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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세대 자녀는 이렇게 키워야 합니다/ 엡6:4/ 소강석 목사/ 어린이주일설교/ 2009-05-05
N세대 자녀는 이렇게 키워야 합니다. 엡6:4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N 세대는 이렇게 키워야 합니다\\\" 제목으로 함께 자녀양육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잘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잘되기 위해서 얼마나 경쟁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겐 우리 자신보다 더 잘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나의 경쟁자이고 나보다 더 잘되는 것을 질투하는 시대에 나보다 더 잘되기를 원하는 대상이 있단 말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 자식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형제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는 나보다 자식이 더 잘되기를 원하고 더 휼륭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대한 마음이 있다고만 해서 자식들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부모의 마음을 자녀들이 몰라준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런 부모의 극성스런 마음과 기대에 자녀들은 오해를 하고 역반응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 반항+탈선을 함. 요즘 부모들의 근심 : 자녀들과 너무나 큰 세대차이를 느낌. 너무나 큰 생각, 가치관, 세계관, 문화의 차이를 느낌 ⇒ 커뮤니케이션이 안됨. 그래서 부모들은 너무나 걱정하고 있음. 부모는 정말 자녀를 사랑합니다. 자녀를 향한 기대와 교육의 열정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모는 못배운 한을 어떻게 공부했건 한을 자녀에게 푸는 심정으로 자녀교육에 혼신을 다합니다. ⇒ 못먹고 안입으며 학원+과외! 그러나 자녀는 그런 부모의 마음을 통 모릅니다. 그래서 공부는 안하고 자꾸 반항하고 역반응을 합니다. 그러니 갈수록 부모와 자녀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자녀는 더욱더 내적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부모와 자녀사이에 엄청난 세대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는 아날로그 세대입니다. 우리는 라디오와 흑백 TV속에서 살아왔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 세대는 일방적인 의사소통의 세대임. 그러나 자녀들은 이미 디지털 매체속에서 자란 세대입니다. 그들은 디지털 세대입니다. 그들은 어릴때부터 PC를 만지며 인터넷을 이용한 세대입니다. ⇒ 의사소통이 디지털 식입니다. 광케이블과 같음. 그러니 부모와 자녀간에는 엄청난 차이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부모가 자기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몰라준다고 아우성칩니다. 그러므로 무슨 문제가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 아예 부모와는 대화조차를 안할려고 합니다. 아예 의사소통이 안된다고해서 부모에겐 입조차 뻥긋 안합니다. 어느 기관에서 설문조사: 초등 4년이상의 1000명 청소년과 부모에게 설문 ①부모에게 : 자녀가 고민+어려운 일 있을 때 부모에게 와서 그걸 털어 놓겠는가? Yes 92% ② 자녀에게 : 정말 부모에게 털어 놓을 수 있겠니? Yes 4.6% 지금 부모들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녀들은 껍데기만 내 자식일뿐 속으로는 자꾸 남의 자식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아는 부모들은 속이타고 걱정을 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들은 N세대 자녀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나무라고 꾸중만 하지 말고 N세대 자녀들의 문화, 세계, 사고, 정서등의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여 대화하고 양육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1) 한국에서의 N세대 특성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1) 즉흥성과 이미지에 익숙함. 요즘 애들은 너무나 즉흥적입니다. ex) 사행시 유행 ⇒ 충동에 끌리는대로 즉흥적 행동을 많이 합니다. 그들은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만 좋아합니다. 딱딱하고 따분한 것은 영 질색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충동을 느끼면 즉흥적 행동을 발휘해 버립니다. ex)음란사이트+채팅 ⇒ 엄청난 충동을 저지름(이해할 수 없는 행동) 또 그들은 이미지에 익숙합니다. ⇒ 정치인, 법관, 의사... 이런 직업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부분이 가수, 연예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웬만한 애들은 거의 다 연예인을 희망합니다. 왜? 그들은 이미지에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에. (2) 인내심이 엄청나게 부족합니다. 요즘 인터넷 다운 로드에 걸리는 시간은 평균 22초가 걸립니다. 그런데 이 시간은 요즘 N세대 아이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입니다. 여러분! 22초가 얼마나 짧은 시간입니까? 부모세대는 담배 한모금 빨았다가 내쉬면 지나가는 시간임.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 시간을 못기다려서 \\\"아휴! 짜증나! 왜 이렇게 늦게 뜨는거야!\\\" 합니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 부모가 용돈만 늦게 줘도 짜증을 부립니다. \\\"약속시간을 조금만 늦게 지켜도 짜증을 냅니다. 부모가 잔소리+야단을 쳐도 참지를 못합니다. (3) 다양한 정체성과 정체성 해체의 위기. 요즘 아이들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의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하나가 아닌 다양한 정체성을 이룹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과 게임+체팅 ⇒ 수많은 사람에게 다양한 자기전시+소개 ⇒ 스스로 자기모습을 바꿈 ⇒ 다양한 복합정체성을 갖음. 그러나 현실로 나오면 나 홀로 존재합니다. ⇒ 엄청난 고독을 느낌. 그리고 현실에서는 하나의 정체성만 소유해야 하므로 적응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또 사이버 속으로 들어갑니다. 계속 그러면 엄청난 자기 갈등, 인격의 분열을 하면서 자기 정체성이 해체가 되는 위기를 겪음. 그래서 이상행동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할 때가 있음. 만일 그런 행동은 안해도 성격이 괴팍해지고 반항적임. 이런 아이에게 야단만 치면 안됨 ⇒ 가출+이상한 짓을 함. (4) 자기 이미지 연출이 강하지만 고독을 많이 느낌. 사이버 공간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기 연출에 강한 애정을 보입니다. 요즘 애들은 자기 내면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려고 하지 않고 자기 외면에서 정체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즉 내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외면에 관심을 둠 ⇒ 의복, 얼굴, 머리등에 관심을 많이 둠. 음식도 맛보다 분위기를 더 따짐. 그러나 이런 아이들일수록 더 고독해 합니다. 속으로는 더 외로워하고 수많은 비교의식과 열등의식이 많을 수 있습니다. 왜? 내면은 철저히 황무해 있고 황폐해 있기 때문에... 부모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5) 통제와 지시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잔소리, 훈계, 통제, 지시가 지겹게만 느껴집니다. 이들은 자유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직업도 프리랜서를 원합니다. 그리고 잔소리+훈계보다는 인정, 격려, 고무, 칭찬을 원합니다. (6) 절대가치가 없고 다양성을 받아들임. 그러므로 어떤 기준과 원칙보다는 상황에 맞게 현실의 다양성을 수용+자유껏 행동함. 보수적인 것을 배격, 언제나 새로운 것을 무엇이든지 수용함. (7) 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꿈이 없습니다. 야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고작 꿈꾸는 것이 연예인이요 벤쳐기업가요 컴퓨터 프로그래머입니다. 그 외엔 큰 꿈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꾸 갈수록 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은 비젼이 없음. 그저 편하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함. 이 정도만 알아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이런 세대속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 자녀들의 현실입니다. 2) 그러면 우리는 이런 자녀를 어떻게 잘 양육해야 할까요? (1) 먼저 이해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자랄 때 부모님과 세대차이를 크게 느겼는데 우리와 우리 자녀들간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는 이런 세대속에서 자라고 있는 자녀를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대화가 될 수 있고 교훈과 훈계를 자상하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아이고! 너는 뭣이 될려고 그렇게 공부를 안하느냐? 나는 어떻게 공부한줄 아느냐 새끼야! 넌 누구를 그렇게 닮아서 멋만 짝짝 부리느냐? 뭐가 될려고 그렇게 머리에 물이나 들이고 바지를 질질 끌리고 다니냐? 앞으로 PC방이나 해먹을려고 그렇게 컴퓨터 광처럼 사느냐? 어서 공부나 해 새끼야! 너 위해서 공부하지 나 위해서 공부하냐 새끼야!\\\" 이래봤자 자녀들은 반항감+역반응만 일으킵니다. 오히려 더 삐딱하게 생각합니다. ⇒ 탈선+가출함.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자녀를 이해+포용하면서 자연스런 대화와 함께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자녀들과 자연스런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녀들과 대화하기 위해선 먼저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ex) 예수 그리스도 - 대제사장 ⇒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옴. 부모도 마찬가지임. 어려울 때 자녀에게 부모가 제사장+천사임을 보여주어야 함. 그래야 자녀는 부모에게 나오고 부모는 자녀를 제사장 처럼, 천사처럼 어루만지고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음. 우리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제사장, 천사임. 자녀와 싸우는 사람, 자녀를 노엽게하고 고문이나 주는 의붓 부모님이 아니라 제사장+천사임. \\\"아들아! 난 네 그런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시절을 경험해 봤으니까 네 마음, 얼마나 고통스럽겠니? 아마 예수님도 네 고통을 더 잘 아실거야. 그러나 넌 지금 한창 성숙해가고 있는 과정속에 있다. 그런 유혹과 고비를 이겨야 네 인생은 성숙하게 된단다. 아빠가 너와 함께 한다. 아빠가 널 도와줄게. 그리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너를 도와 주실거야. 아들아! 힘내라. 앞으로 너의 찬란한 시대가 오게 될 것이다.\\\" ⇒ 그리고나서 간절히 기도해 줌. ※ 요즘 아이들의 고민 : 옛날엔 성적+입시문제로 고민. 그러나 지금은 인간관계+친구 문제로 더 고민을 함. ⇒ 너무나 고독해 함. 그러므로 이런 아이를 이해+따뜻한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함. (2) 주의 훈계와 교훈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섬기는 것이 지혜와 명철의 근본이라고 말씀함(잠9:10)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은 지혜와 명철의 주인공이 됨. 여러분은 오늘날 우리 자녀가 학교교육을 잘 받았다고 다가오는 미래를 잘 감당해 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다가오는 미래는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입니까? 미래는 가면 갈수록 미국 중심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뭘 좀 잘 외우고 수학문제 좀 잘 풀어서 시험성적이 좋다고 사회의 우등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ex)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 학교는 공장과 같다고. 학교는 세상에서의 생존기술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함. 그러므로 진짜 자녀를 성공시킬려면 생존기술을 가르치라고 함 ⇒ ①돈관리 방법 ②인간관계 방법 이책의 저자(로버트 기요사키) : 대단한 실용주의자임. 그러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실용주의 : 죤 두이의 실용주의 사상을 도입 ⇒ 학교에서 기도+성경공부 철폐 ⇒ 프로그매티즘적 교육을 실시 ⇒ 오늘날 미국이 부자가 되었음. 그러나 보세요. 오늘 미국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주의 교훈과 훈계를 가르쳐야 합니다. ①먼저 하나님을 알도록 하라. ②하나님을 경외, 섬기도록 하라. 그러면 지혜와 명철이 옴. ⇒ 미래시대를 감당+리드 할 수 있는 지혜, 능력이 생김. 학교 우수생⇒ 사회에 나가서 우울증+심한 마음의 질환을 앓음.⇒ 인간관계를 못함.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면 모든 지혜와 명철이 생김⇒ 사회에서 지도자+리더쉽을 발휘하는 능력있는 사람이 됨. ③말씀대로 살면 축복이 옴을 가르치라. ex)십일조 : 축복의 근원이 됨. 돈관리 흐름보다, 돈의 투자 법칙보다 십일조를 먼저 가르쳐 보세요. 그러면 축복의 주인공이 됨. ex)유대인 : 십일조하고 복받아라. ④ 자녀를 위해 축복기도함. 이 일을 누가 하느냐? 아버지가 해야 함. ex)유대인의 아버지 : 제사장 ⇒ 종교교육+축복기도! 유대인의 어머니 : 사랑의 천사 ⇒ 따뜻한 가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 전달 ⇒ 눈물의 기도 ⇒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었음.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함. (3) 아이들의 주체성과 천재성을 개발해 주어야 함. 요즘애들은 너무나 온실속에 자람. 부모는 현금지급기+자녀를 과잉 보호시켜며 키움. 그러나 진짜 유능한 자녀로 키우려면 자기 정체성+주체성을 키워주어야 함. ex)무조건 \\\"공부해, 이렇게 해\\\" ⇒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러면 그렇게 해봐. 그리고 현금지급기같은 부모에서 의미를 부여하며 돈을 주는 부모가 되어야 함. ex)돈주며 : 이것은 너에 대한 투자이다. 돈의 의미, 일정한 역할을 주며 줌. 십일조 교육 또 누구에게나 사람은 천재성이 잠재해 있음. ex)예술, 스포츠, 기술, 문학... 이걸 부모는 개발+발전 시켜주어야 함. 요즘 연,고대 나와도 직장 구하기가 힘듬. 전문성이 없으면 안됨. ex)유대인 : 전문성을 안길러 주면 자녀를 도둑놈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학교에서 모든과목을 잘하라고 하지 말고 빨리 자녀의 취미, 개성, 특기를 파악 ⇒ 소질을 잘 계발시켜 주어야 함. 이런 부모가 진짜 부모임. 오늘 본문 : 무조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음. (4) 자녀에게 꿈을 키워주어야 삶. 성경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음. 마찬가지로 꿈이 없는 우리 자녀는 미래가 없음.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의 가슴에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꿈을 먹고 자라게 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약속+축복기도를 해 주고 어머니는 한 없는 사랑, 격려, 고무를 통하여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5) 자녀를 위해 눈물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로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수많은 키를 물려준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녀는 언제 그것을 가지고 엿사먹어 버릴지 모름. 그러나 우리는 열면 닫을 수 없고 닫으면 열 수 없는 축복의 마스터 키를 자녀들에게 물려 주어야 합니다. 자손만대까지 복받을 수 있는 축복권의 키를 물려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임. ①기도의 씨 ②헌신+희생의 씨임. 그러므로 여러분도 자녀위해 씨를 뿌리라. 그러면 아무리 N세대 아니라 N2 세대가 판을 치는 미래사회라 할지라도 우리 자녀는 승리+성공+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 우리 자녀는 기업중의 기업입니다. 주안에서 잘 키우셔서 축복의 주인공으로 양육하시길 축원합니다. 소강석 목사(용인 새에덴교회)
Turn away mine eyes from beholding vanity; and quicken thou me in thy way(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Psalm 119:37(시119:37)/ Pastor Charles Spurgeon(찰스 스펄전 목사)/ 새벽기도회설교/ 1850-01-20
Turn away mine eyes from beholding vanity; and quicken thou me in thy way(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Psalm 119:37(시119:37) DAILY READINGS by Charles Spurgeon sunset Psalm 119:37 EVENING: January 20 There are divers kinds of vanity. The cap and bells of the fool, the mirth of the world, the dance, the lyre, and the cup of the dissolute, all these men know to be vanities; they wear upon their forefront their proper name and title. Far more treacherous are those equally vain things, the cares of this world and the deceitfulness of riches. A man may follow vanity as truly in the counting-house as in the theatre. If he be spending his life in amassing wealth, he passes his days in a vain show. Unless we follow Christ, and make our God the great object of life, we only differ in appearance from the most frivolous. It is clear that there is much need of the first prayer of our text. “Quicken thou me in thy way.” The Psalmist confesses that he is dull, heavy, lumpy, all but dead. Perhaps, dear reader, you feel the same. We are so sluggish that the best motives cannot quicken us, apart from the Lord himself. What! will not hell quicken me? Shall I think of sinners perishing, and yet not be awakened? Will not heaven quicken me? Can I think of the reward that awaiteth the righteous, and yet be cold? Will not death quicken me? Can I think of dying, and standing before my God, and yet be slothful in my Master’s service? Will not Christ’s love constrain me? Can I think of his dear wounds, can I sit at the foot of his cross, and not be stirred with fervency and zeal? It seems so! No mere consideration can quicken us to zeal, but God himself must do it, hence the cry, “Quicken thou me.” The Psalmist breathes out his whole soul in vehement pleadings: his body and his soul unite in prayer. “Turn away mine eyes,” says the body: “Quicken thou me,” cries the soul. This is a fit prayer for every day. O Lord, hear it in my case this night.
가장 위대한 유산/ 히11:1-4/ 소강석 목사/ 2008-09-02
가장 위대한 유산 히11:1-4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서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당이 써주는 부적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성령)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히 여깁니다. 서울 장안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한번 하기 위해 그 사람들이 지불하는 액수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금 액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 집사님중에는 윗 동서가 무당인 사람을 두고 있는 분이 계심 ⇒ 이 분이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 나왔을 때 소목사를 굉장한 부자로 보았다고 함. \\\"저 많은 사람들이 매주 얼마나 많은 돈을 저 목사님께 갖다가 바칠까?\\\" 그분은 자기 동서를 염두에 두고 생각함. 자기 동서는 점한번 치거나 굿한번 하면 엄청난 돈을 벌거든요. ⇒ 많은 재산가가 되었음. 하지만 여기 소목사는 아직도 집 한 채가 없음. 여전히 전세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사람 소원은 오매불망 APT한 채 장만하는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서는 그렇게 치부하고 있는 점쟁이를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TV의 2580이나 PD 수첩 같은 곳에서 60만이 넘는 무당을 때려잡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런데 맨맞한게 교회의 목사들입니다. 얼마나 목사들은 TV에서 얻어맞았습니까? 이렇게 목사들은 가난하게 사는데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사회에서는 그만큼 교회와 목사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무당이나 역술인에게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무당을 찾고 점쟁이에게 아무리 많은 돈을 바쳐도 그들을 신앙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당에게 가서 진지하게 굿을하고 점을 쳐도 그들을 가리켜 미신을 좇고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신 : 무조건 내 소원 성취를 이루기 위하여 맹목적으로 허무맹랑한 귀 신을 달래고 어르는 것임. 오직 내 목적 성취를 위해 귀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임 ⇒ 그 귀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소원성취만 이루려고 함. 또 여기엔 구원이 없음. 영생의 문제를 해결 못 받음. 신앙 : 절대자인 하나님을 내가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내가 그분을 먼 저 확실히 앎. 영접+의지 ⇒ 내가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며 그분 앞에 변화된 삶을 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임. 그리고 여기엔 확실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됨. 영생을 소유하게 됨. 바로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소원도 이루어 주심. 이것이 미신과 신앙과의 차이입니다. 확실히 이런 구별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점쟁이에게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이 변화 받고 새로워지기 위해 갑니까? 그들이 굿한번 한다고 해서 심령이 변화를 받던가요? 삶이 변화를 받던가요? 또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던가요?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었습니다. 변화받고 늘 새로워지기 위해 은혜 받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는 기도하고 응답을 받습니다. 바로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저에게 이런 편지가 날라왔습니다. 어느 한 개척교회 목회자로부터 온 편지였는데 필체도 엉망인데다가 문장도 어수선하고 어체도 중구난방이었습니다. 편지의 요지는 대략 이랬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주 어렵습니다. 교인도 10명이내입니다. 그러나 교회당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새에덴교회 소목사님께 우리 교회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소목사님! 우리 교회를 꼭 지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 교회와 그 목사님에 대해 그 지역에 계시는 잘 아는 목사님을 통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기도했음. 그리고나서 스스로 결론을 얻고 그분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그런 응답을 받았다고 하지만 전 아무리 기도해도 그런 응답이 없네요. 성령께선 저에게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네요. 그러니 더 기도해 보시고 또 그런 영감이 오면 다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껏 연락이 없습니다. 나중에 알아보았더니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는 것입니다. ⇒ 둘 중의 하나는 잘못된 믿음이라고 할 것임. 이렇게 같은 신앙인 끼리도 옳은 믿음을 가질 수도 있고 잘못된 믿음을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데도 옳은 믿음이 있을 수 있고 그른 믿음이 있을 수 있으며 미숙한 믿음이 있을 수 있으며 성숙한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신앙을 갖습니까? 우리에겐 신앙의 확실한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동기는 모든 신앙인에게 있어서 공통분모와 같이 공통적이고 한결같은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1)인간능력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갖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까? 정말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까? 국민일보에 제가 가정예배코너를 두 달 동안 게제 할 때였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설교준비를 하고 있다가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어떤 여자 분이 저에게 상담을 좀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30대 가정주부였는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얼마나 엄격했던지 저녁 8시가 넘어서 집에 오면 시집갈 때까지 아버지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아버지목표 : 딸을 순결하게 키워서 자기 같이 고결한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것이었음. 그런데 이 여자 성도님의 고민 : 그런 엄격하신 아버지 밑에서도 처녀때 다른 남자와 정을 통했음. 그때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음. 아버지에게도 뻔뻔했음. 그러나 그녀가 믿는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나니 자기가 엄청난 죄를 지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남편은 자기 아버지보다 더 진실+착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신앙까지 독실했습니다. 그러니 이 남편 앞에 너무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이전의 죄를 남편에게 고백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느라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니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고 전화상담을 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사람이 뭘 합니까? 아무리 엄격한 아버지래도 자기 마음대로 자식하나 못 키웠습니다. 자기 목표대로 내 자식하나도 못 키웠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어떤 분은 그 여자에게 어떻게 상담을 했느냐고 궁금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고백? 안 고백? ⇒ 그것은 다음주일에 이야기하겠습니다. ex)자녀가 유괴 당할 때 : 부모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트렁크에 갖혀 한강에서 던져졌던 아이의 모습!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며 바닥을 쥐어뜯고 있었음(2x). 그때 부모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요즘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되어 버렸음. 돈이면 무엇이든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으면 안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그 물질 만능주의 사상이 오렌지족을 낳게 되었습니다. 돈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자식들이 한 달에 수천 만원을 쓰고도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없는 오렌지족이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뿐입니까? 요즘은 부부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주변에 세워지는 그 수많은 러브호텔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왜 그런 것들이 그렇게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 물질만능주의 사상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돈좀 벌어놓으니까 이젠 어떻게 즐기며 살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는 나머지 자식들은 오렌지족, 부부는 러브호텔 족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서울 강남의 주부들에게 설문조사 : 70%가 이혼하고 싶다고. 60%는 결 혼 전으로 돌아간다면 지금 남편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25% 결혼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계약결혼을 하고 싶다고. 그런데 이렇게 대답한 사람의 90%이상이 비기독교인이였다고함. 가정은 그렇다손치더라도 우리 개인은 어떻습니까? 내 능력으로 먹어 가는 나이를 막을 수 있습니까? 머리에 돋아나는 흰머리를 막을 수 있습니까? 이마에 생겨나는 주름살을 막을 수 있습니까? 한해가 다르게 쇠퇴하는 우리의 기억력을 희생시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인간능력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 한계를 알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내 자식과 가정과 인생을 맡기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던 밤은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던 밤이었습니다. 전문적인 어부, 어부로 말하면 프로 기질과 근성이 있던 그였는데 그날은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능력의 한계를 통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깊은 물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깊은 물에는, 더구나 아침에는 고기가 안 잡힙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전문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순종 ⇒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음 ⇒ 예수님을 깊이, 인격적으로 만나게 됨.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전 자기 능력으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으면 예수님을 영접치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인생을 몇 년 더 탕진하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부모를 전폭적으로 의뢰하는 이유 : 자기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 100% 부모를 신뢰함.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갓난아이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의지+영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마음이 있었기 까닭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지금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복된 마음입니다. 자기 능력의 한계, 인간능력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 축원! 2) 인간 생명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갖습니다. 인간능력의 한계 때문에만 신앙을 갖는 것은 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인간능력의 한계를 알았는데 지금은 내가 또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 그러면 또 불신앙으로 돌아가 버림. 그러므로 이젠 인간 생명의 한계를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을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나이들었다고 먼저 가고 젊다고 늦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60대 할머니가 성형수술 ⇒ 30대로 변장. ⇒ TV에까지 나와서 인터뷰 \\\"젊음을 되찾아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 그러나 나가는 뒷모습은 영락없이 60대 할머니 모습이 나오더라는 것임 그런데 이 할머니가 30-40대 아줌마와 어울려 등산을 하다가 그만 숨이 막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실화라고 합니다. 어떤 남녀는 지방에서 결혼식 ⇒ 신혼여행을 해외로 가기로 함. 그래서 김포공항을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오다가 교통사고로 즉사 ⇒ 결혼식에서 남는 음식이 몇시간후에 장례식음식으로 바뀌고 말았음. 이렇게 사람은 다 죽습니다. 교통사고로 일찍 안 죽고 병으로 일찍 안 죽어도 사람은 100년을 살지 못하고 죽습니다. 설사 100년을 산다한들 너무나 짧은 인생입니다. 이렇게 짧은 인생 !너무나 허무합니다. 너무나 허무하다 못해 너무나 분 합니다. 여러분! 나도 모르게 솟아나는 흰머리, 주름살, 쪼글쪼글해진 피부를 바라보며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아니 억울함과 분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나이 먹기까지 난 뭣하며 살았는가?\\\" ⇒ 허무+분함을 느낌.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 상여 메갈 때 부르는 노래가 기억납니다. ┤ 산천초목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네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분하고 분하다 우리네 인생살이 어이가노 어이가노 ex)경상도 구미에 가서 장례식 ⇒ 영천에 가서 하관식. 그때 장례풍습 ⇒ 어차피 인생은 흙으로 돌아갈 것을! ex)프랑스에게 출판된 일리쥐웅이라는 미술전문서적 : 거울 속에 비치는 해골의 모습. ⇒ \\\"너는 아무리 가꾸어도 그 육체는 결국 해골이 되고 만다.\\\"는 위대한 멧세지의 교훈을 주는 작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우리가 죽을 존재라는 것을 알때에 오늘 저녁에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맞아들일 수 있음. 창4:26 셋이 에노스를 낳았는데 그때에야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 을 불렀다고 했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래 그 후손 가운데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음. 그러다가 에노스때 와서야 하나님을 찾았음. 에노스의 뜻 :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러므로 인간이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에노스를 보고 깨달을 때입니다. 즉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죽음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며 그러기에 나는 오늘밤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생명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동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동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치 않는 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3) 인간의 의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갖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완전한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유명한 사회학자 토니 캄폴로는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며 죽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맞는 말인지 모릅니다. 업적에 관한한 살아있을 때 후회를 많이 합니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일이 무엇인가? \\\" 그러나 죽을 때는 그런 걸 가지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일생을 어떻게 살았는가? \\\"라고 후회하며 죽습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많은 임종을 보았고 장례식도 많이 집례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 \\\"아! 그때 내가 1000만원만 더 벌었어도... 그때 내가 조금만 노력했으면 그 정도 직책까지는 올라갔어야 했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 이런 것을 후회하고 죽습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것,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 하나님께 충성해야 할 것을 못한 것, 심지어 어떤 분은 십일조 못한 것, 하나님께 작정한 것을 하지 못한 것을 목사에게 고백합니다. 어떤 권사님 : 제발 일어나 전도좀 해야 하는데... 이런 모습을 통해서 저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①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자건, 불신자건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불신자보다 신자가 더 할지도 모름 ⇒ 세브란스 : 신자가 더 두려워했던 사실. ②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기 스스로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죽을 때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인에게서 나오는 의가 있다면 그 의는 걸레조각같은 의입니다. 그러므로 이 걸레조각같은 의는 하나님의 인상을 더욱 찌뿌리게만 만들뿐입니다. ex)자동차를 닦을 때 : 더 더러워지는 경우가 있음. 더러운 기름걸레로 닦았을 때 ⇒ 더 더러워짐. 우리의 의가 그런 기름걸레 같음. 물론 이 의가 인간 앞에서는 상대적인 의가 될 수 있음.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는 의가 될 수가 없음. 그러므로 우리의 선, 우리의 의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만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의의 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 나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나무, 의의 나무입니다. 우리는 원래 돌 감람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는 아무리 거름을 줘도 참감람나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야 함. 그러면 참감람나무 진액을 빨아들이고 그 열매를 맺게 됨.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선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영생을 못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 ⇒ 그분의 의로 구원+거룩한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삶. 우리는 이렇게 의의 한계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바른 삶, 곧 믿음에 기초한 거룩한 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동기가 이렇게 확실한 만큼 믿음의 기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확실한 믿음의 기초 위에서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 거룩한 의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유산을 남기는 것입니다. ex)성 캐더린 수도원 : 한쪽엔 수도사들의 유골이 보관. 한쪽엔 그들이 사용한 유품들이 보관. 그 중의 하나가 슬리퍼임. 그걸 보면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감동 ① 슬리퍼는 남았지만 인간은 없다는 사실임. 있어 봤자 해골들의 모습뿐임.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잘났어도 슬리퍼만도 못한 존재임 ② 그 슬러퍼가 아무렇게나 살았던 사람에 의해 신겨졌던 것이라면, 그냥 먹고마시고 놀러 다니던 사람에게 신겨졌던 것이라면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겠는가? 그 슬리퍼를 신은 수도사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그 슬리퍼를 신고 다닌 수도사의 삶은 진정 너무나 위대+숭고하였기에 걸어 놓았을 것임.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확실한 믿음의 동기 위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 거룩한 믿음의 삶, 의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 삶 자체를 가장 위대한 삶으로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유산이될 때 우리가 썼던 한 자루 볼펜, 우리가 읽던 한권의 성경책이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위대한 멧세지로 남아서 내 자녀들의 삶의 이정표와 길잡이가 될 수 있음. 그 유품자체가 거룩한 유산의 연장이 될 수 있음(2x). 자녀들은 그 유품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길 것임.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자녀들은 우리가 남기고 간 몇 푼 안되는 재산 때문에 서로 아웅다웅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칼부림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우리의 삶은 거룩한 믿음의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죽을 때에도 후회하지 않고 죽을 수 있으며 자녀들에게도 우리의 삶을 거룩한 유산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복받은 인간입니다. ⇒ 축원! 소강석 목사(용인 새에덴교회)
간구하는 사람들/ 느1:11/ 스펄전 목사/ 1855-04-20
간구하는 사람들 느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느1:11) 느헤미야는 자신 외에도 기도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기 혼자만이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또한 그 전을 위해서 혼자만이 기도한다고 생각할 만큼 음울하고 고집이 세고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외에도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많은 종들을 두셨다고 믿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 그는 엘리야보다 더욱 더 소망이 넘치는 사람이었다.(왕상19:10,18) 1. 이것은 참된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1.1 참된 경건은 언제나 간구하는 일이다. 이것은 관습(Custom)이나 유행(fashion), 습관(habit), 감정적 흥분(excitement), 열정(passion) 또는 우연한 일(Chance)로 하는 것이 아니다. 1.2. 참된 종교의 모든 부분은 구하는 일이다. 회개(Repentance), 믿음(faith), 사랑(love), 기타 이러한 것들은 소유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기도와 찬미, 봉사, 구제와 모든 선한 행위는 마음으로 구해야 할 대상들이다. 오! 그러한 것으로 충만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하늘 나라와, 부활과, 지상에 임할 그리스도의 장래의 영광스러움에 대해 얘기 되어질 수 있다. 선한 사람들은 다니엘과 같이 간구하는 자들이다(단9:23). 간구는 경건에 대한 활력의 근원이며 거룩을 탄생시키는 알(egg)이요, 은혜의 새벽이며 완전에 대한 기약인 것이다. 2. 이것은 많은 은혜의 등급을 포함한다. 2.1 비록 구원받은 자신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열성적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이것은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것이다. 2.2 자신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그러나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구하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 주에는 약간의 계층이 있다. 2.3 하나님의 방도를 즐거워하고 평생동안 그 방도 안에서 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는 거룩하게 되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 거룩함 속에 거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근신하여 드리는 간구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견실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이제 이 모든 사람들은 응답될 만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 실로 그들은 언제나 기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간구가 참된 기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높은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기도뿐만 아니라 이 모든 사람들의 기도도 역시 필요하다. 졸병(The rank and file)이 군대의 주요 부분이다. 그와 같이 뛰어난 신자들 외에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기도의 보물은 머지 않아 바닥이 날 것이다. 최후로 이제 우리는 기도하자 - 우리들 모두,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함께 성령 안에서 기도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그리고 느헤미야처럼 거룩한 봉사의 길로 인도하는 일꾼들을 기도로써 도와주기로 하자. 나폴레옹이 엘바(Elba) 섬에서 되돌아 왔을 때, 정원에서 일하던 사람이 황제를 알아보고 즉시 그를 따랐다. 나폴레옹은 그를 사랑스럽게 환영하며 말하기를 \\\"여기서 우리는 군인 보충을 처음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그의 기도가 얼마나 미약 하였던지간에 우리는 그를 환영해야 한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그는 나를 부요케 하는 자이다. 모래알들과 빗방울들은 가장 큰 용도를 위해서 연합되고 또한 그것이 서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이 간구의 고통에서 수완으로 이루어지는 큰 집합에서 보다, 하잘 것 없는 간구의 마음속에는 더욱 더 참된 기도가 있을 수 있다. 당신의 목사가 그의 기도의 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라. 그것은 자기 교인들의 가슴속에 쓰여져야 한다. 만약 당신이 설교를 할 수 없고, 또는 크게 구제하거나 교회의 직분자가 되지 못한다 해도 끊임없이 기도는 할 수 있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교회)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 /엡3:14-19/ 송기성 목사 2019-01-19 11:03:17 read : 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팀 켈러 목사님은 “기도는 고단한 씨름이지만, 본질에 맞닿은 경이로운 길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결코 쉽고 편한 것이 아닙니다.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했던 야곱의 기도처럼 간절한 기도일수록 고단한 씨름입니다. 그런데 그 고단한 씨름과 같은 기도는 기도의 본질에 맞닿은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 /엡3:14-19/ 송기성 목사 2019-01-19 11:03:17 read : 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팀 켈러 목사님은 “기도는 고단한 씨름이지만, 본질에 맞닿은 경이로운 길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결코 쉽고 편한 것이 아닙니다.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했던 야곱의 기도처럼 간절한 기도일수록 고단한 씨름입니다. 그런데 그 고단한 씨름과 같은 기도는 기도의 본질에 맞닿은 경이로운 길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친근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서서 기도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마6:5;눅18:11)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간절한 마음과 복종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도, 그것은 곧 성도의 바람직한 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이제 우리들의 기도와 삶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람직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기 위하여 드려야할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은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3:16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먼저 그들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기를 간구하는’ (요삼1:2) 기도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곧 우리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영광이 풍성하신’ (the wealth of his glory)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공동번역은 ‘넘쳐 흐르는 영광의 아버지’시라고 했습니다. 영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곧 영광이 넘쳐 흐르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며 바람직하게 살아야 할 생활은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미국 프로 야구 선수 커비 퍼켙(Kirby Puckett)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0년 연속 올 스타 멤버로 선발되었으며, 6번이나 골든 글러브 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속팀인 미네소타 트윈스가 월드 시리즈를 두 번씩이나 제패하는데 주역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96년 클리브랜드 팀과의 경기 중 상대 팀 투수의 공에 맞아 오른쪽 눈을 잃고 은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그 투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몸을 빨리 피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오히려 그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은퇴 경기를 마친 후 그는 팬들의 성원에 감사한 뒤 자신의 야구 선수 생활은 끝났지만 인생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매우 감동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제가 오른쪽 눈 때문에 빠른 공을 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눈이 하나 안 보여도 기도 응답을 받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아멘! 고린도후서4:16에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진 사람은 겉사람이 낡아져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며 기도 응답의 은혜를 더욱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더욱 강건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낡아질지라도 속사람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롬14:17) 날로 새로워지는 천국 생활을 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17 전반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에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곧 우리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마음 속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며,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의 마음을 그의 집으로 삼으십니다 (Christ will make his home in your hearts through faith).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8:20)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마음을 거처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며 바람직하게 살아야 할 생활은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오늘은 존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 280주년 기념주일입니다. 그는 22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32세에 미국 조지아에 선교사로 가서 2년 4개월 동안 (1735.10.14-1738.2.1) 사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738년 1월 24일 일기에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아메리카로 인디언들을 회개 시키러 갔다. 오! 그런데 나를 회개시킬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누가 무엇으로 이 불신앙적인 악한 마음에서부터 나를 구해낼 것이란 말인가?” 그 후 4개월이 지난 1738년 5월 24일, 그는 마침내 그가 그토록 갖기를 원했던 믿음을 갖고 회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일기에 그는 다음과 같이 그때의 체험을 적어 놓았습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 경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구원을 위해, 다만 그리스도만 믿고 있음과 주께서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셨음을 믿는 확신을 얻었다.” 아멘! 고린도후서13:5에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자기 마음 속에 계신 사람은 불신앙적인 악한 마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주셨음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요일5: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으시기를 (히11:6)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3:17 후반절에서 19절까지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그들에게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굳게 세워져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펼쳐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 곧 우리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유한한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 곧 그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뿌리를 박고 굳게 세워져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비록 우리의 지식으로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해주셔서 사랑의 실천과 더불어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아 가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1945년 뉴욕에서 크리스천 교양지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를 창간한 노먼 빈센트 필 (Norman Vincent Peale) 목사님이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백화점에서 성탄 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사 가지고 나오는 길에 자기에게 적선을 구하며 손을 내미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린 노먼은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그 손을 피하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안돼. 그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야!” 라고 말하면서 10달러를 드리라고 시켰습니다. 당시 10달러는 큰 돈이었습니다. 노먼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거지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라며 기뻐하더랍니다. 그의 환한 미소를 보며 어린 노먼은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요한1서4:16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한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요일4:12) 것을 볼 수 있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헨리 워드 비처 목사님은 “인생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선택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 한 번 사는 유일회적인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 속에 바람직한 성도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옵소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절한 기도와 바람직한 생활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강권하여 데려 오라(Compel Them to Come In)/ 눅14:23/ 스펄전 목사/ 1855-01-20
강권하여 데려 오라(Compel Them to Come In) 눅14:23 I. 서론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우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마음이 급하므로 서론에 시간을 끌 여유가 없음. 그리스도를 아직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은 오늘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오. 여러분은 조상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도 타락하였음. 그럼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였음. 그러나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죄 많고 자격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음. 그리고 간단하고 명료한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셨음.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이 은혜스러운 초청을 거부함.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런 사람들이라도 강권하여 데리고 오라고 하심. 오늘 아침에는 이미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보다도 아직도 그리스도께 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임. II. 하나님께서 초청한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종을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보내시며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심. 1.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청하심. 물론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침례 요한에게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음. 믿음도 없고 아무 덕도 없고 아무런 선행도 없고 아무 내놓을 것이 없는 인물일지라도 이 초청에서 제외되지 않았음. 도리어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계심. 2. 하나님은 병신들을 데려오라 하심. 물론 육신적인 장애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 스스로의 구원을 이룰 수 없는 영적인 장애임을 의미함. 아무리 거룩한 율법이 앞에 놓여있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달성할 수 없음. 영적인 발이 장애를 입어 인생길을 바로 행할 수 없는 사람들. 영적인 눈이 장애를 입어 진리를 바로 볼 수 없는 사람들. 영적인 손이 장애를 입어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어떤 선행도 할 수 없는 사람들. 보혈이 묻은 십자가의 군기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휘날리고 있는 것임.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와서 값없이 생수를 마시라.” 이 초청은 스스로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영적으로 장애를 입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으나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심. 3. 하나님은 머뭇거리는 자들을 초청하심. 이들은 하이웨이나 골목길을 서성거리며 갈 길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임.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강하게 말씀하심. “너희가 둘 사이에서 얼마나 더 머뭇거리겠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섬기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섬기라.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더 이상의 머뭇거림과 방황을 멈추고 하나님과 진리를 택할 것을 요구하심. 4. 하나님은 소경을 초청하심. 인간은 자기 스스로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존재임. 악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임. 단 것을 쓰다하고, 쓴 것을 달다하는 존재임. 어둠을 빛이라 하고 빛을 어둠이라 하는 존재임.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기쁨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일의 행복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임.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초청하라고 하심. III. 하나님의 종으로서 심부름. 이런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보다는 차라리 어린아이가 삼손과 씨름하여 이기는 편이 쉬울 것임.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전적인 타락성이 앞에 가로 막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명하심. 그러므로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I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이일을 하기 원함. 1. 설교자로서 저는 죄의 하이웨이와 악의 골목길로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임. 하늘의 왕께서 이 시간에 은혜스러운 초청을 하심. “나는 죄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돌아와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심.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와서 변론하면 흰 눈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심.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저는 여러분들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여러분들이 이 소식을 달가워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무거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를 다 알고 계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 죄의 대가가 엄마나 무서운 것임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이 한사람을 주목하십시오. 겟세마네동산에서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분입니다. 죄 없이 모진 채찍과 고난은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사 심장이 터지고 살이 찢어지면서도 죄인들을 용서 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분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저는 여러분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권합니다. 그래도 복음을 거부하시렵니까? 그렇다면 이제 어조를 바꾸겠습니다. 2. 죄인들이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명합니다. 회개하시고 예수를 구주로 믿으십시오. 무슨 권위를 가지고 명령을 하느냐고요? 저는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제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는 말씀이 저를 명하셨습니다. 그래도 거부하시렵니까? 3. 그렇다면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간청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간절합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여러분을 애타게 부르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십니까? “내짐은 쉽고 내 멍에는 가벼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의 훈련이 고되더라도 애굽의 노예생활 보다는 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죄 가운데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기쁨과 축복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4. 이제 저는 말할 수 있는 논리가 바닥이 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개인적인 이익에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원수 되어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쾌락에 젖은 사람들이여. 쾌락이 참된 기쁨이 될 수 있습니까?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여? 참된 안식이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의 혼인 잔치에 와서 먹는 것이 낳지 않습니까? 장애자들이 와서 혼인잔치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이 낳지 않습니까? 방황하는 자들이 잔칫집에 자리 잡고 않는 것이 낳지 않을까요? 5. 이래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피가 여러분이 머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여러분에게 고정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는 불호령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불못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구더기가 소금치듯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IV. 결론 아무리 튼튼한 사람이라도 사소한 사고로 죽을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올해의 성탄절에 또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혈액은 문제없이 잘 순환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세포는 암의 세력에서 안전하다고 자신하십니까? 저는 오늘 애원도 하였고 간청도 하였고 협박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를 소망 없이 돌려보내시렵니까? 나는 너무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자포자기 한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은 죄인의 괴수도 구원하십니다. 구원의 도리를 충분히 모른다고 변명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얻는다는 진리만으로도 구원받기에는 충분합니다. 내일 믿겠다고 미루는 분은 안 계십니까? 저는 내일에 대한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는 믿으십시오. 내일 일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제가 울며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설교자들에게 중생 시키는 능력을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역사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태버너클교회)
거룩한 대회가 더렵혀질 때 쫓겨난 자를 모으며/ 습3:18-20/ 스펄전 목사/ 1855-02-23
거룩한 대회가 더렵혀질 때 쫓겨난 자를 모으며 습3:18-20 거룩한 대회가 더럽혀질 때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병든 시기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로 인한 치욕은 진정한 예루살렘의 거민들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근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모으리니.\\\\\\\" 그렇게 무거운 짐이 마음에 지워졌을 때 그들이 근심 속에 빠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그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는 악한 영의 영향력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저는 자를 구원하며.\\\\\\\" 선지자들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시온을 향한 순례자들은 내내 다리를 절어야 했습니다. 순수한 복음이 선포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의 여정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힘을 빼앗기게 됩니다. 여러분이 빵을 빼앗으면 아이들은 주리게 됩니다. 여러분이 양떼에게 독초를 먹이거나 사막처럼 황무한 들로 인도해 간다면 그들은 곧 파리해지고 목자를 따라가는 매일의 삶 속에서 다리를 절게 됩니다. 교리는 곧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안식일이 그저 쉬는 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잠을 잡니다. 진리를 듣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도, 사람들의 영혼에 유익을 끼치지도 못하는 것들을 신물나게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곳에서 양떼들이 먹을 양식을 기대하며 고개를 들지만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아! 많은 이들이 19절에 있는 \\\\\\\"쫓겨난 자를 모으며\\\\\\\"에 나타난 자처럼 쫓겨나 있습니다. 거짓 교리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소망을 품었던 사람들은 삶의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본성에 의해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죄로부터 회개시키는 진리는 더 이상 선포되지 않습니다. 구하는 자들을 평안으로 인도하는 진리는 구름으로 가리워지고 영혼들은 불필요한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능력을 느낄 수 있도록 은혜와 영광스런 대속의 교리가 사람들의 마음 앞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모든 악한 것들이 그 뒤를 따라오게 됩니다. 이 끔찍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 교회에도 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떨립니다. 머뭇거림은 멸망으로 치닫게 되고 약한 자들은 동요되며 강한 자들조차도 당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거짓 교사들은 가능하다면 택한 자들을 속이려 합니다. 이런 생각만 해도 우리의 마음은 근심에 빠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동안 내내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방황하는 백성들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본문에 동일한 의미가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습3:19).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습3:20). 대적들은 영원한 증거를 침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을 나무에 매달고 그의 몸을 내려다가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고는 그것을 굳게 지켰습니다. 분명히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목적과 뜻이 있었습니다. 자랑하지 말지어다. 너희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아! 돌로 막고 지키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가! 정한 때가 왔을 때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세마포가 구속할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의 꿈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요!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2:4) 사랑하는 여러분, 치욕은 아직 거룩한 대회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나팔 소리 같은 하나님의 진리가 다시 울려 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교회를 부흥시킬 것이고 추수할 볏단처럼 많은 회심자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때 짐 지고 근심하는 자들은 기쁨과 아름다음의 옷으로 갈아입을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속죄는 찬양과 영원한 기쁨이 되어 그들 머리 위에 되돌아올 것입니다. 의심의 갈등이 사라진 전쟁의 끝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도 외치는 그 소리를 듣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교회가 가장 낮은 곳에 처할 때도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의 교리에 의해서 세워지고, 온전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공급받고 있습니다. 지옥의 문은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인해 기뻐합시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했기 때문에 무한히 부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수 만명의 페르시안인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알렉산더의 용기는 더욱더 빛났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한 명의 푸줏간 주인이 무수한 양떼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소?\\\\\\\" 다른 사람이, \\\\\\\"아, 그 많은 페르시아인들이 활시위를 당기면 태양이라도 어둡게 만들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영웅은 \\\\\\\"어둠 속에서 싸운다면 더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소리 높이 외쳤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다나시우스는 말했습니다. \\\\\\\"나 아다나시우스는 세상과 대적할 것입니다.\\\\\\\" 이 말은 유명한 격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전쟁에서 홀로 싸우는 것은 영광스런 일입니다. 우리에게 여섯 명의 아군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힘을 더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돌봐야 할 연약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홀로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이 당신을 버리고 도망쳐 아무도 주위에 남아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이 그 모든 빈자리를 채우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사12:6)...... 배를 조종하고 있는 주 예수님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오, 주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십시오. 그리고 인내하며 그를 기다리십시오.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35:4).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태버너클교회)
거룩한 불만족을 해소시키려면 /눅19:1-10/ 송기성 목사 2019-01-18 02:08:49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거룩한 불만족’ (holy discontent)이란 말을 보편적인 용어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2005년 윌로우크릭 리더십 서밋 10주년 대회에서 거룩한 불만족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대부분의 참석자가 목회자인 이 대회에서 그는 거룩한 불만족에 대해 매
거룩한 불만족을 해소시키려면 /눅19:1-10/ 송기성 목사 2019-01-18 02:08:49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거룩한 불만족’ (holy discontent)이란 말을 보편적인 용어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2005년 윌로우크릭 리더십 서밋 10주년 대회에서 거룩한 불만족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대부분의 참석자가 목회자인 이 대회에서 그는 거룩한 불만족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불만족을 지니고 있습니까? 거룩한 불만족으로 인해 마음이 무너진 목사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지닐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목회자는,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보며 거룩한 불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예,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들과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보며 거룩한 불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에 앞서 자기 자신을 보며 거룩한 불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무너질 정도로 거룩한 불만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불만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거룩한 불만족을 해소시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고 세상도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19:1-10의 예수님과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이 겪고 있는 거룩한 불만족을 속 시원하게 해소시켜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은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전진하는 사람에게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거리를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그 도시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였습니다. 삭개오 (삭카이오스)는 ‛청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이름만큼 청결하지도, 의롭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허가낸 도둑’이라고 했습니다. 허가낸 도둑으로서 삭개오는 큰 권력과 많은 제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그는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정하고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명무실한 자기 자신에 대해 거룩한 불만족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삭개오, 그는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사실 당시 삭개오에게는 일종의 열등감과 대인기피증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외감과 고립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을 보고자 열망하는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 할 수 없었지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앞으로 달려갔으며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아무도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전진하는 그를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열등감과 고립감과 소외감 등 모든 불만족과 거룩한 불만족을 아주 만족하게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인 폴 스톨츠 (Paul Stoltz)박사가 1997년 <역경지수> (AQ:Adversity Quotient), ‛장애물을 기회로 역전시켜라’라는 책을 통해 ‛역경지수’ 이론을 제창하였습니다. 역경지수란 무엇인가? 그는 어떠한 고난과 위기와 역경 가운데서도 좀처럼 위축되지 않고 자신이나 공동체가 꿈꾸는 목표의 완성을 향하여 뜨거운 열정과 남다른 끈기를 가지고 도전해 나가는 지구력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집념과 어떤 위험도 긍정적으로 감수하고자 하는 낙관주의가 확립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역경에 대처하는 모습을 등반에 비유하여 퀴터(Quitter), 캠퍼(Camper), 클라이머(Climber)라는 세 가지로 유형화하였습니다. 첫째, 역경지수가 낮은 퀴터는 산에 오르다가 힘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등반을 포기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둘째, 캠퍼는 등반하다가 직면한 장애물이나 어려움 앞에서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현상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기업을 예로 들 때, 조직 내 약 80%의 구성원들이 캠퍼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역경지수가 높은 클라이머는 역경이 오더라도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클라이머는 캠퍼인 동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면서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려고 하는 의욕도 가지고 있습니다. 폴 스톨츠 박사는 높은 역경지수를 지닌 사람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①그들은 역경이나 실패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비난을 돌리지 않는다. ②그들은 역경이나 실패가 자신 때문에 생겼다고 스스로 비난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③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얼마든지 해결하고 해쳐나갈 수 있다고 낙관적으로 믿는다. 그래서 그는 지능지수(IQ)도 중요하고 감성지수(EQ)도 중요하지만 인생이란 어쨌든 수 없이 많은 역경들을 헤쳐나가느냐의 문제이므로 지성과 감성을 총동원하여 이 역경을 넘어가는 역경지수를 높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9:11-13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온 맘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께 와서 부르짖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평안을 주시고 미래와 희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보고자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전진하는 사람에게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불만족을 해소시켜 주십니다.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전진하는 사람은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은 어떤 난관이나 장애물에 직면해도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향해 열망하는 호기심을 품고 역경을 돌파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고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받으시기를 우리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하는 사람에게 즉각적인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고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며 수근거렸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서서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갑겠나이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며 자기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삭개오를 비판하고 시기하였으며, 예수님을 비난하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의 태도는 그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삭개오, 그는 예수님을 ‛주님’ (Lord)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저가’(this man)라고 하며 무례하게 혹평한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신앙적인 고백을 한 것입니다. 돌무화과나무 위에 숨어 있던 삭개오는 이제 ‛주여, 보시옵소서’라며 주님께 자기를 보아주시기를 원하며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그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취한 것은 네 배로 갑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죄악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삭개오의 회개하는 신앙심에서 비롯된 삶의 변화를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삭개오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하는 그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하심으로써 즉각적인 구원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허가낸 도둑 삭개오의 죄책감과 수치심과 불안감 등 모든 불만족과 거룩한 불만족을 아주 만족하게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2011년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윤복희의 ‛여러분’을 열창하여 모든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결국 눈물을 흘리게 한 뒤 기립박수를 받은 가수 임재범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정신적인 고통이 절정에 달해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울증이 심했던 그는 그 당시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안이 엄습해 왔고 매일 죽음만 생각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심각한 생활고까지 겹쳐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전기요금을 낼 돈이 없어 밤에는 모든 전원을 내렸고, 수도요금을 아끼려고 씻지도 않았으며, 급기야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피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폐인생활을 하던 중 우연치 않은 기회에 성경을 접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정신적 회복을 위해 성경을 그의 곁에 두고 일독을 권했습니다. 한때 불교 등 다른 종교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는 아내가 시키는 대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푹 빠져 살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하게 되었다면서 ‟우울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적일 수 있다” 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 하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2011년 12월 그는 KBS ‛승승장구’ 프로그램에서 6년 동안 심각한 우울증과 조울증을 앓았다면서 인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어 결국 다시 희망을 되찾게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역대하 7:14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에게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시거나 메뚜기가 토산을 먹게 하거나 전염병으로 망하게 하십니다(대하7:13).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고,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의땅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하는 사람에게 즉각적인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불만족을 해소시켜 주십니다.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하는 사람은 변화지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변덕지수, 변질지수가 아니라 변화지수가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함으로써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허가낸 도둑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주님께로부터 즉각적인 구원을 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중국의 노자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 이상의 불행은 없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불만족이 최악의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만족은 불행의 원인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역설스럽게도 불만족이 없으면 회개와 변화도 없고, 도전과 성취도 없습니다. 따라서 불만족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별로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죄인들은 거룩한 불만족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즉각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죄인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열정적인 호기심을 품고 전진함으로써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역경의 클라이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신앙심을 품고 행동함으로써 즉각적으로 구원을 받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거룩한 불만족을 말끔하게 해소시켜 주시는 주님의 은총 안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운’ (빌4:11)행복한 성도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거룩함으로의 부르심 /벧전1:13-19/ 송기성 목사 2019-01-19 08:23:38 read : 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18년 서울신학대학교 총동문대회 및 전국교역자 부부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결, 이 시대의 요구” (레11:45), 이 주제는 이 시대의 요구이기에 앞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본문 베드로전서1:13-19의 말씀을
거룩함으로의 부르심 /벧전1:13-19/ 송기성 목사 2019-01-19 08:23:38 read : 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18년 서울신학대학교 총동문대회 및 전국교역자 부부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성결, 이 시대의 요구” (레11:45), 이 주제는 이 시대의 요구이기에 앞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본문 베드로전서1:13-19의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룩함으로의 부르심’ (A Call to Holy Living)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신학자이며 변증가인 제임스 패커 교수는 <거룩의 재발견>(Rediscovering Holiness) 이라는 그의 책에서 “거룩함이 없으면 아무도 주님을 볼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함은 영성과 도덕성이라는 두 개의 기둥에 놓인 아치와 같아서 두 기둥 중 하나가 가라 앉으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제임스 패커 교수의 경고는 유감스럽게도 오늘의 한국 교회에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영성과 도덕성의 균형을 이루지 못함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해 전에 ‘한국 교회는 교회 본연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운가?’ 라는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100점 만점에 43.9점에 불과 했습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신뢰도가 낙제 점수로 떨어졌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 교회가 그 거룩성을 잃어버린 채 손도 마음도 성결하지 않은 목사와 교인을 양산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고민하며 회복해야 할 과제는 바로 성직자의 성결, 성도의 성결, 그리고 성전의 성결인 줄 믿습니다. 성결의 이유 : 왜 성결해야 하는가?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1:13에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들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고 끝까지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1:14-16) 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왜 성결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성결해야 하는가?’, 성결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자기의 사욕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욕심대로 살았기에 거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결해야 할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11:44,45;19:2;20:7) 맞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를 때에는 욕심대로 살았습니다. 결코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2010년 제3차 로잔대회 케이프타운 선언문을 작성한 크리스토퍼 라이트 목사님은 현대 종교 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우상 셋을 권력(power)과 성공(success)과 탐욕(greed)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곧 우리가 돌아가야 할 것은 HIS, 곧 겸손함(humility)과 진실함(integrity)과 검소함(simplicity)이라고 했습니다. 티머시 켈러 목사님도 <거짓 신들의 세상>이라는 그의 책에서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과 같다. 우상 하나를 처리하면 또 다른 우상을 만들어 낸다. 해결의 길은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체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권력과 성공과 탐욕은 우리들을 우상숭배로 빠지게 하기 쉽습니다. 거기에서 거룩함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겸손함과 진실함과 검소함입니다. 이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우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짓는 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때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출20:4-6) 여기서 ‘천 대까지’(라알라핌)란 그의 자손 ‘천 명의 사람들에게’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거룩함으로 부르심은 우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하던 때에 행하던 우상숭배의 사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천 명의 후손들에게까지 은혜(헤세드, 자비)를 받게 하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함께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더 이상 자기 사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거룩함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결의 자세: 어떻게 성결해야 하는가?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17에 주님의 심판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 는 것은 ‘얼굴을 보시지 않는다’ 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편견으로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편견이나 불공평으로 우리를 보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공의롭고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결해야 하는가?’, 그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결해야 하는가?’, 성결코자 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자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두려움’입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신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보살피시는 분’과(마6:32) ‘재판장으로 심판하시는 분’ 이시라고(눅18:1-7)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우리들을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로 있을 때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행위에 있어 거룩함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몇 해 전에 한완상 박사님이 <예수 없는 예수 교회> 라는 책을 주셨습니다. 제목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한국 교회는 양적 성장에 있어서, 선교 열정에 있어서 세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국민으로부터는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믿으미는 많으나 예수 따르미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예수 교회’ , 그것은 ‘예수 없는 예수 교인’ 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 없는 예수 교인, 신앙 없는 신자, 성결 없는 성도, 성결 없는 성직자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거룩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없는 예수 교인에게는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다만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요일1:16) 살아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13:5)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버림 받은 자’란 ‘완전히 실패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거룩함으로 부르심은 우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움으로 경외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함께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더 이상 외식으로 행하지 말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거룩함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결의 방법: 무엇으로 성결해야 하는가?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1:18-19에 주님의 속죄를 믿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성결해야 하는가?’, 그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성결해야 하는가?’, 성결코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방법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그들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이란 우상 숭배 등의 죄악된 행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대속함을 받은 것’ 이란 고대 로마의 노예 제도에서 비롯된 용어로 ‘값을 지불하고 사다’, ‘속박에서 해방시키다’ 라는 뜻입니다. 헛된 행실, 죄악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는 길은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것 곧 썩어질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느냐? 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함을 그토록 강조하며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짐 심발라 목사님(뉴욕 브룩클린 태버나클 처치)은 , <태풍>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태풍 전에 반드시 경고와 경보를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무시하고 대비하지 않음으로 심각한 피해와 파괴를 당한다면서 ‘엎드려야 산다’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현대 교회는 기도 없이 점점 타협, 타락, 무기력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서 표류한 지 오래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법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가 엎드리면 성령에 붙들리게 된다. 성령이여,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기 위한 우리 노력에 새 능력을 부어 주소서. 우리에겐 하나님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려고 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상황을 바꿔 주셔야만 한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이 기꺼이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아멘!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2:38과 3:19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If you do, times of spiritual strength will come from the Lord.) 아멘! 회개, 헛된 행실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선물을 주시고 영적인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거룩함으로 부르심은 더 이상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자답게 살게 하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함께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더 이상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 곧 썩어질 것으로 헛된 행실에서 벗어나려 하지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거룩함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워드 스나이더 박사는 <21세기 교회의 전망>에서 “미래의 운명은 교회가 신실하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면 미래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실성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신실성, 교인의 신실성, 그것은 곧 오늘 우리들의 거룩함, 성결함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신실하고 성결하면 이 세상이 더욱 깨끗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벧후1:10)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여러분과 저를 부르시고 택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왜 우리가 성결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가 성결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우리가 성결해야 하는가? 성경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하고 성결한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닮아가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함께 부르심을 받은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을 더욱 굳게 함으로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시기를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대속해 주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거절과 배척을 능히 극복하려면 /눅4:14-30/ 송기성 목사 2019-05-21 02:52:28 read : 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옥스퍼드대학의 알렉산더 플로그하우스 교수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로 거절을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렵다”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로 거절을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거절당하는 것이 너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경험은 사람들로부터 거절
거절과 배척을 능히 극복하려면 /눅4:14-30/ 송기성 목사 2019-05-21 02:52:28 read : 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옥스퍼드대학의 알렉산더 플로그하우스 교수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로 거절을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렵다”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로 거절을 당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거절당하는 것이 너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경험은 사람들로부터 거절과 배척을 당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는 거절과 거부, 배척과 배신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실로 실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상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거절과 배척에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그 상처를 (scar) 별로 (star) 만드셨습니다. 거절과 배척,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절과 배척을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거절과 배척을 어떻게 대면하느냐는 것입니다. 거절과 배척을 잘못 대처하면 상처만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과 배척을 잘 대처하면 그것을 잘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성장과 성숙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1. 성령의 능력은 거절과 배척을 능히 극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셔서 그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로부터는 거절과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라나신 고향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마땅히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할 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물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면서 예수님을 단지 목수의 아들로 여기며 비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Doctor, heal yourself.)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그들이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고 말할 것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3:57에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밖에서는 사람들로부터 환영도 받고 존경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고향 사람들로부터는 칭송을 받기는커녕 거절과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거절과 배척을 당한다는 것은 결코 편치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능히 극복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히 그것을 극복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 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실로 성령의 능력으로 일관된 생애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되셨으며,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습니다 (눅4:1).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금식하셨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셨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으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거부와 배척으로도 성령의 능력을 받으신 예수님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는 사람에게는 거절과 배척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는 사람은 능히 모든 거절과 배척을 극복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뉴욕 양키스의 프로야구선수 요기 베라의 이야기입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그는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배트로 십자가를 그리고 잠시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친구이자 상대팀 선수인 조 개러지가 요기 베라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심판에게 타임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요기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나도 크리스천이네. 자네가 십자가를 그린다고 하나님이 자네 편만 들지는 않아. 하나님은 그냥 구경이나 하시도록 내버려두고 경기를 하는 게 어떤가?” 요기 베라는 조 개러지의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구경만 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야. 아니, 관중석에 앉아있기를 오히려 거부하시는 분이지. 하나님은 그라운드에서 우리와 함께 뛰기를 원하신다네. 자네와 나, 우리는 서로 믿는 하나님과 함께 경기를 하면 되는 것이네.” 예수님은 사도행전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증인’ (마르투스) 이 된다는 것은 ‘순교자’ 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에게는 거절과 배척이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능하게 좌절하거나 무력하게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은 능히 거절과 배척을 극복하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롬14:17)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 (갈5:22-2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2. 천부의 사명은 거절과 배척을 능히 극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 이르셨을 때 안식일을 맞아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자 책을 펴사 이사야61:1-2의 말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하나님께 받은 천부의 사명을 선포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예수님께서 감당하실 천부의 사명은 복음, 자유, 다시 보게 하는 회복, 그리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사렛 사람들은 천부의 사명을 받으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거절과 배척을 당한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엘리야와 엘리사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뿐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때 구원 받고 축복 받은 사람들은 천부의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종을 거부하고 배척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천부의 사명을 받으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낭떠러지와 십자가로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천부의 사명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천부의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거절과 배척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부의 사명에 목숨을 건 사람은 능히 모든 거절과 배척을 극복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영국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Robert Jermain Thomas, 1839.9.7. - 1866.9.5.)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865년 중국에서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참수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선교를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통역관 자리를 사임하고 다시 런던 선교회에 재임용을 받아 1866년 8월 9일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General Sherman) 에 승선하여 평양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 배는 대동강에서 조선군의 공격으로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배에서 뛰어내린 그는 조선 해군 부교(副校) 였던 박춘권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조선 해군은 사로잡은 사람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목을 베어 처형했습니다. 마침내 박춘권이 칼을 내리치려 할 때 토마스 선교사님은 말했습니다. “잠깐만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마지막 물건입니다.” 박춘권은 토마스 목사님이 가슴에서 꺼내 준 성경을 얼떨결에 받았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선교사님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말하고는 무릎을 꿇고 “이 일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이 열매로 맺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1866년 9월 5일 27세의 나이에 천부의 사명을 순교로 감당하였습니다. 그 후 그가 순교하며 기도드렸던 대로 조선 땅에 복음의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그를 죽였던 박춘권은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성경을 뜯어 벽지로 쓴 영문주사 박영식 집터에는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또한 선교사님을 죽인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는 박영식의 집에 들어갔다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성서번역위원이 되어 성경 번역에 큰 공헌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명혁,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신앙을 기리며’,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신앙을 기리며’,「뉴스파워」2013.3.8, 권오서,「땅끝까지 거침없이」2018.12, P112) 사도 바울은 천부의 사명을 받은 사람답게 사도행전20:22-24에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였습니다. 천부의 사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거절과 배척이 있습니다. 결박과 환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약하게 타협하거나 비굴하게 타락하지도 않습니다. 천부의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건 사람은 능히 거절과 배척, 결박과 환난도 극복하며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줄 믿습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거절과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동네 밖으로 쫓겨나시고, 낭떠러지까지 끌려가시며, 밀쳐 떨어뜨림을 당하실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주님의 길을 가셨습니다 (But he walked through the middle of the crowd and went his way.)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거절과 배척, 쫓겨남과 끌려감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벼랑 끝에 서서 떨어뜨림을 당할 위기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겨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예수님을 거절하거나 배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과 천부의 사명을 따라 거절과 배척을 능히 극복하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고 도리어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고난과 시련을 변화와 성장의 기회로 /시39:1-7/ 송기성 목사 2019-05-21 02:10:57 read : 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 2월24일 조선일보 1면 탑 기사를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회사 갔다 올게” 하고 집을 나선 아빠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몰려든 실직자들 줄에 섰다는 것입니다. 1월 고용 성적표에 의하면 실업자 122만 4천 명으로 19년 만에 최다 최악의 상태라고 합니다. 고난과 시련, 인생의 필
고난과 시련을 변화와 성장의 기회로 /시39:1-7/ 송기성 목사 2019-05-21 02:10:57 read : 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난 2월24일 조선일보 1면 탑 기사를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회사 갔다 올게” 하고 집을 나선 아빠는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몰려든 실직자들 줄에 섰다는 것입니다. 1월 고용 성적표에 의하면 실업자 122만 4천 명으로 19년 만에 최다 최악의 상태라고 합니다. 고난과 시련, 인생의 필수과정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누구나 예외 없이 겪게 되는 고난과 시련을 오히려 변화와 성장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을 결코 비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난과 시련을 불행으로 단정하지도 않습니다. 카네기는 “운명이 당신에게 신 레몬을 준다면 그것을 달콤한 레모네이드로 만들라” (When life hands you a lemon, make lemonade.)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 레몬으로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신 레몬을 축복으로 여길 것입니다. 신 레몬이 없으면 달콤한 레모네이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개인이든 민족이든 고난과 시련이 없으면 변화와 성장도 없습니다. 문제는 고난과 시련을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처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시편39편 다윗이 고난 중에 취한 고백을 근거로 고난과 시련을 변화와 성장의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1. 자신의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시편39편은 ‘고난당한 다윗의 고백’ (The Confession of a Sufferer)입니다. 당시 다윗은 크게 두 가지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또 하나는 그의 생명을 해치려고 하는 원수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불평과 원망, 독설과 악담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의 행위를 조심하여 그의 혀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인이 그의 앞에 있을 때에 그의 입에 재갈을 먹이고 잠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께서 그와 같은 고난을 그에게 행하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모든 죄에서 건져주소서 라고 하였으며 하나님께 주의 징벌을 그에게서 옮겨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와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며, 그의 죄를 용서하사 그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시39:8-13). 하나님께서는 물론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고난과 시련 중에 낙담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변화와 성장의 은총을 받게 된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원로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평양에서 태어나 공산치하에서 그는 매주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선생님께 매를 맞았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부모님과 생이별한 채 피난민 생활을 한 그는 무척 힘들고 고달픈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삶을 비관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고난과 시련을 변화와 성장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고난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어지간한 가난이나 배고픔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제 가슴 속에 흔들리지 않는 평강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고난의 훈련을 잘 받으면 우리 안에 평강의 열매를 맺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니 시련이 올 때마다 그 시련이 유익이 될 것임을 믿으십시오. 큰 시련이든 작은 시련이든 언제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훈련이 되어 ‘합격하는 믿음’ 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평강이라는 열매를 누리게 됩니다.” 아멘! 이사야53:7에 선지자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였을 때 취하신 언행에 대하여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하였을 때 자신의 언행을 조심하는 사람은 변화와 성장의 은총을 받습니다. 자신의 언행을 조심하는 사람은 범죄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인내하며 연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평강의 열매를 누리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일수록 자신의 언행을 조심함으로 변화와 성장을 이루며 평강의 열매도 누리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은 혀로 범죄할까봐 자기 입에 재갈을 먹이고 잠잠하였습니다. 심지어 선한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근심이 더 심하여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고 불이 붙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의 상한 감정을 사람들에게 퍼부어대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그런 식으로 자기 분노를 표출하였더라면 그의 근심과 후회가 더 막심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은 그의 연약함을 알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 기도를 드리면서 그는 그의 날이 사람이 보기에는 겨우 손 한 뼘 길이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없는 것’ (as nothing before you) 과 같이 지극히 짧은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모두가 허사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형통하여 든든히 서있다 싶을 때에도 결국엔 허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실 승승장구의 삶을 살아온 영웅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범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다윗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변화와 성숙의 은총을 받게 된 줄 믿습니다. 미국의 성공한 사업가이자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릴랜드 스탠퍼드 (Leland Standford, 1824~1893) 의 이야기입니다. 결혼 18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1884년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중 열다섯 살 된 아들이 장티푸스로 사망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그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비탄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꿈속에 나타나, “아빠, 슬퍼하기에는 할 일이 많아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절망에서 빠져나온 그는 ‘이 나라의 불쌍한 아이들이 곧 내 아이들’ 이라는 생각으로 1891년 대학을 건립하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릴랜드 스탠퍼드 주니어 대학교’ 라고 명명했습니다. 지금은 이를 줄여 스탠퍼드대학교라고 부릅니다. 스탠퍼드대학교 기념교회 벽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다. 또한 고통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고린도후서12:9에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고통을 당하는 중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하였을 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사람은 변화와 성장의 은총을 받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일수록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변화와 성장을 이루고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하며 간증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달았을 때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닌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생은 ‘그림자’ 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림자’ (첼렘) 는 ‘헛된 과시’, ‘환영’, ‘착각’ 이라는 뜻입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닙니다. 허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에 불과한 허상 곧 허무한 실존임을 망각한 채 헛된 일에 소란하며 분주하게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재물을 열심히 모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쌓은 재물을 누가 거둘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림자와 같은 인생은 허무와 허탈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다윗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자기 자신이 그림자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는 일에 분주하게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모든 것이 허사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둔 그의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으며 그의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반란도 극복하게 해주셨으며, 나라도 부강하게 해주셨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고 그가 널리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라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시40:5). 결국 다윗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변화와 성숙의 은총을 받게 된 줄 믿습니다. 전 국무총리 정홍원 안수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경남 하동 농촌 마을에서 12남매 중 10째로 태어났습니다. 산에서 나무하고 논일 밭일 거들며 성장했습니다. 학교 다니지 말고 집안일 도우라는 선친을 설득해 경남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진주사범학교와 성균관대 법대 야간과정을 졸업한 뒤 초등학교 교사로 6년을 지내고 준비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 1974년 검사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3년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져 최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때 그는 그가 소망을 두고 바라볼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음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총리가 되면서부터 ‘내가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당신이 시키셨으니 지혜와 담대함과 건강을 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매일 기도했는데, 그땐 더욱 바라볼 곳이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1서3:3에 사도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하였을 때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은 변화와 성장의 은총을 받습니다.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그 주어진 사명을 능히 감당하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일수록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심으로 변화와 성장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생각도 너무 많아 셀 수도 없나이다 라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의 유익과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67,71). 고난과 시련을 변화와 성장의 기회로 삼으려면 자신의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53:10-12/ 송기성 목사 2019-01-19 08:12:33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채근담에 “고통을 밑받침으로 하지 않은 성과는 토대 없이 지은 집과 같이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성과와 성취는 고난과 고통의 결실임에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사건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53:10-12/ 송기성 목사 2019-01-19 08:12:33 read : 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채근담에 “고통을 밑받침으로 하지 않은 성과는 토대 없이 지은 집과 같이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성과와 성취는 고난과 고통의 결실임에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사건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53장은 메시야 예언의 절정 부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고난받는 종의 노래는 결코 슬픈 노래가 아닙니다. 역설스럽게도 고난받는 종의 노래는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행복한 노래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행복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고난을 감수하셨으며, 행복한 노래를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고난을 감수할 때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53:10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며 질고를 당하게 하시기를 원하사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게 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속건제물’과 ‘속죄제물’의 차이를 정확히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속건제물은 부채를 갚거나 또는 죄값을 지불하여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 준다는 뜻도 있어 속죄제물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린 것으로만 언급되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대속적 죽음은 동시에 속죄제물과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10:9,10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오셨으며,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그 어느 아버지도 그 아들이 상함을 받게 하기를 원하며 질고를 당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독생자 예수님을 고난 당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구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뜻이 그렇다 할지라도 그 뜻을 복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대로 고난을 감수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영적 후손인 (시22:30) 그의 씨를 보며,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부활하심으로 (롬6:9) 그의 날이 길어 영원히 그의 나라를 다스리게 되셨습니다. 자기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은 그의 씨를 볼 것이라 (he will see his offspring.) 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의 씨’ 곧 ‘예수님의 씨’, ‘예수님의 후손’(his descendants)입니다. 예수님의 씨, 예수님의 후손에게는 예수님의 유전자 (DNA)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유전자가 있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2:5-11에 이렇게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라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요19:30) 하셨습니다.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고난 당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과 희생을 감수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씨를 보게 하시고 그의 날은 길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림으로 보게 되신 그의 씨는 바로 여러분과 저인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DNA 곧, 예수님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답게 겸손과 복종과 희생으로 고난을 감수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씨를 보고 그 날이 긴 행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53:11에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혜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가리켜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고는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린 수고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감수하고 감내하신 수고입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최악의 죄인이 당하는 극형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나의 의로운 종’ (my righteous servant)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당하실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지혜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그 어느 사람도 자기의 수고가 헛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의 수고가 헛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헛수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수고와 고난을 감수할지라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을 감수할 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이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죄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심으로 그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가치와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마족하게 여기실 예수님은 행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53:1-9에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니와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아멘!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12:2-3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라며 고난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며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죄악과 허물의 사함을 받고 질고의 치유와 관계의 평화를 누리며,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해 하시는 예수님을 본받으시기를 우리를 의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생 끝에 행복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53:12에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게 합니다. 고난을 감수하는 삶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 곧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함으로써 고난을 감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며,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해 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시기를 (벧전2:21)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 /신33:29/ 송기성 목사 2019-01-18 02:18:26 read : 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인간 최고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인간 최고의 상태인 행복에 대한 관심과 추구는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행복의 근원이시며 행복의 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좋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행복이 환경과 무관한 것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 /신33:29/ 송기성 목사 2019-01-18 02:18:26 read : 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인간 최고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인간 최고의 상태인 행복에 대한 관심과 추구는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행복의 근원이시며 행복의 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이 좋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행복이 환경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상의 환경에서 최악의 불행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의 동산 에덴에서 타락하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최악의 환경에서 인간 최고의 상태인 행복을 체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바로 산 증인입니다. 모세는 그 인생을 마무리 짓는 유언에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Israel, how happy you are! 신33:29)라며 그 백성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언적인 축복은 사실 자기 자신의 간증적인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는 적어도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많이 터뜨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험난한 광야에서 행복을 체득하였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 거기에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인생의 지혜가 있고 신앙의 교훈도 있습니다. 1.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의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해 오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곤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의 행복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하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행복해 한 최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There is no one like you, a nation saved by the Lord.)라고 함과 같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수 없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적이 많았습니다. 모세가 그토록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모세만큼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은 이스라엘 중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그 구원이 가져다주는 기쁨과 감격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느낄 수 없는 것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모세는 그 험난한 광야에서나 죽음 앞에서도 행복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의 행복입니다. 2016년 제11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국무총리상을 받은 박관태(47) 의료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려대 의대 입학 동기인 심재학씨와 ‟의사가 되면 함께 몽골에 가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자”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1999년 11월 악성림프종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 교수는 ‛내 몫까지 해달라’는 친구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2001년 몽골로 떠났습니다. 산부인과 의사인 그의 아내도 흔쾌히 그의 뜻을 따랐습니다. 2003년 8월 그는 아버지와 짧은 시간을 보내고 다시 몽골로 돌아가려는데, ‛이게 마지막이겠구나!’ 싶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3주 만인 8월 29일 아버지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소천 소식을 듣고 비행기표를 알아보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외아들에 상주인 그가 이틀 동안이나 빈소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앉아 울면서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게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 네게 정말 믿음이 있다면,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뭘 그리 가슴 아파하느냐?”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하나님께로부터 독한(?)소리를 들은 그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다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게 믿음은 있는가, 천국에 대한 확신은 있는가, 천국을 소망하는가…. 수 많은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흐뭇한 얼굴로 나를, 우리 모두를 지켜보실 것이다.” 아멘! 몽골 아가페기독병원 원장 박관태 선교사, 그는 ‟선교는 힘들거나 거창하거나 결연한 헌신 같은 것이 필요한 무거운 주제가 아닌 재미있고 행복하고 영화로운 한마디로 즐거운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박관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 기존 선교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박관태 선교사의 선교 행복론,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과 즐겁게 동행하는 사역에서 실감되는 행복인줄 믿습니다. 시편128:1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을 갖고 하나님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그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지간의 복을 주시고, 자손의 복을 주시며, 장수의 복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시128:2-6) 톨스토이는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의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에서 행복을 체득한 모세처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으로 불평불만의 불행자가 되지 말고 감사찬송의 행복자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의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그 뜻한 바를 끝까지 이루지 못하면 실망하고 실패감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축복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행복해 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라고 함과 같이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수 없이 불평과 원망의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배은망덕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대적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돕는 방패와 영광의 칼이시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적이 그들에게 복종하도록 대적의 높은 곳을 밟는 승리자가 되게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품고 있었습니다. 모세, 그는 비록 그가 그토록 원하였던 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있었기에 모세는 그 험난한 광야에서나 죽음 앞에서도 행복을 고백하며 그 백성을 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의 행복입니다. 던킨 도너츠의 창업자 윌리엄 로젠버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초등학교도 못나왔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하나님을 먼저 섬기며 살겠다며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한 주에 주급 20달러씩 벌어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했던 때부터 꼬박꼬박 십일조를 드리고 철저히 주일성수를 했습니다. 30세에 트럭 한 대를 구입해 보스톤 외곽에서 노동자들에게 도너츠와 커피를 팔기 시작한 그는 1955년부터는 체인 사업까지 펼쳐 전 세계 도너츠의 대명사인 ‛던킨 도너츠’라는 상표를 개발했습니다. 그는 72세 생일 축하 자리에서 성공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못 배웠습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왔고 그리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내 짐을 맡아주셨습니다. 내가 성공한 것은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한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은 내게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지식’보다는 ‛태도’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로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멘! 기존 성공의 이해를 바꾸어 놓은 윌리엄 로젠버그의 성공 행복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겸손과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실현되는 행복인 줄 믿습니다. 시편121:1-2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실족하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시고 보호해 주셔서 모든 위험과 환난을 면하게 해 주시며 그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시121:3-8) 빅토르 위고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에서 행복을 체득한 모세처럼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불평불만의 불행자가 되지 말고 감사찬송의 행복자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유종의 미,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 (독일격언)고 했습니다. 모세의 일생은 참으로 파란만장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임종시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체득한 행복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의 행복이며,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의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체험적인 신앙과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심으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불평불만의 불행자가 되지 말고 감사찬송의 행복자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구름이란 무엇인가?/ 나1:3/ 스펄전 목사/ 1855-08-01
구름이란 무엇인가? 나1:3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배움이 많은 사람들은 성령께 사로잡힐 때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 보다 더 크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유감스러운 점은 책을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도 종종 책중의 책이요 지혜의 근본인 성경은 참된 지혜를 줍니다. 사람들은 책이외도 인간의 마음을 공부함으로써 많은 것을 배웁니다. 동료들과의 대화중에 책에서 미처 발견치 못한 진리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또 자기 자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 봄으로써 수십권의 철학서적 보다 많은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외에도 대자연을 통해서 많은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자연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생물들에 드러난 것을 보게 됩니다. 어제 저녁에 들에 나가 구름을 보았습니다. 대자연이라는 대학에서 구름을 통해서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을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우선 푸른 하늘에 쫓는 뭉게 구름은 백보좌 심판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죽은자들이 무론대소하고 심판대 앞에서 주님의 준엄한 심판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이 생각이 지나가자 전도서 11:4 말씀이 떠올랐스니다.\\\\\\\\\\\\\\\"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바람이 부니 씨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구름이 일어나니 추수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부정적인 경고론, 신중론으로 인해 할 일을 과감히 추진하고 있지 못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구름도 무시하고 바람도 개의치 말며 씨뿌릴 때 씨뿌리고 추수할 때 거두어 들이자는 결심을 새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 영혼속에 깊이 묵상이 된 말씀이 오늘 아침의 본문 \\\\\\\\\\\\\\\"구름은 그 발이 티끌\\\\\\\\\\\\\\\" 이라는 귀절입니다. 이 말씀을 네가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 바람과 광풍이 있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다 측량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에도 자신을 숨기십니다. 심지어 발을 한 발짝 움직이시는 작은 행동에도 구름이 티끌처럼 일어나서 그 행하시는 길을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안전을 덮는 구름은 얼마나 짙고 짙은 구름일까요? 죄에 빠진 인류에게 창세기 3:15에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고 희미하게 구원의 계획을 보이시고는 구약시대 내내 당신의 독생자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으시고 은밀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희생제물들이 피를 흘리고 번제단의 연기로 불살라지는 순간에도 유대인들은 막연하게 구세주를 상상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비밀의 경륜은 하늘의 천사들도 분명히 알지 못했고 복음전하는 자들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고(엡3:9) 천사들도 그제서야 살펴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벧전 1:12) 갈보리 언덕에서 구속의 신비가 분명히 드러나기 전까지는 어느 천사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시는 일을 피조물에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올바르시고 의로우시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지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갈 때 어느 누구가 그 길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기근에서 구원하는 첩경임을 예측했겠습니까? 외적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괴롭힐 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누가 추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창녀의 혈통에서 메시야가 나오리라는 생각은 감히 누가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이처럼 언제나 숨겨진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마년 사람들은 묻습니다. \\\\\\\\\\\\\\\"도대체 이럴때 하나님은 뭘 하시는가?\\\\\\\\\\\\\\\" 어렵게 얻는 자녀가 시신이 되어 관에 누워있는 것을 볼 때 유한한 지성을 지닌 아담의 후예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불의한 자들이 벌받지 않고 살아갑니까? 왜 신앙좋은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왜 내 사업을 축복해 주시면 교회일에 충성코자 하는데도 사업을 번창케 해주시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께 이런 일들을 모두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지 마십시오.하나님은 설명해 주시지도 않으시고 설명하실 수도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설명해 주셔도 우리가 다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 모든것이 협력해서 선이 되었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에게 엄청나게 큰 일로 보이는 사건일지라도 하나님께 아주 작은 일이라도 진리입니다. 인간에게는 구름의 동요가 큰 일입니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발하며 귀청을 찢는 소나니가 쏟아질 때 인간은 대자연의 큰 위력에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큰 구름이 역사도 하나님에게는 발끝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오늘이 아침에 태산같이 큰 문제로 고통을 겪는 분은 안계십니까? 우리에게 태산같은 고통도 하나님께는 천칭위에 않은 한 티끌입니다. 하나님이 불어버리시면 일순간에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권고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벧전 4:7)\\\\\\\\\\\\\\\"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55:22)\\\\\\\\\\\\\\\" 짐을 대신 져주시는 분이 옆에 계실때 우리는 짐이 크고 작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고통의 짐이 크고 무겁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하나님의 어깨는 무궁하여 어떤짐도 지시기에 넓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태산같은 고난의 짐도 하나님은 \\\\\\\\\\\\\\\"발끝의 티끌\\\\\\\\\\\\\\\" 로 여기십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가볍게 여겨도 하나님은 매우 무겁게 여기십니다.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가벽게 여기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쉽자가에 못박을 정도로 죄를 중시하시고 엄청난 은혜를 주셔서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의 짐은 가볍게 여기시고 작은 죄라고 무시하는 것은 무겁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태버너클교회)
구원: 은혜인가 자유의지인가?(Salvation:Grace or Free Will)/ 요5:24/ 스펄전 목사/ 1855-02-23
구원: 은혜인가 자유의지인가?(Salvation:Grace or Free Will?) 요5:24 I. 서론 이 본문은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산성위에 갈린 최대의 대포입니다. 이 말씀으로 칼빈주의를 공격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는 이 말씀을 도리어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 포의 방향을 돌려 보고자 합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이말씀을 다음과 같이 분해합니다. 1. 인간은 의지가있다. 2. 인간의 의지는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3.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께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안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말씀은 그렇게 분해하는 것이 온당치 않습니다. 인간의 정상적인 신학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철학 조차도 자유의지라는 개념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유스런 행동자 (Free Agency)라는 개념은 인정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다(Free Will) 는 개념은 이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종교개혁가 말틴 루터는 누구든지 구원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자유의지를 인정한다면 그는 은혜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명백히 증거합니다. II. 1대지: 모든 자연적인 인간은 사망한 존재입니다. 너희가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하여 내게로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인간은 누구나 생명이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인 상태에서는 사망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세가지 의미에서 사망했습니다. 1) 인간은 법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아담이 먹은 날 그는 법적으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 안에 있던 모든 인간은 그날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롬5:12 \\\\\\\\\\\\\\\\\\\\\\\\\\\\\\\\\\\\\\\\\\\\\\\\\\\\\\\\\\\\\\\\\\\\\\\\\\\\\\\\\\\\\\\\\\\\\\\\\\\\\\\\\\\\\\\\\\\\\\\\\\\\\\\"이러므로 한사란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로 말미암아 정죄되어 사망이 선고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법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으면 그는 육신적으로 살아 있더라도 아무런 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유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고 투표권을 행사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법적으로 사망한 존재입니다. 2)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표현했습니다. 아담이 첫 범죄를 범하는 순간 인간의 영혼은 즉시 사망하였고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교통은 단절되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 여왕이라도 죽은 시신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의 의지가 힘과 자유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죽은 시신이 팔 다리에 힘이 남아있다는 논리와 같습니다. 3) 인간은 영원한 사망을 할 존재입니다. 앞의 두가지 사망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영원한 사망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영영한 불못에 들어가라\\\\\\\\\\\\\\\\\\\\\\\\\\\\\\\\\\\\\\\\\\\\\\\\\\\\\\\\\\\\\\\\\\\\\\\\\\\\\\\\\\\\\\\\\\\\\\\\\\\\\\\\\\\\\\\\\\\\\\\\\\\\\\\"는 심판주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불못에는 영원한 고통과 형벌만이 있을 뿐 아무런 소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망을 영원한 사망이라 합니다. 그 고통의 소리와 절망의 탄식은 영원할 것입니다. II. 2대지: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너희가 생명을 얻기위하여 내게로 오지아니하는 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나누어 주실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는 법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벌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죄사함을 받으며 모든 법적인 정죄가 철회됩니다. 하나님의 후사가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을 상속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당히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든 정죄의 판결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는 영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영적인 생명을 주시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허락하십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을 바라고 찿고 사랑할 수 있게됩니다.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육신의 생명을 다시주신 것처럼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있던 우리를 부르사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양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아무도 내 손에서 빼았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영원을 보내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IV. 3대지: 예수께 오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예수께오면 영생을 얻습니까? 그러나 이런 질문은 난센스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오게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예수께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예수께 오는 모든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께 스스로 나아오는 자를 거부하는 것도 잘못이고, 인간이 예수께 자유의지를 가지고 마음대로 올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V. 4대지: 그러나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는 그 의지가 예수께 오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내게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예수님께 오는 쪽으로는 도무지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무릎꿇고 빌어도 인간의 본성은 예수께로 오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혼인 잔치를 차려놓고 초청해도 오지않습니다. 인간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와도 아들을 죽이는 포도원의 청지기와 같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유롭다는 주장은 인간의 원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입니다. 원죄는 인간을 사망한 존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시신이 관을 스스로 뚫고 나올 수 있다면 자유의지론이 맞을 것입니다. 원죄를 가진 인간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의 무서운 결과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습니다. 원죄를 가진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는 진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유약한 의존적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로 오지않는 것이 바로 인간의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죄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성이 변명꺼리가 될 수 없습니다. 범죄자가 자기에게 악한 본성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범죄하였다고 핑계를 댄다면 그의 형벌은더욱 과중해 질 뿐입니다. VI. 결론: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되고 죄성으로 인하여 고민하게되고 결국은 죄사함을 받으려고 예수께 나아옵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죄와, 의와 심판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라도 능히 사람에게 영생을 주어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능히 예수께로 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면 아무라도 능히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3위1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라도 영생을 얻기위하여 예수께로 나아올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영생을 얻기 원하는 모든 사람을 예수께로 나아오도록 초청합니다. 그러나 예수께 나아온 사람들은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깨닫고 평생 그 은혜에 감격하며 그 은혜를 갚는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태버너클교회)
구원을 행위로 얻는 것이라면/ 갈2:21/ 스펄전 목사/ 2008-09-02
구원을 행위로 얻는 것이라면 갈2:21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나니 만일 의가 율법으로 인하여 온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갈 2:21). 자신이 행한 행위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은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은근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논박을 해 놓아도 다시금 슬며시 고개를 쳐들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그릇된 교리는 일단 교두보를 마련하고 나면 급속토록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갑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이 사악한 교리와 이것과 유사한 개념들이 발을 붙일 여지를 없애기 위해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바울은 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구원의 교리를 수호했고, 율법에 포함된 의식법이나 도덕법, 혹은 그와 유사한 법들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드는 사고 방식들에 대항하여 평생 격렬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행위를 통한 구원이라는 개념은 언뜻 보면 그럴싸하게 보입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명백한 진리라고 주장하고 실질적으로 아주 유익한 것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하면서, 동시에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라는 교리에 관해서는 나쁜 결과만 불러올 뿐일 것이라는 비난을 퍼부어 댑니다. 그리고 단언하기를, 만일 행위에 의한 구원이 온 사회에 전파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미덕들이 권장 받는 도덕적인 사회에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역사적 실례를 살려보자면,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이상한 교리가 전파된 곳에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미덕들이 풍성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이전보다 희박해지곤 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위의 미덕이 강조되면 될수록 사람들의 도덕성은 밑으로 밑으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전파된 곳에는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던 사람들의 생에서도 고귀한 미덕들이 나타나곤 했었습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자기 의는 그릇된 종교의 핵심입니다. 그들은 어떤 일은 하건 간에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몸을 학대하거나 금식을 하고 또 긴 성지순례에 나서기도 합니다. 즉,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들이 만든 우상 앞에 온갖 수고와 노력을 다 바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조금 열심히 있다 싶은 신자들에게는 늘상 자기부인이라든가 고행, 혹은 수많은 기도들과 성사,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수행들을 통하여 구원받을 만한 존재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그릇된 사고방식은 어느 정도는 무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법에는 무지하기 마련이고 진정한 거룩함이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있어서는 율법 전체를 잘 행하다가도 그 중의 단 한가지라도 그르치게 되면 그 잘못 하나로 인하여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이전에 한번이라도 죄를 지은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을 통하여 의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즉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엄청나게 무지합니다. 자기 의를 운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공공연히 비난받을 만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죄가 없다손 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삶을 정직한 눈으로 되돌아본다면, 그들은 곧 자신이 행한 행위 중 최상의 것을 시작할 때 그것을 시작하게끔한 동기 속에 불순한 것들이 섞여 있었거나, 혹은 그 일을 다 행한 후에는 또 그 일로 인하여 스스로를 치하하면서 몹시 젠체하는 마음을 지니는 잘못을 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은 수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인간을 자기 의라는 그릇된 교리에 솔깃하게 만드는 것은 비단 무지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교만으로 인해 자기 기만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자비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위대한 왕 앞에 부복하고 그분께 죄의 용서를 빌며 자비를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이 영 내키지 않습니다. 그는 그분의 자비와 축복을 간구해야 하는 초라한 존재로 취급받는 것이 몹시 싫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거나, 혹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에서 우리를 구출해 주시겠지만,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를 집어넣으려는 사악한 교리를 끝까지 붙들고 있겠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행위를 붙들고 있겠다면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강단에서 인간의 혼을 파멸로 이끄는 그 사악한 교리의 핵심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제가 보여드릴 두 가지 죄악에는 모두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고 인정하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이 죄들을 지적하는 동시에, 저는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죄악에 빠져 있는 가도 밝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진정으로 믿는 자들은 이러한 죄악들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Ⅰ. 이 두 가지 큰 죄악에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죄악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첫째로, 이 죄악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데 큰 방해가 됩니다. 즉, 그분의 은혜를 회피하며, 거부하고, 거절하며,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 혹은 그분의 은혜를 거부합니다. 쓸데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분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의가 율법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입니다. 만일 혹자가 율법을 지키고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고 여러 종교적인 고행을 견디어냄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는 분명 자기 자신에 관한 한 하나님의 은혜를 그저 가외로 덧붙일 수 있는 덤 정도로 생각하고 한쪽으로 제쳐놓아 버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 얼마나 큰 죄악입니까?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고 있으니 말입니다. 행위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마련인데, 이것 또한 죄악된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노력하는 그만큼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 나머지 부분을 벌충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아나 자신의 느낌, 혹은 자신의 공로나 기도,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외한 자신 속의 그 어떤 것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거부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신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와 병행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6을 보십시오. 『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행위로 된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행위는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롬 11:6). 누군가가 인간의 행위나 고행,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을 구원의 근거로 제시하는 교리를 전파한다면,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전혀 신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희망을 두고 있는 한은, 결코 구속주를 쳐다보지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미 놓여 있는 반석 위에 또 다른 반석을 놓을 순 없습니다. 만일 또 다른 반석을 놓으려는 시도를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반석을 경멸하는 죄를 짓고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적 건축자들이 한쪽에 버려놓은 돌을 가져와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는데, 그들은 그 옛날의 건축자들과 똑 같은 자들입니다. 자신의 의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은혜를 강탈하려는 자와 같습니다. 그들은, \\\"우린 은혜 같은 거 원치 않습니다. 값없는 자비도 필요 없습니다. 혼자서도 잘한다구요.\\\"라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새 언약에서 우리는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 언약에 들러붙어 있는 자들에게 있어 새언약이란, 그저 옛 언약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아니꼬운 존재에 불과합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두 번째 큰 죄악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구원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옳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엇 하러 죽으셔야 했다는 말입니까? 혹자는 감히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여, 당신의 죽음이란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필요도 없는 고통을 겪으셨더군요.\\\" 그들은 감히, 그분의 자비를 그저 쓸데없는 죽음을 몰려고 한 지혜롭지 못한 열정 정도로 치부하려 듭니다. 감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실로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이 죄악에 탐닉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그분 외의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혹은 자신들의 의지나 행위로 충분히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전파하고 있다면, 그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자입니다. 만일 인간이 오직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범죄자들에게는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는 인간들에게 열려 있는 자비의 문을 쾅 닫아버리는 자와 같습니다. 그는 죄인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박탈하고 죄악 가운데 죽게 만들려는 자입니다. 그는 돌아온 탕자들을 다시 되돌려보내고, 죽어가면서 낙원을 갈구하는 강도의 요청을 묵살하려 드는 자들입니다. 만일에 정말로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수많은 이들은 하늘나라의 문도 구경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죄의 본질에 관한 설명은 이 즈음에서 그만두겠습니다. 이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Ⅱ.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이 두 가지 큰 죄에 빠져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러한 죄에 빠져 있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들 스스로를 돌아보고, 이 저주스러운 생각이 마음속에 숨어 있지는 않나 살펴보십시오. 만일 그런 죄악들이 발견되거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것들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복음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도 이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에는, 이제껏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 어떤 사실보다 더 놀라운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계시를 경히 여겨서 \\\'그 정도는 아니야.\\\'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빈말로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야.\\\'하는 말을 한 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그저 기도할 때나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나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유익을 얻고, 또 온 가족이 축복을 얻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까? 이 보배로운 진리들을 하찮게 여긴다면, 그는 하찮게 여기는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짓을 하는 죄인들은 바로 죄에 대해 아무 자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상냥하고 정직하며 관용적인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 타고난 미덕들만 있으면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주변인들에게 호감을 주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생각에 빠져 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자들로 분류됩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과는 달리 또 오로지 절망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이런 목소리를 냅니다. \\\"저는 정말이지 너무 큰 죄인이예요. 전 구원을 받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 많아요. 예수님께서도 저의 이 더러운 죄를 다 씻어낼 순 없으실 거예요.\\\" 아, 친구여, 자네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분의 능력과 권능을 제한하는군. 낙담에서 빠져나오게. 자네가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자네는 결코 그분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네. 자, 이제 이 즈음에서 마지막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진정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깊은 죄의 자각과 함께 큰 기쁨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Ⅲ.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이러한 죄들을 짓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은 앞서 지적한 죄악들을 혐오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방해하거나 헛되이 만드려드는 생각 자체를 참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오직 그분의 은혜만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혹시 어느 정도는 당신 자신에게 신뢰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말하자면, 자선행위나, 기도회 참석 횟수, 혹은 수많은 눈물의 방울방울, 혹은 교회에서의 직분, 또는 주일 학교에서 열심히 봉사한 경력, 아니면 이와 유사한 행위들을 그리스도의 보혈 옆으로 슬쩍 가져다 놓고 자신의 희망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제발, 그런 건 꿈도 꾸지 마시길! 여러분 중에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길 바랍니다. 오히려 제가 방금 묘사한 그릇된 생각 때문에 마음이 몹시 괴로워지는 분들만 있기를 소망합니다. 모두들 그러합니까?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오직 은혜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앞서 언급한 두 번째 죄악과도 무관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신뢰합니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사셨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위대한 대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더 풍성히 알아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대속자를 보내셔서 죄는 치시고, 죄인은 살리신 그 놀라운 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아들조차 아끼지 않으신 그 사랑을 감히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하실 만큼 가치 있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사랑을, 결코 끝이 없을 그 영원한 사랑을 찬양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형제들이여?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점점 그분과 닮아 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이며, 그분을 닮아가고 있고, 그분이 헛되이 죽으신 것이 아니란 사실을 날마나 새롭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진정한 삶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셨고, 영원한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었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복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지옥의 문을 닫았고, 그 대신 하늘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 죽으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완성시켰습니다. 이것은 허황된 망상이나 삼류 로맨스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분은 실로 이 땅에 오셔서 그 모든 일을 이루셨고, 오늘날 우리는 그분의 자비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을 헛된 것으로 생각할 위험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였고, 그 은혜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믿기에, 저는 제 혼에 큰 평안을 느낍니다.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도다』라고 하셨으니, 그분의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단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의 피를 제 손에서 요구하시지 않을까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오늘부터 더욱더 열심히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옥을 경고해 주고 복음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태버너클교회)
구주의 보배로운 피(The Savior's Precious Blood)/ 벧전1:19/ 스펄전 목사/ 1855-08-12
구주의 보배로운 피(The Savior’s Precious Blood) 벧전1:19 I. 서론 독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푸줏간의 종교라고 비난 함. 그 이유는 피에 관한 말씀이 많기 때문. 그들의 말대로 기독교는 피의 종교인데, 오늘 본문에서 그 피를 가리켜 ”보배로운 피”라고 말함. 보통 사람의 피나 짐승의 피와는 달리 매우 고귀한 피라는 의미. 그리스도의 피는 왜 그렇게 보배로우며, 그 능력이 어떠한가? II. 피의 귀중함 1.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피를 귀중한 것으로 여기셨음. 심지어 짐승의 피라 할지라도 인간이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하셨음. 창9:4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지니라” 레위기 7:26 ”너희의 사는 모든 곳에서 무슨 피든지 새자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식물도 음식으로 주시고 동물도 음식으로 주셨으나, 고기와 더불어 피를 먹는 것은 금지하심. 이와 같이 짐승의 피도 경시될 수 없는 거룩성을 가지고 있음. 2. 사람의 피가 거룩함은 말할 것도 없음. 창9:6 ”무릇 사람이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를 흘릴 것이니.” 민 35:31 에도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민 35:33 ” 피는 땅을 더럽게 하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피를 이처럼 귀중히 여기시고 피 흘린 죄는 반드시 살인자의 피를 흘림으로만 갚을 수 있다고 하심. 심지어 사고나 부주의로 피를 흘린 경우에도 도피성에 피하여 있는 경우에만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음. 살인죄나 과실치사죄를 막론하고 피를 업신여긴 죄는 엄중하게 처벌받도록 하심. 3. 보통 인간의 피가 이처럼 귀중한데 성도의 피는 얼마나 귀중한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 하심.” 순교자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신 원하심이 임하게됨. 4. 그러나 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 그리스도의 피임. 이 피는 너무 거룩하므로 행 20:28 에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 그리스도의 피를 하나님의 피라 했음. 그리스도의 피는 수천 수백 가지의 유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지만 다섯 가지로 요약해보고자 함. III.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1.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음. 레위기 17:11, 히 9:22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향기로운 향료도 죄를 사할 수 없고, 젖과 꿀도 죄를 사할 수 없음. 은과 금도 죄를 사할 수 없고, 눈물 콧물도 죄를 사할 수 없음. 오직 피흘림으로만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대 명제임.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제일 원리임. 죄는 거저 용서받을 수 없고 반드시 생명으로 속해야 한다는 것임.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대신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속죄의 피로 받으심. 그러나 짐승의 피는 모두 그림자로서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실체를 가리키는 것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없으신 분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속하시려고 그 무고한 피를 흘리신 것임. 그 피는 짐승의 피처럼 자주 반복적으로 흘릴 수 없는 것이고, 단번에 영원히 그 죄를 속하신 것임. 사람은 아무리 머리 깎고 자기 죄를 반성해도 자기 죄를 씻을 수 없음.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그 죄를 덮어버리는 순간 죄사함을 받고 양심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임. 그리스도의 보혈을 자신의 죄에 덮는 순간 하나님과 화친하게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얻게되는 것임. 날마다 칼을 가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친구되시고, 동행하시고, 은혜주시고, 사랑을 부어주심. 이것이 보혈의 가장 위대한 능력임. 요일 1:7, 계7:14, 사 1:18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살인, 절도, 간음, 사기, 우상숭배들 어떤 죄라도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게 함. 2. 그리스도의 피는 보호하는 능력이 있음. 애굽의 장자가 다 죽을 때도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에는 비극이 임하지 않았음. 사망의 천사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건드릴 수 없었음. 출 12:13. 내 능력, 내 재물, 내 재능으로 인하여 나는 안전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나를 비웃고, 나를 망치고, 나를 바보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보혈은 천상 천하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보호능력을 가짐. 3. 그리스도의 보혈은 변호해 주는 능력이 있음. 히12:24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벨의 피는 죄없이 가인에게 죽었노라고 부르짖었음. 아벨의 피는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하고 가인에게 복수해 줄 것을 부르짖었음.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은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함.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못하나이다.” 그 피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변호함. 죄가 없다고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지만 이 무죄한 피가 대신 흘려졌으니 이 피를 보시고 저들의 죄를 용서 해달라는 부르짖음임. 4. 그리스도의 보혈은 사단을 이기는 능력이 있음. 계 12:11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리스도의 보혈은 지옥을 떨게 만들고 마귀와 귀신들을 굴복시키는 능력이 있음. 그리스도의 보혈은 승리의 보혈임. 5. 그리스도의 보혈은 성화 시키는 능력이 있음. 히 9:13-14.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게 함” 요 6:55 ”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 피는 우리를 깨끗게 하는 음료임. 영적으로 더러워진 성도들을 정결케하는 탁월한 음료임. 이 피를 마음껏 마시라. 6. 그리스도의 보혈은 성도를 결합시키는 능력이 있음.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피로 막한 담을 헐고 하나가 되었다 고함.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밖에 없음.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입을 다물고 하나될 수밖에 없음. 구속의 은혜를 말할 때에 누구나 하나가 됨. IV. 결론 이 보배로우신 피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거저 주시는 것. 지옥에서 해방하고,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고, 멸망에서 해방하고, 마귀에게서 해방하고, 죄악에서 해방하고, 불안에서 해방하는 보혈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오로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자 믿음으로 나올 대 그 능력은 나타나는 것임. 믿음으로 우리 영혼에 그 보혈을 마시고, 믿음으로 그 보혈의 능력을 우리 삶에 적용할 때 그 능력은 실제로 나타나는 것임.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죄를 씻으소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를 보호하소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게 마귀를 이길 능력을 주소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잔을 채우소서. 나를 성화 시키소서. 이것이 성도의 기도가 되야 합니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태버너클교회)
구주의 보배로운 피(The Savior's Precious Blood)/ 벧전1:19/ 스펄전 목사/ 1855-09-02
구주의 보배로운 피(The Savior’s Precious Blood) 벧전1:19 I. 서론 독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를 푸줏간의 종교라고 비난 함. 그 이유는 피에 관한 말씀이 많기 때문. 그들의 말대로 기독교는 피의 종교인데, 오늘 본문에서 그 피를 가리켜 ”보배로운 피”라고 말함. 보통 사람의 피나 짐승의 피와는 달리 매우 고귀한 피라는 의미. 그리스도의 피는 왜 그렇게 보배로우며, 그 능력이 어떠한가? II. 피의 귀중함 1.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피를 귀중한 것으로 여기셨음. 심지어 짐승의 피라 할지라도 인간이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하셨음. 창9:4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지니라” 레위기 7:26 ”너희의 사는 모든 곳에서 무슨 피든지 새자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식물도 음식으로 주시고 동물도 음식으로 주셨으나, 고기와 더불어 피를 먹는 것은 금지하심. 이와 같이 짐승의 피도 경시될 수 없는 거룩성을 가지고 있음. 2. 사람의 피가 거룩함은 말할 것도 없음. 창9:6 ”무릇 사람이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를 흘릴 것이니.” 민 35:31 에도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민 35:33 ” 피는 땅을 더럽게 하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피를 이처럼 귀중히 여기시고 피 흘린 죄는 반드시 살인자의 피를 흘림으로만 갚을 수 있다고 하심. 심지어 사고나 부주의로 피를 흘린 경우에도 도피성에 피하여 있는 경우에만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음. 살인죄나 과실치사죄를 막론하고 피를 업신여긴 죄는 엄중하게 처벌받도록 하심. 3. 보통 인간의 피가 이처럼 귀중한데 성도의 피는 얼마나 귀중한가?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 하심.” 순교자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신 원하심이 임하게됨. 4. 그러나 이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 그리스도의 피임. 이 피는 너무 거룩하므로 행 20:28 에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 그리스도의 피를 하나님의 피라 했음. 그리스도의 피는 수천 수백 가지의 유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지만 다섯 가지로 요약해보고자 함. III.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1.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있음. 레위기 17:11, 히 9:22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향기로운 향료도 죄를 사할 수 없고, 젖과 꿀도 죄를 사할 수 없음. 은과 금도 죄를 사할 수 없고, 눈물 콧물도 죄를 사할 수 없음. 오직 피흘림으로만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대 명제임.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시는 제일 원리임. 죄는 거저 용서받을 수 없고 반드시 생명으로 속해야 한다는 것임. 그러나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대신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속죄의 피로 받으심. 그러나 짐승의 피는 모두 그림자로서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실체를 가리키는 것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없으신 분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속하시려고 그 무고한 피를 흘리신 것임. 그 피는 짐승의 피처럼 자주 반복적으로 흘릴 수 없는 것이고, 단번에 영원히 그 죄를 속하신 것임. 사람은 아무리 머리 깎고 자기 죄를 반성해도 자기 죄를 씻을 수 없음.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그 죄를 덮어버리는 순간 죄사함을 받고 양심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임. 그리스도의 보혈을 자신의 죄에 덮는 순간 하나님과 화친하게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얻게되는 것임. 날마다 칼을 가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친구되시고, 동행하시고, 은혜주시고, 사랑을 부어주심. 이것이 보혈의 가장 위대한 능력임. 요일 1:7, 계7:14, 사 1:18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살인, 절도, 간음, 사기, 우상숭배들 어떤 죄라도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게 함. 2. 그리스도의 피는 보호하는 능력이 있음. 애굽의 장자가 다 죽을 때도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에는 비극이 임하지 않았음. 사망의 천사가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건드릴 수 없었음. 출 12:13. 내 능력, 내 재물, 내 재능으로 인하여 나는 안전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나를 비웃고, 나를 망치고, 나를 바보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보혈은 천상 천하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보호능력을 가짐. 3. 그리스도의 보혈은 변호해 주는 능력이 있음. 히12:24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아벨의 피는 죄없이 가인에게 죽었노라고 부르짖었음. 아벨의 피는 자신의 무죄함을 변호하고 가인에게 복수해 줄 것을 부르짖었음.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은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함.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못하나이다.” 그 피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변호함. 죄가 없다고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지만 이 무죄한 피가 대신 흘려졌으니 이 피를 보시고 저들의 죄를 용서 해달라는 부르짖음임. 4. 그리스도의 보혈은 사단을 이기는 능력이 있음. 계 12:11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리스도의 보혈은 지옥을 떨게 만들고 마귀와 귀신들을 굴복시키는 능력이 있음. 그리스도의 보혈은 승리의 보혈임. 5. 그리스도의 보혈은 성화 시키는 능력이 있음. 히 9:13-14.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게 함” 요 6:55 ”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이 피는 우리를 깨끗게 하는 음료임. 영적으로 더러워진 성도들을 정결케하는 탁월한 음료임. 이 피를 마음껏 마시라. 6. 그리스도의 보혈은 성도를 결합시키는 능력이 있음.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피로 막한 담을 헐고 하나가 되었다 고함.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밖에 없음.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입을 다물고 하나될 수밖에 없음. 구속의 은혜를 말할 때에 누구나 하나가 됨. IV. 결론 이 보배로우신 피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거저 주시는 것. 지옥에서 해방하고,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고, 멸망에서 해방하고, 마귀에게서 해방하고, 죄악에서 해방하고, 불안에서 해방하는 보혈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오로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자 믿음으로 나올 대 그 능력은 나타나는 것임. 믿음으로 우리 영혼에 그 보혈을 마시고, 믿음으로 그 보혈의 능력을 우리 삶에 적용할 때 그 능력은 실제로 나타나는 것임.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죄를 씻으소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를 보호하소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게 마귀를 이길 능력을 주소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잔을 채우소서. 나를 성화 시키소서. 이것이 성도의 기도가 되야 합니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태버너클교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롬8:12/ 스펄전의 아침묵상/ 스펄전 목사/ 1855-02-0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롬8:12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온몸과 영혼과 힘을 다해 순종해야 할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의 계명들을 범한 우리는 또 그의 공의에 대해서도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하나님께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아무 빚도 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이 진 그 빚을 대신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성도는 더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의 긍휼에는 빚진 자지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절대 빚진 자가 아닙니다. 왠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이미 갚은 빚을 갖고 저를 송사하시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백성들이 어떤 빚을 졌든 하나님께서 그 모든 빚을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 죄를 영원히 도말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최대한으로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그 빚을 다 갚은 것입니다. 기록된 모든 죄악들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영수증까지 발부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빚진 자들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공의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께 빚진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제 구원받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빚을 하나님께 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잠시 서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심 없이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사 여러분을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처럼 수도 없이 많이 모욕했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한히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또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죄 가운데 죽어 있던 여러분을 어떻게 일으켜 주셨으며, 여러분의 영적인 생명을 어떻게 보존해 주셨으며, 여러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어떻게 지켜 주시고, 수많은 원수들이 길을 막고 공격할 때 어떻게 여러분을 도와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이 변했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에 대해 이처럼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그 길만이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길 수 있는 길입니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태버너클교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안전/ 롬8:33-34/ 스펄전 목사/ 1855-07-2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안전 롬8:33-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구주께서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는가? 그렇다면 이보다 더 안전할 수야 있는가! 복음을 아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실에서 어떤 논리의 힘도 꾸밀 수 없고 어떤 불신의 힘도 제할 수 없는 하나의 이유를 본다. 마음이 지나치게 편협되어서 그리스도께서 결국 멸망받을 자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내 말은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오늘날 그와 같은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들의 두뇌는 우둔해져서 자기들이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거짓이며, 신성 모독적 죄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면 하나님은 후에 그 사람을 다시 벌하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면 하나님은 후에 그 죄인을 결국 정죄하신다고 말한다.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나는 그와 같은 무서운 오류를 다만 말하기에도 분개를 금치 못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셔서 구주께서 위하여 피를 흘려 구원하신 아담 후손 중 한 사람이라도 결코 벌하지 않으신다. 그렇다. 내 영혼아! 만일 네 주께서 너를 위하여 네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면 어찌 네가 형벌을 받으리요! 주님께서 너를 위해서 죽으셨는가? 내 영혼아! 만일 예수님께서 너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면 그는 네게 구주일 수 없다. 그렇지만 만일 예수님께서 너의 구속자시며, 너의 보증인으로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라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 그리고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그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만일 구주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없이 한다면, 그의 죽으심의 공적을 가산한 구주의 영생이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책에는 믿는 자를 정죄하는 죄란 하나도 없다. 우리의 죄는 다 아사셀의 머리에 얹혀졌다(레위기 16:6-10, 20-22). 신자가 범하는 죄로서 그를 저주할 힘을 가진 죄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것을 자처하심으로 죄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죄는 그를 정죄했다. 그리고 죄가 그를 정죄한 까닭에 죄는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믿는 자여, 그대의 모든 죄와 죄책 그대의 모든 범죄와 불법의 속함을 받았다. 그대가 범죄하기 이전에 벌써 속함을 받았다. 이것이 그대가 받은 구원의 보장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또한 모든 정욕으로 검어졌을 지라도 담대히 나아와 아세셀의 머리에 그대의 손을 얹을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그 머리에 그대의 손을 얹고 그 아사셀이 광야로 이끌려 가는 것을 볼 때 그대를 기뻐 손벽을 치며 \\\\\\\\\\\\\\\"다 이루었다. 죄가 사해졌다\\\\\\\\\\\\\\\"고 개가를 부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알고자 하는 전부이다. 구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그렇다면 나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 가운데 계속 거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아무 것도, 내가 주 예수님의 모든 교회에서, 나의 모든 죄가 나에게서 떠나간 것을 이같이 자랑하는 것을 막지 못하리라! 오, 주님의 죽으심이 실로 기이하도소이다. 주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발을 영원히 사랑의 반석 위에 세우심이여, 주께서 거기에 그들의 발을 굳게 지키시리이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영국 런던 메트로폴리탄태버너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