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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1)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1) http://mission.bz/7094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1. Rogers의 생애 1) 어린시절(my early years) 로저스는 엄격하면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분위기의(religious and ethical atmosphere) 집안에서 6남매 중 4 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들은 그들을 매우 아끼고 돌보았다. 자라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의식 - no alcoholic beverage, no dance, cards or theater -하에 키워졌으며 사회적 관계는 적고 열심히 일하는 집안 분위기에 자라났다. 12살 때 농장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사의 가장 큰 이유는 아버님이 농장에 있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사춘기의 자녀들을 도시의 유혹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고자 한 게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이곳에 있으면서 그는 나방 키우는 취미를 가지게 되고 또 그의 아버지가 농장을 과학적으로 경영하기로 생각하면서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로저스는 이 동물들(chicken, lamb, calves)을 키우며 과학적 영감을 키운 것 같다. 하나의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며 과학적 방법에 대한 지식과 존중을 얻게 되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2) 대학과 대학원시절(college and graduate education) 처음에는 Wisconsin 대학에서 농업 전공을 전공하였으나 졸업은 역사과 였음. 대학 시절 로저스는 종교모임에 참석한 후 목사(ministry)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며 대학 3학년때는 국제기독학생회 후원으로 국게기독학생연합회에 참석하기 위해 6개월간 중국에 갔다오게 되는데(1922년) 이 일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This was a most important experience to me 라고 얘기함). 그는 그곳에서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다양한 종교적 doctrine을 가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되어 그 자신의 종교관도 그의 부모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또한, 대학교졸업 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헬렌 엘리오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로저스가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람으로 로저스에게 꾸준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는데 이런 그녀의 도움이 로저스에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결혼 후 그는 Union Theological Seminary 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그 당시 가장 자유스런 신학교였음(1924). 이 신학교에서 그는 놀랍고도 중요한 경험을 하는데 그건 자유스런 세미나의 경험 - 자기 자신의 생각과 느낌대로 그 결과가 어떠하든 흘러가는 - 이 그의 비지시적 상담의 모형이 된 듯이 보임. 그는 이곳에서 지내면서 점차 자신의 신념을 키우게 되었고 또한 그 자신의 사고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고 함( I wanted to find a field in which I could be sure my freedom of thought would not be limited) 3) 심리학자가 되다(Becoming a Psychologist) 자유스런 field를 원했던 로저스는 다시 전공을 바꾸는데 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의 관심을 끌었던 심리학을 공부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그가 다니던 신학교의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콜롬비아대학교의 사범대학(Teachers' college Columbia University)에서 다시 공부를 한다. 여기서 처음 child guidance work를 하게 되는데 이러는 동안 그는 그를 임상 심리학자로 여기게 된다. 또한 새로운 연구소인 Inaptitude for child guidance 에서도 근무하게 되는데 여기에 있으면서 그는 프로이드적 역동관(dynamic Freudian view)을 가진 사람들과 접하게 되나 그는 이 프로이드적 접근과 갈등을 느끼게 된다. 이 갈등은 그에게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다 로체스터에 있는 Child Study Department 라는 아동폭력방지협회에서 일하게 된다. 비록 보수는 $2,900으로 적었으나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가정을 위한 직장이 생기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4) 로체스터 근무시절(The Rochester Years) (이곳에서 12년간 근무) 로저스는 이곳에서 어린이들과 상담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데 좌절과 성공의 연속에서 차츰 자신의 이론과 견해를 정립시켜 나가게 된다. 『 Does it work?』 『 Is it effective?』라는 질문을 통해 그의 견해를 형식화시켜 나갔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3가지 작지만 중요한 것들을 느끼게 된다. ① Authority 권위적 견해에도 실수가 있을 확률이 있으며 아직도 개발해야 할 지식이 많다. ⇒ 강박적인 방화 충동에 사로잡힌 환자를 면담하면서 그의 성적 갈등(sexual conflict)을 의식적으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례를 통해 느끼게 됨. 성적 갈등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많으며 이것이 드러났을 때 문제는 사라진다는 이론이 맞지 않게 되는 경험인데 로저스는 이 이론에 관심이 많았었다. ② materials 주도적인 인터뷰 방법이 그리 효과적이지 못함을 깨달음 ⇒ 처음에 그는 인터뷰를 빨리 그리고 직접적으로 이끄는 방법을 발견했고 이것에 만족했으나 나중에 이런 그의 방법이 오히려 내담자의 무의식적 동기의 잘못을 인정하게 만드는 논리적인 질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이 계속적인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됐다. ③ my self 어디가 아프며, 어디로 가야 되고, 어떤 경험이 묻혀 있으며, 어떤 문제가 결정적이었는지 하는 것을 잘 아는 것은 바로 내담자 자신이다. 따라서 내 자신의 지식과 똑똑함을 내보이는 것 대신에 상담의 방향을 내담자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 ⇒이런 그자신의 태도의 변화는 어느 지적인 어머님과의 면담에서 느낀 것으로 이 어머니는 그 아들의 문제로 면담을 했었는데 아이의 문제 행동의 원인은 ( The problem was clearly her early rejection of the boy)에 있었다. 그러나 로저스는 이런 그녀의 반복적인 태도에 대해 이해시키는데 실패했고 상담을 종료하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상담실을 나가기 직전에 “어른과도 면담을 하나요?”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이에 로저스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게 되면서 부인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 즉 실패감, 불만, 결혼, 절망감 등에 대해 얘기하게 되는데 이런 얘기는 그녀가 얘기했던 Case history 와는 전혀 다른 얘기였고 이때부터 진짜 치료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5) 로저스의 두 자녀(My Children) 로체스터에 있는 동안 로저스는 두 자녀(다비드와 나탈리)를 키우게 되었다. 자녀들이 유아기와 아동기를 지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그의 직업적인 것에서 보다 더 많은 것들 - 개인, 발달, 관계-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로저스는 그 자신이 좋은 아버지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의 부인은 좋은 어머니였음을 얘기했다. 로저스는 그의 자녀들과의 관계(아동 시절의 기쁨과 고통, 청소년기의 assertiveness 와 어려움들. adults years와 자식들 자신의 가족의 시작)가 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로저스는 그의 자녀들과 깊이 있게 얘기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큰 성과들 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얘기하고 했다. 6) 오하이오주립대 교수시절(Ohio state years) 1940년 로저스는 오하이오주립대학(Ohio state university)의 교수가 된다. 그가 그 대학으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Clinical treatment of the problem child』라는 책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학계에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 자신이 매우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이를 구체화시키고자 노력했다. 1940년 12월에 미네소타대학에 논문을 제출했는데 그 반응이 아주 강했다 (strong). 이런 일은 그 자신의 견해가 타인에게 큰 영향을 줄 수 도 있다는 첫 경험이었다. 또한 1942년에 그는 『 Counseling and Psychology』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상담계에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의 이론능 비지시적 상담이라고 불리는 계기가 된다. 7) 그 후의 생애 1945년 로저스는 시카고 대학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그의 유명한 저서 “내담자 중심치료(Client Centered Therapy)"를 발표했다. 그후 그는 다시 위스콘신대학으로 옮겼는데 그는 그곳에서 심리학과와 정신의학과에서 강의하였으며 병원에 입원해있는 정신병환자를 연구하였다. 1966년 로저스는 위스콘신대학을 떠나 캘리포니아의 라욜라(La Jolla)에 있는 서부행동과학연구소로 옮겼으며 1968년에는 몇몇의 동료와 함께 라욜라에 인간행동연구소(Centers For Studies of Person)을 설립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그의 시간의 대부분을 인간중심집단치료의 연구와 저술에 바쳤다. 그리고 1982년에 숨을 거두었다. Important events in Carl Rogers? life 8 Jan 1902 Born in Chicago, Illinois 1919 Enters agriculture program at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Feb - Aug 1922 Trip to the Far East 22 Oct 1922 Becomes engaged to Helen Elliott 23 Jun 1924 Receives BA in History from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28 Aug 1924 Marries Helen Elliott 1924 Enrolls in liberal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City Summer 1925 Serves as visiting pastor in Dorset, Vermont 1926 Leaves Union for Columbia University Teachers College 17 Mar 1926 David Elliott Rogers born 1 Jun 1927 Recieves MA from Columbia University Teachers College 1928 Joins Rochester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Children (RSPCC) as child psychologist 9 Oct 1928 Natalie Rogers born 1929 Made director of the Child Study Department, RSPCC 20 Mar 1931 Receives doctorate from Columbia University Teachers College 1939 The Clinical Treatment of the Problem Child is published 1940 Accepts position at Ohio State University as clinical psychologist and full professor 11 Dec 1940 Client-centered therapy is ?born? as Rogers addresses the University of Minnesota?s psychological honors society 1942 Counseling and Psychotherapy is published 1945 Moves to the University of Chicago to start counseling center 1946-1947 Serves as president of the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APA) 1951 Client-Centered Therapy is published 1956 Receives the APA?s first Distinguished Contribution Award 1957 Accepts appointment at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in psychiatry and psychology 1961 On Becoming a Person is published Jan 1964 Moves to La Jolla, California, to join staff of the Western Behavioral Studies Institute (WBSI) 1968 With several WBSI colleagues, leaves to form the Center for the Studies of the Person (CSP) 1968-1977 Works with ?encounter groups,? larger organizations 1970 Carl Rogers on Encounter Groups is published 1977 Carl Rogers on Personal Power 1977-1985 Travels extensively to promote his Person-Centered Approach in workshops 29 March 1979 Helen Rogers dies 30 Jan 1987 Nominated for the Nobel Peace Prize by Congressman Jim Bates 4 Feb 1987 Dies in La Jolla, California 이 게시물을...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2)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2) http://mission.bz/7095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2. 로저스 이론의 발달과 보급 1) 로저스 이론의 발달단계 <상담이론, 교육과학사. p.126-127 > ① 비지시적 단계(nondirective stage : 1940 - 1950) 감정의 반영과 비지시적 기법들로 특징지어짐.『 Counseling and Psychotherapy (1942)』출간 ② 내담자 중심 단계(Client centered stage : 950-1957) 『Client - Centered Therapy (1951)』출간. 내담자를 의존적인 환자가 아닌 책임감 있는 내담자로 취급하는 성격 및 심리치료이론 개발 ③ 경험적단계 ( Experiential stage : 1957-1975) 치료자의 유기체적 경험은 내담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행동을 이끄는데 중요한 준거가됨. 이론의 광범위한 적용이 가능. ④ 인간중심단계(Person centered stage) 관심을 개인에서 교육, 산업, 사회, 국제관계 등으로 돌리기 시작 <상담이론 알아보기, 한남대학교 출판부 p.51-52> ① 1940년대 수용, 반복, 명료화 등의 방법을 사용하는 통찰요법이다. 통찰의 내용은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있는 그대로의 자아’를 깨닫는 것이다. 주로 tape분석, 검토를 한다. ② 1950년대 기법보다 counseling 태도가 중시되었다. 내담자의 내적인 참조체제(frame of reference)로 counselor가 같이 공감하고 생각하는 태도, 이것이 치료의 필수요소이다. ③ 1960년대 로저스가 실존주의자로 변모하면서부터이다. 이는 counselor-client 관계를 고치는 자-고침받는 자의 관계(profession)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서로 대화하자는 태도이다. 따라서 client centered 가 아니고 person centered(인간중심)이다. 여기에선 의식적인 기법(수용, 반복, 명료화)이나 의식적인 태도(상대방의 frame of reference)를 포함하여 순간순간의 자기가 원하는 태도를 서로 제시하고 진심으로 충실해지는 것, 이러한 체험 이 사람을 고친다(encounter 중시). 2. 로저스의 이론이 급속히 보급된 이유 정신분석학의 시작은 1990년이며( <꿈의 해석>출판의 해로 출판 당시 프로이드는 44세 였음), 인간중심상담론의 탄생은 1940년이다(로저스가 38세때, 미네소타대학의 초청 강연 때 이론화의 확신을 가짐) 따라서 정신분석 보다 40년이나 늦게 시작한 이 이론이 더욱 급속히 보급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① 비의사(Non-medical)라도 심리요법, 카운슬링이 가능하다. ② 이론이 단순하여 심리학 전공자 이외에도 학습이 용이하다. ③ 정신분석학보다 면접횟수가 적어 보급이 용이하다. ④ 카운슬러가 내담자를 환자가 아니라 손님으로 대하는 인간관계이다.(민주주의 사상 부응, 권위주의에의 반동, 인간존중의 평등한 인간관계 등이 특이하다) ⑤ 인간에게 성장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신뢰감이 미국의 낙천주의에 적합했다.(A.ANeil 이나 E.Fromm의 생각) ⑥ 기독교 문화권에서의 죄의식에 고민하는 자가 로저스의 비심판적 이론에서 해방감을 얻는다. 이 게시물을...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3)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3) http://mission.bz/7096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3. 인간중심상담이론 Ⅰ. 주요개념 1.인간관 로저스는 인간은 자기를 인도하고, 조절하고, 통제하는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적절한 조건만 제공되면 마치 씨앗이 성장하여 기능성을 발휘하는 것처럼 타고난 잠재력을 건설적으로 발달시킨다고 보았다. 2. 성격이론 가) 성격의 구조 로저스는 성격자체보다는 상담의 결과 어떻게 성격변화가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인간 성격의 핵심요소-유기체, 현상적 장, 자아 ① 유기체 : 유기체란 전체 인간-신체, 정서, 지식-을 말한다. 인간은 경험에 대해 유기체적으로 반응한다. 다시 말해 어떤 자극이 있을 때 그 자극에 대하여 우리의 전 존재가 반응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저스는 총체적(holistic)입장을 띤다. ② 현상적 장: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험의 세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적 사실이 아니라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지각하는 가이다. ③ 자기-가장 중요한 요소 전체적인 현상학적 장 또는 지각적 장으로부터 분화된 부분으로 나(I 와 me)에 대한 일련의 의식과 가치를 말한다. 이 자아는 성격구조의 중심이며 성격발전의 핵심이다. 자아는 유기체의 행동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나) 부적응 성격의 발달 타인으로부터 긍정적인 관심을 받으려는 욕구는 유기체가 실질적으로 느끼는 욕구를 억누르게 되고 타인의 생각과 가치를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경험이란 아이 자신이 경험하는 바에 의해서가 아닌 타인의 판단에 의해서 좋고 나쁨이 평가되어진다. ☞ 심리적 부적응 현상 신경증 : 심리적 부적응으로 인해 공격적인 수준의 불안을 지속적으로 경험 성격파탄 : 심리적 부적응이 너무 커서 방어기제가 작용할 수 없을 때 자아개념이 깨어짐 다) 자아실현경향성 인간의 중핵적 경향성(core tendency) 실현적 경향성(Actualizing tendency) 형성적 경향성 (formative tendency ) 모든 유기체는 자기자신을 보호하고 실현하며 또 고양시키려는 하나의 기본적인 경향과 노력을 지니고 있으며 유기체는 유전에 의하여 규정된 방향에 따라 스스로 실현하며 그러한 실현적 경향성은 장기간에 걸쳐서 더욱 성숙하고 확장되며 자율적이 된다.(로저스,1951) 우주내의 모든 유기체와 인간은 일정한 방향으로 형성되고자 하는 경향성이 있는데, 이는 더욱 질서 정연하고 복잡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총체적인 운동이며 진화적인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로저스,1978) 3. 충분히 기능하는 사람(fully functioning person) 자신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능력과 재질을 발휘하여 자신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경험을 풍부히 하는 방향으로 이동해 나가는 사람 가. 경험에의 개방성(↔방어적인 삶) 가치의 조건에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상태로 자신의 감정과 태도를 자율이 경험할 수 있다. 방어기제의 사용 없이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 나. 실존적인 삶(↔대부분 전에 부모로부터 습득한 방식대로 삶) 경직성, 완벽한 조직, 경험에 대한 의도적인 구조가 없는 삶 모든 경험을 이전에는 결코 비슷한 방법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롭게 신선하게 느낀다. 다. 자신의 유기체에 대한 신뢰(↔유기체의 불신) 가장 만족스런 행동에 도달하는 믿을만한 수단이 바로 자신의 유기체임을 믿는 상태. 옳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행동한다. 『어떤 행동이 마치 행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때 그 행동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어떤 상황에 대한 나의 유기체적인 감각전체가 나의 지성(intellect) 보다 더 믿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61, 로저스) 라. 자유감(↔조작되는 느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음) 삶에 대한 개인적 지배감을 즐기며 그것은 일시적인 생각이나 환경 또는 과거의 사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믿는다. 마. 창조성(↔일상적이고 틀에 박힌) 남들로부터의 인정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모든 영역에서 창의적인 소신과 삶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4)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4) http://mission.bz/7097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Ⅱ. 상담의 과정과 기술 1. 상담의 목적과 목표 내담자의 자아개념과 유기체적 경험간의 불일치를 제거하고 그가 느끼는 자아에 대한 위협과 그것을 방어하려는 방어기제를 해체함으로써 충분히 기능하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을 상담의 목표로 삼는다. 2. 상담의 과정 상담의 과정(On Becoming a Person에서 인용) ① 제 1단계: 이 경직된 경험의 상태에 있는 개인은 자발적으로 상담을 하러 오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피상적인 것이다. 친밀하게 터놓고 대화하는 것은 위험한 것으로 느껴진다. ② 제 2단계: 첫 번째 단계에서 충분히 수용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면, 상담의 과정은 제 2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가끔 감정들이 표현되기도하나 아직은 과거의 객관적인 경험의 하나로 묘사된다. 그 문제나 갈등이 있는 갈등이 하나의 객관적인 다른사람의 문제처럼 지각된다. ③ 제3단계: 계속 자신이 있는 그대로 수용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되면, 보다 많은 감정들과 사적인 표현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고 하나의 객체로서 자기와 관련된 경험들의 표현이다. 어떤 문제도 개인의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④ 제 4단계: 3단계에서 내담자가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수용되고 이해되고 있다고 느낄 때, 보다 자유로운 감정의 흐름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전에는 의식하기를 부인했던 감정들이 그대로 표현되기도 한다. ⑤ 제 5단계: 내담자의 유기체적 유동성의 자유가 증가된다. 따라서 감정들이 지금 여기서의 느낌 상태로 표현된다. 전에 부인 되었던 감정들이 두려움은 있지만 의식속으로 흘러나온다. 진실된 나가 되려는 바램이 있다. ⑥ 제 6단계: 제5단계를 거치면서 이제까지의 상담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극적인 단계로 발전한다. 전에는 부인했던 감정들을 즉각적으로 현재의 경험들로 수용한다. 이제까지 객체로서의 자아는 사라지고 경험의 과정은 현실적인 것으로 된다. 내담자는 자신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대처해 걸 수 있게 된다. ⑦ 제 7단계: 이 단계에서는 이제 상담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아와 유기체의 경험들간의 불일치성은 최소화되고, 일시적이다. 자아는 이러한 경험의 과정에서 신뢰롭게 된다. 그리하여 개인은 자유롭게 경험하면서 충분히 경험하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 상담과정의 특징 ① 상담과정이나 문제해결에 대한 내담자의 책임과 구체성을 강조한다. ② 수용적인 상담관계의 중요성을 강조 ③ 수용적인 분위기에서 내담자가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의 해결책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한다. 로운 관계를 맺는다 이 게시물을...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5)
Carl Rogers의 생애와 인간중심상담(5) http://mission.bz/7101치유목회 박윤수 (한국치유상담연구원장) 3. 상담의 기술 가. 공감 ▲ 카운슬러가 내담자의 생각, 느낌, 경험에 대하여 카운슬러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내담자의 입장에서 듣고 반응하는 것이다. ▲ 내담자에게 던져주는 단순한 언어반응이 아니라 내담자와 함께 하는 과정이며 내담자의 내적 참조체제(Internal frame of reference)를 이해해야 한다. ① 내담자의 자기존중감을 증가시킴 ② 내담자의 소외감 해소 ③ 새로운 이러한 경험에 대해 흐뭇하게 느낌 ④ 내담자의 자기각성을 증진시키고 자기탐색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게 됨 나. 무조건적 긍정적 관심(배려) ▲ 내담자에 대한 수용, 비소유적 온정, 존중이다. ▲ 내담자의 자기패배적인 순환과정을 파괴시킨다. 다. 진실성 카운슬러가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반응이 순간순간 그가 내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바와 합치되는 상태를 말한다. #진실성이 중요해지는 이유 ① 내담자로 하여금 카운슬러와의 상담과정을 신뢰하게 해준다. ② 내담자 역시 상담자처럼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 놓게 되어 자기수용의 가능성이 커진다 ③ 내담자 역시 진실성 있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게 된다. #진실성의 특징 ① 단순한 자기노출과는 구별된다. 자기노출-자기자신에 대한 정보, 생각, 느낌, 경험을 드러내 놓는 것 진실성 - 내담자의 경험에 대한 카운슬러의 반응 ② 내담자의 현재 관심사나 상황과 관련된 것 ③ 진실성의 조건 내담자에 대한 카운슬러의 심층적 느낌 ⇒ 자신의 느낌에 대한 카운슬러의 각성 ⇒ 카운슬러 자신의 느낌에 대한 표현
Larry Crabb의 상담모델에 따른 중독상담
Larry Crabb의 상담모델에 따른 중독상담 http://mission.bz/7119치유목회 크리스찬치유목회연구소 Larry Crabb의 상담모델에 따른 중독상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로 오염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 수 있을까”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탈세를 하지 않고도 부를 축적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아버지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자녀들을 대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갑자기 찾아온 교통사고로 신체적 장애를 입고도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정말 함께 살기 싫은 시어머니와 웃는 얼굴로 살 수 있을까?” 등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중독자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중독 대상에서 찾은 사람들이다. “당당하고 떳떳한 아버지가 되기 위하여 일에 성공하자”고 다짐을 거듭한 사람들은 일중독자가 되기 쉽고, “당당하고 떳떳한 아버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술로 달래는”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 쉽다. 신명기 12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겠지만, 절대로 그들의 자취를 밟거나 그 민족들의 신을 의지할 목적으로 탐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고민과 갈등을 안고 살면서도, 그래서 때로는 중독의 유혹에 빠질 수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의지해서 살아가는 그들의 우상이 아니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하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Larry Crabb은 ‘사람들에게 어떤 과정을 거쳐 심리적인 문제가 발생되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모델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중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측의 모델에서 첫 번째 칸의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요구'에는 1) 자신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고 싶은 욕구(가치감)와 2) 관계에서의 안전감에 대한 욕구가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나는 무엇을 잘 해서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여 그 관계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는 분명히 타락 이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충분히 누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욕구를 만족시키고 싶은 잘못된 동기로부터 자신들만의 잘못된 가정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내가 돈이 많다면…'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알아준다면…',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 준다면…', 나는 충분히 내가 중요하다는 느낌과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분명히 장애물이 존재한다. 때로는 자신이 미치지 못할 정도의 너무 높은 목표가, 때로는 우리의 불행했던 가족 환경이나 뜻하지 않은 사건과 사고들과 같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외부 환경이, 때로는 실패에 대한 불안감이 자신이 설정한 기본 가정에 따라 중요함과 안전감에 대한 욕구를 맛보는데 장애물로 작용한다. 그 결과 기대가 너무 높은 사람은 죄책감을, 외부 환경을 탓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분노감을,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모델을 중독 상담에 적용해서 생각해보겠다. 일반적으로 중독상담가들이 임상에서 가장 흔히 경험하는 성격장애에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반사회적 성격장애, 경계선 성격 장애, 그리고 편집성 성격장애가 포함된다. 먼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이 초라하다는 느낌을 피하기 위하여 전혀 미치지 못할 만큼의 높은 삶의 목표를 설정한다. 어쩌면 이들은 목표에 닿지 못했을 때의 죄책감을 피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완벽하고, 잘 나고, 인정받고 싶어할지 모른다. 따라서 이들 가운데 능력과 운, 환경이 따라주는 사람들은 성취에 성취를 거듭하며 ‘일 중독자'가 되어간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내면의 죄책감과 실패감에 대한 고통을 다루기 위해, 또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일이 아닌 다른 것에 빠져든다. 그것이 요즈음의 컴퓨터 게임일 수도 있고, 인터넷 도박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알코올이나 약물일 수도 있다. 두 번째로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좌절에 대한 핑계를 외부 환경으로 돌리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사회가 부조리해서, 나는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잘 살수 없는 체제 밑에서 살아가니까 화가 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믿거나 의지하거나 돌볼 수 없고, 그런 한과 울분을 풀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마지막으로 경계선이나 편집성 성격 장애자들은 사람들에게서 ‘버려짐을 받거나',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 관계에 중독이 되거나,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의 인간 관계를 회피하고 그들만의 안전한 공간에 머무르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인터넷 채팅 중독이나 음란물 중독으로 나타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타락 이후 하나님과 단절된 채 자신들이 세운 잘못된 삶의 가정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중독상담의 과정은 먼저 중독 대상으로부터 떨어지는 연습을 한 후 결국 자신의 삶에 뿌리깊이 박혀 있었던 잘못된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탐색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신이 가진 지위나 돈, 명예에 더 연연해하며 살아오진 않았는가,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받아들임에 일희일비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살펴볼 일이다. 신명기 12장과 Larry Crab의 상담모델은 우리의 이런 모습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가나안에 머물지라도 그들의 신을 탐구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Larry Crab은 그 결과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죄책감, 분노, 불안감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거기 살면서 그와 같이 하지 않기'에 끊임없이 실패하지만 우리가 단절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심으로 다시 회복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매일, 순간 순간 잇닿아 그에 의지하여 살아갈 때 우리는 중독의 위협을 넘어설 수 있다.
감사의 미학
감사의 미학 http://mission.bz/7099치유목회 김진영교수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좋은 계절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린다. 사람들은 흔히 행복한 일에 관하여 그 원인을 묻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이 행복이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내가 불행해졌을 때에, 아프거나 실패했을 때에, 고통과 고난을 당할 때에 원인을 따져본다.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불행의 원인을 내게서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지나간 과거의 어떤 사건 등에서 원인을 찾는다. 또 자기 자신의 실수로 얻게 된 어려움을 다른 사람 혹은 사건의 탓으로 돌린다. 이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담을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기는 자기부인이며 자기방어의 기제이다. 자신이 받아야 할 고통과 책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성향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때에 자기가 책임지고 그 대가를 지불하기보다는 남을 탓하고 나아닌 다른 이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고 남을 원망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 고난과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 고난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것이 있었던 것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보자. 원망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가만히 살펴보면, 다음의 돌이킬 수 없는 인간적인 실수가 동반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① 바꿀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 ② 사소한 일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 ③ 남에게 나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 ④ 어떤 일을 끝까지 시도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 ⑤ 어떤 일을 해보지 않고 실수나 실패를 할까 염려하는 것 ⑥ 일을 하면서 실수를 알면서 반복하는 것 ⑦ 불편이나 실패를 당했을 때에 무심코 내뱉는 말 등. 이러한 원망은 덫에 걸린 짐승이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 덫에서 풀려나기는커녕 자신의 몸을 더욱 상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옭아매게 된다. 이러한 원망과 불평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그 고통과 아픔 자체를 감사하는 태도이다.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은 원망과 불평을 잠재우는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수 년 전 뉴욕에서 교회를 담임했을 때 읽었던 신문 기사가 생각난다. 에반스(Evans)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인 목사의 이야기이다. 뉴욕의 부르클린의 교회를 담임하셨던 분인데, 유학 온 한국인 목사들을 잘 후원하였던 분이었다. 한인 유학생들의 장형노릇을 하던 그가 이십 개월 동안 결장암으로 투병하시다 세상을 떠났다. 이민목회자들의 믿음의 선배이며 후원자를 잃고 슬퍼하였는데 그가 남긴 투병신조 4개조의 항목은 한 번 쯤 읽어 볼만한 것이다. 1) 나는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 (I will never complain.) 2) 나는 집안의 분위기를 밝게 만든다. (I will keep the home bright.) 3) 내가 받은 축복을 헤아려볼 것이다. (I will count my blessings.) 4) 내 병을 유익한 것으로 바꾼다. (I will try to turn it to gain.) 이것은 대학시절 읽었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소감(所感)”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고난은 어두워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들의 삶에서 겪게 되는 많은 아픔의 경험을 원망과 불평이라는 도구로 해소하려 하지 말자. 그것보다는 이 경험들이 나 자신의 영혼을 맑게 해 주는 좋은 보약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성숙해 질 수 있는 기회로 감사하자.
게임중독으로 기도 중입니다/ 치유사역/ 2015-03-23
게임중독으로 기도중입니다/ 치유사역 아들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군요. 일년 동안 공무원시험 준비와 게임에 중독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다 큰 자식을 부모의 아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그가 자기 일에 열심을 다하여 미래에 자립하는 아들로 서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부모님의 기도는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자식의 장래를 위하여 물론 기도하시겠지만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자녀와 많은 이야기 할 시간을 가지십시오. 사실 청년시절에 좌절감을 주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부모님에 대한 실망(뒤 바라지를 제대로 하지 못해 물질적 사회적 소외감을 받을 때)이나. 여자의 배신 . 친구의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 한 대안으로 다른 것에 열중하게 되고 그 것이 게임이나 인터넷 도박이 될 수 있고 알코올이 될 수 있고 불안한 정신 장애가 있으면 마약에까지 손을 대게 됩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다 시작한 것이 그것에서 성취감을 찾으려다가 결국은 그것에 빠져 후회하면서도 계속하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나쁜 것에는 무엇을 하든지 습관적이고 반복으로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아들의 신앙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 과거에 교회를 다녔을 것으로 생각이듭니다. 먼저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저희 가정을 다스려 주옵소서. 남편을 다스려 주옵시고. 아들을 다스려 주옵소서.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 가정에 행복을 방해하는 악한 영들은 나와 남편과 아들 뇌 기억 속에서 떠날 지어다.(반복)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아들 속에 습관적이 반복적으로 게임을 하게하는 뇌 기억 속에 기억들은 제거되고 제거될지어다. 예수이름으로 게임이 제미가 없어지고 정상적인 믿음의 아들로 돌아와 정상적인 청년의 삶을 살지어다. (반복) 주님 감사합니다. 주의 사랑과 평강으로 저희 가정을 채워 주님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기도는 아무 시간이 나 하면 됩니다. 특히 아드님이 자고 있을 때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하면 좋은 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냥 아들을 위하여 반복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아들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나 야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면 좋겠습니다. 주께서 가장 좋은 응답으로 치료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치유사역(성경적 약속인 기도) 구규창 목사
고난이란 보자기에 쌓여오는 축복
고난이란 보자기에 쌓여오는 축복 꽃샘 추위없는 봄을 보았는가? 태풍없는 가을이 있었는가? 단련없이, 정금이 만들어지는가? 성도의 삶에 있어서, 고난없는 삶처럼 무익한 삶은 없다. 세상은 고난을 불행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고난은 유익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고 우리가 축복을 달라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깊은 웅덩이를 허락하시고 우리가 성숙을 요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로 다할수 없는 골짜기로 인도하신다. 어느누가 고난없이, 새벽을 깨울수 있으며 어느누가 허리가 꺽어지는 고통없이, 기도의 자리로 나오겠는가?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이며, 특권이다.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서 만이, 육체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본질로 나아갈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아무 일이 없는, 편안한 사람이다.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꺼리가 없는 사람이다. 예배의 자리에 나와도, 간절할 만한 아무런 동기가 없는 사람이다. 새벽을 깨우려 해도, 도무지 새벽을 깨워야 할 만한 아무런 동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너무 살기가 좋고, 아이들 키우는 재미가 좋고, 사는것이 황홀하고 자아 성취하는 일이 보람차고, 일하는 것이 즐겁고 친구들과 어울려, 세상 문화와 레저를 누리며 삶의 가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새벽은 남의 나라 이야기이고, 기도실은 형무소와 같은 곳일수 있다. 오직 저들의 소원은, 예수를 믿어도 쉽고 편안하게 믿으려는 욕구만 있을 뿐이다. 안 믿자니 그렇고, 믿자니 깊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아무일이 없으면,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아무일도 안 하신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에도 달구도 물에도 집어 넣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알게 함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함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함이다. 내 자신을, 바로 알게 함이다. 인생을, 깨닫게 함이다. 숨은 허물을, 드러나게 함이다. 사람은 누구나, 숨은 허물을 감추고 살고 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도, 거품이 많다. 잘 믿는듯, 영적인듯, 거룩한듯, 신령한듯... 그러나 불같은 고난 앞에만 서면 거품은 사라지고, 숨은 허물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뿐만아니라 위선과, 위장과, 가장과, 외식의 허물들을 벗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앙의 실재만 남는다. 계란의 껍데기를 벗겨 내거나 깨뜨리지 않고는, 계란을 먹을수 없듯이 우리의 숨은 허물들을 드러내고, 우리의 육의 껍질들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영의 세계로 진입이 불가능하다. 우주선이 대기권을 벗어나지 않고서야, 어찌 무한궤도에 진입할수 있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영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의 죄성, 육성, 악성, 독성을 깨드리려 하시는 것이다. 아주 발가벗기시는 작업을 하신다. 신앙은 자기체면도 아니며, 오기도 아니며, 깡도 아니며, 신념도 아니다. 신앙은 생명이며, 관계이며, 능력이다. 그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거저 되는 법이 없다. 그것은 산모가 입덧이나 산고없이, 아이를 출생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산고없이는, 아이도 없다. 마찬가지로 고난없이는, 은혜도 없고 성숙도 없다. 그것이 상처이든, 실패이든, 가난이든, 자녀의 가출이든, 부부간의 지독한 갈등이든.. 구체적인 고난은, 구체적인 은혜를 경험하게 만든다. 성경은 불에도 들어가고, 물에도 들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충만하다. 요셉이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고난이 없었다면, 어찌 용서의 영성을 소유할수 있었을까? 야곱이 에서와의 갈등이 없었다면, 어찌 깨어짐의 사람이 되었을까? 베드로가 한 마리의 고기도 못잡는 실패가 없었다면, 어찌 제자가 되었을까? 바울이 날마다 죽는 것과 같은 삶이 없었다면, 어찌 그 은혜가 머물수 있엇을까? 사도 요한에게 죽음을 방불한 고난이 없었다면, 어찌 하늘이 열렸을까? 신앙의 성숙은, 침대나 쇼파에서 얻어지거나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다. 신앙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부터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지금 만난 고난으로도, 그렇게 맹숭 맹숭하고 미지근하게 사는데 아무일이 없다면, 어찌 하나님을 갈망할까? 은혜의 자리로 나아올까? 어림도 없다. 우리의 육성은, 본래 그런 존재다. 달리면 걷고 싶고, 걸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다. 그런 육신을 믿고 신앙생활하면, 우리의 영은 금방 죽는다. 영이 죽는데는, 하루도 안 걸린다. 영을 살리는 데는, 한참의 시간과 몸부림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고난이 있다면, 춤을 추라. 아무에게나, 그런 고난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안다면, 일단은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래도,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물을 떠난 고기는 못살듯이, 은혜 떠난 성도는 죽는다. 그 은혜는 고난의 통로를 통해서만, 흘러 들어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뿐인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말로 다할수 없는, 유익을 보너스로 얻게 된다. 그것은 축복의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며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가장 크고 값진 축복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많아도 말이다. 금을 닮았다고 금이 아니며, 노래를 잘 부른다고 다 가수가 아니며 뿔이 있다고, 다 소가 아니듯이 영적인 지식이 풍성하고, 체험이 많고, 주의 일에 힘쓰며, 예수를 오래 믿었으며, 영적인 용어를 능숙하게 사용한다고 영의 사람이라, 말 할수 없다. 영의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다. 냄새로, 진짜 예수쟁이를 구별할수 있을 것이다. 생화와 조화를, 향기로 구분 하듯이... 현재 당신이 고난중에 있다면, 당신은 적어도 그분을 닮아가는 일에 초대된 귀빈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아무일이 없이 편안하다면, 그분도 당신을 위하여, 아무일도 안하고 계시는 손님일지도 모른다. 그분으로 하여금, 바쁘시게 하라. 그분으로 하여금, 쉬지 못하시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열두 광주리 가득한, 풍성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관계 사이에 흐르는 힘(power)
관계 사이에 흐르는 힘(power) http://mission.bz/7108치유목회 고 영 순(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 1. 시작하는 말 개인의 어떠함을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자존감이 있다, 혹은 없다’라는 표현보다는 ‘자존감이 높다, 혹은 낮다’라고 말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존감(self esteem)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높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이렇다;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나를 좋아 한다; 내 의견이나 견해에 대해 대체적으로 만족 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능력 있어서 과제를 수행할 때 보통 성공 한다; 성적인 존재로서의 나(여성됨/남성됨)에 만족한다 등. 이처럼 높은 자존감의 소유자는 통합성, 정직성, 책임성, 정열, 사랑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름을 말한다. 그(녀)가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좋고 안전하며 그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할 뿐 아니라 결정한 것에 최선을 다하며, 그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타인들을 존중하며, 인생의 어려운 부분들은 인간적으로 수용한다. 자존감이 낮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다르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다른 성공한 사람들처럼) 변화시키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이나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가끔 내가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껴져 의기소침 한다; 중요한 사람과의 교분을 통해 정체성을 추구 한다; 변화를 두려워한다 등. 낮은 자존감의 소유자는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감과 함께 자기 무가치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그것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공포심과 상대에게 보상받으려는 이기심 때문에 방어적 행동을 하며, 타인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으로 그의 자율성과 개성은 무력해 지고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 정체감도 확립하지 못한다. Carroll Saussy, God Images and Self Esteem: Empowering Women in a Patriarchal Society(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onx Press, 1991), 173-75; 김영애,『사티어 의사소통 훈련프로그램』(서울; KFTC, 2002). 182-83; 데이비드 칼슨, 이관직 역, 『자존감』(서울: 두란노, 2002). 자존감이 높다는 말은 한 인격으로 스스로를 만족해 한다는 의미이다. 만족이란 반드시 조건이 충족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정서가 아니다. 만족감은 자존감과 연결되어 있다. 자존감은 일종의 인지 능력으로 인생 조건에 대해 나름대로 유익과 손해를 판단할 수 있으면서, 예기치 못한 인생의 어려움에 대해 인간적 한계를 인정할 수도 있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자존감은 반드시 행복한 조건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느낌이 아니다. 이러한 인생 태도에 대해 학자들은 가족규칙들이 융통성 있게 적용되는 가족구조가 결정적이라고 말한다. 가족은 자존감을 학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가족에서 배운 자존감을 가지고 우리는 관계(relationship) 안에 들어가며, 그 관계의 연결선상이 체계이다. 자존감을 형성하는 장소, 즉 가족은 하나의 체계(system)이며 각 구성원간의 상호의존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상호의존성은 관계의 역학을 뜻한다. 나의 됨됨이는 자존감에 달려 있으며, 내가 관계 속에 들어갈 때는 지배력(power)이 관계성에 영향 미친다. 어떤 두 사람도 함께 있으면 그 순간부터 관계의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며, 그 결과 한 사람이 지배하고 다른 사람이 복종하는 상보성 아니면 두 사람이 경쟁하는 대칭성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자존감이 높아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두 사람의 상호 욕구 충족이 일어나는 대등성 관계를 발달시킨다. 김선남, 『자기성장 집단상담 모형과 프로그램』(서울; 중앙적성출판사, 2001), 191-92. 본 논문은 체계의 한 요소인 관계(relationships)와 그것에 동기부여 하는 힘(power)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힘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어떻게 그것이 정의되고, 습득되고, 사용되는가 하는 것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체계적 성격을 갖고 있는 힘이 가족체계를 감싸고 있는 우리나라 사회구조와 무관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임정빈.정헤정 공저,『성역할과 여성』(서울; 학지사, 1997); 이혜성, 『여성상담』(서울; 도서출판 정일,1998). 자존감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성적 존재로서의 자기 평가는 여성 의회원의 40%를 넘는 스웨덴과 5%도 안 되는 우리나라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문화권의 큰 차이 없어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여성의 책임이라는 문화적 명령을 계속 받아들인다. 여성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훈련되며, 그리하여 여성은 그들의 결혼에 책임을 느낀다. Carol Gilligan, "Remapping the Moral Domain; New Images of the Self in Relationship," Claudia Zanardi, Essential Papers on the Psychology of Women(New York; New York University, 1990), 481; Nancy Chodorow, The Reproduction of Mothering: Psychoanalysis and the Sociology of Gender(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8). 만약 관계가 잘못 되면 그것은 여성의 잘못인 것이다. 한국의 여성(어린이)은 사회구조의 참여율만큼이나 복지적 혜택을 못 받는 위치이고 보니, 남성에 비해서(혹은 어른에 비해서) 관계성에 있어 그만큼 주도성이 없다고 봐야겠다. 본 논문에서는 특정 관계(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다수와 소수)에 흐르는 힘(power)에 의해 어떻게 체계가 자기규제(self regulation)를 하는지 그 ‘기민성’을 알고, 그 기민성에 대처하는 목회상담을 의도한다. 자존감은 어떤 관계를 만나든지 간에 영향을 줄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반드시 긍정적 결과만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내가 누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따라 부정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에서는 당신은 다수의 입장에서 사회적 통념에 더 편안함(안전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적 통념에 공격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결혼 적령기를 넘긴 사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가족이라는 제도권에 속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않은 소수의 사람에 대해서보다 ‘안전감’을 느낄 것이다. 안전감을 느끼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독신, 결손가족, 이혼한 사람 등)에 대해 불리한, 혹은 편견을 담은 사회적 통념을 만들어 낼 것이다. 다른 한편, 가정폭력과 성폭력이 세계 수위권에 들어 있는 나라에 사는 여성(혹은 아이)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남성들(어른들)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안전에 대한 위협을 느끼면서 사회적 약자에게 가하는 통념(‘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지’, 혹은 ‘옷을 야하게 입었으니까 강간을 당하지’ 등)까지 감수해야만 한다. 더군다나 폭력의 피해자 개인에게 현실의 모든 상황과 문제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우는 것이 우리나라 복지의 현실이고 보면 상담의 역할에 대해 그렇게 낙관할 수 없다. 폭력은 목회 상담가에게 상담가로서의 정체성에 보다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는 분야이다. 권력관계(power-relationship) 속에서 피해자가 당하는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에 목회 상담가로서의 정체성이 달려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힘이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면, 상담도 그 관계성을 풀어가는 것으로 그 기민함을 살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가족치료’라는 말보다는 ‘관계치료’를 선호함을 전제한다. D. S. Becvar & R. J. Becvar, Family Therapy: A Systemic Integration, 정혜정. 이형실 역, 『가족치료: 체계론적 통합』(서울; 도서출판 하우, 2001), 13-15. 체계는 우리에게 문제를 조망하게 해 준다면,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치료의 구체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 체계와 관계성 1) 체계의 경계성(boundary) 가족치료 상담가들이 한 가족원의 증상을 진단할 때 누가 누구의 옆에 있고, 누구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누구를 쳐다보고, 누구에게 기대고, 누구한테 멀어지려 하는지, 누가 다른 사람하고 관계를 맺기가 힘들어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는지, 그것에 대한 다른 구성원들의 반응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들은 가족체계의 패턴과 위치를 알기 위함이다. 한 가족원의 문제 증상은 이런 증상을 유지시키는 패턴을 변화시켜 가족체계 전체의 변화를 유도할 때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Robert Sherman & Norman Fredman, 김영애 편역, 『부부. 가족치료 기법』(서울; 하나의학사, 1996), 181-82. 또 하나의 진단 방법으로, “당신 가족의 적절한 아침 인사 방식은 어떠한 것인가? 가족논쟁에서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되지 않은 행동은 무엇인가?” 하고 묻기도 한다. 불쾌감의 우회적 표현, 문제의 회피, 애정의 표현방식 등은 가족원들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부나 가족의 관계성을 측정해 보기 위해 상담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즉, 평소 자기가 배우자(부모)에게 주로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평가/비난, 충고/조언, 지시/명령, 침묵/무시, 복종/거짓수용, 경청/공감, 표현/압력 등의 예가 있다. 또 다른 질문으로, 평소 자기가 부모(배우자)에게 주로 갖는 느낌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 공포, 열등감, 죄책감, 실망, 적개심, 반발심, 사랑, 기쁨, 이해, 존경, 희망 등의 예가 있다. 김선남, 『자기성장 집단상담 모형과 프로그램』(서울; 중앙적성출판사, 2001), 192-93. 이처럼 가족체계 내의 의사소통과 가족 구성원이 어떤 관계성을 이루고 사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계란 무엇인가,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리고 가족생활과의 관련성이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체계의 특성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체계는 전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대상들의 조합이다. 체계의 한 요인이 변화하면 그에 따라 다른 요인들도 변화하며, 이러한 변화는 원래의 변화 요인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체계는 대상(object), 속성(attribute), 관계(relationship) 그리고 환경(environment)의 네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대상은 체계의 부분이며 가족체계에서는 가족원들이 이에 해당된다. 속성은 체계와 개개의 구성원들의 자질 혹은 고유성을 말한다. 가족이나 가족원은 목표, 에너지, 건강, 인종적인 유전 등과 같은 가족체계의 속성을 가진다. 가족체계의 부분들 사이의 ‘관계’는 가족원들 사이의 관계가 된다. 가족관계는 응집과 적응의 수준에 이르게 하는 의사소통에 의하여 특징화된다. ‘환경’도 체계의 구성요인인 이유는, 체계가 주위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체계의 관점은 가족 상호작용의 분석과 미래의 상호작용의 예측, 그리고 체계내의 의미 있는 변화의 발생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Kathleen M. Galvin& Bernard J. Brommel, Family Communication, 노영주 외역, 『가족관계와 의사소통: 응집성과 변화』( 서울; 도서출판 하우, 1994), 46. 가족에는 부부로 이루어지는 하위체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하위체계 등의 하위 체계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하위체계는 각 경계선에 신축성이 있으면서도 분명하여서 다른 하위체계로부터 침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정에서는 흔히 부부 하위체계가 견고하지 못하므로 자식세대가 경계선을 침범하여 부부하위체계에 개입하게 된다. 김성천, “가족치료의 이론과 실제”, 서울여성의 전화, 『가정폭력상담원 전문교육집』(제 30기), 95. 그러므로 건강한 가정은 위계질서가 분명한 것으로 나타난다. 김혜숙, 『가족치료의 이론과 기법』(서울; 학지사, 2003), 75-76. 그런데 누가 힘을 더 많이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가족의 위계질서도 결정된다. 힘을 어느 한 사람만 너무 과다하게 행사할 때 가족원간에 불평과 불만이 쌓이게 된다. 그리하여 가족간의 은근한 힘 겨루기는 위계질서에 혼란을 초래한다. 건강한 가정은 부모가 동등하거나 비슷한 권력을 갖고, 아이들은 부모보다 적은 권력을 갖는 가정을 말한다. 진영석, 『가족치료』(서울; 백산출판사, 2002), 24-25. 부부관계에 있어서 권력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겉으로는 평화로울지 모르나 갈등의 뿌리가 있어서 지배받는 배우자나 아이에게서 문제증상이 나타난다. 아이가 부모보다 많은 권력을 갖거나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지니고 있을 경우에는, 아동이 부모를 지배하게 되고, 부모의 통제력 결핍으로 부모학대 등의 문제 소지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부부관계에 문제가 생길시 가족 내의 각 하위체계간의 경계선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하위체계간의 경계선의 탄력성이 가족체계의 건강성을 말해준다 하겠다. 2) 관계성의 주요소: 힘(power) 힘(power)은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능력 또는 잠재력을 말한다. 힘은 체계적 특성을 지닌 사회구조적 요소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상호작용적 요소, 그리고 결과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다차원적 현상이다. 힘(권력)은 사회체계 내에서 다른 구성원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개인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힘은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관계의 속성을 가진다. James N. Poling, The Abuse of Power: A Theological Problem(Nashville; Abingdon Press, 1991. 25-26. 가족 안에서 권력이라 함은 가족 내에서 다른 성원들 간의 행동을 통제, 유발, 변화시키는 능력 또는 작용이다. 권력은 또한 가족 내에서의 의사결정 능력으로서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잠재적 능력이다. 권력은 가족원들이 갈등적인 목표를 가지는 가족환경 내에서 그들의 목표를 성취해 낼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옥선화, 정민자, 고선주, 『결혼과 가족』(서울; 도서출판 하우, 2000), 127-28. 가족권력의 원천은 어떤 가족원이 특정 상황에서 상대를 통제할 기회를 증가시켜 주는 자원이다. 가족체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섯 가지 사회적 권력의 원천을 살펴보자. a) 처벌(강제적 권력): 한 개인이 일정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또는 행동하지 않을 경우에 어느 누군가가 자신을 처벌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b) 긍정적인 강화(보상적 권력): 한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느 누군가가 제공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c).전문성(지식): 다른 가족원이 자신보다 어떤 주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d) 합법성(지위): 한 개인이 특정 역할은 어떤 합법적인 책임을 수반한다고 받아들일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e) 동일시(준거적 권력): 한 개인이 자신을 상대방과 유사하게 보고 그 지위를 수용할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f) 설득(정보적 권력): 한 개인이 상대방의 조리 있는 주장을 받아들일 때 권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캐슬린 갤빈, 버나드 브롬멜, 노영주 외역, 『가족관계와 의사소통: 응집성과 변화』(서울; 도서출판 하우, 1994), 191-94. 권력 원천에 대한 다른 말로, 경제적 자원(직업과 수입의 정도), 규범적 자원(연령), 감정적 자원(만족도), 개인적 자원(신체적 매력, 역할수행 능력, 성격), 인지적 능력(교육수준)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권력 용어는 상대방이 상황을 지각하는 방식에 의해서 정의된다. 가족관계 내에서 어느 누구도 위의 여섯 가지 권력원천을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주어진 상황에서 그 모든 것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남편은 보상적 권력과 전문적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가족 내에서 자녀들은 특별히 그들의 의견이 격려 받고 또 존중된다면 합법적 권력과 설득적 권력을 사용하게 된다. 권력원천은 권력결과에 영향을 준다. 가장 큰 보상을 제공할 수 있는 가족원들이 가장 큰 권력을 가진다. 자원이란 한 사람이 목표를 달성하거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어떤 것이다. 권력원천은 보상과 관련되며 이것은 권력의 결과에 영향을 준다. 처벌을 피하는 것, 긍정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 전문가로부터 배우는 것, 명확하게 정의된 규정 속에서 지내는 것, 타인과 동일시하는 것, 설득당하는 것, 타인들이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 등이 보상될 수 있다. 이러한 권력원천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닌 욕구 만족과 목적 달성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구조주의 가족치료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기법으로 ‘하위체계와 동맹 맺기’가 있는데, 이것은 역기능적으로 분배된 힘과 거리를 조절하여 구성원간의 적절한 경계를 형성시키기 위하여 사용된다. 치료자는 일시적으로 한 하위체계(부모나 자녀들)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자신의 힘과 권위를 그 하위체계나 하위체계 내의 구성원에게 더하여 가족체계의 구조에 변화를 유도하고, 변화가 이루어지면 다시 다른 하위체계와 동맹을 맺어 이 하위체계를 강화시킨다. 이 기법의 전제는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적절한 권위와 지도력을 지녀야 하고, 이러한 권위와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행력 또한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하위체계로서의 부모 하위체계는 자녀들이 형성하는 하위체계보다 위에 존재하는 상하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부부간의 하위체계는 배우자로서 서로 동등한 위치를 갖는 동시에 부모 하위체계로서 적절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모든 조직에 있어서 힘의 사용과 분배는 매우 중요하다. 하위체계 구성원들 사이의 힘의 분배 또한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Robert Sherman & Norman Fredman, 같은 책, 197-98. 3. 힘의 사회화와 양상 1) 출생가족과 권력사용의 영향 부부가 사용하는 권력과정 유형은 출생가족에서의 경험에서 유래된다. 물리적 통제를 사용하는 가족에서 자라난 사람은 그와 같은 방식을 따른다. 지배적인 아버지를 가진 아들은 자기가 부인과 동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출생가족은 아동이 최초로 권력에 대해 학습하는 곳이다. 출생가족에서 사용되었던 전략은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 또다시 반복된다. 침묵과 같은 권력행사의 유형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린 시기에 학습한 방식들에 대해서는 거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Gayla Margolin, "Effects of Domestic Violence On Children," 57-59. 한 아기가 온 가족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린아이들도 권력을 행사한다. 자녀들은 성장하고 변화함에 따라 가족구조 내에서 좀더 많은 권력을 요구하며 행사하게 된다. 윌리엄 글래써, 김인자 역, 『행복의 심리: 선택이론』(서울; 한국심리상담연구소, 1998), 70-72. 6세 경에는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늦추려고 투쟁하지만, 16세 경에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한다. 학령기 자녀들은 부모들이 모르는 영역에서 전문성을 갖기 시작하면서 권력을 획득한다. 청소년기는 자녀들이 부모의 권력을 거부하고 반항하므로 가족 내에서 문제가 된다. 자녀로서의 권리의식이 강해 “호루라기(whistle)를 불어서라도”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일종의 힘 행사이다. Carol Gilligan, Meeting at the Crossroads: Women's Psychology and Girls' Development(New York; Valentine Books, 1992), 52-57. 권력이 공유되는 가족 내에서는 그러한 변화를 환영하겠지만, 남편지배형, 부인지배형의 가족에서는 그것이 위협이 된다. 온정적인 가족환경에서는 자녀들이 새로운 재능을 발달시키도록 훌륭한 재능에 대해 좋은 보상을 받는다. 부모들이 자기의 요구와 소망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잘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지의 여부가 권력에 영향을 준다. 또한 이러한 요구를 배우자나 자녀들이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가 권력결과에 영향을 준다. 부부간의 상호독립 또는 의존성의 정도도 역시 가족 권력체계에 영향을 준다. 가족 내에서 권력이 수행되는 방식은 권력과정을 살펴보거나 가족원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상호작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과정들은 가족의 토의, 논쟁, 문제해결, 의사결정, 위기 등의 시점에서 상호작용에 영향을 준다. 이 과정을 영향력, 설득, 주장성 등을 통한 통제의 시도라고 한다. 어떤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몇 번이나 이야기 하는가, 얼마 나 오랫동안 하는가, 누구에게 이야기 하는가와 질문, 이야기 방해, 침묵의 패턴도 포함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크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권력을 가지지 않을 때도 있다. 가족권력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에서는 주장성(assertiveness)과 통제(control)가 있다. 주장성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효과적인 시도 또는 영향력을 뜻한다. 가족집단에 의하여 누구의 의견이 수용되는가, 가족에서 누가 누구에게 협력하는가, 누구의 영향력이 어떠한 상황에서 중요하게 되는가 등이 판단기준이다. Carol Gilligan, In a Different Voice; Psychological Theory and Women's Development, xiv, 173. 2) 부부의 권력유형 부부의 권력구조가 극단적 부인지배형이나 남편지배형인 경우에 가정폭력이 빈번한 것으로 보고 되었다. 남편의 경제적 자원이나 위신이 부인에 비해 낮을수록 남편는 남성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좀 더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에 대한 불만족은 상대 배우자의 강력한 권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동형은 권위를 공유하고 의사결정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것이 특징이며 모든 주요 영역에서 강력한 결정권을 가진다. 자율형에서는 부부가 권위를 나누어 가진다. 즉 남편과 부인은 비교적 동등한 권위를 갖되 각기 다른 영역에서 권위를 가진다. R. Emerson Dobash-Russell Dobash, Violence Against Wives(New York; The Free Press, 1979), 93-96; Vernon R. Wiehe, Understanding Family Violence, 102. 각 배우자는 특정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책임을 진다. 영역의 분배는 역할 기대와 거의 일치한다. 결혼 만족도는 평등형(공동형과 자율형) 부부에게서 가장 높게 나타나며 남편지배형이 그 다음, 부인지배형에서는 가장 낮게 나타난다. 부인이 스스로 지배적이라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만족점수가 낮게 평가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부인은 무력하거나 무지한 남편을 보충하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연구에서는 부인지배형에서 남편은 부인만큼 불만족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역할무능(role incapacity)이론이 뒷받침해 준다. 부부간의 권력은 한 배우자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정도를 살펴보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최소관심의 법칙”(the principle of least interest)에 근거하여, 가장 애착을 가지는 배우자는 관계에서 적은 권력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관심이 적은 사람이 상대방을 더욱 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과의 관계 이외의 관계, 즉 “대안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서 권력을 가진다. 단지 대안적인 관계를 가진다고 해서 더 큰 권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대안적인 관계가 실질적 위협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어느 정도 관계에 몰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Kathleen Galvin & Bernard Brommel, Family Communication, 197-202. 현대의 많은 부부들이 권력의 평등을 강조하는 가족이념을 발달시키려고 시도한다. 또한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가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장려하고자 한다. “각 개인은 인격적인 존재이다” 혹은 “우리는 모든 의견을 존중한다”는 그런 종류의 가족이념은 권력을 공유하게끔 유도한다. 가족이 모든 가족원들의 성취라는 이념을 지향할 때, 권력차원은 가족의 목표들을 반영할 것이다. 만약 어떤 가족이 성별에 관계없이 자기 충족을 위해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 가족에서의 권력과정과 결과는 남성이 여성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족과 다를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족체계는 그 가족이념이 어떻게 작용되는지를 보여주는 권력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3) 의사소통과 권력 인정, 무시, 거부 행동은 친밀감의 발달과 권력에 영향을 주는 전략이다. 인정은 승인 또는 동의를 의미하며 권력을 얻기 위해 상대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할 때 혹은 상대방에게 보상을 주고자 할 때 사용될 수 있다. 칭찬을 잘하는 아버지는 긍정적인 지지를 필요로 하는 자녀로부터 권력을 부여받는다. 부부관계에서도 이처럼 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으로서 긍정적인 인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 피드백은 일관성을 뜻하며 변화를 극소화시키면서 일정기준을 유지하는 반면, 긍정적 또는 변화를 가져오는 피드백은 부부체계를 다른 수준으로 재조정한다. 부정적 피드백의 예로, 남편이 처음으로 아내를 때렸을 때, “다시 한 번 날 때리면 떠나버리고 말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면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긍정적 피드백의 예로, 처음으로 남편이 신체적 학대를 했을 때 부인이 이를 막을 수 없다면 때리는 것이 오랜 동안 갈등 패턴의 일부가 될 것이다. 송성자, 『가족과 가족치료』(서울; 법문사, 1995) 221-23. 또한 가족원들은 무시라는 처벌전략을 통하여 상대방을 열세한 권력의 위치로 몰아낼 수 있다. 부인지배형이나 부인이 지배적인 성격을 가진 부부의 상호작용은 토론이 길었고 남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요약하면 한 배우자가 지배적일수록 그 상대방 역시 지배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배적인 말투가 투쟁적인 의사소통을 발달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편이 지배적일 때 부인의 상호작용 방식은 질의응답식이다. 남편의 성격이 지배적일 수록 부부는 상대방의 결혼 만족도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한다. 부인이 지배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Kathleen Galvin & Bernard Brommel, Family Communication, 211-13. 응집을 이루기 위해서 각 가족은 특정인에게 과도한 권력을 부여하지 않으면서 친밀성을 허용하는 의사소통 패턴을 성취해야 한다. 자기와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행동은 어떤 다른 지배구조 유형에서보다 평등한 상호작용 구조에서 효과적으로 의사소통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족유형은 가족원 각자가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과 포부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에서는 좀더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발달된다. 권력은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녀의 문제를 떠맡을 때 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권력을 갖는 것이다. 타인의 의사 결정을 해 주는 남편, 부인, 연인 등은 상대방의 권력을 잠정적으로 감소시킨다. 평등한 가족관계에서는 가족원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각자가 권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4. 힘(power)의 남용/사회적 통념/목회상담 1) 갈등의 해결양식: 폭력 갈등은 인간관계나 결혼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정상적인 부분이다.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두 사람 사이에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으며, 그것은 때때로 어렵거나 중요한 문제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갈등 해결의 목적은 갈등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는데 있다. 갈등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문제를 해결하는 당신의 태도를 반영한다. 다음의 항목들 중에서 당신은 어떤 태도인가? 즉, 심각한 부부갈등은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심각한 부부갈등이나 폭력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된다; 어릴 때 학대받고 자란 아이는 커서 모두 학대자가 된다. 부부갈등은 한정된 사람에게만 나타난다. 당신이 행복하고 안하기는 상대에게 달려 있다. 부부 사이가 달라지기 위해서는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는 상대가 먼저 변해야 된다 등. 정민자, 『가정폭력 가해자를 위한 가족상담프로그램』(서울; 도서출판 양지, 2002), 164. 폭력은 갈등을 해결하는 의사소통의 한 방법이다. 타협이나 협상의 의사소통으로 풀 수 있는 갈등을 행위자가 자기의 힘을 남용하여(abuse) 상황을 통제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방법으로 상대를 조정(control)하는 것을 말한다. 통제(control)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다. 눈 및, 제스쳐, 행동을 통해서 상대를 협박하는 것,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는 것, 상대를 무시하는 말, 상대가 좋아하지 않은 별명 사용이나 농담을 하는 것, 외부접촉이나 친구관계 등을 제한하는 것, 아내에게 자신의 소득액을 알리지 않는 것, 생활비를 아부를 해야 주는 것, 중요한 결정을 늘 자신 혼자 하는 것 등. 이처럼 폭력은 어떤 관계 안에서 한 사람이 다른 상대방을 지배하고 그에게 힘을 행사하기 위해 심리적 또는 신체적 학대를 가하고, 위협하고, 협박하고, 고립시키거나 경제적으로 억압하는 양식을 말한다. 하다못해 상대를 무시하는 ‘농담’도 그러한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에 하는 힘 행사의 한 방법이다. Vernon R. Viehe, Understanding Family Violence: Treating and Preventing Partner, Child, Sibling, and Elder Abuse(London, New Delhi; GAGE Publications), 75. 통계에서는, 부부의 권력관계(power relationship)와 갈등, 남편의 아내폭력률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이와 가계소득은 거의 상관관계가 없고, 교육의 수준은 경미함과 심함의 차이로 나타났다. 갈등 수준이 중간 단계를 넘어서 높은 단계에 이르면, 남성우위형과 권력분리형으로 차이가 두드러진다. 갈등이 낮았을 때와 높았을 때의 차이가 평등형의 경우, 20%밖에 되지 않아 갈등수준이 높아져도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권력분리형 역시 남성우위형과 마찬가지로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데 여성우위형이나 평등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나타냈는데, 이 부부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기본으로 해서 성립될 가능성이 높으며, 우리나라 부부의 권력분리형은 의사결정권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규범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재엽, “한국 가정의 폭력 실태와 원인”, 서울 여성의 전화, 『여성상담전문교육자료집』 (31기), 49-50. 흥미로운 점은, ‘태도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아내구타에 대해 허용적 태도(경우에 따라서는 아내의 뺨을 때릴 수 있다)는 남성이 더 높게 나왔는데(아내도 이런 허용적 태도를 갖는 사람이 적지 않다), 평소에 아내를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세 배 더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한 폭력의 경우에 있어서도, 허용적인 태도를 가진 남성이 무려 4배 이상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강도가 높게 나타났다. 김재엽, “가정폭력의 태도와 행동 간의 상관관계 연구”,『 한국가족복지학』, 통권 제 2호, 1998. 폭력에 대한 허용적 태도는 의사소통에도 잘 나타난다. 남편이 폭력을 행사했는데, 남편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성 관계를 더 성의 있게 해주거나, 잘못했다고 빌면서 밥상을 더 풍성하게 차려주는 것은,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시켜주는 행위이고 그것을 더 강화시켜도 좋다는 암묵적인 긍정으로 결과 지어질 때가 많다. 부부체계에 환류(feedback)가 부부 행동의 패턴을 만든다고 하였다. Pamela Cooper-White, The Cry of Tamar: Violence Against Women and the Church's Response(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102-103. 힘을 행사하는 의사소통에 대해 피해자가 부정적 피드백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못할 때 가해자의 권력남용 의사소통 방식은 계속되고 또한 강화된다. 가정폭력과 사회폭력의 상관성은 피해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로잡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다. 전문가에 의하면, 사회적 폭력이 증가할 경우 가정폭력이 늘어나는 경향이고, 가정폭력이 증가할수록 사회적 폭력이 늘어난다고 하였다. 가정폭력 간에는 서로 연관성이 있어 남편과 부인사이의 폭력이 있는 경우 자녀에게도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가정폭력의 반복 및 전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의미이다. 즉 가정폭력을 경험함으로써 폭력사용법과 폭력이 어떠한 상황에서 정당화되는지를 학습하면서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폭력을 생활에서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즉 성적 불평등, 사적 공간으로서의 고립화, 사회적 통제의 결여, 폭력을 관용하는 사회적 규범 등이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Gayla Margolin, "Effects of Domestic Violence on Children," Penelope Trikett & Cynthia Schellenbach ed., Violence Against Children in the Family and the Community(Washington, DC;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1998), 77-90. 또한 폭력은 이것에 대해 잘못으로 규정하지 않는 사회문화적 태도, 제도, 법에 의해 계속적으로 유지된다. 이 말은 폭력에 대한 우리의 법과 사회의 메시지는 일조하는 바가 크다는 뜻이다. 일반 범죄와 비교하여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디어, 교육, 종교기관, 제도, 법, 문화 등을 통해 사회화되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부추기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성 역할의 규범을 학습한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 권력구조(경찰, 법, 관례)가 일반적으로 힘이 있는 남성을 선호하고 힘이 없는 여성을 소홀히 하는 것이 사실이다(예. 성폭력). 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봐도 어떻게 그것이 여성(어린이)의 사회적 지위와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즉, 성폭력은 젊은 여성들에게 일어난다(통계를 보면 30%가 만 13세 미만의 어린이다). 여자들의 야한 옷차림과 행동이 강간을 유발한다(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사회 풍토의 문제이다. 남성이 짧은 옷을 입는 경우에는 성적 대상 혹은 성폭력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기를 바란다(아무리 사소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해도 분노와 수치심이 오래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순결관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후유증-자살, 사회부적응, 정신병 등-에 시달린다). 성폭력은 억제할 수 없는 남성의 성충동에 의해 일어난다(남성의 공격적인 성행동을 남성다운 행동이라고 묵인하거나 심지어 조장하는 사회적 풍토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2002년 한국성폭력상담소 통계를 보면,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76.6%이다). 강간범은 정신이상자이다(대부분 사회생활을 멀쩡히 잘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자신이 겪는 소외감, 열등의식, 박탈감, 분노 등을 표출할 대상으로 성적 공격에 대항을 못한다고 보는 여성과 어린이를 택한다). 여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하다(여성은 극도의 공포와 수치심을 느껴 저항하기보다는 무력해지기 쉽다. 많은 경우 말로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라 때리거나 흉기로 위협하기도 한다). 강간은 폭력이 아니라 조금 난폭한 성관계이다(성관계란 남녀간에 애정이나 친밀감을 나타내는 의사소통과 상호교감의 한 방법이다. 강간은 강제에 의해 다른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범죄이다. 강간은 성관계가 아니라 성폭력이다). 여성들이 조심하는 것 말고는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것으로 이는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고 구속하는 소극적 임시방편이다. 진정한 해결은 성폭력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하고 적극적인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등. 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전문상담원 교육자료집』(성폭력상담소, 2003), 54. 폭력에 대한 개인적 대처에도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폭력행위가 부정적 결과 (예를 들어, 배우자의 가출, 법원의 접근 금지 명령, 감옥 혹은 별거)없이 긍정적 보상만 준다면 폭력의 재 시도는 쉽게 이루어 질 것이다. 2) 사회적 통념 힘의 남용에 대한 사회와 개인의 대처방식이 만들어 낸 결과가 바로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다. 김광일 편저, 『가정폭력; 그 실상과 대책』(서울; 탐구당, 1987), 37-44. 이 사회적 통념은 엄청난 위력으로 피해자의 무력한(powerless) 심리를 조장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시도도 좌절시킨다. 피해 여성들의 ‘우울증’은 이 거대한 통념 앞에 너무나 무력해서 생긴 병이다. 우울증의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가 지배적이다. 즉, 가해자를 떠나기가 두렵다; 취업능력이 없다; 자녀들에겐 그래도 아버지가 필요하다; 여성들은 어디 가서 쉽게 도움을 얻을 수 없다; 혼자되고 외로운 것이 두렵다; 내 행동이 달라지면 남편/애인이 변할 것이다; 폭력적인 남성을 떠나는 것이 종교적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막연하게 자신(피해자)에게 잘못된 것 같다; 타인(교회사람, 친정 식구, 친구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두렵다 등. Dana C. Jack, "Silencing the Self: The Power of Social Imperatives in Female Depression," R. Formanek & A. Gurian, Women and Depression(New York; Springer Publishing, 1987). 또한 사회적 통념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적 태도를 만들어 낸다. a) 가정폭력은 부부싸움이 아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이기 때문에 남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가정폭력은 일방적인 폭행으로 치명적인 신체적 손상과 정신적인 황폐화를 야기한다. b)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다? 가해자들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거나 이유 없이 폭력을 일삼는다. 설혹 상대방에게 결점이 있다 해도 그것이 매 맞을 이유가 될 수 없다. c) 내 마누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가부장제의 산물이다. ‘북어와 마누라는 사흘에 한번씩 패야 한다,󰡑혹은 ’아내가 잘못하면 때려서라도 고쳐야 한다‘는 통념 때문에 아내폭력이 정당화되고 있다. d) 자식이 잘못하면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우리사회는 아이들에 대한 체벌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당화 해왔다. 교육의 매, 사랑의 매라는 이름아래 폭력이 난무했던 때가 있었다. e) 가해자는 정신병자나 알코올 중독자이다? 알코올은 단지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들에게 자신의 폭력적 행위에 대한 정당화와 변명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며, 매 맞는 아내에게 술만 아니면 남편의 폭력은 중단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한다. f) 가정폭력은 가난한 집에서 많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폭력은 계층이나 지위와 관련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피해자를 위한 쉼터의 통계자료에서는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사회계층에서나 발생된다고 나타났다. g) 맞고 사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 피해자는 반복되는 폭력으로 공포와 좌절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피해자의 행동양상이 이상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반복된 구타의 결과이지 원인은 결코 아니다. h) 집 안 일이니까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집 안 일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통념은 가정폭력을 방치하고 은폐시켜 왔다. 상담가가 문제시하는 부부(자녀)폭력은, 내 안에 어떤 내적 갈등이 생기면 (열등감, 스트레스 등), 그래서 어떤 불편한 심기가 만들어지면, 때릴 구실을 만들고, 걸려들면 때리고, 때리고 나면 긴장이 풀리는데, 이런 현상이 반복해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폭력을 말한다. 그들이 때리는 이유는, 때리지 않고서는 긴장이 고조되어 견디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가정폭력 워크샆에서 발견된 흥미로운 점은, 한번 쯤 폭력을 행사해 본 사람은 이 ‘긴장’의 의미를 잘 아는데 비해, 폭력을 행사해보지 않은 사람은 폭력과 관계하여 긴장이 생기고 이완이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3) 상담적 접근방법 가해자의 ‘책임감’/ 피해자의 ‘죄책감’ 다루기 사람들 간의 힘 겨루기는 평생을 간다. 권력은 중독성이 있다. Philip MacGrow, Self Matters, 장석훈 역, 『자아』(서울; 청림출판, 2001), 460-62. 만약 어떤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당신을 지배하는 권력을 누려 왔다면 그를 변화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그들에게 권력이 있는데 무슨 이유로 그 권력을 당신에게 넘기겠는가? 무슨 말인고 하면, 힘을 행사해 온 사람이 그것을 그만 두기가 그렇게도 어렵다는 말이다. 가해자가 스스로 상담에 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가해자가 상담에 임하는 경우는 ‘법’에 의해 명령을 받았을 경우이다. ‘비자발적 상담’이란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상담가는 힘의 부정적 사용(남용, 혹은 폭력)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다. 즉, 폭력이 성장한 가정이나, 미디어, 사회 등에서 보고 배운 ‘학습된 행동’인 만큼 재학습을 통하여 비폭력적이고 보다 건설적인 행동으로 대치할 수 있다고 본다. 갈등은 감정적 협상이나 인지적 타협을 통해서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다. 폭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위자가 ‘선택한’ 행동인 것이다. 힘의 부정적 사용이란 상대방을 통제하고 일시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만 힘과 통제력을 가질 수 있다. 강압은 외적인 통제만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부모 있는 데서만 공부하는 채한다거나, 아내가 원치 않아도 성관계를 받아들이거나 하는 것은 외부적 통제에 지나지 않지, 실제로 아내의 마음과 사랑까지 통제되어서 나오는 순응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담가가 폭력에 가져야 할 입장은 폭력은 교정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행위자는 폭력이 아닌 다른 행동들을 선택할 수 있다. 폭력은 남자와 여자 (혹은 어른과 아이)의 불평등한 권력의 결과이다. 음주와 약물복용이 폭력의 근본원인은 아니다. 알코올이나 약물중독은 폭력행동과 분리시켜서 다루어야 한다. 부부갈등, 직장문제, 성적인 문제, 그리고 자녀양육문제가 폭력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스트레스의 원인이며, 스트레스가 높다고 해서 모두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 치료프로그램의 근본 목적은 폭력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부부상담과 가족치료는 가해자가 자기 폭력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폭력을 자제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아내가 남편의 폭력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때 그 효과가 있다. 가해자 치료 프로그램에서는 폭력에 대한 ‘책임성’ 부분에 대해 가해자가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질 때에야 법원에 상담이 성공적으로 종결되었음을 보고할 수 있게 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해서 상담가는 누가 폭력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할 대상인지를 분명히 인식한다. 피해자의 자아 강도는 ‘죄책감’(내가 폭력을 도발했다)으로부터 벗어날 때에야 건강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여성을 폭행했고 조종했으며 그녀의 뜻에 거슬러 폭력을 행사했음을 인정한다. . 자신의 행위가 아내/애인에 의해서 도발된 것이 아니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임을 인정한다. . 자기가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내/애인으로부터 어떤 호의적 반응을 기대하고서 하는 게 아님이 분 명하다. . 자신이 아내/애인의 용서를 받을 권리가 없음을 이해한다. . 아내/애인이 자신을 다시는 신뢰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영원히 자기를 두려워하게 될 수도 있음 을 깨닫는다. . 자기의 명예가 보호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 자기가 앞으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평화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자신에게 필요함을 안다. . 폭력의 원인이 자기와 아내/애인과의 관계나, 그 여성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 앞으로 다른 여성을 구타할 위험성(가능성)이 자기에게 있음을 안다. . 자신에게 폭행당한 여성은 스스로가 원해서가 아니면 위의 사항들을 자신으로부터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없음을 인식한다. James Ptacek, "Why Do Men Batter Their Wives," in Issues In Intimate Violence, 186-94; Korean American Women In Need, 『자원봉사자교육자료집』, 19-20. 피해자에 대한 상담가의 치료 목표는 결국, a)손상된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고, b)나약해진 자아를 강하게 해주고, c)독립심을 키워주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상담가는 피해자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주문할 수 있다. a) 폭력을 당한 사람은 외부와 접촉하지 않고 고립되어 산다. 남편이 외부접촉을 금지하는 경우도 많고 부인 자신도 자존심이 상해 외부접촉을 꺼린다. 그러다 보면 외부 정보를 외면하고 살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히고 그래서 더욱 더 자아가 약해진다. 친정, 친지, ‘여성의 전화’ 같은 데 말하도록 권하고 같은 피해자들과 접촉하기를 권해, 자기 혼자만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림으로 용기를 갖게 한다. b) 가정폭력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잘못된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체념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책이나 강연 테입을 듣도록 권장한다. 그들이 가진 잘못된 생각이란, “남편은 갈등이 많으니까 그럴 수 있다. 남자는 여자를 때릴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혹은 더 잘 대해주면 폭력은 없을 것이다. 나는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등이다. 잘못된 고정관념을 바꾸어 주는 일이 자아강도를 높이는 길이다. c) 가까운 미래에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탐색하게 도와주고 폭력을 피할 수 있는 혹은 감소시킬 수 있는 방법도 함께 모색 한다. 누구도 ‘안전하고 친밀한 관계’에 대한 권리가 있음을 강조한다. ‘문제’중심보다는 ‘해결’중심으로 Peter DeJong & Insoo Kim Berg, Interviewing For Solutions, 허남순, 노혜련 역, 『해결을 위한 면접』(서울; 학문사, 1998); 김윤주, “문제중심모델과 해결중심적 단기치료모델의 비료”, 여성부 주관, 『가정폭력. 성폭력 전문상담원 및 관계공무원 교육』(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2), 124-30. 해결중심상담에서 말하는 기본원리는 이렇다. 즉,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성공했던 경험에 일차적인 초점을 두는 것으로 내담자의 강점과 자원 그리고 능력에 초점을 두며 결함이나 장애는 가능한 다루지 않는다. 이 모델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다는 무엇이 잘 되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과거를 깊이 연구하기 보다는 내담자로 하여금 현재와 미래의 상황에 적응하도록 돕는데 일차적인 관심을 갖는다.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삼는 중심 철학은, a) 내담자가 문제 삼지 않는 것은 건드리지 말라. b)일단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를 안다면 그것을 더 많이 하라. c)그것이 효과가 없다면 다시는 그것을 하지 말고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하라. ‘문제’ 중심 모델과 ‘해결’ 중심모델에는 차이점이 있다(이텔릭체는 ‘문제’ 중심이다). a) 내담자의 문제와 그 해결책은 별개이다(문제와 해결책 사이에 필수적인 관계가 있다). b) 문제보다는 내담자가 원하는 바에 초점을 둔다(문제의 진단에 관심을 둔다). c) 내담자의 문제의 사정보다는 내담자의 장점이나 예외에 대한 탐색이 내담자의 문제해결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본다. d) 문제와 관련된 개인/사회력 조사(문제가 언제 더 심각한가? 문제가 왜 발생하였는가?)를 최소화하고 문제가 해결된 예외 상황이나 문제가 없었던 때에 관하여 질문한다(언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때 무엇을 하는가?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과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상황은 무엇인가?). e)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에 관한 전문가이다(치료자는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가이다). f) 내담자의 준거틀 (전문가의 준거틀)을 사용한다. 해결중심 상담에서는 내담자의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이 매우 중요하다. 준거틀이란 개인 또는 집단이 자신들이 경험하고 지각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활용하는 범주들의 집합이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a) 그들 주변에서 그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b) 선택한 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결정하고, c)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관리하거나 그것과의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해결중심 상담에서는 “문제”에 대한 시각도 다르다. a) 내담자의 지각에 대한 질문과 내담자의 언어에 대한 존중, b) 제시된 ‘문제’가 내담자에게는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파악, c.내담자는 어떠한 것들을 시도해 보았는가? d) 내담자가 가장 먼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하여 상담도 구체적으로 a) 상황파악 단계(폭력의 상황과 관련된 정보를 정확히 얻는 시기), b) 응급처리 단계(신체적 정신적 손상에 대한 응급치료와 응급피신), c) 관계형성단계(피해자는 가해자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에 대한 불신이 강해, 상담자나 지지자까지 불신할 수 있다), d) 대책수립단계(여건 참작해 적절한 방법으로 대책 마련) -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분석적이고 역동적인 접근은 비능률적)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 한다. 권력관계의 피해자 인만큼 상담의 내용도 사회의 성역할 기대들이 내담자에게 어떻게 불리하게 영향 미쳤는지, 어떻게 남성과 여성이 다르게 사회화 되었는지, 내담자가 삶을 통해서 경험했던 직접, 간접적인 성역할 메시지(언어적, 비언어적)를 확인하게 하여 현재 자신의 성역할에 있어서 긍정적, 부정적인 결과들을 깨닫게 한다. 내담자의 여러 관계 속에 흐르는 힘의 관계성의 인식과 내담자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상담자는 남성과 여성이 일반적으로 다른 종류의 힘을 갖는다는 정보를 주며, Rita N. Brock, "And a Little Child Will Lead Us: A Christology and Child Abuse," Joanne C. Brown & Carol R. Bohn, Christianity, Patriarchy, and Abuse; A Feminist Critique(Cleveland, Ohio; The Pilgrim Press, 1989), 42-43. 내담자에게 어떤 힘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본다. 내담자는 그동안 힘을 발휘했던 양식을 알아보고 그러한 양식에 맞는 전략을 배울 필요가 있다. 박애선, “여성주의 상담(Feminist Counseling)", 서울 여성의 전화, 『여성상담전문교육집』(제 30기), 104-05. 구체적으로 ‘역할극’, ‘선택하기’, ‘무력감’, ‘거리감’, ‘역할 전환’, ‘경계선’, ‘변화에 대한 두려움’, ‘그때와 지금’ 등은 각 상담 회기마다 제목을 가지고 시도해 볼 수 있는 피해자를 위한 주제들이다.피해자의 의사소통 방식을 알아차리게 하기 위해 'I Message'도 섣불리 교육시키기 보다는 어느 정도 자아강도가 확인되었을 때 시도해 보게 한다. 권력관계에 대한 자각 없이 ‘I Message'가 쓰여질 때 오는 저항의 피해가 적지 않다. ’나‘,’상황‘,’대상‘을 일치시키기 위한 의사소통도 권력관계의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Ed Jacobs, Creative Counseling Techniques, 설기문. 이경임 역, 『창조적 상담기법』(서울; 양서원, 1999). 피해자를 위한 영성안내(Spiritual Direction) 피해자들의 “왜 이런 일이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나는가,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놔두셨는가, 이것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질문들은 고통의 의미를 알아보려는 몸부림이며 영적인 질문들이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오용은 가정폭력 피해자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스스로를 탓하고, 고통을 겪도록 상당한 기여를 한다. Joanne Brown & Rebecca Parker, "For God So Loved the World?" in Carol Adams & Marie Fortune, Violence Against Women and Children: A Christian Theological Sourcebook(New York; Continuum, 1995), 52-57. 피해자들이 고통 하는 경험에 대해 가해자들은 종교적 전통을 사용하여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한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하며 핑계 대고, 합리화한다. “계명을 지키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매주 매일 예배에 충실 하라, 철야예배를 언제까지 하라, 아침금식을 얼마간 하라, 더 열심히 기도해라.”등의 조언이나 충고가 인생의 질문에 대해 단순하고도 완전한 해답들로서 제시될 때, 단순함에 대한 환상이 생긴다. 즉, 고통에 대해 의지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공식 (만약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그런데 고통 받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표시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어떠한 형태의 고통도 하나님의 처벌이나, 혹은 버림받았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지지해주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확신, 괴로운 경험들이 일으키는 질문과 기꺼이 씨름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상담가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Marie M. Fortune, "The Transformation of Suffering: A Bibl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in Violence In the Family, 243-50. 고통의 경험 (왜 내가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을 ‘원인-결과 관계 시각’에서 응답하는 사람 (예. 남편의 학대는 내가 17세 때 탈선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자신의 괴로움을 오래 전에 있었던, 자신이 죄의식을 느껴왔던 사건에 대한 정당한 처벌로 여겨, 결과 (남편의 학대)와 이유(십대시절의 죄)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의 본질 (남편의 학대)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추어 자기 고통에 대한 책임소재(학대하는 남편)를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이다. 너무나 많은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격려(empowerment)한답시고 ‘잊어버리고 용서하라’라는 말을 한다. 그래야 상처로부터 치유(healing)된다는 것이다. 이름 하여 2FF 기법(Forget/Forgive/Healing)이라고 불린다. 회개(테슈바)라는 말은 ’돌아감‘ (죄지은 후에 하나님께 돌아감)이라는 뜻인데,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죄는 뉘우침과 고백으로 되는데 반해, 인간에 대한 죄는 반드시 다음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본다. 즉, 잘못에 대한 시인, 자신의 잘못으로 학대당한 사람에게 용서구하는 것, 행동의 변화이다. Marie M. Fortune, "Forgiveness: The Last Step," in Violence In The Family: A Workshop Curriculum For Clergy and Other Helpers (Cleveland, Ohio; The Pilgrim Press, 1991), 173-76. 피해자에게 있어 용서란 폭행한 남편이나 애인에 대해 그의 행동을 묵과하거나 면제해 준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모든 과오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수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피해자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는 더 이상 폭력이 내 인생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이제는 더 이상 내 잘못이라고 자신을 학대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삶 속에서 다른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할 능력이 없는 존재라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겠다. 이제는 더 이상 학대당한 기억이 나를 계속 지배하고 자신을 희생시키는 데로 몰아넣지 않도록 하겠다. Marie Fortune, Sexual Violence: The Unmentionable Sin: An Ethical and Pastoral Perspective (Cleveland, Ohio: The Pilgrim Press, 1983), 209.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시간(timing)이다. 학대 경험을 해소시키기 위해 피해자가 학대자를 용서하게끔 목회자나 상담가는 밀어붙인다. 용서는 피해자의 치유과정을 앞당기기 위한 수단이지만, 피해자들은 자신의 보조에 맞추어 용서하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기대로 밀어붙일 수 없다. 그들만의 알맞은 때가 존중되어야 하며, 준비가 되었을 때 용서가 가능한 것이다. 기독교 가르침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고 약속한 곳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임마누엘 (시편 22:55)하시는 신실한 분이라는 것이다. 5. 마치는 말 폭력과 관계된 여러 상담적 접근 방법들이 있다. 사회학습이론, 공격성, 가족체계, 기질론, 성격론, 스트레스 진단법 등. 그러나 그 이론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가해자는 폭력을 ‘선택해서’ 한다는 점이다. 기질이 공격적이라서, 혹은 가족체계에서 그렇게 학습해서, 스트레스에 대처능력이 부족해서, 충동조절이 안 되서가 아니다. A유형이 아무 관계에서나 공격적이 되는가? 스트레스를 자기보다 힘이 많은 상사한테 푸는 사람이 있는가? 힘을 남용하는 사람들은 기실 모두 관계 속에서 ‘전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내적 좌절을 ‘상대를 골라서’ 풀거나 행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힘이 받쳐주기 때문에 그 관계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폭력에 관한 한 여성 목회상담가로서 필자는 상대적인 중립성을 옹호할 수가 없다. 또한 필자는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박혀 있는 가부장적 가치에 물들어 있는 가족들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신념에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여성(어린이)에게 있어 현실은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상담가는 권력관계의 피해자인 여성을 만날 때 그 여성이 힘겹게 싸우고 있는 사회적 통념의 무게를 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나의 태도는 흑인 여성주의자(womanist)에게서 영향 받은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일반적 심리 발달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보인다. 각 인간이 처한 고유한 환경과 그 안에서의 관계성이란 것이 있는데 어떻게 ‘일반적’(general) 심리가 가능하겠는가 하고 묻는다. 백인과 흑인의 심리가 다르며, 흑인 남성과 흑인 여성이 또 얼마나 다른가? 그들은 사회구조가 백인 남성 중심으로 되어 있는 곳에서 흑인 여성의
관상 기도의 이해와 실천
관상 기도의 이해와 실천 http://mission.bz/7113치유목회 권명수 교수 신자의 신실한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기도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기도를 외형적으로 보면 소리내어 하는 구송기도, 마음속으로 드리는 묵도가 있다. 내용을 중심으로 보면 중보기도, 통성기도, 탄원기도, 참회기도, 방언기도, 예언기도, 관상기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를 기독교 전통에는 관상기도라고 여겨 왔다. 관상(觀想)기도 (contemplative prayer)는 구교와 동방교회, 개신교의 일부에서 실천되고 있다. 이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주도적으로 시작은 하지만, 주님과 하나되어 그 분 안에 머무르게 되면, 인간의 주도적 의지는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신자의 영혼 속에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신다. 필자는 이런 기도로 유지되어 가는 영성에 관심을 갖고 이해를 넓혀 가던 중, 오늘 다루고져 하는 토마스 키딩의 글을 접하면서 관상기도를 직접적으로 실천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키딩의 글을 통해 접하고 실천한 관상 기도는 필자에게 낯설지 않았다. 외면적으로 동양에서 오랫동안 행해온 좌선이나 명상과 비슷해서인가 보다. 키딩의 쉽고도 친절한 안내로 어렵지 않게 관상기도의 맛을 보게 되어 필자의 영성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회보에 키딩의 관상기도의 이해를 소개하여, 독자들의 영성 생활의 성숙과 발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을 갖고 이 글을 쓴다. 더불어 독자의 직접적인 실천과 수련의 결과에 대한 경험담을 기다리면서.... 기독교 영성사를 보면, 관상기도에 대한 이해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리 하였음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동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예수의 기를 쉬임없이 기도함으로 종국에는 하느님과 연합하고져 하였다. 이를 통해, 자신이 신성화(deification)되어 가는 것을 관상기도의 최고 수준과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주도적으로 기도의 수련을 통해 성화에 이르며 또 자신의 영이 하느님과 일치코져 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신자의 삶이 점점 주님의 모습으로 닮고져 하였다. 이에 비해 서방교회의 전통에서는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서방교회의 관상기도 이해가 지역의 넓음과 오랜 시기로 인해 한마디로 요약 정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중세 시대의 초반에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인, 대 그레고리 (Gregory the Great, 540-604)의 관상기도 이해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관상기도란 하나님의 환상 (vision)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류의 기도를 觀想기도, 즉 상을 보는 기도라고 번역하여 사용해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키딩의 관상기도 이해는 동방교회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의 관상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께서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열린 자세로서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내주하시어 그 분이 하시고져 하시는 일을 하도록 한다. 이 영역에로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 관할의 영역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내맡기는 대단한 모험을 의미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기본적으로 요청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수한 믿음이 없이는 나 자신을 열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열어 놓지 못하기 때문이 다. 이렇게 순수한 믿음 가운데 자신을 열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린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 기도에 동의하는 상태를 전통적으로 관상 (contemplation)이라고 불렀다 (로마서 8:27-28). 키딩은 관상기도와 관상 생활과 구분한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상태로 이끌어주는 일련의 경험이라면, 후자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룬 그 상태 자체를 의미하며, 이 속에서 기도와 행동이 성령에 의해 움직인다. 이 말은 관상기도를 통해서 여러 기도 경험들을 한다고 해도, 그 열매는 관상생활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관상기도는 자신 만의 개인적인 영역에서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기도의 열매는 일상의 삶 속인 관상생활에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키딩은 일상생활에서 ... 큰 평화와 겸손과 사랑의 존재 여부가 이 기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167쪽).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관상 기도의 경험이 세속 속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남으로, 삶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삶이 되는 생활을 지향한다. 행동과 기도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통전적으로 조화함으로 통합된다. 그런데, 관상 기도 이해에 몇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첫째, 이 기도는 내적 침묵으로부터 시작된다. 관상 기도는 어떤 바램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생각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벗어나서 텅 빈채로 하나님께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식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 그 너머에 있는 상태로 나아가고져 한다. 키딩은 의식 너머의 상태에 이르고 거기에 머무는 데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부잣집에 입양된 아이를 적응시키려고 가르치는 능숙한 가정부 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새 집에 입양된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능숙한 가정부는 서두르지 않고 사랑으로 친절하게 아이를 가르치기도 하고 격려도 하면서 새 삶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키딩은 관상기도의 수련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교육이라고 부른다. 둘째, 관상기도란 어떤 기도의 기술이나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관상기도에 이르는 절차나 기술들이 도움이 되는 면이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기도자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신뢰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도 생활에 힘쓰는 자세가 무엇보다 요구된다. 기도의 체험과 결과에 대한 관심보다는 믿음과 신뢰 가운데에 있음이 우선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관상기도는 세속의 신자들에게 절실히 요청된다. 전통적으로 관상기도는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들의 전유물로 여기어 왔다. 그러나 키딩은 세속 속의 신앙공동체가 진정한 관상기도의 실천 장소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도원의 핵심은 따로 떨어진 수도원의 외부적 구조에 있지 않고, 그 내면적 상태인 관상기도에 있기 때문이다 (47-8쪽). 그래서 진정한 수도 생활의 실천에 있어 중요한 관상기도는 수도원이나 세속 속의 신자들 누구에게도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세속 속의 평신도와 신앙 공동체들에게는 관상기도가 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속 속의 유혹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 필요때문에 키딩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관상기도의 세계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실천적 안내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어렵다고 여겨졌던 관상기도에 이르는 장애를 줄이려고 향심기도 (Centering Prayer)란 이름으로 발전시켰다. 키딩은 향심기도를 관상기도에 이르는 사다리의 맨 밑에 있는 제일 첫 번째 다리일 뿐 만아니라, 관상의 세계로 쉽게 인도하는 매우 좋은 길이며 유일한 길이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향심기도는 수도 영성의 정수의 하나라고 까지 말한다. 필자가 향심 기도를 몸소 실천하고 느낀 바에 의하면, 향심 기도는 기도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도라고 하는 사실이다. 향심기도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는 직접 키딩의 책자를 참고해야 할 것이나,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기도자는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마련한 후, 편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음 속에 떠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조용히 바라보며 저절로 사라지길 기다린다. 그러나 계속해서 생각이 떠오르거나 졸음이 올 경우에 성스런 이름이나 거룩한 단어를 마음 속으로 한 두 번 불러, 마음 속의 생각들에서 마음이 침묵가운데 계속 있기를 지향한다. 이런 과정을 정해진 시간 동안 계속 반복한다. 향심기도가 관상기도의 효과가 있기 위해서는 키딩의 경험에 의하면 20 - 25분 정도를 하루 두 번 하기를 권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기도하는 중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에 신경이 쓰여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에 방해가 되곤했다. 그래서 자명종 시계나 예정된 시간이 지나면 음악이 나오도록 테이프를 틀어 놓고 기도에 들어가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음악이 끝나면 1-2분 정도 침묵을 지키다가 눈을 뜬다. 향심기도는 아주 성서적이고 초대 교회전통에 닿아 있다. 일세기 초대 교회는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즉 성서를 읽되 성서가 말하는 바를 듣고져 했다. 이것은 3단계가 있는데, 첫째 단계는 성서구절을 읽으면서 묵상하고 (meditatio), 둘째 단계는 읽고 묵상한 내용에 응답하고 (oratorio), 마침내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의 쉼 (contemplatio)으로 옮겨 갔다. 향심기도는 거룩한 독서의 마지막 단계의 하느님 안에서 쉼에 해당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성서를 사랑하고 애독하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성서를 읽음과 함께 향심기도를 사용하면 많은 영성적 도움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키딩은 향심기도가 단순히 관상기도에로 인도하는 역할만 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후속 저서인 <사랑에의 초대>와 <하나님과의 친밀관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향심기도를 통하여 심령 속의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간증들과 그 근거들을 다루고 있다. 즉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잠재하여 의식치 못하는 상처의 기억들이 향심기도를 통해 의식 속으로 떠올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신자에게 심리적, 영적 성숙에 기여함을 발견하였다. 이 글을 읽는 신실한 신앙 생활을 염원하는 모든 신자들이 향심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통하는 관상생활의 경지에 이르러, 기도와 세상속의 활동이 서로 조화을 이루는 진솔한 영성생활을 영위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 게시물을...
교회 안에서의 신유사역
교회 안에서의 신유사역 연구자 자신이 목회자이기 이전부터 신유 문제로 어려움을 당해 왔고, 신학공부를 하는 동안 그리고 목회를 하는 동안도 어려움을 당했다. 목회를 하는 동안 이곳저곳 다니면서 공부하고, 국내에 있는 책은 거의 다 읽고 자료를 모아 나름대로 교제를 만들어 훈련하며,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설교하고, 훈련을 시키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연구자는 분명하게 훈련을 통하여 누구나 신유의 은사를 베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한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예수님께서 분부하셨고, 성령께서 역사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대로 행하기만 하면, 역사는 아버지의 소원과 아들에 분부대로 성령께서 신유 역사를 하시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이런 확신 속에서 논문을 통하여 모든 성도들에게 신유교육을 실시하여 올바른 신유관을 정립함으로 신유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밝혔지만 신유문제로 어려움을 당한 것은 신유에 대해서 자신이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는 신유를 잘 모른다. 터부시한다. 이러한 원인들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유에 대한 이해 부족과 잘못된 신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이러한 고정 관념들을 제하기 전에는 훈련을 통하여도 큰 효과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기도를 통하여 손해볼 것은 없다는 것이다. 신유의 역사가 없다할지라도 병자가 위로 받고 마음의 안정을 이룸으로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기도를 받은 모든 사람이 치유를 받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은혜는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ƒ찰스 크래푸트„가 말한 치유사역은 치유자체가 초점이 아니라 목회가 초점이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고 하였다. 이에 더욱 힘을 얻고 신유기도를 행한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신유에 대한 장애물, 신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방법들, 치유사역의 단계 및 태도를 살펴보는 봄으로 신유사역에 효과적인 내용 등 신유의 이론적인 연구를 하고자 한다. 신유사역의 장애물 신유사역을 시행하기에 어려운 점들은 다음의 제기되는 몇 가지 이유들 때문으로 본다. 우리는 신유사역에 있어서 논쟁보다는 모든 사람들의 부정적인 장애요인을 제거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그 후에 하나님의 치유의 은총이 강하게 임할 것이다. 신유사역에 대한 장애에 대해서 프란시스 맥너트는 그의 저서 Healing에서 "기독교가 잃어버린 것 중 최대의 손실은 치유능력에 대한 풍성한 유산이다." 고 말하며 이러한 이유들은 치유에 반대하는 다섯 가지 기본적인 편견에서 야기되었다고 믿는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말한다. "우리는 신유(faith healing)와 상관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의 질병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십자가이다.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는 성자(Saint)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성자가 아니다. 우리는 더 이상의 표적들과 기사가 필요 없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기적들은 진짜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실재를 표현하는 원시적인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위의 관점들을 요약하자면, 하나님과 우리 자신들과 그리고 실재하는 것의 성질에 대해 우리가 가진 세계관의 변화 때문에, 우리는 치유의 가능성을 믿는 것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치유를 반데 하는 서로 연관된 논법이 있다는 것이다. 켄 블루(Ken Blue)는 신학적 장애물이라 한다. 그것들은 목회상 부적합하고,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며, 전반적인 교회의 치유사역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장애물에 대한 근거를 제거하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자 준비할 때, 잡초를 제거하는 것과 똑같은 과정이 우리의 사고(思考) 속에서 발생해야 한다. 온전한 신학적, 성경적 씨앗을 우리의 마음 속에 심기 이전에, 먼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잡초들과 가시덩굴들을 뿌리채 뽑아야 한다." 그는 신학적 장애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말한다. "병을 통한 성화. 신적 운명론. 믿음의 공식. 세속적인 세계관"이다. 질병을 통해 거룩하게 된다(병을 통한 성화),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Ken Blue보다 더 잘 말한 이는 없을 것이다. 그는 ƒ질병은 영혼을 정결케 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빚어 주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는 관념„이 오늘날 효과적인 치유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저해 요소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치유함을 받기보다는 질병을 참고 견디는 것이 더 기독교인답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상 치유함을 추구하는 일은 이기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병을 통한 성화‚의 주창자들은 그 이론의 정당성을 자주 병의 교육적이거나 교정적인 가치를 언급한다. 성경은 이 점을 약간 뒷받침을 해준다. 하나님은 가끔 그의 백성들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육신적인 고통을 보내신다. 그러나 그때는 항상 그들이 무슨 태도를 고치시기를 원하시는가를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은 치유받기 위해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곧 안다. 하나님께서 성숙케 하기 위해 병을 보내실 때 그것은 나쁜 행동을 고치기 위해 보내신다. 그리고 행동이 고쳐질 때, 그 병은 치유된다.(고전 11:27-31) 병을 통한 다른 성화‚의 주창자들은 병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로 간주하며,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과감하게 지기를 기대하신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잘못되었다. 신약성경은 명백하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발적인 행동이라고 가르친다.(마 16:24, 눅 9:23) 병을 통한 다른 성화‚는 병을 하나님이 보내신 시험‚으로 보는 것이다. 병이 교육적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시험받는 사람이 그 시험의 원인을 알 때에만 비로소 효력이 있다. 그런데 만성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그런 정보가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욥 1:6) 모든 인생의 고통을 통해서 혹은 병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숙케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롬 8:28). 그러나 병이 마치 그 자체적으로 좋은 것처럼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 그것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과 싸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고난(suffering)은 때로 긍정적인 것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질병(sickness)에 대해서는 그렇게 언급하지 않는다. 고난과 질병에 대하여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할지니...‚(약 5:14-15)라고 말한다. 때때로 고난은 견디라 하지만 질병에 대해서는 언제나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Ken Blue는 예수님은 한번도 어떠한 더 큰 선(善)을 성취하시기 위해 병을 주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병을 자주 치유하셨다(요 9장). 예수께서는 질병이 친구가 아니라 적임을 명백히 하셨다.‚ 고 한다. 따라서 가능한 질병은 치유되어야지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병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치유하시는 것이었다(요 10:10) 병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을 멸하러 오신 분이 축복이다. 하나님의 뜻이다(신적 운명론),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통제하고 계신다‚고 말할 때, 우리는 논리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고통이나 위로를 섭리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사고를 Ken Blue는 신적 운명론‚이라 말하며, 이러한 사고가 하나의 신학적인 중요장애물로서 치유를 가로막고 있다고 믿는다. 만약 하나님께서 병을 섭리하셨다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그 상태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하나님께서 치유를 섭리하셨다면 기도를 하든지 아니하든지 치유가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를 위한 기도가 무익하거나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은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다. 기독교인은 적절한 치료를 위해서 의사를 부르는 것 이상으로 치유를 위해 기도하거나 치유 받기 위해 기도를 요청하는 것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도나 의학적인 돌봄 이 모두가 100% 효과를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건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신적 운명론‚과 관련된 또 하나의 주된 어려움은 기독교 관심사의 다른 영역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방법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복음을 거부하거나 치유를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벧후 3:9) 그것은 인간의 역사는 단순히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상당부분은 사람들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현제를 지나 사단과 인간의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가 최종적으로 완성될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단순히 병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병을 예정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사고나 죄나 어리석음으로 인해 야기된 병을 통해서도 역사 하신다. 또한 이러한 고통의 원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순종하는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역사 하신다. 하나님은 명백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들 편에 서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의 백성들을 무장시켜 그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사역을 하게 하신다. 오직 믿음으로 치유한다(믿음의 공식). 그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건강이나 부와 같은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축복들을, 각 개인이 충분히 알고 충분히 믿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자기의 것을 만들 수 잇다는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은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상자를 여는 열쇠이다. 만약 당신이 충분한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치유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충분히 믿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하나님은 치유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등식을 Ken Bule는 믿음의 공식ƒ이라 한다. 이 공식에 의하면 치유 받지 못하는 것은 항상 믿음의 부족으로 단정지어져야한다. 믿음의 공식‚의 가르침이 전통적 오순절 운동으로부터 생겨났지만, 대부분의 현대 오순절주의자들은 극단적인 믿음의 공식을 거부할 것이다. 이 믿음의 공식‚이 현실에 맞지 않고, 목회에서 자주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반면, 그것을 치유에 대한 하나의 장애물로 간주하는데는 또한 성서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이유들이 있다. 믿음의 공식‚은 신은 병을 치유할 수 있으나, 치유를 베풀어 주시기 전에 어떤 특정한 질과 양의 믿음이 자신에게 드려지기를 바란다. 이 산과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는 언약이라기보다는 계약적이다. 그는 자신의 축복을 베풀어주기 전에 특정한 양의 인간의 믿음의 일을 요구한다. 만약 그의 백성들이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 일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점이 문제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그들의 행위 때문에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축복들을 약속하셨고, 우리들이 그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주장하라고는 한번도 말하고 있지 않다. 믿음의 공식‚을 가르치는 자들은 어떠한 종류의 고통도 거의 참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축복의 온전한 성취가 우리 믿음의 부족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높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즉각적으로 그렇게 하시겠다고는 거의 약속하시지 않으셨다. 믿음의 공식‚의 사고(思考)가 가지고 있는 가장 파괴적인 효과 중 하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전반적인 기독교 치유사역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믿음의 공식‚ 치유자들 때문에 어떠한 스타일의 치유자들‚에 대해서도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무시를 받고 있는 요소에 대한 두려움이 치유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회피하는 구실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진실로 원하는 바는 교파와 전통과 관계없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화목케 하는 그분의 사역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도움이 되는 것이다. 세속적인 세계관. 오늘 우리들은 서구적인 문화에 지배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세속주위는 종교적인 어떠한 것의 존재나 중요성을 부인하는 사고 체계이다. 하나님의 실제에 대한 현대적인 견해로부터 제거되어 버렸다. 따라서 세계는 이제 자연법칙의 인과법칙에 의해 다스려지는 하나의 닫혀진 시스템으로 이해된다. 이 법칙은 경험적인 세계를 과학적으로 관찰함으로써 발견된다. 지극히 높은 자의 종들이 기도할 때 위로부터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전제는 세속적인 세계관에 의해 아예 처음부터 배제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실제에 대한 그러한 견해를 거부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가 병든 자들을 위해 최소한의 확신이라도 가지고 기도하여, 그들이 치유되는 것을 볼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 현대적 사고의 발달은 데카르트의 책들이 유럽에서 상황을 바꾸기 시작한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데카르트에게는 하나님은 하나의 출발점이요, 나머지는 보증하는 하나의 가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철학자들은 출발점에 하나님을 포함시킬 이유가 없음을 발견했다. 점차적으로 실재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가 과학적이고 기계적인 견해에 의해 대체되었다. 과학적인 세계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의 세계관으로, 오늘날 치유를 위해 바라보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의학이다. 이러한 서구적 세계관이 하나님의 개입의 가능성을 배제해 버림으로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눈이 먼 현대의 우리들의 상태가 때로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C. S. Lewis는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백문이 불여일견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 일이 있다. 이것이 우리가 기적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명백히 해야할 첫 번째 일이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경험한다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이미 초자연적인 것들을 배제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기적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갈등은 교회와 과학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세계관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활동을 허용하는 참된 세계관 사이에 놓여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의 가능성에 대해 세상의 회의적인 태도에 너무 너무 자주 동의하는 것 같다. 우리가 본받아서는 안될 이 세대가 가지고 잇는 하나의 강력한 요소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임상적인 증거에 대한 과학적인 요구이다. 특별히 우리는 병든 자들을 위해 기꺼이 기도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오늘날 병든 자들을 기적적으로 치유하신다는 증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먼저 기적에 대한 과학적인 회의론을 옆으로 제쳐놓고, 병든 자들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 성품에 기초하여 활동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될 뿐 아니라,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에서 그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서양적인 세속주의의 늪에 빠져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넘기 어려운 장벽, 즉 오늘날에 있어서는 초자연적인 치유가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극복한 후에야 비로소 병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신유는 사도들과 함께 끝났다(중지주의). 신유에 대한 두드러진 부정적인 견해의 하나는 더 이상의 표적과 기사는 필요 없다는 중지주의이다. John Wimber는 시드로우 박스터 (J. Sidlow Baxtor)의 견해를 빌어서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표적과 기사에 대한 중지주의적 입장을 세 가지로 소개하며 비판하였다. 첫째는 표적과 기사는 1세기 말을 전후로, 사도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종식되었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표적과 기사는 초대교회에만 속하였기 때문에 종식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세 번께는 표적과 기사는 제도화된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중지주의의 견해는 조작된 기적들(Counterfeit Miracles)이라는 책을 저술한 워필드(B. B. Warfield)에 의해 초자연적인 은사는 사도 시대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그 목적은 사도들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목적이 달성된 후에는 은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보그스(Boggs)와 같은 자는 이러한 견해에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John Wimber는 표적과 기사는 결코 종식될 수 없는 것으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도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이야말로 성경과 교회사가 공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고 말한다. 그밖에 치유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스탠저(Stanger)는 세속적인 세계의 부정적인 영향, 교회의 부정적인 영향, 주위사람들의 부정적인 영향, 환경으로부터 오는 부정적인 영향, 적절한 영적 동기의 결여, 측은히 여기는 마음의 결여, 실망, 기대에 찬 믿음의 결여, 당초에 병을 초래한 요인들의 존속. 나이, 그밖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요인들을 꼽고 있다. 권택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 질병은 하나님의 뜻, 육체의 가시, 기적의 시대가 지나감" 이라고 치유의 장애물을 지적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질병을 통해 거룩하게 된다는 ‚병을 통한 성화‚의 가치관과는 반대로, 병보다는 건강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적 운명론‚이 주장하는 대로 치유는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가능한 것인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이 치유의 가능성은 오직 믿음을 드려야 한다는 믿음의 공식‚이 주장하는 대로 인간의 노력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며, 신유는 사도시대와 함께 끝났다는 중지 주의‚의 주장대로 신유는 사도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있는 신유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Ken Blue가 말하는 것처럼 신학적인 잡초를 제거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사고가 깨끗해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우리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로 복된 소식이라는 진리 안에서 기뻐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갖게 될 것이다. 치유의 원리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치유의 역사를 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병든 자들을 위한 기도를 주저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 이면에는 우리의 불신과 회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죄의 용서와 구원을 받기에는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나, 신유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운데는 신유가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는 단지 그것을 믿기만 하면 치유의 역사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셨다. 하나님은 자비(사랑)의 아버지요,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고후 1:3-4, 출 34: 6, 느 9:17)이시며,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 여호와(시 145:9)이시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풍성히 주시는 하나님께서 치유의 능력도 주신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분의 도구로 사용됨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비에 의지하는 것뿐이며, 치유를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John Wimber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그분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근본적인 원리로 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연구자는 처음에 신유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영성훈련을 받을 때 신학적인 인간구조의 문제로 인하여 큰 고민을 하였다. 지도자는 3분설을 가르치고 연구자는 2분설을 주장함으로 훈련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전인적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죤 윔버 만큼이나 기뻤다. 연구자는 John Wimber의 저서 Healing에서 구원을 받았다. John Wimber는 신유가 일어날 수 있는 영역을 영, 혼, 육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개의 측면이 본질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통전적인 실체‚ 라고 했다. 그 증거로 구약에서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창 1:26-27)는 사실과 신약에서는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24)로 제시하였다. 또한 John Wimber는 교회사 초기의 인물인 아나타시우스와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의 인물인 루터와 칼빈은 인간을 각기 구별되는 측면들을 가진 통전적인 실체로 이해하였으며,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바로 그러한 전체적인 인격에 의해 행하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죄를 지을 경우나, 구원을 받게되는 것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 전체가 죄를 짖거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 것도 우리의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체가 죽는 것이다. 죽음으로 인하여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만, 부활의 때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다시 결합하여 전인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통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의 질병이 치유되기를 기도하는 가운데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신유를 비는 기도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을 때만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자비로 채워주시고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베푸실 때도 인격전체에 맞추어져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항상 따뜻한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의 기본 원리, John Wimber가 제시한 치유의 기본 원리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병든 자들을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마 10:1, 3-8) ②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합하여 치유사역에 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고전 14:26, 갈 6:2, 약 5:16, 벧전 2:9, 4:10) ③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는 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기도하는 것뿐이다.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대문이다. ④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병든 자들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행 1:8, 고전 12:9) 우리의 할 일은 단지 우리의 삶을 성령께 개방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⑤ 우리의 형제나 자매들과 사랑 가운데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롬 12:9-10, 13:8) 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환경을 조성한다. ⑥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태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전체를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요 7:23, 치유의 요인들, 치유의 요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① 치유의 환경. 성령께서 임재 하실 때, 그리고 사람들이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을 때 치유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높다.(막 5:35-42) 이 믿음은 치유를 비는 기도를 하는 사람과, 기도를 받는 당사자 자신과,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다.(히 11:1) 기도하는 시간은 이성적인 동시에 능력에 가득 차고도 영적으로 민감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 치유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예배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때 그분의 영이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 하시기 때문이다. ② 협동적인 과정. 병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마치 자전거 타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도 같다. 처음에 홀로 시도할 때는 엉망징창이 되기 일수이나, 곧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경지가 열리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영적인 능력이 가중된다.(마 18:19) 팀에 의한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높고, 팀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증인이 있어 보호받을 수도 있다.(마 18:16) 귀신을 쫓아내는 경우, 항상 몇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 함게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도 바람직하다(레 26:8, 신 32:30) ③ 훈련. 지도자들이 충분히 훈련을 받았다면, 이제는 그들이 주체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켜야만 할 것이다.(엡 4:11-12)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다. 장애요인들은 스스로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완벽한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이 베풀면 더욱 많이 받게 된다.(눅 6:38)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많이 가르쳐야 한다 ④ 삶의 양식(樣式)으로서의 치유. 치유를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삼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세상에 전할 수 있다. 병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개방하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마 28: 18-20) 치유를 삶의 양식으로 삼음으로서 교회는 영육간에 강건해질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있게 된다. 실천방안들, 치유의 실천 방안은 첫째로 기본적으로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즉 자신을 비우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 능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자비와 은총의 행위(선물)이다. 우리는 단지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행할 뿐이다. 이를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마음문을 열어놓아야 한다(요 14:26, 16:13-15). 둘째로 영적인 안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음은 물론 치유과정에서 그분과 함께 일할 수 있게 된다. 기도하는 동안 성령께서 임재하시면 그들에게 감정적 혹은 육체적인 형상들이 나타나게되며, 그것으로 우리는 성령께서 임재하심을 알 수 있다. 그 현상들은 울거나 소리치는 행위, 장기간 힘차게 찬송을 부르는 행위, 몸을 떨거나 비트는 현상, 땅바닥에 뒹구는 행위(성령 안에서 죽는 것), 웃거나 뛰어 오르는 행위, 등의 분명한 행위와 보다 미묘한 반응으로는 몸을 가볍게 떠는 것, 눈꺼풀이 떨리거나 호흡이 약해지는 현상, 얼굴에 광채가 나는 현상,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거나 숨을 깊이들이 쉬는 현상 등이다. 우리는 그러한 현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로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이해와 확신을 줄 수 있는 말로 기도할 수 있게 되기에는 많은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다. 치유를 비는 기도를 배우는 최선의 방법은 효과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잘 보고 배우는 것이다. 또 다른 기법은 기도 받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치유의 화술을 익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치유되지 않았을 경우, 동정과 위로의 말을 건넬 줄 알아야 한다. 즉석에서 치유되지 않을 경우 좌절과 거부감을 느끼게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치유된 사람들에 대한 후속조치로서 일정한 가르침을 베푸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할 것을 권하여야 한다. 네 번째로 신약에서 사람에게 손을 얹는 행위는 병든 자를 치유할 때(막 1:41, 6:5, 16:18, 눅 4:40, 행 28:8). 축복할 때(마 19: 13-15, 막 10:16). 안수하거나 사명을 맡길 때(행 6:6, 13:3, 딤전 5:22). 영적인 은사를 나누어 줄 때(행 8:17, 19:6, 딤전 4:14, 딤후 1:6)등의 경우이다. 병든 자를 위하여 치유하실 때 예수께서는 보통 그들의 몸에 손을 대시고 질병이 떠나라고 명하시곤 했다(마 8:1-3, 막 7:32-35, 눅 4:38-39, 7:12-15, 행 3:1-5, 20:7-12). 치유과정,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방법은 내가 보아온 어떠한 방법보다 배우기 용이하고, 효과적인 것은 John Wimber의 5단계‚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럼으로 Peter Wagner는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Ken Blue는 치유의 모델을 풀러신학교에서 John Wimber에게 배웠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 반에는 침례교, 오순절교단, 장로교, 감리교 그리고 독립교회 할 것없이 모든 교파의 지도자들이 있었으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이 모델을 사용하는데 익숙해 졌다고 말한다. 제 1 단계 면담 ; 어디가 어떻게 아픈가? 의 해답을 얻어내는 과정이다. 어떤 계기로 그 병이 발생되었는지를 찾아야 한다. 당신께서는 제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하십니까?‚고 질문한다. 병자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일도 중요한데 왜냐하면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면담 중에 특별한 정보를 계시해 주시기 때문이다. 특별한 어떤 예감이나 이와 유사한 감동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성령께서는 그분 스스로 의사이자 치유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치유를 위한 기술적인 지식은 팔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학적인 논의를 길게하는 것은 치유를 비는 기도가 지연되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제 2 단계 진단 :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 사람은 왜 이러한 병을 앓고 있는가? 진단하여 문제의 근원을 명확하게 찾는다. 때때로 신체적인 증상은 정서적, 또는 영적인 문제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내적 치유는 신체의 치유에 선행될 필요가 있다. 초자연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상태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에 관한 통찰력을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 한다. 이러한 통찰력은 지식의 말씀이나 지혜의 말씀 또는 영분별의 은사를 통해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성령께서는 의사의 말이 지니고 있는 영향력이 파괴된 후에라야만 비로소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경우가 많다. 성령께서는 진단 과정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행하시면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를 도와 주신다. 그러나 결국 치유를 행하시는 분은 그분이시지 결코 우리들이 아니다. 제 3 단계 기도의 선택(요일 5:15) : 이 사람을 위해 어떠한 종류의 기도를 할 것인가? 이다. 치유를 비는 기도가 지니고 있는 비밀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이미 우리의 영혼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하나가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치유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에 받다들여야 한다.(요일 5:14-15). 그분은 우리에게 찾아오시어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치유를 비는 기도를 해주는 사람에게도 찾아오시어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신다. 치유기도의 방법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이다. ① 하나님을 향한 기도.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하여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가장 효과적인 중재기도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것이다. 주님, 부디 OOO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②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 신유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할 때 첫째는 하나님께서 명령의 말씀을 말하라고 지시하시는 것을 느낀다. 명령의 말씀은 흔히 환부에 손을 얹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병의 세력이 물러갈지어다!‚ 또는 이제는 그만 그칠지어다!‚라고 말한다. 명령의 말씀을 내릴 때 양손이 뜨겁거나 쑤시는 듯한 느낌을 느끼며, 전기 같은 것이 양손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러한 것은 치유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징표로 생각한다. 기도를 받는 사람이 통증을 느끼는 것과 동일한 신체부위에 통증이나 열기를 느끼는 것이다. 둘째로 선언의 말씀은 명령의 말씀과 매우 흡사하다. 단지 병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에 치유가 이루어졌음을 선언하는 것만이 다르다. 명령의 말씀의 경우는 능력이 용솟음쳐 오르고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경외감과 더불어 뜨겁거나 쑤시는 듯한 느낌이 오는 반면, 선언의 말씀의 경우에는 초자연적인 평화, 즉 이제는 싸움이 끝났다는 평온한 느낌을 동반한다. 주님께서 당신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돌연히 마음속에 뜨오르는 생각이 있을 때는 그 생각대로 저는 당신의 병이 6일 이내에 낫게 되리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치유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후속조치를 지시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이루실 것을 기도한다. 셋째로 권능의 말씀은 성경이 힐책기도라고 부르는 것으로써 이를 통해 귀신이 쫓겨나가거나 혹은 그 세력이 퇴치된다. 제 4 단계 기도의 시행.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효과적인가?‚의 해답이다. 기도의 시행 단계는 기도와 안수,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추가적인 면담이 포함된다. 실제 기도를 시행하는 방식은 진단 및 기도의 선택 단계에서 얻어진 결과들에 의해 결정된다. John Wimber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병자에게 손을 얹고 나서,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임하시어 역사 해 주실 것을 큰 소리로 기도 드린다. 이때 나의 기도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나는 ƒ성령이시여, 저희들에게 오셔서 저희들이 어떻게 기도하여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옵소서!„ 또는 보다 간결하게 ƒ성령이시여, 오소서!„라고 한다.‚ 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 사람들이 항상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진리에 대한 반응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현시(顯示)들 또는 현상들은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즉 딩굴기, 몸의 진동, 흐느끼기, 큰 소리로 웃기, 소리지르기 등 기이한 감정적·육체적인 현상들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법이다. 어떤 매우 격렬한 현상들은 귀신들림과 관련이 있다. 그러한 현상들은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 나라(성령)와 사단의 나라(악령들) 사이에 능력대결이 벌어지고 있음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질서와 평화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질서와 평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는 때때로 무질서하게 보이는 현상이 수반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육체적인 반응들이 그러한 변화를 수반하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오한 치유와 영적인 갱신을 수반하는 이러한 현상들이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 삶과 정상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더 기괴한 형태의 현상들을 체험하게 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치유의 목적은 온전하게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 5 단계 기도가 끝난 후의 후속 조치 : 이 사람이 치유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라는 문제 및  이 사람이 치유되지 못한 경우에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치유되지 못한 경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시킴과 동시에, 희망을 잃지 말고 기도를 계속할 것을 권면 한다. 그들로 하여금 기도팀이나 가정기도 모임 등을 찾아서 장기간의 기도를 받게 한다. 치유된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범하거나 육체의 길을 따르지 않도록 지도한다.(요 8:11참조). 그러나 후속 조치는 그 사람이 처해있는 문제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실제적인 충고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영적인 훈련을 지속하는 가운데 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친, 지속적인 목회적 돌봄이라고 John Wimber는 말한다. 교육을 통한 치유사역이 가능하다. KeLsey는 그리스도의 교제가 영적인 실재를 구현시킬 수 있는 기회로 교회에 주어질 때, 그 교회는 거룩한 것을 지각하는 예배뿐만 아니라 돌보는 관심의 구심점이 된다고 했다. 즉, 교회에서 제공하는 신유훈련이 교인들에게 새로운 치유의 빛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성춘도 기독교영성훈련은 초월적 실제와의 인격적 만남의 경험을 얻게 한다고 했다. 김경중은 그의 논문에서 교육을 통해서 치유 사역에 대한 이해의 변화를 얻었다고 말했다. 윤석용도 그의 논문에서 훈련을 받은 평신도들은 누구나 이 신유사역을 할 수 있다. 고 한다. 황승환도 그의 논문에서 신유사역은 훈련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고 한다. 이재범은 John Wimber 의 Power Healing 역자로서 서문에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훈련을 통해 신유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John Wimber 자신도 그의 저서 Power Healing Study Guide 의 감사의 글에서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방법은 그룹에 의한 훈련을 쌓음으로서 가장 효과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 이라고 말한다. 맥너트(Macbrutt)는 치유사역이 가야할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 교회, 그리고 공동체들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일은 훈련을 통하여 만이 가능할 것이다. 치유사역은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이지만 인간편에서도 개발되고 훈련되어 하나님의 사역자로 쓰임 받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본다.(딤전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
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하지 않는 10가지 이유
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하지 않는 10가지 이유 http://mission.bz/7034치유목회 김해용 (사랑의교회 장애인선교 담당 목사, 한장연 소장) 2003.05.26 조회 : 326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머리되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가진 것을 조건 없이 나누며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쓰며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렇듯 차별과 구별 없이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는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셨습니다. 실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누구든지 죄만 있으면 교회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것이요, 넘쳐나는 사랑의 에너지를 공급받고는 고통을 떨쳐 버리고 절망의 언덕을 넘어 소망의 하나님 나라를 간직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이 땅에서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의 보이지 않는 담은 많은 장애인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 장애인 사역을 교회 본연의 사명이 아닌 부수적인 사역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백성들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치료하셨습니다. 공생애 전체를 통해 볼 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며 특별히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셨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따라가야 한다고 볼 때 장애인 사역은 교회 본연의 사명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사역을 본연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력이 있을 때 하는 부수적 사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장애인들은 소수이고 교회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 영혼에 대하여 가졌던 관심과 교회의 본질을 생각해 보십시오. 장애인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요 절망에 빠진 자입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는 하나가 되고 건강해지며 비로소 교회는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자신의 육체적 장애로 인하여 고민하기보다는 육체적 장애로 말미암는 능력장애,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불리함 때문에 고민하고 나아가서는 사회의 부정적 인식과 편견, 그리고 고정관념 때문에 아파하고 갈등합니다. 특별히 "장애인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장애인은 ∼이 되면 안돼!"라는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부정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부정적인 편견의 시선, 그리고 차별의식이 만연하여 장애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의 능력이 정상인에 비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장애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한 능력위주의 잣대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흠이 생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표현되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이고 불쾌하게 생각되는 용어를 고쳐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지체장애인을 절름발이, 혹은 앉은뱅이로, 청각장애인을 귀머거리로, 시각장애인을 소경, 장님, 봉사 등으로 그리고 정신질환자를 미친 사람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부정적인 용어는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그리고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의 중증장애는 육신의 장애가 아닌 영적 장애가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의 폭넓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잘못된 생각은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교회의 무관심과 소극적인 자세 때문입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초대교회에서는 복음의 폭발적인 능력으로 모든 사람에 대하여 차별이 없는 공동체를 구성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해방을 선언하셨고("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것은 곧 여성, 남성, 아동,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넘쳐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은 각별한 사랑의 대상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노동력을 귀하게 여겼던 초기 농경사회의 영향과 산업사회의 발달로 장애인은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조차도 차별적인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누구에게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누가 마땅히 가져야 합니까? "종이 돌아와서 그들이 말한 대로 주인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종에게 빨리 시내의 큰 거리와 골목에 나가 거지와 불구자와 절름발이와 맹인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현대어성경, 눅 14:21) 4.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기보다는 큰 교회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었던 초기에는 외국선교사들의 장애인에 대한 깊은 관심과 선교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유교적 전통과 일반사회의 배금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등이 교회로 밀려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개교회 중심으로 발전하게 됨에 따라 대부분의 교회는 부흥과 성장중심의 정책을 펴게 되었고 교회성장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장애인은 결국 소외되어 자선적, 시혜적 차원에서 구제와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장애인은 무관심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받아들여야 할 상처 입은 장애인들을 교회가 외면함에 따라 장애인들은 눈치를 보며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큰 교회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작더라도 건강한 교회, 하나된 교회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진정으로 하나된 교회는 장애인들도 함께 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5. 장애인 사역에 대한 담임목회자의 인식부족 때문입니다. 현재 일선에서 사역하시는 대부분의 담임목회자들께서는 신학교시절 장애인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졸업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장애인선교는 당연한 목회가 아닌 선택적 목회로 생각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장애인 사역은 장애인 선교에 사명이 있는 특별한 사역자들이나 선교회에서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부족은 장애인을 동정과 구제의 대상으로 국한시키는 좁은 시각을 갖게 하기 때문에 선교와 교육의 접근은 더욱 어렵게 됩니다. 6. 장애인 사역을 위한 전문 교역자와 교사, 그리고 교육자료 및 프로그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가 영혼구원이라는 편협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영육구원이라는 교회 본질의 사명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큰 교회를 중심으로 복지선교를 표방하며 장애인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애인 선교에 관해서는 신학교에서조차 강의가 없어 가르치지 못했으며 장애인 시설과 연계하여 실천신앙을 배울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장애인 선교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교단이든 장애인에 대한 신학조차 정립되어 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전문교역자와 교사가 배출되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몇몇 큰 교회들을 중심으로 장애인 선교가 시작되었지만 기초가 없는 관계로 발전은 매우 느렸고 그나마 장애인 선교를 담당하는 사역자 역시 평생사역을 할 수 있도록 교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사역자가 양성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교육자료 및 좋은 프로그램이 개발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선교를 하고 싶어도 기초가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장애인선교를 시작한 교회는 장애인 선교의 경험을 토대로 장애인 신학을 정립하여 많은 교회에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7. 장애인 사역자들의 평생사역에 대한 의지결여와 교회의 지원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장애인 사역의 전문성은 인정하면서도 사역자의 전문화를 위하여 지원은 꺼리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장애인 사역을 위하여 평생을 드리겠다는 사역자의 헌신도가 약합니다. 뿐만 아니라 120여 년의 한국교회 역사중 장애인 사역은 거의 제외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장애인 사역은 오랫동안 묻혀있던 다이아몬드 광산을 캐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품고 주위의 조건을 보기보다는 생존을 포기하는 믿음을 가지고 척박한 장애인 선교의 현장에 뛰어든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8. 장애인 선교의 사역을 선교회의 사역으로 국한시키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선교가 교회 내에서 주일학교 형태로 혹은 장애인선교회를 두고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들이 장애인 선교는 전문화되어야 하며 전문성을 가진 사역자와 기관(para-church)들이 해야 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동안의 장애인사역은 para-church라고 불리우는 각종 장애인선교단체에서 감당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목회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마땅히 해야 할 사역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구적인 입장에서 para-church의 사역형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부정적인 양상중 하나입니다. 성도와 교역자와 행정조직이 갖추어져 있는 교회 안에서 장애인 선교는 시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장애인 선교를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시행해야 하며 이것이 교회본질을 회복시키는 요소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9. 장애인 사역을 하게 될 때 많은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교회는 한 영혼에 대하여 경제적 가치를 따지며 접근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수에 의한 민주적 논리를 가지고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에 대한 귀중함을 이미 교훈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인 사역의 현장을 살펴보면 장애인 편의시설과 교육자료를 준비한 곳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 무언의 차별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까지도 돈의 논리에 굴복하여 "영혼구원"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저버리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보다 맘몬(돈)을 섬기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전혀 요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애인들에게 작은 것에 크게 감사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10. 신학교육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장애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애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원의 도구요 통로요 매개체입니다(요 9:1-3). 뿐만 아니라 장애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사역의 대상이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현실적 도래와 함께 종말론적 미래와 모든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좋은 본보기였습니다. 실로 장애인은 인간의 고통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가장 큰 예이며 극심한 고통과 좌절 속에 있는 장애인에게 치료와 함께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도래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사실은 사복음서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 선교는 예수님 사역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에서도 마땅히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장애인에 대한 커리큘럼조차 신학교 내에 거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받지 못한 목회자들이 장애인 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장애인에 대한 교육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당연하고 우선되는 문제로 취급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 빨리 장애인 신학이 정립되어 교회의 장애인 사역에 힘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이 게시물을...
기독교상담과 영성
기독교상담과 영성 http://mission.bz/7056치유목회 반신환교수 (한남대 기독교학과 기독교상담) 2003.10.23 조회 : 355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유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앙,'' ''경건,'' 혹은 ''정신'' 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되는 경우에도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정신'' 대신에 ''현대영성'', ''기독인의 경건'' 대신에 ''기독인의 영성''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 영성이 무엇일까? 이 질문을 우리의 상황에 더 적절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인이 사용하는 영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기독교에서, 영성은 육에 따라 사는 생활 혹은 육체적 성질과 대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사도 바울에게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이 때, 영성은 하나님의 영이 촉발하고 인도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를 사용할 때, 경건성과 신비성을 색채를 갖고 있습니다. 현대에는, 영성이라는 말은 기독교, 심지어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극도로 발달한 합리주의에 대한 반대 혹은 대안으로 동양적 신비주의와 초월주의가 제시되면서, 영성이라는 용어는 세속 영역에서 확대되고 있습니다. 즉, 조작적 물질문명을 벗어난 초월적 경험, 정신세계, 혹은 자연스러운 무위성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신비에의 개인적 참여'' 혹은 ''하나님과의 생생하고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경험적 특성과 초월적 특성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이 상담과 어떻게 관련성을 갖고 있을까? 우선, 이것은 상당히 타당성을 갖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영성이 개인의 경험에 관심을 두고 있고, 기독교 상담도 내담자 개인의 경험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 개인의 경험, 경험적 변화, 변화의 방법론 등에 대한 관심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영성을 ''긍정의 방법(cataphatic)''과 ''부정의 방법(apophatic)''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긍정의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닮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집중력과 불과 같은 열정이 이 방법의 특징입니다. ''부정의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돌립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정결함과 개방성이 이 방법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가는 방법을 수동적 태도에서 찾습니다. 다음의 사례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30대의 여성이 체중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다이어트를 시도했습니다. 황제 다이어트, 풍선 다이어트...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습관을 자세히 적고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간식을 먹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냉장고 문에, 날씬한 미인의 수영복 사진을 붙였습니다. 출출해서 냉장고에 무심코 갔다가, 그 사진을 보고 참았습니다. 냉수만 마셨습니다. 효과가 있었습니다. 일 개월만에 5kg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편이 냉장고 앞에 자꾸 얼씬거리더니, 한 달만에 5kg이 늘었습니다. 이 여성이 갖고 싶은 몸매를 사진으로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긍정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닮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자세히 제시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습 때문에, 우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열심을 갖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남편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우리 욕망의 대상이 될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왜곡된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독선과 욕망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어 인정하고 제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정의 방법''입니다. 상담에는 ''긍정의 방법''과 ''부정의 방법''이 섞여 있습니다. 20세기 초기와 중기의 상담, 목회상담운동에 나타나는 기독교 상담에는 ''부정의 방법''이 강했습니다. 모든 결정을 내담자에게 맡겼습니다. 이것은 개방성의 극치입니다. 그리고 내담자가 호소하는 문제보다, 내담자의 심리적 상처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을 해결하면, 내담자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상담을 했습니다. 개인의 욕망을 제거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현대에 올수록, ''긍정의 방법''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습니다. 내담자가 갖추어야 하는 인간관계의 기술, 대화의 기술, 갈등해결의 기술 등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그것을 습득하도록 격려하고 인도합니다. 내담자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으로 상담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내담자의 심리적 문제에 초점을 두지 않고, 내담자가 지향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그것을 달성하도록 격려합니다. 이것은 ''긍정의 방법''입니다. 기독교 상담에서 ''긍정의 방법''이 다시 발견되고 있습니다.
꿈에 대한 단상
꿈에 대한 단상 http://mission.bz/7124치유목회 정태기 교수 어머니는 나를 갖기 전 한 꿈을 꾸셨다. 글을 못 읽으셨고, 더욱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아무 것도 모르신 분이셨는데 그 태몽에 대해 생각해보면 내가 목회자나 상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징의 꿈이었던 것 같다. 꿈 속에서 어머니는 큰 건물을 보았고 건물 안에는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내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더란다. 그때까지 고향 섬을 한 번도 떠나 본 적도 없었고, 더욱이 그렇게 큰 건물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본적도 만무했었다. 그런데 청년시절 안양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 섬에서 아들 집으로 다니러 온 어머니가 마침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전에 교회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는 어머니가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것이 니 태몽이여, 오메 태몽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여.” 하신다. 참으로 어머니는 어떻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 훗날의 살아갈 모습을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일까? 꿈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신통한 꿈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렇다고 모든 꿈이 다 신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꿈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꿈은 하나님과 깊고 풍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이고, 심리학적인 면에서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중요한 상징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꿈을 통해 인간에게 계시를 들려 주셨다. 지금도 목회 현장이나 상담과정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면 그것은 꿈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꿈이 오랫동안 기독교에서 무시되어 왔고, 목회에서 사장되어 왔다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꿈의 중요성을 알고 난 후부터 상담과정에서는 내담자와, 목회현장에서는 교인들의 영적 성장이나 치유를 위해 꿈을 다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오래 전부터 들었다. 꿈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꿈을,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꿈은 답이 아니고 질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 사람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이 그와의 관계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 속에서 그와 비슷한 갈등을 겪는 꿈을 꾸었다면 이것은 친구와 관계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중단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답이기 보다는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이루어 가는 방식이나 태도를 보여주고, 과연 이런 식으로 관계를 이끌어 가는 것이 옳은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이 ‘지시하는 바’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질문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때로 꿈은 병든 관계를 바로 잡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으라고 부르는 초대로 볼 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사실 기독교 역사상 꿈이 무시되었던 측면도 이와 연관이 있다. 초대교회는 꿈 해석을 통해 신앙공동체나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성취하는데 열심이었다. 이에 반해 5,6세기의 크리스천들은 꿈 해석을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는 도구로 이용하려 했을 뿐, 꿈을 통해 온전한 치유의 삶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의 안일을 지키고 도와주는 일종의 점술로 여겼다. 이 시기에 씌어진 꿈 해석에 관한 글들을 보면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걱정없이 살 수 있는가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며 꿈을 통해 부, 건강, 행운, 성공 등을 보호하거나 미리 알려주는 징조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현상은 요즈음에도 꿈에 돼지를 보면 복권을 산다든지, 조상이 나타나면 길흉을 점치는 지금의 현실에서도 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꿈에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의미는 꿈을 통해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나 자신이나 이웃과의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데 있다. 꿈은 치유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 꿈은 우리들의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긴장과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부분 꿈은 늘 갈등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가득 차 있고 인간사의 상처와 이 상처를 치유해야 할 필요성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잠자리가 사납다 여겨지는 꿈은 다른 어떤 꿈보다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준다. 헤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지거나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쫓기거나 생명이 위태로우면서 도저히 소리 한번 지를 수 없는… 이처럼 반복되어 나타나는 꿈은 치유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내적인 갈등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불안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꿈 해석을 통해 치유에너지를 사용하는 한 방법을 살펴보자. 꿈의 사용: 불안한 꿈 다시 꾸기 뒤숭숭하고 불안한 꿈을 꾸었을 때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한번 꿈을 고쳐봄으로 그 속에서 치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만일 꿈에서 자동차가 부서졌다면 삶 자체가 그렇게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다. 이럴 때는 꿈에서 곧바로 일어나지 말고, 부서진 차를 정비소에 가져가 수리를 한 다음 고친 차를 몰고 신나게 달리다가 꿈을 깨보는 것이다. 혹은 꿈속에서 집이 무너져 내려 엉망이 되었다면 즉시 일어나지 말고 집을 다시 수리하고 깨끗한 집으로 새 단장을 한 뒤, 잠시 동안 기분 좋게 살다가 눈을 뜨고 일어나 보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꿈을 수정하여 다시 기록하는 기술은 우리가 파괴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의 영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파괴적인 습관과 기억은 대부분 무의식 깊이 묻혀있다. 따라서 꿈을 통하여 이 습관과 기억을 의식세계로 떠올리고 나면 자신의 삶의 습성을 보다 분명히 인식할 수 있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불안한 꿈을 꾸었다고 해서 곧 바로 기분 좋은 감정으로 바꾸는 꿈을 꾸고자 노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먼저 불안이 갖고 있는 충분한 이유, 그 상처를 충분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들으며, 어떤 문제가 자신의 감정을 가장 사로잡고 있는지, 먼저 우리에게 어떤 습관이나 상처가 있는지를 알아야,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처나 문제가 자신의 감정을 흔드는 대로 얼마동안 자유롭게 놓아둘 필요가 있다. 불안한 꿈은 우리의 성격 중에서 치유하고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치유와 변화가 보다 쉽게 일어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불안한 꿈을 수정하여 치유에 도움이 되도록 다시 바꿔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하나이다. 먼저 꿈의 상징 언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곰곰이 살피고 나서, 파괴적인 꿈이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뒤흔들도록 얼마동안 놓아둔다. 그 후 치유에 도움이 되도록 꿈을 수정하여 본다. 우선 상상력을 동원하여 꿈으로 다시 들어가 고통스러웠고 마음이 힘들었던 부분에 이른다. 그리고 종이에 그 나머지 부분의 꿈을 수정하여 다시 써본다. 행복한 결말에 이르도록 마음내키는 대로 꿈의 내용을 고치고 바꾼다. 그리고 자신의 꿈 자아뿐 아니라 깨어있는 자아도 행복한 결말을 위해서 어떻게 행동과 감정을 바꾸어 갈 것인지 적어 본다. 이렇게 하다보면 우리는 꿈과 꿈 해석을 통해 자신이 걸어야 할 삶의 여정과 그 궁극적인 목적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꿈은 여전히 신비 살다보면 친해지고 잘 알면 인생 살기가 한결 수월한 것이 있다. 그 중에 꿈과 친해지는 것도 지혜로운 친구를 얻는 든든함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꿈을 잘 알고자 해도 꿈이란 역시 우리에게는 그 신비함을 다 드러내지 않는 미지의 세계이며, 신비로운 것 만큼 그 안에는 놀라운 보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이기도하다. 허나 그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 아니던가! 이 게시물을...
꿈을 이루는 비결
꿈을 이루는 비결 http://mission.bz/7035치유목회 김해용 (사랑의교회 부목사,한국장애인선교연구소장) 창세기 40:4-8 4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수일이라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몽조가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관원장에게 묻되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누구나 한 번쯤은 "내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꿈을 꾸어 봅니다. 죠지 바나는 "꿈이 있는 사람이 꿈이 없는 사람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 놓고 달려가는 사람은 삶의 자세와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공을 꿈꾸는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꿈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꿈을 이루려면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생각과 마음의 폭을 넓혀야 하고 넉넉한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원활한 대인관계와 맡겨진 일을 멋있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도 겸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균형 잡힌 인격이 되도록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균형 잡힌 인격은 나이가 들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을 걸으며 다양한 훈련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고난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균형 잡힌 인격으로 성장 하길을 기대하는 사람은 단순한 몽상가일 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요셉도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루기까지 혹독한 고난을 대가로 지불했습니다. 요셉이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요셉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아버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라났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특별한 사랑 때문에 형제들의 미움을 사고 결국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들에 의하여 자신이 노예로 팔렸다는 사실은 결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11년이라는 노예 생활을 통하여 얻은 것은 또 다른 배신감이었습니다. 바로의 시위대장이었던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고 가정 총무 일을 할 때 그의 외모와 내면의 아름다운 인격으로 말미암아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강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여자의 유혹을 뿌리치자 돌아온 것은 자유를 빼앗기는 감옥이었습니다. 순결한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두 번씩이나 버림받으면서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도 자신의 생애를 맡기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였습니다. 모세는 이 사실을 창세기 39장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세 번이나 기록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요셉의 주권적 신앙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만 신뢰한 요셉의 아름다운 신앙은 총리의 자리에 오르고 형제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 45:5) 자신의 꿈과 역행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역행하는 것과 같은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위대한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뜻을 찾는 사람이야말로 꿈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룟 유다에 의해 팔렸고 수석 제자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부인 당했으며 저주까지 받으셨습니다. 또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오해를 받으셨고 나사렛 동네 사람들로부터 배척 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버림받는 고통의 체험은 버림받은 자들을 이해하고 감싸안기 위하여 매우 유익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히 4:15) 당시의 고난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지만 연단 후에는 넉넉한 인격으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고난은 문제나 고통이 아니라 의미이며 변장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낮아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게 되는 고통을 겪는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요셉은 자신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꿈을 간직한 사람은 자신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무서운 싸움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경을 정복하기 전에 자신을 정복해야 합니다. 요셉의 훌륭한 점은 극기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하여 요셉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갔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바로의 신하들을 섬기며 정치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었으며 애굽 관리들의 관습과 관료들의 언어를 배웠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것입니다. 고난의 시간을 무료하게 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 있게 보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 발전하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로왕 앞에 설 기회를 만들어 주셨을 때 은사를 활용하여 축복의 통로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이라는 환경을 통하여 자신을 극복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요셉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 던져졌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발전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 하나의 문이 닫힐 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십니다. 비록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갔지만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요셉은 노예의 신분에서 총리의 신분으로 높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고난의 힘든 시기를 맞이하더라도 꿈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는 멀리 보고, 넓게 보고, 깊게 보아야 합니다. 고난을 단순하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인생이란 게임은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할 때 쉽게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당한 고난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일 뿐입니다.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는 깊으며 꿈이 클수록 고난은 크게 다가옵니다. 셋째, 요셉은 섬김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높이시기 위하여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집에서 즐겨 입던 채색 옷을 벗기시고 노예 옷을 입히셨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말구유로, 십자가로, 음부로 내려가신 것처럼 더 낮아질 수 없는 자리에까지 내려가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주신 자에게 먼저 내려가도록 만드십니다. 아예 잊혀진 존재로 만드십니다. 본문 4절을 살펴봅니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요셉은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 바로의 관원장의 안색까지 살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요셉이 그들에게 갔는데 요셉은 그들에게 근심스런 빛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두 시종장에게 물었습니다.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창 40:7) 요셉이 바로의 관원장의 근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기회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의 영적 민감성은 하나님의 기회를 포착하게 만들었습니다. 형통은 하나님의 기회와 인간의 준비가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따라서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영적 민감성을 키워야 합니다. 요셉의 놀라운 섬김은 나중에 바로 앞에 설 기회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요셉은 성실한 태도로 항상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섬기는 삶을 그의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김을 기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삶을 기쁘게 사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세우시며 큰 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섬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보냄 받은 우리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는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 (요 13:14-17) 다시 말하지만 섬김의 거룩한 습관은 청지기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세상에서는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이룬 사람은 섬기는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꿈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꼭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멋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꼭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어야 하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훈련 방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훈련이란 하나님만 신뢰하는 훈련, 고난 속에서 자신을 극복하는 훈련, 섬기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 균형 잡힌 인격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가 성공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균형 잡힌 인격을 갖는 것에 있습니다.
나 자신의 상처의 뿌리를 발견하라
나 자신의 상처의 뿌리를 발견하라 http://mission.bz/7127치유목회 정태기 교수 집안에 먼지가 쌓인 곳을 보면, 보이는 곳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 더 많이 쌓여 있는 것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의 문제도 어떤 보이는 이유와 현상 뒤에, 뿌리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이리저리 꼬여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지만, 많은 가정의 속내를 보면 시베리아 벌판보다 더 춥기도 하며, 가족이라는 끈만 달고 사는 가정이 많습니다. 이렇게 많은 가정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혹은 ‘서로의 성격이 맞지 않아서' 등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로의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너와 내'가 만나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치유상담연구원의 ‘부부치유'를 경험한 많은 이들이 고백하는 것은 그동안 ‘남편을 남편으로 보지 못했고, 아내를 아내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학대했던 아버지로 여겨 반응했고, 아내에게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탓하며 지레 화내고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외로워서, 사랑받고 싶어서 서로에게 더욱 다가가고자 하지만, 마음에는 가시가 잔득 돋아서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로 비빌수록, 상처만 깊어지고 아픕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받지 못한 상처를 많이 가진 사람은 남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자식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상한 마음 밭과 그 뿌리를 안다는 것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초석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 밭은 어떤지요! 우리의 마음 밭에 대해 예수님은 세 가지로 분류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길바닥 마음, 바위덩어리 마음, 가시덤불 마음입니다. 이 세가지 마음이 결혼생활의 갈등 요인이자.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원인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길바닥 마음입니다. 이것은 자기 생각만 앞서지 자신과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결혼생활의 갈등을 겪는 사람들에게서 남편 아니면 아내가 바로 길바닥 마음의 소유자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길바닥 마음의 사람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 생각대로 따라 주어야만 합니다. 이런 사람이 내 남편 또는 내 아내라고 상상해봅시다. 이런 사람과 함께 기쁘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엔 어디를 가도 이런 길바닥 마음씨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부부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 밖에 모르는 배우자와 산다는 것, 그것은 때로는 생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부들에게 어떤 창의적이고 행복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는 부부가 함께 살아도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 있는 결혼생활에서는 아무 것도 바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상처로 인해 마음 밭에 바위가 꾹 박혀 있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슴에 한을 품고 사는 한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생명의 열매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바위 덩어리, 즉 무거운 짐은 마음 속에 맺힌 응어리 곧 상처입니다. 마음 속에 상처와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서 사랑의 씨앗이 싹트고 열매가 열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실례로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아내들이 가슴에 한이 서려서 갈등을 겪는 부부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사랑을 받지 못하면 가슴에 한이 쌓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위덩어리 마음으로 갈등을 겪는 부부들 가운데는 어린시절부터 성장과정을 통하여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가슴에 한이 쌓인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결혼을 한 후 배우자로부터 사랑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가슴에 또 다른 한이 겹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시덤불 마음입니다. 가시덤불 마음이란 욕심에서 나오는 시기나 질투의 심리입니다. 세상 걱정과 근심을 다 짊어진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데 자신의 생명력을 쏟아버리고 막상 자신이 써야 할 생명력은 바닥이 난 사람을 일컫습니다. 또한 가시덤불 마음은 심한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자신은 아무 일도 이루어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남편이나 아내는 상대방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 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쉽게 갈등으로 번집니다. 한마디로 가시덤불 마음의 부부는 자신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에너지를 쏟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자신들을 맞추려 발버둥치다가 넘어지기 쉽습니다. 이런 부부에게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말고 너 자신의 일에 열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마음 밭이 강팍한 길바닥 마음이나 한이 많은 바위덩어리 마음, 그리고 걱정과 욕심으로 뒤덮인 가시덤불의 마음이 아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옥토의 마음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여기 지난 번 2월의 영성치유수련 후, 저에게 보내온 한 편지에서 그 실마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말씀이 전혀 젖어들지 못했던 길가 밭, 돌 밭, 가시덤불 밭은 촉촉한 단비를 맞아야 옥토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단비는 우리의 심령에 내리는 성령의 단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의 단비가 우리의 심령에 촉촉이 내릴 때, 우리는 나 자신을 볼 수가 있습니다. 상처로 죄책감과 수치감과 외로움에 왜곡된 나가 아니라, 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마음에 켜켜이 쌓여있어, 어디를 가거나 무슨 일을 하거나 고약한 냄새를 피우는 곪은 상처들을 화해와 용서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옥토 밭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와도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존귀함을 알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타인을 향해 진정한 사랑과 아름다운 축복이 흘러 들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의 삶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남편이, 아내가, 부모가, 자식이 먼저 변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뒤돌아보아야 할 것은 자신입니다. 남편을, 아내를, 부모를, 자식을 탓하기 전에 나부터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는, 나 자신의 상처의 뿌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만물이 한 해의 추수를 위해 땅이 갈아지고, 봄비가 내려지고 있는 이 때에,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나의 마음 밭의 바위는 무엇인지, 나의 심령의 썩은 뿌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뽑혀 나가고, 심령의 촉촉한 단비의 역사로 치유의 새순이 싹을 띄우기를 기도합니다.
낮은 자존감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과 치유방안
낮은 자존감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과 치유방안 박 노권 (목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얼마전 한 교인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고백했으며 교회에서 많은 봉사와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러 가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로 힘들어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단지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 안에 그러한 모습이 보여질수록 더욱더 자신을 질책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 원인이 대부분 낮은 자존감에 뿌리를 둠을 볼 수가 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회심의 체험도 있고, 복음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잦은 죄책감과 우울증, 열등감 등의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성숙한 삶에 관한 책도 읽고, 부흥회에 참석도 해보고, 더 깊은 헌신을 위해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열심히 노력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들 내면에서 들리는 "좀 더 잘해봐, 아직 충분치 않아"라는 음성 때문에 영적인 좌절을 맛보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무엇보다 낮은 자존감이 이와 같이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보이슨이 시도했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의 삶에서 단지 명제적인 교리가 아니고, 실제의 삶에서 구원의 기쁨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학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글에서는 자존감에 대한 분석을 하고 낮은 자존감이 어떻게 신앙에 영향을 주는지를 살펴보고, 자존감 회복을 위해서 상담학적 측면에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자존감 개념의 기원 1970년대부터 기독교 상담학이 활발해 지면서 기독교 안에서 '자기사랑'이나 '자기존중'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자기사랑'이나 '자기존중'에 대한 것은 1940년대부터 일반 심리학에서 이미 중요한 주제가 되어있었고, 50년대와 60년대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기독교 상담이나 돌봄 분야에 영향을 주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존감의 개념을 정리하기 위하여 먼저 이것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살펴보고, 더 깊이 올라가서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실존주의-인본주의 상담방법은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철학적 관심에 강조 점을 두고 있다.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은 자유와 책임에서 도피할 수 없으며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책임과 함께 한다는 대전제를 갖고 있다. 마슬로우(A. Maslow)는 "사람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번영이 그 자체로는 가치 문제의 그 어떤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치가 자리잡을 곳은 인간의 내부와 자기 자신뿐, 그밖에는 아무 곳도 없다"고 말하며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실존주의의 영향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실존주의는 어느 사상보다 개인의 개별성과 주관성을 강조하며, 우리 모두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신이 가치와 의미의 창조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상은 인간을 더 이상 유전과 환경에 의해서 조정되는 생물학상의 기계가 아닌, 최소한 인간 스스로의 판단으로 선택의 자유와 절대 가치를 지니는 인격체로 보게 해 주었다. 이러한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학의 자아실현, 자기배려, 자기존중에 대한 주장은 더욱 효과적으로 기독교의 전통적인 이웃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중 하나인 로저스는 개인들을 "피상적이고 외적인 근거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우선적으로 자아사랑의 희생자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치료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근거로 해서 "문제의 핵심적 원인은...그들이 그들 자신들을 경멸하고, 자신들을 무가치하고 사랑 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다른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입장도 비슷하다. 인간 실존에서 심각한 문제는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기혐오'이며, 사람이 자기사랑을 느끼면(자아가 사랑 받고 또 사랑받을만하다고 느끼면) 자동적으로 타인 사랑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학에서도 자기존중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을 하지만, 구체적으로 인간 조건의 분석에 있어서 자기혐오나 자기존중의 상실 문제에 대해서는 심리학이 신학자들보다 더욱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자기존중에 대한 심리학의 통찰력이 오늘날 기독교 상담과 돌봄에서 말하는 자존감에 대해 많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자존감의 철학적, 심리학적 배경은 인간의 자아를 그 존재의 근원에 놓고 있다. 또한 이 자아 자체가 선하고 사랑 받을 만하고 그러기에 무조건적 존중이 필요하다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은 그 본성 자체가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자존감의 근거에 대해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 동안 심리학의 영향으로 기독교 안에서 자존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기고 강조를 하게 되었지만, 이미 이것은 성서 안에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으며, 심리학적인 자존감 이해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본다. 자존감의 근거에 대한 성서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서의 인간이해는 프로이드의 부정적 인간이해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도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의 완악함과 죄성을 깊이 인식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구속"에 대한 교리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창1:27)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일치를 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의 지으심"과 "통치권의 위임"(창1:28을 근거)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비록 이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인간들을 찾아와서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만큼 인간에게는 아직도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자존감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성서는 로저스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 안에 자기실현 가능성이 있고 본래적으로 선한 존재이기에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하고 병들어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겨 사랑하시고 구속하시기에 존귀하다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자존감의 근거를 제시하는 구절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29)를 들 수 있는데, 트로비쉬(W. Trobisch)는 "결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 없이 이웃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여기에 자기사랑의 전제가 깔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더나아가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 즉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 자존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은즉"(사43:4)이라는 성경 구절은 죄악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자신이 어떠한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적인 자존감은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가치감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과 그분 안에서 갖게 된 절대적인 가치감으로 평가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2.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하는 요소들 낮은 자존감을 갖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증상들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칼슨의 경우 '죄책감'을 특별히 강조하고, 김중술도 다양한 증상들 즉, 허풍이나 과장, 남을 비판하는 것, 자기합리화, 완벽성, 수줍음과 소심함, 자기평가절하, 분노 등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증상들은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동원은 이런 증상들이 인간관계를 굴절시키고, 삶의 순순한 동기를 파괴하며,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고, 그리고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증상들을 갖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외적, 내적, 영적인 원인 등이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외부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아 이것을 내면화시킨 사람들이므로, 외부적인 요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중요한 타인들의 영향 자존감에 영향을 주는 가장 커다란 요인은 바로 "중요한 타인들"(significant others)이다. 우리는 부모, 형제친척, 혹은 학교선생이나 친구 등 우리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자아개념을 습득하게 된다. 그러나 자존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유아기에 어머니와 유아 사이에 형성되는 애착관계이다. 부모와 만족스런 정서적 관계를 형성한 유아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지각한다. 이들은 사회환경에 대하여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던 긍정적 감정의 경험을 토대로 사람이란 신뢰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또한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감이라든가 자존감이 높을 뿐 아니라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부모의 완전주의적인 양육방식과 방치, 거절, 학대 등의 경험은 유아의 무의식 속에 깊이 기억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특히 역기능 가정은 자녀들의 자존감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역기능 가정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침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독특한 개인으로 자유롭게 성장하는 대신에 아이들을 미리 설정된 견고한 틀 안에 갇혀 살게 만들며, 서로 보살피는데 실패함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리게 한다. 자녀들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양육될 때 건강한 자존감을 발달시키게 되는데 정서적 양육이 크게 결여되어 있는 역기능 가정에서 개인의 건강한 자존감의 발전은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2) 사회적인 가치관 자아개념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인 가치관"이다. 예를 들어 국제화 사회인 지금, 영어 실력과 컴퓨터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더 큰 성공의 기회를 부여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컴퓨터나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한 사람보다 더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외모에 대한 여성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많은 여성들이 '비만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대부분 TV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국내외의 늘씬한 모델과 배우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결과이다. 이와 같이 그 시대의 사회적인 가치관이 제시하는 기준들을 소유한 사람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빈곤감을 느끼게 된다. 3) 완전주의적 신앙 낮은 자존감의 뿌리 가운데 특히 신앙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완전주의 신앙'이다. 완전주의는 부모의 끊임없는 요구로 해서 소아기에 주로 형성되며, 완전주의적 신앙은 성인아이 목회자의 영향으로 올 수도 있다.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목회자가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 율법적이고 경직된 신앙관--"아직도 충분치 않아"라는 완전주의적 신앙--을 교인들에게 요구를 함으로, 이런 영향을 받는 교인들의 신앙이 완전주의적인 신앙이 될 수 있다. 그 원인이 부모의 양육태도에서 왔건 목회자에게서 왔건 간에 항상 더 높은 목표만을 제시하는 완전주의적인 신앙은 절망감을 심어주고,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유발시킴으로써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게끔 한다. 3. 낮은 자존감과 신앙과의 관계 이렇게 형성된 낮은 자존감은 삶의 순수한 동기를 파괴하며,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꿈을 파괴할 뿐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존감은 신자의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방해하는 부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것을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하거나 노력이 부족해서, 혹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데서 오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율법적인 종교행위나 회개 등에 그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정서적으로 안정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낮은 자존감이 어떻게 신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 관계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1)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 인식 낮은 자존감이 신앙발달에 있어 영향을 주는 가장 큰 부분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인식하는데 있다. 하나님 인식에 대한 오해는 어린 시절 부모의 양육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 이유는 부모가 하나님의 그림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씨맨즈 목사의 지적처럼, 부모로부터 받은 대우에 따라 성인아이의 하나님 상은 사랑이 많고 자비롭고 선하신 분, 믿을 수 있는 분, 거룩하고 공평하신 분 등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가 하면, 무관심하거나 잔인하고 용서할 줄 모르는 분, 비판하고 불공평하신 분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새겨질 수 있다. 낮은 자존감이 그 인격 속에 형성되어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나, 자신을 받아준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이 경험하는 죄의식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정죄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이 원인이 되어 스스로를 정죄하고 상하게 하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팀 슬레지는 아버지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인상에 영향을 주는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념이 아버지에 대한 관념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내 아버지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고 나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몇 가지 정서들로 인하여 아버지는 나의 가치에 대해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어떤 경우에 아버지는 나를 크게 칭찬했으며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게 해드릴 수 없는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치심을 느꼈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2) 낮은 자존감과 완전주의 신앙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감의 근거를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으려 한다. 어떤 뛰어난 행적을 통해 인정을 받는다던가, 남들보다 성경의 규칙들을 더 잘 순종함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은 봉사와 철저하게 성경의 말씀들을 삶에 적용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 이것은 자신의 자존감을 위협하므로, "좀더 열심히"라는 상향적인 신앙관을 가지게 된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완전주의적인 신앙관을 형성해서 항상 자신이 도달할 목표 이상의 기준을 제시함으로 절망과 죄책감을 경험하게 한다. 이렇게 볼 때 낮은 자존감이 신앙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상 어린 시절 받은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라고도 볼 수 있다. 정당한 정서적 요구가 계속적으로 좌절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상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적당한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사고 속에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고의 왜곡을 익히게 된다. 에론 벡(Aaron Beck)은 이렇게 사회적 적응을 어렵게 만들며 마음에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감정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왜곡된 사고"로, 엘리스(Albert Ellis)는 "비합리적 사고"라고 부른다. 애론 벡에 의하면 사람들이 우울해진다거나 불안해지는 것은 대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고의 왜곡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우울하니까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애론 벡은 비관적인 생각을 하니까 우울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비난의 느낌과 사고의 왜곡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경직되어지고 완전주의자가 되어 계속적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결과를 되풀이하게 된다. 이처럼 낮은 자존감은 사고의 왜곡을 불러와 모든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 인해 신앙생활도 강박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러한 강박적인 관념에 의한 신앙생활은 남들보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유함이 없으며 "아직도 부족해"라는 완전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어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4. 자존감 회복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 낮은 자존감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 있고 가치 있는 삶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거짓된 관계를 만들어 사람을 고립시킨다. 이러한 낮은 자존감은 그 뿌리가 깊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학적 통찰력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전제하며, 심리학적인 접근방법이 자존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심리학의 접근방식들 자존감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정신역동적 접근방법, 실존주의-인본주의적 접근방법, 행동주의적 방법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정신역동적 방법은 자존감의 문제를 과거 아동기와 성장과정에서 억압시켜 놓았던 무의식에 두고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는 문제의 발단이 어린 시절 애착관계와 자신을 양육해 주던 '중요한 타인'의 양육태도에 있다고 본다. 결국 양육과정에서 아이가 받는 부정적인 감정은 무의식 속에 묻혀 열등감을 형성한다. 이 무의식 속에 있던 열등감은 다른 사람에 의해 무시당하는 것 같으면 자아(ego)의 허락도 없이 무의식에서 나와 "너는 무능해", "너는 보잘 것 없어"라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다시 반복함으로 낮은 자존감을 형성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무의식 속에 어떠한 감정들이 억압되어 있는지 발견하기만 하면 문제는 저절로 치유되어진다고 생각하며, 정신역동적 접근은 이 무의식을 깨닫게 하는 것을 상담의 목표로 삼는다. 실존주의-인본주의 접근방법은 낮은 자존감의 문제를 과거의 무의식이 아닌 그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과 현재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접근방법은 그 사람의 자기인식(self-awareness)을 확장시키고 자신의 제한성과 가능성을 충분히 그리고 바르게 깨달아 알면 자신을 결단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이 커지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의 확장과 진정한 의미의 발견은 인간의 관계를 통해 발견되므로 이 접근방법은 상담자의 무조건적이고 긍정적인 존중과 정확한 공감적 이해, 그리고 진실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접근은 인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인정하려고 하며,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상담자는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결단하고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격려해주고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행동주의 접근방법은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여 그 행동이 바로 어려서부터 습성화된 자기 패배적인 행위에 근거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행동은 환경에 의해서 조절되고, 환경이 이 행동을 조절하여 일정한 행동을 습관화시키면, 습관화된 그 행동은 그 사람에게 하나의 습관화된 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주의적 접근은 문제 해결을 위해 비합리적인 생각들을 깨뜨리고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줌으로 자기 패배적인 정체성이 아닌 성공적인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 심리학적 접근의 한계 위의 세 가지 접근방법은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자율적인 인격형성에 다같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건전한 인간에 목표를 두고 건전한 인격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을 어떻게 제거하며, 어떻게 새로운 출발을 하게 도울 수 있을까하는 데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인간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갖고 많은 도움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치 문제와 삶의 방향과 삶의 목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등 영적인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약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든(Thomas Oden)은 오늘날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로저스 상담의 한계성을 지적한다. 인간의 가장 깊은 차원 즉 하나님 아래 있는 피조물이라는 한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에게는 궁극적으로 자기성취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로저스는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든은 무엇보다 타락한 인간을 새롭게 하기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속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로저스의 무조건적 수용에 대해서도 그것은 유한한 인간 형제에 의한 제한적인 수용이라고 그 한계를 밝히고 있다. 동시에 매우 개인주의적인 로저스의 상담이론을 지적하면서 소외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려면, 그는 상당히 양육적이고 훈련적이고 지지적인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든은 인간본성의 한계--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참으로 자유할 수 없는 존재--와, 상담을 받아주는 상담자의 유한성을 지적하면서 일반상담의 한계를 말한다. 5. 자존감 회복을 위한 기독교 상담적 접근 낮은 자존감이란 문제를 만들어 낸 과거의 기억과 그 뿌리, 그리고 현재를 직시하고 결단하는 부분, 미래적으로 행동을 바로잡는 부분까지 일반심리학의 다양한 통찰력을 활용하는 것은 유익하다고 본다. 그러나, 더나아가 낮은 자존감을 치유하는 근원과 가능성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보면서, 자존감 회복을 위한 기독교 상담의 과정을 5단계로 나누어 본 글의 결론으로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자신을 이해하기: 낮은 자존감의 문제성을 직면하라. 보통 자신의 자존감이 낮다는 발견을 하게 되거나, 또는 지적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기 보다 부인하거나, 그렇게 지적한 대상에게 투사하여 화를 냄으로 그 상황을 회피하려 한다. 이와 같이 반응하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완고함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한 감정과 상황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어린 시절에 약간은 긴장되고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성인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그런 가정과 분위기에 익숙하다. 이것은 대부분의 알콜 중독자의 자녀가 알콜 중독자와 결혼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증명이 된다. 또 어려서 부모 또는 중요한 타인에 의해 거절과 방치, 심한 훈계를 받으면서 자라난 사람은 그 내면에 "나는 이런 대우를 받기에 합당해"라는 자기 대화가 계속됨으로 자신을 계속 낮은 자존감에 머무르게 한다. 이때 상담자는 공감적인 이해와 따스함, 관심, 존중, 비밀 보장과 진지함을 통해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변화에 직면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문제성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상담자는 여러 가지 상담 기술을 이용하여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고 결단할 수 있게 해주지만, 궁극적으로 피상담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낮은 자존감의 근본원인이라고 생각될만한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들을 직면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경험들을,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무의식에 영역에 있는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림으로 직면하고 그리고 자신이 손댈 수 없는 용서의 문제를 은혜의 하나님께 내놓을 때, 자신을 괴롭히는 무의식의 악영향을 차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자신을 수용하기: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장단점, 능력과 한계를 파악하는 일인데, 이것은 타인과 비교함으로 발생하는 낮은 자존감의 폐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나의 말과 생각, 행동, 상상력, 느낌, 필요, 관계성 등--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동과 태도 가운데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자기 수용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사랑의 근원이다. 나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교에 대한 기초는 나 자신이지 타인이 아니다. 이것이 올바른 자기평가이고 자존감의 근거이다. 자신을 인정할 때, 하나님이 주신 자질과 능력 안에서 자신의 노력을 자신의 능력에 비교하면서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자신을 칭찬할 수 있으며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 자신에게 완벽을 기대하지 않을 때 자신에 대해 기분 좋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기: 자신의 자존감을 상향 조정하라. 사람의 심리구조는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맞추어, 스스로 그 예상에 맞도록 행동하는 성향이 있다. 밴두라(Albert Bandura)는 이것을 자기 이행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즉, "사람은 자기가 선정한 기대에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맞추어 간다"고 표현한다. 낮은 자존감을 갖은 사람은 자신을 "실패자"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함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거기에 맞추어 행동하게 되므로 자기 패배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상향 조절할 필요가 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신앙인들이 자기사랑에 실패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부인하도록 배워왔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의 죄악으로 느끼는 것에 있다. 참된 자기사랑은 자기도취("나는 나의 세계의 중심이다")와 순교정신("나는 필요 없는 고통도 겪을 것이다")을 벗어나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존재("나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스럽고 소중하며 능력 있는 피조물이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높은 자존감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제껏 자신의 내면에 흐르던 부정적인 자기묘사를 과감하게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잘 나타낸 성경 구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사43:3)에서 보듯이, 천지를 지으시고 그 가운데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신의 가치에 합당한 것은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능력, 소속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인 것이며, 이 때 우리의 자존감은 높아질 수 있다. 4) 완전주의 성향의 탈피: 자신에게 현실적인 요구를 하라. 우리가 지닌 자존감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자신과 이상적인 자신을 비교하는데서 오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원하는 모습에 더 가까울수록 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 즉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파악하고 합당한 요구를 할 때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요구함으로 낮은 자존감을 형성케하는 것이 완전주의이다. 완전주의는 자신을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는 남들보다 낫기 때문에 이러이러 해야해"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요구가 자존감의 상실을 유발하는 이유는 실제로는 자신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적인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현실적이고 합당한 요구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때로 우리의 능력에 넘치는 일을 감당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신이 완전치 않으며 실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실수를 통해 앞으로 나갈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자신을 개방하기: 지원그룹을 활용하라. 최근 들어 교회 안에서 소그룹 운동이 강조되고 있는데, 낮은 자존감에 대한 상처를 치유함에 있어서도 소그룹 활동은 효과적이다. 특히 같은 종류의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소그룹으로 모여 함께 도움을 주고받는 지원그룹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지원그룹은 1920년대 빌 윌슨에 의해 시작된 알콜중독자를 돕기 위한 모임(AA: Alcoholics Anonymous)을 시초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원그룹의 특징은 스스로를 돕는 그룹으로 회원은 안정감을 느끼고 사랑하는 분위기 안에서 서로의 경험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돕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감추어져 있던 정서적 고통을 만나고,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치유에 대한 소망, 용납,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함으로 치료를 경험하게 된다. 지원그룹 안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상처를 받고 있다는 인식을 통해 치유에 대한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자기 고백을 통해 치유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보다 분명히 알게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그룹은 그룹원 간의 유대 관계를 형성해 주기 때문에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으며, 고백과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통해 영적인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날 이혼, 가정폭력, 가출과 성적 혼돈 등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역기능 가정이 늘어나며 성인아이의 증상으로 인해 낮은 자존감과 정서적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교회는 설교나 교육, 심방 뿐 아니라 개인적 상담을 통해, 사람들이 과거의 경험과 낮은 자존감을 형성케 했던 그들 안의 부정적 감정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자신을 수용함으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성장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특히 교회는 치유공동체로서 소그룹 또는 지원그룹의 활발한 운영을 통해서 따뜻하고 지지적인 관계를 만들어주어 낮은 자존감이 긍정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들이 삶 속에서 기쁨을 얻으며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런 방향에서 돕는 것이 앞으로 목회의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낮은 자존감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과 치유방안
낮은 자존감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과 치유방안 http://mission.bz/7111치유목회 박 노권 (목원대학교 교수) 얼마전 한 교인과의 대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고백했으며 교회에서 많은 봉사와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러 가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고 겸손을 가장한 자기 비하로 힘들어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단지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자신 안에 그러한 모습이 보여질수록 더욱더 자신을 질책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 원인이 대부분 낮은 자존감에 뿌리를 둠을 볼 수가 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회심의 체험도 있고, 복음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잦은 죄책감과 우울증, 열등감 등의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성숙한 삶에 관한 책도 읽고, 부흥회에 참석도 해보고, 더 깊은 헌신을 위해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열심히 노력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들 내면에서 들리는 "좀 더 잘해봐, 아직 충분치 않아"라는 음성 때문에 영적인 좌절을 맛보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무엇보다 낮은 자존감이 이와 같이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보이슨이 시도했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의 삶에서 단지 명제적인 교리가 아니고, 실제의 삶에서 구원의 기쁨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학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글에서는 자존감에 대한 분석을 하고 낮은 자존감이 어떻게 신앙에 영향을 주는지를 살펴보고, 자존감 회복을 위해서 상담학적 측면에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자존감 개념의 기원 1970년대부터 기독교 상담학이 활발해 지면서 기독교 안에서 '자기사랑'이나 '자기존중'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자기사랑'이나 '자기존중'에 대한 것은 1940년대부터 일반 심리학에서 이미 중요한 주제가 되어있었고, 50년대와 60년대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기독교 상담이나 돌봄 분야에 영향을 주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존감의 개념을 정리하기 위하여 먼저 이것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살펴보고, 더 깊이 올라가서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실존주의-인본주의 상담방법은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철학적 관심에 강조 점을 두고 있다.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은 자유와 책임에서 도피할 수 없으며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책임과 함께 한다는 대전제를 갖고 있다. 마슬로우(A. Maslow)는 "사람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나 경제적 번영이 그 자체로는 가치 문제의 그 어떤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치가 자리잡을 곳은 인간의 내부와 자기 자신뿐, 그밖에는 아무 곳도 없다"고 말하며 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실존주의의 영향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실존주의는 어느 사상보다 개인의 개별성과 주관성을 강조하며, 우리 모두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신이 가치와 의미의 창조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상은 인간을 더 이상 유전과 환경에 의해서 조정되는 생물학상의 기계가 아닌, 최소한 인간 스스로의 판단으로 선택의 자유와 절대 가치를 지니는 인격체로 보게 해 주었다. 이러한 실존주의-인본주의 심리학의 자아실현, 자기배려, 자기존중에 대한 주장은 더욱 효과적으로 기독교의 전통적인 이웃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중 하나인 로저스는 개인들을 "피상적이고 외적인 근거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우선적으로 자아사랑의 희생자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치료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근거로 해서 "문제의 핵심적 원인은...그들이 그들 자신들을 경멸하고, 자신들을 무가치하고 사랑 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다른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입장도 비슷하다. 인간 실존에서 심각한 문제는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기혐오'이며, 사람이 자기사랑을 느끼면(자아가 사랑 받고 또 사랑받을만하다고 느끼면) 자동적으로 타인 사랑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학에서도 자기존중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을 하지만, 구체적으로 인간 조건의 분석에 있어서 자기혐오나 자기존중의 상실 문제에 대해서는 심리학이 신학자들보다 더욱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자기존중에 대한 심리학의 통찰력이 오늘날 기독교 상담과 돌봄에서 말하는 자존감에 대해 많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자존감의 철학적, 심리학적 배경은 인간의 자아를 그 존재의 근원에 놓고 있다. 또한 이 자아 자체가 선하고 사랑 받을 만하고 그러기에 무조건적 존중이 필요하다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은 그 본성 자체가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자존감의 근거에 대해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 동안 심리학의 영향으로 기독교 안에서 자존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기고 강조를 하게 되었지만, 이미 이것은 성서 안에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으며, 심리학적인 자존감 이해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본다. 자존감의 근거에 대한 성서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본성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서의 인간이해는 프로이드의 부정적 인간이해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도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의 완악함과 죄성을 깊이 인식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구속"에 대한 교리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창1:27)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대부분 일치를 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의 지으심"과 "통치권의 위임"(창1:28을 근거)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비록 이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인간들을 찾아와서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만큼 인간에게는 아직도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자존감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성서는 로저스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 안에 자기실현 가능성이 있고 본래적으로 선한 존재이기에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하고 병들어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겨 사랑하시고 구속하시기에 존귀하다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자존감의 근거를 제시하는 구절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29)를 들 수 있는데, 트로비쉬(W. Trobisch)는 "결코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 없이 이웃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는다"고 말하며 여기에 자기사랑의 전제가 깔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더나아가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 즉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 자존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은즉"(사43:4)이라는 성경 구절은 죄악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자신이 어떠한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적인 자존감은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상대적인 가치감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과 그분 안에서 갖게 된 절대적인 가치감으로 평가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2.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하는 요소들 낮은 자존감을 갖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증상들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칼슨의 경우 '죄책감'을 특별히 강조하고, 김중술도 다양한 증상들 즉, 허풍이나 과장, 남을 비판하는 것, 자기합리화, 완벽성, 수줍음과 소심함, 자기평가절하, 분노 등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증상들은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동원은 이런 증상들이 인간관계를 굴절시키고, 삶의 순순한 동기를 파괴하며,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고, 그리고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증상들을 갖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외적, 내적, 영적인 원인 등이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외부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아 이것을 내면화시킨 사람들이므로, 외부적인 요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중요한 타인들의 영향 자존감에 영향을 주는 가장 커다란 요인은 바로 "중요한 타인들"(significant others)이다. 우리는 부모, 형제친척, 혹은 학교선생이나 친구 등 우리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자아개념을 습득하게 된다. 그러나 자존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은 유아기에 어머니와 유아 사이에 형성되는 애착관계이다. 부모와 만족스런 정서적 관계를 형성한 유아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지각한다. 이들은 사회환경에 대하여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던 긍정적 감정의 경험을 토대로 사람이란 신뢰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또한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감이라든가 자존감이 높을 뿐 아니라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부모의 완전주의적인 양육방식과 방치, 거절, 학대 등의 경험은 유아의 무의식 속에 깊이 기억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낮은 자존감을 갖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특히 역기능 가정은 자녀들의 자존감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역기능 가정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감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침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독특한 개인으로 자유롭게 성장하는 대신에 아이들을 미리 설정된 견고한 틀 안에 갇혀 살게 만들며, 서로 보살피는데 실패함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리게 한다. 자녀들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 양육될 때 건강한 자존감을 발달시키게 되는데 정서적 양육이 크게 결여되어 있는 역기능 가정에서 개인의 건강한 자존감의 발전은 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2) 사회적인 가치관 자아개념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인 가치관"이다. 예를 들어 국제화 사회인 지금, 영어 실력과 컴퓨터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더 큰 성공의 기회를 부여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컴퓨터나 영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한 사람보다 더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외모에 대한 여성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많은 여성들이 '비만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대부분 TV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국내외의 늘씬한 모델과 배우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결과이다. 이와 같이 그 시대의 사회적인 가치관이 제시하는 기준들을 소유한 사람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빈곤감을 느끼게 된다. 3) 완전주의적 신앙 낮은 자존감의 뿌리 가운데 특히 신앙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완전주의 신앙'이다. 완전주의는 부모의 끊임없는 요구로 해서 소아기에 주로 형성되며, 완전주의적 신앙은 성인아이 목회자의 영향으로 올 수도 있다.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목회자가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 율법적이고 경직된 신앙관--"아직도 충분치 않아"라는 완전주의적 신앙--을 교인들에게 요구를 함으로, 이런 영향을 받는 교인들의 신앙이 완전주의적인 신앙이 될 수 있다. 그 원인이 부모의 양육태도에서 왔건 목회자에게서 왔건 간에 항상 더 높은 목표만을 제시하는 완전주의적인 신앙은 절망감을 심어주고,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책감을 유발시킴으로써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게끔 한다. 3. 낮은 자존감과 신앙과의 관계 이렇게 형성된 낮은 자존감은 삶의 순수한 동기를 파괴하며,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꿈을 파괴할 뿐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존감은 신자의 참된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방해하는 부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것을 자신의 신앙심이 부족하거나 노력이 부족해서, 혹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데서 오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율법적인 종교행위나 회개 등에 그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정서적으로 안정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낮은 자존감이 어떻게 신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 관계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1)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 인식 낮은 자존감이 신앙발달에 있어 영향을 주는 가장 큰 부분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인식하는데 있다. 하나님 인식에 대한 오해는 어린 시절 부모의 양육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 이유는 부모가 하나님의 그림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씨맨즈 목사의 지적처럼, 부모로부터 받은 대우에 따라 성인아이의 하나님 상은 사랑이 많고 자비롭고 선하신 분, 믿을 수 있는 분, 거룩하고 공평하신 분 등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가 하면, 무관심하거나 잔인하고 용서할 줄 모르는 분, 비판하고 불공평하신 분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새겨질 수 있다. 낮은 자존감이 그 인격 속에 형성되어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나, 자신을 받아준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이 경험하는 죄의식을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온 정죄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이 원인이 되어 스스로를 정죄하고 상하게 하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팀 슬레지는 아버지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인상에 영향을 주는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관념이 아버지에 대한 관념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내 아버지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고 나를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몇 가지 정서들로 인하여 아버지는 나의 가치에 대해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어떤 경우에 아버지는 나를 크게 칭찬했으며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게 해드릴 수 없는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치심을 느꼈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2) 낮은 자존감과 완전주의 신앙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감의 근거를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으려 한다. 어떤 뛰어난 행적을 통해 인정을 받는다던가, 남들보다 성경의 규칙들을 더 잘 순종함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은 봉사와 철저하게 성경의 말씀들을 삶에 적용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 이것은 자신의 자존감을 위협하므로, "좀더 열심히"라는 상향적인 신앙관을 가지게 된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완전주의적인 신앙관을 형성해서 항상 자신이 도달할 목표 이상의 기준을 제시함으로 절망과 죄책감을 경험하게 한다. 이렇게 볼 때 낮은 자존감이 신앙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상 어린 시절 받은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라고도 볼 수 있다. 정당한 정서적 요구가 계속적으로 좌절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상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적당한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사고 속에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고의 왜곡을 익히게 된다. 에론 벡(Aaron Beck)은 이렇게 사회적 적응을 어렵게 만들며 마음에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감정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왜곡된 사고"로, 엘리스(Albert Ellis)는 "비합리적 사고"라고 부른다. 애론 벡에 의하면 사람들이 우울해진다거나 불안해지는 것은 대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고의 왜곡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우울하니까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애론 벡은 비관적인 생각을 하니까 우울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비난의 느낌과 사고의 왜곡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경직되어지고 완전주의자가 되어 계속적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결과를 되풀이하게 된다. 이처럼 낮은 자존감은 사고의 왜곡을 불러와 모든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 인해 신앙생활도 강박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러한 강박적인 관념에 의한 신앙생활은 남들보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유함이 없으며 "아직도 부족해"라는 완전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어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4. 자존감 회복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 낮은 자존감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 있고 가치 있는 삶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거짓된 관계를 만들어 사람을 고립시킨다. 이러한 낮은 자존감은 그 뿌리가 깊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학적 통찰력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전제하며, 심리학적인 접근방법이 자존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심리학의 접근방식들 자존감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정신역동적 접근방법, 실존주의-인본주의적 접근방법, 행동주의적 방법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정신역동적 방법은 자존감의 문제를 과거 아동기와 성장과정에서 억압시켜 놓았던 무의식에 두고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는 문제의 발단이 어린 시절 애착관계와 자신을 양육해 주던 '중요한 타인'의 양육태도에 있다고 본다. 결국 양육과정에서 아이가 받는 부정적인 감정은 무의식 속에 묻혀 열등감을 형성한다. 이 무의식 속에 있던 열등감은 다른 사람에 의해 무시당하는 것 같으면 자아(ego)의 허락도 없이 무의식에서 나와 "너는 무능해", "너는 보잘 것 없어"라는 부정적인 메시지를 다시 반복함으로 낮은 자존감을 형성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무의식 속에 어떠한 감정들이 억압되어 있는지 발견하기만 하면 문제는 저절로 치유되어진다고 생각하며, 정신역동적 접근은 이 무의식을 깨닫게 하는 것을 상담의 목표로 삼는다. 실존주의-인본주의 접근방법은 낮은 자존감의 문제를 과거의 무의식이 아닌 그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과 현재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접근방법은 그 사람의 자기인식(self-awareness)을 확장시키고 자신의 제한성과 가능성을 충분히 그리고 바르게 깨달아 알면 자신을 결단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이 커지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의 확장과 진정한 의미의 발견은 인간의 관계를 통해 발견되므로 이 접근방법은 상담자의 무조건적이고 긍정적인 존중과 정확한 공감적 이해, 그리고 진실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접근은 인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인정하려고 하며,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상담자는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결단하고 자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격려해주고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행동주의 접근방법은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여 그 행동이 바로 어려서부터 습성화된 자기 패배적인 행위에 근거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의 행동은 환경에 의해서 조절되고, 환경이 이 행동을 조절하여 일정한 행동을 습관화시키면, 습관화된 그 행동은 그 사람에게 하나의 습관화된 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주의적 접근은 문제 해결을 위해 비합리적인 생각들을 깨뜨리고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줌으로 자기 패배적인 정체성이 아닌 성공적인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 심리학적 접근의 한계 위의 세 가지 접근방법은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자율적인 인격형성에 다같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건전한 인간에 목표를 두고 건전한 인격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을 어떻게 제거하며, 어떻게 새로운 출발을 하게 도울 수 있을까하는 데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인간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갖고 많은 도움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치 문제와 삶의 방향과 삶의 목표,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등 영적인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약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든(Thomas Oden)은 오늘날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로저스 상담의 한계성을 지적한다. 인간의 가장 깊은 차원 즉 하나님 아래 있는 피조물이라는 한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에게는 궁극적으로 자기성취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로저스는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오든은 무엇보다 타락한 인간을 새롭게 하기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속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로저스의 무조건적 수용에 대해서도 그것은 유한한 인간 형제에 의한 제한적인 수용이라고 그 한계를 밝히고 있다. 동시에 매우 개인주의적인 로저스의 상담이론을 지적하면서 소외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진정한 치유가 가능하려면, 그는 상당히 양육적이고 훈련적이고 지지적인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든은 인간본성의 한계--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참으로 자유할 수 없는 존재--와, 상담을 받아주는 상담자의 유한성을 지적하면서 일반상담의 한계를 말한다. 5. 자존감 회복을 위한 기독교 상담적 접근 낮은 자존감이란 문제를 만들어 낸 과거의 기억과 그 뿌리, 그리고 현재를 직시하고 결단하는 부분, 미래적으로 행동을 바로잡는 부분까지 일반심리학의 다양한 통찰력을 활용하는 것은 유익하다고 본다. 그러나, 더나아가 낮은 자존감을 치유하는 근원과 가능성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보면서, 자존감 회복을 위한 기독교 상담의 과정을 5단계로 나누어 본 글의 결론으로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자신을 이해하기: 낮은 자존감의 문제성을 직면하라. 보통 자신의 자존감이 낮다는 발견을 하게 되거나, 또는 지적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기 보다 부인하거나, 그렇게 지적한 대상에게 투사하여 화를 냄으로 그 상황을 회피하려 한다. 이와 같이 반응하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완고함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한 감정과 상황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어린 시절에 약간은 긴장되고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성인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그런 가정과 분위기에 익숙하다. 이것은 대부분의 알콜 중독자의 자녀가 알콜 중독자와 결혼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증명이 된다. 또 어려서 부모 또는 중요한 타인에 의해 거절과 방치, 심한 훈계를 받으면서 자라난 사람은 그 내면에 "나는 이런 대우를 받기에 합당해"라는 자기 대화가 계속됨으로 자신을 계속 낮은 자존감에 머무르게 한다. 이때 상담자는 공감적인 이해와 따스함, 관심, 존중, 비밀 보장과 진지함을 통해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변화에 직면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문제성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상담자는 여러 가지 상담 기술을 이용하여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발견할 수 있고 결단할 수 있게 해주지만, 궁극적으로 피상담자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낮은 자존감의 근본원인이라고 생각될만한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들을 직면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경험들을,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무의식에 영역에 있는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림으로 직면하고 그리고 자신이 손댈 수 없는 용서의 문제를 은혜의 하나님께 내놓을 때, 자신을 괴롭히는 무의식의 악영향을 차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자신을 수용하기: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장단점, 능력과 한계를 파악하는 일인데, 이것은 타인과 비교함으로 발생하는 낮은 자존감의 폐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나의 말과 생각, 행동, 상상력, 느낌, 필요, 관계성 등--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동과 태도 가운데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고 고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자기 수용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사랑의 근원이다. 나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교에 대한 기초는 나 자신이지 타인이 아니다. 이것이 올바른 자기평가이고 자존감의 근거이다. 자신을 인정할 때, 하나님이 주신 자질과 능력 안에서 자신의 노력을 자신의 능력에 비교하면서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자신을 칭찬할 수 있으며 죄성을 가진 인간으로 자신에게 완벽을 기대하지 않을 때 자신에 대해 기분 좋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기: 자신의 자존감을 상향 조정하라. 사람의 심리구조는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맞추어, 스스로 그 예상에 맞도록 행동하는 성향이 있다. 밴두라(Albert Bandura)는 이것을 자기 이행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즉, "사람은 자기가 선정한 기대에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맞추어 간다"고 표현한다. 낮은 자존감을 갖은 사람은 자신을 "실패자"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함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거기에 맞추어 행동하게 되므로 자기 패배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상향 조절할 필요가 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신앙인들이 자기사랑에 실패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부인하도록 배워왔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의 죄악으로 느끼는 것에 있다. 참된 자기사랑은 자기도취("나는 나의 세계의 중심이다")와 순교정신("나는 필요 없는 고통도 겪을 것이다")을 벗어나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존재("나는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스럽고 소중하며 능력 있는 피조물이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높은 자존감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제껏 자신의 내면에 흐르던 부정적인 자기묘사를 과감하게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잘 나타낸 성경 구절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사43:3)에서 보듯이, 천지를 지으시고 그 가운데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신의 가치에 합당한 것은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능력, 소속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인 것이며, 이 때 우리의 자존감은 높아질 수 있다. 4) 완전주의 성향의 탈피: 자신에게 현실적인 요구를 하라. 우리가 지닌 자존감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자신과 이상적인 자신을 비교하는데서 오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원하는 모습에 더 가까울수록 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된다. 즉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파악하고 합당한 요구를 할 때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계속적으로 요구함으로 낮은 자존감을 형성케하는 것이 완전주의이다. 완전주의는 자신을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는 남들보다 낫기 때문에 이러이러 해야해"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요구가 자존감의 상실을 유발하는 이유는 실제로는 자신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적인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현실적이고 합당한 요구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때로 우리의 능력에 넘치는 일을 감당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자신이 완전치 않으며 실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실수를 통해 앞으로 나갈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자신을 개방하기: 지원그룹을 활용하라. 최근 들어 교회 안에서 소그룹 운동이 강조되고 있는데, 낮은 자존감에 대한 상처를 치유함에 있어서도 소그룹 활동은 효과적이다. 특히 같은 종류의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소그룹으로 모여 함께 도움을 주고받는 지원그룹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지원그룹은 1920년대 빌 윌슨에 의해 시작된 알콜중독자를 돕기 위한 모임(AA: Alcoholics Anonymous)을 시초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원그룹의 특징은 스스로를 돕는 그룹으로 회원은 안정감을 느끼고 사랑하는 분위기 안에서 서로의 경험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돕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감추어져 있던 정서적 고통을 만나고,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치유에 대한 소망, 용납,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함으로 치료를 경험하게 된다. 지원그룹 안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상처를 받고 있다는 인식을 통해 치유에 대한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들은 자기 고백을 통해 치유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보다 분명히 알게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그룹은 그룹원 간의 유대 관계를 형성해 주기 때문에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으며, 고백과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통해 영적인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날 이혼, 가정폭력, 가출과 성적 혼돈 등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그로 인해 역기능 가정이 늘어나며 성인아이의 증상으로 인해 낮은 자존감과 정서적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교회는 설교나 교육, 심방 뿐 아니라 개인적 상담을 통해, 사람들이 과거의 경험과 낮은 자존감을 형성케 했던 그들 안의 부정적 감정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자신을 수용함으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성장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특히 교회는 치유공동체로서 소그룹 또는 지원그룹의 활발한 운영을 통해서 따뜻하고 지지적인 관계를 만들어주어 낮은 자존감이 긍정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들이 삶 속에서 기쁨을 얻으며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런 방향에서 돕는 것이 앞으로 목회의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아름다운 원형들
내 안에 있는 아름다운 원형들 http://mission.bz/7109치유목회 고영순 (크리스찬치유목회연구원) 2005.11.21 조회 : 273 융은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에 원형들이 존재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원형” (archetype)이라 함은 집단 무의식 (collective unconsciousness)과 같은 것으로,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안정적이며 긍정적인 잠재능력을 말한다. 즉, 우리 인류가 몇 세대에 걸쳐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본능적 에너지로 이러한 원형은 우리들의 행동, 사고, 느낌, 반응 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행동양식의 원형이 실재한다는 것은, 인간이 잘못된 길로 빠지거나, 사람들과의 불행한 만남으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되면, 정서장애를 일으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심리적 문제들은 역으로, 원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모의 잘못된 행동과 자신의 원형 (신비로운 본질이며 에너지의 흐름)과의 괴리 때문에 정서장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 안에 어떤 에너지들이 각인되어 (imprinted) 있다는 것일까? 융은, 우리의 무의식적 차원에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남성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 (아니마)을 억압하게 되고 여성은 자신 안에 있는 남성성 (아니무스)을 억압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닌 한 성을 억압할 때 그 사람은 온전성에 이르지 못하고 미성숙한 인간으로 남아있게 된다. 즉,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다른 성의 통합 없이는 심리적인 성숙, 영적 성숙에 도달할 수 없다. 남성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는 남성다움을 고양시키고,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 내부의 남성적 요소는 여성다움을 고양시킨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의 인격 (personality) 속으로 통합하는 과정이 이루어지면, 남성의 경우에는 ㅌ?煇걋?풍부해지고, 사랑하고 관계하는 능력이 확대되고, 느낌과 관계가 깊어진다. 여성의 경우, 합리적인 사고와 창조적 힘이 가능해 진다. 문제는,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해 가치중립적 이기가 어려운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남성적인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사회이다. 구별, 논리, 인식의 능력을, 수용하고, 감정적이고, 관계지향적인 능력보다 더 가치를 두는 사회 말이다. 융이 말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면 (아니마/아니무스)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에는 가치가 전제된 성 (sex)적 이해가 아닌 전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를 말한다. 가치가 전제되어 있는 성의 일예로, 베스트 셀러 중의 하나인, “화성남자, 금성여자?(John Gray)가 있다. 이 책을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기본적 특성을 다룬 책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의 저자 Gray는 남성과 여성은 다르게 오리엔테이션 (사회화)이 되었으니까, 그 사회화된 대로 (거기에 맞춰) 반응을 해주면 훨씬 더 관계가 좋아진다고 주장한다. Gray에 의하면, 남자들은 능률과 효율, 업적을 중시한다. 자기능력을 입증해 보이거나 힘과 기술을 신장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목적을 이루는 능력을 통해 그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성공과 성취를 통하여 충족감을 맛본다. 그들은 사람들이나 느낌보다는 ‘사물’과 ‘사실’에 관심이 많다. 이들은 전적으로 혼자 일을 처리했다는 데서 자부심을 느낀다. 자율은 힘과 능률, 능력의 표상이다. 반면에 여성들은 개인간의 친밀한 관계, 아름다움 등에 높은 가치를 둔다. 서로 도와주고,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는 일에 그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느낌과 남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을 느낀다. 그들에게는 일이나 기술보다는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며, 남성의 IQ (Intelligence Quality)보다는 EQ (Emotion Quality)적인 세계를 꿈꾼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헤아려 주고,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살펴주는 일에 긍지를 느낀다. 상대가 청하지 않아도 미리 알고 그를 보살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렇게 다르니, 남성은 여성에게 좀 더 감성적이 되고, 여성은 남성의 인정에 대한 욕구를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Gray의 주장이다. 즉 Gray는 어떻게 남녀가 사회적 기대감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고, 그에 기반하여 관계를 기술적으로 (technically) 개선하자는 것인데, 자칫 또 다른 성 (SEX)의 정형화 (stereotype)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화성남자, 금성여자 식의 사고는, 우리가 지금껏 해온 여성성, 남성성에 대하여 좀 더 현실적이고 기술적이 되자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 사고방식에는, 남편에게 꽃을 받기보다 찹쌀떡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이해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현실적인 여성이 설 자리가 없다. 꽃가게를 지나다 향기가 너무 좋아 잠깐 멈추고 싶은 어느 남성에겐 남자답지 못하여 부끄러워야 할 일이다. 우리의 이중적 성문화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 원형은 융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오해를 낳고 있다. 반면에, 같은 나라 미국에서 남성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원형들이 있다. 왕, 전사, 마술사, 연인의 에너지가 그것이다. a) 왕 (King) 에너지: 왕 에너지는 소년기의 심리가 성인심리로 전환하는데 두 가지 기능을 한다. 그 첫째는 질서잡기이고, 두 번째는 풍요와 축복을 주는 것이다. 미성숙하거나 제 역할을 못하는 아버지, 혹은 아버지가 없는 결손 가정에서는 왕 에너지가 부족하여, 그 가정에는 흔히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한다. 현명한 왕은 부하를 알고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생명력을 준다. 그는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 준다. 축복을 받으면 심리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자긍심을 느끼거나, 칭찬을 받거나, 축복을 받았을 때, 우리 몸이 실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있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연장자, 즉 왕 에너지로부터의 축복에 굶주려 있다. 그들이 ‘철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들은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다. 축복의 효력은 치유력을 가지고 있으며, 온전하게 만든다. 우리가 가치를 마땅히 인정받고 타고난 재능과 능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상받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왕의 원형은 우리의 내적 질서를 지켜 주고, 우리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일체감과 정체성 등에 대해서 중심이 선 안정감을 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약하건, 재능이 있건, 어떤 가치가 있건, 있는 그대로 본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영예롭게 하고 고무시킨다. 그것은 시기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왕이며,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에 내재된 창조력을 격려하고 상을 내린다. b) 전사 (Warrior) 에너지: 전사라는 형태의 남성 에너지를 불편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불편하게 느끼는데, 이 에너지의 그림자 형태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바로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간적 분노와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공격성은 전사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공격성은 삶에 대한 자세로서 의식을 일깨우고, 기운을 북돋우며, 동기를 유발시킨다. 우리로 하여금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하게 하며, 혹은 삶의 과제와 문제점들에 대해 ‘주저하는’ 태도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선두에 서고, 앞으로 전진 하라고, 생명력 에너지를 총동원하여, 인생의 전쟁터에 뛰어들라고, 방향은 오직 하나, 앞으로 전진 하라고 충고한다. 전사는 올바른 상황 판단을 하고, 적절한 공격성을 취할 수 있다면 이긴다고 본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공격성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명확한 사고와 분별력을 통해서이다. 전사는 항상 경계하고 있다. 그는 항상 깨어 있다. 그는 자기의 마음과 몸을 집중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전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이상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말도 많이 하지 않는다. 전사는 생이 짧고 나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너무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오래 생각하면 의심이 일고, 의심은 망설임으로, 망설임은 행동의 포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행동의 포기는 전투에서의 실패로 이어진다. 긍정적 전사 에너지는 파괴될 필요가 있는 것만을 파괴하며, 무언가 새롭고 신선하고 살아 있으며 좀 더 영광스러운 것이 나타나게 한다. c) 마술사 (Magician) 에너지 (자각과 통찰력의 원형) : 다윗 왕의 counselor였으며 예언자였던 나단은 왕을 위한 일종의 심리치료사였다. 왕의 언행이 거만하지 않도록 억제시켰으며, 부정을 꿰뚫어 보고 분별력을 발휘한다. 언제 어디서든 악이 선으로 가장하고 있을 때 그것을 알아차린다. 고대의 왕들이 감정에 사로잡혀 특정인이나 마을을 벌주고자 할 때, 마술사는 합리적이고 예리한 논리로 일격을 가하여, 왕의 폭발적인 감정을 풀어주고, 왕의 양심과 상식을 일깨워주곤 하였다 (바쎄바 사건). 사람들은 심사숙고와 결정이 필요할 때, magician지혜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에너지는 자아(Ego)-자신(Self)의 축이 형성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이 에너지는 안정성, 중심감, 정서적 냉정함을 확고히 지켜준다. d) 연인 (Lover) 에너지: 에로스 혹은 리비도는 연인 에너지를 상징한다. 생동감, 살아있음, 열정이라고 불리는 태초의 원형 에너지이다. 외부 환경에 대한 감수성의 에너지로 융 학파에서는 이것을 ‘감각 기능’이라고 부르는데, 색, 형태, 소리, 감촉, 냄새를 지각하는 기능이다. 연인의 결합력은 지능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우선 느낌으로 통한다. 연인은 경계선을 알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설정된 경계선에서 멈추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의 생활은 종종 비인습적이고, 그는 ‘인습’에 대항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삶에서 넓은 의미에서의 감성과 도덕 사이의 갈등, 사랑과 의무 사이의 고전적인 갈등이 재현된다. 자기 내부의 강력한 느낌 속에서 내적 세계와 결합하기를 원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외부세계와 결합하기를 원한다. 우리 모두 행동하기를 멈추고, 존재 자체로서 느끼고,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를 느낄 때, ‘장미 냄새를 맡으려고 섰을 때’ 우리는 연인을 느낀다. 인간관계 속에서 연대감, 생의 환희, 열의, 연민, 동정과 원기를 느끼며, 우리의 삶과 목표와 일, 그에 대한 성취에 대해 낭만적으로 느끼게 된다. 연인을 적절히 접하면, 우리에게 삶의 의미, 감각을 준다. 우리 자신과 타인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열망케 하는 그 근원이 연인이다. “나는 그대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러 왔으니, 더욱 더 풍성하게 될 것이다”라고 연인은 말한다. 이들은 서로 중복된 부분도 있으나, 이상적일 경우에는 상호보완적이다. 훌륭한 왕은 항상 전사인 동시에 마술사이고 연인이다. 성인 남성 심리의 원형, 즉 고대 왕들의 자비심, 고대 전사들의 용기와 결단력, 마술사의 지혜, 연인의 열정이 지금 이 개인주의 시대, 그리고 아버지가 부재한 시대에 필요하다는 것이 남성운동을 주창하는 Robert Moore 외의 융의 제자들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아버지란 존재가 가정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실재로는 부재하는 아버지가 되든지, 반(half) 아버지가 되든지, 혹은 반(against) 아버지가 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흔히 연결성, 친밀감, 관계, 부드러움 등을 여성적 특질로만 간주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편견과 그에 따른 콤플랙스와 관계가 깊다) 사실은 진정한 연인 원형의 에너지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원형 (하나님으로부터 원형적 남성 에너지와 원형적 여성 에너지 모두를 이끌어 오신 분)이다. 예수님은 그의 식탁 친교를 통해 모든 원형적 에너지를 드러내 보여 주셨다. 소외되고 주변화 된 사람들을 자신과 연결시켰고,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면서 무조건적이고 차별 없는 사랑을 극적으로 보여 주셨다. 우리 안에 이런 원형들이 있다니, 스스로를 볼품없고 능력 없다고 과소평가할 일이 아니다. 나는 아름답고, 단호하면서도, 지혜로우며, 다른 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존재인 것이다.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