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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20가지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20가지 http://mission.bz/6969세미나 이성우목사 2004.12.10 조회 : 1077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20가지 이 성우 목사 (KCMUSA.org 사장, 미주 C.C.C 새생명 훈련원장) 20대는 정말 좋다! 스무살, 넘치는 열기와 도전의 특권이 있는 젊음이 있다. 새벽 이슬처럼 푸르고 맑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생선 가운데 토막과 계란의 노른자의 삶을 살면서 결코 놓칠 수 없는 시간이다. 평생의 영적 경건 생활과 인생, 결혼, 우정, 가정, 민족 그리고 삶에 있어서 20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들을 20여 가지로 정리하며 함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 볼 수 있는 대화와 웍샵의 시간입니다. 30대도 굳이 나이를 낮출 수 있는 젊음과 겸손이 있다면 살짝 들어 올 수 있는 강의입니다. *30대를 위한 준비 20대는 도전하는 시기이다. 세계를 향해, 미래를 향해, 20대는 모험해 보는 것도 주어진 특권이다. 20대에 쌓은 경험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바탕이 된다. 20대는 가장 변화의 폭이 큰 시기이다. 30대라는 기대와 두려움 때문에 20대 후반이 되면 막연한 불안감과 설렘이 있게 마련이다. *스물, 넘치는 열기 20대의 특권은 역시 아무 것에나 무엇에나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갈래 길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것 뿐만 아니라 수풀과 덤불이 우거져 도무지 길이 아닌 것 같은 곳이라도 길을 만들면서 갈 수 있는 것이 바로 20대의 젊은이들이다. 더구나 현대는 예전보다도 더욱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겁내는 사람은 젊다고 할 수 없다. 진취적인 열정이 없는 20대는 안타깝다. *20대는 착각의 시기이다. 착각하는 것에도 재능이 필요하다. 인생을 착각하는 편이 오히려 즐겁다. 제 멋대로 착각하면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착각하면서 보는 것이 재능이며 창조 능력이다. 그것이 당신을 보다 넓고 깊고 높은 다른 세계로 안내합니다. *20대는 건방집니다. 세상은 20대의 젊은이에게는 관대합니다. 실패할 확률이 없는 안전한 게임은 젊은이들에게는 오히려 시시한 것입니다. 벤처기업의 모든 창업주들은 다 20대 초반이며 30대는 늦은 노인이다. 긴장 할 필요가 없는 일은 도전하고픈 욕구가 일어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보다는 나의 만족과 스스로 정한 가치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대이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발견된 상형문자에서도 “요즘 아이들은 정말 문제야” 조선시대의 선비의 글 가운데“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고 예의가 없어” 피터팬 신드롬-유아적인 모습으로 살아감 마마보이-엄마의 치마폭에 싸임 온달족-아내의 등뒤로 숨어 버림 1. ( Master )에 대한 발견 인생의 3가지 운명을 좌우하는 3M 나의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의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어린아이가 정성드려 배를 만들고 디워 보냄 시장에서 자신의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 온 후에 너는 내것이다. 헌신은 주인 임을 깨닫는 것이고 주인께 인생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나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결단을 하고 자신은 죽어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 주인께 맡기지 않은 물건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갈2:20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2. ( Mission )에 대한 확신 비전의 사람, 꿈을 가지라. 젊은 청년이 꿈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 같아도 도전해 보라. 할 수 있는 일들만 하지 말라. 20대에 우연히 선택한 직업과 일에 어쩔 수 없이 평생을 묶여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반드시 해야 하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서 청탁 받지 않은 일을 시작하라. 20대는 새롭게 궤도를 수정해도 늦지 않은 마지막 특권의 기회를 누리고 사는 세대이다. 도전과 모험을 해 보라. 청탁 받지 않은 일에 도전하라. 벤처 사업에서는 30대는 노인이다. 모두가 20대에 시작한다. 직업관 일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처음으로 주신 명령이다.(창1:26-28) 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같은 기쁨으로 일을 즐겨야 한다. 윤리적인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직업에는 귀천은 없지만 직업에 선악은 있다.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이로울지라도 버릴 줄 아는 진정한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은사에 맞는 선택을 하라. 직업에 성 속은 없지만 은사에 다른 선택의 차이는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3. ( Mate )에 대한 발견 평생의 친구를 찾아라.-20대에 만난 친구가 평생의 친구가 된다. 기쁨은 기쁨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찾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다. 평생의 짝을 찾아 보라-온 몸으로 사랑해 보라. 가슴이 짖어지는 듯한 사랑에 빠져 보라. 생명과 바꿀 만큼의 사랑을 경험해 보라. 그래야 인생을 안다. 실연의 아픔을 겪어 보라. 두려워하지 말고 짝 사랑도 해보라. 이색적인 결혼식도 계획을 세워 보라. 결혼식을 공장에서 제품 생산 해 내듯 똑 같은 모습으로 치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잘 준비하라. 4. ( 자신의 정체성 )에 대한 확신 바른 자아상에 대한 개발과 확립이 필요하다. 비교 의식은 끝없이 피곤하고 불만족한 삶을 살게 된다.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있다.-미스코리아들도 자기 외모에 대한 각자의 콤플렉스가 있다. 100 밀리언 가진 부자도 부에 대한 불만족이 있다. 열등감과 우월감이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다. A. 외모나 공적인 신분 위에 자아상을 세울 때 바르게 세우지 못한다. 1.자기 성취 위에 자아상을 세울 때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함. 안 될 대 는 좌절감을 갖고 심한 열등감을 가짐 2.사람들의 인기, 사랑, 관심 인정도 절대적이 아니다. 정함이 없고 조건적인 뿐이다. (요2:23-25) 3.외양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 본 회퍼의 세 가지 기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허함과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바꾸어 갈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B. 우리는 우리의 자아상을 통하여 세상을 본다. 왜곡된 자아상을 갖고 있을 때 자신의 결점에 매달려 자신을 싫어하고 부정적인 사고에 매달리게 된다. 잘 못된 인생관을 가지고 있을 때 염세적인 인생관, 다른 사람에 대한 만남의 자신감 결여, 외모나 성취나 지위로 자기 만족을 이루어 보려는 어색함, 잘 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아니라 이겨야 할 경쟁자로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고 열등감에 빠짐. C. 성경적인 자아상 바른 자아상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듯이 더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나 자신을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하신다. 우리 각자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와 독특한 장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나 하나 때문에라도 예수님은 죽어 주실 수 있을 만큼 사랑하시고 바라보시고 있다. 우리는 타고난 자기가 나의 모습이 아니고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난 우리의 새로운 피조물이 우리의 참다운 모습이다. 하나님의 평가와 사랑의 은혜 위에 세워진 자아상이 진정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 할 그 이상을 생각치 말고 나의 나 됨을 받아 들이고 감사하라.-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 감사하여 자신의 나이만큼 꽃다발을 사서 자축하며 자신의 인생을 사랑해 보라. 자기를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하나님께 진정 감사 드리라. -다른 사람과 차이점을 두신 것은 서로 서로 배우고 닮아 가라는 하나님의 성숙에 대한 배려이며 서로 동역 하라는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이시다. 5. ( 청지기 ) 생활에 대한 결단 주인을 발견했으면 이제 내게 있는 것은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니라 관리를 맡은 청지기임을 인정하라. 몸, 인생, 직업, 가정, 약간의 재산, 시간, 건강, 은사, 재능, 모든 것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헤아림을 기다리라. 청지기 요셉처럼 나그네 처럼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으로 살자. 6. ( 개인적인 시간 )관리와 ( 목표 )를 세우고 설정하는 법을 배우라. 우리는 시간을 사는 것이다. 너무 분주한 삶. 시간은 양을 질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우선 순위를 바로 설정하라. 여러 가지 시급한 일들에 바쁘게 움직이다가 정말 중요한 일들은 놓쳐버리고 발등의 불만 끄고 살아 갈 수 있다. 중요성에 우선 순위를 두면서 살자. 시간과 기회는 퍼 내지 않아도 없어진다. 자신이 시간을 구속하라. 세월을 아끼라. 게으리지 말라. 최악이 게으름이며 만 악의 뿌리이다. 게으르기 위해 결심하거나 노력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저절로 게을러진다. 목표가 없으면 저절로 게을러진다. 주간 스케쥴을 설정하면서 살자. POPSB Prayer:기도하라 Objective:목표를 설정하라 Programing:방법들을 열거하라 Schedule:일정표에 시간 게획을 하라 Budget:예산을 설정하고 대가를 계산하라-인적자원 까지 7. ( 인생의 장기적인 목표 )에 대한 시간표를 작성하라 어떤 일본 관동대학 교수가 통계 30년 동안 사는 사람들의 시간 보낸 내용 10,960일을 살면서 잠 3,535일, 일하면서 3,650일 TV보면서 775일 ,독서 772일, 관혼상제축제 554일, 회의나 모임 참석 507일, 남 흉보면서 이야기하는 것 441일, 노래하고 춤추면서 놀면서 252일, 노름하면서 258일, 할 일 없이 집에서 뒹굴면서 197일 보냈다. 하루 24시간 시간표 일주일 168시간 계획표 설정 1년 단위로 목표 설정 5년 단위로 목표 설정 10년 단위의 계획 평생의 장기적인 계획 다섯 가지 관점으로 목표 세우라 1.영적 발전 2.육체적 성장과 건강 관리 3.지적 발전과 성숙 4.인격적 성숙과 사회성 5.자신의 직업적인 성취 8. ( 결혼 )생활과 ( 자녀 교육 )에 대한 설계 짝과의 만남 Age Beauty Character Degree Economic Family 결혼에 대한 계획은 있으나 결혼과 가정 생활에 대한 계획 없이 시핼 착오 가운데 얻어터지면서 싸우면서 하나씩 배워간다. 자녀 몇 명을 둘 것이며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탈무드를 많이 읽어라 잘못된 부모들 밑에서 잘못 배운 습관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에게 전수된다. 준비 없이 아이 낳고 그냥 허둥대며 살아간다. 준비 되어나 세상의 교육 방법만 알고 있다. 가훈은 무엇이며 자녀 양육에 대한 철학은 무엇인가? 9. ( 세계 )에 대한 안목을 넓혀라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똥을 누어 보라-개도 동 눈 곳은 지배한다. 글로벌 시대, 지구촌의 시대, 국경 없는 무한 경쟁시대, 현장 경험, 발로 밟아 보자 진정한 세계인이 되고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다는 것은 사고체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자리 매김하는 것이 진정한 국제적인 시각이다. 문화에 대한 폭 넓은 이해와 아량과 관용이 필요. 세계의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라. 20대에 여행하는 것이 진정한 여행이다. 그 이후에는 관광이며 유람이다. 배낭 여행이라도 하고 미국 일주 여행을 차로 해 보라. 다양한 경험을 쌓아라 10. 3개국 ( 언어 )를 유창하게 구사 11. ( 자신 개발 )과 영향력을 키울 계획을 세우라 컴퓨터는 이제 어디에서나 필수이다. 비즈니스맨으로 성공하는 두 가지 열쇠는 정보와 인맥이다. 정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맥을 통해 정보의 영역을 넓혀 가는 Human Network을 넓혀가라. IQ에서 EQ 그리고 SQ를 개발하라.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문화 공간을 확보하라. 박물관, 외국 문화원, 연극, 오페라 12. ( 한국 방문 )을 경험하라 13. ( 경건 )생활에 대한 계획 QT와 개인 성경 연구와 지속적인 전도와 찬양 경배의 삶을 계획하라 14. ( 해외 선교 )의 경험을 하라-세계를 가자 방콕이나 방글라데시(방안을 굴러다니며 보냄) 젊은 시절 아니면 배낭하나 매고 전국이나 세계로 누비고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활력과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재충전과 재창조를 하는 과정을 말한다. 15. ( 평생 ) 건강의 뼈대를 세우고 관리하라 20대는 누구나 건강하다. 누구나 건강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자기 몸을 마구 써버리는 경향이 있다. 20대에 건강을 위한 뼈대를 형성해야 한다. 하나의 운동을 계획하라. 나의 20대에는 무리하여 오히려 가장 건강이 안 좋았던 때였다. 불규칙한 식사,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여 철야하고 금식하며 무리함으로 여러 가지 병이 시작됨. 위장병 운동과 건강관리에 대한 계획 필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16. ( 100권 )의 책을 모으고 읽어라 어느 분야, 어느 위치에 있든지 간에 최고가 된 사람들을 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확실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성경을 완전히 독파하라. 성경책에 완전히 빠져 보라.-마27:5 유다는 스스로 물러가 목매어 줄을 지니라. 눅10:37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요13:27 네 하는 일을 속히 행하라 머크퍼슨의 이야기- 폭발로 두 손이 잘리고 장님이 되어 버림 100권의 책을 구입하고 목록을 작성해 보라. 탈무드와 데일 카네기의 책,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스티브 코비 리더쉽에 대한 책-존 맥스웰(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을 키우라) 진게츠의 지도자가 되는 길 만나는 선배들에게 인생에서 성경 다음에 가장 영향을 끼쳤던 한 권의 책을 추천 받아라. 한 달에 한 권 읽는 사람-33.9% 한 권도 안 읽음-30.35% 두 권 이상-20.4% 20대는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34.5%로 가장 많은 편이다. 17. ( 인생의 최악 )의 상황을 경험하라-제로점을 경험하라. 거지 순례 전도 기력이 완전히 탕진한 상황을 경험하라. 분출하면 할수록 커지는 에너지가 20대 속에 있다. 마음껏 짜내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면에 있는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활기에 넘쳐서 도저히 주체하지 못 할 에너지를 가진 20대가 되십시오. 자신의 체력의 한계를 도전해 보라. 내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아는 것도 큰 재산이다. 세계 최고봉을 등정한 탐험가에게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도전합니까? 고 질문하자 저의 체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보려고 한계를 알아보기 위한 것입니다. 18. ( 새롭게 시작하는 모험 )의 상황을 경험하라 늦지 않은 마지막 때가 20대이다. 실패해도 관용하며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마지막 때이다. 무엇이든지 새롭게 시작 할 수 있는 때이다. 컴퓨터도 시작하라. 못 한다는 것을 믿지 말라. 불신의 믿음을 깨버려라. 일본 교회에서는 교인들이나 목회자에게 부흥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패러다임 쉬프트를하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모험하는 것을 즐겨라. 그저 안락하고 편안하게 유지하는 일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믿음의 원을 확산하라. 해 보지 않은 것을 못한다고 하거나 실패한 경험이 있는 것이라도 나는 은사나 가능성이 없다고 닫아 버리지 말라 .마지막 새롭게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의 시절이 바로 우리 20대의 젊은이들의 특권이다. 10년을 투자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을 20대 지금 시작하라. 좋은 20대를 보낸 사람들이 결국 인생의 승리자가 됩니다. 승부는 결국 30대에 지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나타날 때까지는 적어도 10년 걸려서 30대에 하고 싶은 일의 토대는 20대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 깜빡 할 사이에 20대는 지나간다. 20대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 10년 후의 자신과 대화해 보는 것이다. 겨자씨 나무처럼 영향력을 키워라. 새를 좇아 다니지 말고 큰 가지들에 그늘을 만들고 온갖 새들이 날아오도록 자신을 키워라. 19. 꼭 해야 될 것 ( 20 가지 )의 목록을 자신이 직접 작성해 보라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누어 있는 것 이것은 기독교에서는 죄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더 무서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0. 자신이 ( 하지 말아야 ) 할 것 20가지를 작성해 보자
21세기의 한국교회의 건전한 재정사용을 위한 공동체적 신앙고백
21세기의 한국교회의 건전한 재정사용을 위한 공동체적 신앙고백 http://mission.bz/6893세미나 성기문 일반적으로 공예배에서 사도신조(Apostles'' Creed)는 신앙공동체의 정체성확인과 공적 선언의 차원에서 사용된다. 필자가 세계적인 가난과 굶주림의 문제를 다루는 기독교 단체인 옥스팜(Oxfam)의, 사도신조를 패러디한 모토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We believe in the life before the death. 내세의 영생도 중요한 문제지만, 현세에서의 개개인의 생명의 중요성과 고귀성을 환기시켜주는 가장 훌륭한 모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개념 자체가 그동안 얼마나 등한히 여겨졌던가! 게다가, 우리의 주제(''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노라'')와 관련지어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고백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성도의 교제''(communicatio sanctorum)라고 하면, 교인들 가운데서 무의미하게 암기되고 독백되는 ''거룩한'' 신앙고백의 한 구절 정도로 여기든지, ''공적 광고''를 의미하는 미사여구로 이해하던지, 아니면, 예배가 끝난 후에 적당히 행해지는 <친교시간>이나 성도들간의 <문안인사>를 나누는 것 정도로 여겨지고 있지 않았는가? 이제 필자는 성도의 교제를 다루고 있는, 몇 가지 대표적인 성경본문들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사도신조의 ''성도의 교제''를 암송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행하게 되는 한국교회의 성경적 vision의 회복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1. 창세기에 나타난 복과 분배의 vision(창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함으로써,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네게서 복을 얻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내용이나 관계성의 측면에서 복잡한 양상을 내포한다. 물론 구약의 복(福)과 신약의 복이 얼마나 연속성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시에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부와 많은 자손들을 포함하는 복을 받은 위대한 민족이 되고 큰 이름의 소유자들이 되어서, 열방백성들에게 복을 분여(分與)하는 일을 맡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약속은 단순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함으로서 얻게되는, 혹은 아무런 수고와 노력 없이 얻어진다는 점에서의) 결과론적으로 이해되었다기보다는 일종의 선언적으로도 그 책임과 의무도 부여받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특별히, 족장사(族長史)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자신들의 생애에 있어서 자기 형제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복을 주는 매개체가 되기보다는, 스스로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하여) 복(특별히 상속권과 물질적인 풍요)을 소유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들간에, 형제간에, 친족간에 투쟁하고 암투하는 모습들만이 비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히려 창세기를 읽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족장들을 통하여 아름답게 성취되는가를 살펴보기보다는,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들의 덧없는 노력들(실수)을 통해서 어떻게 어그러질 뻔했는가를 떨리는 마음으로 살펴보게 되는 것은 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새천년을 열고있는 한국교회가 아브라함의 복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이며 첫 번째 열쇠가 되지 않을까 한다. 2. 신명기에서의 복과 분배의 vision 신명기를 보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복과 분배의 문제가 더 명확하게 부연되어서 제시된다. 여기서 필자는 분배의 정의(正義)와 사랑의 교제(交際)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지하다싶이, 그 개념들은 일반적인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와 객들''에 대한 배려의 규정들과 특별히 십일조와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의 규정들을 통하여 잘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서는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으로 반드시 출석교회에 바침으로써 목회자들의 급여와 교회건물건축과 유지에만 전적으로 쓰여져야 하는 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교인들 임의대로 선교단체를 돕거나 다른 (개척)교회를 돕거나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성도들의 자유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금지하고 있으며, 어떻게 안식일에 세속적인 일을 하지 않으며, 금전사용을 금하고 공적예배에만 몰두하느냐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노동과 휴식의 참뜻에 대한 연구를 등한히 하고 여전히 부정의(不正義)한 노동과 경제현실을 애써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과연 성경은 한국교회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지지해주는가는 의문이다. 2.1 십일조: 부(富)의 분배와 교제의 매개체(신 12; 14, 26장) 모세오경 내에서의 십일조는 언약공동체내에서 세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레위인들의 생계보조와 가족구성원들(나와 아내와 자녀들, 심지어는 종들까지도)의 축제용과 이웃들(고아와 과부와 객들)의 생계보조.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 전부가 야웨의 언약공동체의 구성원들 모두를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레위인들과 사제들, 나와 아내, 자녀들, 종들, 이웃들[고아와 과부와 객들]). 그러한 면에서 음식으로써의 십일조의 분배와 공유는 구약의 언약공동체 내에서 일종의 상징적, 실제적 은총(복)의 나눔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해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과 사제계급에게도 음식으로서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종''으로써 독점적으로 누릴 수 있는, 치부(致富)의 수단도 영적 우월감의 표현도 아니었다. 오히려 언약공동체내의 동거동락(同居同樂)의, 혹은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신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즉, 하나님의 것(주신 복)을 언약공동체가 함께 나눠먹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거룩한 하나님의 것을 어떠한 용도에서든지 공동체가 나눠서 쓰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성경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가 무시되고 착취되고 버림받을 가능성이 많은 이웃들에 대한 일상적인 배려는 이러한 나눔의 십일조규정을 통하여 더 강조되었으며, 더 나아가 제7년마다 행해지는 빚 면제의 해와 노예해방의 해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바른 십일조규정(14:22-29), 빚 면제규정(15:1-11), 노예해방규정(15:12-18)의 실행이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범사에 복 받는 비결이라는 점이다(14:29; 15:10, 18). 하나님의 복을 주심으로 세 가지 법이 잘 준행될 근거가 될 것이며 또한 세 가지 규정들을 준행함으로써 더 큰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 명료하게 제시된다. 3. 사도행전의 복과 분배의 vision(행 2:43-47과 4:32-35) 구약의 복과 분배의 문제가 오랫동안 오해되었듯이, 신약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상태였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특별히 사도행전과 바울의 복과 분배의 vision은 항상 혼동되거나 무시되어왔다. 현대적인 적용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의 재물의 공유가 신실한 이스라엘의 표로서 강조되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것은 신자 개개인의 자발성이 강조가 되는 의무사항이긴 하지만, 성령의 부어주심의 결과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보겠다. 구약의 경우에는 십일조와 다른 규정들을 통하여 의무적으로 "일부를 떼어주는 것"과 "자기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구약율법의 완성으로 이해되었고, 신약의 경우에는, 의무보다는 자발성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실천이 강조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의 법칙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온 몸을 바치는 자기희생을 하셨다는 면에서 그렇다. 초대신앙공동체의 공유의 정신은 누가의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ation)"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러한 주장은 초대신앙공동체의 성령충만한 흥분상태의 결과도, 혹은 임박한 종말을 대비하여 모든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치고 집단생활을 하라는 이단종파의 주장도 아니다. "이상하게도" 예수의 부활의 증거가, 자발적인 헌신의 표로써,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과 성도간에 행해진, 즉 부유한 성도가 가난한 성도를 돕는, 물질적 교제(코이노니아)가 원활해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의 재정관리의 예는 이미 쿰란 공동체에서도 발견되며 헌금의 출연(出捐)과 분배(分配)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약시대의 공동체의 특징이기는 했지만, 그들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공동체의 정신은 사도들과 그를 따르던 헌신적인 제자들에게서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교회)에게 확대되었던 것뿐이었다. 이들은 사도들의 교훈(디다케)과 교제(코이노니아)와 주의 만찬과 기도에 전념하였다. 아마도 당시에는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떡을 떼고 교제를 나누었으며,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서 공적 예배와 증거를 위하여 정규적으로 모였던 것 같다. 그 결과가 "물건의 공유와 분배"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혼돈과 우려가 많은데, 간략하게만, 그 상황과 의미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신약의 초기신앙공동체는 각자의 재산의 (법적) 소유권은 인정되데, 모든 소유의 (실제적인) 공유권을 주장하였다는 의미며, 자발적으로 반복적으로 필요가 생길 때마다 재산을 팔고 나누었다. 4.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복과 분배의 vision(고전 16:1-4; 고후 8-9장; 롬 15:25)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다(출 16:18).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해주십시오. 매주 첫날에 여러분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집에서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허겁지겁) 연보를 하지 않게 하십시오(고전 16:1-2). 여기서 우리는 고후 8-9장(고전 16:1-4; cf. 롬 15:25)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성도간의 나눔(유대계 기독교인 공동체들과 이방인출신의 기독교인 공동체들 간의)이 일회적인 사건이었다는 점과, 예루살렘 공동체의 기둥들과의 합의사항의 실천이라는 점(갈 2:9-10)과, 종말론적인 측면에서의 교제의 나눔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공간적 한계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나눔의 정신은 바울신학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것은 구약의 정신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고후 9:12)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사도 바울의 나눔과 구제의 정신은 반드시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에만 의존했다거나 반드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떻게 그가 이러한 개념을 얻게 되었는가는 알기 어렵지만, 바울에게는 가난에 처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재정적으로 돕는 이 봉사(디아코니아스)의 나눔(코이노니안)이라는 권리(카린)를 갖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러한 특권(카리스)은 하나님의 특권을 본받음이며 이러한 가난해짐은 그리스도의 가난해짐을 본받음이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한 공유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디아코니아는 영적인 섬김(spiritual ministry)이지만, 동시에 물질적인 섬김(material-sharing ministry), 그리고 하나님께와 성도에 대한 섬김(혹은 사역)을 의미한다. 4.1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바울과 헌금, 성도를 섬기는 것(고후 8:1-15; 9:1-15) 아마도 고후 8-9장에 깔려져 있는 고린도 신앙공동체의 정서는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바울의 사도직과 관련된 재정적인 문제와 의혹(疑惑)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성도를 섬기는 헌금에 대해서, 디도에게서 받은 헌금의 진척상황은 썩 낙관적이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이 고린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헌금을 마무리짓도록 강권(强勸)하기도 그렇고 자발적인 마음에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난한 마케도니아교인들은 이미 과도한 헌금을 낸 상태고 부유한 고린도의 신앙공동체들은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상태이며, 곧 디도와 다른 사람들이 헌금을 수금(收金)하러 가게 될텐데. 어떻게 해야한다는 말인가? 그 이유로 해서 저술된 것이 고린도후서 8-9장이지만, 바울의 논조는 권면(advice)이지, 명령(command)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작한 모금을 종결지으라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헌금은 재산상의 불이익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섬김/교제의 헌금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닮은 성도들의 은혜의 소산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성도를 "섬기는" 헌금의 예에서 우리는 현대한국교회에게 주는 성경적 헌금관과 섬김에 대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신약의 신앙공동체에서의 실제적인 헌금모금과 사용의 예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고후 9장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공동체들에도 (예루살렘 신앙공동체의) 성도를 위한 연보(로게이아)를 요청하였으며 고린도 교회공동체에게도 매주 첫날에 각자가 자기 집에 헌금을 적립해 두라고 권면하며 이러한 고린도의 신앙공동체의 ''은혜(관대함, 카리스)''를 예루살렘에까지 나눌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한다(고전 16:1-4). 여기서의 우리의 관심사는 모든 사람이 수입의 일정한 양을 반드시 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십일조에 대한 암시거나 그 연속성의 일환으로 볼 수 없다. 일주일동안에 하나님이 소득을 얻게 하시면 원하는 대로 각자가 알아서 헌금을 모아두라는 교훈일 뿐이다. 이 일에 대한 언급은 롬 15:25-27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역(세번째 선교여행)의 완수(完遂)가 지연되고 있어서 가보고 싶지만 로마에 가는 날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그의 유럽선교사역보다도 더 귀중하고 더 시급히 마쳐야 했던, 그의 사역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구제/교제의 섬김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섬기는 것(디아코논, 25절)과 기여(코이노니아, 26절)와 물질적인 축복(코이노네인, 27절), 섬기는 것(레이투르게사이, 27절)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바울이 구제/교제금을 갖고 예루살렘 공동체의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일을 섬김, 혹은 사역 그리고 교제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째서 이들은 정성껏 혹은 열심히, 혹은 분에 넘치게 헌금을 하는 것을 즐거워했을까?"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과 자발적으로 헌신적으로 하는, 또한 (영적인 것[프뉴마티고이스]을 이미 나눠 갖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하는, 성도간의 섬김이며 교제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사도 바울이 행함과 설득의 예로서 성도들에게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중요한 사역(섬김)이 끝나야 바울은 로마로 가서 기독교인들과 신령한 복을 나눠 가질 수 있을 것이다(롬 1:11). 경우는 다를 수 있겠지만, 바울이 사도들을 만났을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는 사도들의 권면에 대해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은 유대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며 의무였던 것처럼, 바울도 그런 일에 열심히 행하던 자였다고 주장했던 점이나(갈 2:10; 행 11:27-30) 다른 곳에서의 그의 주장들을 종합해보면,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 외에도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이러한 주장은 바울 자신의 저작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누가의 사도행전에서도 그의 섬김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공동체(교회)를 이방인교회들이 돕는 것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성도를 섬기는 헌금의 발단은 바나바와 바울이 다소(Tarsus)에서 만나 안디옥에서 일년간의 사역을 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온 선지자들 중에서 아가보라는 사람이 유대지방에 큰 흉년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 그 예언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유대지방에 사는 형제들에게 능력이 되는 한도에서 부조금(디아코니아)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돈을 모아서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유대지방의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행 11:27-30). 이 부분은 성도의 구제(혹은 교제)에 관한 바울의 교훈들 중의 하나다. 바울에게 있어서 섬김의 헌금은 자발적인, 자유의지(freewill)에 의한 것이었으며, 소유를 비강제적으로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말 그대로 "공유"했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발적인 나눔은 그가 하나님의 소유를 지혜롭게 쓰도록 위임을 받은 ''선한 청지기''라는 정신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강제에 의한 일정분량의 십일조가 아니라, 신약의 공동체는 자발적이고 온 재산과 온 몸을 헌신하고 나눌 수 있는 성령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본 구절은 일부 사람들이 ''교회에 힘에 버거운 과도한 헌금을 내야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교회에 적게 헌금(혹은 십일조)을 내면, 작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증거구절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을 열심히 도우라는 권면의 말이었다는 말이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돕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돕는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이, 그리고 복(연보)을 나누어야 한다는 말은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이상한 소식(strange news)에 불과하다. 결론: 한국교회에서의 복과 분배의 vision 내가 확언하여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너는 세상재물로 부자(富者)인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하라: "돈 때문에 자만하지 말고 정결하지 않은 재물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부자들은 선한 일을 하고 선행하는데 부자가 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고 항상 기꺼이 공유하는 자가 되라." 이것이 참된 생명만을 소유하기 원하는 자들이 미래를 위하여 선한 재화를 모을 수 있는 방법이다(딤전 6:17-19). 이제까지 우리는 성경에서 부의 분배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고 다루어졌는가를 살펴보아다. 우리가 신구약의 복와 분배의 vision을 한국교회에 적용하려고 할 때 몇 가지 고려사항들을 필자의 결론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5.1 무엇이 잘못인가? 우리의 실정에서 하루에 수천 명이 지속적으로 한 교회에 등록하는 현상이 벌어진다면,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무엇일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새성전 건립''일 것이다. 아니, 교회성장의 황금어장인 신도시에서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새성전 건축''이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던 초대신앙공동체에서는 ''새성전 건축''을 위한 작정헌금도 부흥회도 없었고, 사도들의 의식주의 혁명적인 변화(예, 자동차나 아파트나 월급)도 부흥성장의 주역들이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칭송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성도간에 교제하는 일이 더 활발해지고 활성화되었다는 이야기만이 전해진다. 물론 한국교회의 단기간 내의 급속한 교회부흥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지만, 이러한 부흥발전에 대한 이해와 과정이 성경의 경우와 너무나 다르다는 점에서 우리는 놀라와 해야한다. 이들은 계속해서 (우리처럼) 선교하고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의 수가 증가되는 일에 노력하였지만, 우리처럼 재정을 무작정 늘려 잡고 건물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몰두하고 경상비와 인건비에 쏟아 붇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교하는 일과 구제하는 일을 구별하거나 구제하는 일이 교회의 의무인가 아닌가를 토론하거나 의심하지도 않았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부유하면 좋겠지만, 돈이 남아돌거나 잘못 쓰여져서는 안된다. 5.2 누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필자는, 주체가 개인이든지, 아니면 교회라고 하는 집단이든지, 불필요하게 주도권의 문제로 혹은 대상이나 방법론에 대해서 다툴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본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이나 구제/교제하는 일은 신앙인의 본분들 중의 하나다. 5.3 얼마만큼 행해야 하는가? 필자가 보기엔, 경상비와 인건비는 불요불급한 것만을 최소한도 경제적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구제/교제하는 일에 전적으로 사용해야한다고 본다. 우리는 교회재정에 대한 패러다임을 성경적으로 전환하고 우리의 시야와 관심사를 그러한 쪽으로 돌려야 하며, 성도들과 교회들과 이웃들의 아픔과 필요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5.4 교회는 어떻게 구제/교제의 재정을 충당할 것인가? 헌금은 헌신과 자발성에서 비롯된다(고후 8:3-5). 바울은 헌금자들이 얼마를 바쳤는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한 무관심은 그의 열정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는 헌금자 명단이나 명세표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칙론을 강조했을 뿐이다. 이러한 교제의 헌금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신을 비우고 가난해짐으로 가능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바울은 자발성과 은혜로 헌금하기를 권면(勸勉)하고 있지, 축복의 대가로서 그들에게 헌금이나 헌신을 강요(强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구제의 헌금은 자원과 즐거움과 감사와 교제와 자비의 목적을 모두 내포하고 있어야 하지, 신앙생활의 절대적인 외적표현이거나 구원의 조건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에서 심중에서 의와 믿음과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성경과 성령, 그리고 양심의 조명(照明)에 따라 헌금과 마음을 내어 곤경에 빠진 형제들과 이웃들을 구제하고 도와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은 절대로 정죄 되거나 비난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우선적으로 바른 헌금이 되려면, 바른 직업관이 우선해야 한다. 내 직업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신성한 노동윤리 가운데서 내가 정당하게 일하고 그에 대한 바른 대가를 받았는가? 그 후에야 비로소 재물을 어떻게 기독교적으로 쓸 것인가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여러 가지 절기, 목적헌금이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사업상의 불균형과 차별,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불신과 불평과 비난이 많아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든지, 죄(사회의 제도적 불의이든 개인의 탐욕과 악행이든지)를 짓지 말고 그 죄를 미워하고 싸우는 것과 억눌리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는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었던가? 당신은 ''성도의 교제''를 믿는가?
가슴으로 이끄는 지도력
가슴으로 이끄는 지도력 http://mission.bz/7024세미나 고명진 목사 가슴으로 이끄는 지도력 진정한 지도력은 힘과 강압이 아니다. 머리로만 하는 지도력이 아니다. 스스로 하고자하는 마음을 창출해 내는 지도력이다. 가슴에서 나오는 지도력이다. 영혼에서 우러나는 감동의 지도력이다. 햇볕과 바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은가. 서로 자기가 강하고 힘이 세다며 다투지만 결국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일은 세찬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 볕이라는 평범한 진리 말이다. 바람은 불면 불수록 나그네의 단추를 단단히 채우게 만들지만 햇볕은 단추를 풀게 만들고,끝내는 코트를 벗게 한다. 따스함이 바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른바 감성의 리더십이다. 성경에서 살펴보면 진정 따뜻한 지도력의 완벽한 모델은 역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강제적인 감사와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두려움과 공포를 주어 억지로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강압과 협박이나 공갈과 사기로 봉사와 헌신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인은 여기서 주님의 지도력을 읊조리고 있다. 삶의 경험을 통하여 깨달은 그 분의 인도하심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하여 부족함이 없어서가 아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감사를 표현하며 만족함을 고백하는 노래이다. 이 시의 배경은 죽음을 한 치 사이에 두고 전전긍긍했던 다윗이 그의 인생을 통하여 체험한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깨닫고 그 분이 얼마나 우리를 섬세하고 따뜻하게 지도하셨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들의 영혼을 촉촉하게 적시는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성 깊은 지도력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가장 오래 가장 깊이 남는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의 메시지이다. 가슴으로 전달되는 감성적인 지도력은 죽음을 뛰어넘고,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힘을 발휘하게 한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그 무엇도 감동으로 다져진 지도력 앞에는 무기력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다. 가장 질긴 보이지 않는 줄이 있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나오는 나눔이 있기 때문이다. 가슴이 느껴지는 신뢰관계가 되면 더 이상의 요구와 질책이 필요 없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지도력은 말로만 하는 머리의 지도력이 아니라 영혼이 담긴 가슴의 지도력이다.
가장 위대한 카운슬링
가장 위대한 카운슬링 http://mission.bz/6988세미나김영준 목사 사도행전 16:25∼34 / 우리는 주위에서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인도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그것은 평소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에게 해당될 뿐 평소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막연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시작을 해야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가장 기본적인 데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프로 농구선수들이 몸을 풀 때 처음부터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덩크슛부터 하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오래 믿은 사람이든 처음 믿은 사람이건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가,내가 예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가,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가,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족하다는 사실을 내가 믿는가,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하는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낙심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본 그의 아내 캐서린이 검정 상복을 입고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누가 죽었소?”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최초로 말한 사람이 캐서린 루터입니다. 그 말을 듣고 루터가 “그게 무슨 말이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고서야 어찌 믿음의 사람인 내 남편이 이렇게 낙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루터는 다시 힘을 내어 종교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보 간수가 사도 바울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바울이 간수에게 한 마디 카운슬링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진리는 단순한 데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분명하고도 단순한 답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확신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업 결혼 자녀교육 어떤 문제가 있든지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다’는 원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영혼이 잘돼야 됩니다. 영적으로 잘돼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가면 사람들과도 올바른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고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런 대답을 해주기를 주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라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계속해서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 영혼을 돕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를 내가 떠나갔습니까? 예수님 안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는 분이든,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은 분이든 오늘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요,하나님의 응답의 시작이요,도움의 시작이요,축복의 시작이요,내 삶이 형통할 수 있는 비결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가정목회
가정목회 http://mission.bz/6935세미나 윤성주목사 (평촌수정교회) 디모데전서 3:1-7 1. 위기에 처한 목회자 가정 목사들은 가족들에게 제일 인색하다. 교인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하려고 하지만 가족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 피곤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을 위해서는 시간도 내고 대화도 잘하지만 가족들을 위해서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 교인들과는 이야기도 잘 나누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입을 굳게 다문다. 그러다가 또 교인이 집에 찾아오면 금방 사랑과 웃음으로 대한다. 교인들이 돌아가면 가족들에게는 명령과 엄한 얼굴로 일관한다. 그러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가족들에게 ‘늘 같이 살고 얼굴을 마주 보는데 무슨 다른 노력이 필요하냐?’라고 생각하는 목사들이 많다. 그러면서 신경질은 집에서 단독 드리블(dribble)로 부린다. 이런 목회자의 가정이 어찌 행복하겠는가? 교인들의 가정도 살아야겠지만 목회자의 가정이 먼저 살아야 한다. 지금 가장 위기에 처한 가정은 목회자의 가정이다.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도 많다. 1) 목사는 목회에 대한 부담으로 여유가 없다 이건 사모도 이해 못하고, 부모도 이해 못하는 부담이다. 그런데 어찌 성도들이 이해를 하겠는가? ①설교에 대한 부담을 평생 짊어지고 산다. 설교준비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힘든 작업이다. ②설교에 대한 평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다. 이러니 예배를 마치고 나면 제일 신경 쓰이는 것이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을까!“하는 것이다. ③교회부흥은 절대적인 부담으로 목사를 짓누른다. 이것은 생존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여기에 따라서 능력이 있고, 없고가 결정되기 때문에 강한 동기를 안 가지려고 해도 가져지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 동기들 때문에 우리가 발전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④그런가하면 다른 목회자와의 경쟁과 비교도 숨길 수 없는 부담이다. 사람이 제일 비참할 때가 비교해서 뒤떨어질 때이다. 이때 느끼는 패배감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⑤목회를 이해 못하는 사모로 인한 부담도 비중이 크다. 사모가 너무 앞서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교인과의 갈등으로 부담이 되기도 함. 2) 부인은 “사모”라는 말 자체가 스트레스다. ①교인들을 늘 의식한다. ②그리고 알게 모르게 교인과의 갈등도 많다. ③그런가하면 고부간의 갈등으로 스트레스 받는 사모들도 많다. ④여기에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⑤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모들도 많다. 3) 자녀들은 “목사의 아들, 목사의 딸”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늘 눌려있다. 어릴 때는 오히려 목사의 아들, 딸이라고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①교인들에게는 웃는 아빠, 우리들에게는 화내는 아빠. 교인들에게는 친절한 아빠, 우리들에게는 신경질 내는 아빠 교회에서는 복음을 말하는 아빠, 우리들에게는 율법적인 아빠 교회에서는 사랑을 선포하는 아빠, 우리들에게는 매질하는 아빠. ②교인들의 눈도 자녀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목사의 자녀이기 때문에 특별해야 하고,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자녀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③이러다 보니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이걸 부모들은 전혀 모른다.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자녀들이 지고 있는지를 우리가 제일 모르고 있다. 부모로서 무엇을 해준 것만 생각하지 그들의 속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④이러다 보니 탈선으로 빠지는 목회자 자녀들이 많이 있다. ⑤그리고 부모들과의 “생각차이”로 혼자 울고 있는 아이들도 많다. 아빠는 목사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자녀들은 자기들의 수준에서 생각하고 결정한다. 그런데 이것이 맞지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 폭력이 나가기도 한다. 2. 가정목회를 시작해야 한다. 1) 목회자인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한다. ①목회자가 치유되지 않으면 가정치유는 불가능하다. ②특별히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문제와 성격적인 문제는 반드시 치유되어져야 한다. 2) 목사의 노력과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 가정이다. ①사모들은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②자녀들은 아빠의 보살핌을 필요하다. 3) 목회자가 특별히 노력해야 할 것들 ①가족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라. 목회자치고 바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시간이 늘 모자라는 사람이다. 잠시 시간이 나면 쉬고 싶고 눕고 싶지 가족들을 위하여 시간을 할애할만한 여유가 없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온다. 그러므로 가족들을 위하여 시간을 할애하는 헌신이 필요하다. ②그리고 대화를 나누어라. 가정의 위기는 대화의 단절에서 온다. 아이들은 아빠와 대화를 나누기를 원한다. 이것은 사모들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이야기말고, 개인과 관계된 이야기를 나누기 원한다. 다른 사람 이야기말고 자신과 관계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것이 전혀 안된다. 심지어 가정예배를 통해 눌리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가정예배가 기뻐야 하고 축복이 되어야 하는데 예배 메시지를 통해 아빠의 생각을 강조하시기 때문에 가정예배 자체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한마디로 평안과 누림의 예배가 아니라 눌림과 기죽는 예배다. ③요약하면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라. 외식을 한다든지, 영화를 같이 보러 간다든지, 아니면 운동을 같이 한다든지 방법은 많이 있을 것이다. 저는 한 번씩 우리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에 공을 차러간다. 그러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4) 목회자인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①우리 아이들은 보통아이들이다(특별한 것을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마라) ②이 말은 영적인 것 보다 육신적인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라는 말이다. 솔직히 목사인 우리도 때로는 육신적인 것이 휠씬 더 좋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런데 자녀들에게 영적인 것만 말한다면 그들의 눈에 비친 부모들이 어떻겠는가? 3. 목회자들이 속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가정의 축복을 누려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잘 안되고 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가정은 텅 비어있다. 속지 말라.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가정이다. 내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아내요 내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야 한다. 2) 가족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은 인본주의가 아니다. 어떤 분들은 “인본주의 쓰지 말라”고 하니까 가족들을 위한 헌신을 인본주의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있다. 속지 말라. 가족을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복음적인 것이다. 3) 목회의 최고현장은 가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안’을 돌아보기 보다 ‘밖’을 더 돌아본다. ‘안’은 허술한데 ‘밖’을 치장하려고 한다. ‘가정’은 무시하고 ‘교회’만 강조한다. 그러니 사단은 가정을 파고 들어오는 것이다. 속지 말라. 최초의 목회현장은 가정이다.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아야 목회에 성공한 것이다. 4) 교인들의 가정 행복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가정도 행복해야 한다. 사모도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고, 목회자 자녀들도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을 알면서도 잘 속는다. 그러므로 속지 말라. 무엇보다도 가정의 행복을 추구해야 할 사람이 목사이다. 왜 가정에서 목회의 모든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4. 성경에서 말하는 감독의 생활(딤전 3:1-7) 1) 감독의 기본자세: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1) 이 말은 특정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끼치는 모든 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2) 감독의 내적 생활: 책망할 것이 없는 자(2)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비행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이다. ①한 아내의 남편: 한 아내에게 충실하라는 것(한마디로 바람피우지 말라는 것) ②절제하며: 진지한 삶의 자세를 가지라는 것. ③근신하며: 건전한 생각을 하라는 것. ④아담하며: 외적 생활이 단정해야 한다는 것. ⑤나그네 대접하기를 좋아하며: 그 당시는 교통이나 숙박시설이 낙후하였으므로 여행자를 도우라는 것(특히 복음전파자들) ⑥가르치기를 잘하며: 불신자에게 전도를 잘하며, 신자들을 잘 양육하는 것. 3) 감독이 지켜야 할 것(3) ①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술을 통해서 마음의 안식을 얻거나 쾌락을 얻지 말라는 것. ②구타하지 아니하며: 난폭한 행위를 버리라는 것. ③오직 관용하며: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다면 수용하라는 것. ④다투지 아니하며: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다가 다투지 말고 타인의 의견도 수렴하라는 것. ⑤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지 말라는 것. 4) 감독의 가정생활(4-5) ①자녀교육에 성공하라: 자녀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라는 것. ②자기 집을 잘 다스려라: 가정에 충실해야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 5) 감독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6) ①새로 입교한 자: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 ②이유: 교만하여 마귀의 정죄에 빠질까함으로. 이것은 초신자에게 함부로 일을 맡기거나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6) 감독의 외적 생활(7): 선한 증거를 보여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말라. ①목회자가 비방을 받으면 교회에 해롭다. ②목회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감독의 가정생활”이다. 다른 것은 한 절 안 에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가정에 대한 메시지는 2절이나 된다. 이것은 감독의 가정생활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정목회, 오늘부터 시작하라. 모든 목회의 시작과 끝은 가정이다. 목회사역의 알파와 오메가도 가정이다.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강해설교 세미나
강해설교 세미나 http://mission.bz/6909세미나 KCMUSA 1. 설교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정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는 것이다. ◈ 세상에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이 있다. ◈ 우리는 이 진리를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다. ◈ 이 사람들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며, 그것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인정하는 것이다. ◈ 먼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야 한다. ◈ 우리는 그 진리를 개인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 자기가 목회하는 사람들을 잘 알아서 그들의 필요에 맞게 그 진리를 보다 잘 적용해 줄 수 있어야 한다. ◈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열심히 익혀야 한다. ◈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진리를 아는 것에 자라서 자신의 사역에 깊이와 효과가 더해지도록 해야 한다. 2. 설교자도 메시지의 일부분이다. 필립스 브룩스는 설교를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제시"〔『설교학 강의』(Lectures on Preaching), p.5 〕라고 정의했다. 설교자는 소식을 알리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증인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께서 인격을 매개체로 하여 자신의 진리를 전달하신다는 증거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설교자가 성장함에 따라 메시지가 성장하고, 교회도 성장한다. 설교의 배후에 있는 말씀의 권위만 가지고는 안 된다. 말씀의 권위 아래 사는 삶이 어떤 능력을 지니는지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에게 새로운 믿음의 교훈들을 가르치셔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백성을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가 마음으로 고심하는 이유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개인적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가꿔 나가야 한다. 강단은 축복을 빌려다 쓰는 장소가 아니다. 축복이 신선하고 흥미진진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솟아 나오는 축복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설교뿐 아니라 설교자도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둘은 병행되어야 한다. 자기 존재의 영역, 즉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모든 면에 있어서 설교자는 생명의 메시지를 담고 나눌 수 있는 준비된 그릇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결합시켜 놓은 것을 설교자가 나누지 말도록 하자. 3. 설교는 예배의 행위이다. 예배의 행위가 되지 않는 설교는 하나님이 아닌 설교 자체나 설교자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할 것이다. 설교가 예배의 행위가 아닐 때에는, 회중이 하나님이 아닌 설교자에게 예배할 위험이 있다. 설교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들은 보다 깊이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제단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일과 똑같이 생각했다. ". . . .이방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설교하는 것도 하나의 예배행위임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최선을 드리고 싶어할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의 명예를 구하거나 자기의 학식과 총명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것이다. 그런 설교는 예배의 전체적인 흐름에 들어맞아서 그 예배의 모든 순서는 다 구세주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다. 필립스 브룩스는 말했다. "만약 설교를 예배와 별개로 생각한다면, 설교다운 설교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와 기도와 찬양이 수반되는 예배는 설교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4. 설교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의도와 내용이 모두 있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단순히 어떤 주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다. 참된 설교는 주제를 설명하는 일뿐만 아니라 적용하는 일도 한다. 설교자는 단순히 지성(mind)을 교훈 하는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감정(emotion)도 흔들어 놓아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개인적으로 적용하려는 의지(will)를 갖게 하는 일도 해야 한다. 설계 도면이 그려진 청사진이 건물이 아니고, 조리법이 식사가 아닌 것처럼, 설교의 개요가 곧 메시지일 수는 없다.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에 대한 강의가 아니라 약이다. 설교의 목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는 내용 ⊙ 회중의 특정한 필요 ⊙ 목사의 마음 속에 있는 특별한 부담감 ⊙ 목사가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것 목사의 의도(intent)와 성경의 내용(content)응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캠벨몰간(G. Cambell Morgan)은 자기가 들은 어떤 설교에 대해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나는 내가 전혀 찬성할 수 없는 공허한 설교를 들었다. 설교본문은 주제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몰간의 시대에도 소위 상황(contex)과 성경 본문(text)이 따로 노는 때가 많았다. 5. 설교의 의도는 분명해야 한다. 비행사가 자기가 어느 공항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순풍을 만나도 별로 도움을 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자신의 메시지에서 성취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어떤 예배를 드려도 좋은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각 설교마다 특정한 목표를 설정하라.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회중에세 꼭 말해 주라. 존 왓슨(John Watson)은 말했다. "설교는 백과 사전이 아니라 모노그래프(monograph: 특정한 단일 소분야를 주제로 하는 연구 논문 - 역자주)이어야 한다. 단추에서부터 관(棺이르기까지 무엇이든지 구입할 수 있는 잡화상이 아니라 한 가지 상품을 파는 전문 대리점이어야 한다" 만일 설교자가 마음의 수고와 실제적인 준비를 다 했다면, 자신의 메시지가 말하려는 바와 성취하려는 바를 정확하게 한 문장으로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존 헨리 죠윗(Jhon Henry Jowett)은 말했다. "설교의 주제를 짧고 함축성 있는 한문장으로 수정과 같이 많게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는 설교할 순비가 된 것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설교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 한 문장을 설교의 명제, 주제 문장, "큰 개념"(big idea)등 각각 다른 용어로 부른다. 설교에 있어서 이 문장은 인체 골격의 척추, 또는 가옥의 터와 같다. 그 문장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서 최종적인 생산물이 무엇이 될는지 결정해 준다.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 ⊙ 성경적이어야 하며, 설교할 가치가 있는 불변의 진리이어야 한다. ⊙ 회중의 필요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하고도 관련성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 명확하고 분명해야 하며, 추상적인 언어나 문학적인 수식으로 요점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 적확하고 정직해야 하며 설교자가 제시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마천루를 지을 기초를 닦아 두고 그 위에 닭장을 짓지 말라. ⊙ 설교의 주제가 전개됨에 따라 중들에게 더욱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어야 한다. ⊙ 하나님께서 수십세기 전에 모세를 위해 하신 일이 아니라 오늘 날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통상 현재 시제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도와 주셨습니다."라는 것도 타당한 말이지만, 설교의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구세주는 당신 삶의 풍랑 속에 함께 하셔서 도와 주십니다."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 6. 설교는 조직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혼돈케 하시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혼란스럽게 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회중이 설교 개요의 각 대지(大旨)나 소지(小旨)를 파악했는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설교자는 자기가 가고 있는 방향과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일단 주제가 발표되면, 흥미롭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재료를 발전(development)시켜야 한다. 설교의 개요는 대개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다. ⊙ 서론 ⊙ 목적을 진술[명제, "큰 개념"(big idea) ⊙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대지 (main points) ⊙ 결론 화가는 보다 사실적인 인물을 그리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한다. 설교의 개요는 인체에 비유하자면 골격에 해당한다. 명백하지 않더라도 개요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좋다. 설교의 구조는 주로 성경 본문의 내용 전개에 따라 달라진다. 개요를 먼저 작성해 놓고 그것을 억지로 본문에 맞추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구조는 진술한 목적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앞에서 제시한 예들 가운데서 이런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설교에는 세 개의 대지가 있는데 각각은 "하나의 결론"이 된다. 무디의 설교는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들"을 도입함으로써 여러 대지를 포함하게 된다. 웨더헤드의 설교에는 네개의 대지가 있는데 각각은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가 된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구조는 목회자의 전반적인 "설교패턴"을 고려해야 한다. 설교패턴은 늘 다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순회 설교자는 설교 때마다 회중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번 똑같은 설교학적 접근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한 곳에 주재하는 목회자는 매주 같은 회중에게 설교하므로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이유들"이나 "결론" 또는 "교훈들"이란 말을 주일마다 상용하면 설교를 예측할 수 있게 되어 메시지의 힘이 약해진다. 설교마다 자신의 독특한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나름대로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초보자는 자신의 독특한 방법을 발견하고 발전시키기 전까지는 설교학적 법칙들(the homilectical rules) 의 통제에 잘 때라야 한다. 일단 그 법칙들이 당신을 다스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당신이 그 법칙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설교의 조직화(organization)는 부수적인 것이어야지 주가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건축가와 마찬가지로 형식과 기능 사이(form vs. function)의 긴장속에서 고심하며 살아야 한다. "개요가 참 좋군요 !"라는 말은 설교자가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 아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한 층 좋은 말은, "당신이 오늘 우리에게 주님을 보여주셔서, 그 분이 우리의 필 요를 채워주셨습니다."라는 말이다. 7. 본문의 독특한 점 위에 개요를 작성하라. 시편 말씀들은 시련(trust), 신뢰(trust), 승리(triumph)의 세 가지 대지로 개요가 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적들은 어려움, 믿음, 승리의 순서를 따른다. 바울의 여러 훈계 속에는 교리, 의무, 그에 따르는 축복이라는 형식이 반복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 본문이나 사건의 특징을 모사 할 뿐이고 해석이나 적용에는 도움이 안된다. 즉 그런 방식은 본문을 분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을 설교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경의 거의 모든 본문은 배경, 말씀, 의미, 생활 속에 적용하는 문제 증의 네 개의 대지로 된 "개요"로 만들어 설교할 수 있다. 그 네 가지는 본문을 분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고 독특한 점을 찾아내도록 해 주지만, 석교의 개요로서는 빈약하다. 8. 구체적으로 하라. 광고업자의 성패(成敗)는 번뜩이는 보편성에 달려 있지만, 복음을 설교하는 자의 말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정밀한 것에는 힘과 권위가 있다. 설교의 명제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 본문에는 우리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여러 가지 있습니다"와 같은 종류의 설교평은 설교자라면 모두 피해야 한다. 사실 "것들"(things)이란 말은 모호하므로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어떤 종류의 "것들"이란 말인가? 경고들? 장애물들? 권고들? 그렇다면 그런 말들을 쓰라 "진리들", "교훈들" "개념들"이란 말도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주의 깊은 설교자라면 자기가 갖고 있는 사전, 특히 동의어 사전을 활용할 것이며, 마구잡이 어휘와 적합한 어휘는 번갯불과 반딧불만큼 차이가 난다고 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금언을 유념할 것이다. 체스터튼(Chesterton)도 똑같은 말을 했다. "사람은 자기가 말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알 때에 비로소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어휘를 보라. 결과(results)와 결말(consequences), 곤란(difficulties)과 궁지(dilemma), 통일성(unity)과 획일성(uniformity), 처벌(punishmanet)과 연단(disciple)등. 유능한 말씀 사역자는 장인(匠人)이 연장을 다루듯이 어휘들을 사용한다. 즉 그 작업에 맞는 도구(말)를 쓴다. "전도자가 힘써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나니 기록한 것은 정직하여 진리의 말씀이니라"(전 12:10). 인명(人名)과 날짜와 숫자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연구를 통해서 정확한 숫자를 얻어내라. 상세하게 날짜를 대는 것이 "몇 년 전쯤에"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있으며, 상세한 숫자가 "이백여 명이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의미를 지닌다. 성경 구절을 언급하거나 인용할 때에도 구체적으로 하라. 그리고 개요를 완성시키기 전에 꼭 참조 구절을 모두 찾아 확인하라. 성구 사전에도 인쇄 과정의 실수가 있을 수 있는데 설교집은 흔히 그것을 그대로 옮겨 싣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설교는 분명한 사고(思考)로부터 시작된다. 본문과 본문의 목적과 메시지의 전개를 철저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라. 몽롱한 사고를 피하고 모든 것을 정밀하게 하려는 목표를 지니라. 9. 명백한 사실이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 말라 사람들은 명백한 것을 자세히 논하면, 따분해하며,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하면 짜증스러워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신비적인 것도 있으며, 인생이나 성경의 모든 것이 다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순된 말을 하시지 않지만, 그분의 방법과 다르기 때문에 항상 그 분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 내용이 철저한 설교를 허용하지 않을 때에, 암시적으로만 설교할 줄 아는 설교자는 현명한 설교자이다. 동시에,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영적인 지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본문을 설명하는 게 회중에게 역사적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거든 간단하고 빠르게 윤곽만 이야기해 주라. 그렇게 하면 설교의 흐름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지식을 주는 셈이 될 것이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설명하거나, 명백한 것을 예화를 들어가면서 자세히 논하는 경우가 있다. 필자들은 "언제나 정직하십시오.!"라는 한 설교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정직하십시오. 그 분들은 당신을 세상에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형제와 자매들에게도 정직하십시오. 당신은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에게도 정직하십시오. 동료들에게 정직하십시오. 그리고 이웃들에게 정직하십시오. 집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동네에서,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정직하십시오."라고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는 그가 그 다음 할말을 잊어버리고 그 위기를 모면할 길을 찾느라 따분한 반복을 계속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어떤 목사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라는 야고보서 3장 8절 말씀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년시절, 서커스를 보러 가서 길들여진 동물들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에는 길들여진 호랑이들이 있었고, 길들여진 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들과 사자들은 의자위로 뛰어 올랐으며, 불붙은 테를 점프해 지나갔고, 총을 차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길들여진 코끼리들이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짐승들이 앞서 가는 것의 꼬리를 붙잡고 줄지어 걸어가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코끼리들은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대들이 길들여진 개들과 함께 나왔는데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그 개들은 뒷발로 걷고, 곡예사처럼 줄을 타며, 함께 춤을 추기까지 했습니다. 개들은 길들려져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기 회중을 너무 따분하게 만들어 놓아서 회중이 더 이상 그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복하다보니 잔소리가 된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듣는 것보다 더 지루한 것이 있을까?" 라고 『오딧세이』(Odysey)에서 호머(Homer)는 말했다. 말할 때마다 새롭게 들리도록 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의 말을 두 번 듣는 것을 결코 개의치 않을 것이다. 10. 본문이 말하고 있는 범위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내에서 설교하라. 성도들은 사람이라서 아무리 좋은 진리라도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 일정한 양이 있다. 회중의 규모가 커질수록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각 사람의 필요와 수준은 더 다양해진다. 메시지를 준비할 때는, 회중을 "대표하는 사람들"즉, 불안한 십대, 젊은 부부, 외로운 과부, 실직한 가장을 마음 속에 생생히 그려 보라. 그리고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준비하라. 선포할 진리는 각 본문에 담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부가적인 개념을 갖기 위해 본문 외에도 성경을 온통 다 추적해 볼 필요는 A다. 그렇게 허둥지둥 설교할 필요가 있는 경우라면, 아마도 당신이 정한 본문은 너무 F아 잡아늘여야 할 것이다. 훌륭한 설교자라면 쓰레기통을 가지고서도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훌륭한 설교자는 설교가 기괴한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골라낸 개념을 모두 메시지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이 작성한 명제 문장이 분명하고 정확하다면, 어떤 개념을 다음 기회에 쓰려고 떼어놓아야 할 지 알게 될 것이다. 엄청난 설교 재료에 파묻혀서 그것을 생활 속에서 나타내지 않는 것보다는 내용이 충실한 진리 한두 개를 확실히 붙잡고 그것을 잘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모든 준비를 끝낸 다음 설교자는 능숙한 저술가와 편집인이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즉 설교 자료를 보면서,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이 설교를 할 때에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라고 자문해보아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분명하지 않다면, 처음부터 시작하라. 당신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기 때문에 설교하는가, 아니면 무언가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설교하는가! 11. 설교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라 공중 사역을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일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예배가 늦게 시작될 수도 있고, 설교 전 순서에 걸리는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고, 혹은 즉석에서 광고해야 할 것이 생기기도 한다. 또 방문해서 설교할 때에는 시간 계획에 전혀 간섭할 수가 없다. 어쨌든 이러한 한두 가지 이류로 설교시간은 대개 한정되어 있다. 당신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는가? 당신 측에서 불평하지는 말라. 훌륭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만 한다면, 설교자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고 오히려 회중들이 불평할 것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하고 싶은 이야기 따위는 꺼내지도 말라. 그런 것은 시간만 낭비하게 될 뿐이다 ! 메시지를 준비할 때에는 하루 종일을 당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처럼 몰두하라. 그렇지만 설교할 때에는, 비교적 덜 중요한 항목들은 포기하고 중요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라. 메시지가 잘 준비되기만 했다면, 그렇게 한다 해도 그 차이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설교가 불멸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 끝없이 설교할 필요는 없다. 사랑으로써 말씀을 섬길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라. 기억하라. 산상수훈 전체를 큰 소리로 읽는 데에는 10분도 안 걸린다는 것을. 12. 감명을 주기 위한 설교가 아니라 표현하기 위한 설교를 하라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설교의 목적을 두는 설교자는 자기의 설교술이나 웅변술을 과시하기 위해 강단을 이용하는 무례한 도적이다.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설교자는 쇠해야 하고 구세주는 흥해야 한다(요 3:30). 전해지는 말씀은 예수님이고, 설교자는 그것을 전하는 목소리에 불과하다. "저런 설교는 나도 할 수 있겠다"라고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설교에는 단순성이 있어야 한다. 참된 기술은 늘 그 모습을 숨긴다. "당신의 설교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설교하라"는 죠오지 모리슨(George H. Morrison)의 말은 정말 옳다. "위대한 설교"를 준비하려고 애쓰지 말고, 위대하신 구세주를 드높이려고 애쓰라. 항상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높은 목표를 갖되, "위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는 자유로워지라.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대개 우리와는 다른다. 신학용어를 사용할 때에 반드시 분명한 설명을 덧붙이도록 하라. 단순한 단어가 전문용어보다 낫고, 구체적인 말이 추상적인 것보다 낫다. 심오한 것은 복잡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단순한 것에서 나온다. 13. 심층(深層)을 설교하라 첫째, 본문의 심층을 설교함으로써 시작하라. 본문의 말들을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는 것과 그 말들 속의 진리를 설교하는 것과는 다르다. 스펄젼은 자신이 "본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곤 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참 좋은 생각이다.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보라. ● 본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 (사실, 정보) ● 본문은 무슨 뜻인가 ? (진리, 해석) ● 본문은 「나에게」어떤 의미가 있는가 ? (깨달음과 적용) ●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구상, 조직) 둘째, 청중의 마음 심층에 이르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성령께서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적용시키고 사람들이 그것에 어떤 반응을 보일 때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말라. 그 반응은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바울이 회당에서 메시지를 전할 때, 회심한 사람도 있었지만 비웃거나 대적한 사람도 있었다. 셋째, 당신 자신의 심층에서 설교하고 메시지가 당신 안에 깊이 와 닿도록 하라. 목수가 여기저기에서 나무 조각들을 주워 모아 못을 박아 테이블을 만드는 식으로 "설교를 조립"하지 말라. 메시지는 살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메시지는 당신 마음의 토양에서 자라 나온 것이어야 하며, 당신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스스로의 연구에 뿌리를 둔 것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서 조각이나 부스러기들을 만든 설교는 대개 경작된 것이 아니라 가공된 것처럼 들린다. 그런 것은 말로 들려주는 수필이지, 강력한 메시지가 아니며, 헌신된 인격을 통하여 전달되는 진리도 아니다. "교회가 설교자들의 마음 속 깊은 속에서부터 설교하는 것이 되지 않고 얕은 곳에서 설교하는 장소가 되는 것을 나는 가끔 두려워 한다."〔프레데릭 뷔휘너(Frederick Buechner)『기억이라는 방』(Harper & Row, 1984, P.123)〕. 14. 당신 자신의 메시지를 선포하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그분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방식으로 제시하라는 뜻이다. 표절은 가장 저질적인 도적 행위이며, 가장 고차원적인 빈말이라고 정의된다. 딘 잉게(Dean Inge)는 독창성을 "틀리지 않은 표절"이라고 한다. 충실한 설교자는 여러 젖소에러 우유를 짜내지만 그 자신 특유의 버터를 만들어 낸다. "아담은 자기가 훌륭한 말을 할 때에, 자기보다 앞서서 그 말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다"라는 마 크 트웨인의 말이 맞다. 설교내용 가운데에 당신이 연구 중에 뽑은 진리나 개념이 나올 때마다 그 참고 문헌을 명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설교 개요를 이용할 때는, 그의 공로를 밝히라. 특별히 좋은 말을 인용할 때는 문헌을 명시하라. 정직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며, 회중 가운데 누가 똑같은 책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자료를 훔치는 것이 잘못이라면 그의 방법과 스타일을 흉내내는 것도 잘못이다. "스타일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말은 사실이다. 당신 자신 - 최선의 자신 - 답게 하라. 그래서 성경으로 하여금 당신 삶을 메시지 위에 새겨 주시게 하라.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듣고 감동했다면, 그것이 자신의 마음과 가슴속에 스며들어 당신 자신의 것이 되게 하고 바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하라. 부수적인 것말고 본질적인 것을 붙 잡으라. 당신 자신답게 하라.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 하라. 그것이 가장 훌륭한 독창성이다. 15. 다양성과 균형을 위해 힘쓰라 항상 똑같으면 따분해진다. 결론을 예측할 수 있는 설교는 힘있는 설교가 아니다. 우선 주제들을 다양하게 해야 하며, 특정한 주제를 "애용하는 습관"를 제거하려고 힘써야 한다. 성경 전체를 강해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균현 잡힌 식사를 제공한다. 명제가 되는 문장을 다양화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형식들 중의 하나를 취할 수 있다. ● 평서문 : "성령께서 신자를 도우십니다." ● 명령문 : "신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 의문문 : "우리는 어떻게 성령 충만할 수 있을까요?" ● 권고문 : "계속 기도를 하십시오 !" ● 감탄문 : "천국의 기쁨을 생각만이라도 해 보십시오." ● 정의문 : "믿음은 궤계 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메시지의 전개를 다양하게 하라. 개요를 본문에 맞게 작성 했다면, 메시지는 본문의 형태대로 전개될 것이다. 설교가 모두 논증의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다. 본문 자체가 논증일 경우에는 설교도 논증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상상력이 풍부한 설교자는 다른 방식으로도 다룰 수 있겠지만.)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는 사도행전 22장의 바울의 변론과는 문학 장르가 다르다. 주의 깊게 준비된 설교는 본문 안에서 발견된 자료의 형식을 잘 반영한다. 설교의 목적을 다양하게 하라. 물론 각 설교마다 잃어버린 사람을 건져내고, 구원받은 사람은 격려하며, 넘어진 사람을 세워주는 등의「일반적인」 목적이 있지만 구체적인 목표는 주마다 달라져야 한다. 설교자가 본문 설명에 충실하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선입관념에 근거하여 작성한 개요를 본문에 억지로 끼어 맞추는 설교자는 균형 잡혀 있고 다양성 있는 사 역을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본문 구절이 회중들에게 스스로 말하게끔 만드는 설교자는 성령께서 얼마나 다양한 내용을 성공에 기록하였는가에 놀랄 것이다. 16. 계획을 세워서 설교하라. 스펄젼은 주일 아침 설교는 토요일 저녁에, 주일 설교는 주일 오후에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펄젼과 같은 사람은 많지 않다. 매 주마다 자기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안다면 연구 시간을 대개 더 잘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영이 마음 속에 "파고들어" 특별한 메시지를 주기 원하신다면, 그 분은 자유로이 그렇게 하실 수 있으며,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각 설교가 본문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연속되는 설교는 교회의 상황과 교회에 대한 당신의 사역에서부터 나와야 한다. 설교자의 영적 생활과 성경지식이 자라고 있고, 하나님과 교인들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계획하는 일에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의 자문을 구할 수도 있다. 이론상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피상적인 연속 설교는 피하라. 말씀으로부터 취한 실속 있는 영양분을 가지고 회중의 식단을 짜라. 년중 설교 계획은 아마 다음과 같은 분기별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노동절(9월 첫째 월요일)에서 감사절(11월 넷째 목요일)까지 ◐ 강림절(크리스마스 전의 약 4주간) ◐ 신정에서 성회일(聖灰日:사순절의 첫날)까지 ◐ 사순절(상회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40일간) ◐ 부활절에서 오순절까지 ◐ 여름 사역 설교계획을 세우는 데에 교회 절기를 지킬 필요는 없다. 이런 것은 단지 설교 계획을 위해 사용될 수 잇는 "시간 구분"으로 제시했을 뿐이다. 엔드류 블랙우드는 매 해의 절기마다 설교의 강조점을 달리할 것을 제안했다. ◑ 9월에서 크리스마스까지 - 단순하게 묶음 ◑ 1월에서 부활절가지 - 보강시켜 줌 ◑ 부활절에서 오순절까지 - 가르침 ◑ 오순절 이후 - 격려 물론 이런 것들은 포괄적인 계획이다. 거의 모든 설교마다 사역의 이 네 가지 요소가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연속 설교는 항상 계획을 먼저 세운 다음에 발표하고, 계획대로 설교하기 시작하라. 이 말은 각 메시지가 모두 어떤 최종적인 형태를 띠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설교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며 기도하고, 메시지의 대강 윤곽을 잡으며, 자신의 방법에 확신을 가지라는 말이다. 계획대로 설교하다가 생각대로 되지 않아 당황하다가 "자기 방법을 고압적으로 밀어붙이든지" 그만두어야 했던 설교자들이 많다. 우리는 망루를 세우는 사람이나, 전쟁터에 나가는 왕과 같이, 시작하기 전에 자기가 가진 자원의 목록을 검토해 보는 것이 좋다. 17. 연속설교에 포함된 설교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관련이 있어야 한다. 각 설교마다 그것이 유일한 설교인 것처럼 준비하되, 연속된 설교의 일부분이라는 사실도 기억하라. 지난 번 설교를 못 들은 방문객이나. 들었지만 그 내용을 잊어버린 교인들을 고려하라. 배운 것을 회중이 모두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그러나 동시에 다시 살펴보고 환기시키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고 말라. "지난주에 우리가····을 생각해 보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하는 목사는 대부분의 회중이 자기 말을 비켜가기를 요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방문객들은 지난주의 설교를 듣지 않았고 교인들은 그 내용을 대부분 잊어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 설교마다 신선한 도입 방법을 사용하라. 일단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면, 메시지를 설교 계획표속의 다른 설교들과 관련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지난 번 설교의 내용을 자유롭게 사용하라. 항상 참고 문헌을 명시할 필요는 없다. 설교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난번 내용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어야 하며, 그들은 그렇게 해주는 것을 고맙게 여길 것이다. 서론을 지난 번 설교와 결합시켜선 안되는 것처럼, 결론을 다음 설교와 결합시켜도 안된다. 다음 번 메시지를 시금 설교할 특권은 없다. 18. 개개인에게 설교하라 교회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무슨 일이 되게 하는 것은 교회의 각 개인들이다. 효과적인 이야기는 모두 개개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를 들은 어떤 소녀가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스펄젼 선생님이 ''저''에게 말하는 거예요?" 당신의 설교를 들은 사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가 항상 2인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끔 "우리"나 "교회"라는 말을(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신자들"과 같은 다른 동의어를)사용해도 상관없다. 만일 각 개인들을 - 대표적인 필요를 지닌, 회중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 염두에 두고 준비한다면 개인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말씀을 설교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19. 교리, 의무, 헌신을 결코 분리시키지 말라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만 하고 개인적, 실제적 적용이 없는 설교는 신학 강의에 지나지 않는다. 동시에 교리에 근거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만을 권면하고 격려하는 설교는 기껏해야 종교 선전밖에 안된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훈훈하게"만 하고 교리적 기초나 실제적인 적용이 없는 "헌신의 설교"는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설교자는 마음(헌신)과 정신(교리)과 의지(의무)를 겨냥해야 한다. 필립스 브룩스는 "진리의 자녀가 아니면서 의무의 아버지가 되는 감정은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라"고 말했다. 바울 서신을 보면 대부분 교리와 의무 사이에 균형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교리-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근거하지 않은 의무는 짐이 되며, 의무와 연결되지 않은 교리는 애매하고 직접적이지 못하다. 지식(교리)과 생활(의무) 사이의 다리는 사랑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0. 포사이드(P.T.Forsythe)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을 주실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라"고 말했다. 바울이 어떻게 교리와 의무를 연결시켰는지를 주목하라. 의무 교리 베푸는 일 하나님의 은혜 - 고리도후서 8:1-9 용서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 - 에베소서 4:32 진실을 말하라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 - 에베소서 4:25 사랑 안에서 행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에베소서 5:1,2 서로 받아들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셨다 - 로마서 15:7 서로 판단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시다 - 로마서 14:1-13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 즉 모든 진리를 그 분의 인격과 사역에 관련시키는 것이다. 효과적인 설교는 구세주를 모든 것보다 가장 뛰어나게 하는 설교이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메시지 내용에 그치지 않고, 그것의 동기가 되신다. 20.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하라 사랑은 진리를 구미(口味)에 맞는 것으로 만들며, 진리는 사랑이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한다. 사랑 없는 진리는 잔인한 것이라서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으며, 진리 없는 사랑은 진실치 못한 것이라서 역시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다. 진리 없는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며 책임감이 없는 감정이다. 사랑 없는 진리는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무력하며, 진리 없는 사랑은 그릇된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설교자가 진리를 사랑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자신이 사역하는 사람들도 사랑해야 한다. "설교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설교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설교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거울 효과
거울 효과 http://mission.bz/7014세미나 전병욱 목사 거울 효과 23세에 과부가 된 어머니의 유복녀로 태어난 여자분이 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배려로 유학도 하고,나중에는 저명한 교수가 되었다. 고등학교 이후 교회를 떠났던 그분은 어머니의 권면으로 오랜만에 교회에 나가게 되어 잠시 교회를 둘러보는데,실망이 컸다. 여자들이 모여 남 험담을 하고,장로가 다가와서는 아들 대학입학을 청탁하고,회의실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문 밖으로 터져나왔다. 너무 화가 난 교수는 어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가자고 호통쳤다. 그때 조용하기만 하던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평생 교회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너는 딱 하루 교회 나가 많이도 봤구나.” 이 말에 교수는 무너졌다. 생각 없이 교회 다닌다고 생각했던 그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보는 수준과 자기의 보는 수준은 하늘과 땅만큼 큰 것이었다. 자기 수준만큼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며 산다. 그런데 대개 내 눈에 보인다고 하는 것은 가까이 있는 것이다. 먼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있는 것이 보인다. 자꾸 거짓이 보인다면,내가 거짓 가까이 있는 것이다. 자꾸 교만이 보인다면,내가 교만 가까이 있는 것이다. 소매치기의 눈에는 소매치기가 가장 잘 보이는 것이다. 섬기는 사람 옆으로 가보라. 섬김만 보인다. 기도의 사람 옆으로 가보라. 기도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너무 누추한 것이 자꾸 보이면,세상을 탓하기에 앞서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인격의 변화는 발걸음에 있다. 좋은 것에 더 가까이 가라. 변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사건,사람을 통해서 자기를 보기를 원하신다. 야곱은 삼촌 라반을 통해서 사기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야곱은 결혼에서도 사기를 당한다. 자신을 라헬로 속이는 레아의 모습을 통해서 에서인 척하면서 아비의 축복을 도둑질했던 자기를 보았다. 속이는 야곱이 자식들에게도 계속 속는다. 아비에게 상처받은 야곱이 자식들에게 더욱 큰 상처를 준다. 라헬의 아들인 요셉과 베냐민만 진짜 아들로 인정하고,나머지 아들은 자식도 아니었다.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말에 야곱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창 42:36) 요셉과 베냐민만 아들이고,나머지는 아들이 아니란 말인가? 그 말을 들은 나머지 아들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신앙이란 사람과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세상은 나를 보게 하는 거울이다. 자기를 봐야 변화가 가능하다.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남을 향한 신랄한 비판을 자기를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에너지로 변화시키라.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다.
계시록 7교회 시리즈(1)
계시록 7교회 시리즈(1) http://mission.bz/6993세미나 에베소 교회:처음사랑 - 계 2:1-7 - ▣들어가는 말 에베소 교회는 요한 계시록을 통하여 주님이 아세아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 중에서 첫번 수신 교회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가이스텔 강 어구에 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아시아도의 수도였습니다. 지중해 동부에는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가 에베소와 함께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이 도시들을 로마로 연결하는 육, 해로상의 교차로였습니다. 항구 도시로서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얼마나 번창하고 화려 했던가를 짐작할 만합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에베소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장엄했던 아데미 신전의 폐허에 서서 옛 영화를 더듬느라고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정치 상업 면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 면에서도 요충지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이나 체류하면서 전도한 결과 에베소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본론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어떤 서신보다도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의 교훈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마 사랑이 풍성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사랑이 그 주제 입니다. 1.에배소 교회의 장점 1)훌륭한 교회입니다. 주님이 나타내 보이시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모습이셨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장자 유업의 표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는 에베소 교회는 모름지기 아세아 교회의 장자 교회요, 으뜸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아세아에서 일곱교회를 선정하여 편지를 보내십니다. 그 훌륭하고 위대한 교회들 중에서도 에베소 교회는 첫번졔 편지의 수신교회가 된것입니다. 계 1:20에 보면 일곱별은 일곱교회의 사자라고 합니다. 일곱은 단순한 숫자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말합니다. 완전한 종, 사역자들을 말씀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했습니다. 요한이 늙어서 죽기까지 장로로서 시무했습니다.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 순교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로 보아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시무했던 교회입니다.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신 교회들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행위로 주님께 인정 받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인내는 주님이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완전한 교회였습니다. 2)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가려 냈습니다. 진리에도 충만했던 교회였기에 이단사설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3)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끝까지 견디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폴리캅입니다. 폴리캅은 로마의 군대가 예수의 이름을 저주하고 배반하면 그에게 영예와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폴리캅은 86년동안 주님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셨는데 내가 왜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느냐면서 장작더미 위에서 굳굳하게 화형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주님께 인정을 받아 아세아 일곱교회 중에서도 일등교회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본받아 에베소 교회와 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문제점: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에베소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1)위대한 교회의 금촛대를 옮겨 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모든 면에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이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교리적으로 완벽해야 합니다. 교리는 교회의 뼈대와 같고, 기둥과도 같습니다. 교리를 잘 지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어야 하고, 그 소망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교리가 뼈대와 같다면, 사랑은 살과도 같습니다. 뼈대가 없을 수 없지만 뼉다귀만 엉성한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살이쪄서 뚱뚱한 것도 보기 흉하지만, 바짝 말라 뼉다귀만 엉성한 것도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척 보기에 혐오감을 줍니다. 적당하게 살이 오르면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건강합니다. 사랑 받게 됩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사랑을 토대로 하여 생활하라고 권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합니다. 나무는 뿌리가 수분을 섭취하여야 잎이 푸르러 집니다. 수목이 울창한 것은 수분섭취를 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나무의 수분과 같아서 사람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생활 속에 체험하지 않고는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자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울로 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가슴으로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아니고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사랑을 알게 하시고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랑, 일반적인 원칙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실제적 적용이 되는 사랑을 가지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을 지식으로만 가지지 말고 행함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랑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만큼, 얼마나 사랑에 충만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주님이 불가불 편지를 써서 보내지 않으면 안될만큼 사랑이 식어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버림을 받아야 할만큼 위험한 지경에까지 놓인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이라고 말한 그 사랑입니다.(렘2:2) 신랑이 신부를 맞이 하려는 가슴 설레이는 순간의 기쁨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말로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가슴과 가슴으로만 전달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손이나 발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뜨거운 가슴만이 또 다른 가슴을 뜨거웁게 불태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님을 내 구주로 처음 모셔들일 때, 그 가슴 설레이게 하던 기쁨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두 손과 발에 쇠못이 박히고, 온 몸이 갈갈이 찢기어, 방울 방울 선지 피를 흘리며, 나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짊어 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코허리가 시큰해지는 감동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사랑하사 당신의 몸을 버리셨다는 말을 듣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 내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그렇게도 죄악이 더럽고 추해 보이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뜨겁고 간절하게 주님을 사모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저의 첫사랑입니다. 저는 그 날의 감격, 주님께 대한 그 사랑스러움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감사해서 불타는 정열 다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밥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몰랐습니다. 자지 못하여도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먼길을 걸어도 싫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하여서라면 생명을 내어 놓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후 제 인생은 새롭게 변했습니다. 끊임없이 뜨거운 열정이 솟아 올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거리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외장쳐 전했습니다. 저의 젊은 날은 입에 풀 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였지만, 벌어 먹기 위하여 일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굶기를 밥먹듯 하면서도 그것이 더 고마웁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후회없는 삶이었습니다. 이 복음 위하여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첫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미쳤다고 수군대던 것이 싫지도 않고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에게는 그 때, 그 처음 사랑의 진실이 없습니다. 그 감격도 시들어 가고, 그 기쁨도 없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던 날, 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천날을 하루 같이 지냈습니다. 라반의 딸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던 사람과의 결혼이 성사 되었습니다. 신방에 들었지만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좋아하는 라헬보다 언니 레아와 먼저 결혼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절망이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희망의 샘입니다. 무한한 인내의 샘물을 솟게 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더 일합니다. 7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 7년을 하루 같이 보낸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세월을 단축시켜 줍니다.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떤 시련도 이기게 해줍니다. 인내를 주고, 불평 불만을 없애 줍니다. 만사를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사랑은 무엇보다도 눈물을 줍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조의 눈물은 실패의 눈물입니다. 슬픈 눈물입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랑은 아픔만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소망의 눈물을 줍니다. 감격의 눈물을 줍니다. 무엇보다도 연민의 눈물을 줍니다. (예화) 사랑의 눈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대한 전도자 중의 한 분은 미국 시카고에서 목회하는 클락이라는 분입니다. 그는 매일밤 전도집회를 하는데 꾸준하게 회중이 모입니다. 그 회중의 대부분은 술주정꾼, 도둑놈, 소매치기, 투전꾼 등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희망을 모두 잃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설교는 형편 없습니다.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느리고 흐리멍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매일밤 5-600여명의 회중이 모입니다. 무엇에 비틀어 매인 것처럼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결신자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나옵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싫증이 나서 제대로 들을 수 조차 없는 설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동이 되는 것일까요.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클락의 진실된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것은 없습니다. 클락의 눈에는 사랑의 눈물이 언제나 고여 있습니다. 지난 날, 클락이 이곳으로 처음 왔었을 때. 그는 그 불쌍한 회중들의 가련함을 알고 몹씨 운 적이 있었답니다. 그 후 그는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 했습니다.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차갑게 가졌습니다. 그 결과 그의 노력은 성공 했으나 설교는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에 눈물을 돌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눈물을 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놀랄만한 능력도 주셨습니다. 진실한 사랑의 씨를 뿌리려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편은 노래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 사랑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맺는말 에베소 교회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금촛대는 영원히 옮기어 지고 말았습니다. 옛날 그 교회들의 전성기를 자랑하던 폐허에서 지금은 흔적마저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외양은 훌륭하지만 속이 썩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사랑이 메말라 가는 현상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사랑으로 시작하지 아니하는 교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은사의 경험은 많지만 사랑의 경험은 없습니다. 은사는 한국 교인들을 열심있게 하는 반면 교만하고 비뚤어지게 합니다. 사랑을 체험하는 성도들, 처음 사랑을 가지는 교회들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주님은 그 자리에서 금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이 게시물을...
계시록 7교회 시리즈(2)
계시록 7교회 시리즈(2) http://mission.bz/6994세미나 서머나 교회:주인없는 면류관 - 계 2:8-11 - 들어가는 말 성경에는 우리가 본 받아야할 만한 몇몇 교회가 소개되어 있다. 이 교회들을 보면 몇가지 특징들이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서 성령의 사역이 증거된 교회였다.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방언과 빈부로 인하여 멍들었던 교회였으나 바울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교회로 우리 가운데 전해지고 있다. 1.서머나 도시 항구도시로 아릅답기가 아시아의 제일이라고 일컬어지는 서머나는 동방의 문지기였다. 특히 유럽으로 가는 출구인 서머나는 에베소도시가 점차 쇠퇴하자, 가장 관심을 끄는 지역으로 급성장하여 갔다. 2.서머나교회의 복음 전도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7교회 가운데 칭찬을 받은 교회는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 뿐이다. 다른 교회들은 우리 주님에게서 꾸중을 들었으나 이 두 교회는 오히려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위로를 받았다. 우리 주님께서는 선한 수고가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신자에게 결코 칭찬을 주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얼마나 충성되게 감당하며 애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는가를 헤아려 보시고 칭찬하시는 것이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칭찬받은 이유는 신앙으로 생기는 고난을 잘 참았고 장차 올 고난에 대하여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머나 교회는 역사가들도 칭찬한 교회였다. 당시 서머나 교회가 있었던 곳은 지금도 있으며 인구 약 20만이 살고 있는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의 1/3이 신자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회는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칭찬하시고 또 세인들에게도 칭찬을 받을만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향하여 좋은 상급을 준비하여 놓으셨다. [생명의 면류관] 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경기에는 여러가지 모양의 상급이 준비되어 있다. 아마추어 경기에서는 우승 트로피 혹은 메달이 많고 프로경기에서는 거액의 상금까지 곁들여 있어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운다. 이것들은 우승자가 누구인지 알고 준비한 것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오직 우승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면류관이 천국의 진열대에 있다는 것을 매우 감격스러운 일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파멸의 깊은 수렁으로 곤두박질하고 있다면 나를 위하여 천국에 마련하신 생명의 면류관은 주인을 잃고 진열대에 외롭게 남아 있을 것이다. (우수작이 없을 경우)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을 보고 마음 아파하실 것이며 주인 없이 놓여있는 수많은 면류관을 보고 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상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서머나교회를 향하여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들에게도 나타나 여러분 개인과 우리 교회를 위하여 마련해 주신 생명의 면류관이 결코 주인없는 면류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서머나 교회의 칭찬이 곧 우리의 칭찬이 되고 우리가 그 빛나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쓸 주인이 되자. 본론 I.환란과 궁핍을 살아 온 사람 우리 주님께서 성도들의 처지를 알고 계시다고 하는 말 처럼 힘과 용기와 소망 이 되는 것은 없다. 우리 인간은 두가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①나는 알지만 하나님은 모르기를 원하는 마음. ②나는 부족하게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세하게 알아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 하나님이 알고 계신 것은 궁핍과 환란이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것은 실상은 부요한 자이라고 한다. 당시 서머나는 과학과 의술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지금으로 현대과학과 의술이 가장 앞서있는 도시였다. 첨단 장비를 갖춘 저택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너희의 환란과 궁핍을 안다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서머나교회의 교인들의 물질적인 궁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부를 말씀하고 계시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온갖 시련은 육체를 단련하기도 하지만 영혼을 단련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환란과 궁핍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신 바된 인생은 행복하다. Ⅱ.장차 올 고난(Suffering)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 (V.10)“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하지말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의인의 고난을 의미한다. 루마니아의 공산세계에 복음을 密輸出하던 범브렌트 목사는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세어 보았더니 365번 기록되어 있더라고 하였다. 이 숫자는 1년 365 번에 꼭 하루씩 해당되는 수였다. 인간이 얼마나 두려움에 빠지기 쉬운 존재인가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권면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주님은 환란과 두려움이 와도 처음이요 나중이신 내가 함께하고 있으니 투옥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고 환란을 받더라도 두려워 하지말라고 미리 깨닫게하고 계신 것이다. 투옥은 면류관을 받을 성도들이 당하는 첫 관문이다. 요셉을 봅시다.(창 39:20) 삼손과 세례 요한 그리고 사도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겪은 투옥은 겨우 첫번째 관문이 것이다. 투옥은 우리를 파멸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상급을 받게 하는 통로이다. 사단이 와서 여러 모양으로 유혹의 올가미를 씌워 넘어뜨리려 하여도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열흘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의를 외치며 말씀대로 살다가 옥에 던지우고 빈곤의 늪을 헤매는 성도들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다. 교회의 멸절을 위하여 사단은 교묘한 방법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러나 시련들은 우리를 잠간동안 묶어놓을 뿐이지 영원히 결박할 수는 없다. 충성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쓰게 한다. (예화) 추운 겨울에 여행하는 사람이 만난 한 여인은 아이를 업고 있었다. 허나 말에 태워 주었으나 엄마가 죽을 지경이 되자 말에서 내리게 하고 말을 달렸다. 아이를 찾으려는 여인이 악을 쓰며 달여왔고 숨이 턱에 찰만큼 달려온 여인에게 아이를 돌려 주었다. 모두 살았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살기를 바라신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주후 3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당하였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로마의 시가지 밑에 뚫려 있는 카타콤의 광대함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극심한 박해였는지를 말한다. 계산에 의하면 885Km 내지 1,207Km로 보고 거기에 매장된 시체의 수는 350만 에서 600만 명까지로 보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사단의 무리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더욱 돕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참 성도의 신앙은 결코 말살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유혹의 올가미로 접근하여 온다고 하여도 고난의 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신앙의 충성을 드리자. 생명의 면류관의 주인이 될 것이다. (예화) 두 마리의 꿩이 사냥꾼이 쏜 총에 맞아 한 마리는 죽고 또 한 마리는 다리를 절며 살려고 도망간다면 사냥꾼은 어느 것을 잡겠습니까? 그야 물론 산 놈을 먼저 잡으러 갑니다. 이와같이 이미 그 靈이 죽은 사람에게는 시헙이 필요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이는 시험을 받습니다. Ⅲ.말씀의 경청자가 주인이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귀 기울여 들으시는데 하물며 성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아서야 되는가? 귀를 가졌지만 듣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도 무슨 말씀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귀가 어두워서 그렇다. 성령은 마치 우리가 학교에서 뵈어 온 자상한 선생님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증거할 때에 어떻게 증거할 것인지 무엇을 말할 것인지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다. 여러분은 성령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는가? 현대에 교회를 통하여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지 않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일상생활에서 표현되는 말로서 알 수가 있다. 나누는 대화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듯 하자. 어른들이 계시면 앉고 일어서는 것이며 음식을 나눌 때에 가져야 하는 예법이며, 나아가 어른들 앞에서 말씀을 경청하는 일에도 주의해야 한다. 어른들의 말씀이란 대개가 먼저 산 인생의 지혜가 대부분이다. 어른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마지막에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다가 영원한 형벌에 던지운다면 그것은 얼마나 서글픈 이야기인가? 겸허한 영혼이 되자. 서머나 교회는 모든 교인들이 환란과 궁핍 속에서 선한 일을 행하며 영혼의 부를 이룩한 교인들이었다. 옥에 던져도, 고난이 극심하여도, 서머나교인들은 이 시련이지나가면 모두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쓸 영광의 승리자가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나누는 사랑의 교인들이었다. “라디오 설교를 듣는 것과 교회에 나가서 설교를 듣는 것의 차이는 당신의 여 자 친구와 전화로대화하는 것과 그녀와 직접 만나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과 의 차이와 거의 비슷한 것이다.” == MOODY == 병자에게 건강한 피를 수혈하는 것처럼, 교인의 교회 참석은 필수이다. 모든 성도들이 감격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가운데도 더러는 소외되고 무관심 속에 방치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정변이나 어지러운 시기엔 반드시 해를 끼치는 사람으로 돌변하기 쉽다. 이것은 6.25을 통하여 이미 경험한 바있다. 당시 서머나교회도 지배층이면서 세속 문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앞장 섰던 유대인들이 가장 악랄하게 사단의 앞잡이로 성도들을 괴롭혔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소외받고 있는 분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서 사회가 결코 살벌한 곳만은 아님을 걔닫게 해 주어야 한다. 맺는말 하나님 앞에 주인없는 면류관을 두게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이 생명의 면류관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바울 선생이 남겨 주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 보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딤후 4:7-8)”
관리자와 지도자
관리자와 지도자 http://mission.bz/7015세미나 고명진 목사 관리자와 지도자 관리자가 지도자인 경우도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관리자와 지도자는 다르다. 관리자가 주어진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도록 하는 사람이라면 지도자란 올바른 일을 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다. 관리자는 일의 복잡성을 다루는 것이요,리더는 변화를 다루는 것이다. 관리자는 효율적 관리를 추구하며 일을 계획하고 예산에 신경을 쓴다. 사람과 일의 조직화를 염두에 두며 인력 충원에 노력을 기울인다. 안정과 질서를 위해 통제하며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과학적인 분석과 계산에 능하다. 반면 지도자는 변화를 추구하며 미래 지향적으로 비전과 방향을 제시한다. 목적과 비전을 중요시하며 동기 부여와 의욕 고취에 마음을 모은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모험과 도전의식을 가지고 있다. 참된 지도자는 추종자들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나 욕구 충족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 때로 자신이 원하는 욕구 충족을 위하여 추종자들의 욕구 충족을 채워주려 하지만 진정한 지도력은 추종자가 원해야 하는 것을 비전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분명한 자기 확신 속에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가르쳐 주며 확실한 비전을 제시해 그들을 설득한다. 참된 지도자는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가르쳐 주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미래지향적으로 살도록 도전한다. 그들은 숨겨진 가능성을 보며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될 때 어떤 반응이나 상황이 일어날지를 알고 예견한다. 또한 그들은 비전을 추구하는 동안에 일어날 문제나 난관을 예측하며 해결 방법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참된 지도력은 강제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으며 돈이나 해고라는 무기로 위협하지 않는다. 권력이나 힘,돈,보상 등으로 추종자들을 인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따르게 하며 일을 하게 한다. 추종자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하게 한다. 쉬우면 하고 어려우면 하지 않는 일,돈이 되느냐 안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 하나의 성공 실패가 문제가 아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지도력 하나에 한 단체나 조직이나 국가나 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다. 관리 능력도 중요하지만 지도력이 더욱 중요하다. 지도력 빈곤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건강한 지도력을 키워 조국과 민족의 장래가 소망 중에 밝아지기를 기도한다.
교사와 교회교육에 관한 연구(1)
교사와 교회교육에 관한 연구(1) http://mission.bz/6915세미나 KCMUSA Ⅰ. 서론 1. 연구목적 한국교회는 선교2세기를 맞고 있다. 이제 25퍼센트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세계 교회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일이지만,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하였어도 질적으로는 따라가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구원을 받을 감격과 감사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보다는 개인의 세상적 행복을 추구하고 자기의 소원을 성취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자로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생활의 도구로 퇴위시키고 있음을 정직히 시인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교회 되고자 하여 때늦은 감은 있지만 예수님의 교육방법을 도모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가서 모든 족속에게 제자를 삼아 침례를 주고 네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고 명령하셨고 또 친히 가르치신 교육자이시다. 교육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능을 개발, 연마시키는 방법이요 인격 완성의 좋은 수단이다. 교육은 교회의 사명이지만 교육적인 면을 외면한 채 주로 설교와 심방에 쏠리고 있는 경향은 한국교회가 평가기준을 질보다 양에 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설교와 심방의 효과가 교인수 증가라는 직접적인 면이 있다면 교회교육은 떠날 수 없는 관계가 있어서 교회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선교와 다를 바가 없다. 교육이 없는 복음은 그릇 없는 물과 같아서 사람의 의복을 적실뿐인 것처럼 교육 없이 복음이 제 빛을 발휘할 수가 없다. 교회가 변화의 발전과 성장의 과정을 밟아야 할 새 사람들의 교육기관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는 교회의 독특한 교육을 위해 교육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육은 민족의 흥망성쇠와 관계가 깊기 때문에 구약시대교육은 사사, 제사장, 선지자, 임금들의 집에서나 어디에서든지 율법교육을 열심히 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시 1:2)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주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교육 목표였다. 신약시대 교육에는 율법학자와 서기관들이 율법교육을 힘썼고 예수님은 12세 때 성전에서 선생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고(눅 2:46), 바울도 가마니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행 22:3). 예수님은 3년 간 제자와 군중을 가르치셨고 사도들도 교회를 세우며 교육에 주력했고, 교회가 발전함에 따라 새신자를 위해서 예배와 신앙문답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이후 교회에서 학교를 세웠고 신앙문답식 설교와 침례 지원자를 위한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근래 교회에서는 교회 안에 학교형태인 주일학교에서 교육을 실시해 왔다. 현대에 이르러 새로운 과정에서 교회의 모든 기관과 시설과 그 행사가 교회 교육기능을 발휘 할 수 있게 조직되고 적응되어 가고 있다. 교회 교육의 주체인 목회자는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로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존재 할 수 있도록 성숙한 교회로 확장시켜야 하며, 교육의 대상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생활 환경과 교양정도가 서로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면, 목회자의 교육적 기능에 있어서 어떠한 내용이며 목적을 어디에 둘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이해하며 믿고 있는가는 교육 성패에 큰 관계가 있다. 이와 같이 목회자는 교육적 기능에 서로 관련이 깊어서 교육으로 복음을 깨닫게 하고, 교육으로 신자들을 훈련시키고 교회 일에 적극 참여케 하여야 한다. 교회 교육은 교회의 본질적 요청이므로 교육 없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목회자는 교회의 혁신과 교인의 자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대 목자이신 예수께 돌아가 그의 목회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기본적인 목회 방법은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일이였다. 교인들을 성서대로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들의 당면한 문제를 그들 자신이 해결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목회자는 자신이 교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힘쓰기 보다 평상시 교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그 기능을 길러 주어야 한다. 한국교회 이대로는 안되며 양적인 부흥에 치중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질적인 향상이 되어야하고 전도만이 주의 부탁하신 일도 주장되어져야 하지만 교육사업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한국교회는 뿌리가 잘 내려져서 세계적인 복음 수출국으로 될 것을 확신하며 이것이 제대로 정립이 안된다면 교회교육이란 울리는 꽹과리나 소리나는 구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목회자는 교육적 기능을 잘 발휘 할 수 있어야 하고 성서적 예수님의 교육적 기능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2. 연구 방법과 범위 본 연구에서는 주제와 관련된 제반 문헌들을 조사하여 그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제 1장에서는 교육으로서의 목회의 성격을 고찰해 본다. 구약과 신약시대의 여러 종류의 목회자들에게서 교육적인 특징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제 2장에서는 교육적 기능에서 모델을 정하고 교육자상을 예수님께 맞추어서 교육방법의 목적과 사상의 교육형태를 논하려고 한다. 제 3장에서는 교육자로서 목회자가 가지고 있어야 할 제반 자질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 4장에서는 실제적인 운영 면에서 교사모집과 훈련 사명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고취시키고 자기가 가진 기능을 활성화시키고 충전시키는 데 역점을 두려고 한다. 교육의 실태와 적용과 활용과 영적 훈련과 교사의 전문성과 자기 훈련에 역점을 두어 긴박한 상황인 한국 교회의 교육적인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는 목적에 지향한다. 결론에서는 교회를 교회 되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올바른 교육적 목회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그렇게 하기 위한 목회자의 교육적 기능 수행의 중요성을 재천명하고자 한다. Ⅱ. 교육으로서의 목회 1. 구약시대의 교육 히브리민족의 생활은 하나님을 중심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생활이나 집단생활이나 정치나 교육이나 무엇이든지 종교를 중심 하였고 종교를 떠난 교육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1) 그리하여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나 바벨론에서 40년 동안 포로생활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 복종치 않은 보응이라 생각하였다. 그들의 족장들은 제사장인 동시에 교사였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등의 지도자들은 뛰어난 신앙 교사들 이였다. 히브리의 건국자요 입법자인 모세는 구술로 자기민족을 가르칠 때 하나님께서 받은 십계명을 근거로 삼아 전심력을 다해서 가르쳤으며 교육을 받은 대상은 어떤 연령층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일률적으로 종교교육을 빠짐없이 다 받았으니 그들의 생은 온전히 하나님을 중심하고 생활한 백성임을 알 수 있다. (1) 유대인의 종교교육 하나님을 신봉하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법으로 교육을 중요시했다. 포로이전까지 정식학교가 없었고 가정이 교육 도장이었다. 고대사회에 있어 종교적 신앙과 도덕심을 함양하는데 교육을 중요 위치에 둔 백성은 유대인이였다. 하나님을 선민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도록 하는 수단으로 교육을 시도하였다. 또한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인데 율법의 조항에서는 율법을 가르칠 것도 포함되어있다. 족장시대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위시하여 제사장, 선지자, 현인 등 모두가 가르칠 책임이 주어져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종교와 교육이 구분 없이 동일시하여 토라(Torah)라는 한 단어로 종교와 교육에 공통적으로 사용했다. 토라(Torah)는 "율법" 이라는 의미로 번혁 되어 있으나 실제의 의미는 "가르침"이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인류를 위하여 계획하시고 계신 것을 성취하도록 하는 수단으로 교육을 실시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율법을 열심히 가르쳤다. 창세기 18장 19절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은 신앙을 그 자손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받고 자손들에게 열심히 종교 교육을 가르쳤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번제를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자녀들이 보고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책임을 배운 것이다. 이삭과 야곱의 경우에도 아브라함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순종함을 그 생활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애굽에 체류하는 동안 그들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영구히 살 수 있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보존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침내 노예에서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여 응답해 주신 것이다. 구약의 교육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과 교육: 하나님이 히브리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한 역사는 모세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 모세는 유아 때부터 그 생명이 보호 되였으며 가정교육이 원만하였고, 애굽의 향락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취하였다(히 11:24-25).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것도 일찍이 부모의 신앙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애굽에 있을 때 세속적인 유혹을 이긴 것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속박에서 구출하여 광야에서 방탕하면서도 성막을 짓고 백성들에게 예배드리는 법을 가르치고 십계명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본분과 사람에 대한 본분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다 부모에게 받은 종교교육의 힘이라 생각된다.2) 둘째, 부모의 교육:가정은 기본적 교육 장소요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부모는 자녀를 가르칠 책임을 가졌다.3) 셋째, 예언자의 교육: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세워놓은 교육적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교육을 사용하였다. 예언자의 말에는 능력과 감동이 있었고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함으로써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가르치게 하신 것이다. 넷째, 선지자의 교육: 진리를 탐구하고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하며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이었고 존경받는 교사들 이였다. 다섯째, 현인교육: 이스라엘 현인들은 이방나라의 현인들과 달리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 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여섯째, 토라교육(모세율법):유대인의 모든 생활을 규약한 이 율법은 모세 오경에 근거한 것이다. 이 율법은 광범위하여 정치, 사회, 종교, 공인범 등을 포함한 것이다. 이 법을 어기면 심한 벌을 받았다. 유대인의 교수법은 질의 문답식과 교리 문답식을 율법을 기초한 유대인의 종교교육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일정한 방법으로 율법을 반복하고 암송하며 실천하였다.4) 2. 신약시대의 교육 신약시대의 히브리민족도 구약시대의 민족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풍속 사상도 특별한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수의 탄생전과 후가 일반이였다. 그러나 국운에 따라서 생활과 교육제도는 다소 변동이 있었어도 신약시대의 교육기초를 예수님의 교육사상이 그대로 전수된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의 교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열거하려고 한다. (1) 예수님의 교육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철저한 교육자요, 전도자요, 위대한 스승이였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즉 하나님을 섬기는 수직관계와 인간의 올바른 관계, 즉 인간을 사랑하는 수평적 관계를 잘 맺는 일에 목표를 두고 대하는 이들에게 교육적 전도를 하였다(마 4:24).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전도하기도 하시고 가르치기도 하신 일을 볼 수 있다(마 11:1). 2천년 전 예수께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 같이 기독교 교육에 종사하는 지도자들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자인 동시에 복음적 전도자임에 틀림이 없다. (2) 예수님의 모범적 교수법 예수님은 훌륭한 교실이나 이상적인 교제가 없었다. 다만 때로는 수천 명, 때로는 두세 명의 제자를 가지셨을 뿐이다. 그때 그때 당하는 환경과 장소에서 가능한 자료와 방법으로 혹은 회당에서 혹은 강가에서 혹은 산에서, 혹은 길을 걸으며, 친구 집에서, 우물곁에서, 도시와 농촌 어디서나 만나는 이의 어려운 문제와 사정을 들으실 때마다 혹은 대화로, 이야기로, 비유로 몸소 행함으로 가르치셨다. 그의 교훈은 능력이 있었다. 첫째, 인격감화: 예수님의 교육은 겸손하고 참되며 인자하신 품격이어서 그 감화로 수 천명이 따랐다. 둘째, 인격존중: 사람들로 하여금 생에 대한 문제의 결정은 각자 스스로가 해결토록 장려하셨다. 셋째, 민주교육: 예수님은 사람하나 하나의 능력과 취미와 요구와 개인의 차이를 보시고 그들의 발달 상태로 동정과 인내와 사랑으로 깨달아 알도록 지도하시고 절대 자기주장을 따르라고 강압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 넷째, 실천실행: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교훈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여 밤새도록 기도 하셨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신 것만 아니라 몸소 제자의 발을 씻어 주셨으며 평등주의를 부르짖으신 것만 아니라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3) 초대교회의 교육 초대교회 혹은 사도시대의 종교교육은 주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이 베푼교육도 예수님의 교훈대로 행하였는데 곧 인간이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길과 그의 뜻대로 사는 길을 가르치셨다. 초대교회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내세를 동경하며 철학을 배척하고 사랑을 고찰했다. 따라서 신자교육과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지도자와 사도들은 회당에서 청소년 종교기관을 설치하고 성서를 가르치기에 힘썼으니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유대교회에서는 기독교 교육에 전문적으로 종사할 교사를 선출하고 따라서 교사양성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때에 모였던 집회장소는 회당보다 각기 신도의 가정에서 모였고, 자유스럽게 둘러앉아 자유롭게 질의하며 토론을 하였다.5) 3. 목회자의 교육적 기능 기독교 교육은 주님께서 부탁하신 위임사업이다. 주께서 부탁하신 말씀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어 네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런데 오늘의 교회지도자들인 목사들의 전도는 주의 부탁하신 일임을 강력히 주장하지만 교육은 주의 부탁이 아닌 양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목사마다 교회에서 전도사업 못지 않게 교육사업에 주력해야 한다. 교회의 기능은 예배, 전도, 교육, 친교 등이다. 목사는 교회에서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또한 전도와 교육의 기능은 상호 관련되어 있으니 교육을 통하여 복음진리가 전해지는 전도가 되며, 복음 진리가 다시 교육을 통하여 교인으로 하여금 신앙에 굳게 서게 된다. 전도도 교육을 통해서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신자가 된 동기와 경우를 보면 70-80퍼센트가 20세 이전에 주일학교6)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 구미 기독교 국가는 물론 우리 한국교회에서 현실에도 나타나 있다. 목사는 설교나 사경회를 통해 교육울 실시하게 된다. 설교는 교육적 성경을 지니고 있으며, 목사들의 모든 설교는 교육의 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설립당초부터 사경회를 가졌던 관계로 사경회의 중요한 가치를 인식하였다. 사경회를 통해서 부흥된 한국교회는 전 세계의 어느 선교지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부흥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가 이 사경회를 통하여 다른 어느 피선교지의 교인보다도 성경지식을 많이 알게 되었다. 또 복음이 널리 퍼졌다고 말 할 수 있다. (1) 목사와 교육프로그램 목사는 성경을 기준하여 먼저 청사진을 만들어야 한다.7) 사도들은 초대교회에서 프로그램을 가졌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 받았다(행 2:42). 그러므로 주 교육은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고 있으니, 그 이유는 강력한 교육적 계획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8) 다음으로 초대교회는 예배의 특징을 가졌다.9) 초대교회는 "떡을 떼며 기도하는 데 전혀" 힘썼다(행2:42). 신자들이 예배 보기위하여 출석하기는 하나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복음주의의 계통의 교회들까지 참예배를 상실한 느낌이다. 다음으로 초대교회는 봉사의 특징을 가졌다.10) 사도행전에서 주목할 관심사는 예배의 결과가 봉사에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일꾼들의 형편은 성령의 능력으로 봉사하기보다는 그들의 육신의 정욕으로 봉사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 까닭은 신령한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초대교회는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였다. 언제나 주님을 위한 실천적 봉사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고 가장 훌륭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마지막 특징은 성도들의 친교이다.11)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행 2:42) 그리고 "믿는 자들이 다 함께 있어"(행 2:44)라는 말씀은 성도들의 친교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친교를 깊이 맺고 있었지만 먹고 마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사업을 잘 하기 위하여 합심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은 봉사를 보다 더 잘하기 위한 데서 초래한 결과이며, 그들은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단합하여 하나가 된 것이다. 만일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이 네 가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미주] 1) 김폴린, [한국 기독교 교육역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2), p. 36. 2) 김폴린, [한국기독교 교육역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2), p. 39. 3) 잠언 1:7 "아들아 아내의 훈계를 귀담아 듣고 어미의 가르침을 물리치지 말라". 4) Ibid., p.45. 5) Ibid., pp.49-50. 6) 김득용, [주교교육학], (서울:충현출판사, 1973), p.16. 7) Hendricks,H.G. [목사와 기독교교육], 김득용 역. (서울:크리스챤 헤럴드사, 1971), p. 16. 8) Ibid., p. 17. 9) Ibid., p.19. 10) Ibid., p. 20. 11) Ibid., p. 21.
교사와 교회교육에 관한 연구(2)
교사와 교회교육에 관한 연구(2) http://mission.bz/6916세미나KCMUSA Ⅲ. 예수님의 교사상 예수님의 교육훈련에 앞서 예수님은 누구시며, 과연 예수님은 교육자인지, 가르치려고 온 스승인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호온(H.H.Horne)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한분의 교사로서 지니셨던 자질과 위대한 스승으로서 그가 지니셨던 성품 들을 취하여 그것으로서 우리들 자신을 한번 측정해 볼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이상으로 사 용할 수 도 있을 것이다".1) 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가르치는 스승으로,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 선지자로 앞날을 말하는 예언자로 그리고 병자를 치료하는 의사로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온 목적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가르치고 메시지를 전파하며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또 제자들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였다(마 28:10-20). 예수님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인물로 묘사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연구하는 각 계 학자들은 자기들의 입장에 따라 예수님을 정의하고 해석하며 지칭하고 있다. 사회 계획의 신학자들은 예수를 사회 혁명의 기수로 정의하였고, 묵시적 종말론자들은 예수님을 초자연적 신비와 기적을 베푸는 자로 생각하게 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육자들은 예수님을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교육자로 정의하는 것이다.2) 그러나 예수님을 이해함에 있어서 보다 넓은 다른 면을 제거한 채 한 면만을 강조함은 부당하다. 예수님을 구속사적 성취의 목적으로 볼 때 교사이상인 의미와 교사 이하의 의미가 있었으므로 해서 사람들을 참으로 가르칠 수 있었던 스승이였다.3) 1. 성서적 근거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마 8:19) 신약성서에서 4복음서를 기록한 기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선생이라는 호칭을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다. 한 서기관이 부를 때 "선생님이시여..."(마 5:35), 회당장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할 때에도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며"(눅 7:40), 예수님 자신의 제자된 시몬을 부를 때 시몬의 대답이 "선생님 말씀하소서"(요 1:38), 라고 하였고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보고 ''랍비''(선생님)이라고 불렀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마 4:23-25). 이 밖에도 예수님께 대한 ''선생님''의 칭호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요한복음 13:13절에서는 예수님 자신도 ''나는 선생''이라 표현하셨으며 키헬이 쓴 [신학사전]을 보면 예수님 자신을 선생이라 한곳이 29번 나오며,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디다스카로스(didaskalos,교사)라고 부른 것이 58번, 디다스카로스 대신 랍비(rabbi) 나 랍오니(raboni)라 부른 것이 14번 사용되었다고 기록 되여 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유대사회에서 제자들에게는 물론 그의 반대자들 혹은 일반인에게도 선생으로 인정 받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이나 성전, 혹은 공적인 장소에서 회중들을 직접 가르치셨으며, 제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작 할 때는 갈릴리 회당에서부터 시작하셨다(마 5:1-12). 당시 회당은 민중학교로서 유대인에게는 중요한 교육기관 이였다. 예수님께서도 이곳 회당에서 회중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성경을 가르치셨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이 대부분 이었다. 산상수훈(마 5장)은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가르치신 내용인데 이렇게 제자들에게는 산이나 바위 어떤 때에는 길을 지나 가시면서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 이였다(마 28:19-20).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교육방법은 서기관과는 달리 극히 대조적으로 권위가 있었다. 옛 유대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율법을 인용할지라도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위임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치는 형식이 따로 없으며 아주 알기 쉽고 단순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독립된 하나의 교사만은 아니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틀림없는 교사의 활동으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가르치시는 데에 본이 되신 분인 것을 볼 수 가 있으며, 뚜렷한 교육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 했으며 또한 다 이루셨다. 예수님은 그 뚜렷한 교육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목적을 가지고 최선의 방법을 가르쳤으며 그 목적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2. 예수님의 교육방법 예수님의 생애중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병을 고쳐 주신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일반적으로 선생님으로 부른 사실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능력에 있어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명한 교사는 교회의 기본 신앙안에서 그들 자신이 경험하고 발견 될 수 있도록 올바른 행위의 내적 근원과 만나도록 학생을 돕는데 힘써야 한다".4)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을 찾아 나서 제자들을 스스로 깨닫도록 유도하신 것이다. (1) 구전 교육방법 예수님은 가르치는 데 입으로 전하는 구전 교육을 중심으로 하였다. 글로 쓰거나 쓰기 하면서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로 가르치셨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글씨를 쓴 기록은 한 번 군중에게 잡혀온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 땅에 쓴 것(요8:18) 밖에는 없다. 그가 가르친 국언, 명구, 신앙과 도덕 등 결정적으로 지은 모든 말씀 곧 " 하나님의 신학"은 모두 갈릴리 농부와 어부들의 기억을 정리하여 문자로 기록된 말이다.5) 구전식 교육방법은 위험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씨를 뿌리는 농부가 곡식이 결실할 때까지 계속 돌모는 것처럼 예수도 가르친 말씀에 대해 계속 돌보아 주셨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목적을 달성하였다.6) (2) 사건과 현장중심 교육방법 예수의 교훈 대부분은 충분한 원인을 가진 사건과 현장에서 추출되어 나왔다. 어떤 특수한 사건에도 미리부터 생각하고 목적한 사실을 말하고 진실을 설명하였다. 회당에서 반신불수 만난일(마 12:10) 길가에서 귀족청년과 대화(마 21:16), 제자들의 돌연 논쟁(눅 9:46),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마 22:17) 등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자기가 목적하는 교훈을 주었다. 예수님의 교훈 대부분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사건에 관련하여 준 것이지만 지금도 그 교훈은 진리이다.7) (3) 감명을 주는 교육 방법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청주의 입장이 되어 교훈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가 가르친 교훈은 듣는 청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예를 들어 청중은 모세의 율법에 의문을 가지기 때문에 예수는 율법으로써 자기의 교훈을 전개하였고, 거기서 또한 하나님의 더 좋은 율법의 말씀을 전하였다. 또 청중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쏟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나라 없는 처지에서 영적 국가인 하늘나라에 대하여 말하였다.8) 그가 쓰는 말은 청중들에게 맞는 단순하고도 직접적이며 박력 있는 용어들이었다. 그래서 듣는 이로 쉽게 이해하고 감동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급하거나 조급하게 말하지 않고 차분히 단계적으로 가르쳤다. (4) 질문과 답변형식 교육방법 질문의 형식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특별한 방법이다. 예수님 자신이 많은 질문을 던지셨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질문을 하도록 권장하였다. 예수님의 질문을 분석해 볼 때 몇 개는 단순히 알기 위하여 물어 보신 것이 있었으나(막 6:38, 8:23, 눅 8:30)대부분은 명확한 교육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유할꼬?"(막 4:30)하는 물음 후에 그가 바랐던 생각을 이야기(비유)로 차근차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대하여 항상 친절하며 조심성과 동정심을 가지시고 답변하셨다. 항상 묻는 말에는 진지한 태도로 임했으며 진실한 질문에 대하여는 결코 경시하지 않으셨으며 조롱에 대해서도 방임하지 않고 결과는 회피하지 않으셨다. 3. 예수님의 교육목적 (1)구속의 목적 예수님의 이상은 상당히 놀랍다. 그러기에 선한 생을 위하여 사랑을 나눠주심으로 사셨기에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눅 10:10). 또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요 10:10)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생명력이 없는 사람에게 풍성하고 넘치는 생명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오셨으며, 그렇게 사셨고, 가르치셨고 기록하고 있다. (2) 육체적 안녕의 목적 사람에게 있어서 질병으로부터의 고침은 예수님의 사업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마 2:16). 그러나 몸의 가치는 영혼의 가치에 비교할 수 없이 약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 하시고 육체적 안녕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셨으며 육체적 치유를 통해서 심령상의 축복을 도모하도록 모색하셨다(마 9:2-8;). (3)올바른 행위의 강조목적 예수님께서는 간접적 암시뿐 아니나 직접적 격려로 행위를 변화시키기에 힘쓰셨다. 부자가 죄를 지게 된 것은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걸식하는 자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눅 16:19-31). (4) 건설적인 성격의 목적 예수님의 교훈은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규제보다는 하라는 적극적인 이상과 충성을 내세웠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금지된 것을 생각하지 말고 선하고 아름다우며 참된 것을 하라고 권면하신 것이다. 4. 예수님의 교육형태 예수님의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형태는 설교(preaching)며, 이 설교에서 다가오는 사건에 나팔부는 사자로 또한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는 전도의 의미가 내포되어져 있다.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의 생활과 함께 그 현장 한복판에 찾아가셔서, 그곳에서 대화하면서 가르치셨고, 가르치실 때마다 인간 생활전체가 곧 설교의 장이 되었다. 가르치는 방법은 비유(parable)이였으며 청취대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바리새파사람, 로마사람, 서기관:-율법을 절대적 가치 규범으로 삼고 예수님의 말씀을 비판적인 (논쟁적 성격, 변증적 언어); 둘째, 대중들: 이적을 기다리는 무리들(기적과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 선포) 셋째, 제자들: 자기가 직접 부른 사람들과 함께 다니시면서 행하시며 바리새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고난받는 자의 종으로서의 자기 정체를 알려 주셨다. 쉐릴(Lewis Sherrill)교수는 예수님의 교육형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청중들에게 맞추어 적응된 것; 예를 완벽하게 들고 있다. 셋째, 간단하지만 논리적이다. 넷째, 자연에서 나온 것이다. 다섯째, 진리를 고양시키고 나아가서는 진리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여섯째, 진지할 뿐 아니라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특성을 조심 있게 그리고 다양한 접근을 하셨던 예수님의 교육 형태는 모든 계층에 대한 복음을 증거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1) 권위 있는 교육 형태 예수님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추측이나 불확실한 상징적인 내용들이 없다.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 함이니라"(마 7:28)고 기록한 것처럼 권위가 있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등의 자신 없는 표현이 없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마 23:36-39) 와 같이 확신 있게 말을 했다. 그는 자기의 사상을 자기 스스로 말할 수 만 있었다면 대단히 훌륭한 사상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기관들의 사상과 그 처지를 일축해 버리고 전설을 기초로 삼고 있는 그들의 사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옮겨 놓았다.9) 예수님의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하는 권위 있는 태도에 군중이 감동을 받고 그의 체험을 통한 사실과 진리의 말에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 분을 만났다(요 3:2; 4:29)고 믿고 말하게 되었다. 그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비웃고, 놀리고, 비판하던 산혜드린 회원도 결국 그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었다. (2) 인내를 가진 교육 형태 예수님은 그가 가르쳐야만 할 사람에게 대하여 놀랄만한 인내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제성을 띠고 이끌기를 거절하고 그들에게 자기의 의지대로 강요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매우 존중하였다.10) 그는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기적의 힘을 아무렇게나 쓰지 않으므로 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현혹을 주거나 판단을 그르치게 하지 않았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의 기본이 되는 말씀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하였다. 예수는 강요의 방법을 쓰지 않고 권유로 "나는 진리이니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진리를 발견하리라"(요 7:17)고 하였다. (3) 인격존중 교육 형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기의 결정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교육원칙이었다. 이것은 개개인의 인격존중이며 자아인식의 문제이다. 일찍이 그리이스의 소크라테스도 교육에 있어서 지식인이 무지한 사람들에게 지식을 정리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색과 탐구를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무비판적으로 의견을 수용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오직 자유로운 대화를 통하여 보편적인 개념 즉 진리에로 가려고 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동시에 학생들도 그러한 존재임을 확신하였다.11) 소크라테스가 그처럼 개인적인 대화를 통하여 사고하게 하고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유도했던 것이 그를 그토록 위대한 사상가와 철학가로 만들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의 교훈으로서 세계가 일찍이 경험한 사실을 상기하게 하고 또 의문을 가지도록 크게 자극을 시키기도 하였다. 예수는 어떤 문제에 해답을 주었다기보다는 세계에 문제를 제시하고 세계로 하여금 거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 자신의 영적 통찰력과 실제에 대한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하였다.12) (4) 모본의 교육 형태 예수는 자신이 교훈한대로 실천하여 본을 보여 줌으로 교육의 진실성을 나타냈다.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애매하거나 추상적이거나 불확실하지 않고, 분명하고도 뚜렷하게 본을 보여주는 사랑의 방법으로 교육하였다.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교사 자신의 존재로서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교육학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인격의 영향력 때문이다. 사람은 인격을 지닌 사람들과의 만남으로부터 배움을 갖게 된다. 동기유발적 암시나 모방의 이름이 붙은 모든 것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과 더불어 만남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 자신의 주변에 두시고 그들을 각기 다른 상황들 속에서 "부르심"을 통하여 따르게 하였다. 열 두 제자들을 훈련시킴의 가장 큰 비결은 인격적인 교제였고 그 주된 목표는 봉사에 있었다.13) 현대에서는 제자를 삼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정기적인 교제에 주안점을 두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아임스는 말하고 있다.14) [미주] 1) H.H.Horne, [예수님의 교육방법론], 박영호 역, (서울:기독교문서 선교회, 1983), p. 11. 2) 천정웅, [교사이신 예수님], (서울:지혜문화사, 1983), p. 11. 3) 정웅섭, [기독교 교육개설] (서울:대한기독교 교육협회, 1989), pp. 113-115. 4) 김문철, [교회 교육사론], (서울:종로서적, 1989), p. 22. 5) 스튜어트, J. S. [예수의 생애와 교훈], 문창수, 김성수, 역 (서울:정경사, 1981), p. 98. 6) Ibid., p. 99. 7) Ibid., p. 100. 8) Ibid., p. 100. 9) Stuart, J. S. [예수의 생애와 교훈], 김성수 역. (서울:정경사, 1981), p. 103. 10) Stuart, op. cit., p. 104. 11) 신득렬, [교육사상 연구], (대구:계명대학교 출판부, 1970), p. 91. 12) Stuart, op. cit., p. 105. 13) H.H.Horne, op. cit., pp. 179-180. 14) Liroy,Aims, [제자삼는 사역의 기술], (서울:한국네비게이토 선교회, 1981), p. 63. 이 게시물을...
교사의 리더십
교사의 리더십 http://mission.bz/6925세미나 김기제목사 (크리스천 리더십 연구소) 서론 교사로서 나는 누구인가? 교사는 학생들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교사는 단순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만이 아니다. 지식을 가르치고 전달함으로 영향을 주어 설득하고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사로서 리더십을 생각해 보 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분야이건 지도자는 영향력을 주어 변화를 이끌어 내는 사람이라고 가정할 때 리더십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목표와 전략과 프로그램 등을 개발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변화시키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자 질에 관한 요소들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오늘 저는 교사의 직무를 수행하기 전에 교사로서의 소명과 자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싶습니다. 자신에 관해 잘 정립되어 있는 교사는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교사의 직무에 충실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교사는 누구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먼저 생각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사람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하나님을 아는 일과 이해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교사는 잘 가르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올바로 가르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혼돈하는 하는 것은 잘 가르치면 올바로 가르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가르치는 것, 인기 높은 것과 올바로 가르치는 것은 다릅니다. 교사들은 잘 가르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올바른 것을 먼저 습득한 자이어야 합니다. ''옌틀''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인 바바라 스트라이센트는 우주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섭리를 알기 위해 남장을 하고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사는 하나님을 먼저 아는 일에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J.I. Parker는 Knowing God이란 책은 하나님을 알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교사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성숙한 교사가 되기 위하여 아래의 사항들을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이 것들을 마음에 품기를 원합니다. 1) 교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2) 교사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사람이다. 3) 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4) 교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2. 본을 보이는 사람 교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시키는 대로 혹은 지시하는 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사가 행하는 대로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교사는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혹시 나의 행동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을 변화시키려면, 교사가 먼저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학생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막연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을 보기 원합니다. 교사가 예수의 모델이 되어 줄 때 학생들은 쉽게 이해하고 변화되어 질 것입니다. 본을 보이면서 지도하는 교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교사는 하나님 말씀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2) 교사는 학생이 말하는 대로 행하지 않고 보는 대로 행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교사는 학생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4) 교사는 교회의 주요 지도자임을 자인해야 합니다. 3. 섬기는 사람 교사는 학생들이 많이 배우고 확신에 거하도록 돕는 사람이지 학생들 위에 군림하여 지시하거나 지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교사는 학생이 영적 유익을 누리도록 안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대접받기 위하여 학생들을 이용하려는 생각은 머리에서 지워버려야 합니다. 교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학생들을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주고, 그들이 음란, 폭력과 거짓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지키고, 그들이 더욱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지도자들은 조금 더 높아지려고, 조금 더 권력을 행사하고, 조금 더 대접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사는 학생을 위해 존재한다는 섬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1) 교사는 지시와 명령만을 통하여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2) 교사는 권위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며, 활용하는 사람입니다. 3) 교사는 학생들의 발전과 성숙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입니다. 4.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교사는 학생의 정체를 용납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교사는 학생들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학생들의 인격적, 학문적, 그리고 사회적 성장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사에게 중단이란 없습니다. 교사는 더 높고, 고결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학생과 함께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보다는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더 발전할 수 없기 때문에 선생은 학생보다 항상 앞서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먼저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배우며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훌륭한 교사는 훌륭한 학생입니다. 먼저 주일학교 지도자는 훌륭한 학생이 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1) 교사는 학생의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2) 교사는 학생의 정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3) 교사는 더 큰 성장과 성숙을 추구해야 한다. 5. 열정적인 사람 지도자는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동력을 일으킬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 에너지가 바로 리더십에 있어서 열정입니다. 열정은 마치 조그만 불씨가 큰불을 일으키듯이 학생들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사는 열정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사는 학생을 사랑하고 가르치고 훈련하는데 있어서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계획이 좋고, 목표가 분명하더라도 그 계획을 실천하거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열정이 없다면,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경제, 정치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이것을 추진력이라고도 합니다. 결국, 열정적인 사람은 확신을 갖고 시작합니다. 열정적인 사람은 소망을 갖고 진행합니다. 열정적인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열정적인 사람은 인내하며 견디며 참아냅니다. 1) 교사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변화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2) 교사는 열정을 발산해야 한다. 에너지에서 힘을 발산해야 한다. 3) 교사는 긍정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결론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이 말씀은 선생을 격하시키는 것이거나 선생이 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왕에 교사가 되려면 영향력 있고 학생들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열정적인 교사가 되라는 것이다. 학생은 훌륭한 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교사로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늘 교사의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교사의 사명과 역할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항목은 어느 것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발전시켜 나아 갈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제 시해야 할 것이다. 이 게시물을...
교회 안에서의 반낙태운동
교회 안에서의 반낙태운동 http://mission.bz/6897세미나 김현철 (목산교회 목사) 필자는 개인적으로 1983년부터 낙태반대홍보를 준비하여 1986년 미국에 유학 중일 때 교회 안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2년이 지났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낙태반대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고 낙태반대홍보요원으로 헌신하는 분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여러 종류의 대상자들, 여러 단체를 접촉했을 때 가장 접근하기 어렵고 문을 열기 어려운 대상은 놀랍게도 교회였습니다. 지도자들이 "긁어 부스럼 낼 필요가 없다” 는 생각에서인지 선뜻 홍보의 자리를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왜 생명의 창조주를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생명문제에 대해 눈을 지긋이 감아 버리는 것일까? 그 이유를 이렇게 진단해 봅니다: 첫째, 무지해서 입니다. 뱃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낙태가 너무나 보편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도 유경험자들이 많기 때문에 당당히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셋째, 교회의 선교개념이 폭 좁아서 입니다. 교회가 사회적인 대외활동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요인들을 없애기 위해서 바로 교회 안에서부터 반낙태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포함한 교회 안의 그리스도인들부터 자유를 경험해야 그 교회가 밖으로 나가 생명존중을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반낙태운동이 어떻게 실현되어 왔는지 필자가 지체로서 몸 이루고 있는 목산 교회의 실례를 소개함으로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목산 교회의 예 낙태는 살인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일보다도 낙태를 저지하는 일에 먼저 뛰어들었습니다. "11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12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증하시리라.”(잠언 24:11, 12)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1988년 개척초기부터 낙태반대홍보를 제1의 선교활동으로 삼아 일해 왔습니다. 교회 내에 ''태아를 위한 모임’을 두어 자체교육하고 자체 활동합니다. 1994년부터는 ''낙태반대운동연합’의 발기단체가 되어 기독교단체들의 낙태반대운동에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는 낙반연의 공동실무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목산교회에서는 낙반연 서부사무실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년 10월에는 정기적으로 동숭동 대학로에 나가서 길거리 홍보를 합니다. 매년 4월에는 1,2주간 ''생명주간’을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생명들에 대해 생각하고 기도하고 행동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낙태, 장애인, 동물살해, 가정폭력, 성범죄, 환경파괴, 안락사 등 자연계의 생명질서에 역행하는 일들을 상기합니다. 이렇게 낙태반대를 선교활동화하는 데는 선교의 개념을 분명하게 정립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교회지침서에 있는 내용입니다: 믿는 자(개인)들이 모여 교회(집단)를 이룬 이유는 서로의 신앙성장을 돕고 성장된 믿음을 사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기도한 결과는 선교활동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교회가 교육(성경교육, 신앙훈련, 선교교육)한 결과는 선교활동으로 검증됩니다. 만약, 교회가 선교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왜 있어야 하는지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전도란, 예수 믿은 개인이 아직 예수 믿지 아니한 개인에게(특별한 경우에 집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소개하고 구원의 길로 초청하는 행위입니다. 선교란, 궁극적으로 전도가 이루어지기 위해 행하는 신자들(교회)의 모든 대외활동을 가리킵니다. 기독교의 본질과 윤리를 말과 행동으로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적인 움직임, 즉 선교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선교활동이란, 교인이 아닌 사람들 중 어떤 특정한 필요가 있거나 특별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들을 돕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선교활동은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문제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다. 교육 단 1회의 교육으로 의식화가 되고 활동에로의 헌신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인 홍보와 정보제공과 설교로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낙태에 대해 교회가 공통의 윤리의식을 갖게 되는 데는 몇 가지 기초작업이 있었습니다. 1. 회중의 눈치를 보지 않는 분명한 설교가 자주 있었습니다. 생명윤리에 대해 2. 매월 있는 구역모임(다른 교회 구역모임과는 성격이 다름)에서 사회문제와 선교활동에 관한 주제들을 이야기하도록 인도했습니다. 생명에 관한 주제를 많이 다룸으로 의식이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공해, 인공수정과 대리모, 핵문제, TV 중독, 윤락, 광고의 노예, 소년 가출, 사형제도, 과로사, 뇌사, 만화 공해, 마약, 시험관아기, 인간복제, 안락사, 에이즈, 청소년 자살, 성감별과 여아낙태, 입양 등을 이야기 주제로 삼도록 하고 필요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3. 일년에 몇 번은 성경공부시간에 낙태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4. 신앙훈련 프로그램인 『주요 윤리문제』인 과목에서 낙태에 관해 2주 동안 자세히 가르 쳐줍니다. 5. 4월 생명주간에 가장 많이 다루게 되는 주제는 역시 낙태입니다. 전 교인을 대상으로 생 명 지키기에 헌신할 것을 촉구하는 설교와 함께 여러 종류의 낙태비디오가 상영됩니다. 6. ''태아를 위한 모임’ 에서는 낙태문제에 관해 전문적인 교육을 합니다. 7. 낙태반대운동연합에서 주최하는 정기 세미나에 많은 교인들을 참석시켜 낙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윤리문제에 대해 교육받도록 합니다. 기도 매주 수요일 중보기도모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만 하는 모임)에서는 일년 내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이 지켜지기를 기도합니다. 헌금 교회 자체의 낙태반대활동을 위해서는 늘 예산이 잡혀 있습니다. 낙태반대운동연합과 같은 생명운동 단체에는 정기적인 후원금을 보내고 있고 교인중 개인이 지정 선교헌금을 하면 그것도 후원금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매 가정에는 낙태반대운동후원을 위한 저금통이 있어서 3개월에 한 번씩 동전 모으기를 하여 낙반연에 보내기도 합니다. 활동 교회에서 ''태아를 위한 모임’을 발족할 때의 기획서를 보면 활동하고자 하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아를 위한 모임 발족 - PFU(People For the Unborn) 1994년 7월 24일 목산교회 선교활동내용 : 낙태반대운동 대 상 : 교회+ 비 교회 (전국) 관 련 단 체 : 낙태반대운동연합, 새생명사랑회, 생명을 아끼는 모임, 한국누가회, 기독교 윤리실천운동, 마리아수녀회 1. 7월 24일 선교활동그룹 첫 모임-브리핑 2. 시급한 과업들 : ① 9월 정기국회를 대비한 개정형법안 135조 반대서명 ② 9월 국회 앞 시위참여 ③ 8월 1일 김영삼 대통령 탄원서 ④ 침례신학대학교, 수도침례신학교 교수님 동참권유 편지 발송 ⑤ 각 교회 (강서 지방회 교회들 필수) 및 신학교에 반대서명 권유 편지 발송 ⑥ 송정미 자매에게 ''생명운동’에 관한 캠페인 노래 제작 권유 편지, 자료 발송 ⑦ 자동차 스티커 도안, 제작 ⑧ 낙태반대운동홍보용 비디오테이프 제작계획, 라이센스 취득, 제작사 문의 3. 기본활동계획 : ①자체교육과 활동을 위한 정기모임 ②새로운 교인들 정기적으로 낙태반대홍보 ③낙태 유경험자 개인상담 ④낙반연 관련 운동에 적극참여 ⑤낙태반대홍보요원 발굴, 훈련, 파송 4. 담당자 선정 : ①팀장 (대표, 지도) ; ②총무 (행정, 자료관리, 연락) ; ③낙반연 연락담당 (낙반연 연락, 연합사업, 후원금 송금) ; ④교육담당 (자료확보, 자체교육) ; ⑤홍보담당 (대외 낙태반대홍보 전문요원) ; ⑥기획담당 (낙태반대운동 기획, 자료 기획, 출판, 배포) ; ⑦언론담당 (자료 스크랩. 신문기사, 라디오, TV 방송) ; 1. 낙태반대운동연합에서 계획한 모든 활동에 목산교회는 참여합니다. 여러 단체에서 낙태 반대홍보를 요청할 때 목산교회 교인이 출장강의를 합니다. (권위주의적인 사회풍토 때 문에 어려움이 있기도 합니다. 강사초빙을 할 때, 전도사나 평신도가 간다고 하면 No하 는 어리석은 교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2. 10월에는 1회 이상 대학로 길거리홍보에 나섭니다. 3. 자체적으로 낙태반대홍보에 필요한 자료를 제작합니다. 4. 교인들이 일상생활 중 지역주민들에게 전도하듯이 낙태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필요하 면 몇몇을 모아 집에서 홍보합니다. 6. 낙태와 관련하여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미혼모 위탁보호, 기형아 출산 의료 비용, 성형수술비용 부담 등. 7. 개인상담에 응해서 필요한 단체와 연결시켜 주든지 자체적으로 도움을 제공하기도 합니 다. 8. 낙태문제와 연관하여선교활동의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1) 미혼모 보호시설인 애란원과 연계되어, 복음전도, 초기양육, 낙태반대홍보, 혼전순결서 약 등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2) 혼전순결서약을 교회 내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필요로 하는 단체에 자료를 배급하고 있 습니다. (3) 한국에이즈연맹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한국교회가 교회당 안에 갇혀서 개인의 영적인 이익과 즐거움만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받은 바 은혜를 적극적으로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인구의 1/4 이 기독교인으로 통계 잡히는 나라가 어찌 술천국, 담배천국, 윤락천국, 기아(棄兒)천국, 입양아수출천국, 교통사고천국, 과로사천국, 포르노천국, 마약천국이 될 수 있습니까? 대오 각성하여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립시다. 예수님 설교의 한 부분은 "개인신앙은 사회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조용한 사람들’ 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결코 조용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 게시물을...
교회성장가이드 // 뒷문을 막아라!
교회성장가이드 // 뒷문을 막아라! http://mission.bz/6912세미나 KCMUSA 미국교회 교인의 1/3이상은 비활동교인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들 중 상당수가 과거에는 교회봉사에 헌신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 어디서,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이탈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교회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가? 미국 감리교회에서 교회를 이탈한 사람들에 대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원인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나타났다. 교리적인 문제, 거리감, 목회자와의 분쟁, 성도들과의 분쟁, 가족원의 죽음이나 이혼문제,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교회가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 내에서 돌봄을 받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교회를 떠나게 된다. 활동적인 교인 50명과 비활동적인 교인 5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전자는 교회에서 평균 7명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 것에 비해 후자는 2명의 친구들을 사귄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런 그런 설교나, 열악한 시설, 제한된 프로그램, 그리고 어느 정도의 더딘 영적 성장에 견딜 수 있을지 모르나 친구가 없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언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는가? 이탈교인들의 80%는 등록한지 1년 내에 교회를 떠난다. 처음 1년이 문제다. 미국의 교회성장 전문가 챨스 안이 조사해서 발표한 것에 의하면 새신자들이 등록한 후 수주 내에 대다수가 떠나며, 다음에는 6개월 정도가 지나서 그리고 1년이 되어서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등록한지 수주만에 교회를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소개된 세미나나 특강에서 지적한 문제로 함축된다. 즉 교회 시설이나 안내, 예배 등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6개월 후와 1년 후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이다. 처음 6개월을 다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한다. "내가 이 교회에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까?""이곳이 나한테 맞는 곳인가?" "이 교회는 나를 필요로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등록한지 6개월만에 교회를 떠난다. 6개월 이후에도 교회를 다니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이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게 된다. "이 친구들이 과거의 내 친구들 보다 좋은가?" "이 모임은 내 필요를 떠나게 된다. 어떻게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을까? 조사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교회를 떠나는 데는 8-12주가 걸린다고 한다. 목회자는 적어도 이 기간 내에 떠나려는 사람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보화를 알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교회출석이다. 사람들이 특별한 이유 없는 예배나 모임에 결석을 하게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문제가 있다거나 "누가 나에게 신경을 좀 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이때 그들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으면 그들의 의구심과 외로움을 더욱 커지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다. 둘째, 헌금생활의 변화이다. 교회는 교인들의 신앙생활과 함께 헌금생활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목회자가 누구는 얼마 냈는가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헌금생활에 변화가 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돈을 통해 전해지는 그들이 변화이다. 그러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최상의 방법은 예방이다. 비활동 기간이 길수록 치유는 어렵게 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할 경우, 다음과 같은 방법을 참조할 수 있다. 1. 시련을 겪게 될 때 교회가 도움을 주라 시련 속에서 사람들은 수용적으로 변한다. 이탈교인의 가족원 중 누가 아프거나 자녀가 입시에 실패했을 때, 가장이 실직이나 은퇴를 하게 되었을 때와 같이 그들이 겪는 생활의 변화에 교회가 다가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게 되면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다. 2. 새로운 것을 시도하라.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종종 다시 교회를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색하기 때문에 기존 모임에는 참가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소그룹을 개발하라. 예배를 새롭게 함으로 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할 수도 있다. 새로운 목회자도 이탈 교인들이 다시 교회를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목회자들은 많은 가능성이 있다. 기존의 이탈자들을 심방하라. 3. 이탈 교인들을 전도 대상자로 이해하라.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해온 신자들은 불신자 친구들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아서 전도에 많은 한계가 있다. 그들 주위에 있는 이탈자들을 전도 대상자로 인식 시키라. 이미 ''잃은 양 찾기 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4. 이탈 교인들을 교환하라 인근지역 목회자 3-4명이 모여 각 교회의 이탈교인 명단을 교환한다. 그들의 특성, 가족관계, 주소, 전화번호와 같은 정보를 교환한 후 각자 전화나 편지 등을 통해 연락을 취한다. 상처를 입은 교회가 아닌 새로운 인근 교회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준다면 새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교회성장과 임원관리
교회성장과 임원관리 http://mission.bz/6917세미나KCMUSA 1. 서론: 21세기의 목회전략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목회적 역량이나 지침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목회하기 위한 방법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옛말에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충성스런 교회임원이 있다 할지라도 그 지도력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임원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문제 인식과 21세기의 목회적 전략이 바뀌어 나가는 이 시대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임원을 관리하고, 교육하며, 그 지도력을 결합시켜 교회 성장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회의 관심이라 할 수 있다. 협성대의 임영택 교수에 의하면 목회 구조가 변화하고 있는 21세기는 그 초점이 "세계화와 정보화"라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미감리교 제자국의 "21세기의 교육 목회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교회의 임원관리에 상당한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① 신앙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목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② 신앙은 안정과 현상유지의 차원이 아니라 비전을 창출하는 차원이 되어야 한다. ③ 목회는 개인중심 보다는 신앙공동체의 성격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④ 목회는 전통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경험을 주어야 한다. ⑤ 잘 만들어진 커리큘럼보다도 살아있는 커리큘럼, 즉 지도자의 성숙성이 구축되어야 한다. ⑥ 지도자에게는 전문성보다는 영성을 개발하도록 그들의 지도력에 용기를 부여해야 한다. ⑦ 연령층으로 구분하는 목회보다는 회중의 삶이 통합되는 목회의 방향이 필요하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교회의 임원관리는 세 가지 초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는 적극적인 영성과 제자도의 고취와 통전적인 교육 과정을 통한 임원관리이다. 이를 위하여 교회임원을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요, 제자로써 그 역할을 감당하도록 돕기 위해 제자도의 기본 원리와 역할을 재고한 후 임원을 위한 영성 교육과 지도력 개발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교회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본다. 특히 작은 교회는 새신자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문제점과 목회자의 기획능력을 불신하고 재정적 지원이 어려우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목회자의 심사숙고와 지도력 개발도 병행되어야 교회의 임원관리가 더욱 효과적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소고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임원이 제자직을 잘 감당하기 위한 기본적 목표 설정과 임원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임원을 위한 영성훈련 및 교육과정을 살펴본 다음, 현 시대가 요청하는 임원 자신의 지도력 개발을 통해 임원을 관리하는 여러 근거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2. 제자로써의 교회 임원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란 그야말로 자기 자신의 내면의 깊이를 체험하면서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며, 말씀의 실천을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살아가는 책임적인 존재이다. 또한 "제자도(Discipleship)란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계획"이다. 절망과 파괴를 향해 나아가는 이 세계를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봉사만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계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란 결국 교회의 회원일 수는 있으나 영적인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목적으로 하여 성장이란 결과를 따라오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는 늘 성장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찬다운 성장을 가져오질 못한다. "성장은 바로 생명의 결과" 이며, 생명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가끔 잊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제자도를 통해 훈련되고 성장하는 임원으로서의 가치를 먼저 정립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1) 제자 양성의 목표 카알 윌손에 의하면 제자양성의 목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충만하도록 이끌고 개인적으로나 단체로써 성장하는 도와주는 것" 이라 하였으며, 오르티즈 목사에 의하면, "제자란 그의 스승의 삶을 살도록 요구받는 사람이다. 그 다음에 점차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삶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제자 양성을 위한 목표를 원종국 목사는 세 가지로 잡고 있다. 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제자,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죽도록 헌신하는 제자, 제자 양성 사역에 헌신하는 제자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제자도는 지식의 전달이나 홍보가 아닌 생명의 교류이며, 교회에 입문시키거나 교훈하는 것 이상이며,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영적 재창조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옥한흠 목사는 제자훈련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제자훈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라면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제자는 "예수의 제자"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표준이며 목표"라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제자도이며, 올바른 제자 양성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임원의 제자화는 보다 철저한 신앙관과 말씀의 실천을 위한 의지가 분명한 신자로 양성하는 것이다. 제자양성의 목표가 분명하지 못하면 이는 결국 임원의 부실함과 영적 불순종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그분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따르라는 부름을 받은 것이며,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셨고, 그분을 따르면 고통을 당할 것임을 경고하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가르치셨다. 또한 그분은 어떤 원대한 미래를 드러낼만한 경제적, 지적 능력을 소유한 이들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을 부르셔서 그 분이 제자로 삼으셨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현대 교회의 임원교육에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임원 역시 보통사람들에 의해 시작되는 작은 신앙공동체로써 출발하여야 한다. 그 신앙 공동체를 속회로 파악하고, 속회를 통한 신자의 관리와 실천적 제자도를 심어줄 필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왓슨의 "이것은 속회이다"라는 저서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왓슨에 의하면, 감리교 신앙은 의화에 의한 제자직을 통해 역동적인 운동 으로 발전하였으며,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제자직이 교제를 통해서만 육성되고 발전될 수 있음을 파악하였고, 교회속의 작은 교회인 속회조직으로 활성화하였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피상적인 교제나 교회출석, 헌금과 기도생활이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이다. 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 한 몸, 한 지체로써의 의식과 그리스도안에서의 연합 없이는 진정한 제자의 길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진정한 제자도를 통해 서로를 강한 사랑에로 헌신하게 하며, 그 연합을 현실화시켜 나갈 때, 살아있는 유기적 교회가 되어지며, 임원의 역할을 바로 감당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제자 양성과 임원 제자를 양성하는 것과 임원이 된다는 것은 결국 평신도들의 사도적 직분을 강화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위한 원대한 계획에 동참하도록 임원의 역량을 증대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봉사자로써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는 시간 안에서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역사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수행해야한다. 교회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피상적인 대화나 의식에의 참여가 아니라 가족적인 영성을 고취하는 동시에 한 동포, 한 겨레 이상의 힘으로 연대하면서 주님의 뜻을 함께 나누며 성장해 나감으로써 변화된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순례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몸, 한 유기체로써 조직화되고, 서로를 격려하며,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올바르게 감당하면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성령의 친교 안에서의 공동체로써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영에 의해 삶의 능력과 해방경험을 통하여 주님 앞으로 나아가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삶의 성화를 이룩해 나가는 거룩한 친교를 이루어 내야 한다. 이러한 교회는 신앙의 주체성을 되찾아 해방하는 믿음을 선포하며, 사귐을 통한 자유를 만끽하며, 희망을 위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주님의 성령을 통해 변화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관을 통해 임원들은 자기의 소양과 은사를 개발하여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생명을 살찌우고, 새롭게 하는 일에 최우선으로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교회의 임원은 먼저 이러한 제자 양성의 길에 첫발을 들여놓은 신자들로써 철저하게 제자화 되고 양육되지 않으면 오히려 옥상옥을 짖는 결과만을 만들어 내어 교회의 권위적 요소만 부각되어 결국 교회의 본질인 선교적 역량을 감당해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은 선교이며, 그 선교의 목적은 바로 정의이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도덕성 뿐만 아니라 사회정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성서는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창18:19, 암5:24, 사1:16-17) 교회의 임원이 올바른 교회관과 사명의식 즉 종과 섬김의 자세로 교회를 돌보지 아니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미래를 드러내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에 의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이 실천적 행동에, 선교단체들은 인격적 형성에 그 전략의 우선권을 두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제자도의 기본원리가 인격적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성서에 대한 편향적인 이해일 뿐이다. 인격적 변화를 우선했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인격을 온전히 갖추었을 때에까지 선교를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무능과 깨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영성훈련과 실천을 반복적으로 했다는 것은 복음서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제자도는 지행일치의 제자도 즉 학구적 노력이 우선되는 주자학적 관점이 아닌 양명학적 지행합일의 추구를 통해 실천의 해석학적 순환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3) 임원의 제자직 교회의 임원은 곧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쟁기를 붙잡고 뒤돌아보지 않으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선택받은 백성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분명히 깨닫지 않고서는 임원으로써의 영성의 고취와 자아 성취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제자로서의 임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1세기에 활동했던 사도적 직분을 평신도로써 감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어떤 이들은 평신도 사도직이라 한다. 임원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평신도 지도자이어야 한다. 평신도의 지도적 역할은 다양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기능론적 입장에서 네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이는 목회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관리적 기능과 봉사의 기능이다. 평신도의 교회에서의 기능이란 목회적 보조자로써 목회자의 기능을 위한 협조자로써 목회적 교육적 기능을 감당하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목회자라 할 지라도 교회의 모든 기능을 혼자서 처리할 수 없다. 구약성서 시대에도 모세는 목회적 기능의 일부 특별히 재판 및 관할에 관한 여러 권리들을 일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과 나눔으로써 좀 더 효율적으로 행정을 처리하였을(출 17:13-27) 뿐만 아니라 과중한 업무에 대한 부담을 나누면서 영성 훈련을 위한 시간을 더 유용하게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러한 역할 분담을 통해 공동체의 목표를 설정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평신도 임원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영적 권위를 함께 부여받아 말씀을 선포하고, 권면하며, 치유하는 목회의 기능을 목회자와 더불어 함께 나눔으로써 제자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는 이러한 영적 운동의 선두적 역할로 기능한다면 실천적 기능은 바로 평신도 임원과 지도자들에 의해 수행되도록 그 권위와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교회의 상호 보완적 기능을 강화해 나가도록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대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엡4:12) 교회의 임원은 이러한 역할 분담을 통해 믿음이 성숙해 가고, 영적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3. 임원을 위한 영성교육 과정 (1) 감리교 성서연구 감리교회의 아버지 존 웨슬리 목사는 고전적인 개신교전통에 입각한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성서의 영감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기록되어진 것으로는 보지 않고, 그들의 일반적 기억과 전승, 그리고 정확성 없이 성서를 인용하였다고 인정하였다.(신역성서주해 히브리 2:7, 마태1:1, 마태 2:6) 결국 정태적인 문자주의에서 벗어나 전통과 이성과 경험과 관련하여 성서를 해석하였다. 웨슬리는 최고의 권위를 성서에 둔 것은 ぢ성서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음을 확신했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에 유일하고 충분한 법칙임을 믿었다.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한 책 - 성서 - 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했다.(HOMO UNIUS LIBRI) 그러나 그는 사고의 능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의학, 역사, 문학 등을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웨슬리안 적인 관점에서 평신도 성서연구는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몇 년 전에 감리교회 본부에서 발행된 "제자" 성서연구 자료는 구약성서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제자직이란 관점에서 제시한 좋은 성서연구 자료이다. 평신도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영적 지도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성서적인 근거 없이 행할 때에 교회의 질서에 물의를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요건중의 하나가 바로 영적으로 성숙한가에 대한 것이다. 이로 인해 초신자들에게는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윌리엄 헨드릭슨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그의 첫 번째 방문시에 어느 곳에서도 지도자를 임명하지 않았으며, 2차 방문을 통해 영적인 진보를 자신이 만족스럽게 여긴 후에야 임명하였다"는 것이다. (행14:23) (2) 구체적인 영성 생활 임원에게 있어서 영성생활은 영적 지도력을 더욱 강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인간적인 본성과 영적인 성품이 조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임원의 능력은 자신의 재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관리되어질 때 더욱 비로소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신학은 은총의 낙관주의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은총의 낙관주의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하나님의 은총은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참된 성장은 안정과 사랑의 상호관계 속에 있을 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확신은 미래를 보장하는 담보물은 아니며, 지속적인 복종과 충실만이 미래를 보장한다. 감리교회의 신앙의 내면은 바로 이러한 신앙이 낙관주의인데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양심을 주셨다. 웨슬리는 이것을 선재은총(prevenient Grace)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선재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신앙할 수 있으며,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은총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은총에 의한 성장은 은총의 수단으로 더욱 고양되어질 수 있다. 은총의 수단이란 결국 신앙 생활에 힘과 용기를 주며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바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은총의 제도화된 수단을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잇다. 1) 기도 - 이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며,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낙관하며, 더욱 깊은 확신에 차도록 고무시키는 것이다. 2) 성서연구 - 감리교는 성서적 기독교인이 되고자 했다. 늘 성서의 말씀을 전체로써 파악하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감리교인은 스스로 ぢ성서가 내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어떻게 하면 성서의 진리를 다른 사람의 선을 도모하는 것으로 만들 수가 있는가?っ하고 자문하도록 했다. 3) 성찬- 웨슬리는 가능하면 자주 성찬에 참석하도록 했고, 주님이 성찬 가운데 현존하시며, 회개시키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믿었다. 4) 금식- 웨슬리는 매주 수, 금요일에 금식을 지켰다. 그리고 후에는 금요일을 지켰다. 이는 어떤 효력을 가지는 것보다는 그 시간을 하나님과 영적 관심사에 바친다는데 있었다. 5) 친교(기독교인의 모임)- 웨슬리는 전도된 신도들을 반(class; 속회, 동성 4-8명), 조(band; 남녀 지도자), 회(society; 40명의 기도회, 매주모임, 성서해설, 찬송, 간증, 기도회)단위로 묶어 그들의 신앙을 지속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 존 웨슬리는 이 은총의 수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앙 훈련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영성생활은 오늘의 감리교 임원 및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영성 훈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4. 임원의 지도력 개발 (1) 영적 지도력 실제적인 입장에서 오늘날 교회의 영적 지도력 상승을 위한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철저한 성서연구, 영성생활, 그리고 사회적 활동이다. 영적 지도력을 통하여 교회의 임원은 신앙에 대한 굳건한 확신을 가지게 되고, 보다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결단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적 성장을 위한 임원 훈련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실행할 수 있다. 영적 성장을 위한 임원 훈련의 과정(예) a. 초신자를 위한 과정 (초신자반) 제자의 길, 장신출판부 새로운 삶의 길, IVP출판부 b. 임원훈련을 위한 기초과정 (집사반) 교회임원지침(4주과정) 집사반, 권사반, 장로반(본부교재) 신약성서의 이해(12주 과정) 신약의 역사(2), 복음서이해(2), 초대교회사(1), 바울의 신앙과 사상(3), 요한의 사상(1), 베드로 연구(1), 야고보 연구(1), 종말론 이해(1) 영적제자훈련1 (12주) 김성복, 영적제자훈련(전반),제자의 삶1(장신출판부) c. 임원훈련을 위한 중급과정 (속장반) 감리교 신앙(4주과정) 찰스 케이저, 감리교의 유래 구약성서의 이해(16주 과정) 구약의 역사(1), 창세기 신앙(1), 출애굽 신앙(1), 율법의 기능(1), 초기이스라엘사(1) 이스라엘 분열사(2), 예언서 연구(3) 3대 소선지서-아모스, 호세아, 미가(1), 시편연구(1), 이스라엘의 지혜(2), 묵시문학(2) 영적제자훈련2 (12주) 김성복, 영적제자훈련(후반) 제자의 삶2(장신출판부) d. 임원훈련을 위한 고급과정 (권사반, 장로후보반) 지도력개발(4주과정) 임영택, 당신의 지도력을 개발하라 성경 지도 및 속회 지도(6주과정) 핀들리 에지, 효과적인 성서교수법 D.왓슨, 이것이 속회이다. 교회행정과 사역(6주과정) 김정기, 교회행정신론 릭 워렌, 새들백교회이야기 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훈련-(14주) 리차드 포스터- 제자훈련, 제자(감리교교육국) (2) 신앙의 사회화와 교회 관리 감리교회는 이 땅의 현실사회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를 이루며 살아가는 교회이다. 존 웨슬리의 말대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며, 그것을 고독화하려는 것은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찰스 케이저는 [감리교의 유래]라는 저서를 통하여 "최초의 감리교 사상은 사회가 개인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낙오된 인간을 변화시켜 생산적인 시민을 만듦으로 해서 사회변화를 성취"하고자 했다고 감리교 사상의 특징을 밝히고 있다. 교회의 임원은 교회와 사회의 영적 지도자로써 자신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신앙을 사회화하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 교회 임원의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 영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감화와 교회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특별히 임원들은 영적 지도력을 위하여 영적 관리뿐만 아니라 자신 관리, 지적관리, 건강관리, 가족관리를 잘하여야 한다. 옛말에도 이르기를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고 했듯이 자기관리로부터 시작하여 신앙의 사회화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영적 지도력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는 지식과 관점, 신념, 기술, 인격을 형성하는데 논리적인 순서가 있으며, 그 영적 성장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그는 사무엘 스마일즈의 명언을 인용하면서 성서적인 근거에 의한 교인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개인적 신앙에서 사회화된 신앙은 교회에서 중간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목회자는 평신도 임원들의 개인적 신앙과 능력에 따라 교회의 당회부서인 선교부, 교육부, 재무부, 사회봉사부, 음악부, 남선교회, 여선교회 등에서 임직을 맡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영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교회의 기능에 구체적으로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더욱 효과적으로 교회성장을 도울 수 있다. (3) 신앙의 네트워킹 많은 사람들은 요즈음을 정보화 시대라고 한다. 이러한 정보화 시대는 평신도들의 사회생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우리 교회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미리 예측했지만 실천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통신망인 하이텔 을 통하여 설교요약자료를 제공하기 시작하여 최고 1000명 이상의 설교독자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직접 인터넷을 통하여 사이버 교회를 구성하여 설교자료, 목회자료, 교육자료 등을 제공하고, 사이버 시대에 걸맞는 기본적인 읽을거리와 직접적인 자료 링크들을 제공하는 감리교회 최초의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이에 계속해서 많은 교회들이 홈페이지를 구성하였고, 최근에는 우리교회의 홈페이지에 모든 한국 감리교회의 홈페이지가 연결되도록 하였다. 특히 우리교회의 임원들 중 사업을 하는 이의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개인 통신에 가입하도록 도움으로써 언제든지 목회자와 임원간의 상호통신을 통한 체제가 구성되었다. 구역회 대표인 3가정이 통신아이디를 가지고 있으므로 필요하면 통신을 통해 즉시 자료를 제공하거나 기도 요청을 할 수 있으며, 신앙을 나눌 수 있다.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임원의 경우 설교자료를 제공하여 반드시 읽도록 하고, 수요예배에 필요한 성경연구 자료를 미리 제공하여 연구하고 참석할 수도 있다. 각 모임을 위해 한번의 통신접속으로 수십명에게 공지사항을 보낼 수 있으며, 빈번한 교제를 이룰 수 있다. 특별히 청년 및 청소년 목회에서 최근 들어 이러한 통신을 통한 나눔이 많아지고 있으며, 회지발간 및, 공동 작품을 위한 채팅 등이 성행하고 있다. 교회의 임원을 관리하는 데에 이러한 신앙의 네트워킹이 필요한 시대가 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교회의 정보화가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한국기독교컴퓨터센타 소장인 김거성 목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정보화시대는 교회에게 위기만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정보화 매체들을 잘 활용한다면 오히려 이는 교회에 하나의 질적 도약을 가져올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교회는 각종 미디어 프로그램들의 제작과 유통, 공급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교회의 선교적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해야 한다. 상업주의나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정보매체의 대안으로 이를 극복하고 선교적 목적에 복무할 컴퓨터의 게임이나 교육 소프트웨어의 생산, 제작지원과 보급, 또한 재미있고 유익한 교계의 인터넷 홈페이지(homepage)의 제작 및 운영 등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연합 차원에서 지교회와 지역 조직, 각 교단, 기관 등을 아우르는 대규모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이를 통한 양질의 정보의 유통, 소비, 생산을 장려하며 민주적 의사수렴과 의사소통을 통한 정책결정과 사업집행, 선교-지원구조의 형성을 촉진하고 인터넷을 활용하여 국내외의 에큐메니칼 연대와 협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현재 고립, 분산되어 운영되고 있는 각종 교계 정보서비스들을 통합하여 안정적으로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육성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이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자신을 ''네티즌''이라 이름 붙여 주기를 희망하는 신세대들에게도 좋은 선교방편이 될 것이다." 이제 네트워킹을 통한 교회의 성장은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크리스천을 위한 인터넷]의 저자인 슐츠는 교회의 통신을 통한 교제와 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는 훨씬 인격적이고 쌍방향적이다. 둘째로는 회중(교인) 사이에 있는 의사소통 욕구를 쉽게 빨아드린다. 셋째로, 설치하고 관리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용도에서 교회에서의 신앙적 네트워킹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1) 모든 가입자들에게 자동적으로 기도제목을 내보내는 전자 기도망 2) 멀리 이사를 갔지만 여전히 교회를 후원하고 교회의 소식을 받아 보고자하는 교우 3) 교회행정담당자, 장로, 집사 등을 위한 모임, 관심, 사업의제 제시 4) 순번으로 돌아가는 봉사를 맡은이들에게 순서가 돌아 왔음을 알리는 일 5) 설교에 관한 토론 6) 자녀들이 교회내의 다른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 7) 다음주 설교 제목, 예배시간 변경안내, 특별집회, 위원회 소집에 관한 정보의 제공 이제 예전과 같이 교회의 임원관리는 단지 교회 중심적인 사고에 한계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정보화 시대에 맞도록 운영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이다. 5. 결론: 교회성장과 임원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의 임원교육을 통한 관리는 효과적인 교회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이 작은 교회에서는 아직까지 실천되기 어려운 면도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 동안 중소교회에서 청년을 교육하며, 함께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를 소원하던 청년들이 여러 교회에서 봉사하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감격스럽다. 교회에서 임원을 제자화 시키면서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교회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이 전통적인 교육 체제에 묶여 새로운 기회들을 포착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임원의 영적 지도력 개발은 신앙의 확신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교회 내 뿐만 아니라 사회화의 과정을 통하여 보다 건전하고 영적으로 풍요한 삶,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나아가서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면 취직조차 할 수 없는 이 시대의 현실을 교회가 좀더 일찍이 인식하여 교회임원을 좀더 사회생활과 밀접한 능력을 배양하도록 도움을 줌으로써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사회적으로 우수한 공동체를 만들어 사회에 더 큰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이를 통해 교회는 여전히 사회의 중심으로 주변의 비신자들에게 좋은 감정을 심어준다면 교회의 선교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바로 선교는 교인의 요구와 사회의 요청을 분명히 깨달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교회의 임원관리는 교회를 위한 임원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봉사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도움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인격과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긴 증인으로써의 사명을 보다 가깝게 실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을 쓰면서 느낀 결론은 아직까지도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화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이 일을 위해 좀더 효과적인 교육 과정과 더불어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을 더 많이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교회 체제의 정보화를 통해 더 좋은 자료를 개발하고 교회의 물질적 관리보다는 영적 인력관리 즉 임원관리에 좀 더 많은 투자가 있어야 하겠다. 6. 참고도서 김성복, 영적제자훈련,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8. 김정기, 교회행정신론, 성광문화사, 1992. 데이비드 L. 왓슨, 이것이 속회이다, 한경수 역, 주안교회출판부, 1993. 데이빗 왓슨, 제자도, 문동학 역, 두란노서원, 1986. 도날드 A. 맥가브란, 교회성장이해,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리차드 포스터, 영적 성장을 위한 제자훈련, 보이스사, 1985. 릭 워렌, 새들백교회 이야기, 김현희-박경범 역, 디모데,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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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선교단체 재정관리의 투명성과 건전성 제고를 위한 방안
교회와 선교단체 재정관리의 투명성과 건전성 제고를 위한 방안 http://mission.bz/6913세미나 최현돌교수 (대구대학교 회계정보학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로새서 3: 23-24)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발표자 황 교수님이 우리나라 교회와 선교단체의 재정관리에서 투명성과 건전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유와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잘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 관련 기관을 포함한 우리나라 전반적인 사회조직에의 신뢰성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많이 지적되어 왔다. 우리가 누구 앞에서나 정직하면 신뢰를 얻게 되고 신뢰하게 되면 투명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상장기업들의 재무보고에 대한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원초적인 자료에 부정직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신뢰성과 투명성에 대하여 의심을 받고 있다. 정보에 신뢰성이 있다는 것은 검증가능 해야 하고, 중립적이며, 표현이 충실해야 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나 선교단체의 재무정보가 정직해야 하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이것이 왜 바람직한가? 도덕적 관점을 배제하고 순수한 경제적 효율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정직한 정보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사람은 부정직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보다 자원을 가치 있게 사용할 사람에게 배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부정직한 시스템보다는 정직한 정보시스템이 잡음이 더 적다. 정직성과 효율성의 관계는 어디서 생기는가? 정직한 정보시스템의 효율성에 대한 근거는 하나님의 속성에 있다. 하나님은 온전하시기 때문에 진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온전하시기 때문에 그의 진리는 합리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의 길은 측량할 수 없을지라도, 그의 성과는 항상 효율적이다. 하나님은 부정직한 것을 미워하신다. 부정직은 성경에서 표적을 빗나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죄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정직성이 회복되고, 정직성이 회복되면 신뢰가 두터워 지고, 신뢰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투명해지게 될 것이다. 청지기 원리를 바로 배우자 청지기 원리는 기본적으로 위탁자(주인)와 수탁자(대리인)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원리이다. 주인은 하나님이며, 사람은 그의 대리인이다. 수탁자는 주인께로부터 위임받은 일을 수행한 후에 대리인은 주인에게 결과를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는 회계보고를 정직하게 하거나 또는 거짓되게 할 수도 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청지기들은 정직하게 보고했다. 하나님은 정직한 정보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부정직하게 회계보고 한 사람을 엄하게 다루셨다(행 5: 1-5). 교회와 선교단체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청지기 원리에 따라 재정관리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확보한 후,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에 산재해 있는 부정직한 대리인의 문제해결에 선지자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사회의 부정직한 대리인문제에 기독교 관련자들의 영향력이 부족한 것은 우선 성경적 청지기 원리를 기독교 관련 조직에서 실천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목사님들의 헌금설교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설교하실 때 헌금을 드리는 것에 대한 성경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헌금의 사용에 대해서도 성경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설교하셔야 한다. 교회의 설교에서 헌금을 드리는 것에 대하여는 자주 듣기도 하지만, 헌금의 사용에 대한 성경적 원리에 대한 설교와 교육의 기회는 좀처럼 가질 수 없다. 헌금사용에 대한 설교와 교육의 기회를 통하여 황 교수님이 지적한 교회 재정관리의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어떻게 벌이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우리가 자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헌금을 어떻게 드리는가도 중요하지만, 드려진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단이 재정의 투명성과 건전성 제고를 위한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교단이 소속교회들의 재정관리 투명성과 건전성 제고를 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 통일된 교회 회계기준을 소속 각 교회에 보급하는 것과 그것의 적용에 관한 교육도 교단적인 차원에서 실시되어야 한다. 각 개교회의 담임목사님과 재정담당자들에 대한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목사님들에 대한 교육은 재정관리의 투명성과 건전성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이 필요하다. 담임목사님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없으면 특히 재정관리의 투명성과 건전성은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목사님들의 인식에 전환만 이루어지면, 재정관리 담당자들은 교육을 통하여 재정관리의 투명성과 건전성의 제고를 실행하게 한다면 짧은 기간에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된 회계기준과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면, 발표자가 제시한 재무제표를 작성하겠다고 하는 많은 개 교회들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개 교회를 모아 교단에서 보급과 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 교단에 전문가가 있으면 이용하고, 전문가가 없으면 외부에서 초빙하여 교육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 모든 분야에서 구조조정과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모든 분야에서 투명성을 높이기 위하여 법과 제도를 바꾸고, 과정을 단순화하며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교회와 선교단체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관련자 모두가 성경말씀과 교회 앞에 지혜를 얻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게시물을... 목록
교회의 재정지출 어떻게 건강하게 할 것인가?
교회의 재정지출 어떻게 건강하게 할 것인가? http://mission.bz/6892세미나 오세택 (두레교회 목사) 1. 한국 교회 재정지출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교회의 재정이 바르게 쓰이고 있는지의 문제는 정확한 통계가 없는 것과 개 교회에 따라 재정지출의 유형과 내용이 천차만별이라는 점 때문에 뭐라고 한마디로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이 예배당과 부속건물 건립과 유지보수, 그리고 목회자 및 직원 인건비와 사무비로 재정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는 현상 - 많은 부분이 특별예.결산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공식적인 일년 예. 결산안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을 직시할 때 한국 교회의 재정지출은 위기상황에 봉착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한국 교회 재정지출을 위기상황이라고 보는 근거는? 무엇보다도 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헌금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인식하거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대한 간구의 수단 내지는 교회라는 조직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구성원으로서의 기본 의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와 같은 헌금에 대한 인식은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의 전통과 의미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신12:5-19, 레27:30-33, 민18:21-32).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가 있었다. 먼저 그 해 소출의 1/10을 제사업무와 성전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서 드렸다. 그리고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를 제외한 나머지에서 다시 1/10을 가족이나 친지, 남녀 종들과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함께 감사제사(축제)를 드리기 위해 바치는 십일조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 3년마다 감사제사 대신에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해 십일조가 있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십일조는 제사와 성전 업무를 수행하는 레위인들의 생계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축제와 백성들을 물질적 고통을 들어주기 위한 구제의 목적으로 드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헌금이 십일조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다. 신약에서의 헌금이란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모아지는 현금이라는 의미가 두드러진다. 신약에는 헌금에 대한 언급이 아홉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 중에 예수님이 두 번 언급하시는데(막12:11-44, 눅21:1-4) 여기서는 헌금에 대한 의미보다는 헌금에 대한 자세를 교훈하셨다. 그 나머지 부분은 주로 바울 서신에 언급되는데 고전16:1에서 처음 언급이 되고 나머지는 고후8,9장에서 집중적으로 언급이 된다. 바울이 언급한 헌금에 대한 단어들을 정리해 보면 ''모금''(collection, 고전16:1), ''은혜의 표현''(grace, 고전16:3), ''선물''(gift, 고후8:1,6,7), ''연보''(generosity, 고후8:2), ''성도를 섬기는 일''(고후8:4,9:1),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고후8:8), ''물질적으로 평균케 하는 것''(고후8:13, 14)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라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한 성령의 은혜와 감동으로 행해지는 모금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특정한 목적이란 이미 위에서 언급했던 바울 서신에 잘 나타나 있는데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일이다. 특별히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에 대한 교회적인 이해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거룩성을 지키기 위한 물질적 공유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인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면 의롭게 살며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의 부족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거룩을 유지할 수 없는 성도가 있다면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책임을 느끼며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실천된 것이 헌금이었다. 신, 구약에 나타난 헌금의 의미로 미루어 볼 때 교회 재정은 가난한 성도들의 물질적 고통을 들어주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 말은 재정지출의 있어서 소위 구제비 혹은 나눔비에 가장 높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 재정지출의 현실의 위기상황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적합한 통계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1994년에 발간된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총회 설립 80주년 기념 자료집인 ''교회 사회 봉사 총람''에 의하면(교회 사회봉사 사업의 실태, 약 2000교회 설문응답) 교회 재정 가운데 사회 봉사비의 비율을 어느 정도 책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73.6%가 10%미만으로 답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51%이상 책정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은 0.2%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봉사 사업에 대한 실시가 어려운 이유로 61.3%가 재정을 부족을 들고 있었다. 연간 사회봉사비 지출액으로는 92.1%가 천만 원 미만인 것으로 답했다. 헌금에 대한 기본 인식과 실천이 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빗나가 있음을 보게 된다. 3. 어떻게 교회의 재정지출을 건강하게 할 것인가? 첫째로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적인 헌금의 의미를 바로 가르쳐야 한다. 물질적 공평을 위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라는 개념을 심어야 한다. 사실 헌금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성도의 인식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헌금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의미를 부여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만 헌금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예배시간에 엄숙하고 경건하게 헌금을 드리는 행위 자체로 만족해 버린다. 이런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성경적인 헌금의 의미를 강조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헌금''이나 ''연보''란 말보다 ''나남비''나 ''사랑의 물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만약 성도가 헌금을 나눔의 수단이나 평균케 하는 은사라는 인식을 가지게 될 때 헌금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상당한 사회적 자긍심과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헌금을 통해서 사회가 겪고 있는 부의 분배나 소유로 인한 갈등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헌금에 대한 이런 인식을 갖고 재정지출을 실천한다고 생각해 보라. 어느 역사 어는 이념이나 체제가 이루지 못한 물질로 인한 갈등과 분쟁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을 충만케 하는 충만으로서의 교회의 본래 존재가치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교회가 세상 가운데 높이 들리워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서는 헌금에 대한 적극적인 권면들이 많다. 극한 가운데서도 풍성한 헌금을 강조했으며(고후8:2), 장사하여 남긴 이, 즉 잉여가치를 다 바치라는 권면도 있다(고전16:1). 그리고 헌금에 대해서 부요하고 너그러워야 할 것을 권면한다(고후9:1).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헌금을 가르치고 권하는 사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른 헌금을 가르치고 적극적인 헌금생활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물질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에 대한 바른 판단을 갖게 하여 건강한 국가 건설과 세계 경제 질서를 회복하는데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재정지출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헌금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 내지는 체제를 갖는 것이다. 토지와 건물에 대한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체제를 갖는 것이다. 이 부분을 아직 연구되지 않았지만 교회의 본질을 담아내고 그러면서도 전투적이고 건강한 교회를 이루기 위한 교회의 외적인 크기(size)를 규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필요 이상으로 교회가 커지면 분립개척과 같은 방법으로 건물과 체제 유지를 위한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성경에는 나눔과 평균케 해는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지만 이 외에는 어떤 물질적인 부담도 주지 않고 있다. 이것은 신구약을 통틀어 일관되게 강조되는 부분이다. 모세에게 성막을 세우라고 명령하시면서 그 규모를 작게 정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을 모세에게 알아서 지으라고 하셨다면 틀림없이 피라밋보다 더 크게 지으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를 이기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권위와 위상을 생각해서 웅장하게 지어야 한다는 이론이 지배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짓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평생을 소모했을 것이며 재원과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서 성전(聖戰)이란 명분으로 침략을 계속했을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왜곡되었을 것이다. 이런 어리석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직접 식량을 정하시고 그 규모를 제한하셨다. 이와는 반대로 안식년 제도나 대물림이나 희년에 관한 명령은 아주 엄격하다. 일전의 어떤 선교단체에서 봉사한 적이 있는데 그 선교단체가 선교와 교육의 효율성을 내세워 건물을 연이어 짓고 직원들의 수를 늘려나갔다. 그러나 몇 년이 못되어 건물과 직원들의 인건비를 충당하느라 본질에서 빗나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체제를 유지하느라 헌금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가 재정을 바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공과 성장주의라는 이념을 허물고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와 기도원 건물들을 허물어야 한다. 대형교회라야만 선교를 포함한 구제사업이나 사회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은 ''작지만 연합하는 교회운동''이라는 철학과 실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셋째로 교회 재정에 대한 정책결정과 재정지출에 대한 감시에 성도들이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대부분의 대형교회에서는 헌금의 주체가 되는 성도들이 교회재정의 정책결정과 재정지출의 감독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심지어 이런 부분에 있어서 관심을 갖는 것은 교회의 전통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교회에서는 제직회를 통해서 정책결정과 감독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제한된 실정이다. 평소에 재정에 관한 자세한 상황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놓아 모든 성도들이 언제든지 관찰할 수 있고 자신들의 생각을 개진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재정에 대한 최고 의결조직인 공동의회 때 재정에 관한 정책과 예결산 세부 사항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도록 사전에 모든 자료를 제시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4. 마치는 말 현재 한국 교회의 재정지출은 앞에서 살펴 본대로 위기상황이다. 재정지출의 위기는 재정수업의 위기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헌금이 성경적으로 바로 쓰이지 못하면 성도들이 헌금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다는 뜻이다. 성경의 권면처럼 인색함으로나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이고 너그럽게 헌금할 수 있기 위해서는 헌금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재정지출에 대한 과감한 제도적 혁신이 있어야 한다. 하루 속히 한국교회의 재정지출이 개선되어 만물을 충만케 하는 충만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구약에서의 민중과 민족
구약에서의 민중과 민족 http://mission.bz/6899세미나 임태수 (민중신학연구소장, 호서대 교수) I. 개념정의 1. 민중 "민중이 누구냐" 하는 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민중과 민족"을 이번 주제로 정한 일본성서학연구소가 생각하는 민중은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을 전제한다고 보고 민중신학적인 입장에서 민중을 간단히 정의해 보려고 한다. "민중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민중신학뿐만 아니라 민중사학(民衆史學), 민중경제학, 민중문학, 민중사회학 등 각 분야에서 학자들마다 자기 나름대로 민중을 정의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에서 민중의 개념정의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지만 완전한 합일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민중론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느 학문, 어느 개념을 막론하고 토든 학자들이 완전한 일치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여 기에서 민중개념 정의에 대한 논의를 상술하는 것을 생략한다. 그 대신 학자들마다 민중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중요한 부분에서는 대체적인 공통점과 합의점들이 있으므로, 그동안 신학 이외의 학문영역들에서 논의된 바 있는 민중론과, 서남동, 안병 무, 김용복 등을 비롯해서 민중신학자들이 논의한 민중론을 참고해서 필자 나름대로 생각하는 민중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명제로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1)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며 사회적 실체이다. (2) 민중은 정치적 피억압자, 경제적 피수탈자, 사회적 소외자 등 사회의 하류층이다. (3) 민중은 자각된 대중(민중)뿐만 아니라 우매한 대중(민중)도 포함한다. (4) 민중은 역동적이며 상대적인 개념이다. 상대에 따라서는 비민중이면서 동시에 민중적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 (5) 하나님과 예수는 민중의 편에 서신다. (6) 민중이 주체가 된 나라는 전 국민이 민중화된 나라 즉 정의·평등·자유·평화의 나라다. 이러한 민중이해에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민중들을 찾아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구약에서는 고아, 과부, 나그네, 임시 거주자, 품 꾼, 극빈자, 약자, 가난한 자, 노예, 그리고 신구약 중간시대에는 암하아레츠 등이 민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신약에서는 오클로스가 민중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 민족 브리태니커 사전은 민족(nation)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남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문화적 공통사항을 지표(指標)로 하여 상호간에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렇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 여기서 말하는 문화적 공통사항에는 언어, 종교, 세계관, 사회조직, 경제생활, 그 밖의 생활양식 등이 포함된다." 동양언어에서 민족이라고 쓰는 말을 독일어에서는 Volk와 Nation 두 가지로 쓴다. Volk는 기원, 역사, 문화 그리고 대부분 언어까지도 동일한 인간집단을 말한다. 독일어에서 이 말은 Nation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Nation이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면, Volk는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더 많이 함유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에 와서 민족 개념은 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국가의 성립과 함께 국민문화와 국민성이 발달하면서 국민이 바로 민족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민족(韓民族), 일본민족, 독일민족 등 대부분의 민족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미국, 러시아, 중국 등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민과 민족이 엄격하게 구별되기도 한다. 각 민족은 각각 나름대로의 민족의식 (Nationalbewußtsein)을 가지고 있다. 모든 민족이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고 자기 민족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이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관념 내지 의식이 민족의식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식은 자기 민족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을 명확하게 인식하여 자기 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긍지를 가지고 나아가 미래의 문제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명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족의식에 합리적·사상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애국사상의 체계화이며 이것이 그대로 민족주의와 연결된다. 민족주의는 불란서 혁명 때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일차대전 이후에 많은 나라들이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제1,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전체주의적인 성향의 민족주의가 나타나서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였다. 또한 나라 안에 소수 민족이 있을 경우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이 소수 민족을 억압하여 억지로 소수 민족을 다수 민족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소수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하려는 민족주의도 있다. 이럴 경우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소수 민족의 민족주의가 나타나 서로 대립하게 된다. 민족주의의 파괴적인 측면은 특히 한 민족의 민족주의가 다른 민족의 민족주의와 이해상충(利害相衝)이 되어 서로 부딪치고 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 경우이다.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고 자기 민족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이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민족의식과 노력은 결코 세계평화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긍정적인 의미의 민족사랑/애국심(Patriotismus)은 다른 민족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전제한 민족사랑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중·동부 유럽에서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의 민족주의,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신생국가들의 식민지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자기 민족의 역사, 문화, 고유성을 회복하고 지키려는 민족주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침략적이고 억압적인 극단적인 민족주의 (Chauyinism, Jingoismus, Pangermanismus 등)는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해치게 된다. 세계 제2차대전시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적 민족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II. 민중과 민족 우리는 위에서 민중과 민족, 그리고 민족주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개념정의 차원에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기본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성서에서 민중과 민족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민중의 하나님 하나님은 민중의 하나님이다. 우리들은 위에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민중들이 고아, 과부, 나그네, 임시 거주자, 품꾼, 극빈자, 약자, 가난한 자, 노예 등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구약성서에는 민중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민중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이들 민중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알아 보려고 한다. 고아(yatom) : 구약에서 하나님은 "고아를 돕는 자"(시편 10,14), "고아의 아버지"(시편 68,5), "고아의 하나님"으로 자처하고 나선다. 하나님은 고아를 억울하게 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는 것을 금한다(출애 22,21; 잠언 24,10; 예레 7,6).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고아를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여러 가지로 지시한다. 추수 때에는 고타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하여 일부러 곡식단이나 올리브 열매, 포도를 남겨 두어야 한다(신명 24,17-22; 레위 19,9; 23,22), 그리고 잔치 때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불러서 반드시 참석시켜야 했다(신명 16,11-15). 또 삼 년마다 드리는 "민중의 십일조"는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인 고아, 과부, 레위인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신명 14,28-29; 26,12-15). 과부(almana) : 과부는 보통 가난하고 고독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과부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섰다(신명 10,18). 하나님은 이러한 과부를 착취하거나 억압하거나 억울하게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는 한편(출애 22,22; 신명 27,19; 이사 10,2 등), 남편 대신 과부를 보호하고 책임질 의무를 이스라엘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부여하였다. 고아와 마찬가지로 과부는 추수 때에 남은 이삭을 거두어 가질 수 있었고(신명24,19-21), 칠칠절, 장막절 등 축제 때에 참석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어먹을 수 있었다(신명 16,11.14). 또 과부는 삼 년마다 바치는 "민중의 십일조"의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다(신명 14,28-29; 26,12-l5). 나그네(ger) : 나그네는 본토인(本土人, ''erah)과 외국인(nokri) 사이에 있는 존재다. 나그네는 정치, 경제, 기타 다른 이유로 고국을 떠나 외국 땅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본토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이와 같이 정치적·경제적 사회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나그네를 하나님은 긍휼히 보시고 그들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선다. 추수의 남은 이삭을 나그네가 먹도록 놔두고(레 위 19,10; 신명 24,19-21). 안식년에 실시되는 휴경(休耕)의 수확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하며(레위 25,6-7), "민중의 십일조"를 받아 곤궁을 면하도록 했다(신명 14,28-29). 임시 거주자(toshab) : 임시 거주자는 시민권 없이 남의 나라, 남의 집에 곁들여 사는 체류자들이다. 임시 거주자는 가난한 자로서 품꾼(sakir)이나 남종, 여종과 같이 휴경 등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기도 했다(레위 25,6.35). 임시 거주자는 종교적인 면에서 나그네 (ger)보다도 더 차별대우를 받았다(레위 25,10; 출애 12,45), 임시 거주자는 나그네(ger)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 개념으로 쓰인 경우가 많다(창세 23,4; 레위 25,23, 시편 39,12). 품꾼(sakir): 품꾼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지만, 품삯을 받고 일하는 품팔이 일꾼이었다(신명 24,14). 그들은 오늘날의 ''날품팔이꾼"과 마찬가지로 하루 동안만 일을 하거나(레위 19,13; 신명 24,15), 일 년 동안 계약을 맺고 일을 하기도 하였다(레위 25,50.53; 이사 16,14). 법전들에서는 이러한 품꾼을 보호하는 조치로서, 해지기 전에 당일의 품삯을 지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위 19,13; 신명 24,15)예언자들은 이들을 착취하는 자들로부터 품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예레 22,13). 극빈자(ebyon) :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에브욘이라 불렀다. 에브욘을 "극빈자"(極貧者)"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나님은 에브욘의 하나님이요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분이다(시편 35,12-14; 86,1). 아모스서에서는 에브욘과 의인이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2,6; 5,12). 법전들에서는 에브욘을 보호하는 여러 가지 법들이 있다(출애 23,1-9; 레위 25,39-43). 그리고 아모스(2,6; 4,1), 예레미야(5,28; 22,16), 에스겔(18,12) 등 예언자들은 하나 같이 에브욘의 편에 서서,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자와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에브욘의 옹호자들로 나선다. 약자(dal) : 달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약자이다(아모 5,11; 8,6). 이들은 힘있는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으므로 예언자들은 이들 약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 부자와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이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였다(아모 5,11; 이사 10,1-2; 스바 3,12). 또 시편과 잠언에서도 달은 보호받을 대상으로 나타난다(시편 82,3-4; 72,13; 113,7; 잠언 14,31;22,16; 28,8), 하나님은 이러한 달의 하나님이다(잠언 14,31). 가난한 자(''ani, rash): "아니"는 일차적으로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킨다(출애 22,25; 레위 19,10 등). 또 아니는 정신적으로 겸손하며 경건한 자를 가리킨다(시편 34,6; 74,21 등). 아니는 완전한 이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악한 자들과 부자들, 권력자들의 희생제물이 된 사람들이다(이사 3,15; 잠언 22,22; 시편 35,10등). 야훼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이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신다(이사 10,2; 14,32; 시편 22,24 등). 예언자들 또한 이들 아니의 고난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심판을 선언한다(에제 16,49; 아모 8,4 등). 아니와 비슷한 아나우(''anaw, 복수 ''anawim)는 구약성서에서 별 차이가 없이 상호교환적으로 쓰인다. "라쉬"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삼하 12,1-4). 라허는 특히 지혜서에 많이 나온다(잠언 14,20; 18,13; 22,7). 라쉬는 가난해서 노예가 되기도 하고, 생존경쟁의 낙오자가 되기도 하는 사회의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노예(''ebed, shiphah, ''amah) : 노예는 주인의 재산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자유롭게 사고 팔고 할 수 있었다. 인격이 없는 물건 취급을 받은 셈이다. 이스라엘 사람은 노예가 되더라도 면제년 즉 안식년 혹은 희년이 되면 해방되도록 법전들이 규정하고 있다(출애 21,2-11; 신명 15,1-18; 레위 25,39-55). 그러나 여자노예(출애 21,7)와 외국인 노예(레위 25,44-46)는 해방될 수 없었다. 또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해방되기를 포기하는 노예들도 있었다(출애 21,5-6). 이러한 노예들은 평생을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채 주인의 소유물로서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의 편에 섰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벨, 노아, 아브라함, 하갈, 이스마엘, 야곱, 이집트의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편에 섰다. 그리고 왕조시대에는 피지배계층인 민중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편에 섰 다. 왕조시대의 민중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2. 민중을 억압하는 민족의 지배자들 이스라엘 민족은 사사시대가 지난 다음 주전 11세기경에 왕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왕국시대의 이스라엘은 민족과 국가가 구별되지 않고 민족과 국가가 동일한 민족국가였다. 물론 통일왕국시대 이후에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단되어 한 민족 두 국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국가라는 차원에서 동일한 범주로 보고 왕국치하에서의 민족/국가(Nation)와 민중의 관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왕국시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과는 달리 평등과 자유와 정의의 사회를 이룩하지 못하고, 반대로 억압과 착취와 불의와 불법의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계층 간의 갈등이 생겨났다. 크게 보아서 국가의 권력과 부를 독점한 상류층과, 힘없고 가난한 하류층 즉 민중계층으로 둘로 갈라져 이스라엘 사회는 갈등과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에는 민족과 국가를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계층 간의 갈등에서 하나님은 어느 편에 섰는가? 이스라엘의 왕국사를 말하는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와 역대기사가의 역사서, 그리고 예언서들 은 하나님은 이러한 갈등관계에서 권력자와 부자들의 편에 서지 않고, 가난하고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민중들의 편에 섰음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분명 민중의 하나님이다. 아래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통일왕국시대의 왕들 : 다윗은 사무엘서에서, 그리고 역대기상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사무엘서에서는 다윗에 대한 비판도 상당부분 차지한다(삼하 11-열상 2장). 다윗은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든다(삼하 11장). 그리고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 압살롬의 반란(삼하 13-19장)과 세바의 반란(삼하 20,1-2)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다윗의 통치에서 소외된 민중들, 특히 유다 지파를 제외한 북쪽지파 사람들이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의 위엄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호화로운 왕궁을13년에 걸쳐 건축했다. 그리고 성전도 7년에 걸쳐 건축하였다. 이외에도 나라를 방어하기 위하여 많은 군사요새들을 구축하였다. 이와 잘은 대토목공사를 장기간에 걸쳐 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솔로몬은 많은 백성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였다. 한때 이 강제노동에는 무려 18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감독관만도 3,300명에 이르렀다(열상 5,13-16). 건축공사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또 솔로몬은 일천 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리고(열상 11,3) 사치스러운 식생활을 하였으므로(열상 3,22-23) 많은 재정을 필요로 하였다. 솔로몬은 이 비용을 무역을 통해 일부 충당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해서 충당하였다. 국가건설, 민족번영이라는 명분 하에 민중들만 허리가 휘도록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이다(열상 12,1-11). 솔로몬 시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를 가져온 시기였다. 무역이 활발하였고, 특히 솔로몬은 말, 병기 등의 무역을 독차지함으로써 많은 이득을 이스라엘에 가져왔다. 그리고 상업, 공업 등 개인기업도 상당히 번창했다. 그러나 일부 도시, 소수 지배자들만이 이러한 부를 독점하여 상류층을 형성함으로써 노동자, 노예, 가난한 자 등 민중과 계급 차별이 생기고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또한 권력도 공무원, 군인, 상인, 지주, 부자 등 소수 상류층이 독점하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결국 솔로몬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의 민주적 지파체제가 무너지고 전제군주적인 계급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왕국 유다의 왕들 : 유다는 르호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열아홉 왕 모두가 다윗 후손으로서, 다윗 왕조가 계속되었다. 이 다윗 왕조는 백성들의 자유와 평화, 평등을 지켜 주는 목자로서의 역할을 결코 잘 했다고 볼 수 없다. 르호보암 이후의 유다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열왕기나 역대기가 주로 종교적인 관점에서 왕들을 평가한 반면,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대민관계에 대해서는 역사서에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이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예언이 남아 있어서 어느 정도는 그 시대상을 알 수 있다. 이사야, 미가, 스바냐, 예레미야 등 남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들에 의하면 대부분의 왕들과 상류층들이 불의를 자행하고, 가난한 민중들을 착취하고 억압하였다고 비판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왕국 유다의 왕들은 북왕국의 왕들보다도 그래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왕들이 많지만, 어느 한 왕도 부분적으로나마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은 왕은 하나도 없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 : 여로보암은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강압정책에 시달린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나라를 갈라 나가 새로운 왕국을 창건했지만, 다윗과 솔로몬의 과중한 세금과 강제노역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 농민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솔로몬의 군사제도, 행정제도를 그의 영토 안에 유산으로 받아들였으므로 세제(稅制)나 강제노역, 징집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못하고 늘어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여전히 세금을 징수하고, 백성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여로보암은 그의 혁명을 뒷받침해 준 예언자나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새 질서확립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북왕국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왕들은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에 속한 왕들이었다. 오므리 왕조 때에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기도 하였으나 과중한 세금, 강제노동의 증가, 빈부격차의 심화 등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아합 왕이 왕권을 남 용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야기는, 당시 왕을 포함 한 상류충이 민중들을 어떻게 착취하였는가 나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오므리 왕조를 뒤이은 예후 왕조가 통치하던 주전 800-750년은 북왕국의 전성기였는데, 특히 여로보암 2세 때(주전 787-747년)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편중되고, 민중은 착취대상 이 되어 많은 세금과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모스, 호세아 등이 나타나 이러한 착취와 불의에 패해 준엄한 비판과 심판을 선언하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다윗왕조에서 독립해 나간 것은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강제노역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므리 왕조, 예후 왕조의 경우에 서 보았듯이 북왕국의 왕들도 여전히 민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전제군주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북왕국은 민중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왕국으로 출발했으나 결국 그 이상에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통일왕국시대는 물론 남북 왕국시대의 이스라엘은 국가권력을 잡은 통치자들이 국가유지, 민족공동체 형성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민족 공동체인 국가는 민중을 한낱 수단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민중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봉사하는 기구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 반대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민족의 지도자들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경종을 울리고 예언자들을 보내서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들 민족의 지도자들은 이를 듣지 않고 악행을 계속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민중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남북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을 비롯한 상류층들을 포로로 잡아갔던 것이다. 현대 민족국가의 모습은 어떤가?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독일의 나치 정권은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대인을 학살하고, 장애인, 유전병 환자들을 살해하거나 더 이상 출산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단종(斷種) 수술을 하였다. 장애인, 유전병 환자들의 단종수술은 지금 북한에서도 실시되고 있다고 한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흑인들은 미국인이면서도 극심한 인종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부락민, 아이누족, 재일 한국인 등이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이들은 모두 민중들이다. 이들 민중들은 한 국가 안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억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세계 도처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한국의 예를 들어 보자. 한국은 지난 30여 년 이상을 군사정권 하에서 살았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 조국의 근대화, 경제개발 등을 내세우면서 민중의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하며 노동자를 착취하는 정책을 자행하였다. 민족이라는 미명하에 민족의 주체요 주인인 민중을 노예화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20세기에 생겨난 거의 모든 신생국가들에서 일어난 현상들이다. III. 민족과 민족 우리는 위에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민중과 민족/국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민족은 어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1. 이스라엘의 민족의식; 선민사상 이스라엘의 민족의식은 ''선민의식''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외에도 자기 민족이 선민이라고 주장하는 민족들이 있지만, 이는 대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을 본따서 흉내내거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한낱 방편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본래적인 선민사상을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이 땅 위에 이스라엘 민족만큼 선민의식이 강한 민족은 없다.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을 나타내는 중요한 용어는 "선택하다''는 뜻을 가진 바하르(bahar)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신명기 7장 6-7절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리고 열왕기상 3장 8절에도 나온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일부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은 신명기사가의 시대 즉 주전 7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확립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선택사상을 너무나 ''바하르''라는 한 단어에 의존하여 설명하려는 데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선민사상을 나타내는 말로서 ''바하르''와 동의어로 쓰이는 말들이 구약성서에는 많이 있다. ''알 다'' (창세 18,19; 아모 3,2), ''짓다'' (출애 I5,16). ''부르다'' (호세 11,1) 등의 용어가 이스라엘의 선택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은 ''바하르''란 한 단어에 매여서만 보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야훼 문서 기자(J)는 이미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을 보고 있고(창제 12,1-3), 엘로힘 문서 기자(E)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은 시나이 계약(출애 19,5-6)에 의해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 주전 7세기경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언제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 훨씬 이전에 시작되어 내려온 사상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하나님(야훼)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몫''으로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의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택해 세웠는가? 이스라엘 선택의 목적과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의 본질을, 선민사상과 관련된 주요 구절들을 중심으로 찾아보도록 하자. 야훼 기자(J)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12,2-31). 여기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다. 여기에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이 두 가지로 나타나 있다. 2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한 큰 나라 즉 이스라엘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축복해 준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결코 이스라엘 민족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3절에서 말한다. 아브라함 즉 이스라엘에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땅의 모든 족속에게까지 전달되어 온 인류가 함께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 선택의 궁극적 목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 함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의 ''중간 전달자''라는 말이다. 이러한 약속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설화에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다(창세 28,18; 22,18; 26,4; 28,14).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 즉 선민으로 계약을 맺는 장면을 묘사한 엘로힘 기자(E)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정체를 말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 19,5-6). 여기 나타난 ''내 소유'',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은 선민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전문용어이다. 이 구절에서 특히 주목할 말은 ''제사장 나라''라는 말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사람들의 죄와 간 구를 하나님께 알리고 용서를 고하는 역할이 제사장의 일이다. 이 ''중재자의 역할''을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이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하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중재자적인 역할에 대하여 또 다른 적절한 표현을 한 예언자가 있는데 그는 제2이사야다. 그 는 당시 세계 중심지인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여러 다른 민족과 국가들을 경험하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한다 (이사 41,6; 44,1-2), 종은 남을 섬기는 자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이요 증인으로서(이사 43,10, 44,8)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섬겨야 할 사명이 있음을 의미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사명과 목적을 위하여 그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만한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는가? 아니다. 그 반대다. ''바하르''(선택)라는 분명한 용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선택을 말하고 있는 신명기 7장 6-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야훼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야훼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이스라엘이 선택될 만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다거나, 수효가 많고 위대한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작고 보잘 것 없는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역설이다. 왜 하나님은 이런 역설적 인 선택을 했을까? 거기엔 이유가 있다. 첫째, 자기가 잘나서 선택된 것이 아니므로 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라는 의미고, 둘째, 자기 자신이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으니 늘 이 세상의 작고 미천한 사람과 민족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일하라는 뜻이 고, 셋째, 결코 강대국이 되어 남의 나라를 지배하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섬기며 봉사하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역할을 올바로 함으로써 이 땅 위에 자유와 평화와 평등의 사회가 건설될 수 있기를 하나님은 바라신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사실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역할을 수행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범을 이스라엘에게 바라신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을 종합하여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이 선민이 된 것은 ''자기 목적''(Selbstzweck)을 위해서가 아니고, 세계구원과 인류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중재자, 봉사자로서 일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구별하신 본래의 의도인 것이다. 이러한 범세계 구원사상은 구약성서 도처에 나타나 있다(호세 2,23; 이사 19,24-25; 말라 1,11; 시편 22,27; 86,9). 이상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을 보면 그 방향과 내용이 야훼 신앙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이스라엘만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만민을 다 창조하였으므로 만민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만민이 한 가족, 한 인류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 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고 ''역사의 주'' 하나님은 온 세계 만민을 통치하시고 그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되기를 바라시고, 또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신다. 또 하나님은 ''배방의 하나님''으로서 어느 한 민족도 다른 민족의 지배 하에서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리고 모 든 사람이 다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민중의 하나님'' 야훼는 이 땅 위의 어떤 민중적 민족도, 어떤 약하고 가난한 민중도 멸시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본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답게 대접받고 살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화의 하나님''은 이 세 계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이 갈등과 전쟁을 그치고 에덴 동산처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믿는 야훼의 뜻이요, 이것을 이 땅 위에 실현하도록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할 일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 거대한 뜻은 이스라엘만 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민족이 다 함께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장자로서 우선적으로 이 사명을 감당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2.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많은 전쟁을 하기도 하였다. 출애굽 당시 이집트와의 대결, 광야에서 아말렉, 아모리, 모압 등과의 전투, 가나안 정착 당시 가나안 민족들과의 대결, 사사시 대에 모압, 미디안, 암몬, 불레셋 등과의 싸움, 왕조시대에 불레셋, 아람, 바빌론, 앗시리아 등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적대관계에 대한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위에서 살펴 본 이스라엘 선민사상의 궁극적 목적, 즉 세계구원과 인류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중재자, 봉사자로서의 역할과 관계된 타민족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평화적 공존사상(요나서) 요나서는 주전 400-200년 사이에 기록된 책이다. 요나서는 작은 책이지만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책이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국이다. 그리고 죄가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이 당장 쳐들어가 점령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요나서의 처방은 이와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신다. 결국 니느웨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방이 둘이 아니요 하나가 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은 이미 이사야도 묘사한 바 있다. "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이사 19,24-25). 하나님이 이스나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세계 만민에게 선포하여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구원을 받고 한 인류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세계 만민이 한 공동체가 되는 평화공존의 길을 요나서는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다."(미가서) 미가서 4장 1-5절은 이사야서 2장 2-5절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평행을 이루고 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아직까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 사상이다. 여기에 전쟁종식의 영구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국제적인 어려운 문제들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민족들이 그 돌파구를 야훼의 말씀에서 찾으려고 시온 산으로 몰려 올 때(1절), 선민 이스라엘은 이들 민족들에게 전쟁이 아닌 평화공존의 길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맡기신 선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의미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는 길"이 바로 전쟁종식의 길임을 여기서 밝히오 있다. 너무나 쉽고 자명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인류역사는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왔다. 사람들은 전쟁을 막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 전쟁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는가? 아니다! 그 반대였다. 평화를 빌미로 만든 무기로 결국은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지 않았던가?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양두구육식(羊頭狗肉式)의 사이비 평화논리에 속지 말아야 한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더 이상 무기를 만들지 말고, 둘째, 이미 만들어진 무기는 폐기하여 생산도구로 만들고, 셋째, 군비축소를 계속하여 결국 이 땅 위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무기가 하나도 남지 않도록 하고, 넷째, 그리하여 전쟁이 역사에서 파라지게 해야 한다. 이 길만이 영원한 전쟁종식의 길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반드시 이 길을 앞장 서 가야 한다(미가4,5). 이러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인 서구 기독교 민족들의 타민족에 대한 자세는 어떠하였는가? 서구 기독교 국가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식민지주의다. 포르투갈은 15세기 이후 남미의 브라질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으며, 스페인도 칠레에서부터 멕시코에 이르는 거대한 식민지제국을 건설하였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초부터 자카르타를 비롯하여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여 식민지를 삼았다. 영국은 아시아를 비롯하여 북미,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세계에 걸친 해질 날이 여는 대식민지제 국을 건설하였다. 이들 서구 기독교 국가들은 위에서 살펴 본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나, 요나서와 미가서에 나타난 봉사정신이나 평화사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말에서부터 20세기 초에는 전 세계적으로 팽창주의가 발호 하여 독일을 비롯하여 미국, 벨기에,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고 일본 등이 식민지 쟁탈전에 나서서 가능한 한 넓은 지역을 식민지로 확보하여 억압과 수탈정책을 자행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 대부분의 식민지 국가들은 해방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신생국가들이 식민지 시절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든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과 일본이 혹시나 또다시 재무장하여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세계는 강대국들의 팽창주의, 식민주의 가 다시금 발호 하여 더 이상 약소민족들을 괴롭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IV. 맺는 말 (1) 민족이나 국가는 과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민족이나 국가는 그 구성체인 북민이나 민중이 인간다운 삶,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 수 있도록 해 줄 때 비로소 그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반대로 민족이나 국가의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한다면 이러한 민족이나 국가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민족국가들이 이 땅 위에 여전히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2) 민족주의 가운데는 ''침략적 억압적 민족주의''가 있는 반면에 ''해방적 자주적 민족주의''가 있다. 전자는 대개 강대국들에서 나타나고, 후자는 약소국들에서 나타난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에서 인류의 발전과 평화에 기여하는 ''봉사적·희생적 민족주의''가 있음도 보았다. 어느 의미에선 각 민족은 모두 다 어떤 형태건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이기주의적인 침략적·억압적 민족주의는 인류 발전에 백해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 민족의식은 모두 다 경계하고 배척하고,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해 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대국들의 지배 하에서 아직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거나, 외형상 독립은 했다 할지라도 아직도 완전한 자주 적 국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약소 민족들에서 나타나는 해방적·자주적 민족주의는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서 완전한 독립과 주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올바른 민족의식, 선민의식에서 보았듯이, 보다 적극적이고 희생적이며 봉사적인 민족의식, 민족주의가 모든 민족들에 나타나 인류의 구원과 평화공존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길만 이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살아 남는 길이기 때문이다. 논문의 출처 임태수, "구약에서의 민중과 민족", 한국민중신학회편『민중신학』-창간호/1995, (한국신학연구소), pp.57-78. 이 게시물을...
구역모임에서 셀 목회로 전환해야 될 이유
구역모임에서 셀 목회로 전환해야 될 이유 http://mission.bz/6971세미나 이성우목사 2004.12.17 조회 : 672 왜 구역모임을 셀 교회로 전환해야 하는가? 이성우 목사 서 론 사례 연구 몇몇 남녀들이 어떤 모임을 구성하여 그들이 사는 도시의 환경을 개선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매주일 만나서 문제점들을 토론하고 행동에 들어가야 할 과정을 계획하기로 결정하였다. 첫 모임에서 그들은 모두 그 도시의 가장 중요한 당면 문제는 공원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들이 행동에 들어가야 할 과정을 계획하고, 위원회를 구성하고, 행동을 시작하면서 그들은 모두 흥분과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난 뒤에 그들은 이 사업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공원이 지어 지려면 몇 년은 걸릴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모였으나 이 사업의 완성은 너무나 먼 훗날로 남아 있으므로 그들의 모임은 흥미와 의욕을 잃게 되었다. 그들은 모임을 보다 활성화시키기 위해 오락적인 것들을 가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가지 않아서 그 모임은 단지 주간 친목회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모임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 목표는 성취되어질 것인가 ? 이 모임은 목표를 잃어버리고 수단인 모임 자체가 목표가 되어 버렸다. 시간이 지나도 결코 처음 가진 목표를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A. 왜 셀 모임으로 전환해야 하는가? 1. 전세계적인 교회의 ( 흐름 )이기 때문이다 제2의 종교개혁-평신도를 사역자로 세워가야 한다. 일에 대한 기능적 봉사가 아니라 평신도 사역자로 세워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2. 전세계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들은 (셀 목회 )로 전환하고 있다. 1)루지아나의 래리 스탁스틸 목사- (베다니 교회) 93년 800명으로 시작하여 10년만에 12,000명으로 성장 약 1,200개의 셀을 가진 교회 2)싱가폴의 로렌스 콩 3)콜롬비아의 세자르 목사 4)한국교회에도 셀 목회로의 전환 열풍-이동원목사의 지구촌교회 5)최영기 목사의 휴스톤 서울침례교회 3. (승법번식)의 가장 좋은 전략은 셀 모임을 통한 것이다. 구역장은 목양에 동참하는 가장 중요한 특권이다. 고전4:15일만 스승은 있으되 아비가 없다 구역은 교회에서 그 작은 지역에 파송된 선교지이며 작은 교회이며 전도의 그물코이며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이다. 사랑방의 대화를 회복해야 한다. 결코 교인들을 위한 또 한번의 예배드리는 장소가 아니다. 4. 평신도 리더들이 (평신도 사역자)로 동참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기 때문이다. 달란트 비유-우리는 2달란트 받았으며 상급은 목회자와 동일하다. 살전2:8-9 나의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 사과나무의 열매는 사과가 아니라 사과나무이어야 한다. 셀의 진정한 열매는 많은 셀원을 12명으로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셀을 만들어내야 하고 또 다른 셀을 만들 수 있는 셀 리더들을 세워가는 것이다. 이것이 셀의 승법번식 비밀이다. 전세계적인 G12 전략이다. 5. 셀 모임의 효과가 놀랍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기러기 떼는 V자를 이루면서 날아갈까요? 1. 리더하는 것을 번갈아 가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들이 서로서로 ( 보호 )할 줄 알기 때문이다. 3. 그들은 ( 협력 )하여 바람을 뚫고 거슬러 나아가기 때문이다. 4. 매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서로 서로를 ( 격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함께하는 원리를 아는 기러기라면 무엇을 두려워하고 어떤 기러기가 혼자 떨어져 나가겠는가? B. 어떻게 셀 모임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과감한 위임이다. 평신도의 가능성을 최대한 기대하고 인정하여 씨속에 있는 씨를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 12명 속에 세계 땅 끝을 보았다. C. 전형적인 셀 모임의 성격 연구를 위해서는 개인이 하는 방법은 P B S( 개인성경연구 )이며, 소그룹을 위해서는 G B S(그룹성경공부), 대그룹을 위해서는 강의의 방법이 있다. 은혜 받기 위한 것으로 개인적인 것은 Q, T이며, 소그룹은 나눔(Sharing )을 통해서 가능하며 대그룹에게는 설교의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