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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두 렙돈/ 왕상17:8-16, 마12:38-44/ 2003-07-22
과부의 두 렙돈 왕상17:8-16, 마12:38-44 오늘 신약의 본문은 서로 다른 두 계층의 사람들, 너무나 상반된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38절-41절까지는 율법학자와 이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빼앗김을 받는 과부로, 42절-44절까지는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로 아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상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부유한 사람이고 한쪽은 가난한 과부입니다. 한 쪽은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과, 다른 한 쪽은 멸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과부는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후, 혼자 사는 여인이었고, 동시에 가난한 계층의 여인이었습니다. 과부는 그 당시 혼자 생활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처럼 불렸습니다. 이 때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헌금합니다. 다른 한쪽인 가난한 과부는 혼자서 두 렙돈을 바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친구들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학자는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고 한다.”고 예수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경건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긴 옷과 흰 세마포 두루마기를 입고 화려한 옷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그럴듯한 행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우리 역시 이런 사람들을 손가락질하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 일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보통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인정받기 원하고 인사 받기를 좋아합니다. 또, 높은 자리에 앉길 좋아하고 제일 윗자리에 앉길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 또한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좋은 옷을 입었느냐를 두고 사람을 판단하고, 좋은 학벌에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반면에 이 과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과부란 말 그대로 남편을 잃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런데, 그를 향해 ‘남편 잡아먹은 여자’라는 오명을 덧씌웁니다. 그래서 남편을 잃고 그 빈 공간을 채울 수 없는 허전함과 아픔을 가지고, 더욱이 이제 기댈 데가 없어서 삶을 어떻게 삶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망막함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데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여 마치 자신으로 인해서 남편이 죽기라도 한 양 죄인처럼 살아갑니다.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도 못하고 숨을 죽이면서 사람들 뒤에서 숨어 지냅니다.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삶이었습니다. 이 과부는 아마도 조용히 여인의 뜰에 살짝 앉았다가 예배만 끝나면 곧장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고 관심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 과부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과부의 행동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과부를 인정해주시고 과부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사회의 약자인 사람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다른 사람이 평할 때 지식인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구성원이 대부분 학벌이 좋고 의식수준이 높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도 있지만 한편 그것으로 인해 지적도 받습니다. 우리가 약자를 위해서 애쓰지만 그러나 우리 교회에 평범한 사람이 과연 적응할 수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교회에서 소외 받고 있거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고, 관심을 갖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왜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을 칭찬했을까요? 두 렙돈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주 적은 액수의 돈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동전에 불과합니다. 렙돈은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헬라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입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말하는데 그 1데나리온의 1/128에 해당하는 돈이기에 아마도 지금 돈으로 환산한다면 4, 5백 원 정도에 해당할 것이고 두 렙돈이니까 약 1천 원 정도입니다. 칭찬 받기에는 아주 적은 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이 과부는 지금 있는 것의 전부를 넣었다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이 여성에게 두 렙돈은 내일 당장 필요한 생활비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렙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체를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나 우리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칭찬하십니다. 결코 세상의 조건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평가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나는 이러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고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는 율법학자보다는 소리 없이 뒤에서 적은 일이라도 자신을 기꺼이 바쳐서 일하는 과부를 인정해 주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행위나 체면 때문에 하는 것은 진정한 헌신이 아닙니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자신의 있는 것으로 헌신을 다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많은 사람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의 것을 헌신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본문인 열왕기상의 말씀에 나타난 ‘사렙다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흉년이 들어 심한 기근 중에 마지막 빵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과부에게 엘리야가 찾아왔습니다. 엘리야 역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다가 가뭄이 너무 심하여 강물의 물도 바짝 다 말라버리게 되자 이 사렙다 과부를 찾아갑니다. 힘없이 땔감을 줍고 있는 이 여성에게 엘리야는 물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여성이 물을 뜨러 가는 데 또 다시 요청합니다. 무엇이라도 먹을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엘리야가 요구한 것은 과부에게 있어서 모든 것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성은 엘리야의 말대로 먹을 것을 만들어 대접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로 예언자를 공궤하고 배고파 지쳐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나눈 것입니다. 꼭 재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재능이나 시간, 사랑을 나눌 때 비록 그것이 크든 작든 기꺼이 바치는 헌신은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70년대에 시골에서 교회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한 가난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예배 중 헌금시간에 ‘헌금 쟁반’이 왔다 갔다 하는데 드릴 돈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그 자신이 ‘헌금 쟁반’에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드릴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이겠지요.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께 충성, 봉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의 재물과 시간과 우리의 몸을 바쳐서 헌신하고 있는가? 되돌아봅시다. 봉헌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적인 자기 헌신일 것입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예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회에서, 자신이 일하는 현장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주변에서 다양하게 헌신과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교회에서 자신을 기꺼이 바치며 헌신하길 원합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전체가 아님을 생각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해마다 우리 교회는 연말쯤 되어서 교회학교 교사로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모집합니다. 그러나 지원자가 없어서 아주 애를 먹습니다. 물론 ‘내가 꼭 지원하지 않아도 향린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이 그 일을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지원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교사로 일할 사람이 없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향린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많이 염려를 하게 됩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크게 혹은 작게 자신을 헌신하며 살아가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헌신이 특히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젊음을 가졌을 때, 우리 가슴속에 우리가 가진 것을 바쳐서 교회가 달라지고, 사회가 바뀌고, 이웃이 즐거움을 느낀다면 기꺼이 우리의 것을 바치겠다고 생각하고 다짐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연극하나를 관람했습니다. 그것은 전태일 열사 30주기를 맞아 극단한강에서 공연한 ‘연극 전태일’입니다. 전태일은 22세이던 70년 당시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다 동료들이 아주 열악한 환경 속에서 16시간씩 일하고도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최저임금과 최소한의 노동조건에도 훨씬 못 미치는 처우를 받는 것에 항의, 분신했던 한 젊은이입니다. 저는 전태일에 관한 책도 읽고 몇 년 전에 영화도 보았기 때문에 연극은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관람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공동으로 토론해가며 대본을 만든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새로운 기법들, 전태일의 업적을 새롭게 해석하여 그것을 여러 각도로 표현하여 관객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두 장면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좁은 다락방으로 만들어진 봉제공장에서 10대 소녀들이 천에서 나오는 먼지를 마시며, 폐병에 걸려가며 하루에 16시간씩 일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달을 여유 없이 일하는 기계로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도 잊어버린 채 1번 시다, 2번 미싱사로 불리면서 어린 시다들은 하루에 한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고픔을 물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전태일의 분신 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좁은 다락방이 다시 등장하였습니다. 전태일의 분신 후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청년 전태일의 열정과 분신으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전태일이 그 먼지로 가득한 다락방의 창문이 되어준 것입니다. 창문이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창문을 열고 새 공기, 맑은 공기를 마십니다. 따사로운 햇살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던 식순이, 공순이, 1번 미싱사, 2번 시다로 불리던 이들이 이름을 찾고 인간성을 회복해 간다는 것을 묘사한 장면이었습니다. 10대의 동생들이 물로 배를 채운다는 것을 알게 된 전태일은 자신의 버스 값을 아끼고 아침저녁으로 걸어 다니면서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다주는 순수하고 마음 착한 젊은이였습니다. 그 당시의 악덕 기업주들의 눈에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10대 소녀들이 1번 시다, 7번 미싱사로 보였지만 전태일의 눈에는 배고픔에 떨고 있는 소녀, 한 인간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전태일의 가슴속엔 온통 이런 상황 속에서 일하고 수많은 동료들이 어떻게 하면 제대로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 가득 차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결국 자신의 몸을 내어 던졌습니다. 우리도 내 몸을 불사르겠다는 결심까지는 아니지만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서, 사회의 그늘을 보면서 이러한 열정을 가슴속에 품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열정을 다시 회복합시다. 우리를 기꺼이 내어 주어서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우리가 창문이 되어봅시다. 닫힌 창고와 같은 곳에서 창문이 되어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따사로운 햇볕을 쬘 수 있게 하는 것, 그래서 생명이 살아나고, 인간성이 회복되어 갈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일에 우리의 힘을 기울입시다.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지금까지 아무도 알아주거나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그 과부의 헌신을 알아주시고, 인정해주시고,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 여인은 그저 이름 없는 과부로 남았을 뿐 이름조차 성서에 기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던 한 여인 역시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일이 기억될 것이라 했지만 그저 이름 없는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서에 과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전해지기는 하지만 우리는 별로 이 과부에 관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잊히고 있습니다. 좀 전에 제가 잠시 전태일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얼마 전 신문기사에서 전태일 열사를 기리기 위해 지난 88년부터 민주노총 주최로 매년 열려온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겸 ‘전태일 열사 30주기 추모문화제’가 행사를 하루 앞둔 10일까지도 장소를 정하지 못하여 아주 애를 태운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난달 말부터 동국대와 연세대, 경희대 등 서울시내 10여 개 대학 쪽에 협조를 요청해왔지만 학교마다 내부사정을 이유로 하나같이 난색을 표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태일의 뜻을 기리는 것이 거부되는 상태입니다. 더욱이 학내 선거를 앞두고 총학생회장 후보들이 외부 인사나 외부행사를 유치하지 않겠다고 공약한 대학들도 있다고 합니다. 대학을 제외하고는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은 현실에서 한국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전태일 열사 30주기를 기념해 열리는 이번 행사에 학생들과 학교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는데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전태일 열사 30주기 추모사업회’(공동위원장 단병호, 김금수)는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들과 아픔을 함께 했던 청계천 3~8가 일대를 ‘전태일 거리’로 거리 명칭을 개정할 것을 건의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이 전태일이란 사람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처사입니다. 기억하지 않고 잊힌다는 것은 그 뜻이 이 땅에 살아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행이, 최근 전태일(사진)의 분신 장소인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A동과 B동 사이에 가로 40㎝ 세로 30㎝의 동판(銅版)추모비를 설치했고 이 추모비에 ‘이곳은 영원한 노동자의 벗 전태일이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신 항거한 곳입니다’ 라고 새겼다고 합니다. 관심에서 떠나면 그것은 잊히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그 뜻을 이어가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전태일이란 이름이 남아있을 때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관심을 가질 것이고, 우리 가슴속에 두 렙돈을 바쳤던 과부를 기억할 때 우리의 자발적인 자기 헌신은 끊이질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을 알아보시고 귀중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렙다 과부의 마지막 밀떡을 복 주셔서 그 뒤주와 기름병에 하나님의 복을 가득 채우십니다.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것 같고 그것을 기억하지 않고 지워버리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정성과 힘을 다한 헌신은, 작은 헌신이라도 그것을 알아보시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른 동네 러시아 딸돔/ 눅4:42-44/ 2015-09-20
다른 동네 러시아 딸돔 눅4:42-44 할렐루야! 여러분 사랑합니다. 지난 한 주간 다 잘 지내셨습니까? 지난주 성가대도 한 줄이 집단 이탈을 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정상적으로 복귀해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 아침 6시에 출발해서 사천공항과 김포공항을 거쳐 러시아 항공소속 애로플로트 600편으로 밤 10시에 모스크바에 도착했습니다. 몆년 전만 해도 모스크바는 철의 정권의 온상지요 붉은 광장은 대포와 장갑차 그리고 총칼을 군인들을 사열하는 스탈린의 굳은 표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크레믈린궁을 돌아보는데도 경비가 삼엄할 것 같아서 미리 출발하기 하루 전에 푸틴 대통령에게 E메일을 보내놓고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도착하고 보니 모스크바 중심지를 가로지르는 거리에 우리 나라 LG와 삼성마크를 단 전동차들이 누비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 속에는 평화로움과 발걸음에서 내일에 대한 희망의 여력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밤11시경에 신학교에 도착했는데 거기 시간으로는 오후 5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한번 둘러본 뒤 6시에 또 저녁을 먹고 숙소에는 9시 도착했는데 백야 현상으로 저녁 10시가 넘어도 날씨가 대낮 같아서 아이들이 밖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꼬박 24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긴 해 길이 만큼이나 긴 행로였습니다. 드디어 주일 아침6시가 되자 운전기사가 깨우러 왔습니다.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서둘러 준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신학교로 가서 아침을 먹고는 딸돔교회 전교인들이 식사할 수 있을 만큼 미리 준비한 음식을 싣고 7시에 교회로 출발했습니다. 다찌아나라는 행정책임자와 뽈리나라고 하는 교포가 통역자로 함께 동행했습니다. 딸돔교회는 모스크바에서 좀 벗어나 남쪽으로 약 3시간정도 걸리는 조용한 시골지역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달려도 산이나 돌이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과 높이 솟아난 싱그런 자작나무 그리고 탐스럽기까지한 옥토들이었습니다. 저는 가면서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이렇게 넓고 비옥한 땅을 가진 나라의 백성들이 식량부족으로 굶주리고 있는 일이 첫째 기적이요 둘째는 지하자원이 하나도 없고, 가꿀 토지가 없어서 옥상 위에 화분을 올려놓고 고추와 상치를 심어야 하는 이 조그만 나라가 저 나라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딸돔 하청교회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이었는데 도착하자 수로보프 미하일 로비치 전도사는 저를 아주 당회장처럼 예우를 해주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은 약 40명 가량이었는데 신학교 학생들 3명이 와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찬송을 인도하고 또 성가대처럼 찬양을 하며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저를 아주 주님의 사자처럼 여겼고 설교를 들을 때는 여기저기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우리 딸돔 하청교회가 특별한 것은 러시아에서는 13세까지 종교교육을 시키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교회에 나가면 법적으로 구속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러시아 교회는 정교회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딸돔 교회에는 어린 아동들이 약 15명 가량이 예배에 참석하였다가 설교시간에는 잠시 따로 나가서 선생님이 성경이야기를 가르친 다음 설교가 끝날 때 다시 예배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어디를 가든지 희망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어린아이들이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때 우리 하청교회가 얼마나 귀하고 큰 일을 하고 있는지 그제서야 새쌈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더욱 수로보프 전도사는 지금 62세로 지하교회 출신목회자입니다. 그는 본래 정교회 신자였지만 21세때 어느 개신교 할머니의 전도를 받고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개신교를 믿는다고 국가와 정교회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던 분입니다. 학교교육도 거절당했고 직장도 거절당했습니다. 어디서 일하다가도 개신교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공부를 못한 바보 멍청이들이라고 해서 쫒겨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록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고 또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 혼자서 살고 있는데 몆년전 아내가 심장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아들들은 결혼해서 독립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패기가 넘쳤고 토요일마다 교인들을 데리고 공원 숲속 같은데서 나아가 전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작년 4월까지는 교회건물이 없어서 딸돔시에 속한 문화회관을 빌려서 교회로 사용했는데 그것도 주일 예배시간 2시간 정도만 허용되고 6개월마다 재계약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성경공부도 할 수 없고 식사도 할 수 없고 신앙상담은 물론 교인들이 자유롭게 와서 기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교회에서 압력을 넣어서 계약을 못하게 하면 언제라고 쫒겨나야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5월 21일자로 우리교회가 건평 23평 총 대지 314평짜리의 개인이 살고 있던 가정집을 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가정집을 예배당으로 개조해서 예배당과 사무실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공간은 좁고 시설은 비록 형편없지만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우선 목회자가 마음놓고 일주일 내내 사무실에 있으면서 상담도 하고 성경공부도 할 수 있다는 것과 또 예배 후 서로 가지고 온 음식들을 나누면서 시간에 제한 받지 않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우리교회 달력을 두 개 가지고 갔는데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리고 우리교회 사진과 전도지를 주었더니 그것을 사무실에 붙혀 놓고 교인들이 늘 보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마음이 아픈 것은 교회에 컴퓨터 한 대와 또 복사기 한 대쯤만 있어도 예배 순서지 정도는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딸돔 교회에서 약 5분 떨어진 곳에는 지붕을 금으로 도금한 러시아 정교회가 있는데도 그리로 가지 않고 낡아서 기울기 시작하는 초라한 목조 건물속으로 들어오는 교인들을 바라볼 때 그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그 교회에 들어서자 말자 이상하게 그 교회가 러시아 교회가 아니라 바로 우리 하청교회라고 여겨졌고 우리 하청교회 교인들이 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그 순간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는 사실과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게 되엇습니다. 예배를 마친후 바로 그 예배드린 장소에서 여기서 준비해간 선물들을 나누고 또 나무판자를 판상으로 맞추어 놓고 아름다운 찬양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준비해간 음식을 함께 나눌 때 그 느낌은 마치 초대교회와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배후 돌아오는 시간 내내 예배의 감격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졸기도 했지만 저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 놀란 것은 강의실에서 였습니다. 첫째는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고 또 강의 중간마다 신앙적으로 조금 감동이 되면 스스럼 없이 아멘 아멘을 하는 것입니다. 통역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강사가 아무리 열을 내어도 통역이 감동이 되지 않거나 개념이 정확히 전달이 되지 않으면 아멘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칠 때 제가 기도를 하자고 하니까 다 일어서서 기도를 하는데 그 중에는 제가 기도하는 그 기도 내용까지 노트에 베끼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통역자였는데 이 사람은 전직이 열심공산당원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은혜 받고 신학공부를하고 목사가 되어서 통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신학생들 중에는 정규사관학교를 졸업한 러시아 현역 장교들이 약 40명이 신학강의를 배우러 야간시간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최고 계급 대령을 비롯하여 중령 대위등 아주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생각할 때 이들이 이 학교에 오는 것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보조해 주니까 그 때문에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강의가 마치자 의욕적으로 질문도 할뿐만 아니라 역시 기도할 때 다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하니까 다 아멘 하는데 야 역사는 여기서부터 일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군대에는 계급입니다. 장교한 사람은 사병들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 장교들중 단 몆 명만이라도 제데로 된다고 해 보십시오 이들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러시아 병사들이 전도가 되겠습니까? 지금 대단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마지막으로 공항까지 안내한 가이드는 리자라는 한국계 러시아인이었습니다. 그는 5년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이 있는지 교회는 무엇 때문에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류대학을 나와서 설계사무소에서 연구원으로 가정이나 직장에서나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개척한 교회의 목사님을 통해서 자꾸만 교회에 한번 나오라는 말을 듣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재미가 있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모스크바대학 물리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세계적인 물리학자를 베출한 곳, 그 아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했더니 그말만 하면 어머니를 미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4학년이 되어서 몸이 아파서 시험을 못치게 되자 점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1년을 휴학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총장에게 3번이나 갔지만 거절 되었다. 점수가 안되어서 졸업도 못하고 쫒겨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완전 낙심가운데 아들에게 너 성경을 읽어봐라. 그리고 잠언서부터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답니다. 그 아이가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 성경을 읽었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제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다시 한번 학교에 가서 휴학을 신청해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데로 갔더니 3번씩이나 거절하던 총장이 보지도 않고 휴학에 싸인을 해 주더랍니다. 너무나 신기해서 그 이후로 그 아들도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옛 날에 하나님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살아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저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신앙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 교회가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한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다음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도록 만류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여러분 다른 동네가 어디입니까? 그 당시 한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옮겨가자면 하루나 이틀은 족히 걸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스크바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모스크바는 바로 우리들의 또 다른 한 동네입니다. 실제로 가장 먼곳 땅끝은 도심지에 있는 옆집 아파트입니다. 주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하청교회가 한 일도 너무나 귀한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전교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선교사업에 힘을써서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선교의 보고와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에게 선교의 사명과 열정이 새롭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러시아 정교회의 약사와 영성/ 욥1:13, 욥42:12/ 2016-04-24
러시아 정교회의 약사와 영성 욥1:13, 욥42:12 욥은 갑자기 자기 앞에 닥쳐온 재난을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모든 소유를 잃었고 끝내는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저주의 말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욥은 정말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시련을 잘 참아내면서 그런 비참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욥을 축복하시어 전보다 갑절이나 넘는 많은 재산을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주셔서 행복한 삶을 오래오래 살게 해주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한 평생을 살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합니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개인적, 가정적, 지역적 또는 국가적 민족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시기는 많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경우, 60년 전 러시아 땅 연해주에서 자리잡고 살던 우리 한민족 동포들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가진 것 모두를 빼앗기고 황량한 벌판에 버려졌습니다. 그 사건은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이 저질렀던 만행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 민족사에도 러시아 민족이 참혹하게 당했던 고난의 시기는 있었습니다. 10세기 이래로 키예프 러시아는 모든 우상숭배 행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 민족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교 국가로서 러시아는 복음정신에 바탕을 두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열의가 있었습니다. 한 예로서 비잔틴에서 받아들인 형법에서 사형제도를 폐지했고 어떠한 형태로든 체형을 금지시켰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정부가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 곳에 수도원과 성당이 건설되었으며 비옥한 땅에서 풍성한 양식이 생산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여러 방면에서 전체적으로 발전했고, 안정된 시대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몽골의 침략이 키예프 러시아를 폐허로 만들었고(13세기) 살아남은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식민통치하에서 죽음이 그늘진 음지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름답게 건축되었던 성당과 건물들이 다 불타 버리고, 거리 곳곳에는 사람들의 머리들이 산처럼 쌓였고, 어떤 사람의 머리는 길가에 나뒹굴어져 있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민족은 240년이라는 긴 고난의 세월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15세기 이후에서야 러시아는 공국이 아니라 제국으로 성장, 발전하였습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힘을 모으고 단합하여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하에서 해방되었고 서방의 적들도 물리쳤습니다. 러시아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부강한 나라로 발전합니다. 러시아의 재건은 그리스도교 정교회 정신이 힘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의 그리스도교 정교회는 하나의 종교로서 여겨지기보다는 러시아 정신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리스도교를 토착화하여 자기들의 민족종교화, 민족문화화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과 예식서는 초기부터 러시아어(교회 슬라브어)로 번역되었고, 교리서와 신학서적들도 러시아어로 저술되었으며, 음악, 미술,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도 창조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열도 대단히 높았습니다. 몽고 치하에서도 몽고인들에게 선교했고 광활한 전 국토를 복음화 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알래스카로의 선교사업은 오늘날 를 탄생시켰고 중국, 한국, 일본에도 선교사업을 펼쳤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내적 소용돌이 속에서 무신론자들이 정권을 쟁탈하게 되었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교도권을 마비시키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1918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성직자들을 체포, 감금, 추방, 살해하였습니다. 교회는 폐쇄되고 신학교, 수도원들도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큰 성당들을 폭파하거나 그 용도를 변경하여 수영장, 공장, 체육관, 영화관, 극장으로 이용했습니다. 종교교육은 전면 금지되었고, 2∼3명의 어린이를 모아놓고 하는 종교 신앙교육도 형법에 저촉되었으며,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준다는 조항은 있지만 종교 반대활동의 자유라 하는 조항을 넣어서 종교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초기에는 28명의 주교가 처형되었고 150명의 주교들을 한꺼번에 체포, 감금, 살해했습니다. 수녀들을 한꺼번에 2천여 명이나 학살했고 일반 성직자들 6만여 명을 체포, 추방 살해했다고 했습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끔찍한 시련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순교할 각오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지하교회를 형성하여 예배를 드리고 성직자를 양성해내었습니다. 또 해외에 퍼져 있던 러시아 정교회와 추방되거나 망명한 성직자들이 해외 러시아 정교회 주교회의를 조직하여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이 회개하도록 기도하며 활동했습니다. 해외 러시아 정교회 본부는 처음에는 유고슬라비아에 두었다가 그곳이 공산화됨으로써 독일 뮌헨으로 옮겼고 세계 2차 대전시 독·소 전쟁 이후 1949년에 미국의 뉴욕으로 옮겨서 러시아 땅 밖의 전 세계를 향하여 사목과 선교활동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은 살아남았던 고위 성직자들을 협박하여 무신론 정권을 인정하게 하고 티콘 총 대주교가 공산주의자들을 파문했던 사항을 무시하게 하여 모스크바에서 주교회의를 열고(참석주교 19명) 새 총 대주교를 뽑아서 무신론 정권의 하수인처럼 억압하였습니다. 1941년 독·소 전쟁에서 밀리던 스탈린은 정교회 지도자들에게 선심을 쓰면서 2개의 신학교 및 신학 아카데미야의 문을 열게 하고 소수의 성당과 수도원의 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독·소 전쟁에서 승리한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후르시쵸프)은 계속해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견디기 어려운 재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회복해주시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러시아는 신앙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었지만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와 문명과 충돌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이제 또 다시 깨어지고 분할되고 헤어지는 진통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밖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러시아 CIS는 이념적 진공상태라고 표현하면서 아전인수격으로 선교사업을 펼쳤습니다. 근 1세기동안 빼앗기고 매맞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신음해오다가 이제 겨우 일어서려는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인 러시아 정교회의 어려운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자기들의 종파나 교세확장을 러시아 땅에 감행함으로써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으며, 결국 작년 1997년에 러시아 땅 안에서 외국인들의 선교활동을 제한하는 법이 확정 시행되게 된 것입니다. 한국과 러시아는 근 1세기만에 화해하여 국교를 정상화하고 여러 방면에서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러시아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파악 못한 채 파송되었던 한국인 선교사들은 많은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대형 선교집회 운영과정에서도 문제가 있었고 설교자들의 설교내용이나 발언에서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러시아 정교회는 우상숭배자들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짜르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어먹고 살았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말 성경책도 없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 받은 자들은 신앙의 결단 없이 세례를 받았으므로 재 세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에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이 생기고 국민들을 고통에 시달리게 한 책임은 러시아 정교회에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인들의 구원을 위한 일을 러시아 정교회에 맡길 수 없다. 개신교가 그들의 영혼을 구해야 한다.“ “러시아 정교회는 썩었다.“ 이러한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발언은 문화적, 문명적 충돌로 발전한 원인 중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소련정부로부터 이어진 한국정부에 대한 거액의 채무가 있으며, 국민경제는 어렵게 되어 가난한 살림살이를 하고 있고,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외국인들이 만든 기업에 들어가 고용살이를 하면서 동정을 구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초강대국이었던 자존심으로는 참아내기 힘든 어려움입니다. 제정 러시아 때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빚을 지고 갚을 길이 없을 때 러시아에 차관을 요청한 바도 있었고 일본의 침략자들을 피하여 이란 수모를 겪었을 때 러시아는 우리의 보호자 행세를 하였으며 러시아 선교사들이 나진, 선봉, 청진, 원산, 서울, 문산, 일산, 부산, 마산 등 우리 나라 땅 여러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업을 펼쳤습니다. 비록 과거의 이야기라 하지만 그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우리 나라에 대한 우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 문화와 러시아 정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식을 가지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이해하여 한·러 양국간의 상호발전을 위하여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러시아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과 비슷한 입장에 있습니다. 양국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바탕이 된 그리스도교적 국가들입니다. 그리고 북한과 중국은 아직도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지 않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반면 러시아와 우리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노선과 시장경제체제로의 발전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와 우리 나라는 여러 방면에서 교류 협력을 증대하여 상호이익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러시아 정교회 영성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교회일치 운동의 차원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치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러시아 정교회 영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리뚜르기야‘라고 하는 거룩한 성찬예배를 통해서이고, 두 번째는 수도생활을 이해함으로써 정교회 영성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뚜르기야는 일반 성당에선 매주일과 주간에 집전되고 수도원에서는 매일 집전됩니다. 리뚜르기야라는 말은 민중이 ‘협동으로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본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모든 피조물-자연)과 협력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의 성제입니다. 그래서 희랍 말로 ‘에프하리스띠아‘(유카리스트)라고도 말합니다. 리뚜르기야의 내용은 신구약 성서의 내용과 정교회 교부들의 신학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리뚜르기야는 1부에서는 말씀의 전례로서 찬양과 연도 그리고 성경봉독과 강론이 있습니다. 강론은 보통 10분 내외로 합니다. 그날 봉독된 구약이나 신약성경을 복음에 비추어 해설하는 형태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자들은 설교가 끝나면 원칙적으로는 퇴장합니다. 그 후에는 세례 받은 자들만이 참석하게 되는 성찬의 전례가 집전됩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에피끌리시그‘라고 하는 성령강림의 기도입니다. 집전자와 신도들, 빵과 포도주에 성령이 강림하시길 기도 드리는 것입니다. 정교회에서는 봉헌용 빵은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을 사용합니다. 포도주는 붉은 색을 사용합니다. 축성된 성체·성혈(빵과 포도주)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는 금식을 전제로 합니다. 리뚜르기야 집전자는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들입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제도는 부제, 사제, 주교입니다. 독신자나 기혼자의 구별 없이 성직자가 될 수 있지만 서품 후에는 결혼이나 재혼을 할 수 없고 주교는 독신자 중에서 선임됩니다. 정교회 수도생활은 초대교회 때부터 발전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고 후에 비잔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비잔틴 사람들은 현세의 제국을 천국의 표상으로 착각했습니다. 공의회가 열리고 고칠 수 없는 교의가 확정되면서 공의회 결정에 불복한 이들은 모두 이단으로 단죄되었습니다. 제국에서 많은 성직자들은 관료화되어 백성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올바른 믿음, 올바른 신앙생활을 지향한 이들의 설 자리가 제국 안에는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복음적 생활의 실천을 위해서 광야나 산림, 숲 속에서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성덕을 많이 쌓은 은수자들의 주변에는 새로운 수도생활 지망자가 모였습니다. 보통 2∼3명 또는 3∼5명이 모여 수도생활을 하는 스케테가 여러 곳에 많이 생겼고 10명 이상 또는 수십명 이상이 모여 규칙을 정하고 기도와 노동으로 수도생활을 하는 대형 수도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에 수도원이 많이 생겼는데 그리스의 성 아토스 산은 수도원 국가처럼 여러 나라에서 모여와 자율적 수도원 공동체를 형성하였습니다. 수도자들은 고요함 중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도자들을 헤시카스트(Hesychast)들이라 말합니다. 그리스말로 ‘이시하스모스‘는 고요함, 침묵을 뜻합니다. 헤시카스트들은 예수의 기도를 많이 실행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짧은 기도문으로 훈련하는 진정한 의미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항상 내 안에 머무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수도자들은 “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면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합니다. 정교회 수도자들은 “빛이 되라.“는 말씀을 실행하기 위한 기도생활을 합니다. 먼저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타볼 산에서 빛을 발하셨던 예수님을 그 제자들이 본 것처럼 말입니다. 빛을 본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먼저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께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을 발하신 것처럼 수도자들도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 빛을 받은 자가 탈혼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고와 생활을 하는 중에서 빛을 보게되고 또 발하게 됩니다. 그 빛은 ‘창조되지 않은 빛‘이라고 말합니다. 18세기 러시아의 수도자 사라보의 성 세리핌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빛을 발하는 분으로 유명한 은수자였습니다. 그는 천일 동안 돌 바위 위에 선 채로 밤을 새우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도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아야 구원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맹수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자급자족하면서 은수생활을 했지만 제도교회와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도생활 영성에 대해서 라돈쯔의 성 세르게이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13세기 몽고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러시아 땅을 가꾸어 가난한 민중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면서 대수도원 운동을 전개하고 몽고침략에서 러시아를 해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오늘날까지 ‘러시아의 창설자‘라는 호칭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유해는 모스크바에서 약 100km 떨어진 성삼위 일체 대수도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생활을 영성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으로 잘 조화시켰습니다. 황무지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 주변을 개간하고 옥토로 만들어 새로운 그리스도인 마을을 형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생전에 이러한 수도원을 50여 개 만들었고, 그분의 사후에는 제자들이 또 50개나 더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도생활의 이 양면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은 제도화된 수도원의 몸집이 커지게 되자 이런 제도를 통해 수도원들이 욕심을 부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도적 수도원은 농노를 부렸고, 그들을 학대했습니다. 또 엄청난 토지소유를 함으로써 백성들은 가난한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국가권력과 야합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을 규칙화하여 율법주의적 경향으로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소유파 수도자들로 불려졌습니다. 반면에 무소유파 수도자들은 소유파 수도자들을 정면에서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구실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전례음악이나 이콘도 수도자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장애가 된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권력과 야합한 소유파들은 무소유파를 무력으로 공격하여 변두리로 쫓아내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적인 영성은 바로 이렇게 상반되는 소유파와 무소유파의 공동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례음악이나 이콘은 하나의 신학으로 정리가 된 한편, 무소유적 수도생활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최고로 가치가 있는 신비신학을 탄생시켰습니다. 17세기에 있었던 러시아 정교회의 신·구파 이교사건은 러시아 정교회의 또 다른 영성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비잔틴으로부터 전이된 종교, 문화적 전통을 토착화하고 러시아화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비잔틴 전통을 추종하던 니콘이라는 자가 총대주교에 취임하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모든 예식을 그리스-비잔틴식으로 복고적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 전례의 개혁과정에서 서구화 조짐도 있었기 때문에 니콘의 개혁에 반대한 자들은 처형당하고 추방당했습니다. 개혁파를 신파라 하고 개혁에 따르지 않은 파를 구파라 했는데, 구파는 이로 인해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러시아화한 전통을 고수했습니다. 구파는 후일 성직자파와 무성직자파로 나뉘게 됩니다. 성직자파는 구파 안에서 성직자를 세우는 전통을 지켰고, 무성직자파는 성직자를 세우지 않고 평신도들로 교회를 유지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수도생활의 근본적 영성은 순교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의 삶이란, 비잔틴시대나 10세기 이후의 러시아의 국교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피 흘려 순교할 일이 없게 되었을지라도 자신의 온 몸과 마음 모두를 주님께 내어 맡기는 삶, 희생적인 삶을 사는 순교자의 믿음을 본받는 수도생활이 있고, 비록 수도생활을 하지는 못하지만 사회생활 속에서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 사는 삶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교회에서는 순교자들을 세 가지로 분류하게 됩니다. 즉 붉은 순교자, 하얀 순교자, 푸른 순교자입니다. 오늘날 러시아 정교회는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스스로 찢어왔던 상처를 다시 자체적으로 치유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아직 미진한 부분은 공산주의 무신론자들의 혹독한 박해를 피해 어머니 같은 조국의 땅을 비통하고 힘겹게 벗어나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며 정교회의 신앙을 고스란히 보전해온 와 공산주의자들과 야합했다는 욕을 먹으면서도 러시아 땅을 지켜온 그리고 간의 화합입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거의 무너진 상황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정신문화의 재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외래의 다양한 종교 문화, 문명의 쇄도와 혼미 속에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병약한 노구(老軀)로 보여지는 러시아 정교회에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 다시 내려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한 번은 한 외국인이 어느 러시아 정교회 사제에게 “지금 러시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그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빠루시아!“ 이 말의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야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뜻입니다. 아멘. 강태용 목사
로마를 향하여/ 행23:11/ 2012-02-12
로마를 향하여 행23:11 한 세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 나라는 어느 민족보다도 많은 환난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밖으로부터의 침략과 안으로의 갈등을 경험하면서 지나왔습니다. 그러나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셔서 오늘 이렇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이 있는 민족, 사명이 있는 민족,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고난이 있다고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며, 시련이 있다고 해서 무너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민족은 하나님이 친히 연단하셔서 더 귀하게 들어 쓰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기르시고, 세계를 향하여 큰 등대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는 주님이 복음을 위하여 택하여 쓰시는 사도 바울에게 약속의 말씀을 해 주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1.2.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를 고소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붙잡혔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는데 천부장에 의해서 보호를 받다 가 다음날 다시 산헤드린 공회 앞에 와서 심문을 받을 때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날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증거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은 바울곁에 서서 "바울아! 두려워 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너에게 이렇게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지만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보다 더 큰 로마에 가기 위해서 너를 지금 기르고, 훈련시키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붙잡혔지만 주님은 곁에 계십니다. 주님이 바울과 동행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집에 있어도 주님이 우리 집에 오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 이것이 우리의 힘인 것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만 잡고도 홍해를 건너게 할 수 있었고 가나안을 향하여 백성을 이끌어 갈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는 강한 자요, 힘있는 자요, 자유인인 것입니다. 주님은 "로마를 보아야 하리라"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할 일을 지시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바울에게 말씀하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어려움 속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미래는 세계를 향하여, 로마를 향하여, 저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새 시대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만 부활하시고 승리하 셨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고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일어나게 되어져 있고, 승리하게 되어져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는 말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힘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를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기 위하여 언제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 를 찾아내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은 언제나 용기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언제나 주님은 우리를 칭찬해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사랑을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과거에 매여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날보다 미래를 더욱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담대하게 하시는 주님 을 바라보며 머무르지 말고 나아가십시다. 복음을 들고 나아가십시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문을 나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의 삶으로 새 시대를 맞이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며 새 시대를 걸어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 리더십/ 수3:1-13/ 2009-11-29
여호수아 리더십 수3:1-13 리더십은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거나 가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설득시키는 모든 행위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단강물이 흘러넘치는 시기에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을 건넌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새벽 리더십 1절 말씀을 보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라고 합니다. 여호수아 리더십은 새벽리더십입니다. 여기서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자기를 관리하거나 통제할 줄 아는 영성관리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리더십은 자기의 영성 관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끌어주심을 받고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의 교통의 시간을 갖고 이끌어주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힘이 바로 리더십입니다. 세상의 리더십은 권력과 재력이라는 것을 매개물로 하여 소기의 목적과 이익을 창출해내는 리더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은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서지 못하면 리더십은 설 수 없습니다. 교역자든, 당회원든 중직자든 경건생활을 하지 않으면 리더십은 서지 않습니다. 영적 권위는 직분에 있지 않고 그의 경건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러한 영성관리를 통해서 백성들을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리더십을 가지게 됩니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을 아무런 반대 없이 이루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성관리를 잘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새벽을 깨워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을 이루십시오. 영성관리에 승리하십시오. 새벽리더십을 발휘하십시오. 2. 언약궤를 뒤따르게 하는 리더십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 교통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궤를 뒤따르도록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언약궤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입니다. 이 언약궤를 보고 쫓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만 보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리더십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백성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면 그는 실패한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리더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리더십이어야 합니다. 또 언약궤를 따라간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리더십의 목표는 사역입니다. 언약궤를 따라간다는 것은 자기에게 맡은 역할을 철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언약궤를 따라갈 때는 그냥 몸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그러나 간격을 이천 규빗으로 하라고 합니다. 각자의 사역을 하되 남의 역할을 침입하거나 훼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으로 하여금 언약궤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각각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며 언약궤를 따라가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주님을 따라가게 하십시오. 말씀을 따라가게 하십시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발휘해야 할 리더십입니다. 3. 백성을 성결케 하는 리더십 여호수아는 백성들로 성결하기를 명령합니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의 말 한마디 때문에 백성이 성결하여집니다. 성도들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성결한 영향력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부정적 영향력, 부패한 영향력을 준다면 곤란하겠지요. 내가 머무는 공간이 성결해지기를 바랍니다. 나로 인해서 공동체가 성결해져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로 인해서 백성이 성결하게 됩니다. 나로 인해서 기도하게 되고, 나로 인해서 봉사하게 되고, 나로 인해서 예배하게 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나로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로 인하여 누군가가 변화될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4. 용기를 주는 리더십 여호수아는 이제 백성들을 앞에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도록 명령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려는 때는 15절 말씀대로 곡식을 거두는 시기로서 항상 언덕에 넘치는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을 밟고 건너라고 하는 것은 생명에 위험이 있는 일이기에 그들에게 믿음을 주고 용기를 줍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용기를 주는 리더십입니다. 제사장들이 물속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 물이 차례로 쌓여 더 이상 흐르지 않게 되었고 백성들은 건넜습니다. 언제 물이 다시 합쳐 요단강이 흘러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렇게 행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제사장에게 용기를 주었고 마침내 요단 도하는 성공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힘이 되어주고 격려가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다시 힘을 얻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리더십입니다. 리더십은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서 요단을 건너게 한 것처럼 나도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고, 성결하게 되고, 영성관리하게 되고 구원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류우열 목사(인천 복된교회)
여호수아 리더십/ 수3:1-13/ 2009-11-29
여호수아 리더십 수3:1-13 제가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아주 쉽고 재미있는 ‘겅호’라는 책이 있어요. 무너져가는 회사를 살려낸 리더십의 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책입니다. 왜 어떤 사람이 회사를 이끌어갈 땐 회사가 손해가 나서 문을 닫을 지경이 되고 또 누가 회사를 리드하니까 회사가 살아나고 수익을 올리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책에서는 회사를 살려내는 세 가지 정신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다람쥐 정신이요. 둘째는 비버 정신이요. 셋째는 기러기 정신입니다. 다람쥐처럼 각각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서 일을 하는 정신입니다. 또 비버처럼 남이 무엇을 하든지 간섭하지 않고 자기의 일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러기처럼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회사를 운영 했더니 무너지는 회사가 흑자를 내고 회생하게 되었다는 앤디 클롱로우의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 프로농구에 KT라는 팀이 있는데 작년에 꼴찌를 했던 팀이었습니다. 선수는 그대로인 상태에서 감독이 바뀌었는데 지금 1등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팀을 이끄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리더십이란 무엇입니까? 따라해 보실까요. “영향력” 리더십은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거나 가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설득시키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좋은 영향을 주면 좋은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요 나쁜 영향을 주면 나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치면 부부간에 관계가 좋아지고 자녀들이 순종하고 믿음생활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수백 명, 수천 명 모이는 회사에만 리더십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리더십이 있을 것이고, 어머니의 리더십이 있을 것이고 형의 리더십이 있을 거예요. 둘이 길을 가면 그들 중의 하나가 스승이라고 하는 말처럼 둘 중의 하나가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상대방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참석한 모든 성도님들이 자신이 속한 그 곳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금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점점 증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축구팀을 월드컵에서 4강으로 올려놓았던 것을 히딩크 리더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어떤 리더십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결과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리드했더니 세계복음화를 이루게 된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담임목사의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또한 평신도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저도 예수님과 같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평신도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위해 기도합니다. 목자, 교사 그리고 부서의 책임자들이 주님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간절한 바람은 성도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성경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물이 흘러넘치는 시기에 어떻게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을 건널 수 있었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 같은 리더십을 가질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각자의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우리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또 나아가서 수많은 영혼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목장 안에서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목장이 가정처럼 편안한 곳이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일 학교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면 그 반이 부흥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리더십은 큰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쳐서 점점 확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자기의 위치를 잘 찾지 못하고 살아가신다면 그것은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사는 거예요. 1. 새벽리더십 그러면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어떤 리더십일까요? 따라해 보실까요. “새벽 리더십”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 여호수아 리더십은 새벽리더십입니다. 여기서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자기를 관리하거나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시간 관리를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성관리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리더십은 자기의 영성 관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경건생활을 통한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진정한 리더십은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경건생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끌어주심을 받고 삶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주도하는 것이 경건생활입니다. 경건 생활을 통해서 리더의 힘이 나옵니다.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의 교통의 시간을 갖는 사람이었으며 더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이끌어주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가정을 바로 이끌어가려고 해도 이런 경건생활이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도 경건한 부모는 자녀들에게 경건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부모가 엉터리로 살면서 자녀들에게 바르게 하라고 말하면 자녀들이 말을 듣겠어요. 기독교 리더십의 기본은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통해서, 경건 생활을 통해서 나오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 영권을 가지고 말할 때 영향력이 끼쳐지는 거예요. 만약 경건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말을 하면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어요. 세상의 리더십은 권력과 재력이라는 것을 매개물로 하여 소기의 목적과 이익을 창출해내는 리더십입니다. 직장 상사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아도 그가 나보다 위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지도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리더십은 이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리더십이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목사가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서 성도들에게 새벽기도를 하라고 강조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리더십은 서지 않는 것입니다. 교역자든, 당회원이든, 중직 자든 경건생활을 하지 않으면 리더십은 서지 않습니다. 영적 권위는 직분에 있지 않고 그의 경건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직분 자들만 경건생활에 승리해야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경건생활에 승리해야 가정에서도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자녀들을 영적으로, 말씀으로 하나님 뜻 가운데 인도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영성관리가 되면 옆 사람에게 ‘우리 함께 예배드리시지요.’라고 말할 때 영향력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예배도 드리지 않으면서 이런 말을 하면 ‘너나 잘하세요.’가 되고 마는 거예요. 2. 언약궤를 뒤따르게 하는 리더십 여호수아는 이러한 영성관리를 통해서 백성들을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리더십을 가지게 됩니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을 아무런 반대 없이 이루어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영성관리를 잘하였기 때문입니다. 3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이런 리더십입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언약궤를 뒤 따르게 하는 리더십” 이미 본인이 언약궤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궤를 뒤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미 본인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언약궤를 따라가라고 하는 그 리더십이 그대로 발휘되어서 백성들이 다 언약궤를 따라가는 역사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석판, 만나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입니다. 이 언약궤를 보고 쫓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가시니 하나님만 보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따르지 마시고 말씀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모세를 따라가다가 실패했어요. 모세를 따라가다 시내 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모세가 40일 동안이나 없어졌어요. 그때는 모세가 시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말씀을 받는 순간이에요.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입니까. 그런데 모세를 따르던 사람들은 지도자를 놓쳤기 때문에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해서 금송아지 만들고 우상숭배 했어요. 사람 따라가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교회에서도 왜 시험 들지요? 하나님 따라가는 사람은 절대로 시험 들지 않아요. 사람 따라가서 시험 드는 거예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때 우리가 시험도 이기고 환란도 이기고 모든 문제를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리더십입니다. 언약궤를 따라가는 리더십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백성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면 그는 실패한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리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리더십이어야 합니다. 나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요단을 건넌다는 것은 참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적으로 애굽에 있는 것을 죄 가운데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홍해를 건넌 광야생활을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신앙생활이 끝나고 나서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 땅 아닙니까? 가나안 땅을 영원한 천국에 입성하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생각할 때에, 요단을 건너려고 한다면 우리는 말씀 따라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친목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을 따라가는 거룩한 지체들인 줄로 믿습니다. 심지어는 목사가 없어도 여러분이 말씀 따라 살기만 하면 여러분은 삶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리더가 잘못되면 자기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자기의 종을 만들어요. 여러분은 인간 누군가의 종이 되지 마세요. 말씀의 종이 되어야 되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종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세요. 목사 앞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제도와 질서 상 순종해야 되는 것이지만, 여호수아의 말에 백성들이 순종해야 하지만 근본적인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지요. 제가 인간적으로는 무슨 권위가 있습니까? 아무 권위도 없어요. 다만 말씀을 선포하는 권위가 있을 뿐인 거예요. 그 말씀은 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사실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따라가게 만드는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여러분이 기관이나 부서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때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마세요. 예수님을 따라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을 만들어야 돼요. 사람은 멀리 있으면 다 귀해 보여요. 저 뒤에 계신 분! 제 피부가 어떻습니까? 깨끗해 보이지요. 가까이에서 보면 쭈글쭈글해요. 어제 어느 자매가 강단에서 찬양을 하는데 멀리서 보니까 피부가 백옥같이 예뻤어요.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엉망이었어요. 너무 가까이 보면 안 돼요. 적당히 봐야 돼요. 사람 사이도 그 사람을 잘 모를 때는 다 좋아 보여요. 그러나 알고 나면 안 좋은 것들이 보여요. 그러니까 사람 바라보면 안 돼요.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예요. 여러분! 사람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 바라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언약궤를 따라간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며 따라간다는 거예요. 언약궤를 따라간다는 것은 맥 놓고 쫒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짐을 지는 사람은 지고, 드는 사람은 들고 따라가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언약궤를 따라간다는 것은 그냥 따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법궤를 메고, 휘장을 걷고, 각 사람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싸서 지고 자기에게 맡겨진 짐과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 리더십으로 말미암아 맺혀지는 열매는 모든 사람이 사역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라 갈 때는 빈 몸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 하나라도 데리고 가는 것이 사역이에요. 오늘 교회에 나오실 때 유치부, 교회학교 아이 데리고 나오는 것도 사역이에요. 교회에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남편을 데리고 나오는 것도 사역이에요. 목장 식구를 카풀해서 데리고 나오는 것도 사역이에요. 나만 혼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며 나아오는 일꾼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백성으로 만들었어요. 오늘 우리가 옆 사람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쳐갈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에 나올 때도 생각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을 생각해보고, 돌아보고 나왔으면 좋겠어요. 목장식구들에게 전화라도 해보고, 서로서로 권면하고 교회에 나왔으면 좋겠어요. 상상으로 6.25 때를 생각해보세요. 피난 갈 때에 아버지는 지게에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잔뜩 짊어집니다. 그리고 아이들 손을 잡고 갑니다. 피난을 가는데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빈 몸으로 혼자 가면 그게 부모입니까? 우리는 먼저 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짐이 있어요.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엄마, 아빠, 형님, 누나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나만 혼자 믿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의 리더십이에요. 그들을 데려다가 다 주님 바라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목장이 살아날 거예요. 연약한 성도들이 살아날 거예요. 이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수백 명, 수천 명 앞에서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명을 잘 데리고 오는 것, 한명을 잘 보살피는 것, 한명을 믿음으로 잘 세우는 것이 리더십이에요. 3. 백성을 성결케 하는 리더십 여호수아는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따라가게 하면서 백성들에게 5절에는 성결하기를 명령합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따라해 보실까요. “백성을 성결케 하는 리더십” 영향력 있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느냐가 참 중요해요. 말에는 영향력이 있어요.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인 영향력이 끼쳐요. 서너 명이 모여서 한 사람을 비난하면 완전히 사람을 매도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려요. 그러나 어느 모임에서 칭찬하고 사람을 세워주면 긍정적인 분위기로 전환됩니다. 말 한마디의 영향력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어제는 우리 교회에서 행복한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이것을 놓고도 부정적으로 ‘교회에서 무슨 그런 이벤트를 해. 무엇 때문에 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말 한 대로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긍정적으로 ‘이것을 통해서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어.’ 라고 하면 그대로 되는 거예요. 이처럼 말에는 영향력이 있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에게는 영향력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귀를 닫고 있는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어요.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열 번 하던 사람이 다섯 번으로 줄일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줄어서 나중에는 긍정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성결하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백성들은 성결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어요. 성결 하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죄 짓지 말고, 부정적인 말 하지 말고, 나쁜 행동을 하지 마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라가는 너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모두가 말 할 수 있는 말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말, 사람을 살리는 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영향력 있는 말들이 우리 입에서 나와야 돼요. 들으면 힘 빠지고, 실망하고, 불평이 나오고, 원망 나오고, 교회 떠나고 싶은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오면 안 돼요. 따라해 보실까요. “말이 영향력이다.” “얘야 너 피곤하지 그래도 일어나서 교회가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영향력이에요. 자고 있는 아이를 가만히 놔둬 보세요. 아무 영향력이 없어요. 아침부터 TV스포츠에 빠져 있는 남편에게 “여보, 교회 갑시다.” 라고 말하면 그 말에 영향력을 받아서 교회에 나오는 분도 있어요. 그러다가 은혜 받고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 나오는 분에게 “교회 나오세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번 말해서 안 나오면 기도하고 또 가서 권면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라고 반복해서 계속 권면하면 “교회에 가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제가 바빠서요.” 라고 말하다가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서 나중에는 예수 믿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말의 영향력이에요. 말하지 않는 사람은 전도 못하는 사람이에요. 목사는 외쳐야할 의무가 있어요. “여러분! 새벽을 깨웁시다.” 아멘. 이 말을 듣고 분명히 새벽에 안 나오던 사람이 내일 새벽에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안 해도 돼요 그냥 쉬세요.” 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고 하던 사람도 안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말을 하느냐, 무슨 말을 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성결해라. 기도하자. 하나님 바라보자.’ 이것이 여호수아의 영향력이에요. 여호수아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말 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여호수아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죄가 물러가고, 악행이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목장 모임에서도 이렇게 말해 보세요. ‘이번 주에는 꼭 예배드립시다. 아무개 집에서 만납시다.’ 그러면 그 말 때문에 안 나올 사람이 나오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여호수아처럼 살리는 말,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 힘을 주는 말, 생산적인 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을 함으로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긍정적인 영향력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 나름대로 영향력을 주셨고, 장로님은 장로님대로, 권사님은 권사님대로 영향력을 주셨어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먼저 스스로 영성 관리를 잘 해야 돼요. 경건 생활과 영성 관리를 잘 하면서 연약한 성도들에게 믿음의 말을 심어주는 거예요. 그럴 때 믿음은 점점 커지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격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말 한 마디 때문에, 한 마디의 권면 때문에 그들이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번 사랑의 콘서트를 통해서 신현동, 원창동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106가정에 이불을 나누어 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것이 영향력이에요. 가서 그들을 섬기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자녀도 없고 혼자 사시는데 예수님 의지하고 사세요. 이 세상 살 날 얼마 남지 않았는데 천국 바라보고 사세요.’ 이런 말 한 마디에 영향력이 끼쳐지는 거예요. 4. 용기를 주는 리더십 여호수아는 이제 백성들을 앞에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도록 명령합니다. 평소에 요단강은 사람이 건너기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려는 때는 15절 말씀대로 곡식을 거두는 시기로서 항상 언덕에 물이 넘치는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을 밟고 건너라고 하는 것은 생명에 위험이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고 용기를 줍니다. 요단을 건널 수 있다는 믿음을 줍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용기를 주는 리더십입니다. 제사장들이 물속으로 첫발을 내디딘 후 물이 차례로 쌓여 더 이상 흐르지 않게 되었고 백성들은 건넜습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강바닥에 계속 서 있어야 했습니다. 언제 물이 다시 합쳐 요단강이 흘러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렇게 행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제사장에게 용기를 주었고 마침내 요단을 건너는데 성공합니다. 리더십은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쳐서 모든 한 명도 광야에 낙오되지 않고 요단을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아멘. 저와 여러분의 영향력을 통해서 주변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류우열 목사(인천 복된교회)
위기에서 보여준 요셉의 리더십/ 창47:13-26/ 2009-05-31
위기에서 보여준 요셉의 리더십 창47:13-26 제목을 다 같이 따라해 보실까요. “위기에서 보여준 요셉의 리더십” 지난 한 주간 동안 많이 우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속상해 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많은 분들이 상당히 우울한 가운데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전쟁이 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지낸 분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한 주간에는 우리나라가 위기 가운데 빠졌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위기를 관리하고 대처하는지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위기를 만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능력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지혜가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리더십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를 평가 할 수 있겠지요. 지난 주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과 북한 핵실험으로 인한 남∙북간 갈등에 관한 소식으로 인해 나라가 온통 소용돌이에 파묻혔습니다. 그래도 주가가 떨어지지 않고 환율이 폭등하지 않은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것을 보면 세계적으로 이 문제는 우리나라 내부적인 잠깐의 문제로만 생각을 할뿐 심각한 문제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소식은 사람이 위기상황이 올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을 한 그 분의 마음이 많이 힘들었겠지요. 자살한 그분의 속마음의 아픔과 구체적인 고통을 우리는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평생 신념처럼 지켜왔던 청렴이라는 것이 무너졌을 때와 자기를 도와주었던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고통으로 인해서 받는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검찰에서 가족을 수사하고 주변 인물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압박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압박감, 고통, 좌절감, 이루형용 할 수 없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었겠지요.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한 것입니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마음이 보수와 진보 두 쪽으로 나누어져서 나라의 민심이 이반되는 흉흉한 상황을 만나게 되었는데 또 이런 순간에 북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계속 발사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니 내부적인 문제 뿐 아니라 외부적인 문제까지 생겼어요. 정부는 단호하게 PSI에 가입을 하였고 이로 인해 북한은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아이들은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초등학교 학생이 청년 앞에서 근육 자랑하고 있는 거야.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야.’ 이렇게 국가적으로 큰 어려움을 만났어요. 개인이든 교회든 아니면 국가든 위기의 상황이 언제나 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위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압박이 오고, 상처가 오고, 문제가 오고, 여러 가지의 어려운 상황이 사방으로 조여 오면 무조건 죽어야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저는 자살이라는 것은 개인의 위기관리의 실패라고 봅니다. 절대로 영웅도 아니고 성공도 아닙니다. 자살을 영웅시하고 성공시하는 이 나라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로 인해 받게 될 남은 유가족들의 아픔과 좌절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또 국민들이 겪게 되는 좌절감이 얼마나 큽니까?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드립니다. 국민들에게도 위로를 드려야 됩니다. 역사 이래 이런 일이 없는데 이 일로 인해서 민족의 자긍심이 떨어지고 대한민국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말았어요. 이 기회에 자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살은 어떤 모습으로도 미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합법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인터넷과 신문에 보니까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 김인국 신부(사제단 총무)는 "자살을 하지 말라는 계명은 생명이 본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스스로 처분할 수 없다는 뜻"이라며 "노 전 대통령 서거는 비록 자살이지만 사회적 타살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므로 구원의 여지가 열려있다고 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생각일 뿐 자살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요즈음은 사회적인 타살이라며 자살을 합리화 시킵니다. 혹자는 자살은 우울증과 같은 질병으로 말미암은 죽음이기에 질병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합리화를 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우울증 없는 사람은 없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우울증이 있어요.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입장은 분명합니다. 자살은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으로 타살과 다름없는 살인행위입니다. 타살은 내가 남을 죽이는 것이고 자살은 내가 나를 죽이는 거예요. 또한 자살은 타살 이상으로 가족과 이웃에게 많은 상처를 남기게 되기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이 시대의 문제요 사단의 역사입니다. 생명존중은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흉년이 극심하게 되는 위기를 만난 요셉이 그 위기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이 민족이 당한 위기와 요셉이 7년의 기근을 만난 위기를 비교 한다면 지금 우리가 만난 위기는 큰 위기도 아닙니다. 7년의 흉년을 만났으니 얼마나 큰 위기 입니까? 이것은 국가의 생존, 존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위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크게 두 가지를 이루어냈습니다. 첫째, 기근에 빠진 백성을 기근에서 구하였습니다. 둘째, 나라가 왕을 중심으로 흔들림 없는 강성대국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근 가운데서 오히려 애굽은 강성 대국의 기초를 놓았다는 거예요. 오늘은 위기를 통해서 요셉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리더십이 있다고 믿습니다. 대통령만 리더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장만 리더십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혼자서 살아간다면 몰라도 둘 이상 사람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리더십은 상대방에게 주는 영향력입니다. 나를 통해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 그 사람은 좋은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나쁜 영향력을 미치면 그 사람은 좋지 않은 리더십을 보여주는 거예요. 요셉이 어떤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나 때문에 좋은 리더십이 전달되어 질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이런 경우도 있어요. 어떤 성도는 그 성도를 만나면 믿음이 올라가요. 이 성도를 만나면 낙심했던 사람이 힘을 얻어요. 이 성도를 만나면 소망을 갖게 돼요. 이 성도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할렐루야! 이 사람은 긍정적인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떤 성도를 만나고 나면 우리 교회가 다 부정적으로 보여요. 하나님도 믿고 싶지 않아요. 교회도 나오고 싶지 않아요. 이 나라 폭상 망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사람은 아주 부정적인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저와 여러분은 요셉처럼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살려 낼 수 있는 리더십이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1. 위기를 통해 세워진 리더십 애굽에 닥쳐진 상황을 보면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보여 주신대로 7년의 풍년이 지나고 7년의 흉년이 왔습니다. 7년의 풍년을 기억할 수없는 대흉년입니다. 가나안에 있던 요셉의 가족이 고센 땅에 정착한 후 흉년은 더 심해졌습니다. 흉년이 얼마나 심해졌는지 애굽과 가나안의 땅이 황폐하게 되었고 더 이상 수확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47장 14절로 15절을 보면 요셉은 저장했던 곡식을 돈을 받고 팔게 되는데 사람마다 가진 돈이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도 이것은 행복한 거예요. 돈은 있는데 곡식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돈이 아무 소용없는 거지요. 지금 애굽에는 돈은 없고 곡식은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행복이에요. 백성들은 돈이 떨어져 곡식을 살 수 없으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가축으로 곡식을 바꾸라고 합니다. 어렵다고 무조건 나누어 준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질서가 있었고 규칙이 있었어요. 그래서 가축을 가지고 오면 예를 들어 귀를 뚫는다든지 어떤 비표를 해서 정부 소유로 표시를 하고 다시 돌려주는 거예요. 그리고 곡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해에는 가축으로 곡식을 바꾸어 먹고 백성이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다음 해가 되어서는 더 심각한 기근이 진행 되어 돈도 가축도 없게 됩니다. 이젠 몸과 토지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요셉은 몸과 토지를 곡물을 주고 사서 바로에게로 소유를 옮깁니다. 그래서 몸은 바로의 종이 되고 토지는 국가의 소유가 됩니다. 그때 아마 종이 된 자는 다 귀걸이를 했을 거예요. 종 만드는 방법을 아세요? 내가 자원해서 종이 되고 싶을 때는 대청마루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뚫는 거예요. 그리고 귀걸이를 하면 종이라는 비표가 되는 거예요. 혹자는 요셉이 정치를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백성의 재산을 모아서 바로에게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백성의 재산과 자유를 박탈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군주중심의 정책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선정이 없었더라면 7년의 대 흉년에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고 나라도 개인도 망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백성을 살려내고 국가를 든든히 세우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리더십은 오늘 우리가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생각해야할 리더십 인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요셉처럼 살려내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요셉의 리더십은 살리는 리더십입니다. 요셉의 리더십은, 따라해 보실까요. “살리는 리더십” 아무리 리더십이 있어도 죽이는 리더십은 소용이 없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살리는 리더십을 보여 주셨어요. 반면 사단 마귀는 죽이는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즉 사단 마귀는 이 땅에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리더십을 발휘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주시고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리더십을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요셉의 리더십의 공통점은 죽을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셉은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리더십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인해서 죽을 인생들을 살려주시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을 가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하루 종일 먹지 못하고 굻었어요. 이 때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이적을 베푸세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더 되는 사람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시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이 장차 이루실 역사를 상징하는 기적이에요.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찢어서, 당신의 피를 흘려서 만백성에게 그 살을 떡으로 나누어주시고 그 피를 포도즙으로 나누어 주셔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이 기적을 보여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살려주시는 살리는 리더십을 베풀어주신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이 주변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이런 살리는 리더십이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서 살릴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만나지 못해서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살려낼 수 있는 살리는 리더십이 오늘 우리 속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목장별 VIP초청을 진행하고 있어요. 목장에서 살리는 리더십이 발휘되면 죽을 영혼, 아직 하나님 만나지 못한 영혼을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목장에서 살리는 리더십이 있으면 그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주의 사랑으로 돕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도 살리는 리더십,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도 살리는 리더십이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2) 평화를 이끌어낸 리더십입니다. 두 번째로 요셉의 리더십은 평화를 만들어내는 리더십이에요. 따라해 보실까요. “평화를 만들어내는 리더십” 먹을 것이 없고, 돈도 없고, 가축도 없으면 폭동이 일어납니다. 대 혼란이 일어납니다. 앞으로 인류의 최대 위기는 식량위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자연의 파괴와 아울러 몰아닥칠 대 기근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세계적인 혼란이 일어나겠지요. 요셉은 기근으로 인해 최대의 혼란이 일어날 상황이었지만 평화롭게 혼란을 가라앉히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평화의 리더십입니다. 우리가 소속된 어떤 모임에서 항상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하겠습니까? 아무리 유능해도 평화를 깨뜨리는 리더십은 결코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LG 경제연구소에서 위기를 극복한 CEO에게서 발견한 리더십의 공통점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들은 7가지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두려움을 다스리는 용기, 흔들림 없는 소신, 솔선수범의 진정성, 무난한 리더십에 대한 경계심, 사소함에 대한 관심, 바닥을 두루 살피는 소통, 포기하지 않는 초심 이라고 합니다. 이런 부분이 어우러져서 어려움에 빠졌던 회사는 부도와 분열의 위기에 휩싸이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오히려 발전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평화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 위기를 만났지만 초심을 잃지 않았어요. 소신을 굽히지 않았어요. 진정성이 있었어요. 이 민족을 살려내야 되겠다는 진정성 앞에 어떤 혼란도 없었고 평화로운 가운데 모든 문제들이 잘 해결 된 줄로 믿습니다. 3) 감사를 만들어내는 리더십입니다. 세 번째로 요셉의 리더십은 이런 것입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감사를 만들어내는 리더십” 기근을 만났으니 백성들이 원망도 할 만한데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곡물을 질서 있게 분배하였으므로 백성들은 요셉이 백성을 살리고자하는 중심을 이해하였습니다. 백성이 요셉을 믿고 따름으로 백성들의 마음과 요셉의 마음이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백성은 원망이 아닌 감사를 했던 것입니다. 25절에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요셉은 원망이 팽배할 상황에서 감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대통령 때문에 감사하다. 사장님 때문에 감사하다고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사장을 서로 안하려고 한대요. 사장처럼 힘든 것이 없어요. 벌면 벌었다고 욕하고 못하면 못한다고 욕해요. 제가 어떤 글을 보았는데 세상에 변호사가 많으면, 한 마디로 말하면 똑똑한 사람이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는 직업이 번성되는 나라는 다 망한다는 거예요.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람이 기업체 사장입니다. 기업체 사장님을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들 때문에 나라가 사는 거예요. 서로서로 주어진 조직에서 책임자들에게 감사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감사하고, 소속된 교회에서는 지도자에게 감사하고,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휘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4)백성으로 하나 되게 하는 리더십입니다. 엄청난 기근을 만났으므로 뿔뿔이 흩어져야 할 상황이지만 요셉의 리더십은 왕을 중심으로 하나로 똘똘 뭉치는 국가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하나 되게 하는 리더십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최대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나누어진 민심입니다. 지역감정으로 나뉘었고 보수 대 진보의 이념으로 나뉘었습니다. 이처럼 나누어진 민심을 하나로 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부시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을 볼 때에 부시는 보수적이고 클린턴은 진보적인 대통령이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이 우리는 형제요 친구라고 하면서 서로 위해 줍니다. 인터넷을 보니 지금의 오바마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이 한 일들을 다 뒤집어 놓아도 부시는 한 마디도 욕을 하지 않는 답니다. 절대로 전임자는 후임자를 욕하지 않는답니다. 클린턴도 부시에게 그렇게 했답니다. 후임자가 자기 주관대로 운영하는 거니까 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 그것이 잘못되었으면 선거로 평가 받으면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문제는 서로 헐뜯고 욕하는 것에 있습니다. 지금 퇴임하신 분들은 입 다물고 계셔야 돼요. 뒤에 오는 사람에게 욕을 하니까 민심이 갈라지는 거예요. 이 대통령이 잘못하면 5년 지나서 평가 받을 거예요. 이미 세워진 사람이 잘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음에 진보적인 분이 정권을 잡으면 그대로 또 맡겨두면 돼요. 서로 욕하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거예요. 흉년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면 백성의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나누어질 것인데 요셉은 오히려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만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기관을 맡았다가 누군가에게 물려주게 되었을 때 절대로 전임자는 후임자를 욕하면 안 돼요. 후임자도 전임자를 욕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조금씩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5)개혁하는 리더십입니다. 애굽 땅에 흉년이 들기 전에는 빈부의 차이가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흉년을 통해서 모든 땅, 가축과 재산이 바로 앞으로 넘어갔습니다. 국가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 모두가 소작농이 된 것이며, 신분상 바로의 종이 된 것입니다. 빈부의 차이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요셉이 백성의 인권을 유린한 것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약자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5분지 1의 세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요셉은 빈부차를 해소하고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고 나라를 중심으로 일들을 이루어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요셉 한 사람의 리더십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는 애굽, 흩어질 수밖에 없는 그 나라, 산산조각이 날 수 밖에 없는 그 위기가 지혜롭게 해결 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국가적으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있는 처소에서 요셉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살리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 되게 하는 말을 하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 평화를 이루어내고 서로 세워주는, 예수님처럼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게 하려고 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똑똑해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리더십은 이 나라를 하나로 만들 수가 없고 복된 민족을 만들어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가정이 흔들립니까? 여러분의 리더십이 요셉 같이 살리는 리더십, 하나 되는 리더십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하나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 간에도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직장에서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내려놓으시고 하나 되는 것에 헌신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 복된 성도님들의 발길이 머무는 그 곳마다 요셉 같은 리더십이 발휘되어서 여러분이 속한 작은 단체가 살므로 마침내 이 민족도 사는 역사가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요셉과 같은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살리는 리더십이 대통령뿐만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우리들에게까지 있게 되길 소원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민족이 회복되고, 강성대국이 되고, 선교대국이 될 수 있도록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류우열 목사(인천 복된교회)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 민18:1-7/ 2014-03-23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 민18:1-7 (민18:1)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족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너와 네 아들들은 너희가 그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니라 (민18:2) 너는 네 형제 레위 지파 곧 네 조상의 지파를 데려다가 너와 합동시켜 너를 섬기게 하고 너와 네 아들들은 증거의 장막 앞에 있을 것이니라 (민18:3) 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단에는 가까이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민18:4) 레위인은 너와 합동하여 장막의 모든 일과 회막의 직무를 지킬 것이요 외인은 너희에게 가까이 못할 것이니라 (민18:5)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단의 직무를 지키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민18:6)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 형제 레위인을 취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민18:7) 너와 네 아들들은 단과 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이울지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아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물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하면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그리고 많은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라고 하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참 빛이다 너희도 세상의 빛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랑이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하나하나 알아갈 때,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기뻐하시는 데로,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를 바로 잡으셨습니다. 온 우주와 천지만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대로 조금도 오차가 없이, 질서 있게 운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순서와 절차가 있어야 하고, 어떤 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수없이 강조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 말씀하십니다(레18:5, 26, 20:22, 신4:1).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곧 그 규례와 법도를 따라 행할 때에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고 그릇 행하면 혼돈과 파멸이 초래되고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레위 자손들이 자신들의 직무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교만하였다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고 다시금 하나님께서 질서를 확립하시는 내용입니다. 1. 제사장의 직무 그러면 제사장이 하는 일, 그들이 맡은 역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을 택하여 성별하실 때에는 기름을 부어서 성별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지만 특별히 성별의 의미가 있습니다. 민수기 7:1절을 보면 성막의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구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다른 똑같은 물건들이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이 되어서, 하나님께 드린바 된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세울 때에도 반드시 기름 뿔을 취하여 그 머리에 기름을 붓고 선지자가 그 머리에 손을 얻고 안수하여 왕으로 세웠습니다. 제사장을 세울 때에도 역시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장막 속에 있는 단이나 기물들 모두에게 기름을 발라서 성별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지명하여 부르시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거룩히 구별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의 소유이며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사43:1, 시100:3). 하나님이 거룩히 구별하여 택하신 것은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것은 주의 소유이며 특별히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사장은 하나님이 거룩히 구별하여 택하신바 되었습니다. 제사장은 선별된 레위인 중에서도 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론의 자손만이 되었습니다. 아론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바로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와 법도는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엄위한 것이어서 그릇 행한 자는 가차 없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잘못 행한 나답과 아비후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불로 드리지 않았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아론의 다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의 직분을 맡은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이 제사장들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사하셨고 기도와 간구를 들으셨으며,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통하여 응답하셨습니다. 구약시대 제사장의 역할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모든 성도는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게 되었고 모든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중제 역할을 해야 하는 막중한 직임을 부여받았습니다. 베드로전서 2:9절 말씀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 이 놀라운 직임을 잘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레위인의 직무 그러면, 레위인들의 직무는 무엇일까? 제사장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라면 당시에 레위인들은 제사장과 백성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는 사역 역시 거룩한 것이어서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며 의복을 빨아야 했습니다(민8:7). 레위인들은 제사장들과 같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존재였지만 그러나 제사장은 아니었습니다. 레위인들이 하는 일은 성막의 모든 기구들을 돌보고 정리하며 아론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레위인들의 직무는 제사가 아니라 성소에서 섬기는 일, 즉 제사장인 아론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기는 일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이 귀한 것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섬김을 귀히 여기십니다(요12:26). 마태복음 20:28절에서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분은 그 자체가 섬김을 위한 봉사직이요 이는 매우 귀한 직분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몸을 떠받드는 발이 없다면 온전한 몸을 이루지 못하여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안성에서 목회할 때 6,25 때 부상을 입은 상이용사 집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별로 하는 일은 없지만 교회 출석만큼은 열심히 나오셨습니다. 주일날 제일 먼저 앞자리에 앉으십니다.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어김없이 자기 자리에 앉으십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 후, 이 집사님이 앉으셨던 자리가 얼마나 썰렁하던지, 한동안 제 마음이 썰렁하고 아쉬움과 서글픔을 금치 못했습니다. 시골교회는 교인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젊은이들은 다 도시로 떠나가고 노인들만 남아있습니다. 그 집사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저는, 죽음이 임박한 사람을 보면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여!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그 자리만 앉아 있게만 해 주세요.” 저는 가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날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무 일을 하지 않으셔도 단지 내 옆에 그냥 계시기만 해도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때로 자기 자리에 앉아만 있는 것도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임은 분량의 차이는 있어도 우열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은 자는 주어진 일에 충성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직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직무이므로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충성하여야 합니다. 3. 고라의 반역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의 일당이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반역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제사장은 하나님이 거룩히 구별하여 세우신바 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세와 아론에게 대한 도전은 하나님께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고라 한 사람이 시작을 하였는데 이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총회에 택함을 입은 족장 이백 오십 명과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온이 당을 지어 대항한 것입니다. 고라는 레위 자손인데 그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택하사 거룩케 하셨는데 왜 유독 모세와 아론은 모든 총회 위에 서서 높은 보좌에 앉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라가 바라보는 모세와 아론의 행위는 눈에 가시처럼 심히 오만하고 매우 교만한 것 같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크게 노를 발하면서 민수기 16:7절 이하에 보면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별하여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모든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주를 섬기게 하셨는데 그것이 작은 일이냐?” 하고 반문하면서 호통을 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직무가 귀한 줄도 모르고 제사장의 직분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과 직임은 사람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실 일입니다.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과 한계가 있습니다. 다 머리가 되고 손이 되길 원한다면 누가 발이 되겠습니까? 이들의 죄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은 것입니다. 로마서 12:3절 말씀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은 어떤 것이든 간에 귀한 줄 알고 주신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해야 합니다. 코는 열심히 냄새를 맡고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귀는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코가 생각하기를 나는 매일 더러운 코를 머금고 있어야 하는데 차라리 손이 되면 좋겠다 생각해서, 냄새도 안 맡고 숨을 안 쉬고 단식 투쟁을 벌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부 다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모든 부분들이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자기도 살고 모두가 다 건강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심판 고라와 다단의 반역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을 멸하려 작정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하나님, 한 사람이 범죄 하였는데 어찌 모든 사람을 멸하려 하십니까?” 하고 간구하여 결국 반역에 가담한 자들과 그 가속들 그리고 그들의 물건들까지 다 멸하시고 그들을 따랐던 족장 이백 오십 인을 멸하는데 그렸습니다(민16:22). 그런데 그 이튿날이 되니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또 원망하기를 “너희가 무고한 백성을 죽였도다.” 하면서 온 회중들이 모여 모세와 아론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실로 앞뒤를 분별치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시작될 때, 회막을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으로 나타나 회막을 덮었고 하나님의 음성이 모세에게 들리기를 “너희는 회중에게서 멀리 떠나라 내가 저희를 진멸하리라” 하였습니다. 제사장 아론은 즉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향로를 가지고 백성들에게로 달려갔는데 벌써 염병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이 향로를 들고 죽은 자와 산자들 사이에 섰을 때 염병이 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채찍을 드셨으나 제사장 아론이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할 때 하나님께서는 즉시 채찍을 거두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을 통하여 백성들의 제사를 받으시며, 제사장들을 통하여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약속을 주님은 지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 언약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세우신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는 그쳤으나 이일로 인하여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 명이었습니다(민16:49). 5.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원망하였습니다. 심지어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을 축출하려는 백성들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처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금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친히 구별하여 택하시고 세우신 주의 종이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들의 대표자들을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그들의 지팡이에 각각 자기들의 이름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론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날 터인데 너희들은 이것을 보고 더 이상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17:5).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보니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론의 권위를 높여서 성직의 존엄성을 보여주시고 망령된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반역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표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6. 권위의 확립 그래서 주님은 다시금 질서를 바로 잡아 주시고 그들의 직무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말씀하십니다. 1)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신 제사장 직분(민18:1∼2) 제사장은 제사장 직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직무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하거나 다른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직무를 침범하도록 내버려두거나 아니면 그들의 권한 밖의 일을 한다면 제사장들은 그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중요한 직임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2) 레위 지파에게 주신 성소에서 섬기는 직분(민18:3∼6) 레위인들의 직무는 제사가 아니라 성소에서 섬기는 일, 즉 아론의 아들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기는 일보다 섬김을 받는 것이 더 귀한 것인 줄 알지만 하나님은 섬김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직분은 그 자체가 섬김을 위한 봉사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그것을 맡기신 분은 주님이시기에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항변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요구하십니다. 똑같이 다섯 달란트를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다 다섯 달란트를 달라고 항변할 이유도 없고 그것을 부러워 할 이유도 없습니다. 맡기시는 일은 주님이 친히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고 적게 맡은 자들에게는 적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신 직분이 무슨 직분이든지, 그것이 주가 주셨기에 감사함과 감격함으로 받고, 자기의 자리를 잘 지키고, 주신 분량만큼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어서, 주 앞에 섰을 때 잘했다고 칭찬 받는 신실한 종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