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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호 (1) 동양인 유일 미국 올해의 중소기업인상
고종호 (1) 동양인 유일 미국 올해의 중소기업인상 2009.06.25 18:04 지난 5월19일, 미국 백악관 직속 행정기관인 중소기업청(SBA)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전 미국 올해의 중소기업인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이 시상식에서 내가 회장으로 있는 '필로스 테크놀로지'가 동양인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돼 자랑스런 트로피를 받았다. 시카고에 본사를 둔 우리 회사는 지난해에 미국내 매출만 8000만달러를 올려 주변을 놀라게 했다. 티타늄 나노 열처리 세계 특허를 가진 '필로스 테크놀로지'는 아들 새뮤얼 고(32)가 사장으로 있는데 아들에겐 이 시상식 전 카렌 밀스 SBA청장과 단독으로 면담하는 시간도 주어졌다. 일전에는 오바마 대통령 앞에서 중소기업 대표로 연설까지 하는 영예를 누렸다. 나는 세계 각국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17년 전 미국에 도착해 지내온 그동안의 내 모습을 조용히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감격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저 인내하며 눈물 뿌려 기도했는데 이런 귀한 선물을 주셨군요.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기도하는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느 때였던가. 우연히 '하나님이 하셨어요'란 책 제목을 본 적이 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한마디면 족하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은 연주자이셨고 나는 악기였다. 때론 곁길로도 빠지고 반항도 했지만 돌이켜 보면 내 자리는 언제나 주님이 품어 주신 따뜻한 보금자리였음을 고백하게 된다. 내 나이 올해 65세. 인생의 종반부를 향해 발걸음을 시작했다. 이 지면을 통해 그동안 내 삶에 좌정하셨던 주님과의 이야기를 풀어 놓으려 한다. 잘못한 것, 실패한 것을 모두 내놓고 이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나누고자 한다. 그래서 나를 만나 주시고 힘 주시고 능력을 허락하신 좋으신 주님을 여러분도 꼭 만나길 기도한다. 우리 집안은 내가 4대째 신앙이니 아들과 손녀까지 합치면 6대로 이어지는 집안이다. 고조할아버지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뒤 그 맥이 계속 이어져 왔다. 나 역시 모태부터 예수를 믿었고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조부와 선친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선친은 기독교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일본에 건너가 대학에서 공부한 뒤 다시 귀국하셨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며 결혼을 해 1945년 나를 낳으셨다. 아버님은 수학교사이셨는데 이와는 다르게 금속의 표면처리를 하는 도금을 연구하셨다. 금속 쪽에 조예가 있고 일본에서 이 분야의 일을 좀 하셨는지는 몰라도 아예 연구소 간판을 걸고 도금연구에 몰입하셨다. 그러나 돈 버는 재주는 영 없으셔서 이 때문에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은 엄청나게 고생을 해야 했다. 나는 부친의 권유로 미션스쿨인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 농대에서 농기계 분야를 전공했다. 졸업한 뒤 국제전선이란 기업에 취직을 해서 근무를 하는데 내 길은 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파고들었다. "직장생활이 뿌리가 굳어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당장은 힘들어도 내 사업을 하자. 그러려면 용단을 내려야 한다." 나는 직장에 출근한 지 일주일만에 사표를 썼다. 배짱이 좋은 것인지 무모했던 것인지 모르지만 아버님이 연구하시던 도금기술을 나도 배우기 시작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장로 약력 △삼보금속 대표이사(1970∼1993) △한국도금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중소기업진흥공단 연수원 강사 △현 미국 필로스 테크놀로지사 회장 △현 한국 ㈜PLS테크 회장 △현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새마을 훈장 협동장 포상
고종호 (10) 판로 막히자 적자 허덕… 한때 자살 결심
고종호 (10) 판로 막히자 적자 허덕… 한때 자살 결심 2009.07.07 21:30 미국 앨라배마 버밍햄시로 투자 이민을 간 나는 안경테 제작 및 도금 공장을 운영했는데 생각과 달리 적자를 계속 보았다. 제품은 좋았으나 판로가 제대로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에서 동양인을 은근히 무시하는데다 적극적으로 우리 영업을 방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같은 미국이라도 이곳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동양인이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것 자체를 막으려고 했다. 나는 늘상 기도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 도착한 직후 한인교회를 찾아가 목사님께 투자 이민온 것을 설명 드리고 회사 이름을 지어줄 것을 부탁해 '필로스'란 이름을 받았다. 요한복음 15장 14절에 등장하는 '주님은 나의 영원한 친구'란 뜻이다. 여기에 '테크'를 덧붙여 '필로스테크'라고 회사 이름을 지었다. 공장 직원은 30여명 정도였는데 미국의 인건비가 보통 센 것이 아니었다. 잔업을 하면 몇 배나 더 주어야 했다. 공장에는 물건이 쌓여가는데 판매는 더디니 속이 타들어갔다. 그러나 인내하면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면 무슨 수가 날 것이라 믿었다. 이곳에는 한인교회 중에 순복음교회가 하나도 없었다. 마침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임직 동기인 김춘 장로가 목사가 되어 이곳에서 나와 함께 버밍햄순복음교회를 창립했다. 그는 목사가 된 후 이름을 '김조운'으로 바꾸었다. 나와 아내가 교회의 모든 행정과 예산 집행 등 중추적인 책임을 맡아 봉사했다. 사업은 어려웠지만 주일은 물론 틈틈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헌신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이겨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안되는 사업을 언젠가를 기대하며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 공장설립 3년이 되자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온 것 같았다. 여기서 더 기다린다고 해서 무슨 수가 나올 것 같지 않고 빚만 더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미국에 와서 내 전공인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역점을 두지 않고 공장을 경영해서 돈부터 벌겠다고 생각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 막상 버밍햄 공장 문을 닫으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가 고향을 떠나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이렇게 실패를 하리라곤 상상도 해보지 않아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사람이 극한 스트레스가 쌓이면 우울증이 오고 그 우울증은 자살을 하고싶은 마음까지도 갖게 만든다. 이것은 삶을 파괴하려는 사탄이 갖다주는 생각일 것이다. 나는 이 무렵 고통을 어디서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차를 몰다가 그냥 산속으로 불쑥 들어가 몇 시간씩 울면서 기도하고 부르짖었다. "하나님, 사업이 이제 버틸 힘이 없어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냥 죽고만 싶은데 아내와 다섯이나 되는 자녀들이 눈에 밟힙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다. 나는 결국 자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죽으면 보험금 10만달러 정도는 아내가 탈 것 같았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가다 운전 실수인 것처럼 가드라인을 들이받는 사고가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충돌 지점이 좋을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이상한 행동과 표정을 아주 예민한 아내가 찾아내고 말았다. 내가 죽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아내는 내 손을 잡고 울면서 애원했다. "애들과 나는 당신 하나만 보고 살아왔어요. 전 죽을 만한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지금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우리 믿음으로 이겨내요, 여보." 아내가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갑자기 힘이 솟구쳤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11) 공장 일감없어 파트타임 일하며 생계 해결
고종호 (11) 공장 일감없어 파트타임 일하며 생계 해결 2009.07.08 17:40 버밍햄을 떠나 애틀랜타로 가기 며칠 전 내가 출석하던 버밍햄순복음교회의 김조운 목사님과 차타누카 순복음교회를 담임하는 이자용 목사님이 문 닫는 우리 공장 사무실로 오셨다. 그리고 기도를 해주셨다. "하나님. 필로스 회사를 새롭게 하여 주시고 고 장로님에게 용기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심령을 위로해 주시고 담대함으로 사업을 다시 일으켜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믿음의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이자용 목사님이 얼마나 간절히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시는지 우리 부부와 김조운 목사님까지도 함께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애틀랜타에서는 공장을 자그마하게 시작했다. 한번 큰 실패를 맛보았고 그 여파로 아직 고통 중에 있었기에 매사가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한국에서부터 연구해 왔던 티타늄 나노 열처리기술을 개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래도 우리의 전문은 금속 표면처리였기에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고 애틀랜타에서도 이 일을 한다고 등록은 했지만 일거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와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밤낮으로 뛰지 않을 수 없었다. 주급을 받을 수 있는 일거리만 생기면 무조건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한때 한국에서 사장이랍시고 자가용만 타고 다녔던 내가 시간당 10여달러씩 받으며 일하려니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을 하지 않으면 밥을 굶어야 했다. 나야 회사일을 한다고 이리저리 다니기도 했지만 아내는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까지 두 곳은 기본이고 세 곳까지 다니며 억척같이 일했다. 어느 날 아내는 양 손의 손가락이 펴지지 않는다고 울먹였다. 이곳저곳에서 일하느라 얼마나 손을 많이 썼는지 류머티즘 관절염 증세가 온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 아내의 손을 잡고 울먹이며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아내의 손가락만 펴지게 해 주세요. 아내를 미국에 데려와 이렇게 고생시키고 여기에 이런 고통까지 주면 안 되지 않습니까." 아내의 손은 1년 후에 기적처럼 펴지고 고침을 받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아내를 통해 나를 기도훈련까지 시키신 것이다. 가끔 앨라배마 지역에서도 도금 하청이 올 때가 있었다. 예전 거래처에서 연락이 오면 일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왕복 6시간을 차 안에서 보내야 했다. 이때 내가 한국에서 올 때 가지고 온 조용기 목사님 카세트 설교테이프가 신앙을 다시 깨우는 자명종이 됐다. 나는 차 안에서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들으며 혼자 부흥회를 했다. 신앙적으로 성장을 하면 사탄의 공격도 따르는 것이 분명했다. 은혜가 충만하다가도 현실을 보면 너무나 암담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종호. 그래 여기 애틀랜타에 와서도 네가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 여전히 살기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느냐. 열심히 일해도 이제 너의 회사 '필로스테크'는 끝이다.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개발도 돈이 있어야 마무리하고 특허도 받을텐데 지금 빚만 잔뜩 있으니 그냥 포기해라. 그리고 이 세상을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어떻겠니." 예전의 우울증 증세가 조금씩 도지면서 자살의 유혹이 나를 향해 넘실거렸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12) 자포자기 심정으로 ‘고의 교통사고’ 충동
고종호 (12) 자포자기 심정으로 ‘고의 교통사고’ 충동 2009.07.09 21:03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다. 나란 존재가 너무나 보잘것 없고 고통의 상황에서 헤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포자기하게 되고 결국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또다시 고속도로에서 차 사고를 일으키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 그런데 실행하려고 할 때마다 아내와 손녀가 차에 동승해 기회를 만들 수 없었다. 그것은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아내가 의도적으로 손녀까지 데리고 차에 타겠다고 나서곤 했던 것이다. 손녀까지 데리고 있는데 최소한 자살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기가 막힌 방법으로 내 자살 충동을 단번에 치유하셨다. 어느 날 버밍햄 전력회사에 은도금 스위치 부품을 납품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혼자 달리고 있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동차 사고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동안 지내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고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몰던 밴이 갑자기 고속도로에서 방향을 잃고 미끄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사고를 내려고 한 상태가 아닌데 내 차가 이상해진 것이다. 나는 "어, 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방향감각을 잃은 내 차는 가운데 중간 녹지를 넘어 콘크리트 구조물과 연속적으로 부딪치며 반대편 차선을 침범하고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이제 나는 죽는다는 생각만이 의식을 맴돌았다. "하나님"이란 외마디 소리만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달려오던 차와 부딪치는 일만 남았다고 여겼다.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이미 여러 곳과 부딪치며 찌그러진 내 차는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가서야 브레이크가 먹히면서 멈췄다. 그런데 놀라운 속도로 달려오던 반대편 차들도 기적적으로 내 차 바로 앞에서 정지를 했다.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차가 찌그러져 문을 열 수 없었고 조수석을 통해 겨우 빠져나왔다. 내 차는 이 상태에서 살아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만약 내 옆자리에 아내가 평소처럼 나를 지키기 위해 탔더라면 목숨을 지키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남품할 무거운 동스위치가 충격을 받아 뒤에서 날아와 앞자리 조수석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큰일을 당할 뻔한 것이다. 이 일을 막아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더 큰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몸이 어느 한 곳도 다치지 않고 멀쩡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납품해야 하는 스위치 부품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만약 이 부품에 이상이 생기면 납품 계약 위반이 되어 크게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너무나 놀라 정신이 몽롱한 중에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서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고종호, 죽음 직전까지 갖다 오니 기분이 어떠니? 이래도 죽겠다는 말을 자꾸 할래? 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단다. 인내하고 기다려라. 믿는 자들에겐 고난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단다." 나는 즉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앞으로 죽겠다는 말은 입으로도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13) 아버지·아들 도움 받아 사업 매진 고난 이겨내
고종호 (13) 아버지·아들 도움 받아 사업 매진 고난 이겨내 2009.07.10 17:45 고속도로에서 엄청난 사고를 겪은 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니 계속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노라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심기일전해 기도하면서 사업의 어려움을 하나 하나 풀어나갔다. 그리고 기도와 찬양, 말씀 읽기, 예배 참석에 더 열심을 냈다.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면서 일에 대한 의욕이 되살아났다. 고난의 순간을 이겨내자 하나님이 만드신 멋진 반전 드라마가 준비돼 있었다. 신앙으로 다시 새 힘을 얻고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을 미국 특허청에 제출했다. 미국의 특허 심사는 아주 까다로워 금방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검토와 확인을 거쳐야 한다. 특허 신청을 위해 기술을 설명하고 보완할 부분이 많았다. 특히 한국어로 된 것을 영어로 번역해야 하는데 아무에게나 번역을 맡길 수 없었다. 기술이 유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를 번역하자면 일반적으로 영어를 잘한다 해도 전문적인 기술 용어를 해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번역 비용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나를 암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사무엘)을 미리 공대에서 화공학을 전공하게 하셨고 영어도 능통해 아들에게 맡기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다. 방법을 찾은 우리 부부는 너무나 행복했다. 특허는 한국어로 작성된 것을 완전히 번역, 특허 변호사에게 넘기기까지는 두 달 이상이 소요됐다. 당시 한국에 계신 아버님은 80세가 넘으셨는데 내가 목숨 걸고 기술 개발에 정진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노구를 이끌고 도와주러 오겠다고 하셨다. 한국에서 오신 아버님이 그동안 발전시킨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을 보시더니 두 눈을 크게 뜨셨다. "이미 네가 개발한 기술 수준이 내 상상을 초월해 너무 놀랍구나. 이대로 잘하면 필로스테크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기술을 가진 회사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이 결과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며 기적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겨지는구나." 감격해하시는 아버님의 격려는 기술 개발을 해온 내게 큰 힘이 됐다. 이때는 우리 환경이 너무 어려울 때라 아버님께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햄버거를 하나 사드려도 나를 생각해서인지 아주 맛있다며 잘 드시곤 했다. 아들의 세세한 마음까지 배려해주신 아버님이셨다. 환경이나 음식 모두 불편한 가운데서도 아버님은 우리 기술 개발에 직접 참여하시면서 필로스테크의 기술이 세계 최고가 되기를 기도해주셨다. 1998년 1월, 나와 아내는 새해 아침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저희가 이제 이곳 애틀랜타로 옮겨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고난과 역경이 있었지만 이를 통해 신앙을 성장시켜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어떤 고난의 파도가 닥쳐도 주님을 향한 믿음만큼은 변치 않게 하시고 필로스테크가 진정 하나님의 기업으로 바로 서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며칠 후 우리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하나님이 필로스테크를 위해 드디어 움직여주시기 시작한 것이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14) 쟁쟁한 美 회사 물리치고 대기업 납품 따내
고종호 (14) 쟁쟁한 美 회사 물리치고 대기업 납품 따내 2009.07.12 17:45 전혀 모르는 곳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내용은 나를 놀라게 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미국 원자력발전소에 기계를 공급하는 회사입니다. 납품할 부품들의 표면처리(도금) 회사를 찾는데 필로스테크도 참여하실 수 있는지 확인차 전화 드린 것입니다." 대기업에서 아주 작은 공장을 하는 나에게까지 전화를 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참여하겠다고 했더니 납품 설명회 일시와 장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의아해하다 그 이유를 기도중 깨달았다. 하나님이 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회사 실무자로 하여금 전화번호책을 보도록 만드셨고, 그곳에 작게 한 줄로 나와 있는 '특수표면처리 전문 필로스테크'를 눈에 띄도록 만드신 것이다. 설명회에 가보니 회사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이번 경쟁 입찰은 품질과 가격을 함께 보는데 미국의 쟁쟁한 표면처리 업체들과 불꽃 튀는 경쟁이었다. 그곳 직원들이 하청업체들을 위한 설명과 함께 도금해야 할 부품 샘플을 몇 개씩 나눠주었다. 그리고 이것을 이틀 안에 완벽하게 도금한 뒤 납품할 수 있는 단가까지 써서 함께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정성을 대해 도금 작업을 했다. 그리고 내가 맞출 수 있는 가격을 적어 제출했다. 그런데 다음날 당장 회사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대체 신기하네요. 저도 특수도금 전문가인데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고 단단하게 표면처리를 할 수 있지요. 그건 그렇고 단가도 그 가격에 만들 수 있다는 게 정말인가요. 제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아서요." 담당자는 신기한 듯 내 얼굴과 도금한 부품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나는 양심적으로 가격을 썼는데 다른 회사의 반 정도였던 것 같았다. 반면 도금은 제일 잘했기에 나를 믿을 수 없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 정도 실력에 이 가격이면 다른 회사 입찰은 더 이상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회사가 정말 우리 부품을 정확한 기일 내에 납품할 수 있을지 공장 실사를 해보고 싶습니다." 정신이 아찔했다. 우리 공장을 보면 규모가 너무 작아 계약을 하지 못하겠다고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공장을 깨끗이 청소하고 실사단을 맞았으나 그들의 표정에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도금제조 공정만은 자신 있게 보였다. 이런 여건에서 어떻게 그런 제품이 나올까 의심했던 그들은 실력을 보고나서 우리를 완전히 인정했다. 미국의 쟁쟁한 회사들 네 곳이나 물리치고 우리 회사가 최종 선정됐다. 그들은 내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고 사장. 우리는 당신의 도금기술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가 보유한 사무실과 공장을 무료로 빌려줄테니 이곳에 와서 일해 납품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공장은 작업에 필요한 기본적인 설비가 다 되어 있으니 아마 훨씬 일하기가 수월할 것입니다." 그 조건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 공장 안으로 우리 회사가 들어가면 전기세 및 시설사용 비용, 물류 비용이 전혀 들지 않아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우리 회사가 직원을 5명 정도 더 채용해 7개월 동안 열심히 일해야 생산할 수 있는 큰 계약이었다. 조인식을 하던 날 독일계 미국인인 그 회사 사장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파트너가 된 것을 축하합니다. 저는 이번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재능이 많으며 정말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필로스테크가 저희 회사와 함께 발전해나가길 원합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15) “열처리 기술 결실을” 교수 꿈꾸던 아들 설득
고종호 (15) “열처리 기술 결실을” 교수 꿈꾸던 아들 설득 2009.07.13 17:42 원자력발전소의 표면처리 하청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족이 많은 것은 이럴 때 유리했다. 아이들의 학교 여름방학과 겹쳐 전 가족과 멕시칸 직원 5명이 '핵발전소 프로젝트'에 참여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했다. 매달 회사 은행계좌로 어김없이 대금이 착착 들어왔고 내 골머리를 썩이던 빚들이 점점 줄어들어가는 것을 기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아쉬웠지만 7개월이 금방 지났다. 원자력 회사는 그동안 우리가 너무 일을 잘해 주어 고맙다며 곧 2차 발주가 있을 텐데 그때도 함께 일하자고 만족을 나타냈다. 그동안 나는 밀렸던 빚도 다 갚고 저축도 좀 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수지를 맞추어 보니 7개월간 50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인내하고 기다리며 기도한 결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자립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이 회사는 나중에 미국 쌍둥이 빌딩을 항공기로 공격한 9·11 테러의 영향으로 2차 공사가 무산돼 우리와 더 이상 일은 못했지만 필로스테크에겐 너무나 고마운 회사였다. 나는 7개월 동안 일하면서 우리 공장도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일리노이주가 미국 중공업 단지의 중심축이 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간구를 반드시 들어주신다. 2002년 9월3일 우리 필로스테크는 시카고 글랜드 하이츠시에 600여평의 공장을 마련하고 이사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동안 연구해 온 티타늄 나노 열처리 특허 및 기술개발에 집중했다. 나는 여기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당시 아들 사무엘은 매릴랜드대학 박사과정 중에 있었다. 아들은 박사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연구소에 들어가 전문기술을 개발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우리 회사로서는 영어에 능통한 전문인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는 아들을 옆에 불러 앉혔다. "사무엘. 내가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아 이 일을 하는 것처럼 너도 내 일을 이어받아 우리 집안의 특별한 표면처리기술이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네가 빨리 우리 회사에 들어와 실무를 익히는 것이 박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요구가 될 수 있었다. 학비도 제대로 주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하게 하더니 이제 박사를 눈 앞에 둔 상태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 일을 도우라고 했으니 말이다. 아들은 기도해 보겠다며 두 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회사 일에 몸을 던졌다. 관련 전공과목을 체계적으로 공부했고 기업경영학까지 공부한 아들이 회사 행정과 공장일을 맡자 회사는 몰라보게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이어 희소식이 이어졌다. 드디어 오랜 숙원이던 티타늄 나노 열처리기술과 산화티타늄 광촉매 축광기술을 완성하면서 한국과 일본, 미국에서 특허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이 기술을 간단히 설명해 보면 이렇다. 한마디로 매우 싼 가격의 철을 열처리를 통해 고급철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강하게 만들어 철의 부가가치를 올리는 기술이다. 이 때 티타늄을 촉매로 사용하는데 다양한 금속에 적용시킬 수 있고 내마모성이 우수하고 변형이 없어 이를 적용한 절삭공구 및 금형 등의 기계류 수명이 10배까지 늘어나는 것이다. 나는 27세인 아들에게 사장 직함을 주고 내가 회장이 되었다. 아버지 역시 내 나이 27세에 그러셨던 것처럼 내가 아들에게 영업 및 기술개발의 전권을 맡긴 것이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16) NASA 공학박사들 우리 기술력에 깜짝
고종호 (16) NASA 공학박사들 우리 기술력에 깜짝 2009.07.14 18:12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손을 반드시 들어 주신다. 내가 아내와 끊임없이 기도해 온 것은 필로스가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믿음의 기업으로 세상 속에 나가 덕을 세우고 선교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주십사는 것이었다.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에 대한 특허가 나온 상태에서 열처리는 자신이 있었지만 아직 우리 기술을 과소평가해 버리려는 미국 사람들이 많았다. 동양인인 네가 해 보았자 무엇을 하겠느냐는 정도였다. 우리가 문을 노크하는 회사나 공장 실무자들은 아예 나를 만나주지도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드디어 때가 왔다.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듣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믿는다. 한국중소기업진흥공단 시카고 지사장과 대화를 하면서 이 자신있는 기술을 갖고도 미국에서 아직 더 크지 못하는 이유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더니 일리노이주 통상부 하라노 차관보를 한번 만나보라고 소개해 주었다. 일본인 3세인 그는 같은 동양인이니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을 것이라 했다. 시카고를 포함한 일리노이주 전체 지역의 중공업 분야를 관할하는 하라노 차관보는 나를 매우 반가워하며 내 손을 잡고 한참이나 흔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라노씨는 티타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인이었고 열처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우리 회사의 기술설명에 대해 귀를 세우고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직접 샘플을 보더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기술을 갖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이런 강도를 유지한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하라노씨는 곧바로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전화를 걸어주며 관련 과학자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나는 특허를 받은 내용을 갖고 NASA 시카고 지부장과 연구소장을 찾아 갔다. 그런데 이미 우리 특허기술을 파악하고 있었다. NASA는 미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비군사적인 우주개발을 모두 관할하고 종합적인 우주계획을 추진하는 곳이다. 항공우주 활동 기획 및 준비를 하는데 세계 최첨단의 기술이 이곳에 집약돼 있다고 보면 된다. NASA와의 미팅도 대성공이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공학박사들과 우리 기술을 갖고 회의를 했는데 놀란 것은 NASA가 미팅 전에 우리 회사에 대한 기술조사를 이미 다 끝낸 상태였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과연 이론대로 가능할 것인가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 석학들도 필로스가 내놓은 샘플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내게 질문이 쏟아졌다. "대단하군요. 어떻게 우리도 생각지 못한 이런 기술을 발명할 수 있었지요?" "누구에게서 이 기술을 얻게 되었나요?"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하늘을 가리키며 단 한마디로 답변했다. "마이 갓(My God)" 바로 내 하나님이 이 기술을 얻게 하고 발명할 수 있도록 한 분이라는 내 답변에 그들의 눈의 더 커졌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번 더 청했다. 긍정의 표시였다. 알고 보니 세계적인 공학자들도 거의 크리스천들이었다. 최고의 기술만이 살아남는 이곳에서 필로스의 기술을 인정받고 이 기술을 응용하기로 한 동시에 NASA 연구소장은 이 기술은 방위산업체에 아주 적합한 기술이라며 이스라엘 방위산업회사를 다시 소개시켜 주었다. NASA가 인정한 필로스는 이제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었다. 하나님의 반전드라마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전혀 따라갈 수 없다. 단 한번에 하라노씨를 통해 NASA를 만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아마 나 혼자 NASA문을 두드렸다면 아직도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면 못 풀 것, 못 이룰 것이 없다. 나는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17) 美 최대 車부품 공장에 월 12억원대 납품
고종호 (17) 美 최대 車부품 공장에 월 12억원대 납품 2009.07.15 21:18 NASA와 이스라엘 방위산업체에서 인정한 우리 회사는 예전과 위상이 확 달라졌다. 이젠 미국의 금형회사들이 관심을 갖고 우리에게 먼저 만나자고 요청을 해왔다. 역시 NASA의 위력이 보이지 않게 작용한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동안 문을 두드려도 대꾸조차 안 했던 미국 최대 자동차 부품 단조공장인 전버그(JERNBERG) 사에 다시 연락을 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이 회사는 우리 회사 기술을 바로 적용할 수 있는 회사여서 접촉을 꾸준히 해왔던 것이다. 테리 플라이란 이름을 가진 이 회사 금형담당 공장장은 키가 1m90㎝가 넘고 아주 미남이었다. 50대 중반의 그는 이 회사에서만 23년을 근무한 베테랑이었다. 우리 회사가 NASA에서 인정받았음을 강조하자 그때서야 나를 만나주겠다고 했다. 사실 그를 만난다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열처리가 필요한 당신 회사의 금형 샘플을 주면 내가 티타늄 나노 방식으로 열처리한 뒤 가져오겠소. 그리고 그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내가 자신 있게 이야기해도 공장장은 조금도 요동치 않았다. 아직 우리 기술을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였기에 내가 먼저 농담을 걸었다. "내게 이 기술을 알려준 우리 아버지가 올해 90세예요. 왜 그렇게 건강하며 오래 사는지 아시나요?"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는 공장장에게 곧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아버님은 나와 평생 이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을 연구했는데 이 티타늄이 쇠만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기만 해도 사람도 건강하게 만든답니다. 그러니 우리 기술을 믿으세요." 공장장은 박장대소를 하며 내 어깨를 쳤다. 그리고 그 누구도 얻기 어렵다는 금형 샘플 2개를 내게 주었다. 나는 이것을 3일 만에 완벽하게 열처리한 뒤 갖고 공장장 앞에 내놓았다. "이제 열처리가 얼마나 잘됐는지 수명 실험을 할텐데 내 부탁이니 직원들 시키지 말고 바로 직접해주시길 부탁합니다. 꼭 직접해주세요" 왜냐하면 사용 시효 테스트 등을 자칫 성의없게 하면 테스트 결과가 잘못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와의 약속을 확실히 지켰다. 직접 일일이 체크를 했고 곧장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가 흥분돼 있는 것 같아 좋은 소식일 것 같았다. 마주 앉자마자 그는 엄지손가락부터 치켜올렸다. "필로스 대단하네요. 다른 회사보다 금형 수명이 무려 3.5배나 높게 나타났어요. 이런 기술이 가능한지 정말 놀랍군요. 오늘 금형 샘플 10개를 더 드릴 테니 다시 해오시고 여기서도 합격하면 우리와 함께 일합시다." 나는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10개를 다시 열처리했고 모두 합격했다. 드디어 필로스와 100년 역사의 미국 자동자 부품 회사인 전버그가 협약식을 가졌다. 이때부터 전버그에 열처리된 부품을 납품하기 시작했고 이 계약액은 조금씩 늘어나 한달에만 100만달러(12억원) 정도가 되었다. 공장장은 우리 회사를 만나 업무 능률을 향상시켰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전무로 승진까지 되어 나도 보람이 컸다. 테리 플라이 공장장은 전무로 승진한 뒤 나를 조용히 보자고 하더니 우리 회사 기술에 반했다면서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것이 아닌가. 그의 이름은 미국 자동차 관련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데 우리처럼 작은 회사에 오겠다니 믿을 수 없었다. "고 회장, 난 대기업의 철저한 조직 운영에 이제 질렸고 공장 쇳소리도 그만 듣고 싶어요. 한 달 안에 이곳에서 사표를 쓰고 나갈 테니 받아주세요."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18) 회사 승승장구 기쁨도 잠시 아내 갑자기 쓰러져
고종호 (18) 회사 승승장구 기쁨도 잠시 아내 갑자기 쓰러져 2009.07.16 18:05 공장장 출신 테리 플라이는 20만달러 이상의 고액 연봉자였는데 우리 회사와는 연봉 10만달러에 성과급을 주기로 했는데도 사인을 했다. 그가 우리 회사의 장래성을 그만큼 높이 본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그가 다니던 전버그사에서 비상이 걸렸다. 마치 우리가 플라이를 스카우트해 간 것으로 오해를 해서 물량수주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중에 플라이가 가서 잘 이야기해 오해는 풀렸다. 아들과 플라이의 활약으로 우리 필로스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계속 연매출을 늘리며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회사가 발전할수록 마음 한 구석에서 내가 한국을 훌쩍 떠나온 것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이 남았다. 100억원 규모의 회사를 한국 직원들에게 조건 없이 나눠주고 왔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성장하고 회사를 운영해 온 내가 미국에서 회사가 잘된다고 그냥 안주하는가라는 부분이었다.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생각나지 않았는데 잘되고 열매를 맺으니 역시 내 고향이자 조국인 한국을 위해 무언가 도움이 돼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애국심이 생긴 것이다. 사실 주변에서는 미국에서 회사가 이렇게 잘되고 있는데 왜 한국에 관심을 갖느냐고 손사래를 쳤다. 한국의 기업윤리가 아직 많이 부족해 또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이 기술로 이제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꽃을 피우게 됐는데 그 혜택을 우리나라도 함께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에 다시 회사를 차리기로 하고 2003년 '필로스테크 코리아'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들어와 보니 벤처한답시고 일확천금만 꿈꾸는 이들만 우리에게 모여들고, 기술을 발전시켜 세계로 뻗어 가겠다는 야심찬 기업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도 나는 회사를 유지하며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번 돈을 한국에서는 쓰기만 해야 했다. 기업 정서에 한탕주의가 많은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우리 회사는 미국에서 계속 상승세를 탔다.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공장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디애나주, 위스콘신주, 캘리포니아주, 펜실베이니아주 등 5곳에 공장을 차례로 설립해 수주한 기계부품들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필로스의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은 이 분야 전문가들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이론상으로는 이 정도 높은 열처리 강도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속학상의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나는 이 기술이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그 힘을 덧입혀 주신 것이라 굳게 믿는다. 비기독교인이 들으면 이해가 안되겠지만 세계적인 신기술로 인정받기까지 숱한 눈물과 기도의 시간이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필로스의 티타늄 나노 열처리 기술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기술, 기적의 기술'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선물'임을 굳게 믿는다. 이 기술은 우리가 현대생활에서 밀접하게 사용하는 1000여개 제품에 모두 접목이 될 수 있어 아직도 그 사업 전망이 무궁하다. 이렇게 회사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2005년 12월20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나를 돕느라 너무 무리한 탓일까. 정신이 아득했다. 아내의 기도가 없었다면 나는 오늘날까지 지탱해 오지 못했을 것이다. 심장에 이상이 생긴 아내는 우리 가족 모두의 간절한 기도와 사랑 안에서 수술을 받고 쾌유했다. 건강의 어려움을 겪고 나면서 우리 가족은 신앙으로 한 걸음 더 성장해 있었다. 돌이키면 항상 고난은 은혜를 위한 전주곡이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19) 1년 방치한 ‘피부암’ 쾌유 과정 신앙성숙 체험
고종호 (19) 1년 방치한 ‘피부암’ 쾌유 과정 신앙성숙 체험 2009.07.17 18:02 아내가 수술을 받고 쾌유되기에 앞서 나 역시 하나님의 치유를 깊이 체험하고 감사 드린 적이 있다.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기 전인 2001년 5월이었다. 한국 방문 중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허벅지가 유난히 아팠다. 허벅지에 상처 같은 종양이 생긴 지 1년 정도 됐는데 그저 괜찮을 것으로 여기고 방치해 왔던 것이다. 한국에 나간 김에 마침 미국 연수차 오셨다가 알게 된 정신과 손봉기 박사가 계시는 춘천의 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허벅지의 통증을 상의했더니 피부과로 나를 보냈고 담당 의사는 즉시 조직검사를 하자고 했다. 다음날 부산에 와 있던 내게 손 박사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즉시 병원으로 오셔야겠습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차분히 기도하면서 병원을 찾았다. "피부암입니다. 그런데 워낙 오랫동안 방치하셔서 상처 부위가 너무 크고 깊습니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암세포가 척추까지 전이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곧바로 수술대에 올라 한 시간 동안 의료진이 수술을 했다. 당시 일정상 나는 다음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의사들은 이 상태로 힘들다면서 난감해했다.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들을 설득해 절뚝거리며 퇴원하고 약도 미국에서 구입하는 것으로 처방전을 받은 뒤 일단 춘천에서 서울로 왔다. 숙소로 걸어가는데 얼마나 수술 부위가 아픈지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늦었지만 더 문제가 되기 전에 손 박사를 만나게 하셔서 수술받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속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며 아픔을 견뎌냈다. 나는 이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고통'도 은혜로 느끼게 해주신 것을 감사했다. 미국에 도착, 나흘 후 병원에 가서 수술 실밥을 뽑으려니 미국인 의사가 깜짝 놀랐다. 수술 부위가 이렇게 큰데 바로 퇴원하고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을 신기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지독한 사람은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하나님은 이후 한번 더 수술을 받게 하셨지만 피부암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건강한 몸이 되었다. 어려움을 통해 믿음은 자란다. 이 경험은 아내의 심장 수술과 쾌유 과정에서 아내를 위해 더 뜨겁게 기도하는 바탕이 되었다. 아내에게 진 기도의 빚을 아내가 병상에 있을 때 갚으려고 노력했다. 아내가 아직 입원 중인데 이번엔 아버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만사를 제쳐놓고 한국으로 달려가 병상을 지켰다. 워낙 노령이라 말씀을 잘 못하셨는데 옆에서 찬송을 불러드리면 아주 좋아하셨다. 나는 한국에 머무르며 마지막 효도를 하려고 노력했다. 반면 아버님은 많이 괴로워하셨다. 알고보니 어느 사람이 끈질기게 돈을 주겠다고 유혹하는 바람에 결국 우리의 기초기술 일부를 건네준 사기를 당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필히 해결하시겠다고 내게 굳게 약속하셨는데 그러질 못했으니 내내 안타까워하셨던 것이다. 아버님은 70일 동안 아무것도 못 드시다 2006년 5월6일 별세하셨다. 미국에 오셔서 우리가 성공한 것을 누구보다 기뻐하셨던 아버님이셨는데 더 성공한 것을 보여드리지 못해 안타까웠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메모리얼 파크에 아버님을 모셨다. 장수하셨지만 부모님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며 삶에 성공하기보다 신앙에 더 성공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2) 부품 회사 창업 “일제보다 기술력 낫다” 주문 몰려
고종호 (2) 부품 회사 창업 “일제보다 기술력 낫다” 주문 몰려 2009.06.26 18:18 1972년 4월1일 서울 구로구 고척동에 삼보금속공업사란 이름의 도금전문 회사를 차렸다. 내 나이 27세였다. 사실 나는 이름뿐이고 기술은 아버지가 다 갖고 계셨다. 금속은 표면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내구성과 강도가 다르고 마모되는 속도도 현저히 달라진다. 나는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도금기술을 익혔다. 대학에서 농기구를 공부했기에 기계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기술울 배우는 일도 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내 스스로 직장인이 되는 길을 포기했고 사업에 승부수를 던졌으니 여기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대학을 농대에 간 것에는 가슴아픈 사연이 숨겨져 있다. 나는 고교를 다니며 등록금을 내지 못해 수업 중 집으로 쫓겨가는 아픔을 여러 번 당했다. 이 때문에 장학금을 주는 농대에 지원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막 시작된 수출에 주력할 때였다. 섬유회사들이 이때 막 발돋움을 하는 시기였다. 이 회사들의 실을 뽑아내는 기계는 모두 일본 제품이었다. 이들 중 동양나이론은 나일론으로 실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역시 기계도 모두 일본 것이고 당연히 부품도 일본산이었다. 공장은 24시간 돌기에 기계 부품이 강철로 돼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마모가 되어 바꿔줘야 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일본에서 전량 수입해야 하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는 연구소에서 도금(금속표면처리)을 연구하신 분이라 이 정도 기술은 우리도 가능하다며 부품을 만들어 납품, 사용해 보도록 했다. 그런데 동양나이론 생산과장이 깜짝 놀라며 우리를 불렀다. "아니 삼보금속에서 만든 부품을 써 보았는데 일본 것과 비교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구태여 비싸게 부품을 들여올 필요가 없지요. 오늘부터 삼보 것을 사용할 테니 만들어 납품해 주세요." 3명이던 우리 회사 직원들이 갑자기 바빠졌다. 동양나이론에서 부품을 수입하지 않고 한국 삼보 것을 갖다 쓴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섬유 회사들도 우리 공장을 기웃거렸다. 우리는 당시 경질 크롬 도금법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시작이 되어 코오롱과 선경, 삼양사 등 현재 내로라는 대기업이 된 회사들이 우리 회사 제품을 쓰기 시작했다. 고척동 작은 공장에 직원이 늘어나고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 가족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주일성수였다. 전통적인 감리교 신자였던 부모님은 내가 고1 때 어떤 연유에서인지 당시 서대문에 있던 순복음중앙교회를 다니셨다. 당시 순복음교회는 성령 체험을 강조하며 빠르게 성장할 때였고 나 역시 부모의 영향을 받아 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종호야.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분이시다. 인생에서 모든 것을 실패해도 신앙에서만은 실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피할 길과 구원의 길을 예비해 주신다." 모태신앙인들이 갖는 공통분모가 있다면 신앙은 있지만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져 역동적인 파워로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그저 크리스천인 것으로 만족하고 자부하는 수준에서 더 이상 발전하고 있지 못했다. 삼보금속의 도금 기술력을 인정받으면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일본 부품을 쓰는 회사보다 우리 회사 부품을 쓰는 회사가 더 많아졌다. 우리 회사가 갑자기 애국하는 회사가 되었다. 수입 대체 효과의 제품을 만들어 원가를 줄이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20) 美 시카고 이어 광주광역시에 공장 설립
고종호 (20) 美 시카고 이어 광주광역시에 공장 설립 2009.07.19 17:53 필로스가 미국에서 주목받는 계기가 된 것은 NASA의 기술력 인정 외에도 2004년 미국중소기업청(SBDC)에서 우수 외국인 기업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사장으로 있는 아들 사무엘은 올해 2월, 동양인으로는 처음 이곳에서 '최고 중소기업인'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2007년 8월, 나는 시카고 윌링시에 2500㎡ 규모로 새 공장 2동을 더 건립하면서 특수공구를 만드는 회사 '필로스 툴'을 또 설립했다. 그래서 공장 하나는 티타늄 나노 열처리를 하고 다른 한 곳은 특수공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해 11월, 광주광역시장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나와 평동 산업단지를 둘러보았다. 호남 지역이 타지역에 비해 산업단지 조성이 부족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시장은 내 손을 잡고 필로스의 세계적인 기술을 선보이는 공장을 이곳에 세워주면 광주시 차원에서 적극 뒷받침해줄 것을 약속했다. 나는 호남 지역이나 광주와는 어떤 연고도 없지만 광주시의 적극적인 구애에 마음문을 열었다. 그래서 필로스 광주공장 설립을 결정하고 지난해 3월10일 500만달러의 투자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나는 광주시에 이렇게 약속했다. "우리가 독일에 가면 유명한 쌍둥이 칼이나 가위를 한두개씩 사오지요. 한국은 물론 세계 사람들이 광주에 오면 역시 이곳에서 유명한 철 제품을 사갈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결국 상품이 관광객을 오도록 특성화할 것입니다. 3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광주에 자동차 공장도 있고 첨단 부품을 생산하는 곳이 많아 나는 이곳에서 우리 열처리 기술을 바탕으로 명품 칼과 미용가위, 주방기구 등을 생산하고 금형 및 절삭 공구와 자동차 부품들을 생산키로 했다. 특히 필로스가 제조하는 명품 미용가위는 개당 100만원 정도 하는 고급이지만 이보다 더 비싸게 파는 일본에서 오히려 주문이 오고 있다. 품질도 좋고 가격은 더 싸니 경쟁력에서 우리가 일본보다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티타늄으로 골프클럽 헤드를 생산하고 각종 가전제품에도 우리 기술을 응용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 회사의 철의 수명연장 기술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확산돼 나가고 있다. 석유도 나지 않고 자원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앞서가는 길은 결국 기술로 승부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최고의 앞선 기술 앞에는 고개를 숙이게 되어 있는 것이 경제논리다. 그러므로 기술강국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돼 있다. 한국이 휴대전화와 반도체에서 세계 시장 1위가 되어 얻어내는 엄청난 달러는 결국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도할 때마다 "주여, 한국이 세계 최고의 기술을 많이 보유하는 국가가 되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원한다. 시카고 집에 있을 때 나는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세운 윌로크릭교회에 출석한다. 미국 현지 크리스천들과도 폭 넓게 교제하고 우리 회사 미국인 직원들도 자연스레 전도하기 위해서다. 또 한국에서는 장로 안수를 받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시 출석하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 새로운 공장을 지을 때마다 오셔서 축복해 주셨던 조용기 목사님이 벌써 은퇴하신 것이 세월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주일 오후마다 듣는 조 목사님의 메시지를 통해 '5중 복음과 3박자 축복'의 믿음을 계속 키워나가고 있다. 하나님은 내가 사업 실패 후 고통 속에 있을 때 앨라배마 버밍햄의 숲속에서 눈물 뿌리며 부르짖었던 그 기도소리를 들으셔서 오늘의 나와 필로스테크가 있음을 확실히 믿는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21·끝) “고난을 통해 얻은 최고의 자산은 감사”
고종호 (21·끝) “고난을 통해 얻은 최고의 자산은 감사” 2009.07.20 18:00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와 현대자동차 등이 미국 시카고 필로스테크 본사에 탐방을 오는 등 회사는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지난해 매출은 8000만달러 정도였지만 올해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요즘 자동차산업이 침체를 맞고 있어서 그렇지 앞으로 우리 회사가 세계 각국의 자동차 회사들과 손잡으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일어날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의 기술 접목은 미국에서 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모든 기업들마다 혁신, 원가 절감, 품질 향상을 강조하고 있으나 좀 깊이 들어가면 아니었다. 첫째로 신기술을 접목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고 협의된 사안들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로 지연, 학연 그리고 돈에 너무 깊이 연결돼 있는 점도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나 끈질기게 기도하며 기술 영업을 공격적으로 했기에 그나마 자리매김이 빨리 이뤄졌다고 본다. 좋은 일도 있었다. 지난해 5월, 아들 사무엘이 결혼해 독립을 하게 되었고 이제 안정된 상태에서 사업에 매진하는 모습을 기쁘게 지켜보고 있다. 하나님은 4녀1남의 다복한 자녀를 주셨다. 자녀들을 축복해주시고 한 사람도 빗나가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린다. 벌써 손자와 손녀가 7명이나 된다. 나는 자녀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인생을 잘사는 비결은 하나님 안에서 매사에 감사하며 삶에 성공하기보다 신앙에 성공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 기도를 빠뜨리지 않는다.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축복을 저희에게 주셔서 자손들과 사업이 창대케 만들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여생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며 이웃을 사랑하고 나누어주는 복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필로스테크는 요즘도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도전을 하고 있다. 오는 9월에는 세계적 피겨 선수인 김연아씨와 세계 정상인 우리나라 쇼트트랙 선수들을 위해 개발한 필로스 명품 스케이트가 선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는 중국에도 대규모 공장이 들어설 예정이며 세계 각국의 유명 회사들이 우리 필로스에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 빅3의 부품을 수주받아 전량 납품할 준비도 하고 있고 특수 공구 제작도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 나는 시편 23편과 이사야서 40장 29∼31절 말씀을 좋아하지만 이 중에서도 이사야서 41장 10절 말씀을 가장 즐겨 묵상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외우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깊은 은혜와 자신감이 솟구친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면 못할 것이 없다. 또 아무리 고난의 파도를 만나도 하나님이 잡아주시면 못 이겨낼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찬송도 '너 근심 걱정 말아라' '나의 갈길 다 가도록'을 즐겨 부른다. 나는 아무리 사업에 성공을 하고 부자가 된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란 사실을 항상 인정하고 겸손할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한다. 그리고 앞으로 미국에 장학재단을 세워 한국의 실력있는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또 사랑재단 등 NGO 단체를 지원,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지구촌에 편만하게 넘칠 수 있길 원한다. 기도해온 대로 선교에도 열심을 내고 싶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감사하며 이 연재를 통해 서로 연락이 끊겼던 분들과도 만나 기쁨을 나누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길 기원한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3) 부품 만들다 기계까지 제작… 매출 수직상승
고종호 (3) 부품 만들다 기계까지 제작… 매출 수직상승 2009.06.28 17:56 어느 날 아버지와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며 사업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받았다. 성경 속 믿음의 인물들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순종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면서 꿈꾸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도금만 하겠느냐는 생각을 했는데 아버지가 먼저 말씀하셨다. "종호야, 우리 삼보가 부품만 만들 것이 아니라 기계까지 만들어 보면 어떻겠니. 그 정도 기계는 우리도 만들 수 있지 않겠니." 직원들과 밤을 새우다시피하며 섬유 관련 기계를 만들었다. 드디어 삼보금속이 기계까지 만들어 선 보였는데 조금 미숙한 부분은 있어도 그 가격은 도금과는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경쟁력이 있었다. 우리와 거래하던 회사들은 우리의 도금기술력을 믿고 기계까지 구입했는데 써본 뒤 아주 만족했다. 하기야 일본에서 기계를 가져오면 운송과 설치까지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데 우리가 만든 기계값은 절반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도금에서 기계까지 만들게 된 우리 회사는 수직상승을 시작했다. 직원도 더 늘었고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고척동 공장 규모로는 도저히 되지 않아 막 공업단지 개발이 시작된 부천으로 공장을 옮겼다. 2200㎡(700여평)의 부지를 사서 시설을 공장으로 개조한 뒤 밤낮으로 일했다. 부모님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며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셨다.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나는 회사 설립 전인 1971년에 결혼했다. 군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가 을지로6가에 있던 메디칼센터 영양사로 있던 아내(박혜원 권사)를 소개했는데 우리는 서로 첫눈에 반해 교제 기간도 얼마 되지 않은 가운데 가정을 이뤘다. 부모님의 며느리 조건 1순위는 '예수 잘 믿는 여성'이었는데 그 조건에 아내는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이북 출신인 아내도 3대로 이어지는 믿음의 집안이었고 외할아버지가 이북 신의주에서 목회를 하셨던 유명한 김화원 목사님이셨다. 김화원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을 신앙인으로 키워 신학을 하게 하고 목사까지 되도록 인도해 주신 분으로 알고 있다. 돌이키면 내 삶에서 고비고비마다 아내의 눈물어린 기도와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었음을 난 어디서나 자랑스럽게 말한다. 신앙은 항상 견고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에 한쪽이 흔들리면 다른 쪽이 잡아주고 중보기도를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난 자녀들과 젊은이들에게 언제나 강조한다. 회사가 자리 잡으면서 1978년 공장을 직접 지었다. 허름하게 있던 기존 건물을 헐어내고 깨끗하고 멋진 현대식 건물로 짓느라 제법 많은 지출을 했다. 주변에서는 공장 짓는데 무슨 돈을 많이 들이느냐고도 했지만 제품이 최고이면 건물도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장 준공식날 우리 가족이 출석하던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준공예배를 드렸다. 조 목사님은 "삼보금속이 하나님의 복을 넘치게 받아 선교하는 기업이 돼라"고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공장을 짓고 나니 직원들 숙소가 너무 허름해 대비가 되었다. 나는 직원들에게 어떤 숙소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4) 17세 소년 공원의 죽음 계기 나눔의 삶 실천
고종호 (4) 17세 소년 공원의 죽음 계기 나눔의 삶 실천 2009.06.29 17:51 나는 공장을 시작하며 공원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일해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안다. 내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 있는 일이 있다. 막 공장을 시작해 바쁘게 일할 1973년, 최영철이란 17세 소년이 우리 공장에서 함께 일했다. 당시는 시골에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는 남녀가 많았다. 최군도 그런 경우로 우리 공장에서 일을 배우며 성실하게 근무했다. 하루는 최군이 이유없이 출근을 하지 않아 불길한 생각이 들어 숙소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당시 쪽방이라고 불리며 공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는데 사람 하나 누우면 차는 작은 방들이 수십개씩 붙어 있었다. 그런데 최군이 연탄가스를 마셔 아침에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것이다. 급히 대림성모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던지 엉엉 울고 말았다. 그러면서 우리 회사에 기숙사가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회사가 커지면 기숙사를 훌륭하고 멋지게 짓겠다고 최군 앞에서 다짐했다. "하나님, 최군은 서울에 청운의 꿈을 안고 올라와 돈 벌어서 공부하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그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삶을 하직했습니다. 저희 삼보금속이 앞으로 크게 성장한다면 최군처럼 공부하고 싶은데 힘이 안 되는 학생들을 돕고 또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래서 1978년 새 공장을 짓고 곧바로 기숙사 건립에 착수한 뒤 직공들에게 어떤 기숙사를 원하느냐고 했더니 대통령이 사시는 청와대 같은 건물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장난기가 섞인 말이었는데도 나는 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 이들이 나중엔 청와대처럼 멋진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갖도록 그렇게 지어주자. 또 저세상에 간 최영철 군과 내가 약속도 하지 않았는가." 나는 공장 기숙사를 청와대처럼 푸른색 기와를 얹어 설계했다. 식당과 내부시설을 당시로선 최고급으로 했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강당도 지었다. 삼보금속 전 직원은 매주 수요일 오전에 목사님을 초빙해 예배를 드렸고 직원 전도에도 앞장섰다. 기독교 기업으로 좋은 시설과 근무여건을 가진 우리 회사에 들어오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나는 정말 직원들을 따뜻하게 가족처럼 대해주려고 노력했다. 당시는 일자리를 구하려는 직원들이 많아 어느 공장이나 월급과 시간외수당이 전부였다. 그러나 우리 회사는 연 400%의 보너스를 지급했고 직원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모두 채워 주었다. 그러자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삼보금속은 섬유기계를 제작하는 일류기업체로 빠르게 발돋움했다. 당시 상공부와 상공회의소,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등 3곳에서 합동으로 최우수기업을 선정하는 제도가 있었다. 근무조건, 환경, 만족도 등을 조사했는데 총괄점수에서 우리 삼보금속이 1등을 했다. 그래서 중소기업 새마을 최우수업체로 선정되어 대통령기를 받고 나는 나중에 새마을운동 협동장이란 훈장도 받았다. "우리 회사가 이렇게 성장하는 것은 열심히 일도 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결과다. 자만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신앙인으로 바로 서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라." 부모님은 내게 신앙을 최우선으로 가르쳤고 나도 여기에 맞추려고 최대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계속 발전을 거듭한 우리 회사는 부천공장 규모로는 도저히 수주 물량을 소화하기 힘들었다. 나는 성경말씀대로 입을 크게 열고 과감하게 공장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경기도 송탄에 4만㎡(1만2000여평) 부지를 마련해 1만㎡(3000여평)의 공장과 1300㎡(400여평)의 기숙사를 건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최첨단 시설을 도입한 공장이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5) 30년전 도왔던 고아 소년,성공한 뒤 답례인사
고종호 (5) 30년전 도왔던 고아 소년,성공한 뒤 답례인사 2009.07.01 17:53 1988년 가을 경기도 송탄에 대규모 첨단 공장을 완공하고 준공 예배를 드렸다. 당시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안수집사였는데 조용기 목사님이 오셔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약 1만㎡(3000평)의 공장 내부 모습은 사람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사실 이 공장을 짓기까지 어려움도 많았다. 공장이 잘되니 직원들이 뭉쳐 독립을 하겠다며 10여명이 나가버린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다. 알짜 기술자들이 동시에 빠지면 공장 가동이 정상적으로 되지 못한다. 나는 직원들에게 대우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직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직접 독립하면 훨씬 더 나을 것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이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다. 납품 기일은 다가오고 비상이 걸려 엎드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이때는 직원들과 야간작업을 하며 손에 기름때를 묻혀야 했다. 고비고비를 넘기며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날 사업이 잘되면 공부하기 힘든 불우한 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돕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한 일이 문득 생각났다. 나는 인근 고아원인 새소망소년원에 연락해 내가 3명의 학생을 돕겠으니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고아원에서는 중·고생 3명을 소개해주었는데 그냥 돈만 매달 보내는 것보다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번씩 만나 손이라도 잡고 격려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이 학생들을 월초에 공장 사무실로 오도록 했다. 비록 사무실에서 잠깐 만나는 것이지만 어깨를 두드려주고 기도도 해주곤 했다. 이것이 벌써 30여년 전의 일이라 나는 도움을 준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고종호 사장님 맞느냐고 몇 번을 확인한 뒤 우리 사무실로 달려온 40대 후반의 그분은 자신이 그때 도움을 받았던 3명 중의 하나라고 밝히며 나를 얼싸안았다. "사장님이 그때 얼마나 고마웠던지요. 우리 3명이 그때 공장으로 가면 언제나 밝게 맞아주시며 돈봉투를 하나씩 나눠주시고 격려해주셨지요. 그때 3만원씩 주셨는데 제법 큰돈이라 고아원 다른 친구들이 여간 부러워하지 않았죠. 공장을 나서서 항상 자장면 한 그릇씩 먹고 돌아오곤 했는데 참 행복했었습니다. 사장님의 관심과 사랑 덕분에 제가 곁길로 가지 않고 이렇게 잘 성장해 가정을 이루고 잘살고 있습니다. 사장님을 그토록 찾았는데 이제야 뵙는군요." 소방공무원으로 머지않아 소방서장이 된다는 그분은 내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랐다. 작은 선행이 이렇게 귀한 일이 된 것에 나 역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 공장에서 모두들 열심히 일한 결과, 이곳에서 새마을훈장을 받았다. 삼보금속은 모범 기업으로 인정을 받아 많은 기업들이 우리를 본받으려고 했다. 나는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여름엔 전 직원 수련회를 갖고 겨울에도 스키 캠프를 열었다. 전 가족이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군부대 위문과 이웃 돕기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회사는 탄탄대로만 달려주지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감사하지만 당시로선 엄청난 고난의 파도가 나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6) 돌연사 직원 문제로 1년 이상 법정 다툼
고종호 (6) 돌연사 직원 문제로 1년 이상 법정 다툼 2009.07.02 21:21 부천공장에서 새로 지은 송탄공장으로 옮겨 열심히 일하던 우리 회사에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는 부천공장도 철수하지 않고 송탄공장과 함께 가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천공장에서 일하던 공장 중견 직원이 한밤 중에 송탄 공장 기숙사에 들어가 잠을 자다 갑자기 숨을 거두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동료 직원에 따르면 코를 아주 심하게 골았다는데 무호흡증으로 숨을 거둔 것 같았다. 기숙사에서 지내는 직원도 아니고 자녀가 넷이나 되는 가장이었는데 참으로 안타까웠다. 들은 이야기로는 부부싸움을 하고 화가 나 집을 뛰쳐나와 공장으로 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직원은 우리 회사가 사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모범적인 부부를 매년 선정해 상을 주고 직급도 한 단계 올려주는 '모범부부상'의 1회 수상자였다.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이니 나로서는 회사에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장례비를 포함해 도움을 주겠다고 했는데 가족들의 태도가 갑자기 싹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한 모든 것을 인권 변호사에게 위임했다며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런데 변호사를 통해 요구하는 액수가 당시로서는 매우 커 도저히 수용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업무 중에 생긴 사고도 아니고 본인이 공장에 들어와 자다 일어난 일인데 너무하다 싶어 조정을 요구했으나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장례식을 계속 미루고 부천공장 정문 앞에 와서 보란 듯이 시위까지 하는 것에 참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입장을 바꾸어 보자. 자녀가 여럿이 되는 한 가정에서 가장을 졸지에 잃었으니 얼마나 아득할 것인가. 예수 믿는 내가 좀 양보하고 덕을 베풀자." 나는 변호사가 제시한 액수의 60% 정도까지 주고 대신 자녀들 모두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의 등록금을 부담하겠다고 했다. 돈은 자칫 다 써버릴 수 있기에 자녀들이 원하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제시할 수 있는 마지막임을 분명히 했다. 내가 워낙 단호하게 이야기해서인지 가족들과 변호사가 회의한 후 승락을 해 합의가 되었다. 일단 고인의 빈소에 가서 조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옷을 차려 입었다. 그랬더니 우리 직원들이 저쪽에서 사장님에게 또 어떤 새로운 요구를 하거나 위해가 있을 수 있으니 대리인만 보내라고 권했다. 그러나 우리 직원으로 오랫동안 함께 했는데 그럴 수 없다며 운전기사를 데리고 빈소를 찾았다. 내가 온다는 이야기가 미리 들어갔는지 현장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문을 마치고 나자마자 나를 낚아채듯 붙잡아 불법으로 감금을 시켜버리는 것이었다. 요구 조건이 처음에 제시한 금액을 다 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합의하지 않았느냐고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시 처음 액수를 다 주겠다고 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참 난감하고 화가 났지만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조용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고씨도 고집이 만만치 않다. 이대로 회사가 그들에게 끌려만 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새벽 2시, 잠시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그곳을 빠져나왔고 다음날 그들에게 통고했다. "지금까지 대화로 했지만 사람을 불법으로 감금하는 이들과는 법으로만 하겠다. 지금까지 합의는 깨진 것으로 하고 정식으로 재판을 청구하길 바란다." 그들도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이때부터 1년 이상 지루한 법정 다툼이 있었다. 모두가 정신적으로 손해이고 시간낭비였다. 그러나 내가 직원들에 실망한 것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7) 회사 성공사례 TV드라마로 제작… 신앙생활도 열심
고종호 (7) 회사 성공사례 TV드라마로 제작… 신앙생활도 열심 2009.07.03 18:09 내가 운영하던 삼보금속은 대표적인 모범 중소기업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었고 지속적인 기술투자로 계속 뻗어갈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공장설비를 자동화함으로써 인력을 최대한 줄여 효율성을 높인 회사로 주목받았다. 우리 회사의 성공 사례는 당시 MBC와 KBS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숙직실에서 숨을 거둔 직원 가족이 회사를 향해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재판을 청구하면서 무척이나 나를 지치게 했다. 고용주가 고용인 한 사람에게 이렇게 끌려가도 사회에서 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고비를 잘 넘겼고 나는 삼보금속의 TV 드라마 방영을 계기로 새마을연수원과 상공회의소, 중소기업진흥공단 등의 행사에 단골 강사로 초청돼 기업 성공 사례를 나누었다. 신앙생활도 더 열심을 내어 1989년 장로장립을 받았다. 내 나이 44세 때였으니 아주 일찍 임직을 받은 셈이다. 장로가 되니 집사 때와는 또 다르게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고 기도시간도 늘어났다. 성경을 보면 장로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종이라는 것을 알기에 삶과 신앙에서 주변의 본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90년이 되면서 국내 노동계는 갑자기 노동조합 결성을 통한 노동운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도 노동조합이 생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건전한 조합운동이라면 반대할 것이 없고 지원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우리 회사는 민주노총 금속노조와 연결되는 듯했는데 직원들이 며칠씩 자리를 비우고 노조교육을 받고 오곤 했다. 그런데 교육만 받고 오면 나를 향한 시선이 아주 싸늘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직원 모두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대우나 복지를 국내 어느 회사보다 잘해준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직원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배를 불리고 봉급은 쥐꼬리만큼만 주는 악덕 고용주로 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어느날 차를 타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앞마당에 노조원들이 모여 앉아 북과 꽹과리를 치며 데모를 하고 있었다. 공장 가동을 멈추고 봉급인상과 처우개선을 더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아주 도가 지나쳤다. 당시 아버님도 우리 회사에 나와 기술자문을 해주고 계셨다. 노조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아버님은 노조원들을 향해 빨리 회사로 들어가 일을 하라고 만류하시는 것 같았다. 나도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걸어가는데 노조위원장이라는 자가 아버님을 향해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폭언을 서슴지 않는 것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분노가 밀려왔다. 나는 누구보다 아버님을 존경해 왔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들어와 도금연구소를 차려 기술개발에 주력해 한국 산업화에 크게 기여하신 분이었다. 또 내게 기독교 신앙을 전해주심으로써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삶의 목표를 깨닫게 해주신 분이 아니신가. 사실 더 화가 난 것은 데모의 주동이 된 노조위원장이 처음에 경비직으로 우리 회사에 입사했는데 성실한 것 같아 차분히 기술을 가르쳐 엔지니어로 임명했고 다시 작업반장으로까지 내가 승진시켰던 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가 내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인간적인 배신감이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했다. 정리=김무정 기자
고종호 (8) 세계시장 진출 열쇠 된 티타늄 열처리 기술
고종호 (8) 세계시장 진출 열쇠 된 티타늄 열처리 기술 2009.07.05 17:49 노조위원장이 70대인 부친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설까지 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나는 직원들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산업화의 역군이라는 자부심 아래 정신없이 달려왔고 내가 번 것은 전액 회사에 재투자해 더 큰 공장을 세워 새 노동력을 창출해 왔는데 결국 현재의 나는 직원들에게 그저 악덕 고용주일 뿐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 회사에 노동운동에 의식화된 이가 위장취업을 했고 직원들을 뒤에서 조종해 노사분규를 일으킨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우리 회사 직원은 150여명이었는데 한 사람에 의해 150여명이 동조해 분규를 일으킨 것이다. 회사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휘말릴 상황이었다. 직원들 얼굴도 보기 싫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피땀 흘려 여기까지 온 회사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 회사를 모범기업으로 여기며 부러워해 왔는데 제가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지혜를 주세요." 기도를 마쳤는데 내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왔다. 난 우선 노사분규를 주도한 이들을 불러 함께 일할 수 없으니 사표를 쓰든 조용히 근무하든 택일하라며 강공으로 나갔다. 그리고 노조위원장 부인을 불러 그동안 남편과 나와의 관계를 설명하며 이럴 수 있느냐고 내 심정을 피력했다. 그리고 전 직원을 강당에 모았다. "저는 사실 지금 참담한 기분입니다. 여러분과 가족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저만의 생각이었고 여러분에게 전 나쁜 기업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오늘부로 모두 덮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공장이 잘 돌아가는 길만이 여러분과 제가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조금만 참아주시고 회사가 더 발전하면 노조를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더 많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피를 토하듯 이야기해서인가 아니면 내 진실함이 전달되어서인가 반기를 드는 이들이 없었다. 일단 노조가 잠잠해지고 회사는 평정을 찾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흔들렸다. 직원들이 나와 아버지에게 행한 무례한 행동은 차치하고라도 이들이 언제곤 마음에 안 들면 회사를 대상으로 파업을 해서 뒤집거나 등 돌릴 수 있다고 느낀 것이다. 한솥밥을 먹으며 오랫동안 달려온 직원들이었기에 내가 느끼는 배신감은 더욱 컸던 것 같다. 이 무렵 우리 삼보금속은 도금과 섬유기계 생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해 아버님과 함께 티타늄(titanium) 나노 표면 열처리 기술을 계속 연구하고 있었다. 티타늄은 가볍고 단단하고 내식성이 있는 은백색의 광택이 있는 전이금속 원소다. 철이나 알루미늄의 가볍고 단단한 합금을 만드는 데 쓰여왔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표면에 처리할 때 엄청난 강도를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광물은 내열성과 내식성, 내마모성을 갖고 있다. 삼보금속은 1980년부터 이 티타늄 열처리를 연구해 왔고 그 무렵 티타늄으로 금은합금을 만들어 일본의 도금연구소에 테스트를 의뢰했었다. 그랬더니 일본에서 모든 면에서 우수한 성능이 나오는 이 금속을 도저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 마크를 찍어 보내왔다. 우리가 만든 이 금속을 이 분야 세계 정상인 일본이 모른다면 우리의 연구가 성공한 셈이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가능성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정도면 연구의 70%를 달성한 셈이었다. 세계시장에 도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김무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