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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종교 개혁 시대 (1517-1648)/근세교회사/역사신학
I. 종교 개혁 시대 (1517-1648) -------------------------------------------------------- 1. 서 론 2.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와 개혁 3. 독일의 개혁 운동 4. 쯔빙글리 (Zwingli)의 개혁 운동 5. 칼빈의 개혁 운동 6. 개혁자들의 신학비교 7. 제세례 파 (Anabaptist) 8. 예수회 9. 트렌토 (Trento) 회의 10. 스칸디나비아의 종교 개혁 11.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 12. 프랑스의 종교 개혁 13.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 14. 영국의 종교 개혁 15. 30년 전쟁 전의 독일 16. 30 년 전쟁 17. 아르메니우스파의 신학론과 도르트레히트 회의 18. 소키누스 (Socinus) 신학 19. 그리이스 교회 --------------------------------------------------------- 1. 서 론 1) 개혁의 필요성 (1) 교회의 부패...교직 매매,고급 성직자의 부도덕한 생활,음행. (2) 교황의 세속화...교회의 권위 추락. 2) 개혁의 원인 (1) 교회의 타락...교직의 타락으로 휴머니즘의 발생. (2) 개혁 전 개혁자의 위클리프,후스 등의 개혁론의 영향. (3) 교황 레오 10세의 속죄표 판매에 대한 루터의 봉기. 3) 개혁의 형태 (1) 루터파...독일과 동북 유럽. (2) 쯔빙글리파...쮜리히를 중심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와 남부 독일. (3) 칼빈파...제네바를 중심으로 불어를 사용하는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 (4) 영국 개혁파...영어를 사용하는 민족. (5) 제세례파...서부 유럽의 대부분. (6) 예수회...구교 운동으로 반종교 개혁 운동 4) 개혁이 성공한 지역. (1) 튜톤족이 자리잡은 북유럽과 로마 이외의 지역. (2) 로마교화된 라틴족이 거주하는 남유럽 실패. 5) 정치 형태 (1) 루터파...확정된 양식이 없음. (2) 칼빈파...장로 정치. (3) 영국교...구교 정치. (4) 재세례파...침례교가 회중 정치. 6) 신학 사조 (1) 구교와 일치점...하나님,그리스도,성령, (2) 다른점...교회,성경,구원,내세관 등. a. 전설,가경을 배격. b. 교회내 구원,예전 반대. c. 연옥설,속죄표,미사.화체설 반대 d. 루터,쯔빙글리는 개척,칼빈과 멜랑히톤은 조직. 7) 예배 의식. (1) 지방어로 설교,교육 부흥,미사 분향 제도 폐지. (2) 성일,성자,유물,성상 숭배,사자 위한 기도,성지 순례 등 폐지. <요 약> *종교 개혁의 공과 1) 공 (1) 성경의 근본 사상으로 환원. (2) 우상화와 의식화한 예배를 중심으로 환원. (3) 전체주의에서 신앙의 자유 얻음(성경 해석의 길 제시, 하나님과의 직접 교제). (4) 로마 교회내의 자체 혁신 운동 전개. 2) 과 (1) 신교안에 여러 교파가 생김. (2) 전쟁 유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파탄) * 종교 개혁이 경제계에 미친 영향. (1) 봉건주의의 몰락으로 중산 계급의 부흥. (2) 일반적 지식을 발달로 문화의 향상. (3) 개인주의 부흥으로 자본주의 형성, (4) 각종 공업 발달의 계기. 2.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와 개혁 1) 생애 (1) 1483.11.10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출생,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다. (2) 19세에 에르푸르트(Erfurt)대학에서 스콜라 철학과 라틴 문학 전공. (3) 법학을 전공하려다가 아우그수티누스 교단 수도원에 들어감. (4) 베텐베르크 대학의 논리학,물리학 교수를 거쳐 신학 교수가됨. (5) 1511년 수도사 회의 사명을 띠고 로마 여행,교회의 여러가지 부조리를 알게됨. 1512년 신학 박사 됨. (6) 1525년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수녀와 결혼 (7) 1546.2.18 죽음. 2) 개혁 사업 (1) 발단...교황 레오 10세의 속죄표 판매에 반대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 논제로 공격. (2) 추방장...에크(John Eck)의 재빠른 고발에 따라 a. 저서를 불태우라 b. 60일내 회개하지 않으면 그 일당까지 체포한다. 루터는 1520.12.10 대학 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모아놓고 추방장을 불태워 버렸다. (3) 95개조 항의문 a. 대의 ㄱ.속죄표는 하나님의 징벌을 없이 할 수 없고, 교회의 정죄만 없이 할 뿐이다. ㄴ.속죄표는 죄를 사할 수 없다. ㄷ.속죄표는 죄인이 하나님께 의당히 받아야 할 형벌을 없이 할 수 없다. ㄹ.연옥에 있는 영혼에게는 속죄표가 쓸 데 없다. ㅁ.죄를 참회한 신자는 하나님께 사죄함을 이미 받은고로 속죄펴는 쓸 데 없다. ㅂ. 선행,공로,보화가 무엇인지 평민이 깨달을 수 없고 그 보화 창고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가르친 복음 뿐이다.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나 성도들의 공로를 팔 권한이 없고 정죄만 없앨 권한이 있다. b. 내 용 ㄱ.서론 1-7 ㄴ.연옥에 있는 자 사면 문제 8-29 ㄷ.살아있는 자 사면 문제30-80. ㄹ.평신도로서 반대 81-91 ㅁ.판매 동기의 잘못 지적 92-95. 3) 사상과 저서 (1) 사상 a. 경험적,실제적 종교 탐구. b. 성찬은 공재설 주장. c. 삼대 주장 ㄱ.이신득의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ㄴ.신자개제사장 (믿는자는 모두 제사장 이다) ㄷ.성경의 권위. (2) 저서 a. 1520.5.선행론 (선행은 오직 신앙에서) b. 1520.8.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고함 (교황청의 부패를 공격) ㄱ.교황의 속권 지배 반대. ㄴ.교황만의 성경 해석 반대. ㄷ.교황만의 회집권 주장 반대. c. 1520.10 교회 바벨론 포로 (성도는 다 제사장,성찬,세례,참회만 예전) d. 1520.11 크리스챤의 자유 (로마서를 토대로 한 이신득의 교리). 4) 루터의 바름스 (Warms) 국회 (1) 1521년 1월 21일 카알(Karl) 5세가 바름스(Warms) 에서 국회를 소집. (2) 의제 - 루터 처리 문제. (3) 교황 특사 - 알렉산도 (Alexander) (4) 루터의 국회 출두 a. 카알 5세가 신변 안전 보증서를 주어서 소환. b. 죽음을 각오하고 3월 26일 출발. c. 도중에서 군중들의 환송을 받음. d. 작사,작곡의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름. (5) 국회의 심문 (4월 17일) a. 25권의 저서가 루터의 것인가? (그렇다) b. 이를 취소할 수 없는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으로 증명하기 전에는 취소할 수 없다). (6) 황제의 명령. a. 루터는 죄인.그와 만나는 자도 처벌하다. b. 루터는 저술을 금한다. (7) 4월 26일 구기 도중 친구의 성으로 납치되어 신약 번역에 착수했다. 1521년 3월에 탈고, 1543년에 14회 정정 출판. 3. 독일의 개혁 운동 1) 멜랑히톤(Philipp Melancthon 1497-1560) (1) 21세기부터 대학의 어학 교수 (히브리어,그리이스어) (2) 성격이 온유 겸손하고 강직하므로 혁명적인 루터의 유일한 동지였다. (3) 저서 <신학 통론> a. 권위는 성경에 있다. b. 신앙...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을 확신하는 것. c. 예전...세례와 성찬. 2) 과격파와 온건파 (1) 온건파...에라스무스 (루터의 개혁이 과격하다고 비판) (2) 과격파 a. 카알시타트(KarlstadtP...독신주의,성상 숭배,성찬식.제사 부분 등 반대. b. 토마스 뭔쩌 (Thomas Munzer) 등 3인 ㄱ. 유아 세례 부인 ㄴ.성경과 교직을 경히 여김. ㄷ. 사회 조직의 개혁을 강조 ㄹ.세상 종말이 가까웠다고 혼란. (3) 루터의 방문...1522년 3월 바르트부르크(Warburg)에 a. 8일간의 설교로 혼란과 질서를 완전히 회복 (과격주의 배격) b. 많은 수도사와 일반 귀족들의 지지를 얻음. 3) 분열 (1) 농민의 난...1524년 농민의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사망.자 15만명에 달함. 루터는 귀족편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킴. (2) 에라스무의 분열...자유 의지를 강조하여 루터와 반대의견 발표. (3) 루터의 결혼...1525년 귀족 출신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결혼 (이는 많은 사람에게 조소 거리가 됨). 4) 황제외 박해와 항의 (1) 1526년 스파이어(Speier)국회...제후는 교황이나 황제 앞에서 답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신앙을 정하는 권리가 있다. (2) 1529년 국회 재소집. a. 가톨릭 제후국주의 개혁주의 선전을 금지함. b. 개혁주의 제후국에서 가톨릭 활동은 자유. c. 옛날부터의 권위와 세입은 그대로 가진다. (3) 개혁파의 항의 a. 1529년 4월 19일 항의문 제출. b. 서명자...5제후국,14자유시 5) 신교 발전 (1) 1530년 6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문 작성 (멜랑히톤이 기초) (2) 1532년 뉘른베르크에서 신구교 화친 조약 체결. (3) 1539년 덴마아크,스웨덴,노르웨이 등이 신교권에 가담. 4. 쯔빙글리 (Zwingli)의 개혁 운동 1) 생애 (1) 1484년 1월 1일 스위스 빌트하우스 (Wildhaus)에서 출생. (2) 15세때 뵐플린 (Wolflin)의 문하생이 되고, 2년 후에 비엔나에서 유학, 철학 연구 (3) 1506년 글라루스(Glarus)에서,1516년 아인지이델른에서, 1519년 쮜리히에 서 목회. (4) 1531년 10월 갑펠에서 가톨릭 연맹과의 싸움에서 전사. 2) 개혁 사업 (1) 주요 활동 무대...쮜리히 쮜리히는 인구 7천명의 소도시.1519년에 쮜리히 목사가 됨. (2) 67개조 논재 (루터의 95개조 논제와 비슷)를 걸고 토론하여 시 의회에서 통과됨.(민주국가이므로 다수의 지지로 통과.시행). a. 예배 의식의 근본적 개혁. b. 교회 정치의 주권은 교회에 있음. c. 대회 조직-목자,각 교회 대표 2명,정부 대표8명. 3) 스위스의 각지의 개혁 운동 (1) 베른(Bern) a. 1528년 1월 26일 개혁 단행. b. 베르트홀로 할러 (Berthold Haller).세바스티안 마이어 (Sebastian Mayer)등이 지지함. (2) 바알 (Bazel) a. 1525년 2월에 개혁 b. 요한 외콜람파디우스 (Johann Oecolampadius,1482-1531)가 개혁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목사요, 대학 교수로서 쯔빙글리 다음가는 개혁자였다. 4) 신구 양파의 투쟁 (1) 원인 a. 산림 지역 5개조는 개혁을 거절하고 연맹을 맺음. b. 시비쯔주에서 목사 1명을 이단이라고 화형시킴. (2) 캅펠 (Kappel)의 제1일 조약 a. 산림 지역 주는 군비를 지출한다. b. 각주의 신앙은 다수로 결정한다. c. 종교상 문제로 분쟁하지 말것. (3) 캅펠 제 2 조약 a. 1531년 산림 지역 주들이 조약을 어기고 군사 8천명으로 쮜리히 급습. b. 개혁 도시들도 대항했으나 대패 쯔빙글리의 전사. c. 조약 체결. ㄱ.개혁 도시 주는 군비를 지출할 것. ㄴ.5개 산림 지역 주는 로마교를 지킨다. 5) 루터와의 만남. (1) 시기...제 1 갑펠 조약과 제 2조약. (2) 때와 목적 - 1529년 10월 1일 마르부르크에서 (3) 차이점 a. 정치 문제...루터는 작센의 동의만 얻으려함. 쯔빙글리는 독일과 스위스 개혁자의 합동으로 프랑스 왕과 협력하여 카알 5세로 하여금 신교를 공인 하게 하려함. b. 성찬 문제...쯔빙글리(상징설) 루터(공재설) (4) 결과 ... 15개조의 신조중 14개조는 합의했으나, 성찬 문제로 성립되지 못함. 5. 칼빈의 개혁 운동 1) 생애 (1) 1509년 7월 10일 파리 동북방에 소재한 느와이용(Noyon)에서 5형제 중 둘 째로 출생함. (2) 부친 제라드(Jhon Gerad)는 법률가로 감독.서기로 근무 했고,모친은 경건 한 신앙인이었다. (3) 1523년 8월에 파리 대학에 입학.라틴어,철학,인문 과학을 공부함. 졸업 때 에 법과를 전과함. (4) 1533년 11월 1일에 친구 니콜라스 코프(Nicholas Cop)가 파리 대학 학장으 로 취임 할 때 취임 연설의 기초자로 복음주의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코 프는 바젤로 피난하고 칼빈은 앙궐렘(Anguleme)의 뒤틸레(Du Tillet)의 집 에 피신하였다 이 집은 은퇴 교역자의 집으로 윤곽을 잡았다. (5) 1535년 바젤에서 역사적 명저인 <기독교 강요> (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를 발행하였다. (6)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도중 제네바에서 파렐 (W.Farel)를 만나 제네바에 영원히 머물며, 개혁 사업에 종사하였다. (7) 1540년 8월 네덜란드에서 피신해 온 과부와 결혼하였다. (8) 1564년 5월 24일 55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그는 분주한 개혁 사업 속에서 과로로 신체가 허약 하였는데, 수년간 1일 1식을 하였고 매일 설교하며, 주 3회 신학강의를 하고 저술에 종사하는 한편 외국의 신앙 동지들과 연락 하는 등 과로 속에서 지냈다. 2) 제네바의 개혁 운동 (1) 개혁전의 정치 조직 a. 제네바시는 자치권이 있었다. b. 시정을 세 종류의 의회 (평의회,200인 의회, 시민 총회)에 의해 지배됨. (2) 제네바의 개혁 운동 a. 1521년경에 루터의 저서가 제네바에 전달되어 개혁 운동의 기운이 가득하 였고, 1532년에는 일반인의 동요가 있었다. b. 파렐(Farel)의 베른 개혁 운동이 성공하여 제네바가 개혁당에게 힘과 자극 을 주었다. ㄱ.200인 의회는 미사를 금했다. ㄴ.풍속 개량과 규율을 엄해 지켰다. c. 팔렐과 칼빈의 개혁 운동 ㄱ.칼빈은 3인의 목사중 1인 ㄴ.시민들의 반항으로 의회는 파렐과 칼빈의 추방을 결의 ㄷ.스트라스부르에서 3년간 성경 주석 집필 ㄹ.1541년 신파의 집권으로 다시 초청되어 23년간 머무르며 개혁 운동에 전 력하였다. 처음 13년을 고전하였으나 후기 10년은 성공적인 개혁 사업을 전개하였다. 3) 칼빈의 개혁 사업 칼빈의 이상은 정교 일치로 신정 건설에 있었다. (1) 교회법 제정 a. 교회 정치...감독없이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b. 교회 직원...목사 (목사회가 선정하고 시의회에 회부,교회의 동의로 확정) 장로 (교회 정치 담담), 집사 (회계와 구제사업 담당) c. 교인...전 시민이 교인으로 신앙 고백을 하여야 했다. (2) 평의회 조직 a. 목사 5인,장로 12인으로 조직된 풍속.도덕 취체 기관으로 매주 1회 회집 하였다. b. 칼빈은 목사 회원이었으나 성경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c. 교회 추방권이 있었고 1542-46년 사이에 58명 사형,76명 추방의 결정이 있 었다. (3) 사업 부흥을 위하여 견직 공업을 장려하였다. (4) 시민 교육을 위해 대학을 설립함. 4) 저술 활동 (1) 기독교 강요 (2) 신구약 주석 (3) 문답서 (4) 설교, 서신 (5) 세네카의 주해 등. 5) 칼빈의 신학 사상 (1) 사상 a. 신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 주장, 그리고 인간과 의 밀접한 관계에 두었다. b. 성찬론은 기념설을 주장하였다. (2) 신앙 5개 신조 a. 인간의 전적 타락 b. 무조건적 예정. c. 제한된 선택. d. 불가항력적 은총. e. 성도의 견인. 6) 칼빈이 유럽에 끼친 사상적 영향 (1) 영국 a. 청교도들에 의하여 가톨릭식의 의식과 미신적 예식 일소. b. 청교도 신앙을 배양 c. 후우퍼,(Hooper), 험프리 (Humphrey) 밀톤 (Milton) 번연 (Bunyan)등을 배출. (2) 스코틀랜드 a. 패트릭 해밀턴 (Patrick Hamilton)과 조오지 위셔트 (G.Wishart) 에 의하 여 개혁의 봉화가 일어났다. b. 존 녹스 (John Knox)에 의하여 1506년 개혁 교회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3) 프랑스 a. 위구노 (Huguenots) 가 활동, 그 중심 인물은 페르베였다. b. 1572년 성 바돌로매 (St,Bartholomew) 전야제에 위구노 대량 학살이 있었 다. 1598년 앙리 4세의 난트(Nantes) 칙령에 의하여 신교의 자유를 획득 하였다. 7) 칼빈 사상이 발전한 원인. (1) 신학이 통일적이다. (2) 교회의 기치가 선명하다. 교회 정치는 세계 각국에서 적용하여도 편리한 점이 많다. (3) 기독교 생활 훈련에 치중하여 실효를 거두었다. (4) 재세례파,루터파,쯔빙글리파들을 넓게 포용하였따. (5) 훌륭한 테오도르 베자 (Theldore Beza)와 같은 후계자가 있었다. 6. 개혁자들의 신학비교 개혁자들의 신학을 여러가지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으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                                        구 분   루 터   쯔빙글리   칼 빈    ---------------------------------------------------------------                                        신 학 중 심  그리스도중심  신의지 중심   신의 절대 중심                                            근본원칙 이신득의   이신득의   신의 절대 주권                                            성찬론   공재설   기념설   영적 임재설                                            국가와의 관계  교회는 국가에  민주헌법,교권   국가와 교회 분리      복종   배격      ----------------------------------------------------------------                                     7. 제세례 파 (Anabaptist) 1) 기원 (1) 종교개혁 이전부터 독일,화란,이태리 등지에 흩어져 있던 개혁 신앙을 소 유한 적은 무리들. (2) 동기는 초대 교회 형태로 교회를 회복시키자는 의도였다. (3) <재세례파>란 명칭의 유래는 유아 세례를 부인하고 장년 세례만을 주장하 는 데서 나옴. (4) 중세 교회의 조직,의식, 예전을 반대하고 예배하는 자국어로 하고 기도에 힘씀. (5) 교회는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집단체라고 주장. 2) 주장 (1) 1527년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총회가 회집되어 재세례파 교회를 조직. (2) 교회 정치는 목사, 장로, 집사직을 두었다. (3) 대표자는 발다자르 휘브마이어 (Balthasar Hubmaier)와 한스 뎅크(Hans Denk)이다. 3) 신앙 (1) 초대 교회의 신앙 생활을 모방. (2) 신앙적 의식을 가지고 신앙 고백을 할 때라야 세례의 의의가 있다고 주장 (유아 세례 반대) (3) 무저항 주의 (4) 국가 지배 반대,세금 납부 반대. (5) 예정론을 배격하고 자력 구원설 주장. (6) 그리스도의 산상 설교나 말씀을 문자대로 복종하려고 노력함. (7) 예배는 단순하고 신앙은 의식적이어야 한다고 주장. 4) 결과 (1) 로마교,루터파,칼빈파의 반대로 박해를 받음. (2) 오늘의 침례파 형성은 재세례파의 발전에서 온것임. 8. 예수회 개신교의 개혁 운동에 대항하려는 로마 교회의 반종교 개혁 (Counter Reforma tion)으로서 로마 교회의 부패를 정화하고, 규율을 바로 잡으며 교리적으로는 종래의 입장을 계속 유지하려는 운동이다. 1) 기원 (1) 히메네스 (Ximenes, 1436-1517) a. 로마에서 수학하고 프란체스코 교단에서 엄격한 신앙 생활을 하였다. b. 1495년 톨레도 (Toledo)의 대감독이 되었고 스페인 교회의 머리가 되었다. c. 그는 교회의 정화,대학의 설립,아퀴나스 신학에의 복귀에 최선을 다하였다 (2) 캄페기오 (Camperggio)... 1524년에 남부 독일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 다. (3) 콘타리니 (Contarini)와 카랍파 (Caraffa)...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개혁 운 동에 종사함, 카랍파가 1555년 바울 4세로서 교황이되자 도덕 혁신, 예배 의 진흥,재정의 정리에 힘을 쏟음. 2) 창설자 이그나티우스 로율라(Ignatius Loyola) (1) 1491년 스페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남 (로율라는 성 이름임). (2) 무사 교육을 받고 통솔력을 키움. (3) 1521년 전쟁에서 중상을 당해 입원 중 성자전을 읽다가 헌신하기로 결심함 (4) 37세때 파리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신학을 연구함. (5) 이들은 팔레스티나에서 고생하는 기독교인을 보호하고 로마 교회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3) 예 수 회 ((라) Societas Jesu, (영) Jesits) (1) 정의...로마 교회 안에서 생긴 수도사의 단체로서 일정한 규칙 생활을 하 고 전도하며 이단과 싸우고 이교도들을 개종시키기에 힘쓴 결사 단체임. (2) 로욜라가 규합한 6명의 동지로 출발 (3) 1540년 9월 27일 교황의 재가를 얻음 (단원 60명으로 출발) (4) 강령은 절대 복종,2년간 예배 훈련 (금욕적 고행과 노역), 학생(5년) 부사원 (교수와 수학,5년) 정사원 (신학 연구,4년) 등 모두 16년간 수련을 받음,복종,빈곤,독신의 이들의 3대 서약임. (5) 세력 확장의 방법 a. 고백을 들음(정치상 기밀을 들음으로 확장의 기회로 활용) b. 교육 (대학 경영, 상류 사회를 이끔) c. 외국 선교 (크게 성공함) ㄱ.프란티스코 하브예르 스페인 (Francis Xavier,1506-1552)... 인도, 스리랑카,일본 등지에 선교. ㄴ. 맛테오 릿치(Matteo Ricci)...중국,브라질,유럽 아이 등지에 선교. 4) 결과 (1) 로마 교회의 내부 각성 (2) 개신교 영향을 줌. 9. 트렌토 (Trento) 회의 1) 동기 (1) 소집자...교황 바울을 3세 (황제 카알 5세의 청원으로) (2) 시일... 1545-1663 (18년간,5대 교황이 교체됨) (3) 세계 종교 대회로서 19회 째임. (4) 의제 a. 황제편에서... 교회의 개량,신교와 가급적 타협을 주장. b. 교황편에서...신교 혼동 방지를 위해 교리 제정을 주장. 2) 회의 (1) 제 1 기...1545-1549.9.17 교리 문제에 치중하여 교황과 황제의 충돌을 피 하기 위해 무기 정회 (1547.3.전염병으로 볼로냐 (Bologna)로 옮겨 모임). (2) 제 2 기...1551-52 율리우스 3세에 의해 트렌토에서 열리게 되었다. (황제의 타협 정책) (3) 제 3 기...1562-63,피우스 (Pius) 4세가 회의를 소집함. 비타협파가 주도 권을 장악하였다. 3) 결의 (1) 제 1 기...성경과 교회 전통의 동권, 세례,견신을 인정. (2) 제 2 기...성찬,참회,예전을 인정. (3) 제 3 기...생사자간의 중보기원 유효, 성자 숭배,속죄표 인정. 4) 결과 (1) 로마 교회의 수뇌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함. (2) 비타협적이며 신교의 언권을 봉쇄. (3) 로마 교회 교리 재확인. (4) 교회 규율을 바로 잡음. (5) 로마 교회의 개혁 운동과 전도 운동의 계기를 마련 (신학교와 감독 선거 에 개혁이 옴). 5) 공포 1564년 피우스 4세에 의해 공포됨. 10. 스칸디나비아의 종교 개혁 1) 스위덴의 종교 개혁 (1) 구스타프 파사 (Gustav Vasa)가 독일 망명시에 루터를 만났고 왕이 된 후 에도 계속 교류를 하였다. (2) 울라프 페터손 (Olaf Pesterson,1499-1573), 라아스 페터손 (Lars Peter- son)라아스 안도손 (Lars Anderson,1480-1552) 등은 스웨덴 종교 개혁의 3대 인물로서 신약을 번역하였다. (3) 국왕은 1527년에 국회를 소집하고 루터파 예배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2) 덴마아크의 종교 개혁 (1) 왕 크리스찬 2세가 루터주의를 찬송하는 정치 채택. (2) 한수 타우젠 (Hans Tausen, 1494-1561) 이 덴마아크의 궁전 목사로서 1530년 동지들과 함께 43조의 신앙 고백을 제정하였고, 교회 정치를 루터 식으로 함. 3) 노르웨이의 종교 개혁 왕의 권력으로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4) 아이슬란드의 종교 개혁 깃세르 아이나르센 (Gisser Einarsen ) 이 1540년 스칼홀트 (Skal holt)에 서 루터 교회 감독이 되어 개혁 사업을 단행하였다.1554년에 신교가 이 섬 을 지배하게 되었다. 11.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 네덜란드 (Netheland)라고 부르는 지역은 오늘날의 화란과 벨기에에 이르는 지 역으로 여러 제후국으로 나누어져 있다가 부르고뉴 (Brougogne)공이 결혼, 매 수 약탈의 방법으로 병합하였다. 1) 식민지 시대 (1) 부르고뉴 공이 프랑스와 싸워 전사하자 국토의 대부분이 프랑스령이 됨. (2) 독일 황제 카알 5세가 집권하자 대부분이 독일령이 됨. (3) 카알 5세의 신교 탄압이 심하였으나 루터와 칼빈의 사상이 널리 퍼짐. (4) 스페인 영토가 되어 필립 2세의 박해를 받음. 2) 독립 전쟁. (1) 오랑주 공 빌헬름 (Whilhelm) (1533-1534) a. 가톨릭 신앙으로 양육 받음. b. 11세때에 오랑즈 (Orange)가를 상속받고, 카알 5세의 총애를 받음. c. 필립 2세가 알바 (Alva) 공을 파견하여 <피의 법정 <이라는 재판을 하여 18.000명을 죽이는 대박해를 함. (2) 1568년 빌헬름 (Wilhelm)은 신앙의 자유와 가치권을 부르짖고 어민과 수 부들을 모아서 독립 전쟁을 시작함. a. 1574년 라이덴 (Leiden)포위시 빌헬름은 제방을 끊어 바닷물을 넣어 승리함. b. 1581년 독립을 선언, 빌헬름이 대통령이 되어 라이덴 대학을 중심하여 개 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c. 1584년 빌헬름은 필립 2세가 보낸 자객에서 암살되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 와 아들이 계승하여 1648년 베스트팔리아 (Westphalia) 조약을 체결하였다. 3) 결과 (1) 라이덴 대학을 비롯하여 프라넥케르, 그레요닌겐,우트레히트,할더비크 대 학이 등이 설립되어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2) 칼빈주의가 발달하였고, 신앙 자유를 통한 개혁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12. 프랑스의 종교 개혁 1) 개혁의 반대자들 (1) 왕권 (2) 고등 법원(파를라망:Parlment) (3) 소르본 (Sorbonne) 2) 개혁자들 (1) 마르가레트 (프랑소와 1세의 누이) a. 신교도는 아니어도 개혁 사상을 동정하고 보호함. b. 1527년 프랑스령내 소국인 나바르 왕과 결혼하여 나바르여왕이라 불리웠고 궁전을 개혁자들의 은신초로 제공하였다. (2) 칼빈 a. 칼빈은 프랑스에 거주하지 않았으나 프랑스를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지원 을 하였다. ㄱ.1555년 파리에 프랑스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ㄴ.8년간 49개처 교회가 설립되었다. b. 교회의 지도자들은 제네바에서 교육을 받은 자들이며 1567년까지 120명의 목사가 파견되었다. 3) 위그노 (Huguenots)사건 (1) 시발 카타리나가 섭정하면서 세력 확장을 위하여 신교와 결탁하자 가톨릭파 지 도자인 귀이즈 (Guise ) 형제는 이를 결렬시키고자 1562년 3월 1일 그의 호위 병으로 바시 (Vassy) 에서 예배드리는 위그노파를 습격하였다.(이것을 <바시의 혈낙>이라고 한다) (2) 경과 프랑스의 종교 쟁론이 전쟁으로 변하였고 위그노 사건이라는 장기전으로 돌입하였다. a. <1차전> 노르망디에서 1년간 전쟁. ㄱ.위그노의 지도자는 콘데 (Conde)로서 영국과 독일의 개혁파들이 응원하였다 ㄴ.가톨릭의 지도자는 귀이즈 형제 외에도 몽모랑시 (Montmorency) 장군과 생 앙드레 (St.Anere) 였고, 쌍방의 지도자 모드가 포로되고 전사하였다. ㄷ.1563년 3월 앙부와즈 (Amboise) 칙령으로 종전하였다. 이 칙령의 내용은 가톨릭 교회는 파리와 각 도시에서 로마교 성당에서 예배드리고, 위그노파의 귀족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그들이 소속한 시나 궁전 에서 예배 처소를 구할 수 있게 하였다. b. < 2 차전> 위그노파는 로레인의 홍의 주교가 궁중에서 득세하자 이를 제거하려는 것이 전쟁으로 변하였다. 1569년 11월에 양파가 모두 기진하여 휴전하였다. c. < 3 차전> 카타리나가 2차전의 책임이 위그노에게 있다 하여 그 목사를 추방하므로 시 작하였고 얼마후 양파 모두 기진하여 1570년 8월에 생 제르맹 (St.Germain) 조약을 체결하였다. (3) 결과 a. 이 조약에 의하며 위그노는 파리 이외에서 예배의 자유와 평등 권리가 허용 되었다. (관직 부여) b. 조약 실행의 담보로 4개 도시를 주었다. 4) 바돌로매 축제의 학살 위그노 전쟁이 프랑스 국내의 내란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유럽 전 지역의 신구교 국가 사이에 전쟁과 실력 대결로 변하였다. (1) 카타리나는 자기의 딸 엘리자베토를 스페인왕 필립과 결혼 시켰고, (2) 신교측에서는 엘리자베토의 노이 마르가레토를 나바르의 앙리 (Henri) 와 결혼 시켰다. (3)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 축제일) 결혼 축하를 위해 양파가 파리에 모였을 때 종소리를 신호로 콜리니 (Coligny)를 위시하여 파리에서 7만 여명,지방에서 무스히 위그노를 학살 하였다. 5) 낭트(Nantes) 칙령 1598년 4월 3일 앙리 (Henri) 4세가 국가와 개혁 교회와의 관계 즉 신교의 양심의 자유를 용인하는 칙령 (1) 예배 자유를 허락하고 (2) 관직 취득권 부여. (3) 신교도들도 로마 교인과 동등권 부여 (4) 안전 보증으로 수개처 도시에 병력을 허용. 13.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 1) 혼인 관계. 프랑스 왕실과의 관계로 친밀함. 2) 칼빈의 영향. 스코틀랜드는 독립 국가이므로 프랑스와 친밀하고 칼빈의 영향을 받아 종교ㅕ 개혁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3) 3개의 대학 설립. (1) 1413년 세인트 앤드루우즈(St.Andrews)대학 (2) 1451년 글래스고우 (Glasgow) 대학. (3) 1464년 애버디인(Aberdeen)대학. 4) 개혁자들 (1)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톤 (Patrick Hamilton)...1528년 2월 27일 순교. (2) 조오지 위셔트(Geoge Wishart)...1546.3.1 순교. (3) 존 녹스(John Knox,1505-1572). a. 대지주의 아들로 그래스고우 대학 수학. b. 1530년까지 로마 교회 소속. c. 조오지 위셔트의 제자. d. 투옥되었다가 1549년 탈출하여 영국 목사가 되었고, 1554년에는 제네바 칼빈을 만남. e. 여러 교회에서는 목회하였으며 개혁 운동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4. 영국의 종교 개혁 1) 성격 (1) 교리와 신학 중심이 아님. (2) 정치와 교회법이 중심. 2) 원인:(헬리(Henry) 8세의 중혼 문제로 교황과 충돌이 생김. (1) 헨리 8세가 형수인 캐더린 (형은 이미 죽음)과 결혼하려고 교회법이 인 정하지 않은 것을 교황을 강요하여 결혼 하였다. 15년간 매어리(Mary)외 에는 자식이 없었다. (2) 15년간 매어리 외에는 자식이 없으니 이 결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교황에게 선언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교황이 거절 하였다. 헨리 8세는 1533년 궁녀인 앤 불린(An Boleyn)과 결혼하였으나 교황이 반대하였다. 3) 개혁의 방법 (1) 교황과 단절하고 국교를 창설 (2) 교회 수장령을 발펴 (1535). (3) 교황에게 납세와 재판을 금함. (4) 수도원을 해산하고 수입을 황실에 귀속시킴. (5) 그러면서도 구교적 태도를 취하였고 화체설 부인자를 화형에 처하였다. 4) 종교 정책 (1) 대립하여 오던 신구교 양파를 모두 탄압하고 영국교회에 복종을 강요함. (2) 1559년 국회에서 교회 수장령을 가결. (3) 공기도움 채택. a. 성찬식에서 일반에게 떡을 나누어 줄 일. b. 십자가,제단,화상을 제거. c. 단순한 제복 착용, 로마교 의식이 많음. (4) 1563년 39개조 신조를 제정. a. 성찬식 견해는 칼빈의 사상과 같음. b. 신조는 진보적 경향이 농후함. 5) 결과 의식이 치중하므로 여기에 반대하여 청교도 운동이 일어남. 6) 관련 인물들 (1) 헨리 8세 (Henry Vlll, 1509-1547) a. 교황 레오의 부탁으로 루토의 저서를 금함. b. 중혼 문제로 교황과 대립. c. <7종의 예전의 고수>라는 책을 저술하고 가톨릭 성례를 그대로 준수함. (2) 윌림엄 틴들(William Tydale, 1484-1535) a.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 b. 성경 번역을 완성. c.이단자로 교수형 당함. 시체를 불사름. (3) 에드워드 6세 (Edward VI,1547-1553) a. 칼빈주의를 취함. b.중요한 감독 직위에 신교도를 배치. c. 유명한 신학자를 초빙하여 대학 교수에 임명. (4) 매어리 (Mary,1553-1558). 영국을 가톨릭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신교의 목사와 감독을 체포하고 불사 르는 피의 여왕. (5) 엘리자베드 (Elizsbeth, 1558-1603 재위) a. 46년간의 치세는 영궁의 중흥기였다. b. 신교의 기치를 들고 나옴. c. 의식 치중의 영국 국교를 강요. d. 청교도 운동이 일어남. 15. 30년 전쟁 전의 독일 1) 시말칼덴(Schmalkalden)전쟁 (1546-47). 프로테스탄티 제후들과 카알 5세와의 전쟁. (1) 원인 a. 1531년 신교 계통 제후들이 시말칼덴에서 동맹을 체결. b. 카알 5세가 교황과 합하여 스페인 군대로 이들을 공격. (2) 결과 a. 작센공 모리쯔(Moritz)등이 변절하여 황제 편에 가담. b. 신교군이 대패. 2) 아우크스부르크 가신조 (Augsburg Interim) (1) 선언 이유 a. 교황은 황제의 세력 신장이 두려워 구원병을 소환. b. 황제가 노하여 자력으로 종교를 정리하고자 선언함. (2) 내용 a. 교직자의 결혼 허락 b.일반 교인에게도 성찬 때 잔을 줌. c. 7예전,사자 위한 미사.성자의 공덕 등 로마 교회 제도를 답습. (3) 결과 : 남부 독일 외에는 잘 시행되지 않음. 3)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평화회의 조약 (1) 모리쯔 등 변절자들이 회개하고 1552년 3월에 황제는 습격하여 승리함. (2) 1555년 국회가 열리고 9월 25일에 협정함. a. 로마교 신자와 아우크스부르크 신조 신봉자는 같은 권리를 가짐 . (칼빈,쯔빙글리는 제외). b. 주의 시민의 신앙은 군후의 신앙과 같아야 함.같지 않으면 재산을 팔아 다른 주로 이사하여야 함. 4) 카알 5세의 토위 (1556) (1) 스페인,인도,네덜란드,이탈리아의 왕위를 아들 필립 2세에게 물려줌. (2) 독일 왕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 주었으나 1564년에 막시밀리안 2세에게 계승시킴. 16. 30 년 전쟁 1) 의의 (1) 가톨릭 교도와 신교도들의 신앙 교리로 인한 전쟁. (2) 독일 제국의 안전과 파괴 문제는 정치적 전쟁임. 2) 원인 (1618-1648) (1) 독일의 루돌프 (Rucolf)황제가 신교의 자유를 허략하였으나 그 후 가톨릭 파인 페르디난트 황제가 즉위하고 신교를 박해 하였따. 신교 개혁파는 여 기에 굴하지 아니하고 구교에 도전하여 독일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2)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가톨릭 보호령인 보히미아(Bohemia)에 스페인왕 구 스타프 아돌프 (Gustav Adolf)가 신교를 적극 후원한 데 있다. 3) 경과 (1) 제 1 기 (1618-23) 팔쯔 (Pfalz) 전쟁 a. 왕이 신교를 탄압하여 회당을 헐게하므로 개혁파들이 궐기하여 프라하를 점령하였다. b. 개혁파에 영국왕의 원조가 없고, 루터파는 변절하엿다. 왕군은 틸리(Tilly 를 대장으로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이에 망명자가 3만명이나 되었다. (2) 제 2 기 (1625-29) 덴마아크 전쟁 덴마아크왕 크리스찬 4세는 영국, 네덜란드 군대와 같이 독일의 신교군을 후원하였으나 독일 왕군에게 격퇴 당하였다. (3) 제 3 기 (1630-35) 스웨덴 전쟁.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 (Gustav Adolf)가 신교군을 도와 침입하였으나 발렌시타인에 의해 격퇴되었다. (4) 제 4 기 (1635-48) 프랑스 전쟁. 프랑스는 독일 왕권의 강화를 견제하기 위하여 스웨덴을 도와 남부 이탈리 아를 공격하여 독일에 혼란을 주었고, 프랑스의 야심을 보고 신교 제후들 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4) 결과 (1) 전쟁의 피해로 인구 3분의 2가 감소. (2) 교역자 전사가 620명. (3) 교육,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가 황폐하여짐. (4) 베스트팔리아 조약 체결 (1648) 5) 베스트팔리아 (Westphalia)조약 30년 전쟁으로 1648년에 독일과 스웨덴 사이에 맺은 강화 조약이다. (1) 종교에 관한 규정 a. 가톨릭파,루터파,칼빈파 모드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b. 교황재산 소유권은 1624.1.10. 현상으로 환원한다. c. 자유 이주권은 허용하며 재산 몰수는 할 수 없다. d. 루터파와 개혁 교회와의 관계는 조약 체결 당시의 현상에 준하다. 신앙 자유 유,재산 소유를 인정한다. (2) 정치에 관한 규정 a.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승인한다. b. 독일은 스웨덴의 독립을 승인한다. c. 스웨덴에 포메라니아 (Ponerania)의 일부와 뤼겐 (Rugen)섬을 할양하고 이 지역 대표는 독일 국회에 참석한다. d. 프랑스는 메츠 (Metz) 툴루즈 (Toulouse), 베르덩 (Verdun),알자스 (Alsace 의 대부분을 획득한다. e. 각국은 자유로 서로 연합하여 또 자기 나라와 외국 간에 맹약할 수 있다. 17. 아르메니우스파의 신학론과 도르트레히트 회의 ( Dordrecht = 도르트.Dort) 1) 아르미니우스 (Arminius,1560-1609) (1) 156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생. (2) 제네바에 유학한 후 1588년에 암스테르담 목사가 됨. (3) 학시과 웅변이 탁월하였다. (4) 코오른허트 (Coornhert) 설을 논박해 달라는 관의 위촉을 받고 연구하다 가 여기에 탁월하였다. (5) 1603년 라이든 대학 교수가 되어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함. 2)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차이  ------------------------------------------------                                문 제   Calvin 파   Arminius 파    ------------------------------------------------                                인 간   완전 타 락  자유 의지 의존                                    예 정   무조건 예정  예지 예정                                    속 죄   제한된 선택 구원  무한 선택 구원                                    은 총   불가항적 은총  가향적 은총                                    성 도   성도의 견인 (보호)  성도의 보호 불확실.    ------------------------------------------------                              3) 도르트레히트(Dordrecht, Dort) 회의 (1) 목적...칼빈파의 아르미니우스파의 분쟁을 종결 짓고 아르미니우스 파를 배제할 목적. (2) 시일,장소...1618.11.13. 네덜란드 도르트레히트에서 회집. (3) 소집자 및 회원...네덜란드 국회의원 84명,아르미니우스는 피고로 참석. (프랑스의 불참) (4) 결의 내용 a. 아르미니우스파 국외 추방. b. 칼빈 신조를 채택하여 <도르트 레히트 신조>를 제정. (5) 결과 a. <정치적 속죄론>으로 우세하던 아르미니우스파가 쇠퇴하므로 개혁파의 위 기를 막았다. b. 드르트레히트 신조는 그후 위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작성에 큰 영향을 줌. 18. 소키누스 (Socinus) 신학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고 단일신론 (Unitarianism)을 주장하는 흐름.제세례파 와 신비주의 중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소키누스에 와서 구체화 되었다. 1) 소키누스 (Faustus Socinus, 1539-1604). (1) 이탈리아 귀족으로 법률가 (2) 백부 레리오 소키누스 (Lelio Socinus, 1525-1562)의 유지를 받들어 삼위 일체설을 반대하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고 폴란드로 감. (3) 만년에 신조와 문답서를 편찬하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4) 1605년에 시말쯔 (Schmalz)가 이를 완성하고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였다. (5) 1638년 예수회에 의해 폐쇠되고 추방을 당함. 2) 사상 (1) 신앙...신의 명령과 약속을 승인. (2) 성경...교리와 도덕을 가르친 글. (3) 기독론 a. 그리스도의 교사적 측면 강조 b. 신인 양성의 합일을 부인. c. 기적적 탄생으로 보통 인간과 다르게 출생. d. 전도에 착수하기 전 하늘에 올리워져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며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나라의 지배권을 얻음. (4) 속죄론...대속설 반대. 그리스도는 죄의 지배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고, 우리의 죄를 버 리게 하셨다. (5) 삼위일체 교리를 구원에 필요치 않으나 대단히 유용하다. 19. 그리이스 교회 1) 키릴로스 루카리스(Cyrillos Lucaris) (1) 1572년 그레데 섬에서 출생. (2) 1602년에 알렉산드리아 대주교가 됨. (3) 1616년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조오지 아보트 (Georg Abbot)와 연락. (4) 알렉산드리아 사본 (Codex Alexandrinus) 을 영국왕 차알즈 1세에게 기증. (5) 162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됨.그는 신앙 고백서를 제네바에서 출 판하여 이단으로 몰리고 5번 추방 되고 5번 복직되었다. 1638년 6월에 사 형을 당하였다. 2) 러시아의 교회 (1) 몽고의 침입으로 유럽과 교통이 끊어졌으나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2) 교회의 중심지는 키에프(Kiev) 였고 후에 모스크바 (Moskva)로 옮겼다. (3) 주교 필라레트 로마노프 (Philaret Romanov) 가 수도원을 중심으로 국난을 막음. 그의 아들 1613년에 즉위함. (4) 니콘 (Nikon 1652-1667) a. 필라레트 로마노프의 후계자로서 교회 개혁을 기도...교직자 음주를 금하 고, 인쇄소를 설치하여 문서 운동을 전개, 교회 음악 개량. (5) 페트로 대제 (1689-1725) a. 진실한 신자. b. 모스크바 대주교를 폐하고 성회(성회)를 설치하여 그 의장이 되었다.
1. 성경의 유래
1. 성경의 유래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신비스러운 책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것은 흔히 \"책\"(the Book)이라고도 불립니다. 이같이 칭하는 이유는 그 책 자체가 벌써 하나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영어로 \"바이블\"(Bible)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원래 \"책\"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성경은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40여명의 저자들이 1600여 년 동안에 걸쳐 저술한 것으로서 66권의 책을 편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각 부분의 내용이 서로 모순됨이 없이 오히려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오늘 우리가 이 책을 갖게 된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실지로 우리가 이것을 더욱 깊이 연구해 가면 그것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성경이 기록된 방법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알려진 두개의 큰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에 비해 3배나 분량이 많으며 기록도 그리스도의 탄생 400여 년 전에 완성된 것입니다. 성경의 원본은 동물의 가죽(양피지)이나 파피루스 초목으로 만들어진 종이 위에 손으로 써 놓았다 합니다. 그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 장마다 손으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습 니다. 그러므로 사본들이 드물었고 매우 귀중했습니다. 구약의 39권은 아람어로 된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39 권 중 처음 5권은 주전 1500 년경에 모세가 쓴 것이고, 나머지 책들은 그 후 약 천년동안에 저술된 것인데 주전 400년경 서기관 에스라가 그 책들을 편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느헤미야 8:5). 최초의 훌륭한 구약의 번역서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한 것으로 셉투아진트(70이 라는 뜻)라고 불립니다. 그 까닭은 아마 70명의 학자들에 의해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을 희랍어로 번역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가르치실 때 이 번역서를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신약 27권은 여덟 사람이 희랍어로 원본을 쓴 것인데 그 대부분의 저자가 그리스도의 사도들이었으며, 주후 1세기에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 당시에 일어났던 획기적인 일들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일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 다. 성경 각 권의 원본은 모두 분실되었거나 파손되어 버렸지만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원본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이 원본들의 사본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3개의 사본은 로마의 바티칸에 보존되어 있는 주후 4세기에 기록한 바티칸 사본과, 런던 대영 제국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주후 5세기에 기록된 알렉산드리아 사본, 그리고 역시 대영 제국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주후 4세기에 기록한 시내 사본 등입니다. 이외에도 이만큼 중요하지는 않아도 수많은 사본들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해사본은 1947년에 사해근처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주전 1세기나 2세기경에 기 록된 것으로 최근의 구약의 번역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사해사본 보다 먼저 기록 된 사본들과의 원문 대조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 구약성경의 저자들의 본래의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신약 원본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신약이 저술된 직후에 만들어진 번역서 들인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라틴어로 기록한 불가타(Vulgate)라고 부르는 것으로 주후 405년에 제롬에 의해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초대교회 교부들이 만든 수많은 성경 인용문들이 있습니다. 희랍어 원본과 초기 번역서들 그리고 교부들의 인용문들을 학자들은 서로 비교해 가며 신약저자들이 쓴 내용을 거의 정확하게 단정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최 초에 준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필사할 때 다소 애로가 있었 더라도 성경의 뜻과 내용에는 변화가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번역본 처음으로 성경이 영어로 번역된 것은 죤 위클리프가 22년 동 안의 힘든 노력으로 1382년에 완성한 것입니다. 1456년에는 요한 구텐베르그에 의해 인쇄술이 발명됨으로써 성경의 출판 을 훨씬 빠르게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쇄상의 애로도 거의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구텐베르그가 처음으로 인쇄한 책은 라틴어 성경이었습니다. 윌리암 틴데일이라는 사람은 천주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약을 번역하여 1525년에 인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쇄한 사본이 대부분 런던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불태워져 버렸고, 그 자신도 백성에게 성경을 나누어주었다는 이유로 사형대에 올라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최후에 \"주님 이시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처음으로 성경전서를 영어로 인쇄하는 일은 역시 영국의 마일스 커버데일이라는 사람이 수행 했습니다. 다른 번역서도 뒤따라 나오게 되었고, 1604년에는 영국 왕의 눈도 띄어져 드디어 당시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킹 제임스판(King James Version) 성경전서의 번역을 하게 하였습니 다. 그리하여 54명의 학자들이 이 일을 1611년에 완성시켰습니다. 그것이 수 백년 전에 번역되 었지만 아직도 가장 많이 애독되는 영어 번역본 중의 하나입니다. 1982년에는 뉴 킹제임스판 (New King James Version)이 출판되었습니다. 킹 제임스판(KJV)이 나온 후에 다른 몇 가지 역본들이 나왔습니다. 1885년에는 84명의 영국 과 미국의 학자들이 킹 제임스판을 발간할 당시 발견되지 않았던 사본들을 참조하여 영어개정 판(English Revised Version)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번역판은 1901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를 미국 표준판(American Standard Version)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개정한 개정 표준판(Revised Standard Version)이 1952년에, 그리고 New American Standard는 1970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번역본들은 고어체를 이해하기 쉬운 현대어로 고치고 최근에 발견된 사본들을 통해 원문의 정확성을 높이려는 의도를 갖고 번역된 것들입니다. 또, 1978년에는 NIV(New International Version) 등 그 후에도 여러 번역본들이 출판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도 독 자적인 번역본들을 갖고 있습니다. 라임즈 듀아이 카톨릭판(Rheims Douai Catholic Version)의 역본은 1582년에 출판되었는데 그것은 1970년에 New American Bible로 대체되었습니다.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성경은 다른 번역판 신약의 책과 똑같고 구약도 같으나 구약에 14권의 책들이 더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여분의 책을 가리켜 외경(Apocrypha)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근원이 의심스럽다\"는 뜻입니다. 이 의심스러운 책들은 희랍어로 쓰여졌는데 구약 히브리어 정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판 이외의 성경에서는 제외 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한글 번역은 스코틀랜드부터 만주에 와서 선교하던 J. 로스가당시 만주에서 몇 명의 한국인과 협력하여 1882년 누가복음을 시작으로 일부분씩 번역하다가 1887년에 이르러 \"예수셩교전셔\"라는 이름으로 신약이 완역되어 간행했는데 이것을 \"로스 번역(Ross Version)\"이라고도 합니다. 국내에서의 성경 번역은 1893년 에 공선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되어 1900년에 신약이 완역되었으나, 미흡한 점이 많아 1904년에 개역이 완료되었고, 1906년에 재수정하여 공인역으로 출판하였습니다. 그 후 1910년에 구약까지 완역되었고, 1911년에 신약을 포함하여 \"셩경젼셔\"로 합본, 간행되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애독되는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은 공선 성서번역위원회가 펴낸 위의 번역본을 대한성서공회가 여러번 편집 및 번역을 고쳐 1956년에 펴낸 것입 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성령의 감화로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하였습니다. 성령이 성경을 쓴 사람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이 가르친 것으로 하니...(고전 2:13)\" 이 때문에 성경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 이는 구절도 자세히 살피고 연구해 보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성경이 진리라는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몇 가지의 특색으로 밝힐 수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과학서적은 아니지만 과학적으로 정확한 책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정확하며 역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했습니다. 성경이 예언적으로도 정확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취된 그 많은 예언들에 의하여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공평하며, 모든 사람의 선과 악을 가려주며, 하나님 자신 의 \"마음에 합한 자\"라도 그의 죄를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높은 도덕의 표준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의 적들은 이것을 없애 버리려고 수없이 많은 시도를 했지만 결국 불멸의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1.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은 수백 종류나 되며 그 외의 증거들도 무척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책들을 읽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으며, 이것은 크리스천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오류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합당하지 않은 책이라고 주장하는 속임수 곧 인기 있는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경에 오류가 전혀 없으며 가장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습니다. 사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만일 40여 명의 성경 기록자들이 이 점에서 모두 잘못 되었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쟁이였든지 아니면 미치광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책보다도 가장 훌륭한 문학 서적이요, 가장 완전한 도덕 법전이며 또한 전 시대에 걸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가장 위대한 책인 성경이 사람을 속이는 광신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면,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일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진지한 마음으로 자세히 조사해 보기만 한다면 누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성경 기록자들의 주장이 지극히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성경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이모저모로 무려 3,000번이 넘게 언급했습니다. 성경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들 가운데 하나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수많은 성경의 예언들이 상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성취되어 오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예언을 했던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 매우 오랜 후에 그의 예언이 성취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전 538년경에 대언자(선지자) 다니엘은 페르시아 왕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483년이 지나면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약속된 구세주로 왕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바 있는데(단 9:24-27), 이것은 수 백년이 지난 후에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언들(겔 37:22, 사 11:11, 눅 21:24, 기타 다른 많은 예언들)은 마지막 때가 되면 유다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국가를 회복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1,500년 동안 전혀 불가능하게 보였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 예언들이 우리 세대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중동 땅에 서 있는 이스라엘이 바로 그 예언의 일부가 성취된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부분이 상세하게 다 성취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예언되어 있으며, 이 모든 예언들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300가지가 넘는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그분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예언들은 전 세계로 기독교가 퍼져나가는 것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거짓 종교들을 포함한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동서고금을 통해 성경과 같은 책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딕슨(Jeane Dixon)이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케이스(Edgar Cayce) 등의 거짓 예언자들은 애매모호하며 허점투성이인 예언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성경과 같은 범주에 속할 수 없는 것들이며, 코란이나 논어 및 기타 비슷한 종교서적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이처럼 놀라운 예언의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그 규모가 어찌나 엄청난지 성경이 하나님께서 직접 드러내 주신 계시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그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도 이집트나 아시리아 그리고 그 외 다른 고대 국가들의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뛰어납니다. 참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성경의 기록이 고고학적으로 확증된 것만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에 관하여 아마도 가장 위대한 권위자라 할 수 있는 글루에크(Nelson Glueck)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찾아낸 수십 가지의 고고학적 발굴들은 성경의 역사 기록들을 개괄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아주 정확하게 확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자세히 파악함으로써 종종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를 들자면, 과학자들이 현대 과학의 많은 법칙들을 실험적으로 확증하기 오래 전부터 성경에는 이미 이런 것들이 자연에서 발견되는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사 40:22), 거의 무한대로 큰 우주(사 55:9), 질량 에너지 보존 법칙(벧후 3:7), 물의 순환(전 1:7), 엄청나게 많은 별(렘 33:22), 물질과 에너지의 동등성(히 1:3),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시 102:25-27), 생명체의 활동에 있어서 피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레 17:11), 대기의 순환(전 1:6), 중력장(욥 26:7) 등등.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은 현대 과학의 전문 용어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현대 과학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한 사실들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경이나 과학이나 역사나 기타 다른 어떤 분야에 속한 문제에 있어서 성경의 내용이 정말로 잘못되었음을 증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오류들을 지적하긴 했지만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은 이 모든 지적 사항들에 대해 언제나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해 왔습니다. 성경의 구조 역시 매우 놀라운 것으로 마땅히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거의 2천 년의 기간에 걸쳐 각기 다른 40명 남짓한 사람들이 기록한 책으로, 모두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완전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한 권의 책입니다. 각각의 성경 기록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면서도 자신들의 메시지가 결국에 가서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람의 메시지는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각각의 독특한 목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우연이나 공모로는 성경의 놀라운 구조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며, 그 안에서 놀랍도록 조직적이고 수학적인 구조와 대칭성과 복잡 미묘함 등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장엄하게 전개되는 성경의 일괄된 주제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 즉 하나님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만물의 창조와 구속(救贖)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 사람과 여러 국가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볼 때에도 성경은 전례 없는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심장과 마음을 끄는 공전(空前)의 베스트 셀러이며, 빈부귀천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경을 전해 받은 모든 인종과 국가와 부족의 사람들에게 큰사랑을 받은 책입니다. 사실 이처럼 범세계적인 매력을 지니고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은 성경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국가 전체의 삶에서 성경을 존중하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중히 여기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나라의 예를 들자면 특별히 영국과 미국을 들 수 있는데, 현시대에서 전 세계의 성경 창고라 할 수 있는 이 나라들로부터 대부분의 성경과 선교사와 설교자가 전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에 들어서 영국은 지난 수 십 년간 배교와 불신의 늪으로 빠졌고 그 결과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현재 미국 역시 점차 이와 동일한 길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는 이 말씀을 믿은 사람들의 간증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와 과거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바는 성경의 약속이 사실이라는 것이며, 성경의 교훈은 건전하며, 성경의 명령과 권고는 지혜로우며, 성경의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10- 강해설교 작성법/ 전달
10- 강해설교 작성법 장두만 강서침례교회 담임목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교수 우리는 지금까지 설교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논의해 왔다. 본문 선택과 중심 내용의 파악, 본문의 연구, 청중의 필요와 설교의 목적, 본론 전개 방식 결정과 아웃라인 작성, 적용, 보조 자료, 서론과 결론 등을 논의하느라고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내용> (설교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집을 발행한다든지 잡지나 신문에 문자화된 설교를 발표할 경우에는 좋은 설교 내용만으로 족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만드는 주된 이유는 강단에서 구두로 전파하기 위해서이다. <내용>은 <전달>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그 내용이 어떠하냐 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하다. 희랍의 유명한 웅변가였던 데모스데네스(Demosthenes; 384-322 B.C.)가 "웅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전달, 전달, 전달"이라고 답변했다. 설교에 있어서도 유사한 말을 할 수 있다. 해던 라빈슨(Haddon Robinson)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설교가 효과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설교의 내용)와 함께 "어떻게 말할 것인가?"(=설교의 전달) 하는 문제가 바로 되어야만 한다.1) 설교자의 과제는 단지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참고서적을 조금만 뒤지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진리를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진리를 전하되 "어떻게 전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들을 만한 내용이 없는 설교도 청중을 참기 어렵게 만들지만, 힘없는 전달은 더 참기 어렵게 만든다. 그런 설교는 청중에게 수면제 역할밖에는 못할 것이다. 전달이 시원치 않으면 청중은 내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전에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내용>과 <전달>은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다. 어느 하나도 없거나 고장이 났을 경우 자전거는 자전거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먼로우(Alan Monroe)와 에닝거(Douglas Ehninger)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연설이 얼마나 효과적이냐 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좋은 내용이 없이는 전달할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요, 효과적인 전달이 없이는 당신의 생각을 분명하고 생생하게 남에게 전할 수 없다. 투수가 그 볼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볼의 방향과 속도가 정해지듯이 연설가는 그의 전달 방식에 따라 그의 연설의 힘과 활력이 정해진다.2) 훌륭한 내용을 가진 설교도 전달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효과는 상당한 정도로 감소된다. 이와 반대로 내용은 그리 훌륭하지 못해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면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설교는 훌륭한 내용과 함께 효과적인 전달, 이 두 가지를 다 갖춘 설교일 것이다. 머크라스키(James C. McCroskey)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연설에서 좋은 증거를 사용하는 것이 설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한 논문에서("A Summary of Experimental Research on the Effects of Evidence in Persuasive Communication") 이렇게 결론 짓고 있다: "만일 메시지가 형편없이 전달된다면 좋은 증거를 포함하고 있더라도 청중의 태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3) 설교에 있어서 전달이 그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교자들은 이 분야를 너무나 경시하고 있다. 전달 능력은 마치 생득적(生得的) 능력이나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설교자가 대부분인 것 같이 보인다. 설교의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전달과 내용은 상호 보완적이란 의미에서 함께 일한다" 4)는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는 준비하고 다른 하나는 준비하지 않음으로 설교를 절름발이로 만드는 우(愚)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I. 전달에 있어서의 실패 이유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설교에 있어서 전달의 중요성은 설교의 내용에 못지 않은데 왜 그처럼 많은 설교자가 이 면에서 실패하고 있는가? 로이드 페리(Lloyd M. Perry)가 지적하고 있는 여덟 가지 이유는 모든 설교자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5) 첫째 이유는 에세이(essay)와 연설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세이와 연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면 양자는 다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세이는 문자로 표현된 것이고 청중이 눈앞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그 순간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설에 있어서는 청중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연설의 경우에는 비록 그 내용이 에세이와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청중이 관심을 갖고 경청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실패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미리 작성해 온 설교문을 읽는 것이 곧 설교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沒理解)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치명적이다. 연설이나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둘째 이유는 명백한 것만 주로 취급하려 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청중을 무시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청중과 함께 호흡을 같이 하면서 무엇인가를 나누려 하기보다는 청중이 듣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말해 버리려는 경향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넷째 이유는 성취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 또는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유는 청중으로부터 너무 조급하게 많은 반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기대하는 궁극적인 반응은 청중이 어떤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 반응을 얻는데 필요한 다른 요인은 무시하거나 경시한 채 최종 결과만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여섯째 이유는 설교자나 연설자가 자기 자신을 청중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메시지는 단순히 설교의 원고만을 읽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자의 열성, 신실함, 진지함 등이 함께 가야 하는데, 이런 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단순히 원고 내용만을 청중에게 전해 주려 할 때 실패하게 된다. 일곱째, 청중의 청취 능력이 설교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때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원리들을 기계적으로 인간 세계에 그대로 이식(移植)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청중은 기계가 아니라 인격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복합적인 요인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서 이런 요인들을 발견해 설교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러한 실패의 원인을 잘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이전보다 훨씬 더 향상된 상태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청중을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II. 전달 훈련의 필요성 어느 누구도 나면서부터 저절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본구적(本具的)으로 있지만, 그 능력을 계발 (啓發)하지 않으면 언어 습득 능력은 사장(死藏)되어 버리고 만다.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은 그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선천적 재능의 다소와는 관계없이 후천적인 훈련을 통해서 상당한 수준의 전달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설교자로서의 불후(不朽)의 명성을 남긴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의 경우를 보자. 그의 사역의 초기에 영국 런던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온 후 소문이 들려오기를 예배당에서 너댓줄 이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전혀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때부터 부적합한 음성에 의해서 설교가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전달 연습을 했고, 그것이 결국은 그를 교회사에 큰 족적(足跡)을 남길 정도의 대설교가로 만들어 주었다. 6) 조지 트루엣(George W. Truett) 목사의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어떤 공식적인 스피치 훈련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음은 분명했고, 그의 전달은 효과적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처한 특수한 환경에 기인한다. 대평원에서 카우보이들에게 설교함으로 그는 음성을 개발했다. 또한 농아인 그의 동생과 대화하기 위해 입모양이나 발음을 분명히 해야 했기 때문에 좋은 스피치 훈련을 받은 셈이 되었던 것이다. 7) 크롤(Woodrow M. Kroll)이 제시하고 있는 스피치 훈련의 세 가지 이유는 아무런 가감 없이 전달 훈련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8) 첫째, 그것은 논리적 사고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둘째, 그것은 복음 증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요인들을 제거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효과적인 전달 방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실제로 응용할 때 평범한 설교자가 탁월한 설교자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기본 원리를 습득하는 것은 교화적(敎化的)인 설교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요소라고 하겠다. III. 전달에 있어서 언어적 측면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전달에 있어서 실패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연설과 에세이의 구별의 실패, 즉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의 구별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설교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다 기록해 놓은 원고도 아니고, 아웃라인도 아니다. 이런 것과는 달리 설교는 음성이나 표정이나 제스쳐(gestures) 등의 연속이다. 거기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다. 문자로 기록해 놓은 것은 다시 읽을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에선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설교자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그 순간 이해하지 못하면 끝나버리고 만다. 설교자는 자기 설교의 전체를 다 알고 있지만 청중은 한 부분밖에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확한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적 측면과 비언어적 측면이 있는데, 먼저 언어적 측면부터 고찰하도록 하겠다. A. 단어 선택의 문제(또는 표현 문제) 설교는 문자 언어가 아니고 음성 언어이기 때문에 설교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에세이(essay)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달라야 한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는 설교자는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격을 결(缺)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에서는 어떤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인가? 첫째, 평이한 단어를 사용하라. 설교자는 설교시 지나치게 난삽(難澁)하고 현학적(衒學的)인 단어 사용은 피해야 한다. <-적 (的)>을 남발한다든지, 신학적-철학적 전문 용어를 연발한다든지, 고사성어(古事成語)를 계속 사용한다든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알아들을 만한 난해한 어휘를 상용(常用)한다든지 하는 것은 설교자의 어휘력 과시는 될지언정 청중의 설교 이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서고금의 철학과 사상에 통효(通曉)하여 고담준론(高談峻論)이나 명론탁설(名論卓說)을 강(講)해도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명한 침례교 설교자였던 스펄전(C.H.Spurgeon)이 말한 바와 같이, 시장(市場)의 사람들은 학문적 언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에 학문하는 사람들이 시장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어려운 단어를 쉽게 번역하는 것은 목사가 해야 할 숙제이지 성도들의 숙제는 아닌 것이다. 9) 웨슬리(John Wesley)는 가끔 자신의 설교를 무식한 하녀에게 읽어주면서,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나 구(句)를 내가 쓰거든 나를 중단시켜라"고 하면서 쉬운 용어를 사용하려고 애를 썼다. 설교자는 평이한 단어를 쓰면서도 고상하고 세련된 표현을 하도록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세련되고 고상한 표현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다.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할 때 비로소 그것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난삽한 단어를 의도적으로 남용하는 설교자들은 대개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가리기 위해서, 말하자면, 심리적 <보상 행위>(compensation)의 일종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결격 사유가 있을 때 이를 은폐하여 유식하게 보이기 위해서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설교자라고 해서 조잡(粗雜)한 표현만 써야 한다는 이유는 없다. 교육의 다소와는 상관없이 모든 설교자는 세련된 표현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어떤 부족한 면을 은폐하기 위해 어려운 단어를 남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둘째, 명쾌한 표현을 사용하라. 독일의 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이체(Friedrich Nietzsche)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심오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명쾌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대중에게 심오하게 보이게 하고 싶은 사람은 애매모호하려고 노력한다." 해던 라빈슨(Haddon Robinson)이 자주 말하듯이, "강단에서 아지랑이가 끼면 회중석에서는 안개가 낀다"는 말을 모든 설교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10) 설교자는 자신을 심오하게 보이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고, 진리를 숨기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해서 그들이 변화되게 하기 위해서 설교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자의 절대적인 의무이다. 필자는 얼마전 어느 교회에서 주관하는 선교집회(mission conference)에 강사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주강사는 선교사로서의 경험도 풍부하고 학문적 수련도 제대로 된 훌륭한 분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 강사가 선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 학교를 다닐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을 설교의 서론으로 인용함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것은, "당신은 우주적 중요성이 있느냐?" (Do you have universal significance?)는 질문이었다. 영어를 아는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universal significance"라는 표현은 아주 애매하고 번역하기도 굉장히 까다로운 표현이다. 이 표현은 "우주적 중요성" "우주적 의의" "보편적 중요성 "보편적 의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게 한 가지 문제이고, 또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어느 번역도 이 표현의 의미를 명쾌하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교 내내 필자는 그 표현을 뭐라고 하면 의미를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에 그 강사와 대화하면서 "당신이 사용하던 '우주적 중요성'이란 표현은 애매해서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되니 '범세계적인 영향력'(world-wide impact)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더니, 그 강사는 "그 표현이 훨씬 명쾌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이해되지 않는 애매한 표현은 설교 용어로서는 마땅히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전(前)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의 체험을 통해서 명쾌한 단어의 사용이 설교자나 연설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지적인 활력이 넘치는 분이셨다. 나의 최상의 훈련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왔다. 그는 애매한 표현을 전혀 용납하지 않으셨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1903년 아버지가 타계(他界)하실 때까지--그 때 그는 81세의 고령이셨다--나는 내가 쓴 모든 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내가 일일이 그것을 큰 소리로 읽도록 하셨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항상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수시로 나를 중단시키시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다. "그러면 왜 그렇게 표현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곤 했다. "참새 한 마리를 쏠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 전체를 쏘지 말아라. 내가 말해야 할 그것을 향해 정확하게 겨냥하라." 11) 셋째, 문장의 길이를 가능하면 짧게 하라. 설교는 음성언어이기 때문에 듣는 순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긴 문장,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문장은 피하고 가능하면 간결한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추상적이고 애매한 말은 긴 문장으로 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짧은 문장을 통해서 청중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 문장에서 사용된 단어의 수와 문장의 난이도(難易度)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플레쉬(Rudolf Flesch)의 연구는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도표화하고 있다. 12) 8개 단어 이하 아주 쉽다 11개 단어 쉽다 14개 단어 비교적 쉽다 17개 단어 표준 21개 단어 비교적 어렵다 25개 단어 어렵다 29개 단어 이상 아주 어렵다 이 도표에 의하면 한 문장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수는 17개 단어 이내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넷째, 구체적 표현을 사용하라. 추상화(抽象化)라는 것은 자세한 부분들을 생략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지도는 어느 지역을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지도 제작 목적에 맞는 내용만 포함하고 나머지는 다 제외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 몇 가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이란 것도 우리에게 있어서 지도와 마찬가지다. 유용하기는 하지만 많은 제약이 있다. 그것은 마치 비누거품 같아서 우리 앞에서 조금 떠돌다가 손에 잡으려고 하면 터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13) 문장 표현에 있어서 사용되는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표현은 오해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릿핀(Duane Litfin)은 추상적 단어와 연관하여 다음과 같은 원리를 제시한다: "단어가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그 단어는 재미가 없고 기억하기도 어려워진다" 1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가능하면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부엌에 놓아두었던 고기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역겹다면 옆에서 궁금해하는 어린 아들에게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새로운 화학적 물질을 형성하기 위해서 고기의 성분이 분해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할 것인가? 이렇게 말하면 어린 아이가 알아듣겠는가? "고기가 썩었어!"라고 표현한다면 어느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근거해서 우리의 견해와 판단을 형성한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표현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또 하나를 더 보자. "성서적, 신학적 지식의 결여는 신앙 성장 과정에 있어서 중대한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표현보다는 "성경을 잘 모르면 신앙이 자라기 어렵다"라고 하는 표현이 훨씬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인 표현이다. 다음의 두 가지 대비(對比)를 통해서 추상적인 표현과 구체적인 표현의 차이점을 좀더 자세히 보도록 하자. 추상적 구체적 더러운 동물 돼지 위대한 영국 시인 밀턴(John Milton) 몇몇 사람 다섯 명의 우주인 오래 전에 1840년 5월 3일 많은 외제차 72%에 달하는 벤츠와 렉서스와 BMW 가까운 장래에 2주 후에 약간의 채소 홍당무, 시금치 및 배추 많은 꽃 200여 송이의 장미와 40여 송이의 튜울립 다섯째,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라. 감각적인 단어는 우리의 오감(五感) 가운데 어느 하나에 어필(appeal) 하는 단어인데, 이런 단어는 그렇지 않은 단어에 비해서 훨씬 강하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감각적인 표현은 단어 그 자체를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의성어(擬聲語)나 의태어(擬態語)의 사용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은유법이나 직유법 같은 수사법을 통해서 나타낼 수도 있다. 랠프 루이스(Ralph Lewis)의 연구에 의하면, 호세아서에서는 600여 개 이상의 감각적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각과 관련된 표현이 98개, 청각과 관련된 것이 46개, 미각과 관련된 것이 55개, 후각과 관련된 것이 6개, 촉각과 관련된 것이 34개, 근육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 129개, 내적 심상(心像, internal images)과 관련된 것이 234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15) 감각적인 표현은 성경에서는 물론 위대한 문학 작품이나 일상적 언어 생활에서도 다반사(茶飯事)로 사용되고 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공든 탑이 무너지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같은 속담들이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유치환의 「깃발」에서) 이라든지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눈이 나려 /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여 / 마음 허공에 등불을 키고 / 내 홀로 밤 깊이 뜰에 나리면 /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雪夜」에서) 같은 것도 모두 감각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문장의 경우에도 감각적인 표현이 효과적이라는 데에는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그가 길을 가고 있었다"는 표현보다는 "그는 비틀비틀 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라든지 "그는 어슬렁거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라든지 "그는 미친듯이 빠른 걸음으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는 표현이 훨씬 더 감각적인 표현이다. 직유법이나 다른 사물과 비교하는 표현도 좋은 감각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의 심령은 건조해진다"는 표현보다는 "말씀과 기도에 게을러지면 우리 심령은 메마른 사막같이 생명 없는 불모지로 변한다"는 것이 더 낫다. 박목월(朴木月)의 시 「나그네」는 직유법과 감각적인 표현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 속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효과적인 언어 사용은 생득적(生得的)인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계속 계발(啓發)될 수 있는 후천적인 능력이다.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아 프리오리'(a priori)한 것이 아니라 '아 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한 것이다. 그러면 설교자로서 어떻게 하면 이 면에서 진보를 가져올 수 있을까? 다음의 몇 가지 제언(提言)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1) 자신의 언어 사용 습관을 점검해 보라. 16) 나 자신이 사용하는 문장은 짧은가, 긴가? 단문인가, 복문인가? 어휘는 대학의 국문과 출신이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인가, 아니면 초등학교 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한가? 문장의 표현 방식은 복잡한가, 단순한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 문체(style)에 대해서 이런 종류의 질문을 던지며 비판적으로 자신의 설교를 대한다면 분명한 향상이 있을 것이다. (2) 다른 사람의 문체를 주의해서 보라. 17) 좋은 수필집, 문학 작품, 다른 설교자의 설교집 등을 읽을 때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표현에 유의를 하면서 읽고, 또 읽다가 효과적인 표현이 나오면 그것이 왜 효과적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표현들을 깊이 연구해서 그 이유를 발견하여, 동일한 원리를 사용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표현 자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3) 설교를 기록하라. 18) 설교는 문자로 기록된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다. 설교 전달 방식으로는 원고낭독형이나 다른 방식보다 아웃라인형이 가장 좋다. 그러나 단어 사용이나 문장의 표현에 문제가 있거나 자신이 없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써 보는 것이 좋다. 이런 방법은 특별히 설교 경험이 없는 초보자에게 권장을 하고 싶다. 물론 이 방법을 통해서 언어 구사에 상당한 자신을 갖게 되면 설교문을 완전히 작성하는 대신 처음부터 아웃라인식으로 작성해 설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B. 음성 사용 문제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단어 선택 문제와 함께 선택된 단어와 문장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1) 고저(pitch) 전달에 있어서 피해야 될 최대의 금기(禁忌)는 <단조로움> (monotony)이다. 낮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한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높은 음성으로만 계속 설교하는 것은 전달에 있어서의 최대의 적이다. 설교자는 청중이 설교 중에 졸지 않게 하려면 음성의 고저를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한다. 설교할 때마다 졸음과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설교자라면 결코 효과적인 설교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속삭이듯이 낮게, 어떤 경우에는 맹수가 포효하듯이 사자후(獅子吼)를 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런 대화식으로 다양하게 해야 된다. 위대한 설교자치고 음성의 고저를 다양하게 사용하지 않는 설교자는 없다. 낮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높은 음성만으로 설교한다든지 하는 것과 꼭 같은 정도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동일한 패턴(pattern)을 반복하는 것이다. 음성의 고저가 있기는 분명히 있는데 똑 같은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123454321-123454321같은 식이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리듬이 생기게 되고, 리듬이 생기게 되면 그것은 음악으로 변하고, 음악은 청중을 잠재우는 자장가가 된다. 설교자는 그 음성이 고저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사용해야 된다. 필요하다면 갑자기 높이고, 또 필요하면 갑자기 낮추어야지 그 변화에 일정한 패턴이 있어서는 안 된다. (2) 속도 (rate) 음성의 고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음성의 속도이다. 말은 너무 빨리 해도 안 되고, 너무 느리게 해도 안 된다. 너무 빨리 말하면 청중이 제대로 따라오기 어렵고, 너무 느리게 말하면 박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말의 속도는 전달하려는 설교의 내용이나 설교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청중은 1분에 약 500단어 정도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한 속도로 말을 들을 때에는 듣는 내용을 다 소화시킬 수가 없다. 설교나 연설에서 정상적인 속도는 1분에 120단어에서 170단어 정도의 속도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설교 내내 고정불변이라는 뜻은 아니다. 설교의 내용이 고조되면 말의 속도도 빨라져야 한다. 또한 어떤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할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출 수도 있다. 설교자는 설교가 끝날 때까지 항상 동일한 속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청중은 전달시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전달은 그만큼 효과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음성의 속도를 변화시키면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19) 첫째, 설교자가 전하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둘째, 그것은 독서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해서 청중이 설교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그것은 한 가지 내용에서 다른 내용으로의 전이(轉移)를 용이하게 해 준다. 넷째, 그것은 중요한 개념을 강조해 준다. 다섯째, 그것은 청중의 관심을 끌게 해 준다. (3)강약(volume) 설교자의 음성의 크기는 대개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20) 첫째는 음성을 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힘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설교자와 청중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고, 셋째는 설교하는 환경이 어떠하냐, 즉 설교를 방해하는 요소(예: 잡음,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 등)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어야지 설교 내내 항상 불변한다면 청중은 쉽게 지치고 말 것이다. (4) 휴지(休止; pause) 설교에 있어서 휴지라는 것은 '어' 또는 '에'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설교를 머뭇머뭇 거리면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21) 설교에 있어서의 휴지는 말이 막혀서 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잠깐 쉬는 것이다. 그것은 음성 변화와 마찬가지로 문장에서의 구둣점과 같은 역할을 한다. 먼로우(Alan H. Monroe)와 에닝거(Douglas Ehninger)는 휴지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휴지는 사고(思考)에 구둣점을 찍는다. 쉼표나 세미콜론이나 마침표가 문장의 단어들을 사고 단위로 분리시키듯이 상이한 길이의 휴지는 연설의 단어들을 의미 단위로 분리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연설을 할 때나 원고를 읽을 때 휴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인쇄물에서 잘못된 구둣점을 사용함으로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혼란과 같은 혼란을 청중에게 가져다준다. 22)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휴지를 사용할 때에는 하나의 사고 단위가 끝난 다음에 해야 할 것이다. 문장의 중간에나 어떤 논리를 한창 전개해 나가는 도중에 그렇게 하면 그것은 혼란만 가중시키고 청중의 의혹만 받게 된다. 때아닌 휴지는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할 말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지언정 유익은 되지 않는다. 휴지는 종종 강조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 어떤 중요한 진리를 선포한 직후에 잠시 설교를 중지하고 쉬는 것은 "내가 방금 한 말을 잘 생각해 보시오"하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떤 예화를 들려주기 직전에 잠깐 쉬는 것은 청중으로 하여금 예화에 더 큰 기대를 하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설교를 잠깐 중단하고 쉬는 것은 어떤 강력한 언어보다도 설교자의 감정이나 의향을 더 잘 표현해 준다. 설교자는 절대로 휴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잠깐 쉬면 다음에 할 말을 잊어 버릴까봐, 아니면 그 사이에 청중이 설교자에게 너무 시선을 집중할까봐 두려워서 쉬는 동안에도 '어' '음' '에'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휴지의 목적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잠깐 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또 쉴 때는 완전히 쉬어야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5) 기타 언어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고저, 강약, 속도, 휴지의 어느 범주에도 포함시키기 어려운 면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설교자는 전달할 때 열정(enthusiasm)이 있어야 한다.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를 계속해서 고성으로만 하라는 말이 아니다.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야 되고, 그 확신이 음성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열정이 없는 설교는 청중은커녕 설교자 자신도 감동시키지 못할 것이다. 설교자가 불타면 청중은 불 구경하러 모일 것이다. 둘째, 설교자는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어떤 설교자들은 습관적으로 각 문장의 끝을 너무 떨어뜨려서 아예 입 밖으로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삼켜 버리는 경우가 있다. 각 문장의 끝을 떨어뜨리지 않거나 높이는 것도 어색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떨어뜨려서 귀에 들리지도 않게 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각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하고, 또 그 끝을 적당히 낮추어서 청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설교자는 비어(鄙語)를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강단에서 욕설이나 저속한 표현을 마구 남발하는 것은 청중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육을 어느 정도 받아서 교양이 있는 청중이라면 비어를 마구 쓰는 설교자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과 일본 사람을 아무리 증오하더라도 강단에서 이들을 지칭할 때 '왜놈'이라고 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놈...' '...년' '...새끼' 같은 용어도 설교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넷째, 가능하면 문법에 맞는 표현을 쓰도록 해야 한다. 물론 원고 낭독형의 설교가 아닌 다음에야 문법적으로 완벽한 설교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문법적으로도 흠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은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평소에 문장 수련이 잘 되어 있으면 실제 설교할 때에도 임기응변하는 능력이 탁월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섯째, 원어의 사용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신학교에서 한두 학기 배운 원어 실력 가지고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원어를 제대로 모르면서 청중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꼭 필요한 경우라면 원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웬만한 경우라면 "이 단어는 원어에서 ....라는 의미입니다"라든지 "이 구절을 원문에 좀더 충실하게 번역한다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라는 식의 간접적 사용이 바람직할 것이다. 여섯째, 사투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서울, 경기도, 충정도, 강원도는 전반적으로 표준어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특히 영남 출신과 호남 출신은 사투리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 영남 사람들은 서부 경남 사람들 외에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포항과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했다.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쌍시옷을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자의 주위에는 쌍시옷을 발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2 때 독일어를 배우면서 그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라디오에 나오는 아나운서의 표준 발음을 따라서 수년간 연습을 했다. 끈질긴 연습의 결과 지금은 쌍시옷을 제대로 발음할 수 있다. 영남 사람은 <으>와 <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 서부 경남 출신들은 중모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신'을 '학신'으로 발음하고, '위대하다'를 '이대하다'로, '경쟁'을 '갱쟁'으로 발음한다. "강원도의 관광사업을 진작시킨다"는 말을 "강언도의 강강사업을 진작시킨다"는 식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강하다. 호남 출신은 <예>를 <에>로 발음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예배'를 '에배'로, '예산안'을 '에산안'으로 발음하기도 하고, 소유격 조사 <의>를 <으>로 발음하는 사람도 많다. 또 조사 <과>를 경음화해서 <꽈>로 발음하는 경향이 많다. 또 일부 호남 사람들은 격음화 현상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적합하다'는 격음화 현상에 따라 '저-캅-하-다'는 식으로 발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갑-하-다'와 같이 발음하기도 한다. 표준어권에 속하는 사람도 가끔 사투리를 쓰는 경향이 있다. '겁이 많다'를 '겂이 많다'라고 하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 '손을 씻는다'라고 말해야 할 경우에 '손을 닦는다'라고 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손을 물에 씻고, 수건으로 닦아야지 물에 손을 닦는 것은 아니다. 사투리는 아니지만 어법에 맞지 않는 발음을 하는 경향은 출신 지역과 상관없이 널리 퍼져 있다. <잊다>와 <잃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설교자,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 <낫><낮><낯>이나 <빗><빚><빛>도 제대로 구별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빛이 있으니'는 '비시 이쓰니'로 발음해서는 안 된다. '비치 이쓰니'로 발음해야 연음법칙에 맞는 발음이 된다. '무릎을 꿇고'는 '무르블 꿀고'로 발음해서는 안되고 '무르플 꿀코'라고 발음해야 연음법칙과 격음화 현상을 제대로 따른 발음이 된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사'는 '흐그로 사라믈 비즈사'가 아니라 '흘그로 사라믈 비즈사'라고 해야 연음법칙에 맞다. 설교자는 국어 순화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영어나 외국어를 공부할 때에는 철자나 발음에 굉장히 신경을 쓰면서 왜 우리가 평생 사용하는 국어에는 무관심한가? 자기 나라말을 어법에 맞지도 않게 마구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효과적인 음성 사용에 관심이 있는 설교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목사의 사모가 좋은 비평자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설교를 녹음해서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몇 개월 동안만 자신의 설교를 비판적으로 들어보고 개선하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천하면 음성의 사용은 물론 설교 전체가 휠씬 개선될 것이다. Ⅱ. 전달에 있어서의 비언어적 측면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언어 외적(言語外的) 측면은 언어적 측면 못지 않게 중요하다. 설교자는 양자 모두를 통해서 그의 의사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홀(Edward Hal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언어로 무엇인가를 말하는 이외에 소리 없는 언어, 즉 행동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부단히 우리의 진짜 감정을 전달한다" 23) 설교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강단에 올라설 때 그의 몸과 함께 서게 되고, 그 몸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큰 자산이 될 수도 있고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언어와 함께 설교자의 행동 하나 하나가 의미 전달에 매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달에 있어서 비언어적 측면의 중요성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다. 설교자의 얼굴 표정이 어떠한지, 설교자가 손이나 팔, 머리 같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청중은 그 속에 포함된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면 설교는 가일충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언어 외적인 요소로서 설교의 전달과 관계 있는 것들로는 복장 및 외모, 몸과 손의 움직임, 눈의 사용 등이 있다. A. 복장 및 외모 (dress and appearance) 밀즈(G. R. Mills)와 애런슨(Elliot Aronson)은 연설가의 복장 및 외모가 연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들은 한 젊은 여인을 대학의 여러 클래스에 나타나게 해서 어떤 의견을 개진하도록 사전에 계획을 세웠다. 수업이 시작되면 강사는 학생들에게 교양 교육과 직업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이 어떠한가를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설문서를 배부하고 여러 질문에 응답할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이 때 강사는, 학생들이 질문에 답변을 하기 전에 어떤 자원자가 나와서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응답한 후에 학생 각자가 자기의 설문서에 답변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자원자 가운데는 그 젊은 여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강사는 그 여인을 지명해서 교양 교육과 직업 교육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라고 부탁했다. 똑같은 방식의 실험이 여러 클래스에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몇몇 클래스에서는 그 젊은 여인이 아주 말쑥하고 매력적인 옷차림, 잘 어울리는 화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모습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게 했고, 다른 몇몇 클래스에서는 똑같은 내용의 의견을 개진하게 하되 옷은 초라하고, 화장은 도무지 잘 어울리지도 않고, 머리는 헝클어진 모습으로 하게 했다. 학생들이 받은 설문서는 어떤 클래스든 간에 다 동일했고, 또 그 여인이 개진한 의견도 동일했지만 매력적인 모습으로 의견을 개진한 경우 학생들은 연설가의 의견에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휠씬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24)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복장이나 외모를 단정하게 하고서 강단에 서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최첨단 유행을 따라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25) 설교자가 너무 유행에 민감하면 경박하다는 인상을 주고, 너무 유행에 뒤지면 시대에 뒤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설교자는 중용을 취해야 할 것이다. 복장 및 외모에 관련해서 주의해야 될 것은 이것이 장소나 분위기와 잘 조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 예배 같은 경우에는 물론 정장을 해야 되겠지만 한 여름의 야외 캠프 같은 데서는 오히려 평상복 차림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머리나 구두는 제대로 손질이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B. 몸과 손의 움직임(body movement and gestures) 설교자는 제스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언어외적 의미를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검지(檢指)는 무엇을 지적하거나 방향을 보여줄 때 사용하고, 손바닥을 위로 한 모습은 무엇을 받거나 줄 때, 손을 세워서 좌우로 흔드는 것은 거절할 때, 주먹을 쥐는 것은 무엇을 특히 강조할 때, 양손을 세워서 손등을 서로 엇갈리게 하는 것은 적대 관계에 있을 때, 그리고 세워서 마주 붙인 손등을 떼는 것을 헤어지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이 이외에도 무엇을 묘사할 때 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어떤 물건이 사각형이면 손이나 손가락 몇 개를 써서 사각형을 그리고, 삼각형이면 삼각형을 그려 보임으로 그 물건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밖에도 필요에 따라 설교자는 손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효과적인 제스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26) 첫째 그것은 자연스럽다. 인위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나오는 제스처는 어색하다. 자연스럽게 몸에 밴 대로 제스처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그것은 다양하다. 어느 한 종류의 제스처만 계속 사용하는 것은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한다. 설교 내용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제스처를 사용해야 한다. 셋째, 그것은 시의(時宜)에 적절하다.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제스처를 사용해야지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좋은 제스처도 무용지물이다. 넷째, 그것은 청중의 규모와 조화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소규모의 청중 앞에서는 제스처의 크기가 작다. 그러나 대규모의 청중 앞에서는 크게 해야 격에 맞을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많은 청중 앞에서 제스처를 아주 작게, 그리고 반대로 소규모의 청중 앞에서 제스처를 크게 하면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다섯째, 좋은 제스처는 분명하다. 제스처를 사용하는 것인지 아닌지 엉거주춤한 상태가 아니라 분명하다. 손의 사용과 함께 몸의 움직임도 적절해야 한다. 동상이나 조작품같이 한 자리에 부동 자세로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은 어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강단이 좁다 하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체신머리 없게 보인다. 필요한 때마다 적절하고도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 손이나 몸의 움직임 이외에 얼굴 표정도 중요하다. 설교자가 영화 배우나 연극 배우같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효과적인 설교의 전달을 위해서 배우의 표정을 어느 정도 빌어 오는 것은 크게 해로울 것이 없다. 슬플 때는 슬픈 표정을, 기쁠 때는 기쁜 표정을, 화났을 때에는 노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의 발로이다. 설교의 내용에 맞게 얼굴 표정도 변화되어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면 너무 엄숙하고 무서운 표정보다는 온화하게 웃는 듯한 표정을 짓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계속 애쓰다 보면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C. 눈의 접촉(eye contact) 우리의 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은 비언어적 전달(non-verbal communication)의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이다. 일찍이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말했다: "전달에 있어서 음성 다음으로 그 효과면에서 중요한 것은 얼굴 표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의해서 좌우된다." 남의 시선을 피한다든지, 계속 노려본다든지, 머뭇머뭇하면서 남을 쳐다본다든지 하는 것 모두가 다 무엇인가를 전달해 준다. 심리학자 메라비안(Albert Mehrabian)은 설교의 총체적 효과는 7%의 단어와 38%의 음성과 55%의 얼굴로 되어 있다고 했다. 설교에서 청중과의 눈의 접촉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필자는 설교할 때 전체 시간의 90% 이상을 청중에게 향하고, 오직 10% 미만을 원고를 보는데 사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설교에 있어서 원고에 있는 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보다 청중에게 시선이 향해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고에 푹 파묻혀서 그것을 전달하는 데에만 급급하고 청중의 반응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설교자는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직시해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그 시선이 거의 원고에만 고정되어 있고, 어떤 설교자는 교회당 벽만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설교자는 교회당 천장만 바라보기도 하는데, 모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을 직시해야 하지만 어느 한 곳만 계속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때로는 왼편으로, 때로는 중앙으로, 때로는 우편으로 시선을 골고루 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어느 한 쪽만 바라보면 시선을 전혀 받지 못한 청중은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설교할 때 설교자의 시선이 청중을 향해 있지 않으면 청중은 다음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로 설교자를 송사할 것이다. 27) 첫째, 청중은 설교자가 상당히 부정적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환언하면, 설교자는 청중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설교자가 겁장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청중을 두려워하고, 설교에 자신이 없이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셋째, 설교자가 설교에 별관심이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원고만 다 읽고 끝내는 데 관심이 있지 어떤 진리를 전달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설교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청중이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청중과 눈 접촉을 많이 갖기 위해서 설교의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Ⅲ. 전달의 방식 (methods of delivery) 설교를 어떻게 청중에게 전달하느냐 하는 방식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설교자는 그 취향이나 역량에 따라 자기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방식을 사용해야 할 것이지만, 문제가 많은 방식을 사용하는 설교자는 그것을 개선하도록 노력을 많이 해야 될 것이다. A. 원고 낭독형 (reading method) 이 방식은 서론에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설교 내용 전체를 다 기록해서 이것을 설교 시간에 청중에게 읽어주는 방법이다. 이 방식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에게 안도감을 준다. 28) 해야 할 설교를 앞에 둔 설교자 치고 일말(一抹)의 불안감이 없는 설교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 낭독형의 설교를 하면 설교하기 전이나 하는 동안에 불안감은 거의 갖지 않게 된다. 아마 이런 유형의 전달 방식을 사용하는 설교자는 토요일 밤에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될 것이다. 둘째, 이 방식은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게 해 준다. 29) 설교 내용 전체를 문자로 다 기록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나도 틀림없이 다 전할 수 있고, 설교의 길이도 미리 다 정해 놓을 수가 있다. 셋째, 이 방식은 설교자에게 좋은 훈련이 된다. 30) 원고를 계속 쓰는 것은 설교자로 하여금 충분히 준비하게 하고, 또 글을 씀으로써 설교자 자신에게 큰 훈련이 된다. 넷째, 이 방식은 설교 원고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므로 후일에 설교집을 출판할 때나 다른 데 설교를 기고할 때 특별히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잇점이 있다. 31) 원고 낭독형의 설교는 위에서 열거한 장점에 비해 그 단점이 너무 크기 때문에 별로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로 하여금 원고에 집착하게 되므로 청중에게 시선을 주기도 어렵고, 청중의 반응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렵다. 32) 이 방법에 매여 있는 설교자는 하우(Reuel Howe)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관계가 원고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 하면 복음 자체가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원고의 전달이 아니라 만남이다." 33) 원고를 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원고를 보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원고 낭독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설교자의 경우는 예외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원고 낭독형의 설교를 하는 설교자는 어쩌다가 한 번씩 원고에서 눈을 떼 청중을 바라볼 뿐 -- 더군다나 그것도 아무 촛점도 없이 -- 설교 시간의 대부분은 원고에 매여 거기서 꼼짝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되면 설교자와 청중은 거리감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설교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어렵다. 둘째, 이 방식은 청중에게 설교자에 대한 불신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설교자가 원고에 얽매여서 꼼짝을 못하면, 설교자가 제대로 준비도 하지 않고서 남의 설교를 베껴서 하는구나, 설교를 제대로 소화시키지도 못한 채 하는구나 하는 불신감을 청중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많다. 셋째, 이 방식은 전반적인 전달 효과에 있어서 다른 방식보다 덜 효과적이다. 이 방식은 엄밀히 말하면 설교라기보다는 글을 읽는 것이기 때문에 낭독에 아무리 숙달되어 있다 해도 눈의 접촉 부재, 제스처 부재, 낭독으로 인해 오는 부자연스러움, 읽을 곳을 제대로 찾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설교의 중단 등의 문제점을 피할 길이 없다. 넷째, 이 방식은 성령이 특별히 역사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설교자가 아무리 준비를 해도 실제로 설교를 하다 보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설교 준비시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런데 원고 낭독형은 이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법은 별로 권장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꼭 이 방법을 사용하려거든 많은 연습을 통해 그 단점을 극복하고 난 다음에나 할 것이다. B. 암기형(memorization method) 이 방법은 원고 낭독형보다는 진일보했다고 하겠다. 이 방법으로 설교하는 설교자는 먼저 원고를 완전히 준비한 다음에 그것을 암기해서 설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첫째, 이 방법은, 원고 낭독형과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전하려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게 해 주고, 설교자에게 좋은 훈련이 되고, 원고를 후일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기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암기형은 원고 낭독형이 갖지 못하는 장점이 있다. 둘째, 이 방식은 원고를 다 암기하기 때문에 원고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따라서 눈의 접촉이나 제스처 같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34) 셋째, 이 방식은 청중에게 설교자의 표현이 아주 미려하고 세련되어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35) 그러나 이 방식은 장점을 훨씬 능가하는 단점도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 방식은 설교자의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 간다. 36) 어느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설교자는 일주일에도 여러 번 설교를 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설교를 일일이 다 암기한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불필요한데 허비하는 결과가 되겠는가! 둘째, 이 방식은 암기한 것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염려 때문에 신경 과민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37) 셋째, 이 방식은 자연스럽지 못한 가능성이 많다. 38) 그냥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에 비해서 암기한 것은 아무래도 인위적이고 암기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이 많다. 넷째, 이 방식은 원고 낭독형과 마찬가지로 설교하는 도중에 성령께서 특별히 역사하셔서 미리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경우 그것을 처리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 39) 이러한 심각한 단점 때문에 암기형의 설교는 별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설교 경험이 별로 없는 초보자들이 설교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이 방법으로 시작해서 설교에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기게 되면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바꾸는 것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 처음에는 암기형의 설교 방식을 취했다. 우리말로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말로 하는 설교같이 표현이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원고를 영어로 다 작성한 다음에 이것을 암기해서 여러 번 연습을 한 후 설교 시간에 그대로 했다. 이 방법이 그대로 주효(奏效)해서인지 교수와 학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결국은 학교내의 설교 대회에 출전해 입상했던 경험까지도 있다. 그러나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암기하지 않고 설교 아웃라인만 가지고 하는 방식으로 바꾸었고, 지금은 영어 설교나 우리말 설교나 모두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C. 즉석형(impromptu method) 이 방식은 설교자가 사전에 특별한 준비도 없이 즉석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설교하는 방식이다. 설교자는 어떤 부득이한 경우에 사전에 준비하지도 못한 채 설교해야만 될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평소에도 이런 방식으로 설교한다면 그는 일찌감치 설교를 그만두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성도들을 위해서 유익할 것이다. 이러한 설교를 계속해서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이요, 자신과 성도들에 대한 기만이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점점 성장해 감에 따라 열두 사도는 구제하는 일 때문에 사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주력을 못하게 되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행 6:2)라고 하면서 일곱 사람을 택해 그들에게 세상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 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사도들도 세상일을 제쳐놓고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했다면 오늘날의 설교자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말씀 준비하는 일에 게을러서 준비 없이 설교하는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D. 아웃라인형(outline method, or extemporaneous method) 이 방식은 원고 낭독형이나 암기형과 마찬가지로 사전에 충분히 준비를 하지만, 설교 내용을 완전히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하고자 하는 바를 아웃라인 형식으로 만들어서 실제 설교할 때에는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지금까지 논의한 어느 방식보다도 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이 방식이 갖는 많은 훌륭한 장점 때문이다. 첫째, 이 방식은 아웃라인만 가지고 설교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거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지엽적인 것들은 일부 빼먹을 수도 있겠지만 설교 전체의 내용이나 흐름에 지장이 없는 한 사소한 것을 빼먹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방식은 전달이 아주 자연스럽다. 40) 원고에 완전히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설교의 방향이 벗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웃라인을 쳐다보기 때문에 청중과의 눈의 접촉, 제스처 등을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셋째, 이 방식은 그 내용에 다소 융통성이 있을 수 있다. 41) 청중의 반응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때 그때 일부 내용을 빼어버릴 수도 있고 설교 준비할 때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것을 추가해서 말할 수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아웃라인조차도 없이 하는 소위 <자유 전달형>(free delivery method)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42) 그러나 이 방법은 할 말을 잊어버릴 경우 엄청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설교 준비를 철저히 하고 설교 내용에 익숙해 있다 하더라도 잊어버릴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자유 전달형은 암기형이 갖는 단점을 모조리 다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아웃라인형 전달에 대한 반론도 몇 가지 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아웃라인형의 설교는 준비를 대충해서 설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43) 그러나 이 반대는 별로 설득력이 없다. 설교 준비를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달 방법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설교 철학과 관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웃라인형의 설교는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웃라인만 가지고 하면 설교가 횡설수설(橫說竪說)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한다. 44) 이것도 전달의 형태와 관계 있는 문제는 아니다. 설교의 조직 능력이 없는 설교자는 어느 방법을 써도 횡설수설할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아웃라인형의 전달 방식을 즐겨 쓰지만 설교가 왔다 갔다 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방식은 아웃라인을 늘 쳐다보기 때문에 설교의 맥이 끊기고 또 눈의 접촉이 좋지 못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45) 이 반대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아웃라인형의 설교에 익숙하지 못한 설교자는 앞을 보기보다는 아래를 볼 때가 더 많다. 그렇
10. 예수 그리스도
10. 예수 그리스도 이제 우리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생을 산 사람의 생애를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 도이십니다. 그는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에 인간의 몸을 입고 계신 동안의 이야기는 복음서라고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성경 전 체가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 첫 책인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 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는데, 그것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전장에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장차 오실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였다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신약 전체도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 그의 교회에 대해 증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복음서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각기 글쓴이들의 입장에서 기록하였습니다. 어떤 복음서에 기록된 것이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어떤 내용은 조금 다르게 전해진 것도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예언 내용을 즐 겨서 인용했습니다. 마가는 예수가 말씀한 것보다 예수가 행하신 그 업적에 대해서 더 밝혔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 예수의 자비를 묘사했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신성에 증거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20:30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기록한데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례요한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서 언급하기 전 예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에 대해 생각해보 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친척이었고 예수님에게 세례를 준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과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항상 세례요한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보다 그를 세례요한이라고 부르는 중요한 이유는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먼저 왔습니다. 이사야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마 3:3). 그는 보통 사람과는 좀 달랐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 는 그곳에서 전도했고 설교를 들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대중 앞에 서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며, 자기 뒤에 장차 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 들의 죄를 책망하는데 용감했고,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를 하도록 설교했습니다. 예수님께 세례 준 후에 그 는 예수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자기의 모든 권위와 일들을 삼가고 물러섰다가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힌 바 되어 목 베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 보 다 큰이가 없다(마 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교회는 세례 요한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 라 세상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 하나님의 아들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4-17을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 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가 거기 창조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는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의 탄생 예수님은 주전 4년에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서기 연대를 측정할 때에 연대의 착오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4년의 오차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동정녀이고 그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잉태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셨습니다. 그의 족보에서는 다윗 왕의 후손으로 태 어났음을 말하지만 그의 왕국은 다윗의 왕국과 같이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왕국을 의미합니다. 이제 때가 차서 미가의 예언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 (미가 5:2). 당시 로마의 황제는 전국에 호적령 을 내렸습니다. 호적을 하려고 마리아와 요셉은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베들레헴 마 을에 왔을 때는 이미 집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고 여관방 마저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 구간에 묵게 되었습니다. 거기 가장 비천한 자리에 아기 예수가 태어나 강보에 싸여 말구유에 눕게 되었 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어떻게 박사들이 별을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왔으며, 어떻게 목자들이 어린 아기를 보러 왔는가를 잘 아실 것입니다. 박사들이 베들레헴 땅 근처에 왔을 때 헤롯왕에게 어디에 왕이 될 새 아기가 탄생했는가를 물어 보았습니다(성경은 동방 박사가 3명이라는 언급이 없습니다). 이때 성경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된(미 5:2) 말씀을 두려워한 헤롯왕은 새 어린 왕이 나면 자기의 왕위가 빼앗길까봐 겁을 먹고 베들레헴 근처의 모든 마을에서 태어난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다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왕은 예수를 죽이려는 자기의 음모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요셉의 꿈을 통해서 그의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 요셉과 그의 가족들은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는 예수가 난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왔습니다. 갈릴리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북방에 위치하 고 있으며, 유다는 남쪽에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그 중간에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의 교훈 중의 대부분은 갈릴리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기의 교훈은 요단강 너머 유다와 뵈레아 지역에서 이 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단지 12살 때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과 함께 예 루살렘 성전에 올라 가셨다는 이야기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찾아다닐 때 예수님 은 성전에서 선생들과 함께 모세 율법의 어려운 점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외에 예수 의 어린 시절에 관해 그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의 기록 외에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의 세례 삼십세 되시던 해에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은 예수가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세례 주기를 주저했습니다. 예수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 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느니라(마 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세례를 받으신 것 은 우리에게 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모범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지 결코 그가 죄가 있어서 죄사함을 얻으려 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보면 세례의 목적은 죄사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셨습니다(마 3:16). 어떤 그림들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물을 떠서 뿌리는 모습이 보이지만 마태복음 3:16과 마가복음 1:10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 는 침수 세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 오실새"라는 말이 이 사실을 잘 입증하 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증명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0에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도사업을 시작하심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은 광야로 기도하러 나가셨습니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40일 기간이 끝날 무렵에 예수님은 사탄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에 지지 않으셨 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한번도 죄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티 끌 만한 죄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일 처음에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이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셨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자주 이적을 행하셨습 니다. 얼마 후에 예수는 갈릴리 바닷가의 가버나움에서 그의 전도 사업의 터전을 닦으셨습니다.
12.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12.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그가 행한 이적이 위대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더욱 훌륭합니다. 본 장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으며 어떻게 가르치셨나 하는 것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나?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과 연관시켜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많은 교훈을 비유로도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는 교훈이 들어있는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5:11-32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매우 훌륭한 이야기로 된 비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단순히 청중들에게 흥미를 돋구어 주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길 잃고 방황할 때 다시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유는 보는 관점에 따라 27개에서 50개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비유는 인간에 관한 것이고 동물이나 식물, 또 인간과 친근한 사물을 주제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 가장 전형적인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어떤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릴 때에 어떤 것은 길가에, 어떤 것은 흙이 얕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밭에, 그리고 어떤 것은 옥토에 떨어졌는데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좋은 결실을 맺었고, 다른 곳에 떨어진 것들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그는 제자들에게 이 비유가 뜻하는 바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즉,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씨가 자라거나 자라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고, 결실은 그들의 삶 가운데 거둬들이는 것 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질문 형식으로 가르치시기도 하셨습니다. 한번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묻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50)고 가르치셔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적대자들이 함정에 빠뜨리려고 교묘한 질문을 할 때마다 그들이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다시 하심으로 오히려 적대자들을 곤경에 빠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때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등 모범을 통해서 가르치시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발이 더러워서 씻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참된 위대함은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는 무엇을 가르치셨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은 그가 가르친 방법보다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가르침에서든지 언제나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황금률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7:12에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교훈에 나타난 삶의 새로운 방법은 어떤 이방 종교에서도 혹은 모세의 율법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교훈인 것입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는 예수님이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산상 설교"일 것입니다. 이 설교는 마태복음 5, 6, 7장에 나옵니다. 이것은 어떤 한 가지 사상에 일관해서 설교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주제에 관해 가르친 것입니다. 이 산상 설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7,8) 등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자 혹은 명성이 있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른 마음과 이웃을 섬기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는 가르침을 통해 주님은 참된 부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단지 행위로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혹은 생각으로) 죄를 짓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히브리인의 욕설중의 하나)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고 가르치셨으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혼에 대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 (마 5:32) 맹세에 대한 교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마 5:34,35) 예수님은 이 산상설교에서 무저항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정말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 순종한다면 이 세상에는 전쟁이 그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38, 39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행하기 어려운 교훈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전도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많이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비유중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즉, 겨자씨 비유나 누룩에 관한 비유 등이 그것입니다. 이전에 다니엘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단 2:44). 유대인들은 잠정적인 그들의 왕국을 찾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가 세우실 나라는 영적인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위에 올라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나라를 세우려 오셨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나라는 교회라고 하셨으며 (마 16:18,19), 이것은 곧 세워질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 나라(교회)가 세워졌는지에 대한 것은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에 관해서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주님께 충성된 모든 자들이 거처할 처소라고 하셨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의 처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재림하실 때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2)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사 이 무서운 종말로부터 인간을 건져주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바로 살라고 외친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욱 도덕적이셨습니다. 그는 세상을 죄에서 건지시려고 오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그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허위의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교훈 자체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신성을 지녔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예수의 초대 구세주 예수는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오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억지로 그를 영접하도록 하시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8-30).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셨는지요?
13. 그리스도의 십자가
13. 그리스도의 십자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사복음서에도 이 사실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책들의 삼분의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에 관하여 쓰여져 있습니다. 본 장에서는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마지막 한 주간 때때로 예수는 자기가 떠나시게 될 것을 12제자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진정한 나라는 잠정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도 많은 군중들은 겉옷을 길에 깔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뒤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 21:9)"라고 외쳤습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예수를 영적인 나라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왕으로서 잘못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던 때는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기 불과 닷새 전이었습니다. 다음 날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그곳은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에게 부당한 이익을 남기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었던 곳입니다. 이 사건이 예수의 반대자들로 하여금 그를 죽일 결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그 다음날 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30을 받고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유월절 만찬 배신당하시던 날 밤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들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만나셨습니다. 이 때 그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모범을 보여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간곡히 권면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는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 앞에서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는 먼저 유월절 누룩 없는 떡을 떼시고 그 후에 잔(포도즙)을 취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이 나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마 26:26-28).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떡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문자 그대로 그의 몸과 피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것은 나의 몸이니 받아 먹으라 하신 그 떡이 정말로 예수의 몸은 아닙니다. 그것은 누룩 없는 떡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이것은 나의 몸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만찬이 끝난 후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곧 나의 뜻대로 마옵 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후에 제자들이 있는 곳에 와 보니 그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에게 그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가 애써 기도하시며 흘리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았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그 동산을 떠나려고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일단의 무리가 검과 몽둥이를 들고 평화의 왕 예수를 잡으러 왔습니다. 유다는 예수께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는 인사를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무리들은 예수를 잡았습니다. 잠시 베드로가 흥분하여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으나 곧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들은 무서움에 떨면서 예수를 홀로 남겨 둔 채 도망해 버렸습니다. 심문 그리스도가 당하신 심문은 재판의 원칙에 어긋나고 불법적인 것이었습니다. 한밤중에 예수는 유대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 앞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안나스에게서 다시 예수는 가야바 앞으로 끌려 오셨습니다. 가야바는 예수가 사형 당함이 마땅하다고 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어두운 한밤중에 베드로는 두려워하여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유다가 먼저 예수를 배신하고 이제는 베드로가 그를 부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가서 목메어 자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고 회개한 후 주님께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해가 돋은 후 예수는 유대인 공회에 끌려가고 거기서 가야바의 판결에 대해 승인을 받습니다. 그러나 로마법에 의하면 유대인들로서는 죄인이라도 사형에 처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를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지만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갈릴리지방을 다스리던 헤롯왕에게로 예수를 보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예수가 주로 설교하셨던 곳입니다. 그러나 헤롯왕도 예수를 빌라도 총독에게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한 결과 무죄함을 알고 놓아 줄 방법을 모색하였지만 유대 백성들의 반동을 두려워 한 나머지 결백한 예수를 죽이도록 로마 병정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총독의 군병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희롱하면서 그의 머리를 치고 십자가 위에 못박으려고 예수를 끌고 나갔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힘 히브리어로는 "골고다"라고 불리고 희랍어로는 "갈보리"(해골이란 뜻)라고 불리는 곳에 이르러 예수는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때가 금요일 (목요일이라는 설도 있음) 아침 9시경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예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죄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두 명의 강도가 예수의 좌우에 달렸는데 그것은 예수를 모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암흑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암흑의 순간도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과 무덤에서 승리하고 일어나심으로써 곧 다시 밝아졌던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일곱 말씀에서 그의 죽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자기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갖는 병정들과, 구경하는 백성들과 비웃는 관원들을 향해서 예수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2) 자기 육친의 어머님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도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시면서 자기의 어머니를 돌볼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3)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5) 정오 때쯤 되어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 3시경에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시고는 운명하셨습니다. 그가 운명하실 때 땅은 떨며 지진이 일어났고,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는데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끝났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백부장은 심히 두려워하여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일찍이 밤에 예수께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이 몇 명의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 예수를 부자인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곧 밤이 되었으므로 그들은 미처 하지 못한 일은 안식일(토요일)이 지난 후에 하기로 결정하고 장례 일을 마쳤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 갈까봐 병정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다음날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 왔을 때에는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는 마침내 부활하셨습니다.
14. 그리스도의 부활
14. 그리스도의 부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 28:6)" 이 말은 안식 후 첫날 새벽녘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전한 천사의 이야기 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안식일을 쉬고 미처 못 다한 장례 일을 마치기 위해 무덤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무덤 입구에 있던 돌이 굴러져 있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의 나타남 그 여자들은 그들이 보고들은 것을 사도들에게 말하기 위해 갔습니다. 즉시로 베드로와 요한이 여자들의 보고를 확인하기 위해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얼마 후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곁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예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그의 형제들에게 그가 살아나셨고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 즈음에 예수는 다른 여자에게도 자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도 거기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부활의 소식은 십자가 사건 후에 목자를 잃어 절망에 사로잡힌 양들 - 사도들 - 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곧 이어 다른 보고도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엠마오로 가는 시골길에서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과 게바(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사건들입니다. 그날 밤 예수께서 문을 닫고 모여 있던 제자들 한 가운데 나타나심으로 깜짝 놀랐지만 그들은 곧 그의 몸의 상처를 보고 그들 앞에 서 계신 분이 그들의 육체를 가진 그들의 주님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운 생선을 먹으심으로서 살과 뼈가 없는 영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눅 24:43).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을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할 때에도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한 주 후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를 향해서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들 특히 도마로 하여금 의심에서 예수의 몸의 부활을 믿게 만든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 것입니다. 이후에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산 위에서는 11 제자들에게도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6,7절에서 예수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도 보이셨습니다(고전 15:6,7). 마지막으로 부활하신지 40일 후에 하늘로 승천하실 때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말씀하시고 마지막으로 축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하늘 구름 속으로 올라 가셨으며 그들의 눈에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빈 무덤의 중요성 바울은 예수의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약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4, 15, 17) 예수는 우리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또한 무덤에서 일어나신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정복할 힘이 없었던 자였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할 능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빈 무덤의 빛을 통해서만 십자가의 중요성은 부각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가능성도 증명해 줍니다. 그가 자기의 죽음을 정복하셨다면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도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영생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예수의 부활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옛 언약과 그 율법의 종말을 가져왔음을 또한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을 1500년 동안 지배했던 모세 시대(율법 시대)는 갈보리 언덕 위에서 끝이 난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 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입니다(골 2:14). 그때부터 유대인과 이방인 등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 시대(Christian Age)에 살고 있으며,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대 사명 (The Great Commission) 예수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대 사명을 주셨습니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이 사실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 예수께서 12제자에게 유대 땅으로만 다니면서 전도하라고 명하셨지만 지금 그가 주시는 새 사명은 전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대 사명에 대한 세 가지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 다음 표는 이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에게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마가복음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믿고 세례받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누가복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 요 약 가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라. 믿고 회개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 기독교는 전진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그는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 때문에 죽으셨고, 장사되었으며,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전한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정치, 과학, 혹은 경제를 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은 또한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과는 달리 복음은 모든 인종, 국가를 망라하여 예수를 그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사명을 통해 여기서 주어진 구원의 조건은 대단히 단순합니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 집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죄사함을 받는 축복은 세례의 결과로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6:16).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가르쳐야만 된다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잃어버린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상을 받기 위해 어떻게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지 배워야만 합니다.
15. 죄와 그 결과
15. 죄와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들이 믿고 있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이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본 장에서 우리는 죄가 무엇이고 또 죄의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죄란 무엇인가? 요한은 "죄는 불법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일 3:4). 범죄는 세상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행악이란 도덕적 표준과 사람의 관습을 어기는 것이지만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란 문자적으로 "표적을 빗나가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표적이므로 우리가 그 뜻에 순종하지 못할 때마다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간음, 술 취함 등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지적하는 죄이지만 다른 죄들 이를테면 도박 등은 성경에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에 비춰볼 때 이것은 죄입니다. 요한은 육신으로 좇아난 "모든 불의가 죄"라고 했습니다(요일 5:17). 태만(怠慢)도 성경은 죄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예를 들면 그리스도인들은 병자를 문병할 의무가 있는데(마 25:36) 찾아가 보아야할 병자가 있는데도 문병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하지 않아야만 될 뿐 아니라 그가 명하신 것들을 반드시 행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도덕적인 원칙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다 멸하라"고 명하셨지만 사울 왕은 그가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약간의 동물들을 살리고 아말렉 왕을 살린 적이 있습니다. 그가 도덕적으로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으므로 죄를 짓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주님의 만찬에 쓰일 재료로 떡과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사용할 것을 지시하셨는데 우리가 닭튀김이나 오렌지 쥬스 등으로 대신한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변경시키고 그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가 얼마나 크고 작으냐는 것에 대해서는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작은 거짓말"은 용서해 주고 "큰 거짓말"만 정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라"고 가르칩니다(계 21:8). 사람을 미워하는 것과 살인하는 것을 비교해 봅시다. 요한은 이렇게 교훈 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죄의 결과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도 함께 일러 주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과연 죽었습니다. 그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간 결과 그는 세월이 지난 후 육체적으로 죽었고, 그 후로부터 그의 후손들도 육체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 영적인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영적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인 반면 육적 죽음은 몸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죽음을 영원히 소멸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는 죄의 결과는 영적인 죽음이라고 기록된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3에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바울은 사람들이 모두 육체적으로는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강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고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우리가 다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우리들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엡 2:1).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골 2:13). 이와 같이 죄의 결과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영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머지 않아 육체적으로도 죽어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계 21:8). 죄는 유전되는가? 그러면 우리가 아담의 죄와 우리 부모의 죄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과연 아담과 부모가 지은 죄를 물려받는 것일까요? 혹은 우리들이 지은 죄의 대가만 받을까요?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우리에게 밝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4:12에는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0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죄의 대가는 반드시 자기가 지는 것이지 결코 부모의 죄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지적한대로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지 우리 선조들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은 점을 주목하십시오. 어린아이가 날 때부터 아담과 부모의 죄를 이어 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교리를 "원죄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죄" 혹은 그와 같은 사상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의 사실을 말합니다. 에스겔 18:20에 있는 기록을 보면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 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 돌아가리라." 이와 같이 갓난아기는 결코 부모의 죄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원죄의 교리는 "죄는 불법(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행동)이라(요일 3:4)"는 가르침과 상반됩니다. 이것은 유전되는 특성이 아닙니다. 요리하는 법이라든가 자동차 운전 등이 유전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특성이 아니라 행동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갓난아기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면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우리가 본받아야될 예로 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8:3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원죄를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모순이 생기고 말 것입니다. 즉,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자손이고(행 17:29), 영혼은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에(창 2:7), 날 때부터 인간이 죄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 죄의 기원은 하나님께로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원죄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럼, 우리는 육신의 부모에게서 무엇을 물려받았을까요? 죄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의사들은 약한 부모에게서는 약한 아이가 태어나고 병이 있는 부모에게서는 병이 있는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육체적인 유전은 있으나 죄의 유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나이쯤 되어서는 죄의 저항력이 없는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어린아이는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순결한 것입니다.
16. 예수 그리스도 - 죄 사함의 길
16. 예수 그리스도 - 죄 사함의 길 만약 인간이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면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죄가 우리 창조주와 모든 인간사이에 영적 죽음이라는 큰 틈을 갈라놓았습니다. 본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케 하신 죄의 치유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속죄의 필요성 인간은 자기가 지은 죄를 위해 스스로 속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많은 선행을 쌓았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죄의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그 죄를 위해 하나님께 속죄를 드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사 59:2)"고 선언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인간을 사랑하시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신 속죄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 죄 사함은 인간이 좋은 일을 많이 하여서 그 공로로 인해 사함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예화를 하나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빌린 돈을 갚을 길이 없어서 법정에 끌려갔습니다. 판사가 막 판결을 하려고 하는데 그의 친구 한 사람이 빚을 대신 갚아 줍니다. 이 죄수는 비록 자기 힘으로 빚을 갚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친구가 그 빚을 다 청산하여 주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인간이 스스로 도저히 자기의 죄를 사함 받지 못할 때 그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담당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실 때에도 그 죄의 벌을 주님 스스로 받으신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피 흘림이 있어야만 합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결코 죄 사함이 없다고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히 9:22). 하나님은 왜 죄 사함을 위해 피 흘리는 희생을 요구 하실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법 아래서의 속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그들을 다스릴 모세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 사함을 받으려고 할 때에는 동물의 피를 대신 흘리도록 하였습니다. 이 속죄제는 반드시 동물 중에서도 가장 흠이 없고 좋은 것을 바쳐야만 됩니다. 상처를 받은 동물이나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동물은 바쳐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물의 희생제는 불완전한 것으로서 인간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거듭 거듭 되풀이하여 누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0:3,4에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고 기록되었으며, 히브리서 10:1에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 완전한 속죄 제물 동물의 희생이 인간의 죄를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의 완전한 희생물이 바쳐져야 했는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의 아들을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의 피를 흘리게 하시고 죽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가장 귀한 성구 중 하나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3:16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예수는 우리 인간들이 받을 수 있는 시험을 다 받으시며 약 30년 동안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히 4:15). 그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셨습니다(벧전 2:22). 예수는 이와 같이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인류란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과 이후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7-9)."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또, 에베소서 1:7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 구속의 놀라운 메시지가 위의 구절들에 요약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과연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곧 그의 희생에 의해 모든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여서 법정 안에 서있는 죄인이 자기 대신 빚을 갚아 주는 친구의 은혜를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통해 죄 사함 받는 길을 열어 주셨지만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사람을 억지로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가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9)" 라고 기록한 것처럼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그는 구원을 베푸실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영접하는가? 우리가 예수께 순종해야하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마땅히 행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를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로 모셔 들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정죄함이 없는 그리스도 안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알게 된다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의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6:3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또, 갈라디아서 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죄함이 없는 곳, 곧 죄 사함이 있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들어가는 방법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가 흘리신 피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우리 인간 편에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과(요 3:16), 죄에 대한 회개가(행 2:38) 세례에 수반되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짓게 되는 죄에 대한 용서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죄 짓는 일을 멀리해야 하지만 요한일서 2:1에 기록된 말씀처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신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17. 옛 언약과 새 언약
17. 옛 언약과 새 언약 여러분이 미국 개역 표준판(RSV)의 신약 성경 서문을 보신다면 "새 계약(New Covenant)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New Testament)을 의미합니다"라고 언급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에는 언약을 뜻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테스타멘트(Testament)와 커비넨트(Covenant)가 그것입니다. 커비넨트는 보통 의미의 언약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는 하나의 언약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 언약이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맺어진 것입니다. 계약은 한편만으로는 가능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상대와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과 두 번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이 두 언약을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8:7에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라고 합니다. 두 언약 모두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조건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첫 언약 (옛 계약) 첫 언약은 처음에 아브라함과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서 다시 맺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본 성경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실 것, (2)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실 것, (3) 그에게 땅을 주실 것, (4) 이 땅의 모든 족속이 그의 후손으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음을 배우셨습니다(창 12:1-7). 이 언약의 표로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창 17:1-14). 이 언약은 그 후 수 백년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다시 맺어질 때까지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으로 이루어진 언약을 재확인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해야하는 규칙들을 덧붙였습니다. 그것은 (1) 돌 판에 기록한 십계명(출 20:1-17, 30:27-28)과 (2) 언약서(출 24:7)라 불리는 율법의 기타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만 존속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맺어진 법이라기보다는 문자적으로 맺어진 법입니다. 유대인들은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동물의 피를 드려 그것으로 그 언약을 세운 것이었습니다(히 9:18-21). 이 옛 계약은 몇 가지 일들을 성취했습니다. (1)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유대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과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것과, 땅을 주시겠다는 것. (2) 죄의 본성을 드러냈다는 것, 즉 범죄를 더욱 가했다는 것(롬 5:20). (3) 사람들로 하여금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히 10:3). (4)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새 언약을 맺을 동안까지만 한시적으로 효력을 갖는다는 것, 즉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것 등입니다(갈 3:19-25). 둘째 언약 (새 언약) 새 언약은 말할 것도 없이 옛 언약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1:31-34). 이 예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겠다고 하신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창 22:18).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셔서 이 세상 모든 족속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의 내용은 신약 성경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큰 차이점을 든다면 첫 언약이 유대 민족과만 맺어진 것인데 비해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과 맺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 언약의 우주적인 특성이 갈라디아서 3장 26-2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구별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와 같이 새 언약의 약속은 어떠한 민족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나 빈자나 차별 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두 언약이 맺어진 방법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옛 언약은 동물의 피로써 언약을 맺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어졌습니다(히 9:11-15). 새 언약은 옛 언약에서처럼 문자적인 언약이 아니라 영적인 법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예를 들면 옛 언약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만일 형제를 미워하고 마음속으로 멸시한다 하더라도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는 율법을 어긴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이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을 범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요일 3:15). 이와 같이 새 언약에서는 단순히 문자적으로 죽이는 것만 금한 것이 아니라 죽이기 이전의 심리적인 상태의 올바르지 못한 관계부터 금한 것입니다. 결국 쓰여진 문자의 법만 지킬 것이 아니라 그 문자 뒤에 숨어있는 영적인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옛 언약은 죄가 무엇인지 그 본성을 드러낼 뿐이지만 새 언약은 죄를 제거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즉, 옛 언약에서는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새 언약에서는 죄 사함 받는 길을 제시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이 잠정적인 언약이 아니라 영원한 언약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죄의 본성을 들어내어 가르쳐 주었지만 영원히 용서받는 길은 제시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죄 사함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전 장에서 배웠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은 피하겠습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을 어떻게 대체하는가?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17). 그의 죽으심으로 통해 그리스도는 옛 언약을 성취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목적이 완성되었으며, 그 율법은 새 계약으로 대체가 되었습니다. 다음 성경 말씀을 살펴보십시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4,6)."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 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4,15)" 이상의 말씀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아직도 옛 언약 아래 있다고 아무도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의 말씀들은 또한 안식일 (혹은 토요일)을 지켜야한다는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명령은 모세 율법중의 일부였으나 안식일을 포함하여 옛 언약을 지켜야한다는 언급은 신약에서 결코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동물 희생을 드려야하고 이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리는 매주 첫날도 안식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날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날이라고 부릅니다(계 1:10).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의 구원은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가 달렸던 강도는 세례를 받지 않고도 구원을 얻지 않았는가?" 그 강도가 세례를 받았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그는 이 약속을 옛 언약이 아직 유효한 때인 그가 죽기 전에 하셨습니다.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히 9:17)."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에 하신 약속이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후에 그 효력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새 계약은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영원한 언약"입니다(히 13:20).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는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마련한 영원한 집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이 계약을 성취하시는지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18. 교회의 설립
18. 교회의 설립 승천하신 10일 후 오순절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예루살렘에 세우셨습니다. 어떻게 교회가 세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의사 누가가 기록한 본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한 내용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바울의 활동에 중점을 두고 기록했습니다. 본 장에서 우리는 교회의 설립과 그에 따른 일들에 대해 기록한 사도행전 1장부터 7장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회", "하나님의 나라", "하늘 나라" 등이 그것입니다. 교회(church)와 나라(kingdom)는 동일한 몸을 나타내는데 적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천국(kingdom of heaven)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 16:18,19). 여기에서 예수께서 두 가지 단어를 교대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교회 설립에 대해 이 점을 주목해 연구해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교회 교회가 설립되기 전 하나님의 계획 속에 교회가 있었음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10,11)."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교회 다니엘서 2:44에는 다니엘은 느브갓데살 왕의 꿈 해몽을 통해 교회가 설립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언했습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그러나 그때에는 아직 그 나라의 영적 특징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교회 설립을 위한 준비 이 교회가 설립되기까지는 준비 기간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께서 수개월 후에 그의 전도사역을 시작하기 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가르쳤고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선언했습니다. 얼마 후 예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천국이 가까웠다(마 10:7)"고 전파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나중에 베드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교회를 어떻게, 언제, 그리고 어디에서 세우실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예루살렘 성에 유하라(눅 24:49)" 이와 같은 예수의 말씀을 종합해 본다면 (1) 교회는 사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세워질 것이라는 점 (2) 교회는 권능으로 세워진다는 점 (3) 교회는 예루살렘 성에서 세워질 것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완성(설립)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사도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 목매어 자살한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열흘 후(유월절 50일 후)에 오순절이 임하였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각지로부터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였습니다. 아침 9시쯤 사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 2:2-4)." 여기에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그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뜻하신 바 있었고, 선지자들도 이것에 대해서 예언하였는데 이제야 완성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군중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각지에서 모여온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네 언어로 행하는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술 마시고 주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모든 사람들 앞에 서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들이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이와 같은 권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선언했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설교는 힘이 있었고 사람들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를 알고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이와 같이 회개하고 세례 받기 전까지는 그들은(우리 또한)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날 약 삼 천명이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때에야 비로소 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그 때 첫 개종자들이 구원을 받았으며 주님은 그들을 교회에 더하셨습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그들은 죄로부터 구원되었으며 교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란 구원 얻은 자들로 구성이 되며 누구든지 교회 안에 있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믿는 자들이 주님에 의해서 교회에 더해졌지 결코 믿는 자 자신이 스스로 교회에 더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던 것입니다(행 2:42). 여기에서 떡을 뗀다는 것은 주의 만찬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절름발이를 고쳐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협박도 놓아주었습니다. 석방된 그들은 다시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두 번째로 이들을 붙들어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옥문이 열림으로써 다시 나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세 번째로 다시 잡혀 협박당하고 매맞기까지 하면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다른 어려운 문제도 생겨났습니다. 기근이 일어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돈을 가져왔습니다.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도 땅을 팔았으나 그 중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에게는 전부를 바치는 것처럼 속였습니다. 그들의 거짓말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을 침으로 죽게 되고 이 일로 인해 교회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무시를 당하자 원망이 일어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일곱 남자를 택해 매일처럼 돌보는 이 일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스데반인데, 그는 얼마 후 유대인과 논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가 잡혔을 때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분개한 사람들이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 그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 백성들이 돌을 던져 스데반을 죽일 때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 앞에 두었습니다. 이 사람이 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바울 사도입니다.
2. 성경의 올바른 분류법
2. 성경의 올바른 분류법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본 장에서 우리들은 성경을 바로 활용하기 위한 올바른 분류법을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은 66 권으로 되어 있으며 두개의 큰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구약과 신약이라 불립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기록했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대해 주시는지 알려주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과 그리스도인의 생활하는 방법 등을 깨닫기 위해서는 구약보다 신약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예수는 구약을 크게 3부분으로 나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 과 시편" 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구약을 크게 5부분 - 율법, 유대인의 역사, 시, 대선지서, 소선지서 - 으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신약은 사복음서, 초대교회의 역사, 바울서신, 일반서신 및 예언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여러책들 구약의 처음 5권은 율법책들입니다. 이를 모세 5경이라고도 합니다. 이 5권은 모세가 쓴 것이 며, 인간의 시초와 그들이 살아 나간 초기의 역사를 더듬어 살핀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 인간의 타락, 홍수, 그리고 족장시대의 일들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까지를 알려 줍니다. 그 시대에는 성문 화된 하나님의 법이 없었습니다. 각 종족별로 나누어 족장들이 자기 종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사를 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가리켜 족장시대 (직접계시 시대)라고 합니다. 거국적인 예배(제사)제도는 모세가 율법을 받은 후에야 실행되었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 라엘 자손들(후에 유대인으로 불림)이 애굽으로부터 구출된 사실과 그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던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도 그들의 방랑생활의 역사와 율법 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은 그 당시부터 예수가 돌아가실 때까 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을 주관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 지의 시대를 모세시대라고 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적용된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에 게는 결코 적용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끝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12권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역사책이라고 합니다. 이 책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떻게 위대한 민족이 되었으며, 그들이 하나님께 어떠한 죄를 범함으로써 포로가 되어 먼 나라로 잡혀가게 되었고, 그들의 일부가 어떻게 고국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게 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 상하, 에스라, 느헤미아 및 에스더, 역대상하 입니다. 이 책들 중 어떤 것은 그 저자가 미상인 것도 있습니다. 다음 5권의 시가집들은 일반적으로 헌신과 훈계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가들은 번역할 때 시감이 없어져 우리들에게 시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것도 있지만 성경 중 가장 애독되는 책들에 속합니다. 이 시가집에는 욥기(저자 미상임), 시편 또는 찬미의 노래 (이는 주로 다윗이 기록한 것임), 잠언, 전도, 아가서 (이 셋은 솔로몬이 기록한 것임) 들이 있습니다. 이 중 에서 특히 시편 23편은 이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에 이르기 까지 사람들은 솔로몬 왕의 훈계보다 더 훌륭한 지혜의 말을 아직 찾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한 부유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재물과 자식을 다 잃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충실함으로써 갑절이 넘는 보상을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서(예언서)들은 보통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분류합니다. 대선지서에는 보다 긴 내용의 글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레미아가 기록한 애가서를 제외한 모든 선지서들은 그 내용을 예언 한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표제를 붙였습니다. 다섯권의 대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 겔 및 다니엘서 등이며, 소선지서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 바냐, 학개, 스가랴 및 말라기서 등입니다. 이사야서는 다른 책들 보다 그리스도의 강림(초림)에 대하여 가장 많이 예언했기 때문에 메시아적 예언서라고도 부릅니다. 다니엘서에는 예언외에도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때의 일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여러 선지서들도 유 대 및 이웃나라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말라기서를 끝으로 구약성경이 끝나게 됩니다. 신약의 여러 책들 신약의 처음 4권의 책은 저자들의 이름을 따서 표제를 붙인 것인데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 또는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이 책들은 그리스도(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란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라고 합니다. 이 책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해 놓았는데, 저자들이 어떤 일들은 내용을 똑같이 기록해 놓았고, 어떤 것은 따로 따로 기록해 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부활에 대하여 충실히 그리고 완전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모세시대(율법시대)는 끝나고 세상 종말까지 지속될 그리스도시대(은혜시대)가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역사책입니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설립과정과 사도들의 전도활동, 초대교회의 역사 등이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책이라고도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21권의 책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방법을 말해 주는 서간집입니다. 어느 것은 개인들에게 또 다른 것들은 여러 회중들에게 보내진 편지들입니다. 처음 14권은 바울이 썼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 서, 디도서, 빌레몬서 및 히브리서(히브리서는 바울이 썼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부정하는 사람도 많음) 등입니다. 다른 7권의 서신은 바울서신과 분리하여 때로는 일반서신이라고 불립니 다. 이 서신들은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1,2,3서 및 유다서 등 입니다. 이 모든 책들은 그 내용을 기록한 저자의 이름을 표제로 붙였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은 계시록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예언의 책입니다. 이 책은 앞으로 "속히 될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계 1:1). 이 책의 어느 부분은 상징적 용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매우 고귀한 책이며 우리가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성경을 구분하여 보았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모두 귀중하지만 신약은 구약보다 더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은 우리들의 살아가는 방 법을 일러주는 반면,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 이전 사람들에게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2.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까?
2.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까?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록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경, 특히 구약 성경에는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말씀하시되......" 등과 같은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와 같은 대언서에는 위와 같은 표현이 무려 1,300번 이상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와 같은 역사서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400번 이상이나 나오며,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는 거의 700번이나 나옵니다. 출애굽기의 경우 거의 절반 이상이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부터 직접 인용한 글이나 지시사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상을 모두 합친다면 구약성경에서만 하나님이 성경을 영감으로 주셨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주장이 무려 2, 600번 이상이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며, 사실 구약 성경은 그들의 모든 생각과 삶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구약성경으로부터 약 320번 이상이나 직접 인용했고, 이 외에도 수 백 번씩이나 간접적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임을 매우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에서 만도 무려 60번 이상이나 인용하고 있는데, 이 인용 구절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로 여김을 받았으며 그 결과 그들이 다루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구약성경을 높이 평가한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성경은 폐하지 못할진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35) 그분은 구약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인용하셨는데, 여기에는 현대의 회의주의자들이 크게 조롱하는 사항들이 특별히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사람의 창조에 관한 기사를 마태복음 19:4에서 인용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의 대홍수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셨고 또 언급하셨으며(마 24:37-39), 소돔의 멸망과 엘리야의 기적들을 역사적 사실로 인용하셨습니다.(눅 17:26-32, 눅 4:25-27) 그분은 모세5경이 모세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문자 그대로 믿으셨으며(요 5:46-47, 눅20:37-38), 이사야가 이사야서의 두 부분을 다 기록한 것으로 믿으셨습니다.(마 4:14-16, 12:17) 사실 그분은 나중에 20세기의 비평가들이 이것을 부인하리라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니엘의 기록들을 참된 예언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마 24:15) 영감의 본질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히 1:1)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실 때 볼 수 있는 것처럼) 때때로 자신의 대언자(선지자)에게 직접 받아쓰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또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흔히 사용하신 방법은 대언자(선지자) 자신의 배경과 교육, 경험, 연구 등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어떻게 영감을 주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으며 또 기록자 자신의 특별한 문체와 재능을 종종 사용하시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이 모든 과정을 지도하심으로써 그 최종적인 결과가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이는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을 통해 감동을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게다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성경의 모든 단어들조차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었는데, 이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에서 자기가 인용하는 단어가 복수 형태가 아닌 단수 형태(즉, "씨들"이 아니라 "씨")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논증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32에서 구약의 한 단락 가운데 나오는 어떤 단 하나의 단어 즉, "…이었느니라"는 '과거 시제의 'was'가 아니라 "…이니라"는 현재 시제의 'am'으로부터 부활에 관한 멋진 결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실로 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모두 성취되리라."(마 5:18). 따라서 성경에서 소위 오류라고 하는 것을 찾는 일에서 큰 기쁨을 얻고 있는 현대의 목사들과 신학교수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관계되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저마다 맡은 바 성경을 기록할 때가 오면 그들이 성령님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26, 16:13-14) 그들도 역시 자기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고 빈번히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오직 내가 너희에게 확실히 알게 하노니 내가 선포한 복음은 사람을 따라 난 것이 아니니라.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부분은 마지막 사도인 요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계시하신 '요한계시록'이라는 놀라운 책입니다.(계 1:1) 이 책이 완성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 22:18) 그 다음에 그분은 더욱 엄숙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생명 책과 거룩한 도시에서 그리고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이것은 매우 엄중한 말씀이며 몹시 조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성경의 영감성에 관한 참된 교훈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디모데후서 3:16에서 다음과 같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이 말은 성경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생각뿐만 아니라 "성경"이 곧 실제로 기록된 말씀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영감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것입니다." ('given by inspiration of God.' - 우리 말 성경에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로 나와 있음- 역자 주)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믿음과 생명과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안내자이며 동시에 충분한 안내자입니다.
21. 구원을 얻는 믿음
21. 구원을 얻는 믿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히브리서 11:1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 중에는 아무도 하늘 나라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이같이 보이지는 않으나 하늘 나라가 있으며, 죽음 후에 그곳에서 복을 누리게 된다는 소망을 우리의 믿음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의 모든 생애가 이와 같은 믿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농부들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홍수나 우박 등이 갑자기 와서 농부의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만 농부는 믿음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수고가 머지 않아 수확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지 어떤 종류의 믿음이라도 갖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희랍어 신약성경에서 찾아보면 "믿음(faith)"과 "믿다(believe)"는 같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believe)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faith)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롬 10:17).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성경을 읽던가 다른 사람을 통해 듣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종류 믿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 하시고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 라고 가나안 여인을 칭찬하신 적도 있습니다. 또, 자기 하인을 고쳐주기를 간청한 백부장을 보시고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바울은 심지어 산을 옮길만한 믿음(고전 13:2)을 언급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믿음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인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그러나 어떤 종류의 믿음이라도 다 구원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를 믿었지만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음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니라(요 12:42)." 이런 약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그러므로 이와 같은 유대인 지도자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그 믿음을 고백할 수 없다면 심판 날에 주님께서 그와 같은 자들을 모른다고 부인하실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 그렇다면 어떤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일까요? 그것은 사탄이나 그의 추종자들이 가진 믿음과는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야고보서 2:19에는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사탄이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해서 구원 얻는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거기에는 믿음만 있었지 순종이 없었습니다. 믿기는 했지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인식은 갖고 있었으나 그를 의지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음으로는 믿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로마서 16:26에서 바울은 "순종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순종을 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성경가운데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믿음으로 이룩한 많은 일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항상 순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순종하여....." 이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은 그들의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 무언가를 행했습니다. 그들이 행한 일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언가를 지시하실 때 왜냐고 묻지 않았으며 지체하지 않고 행했습니다. 이렇듯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 죄 사함과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복은 우리의 믿음을 순종을 통해 나타낼 때라야 비로소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예가 많습니다. 시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함을 받기 위해서는 요단강 물에 몸을 일곱 번 담그라는 선지자 엘리사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나아만이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마침내 순종하여 일곱 번 몸을 잠그자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왕하 5장).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나아만이 그 마음을 바꿔 믿는 순간 하나님이 그를 치료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순종을 통해 그의 믿음을 나타낼 때 비로소 그의 문둥병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곧 나아만이 병고침을 받은 것은 그의 순종의 결과인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라고 하는 영적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믿으면 그는 이 죄라고 하는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순종하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에 대한 증거를 다음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6-27)." 바울은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도록 인도함을 보여 줍니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합니다. 이와 같이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들어갈 때 비로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빌립보 간수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가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라고 물었을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간수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다음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 16:33-34)." 그는 믿은 후 회개했습니다. 사도들의 맞은 자리를 씻어준 것은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친 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만일 회개하지 않고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회개와 세례를 통해 그의 믿음을 나타낼 때 그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을 얻는 믿음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그의 명령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는 믿음입니다.
21세기성장 교회의 모델들?
21세기성장 교회의 모델들? 21세기를 맞이하여 지상 명령(마 28:18-20)에 충실한 교회들은 번성하고 있지만 또 다른 교회들은 비록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계 3:1을 보라) 솔직히 말해 죽은 교회들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만 교회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마 13:24-30, 36-43을 보라). 알곡과 가라지가 동시에 같은 비율로 자라고 있다.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감에 따라 교회는 점점 더 빛을 내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는 외견상으로는 서로 상충되는 경향과 강조점이 서로 공존한다. l 회중들의 연령층이 점점 높아지고 (베이비 붐 세대들) 또 다른 곳에서는 점점 더 젊어진다 (부스터 또는 X 세대). l 회중들이 점점 대형화되어 가는 동시에 (대형 교회들), 또 점점 더 작아져 간다 (메타 교회들). 교파의 구분이 점점 희미해진다. l 혁신과 전통 모두가 핵심적 가치가 된다. l 개인과 공동체 모두가 다 중요하게 보인다. l 리더는 마음과 머리, 형식과 자유, 축제와 묵상, 신학과 경험 모두의 통합을 추구한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관찰한 결과, 적어도 6개의 모델이 부상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l 전통적교회 모델 (주류, 복음적 및 카리스마적 교단) l 새들백교회 모델 (목적 지향적) l 윌로우크릭교회 모델 (불신자 전도 중심) l 사도적교회 모델 (사도적 지도자들) l 토론토공항교회 모델 부흥 중심) l 메타교회 모델 (셀 중심) 각 모델의 장점들 대부분의 갱신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주류 교단 및 복음적 기독교와 친근하다. 교회사학자인 빈슨 사이난이 잘 보여준 바와 같이, 오순절/카리스마적 흐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카리스마]나 [미니스트리 투데이] 등과 같은 잡지의 성공이나 영향력이 미국 기독교에서 오순절/카리스마적 전통이 확립되고 번성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전통적인 부대는 낡을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부대는 낡았고 현재의 부흥이나 갱신에 대해 적대적이다 (눅 5:37-39를 보라). 이전의 갱신가들은 "그것들은 우리가 행한 방식이 아니고 우리가 본 징조들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갱신을 무자비하게 비판한다. 한편 누가 복음 5장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의 최전선에 있는사람들에게 필요한 경고를 준다. 미국의 기독교는 아직 전체적으로 성령이 지구의 다른 부분에 가져오신 폭풍 같은 변화를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령의 부어주심이 미국 교회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새들백교회 모델. 새들백교회 모델의 예들은 거의 모든 교회 구조 속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중 가장 빨리 성장하고 영향력있는 모델일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레이크 포레스트에 소재하는 [새들백 밸리 컴뮤니티 교회]의 목사인 릭 워렌은 그와 자신의 동료들이 발견한 것을, 하나님의 성회 교단을 포함하여 관심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비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눈다. 워렌 목사는 우리들에게 성경에 의한 교회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꾸준히 상기시키며,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교회로서 목적을 가지고 하도록 권면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것을 그분의 방법대로 하기 위해 시작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분이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심을 발견하게 된다 (행 5:32를 보라). 윌로우크릭교회 모델. 일리노이 주 사우스 베링톤에 있는 윌로우크릭 교회의 목사인 빌 하이벨스 목사와 윌로우크릭교회 모델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람을 낚기 위해 부르셨다는 것에 대한 국가적인 수준에서 경고를 울리는 첫 사람들이 될 것이다 (막 1:17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를 만드라는 명령에 대해 눈이 멀고 피상적인 “숫자 놀음”에 빠져 단지 고기를 장사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닥아가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이땅에 남기셨다. 하이벨스 목사는 고기를 낚기 위해서라면 효과적인 어떤 미끼라도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비도덕적, 비윤리적, 불법적 또는 비성서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이것에 대해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사도적교회 모델. 목회자들의 지도자인 피터 와그너는 이러한 열정을 수십 년 동안 가져 왔다. 그는 지구의 기독교를 관찰한 후, 가장 극적인 성장은 사도적 목사가 인도하는 대형 교회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들 중의 대부분이 수많은 회의와 정치적 책략 등으로 분주한 반면 오늘날의 사도적 목회자들과 교회 설립자들은 수 천의 제자들을 만들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대원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따른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효율적으로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들 역동적인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비전을 고양시키고 마지막 때의 추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훈련하기 위해 트레이닝 센터를 설립한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 시대의 흥분할 만한 현상이다. 토론토공항교회모델. 존 아노트 목사가 섬기는 토론토 공항교회에 리바이벌의 불이 떨어졌을 때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 솔직히 말해서, 메마르고 열매 없는 오늘날의 크리스천의 삶과 사역 속에 있는 우리들 카리스마적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가 더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랜디 클라크와 같은 빈야드 목사들은 새로운 기름부음을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들을 내려놓음으로써 우리들에게 선두에 서서 모범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각성의 가장 궁극적인 결과는 교회를 위한 새로운 모델이었다. 나는 그것을 '토론토교회 모델'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마도 거룩한 웃음, 영적인 “취함”, 몸의 떨림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다른 현상 등과 같은 놀라운 영적인 현상들로 인해 다른 모든 모델보다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곳 오클라호마 주, 털사 시에 있는 죠엘 버드 목사의 경우, 비록 이러한 이상야릇한 현상들에 걸림돌이 된 진실한 신자들이 대거 교회를 떠났지만 동시에 극적인 체험을 경험한 수많은 새로운 신자들이 괄목할만하게 몰려들어와서 교인 수는 헌금액도 증가하였다! 오늘날 토론토 타입의 교회들을 방문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비슷한 간증을 듣고 비슷한 영적 건강과 성장을 목격할 것이다. 메타 교회(셀 교회) 모델. 마지막으로 미국의 교회들은 남한의 서울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조용기 목사로부터 소그룹 또는 셀그룹이 주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많은 영적 훈련과 제자 훈련 작업을 성취하기 위한 최선의 장이라는 것을 배우고 있다.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바톤 루지에 소재하고 [셀 교회](The Cell Church))를 집필한 래리 스탁스틸 목사는 대중 모임보다 셀그룹을 교회의 초점으로 만든 후 패러다임 쉬프트와 흡족한 결과를 경험하였다. 또한 미국 콜로라도 주의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소재하는 [뉴 라이프 교회]의 테드 헤가드 목사는 모든 종류의 (영적 전쟁으로부터 썰매에 이르기까지) 소그룹을 통해, 효과적인 아웃리치(전도)와 제자훈련 기회를 제공하였다. 다양함의 중요성 점점 더 확실해 지는 것은 건강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위에서 말한 각 모델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포스트 모던(후기 현대주의) 문화가 그러하듯 다양성 속에 자신을 드러내신다 (고전 12장을 보라). 우리는 우리의 방법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TV가 출현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라디오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라디오는 어느 때보다 더 중요이다. 인터넷이 지구상에 폭발할 때 모든 사람은 TV가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조급한 판단이었다. 전자 미디어가 프린트 미디어를 대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이 테크(Hi-Tech)와 하이 터치(Hi-Touch) 둘 다를 귀하게 여긴다. 기본 선은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는 혼자 있고 싶어하고 또 때로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 그들은 독서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며 인터넷을 서핑하기도 한다. 우리 문화의 장은 선택의 여지를 요구한다. 결국 역동성이 교회의 사역 모델을 결정지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전통이 다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빨리 배우고 있다. 사실전통은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의 신조와 고백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기 보다는 오히려 발달시켰다. 우리의 기본적인 삼위일체 교리는 이러한 역동성에 기인하고 있다.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오직 한 가지 복음만이 존재할 것이다. 새로운 세대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전파하고 축하할 새롭고 타당성 있는 방법들을 발견해야 한다. 찬양가 경배는 지난 이십 년 동안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소위 찬양과경배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은 일반적으로 이전 어느 때보다 찬양과 경배의 중요성을 높이 인식하고 있다. 혁신적인 아웃리치(전도 및 선교) 방법들이 쏟아져 나오고 참된 교제와 영성이 점점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흔히 우리가 보기 전에 세상 사람들이 먼저 신자들의 교제와 영성의 피상성을 꿰뚫어본다. 종교란, 용어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생명을 잃은 것이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이고, 신인 상호작용적인 동시에 정직하고 자연스러우며 인간의 상호작용적인 실재적인 것을 원한다. 위에 제시한 모델 중 어떠한 모델이라도 교회의 갱신과 역동성을 제공해 준다면 유익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전통적인 것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류교단이나 전통적인 교단과 마찬가지로 이미 전통이 확립된 오순절이나 카리스마적 교회 중에도 살아있는 교회가 있고 죽은 교회가 있다. 어떤 한 모델이 다른 전부를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년 동안 내가 출석하는 교회 (남침례 교회)는 불신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대형 교회와 소교회의 형태를 취하였다. 대형 교회가 모든 능력을 다해 일하는 것을 보는 이상으로 흥분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작은 교회들이 하고 있는 역동적인 역할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내가 거주하는 털사 시에는 대형 교회들이 많다. 이들 중 대부분이 독립 적인 카리스마 교회들이다. 그러나 나는 수많은 소형 침례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그들 모두의 신자를 합한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회중의 평균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약 75 명이다! 우리는 젊은 사도들을 훈련하여 성령이 분명히 우리 시대에 기름 붓고 계시는 대형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이 이 마지막 시대에 일으키시는 다른 모든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계속해서 무장시키고 인정하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 건설보다 더 흥분되는 때가 언제 있을 것인가? 당신의 사역 모델이 무엇이든 왕과 그분의 왕국을 위해 전진하라. (래리 하트는 오클라호마 주 털사 시에 있는 오랄 로버츠 대학교의 신학교수이다).
21세기의 목회자 및 영적 지도자의 새로운 모습
21세기의 목회자 및 영적 지도자의 새로운 모습 나 구 용 목사(뉴저지 연합감리교회 담임) 목회자 즉 교회의 영적 지도자로 부름 받은 자로서 나 자신에게 늘 물어보는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는 과연 어떤 타입의 사람일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Henri Nouwen의 책 In the Name of Jesus(예수님의 이름으로)를 읽고 너무 공감되는 내용이 많았기에 동역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그는 마태복음 4:1∼11과 요한복음 21:15∼19 말씀에 근거하여 21세기 목회자 및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다음 3가지로 강조하고 있다. 1. 현실지향의 기도로(From Relevance to Prayer) 2. 유명세에서 목회로(From Popularity to Ministry) 3. 인도하는 자리에서 인도 받는 자리로(From Leading to Being Led) 가는 사람이 미래를 이끌고 갈 수 있는 지도자라고 말한다. 이러한 Nouwen의 글에 기반을 두고 나의 느낀 점을 동역자 여러분들과 나누어 보고자 한다 1. 현실지향의 기도로 (From Relevance to Prayer) 우리는 성공 지향적인 생각으로 교회를 인도해왔다. 교회도 대형교회로, 선교도 크게, 그리고 개인 삶도 잘 되는 것을 지향하며 살다가 "영적인 것"을 잃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이 같은 모습을 초래한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Living for the Lord)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Living with the Lord)를 원하신다. 우리는 교회의 일(Business)과 영적인 것(Spirituality)을 같은 것으로 착각해 왔다. 교회의 일을 많이 해야 영적인 교회가 되는 줄로 착각했다. 생명은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에 있지 않고 예수님 안에 있다(행 17:25).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로는 충분치 않으니 더 하고 더 해야지 하며 애쓰다가 목사는 병들고 교인은 피곤해 졌다. 교인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지 예수님의 생명을 주지 못했다. 교회는 예수님을 원하고 있다. "주님을 위한(Living for the Lord)"일 중심의 목회를 하게 될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유혹은 항상 "현실적이 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 받으신 시험이 바로 이 시험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지극히 현실 지향적인 일을 하므로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라는 시험이었다. 목회를 하면서 경험하는 가장 큰 고통은 나의 영향력이 별로 없다는 권위 상실이다. 그래서 목사는 현실적인 해답을 주는 자가 되려는 유혹을 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험을 물리친 예수님의 해답을 잘 들어야 한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성공 지향적이고 현실적인 빵 문제 뒤에 숨겨져 있는 사람들의 고독감, 소외감, 깨어진 관계, 권태감, 공허감, 우울한 마음 등으로 심각하게 영적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상태를 보아야 한다. 영적인 지도력은 모든 화려한 성공 뒤에 가려진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고, 그곳에 예수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영적인 지도자로 준비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물으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무조건적인 제1의 사랑을 아느냐고 물으신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무조건적인 제1의 사랑을 아느냐고 물으신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제1의 사랑의 경험 없이 인간들 사이에서만 나누는 제2의 사랑을 하다가 좌절과 원망과 분노를 낳고 만다. 거기에는 포기, 배신, 거절, 단절이 동반하는 숱한 상처들로 골이 진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길은 Nouwen은 "기도"라고 말한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된다. 기도하는 곳에 거하는 자는 이미 거할 곳을 찾았으며 우리는 벌써 하나님께 속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학(Theology)이라는 용어의 원래 의미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Union with God In Prayer)" 오늘날 신학은 예수님 없는 하나의 학문이 되어 버렸다. 영적 지도자들은 지속적인 묵상기도를 통하여 사랑의 목소리를 거듭거듭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불붙는 Issue들만 다루는 것은 분열만 조장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를 깨닫기도 전에 두어진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인격적인 친밀감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상대적이지 않으면서도 유연할 수 있으며, 독단적이 아니면서도 확신에 차 있을 수 있고, 너무 무르지 않으면서도 온화하게 용서할 수 있다. 미래를 인도할 수 있는 영적 지도력을 갖추기 위해서 우리는 도덕으로부터 영적으로 전환하여양 할 것이다. 누구는 옳고, 누구든 그르며,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다고 하는 선악을 판가름하며 선악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먹고 살던 모습에서 생명 나무이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열매를 따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2. 유명세에서 목회로 (From Popularity to Ministry) 우리 지도자에게 찾아오는 또 하나의 유혹은 개인주의이다. 이 시험이 바로 예수님에게 온 사탄의 두 번째 유혹이다. "정확하게 무언가 굉장한, 열렬한 박수 갈채를 안겨다 줄 만한 일을 해보라는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 그리하면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턴트맨이 되기를 거부하셨다. 자신이 굉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으셨다. 그 분은 석탄 불 위를 걷지도 않았고, 사자의 입 속에 자신의 머리를 넣지도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오늘날 지도자 사이에는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뭔가 별로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뭔가 보여줄게 있으면, 혼자서만 해야된다고 느끼는 것 같다. 언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의 박수만 고대하면서 이 꼭대기에서 저 꼭대기로 연결된 줄타는 곡예사처럼 살아왔다. 경쟁사회의 분명한 한 측면인 스타 의식과 개인주의적 영웅주의는 우리 지도자 속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후에 비로서 "내 양을 먹이라" 하셨다. 목회하라는 사명을 그제서야 주신 것이다. 목회자가 유명해지려고 할 때 그것은 큰 문제이다. 예수님께서는 목회란 공동체적이며 상호 보완적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8:19~20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하늘에서 이루게 하신다"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에도 둘씩 짝지어 내보내셨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 예수님께 진심으로 신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함께 기도하고 당면한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며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늘 순수하도록 도전할 형제 자매가 필요하다. 우리가 함께 사역하면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쉽게 인식시킬 수가 있다. 목회는 공동체에서 경험되어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친구 관계를 넘어서 공동체로 가야 한다. 독자적(Independence)인 것을 넘어서 상호 의존(Interdependence)으로, 굳은 상태(Invulnerability)를 넘어서 민감한(Vulnerability) 상태로, 닫힌 마음(Non-disclosure)을 넘어서 열린 마음(Self-disclosure)으로 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러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만일 우리가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허락해 드리기만 한다면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나는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다. 나는 남을 알고 싶고 알려지고 싶다. 나는 남을 섬기고 싶고 섬김을 받고 싶다."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야만 행복할 수 있게 되어져 있다. 이러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길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기꺼이 고백하고 그들이 목회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될 때 가능해 진다. 고백과 용서는 죄인 된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목회지인 공동체와 자신을 분리시켜 놓고 살아간다. 자신들이 가진 욕구를 무시해 버리거나, 아니면 채우더라도 멀리서 또는 익명의 장소에서 채우는 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가장 은밀한 내면 세계와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세계가 점차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목사들이 돈 문제와 여자 문제와 권력 문제에 빠져 버리게 된다. 자신의 영성을 외적으로만 체계화 하려하면 육신의 삶은 정욕적이 되고 만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성육신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것은 공동체라는 전체의 몸 안에 사는 것이며 그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고백과 용서는 형식적인 영성화와 세상 정욕을 배제하고 진정한 성육신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육체와 영혼의 통합이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말은 목회자들이 반드시 자신의 죄와 과오를 강단에서 털어놓으라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은 목회자들도 그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공동체의 한 지체로 부름 받았으며, 공동체의 사랑과 지원을 필요로 하고 상처 입은 자아를 포함한 모든 공동체 전체를 사역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뜻이다. 특별히 여러분 가운데 고통을 많이 받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 분들이 함께 모여서 자신의 깊은 고통과 투쟁을 함께 나눌 공동체가 필요하다. 더 깊은 하나님과의 신비 속으로 인도해 줄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장소이다. 함께 한 사람들은 나의 숨겨진 고통에 관심을 가져주고 점잖은 충고와 성원으로 나의 소명을 지켜 나가도록 해 줄 것이다. 3. 인도하는 자리에서 인도 받는 자리로 (From Leading to Being Led) 이것은 Servant Leadership(종으로서의 지도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오는 유혹은 "힘이 최고다"라는 생각이다. 예수님이 받았던 3번째 시험도 힘에 대한 시험이었다. "내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네게 주겠다"하는 마귀의 꼬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바로 이 단어 "힘"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늘 빠지고 있는 시험 중 하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끊이없이 정치적인 힘, 군사적인 힘, 도덕적인 힘, 영적인 힘 등 바로 이 힘의 시험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힘을 갖는 것"이 목회를 하는데 쓰여진다면 좋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들어왔고 말해왔다. 이러한 합리화 때문에 십자군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큰 영향을 미치는 자리들을 바라게 되었고 영혼 구원에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대형 교회를 만들어 힘으로 무엇을 해보려 한다. 21세기의 부패해 가는 교회의 모습을 볼 때 이런 파멸의 주요 원인을 나는 목사들이 행사하는 바로 그 "힘" 때문이라고 본다. 힘에 대한 유혹이 막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사람이 해 낼 수 있는 과제에 대한 손쉬운 대체물을 힘이 제공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람들을 Control 하기가 더 쉽다. 우리는 사랑을 힘과 바꾸려는 유혹을 받아왔다. 우리는 사랑 대신에 힘을, 십자가 대신에 지배력을, 인도 받기 보다 인도하려는 유혹을 받고 살아왔다. 이런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야말로 영적 지도자일 것이다. 기독교를 세우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줄줄도, 또 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영적 지도력의 핵심은 인도하는 자리에서 인도 받는 자리고 옮기는 것이다. 요한복음 21:18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러한 Leadership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성숙이란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목자가 되라는 명령을 주신 후에 섬기는 지도자가 되라고 도전하신다. Servant Leadership이다. 힘과 지배력이 Leadership이 아니라 Powerlessness와 겸손의 Leadership안에서 고통받으시는 하나님의 종(예수 그리스도)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환경의 수동적인 희생물이 되는 그런 심리적으로 유약한 Leadership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분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도자가 가져야 하는 훈련이 있다. 예수님과 늘 붙어사는 훈련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훈련이다. 이것을 Nouwen은 "신학적 성찰"이라 했다.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제일의 사랑 속에 붙어 있게 했듯이, 죄의 고백과 용서가 우리의 목회를 공동체적이고 상호관계를 유지하게 했듯이, 신학적 조명(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은 우리가 어디로 인도 받고 있는지 분명하게 해준다. 영적인 지도자들에게는 에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일상의 고통과 기쁨의 현실을 깊이 생각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의식을 하나님의 부드러운 인도하심을 아는데 까지 끌어 올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현실 적용과 유명세의 힘을 효과적인 목회의 요소들이라고 인식했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후 우리를 목자로 파송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갈수록 더욱 더 우리 팔을 벌리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이끌려 가야 하는 그런 삶을 명령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실성에 대한 관심에서 기도하는 삶으로, 유명해지려고 긍긍하는 데서 공동체적이고 상호 관계 적인 사역으로, 힘 위에 세워진 Leadership에서 하나님이 목화자와 교인들을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확실히 분별하는 그런 하나님에게 이끌림을 받는 Leadership으로 옮아 가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두 팔을 벌리고 낮은 데로 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것은 기도하는 지도자,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살 수 있는 신뢰하는 지도자, 종으로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지도자의 모습이 2000년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가슴을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으로 가득 채우시기를 기원한다.
22. 성경적인 세례
22. 성경적인 세례 예수님은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영혼의 구원만큼 우리가 주의 깊게 연구해 보아야 할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세례가 본 장의 주제입니다. 본 장에서 우리는 오늘날 사람들이 행하는 세례의 양식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 행해진 세례에 대해 연구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올바른 답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세례가 어떤 방법(침수, 약식, 혹은 물 부음)으로 행해졌는가? (2) 세례의 목적은 무엇인가? (3) 누가 세례를 받았는가? (4)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 먼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는 여섯 번에 걸쳐 언급된 성령 세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물세례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세례"라고 언급을 할 때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물세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의 방법(형식) 세례의 형식에 대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침수, 약식(물 뿌림), 물 부음 중 어느 방법으로 세례를 주어야 하는가, 혹은 이 세 가지 방법이 모두 성경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희랍어 학자들은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세례를 행하던지 상관없이 신약 성경에서 언급한 세례는 물에 넣다, 물에 잠그다, 물에 담그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합니다. 신약 시대에 처음으로 세례를 준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그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요 3:23)."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물을 머리에 붓는 세례를 행했든 약식세례를 행했든 상관없이 많은 물이 필요했다는 사실입니다. 침수를 행하려면 이것은 필수적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쌔"(마 3:16). "곧 물에서 올라오실 쌔 하늘이 갈라지고"(막 1:10). 예수님이 물 속에 들어가지 않으셨다면 어찌 물 속에서 올라오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세례 요한이 물 몇 방울을 머리에 떨어뜨리는 약식 세례를 행했다면 그것을 강가에서 행하지 않고 허리까지 차는 물 속에 들어간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그가 침례를 받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개종한 예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 쌔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행 8:38-39). 여기에서 우리는 내시가 침례를 받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례를 장사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 6:4).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골 2:12). 오직 침례만이 장사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약식 세례나 물 붓는 세례가 사도 시대에 행해진 예가 있었을까요? 신약 성경을 자세히 공부해 보면 물 뿌리는 약식 세례나 물 붓는 세례에 대해 한 구절도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세례의 방법은 사도들에 의해 행해진 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세례의 목적 사도 시대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구원 (죄 사함)을 얻기 위해 침례를 받았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6). 죄 사함 없이는 구원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세례가 구원에 있어 필수적으로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 3:21)." 그런데 왜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게 될까요? 왜냐하면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주어지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롬 3:24)이라고 말한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으며, 세례를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죄 사함은 세례보다 선행될 수 없으며, 세례 후에 오게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가 "내적 은혜의 외적인 표시"는 결코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행위입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 성경이 유아 세례에 대해 가르치는지 혹은 장성한 사람에게만 주라고 가르치는지 알고 싶어하는 질문을 때때로 받곤 합니다. 성경은 이런 용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믿는 자의 세례입니다. 예수님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8을 보면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라는 어떤 명령도 받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세례를 받을 사람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 사명 가운데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는 점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회개도 세례에 있어 필수적입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행 2:38). 아직 믿을 수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며, 회개할 수 없는 유아는 세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죄 사함 받기 위해" 세례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받아야 할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유아 세례에 대한 명령이나 실례, 혹은 어떤 암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유아 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말씀을 그 근거로 듭니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이 세례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언급한 어린이들은 그에게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례를 주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내게로 데려 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신 것은 어린아이가 선악을 분별하여 죄를 짓게 되기 전까지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할만큼 깨끗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가 예수님이 주신 대 사명에서 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19)"라고 하신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38에서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의 이름으로"는 "....의 권위로"라는 뜻입니다. 경찰이 도망치는 범인을 향해 "멈춰 서라"고 외칠 때 그것은 "내가 법의 권위로 너에게 명하니 멈춰 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그는 예수의 이름 혹은 그의 권위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그 명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에 대해 변경을 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본향에 가기를 소원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변경한 것을 따르는 위험한 것보다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안전한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3.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 (The Epistles)
23.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 (The Epistles) 제1세기경 그리스와 로마의 우상숭배 종교와 비교해 볼 때 현저하게 다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덕적 원리 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법을 교훈하기 위해 교회와 개인 들에게 보낸 서신(편지)입니다. 이 21편의 서신에 대해 본 장에서 다루려고 합니 다. 이 가운데 14권은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나머지 7편의 서신은 일반 서신이라고 부 르는데 네 명의 저자 이름이 제목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그 서신을 수 신하는 교회의 이름이나 개인의 이름이 서신의 제 목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서신들에서 가르치는 교훈은 당시의 초대 교회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바울 서신 바울서신 중에서 네 편은 개인에게 쓴 것이고, 여덟 편은 특정한 교회에게 보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쓴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바 울이 썼는지 다른 사람이 썼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빌레몬서와 같이 매우 개인적인 색채가 있는가 하면, 로마 서와 같이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해 설명한 대단히 교리적인 것도 있습니다. 어떤 서신들은 당시 교회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을 교리적으로 해결해 주려는 책들 입니다 . 칭찬하는 편지가 있는 반면 어떤서신은 매우 비평적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 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파악하여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와같은 그의 설교식 편지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쓴 것입니다. 어떻게 로마교회가 시작되 었는지는 모릅니다. 성경은 바울이나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는지 다른 사람이 세웠는지 이 점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그리스도 인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인함이지 행위(혹은 공적)로 인한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 점이 바로 핵심적인 논지입니다. 나머지 5장에 걸쳐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교훈입니다. 즉, 후자는 기독교인의 윤리에 관계된 것이고, 전자는 기독교의 교리에 관계된 것입니다. 고린도전·후서는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들 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에 이 교회 내에는 여러 가지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즉, 교인들의 분열, 근친 상간, 형제끼리 송사하는 일, 결혼 문제, 성령의 은사, 부활에 대한 논쟁 등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단호하지만 애정 어린 권면을 합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앞서 보낸 서신 을 통해 그와 같은 문제가 다소간 올바르게 해결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특별히 감사헌금에 대하여 열거하였으며, 가난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도와 줄 것 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돌보아 줄 것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모세의 율법에 좀더 첨가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고, 모세의 율법은 속박의 법이고 그리스도의 법은 자유의 법이라고 교훈 합니다. 갈라디아서 5:4은 이점을 간단히 요약해서 잘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너희는 그리스 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 이 점은 또한 그리스도인도 은혜에서 떨어지고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이 서신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가 유대 인과 이방인의 담을 헐었음을 보여 주면서 교회가 하나되기를 강 조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가족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비판적인 문장이 거의 없고 매우 부드러운 문체로 쓰여졌습니다. 이 서신의 마지막 장은 특히 고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위대하심 (교회의 머리가 되심)에 대해 언급합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들입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주님의 재림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잘못 알고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습 니다. 일도 안하고 문제만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바로잡아 줄 필요성을 느꼈던 것입니다.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바울이 세운 교회에 바울이 파송한 두 젊은 전도자에게 쓴 편지들입니다. 이 서신들에서는 교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며, 어떻게 장로를 택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도자로서의 삶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빌레몬서: 이 서신은 1장으로 된 짧은 편지인데, 바울이 개종시킨 오네시 모라고 하는 도망친 하인을 대신하여 그 주인에게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그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같이 대해 주라는 요지 의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이 서신 가운데서 바울의 이름은 어디서고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바울의 다른 서신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가지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옛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으로 대체되었으며,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도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반서신 야고보서: 이 서신은 아마도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썼을 것입니다. 이것은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약 1:1).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믿음과 행함을 함께 다루었 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혀를 바로 사용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는 큰 핍박을 당하고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 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는 거짓 교사에 대해 경고하면서 그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 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본 서신의 제3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재림의 날에 대해 그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 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말했 습니다(벧후 3:10). 이것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땅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요한1,2,3서: 이 서신들은 사도 요한이 썼습니다. "사랑"이 요한1서의 중심 주제입니다. 5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서신에 "사랑"이라는 말을 44번이나 쓰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 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요한2서는 성경에서 가장 짧은 책일 것입니다. 이 서신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에게 쓴 편지 인데 우리는 그 여자가 누구 인지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본 서신에서는 "지내 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9절)고 경고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할 것을 강조했 습니다. 요한3서는 가이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에 대해서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이 책의 저자는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의 형제 유다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후서와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거짓 교사를 경고하 고,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4. 기독교의 권위 (Religious Authority)
24. 기독교의 권위 (Religious Authority)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 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 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본 장에서 우리는 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변경을 가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은 요한계시록과 기독교의 권위 문제에 대해 다루 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 (The Book of Revelation) 이 책은 신약 가운데 하나 밖에 없는 예언서입니다. 때때로 이 책을 묵시록(Apocalypse)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책은 사도요한이 썼다고 해서 요한계시록 이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사도 요한이 그의 말년에 소아시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밧모 섬으로 유배당해 갔을 때 거기서 쓴 것입니다. 아마 성경 중에서 가장 늦게 쓰여진 책일 것입니다. 이 책은 소아시아에 있던 주님의 일곱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이들 일곱 교회 중에 두 교회는 매우 칭찬을 들었고, 두 교회는 매우 혹독히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 교회는 칭찬도 받고 비판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요한이 "주의 날"에 본 환상의 기록입니다. 주님의 날 이란 주의 첫날 (일요일) 곧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의미합니다. 아마 성경의 어떤 책도 이렇게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사물과 상징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 책을 연구하는 데 있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될 일"(계 1:1)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그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본 것을 기록했습니다. 둘째, 이 책은 매우 상징적이라는 점입니다. 대체적으로 성경의 기록은 문자적 해석을 할 수 있지만 예언서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나오는 일곱 촛대는 이책의 수신자들인 일곱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상징과 환상을 해석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난해한 구절에 대해 자의적 해석을 내리는 신학자나 대부분의 시간을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만 설교하는 사람들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교는 청중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킬 수는 있으나 듣는 사람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22장에서는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 공과의 마지막 장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 22:21) 이제 기록된 성경은 끝났습니다. 성경은 약 1900년 전에 완성 됐지만 책 중의 책인 이 책의 영향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권위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을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 하는가" 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약 성경의 계명들을 오늘날에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분열의 원인은 권위의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권위가 교회에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이 권위라고 여기면서도 그것을 성문화된 교리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유일한 권위라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권위) 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성부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이 변화하신 산 위에 계실 때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 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마 17:5)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예수께서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을 보고 놀랐습니다.(마 7:29)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 이와 같은 권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권위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부터 모범을 받은 사도들의 말씀에도 우리는 순종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말씀하신 후에 사도들에게 그 권능을 주시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 16:13).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갖고 가르쳤으며 서신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들의 가르침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들의 권면과 가르침은 예수님의 권면이나 가르침과 부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오늘날에는 예수님도 사도들도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진 몸으로 이 세상에 거하 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말씀을 기록으로 신약 성경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신약 성경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권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감으로 기록된 이와 같은 가르침에 변경을 가하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 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6-8) 여기에서 보면 "복음"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외함으로서 그것을 왜곡시키는 것은 정죄하고 있습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이 9)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을 우리가 말해야 할뿐만 아니라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우리도 침묵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성경의 명령이나 교훈의 본질을 오늘날 21세기에 맞춰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 시대에 침수로 행했던 세례의 방법을 약식(물 뿌림)으로 변경하는 것 등은 성경의 교훈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신조, 교리 혹은 신앙 고백 등을 하나님 말씀과 같은 권위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만든 그와 같은 것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혹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와 같은 것들을 권위로 받아들인다면 지내쳐 그리스도의 교훈안에 거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그와 같은 신조(교리)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는 바로 그 사실이 성경과 일치될 수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다음 3장에 걸쳐 우리는 신약 교회의 본질에 대해 살펴 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제1세기의 초대 교회가 어떠했으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해야만 하는지를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권위로서 우리에게 보여 준 순전한 원리를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