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교회력과 음악목회 / 부활절
교회력과 음악목회 / 부활절 (정소영) -------------------------------------------------------------------------------- 부활절 (Easter) 고난기간의 슬픔과 비탄 후에, 복음의 완성인 부활의 사건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기쁨과 환희는 1년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은 크리스챤의 새 생활의 시작이 되고, 말씀의 완성이며, 물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세례가 시작되는 날이다. 그동안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던 것을 이때 부터기독교는 주께서 부활하신 주일의 첫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하여 주의 부활을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예배와 성찬을 계속함으로써 부활의 신비를 늘 새롭게 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한때 부활주일 부터 성령강림 주일 까지 50일을 매일 주님의 날, 즉 부활의 날로 지키면서 할렐루야를 부르며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50일을 지냈다. 오늘날 대개의 개신교회에서 부활절의 기쁨과 행사가 그날로 끝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 한다. 승천일과 성령강림 주일까지 부활절의 기쁨은 계속되야 한다고 본다. 의식 예배극 (Liturgical Drama)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무덤을 방문하는 의식이 새벽에 행해 졌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제일 먼저 만난 두 여인으로 분장한 사제가 무덤에 가고, 거기에서 찬란한 천사의 옷으로 분장한 사제가 두 여인을 향하여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다!"고 말하여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면 처음 두 사제는 찬양대와 그 옆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분장한 다른 두 사제에게 와서 함께 다시 무덤으로 달려간다. 거기에서 이들은 빈무덤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예수의 몸을 감쌌던 흰 수의를 들고 나와 사 람들에게 보여준다. 이때 찬양대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와 "유월절의 제물이 되신 주를 찬양합니다"를 노래 한다. 이와 같은 의식이 계속 발전하여 10세기 경에는 의식예배 연극이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의식 예배극은 부활절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에도 있었다. 이와같은 의식 예배극을 부활절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갖는다면 그 예배는 더욱 극적일 뿐만 아니라 더욱 의미있는 부활절 예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 새벽예배 부활절의 새벽예배가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그 근원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복음서의 부활에 대한 기사에 근거를 둔 듯하다. 즉 요한복음 20장 1절에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라고 기록된 것을 재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부활절 새벽 예배는 우리가 이미 위에서 밝힌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과, 해(그리스도의 빛)가 솟음으로 밤(죽음의 권세)을 이기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의미가 덧 붙여진다고 본다. 대개의 경우 부활절 새벽예배는 각 교파의 목사와 모든 교회의 교인들이 함께 모여 연합으로 드린다. 이때 성가대도 연합성가대가 조직되어 거대한 새벽예배를 갖는 것이 한국이나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부활절의 제단은 백합화와 흰색으로 장식하고, 목사와 성가대의 스톨(stole)도 사순절과 고난주간의 보라색에서 흰색으로 바뀐다. 그리고 제단의 촛불을 킴으로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임재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알렐루야를 반복해서 부르고 대영광송도 불려진다. Te Deum과 같은 승리적인 대 합창곡이 연주되고, 특별히 승리의 상징이 되는 나팔과 브라스 앙상불(brass ensemble)로 찬송가를 반주하게 한다든가, 또는 성가대의 합창과 함께 연주하게 하면 부활절 예배의 분위기가 훨씬 더 고무 될 것이다. 이날 대체로 찬양대 특송으로 Handel의 할렐루야를 많이 부르는데 크리스마스 때 이를 많이 부르기 때문에 부활절에는 Beethoven의 할렐루야를 부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교회력에 관한 고찰 - 부활절
교회력에 관한 고찰 - 부활절 호남신학교 김충환 교수 -------------------------------------------------------------------------------- 부활절은 초기 3세기를 통해 모든 교회가 지켰던 유일한 절기이다. 또한 이 부활절은 교회력의 모든 절기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교회력의 근원을 제공하고 있다. Josef Andreas Jungmann, Der Gottesdienst der Kirche, 201. 이 부활절(독: Ostern, 영: Easter) 명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부활절 명칭의 어원적 근원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그 근원을 앵글로색슨의 봄의 여신인 Eoster 혹은 Ostare에 두고 있다. 이 축일은 해마다 춘분에 행하였다. 둘째로, 이 기원을 고대 게르만 단어인 austrovon (aust=Ost)의 파생으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상징화시켰다고 보고 있다. D. William Nagel, Geschichte des christlichen Gottesdienstes, 234. , 부활절과 그 기쁨과 승리의 기분은 원시 교회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이 부활절은 초대 설교자들의 전도 활동의 원동력이었으며 동시에 설교의 핵심이 되었다. 2세기 후기에는 이 부활절을 언제 지키느냐가 논쟁이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세상의 구원이 유대의 절기인 유월절과 연결된 후에, 이것은 기독교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지켜지게 되었다. 즉 오늘날까지 이 부활절은 달력으로는 유대교의 유월절과 연결되어있다. 서아시아에서는 부활절을 유대교의 유월절인 Nisan 유대인들은 월력을 지키고 있다. 이에 따라 매 달은 초승달로 시작된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새해를 Nisan월로 시작하고 있다. 이 Nisan월 14일 즉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에 이들은 유월절을 지키고 있다. 월 14일에 시작하였다. 이에 반해 로마에서는 Nisan월 14일이 지난 후 주일을 부활절로 지켰다.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날을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부활절이 음력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부활절은 주중의 날에 관계없이 3일 후에 지켜졌다. 이들은 성금요일을 Nisan월 14일이라 믿었다. 이에 따르면 한 예로서 성금요일(Nisan월 14일)이 당해 화요일로 되면 부활절은 목요일에 지켜졌다.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Quartodecimans(열 넷째 날장이)"라 불리었다. 이에 반해 서방에서는 부활절이 언제나 일요일 즉 부활일에 지켜져야 하며 십자가 처형은 언제나 금요일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여기어졌다.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중(週中)의 날이 중요하였고, 동방교회에는 달(月)이 중요시되었다. 이 분쟁은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해결되었다. 여기서는 달과 주중의 날이 다 인정되도록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부활절을 춘분 다음 첫 만월 후 첫째 주일에 지키기로 하였다. 부활절은 언제나 유월절 때에 온다는 것과 또 언제나 주일에 온다함을 양측에 확증시켜주었다. 그러나 춘분을 정하는 데에도 난점이 생김에 따라 3월 18일부터 25일 사이의 여러 날자가 사용되어 상이한 부활절을 지켜왔다. 5세기에 이르러 천문학과 수학 연구가 활발하였던 알렉산드리아 감독에게 해마다 부활절 일자를 정하는 책임이 주어지게 되었다 A. J. Wegman, Liturgie in der Geschichte des Christentums, 74-76. Josef Andreas Jungmann, Der Gottesdienst der Kirche, 201; Edward T. Horn, {교회력}, 161-162. 이러한 날짜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부활절에 주님께서 고난 가운데서 역사 하시고 또한 부활하심으로 완성하신 그 주님의 구원하심을 감사하며 또한 기리고 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주님의 부활은 그들 생활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 부활절은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까지 지켜졌다. 이와 함께 주님의 부활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자리잡도록 7주간 동안 부활 주간이 계속되었다. 부활절은 토요일저녁 예배로 시작하였다. 이 예배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을 감사하며 밤새 진행되었고, 성서낭독이 있었으며, 세례식과 성찬 성례전이 거행되었고, 아마도 촛불예배로 진행되었다. Horace T. Allen, A Handbook for the Lectionary, 28. 이러한 초대교회의 부활절에 대해 딕스(Dom Gregory Dix)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부활절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을 단순히 기억하고 기념하기보다는 구원에 관한 예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은 물론 이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는 방법이었다. '그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시간과 죄,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고난, 부활, 그리고 승천의 사건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사고 속에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다. Dom Gregory Dix, The Shape of the Liturgy (New York: Seabury Press, 1983), 338-339. 4세기에 이르러 부활절이 성금요일과 연관되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고난과 무덤에 묻힘,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3일(Triduum)의 연속성이 부각되었다. 이 오래된 3일(tridumm passionis)은 현재 고난 주간에 지켜지는 3일(tridumm sacrum) 성 목요일(Gr ndonnerstag), 성 금요일(Karfreitag), 부활절 전 토요일(Karsamstag)과는 구분되어 이해되어져야한다. Josef Andreas Jungmann, Der Gottesdienst der Kirche, 201. 이 시기에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다수의 시편들이 예배에 사용되었고, 목요일에는 시편 68-76편만이 사용되었다. 이는 목요일은 당시의 부활절 3일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부활절과 관련되어 많은 관습들이 생겨났다. 어떤 것은 기독교적인 것이고, 다른 어떤 것은 비기독교적인 것이다. 일부 동방교회에서는 사제들이 부활절 전날에 교인들의 각 가정들을 찾아가 부활절 음식에 축복하여 주는 관례가 남아 있다. 이는 원래 오랜 수난절 금식 기간 동안에 금지되었던 음식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일부 중세기 교회에서는 수난절 초에 강단에 묻어 놓았던 관에서 알렐루야를 다시 꺼내거나 혹은 성 금요일에 안치한 관에서 그리스도의 초상이나 십자가 등을 꺼내는 관습이 행하여졌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부활절에 달걀 염색과 달걀 굴리기가 행해졌다. 이 달걀 굴리기는 백악관에서 매디슨(Madison)대통령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유럽에서는 잘 준비된 부활절 연극이 부활절 이브에 상연되었다. 스위스 고올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된 14세기의 한 대본에 따르면 부활절 극이 9막 35장에 이르고 있다. 이 대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부활까지 다루고 있다. 또한 홀란드에서는 여기에 창조, 루시퍼의 타락, 인간의 타락, 발람, 이사야 그리고 구세주를 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dward T. Horn, {교회력}, 169. 한 주간의 첫날에 이루어진 부활의 역사는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큰 생명이다. 그러므로 매 주일은 주님의 날로서 기독교 교회력에서는 또한 이를 작은 부활절로 강조하고 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과 영광을 함께 하는 새로운 존재를 경험하는 기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 (신학용어) -------------------------------------------------------------------------------- 그리스도의 부활 (희)avaoraois (영)resurrection (독)Anferstehung 초대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승천하게 하여 "아버지의 우편에" 앉게 하셧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확신은 신약성서 신앙의 중심적인 내용이 되었다. 또한 기독교 사상사에서도 중심이 되었고, 특히 불사성(immortality) 신앙의 기초가 되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정적인 계시와 창조자 하나님의 주권의 입증으로 그리고 죄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한 승리로 간주되었다. 이 "권세"는 매우 분명하게, 즉 사탄은 "이 세상 신"(고후4:4)이며, "이 세상 임금"이며 "공중의 권세잡은 자"라고 기록되어있다. 사탄은 혼자 있지 않으며 마귀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 그리고 "이세상초등 학문"을 데리고 있다. 다른 한편 하나님 주권의 세계 정복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말론적 상징주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많은 이적 중에 있는 단순한 하나의 이적이 아니라 "시대의 표적" 이며 창조행위와 비교가 되는 우주적 행위였다. 이 부활은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 믿는 신앙의 기초가 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권세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한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신앙은 현재의 생활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정통신앙에서는 영생을 믿는 신앙의 기초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직분의 하나로 간주했다. 신앙의 본질상 성서비평은 부활신앙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수긍보다는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반어 들은 다음과 같다. 성서 비평은 자유주의 개신교에서 시작되어 성장했기 때문에 부활은 소망의 소산으로 간주되었고, 역사적 조회는 신약성서의 확고하고 기적이 아닌 신앙, 즉 예수의 인격과 교훈을 확증했다. 그리고 부활의 구심성(centrality), 특히 예수의 설교 안에 종말론적 요소가 결정적으로 들어있는 것을 발표한 것은 바로 이 성서비평 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Christ)
그리스도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Christ) (성서 교리학) -------------------------------------------------------------------------------- (a) 부활의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독특한 이적이다. 이 부활의 실재성을 한 번 기정사실로 설정하고 나면 복음서에 기로되어 있는 여타의 이적에 대하여는 왈가 왈부 토론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더욱이 이 이적을 믿느냐 안믿느냐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 설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기독교는 천 구백여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있었던 확실한 사건에 그 가르침의 기초를두고 있는 역사적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그의 탄생과 그의 전도와 죽음과 장사 지냄과 부활이다. 이 여러 가지 사건 중에서도 그의 부활은 가장 중요한 관석이 된다. 왜 그러냐하면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그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의죽음이 대속의 죽음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기독 교인들은 여러 세기를 두고 내려 오면서 속은 것이요 설교자들은 거짓을 설교한 것이 되며 신도들은 헛된 구원의 소망에 기만을 당해 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부활의 교리에다 의문 부호를 부치지 않고 감탄 부호를 붙일 수 있게 된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b) 부활의 증거 "기독 교인들은 빈 무덤의 냄새를 맡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어떤 불란서의 회의주의자는 말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아침에 예수의 시체에 향을 바르러 왔던사람들이 그의 무덤이 텅 비여 있었던 것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다. 무덤이 텅비어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의 부화르이 사실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설명될 길이 없다. 만일 유대인들이 우리 주님의 시체를 어디서든지 발견해 낼 수만 있었다면부활을 전하는 최초의 설교자들의 증거를 논박하기는 매우 용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면 기독교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확실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매장된 채로 그대로 있을것이 분명하다. 오순절날 생명있고 빛나는 교회가 어떻게 죽은 지도자로부터 탄생할 수 있었으랴! 그러면 부활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본 사람들의 증언을 어떻게 취급해야할 것인가? 부활 수에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 본 사람 중에 그와 더불어 말한자도 있고 그의 몸을 만져 본 자도 있고 그와 더불어 같이 식사한 자들도 있었다. 바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본 자들이 아직도 많이 살아 있다고 바울은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영감된 증언을전해 주고 있지 않는가? 너무나 정직하고 성실하여 거짓된 멧세지를 전하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증언을 어떻게 받다 드려야만 옳은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만일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보지 못했다더라면 어떻게 그가 위대한 전도자의 한 사람으로 개종할 수 있었을가?위에 열거한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부인하게 위하여 온갖 노력을 해왔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잃고 실망 낙담한 그의 제자들이 감히무장을 하고 시체를 기티고 있는 로마 병정들로부터 그 시체를 빼앗아 올 용기가 있었을까! 그런데 현대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다."제자들은 다만 환상을 보는 체험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수백명의 사람들이 동일한 환상을 보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상상할 수 있었을가!또 그렇게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수께서 실제로 죽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졸도했던 것에 불과하였는데 십자가에서 그 시체를 내렸을 때에 그는 아직도 생명이 붙어있었다." 그렇다면 창백하고 피기 없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예수가어떻게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 특별히 회으심을 품고 있던 도마에게 자기가 부활하신 생명의 주라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 있었을가! 위에 열거한 현대 학자들이 설명은 너무나 빈약한 것이기 때문에 논박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재 확인하는 바이다. 자유주의 신학잗 드웨테 (De Wette)씨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씨자가 암살당한 것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인 것과 꼭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부활의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바 아니다. (c) 부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가 되신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주장에 대한 세상의 대답은 십자가이며 하나님의 대답은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속죄의 죽음이 하나의 실재라는 것을 뜻한다. 곧 인간은 자기의 과거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과 화목할수 있게 되었다. (롬4:25). 부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평범한 하나의 죽음이아니며 또한 죄를 제거할 수 있는가?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때문이다. 동정 많은 우리들의 대제사장은 하늘에 계신데 그는 우리들의 생명을 위하여사셨고 우리들의 슬픔과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매일 매일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또한 우리를 위하여 사셨다 (롬8:34,히7:25).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죽었다 살아나서 내세에 대하여 말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로 보톤 사람들은 내세를 부인하려고 한다. 그러나 죽었다 살아 난 사람이 있다즉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 부활하였다."만일 사람이 죽었다 다시 살수 있느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과학은 다만 "알 수 없다"고 대답할 뿐이다. 또한 철학은"내세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죽었다가 사신 것처럼 우리들도 죽었다가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 불멸의 사실을 입증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원불멸을 보증한다 (살전4:14,고후4:14,요14: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미래에 있을 심판에 확실성을 의미한다. 영감 받은 사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1). 예수께서 분명히 죽음에서 부활하여 인간의 심판자가 된 것처럼 인간들도 분명히 죽음에서 부활하여 예수님에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령과 부활
그리스도의 성령과 부활 (성서 교리학) -------------------------------------------------------------------------------- 성령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어서 살리시는 영의 구실을 하였다.(롬1:48:11)부활하신지 몇 일 후에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숨을 내쉬면서"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20:22,행1:2 참조). 이 말씀은 능력의 부여를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받기 위하여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어떤 성서 학자들은 여기서예수께서 숨을 내쉰 것은 그로부터 오십일 수에 일어날 사건을 상징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창2:7 을 비교해 볼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 넣는 행위는 창조적 행위를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후에 그리스도는 살려주시는 영 또는 생명을주시는 영으로 기술되었다. (고전15:45). 이와 같은 경우에 생명의 주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 함으로 알 수 있게 할 수는 없었을가? 열 한 제자들은 새로운 임무를 수 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파송되기로 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승하여실천해야만 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승하여 실천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사명을 자기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었다. 이는 마치 생명 없는 육체가 산 사람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음과 같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생명을 주시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옛 사람에게 숨을 불어 넣으신 것과꼭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사람에게 숨을 불어 넣으신다. 만일 우리들이 이 경우에 있어서 성령의 참다운 부여를 인정한다고 하드래도그러나 이는 보혜사의 인격 자체가 아니라 전달된 그의 생명을 영감이라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위스콜 (Wescott) 감독은 "부활절의 선물"(TheGift-of Easter)과 "오순절의 선물" (Gift of Pentecost)이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활절 선물은 부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요 오순절의 선물은 승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 된다." 즉 다시 말하면 전자는 살려주시는 은혜요 후자는 부여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약개론:바울의 신학) -------------------------------------------------------------------------------- 구원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1. 구원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및 受肉 신의 은혜 행위는 신이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주어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음과 함께 구원 사건을 이룬다. 바울은 이것을 전승으로 받았다. 그러나 수육에는 독자적인 의미가 부가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행위의 통일성을 이룬다. 이 죽음에서 증명된 된것은 그의 순종이다. 바울에게는 예수가 교사도 예언자도 아니다. 인간적인 규범에 의해 예수를 평가하는 것은 육에 따라 그를 평가하는 것이다. 2. 문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 사건이 선행된 신의 은혜의 행위라는 것과 인간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그것의 능력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순수히 신에 의해 제기된 사건이다. 문제는 이 사건이 어떻게 은혜의 행위로서 인간에게 경험될 수 있는가이다. 3. 개념성들 a) 속죄제물 : 이 개념은 유대교적 제사 사상과 법언어적 사유의 개념성을 사용하여 표현한 것이다. b) 대속 제물 : 속죄제물과 유사한 것으로 제사 - 법정 용어 사유의 영역에서 생긴 것이다. c) 속량 : 율법의 저주에서 죄에 대한 벌에서 속량하는 수단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한다. 속량에 의해 얻어진 자유는 율법 자체에 대한 자유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책 즉 범죄함으로 정해진 형벌을 도말하는 제물이며 율법과 죄, 죽음에서 자유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d) 밀의 종교적인 죽음 : 예수의 죽음으로 야기되는 그 작용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묘사된 것이다. 이것은 세례와 주의 만찬을 통한신성에의 합일로 나타나 있다. e) 영지주의적 신화 : 이 사상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구세주와의 통일 즉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신자들은 반신적 세력에서의 해방을 경험한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우주적인 사건으로 묘사한다. 4. 두 신앙 개념 바울이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유대교적 제사 및 법 사유의 범주들로 논술 하는데 한정시키지 않고 밀의종교적인 그리고 영지주의적인 신화의 규범을따라 기술하였다면 그것은 구원사건이 실제로 인간에서 수행되는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앙의 행위와 동시에 신앙 개념을 둘로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선재적인 신의 아들을 통한 신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이고, 신의 은혜에 대한 신뢰로 지금까지의 인간의 자랑을 철저히 포기하는 신앙을 말한다. 5. 그리스도 승인과 새로운 자기 이해에서의 신앙의 통일성 어쨋든 바울은 신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신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 그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그의 자아를 죽음에 던지자로서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구원 사건이 어디서도 선포하고 말을 걸고 요구하고 약속하는 말에서 현재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도 확실하다. 즉 구원 사건은 말로서 수행되고 항상 현실에서 수행뙤므로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이는 믿는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결합된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선포의 말에서 결단을 내려아 할 실존의 가능성으로 되고 신앙이 그것들을 이해하고 믿는 자의 실존을 규정하는 세력들로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 先在 및 受肉, 復活 a) 구원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사건으로 인식되는 것은 십자가의 말이 듣는 자 앞에 세우는 결단의 물음에서 유래한다. 이 사건은 언제나 현재에서, 선포되는 말에서, 성례전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들 속에서 수행된다. b) 선재와 수육 : 그리스도의 선재와 수육은 그것이 신의 종말론적 행위라는 사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수육은 그 자신의 순종과 사랑의 행위로 앞서오는 신의 은혜와 사랑에 관한 신의 인정을 받은 선포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선제에 관한 말에서 신화적 표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선재성이 믿어지면서 동시에 듣는 자에게 적중되는 신의 말의 있음이 수긍된다. 선재자를 창조의 중개자로서 말할 때 신앙은 창조와 구속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 케리그마의 말에서 만나는 신의 사랑이 그 근원을 영원 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말한다. c) 부활 : 이는 객관적으로 증명,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부활한 자를 주로 승인하는 신앙 이전에 통찰될 수 없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아버지에게 반환할 때 까지 소유하는 왕좌에 그가 올라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그리스도는 부활한 자로 현재한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통해 자신을 보인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바울신학/ 2015-06-29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A. 바울의 회심의 사건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있는 사울은 예수가 바로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행2:25-28; 시16:8-11 (참고 눅24:27).) 선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하였으며, 더욱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 즉 메시야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삼일만에 다시 부활케 하셨다 하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말에 분노하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한다하고 특히 스데반을 신문할 때 증인으로 섰고, 돌에 맞을 때에는 그가 사형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행 7:55-58, 8:1.) 주장하였으며, 또한 다메섹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넣기 위해 산헤드린에서 발급한 정식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강한빛을 보매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 이때 그는 눈을 뜰수 없었으며 홀연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나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하셨다. 동행인들은 그소리만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였다.(행 9:6-9)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야를 만나 아나니야의 인도에 따라 시력을 회복하였으며, 그에게 세례받고 모든 사람 앞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보고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증인이 될 것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바울의 다메섹 도사에서 회심의 사건은 사도행전에 삼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회심의 표현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9장 7절에는 동행인이 소리는 들었으나 보지는 못하고, 사도행전 22장 9절에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고, 사도행전 26장 13절과 14절에는 밝은 빛이 내려와 함께 가던 사람들은 두루 비추었다 하였다. 문제는 표현하는 글에 뜻있는 것은 아닌 줄로 안다.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맨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자였던 사울은 그를 복음전하는 사도로 부르시는 소명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B. 회심의 신학적 의의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의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기록과 바울 자신이 쓴 서신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전설적이고 객관적인데 비해, 바울 자신이 쓴 서신( 갈1:15-16; 고전9:1-2; 고후4:5-6.)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실상 바울의 회개의 계기는 바로 바울 자신의 주관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이방에 복음을 전파할 주의 사도로 쓰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였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행22:21; 고전15:8-10; 엡3:7; 갈1:1; 엡1:1; 딤후1:1.) 그리고 바울의 신앙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기의 잘못된 신앙관을 깨닫고 회심한후 그의 신앙은 180도로 변한 철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믿었다.(빌 3:7-9) 바울은 회심 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율법적인 신앙관을 바꾸어 복음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됨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을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하셨다고 하였다.(갈 1:15-16) 하나님은 바울의 전 생애를 영광가운데 인도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자기의 성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 했다.(엡 3:7-9) 바울의 이같은 확실한 신앙은 마침내 자신을 이방인들을 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불같은 사명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골 1:25)(딤후 1:9-11) C. 부활에 대한 바울의 확신 바울 자신도 회심 이전에는 일반 유대인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유포한 한낱 유언비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 들이야말로 기존 유대 종교를 혼란시키는 이단자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다는 확증을 얻게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에 보면 그가 극적인 내적 각성을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가 전환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요 또한 바울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전경연, [신학성서 신학서설]. 서울:사상계사. 1955, p.132.)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에서 여러번 언급하고 ( 고전15:1-21; 롬1:4; 고후5:15; 빌3:10-11; 롬6:5-10.) 있으며, 고린도후서 5장1절에서 21절에는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을 다루고 있고 기독론의 기초가 되어 있다. 예수 부활의 사상이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만큼 '핵심적인 것' 이었는지는 데살로니가 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다.( 롬6:47:4; 고전6:14; 고후13:4; 갈1:12:20; 고전15:21-22; 엡1:20; 빌3:10-11; 골3:1-3; 살전1:105:10; 딤전2:5-6; 딤후2:8; 딛2:14.) 바울은 부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단호하게 선언한 것은 고린도전서 15장 15절에서 19절에 잘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도 신학적인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얻은 최대의 사건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그의 모든 생활의 초점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 안에서의 삶에 맞추었다.( 갈2:19-20; 고후5:13-15; 빌1:20-213:7-9,10-14.)
바울 신학으로 본 부활
바울 신학으로 본 부활 고전15장은 이른바 `부활장`으로서 사도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 전파 곧 (케그리마)도, 거기에 따른 믿음, 곧(피스티스)도 헛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바울 사도가 힘있게 증거한 예수 부활사건은, 오늘 우리 모두 경건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 죽어 장사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확실히 믿으며 또 고백? 한다. 과연 기독교는 확신으로 넘치는바 생명의 종교요, 또한 부활의 종교이다. 예수께서는 그 자신을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요11:25)고 하셨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부활하심 에 대해 확신하기 바란다. 그림설명 / 그리스도의 부활 : 이 유화의 초기 형식을 묘사한 것을 보면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전에는 생략되었고 이미 텅빈 무덤의 뚜껑을 여는 천사를 보고 수직하던 자들이 놀라 떤다고 하는 마태의 기술을 충분히 지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부활의 광경을 그려달라는 주문에 따라 후에 그는 그리스도의 자태를 화면에 첨가하였던 것이다. 또한 세사람의 여 자들(눅 16:1-8) 이 아니고 두 사람만 묘사한 점도 마태복음에 따라 묘사했기 때문이다. 패널 위의 캔버스.유화. 상부원형.92*67cm 1639년 제작. 뮌헨 회화관 소장. 바울이 쓴 서신과 사상에서 그의 강조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희생적인 죽으심과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 부활사상이 어떻게 바울 사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는가는, 그가 데살로니가 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한 그의 모든 서신 서에서 부활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고 또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했다.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는 그의 말 첫마디도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였다. 또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롬6:4, 7:4, 고전6:14, 고후13:4, 갈1:1, 엡1:20.) 바울은 또한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이와 같이 전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골2:12) 이라고 했으며,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가장 풍부한 교훈을 하고 있다. 그는 우선 무엇보다 부활에 관한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그의 첫마디 말은 이러하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노니,"(고전 15:3)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그는 교회의 표준이 되는 가르침에 관해서 전했다. 이는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의 터무니없는 전개나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초창기부터 교회 안에 구체적으로 있었던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전승에 대한 증거와 관련해서 바울은 몇 가지 사실을 더욱 첨가해서 전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내놓은 증거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이신 실례들을 명단으로 나열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 느니라"(고전15:4-8)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간접적으로 전해듣고 받아드려야 했던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 사건이었으며, 또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할 수 있는 사건이었으며, 또한 그의 증거는 직접적인 것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였다 한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산물이었으며, 하나님이 친히 하신 행위였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4절에서 "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불멸의 능력에 대한 완벽한 증거였다. 또한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최종적인 증거였다. 그는 로마서 1장 4절에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말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은 오실 메시야는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왕으로 오실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메시야와 마주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 관과는 모든 면에서 거리가 먼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그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역사가 필요했다. 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시키는 한 가지 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들이 꿈꾸던 사상을 초월한 승리요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부활하신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강조하였다. 실례를 보면 사도행전 13장 14-43절에 바울이 바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 회랑에서 설교한 내용에 대해서 누군가 진술하고 있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 바울이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들면서 예수의 메시야 되심에 관해서 유대인들을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쓴 서신이 바로 히브리서이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온전한 대제사장으로 여기는 사상은 히브리서의 특징이 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는 그 사상을 최소한 한번 사용했다. 로마서 8장 27절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중재 곧 중보의 기도를 하시는 것에 대해서 기록했다. 또한 로마서 8장 34절에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했다. 바울 사상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사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재판장으로 보는 사상이라 하겠다. 그 사상은 로마서 14장 9, 10절에서 볼 수 있 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 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한때 인간들이 재판 석에 앉아서 신문을 하고 또 인간들에게 정죄를 받으신 바 있는 바로 그 예수님이 모든 사람이 나아가 그의 심판석 앞에서야 할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라 했다. 바울의 사상중에 매우 깊게 뿌리 박혀 있고 그가 소중히 여기는 사상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부활의 능력이라는 사상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자신의 삶의 최종 목표들 가운데 하나를 밝히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에베소서 1장 19-20절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에 관해 말하기를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사 하신 그 능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인이 영위할 새 생활과 연관시키며 또 그리스도인을 옷입히는 새로운 선행과 연관시켰다. 로마서 6장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로마서 7장 4절에서도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하였으며,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그리 스도께서 약하심으로(인간적인 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희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현존하는 능력이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철저한 필연성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14-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 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이와 같이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그리스도인을 보증하고 보호하는 위대한 진리로 믿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위대한 진리들의 보증이 된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이르렀다. 인간들은 그 진리를 무시하고, 말살하고 파괴하려고 했지만 그러 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할 수 없는 것임을 증거 하는 최종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2) 또 그것은 선이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 하신 선이 셨다. 인간의 죄는 그 선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선이 결국에는 그것을 대항하고 있는 모든 악을 반드시 정복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3) 또 그것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단지 한번만에 멸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생명을 멸할 수 없는 것임을 증거 하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4) 또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함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영원토록 파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의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들의 모든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미움에 대항을 모두 좌절시킨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 아니며, 하나의 신학적 교리도 아니다. 그 사건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사실이다. 이 사실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체험한 사실을 입증한다. 바울의 이러한 윤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살아 계셔서 현존하는 주님의 역사인 성령을 통해서 입증되어 있다(롬6:1-9,8:1-2).
바울의 기독론
바울의 기독론 바울의 메시지의 기본 요지인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인간사 속에서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안에 두고 있다. A.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세상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인간의 삶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갈4:4 (참고 요1:1418).) 이것이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교리이다. 바울은 성육신을 두가지 면에서 인식했다. ⑴ 성부 편에서의 성육신 인식 바울에게 성육신은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한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모든 사람이 입고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롬8:3; 갈4:4-5 (참고 요1:14))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롬5:8, 8:39 (참고 요일4:9).)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고후5:19; 골1:19-20 (참고 요일4:10).) 그의 은사는 말할 수 없는 은사이다.( 엡2:4-5 (참고 요1:1816; 약1:17).) 그와 같은 사랑의 행동 즉, 성육신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상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었다. ⑵ 성자 편에서의 성육신 인식 여기서 바울은 그 만이 볼 수 있는 독특한 면에서 성육신을 이해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땅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영원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시기 위해 무엇인가 고귀한 것을 포기했다고 믿었다. "그는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9:8) 이라고 말함은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세상이 있기 전부터 예정되었으며, 그 출발이 영원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엡1:4-5; 딤후1:9.) 바울의 이러한 사상이 빌립보서 2장 5-15절에 완전하게 나타나 있다. 거기서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권한을 갖고 계시면서도 그 권한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인간이 되신 점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복종에 대해 말한다. 예수는 권세와 능력과 만물을 다스릴 왕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러나 그는 왕이 아니라 종으로 세상에 왔다. 그는 명령하러 온것이 아니라 도리어 순종하려 왔다. 그는 죽음에 복종하였다.( 롬5:19; 히5:8 (참고 마20:28).) 그의 죽음이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빌2:8 (참고 마27:3850; 막15:2537).)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인간들을 위해서 즉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포기해야 했던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바울은 이 성육신의 실제성을 여러번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완전성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보았다. 또한 로마서 1장 3절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실제로 육신을 입으심으로 후손이 되었다는 사실이 로마서 맨 처음에 나온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세상에 보낸 사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실제성에 대한 기록은 복음서와 요한서신에서도 볼 수 있다.( 눅1:26-312:10-12; 요일4:2-3.)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로 보았다. 또 그는 성육신을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엡1:3-12.) 바울에게 예수님의 인성은 대단히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의해서만큼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의 내용이 많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볼 때, 그리스도의 삶은 구원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만큼이나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였다. 왜냐하면 이는 바울이 쓴 가장 어려운 내용들 중 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구원의 사역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바울의 서신가운데 주로 두곳에 나온다. 고린도전서 15장 21-22절에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는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생명의 능력사상이 가장 충만하게 나타난 곳은 로마서 5장 12-21절이다. 이 두서신의 구절들의 기본 사상은 로마서 5장 19절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구절의 요지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모든 사람들이 아담이 범한 동일한 형태의 죄를 범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어떤 죄를 짓는 성향을 물려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범했다는 그 사실이 모든 사람들을 죄인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아담안에서 범죄했다는 이 사상으로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죄와 관련되어 있다. 즉 아담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도 죄인이 되었다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를 증거하였다. 바울의 논증 가운데는 확실한 기본적인 단계들이 있다. ① 바울의 논증의 기본은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죽음은 죄로 인해 왔다는 것이다.( 롬5:126:20-21,23.) 죄가 없었다면 죽음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② 아담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 곧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그것으로 아담은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또 그 때문에 죽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 롬5:126:23 (참고 창2:16-173:17-19,히9:27)) ③ 그러나, 바울은 아담의 이 특별한 죄안에서 모든 사람들도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 이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었다."고 하여 로마서 5장 13-14절에 논증하였다. ④ 그러면 왜 율법도 없었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어야 했나, 하는 것이다. 그 답변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연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했다 하였다.( 롬5:17216:12.) 바울의 논증의 요지는 율법이 존재하기 전, 따라서 죄가 성립될 수 있기 전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담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온전한 의와 온전한 순종을 드렸다. 그래서 아담의 죄안에 연관되여 있던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악하고 끝없이 계속되는 죄와 죽음의 결박 속에서 해방케하였다.( 롬8:1-2; 히5:8-9.) 즉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죄안에서 죄인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의로운 자되게 하였다. 이와같은 바울의 논증가운데는 영원한 진리가 내재해 있다. 즉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이 될 수 없는 상황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죄로 인한 사망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롬3:23-24; 갈3:16; 빌3:9.) 이로 볼 때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의인됨을 강조하였다. B.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본질적인 중심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내가 너희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했으며 또 갈리디아 교인들에게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다.( 고전1:232:2; 갈6:14.) 이와 같이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확실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지혜의 아름다운 말로 가르치지 않았으며," 또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가 그들 보는 앞에 밝히 계시되었는데도 어찌하여 그들이 실족하였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고전1:172:1; 갈3:1.)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자체에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장벽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 고전1:18; 엡2:13-14; 골2:14-15.) 바울은 자신의 사명의 최우선적인 임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대해서 어떤 꾸미는 말 없이 그냥 사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어떤 진리를 발견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에 관해서" 기록했다. 또한 그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살전 5:10; 엡5:25.) 십자가의 사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리고 구속의 사상은 바울의 신학 사상 가운데 긴밀하고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 사실은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빌3:20.) 그가 말한 한 간략한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으심으로 인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5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다. 이 말씀 속에는 두개의 사상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율법주의적인 안목에서 건지시고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세력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함을 보이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② 하나님은 율법 아래 있는 그들이 당해야 할 형벌들에서 구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유사한 것처럼 보이는 이 두개의 요소를 함께 묶어서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여기서 구속이란 인생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별에서 용서와 은혜를 입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은 자유함을 성취한 것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었다. 바울은 거듭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죄와 연관시킨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이다.( 고전15:3.) 또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서두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또 그는 로마서에서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신 우리 주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했으며" 또한 바울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자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이야기 하였으며, 그리고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한다.( 갈1:4; 롬4:25, 5:6,8.) 이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신 크고 기본적인 사역은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이었다는 사실과, 또 그결과 그의 공생애와 특히 그의 죽으심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잃었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바울의 사상을 생각하는 데에 한가지에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희생"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며, 또 에베소서 5장 2절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했다. 이 보다 더 바울사상 전체에 대한 열쇠이자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한 구절을 바울이 쓴 서신들 가운데 찾을 수 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이 바로 그 구절인데 거기서 바울은 이와 같이 말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이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구출받은 것을 기념한 아주 유명한 이스라엘의 절기였다. 유월절 이야기의 진수는 그 이름 자체에 있다. 영원토록 간직될 유월절의 진수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그 집의 가족들을 죽음의 형벌로부터 구출한 것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다. 바울의 사상 가운데 이와같은 사상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들을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받게 될 죽음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바울에게도 과연 그랬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가장 실제적인 의미에서 인간들을 위한 하나의 희생물이 된다. 이 희생이야말로, 인간들을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영혼의 죽음에서 건지시는 희생이었다. 바울은 이 사상을 뒷받침하며 강조하는 진술을 두차례 이상 했다. ①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진술과 ② 고린도후서 5장 21절의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인간들의 죄와 또한 바울 자신의 죄를 위한 최상의 희생제물이 됨을 알았다. 이제 바울이 사용한 모든 표상들을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① 법앞에서 취한 표상으로 "칭의"가 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그가 마치 선인이었던 것처럼 대하신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 도덕적인 혼란이 생긴다. 따라서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누군가가 치러야 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바울이 말한 대로 "이제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것이다.( 롬3:25-265:9; 고후5:21.) ② 우정에서 취한 표상으로 "화목"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행실이 깨끗하거나 마음이 청결한 자가 아닌 한, 아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래 속성상 흠없이 정결하고 거룩하여 죄인으로서는 가까이 갈 수 없다. 그러면 누군가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바울은 말한다.( 롬5:10-11; 딤전2:5; 골1:21-22.) ③ 노예에게서 취한 표상으로 "구속, 해방"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받아야 한다. 그러나 노예의 세계에서 노예인 본인이 몸값을 치르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다. 혹 자비가 많은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몸값을 치르면 된다. 인간의 노예 해방은 반드시 그의 몸값을 치러야만 한다. 죄많은 인간이 그 죄에서 해방되려면, 누군가가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희생을 해야 하는 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바울은 말한다.( 갈3:13; 롬5:8; 고전7:23-24; 롬14:8.) ④ 가정에서 취한 표상중 "양자"삼음이라는 것이 있다. 세상 법에서도 양자로 입적하려면 정해진 절차를 거쳐야 한다. 즉 새로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절차를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가 자격을 갖추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말한다.( 롬8:15; 갈4:53:25.) ⑤ 희생으로부터 취한 표상으로 "속죄"라는 것이 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죄를 지으면 참회의 표시이자 증거를 하기 위해 소나 양을 희생시켰다. 그러나 바울의 경험으로는 소나 양같은 짐승을 희생시켜 죄를 대속할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러한 희생을 마땅히 찾아야 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희생이 되어서 그러한 희생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하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엡1:7; 히9:12 (참고 벨전1:18-19).) ⑥ 바울이 사용한 마지막 표상이 있다. 그것은 바울의 마음에 매우 가깝게 있던 표상이다. 그것은 "회계(계산)"을 통한 표상이다. 바울의 사상은 지기 계산에 하나님과 균형을 맞출만한 사람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도저히 지불 능력이 없을 정도의 빚을 하나님께 지고 있으나, 그러나 하나님의 지비안에서 그의 빚은 면제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빚의 댓가로 그에게 돌려진다. 이로서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의로 옷입게 된다 한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어떤힘이나 혹은 우리가 노력함으로 해낼 수 있는 자신의 자격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앞과 그분의 가족 앞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역사를 보았다. 또 바울이 본 이 하나님의 역사란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일을 가능케 하셨다고 말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도는 바울신학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한 바울의 복음이기도 하다. 그런고로 십자가의 도는 화목하는 도요, 하나님의 아들되는 도요, 구원받는 도요, 복음이다.( 고전1:18; 롬1:16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이심 - 고전1:24).)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우리가 자든지 깨든지 함께 살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살전5:10; 갈2:205:24; 고후5:15.) C. 부활하신 그리스도 바울이 쓴 서신과 사상에서 그의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희생적인 죽으심과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 부활사상이 어떻게 바울 사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는가는, 그가 데살로니가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한 그의 모든 서신서에서 부활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했고 또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했다.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는 그의 말 첫마디도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였다. 또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롬6:4 (참고 7:4); 고전6:14 (참고 고후13:4); 갈1:1; 엡1:20.) 바울은 또한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이와 같이 전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 골2:12.) 이라고 했으며, 또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가장 풍부한 교훈을 하고 있다. 그는 우선 무엇보다 부활에 관한 사실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그의 첫마디말은 이러하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노니,"(고전 15:3)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그는 교회의 표준이 되는 가르침에 관해서 전했다. 이는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의 터무니없는 전개나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초창기부터 교회 안에 구체적으로 있었던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전승에 대한 증거와 관련해서 바울은 몇 가지 사실을 더욱 첨가해서 전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내놓은 증거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이신 실례들을 명단으로 나열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15:4-8.)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간접적으로 전해듣고 받아드려야 했던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 사건이었으며, 또 그가 목격자로서 증언할 수 있는 사건이었으며, 또한 그의 증거는 직접적인 것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였다 한다.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의 산물이었으며, 하나님이 친히 하신 행위였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4절에서 "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했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불멸의 능력에 대한 완벽한 증거였다. 또한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최종적인 증거였다. 그는 로마서 1장 4절에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말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오실 메시야는 영광과 권세와 능력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할 왕으로 오실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메시야와 마주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관과는 모든 면에서 거리가 먼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그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역사가 필요했다. 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시키는 한 가지 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들이 꿈꾸던 사상을 초월한 승리요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부활하신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강조하였다. 실례를 보면 사도행전 13장 14-43절에 바울이 바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 회랑에서 설교한 내용에 대해서 누구가 진술하고 있는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 바울이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들면서 예수의 메시야 되심에 관해서 유대인들을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쓴 서신이 바로 히브리서이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온전한 대제사장으로 여기는 사상은 히브리서의 특징이 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는 그 사상을 최소한 한번 사용했다. 로마서 8장 27절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중재 곧 중보의 기도를 하시는 것에 대해서 기록했다. 또한 로마서 8장 34절에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했다. 바울 사상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사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재판장으로 보는 사상이라 하겠다. 그 사상은 로마서 14장 9, 10절에서 볼 수 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리라." 한때 인간들이 재판석에 앉아서 신문을 하고 또 인간들에게 정죄를 받으신 바 있는 바로 그 예수님이 모든 사람이 나아가 그의 심판석 앞에서야 할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라 했다. 바울의 사상중에 매우 깊게 뿌리박혀 있고 그가 소중이 여기는 사상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부활의 능력이라는 사상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자신의 삶의 최종 목표들 가운데 하나를 밝히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에베소서 1장 19-20절에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에 관해 말하기를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사하신 그 능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인이 영위할 새생활과 연관시키며 또 그리스도인을 옷입히는 새로운 선행과 연관시켰다. 로마서 6장 4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했다. 로마서 7장 4절에서도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자들 가운데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하였으며,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인간적인면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희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현존하는 능력이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철저한 필연성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14-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이와 같이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그리스도인을 보증하고 보호하는 위대한 진리로 믿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래와 같은 네가지 위대한 진리들의 보증이 된다. ①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이르렀다. 인간들은 그진리를 무시하고, 말살하고 파괴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할 수 없는 것임을 증거하는 최종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② 또 그것은 선이 악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 하신 선이셨다. 인간의 죄는 그 선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선이 결국에는 그것을 대항하고 있는 모든 악을 반드시 정복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③ 또 그것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단지 한번만에 멸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생명을 멸할 수 없는 것임을 증거하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④ 또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함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영원토록 파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들의 모든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미움에 대항을 모두 좌절시킨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 아니며, 하나의 신학적 교리도 아니다. 그 사건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사실이다. 이 사실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체험한 사실을 입증한다. 바울의 이러한 윤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살아계셔서 현존하는 주님의 역사인 성령을 통해서 입증되어 있다.( 롬6:1-98:1-2.)
부활
부활 1.의인의 부활.................................눅14:13-14 2.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한 자들.................눅20:35-36 3.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죽은자들을 일으킴..눅20:37-38 4.아들은 그가 원하는 자를 다시 살린다.........요5:21 5.생명의 부활과 멸망의 부활...................요5:28-29 6.죽음에서 일으켜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임......요6:44 7.그리스도는 부활과 생명이다..................요11:25
부활 RESURRECTION
부활 RESURRECTION -------------------------------------------------------------------------------- (헬,아나스타시스)'일어남' (엥게르시스) '일으킴'이란 뜻. 성경적 의미의 부활이란 낱말은 죽은 사람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한다. 그것은 나사로의 경우처럼(요11:38) 일시적으로 되살아 나는 때도 있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영화로운 영생으로 되살아날 때도 있다. 그리고 크리스챤도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일으킴을 받아 영생을 누릴 것이다. 성경은 또한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를 믿지 않다가 죽은 자의 몸과 영이 부활하여 영원한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마10:28,요5:2829 행24:15)."부활"이란 낱말의 용법을 분류하여 보면,보통은 "죽은 자의 부활"이란 표현이 사용되었다(마22:31,눅20:37,행4:217:3223:624:2126:23,고전 15:12). 신자들의 부활은 "의인들의 부활"이란 말이나(눅14:14,행24:15)"생명의 부활"이란 말이나 (눅14:14,행24:15),"생명의 부활"이란 말로(요5:29),"악인의 부활"이란 말로(행24:15)표현되었다. 신앙고백문에 자주 나오는 "몸의 부활"이란 표현은 성경에 입각한 것이다(마27:52,롬8:11,고전15:3542-44,빌3:21).초대 교부들과 신앙고백문들이 증거한 초대 교회는 "육의 부활"이란 구절을 도입하였는데,이 귀절은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 신앙고백문 속에 나온다. 교회가 이 표현을 채용한 것은 많은 이단들이 몸에 대한 영원한 미래를 부정하면서 죽은 자"란 낱말을 "죽은 영혼들"이란 뜻으로 이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몸이 부활한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죽은 자는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성경의 진리를 강조하였다.이 표현은 성경 자체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를 보존해야 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은 "몸의 부활"이란 표현 속에 나오는 "몸"이란 낱말이 신체적인 몸을 배제한 "자아"나 "인격"을 뜻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I.절대 무오한 성경의 지식 이교는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지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엡2:12,살전4:13).헬라 철학은 "영혼의 불멸성"을 가르쳤다. 영혼은 신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육은 물질이므로 약하며,여기에는 어떠한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헬라 철학은 생각하였다. 헬라인들은 바울의 부활 설교를 조롱하였다(행17:32).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부활에 대한 희망을 현대적인 영혼의 불멸성론으로 환원시켰다. 즉 인간의 참된 "자아"는 물질적이고 유령같은 영적인 몸 속에서 계속 존속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부정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에게 있어서 종말은 "영원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현세의 삶을 끝낸 뒤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신 속에서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Church Dogmatics III/2,698 ff. III/3,99ff. 257ff.).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영혼은 신적인 것이 아니며 불멸적인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그 존재의 전국면에 걸쳐 "심히 좋았"으며 그 몸과 영으로 영생할 운명을 부여받았다(창3:22).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몸으로부터의 해방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의 몸과 영이 죄와 죽음의 권능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가 신자들에게 허용한 것이다(요6:4011:24-26,고전15:54-56). II.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역사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마22:29,고전6:1415:38 고후1:94:14).이러한 역사는 주의 사자를 통하여 실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란 예언자와 사도들이다(왕상 17:17 ff.왕하 4:32 ff. 행20:10).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했다(요5:216:3940).예수 자신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그는 생명과 불멸성을 드러내었으며(딤후1:10),그가 영광 가운데 부활한 것은 크리스챤의 부활은 보증하는 것이다(고전15:20-23:47-49,살전4:14 ff.)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모른채 살다 죽어 간 자들을 일으키신다 할지라도,그들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행한 구속사업은 본질적으로 구속적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심판관으로서 그들을 일으키실 것이다(요5:26-30). 각자는 그의 손으로부터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심판을 받을 것이다. 고후5:10). III. 구약에서 본 부활과 부활에 대한 희망 A. 역사기록 : 구약에 보면 사르밧에 사는 과부의 아들(왕상17:17ff),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32ff),rm 시체가 엘리사의 묘실로 던져진 남자 등 세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물로 s이에 대해서는 그 과부의 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충분한 실증을 eof 수가 없다. 이 세가지 경우의 부활이 지상의 삶으로 잠정적으로 되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실례들은 죽으 s자를 부활시킬 수도 있는 하나님 여호와의 전능하신 권능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돈독하게 만들었다. B. 부활에 대한 증거가 초기에는 자주 나오지 않았다는 점 : 구약에는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는 구절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구절은 퍽 후대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희망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강조하였으며(출20:12),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미래가 있다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오직 점진적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죽음을 정복할 때까지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완전한 희망을 알지도 못했고 향유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참 신자들은 모세가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신32:39)라고 노래한 그들의 강대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즉 그들의 몸 뿐만 아니라 또한 영을 위하여) 이생의 삶보다 더 큰 것을 마련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여기서 "몸 뿐만 아니라 또한 영을 위하여"라고 한 것은,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면 양자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말하였다(11:19). 한편 히브리서 11:8-16절에 보면,족장들은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기대하였으며, 가나안 보다 "더 나은 본향"을 원했고 "이 사람들은 다 믿음에 따라 죽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구절들이 비록 초기의 모호한 형태이긴 하지만 부활에 대한 희망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이 부활에 대한 희망은 나중에 가서 하나님의 부활의 권능이 뚜렷이 나타났을 때 더욱 커졌던 것임에 틀림없다(III의 A)을 보라)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영생을 얻은 에녹(창5:22-24,히11:5)과 엘리야(왕하 2:1112)의 "승천"도 몸과 영을 가진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향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더욱 강화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이스라엘적 희망의 원천을 고대 "세계의 민간 전승"이나 "일반적인 종말론적 사건"에 관한 이론 및 여타 지방에서의 가르침에서 찾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이에 대하여 지지할 수도 없는 일이다(IDB,I,p,41). C. 구약에 표현된 부활에 대한 희망 : 이 점에 관하여 우리가 고려해 보아야 할 구약의 주요 구절들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는 우선 사무엘상 2:6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한나의 노래를 고찰해 보겠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한나가 실제적인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가는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항상 행하시는 바를 언급한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6절은 여호와께서는 음부의 문 앞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거둘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보존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이 항목에서 다루고 있는 이 구절과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대한 세밀한 해석에 관해서는,The Nature of the Resurrection Body[1964]를 보라). 한편 욥은 말하기를(19:25-27),"내가 알기로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하였다. 현대의 주석가들은 대부분 논리정연한 사상의 흐름을 보아 이른바 사후(post-mortem)해석론이 정당한 것 같다. 즉 욥은 그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자(히<꼬엘>)로 일어나셔서 그를 변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는 것이다. RSV은 '밉베사리'(mibbesari)란 히브리적 표현을 "나의 육으로부터"(from my flesh)라고 번역하였는데,이것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죽은 자로부터 부활한 후 욥은 다시 회복된 육 바깥에서 그 자신의 눈으로 신적인 심판관이 그를 변호하는 것을 볼 것이다. 정신사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2부활에 대한 이러한 희망이 생각될 수도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이러한 주장에는 문제성이 있다(cf.3의 2).한편 시편 16:9-11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라.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다. 9절에 나오는 '신체기간의 평행귀'(praallelism membrorum)는 이 세상에서 몸(또는 육체-인격)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9절 하반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요불가결하다. 그러나 여하튼 "이는..."으로 시작되는 10절은 미래의 부활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구절은 생명의 완전한 승리를 일반적이고 절대적인 용어로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그의 부활시에 드러낼 영광스러운 영생을(행2:26ff.13:35ff).예언자적으로 볼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번에는 이사야 25:8절 상반절을 보자. "만군의 여호와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라했다. 이 구절은 행간 사이에 적어 넣는 간결한 평주가 아니며, 열국에 퍼진 탄식과 슬픔의 베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7절과는 자연스럽게 연속된다(참고.삼하 15:30,에6:12,렘14:3).이사야 25:8절 하반절은 이 상징적 베일이 없어져야 하는 까닭을 여호와가 죽음 그 자체를 완전히 멸절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만민을 위하여"마련된 종말론적인 연회에 대하여 감동적으로 묘사한 6절의 틀 속에서 8절은 여호와의 위대하신 날에 죽음이 절대적으로 파괴될 것에 대하여 명확히 이야기한다(참고 고전 15:54,계21:4).한편 이사야 26:19절에 보면,"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고 했다.14절과 비교해 볼 때(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미래에 부활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이 죽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19절은 의롭게 죽은 자들의 종말론적이고 육체적인 부활을 예언하는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롭게 죽은 자들이란 13절에 나오는 "다른 주들" 아래에서 죽어 간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뜻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일반적"인 부활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결코 일반적 부활이 그 당시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 누릴 위안은 오히려 일반적 부활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다(참고 25:8 절 상반절).에스겔 37:1-10절은 이미 마른 해골(뼈)골짜기의 환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뼈들은 생명을 잃은 채 서로 떨어져 있었으나 성령의 강한 능력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는데 이것이 곧 부활을 뜻한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이 환상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회복할 것에 대한 예언이며(11-14절),이는 죽은 자가 장차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통속적인 신념을 전제한다고 한다. 이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에 대해 실증자료를 댈 수는 없다. 또한 다니엘도 12:2,3절에서 부활을 예언하였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가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다. 선지자 다니엘은 가까운 장래에 전례없었던 환난을 당할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로하였다.(1절).이들 중 대부분은 여호와를 위하여 목숨을 내 던져야 했었다. 이러한 순교자들은 영광 속에서 육으로 부활한다는 확신에 의하여 위로받았다. 그러나 여호와를 부인한 자들은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입을 것이었다. 물론 이 구절에는 죽은 자들 일반의 부활이라는 사상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다니엘이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당하여야 할 동포를 위로하고자 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의 예언은 종말론적인 몸의 부활 신앙에 대하여 확고한 증거를 제공해 준다. 그 다음 호세아 14:13절은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고 선포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생각나게 하는 말투로 죽음과 무덤에 대한 완전한 승리에 관하여 말했다(고전 15:55).물론 이것은 호세아 13:14절이 죽은 자의 부활을 예언하였다는 뜻이 아니다.문맥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에 대한 심판이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14절을 자연스럽게 해석하여 보면 에브라임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러므로 죽음과 음부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여호와도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위에서 말한 바의 결론을 내려보자.구약은 매우 명료한 것으로부터 조금 모호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다양하게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지 이교 사상으로부터 채용한 것이 아니다. IV.정경 이외의 자료에서 본 부활 고대 유대교 및 기독교 시대의 비정경 자료에도 (사해 두루마리,탈굼,탈무드.외경 및 위경) 부활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이 표방하는 개념과 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이 구절들에 대하여 논의할 수 없다(T.H.Gaster, IDB,IV,pp,41-43을 보라). V. 신약에서 본 부활 A. 명사 및 동사 헬라어 아나스타시스는 죽은 자의 영적인 부활이나(눅2:34 참고.엡 2:15:14) 육적인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예수와 모든 사람은 마지막 날에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 신약 도처에 이에 관한 구절이 나와 있다). 한편 헬라어 엥게르시스(문자거으로는 깨어남"이라는 뜻)는 오직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마27:53).이러한 명사와 상관되어 흔히 쓰여진 동사에는 아니스테미와 엥게이로가 있는데,이 동사는 타동사로서('일으키다'란 뜻이다) 하나님의 주도권과 활동을 강조하며,특히 예수의 부활이나(행2:2432. 3:26. 17:31),활기를 띠게끔 자극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사용되었다(신약 곳곳에 나옴: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자주 사용되었음). B.역사기록 1.예수의 부활과 상이한 죽은 자들의 부활.예수 자신은 야이로의 딸(막5:35ff. 및 평행귀절),과부의 아들(눅7:11ff),나사로(요11:11ff)등 여러 사람을 다시 살리신 적이 있다. 예수가 사망하였을 때 죽어 있었던 성자들이 많이 일어났다(마27:5253).한편 베드로는 도르가를 일으켰고(행9:36ff.) 바울은 유두고를 일으켰다(행20:9ff). 예수가 죽은 자를 일으키신 것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예수를 통하여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가져다 준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마11:5,눅7:22,요11:25).잠자던 성자들이 신비스럽게도 많이 일어섰다는 기사도 이와 꼭같은 방향을 취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도르가와 유두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예수의 제자로서 여러 가지 치료 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행3:616:18,고후12:12,참고 마10:8).이 모든 부활은 예수가 갖고 있었던 부활의 권능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부활은 오직 죽을 수 밖에 없는 현세의 삶으로 되돌아 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최종적 승리는 종말이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2. 예수의 부활은 금요일 저녁 예수가 죽어 장사한지 사흘만인 일요일 아침에 일으났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 자신이 만인과 상이한 것처럼 여타의 부활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성육신 한 하나님이요(요1:14), 죄많고 잃어버린 인류를 상징하는 마지막 아담이요(롬5:12.ff,고전 15:45ff),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유일한 중재자요(딤전 2:5),죽음의 권세를 가진 악의 역사를 파괴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요(히2:14,요일 3:8),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딤전 1:15).이러한 능력을 갖고 계셨던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죽으셨으며(롬4:25),"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rausom)으로 주셨으며"(딤전2:6),"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고"(롬4:25),"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그는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사셨으며(빌3:21),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롬6:9).그는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는"대제사장이며(히7:16),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참되고 영광스럽고 무궁한 생명의 원천이 되셨다(요3:166:56ff,11:25,26.14:19,고후13:4,딤후1:10,계1:18).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예수의 부활과 부활하신 주의 현현을 최초로 기록하였다(고전 15:3ff,참고 11:23).바울에 의하면 복음서의 설교와 그리스도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헛될 것이라고 한다(고전 15:17). 예수의 부활에 대한 교회의 신앙이 입각하고 있는 세부적인 빈무덤 및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 기사는 복음서에 나온다(마28장,막16장,눅24장,요20,21장).예수의 부활에 대한 완전한 논의에 관해서는 부활(예수 그리스도의)을 보라. C.죽은 자의 부활. 1.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모두 일으키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신약은 죽은자 모두의 부활을 명료하게 가르친다. 즉 신약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간에 오로지 그들의 업적에 따라 그들 자신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부활할 것을 가르친다(요5:2829,행17:31,롬14:10,고후5:10,계11:1820:11-15).하나님이 지향하는 목적은 인간이 그의 몸이 없이 존재하는 중간상태일 리가 없다(히12:23,계20:4).인간의 전체성(즉 몸과 영)은 영원을 위하여 지음받은 것이다. 그리고 심판은 각자가 그 몸 안에서 행한 바와 관계될 것이다(고후5:10).그러므로 몸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마10:2825:34,요3:365:29,계20:15).비록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심판관으로서의 그리스도(행17:31)가 죽은 자를 모두 살리겠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한 신자들의 부활은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하여 보증될 것이다(고전 15:20ff,살전4:14).고린도전서 15:22절의 빛 안에서 보면,22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사람 모두를 뜻하는 것 같다. 성경의 본질은 구원의 복음이므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부활에 관해서 신약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특히 저 위대한 부활장(고전 15장)은 오직 신자들의 부활만을 강조한다. 2. 그렇다면 죽은 자는 언제 부활하는 것일까? 신약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특별히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고전 15:5152, 살전4:16),죽은 신자들의 부활은 주의 재림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이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되살아나자마자 즉히 변화될 것이다. 만세에 걸친 신자들은 모두 영광된 성자들의 연합을 구성하며, 공중에서 그들의 구속자를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것이다. 처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그 아버지의 나라로 환영받아 들어간 후(마25:31-40), 이들은 불신자와 타락한 천사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마25:41ff,고전6:23).불신자들이 신자들과 동시에 부활할 것인지,아니면 일부 학자가 주장하듯이 조금 나중에 부활할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주제는 부활이 하나의 일반적인(통전적인) 몸의 부활인지 아니면 처음에는 부분적인 부활이었다가 얼마 후 나중에 가서야 몸 전체가 부활하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적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동안 끝까지 신실하였던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는 계시록 20:4절 이하를 그 전거로 내세운다. 한편 오직 몸의 부활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계시록 20장을 별도로 치며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서로 구별하는 내용이 성경에 전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계시록 20:5절의 "첫째 부활"을 실신한 성자들이 죽고 난 후 즉히 중간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는 단계로 이해한다(참고, 빌1:23,히12:22).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이러한 주석 문제를 더욱 상세하게 다룰 수가 없다(천년왕국을 보라). VI.몸의 부활. A.육적인 몸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소위 과학적인 근거에서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이다(참고 마12:24). 또한 이들은 몸을 죄의 원천이거나 죄의 본거지로 간주함으로 인하여 이러한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영혼으로 부활하거나 "천사와 같은" 비물질적인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한다. 비록 성경(특히 바울서신)에서 "육"이란 낱말이 종종 인간의 악한 본성을 뜻할 때도 있지만, 이러한 육적인 몸이 악하다거나 죄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한 군데도 없다. 오히려 악한 것은 인간의 인격적 중심인 마음(칼디아)이라고 했다(창8:21,막7:14ff,롬2:5).육적인 몸은 윤리적으로 보면 중립적인 매체이다. 그것은 신자에 관한 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고전6:15),성령의 전이며(고전 6:1213).일부 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몸"이라는 낱말은 인간의 "자아"나 "영적인 인격"을 뜻한다고 단정하는데,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한 실증자료를 댈 수가 없다. 죽은 자가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예수 "살과 뼈"를 지닌 몸으로 부활하신 사실에 의하여 보증된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을 만질 수도 있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눅24:38-43,행10:41).예수는 승천하실 때에도 이러한 육적인 몸을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 1:1,빌립보서 3:21,계시록 1:17절에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부활한 신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똑같은 것이므로(고전 15:49,빌3:21,요일3:2)이들도 또한 육적인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참고 고전 15:35-42). 그리하여 인간은 그 전체성에 있어서 구원받을 것이며 새로운 땅에서 살아갈 것이다(사65:17ff,66:22,마5:5,계21:1-3). B.육의 부활을 부정하는 듯한 성경 구절들 예수는 사두개 사람들에게 부활한 성자들은 천사와 같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마22:30,막12:25).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부활 이후에는 결혼관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러한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0:36절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까닭을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 구절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발생하는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자녀들을 재생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부활한 몸의 본성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위에서 인용한 구절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제거된다는 뜻도 들어 있지 않다. 고린도전서 15:44절에 보면, 부활한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부활한 몸이 영으로 구성된 몸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령한 몸"(sub voce)이라는 말이 보다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부활한 몸이 성령으로 채워지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5:50절에서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도 없고" 라고 말했는데 학자들은 이 구절이 육적인 몸의 부활을 배제한다고 종종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상 사도 바울은 이와는 전적으로 판이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혈과 육"이란 표현은 몸의 "본질"(실체)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전체성(몸과 영)이 덧없고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마16:17, 갈1:16, 엡6:12, 히2:14).이것은 고린도전서 15:50절의 의미와 꼭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평행 구절인 50절 하반절에서 사용된 "썩은 것"이란 낱말은 인간 전체가 썩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 그것이 몸의 본질임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맥 전체를 살펴보건대,덧없고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은 영광스럽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는 처음에 불멸하고 멸망당하지 않으면,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탈바꿈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육적인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구절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셈이 된다. C.동일성과 변화. 비록 부활한 몸이 육적인 몸이라는 점에서 현재의 몸과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몸의 존재 조건에 관해서는 변모가 있을 것이다. 바울은 죽은 자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재림할 때 아직 살고 있는 자들의 몸이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특히 53절의 "불가불"이라는 낱말에 주목하라).이러한 변화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한 신자들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죄를 범하지 않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세계로 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15:47-49).여기서 말하는 "새 영광"이란 그리스도의 영광과 같은 것이며(고후 3:18),개개인의 신자가 현세에서 주에 대하여 헌신한 바에 따라 달라질 그러한 영광이다(단 12:3,고전3:1415,고후 9:6). 이러한 변화는 기적적이고 장엄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무덤 이쪽 편에서 이에 대하여 적당한 사상을 형성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하여 신뢰할 만큼 세부적으로 묘사할 수도 없다.
부활(예수 그리스도의)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부활(예수 그리스도의)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 (헬)아나스타시스 엥게르시스. 이 낱말은 마태복음 27:53절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 금요일에 사망하여 매장당한 후,일요일 아침 몸과 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나사로와 여타 인물들의 부활처럼 단순한 소생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되살아 난 것이므로 다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으로 영원한 영광으로 부활하셨다(롬6:910,히7:16, 벧전1:21,계1:18). I.신약 케뤼그마에서의 부활의 위치. 케뤼그마(기쁜 소식에 대한 신약의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복음서의 절정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묘사이다(마28장,막16장,눅24장,요2021장).초대 교회의 첫 케뤼그마의 초점은 부활에 있었다(행2:24-323:14-16,26.4:10.5:30,7:55ff,10:39-43).부활은 바울서신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고린도전서 15:17-19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앙 전체와 기독교 신앙이 가져다 주는 구원은 우리 주의 부활과 더불어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다(행17:31,롬8:11,고전6:14,갈1:1,엡1:20,골2:12). 신약의 어느 곳에서 보든지 부활은 예수의 생애와 세계 구원사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선포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독특한 인격과 사역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한 하나님이요 메시야였다(4:25,26).또한 그 업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속죄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하나님과 죄로 가득찬 인류를 화해시켰다(마20:28,롬5:10,고후5:1819,골1:2122,딤전2:5-6).또한 부활하신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 그의 죽음에서 기인한 속죄의 열매를 가져다 주었다. 의인(롬4:255:910),성화(롬8:12,고전1:30),영화(롬8:30,고후 3:184:17)등이 그것이다. II.신앙에 의하여 받아 들여야 할 역사적 사실로서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는 성경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바울이 체험한 계시(행9:1-6,고전15:3-8)와 목격자들의 체험이 기록되어 있는 복음서이다. 주님은 이러한 목격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셨다"(행1:3).이러한 자료들에 의하면 부활은 초자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영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요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이므로(성경을 보라)부활은 신앙의 대상으로, 다시 말하면 신앙만의 대상으로 된다. 성경의 절대무오성을 부정하는 고대 및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적 연구 및 추론 도구인 고등비평방법을 하나님의 계시 영역에 적용함으로써 예수의 부활과 관련되어 일어난 사건을 명확하게 가려내려고 했었다. 그 결과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 그대로의 부활을 부인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부인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문자 그대로 살과 뼈를 갖추고 있는 그 자신의 몸으로 실제로 빈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들은 부인하였으며 지금도 부인하고 있다(눅24:39-40,요20:27). 이러한 비평가들에 의하면, 복음서 및 나머지 신약 문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입증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원시 전승을 후대에 윤색한 것"으로서 거부되어 마땅하다고 한다(R. Bultmann, Kerygma and Myth, H.W. Bastsch 편집,I,38).또한 몸의 부활이란 20세기의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의 발견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Paul van Bwren, The Secular Meaning of the Gospel, p.17) 사실 자연과학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하등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도 복음서에 기록된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설명하여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초대 신자들이 그들의 주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평가한 데서, 그리고 그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기를 간절히 소망한 데서 기인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정이 초대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믿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예수가 죽고 난 후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오직 "영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고 가정한다. 필자는 뒤에서 이 이론들에 관하여 논의해 보겠다. 만일 "역사적"이라는 말이 현대의 역사 연구 방법에 따라 성령의 신뢰성에 대한 신앙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현 단계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비록 역사적 사실임에는 틀림없으나, 역사적 사실임에는 틀림없으나, 역사적 검증에 의하여 확립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비록 현대 역사가들이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이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검증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이것은 단순히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소생을 뜻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가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야요 잃어버린 세계의 구주로 부활한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그가 십자가상에서 이룩한 화해는 성경에 기록된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모두에게 영생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이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연구를 지배하는 곳에서 비로소 복음서는 예수가 문자 그대로 그 자신의 육적인 몸으로(비록 영광된 몸이긴 하지만) 무덤으로부터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풍부한 "증거"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결여되어 있는 곳에서는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검증"하려고 해도 이는 반드시 실패하고야 만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적인 탐구와 추론에 의하여 그의 비밀을 발견하게 하시지 않았다. 인간은 오로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진리를 계시하는 분에 대하여 믿음으로써 비로소 그의 비밀을 알 수 있다(마11:2516:17,고전 1:20-25). III. 그리스도의 부활과 역사. 비록 우리가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를 초월하며,그 때문에 "더 이상 우리들의 역사의 일부가 아닌 새 역사의 시작"으로 일컬어져 마땅하다는 사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K. Runia, The Resurrection and History,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1966년 5-8월호).여기서 말하는 새 역사란 몸과 영이 불멸적이고 영광스럽게 된 인간의 생활사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러한 새 역사는 신자에 대한 하나님 경륜의 마지막 차원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새 역사는 예수가 하늘나라로부터 재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 역사는 신자에 대한 하나님 경륜의 마지막 차원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새 역사는 예수가 하늘 나라로부터 재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영광된 몸으로 변모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거주하게 될 장소이다(계 21:1-4).그렇게 되면 죄와 형벌과 죽음으로 가득 찬 현 역사의 강물은 불멸의 영광 속에서 인류가 존속할 새 역사의 바다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이러한 새 역사는 종말이 없으며 죄와 불행과 죽음이 없는 역사이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그는 모든 신자의 "선구자"로서 저 새로운 역사에 앞장을 선 것이다. 이 순간으로부터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과 가호를 받았으며 그에 의하여 완전히 지배되었다(마28: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이러한 역사를 초월하였다. 그 때문에 예수는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 40일 동안 예수가 지상에 머무른 유일한 이유는 그의 부활의 실재에 관하여 그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을 통하여 신자 모두에게 확실한 증거를 주기 위함이었다(행1:3). 이러한 몇 가지 이유가 없었더라면 그는 더 이상 현재의 역사에 속하지 않는 자로서 그리고 새롭고 영원한 종말의 역사를 이룩한 자로서 부활한 즉시 하늘로 승천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주여 이제 우리는 당신을 다시 가시도록 하지 않겠나이다"라는 의미로 예수를 붙들었을 때, 그녀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하였다. 예수는 그녀에게 "나를 만지지(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못하였느니라"(요20:17) 고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예수가 부활시에 이미 인류의 역사와 불멸과 영광의 새로운 영원한 역사 사이의 분기선을 넘어섰음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예수가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 나타나지 않고 그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까닭이기도 하다. 그 당시의 불신자들과 만세에 걸친 불신자들은 이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신앙을 가져야 했다(요20:17). IV. 예수는 일으킴을 받았는가 아니면 스스로 일어나셨는가? 헬라어로 된 신약에서 예수의 부활을 뜻하는 데 보통 사용된 낱말은 명사 아나스타시스이다. 그러나 엥게르시스라는 명사도 단 한번 사용된 적이 있다. 이 두 명사는 모두 "일어남","일으켜짐"을 동시에 뜻하기 때문에, 이들의 용법은 예수가 일으킴을 받았는가 아니면 죽은 자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와 상관된 동사 아니스테미에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 동사는 자동사('일어나다'란 뜻)와 타동사('일으키다"란 뜻)로 쓰였는데, 바울서신의 경우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이 동사가 타동사로 쓰여지면 (롬4:24, 6:4, 8:11,고전15:15, 갈1:1) 부활은 명백히 아버지의 일로 된다. 그러나 이 동사는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자동사로 쓰였으며 바울서신에서도 이따끔씩 그렇게 사용되었다(막 8:31, 9:9,10,31,10:31,34,눅18:3324:746,요20:9,행17:3,살전4:14). 이러한 경우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사실 이 동사의 자동사적 용법은 예수가 그 자신의 힘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났음을 충분히 입증하지는 못한다. 이 동사의 자동사적 의미는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났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죽은 자의 부활을 뜻하는 데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살전 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의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한 요한복음 10:1718절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때,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아니스테미의 자동사적 용법이 빈번하게 사용된 것은 의미심장하게도 예수가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났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예수가 아버지에 의하여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과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섰다는 것"을 서로 대조시킬 필요는 없다. 인간의 죄와 그에 대한 저주를 등에 진 여호와의 순종하는 종으로서 예수는 아버지가 그를 일으켜 주실 것을 기다려 예수의 아버지가 그를 일으켜 주실 것을 기다려 예수의 구속 사업이 완성되었음을 입증하였고(요19:30),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성육신한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자의적으로 버린 생명을 다시 취할 권세를 가졌으므로 죽음을 능동적으로 제거하여 영생과 불멸성을 다시 드러내셨던 것이다(딤후1:10). 그리하여 그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부활의 함축의미에 대한 보다 세부적인 논의에 관해서는 이 항목 제 VIII장을 보라). V.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빈 무덤 복음서에 보면, 일요일 아침 무덤이 빈 채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공관복음서에 의하면 무덤에는 천사들이 앉아 있었으며 이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 그의 몸이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마28:6,막16:5,눅24:1-523).한편 요한복음 20:1-8절에 보면, 어떻게 "그 다른 제자"(이는 요한 자신임에 틀림없다)가 예수가 부활하셨음을 믿었는가 묘사되어 있다. 그 제자는 무덤에 들어서자 마자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놓여 예수의 몸을 쌌던 베옷이 주의 깊게 개켜져 옆에 놓여 있는 것을 목도하였던 것이다. 그림설명 : 무덤의 봉인을 떼고 시체를 옮기거나 몰래 가지고 가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진다는 포고 문이 돌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제자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시체가 무덤 밖으로 옮겨져 모종의 장소에 매장되었을 것이라는 마리아 이론을 배제시켰다. 만약 사정이 그러했다면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상복을 벗겨 그토록 질서 있게 놓아 두었을 리가 없을 것임을 요한은 분명히 깨달았던 것 같다. 이러한 빛 안에서 보면 빈 무덤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료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사실 고대 및 현대의 불신앙 때문에 학자들은 이 빈무덤의 증거를 설명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이러한 경향은 부활 직후에 시작되었다. 무덤지기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보고하였을 때, 이들은 병사들을 매수하여 그들이 잠들고 있을 때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마28:11-15). 이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은 아래의 사실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1) 병사들이 잠들고 있는 동안 과연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가는 일을 보지 못했을까! (2) 병사들이 잠들고 있는 동안 많은 제자들이 무덤에 접근하여 굳게 닫힌 돌을 들어낸 후 시체를 바깥으로 가지고 나왔는데도 병사들 중 한 사람도 깨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빈 무덤에 대한 여타의 "설명들"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조리가 서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일부의 학자들은 어두움에 길을 잘못 든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 갔고 거기서 한 젊은이가 길을 잘못 찾아 왔다고 그 여인들에게 말한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들은 "그가 살아나셨다"는 청년의 말을 부정해야 할 것이다. 텍스트상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 말은 원 텍스트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배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이러한 이론을 거부할 수 있다. (a) 마가복음 16:2절에 의하면, 여인들은 해 돋을 때에 예수의 시체가 들어 있던 곳으로 갔다고 한다(막15:47,눅23:55). (b).만약 이 이론이 옳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두 번째 실수를 저지른 셈이 된다. (c) 이 여인들 외에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2)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하였다는 이른 바 "졸도 이론"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래와 같은 몇가지 이유 때문에 이 이론을 받아 들일 수가 없다. (a) 예수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입증되고 확인된 것이다(막 15:4445). (b) 그의 옆구리는 창으로 찔렸다. 비록 그가 죽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를 통하여 그는 사망하였을 것이다. (c) 십자가에 달려 잔혹한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면 "상복의 긴 동아줄을 풀어 낼"수 없었을 것이며(W.Barclay, Crucfied, p.145), 무덤의 입구를 가로 막은 무거운 돌을 제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d) 비록 그가 육체적인 힘에 의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무덤지기가 그의 탈주를 방해하였을 것이다. 3)제자들이 이른바 부활에 대한 "증거"를 만들기 위하여 예수의 시체를 옮겨 이를 감추었거나 도둑들이 이를 훔쳐갔다는 설. 후자의 견해에 관한 한, 우리들은 도둑들이 값비싼 생각할 수는 있다(요19:3940).그러나 시체에서 옷을 먼저 벗긴 후 이 옷을 가지런히 개어 놓고 몰약과 옷을 무덤에 남겨 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덤지기가 이를 감시하여 방해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는 설에 관하여 생각해 보면, 이러한 견해는 이들이 가장 뻔뻔스러운 제자들임을 뜻하는 것이다. 유대인 학자까지도 "1천9백년간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의 신앙은 기만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견해가 불가능함을 천명한 바 있다(Joseph Klausner, Jesus of Nazareth, p. 35). 4) 유대 당국이나 로마 당국이 시체를 무덤으로부터 끌어낸 후 그들의 목적을 위하여 보관하였으리라는 견해. 그러나 이에 대한 주요 반론은 이 경우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선포하였을 때(행2:24.f), 당국으로서는 그들이 기만자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용이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당국은 그때 시체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5) 몇몇 비평가들에 의하면, 고린도전서 15:34절에서는 빈 무덤이 언급되지 않는다고 한다. 15:1-8절은 부활에 관한 초기 전승을 대변하므로, 이 구절들이 빈 무덤 설화가 부활 신앙을 보다 돈독하게 하기 위하여 초대 교회가 지어낸 것임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a) 이러한 견해는 초대 교회가 가공설화를 지어내어 이를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으로 간주할 만큼 능숙하게 사람들을 기만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b) 사실 고린도전서 15:34절에는 빈 무덤이 명확히 전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말에 "그가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말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절은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는 셈이다. 이러한 뒷 배경을 살펴볼 때,"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뜻으로 된다. 이것은 무덤을 특별히 강조해서 이야기하는 사도행전 13:2930절의 바울의 설교에 의하여 분명해진다. 6) 빈 무덤의 표징은 이와 관련된 설화의 상호 모순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는 견해 예컨대 마태와 마가는 한 명의 천사를 언급할 뿐인데 반하여 누가는 "두 사람"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는 모순을 이야기할 하등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누가가 말한 것처럼 무덤에는 본래 두 명의 천사가 앉아 있었으나 여인들에게 이야기한 천사가 앞에 있어 그 여인들에게 잊어 버릴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것은 어째서 불가능한 견해일까? 이것이야말로 마태와 누가가 저 대언자를 강조하면서도 그 뒤에 또 하나의 천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까닭이 아닐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빈 무덤 안과 그 주변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세부적으로 알려져 있다면(지금으로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른바 빈 무덤 설화에는 모슨이 존재한다는 견해는 분명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빈 무덤에 대한 목격자가 아직도 살아 있을 때 예수의 부활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면서 서로 서로에게 모순된 기사를 작성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만일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복음서 기자들이 각자의 문서에 관하여 서로 협의 하였으며,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서의 일부를 각자의 복음서에 안에 삽입하였다는 것이 옳다면, 이러한 모순점들은 견해의 차이일지언정 모순이 아닐 것이다. 빈 무덤 설화에 대한 논의를 끝내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즉 빈 무덤에 관한 증거를 뒤집어 엎으려는 사람들이 다양하긴 하지만 설득력 없는 설명을 한다는 사실은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에서 실제로 그리고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성경의 진리를 강력히 옹호하는 것이다. VI. 부활 이후의 현현 A.이에 관한 기록 예수는 부활한 후 40일 동안 그의 부활에 관한 "많은 증거"를 주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행1:3).예수는 여러 차례 성도 예루살렘이나 그 근처에 나타났으며 이것을 가리켜 소위 "예루살렘 현현"이라고 한다. 예수의 현현을 목격한 사람들은, (1) 동산에 있었던 마리아(요20:11ff) (2) 길 가에 서 있었던 여인들 (마28:910). (3) 시몬 베드로 (눅24:34). (4) 엠마오 도상에 있었던 제자들 (24:13.ff). (5) 부활절 아침에 모여 있었던 사도들과 제자들의 무리(24:33,34, 요20:19ff). (6) 일주일에 뒤에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도마. (7) 올리브 산에서 예수가 승천하는 것을 보았던 제자들 (눅24:5051,행1:9)이다. 예수는 또한 갈릴리에서도 몇 차례 나타났으며,이를 가리켜 이른 바 "갈릴리 현현"이라고 한다. 예수의 갈릴리 현현을 목격한 자들은, (1) 해변 가에 있었던 7제자들(요21:1ff). (2) 산에 모여 있었던 예수의 제자들(마28:16) 이다. 그런데 이 현현은 바울이 기록한 바 있었던 5백여 형제들에게 현현한 사건과 동일한 것인 듯 하다. 이 예루살렘 및 갈릴리 현현 이외에도 부활하신 주님은 야고보 (15:7) 와 다메섹 도상의 바울에게 끝으로 나타나셨다(행9장). 바울은 이 현현을 여타의 현현들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하였다(고전 14:8). B.도전받고 있는 현현 설화들 일부의 학자들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현현 설화의 신뢰성을 부인해 왔다. (1) 고린도전서 15:1-8절의 초기 기록에서 바울은 오직 다섯 번의 현현에 대하여 언급할 뿐이다. 이들 중 한 가지도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비평가들이 내린 결론에 의하면, 후대에 교회는 변증적 목적을 위하여 몇 가지 특별한 설화를 "지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용납될 수 없다. (a) 이러한 견해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초대 교회가 변증의 목적으로 "선의의 거짓말"을 지어냈다고 혐의를 두는 것이다. (b) 이 두 가지 문서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일치점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확실히 바울은 "특별한 힘을 갖고 있었던 사건들을 교회 공동체 지도자나 다수 목격자에게 나타난 현현과 결합시켰을" 뿐이다(E.L. Allen,NTS.1957년 7월호,p.351). 복음서 기자들은 목격자들에게서 얻은 자료들을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초기의 증거자료를 강화시켰으며,그 때문에 이러한 자료들은 초기 자료와 똑같은 진실성을 갖는다. (2) 비평가들은 마태의 갈릴리 현현 기록과 누가의 예루살렘 현현 전승 사이에는 서로 화해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지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서의 비교 연구에 의하면, 각각의 복음서 기자는 그가 고려하였던 특수한 목적에 맞추어 수집한 자료들을 취사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주요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마태와 요한이 기록한 바와 같이 예수가 다른 곳에도 나타났음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3) 설화들이 서로 모순된다는 견해. 예컨대 마리아는 예수의 몸을 건드릴 수 없었는데 반해 (요20:17),도마는 예수님의 권유에 따라 그것을 만졌다는 것이다(요20:27). 그러나 여기서도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상황이 서로 다를 뿐이다. 이미 논의한 바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예수를 따엥 모시고 싶어했으며, 예전과 같이 제자들과 계속 몸의 친교를 나누기를 원했다. 마리아는 예수를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붙잡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의심 많은 도마는 장차 복음이 전파되는 데 있어서 그의 증언이 큰 몫을 차지할 사도였다. 그는 예수의 부활의 실재를 완전히 납득할 수 있어야 하였다. C. 여러 가지 이론. 몸의 부활을 거부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교회의 부활 신앙을 창출한 "모종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까? 이 문제에 관하여 이들은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1) 주관적 환상설 : 이 이론에 의하면, 제자들이 죽은 주를 너무나도 간절히 그리워한 결과 그를 보았고 그가 그들에게 이야기했다고 상상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펴는 학자들 중 일부는 환상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환상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주관적인 것이며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흥분된 마음 속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받아 들일 수 없다. (a) 이러한 종류의 환각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과장된 소망의 절정(climax)으로 일어나는 법이다"(John R. W .Stott, Basic Christianity, p. 55).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감시"하고 있었다기보다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 들었을 때, 그리고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 자신을 보았을 때에도 이를 불신하거나 의심하였다(마28:17,막16:81114,눅24:1137,요20:2425). (b) 객관적 환상설 : 이 이론에 의하면, "나사렛 예수의 연속체"인 예수의 불멸의 영 또는 영적인 그리스도는 아직도 영적으로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부활 설화가 예수의 부활체라는 실재 및 예수의 부활체와 매장된 시체와의 동일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예수 자신도 (눅24:3941,요20:171821L9).복음서들은 이 부분의 기록들을 초대 교회가 창조한 선의의 거짓말로 치부하게 하는 근거를 전혀 제공하고 않는다. D.사건의 진상 그렇다면 예수의 현현이 사실이며, 예수가 "살과 뼈"를 지닌 부활한 육적인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전혀 의심될 수 없다(눅24:39).이러한 육적인 몸은 매장시의 그것과 꼭 같은 것이었다. 즉 창에 찔린 상처의 흔적도 여전히 볼 수 있었다(요20:25). 이와같은 현현에 기초하여 교회는 주님이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셨으며, 우리들의 몸에 대한 죽음의 파괴적인 영향도 제거하셨다는 절대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VII. 예수의 부활체 A.영화되었다는 견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나 죽은 자 일반이 몸으로 실제 부활하였다는 사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몸은 본래 악하며 영혼은 본질적으로 선하여 신적이므로 불멸적이라는 고대 헬라 사상의 지배를 받았으며, 또한 지금도 그러하다. 최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용어에 관한 한 이러한 헬라 사상을 거부한다. 이들도 몸의 부활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후자는 육적인 몸이 아니다. 이들은 현대적 세계관의 빛 안에서 볼 때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은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죽은 자가 육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신화이다"(E. Brunner, Das Ewige Zukunft und Gegenwart, pp.26, 122). 이들에게 있어서 "몸"이란 "인격"과 "자아"를 뜻한다 (J.A.T. Robinson, The Body, 여러곳).이러한 "몸"은 죽은 다음에 빗물질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이러한 계속적 존재를 몸의 "부활"이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이러한 견해와 헬라 사상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거의 없다. "이 이론의 옹호자들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강조점이 아데네에 있지 않은가 의심하는 바이다"(E. Eillis, 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 p. 48). 또한 이들 중 일부가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란 교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 (O. Cullmann, Proleptic Deliverance of the Body, pp. 168.172). 이들에게는 예수의 인격적 부활체는 완전히 빗물질적인 것이거나 유령과도 같은 "영체"로 간주되고 있다. B. 실제의 육적인 몸. 예수의 부활체를 영화시키는 사상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과 전혀 반대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얼굴과 목소리로 예수를 알아 보았다는 사실이다(마28:9,눅24:31,요20:16192021:12).더우기 이들 중 몇 사람은 그의 몸을 만졌으며, 또 그렇게 하도록 권유받았다(마28:19,눅24:39,요20:1727). 한편 예수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먹었으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눅24:304243,요21:1213,행10:4041). 이 이외에도 예수는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였다(눅24:39).성경이 예수의 부활체가 육적인 실재를 갖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C. 꼭같은 몸이긴 하지만 영화로와진 상태에 있는 몸. 예수의 부활체는 장사할 때와 꼭같은 몸이었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퓨히신 흔적이 역력한 손발과 옆구리를 보이셨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눅24:39,요20:20).도마는 예수의 부름을 받아 상처를 확인하기 위하여 이를 직접 만져보기도 하였다. "이 상처들은 부활한 몸과 장사한 몸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절대무오한 증거였다" (Marcus L.Loane, It is the Lord,p.17). 이러한 사실은 모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즉시 몸의 상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부활 설화 속에는 신비한 요소가 들어 있다. 예컨대 부활하신 주님이 놀라웁게도 벽으로 나타났다 사라질 수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 그는 엠마오 도상의 두 사람에게 나타났다가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눅 24:31,영어 성경으로는 "사라졌다"). 이와 관련해서 이 구ㅜ절에 나오는 헬라어는 아판토스(aphantos)인데, 이는 "초자연적으로 사라짐"을 뜻한다(J.M.Creed, Comm.[누가복음 주석].예수가 친히 "그 가운데 서 계셨다"는 누가복음 24:36절도 예수가 기적처럼 홀연히 나타났음을 전제한다. 그 까닭에 제자들은 영을 보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37절).요한도 이 사건을 기록하였다. 즉 그는 문이 닫혀 있는 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들어 와 그들 가운데 서 계셨다고 한다(20:19). 성경은 예수가 어떻게 닫힌 문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섰는지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에 대하여 독단적인 입장을 취할 수가 없다. 이 신비롭고 기적적인 사건의 특징으로부터 우리는 부활 이후에 주님의 인간성이 하나님의 편재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겠지만 (R.C.H. Lenski,요한복음 주석). 이러한 견해는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해석은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긴 하지만 참 인간이며 여전히 인간이라는 성경의 끊임없는 가르침(딤전 2:5) 과 모순된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몸을 취하고 있었을 때에도, 예수는 신적 편재성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해석은 예수의 참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승천으로부터 그 실재성을 빼앗는 것으로 된다. 또 하나의 신비스러운 요소는 사람들이 첫 눈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28:17절에 보면 예수가 갈릴리에 나타나셨을 때에도 이를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의 동일성을 의심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동산지기로 잘못 보았으며, 그의 목소리를 알아 챌 수 없었다(요24:15).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의 경우처럼 눅(24:16) 예수 자신이 이러한 변화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부활이 예수의 몸에 일으킨 변화도 역시 중요한 것이다. 요한복음 21:12절에 보면, "(제자들 가운데)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들이 그가 주님이신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현현이 다소 이례적인 것이었으며 몇몇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동일성을 확신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겠다. 기적적으로 많은 고기를 잡아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그의 현현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이 누구냐?"고 묻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신비와 기적의 요소들은 기적적인 승천과 함께 예수의 몸은 비록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제는 영광스러운 조건 속에 있으며 시공간의 법칙과 무관하게 행동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자신이 시공간 너머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는 또 다시 예수의 참 인간성을 제거하겠기 때문이다. 예수의 몸은 바울이 말한 바 있었던 것과 꼭같이 "신령한 몸"이었으며,이는 신자의 부활체 형태이기도 하다(고전 15:44,빌3:20).여기서 "신령한"이라는 낱말은 예수의 부활체를 영화하려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바와 같이 "비물질적"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 않다. 바울의 용어법에 있어서 "신령한"이라는 낱말은 '영의 지배를 받는'다시 말하면 '성령에 의하여 지배되는'이란 뜻이다. 신령한 몸은 성령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몸이며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는 몸이다. 이러한 몸이 주님의 부활체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즉 바울이 신령한 몸을 묘사하듯이 이러한 몸은 멸망하지 않으며 영광스러우며 권능으로 가득 차 있으며 썩지 않으며 죽지 않으며 승리하는 몸이다(고전 15:42-50). 살과 뼈로 이루어져 있는 영광스럽고 신비스러운 몸을 과학적인 견지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말씀을 믿어야 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신령한 몸을 보라). VIII. 예수의 부활이 갖고 있는 의미 인격과 사역은 대단히 독특하기 때문에 그의 부활도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가 영과 d속에서 부활한 것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권능을 가장 놀라웁게 나타내는 것이다. 신자는 이러한 권능이 그 안에서도 역사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후 13:4,엡1:1920,벧전1:5-7). 예수는 부활을 통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등한 자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를 사형에 처하였었다 (마26:63-65,막14:61-64,눅22:7071).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할 방도가 없게끔 증거하셨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 예언자로, 하늘의 보좌에 앉은 제사장으로 높혀지는 것의 시작이었다(행29:36,빌2:9-11). 또한 예수 자신이 선포했듯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다(마28:18).사도들은 부활하신 구주의 왕권을 증거하는 표징으로서 기적을 행하였다(행4:17).입으로 예수가 구주라고 고백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셨다고 믿는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하나님은 예수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세상의 심판자라고 선포하셨는데(행17:31), 이는 우리 주 자신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였다(요5:2227). 세상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영생에 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갖는다(요3:16193536).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신자는 의인과 화해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을 얻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축복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서 찾을 수 있다(롬5:1017-19). 그러나 부활이 없다면, 저 구속적 죽음은 구속의 능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 의미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될 것이다. 부활은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의 외침에 대한 하나님의 "아멘"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신자가 하나님과 화해하였고 의롭게 인정되었음을 보증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그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롬8:3233). 그리스도가 부활하였을 때, 그의 죽음과 부활로 대변하였던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갈3:1). 그의 죽음은 신자들에게 부과되어 있었던 죄의 멍에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였을 때, 그는 죄의 멍에가 없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는 자유와 영광 속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6:9-11).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인하여 스스로를 죄로 인해 죽은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죄를 죽임으로써, 신자는 부활하신 주님과 친교를 나누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롬6:5612-14,골3:5). 예수께서 영광스럽고 영존하며 신령한 육의 몸으로 부활한 사실은 신자들에게 장차 그들도 꼭같은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롬6:5,고전15:47,빌3:21,요일3:2).
부활에 관한 기사들
부활에 관한 기사들 데이빗 휘튼(DAVID WHEATON) -------------------------------------------------------------------------------- 네 복음서들에 나오는 부활에 관한 기사들을 건성으로 읽으면 그 기사들 가운데 서로 불일치되는 점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것들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되고 있음을 발견하고 또 표면상 모순점들로 보이는 내용들을 사실상 복음서 저작자들이 초대교회의 서로 다른 출처들에서 그들의 자료를 수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넷다 근본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무릇 한 사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증인들에게서 증언을 들어본 사람이면 그러한 상황에서 관심사와 배경과 정서적인 특성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주견에 따라 동일한 사건들을 얼마나 다각적인 면에서 단편적으로 보고 또 서로 다른 점들을 기억하고 있는가를 잘 알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마28:1-10,막16:1-8,눅24:1-12,요20:1-10) : 1380년경의 패널로 크기는 132*97cm 이며 프라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남부 보헤미아의 아우구스티스 수도원 부속 성당에 그려진 제단화의 익화로 앞에 비스듬히 놓여진 석관 위에 붉은 옷을 입은 그리스도가 서 있다. 묘지기를 하던 병사들은 졸고 있는 사람도 있고 부활의 기적에 놀란 눈초리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나무 하나하와 숲의 풍경 저편에는 별이 반짝이는 붉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자연주의적인 표현과 상징적인 표현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보헤미아적인 신비주의의 세계를 낳고 있다. 빈 무덤을 처음 보았던 주요 증인들은 최근에 정서적으로 심각한 긴장상태에 있었던 일단의 여자들이었다. 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나서 곧 그 여자들은 그 소식을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각기 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세부사항에 있어서 그 설명들이 달라진 것은 놀랄 일이고 또 그 증거는 어떤 의미에서 가치를 잃게될 것이다. 차이점들은 복음서 저작자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출처에서 그들의 증거를 수집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해주며,이 사실은 네 복음서의 기사들의 전체적인 일치를 더욱더 인상깊게 만들어주고 있다. 복음서들의 기록에 나오는 사건들은 대게 다음과 같이 간추려 놓을 수가 있다. 성경의 증거 일단의 여자들이 안식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무덤에 가다(마28:1,막16:1-2,눅24:1,10,요20:1 상) 그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 돌문이 굴려진 것을 발견하다(마28:2-4,막16:3-4,눅24:2,요20:1하). 그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 대신에 그들에게 되어진 상황을 설명하여 주고 또 메시지를 준 천사를 만나다(마28:5-7,막16:5-7,눅24:3-7). 그들이 예루살렘에 달려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나 대부분 믿지 아니하다(마28:8,눅24:8-11,22-23,요20:2).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가 무덤에 달려가서 그것이 비어 있음을 확인하고 그후 집으로 돌아가다(요20:3-10,눅24:24 을 보라). 막달라 마리아가 그 두 제자를 뒤따라 무덤에 가서 그들이 떠난 뒤까지 그곳에 머물다.이때 예수께서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요20:11-18,마28:9,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바로 그 날에 예수께서 베드로(눅24;34,고전15;5)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눅 24;13-32,막16:12-13을 보라)에게 나타나시고 다시 예루살렘에서 도마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요20:19-23,눅24:36-43,막16:14)에게 나타나시다. 이 특주의 범주에 들지 아니한 그 밖의 "나타나심"은 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1장 및 고린도전서 15장에 기록되어 있다.모든 기사들에서 얻어지는 결론은 두가지 관점 곧 예수께서는 이제 그의 부활의 몸을 자신의 뜻에 따라 나타낼 수도 있고 숨길 수도 있으시다는 사실과 오직 그를 좇는 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운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표면상의 모순점들 어떤 여자들이 무덤에 갔는가?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와 요안나와 "갈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다른 여자들"(눅23:55)이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만을 골라내어 언급하고 있다.(20:1) 어쩌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준 것이 막달라 마리아였기 때문일 것이다.20:2에서 막달라 마리아 자신이 자기와 함께 다른 여자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그러므로 복음서 저작자들은 각기 자기에게 인상적인 자료를 제공해주는 여자들을 골라서 그 이름을 밝히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무덤의 돌문은 언제 굴려졌는가? 마가복음 16:3-4과 누가복음 24:2은 여자들이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 이미 굴려져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2-4의 사건도 그들이 이르기 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고 또 그 결과 파수꾼들이 성으로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28:11-15에서 그 파수꾼들은 여자들이 무덤에서 돌아가고 있을 때 이미 성내에 들어가 그들의 거짓말을 여기 저기 퍼뜨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곳에 천사들이 몇이나 있었는가? 여자들이 도착했을 때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의 돌문을 굴려낸(마28:2)그 천사는 무덤 안에 들어가서 다른 천사와 함께 있었다(눅 24:4-막달라 마리아 역시 두 천사를 보았다.요20:12). 마태와 마가는 대언자 역할을 하여 그 여자들의 주의를 끈 천사만을 언급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24:5("두 사람이 이르되")의 복수는 한 천사가 말하고 다른 천사는 옆에서 확증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을 것이다. 천사들은 무슨 말을 하였는가? 다시 한번 각 기사들을 종합하여 볼 때 우리로 하여금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너희가 여기 온 이유를 아노라. 예수는 살아나셨음으로 여기 계시지 않느니라. 빈 무덤을 보라. 가서 제자들에게 이르랴. 주께서 갈릴리에서 너희를 만나시리라. 그가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예수님을 처음 본 사람은 누구였는가? 마가복음 16:9은 주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의 기사와 일치된다. 누가복음에는 이것과 상충되는 내용이 없다. 마태복음 28:9에서는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중심인물)와 "다른 마리아"에게 나타나신다.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그 이야기가 퍼져나갈 때 말달라 마리아의 이름은 밝혀지고 다른 마리아는 잊혀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마치 다른 복음서 저작자들이 바디매오는 언급하고 또 한 소경은 생략했듯이, 그리고 군대귀신 들린 자만 언급하고 또 다른 귀신 들린 자는 생략했듯이-하지만 마태는 각 경우 모두 둘 다 언급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기록하고 있고,누가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나타나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요한복음 21장은 우리를 갈릴리로 데려다 주고 있고 또 마가도 그의 복음서 추신에서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나타나신 일들을 언급하고 있다. 마태와 누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이 각 저작자의 의도와 구조에 조화되고 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처음 시작한 곳-예루살렘-에서 끝맺고 있고 마태는 갈릴리의 한 산에서 하신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왕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선언(28:16-20)으로 더불어 끝맺고 있다.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 (유재인, 정상신) -------------------------------------------------------------------------------- 그리스도 재림의 주된 결과는 개인적 종말론의 견지에서 볼 때에 부활일 것이다. 또한 이것은 죽음에 직면해 있는 믿는 이들의 소망의 근거일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가르치고 있는가? 1)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 (마22:30-33; 막12:25-27; 눅20:35-38)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리라 죽은자의 부활을 의논할 진대...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마 22:30-33).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는...죽은자의 살아 난다는 것을 의논 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막12:25-27). "저 세상과 및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게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 없나니... 죽은자의 살아 난다는 것은 모세도...하나님은 죽은다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눅20:35-38). 위의 성경 구절들은 부활에 대해서 예수님과 사두개인들광의 논쟁에 관한 말씀이다. 사두개인들은 유대주의적 전통을 벗어 버리고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며, 교리적으로는 내세나 부활 혹은 천사나 사단과 같은 영적 존재를 믿지 않았다. (Ibid., p. 448.) 모세 오경을 인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신명기 25장 5절과 6절에 기록된 모세의 규례를 제시하면서 만약 부활이 있다면 부활 후에 계대 결혼을 한 사람들의 혈통관계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한다. 이것이 이 논쟁의 배경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요경에 있는 부활의 중거(마22:31-33; 막12:26-27; 눅20:37-38)를 역으로 제시하며 반박한다. 예수는 부활 후에는 결혼 제도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도 없다고 말씀 하신다. 또한 사후 부활체의 삶의 양식이 어떠한지도 본문에서 압시해 주는데, 그것은 천사와 같게 되리라는 것(마22:30; 막12:25; 눅20:36) 이다. 물론 이것은 부활체와 천사들의 존재 양식이 같게 되리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단순히 영적인 존재들인 반면, 부활체는 영육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참조. 고전15:35-58). 단지 부활한 성도들은 더 이상 세상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고 새로운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특이한 것은 구약성경이 부활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예수와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주장 하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수가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는 그 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잘 모르는데서 그런 오해를 하였다고 비난한 다음에, 계속해서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부활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 시 구약 성경을 인용했던 것으로 보아 예수는 구약 성경의 권위와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명백하게 구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예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의 자녀로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마22:30; 막12:25; 눅20:34-36)라고 말씀하신다. 오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위로의 원천이 될 것이다. 부활 사상이 이미 모세를 통하여 표현 뒤었다고 선언하였을때 예수님은 또 하나의 교훈을 더 하셨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모세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6)고 기록하였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여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리라"(눅20:38)고 적절하게 덧붙여 말한다. 그러므로 이미 모세의 시대에 부활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진리가 드러났다고 한다. ( Chester K. Lehaman, Bibiecal Theology Vol. II New Testament. (Scottdale, PA: Herald press, 1974), p. 281.) 마태복음 22장 32절은 헬라어 본문에 보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굡의 하나님이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제가 분명히 현제 시제로 되었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 시제로서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 또한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불 수있다. 결국은 예수는 그의 재림시에 성도들이 부활하여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할 것을 구약 성경에 기초하여 부활의 확실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부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눅14:14; 요5:19-29; 11:25-26) 부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성부의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자신의 사역에 관련하여 이야기한 요한복음 5장 29절의 내용일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은 살리느리라"(21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능을 가지셨다는것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장차 영생을 누리게 하는 권능을 소유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모든 심판을 자신에게 주셨다고 선언하시며 (22절), 그런 다음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고 덧붙혀 말씀하신다. 이러한 근본적인 진리들 위에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가르침을 세운다. 그것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 는 자는 살아나니라...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5:25-27)고 말씀하는데, 예수님은 우선 부활에 관한 말씀 속에 제시된 영적인 체험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체스터 K. 레만, [성경신학 II] 김인환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p. 279.) 이어서 예수님은 육체의 부활을 밝히는데 까지 나아가는데 그것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8, 29절)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부활에 뒤이어 있을 심판이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예수는 28절 19절을 통해서 의로운 자의 부활과 악한 자의 부활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구분하는 선은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24절에 언급된 대로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믿는 것"에 그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믿음이 영생과 영벌의 최종적 기 준이 되는 것이다(눅14 :14; 요11:25-26). 이렇듯 예수는 부활에 대해서 성부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자신의 사역에서 분명하게 의로운 자의 부활과 악한 자의 부활이 있는 것을 말한다. 3) 부활의 시기 (요5:28-29; 요6:39404454) 예수님은 부활의 시기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듣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요5:27-28).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여 함이니라...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살리라"(요6:3940).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내가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마지막 날()이라는 말은 말은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 구원과 심판의 날 '주의 날'에 뿌리를 둔다(참조. 사13:6; 욜3:14; 습1:714). 예수 는 선인과 악인에 대한 이중적 부활에 대해 언급했는데(요5:2829), 본절에서는 직접적으로 '성도들의 부활하는 날'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제자원 편저, op. cit., p. 705.) 즉 부활의 시기는 예수는 재림하는 '마지막 날'에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4) 부활체에 관한 예수의 견해 종말에 있을 확실하고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이미 죽은 사람의 부활일 것이다. 죽은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체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예수의 입장과 견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리니"(마22:30).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고 아니가고...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막12:25).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눅20:35-36).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20:27). 위 구절들은 부활체의 특성과 성질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는 부활체의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천사들과 비교해서 가르치고 있음을 발견할 수있다. 천사들이 영적인 존재이듯이 부활한 인간의 몸도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이말은 천사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부활할 성도들의 삶의 양식이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2장 30절과 마가복음 12장 25절 그리고 누가복음 20장 35-36절의 말씀은 앞의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 부분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24장 39절과 요한복음 20장 27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단순한 영이 아니라 완전한 육신을 입고 계심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육신은 장차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때 성도가 입게 될 바로 그 변형된 육체라는 것이다(cf, 고전15:35-395152; 빌4:21). (제자원 편저, op. cit., p. 541.) 예수가 제자들에 의하여 보고 듣고 인정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이전에 가지셨던 것과 유사한 몸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무덤이 비어 있었고 몸이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에 의하여 결코 제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부활의 육체적인 성격에 대한 암시임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부활시 그 모습은 본성상 육체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결국 신자의 구원을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성도의 부활에 있어서 몸의 본질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으셨지만, 위에서 제시된 구절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부활체에 대한 그 특성과 성질에 대해서 알 수 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cf, 롬8:11; 고전15장; 빌4:21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해 볼때 부활시에 어떤 형태의 육체적인 실재가 존재할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우리의 원래의 몸과 관계가 있으며, 그 것으로부터 유래하게 될 것이지만, 단순히 우리의 원래의 몸의 부활의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변화나 변형이 된 부활체라는 것이다. (밀라드 J. 에릭슨, op. cit., p. 405.) 다시말해서 부활한 성도의 몸은 죽기 이전의 육체와 동일하다. 그러나 부활한 몸은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어(고전15:44), 아픈 것이 다시 없는(계21:4), 썩지 아니할(고전15:53) 영광스러운 육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
부활은 역사적 사건 (예수의 생애와 교훈 / J.S.스튜어트 저 문창수,김성수 공역) -------------------------------------------------------------------------------- 부활은 역사적 사건 부활에 대한 증거는 논박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 것이다. 물론 이 중 요한 사건에 대한 여러 복음서의 기록에서 세부적인 차이가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그 이야기의 신빙성을 흔들리 게 하거나 파괴하기는 커녕 실제로 그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고 엄청난 놀라움과 당혹에 빠져있었다. 또한 그 사건을 눈으로 본 다른 증인들, 즉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사람들은 극도로 고조된 감정과 흥분속에서 살고 있었다. 후일 복음서 기자들이 이런 혼잡하고 찬란했던 순간들의 기억들을 모아 복음서 속에 기록하게 되 었을 때 세부적인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야만할까? 이것이 조금이라도 그들 증언의 가치를 손상시키는가?이와는 반대로 만일 그러한 차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불안해 해야 할이유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 여러 복음서 기록들이 의도적으로 일치하게끔 만들어 졌다는 결론을 물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피상적 인 불일치가 대사건의 보도에서 생기게 될 수 밖에 없는 경로에 대한좋은 예증을 제1차 세게대전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특별한 사건에 대한 목격자들이 각각 그 나름대로 그 사건을 묘사하곤 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증언은 문면상으로도 현실성과 진정성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 증언은 그들 스스로 철저하게 확신했던 사람들의 증언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확신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불과 50일 후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부활은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증언이 수천명으로 하여금 확신케 했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사도들이 공공연히 선언하여 그러한 놀라운 결과들을 낳게 했던 사실들이 참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사건이 바로 최근에 일어났던 것인 만큼 그들의 적이 그 사실에 도전하여 논박하려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그 새로운 움직임이 봉오리채 꺾어지는 것을 무엇보다 더 바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만일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를 불신하고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증언에 대하여 논박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분명히 그때가 예수님께서 부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용이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증명은 시도되지 않았 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 편에서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자체가 사도들이 선포하고 있던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최상의 증거가 된다. 그 사실들은 그것들이 도전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도전받지 않은 채로 있었다. 부활의 복음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혀 문서상의 증거를 떠나서도 한 뚜렷한 증거가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제자들 자신의 놀라운 변화 속에 나타나 있다. 부활 사건만이 이 사람들의 절망적이고 무익했던 생이 온전히 빛나고 승리에 찬 생에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이사실이야말로 부활 하건이 어떤 꾸며낸 이야기나 단순한 환상적 공상 이라는 주장을 산산히 부서뜨리려는 견고한 반석이다. 선생을 잃은 제자들이 그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주장은 제자들 자신의 생활에 의해 부정되며 또한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드러나게 된다. 만들어 낸 이야기가 사람의 성격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며 거짓된 것을 위해 순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제자들의 믿음을 순전히 환상적인 근거에서만 설명하려고 한 시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그쳤다. 한가지, 단 한가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이 이 열한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을 믿을 있게 한다. 그러나 그 증거는 최초의 제자들을 지나서 [교회의 실제성(the fact of the christian Church)에서도 발견된다. 교회를 건립하게 한 힘이 부활신앙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교회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땅의 정복을 위해 쏟아져 나왔을 때에도 그 추진력이 된 것은 부활의 메시지였다. 4복음서가 그 끝에서 취그바고 있는 놀라운 사실들의 진실성은 천구백년 동안의 교회사가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본질에 있어서 불멸성을 지니며 그 가능성에 있어서 무한하여 인간 영혼에 대한 그 가치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교회와 같은 영적운동에 완전히 그리고 순전히 사실이 아닌 어떤 것에서 생겨 났거나 고취되었다고는 아무도 심각하게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오래 전에 멸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격심한 공격이 사회적,정치적, 지적 방면에서 수천년을 계속하여 교회에 가해져 왔기 때문이다. 교회는 여러 차례 절망적이고 죽은 것처럼 보였다.[흄][볼테르]등은 그 무덤을 파는 일에 분주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그 무덤을 깨뜨리고 그 돌을 굴러 버렸다. 살아 게신 하나님의 교회의 이러한 역사는 다만 예수님의 부활 사실만이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방면의 증거도 유효하며 큰 중요성을 가지나 부활에 대한 절대적 증거, 즉 부활 사실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들기만 할 뿐 아니라 불가피한 사실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다. 최초의 놀라운 충격이 불변의 확신으로 된 후에 제자들이 보게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동일하시기 때문에 그가 바로 이전과 동일하신 분이 아닌 어떤 분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중 하나가 옛일을 회상하면서 이 사실을 표현한대로 "그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2;24). 이것은 위대한 확신이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의 생활에 대한 연구에서 이 확신에 관여한 몇몇 요인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에 대해 언제나 깊이 느낀 것 중 한가지는 그의 순전한 생명력이었다.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하고있다(요1:4).베드로는 그를 [생명의 주](행3:15)로 부르고 있다. 복음서를 어느 곳이라도 펴 보라.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침의 해처럼 빛나며 하나님의 생기처럼 생명력있는 어떤 분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접촉하게 된 사람은 누구나 그가 거대한 숨은 힘을 소유하고 계시며 아무리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알아내더라도 그 뒤에 더 많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 사실을 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왔던 놀랍고도 대담한 요구가 설명해준다. 그 한 예로 문둥병은 널리 알려진 불치의 병이었다. 그러나 한 문둥병자는 단순히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2).그들은 예수님께서 감다하지 못하는 상황이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죽음까지도 굴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 위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다. 제자들이 그를 알게 된 최초의 그날부터 그 사랑은 그 위에 불멸의 인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랑은 이전에 바다에나 육지에나 어느 곳에도 결코 없었던 빛으로 온 세게를 가득하게 하였다. 그러한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자에게서 결코 탈취 될 수 없었다. 그 사랑은 그 사랑하는 자를 곁에 서서 지키기 위해 무덤을 깨뜨릴 것이었다. 그러나 저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무죄와 도덕적 완성이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치유이적에 대한 연구에서 예수님의 능력있는 이적 이 어떻게 그 자신의 무죄 사실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그 사실에 의존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모든 인간중 에수님 한분에게서만 죄와의 결정적인 단절이 이루어졌다. 또한 죄의 부패와 습관에 의해 언제나 가로 막히고 좌절되었던 [물질에 대한 영의 지배력]이 그에게 있어서 온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이와같이 이적의 역사가 예수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었다. 또한 가장 위대한 이적인 부활도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었다. 그와 매일 가졌던 교제가 그들에게 예수님은 인간 이상이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비록 갈보리의 십자가가 일 시적으로 그 고귀한 믿음을 흐리게 했으나 그 믿음은 다시 밝게 빛나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하여 는던 것과 같은 감정을 예수님에게서 느끼게 된 그들은 이제 부활이 처음부터 확실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께서 죽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면 하나님 자신이 죽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부활에 대한 최후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망에 매여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활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부활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조직신학:성구모음) -------------------------------------------------------------------------------- 첫째로 그는 자기 부활을 통하여 사망권세를 이기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가 우리에게 그의 죽음을 토가자하여 획듣해 주신 의에 참여 할수있게 해주셨습니다. 둘째로 우리도 지금 그의 능력을 통하여 새 생명에로 부활되었습니다 세째로 우리의 축복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고전 15: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어디 있느냐 (롬 4: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6: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8: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게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벧전 1: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하시며 (벧전 1: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있게 하셨느니라 (골 3: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앉아 계시느니라 (골 1: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엡 2: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고전 15: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못하셨으리라 (고전 15: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 할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롬 4: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엡 1: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 1: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엡 1: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 1: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 2: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 2: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자녀이었더니 (엡 2: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인하여 (엡 2: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2: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엡 2: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함이니라 (엡 2: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전 15: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 상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후 4: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전 15: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 구세주에게 (롬 1: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행 10: 40)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행 5: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행 5: 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빌 2: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엡 1: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엡 1: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 1: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죄인에게 (행 17: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작정 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 마귀에게 (히 2: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모양으로 혈육에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계 20: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 안식일과의 관계에 있어서 (행 20: 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고전 16: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 서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히 7: 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 부활의 상징 (롬 6: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 6: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아니하려 함이니 (롬 6: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롬 6: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아니 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줄을 앎이로라 (롬 6: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롬 6: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골 2: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부활은 하나님의 계획(1)
부활은 하나님의 계획(1) (박국현목사) -------------------------------------------------------------------------------- 마가복음 12:1-12 성경 안에 있는 내용을 넓게 보자.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인간이다. 성경 해석도 인간본위의 입장만 하다보니 문제가 생기고 이에 대한 해결을 하지 못하여 난제가 생겨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봄으로 티끌 같은 인류의 구원보다 중대하고 우선하는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목적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진리의 정도를 걸어야 하겠다. 이러한 안목을 제대로 갖추고 성경을 본다면 생수가 힘있게 솟아 오르는 우물을 판 것과 같아서 생명 있는 말씀들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게 돼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영적 갈증을 느끼며, 썩은 물을 찾아다니는 것을 볼 때 한심한 생각이 든다. *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만족하시며 스스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분이시다. 인간의 기쁨이나 행복은 영원불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행복으로 채워지는 것이 축복된 삶이다. 왜 인생에 영속적인 기쁨이나 행복이 없는 것일까? 우주라는 물질게 안의 모든 것이 썩어가고 소멸돼가기 때문이다(엔트로피 증대의 법칙). 인간의 육체도 그렇고 육체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모든 것이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것을 구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지만 항상 부족하고 갈급한 상태를 면치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고 하나님의 것은 소멸되지 않으니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구해야 한다. ┌────────────────────────────────┐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것으로 충만한 여러분 되시기 축원합니다!│ └────────────────────────────────┘ 예수께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17:13)하셨고,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보증)치신 자니라"(요6:27)하셨으니, 주님의 기쁨과 양식은 소멸되지 않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에게 영을 주셨으니 영은 소멸되지 않고 영원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것들을 소유할 수 있는 그릇이다. * 하나님은 품속에 계신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기로 뜻을 정하시고 아들을 위하여 하늘을 창조하셨는데 "후사"란 세상의 상속자와는 다르다. 세상에는 부모가 죽으면 그 재산을 자녀가 이어받지만 하나님은 죽음이 없고 홀로 자존하시니 물려줄 재산도, 필요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없던 것을 창조해서 주셨는데 하늘이라는 피조세계를 상속으로 주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왕좌, 왕위, 왕권)들이나 주관(힘, 능력, 군대 통치력)들이나 정사(통치자, 지배자, 주권자, 직권)들이나 권세(개인적으로, 권위 권력 위신 주권)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만유 안에 있는 영계, 우주(음부, 흑암, 일월성신과 지구, 인간 등) 그에 속한 모든 것들은, 오직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을 구원론으로 보는 인본주의 자들은 만유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인간을 위해서 아들이 죽으신 것으로만 알고 있으니 얼마나 위 아래가 뒤집어진 견해인가! 하나님은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무한하시니 구분이 좌정 하실 보좌란 있을 수 없고 자신이 바로 보좌이지만 아들을 위하여 자신의 우편에 창조하신 하늘에는 아들의 보좌를 두시고 거기에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다음 천사들을 창조하사 아들이 보좌에 좌정 하실 때까지 그 이름을 받들어 섬기게 하셨다. 또한 한 천하로 하여금 그 이름으로 보좌를 지키며 다스리게 하셨으니 그가 곧 "여호와의 사자"였다. 그런데 한 천사장이 작당하여 그를 대적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보좌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그들을 음부에 가두었다. 이젠 아들이 보좌에 좌정 하셔도 되지만 아들은 <보좌로 직행하는 것은 아버지와 동등 됨을 취하는 것>이니 감히 그럴 수 없다 하여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를 심판하여 그 이름의 영광부터 회복한 후에 들어가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로 음부에 오셔서 죽음과 <<부활>>을 거쳐 들어가시기로 결심하신다. 하나님 아들이 자신을 낮추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마귀를 진멸하기 위한 것이다. 아들은 이러한 자신의 결심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다시 얻을 권세를 아버지로부터 허락 받은 것을 "계명"을 받았다고 하셨다. 권세와 계명의 설명에 주의할 것. * 하나님은, 반역한 천사일당을 하늘에서 왜 그 즉시 진멸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취하실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악한 소작인의 비유"가 그 사정을 설명해 준다. 악한 소작인들은, 실과를 받으려고 주인이 보낸 처음 종들을 폭행하고 죽이고 두 번째 그렇게 하고 마지막으로 아들까지 죽임으로써 주인의 유업을 찬탈하려는 증거가 드러나자 주인은 그들을 진멸 한다. 이것은 하늘에서 처음 종인 여호와의 사자를 대적했던 마귀가 두 번째 종인 아담을 타락시키고 마지막으로 아들까지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한 자>라는 증거가 분명해졌을 때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니 자신이 정하신 법이라도 함부로 번복하지 않으신다. 천사를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있고, 수용할 수도 있는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이렇게 그들에게 인격적인 자유의지를 주신이상 그것을 어떻게 행사하건 그들의 자유요 권리이지만 만약 자기 직분을 지키지 않고 자기 신분에 걸 맞는 입장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명예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보좌를 차지하려고 행사하면, 죄가 성립된다. 그러나 죄로 판정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적한 것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하늘에서 천사일당의 반역은 표면상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 대한 도전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 목적을 위하여 음부에 하나님의 형상인 인자의 모양대로 아담을 창조하셨더니 아니나 다를까.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던 아담을 미혹하여 사망권세인 자기 아래 둠으로써 두 번째로 그 죄성을 드러냈다. 드디어 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오시자 마귀는 백방으로 훼방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을 남의 죄라도 뒤집어 씌어 죽임으로써 그 죄성이 분명해졌다. 생명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 영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예수의 죽음도 죄의 결과이다. 하나님이시라도 자기 죗값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남의 죄를 억울하게 누명쓰고 죽은 고로 다시 살리셨다. 할렐루야! 마귀는 아들 예수만 어쨌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죽이기만 하면 모든 권세는 자기 것이 될 줄로 알고 아들을 죽였으나, 자기 망할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은 억울한 죽음을 살려내지 않으면 공의가 아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살리심으로 공의이심이 드러났다. 오늘은 아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로서 모든 기독인들은 이날을 기 한다. 예수께서 죄없이 우리 죄를 가지고 죽으심으로 마귀의 악함이 드러났고, 정죄 되었으며, 이제 형벌에 들어갈 날만 남았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심으로써, 즉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최고 절정의 증거가 드러났으며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로서 하늘 보좌에 올라 계심을 믿어라. 그가 우리 보장이 되어 주신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어주마 약속하셨다. "할렐루야!" 성령으로 예수를 증거하며, 하늘의 상급을 준비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다같이 기도하자.
부활은 하나님의 계획(2)
부활은 하나님의 계획(2) (박국현목사) -------------------------------------------------------------------------------- 성경은 하나님의 일을 기록한 책. 하나님 중심, 하나님 본위의 책. 인간 본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면 난제 투성이.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면 시원한 해석, 놀라운 내용을 깨닫고, 그분이 하신 그리스도의 일을 체험하게 됨. 하나님은 육체를 만드시니, 육체는 죽음을 맞이하는 고난의 실체들이면서 나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축복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다. 하나님이, 어두운 영들을 가둔 곳에 하나님의 형상인 인자의 모양대로 아담을 창조하셨더니 마귀는 하나님께 순종하던 그 아담을 하나님과 이간질하고 미혹하여 하나님을 떠난 자기 밑에 복종하는 영이 되게 하여 죽은 영으로 육체의 일생을 살아감으로 인하여 육체라는 제한된 시간을 지나고 나면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죽은 영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인류에게서 죄를 벗겨주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실 뿐 아니라, 구원받은 영이 머물고 있는 육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신 일을 이어받아 할 수 있도록 사명을 주셨다. 우리 인간이 육체 안에 머무는 기간은 이 예수를 배우는 기회,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는 기회, 천사는 <영>인고로 성장도 없고, 영원히 그 위치, 이렇듯, 우리도 육체 벗은 후에는 성장 없다. 영원히 그 위치일 뿐! 고로 인간 육체는 예수 생명을 사모하는 기회, 인간 육체는 예수 생명을 체험하는 기회, 그래서 기독교는 육체 안에 머무는 영들이 영워한 생명이신 예수를 체험하는 체험의 신앙! 인간 육체는 부활하신 예수 생명을 영입하므로 써, 죽은 영을 살리는 기회. 인간의 영은 죄로 죽었기에 살아날 수가 없다. 과거의 '나'라는 영적 존재는 죽었으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대속으로 인하여 살아났고 고귀한 생명이 내 영에 들어옴으로 하나님 아들의 고귀하고, 복된 생명이 내 안에 살아 계시게 되었고, 하나님은 나를 보실 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보시게 되었다. 아들은 마귀를 심판하기 위하여 육체로 오시되,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오시고자, 자신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시자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마저 유혹하여 자기 종으로 만들고 말았다. 아담을 죽음 아래로 떨어뜨렸다. 타락시켰다. ┌───────────────────────────┐ │ 생각하고 넘어가자 │ │ │ │ 맏아들 먼저 나심 -> 천사 창조, 타락 -> 쫓겨 내려옴 │ │ -> 인류 창조 -> 아담 -> 계명 -> 선악과 유혹, 타락 │ │ -> 생명과로부터 추방 -> 예수 성육신 │ └───────────────────────────┘ 그러나 아담의 타락은 도리어 아들이 짊어지고 죽을 죄를 마련함으로써 하나님 아들의 일을 성공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 마귀 하는 일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성공시키는 것 뿐이지, 자기 일이 잘 되는 일은 없는 존재. 아담은 "먹으면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죽게 되었으나 죽음에서 영생하게 되는 조처가 결정되기 전에 곧,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하게 되기 전에 생명나무 과실로 가는 길을 막아버리셨다. 그러므로, 지옥에서 영생하는 일을 벗어나올 수 있는 기회가 있게 하셨다. 곧 예수 오시면 그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불순종한 아담의 죗값을, 아들이 대신 받아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죄 즉 사망에 매여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인류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갚아주심으로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시고 죄(사망) 대신 생명 저주 대신 축복 하나님의 이름까지 주셔서 육체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므로 하늘의 상급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에 속한 나에게 지워졌던 죄도 다 죽음 아래 던져버리셨다"는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영원히 존귀한 존재로 살되, 상급까지 받게 하셨으니, 오늘의 우리가 그런 신분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는 생명!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 하신 후 먹으니까 이번에는 "이자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 하셨다. 생각하여 보라!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 하셨으니,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사역 중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아는 분은 한 분이시다는 말인가? "하나같이 되었다." 하셨지 않나!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알지 못하는 분은 누구일까? 하나님의 삼위 사역 중에 선과 악을 구분도 못하시는 분이 있단 말인가? 선악이란, 선한 것은 생명, 악한 것은 죽음을 뜻한다. 아는 일, 곧 안다 함은 경험한다는 뜻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중에서 죽음과 생명을 계명으로 가지신 일생을 살아가는 분은 성자 곧 하나님의 아들뿐이시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죽고 사는 일 즉 죽음과 생명을 경험하는 일에 인생들이 동참하게 된 사실을 가리켜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먹으면 죽으리라"는 말씀은 "첫 번째 인류 대표자 에덴의 아담이 먹으면, 두 번째 인류의 대표자 골고다의 아담이, 첫 아담의 죄를 가지고 죽으리라." 골고다의 예수가 죽으리라. "둘째 아담 예수께서 첫 아담의 죄를 가지고 죽으신 고로 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인류의 대표자로서 첫째 아담은, 죽을 수 있는 죄를 빼앗긴 것이요, 영원히 죽을 방법이 없으리라. 그러니 영원히 살리라."는 뜻.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아서 에덴을 그대로 유지하였더라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죽을 수 있는 무슨 죄를 가졌어야 되었으니, 예수 자신의 죄가 있어서 죽었다하자. 그러면 자신의 죗값으로 죽었으니, 마귀는 정당한 일을 한 것이 된다. 그럼, 마귀를 심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고로 예수께서 죽을 수 있는 죄를 대신 가져가서 죽기까지 그 죄와 저주를 대신 가지고 고난을 당한 첫 아담의 후손들이었다. 에덴의 아담이 죄를 지은 즉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곧 성부, 성자, 성령 중에 성자와 같이 죽고 사는 경험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죄라 하는 어려운 일을 가지고 고난을 당하는 인생이 되지만, 예수께서 그 고난을 다 가져가실 것이고,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고난으로써 동참한 인생인고로 최고의 보상을 하여 주시겠다 하시는 약속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시다. 이 일에 동참된 인생에게 최고의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시다. 그러기에 선물로 주신다. "믿기만 하여다오"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이 선한 일에 동의하지 않는 일인 고로, 하나님도 그를 보장할 수 없다. 그래, 하나님과 같은 모양의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일에 시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명예까지도 주시고, 보좌 이외의 것은 다 주마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이젠 아담의 죄 때문에 죽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하신 일을 믿지 않아서 죽을 뿐이다. 예수는 죽기 위해 오셨으므로 어떤 방법으로든지 죽기는 죽을 것인데 마귀의 유혹으로 범죄한 아담이 죄인이 되어 이 죄인의 손에 의해서, 죄인으로 몰려 죽게 된 것이다. 죄 없는 자가 죄인에 의하여 죄인으로 몰려 죽었으니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그를 살리시지 않겠는가?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처음부터, 근본부터 하나님께 대적하였었다는 증거가 드러났으니 하나님은 아들을 <<부활>>시키므로 써 마귀가 오류를 범하였다. 잘못 죽였다고 심판하신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는 자신의 죄로 죽은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건대 마귀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아담을 타락시킨 것이 마귀 자신의 멸망을 가져오고 예수에겐 영원한 승리를 안겨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은 마귀가 아담에게 생명과마저 먹여 영원한 죽음이 되게 함으로써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훼방할 것을 미리 아시고 생명과의 길을 철저히 차단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를 아덴에서 쫓아 내셨다. 하나님은 인류가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영생하는 생명나무 과실을 교회를 통하여 주신다 약속하셨으니, 계2:7 "교회아 들어라! 영적 생활에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약속하셨다. "할렐루야!" "생명나무 실과를 주겠다."는 약속이 성취되는 사실을 계시록 마지막에 기록하였으니, 계22:1 수정같이 맑은 생명 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는데,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생명 나무에 갈 수 있다. 계22:19 누구든지 성경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례할 수 있다. "할렐루야!" 성령으로 교회 생활하다가, 그곳에 들어감을 넉넉히 얻게하여 주소서. 다같이 기도하자.
부활의 낱말 뜻 / 시
부활의 낱말 뜻 / 시 -------------------------------------------------------------------------------- * 부활의 낱말뜻 * [*386] ajnavstasi\" 발음 : 아나스타시스 anastasis {an-as\'-tas-is} 어근 : *450 에서 유래 어의 : 회복, 다시 살아나는, 죽음에서 일어나다. 문법 : 여성형 명사 이 단어로는(마 22:28, 22:30, 막12:23, 눅14:14, 20:33, 요11:24, 계20:6)에서 나온다. from 450; TDNT - 1:371,60 AV - resurrection 39, rising again 1, that should rise 1, raised to life again + 1537 1; 42 1) a raising up, rising (e.g. from a seat) 2) a rising from the dead 2a) that of Christ 2b) that of all men at the end of this present age 2c) the resurrection of certain ones history who were restored to life (Heb. 11:35) <빈 무덤을...> 적막한 동산에 이르른 그들 그늘진 어둠 속에서 보았네 빈 무덤을, 그 분의 거룩한 시신에 붓고자 향유 예비하여 왔건만 놀랍게도 그들은 보았네. 살아계신 주님을. 그들 마음은 무겁게 짓눌려 있었고 깊은 절망으로 가라 앉아 있었지.... 그러나 눈물로 흐려진 두 눈 들었을 때 아, 예수님 거기 서 계셨네.? 갈보리에서 꺼져가는 호흡과 함께 모든 소망 끝났다 그들 생각했었지 그러나 그들은 보았네. 죽음 이기신 능력의 구주 그 놀라운 부활절 아침, 촉촉히 이슬 맺힌 동산에 그분은 오셨네 무덤에서 세상으로, 구원하시려- 살아서 새로이 다스리시려. 소망은 차갑게 식어 죽은 듯 보이고 슬픔은 깊을 때 젖은 눈 들어 보면 우리도 볼 수 있으리. 빈 무덤을.
부활의 내면적 의미
부활의 내면적 의미 (예수의 생애와 교훈 / J.S.스튜어트 저 문창수,김성수 공역) -------------------------------------------------------------------------------- 부활의 내면적 의미 우리는 이 장에서 부활의 사실성과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지게 했던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을 취급해 왔다. 이제 우리는 최종적으로이 사실의 내면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분명히 이와 같은 사건은 제자들이나 교회 뿐만 아니라 전 세게에 대한 어떤 결과 또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부활은 그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증이었다. 제자들이나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하며 선포할 때에 그들은 의미 심장하게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를 사용하여 그 사건을 묘사하였다. 그들은 꼭 [그가 부활하셨다]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들이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 일어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며 하나님의 오른팔이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행2;24,32,3:15,4:10,롬6:49,고전 15;15).흉악범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은 정통파 유대인의 생각에는 충격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참람한 것이었다. 예수님에 대해 은밀한 기대를 가졌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십자가 형벌로 인해 그의 거짓됨이 드러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부활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품어왔던 가장 고귀하고 대담한 희망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과 예수님의 메시야 권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 그리고 그의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입증이 나타났다. 부활은 더 나아가서 의에 대한 입증이었다. 대담하고 용감하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건부를 선과 진리,그리고 사랑의 절대적 타당성에 거셨다. 이것들의 중요성을 그는 항상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위해 그는 [자기 헌신]의 마지막 한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생을 바치셨으며 이것들에 대한 믿음을 위해 그는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만일 무덤에 머물러 계셨다면 이 세상은 도덕적으로 혼란하며 善이란 한낱 신기루이며 도의심이란 해로운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날 새벽 온 우주가 하나의 위대한 행도에 의해 고상하고 이기심 없는생활 방식을 보증하고 확인하였다. 이제는 우주자체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인간 편에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으며 이로써 의가 입증되었다. 부활은 영생에 대한 보증이었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에 의해 감동을 받으나 가장 감명을 받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죽음에 대한 경멸이다. 그러나 사 망의 왕에게서 그 권세를 박탈하신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였다.[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 접하리라](요14:2-3). 만일 죽음이 이러한 것이라면 두려워 할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망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그를 믿는 자들의 승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겠음이라](요14:19). 부활하신 날 아침은 영생을 밝히 드러낸 아침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사망이 패배하여 넘어진 것을 보면서 시편 기자와 함께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 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중에 올라가시도다](시47:5)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끝으로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후 말할 수 없이 즐거웠던 사십일간이 끝나고 예수님의 육체적 현현이 그쳤을 때에도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매일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그들의 체험 속에서 실증되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그들의 파란곡절 많은 모든 봉사활동을 통해서 그들을 버티어준 것은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적 임재와 매일매일의 교제였다. 사망이 난폭하게 닥쳐 오는 것을 그들이 보았을 때에 그들을 붙잡아 준 것은 예수님의 손이었다. 그들의 체험만이 유일하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이 살았던 시대 이레로 수많은 남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해 왔다.이것은 이적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면 즉 그가 지금도 살아 계셨다면 그의 친구들이 종종 그를 대면하여 만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교제는 부활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어떤 날 [매튜 아놀드](는 (mattew arnold)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오, 그 위대했던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 영광이 새로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며 나의 황홀한 영혼을 사로 잡았을 것을! 이제 그는 죽었다. 그 오랜 동안을 [시리아]의 쓸쓸한 마을에 그는 묻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무덤 위를 [시리아]의 별들만이 반짝이는 눈으로 내려다 본다. [아놀드]는 잘못 알았다. 그는 전혀 결정적으로 잘못 알았다. 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가? 그리스도는 살아계신다. [버밍험]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故[데일]박사는 어느 날 그가 부활주일의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어떻게 부활의 사실성이 이전에 결코 그랬떤 것이 없었던 만큼 강렬하게 그에게 엄습해 왔는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신다!] 라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다!]그리고는 잠간 있다가 다시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다! ] 잠깐 후에 다시 말했다. [그는 살아계신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처럼 실제로 살아계실까?]나는 일어나 걸으면서 되풀이 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맨처음에 그 사실은 이상하고 그의 진실이 아닌 것처럼 영광의 광채처럼 나를 휩쌌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단순한 이론이나 불확실한 소문이 아니라 확증된 불가침의 체험이 되고 있다.만일 그들이 한때 패배했던 그곳에서 승리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부활하신 아침에 동산의 꽃밭을 거니시던 부활하신 주님을 그들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일이 성구 고린도전서 15:8-9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 요한복음 20:11-18 무덤에 간 막달라 마리아 누가복음 24:13-35 [엠마오]길의 그리스도 요한복음 20:19-23 잠긴 문 뒤에서 요한복음 20:24-31 도마의 믿음 요한복음 21:1-14 갈릴리 호숫가에서 사도행전 2:29-36 부활의 복음 토론을 위한 질문 1. 당신은 부활에 대한 주요 증거로서 어떤 것을 제시하겠는가? 2.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지 아니하셨으면 너희는 아직 너희 죄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3.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으며]라는 사도신경 중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4. 아직도 부활을 부정하는 편에 서 있는 기독교이들이 너무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