었다. 1학년 커리큘럼을 보면 14과목 중 11과목이 성서학과 실천신학 과목이고 2학년 16과목 중 11과목이 그리고 전체 47과목 중 34과목이 성서학과 실천신학 과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이 당시 소양에게는 연희전문학교 상과에서 수강했던 세속학문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매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으면서 평신의 훌륭한 교수들의 신앙과 인격에 감화를 받았다. 본래 오산에서의 민족주의 의식이 차원 높은 순수 기독교 민족주의로 승화되어 갔던 것도 이 시기였다. 목회자로로 부름받았다는 강한 소명의식 때문에 소양은 스승 고당 조만식이 자신을 찾아와 교육계 투신을 권유할 때도, 60 노구를 이끌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장차 오산학교를 맡기겠다며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로의 유학을 권할때도 주저하지 않고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 목회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에는 추호도 의심에 여지가 없었다. 정치적인 독립의 소망이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되어 이 민족이 진정으로 살길은 복음화되는 길이며, 전 민족이 자신들의 위치에서 기독교적 이상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순수 기독교적 민족 이상이 바로 평신학생을 여타 학교의 학생과 구별짓는 것이었다. 소양에게는 늘 이 민족 전체를 염려하는 선각자적 혜안이 있었고, 이런 역사의식은 평신에 있는 동안에도 표출되었다. 소양은 지방 출신별로 기숙사가 따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 학교의 화합과 일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철폐해 줄 것을 학교 측에 건의했다. “지방별로 기숙사에 입사시킬 것이 아니라 각 지방 학생들을 고루고루 섞어 배방을 하면 서로 지방의 특징도 배우고 친목을” 도모하며 결국 “후일 한국 교회는 지방색이 없는 하나의 교회”가 될 것이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고 건의 할 수 있는 평범한 일 처럼 보이겠지만 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역적인 장벽을 넘어 한국 전체를 바라 보는 역사적 혜안을 가진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소양의 건의가 장로교단과 더 나가 전 한국교회의 장래를 염려하는 한 젊은이의 애교심에서 나온 충정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신학교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소양은 주의 종으로서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맡겨진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소양은 평양신학교를 다니면서 1922년 겨울부터 1925년 9월까지 경상남도 양산교회 조사로 성역을 시작했다. 평신에서의 3년 간은 주 중에는 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주말에는 평양에서 경산 양산까지 내려가 주일을 지키고 다시 수업을 받기 위해 평양까지 올라 와야하는 고된 훈련의 기간이었다. III. 목회사역 앞서 언급했듯이 평양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은 단순히 학적인 훈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실천적이리라 할 만큼 현장을 강조하는 신학교육이었다. 신학교가 교단과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신학교육은 생명을 상실한 것이다. 말씀 그대로 확신 있게 외치고, 현장에서 몸으로 실천하는 목회자 양성, 바로 이것이 평양신학교의 교육 목표였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 장대현 교회에서 처음 시작된 새벽기도가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하면서, 모든 학생들은 새벽마다 학교 채플에 모여 기도를 했다. 이것은 학교 경건훈련의 커리큘럼에 따른 것이지만, 결코 학생 자신들이 강제성을 띠기 때문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암울한 그 시대, 이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자각하고 있던 이들은 민족의 소망이 기독교에 달려 있다는 그 자성의 외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평신에서는 민족주의라는 단어나 분위기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이 민족을 일제의 압제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확신은 평신의 교수들이나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갖고 있었다. 100만인 구령 운동이 교파를 초월해 이 시대의 전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그시대 민족의 복음화는 곧 민족의 구원이라는 신념이 팽배했다. 이것으로 조국의 미래에 대한 소양의 오랜 정신적 방황도 완전히 끝난 셈이다. 1. 부산 초량교회 목회 입학한지 4년만인 1925년 12월 22일 19회로 평신을 졸업한 소양은 그해 12월 30일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초량교회에 부임했다. 그가 초량교회에 부임하던 1925년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 전반에 걸쳐 일제의 한국 침략 기간 중 가장 변화 무쌍했던 격동기였다. 반서구, 반 선교사, 반 정통의 기치를 내걸며 친일 기독교를 표방했던 김장호와 이만집의 조선기독교가 설립된 것도, 반서북, 반선교, 반교권의 기치를 내걸고 신흥우가 분파운동, 적극신앙단을 시작한 것도, 총독부가 한국경제를 완전히 찬탈하려 한 것도, 또 한국 젊은이들의 정신적 해체를 목표로 아편 공창 주초를 정책적으로 육성하려는 총독부의 부도덕성이 정점에 달했던 것도, 그리고 156만 4582원이라는 거금과 5년 6개월의 대공사를 거쳐 서울 남산에 거대한 조선신궁을 완성한 것도 바로 1925년이었다. 조선신궁이 건립되던 그해 후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끝내 순교한 소양의 공식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리라. 이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이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일제의 대한 파괴 공작 속에 민족의 수치와 아픔이 극에 달하던 바로 그때 소양은 평신에서의 3년간의 신학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역사 깊은 초량교회에 부임한 것이다. 이미 평신 졸업식에서 30명의 졸업생을 대표하여 답사하는 영예을 차지할 정도로재학 시절부터 동료와 교수들로부터 학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소양에게 초량교회 부임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소양의 초량교회 부임은 그가 촉망받는 이 시대의 젊은 지도자라는 사실을 전국 교계에 알리는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전임자 정덕생 목사의 후임으로 초량교회에 부임한 후 소양에게 부여된 첫번째 과제는 전임자로 말미암아 야기된 교회의 동요를 안정시키고 타교회에 비해 약한 교세를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에 걸맞게 성장시키는 일이었다. 소양이 볼때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서 초량교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교회 개혁은 시급한 요청이었다. 때문에 목회도 이런 방향에 맞추어졌고, 그중에는 “말씀의 진정한 전파” “성례의 신실한 거행” “권징의 정당한 시행”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먼저 전임자 정덕생 목사의 영향으로 남아 있는 정치적 민족주의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정목사는 소양이 부임하기 3년전 70평의 예배당을 신축하여 교회를 단장하기는 했지만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해 교회 안에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늘 모여들었고, 그결과 정치적인 요소들이 영적인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것을 간파한 소양은 성경공부와 기도회 중심으로 교회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행정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두번째 그가 단행한 것은 교회 재정상의 개혁이었다. 국가 경제의 어려움으로 교회 재정이 압박을 받자 자신의 사례를 하향 조정하고, 부인 안갑수의 재산 논 6000여평을 점차적으로 처분하여 교회재정 일부로 충당하는 등 헌신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교회의 재정 압박 속에서도 상회비, 선교비, 신학생 보조금은 삭감하지 않고 계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양의 목회 철학이 그 첫 목회지에서 여실히 나타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인으로서의 신앙의 모습을 갖추지 않을 때는 성경과 교회의 원칙을 따라 엄격히 치리하는 등 신앙의 순결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과감한 결단,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실천적인 신앙,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용기,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하는 기도의 삶, 성서 중심의 설교, 교회교육, 그리고 행정은 전임자의 목회철학과 달랐고, 그것은 교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원동력이었다. 부임당시 100여명의 교세는 얼마 가지 않아 그 세배, 300명의 교세로 급성장하였다. 이것으로 소양은 교단으로부터 성공적인 목회자로 주목 받기에 충분했다. 소양의 성서적 신앙과 목회는 전임자와 다른 방향에서 교회를 안정시키고, 교회의 지도자들을 배출하게 만들었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던 방계성, 일제하에 초량교회를 끝까지 지켜준 양성봉 목사,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 손양원 목사, 한국 보수주의의 탁월한 지도자 이정심 목사도 모두 소양의 신앙과 인격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외 전재선 목사, 박손혁 목사, 김석진목사, 노진현목사, 구영기 목사도 소양의 감화와 영향을 받은 지도자들이었다. 이들 모두 소양을 따라 성서적 신앙에 기초한 전통적인 한국 장로교의 순수한 신앙을 계승한 이들로 신사참배와 자유주의 도전 앞에 교회의 순수성 보존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이들이었다. 2. 마산 문창교회 목회 소양의 초량교회 목회 시절과 관련되 빼 놓을 수 없는 한가지 사건은 1931년 그가 속한 경남노회가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신사참배 반대안을 결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양의 역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초량교회가 경남노회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가장 큰 교세를 가지고 있었고, 또 소양이 (당시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목회로) 노회에서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때 그 일이 성사되기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에서 뿐 아니라 노회적인 차원에서 신앙의 순수성과 순결성의 보수는 시대적 사명이고, 일차적인 복음의 명령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철저한 성서적 신앙, 그위에 기초한 목회사역은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마산 문창교회에 가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가 초량교회를 떠나 문창교회로 사역지를 옮긴 이유는 교회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기철 목사가 아니면 마산교회[문창교회]는 치리할 수 없다”는 원로 목사 여러분들의 요청을 받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생각”한후 “마산교회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문창교회에 부임한후 한 일은 주일학교 교육의 강화, 엄격한 권징의 실천, 이단의 척결, 그리고 면려회 운동의 활성화 등 여러가지였지만 이들 모두는 철저한 성서적 목회철학의 실천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성경대로의 목회는 자연히 보수성을 지닐 수 밖에 없었고, 비 성서적인 요소에 대항하고 그것을 교회에서 척결하는 일에 전투적이도록 만들었다. 사역의 현장만 다를 뿐이지, 바로 이것이 미국 프린스톤의 신약학 교수 메이첸과 그의 친구 북장로교 목사 매카트니가 미국에서 보여주었던 신앙의 모습이었다. 철저한 성경 중심의 신앙, 처녀 탄생이나 축자영감과 같은 전통교리에 대한 확신, 철저한 칼빈주의 신앙, 그리고 신앙의 행동화는 여러가지 면에서 이들과 유사했다. 카톨릭이 기독교의 변형인지 몰라도 현대주의는 그 출발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라고 선언했던 점에서도 메이첸과 소양, 이 둘은 유사한데가 있었다. 1931년 6월 문창교회에 부임한 소양은 교회 안에 일고 있는 이단적인 세력들을 척격하는 것이 그 교회를 살리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하고 이일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30년대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교단의 흐름과 신학적 지도력이 한국인들에게 전이되면서 전에 없는 혼란을 맞았다. 구 학파 전통의 평양신학교의 보수성에 반기를 든 신흥우, 또한 이용도, 백남주, 황국주, 박계주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추구하는 원산신학산파의 신비주의 세력, 반선교사와 반교권을 외치며 기성교회를 비판하던 김교신으로 대표되는 무교회주의, 그리고 한국의 장로교를 “정통으로 통조림된 교회”라고 외치며 반정통주의 기치를 내걸었던 진보주의 세력, 이 모두가 한국교회를 위협하던 것도 바로 이 즈음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이들의 영향은 커지고 그만큼 이들에게 미혹되는 자들의 수도 증가되고 있었다. 남쪽에는 주로 무교회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고, 북 쪽에는 신비주의 운동이 교회의 정통신앙을 뒤 흔들고 있었다. ... 南朝鮮地方으로는 무교파[회]주의의 신자들이 기성교회를 훼방하야, 신성치 못하다. 혹은 形骸(형해)만 가진 교회라고 선전하야 신자들을 유혹한다. 그래서 튼튼한 터에 신앙의 뿌리를 박지 못한 자들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바람부는 대로 기우러지는 경향이오, 西北으로는 黃國柱 일파와, 元山의 소위 女先知를 중심한 일파와, 평양의 이용도를 중심한 기도단의 일파라 하겠다. ..... 우리는 이제 이 무리들을 “이세벨”의 당’이라고 하고 싶다. 정통교회의 신앙을 위협하는 이와 같은 이설이 전국적인 현상일진대 경남노회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드디어 경남노회 안에서도 그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대담한 신신학”을 표방하던 경남노회의 대지교회의 조사 김형윤이 1935년 최태용과 함께 복음교회를 창립한 무교회주의자 백남용을 초정하여 신학강연을 한 것이다. 백남용은 일본에 유학하는 동안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고 함석헌, 김교신과 함께 무교회주의를 확산시키며 장로교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던 인물이다. 이곳에 초빙받은 백남용은 “예수는 육(肉)이다. 그러나 이 육은 하늘에서 내려온 육이다”며 “소위 순육설(純肉說)”을 주창하였고, 또한 “현대인이 성신의 은사를 받아서 글을 쓴다면 그것도 성경이다”며 특별 계시의 종결성을 거부하였으며 “십계명은 불필요한 것이다”며 “십계명 무용설”마져 생명 내걸고 외쳐댔다. 백남용이 설파한 진리는 한 두가지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가르침은 정통교회가 지난 2천년동안 소중하게 여겨 온 양성 교리에 배치되는 것이며, 성경으로 특별계시는 종결되었다는 정통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일대 도전이며, 구약의 계명을 파기하는 율법파기주의(antinomianism)의 한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교회사에 무지한 자들이 흔히 드러내는 이설(異說) 중의 이설이다. 이런 백남용의 이단성을 간판한 박형룡은 1933년도 신학지남에서 백남용의 가르침은 “조선기독교 장로회에는 결코 용서하지 못할 이단”이며, 서양의 낡은 이단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1932년 9월 총회에서 노회장 주기철이 경남노회를 대표해 “본 노회 경내에서는 백남용씨가 창도한 예수 순육설(순육설)이 유행하여 거기 감염된 전도사와 교인들이 있어 교회가 다소 어지러운 중에 있아오며”라고 보고할 정도였다면, 백남용의 가르침이 경남노회 뿐만 아니라 전국 교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단의 위협 속에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할 필요를 절감한 소양은 1933년 7월 박형룡박사를 초청하여 신학수양회를 열었던 것이다. 길선주와 동갑내기 박형룡은 프린스톤과 남침례회신학교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전국교회에 유망한 젊은 교수로 인정을 받고 있던 차였다. 박형룡박사의 엄격한 정통주의 신앙은 주기철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이단 사설이나 자유주의 신앙에 대해서는 냉혹하리 만큼 가차 없었다. “금년(1933) 7月에 본 노회 주최로 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를 청하여 특별히 교리에 대한 문제로 일주일간 수양회를 하엿사오며”라는 경남노회의 보고는 세가지 사실 즉 박형룡박사가 적격자로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그를 초빙한 것이 교리적인 이유라는 사실, 그리고 그의 초빙이 노회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단에 빠진이들에게 이단의 길을 걷고 있다고 일깨워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가 그들을 일깨우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영향력을 극소화하기 위해 가부간의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엄격한 권징의 실천은 한 교회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노회적인 차원에서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1933년 7월 3일, “이단에 감염된 전도사와 교인들이” “누누히 로회로서 권유하였으나 종시 듯지 안코 점점 악화”되자 경남노회는 감염 경중에 따라 10여명 이상을 “출교”하거나 “면직 책벌”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성서적 신앙에 뿌리를 둔 주기철 목사의 목회 철학에서 볼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양은 교회도 그런 방향에서 엄격하게 다스렸다. 얼마전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소양이 전혀 개인적 슬픔에 침잠되거나 몰입되지 않고 대도를 걸으며 바른 신앙 바른 교회를 구현하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책벌 받은 이들이나 또 이들과 신앙적 색갈을 같이하는 무리들은 자신들이 “制度 否認者”도, “무교회주의자도” “성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도” “불건전한 神秘主義者도” 교리상으로 전혀 “異端者”도 아니며 또한 조선교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야심도 없고, 다만 “신약성서적 산 신앙을 재인식코저 하는 자들”이라고 변호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 주기철 목사가 문창교회를 담임하면서 실천에 옮겼던 목회철학, 그것은 “성서와 신앙 정통성 확인의 목회”였다. 이단에 대해 추호도 양보할 수 없을 만큼 확고했던 소양은 홀이라도 이단 사상과 현대주의에 물든 교인들이 있을까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성경대로의 신앙을 떠난 사람들을 바로 세우는 일이 그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이자 그에게 부여된 거룩한 소명이었다. 3. 불의를 향한 예언자적 항거 왜 소양이 생명을 내걸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섰는가하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한일합방과 더불어서다. 그러나 신사참배 강요가 정치적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확립된 것은 1931년 6월 만주사변이 발생하고부터였다. 이미 일제의 깊은 의도를 언론들은 간파하고 있었다. “혹은 거울로 혹은 구술로 혹은 칼로 ...모양을 만들어 모셔두고 신이 여기에 있다하여 이에 대하여 숭배하며 또는 기도함은 모두 우상숭배”라며 일본의 신사참배참배 강요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으로 정간을 당한 동아일보는 속간하자 1925년 3월 18일 사설에서 신사참배 강요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신사에 대하여 일본인이 “숭고한 경의를 표하는 것은 일본민족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일본인만 위하는 신사에 대하여 일본인 이외에 민족이 일본인과 같은 감정으로 신사 존중하기를 바라지 못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동아일보의 사설은 신사가 일본 사람들의 문제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그것은 국민의례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라는 일반인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누누히 신사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고 단지 예식에 불고하다는 변명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동아일보는 신사참배가 단지 국가에 대한 예식에 불과하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검열과 통제아래 언제나 폐간의 위협을 받고 있는 언론으로서는 국민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민족 굴종과 압박, 그리고 착취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등장”한 신사참배를 “민족사적 차원에서 대결할 힘과 조직이 한국을 통틀어서 교회 밖에 따로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양의 역사 무대의 등장은 시대적 소명이었다. 1932년 9월 17일 일제가 평양의 “만주출정용사 위령제”에 미션스쿨 전 학생들이 참배할 것을 지시한 사건, 그것도 장로교 총회가 평양에서 회집되는 바로 그시기에 지시한 사건이 발생하자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고 확신하던 총회는 “기독교 학교 생도는 他宗敎式典에 참열함을 不許”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총회적인 차원에서 신사참배 문제를 논하기 위해 총회는 1935년 정인과, 염봉남, 이인식, 장규명 ,관신근, 이학봉, 오천영을 위원으로 한 연구위원을 임명하였다. 현대주의 도전이 한꺼번에 한국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1934년과 1935년 한국교회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두 총회가 열렸다. 자유주의 신학 문제, 아빙돈 성경주석 문제, 적극신앙단 문제, 여권문제, 창세기 저작문제가 한꺼번에 제기되어 총회적인 차원에서 이문제를 숙의하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자연히 이들 현대주의에 대한 총회의 결정은 단호할 수 밖에 없었고,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강한 총회의 신사참배 반대 결정을 유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신사참배반대의 기치를 분명히 했던) 경남노회였고, 또 그 노회의 결정 이면에는 소양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소양은 적어도 자유주의와 이단과 신사참배의 도전 앞에 한치의 양보나 타협이 없었다. 성서대로의 신앙,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의 사역을 통해 암울한 역사적 현실을 넘어 이 조국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직시하려 한 이시대의 지도자였다. 그에게 불의와의 타협은 곧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한국교회가 이런 역사적 섭리를 거슬러 올라가 타협한다고 해도, 소양만은 결코 그럴수 없었다. 1934년의 설교, <죽음의 준비>는 이런 소양의 신앙적 결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매일 매일 자기를 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복종하는 것, 불의한 시대에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것, 조국의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역사적 혜안으로 관조하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진정한 이 시대의 예언자의 모습이리라. 1935년 5월 1일부터 5일까지 약 200여명의 장로교 목사, 선교사들이 일제의 총독정치의 식민화 정책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모였다. 여기서 소양은 <예언자의 권위>라는 설교를 통해 예언자적 혜안을 가지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횡포에 항거했다. 구약의 참 선지자들은 불의에 세력 앞에 타협하지 않고 문제들을 고발했던 시대의 선각자들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황폐를 고발한 구약의 엘리야가 그랬고, “평안하다, 잘되어간다고 집권당국에 아부하는 자”들이 득실 거리는 당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대를 고발하고 경계했던 예레미야가 그랬으며, “생살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했던 세례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속에 불의를 불의라고 외쳤던 일사각오의 신앙인들, 메리 여왕 앞에 굴하지 않았던 존 낙스, 교황청의 압력에 굴종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추진했던 마틴 루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실현했던 존 칼빈, 모두 시대에 살면서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간 예언자들이었다. 일본 천황의 숭배 곧 그것은 배도의 길이며, 망국이라고 외쳤던 주기철의 용기, 그것은 엘리야, 예레미아, 그리고 세례 요한의 용기, 바로 그것이었다.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으며, 목사 수양회를 감시하던 임검 경찰관이 “중지”라고 외치자 소양의 설교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소양은 “천황제의 사신 우상성, 그리고 그 국체의 독신성(瀆神性)을 고발하는 하나님의 종의 자세, 거기에 비로소 진실한 목사, 충실한 예언자의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교계 지도자들과 일경 앞에 천명해 모인이들의 의지를 새롭게 결집시켰다. 그해 소양에게는 가정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다. 1933년 5월 조강치처 안갑수와의 사별한 소양이 2년후 1935년 11월 우여골절 끝에 그가 시무하던 문창교회 집사로 있던 강직한 여인 오정모와의 재혼한 것이다. 한달후 소양은 평양신학교 사경회 강사로 초빙받아 후배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순교자의 결단을 담은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1935년 12월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때 한 “일사각오”의 설교는 소양의 예언자적 혜안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설교다.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타인을 위한 일사각오, 부활진리를 위한 일사각오, 그것은 예수 안에서의 죽음이 진정한 생의 출발이며, 부활을 위한 입문임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를 버리는 것이 죽는 길이며, 오히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며, 죄인을 위해 죽기까지 피흘리시고 자신의 생명을 주신 그 남을 위한 희생, 그것이 바로 이시대 우리가 따라야 할 가르침이다. 죽음 저 너머에 보여주시는 부활의 희망, 바로 그것이 죽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될 이유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설이 그리스도 생애 속에서 살아 있는 진리로 승화되었듯이, 죽음과 그 넘어의 부활이 소양의 전 인격 속에 완전히 하나로 용해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소양은 예수의 말씀 그대로를 자신의 주어진 실존 속에서 행동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남을 위한 희생”을 본받아 타인을 위한 일사각오의 신앙구현, 불의의 도전 앞에 순교를 각오하고 외치는 진리의 소리, 그것은 이시대를 찬란하게 여명하는 광야의 소리며, 잠들어 있는 수많은 뭍 영혼들을 각성시켜 하나님의 섭리를 조망하게 만드는 이시대의 나팔이었다. 그의 순교자적 결단의 신앙은 평신의 학생들만 아니라 그곳에 참석한 평신의 교수들, 특히 박형룡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었다. 몇년전 교역자 수양회에서, 다시 평신의 사경회에서 소양의 예언자적 혜안과 순교자적 결단, 탁월한 인격, 그리고 보수 신앙의 뿌리를 재확인한 박형룡은 몇개월후 소양에게 한통의 편지를 발송했다. 그것은 송창근 목사가 사임했으니 후임문제를 상의했으면 좋겠다며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의 청빙을 타진하는 편지였다. 1936년 3월 1달간의 일본 순회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소양에게 평신의 박형룡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4. 산정현교회 목회 1936년 7월로 불의에 대한 예언자적 항거로 점철된 마산 문창교회에서의 목회를 마감한 소양은 주님의 거룩한 부름을 따라 평양 산정현 교회로 옮겼다. 주어진 사역지에서 생명 내걸고 주의 명령을 준행한 후 주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아골골짝 빈들이라도 복음들고 가겠다는 것이 소양의 목회철학이었다. 하나님의 강한 주권, 자기의 전생애를 인도하시는 그의 절대적인 섭리 앞에 언제든지 순종하고, 심지어 주를 따라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1905년 모교회 장대현 교회에서 분립 설립된 산정현교회는 주기철 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할 즈음에는 30년의 역사를 가진 틀 잡힌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강규찬 목사가 떠난후 송창근 목사가 후임이 되었으나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목회 경험이 없는 것은 차지하고라도 여과되지 않은 그의 직선적인 비판은 소화하기에는 너무 날카로웠다. 당시 교계가 서북 대립으로 갈라선 현실을 안타까워 한 송창근은 “요즘 天下 共知하는 바에 조선교계에는 무슨 黨이 있다, 누구의 派가 있다고 하야 서로 놀여 보고, 못밋업어는 터이요, 게다가 갓흔 조선 사람으로서 南놈 北놈 하야 스사로 갈등을 일삼으니 이 엇지함인가. ... 50년 禧年(희년)인가 50년 噫年(희년)인가”며 개탄했다. 물론 이것이 근거 없는 것도, 교인들에게 직접한 것도 아니고 당대 시대를 한탄하면서 쓴 시론성 글이지만, 그가 어떤 방향에서 목회를 했는가를 암시해주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건축기금 조성을 둘러싸고 당회와 의견이 대립하면서 송창근은 점점 더 신뢰를 잃어갔다. 이 모두가 그의 사역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산정현교회를 떠나야 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신학 문제였다. 비록 그가 프린스톤과 덴버에서 수학을 했지만, 일찍이 일본 청산학원에서 받았던 진보적인 신학교육의 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시대 송창근과 함께 청산학원을 거친 김재준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이 수학하던 당시 일본 청산학원은 급진적인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출장소라고 할 만큼 자유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담임 목회 경험이 없었던 송창근이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면서 그의 목회철학과 설교 또는 그가 기고한 글들에 이런 교육적 배경에서 나온 진보적인 사상이 자연스럽게 노출되었고, 급기야는 그것이 총회적인 차원에서 문제시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산정현교회의 문제점과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알 고 있던 사람이 박형룡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산정현교회 동사목사로 때로는 임시당회장으로 교회를 섬기며 교회의 형편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송창근목사가 아빙돈 단권성경주석 번역에 참여하여 총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실도, 그가 감격의 세월이라는 시평을 통해 교회를 신랄하게 비평했던 사실도, 프린스톤에 다녔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청산학원의 진보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었다는 사실도 잘알고 있었다. 박형룡이 볼때 이런 상황에서 산정현교회를 지켜줄 적격자는 주기철 밖에 없었다. 박형룡은 이미 3년전 경남노회 신학수양회를 통해 소양이 이단과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철저한 신앙의 목회자 임을 확인한 데다, 최근의 초량교회와 마산문창교회의 목회, 그리고 총회에서의 그의 지도력으로 이미 교계에 잘 알려진 차제에 산정현교회 후임자로의 추천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당회에 산정현교회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가 바로 주기철 목사라며 그의 청빙을 강하게 권했던 것이다. 오산의 옛 스승 조만식이 문창에까지 내려가 소양의 청빙을 알리자 소양은 그것이 그를 향한 거룩한 부르심으로 받아들이고 주저하지 않고 문창을 떠나 평양으로 올라 온 것이다. 조만식, 김동원, 유계준, 오윤선과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운집한 산정현교회는 서민층들로 구성된 초량교회나 문창교회와 달라 소양에게는 목회가 쉽지 않았다. 그로 인해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소양은 교회가 본래의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자신의 목회 철학에 따라 소신 있게 목회를 해나갔다. 그결과 부임하기 전 100명으로까지 교세가 줄어든 산정현교회는 1937년 9월 5일 입당예배를 드릴 즈임에는 무려 600명으로 불어났다. 부임한지 불과 1년 여만에 교인수가 여섯배로 증가한 것이다. 교회 건축이 완료됨으로써 기존의 기와집 예배당이 서구형의 총 300평 규모의 2층 벽돌집 새 예배당으로 바뀐 것이다. 소양이 입당예배 설교때 밝힌 것처럼, 이 새 예배당은 주님이 재림하셔서 다스리실 “신천신지 새 예루살렘”에까지 영접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곳, 바로 이것이 그의 교회관이었고, 이런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라고 생각했다. 소양은 교회가 조국의 미래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된다고 보았으나 그 시각이 산정현 교회를 주도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시각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정치적인 독립이나 경제적인 자립, 국민의 계몽에 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이 민족의 미래를 밝게 만드는 것이 민족주의자들의 사고라면, 소양에게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복음과 그리스도에 충정하는 것이 결국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었다. 이면에서 소양은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구 학파 전통에 선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박형룡의 신앙의 칼라와 별 차이가 없었다. 진정한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은 개인의 회심과 구원에서 출발되며, 때문에 개인과 집단의 영적구원이야 말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었다. 교회의 영적 책임이 사회적 책임과 무관하지 않지만, 영적 책임 없이는 진정한 사회적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자 가운데 민족주의자 였던 조나단 웨드워드가 교회의 영성회복을 자신의 목회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점에서 소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양은 입당예배를 드린 얼마후 1937년 12월 19일 “성신을 받으라”는 강한 멧세지를 증거한 것이다.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동참하는 길은 바로 개인의 회심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힘입는 것이고 그 채널은 성신이었다. 일본의 무서운 도전 앞에 각 개인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성신의 충만을 통해서다. 성신을 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 죄인이 사유받고 구원의 은총을 힙입는 것이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순교의 기쁨”을 얻는 원동력이었다.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은 성신의 능력과 권능을 힘 입을때 가능하다. 소양이 문창에서는 이단사상으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이라고 확신했다면, 산정현 교회에 와서는 민족주의 운동으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민족운동. 정치운동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나, 인격을 높이며 도덕생활을 하기 위해 교회에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품고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었다. 소양에게 이 민족을 향한 애국심과 민족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누구 보다도 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열망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그가 가슴에 지니고 있던 민족주의는 당시의 통속적인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민족이 죄를 자복하고 주께 돌아오는 바로 그것이 민족의 구원과 해방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이런 소양의 신앙은 목회를 하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어릴때부터 소양이 받았던 신앙교육이었고, 또 성장하면서 그가 추구했던 신앙의 모습이었으며, 평신과 목회 현장에서 일관되게 견지했던 신앙의 모습이었다. 소양에게 신사참배는 제 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배도의 행위였다. 이 때문에 소양은 신사참배로 인한 모든 책임은 담임목사 자신이 지겠다며 “신사참배에 호응한 신도는 지위나 신분을 불문하고 공개제명 출교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런 소양의 선포는 “國體明徽(국체명휘), 鮮滿一和(선만일화), 敎學振作(교학진작), 農工倂進(농공병진), 庶政刷新(서정쇄신)”등 다섯가지 지침을 내걸며 1936년 8월 부임 초부터 일본의 제국주의 정치구현을 외치던 제 8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미나미 총독이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미션스쿨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정책에 맞서 선교회 산하 미션스쿨의 인퇴를 결의하고, 그해 9월에 선교부 산하 10개 학교 가운데 광주의 숭일, 수피아, 목포의 정명, 영흥, 순천의 매산, 매산녀, 담양의 광덕학교를 모두 폐쇄했다. 신사참배를 국체의 이데올로기로 삼겠다는 총독의 부임과 그 배도적 강요에 굴복하지 않고 목숨으로 항거하겠다는 소양의 청빙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데는 인간의 역사(history) 속에 역사(work)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내재되 있었다. IV. 소양의 순교: “진달래 필때 가버린 사람” 따라서 산정현 교회로의 부임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남부와는 달리 북부의 신앙은 보수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평양의 교회들이 있었다. 소양이 부임하면서 산정현 교회는 평양의 교회 중에서도 더욱 보수적이었다. 자연히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있어서도 산정현 교회는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일제의 파괴 공작의 영향으로 친일세력이 득세해 1938년에 이르러 총회 마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교회는 겉잡을 수 없이 신사참배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일제가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에서의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전 국민에 대한 황민화정책을 가속화했던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총독부가 교회에 “기독교인에게 국기 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 제창 실시” “일반신도의 신사참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여행에 힘쓸 것”을 골자로 한 시국관련 시정방침을 하달했던 것도 그해였다. 신사참배의 이면에는 일본 신들에 대한 봉체와 민족 정신의 말살, 식민정책의 실현, 황국신민화, 조선교회의 파괴의 의도가 깊숙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국교회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몰역사적이고 몰 신앙적인 현상들이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여기 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朝鮮基督敎徒는 皇國臣民으로 國體明徵, 國民精神總動員, 銃後後援, 精神作興 제行事를 忠誠으로써 行하여야 할 것이오, 行치 않으면 안될 것이다. ... 그러므로 皇國臣民으로서 國家의 元祖를 崇拜하는 神社參拜를 禮拜하는 것이 當然한 일이요, 異論할 必要가 없는 것 같다. ... 우리 基督敎徒들은 國家가 잇슨 然後에 宗敎가 있고, 宗敎만으로는 生을 完全히 못할 것을 깨닫고 皇國 非常時에 내버린 돌맹이가 되지 말고, 집짓는 데 모퉁이 주추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지성인 중에 지성인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이들이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앞장섰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 대부분이 1934년 총회에서 자유주의 요주의 인물로 경고를 받았던 일본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보다도 일본을 잘알고 있었던 이 지성인들이 한국교회의 신앙적 전통을 친서구, 친선교사라고 매도하며 조선적 기독교라는 명분을 앞세우며 한국기독교의 해체 작업에 앞장서서 신사참배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사실, 이시대 신사참배 분위기를 고조시킨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감리교와 천주교는 이미 오래전에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입장을 받아들여 참배를 결정했고, 장로교도 1938년 6월 전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노회들이 “當局의 指示대로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參拜는 국민정신통일을 위한 國家儀式임을 인식하고 ...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義務인 동시에 교회 지도상 선명한 태도”라고 결의하고 직접 앞장서서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이에 앞서 1938년 4월 25일 유형기, 최성모, 김응조, 장정심, 박연서, 김유순, 김종우목사등 교계지도자들이 서대문 경찰서에 모여 “신사참배는 물론 기타 추후 보국제반 행사에 참가할 것과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 황도정신을 함양”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신민화정책에 앞장설 것을 결의한 일이 있다. 그해 9월 감리교는 “ ... 신사참배는 반드시 행할 국가 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 ...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 추호도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라는 총리사 양주삼 박사의 명의의 성명서를 전국교회에 발송하였다. 1. 소양의 1차 검속 이런 상황에 고무된 일제는 장로교 총회에서 조직적인 신사참배 결정을 끌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일 짐스러운 존재가 바로 소양이었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구속할 구실만 찾고 있었다. 여기에 빌미를 제공해준 사건이 바로 평신 학생 장홍련의 사건이다.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막강한 평북노회가 1938년 2월 9일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분개한 장홍련이 그 노회 노회장 김일선이 평신의 교정에 심어논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버린 것이다. 이를 기화로 신사참배 반대 세력을 척결하겠다는 일본의 단호한 의지가 “기왕에 도전적인 설교”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앞장선 소양의 구속으로 이어진 것이다. 소양은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소양이 그일을 사주한 것도, 장홍련에게 그렇게 하도록 부추긴 것도 아니다. 다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신사를 우상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외치며 반신사참배의 기치를 확고하게 내걸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구심점을 제공하던 소양의 행실이 미웠던 것이다. 2월 18일로 예정된 헌당일을 앞두고 소양이 구속되었다. 하지만 이미 순교를 각오한 소양에게 일제의 구속은 전혀 위협의 대상이 아니었다. 3개월 후 소양은 풀려났다. 바로 이런 신사참
주기철 목사 일대기(1)/ 믿음의 사람으로 준비되다/ 2009-09-04
주기철 목사 일대기(1)/ 믿음의 사람으로 준비되다 일제시대 말기 신사참배로 한국의 교회들이 무너질때 한알의 밀알이 되어 순교하심으로 한국 기독교의 신앙의 불길을 지피신 주기철 목사님의 일생은 우리들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주기철 목사, "목사님은 승리 하셨습니다" 성화된 성도들의 빛된 삶   주기철 목사 어린 시절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11월 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 있는 농가에서 주현성 씨와 조재선 여사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기복이였다. 기복은 8세 때 개통학교에 입학했다. 나이도 어리고 몸도 허약하였지만 성적은 월등하게 뛰언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동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한일합당이 되었을 때 어른들은 모여 통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더러는 무능한 조정을 원망했다. “이렇게 어이없이 일본한테 목이 매어 끌려가야 하는가?” 나라 잃은 사람들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기복이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큰 형 기원이었다. 기원은 웅천읍에다 조그마한 교회당을 세웠다. 그래서 기복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가자 오산으로 기복이 개통학교에 다닐 때 아직 20세인 춘원 이광수가 부산 지구로 순회강연을 나왔다가 개통학교에 들러 “학문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니 젊은이들이 열심히 배우고 나라를 다시 찾아야 우리들의 미래도 열린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오산학교를 소개했다. ‘가자, 오산으로!’ 기복은 뜨거운 마음으로 결심했다. 그곳은 1,500리 길이나 되는 먼 길이어서 가족들이 반대하였으나 기복은 굽히지 않고 사촌형인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떠나기 전에 이름을 기철로 바꾸었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계셨다. 그는 가난한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자수성가하여 우리나라에서 첫손 꼽힐만한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많은 돈을 잃어버리면서 모든 것이 헛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40세에 공부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 평양에서 열린 안창호 선생님의 교육진흥론을 듣고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리고 금주금연을 선언하신 뒤에 청결하게 삶을 사시다가 1907년 43세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1916년 기철은 4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남강 선생과 고당 선생은 기철에게 많은 기대를 품으며 오산학교의 기둥으로 쓰고 싶어 하셨다. 남강 선생은 기철에게 우리나라 경제를 부흥시켜 민족 산업을 일으키는 좋은 재목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며, 연희전문학교의 상과에 진학하기를 권유하였다. 제3의 존재를 찾아서 기철은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앓던 고질병인 안질이 더 심해져서 공부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게다가 큰 형 기원이 하던 염전과 어업, 양조장이 한꺼번에 기울어져 재산 상속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후 상속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을 보고 눈도 나았지만 몹시 쓸쓸한 나날을 신앙으로 달래면서 살아갔다. 그러던 차에 이기선 목사님이 소개해준 안기영씨의 막내딸 안갑수와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음 편하게 가정의 행복 속에 빠져있지는 못했다. 많은 기대 속에서 흥분하며 일어났던 3.1운동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를 세웠던 큰 형도, 작은형도 교회를 등졌다. 교회에서 십여 년이나 봉사하던 형들이 불신으로 빠지는 것을 보며 기철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다. ‘아아 이것도 아니다. 정녕 삶은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라를 위하여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이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제3의 그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왜 나는 그것을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 1년이 지나 첫아들 영진이가 돌이 될 무렵 마산 문창 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를 모시고 부흥 사경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듣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분출했다. ‘가자, 가자! 문창교회로!’ 은혜체험 울며 회개하는 사람, 병고침을 받았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 방언이 터진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예배당이 가득 찼고 모드들 매어 달리는데, 기철과 친구들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은혜를 못 받는가?’ 안타까움과 분함으로 답답해했다. 셋째날 밤 집회에서 김익두 목사님은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다. 장내는 성령의 불길로 휩싸였다.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요! 귀머거리가 귀가 뚫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오!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오!” 이때 기철은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갑자기 통곡과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고꾸라지면서 방성대곡을 터뜨렸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주님만 느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찾던 그 빛, 허망함 속에서 그렇게 갈망했던 그 존재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해 11월 1일 주기철과 그의 친구들은 신학생이 될 것을 결심했다. 기철은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는 이국땅에 와서 고스란히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엔 뜨거움이 솟아오르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초량교회의 위임목사 그는 1926년 3월 평양신학교를 19회로 졸업했다. 그의 나이 서른!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두 번째 아들 영만이와 세 번째 아들 영묵이가 태어났다. 자식이나 아내를 호강시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갈 수가 있을까? 세 아들과 아내와 어머님을 이끌고 나는 목회자의 길을 가야한다.’ 그는 1926년 봄에 설립된 지 33년 되는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주목사는 비상한 고심과 정성으로 대개 목요일까지 설교원고를 작성했다. 원고를 작성하다가도 가끔 산에 올랐다. 방 두 칸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서재가 없어 집보다는 교회에서 많이 생활하며 산에 가서 철야하기가 일쑤였다. 주목사는 구봉산 바위굴에서 살다시피 하고 교회의 교육이나 재정관리에 빈틈없이 철저했으며, 그의 사례비의 반은 교회로 되돌아왔다. 교회에서는 보릿고개 때도 점심을 지어 배고픈 사람을 먹일 정도로 구제와 선교에 힘썼다. 주목사는 기도와 철저한 생활, 보살핌으로 어수선한 시국과 기독교계를 성경말씀으로 지키며 든든한 기초를 다졌다. 그래서 위임받은 지 한 해 만에 100여명의 교인이 300명으로 불어났다.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불신(不信)이오 주목사가 구봉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마다 늘 아내 몫으로 친정에서 주신 당 6천 평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못내 양심에 걸렸다. “굶어 병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빤히 알면서 그 땅을 어떻게 끼고 있겠소? 내가 어떻게 강대상 위에서 성도들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권면하겠소? 나의 아내인 당신이 주인이니 내가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는 게요. 처분하여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봅시다.” 남편의 말이지만, 끝없는 목회자 가정의 가난한 사람을 하다보니 자식들의 장래가 걱정되어 남겨두었던 어미의 마음인지라 부인은 계속 반대했다. “여보,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불신이오.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굶기시거나 까막눈을 만드시겠소? 또 설사 그렇게 하신다 하여도 무슨 뜻이 있으실 것을 못 믿겠소? 당신이 그렇게 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불신이오!” 눈물로 기도한 후 결국 절반의 땅을 처분하여 구제했다. 한편, 그는 24회 경남 노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고 25회 노회에서 다시 유임. 주목사의 제의로 경남노회가 신사 참배 반대를 결의한 뒤로 경남 일대의 교회는 뜻을 같이 하기로 단단히 결속했다. “신사 참배는 십계명 중 엄연히 제1, 2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는 짓이다. 우리는 계명을 어기고는 살 수 없음을 천명하여, 일본이 받는 신사 앞에는 결단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주목사는 신사참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신앙을 짓밟으려는 마귀를 정면으로 대적하고 나선 것이다. 상처받은 문창교회의 호소 문창교회는 주목사가 처음 성령을 체험을 한 곳이었다. 예배당은 크고 재정도 튼튼했으나 목회자 문제로 늘 불안한 교회였다. 시련을 겪은 지 4년이 이르도록 계속 흔들리는 문창교회는 교회를 새롭게 이끌어 줄 인물로 주기철 목사를 청빙했다. 1933년, 암울한 기운은 점점 무겁게 조선 땅을 짓눌렀고,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가 일본의 군국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이에 일본은 북벌을 꿈꾸면서 조선 땅을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다. 상처 입은 문창교회 문제를 주기철 목사는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해결하였다. 오랫동안 높은 영적 기갈에 허덕이던 교인들은 다시금 맑은 물을 얻게 되어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안갑수 사모와 당시 일본으로 유학 가려다 병이 나서 포기된 후 의신여학교 교사가 된 오정모 선생이 주일학교 교사로 일했다. 기도와 성경에만 열중하고 구제에도 열심히 있는 주목사의 관후하고 온유한 인격은 전 신도들에게 언제나 만족을 주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영력, 사랑, 학식이 다 구비되어 있어 나날이 그는 문창교회의 빛이 되었다. 1933년 5월 19일 돌연 안갑수 사모는 큰언니 장례를 치르고 심신이 피곤한 가운데 인중에 난 종기를 수술한 것이 잘못되어 결국 살 가망이 없게 되었다. 공인의 종으로서 치리하다 1933년 7월 3일, 경남 노회는 임시 노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육이라는 순윤설과 십계명 무용설을 주장하는 신진리파에 대한 정죄여부를 가려야만 했다. 그는 노회장으로서 신진리파의 문제를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젊은 지성인들 몇과 함께 그가 아끼던 청년들이 연류되어 있었지만, 아픈 가슴으로 7월 3일 노회에서 몇몇 사람은 면직으로, 나머지는 출교로 책벌을 단행했다. 그후 자기를 초량교회 취임목사로 청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선배 장덕생 목사가 교리해석을 제멋대로 만들어 새 교파를 형성하고 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권징조례에 따라 그 이름을 노회 명부에서 제명해야 했다. 비록 잘못이 있다고는 해도 한 교직자의 생명을 그렇게 잘라야만 하는 노회장 주목사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는 산으로 올라갔다. 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맡기시는지 정말 괴로웠다. 그는 산에 올라 하나님의 뜻이 밝혀질 때까지 기도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평평한 바위 위에 꿇어 엎드린 그의 숨결은 그대로가 신음이었다. 사흘만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죽음 두 아이의 죽음, 제명, 책벌, 한국을 키질하듯 들볶는 일본, 이땅 곳곳에 세워지는 일본의 신사. 주님을 찾는 그의 울부짖음은 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새벽녘에야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제단은 높은 곳에 있느니라. 제단에 오르려면 계단을 밟아야 하느니라.”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걸아가는 길이 제단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의 제물이 되기 위해 육신에 속한 애정과 욕망을 끊어내는 좁은 길이라는 것을.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 그는 그 주일에 주일예배를 드린 후 자리에 눕고 말았다. 과로에 영양실조. 십 여일간 호되게 앓고 난 후 민망할 정도로 수척해졌다. 1934년 목사님의 건강이 더욱 안 좋아지자 제직들이 재혼문제를 들고 나섰다. 모두의 이야기가 안갑수 사모의 유언도 있고, 여러 가지 면으로 봐서 오정모 선생이 적임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선생은 주목사를 성직자로서 존경하며 사모했으므로 그 동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러나 결핵성 복막염으로 죽음의 고비를 겪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금강산에 있는 장로교 수양관에서 수양회가 열렸다. 장로교 총회의 모든 목사와 선교사 200명이 일제히 모여 조선교회의 당면문제며 과제를 두고 기도하며 의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주목사는 ‘예언자의 권위’(마3:1-13)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엘리야의 권위, 예레미야의 권위, 세례 요한의 권위는 일사 각오 연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을 못하십니까? 우리가 왜 벙어리개가 되었습니까? 오늘 목사도 일사각오 연후에 한 말을 해야만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아무 까닭 없이 일본의 한낱 순경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그러나 미처 그 대목의 말을 맺기도 전에 장내를 찢을 듯한 제지의 소리가 단상을 가로질렀다. “중지! 중지! 당장 중지!” 단상은 일경들과 목사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참석자들 모두가 일경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멍이 든 채 그 밤을 지내고 강제로 해산을 당하였다. 한편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던 몇몇 목사들에게서 일본 순회 전도 강연을 부탁받아 주목사는 한 달 이상 전도 강연 길을 떠난 후 교회도 조용해졌다. 목사님이 돌아오신 후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그를 청빙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를 내려놓고 무학산으로 올라가 엎드렸다. “왜 저를 부르십니까. 왜 남쪽 끝에 있는 제가 그곳으로 가야 합니까? 조만식 선생님이 며칠 후 친히 찾아오셨다. 산정현교회 1936년 7월. 새로운 목사를 맞이하는 산정현 교회는 잔치 분위기였다. 산정현 교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총본산으로 자타가 공인할만한 교회이고, 중산층을 웃도는 식자들이며,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교인이 되는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길 만큼 특수층을 수용한 교회였다. 일본도 이에 맞서듯 주목사가 산정현 교회로 부임해 온 그 시디에 악명을 떨치는 군인출신의 미나미 지로를 서둘러 조선 총독으로 내보냈다. 주기철 목사는 신앙은 조국이나 민족을 초월한 절대 절명의 것이어야 하며, 민족 운동을 위한 신앙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조국 해방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신앙의 민족사적 결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다음에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산정현교회 교인들에게 밝히 전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사람을 산정현 교회로 부르신 뜻은 다만 한가지, 주님이 머릿돌 되어 세우신 교회를 끝까지 지키라는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총독부는 곧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 이라도 잡아 끌어내어 신사참배를 하도록 갖가지 계책을 쓸 것입니다. 감언이설, 강제, 위협, 자신들의 법으로 온갖 방법을 휩쓸어 올 것입니다. 신사참배가 총칼이 아니니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생명을 잃느냐 지키느냐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하게 되는 절대 절명의 사건이요 시험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민족을 쓰시기 위하여 연단하심이요 시험하시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시험을 통과한 뒤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산정현 교회의 소명은 이땅의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라 하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구체적인 활동 미나미 총독은 부임하면서부터 조선 사람들의 목을 단단히 조이기 시작했다. 부임하기 전에 조선을 일본 앞에 무릎 꿇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대로 본때를 보일 속셈이었다. 10월 1일, 총독부는 소위 ‘황국시민서사’를 제정하고, 황국신민 체조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했고, 관공서와 각급 학교에 ‘일본천황의 사진, 일장기, 일본 국가를 인쇄한 액자’를 배급하여 매일 경배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강제로 집집마다 가미다나를 설치시켰고 평양에는 곳곳에 신사를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코가 땅에 닿도록 공손하게 절하지 않으면 그것도 불경죄라 하여 잡혀 갈 판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학교마다 신사를 참배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던 조선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였다. 결국 북장로교나 남장로교, 호주 선교부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남을 알아 신사에 참배할 수가 없고, 또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도 없다.” 하여 미션학교들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53회 평북노회가 2월 7일이었다. 평복 노회에서 김일선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친일파 앞잡이가 목사가 되어 노회장이 되고 조선교회의 신사참배 안건이 통과되었다고 울분과 흥분으로 김일선 목사 졸업기념식수를 뽑아버리고, 돌 푯말까지 깨뜨렸다. 그런데 이 일을 주기철 목사가 사주했다며 형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주목사를 끌고 갔다. 교인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형사를 붙잡고 말리다가 탄식하는 조만식 장로를 보고 주목사는 엷은 웃음을 머금으며 뒷일을 부탁했다. 학생들 10여명, 산정현교회 교인들까지 검속해 들인 후 2월 9일 조선의 공교로서는 처음으로 신사 참배를 가결한 치욕의 날이었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렇게 잡아들인 것이다. 목사님이 감옥에 계신 동안 오정모 사모와 성도들은 철야기도를 했다. 결국 목사님은 4주만에 풀려났다. 무너지는 한국교회 전국 24개 노회가 하나하나 무너지는 소식은 하루가 바쁘게 들려왔고, 평양신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았다.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있던 날, 주목사님은 방문을 닫고 숨소리도 없이 홀로 계셨다. 오후에 되어 동료목사님들이 침통한 얼굴로 목사님의 방문을 열었다.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평양신학교를 짓밟은 자들이 모란봉에 세운 일본 신궁 텃밭에 평양신학교를 새로 세웠다. 평양 기독교 친목회와 서울 혁신교단은 조선 총독부에 직통으로 통하는 세력단체로 커져 산정현교회 새벽기도 내용까지 일일이 그 친목회에 밀고 되고 있었다. 일본이 파견한 일본 기독교회 대회 의장 도미다 목사가 총회를 앞두고 회유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평양에 도착한 그들 일행을 4개 노회가 연합으로 주최하여 모은 백여 명의 목사와 임원들이 성대한 환영 만찬으로 맞이한 후, 모임 장소를 산정현 교회로 정했다. 도미다는 깍듯한 태도와 싹싹한 말씨로 신사를 종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누누이 설명을 했다. 주기철 목사는 차분하면서도 죽을 각오한 단호함과 의연함으로 대처했다. 사단과의 한판승 “도미다 목사께서는 십계명을 외우십니까? 목사님께서는 언제 성경을 읽으셨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강령이라면 도미다 목사께서는 조선을 불법으로 점령한 일본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불법을 함께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도미다 목사님, 목사님이 진정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그리고 진정 조국 일본을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조선 사람들에게 신사를 참배하라고 권고하며 다니시기보다 같은 동포인 일본 사람들에게 좀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에는 신앙양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지키고 있는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일본도 한시 바삐 여호와 앞으로 돌아와 더 큰 일을 저질러 돌이킬 수 없이 되기 전에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 무릎 꿇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도미다는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쓴웃음을 짓기도 하면서 주목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 간담회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결국 도미다 목사일의 패배로 끝맺었다. 그런데 산정현교회에서 간담회로 밤을 지새운 날 저녁, 선교부로부터 도미다 일행에게 성대한 만찬이 벌어졌고, 도미다는 4개 노회 신사 참배를 가결의 선물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님은 저녁상을 받지 않았다. 도미다 목사의 한국방문은 9월에 개최될 예정인 장로교 제27회 총회를 위한 선무공작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27회 총회에서 조선교회의 신사참배를 가결시킬 계획을 치밀하게 짜놓고 있었다. 1938년 7월 초복더위가 땅을 절절 끓게 만들던 날, 사복 경찰 몇 명이 교회 사무실로 들이닥쳐 영장 제시도 없이 창백해진 목사님을 무조건 끌고 나갔다. 총회가 열리기 전에 신사참배 반대 안건을 들고 나올 주인공이기에 주목사를 묶어두기 위한 작전이었다. 십자가의 길 시미즈가 형사는 막상 주기철 목사를 구속해 놓기는 했으나 죄목을 잡을 수가 없고 모두들 존경하는 터라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의성읍 경찰서의 고등계 계장 악마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낭하형사 밑에서 훈련받은 배만수 형사가 평양에 왔다. 배만수 형사는 의성교회를 뒤지다가 유재기 목사가 ‘기독교 청년 면려회’ 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의성교회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잡아 가두며 관계된 목사들을 의성으로 끌어들였다. 이 ‘농우회’는 5년 전 평양신학교 신입생 환영 야유회에서 출발한 농촌계몽운동이었는데, 회장이 산정현 교회 조만식 장로요, 교인들 중에 몇 사람이 중요한 인물임을 알고 주기철 목사를 주동자로 추적한 것이다. 8월 10일, 평안남도에 있는 장로교회들이 너무나도 앞장서듯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는 교회가 무너지는 처절한 소리를 들으며 의성으로 끌려갔다. 그의 도착은 고문의 시작이었다. 검도용 몽둥이가 자주 부서졌고, 앉혀놓고 짓이기는 매질이 지루해지면 천장에 가로지른 각목에다 발목을 묶어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비행기를 태웠다. “아하, 아직 매운 맛을 못보아서 입이 살았어.” 주목사를 거꾸로 매어 달아놓고 고춧가루를 가득 푼 주전 물을 코와 입에 쏟아부었다. 영원한 지옥불의 불붙임 같기도 했다. 극심하던 고통은 순간 끊어져 무의식 속에 빠졌고 고춧가루 물고문은 숨통만을 막는 것이 아니라 혈관도 타 붙게 만들었다. 주목사는 감방에 있던 청년이 내미는 밥덩이를 간신히 받아들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주님,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마치 완전히 버림받은 자 같을 뿐이오며, 갈 곳이 아주 없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겠고, 희망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모르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주님, 성찬으로 받사오니 주께서 저와 함께 하심을 확증하게 하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새 힘을 주시옵소서.” 농우회 사건은 당초에 낭하 형사와 배만수 등이 기대했던 것만큼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약이 오른 배형사와 낭하형사의 고문은 더 혹독해졌다. 그들은 주목사의 손톱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 손톱 뿌리가 남아 있는 자리를 대나무 바늘로 쑤시고 찔렀다. “주여,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을 용서하소서.” 기절한 주목사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의식이 깨어난 주목사를 널판자에 눕혀놓고 사지를 묶었다. 그리고 아랫도리를 벗긴 뒤에, 알코올을 적신 탈지면을 감은 꼬챙이를 요도에 쑤셔 넣었다. 찢겨서 피가 흐르고, 면도날로 아랫배를 저며 내는 듯 했다. 얼마나 고문이 심했던지 의성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던 권중하 전도사가 순교했고, 박학전 목사는 고문 끝에 맑은 정신을 잃고 신성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편 평안 장로회는 “신사 참배는 교리에 배타되는 것이 아니다.”고 선언하며 9월 2일 경안노회도 정기노회도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9월 9일 총회가 열리기 전에 총노회 27개 중 과반수가 넘는 17개 노회가 신사 참배를 스스로 가결했던 것이다. 드디어 장로회 27차 총회가 9월 9일 평양의 서문 밖 예배당에 219명의 총회 참석자가 모여들었다. 참석자 219명 사이사이 경찰관이 97명이 끼어 앉아 장로회 총회가 아니라 경찰관 모임 같았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임원선거를 하고 허둥지둥 불법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오정모 사모의 절개 의성에서 면회를 허락한다는 전갈이 오자 오사모는 먹는 것도 잊고 자는 것도 잊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낭하형사와 배형사는 오사모를 앉혀놓고 회유하였다. “주목사는 시국에 대해 아주 둔하더군요. 그러니 부인께서 면회를 하시면서 요즈음에 돌아가는 사태를 잘 설명하시고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설득하세요. 아시겠습니까? 그것 한가지면 당장 석방입니다. 오사모는 어떻게 할까 갈등하고 있는데, 형사실 문이 열렸다. 주목사의 깍지 못한 수염속에 얼굴은 백납 빛이었다. 안질이 도져 벌겋게 충혈되었고, 저고리를 헐렁하여 허수아비에게 걸쳐놓은 옷처럼 보였다. 오사모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목사님 장하십니다. 조선의 교회가 다 무너져도 목사님이 견디시는 한 우리 주님의 교회는 그 자리에 건재합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목사님의 승리를 끝까지 지켜보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갑자기 배형사가 머리채를 잡아채었다. “아니! 이런 독한 계집이 있나? 제 서방을 석방시키도록 말을 거들랬더니 무어야? 더 견디고 승리하라고! 세상에 서방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 독한 여편네로구만!” “목사님, 우리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견디신 것처럼 기도하시면서 견디십시오. 모두들 잘 계시니 집안 염려는 하시지 마세요. 산정현 교회도 꿋꿋하게 잘 견디고 있습니다. 교인 중에 아무도 십게명을 어긴 사람이 없습니다.” 배형사는 오사모를 내동댕이 쳤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오사모는 한없이 울었다. “주님 용서하세요. 기차 안에서만 울고 평양에 도착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겠으니 지금만 용서하세요.” 5가지 기도제목 다음해 2월 농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검찰청으로 넘겨졌고, 검찰에서는 유재기 목사 한 사람만 기소를 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혐의로 석방하기로 결정을 했다. 2월 5일. 주일 아침 평양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기철 목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날 예배 시간이 되자, 평양과 대동과 선교리의 3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들이 산정현 교회로 몰려들었다. 2천여 명이 집결한 자리였으나 숨소리 한가닥 들리지 않았다.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서도 나와 함께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신 여러분의 기도 안에서 저는 모든 것을 잘 견디고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7개월 동안 저는 5종목의 기도가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입니다. 저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사람을 위협하는 마귀가 최대 무기인 듯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 주님 이 목숨 아끼다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겪지 않게 해주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사랑만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그 젊음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게 하소서.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입니다. 단번에 겪는 고난은 이겨내기 쉬우나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가 힘이 듭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고문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달, 두달, 1년 10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저처럼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누리고 고난은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주어지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하랴! 세 번째는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나에게는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와 아직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 태어나 자식의 의무도 중요하고,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식들의 아비가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을, 병든 아내를, 어린 자식들을, 불안해하는 양떼를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싸매어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인도하시며,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당신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을 얽어맨 인정의 줄이 나를 얽어매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부모나 처자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합당치 않다 하셨으니 저로 예수님께 합당한 자가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네 번째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십시오.’ 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리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님 안에서 자랐고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목사가 되어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죽음을 피하려 하겠습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예수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다섯 번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혹여 옥중이나 사형장에서 저의 목숨이 끊어질 때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저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저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저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시옵소서. 저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나이다. 아멘.” 눈물바다를 이룬 산정현 예배당에서 그날 그 자리에서만은 모든 사람이 하나였다. 일본의 앞잡이로 손가락질 받던 조선 형사들까지 눈물을 머금었다. 외로운 하나님의 종 목사님이 집으로 돌아오신 뒤 6개월 후의 일이다. 8월 초순 어느 주일 예배시간이 임박하여 여러 명의 형사대가 찾아와 설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주목사는 낯빛 하나 변하는 일없이 형사 앞에 꼿꼿하게 섰다. “당신네들은 일본 헌법에 예배의 자유가 보장된 것을 모르시오? 당신들은 지금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위반하고 있소.” 순간 형사들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목사님은 지혜롭게 적을 공격한 것이다. 그날의 설교가 있은 지 나흘째 되던 날, 여섯 명의 형사들이 사택으로 들이닥쳤다. “갑시다!” “이번에는 무슨 명목이오? 법에도 없는 폭력을 언제까지 행사하리라 믿고 이러시오? 나는 당신네들에게 끌려갈 일을 한 적이 없소.” “잔소리가 많다!” 부장형사가 목사의 팔을 낚아챘다. 고무신을 신은 주목사를 형사들 서너 명이 달려들어 잡아 끌었다. 일본 관헌은 9월에 소집할 예수교 장로회 28차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 을 조직한 사전 모의를 끝낸 뒤에 그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미리 주기철 목사를 구속한 것이다. 주목사를 연행하자마자 지하실에 끌어다 놓은 시미즈가 형사는 주목사님을 먼저 거꾸로 매어 달았다. 그리고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풀었다. 피가 머리로 쏟아지고 눈알이 당장 빠질듯했다. 코로 입으로 들이 붓는 고춧가루 물은 뇌수를 긁어 흔들며 단숨에 숨통을 막았다. 목구멍이 찢어지고 콧 속이 타는 듯했다. 얼마 만에 혼절, 다시 의식이 돌아오자 그들은 주목사를 천장에서 끌어내려 엎어놓고 등을 발로 밟고 옆구리에 발길질을 했다. 코로 입으로 들어갔던 고춧가루 물이 다시 조금씩 밀려나왔다. 그들은 주목사를 의자에 묶어 놓고 전기 고문을 했다. “전기 찜질을 하셨으니 이번에는 손톱 소제를 해드리지.” 대나무 바늘로 손톱을 쑤시고 발톱을 후볐다. 그때 홀연히 주목사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다. “ 이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오니 주 예수 힘주사 굳세게 하소서.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같이 희겠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형사들은 얼굴을 흉측하게 찌푸렸다. “예수한테 힘을 달라고 노래를 한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고문을 받으면서 노래를 부른다고?” 주목사는 다시 천장에 거꾸로 매어 달렸다. 그리고 코와 입으로 쏟아붓는 고춧가루 물을 들이켰다. “하나님 찬양… 주여, 나를 주님 곁으로 부르소서. 나의 육체가 슬프오니 내 슬픔을 거두어 주소서. 주여!” 시험받는 산정현교회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목자 잃은 양떼였다. 며칠 후 평양경찰서에서 산정현교회로 긴급 호출령이 떨어졌다. 경찰서로 간 교회 중진들에게 경찰서는 지시사항을 주면서 협박을 했다. 1. 교회 제직은 모두 매주일 반드시 한 번씩 신사참배를 이행할 것. 2. 설교 또는 교회 사무는 제직들이 집행하고 서양인과 기타 다른 사람은 교회일에 관여하지 못한다. 3. 이 사항들에 관한 결정을 금일 오후 3시까지 회답할 것. 4. 이상 세가지 항목 중에 단 한가지라도 불응할 때에는 당장 내일부터 교회를 패쇄한다. 이제는 주기철 목사와의 싸움이 아니라 산정현교회와의 싸움이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주일예배는 눈물의 예배였다. 예배를 감시하던 형사들이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성도들 개중에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아가며 타협을 제의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모두 경찰서에 갇히는 것이 낫지, 순교라면 몰라도 누가 배교에 앞장서라는 말이오? 산정현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온 정절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는 안 될 일이다.” 라고 하였다. 또 한 청년회원들은 혹여라도 제직들이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할까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신사참배가 결정되지 않자 그날 오후 형사대 십여 명이 예배당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예배당에 안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말 몇 마디를 던졌을 뿐, 감히 교회문에 못을 박지는 못했다. 10월 23일의 일이었다. 수요일예배 설교를 하러 강단에 올라가던 방장로를 갑자기 형사 서너 명이 덮쳤다. “장로의 설교가 금지된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슨 반항이야?” 형사들은 육십을 넘긴 방장로님의 팔을 비틀어 잡아끌면서 밖으로 나갔다. 교인들은 일제히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엎드려져 통곡을 터뜨렸다. 통곡이 기도요 찬송이었다. 영문 밖의 길 방장로님이 끌려간 곳은 주기철 목사님이 고문을 당하고 있던 지하실이었다. “어이 주목사! 당신이 잘못 가르쳐서 여기까지 잡혀 온 늙은이가 있으니 보라구!” 하면서 방장로를 천장 지렛대에 팔목을 묶어 놓고, 다리며 발바닥을 뭉둥이로 때려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형사들은 주목사를 매어달아 놓은 채 그 앞에서 방장로를 형틀에 묶어 놓고 미친 듯이 두드려 피개 시작했다. 방장로는 고통 중에도 주목사님의 괴로워할 것만 염려되어 신음소리 한번 마음 놓고 쏟아놓지 못했다. “야! 이 늙은 것이 매를 맞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야? 바른 대로 불어! 누가 신사 참배를 하지 말라고 시켰어?” “사람이 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그 따위 우상에게는 절하지 말라고 하시었소. 나를 이 자리에서 죽여보시오. 그 외에 다른 대답이 나오겠는가.” 독이 오른 형사들은 누가 더 잔인한 매질을 하는가 경쟁을 하면서 양쪽에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방장로는 일어나 걷지 못하는 주목사를 끌어 등에 업고 감방을 향해 걸었다. 익서이 이유가 되어 기운이 남아 저렇다며 방장로를 또 끌어다가 고민을 시켰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감방에 돌아왔다. “장로님, 우리의 정신은 생생합니다. 더구나 주님의 장중에 붙잡혀 있는 우리의 영혼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지요. 일본 관헌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우리의 영혼만은 흠집 없이 지켜주십니다.” 주목사는 기도하는 방장로의 등 뒤에 대고 나직한 그 동안 고문을 당하면서 한줄한줄 기도하듯 지은 ‘영문밖의 길’ 이라는 시를 그 무렵 널리 알려진 ‘다뉴브 강의 잔물결’ 이라는 곡조에 붙여 노래를 불렀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 여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걸머지고 /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 한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 목사직 파면과 산정현교회 패쇄 경찰은 산정현교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참배를 시키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교회는 똘똘 뭉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평양노회장 최목사를 이용하여 외유를 해보았으나 실패하자, 경찰의 명령에 따라 임시 노회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주기철 목사를 파면시켰다. 부활주일에 평양노회 전권 위원들 9명이 강단을 차지하고 이인식 목사를 당회장으로 세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교인들은 부활주일 전날 밤부터 예배당에 모여 눈물로 기도하며 밤을 세웠다. 주일을 앞둔 예배당의 철야기도는 장엄이요 거룩이었다. 주일예배 시작이 다가오자 양재연 집사가 20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와 ‘십자가 군병들아’를 이어서 부르며 절대로 중단하지 말자고 외쳤다. 9명의 수습위원 목사님들과 경찰 40여명이 밀어닥쳐 중지를 시키려고 악을 써댓으나 곧 찬송소리에 묻혀 버렸다. 화가 난 형사들이 교인들을 잡아 끌어내고 내동댕이치며 감옥으로 끌고 갔다. 결국 경찰은 예배당을 폐쇄시켰다. 경찰은 주기철 목사의 가족들이 기거하고 있는 사택도 빼앗았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주목사님을 취조했던 구가 경사는 목사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주기철 목사가 국사범만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주목사님을 존경할 뻔했소’” 라고 고백했다. 평양경찰은 일단 주기철 목사를 가석방이라는 명목으로 방면할 방침을 세웠다. 가석방의 소식을 들은 산정현교회 교우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며 웃으며 기뻐했다. 목사님은 산정현교회로 가서 손수 각목을 떼어내고 들어가셨다. 먼지 앉은 강단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주님, 주님이 견디셨습니다. 주께서 이기셨습니다. 나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만나처럼 내려주시며 주께서 이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주님, 감히 질문을 해도 된다 하시면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제가 겪어야 할 일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주님, 이 흩어진 양떼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경찰은 목숨을 걸고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며 부흥집회로 교회재건 운동을 서둘던 한상동, 이기선 목사를 구속하면서 주기철 목사님을 다시 수감했다. 가석방되어 집에서 기거하기 한 달여 만에 교회재건파라 이름 붙인 목사님들 21명과 주기철 목사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자들에 대한 일체 검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40년 여름 일본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켰고, 22년간 조선교회의 보수적 신앙을 이끌어가며 꾸준하게 출간되던 ‘신학지남’까지 폐간시키므로 평양신학시대의 막을 강제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수많은 목사들과 신자들을 검거했다.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가 검거되고 손양원 목사는 여수 경찰서에 투옥되었다. 잔인한 특별면회 다음 해 초봄, 느닷없이 형사가 들이닥쳤다. 특별면회라고 하면서 식구들 모두 함께 데리고 갔다. 특별 면회라는 말에 노모는 솔깃하고, 광조는 그저 좋아하며 따라나섰다. 그런데 3층 형사실이 아닌 지하 고문실로 데려갔다. 형사들은 가족들이 보이는 앞에서 주목사님을 잔인하게 고문하기 시작했다. 노모는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고 오사모는 어머님을 무릎에 안고 엎드려 숨차게 주님만 찾았다. 목사님이 기절하니 천장에서 끌어내려 이제는 고춧가루를 주전자에 풀어 그 물을 목사님의 코와 입에 붓기 시작했다. 형사는 주목사가 고문받는 것을 지켜보지 않는다고 노모와 오사모를 발길로 걷어차고 머리끄덩이를 끌어 내동댕이쳐가며 소리를 질렀다. 목사님의 배가 출산 직전의 임산부처럼 부풀어 오를 때까지 붓더니 이제는 목사님의 배에 의자 둘을 엎어놓고 배를 짓눌렀다. 핏물인지 진물인지 검누런 물이 코에서 귀에서 쏟아져 나왔다. 노모는 다시 혼절하여 늘어지셨고, 오사모는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형사들은 야비한 웃음을 떠올리며 목사님을 일으켜 책상위에 앉혔다. 주목사와 오사모의 눈이 마주치자 깊은 신뢰와 아픔과 사랑으로 미소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야, 이년아!”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형사들은 검도용 칼로 오사모를 후려치며 발길질을 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살이 터지면서 흐른 피가 시멘트 바닥을 적셨다. 밤이 깊어서야 세 식구는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노모는 정신을 잃고 어린 광조는 아버지가 당하는 고문과 어머니의 매 맞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그러나 입을 벌려 말해보려고 애쓰던 광조는 끝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다. 그러면 좀더 견디자. 우리 기도하며 기다리자꾸나.” 오사모는 광조를 가슴에 안았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나를 돌박산에 묻어주오 1944년 전쟁은 막바지에 달한 것 같았다. 그 간에 폐쇄된 교회가 2백여, 목회자나 장로, 집사, 평신도들을 구속 수감한 숫자가 2천여에 이르렀다. 징병제를 학병제로까지 이어졌다. 학교 건물뿐 아니라 교회 건물까지 일본 군대를 주둔시켰고 교회 안에까지 ‘가미다나’를 설치했다. 4월 19일 저녁에 형무소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주기철이 위독하여 병감에 수용되어 있으니, 긴급 면회 바람.” 날이 밝기도 전에 형무소로 달려갔다. 간수는 면회실이 아닌 소장실로 오사모를 안내했다. “부인, 부군께서 너무 위중한데 병원으로 모시고 가십시오, 수속을 밟아 드리겠습니다.” 이들은 열흘 전에 최권능 목사님을 이렇게 밀어냈었다. 최목사님은 옥중에서 소천하시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지만 강제로 모시고 나가서 닷새만인 4월 15일 병원에서 소천하시지 않았는가. 이들은 목사님들이 옥중에서 순교하셨다는 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두 간수에게 들려오셨다. 서 있을 힘도 잃은 듯 간수들에게 몸을 의탁한 목사님은 앞이 보이지 않는 듯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다 오셨습니다. 끝까지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월계관을 들고 계신 것 보이시지요? 눈을 들고 바라보세요. 주님의 얼굴을 바로 보세요 목사님!” 목사님이 타 붙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머지않아 주님 앞으로 갈 것이오. 아! 어머님이 보고 싶소. 불쌍한 어머님을 내 대신 잘 모셔주시오. 어린 자식들을 잘 부탁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조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여보, 나를 웅천으로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주시오.” 그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목사님은 쓰러졌고 간수들은 황급하게 목사님의 몸을 양편으로 붙들었다. 끌려가시던 목사님이 뒤돌아보며 “여보,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마시고 싶소.” 하시며 진한 여운을 남기고 가셨다. 오사모는 그 밤을 혼자 엎드려 울었다. 일본이 무너지기 1년 4개월 전이었다. “목사님의 유채를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수속해 주십시오” 밖에서 기다리던 백인숙 전도사와 여집사들은 사태를 짐작하고 달려와 함께 쓸어안고 흐느꼈다. “우리 목사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이 지금 기뻐하십니다. 목사님의 승리를 기뻐하십니다.” 세 개의 면류관 “사모님, 어제 목사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며 마지막 외치시던 음성이 어찌나 우렁찼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무척 놀랐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라고 한 간수가 말해주었다. 5일장, 장례일인 화요일 아침에는 눈부시도록 화창한 햇살이 쏟아졌다. 평양 고등보통학교 정문 앞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찰관들이 몰려들었으나 그 수많은 사람들 기세에 눌렸는지 아무런 행동개시도 하지 못했다. 기자묘 앞을 지나서 대성산 공동묘지, 목사님이 그렇게도 그리워하사던 돌박산에 일르렀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효자요, 아이들의 훌륭한 아버지요, 애정을 가진 남편이요, 연약을 육신을 입은 인간 주기철. 그러나 그 인간의 애절함과 연약함을 지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십자가만 바라보며 묵묵히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간 하나님의 종,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그 명령에 겸손히 순종한 충성스러운 종이었다. 그의 순교는 산정현 교회와 오사모 가족들이 함께 한 고난 후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주기철 목사 일대기/ 2014-01-22
주기철 목사 일대기 주기철 목사(朱基徹 1897~1944)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11월 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 있는 농가에서 주현성 씨와 조재선 여사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기복이었다. 기복은 8세 때 개통학교에 입학했다. 나이도 어리고 몸도 허약하였지만 성적은 월등하게 뛰어나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의 생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어른들은 모여 통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더러는 무능한 조정을 원망했다. “이렇게 어이없이 일본한테 목이 메어 끌려가야 하는가?” 나라 잃은 사람들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기복이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큰 형 기원이었다. 기원은 웅천읍에다 조그마한 교회당을 세웠다. 그래서 기복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기복이 개통학교에 다닐 때 아직 20세인 춘원 이광수가 부산 지구로 순회강연을 나왔다가 개통학교에 들러 “학문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니 젊은이들이 열심히 배우고 나라를 다시 찾아야 우리들의 미래도 열린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오산학교를 소개했다. ‘가자, 오산으로!’ 기복은 뜨거운 마음으로 결심했다. 그곳은 1,500리 길이나 되는 먼 길이어서 가족들이 반대하였으나 기복은 굽히지 않고 사촌형인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 이름을 기철로 바꾸었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계셨다. 그는 가난한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자수성가하여 우리나라에서 첫손 꼽힐만한 대 실업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많은 돈을 잃어버리면서 모든 것이 헛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40세의 늦깎이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였다. 오산학교와 남강 이승훈 얼마 후 평양에서 열린 안창호 선생님의 교육진흥론을 듣고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르고 금주와 금연을 선언한 뒤에 청결한 삶을 사시다가 1907년 43세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1916년 기철은 4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남강 선생과 고당 선생은 기철에게 많은 기대를 품으며 오산학교의 기둥으로 쓰고 싶어 하셨다. 남강 선생은 기철에게 우리나라 경제를 부흥시켜 민족 산업을 일으키는 좋은 재목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며, 연희전문학교의 상과에 진학하기를 권유하였다. 연희전문학교 기철은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앓던 고질병인 안질이 더 심해져서 공부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게다가 큰 형 기원이 하던 염전과 어업, 양조장이 한꺼번에 기울어져 재산 상속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상속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을 보고 눈도 나았지만 몹시 쓸쓸한 나날을 신앙으로 달래면서 살아갔다. 그러던 차에 이기선 목사님이 소개해준 안기영 씨의 막내딸 안갑수와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음 편하게 가정의 행복 속에 빠져있지는 못했다. 큰 소망과 기대 속에서 열망하며 일어났던 3.1운동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실망감에 교회를 세웠던 큰 형도, 작은형도 교회를 등졌다. 교회에서 십여 년이나 봉사하던 형들이 불신으로 빠지는 것을 보며 기철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다. ‘아아! 이것도 아니다. 정녕 삶은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라를 위하여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이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제3의 그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왜 나는 그것을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 1년이 지나 첫아들 영진이가 돌이 될 무렵 마산 문창 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를 모시고 부흥 사경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듣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분출했다. 김익두 목사(金益斗 1874∼1950) 한국 최초의 부흥목사 1930년 즉묵 소섭교회에서 개최된 김익두 목사 초청 부흥사경회 울며 회개하는 사람, 병 고침을 받았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 방언이 터진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예배당이 가득 찼고 모두들 기도에 매달리는데, 기철과 친구들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은혜를 못 받는가?’ 안타까움과 분함으로 답답해했다. 셋째날 밤 집회에서 김익두 목사님은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다. 장내는 성령의 불길로 휩싸였다.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요! 귀머거리가 귀가 뚫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오!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오!” 이때 기철은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갑자기 통곡과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고꾸라지면서 방성대곡을 터뜨렸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주님만 느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찾던 그 빛, 허망함 속에서 그렇게 갈망했던 그 존재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해 11월 1일 주기철과 그의 친구들은 신학생이 될 것을 결심했다. 기철은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는 이국땅에 와서 고스란히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엔 뜨거움이 솟아오르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주기철은 1926년 3월 평양신학교를 19회로 졸업했다. 그의 나이 서른!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두 번째 아들 영만이와 세 번째 아들 영묵이가 태어났다. 자식이나 아내를 호강시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갈 수가 있을까? 세 아들과 아내와 어머님을 이끌고 나는 목회자의 길을 가야한다.’ 그는 1926년 봄에 설립된 지 33년 되는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주 목사는 비상한 고심과 정성으로 대개 목요일까지 설교원고를 작성했다. 원고를 작성하다가도 가끔 산에 올랐다. 방 두 칸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서재가 없어 집보다는 교회에서 많이 생활하며 산에 가서 철야하기가 일쑤였다. 주 목사는 구봉산 바위굴에서 살다시피 하고 교회의 교육이나 재정 관리에 빈틈없이 철저했으며, 그의 사례비의 반은 교회로 되돌아왔다. 교회에서는 보릿고개 때도 점심을 지어 배고픈 사람을 먹일 정도로 구제와 선교에 힘썼다. 주 목사는 기도와 철저한 생활, 보살핌으로 어수선한 시국과 기독교계를 성경말씀으로 지키며 든든한 기초를 다졌다. 그래서 위임받은 지 한 해 만에 100여명의 교인이 300명으로 불어났다. 주 목사가 구봉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마다 늘 아내 몫으로 친정에서 주신 당 6천 평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못내 양심에 걸렸다. 초량교회(부산) “굶어 병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빤히 알면서 그 땅을 어떻게 끼고 있겠소? 내가 어떻게 강대상 위에서 성도들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권면하겠소? 나의 아내인 당신이 주인이니 내가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는 게요. 처분하여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봅시다.” 남편의 말이지만, 끝없는 목회자 가정의 가난한 사람을 하다 보니 자식들의 장래가 걱정되어 남겨두었던 어미의 마음인지라 부인은 계속 반대했다. “여보,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불신이오.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굶기시거나 까막눈을 만드시겠소? 또 설사 그렇게 하신다 하여도 무슨 뜻이 있으실 것을 못 믿겠소? 당신이 그렇게 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불신이오!” 눈물로 기도한 후 결국 절반의 땅을 처분하여 구제했다. 한편, 그는 24회 경남 노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고 25회 노회에서 다시 유임. 주 목사의 제의로 경남노회가 신사 참배 반대를 결의한 뒤로 경남 일대의 교회는 뜻을 같이 하기로 단단히 결속했다. “신사 참배는 십계명 중 엄연히 제1, 2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는 짓이다. 우리는 계명을 어기고는 살 수 없음을 천명하여, 일본이 받는 신사 앞에는 결단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신앙을 짓밟으려는 마귀를 정면으로 대적하고 나선 것이다. 문창교회 (마산) 문창교회는 주 목사가 처음 성령을 체험을 한 곳이었다. 예배당은 크고 재정도 튼튼했으나 목회자 문제로 늘 불안한 교회였다. 시련을 겪은 지 4년이 이르도록 계속 흔들리는 문창교회는 교회를 새롭게 이끌어 줄 인물로 주기철 목사를 청빙했다. 1933년, 암울한 기운은 점점 무겁게 조선 땅을 짓눌렀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가 일본의 군국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이에 일본은 북벌을 꿈꾸면서 조선 땅을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다. 상처 입은 문창교회 문제를 주기철 목사는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해결하였다. 오랫동안 높은 영적 기갈에 허덕이던 교인들은 다시금 맑은 물을 얻게 되어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안갑수 사모와 당시 일본으로 유학 가려다 병이 나서 포기된 후 의신여학교 교사가 된 오정모 선생이 주일학교 교사로 일했다. 기도와 성경에만 열중하고 구제에도 열심히 있는 주 목사의 관후하고 온유한 인격은 전 신도들에게 언제나 만족을 주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영력, 사랑, 학식이 다 구비되어 있어 나날이 그는 문창교회의 빛이 되었다. 1933년 5월 19일 돌연 안갑수 사모는 큰언니 장례를 치르고 심신이 피곤한 가운데 인중에 난 종기를 수술한 것이 잘못되어 결국 살 가망이 없게 되었다. 1933년 7월 3일, 경남 노회는 임시 노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육이라는 순윤설과 십계명 무용설을 주장하는 신진리파에 대한 정죄여부를 가려야만 했다. 그는 노회장으로서 신진리파의 문제를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젊은 지성인들 몇과 함께 그가 아끼던 청년들이 연루되어 있었지만, 아픈 가슴으로 7월 3일 노회에서 몇몇 사람은 면직으로, 나머지는 출교로 책벌을 단행했다. 그 후 자기를 초량교회 취임목사로 청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선배 장덕생 목사가 교리해석을 제멋대로 만들어 새 교파를 형성하고 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권징조례에 따라 그 이름을 노회 명부에서 제명해야 했다. 비록 잘못이 있다고는 해도 한 교직자의 생명을 그렇게 잘라야만 하는 노회장 주 목사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는 산으로 올라갔다. 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맡기시는지 정말 괴로웠다. 그는 산에 올라 하나님의 뜻이 밝혀질 때까지 기도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평평한 바위 위에 꿇어 엎드린 그의 숨결은 그대로가 신음이었다.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죽음 두 아이의 죽음, 제명, 책벌, 한국을 키질하듯 들볶는 일본, 이 땅 곳곳에 세워지는 일본의 신사. 주님을 찾는 그의 울부짖음은 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새벽녘에야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제단은 높은 곳에 있느니라. 제단에 오르려면 계단을 밟아야 하느니라.”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제단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의 제물이 되기 위해 육신에 속한 애정과 욕망을 끊어내는 좁은 길이라는 것을. 주기철 목사는 그 주일에 주일예배를 드린 후 자리에 눕고 말았다. 과로에 영양실조. 십 여 일간 호되게 앓고 난 후 민망할 정도로 수척해졌다. 1934년 목사님의 건강이 더욱 안 좋아지자 제직들이 재혼문제를 들고 나섰다. 모두의 이야기가 안갑수 사모의 유언도 있고, 여러 가지 면으로 봐서 오정모 선생이 적임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선생은 주 목사를 성직자로서 존경하며 사모했으므로 그 동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러나 결핵성 복막염으로 죽음의 고비를 겪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금강산에 있는 장로교 수양관에서 수양회가 열렸다. 장로교 총회의 모든 목사와 선교사 200명이 일제히 모여 조선교회의 당면문제며 과제를 두고 기도하며 의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주 목사는 ‘예언자의 권위’(마3:1-13)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엘리야의 권위, 예레미야의 권위, 세례 요한의 권위는 일사 각오 연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을 못하십니까? 우리가 왜 벙어리개가 되었습니까? 오늘 목사도 일사각오 연후에 한 말을 해야만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아무 까닭 없이 일본의 한낱 순경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그러나 미처 그 대목의 말을 맺기도 전에 장내를 찢을 듯한 제지의 소리가 단상을 가로질렀다. “중지! 중지! 당장 중지!” 단상은 일경들과 목사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참석자들 모두가 일경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멍이 든 채 그 밤을 지내고 강제로 해산을 당하였다. 한편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던 몇몇 목사들에게서 일본 순회 전도 강연을 부탁받아 주 목사는 한 달 이상 전도 강연 길을 떠난 후 교회도 조용해졌다. 목사님이 돌아오신 후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그를 청빙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를 내려놓고 무학산으로 올라가 엎드렸다. “왜 저를 부르십니까? 왜 남쪽 끝에 있는 제가 그곳으로 가야 합니까?” 조만식 선생님이 며칠 후 친히 찾아오셨다.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진 전도사 장례식 산정현 교회 (평양) 1936년 7월. 새로운 목사를 맞이하는 산정현 교회는 잔치 분위기였다. 산정현 교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총본산으로 자타가 공인할만한 교회이고, 중산층을 웃도는 식자들이며,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교인이 되는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길 만큼 특수층을 수용한 교회였다. 일본도 이에 맞서듯 주 목사가 산정현 교회로 부임해 온 그 시디에 악명을 떨치는 군인출신의 미나미 지로를 서둘러 조선 총독으로 내보냈다. 주기철 목사는 신앙은 조국이나 민족을 초월한 절대 절명의 것이어야 하며, 민족 운동을 위한 신앙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조국 해방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신앙의 민족사적 결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다음에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산정현교회 교인들에게 밝히 전했다.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 교회 재직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사람을 산정현 교회로 부르신 뜻은 다만 한 가지, 주님이 머릿돌 되어 세우신 교회를 끝까지 지키라는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총독부는 곧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 이라도 잡아 끌어내어 신사참배를 하도록 갖가지 계책을 쓸 것입니다. 감언이설, 강제, 위협, 자신들의 법으로 온갖 방법을 휩쓸어 올 것입니다. 신사참배가 총칼이 아니니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생명을 잃느냐 지키느냐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하게 되는 절대 절명의 사건이요 시험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민족을 쓰시기 위하여 연단하심이요 시험하시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시험을 통과한 뒤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산정현 교회의 소명은 이 땅의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라 하시는 것입니다.” 조선총독으로 미나미 총독은 부임하면서부터 조선 사람들의 목을 단단히 조이기 시작했다. 부임하기 전에 조선을 일본 앞에 무릎 꿇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대로 본때를 보일 속셈이었다. 10월 1일, 총독부는 소위 ‘황국시민서사’를 제정하고, 황국신민 체조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했고, 관공서와 각 급 학교에 ‘일본천황의 사진, 일장기, 일본 국가를 인쇄한 액자’를 배급하여 매일 경배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강제로 집집마다 가미다나를 설치시켰고 평양에는 곳곳에 신사를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코가 땅에 닿도록 공손하게 절하지 않으면 그것도 불경죄라 하여 잡혀 갈 판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학교마다 신사를 참배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던 조선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였다. 결국 북장로교나 남장로교, 호주 선교부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남을 알아 신사에 참배할 수가 없고, 또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도 없다.” 하여 미션학교들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의 신사참배 한편 53회 평북노회가 2월 7일이었다. 평복 노회에서 김일선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친일파 앞잡이가 목사가 되어 노회장이 되고 조선교회의 신사참배 안건이 통과되었다고 울분과 흥분으로 김일선 목사 졸업 기념식수를 뽑아버리고, 돌 푯말까지 깨뜨렸다. 그런데 이 일을 주기철 목사가 사주했다며 형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주 목사를 끌고 갔다. 교인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형사를 붙잡고 말리다가 탄식하는 조만식 장로를 보고 주 목사는 엷은 웃음을 머금으며 뒷일을 부탁했다. 학생들 10여명, 산정현교회 교인들까지 검속해 들인 후 2월 9일 조선의 공교로서는 처음으로 신사 참배를 가결한 치욕의 날이었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렇게 잡아들인 것이다. 목사님이 감옥에 계신 동안 오정모 사모와 성도들은 철야기도를 했다. 결국 목사님은 4주 만에 풀려났다. 전국 24개 노회가 하나하나 무너지는 소식은 하루가 바쁘게 들려왔고, 평양신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았다.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있던 날, 주 목사님은 방문을 닫고 숨소리도 없이 홀로 계셨다. 오후에 되어 동료목사님들이 침통한 얼굴로 목사님의 방문을 열었다.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평양신학교를 짓밟은 자들이 모란봉에 세운 일본 신궁 텃밭에 평양신학교를 새로 세웠다. 평양 기독교 친목회와 서울 혁신교단은 조선 총독부에 직통으로 통하는 세력단체로 커져 산정현 교회 새벽기도 내용까지 일일이 그 친목회에 밀고 되고 있었다. 일본이 파견한 일본 기독교회 대회 의장 도미다 목사가 총회를 앞두고 회유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평양에 도착한 그들 일행을 4개 노회가 연합으로 주최하여 모은 백여 명의 목사와 임원들이 성대한 환영 만찬으로 맞이한 후, 모임 장소를 산정현 교회로 정했다. 도미다는 깍듯한 태도와 싹싹한 말씨로 신사를 종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누누이 설명을 했다. 주기철 목사는 차분하면서도 죽을 각오한 단호함과 의연함으로 대처했다. “도미다 목사께서는 십계명을 외우십니까? 목사님께서는 언제 성경을 읽으셨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강령이라면 도미다 목사께서는 조선을 불법으로 점령한 일본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불법을 함께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도미다 목사님! 목사님이 진정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그리고 진정 조국 일본을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조선 사람들에게 신사를 참배하라고 권고하며 다니시기보다 같은 동포인 일본 사람들에게 좀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에는 신앙양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지키고 있는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일본도 한시 바삐 여호와 앞으로 돌아와 더 큰 일을 저질러 돌이킬 수 없이 되기 전에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 무릎 꿇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한국을 떠나는 선교사들 도미다는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쓴웃음을 짓기도 하면서 주 목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 간담회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결국 도미다 목사일의 패배로 끝맺었다. 그런데 산정현 교회에서 간담회로 밤을 지새운 날 저녁, 선교부로부터 도미다 일행에게 성대한 만찬이 벌어졌고, 도미다는 4개 노회 신사 참배를 가결의 선물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님은 저녁상을 받지 않았다. 도미다 목사의 한국방문은 9월에 개최될 예정인 장로교 제27회 총회를 위한 선무공작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27회 총회에서 조선교회의 신사참배를 가결시킬 계획을 치밀하게 짜놓고 있었다. 1938년 7월 초복더위가 땅을 절절 끓게 만들던 날, 사복 경찰 몇 명이 교회 사무실로 들이닥쳐 영장 제시도 없이 창백해진 목사님을 무조건 끌고 나갔다. 총회가 열리기 전에 신사참배 반대 안건을 들고 나올 주인공이기에 주 목사를 묶어두기 위한 작전이었다. 시미즈가 형사는 막상 주기철 목사를 구속해 놓기는 했으나 죄목을 잡을 수가 없고 모두들 존경하는 터라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의성읍 경찰서의 고등계 계장 악마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낭하형사 밑에서 훈련받은 배만수 형사가 평양에 왔다. 배만수 형사는 의성교회를 뒤지다가 유재기 목사가 ‘기독교 청년 면려회’ 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의성교회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잡아 가두며 관계된 목사들을 의성으로 끌어들였다. 이 ‘농우회’는 5년 전 평양신학교 신입생 환영 야유회에서 출발한 농촌계몽운동이었는데, 회장이 산정현 교회 조만식 장로요, 교인들 중에 몇 사람이 중요한 인물임을 알고 주기철 목사를 주동자로 추적한 것이다. 8월 10일, 평안남도에 있는 장로교회들이 너무나도 앞장서듯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는 교회가 무너지는 처절한 소리를 들으며 의성으로 끌려갔다. 그의 도착은 고문의 시작이었다. 검도용 몽둥이가 자주 부서졌고, 앉혀놓고 짓이기는 매질이 지루해지면 천장에 가로지른 각목에다 발목을 묶어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비행기를 태웠다. “아하! 아직 매운 맛을 못 보아서 입이 살았어.” 주 목사를 거꾸로 매어 달아놓고 고춧가루를 가득 푼 주전 물을 코와 입에 쏟아 부었다. 영원한 지옥불의 불붙임 같기도 했다. 극심하던 고통은 순간 끊어져 무의식 속에 빠졌고 고춧가루 물고문은 숨통만을 막는 것이 아니라 혈관도 타 붙게 만들었다. 주 목사는 감방에 있던 청년이 내미는 밥덩이를 간신히 받아들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주님,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마치 완전히 버림받은 자 같을 뿐이오며, 갈 곳이 아주 없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겠고, 희망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모르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주님, 성찬으로 받사오니 주께서 저와 함께 하심을 확증하게 하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새 힘을 주시옵소서.” 농우회 사건은 당초에 낭하 형사와 배만수 등이 기대했던 것만큼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약이 오른 배 형사와 낭하형사의 고문은 더 혹독해졌다. 그들은 주 목사의 손톱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 손톱 뿌리가 남아 있는 자리를 대나무 바늘로 쑤시고 찔렀다. “주여!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을 용서하소서.” 기절한 주 목사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의식이 깨어난 주 목사를 널판자에 눕혀놓고 사지를 묶었다. 그리고 아랫도리를 벗긴 뒤에, 알코올을 적신 탈지면을 감은 꼬챙이를 요도에 쑤셔 넣었다. 찢겨서 피가 흐르고, 면도날로 아랫배를 저며 내는 듯 했다. 얼마나 고문이 심했던지 의성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던 권중하 전도사가 순교했고, 박학전 목사는 고문 끝에 맑은 정신을 잃고 신성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결정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 임원 기념사진 앞줄 중앙이 홍택기, 그 우편이 김길창 목사 한편 평안 장로회는 “신사 참배는 교리에 배타되는 것이 아니다.”고 선언하며 9월 2일 경안노회도 정기노회도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9월 9일 총회가 열리기 전에 총노회 27개 중 과반수인 17개 노회가 신사 참배를 스스로 가결했던 것이다. 드디어 장로회 27차 총회가 9월 9일 평양의 서문 밖 예배당에 219명의 총회 참석자가 모여들었다. 참석자 219명 사이사이 경찰관이 97명이 끼어 앉아 장로회 총회가 아니라 경찰관 모임 같았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임원선거를 하고 허둥지둥 불법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오정모 (吳貞模 1903~1947) 주기철목사의 사모. 평양 정의학교 졸업 후 마산의 신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문창교회에 출석하다가 주기철 목사를 만남 의성에서 면회를 허락한다는 전갈이 오자 오사모는 먹는 것도 잊고 자는 것도 잊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낭하형사와 배 형사는 오사모를 앉혀놓고 회유하였다. “주 목사는 시국에 대해 아주 둔하더군요. 그러니 부인께서 면회를 하시면서 요즈음에 돌아가는 사태를 잘 설명하시고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설득하세요. 아시겠습니까?” 그것 한 가지면 당장 석방입니다. 오사모는 어떻게 할까 갈등하고 있는데, 형사실 문이 열렸다. 주 목사의 깍지 못한 수염 속에 얼굴은 백납 빛이었다. 안질이 도져 벌겋게 충혈 되었고, 저고리를 헐렁하여 허수아비에게 걸쳐놓은 옷처럼 보였다. 오사모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목사님 장하십니다. 조선의 교회가 다 무너져도 목사님이 견디시는 한 우리 주님의 교회는 그 자리에 건재합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목사님의 승리를 끝까지 지켜보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갑자기 배 형사가 머리채를 잡아채었다. “아니! 이런 독한 계집이 있나? 제 서방을 석방시키도록 말을 거들라고 했더니 무어야? 더 견디고 승리하라고! 세상에 서방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 독한 여편네구만!” “목사님, 우리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견디신 것처럼 기도하시면서 견디십시오. 모두들 잘 계시니 집안 염려는 하시지 마세요. 산정현 교회도 꿋꿋하게 잘 견디고 있습니다. 교인 중에 아무도 십계명을 어긴 사람이 없습니다.” 배 형사는 오사모를 내동댕이쳤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오사모는 한없이 울었다. “주님 용서하세요. 기차 안에서만 울고 평양에 도착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겠으니 지금만 용서하세요.” 다음해 2월 농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검찰청으로 넘겨졌고, 검찰에서는 유재기 목사 한 사람만 기소를 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혐의로 석방하기로 결정을 했다. 2월 5일. 주일 아침 평양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기철 목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날 예배 시간이 되자, 평양과 대동과 선교리의 3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들이 산정현 교회로 몰려들었다. 2천여 명이 집결한 자리였으나 숨소리 한 가닥 들리지 않았다.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서도 나와 함께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신 여러분의 기도 안에서 저는 모든 것을 잘 견디고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7개월 동안 저는 5종목의 기도가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입니다. 저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사람을 위협하는 마귀가 최대 무기인 듯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 주님 이 목숨 아끼다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겪지 않게 해주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사랑만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그 젊음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게 하소서.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입니다. 단번에 겪는 고난은 이겨내기 쉬우나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가 힘이 듭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고문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저처럼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은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주어지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하랴! 세 번째는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나에게는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와 아직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 태어나 자식의 의무도 중요하고,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식들의 아비가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을, 병든 아내를, 어린 자식들을, 불안해하는 양떼를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싸매어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인도하시며, 낙심하고 범죄 한 자를 당신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을 얽어맨 인정의 줄이 나를 얽어매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부모나 처자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합당치 않다 하셨으니 저로 예수님께 합당한 자가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네 번째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십시오.’ 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리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님 안에서 자랐고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목사가 되어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죽음을 피하려 하겠습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예수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다섯 번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혹여 옥중이나 사형장에서 저의 목숨이 끊어질 때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저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저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 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저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시옵소서. 저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나이다. 아멘.” 눈물바다를 이룬 산정현 예배당에서 그날 그 자리에서만은 모든 사람이 하나였다. 일본의 앞잡이로 손가락질 받던 조선 형사들까지 눈물을 머금었다. 목사님이 집으로 돌아오신 뒤 6개월 후의 일이다. 8월 초순 어느 주일 예배시간이 임박하여 여러 명의 형사대가 찾아와 설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주 목사는 낯빛 하나 변하는 일없이 형사 앞에 꼿꼿하게 섰다. “당신네들은 일본 헌법에 예배의 자유가 보장된 것을 모르시오? 당신들은 지금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위반하고 있소.” 순간 형사들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목사님은 지혜롭게 적을 공격한 것이다. 그날의 설교가 있은 지 나흘째 되던 날, 여섯 명의 형사들이 사택으로 들이닥쳤다. “갑시다!” “이번에는 무슨 명목이오? 법에도 없는 폭력을 언제까지 행사하리라 믿고 이러시오? 나는 당신네들에게 끌려갈 일을 한 적이 없소.” “잔소리가 많다!” 부장형사가 목사의 팔을 낚아챘다. 고무신을 신은 주 목사를 형사들 서너 명이 달려들어 잡아끌었다. 일본 관헌은 9월에 소집할 예수교 장로회 28차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 을 조직한 사전 모의를 끝낸 뒤에 그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미리 주기철 목사를 구속한 것이다. 주 목사를 연행하자마자 지하실에 끌어다 놓은 시미즈가 형사는 주 목사님을 먼저 거꾸로 매어 달았다. 그리고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풀었다. 피가 머리로 쏟아지고 눈알이 당장 빠질듯했다. 코로 입으로 들이 붓는 고춧가루 물은 뇌수를 긁어 흔들며 단숨에 숨통을 막았다. 목구멍이 찢어지고 코 속이 타는 듯했다. 일제의 고문 만행 얼마 만에 혼절, 다시 의식이 돌아오자 그들은 주 목사를 천장에서 끌어내려 엎어놓고 등을 발로 밟고 옆구리에 발길질을 했다. 코로 입으로 들어갔던 고춧가루 물이 다시 조금씩 밀려나왔다. 그들은 주 목사를 의자에 묶어 놓고 전기 고문을 했다. “전기 찜질을 하셨으니 이번에는 손톱 소제를 해드리지.” 대나무 바늘로 손톱을 쑤시고 발톱을 후볐다. 그때 홀연히 주 목사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오니 주 예수 힘 주사 굳세게 하소서.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같이 희겠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형사들은 얼굴을 흉측하게 찌푸렸다. “예수한테 힘을 달라고 노래를 한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고문을 받으면서 노래를 부른다고?” 주 목사는 다시 천장에 거꾸로 매어 달렸다. 그리고 코와 입으로 쏟아 붓는 고춧가루 물을 들이켰다. “하나님 찬양… 주여, 나를 주님 곁으로 부르소서. 나의 육체가 슬프오니 내 슬픔을 거두어 주소서. 주여!” 산정현 교회 교인들은 목자 잃은 양떼였다. 며칠 후 평양경찰서에서 산정현교회로 긴급 호출령이 떨어졌다. 경찰서로 간 교회 중진들에게 경찰서는 지시사항을 주면서 협박을 했다. 1. 교회 제직은 모두 매주일 반드시 한 번씩 신사참배를 이행할 것. 2. 설교 또는 교회 사무는 제직들이 집행하고 서양인과 기타 사람은 교회 일에 관여하지 못한다. 3. 이 사항들에 관한 결정을 금일 오후 3시까지 회답할 것. 4. 이상 세 가지 항목 중에 단 한 가지라도 불응할 때에는 당장 내일부터 교회를 폐쇄한다. 이제는 주기철 목사와의 싸움이 아니라 산정현 교회와의 싸움이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주일예배는 눈물의 예배였다. 예배를 감시하던 형사들이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성도들 개중에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아가며 타협을 제의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모두 경찰서에 갇히는 것이 낫지, 순교라면 몰라도 누가 배교에 앞장서라는 말이오? 산정현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온 정절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는 안 될 일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청년회원들은 혹여라도 제직들이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할까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신사참배가 결정되지 않자 그날 오후 형사대 십여 명이 예배당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예배당에 안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말 몇 마디를 던졌을 뿐, 감히 교회 문에 못을 박지는 못했다. 10월 23일의 일이었다. 수요일예배 설교를 하러 강단에 올라가던 방 장로를 갑자기 형사 서너 명이 덮쳤다. “장로의 설교가 금지된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슨 반항이야?” 형사들은 육십을 넘긴 방 장로님의 팔을 비틀어 잡아끌면서 밖으로 나갔다. 교인들은 일제히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엎드려져 통곡을 터뜨렸다. 통곡이 기도요 찬송이었다. 방 장로님이 끌려간 곳은 주기철 목사님이 고문을 당하고 있던 지하실이었다. “어이 주 목사! 당신이 잘못 가르쳐서 여기까지 잡혀 온 늙은이가 있으니 보라구.” 하면서 방 장로를 천장 지렛대에 팔목을 묶어 놓고, 다리며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려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형사들은 주 목사를 매어달아 놓은 채 그 앞에서 방 장로를 형틀에 묶어 놓고 미친 듯이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방 장로는 고통 중에도 주 목사님의 괴로워할 것만 염려되어 신음소리 한번 마음 놓고 쏟아놓지 못했다. “야! 이 늙은 것이 매를 맞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야? 바른 대로 불어! 누가 신사 참배를 하지 말라고 시켰어?” “사람이 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그 따위 우상에게는 절하지 말라고 하시었소. 나를 이 자리에서 죽여 보시오. 그 외에 다른 대답이 나오겠는가.” 독이 오른 형사들은 ‘누가 더 잔인한 매질을 잘하는가.’ 경쟁하면서 양쪽에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방 장로는 일어나 걷지 못하는 주 목사를 끌어 등에 업고 감방을 향해 걸었다. 주 목사를 부축한 것이 이유가 되어 기운이 남아 저렇다며 방 장로를 또 끌어다가 고문을 시켰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감방에 돌아왔다. “장로님, 우리의 정신은 생생합니다. 더구나 주님의 장중에 붙잡혀 있는 우리의 영혼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지요. 일본 관헌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우리의 영혼만은 흠집 없이 지켜주십니다.” 주 목사는 기도하는 방 장로의 등 뒤에 대고 나직한 그 동안 고문을 당하면서 한 줄 한 줄 기도하듯 지은 ‘영문 밖의 길’ 이라는 시를 그 무렵 널리 알려진 ‘다뉴브 강의 잔물결’ 이라는 곡조에 붙여 노래를 불렀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 밖에 비치누나 / 연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걸머지고 /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 한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 경찰은 산정현 교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참배를 시키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교회는 똘똘 뭉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평양 노회장 최 목사를 이용하여 외유를 해보았으나 실패하자, 경찰의 명령에 따라 임시 노회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주기철 목사를 파면시켰다. 부활주일에 평양노회 전권 위원들 9명이 강단을 차지하고 이인식 목사를 당회장으로 세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교인들은 부활주일 전날 밤부터 예배당에 모여 눈물로 기도하며 밤을 새웠다. 주일을 앞둔 예배당의 철야기도는 장엄함과 거룩함이었다. 주일예배 시작이 다가오자 양재연 집사가 20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와 ‘십자가 군병들아’를 이어서 부르며 절대로 중단하지 말자고 외쳤다. 9명의 수습위원 목사님들과 경찰 40여명이 밀어닥쳐 중지를 시키려고 악을 써댔으나 곧 찬송소리에 묻혀 버렸다. 화가 난 형사들이 교인들을 잡아 끌어내고 내동댕이치며 감옥으로 끌고 갔다. 결국 경찰은 예배당을 폐쇄시켰다. 경찰은 주기철 목사의 가족들이 기거하고 있는 사택도 빼앗았다. 주 목사님을 취조했던 구가 경사는 목사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주기철 목사가 국사범만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주 목사님을 존경할 뻔 했소.’”라고 고백했다. 평양경찰은 일단 주기철 목사를 가석방이라는 명목으로 방면할 방침을 세웠다. 가석방의 소식을 들은 산정현 교회 교우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며 웃으며 기뻐했다. 목사님은 산정현교회로 가서 손수 각목을 떼어내고 들어가셨다. 먼지 앉은 강단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주님, 주님이 견디셨습니다. 주께서 이기셨습니다. 나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만나처럼 내려주시며 주께서 이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주님, 감히 질문을 해도 된다 하시면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제가 겪어야 할 일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주님, 이 흩어진 양떼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경찰은 목숨을 걸고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며 부흥집회로 교회재건 운동을 서둘던 한상동, 이기선 목사를 구속하면서 주기철 목사님을 다시 수감했다. 가석방되어 집에서 기거하기 한 달여 만에 교회재건파라 이름 붙인 목사님들 21명과 주기철 목사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자들에 대한 일체 검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40년 여름 일본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켰고, 22년간 조선교회의 보수적 신앙을 이끌어가며 꾸준하게 출간되던 ‘신학지남’까지 폐간시키므로 평양신학시대의 막을 강제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수많은 목사들과 신자들을 검거했다.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가 검거되고 손양원 목사는 여수 경찰서에 투옥되었다. 다음 해 초봄, 느닷없이 형사가 들이닥쳤다. 특별면회라고 하면서 식구들 모두 함께 데리고 갔다. 특별 면회라는 말에 노모는 솔깃하고, 광조는 그저 좋아하며 따라나섰다. 그런데 3층 형사실이 아닌 지하 고문실로 데려갔다. 형사들은 가족들이 보이는 앞에서 주 목사님을 잔인하게 고문하기 시작했다. 노모는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고 오사모는 어머님을 무릎에 안고 엎드려 숨차게 주님만 찾았다. 목사님이 기절하니 천장에서 끌어내려 이제는 고춧가루를 주전자에 풀어 그 물을 목사님의 코와 입에 붓기 시작했다. 형사는 주 목사가 고문 받는 것을 지켜보지 않는다고 노모와 오사모를 발길로 걷어차고 머리끄덩이를 끌어 내동댕이쳐가며 소리를 질렀다. 목사님의 배가 출산 직전의 임산부처럼 부풀어 오를 때까지 붓더니 이제는 목사님의 배에 의자 둘을 엎어놓고 배를 짓눌렀다. 핏물인지 진물인지 검누런 물이 코에서 귀에서 쏟아져 나왔다. 노모는 다시 혼절하여 늘어지셨고, 오사모는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형사들은 야비한 웃음을 떠올리며 목사님을 일으켜 책상위에 앉혔다. 주 목사와 오사모의 눈이 마주치자 깊은 신뢰와 아픔과 사랑으로 미소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야, 이년아!”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형사들은 검도용 칼로 오사모를 후려치며 발길질을 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살이 터지면서 흐른 피가 시멘트 바닥을 적셨다. 밤이 깊어서야 세 식구는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노모는 정신을 잃고 어린 광조는 아버지가 당하는 고문과 어머니의 매 맞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그러나 입을 벌려 말해보려고 애쓰던 광조는 끝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다. 그러면 좀 더 견디자. 우리 기도하며 기다리자꾸나.” 오사모는 광조를 가슴에 안았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1944년 전쟁은 막바지에 달한 것 같았다. 그 간에 폐쇄된 교회가 2백여, 목회자나 장로, 집사, 평신도들을 구속 수감한 숫자가 2천여에 이르렀다. 징병제를 학병제로까지 이어졌다. 학교 건물뿐 아니라 교회 건물까지 일본 군대를 주둔시켰고 교회 안에까지 ‘가미다나’를 설치했다. 4월 19일 저녁에 형무소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주기철이 위독하여 병감에 수용되어 있으니, 긴급 면회 바람.” 날이 밝기도 전에 형무소로 달려갔다. 간수는 면회실이 아닌 소장실로 오사모를 안내했다. “부인, 부군께서 너무 위중한데 병원으로 모시고 가십시오, 수속을 밟아 드리겠습니다.” 이들은 열흘 전에 최권능 목사님을 이렇게 밀어냈었다. 최 목사님은 옥중에서 소천하시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지만 강제로 모시고 나가서 닷새만인 4월 15일 병원에서 소천하시지 않았는가. 이들은 목사님들이 옥중에서 순교하셨다는 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두 간수에게 들려오셨다. 서 있을 힘도 잃은 듯 간수들에게 몸을 의탁한 목사님은 앞이 보이지 않는 듯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다 오셨습니다. 끝까지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월계관을 들고 계신 것 보이시지요? 눈을 들고 바라보세요. 주님의 얼굴을 바로 보세요. 목사님!” 목사님이 타 붙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머지않아 주님 앞으로 갈 것이오. 아! 어머님이 보고 싶소. 불쌍한 어머님을 내 대신 잘 모셔주시오. 어린 자식들을 잘 부탁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조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여보, 나를 웅천으로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주시오.” 그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목사님은 쓰러졌고 간수들은 황급하게 목사님의 몸을 양편으로 붙들었다. 끌려가시던 목사님이 뒤돌아보며 “여보,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마시고 싶소.” 하시며 진한 여운을 남기고 가셨다. 오사모는 그 밤을 혼자 엎드려 울었다. 일본이 무너지기 1년 4개월 전이었다. “목사님의 유채를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수속해 주십시오.” 밖에서 기다리던 백인숙 전도사와 여집사들은 사태를 짐작하고 달려와 함께 쓸어안고 흐느꼈다. “우리 목사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이 지금 기뻐하십니다. 목사님의 승리를 기뻐하십니다.” “사모님, 어제 목사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며 마지막 외치시던 음성이 어찌나 우렁찼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무척 놀랐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라고 한 간수가 말해주었다. 주기철 목사의 장례 5일장, 장례일인 화요일 아침에는 눈부시도록 화창한 햇살이 쏟아졌다. 평양 고등보통학교 정문 앞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찰관들이 몰려들었으나 그 수많은 사람들 기세에 눌렸는지 아무런 행동개시도 하지 못했다. 기자묘 앞을 지나서 대성산 공동묘지, 목사님이 그렇게도 그리워하시던 돌박산에 이르렀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효자요, 아이들의 훌륭한 아버지요, 애정을 가진 남편이요, 연약을 육신을 입은 인간 주기철. 그러나 그 인간의 애절함과 연약함을 지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십자가만 바라보며 묵묵히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간 하나님의 종,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그 명령에 겸손히 순종한 충성스러운 종이었다. 그의 순교는 산정현 교회와 오사모 가족들이 함께 한 고난 후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흘리셨습니다. 주님, 나를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만 있을 뿐입니다.” 1897. 11. 25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부친 주현성 장로와 모친 조재선의 4남으로 출생 1906. 03. 웅천 개통학교 입학 1912. 웅천 개통학교 보통과 졸업 1913. 봄.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입학 1916. 03. 23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 1916. 봄. 서울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 1916. 여름. 안질로 연희전문학교 중퇴하고, 웅천으로 낙향 1917. 가을. 김해 안기영의 4녀 안갑수와 결혼함 1917. 웅천에서 교남학회 조직 1919. 웅천교회 집사 피택 1919. 04.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웅천 성내리 만세사건 행동책으로 참가하여 1개월간 경찰서에 구류 1919. 10. 25 장남 영진 출생 1922. 03.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입학 1922. 11. 05 차남 영만 출생 1922. 겨울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무함(1925년 9월까지) 1925. 01. 09 3남 영묵 출생 1925. 02. 22 평양 신학교 19회로 졸업함 1925. 겨울 목사안수 - 부산초량교회 시무(1926년 1월 위임목사) 1927. 11. 13 4남 영해 출생 1928. 제24회, 제25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28. 3남 영묵 병사 1929. 경남노회에서 주 목사 주도로 신사참배 반대결의 1930. 03. 05 장녀 영덕 출생 1930. 제28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31. 07. 마산 문창교회 부임 1931. 경남노회 제31회 노회장으로 피선 1932. 03. 18 4남 광조 출생 1933. 05. 16 안갑수 사모 급서(당34세) 1934. 08. 부친 주현성 장로 별세(향년81세) 1935. 5. 금강산 은정리 장로회 목사 수양관에서 “예언자의 권위” 설교 1935. 가을 오정모 집사와 재혼 1935. 12. 평양장로회 신학교 사경회 마지막 날 “일사각오” 설교 1936. 주 목사 장모 안부인 별세(향년 74세) 1936. 07. 평양 산정현교회 부임 1937. 09. 05 신축 산정현교회 입당예배 1938. 02. 평양신학교 장홍련사건으로 신축 산정현교회 헌당예배 직전 제1차로 검속 당함 1938. 06. 이유택, 김화식 목사와 함께 묘향산에서 금식기도 1938. 06. 30 일본기독교회 의장 도미다만 목사 평양에 와 산정현교회에서 신사참배 계몽강연 강행하다가 주 목사와 새벽 4시까지 토론 격전이 벌어짐 1938. 08. 제27회 장로회 총회 직전 제2차로 검속당한 후, 1938. 08. 의성 농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의성경찰서로 압송되어 7개월간 구금됨 1938. 09. 10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사참배 찬성결의 1939. 02. 04 의성경찰서에서 석방 1939. 02. 05 평양 산정현교회에 돌아와 “5종목의 나의 기도” 설교 1939. 09.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으로부터 해임시키고자 제3차 검속 1939. 12. 19 평양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주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처분결의 1940. 03. 24 평양산정현교회당 완전 폐쇄하고 목사관 사택에서 가족을 추방함 1940. 04. 주 목사가 가석방되어 육로리 셋집으로 돌아옴 1940. 여름 제4차 검속 1941. 8. 25 평양경찰서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2년 8개월간 유치 당함 1944. 3. 31 4남 광조와 마지막 면회 1944. 4. 21 오후 4시 주 목사와 오정모사모의 마지막 면회 후 밤9시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순교 1944. 4. 25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 1947. 1. 27 오정모 사모 유암으로 소천 1950. 9. 주 목사 장남 주영진 전도사 평남 대동군 김제면 장현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공산당에 의하여 순교 1990. 12. 21 주 목사 3남 주영해 장로(신성북교회) 소천 1997. 4. 20 주 목사 복권 및 복적.
주기철 목사, 목사님은 승리 하셨습니다/ 성화된 성도들의 빛된 삶/ 2008-12-10
주기철 목사, 목사님은 승리 하셨습니다/ 성화된 성도들의 빛된 삶 어린 시절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11월 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 있는 농가에서 주현성 씨와 조재선 여사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기복이였다. 기복은 8세 때 개통학교에 입학했다. 나이도 어리고 몸도 허약하였지만 성적은 월등하게 뛰언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동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한일합당이 되었을 때 어른들은 모여 통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더러는 무능한 조정을 원망했다. “이렇게 어이없이 일본한테 목이 매어 끌려가야 하는가?” 나라 잃은 사람들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기복이의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큰 형 기원이었다. 기원은 웅천읍에다 조그마한 교회당을 세웠다. 그래서 기복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주일학교에 다녔다. 가자 오산으로 기복이 개통학교에 다닐 때 아직 20세인 춘원 이광수가 부산 지구로 순회강연을 나왔다가 개통학교에 들러 “학문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니 젊은이들이 열심히 배우고 나라를 다시 찾아야 우리들의 미래도 열린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오산학교를 소개했다. ‘가자, 오산으로!’ 기복은 뜨거운 마음으로 결심했다. 그곳은 1,500리 길이나 되는 먼 길이어서 가족들이 반대하였으나 기복은 굽히지 않고 사촌형인 주기용과 함께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떠나기 전에 이름을 기철로 바꾸었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은 105인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고 계셨다. 그는 가난한 시골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었으나 자수성가하여 우리나라에서 첫손 꼽힐만한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많은 돈을 잃어버리면서 모든 것이 헛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40세에 공부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 평양에서 열린 안창호 선생님의 교육진흥론을 듣고 그 자리에서 상투를 자리고 금주금연을 선언하신 뒤에 청결하게 삶을 사시다가 1907년 43세에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1916년 기철은 4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남강 선생과 고당 선생은 기철에게 많은 기대를 품으며 오산학교의 기둥으로 쓰고 싶어 하셨다. 남강 선생은 기철에게 우리나라 경제를 부흥시켜 민족 산업을 일으키는 좋은 재목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며, 연희전문학교의 상과에 진학하기를 권유하였다. 제3의 존재를 찾아서 기철은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앓던 고질병인 안질이 더 심해져서 공부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게다가 큰 형 기원이 하던 염전과 어업, 양조장이 한꺼번에 기울어져 재산 상속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후 상속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을 보고 눈도 나았지만 몹시 쓸쓸한 나날을 신앙으로 달래면서 살아갔다. 그러던 차에 이기선 목사님이 소개해준 안기영씨의 막내딸 안갑수와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음 편하게 가정의 행복 속에 빠져있지는 못했다. 많은 기대 속에서 흥분하며 일어났던 3.1운동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를 세웠던 큰 형도, 작은형도 교회를 등졌다. 교회에서 십여 년이나 봉사하던 형들이 불신으로 빠지는 것을 보며 기철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갔다. ‘아아 이것도 아니다. 정녕 삶은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라를 위하여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이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러면 제3의 그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왜 나는 그것을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 1년이 지나 첫아들 영진이가 돌이 될 무렵 마산 문창 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를 모시고 부흥 사경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듣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분출했다. ‘가자, 가자! 문창교회로!’ 은혜체험 울며 회개하는 사람, 병고침을 받았다며 함성을 지르는 사람, 방언이 터진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예배당이 가득 찼고 모드들 매어 달리는데, 기철과 친구들은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은혜를 못 받는가?’ 안타까움과 분함으로 답답해했다. 셋째날 밤 집회에서 김익두 목사님은 ‘성신을 받으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다. 장내는 성령의 불길로 휩싸였다. “장님이 눈을 뜨게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요! 귀머거리가 귀가 뚫리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오!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는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이오!” 이때 기철은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갑자기 통곡과 함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고꾸라지면서 방성대곡을 터뜨렸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주님만 느꼈다.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헤매며 찾던 그 빛, 허망함 속에서 그렇게 갈망했던 그 존재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해 11월 1일 주기철과 그의 친구들은 신학생이 될 것을 결심했다. 기철은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는 이국땅에 와서 고스란히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엔 뜨거움이 솟아오르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초량교회의 위임목사 그는 1926년 3월 평양신학교를 19회로 졸업했다. 그의 나이 서른!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두 번째 아들 영만이와 세 번째 아들 영묵이가 태어났다. 자식이나 아내를 호강시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갈 수가 있을까? 세 아들과 아내와 어머님을 이끌고 나는 목회자의 길을 가야한다.’ 그는 1926년 봄에 설립된 지 33년 되는 부산 초량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주목사는 비상한 고심과 정성으로 대개 목요일까지 설교원고를 작성했다. 원고를 작성하다가도 가끔 산에 올랐다. 방 두 칸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서재가 없어 집보다는 교회에서 많이 생활하며 산에 가서 철야하기가 일쑤였다. 주목사는 구봉산 바위굴에서 살다시피 하고 교회의 교육이나 재정관리에 빈틈없이 철저했으며, 그의 사례비의 반은 교회로 되돌아왔다. 교회에서는 보릿고개 때도 점심을 지어 배고픈 사람을 먹일 정도로 구제와 선교에 힘썼다. 주목사는 기도와 철저한 생활, 보살핌으로 어수선한 시국과 기독교계를 성경말씀으로 지키며 든든한 기초를 다졌다. 그래서 위임받은 지 한 해 만에 100여명의 교인이 300명으로 불어났다.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불신(不信)이오 주목사가 구봉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마다 늘 아내 몫으로 친정에서 주신 당 6천 평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못내 양심에 걸렸다. “굶어 병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빤히 알면서 그 땅을 어떻게 끼고 있겠소? 내가 어떻게 강대상 위에서 성도들에게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권면하겠소? 나의 아내인 당신이 주인이니 내가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는 게요. 처분하여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봅시다.” 남편의 말이지만, 끝없는 목회자 가정의 가난한 사람을 하다보니 자식들의 장래가 걱정되어 남겨두었던 어미의 마음인지라 부인은 계속 반대했다. “여보,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은 불신이오.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굶기시거나 까막눈을 만드시겠소? 또 설사 그렇게 하신다 하여도 무슨 뜻이 있으실 것을 못 믿겠소? 당신이 그렇게 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불신이오!” 눈물로 기도한 후 결국 절반의 땅을 처분하여 구제했다. 한편, 그는 24회 경남 노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되고 25회 노회에서 다시 유임. 주목사의 제의로 경남노회가 신사 참배 반대를 결의한 뒤로 경남 일대의 교회는 뜻을 같이 하기로 단단히 결속했다. “신사 참배는 십계명 중 엄연히 제1, 2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는 짓이다. 우리는 계명을 어기고는 살 수 없음을 천명하여, 일본이 받는 신사 앞에는 결단코 나가지 않을 것이다.” 주목사는 신사참배를 통해 우리 민족의 신앙을 짓밟으려는 마귀를 정면으로 대적하고 나선 것이다. 상처받은 문창교회의 호소 문창교회는 주목사가 처음 성령을 체험을 한 곳이었다. 예배당은 크고 재정도 튼튼했으나 목회자 문제로 늘 불안한 교회였다. 시련을 겪은 지 4년이 이르도록 계속 흔들리는 문창교회는 교회를 새롭게 이끌어 줄 인물로 주기철 목사를 청빙했다. 1933년, 암울한 기운은 점점 무겁게 조선 땅을 짓눌렀고,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가 일본의 군국주의를 더욱 부추겼다. 이에 일본은 북벌을 꿈꾸면서 조선 땅을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다. 상처 입은 문창교회 문제를 주기철 목사는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해결하였다. 오랫동안 높은 영적 기갈에 허덕이던 교인들은 다시금 맑은 물을 얻게 되어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안갑수 사모와 당시 일본으로 유학 가려다 병이 나서 포기된 후 의신여학교 교사가 된 오정모 선생이 주일학교 교사로 일했다. 기도와 성경에만 열중하고 구제에도 열심히 있는 주목사의 관후하고 온유한 인격은 전 신도들에게 언제나 만족을 주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영력, 사랑, 학식이 다 구비되어 있어 나날이 그는 문창교회의 빛이 되었다. 1933년 5월 19일 돌연 안갑수 사모는 큰언니 장례를 치르고 심신이 피곤한 가운데 인중에 난 종기를 수술한 것이 잘못되어 결국 살 가망이 없게 되었다. 공인의 종으로서 치리하다 1933년 7월 3일, 경남 노회는 임시 노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육이라는 순윤설과 십계명 무용설을 주장하는 신진리파에 대한 정죄여부를 가려야만 했다. 그는 노회장으로서 신진리파의 문제를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젊은 지성인들 몇과 함께 그가 아끼던 청년들이 연류되어 있었지만, 아픈 가슴으로 7월 3일 노회에서 몇몇 사람은 면직으로, 나머지는 출교로 책벌을 단행했다. 그후 자기를 초량교회 취임목사로 청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선배 장덕생 목사가 교리해석을 제멋대로 만들어 새 교파를 형성하고 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권징조례에 따라 그 이름을 노회 명부에서 제명해야 했다. 비록 잘못이 있다고는 해도 한 교직자의 생명을 그렇게 잘라야만 하는 노회장 주목사의 심정은 참담했다. 그는 산으로 올라갔다. 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맡기시는지 정말 괴로웠다. 그는 산에 올라 하나님의 뜻이 밝혀질 때까지 기도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평평한 바위 위에 꿇어 엎드린 그의 숨결은 그대로가 신음이었다. 사흘만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죽음 두 아이의 죽음, 제명, 책벌, 한국을 키질하듯 들볶는 일본, 이땅 곳곳에 세워지는 일본의 신사. 주님을 찾는 그의 울부짖음은 산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새벽녘에야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제단은 높은 곳에 있느니라. 제단에 오르려면 계단을 밟아야 하느니라.”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걸아가는 길이 제단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님의 제물이 되기 위해 육신에 속한 애정과 욕망을 끊어내는 좁은 길이라는 것을.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 그는 그 주일에 주일예배를 드린 후 자리에 눕고 말았다. 과로에 영양실조. 십 여일간 호되게 앓고 난 후 민망할 정도로 수척해졌다. 1934년 목사님의 건강이 더욱 안 좋아지자 제직들이 재혼문제를 들고 나섰다. 모두의 이야기가 안갑수 사모의 유언도 있고, 여러 가지 면으로 봐서 오정모 선생이 적임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선생은 주목사를 성직자로서 존경하며 사모했으므로 그 동경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러나 결핵성 복막염으로 죽음의 고비를 겪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금강산에 있는 장로교 수양관에서 수양회가 열렸다. 장로교 총회의 모든 목사와 선교사 200명이 일제히 모여 조선교회의 당면문제며 과제를 두고 기도하며 의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주목사는 ‘예언자의 권위’(마3:1-13)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엘리야의 권위, 예레미야의 권위, 세례 요한의 권위는 일사 각오 연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을 못하십니까? 우리가 왜 벙어리개가 되었습니까? 오늘 목사도 일사각오 연후에 한 말을 해야만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아무 까닭 없이 일본의 한낱 순경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그러나 미처 그 대목의 말을 맺기도 전에 장내를 찢을 듯한 제지의 소리가 단상을 가로질렀다. “중지! 중지! 당장 중지!” 단상은 일경들과 목사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참석자들 모두가 일경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멍이 든 채 그 밤을 지내고 강제로 해산을 당하였다. 한편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던 몇몇 목사들에게서 일본 순회 전도 강연을 부탁받아 주목사는 한 달 이상 전도 강연 길을 떠난 후 교회도 조용해졌다. 목사님이 돌아오신 후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그를 청빙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를 내려놓고 무학산으로 올라가 엎드렸다. “왜 저를 부르십니까. 왜 남쪽 끝에 있는 제가 그곳으로 가야 합니까? 조만식 선생님이 며칠 후 친히 찾아오셨다. 산정현교회 1936년 7월. 새로운 목사를 맞이하는 산정현 교회는 잔치 분위기였다. 산정현 교회는 민족주의자들의 총본산으로 자타가 공인할만한 교회이고, 중산층을 웃도는 식자들이며,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교인이 되는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길 만큼 특수층을 수용한 교회였다. 일본도 이에 맞서듯 주목사가 산정현 교회로 부임해 온 그 시디에 악명을 떨치는 군인출신의 미나미 지로를 서둘러 조선 총독으로 내보냈다. 주기철 목사는 신앙은 조국이나 민족을 초월한 절대 절명의 것이어야 하며, 민족 운동을 위한 신앙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조국 해방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신앙의 민족사적 결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다음에 허락되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산정현교회 교인들에게 밝히 전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사람을 산정현 교회로 부르신 뜻은 다만 한가지, 주님이 머릿돌 되어 세우신 교회를 끝까지 지키라는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총독부는 곧 우리 민족 한 사람 한 사람 이라도 잡아 끌어내어 신사참배를 하도록 갖가지 계책을 쓸 것입니다. 감언이설, 강제, 위협, 자신들의 법으로 온갖 방법을 휩쓸어 올 것입니다. 신사참배가 총칼이 아니니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새 생명을 얻은 우리가 생명을 잃느냐 지키느냐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하게 되는 절대 절명의 사건이요 시험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민족을 쓰시기 위하여 연단하심이요 시험하시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시험을 통과한 뒤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산정현 교회의 소명은 이땅의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라 하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구체적인 활동 미나미 총독은 부임하면서부터 조선 사람들의 목을 단단히 조이기 시작했다. 부임하기 전에 조선을 일본 앞에 무릎 꿇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대로 본때를 보일 속셈이었다. 10월 1일, 총독부는 소위 ‘황국시민서사’를 제정하고, 황국신민 체조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했고, 관공서와 각급 학교에 ‘일본천황의 사진, 일장기, 일본 국가를 인쇄한 액자’를 배급하여 매일 경배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강제로 집집마다 가미다나를 설치시켰고 평양에는 곳곳에 신사를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코가 땅에 닿도록 공손하게 절하지 않으면 그것도 불경죄라 하여 잡혀 갈 판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학교마다 신사를 참배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던 조선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였다. 결국 북장로교나 남장로교, 호주 선교부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남을 알아 신사에 참배할 수가 없고, 또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칠 수도 없다.” 하여 미션학교들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53회 평북노회가 2월 7일이었다. 평복 노회에서 김일선 목사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친일파 앞잡이가 목사가 되어 노회장이 되고 조선교회의 신사참배 안건이 통과되었다고 울분과 흥분으로 김일선 목사 졸업기념식수를 뽑아버리고, 돌 푯말까지 깨뜨렸다. 그런데 이 일을 주기철 목사가 사주했다며 형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주목사를 끌고 갔다. 교인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형사를 붙잡고 말리다가 탄식하는 조만식 장로를 보고 주목사는 엷은 웃음을 머금으며 뒷일을 부탁했다. 학생들 10여명, 산정현교회 교인들까지 검속해 들인 후 2월 9일 조선의 공교로서는 처음으로 신사 참배를 가결한 치욕의 날이었다.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렇게 잡아들인 것이다. 목사님이 감옥에 계신 동안 오정모 사모와 성도들은 철야기도를 했다. 결국 목사님은 4주만에 풀려났다. 무너지는 한국교회 전국 24개 노회가 하나하나 무너지는 소식은 하루가 바쁘게 들려왔고, 평양신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았다.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있던 날, 주목사님은 방문을 닫고 숨소리도 없이 홀로 계셨다. 오후에 되어 동료목사님들이 침통한 얼굴로 목사님의 방문을 열었다. 선교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평양신학교를 짓밟은 자들이 모란봉에 세운 일본 신궁 텃밭에 평양신학교를 새로 세웠다. 평양 기독교 친목회와 서울 혁신교단은 조선 총독부에 직통으로 통하는 세력단체로 커져 산정현교회 새벽기도 내용까지 일일이 그 친목회에 밀고 되고 있었다. 일본이 파견한 일본 기독교회 대회 의장 도미다 목사가 총회를 앞두고 회유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평양에 도착한 그들 일행을 4개 노회가 연합으로 주최하여 모은 백여 명의 목사와 임원들이 성대한 환영 만찬으로 맞이한 후, 모임 장소를 산정현 교회로 정했다. 도미다는 깍듯한 태도와 싹싹한 말씨로 신사를 종교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누누이 설명을 했다. 주기철 목사는 차분하면서도 죽을 각오한 단호함과 의연함으로 대처했다. 사단과의 한판승 “도미다 목사께서는 십계명을 외우십니까? 목사님께서는 언제 성경을 읽으셨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강령이라면 도미다 목사께서는 조선을 불법으로 점령한 일본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불법을 함께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도미다 목사님, 목사님이 진정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그리고 진정 조국 일본을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조선 사람들에게 신사를 참배하라고 권고하며 다니시기보다 같은 동포인 일본 사람들에게 좀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에는 신앙양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지키고 있는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일본도 한시 바삐 여호와 앞으로 돌아와 더 큰 일을 저질러 돌이킬 수 없이 되기 전에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 무릎 꿇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도미다는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쓴웃음을 짓기도 하면서 주목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그 간담회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결국 도미다 목사일의 패배로 끝맺었다. 그런데 산정현교회에서 간담회로 밤을 지새운 날 저녁, 선교부로부터 도미다 일행에게 성대한 만찬이 벌어졌고, 도미다는 4개 노회 신사 참배를 가결의 선물을 안고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님은 저녁상을 받지 않았다. 도미다 목사의 한국방문은 9월에 개최될 예정인 장로교 제27회 총회를 위한 선무공작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27회 총회에서 조선교회의 신사참배를 가결시킬 계획을 치밀하게 짜놓고 있었다. 1938년 7월 초복더위가 땅을 절절 끓게 만들던 날, 사복 경찰 몇 명이 교회 사무실로 들이닥쳐 영장 제시도 없이 창백해진 목사님을 무조건 끌고 나갔다. 총회가 열리기 전에 신사참배 반대 안건을 들고 나올 주인공이기에 주목사를 묶어두기 위한 작전이었다. 십자가의 길 시미즈가 형사는 막상 주기철 목사를 구속해 놓기는 했으나 죄목을 잡을 수가 없고 모두들 존경하는 터라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의성읍 경찰서의 고등계 계장 악마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낭하형사 밑에서 훈련받은 배만수 형사가 평양에 왔다. 배만수 형사는 의성교회를 뒤지다가 유재기 목사가 ‘기독교 청년 면려회’ 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의성교회를 중심으로 청년들을 잡아 가두며 관계된 목사들을 의성으로 끌어들였다. 이 ‘농우회’는 5년 전 평양신학교 신입생 환영 야유회에서 출발한 농촌계몽운동이었는데, 회장이 산정현 교회 조만식 장로요, 교인들 중에 몇 사람이 중요한 인물임을 알고 주기철 목사를 주동자로 추적한 것이다. 8월 10일, 평안남도에 있는 장로교회들이 너무나도 앞장서듯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는 교회가 무너지는 처절한 소리를 들으며 의성으로 끌려갔다. 그의 도착은 고문의 시작이었다. 검도용 몽둥이가 자주 부서졌고, 앉혀놓고 짓이기는 매질이 지루해지면 천장에 가로지른 각목에다 발목을 묶어 매달아 놓고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비행기를 태웠다. “아하, 아직 매운 맛을 못보아서 입이 살았어.” 주목사를 거꾸로 매어 달아놓고 고춧가루를 가득 푼 주전 물을 코와 입에 쏟아부었다. 영원한 지옥불의 불붙임 같기도 했다. 극심하던 고통은 순간 끊어져 무의식 속에 빠졌고 고춧가루 물고문은 숨통만을 막는 것이 아니라 혈관도 타 붙게 만들었다. 주목사는 감방에 있던 청년이 내미는 밥덩이를 간신히 받아들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주님,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마치 완전히 버림받은 자 같을 뿐이오며, 갈 곳이 아주 없는 자 같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움도 모르겠고, 희망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모르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주님, 성찬으로 받사오니 주께서 저와 함께 하심을 확증하게 하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시고 새 힘을 주시옵소서.” 농우회 사건은 당초에 낭하 형사와 배만수 등이 기대했던 것만큼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약이 오른 배형사와 낭하형사의 고문은 더 혹독해졌다. 그들은 주목사의 손톱을 잡아 뽑았다. 그리고 손톱 뿌리가 남아 있는 자리를 대나무 바늘로 쑤시고 찔렀다. “주여,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들을 용서하소서.” 기절한 주목사의 얼굴에 물을 끼얹고 의식이 깨어난 주목사를 널판자에 눕혀놓고 사지를 묶었다. 그리고 아랫도리를 벗긴 뒤에, 알코올을 적신 탈지면을 감은 꼬챙이를 요도에 쑤셔 넣었다. 찢겨서 피가 흐르고, 면도날로 아랫배를 저며 내는 듯 했다. 얼마나 고문이 심했던지 의성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던 권중하 전도사가 순교했고, 박학전 목사는 고문 끝에 맑은 정신을 잃고 신성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편 평안 장로회는 “신사 참배는 교리에 배타되는 것이 아니다.”고 선언하며 9월 2일 경안노회도 정기노회도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9월 9일 총회가 열리기 전에 총노회 27개 중 과반수가 넘는 17개 노회가 신사 참배를 스스로 가결했던 것이다. 드디어 장로회 27차 총회가 9월 9일 평양의 서문 밖 예배당에 219명의 총회 참석자가 모여들었다. 참석자 219명 사이사이 경찰관이 97명이 끼어 앉아 장로회 총회가 아니라 경찰관 모임 같았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임원선거를 하고 허둥지둥 불법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오정모 사모의 절개 의성에서 면회를 허락한다는 전갈이 오자 오사모는 먹는 것도 잊고 자는 것도 잊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낭하형사와 배형사는 오사모를 앉혀놓고 회유하였다. “주목사는 시국에 대해 아주 둔하더군요. 그러니 부인께서 면회를 하시면서 요즈음에 돌아가는 사태를 잘 설명하시고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도록 설득하세요. 아시겠습니까? 그것 한가지면 당장 석방입니다. 오사모는 어떻게 할까 갈등하고 있는데, 형사실 문이 열렸다. 주목사의 깍지 못한 수염속에 얼굴은 백납 빛이었다. 안질이 도져 벌겋게 충혈되었고, 저고리를 헐렁하여 허수아비에게 걸쳐놓은 옷처럼 보였다. 오사모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했다. “목사님 장하십니다. 조선의 교회가 다 무너져도 목사님이 견디시는 한 우리 주님의 교회는 그 자리에 건재합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목사님의 승리를 끝까지 지켜보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갑자기 배형사가 머리채를 잡아채었다. “아니! 이런 독한 계집이 있나? 제 서방을 석방시키도록 말을 거들랬더니 무어야? 더 견디고 승리하라고! 세상에 서방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는 독한 여편네로구만!” “목사님, 우리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견디신 것처럼 기도하시면서 견디십시오. 모두들 잘 계시니 집안 염려는 하시지 마세요. 산정현 교회도 꿋꿋하게 잘 견디고 있습니다. 교인 중에 아무도 십게명을 어긴 사람이 없습니다.” 배형사는 오사모를 내동댕이 쳤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오사모는 한없이 울었다. “주님 용서하세요. 기차 안에서만 울고 평양에 도착하면 눈물을 흘리지 않겠으니 지금만 용서하세요.” 5가지 기도제목 다음해 2월 농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검찰청으로 넘겨졌고, 검찰에서는 유재기 목사 한 사람만 기소를 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혐의로 석방하기로 결정을 했다. 2월 5일. 주일 아침 평양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기철 목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날 예배 시간이 되자, 평양과 대동과 선교리의 3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들이 산정현 교회로 몰려들었다. 2천여 명이 집결한 자리였으나 숨소리 한가닥 들리지 않았다.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서도 나와 함께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기도해 주신 여러분의 기도 안에서 저는 모든 것을 잘 견디고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7개월 동안 저는 5종목의 기도가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입니다. 저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망의 권세는 사람을 위협하는 마귀가 최대 무기인 듯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 주님 이 목숨 아끼다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겪지 않게 해주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사랑만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에, 스데반은 그 젊음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게 하소서.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입니다. 단번에 겪는 고난은 이겨내기 쉬우나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가 힘이 듭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고문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달, 두달, 1년 10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저처럼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누리고 고난은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주어지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 고 물으시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하랴! 세 번째는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하는 기도입니다. 나에게는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와 아직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 태어나 자식의 의무도 중요하고,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식들의 아비가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을, 병든 아내를, 어린 자식들을, 불안해하는 양떼를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싸매어 주시고, 길 잃고 헤매는 자를 인도하시며,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당신의 보혈로 사유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을 얽어맨 인정의 줄이 나를 얽어매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부모나 처자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합당치 않다 하셨으니 저로 예수님께 합당한 자가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네 번째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십시오.’ 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리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의가 있습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님 안에서 자랐고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목사가 되어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죽음을 피하려 하겠습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예수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다섯 번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혹여 옥중이나 사형장에서 저의 목숨이 끊어질 때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저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저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저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시옵소서. 저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나이다. 아멘.” 눈물바다를 이룬 산정현 예배당에서 그날 그 자리에서만은 모든 사람이 하나였다. 일본의 앞잡이로 손가락질 받던 조선 형사들까지 눈물을 머금었다. 외로운 하나님의 종 목사님이 집으로 돌아오신 뒤 6개월 후의 일이다. 8월 초순 어느 주일 예배시간이 임박하여 여러 명의 형사대가 찾아와 설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주목사는 낯빛 하나 변하는 일없이 형사 앞에 꼿꼿하게 섰다. “당신네들은 일본 헌법에 예배의 자유가 보장된 것을 모르시오? 당신들은 지금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위반하고 있소.” 순간 형사들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목사님은 지혜롭게 적을 공격한 것이다. 그날의 설교가 있은 지 나흘째 되던 날, 여섯 명의 형사들이 사택으로 들이닥쳤다. “갑시다!” “이번에는 무슨 명목이오? 법에도 없는 폭력을 언제까지 행사하리라 믿고 이러시오? 나는 당신네들에게 끌려갈 일을 한 적이 없소.” “잔소리가 많다!” 부장형사가 목사의 팔을 낚아챘다. 고무신을 신은 주목사를 형사들 서너 명이 달려들어 잡아 끌었다. 일본 관헌은 9월에 소집할 예수교 장로회 28차 총회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 을 조직한 사전 모의를 끝낸 뒤에 그 계획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미리 주기철 목사를 구속한 것이다. 주목사를 연행하자마자 지하실에 끌어다 놓은 시미즈가 형사는 주목사님을 먼저 거꾸로 매어 달았다. 그리고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풀었다. 피가 머리로 쏟아지고 눈알이 당장 빠질듯했다. 코로 입으로 들이 붓는 고춧가루 물은 뇌수를 긁어 흔들며 단숨에 숨통을 막았다. 목구멍이 찢어지고 콧 속이 타는 듯했다. 얼마 만에 혼절, 다시 의식이 돌아오자 그들은 주목사를 천장에서 끌어내려 엎어놓고 등을 발로 밟고 옆구리에 발길질을 했다. 코로 입으로 들어갔던 고춧가루 물이 다시 조금씩 밀려나왔다. 그들은 주목사를 의자에 묶어 놓고 전기 고문을 했다. “전기 찜질을 하셨으니 이번에는 손톱 소제를 해드리지.” 대나무 바늘로 손톱을 쑤시고 발톱을 후볐다. 그때 홀연히 주목사의 입에서 찬송이 흘러나왔다. “ 이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오니 주 예수 힘주사 굳세게 하소서. 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 피와 같이 붉은 죄 눈같이 희겠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형사들은 얼굴을 흉측하게 찌푸렸다. “예수한테 힘을 달라고 노래를 한다?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고문을 받으면서 노래를 부른다고?” 주목사는 다시 천장에 거꾸로 매어 달렸다. 그리고 코와 입으로 쏟아붓는 고춧가루 물을 들이켰다. “하나님 찬양… 주여, 나를 주님 곁으로 부르소서. 나의 육체가 슬프오니 내 슬픔을 거두어 주소서. 주여!” 시험받는 산정현교회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목자 잃은 양떼였다. 며칠 후 평양경찰서에서 산정현교회로 긴급 호출령이 떨어졌다. 경찰서로 간 교회 중진들에게 경찰서는 지시사항을 주면서 협박을 했다. 1. 교회 제직은 모두 매주일 반드시 한 번씩 신사참배를 이행할 것. 2. 설교 또는 교회 사무는 제직들이 집행하고 서양인과 기타 다른 사람은 교회일에 관여하지 못한다. 3. 이 사항들에 관한 결정을 금일 오후 3시까지 회답할 것. 4. 이상 세가지 항목 중에 단 한가지라도 불응할 때에는 당장 내일부터 교회를 패쇄한다. 이제는 주기철 목사와의 싸움이 아니라 산정현교회와의 싸움이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주일예배는 눈물의 예배였다. 예배를 감시하던 형사들이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성도들 개중에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아가며 타협을 제의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모두 경찰서에 갇히는 것이 낫지, 순교라면 몰라도 누가 배교에 앞장서라는 말이오? 산정현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온 정절이 아까워서라도 그렇게는 안 될 일이다.” 라고 하였다. 또 한 청년회원들은 혹여라도 제직들이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할까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신사참배가 결정되지 않자 그날 오후 형사대 십여 명이 예배당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예배당에 안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말 몇 마디를 던졌을 뿐, 감히 교회문에 못을 박지는 못했다. 10월 23일의 일이었다. 수요일예배 설교를 하러 강단에 올라가던 방장로를 갑자기 형사 서너 명이 덮쳤다. “장로의 설교가 금지된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슨 반항이야?” 형사들은 육십을 넘긴 방장로님의 팔을 비틀어 잡아끌면서 밖으로 나갔다. 교인들은 일제히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엎드려져 통곡을 터뜨렸다. 통곡이 기도요 찬송이었다. 영문 밖의 길 방장로님이 끌려간 곳은 주기철 목사님이 고문을 당하고 있던 지하실이었다. “어이 주목사! 당신이 잘못 가르쳐서 여기까지 잡혀 온 늙은이가 있으니 보라구!” 하면서 방장로를 천장 지렛대에 팔목을 묶어 놓고, 다리며 발바닥을 뭉둥이로 때려 피를 흘리게 만들었다. 형사들은 주목사를 매어달아 놓은 채 그 앞에서 방장로를 형틀에 묶어 놓고 미친 듯이 두드려 피개 시작했다. 방장로는 고통 중에도 주목사님의 괴로워할 것만 염려되어 신음소리 한번 마음 놓고 쏟아놓지 못했다. “야! 이 늙은 것이 매를 맞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야? 바른 대로 불어! 누가 신사 참배를 하지 말라고 시켰어?” “사람이 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 그 따위 우상에게는 절하지 말라고 하시었소. 나를 이 자리에서 죽여보시오. 그 외에 다른 대답이 나오겠는가.” 독이 오른 형사들은 누가 더 잔인한 매질을 하는가 경쟁을 하면서 양쪽에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방장로는 일어나 걷지 못하는 주목사를 끌어 등에 업고 감방을 향해 걸었다. 익서이 이유가 되어 기운이 남아 저렇다며 방장로를 또 끌어다가 고민을 시켰다. 새벽 2시가 넘어서야 감방에 돌아왔다. “장로님, 우리의 정신은 생생합니다. 더구나 주님의 장중에 붙잡혀 있는 우리의 영혼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지요. 일본 관헌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우리의 영혼만은 흠집 없이 지켜주십니다.” 주목사는 기도하는 방장로의 등 뒤에 대고 나직한 그 동안 고문을 당하면서 한줄한줄 기도하듯 지은 ‘영문밖의 길’ 이라는 시를 그 무렵 널리 알려진 ‘다뉴브 강의 잔물결’ 이라는 곡조에 붙여 노래를 불렀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누나 / 여약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걸머지고 /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 한없이 걸어가신 영문밖의 길이라네…/” 목사직 파면과 산정현교회 패쇄 경찰은 산정현교회에 압력을 가하여 신사참배를 시키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으나 교회는 똘똘 뭉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평양노회장 최목사를 이용하여 외유를 해보았으나 실패하자, 경찰의 명령에 따라 임시 노회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한 주기철 목사를 파면시켰다. 부활주일에 평양노회 전권 위원들 9명이 강단을 차지하고 이인식 목사를 당회장으로 세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교인들은 부활주일 전날 밤부터 예배당에 모여 눈물로 기도하며 밤을 세웠다. 주일을 앞둔 예배당의 철야기도는 장엄이요 거룩이었다. 주일예배 시작이 다가오자 양재연 집사가 20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와 ‘십자가 군병들아’를 이어서 부르며 절대로 중단하지 말자고 외쳤다. 9명의 수습위원 목사님들과 경찰 40여명이 밀어닥쳐 중지를 시키려고 악을 써댓으나 곧 찬송소리에 묻혀 버렸다. 화가 난 형사들이 교인들을 잡아 끌어내고 내동댕이치며 감옥으로 끌고 갔다. 결국 경찰은 예배당을 폐쇄시켰다. 경찰은 주기철 목사의 가족들이 기거하고 있는 사택도 빼앗았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주목사님을 취조했던 구가 경사는 목사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주기철 목사가 국사범만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주목사님을 존경할 뻔했소’” 라고 고백했다. 평양경찰은 일단 주기철 목사를 가석방이라는 명목으로 방면할 방침을 세웠다. 가석방의 소식을 들은 산정현교회 교우들은 서로 얼싸안고 울며 웃으며 기뻐했다. 목사님은 산정현교회로 가서 손수 각목을 떼어내고 들어가셨다. 먼지 앉은 강단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주님, 주님이 견디셨습니다. 주께서 이기셨습니다. 나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만나처럼 내려주시며 주께서 이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주님, 감히 질문을 해도 된다 하시면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제가 겪어야 할 일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주님, 이 흩어진 양떼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경찰은 목숨을 걸고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며 부흥집회로 교회재건 운동을 서둘던 한상동, 이기선 목사를 구속하면서 주기철 목사님을 다시 수감했다. 가석방되어 집에서 기거하기 한 달여 만에 교회재건파라 이름 붙인 목사님들 21명과 주기철 목사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자들에 대한 일체 검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940년 여름 일본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켰고, 22년간 조선교회의 보수적 신앙을 이끌어가며 꾸준하게 출간되던 ‘신학지남’까지 폐간시키므로 평양신학시대의 막을 강제로 내렸다. 그리고 다시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수많은 목사들과 신자들을 검거했다.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가 검거되고 손양원 목사는 여수 경찰서에 투옥되었다. 잔인한 특별면회 다음 해 초봄, 느닷없이 형사가 들이닥쳤다. 특별면회라고 하면서 식구들 모두 함께 데리고 갔다. 특별 면회라는 말에 노모는 솔깃하고, 광조는 그저 좋아하며 따라나섰다. 그런데 3층 형사실이 아닌 지하 고문실로 데려갔다. 형사들은 가족들이 보이는 앞에서 주목사님을 잔인하게 고문하기 시작했다. 노모는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졌고 오사모는 어머님을 무릎에 안고 엎드려 숨차게 주님만 찾았다. 목사님이 기절하니 천장에서 끌어내려 이제는 고춧가루를 주전자에 풀어 그 물을 목사님의 코와 입에 붓기 시작했다. 형사는 주목사가 고문받는 것을 지켜보지 않는다고 노모와 오사모를 발길로 걷어차고 머리끄덩이를 끌어 내동댕이쳐가며 소리를 질렀다. 목사님의 배가 출산 직전의 임산부처럼 부풀어 오를 때까지 붓더니 이제는 목사님의 배에 의자 둘을 엎어놓고 배를 짓눌렀다. 핏물인지 진물인지 검누런 물이 코에서 귀에서 쏟아져 나왔다. 노모는 다시 혼절하여 늘어지셨고, 오사모는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형사들은 야비한 웃음을 떠올리며 목사님을 일으켜 책상위에 앉혔다. 주목사와 오사모의 눈이 마주치자 깊은 신뢰와 아픔과 사랑으로 미소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야, 이년아!”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형사들은 검도용 칼로 오사모를 후려치며 발길질을 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살이 터지면서 흐른 피가 시멘트 바닥을 적셨다. 밤이 깊어서야 세 식구는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노모는 정신을 잃고 어린 광조는 아버지가 당하는 고문과 어머니의 매 맞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그러나 입을 벌려 말해보려고 애쓰던 광조는 끝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쓰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다. 그러면 좀더 견디자. 우리 기도하며 기다리자꾸나.” 오사모는 광조를 가슴에 안았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나를 돌박산에 묻어주오 1944년 전쟁은 막바지에 달한 것 같았다. 그 간에 폐쇄된 교회가 2백여, 목회자나 장로, 집사, 평신도들을 구속 수감한 숫자가 2천여에 이르렀다. 징병제를 학병제로까지 이어졌다. 학교 건물뿐 아니라 교회 건물까지 일본 군대를 주둔시켰고 교회 안에까지 ‘가미다나’를 설치했다. 4월 19일 저녁에 형무소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주기철이 위독하여 병감에 수용되어 있으니, 긴급 면회 바람.” 날이 밝기도 전에 형무소로 달려갔다. 간수는 면회실이 아닌 소장실로 오사모를 안내했다. “부인, 부군께서 너무 위중한데 병원으로 모시고 가십시오, 수속을 밟아 드리겠습니다.” 이들은 열흘 전에 최권능 목사님을 이렇게 밀어냈었다. 최목사님은 옥중에서 소천하시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지만 강제로 모시고 나가서 닷새만인 4월 15일 병원에서 소천하시지 않았는가. 이들은 목사님들이 옥중에서 순교하셨다는 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두 간수에게 들려오셨다. 서 있을 힘도 잃은 듯 간수들에게 몸을 의탁한 목사님은 앞이 보이지 않는 듯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목사님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다 오셨습니다. 끝까지 승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월계관을 들고 계신 것 보이시지요? 눈을 들고 바라보세요. 주님의 얼굴을 바로 보세요 목사님!” 목사님이 타 붙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머지않아 주님 앞으로 갈 것이오. 아! 어머님이 보고 싶소. 불쌍한 어머님을 내 대신 잘 모셔주시오. 어린 자식들을 잘 부탁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조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여보, 나를 웅천으로 가져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주시오.” 그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목사님은 쓰러졌고 간수들은 황급하게 목사님의 몸을 양편으로 붙들었다. 끌려가시던 목사님이 뒤돌아보며 “여보,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마시고 싶소.” 하시며 진한 여운을 남기고 가셨다. 오사모는 그 밤을 혼자 엎드려 울었다. 일본이 무너지기 1년 4개월 전이었다. “목사님의 유채를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수속해 주십시오” 밖에서 기다리던 백인숙 전도사와 여집사들은 사태를 짐작하고 달려와 함께 쓸어안고 흐느꼈다. “우리 목사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이 지금 기뻐하십니다. 목사님의 승리를 기뻐하십니다.” 세 개의 면류관 “사모님, 어제 목사님께서 운명하시던 순간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하며 마지막 외치시던 음성이 어찌나 우렁찼던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무척 놀랐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라고 한 간수가 말해주었다. 5일장, 장례일인 화요일 아침에는 눈부시도록 화창한 햇살이 쏟아졌다. 평양 고등보통학교 정문 앞 광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찰관들이 몰려들었으나 그 수많은 사람들 기세에 눌렸는지 아무런 행동개시도 하지 못했다. 기자묘 앞을 지나서 대성산 공동묘지, 목사님이 그렇게도 그리워하사던 돌박산에 일르렀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효자요, 아이들의 훌륭한 아버지요, 애정을 가진 남편이요, 연약을 육신을 입은 인간 주기철. 그러나 그 인간의 애절함과 연약함을 지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십자가만 바라보며 묵묵히 한 걸음씩 주님을 따라간 하나님의 종,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시기에 그 명령에 겸손히 순종한 충성스러운 종이었다. 그의 순교는 산정현 교회와 오사모 가족들이 함께 한 고난 후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아폴로기아(교회영성훈련본부)
주기철 목사님 생애 요약/ 2009-09-04
주기철 목사님 생애 요약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주현성(朱炫聲)씨의 4남 3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후에 웅천교회 장로가 되었다. 1913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이승훈, 조만식, 이광수 등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1915년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20살이 되던 1917년에는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지망하여 학업에 힘쓰던 중 안질환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청년 운동과 교회의 집사로서 열심히 충성하였다. 그러던 중에 김익두 목사의 마산 집회에서 성직에 대한 소명을 받게되어 1921년 12월에 경남노회 의천서를 받아 이듬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1931년까지 부산 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시무하던 중에 일제의 신사참배 문제를 단호하게 거절해야 된다는 안을 노회에 제출하여 투쟁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후 경남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1936년 7월 산정현교회로 부임하였다. 부임 후 새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1년여만에 아름다운 성전을 봉헌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김일선 목사의 평양신학교 졸업기념 식수를 한 신학생이 찍어버린 사건이 구실이 되어 예배 직전에 검속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1938년 9월에 있을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찬성 결의를 강제하기 위해 강경한 반대자였던 그를 7월에 다시 예비 검속하였다가 신사참배를 가결시킨 후 석방시켰다. 그 후 1939년 7월에 다시 의성 농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3차로 의성경찰서로 연행되어 7개월간 구금되어 다음해 2월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평양의 산정현교회로 돌아와 "5가지의 나의 기도"란 제목하에 그의 유언적 결사각오의 설교를 하며 마지막을 준비했다. 목사파면의 위협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가 1939년 9월 4차로 검속되었다. 그 해 12월 19일 평양 임시노회에서는 주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 처분결의 하였고 1940년 3월 24일, 평양 산정현교회당이 완전히 폐쇄당하고 가족들은 목사관 사택에서 추방하였다. 주 목사는 지병인 안질환의 악화와 폐와 심장병이 겹쳐 모진 고문과 함께 고통을 겪는 중 1942년에는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그 후 삼년 뒤인 1944년 4월 13일에 병감으로 이감되었으며 한 주일 후인 4월 21일 밤 9시에 평양 형무소 병감에서 순교하였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 평양 이전의 생애를 중심으로/ 2006-06-10
주기철 목사의 신앙/ 평양 이전의 생애를 중심으로 들어가는말 주기철 목사의 생애와 삶, 신앙과 신학에 관한 연구는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이미 적지 않은 전기류가 낙양의 지가를 높여 왔으며, 최근에는 학술적인 연구도 축적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웬만한 연구는 기존의 것을 답습하거나 혹은 윤색하는 정도에 그치게 하고 있다 이것은 관심이 증대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1차자료 발굴이 부진하기 때문에 재래된 것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출간된 연구들에는 적지 않은 혼선이 나타나기도 하고 기존의 오류가 계속 답습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필자는 이번 기회에 지금까지 나온 전기와 연구서들의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연구자들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더 헤집고 들어갈 분야가 있을 것같지가 않았다. 연구과제를 발견한다는 자체가 난제였다. 그러다가 어렵게 주기철 목사가 활약할 당시의 경남노회록을 얻어볼 수 있게 되어 거기에서 그의 행적을 더 밝힐 수 있는 몇몇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경남노회장으로 있을 당시의 신앙사조와 관련된 것으로서, 당시 성행하기 시작한 무교회주의의 일파인 최태용(崔泰瑢) 계열의 신앙노선과 관련된 문제였다. 경남노회록의 이같은 자료를 근거로 하여 최태용이 간행한 《영(靈)과 진리(眞理)》를 대조해보니 거기에도 적쟎게 경남노회와의 관계를 암시 또는 설명하는 자료들이 보였다. 필자가 주기철 목사에 관하여 뒤늦게 붓을 든 것은 기존의 연구에 새로운 해석을 가하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위에서 말한 자료들이라도 새로 소개할 수 있다면 학계에 도움이 될 것 같이 느껴졌다. 글의 제목과 관련, 주기철 목사에게 '신학'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수 있을까도 생각하다가, 고심 끝에 '신앙'으로 잡았는데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다. 글의 순서는 그의 생애를 간단히 스케치하고 그의 신앙의 배경이라할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를 살펴본 후 그의 신앙의 내용, 그의 노회장 시절 경남노회내의 신앙 갈등=최태용계와의 갈등을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1. 그의 생애에 대한 관견(管見)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는 한국 기독교회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신앙인 중 한 분이다. 그는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된 지 반세기가 조금 넘었을 일천한 시점에 한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일본의 저 천황(天皇)주의 이념에 바탕한 무도한 군국주의 횡포에 저항하여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고 그 절대성을 증거하여 위대한 순교적 증인이 되었다. 그의 삶은 비록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구약시대 이래의 유일신 하나님 신앙 전통에 입각하여 한국 기독교교회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순교자의 반열에 추앙되었다. 그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직후에 태어났다. 광무(光武) 원년이었다. 그가 태어난 경남 창원군 웅천(熊川)은 조선조 초기 내이포(乃而浦) 혹은 제포(薺浦)라는 이름을 가지고 일본 세견선(歲遣船)에 문호가 개방되었던 곳으로 중종 때(1510) 일어난 삼포왜란(三浦倭亂)으로 더욱 유명해졌으며, 임진왜란기에는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침략군 부대를 이끌고 들어온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듭된 후퇴로 고달프게 된 예하부대를 머물게 하며 본국에 요청, 선교사로 와 있던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Gregorio Cespedes)를 초빙한 곳이기도 하였다. 조선이 형식적이지만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고 국가 중흥의 의미를 띤 연호 광무를 사용한 그 첫해에, 일찍부터 일본과 악연을 맺어온 곳에서 일제의 천황신숭배에 반대하여 순교한 주기철이 태어났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을사조약 후 통감정치가 시작되던 첫해(1906)에 고향의 개통학교에 입학, 초등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2년 뒤에 그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가 졸업한 1912년은 한국교회로서는 뒷날 그가 그 교단의 목사로 임직되는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총회가 조직되던 해였다. 졸업 후 그가 가까운 곳에 있는 상급학교를 굳이 마다하고 정주 오산(五山)학교를 택하여 진학한 것은, 당시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던 이광수(李光洙)의 웅천 방문과 학교 소개, 진학권유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그 자신의 의지나 그에 대한 학부형의 기대가 어우러져 결정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오산 진학의 배후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오산과 관련을 맺지 않고 오산에서 배웠던 신앙적 민족적인 기초가 없었다면, 뒷날 과연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 주기철로 다듬어질 수 있었을까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는 것은 더욱 의미깊다. 여하튼 주기철은 대한제국이 일제 강점기로 바뀌고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가 착착 정비되던 시기, 그 자신으로서는 망국의 설음을 느낄 수도 있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를, 고향을 떠나 배움의 터전인 정주 오산학교에서 아마도 예민한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보내었을 것이다. 그가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세운 학교에서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과 학행(學行)이 겸비된 스승들로부터 신앙과 민족을 배우고 오산을 졸업하게 되는 것은 1916년 봄이다. 그가 오산에 입학하기 직전에 불었던 소위 '105인사건'의 한파는 한국의 기독교계와 애국계몽운동계 및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들을 얼어붙게 만들어 많은 지도자들이 무고하게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승훈이 옥에서 간고를 겪고 있는 사이에 주기철은 남강에게서 직접적인 교양을 거의 받지 못한 채 감수성이 강했던 오산시절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남강 대신 고당에게서 산 교육을 받고 오산을 졸업하게 되었다. 뒷날 주기철이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받을 때에 마산으로 와서 교섭을 벌인 산정현교회 대표가 고당이었다는 것은 사제간에 얽힌 여러가지 미담들을 상상케 한다. 오산을 졸업한 주기철은 스승들의 권유에 따라 서울의 연희(延禧)전문학교 상과(商科)를 진학하였다. 당시 오산학교는 장래 우리 나라에 필요한 인재들의 충원을 고려하여 졸업생들의 진학방향을 조언하고, 졸업생들은 그 조언에 거의 순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에 따르면, 주기철은 아마도 고당이나 남강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들여, 장차 조선의 경제문제와 씨름할 결심을 하고 연전에 진학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연전은 재한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오랜 동안의 논란을 거쳐 이 해에 서울의 YMCA 건물을 빌려 개학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주기철은 연전의 제1회 입학생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를 지도한 오산의 스승들이나 그 자신이 서북적인 분위기를 안고 있던 숭실전문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갓 태어난, 그래서 그 분위기나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연전을 택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주기철의 성향이 숭실적인 분위기보다는 연전적인 분위기를 선호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어떨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연전 선택은, 안질(眼疾)이라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정확하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좌절당하고 만다. 여기서도 우리가 그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꿰?어 보아야 한다면, 그의 생애를 너무 자주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시켜 고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주기철은 1916년 여름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몇년간 뚜렷한 방향이 없이 방황하는 듯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의 학업중단과 귀향이 이복(異腹) 형들에 의해 야기된 유산 분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의 생애에서 뚜렷한 목표가 보이지 않는 이 기간은 1922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까지 5년 이상 계속되었다. 귀향한 이듬해 그는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1917년 김해교회 출신으로 신교육을 받은 안갑수와 결혼하여 이 방황의 기간에 위로를 받는다. 불확실한 자료들은, 그가 이 기간에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주도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이고 <민족자결주의>의 세계풍조에 따라 독립운동을 꾀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3 1운동 때 그 지방 만세운동의 행동책으로 활동하다 1개월 동안 구류를 살았다. 주기철은 그만한 나이의 의식있는 청년이라면 으레 걸을 수 있는, 민족을 향한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주기철은 고향에서 열심히 교회를 봉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집사의 직분을 맡기도 하였고 교회의 회계를 맡기도 하였다. 깊은 방황은 때때로 창조적인 출구를 기약해 준다. 섭리 가운데 마련될 새로운 길은 본격적인 경제운동이나 민족운동을 통한 길이 아니었다. 그가 뒷날 강조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뛰어날 수 있다고 평가한 영적인 분야가 마련되고 있었다. 그는 1920년 두 차례에 걸친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 참석하고 자신의 진로를 목회자의 길로 굳힌다. 즉 그 헤 9월의 마산 문창교회와 11월 웅천읍 교회에서 개최된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는 몇년간 방황하던 주기철의 앞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사경회를 통해 그는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를 쓰기 위해 몇년간의 방황의 때와 김익두와 같은 부흥사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아마도 오산과 연전에서 가졌던 이상과 지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면 그는 김익두를 통해 그렇게 큰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그의 5년간의 방황의 의미가 있다. 주기철은 1921년 경남노회에서 목사후보생 시취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 공부하는 한편 졸업할 때까지 경남 양산읍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의 신학교 수련은 모세의 40년 광야생활에 비교될 만큼 그의 사역을 위해서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오산과 연전, 그 후 몇년간의 방황기간동안, 모세가 애굽의 궁중에서 히브리민족을 안타까와하였듯이, 의식있는 젊은이로서 자신이 처한 시대와 민족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였을 것이다. 모세가 공사판의 애굽의 감독관을 쳐죽일 정도로 민족의식이 충일했듯이, 그도 아마도 오산의 스승들로부터 전수받은 민족에 대한 고민을 가꾸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광야도피는 바로 스스로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 인간적인 민족애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모세의 광야행이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자기신뢰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듯이, 주기철의 평양신학교행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자기를 신뢰하고 자신을 사로잡아온 문제들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민족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신앙적 승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렙산 가시떨기 앞에 선 모세가 40년 전의 도도한 자기신뢰와 인간적인 자신감을 다 비우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고백하였듯이, 주기철도 이제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는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자신의 무력을 철저히 깨닫는 자를 세워 지도자로 그리고 승리자로 만들어준다. 이것이 신앙인의 승리의 비결이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목사안수를 받은 주기철은 1931년 7월까지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1936년 7월까지는 마산(문창)교회 담임목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아 인생의 큰 전기를 맞았던 마산 문창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여 그의 목회사역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으나 그는 인생의 첫 반려자 안갑수를 잃고 오정모를 새로 맞아야 하는 등 곡경을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그가 노회장으로 있는 기간(1932-33)에 야기되었던 경남노회 안의 신앙적 갈등의 문제는 어쩌면 그가 앞으로 신사참배와의 대결에 앞서 겪어야 했던 신앙노선상의 한 시련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경남노회가 겪었던 그 사건은 한국 교회가 희년(1934-35)을 맞던 때에 일어났던 여권문제 창세기의 모세저작부인 문제 단권주석 사건과 같은 새로운 신학사조와의 갈등이 있기 전에 나타난 시련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사상 중요한 의미를 던져 주었다. 경남에서 교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은 주기철은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일제 태양신에 대결하기 위한 한국 교회 최후의 보루로서 그는 한국 교회의 전면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그를 밀어넣고 있었다. 한국 교회가 겪어야 할 십자가의 고난의 길, 그는 그 길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골고다로 향했다. 일제의 거듭되는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검속,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다가, 1944년 4월 21일 한국 기독교사에 찬란히 빛나는 순교의 길을 걸으니 47세였다. 그는 갔지만, 지금도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를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존재로 기억하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사의 아름다운 전통이 계속되는 한 그는 그 역사와 함께 역사 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2. 신앙 형성의 배경 2-1. 한국 교회 초기에 소개된 신앙: 주기철은 그의 나이 14세되던 1910년 12월 말경에 웅천읍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어린 시절 출석하던 웅천읍교회는 1906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창원군 웅천읍 교회가 성립하다. 이에 앞서 선교사 심익순(沈翊舜)의 전도로 약간의 신도가 점차 나아와 송화여(宋化汝) 사저에서 예배하였고 교회가 점진하여 서중리(西中里)에 예배당을 건축하였다가 뒤에 북부리(北部里)에 예배당을 옮겨 지으니라" 경남지역은 일찍부터 호주 장료회 선교사들이 들어왔지만, 선교 지역의 분할이 확정되기 전에는 미국 북장로회도 부산과 밀양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펴고 있었다. 웅천읍교회가 성립되기 전 이 근방에도 복음이 전파되어, 김해읍 내지교회(1898)와 구마산교회(1901)가 성립되었고, 1905년에는 김해읍교회를 비롯하여 김해군 진례면 시례동(詩禮洞)교회, 창원군 경화동(慶化洞)교회 등이 성립되었다. 우리가 주기철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이 이 땅에 처음 전파될 때 어떠한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다시 말하면, 주기철의 신앙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의 시대의 신앙은 어떠했을까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 기독교 수용초기에 사용된 전도문서에 대한 검토와 둘째 장로교가 채택한 신경 셋째 초기의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신학사조 및 그가 신학교 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김익두의 신앙을 거론해보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 선교사들의 신학사조와 관련, 평양신학교의 신학적인 입장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1900년대 이전에 한국에서는 60여종이 넘는 전도문서들이 간행되었는데, 이들은 성경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과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설명하는 것, 기독교를 동양종교와 비교설명한 것, 교회의 의식과 규칙에 관한 것, 교리공부를 겸해 국문공부를 위한 것 그리고 찬송가책 등이다. 이들 중 1897년에 노병선이 쓴 《파혹진선론(破惑進善論)》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번역된 것으로서, 이들은 현대신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기독교교리의 핵심에 도달하고 있었다. 초기의 전도문서는 한국 사회의 범신론(汎神論)적인 사고를 배격하고 유일신(唯一神)관을 분명히 하였고, 하나님이 존재의 기반이고 만물의 제일원인이며 자존영원(自存永遠)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능(無所不能)한 인간의 아버지임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기독신자들에게 제일, 제이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고 거기에 따른 비타협적인 신앙생활을 엄격하게 수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스도론(基督論)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타락한 인간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으며 인류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3일만에 부활, 승천하여 장차 재림할 것이라고 성명하고 있다. 이러한 신관 기독론을 전제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배타적이며 다른 종교와 양립할 수 없는 신관을 갖고 비타협적으로 전통적인 종교사상에 도전하였으며, 따라서 우상거부와 제사폐지 등의 반전통적 행동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기독신자들로 하여금 전통적 윤리에서 자신을 고립시킴과 동시에 성속을 구분하여 세속으로부터 성화(聖化)를 이룩하려는 개인윤리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도문서는 한편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 이원론(二元論: 二分法)적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간을 통일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현대 기독교적인 인간관과는 다르다. 이원론적 인간관은 희랍적 혹은 영지주의적 인간관과 상통하는 것으로, 한국의 경우 무교(巫敎)적 바탕 위에서 성립된 인간관이라 할 것이다. 이원론적 인간관은 영혼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예수믿는 것을 영혼의 일로 귀속시키고, 육체를 세속과 연관시켜 일상생활을 철저히 영적인 세계와는 분리시켰다. 사후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을 전제로 예수믿는 것이나 땅위의 선행의 목적은 사후에 영혼의 안식과 영복(永福)을 누리는 데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원론적인 사상은 일 자체도 하나님의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고 세속적인 생활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차단시켰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개인적인 경건생활에 머물러버리게 되었다. 이것은 1920년대에 성행하게 된 타계(他界)주의 사상과 함께 기독신자의 사회의식을 마비시키고 윤리생활도 개인적인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이 개인의 생활을 규제하는 사회의 구조문제에 대해서 일정하게 눈감아버리게 만들었다. 2-2. 요리문답과 신경: 주기철의 신앙형태를 규정했을 신앙적 지형은 당시 장로교단이 채택했을 신경에서 엿볼 수 있다. 교단적으로 신경을 채택하기에 앞서 장로교회의 언더우드는 1888년에 장로교 교리의 핵심이라 할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Westminster Cstechism>을 번역, 출간하였고 이어서 1890년에는 <성교촬리 Salient Doctrines of Christianity>를 간행하여 신자들의 교리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들 교리서들은 장로교 신자들이 믿어야할 중요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북장로회 남장로회 호주장로회 카나다장로회 등 4개의 재한(在韓)선교부들이 공의회를 조직하여 장로교적인 이념과 치리기구를 일치시키려고 하면서 신경의 제정을 서둘렀다. 이미 1905년 9월에는 장로회공의회가 이런 결의를 남기고 있다. "1905년에 교회신경(1907년에 채용된 것이라)을 공의회가 의정(議定)채용하였는데 그 위원이 보고하기를 새로히 신경을 제정하지 아니하고 만국장로회에셔 전부터 사용하는 신경과 신경에 대하여 개정한 것과 신경도리에 대한 광고와 또 선교각지방에셔 통용하는 신경을 비교하야 조선예수교장로회형편에 적합한 신경을 택하는 것이 가한 줄로 인정하노라. 이 신경은 몇개월전에 새로 조직한 인도 나라 자유장로회에서 채용한 신경과 동일하니 우리가 이 신경을 보고한 때에 희망하는 바는 이 신경이 조선, 인도 두나라 장로회의 신경만 될뿐아니라 아세아 각 나라 장로회의 신경이 되어각 교회가 서로 연관이 되기를 옹망(毋望)한다 하니라(1905년 영문회의록 37페지)" 이 때부터 시작된 신경제정의 논의는 그 이듬해에는 교회정치문제에 집중, 계속되었고,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면서 유안해 온 신경을 장로회규칙과 함께 1년만 채용하기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 서문은 이 신경이 장로교회의 가르치는 표준이며 '성경을 밝히 해석한 것'임을 천명하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대한 장로교회에서 이 아래 기록한 몇가지 조목으로 신경을 삼아 목사와 및 인허강도인과 장로와 집사로 하여곰 청종케 하는 것이 대한교회를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 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요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드민스터 신경과 셩경요리문답 대소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 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셩경요리문답 적은 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느니라" 물론 이 신경이 확정되는 것은 그 뒤 신중한 논의를 더 거쳐서 채택되었다. 이 신경을 '12신조'라고도 부르는데, '칼빈주의' 경향이 강력하게 표시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2개 조목은, 제1조 "신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믿고 행할 본분의 확실한 볍례인데 다만 이 밖에 없느니라"로 하여 신앙의 출발점인 성경의 권위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신 속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인간창조, 인간의 타락과 범죄, 대속자(代贖者)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 예정과 구원, 성례, 믿는자의 본분 그리고 최후의 부활 심판 등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주기철이 주일학교시절부터 쳬계적인 교회교육을 받았다면, 당시 책자로 소개되고 있었을 웨스트민스터 신경과 장로교단에서 채택한 12신경을 중심으로 하여 교육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교육받은 신앙은 앞서 전도문서에서 보이는 신앙유형에다 장로교 교리 속에서 터득한 것을 그 중요한 내용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2-3. 부흥운동적 열정: 교리와 신조는 신앙을 냉정하게는 하지만 가슴 속에서 울어나는 뜨거움은 없다. 뜨거움이 없이는 회심도 생의 방향에 대한 결단도 할 수 없다. 주기철이 그 때까지 쌓은 학식과 3 1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민족적 고뇌로 방황하고 있을 때 그에게 생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사건은 바로 길선주와 김익두로 대표되는 1920년 전후의 부흥운동에 접하면서부터라 할 것이다. 그는 김익두의 마산 문창교회와 웅천교회에서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크게 회심하여 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결심하였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그의 생애를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김인서는 부흥운동가 김익두를 두고 이렇게 언급하였다. "조선 초대교회는 영계(靈溪) 선생의 영화(靈化)운동을 통하여 그 터가 잡혀졌다. 그러나 신문화 수입에 선구되였던 것만치 과학사조와 함께 신신학사조가 침습함에 미쳐 신앙상 동요가 생기게 되고 일변(一邊) 민족주의자의 이용에 기울어진 때도 있었고 우(又) 일방(一方) 사회주의의 방해도 받게 되어 기미(己未) 전후의 조선교회는 정(正)히 위기였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내세운 종이 권능의 사자 김익두였다. 조선교회를 바로 보는 일(一) 노인은 말하되 '기미 이후에 만일 김익두 아니더면?' 하고 탄식과 감사를 마지아니함도 이 때문이다." 김인서의 지적대로 기미 전후에 조선교회를 향한 김익두의 역할이 이러하였다면, 바로 그 시기에 주기철은 기미 직후(1920) 한국 사회나 그 자신이 혼란에 빠졌을 그 때에 김익두에 의해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익두는 경건과 독경(讀經), 기도로 신유의 큰 권능을 받아 한국 교회 부흥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부흥운동의 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게 되니 눈에는 흔적이요 얼굴에는 기쁨이라 여광(如狂) 여취(如醉)하니 부흥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옷모양이나 태도가 이 세상 사람같지 아니하였다. 대정(大正) 9년 사람들은 새벽 기도회에 모이면 회개하여 울고 슬피 울었나니 울고 울어 눈물의 집회였고, 낮공부에 모이면 두려운 기운에 잠기었고, 저녁에 모이면 웃고 또 울었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인 때문에 다수의 회중은 김목사의 말을 잘 듣지도 못하면서 김목사의 모양만 보고 웃고 울었다. 선생이 문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신인(神人)의 얼굴을 뵈옵고자 좌우에 인성(人城)을 쌓고 병자들은 그 그림자라도 스치기를 바랐다. 그 때 김목사의 설교의 내용을 전하는 대로 들어보면 지금 김목사의 설교보다 나을 것이 없었건만 보다 더 큰 은혜가 내렸으니 이는 하나님이 때의 조선 교회를 돌보시고 특별히 성신으로 감화하신 것이다." 대정 9년이라면 바로 1920년이다. 이 때의 김익두의 부흥회의 광경이 이랬다면, 마산이나 웅천읍의 김익두의 부흥회도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선상에서 진행되었을 것이고, 주기철이 김익두의 부흥회에 참석하고 생의 방향을 틀었다면 그는 바로 이러한 부흥운동의 성령의 역사에 사로잡혔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주기철이 지금까지의 오산 연전으로 이어지는 어쩌면 민족운동적이라고 해야 할 삶의 방식에서 자신과 민족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고 의지하는 삶의 방식으로 바꾸는 데는 1920년의 한국 부흥운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주기철이 뒷날 일제의 태양신과 투쟁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김익두를 준비하셨고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에서 축적된 힘이 밑받침되었던 것이다. 2-4. 지성을 갖춘 신학교육: 부흥운동을 통해서 형성된 불같은 신앙은 자칫 순간적일 수 있다. 그 불을 계속 지피는 데는 교리나 신조 공부와는 다른 냉정한 수련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은 주기철로 하여금 부흥운동의 뜨거움을 신학공부로 연결시킨 것은 가슴과 머리의 신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김인서가 길선주 김익두 후에 일어나야할 제3의 부흥운동을 전망하면서, "제3 부흥의 그 사람은 길선주 신앙에 플러스 김익두 권능 그리고 또 플러스 석학(碩學) 대덕(大德)이라야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 때는 언제일가? 과거를 기록하는 분은 미래를 전망한다." 김인서가 길선주 김익두에다 석학 대덕을 겸비한 인물을 말했을 때 그 자신은 예측한 것 같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그 제3의 인물을 부흥운동가가 아니라 일제의 태양신과 투쟁할 수 있는 인물로 예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존재함으로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을까. 따라서 김인서가 고대했던 그런 인물은 뜨거운 신앙과 냉철한 지성을 갖춘 인물이어햐 했다. 김익두의 부흥회로 뜨거워진 주기철은 평양신학교의 배움을 통해 신앙적인 지성을 갖추게 되었다. 그가 신학교에서 수학한 것은 1922년-25년의 3년간인데, 그 때 신학교의 정식 교수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네비어스 방책 중 한국인 교역자 양성책과 관련, 장로회 선교부는 한국인에게 외국 유학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물러나기까지 장로교단의 신학문제는 거의 선교사들이 쥐고 있었다. 그 때문에 주기철은 재학 시절, 3 1운동 때 장로회 총회장으로서 독립운동에 앞장 섰다가 옥살이를 경험한 김선두 목사와 미국 유학에서 갓돌아온 남궁혁 박사를 졸업 전에 교정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선교사들의 출신학교와 교과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있었던 선교사들은 호주선교회 소속으로 왔던 엥겔(G.O.Engel, 王吉志)이 스위스 바젤 출신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미국 캐나다의 신학교 출신이었다.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공부한 신학교들은 '보수주의 신학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미국에서 근본주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하였다. 근본주의운동은 천년왕국운동을 기초로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설, 삼위일체설과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인간의 전적타락과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및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주기철의 신학교 재학 시절, 미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을 근본주의 운동이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보다는 길선주 김익두 및 이용도 등으로 대표되는 부흥사들에 의한 부흥운동이 신앙의 큰 조류로서 전개되었음을 더 유념해야 한다. 교과과정의 시간 배정으로 볼 때 평양신학교는 감리교계통의 협성신학교에 비해서 성경신학의 백분율이 서로 비슷했다. 조직신학과 실천신학 분야의 교육은 훨씬 강조되었다. 성경신학도 성경해석 정도에 그쳤을 것이며, 현대적인 성경신학을 교수했다고는 볼 수 없다. 1930년대 이전, 평양신학교는 성경원어 교육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것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교역자 양성책'을, 한국인의 평균 교육수준보다 약간 높게 교육하자는 선에서 묶어 두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기철이 신학교에서 교수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새 신학사조를 소개받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정통적이고 교조적인 이론은 열심히 되풀이되었고, 칼빈주의적 신경과 거기에 따른 훈련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는 교역자될 사람들은 금식과 철야기도 등 고된 훈련을 강화하도록 하자는 교역자 양성책과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뒷날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전시체제가 강화되고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이 전개되는 시점에 이르게 되면, 근본주의 신앙과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함께 수용되어 군국주의와 부딪치게 되었다. 기독교의 1,2계명은 군국주의와 더 이상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의 태양신숭배 강요와 기독교의 우상숭배거부론은 결국 신사참배에서 강요와 거부로 부딪쳤던 것이다. 3. 경남노회 시절의 신앙행적 확인 주기철이 1925년 말에 목사로 안수받아 부산 초량교회의 담임목사로 그리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마산 문창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수많은 곡경을 겪게 된다. 그 중에는 아내 안갑수를 먼저 보내는 인간적인 비애를 맛보기도 하지만, 경남노회의 중진이었던 그는 교회의 정체성 수호와 관련된 여러가지 갈등에 어쩔 수 없이 휘말리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 장로교회가 1934년 희년을 맞아 신학 노선의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기 전에 터졌던 것이다. 희년을 맞으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여권(女權) 문제와 모세의 창세기저작 부인(否認)문제 그리고 단권주석(單券註釋) 문제 등의 '신신학(新神學)'적 사조에 관련된 갈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경남노회에서는 이와는 다른 일종의 신앙적인 갈등을 겪는데, 이들 사건들은 주기철이 당회장으로서 혹은 노회장으로서 처리해야 했었기 때문에 그의 신앙노선과도 일정하게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박승명 목사 사건, 정덕생 목사 사건 그리고 최태용 추종자들과의 문제 등이 있다. 그 중 한국교회에 소개되지 않은 뒤의 두 사건만 언급하겠다. 주기철의 행적에서 이 기간 동안 몇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그가 1929년 혹은 1931년에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반대 결의를 이끌어냈다는, 전거가 불확실한 그의 행적이다. 둘째는 그가 노회장으로 재직한 시기이다. 곁들여 그의 초취부인 안갑수에 대한 것이다. 먼제 이 문제를 거론한 뒤에 정덕생 목사 사건과 최태용 백남용과 관련된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3-1 경남노회 신사참배 거절안 가결의 문제: 이것은 아마도 김인서(金麟瑞)가 "주목사가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거절안을 제출하여 가결하였다. 당시 일인(日人)의 부산일보(釜山日報)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로 공격하여 일본의 조야를 놀라게 했다. 주(朱) 목사가 태양신(太陽神)과 싸운 것은 경남에서 시작하였다."고 썼던 데서 발단되었던 것같다. 그 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인용, 답습하거나 혹은 이를 전재한 것을 다시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김요나는, 주기철이 1929년 노회석상에서 <신사참배 반대 헌의안>을 경남노회장 함태영 앞으로 제출하여 가결케 했다는 것과, 가결되던 날 왜인들이 경영하던 부산일보가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완미(頑迷)한 양귀(洋鬼), 끝끝내 신사참배 거부"라는 사설까지 게재하여 신랄히 비판하였다고 했으며, 또 "주목사의 신사참배반대의지가 대외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최초의 일이었다. 김충남 전기는 이 장면을 전일본과 한국 교회는 소년 다윗과 골리앗을 보는 느낌으로 이 싸움을 주목하게 되었다고 했다."고 썼다. 민경배는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개설이 '김인서와 『어둠을 밝힌 사람들』의 저자'에게서 나타나며 그 후의 모든 전기나 논문에 문헌비판 없이 그대로 답습되어 왔음을 지적하면서 전승의 전모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주기철이 초량교회에서 목회할 때 경남노회에 신사참배 거절안을 제출하여 가결되었다. 그래서 당시 부산의 일본인 발행 부산일보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공박하되, '완매(頑迷)한 양귀(洋鬼) 끝내 신사참배 거부'라고 해서 일본 조야에 충격을 주었던 일이 있었다.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여기서 발단된다. 따라서 한국교회 신사참배 반대투쟁사는 여기서부터 기론해야 한다. 그 다음 시대가 경남노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그리고 제3기가 전국적인 신사불참운동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의 주기철 저항과 순교에서 정점을 이루는 투쟁기라고 본다. 경남노회에서 거절안이 가결된 것은 1931년 여름의 일로 추정된다." 필자는, 주목사 주도로 경남노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가결을 끌어낸 주장과 '부산일보'에서 그 점을 대서특필하였다는 점과 관련, 연구자들이 김인서를 인용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거를 제시하지만 그 원자료(原資料)에 대해서는 어떤 전거도 내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그 해결방법의 하나로서 무엇보다 경남노회록의 소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다행히 1929년 9월에 이홍식(李弘植) 목사가 편집, 간행한 경남노회 제22회(1926)∼제27회(1929) 노회록과 <송상석(宋相錫) 목사 자료>에서 제 28회∼제40회 경남노회록을 발견하고 기록을 검토하였지만, 1929년과 1931년에 '신사참배반대'를 논의하거나 가결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1929년이나 '1931년 여름'에 가결하였다는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1925년말 주기철이 경남노회원이 되었을때부터 노회를 떠나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는 1936년까지의 기록에서는 경남노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다루었다는 어떠한 논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경남노회에서 주기철의 주도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결의를 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경남노회에서 그같은 결의를 했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더구나 주기철과 한상동의 신사참배반대 방식을 비교하면서, 한상동이 운동차원에서 진행시켰다면 주기철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용히 진행시켰다고 주장하는 형편이고 보면, 주기철이 경남노회에서 그런 결의안을 가결하도록 주도했다는, 말하자면 운동적인 방식으로 반대시위를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연구자들은 주기철이 내면에 정열을 안고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매우 합리적인 신앙인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구나 뒷날에 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급박한 사단이 아직 벌어지지 않은 분위기에서 주기철이 미리 앞장서서 참배반대에 나섰다는 것은 충분히 설득되는 것은 아니다. 주기철의 신사참배반대와 순교에 연계되어 이루어진 이 불확실한 증언은 사료적인 실증을 거치지 않은채 많은 연구자들의 검증없는 지지를 끌어내었다. 이런 지지 분위기 속에서라면 그가 초량교회를 떠나면서 행했다는, "이제 앞으로 일제가 강요하는 우상숭배의 어려운 시대가 눈앞에 다가옵니다. ."라는 설교가 나타났다는 것도, 그 전거가 희박하지만, 자연스럽다. 그러나 경남노회가 주기철의 주도로 일찍 신사참배 반대를 가결했다는 항간의 주장은, 아직까지는 그 확실한 전거를 들이대어야 할 단계이지, 그것이 사실(史實)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 '사실'을 해석해야 할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3-2. 노회장 재임시기와 사모 안갑수: 몇몇 연보나 행적기록에서 그가 경남노회장으로 피선된 시기를 1931년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경남노회록에 의하면, 그는 1930∼31년은 부회장(회장 김만일 목사)으로 봉사하였고, 1932년 1월 5일 밀양읍예배당에서 회집된 경남노회 제30회 정기노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었으며, 그 이듬해 1933년 1월 3일 부사진예배당에서 회집된 31회 정기노회에서 회장으로 재선되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그가 노회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경남노회 관내에서 두가지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하나는 경남노회 내의 목사 정덕생 씨에 관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최태용 백남용 등이 경남노회 관내에 와서 집회를 가짐으로 적지 않은 파란이 야기된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주기철의 초취부인 안갑수는 1931년과 32년에 경남부인전도회 회장으로서 해당년도 정기노회에 출석하여 경남부인전도회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가 이렇게 경남여전도회 회장으로 활약하였다면, 그를 두고, '한국 목사 부인들의 한 삶의 모습' 혹은 '말없이 조용히 목사의 일과 많은 목회 성역(聖役)을 뒤에서 돕고, 어렵게 가정생활을 꾸려나가며, 그러다가 병약에 시달리다 다시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삶의 모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할런지 의문스럽다. 안갑수가 이같이 연합활동에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활달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돌아가자 경남부인전도회는 전회장 안갑수의 장례를 적극 도왔고 주기철은 그 이듬해 2월에 그 후의에 감사하여 경남부인전도회에 엽서를 보내고 그의 아내 장례 때에 도와주심에 감사하였던 것이다. 3-3. 정덕생 목사 사건: 주기철 목사에 앞서 초량교회에서 거의 10여년간 시무했던 분은 정덕생 목사다. 그는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8회)하고 그해 경상노회에서 목사안수받고 초량교회의 전신인 영주동교회로 부임하였다. 2년후 그는 장로회 총회의 파송을 받아 일본 고베(神戶)신학교에 유학생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교포 교회를 운영하는 등 선교활동도 하면서 학문에도 전념하였으나" 그 부인의 신병으로 귀국, 다시 초량교회를 섬겼다. 그가 시무하는 동안 초량교회는 30∼40명의 교인이 240∼250명으로 증가되어 초창기의 기초가 다져졌다. 삼일운동 이후 절망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그 교회에는 독립운동 자금조달 기관으로 1914년에 설립된 백산상회(白山商會)의 백산 안희제(安熙濟, 1885∼1943) 등이 출석하였으며, 항일운동을 위해 초량교회에서 비밀회합을 가졌다고 한다. 초량교회사는 백산상회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백산상회는 백산 안희제 선생이 세운 무역상회이나 사실은 무역상으로 위장된 족립운동의 연락처였던 것이다. 안희제 선생이 부산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할 때 초량교회에서 간부들이 비밀 모임을 자주 가졌다. 백산상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지사 중에는 초량교인들이 많다고 했는데 그 중에서 특이한 인물이 윤현진 집사이다. 호가 석산(石山)인 윤씨는 1892년양산에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 씨와 손잡고 처음에는 소비조합을 만들려고 12,000원의 자금을 모았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안희제, 송문주 등과 함께 백상회를 설립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내통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백산상회의 안희제가 초량교회와 이런 관계를 가졌다면 담임목사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정덕생 목사가 1922년 예배당을 신축, 헌당식을 거행하는 그 해 2월경, "대정 8년(1919) 제령위반피고사건이라고 평북 중강진 경찰서에 압송되어 3천리이 먼길을 16유치장을 거쳐서 50일만에 무사히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1919년에 관련된 '피고사건'이라면, 초량교회사(105)에 "정목사가 독립운동하는 사람들과 연대되어 이들을 측면지원한던 것이 발각되었던 것"으로 언급된 것처럼, 3 1운동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런 사실은 그의 백산상회와의 관계 및 그 후의 그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주기철이 1925년 부임한 후에도 초량교회에는 정 목사 때의 그같은 '민족주의적' 분위기는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윤현진은 1919년에 상해에 파송되어 그 뒤 임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주기철이 부임한 지 2년만인 1927년에 해산되었으며, 그 즈음해서 안희제도 만주로 망명한 듯 1931년 10월 3일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주기철이 부임한 후 김익두 목사(1927년과 30년)와 이명식 목사(1931년)를 부흥강사로 모신 것은 교회의 이런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주기철이 6년 동안 교회의 부흥을 위해 애쓴 결과 초량교회는 400여명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주기철이 마산교회로 부임한 후 1932∼33년에 경남노회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그는 1933년 9월 초에 회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2회 총회에서 "졍덕생목사는 딴교파를 세우고 나아갓슴으로 본로회로서는 권증죠례 54조에 의하야 그 셩명을 로회명부에서 제명하얏사오며"라고 보고한 것이 보인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정덕생 목사가 "딴 교파를 세우고 나갔다"는 점이다. 자신에 앞서 초량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부산에 있는 동안 정목사에 대하여 소상하게 이해하였을 주기철로서는 노회장의 직분상 이 일을 처리하는 데에 많은 인간적인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정덕생 목사 문제는 1933년 1월 3일 31회 경남노회가 부산진예배당에서 회장 주기철의 인도로 회집되었을 때 노회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정덕생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부산진 교회의 김덕경씨가 1931년 5월 16일에 '교인을 선동하여 불복도장을 받아' 별노회소집을 청원한 적이 있었고, "김덕경 씨가 노회장 주기철씨를 상대로 한 고소장"을 제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건은 1931년에 이미 벌어졌던 것이다. 노회는 김덕경 씨의 고소장이 합법이 아니므로 본인에게 반려하였지만, 정목사는 이 때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정도로 신앙생활에서 떠나 있었다. 노회가 특별위원을 파송, 정목사의 일을 심사토록 하고 그 다음 노회에서 논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정덕생목사에게 대하여 주일 지킨 상태를 물어보니 거년 3월로 11월까지는 아들 병으로 인하여 간호하기 까닭에 주일 예배에 출석지 못한 것과 그 외에는 외처 여행중에 있엇다 함으로 또다시 목사의 성직을 가지고 광업을 함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하등 양심에 가책이 없다고 하였으며, 3. 목사 정덕생씨에 대하여 금일까지 지내오는 중 주일을 잘 아니지키는 것과 광업을 한다는 것으로 목사성직에 부당한 소문이 들릴 뿐더러 건덕에 방해스러운 일이 많이 있으니 그 사실에 진부를 회중에서 한번 청취하여보기로 가결하고 정덕생 목사로 회중에 설명케 하니 정덕생 목사는 형편에 의하여 주일을 지키지 못한일도 있고 광업도 경영하는 것이 사실이라 함으로 회중에서는 목사의 성직으로 이러한 건덕에 방해되는 일을 함이 불가하니 이제부터는 이런 일을 아니 하겠느냐고 하매 정목사는 노회 앞에서 자복하고 이후로는 주의하겠다 함으로 노회에서는 2개월 기한을 정하고 광업 폐지할 것을 부산 시찰에 맡겨 돌아보고 권면하기로 회중에 가결하다" 이 일의 자초지종을 잘 설명하고 있지 않아서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부산진교회의 김덕경이 노회에 고소장을 제정(提呈)하는 등의 와중에서 정목사는 아들의 병과 외처(外處) 여행 등으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하지 않았고, 노회에서는 성수주일 문제와 목사로서 광업을 경영하는 문제로 그를 불러 권면하니, 건덕(建德)을 위해 앞으로 '이런 일'을 하지 않기로 자복(自服)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듯했다. 그러나 정덕생 목사는 노회 앞에서 '자복'한 것과는 달리 금광사업을 정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하고 경남노회를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1933년 7월 3일 마산문창예배당에서 모인 임시노회는 그를 노회명부에서 삭제하는 책벌을 단행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노회장 주기철은 이를 그해 9월 총회에 보고하였다. 경남노회의 기록이다. "7. 정덕생씨에 대하여는 거(去) 노회에서 2개월내로 금광사업을 정리하겠다 하였음으로 2개월 지난 후 본시찰회에서 2차나 불렀으되 한번도 오지 않았사오며 아직 금광도 정리하지 않았사오며 또한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명칭하고 목사직을 행하며 세례를 주고 장로와 직원을 택하며 동예배당 건축비라 하고 노회반동분자가 있는 각 교회에 불온언사의 문구(경남로회의 무법과 폭정행위라는 문구)를 써서 각 교회에 선전한 일도 있었사오며 출교를 당하고 벌아래 있는 자들을 제직이라는 명칭을 주고 선전문에 기록하여 배부한 일도 있었사오며(선전문 첨부), 정덕생 목사는 부산시찰의 보고에 의하여 권징조례 54조대로 그 성명을 노회명부에서 삭제함이 좋은 줄 아오며." 총회에 보고한 내용과 노회의 결의사항을 앞뒤로 맞춰보면 정목사가 노회명부에서 삭제되는 책벌을 받게 된 것은 "딴 교파를 세우고 나갔다"(총회록) "불법당파를 망라하여 조선예수교회라 명칭"(노회록)한 것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장로교회에서는 1918년에 이르러 소종파가 나타나고 있었다. 황해도 지방 김장호(金庄鎬)의 '조선기독교회'와 대구 이만집(李萬集)의 '조선기독교회'였다. 이들은 반선교사 내지는 자치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들 중심으로 가르치는 평양신학교의 신학노선과 달랐고 선교사들의 지도를 충실히 따르는 장로교회의 신앙노선과도 이념을 달리하려고 하였다. 이들이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분파되었다는 점에서 정덕생의 '조선예수교회'도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교단의 지도부가 일차적으로 우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조선예수교회'라는 명칭일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명명되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명칭은 바로 그 해(1933) 1월 3일 이용도(李龍道)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창립된 새 교단 '예수교회'의 이름을 연상케 한다. 정덕생의 '조선예수교회'와 이용도의 '예수교회'는 이름이 유사하다는 점을 우선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1930년에 들어서서 이용도는 경남지방에 부흥사경회 강사로 자주 내려왔다. 그러다가 이용도는 장로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기독신보에 의해 '이세벨의 무리'로 낙인찍혔다. 그 때문에 이용도가 창설한 '예수교회'라는 명칭이 장로교회에 주었던 거부감이 컸을 것이다. 여기서 정덕생의 책벌이 단순히 주일성수나 목사로서 광업에 종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또 그가 과거 민족운동을 도았다던가 직접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게는 신앙노선상의 갈등을 책벌문제의 핵심으로 삼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경남노회가 주기철 주도로 정덕생 목사의 새교단설립을 책벌한 처사는 당시까지의 장로회 신앙정통을 수호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경남노회가 엄중한 책벌을 가하고 그것을 총회에까지 보고하였지만, 노회는 계속 그의 귀순을 권고하면서 정덕생과 접촉하여 1935년 6월 4일 부산 항서예배당에서 회집된 35회 경남노회에서는, 특별위원 3인을 택하여 정덕생 씨를 권면하여 본 노회에 돌아오게 하기로 가결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특별위원들이 정덕생 씨를 권면한 결과 노회에 귀순할 마음이 있음을 확인하고 노회 앞에서 말할 기회를 요청, 노회 앞에서 사과하니 회중은 이를 감사히 받고, 그의 귀순에 따른 후속조치를 임사부원과 특별위원 3인에 맡겨 의논, 보고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임사부는, 정덕생씨가 내주일부터 노회 관내의 장로교회에 예배보려 오겠다는 것과 정덕생 씨의 장래문제는 부산시찰회에 맡겨서 다음 노회시에 보고케 하도록 하겠다고 보고하였다. 1935년 12월 3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회집된 경남노회는, 부산시찰 보고에 의해, 정덕생 목사를 회원으로 받자는 안을 45대 27로 가결하는 한편 정덕생 목사에게 금후 일년간 당회장권을 맡기지 않고 전도사로 청하는 곳이 있으면 허락하기로 가결하였다. 이로써 약 4년간 끌었던 정덕생 목사 문제는 일단락을 지었다. 주기철이 노회장으로 있을 때에 터진 문제가 그가 경남노회를 떠나기 전에 이렇게 해결되고 그 이듬해 그는 다소 홀가분한 심경으로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할 수 있었다. 주기철이 이런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노회장으로 있을 때에 이런 책벌이 단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주기철은 다음에 볼 최태용 백남용의 문제에서와 같이 신앙적 보수성 내지는 정통성 고수에 충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최태용 백남용 계열과 경남노회-정통신앙 보수의 문제 주기철이 경남노회장으로 재임하던 2년동안 그는 장로회총회에 두 차례에 걸쳐 경남노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 경남노회 회장 자격으로 노회 관내에서 문제되고 있는 '예수?육설'과 '이단'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본로회 경내에는 백남용 시의 창도한 예수?육셜이 류행되야 거긔 감염된 젼도사와 교인들이잇셔 회가 다소 어지러운 ?에 잇싸오며" "본로회 경내에는 이단에 감염된 젼도사와 교인들이 잇서 루루히 로회로써 권유하엿스나 종시듯지 안코 졈졈 악화되여 나아감으로 치리를 바든 자들이 만사오며, 금년 칠월에 본로회 주최로신학교 교수 박형룡 박사를 청하야 특별이 교리에 대한 문뎨로 일주일간 수양회를 하얏사오며" 위의 인용에서 말한 '예수순육설'이나 '이단'은 같은 내용으로서, 최태용(崔泰瑢)이나 백남용(白南鏞)과 장도원(張道源) 등이 경남지방에 와서 강설한 내용을 두고 지칭한 것이다. 경남노회록을 보면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경남노회 관내에는 부흥 사경회가 자주 열렸다. 당시 전국적인 부흥사로 이름이 높은 강사들이 많이 내려왔다. 1931년에만 하더라도 이용도 목사가 사천읍교회, 통영읍교회, 거창지방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다. 주기철은 자신이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서 회심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부흥사경회 개최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김익두 목사가 당시 일부에서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량교회에 시무할 때에 그를 두번이나 강사로 모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부흥사경회의 강사로서 봉사하였다. 경남노회가 백남용의 집회를 처음 거론한 것은 1932년 1월 5일 밀양읍예배당에서 제 30회 노회를 개최했을 때다. 마지막날 임사부는 "부산시찰 구내에 백남용씨에 대한 문제 듣기로 회중이 가결하다. 백남용씨의 대한 문제는 해 시찰회와 관계된 당회에 맡겨 돌아보고 내회에 보고하기로 회중이 가결하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은 그 전해(1931) 9월 12일부터 19일까지 김해 대지교회에서 부산시찰 구내의 전도사들이 '당회의 허락도 받지 않고' 백남용을 강사로 하여 집회한 데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고, 그 경위를 살펴보고 적당한 조치를 취한 후에 다음 노회에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경남노회의 전도사들이 최태용 계열의 백남용을 초빙하여 집회를 가지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기성교회가 영적인 피폐성을 드러내는 한 증거이면서 새로운 신앙사조에 갈급했던 것을 보여주었다. 1920년데부터 일본에 유학하면서 우찌무라(內村鑑三)로부터 성경과 민족의식을 배웠던 김교신과 최태용 등은 조선의 이같은 영적인 갈급을 채워주고자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김교신은 1927년 7월부터 《聖書朝鮮》을 간행하면서 <성서 위에 조선을>이라는 기치를 높이 쳐들었으며, 최태용은 1925년 6월부터는 《天來之聲》을, 1929년 2월부터는 《靈과 眞理》를 간행하였다. 조선 교회의 기성 신앙에 일정하게 식상한 젊은 전도사들 중에는 이러한 잡지를 구독하는 이들이 있었다. 백남용을 초청한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1931년 9월에 그를 초청한 것으로 보아 이미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경남노회 안에서 둥지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잡지가 구독되고 새로운 신앙사조가 소개되면서 교회에 따라서는 최태용과 연결된 이들에 대해 교권이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들에게 동조하는 신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듯, 최태용은 《영과 진리》를 통해 '조선교회의 관용을 바란다'는 글을 띄웠다. 당시 최태용과 그의 추종자들이 기성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현대 문법으로 풀어 쓴, 그 글의 일부다. "조선교회에 관용을 바람 교회는 교리로써 통일될 것이 아니다. 종래 교회가 교리적 통일만을 주안으로 하였음으로 그것은 지리멸렬, 他를 이단으로 매도함을 능사로 한 것이다. 교리적 통일을 주안으로한 교회,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새 번역이 이염이명 일어나는 예언자정신이 현저히 쇄감되어 있다. 교리적 교회는 산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도 가지고자 한다. 조선교회에서 교리에 충성된 정통주의자를 향하야 나는 울고 싶으다. 정통주의자여, 너는 과연 기독교를 네 배속에 생수가 강과 같이 흐르는, 하나님 말씀의 샘이 네 영혼안에 터저 있는 산 종교로 가졌느냐고. 안의 깊음에 산 종교를 가짐이 없이, 네가 누구의 正한 교리를 지적으로 쥐고 있음으로 신자인체하나, 우리는 그것을 칭하야 종교상의 이지주의 intellectualism이라 하야 거기에는 종교가 십분지일도 잡혀 있지 아니한 줄로 안다. 교리적인 통일을 무시하면 이단사설이 백출하는 혼란에 빠질 것이 아니냐고 혹은 말하리라. 그러나 이는 역시 교리적 관념에 잡힌 판단에서 나오는 기우이지, 사실은 그럴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교리를 떠나서 기독교 신자를 통일할 규정은 충분히 있다. 성신받은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거듭난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그리스도를 그 안에 살리고자 하는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를 신자로 하면 된다. 성령의 다스림이 행하는 곳에 아무 혼란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근자에 우리에게서 복음을 들은 자를 어떤 노회는 그 이유로써 그 소속교회의 장로를 파면하며, 어느 지방에서는 저희가 저희의 말하는 교리에 복종치 아니함을 책잡고자 소동을 일으키며, 또 어떤 지방에서는 신자가 오인의 잡지를 구독함을 금하랴 하니, 이 어찌 가당한 일인가. 나는 그 교권자들이 어떤 정도로 칼비니즘, 웨슬레정신에 철저하여 있는지를 모르거니와, 짐작건대 그것은 전통주의적정통주의가 아닌가 한다. 저희는 칼빈적, 웨슬레적 종교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신경문자의 표면을 할터 모은 지식을 가지고 산 신앙을 비판하는 자들이 아닐가 한다. 나는 나의 우인들이 나의 보는 바로써하면 저의는 그 기도가 성하며, 그 언설이 열렬하며, 보담 더 생명이 약동중에 있음으로써 진부한 교권자들과 낡은 신자들과 구별되어 저희 두 사이에는 싸움이 일게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지금 기성교회의 파괴를 일하(삼?)지 아니하며, 신교파를 창시코자 아니한다. 우리의 우인들로 장로는 그 교회의 충실한 장로이고자 하며 전도사는 그 집회에 생명의 말씀을 주기를 힘쓰며 평신도는 그 회당을 기도의 집으로 쓰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신앙을 생명이라고 깨닫고 그리스도와 보담 더 생명적인 관계에 들어가랴고 힘쓰며, 들어가는 확신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교회의 부흥은 신앙의 부흥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산 신앙을 자기로써 예증하여 교회에 종사하려는 자들이다. 교회가 만일 우리를 용납하면 우리는 교회에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왕성케 할지언정 교회를 못되게 하지 아니할 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으로써 신앙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더 긴밀한 것, 더 생명적인 것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스도 인격을 그 진리의 높음대로, 깊음대로 개념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하는 바가 신앙을 더 참되게 하며, 그것을 더 생명적으로 하여 신자로 더 좋은 신앙의 소유자로 하지 아니 하거든 우리를 심판하며, 우리를 정죄하라. 우리가 상이한 형식을 가진 자들일지라도 같은 주안에 있는 형제애를 感하야 서로 손을 이끌고 하나님나라의 싸움을 싸울 것이 아닌가. 나는 조선교회가 성령 이외의 다른 아무 것에도 잡히지 아닌(니한?)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주기철 목사의 십자가의 길/ 2014-11-15
주기철 목사의 십자가의 길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는 한국 기독교회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신앙인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된 지 반세기가 조금 넘었을 시점에 한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일본의 천황(天皇)주의 이념에 바탕한 무도한 군국주의 횡포에 저항하여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고 그 절대성을 증거하여 위대한 순교적 증인이 되었다. 그의 삶은 비록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유일신 하나님 신앙 전통에 입각하여 한국 기독교 교회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가장 영예로운 순교자의 반열에 추앙되었다. 1. 그의 생애에 대한 관견(管見) 그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직후에 태어났다. 그는 을사조약 후 통감정치가 시작되던 첫해(1906)에 고향의 개통학교에 입학을 시작으로, 1912년은 정주 오산(五山)학교를 택하여 진학, 졸업 후 스승들의 권유에 따라 서울의 연희(延禧)전문학교 상과(商科)를 진학하였는데, 1916년 여름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몇년간 뚜렷한 방향이 없이 방황하는 듯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1920년 두 차례에 걸친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 참석하고 자신의 진로를 목회자의 길로 굳힌다. 주기철은 1921년 경남노회에서 목사후보생 시취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 공부하는 한편 졸업할 때까지 경남 양산읍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목사안수를 받은 주기철은 1931년 7월까지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1936년 7월까지는 마산(문창)교회 담임목사로 봉사하다가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일제 태양신에 대결하기 위한 한국 교회 최후의 보루로서 그는 한국교회의 전면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교회가 겪어야 할 십자가의 고난의 길, 그는 그 길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골고다로 향했다. 일제의 거듭되는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검속,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한국 기독교사에 찬란히 빛나는 순교의 길을 걸으니 47세였다. 2. 주기철 목사의 구원론 주기철 목사의 신학은 개신교회의 보편적 구원론에서 출발한다. 즉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은 '죄론'에서 출발한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죄로 인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심판'이 예상되는 죽음에 임박하여 그 공포심은 더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죄의 공포' 앞에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다. 종교적 은둔생활이나 율법 실천으로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하느님의 독생자를 믿는 그 한 가지 방법" 뿐이다. 그는 이것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입는 것' 외에 죄를 극복할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능력에 '접붙임'될 때에야 인간 속에 있는 혈기와 교만, 음욕 등 '내적인' 죄가 소멸되고 따라서 음주와 도박, 흡연 등 '외적인' 죄도 자연 소멸될 수 있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아니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같은 구속의 방법은 인간이 창안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창안하신 방법이고 따라서 인간에게는 은총일 뿐이다. 먼저 그리스도인 자신이 경건과 정직의 생활을 실천하여 자신을 맑게 한 후, 사회를 "맑고 깨끗하게" 정화하는 '소금과 빛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의 개인 윤리는 사회 윤리로 연결된다. 3. 그리스도인의 사회 윤리(민족 구원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속함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총'에 보답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하나님의 은총은 1) '위로부터' 온 것이며, 2) 받은 양에 따라 책임의 분량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같은 맥락에서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책임'을 다하는 생활로 보답해야 하는 데, 건강한 사람은 '병약한 사람'을 조롱하지 말고 재물에 여유가 있는 자는 그것을 자신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쓸 것이 아니라 교회 사업을 위해 사용하거나 주변의 가난한 자,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하고 보살피는데 사용할 것을 촉구하였다. 지식을 가진 자는 그것으로 무식한 자를 조롱하거나 멸시하지 말고, 지식을 사기와 착취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오히려 문맹자를 가르치고 깨우치는 봉사의 도구로 사용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처럼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책임 의식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인의 '윤리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타나는 구속의 은혜가 개인적 차원의 만족에 그치지 않고 교회와 이웃, 사회와 민족을 위한 봉사 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4. 주기철 목사의 신앙 1) 체험적 신앙 주기철 목사 신학에서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가 '성경 중심주의'다. . 그의 '성경 중심' 신앙은 '체험과 경험'으로 확증되고 보완되었다. 그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임재와 섭리의 역사를 자신의 삶 속에서도 체험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는' 섭리의 손길을 체험하며 목회의 길에 들어섰고 목회 생활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임하였고 그 과정에서 순간 순간 '기쁨'을 체험하였다. 2) 그리스도 사랑 '하나님 사랑'은 '그리스도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예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주기철 목사는 예수를 사랑하면 그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순종하되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절대 순종은 오직 사랑에서라야 가능한 것이다. 사랑 없는 순종은 억지거나 강제일 뿐이다. 되겠다." 베드로 역시 주님으로부터 '죄의 용서'와 '사명 부여'라는 2중 사랑을 받고 감격하여 고난과 역경의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었다. 3) 십자가 사랑 주기철 목사의 '예수 사랑'은 '십자가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신앙 생활에서 '십자가 고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길은 곧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은 억지로, 마지못해 받는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자진해서, 기쁨으로 받는 고난, 즉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 '주님 사랑'에 뿌리를 둔 자발적 수난(受難)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첫째, 십자가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다. 그 생명의 힘으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생명과 능력을 십자가에서 얻어야 한다. 둘째, 십자가 길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앙에서 십자가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자는 핍박을 피할 수 없다. 고난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하지만 특히 '패역한 시대'에는 고난 당하는 것으로 그가 진리의 길을 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패역한 시대'에 고난 당하지 않고 칭찬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사는 것은 곧 '십자가의 길에서 탈선되어 시대 사조에 휩쓸리여 바람부는대로 살아가는 자'이거나 아니면 '자기의 안일을 위하여 비진리와 타협하며 사는 자'일 것이 분명하다. 어려운 시대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고난의 길을 피할 수 없다. 곧 주기철 목사가 걸어야 했던 길이었다. 셋째, 십자가 길이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동행하려면", "예수를 만나려면"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한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십자가 외에는 주님과 동행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과 동행하기를 윈하는 자는 마땅히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한다. 다만 주님을 원치 않으면 피할 수도 있는 길이다."바울 같은 이도 구태여 그 길을 갈 필요는 없었으니 자긔가 원치 않었다면 얼마든지 안갈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사랑 때문에 그는 그 험한 십자가의 길을 즐겨 걸어간 것이다." 넷째, 십자가 길이 '하늘의 평화가 넘쳐흐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이 강권하여 그 길을 간다 하지만 십자가 길에 고난과 죽음만 있다면 끝까지 그 길을 가기 어렵다. 십자가 길 마지막에 생명과 평화의 기쁨이 있기에 그 길을 선택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과거 성인(聖人)들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십자가의 길을 갔다. 다섯째, 십자가 길이 '천국에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진리'의 길로 알고 '주님과 동행'하며 걸어간 십자가의 길 끝에는 '천국'의 평안,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그 길을 가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선택하기도 어렵고, 선택한 후 끝까지 가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는 '사랑'의 힘이 아니고는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 사랑', '예수 사랑'에 감동되어 살았던 주기철 목사에게 '십자가 길'은 대안(代案)이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갈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의 길은 신자가 '경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십자가의 길은 진리의 길인 때문에 환난과 핍박이 파도처럼 위험할지라도 안갈 수가 없는 길이다.그리고 마지막 때 경건한 신앙을 지키려는 성도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그의 신앙때문에 1938년 9월 장로교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주기철 목사는 2차 검속을 받아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38년 총회 기간 내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주기철 목사가 속한 평양노회에서조차 노회장 보고를 하면서 그의 신변에 관한 언급 한 마디 없었다. 오히려 노회는 이듬해(1939년) 12월 15일 평양 남문밖교회에서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되어 있는 주기철 목사에 대해, "昭和 十三年 九月 平壤에서 열린 長老會 總會 冒頭에 '神社參拜는 國家儀式이요 宗敎가 아니므로 國民된 義務上 宜當히 參拜하기로 함' 하고 決議한 精神에 違反"된다는 이유로 "朱牧師에게 峻烈히 免職處分의 決議를 하였다" 그는 총회나 총회원들의 무관심과 외면 속에 '홀로'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했다. 5. 그리스도의 겸비 1939년 2월 2일, 주기철 목사가 '투옥'에서 '순교'로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기 직전에 작성한 기도문은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그리스도 '열애자'(熱愛者)의 열정이 담겨 있다. 이 기도문의 주제인 '겸손' 혹은 '겸비'도 그의 이러한 '예수 사랑', '십자가 사랑'의 필연적 결과이다 '겸비'가 아니고는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의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그리스도였다. 그는 이런 '스스로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였다. 자신 안에 남아 있어 수시로 불평과 분노를 발하는 '자아'를 제거해야만 그리스도께서 계신 '무아(無我)의 역(域)'에 들어갈 수 있다. 거기선 '겸손'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주기철 목사는 이런 '무아지경'(無我之境)을 사모했다. '성신의 방망이'가 아니고는 내 안의 '자아'를 깨뜨릴 수 없다. 성신의 능력으로 자아가 깨지고 '무아지경'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외람된 오만'에서 해방된다. 그러면 '겸손'과 '겸비'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주기철 목사는 이런 '성신의 능력'에 사로잡히기를 간구하였다. 주기철 목사는 '그리스도의 완전'을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였고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모하였다. 마음에 '오만'이 사라지고 '비어 있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기 원하였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악'으로 인하여 '통회'하고 '애통'하며 '회개'하였다. '재에 앉어 가슴을 치는 통회'가 없음을 통회하였다. 회개는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바란 것은 바로 이 것, 온전히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겸비'의 극치인 '십자가'를 통해서라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1944년 4월 21일, '십자가의 날'인 금요일 밤, 아무도 없는 평양 형무소 어두운 감방 안에서 그 생명이 스러지는 순간, 주기철 목사가 마지막 호흡으로 드렸을 기도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오! 주여! 나는 당신의 겸손을 사모하오며 당신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6. 결론 주기철목사(朱基徹 1897∼1944)는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한국교회의 큰 별이었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5차례에 걸쳐서 총 5년4개월간의 투옥생활을 하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신앙수호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일사각오'의 자세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이와 같은 항거 끝에 주기철목사는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그날 밤 9시 30분에 주목사님은 4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시고 웃으며 운명하셨다. 그는 갔지만, 지금도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를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존재로 기억하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사의 아름다운 전통이 계속되는 한 그는 그 역사와 함께 역사 속에 살아 있을 것이며 그의 십자가의 길이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채인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기철 목사/ 2014-11-15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기철 목사 서론 주기철 목사님이 사신 시대는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통치하는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이 때 젊은이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것이 자기들의 해야 할 일임을 느꼈고, 교육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 시대의 지도자를 양성하며, 물산 장려운동으로 민족 경제를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배우고 익히기만 하면 잘 살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동학과 서학으로 대별하던 천도교와 기독교가 물결처럼 밀려 들어와 시대의 정신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시대가운데 신앙의 지조를 지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기철목사님의 생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I. 젊은 시절 1. 좌절과 방황의 세월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에 경상도 웅천에서 둘째 부인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후처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러 이복 형제와 사촌들 사이에서 따돌림 받을 위치에 있었지만 워낙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이라서 오히려 형제들을 융합시키는 다리역할을 할 정도였습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는 나라와 민족을 걱정했고, 보통학교 시절 춘원 이광수의 영향으로 오산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특히 남강 이승훈 장로와 고당 조만식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남강이 105인 사건과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후 드린 첫 기도 "주여, 이때까지 이기고 오게 하여 주셨사오니 감사합니다. 그와 같이 이후도 이기고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를 통해 남강의 일제 저항이 무엇을 뜻하며 민족과 교회에 던져주는 의의와 가치가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20세의 당당한 청년이 되어 오산학교를 졸업하면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고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분위기가 낯선데다가 부패한 도시습성과 일본인들의 간교한 웃음소리는 오장육부가 뒤틀릴 정도로 견딜 수 없게 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오산학교 졸업 무렵부터 악화된 유전성 눈병이 더 악화되어 신경이 전부 눈으로 쏠렸고 재산 상속문제로 집안에 불화까지 있었습니다. 이복형제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과 질시가 재산 분배문제에 얽혀 고개를 들 수 없을만큼 따갑게 느껴졌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별거, 실낱같이 이어진 형제관계, 고질화된 눈병의 악화로 모든 것이 심란해진 그는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로인해 그는 고향으로 낙향해 청년운동과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열정을 보이며, 내면 깊이 잠재된 자기세계를 표현하고 좌절과 방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2. 영적 체험과 사역자로의 부르심 1917년에 그는 목사님의 중매로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장모인 안 부인의 신앙은 아주 뜨거워서 그를 목회자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기도하고 권유하였습니다. 한번은 영적 변화를 기대하며 마산의 문창교회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영적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임재하심에 그동안 죄로 가리웠던 허상이 벗어나고 벌거벗은 자기의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너무나 약한 피조물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주 독립을 성취하고 이 땅에 이상향을 세울 것이라고 확신했던 모든 것이 한낱 물거품으로만 여겨졌고, 그보다 더 큰 성령의 능력으로써 이 모든 불의와 악의 세계를 물리칠 수 있다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자기계획에 이용하려 했고, 거듭나지 않은 죽은 생명을 가지고 민족주의니 교육구국이니 떠들어 왔던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만과 이기심만 앞세워 왔던 것을 통회하고 이제 앞으로의 모든 생애를 주님께 맡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비로소 죽어가는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 시대의 사역자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고 계심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II. 목회기 1. 신학교 시절 지금도 그렇지만 그당시 목회자들의 생활은 몹시도 궁핍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결심을 가족들은 '좋은 녀석이 아깝게도 빈궁 생활로 들어가는구나!'하며 강력히 반대하였습니다. 한번은 오산의 스승인 남강이 신학교로 그를 찾아왔는데 오산학교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하였습니다. 이는 이전에 그가 바라던 것이었고, 명예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기의 몸에 진 십자가를 벗어버릴 수 없는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고 있기에 세상 명예와 욕망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교역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고, 오로지 한 길인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2.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 그의 신앙과 목회를 한 마디로 정의해 보면 일사각오라 할 수 있습니다. 네살된 아들 영묵이와 두 살된 딸 영덕이의 죽음, 오산의 대은사인 남강 이승훈 장로의 별세로 그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실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순종하며 진실되게 사는 것만이 인간의 참된 본분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날로 더해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또 한 차례 죽음의 회오리 바람이 교회에 불어닥칠 것 같은 암울함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만이 승리로 이끌고 부활의 영광을 얻는다며 죽음을 신앙과 연결시켜 귀결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항상 죽음을 앞에놓고 살아가는 삶 밖에는 고귀한 삶이 없다.' 는 내용의 죽음을 언제나 역설했습니다. 이렇게 한 번 죽기를 각오한 그의 신앙과 목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한 줄기였습니다. "死의 準備-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준비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건 모르건, 칭찬하건 말건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경건한 생활을 할것이다. 신자는 천국에서 서로 만나 주를 영접하며 영광 중에 먼저 생활할 것임에 죄가 없는 것을 생각하니 기쁨 밖에 없다. 신자는 재물을 하늘에 쌓고 소망을 저 나라에 두고 천국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이다." "一死覺悟 - 예수님을 따라서의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의 일사각오, 부활진리를 위하여의 일사각오." 이것이 바로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며 그는 무엇보다도 기도를 통한 진정한 말씀 전파에 힘을 쏟았는데 그가 자기 기도처에서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하고 내려올 때면 비라도 맞은 것처럼 아침 이슬에 흠뻑 젖은 모습이었습니다. 산에서 기도를 하지 않을 땐 새벽에 예배당 강단 위에 엎드려 기도했으며 주일에 할 설교의 윤곽은 주로 월요일 새벽기도를 통해 구상하여 토요일 밤까지 계속 기도하면서 설교를 완성하는 열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목회에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양떼들의 목자가 되어 어두운 시대를 살아나갈 뿐 아니라,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III. 한 알의 밀알이 되기까지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일제는 기독교가 사회의 개혁과 생활개선에 미치는 긍정적인 면에 관심을 두어 기독교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시행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는 조선인을 보다 더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 모든 조선인으로 하여금 신도의식(神道儀式)에 참가하도록 법적으로 의무화하였습니다. 일본의 신사라는 것은 일본 역대 천황과 나라를 위해 순국한 군인들과 조상들의 영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놓고 참배하는 사당을 말하는데 이것을 종교화한 것이 신도입니다. 또한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정하여 호창하게 하고 황국신민 체조를 제정하여 학교, 관공서에서 아침 조회 시간마다 하게 하였고, 일본천황의 사진과 일장기 사진, 국가가 기재된 사진틀 등을 각급 학교에 배부하여 교실에 붙여 놓고 매일 경배토록 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점심 시간에는 일본 천황에게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야 도시락을 먹게 하였으며 또 천황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부동자세를 취하게 하는 등 모든 국민을 일제에 순종하는 꼭둑각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신사는 여기저기에 세워졌는데 그 앞을지나는 사람들마다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해야 했습니다. 전차가 그 앞에 이르게 되면 차장이 "신사 참배!"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전차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절을 해야 했으므로 착실한 기독교인들은 한 정거장 미리 내려 걸어가서는 다음 정거장에서 다시 전차를 타야 할 정도였습니다. 2. 흔들리는 조선 교회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 외에도 한민족을 황국신민화하려는 일제의 계책임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항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신사참배 강요가 교회로서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신사참배가 하나의 국민적 의례로서 정치적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적 성질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지, 또 설사 종교적 행위라 할지라도 교회를 폐쇄시키면서까지 참배에 거부할 까닭이 있는지 없는지 분별할 수 없어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일제는 계속해서 교회의 목을 죄어 왔습니다. 엉뚱한 혐의로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구속하기 일쑤였고, 집회마다 쫓아다니며 감시하였습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거나 그런 이야기가 있는 교회를 폐쇄하고, 목사로 하여금 신사참배 설득 강연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산발적으로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큰 효과를 얻지 못한채 교회가 하나하나 우상 앞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는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르렀고 어용노회가 되어 믿음의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를 괴롭혔습니다. 3. 주 목사님의 최후 승리 이러한 때에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 문제가 곧 전국의 모든 교회에 시련을 안겨다 주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는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의 연단을 더욱 굳건히 하도록 강조하며 우상숭배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노회에 제출해 대일본 제국에 도전장을 내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우리의 적은 바로 우리의 죄'라고 절규하면서 신사참배 문제가 우리 자신의 신앙의 절개와 관련된 일임을 깊이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더욱 일사각오의 신앙을 강조하었습니다. "예수를 환영하던 때도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임박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一死)를 각오하고 나서라. 망하여 가는 예루살렘성下에 눈물의 자취,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어린 자취! 우리도 그와 같이 일보 이보 눈물과 땀방울의 자취를 걸어야 할 것이며 골고다에 흘리신 피의 자취를 따라 우리도 이 피의 자취에 엎디어 이 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한다." 그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대외적으로 표면화되어 그는 곧 요시찰 인물이 되어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머지않아 주의 제단에 몸을 바쳐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예감했습니다. 그는 일제에 신사참배 반대자로 눈의 가시가 되어 툭하면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의 고문은 자백을 받기 위한 고문이 아니라, 광인이 저지르는 살인적인 만행이었습니다. 훈련용 검도로 머리든지 몸이든지 닥치는 대로 후려갈겼고 그것도 싫어지면 그를 천정에다 매달고 채찍질을 수도 없이 하였습니다. 고추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코에 부어 넣기도 하여 숨이 끊어지는 듯한 기절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고문으로 식도가 부어올라 며칠 동안 식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숨쉬기조차 곤란했습니다. 거기다가 외형적으로는 아무런 상흔을 남기지 않는 성기고문이 있는데, 그것은 알콜 심지를 성기 요도에다 쑤셔넣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하게 했는지 고문을 받은 그곳 요도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고 아랫배의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계속 왔습니다. 그 고문을 받고 나면 소변을 볼 때마다 통증이 심해져 온 방을 뒹굴었고 변소통을 잡고 울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고통을 잊기 위해 찬송을 불렀습니다. 온 정신을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난 그 쓰라린 장면에 집중시켜 찬송을 부르면 통증도 잊게 되었고 고문하던 사람도 어찌된 영문인지 맥이 탁 풀려 지독한 놈이라는 욕설만 퍼붓고 말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순교의 길을 갔지만 끝까지 그 길을 지킨 분은 많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도중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왜경은 당회에다 압력을 넣어 먼저 목사 사직서를 받았고 다음으로 가족에게는 생활비를 지출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인들로 하여금 남편을 면회시켜주면 열이면 열, 그 자리에서 모두 훌쩍훌쩍 울며 밥을 굶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 '아버지, 배고파!' 하고 울음을 터뜨리면 강철같은 아버지의 마음도 오장육부가 녹아내려 항복하고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경은 주기철 목사님에게도 같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다른 목사들은 형식적으로 한다 하고 풀려나온다는데 동생도 그렇게 하고 나오너라. 형식적인 신사참배가 무슨 죄가 되겠느냐?" 하며 상대적인 생각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도 안되자 이번에는 당회에서 파면시키면 아무 힘도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목사를 파면시키고자 조작하였습니다. 끝내 산정현 교회를 폐쇄하고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감시하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이런 가운데서도 믿음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한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면 안된다는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께서, 자신도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고 사망의 권세를 발 아래에 밟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준다는 데에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는 그 고난을 견딜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한 자신이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감옥에 안 들어가고 양떼를 진리로 평안히 인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그러나 진리를 외치면서, 평안을 외치면서, 평안을 줄 수 없는 처지에 있으니 차라리 옥중에서 평안을 주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순교해서라도 조선 교회를 살리고자 하였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고자 했습니다. 4. 사모 오정모 집사의 눈물겨운 헌신과 복음적인 내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나기까지 밀알 자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밭을 갈아 거름을 주고 씨앗을 뿌리는 자가 있어야 하고 묻어주는 자, 물을 뿌리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여러 사람의 노력과 정성을 빌려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본인의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되었지만 그 주위에 피나는 뒷바라지가 없었던들 일제의 간악한 마수 속에서 이루어지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교회의 희생과 뒷바라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모 오정모 집사의 내조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주기철 목사님을 순교시키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왜경이 아무리 그녀를 구스르고 달래어 목사님을 설득시키려 해도 오히려 '교회도 다 평안합니다. 어머님도 평안하십니다. 아이들도 학교 잘 다니고 있습니다.' 라고 하여 목사님을 안심시켰습니다. 사실 교회는 주일날만 되면 경찰이 에워싸고 어머니는 매일 아들 걱정으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고 아이들도 학교에서 퇴학당해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어느날 평양 경찰서는 주 목사를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이가 오 정모라고 판단하고 면회온 그녀를 발길로 차면서, "이년, 네가 나쁜 년이 되어서 네 남편을 이렇게 고생시킨다" 며 욕을 하였고 며칠씩 가두어둘 때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사흘 가석방을 받아 나왔을 때 오정모 집사는 주 목사를 만나자마다 "승리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주 목사가 빙긋이 미소만 짓자 안심을 하며 "목사님, 사흘 동안 푹 쉬시고 다시 감옥에 들어가실 준비를 하셔요" 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주기철 목사님의 생명이 경각간에 달한 것을 알고 가석방시키고자 했지만 무죄로 석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며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에게 항복은 죽음보다 더한 패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를 위해 목회자 없는 교회와 가장 없는 가정을 대신하여 억척스럽게 꾸려나갔고 5년 4개월의 피눈물나는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IV. 배운 점 인간에게 한 번의 죽음은 정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저는 [세계선교보고대회]에서 선교사님들의 생애를 들으며 과연 내가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자기실현과 행복과 안락을 다버리고 순수하게 주와 복음을 위해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살 수 없을 것같았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의 생애를 보면서 그 분을 위대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일사각오였습니다. 한 번 죽기를 각오한 그에게 하루하루는 여느 사람들의 하루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준비하는 나날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부르실 것을 아는데 죄짓고 살사람이 있겠습니까? 또 내일 죽을터인데 오늘 내가 청소부로 살든, 교수로 살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런 그의 신앙은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든 말든 관계치 않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의 죽음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날마다 부활하였습니다. 제가 이 분의 신앙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일 죽을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바라보고 시대와 캠퍼스의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