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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가지 사랑과 축복의 길/ 삼하23:13-17/ 2003-12-15
3가지 사랑과 축복의 길 삼하23:13-17 <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는 사람 > 요새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했을 때 나이에 따라 미혼 여성들의 반응이 다르다고 합니다. 10대 후반에는 자기에 제일인 줄 알고 해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나와줍니다. 20대 초반에는 아직도 환상에 빠져 외모와 키를 따지다가 못 이기는 척 나옵니다. 20대 후반에는 현실에 눈을 떠서 직장과 집안과 사람됨을 묻지만 결론은 항상 \"예스!\"입니다. 그러다가 30대 이상이 되면 너무 반가워서 울면서 메모지를 들고 만날 장소를 받아 적는다고 합니다. 드디어 소개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때 반응도 다릅니다. 10대 후반에는 애프터를 신청해주기만을 기다립니다. 20대 초반에는 은근슬쩍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고 애교를 떱니다. 20대 후반에는 강제로 집에 데려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시킵니다. 그러다가 30대 이상이 되면 그 동안 시집가려고 모아둔 통장을 꺼내 보여준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이 유머를 보고 저는 \"세월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금방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세월입니다. 우리의 미모, 우리의 재산, 우리의 힘도 세월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항상 \"겸손하게 살자!\"고 스스로 다짐해야 합니다. 사람은 대개 힘이 있으면 과시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본능을 억제하고 주어진 힘을 겸손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무슨 수단을 쓰시더라도 그 마음을 꺾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 장인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인구조사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구조사에는 \"내가 이런 나라를 이뤘다!\"는 과시욕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잘못으로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돌고 백성 7만 명이 죽습니다. 그때 다윗은 철저히 회개를 합니다. \"주님! 백성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대신 저와 저의 가문을 치소서!\" 그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가서 \"회개의 제단을 쌓으려고 하니 네 타작 마당을 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라우나는 다윗에게 기쁘게 타작 마당을 내어놓습니다. 그곳에서 회개의 제단을 쌓자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되었고, 훗날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아라우나는 온 나라에 화를 끼친 다윗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썼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타작 마당을 기쁘게 내어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라우나처럼 남을 비판하는 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나를 드리는 시간은 최대한 늘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축복하실까요?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축복하시고, 가진 것이 있어도 신앙이 변치 않고 가진 것이 없어도 신앙이 변치 않는 한결같은 사람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드릴 줄 아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이름 없는 들풀과 같은 존재일지라도 아라우나처럼 소중한 일에 자기의 것을 내어드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행복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은 변화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은 세워질 것입니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오늘 본문에는 아라우나처럼 자기를 드려 헌신했던 세 명의 용사가 나옵니다. 그들은 요셉밧세벳(8절), 엘르아살(9절), 그리고 삼마(11절)로서, 그들은 다윗 진영을 이끌었던 으뜸 가는 세 명의 용사였습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행위를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저는 본문을 통해서 사랑을 3가지로 정의해 보았습니다. 1. 첫째, 사랑은 듣는 것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다윗이 참 철이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군대가 산성에 있고, 블레셋 군대가 베들레헴 성에 있어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고 싶다. 누가 나로 저 물을 마시게 할까?\"고 하니 얼마나 철이 없는 행동입니까? 전시에 어렸을 때의 향수에 젖어서 리더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큰 인물이 되겠습니까? 그런 말은 부하들의 가십거리가 될만한 말입니다. 그러나 세 용사들은 \"주군이 이상해졌어!\"라고 가십거리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말을 마음속 깊이 들었습니다. 그처럼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것이 바로 사랑의 기초입니다. 여러분! 리더의 허물을 보고 가십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허물을 덮으라고 나를 목자 곁에 두셨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목회자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예배 후에 가끔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속으로 말합니다. \"성도님! 말씀 잘 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요새는 말씀을 잘 전하는 목사님보다 말씀을 잘 듣는 성도님들이 더 훌륭해 보입니다. 그만큼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말씀을 잘 듣는 분들은 교회 일 부탁하기가 참 편합니다. \"집사님! 이것 좀 해주실래요?\" 그러면 다른 말없이 \"네!\" 하고 대답합니다. 천사표 교인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첫째 이유는 기본적인 교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이유는 공동체 생활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잘 듣는 것은 소중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가장 무서운 일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경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병입니다. 성경을 볼 때 \"내가 이만한 존재다!\"라고 생각하면 성경은 침묵해버립니다. 더 이상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그때부터 침묵하던 성경은 말합니다. 그때부터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고, 다른 사람의 말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남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자기의 부족함을 모르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대개 보면 교만할 내용이 별로 없는 사람이 교만해지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이 남보고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말합니다. 심리학자들은 가장 결함이 많은 사람이 가장 많이 남을 비판한다고 말합니다. 또 보면 교만한 사람이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결국 말을 안 듣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환영해주는 곳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기댈 곳도 없게 됩니다. 멀리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해도 눈물 흘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듣지 않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우리는 더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해력이 커집니다. 이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지만 오해는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왜 부부관계가 깨집니까? 대개 오해 때문입니다. 남편은 대개 아내의 가사 돌보는 일이 쉽다는 오해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은근히 \"나는 이 고생을 하는데 낮잠만 자면서 웬 불평이냐?\"고 생각합니다. 큰 오해입니다. 사실 가사처럼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생색이 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몇 배 힘듭니다. 그런 점을 몰라주는 것도 일종의 교만이고, 사랑이 없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보면서 항상 속으로 \"여보! 이렇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속으로만 생각하십시오. 겉으로 그렇게 말하고 여전히 짜증을 잘 내면 인격을 의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아내를 긍휼히 여기며 이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반대로 아내가 \"남편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말로 구구절절이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되는 것이 세상인데 마음까지 알아달라고 요구하고 불평하니 그것도 너무 이해가 없는 태도입니다. 남편이 신도 아닌데 어떻게 아내의 마음을 구석구석 다 알아줍니까? 그러므로 아내가 할 일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남편의 마음을 알아주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 가장 교만한 태도는 바로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 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별로 문제가 없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 말은 \"나만 옳다! 나는 당신 말을 안 듣겠다! 당신은 나만 이해하라! 나는 당신을 이해해주지 못하겠다!\"는 무언의 폭력입니다. 그것은 진짜 가정폭력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는 사단적인 생각은 철저히 버리고 \"내가 좀더 들어주자! 내가 좀더 이해해주자!\"라고 하는 성령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서로가 들어줄 줄 아는 삶이 부부관계를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사랑은 듣는 것입니다. 조금 더 들어주십시오. 들어줄 줄 모르면 평생 가도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얻지 못합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도 힘듭니다. 사람의 마음도 얻지 못하면서 무슨 하나님의 마음을 얻겠습니까? 자기 의견만 주장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맨날 오해만 하고, 맨날 불평만 하다가 어려운 지경에 처합니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보십시오. 맨날 이해만 하고 맨날 감사만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No\'라는 말을 많이 할 구실을 찾습니다. 그렇지만 성숙한 사람은 \'Yes\'라는 말을 많이 할 구실을 찾습니다. 자세히 보면 \'No\'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No\'라는 말을 받을 줄 아는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오냐 오냐\' 하고 키우면 \'Yes\'를 받을 줄만 알고 \'Yes\'를 할 줄은 몰라 커서도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Yes\'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스맨\'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예스!\" 하면서 남을 격려할 줄 아는 \'예수맨\'이 되라는 말입니다. 남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들어주고, 양보하면서 보다 큰 것을 얻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2. 둘째, 사랑은 조용히 행동하는 것입니다. 세 명의 용사는 다윗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희생을 작정했습니다. 결국 이 세 명의 용사는 물을 구하러 사명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있는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50리 정도 됩니다. 왕복 100리 길을 오직 물을 얻기 위해서 적진으로 들어가는 이 세 명의 용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진정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어리석을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전혀 논리가 맞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조용히 실천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헌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명이라고 하면 이사야가 생각이 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을까요? 가끔 보면 어려운 일에 앞서 헌신을 다짐하며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해보죠.\" 그런 분들 보면 흥분이 됩니다. 너무 기쁘고 감동이 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말없이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인터넷을 통해서 저의 필요와 기도제목을 알아차리고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이 아닌데도 멀리서 우리 교인보다 더 신경을 써주는 분도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의 헌신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 어느새 그분의 환한 얼굴이 기도 중에 영상으로 떠오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푸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온갖 목회의 시름과 스트레스가 다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처럼 조용한 헌신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세 용사도 \"왕이여! 제가 한번 갖다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아무리 다윗이 그 우물물을 먹고 싶어도 갖다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물을 얻으러 갑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합니다. 그처럼 사랑은 조용히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이처럼 조용히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만 하고 영적이지 못하고 책임적이지 못한 성도가 아니라 조용히 행동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여자의 길이고, 또 하나는 방관자의 길입니다. 참여자의 길이 행복을 얻는 길이고,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들러리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지 \'신부의 들러리\'가 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생활에서 주인공이 되지는 못해도 중심 인물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조용히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셋째, 사랑은 나의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와서 다윗에게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드린 것은 우물물이 아니라 자기들의 목숨이었습니다. 그처럼 자기의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도 줄 수는 있지만 주는 것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진실한 관계는 드리는 삶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무엇인가 소중한 일에 내 마음을 드리면 이상하게도 내 영혼이 살아납니다. 내가 죽으면 내 육신이 살아나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거목이 쓰러지면 산이 망할 것 같지만 그 쓰러진 것이 거름이 되어 작은 나무들이 더 많이 생기게 됩니다. 교회도 부흥하려면 자신을 드릴 줄 아는 거목들이 많아야 합니다. 취하는 삶은 갈증을 더하지만 바치는 삶은 영혼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취하는 삶은 내가 주인인 줄 아는 삶입니다. 그러나 바치는 삶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아는 삶입니다. 취하는 삶에는 눈물이 나오게 되지만 바치는 삶에는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삶은 \'취할 기회\'만 있고 \'바칠 기회\'는 없는 삶입니다. 가끔 부부간에 서로 더 달라고, 서로 더 취하려고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인류 중에서 그 사람이 내 남편이 되어주고, 내 아내가 되어준 것을 생각하면 몸 전체를 다 준 것인데 더 달라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서로 줄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가 구원받은 것만 해도 우리는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받으려고만 하고 취하려고만 하면 그것이 불행의 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더 드릴 일만 있을 뿐입니다. 목회하면서 제일 감동될 때가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사람이 물질적 헌신을 할 때입니다. 그때는 온 몸과 마음이 떨리면서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은 피눈물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저는 갚을 길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분들에게 영혼의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좀더 덜 누리고, 좀더 덜 쓰고 살기로 작정하면 영혼의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시성 타고르는 \"바람이 불어 배 안의 등불이 꺼지니 뱃전에 달빛이 차더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릴 때 행복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그만 힘이라도 주어질 때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주눅들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영혼의 만족의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 중에는 예배와 기도에는 강한데 나누는 일에는 국물도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 사람은 절대로 인색하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되면 안됩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은 세상을 너무 몰라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몰라도 주님의 뜻은 알고 있습니다. 그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축복 받을 생각도 안 해도 하나님께서는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제 나누는 일을 더 많이 하십시오. 우리가 소중한 일을 위해 호주머니를 비울 때 그 빈 호주머니에 하나님은 더욱 풍성한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웃의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도 많이 나누십시오. 우리 주위에 어려운 분들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너그럽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드리고는 싶은데 여건이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방법과 길은 반드시 하나님이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 위대한 이해력을 가진 분들이 되십시오 > 세 명이 용사가 가져다 준 우물물을 받고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그 엄청난 헌신을 보고 다윗은 이기적인 감성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욕망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것, 그처럼 소중한 물을 전혀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물은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갔던 사람들의 피입니다. 제가 도저히 마실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부하들이 보면서 얼마나 감동이 되겠습니까? 그 순간 그들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들은 더욱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게 되었고 결국 나라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치인들이나 지도자들에게 있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분들이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정책 결정을 하는데 완벽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원하는 것은 사심 없이 국민들을 위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 잘못을 시인하고 근신하는 모습입니다. 한 가지 잘못을 시인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다 물어뜯는 사람들 때문에 시인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잘못에 대해 진지하게 용서를 구하면 대다수 국민들은 용서에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용기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고, 사실 우리 자신이 다 그런 존재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을 때 다윗의 갈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깨끗이 해소되었을 것입니다. 헌신은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는 촉매제입니다. 다윗도 위대한 사람이지만 세 용사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하였더라.\" 이 세 용사는 헌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누군가의 필요에 반응할 수 있는 위대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위대한 이해력이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화요일 교회 이전 장소 계약을 했습니다. 계약금을 치르고 나니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부부처럼 마음이 설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설움이 설렘으로 변화된 줄 믿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앞으로 필요한 것들을 생각할 때 남모르는 부담감이 저의 영혼에 저며옵니다. 4월 30일까지 중도금을 치러야 하고, 인테리어 비용과 여러 교회 물품 등 상세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교회 이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도 알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통해 작은 은혜가 주어져서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이번에 주님의 몸된 전을 위해 저와 함께 조금이라도 부담을 나누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서로 더욱 격려해야 할 때입니다. 모두 일체감을 가지고 함께 이 일에 심취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소리 없는 헌신을 기대합니다. 다윗의 세 용사처럼 목자의 필요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위대한 이해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진지 처음으로 맞이하는 헌신의 장을 지나면서 여러분들의 신앙의 차원이 한 차원 높아지고, 잃었던 활력을 다시 한번 찾고, 다시 한번 헌신을 통해 주어지는 영혼의 새로움을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을 세우는 하늘 나라의 거룩한 기초석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강해지는 다윗 약해지는 사울/ 삼하3:1/ 2005-01-24
강해지는 다윗 약해지는 사울 삼하3:1 본문 말씀은 서글픈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을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준수하여 한 때 인기가 높았던 사울 왕의 집은 점점 쇄약해지고 반대로 이새의 막내아들로 일개 목동이었던 다윗의 집은 점점 강성해 간다는 말씀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고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강해지는 집과 약해지는 집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가 점점 강성해지는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왜 다윗의 집은 점점 흥해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쇠약해 지는가? 첫째, 다윗의 마음은 넓었고. 사울의 마음은 좁았다. 다윗은 비록 목동출신이었지만 마음이 바다같이 넓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마음은 좁았습니다. 무엇을 보아 알 수 있나하면, 질투심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목동 출신 다윗이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블레셋 나라의 무적 장군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 하나로 쳐 죽이고 목을 베어가지고 돌아왔을 때 여인들이 춤을 추며 창화하여 가로되“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고 하자.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사울의 마음은 심히 불쾌해 지고 노하여 강한 질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니까 마음이 점점 좁아지면서 성령은 떠나고 악신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구국공신이요. 자기 사위인데도 악령이 역사하니까 사울은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이 넓어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이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고 하나님이 처리해 주실 때까지 피해 다니기만 했습니다. 한번은 식탁에 앉은 다윗을 사울이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으나 다윗은 재빨리 피하여 위기를 모면한 때도 있었습니다. 누워있는 그를 죽이려 한때도 있었고. 다윗이 광야로 피신하면 광야를 쫓아다니기도 했으나 결국 사울은 그 창으로 자기가 엎드려 자살해 죽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 까지 그 전쟁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질투심을 절제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면 마음이 점점 좁아지고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욥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잠14: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쳐 죽인후로 인간은 누구에게나 시기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칭찬받고 존경받는 사람일수록 시기심이 더 큽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 장로들이 인기가 오르고 있는 예수님을 시기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요셉을 보다 못해 죽이려다가 애급 장사꾼들에게 팔아먹고 아버지에게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가지고 가 찢겨죽었다고 했습니다. 시기심은 누구나 있는데 이런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마귀를 물리치고 말씀을 묵상하여 기도로써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치사한 사람이 되고 결국 사울과 같이 쇠하여지고 맙니다. 옛날 리비아 사막에 한 성자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마귀들이 의심과 온갖 유혹으로 그 육체를 괴롭혔으나 굴하지 않았는데 늙은 마귀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그런 조잡스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야단을 치면서 그 성자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말하길‘그 소식을 들었습니까? 당신의 형제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었다는 소식 말입니다’ 하니까 그 성자의 그 평온하던 얼굴이 삽시간에 찌부러지더니 악의에 찬 얼굴이 되고 말더랍니다. 유명한 주경신학자 F.B 마이어 목사님이 한 말입니다. G. 캠벨. 모르간 목사님 (당시 유명한 설교자)이 미국에 있을 때는 그가 성공하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쉬운 일이었는데. 막상 그가 런던으로 돌아와서 자기 교회 가까이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는 문제가 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옛 사람 아담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으나 발꿈치로 그 머리를 밟아버리고 친구에 대해서 올바른 감정을 가지고 올바르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에서 캠벨 목사님 환영식을 하고 양해를 얻고 주일 저녁 예배를 그 캠벨 목사님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러 갔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당시 유명한 스펄쳔 목사님이 자기 옆줄에 와 앉아있더랍니다. 주님의 은혜로 그 모든 악한 감정을 이겼더니 마이어 목사님은 그 목사님대로 교회가 부흥하더랍니다. 그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 냈습니다. 어느 날 유명한 화가 레오나드 다빈 치에게 플로렌스의 큰 홀에 그림을 그리도록 부탁을 하고 또 젊은 화가인 미켈란젤로에게도 스케치를 하라고 했더니 다빈치도 잘 그렸지만 미켈란젤로의 그림도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 누가 말하기를 “레오나드도 이제 늙었구먼”하며 명예를 실추시키는 말을 다빈치가 들었을 때 그는 이 말을 잊지 않고 남은 생애를 우울한 상태로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며 주의해야 할뿐만 아니라. 남에게 시기심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울 왕이 악신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하다가 결국 망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첫째로는 사울의 책임이지만 그 여인들이 가볍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 그 말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시기심과 거부감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항상 자기를 높이거나 자랑하는 말을 조심해야합니다. 자기 자랑을 너무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고 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옛 격언에 “성공한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완전한 패배자가 된 것은 아니다”“시기하지 않고 친구의 성공을 존경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거의 없다” “나의 불행을 동정할 수 있는 사람이 한명쯤 있다면 나의 성공을 미워할 사람은 천명이나 된다”“시기는 다른 사람을 쏘지만 결국 상처는 자기가 입는다”“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돕기에 바쁜 사람은 자기 위에 있는 사람을 시기할 시간이 없다” 사울은 마음이 좁아서 시기심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다가 점점 쇠하여져서 망했고, 다윗은 마음이 넓어서 점점 흥해졌습니다. 시기심을 조심해야 우리 집에 행복이 보장됩니다. 둘째, 다윗은 겸손했고, 사울은 교만했습니다. 다윗은 목동시절이나 왕이 된 후에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겸손했습니다. 다윗이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는 장막에 있음을 죄송하게 생각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할 때, 다윗은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서도 그 마음을 가상히 여겨 축복하실 때 다윗이 말하기를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 오며 내 집은 무엇이 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하고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가 법궤를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올 때 왕의 체면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힘을 다하여 기뻐 뛰며 춤을 추며 환영했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때 다윗은 부인이 비웃으며 하는 말이 “방탕한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들어내는 것같이 그 심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들어내었도다”하고 비웃을 때에 다윗은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다윗이 범죄 했을 때 무명의 선지자 나단이 와서 손가락질을 하며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죄를 책망했을 때도 겸손히 받아들이며 회개했습니다. 왕의 권위로 나단 선지자를 쫓아내거나 투옥시킬 수도 있었지만 겸손했고 체면을 생각해서 변명하거나 숨기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죄를 범 하였나이다”하며 고꾸라져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다윗은 참으로 마음이 겸손하고 부드러웠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했으나 왕이 된 뒤에는 교만하고 완악해져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무명의 선지자 나단의 말을 듣고 회개했는데, 사울은 사무엘 상 하서를 기록한 대 선지자 사무엘의 간곡한 권면을 듣고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변명하면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점점 쇠하여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삼상15:23절에 “거역하는 것은 사슬에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이렇게 무서운 선언을 들었습니다. 다윗은 겸손하여 점점 흥하여갔고 사울은 교만하여 점점 쇠하여 갔습니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약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잠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이런 말씀들과 같이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고 쇠약해집니다. 셋째, 다윗은 용서의 사람이었고, 사울은 복수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큰 바다와 같아서 남의 잘못을 잘 용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실예로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왕위를 빼앗고 아버지를 죽이려한 불효막심한 놈이었지만 전쟁터에서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내 아들 압살롬아...” 하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할 때 시므이가 언덕위에서“피 흘린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하면서 돌을 던지며 저주할 때 당장 죽일 수도 있었으나 용서해 주었고. 승리하고 돌아올 때 길가에 엎드려 용서해 달라고 빌 때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고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다윗은 집은 점점 흥왕해 갔습니다. ‘에게디’ 굴속에 있을 때에도, 또 십 황무지에 있을 때에도 사울을 죽여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으나 옷자락만 베거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오거나 하면서 절대로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마음이 좁고 완악하여 걸핏하면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죽였고 심지어 하나님의 종인 제사장까지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아들 요나단 까지도 자기 말대로 안했다고 칼로 쳐 죽일 뻔 한 일도 있었습니다. 용서의 사람 다윗의 집은 점점 흥왕해가고. 복수의 사람 사울의 집은 점점 쇠약해갔습니다. 성경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이유는 아마도 원수나 이웃이나 다 같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수심에 차서 원수 갚기 좋아하는 사람이 흥왕할 수 없습니다. 용서의 사람. 다윗은 점점 흥왕해 지고. 복수의 사람 사울은 점점 쇠약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넷째, 다윗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사울은 하나님이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삼하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은 하나님이 늘 함께 하셨기 때문에 환난을 당할지라도 점점 강성해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적군 골리앗을 쳐부순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삼하7: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그 말씀 그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므로 존귀해지고 강성해 졌습니다. (삼하8:6,14)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요셉도 머슴살이 할 때나 감옥살이 할 때나 총리대신 할 때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점점 흥왕해 갔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회개치 않으므로 결국 하나님이 버리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런 결과 악령만 역사하고 시기심만 작동하고 복수심만 가득하므로 쇠약해지다가 비참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여 하나님 편에 서시고 마귀 편에서지 마십시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사람이 됩시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여러분, 시기심을 버리고. 넓은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항상 겸손한 사람이 되며 복수가 아니라 용서의 사람이 됩시다. 또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되어 점점 흥왕해가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눅3:1-6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눅3:1-6 필라델피아에 죤이라는 13세의 소년이 있었다. 벽돌공장에서 노동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교회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창길이 되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대책을 안세웠다. 자기 집 같으면 벌써 훌륭하게 벽돌이나 돌로 포장 되었을 것이다. 어느 주일 죤은 결심했다. 이미 죤의 눈에는 벽돌로 포장된 길과 그리로 들어가는 많은 아이와 어른들이 보였던 것이다. 죤은 7센트의 임금 속에서 날마다 벽돌을 한 장씩 자기 공장에서 사서 깔기 시작했다. 이 길과 넓은 길을 죤이 혼자 완성하려면 2년이 걸릴 것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1개월내에 일어났다. 죤의 모습을 보고 이기적이며 형식적이었던 신앙생활을 반성한 교인들은 길뿐이 아니라 낡은 교회당을 헐고 신축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이 소년의 이름은 죤 워너메이커이다. 미국의 백화점왕이 되었고 미국과 전세계에 YMCA 건물을 수없이 지어 주었는데 서울 종로 2가에 있던 YMCA 벽돌건물도 워너메이커의 기증이었다. 하나님은 교회로 가는 길을 아름답고 만들고 싶어했던 죤이라는 소년에게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오자. 오늘의 본문에는 교회로 가는 길 정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 가는 길을 헌신적으로 닦았던 세례 요한이 등장하고 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바로 그의 별명이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우리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1. 세례 요한 당시의 시대 배경 먼저 세례 요한이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자. 1) 일반적인 배경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살던 시대적인 배경이 어떻게 언급되고 있는가?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2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가이사-로마의 황제. 유대지역을 속국으로 하고 있는 로마의 주인. 이름은 디베리우스 총독-로마에서 파송한 감독관의 칭호. 빌라도는 유대지역의 총독.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 분봉왕-로마 황제가 세운 지역의 왕. 임명왕. 그러기에 왕이 여럿임. 대제사장-하나님 앞에 제사드리고 백성을 돌아보는 지도자. 가야바가 실제적인 대제사장. 안나스는 전임. 동시에 가야바의 장인. 2) 보다 세부적인 배경 로마 황제-유대백성을 위하지 않음. 총독-자신의 자리 유지에 급급. 빌라도는 자신이 살기 위해 예수를 죽인 장본임. 매우 잔인한 총독. 분봉왕-헤롯가는 이두메 출신. 유대인이 아님.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성전을 지엇지만 실제로 유대인을 위하지는 않음. 대제사장-백성의 목자 위치. 그러나 백성을 돌아보지는 않음. 예수님이 무리 보시고-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함을 민망히 여기심. 3) 보다 영적인 배경 말라기 이후 400년간 선지자의 소리가 끊어져 있음.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 메시야 대망이 드높아진 시기. 그렇기에 세례 요한이 드장하자마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목이 말랐다는 이야기다. 세례 요한이 등장한 때는 바로 이런 시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2. 세례 요한의 신상 명세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떠한 삶인가? 1) 부모의 기도로 태어난 사람 첫째로 그는 부모의 기도로 태어난 사람이다. 또한 부모의 신앙 영향을 받으며 자라낫다.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쌔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장) 이것은 세례 요한의 복임.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자녀를 복있는 자녀로 삼으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기도의 사람, 신앙의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부모의 기도 속에 자란 사람은 설사 잘못된 길로 가다가도 주님 앞에 돌아오게 되어 있다. 1920년 일본 동경의 미도리마치(록정) 3정목에 있는 성결교회 청년들이 노방전도하는 모습을 2층에서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고있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그 모습을 보더니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아버님, 어머님은 오늘도 나를 위하여 기도하실텐데 나는....\\\"하며 소리를 내어 울었던 것이다. 그 때에 그 청년이 일하고 잇는 신문지국장의 부인이 물었다. \\\"황 군 왜 우는거야?\\\" \\\"저것 보십시오. 저 청년들의 전도하는 것을. 나도 전엔 기독교 신자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타락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실텐데......\\\"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 부인은 아주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예수 믿어 무엇하게요. 황군 단념하세요\\\" 그런데 그 청년은 아무말 없이 일어나서 옷을 입고 전도하는 청년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려 했고 부인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신문배달부들에게 그 청년을 놀리며 떠들어 댔다. 그러나 그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그들의 전도를 들었다. 그 청년은 21세의 나이로 학문의 높은 뜻을 품고 동경에 왔으나 학비를 벌기 위하여 신문배달을 하면서 고항에서 영접한 예수를 잊고 살았던 청년이었고 결국은 부모의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었던 황철도 목사였다. 2) 광야에서 자라난 사람 둘째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 광야란 물없는 곳 낮에는 덮고 밤에는 춥고 먹을 것이 마땅치 않고 사람도 살지 않고 뱀과 전갈이 있는 곳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 광야에서 자랐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세례 요한은 존귀한 제사자의 아들, 그것도 노년에 낳은 외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지중지 키웟어야 할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귀한 아들이 광야에서 자란 것임. 그리고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이 되어간 것임. 그리고 이것은 세례 요한만이 아님. 모세가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음. 예수님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훈련을 받으심. 우리 역시 인생의 광야가 있다. 이 광야에서 우리가 다듬어진다. 우리가 견고해 진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바뀌어간다. 왕궁이 아닌 광야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사람인 것이다. 3)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 세례 요한은 이 광야에 있었고 바로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400년간 그쳤던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선포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하나님의 사람이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게 되는 놀라운 출발이기 때문이다. 3. 세례 요한이 감당하게 될 사역 그리고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사역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예언된 것이고 이제 그 예언의 성취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주는 예수님.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세례 요한이 닦는 길은 마음의 길임. 사람들의 마음을 예비시키는 것. 1)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길이 깊이 패여 있으면 다니기가 불편함. 패인 곳은 메꾸어야 한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 일을 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 마음이 패여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열등감. 낮은 자존감. 이것은 신앙의 걸림이 됨. 자꾸 넘어지는 사람.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이 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음. 이런 사람은 시험에 잘 듬.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잘 받음. 친구들의 영향. 이웃의 영향. 직장 동료의 영향 등등. 유혹을 잘 받게 되는 것이다. (동창회, 부녀회, 직장 모임등등의 문제) 거꾸로 생각해 보라. 자존감이 쉽게 끌려다니지 않음. 술과 담배. 정죄하거나 비판하고 싶지는 않음.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는 자존감이 분명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자녀로서의 긍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기꺼히 거절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의무감으로 마지 못해 하는 것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존감이 없으니까 사람들 속에 끼고 인정받고 싶은 나머지 함께 따라가 주는 것이다. 부디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깊은 골이 메워지기를 축원한다. 세례 요한 당시에 깊은 골짜기 같은 사람. 세리 창녀 죄인 이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음. 후에 예수님을 더 잘 영접함. 2)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길이 솟아있으면 다니기가 어려움. 교만. 어떤 신사가 좋은 차를 몰고가다가 냇물을 만났다.그곳에 마침 농부가 있었다. 신사는 거만하게 물어보았다. \\\"여보시오,내 차가 여기를 건너갈수 있겠오?\\\" 농부는 부자의 교만에 맘이 상했지만 꼭 참고 대답했다. \\\"예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차를 몰고 건너다가 물에 빠져버렸다. 그러자 신사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 \\\"이봐요. 여기를 건널 수 잇다고 했잖소. 이게 뭐요\\\" 이때 농부는 말했다. \\\"조금 전에도 오리가 건너갔는데요\\\" 그까짓 좋은 차좀 탔다고 교만해지는 것이 사람이다. 남보다 조금 더 나은 것이 있으면 잘난척하는 것이 사람이다. 공부좀 잘해봐라. 얼마나 교만한가? 얼굴 좀 이뻐봐라. 얼마나 콧대가 높은가? 집안이 좀 좋아봐라 얼마나 으스대는가? 그리고 이런 교만이 맘 속에 자리 잡을 때 주님은 그 길을 지나실 수 없다. 낮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런 교만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일을 했다.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장) 3) 굽은 것이 곧아지고 길이 굽으면 제대로 다닐 수가 없음. 물론 다니기는 할 것이지만 힘들고 불편함. 대관령. 꾸불꾸불. 속도가 안나고 위험함. 외곡된 심령. 비뚤어진 심령. 어릴적 상처가 많이 작용함. 수가성의 여인같은 사람. 굽어져있는 여인.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찾아 헤매지만 그것이 무의미함을 모름. 아니 알면서도 벗어나지를 모함.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죄악을 즐기기도 함. 다양하게 합리화하면서. 이것은 바로 잡아야 함. 세례요한은 그처럼 굽어져 있는 것을 향해 그것이 분명 잘못된 것임을 당당하게 지적함. 헤롯에 대해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눅 3장) 세례 요한은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죽게 됨. \\\"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8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마 14장) 4)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험한 길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음. 돌아가더라도 제대로 다닐 수 있는 길을 걸을 것임. 생각해봐라. 진탕길로 가겠는가? 유리가 부서져 늘어선 길을 가겠는가? 거친 사람들.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며 상처를 주는 사람들. \\\"나는 상처를 잘 안받아\\\"하는 사람. 그것이 자랑만은 아니다. 그런 사람 중에 남에게 상처를 잘 주는 사람이 있음.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음. 기경이 필요한 사람들임.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결국 세례요한이 하는 것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것.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 회개의 세례 4. 세례 요한의 별명과 그 의미 이처럼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그에게 주어진 별명이 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우리가 잘아는 내용이다. 1) 납득이 안가는 내용 광야인데 거기서 무엇을 외친단 말인가? 광야에는 사람이 없는데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많은 곳으로 가야하지 안흔가? 웅변을 하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선거철에-돈들여 사람동원. 사람없으면 외치는 것도 웃김. 그런데 세례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임. 이것은 형식으로가 아닌 실제로 그러함. 요한은 도시가 아닌 광야에서 설교를 했음. 그런데 사람들이 그 광야에 빼곡하게 모여듬.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장) 어떻게 이런 일이? 세레 요한에게는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임.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임했다고 앞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예수님에게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막 1장)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계셨는데 사람들이 모여든 것임. \\\"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막 1장) \\\"42○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눅 4장)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장) 여러분. 늘 말하지만 다시 말한다.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 말씀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되게 해 달라고. 시간 시간 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해 달라고... 그러면 우리가 예배하는 자리에 그 말씀을 들으려고 수많은 무리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2) 소리가 가진 의미 자신은 사라짐 끝까지 남아있는 것이 문제임. 어떤 사람이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씨에게 그의 성공의 비결을 물었을 때, 부스씨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드디어 눈물어린 눈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보다 더 훌륭한 두뇌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저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을 했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 부스씨의 딸이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셨다고 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그것이 비결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비결은 헌신하신 것을 결코 되돌려 받지 않은 데 있습니다.\\\" 부스의 위대함은 그 헌신에도 있지만 헌신 이후에 자신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는 데에 더욱 큰 위대함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다가 실족하는 이유. 자신이 의미를 전달하고 사라지는 소리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 여러분 생각해보라. 소리가 의미를 전하고 사라지지않으면? 시끄러워 못산다. 시끄러운 교회는 바로 사라지지 않는 소리 때문이다. 분명히 기도도 한다. 헌신도 한다. 봉사도 한다. 참 열심이다. 그런데 자기를 드러내려고 안달이다. 이런 사람이 모인 교회는 조용할 날이 없는 법이다. 주님의 가르침.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눅 17장)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잡음이 아닌 소리가 되시기를 축원한다. 3)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그러면 세례요한은 왜 사라졌는가? 자신이 사라지면서까지 드러내기를 원했던 것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요 1장) 자기 제자를 아낌없이 보냄. 그중 한명이 안드레. 그 안드레가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 \\\"15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장)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장)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왜 문제인가? 자신이 남아서 예수님을 가려버리는 것이다. 조연이 무대를 비켜주어야 주연이 조명을 받으며 등장할텐데 여전히 조명받고 시어서 무대에 남아있는 조연을 생각해보라. 그 연극은 완전히 망치는 거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연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 그런데 자신이 사라지기 싫어 남아있는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주님의 일 자체를 이상하게 만들고 결국 KRL 자신에게도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 권사님이 하늘 나라에 갔다 오셨다. 그 분은 세상적으로 이름이 있는 분이었고 또 신유의 은사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분을 능가할 분이 없을 정도로 큰 은사를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분이었다. 기도도 많이 한 분이고 주님 앞에 외견적으로는 충성을 다한 분이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가 보니 그 분에게 배당된 집은 개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님께 나를 아시느냐고 했더니 모른다고 하셨다. 또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목사님을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그런 일을 경험한 후에는 자기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북한 선교원에 몇십억을 기증했다고 한다. 그분도 유명한 목사님도 문제가 무엇일까? 자신들이 여전히 영광받는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사라지고 주님은 드러나야 하는데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광은 주님만이 받으시게 하라. 할레루야.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름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전도할 수 있다. 드러내지 않고 헌금. 드러내지 않고 봉사. 드러내지 않고 심방. 이것은 남이 보지 못하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동기로 모든 것을 하라는 것이다. 부디 새능력교회가 그런 성도들로 가득하길 축원한다. 결론 세례 요한은 주님을 전하고 사라졌다. 그는 참으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그러면 주를 위해 사라진 자는 완전히 잊혀졌는가? 아니다. 주를 위해 사라진 자의 영광의 자신을 드러낸 사람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는 법이다. 세레 요한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는 예수님의 인정. 영국 대부호 캐리(Carey)씨는 죠지(George)와 윌리암(William)이란 두 아들을 두었다. 모두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들이었다. 그후에 죠지는 국회의원이 되고 돈도 많이 벌어 부호 정치가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윌리암은 난데없이 인도 선교사를 지망하여 온 가족이 극력 반대하고 친구들은 그런 그를 어리석다고 규정지었다. 후에 대영백과사전에 이 두 사람이 소개되었다. 윌리암에 대해서는 1페이지 반을 할애하여 상세히 소개되었으나, 죠지에 대하여는 한마디 \\\"윌리암 캐리의 형이었다\\\"라고만 소개되었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큰 차이.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하나님 앞에 사라지는 자가 되고 싶으신가? 아니면 세상에서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 큰 자로 남고 싶은가? 보이는 잠간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영원을 택할 것인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그 소리는 사라졌지만 그 의미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영원히 서 있는 것이다. 오 하나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게 하옵소서\\\"
광야의 세례요한/ 마3:1-17/ 2013-04-23
광야의 세례 요한 마3:1-17 세례 요한은 제사장 반열에 든 사람이다.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광야에서 외친 이유는 무엇일까? 1. 전파 장소, 내용(마3:1-3) 1) 광야 2) 회개하라! 3) 천국 4) 첩경을 예비하라 2. 세례 요한의 모습과 활동 1) 에비온 파(마3:4) - 약대털 옷, 가죽띠, 메뚜기, 석청 2) 시대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마3:6-12) 3. 하나님 아들의 증거 1) 세례 요한 - 제사장 2) 세례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3) 마3:16-17 대.청 메세지 43 광야의 세례요한 교사용 마3:1-17 세례 요한은 제사장 반열에 든 사람이다.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광야에서 외친 이유는 무엇일까? 1. 전파 장소, 내용(마3:1-3) 1) 광야 세상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로 다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광야에서 외친 것이다. 우리는 광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시내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영적으로 광야에서 길을 잃고 헤메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광야에서 지친 저 대학생들에게 가야한다. 영적으로 황페한 곳에서 헤메는 자들을 불러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요한처럼 광야로 나가야 한다. 전 지역에 미션홈을 만들어 놓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이다. 너무 물없고, 지쳐서 죽어가는 자들이 있는 그들에게 가서 세례요한이 외친 것이다. 뭐라고? 2) 회개하라!고 외친 것이다. 3) 천국 - 천국이 가까왔다. 4) 첩경을 예비하라 2. 세례 요한의 모습과 활동 1) 에비온 파(마3:4) - 약대털 옷, 가죽띠, 메뚜기, 석청(=꿀) 나실인보다 더 확실한 사명자가 에비온파이다. 2) 시대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마3:6-12)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향하여, 여자가 낳은 자중에 저같은 남자가 없다고 하였다. 앞으로 말세는 둥글둥글하게 살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지금 대학,청년들은 마지막 때를 대비하여 사명자를 키워 내어야 된다. 세례요한 보다 더 큰 사명자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 ‘앞으로 뭐 적당하게 하지 뭐, 교회는 여러가지 프로그램 가지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렇게해서는 안된다. 3. 하나님 아들의 증거 1) 세례 요한 - 제사장 2) 세례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처음에는 세례요한이 사양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와함께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고 하였다. 3) 마3:16-17 - 세례를 주는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광야의 소리 세례요한/ 요1:19-37
광야의 소리 세례 요한/요1:19-37 2003-08-12 08:01:31 read : 25 오늘 아침에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1번째 설교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한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막달라 마리아의 10분의 일이라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생명을 다 바쳐 예수님을 증거한 또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나서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며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자기는 숨고 예수님만을 드러낸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이름보다는 자기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을 드러내며 예수님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강변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영안교회를 개척해서 8개월 동안 목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안교회에서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나 교회의 이름을 나타내면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타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고 영안교회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설교를 자주했습니다. 그때 제가 모델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런 설교가 1억원을 내어 영안교회를 설립한 한 가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과 아들 장로님, 어머니 권사님과 며느리 권사님은 자기들이 인정을 받고 자기들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교회를 그만둘 때까지 그런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저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멘 아멘을 크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너무 귀하게만 보였습니다. 떠나기 4일전인 목요일 저녁에야 그분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이 제가 교회를 그만 두는데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 설교를 마치고 아무 미련 없이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날 거기에는 한도정 집사님도 계셨고 박윤선 목사님도 계셨고 김재열 전도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그들 가족들이 제가 떠난 후 목회자들을 10여명이나 갈아치우다가 마지막에는 그 교회에서 쫓겨났고 결국 그 교회당은 어느 회사에 팔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자기 이름이나 자기 지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은 저의 경고의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뚜렷한 거처도 없었고 뚜렷한 조직도 없었고 뚜렷한 지위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묘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의 지위를 말하는 대신 그의 직함을 말하는 대신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는 어떤 거처도 조직도 지위도 없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잠간 들리다가 쓸쓸하게 사라지고 맙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려고 했을 때 강한 의지로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 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중에 이런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0). 세례 요한 이야말로 주님을 증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등이나 탐조등은 자기 자신을 비추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은 어두움에 숨깁니다. 그래야 무대가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름이나 지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듯 하지만 사실을 자기를 나타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이나 지위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를 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 자기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분명하고 가장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뒤집어 엎을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민중의 기대에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또한 이스라엘 종교를 회복할 종교적 메시야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왔다고 했습니다(마3:7).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입지와 세력을 강화해줄 종교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종교인들의 기대에 편승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고 밝히 증거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린양은 속죄양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대신 죽는 속죄양을 말합니다. 출애굽 전날 밤 수 많은 어린양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인류의 출애굽 3일전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팔레스틴 사람들의 죄도,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필리핀이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죄도, 브라질이나 독일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터키나 한국 사람들의 죄도, 아니 이 세상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인종주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주의와 세상주의만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항상 즐겨 사용한 '세상'이란 말을 세례 요한이 먼저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속주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대속주 어린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유대인 강도에게나 로마인 백부장에게나,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보라, 보라, 어린양을 보라" 라는 말을 거듭했습니다(29,36). 세례 요한은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수제자 두 사람을 향해서도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결국 두 수제자는 어린양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수제자 두 사람이 자기를 떠나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인간적으로는 섭섭했을지 모르나 광야의 소리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을 보고 영혼의 만족을 누렸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은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예수님이 입으신 옷과는 정 반대의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평안과 부요의 옷을 입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었던 중세 교회가 그랬고 권력을 누렸던 러시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반면에 성 프랜시스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장기려 박사님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증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 닮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입이나 말로가 아닌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고 했습니다(마3:4). 아마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 공기 좋은 광야에서 건강 식품을 먹으면서 멋지게 살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문명적인 모든 혜택을 포기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밀 이삭을 비벼 먹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두 벌 옷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이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살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마감했습니다.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결박을 당했고 감옥에 갇혔고 마지막에는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가실 길과 그 후 사도 바울이 걸어갈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결박을 당하시고 감옥에 갇히시고 죽임을 당하신 주님이 가신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세상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죽음의 예표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삶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그들 중의 처음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9,11).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삶이 어떤 삶입니까? 예수님을 뜨겁게 믿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봉사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칭찬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세레 요한처럼 아니 그분들의 10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봉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야의 소리 세례요한/ 요1:19-37/ 2002-09-05
광야의 소리 세례 요한 요1:19-37 오늘 아침에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1번째 설교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한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막달라 마리아의 10분의 일이라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생명을 다 바쳐 예수님을 증거한 또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나서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며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자기는 숨고 예수님만을 드러낸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이름보다는 자기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을 드러내며 예수님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강변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영안교회를 개척해서 8개월 동안 목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안교회에서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나 교회의 이름을 나타내면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타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고 영안교회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설교를 자주했습니다. 그때 제가 모델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런 설교가 1억원을 내어 영안교회를 설립한 한 가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과 아들 장로님, 어머니 권사님과 며느리 권사님은 자기들이 인정을 받고 자기들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교회를 그만둘 때까지 그런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저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멘 아멘을 크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너무 귀하게만 보였습니다. 떠나기 4일전인 목요일 저녁에야 그분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이 제가 교회를 그만 두는데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 설교를 마치고 아무 미련 없이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날 거기에는 한도정 집사님도 계셨고 박윤선 목사님도 계셨고 김재열 전도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그들 가족들이 제가 떠난 후 목회자들을 10여명이나 갈아치우다가 마지막에는 그 교회에서 쫓겨났고 결국 그 교회당은 어느 회사에 팔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자기 이름이나 자기 지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은 저의 경고의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뚜렷한 거처도 없었고 뚜렷한 조직도 없었고 뚜렷한 지위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묘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의 지위를 말하는 대신 그의 직함을 말하는 대신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는 어떤 거처도 조직도 지위도 없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잠간 들리다가 쓸쓸하게 사라지고 맙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려고 했을 때 강한 의지로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 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중에 이런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0). 세례 요한 이야말로 주님을 증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등이나 탐조등은 자기 자신을 비추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은 어두움에 숨깁니다. 그래야 무대가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름이나 지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듯 하지만 사실을 자기를 나타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이나 지위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를 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 자기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분명하고 가장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뒤집어 엎을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민중의 기대에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또한 이스라엘 종교를 회복할 종교적 메시야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왔다고 했습니다(마3:7).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입지와 세력을 강화해줄 종교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종교인들의 기대에 편승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고 밝히 증거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린양은 속죄양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대신 죽는 속죄양을 말합니다. 출애굽 전날 밤 수 많은 어린양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인류의 출애굽 3일전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팔레스틴 사람들의 죄도,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필리핀이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죄도, 브라질이나 독일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터키나 한국 사람들의 죄도, 아니 이 세상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인종주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주의와 세상주의만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항상 즐겨 사용한 \\\'세상\\\'이란 말을 세례 요한이 먼저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속주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대속주 어린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유대인 강도에게나 로마인 백부장에게나,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보라, 보라, 어린양을 보라” 라는 말을 거듭했습니다(29,36). 세례 요한은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수제자 두 사람을 향해서도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결국 두 수제자는 어린양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수제자 두 사람이 자기를 떠나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인간적으로는 섭섭했을지 모르나 광야의 소리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을 보고 영혼의 만족을 누렸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은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예수님이 입으신 옷과는 정 반대의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평안과 부요의 옷을 입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었던 중세 교회가 그랬고 권력을 누렸던 러시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반면에 성 프랜시스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장기려 박사님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증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 닮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입이나 말로가 아닌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고 했습니다(마3:4). 아마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 공기 좋은 광야에서 건강 식품을 먹으면서 멋지게 살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문명적인 모든 혜택을 포기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밀 이삭을 비벼 먹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두 벌 옷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이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살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마감했습니다.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결박을 당했고 감옥에 갇혔고 마지막에는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가실 길과 그 후 사도 바울이 걸어갈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결박을 당하시고 감옥에 갇히시고 죽임을 당하신 주님이 가신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세상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죽음의 예표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삶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그들 중의 처음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9,11).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삶이 어떤 삶입니까? 예수님을 뜨겁게 믿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봉사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칭찬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세레 요한처럼 아니 그분들의 10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봉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야의 소리 세례요한/요1:19-37
광야의 소리 세례 요한/요1:19-37 2003-06-24 23:12:44 read : 8 오늘 아침에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1번째 설교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한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막달라 마리아의 10분의 일이라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생명을 다 바쳐 예수님을 증거한 또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나서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며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자기는 숨고 예수님만을 드러낸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이름보다는 자기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을 드러내며 예수님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강변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영안교회를 개척해서 8개월 동안 목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안교회에서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나 교회의 이름을 나타내면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타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고 영안교회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설교를 자주했습니다. 그때 제가 모델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런 설교가 1억원을 내어 영안교회를 설립한 한 가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과 아들 장로님, 어머니 권사님과 며느리 권사님은 자기들이 인정을 받고 자기들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교회를 그만둘 때까지 그런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저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멘 아멘을 크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너무 귀하게만 보였습니다. 떠나기 4일전인 목요일 저녁에야 그분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이 제가 교회를 그만 두는데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 설교를 마치고 아무 미련 없이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날 거기에는 한도정 집사님도 계셨고 박윤선 목사님도 계셨고 김재열 전도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그들 가족들이 제가 떠난 후 목회자들을 10여명이나 갈아치우다가 마지막에는 그 교회에서 쫓겨났고 결국 그 교회당은 어느 회사에 팔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자기 이름이나 자기 지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은 저의 경고의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뚜렷한 거처도 없었고 뚜렷한 조직도 없었고 뚜렷한 지위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묘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의 지위를 말하는 대신 그의 직함을 말하는 대신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는 어떤 거처도 조직도 지위도 없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잠간 들리다가 쓸쓸하게 사라지고 맙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려고 했을 때 강한 의지로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 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중에 이런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0). 세례 요한 이야말로 주님을 증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등이나 탐조등은 자기 자신을 비추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은 어두움에 숨깁니다. 그래야 무대가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름이나 지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듯 하지만 사실을 자기를 나타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이나 지위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를 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 자기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분명하고 가장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뒤집어 엎을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민중의 기대에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또한 이스라엘 종교를 회복할 종교적 메시야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왔다고 했습니다(마3:7).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입지와 세력을 강화해줄 종교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종교인들의 기대에 편승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고 밝히 증거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린양은 속죄양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대신 죽는 속죄양을 말합니다. 출애굽 전날 밤 수 많은 어린양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인류의 출애굽 3일전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팔레스틴 사람들의 죄도,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필리핀이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죄도, 브라질이나 독일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터키나 한국 사람들의 죄도, 아니 이 세상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인종주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주의와 세상주의만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항상 즐겨 사용한 '세상'이란 말을 세례 요한이 먼저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속주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대속주 어린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유대인 강도에게나 로마인 백부장에게나,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보라, 보라, 어린양을 보라" 라는 말을 거듭했습니다(29,36). 세례 요한은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수제자 두 사람을 향해서도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결국 두 수제자는 어린양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수제자 두 사람이 자기를 떠나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인간적으로는 섭섭했을지 모르나 광야의 소리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을 보고 영혼의 만족을 누렸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은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예수님이 입으신 옷과는 정 반대의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평안과 부요의 옷을 입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었던 중세 교회가 그랬고 권력을 누렸던 러시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반면에 성 프랜시스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장기려 박사님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증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 닮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입이나 말로가 아닌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고 했습니다(마3:4). 아마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 공기 좋은 광야에서 건강 식품을 먹으면서 멋지게 살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문명적인 모든 혜택을 포기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밀 이삭을 비벼 먹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두 벌 옷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이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살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마감했습니다.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결박을 당했고 감옥에 갇혔고 마지막에는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가실 길과 그 후 사도 바울이 걸어갈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결박을 당하시고 감옥에 갇히시고 죽임을 당하신 주님이 가신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세상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죽음의 예표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삶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그들 중의 처음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9,11).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삶이 어떤 삶입니까? 예수님을 뜨겁게 믿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봉사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칭찬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세레 요한처럼 아니 그분들의 10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봉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야의 소리 세례요한/요1:19-37
광야의 소리 세례 요한/요1:19-37 2003-08-12 08:01:31 read : 26 오늘 아침에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1번째 설교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한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막달라 마리아의 10분의 일이라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생명을 다 바쳐 예수님을 증거한 또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나서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며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자기는 숨고 예수님만을 드러낸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이름보다는 자기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을 드러내며 예수님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강변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영안교회를 개척해서 8개월 동안 목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안교회에서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나 교회의 이름을 나타내면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타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고 영안교회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설교를 자주했습니다. 그때 제가 모델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런 설교가 1억원을 내어 영안교회를 설립한 한 가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과 아들 장로님, 어머니 권사님과 며느리 권사님은 자기들이 인정을 받고 자기들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교회를 그만둘 때까지 그런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저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멘 아멘을 크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너무 귀하게만 보였습니다. 떠나기 4일전인 목요일 저녁에야 그분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이 제가 교회를 그만 두는데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 설교를 마치고 아무 미련 없이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날 거기에는 한도정 집사님도 계셨고 박윤선 목사님도 계셨고 김재열 전도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그들 가족들이 제가 떠난 후 목회자들을 10여명이나 갈아치우다가 마지막에는 그 교회에서 쫓겨났고 결국 그 교회당은 어느 회사에 팔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자기 이름이나 자기 지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은 저의 경고의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뚜렷한 거처도 없었고 뚜렷한 조직도 없었고 뚜렷한 지위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묘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의 지위를 말하는 대신 그의 직함을 말하는 대신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는 어떤 거처도 조직도 지위도 없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잠간 들리다가 쓸쓸하게 사라지고 맙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려고 했을 때 강한 의지로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 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중에 이런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0). 세례 요한 이야말로 주님을 증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등이나 탐조등은 자기 자신을 비추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은 어두움에 숨깁니다. 그래야 무대가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름이나 지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듯 하지만 사실을 자기를 나타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이나 지위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를 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 자기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분명하고 가장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뒤집어 엎을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민중의 기대에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또한 이스라엘 종교를 회복할 종교적 메시야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왔다고 했습니다(마3:7).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입지와 세력을 강화해줄 종교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종교인들의 기대에 편승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고 밝히 증거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린양은 속죄양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대신 죽는 속죄양을 말합니다. 출애굽 전날 밤 수 많은 어린양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인류의 출애굽 3일전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팔레스틴 사람들의 죄도,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필리핀이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죄도, 브라질이나 독일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터키나 한국 사람들의 죄도, 아니 이 세상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인종주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주의와 세상주의만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항상 즐겨 사용한 '세상'이란 말을 세례 요한이 먼저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속주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대속주 어린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유대인 강도에게나 로마인 백부장에게나,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보라, 보라, 어린양을 보라" 라는 말을 거듭했습니다(29,36). 세례 요한은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수제자 두 사람을 향해서도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결국 두 수제자는 어린양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수제자 두 사람이 자기를 떠나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인간적으로는 섭섭했을지 모르나 광야의 소리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을 보고 영혼의 만족을 누렸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은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예수님이 입으신 옷과는 정 반대의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평안과 부요의 옷을 입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었던 중세 교회가 그랬고 권력을 누렸던 러시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반면에 성 프랜시스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장기려 박사님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증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 닮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입이나 말로가 아닌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고 했습니다(마3:4). 아마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 공기 좋은 광야에서 건강 식품을 먹으면서 멋지게 살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문명적인 모든 혜택을 포기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밀 이삭을 비벼 먹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두 벌 옷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이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살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마감했습니다.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결박을 당했고 감옥에 갇혔고 마지막에는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가실 길과 그 후 사도 바울이 걸어갈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결박을 당하시고 감옥에 갇히시고 죽임을 당하신 주님이 가신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세상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죽음의 예표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삶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그들 중의 처음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9,11).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삶이 어떤 삶입니까? 예수님을 뜨겁게 믿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봉사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칭찬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세레 요한처럼 아니 그분들의 10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봉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야의 소리 세례요한/요1:19-37
광야의 소리 세례 요한/요1:19-37 2003-06-24 23:12:44 read : 7 오늘 아침에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1번째 설교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한 사람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막달라 마리아의 10분의 일이라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정성껏 봉사하고 예수님을 온 몸으로 증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생명을 다 바쳐 예수님을 증거한 또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태어나서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을 증거하며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왔습니다. 그는 자기는 숨고 예수님만을 드러낸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이름보다는 자기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을 드러내며 예수님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강변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영안교회를 개척해서 8개월 동안 목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안교회에서 설교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나 교회의 이름을 나타내면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타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고 영안교회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설교를 자주했습니다. 그때 제가 모델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설교를 했는데 그런 설교가 1억원을 내어 영안교회를 설립한 한 가족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과 아들 장로님, 어머니 권사님과 며느리 권사님은 자기들이 인정을 받고 자기들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교회를 그만둘 때까지 그런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우리의 이름은 없어져도 좋다'는 저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아멘 아멘을 크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너무 귀하게만 보였습니다. 떠나기 4일전인 목요일 저녁에야 그분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장로님이 제가 교회를 그만 두는데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 설교를 마치고 아무 미련 없이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날 거기에는 한도정 집사님도 계셨고 박윤선 목사님도 계셨고 김재열 전도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그들 가족들이 제가 떠난 후 목회자들을 10여명이나 갈아치우다가 마지막에는 그 교회에서 쫓겨났고 결국 그 교회당은 어느 회사에 팔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자기 이름이나 자기 지위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은 저의 경고의 메시지를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긴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없어져도 좋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뚜렷한 거처도 없었고 뚜렷한 조직도 없었고 뚜렷한 지위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묘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의 지위를 말하는 대신 그의 직함을 말하는 대신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는 어떤 거처도 조직도 지위도 없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잠간 들리다가 쓸쓸하게 사라지고 맙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높이려고 했을 때 강한 의지로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 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은 나중에 이런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0). 세례 요한 이야말로 주님을 증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등이나 탐조등은 자기 자신을 비추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은 어두움에 숨깁니다. 그래야 무대가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름이나 지위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듯 하지만 사실을 자기를 나타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이나 지위를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설교를 하면서 자기를 나타내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서 자기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분명하고 가장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뒤집어 엎을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민중의 기대에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또한 이스라엘 종교를 회복할 종교적 메시야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왔다고 했습니다(마3:7).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입지와 세력을 강화해줄 종교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종교인들의 기대에 편승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하고 밝히 증거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린양은 속죄양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대신 죽는 속죄양을 말합니다. 출애굽 전날 밤 수 많은 어린양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인류의 출애굽 3일전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팔레스틴 사람들의 죄도,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필리핀이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죄도, 브라질이나 독일 사람들의 죄뿐 아니라 터키나 한국 사람들의 죄도, 아니 이 세상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인종주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주의와 세상주의만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항상 즐겨 사용한 '세상'이란 말을 세례 요한이 먼저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속주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대속주 어린양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유대인 강도에게나 로마인 백부장에게나, 죄 사함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보라, 보라, 어린양을 보라" 라는 말을 거듭했습니다(29,36). 세례 요한은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수제자 두 사람을 향해서도 자기를 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결국 두 수제자는 어린양을 바라보다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수제자 두 사람이 자기를 떠나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인간적으로는 섭섭했을지 모르나 광야의 소리로서의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을 보고 영혼의 만족을 누렸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은 밝히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예수님이 입으신 옷과는 정 반대의 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평안과 부요의 옷을 입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었던 중세 교회가 그랬고 권력을 누렸던 러시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반면에 성 프랜시스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장기려 박사님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증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좀 더 가까이 닮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입이나 말로가 아닌 삶으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다고 했습니다(마3:4). 아마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 공기 좋은 광야에서 건강 식품을 먹으면서 멋지게 살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문명적인 모든 혜택을 포기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밀 이삭을 비벼 먹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두 벌 옷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이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의 옷을 입고 살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마감했습니다.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결박을 당했고 감옥에 갇혔고 마지막에는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가실 길과 그 후 사도 바울이 걸어갈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결박을 당하시고 감옥에 갇히시고 죽임을 당하신 주님이 가신 길을 미리 걸어간 것뿐이었습니다. 세상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보다 생생하게 증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죄와 불의를 지적하다가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죽음의 예표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삶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고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그들 중의 처음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9,11). 세례 요한은 자기를 숨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만을 증거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수고와 고난과 죽음의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삶이 어떤 삶입니까? 예수님을 뜨겁게 믿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봉사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칭찬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세레 요한처럼 아니 그분들의 10분의 일이라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봉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삭개오/눅19:1-10
구원받은 삭개오/눅19:1-10 2003-06-23 16:22:44 read : 2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고 지나가시게 됨이러라.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가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죄사함 받고 영생의 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은 영혼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영혼 구원받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망하며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죽음이 있으며 지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아니며 이 세상 집은 영원한 우리의 안식처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떠나야 합니다. 때문에 구원받아야 합니다. 여기 한 행복한 사람 곧 구원받은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일학교를 어려서부터 다닌 사람은 일년에 몇 차례씩 교회학교 선생님을 통해서 재미있게 삭개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대문입니다. 삭개오에 대한 노래도 있고 율동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신이 나서 노래하고, 율동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믿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성경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면 당연히 삭개오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삭개오의 구원에 관한 기록은 동화, 동요, 율동의 소재나 이야기 거리가 궁색한 사람의 가벼운 얘기 소재가 되어 난처한 입장(?)을 해결해 주는 재료로만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매우 중요한 구원의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 누가복음 19장 1절에서부터 10절에 나타난 주님의 생애 가운데 제외할 수 없는 이 기적적인 구원의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깨달음과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본문은 일언하면 "죄인 삭개오란 사람이 구원의 주님을 만나 그의 영혼이 변화되고 그의 생애가 변화된 구원받은 기적직인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더라"(눅 19:1)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사랑의 사건이, 은혜의 사건이, 축복의 사건이, 무슨 구원의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기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주님을 통한 역사가 나타나곤 하였기 대문입니다. 성경을 보니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그 여리고 도성은 삭개오란 사람이 사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삭개오의 구원의 기적은 바로 여리고에서 일어났습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 제일 먼저 공격해서 점령했던 바로 그 도성입니다. 여리고는 사해 입구 요단강에서부터 북서쪽으로 16㎞지점,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27㎞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곧 폭군 헤롯1세 통치 이전부터 여기고는 "작은 파라다이스"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 도시의 가로수는 종려나무로 되어 있었고 도시 곳곳에 장미꽃 정원들이 있었으며 여러 종류의 무화과나무와 유실수들이 있었으며 기후 또한 사시사철 쾌적하여 사람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 성이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폭군 헤롯1세와 그의 아들 이켈레우스 헤롯이 이 도시의 경관을 더 아름답게 꾸미고 자신들의 향락을 위한 거대한 겨울 궁전을 이곳에 세우고 연극장, 경기장을 세워 권력이 이루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모욕적인 죄 많은 생애를 지낸 곳이기도 합니다. 누가 묻기를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왜 자신의 속국이었던 이 도시를 애굽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자신의 사랑의 증표로 주지 않았을까?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 도성에 예수님께서 방문하셨고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삭개오에 대해서 "삭개오라 이름하는 이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눅 19: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세리장이었습니다. 곧 세무서장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땅 전국에는 세 도성에만 세무서가 있었습니다. 여리고, 가버나움, 그리고 가이사랴였습니다. 여리고 세무서는 유대지역의 세금을 거둬들이고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방, 가이사랴는 사마리아 지역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 세금들은 지배 로마 정부로 들어가는 돈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배국인 로마제국은 피지배 국민의 종교, 언어, 문화 등 사회의 기타 규범들은 허락했으나 세금은 철저하게 거두어 갔습니다. 이때 로마는 로마 사람을 책임자로 세워 세금을 거두어 간 것이 아니라 피 지베 국민 중에서 로마에 충성하는 사람을 세무서장에 앉히고 그 부하 직원들을 두도록 하고, 매년 로마 정부에 납부할 고정 액수를 결정해 주고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를 거둬들이든 관계없이 그 액수만 로마 정부에 귀속시키는 조세 정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세리장이 자기 마음대로 해도 무관하였습니다. 당시 여리고는 이스라엘 상거래 중심지 중의 하나로 고급 향수, 향료의 주산지로써 거액의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도시로써 상기 세 도시의 세무서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세무서였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여리고는 봉선화나무(balssm)에서 추출된 향유가 유명하며 이것이 고가 품으로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또한 여리고는 당시 교통의 요지로 북쪽으로는 다메섹, 시돈, 두로와 통하고 서쪽으로는 가이사랴와 욥바로, 남쪽으로는 애굽과 통하는 위치에 있어 상거래의 활동이 많았고 따라서 징수되는 세금 액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여리고성 세무서장 삭개오는 로마 정부가 유대에 파견한 총독 빌라도나 유대왕 헤롯에게는 중요한 인물로 헤롯 정부의 고관 관리였으며 유대인들에게는 민족 배신자요. 사악한 자로 평가되었다고 실상 또 그랬던 것입니다. 다라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집에 들어갔었을 때 사람들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눅 19:7)고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그가 왜 어떤 동기로 동족을 배신하고 모든 사람이 천직으로 여기는 그 길을 가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은 몇 가지로 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부친이 세리였기 때문에?" "너무 가난한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신체의 결함을 보상해 보려고?" "원래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여하튼 그는 실력 있고 수완 있는 출세한 세무서장이었습니다. 성경은 또한 그를 가리켜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왜 삭개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그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정부의 합법적인 비호 하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동족들의 세금을 긁어모았습니다.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민족적 긍지도 등뒤로 던져버리고 적국 로마에 아첨 아부하여 할당액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정부에 바칠 것은 갖다 바치고, 헤롯에게 줄 것은 주고, 그 나머지 거액을 착복, 치부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재산 가운데는 정당한 재산도 일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신체적 결함이 있었습니다. 큰 결함은 아닐런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는 매우 키가 작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경은 "키가 작고"라고 기록하셨습니다. 웬만큼 작았으면 "키가 작고"라고 표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작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 것이며, 키가 작은 것은 아직 덜 장성한 소년이면 몰라도 다 장성한 어른에게는, 그것도 남자에게는 큰 결함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족들로부터는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눅 19:7)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이를 본 사람들이 수군거린 내용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인의 집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의 집에 들어가면 자신들의 영혼과 몸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고 상종을 거부한 사람들은 간음 중에 잡힌 여인과 사마리아 여인같이 이 남성 저 남성에게 몸을 팔거나, 팔다시피 사는 부정한 여자와, 삭개오 같이 민족을 배신하고 이방인들과 하나되어 놀아나는 사람들,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 및 문둥병자, 소경, 앉은뱅이 등 율법상 부정한 병이나 불치의 신체 불구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에게 아부 아첨하며 그들의 일을 해주고 녹을 먹고사는 삭개오는 철저하게 버림당하고 침 뱉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자신의 이름 값도 못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자케"(ZAKE)이며 헬라어로는 "작카이오스"(ZAKKAIOS)입니다. 그 뜻은 모두 "정의" "순수" "정결"이란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식을 낳으면 아버지가 그 아들의 이름을 지어 줍니다. 삭개오의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자케"로 지어 주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한없는 소망을그 이름에 담아 죄 짓지 말고 정의롭고, 순수하고, 정결하게 살라고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삭개오는 오히려 정반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삭개오에게 기적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가 구원받았습니다. 삭개오만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집, 곧 삭개오의 온 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어떻게 이 구원의 기적이 죄인 삭개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까? 첫째,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눅 19:3)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방문하셨을 때 삭개오가 어디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자신의 사무실, 아니면 자기 집, 아니면 세금징수 관계로 밖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니면 자기 직원이 혹은 아내나 자기 자식이 여리고성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예수가 여리고성에 오셨다는 소식을 삭개오에게 전했는지 모릅니다. 여하튼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듣지 못했다면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기 사무실이나 집에 그냥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에게 기적이 발생하는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말미암았느니라" 구원이 임할 자에게는 예수라는 그 이름만 들어도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삭개오는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달려나갔습니다. 자신이 들은 그분이 도대체 어떠한 분인가하여 그는 그분을 보고자 달려나갔습니다. 둘째, 그는 주님 보기를 간절히 영망하였습니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서니 이는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3-4) 우리는 이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키가 작은 삭개오는 주님을 뵈옵고자 달려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먼저 듣고 몰려온 여리고성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보다 키가 컸습니다. 자신이 키만 켰더라도 사람들 머리 위로 보여지는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키가작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나갈 여러 시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순간 기지를 발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여기쯤으로 지나가실 것이다. 그는 계산된 그 지점 옆에 한그루의 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속히 그 나무 위로 기어 올랐갔던 것입니다. 뽕나무로 번역된 이 나무는 헬라어로 "수케모론"(sukemoron)으로 소아시아산 무화과나무인데 잎은 뽕나무와 비슷하지만 열매는 무화과인 나무입니다. 다행히도 이 나무는 어느 정도 성장하여 제법 굵은 줄기와 가지가 있어 어른인 삭개오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증오하고 싫어하는데 무엇할려고 사람 많이 모인 곳에 나가겠습니까? 또 나가서 사람이 많아 볼 수 없으면 포기하고 그냥 되돌아와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금도 절망하지 않고 예수님을 뵈옵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일을 하였습니다. 주님을 뵙기 위한 최후의 카드였습니다. 그것은 나무 위로 올라간 기괴한 행동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원 세무서장이 수원을 방문한 누구를 만나려고 가로수 나무 위로 올라갔다는 행동을요. 얼마나 그가 예수님을 뵙기 원했으며 그런 생각을 해 내었겠습니까? 그의 목적을 달성하고 마는 끈질긴 성격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삭개오의 그 같은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영적인 갈구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삶에 대한 말못할 번뇌와 고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번뇌에서 해방되어지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는 죽음보다 더 강하게 자신의 영혼의 숨통을 죄어 오는 이 영혼의 질식상태에서 해방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예수라는 분이 나의 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지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영적인 갈구가 예수님을 뵙기 위한 이상한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셋째,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이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친히 삭개오가 있는 그 나무 아래로 오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여리고성 방문 목적은 군중이 아니라 여기 있는 이 죄인 삭개오의 구원이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삭애오는 소문을 들은 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멀리 보는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은혜로우신 말씀을 친히 듣게 된 것입니다. 이 축복, 이 감사로 삭개오의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 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렇게 뵙기를 소망하였던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서 하루를 묵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주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서 하루를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선택받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택함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미리 아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친히 부르셨습니다. 누가 삭개오의 이름을 가르쳐 드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이 아셨습니다. 삭개오를 구원하기 위해 여리고에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넷째, 삭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였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여 영접하거늘"(눅 19:6)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늦게 응답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신속히 응답하였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나무에서 그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두려움이 아닌 기쁨이었습니다. 강요가 아닌 자원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영접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도 영접하였습니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 사건은 기적입니다.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최상 최대의 기적은 영혼 구원의 기적입니다. 이 사건은 축복입니다. 최상 최대의 축복은 영혼 구원의 축복입니다. 삭개오는 이 순간 구원받았습니다. 최대의 선물을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선물, 구원의 축복, 구원의 기적을 그는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해 줄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부모도 해 줄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자신도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 삭개오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구원받은 후에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행함, 곧 변화를 수반합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구원한 그의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 구원받은 후 자신의 결심을 고백합니다. 이 거룩한 고백을 들어보십시오l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그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구원받았으니 변화되지 않고는 안되었을 것입니다. 생활이 변했습니다. 구원받기 전까지는 생명처럼 여겼던 재물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난히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었다고 사람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재물은 그들의 생명이고 인격이며 실력이고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그 두 주인을 하나님과 재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심하고 구원받은 자가 되면 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재물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제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재물보다 더 말입니다. 그는 구원받기 전 생명처럼 여겼던 자신의 전 재산의 반을 내어 선한 일에 사용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토색한 것은 찾아내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분명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워하려 함이니라"(눅 19:9-10) 예수님께서 구원의 확신과 명백하 구원의 보증을 구원받은삭개오에게 주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구원받은 기적의사건에서우리가명심해야 할 구권에 관한 종요한 영적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입니다. 주님은 삭개오를 미리 아시고 그를 구원하시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눅 19:5) 그 무수한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오셨고, 그를 만나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어찌된 일입니까? 그 많은 사라들을 지나치시고 왜 유독 삭개오 그 한사람을 찾아 구원의 은혜를 내리셨나요? 편애하셨나요? 아닙니다. 이것은 그분의 불가항력적인 전권에 의한 그분의 사랑이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이렇게 이 비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겠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시기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0-24) 사도 베드로는 이에 대해 성령 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벧전 1:2)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양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그렇습니다. 삭개오는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이루어지는 택함으로 삭개오는 모여든 그 많은 여리고성 사람 가운데서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 삭개오는 십중팔구 여리고성 세무서장직을 그만 두고 새 직업을 찾았든지 아니면 가장 청렴한 세무서장으로 일을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구원받아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구원받은 그날부터 비록 가난하게 살게 되었을런지 모르지만 가진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예수님의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전하면서 그를 구원하신 예수님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 삭개오는 영광 중에 그때 이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품안에서 영원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혼 구원입니다.
그 제자와 베드로/ 요21:1-14/ 2009-09-21
그 제자와 베드로 요21:1-14 중국 송대(宋代)의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벽암록(碧巖錄)에 \\\\\\\\\\\\\\\'줄탁동기( 啄同機)\\\\\\\\\\\\\\\'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란이 부화하여 병아리로 태어날 때, 이제는 모든 것이 충분히 자라 밖으로 나 갈 때가 되었음을 병아리가 안에서 알을 톡톡 쳐서 어미 닭에게 알리는 것을 \\\\\\\\\\\\\\\'줄( )\\\\\\\\\\\\\\\'이라 합니 다. 그리고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어미 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 껍질을 깨트려 주는 것이 \\\\\\\\\\\\\\\'탁 (啄)\\\\\\\\\\\\\\\'입니다. 바로 이 \\\\\\\\\\\\\\\'줄( )\\\\\\\\\\\\\\\'과 \\\\\\\\\\\\\\\'탁(啄)\\\\\\\\\\\\\\\'이 \\\\\\\\\\\\\\\'동기(同機)\\\\\\\\\\\\\\\'―\\\\\\\\\\\\\\\'한가지 동(同)\\\\\\\\\\\\\\\'과 \\\\\\\\\\\\\\\'때 기(機)\\\\\\\\\\\\\\\'―즉 \\\\\\\\\\\\\\\'줄\\\\\\\\\\\\\\\'과 \\\\\\\\\\\\\\\'탁\\\\\\\\\\\\\\\'이 정확하게 같은 때, 같은 시각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쪼아 주는 것이 안에서 두드려 알리는 것보다 빨라도, 그렇다고 해서 늦어서도 않됩니다. 안팎의 타이밍이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튼튼한 병아리가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줄탁동기\\\\\\\\\\\\\\\'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세상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새로운 시대를 일구어 가거나 매사를 처리하는 데에도 적절한 \\\\\\\\\\\\\\\'때(時機)\\\\\\\\\\\\\\\' 적절한 행동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선각자 혹은 선구자 그리고 지도자들의 행 동이 이 \\\\\\\\\\\\\\\'때\\\\\\\\\\\\\\\'를 앞지르면 많은 희생이 뒤따르고, 반대로 이 \\\\\\\\\\\\\\\'때\\\\\\\\\\\\\\\'를 놓쳐 버리면 그것은 기필코 민족적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줄탁동기\\\\\\\\\\\\\\\'의 함축적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결코 닭이나 병아리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하찮은 닭과 병아리의 세계에서는 오늘도 줄탁동기가 어김없이 이루어 지고 있는 반면, 인간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줄탁동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 시 지각력과 행동력이 동시에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알속에 있는 병아리는 더 이상 알속에 있어 서는 않된다는 것을 깨닫는 지각력과, 알을 두드려 그 때를 밖으로 알리는 행동력을 동시에 지니 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놓쳐도 그것은 정상적으로 부화될 수는 없습니 다. 밖에 있는 어미 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들을 수 없는, 알속의 새끼가 보내는 신호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지각력과 함께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알을 쪼아 주는 행 동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한가지라도 결여된다면 그 어미 닭은 정상적인 새끼를 얻을 수는 없 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기에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이 지구상의 모든 닭들이 한결같이 \\\\\\\\\\\\\\\'줄탁동기\\\\\\\\\\\\\\\'의 결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이처럼 정확한 지각력과 행동력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하는 줄탁동기의 원칙과 법칙 위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기에, 닭과 병 아리의 세계에는 부조리나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왜 인간 세상에는 혼돈과 혼란이 끊어지지 않으며, 정의의 이름으로 그릇된 과거가 반복되는 비극이 중단되지 않습니까? 인간은 줄탁동기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 다. 바른 지각력과 행동력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는 줄탁동기의 법칙을 소홀히 여기고 있기 때문 입니다. 지각력을 지녔다는 사람들은 한발 물러서 비판만 할뿐 행동하려 하지 않는 반면, 행동이 앞서는 사람들은 바른 지각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예로부터 인간 세상의 특징입니다. 지각력을 상실한 행동력이란 모두 부질없는 짓이며, 행동력이 결여된 지각력이란 헛된 망상에 지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지각력과 행동력이 함께 가지 않을 때 인간의 생각과 삶은 늘 분 리될 수밖에 없고, 그 당연한 결과로 인간사회는 악순환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신앙의 세계 또한 이와 똑 같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명령을 좇아 갈릴리로 되돌아간 제자들― 그러나 그들은 갈릴리 에 도착한 뒤론 그만 주님을 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욕구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충동적으로 물고기잡이에 나서고 말았습니다. 물고기 잡는 일이라면 언제 든 자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온 열심을 다해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만나 뵈어야 할 주 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으나 그들 중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고기잡이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맞도록 쉬지 않고 그물을 던졌건만 웬일인지 단 한 마리의 물 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새벽이 되었건만 그들은 여전히 빈손, 빈 그물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바닷가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낯익은 음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 니다. 그들은 \\\\\\\\\\\\\\\'없나이다\\\\\\\\\\\\\\\'하고 기계적으로 대답했을 뿐이었습니다. 똑같은 음성이 다시 울렸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 음성이 지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다시 한번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면서도 자신들에게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심을 아무도 깨달으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마치 상 가 집에 가서 목을 놓아 통곡하면서도 막상 누가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것과 같은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한 번 더 던진 그물을 들어올리려고 했을 때 제자들은 깜짝 놀라고 말 았습니다. 그물을 쉽게 끌어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텅 비어 있던 갈릴리 바다였음 이 틀림없건만 마지막 던진 그물에 그물이 넘치도록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마지막 순간 전개된 대 역전극의 감격에 도취되어 있을 때, 그들과는 다른 두 제자의 모습을 본문 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여기에서 말하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란, 이미 오래 전 요한복음 13장 23절에서 살 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 자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던 진 그물에 그물을 들어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을 확인하는 순간, 요한은 지체없이 베드로를 향해 \\\\\\\\\\\\\\\'주시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아니시고서는 공허하기만 하던 갈릴리에서 결코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날 수 없음을 요한만은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 의 외침을 들은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겉옷을 벗어둔채 그물을 잡고 있던 베드로는 \\\\\\\\\\\\\\\'주시 라\\\\\\\\\\\\\\\'는 요한의 말을 듣는 순간, 황급히 겉옷을 두른 후에 아예 바다 속으로 뛰어내리고 말았습니 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들은 이상 더 이상 배 위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천년 전 갈릴리 바다에서 요한과 베드로가 보여주었던 대조적인 모습을 좀더 면 밀하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잡힌 고기에만 얼이 빠져 그 고기의 배후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도, 알려 하지도 않을 때에, 요한만은 그것이 주님의 역사이심을 정확하 게 알았습니다. 이제 방금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말씀하시던 그 음성의 주인공이 주님이심을 비로소 제대로 인식했습니다. 바닷가에 서시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그제서야 똑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분명하게 인식한 자는 요한 뿐이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각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께서 계심을 가장 먼저 깨달았을 뿐, \\\\\\\\\\\\\\\'주시라\\\\\\\\\\\\\\\'고 외치기만 했을 뿐, 자신이 주님을 향해 뛰쳐 나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를 않았습니다. 마치 \\\\\\\\\\\\\\\'주시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요한의 지각력은 누구보다도 출중하였지만,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행동력 이 요한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스스로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자란 자부심을 평소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그 자부심에 걸맞는 행동의 본을 보 여준 적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주시라\\\\\\\\\\\\\\\'는 외침이 요한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바다 속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다\\\\\\\\\\\\\\\'는 구절을 원문은, \\\\\\\\\\\\\\\'베드로는 자기 자신 을 바다속으로 던졌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초라도 더 빨리 주님에게 다다르고자 하는 베드 로의 급한 심정을 잘 묘사한 표현입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그 급한 와중에도 벗어 두었던 겉옷을 걸쳐 입을 정도로 예의를 갖추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서 행동력이 가장 앞서는 인물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베드로의 행동을 흉내 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의 행동은 전광석화처럼 빨랐습니다. 이점에 관한 한 그는 분명히 요한보다 나았습니다. 그러 나 전체적으로 볼 때 베드로가 요한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은, 행동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베드 로이긴 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요한과 같은 지각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처럼 급하게 뛰 어내리기 전에 요한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과연 주님이신지 아닌지, 주님이 맞다면 정확하게 어디에 계신지 자신이 직접 확인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확인한 것이 없었습니 다. 겉옷까지 다 두르고서 물속에 뛰어드는 것이 과연 주님앞에 더 빨리 당도할 수 있는 길인지 조차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뛰어내리기부터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다음과 같 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50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8~9a) 여기에서\\\\\\\\\\\\\\\'50간\\\\\\\\\\\\\\\'이란 지금의 단위로 100m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그 거리를 베드로가 가장 먼 저 건너왔다고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를 타고 있던 다른 제자들의 도착 소식만 전하 고 있습니다. 그래서 Hoskyns같은 신학자는 겉옷까지 두른 베드로의 수영보다 다른 제자들이 탄 배가 더 빨랐다고 단정합니다. 수영한 베드로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배를 탄 다른 제자들이 먼저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황급히 물 속에 뛰어내렸다는 것 외에, 그 이후의 예수님께 당도하기까지의 과정을 철저하게 무시해 버림으로써, 성경은 베드로의 그와 같은 행동이 사려 깊지 못한 충동적인 해프닝에 불과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 로의 충동적인 행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 지각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베드로의 행동은 매사에 충동적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주님을 기다리다가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 지 못해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며 제자들의 앞장을 선 것도 베드로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 실 것을 예고하신 주님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주님을 꾸짖는 돌출 행동을 한 사람도 베드로였고, 예수님을 심문하는 대 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노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장본인 역시 다른 사람 아닌 베드로 였습니다. 이처럼 지각력이 행동력을 수반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행동력이 지각력을 앞설 때, 요한이나 베드로나 신앙과 삶이 궤리현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의 사이에서 참된 줄탁동기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신앙은 공허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삶 은 욕구의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고, 그들의 무리는 추악한 이기 집단에 지나지 않았습니 다. 그러나 그들이 불완전한 자신을 벗어 던지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온전히 거하였을 때에, 성령의 조명 안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온전하심을 힘입었을 때에, 주님 안에 서 그들의 지각력과 행동력은 회복되고 통합되었습니다. 주님이시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을 향해, 지각력과 행동력의 완전일치 완전조화를 이루신 그리스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 들은 그때부터 주님과 바른 줄탁동기의 관계를 맺으면서 비로소 진리의 부화, 생명의 부화, 사랑 의 부화, 공의의 부화, 구원의 부화, 빛의 부화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각력 과 행동력을 회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바른 줄탁동기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리스도인답게 바른 삶의 부화를 꾀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1919년 오늘은 일제에 항거하는 3.1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던 날입니다. 당시 3.1운동 의 주도 세력이 교회였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때의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고, 그리스 도인들은 민족의 등불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 수는 지금의 50분의 1에 불과 했 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별하는 지각력과, 지각한 것을 실 천하는 행동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진리 안에서 참된 생명 과 빛을 부화해 내는 줄탁동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79년이 지난 오늘, 이 땅의 전국 방방곡곡에는 십자가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교회와 교인들이 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안에서 지니고 실천해야 할 지각력과 행동 력―이 둘 중 하나를, 혹은 모두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말입니다. 누가? 바로 우리가 말입니다. 누가? 나 자신이 말입니다. 재벌들의 변칙적인 부의 세 습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재벌이란 철저한 이익집단이기에 이익이 되기만 한다면 한국적인 상황속에서는, 변직적인 부의 세습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익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따르는 무리들의 집단으로 이해 관계를 초월해야만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적어도 교회에서 성직의 세습 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목회자가 자신의 자식에게 목사직을 세습해 주는 일이 이땅의 도처에서 시행되었고, 또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사유물로 여기지 않는 한 있을수 없는 일이기에 목사직의 세습은 교회타락의 극치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이에 대하여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썩었는데 사회를 탓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각력을 지니고 있되 행동력을 결여한 요한, 지각력 없이 충동적인 행동력만으로 덤벙대는 베드로, 그들 모두를 상실 한 채 여전히 고기 그물만을 움켜쥐고 있는 나머지 제자들―이 삼자 중의 하나가 영락없는 나 자 신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 각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리 안에서 지각력과 행동력의 회복 및 통합을 이루었던들 어찌 이 땅의 교회가 비판의 대상이 되며, 천 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산다는 이 나라가 어찌 이처럼 부실하고 불의하며,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겠습니 까?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이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 님께서 구원자로서의 지각력과 행동력의 통합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던 고난을 기리는 회개의 절기입니다. 십자가를 이루는 두 나무 중 하나가 지각력을 뜻한다면 나머지 하나 는 행동력이었고, 그 양자가 통합되는 그 위에 주님의 고난이 수반되었던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 없이 진리의 지각력과 행동력은 통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양자의 통합을 위하여 주님께서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을 때,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님 사이에 줄탁동기가 이루어 졌으니, 부활 곧 영원한 생명이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화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화된 생명 속에서 우리가 이렇듯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는 이 아침,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십 시다. 우리 심령의 갈릴리 바닷가에서 밤이 맞도록 우리를 향해 서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맞추어 보십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우리가 무엇을 잘못 행하고 있는지, 우리로 하여금 늘 깨닫게 해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톡톡 두드리시면서 쉬임없이 \\\\\\\\\\\\\\\'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지각한다면, 때를 놓치지 말고 주님의 그 말씀을 좇아 이번에는 우리가 \\\\\\\\\\\\\\\'탁(啄)\\\\\\\\\\\\\\\'으로 응답해 드립시다. 그 과정을 통해 껍 질이 깨어지는 고통과 아픔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다. 그 고통을 주저하는 한 생명일 수 있는 병 아리는 알속에서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다. 주님의 \\\\\\\\\\\\\\\'줄\\\\\\\\\\\\\\\'에 우리가 \\\\\\\\\\\\\\\'탁\\\\\\\\\\\\\\\'하는 것만이 우리 자신과 이 민족 그리고 나라를 살리는 길이요, 오직 줄탁동기가 있는 곳에서만 새 생명의 새 역사가 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와 \\\\\\\\\\\\\\\'베드로\\\\\\\\\\\\\\\' 는 별개의 둘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통합되어야 할 하나의 양면인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지각없는 행동은 충동이요, 행동을 수반하지 못하는 지각이란 망상일 뿐임을 깨닫게 해주시 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모두 망상과 충동 속에서 살아온 결과가 오늘의 위기임을 깨닫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줄탁동기가 있는 곳에서만 생명의 부화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 것을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공허한 세상으로부터 주님을 향해 돌아서므로, 주님 과 우리 사이에, 우리와 우리 사이에, 우리와 세상 사이에, 참된 줄탁동기가 쉬임 없이 이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오늘날 경제적 위기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과 아픔이 떨쳐 버려 야 할 껍질을 깨는 과정이게 하시고, 마침내 우리의 삶 속에 새 생명의 새 역사가 부화되게 하옵 소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기의 중요성을 잊지 말게 해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지각력과 행동력을 상실한채 살다가, 줄탁동기를 지금도 어김없이 실행하고 있는 닭이나 병아리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이재철 목사(서울 백주년기념교회)
기도의 사람 사무엘/ 삼상3:1-14
기도의 사람 사무엘 삼상3:1-14 오늘은 특별히 우리의 자녀들과 기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가 임하기를 바 랍니다. 어린이는 축복 속에서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하고,부모의 축복 을 받아야 하고, 이웃 어른들의 축복을 받고 자라야 합니다. 그런 아이라야 자라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남을 위해서 일할 줄 알고, 많은 사람에게 축복을 가 져다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물엘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1. 사무엘은 부모의 기도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어린아이의 영적인 발달은 성령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신 임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 139편 13-16절에도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기록 되었나이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부모의 신앙과 기도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부모가 심은 것은 자녀를 통해서 거둡니다. 1000대까지 그 열매가 이어집니다. 육신으로 심어서 육의 열매를 거두는데 그치지 마시고, 기도로 영적인 것을 자녀 에게 심으시기 바랍니다. 2. 3살까지 부모님의 기도로 자라났습니다. 한나는 그처럼 처절한 기도로 사무엘을 잉태했고, 10달의 임신기간에 잠시도 하나 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으며 기도의 생활을 하고, 3년을 젖을 먹이면서 밤낮없이 기 도의 손길로 보살피다가 성전에 드려 제사장의 손에 맡겨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기도 속에서 시작해서, 기도에 묻혀서 자라난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 이 보고 배운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실천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의 분위기와 신앙적인 환경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신앙의 습관을 갖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3. 사무엘은 평생을 제단에서 살았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편히 누워 자는 시간에도 사무엘은 성전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 는 육신적으로 보잘 것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거인이었습니 다. 하나님이 급하실 때 엘리를 찾지 않으시고, 사무엘을 찾으셨습니다. 중요한 일 을 위해서 사무엘과 의논하셨습니다. 우리들과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전에 가까이 나아와 기도의 생활을 하므로 하 나님과 가까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주 찾으시는 하나님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삼상9:15-삼상10:1/ 2005-02-14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삼상9:15-삼상10:1 제28회 아테네 올림픽이 꼭 보름 남았습니다. 376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마지막 비지땀을 흘리면서 금메달을 향하여 열심히 경주하고 있습니다. 9개 종목에서 적어도 13개의 금메달을 따는 것이 이번 대회의 목표라고 올림픽위원회는 예상하고 있습니다. 올림픽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지역대회와 전국대회에서 상위에 입상한 이들이 다시금 올림픽 대표 선발전이라고 하는 어렵고도 힘든 선발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그들의 가슴에 태극기 휘장을 달수 있습니다. 국가대표가 귀한 것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을 대표한 선수이기때문입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저는 우리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대표라는 자부심이 있다면 얼마나 기쁨이 클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기름을 붓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해 세우신 세 종류의 지도자에게 허락하시는 특별하고 공인된 예전입니다. 왕을 세우실 때, 예언자를 세우실 때, 그리고 선지자를 세우실 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종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기름을 붓도록 하셔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명실공이 하나님께서 인정한 지도자로써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 15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스라엘 지도자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에게 명하셨을 때, 그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공식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9장과 10장에서는 왕이라는 표현보다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라고 하는 표현을 본문 기자는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란 곧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납법적으로 생각을 하면, 왕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기업을 대표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회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대표성을 갖는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30년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요셉에게 약속하신 일관된 약속은 다름이 아니라 \\\'땅\\\'에 대한 것이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땅을 주리라\\\" 그리고 하나님게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습니다. 아주 오래전 아브라함 시절부터 약속해 주셨던 땅을 그들은 애굽에서의 기나긴 430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12지파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앗고, 그 땅을 지파별로, 가문별로 분배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땅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중요한 터전이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지금 사무엘을 통하여 행하신 기름을 붓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사람을 지도자로 삼아 하나님께서 행하실 주권을 위임받는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사울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암나귀 떼를 잃어버린 것을 찾으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갔다가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성실한 그의 마음이 숩이라고 곳까지 이르게 되었고, 너무 멀리와 오히려 아버지가 우리를 염려하시겠다며 돌아가자고 했을 때 지혜로운 사환의 충고가 사울의 인생을 이렇게 역전 시키는 동기가 된 것입니다. 여기 지금 사환이 뭐가 아쉬워서 그것도 자기 돈으로 주의 종 사무엘을 만나게 하는 일에 그렇게 애를 쓸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사환은 진정으로 주인의 아들이 주 앞에서 귀한게 쓰임 받는 것을 소원했기에 그는 최선을 다한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만한 동역자가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지요. 그런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찾아오기 전 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내일 베냐민지파의 한 청년이 너를 찾아 올 것이다. 그러면 네가 그 청년에게 기름을 부어라. 기름을 부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가 없습니다. 왕으로 세우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에게도 충격적인 이야기지요. 그 청년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을 세운 일에 자신의 어떤 사전 답사를 한 적도 없습니다. 면담을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일 너를 찾아오는 그 베냐민지파의 젊은이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명령은 때때로 우리에게 전폭적인 순종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기다려 보세요. 하나님, 제가 그 사람 면담도 안 해 봤는데,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알아보지도 않았는데, 좀 천천히 좀 하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에 우리가 그렇게 또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할 때가 있지요. 제가 가끔 여러분에게 어떤 신앙적인 사명을 드리면 여러분이 대부분 순종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 분들도 있지만, 가끔씩은 ‘제가 글쎄요, 제가 기도해 보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는 분들도 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아주 건방진 것이지요. 목사 앞에서 기도해 보고 해 보겠다는 말은 거절하는 말보다 더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종을 고백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두말 하지 않고 자기를 찾아온 베냐민 젊은 청년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는 양떼를 찾으러 갔다가, 염소떼를 찾으러 갔다가 주의 종을 만나고 나서 그리고 돌아가자고 하는 사환의 권면을 받고 주의 종을 만났을 뿐인데, 주의 종은 자기를 만나자 마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어저께 너에게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은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왕이 행하는 공인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치 수많은 난관을 뚫고 국가대표가 된 올림픽 선수들처럼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 땅에 지도자로 세운다고 하는 공인된 예식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돌아오는데 사울에게는 참으로 긴가민가 합니다. 내가 진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인가? 내가 진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인가? 굉장히 그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세웠노라고 하는 세가지 확실한 징조를 사람들을 통해서 알게 하십니다. 10장 2절에 보면 내가 오늘 너를 떠나서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으로 지나갈 때 두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암나귀들을 찾았지 않았느냐? 그 암나귀들을 찾았노라.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았음을 그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들이 사울에게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았다고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베냐민지파의 사람 사울에게 그런 확증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그 곳에서 두 사람을 만날 터인데, 이곳에 온 목적인 암나귀떼를 니가 찾지 않았느냐? 그들이 너에게 암나귀떼를 찾았노라고 전해 줄 것이다. 두 번째 3절의 말씀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 세 사람을 너와 만나게 하리라.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세 마리를 가졌고, 한 사람은 떡 세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는데, 그 세 사람이 너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들이 너에게 문안하고, 너에게 떡 세덩이 중에 두 덩이를 너에게 대접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드리려고 하는 그것이 없어서 사환의 것을 빌려서라도 그것을 이루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사람들에게, 선택된 사람들에 의해서 네가 섬김을 받으리라. 내가 왕이 되었나? 내가 왕인가? 내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이 맞는가? 그런 자신의 부분에 의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를 확증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5절입니다. 선지자의 무리가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가지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들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만나면 너에게 여호와의 힘이 임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힘이 너에게 임한다면 너는 두가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너도 예언을 하게 될 것이다. 은사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서? 은혜 충만한 사람들을 만나서, 은혜 충만한 사람들과 가까이 하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성가대 하면 어떤 일이 생기나요? 주요 모여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떤 찬양을 할까? 어떻게 하면 찬양을 잘 할까? 어떻게 하면 찬양하는 사역에 빠지지 않고 잘 할 수 있을까? 서로 그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게 되겠지요. 가능하면 우리 성가대는 부부들이 앉았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못 앉은 사람들은 실망해서 그러지 말고요. 가능하면 그런 분위기로 가면 좋겠어요. 사실은 이제 교회의 일이 부부로 가야 합니다. 축구선교회 기도회 모이는 것 부부로 모이고요, 테니스선교회는 벌써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부부가 모여야 합니다. 평안의교회가 부부가 많이 활동하는 교회로 유명한데, 모든 영역이 이제는 부부로 가야 합니다. 식당을 가 보세요. 과거에는 남자끼리 밥을 먹거나, 여자끼리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거의 대부분 4명 아니면 5명, 아빠 엄마 그리고 아이들, 거의 대부분은 이제는 가족끼리 식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모습이, 삶의 패턴이 달라졌어요. 가족끼리 하는 행사를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시대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공동체에 내가 포함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은사 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저 모여서 목사 흉이나 보고, 교회 비판이나 하고, 그런 사람들과 모이고, 그런 정보만 얻게 되고, 그런 얘기들만 하게 됩니다. 어떤 얘기가 들리면 어떤 루트가 있어요. 누구로부터 시작이 되서, 누구를 통해서, 누구에게까지 왔다. 그 루트가 아주 뻔합니다. 마음이 안타깝지요. 저 사람은 저런 부정적인 마인드에서 긍정적인 마인드로 변할까? 저 뒤에서 툴툴 거리는, 저 뒤에서 찡찡거리는 그 생활에서 이제는 앞장 서서 VIP로 헌신적 그룹에 언제나 저의 삶이 변화될까? 안타깝지요. 은혜 받은 자리, 은혜 받은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는 내게도 영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 첫 번째 변화는 너도 예언을 하게 될 것이다. 너도 은사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울이 주의 종들과 주의 사람들과 만나서 은혜를 하고 예언을 하는 소문이 사람들에게 들렸을때,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한 줄 아십니까? 사울도 예언자 중에 있어? 그 사람 언제부터 예언했는데? 언제부터 은혜 충만했어? 그 사람 언제부터 예수 믿었어? 사실 사울은 외모가 준수한 사람이라고 성경이 거듭 이야기를 했습니다. 잘 생겼다는 이야기지요. 키도 휜칠 했습니다. 외국사람들은 자기의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있어요. Smart라고 하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도 약점이 있었어요. 외모는 준수하고 스마트 했는데 영적인 부분에서 약점이 있었습니다. 늘 기도하고 은혜 받았던 사람이라면 은혜 받고 기도하고 은사충만한 것에 대해서 ‘아이고, 아무개 집사님, 성령 충만해. 그 분은 말 할 것도 없지.’ 이렇게 동의가 될텐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개가 이번에 방언한대. 이번에 사회봉사단에서 헌신한 줄 몰라. 그 사람이 언제부터 봉사했대? 언제부터 그렇게 했어?’ 그렇게 비아냥 거리고, 조롱하는 그런 상황이라면 그 전에 그런 이미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지요. 최근 우리 사회 전반에 외모지상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명품이 아니면 쓰지도 않고, 입지도 않아요. 양복도 명품, 시계도 명품, 구두도 명품, 핸드백도 명품, 심지어는 넥타이도 명품, 어느 책을 보니까 젊은 회사원들은 만나면 악수하면서 넥타이를 뒤져 본답니다. ‘아이고, 이 친구 싸구려구만.’ ‘아이고, 이 친구 명품 넥타이 했는데..’ 대우가 달라진답니다. 그러니까 중고품이라도 명품을 차고 명품을 입으려고, 중고품 명품 가게가 아주 성황이랍니다. 명품이 자기를 대변해 주는 거지요. 자기의 부족한 것을 명품이 채워 준다는 거예요.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10만원짜리 양복을 입어도, ‘목사님은 양복이 되게 비싸보이네요.’ ‘이거 꽤 비싼거야. 이거 당신들은 어려울걸?’ 자존심을 건드리지요? ‘아휴, 얼마짜린데요?’ ‘이거 꽤 비싼건데?’ ‘아휴, 목사님이 입으신거니까 한 70만원 정도 하겠지요.’ ‘그 정도 밖에 안돼?’ ‘아휴, 더 되나요?’ 그러면 굉장히 또 올라가지요. ‘얼만짜린데요?’ ‘사실은 이거 10만원 줬어.’ 믿지 않습니다. 사람이 가치가 있으면 싸구려를 입어도 명품처럼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죽 인간이 부족하면 명품 가지고 자기 인간의 가치를 높이려고 그러겠어요? 요즘 또 우리에게 외모지상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외모를 통해서 두각을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웰루킹(Well-looking)족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얼짱 몸짱하는 말입니다. 외모를 통해서 자신을 좀 돋보이게 하는 성형수술하는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돈을 모읍니다. 올해는 코 3mm 높이고 내년에 열심히 돈 벌어서 턱을 3mm 깎아야지...... 자기의 외모를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쓰고, 그렇게 해서 좀 대우좀 받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외모 지상주의가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 너무 심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이 시간에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울은 외모가 준수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 가지고 지도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내면에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채우셔서 은혜의 체험을 하게 하고, 성령의 체험을 하게 하고, 그래서 6절에 보면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할 뿐만 아니라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달라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의 심령이 새로워지고, 그의 영적인 모든 부분에서 평형을 이루는 그러한 사람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이 징조가 내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지금까지 이 세가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너를 만나서 이런 일들이 생길 때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은 진정으로 확증이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너를 세웠다는 것을 내가 확신을 가져라 그 말이예요. 사람들이 변화된 사울을 만났습니다. 사울이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의 심령이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그의 삶이 이제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려고 할 때에 사람들이 그것도 11절에 보면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 변화되기 이 전에 사울을 알고, 은혜 받기 이전에 사울을 알았던 사람들이 사울도 예언자 중에 있었느냐?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두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인 줄 믿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때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때는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너가 너를 세웠노라고, 내가 너를 택했노라고, 너는 나의 백성이라고 하나님의 귀중한 일들을 우리에게 맡기시려고 할 때에 우리가 준비된 모습으로, 때로는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채워주시려고 인도하실 때에 그 인도하심에 순종해 가면서 주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우리, 그 주님의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언제나 은혜의 중심에 있게 하시고, 언제나 성령 충만의 중심에 있게 하시고,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저희들을 변하여 새사람 되게 하옵소서. 변화된 모습으로 주님이 세우신 지도자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오늘도 이 주님의 세우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저희들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기적의 아들 삼손/ 삿13:1-8
기적의 아들 삼손 삿13:1-8 저희 교회 교우 가운데 아이를 낳다가 거의 죽을 뻔한 자매가 있습니다. 저희 부부가 병원을 찾아갔을 때 그 자매는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서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야기를 나누려 해 보았지만 일체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10분 동안 그 옆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끝내고 눈을 뜨자 자매의 눈동자가 반짝였습니다. 눈으로 무슨 말을 하였습니다. 소리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제 아내는 그 자매가 살아날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자매와 그 가정에 기적을 내려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대로 그 자매는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기억을 회복할 수 없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있다면 주님은 이 문제까지도 능히 해결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남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가족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억력을 되찾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이 가정에 신실한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특히 이 자매는 대부분의 기억을 상실한 가운데서도 말씀과 찬양을 기억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한 부부가 수요 예배가 끝난 뒤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부부는 솔직하게 그들의 갈등을 털어놓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혼을 결심하고 최종적으로 제 조언을 들으러 왔습니다. 남편은 󰡒우리 부부는 끝났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혹시 기적이 일어난다면 몰라도…󰡓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때 이 부부에게 『그래요? 제가 보기에는 두 분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적이 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저는 두 시간 가까이 그들에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복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부부는 교회에는 가끔 출석하지만 진정한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벽 1시가 다 되어 제 사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남편이 󰡒목사님, 어쩐지 희망이 생깁니다.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 보겠습니다󰡓 하고 다짐했습니다. 처음에는 부부가 따로따로 들어왔는데 나갈 때는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제 생애에 그 순간처럼 유쾌하고 보람찼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하늘의 별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은 날마다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적은 아직도 역사의 현장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답답한 상황에 처해 고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문에 그런 가정이 등장합니다. 바로 삼손이 태어날 가정입니다. 이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가 없는 것은 한 가정의 죽음과도 같은 절망이었습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2절). 그 시대에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이 최대의 저주이고 최고의 수치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를 삼손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아들은 기적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기적을 낳게 한 원인으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 ^^^^^^^^^^^^^^^^^^ 본문의 시대 정황을 알려 주는 1절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면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새로운 사사를 보내어 구원하는 악순환의 역사를 계속 반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고 용납하사 또 한번 기회를 주시는데도 이스라엘은 또 죄를 범합니다. 참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저 같으면 벼락을 내릴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 백성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들을 멸망시키거나 저주하거나 심판하기는커녕 주님의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사를 예비하십니다. 그 사람이 삼손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그것이 은혜란 말의 본뜻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삼손의 탄생은 개인적으로는 희망을 잃었던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자녀가 없어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던 가정에 친히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몸소 이 부부 곁에 찾아오셨습니다. 은혜는 항상 하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손길을 뻗으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 6). 항상 은혜의 사역은 주님 편에서 시작됩니다. 마노아의 아내에게도 주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여인에게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으로 방문하셨습니다. 마노아 부부는 자기들을 찾아온 분이 하나님의 천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 같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18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奇妙)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기묘󰡓라고 밝히셨습니다. 영어로는 󰡒wonderful󰡓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그 이름은 󰡒기묘자󰡓(9:6)라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분이 놀라운 방법으로 슬픔과 절망에 젖어 있는 여인 곁에 다가오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직접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나기도 힘이 드는데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는 것은 보통 큰 은혜가 아닙니다. 마노아의 가정이 받고 있던 고통을 해결하시고 그 시대에 새로운 희망을 주기 위해 친히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살던 인물 가운데 룻이 있었습니다. 모압 여인이었던 룻은 남편을 잃은 뒤 시어머니를 따라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에 와서 살았습니다. 룻은 이삭을 주으며 근근히 연명했습니다. 그런데 룻 앞에 하나님이 보내신 남자가 한 사람 등장합니다. 룻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룻은 이 하나님의 사람 앞에 엎드려 자기의 절실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룻 2:13).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때부터 룻의 삶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기적의 원천입니다. 은혜는 기적을 낳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기적이 필요하다면 그 기적은 은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당신에게 임하여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 거룩함 ^^^^^^^^^^ 거룩함이 있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꾸만 죄를 범하는데 하나님은 저주 대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마치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5:20)고 한 말씀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곡해하지 마십시오. 죄가 있는 곳에 은혜를 주시니까 더욱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더 악한 죄를 범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의 기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를 베푸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죄를 떠나고자 노력하는 것,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거룩함을 사모하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 사건들을 나열해 보십시오.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요구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려는 장면을 예로 들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요단 강을 건널까를 걱정했는데, 하나님은 그 대답을 주시기 전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奇事)를 행하시리라󰡓(수 3:5). 우리는 󰡐이 궁지에서 어떻게 빠져 나갈까, 내 삶에 희망은 있는가󰡑에 관심이 있으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차적인 기대는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사사기를 읽다 보면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벌하고 징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던 블레셋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한껏 주었습니다. 정복자인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음대로 결혼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사치한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블레셋의 노예가 되는 것, 망해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본래 팔레스타인이라는 낱말은 블레셋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고대 문화의 대표적인 예가 팔레스타인 문화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유적지들을 발굴하여 삼손 시대로 추정되는 고고학적 유물들을 많이 발견하였습니다. 유물들 가운데 대부분이 술병, 술항아리, 술주전자 따위입니다. 당시의 향락 문화와 쾌락주의를 짐작케 하는 물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블레셋의 세속 문화에 휩싸인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원자로 택한 사람이 삼손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잉태하게 하면서 먼저 그 어머니에게 두 가지 금지 사항을 말씀하셨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첫째/포도주와 독주 대개 음주 문화가 발달하면 그 시대는 망하기 시작합니다. 쾌락과 사치와 방종의 삶은 술에서 비롯됩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온갖 핑계를 다 대면서 술 마실 건수를 만듭니다. 사업상 어쩔 수 없이, 체면상 할 수 없이, 도의상 안 마실 수 없어 마셨다고 합니다.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월요일은 원래 마시는 날이고, 화요일은 화끈하게 마시는 날이고, 수요일은 수없이 마시는 날이고, 목요일은 목이 터져라 마시는 날이고, 금요일은 금방 마시고 또 마시는 날이고, 토요일은 토하고 마시는 날이고, 일요일은 일일이 술집 찾아다니면서 마시는 날이랍니다. 한국에서 제일 많이 새로 생기는 것이 술집과 교회라고 합니다. 술집과 교회는 비례하여 증가한다고 합니다. 보통 비극이 아닙니다. 교회가 많아지면 술집이 줄어야 하는데 왜 술집이 같이 늘어납니까? 역사를 뒤돌아보면 교회에 진정한 영적 각성과 부흥이 일어날 때 술집이 다 문을 닫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술집이 줄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를 일깨우지 못하고 있는 교회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부정한 것 하나님은 단순하게 부정한 음식만을 먹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삶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날 삼손도 어머니와 같이 위의 두 가지 금지 사항을 지켜야 했고(13,14절 참조), 이와 더불어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 했습니다(5절 참조). 머리를 자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헌신했다는 표시입니다. 본래 나실인은 일정 기간만 서원할 수도 있고 평생을 서원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삼손에게 평생 헌신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나실인은 나실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나지르』인데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평생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입니다. 이 시대를 구원할 사사는 세상의 죄악에서 구별된 사람, 세상 사람들의 풍조와 유행에서 구별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깨우는 일에 거룩한 사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아직 술을 끊지 못한 사람은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술 자체가 구원과 관련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과는 분명히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원합니다. 경기가 침체되어 있으면 내가 하는 사업이 번창하는 기적을 원하고, 몸이 아프면 병에서 낳는 기적을 원합니다. 출세하기 원하고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 얻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원하는 만큼 거룩함을 사모하는가?󰡓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적을 원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삶에서 참으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사모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말년에 암으로 고생하면서 미국 유수의 대학들을 방문했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상태에서 여러 학교와 교회를 방문한 쉐퍼는 피를 토하듯 진리를 외쳤습니다. 쉐퍼 박사가 진단한 미국의 문제는, 행복은 추구하지만 거룩은 추구하지 않는 점이었습니다. 지난날에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 때문에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고민을 했습니다. 거룩하지 못한 삶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닮아 출세와 세상 명예와 행복만을 원합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 거룩하게 살기를 원합시다. 부정하게 출세하고 잘사는 것보다 손해 보고 못 살더라도 거룩해지기를 원합시다. 죄를 지으면서 부자가 되고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도 가난하게 살더라도 주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살기를 원합시다. 기적은 거룩함에 기인합니다. * 기도 ^^^^^^^^ 8절 말씀에 기적의 또 한 요인이 나옵니다.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마노아는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기로 이미 약속하셨는데도 마노아는 기도했습니다. 기도야말로 기적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대로 행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기도할 때를 기다리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통로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위대한 기적, 영광의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동행하며, 나를 사용하시고,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내 삶에 그분의 풍성함을 채우시고, 놀라운 감동을 주는 기적이 지금은 왜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사도 야고보가 이에 대해 답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 구하지 않기 때문에 응답이 없고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기심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기도가 정말 하나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기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기도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정의(定義)하였습니다. 󰡒참된 기도는 나의 소원, 내 뜻을 하늘에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나의 삶에서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진정한 이유는, 단순히 우리 소원을 성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기도의 핵심, 기도의 정신이 가장 잘 표현된 주기도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주기도문의 첫번째 부분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뜻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우리의 삶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통해 주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거룩을 추구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평범한 인간이지만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고민하고 주님이 기뻐하실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주님이 주시는 신선한 기쁨과 감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부족한 대로 주님의 일을 하고 이웃을 돕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일상 생활에서 실현할 때 하늘의 축복이 임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얄팍한 이기심이 아닌 하나님 뜻에 맞추어 살아갈 때 세상에서의 삶이 비록 힘들더라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기쁨을 얻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한없는 복을 주십니다. 주님의 뜻에 우리 삶의 초점을 맞추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늘 기쁘고 즐거울 뿐 아니라 기적 가운데 살게 됩니다. 당신에게 이런 신앙의 체험이 있기 바랍니다.
나실인 삼손/ 삿13:1-13
나실인 삼손 삿13:1-13 사사기 13장에서 16장까지는 삼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넉장에 걸쳐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삼손이 대단히 위대했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삼손이 위대한 영웅이거나 신앙적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멧세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비중을 두고 그를 다루고 있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를 잉태하였을 때 부모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희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다. 그 머리를 깎지 말라\\\\\\\' 명령했습니다. 또 그 태어날 아이 뿐 아니라 그 어머니에게도 \\\\\\\'독주와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포도 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을 다 지킬 것이니라(삿 13:13)\\\\\\\" 나실인이 아닌 그의 어머니에게 이렇듯 강력하게 말씀했다면 본인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강조되는 것입니까? 구약에 나실인은 오늘 신약시대에 와서는 누구를 가르칩니까? 나실인은 하나님의 일에 쓰시기 위해서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습니다. 오늘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심을 입은 구원함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다 영적인 의미에서 나실인 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깨달은 중요한 깨달음이 만인 제사장입니다. 이 이론은 어떤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되었으니 우리 모두에게 맡기신 사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나실인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성도라 부릅니다. 구약에는 성직자들이 다 있지만, 오늘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구별함을 받은 성도입니다. 우리는 나실인입니다. 오늘 나실인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나실인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특별히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 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나실인들과 달리 평생을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사무엘이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라면 삼손과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허락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에게는 무엇을 요구합니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 13:5)\\\\\\\"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삿 13:7)\\\\\\\" 나실인에게는 다음의 한 가지를 기억해야합니다. 또 세 가지가 금지되었습니다.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구별된 자들입니다. 이들을 구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특별히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그 가운데서 또 구별하여 나실인을 세웠지만,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 내어 구별된 삶을 살게하십니다. 삼손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을 정복해야할 사사 삼손이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 졌으며 함께 죄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악한 사단의 역사로 심히 혼탁해진 세상에서 나와라 하십니다. 다음으로 준수해야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적으로 보면 지켜 살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구별된 삶을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런 다음에 준수할 것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것을 먹지 말 것. 머리를 깎지 말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면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데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지켜도 율법주의가 되고, 그 율법주의는 나중에는 방탕주의가 되고맙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요구를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왜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습니까? 성경에서 술은 영적인 의미를 가리키지만, 독주, 그 자체를 말씀하기도 합니다. 믿는 성도로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하신 것은 우리들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성경에 술을 언급하지 않았다해도 성도의 삶에 술이 있으면 방탕으로 돌아가기 쉬웠을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바울은 왜 성령충만과 술 취하는 것을 대비시키셨습니까? 이는 정반대이면서 동시에 비슷한 일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모두 충만입니다. 무엇으로 충만입니까? 무엇으로 흘러 넘칩니까? 이것은 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너는 이미 주인이 있는 몸이니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가를 밝히기 위해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신 것이다. 술 취하는 것은 세상의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도 진리도 잊어비리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제사법을 통해 하나님을 부정한 것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통 주검은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부정한 것입니까? 시체를 만지는 것이 부정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부정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마 15: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들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머리를 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킴으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인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그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2-14)\\\\\\\" 남자가 머리를 깎고 여자가 머리를 기르는 가장 큰 이유는 남녀관계에서 남자가 질서상 \\\\\\\'대표\\\\\\\'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머리를 길게하지 않게 되어 있었고, 여자는 머리를 짧게 깎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면 안됩니다. 자기가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실인은 머리를 자르지 말도록 했습니다. 곧 머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나실인이란 전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 누구 수하에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머리가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성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그런 자기 신분임을 밝히기 위해 나실인 제도를 내었습니다. 금하신 것을 지키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증거가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죄악을 행치 않고, 또 하나님께 철저한 순종의 생활을 보일 때에 구별된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금지된 일을 하지않고 남에게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삼손이란 이름의 뜻은 \\\\\\\'강한 자\\\\\\\'입니다. 사사기 14장에서 삼손은 블레셋에 내려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의 잔치에 술이 빠지지 않습니다. 삼손은 술을 입에 댄 것이 아니라 퍼 마신 것입니다. 또 삼손은 14장에서 사자를 죽이고 그 몸에서 꿀을 꺼내어 마셨습니다. 이것은 시체를 먹는 부정한 것을 만지고 먹은 것입니다. 삼손 그는 나실인으로 금해야 할 일을 모두 다 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16을 보면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16:17)\\\\\\\" 이 말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금한 일을 모두 다 해 놓고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나는 나실인이다\\\\\\\'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실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이방여인과 결혼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처음이라면 이해가 어느 정도 되겠으나 들릴라는 벌써 두 번째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최소한 머리는 안 잘랐기 때문에 나실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외식하는 주일 신자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모든 죄를 다 지으면서 최소한 나는 이것을 하기 때문에 신자라 생각합니다. 주일에 교회는 나가니까, 십일조는 했으니까 하는 식입니다. 다행입니까? 그가 신자라고 인식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지는 그의 신앙생활이 끝내 변하지 않는다면 삼손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삼손이 등장해서 하는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지금 사사 시대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삼손\\\\\\\'이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그 이름의 뜻이 \\\\\\\"찬란한 태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신앙 행태를 살펴보면 삼손을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삼손과 같은 이름과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내 생애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삼손과 같을 것입니다.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더라(16:31)\\\\\\\" 이 말씀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말씀은 그가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사사로서의 삶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차이를 보입니다. 보통 사사의 등장과 그의 죽음을 마무리 할 때 사사기가 쓰는 일반적인 평가는 \\\\\\\'그가 사사로 몇년을 지내었고 그가 사사로 있는 몇년 동안 이스라엘이 태평하였더라\\\\\\\'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가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을 뿐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적은 없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손은 개인적으로 싸우지 이스라엘로 싸우지 않는다. 수수께끼로 삼십명을 죽이는 일도,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블레셋의 농작물을 망치는 것도 여인 때문에, 개인적 원한 때문에 저지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삼손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쓰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에서 알게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 그러나 삼손의 최후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 이제 최후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놀라운 역사로서 블레셋을 치게하십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나실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실인 삼손/ 삿13:1-13
나실인 삼손 삿13:1-13 사사기 13장에서 16장까지는 삼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넉장에 걸쳐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삼손이 대단히 위대했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삼손이 위대한 영웅이거나 신앙적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멧세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비중을 두고 그를 다루고 있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를 잉태하였을 때 부모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희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다. 그 머리를 깎지 말라\\\\\\\' 명령했습니다. 또 그 태어날 아이 뿐 아니라 그 어머니에게도 \\\\\\\'독주와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포도 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서 내가 그에게 명한 것을 다 지킬 것이니라(삿 13:13)\\\\\\\" 나실인이 아닌 그의 어머니에게 이렇듯 강력하게 말씀했다면 본인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강조되는 것입니까? 구약에 나실인은 오늘 신약시대에 와서는 누구를 가르칩니까? 나실인은 하나님의 일에 쓰시기 위해서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습니다. 오늘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심을 입은 구원함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들이 다 영적인 의미에서 나실인 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깨달은 중요한 깨달음이 만인 제사장입니다. 이 이론은 어떤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되었으니 우리 모두에게 맡기신 사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나실인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성도라 부릅니다. 구약에는 성직자들이 다 있지만, 오늘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이요, 선지자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구별함을 받은 성도입니다. 우리는 나실인입니다. 오늘 나실인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나실인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특별히 삼손, 사무엘, 세례요한 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나실인들과 달리 평생을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입니다. 사무엘이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라면 삼손과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허락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에게는 무엇을 요구합니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 13:5)\\\\\\\"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삿 13:7)\\\\\\\" 나실인에게는 다음의 한 가지를 기억해야합니다. 또 세 가지가 금지되었습니다. 먼저 기억해야할 것은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구별된 자들입니다. 이들을 구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특별히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그 가운데서 또 구별하여 나실인을 세웠지만,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 내어 구별된 삶을 살게하십니다. 삼손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을 정복해야할 사사 삼손이 오히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 졌으며 함께 죄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악한 사단의 역사로 심히 혼탁해진 세상에서 나와라 하십니다. 다음으로 준수해야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적으로 보면 지켜 살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구별된 삶을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런 다음에 준수할 것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것을 먹지 말 것. 머리를 깎지 말 것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면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는데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지켜도 율법주의가 되고, 그 율법주의는 나중에는 방탕주의가 되고맙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요구를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왜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셨습니까? 성경에서 술은 영적인 의미를 가리키지만, 독주, 그 자체를 말씀하기도 합니다. 믿는 성도로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하신 것은 우리들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성경에 술을 언급하지 않았다해도 성도의 삶에 술이 있으면 방탕으로 돌아가기 쉬웠을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바울은 왜 성령충만과 술 취하는 것을 대비시키셨습니까? 이는 정반대이면서 동시에 비슷한 일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모두 충만입니다. 무엇으로 충만입니까? 무엇으로 흘러 넘칩니까? 이것은 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너는 이미 주인이 있는 몸이니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누구의 소유인가를 밝히기 위해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신 것이다. 술 취하는 것은 세상의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도 진리도 잊어비리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제사법을 통해 하나님을 부정한 것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통 주검은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무엇이 부정한 것입니까? 시체를 만지는 것이 부정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부정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마 15: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들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머리를 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킴으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인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그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2-14)\\\\\\\" 남자가 머리를 깎고 여자가 머리를 기르는 가장 큰 이유는 남녀관계에서 남자가 질서상 \\\\\\\'대표\\\\\\\'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머리를 길게하지 않게 되어 있었고, 여자는 머리를 짧게 깎지 않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면 안됩니다. 자기가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실인은 머리를 자르지 말도록 했습니다. 곧 머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나실인이란 전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 누구 수하에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머리가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성도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그런 자기 신분임을 밝히기 위해 나실인 제도를 내었습니다. 금하신 것을 지키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께 구별된 자라는 증거가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속에 빠지지 않고, 죄악을 행치 않고, 또 하나님께 철저한 순종의 생활을 보일 때에 구별된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금지된 일을 하지않고 남에게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삼손이란 이름의 뜻은 \\\\\\\'강한 자\\\\\\\'입니다. 사사기 14장에서 삼손은 블레셋에 내려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의 잔치에 술이 빠지지 않습니다. 삼손은 술을 입에 댄 것이 아니라 퍼 마신 것입니다. 또 삼손은 14장에서 사자를 죽이고 그 몸에서 꿀을 꺼내어 마셨습니다. 이것은 시체를 먹는 부정한 것을 만지고 먹은 것입니다. 삼손 그는 나실인으로 금해야 할 일을 모두 다 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16을 보면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16:17)\\\\\\\" 이 말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금한 일을 모두 다 해 놓고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나는 나실인이다\\\\\\\'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실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이방여인과 결혼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처음이라면 이해가 어느 정도 되겠으나 들릴라는 벌써 두 번째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최소한 머리는 안 잘랐기 때문에 나실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외식하는 주일 신자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모든 죄를 다 지으면서 최소한 나는 이것을 하기 때문에 신자라 생각합니다. 주일에 교회는 나가니까, 십일조는 했으니까 하는 식입니다. 다행입니까? 그가 신자라고 인식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지는 그의 신앙생활이 끝내 변하지 않는다면 삼손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삼손이 등장해서 하는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지금 사사 시대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삼손\\\\\\\'이라는 것입니다. 삼손은 그 이름의 뜻이 \\\\\\\"찬란한 태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신앙 행태를 살펴보면 삼손을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삼손과 같은 이름과 신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내 생애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삼손과 같을 것입니다.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집이 다 내려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더라(16:31)\\\\\\\" 이 말씀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말씀은 그가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사사로서의 삶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차이를 보입니다. 보통 사사의 등장과 그의 죽음을 마무리 할 때 사사기가 쓰는 일반적인 평가는 \\\\\\\'그가 사사로 몇년을 지내었고 그가 사사로 있는 몇년 동안 이스라엘이 태평하였더라\\\\\\\'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가 사사로 이십년을 지내었을 뿐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적은 없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삼손은 개인적으로 싸우지 이스라엘로 싸우지 않는다. 수수께끼로 삼십명을 죽이는 일도, 여우 꼬리에 불을 붙여 블레셋의 농작물을 망치는 것도 여인 때문에, 개인적 원한 때문에 저지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삼손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쓰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에서 알게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 그러나 삼손의 최후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기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단지 그가 이제 최후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놀라운 역사로서 블레셋을 치게하십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나실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실인 삼손의 삶/ 삿16:15-22
나실인 삼손의 삶 삿16:15-22 삼손은 우리가 잘 아는 인물입니다. 그는 대단히 강한 힘의 소유자라는 것과 기생 들릴라 때문에 망한 인물이라는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들 중에 삼손만큼 경건한 출생을 가진 사사도 없고, 삼손만큼 능력을 가진 사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부모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며, 복중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되다. 거룩하게 바치다\\\"라는 뜻으로, 삼손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독주를 마시지 않게 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불결한 것을 만지지 말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삼손은 주어진 이 모든 특권과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했었는데, 그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살면서 모든 것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사라는 이름을 갖기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고 나실인 이라는 이름에도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나지르\\\"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도쉬\\\" 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카도쉬는 성도라는 말입니다. 성도라는 뜻도 세상 사람과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음 받아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별히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도\\\" 라는 이름은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실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삼손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신자다운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설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나실인이면서도 세상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을 타파하기 위해 세워진 사사인데, 불레셋의 여인과 사귀다가 망했습니다. 사사기 13장은 사사 삼손의 출생과 그 배경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13장 맨 마지막에 보면, \\\"여인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의 감동이 어린 아이인 삼손에게 함께 하셨다는 복된 출발입니다. 그리고 나서, 14장에 청년이 된 삼손에 관한 첫 기록이 나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딤나에 내려가서 불레셋 사람의 딸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반해서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혼을 고집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귀하게 태어났고 귀한 직분을 맡았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땀 흘려 감당하기보다는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삶을 택하였고, 그것이 너무 달콤해서 부모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14:4절 이하에 보면, 삼손의 의중에는 구실을 만들고 기회를 보아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백성을 돕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세상과 벗을 삼아 즐기는 모습입니다. 세상을 즐기면서 세상을 이기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옛날에, 기독교 서클에 대해 불만스러워 하는 한 대학생이 있었는데, 훌륭한 장로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지금 우리끼리 모여서 희희낙낙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영적 생명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저들의 구원을 위하여 저들과 동행해야한다고 그는 저들과 함께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과 어울리는 일에만 익숙해져있습니다. 그것을 삼손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점점 더 세상과 타협하는 인물이 되어갑니다. 그는 구별된 사람인 나실인인데, 그의 생활은 날마다 이방 여인들이나 따라다니며 음행을 일삼고, 블레셋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고 그들과 원수 맺는 일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그들에게 점점 가까워져 갔고, 마지막에는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 비밀을 고백하게 됩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들릴라에게 거짓말로 일러주었습니다. 마르지 아니한 칡 일곱 줄로 묶으면 나는 힘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들릴라는 얼른 그렇게 해 보았지만 삼손의 힘이 없어지지 않자 삼손에게 투정을 부리며 조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냐, 어떻게 세 번씩이나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느냐 면서 조르자 결국 자기는 나실인이어서 머리에 가위를 대지 않은 사람이니 만일 내 머리를 자르면 힘이 사라질것이라고 대답을 하고 맙니다. 아무리 여자에게 정신이 빠졌다고 해도, 어떻게 하면 당신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해 주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나실인의 신분과 능력의 비밀을 이방 기생에게 넘겨주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 후서6:14을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14-16)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요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세상과 섞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당히 세상과 어울리며 남들이 가진 세상의 즐거움 나도 얻어 보겠다고 세상과 친구가 되며 체면과 양심과 신앙도 팔아먹는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돈과 쾌락을 좇아 다니며 사니까 그렇게 산들 어떻겠습니까? 먹고살다 죽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니 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도입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한발 더 앞장서서 돈과 명예와 쾌락에 젖어 그것에 목 매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그런 면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세상과 어울려 살면, 성도는 세상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잃게 됩니다. 성도의 힘은 성결에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성도의 힘이 유지되며, 사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십시다. 2.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7) 삼손의 두 번째의 혼동은, “머리만 자르지 아니하면 나실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착각했습니다. 나실인은,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아야 했고, 시체도 만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머리만 기르면서 나는 나실인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으로 가다가 사자를 만나서 강한 힘으로 사자를 쳐 죽였는데, 돌아오다 보니 죽은 사자의 시체에 벌들이 집을 짓고 꿀을 모아놓은 것을 발견하고 꿀을 따먹었습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은 결코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부모는 그에게 당부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실인으로 멀리해야할 짐승의 시체에 꿀이 있다고 그것을 따 먹었습니다. 또한 그는 나실인인데도 기생과 동거하는 타락한 삶을 즐겼습니다. 그러고도 삼손은 나는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나는 구별된 나실인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일에 교회 다녀왔다고 성도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십일조 했다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은 우리에게 명확한 대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 한자가 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삼손이 지켜야할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삼고 복을 주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겼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신 능력과 특권을 다 잃어버리고 처참해집니다. 20절에,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였습니다. 참 슬픈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며 사는 성도가,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야, 하나님이 아직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을꺼야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버리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를 절망에 빠뜨린 것은 머리털을 자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떠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큰 슬픔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고 떠나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자, 최고의 정복자였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 부터 심한 책망을 듣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죄를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고백이 시편51편에 나와 있습니다. 그 10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정말 두려워하였던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쫓아 내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신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보셨습니까? 주님이 내 옳지 못한 삶을 보시고 실망하신 나머지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여러분 가운데 있었습니까? 우리는 노후에 어떻게 살까, 아들이 대학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보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시고 은혜를 내게서 거두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걱정해야 합니다. 이런 근심은 회개를 이루고, 그런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삼손 같은 마음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삼손처럼 머리하나 깎지 아니한 것만 가지고, 주일날 교회한번 나왔다 간 것만 가지고, 나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고 있고 내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낱만한 계명 하나 지켰다고 모든 일을 다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성도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교회에 나왔다 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매일 매시, 하나님의 성령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을 받드는 것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구별된 백성으로서 분명한 신자의 색깔을 지니고 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능력은 지식이나 물질이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결함에 있고 성령 충만함에 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 지킨 것 같이 말씀중에 한 가닥만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불안하고 피곤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한, 말씀을 기꺼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 그 삶 안에는 사랑, 기쁨, 행복과 만족의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3. 자기만족을 추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받은 남다른 은혜와 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14장부터 시작되는 그에 관한 사건의 전부는 \\\"기생과 이방 여인과 놀아나는 것\\\"과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뿐이었습니다. 마지막 16장까지 그는 온통 육체적 향락과 미를 좇아 놀아나고, 자기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일로 끝이 납니다. 삼손은 그에게 주신 은혜와 능력을 온통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힘이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는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는 오늘같이 다양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힘이 강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그는 재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였다면, 만족과 쾌락을 충분히 얻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충분한 쾌락과 만족이 아니라 고통과 싸움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역사를 가만히 보면 원수 맺고, 원수 갚고, 원수 맺고 원수 갚은 일의 연속입니다. 그는 딤나에서 여인을 보았는데, 그 장인 되는 사람이 그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고 그 동네에 찾아가 동네 곡식에 불을 질렀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장인과 그 여인을 잡아 죽였으며, 삼손은 다시 그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고,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유대인들에게 앙갚음을 하였습니다. 원수 만들고 원수 갚는 것이 전부입니다. 또한, 그는 여인들을 사랑했지만 여인들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 16절절에 보면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만족과 쾌락을 위해 헌신한 삶이 죽을 지경의 고통만 가져다주었다는 기록입니다. 삼손이 육체적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다 허비한 결과로 얻은 것은 버림받는 것이었고, 두 눈을 뽑히는 것이었고, 짐승들이나 돌리는 연자 맷돌을 돌리는 수치스러운 일 뿐이었습니다. 삼손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평안과 만족과 쾌락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고 해가 지나면서 남겨지는 열매들은 무엇입니까? 서로가 원망을 하고 원수를 맺는 일과 싸움과 고통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고민과 고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온 것들입니다. 즉, 형제나 이웃이나 사업상 친한 사람이나 친척이나 친구 등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나는 잘 해보려고 했는데, 그들을 돕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 하나님께 해야할 일도 손해 보면서 그를 도왔는데, 결과는 그들 때문에 고난만 겪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이웃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인 수직적 관계를 뒤로 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이고, 이웃과의 관계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형제나 이웃 등 모든 수평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비결이 됩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우선이어야지, 수평적인 관계를 우선하게 되면 모든 수평적 관계가 헝클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양심적인 성도는, “목사님! 신앙생활이 게을러지니까 모든 일이 다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대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에 게으르면, 모든 일이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영광을 받기 위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만 즐거우시고 우리는 아무 재미도 없이 살라고, 독선적으로 자신만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만 우리에게 영광이 있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도 다른 것을 도울 때에 자기를 돕는 것이 됩니다. 식물과 동물이 그렇고 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인생들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우리의 모든 일이 잘 되어지고 행복을 누립니다. 시편37:4절 이하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주셨고 건강한 몸과 복된 환경을 주셨으며, 만민중에서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주셨습니다. 나실인 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불러내어진, 택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받은 모든 것, 이 축복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오늘 무엇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기만족을 위하여 살아가면 싸움과 버림받음과 고통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기쁨이 있고 행복의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그래야 참으로 온전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 길로 힘차게 달려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결심만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새 힘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실패한 나실인 삼손을 본받지 말고 이 시대의 성공한 나실인들이 되십시다.
나실인 삼손의 삶/ 삿16:15-22/ 2002-03-07
나실인 삼손의 삶 삿16:15-22 삼손은 우리가 잘 아는 인물입니다. 그는 대단히 강한 힘의 소유자라는 것과 기생 들릴라 때문에 망한 인물이라는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들 중에 삼손만큼 경건한 출생을 가진 사사도 없고, 삼손만큼 능력을 가진 사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부모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며, 복중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되다. 거룩하게 바치다\\\"라는 뜻으로, 삼손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독주를 마시지 않게 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불결한 것을 만지지 말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삼손은 주어진 이 모든 특권과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했었는데, 그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살면서 모든 것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사라는 이름을 갖기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고 나실인 이라는 이름에도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나지르\\\"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도쉬\\\" 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카도쉬는 성도라는 말입니다. 성도라는 뜻도 세상 사람과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음 받아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별히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도\\\" 라는 이름은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실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삼손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신자다운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설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나실인이면서도 세상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을 타파하기 위해 세워진 사사인데, 불레셋의 여인과 사귀다가 망했습니다. 사사기 13장은 사사 삼손의 출생과 그 배경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13장 맨 마지막에 보면, \\\"여인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의 감동이 어린 아이인 삼손에게 함께 하셨다는 복된 출발입니다. 그리고 나서, 14장에 청년이 된 삼손에 관한 첫 기록이 나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딤나에 내려가서 불레셋 사람의 딸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반해서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혼을 고집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귀하게 태어났고 귀한 직분을 맡았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땀 흘려 감당하기보다는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삶을 택하였고, 그것이 너무 달콤해서 부모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14:4절 이하에 보면, 삼손의 의중에는 구실을 만들고 기회를 보아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백성을 돕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세상과 벗을 삼아 즐기는 모습입니다. 세상을 즐기면서 세상을 이기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옛날에, 기독교 서클에 대해 불만스러워 하는 한 대학생이 있었는데, 훌륭한 장로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지금 우리끼리 모여서 희희낙낙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영적 생명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저들의 구원을 위하여 저들과 동행해야한다고 그는 저들과 함께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과 어울리는 일에만 익숙해져있습니다. 그것을 삼손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점점 더 세상과 타협하는 인물이 되어갑니다. 그는 구별된 사람인 나실인인데, 그의 생활은 날마다 이방 여인들이나 따라다니며 음행을 일삼고, 블레셋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고 그들과 원수 맺는 일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그들에게 점점 가까워져 갔고, 마지막에는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 비밀을 고백하게 됩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들릴라에게 거짓말로 일러주었습니다. 마르지 아니한 칡 일곱 줄로 묶으면 나는 힘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 들릴라는 얼른 그렇게 해 보았지만 삼손의 힘이 없어지지 않자 삼손에게 투정을 부리며 조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냐, 어떻게 세 번씩이나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느냐 면서 조르자 결국 자기는 나실인이어서 머리에 가위를 대지 않은 사람이니 만일 내 머리를 자르면 힘이 사라질것이라고 대답을 하고 맙니다. 아무리 여자에게 정신이 빠졌다고 해도, 어떻게 하면 당신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해 주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나실인의 신분과 능력의 비밀을 이방 기생에게 넘겨주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 후서6:14을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14-16)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요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세상과 섞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당히 세상과 어울리며 남들이 가진 세상의 즐거움 나도 얻어 보겠다고 세상과 친구가 되며 체면과 양심과 신앙도 팔아먹는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돈과 쾌락을 좇아 다니며 사니까 그렇게 산들 어떻겠습니까? 먹고살다 죽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니 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도입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한발 더 앞장서서 돈과 명예와 쾌락에 젖어 그것에 목 매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그런 면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세상과 어울려 살면, 성도는 세상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잃게 됩니다. 성도의 힘은 성결에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성도의 힘이 유지되며, 사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십시다. 2.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7) 삼손의 두 번째의 혼동은, “머리만 자르지 아니하면 나실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착각했습니다. 나실인은,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아야 했고, 시체도 만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머리만 기르면서 나는 나실인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으로 가다가 사자를 만나서 강한 힘으로 사자를 쳐 죽였는데, 돌아오다 보니 죽은 사자의 시체에 벌들이 집을 짓고 꿀을 모아놓은 것을 발견하고 꿀을 따먹었습니다 .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은 결코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부모는 그에게 당부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실인으로 멀리해야할 짐승의 시체에 꿀이 있다고 그것을 따 먹었습니다. 또한 그는 나실인인데도 기생과 동거하는 타락한 삶을 즐겼습니다. 그러고도 삼손은 나는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나는 구별된 나실인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일에 교회 다녀왔다고 성도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십일조 했다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은 우리에게 명확한 대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 한자가 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삼손이 지켜야할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삼고 복을 주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겼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신 능력과 특권을 다 잃어버리고 처참해집니다. 20절에,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였습니다. 참 슬픈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며 사는 성도가,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야, 하나님이 아직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을꺼야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버리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를 절망에 빠뜨린 것은 머리털을 자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떠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큰 슬픔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고 떠나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자, 최고의 정복자였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 부터 심한 책망을 듣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죄를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고백이 시편51편에 나와 있습니다. 그 10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정말 두려워하였던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쫓아 내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신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보셨습니까? 주님이 내 옳지 못한 삶을 보시고 실망하신 나머지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여러분 가운데 있었습니까? 우리는 노후에 어떻게 살까, 아들이 대학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보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시고 은혜를 내게서 거두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걱정해야 합니다. 이런 근심은 회개를 이루고, 그런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삼손 같은 마음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삼손처럼 머리하나 깎지 아니한 것만 가지고, 주일날 교회한번 나왔다 간 것만 가지고, 나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고 있고 내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낱만한 계명 하나 지켰다고 모든 일을 다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성도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교회에 나왔다 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매일 매시, 하나님의 성령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을 받드는 것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구별된 백성으로서 분명한 신자의 색깔을 지니고 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능력은 지식이나 물질이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결함에 있고 성령 충만함에 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 지킨 것 같이 말씀중에 한 가닥만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불안하고 피곤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한, 말씀을 기꺼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 그 삶 안에는 사랑, 기쁨, 행복과 만족의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3. 자기만족을 추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받은 남다른 은혜와 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14장부터 시작되는 그에 관한 사건의 전부는 \\\"기생과 이방 여인과 놀아나는 것\\\"과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뿐이었습니다. 마지막 16장까지 그는 온통 육체적 향락과 미를 좇아 놀아나고, 자기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일로 끝이 납니다. 삼손은 그에게 주신 은혜와 능력을 온통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힘이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는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는 오늘같이 다양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힘이 강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그는 재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였다면, 만족과 쾌락을 충분히 얻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충분한 쾌락과 만족이 아니라 고통과 싸움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역사를 가만히 보면 원수 맺고, 원수 갚고, 원수 맺고 원수 갚은 일의 연속입니다. 그는 딤나에서 여인을 보았는데, 그 장인 되는 사람이 그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고 그 동네에 찾아가 동네 곡식에 불을 질렀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장인과 그 여인을 잡아 죽였으며, 삼손은 다시 그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고,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유대인들에게 앙갚음을 하였습니다. 원수 만들고 원수 갚는 것이 전부입니다. 또한, 그는 여인들을 사랑했지만 여인들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 16절절에 보면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만족과 쾌락을 위해 헌신한 삶이 죽을 지경의 고통만 가져다주었다는 기록입니다. 삼손이 육체적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다 허비한 결과로 얻은 것은 버림받는 것이었고, 두 눈을 뽑히는 것이었고, 짐승들이나 돌리는 연자 맷돌을 돌리는 수치스러운 일 뿐이었습니다. 삼손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평안과 만족과 쾌락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고 해가 지나면서 남겨지는 열매들은 무엇입니까? 서로가 원망을 하고 원수를 맺는 일과 싸움과 고통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고민과 고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온 것들입니다. 즉, 형제나 이웃이나 사업상 친한 사람이나 친척이나 친구 등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나는 잘 해보려고 했는데, 그들을 돕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 하나님께 해야할 일도 손해 보면서 그를 도왔는데, 결과는 그들 때문에 고난만 겪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이웃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인 수직적 관계를 뒤로 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이고, 이웃과의 관계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형제나 이웃 등 모든 수평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비결이 됩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우선이어야지, 수평적인 관계를 우선하게 되면 모든 수평적 관계가 헝클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양심적인 성도는, “목사님! 신앙생활이 게을러지니까 모든 일이 다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대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에 게으르면, 모든 일이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영광을 받기 위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만 즐거우시고 우리는 아무 재미도 없이 살라고, 독선적으로 자신만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만 우리에게 영광이 있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도 다른 것을 도울 때에 자기를 돕는 것이 됩니다. 식물과 동물이 그렇고 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인생들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우리의 모든 일이 잘 되어지고 행복을 누립니다. 시편37:4절 이하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주셨고 건강한 몸과 복된 환경을 주셨으며, 만민중에서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주셨습니다. 나실인 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불러내어진, 택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받은 모든 것, 이 축복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오늘 무엇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기만족을 위하여 살아가면 싸움과 버림받음과 고통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기쁨이 있고 행복의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그래야 참으로 온전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 길로 힘차게 달려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결심만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새 힘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실패한 나실인 삼손을 본받지 말고 이 시대의 성공한 나실인들이 되십시다.
나실인 삼손의 삶/삿16:15-22
나실인 삼손의 삶/삿16:15-22 2003-06-27 11:50:33 read : 17 삼손은 우리가 잘 아는 인물입니다. 그는 대단히 강한 힘의 소유자라는 것과 기생 들릴라 때문에 망한 인물이라는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들 중에 삼손만큼 경건한 출생을 가진 사사도 없고, 삼손만큼 능력을 가진 사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부모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며, 복중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되다. 거룩하게 바치다"라는 뜻으로, 삼손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독주를 마시지 않게 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불결한 것을 만지지 말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삼손은 주어진 이 모든 특권과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했었는데, 그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살면서 모든 것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사라는 이름을 갖기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고 나실인 이라는 이름에도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나지르"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도쉬" 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카도쉬는 성도라는 말입니다. 성도라는 뜻도 세상 사람과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음 받아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별히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도" 라는 이름은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실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삼손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신자다운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설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나실인이면서도 세상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을 타파하기 위해 세워진 사사인데, 불레셋의 여인과 사귀다가 망했습니다. 사사기 13장은 사사 삼손의 출생과 그 배경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13장 맨 마지막에 보면, "여인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의 감동이 어린 아이인 삼손에게 함께 하셨다는 복된 출발입니다. 그리고 나서, 14장에 청년이 된 삼손에 관한 첫 기록이 나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딤나에 내려가서 불레셋 사람의 딸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반해서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혼을 고집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귀하게 태어났고 귀한 직분을 맡았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땀 흘려 감당하기보다는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삶을 택하였고, 그것이 너무 달콤해서 부모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14:4절 이하에 보면, 삼손의 의중에는 구실을 만들고 기회를 보아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백성을 돕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세상과 벗을 삼아 즐기는 모습입니다. 세상을 즐기면서 세상을 이기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옛날에, 기독교 서클에 대해 불만스러워 하는 한 대학생이 있었는데, 훌륭한 장로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지금 우리끼리 모여서 희희낙낙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영적 생명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저들의 구원을 위하여 저들과 동행해야한다고 그는 저들과 함께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과 어울리는 일에만 익숙해져있습니다. 그것을 삼손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점점 더 세상과 타협하는 인물이 되어갑니다. 그는 구별된 사람인 나실인인데, 그의 생활은 날마다 이방 여인들이나 따라다니며 음행을 일삼고, 블레셋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고 그들과 원수 맺는 일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그들에게 점점 가까워져 갔고, 마지막에는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 비밀을 고백하게 됩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들릴라에게 거짓말로 일러주었습니다. 마르지 아니한 칡 일곱 줄로 묶으면 나는 힘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들릴라는 얼른 그렇게 해 보았지만 삼손의 힘이 없어지지 않자 삼손에게 투정을 부리며 조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냐, 어떻게 세 번씩이나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느냐 면서 조르자 결국 자기는 나실인이어서 머리에 가위를 대지 않은 사람이니 만일 내 머리를 자르면 힘이 사라질것이라고 대답을 하고 맙니다. 아무리 여자에게 정신이 빠졌다고 해도, 어떻게 하면 당신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해 주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나실인의 신분과 능력의 비밀을 이방 기생에게 넘겨주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 후서6:14을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14-16)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요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세상과 섞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당히 세상과 어울리며 남들이 가진 세상의 즐거움 나도 얻어 보겠다고 세상과 친구가 되며 체면과 양심과 신앙도 팔아먹는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돈과 쾌락을 좇아 다니며 사니까 그렇게 산들 어떻겠습니까? 먹고살다 죽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니 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도입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한발 더 앞장서서 돈과 명예와 쾌락에 젖어 그것에 목 매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그런 면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세상과 어울려 살면, 성도는 세상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잃게 됩니다. 성도의 힘은 성결에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성도의 힘이 유지되며, 사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십시다. 2.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7) 삼손의 두 번째의 혼동은, “머리만 자르지 아니하면 나실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착각했습니다. 나실인은,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아야 했고, 시체도 만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머리만 기르면서 나는 나실인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으로 가다가 사자를 만나서 강한 힘으로 사자를 쳐 죽였는데, 돌아오다 보니 죽은 사자의 시체에 벌들이 집을 짓고 꿀을 모아놓은 것을 발견하고 꿀을 따먹었습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은 결코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부모는 그에게 당부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실인으로 멀리해야할 짐승의 시체에 꿀이 있다고 그것을 따 먹었습니다. 또한 그는 나실인인데도 기생과 동거하는 타락한 삶을 즐겼습니다. 그러고도 삼손은 나는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나는 구별된 나실인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일에 교회 다녀왔다고 성도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십일조 했다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은 우리에게 명확한 대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 한자가 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삼손이 지켜야할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삼고 복을 주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겼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신 능력과 특권을 다 잃어버리고 처참해집니다. 20절에,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였습니다. 참 슬픈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며 사는 성도가,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야, 하나님이 아직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을꺼야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버리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를 절망에 빠뜨린 것은 머리털을 자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떠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큰 슬픔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고 떠나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자, 최고의 정복자였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 부터 심한 책망을 듣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죄를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고백이 시편51편에 나와 있습니다. 그 10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정말 두려워하였던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쫓아 내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신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보셨습니까? 주님이 내 옳지 못한 삶을 보시고 실망하신 나머지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여러분 가운데 있었습니까? 우리는 노후에 어떻게 살까, 아들이 대학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보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시고 은혜를 내게서 거두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걱정해야 합니다. 이런 근심은 회개를 이루고, 그런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삼손 같은 마음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삼손처럼 머리하나 깎지 아니한 것만 가지고, 주일날 교회한번 나왔다 간 것만 가지고, 나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고 있고 내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낱만한 계명 하나 지켰다고 모든 일을 다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성도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교회에 나왔다 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매일 매시, 하나님의 성령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을 받드는 것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구별된 백성으로서 분명한 신자의 색깔을 지니고 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능력은 지식이나 물질이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결함에 있고 성령 충만함에 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 지킨 것 같이 말씀중에 한 가닥만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불안하고 피곤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한, 말씀을 기꺼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 그 삶 안에는 사랑, 기쁨, 행복과 만족의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3. 자기만족을 추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받은 남다른 은혜와 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14장부터 시작되는 그에 관한 사건의 전부는 "기생과 이방 여인과 놀아나는 것"과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뿐이었습니다. 마지막 16장까지 그는 온통 육체적 향락과 미를 좇아 놀아나고, 자기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일로 끝이 납니다. 삼손은 그에게 주신 은혜와 능력을 온통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힘이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는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는 오늘같이 다양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힘이 강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그는 재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였다면, 만족과 쾌락을 충분히 얻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충분한 쾌락과 만족이 아니라 고통과 싸움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역사를 가만히 보면 원수 맺고, 원수 갚고, 원수 맺고 원수 갚은 일의 연속입니다. 그는 딤나에서 여인을 보았는데, 그 장인 되는 사람이 그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고 그 동네에 찾아가 동네 곡식에 불을 질렀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장인과 그 여인을 잡아 죽였으며, 삼손은 다시 그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고,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유대인들에게 앙갚음을 하였습니다. 원수 만들고 원수 갚는 것이 전부입니다. 또한, 그는 여인들을 사랑했지만 여인들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 16절절에 보면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만족과 쾌락을 위해 헌신한 삶이 죽을 지경의 고통만 가져다주었다는 기록입니다. 삼손이 육체적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다 허비한 결과로 얻은 것은 버림받는 것이었고, 두 눈을 뽑히는 것이었고, 짐승들이나 돌리는 연자 맷돌을 돌리는 수치스러운 일 뿐이었습니다. 삼손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평안과 만족과 쾌락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고 해가 지나면서 남겨지는 열매들은 무엇입니까? 서로가 원망을 하고 원수를 맺는 일과 싸움과 고통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고민과 고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온 것들입니다. 즉, 형제나 이웃이나 사업상 친한 사람이나 친척이나 친구 등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나는 잘 해보려고 했는데, 그들을 돕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 하나님께 해야할 일도 손해 보면서 그를 도왔는데, 결과는 그들 때문에 고난만 겪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이웃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인 수직적 관계를 뒤로 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이고, 이웃과의 관계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형제나 이웃 등 모든 수평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비결이 됩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우선이어야지, 수평적인 관계를 우선하게 되면 모든 수평적 관계가 헝클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양심적인 성도는, “목사님! 신앙생활이 게을러지니까 모든 일이 다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대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에 게으르면, 모든 일이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영광을 받기 위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만 즐거우시고 우리는 아무 재미도 없이 살라고, 독선적으로 자신만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만 우리에게 영광이 있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도 다른 것을 도울 때에 자기를 돕는 것이 됩니다. 식물과 동물이 그렇고 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인생들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우리의 모든 일이 잘 되어지고 행복을 누립니다. 시편37:4절 이하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주셨고 건강한 몸과 복된 환경을 주셨으며, 만민중에서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주셨습니다. 나실인 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불러내어진, 택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받은 모든 것, 이 축복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오늘 무엇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기만족을 위하여 살아가면 싸움과 버림받음과 고통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기쁨이 있고 행복의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그래야 참으로 온전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 길로 힘차게 달려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결심만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새 힘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실패한 나실인 삼손을 본받지 말고 이 시대의 성공한 나실인들이 되십시다.
나실인 삼손의 삶/삿16:15-22
나실인 삼손의 삶/삿16:15-22 2003-09-22 13:26:57 read : 18 삼손은 우리가 잘 아는 인물입니다. 그는 대단히 강한 힘의 소유자라는 것과 기생 들릴라 때문에 망한 인물이라는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들 중에 삼손만큼 경건한 출생을 가진 사사도 없고, 삼손만큼 능력을 가진 사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부모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며, 복중에서부터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되다. 거룩하게 바치다"라는 뜻으로, 삼손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가 독주를 마시지 않게 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고, 불결한 것을 만지지 말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삼손은 주어진 이 모든 특권과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했었는데, 그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살면서 모든 것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사라는 이름을 갖기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고 나실인 이라는 이름에도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나지르"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도쉬" 라는 말과 같은 뜻인데, 카도쉬는 성도라는 말입니다. 성도라는 뜻도 세상 사람과는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음 받아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특별히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도" 라는 이름은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실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삼손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신자다운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설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1. 나실인이면서도 세상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삼손은 블레셋을 타파하기 위해 세워진 사사인데, 불레셋의 여인과 사귀다가 망했습니다. 사사기 13장은 사사 삼손의 출생과 그 배경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13장 맨 마지막에 보면, "여인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성령의 감동이 어린 아이인 삼손에게 함께 하셨다는 복된 출발입니다. 그리고 나서, 14장에 청년이 된 삼손에 관한 첫 기록이 나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딤나에 내려가서 불레셋 사람의 딸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반해서 부모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혼을 고집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귀하게 태어났고 귀한 직분을 맡았지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붙들고 땀 흘려 감당하기보다는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삶을 택하였고, 그것이 너무 달콤해서 부모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14:4절 이하에 보면, 삼손의 의중에는 구실을 만들고 기회를 보아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려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자기백성을 돕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세상과 벗을 삼아 즐기는 모습입니다. 세상을 즐기면서 세상을 이기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옛날에, 기독교 서클에 대해 불만스러워 하는 한 대학생이 있었는데, 훌륭한 장로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지금 우리끼리 모여서 희희낙낙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영적 생명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저들의 구원을 위하여 저들과 동행해야한다고 그는 저들과 함께 술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까지도 세상 사람과 어울리는 일에만 익숙해져있습니다. 그것을 삼손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점점 더 세상과 타협하는 인물이 되어갑니다. 그는 구별된 사람인 나실인인데, 그의 생활은 날마다 이방 여인들이나 따라다니며 음행을 일삼고, 블레셋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고 그들과 원수 맺는 일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그들에게 점점 가까워져 갔고, 마지막에는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자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 비밀을 고백하게 됩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들릴라에게 거짓말로 일러주었습니다. 마르지 아니한 칡 일곱 줄로 묶으면 나는 힘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들릴라는 얼른 그렇게 해 보았지만 삼손의 힘이 없어지지 않자 삼손에게 투정을 부리며 조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냐, 어떻게 세 번씩이나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느냐 면서 조르자 결국 자기는 나실인이어서 머리에 가위를 대지 않은 사람이니 만일 내 머리를 자르면 힘이 사라질것이라고 대답을 하고 맙니다. 아무리 여자에게 정신이 빠졌다고 해도, 어떻게 하면 당신을 죽일 수 있느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해 주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나실인의 신분과 능력의 비밀을 이방 기생에게 넘겨주고 망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 후서6:14을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14-16)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요 구별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세상과 섞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당히 세상과 어울리며 남들이 가진 세상의 즐거움 나도 얻어 보겠다고 세상과 친구가 되며 체면과 양심과 신앙도 팔아먹는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돈과 쾌락을 좇아 다니며 사니까 그렇게 산들 어떻겠습니까? 먹고살다 죽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니 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도입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입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한발 더 앞장서서 돈과 명예와 쾌락에 젖어 그것에 목 매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그런 면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세상과 어울려 살면, 성도는 세상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특권을 잃게 됩니다. 성도의 힘은 성결에 있습니다. 바르게 살아야 성도의 힘이 유지되며, 사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십시다. 2.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7) 삼손의 두 번째의 혼동은, “머리만 자르지 아니하면 나실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라고 착각했습니다. 나실인은, 머리만 자르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아야 했고, 시체도 만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머리만 기르면서 나는 나실인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으로 가다가 사자를 만나서 강한 힘으로 사자를 쳐 죽였는데, 돌아오다 보니 죽은 사자의 시체에 벌들이 집을 짓고 꿀을 모아놓은 것을 발견하고 꿀을 따먹었습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은 결코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부모는 그에게 당부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실인으로 멀리해야할 짐승의 시체에 꿀이 있다고 그것을 따 먹었습니다. 또한 그는 나실인인데도 기생과 동거하는 타락한 삶을 즐겼습니다. 그러고도 삼손은 나는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나는 구별된 나실인이라 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일에 교회 다녀왔다고 성도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십일조 했다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0절은 우리에게 명확한 대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 한자가 되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삼손이 지켜야할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삼고 복을 주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겼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신 능력과 특권을 다 잃어버리고 처참해집니다. 20절에,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였습니다. 참 슬픈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며 사는 성도가,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야, 하나님이 아직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을꺼야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미 자기를 버리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를 절망에 빠뜨린 것은 머리털을 자른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떠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도의 가장 큰 슬픔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고 떠나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자, 최고의 정복자였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 부터 심한 책망을 듣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죄를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고백이 시편51편에 나와 있습니다. 그 10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정말 두려워하였던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쫓아 내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신 성령을 거두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보셨습니까? 주님이 내 옳지 못한 삶을 보시고 실망하신 나머지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여러분 가운데 있었습니까? 우리는 노후에 어떻게 살까, 아들이 대학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보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시고 은혜를 내게서 거두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걱정해야 합니다. 이런 근심은 회개를 이루고, 그런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시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삼손 같은 마음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삼손처럼 머리하나 깎지 아니한 것만 가지고, 주일날 교회한번 나왔다 간 것만 가지고, 나는 성도로서의 삶을 살고 있고 내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낱만한 계명 하나 지켰다고 모든 일을 다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성도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교회에 나왔다 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직분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매일 매시, 하나님의 성령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을 받드는 것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구별된 백성으로서 분명한 신자의 색깔을 지니고 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능력은 지식이나 물질이나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결함에 있고 성령 충만함에 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 지킨 것 같이 말씀중에 한 가닥만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불안하고 피곤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한, 말씀을 기꺼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 그 삶 안에는 사랑, 기쁨, 행복과 만족의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3. 자기만족을 추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받은 남다른 은혜와 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14장부터 시작되는 그에 관한 사건의 전부는 "기생과 이방 여인과 놀아나는 것"과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뿐이었습니다. 마지막 16장까지 그는 온통 육체적 향락과 미를 좇아 놀아나고, 자기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일로 끝이 납니다. 삼손은 그에게 주신 은혜와 능력을 온통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힘이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는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는 오늘같이 다양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힘이 강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그는 재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였다면, 만족과 쾌락을 충분히 얻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충분한 쾌락과 만족이 아니라 고통과 싸움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역사를 가만히 보면 원수 맺고, 원수 갚고, 원수 맺고 원수 갚은 일의 연속입니다. 그는 딤나에서 여인을 보았는데, 그 장인 되는 사람이 그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주었다고 그 동네에 찾아가 동네 곡식에 불을 질렀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장인과 그 여인을 잡아 죽였으며, 삼손은 다시 그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고,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유대인들에게 앙갚음을 하였습니다. 원수 만들고 원수 갚는 것이 전부입니다. 또한, 그는 여인들을 사랑했지만 여인들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본문 16절절에 보면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만족과 쾌락을 위해 헌신한 삶이 죽을 지경의 고통만 가져다주었다는 기록입니다. 삼손이 육체적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다 허비한 결과로 얻은 것은 버림받는 것이었고, 두 눈을 뽑히는 것이었고, 짐승들이나 돌리는 연자 맷돌을 돌리는 수치스러운 일 뿐이었습니다. 삼손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평안과 만족과 쾌락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행복을 얻고 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고 해가 지나면서 남겨지는 열매들은 무엇입니까? 서로가 원망을 하고 원수를 맺는 일과 싸움과 고통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고민과 고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온 것들입니다. 즉, 형제나 이웃이나 사업상 친한 사람이나 친척이나 친구 등으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나는 잘 해보려고 했는데, 그들을 돕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 하나님께 해야할 일도 손해 보면서 그를 도왔는데, 결과는 그들 때문에 고난만 겪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이웃들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인 수직적 관계를 뒤로 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이고, 이웃과의 관계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형제나 이웃 등 모든 수평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는 비결이 됩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우선이어야지, 수평적인 관계를 우선하게 되면 모든 수평적 관계가 헝클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양심적인 성도는, “목사님! 신앙생활이 게을러지니까 모든 일이 다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대요” 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에 게으르면, 모든 일이 흐트러지고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영광을 받기 위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만 즐거우시고 우리는 아무 재미도 없이 살라고, 독선적으로 자신만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만 우리에게 영광이 있고 기쁨이 되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도 다른 것을 도울 때에 자기를 돕는 것이 됩니다. 식물과 동물이 그렇고 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인생들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우리의 모든 일이 잘 되어지고 행복을 누립니다. 시편37:4절 이하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복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주셨고 건강한 몸과 복된 환경을 주셨으며, 만민중에서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주셨습니다. 나실인 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서 불러내어진, 택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받은 모든 것, 이 축복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오늘 무엇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기만족을 위하여 살아가면 싸움과 버림받음과 고통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기쁨이 있고 행복의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그래야 참으로 온전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 길로 힘차게 달려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결심만 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어 새 힘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실패한 나실인 삼손을 본받지 말고 이 시대의 성공한 나실인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