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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유다와 베드로/ 요13:21-22, 요18:1-3,15-27/ 강영래 목사/ 2016-03-06
가룟 유다와 베드로 요13:21-22, 요18:1-3,15-27 베드로와 가룟 유다처럼 두 인간 사이에 운명이 갈라진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둘 다 나름대로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지도자 노릇을 했습니다. 둘 다 놀라운 일들을 많이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희망에서 공포로 그리고 환멸을 느끼게 되는 과정도 서로 비슷했습니다. 상황이 위험스럽게 돌아가자 둘 다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원래 ‘유다’라는 이름은 당시로선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사라진 이름이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지성적이고 분석적이며 계산이 빠른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곧 제자들 중 회계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그는 열정적 애국주의자로 출신이기도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촌 동네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쪽 유대 땅 가룟 지방 출신 도시 사람이었습니다. 눅6:12-16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늦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리고 12제자들의 이름이 가룟 유다를 포함하여 언급되고 있습니다. 유다는 분명 사도들 중의 한 사람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배반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선택된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활동이 복음서에 두어 번 언급되고 사도행전 1장에서 마지막 최후의 불행한 순간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갔다고 표현했습니다(눅22:, 요13: 등) 그리고 예수님께서 5병2어를 베푸신 후 요6:67에서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가룟 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룟 유다는 분명 걸림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역사를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사람들에게 흔히 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보면,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삼상16:23)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삼상19:9)라고 합니다. 사울에게 악신이 틈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에게도 사탄이 틈탔습니다. ‘사단이 일어나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 밧세바 사건에서도 다윗에게 사탄이 틈탔습니다. 욥에게 사단이 이르러 시험하기도 했습니다(욥기).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사탄이 틈탔습니다. 마16:23을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유1:9에서는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변론할 때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역사가 가룟 유다만의 전유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역사 2000년 동안 가룟 유다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 대표적인 마귀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주석가 중 한 분인 G. 캠벨 모르간 박사의 견해를 들어보면, ‘나는 가룟 유다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유다는 사악한 일이나 지옥의 일을 하기 위해 역사상 창조된 마귀의 화신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단순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가룟 유다가 섬찍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남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소름 끼치게 하는 그런 유형의 악한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유다를 영웅으로 그린 작가도 나왔습니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에서 유다를 악한에서 일약 영웅으로 변신시키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선포하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예수를 당국에 팔아넘긴 것으로 영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충성스런 제자였다고 그의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미화시킬 것까지는 없더라도 유다가 구제받을 수는 없었을까요? 유다는 전혀 용서의 대상으로는 가능치 않았을까요? 요13:21-30에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 중 아무도 가룟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빵 한 쪽을 떼어 유다에게 주시며 은밀히 그에게 마지막으로 돌이킬 것을 재촉하셨습니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주님의 음성이 유다에게만 들렸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유다의 인격을 배려하셔서 다른 제자들이 듣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빵을 받은 즉시 주님과 더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나가버렸습니다(요13:30). 마26:50에서는, 유다가 예수를 잡으려는 패거리를 이끌고 동산에 나타났을 때 주님은 그를 ‘친구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막을 수 없는 사랑! 배신한 사람들에게조차도 뻗어가는 그 사랑으로도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수치스럽게 매달려 있는 순간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비슷하게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선택의 자유를 마귀에게 넘겨 버립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가룟 유다가 “죄”를 선택한 것은 강제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는 “죄”를 스스로 선택하라고 주신 자유가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택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12:9) 사단은 우리가 무얼 선택하느냐를 지켜보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마음의 악한 동기와 함께 활동합니다. 죄에 탐닉하면 사단의 종이 됩니다. 죄의 배후는 사단이 장악하고 원격 조종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요일3:8) 사단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자기의 하려는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이지 인식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선택해 가고 있는 길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자입니다. 창세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을 이간시켜 악에 빠뜨리는 게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유다는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적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치가 은 30냥 정도로 평가되었습니다. 그것이 유다의 기준이었습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의 존재 가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라고 인식할 때, 하나님을 상대화했을 때 항상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의 수호신 정도로 전락시켰을 때 그들은 실패와 좌절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동기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중심이 여호와를 향했느냐? 시18: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가룟 유다의 회개가 마27:3-5에서 잠깐 소개되지만 거기에서 ‘메타멜레데이스’(repent), 이 어휘는 베드로에게는 오히려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했지만, 그리고 나서 사탄이 다시 그를 붙잡아서 그는 더 큰 죄악의 수렁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자결은 예수님이 기꺼이 주려는 용서의 선물을 거절한 행동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유다는 마지막 주님으로부터 구원 받을 여지를 스스로 끊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죄를 담당하러 오신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유다의 오만함이었습니다! 베드로 또한 그 못지않은 비참함을 느꼈지만, 예수님의 은총과 용서에 자신을 열어드려서 그는 새 사람이 되어서 예루살렘의 대 부흥을 주도하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 유다처럼 넘어졌습니다(마26:69-74). 그러나 1. 베드로는 자기의 넘어짐을 통해 비로소 자기가 큰 소리 칠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라고 했지만, 자기 이성이나 의지대로 안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자기 의지를 신뢰할 수 없음을 철저히 인식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자기가 할 수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 사건 후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가 온전히 성령께 의지했을 때 교회는 한 번에 3000명, 5000명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3. 베드로는 비로소 주님께 의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삶의 일부만이 아니라 전 영역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눅5장에서 그는 동료들과 밤이 맟도록 그물을 내려 보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깊은 곳으로 가라.” 주님은 바다의 생리와는 달리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허탈한 가운데서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동료들까지 불러서 그물을 끌어올렸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4. 베드로는, 내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주님이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는 줄 알았는데, 주님을 부인했는데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갈릴리로 찾아오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자기 같은 배신자에게 여전히 사랑을 보이시고 사명을 맡기시는 주님, 그는 주님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주님은 꿰뚫어 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세상 살면서 죄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면서 오물을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둥지를 틀고 정착하도록 허용하면 안 됩니다. 죄를 즐기고 죄에 탐닉하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막4:12) 마치 가시덤불에 파종하는 것과 같은 꼴이 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4:3-4) 죄에 깊이 빠지면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에 빠지더라도 유다가 되지 마시고 베드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강영래 목사(인천 주님의영광교회)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요13:21-22,18:1-3,15-27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요13:21-22,18:1-3,15-27 2003-07-06 15:13:51 read : 7 베드로와 가룟 유다처럼 두 인간 사이에 운명이 갈라진 경우는 없을 것이다 둘다 나름대로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지도자 노릇을 했다 둘다 놀라운 일들을 많이 목격하고 체험 희망에서 공포로 그리고 환멸을 느끼게 되는 과정도 서로 비슷 상황이 위험스럽게 돌아가자 둘 다 주님을 배신함 그런데... 원래 '유다'라는 이름은 당시로선 흔한 이름 그러나 갑자기 사라진 이름이라 함 가룟유다는 지성적이고 분석적이며 계산이 빠른자였던 것 같다 그는 곧 제자들 중 회계를 담당하게 됨 그 외에 그는 열정적 애국주의자로 출신도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촌동네가 대부분 그러나 그는 남쪽 유대 땅 가룟 지방 출신 도시 사람 눅6:12-16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늦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리고 12 제자들의 이름이 가룟 유다를 포함하여 언급되고 있다 유다는 분명 사도들 중의 한 사람으로 택함을 받았다 그는 예수를 배반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선택된 사도가 아니었다 유다의 활동이 복음서에 두어번 언급되고 사도행전 1장 에서 마지막 최후의 불행한 순간이 언급됨 성경은 그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갔다고 표현 (눅22장,요13장등) 그리고 예수님께서 5병2어를 베푸신 후 요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가룟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룟유다는 분명 걸림돌이었을 것 그러나 마귀의 역사를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사람들에게 흔히 봄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삼상16:23)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삼상19:9)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 '사단이 일어나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 밧세바사건 욥에게 사단이 이르러 시험함(욥기) 에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유다서 1: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변론할 때에...' 우리는 사단의 역사가 가룟유다만의 전유물로 알아서는 안됨 교회역사 2000년 동안 가룟유다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 대표적인 마귀의 화신이 됨 영국의 유명한 주석가 중 한 분인 G 켐벨 모르간 박사의 견해 '나는 가룟유다가 일반적이 의미에서의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유다는 사악한 일이나 지옥의 일을 하기 위해 역사상 창조된 마귀의 화신이었다' 도로시 세이어즈의 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단순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가룟유다가 섬찍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남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소름끼치게 하는 그런 유형의 악한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유다는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유다를 영웅으로 그린 작가도 나옴 그리이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에서 유다를 악한에서 일약 영웅으로 변신시키고 있다 유다는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선포하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예수를 당국에 팔아 넘긴 것으로 영웅시 따라서 그는 예수의 충성스런 제자였다고 그렇게 미화시킬 것 까지는 없더라도 유다가 구제받을 수는 없었는가? 유다는 전혀 용서의 대상으로는 가능치 않았는가? 요13:21-30 예수님께서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실 때 제자들 중 아무도 가룟 유다를 의심하지 않음 예수님께서 빵 한 쪽을 떼어 유다에게 주시며 은밀히 그에게 마지막으로 돌이킬 것을 재촉하심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주님의 음성이 유다에게만 들렸던 것 같다 주님이 유다의 인격을 배려하셔서 다른 제자들이 듣지 못하게 하신 것 그는 빵을 받은 즉시 주님과 더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나가버림(요13:30) 마26:50 유다가 예수를 잡으려는 패거리를 이끌고 동산에 나타났을 때 주님은 그를 '친구여' 부르심 예수님의 이 막을 수 없는 사랑! 배신한 사람들에게 조차도 뻗어가는 그 사랑으로도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수치스럽게 매달려 있는 순간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비슷하게 닮아가는 것 같다 유다는 선택의 자유를 마귀에게 넘겨 버린다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가룟유다가 <죄>를 선택한 것은 강제적이거나 필연적인 것 아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는 <죄>를 스스로 선택하라고 주신 자유 아님 스스로 하나님을 택하고 선에 속하라! 사단은 우리가 무얼 선택하느냐를 지켜보고 있다가 본격적으로 마음의 악한 동기와 함께 활동함 죄에 탐닉하면 사단의 종이 됨 죄의 배후는 사단이 장악하고 원격 조종한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요일3:8) 사단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자기의 하려는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이지 인식 못함 자기가 선택해 가고 있는 길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함 사단은 하나님과 원수됨 창세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을 이간시켜 악에 빠뜨리는 게 목적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유다는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적 수단으로 이용하려 함 예수님의 가치가 은 30냥 정도로 평가 그것이 유다의 기준임 (유다에게 있어서 예수의 존재 가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라고 인식할 때(상대화) 항상 그 댓가를 톡톡히 지불하였음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의 수호신정도로 전락시켰을 때 그들은 실패와 좌절을 면할 수 없었음 우리의 마음의 동기가 문제임 중심이 여호와를 향했느냐... 시18: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가룟 유다의 회개가 잠간 소개되지만 마27:3-5 '메타멜레데이스' (repent) 이 어휘는 베드로에게는 오히려 없는 행위이다 '회개' 그러구 나서 그는 더 큰 죄악의 수렁으로 빠지고 만다 그의 자결은 예수님이 기꺼이 주려는 용서의 선물을 거절한 행동이었다 불행하게도 유다는 마지막 주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여지를 스스로 끊어 버리고 만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죄를 담당하러 오신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오만함! 베드로 또한 그 못지 않은 비참함을 느끼지만 예수님의 은총과 용서에 자신을 열어 예루살렘의 대 부흥을 주도하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은 멈추지 않았다 그도 결정적인 순간에 유다처럼 넘어짐(마26:69-74) 1. 베드로는 자기의 넘어짐을 통해 비로소 자기가 큰 소리칠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됨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자기 이성이나 의지대로 안됨을 경험함 그는 자기 의지를 신뢰할 수 없음을 철저히 인식 사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임 2.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자기가 할 수 없음을 고백 그는 이 사건 후 크게 달라짐 그가 온전히 성령께 의지했을 때 교회는 한 번에 3000명, 5000명 회개의 역사 일어남 3. 의존한다는 것이 무엇임을 깨달음 삶의 일부만이 아니라 전 영역을 주님께 맡겨야 함 사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으로 고백함 눅5장에서 그는 동료들과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려 보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함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오심 (깊은 곳으로 가라 : 바다의 생리와는 달리 명령하심) 그러나 그는 허탈한 가운데서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함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힘 동료들까지 불러서 그물을 올림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함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4. 내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주님이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는 줄 알았는데 주님을 부인했는데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갈릴리로 찾아 오심 자기같은 배신자에게 여전히 사랑을 보이시고 사명을 맡기심 그는 주님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음 그의 마음을 주님은 꿰뚫어 보심 우리는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세상 살면서 죄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새가 머리 위로 지나갈 수 있다 그리고 지나 가면서 오물을 떨어 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둥지를 틀고 정착하도록 허용하면 안된다 죄를 즐기고 죄를 탐닉하면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함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막4:12) 마치 가시덤불에 파종하는 것과 같은 꼴이 됨 렘4:3-4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죄에 깊이 빠지면 회개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가룟유다의 죽음과 빌라도의 심문/ 마27:1-31/ 2016-04-24
가룟 유다의 죽음과 빌라도의 심문 마27:1-31 서론 ▶27장 1절 말씀에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낮에 해도 될 일을 새벽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일에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는데 특별히 악한 일에 굉장히 열심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축복된 자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복음 때문에 하나님의 선한 일에 열심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람들이 열심을 새벽부터 내었는데 직분 맡은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하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제사장 중에서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구별된 사람입니다. 꼭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교역자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구약의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아야 마땅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또 복음을 방해 하는 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양심이 없는가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6절에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룟 유다가 자기 죄를 뉘우치며 목매달아서 자살을 하면서 은이 다 떨어졌는데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이런 일을 볼 때에 종교적인 양심은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나 중심이 하나님의 일과 영광을 돌리는데 있지 않고 자기의 영광과 영예와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는 관계없이 내 영예나 권력이나 이익에만 먼저 생각하고 일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도는 제일 우선순위가 하나님께 영광, 복음 전하는 중심으로 우선순위가 정해지고 방향이 정해지면 하나님의 온전한 인도를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마귀는 우선순위를 바꾸어 가지고 자기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의 일을 막는 경우가 있다, 자기는 충성을 한다고 했는데 복음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자신을 먼저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행20;2에 보면 “내가 복음 전하는 일에는 내가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빌1;20에는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하노라” -저와 여러분이 잘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 중심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전하는 우선순위가 되면 하나님 앞에 귀중한 쓰임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바른 양심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선순위가 틀려서 자기를 위한 일이 된다면 결국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억울한 죄로 누명을 쓰시고, 언뜻 보면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독생 하신 아들을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전능하시고 어떤 개인이나 단체나 어떤 사건을 통해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께서 왜 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우리가 먼저 근본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만드실 때에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하나님이 영이듯이 사람만 영혼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에게만 인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지, 정, 의라고 해요. 사람만 지식을 습득도하고 지혜도 있고 감정도 있고 의지도 있고 그런데 짐승은 없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 때는 가난하고 고생되고 병들고 고통스럽고 지옥 가는 인간이 아니고 영원히 행복 된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그것이 정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대화하도록 만드셨어요. 또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제일 확실한 증거는 지금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니... ▷요5;24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터이요 저를 내 손에서 뺏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가 생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라는 증거! 예수님은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다 되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그 때부터 하나님과 통해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셔요. 그 전에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고 마귀가 듣습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해도 하나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들으시지 않으십니다. 이때부터 마음에 평강이 있어요. 기쁨이 있어요. ▷우리 성도의 어머님이 오늘 오셨는데 물으시기를 자신이 영접이 되어있는지 확인을 해야겠다고 하셨어요. 당신이 옛날에 절에 많이 다니셨는데 목탁 소리와 염불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걱정 근심이 없어지더라고 하셨습니다. 왜? 아버지께서 하시지 뭐 하시면서... 이제는 목탁 소리가 듣기 싫고 찬송소리가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면 통하고 그래서 할머니는 구원받고 영접하신 것이 확실합니다고 했습니다. ▶빛은 어두움과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빛이 비취면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이고 빛이 없으면 어두움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평안하게 되어 있어요. ▷요14;27에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 이상하게 문제는 생기는 데 평안해요. 혹시 어려움 당하고 실패했는데도 마음에 위로가 있고 평안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을 다 주시고 하나는 금해 놓으셨습니다. 선악과! 과일 하나를 두고 금해 놓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약속을 했는데 창대하라. 편만하라, 그래서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당연하고 이 땅에서도 절대로 부족함이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엉뚱한 것을 믿어요. 재가 성경공부를 하러 가면서도 돈 얘기를 했는데 사람들이 제일 잘 알아듣는 것이 돈 얘기이기 때문에..... 50억 있는 사람이 있는데 50억이 있는지 모르고 매일 가난하게 살고 헐벗고 살고...몰라서 못 쓰고 있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을 신앙으로 표현할 때 불신앙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50억 있다는 것을 알아요. 이것을 가지고 필요한 것을 다하고 누리면서 사는 사람을 신앙적으로 바르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은 50억 정도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 안에 통일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를 주시지 않고 그리스도를 주셔서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는데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와 복인지 모르니 매일 불신자처럼, 불신자보다 더 눌려서 살아요. 이것을 보고 신앙생활을 잘못한다고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안에 있는 축복을 알면 늘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못 누리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믿는 만큼 누리게 되어 있어요. 제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는데도 예수님을 모르니까 전부다 부족하더라구요. 제일 부족한 것이 돈 이었어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정말로 믿으니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게 되었어요. ▷광야에서 양의 피를 뿌리고 나왔는데 광야에서도 부족하지 않았고 우리 주님이 약속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풍성은 단지 물질만 아닙니다. 영혼도, 감사, 기쁨, 물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이 다 주셨는데 하나는 금해 놓으셨습니다. 선악과!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믿으면 되는데 이게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 하와가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마귀 말을 듣고 불신앙을 하고 나니 하나님의 말은 전부다 거짓말처럼 보이고 마귀 말이 사실로 보이게 됩니다. 마귀를 섬기는 자매를 만나서 복음을 전해 봤는데 이 자매의 말이 자기가 성경을 읽어보니 전부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도 믿을 것이 없다고, 제가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나니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증거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나타나더라구요. 그 때 제가 아! 정말 성경 말씀대로 맞구나, 그러고 보니 성경이 전부다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신앙하면 전부다 거꾸로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불신앙을 하고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이렇게 해서 마귀의 말을 들었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음이 오게 된 것입니다.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말씀도 살아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성취됩니다. 그 증거가 누구든지 예수 영접하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며 또 증거는 이것이니 너희 속에 성령이 계시겠음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했어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서 창3장 1-6절에 이때부터 죽음, 가난, 병, 지옥... 하나님을 떠나서 은혜 받지 못하면 불안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롬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 착한 사람도 문제 생기고 열심히 살아도 재앙이 오고 돈 많은 사람도 저주가 임하고 권력 있는 사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만큼 이 모든 것이 축복으로 변해요. **요셉은 팔려가서 노예 생활 했는데 그것이 복으로 변했어요.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는 어부인데 예수님을 만나고 대 사도가 된 것입니다. **핍박자 사울이 예수를 믿고 알고 나니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축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전 세계에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세리 마태, 창기와 같이 취급된 사람이요, 그런데 예수 만난 후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복된 사람이 되었어요. ▶여러분! 정말 과거의 “어떤 사람이다”는 문제가 안 돼요. 얼마나 실패한 사람인가는 문제가 안 돼요, 복음은 얼마나 귀중한지 예수님을 알고 구원 받았더니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천주교에 가면 존경받는 성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하면 부모를 거역하고 온갖 나쁜 일을 일삼은 사람이었어요. 그 어머니 이름이 모니카인데 이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어느 날 어거스틴에게 책을 펴라는 음성이 들렸어요, 펴니 로마서 13장이 나왔는데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와서 너무 훌륭한 주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어머니의 기도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쓸모없는 사람도 예수 알고 복음을 알았더니 하나님 앞에 귀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 믿지 않았다면 저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고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저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생기는 것이 감사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입니다. ▷롬8장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엡2:2에 공중 권세 잡은 자들에게서 해방 받습니다. 이렇게 있다가 자꾸 육신문제, 정신문제, 영적인 문제 속에 인간이 살아요.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복음을 주셨는데 창3;15, 여자의 후손이 오면 뱀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제일 먼저 주셨다고 해서 원시복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한 사람을 보낼 것인데 인간을 구원할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멸시를 받으시고 사람에게 조롱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는데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대신 저주 가운데 있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조롱을 당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시는가? 저와 여러분이 당해야 할 모든 죄를 대신지시고 이렇게 당할 것이다라는 것이 예언 되어 있는데 그 말씀이 오늘 성취되는 현장이 마태복음 27장,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3절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메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 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한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가룟 유다가 자살해서 죽었는데 제사장은 이것으로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 말씀이 슥11;13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정가를 토기장이에게 주고...” 이 말은 사실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언된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로 인해 잡히시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도 나사렛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구원을 베풀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얼마나 믿음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을 원하시는가 하면 예수님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전부 성취시켜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탄생도 베들레헴에서, 나사렛에서 자라게 하시고, 세례 받으실 때도 예언되어 있는데 비둘기 같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그 자가 메시야라는 것을 세례요한을 먼저 보내사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도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고.... 많은 증거를 주셨는데 예수님은 다니시면서 메시야라는 증거를 계속 성취시켜나가십니다. 예수님이 잡히심도 팔려갈 것도 고난 받는 것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구주를 보내셨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구주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메시야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발걸음을 구약 성경을 전부다 성취시켜 가시면서 의심하는 자가 한 명도 없이 다 믿고 구원 받도록 하나님은 세밀하게 성취시켜 나가시는 것을 믿습니다. 2.빌라도의 심문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는데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죄했습니다. 자신의 인기와 권력과 유익을 위해서!!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앞에 진리 앞에 “예” “아니요”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도 예수는 하나님 만나는 길이 맞다는 것을 “예”라고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님을 죄인으로 내 주었습니다. 간단한 한 사건이지만 큰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정말로 하나님 앞에 “예” “아니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말 그러면 그렇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내가 분명히 믿고... 한국교회가 지금은 회색신앙이 많아요. 회색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분명한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분명이 믿어야 합니다. 분명히 응답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사실이라면 분명히 성취되어야 합니다. 진리 앞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빌라도가 지금 이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못 박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 바라바를 놔 줍니다, 죄 지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못 박아요. 주동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거기에 군중들! 여러분! 본인이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안 돼요. 분명히 알고 말해야 합니다. 복음 전하는데 분명히 알지 못하고 말하면 안 되고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 확인하고 맞으면 믿고.... -이 빌라도가 예수를 내어주니 그 군중들과 제사장과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혔어요, 가시면류관을 세우고 갈대 지팡이를 들고 그 앞에서 “왕이여”하며 희롱을 했습니다. 홍포는 왕이 입는 옷이며 가시면류관은 왕이라고 씌우며 지팡이, 곧 왕의 홀을 들게 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데 죄인 된 인간이 오히려 지금 메시야를 조롱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 인류의 죄,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고난당하고 멸시를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사53장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본문13절에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 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로 대답지 아니하시니” 12절에도“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이 변명하시지 않고 대답지 않는 것이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데 이것도 예언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하심과 하신 일은 메시야라는 증거입니다. **영적인 문제 있는 사람은 해방 받아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을 주셔요. **가는 곳 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살아계심의 증거!! 3.증 거 ▷사53장에 “그가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진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그리스도 메시야이지만 많은 사람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성경대로 이루어지게 된 줄 믿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기도하고 빌라도가 죄 없는 자를 정죄하기도 하고 대제사장들이 전부다 정죄를 했는데 이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야 맙니다.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으며 빌라도도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좋지 않은 것으로 고백을 하게 되고... 우리가 잘못하는 죄가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 앞에 잘못된 신앙고백을 하면 영원히 멸망합니다, 우리가 진리 앞에 바르지 않으면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진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혹 천사가 와서 전한다 하더라도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죄가 없다, 나는 이 죄를 정죄 하지 않겠다하니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치고 빌라도가 그러면 이 죄를 너희가 감당하라 하니 유대인들이 <나와 우리의 후손에게 돌리소서> ... 십자가에 못 박는 죄가 얼마나 큰지 유대인들이 세계 2000년 동안 방황하고 있고 2차 대전에서 독일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증거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나라는 지금 가난한 나라가 되어있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복음을 거부하고 막은 나라, 불순종한 나라가 성장한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잘 사는 것 같지만 예수 믿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요,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유대인들이 복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복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방해하더라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야 맙니다.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주의 복음은 땅 끝까지 증거 되게 되어 있습니다. 막을 수가 없어요,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제자 삼으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성취될 줄 믿습니다. ▶예수가 죄가 없다는 증거!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았지만 예수는 죄가 없다고 증거 했고 빌라도와 그의 아내도 그의 무죄함을 알았습니다. 예수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를 죽인 자들도 죄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런데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줄 믿습니다. 결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때 자녀 돼요. 그러면 우리의 삶속에 그 분이 주인 되시는 것입니다. ▷갈2;20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전10;30에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왜? 그 분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 그래서 바울은 내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노라 했습니다. ▶우리의 방향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전하는 방향의 중심이 되어야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중직을 가질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제일 복음을 막는 사람이 목사님, 장로님, 중직자들. 제일 복음을 잘 전하는 사람이 목사님, 장로님, 중직자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알고 방향을 맞추면 제일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중직자요,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중직자요, 얼마나 무서운가? 그래서 우리가 마28;20절 복음 전하는 자에게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성경에 보면 전도자 가는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증거! 빌립이 복음전하는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을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천사를 보내고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갔는데 지진을 통해서 옥문이 열리고 바울의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예수 믿고 복음 전하는 여러분의 발걸음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방향 맞추고 복음 전하면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복음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면 얼마나 가슴 속에 있으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 믿고 복음 전하면 여러분의 가정이나 사업이나 직장이나 기능이 전부다 축복으로 변해요. 길이 있습니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주인이십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넘치는 바울/ 빌4:10-13/ 추수감사절설교/ 2008-11-23
감사가 넘치는 바울 빌4:10-13 빌립보서 4:10~13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들어가는 말 추수감사절에는 세 가지 정신이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청교도 신앙이고, 둘째는 이웃과의 교제이고, 그리고 셋째는 하나 님께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킬 때 바로 이 정신을 이 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아무리 열악한 환경 속에 있 다고 할지라도 감사를 잃어버리지 맙시다. 그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에 대해 감사합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이웃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 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 절기는 청교도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영국에서는 국교회에 대한 개혁으로 청교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1620년 9월 2일 180톤급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배에 남자 72명, 여자 29명, 총 101명이 승선했습니다. 그들은 65일간의 긴 항해 끝에 11월 9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케이프카드만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앞에는 굶주림, 매서운 추위, 사나운 맹수의 습격, 그리고 인디언들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 해 겨울을 보내고 1621년 2월 28일 101명의 청교도 가운데 그동안 50명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봄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인디언들이 농사기구를 훔쳐가기도 하고, 콩밭 밀밭을 짓밟아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인디언 추장인 마사소이드와 상호협력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후 그들은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와 밀을 경작하는 법을 배워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해 가을 그들의 농사는 풍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1주일간 축제를 열었습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입니다. ■ 유대인들의 감사절기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 가지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유월절,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나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등입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모두 감사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열 번째 장자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오순절은 곡식 추수를 감사할 뿐 아니라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이며 성령이 임함을 감사하는 절기로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팔절은 새해 첫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 때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아울러 한 해의 곡식 추수를 마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처음으로 농사하여 초막을 짓고 가족들과 함께 한 주간을 초막에서 하나님이 출애굽한 사건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절기를 지키도록 명하신 것은 은혜를 깨닫고 때를 따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감사할 줄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의 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날 불평불만을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만큼 많은 은혜와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애굽의 열 번째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을 받았지요, 홍해를 기적으로 건넜지요,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지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와 보호를 받았지요, 반석에서 생수를 맛보았지요… ….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은혜와 이적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주의 종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입만 열면 원망이고 입만 열면 불평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경험한 광야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다 죽도록 하셨겠습니까?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감사하지 아니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한 감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혜와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감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문 말씀] 빌립보서는 바울의 감사가 담겨있는 편지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교를 하면서 빌립보 교회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4:15~16>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특히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어려운 처지를 알았던 빌립보 교회는 정성껏 사랑의 성금을 모아 그에게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일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겠습니까?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썼던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로마 감옥에 갇혀있고 설상가상으로 경제적인 궁핍함에 처해있는 바울이 그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바울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누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단지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사랑의 성금 때문에 감사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아무리 극한 상황 속에서라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감사할 수 있는지를 바울에게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Ⅰ. 바울은 주(主) 안에서 감사했습니다. <본문 10절> ”내가 주안에서 기뻐함은……. 우리가 주안에 있어야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나는 주안에 있다’는 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환경만 보았다면 그것은 감옥뿐이었을 것입니다. 경제적인 궁핍함뿐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배고프고 굶주리고 헐벗음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여러분을 감싸고 있는 열악한 환경만 보이십니까? 열악한 환경에서 감싸여서 조금도 옴짝 달싹하지 못하는 환경에 처했습니까? 사업이 잘 안됩니까? 하는 일들이 막힙니까? 누구를 원망할 만한 어려운 한경에 처했습니까? 주님 안에 있음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음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 안에 있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만 바라보고, 세상만 바라보고, 사람만 바라본다면, 낙심되고 원망스럽고 좌절 내지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는 믿음 없는 행위입니다. ■ 38년 된 병자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처지를 말합니다. 누구하나 자신을 물이 동할 때 못으로 넣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면서 사는 인생입니다. 부모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고 친한 친구도 소용이 없고 사랑하는 부인도 자신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라본다면 그는 원망과 불평속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신령한 눈으로 예수를 발견하였다고 하면 환한 웃음을 웃으면서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탓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을 때에 비로소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찬455장 1절) 신앙인이 항상 기뻐할 수 있음은 주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주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면 자신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자신이 만주의 주가 되고 만왕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십자가는 모멸감을 면치 못하고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외쳤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오죽 하였으면 할 수 만 있으면 이 쓴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말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였습니다. 이 때 그 십자가는 자신에게 영광이 되었습니다. Ⅱ. 바울은 자족함으로 감사하였습니다. <본문 11-12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인류의 크나큰 병중의 하나는 ’욕심과 탐욕’입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들은 대부분 다 욕심이 과해서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현대인은 만족하고 자족할 줄을 모릅니다. 욕심이란 뭘까요? 얼토당토않게 많은 것을 원하는 것만 욕심이 아닙니다. ’나에게 조금만 더 있으면…….’ 하는 마음이 바로 욕심입니다. 왜 사람들이 사치하고, 허영에 들뜨고, 향락과 퇴폐에 빠집니까? 다 욕심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합니까? 자족할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무 욕심부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신앙생활 한다고, 헌신했다고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됩니다. 바울은 일평생 자족하는 마음, 만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풍부에도 궁핍에도 어떠한 형편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6>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되느니라.” 원래 남의 떡이 맛있어 보이고 커보이는 것입니다. 다 욕심 때문입니다.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습니다. 참 불행한 것입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 내 부모, 내 가정, 내 직장, 내 교회 만족하고 감사하시기를 ■ 행복지수 98년도에 런던정경대학(LSE)이라는 곳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행복한가?하는 조사를 한 바 있는데 그 당시에 방글라데시, 아제르바이잔, 나이지리아가 1,2,3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영국의 심리학자 로스웰(Rothwell)과 인생 상담사 코언(Cohen)이 만들어 2002년 발표한 행복공식(즉,행복지수)에서도 1위를 방글라데시가 차지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행복지수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이유를 경제학자 레이야드는 두 가지 요인으로 보았습니다. ⑴ 사람들이 너무 쉽게 더 좋은 여건에 적응해 버린다는 사실!! 부채가 있을 때는 선풍기가 아쉬웠는데, 선풍기가 생기니 이번에는 에어컨이 없으면 불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불행을 느낀다는 것이다. ⑵ 상대적 소득수준!! 하버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남들이 2만 달러 받을 때 5만 달러 받는 것이 남들이 20만 달러 받을 때 100만 달러 받는 것보다 더 좋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득수준이나 경제적 제도가 후진국인 방글라데시 등의 국가의 행복지수가 더 높게 나온 것입니다. 로스웰과 코언이 행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는데 아래의 내용들입니다. 이 말은 생존경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소유하고 많아야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많아야하고 가져야 하고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만 달러 받으면 식구들과 충분히 먹고 살아가는데 다른 사람이 20만 달러 받으면 불행하다는 이야기나 같습니다. 나보다 더 부자로 살고 월급이 많으면 박탈감을 갖는 것이나 동일합니다. 내가 낸 세금으로 내가 받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은 박탈감을 갖게 된 불행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살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나의 보호자가 됨을 알아 그 안에 사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Ⅲ. 바울에 감사는 하나님으로 한다. <본문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면 된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여러분! ’안 된다, 할 수 없다, 힘들다, 어렵다, 곤란하다’ 하면서 주저주저 하는 자가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적극적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불평은 대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고, 감사는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들이 합니다. <디모데전서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골로새서 1:29>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노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감사도 동일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게 합니다. 인간은 항상 욕심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어린아이의 모습 아이들은 무엇을 주고 달라면 안 줍니다. 조금만 달라고 해도 안 줍니다. 한쪽 손에 10000원 짜리 지폐를 가지고 달라고 하면 그 때에야 줍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나에게서 나가면 손해보는 감정을 가집니다. 그러나 주게 되면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이 있음을 믿을 때 서슴없이 주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1세대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지만 그곳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그들에게 주시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감사하는 자가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주님은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했습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지옥에 가서도 원망하고 불평한다는 의미입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들이 이 땅에서 감사했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버릇 버리지 못하고 지옥에 가서도 여전히 원망하고 불평할 것입니다. 감사해 보십시오. 지옥 같았던 우리의 마음이 천국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지옥 같았던 우리 가정이 천국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온통 천국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감사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시편 100:4>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편 107: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에베소서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골로새서 3:15>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누가복음 17:11>이하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도중 한 조그마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 그들은 한목소리로 예수님께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고쳐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그들은 가다가 문둥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열 명이 다 큰 은혜를 체험했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10%에 불과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은 감사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실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서도 감사할 줄 모른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배은망덕한 행위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여러분, 감사합시다. 어떻게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까? ⑴ 주안에서 감사하였습니다. ⑵ 자족함으로 감사하였습니다. ⑶ 하나님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양승복 목사(서울 새길교회)
건전한 신자/ 빌립/ 행8:4-8, 행8:26-40/ 2004-02-02
건전한 신자/ 빌립 행8:4-8, 행8:26-40 I. 서론 오늘은 사도행전 8장 4절에서 8절까지 있는 말씀과 26절에서 40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건전한 신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주보에는 사도행전 8장 4절에서 8절, 26절에서 40절이라고 나와 있지만, 사실은 8장 전체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게 되겠습니다. 건전하다고 하는 말은 건강이라고 하는 말과 온전이라고 하는 말을 합해서 만들어 낸 합성어입니다. 건강하면서도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온전하면서도 건전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어렸을 때 자라나던 모습을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건전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전도사로 봉사하던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여집사님 중에 홀로 되어서 두 아들을 키우는 분이 있었는데, 그 아들 형제가 어떻게 기골이 장대한지 모릅니다. 그 집사님의 둘째 아들은 스물 대여섯 살로, 키도 크고 아주 건강했지만, 정신 지체 장애가 굉장했습니다. 스물 대여섯 살 난 청년이 다섯 살 여섯 살 난 아이들과 함께 소꿉장난을 하며 놀곤 했습니다. 정신연령이 그 이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은 굉장히 건강했고, 나이는 스물 대여섯 살이면서, 노는 것은 대여섯 살 난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입니다. 정신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의 건강은 두 말 할 것 없이 좋았으나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온전하면서도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건강하면서 온전해야 합니다. 이것을 겸해서 말하는 것이 ‘건전하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합니다. 믿는 사람도 건전한 신자여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건전한 신자’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건전한 신자에 대해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빌립입니다. II. 본론 1. 첫째, 마음이 열린 신자가 건전합니다(4-8).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키우신 열두 제자 가운데서 세계 선교사를 뽑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뽑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열두 제자를 제쳐놓으시고, 예수님 살아생전의 제자가 아니었던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을 이방인의 그릇, 즉 세계 선교사로 제일 처음으로 내보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선민이요,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게 되어 있고, 하나님은 자기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이 구원 얻을 자격이 없다.’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선민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방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면 절대로 전도하지 않습니다. 이방을 향해서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이면서도 전혀 다릅니다. 그 이유는 길리기아 다소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난 까닭에 헬라 문화권의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 문화권이 아닙니다. 바울은 헬라 문화권에서 태어났고, 헬라 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시야가 아주 넓습니다. 시야가 넓기 때문에 바울 자신은 자기는 선민이면서도 선민만의 구원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열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유학을 하여 가말리엘 선생 아래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마음은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이방에 나가서 전하라고 하면 거침없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를 이방인 사도로 보내어 이방인 전도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은혜도 받지 못합니다. 이 시간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야 그 말씀이 하나도 빠짐없이 마음에 닿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닫혀 있으면, 말씀이 마음에 와서 닿지를 않습니다. 학생이 선생에 대해서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닫고 공부를 하면, 그 과목은 항상 낙제 점수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좋아해서 마음을 활짝 열면 그 과목은 일등 과목이 됩니다. 마음 문을 열어 놓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과 예배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 예배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열려져있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8절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무심코 읽어 내려가면 별로 은혜가 되지 않는 구절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빌립이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이 아닙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빌립 집사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부흥이 되고 각지로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유다 지방으로만 나아갔겠습니까?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남쪽에 유다 지방이 있고, 그 가운데 사마리아 지방이 있고, 그 북쪽으로 갈릴리 지방이 있습니다. 갈릴리 지방이나 유다 지방은 꼭 같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자기들끼리는 잘 통합니다. 전혀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지방은 앗수르 나라의 속국이 되었을 때 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의 피가 섞였습니다. 즉 혼혈족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너희는 혼혈족이라고 해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절대로 상종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지 너희의 하나님이 아니요, 구원은 우리의 것이지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사마리아에 가지 않았는데, 빌립 집사는 그 사마리아에 갔습니다. 그는 저 사람들도 우리처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을 사람이요, 우리의 하나님은 저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활짝 열려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그 사람들이 얼마나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지 ‘그 큰 성에 기쁨이 가득했더라.’고 했습니다. 즉,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마음이 열린 사람을 이방에 보내셔서 큰일을 하게 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빌립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디오피아 사람이면 흑인이 아닙니까?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권세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갈 때, 그 내시에게도 전도를 했습니다. 빌립은 이 흑인에게 전도를 하고, 또 돌아갈 때에는 아소도라고 하는 곳으로 갑니다. 아소도는 유대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닙니다. 블레셋 다섯 도시 중에 하나로 아스돗이라고도 합니다. 그곳에 가서 또 열심히 복음을 전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빌립은 일곱 집사 중에서도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순교한 것으로 유명했고, 빌립 집사는 이렇게 이방인에게 전도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를 고부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고부간의 갈등이 심한 가정은 가정이 벌컥벌컥 뒤집힙니다. 난리가 납니다. 지금 미국도 고부간의 갈등이 아주 심각합니다. 무슨 고부간의 갈등인가 하면, 고어 대통령 후보와 부시 대통령 후보 간의 갈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고부(?) 아닙니까? 지금 그 문제로 나라가 시끌시끌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부 갈등이 심각합니다. 한번은,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기만 하면,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와 소곤거리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합니다. 말끝마다 시어머니 욕이요, 시어머니 흉을 보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정어머니가 “그 시어머니가 빨리 죽어야 되겠는데.” 하고 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빨리 죽으면 좋겠는데 안 죽네요. 귀신도 안 물어가네요.” 그 이야기를 들은 친정어머니가 “내가 빨리 죽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너는 가서 시치미 뚝 떼고 내가 가르쳐 준 대로만 하면 된다. 사람이란 자꾸 과식을 하고 많이 먹으면 빨리 죽게 되어 있단다. 너는 보나마나 시어머니에게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밥도 되는 대로, 반찬도 되는 대로 해서 차려 드려서 아마 맛이 없었을 거야. 그러니 시어머니가 죽냐?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정성을 들여서, 밥맛을 아주 좋게, 그리고 좋은 반찬을 준비해서 대접을 해라. 밥맛이 있으면 얼마나 많이 먹겠느냐? 하루 삼시 세 끼를 꼭 꼭 그렇게 하도록 해라.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참도 아주 맛있는 것으로 해서 갖다 드려라. 그러면 돼지처럼 살이 쪄서, 얼마 못 살고 죽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친정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딸이 시댁으로 돌아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전에 없이 밝은 웃음을 보여 주기도 하고 정성을 들여서 맛있게 밥을 하고 반찬을 해서 대접을 했습니다. 점심에도 저녁에도 그렇게 맛있게 밥을 차려서 갖다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석 달이 지나도 며느리가 변함없이 잘합니다. 며느리가 너무 너무 잘하니까, 그 때부터는 시어머니가 나가서 며느리 칭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소리가 며느리에게 들어오지 않습니까? 시어머니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얼마나 며느리를 좋아하는지, 또 며느리에게 잘하는지 모릅니다. 며느리가 생각하니, 이제 시어머니가 죽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며느리도 시어머니에게 닫았던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부간에 대화가 잘 통하고, 이제는 재미있게 살아갑니다. 친정어머니가 시어머니 죽으라고 그렇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네가 지금까지 시어머니에게 잘 못했으니까 이제는 가서 더 잘하라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 동안 시어머니는 며느리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대해서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닫고 있으니 말이 통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 가정에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 열어 놓으십시오. 교인들 사이에 서로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 열어 놓으십시오.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놓으십시오. 특별히 목사에게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 열어 놓으십시오. 마음을 닫고 있으면 절대로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나는 누가 마음을 닫고 있는지 열고 있는지 모릅니다. 닫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인 내가 여러분 중에 누구에게 마음을 닫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도 마음을 열어야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 문 활짝 열어 놓은 신자가 건전한 신자입니다. 2. 둘째, 선을 지켜 사는 신자가 건전합니다(26-27). ‘긋다’는 말을 “지키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어 놓으신 선을 분명하게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그 선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보디발 장군의 종이 되지 않습니까? 장군이 일 처리 하는 요셉을 보니 너무 잘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맡겨 놓았더니 그가 모든 살림을 맡은 때부터 축복이 불길같이 일어납니다. 즉 만사가 형통합니다. 그래서 ‘이제 네 마음대로 하라’고 모두 맡겨 주었습니다. 열일곱 살에 종이 되었던 요셉이 스무살이 되고, 스물다섯 살이 되고 보니, 얼마나 늠름한 청년이 됩니까? 보디발 장군이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곤 합니다. 하루 종일 혼자 있어야 하는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웠겠습니까? 그러던 중 한번은 일 보러 들어 온 요셉을 붙잡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럴 때 요셉은 “주인이 이 집의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 주었지만, 당신만은 절대 맡겨주지 않았고, 선을 분명히 그어 놓았기 때문에 저는 그 선을 넘지를 못합니다.” 하고 그 선을 지켰습니다. 요셉이 그 선을 지켰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억울하게 감옥에 가지만 감옥에 간 것이 오히려 요셉에게는 전화위복이 됩니다.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분명히 선을 지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어 주신 선을 꼭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일주일 중에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지만 하루는 하나님의 날입니다. ‘이 날은 절대 오락을 하지 말고,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라.’고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날에 왜 설악산에 갑니까? 이 날에 왜 세상 향락을 쫓아가고, 하나님 앞에는 얼굴도 비치지 않습니까? 선을 벌써 넘어 버린 것입니다. ‘네가 돈을 벌거들랑 아홉은 네가 먹고, 그 중의 하나는 손대지 말고 내놓아라.’고 하셨습니다. 열 개를 다 먹으라고 주신 적이 없습니다. 열 개를 모으면 부자가 될 것 같아도 그것은 먹으라고 준 일이 없기 까닭에 나중에 누구 좋은 일을 시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는 내 놓지만 아홉은 먹으라고 했기 때문에, 아홉으로 돈을 모으면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제 문제, 돈 문제에도 선을 그어 주신 것입니다. 그 선을 꼭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6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면서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29절을 보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고 또 선을 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39절에서 40절 상반절을 보면,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라고 했습니다. 역시 성령이 빌립의 갈 곳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전도에 성공하고 그 곳에 있었으면 편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주의 사자가 나타나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그 길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그 길은 광야 길입니다. 왜 가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가라고 하기에 거기까지 갔습니다. ‘그 이상 넘어가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에 못 미쳐 중도에 포기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가 경계선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가서 기다려 섰습니다. 그랬더니 그 광야 길에 병거 하나가 나타납니다. 그 때 성령이 두 번째로 주시는 말씀이, ‘병거 가까이 가라.’고 했습니다. 병거에 가까이 가니 흑인 하나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성경을 읽으면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 사람 재무장관이 빌립에게 ‘빨리 올라타라’고 하더니 읽던 성경을 물어 보았습니다. 빌립이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물 있는 곳에서 빌립에게 세례를 받고, 그 에디오피아 내시는 자기 길을 기쁨으로 갔습니다. 세 번째로 성령이 빌립을 이끌어 간 곳은 아소도였습니다. 아소도는 아스돗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이스라엘의 도시가 아닙니다. 블레셋 나라 다섯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 곳에 가서 열심히 전도하라고 했습니다. 빌립은 꼭 가라고 한 곳까지만 갔습니다. 하라고 하는 일만 꼭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한 곳이 있고, 가면 안 된다고 하신 곳이 있습니다. 그 선을 분명히 지켜서, 빌립은 살았고 믿었고 승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건전한 그리스도인은 선을 분명히 지켜 살고, 하나님이 그어주신 그 선을 분명히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번은 금융회사를 새로 만들어 놓은 그 회사 주인이 사람들을 모집합니다. 경리를 담당할 사람은 아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 그리고 능력이 있어도 양심이 비뚤어진 사람이 아닌, 아주 양심적인 사람을 선발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회사를 차렸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 회사를 하는 자기 친구를 찾아가서 “내가 이런 금융회사를 새로 차려 놓았으니 아주 양심적이고 아주 정확히 계산하는 능력 있는 사람을 한 사람 소개해 주게.”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 사장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한 사람이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누군데? 그럼 소개해 주게.” “내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이야.” “아니, 자네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을 왜 나한테 추천하지? 그럼 우리 회사 망하라는 거야?” “그게 아니야” “이 사람이 우리 경리 책임을 맡았었는데, 얼마나 정확하고 정직하게 하는지 그만이야.” “그런데 왜 쫓아냈지?” “내가 좀 바빠서 주일날 나와서 좀 일해 달라고 부탁을 하면, 칼로 떡을 자르듯이 거절을 하면서 ‘나는 이 회사를 그만두면 그만두었지, 나는 주일을 범하고 나와서 일은 못 합니다.’라고 거절을 하더군. 한 번, 두 번이어야지. 그래서 너 같은 사람은 필요 없다고 쫓아냈다네. 사실 쫓아내긴 했지만, 그 만한 일꾼은 구할 수가 없었네.” “그래? 그럼, 우리가 모셔가지.” 하고 더 높은 자리에 더 많은 월급을 주고 그 사람을 모셔갔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선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었겠지요? 적당하게 말입니다. 그러면 그 회사에서 인정받고 잘 살았을는지 모르나,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어 주신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습니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이 선을 넘어? 몇 푼 더 받기 위해서 선을 넘어? 어림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어 주신 선을 지키다가 쫓겨났지만, 나중에는 더 좋은 곳에서 더 많이 주는 곳에서 모셔갔습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불러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몇 푼 더 수입을 올린다고, 내 자리를 지킨다고 하나님께서 그어주신 선을 넘어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꼭 그 한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은 ‘해야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가야 하는 곳이 있고, 가서는 절대 안 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그 선을 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선을 넘으면 이미 신자는 아닙니다. 빌립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3. 셋째, 남의 믿음을 돕는 신자가 건전합니다(28-40). 나 혼자 잘 믿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의 믿음을 돕는 것은 더욱 좋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이 기뻐하는 신자요, 그 사람이야말로 아주 건강하고 온전한 즉 건전한 신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5절에서 39절을 보면,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내시는 에디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은 권세 있는 재무장관입니다. 이 사람은 흑인입니다.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습니다. 왜 예배하러 왔었습니까? 오래 전 솔로몬 왕 때 에디오피아에는 여왕이 있었는데,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 만나보고 돌아갈 때 하나님을 모시고 가서 그 나라는 유대교를 이미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알고 또 예루살렘 성전을 알기 때문에 그 내시가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거리가 차를 타고 한 시간 두 시간 걸리는 거리입니까? 2천리 3천리가 되는 거리입니다. 예배하러 왔다가 낮잠을 자면서 갔습니까?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갔습니다. 그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도저히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 때에 성령이 빌립을 보낸 것이 아닙니까? 빌립이 바로 그 병거에 같이 탄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이 읽는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라고 떠먹이듯이 가르쳐 주었더니, “그 예수를 나도 믿습니다. 저기에 물이 있는데 내려가서 나에게 세례를 줄 수 없습니까?” 그리고 내려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내시가 세례를 받고는 흔연히 제 갈길을 가는데 그렇게 기뻐하며 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흔연히’라는 말은 ‘기쁨으로’라는 말입니다. 빌립 집사는 자기 혼자 잘 믿은 것이 아니라, 에디오피아의 권세 있는 내시의 믿음을 얼마나 잘 도와줬습니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온 내시가 자기의 나라 에디오피아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유대교를 기독교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의 에디오피아 콥틱 교회가 바로 그 교회입니다. 이런 믿음이 되기까지 누가 도왔습니까? 빌립이 아닙니까? 남의 믿음에 손해를 주지 마십시다. ‘예수를 저렇게 믿는가?’라고 초신자들이 배웁니다. 즉,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일날 저녁까지 나오는 줄 알고 있는데, 자기를 전도한 집사는 주일날 저녁예배에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를 전도한 권사도 주일날 저녁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초신자의 믿음이 어떻게 됩니까? 결국 믿음에 손해를 주는 것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남의 믿음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구역장들 중에는 구역 식구를 늘리고 부흥시켜서 1년이 지나면 구역을 나누어야 되는 구역장이 있습니다. 그런 구역장에게 새로 되는 권찰을 붙여 주면, 권찰이 그 구역장이 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그대로 배웁니다. 나중에 그 권찰을 다른 곳에 구역장을 맡기면, 또 그대로 합니다. 그런데 날라리 구역장이 문제입니다. 그저 적당히 해서 시간만 때우고 맙니다. 그러다 보니 잘되는 구역을 맡겨 놓아도 다 거들내고 맙니다. 구역이 부흥되는 것은 고사하고, 구역예배를 모이기조차 못합니다. 그 구역장 밑에 새로 되는 권찰을 붙여 줘 보십시오. 구역장이 하는 것 그대로 배워서 나중에 나가서 자기도 날라리가 됩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남의 믿음에 도움을 주는 사람과 남의 믿음에 손해를 주는 사람을 비교해 볼 때 어떻습니까?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닙니까? 남의 믿음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빌립은 남의 믿음에 도움을 주는 건전한 신자였습니다. III. 결론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건전한 신자는, 1) 첫째, 마음이 활짝 열린 신자입니다. 누구에게나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께 마음을 엽니다. 2) 둘째, 선을 긋고 사는 신자입니다. 그 선을 내가 긋든가, 아니면 하나님이 그어 놓은 선을 다시 긋든가, 그 선을 지키며 그 한계 안에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건전한 신자입니다. 3) 셋째 남의 믿음을 돕는 신자입니다. 나 자신이 잘 믿을 뿐 아니라 너의 믿음을 잘 돕는 사람이 건전한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빌립 같은 건전한 신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겨울을 난 바울 로마로 발걸음을 서두르다/ 행28:11-15/ 2013-02-27
겨울을 난 바울 로마로 발걸음을 서두르다 행28:11-15 본문에 나오는 몰타(멜리데)섬의 오늘 날씨를 보니 섭씨 13도 정도가 됩니다. 학자들은 본문의 시기를 약 60년 2월 중순경으로 봅니다. 약 2000년 전 바울은 이 몰타섬에서 긴 겨울을 보내고 이때쯤 꿈에 그리던 자신의 사명지 로마로 복음을 전하려고 신발을 고쳐 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은 지금 최고의 이방인의 도시이며 최고의 정치 중심인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달하려는 열정 속에 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이 로마를 복음화하면 전 세계의 복음화는 지척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명에 투철한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험한 광풍의 어려움을 겪고 멜리데 섬에 도착하여 전도를 하며 석 달(행 18:11)을 보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은 벌써 로마에 가 있습니다. 이젠 겨울날씨도 풀려 여행하기에 적시입니다. 지난 2월 15일이 우수이고 오는 3월 5일이 경칩입니다. ‘우수 경칩이 되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수(雨水)는 눈이 비가 되어 내리고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는 뜻으로 날씨가 많이 풀려 봄기운이 돋고 초목이 싹트는 절기입니다. 경칩(驚蟄)은 날씨가 따뜻하여 각종 초목의 싹이 트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땅위로 나오려고 꿈틀거리고 사람들도 긴 겨울을 보내고 이젠 더 열심히 일하려는 절기입니다. 봄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긴 겨울을 기도생활과 성경공부를 통하여 신앙의 내공을 쌓는 일에 전념했다면 이젠 바울처럼 더 활발히 우리 활동반경을 확장하여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신발 끈을 잡아매고 더 열심히 일할 때입니다. 바울이 몰타섬을 떠날 때 탄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행 28:11)로 되었는데 디오스구로는 제우스의 아들인 쌍둥이 신으로 바다의 광풍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같은 배에 타서 난파의 위험을 몸소 경험한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는 이것을 구태여 성경에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지난 배 여행에서 항해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아서 배가 파손되고 전부가 생명을 잃을 뻔한 사건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신이나 사람의 지혜도 항해하는 인간을 도울 수 없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바다를 다스리시며 더 나아가 인간의 생사회복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일행이 이젠 배에서 내려 보디올부터는 육로로 로마여행을 합니다(행 28:13). 65㎞만 더 가면 드디어 로마입니다. 그런데 이때 로마의 형제들이 압디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세 여관이란 뜻)까지 마중을 와서 바울을 환영합니다(행 28:15). 아마 이들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로마로 보낸 편지를 보고 그들을 방문하겠다는 바울을 기다리다 연락을 받고 온 로마의 기독교인들일 것입니다. 이곳은 원래 로마로 입성하는 로마의 승전군들을 미리 환영하는 곳인데 바울이 로마를 복음화할 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이들을 미리 보내셔 복음의 승리를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몰타에서 겨울을 보내고 자신의 사명지인 로마로 선교하러 전진하듯이 우리도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위해 가정, 이웃, 직장, 교회, 나라를 향해 더 열심히 전진할 수 있는 계절이 왔습니다. 일어나십시다! 로마로 가기 위해서! 양정 목사(광주 학동교회)
결혼에 대한 바울의 충고/ 고전7:1-7/ 2004-06-05
결혼에 대한 바울의 충고 고전7:1-7 러시아의 속담에 「바다에 나갈 때는 한 번, 전쟁에 나갈 때는 두 번, 결혼을 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결혼에 실패하면 인생을 실패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결혼은 인생의 대사(大事)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권면하려는 골자는 그릇된 윤리 의식으로 혼란을 겪고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결혼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적 방종과 금욕이라는 극단적 이중성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말할 것 없이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육체는 무가치하므로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그 반대로 육체의 본능을 철저히 억제하자는 금욕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이 둘은 한 뿌리에서 난 이란성 쌍둥이였습니다. 이 문제로 바울도 고민했고, 고린도 교인들도 고민했습니다. 7장 1절에 \\\'너희의 쓴말에 대하여는\\\'이라는 표현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간에 일련의 서신왕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구절입니다. 학자들은 고린도전서가 나오기까지 네 단계가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1.바울의 원복음, 2.예루살렘 총회를 다녀와서 내린 훈령(고린도전전서), 3.고린도 교인들의 항의성편지, 4. 그 편지의 답장으로서의 고린도전서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너희의 쓴 말」에 해당하는 글이 바로 고린도 교인들의 항의성 편지에 해당합니다. 왜 고린도 교인들은 이런 항의성 글을 보냈을까요? 바울은 전도당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성적 방종으로 오해했고 음행을 금하라는 예루살렘총회결의 사항이 전해지자 내부적으로 혼선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포괄적인 해명이 필요했기에 오늘의 본문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견해, 첫째-결혼보다 독신이 좋다. 결혼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독신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결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임박한 종말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과 교회라는 제도만을 주셨습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성숙한 남녀의 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제도를 부인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과 자신의 권면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결혼의 정당성을 인정하되 임박한 종말사상으로 더 큰 목적을 위해서는 결혼은 잠정적으로 유보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결혼의 참 뜻 결혼은 성이 다른 남녀의 결합입니다.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이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비이며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음행의 도피처가 결혼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생활은 불결하고 부덕한 것이지만 음행이 두려워 음행의 도피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제도의 목적을 잘 알아야 합니다. 1.보완의 의미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홀로 살 수 없고 반드시 도움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하면 반드시 당부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자는 경제적 의무를 여자는 가정의 행복한 보금자리를, 쌍방에게는 성적의무를 강조합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 하는 분야가 각기 있습니다. 물구나무를 서서 아무리 달려보았자 발로 달리는 평범을 사람을 당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할 일과 여자의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분화되어도 고유한 임무는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보완해야 합니다. 2.행복공장입니다. 부부와 자녀가 함께 앉아있는 식탁이나 나들이하는 그림은 행복의 원천입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것은 인간을 물건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즉 유물사관이 그들을 파멸로 몰아넣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취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등주의 같으나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이나 행복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일률적인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원인과 결과가 항상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가정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도 가능합니다. 3.생육하고 번성하는 곳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종족보존본능입니다. 방종과 결혼이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적인 욕구를 채운다는 점에서 혼외정사나 부부정사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전자는 쾌락이 목적이라면 후자는 자녀양육과 책임감이 동반 된다점입니다. 셋째-구체적 권면 1.의무를 다하라고 합니다. 3절에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 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 여기에 의무라고 표기된 단어는 \\\'빚\\\' 혹은 \\\'채무\\\'라는 의미입니다. 빚을 갚는 심정으로 임하라는 뜻입니다. 이 의무에는 성적의무, 경제적 의무, 윤리적의무가 포함됩니다. 2. 별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말라고합니다(5절). 왜냐하면 성적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여 비정상적인 성적 분출이 염려되기 때문이고, 사탄의 유혹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지나치게 거룩해 지려고 하면 외식주의자가 됩니다. 교육전도사 시절 어느 동계 수련회에서 켐프화이어가 끝나고 학생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몇 학생은 공개적으로 자기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밝혔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지키지 못할 부분들도 많았습니다. 수련회가 끝나고 정상적인 교회 생활로 돌아 왔을 때 수련회때 한 약속들이 스스로에게 짐이 되어 신앙자체를 포기하는 학생이 생기기까지 했습니다. 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금욕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성적 죄악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고아원이 주로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3.남의 인격을 존중해 주라는 겁니다. 남자가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가부장적 사회였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바울의 결혼관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6절에서 「권도요 명령이 아니」라고 합니다. 명령은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권도는 바울 자신의 견해를 말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얼마나 사려 깊은 사람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신은 비록 독신이지만 독신만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태도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때도 입니다. 바울이 결혼을 했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행 26장 10절에 「성도를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하였다」는 것은 그가 산헤드린 회원이었다는 강한 증거인데 산헤드린 회원은 반드시 결혼해야만 했던 것을 감안할 때 그가 결혼을 했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사별을 했는지, 예수 믿은 후 아내가 스스로 떠나가 버렸는지 모르지만 이 글을 쓸 당시에는 독신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람의 식성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듯이 신앙생활 하는 방식도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통성 기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묵상 기도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정오기도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률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바울은 실질적인 문제요 인생의 근본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결혼의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형식이나 관습에 얽매어억지로하는 형식적인 결혼보다는 독신이 좋고, 독신 또한 외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제할 은사가 주어진 자들에 허락되어진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은 어느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될 것인가에 두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양심에 따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시기 바랍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설교의 대가인 스펄젼 목사님이 한 번은 그의 설교 도중에 할아버지의 얘길 했다. “할아버지는 대가족의 부양자였으나 아주 적은 수입으로 살아갔으며 주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며 섬겼다.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복음전하기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황제에게도 전했다. 그는 조그마한 농장과 한 마리 소를 갖고 그날그날 살아갔는데 어느 날 그 젖소마저 죽고 말았다. 할머니는 낙심하여 주님은 늘 “예비하신다고 하셨죠?”라고 불평어린 기도를 털어 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영국 귀족협회에서 시골의 가난한 목회자를 위한 기부금을 부쳐왔다. 할아버지는 \"그것 보세요 하나님께서 늙은 소만 못하시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던들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서 이처럼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신앙이 있는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을 영접하고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한 후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흔쾌히 길을 떠나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갔다. 고넬료는 이미 베드로의 방문을 예상하고 그의 모든 일가들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 Vision의 사람, 기도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며, 그 말씀이 임할 때 즉각 즉각 순종하여 열매를 경험하는 사람이 된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상봉하여 축복의 말씀을 전하게 된 날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지 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즉 첫째 날에는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고(10:1-8). 둘째 날은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서 함께 유숙했고(10:9-23). 셋째 날은 베드로가 “욥바”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으며(10:23). 넷째 날에야 비로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고넬료를 만났던 것이다(10:24, 30). 베드로가 욥바를 떠날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환들과 욥바에 사는 “두어 형제”와 함께 동행 했다. 그런데 11:12에는 “여섯 형제”가 동행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믿음으로 베드로가 올 줄 알고 이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본다. 즉 베드로가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서”영접했다. 이것은 그가 겸손하면서도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에게 뿐 아니라, 그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를 가진 자의 기도는 진실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1. 복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하면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 신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욥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고 하셨다. 아무리 많은 자녀를 두었다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은 자녀를 다 똑같이 사랑한다. 재치 있고 똑똑하다고 편애를 두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미모나 지위, 국적이나 성별, 부귀와 영예로 인하여 인간을 차별하시거나 더 호의를 베풀지 아니하신다. 겉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할례를 받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와 진노를 형벌로 내리신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베드로는 말하기를 28-29절에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고 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율법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과 상대하지도 그들과 음식을 나누거나 교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편견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 계획을 가지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시대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시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지상 계실 때 유대인의 편협된 율법과 전통을 깨뜨리고 그들이 머리하는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와 이방인들까지 가까이 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 주셨다. 이제는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깨끗하다고 선언하신다. 깨끗케 된 것을 믿으세요. 확신하세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믿으세요. 이것이 복음이요, 은혜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와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7-28)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의 구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도 유효하고 무할례도 유효하므로 나누임이 없어졌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않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들은 그의 학벌이나 신분, 재산 정도에 따라 평가하기 쉬우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속사람을 보신다. 고넬료가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지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 베드로를 초청하고 그의 말씀 앞에 일가친척을 다 모아 무릎을 꿇는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되 외식적이 아닌 중심으로 사랑하는 복음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해야 한다. 38-39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셨느니라”고 했다.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집에서 세상의 잡다한 뉴스거리나, 삼순이, 굳세어라 금순이 TV드라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증거 하였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셨으며,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성장과 사역 방법은 나사렛의 평범한 한 청년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사람들 가운데 섞여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셨고 그들 중에 계셨다. 이처럼 철저하게 인간적인 삶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구속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이 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성령과 권능으로 당신의 아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셨지만 사실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가 바로 이 “성령과 능력”에 있었다. 하나님이 기름 붓듯이 주신 성령 충만과 능력으로 예수님은 구세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선행들 중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한층 드러내는 사건으로 오직 예수님의 권세로, 예수 이름의 권세와 기도의 능력으로 마귀의 진이 파하여지는 권능을 가지셨고, 또 그를 믿는 자에게 주셨다. 마귀는 어느 때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리고 반역하고 훼방하는 패역한 존재이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게 가난의 저주에 가둬두고 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상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리며 복된 삶을 살아갈 권리와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마귀의 무리들이 에덴에서부터 인간을 죄악의 길로 끌어들임으로써,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상처에서 치유 받지 못하게 하며 가난의 저주에 가두어 비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예수의 이름과 그의 능력으로 이 모든 마귀의 사슬과 저주를 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마귀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를 고치셨고 해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세 있는 이름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이 마귀를 물리치게 하셨다. 이 귀신을 좇아내고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 복음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죄에서, 가난에서, 마귀의 사슬에서 구원코져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치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22:32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육신에 져서 육신의 욕망대로 살다가 영벌, 지옥 불”에 거하게 되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는 환난, 고난,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세히 증거 하고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본 증인들이라고 말하였다. 3. 복음은 믿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선포한다. 42-43절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 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하신다. 사전에 찾아보니 “믿음”은 어떤 신조나 종교에 대한 옳다는 확신이요, 신뢰요, 성실이며, 충성이라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모든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 모든 상처에 치료해 주신다. 믿음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도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요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오신 분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유일성을 강조하셨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 예수님만이 속죄 제물이 되신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망하거나 심판받거나 지옥에 이르지 않는다. 왜요, 그 무서운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구세주요, 구원자 되신다. 그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여 주신다.”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 받았다는 믿음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저를 믿는 사람들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도다”하니 믿음이 죄에서 자유케 하고 정죄함이 없는 복음의 은혜와 그 축복이 이 시간 넘치기 바랍니다. EX. 수천 명의 관중이 기다리는 중에 한 운동경기가 막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이때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곧 사라들이 사방에서 개를 둘러쌓았고 이에 당황한 개는 그대로 서서 웅크리고 등어리 털을 고추 세운 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때 운동장 끝에서 한 소년이 두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큰소리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자 강아지는 주인 소리임을 듣고 그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언제든지 나의 주인인 하나님의 음성에, 그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고넬료와 베드로 같은 복음적인 성도가 다 되어 가족을 구원하며, 주신 직분과 사명을 다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2005-10-14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설교의 대가인 스펄젼 목사님이 한 번은 그의 설교 도중에 할아버지의 얘길 했다. “할아버지는 대가족의 부양자였으나 아주 적은 수입으로 살아갔으며 주님 무척이나 사랑하며 섬겼다.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복음전하기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황제에게도 전했다. 그는 조그마한 농장과 한 마리 소를 갖고 그날그날 살아갔는데 어느 날 그 젖소마저 죽고 말았다. 할머니는 낙심하여 주님은 늘 “예비하신다고 하셨죠?”라고 불평어린 기도를 털어 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영국 귀족협회에서 시골의 가난한 목회자를 위한 기부금을 부쳐왔다. 할아버지는 그것 보세요 하나님께서 늙은 소만 못하시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던들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서 이처럼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신앙이 있는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을 영접하고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한 후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흔쾌히 길을 떠나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갔다. 고넬료는 이미 베드로의 방문을 예상하고 그의 모든 일가들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 Vision의 사람, 기도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며, 그 말씀이 임할 때 즉각 즉각 순종하여 열매를 경험하는 사람이 된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상봉하여 축복의 말씀을 전하게 된 날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지 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즉 첫째 날에는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고(10:1-8). 둘째 날은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서 함께 유숙했고(10:9-23). 셋째 날은 베드로가 “욥바”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으며(10:23). 넷째 날에야 비로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고넬료를 만났던 것이다(10:24, 30). 베드로가 욥바를 떠날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환들과 욥바에 사는 “두어 형제”와 함께 동행 했다. 그런데 11:12에는 “여섯 형제”가 동행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믿음으로 베드로가 올 줄 알고 이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본다. 즉 베드로가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서”영접했다. 이것은 그가 겸손하면서도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에게 뿐 아니라, 그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를 가진 자의 기도는 진실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1. 복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하면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 신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욥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고 하셨다. 아무리 많은 자녀를 두었다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은 자녀를 다 똑같이 사랑한다. 재치 있고 똑똑하다고 편애를 두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미모나 지위, 국적이나 성별, 부귀와 영예로 인하여 인간을 차별하시거나 더 호의를 베풀지 아니하신다. 겉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할례를 받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와 진노를 형벌로 내리신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베드로는 말하기를 28-29절에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고 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율법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과 상대하지도 그들과 음식을 나누거나 교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편견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 계획을 가지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시대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시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지상 계실 때 유대인의 편협된 율법과 전통을 깨뜨리고 그들이 머리하는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와 이방인들까지 가까이 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 주셨다. 이제는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깨끗하다고 선언하신다. 깨끗케 된 것을 믿으세요. 확신하세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믿으세요. 이것이 복음이요, 은혜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와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7-28)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의 구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도 유효하고 무할례도 유효하므로 나누임이 없어졌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않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들은 그의 학벌이나 신분, 재산 정도에 따라 평가하기 쉬우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속사람을 보신다. 고넬료가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지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 베드로를 초청하고 그의 말씀 앞에 일가친척을 다 모아 무릎을 꿇는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되 외식적이 아닌 중심으로 사랑하는 복음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해야 한다. 38-39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셨느니라”고 했다.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집에서 세상의 잡다한 뉴스거리나, 삼순이, 굳세어라 금순이 TV드라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증거 하였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셨으며,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성장과 사역 방법은 나사렛의 평범한 한 청년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사람들 가운데 섞여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셨고 그들 중에 계셨다. 이처럼 철저하게 인간적인 삶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구속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이 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성령과 권능으로 당신의 아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셨지만 사실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가 바로 이 “성령과 능력”에 있었다. 하나님이 기름 붓듯이 주신 성령 충만과 능력으로 예수님은 구세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선행들 중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한층 드러내는 사건으로 오직 예수님의 권세로, 예수 이름의 권세와 기도의 능력으로 마귀의 진이 파하여지는 권능을 가지셨고, 또 그를 믿는 자에게 주셨다. 마귀는 어느 때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리고 반역하고 훼방하는 패역한 존재이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게 가난의 저주에 가둬두고 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상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리며 복된 삶을 살아갈 권리와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마귀의 무리들이 에덴에서부터 인간을 죄악의 길로 끌어들임으로써,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상처에서 치유 받지 못하게 하며 가난의 저주에 가두어 비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예수의 이름과 그의 능력으로 이 모든 마귀의 사슬과 저주를 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마귀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를 고치셨고 해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세 있는 이름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이 마귀를 물리치게 하셨다. 이 귀신을 좇아내고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 복음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죄에서, 가난에서, 마귀의 사슬에서 구원코져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치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22:32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육신에 져서 육신의 욕망대로 살다가 영벌, 지옥 불”에 거하게 되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는 환난, 고난,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세히 증거 하고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본 증인들이라고 말하였다. 3. 복음은 믿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선포한다. 42-43절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 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하신다. 사전에 찾아보니 “믿음”은 어떤 신조나 종교에 대한 옳다는 확신이요, 신뢰요, 성실이며, 충성이라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모든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 모든 상처에 치료해 주신다. 믿음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도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요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오신 분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유일성을 강조하셨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 예수님만이 속죄 제물이 되신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망하거나 심판받거나 지옥에 이르지 않는다. 왜요, 그 무서운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구세주요, 구원자 되신다. 그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여 주신다.”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 받았다는 믿음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저를 믿는 사람들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도다”하니 믿음이 죄에서 자유케 하고 정죄함이 없는 복음의 은혜와 그 축복이 이 시간 넘치기 바랍니다. EX. 수천 명의 관중이 기다리는 중에 한 운동경기가 막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이때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곧 사라들이 사방에서 개를 둘러쌓았고 이에 당황한 개는 그대로 서서 웅크리고 등어리 털을 고추 세운 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때 운동장 끝에서 한 소년이 두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큰소리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자 강아지는 주인 소리임을 듣고 그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언제든지 나의 주인인 하나님의 음성에, 그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고넬료와 베드로 같은 복음적인 성도가 다 되어 가족을 구원하며, 주신 직분과 사명을 다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2005-10-14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설교의 대가인 스펄젼 목사님이 한 번은 그의 설교 도중에 할아버지의 얘길 했다. “할아버지는 대가족의 부양자였으나 아주 적은 수입으로 살아갔으며 주님 무척이나 사랑하며 섬겼다.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복음전하기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황제에게도 전했다. 그는 조그마한 농장과 한 마리 소를 갖고 그날그날 살아갔는데 어느 날 그 젖소마저 죽고 말았다. 할머니는 낙심하여 주님은 늘 “예비하신다고 하셨죠?”라고 불평어린 기도를 털어 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영국 귀족협회에서 시골의 가난한 목회자를 위한 기부금을 부쳐왔다. 할아버지는 그것 보세요 하나님께서 늙은 소만 못하시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던들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서 이처럼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신앙이 있는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을 영접하고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한 후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흔쾌히 길을 떠나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갔다. 고넬료는 이미 베드로의 방문을 예상하고 그의 모든 일가들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 Vision의 사람, 기도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며, 그 말씀이 임할 때 즉각 즉각 순종하여 열매를 경험하는 사람이 된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상봉하여 축복의 말씀을 전하게 된 날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지 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즉 첫째 날에는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고(10:1-8). 둘째 날은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서 함께 유숙했고(10:9-23). 셋째 날은 베드로가 “욥바”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으며(10:23). 넷째 날에야 비로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고넬료를 만났던 것이다(10:24, 30). 베드로가 욥바를 떠날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환들과 욥바에 사는 “두어 형제”와 함께 동행 했다. 그런데 11:12에는 “여섯 형제”가 동행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믿음으로 베드로가 올 줄 알고 이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본다. 즉 베드로가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서”영접했다. 이것은 그가 겸손하면서도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에게 뿐 아니라, 그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를 가진 자의 기도는 진실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1. 복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하면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 신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욥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고 하셨다. 아무리 많은 자녀를 두었다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은 자녀를 다 똑같이 사랑한다. 재치 있고 똑똑하다고 편애를 두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미모나 지위, 국적이나 성별, 부귀와 영예로 인하여 인간을 차별하시거나 더 호의를 베풀지 아니하신다. 겉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할례를 받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와 진노를 형벌로 내리신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베드로는 말하기를 28-29절에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고 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율법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과 상대하지도 그들과 음식을 나누거나 교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편견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 계획을 가지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시대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시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지상 계실 때 유대인의 편협된 율법과 전통을 깨뜨리고 그들이 머리하는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와 이방인들까지 가까이 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 주셨다. 이제는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깨끗하다고 선언하신다. 깨끗케 된 것을 믿으세요. 확신하세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믿으세요. 이것이 복음이요, 은혜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와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7-28)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의 구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도 유효하고 무할례도 유효하므로 나누임이 없어졌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않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들은 그의 학벌이나 신분, 재산 정도에 따라 평가하기 쉬우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속사람을 보신다. 고넬료가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지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 베드로를 초청하고 그의 말씀 앞에 일가친척을 다 모아 무릎을 꿇는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되 외식적이 아닌 중심으로 사랑하는 복음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해야 한다. 38-39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셨느니라”고 했다.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집에서 세상의 잡다한 뉴스거리나, 삼순이, 굳세어라 금순이 TV드라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증거 하였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셨으며,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성장과 사역 방법은 나사렛의 평범한 한 청년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사람들 가운데 섞여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셨고 그들 중에 계셨다. 이처럼 철저하게 인간적인 삶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구속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이 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성령과 권능으로 당신의 아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셨지만 사실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가 바로 이 “성령과 능력”에 있었다. 하나님이 기름 붓듯이 주신 성령 충만과 능력으로 예수님은 구세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선행들 중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한층 드러내는 사건으로 오직 예수님의 권세로, 예수 이름의 권세와 기도의 능력으로 마귀의 진이 파하여지는 권능을 가지셨고, 또 그를 믿는 자에게 주셨다. 마귀는 어느 때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리고 반역하고 훼방하는 패역한 존재이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게 가난의 저주에 가둬두고 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상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리며 복된 삶을 살아갈 권리와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마귀의 무리들이 에덴에서부터 인간을 죄악의 길로 끌어들임으로써,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상처에서 치유 받지 못하게 하며 가난의 저주에 가두어 비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예수의 이름과 그의 능력으로 이 모든 마귀의 사슬과 저주를 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마귀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를 고치셨고 해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세 있는 이름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이 마귀를 물리치게 하셨다. 이 귀신을 좇아내고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 복음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죄에서, 가난에서, 마귀의 사슬에서 구원코져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치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22:32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육신에 져서 육신의 욕망대로 살다가 영벌, 지옥 불”에 거하게 되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는 환난, 고난,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세히 증거 하고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본 증인들이라고 말하였다. 3. 복음은 믿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선포한다. 42-43절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 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하신다. 사전에 찾아보니 “믿음”은 어떤 신조나 종교에 대한 옳다는 확신이요, 신뢰요, 성실이며, 충성이라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모든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 모든 상처에 치료해 주신다. 믿음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도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요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오신 분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유일성을 강조하셨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 예수님만이 속죄 제물이 되신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망하거나 심판받거나 지옥에 이르지 않는다. 왜요, 그 무서운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구세주요, 구원자 되신다. 그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여 주신다.”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 받았다는 믿음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저를 믿는 사람들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도다”하니 믿음이 죄에서 자유케 하고 정죄함이 없는 복음의 은혜와 그 축복이 이 시간 넘치기 바랍니다. EX. 수천 명의 관중이 기다리는 중에 한 운동경기가 막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이때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곧 사라들이 사방에서 개를 둘러쌓았고 이에 당황한 개는 그대로 서서 웅크리고 등어리 털을 고추 세운 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때 운동장 끝에서 한 소년이 두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큰소리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자 강아지는 주인 소리임을 듣고 그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언제든지 나의 주인인 하나님의 음성에, 그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고넬료와 베드로 같은 복음적인 성도가 다 되어 가족을 구원하며, 주신 직분과 사명을 다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2005-10-14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설교의 대가인 스펄젼 목사님이 한 번은 그의 설교 도중에 할아버지의 얘길 했다. “할아버지는 대가족의 부양자였으나 아주 적은 수입으로 살아갔으며 주님 무척이나 사랑하며 섬겼다.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복음전하기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황제에게도 전했다. 그는 조그마한 농장과 한 마리 소를 갖고 그날그날 살아갔는데 어느 날 그 젖소마저 죽고 말았다. 할머니는 낙심하여 주님은 늘 “예비하신다고 하셨죠?”라고 불평어린 기도를 털어 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영국 귀족협회에서 시골의 가난한 목회자를 위한 기부금을 부쳐왔다. 할아버지는 그것 보세요 하나님께서 늙은 소만 못하시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던들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서 이처럼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신앙이 있는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을 영접하고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한 후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흔쾌히 길을 떠나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갔다. 고넬료는 이미 베드로의 방문을 예상하고 그의 모든 일가들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 Vision의 사람, 기도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며, 그 말씀이 임할 때 즉각 즉각 순종하여 열매를 경험하는 사람이 된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상봉하여 축복의 말씀을 전하게 된 날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지 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즉 첫째 날에는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고(10:1-8). 둘째 날은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서 함께 유숙했고(10:9-23). 셋째 날은 베드로가 “욥바”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으며(10:23). 넷째 날에야 비로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고넬료를 만났던 것이다(10:24, 30). 베드로가 욥바를 떠날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환들과 욥바에 사는 “두어 형제”와 함께 동행 했다. 그런데 11:12에는 “여섯 형제”가 동행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믿음으로 베드로가 올 줄 알고 이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본다. 즉 베드로가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서”영접했다. 이것은 그가 겸손하면서도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에게 뿐 아니라, 그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를 가진 자의 기도는 진실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1. 복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하면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 신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욥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고 하셨다. 아무리 많은 자녀를 두었다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은 자녀를 다 똑같이 사랑한다. 재치 있고 똑똑하다고 편애를 두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미모나 지위, 국적이나 성별, 부귀와 영예로 인하여 인간을 차별하시거나 더 호의를 베풀지 아니하신다. 겉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할례를 받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와 진노를 형벌로 내리신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베드로는 말하기를 28-29절에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고 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율법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과 상대하지도 그들과 음식을 나누거나 교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편견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 계획을 가지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시대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시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지상 계실 때 유대인의 편협된 율법과 전통을 깨뜨리고 그들이 머리하는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와 이방인들까지 가까이 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 주셨다. 이제는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깨끗하다고 선언하신다. 깨끗케 된 것을 믿으세요. 확신하세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믿으세요. 이것이 복음이요, 은혜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와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7-28)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의 구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도 유효하고 무할례도 유효하므로 나누임이 없어졌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않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들은 그의 학벌이나 신분, 재산 정도에 따라 평가하기 쉬우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속사람을 보신다. 고넬료가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지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 베드로를 초청하고 그의 말씀 앞에 일가친척을 다 모아 무릎을 꿇는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되 외식적이 아닌 중심으로 사랑하는 복음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해야 한다. 38-39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셨느니라”고 했다.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집에서 세상의 잡다한 뉴스거리나, 삼순이, 굳세어라 금순이 TV드라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증거 하였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셨으며,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성장과 사역 방법은 나사렛의 평범한 한 청년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사람들 가운데 섞여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셨고 그들 중에 계셨다. 이처럼 철저하게 인간적인 삶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구속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이 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성령과 권능으로 당신의 아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셨지만 사실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가 바로 이 “성령과 능력”에 있었다. 하나님이 기름 붓듯이 주신 성령 충만과 능력으로 예수님은 구세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선행들 중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한층 드러내는 사건으로 오직 예수님의 권세로, 예수 이름의 권세와 기도의 능력으로 마귀의 진이 파하여지는 권능을 가지셨고, 또 그를 믿는 자에게 주셨다. 마귀는 어느 때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리고 반역하고 훼방하는 패역한 존재이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게 가난의 저주에 가둬두고 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상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리며 복된 삶을 살아갈 권리와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마귀의 무리들이 에덴에서부터 인간을 죄악의 길로 끌어들임으로써,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상처에서 치유 받지 못하게 하며 가난의 저주에 가두어 비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예수의 이름과 그의 능력으로 이 모든 마귀의 사슬과 저주를 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마귀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를 고치셨고 해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세 있는 이름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이 마귀를 물리치게 하셨다. 이 귀신을 좇아내고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 복음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죄에서, 가난에서, 마귀의 사슬에서 구원코져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치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22:32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육신에 져서 육신의 욕망대로 살다가 영벌, 지옥 불”에 거하게 되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는 환난, 고난,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세히 증거 하고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본 증인들이라고 말하였다. 3. 복음은 믿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선포한다. 42-43절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 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하신다. 사전에 찾아보니 “믿음”은 어떤 신조나 종교에 대한 옳다는 확신이요, 신뢰요, 성실이며, 충성이라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모든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 모든 상처에 치료해 주신다. 믿음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도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요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오신 분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유일성을 강조하셨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 예수님만이 속죄 제물이 되신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망하거나 심판받거나 지옥에 이르지 않는다. 왜요, 그 무서운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구세주요, 구원자 되신다. 그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여 주신다.”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 받았다는 믿음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저를 믿는 사람들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도다”하니 믿음이 죄에서 자유케 하고 정죄함이 없는 복음의 은혜와 그 축복이 이 시간 넘치기 바랍니다. EX. 수천 명의 관중이 기다리는 중에 한 운동경기가 막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이때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곧 사라들이 사방에서 개를 둘러쌓았고 이에 당황한 개는 그대로 서서 웅크리고 등어리 털을 고추 세운 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때 운동장 끝에서 한 소년이 두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큰소리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자 강아지는 주인 소리임을 듣고 그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언제든지 나의 주인인 하나님의 음성에, 그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고넬료와 베드로 같은 복음적인 성도가 다 되어 가족을 구원하며, 주신 직분과 사명을 다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2005-10-14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Peter’s Preaching at Cornelius’ House) 행10:24-43 설교의 대가인 스펄젼 목사님이 한 번은 그의 설교 도중에 할아버지의 얘길 했다. “할아버지는 대가족의 부양자였으나 아주 적은 수입으로 살아갔으며 주님 무척이나 사랑하며 섬겼다.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복음전하기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황제에게도 전했다. 그는 조그마한 농장과 한 마리 소를 갖고 그날그날 살아갔는데 어느 날 그 젖소마저 죽고 말았다. 할머니는 낙심하여 주님은 늘 “예비하신다고 하셨죠?”라고 불평어린 기도를 털어 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영국 귀족협회에서 시골의 가난한 목회자를 위한 기부금을 부쳐왔다. 할아버지는 그것 보세요 하나님께서 늙은 소만 못하시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던들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서 이처럼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신앙이 있는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을 영접하고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한 후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흔쾌히 길을 떠나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갔다. 고넬료는 이미 베드로의 방문을 예상하고 그의 모든 일가들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 Vision의 사람, 기도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며, 그 말씀이 임할 때 즉각 즉각 순종하여 열매를 경험하는 사람이 된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상봉하여 축복의 말씀을 전하게 된 날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지 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즉 첫째 날에는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고(10:1-8). 둘째 날은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서 함께 유숙했고(10:9-23). 셋째 날은 베드로가 “욥바”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으며(10:23). 넷째 날에야 비로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고넬료를 만났던 것이다(10:24, 30). 베드로가 욥바를 떠날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환들과 욥바에 사는 “두어 형제”와 함께 동행 했다. 그런데 11:12에는 “여섯 형제”가 동행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믿음으로 베드로가 올 줄 알고 이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본다. 즉 베드로가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서”영접했다. 이것은 그가 겸손하면서도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에게 뿐 아니라, 그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를 가진 자의 기도는 진실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1. 복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하면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 신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욥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고 하셨다. 아무리 많은 자녀를 두었다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은 자녀를 다 똑같이 사랑한다. 재치 있고 똑똑하다고 편애를 두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미모나 지위, 국적이나 성별, 부귀와 영예로 인하여 인간을 차별하시거나 더 호의를 베풀지 아니하신다. 겉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할례를 받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와 진노를 형벌로 내리신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베드로는 말하기를 28-29절에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고 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율법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과 상대하지도 그들과 음식을 나누거나 교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편견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 계획을 가지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시대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시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지상 계실 때 유대인의 편협된 율법과 전통을 깨뜨리고 그들이 머리하는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와 이방인들까지 가까이 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 주셨다. 이제는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깨끗하다고 선언하신다. 깨끗케 된 것을 믿으세요. 확신하세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믿으세요. 이것이 복음이요, 은혜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와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7-28)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의 구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도 유효하고 무할례도 유효하므로 나누임이 없어졌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않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들은 그의 학벌이나 신분, 재산 정도에 따라 평가하기 쉬우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속사람을 보신다. 고넬료가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지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 베드로를 초청하고 그의 말씀 앞에 일가친척을 다 모아 무릎을 꿇는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되 외식적이 아닌 중심으로 사랑하는 복음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해야 한다. 38-39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셨느니라”고 했다.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집에서 세상의 잡다한 뉴스거리나, 삼순이, 굳세어라 금순이 TV드라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증거 하였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셨으며,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성장과 사역 방법은 나사렛의 평범한 한 청년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사람들 가운데 섞여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셨고 그들 중에 계셨다. 이처럼 철저하게 인간적인 삶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구속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이 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성령과 권능으로 당신의 아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셨지만 사실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가 바로 이 “성령과 능력”에 있었다. 하나님이 기름 붓듯이 주신 성령 충만과 능력으로 예수님은 구세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선행들 중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한층 드러내는 사건으로 오직 예수님의 권세로, 예수 이름의 권세와 기도의 능력으로 마귀의 진이 파하여지는 권능을 가지셨고, 또 그를 믿는 자에게 주셨다. 마귀는 어느 때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리고 반역하고 훼방하는 패역한 존재이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게 가난의 저주에 가둬두고 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상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리며 복된 삶을 살아갈 권리와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마귀의 무리들이 에덴에서부터 인간을 죄악의 길로 끌어들임으로써,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상처에서 치유 받지 못하게 하며 가난의 저주에 가두어 비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예수의 이름과 그의 능력으로 이 모든 마귀의 사슬과 저주를 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마귀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를 고치셨고 해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세 있는 이름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이 마귀를 물리치게 하셨다. 이 귀신을 좇아내고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 복음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죄에서, 가난에서, 마귀의 사슬에서 구원코져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치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22:32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육신에 져서 육신의 욕망대로 살다가 영벌, 지옥 불”에 거하게 되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는 환난, 고난,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세히 증거 하고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본 증인들이라고 말하였다. 3. 복음은 믿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선포한다. 42-43절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 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하신다. 사전에 찾아보니 “믿음”은 어떤 신조나 종교에 대한 옳다는 확신이요, 신뢰요, 성실이며, 충성이라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모든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 모든 상처에 치료해 주신다. 믿음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도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요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오신 분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유일성을 강조하셨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 예수님만이 속죄 제물이 되신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망하거나 심판받거나 지옥에 이르지 않는다. 왜요, 그 무서운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구세주요, 구원자 되신다. 그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여 주신다.”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 받았다는 믿음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저를 믿는 사람들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도다”하니 믿음이 죄에서 자유케 하고 정죄함이 없는 복음의 은혜와 그 축복이 이 시간 넘치기 바랍니다. EX. 수천 명의 관중이 기다리는 중에 한 운동경기가 막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이때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곧 사라들이 사방에서 개를 둘러쌓았고 이에 당황한 개는 그대로 서서 웅크리고 등어리 털을 고추 세운 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때 운동장 끝에서 한 소년이 두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큰소리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자 강아지는 주인 소리임을 듣고 그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언제든지 나의 주인인 하나님의 음성에, 그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고넬료와 베드로 같은 복음적인 성도가 다 되어 가족을 구원하며, 주신 직분과 사명을 다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 행10:24-43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의 증거 행10:24-43 설교의 대가인 스펄젼 목사님이 한 번은 그의 설교 도중에 할아버지의 얘길 했다. “할아버지는 대가족의 부양자였으나 아주 적은 수입으로 살아갔으며 주님 무척이나 사랑하며 섬겼다.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복음전하기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황제에게도 전했다. 그는 조그마한 농장과 한 마리 소를 갖고 그날그날 살아갔는데 어느 날 그 젖소마저 죽고 말았다. 할머니는 낙심하여 주님은 늘 “예비하신다고 하셨죠?”라고 불평어린 기도를 털어 놓았다. 그런데 다음날 영국 귀족협회에서 시골의 가난한 목회자를 위한 기부금을 부쳐왔다. 할아버지는 그것 보세요 하나님께서 늙은 소만 못하시겠소?”라고 했다고 한다.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던들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서 이처럼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즉 신앙이 있는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을 영접하고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한 후 그 이튿날 그들을 따라 흔쾌히 길을 떠나 고넬료의 집으로 들어갔다. 고넬료는 이미 베드로의 방문을 예상하고 그의 모든 일가들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 Vision의 사람, 기도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며, 그 말씀이 임할 때 즉각 즉각 순종하여 열매를 경험하는 사람이 된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상봉하여 축복의 말씀을 전하게 된 날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지 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즉 첫째 날에는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고(10:1-8). 둘째 날은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서 함께 유숙했고(10:9-23). 셋째 날은 베드로가 “욥바”를 떠나 가이사랴로 갔으며(10:23). 넷째 날에야 비로서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고넬료를 만났던 것이다(10:24, 30). 베드로가 욥바를 떠날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환들과 욥바에 사는 “두어 형제”와 함께 동행 했다. 그런데 11:12에는 “여섯 형제”가 동행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믿음으로 베드로가 올 줄 알고 이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본다. 즉 베드로가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서”영접했다. 이것은 그가 겸손하면서도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에게 뿐 아니라, 그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복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를 가진 자의 기도는 진실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1. 복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하면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다. 신10: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욥34:19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고 하셨다. 아무리 많은 자녀를 두었다 할지라도 부모의 마음은 자녀를 다 똑같이 사랑한다. 재치 있고 똑똑하다고 편애를 두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미모나 지위, 국적이나 성별, 부귀와 영예로 인하여 인간을 차별하시거나 더 호의를 베풀지 아니하신다. 겉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며 할례를 받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와 진노를 형벌로 내리신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베드로는 말하기를 28-29절에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고 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율법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과 상대하지도 그들과 음식을 나누거나 교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편견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구원 계획을 가지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시대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어시고 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지상 계실 때 유대인의 편협된 율법과 전통을 깨뜨리고 그들이 머리하는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와 이방인들까지 가까이 하시고 용납하시고 받아 주셨다. 이제는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고 깨끗하다고 선언하신다. 깨끗케 된 것을 믿으세요. 확신하세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믿으세요. 이것이 복음이요, 은혜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와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3:27-28)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의 구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도 유효하고 무할례도 유효하므로 나누임이 없어졌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치 않으신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들은 그의 학벌이나 신분, 재산 정도에 따라 평가하기 쉬우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며 속사람을 보신다. 고넬료가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지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 베드로를 초청하고 그의 말씀 앞에 일가친척을 다 모아 무릎을 꿇는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되 외식적이 아닌 중심으로 사랑하는 복음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해야 한다. 38-39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셨느니라”고 했다.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집에서 세상의 잡다한 뉴스거리나, 삼순이, 굳세어라 금순이 TV드라마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상세하게 증거 하였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셨으며, 지극히 인간다운 삶을 사셨다. 예수님의 성장과 사역 방법은 나사렛의 평범한 한 청년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사람들 가운데 섞여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셨고 그들 중에 계셨다. 이처럼 철저하게 인간적인 삶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구속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이 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성령과 권능으로 당신의 아들과 함께 하셨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셨지만 사실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가 바로 이 “성령과 능력”에 있었다. 하나님이 기름 붓듯이 주신 성령 충만과 능력으로 예수님은 구세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선행들 중에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한층 드러내는 사건으로 오직 예수님의 권세로, 예수 이름의 권세와 기도의 능력으로 마귀의 진이 파하여지는 권능을 가지셨고, 또 그를 믿는 자에게 주셨다. 마귀는 어느 때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거스리고 반역하고 훼방하는 패역한 존재이다.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게 가난의 저주에 가둬두고 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상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리며 복된 삶을 살아갈 권리와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마귀의 무리들이 에덴에서부터 인간을 죄악의 길로 끌어들임으로써,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상처에서 치유 받지 못하게 하며 가난의 저주에 가두어 비겁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예수의 이름과 그의 능력으로 이 모든 마귀의 사슬과 저주를 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마귀의 권세를 파하시고 우리를 고치셨고 해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권세 있는 이름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이 마귀를 물리치게 하셨다. 이 귀신을 좇아내고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 복음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죄에서, 가난에서, 마귀의 사슬에서 구원코져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치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까지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22:32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산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고, 예수님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육신에 져서 육신의 욕망대로 살다가 영벌, 지옥 불”에 거하게 되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신앙생활에는 환난, 고난,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세히 증거 하고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을 본 증인들이라고 말하였다. 3. 복음은 믿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선포한다. 42-43절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 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고 하신다. 사전에 찾아보니 “믿음”은 어떤 신조나 종교에 대한 옳다는 확신이요, 신뢰요, 성실이며, 충성이라고 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모든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 모든 상처에 치료해 주신다. 믿음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참예할 수도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요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오신 분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유일성을 강조하셨다. 오직 예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 예수님만이 속죄 제물이 되신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망하거나 심판받거나 지옥에 이르지 않는다. 왜요, 그 무서운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구세주요, 구원자 되신다. 그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여 주신다.”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 받았다는 믿음이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저를 믿는 사람들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도다”하니 믿음이 죄에서 자유케 하고 정죄함이 없는 복음의 은혜와 그 축복이 이 시간 넘치기 바랍니다. EX. 수천 명의 관중이 기다리는 중에 한 운동경기가 막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이때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곧 사라들이 사방에서 개를 둘러쌓았고 이에 당황한 개는 그대로 서서 웅크리고 등어리 털을 고추 세운 채 물어뜯을 기세였다. 그때 운동장 끝에서 한 소년이 두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큰소리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그러자 강아지는 주인 소리임을 듣고 그쪽으로 향해 달려갔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은 언제든지 나의 주인인 하나님의 음성에, 그의 말씀에 늘 순종하는 고넬료와 베드로 같은 복음적인 성도가 다 되어 가족을 구원하며, 주신 직분과 사명을 다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강해(21)/ 바울의 사도직과 생활비 문제/ 고전9:1-11/ 정수환 목사/ 학운교회/ 2004-08-18
바울의 사도직과 생활비 문제 고전9:1-11 Ⅰ.내용 분해와 조직 1.머리말 -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거 론하면서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변증하고 있다. 2.본론 ①바울의 사도직에 관한 문제 ㄱ.내가 사도가 아니라는 말인가? a.내가 자유인이 아닌가? 사도가 아닌가? 내가 우리 주 예수님을 보지 못했는가?(1) b.내가 주를 위해 일한 결실이 바로 너희 아닌가?(1) ㄴ.주를 믿는 너희가 나를 증거하는 표다. a.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다(2) b.주님을 믿는 너희가 내가 사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표가 되기 때문이다(2) ②인간적인 권리와 생활비 문제 ㄱ.우리에게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a.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는가?(4) b.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베드로처럼, 우리에게도 믿는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는가?(5) ㄴ.우리도 수고한 댓가를 받을 권리가 있다. a.다른 사도들에게는 생활비를 주면서, 바나바와 나는 생계를 위해서 계속 일을 하게 하는가?(6) b.자기 비용으로 군대생활을 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c.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를 먹지 않을 자가 누구며, 양을 기르면서 그 젖을 먹지 않을 자가 누군가?(7) ③일한 수고에 대한 댓가문제 ㄱ.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라. a.나는 단순히 인간의 관점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말씀을 두고 하는 말이다(8) b.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라’고 기록되어 있다(9) c.하나님이 소를 염려해서 이 말씀을 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위하여 말씀하셨는가?(10) ㄴ.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a.밭가는 사람이나 타작하는 사람은 제 몫을 받을 희망을 가지고 일한다(10) b.너희에게 영적인 씨를 뿌린 우리가 물질적인 열매를 거둔다고 해서 지나친 일이 되겠는가?(11) 3.맺는말 ①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부정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질문 형식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②더군다나, ‘왜, 일한 몫을 주려고 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장면에서는 바울의 애처롭고 가련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③바울이 생활비를 거론한 것은, 꼭 일한 몫을 받아야겠다는 것보다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바르게 교육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Ⅱ.내용 연구와 삶의 적용 1.사도직 문제 ①질문 ㄱ.내가 사도가 아니라는 말이냐?(1) ㄴ.내가 우리 주 예수를 보지 못했는가?(1) ②답변 ㄱ.내가 사도로서 주를 위해 일한 결실이 바로 너희다(1) ㄴ.예수를 믿는 너희가 바로 내가 사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표가 된다(2) 2.생활비 문제 ①질문 ㄱ.다른 사도에게는 생활비를 주면서, 왜 바나바와 나는 생계를 위해서 계속 일을 하게 하는가?(6) ㄴ.자기 비용으로 군대 생활을 할 자가 어디 있는가?(7) ㄷ.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를 먹지 않을 자가 누구며, 양을 기르면서 그 젖을 먹지 않을 자가 누군가?(7) ②답변 ㄱ.나는 단순히 인간의 관점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다(8) ㄴ.모세 율법에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라’고 기록되어 있다(9) ㄷ.밭가는 사람이나 타작하는 사람은 제 몫을 받을 희망을 가지고 일한다(10) ③결론 : 너희에게 영적인 씨앗을 뿌린 우리가 물질적인 열매를 거두는 것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니다(11) 3.삶의 적용 ①인간의 문제와 그 결과 ㄱ.자기 직무에 충실하지 못할 경우,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갖기가 쉽다. ㄴ.다른 사람의 지위나 직분을 인정해주는 데에는 무척 인색하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나 일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한다. ㄷ.내가 일하고 받는 몫에 대해서는 항상 적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일하고 받는 몫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받는다고 생각한다. ②하나님의 치료와 섭리 ㄱ.하나님은 각 사람들에게 그 특성과 재능에 따라 직분을 맡기셨다. ㄴ.씨를 뿌리고 일한 만큼 그 댓가를 받도록 하셨다. ③인간의 응답과 실천 ㄱ.사도직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그 잘잘못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ㄴ.사도도 먹고 마실 권리가 있으며,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ㄷ.일한 만큼 그 댓가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뿌린 만큼 거두게 되어 있다. 내가 남을 인정해 준 만큼, 나도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현대어성경 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니란 말입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의 삶이 변화된 것도 내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결과가 아닙니까? 2 비록 다른 사람들은 나를 사도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내가 분명히 사도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나를 힐난하는 사람들에게 묻겠습니다. 4 도대체 내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말입니까? 다른 사도들처럼 여러분의 집에서 손님으로 대접받을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5 만일 내게 그리스도인 아내가 있다면 다른 제자들이나 주님의 형제나 게바처럼 아내를 데리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6 왜 여러분은 다른 사도들에게는 생활비를 주면서 바나바와 나만은 생계를 위해 계속 일을 하게 합니까? 7 자기가 비용을 써가면서 군대생활을 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한 농부가 그 곡식을 먹을 권리가 없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양이나 염소를 먹이는 목자가 그 젖을 먹을 권리가 없습니까? 8 나는 단순히 인간의 관점에서 권리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말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율법 중에서 ‘타작마당에서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이 단순히 소만 생각하고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10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일을 한 대가로 사람들에게서 보수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밭 갈고 타작하는 사람이 추수한 몫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11 우리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씨를 심었습니다. 그러니 그 보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요구한다고 해서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표준새번역 1 <사도의 권리>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은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3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4 우리에게 먹고 마실 권리가 없습니까? 5 우리에게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동생들이나 e) 게바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습니까? (e. 베드로) 6 나와 바나바에게만은 노동하지 않을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 7 자기 비용으로 군에 복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따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양떼를 치고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8 내가 인간의 관례만을 따라 이런 말을 하는 줄 아십니까? 율법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9 모세의 율법에 기록하기를 f) “타작 일을 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를 걱정하신 것입니까 ? (f. 신25:4) 10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까 ?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마땅히 희망을 가지고 밭을 갈고, 타작을 하는 사람은 한 몫을 차지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일을 합니다. 11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을 뿌렸으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 되겠습니까?
고린도후서강해/ 본문개관/ 바울의 자랑/ 고후12:1-7/ 2015-09-20
고린도후서강해/ 본문개관/ 바울의 자랑 고후12:1-7 1. 본문배경 바울은 고후 11-12장에서 자신이 겪은 개인적인 체험들을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이 부분은 지금까지 그가 쓴 다른 성경과는 다르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말하였던 바울 선생이 자신의 체험을 집중적으로 거론하게 된 이유는 고린도교회에 거짓 교사인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미혹하면서 바울 선생의 사도권을 부인하였고, 더 나아가 바울 선생을 거짓 사도로 몰아 붙이면서 고린도 성도들 위에 군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바로 잡고 해결하는 길은 부득불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길 뿐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환상과 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11절). 2. 본문관찰 1) 바울의 세 가지 경험 첫째, 1 - 6 :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세째 하늘을 경험케 하심. 둘째, 7 - 8 : 바울을 겸손케 하기 위하여 육체의 가시를 부여함. 세째, 9 - 10 : 육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심. 2) 바울의 세 가지 세심한 주의 첫째,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둘째, 바울은 세째 하늘에서 있었던 일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개인의 체험을 중시하지 않게 하기 위함. 세째,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14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3. 강해설교 아웃라인 제 목 : 바울의 자랑 본 문 : 고후 12:1-7 중심내용 : 천국시민은 자랑하지 않는다. 설교목적 : 천국시민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자세를 제시하기 위함. 서 론 1) 자랑하다가 떨어져 죽은 개구리 이야기 하늘을 날아보고 싶은 개구리가 있었다. 마침 하늘을 나는 황새에게 개구리는 막대기를 서로 입에 물고 날아주기를 부탁했다. 자연히 막대기에 매달린 개구리도 하늘을 날게 되었다. 그때 연못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개구리들이 보고 부러워 하며 물었다. “그거 누구 아이디어냐?” “응, 내 머리야!” 하는 순간 개구리는 입에 물었던 막대기를 놓쳐버렸고 결국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 자랑하다가 손해본 대표적인 케이스 2) 정치가들은 열심히 자기 선전을 한다. 그래야 표를 얻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교회의 제직원 투표 때도 비슷한 양상이 발생한다. 3)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부끄러운 것을 자랑했다. I. 자랑에 대한 바울의 자세 - 자랑은 무익한 것이다(1-5). A. 그는 누구보다도 자랑거리가 많은 자였다. 1. 그의 가문이 훌륭했다. 유대인이면서 겸하여 로마 시민권까지 소유했다. 2. 요즘 말로 KS 학문, 학벌의 배경이었다. 3. 신앙적 배경 또한 훌륭하다. 개종한 뒤 승천하신 예수를 유일하게 만났을 뿐만 아니라 3층천의 체험을 하였다.(1-4). 4. 이와 같이 자랑할만한 조건이 누구보다도 많이 구비된 자였지만 그는 자랑을 “무익한 것”이라고 규정지었다. B. 왜 사람들은 자랑하려 하는가? 1. 세상에 속한 사람일수록 자랑을 좋아한다. *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본능이 자랑을 유도한다. 남에게 없는 것, 남과 다른 것, 좀 특별난 것을 자신의 장점으로 내세우려 한다. * 조상, 고향, 학벌, 친척, 선배, 동창, 교회, 목회자, 교인, 학위, 승용차, 숫자 등등 그 경우를 모두 예로 들기에는 끝이 없다. 2.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앙체험을 과대평가 내지는 과대선전하려 드는 바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만일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 다면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마치 이러한 체험을 자신만의 전매 특허품 쯤으로 여기려 한다. 바울을 본받자. 바울은 자신에게 체험을 허락한 존재가 있음을 깨달았고 오직 그에게만 영광을 돌렸다. 다시 말해 3층천을 체험한 대상은 중생한 바울이지 자연인 바울은 아닌 것이다. 중생한 영혼이 주체가 되는 구원이다. 신령한 속사람 즉, 3층천을 체험한 것은 하나님께 사로잡혀진 바울이다. 우리가 신령한 체험을 하는 때는 온전히 하나님께 속해 있을 때이다. 그러므로 자랑을 하려거든 나같은 죄인에게 영광을 보여주신 하나님을 자랑해야 한다. 3. 자랑은 우월감에서 출발한다. 우월감은 교만이요, 교만은 사단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랑을 물리쳐야 한다. 4. 성경은 자랑을 금한다. 약 4:16에 보면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하였다. C. 나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가? 너의 자랑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와 같이 단호하게 자랑의 무익함을 전제한 후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랑을 소개하고 있다. II. 바울의 자랑 - “나는 약하다”(5-7). A. 바울에게는 가시가 있었다. 1. 정신적인 가시가 있었다. * 거짓 선생들의 끊임없는 도전은 바울을 늘 긴장시켰다. * 자신이 전도한 성도들로부터 배신당하는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다. 이것은 외부의 도전보다도 더 괴로운 고통이었다. 2. 육체적인 가시도 있었다. 그의 건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쓰임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B. 하나님의 원리는 인간의 원리와 다르다. 1. 인간은 남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는 악한 습성, 본능이 있다. * 만일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쓸 경우,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2. 그래서 하나님은 다소 약점이 있다 할지라도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약점이 오히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조건이 될 수 있었다. C. 나의 약점은 무엇인가? 1.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 때문에 괴로와 한다. 그러나 세상에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2. 나의 약점 때문에 바울처럼 신비한 체험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3. 약점이 있는 자는 겸손하다.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약함은 부끄러움이 아니요 적극적으로 자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달았기에 이처럼 나는 나의 약점을 자랑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4. 나는 부족하다고, 나는 약하다고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여! 그대들은 복이 있도다. 천국이 당신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5. 하나님 나라에서는 약한 것이 흉이 되지 않는다. 주님은 온갖 약한 것과 질병을 치료해 주셨다. 약한 부분이 있던 자는 주님으로부터 치료함의 은총을 선물로 받았지만 스스로 강한 자는 은총을 받지 못한다. 결론 잠 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다. 성도는 마땅히 헌탄한 자랑을 버려야 한다. 허탄한 자랑은 자신의 운명을 망친다. 모든 인간은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현대의 정주영씨도 노동자들의 파업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입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한다. 겸손은 오직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긍극적으로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본문 분석: 고후 12:1-7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 약 4:16 “자랑은 허탄한 것.”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환상과 계시의 주인은 하나님. 그것은 절대로 체험자의 것이 아니다. 체험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이루어지는 수동적 행위이다. 체험은 인간의 전유물일 수 없다.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 체험의 전제 요소. 한 사람을 아노니 : 그는 중생한 바울이었다. 14년 전에 : 분명히 바울의 체험이었음에도 겉사람의 체험이 아닌 속사람의 체험이었기에 하나 그가 : 하나님께 속한 자.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 하나님의 세계.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 완전히 자아가 단절된 헌신의 단계. 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 부패한 나는 그 일을 알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신령한 세계는 신령한 눈으로만 볼 수 있다.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 부패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인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 : 은총에 사로잡힘 당한 자. 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 육신은 신령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 영적인 일은 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 영의 세계. 말씀의 세계.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 생명의 말.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영생의 언어.생명의 열매가 제거된 세상에서는 개념이 불가능한 언어. 5. 내가 : 세상에 속한 중생한 인간.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 철저히 자기비하의 중생에 참여한 사람. 하나님께 은총 받은 사람. 나를 위하여는 :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 죄의 오염 속에 살아가는 나.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 약함은 자신을 겸손케 만든다. 약함은 교만의 기를 꺾어 준다.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 그것은 분명한 바울의 체험이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 틀림없는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내가 참말을 함이라 : 분명한 중심. 하나님은 그의 증인.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어떻게 하는 것이 누구에게 더 이득이 되는가?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 깨끗이 닦인 렌즈라야 더 멀리 볼 수 있다. 거울은 깨끗할수록 정확에 가까운 모습을 비춰준다. 육체의 질병은 늘 긴장하게 된다. 악역 배우. 유비무환. 마음이 청결한 자라야 천국을 보고, 심령이 가난한 자라야 천국을 소유한다. 성도가 이 땅에서 겪는 모든 고난이야말로 참된 축복이다.
고침받은 베드로의 장모/ 마8:14-17/ 2003-06-25
고침받은 베드로의 장모 마8:14-17 지난 8일, 낮 12시. 서울 강남전철역 입구에서 30여명정도되는 사람들이 모여 가두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몇 명되지 않는 이들의 가두시위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가두시위를 벌인 목적이 '생명복제 찬성을 위한 가두시위'였기 때문입니다. 세계 첫 인간복제 회사인 '클로나이드'사가 국내에 상륙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인간복제를 상품화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복제희망자를 모집하고자 이렇게 가두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그날 석간신문에 '생명 복제 프로젝트에 참여할 한국 과학자 및 연구소를 찾는다'는 광고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5만달러만 내면 의뢰인이 불치의 병이나 사고로 죽을 경우 보관세포를 꺼내어 새 인간으로 복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인간복제기술이 어디에까지 이르렀는지 정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정말 충격적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복제하겠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사람의 생명을 5만달러에 상품화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겠습니까? 지금 이 현실을 보시면서 우리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한 생명을,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실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처음 등장했던 인물은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는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입니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사람들에게 나타나기만 하면 돌을 던져서 쫓아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문둥병자를 소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인격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믿음도 귀하게 여기셔서 그를 고쳐주었습니다. 두 번째 등장을 했던 백부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백부장이라는 높은 신분에 속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백부장이 자기에게 나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본일이 없다'고 칭찬하시면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세 번째 등장하는 인물은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것은 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고려해 볼 때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여자는 언제나 무시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이 숫자에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여인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일곱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와 나사로의 누이들이었던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고, 세상적으로 버림을 받은 수가성의 여인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보호해 주신 일도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남자나 여자나, 주인이나 종이나,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들 중에 특별히 누군가를 구별해서 만나시거나 치료하신 적은 없습니다. 모두가 동등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에 귀하게 여기시고 필요에 따라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귀신들린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누가 좋아합니까? 누가 그와 함께 있으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현대의 우리들처럼 사람을 상품화 한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언제나 소외당하던 문둥병자, 자기 민족이 그토록 싫어하는 이방인,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는 여인들, 귀신들려 말썽만 피우는 사람들, 오늘날 인간복제를 운운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상품의 가치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주님은 이들을 모두 품으시고, 그들의 병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육체의 질병이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질병이든지 우리의 연약함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서 마태는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17절에 말하기를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했습니다. 말씀 그대로 사람들이 참 강한 것 같지만 실상은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지식이 많거나 돈이 많거나 환경이 부유하다고 해서 강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런 것을 가지고 강한 척 할 뿐입니다. 우리중 어느누구도 진정으로 강한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우리를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질병'입니다. '죽음'입니다. 설령 인간복제 기술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실용화 단계에 이르게 된다 할지라도 질병과 죽음에 대한 근본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질병과 죽음의 원인은 죄로부터 출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인간이 노력을 해서 기술을 개발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원인을 치료하지 않는 질병은 온전한 치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떻게 치료가 가능합니까? 마태는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1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사야서 53:4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이사야서는 이 말과 조금 달리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다'고 말했고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말씀은 서로 다른 말씀이 아닙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있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 치료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상품처럼 여기셨다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실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들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연약함이 치유되기를 진실로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여자이든지 아니면 귀신들린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을 받는 사건에 대해서입니다. 17-18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시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종합해보면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피곤하셔서 잠시 쉬실양으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온종일 돌아 다니시다 보면 육신이 피곤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피곤하셔서 쉬실양으로 베드로의 집에 들아가게 되었는데 베드로의 집에는 또 다른 문제가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몹씨 지쳐 있는 상태이지만 주님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일에 주저함이 있지 않으셨습니다. 열병으로 앓아 누워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보시고 지체하지 않고 그 즉시 그의 손을 만져 고쳐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자신이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지만 지친 자신보다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의 상태를 더 염려하셨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런 사실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121:3-7) 책을 읽다가 아주 감동어린 내용을 보았습니다. 어느 대학교 교수님이 가족들을 태우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피곤하여 그만 깜박 졸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커다란 덤프트럭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습니다. 졸다가 그만 중앙선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그순간 '죽었구나'하면서 어찌할바를 몰라하는데 달려오던 트럭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논으로 곤두박질을 하고 뒤집혔습니다. 망연자실하여 서 있는 그 교수님에게 전복된 트럭에서 빠져 나온 젊은 운전사는 "가족들이 타고 계신 것 같아서 핸들을 꺾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실족당하거나, 우리가 상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이 피곤하신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 가운데 있는 상처와 질병을 더욱 염려하시며 우리를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면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나음을 받은 베드로의 장모는 어떠했습니까? 15절에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고 했습니다. 병이 낫자 그 즉시 주님을 섬겼다고 합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병을 낫게 한 주님의 은혜도 귀한 것이지만 그 은혜에 감격해서 주님을 섬겼다는 것도 참 귀한 일입니다. 왜 그 일이 귀한 일입니까? 우리는 조석(朝夕)으로 마음이 잘 변하기 때문입니다. 병들고 괴로울 때, 그 병이 낫기만 하면 뭐든지 다 할 것같이 주님께 매달리고 떼를 쓰다가 막상 병이 나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태도를 바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앞에 우리의 마음이 한결같아지는 것입니다. 카멜레온과 같이 주변환경에 따라서 내 생각과 태도를 수시로 바꾸어서는 안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들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의 마음을 바꾸기도 하고 우리의 생각과 태도도 바꿉니다. 힘들때는 하나님께 구하고 간구하다가 조금 편해지면 하나님앞에서 자신이 결심했던 부분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아니 결심하거나 약속했던 것을 아예 기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볼 때 베드로의 장모가 병이 나은직후 예수님을 수종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두 번째는 귀신들린자가 고침을 받는 사건입니다. 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귀신들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당시에 의외로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귀신들린자를 많이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시각은 '저문시각'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물다'함은 해가 지고 난후 캄캄해진 밤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지난 후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유대나라의 시간개념은 해질무렵부터 다음날 해질 무렵까지가 하루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은 토요일 해가 진후 안식일이 끝났다고 생각한때, 바로 그때 사람들이 귀신들린자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때를 택한 것입니까? 안식일에는 그 어떤 노동도 해서는 안된다는 율법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의 엄격한 율법 때문에 안식일이 지나야만 병자들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율법에 근거한 행동이지만 우리는 이들이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을 편히 쉬는 공휴일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주일에 대한 우리 주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구별하여 드린다는 것인데 우리들은 이날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지 일주일중에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하루로 보낼때가 많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속에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자화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볼 때 귀신들린 사람의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 1절이하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첫째가 부끄러움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더럽다'는 말은 단순히 위생상태나 청결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모른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옷을 입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귀신들린 사람은 옷을 벗고 다녀도 조금도 부끄러운줄 모릅니다. 두 번째는 끊임없이 방황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삶의 목표가 없습니다.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삽니다. 세 번째는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5장 5절에도 귀신들린 사람이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몸을 상하고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지 언급이 되어 있지 않음으로 정확하게 그 증세를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쨋든 이 귀신들린자를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고치시는데 있어서 조금전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방법과는 사뭇다릅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은 그녀의 손을 만지심으로 고치셨는데 반해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셨다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은 말씀으로 쫓아내십니까? 이것은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들린자 혹은 악한영에 사로잡힌 자를 치료하는 방법은 한가지뿐입니다. 말씀으로 쫓아내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현대에서 말하는 정신질환은 대부분 그 원인이 '귀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악한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알콜중독자의 경우 처음 병의 원인은 술을 자주 마시는 버릇 때문에 시작이 됩니다. 악한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술을 과다하게 마시다가 알콜 중독자가 되면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사람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것은 악한 영의 짓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병은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병이 육신의 질병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질병이든 주님은 고치실 수 있습니다. 어떤경우에는 우리를 친히 만져 주심으로 고치시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말씀으로 치유하시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우리는 여러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이 고침을 받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서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자는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병에 걸렸든지 간에 예수님을 만난 이들이 다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지극히 평범한 사실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다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병에 관한 문제이든 아니면 삶에 관한 문제이든 예수를 만나면 궁극적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십니까? 주님은 우리를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온다면 주님은 우리의 육신의 문제, 정신적인 문제,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반드시 제시하실 것입니다.
고침을 받은 맹인 바디매오/ 믿음, 순종/ 막10:46-52/ 조용기 목사/ 2016-04-10
고침을 받은 맹인 바디매오/ 믿음, 순종 막10:46-52 <서론> ‘고침을 받은 맹인 바디매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루살렘 근처 여리고에 바디매오라고 하는 장님이 살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구걸해먹고 사는 것이 참 괴로웠습니다. 어느 날 바디매오가 평상시와 달리 굉장히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면서 여리고성을 지나가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인가 물어보니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말을 듣고 뛰고 구르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소리 질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으나 아랑곳 않고 더욱 크게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로 그때 예수께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돌아보시면서 “그 사람을 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 앞에 왔으니깐 예수님이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니 바디매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어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본론> 1. 소망을 가져라 바디매오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아버지의 덕에 여리고 성 출입구에 동냥할 수 있는 자리를 얻었습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하기 때문에 동냥을 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그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반기는 사람 없고, 겨우 조금 몇 푼, 돈을 빌어서 먹고, 하루가 지나가고, 먹고, 자고, 깨고 그것밖에 희망이 없습니다.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삶의 아무 목적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희망이 없는 여리고 성 입구에 앉아서 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동냥을 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합니다. “예수란 분이 태어났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인의 죄를 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마다 다 고쳐주신다. 예수님은 메시아인데, 죄를 사하시고 병을 고치는 메시아다.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아니하신다.” 그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깐 자기 마음속에도 소망이 생겼습니다. ‘아 나도 눈을 뜨게 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직장을 얻어 살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느냐’ 소망이 생겼습니다. 소망의 분위기가 꽉 찼습니다. 소망이란 것은 여러분, 우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소망인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깐, 살인, 방탕, 사기 치는 것 이런 이야기는 별로 없고, 긍정적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서 치료해주는 이야기만 꽉 들어찼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가 소망 찬 이야기를 많이 하면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정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사업장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친구들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분위기가 긍정적이어야 됩니다. 분위기가 부정적이 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교회 와서 찬양을 부르고, 춤을 추고, 하나님께 고함쳐서 기도하고, 교회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 분위기 속에 마음 문이 열리고,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마는 귀가 남보다 밝았습니다. 구걸을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많은 소문을 들어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들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가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또 어떤 날에는 침상에 실려 온 중풍 병자가 벌떡 일어나 그 침상을 들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놀라운 소문은 계속 들려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다, 귀신 들린 자가 나았다, 나병 환자가 나았다... 그는 어느 날 자기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 눈을 떴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예수를 만나서 꼭 눈을 뜨겠다.’ 그렇게 꿈을 꾸었습니다. 소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은 막연하지만은 꿈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나도 예수를 만나서 꿈을 이루겠다.’ 병자들이 나았다는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바디매오의 꿈은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꿈을 꾸고 있을 때, 주님이 찾아와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2. 구체적인 꿈을 가져라 우리가 소망만 가지고 구체적인 꿈을 꾸지 않으면 그릇이 없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소망은 ‘목이 말라 물을 마셔야겠다.’는 소망이 있으면, 꿈은 그릇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릇이 있어야 물을 담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많은 목사들 교회 성장회 가면 ‘큰 교회를 세워서 목회를 하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나는 어떻게 해서 큰 교회를 세우겠다.’는 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이 소망만 가지고 있으면 세월이 지나가지만 하나님이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목회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었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해서 300명 꿈을 안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 그릇에 하나님이 보내신 영혼이 차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500명, 그 다음에 1,000명, 10,000명, 50,000명, 100,000명, 이렇게 그릇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입은 내가 열고, 채우는 것은 주님이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꿈을 분명히 하는 게 참 중요합니다. 바디매오는 소망을 넘치게 얻어서 소망의 도움으로 마음속에 꿈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도 봐야 되겠다! 나도 눈이 열려 봐야 되겠다.’ 여러분께서 교회 와서 목사님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음으로 소망이 없는 사람은 소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하는 그게 소망이니깐 ‘하나님, 할 수 있습니다. 일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환상과 꿈이 들어오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그 그릇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함을 치니깐 얼마나 고함을 쳤는지 옆에 사람들 고막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밀치고 “야 이놈아 앉아라. 너 같은 장님을 누가 돌봐주겠냐.” 그래도 아랑곳 않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고함을 쳤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뭐라고 하든지 간에 자기 꿈이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 중에 하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지금 굉장히 교회가 뜨거워진 것은 “주여, 주여, 주여” 세 번 부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 나와도 다른 사람이 “주여”하니깐 따라서 기도해, “주여, 주여, 주여”해서 뜨거운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 자기 남편이 브닌나라는 첩에게서 자식을 낳았는데, 자기는 자식을 못 낳아서 하나님 성전에 와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엘리 제사장이 앉아서 보니깐 와서 고함쳐서 기도하는 한나가 점점 고함소리는 없어지고 입만 달싹 거립니다. ‘이 여자가 술을 많이 먹었구나.’ 그래서 “술을 그쳐라. 술 취해서 하나님의 전에 들어오지 마라!” 그러니깐 한나가 “내가 술을 먹고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너무 간절해가지고서 혀가 묶여서 말이 안 나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제사장이 “네 소원대로 이루어지라”고. 그래서 그가 낳은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해서 기도를 할 때, 자기의 속에 있는 창자가 밖으로 나오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인 것입니다. 제가 오늘 주일날이 아닌 부흥회하는 것 같은 기분이 생겨서 정신이 왔다 갔다 합니다. 왜냐하면 대만에 집회를 하는데 하나님의 기적이 안 나타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젊을 때는 활기차고 힘 있게 부흥회를 이끌어 나갔는데,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기억도 왔다 갔다 하고, 기운도 모자라고. 그래서 ‘하나님 죽든지 살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모르겠으니 좌우간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부르짖고 했는데, 조금만 더 있었으면 더 큰 기적을 볼 수 있을 믿음이 임했어요. 그런데 그 기적이 오늘 서울로 가져와야 되겠는데, 오늘 제가 더듬거리더라도 여러분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3. 믿음으로 나아가라 우리가 믿음을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습니다.”하면 그 믿음을 하나님이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가 자기 믿음을 예수님께 보여준 것은, 주님이 오라하니깐 겉옷을 벗어서 던져버리고 뛰어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바디매오야! 너 겉옷을, 겉옷을!”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벗어 던졌습니다. 그 겉옷은 왜 중요하냐면, 길목이 좋은 출입구에서 구걸을 할 수 있는 허락증서인 것입니다. 정부에서 그 옷을 특정인에게 주어서 좋은 자리에서 구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 옷이 직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가면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 산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 던져버렸어요. 그 겉옷이야 말로 그에게 재산목록에 제 1호고, 비오면 우비도 되고, 추우면 외투도 되고, 잠잘 땐 이불도 되고, 그 하나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놓을 수 없는 것인데, 예수님께 나갈 때, 예수님께 나가면 자기 인생이 달라져서 다시 여리고의 출입구에 앉아서 구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저 구걸 거렁뱅이의 허가서인 저 옷도 입지 않을 것이다. 뛰어오니깐 모든 사람이 다 놀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믿음을 보고 “무엇 해주길 원하느냐”, “보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볼지어다.” 눈이 열리고 보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알아보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내가 너를 고쳐줬다”는 말 안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편안히 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할 때 그땐 비를 본 적이 없습니다. 비가 안 내린 시대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세상에 홍수를 주겠다.”고 하니깐 곧장 가족들이 홍수를 면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니까는 정말 하나님 말씀만 믿고 홍수를 본 적도 없는데 그 방주를 만들어서 홍수가 왔을 때는 그 방주에 피신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10장38절)’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받아서 실천을 해야지, 어렵다고 해서 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희망 속에서 꿈을 갖고 일어나서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면 주님은 그 믿음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4.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래서 그 믿음을 보여줘야 돼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아 너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드리라”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이 약속해서 준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두말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3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가서 장작을 펼쳐놓고, 그를 묶어 장작불 위에 얹어 칼로써 목을 따려고 하는데, 왜 그랬냐면 하나님이 기도 응답을 주실 때 ‘네 자식은 이삭이 네 자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으므로 일단 하나님의 믿음으로 받았으므로 죽여도 또 살려놓을 거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준 아들을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이 또다시 잿더미 속에서 일으킬 것을 믿었기 때문에 서슴지 아니하고 제물로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손대지 마라. 네가 이와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즉 네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줄 내가 알겠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큰 축복을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열두 해를 혈루병 앓은 여인이 혈루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도 그가 군중 속를 파헤치고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는 거에요. 행함이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고 한 것입니다. 또 그들이 두로와 시돈지역에 갔을 때 한 여자가 고함고함 치면서 따라왔습니다. “왜 따라 오냐”니깐 “우리 딸이 무섭게 귀신들렸으니 좀 고쳐 달라”고. 그러니 예수님께서 “나는 지금은 유대인을 위한 때이기 때문에 이방 개에게는 고쳐주지 못한다.”고, 그러니깐 “주님이시여. 개들도 애들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굉장한 모욕을 예수님이 주었었습니다. ‘너 이방인들은 개인데, 개들에게 내가 무엇을 주느냐.’ 믿음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니깐 그 여자는 “맞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애들 밥상 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니깐 나에게 부스러기만 주십시오.” 주님이 “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이 말을 했으므로 네 집에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쩐지 믿음을 보기를 원합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라 하며 그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11장23절)’ 믿음은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꿈을 주시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면 그 기도를 따라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이 보이는 믿음이 되면 주님이 꼭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11장24절)’ 맹인 바디매오는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할 때,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께서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고 고쳐주었어요. 한번은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는데 맹인들이 집에 따라 들어왔습니다. “내가 능히 너희를 고쳐줄 줄을 믿느냐?”, “주여 그러하오이다.” 그러니깐 주님이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나아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꿈을 가지고 “믿습니다!”를 하면 주님이 여러분에게 응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네 사업이 될 것이다. 네 병이 나을 것이다. 너의 마음에 기쁨을 얻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을 굉장히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마가복음10장50절)’ “보라”면 눈이 생기고, “서라”면 다리가 생겨나고, 죽은 자도 “일어나라”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좌우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소망을 가지고 구체적인 꿈을 꾸고 기도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의 역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는 독일 사람인데, 영국으로 건너가서 빈 손으로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는데, 이천 명이 넘는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교육까지 다 시켰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땅에는 단 한 가지 빈곤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기도의 빈곤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이상 하나님이 도와주시므로 빈곤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믿음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산을 옮긴다.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능치 못할 산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장애물이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으면 어떤 장애도 다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움직이는 동사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자기의 전 재산이었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께 뛰어 갔습니다. 그는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기독교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는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팡이를 들어야 바닷길이 열린다. 여리고 성을 돌아야 성이 무너진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야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신다.”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일 때 주님께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물 파기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우물을 파면 꼭 물이 나와요. 다른 사람이 우물을 파서 백 퍼센트 물이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은 여러 곳을 파야 우물물을 발견할 수 있는데, 당신은 팠다하면 물이 나오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굉장한 대답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다른 것은 나는 물이 땅 속에서 꼭 나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물이 나올 때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물이 나온다고 나는 믿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이더라도 행동으로 파고 들어가고, 파고 들어가면 물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육십에 스키 타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나를 따라 같이 여행하던 사람들은 우리 장로님, 내 제자들이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안 부러졌느냐하면, 저는 믿음으로 스키를 탔기 때문에 안 부러졌습니다. 무슨 믿음이냐 하면 ‘주님이 날 지켜 주십시오.’ 그러고 난 다음 저는 꼭대기에서 출발을 하면은 다른 말 안 하고 “주님,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주님, 살려주십시오.” 주님이 같이 계시니깐 안 넘어지고 다리가 안 부러져요. 이 세상에 무엇이든지 주님과 같이 하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의 기적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의 그릇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기적의 그릇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기적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주님이 호통을 친 것은 꿈과 믿음은 그릇입니다. 그릇 없이 하나님께 아무리 구해도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력을.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 생애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희망이 있지요? 말씀이 있으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준 희망의 보따리인 것입니다. 말씀을 읽어서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을 다 제껴 버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여러분 분명한 꿈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꿈이 뭐냐”, “하나님, 대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너의 꿈은 뭐냐”, “나는 시집가는 것입니다.”, “네 꿈은 뭐냐”, “나는 장가드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저에게 ‘시집가게 해 달라, 장가가게 해 달라’는 편지가 많이 옵니다. 그 꿈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 믿음으로 하나님 기다리고 있으면, 여러분이 그릇이 있으면 반드시 그릇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릇이 없이 부르짖으면 10년을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속에 분명한 꿈이 있고, 그것을 믿고서 흔들리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러분에게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곤고한 자, 베드로/ 롬7:15-25/ 2001-12-06
곤고한 자, 베드로 롬7:15-25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고백을 실현하고 있는 초라하고 비참한 베드로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바로 며칠 전에 주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 호언장담하였습니다.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만은 버리지 않겠나이다! 어디까지든지 가겠습니다! 죽는 자리까지도 주를 따르겠나이다! 그가 지금 비록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지만, 그가 전에 한 말을 모두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다른 제자들은 다 두려워했지만 베드로만은 칼을 뽑아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정들을 향하여 칼을 휘둘렀던 사람입니다.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 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막14:46-47, cf. 요18:10)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베드로는 비록 멀찍이 떨어져서나마 예수님의 뒤를 좇아갔습니다. 그 모습이 초라하긴했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말대로 예수님을 좇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합니다. 베드로는 마음속에 생각과 다른 말과 행동을 해 버린 것입니다. 한 계집종이 와서 `당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까?\\\'라고 했을 때에 그는 마음으로는 \\\"그렇다. 내가 바로 예수의 제자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네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막14:68)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바울은 \\\"나는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 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롬7:24) 했는데, 지금 베드로에게 꼭 맞는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힘입기 전에는 사람이 아무리 선한 생각을 하고 덕을 세우려고 애를 쓰고 열심을 낼지라도 악에게 매여있고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이처럼 생각과는 달리 죄를 쉽게 짓습니다. 자기 열심과 자기 결단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죄를 짓고 안 짓고는 심령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싸움입니다. 주를 부인함으로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죄를 짓게 되며, 그 죄로 인해 두려워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이 사실을 실감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시편53:5) 시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없다\\\"(시편53:1)는 자들의 내적 감정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들이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늘 두려워하며 지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 . .\\\" 이것은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소외, 외로움, 질병, 죽음은 물론, 실제적이든 가상적이든 수많은 다른 가능성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의하는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주로 육체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유\\\"를 얻을지는 몰라도 대신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삶을 살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부인한 것은 \\\"하나님이 없다\\\" 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 당시 분위기로 볼 때, 예수님을 시인하게 되면 육신의 자유를 잃고 육체적 고난을 당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막14:63-65을 함께 읽겠습니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막14:63-65)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임을 선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베드로를 비난만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그런 자리라면 빨리 벗어나고픈 생각만 간절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는 네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막14:68)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베드로는 이처럼 \\\"하나님이 없다\\\" 함으로 그가 생각한 자유를 얻긴 얻었습니다. 그 대제사장의 뜰에서 벗어났으니 말입니다. 여종을 비롯해 사람들이 보내는 의심의 눈길에서 벗어 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몸의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곧 베드로는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으로 \\\"영혼의 부자유\\\"를 느낍니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 밖에서 두려워합니다. 그 곳은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입니다. 다만 닭울음소리만 들리는 육신적으로는 안전한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 밖, 두려움이 없어야 할 바로 그 곳에서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마26:75) 그 곳에서 베드로는 육신의 자유를 얻은 기쁨이 아니라, 영혼의 부자유로 말미암아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바울의 고백을 하였을 것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을 힘입어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이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복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지키십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크게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조차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은 이들에게 주십니다. 그리하여 삶의 모든 상황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이 질병 없이 장수는 비율이 훨씬 높다고 합니다. 원광대 복지 보건학부 김종인 교수팀은 1953년부터 작년까지 일가니 부음란을 통해 11개 직업에 대한 평균수명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종교인이 79.2세로 가장 수명이 길었고 정치인과 연예인, 교수가 73세 가량으로 그 뒤를 이었다. 가장 수명이 짧은 직업은 언론직으로 64.6세에 불과했다. 사망의 원인이 되는 질환을 조사한 결과 언론인은 암, 작가는 심장질환, 연예인과 예술가는 간질환, 위장병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질환없이 노환으로 죽는 경우도 종교인이 42%에 반해 언론인은 15%에 불과 해 건강 면에서 언론인은 가장 불리한 직업으로 조사됐다. 언론인의 수명이 짧고 질병이 많은 것은 마감시간에 쫒기고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등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라는 것. 이에 반해 종교인이 오래 사는 이유는 \\\"돈벌이에 대한 압박이나 가족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 등 스트레스가 적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주간중남부 2001년 3월 26일) \\\"하나님이 없다\\\" 하던 베드로가 \\\"하나님이 있다\\\"고 외치는 사건이 사도행전 4장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행4:20에 보면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다가 붙잡힌 베드로가 유대인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우리는 보고 들을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때문인가? 그 때는 성령을 힘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결심만 가지고는 실패했지만, 성령체험 후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자 그는 변한 것입니다. 그러자 객관적으로 볼 때 \\\"크게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조차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 못합니다. 죽음에서 자유 한 사람을 사람이 어찌 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거주지를 천국으로 옮겨 논 사람들이기에 세상 사람들이 목을 메는 세상의 권세, 명예, 물질, 인기, 영광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탈매쥐(Thomas DeWitt Talmage)라는 분은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8:51)는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분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 목사님은 교인들이 죽은 후에도 그들의 이름을 결코 교인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 옆에 있는 빈칸에 `거주지 이전\\\'(changed residence)이라고 간단히 적어 놓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은퇴하시기 직전의 교인수는 모두 3천명이었는데 그중 500명만이 당시 살아있는 교인들이었고, 나머지 2,500명은 `거주지를 이전\\\'한 교인들이었다고 합니다. (Mark Link, S.J., Illustrated Daily Homilies, 1987 p.28) 로마의 네로 황제시대에 \\\'황제의 투사들\\\'로 잘 알려진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목숨을 건 경기를 통해 선발된 용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황제의 투사들은 선발된 후 황제의 보좌앞에서 ?우리들은 황제를 위해 싸울 것이며 황제로부터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라고 선서를 한 후 황제의 경호를 위해 목숨 받쳐 충성하는 군인들입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어느 날 그들 중에 크리스챤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백부장 베스파시안에게 그들을 색출하여 죽여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베스파시안은 추운 겨울날 얼어붙은 호숫가에 캠프를 치고 황제의 메시지를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투사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중 크리스챤이 있으면 나오라.? 나오면 사형되는 자리인지라 베스파시안은 크리스챤이 있더라도 그들을 금방 색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투사들 가운데 40명이나 일제히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베스파시안은 두 번 놀랐습니다. 그 숫자에 놀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놀랐습니다. 베스파시안은 부하들을 진정으로 염려하고 사랑하는 상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설득하여 예수를 부인하도록 권면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스파시안은 ?나는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동료들에 의해 피흘려 죽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제 맨몸으로 얼음을 깨고 물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들의 생사를 성체의 자비에 맡긴다?고 하면서 뒤돌아 섰습니다. 그러자 40명의 투사들은 일제히 옷을 벗고 얼음물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찬송을 하였다. ?40명의 투사들은 주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오 그리스도여 주를 위해 승리하게 하시고 주님으로부터 승리의 면류관을 얻게 하소서? 베스파시안은 밤새도록 모닥불을 피워놓고 지켜보면서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투사들의 노랫소리는 몸이 얼어가면서 점점 작아졌으마 아무도 나오지 않았았습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한 명이 견디지 못하여 불이 있는 곳으로 기어왔습니다. 그러자 다른 투사들이 캄캄한 중에 비록 작지만 명확한 소리로 ?39명의 투사들은 주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승리하게 하시고 주님으로부터 승리의 면류관을 얻게 하소서? 하면서 노래를 계속해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베스파시안은 한 병사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나올 때 하늘로부터 환한 빛이 내려 연못에 있는 병사들을 비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베스파시안은 알 수 없는 힘이 사로잡혀 투구와 옷을 벗어 던지고 얼음물로 뛰어들어가면서 외쳤다. ?40명의 투사가 주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여 당신을 위해 승리하게 하소서 주님으로부터 승리의 면류관을 얻게 하소서? 이 노래는 비록 오늘 여기서 숨쉬고 있지만,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는 이 땅에서 그 나라로 옮겨 논 사람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내 의지로 내 결심만으로 할 수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의 뜰에 머물던 베드로는 이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 머물며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는 힘차게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노래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될 실 때 부를 수 있는 뭍 영혼의 심령을 흔드는 노래입니다.
골로새 교회를 위한 바울의 감사기도/ 골1:1-5
골로새 교회를 위한 바울의 감사기도 골1:1-5 골로새 교회는 은혜가 충만한 교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굳건한 교회로 알려지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 열심이 있는 교회로 사도는 칭찬을 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도 할 때 마다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위한 감사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1.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때문에 감사기도를드렸습니다 본문 (3 -4)절에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엔크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골로새 교인는 그 믿음이 1)그리스도에게만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2)순수한 믿음이었습니다. 괴변적이 아니고, 변질적인 것도 아니고 일편단심 순수히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3)사도들과 신앙 고백이 같고 사상이 일치된 믿음이었습니다. 2. 골로새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 때문에 감사기도를 올렸습니다. (4절) 골로새 교인들이 서로 사랑 한다는 것은 1)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까닭입니다. 무거운 죄 짐을 없이 함을 얻었고,(마11:28) 영생의 길을 가게 되었다.(요14:6) 2)성도끼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지체가 되었으니 서로 사 랑하게 되고,(롬12: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3)허물을 서로 덮어준다는 것입니다.(벧전4:18) 성도는 그리 스도께로부터 허물을 용서 받았으니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골3:13) 3. 하늘에 쌓아둔 소망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골1:5) 골 로새 교인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은 날 부터 하늘에 소망을 쌓 아 두면서 살았고, 복음음 기쁜 소식이요, 영생의 말씀이요, 소망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늘 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신자가 산 믿음으로 서로 사랑을 하며 하늘에 참 소망을 가 진 신앙들이 칭찬받을 믿음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바울의 마음/골2:1-5
공동체를 향한 바울의 마음/골2:1-5 2003-06-03 20:26:25 read : 22 부산 아시안게임이 한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월드컵에 이어서 스포츠를 통해 우리의 위상을 알릴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중심국가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엔 실업팀에 소속된 축구선수 두명이 덴마크의 프로팀에 입단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데 덴마크 프로팀에서 그들을 스카웃해 갔습니다. 사실 월드컵이전까지만 해도 대표선수들조차 쳐다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실업팀 선수들에게도 손을 뻗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실감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다시 한번 월드컵과 같은 영광을 재현하고자 선수들은 오늘도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수들이 일주일에 한번 받는 지옥훈련은 선수들을 거의 초죽음에 이르게 하는 강도 높은 훈련입니다. 이 훈련을 받고나면 거의 탈진상태에 이릅니다. 하지만 선수들은 그 험악한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훈련이 궁극적으로 목표를 향한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도 이와같은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균형잡힌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골로새교회 주변은 그들을 미혹케 하는 세력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체조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훈련도 훈련이지만 음식량도 조절해야 합니다. 레슬링선수나 유도선수들은 많은 양의 훈련과 더불어 식사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조선수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먹는 것까지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식사시간에 다른 선수들은 먹을 것을 마음대로 갖다놓고 먹지만 그들은 겨우 우유 한컵으로 한끼 식사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훈련뿐 아니라 먹는 것으로부터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선수들이 먹는 것을 보면 먹고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을 뿌리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골로새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굳게 서기 위해서는 그들 주변에 있는 미혹케 하는 세력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견고하게 설 수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그들이 지금 만나고 있는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통해 그들게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친하게 지내다가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저도 대학 다닐 때 참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친구와 떨어진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졸업 후 그 친구는 부산에 있는 직장에 취직을 했고, 저는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연락조차 되지 않습니다. 물론 거리가 멀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얼굴을 보지 않으니 자연 잊혀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생각하는 것은 사귀다가 헤어진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골래서 교회성도들은 한번도 본 일도 없고 만난 일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깊은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성도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같은 전도회니까 관심을 갖고, 같은 구역이니까 생각해주고, 같은 부서의 교사니까 배려해주고, 그런 정도에서 그쳐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설령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할지라도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된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표해야 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지난 수련회 이후 여명교회 학생들과 활발하게 홈페이지를 통해 의견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비록 거리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서로를 생각해주고, 서로를 격려해주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 강릉지역에서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전도사님이 개척을 해서 수개월이 되었지만 교회는 거의 답보상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으로 침체해 있고, 교회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짧은 기간동안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고 사영리로 전도활동을 했던 것은 얼마만큼의 결실이 있었느냐?를 떠나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지에 충분했습니다. 바울은 한번도 본 일이 없지만 골로새 교회의 사정을 듣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의 그런 마음이 그들에게 전달되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하고 있으니 나를 좀 알아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들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전달되어지기를 원했고 그들이 오히려 그들에게 큰 힘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백성들의 거룩한 모임이며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이 교회에 나와서 낙심했던 마음이 서로를 통해 위로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무기력했던 마음이 새로운 힘을 공급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여름행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캠파이어입니다. 장작에 불을 지펴서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며 신앙의 결단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각오를 세워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장작을 지필 때 나무하나만 덩그러니 두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불은 이내 꺼지고 맙니다. 캠파이어를 위해 사용하는 장작은 여러개를 서로 겹쳐서 세워둡니다. 그러면 잘 타오릅니다. 한자로 사람을 사람 인(人)으로 표기하지 않습니까? 비록 한자지만 참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홀로 설 수 없다는 뜻으로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와같이 불러 모으셨습니다. 혼자서는 너무도 쉽게 넘어진다는 사실을 아시기에 함께 설 형제 자매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함께 서야 하는 형제자매끼리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혼자 편하겠다고 속 빠지는 경우도 있고, 괜한 트집을 잡아서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이번 주부터 구역예배도 금요기도회도 목요전도대도 모두 모입니다. 구역예배 모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역식구들끼리 서로 세워주라는 의미에서 구역예배를 모입니다. 그곳에서 자기에게 있는 문제를 서로 나누고 함께 기도하면서 해결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구역예배를 드리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귀찮아하고 주일 예배만 드리면 되었지 또 무엇 때문에 모이느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만약 모든 것을 나 혼자서 해결해 나가려 한다면 교회가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난 한달동안 여름행사로 구역예배를 쉬지 않았습니까? 어떤 분은 한달동안 잘 쉬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쉬는게 쉬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한달 쉬어보니까 오히려 영적인 침체를 가져오기도 하고 구역식구들이 보고 싶어서 별로 좋지 않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잘 쉬었다'라고 말씀하는 것보다 '구역식구들이 보고 싶었다'라는 말씀이 얼마나 귀합니까? 혹시 방학이 끝났다고 서운하게 생각하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말씀을 듣고 보니 내년엔 방학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이번 휴가기간동안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사흘동안 비가 와서 계획했던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성도가 함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2절에서 이와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교회에 와서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마음에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연합해야 합니다. 성숙한 성도는 도움만 바라지 않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위안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위안을 주기 위해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발돋움해야 합니다.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지 사랑 안에서 연합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아무리 올바른 주장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교회 내에 있는 많은 요소들이 바뀌고 변해왔습니다. 예배의식에서부터 교회정치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 아니 영원토록 변할 수 없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말을 하든지 그 속에 사랑이 담겨져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아야겠습니다. 만약 교회에 왔는데 서로를 위로해주는 것도 없이 상처만 주고, 사랑으로 대함이 없이 미움만 있다면 이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형제를 향한 나의 한마디에 위로가 있는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자매를 향한 나의 한마디에 사랑이 담겨져 있는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혹 가시돋힌 말이거나, 언중유골의 말이라면 삼가야겠습니다. 오직 교회 안에서는 위로가 있고, 사랑으로 연합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을 나누는 어떤 일이 있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지식과 지혜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성도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데 좀 더 적극적이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미혹하는 세력들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골로새 교회 주변엔 이단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연약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미혹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성도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운동선수들의 기본은 체력입니다. 히딩크 감독이 중점을 두고 우리 대표선수들을 훈련시켰던 것도 체력훈련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그동안 잔디구장이 없어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유럽선수들에게 주눅이 들어있기 때문에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히딩크가 본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런 문제가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히딩크는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해야할 부분이 체력이었습니다. 90분동안 지치지 않고 뛸 수 있는 기본체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 후반에 대량실점을 하여 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 그의 분석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체력훈련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사실로 판명되어졌습니다. 우리선수들이 90분동안 지칠줄 모를 정도로 뛰니까 수비도 안정이 되고, 경기에서 쉽게 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뒤로하고 어떻게 우리의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위해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핑계는 항상 '바빠서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바쁘다고 화장실 그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바쁘게 가야 할 곳이 있어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이라할지라도 볼일(?)을 봐야 할 사람은 반드시 휴게실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대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의 지식을 획득하게 되면 그 속에서 보화를 캘 수 있는 방법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풍성한 지식을 소유하고도 인생이 어디에서 왔고 인생의 궁극적인 결과가 어떠한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엉뚱한 주장을 일삼게 됩니다. 가령 예를 들어 인생이 원숭이에게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 가면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원숭이 사냥으로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원숭이에게서 인류가 진화되었다면 조상을 잡아 먹는 사람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습니까? 못 잡아먹게 말리든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말씀 속에 담긴 보화라는 것은 그런 것에 국한되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여기에 다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을 종합하면 하나로 귀결되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모든 보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빌립보서 3장 7절이하에서 거듭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비록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하여도 그리스도를 얻으면 결국 모든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잃어버려도 세상의 것은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그리스도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주일을 지키지 않거나 소홀히 여기는 분들을 볼 때입니다. 사실 주일날 장사를 하고, 가게문을 열면 지금 당장은 약간의 소득이 생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면으로 봤을 때 그것이 내 인생에게 얼마나 큰 마이너스가 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결국 내 영적인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고 그 엉망이 되어버린 삶이 결국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지금 당장 소득이 약간 줄더라도 과감하게 신앙적인 결단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본인이 사는 길입니다. 외환위기때 구조조정으로인해 참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원래부터 기업은 그러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냥 이름만 자랑하는데 급급해서 몸통만 불려놓았다가 그런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구조조정에 많은 반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우리는 경제적인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덕이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 중간에 해고된 사람은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이런 것을 생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조정이라는 결단이 우리의 경제를 살렸다면 우리의 신앙에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구조조정이 필요합니까? 군더더기같은 비 신앙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신앙적인 삶을 살기 위해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대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발버둥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인생의 진정한 보화는 말씀안에 있고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선생들이 많은 말로서 그들을 미혹시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는 참된 보화가 없습니다. 잠깐동안은 맞는 말처럼 들려질는지 몰라도 결국은 그들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주장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보화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과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에도 공교한 말로 우리를 속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첫째는 이단들이 그렇겠지만 이단이 아니라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과 주장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요즘 텔레비전 홈쇼핑을 통해 물건 판매가 급증한다고 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홈쇼핑에 보면 여러 가지 물건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방송을 보면 그 물건을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쇼 호스트들이 말을 잘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건이 얼마나 좋으냐?입니다. 가끔은 그렇게 해서 물건을 구입했다가 방송에 나오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 반품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합니다. 이단들의 특징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정말 기존교회의 주장이나 교리가 다 틀린 것 같습니다. 얼마나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을 잘해서 상품을 얼마나 많이 파느냐? 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진실되냐? 하는 것입니다. 이단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분별해야 할 것은 주의 말씀이 얼마나 바르게 전해지고 있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대부분 말씀을 들을 때 몇 번 웃고 나면 그날 '말씀에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달변가처럼 말을 유창하게 잘하면 설교 잘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아멘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부흥사가 '오늘 제가 저녁을 보신탕을 먹었습니다'라고 하는데 앞에 앉은 분이 '아멘'합니다. '차가 너무 막혀서 갓길로 운전해서 집회시간 맞추어 왔다'고 하니까 또 '아멘'합니다. 그런 것은 '아멘'이 아니라 '노멘'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얼마나 바르게 증거되어지느냐?입니다. 얼마나 진실성이 있느냐?입니다. 지금 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이런 잘못된 것에 미혹이 되어 그들의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비록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한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에 대해 바울은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신앙적으로 공격받는 일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공동체는 어떠합니까? 우리 가운데 위로가 있습니까? 사랑으로 연합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붙드는 견고함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를 다시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담긴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