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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요17:23/요일2:6 2015-07-08 07:00:58 read : 21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가 이제까지 70년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 살아온 지는, 20살에 거듭나서, 지금까지 50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50년의 제 크리스천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그간 제가 배우고 경험했던 중요한 신앙적 원리를, 16가지로 정리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 /요17:23/요일2:6 2015-07-08 07:00:58 read : 21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가 이제까지 70년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으로 살아온 지는, 20살에 거듭나서, 지금까지 50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50년의 제 크리스천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그간 제가 배우고 경험했던 중요한 신앙적 원리를, 16가지로 정리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제가 한 시간에 4가지씩, 총 4회에 걸쳐, 그 16가지 원리를 모두, 이 집회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는, 그 중에 첫 번째 원리만 녹취했습니다. ▲제 일생을 통해, 가장 큰 은혜 받은 구절은, 요17:23절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요17:23b,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구절은 여러 곳에, 여러 다른 표현으로 많이 나옵니다만, 위 구절은, 특별히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놀라운 진리입니다. 막연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제가 위 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저는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후로, 이 진리를 한 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말씀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진 감정 중에 하나는 <불안정감 insecurity>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불안과 불안정감으로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찬양드리는 모습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이 집에 돌아가서, 7일간 살아갈 때는.. 그렇지 않은 것을 봅니다. 그들은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직면해서, 불안과 초조감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사람들이 불안하게 살아가는 그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관념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르나, 자기 삶에서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 믿었던 초기에도 그러했습니다. 제가 거듭나고, 세례를 받았으나, 제 삶은 늘 불안했습니다. 제 삶에서 종종 용기를 잃었고, 패배감 가운데 시달렸으며, 우울함에 짓눌렸으며, 남이 저를 쳐다보면 항상 어두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정상인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주위의 신자들을 보니까, 다 그렇게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그러던 중에 제가 성경말씀을 한 구절 읽게 되었습니다.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예수님)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러니까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님처럼 살게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놀라운 도전입니다. 당시 젊은 제게,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살아라’고 도전한 사람은 없었지만, 저는 성경이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기로’ 작정하고, 성경을 면밀히 읽어보니, 예수님은 그 삶에 ‘불안감’이 전혀 없으셨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insecure ▲예수님은 결코 우울했던 적이 없으시며, 용기를 잃고 낙심하거나, 침울한 얼굴 표정으로 사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문제와 난관이 없으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당하시거나 겪으셨던 문제와 난관은, 지금 우리 각자가 겪는 것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결코 우울/낙망/침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했기에, 그 모든 삶의 어려운 문제와 난관을, 넉넉히 극복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갈 상황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 위기의 불안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11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예수님이 혼자만 남게 되셨을 때, 자기를 잡으려는 무리들이 서슬이 시퍼렇게 날뛸 때, 그때는 정말 불안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일2:6절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행하라(살아라)고 말씀하고 있고,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께, 예수님처럼 안정감을 누리고 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만큼, 똑같이 나를 사랑하신다’ God loves us as much as he loves Jesus 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할 때, 우리는 불안한 세상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내게도, 아버지께서 똑같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불행하게도,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지 못하고 자라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변명하거나, 누구를 탓하지 마십시다. 그런 분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보호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요17:23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셨으니, 하나님은 나를, 아기 때부터 사랑하신 것을 알고, 믿게 됩니다. ↙ 헤롯이 얼마나 아기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신 손길로,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셨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안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이렇게 같은 방식으로, 어릴 적부터 저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를 예수님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 사실을 믿으시면,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랐다고 한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죽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되기까지는, 아무도,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안정감>을 누리고 사셨던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쳐서 죽이려 했으나,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눅4:29 예수님은, 죽으시기로 작정된,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가 이르기까지는, 아무도, 그 어떤 질병도, 그 어떤 공격도, 예수님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진, 믿음 안에서의 안정감이었습니다. 비단 마지막 죽음의 순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여정(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우여곡절과 위태로운 사건들 뒤에 성경(특별히 마태복음)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자기가 정해진 길을, 지금 가고 있다고 여기시고 계셨기 때문에, 그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안정감을 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7:30, 요2:4참조. 때가 이르기 전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12:23 우리의 삶 역시도, 성경책에 미리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139:16 위 다윗의 시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지만, 확대하면 예수님의 씨를 그 속에 가진, 우리 각자에 대한 예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무슨 위태한 일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안정감을, 하나님 안에서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시며,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믿지 않으니까, 우리 삶에 안정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할 때, 위에서, 그 수많은 삶의 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안정감을 누리셨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우리 각자도, 위태로운 세상에서, 삶의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배운다고 해서, 오늘 당장 우리가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론과 원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과 원리를 토대로, 안정감을 누리는 삶을 사는 연습을, 아기가 걸음마 떼듯이, 스스로 체득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의 불안> 뿐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질투심> 때문에, 많은 불행과 고통 가운데 살아갑니다. ‘저 사람은, 잘 풀리고, 잘 나가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부진할까?’ 이런 비교의식 가운데서 생기는 <열등감, 질투심>이, 자기 스스로를 불행하게 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데서, 오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삶이 항상 불안하고, 갈등하고, 평안함과 담대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 공평하십니다. unpartiality 라고 말하죠. 하나님은, 누구를 더 잘 봐주고, 그런 것 없습니다. 작은 사안에 대해서는, 그런 높낮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큰 그림을 놓고 보면, 하나님의 공평함/정의/공의의 잣대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절대 부인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롬2장을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주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것은 자연적으로, 예수님이 우리 형님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아들Jesus이나, 작은 아들들us이나, 공평하게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고, 주가 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맏형이 되십니다. 여러분, 구약에는,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맏형’으로 여긴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신약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권 중의 하나입니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to my brothers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 형제들에게’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부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맏형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동생들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 ‘형제님, 자매님’ 부르는데, 사실 그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호칭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는 편애가 없으십니다. 절대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듯이, 그 동생인 우리들을 똑같이 사랑하신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unpartiality(절대 공평) 하시니까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를 똑같이 사랑하신다! 그 사실이 제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니, 제 삶의 모든 불안감과 불확실성 가운데서도, 저는 안정감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감, 무슨 중병에 걸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 혹시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나를 빠뜨리지는 않으실까.. 이런 모든 불안감에서, 저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 동생인 나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여러분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다만 여러분 각자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 안에 있는 나는/요3:1-8 2002-01-30 07:24:49 read : 70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아십니까? 저는 늘 하나님의 복음을 대하면서 누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겠는가하는 답답한 마음이 제안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면서 제일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이십니까. 여러분, 그것을 인정하시죠? 그분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아버지 안에 있는 나는/요3:1-8 2002-01-30 07:24:49 read : 70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아십니까? 저는 늘 하나님의 복음을 대하면서 누가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겠는가하는 답답한 마음이 제안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면서 제일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이십니까. 여러분, 그것을 인정하시죠? 그분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분은 모든 것을 다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그분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줄려고 창세전부터 예정한 생명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분은 그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기 위해서 이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좋았을까요. 자기를 위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아들이 누릴 영원한 행복과 축복을 생각하면 좋았던 것입니다. 둘째날 하늘을 만드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고 이렇게 하루하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날에 그분이 창조한 창조의 주인공인 인간이 태어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말씀으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말씀으로 짓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분의 형상을 그대로 집어넣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피조물이었습니다. 그저 있으라 하면 있었습니다. 없으라하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하신 그분이, 온전하신 그분이 그분의 생기를, 그분의 형상을 넣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이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하나님이 가진 그 모든 풍요로운 세계를 누리며 영원히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약속하시기 위해서 에덴동산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안에 거하는 진정한 선과 하나님밖으로 나가는 진정한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님은 에덴동산 중앙에 두신 것입니다. 그 나무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 축복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때 아담과 하와만 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꿈속에 예정된 자들입니다. 당신과 나는 그래서 그렇게 존엄한 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다가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다가 살다가 없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존재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가 오시었고, 무엇 때문에 그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대신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그 안에 거하는 축복을 입히시겠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하나님의 꿈속에 자리하는 인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진정한 절대값을, 절대 생명의 세계를 여러분속에 영원히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대로 우리는 지금 그땅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입히신 그 존엄의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를 염려하는 고아처럼, 잃어버린 양처럼, 나간 자식처럼 쥐엄열매로 배불림을 받고 싶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참한 존재로 살 수 밖에 없는,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좌절과 절망과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불안, 그 모든 어둠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 인간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님이 여러분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도 있고, 내 생명의 주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형상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신과 이성은 있어도 그것은 육체에 기인된 세계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위대한 시스템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고, 아담은 아담의 형상대로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형상입니다. 우리속에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악이 가득합니다. 우리 속에는 아담의 피가 흐릅니다. 우리가 성찬을 하면서 내 몸이 예수님의 몸이 되고, 내 피가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우리의 영은 성령으로 무장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썩어빠진 육체가 여러분의 본질인 것처럼 육체에 종노릇하며 살아가지 아니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그분의 간절한 아픔이, 그분의 간절한 의지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이 육체의 시스템이라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문제를 만들어 놓습니다. 신앙은 절대 살벌한 세계입니다. 주일마다 왜 모이고, 주일마다 왜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쳐 주는지 압니까? 우리는 언제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어둠의 영이, 이 세상 신이 우리를 무릎꿇게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육체덩어리일 뿐만 아니라 이세상 신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밑에 굴복하고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 인간은 그 아래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땅에 태어난 인간이 어둠의 영의 지배를 받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악하게 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악하게 살지 않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덩어리로 어떻게 어둠의 영을 막아낼 수 있습니까. 영계로 영의 세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둠의 영은 철저히 우리를 괴롭힙니다. 어둠의 영의 목표는 죽음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 죽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면서 이미 죽는 것입니다. 영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고,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과의 싸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그를 대적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복음의 예비한 신발을 신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여러분들이 이만큼이나마 평화속에서 사는 것은 목사가 여러분의 파수꾼이 되어서 여러분을 지켜주기 때문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어둠을 물리칩니까. 이 예배는 여러분 인생을 참되게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히시려는 그 시스템을 입으면 빛이 되고 영광이 되고 권세가 넘치고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신령한 은사와 모든 것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이 넘치는 축복이 이제로 영원토록 보장되는 영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되면 바람에 나는 겨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이 우리안에 정말 소망하는 것은 우리를 새아들 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다음에 천국가고 지옥가는 것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죄를 짓고 안짓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면 끝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땅에 살게 하다가 죽은 다음에 천국가게 할 것인가 지옥가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과거에는 사는 꿈보다는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이면 인생을 정말 열심히 살았을텐데 그때는 죽어서 천국가는 것만꿈꾸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전부 버리고 벗어던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나는 점점 살수록 안될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안에 입히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분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웃으며, 선하게 살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속에 자리하는 그 찬란하고 황홀했던 그 인간으로 오늘 나를 회복시키실까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꿈꾸시는 그 꿈속에 자리하는 나로 회복받았습니까? 이것을 회복받는 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어릴적부터 이 꿈을 회복받은 인간은 멋진 신의 아들로 왕같이 삽니다. 이것을 회복받으면 모든 세계가 달라집니다. 고아와 같이 살고, 거지같이 살고, 이 세상에서 마치 짐승처럼 살고 늘 죽음이 내앞에 기다리고 있고 그것 때문에 더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이 싸이클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꿈의 실현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깊이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알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생명이 여러분에게 보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깊이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보통 아버지하나님이라고 하면 창세전부터 있었던 나를 창조한 아버지로만 이해하는데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세계이고 얼마나 무서운 세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속에 얼마나 위대한 옵션이 자리하고 있고, 여러분속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를 깊게 체험하고 살아가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구원안에 있는 여러분들이여, 내가 누구인지를 똑바로 알고 사세요. 왜 껍질같은 그것을 붙잡고 삽니까. 여러분, 우리는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의 사람으로서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회복받았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육체에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입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안에 입히시고자 하시는 새아들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분이 친히 육신을 입고 아들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시었습니다. 나에게 형상을 넣어 주셨는데, 그 형상은 사라져 버렸고, 우리는 동물과도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땅에 태어났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입히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영원히 죽을 형벌의 인생, 저주의 인생, 죽음의 인생을 없애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여러분에게 죽음이 아닌 영생을 가진,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인 그 영광을 가진 사람으로 여러분을 살게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을 모신 자는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심으로, 예수속에 들어있는 진정한 새사람이 여러분안에 입힘받는 귀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모신 여러분들이여, 껍질에 의해서 살지 마세요. 내 속에 있는 악과 나를 쓰러뜨리려고 덤벼드는 어둠의 시스템을 완벽하게 제거하고 내 몸을 쳐서 복종하기에도 바쁩니다. 잘난 신앙 제발 좀 하지 마세요. 이 목사는 새벽에 눈을 뜨면서부터 나를 하늘가득한 세계를 충만히 받고, 얼마나 주의 은혜를 사모하며 몸부림치며 내가 갖고 있는 작은 틀을 부수며 하나님의 가득한 세계를 입기 위해서 내 작고 작은 틀을 부수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를 알아가는데 있어서 제일 못된 적이 나라는 것을 압니다. 내 틀은 작습니다. 나는 작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이 작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도 작게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 모든 형벌의 인생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이 꿈꾸는 그 천국이 영원히 지속되는 그 빛의 세계, 그 영광의 세계, 그 소망의 세계를 영원히 입혀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어찌 내 작은 육체와 비교할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가득한 시스템이 여러분안에 가득히 빛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 교회는 그것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아직도 굼뱅이적 생각을 합니까. 아직도 그 나로 알고 있습니까. 예수가 당신의 형벌을 다 당해주셨습니다. 예수가 당신의 육체가 당해야 할 과거와 모든 육체적인 삶의 문제들과 지옥의 형벌과 모든 것을 다 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또 그것을 당해야 합니까. 그것을 하고 살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없어짐과 동시에 하나님이 꿈꾸는 그 모든 꿈의 세계가 우리안에 이루어집니다. 아버지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을 보호하십니다. 여러분을 보장하십니다. 그분이 머리카락 하나도 상한바 되지 않도록 영원토록 인도하십니다. 믿음속에 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안에 있는 사람은 99가 하나님이 일하시고 나는 1만 도와드리면 됩니다. 나는 조금만 노력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실 줄 믿습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다 인도하심을 믿고 그 안에서 여러분이 감당할 것만 감당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고아같은 아들되지 마시고 살아계신 아버지의 절대적인 은혜안에 거하는 아들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감당치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하나님안에서 살아갈때에는 내 마음도, 누구도 막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내 앞길도, 누구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되었다면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대로 될찌어다. 믿음대로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계시고 우리는 아들입니다. 그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깊은 말씀을 묻고 살면 얼굴이 환해지고, 삶이 바뀌어지고 축복과 능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충만한 은혜속에 거하여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정말 살리는 모든 좋은 말씀은 하나님안에 가득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어둡게 하는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속에 있지 않습니다. 빨리 아들되고, 아들된 여러분들은 하루하루 살면서 그 모든 세계를 누려가는 날들로 굳건히 다져가는 반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예수님 통해 불안감 끝장낼 수 있다/요14:27 2005-01-07 요 > 11장-21장(전체리스트) > 14장(전체리스트) 예수님 통해 불안감 끝장낼 수 있다/요14:27 2005-01-07 16:52:52 read : 12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얼마 전 '한국사회 불안감 조사'결과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불안을 느낍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많이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73%, "조금 느낀다."라고
예수님 통해 불안감 끝장낼 수 있다/요14:27 2005-01-07 16:52:52 read : 12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얼마 전 '한국사회 불안감 조사'결과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불안을 느낍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많이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73%, "조금 느낀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20%가 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93%가 불안을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가운데서 80% 이상의 사람들이 "작년보다 금년이 더 불안하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 지수가 더 높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불안한 이유에 대해서는 경제, 직장, 건강이었고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교통사고였습니다. 창피하게도 교통사고가 우리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나라입니다. 요사이 저는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할지 불안합니다. 노 대통령이 잘하느냐 못하느냐 보다 그냥 대통령께서 말씀하면 저는 불안합니다. 여러분! 질문 하나 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으면 불안이 없어집니까? 아닙니까? 분명히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어느 날 똑같이 불안해하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이 먹으면 어떻게 살지 불안합니다. 누구와 결혼할지? 이러다가 영원히 노총각, 노처녀로 사는 것이 아닐까 불안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잘 살지 불안합니다. 좋은 직장을 갖게 될지 불안합니다. 돈이 없고 집도 없어서 불안합니다. 병에 걸릴까봐 불안합니다. 사고가 날까 불안합니다. 유가가 오를 때마다 불안하고 혈압도 오릅니다. 과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마찬가지 아닙니까? 가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 믿기 전의 걱정을 똑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불안해지니 기도도 안 됩니다. 돈벌러 나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불안이 자기를 누르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안하니 새벽기도를 합니다. 찬송도 합니다. 열심히 예배를 참석합니다. 무엇인가를 합니다. 그리고 나면 반짝 평안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뿐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믿음생활을 해야 할까요? 이 세상에서 누가 불안감을 완전히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목사인 저요? 아니오! 불안합니다. 암에 걸리까봐 탄 음식도 먹지 않습니다. 불안합니다. 교인들이 다 도망갈까 봐 불안하고 떨고 있습니다. 설교하다가 헛소리할까봐 불안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불안감을 완전히 박멸할 방법이 없을까요? 다행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완전히 불안을 박멸하신 분이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 완전히 불안을 이겨 내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와 다른 불안입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도 언제 죽으실 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이 본문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준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평안은 다르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가지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배워야 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주는 평안은 정 말 그때뿐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목회자들은 주일 날 저녁에 직업병이 있다고 합니다. 많은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고 나면 허전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이루었다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들은 이야기이지만 주일날 저녁 자유로에 가면 양복 입은 목사님 같은 분들이 속도를 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학교강의를 마치는 월요일 저녁에 그런 병에 걸립니다. 그때 얼마나 평안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수요일이 되면 다시 불안해집니다. 수요기도회 설교부터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안과 다릅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안은 반짝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한번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받고 제자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마 ‘아멘’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불안감이 해소되었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따라 평안을 얻었다고 하는 제자의 모습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때는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불안에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언제 알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성령이 임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평안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평안입니다. 이들은 그래서 제자들은 죽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아멘 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나의 평안’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얻으실 수 있었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평안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안을 늘 유지하는 비결은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심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문제 삼았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조차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입니다. 불안을 박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마가복음 14장 36절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특별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말은 4~5살 먹은 어린애가 아빠를 부를 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현대 아랍어에서는 '지바'라고 합니다. "지바, 지바" 하면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향해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른 것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언덕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기도를 이 말 속에 있는 뉘앙스를 그대로 살려서 다시 표현한다면 "아빠, 아빠! 아빠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잖아요. 무엇이나 하실 수 있잖아요. 무엇이나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십자가를 안 지게 해주세요." 완전히 어린애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니 평안한 것입니다. 아빠라고 하는 것은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의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혹시 아이가 아버지 있는데 “아! 인생을 어떻게 살지? 집은 어떻게 먹이고 살지?” 그래보십시오. 한대 아버지한테 군밤 맞지요. 저는 아빠에 대한 상처가 많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일찍 잃었습니다. 옛날에 개구쟁이 시절에 동네에서 싸움을 합니다. 그러면 힘세고 등치 큰 제가 이깁니다. 그러면 곧 “우리 아빠한테 이를래!”하고 울면 들어가면 무서워서 도망을 왔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어린나이에 그 소리에 상처 받아서 집에 와서 “나는 왜 아빠 없어!” 그렇게 엄마에게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희 어머니는 “무슨 소리냐고 너 아빠 있어! 성은 하씨이고 이름은 나님이라고”하면서 위로해주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빠, 아빠라고 부르는데, 너희들도 그렇게 해라." 그리면서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왜 아바라는 표현을 했습니까? 큰 자식이 아닙니다. 아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랬습니다. 아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에게 인생을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튼 분이십니까? 그런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드시죠. 정말 힘이 들고 불안하시죠.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아버지가 기다리십니다. 이제 돌아가십시오. 아버지를 떠나면 외롭고 불안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불안한 것은 아버지에게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였습니다. 예수님은 목표를 아빠 모시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론적으로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잃고 길거리를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빠를 기억하십시오. 아! 절대적인 하나님을 기억 하십시오. 십자가로 몸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아빠를 기억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 방법이 있습니다. 모세를 잃고 불안해하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데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가장 큰 문제는 아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나처럼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놀랍게 있어요. 자신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불안해하던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형으로부터 밤중에 도망가는 불안한 야곱이 나옵니다. 오죽 했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을까요? 그 다윗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들이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어도 끝까지 도와 주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오빠라고 부르시는 분이 안 계실 것입니다. 그래요. 바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감격해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처럼 우리도 불안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편 27편 1절 말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이런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을 마음에 잘 담으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를 마음에 담고 운전할 때도 묵상하고, 설거지할 때도 묵상하고, 불안이 고개를 들 때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것이 느껴지면서 내 마음의 불안이 슬슬 힘을 잃어버리고 쫓겨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다는 그 평안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노력하십시오. 가만히 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불안할 때 엎드려서 어린아이들처럼 징징대지 마십시오.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진짜 내 아버지로 느껴지는지 한번 자기를 점검하십시오. 오늘 이시간도 아이처럼 아버지를 느껴지는지 자기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평안을 철저한 순종으로 얻었습니다. 불안은 누군 과와 관계가 좋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을 하면 불안합니다. 아이를 혼내고 나도 불안합니다. 시어머니나 친구들과 싸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불안한 이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 때문입니다. 불안할 때는 하나님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집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과 불편해지는데 그 마음이 평안할 수 없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관계가 좋을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하나님과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생각이 옳은 것 같지요? 그러나 이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멀리합니다. 그리고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평안을 얻는 길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에 살아갑니다. 돈을 잔뜩 저금해 두어도 불안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은 누구의 일을 합니까? 예! 우리의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링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모를 받는 대통령입니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마자 그 다음해부터 4년 동안 남북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얼마나 그 전쟁이 비참했는지, 총 60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생겼습니다. 개전하고 나서 한 1년 동안 계속 북군이 밀렸습니다. 나중에 굉장히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링컨은 온갖 스트레스를 다 받았습니다. 심지어 83kg에서 57kg로 떨어질 정도로 체중이 감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음으로 북군이 이겼습니다. 그 희소식이 백악관에 전달됐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참모가 링컨에게 축하를 했습니다. "각하, 이제부터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입니다. " 그러자 링컨이 정색을 하면서 내밷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염려하고 마음에 걱정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하나님 편에 바로 서 있는가 서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편에 서 있을 때 나는 걱정을 안 한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가 문제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되실 수 있어. 하나님은 성경의 다윗을 통해서 내게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게 해 주셨네." 가끔 참모들은 이런 링컨을 보고 어떻게 저리 태평할 수 있는지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링컨에게는 비결이 있었습니다. 링컨은 항상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었고, 그 평안 때문에 그는 흔들리지를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불순종하면서 평안을 달라고 합니다. 교회는 나오는데 하나님께는 순종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갖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안입니다. 항상 불안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배웠으면 지키십시오. 진리라는 것을 확신했으면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가지신 참 평안을 얻게 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평안을 간절히 기도함으로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기도하는 것이 불안을 극복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감동적인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억나십니까? passion of the christ에서 시작 장면이 겟세마네 기도이었습니다. 왜 감독은 이 부분을 첫 장면으로 넣었을까요? 그것은 영화시작에서 마귀가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머리 마귀! 그때 예수님의 모습이 기억나십니까? 인생 최대의 위기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감독은 그 시간을 사탄의 시간으로 보았습니다. 어두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영화가 잘된 이유는 그 불안과 두려움이 관객에게도 전이되게 하였습니다. 아 ! 그때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것처럼 보입니다. 연약하고 유약하셨습니다.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피와 땀을 흐리는 기도! 아바 아버지여" 라고 부르짖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평안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러자 기도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들이 가까이 왔느니라." 얼마나 담대합니까? 얼마나 평안합니까? 이 영화는 불안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뱀이 몸에서 나와 도망가는 장면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함으로 이러한 평안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나처럼 기도하면 이 평안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평생 많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 7:5) 사도 바울은 정말 하루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빌립보 4장 6, 7절에서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두려움에 휩쓸릴 때마다 이 말씀대로 기도했더니, 실제로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불안할 때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기도하십시오. 혼절하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불안을 이겨 내시길 바랍니다. 요즘 암 때문에 많이 걱정들을 하곤 합니다. 암으로 고생하다 세상 떠나는 분들이 많아서 누구나 암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암에 걸리지 않을지 애를 씁니다. 육류를 적게 먹는다, 담배는 아예 끊는다, 스트레스를 가급적이면 받지 않는다, 채소를 많이 먹는다, 생식을 많이 먹는다, 공기 좋은 데 가서 산다, 할 수 있으면 웃으면서 산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라, 화내지 말라,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불안은 암보다 더 무섭습니다. 불안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계속 이 불안을 놓고 싸워야 되고, 이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 평안의 방법을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평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우리 아빠이십니다. 이제 맡기십시오. 2. 하나님 편에서 일하십시오. 그리고 말씀 듣고 순종하십시오. 3. 혼절하도록 기도하십시오. 불안이라고 하는 사탄이 지배를 못하도록 하십시오. 이런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꼭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469장 2절을 다같이 부르시겠습니다.
자비의 집에서 베푼 사랑/요5:1-9 2001-10-24 16:05:26 read : 10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님께서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에 가시게 되었는데 거기서 많은 병자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은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할 때에 먼저 뛰어들어가면 낫는다는 전설을 가진 그런 못이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집이라는 의
자비의 집에서 베푼 사랑/요5:1-9 2001-10-24 16:05:26 read : 10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예수님께서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에 가시게 되었는데 거기서 많은 병자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은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할 때에 먼저 뛰어들어가면 낫는다는 전설을 가진 그런 못이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라는 말은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베트와 자비, 친절등을 가르키는 헷세드라는 말과의 합성어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비의 집에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삼십팔년된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의미를 그들에게 충분히 보여주셨던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1.세상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문이 주는 영적인 교훈 가운데 하나는 세상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과 3절에 보면 베데스다 못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보니까 많은 병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병자는 그 밑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병자라고 기록된 단어는 '약하다'는 의미가 있고 '힘이 없는 자'라는 의미가 있고 '앓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나중에 나오는 사람들과는 또 다르게 힘이 없고 약하고 뭔가는 나타낼 순 없지만 병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가하면 세상을 전혀 볼 수 없는 소경들도 거기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리를 정상적으로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한편 손발이 마비된 상태에서 고생을 하는 마비환자도 있었습니다. 혈기 마른 자라고 본문은 기록을 합니다. 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에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더 안타까운 일은 삼십팔년 동안이나 누워서 고생한 환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행각에 모인 사람들이 언제부터 모였는지는 잘 모르고 또 언제부터 병이 낫는지도 잘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들은 모두가 무거운 짐에 눌려서 신음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볼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을 것입니다. 약을 먹어보기도 하고 병원을 다녀서 치료도 받아보고 아니면 세상적인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쓰고 수고해도 진전이 없고 회복이 안되어서 그야말로 실락같은 희망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최후의 방법으로 베데스다 못가에 와있었을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이처럼 무거운 짐에 눌려 신음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이란 짐에 눌려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육신의 질병이라는 짐에 눌려서 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죄에 짐에 눌려 사는 사람도 있었고 문명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된 체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최고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마음의 평안함과 기쁨이 없이 소망이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처럼 전쟁을 하면 승리하고 많은 훈장도 달았지만은, 그 육체는 문둥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상태에 고민하고 염려하고 안식이 없는 가운데 살고 있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정상적으로 자란다는 게 참 귀한 일인데 낳지 얼마 안돼서부터 병이 나서 수개월동안을 병원에 입원한 아이들도 있고 어떤 아이는 날 때부터 콩팥이 정상이면 2개이어야 하는데 하나로 태어나 가지고 소변을 못보고 고생하는 아이도 있다고 합니다. 성경도 이렇게 우리 인생들을 진단하면서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인생이라고 기록합니다. 마11장 28절에 예수님이 인생을 진단한 결과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 자신도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이지만은 그 숱한 시련과 연단 속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욥14장 1-2절에 보면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하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새벽마다 출애굽기를 강의하는데 출 14장에는 홍해를 건너서 기쁨과 감격으로 나아가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15장 서두에 보면 그 사실이 감격스럽고 너무 귀해서 미리암이 소고를 치며 하나님 앞에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홍해사건이 있고 나서 얼마 후에 또 그들에게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삼일 길을 걸었지만은 마실 물이 없어서 고생을 합니다. 삼일만에 만난 물은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마라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홍해라는 문제를 건넜으면 이젠 그런 문제를 좀 해결했으면 이제는 조금 조금 편히 쉬어야 되고 좀 뭔가 나아져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오히려 더 많은 문제가 더 심각한 문제가 그들 앞에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 1장 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두가지 시련이 아닌 여러가지 시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 사도도 자기 인생 경험을 말하는 가운데 베드로 전서 1장 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여러 가지 시험 때문에 잠깐이지만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그렇게 시험주고 어렵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33절에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이런 많은 고생과 시험과 시련과 연단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를 진 결과인 것을 성경은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3장 16절에서 19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범죄 한 까닭에 인간은 그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인에게는 잉태의 고통을 크게 더하고 아이를 낳는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런가하면 종신토록 수고해야되는 노동의 고통이 우리에게 오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남자는 땀을 흘려야 되는 고생이 있게 되었고 마지막으로는 가장 인간을 두렵게 하는 죽음의 문제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 속에서 인간들은 살게 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세상을 말하면서 고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2.고통과 슬픔 속에 있는 인생들을 찾아오셨다. 그런데 여기 두 번째 중요한 문제는 이런 문제를 만나 고민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슬퍼하는 인생들에게 우리 주님은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자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런 자들을 멀리서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문제와 함께 해결해 주시길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은 주도권을 가지고 그들 앞으로 달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서 현장으로 달려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기록들을 우리에게 많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베드로에 집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장모님이 열병을 앓아서 누워있었습니다. 열이 펄펄 오르고 도저히 가망이 없는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 당하는 고통을 감지하시고 베드로의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마 태복음 8장 14-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 가사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장모를 데리고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 가셨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절망 가운데 있는 이 여인을 치료해 주기 위해서 이 여인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 들어가셨다는 겁니다. 그에 손을 만졌을 때에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을 드는 완전한 치유의 은혜가 임했던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한 고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 산 위에서 하나님께 밤이 늦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지나갑니다. 그런데 종종 있는 일이지만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심하게 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뼈가 자란 제자들은 그 어려운 사항을 너무 너무 잘 알죠. 갈릴리 호수 맞은 편에는 홀몬 산이 있어서 그 높은 산에 바람이 부딪히면 이 바람이 돌풍이 되어서 바닷물을 솟구쳐 올라오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노를 저어도 안돼는 것예요. 방법이 없는 거예요. 성경에 표현대로 보면 이들이 괴롭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사력을 다해서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죽을 지도 모르는 전복될지도 모르는 위기를 만나서 힘들게 노를 젓고 있는 그때에 우리 주님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밤 사경이 되어서 풍랑치는 바다 위를 주님은 걸어오셨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믿습니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생사를 구별 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 그야말로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그 밤에 아무의 도움도 혜택도 받을 수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우리 주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매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잔잔해져서 그들을 편안한 항해를 지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에 파도를 만나서 괴로워하는 우리들에게 주님 찾아오셔서 오늘도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아라. 사람들은 문제를 당한 사람들을 향해서 안심하라고는 말 할 수는 있지만은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안심하라 라고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갈급한 삭개오의 영원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죄에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해 방황하는 사마리아 여자를 구원 하실려고 사마리아로 직접 들어가시는 예수님. 그래서 빌립보 2장 6절 - 8절은 그 주님의 모습을 표현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근본은 하나님이시지만은 하나님과 동등 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문제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 복종하셨는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 하셨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뭐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동떨어진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4장 15절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를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고파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 갇혀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감옥에 갇힌 사람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질병의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질병으로 당하는 고통의 아픔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와줄 수 있고 우리를 책임 질 수 있는 이유가 뭐냐하면 그분이 모든 시험을 다 경험해 보셨다는 거예요. 히2장 18절도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가난의 시험을 당해보셨습니다. 질병의 시험을 당해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소외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를 경험해 보셨습니다. 그분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하는 것이 얼마나 아픈 마음인가를 경험해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능히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누구든지 만나는 사람마다 문제를 해결 받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분을 만나면 그분의 동정과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긍휼하심을 따라서 문제 해결을 받았습니다. 절망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희망이 넘치게 되었고 고뇌와 번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평안함이 넘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슬프고 우울한 삶을 사는 인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도 그분을 만날 때에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고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들도 그분을 만날 때에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변화시키고 모든 여건을 회복시키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30편 11절에서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그런 찬양을 합니다. 베옷은 슬픔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춤을 추는 기쁨을 맛보도록 역사 하신다는 사실이죠. 성경에 보면 그런 기록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자도 예수님을 만나니 예수님이 주시는 치료의 은혜를 입고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61장 3절에 보면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분명히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세요. 그래서 그 재를 대신하게 하시고 희락의 기름을 주어서, 그 슬픔을 대신하시고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신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이 주님을 체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오늘처럼 이 절망적인 세대에 어느 곳에서도 소망이 없다고 사람들은 아우성이지만은 우리 주님은 유일한 소망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주님은 이 시대에 희망이신 줄 믿습니다. 주님 계신 곳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디메오라고 기록되어 있는걸 보면, 분명 아버지가 있는 사람이 소경이 되어서 거지신세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는 바디메오도 우리 주님 만나니 광명한 세상을 보는 축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로 52절에 52절을 보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쫓으니라." 그랬습니다. 마가복음 5장은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에 대한 기록입니다. 귀신이 얼마나 악랄한지 이 사람을 집에도 못있게 하고 무덤사이에 있게 하고 돌을 가지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소리를 질러서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쇠고랑으로 쇠사슬을 묶어봤지만은 소용이 없을 만큼 그러나 예수를 만났을 때에 우리 주님 그를 괴롭히고 있던 2천 마리의 귀신을 돼지 떼에게 보내 몰살케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시고 그 육체를 회복해 주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실려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 주실려고 그분은 채찍에 맞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부유함을 주실려고 가난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주님 앞에 맡기십시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믿음을 가지고 나와 기도하면 우리 주님 풍성하신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오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을 다스려 주시길 원하십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그분을 인정할 때만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 절에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실 때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주님이 걸아 가라고 말하니까 이 사람이 나은 줄 믿고 걸어가니까 주님이 그 믿음대로 역사 하셔서 그는 걸어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히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주님은 보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 오늘도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해결하길 원하시는 주님 앞에 여러분의 짐을 맡기고 그분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요11: 1-7 2003-01-14 14:03:27 read : 12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박세리와 박찬호 그리고 영국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공통점이 있답니다. 무엇일까요? 첫 번째 모두 다 공주 출신이다는 사실입니다. 박세리도 공주출신, 박찬호도 공주출신,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도 공주출신이라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모두다 공을 가지고 논다는 사실입니다. 박세리는 골프 공을, 박찬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요11: 1-7 2003-01-14 14:03:27 read : 12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박세리와 박찬호 그리고 영국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공통점이 있답니다. 무엇일까요? 첫 번째 모두 다 공주 출신이다는 사실입니다. 박세리도 공주출신, 박찬호도 공주출신,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도 공주출신이라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모두다 공을 가지고 논다는 사실입니다. 박세리는 골프 공을, 박찬호는 야구공을 엘리자베스 여왕은 필립 공을 가지고 논다. 참 썰렁한 유머이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가지 알게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조그마한 유머가 열어줄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맞습니다. 인생에서 유머와 웃음은 삶을 건강하게 만들어요. 여러분, 사람의 긴장을 풀어줄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유머와 웃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서양사람은 아이스 레이커 "얼음깨기" 라는 말을 말합니다. 딱딱한 아이스를 깨주는 것, 항상 밝게 해 주는 것 이 사람을 참 좋아합니다. 사람이 힘들 때 간단한 유머가 그 사람에게 생기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맨날 농담 따먹기나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머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시는 분은 10가지 유머는 가지고 있어야 해요. 우리 교회에 유머감각이 뛰어난 형제와 자매가 있지요. 전건국형제와 김은경자매입니다. 어떤 분은 말할거에요. "아 목사님, 썰렁인데요?" 그렇지 않아요. 눈물겨운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희 교회가 청년들이 많은데 청년회 2기 회장과 총무를 이 형제와 자매로 뽑았습니다. 청년회가 재조직이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리고 역시 하나님은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신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가 뽑은 것 같지만 아니에요. 하나님이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들의 장점을 보니까 유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딱딱한 것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더라구요. 김은경자매는 보면 어떻게든지 유머를 발휘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그 썰렁한 유머도 기대가 됩니다. 이들만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딱딱한 것을 갈아주는 아이스 레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고난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지친 인생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해야 합니까? 딱딱함을 풀어줄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거에요. 19세 유명한 목사님 중에 스펄전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신학생을 가르치면서 강의를 했는데 한 신학생은 늘 찡그리고 우울하게 앉아 있더래요. 그래서 목사님이 말했다잖아요. "목사는 자고로 얼굴표정이 중요하다고! 하늘의 소망을 전하는 사람이여서 하늘의 소망을 설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고, 주의 사랑을 전하니까 성도와 성도 눈을 마주쳐야 한다고! "그런데 이 찡그리던 신학생이 은혜를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물었대요. "스펄전 목사님, 지옥설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합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스펄젼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데요. "너 평상시 표정대로 하면 된다고!" 그만큼 얼굴이 중요합니다. 우리 옆사람 얼굴 확인한번 합시다. 소망있는 얼굴인지 아닌지 확인해 봅시다. 따라서 합시다. "주여 아이스메이커가 아니라 아이스 레이커가 되게 하옵소서" 교회는 성도의 얼굴이 중요합니다. 목사의 얼굴이 중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말합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무엇을 보는가? 이번에 김성순형제가 오래곤으로 갔지요. 제가 말했어요. 우리 성결교단의 목사님도 소개했지만 교단 교파 따지지 말고 얼굴이 밝은 목사님, 얼굴이 밝은 성도들, 밝은 교회로 가라고! 목사인 저는 알아요.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를요! 얼굴이 우울한 목사보다도 밝은 목사가 있는 교회가 좋습니다. 우울한 성도가 모여 있는 교회보다도 밝은 성도들이 많은 곳이 좋은 교회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새신자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 것 같습니까? 주보에 써놓은 글들, 교회 비전들, 논리적인 언어들, 목사의 근엄한 모습들 이런 것 봅니까?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은 얼굴을 봅니다. 그래서 새신자들이 제일 많이 보는 것이 목사 얼굴을 본대요. 그래서 항상 저는 마음이 두렵고 떨림이 있어요. 그런데 이것 아세요? 여러분이 저를 보듯이 저도 여러분을 보고 있습니다. "아 목사님은 어떤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지만 저 역시 저 역시 저 성도는 어떤가? 저 형제는 어떤가? 저 자매는 어떤가? 저도 여러분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 눈은 금방 변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착시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 다 맞는 것 같고 자신이 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착각일수 있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전투하는 전투 비행 조종사가 있습니다. 이들을 훈련하는 텍사스에 가장 필수 기본이 무엇인가면 하늘에서 비행기가 돌고 몸도 돌면서 전투를 할 때 이때 가장 유념해야 하는 것 중에 자기 눈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돌 때 하늘로 올라간다고 눈에 보이는 데로 하면 땅으로 곤두박질한다는 거예요. 산에 붙딪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믿는 것이 아니라 계기판을 믿으라는 거예요. 우리 신앙도 똑 같습니다. 자기의 눈대로, 자기의 느낌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 기분 따라서 하는 것 아니에요. 사람의 생각 따라서 하는 것 아니에요. 누가 이러고 누가 저러고 누구에게 장단을 맞춥니까? 그러면 교회는 망해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사람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보고 성도들보고 신앙 생활한다 이것도 맞는 것 같지만 이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우리는 신본주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환경만 보면 안됩니다. 느낌만 보면 안됩니다. 오늘도 살아 계시고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할 때 사람에게 보이듯이 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람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면서요? 믿음이 좋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더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 먹을 꺼 마실 꺼 입을 꺼 염려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미국에 살면서 유학생활 하면서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있어요.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있어요. 사람들 만나면 다 자신의 고민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염려하고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신앙인의 참모습이 아니라는 거예요. 맨날 고민해 가지고, 맨날 초조해 가지고 맨날 불안해 가지고 사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런 것은 불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백성이 되라는데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신앙인의 참모습은 그 어떤 상황이라도 항상 여유와 배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니까 세상의 염려에 덮여서, 고민에 덮여서 허우적거리며 살지 말라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여유와 베짱은 맹목적인 낙관주의가 절대로 아닙니다. 무사안일주의가 아닙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입만 떡 벌리고 밥주세요. 물 주세요. 입을 옷 주세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떻게요? 우리는 말하잖아요? 철저히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가지는 배짱과 여유는 다른 것입니다. 그 뿌리가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 안에 배짱이 있고 여유가 있어요. 도대체 그 뿌리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사람들은 없는 것 같은데 항상 얼굴이 여유 있고 배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고 나의 인도자 되신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배짱과 여유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옥에도 갇혔고 매도 수없이 맞았어요. 돌에 맞았고 파선하는 경험도 세차례나 했어요. 그런데 고난 속에서 어려움 속에 그는 넘어지고 죽었나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강한 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어요. 웬만한 어려움이 와도 호들갑 떨지 않았습니다. 왜요?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자의 여유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이 나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가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자굴에 다니엘이 들어가도 다니엘이 사자가 죽이지 못했어요. 풀무불에 다니엘의 세친구가 들어갔어요? 풀무불도 다니엘의 세친구를 죽이니 못했어요.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보호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엘리야 알지요? 오랜 가뭄 속에 있어 하나님은 그를 그릿 시냇가로 이끄시고 까마귀가 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나중에 그릿 시냇가가 다 말라 버리자 이번에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의 집을 통해서 풍성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좋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일용할 양식을 끊으신 적이 한번도 없으십니다.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생활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순간 순간 우리에게 채워 주시 않았습니까? 한번도 일용할 양식을 끊으신 적이 없어요. 항상 먹을 것을 주셨고 그리고 우리가 힘들 때 피할 길을 주셨고 지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21편 5절에 본인 자신의 간증을 통해서 말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에게 힘들 때 어려울 때 피할 길을 주셨고 지켜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찬양합시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란을 면케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온다고요? 우리를 조성하시고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로서 온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아주 역설적으로 우리 성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도는 이런 모습이라는 거예요. 어떻게요? 고린도후서 6장 9-10절을 찾아서 읽어봅시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중에 어떤 지파가 가장 부유한 지파일 것 같아요? 그것은 레위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땅을 분배하실 때 오직 레위지파에게는 아무 땅도 주지 않았어요. 다른 11지파에게는 먹고 살수 있는 땅을 허락하셨는데 오직 레위 지파에게만은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대신 레위지파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파입니다. 제사장이 그곳에서 나오고 하나님께 수종드는 지파들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목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지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 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너는 땅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네가 하나님을 소유했다. 하나님을 소유한 네가 가장 부유한 지파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 하나님의 일을 담당하는 것이 가장 부유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거예요.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형제와 자매들,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을 소유하는 귀한 백성되기 원합니다. 가장 부유한 백성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입니다. 부자는 따른 것이 아니에요. 예수 없는 부자는 졸부입니다. 하지만 예수 있는 자는 가장 큰 부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싸움은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쓰고 얼마나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는가? 지위를 누릴 수 있는가?" 이딴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인생의 싸움이란 하나님을 소유하는 싸움이라는 거예요. "내 안에 얼마나 하나님을 충만하게 모시고 사는가" 이 싸움이 진정한 인생싸움이라는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가장 부유한 자의 고백이 나옵니다. 구약은 시편 23편 1절에 나옵니다. 찾아보세요. 그리고 신약에서 가장 풍성한 고백은 또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어요. 한번 찾아보십시다. (시 23: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누구 때문에 부유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부유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서 부족함이 없는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 여유 있는 성도들이 되길 원합니다. 좀 베짱이 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어디에서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어요? 바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과 대화함(Engage the Word) 오늘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이 참으로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성경 복음서에 주님을 잘 섬겼던 가정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오고 그 오라버니 나사로가 나오는데 바로 나사로가 병이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부리낳게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말씀합니다.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다급히 예수님께 구원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왜 예수님이 이 가정을 그렇게 사랑하셨는가를 표현할 때 이렇게 표현하는 성경학자도 있어요. 나사로의 가정이 결손가정이라는 거예요. 오리비 하나와 누이동생 둘로 구성된 그런 결손가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결손가정을 주님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분입니다. 약한 자를 찾아가시는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자를 돕는 것이 경건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오늘 말씀 가운데서 잘 모시면 이 병든 나사로가 죽습니다. 병들었을 때 주님에게 가서 말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소식을 듣자마자 올 것 같았는데 급히 가지 않으셨습니다. 2틀을 더 있던 곳에서 유하다가 가셨어요. 당장 뛰어 올 것 같았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을 잘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셨어요. 어떻게요? 4절에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그리고 6절에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오실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계시던 곳에서 2틀을 더 머무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나사로의 가정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사랑을 거절당한 느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외면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친근하게 지내던 가정 나사로의 가정은 예수님에게서 큰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어요. 나중에 예수님이 오시고 나니까 마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 좀 일찍 왔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예수님 좀 일찍 오시지요? 이런 말을 봅니다. "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1 무슨 말입니까? 속 깊숙이 밝혀 보면 예수님 왜 늦게 왔어요. 내가 그렇게 빨리 오라고 했는데 예수님 늦게 오시다니요? 예수님 나 상처받았어요? 예수님. 좀 일찍 오지 않고서요?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새롭게 말씀이 조명되고 왜 예수님은 직접 가지 않으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 걸렸을 때 곧장 가셔서 치료하시면 좋았을 텐데 왜 2틀을 더 묵었을까? 여기에 영적인 말씀이 담겨 있어요. 성경에는 특별한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이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병이라는 단서 하나만이 있습니다. 그냥 주님이 2틀을 더 유하셨어요. 나중에는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 우리가 잘 아는 은혜로운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으리라" 아주 은혜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심각한 상처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우리 삶의 현장으로 가지고 가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렇게 겪는지 모릅니다. 내가 1년 2년 동안 기도했는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이때 성도가 느끼는 감정은 정말로 낙심입니다. 그러다가 생각해요. "그래 역시 돈으로 되지 하나님으로 되는 것 아니지, 아무리 기도하면 뭐해?" 내가 예수님을 믿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 거야? 낙심해 버립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시험에 빠질 때 그 교회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관계로 호소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하고 어떤 관계인데 이럴 수 있느냐? 내가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데 내게 이럴 수 있느냐?" 목사에 대해서, 성도에 대해서 배신감이 있어요. 은혜 충만이 아니라 배신감 충만 입니다. 이거 망할 교회입니다. "내가 저 사람 믿었는데 왜 저래" 원래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도 안 받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가 상처를 받으면 아주 싶습니다. 형제와 형제들이 상처를 받으면 정말 깊습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어머니가 말하면 "나를 길거리에서 주어 왔지요? 다리 밑에서 주어왔지요?" 이딴 소리를 합니다. 가까울수록 상처들이 더 심해요. 그래서 경험이 많은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목사님, 성도가 아무리 사랑스럽다고 하더라도 너무 친근하면 나중에 강한 훈련을 시키지 못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더라구요. 너무 가깝게 하면, 너무 거리가 없이 하면 나중에 그것으로 더 힘들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하고 어떤 관계인데 이럴 수 있느냐?" "교회가 누구 때문에 되었는데?" 이딴 소리 나온다는 거에요. 아직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사랑해주면 나중에 알겠지요. 그리고 나중에 내가 좀 상처받으면 어때 이런 식으로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주님이 왜 2틀을 더 유했을까요? 왜 빨리 가지 않았을까요? 저는 귀한 관계를 발견합니다. 여러분,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존귀하게 대하셔야 합니다. 가깝다고 막 대하면 안돼요 우리 형제들, 자매들, 제가 가깝지만 존대합니다. 부부일수록 더 존대해야 합니다. 함부로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의 운전을 못 가르쳐 준다고 하잖아요. 영어공부도 남편이 아내에게 못 가르쳐 준다고 그러잖아요? 운전하면서 "아이고 이것도 못해, 그게 뭐야? 나중에 말하지요? 잘 하는 게 뭐야? " 이럴 때 여자들 배신감 느낍니다. " 나는 이 사람한테 인생을 걸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올 수 있어?"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6절에는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다시 말해서 목자와 양떼 사이에 조금의 틈도 나지 않도록 하나됨을 유지하라는 거예요. 서로가 가깝지만 더 존대하며 더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틈이 나면 안됩니다. 말씀으로 응답함(Responds the Word) 여러분, 나사로의 집안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에 대한 배신감을 가지면 안됩니다. 좀 늦게 온다고 해서 불평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나중에 그분의 귀한 뜻을 보여 주셨어요. 사랑을 확인시키셨어요. 여러분, 기도제목 때문에, 좀 지체되는 것 때문에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계신 주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는 그런 모습은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조금 힘들고 환난이 오고 곤고가 오고 핍박이 온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요. 그럴 때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로마서 8장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계속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기도하면서도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낙심하면 안됩니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를 더 연결하는 은혜의 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주보에 성경퀴즈 하나 풀어 볼까요? 성경에서 고난하면 누굴 듭니까? 욥을 듭니다.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요? 욥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퀴즈 7번 문제를 보십시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 )하신 후에는 내가 ( )같이 나오리라." 욥(23:10) 답이 무엇입니까?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순도 100%의 인생 만들어 주시겠다는 거예요. 정금같이 나를 단련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고난이 어려움이 하나님과 나를 이어지는 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우리와 주님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나요? 75세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몇 년 걸렸어요? 25년 걸렸습니다. 그러면 25년 동안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습니까? 환난과 곤고와 핍박이 그에게 들이닥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라고 믿었습니다. 이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합니까?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 기도하면서 낙심했어요? 그러지 마세요. 이런 것은 마귀가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사랑을 끊으려는 시도입니다. 낙심했던 분 있어요? 고난가운데 있었던 분 있습니까? 정금같이 서는 귀한 성도 되길 원합니다. 나중에 주님은 병든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한대로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을 실현하셨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을 보면 왜 하나님은 골리앗이라는 엄청난 대적을 안겨 주실까요? 비슷한 것 물리치고 조그만한 영웅 되라는 것이 아니라 큰 영웅을 만드시기 위해서 그러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면 그것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더 성숙시키시고 더 크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으면 거룩한 미소를 보여야 합니다.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회심의 미소가 있어야 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내 미래에 얼마나 큰 영광을 주시려고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 여유와 배짱 이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인해서 그로 인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만의 믿음을 강화시킨 것이 아니라 나사로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어요. 오늘 말씀 뒤에 나옵니다. 요한 복음 11장 14-15절에 말씀하잖아요.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믿음을 심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믿음이 굳건해 지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이 굳건해 지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음이 굳건해 졌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우리를 강한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 있어요. 믿음이 약한 자가 그것을 바라보면 믿음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일로 인해서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파급효과가 생겼습니다. 요 11:45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나사로의 죽음과 그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믿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고난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면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나의 고난, 나의 이 어려움까지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길 원합니다." 성도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성도는 넘어져도 은혜요 일어서도 은혜요 전진해도 은혜요 후퇴해도 은혜다"라는 말씀에 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다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쓰레기통이 없다고 그러잖아요. 말씀으로 나감(Go with the Word) 우리 삶 가운데 그렇게 부르짖어도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은 막막함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면 그 안에 숨은 뜻이 펼쳐집니다. 내가 별것도 아닌 일을 주님을 위해서 감당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숨은 뜻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은 롬 8:28입니다. 다 찾아서 읽어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습니다. 이런 고백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자세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합력하여 선을 이룹시다." 한가지만 더 말씀합니다. 아틀란타에 가면 코카콜라 본부가 있는데요. 저는 아틀란타 에모리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면 이곳에 꼭 구경을 시켜줍니다. 그래서 이곳에 참 많이 갔습니다. 예수가 안 전해진 공산국가, 아무리 오지 아프리카라고 하더라도 이 코카콜라는 다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이 회사 사장은 모든 생활과 정열이 이 코카콜라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코카콜라 판매에 미쳐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코카콜라에 정신이 빠졌는지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코카콜라만 생각하고 코카콜라만 말했다고 합니다. 기자한테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내 혈관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습니다."' 완전히 코카콜라에 미쳐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코카콜라의 아성을 무너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가면 어떤 도시가 나오는데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코카콜라를 좋아하냐면 밥에 코카콜라를 부어서 마시더랍니다. 이게 누구 때문인지 아세요. 바로 그 사장이 만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 안에 무엇이 흐릅니까? 아니 무엇이 흘러야 합니까? 바로 주의 심장을 소유해야 하고 주의 십자가의 보혈이 흘러야 합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해야합니다. 주님, 내 심장을 주의 보혈로 흐르게 하옵소서. 주님 나의 삶에 어떤 일이라도 주님이 사용하여 주옵소서. 심지어 고난까지도, 나의 이 부족함까지도 주님의 일이라면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쓰레기통이 없는 줄 믿습니다. 주여 믿음 주옵소서. 우리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Año nuevo, Ropero nuevo!(New year, new Clothes!, 새해에 새 옷을!)/ Juan 19:23-24(요19:23-24)/ Alejandra Borda/ 신년축복주일설교/ 2013-01-03
!Año nuevo, Ropero nuevo! Juan 19:23-24 Juan 19:23-24 “Cuando los soldados hubieron crucificado a Jesús, tomaron sus vestidos e hicieron cuatro partes, una para cada soldado. Tomaron también su túnica la cual era sin costura, de un solo tejido de arriba abajo” Esta es una cita bíblica que nos refiere que Jesús usaba vestiduras sin costura, sus vestiduras eran “perfectas”. A través de esta palabra podrás discernir que vestiduras perfectas como las de Cristo, debes usar; y aquellas que están imperfectas, te llevará a desechar. Para poder recibir esta palabra en tu vida, es necesario que antes examines tu ropero espiritual para que este sea renovado y transformado y para esto necesitas tener una actitud de cambio. Cuando finaliza y comienza un año nuevo, cada persona tiene una forma diferente de actuar con su ropero, clóset o armario. Según como actuamos frente al arreglo de nuestro armario, actuamos en nuestra vida espiritual. El estado de tu clóset, es el reflejo de tu relación con Dios. Partiendo de este punto, las personas se pueden catalogar o dividir en tres grupos diferentes: Cuando se termina un año e inicia uno nuevo encontramos: Los que no hacen nada; tienen el clóset que se revienta pero no sacan nada, cada vez que se tropiezan con algo que ya no usan, siempre existe una excusa: Me lo pondré cuando pierda unos kilitos, lo usare en una ocasión especial, cuando compre el pantalón que le combine, siempre tienen una excusa para recibir los cambios. Estas personas nunca cambian, siempre los vemos lo mismo que antes. El segundo grupo de personas son las que esperan que el año pase para ver que le dieron, que se pudo comprar, que le regalaron, cuanto van a bajar de peso; y de esta forma, conforme lo que reciban, descartan. Este tipo de personas por lo general los cambios se les convierten en crisis, cuando necesitan verse diferente, es un problema, por que Ninguna cosa les gusta y todo esta mal. Y el tercer grupo, son todos aquellos que antes de que termine el año sacan todo lo que no usan, lo que no les sirve, lo que ya no les queda y el armario queda casi vacío y simple mente quedan en espera muchas veces por fe, de todo lo que le han pedido al Señor. Este grupo de personas son triunfadores, en sus manos esta la victoria, porque antes de venir los cambios, ellos están preparados y dispuestos para ellos. Que significado tendrá el vestido: A los reyes se les reconoce por sus vestidos, a los militares, a los niños de determinado colegio, a José se les distinguía por la túnica de colores... El vestido de una persona nos dice dos cosas: Qué es?. Y Quién es?. Hoy vamos a ver que para vernos como hijos de Dios que somos, nos es necesario cambiar el ropero, renovarlo, buscar que nuestros trajes sean sin costura, sin defecto y colocarnos algunos trajes que en ocasiones se nos olvida que debemos llevar limpios todos los días. Por lo general usamos dos tipos de ropa, la ropa interior y la ropa exterior, en la vida espiritual sucede lo mismo. COMENCEMOS POR LA ROPA INTERIOR. Esta es la que te dice Que eres. En nuestra vida espiritual hay tres tipos de ropa interior y cada vez que Ud. se este vistiendo, recuerde siempre ponerse esta tipo de vestido. Veamos cuales son: 1. EL VESTIDO DE LA SALVACIÓN, Génesis 3:21 Desde el mismo día en que el hombre peco y genero perdida de su vida eterna, Dios fue el primero que los vistió, ellos intentaron taparse, pero Dios los vistió. El anticipo y anuncio nuestra salvación. Por que? Por que para que fuésemos salvos, era necesario un sacrificio y a este capitulo la palabra no nos había hablado de sacrificios por no haber pecados, pero Dios es quien ofrece el primer sacrificio mata un animal y con su piel, hace vestiduras para cubrir al hombre. El hombre se sentía desnudo y así estaría recordando siempre que era un pecador. Más Dios lo cubre con pieles y le dice “Tienes otra oportunidad, más difícil pero te ofrezco una nueva oportunidad”. 2 Corintios 5:2 Por que dirá la palabra: revestido? por que desafortunadamente hay cristianos que tienen por costumbre quitarse en la noche esta ropa interior de la salvación y al día siguiente se le olvida colocársela de nuevo. Nosotros no podemos andar sin salvación por que si Dios viene para donde nos vamos? Por esto no podemos colocarnos el resto de al ropa sin habernos vestido de salvación- 2. EL VESTIDO DE TESTIMONIO, Colosenses 3:9-10 Iglesia, Yo creo que ninguno se deja los mismos interiores por mas de un día, de la misma manera como uno a diario se cambia los interiores, a diario esta vestidura se debe cambiar y renovar. Día a día hay que despojarnos de esa imagen sucia, contaminada, de pecado y clocarnos una nueva que huela a testimonio como dice su palabra, que se vea en nosotros la imagen de cristo. El verso 10 b significa que la nueva vida, cada día que pasa, logre ejercer dominio total sobre nuestra condición de pecadores, sobre nuestra conducta moral. 3. VESTIDO DE LA IDENTIDAD, Gálatas 3:27 Bautismo viene de la palabra “baptista”, y significa un proceso de inmersión, sumersión y emersión. Pero la expresión es “bautizados”, vienen de “baptizo” que significa bautizar. Esta palabra griega era usada cuando se tenia una tela sumergiéndola en una tinaja pequeña y luego esta en una mas grande. Cuando la prenda era teñida, perdía la identidad anterior y recibía una nueva. Espiritualmente, asumimos querer dar un testimonio, asumimos identificarnos con Cristo. No nos podemos levantar y decir, no voy a ser santo, hoy no quiero que me identifique que voy a una Iglesia, hoy no quiero ser espiritual. No se puede por que sencillamente llevamos su marca. Ahora mire esto, si Ud. va a comprar ropa interior encuentra de todas las marcas y valores pero lo que si se, es que la mas fina cuesta mucho. Iglesia su vestidura interior (Santidad, Testimonio e Identidad) costo mucho, el Padre pagó un precio muy alto, su Hijo. Apreciemos este regalo maravilloso que Dios nos ha entregado. No podemos seguir quitándonos y poniéndonos a nuestro antojo por que nos pertenece. AHORA HABLEMOS DE LA ROPA EXTERIOR La que dice Quién eres, la que habla de nuestra imagen. Podríamos hablar de oración, comunión, servicio, ministerios... pero vamos a centrarnos en 5 vestidos que es necesario que elimines de tu ropero para que luzcas diferente, renovado, siempre en victoria. 1. VESTIDURAS DE DERROTA, Gen 27:15 Todos conocemos la historia de estos dos hombres, Las vestiduras de Esau fueron puestas a Jacob, pero eran de derrota. Por que?. Gen 25:27-34 Por que Esau fue quien vendió su progenitura su derecho de ser bendecido, su derecho de ser el mas prospero, su derecho de ser el generador de bendiciones, simplemente por que llego cansado y prefirió un plato de lentejas. Como Esaú pensó que moriría debido a su enorme cansancio, dejo de sonar, dejo de tener esperanzas. Como hijos de Dios tenemos la certeza de que muchas promesas faltan por venir y por esto hoy no nos rendimos y en cambio, nos despojamos de todo vestido de derrota. 2. VESTIDURAS DE LEPRA, Levítico 13:47-52 El vestido de la lepra es el vestido del pecado. La palabra nos dice que debía ser encerrado durante 7 días. Esto significa Oportunidad en Cristo. Por pecadores que hayamos sido, tenemos la posibilidad de ser restaurados, depende solo de nosotros. No importa el pecado, no importa el portador del pecado, por esto nos habla de vestidos de lino, de lana, de cuero. Pero siempre es necesario despojarnos del vestido de pecado. Dice que si hubiere lepra este será quemado. La lepra se posaba sobre las ranuras, las costuras, los dobleces; por esto es necesario mirarnos a diario al espejo espiritual para buscar en esos rincones ocultos donde nuestros ojos de hombres no alcanzan a ver para erradicar toda vestidura de lepra, de pecado de nuestras vidas. 3. VESTIDURAS DE ENGAÑO, Josué 9:3-6, 16-21, 23 Las vestiduras de engaño producen esclavitud. Una persona que vive engañando y mintiendo para justificarse, es una persona que siempre va a estar por debajo de los demás, así aparentemente tenga posiciones altas, es una persona que va a estar ubicando bajos lugares, bajos posiciones en todas las áreas de su vida. Son personas que tienen complejos de debilidad y otro tipo y se defienden con la mentira y el engaño como este pueblo. Estos hombres por mentirosos fueron confinados a ser leñadores y aguateros. Ellos no mintieron por querer, ni por costumbre, ni por placer, sencillamente por temor y las mentiras por temor generan consecuencias mas graves por que a la final, nada queda oculto y terminan siendo desnudados. Es tiempo de despojarnos de las vestiduras de la mentira y el engaño para estar en el lugar que Dios nos tiene preparado, para estar por cabeza y no por cola. 4. VESTIDURAS DE LA VERGÜENZA, O DE LA PENA, 2 Samuel 10:4 Al leer esta historia pareciese que Hanún era un hombre perverso y desconfiado. No creyó que los siervos de David le fueran a honrar y estos hombres perdieron su credibilidad. Hanún se burló de ellos, los ridiculizo, los dejo con media barba y aparte de todo les corta las túnicas al nivel de las nalgas, como en las películas. Pero saben, lo que mas me impacto de éstas palabras, es que cuando van donde David, el los resguarda, los manda a casa mientras su barba crece de nuevo, para que se vistan y les dice: “Volved”. Los hijos de Amón al ver que David no hizo nada, decidieron atacarlo pero David se dividió en dos grupos de batalla y fueron contra Amón y los sirios y estos salieron huyendo. V11,14 Cuando tú decides despojarte de las vestiduras de la vergüenza y la pena, por más que hayas tenido o no culpa en ello, Dios te va a respaldar. Iglesia, es de valientes reconocer los errores y pedir perdón, y aunque nos hayan cortado las túnicas hasta las nalgas, Dios nos va a guardar y a respaldar. 5. VESTIDURAS DE RUINA, Job 13:28 Este es el ultimo verso del capitulo 13. Job se sentía carcomido, desecho, desleído. Y estas palabras las dijo luego de que se quejase y defendiera su integridad ante Dios. Luego de estar viendo lo mentirosos y todos los defectos de sus amigos, luego de estar preguntándole a Dios por que tuvo que vivir ese trato, por que no vino el mismo trato para sus amigos que si hacían lo malo y murmuraban y renegaban en verdad. Algunos dicen: Dios porque yo no nací con mejor casa, con mejor carro.. Iglesia, hasta que no dejes de ver lo que no tienes, no podrás ver lo que posees y habrás de poseer. El mirar lo que nos falta nos trae ruina, El esperar en cristo te trae abundancia. Pablo decía: “Para mi, el vivir es Cristo y el morir es ganancia. Hasta tanto no te despojes del vestido de la ruina, no podrás vestir el vestido de la fe y la victoria que es en Cristo Jesús. CONCLUSIÓN: Si aprendemos a revestir y vestir apropiadamente nuestro espíritu, llegaremos con honores ante la presencia de Dios Padre para vestir aquellas que nos identificaran como la esposa el Cordero Inmolado. Apocalipsis 19:8 “Y a ella se le han concedido que se vista de lino fino, limpio y resplandeciente; por que el lino fino es las acciones justas de los santos” Contacte al Autor: alejandraborda [arroba] gmail.com Ministerio: CFA Norte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 막4:24-25/ 김성광 목사/ 신년축복주일설교/ 2009-01-03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 막4:24-25 설교 개요 A. 믿음과 축복에 대하여 1. 믿음과 축복 2. 본문 배경 설명(막4:24-25) B.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 1. 기도 시간에 ‘0’을 더하는 믿음 -기도 1분→10분, 10분→100분/ 응답(마7:7-8) 2. 헌금에 ‘0’을 더하는 믿음 - 헌금 10만 원→100만 원, 100만 원→1,000만 원/ 풍성한 축복(고후9:6-7) 3. 전도한 사람의 숫자에 ‘0’을 더하는 믿음 - 전도 1명→10명, 10명 →100명/ 건강(딤후4:2) 4. 봉사와 충성에 ‘0’을 더하는 믿음 - 봉사, 충성 3분→30분, 5분→50분, 10분→100분/ 기쁨(벧전4:10) C. ‘0’을 더하는 믿음으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자 A. 믿음과 축복에 대하여 1. 믿음과 축복 오늘은 마가복음 4장 24-25절의 말씀으로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제목이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축복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축복의 근원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작은 믿음도 있고, 큰 믿음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믿음을 통해서 크게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어떤 가난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예배도 잘 드리고, 또한 새벽 기도까지 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도 뭔가 좀 하게 하옵소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거지처럼 살지 말고, 나도 정착해서 보람된, 안정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다가 마음속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지. 나도 뭔가 해야 돼!’ 그래서 콩나물을 도매로 싸게 받아서 아파트 입구에 앉아서 콩나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을 받아와서 콩나물 장사를 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돈이 모여서 몇 년이 되자 조그만 가게를 하나 얻을 수 있게 되었고, 또 가게를 얻어서 열심히 장사하니까 나중에는 두부 공장까지 차리게 됐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부 공장을 차려서 사장이 됐으니 이제는 인생이 살맛 나고 신났습니다. 그런데 두부 공장을 운영하니까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콩나물 장사할 때는 시간이 남아서 예배에 참석하고, 새벽 기도까지 나갔는데, 이제는 두부 공장 사장이 되니까 바빠서 새벽 기도도 못 나옵니다. 수요일도 못 가고, 금요일도 못 가고, 겨우겨우 주일만 한 번씩 교회에 가는 신앙이 됐습니다. 그는 사업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두부 공장, 두부 공장, 돈을 벌어야 돼. 사업 해야 돼.’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기꾼에게 걸리고, 운영이 잘 안 되자 사업에만 정신이 빼앗겨서 결국 신앙도 잃어버리고, 두부 공장도 부도로 날아가고, 장만했던 집도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는 알거지가 됐습니다. 또 다시 거지가 됐습니다. 그는 자기 과거를 생각했습니다. ‘아! 그때 새벽 기도 다니면서 콩나물 장사 할 때가 행복했구나. 나는 이것저것 다 잃어버렸구나.’ 여러분, 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돈, 돈 하면서 돈 따라갔다가 돈도 잃어버리고, 신앙도 잃어버리고, 인생도 헛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돈 버는 것도 좋고, 출세하는 것도 좋고, 성공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우선적으로 이 모든 것은 믿음에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바탕이 있어야 물질도, 돈도, 명예도, 세상의 좋은 조건도 오래 지속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큰 자산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산도 있고, 눈에 안 보이는 자산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안 보이는 자산 중에서도 가장 큰 자산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면 큰일을 할 수 있고, 믿음이 작으면 작은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창조적인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시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믿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온전한 믿음을 가져서,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 축복받고, 형통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막4:24-25)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 마가복음 4장 24-25절에는 예수께서 그릇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헤아린다’는 것은 ‘그릇’을 말합니다. 큰 그릇에는 크게, 많이 담을 수 있지만, 작은 그릇으로는 적게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그릇으로 표현했습니다. 믿음은 바로 그릇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나 사랑이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크기의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큰 사람은 크게 역사하지만 작은 사람은 작게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큰 사람은 ‘아멘’이 많습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은 ‘아멘’도 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어떤 믿음을 가져야 됩니까? 오늘 봉독한 말씀의 제목처럼 ‘0’을 하나 더 더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1이라면 10개의 믿음을 갖고, 믿음이 2라면 20개의 믿음을 갖고, 믿음이 3이라면 거기다 ‘0’을 붙여서 30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0’을 덧붙여서 10배의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거기에 따른 축복도, 은총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일은 많이 해야 되고, 나쁜 일은 안 해야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의 공부하는 시간, 사업하는 사람의 사업에 대한 열정, 신앙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 이것은 많을수록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것, 또한 전도하는 것, 충성, 봉사하는 것, 여기에도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을 저는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 시간에 ‘0’을 더하라. 둘째,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 예물 드리는 믿음에 ‘0’을 하나 더 더하라. 셋째, 전도할 때 전도하는 사람 숫자에 ‘0’을 하나 더 더하라. 넷째, 봉사와 충성에도 ‘0’을 더 더하라. ‘0’을 더할 것이냐, ‘0’을 뺄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0’을 더하는 사람에게는 축복도 더해지지만, ‘0’을 빼는 사람에게는 축복도, 은총도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B.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 1. 기도 시간에 ‘0’을 더하는 믿음 - 기도 1분→10분, 10분→100분/ 응답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기도는 조건적입니다. 아무에게나 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찾게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닙니다. 구하는 사람, 찾는 사람, 문을 두드리는 그 사람에게 찾아지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고, 얻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9-11절 말씀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 조건적으로, 구하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구할 때 끈기 있게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 기도로 하나님 앞에 구합니다. 한밤중에 주님 앞에 철야 하면서 기도합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응답 주실 때까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의 그 기도를 통해서 응답하고 역사하여 주십니다. 사무엘상 1장 말씀을 보면,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장 12절 말씀을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서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기도도 시간에 따라 다릅니다. 잠깐 기도하는 것하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 그 기도의 차이는 다릅니다. 기도 시간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정성,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삶의 질과 삶의 양이 달라지게 됩니다. 1분 기도하는 사람과 10분 기도하는 사람, 3분 기도하는 사람과 30분 기도하는 사람, 5분 기도하는 사람과 50분 기도하는 사람, 6분 기도하는 사람과 60분 기도하는 사람은 삶의 질과 양이 다릅니다. 과거에는 기도 시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무관심했더라도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과 기도 시간의 연관성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 24시간 동안에 몇 시간, 몇 분을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는 뭔가 다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어떤 능력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시50:15). 기도하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진리 가운데 삽니다(시119:18). 생활의 변화가 나타납니다(시121:1-2; 34:4). 기도를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사40:31).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요16:24, 빌4:6-7). 기도하는 사람은 순종을 잘합니다(행4:29). 기도를 하면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가 있고(엡6:12, 벧전5:8),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기도를 통해서 기적이 나타납니다(약5:16, 행12:5-10, 행16:25).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얼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걱정과 근심과 불안, 두려움,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벌써 자신감이 넘치고, 그 얼굴에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언니 되는 사람이 갑자기 동생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데 오후에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심각한 수술을 받게 됐는데 살아날 가능성은 10%도 아니고,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이기 때문에 수술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언니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 이제 동생이 세상을 떠나는가 보다. 동생을 잃는가 보다.’ 그는 그 전화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을 기도했습니다. 60분을 기도했습니다. 2시간, 3시간, 3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동생의 생명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내 동생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3시간 기도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확신이 생겼습니다. 기도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하고, 기도는 응답이 왔다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해야 합니다. 3시간 동안 기도하자 그는 마음에 평강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아, 내 동생이 떠나는구나. 내 동생이 결국 수술 받고 잘못 돼서 세상을 떠나는구나. 아니야,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내 동생을 살려줬을 거다.’ 하는 생각이 번득 떠오르면서 ‘내 동생을 살려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과연 그 전화는 사망 전보가 아니라 여동생의 상태가 호전되어서 언니를 만나고 싶으니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전갈이었습니다. 즉시로 3시간 동안 동생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2시간, 3시간, 몇 시간씩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 병들었을 때, 또는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와 기도원, 내가 속한 모든 곳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는 응답받을 때까지, 확신이 생길 때까지 해야 하나님께서 응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시간에 ‘0’을 하나 더 더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멘’ 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겁니다. 그러나 ‘아멘’ 못하는 사람은 둘째 단계로 넘어갑시다. 2. 헌금에 ‘0’을 더하는 믿음 - 헌금 10만원→100만원, 100만원→1,000만원/ 풍성한 축복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할 것이요 인색(吝嗇)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하나님은 기쁘게, 자원해서, 감사함으로 드리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A.D. 55년경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고통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기근과 핍박으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가 여유가 있으니까 예루살렘 성도들을 좀 도와주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많이 주신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성경을 통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은 목사님들이 만든 말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에 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근거와 배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물질 드리고, 예물 드리는 것이 마치 농사짓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지을 때 씨를 심는 것과 비유했습니다. 농부가 종자 씨를 심을 때 그것을 다 먹어 치우지 아니하고, 밭에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수확을 얻습니다. 옥수수를 심고, 벼를 심어서 열매 맺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종자 씨를 다 먹어 버리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자기가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열심히, 많이 심으면 종자 씨도 살아남을 것이요, 또한 그 다음에 심을 많은 씨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농사의 법칙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통해서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물질적인 관계는 농사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농부가 농사짓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시편 126편 5절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씨를 뿌릴 때는 눈물을 흘린다 할지라도, 울어가면서라도 씨를 뿌리면 나중에는 기쁨으로 열매를 거둡니다. 울 일 있다고 해서, 눈물 흘린다고 해서 씨 뿌리는 것을 포기하면 영원히 포기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씨를 뿌리면 나중에 기쁨과 즐거움과 축복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크게 경영하는 교포가 있었습니다. 대개 교포들이 음식점, 식당 사업을 하면서 세금들을 제대로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로부터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이 먹으면 정부 돈(social security)을 받습니다. 이런 불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 한국 사람들이 미국 비자 얻기가 참 힘듭니다. 이 사람도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세금을 정당하게 내지 않고 조금 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돈을 버는 대로 전부 다 가게 벽에다가 금고를 만들어서 그 속에다 숨겼습니다. 돈을 벌면 저녁에 벽 속에 감추고, 감추고 한 것이 한 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3년쯤 지나서 ‘아, 이제는 몇 십만 달러쯤 됐겠구나.’하고 그가 돈을 계산하려고 그 벽을 뜯었더니 돈이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전부 종이조각, 전부 조각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 알고 보니 음식 장사가 음식 하면서 돈을 만지니까 그 돈에 음식 냄새가 배어서 쥐들이 전부 갉아먹고 수십만 달러가 전부 먼지 조각, 종이 조각이 된 것입니다. 세금도 내지 않고, 은행 갖다 주면 적발되니까 은행도 갖다 주지 않고, 숨겨 둔 돈,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모은 돈이 먼지가 되고 조각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어리석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6장 19-20절 말씀을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들은 은행에 놓아 두든, 적금을 들든 여러분이 어떠한 방법으로 돈을 쌓았든지 간에 도둑질 당합니다. 이 사람이 가져가고, 저 사람이 가져가고, 가족, 형제, 친척들이 가져가고, 사업해서 망하고, 돈 꿔 주었다 망하고, 이리저리 다 없어집니다. 이 세상에다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다가 재물을 쌓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쓸 것을 넘치게 채워 주십니다. 여러분, 돈과 물질은 쓰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쌓아 놓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 써야 됩니다. 들어올 때는 들어오고 나갈 때는 나가야 되는데, 욕심과 탐욕으로 말세에 돈을 세상에 쌓아 놓은 사람들은 교만해집니다. 불신앙에 빠집니다. 마귀의 시험에 들어갑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들어온 것만큼 다 없어집니다. 재물이 독수리의 날개 치며 나는 것 같이 날아갈 것입니다(잠23:5). 재벌들의 돈도 없어집니다. 회사 사장, 회장들의 돈도 없어집니다. 이 세상의 돈은 왔다 가고, 없어지고, 사라지고, 돌고 도는 것이 돈입니다. 여러분, 돈에 너무 미련 갖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물질로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부산의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계시는데, 이 장로님은 조그마한 개인 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장로님은 개인 병원의 의사였지만, 자기 병원보다 교회를 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화가 없다고 하면 자기 병원에 있는 전화기를 떼어 주고, 선풍기가 없다고 하면 교회에 선풍기를 달아 주었습니다. 하여튼 교회에서 뭐가 조금만 필요하다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를 위해서 아주 충성하는 그런 장로님이었습니다. 얼마 후 병원이 잘 돼서 이제 그 병원을 확장하려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더 크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장로님은 ‘하나님의 집이 먼저지, 병원이 먼저냐?’ 하며 주저하지 않고 병원을 확장하려던 돈을 교회에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러고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그 부산 온 지역에 장티푸스,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장티푸스, 전염병이 도니까 사람들이 전부 병원에 왔습니다. 너무너무 환자들이 많아서 옆에 있는 학교 강당을 빌려 이 사람, 저 사람, 사람들을 다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돈이 쌓이고 물질이 쌓였습니다. 이 장로님은 엄청난 돈을 저축하게 되어, 이제는 병원을 확장하려던 계획을 아예 취소하고 종합 병원을 지었습니다. 크게 종합 병원을 지어서 그 종합 병원 원장이 됐습니다. 조그만 개인 병원 원장에서 종합 병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더 풍족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작은 부자는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 있지만, 큰 부자는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심을 통해서, 은총 베풀어주심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물을 생각할 때,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퍼내는 것과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부어 주시는 축복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말3:10).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릴 때 ‘0’을 뺄 것인가, ‘0’을 더할 것인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0만 원 드릴 사람이 100만 원 드리고, 20만 원 드릴 사람이 200만 원 드리고, 하나님 앞에 물질을 더 드려서 하늘나라 은행에 적금하고,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10%, 20%, 30% 이자가 아니라 30배, 60배, 100배로 채워 주시고, 여러분의 가정을 풍족하게 하시고, 사업을 크게 번창시키시고, 여러분을 통해서 물질 축복의 영광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 중에서 크게 재물의 축복을 받는 분이 많이 나오시기를 축원합니다. 3. 전도한 사람의 숫자에 ‘0’을 더하는 믿음 - 전도 1명 →10명, 10명 →100명/ 건강 “너는 말씀을 전파(傳播)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警責)하며 경계(警戒)하며 권(勸)하라”(딤후4:2)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도하지 못한 것이 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전도를 해야 됩니다. 본문에서 전도에 대한 단어는 무엇입니까? ‘전파하라’입니다. 이 ‘전파하라’는 본래 헬라어 성경에 ‘케륏손,’ ‘공포를 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말씀을 공포를 하라.’는 명령적인 단어로 씌어 있습니다. 또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를 보지 말고 항상 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고, 잘못 믿는 사람을 올바로 믿게 하는 그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1명 전도하던 사람에게 ‘0’이 붙으면 10명 전도하고, 1명을 가르치던 사람이 10명을 가르치고, 10명을 가르치던 사람이 100명을 가르치고, 5명을 전도할 사람이 50명을 전도하고, 50명 가르칠 사람 500명 가르치고, 전도의 숫자에도 ‘0’을 하나 더 더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할 때 도와주시고 역사하십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말씀에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福音)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 화가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대개 보면, 전도하지 않아서 화 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늘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특별한 병명도 아니고, 병원 가서 낫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전도하지 않아서 건강을 잃어버리고, 지위를 잃어버리고, 전도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빼앗기고 떠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도를 해야 전도하지 않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 말씀에도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康健)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傳道)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전도하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건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육체를 건강하게 하십니다. 정신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시험과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기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왜 인생에 기쁨이 없습니까?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보람도 없습니다. 의미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자는 멸망치 않습니다. 저는 풍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씨를 뿌려야 거두는 재미도 있지, 심는 것도 없고 거두는 것도 없고 매일 남 뿌리고 거두는 것만 구경하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여러분, 전도에 구경꾼이 되지 마시고, 전도하는, 씨 뿌리는, 전도의 일꾼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도 보면 전도 열심히 하는 교회가 크게 부흥합니다. 회사도 전도하는 회사가 크게 부흥하고 발전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타락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게을러집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교만해집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동대문에서 30년 동안 장사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교회는 왔다 갔다 하나 별로 남에 대한 관심도 없고 전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돈 버는 재미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30년 동안 돈을 벌어서, 젊은 나이에 시작했으나 이제는 머리가 허옇게 되고 60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출근하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예수님 믿으세요.” 하며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그 전도하는 사람을 만나자 그는 마음에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 ‘나는 돈만 벌려고 한평생, 젊었을 때부터 이렇게 백발이 되도록 ‘돈, 돈’하고 살았는데, 저 젊은이는 전도를 하다니…. 전도를 하는구나. 나한테 전도를 했어.’ 그러면서 그는 자기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어서 어디다 쓸 것인가? 쓰지도 못하고 죽을 돈을 왜 이렇게 계속해서 벌고 또 버는 건가? 내 인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돈이라는 것은 벌고 써야지 쓰지도 못할 돈 자꾸 쌓아 놓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들, 딸한테 물려준다고 해서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돈 때문에 방탕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까? 이웃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얼마든지 쓸 곳이 많은데, 오늘날은 돈 벌어서 자꾸 쌓아 두는 것만이, 그것만이 좋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때 생각했습니다. “나도 이제는 좋은 일 좀 해야지. 삶에 대한 보람을 느껴야 해.” 그렇게 생각한 후부터 그는 물건을 팔면서 물건 속에다 전도지를 한 장씩, 한 장씩 넣어 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제는 전도가 삶의 목적이고, 장사는 부업입니다.” 그 전에는 돈 버는 것이 전문이고 교회 나가는 것이 부업이었는데, 그가 인생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는 이제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고 장사하는 것은 부업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하는 사람은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고 삶의 목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지 않고 돈, 돈, 돈 하면서 세상 쾌락, 세상 죄악, 세상으로 흘러가는 사람은 결국 그 세상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지 못하고,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전도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 사장님이 교회에 10년 동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목사님이 전도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내가 교회 나오는 것이 좋고 하나님 믿는 것이 좋다면, 왜 좋은 것을 나 혼자만 믿는가? 진정으로 내게 도움이 되고 좋으면 남에게도 권해야지. 음식 먹고 맛있으면 그 음식 먹어보라고 하고, 내가 좋은 건 좋다고, 다른 것은 다 말하면서 왜 교회 나오는 것, 예수 믿는 것, 하나님 믿는 것은 왜 남에게 전하지 못하는가? 나도 전도해야 되겠다.’ 그래서 교회 나온 지 10년 만에 그는 전도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사무실에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나도 이제는 전도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사무실에 먼저 들어오는 사람에게 전도하겠습니다.’하고 기도하고 결정을 했는데, 마침 직원이 결재 서류를 가지고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왔습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리 오게. 잠깐 할말이 있네. 자네 교회 다니나?” 직원이 깜짝 놀랐습니다. “사장님, 웬일로 교회 다니냐고 물어보십니까? 결재해 주십시오.” “아니야, 결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네. 내가 10년 동안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도 한 번도 자네에게 전도를 하지 않았지? 내가 이제부터 자네에게 전도를 해야겠어. 교회 나가세.” 그랬더니 이 직원이 “사장님 고맙습니다. 저는 사장님이 10년 동안 교회 나가는 것 알고 있었 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좋아서 나가는지 나빠서 나가는지 그걸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데 가면 나보고 한 번도 같이 가자는 소리를 안 하는가? 아마 사장님은 나 같은 사람은 상대도 안 하는가 봐. 아마 교회는 나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나 봐.’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사장님이 나보고 교회 가자고 그러니까 같이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사장님과 꼭 같이 가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여러분, 의외로 전도하고자 하면 쉽게 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좀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부인이 좀 같이 가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부모가 좀 같이 가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전도하지 않으니까 옆에서 구경만 하고 방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가족 중에서, 또는 형제, 이웃, 친척, 친구 중에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할 때, 전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전도하는 자에게 물질을 주시고, 전도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시고, 전도하는 자에게 삶의 보람을 느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전도하시는 전도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봉사와 충성에 ‘0’을 더하는 믿음 - 봉사, 충성 3분→30분, 5분→50분, 10분→100분/ 기쁨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恩惠)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은사를 받은 대로, 은혜를 받은 대로, 하나님 앞에 사랑과 축복을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청지기’라는 말 많이 들으셨지요? ‘청지기’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인데, 그 뜻은 ‘가정 관리자, 가정의 살림을 맡은 종’을 말합니다. 청지기는 가정 살림을 맡은 종입니다. 주인이 바쁘고 할 일이 많으니까 집안 살림을 다 맡아 하는 종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임된 사람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사를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것에 종으로서 충성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종은 자기의 소유가 없습니다. 다 주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잘만 하면 주인이 상도, 보상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분도 주시고 은사도 주십니다.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구제하는 것, 다스리는 것, 긍휼을 베푸는 은사를 직분을 위해 주셨고, 또한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분도 주시고 이 모든 은사도 주셨습니다. 이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집사, 장로, 권사, 구역장, 조장 이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 직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청지기 직분입니다. 장관도, 국회의원도 청지기 직분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직업이 다 하나님 앞에 청지기 직분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판사, 검사도 다 청지기입니다. 회사 사장들도 다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하늘과 땅,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늘과 땅을 다 창조하신 하나님께 속하였고, 이 모든 직분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인생을 깨달아야, 겸손한 인생을 살고 하나님 앞에 은총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축복받고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잠언 28장 20절에 충성된 자는 복이 많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은총과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께서 달란트 비유를 설명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있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감췄다가 가져와서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책망 받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네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 달란트를 만들어가지고 주인에게 왔을 때 주인이 칭찬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3절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주인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늘도 땅도 세상 만물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창조된 모든 것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인정 해야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말씀에도 “…죽도록 충성(忠誠)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는 사람은 어떻게 충성해야 합니까? 목숨 걸고 충성하는 겁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놀아 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눈치 봐 가면서, 한눈팔면서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죽도록, 목숨 걸어 놓고 충성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봉사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봉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행복이 주어집니다. 보람과 기쁨이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보람과 기쁨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3분 봉사하는 사람은 30분 봉사하고, 5분 봉사, 충성하는 사람은 50분 봉사하고, 10분 봉사하는 사람은 100분 봉사하여 봉사하는 시간을 늘리고 봉사하는 질을 높여서 하나님께 봉사해야 합니다. 장로, 권사, 집사, 조장, 구역장, 선교회, 성가대, 교회학교로 봉사해야 합니다. 예배만 보고 훌쩍 가는 것은 진정한 봉사·충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초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도 봉사하게 하옵소서. 충성하게 하옵소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교인 되지 말게 하시고, 무언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봉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채문경 교수라는 분이 간증을 했습니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가서 풍금으로 반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훌륭한 반주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피아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에서 반주하기 시작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반주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반주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그는 학교 공부보다 교회 반주를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피아노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과에 입학하고 나서도 성가대 반주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독일 베를린 음대 성악과 교수가 내한했다가 반주자가 필요해서 누가 반주를 잘하는지 수소문했는데, 이 채문경 학생이 반주자로 채택이 됐습니다. 반주를 하고 나니까 그 독일 대학 교수가 유학을 제안했습니다. “반주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독일로 유학 가고 싶으냐?” “네, 가고 싶어요.” 그래서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독일로 유학 가서 오르간을 공부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 초대 오르간 연주자로 초빙 받아서 상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국제 초청 오르간 연주를 하였고, 국제 콩쿠르 심사 위원이 되었습니다. 대학 교수가 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릴 때 교회에서 풍금, 피아노 만지면서 ‘하나님, 이 반주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며, ‘반주, 반주, 반주’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국가의 행사에도, 또 국제적인 콩쿠르에도 관여하게 하시고,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축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봉사를 할 것인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할 것인가? 비록 적은 일이라 할지라도 충성하면 큰 것 주시고, 큰 것까지 충성하면 더 큰 것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C. ‘0’을 더하는 믿음으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자 믿음에 ‘0’을 더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 설교 제목에 은혜가 됩니까? 믿음이 생깁니까? 올 한 해 그렇게 살아 보시겠습니까? 가난과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은 믿음으로 겨우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큰 믿음을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왕 가지고 나오려면 큰 것, 큰 그릇을 가지고 나와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도 많이 담지, 매일 손바닥만 가지고 나오니 뭐 담길 게 있습니까? 손바닥 내밀어봐야 비가 요리 떨어지고 조리 떨어지고 남는 게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받으려면 그릇이 커야 되는 것처럼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못을 파면 연못 물이 출렁거리고, 댐을 파면 댐 물이 출렁거립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데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믿음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0’을 더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부자 되고 물질 축복 받으십시오. 기도해서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 전도 많이 해서 많은 사람 앞에 존경과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 앞에 봉사·충성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만 봉사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동창회에서도, 사회에서도, 또한 교회에서도 봉사·충성 많이 할 때, 충성하는 것만큼 하나님께서 은총과 축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전라북도 어느 교회에 열심 있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늘 하나님께 충성하고, 더 많은 것으로 헌금할 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한번은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목표액을 정하고, 전 교인이 작정 헌금을 하기로 하고, 먼저 제직들부터 모범을 보이려고, 모두 모여서 한 사람, 한사람 돌아가면서 자신의 작정 헌금 액수를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자기는 맨 나중에 작정하겠노라고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그러려니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작정 순서가 끝나고, 이 집사님이 작정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집사님은 다른 사람들의 작정 헌금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에다가 '0'을 하나 더해서 자기의 작정액으로 정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집사님은 날마다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작정 헌금을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 결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집사님을 서울로 옮기게 해 주시더니, 장사를 시작하게 해 주셨습니다. 집사님은 얼마나 장사가 잘되던지, 작정한 건축헌금을 모두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서 큰 부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서울 어느 교회의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0'을 더하는 믿음으로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 '0'을 더하는 큰 믿음을 가져서, 차고 넘치는 큰 축복을 받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성광 목사(서울 강남교회)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막4:24-25 2001-11-19 17:25:27 read : 1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A. 믿음과 축복에 대하여 1. 믿음과 축복 오늘은 마가복음 4장 24∼25절의 말씀으로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제목이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축복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축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막4:24-25 2001-11-19 17:25:27 read : 1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A. 믿음과 축복에 대하여 1. 믿음과 축복 오늘은 마가복음 4장 24∼25절의 말씀으로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제목이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축복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축복의 근원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작은 믿음도 있고, 큰 믿음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큰 믿음을 통해서 크게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어떤 가난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예배도 잘 드리고, 또한 새벽 기도까지 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도 뭔가 좀 하게 하옵소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거지처럼 살지 말고, 나도 정착해서 보람된, 안정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하고 기도를 하다가 마음속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지. 나도 뭔가 해야 돼!’ 그래서 콩나물을 도매로 싸게 받아서 아파트 입구에 앉아서 콩나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을 받아와서 콩나물 장사를 했는데 조금씩, 조금씩 돈이 모여서 몇 년이 되자 조그만 가게를 하나 얻을 수 있게 되었고, 또 가게를 얻어서 열심히 장사하니까 나중에는 두부 공장까지 차리게 됐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부 공장을 차려서 사장이 됐으니 이제는 인생이 살맛 나고 신났습니다. 그런데 두부 공장을 운영하니까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콩나물 장사할 때는 시간이 남아서 예배에 참석하고, 새벽 기도까지 나갔는데, 이제는 두부 공장 사장이 되니까 바빠서 새벽 기도도 못 나옵니다. 수요일도 못 가고, 금요일도 못 가고, 겨우겨우 주일만 한번씩 교회에 가는 신앙이 됐습니다. 그는 사업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두부 공장, 두부 공장, 돈을 벌어야 돼. 사업해야 돼.’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기꾼에게 걸리고, 운영이 잘 안 되자 사업에만 정신이 빼앗겨서 결국 신앙도 잃어버리고, 두부 공장도 부도로 날라 가고, 장만했던 집도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는 알거지가 됐습니다. 또 다시 거지가 됐습니다. 그는 자기 과거를 생각했습니다. ‘아! 그때 새벽 기도 다니면서 콩나물 장사할 때가 행복했구나. 나는 이것저것 다 잃어 버렸구나.’ 여러분, 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돈, 돈 하면서 돈 따라 갔다가 돈도 잃어버리고, 신앙도 잃어버리고, 인생도 헛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돈 버는 것도 좋고, 출세하는 것도 좋고, 성공하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우선적으로 이 모든 것은 믿음에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바탕이 있어야 물질도, 돈도, 명예도, 세상의 좋은 조건도 오래 지속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큰 자산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산도 있고, 눈에 안 보이는 자산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안 보이는 자산 중에서도 가장 큰 자산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면 큰 일을 할 수 있고, 믿음이 작으면 작은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창조적인 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시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믿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온전한 믿음을 가져서,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하나님 앞에 축복 받고, 형통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막 4:24∼25)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 마가복음 4장 24∼25절에는 예수께서 그릇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헤아린다’는 것은 ‘그릇’을 말합니다. 큰 그릇에는 크게, 많이 담을 수 있지만 작은 그릇으로는 적게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그릇으로 표현했습니다. 믿음은 바로 그릇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나 사랑이나 축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크기의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큰 사람은 크게 역사하지만 작은 사람은 작게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큰 사람은 ‘아멘’이 많습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은 ‘아멘’도 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되는데 어떤 믿음을 가져야 됩니까? 오늘 봉독한 말씀의 제목처럼 ‘0’을 하나 더 더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1이라면 10개의 믿음을 갖고, 믿음이 2라면 20개의 믿음을 갖고, 믿음이 3이라면 거기다 ‘0’을 붙여서 30만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0’을 덧붙여서 10배의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거기에 따른 축복도, 은총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일은 많이 해야 되고, 나쁜 일은 안 해야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의 공부하는 시간, 사업하는 사람의 사업에 대한 열정, 신앙을 가진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 이것은 많을수록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것, 또한 전도하는 것, 충성, 봉사하는 것, 여기에도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을 저는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기도 시간에 ‘0’을 더하라. 둘째,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 예물 드리는 믿음에 ‘0’을 하나 더 더하라. 셋째, 전도할 때 전도하는 사람 숫자에 ‘0’을 하나 더 더하라. 넷째, 봉사와 충성에도 ‘0’을 더 더하라. ‘0’을 더할 것이냐, ‘0’을 뺄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0’을 더하는 사람에게는 축복도 더해지지만, ‘0’을 빼는 사람에게는 축복도, 은총도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B. ‘0’을 더하는 믿음의 축복 1. 기도 시간에 ‘0’을 더하는 믿음 - 기도 1분→10분, 10분→100분 / 응답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기도는 조건적입니다. 아무에게나 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찾게 되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닙니다. 구하는 사람, 찾는 사람, 문을 두드리는 그 사람에게 찾아지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고, 얻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9∼11절 말씀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여러분, 조건적으로, 구하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구할 때 끈기 있게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새벽 기도로 하나님 앞에 구합니다. 한밤중에 주님 앞에 철야하면서 기도합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응답 주실 때까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의 그 기도를 통해서 응답하고 역사하여 주십니다. 사무엘상 1장 말씀을 보면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장 12절 말씀을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서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기도도 시간에 따라 다릅니다. 잠깐 기도하는 것하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 그 기도의 차이는 다릅니다. 기도 시간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정성,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삶의 질과 삶의 양이 달라지게 됩니다. 1분 기도하는 사람과 10분 기도하는 사람, 3분 기도하는 사람과 30분 기도하는 사람, 5분 기도하는 사람과 50분 기도하는 사람, 6분 기도하는 사람과 60분 기도하는 사람은 삶의 질과 양이 다릅니다. 과거에는 기도 시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무관심했더라도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과 기도 시간의 연관성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 24시간 동안에 몇 시간, 몇 분을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는 뭔가 다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어떤 능력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시 50:15). 기도하는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진리 가운데 삽니다(시 119:18). 생활의 변화가 나타납니다(시 121:1∼2; 34:4). 기도를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사 40:31).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요 16:24; 빌 4:6∼7). 기도하는 사람은 순종을 잘합니다(행 4:29). 기도를 하면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가 있고(엡 6:12; 벧전 5:8),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기도를 통해서 기적이 나타납니다(약 5:16; 행 12:5∼10; 16:25).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얼른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걱정과 근심과 불안, 두려움,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벌써 자신감이 넘치고, 그 얼굴에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언니 되는 사람이 갑자기 동생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데 오후에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심각한 수술을 받게 됐는데 살아날 가능성은 10%도 아니고, 1%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이기 때문에 수술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언니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아! 이제 동생이 세상을 떠나는가 보다. 동생을 잃는가 보다.’ 그는 그 전화를 받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을 기도했습니다. 60분을 기도했습니다. 2시간, 3시간, 3시간 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동생의 생명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내 동생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3시간 기도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확신이 생겼습니다. 기도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하고, 기도는 응답이 왔다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해야 합니다. 3시간 동안 기도하자 그는 마음에 평강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가슴이 덜컹 했습니다. ‘아, 내 동생이 떠나는구나. 내 동생이 결국 수술 받고 잘못 돼서 세상을 떠나는구나. 아니야,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내 동생을 살려줬을 꺼다.’하는 생각이 번득 떠오르면서 ‘내 동생을 살려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과연 그 전화는 사망 전보가 아니라 여동생의 상태가 호전되어서 언니를 만나고 싶으니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전갈이었습니다. 즉시로 3시간 동안 동생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2시간, 3시간, 몇 시간씩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 병들었을 때, 또는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와 기도원, 내가 속한 모든 곳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는 응답 받을 때까지, 확신이 생길 때까지 해야 하나님께서 응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시간에 ‘0’을 하나 더 더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아멘’하는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겁니다. 그러나 ‘아멘’ 못하는 사람은 둘째 단계로 넘어갑시다. 2. 헌금에 ‘0’을 더하는 믿음 - 헌금 10만원→100만원, 100만원→1000만원 / 풍성한 축복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할 것이요 인색(吝嗇)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하나님은 기쁘게, 자원해서, 감사함으로 드리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A.D. 55년경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고통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기근과 핍박으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게 “너희가 여유가 있으니까 예루살렘 성도들을 좀 도와 주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많이 주신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성경을 통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은 목사님들이 만든 말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에 있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근거와 배경을 보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물질 드리고, 예물 드리는 것이 마치 농사 짓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 지을 때 씨를 심는 것과 비유했습니다. 농부가 종자 씨를 심을 때 그것을 다 먹어 치우지 아니하고, 밭에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수확을 얻습니다. 옥수수를 심고, 쌀을 심어서 열매 맺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종자 씨를 다 먹어 버리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자기가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열심히, 많이 심으면 종자 씨도 살아남을 것이요, 또한 그 다음에 심을 많은 씨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농사의 법칙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통해서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물질적인 관계는 농사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농부의 마음으로, 농부가 농사 짓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시편 126편 5절 말씀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씨를 뿌릴 때는 눈물을 흘린다 할지라도, 울어가면서라도 씨를 뿌리면 나중에는 기쁨으로 열매를 거둡니다. 울 일 있다고 해서, 눈물 흘린다고 해서 씨 뿌리는 것을 포기하면 영원히 포기입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씨를 뿌리면 나중에 기쁨과 즐거움과 축복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크게 경영하는 교포가 있었습니다. 대개 교포들이 음식점, 식당 사업을 하면서 세금들을 제대로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로부터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이 먹으면 정부 돈(social security)을 받습니다. 이런 불의한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 한국 사람들이 미국 비자 얻기가 참 힘듭니다. 이 사람도 시카고에서 음식점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는데 세금을 정당하게 내지 않고 조금 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돈을 버는 대로 전부 다 가게 벽에다가 금고를 만들어서 그 속에다 숨겼습니다. 돈을 벌면 저녁에 벽 속에 감추고, 감추고 한 것이 한 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3년쯤 지나서 ‘아, 이제는 몇 십만 달러쯤 됐겠구나.’하고 그가 돈을 계산하려고 그 벽을 뜯었더니 돈이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전부 종이 조각, 조각, 조각, 전부 조각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 알고 보니 음식 장사가 음식하면서 돈을 만지니까 그 돈에 음식 냄새가 배어서 쥐들이 전부 갉아먹고 수십만 달러가 전부 먼지 조각, 조각이 된 것입니다. 세금도 내지 않고, 은행 갖다 주면 적발되니까 은행도 갖다 주지 않고, 숨겨 둔 돈,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모은 돈이 먼지가 되고 조각, 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어리석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6장 19∼20절 말씀을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들은 은행에 놓아 두든, 적금을 들든 여러분이 어떠한 방법으로 돈을 쌓았든지 간에 도둑질 당합니다. 이 사람이 가져가고, 저 사람이 가져가고, 가족, 형제, 친척들이 가져가고, 사업해서 망하고, 돈 꿔 주었다 망하고, 이리저리 다 없어집니다. 이 세상에다 쌓지 말고 하늘 나라에다가 재물을 쌓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쓸 것을 넘치게 채워 주십니다. 여러분, 돈과 물질은 쓰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쌓아 놓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 써야 됩니다. 들어올 때는 들어오고 나갈 때는 나가야 되는데, 욕심과 탐욕으로 말세에 돈을 세상에 쌓아 놓은 사람들은 교만해집니다. 불신앙에 빠집니다. 마귀의 시험에 들어갑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들어온 것만큼 다 없어집니다. 재물이 독수리의 날개 치며 나는 것 같이 날아갈 것입니다(잠 23:5). 재벌들의 돈도 없어집니다. 회사 사장, 회장들의 돈도 없어집니다. 이 세상의 돈은 왔다 가고, 없어지고, 사라지고, 돌고 도는 것이 돈입니다. 여러분, 돈에 너무 미련 갖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물질로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부산의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계시는데, 이 장로님은 조그마한 개인 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장로님은 개인 병원의 의사였지만 자기 병원보다 교회를 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화가 없다고 하면 자기 병원에 있는 전화기를 떼어 주고, 선풍기가 없다고 하면 교회에 선풍기를 달아 주었습니다. 하여튼 교회에서 뭐가 조금만 필요하다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를 위해서 아주 충성하는 그런 장로님이었습니다. 얼마 후 병원이 잘 돼서 이제 그 병원을 확장하려고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더 크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장로님은 ‘하나님의 집이 먼저지, 병원이 먼저냐?’하며 주저하지 않고 병원을 확장하려던 돈을 교회에 건축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러고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그 부산 온 지역에 장티푸스,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장티푸스, 전염병이 도니까 사람들이 전부 병원에 왔습니다. 너무너무 환자들이 많아서 옆에 있는 학교 강당을 빌려 이 사람, 저 사람, 사람들을 다 수용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돈이 쌓이고 물질이 쌓였습니다. 이 장로님은 엄청난 돈을 저축하게 되어, 이제는 병원을 확장하려던 계획을 아예 취소하고 종합 병원을 지었습니다. 크게 종합 병원을 지어서 그 종합 병원 원장이 됐습니다. 조그만 개인 병원 원장에서 종합 병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더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작은 부자는 사람의 노력으로 될 수 있지만, 큰 부자는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심을 통해서, 은총 베풀어 주심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물을 생각할 때,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퍼내는 것과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부어 주시는 축복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말 3:10).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릴 때 ‘0’을 뺄 것인가, ‘0’을 더할 것인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0만 원 드릴 사람이 100만 원 드리고, 20만 원 드릴 사람이 200만 원 드리고, 하나님 앞에 물질을 더 드려서 하늘 나라 은행에 적금하고, 하나님 앞에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10%, 20%, 30% 이자가 아니라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시고, 여러분의 가정을 풍족하게 하시고, 사업을 크게 번창시키시고, 여러분을 통해서 물질 축복의 영광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 중에서 크게 재물의 축복을 받는 분이 많이 나오시기를 축원합니다. 3. 전도한 사람의 숫자에 ‘0’을 더하는 믿음 - 전도 1명 →10명, 10명 →100명 / 건강 “너는 말씀을 전파(傳播)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警責)하며 경계(警戒)하며 권(勸)하라”(딤후 4:2)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도하지 못한 것이 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전도를 해야 됩니다. 본문에서 전도에 대한 단어는 무엇입니까? ‘전파하라’입니다. 이 ‘전파하라’는 본래 헬라어 성경에 ‘케륏손,’ ‘공포를 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말씀을 공포를 하라.’는 명령적인 단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또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를 보지 말고 항상 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안 믿는 사람을 믿게 하고, 잘못 믿는 사람을 올바로 믿게 하는 그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1명 전도하던 사람에게 ‘0’이 붙으면 10명 전도하고, 1명을 가르치던 사람이 10명을 가르치고, 10명을 가르치던 사람이 100명을 가르치고, 5명을 전도할 사람이 50명을 전도하고, 50명 가르칠 사람 500명 가르치고, 전도의 숫자에도 ‘0’을 하나 더 더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할 때 도와주시고 역사하십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말씀에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福音)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 화가 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대개 보면은 전도하지 않아서 화 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늘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특별한 병명도 아니고, 병원 가서 낫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전도하지 않아서 건강을 잃어버리고, 지위를 잃어버리고, 전도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빼앗기고 떠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도를 해야 전도하지 않는 죄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 말씀에도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康健)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傳道)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전도하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건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육체를 건강하게 하십니다. 정신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시험과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기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왜 인생에 기쁨이 없습니까?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보람도 없습니다. 의미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자는 멸망치 않습니다. 저는 풍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씨를 뿌려야 거두는 재미도 있지, 심는 것도 없고 거두는 것도 없고 매일 남 뿌리고 거두는 것만 구경하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여러분, 전도에 구경꾼이 되지 마시고, 전도하는, 씨뿌리는, 전도의 일꾼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도 보면 전도 열심히 하는 교회가 크게 부흥합니다. 회사도 전도하는 회사가 크게 부흥하고 발전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타락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게을러집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교만해집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동대문에서 30년 동안 장사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교회는 왔다 갔다 하나 별로 남에 대한 관심도 없고 전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돈 버는 재미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30년 동안 돈을 벌어서, 젊은 나이에 시작했으나 이제는 머리가 허예지고 60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출근하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예수님 믿으세요.”하며 전도지를 주었습니다. 그 전도하는 사람을 만나자 그는 마음에 큰 쇼크를 받았습니다. ‘나는 돈만 벌려고 한평생, 젊었을 때부터 이렇게 백발이 되도록 ‘돈, 돈’하고 살았는데, 저 젊은이는 전도를 하다니…. 전도를 하는 구나. 나한테 전도를 했어.’ 그러면서 그는 자기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어서 어디다 쓸 것인가? 쓰지도 못하고 죽을 돈을 왜 이렇게 계속해서 벌고 또 버는 건가? 내 인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여러분, 돈이라는 것은 벌고 써야지 쓰지도 못할 돈 자꾸 쌓아 놓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들, 딸한테 물려준다고 해서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돈 때문에 방탕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고,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그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까? 이웃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얼마든지 쓸 곳이 많은데, 오늘날은 돈 벌어서 자꾸 쌓아 두는 것만이, 그것만이 좋은 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때 생각했습니다. “나도 이제는 좋은 일 좀 해야지. 삶에 대한 보람을 느껴야 해.” 그렇게 생각한 후부터 그는 물건을 팔면서 물건 속에다 전도지를 한 장씩, 한 장씩 넣어 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제는 전도가 삶의 목적이고, 장사는 부업입니다.” 그 전에는 돈버는 것이 전문이고 교회 나가는 것이 부업이었는데, 그가 인생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는 이제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고 장사하는 것은 부업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하는 사람은 삶에 의미가 있습니다.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고 삶의 목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지 않고 돈, 돈, 돈 하면서 세상 쾌락, 세상 죄악, 세상으로 흘러가는 사람은 결국 그 세상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지 못하고,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전도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 사장님이 교회에 10년 동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목사님이 전도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렇지, 내가 교회 나오는 것이 좋고 하나님 믿는 것이 좋다면, 왜 좋은 것을 나 혼자만 믿는가? 진정으로 내게 도움이 되고 좋으면 남에게도 권해야지. 음식 먹고 맛있으면 그 음식 먹어보라고 하고, 내가 좋은 건 좋다고, 다른 것은 다 말하면서 왜 교회 나오는 것, 예수 믿는 것, 하나님 믿는 것은 왜 남에게 전하지 못하는가? 나도 전도해야 되겠다.’ 그래서 교회 나온 지 10년 만에 그는 전도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는 사무실에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나도 이제는 전도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사무실에 먼저 들어오는 사람에게 전도하겠습니다.’하고 기도하고 결정을 했는데, 마침 직원이 결재 서류를 가지고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왔습니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리 오게. 잠깐 할말이 있네.” “자네 교회 다니나?” 직원이 깜짝 놀랐습니다. “사장님, 웬일로 교회 다니냐고 물어보십니까? 결재해 주십시오.” “아니야, 결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네. 내가 10년 동안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도 한번도 자네에게 전도를 하지 않았지? 내가 이제부터 자네에게 전도를 해야 겠어. 교회 나가세.” 그랬더니 이 직원이 “사장님 고맙습니다. 저는 사장님이 10년 동안 교회 나가는 것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좋아서 나가는지 나빠서 나가는지 그걸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데 가면 나보고 한번도 같이 가자는 소리를 안 하는가? 아마 사장님은 나같은 사람은 상대도 안 하는가 봐. 아마 교회는 나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나 봐.’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사장님이 나보고 교회 가자고 그러니까 같이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사장님과 꼭 같이 가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했습니다. 여러분, 의외로 전도하고자 하면 쉽게 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좀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부인이 좀 같이 가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부모가 좀 같이 가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전도하지 않으니까 옆에서 구경만 하고 방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가족 중에서, 또는 형제, 이웃, 친척, 친구 중에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말씀을 증거할 때, 전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전도하는 자에게 물질을 주시고, 전도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시고, 전도하는 자에게 삶의 보람을 느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전도하시는 전도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봉사와 충성에 ‘0’을 더하는 믿음 - 봉사, 충성 3분→30분, 5분→50분, 10분→100분 / 기쁨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恩惠)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은사를 받은 대로, 은혜를 받은 대로, 하나님 앞에 사랑과 축복을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청지기’라는 말 많이 들으셨지요? ‘청지기’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노모스’인데, 그 뜻은 ‘가정 관리자, 가정의 살림을 맡은 종’을 말합니다. 청지기는 가정 살림을 맡은 종입니다. 주인이 바쁘고 할 일이 많으니까 집안 살림을 다 맡아 하는 종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임된 사람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사를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것에 종으로서 충성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종은 자기의 소유가 없습니다. 다 주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잘만 하면 주인이 상도, 보상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분도 주시고 은사도 주십니다.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구제하는 것, 다스리는 것, 긍휼을 베푸는 은사를 직분을 위해 주셨고, 또한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분도 주시고 이 모든 은사도 주셨습니다. 이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집사, 장로, 권사, 구역장, 조장 이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 직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청지기 직분입니다. 장관도, 국회의원도 청지기 직분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직업이 다 하나님 앞에 청지기 직분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판사, 검사도 다 청지기입니다. 회사 사장들도 다 하나님 앞에 청지기입니다. 하늘과 땅,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늘과 땅을 다 창조하신 하나님께 속하였고, 이 모든 직분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인생을 깨달아야, 겸손한 인생을 살고 하나님 앞에 은총을 받으며 하나님 앞에 축복 받고 사랑 받을 수 있습니다. 잠언 28장 20절에 충성된 자는 복이 많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은총과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께서 달란트 비유를 설명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있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감췄다가 가져 와서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책망 받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네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 달란트를 만들어 가지고 주인에게 왔을 때 주인이 칭찬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3절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주인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늘도 땅도 세상 만물도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창조된 모든 것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말씀에도 “…죽도록 충성(忠誠)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는 사람은 어떻게 충성해야 합니까? 목숨 걸고 충성하는 겁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놀아 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눈치 봐 가면서, 한눈 팔면서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죽도록, 목숨 걸어 놓고 충성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봉사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봉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행복이 주어집니다. 보람과 기쁨이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보람과 기쁨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3분 봉사하는 사람은 30분 봉사하고, 5분 봉사, 충성하는 사람은 50분 봉사하고, 10분 봉사하는 사람은 100분 봉사하여 봉사하는 시간을 늘리고 봉사하는 질을 높여서 하나님께 봉사해야 합니다. 장로, 권사, 집사, 조장, 구역장, 선교회, 성가대, 교회학교, 예배만 보고 훌쩍 가는 것은 진정한 봉사·충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초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도 봉사하게 하옵소서. 충성하게 하옵소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교인되지 말게 하시고. 무언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봉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채문경 교수라는 분이 간증을 했습니다. 그분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가서 풍금으로 반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훌륭한 반주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피아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에서 반주하기 시작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반주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반주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그는 학교 공부보다 교회 반주를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피아노 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피아노 과에 입학하고 나서도 성가대 반주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독일 베를린 음대 성악과 교수가 내한했다가 반주자가 필요해서 누가 반주를 잘 하는지 수소문했는데, 이 채문경 학생이 반주자로 채택이 됐습니다. 반주를 하고 나니까 그 독일 대학 교수가 유학을 제안했습니다. “반주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독일로 유학 가고 싶으냐?” “네, 가고 싶어요.” 그래서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독일로 유학 가서 오르간을 공부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에 초대 오르간 연주자로 초빙 받아서 상임 연주자가 되었습니다. 국제 초청 오르간 연주를 하였고, 국제 콩쿠르 심사 위원이 되었습니다. 대학 교수가 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릴 때 교회에서 풍금, 피아노 만지면서 ‘하나님, 이 반주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며, ‘반주, 반주, 반주’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국가의 행사에도, 또 국제적인 콩쿠르에도 관여하게 하시고, 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축복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봉사를 할 것인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할 것인가? 비록 적은 일이라 할지라도 충성하면 큰 것 주시고, 큰 것까지 충성하면 더 큰 것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C. ‘0’을 더하는 믿음으로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자 믿음에 ‘0’을 더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 설교 제목에 은혜가 됩니까? 믿음이 생깁니까? 올 한해 그렇게 살아 보시겠습니까? 가난과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적은 믿음으로 겨우 하루 세 끼 밥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큰 믿음을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왕 가지고 나오려면 큰 것, 큰 그릇을 가지고 나와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도 많이 담지, 매일 손바닥만 가지고 나오니 뭐 담길게 있습니까? 손바닥 내밀어 봐야 비가 요리 떨어지고 조리 떨어지고 남는 게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받으려면 그릇이 커야 되는 것처럼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못을 파면 연못이 철렁거리고, 댐을 파면 댐이 철렁거립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데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믿음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0’을 더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부자되고 물질 축복 받으십시오. 기도해서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 전도 많이 해서 많은 사람 앞에 존경과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 앞에 봉사·충성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만 봉사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동창회에서도, 사회에서도, 또한 교회에서도 봉사·충성 많이 할 때, 충성하는 것만큼 하나님께서 은총과 축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전라북도 어느 교회에 열심있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늘 하나님께 충성하고, 더 많은 것으로 헌금할 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한번은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목표액을 정하고, 전 교인이 작정헌금을 하기로 하고, 먼저 제직들부터 모범을 보이려고, 모두 모여서 한사람, 한사람 돌아가면서 자신의 작정헌금 액수를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자기는 맨 나중에 작정하겠노라고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그러려니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작정 순서가 끝나고, 이 집사님이 작정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집사님은 다른 사람들의 작정헌금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에다가 '0'을 하나 더해서 자기의 작정액으로 정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집사님은 날마다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작정헌금을 드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 결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집사님을 서울로 옮기게 해 주시더니, 장사를 시작하게 해 주셨습니다. 집사님은 얼마나 장사가 잘되던지, 작정한 건축헌금을 모두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서 큰 부자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서울 어느 교회의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0'을 더하는 믿음으로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여러분, '0'을 더하는 큰 믿음을 가져서, 차고 넘치는 큰 축복을 받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번째 대접 재앙/계16:1-9
1-4번째 대접 재앙/계16:1-9 2003-06-20 15:42:41 read : 13 계시록 16장에는 계시록의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4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앙들은 이미 우리 사회 속에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임을 우리가 알수 있는데 주님의 재림의 날(정확히는 재림 직전에)에 이 모든 재앙들이 다 이루어 질 것입니다. 아무튼 이 7대접 재앙은 우리가 사는 땅 위에와, 물 위에와, 바다 위에와 태양 위에 부어지는 그런 내용입니다. 또 이 재앙은 곡식 추수가 끝난 다음에 거기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을 심판하는 재앙입니다. 마치 농부가 알곡을 추수해서 곡간에 저장하듯이 예수님께서 직접 추수하시는데 여기 끼지 못하는 사람들, 가라지 같고 쭉정이 같은 인생 염소 같은 인생에게 내리는 아주 무서운 심판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재앙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1절을 보면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왜 이와 같이 큰 음성으로 말했을까요? 그것은 너무도 큰 심판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명령이 아니라 큰 명령이기 때문에 이처럼 큰 음성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계시록 16장에는 '크다'나 '큰'이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어 나옵니다. 9절에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지금 우리가 살펴본 1절에도 "큰 음성"이 나오고, 12절에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14절에는 "큰 날의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8절에도 "어찌 큰지", 19절에는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21절에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21절에는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 크다는 단어가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일곱 대접 재앙이 너무나 크고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그 규모와 범위가 다른 것과 비교 할 수 없어서 "큰 음성으로"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큰 음성이 "성전에서"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바로 이 성전을 통해서 전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마지막 경고의 말씀도 성전을 통해서 들을 수 있고, 마지막 재앙 때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도 성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 계시록의 재앙들 가운데서도 특히 일곱 대접 재앙은 너무도 큰 재앙입니다. 첫번째 대접 재앙 2절을 보면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대접 재앙의 대상은 바로 땅입니다. 땅은 어떤 곳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집이 있고 직장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땅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땅에 대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2절은 아주 구체적으로 재앙을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고 했습니다. 이 첫 번째 재앙이 짐승의 표 받은 사람과 그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666이라는 짐승의 표를 오른손이나 그 이마에 받은 자들에게 이런 독종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종기가 아니라 이름 그대로 '독종'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못살던 때라 아이들이 머리나 몸에 헌데가 많고 피부병으로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독하고 굉장히 악한 종기라는 것입니다.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뱃지를 달아야 살아 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종말의 날에는 김정일 뱃지가 아니라 666이라는 인을 맞아야 상거래도 할 수 있고 살아 남을 수 있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육신이 살아 남기 위해 믿음을 버리고 우상에게 절하고, 점치고, 이마와 오른손에 우상인 짐승의 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절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이 바로 악하고 독한 종기라는 것입니다. 출 9:9에도 이와 비슷한 독종이 있습니다. 출애굽 시에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재앙 중에 여섯 번째 재앙이 바로 독종의 재앙입니다. 또 욥기 2:7에도 욥이 독종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열왕기하 20:7에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독종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때때로 이 독종을 통해 심판을 하시고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알수 있는데 심판 때에는 한두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이 독종이 666표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대접 재앙 3절에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재앙이 땅에 임하는 재앙인데 반해 두 번째 재앙은 바다에 임하는 것입니다. 둘째 대접을 든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을 때 바다가 피같이 변하여 모든 생물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출7:20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재앙이 있는데 거기에는 나일강만 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대접 재앙은 제한적이고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임하게 되는 재앙인 것입니다. 요즘 물 공해가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조차도 수돗물을 믿을 수 없어 정수기를 사용하지 않고는 않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남해바다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청정해역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는데 이젠 오염되서 물이 썩고 먹물 같이 시꺼멓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있는 고기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머지 않아 온 세계의 바다가 본문의 바다같이 오염되어 피처럼 먹을 수 없는 물로 변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임할 대접 재앙의 내용인 것입니다. 세 번째 대접 재앙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땅, 두 번째는 바다, 셋째는 강으로 이렇게 차츰 재앙의 범위가 점전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강뿐 아닙니다. 4절을 자세히 보면 물 근원, 지하수까지 재앙이 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도 다 강을 중신으로 발달했습니다. 인류는 물을 떠나서는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근원되는 강과 샘물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므로 그 물이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괴로움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물을 피로 만드는 재앙을 내리실까요? 그것은 6절에 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이 많은 주님의 종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시는 분입니다. 그 다음에 제단에서 음성이 들려 옵니다.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7절) 고 했는데 이 제단은 어떤 제단입니까? 바로 순교자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은 순교자들이 외치는 소리의 응답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들이 흘린 피에 대한 보복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이 심판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너무도 당연하고 공의로운 심판인 것입니다. 네번째 재앙 8-9절을 보면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고 합니다. 이제 재앙의 범위가 천체입니다.그 중에서도 특별히 태양이 재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태양은 단순히 빛만 비춰 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자라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4번째 재앙에서 천사가 그 대접을 태양에 부으매 그 태양의 빛이 강렬해져서 사람을 태워 죽일 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태양의 빛이 강렬해져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오늘날 사람들이 레이져나 무기 등 태양열을 이용한 각종 장비들을 일컫는 것들도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태양을 잘 선용하지 않고 살상 목적으로 악용하여 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 어느 것이든지 간에 이 태양이 우리 인간들에게 임하는 재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러한 무서운 재앙을 당하고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9절) 이게 문제입니다. 이런 재앙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뉘우치면 좋겠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영광을 가리우는 일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10% 감사 /눅17:11-19 2011-07-25 15:35:58 read : 3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병환자로 산다는 것은 고통과 외로움이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시대에 나병은 천형으로 알려졌습니다. 치유가 불가능한 병,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고 외딴 곳에 거주해 격리되어 생활할 수 밖에 없는 외롭고 고통의 사람들이 그 당시의 나병환자들이였습니다. 열병의 나병환자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10% 감사 /눅17:11-19 2011-07-25 15:35:58 read : 3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병환자로 산다는 것은 고통과 외로움이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시대에 나병은 천형으로 알려졌습니다. 치유가 불가능한 병,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고 외딴 곳에 거주해 격리되어 생활할 수 밖에 없는 외롭고 고통의 사람들이 그 당시의 나병환자들이였습니다. 열병의 나병환자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나사렛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어떤병이든 고칠수 있고 죽은자까지 일으킬 수 있다는 능력의 소문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고대하며 소망했는데 어느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께서 갈라디아와 사마리아 중간지방을 거쳐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나병환자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보고 달려가서 소리지릅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소리질러서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제 너희몸을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 제사장은 그 당시에 종교적인 일도 행하지만 의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판단해서 당신은 나병이 다 나았소하면 그는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병은 문둥병자,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제사장에게 달려가는 도중에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나은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간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해서 갔습니다. 이것도 위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당장 문둥병이 나은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제사장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뭔가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 가다가 보니까 병이 나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중 9명은 병이 나은 사실에 감격하고 너무너무 좋아서 기뻐하지만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 한사람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사마리아인만은 내게 이 선물을 주신 그 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병 고침받은 것도 기쁘지만 내게 나병을 고치게 하신 근원되신 그분에게 내가 가서 감사해야 되겠다 그래서 한 사람은 가던길을 뒤돌아서 다시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했다. 예수님은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열사람이 나음을 입었는데 이방인 한사람외에는 감사할 줄 모르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느냐 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하시면서 그에게 온전한 구원을 선물해 주신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감사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아는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몇가지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는 감사하는자가 적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무엇입니까? 10%의 감사. 다시말하면 10명 전체가 감사했더라면 100%의 감사가 되었을텐데 10명중에 한사람만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10%의 감사입니다. 무엇입니까? 감사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흉내는 낼지언정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그리많지 않다하는 것입니다. 자수성가한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중견기업을 이끌어가는데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자신이 어렸을 땐 너무 가난했습니다. 학교갈 처지가 안됐습니다. 그런데 정말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그 선생님이 때로 책가방도 사주고 교과서도 사주고 수업료도 내주고 자기를 격려해서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 은혜를 깨달으니까 그냥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어렸을 때 자기를 그렇게 격려해주셨던 선생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선생님의 돌보심이 아니였다면 선생님의 은혜가 아니였다면 제가 여기까지 올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면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얼마후에 이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답장이 뭐냐면 여보게 자네의 감사편지를 받고 나는 너무너무 기뻤다네. 내 교직 40년만에 이런 기쁨을 맛보기는 처음이야. 왜냐하면 내가 많은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한테 수업료도 내주고 책가방도 사주고 교재도 사줬지만 나에게 감사편지를 보낸사람은 자네게 유일한 사람일세. 나는 내 교직 40년의 보람과 긍지를 자네 때문에 갖게 되었어.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제자에게 보냈더라는 것입니다. 감사란 그렇게 쉬운게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1860년 미국 미시건 호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람선 한척이 호수를 지나가다가 암초를 만나서 침몰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헤엄을 못치고 휩쓸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스펜서라는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뛰어들어서 정신없이 구조했는데 17명이나 구조했습니다. 죽을 사람들을 살려낸 것입니다. 그래서 스펜서의 이름이 대서특필되고 많은 사람에게 영웅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스펜서가 연로한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한 기자가 와서 묻습니다. 스펜서선생님 당신이 오래전에 17명의 생명을 구조한 일이 있죠. 그렇죠. 그런데 그 중 몇 명이나 당신에게 감사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스펜서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네 그중 단한사람 어린 소녀만이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는 내게 감사편지를 보내고 매년 성탄절만 되면 내게 감사카드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17명중에 단 한명이. 생명을 구조한 은혜에 대해서도 단 한명만이 감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현 주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이 어느날 천수 둘에게 바구니하나씩 들려서 세상에 내려보냈습니다. 너희가 가서 한바구니에는 기도의 내용을 담아가지고 오고 또 한바구니에는 감사의 내용을 담아가지고 오너라. 이 두천사가 각기 길을 떠났습니다. 한달후 그들이 돌아왔는데 기도의 바구니를 들고간 천사는 끙끙대면서 올라오는데 거기에 기도의 내용을 가득담아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 이것도 해주세요, 저것도 해주세요, 복도 주세요. 그런데 감사의 바구니를 들고온 천사는 덜렁덜렁 올라오는데 감사의 내용이 세장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다급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다급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응답받은후에 감사하는 자가 적다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얼마나 절박했을까요. 이 죽음의 자리에서 건짐받는 것, 고침받는 것, 기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막상 고침받고나니까 그들은 핑계가 많았습니다. 갈길이 바쁘다. 가족에게 가야되겠다. 제사장에게 먼저가야 되겠다. 그들은 감사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 중 한명 사마리아인만이 모두에게 멸시받고 소외된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 시대에 감사하지 못하는 군상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종말의 시대에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릅니다. 그 영광을 내가 다 가로채 버립니다. 그리고 감사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보니까 종말의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만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자랑하기 좋아하고 교만하고 남 헐뜯기 좋아하고 비방하고, 부모에게 거역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거룩하지도 못합니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하는 것입니다. 영신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이 본문에서 주시는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감사할 수 있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같이 하지만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있고 집사님 권사님 몇십년 신앙생활해도 은혜가 뭔지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양은 그럴듯한데 진정한 감사의 소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15절에서 18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덮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어찌보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섭섭함이 있습니다. 이 이방인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자가 없느냐 너 외에 나머지 아홉명은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질문이십니다. 감사하는 자가 많지 않다. 그러면 누가 감사할 수 있는가.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는 더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더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마음이 닫히고 굳어져서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던 사람들, 자칫하면 우리도 그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릴때부터 예수믿었는데 신앙의 연륜은 자랑하지만 그 마음에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이미 돌같이 굳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이 없습니다. 돌같이 굳어진 마음 안타까운 것입니다. 어찌보면 유대인들의 마음이 그와같은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사마리아 이방인은 마음이 순수합니다. 그는 이 놀라운 감동앞에서 감동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 은혜를 깨닫고 주님앞에 달려와서 엎드려 감사했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은혜를 깨닫는 자와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자와 배은망덕한 사람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은혜를 깨다는 것은 신앙의 철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말을 종종 합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이 철좀들은 것 같습니다. 같이 40년을 살아도 몰랐는데 요즘 남편이 달라졌습니다. 철이 든것 같습니다. 겁난다고 합니다. 철들면 빨리돌아가신다고. 우리도 신앙의 철이 들어야 합니다. 가정에 보면 3남매도 있고 5남매도 있고 7남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합니까. 공부잘하고 학벌이 좋은 자녀가 효도하나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번 자녀가 효도합니까? 꼭 그렇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러면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효도합니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떤집은 장남이 최고라고 장남한테만 쏟아붓습니다. 차남은 찬밥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장남은 효도 안합니다. 오히려 괄시받은 차남이 부모모시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꼭 그런거 아니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합니까? 은혜를 깨달은 사람, 부모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 부모님은 역시 부모님이야 부모님이 없이는 내가 여기 있을 수 없지. 마음에 우러나는 효도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흉내는 다 냅니다. 그러나 누가 진심으로 부모를 생각하고 효도하는지는 부모님은 다 압니다. 말안해도 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다 압니다. 저 아무개 형식적으로 감사하는구나. 흉내만 하는구나. 체면처리하는구나. 그러나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심방하면 그럽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나 감사할게 많은데 제가 생활이 어려워서 더 감사하지 못하는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런분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들을 보면 너무너무 풍족한데 감사헌금하는 걸 보면 너무너무 미안합니다. 이것은 우리교회에서 제일 어려운분이 하는 감사정도입니다. 제일 부유한 사람인데. 이것이 마음이 담긴 감사일까요. 그건 아직 철이 안든 감사입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한 감사입니다. 성경은 은혜를 깨달은 자를 향해서 너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을 보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아버지께 감사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감사를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다윗이였습니다. 시편 116편 12절에 보면 다윗이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그는 은혜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고민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이게 고민입니다. 시편을 지어서 고백하고 찬양으로 고백하고 물질을 드려 고백하고 성전을 짓는데 자신의 전재산을 드려서 고백하고 그의 고민은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고 갚을 수 있을까. 다윗은 은혜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도 보십시오. 그는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였기 때문에 지하감옥에 갇혀도 매를 맞아도 억울한 오해를 받아도 하나님앞에 변함없이 찬양하고 변함없이 감사하고 기도합니다.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고 그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할수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깊은 신앙에 감사의 비밀을 깨닫는 감사의 은혜를 깨닫는 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마지막으로 생각할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감사는 더 큰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더 큰 축복의 통로입니다. 19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오늘 사마리아인에게 뭐라고 축복하십니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는 육신의 질병을 치료받은 것도 감사한데 영혼까지 구원받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목할게 하나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신기합니다. 그 사람이 와서 감사했으면 네 감사가 너를 구원했다라고 해야 할텐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보시기에 감사와 믿음은 같다는 것입니다. 믿음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건 잘못된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감사하는 성숙한 신앙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다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믿음이 축복의 조건이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 배후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뱃새다 광야에서 오천명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들을 돌려보내는데 모두가 굶주려 있습니다. 굶주린 무리들을 그냥 돌려보낼수가 없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것을 주어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빌립같은 사람은 회의적인 사람인데 와서 그럽니다. 선생님 여기에 이 많은 사람을 먹일 빵이 어디 있습니까. 또 떡이 있다고 한들 그 떡을 할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그는 매우 회의적인 발언을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떡이 어디있고, 돈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 안드레는 주님의 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회중석을 비집고 다니다가 한 소년의 오병이어 도시락을 가져온것을 알았습니다. 오병이어라는 것은 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 아주 가난한 소년의 점심도시락입니다. 그걸 들고 예수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도시락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누가복음 9장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그랬습니다. 놀랍게도 오병이어를 가지고 감사기도를 했는데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광주리가 남는 그런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바로 감사의 능력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축사하셨다는 것은 원어로 감사했다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기적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나 바클레이 같은 인본주의적인 설교자들은 반대로 해석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기도해서 나타난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자기 도시락내놓으니까 어른들이 그것을 보고 자기 먹을거 다 숨겨놨다가 미안해서 자기것을 다 내어놓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것은 산처럼 쌓여서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광주리가 남았다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해석이며 인본주의적인 해석입니다. 비신앙적인 해석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손을 들어 감사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바로 감사의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1절에 보면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뭍혔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조금만 더 일찍 도착하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안죽어도 되었을 텐데 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함께 무덤에 가자 무덤에 가서 무덤문을 열어라 했더니 무덤문을 왜 치우라고 합니까 지금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서 냄새까지 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돌문을 치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감사기도를 합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순님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기도를 하시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럴때 죽었던 나사로가 생명을 회복하고 걸어나온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들어 감사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시고 나사로를 향해 명령하실 때 나사로가 걸어나왔다 감사는 기적의 조건이요 축복의 통로인 줄 믿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스펄전목사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촛불앞에 감사하면 촛불을 놓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등을 주십니다. 전등을 놓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빛을 주십니다. 달빛을 놓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더 밝은 햇빛을 주십니다. 햇빛을 놓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햇빛보다 더 밝은 천국을 주십니다. 작은것에 감사하면 하나님은 점점 더 우리에게 큰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우리를 종말의 삶으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파멸의 삶으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에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는데 10명은 와서 매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땅은 성읍은 견고하고 키는 장대같이 크고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와 같고 잘못된 보고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평합니다. 여기까지 데리고 온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향해 돌을 들어 쳐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징계하시는데 불평하던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음으로 고백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외에는 장년들은 다 죽었습니다. 한사람돌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종말은 죽음입니다. 파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너희에게 응답할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린 여기서 다 죽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땅에 들어간줄 믿습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낳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우리를 파멸의 길로 불행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감사하되 풍성함으로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8장6절에 보니까 이것은 곧 적게 심는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진정 내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앞에 예물을 드리는 그 예물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입술로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물질을 드려서 우리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넉넉해서 감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박국기자의 감사는 감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박국 3장 10절 이하에 보면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해도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밭에 먹을 것이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어도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주앞에 감사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표현하고 주를 찬양하고 주와동행하는 행복하고 능력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0% 복 받을 짓(1)/ 마18:1-10/ 어린이주일설교/ 2015-05-03
100% 복 받을 짓(1) 마18:1-10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 18장입니다 제가 중요한 부분 절을 말할 때 우리 같이 읽습니다. 우리 5절부터 10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아멘 여러분 우리 5월 1일 노동절부터 어린이날까지 황금연휴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도 많이 아이들 데리고 출타를 한 것 같습니다. 출타한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어린이날 황금연휴에도 교회 와서 어린이 주일을 지키는 여러분들에게는 그분들보다 만 배의 복이 있을지어다. 아멘 한 사람에게는 만만 배의 복이 있을지어다. ㅎ ㅎ ㅎ 자 우리 주일 학생들 목사님 먼저보고 퀴즈 하나 낼 테니까 맞추는 사람에게는 목사님 안에는 언제나 용돈이 있어요. 마치고 줄 거예요. 서울 시민을 향한 말씀이 무슨 말씀일까? 모르겠어? 누구야? 서울 시민을 향한 말씀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ㅎ ㅎ ㅎ 내가 너무 수준 높은 개그 했나? 하나 더 마칠 때 가만히 생각했다가 답하는 사람 또 줍니다. 여러분 타이타닉 모르지요? 알아 아우 타이타닉에게 구명보트가 있는데 구명보트에는 몇 명의 사람이 탈수 있을까? 설교 마치고 할 거예요. ○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다.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이 주일인데 오늘 제가 설교 제목을“100% 복 받을 짓”해 놨어요. 조금은 거친 표현이지만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먼저 여러분 오늘 읽은 5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에게 무엇을 대접하고, 예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은, 남들이 없인 여기는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오늘부터 여러분들이 정말 어린아이들을 잘 대접하고 귀하게 여김으로,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가정과 여러분들의 생애와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놀라운 은혜의 복이 임하는 출발이 되는 어린이 주일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좋은 말씀만 한 것이 아니고요, 오늘 이 본문하고 마태복음 23장에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계세요.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은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은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1. 네 손발과 눈이 범죄하면 찍어 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 어린아이와 사회적인 약자들을 실족하게 하면 수호천사가 하나님께 고소하면 화가 있다. 데이빗 콜먼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 대한민국. 2400년이 되면 부산에서 마지막 출산 아이 울음소리. 그리고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되면 빼어 버리라, 두 눈 가지고 사는 것보다 한눈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이렇게 말을 해요. 그러면서도 10절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그것이 신화화 되다 보니까 천사론이 좀 약한데 유대교에는 사람들마다 수호천사 가 있다 이런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은 그 어린아이의 수호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은 하나님 보좌 앞에 가서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 뵈옵고 있기 때문에 그 수호천사가 하나님께 고소하게 되면 화를 당한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서도 여러분 7절에 보면 뭔가 하면 7절에 보면 어린 아이들이 실족 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세상에 화가 있다. 왜 세상에 화가 있는가 하면은 어린아이들이나 사회적인 약자들을 실족하게 하기 때문에 화가 있는데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은 화가 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이 그래 중요하냐 하면은 옥스퍼드대학에 인구 학자로서 아주 세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분이 데이빗 콜먼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말을 하기를 뭐라 했는가 하면은, 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랬습니다. 지금과 같은 출산율 지금과 같은 상태로 가면은 이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 제일 먼저 사라지는데 2100년쯤 되면 지금 인구의 절반으로 줄어들고요 2400년이 되면 부산에서는 마지막 아이의 태어나는 울음소리를 듣게 되고, 그 이후가 되면 서울과 수도권 인근에 여러분 굉장히 기뻐하세요, 이제는 2400년만 되면요 동백에 여러분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 하나가 한 사람씩 사는 그런 세상이 온다는 거예요. 여러분 참 우리가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지만은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화를 당한다는 말씀을 제가 마음에 담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대할 때에 왜 대한민국이 출산율이 낮고,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져야 되는 나라가 되는가 하면은,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날 좀 반성해야 됩니다. 자기 자녀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사람의 자녀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에 어린아이를 실족하게 한다고 할 때에 자기 자녀를 실족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자녀를 실족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과 유사한 본문이 누가복음 18장인데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부모들이 자기 아이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올 때에 머리에 안수해 주기를 바라면서 데려 오는데 제자들이 꾸짖으면서 내쫓은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도 자기 배에서 난 자식들은 예수님에게 안수 받아서 복 받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본능적인 마음이에요.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내쫓았고 꾸짖었다고요. 그럴 때 예수님이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용납하라 이렇게 말씀한 거예요. 여러분 예수 믿고 거듭나게 되면 제가 이야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어떻게 변화되는가 하면은 내 자식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녀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거듭난 자의 마음이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의 마음입니다. 왜 우리가 요즘 자녀를 키우면서 많은 사회적인 비용이 드는가 하면은 자기 자녀만 귀하게 여기다 보니까 지구상에서 우리나라같이 경쟁이 심한 사회가 없는 겁니다. 2. 성령 안에서 거듭나서 내 자녀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녀도 소중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100% 복을 받는 모든 부모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런 것들을 깨우쳐야 되는데 하나님 잘 믿으면 내 아들만 잘 된다고 하기 때문에 더 실족 하는 일로 화가 미치게 되는 겁니다. 우리 어린이 주일 맞이하면서 정말 우리 교회는 저는 그래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자녀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녀도 소중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100% 복을 받는 모든 부모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은요 사람들이 또 나가면서 잊어버려요, 그래서 제가 우리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우리 교역자들에게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름표를 다 달도록 해라. 자기 이름 달고 고 뒤에 부모 이름을 적도록 해라. 왜 그랬는가 하면은요, 저도요 이제 30대 제가 부목사일 때에는 면목동 동부 교회는요 한 천명 모이는데 얘들까지 2천명 되는 이름을요 전부 외웠어요. 그런데 요즘은 돌아서면 잊어버려. 얼마나 아이들에 미안한지 모르겠어요. 만날 때마다. 그래서 이름표를 붙이면 여러분 이런 것 한번 상상해 보세요. 교회 이렇게 와서 아이들이 복도에서나 아니면 마당에서나 지나갈 때에 목사님이나 교회 어른들이 우리 월삭 예배 때 했는데 한번 따라 합시다. 애들 말고 어른들 ㅎ ㅎ 다 크게 따라 하세요. 와, 네가 함상희 집사 딸이구나. 와, 네가 최정화 집사 아들이구나. 왜 목사님 함상희, 최정화만 이야기 합니까? 함상희, 최정화 집사 아들 보민이, 지환이가 우리 교회에 젓먹이 때 와서 나이가 같아요. 우리 교회가 10살인데 그 아이들이 10살이라고요. 정말 여러분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이들을 그렇게 대할 때에 아이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정말 설교 마치고 부를 건데요.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하지 않겠습니까? 큰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요, 그나마 우리 교회가 대한민국에서는 그래도 주일학교가 제일 많은 축에 들어가요, 어른 대비. 왜 그런가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목회의 방향이 그래서 그렀습니다. 우리 교회의 초창기에 저 모아미래도 상가에 있을 때 그때에도 저는 어떤 마음으로 목회를 했는가 하면 부잣집 아이들은 외국에 갔다가 어디에 갔다 왔다, 뭐 스키캠프 갔다 왔다, 이런 것 자랑할 때 기죽지 않도록 주일 학생들 어릴 때 다 데리고 대명 콘도 가 가지고 스키캠프 열고요, 오색그린호텔 가서 수련회 한 것은 내 아이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가장 가난한 집의 아이도 고급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이었어요. 오늘도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들이 아이들 볼 때에 이것 돈 드는 것 아니잖아요. 여러분 이것 힘 드는 것 아니잖아요. 선생님들이 명찰 붙여 주려고 할 필요도 없어요. 가장 간단한 것은 내가 명찰 달린 아이들에게는 만날 때마다 용돈을 줄려고 그래 ㅎ ㅎ.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야! 네가 최정화 집사 아들 지환이구나. 옛날에는 요만했는데 이만큼 컸구나.”라고 이야기를 해 줄 때 아이들이 신나잖아요. 또 아이들만이 아니고 따라 합시다. “와, 네 어머니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아느냐?” 하얀 거짓말. 아이들은 자기 엄마가 인정받는 공동체가 마음 든든하거든요. 우리 어린이주일 날 오늘 여기 있는 대로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그랬어요. 지금은 내 아이만 알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내 아이만 잘 되기를 바라는 극렬한 한국의 엄마들 때문에 화가 있는 겁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서 우리 교회에 모든 아이들이 내 아이가 소중한 만큼, 소중하게 여겨지고,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아이들 만날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정말 네 어머니가 얼마나 훌륭한지 아니? 내가 네 이름은 알았는데 네가 동현인 줄 몰랐구나.’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해 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가정과 생업 위에 또 우리 교회에 또 이 나라에 100% 복을 주는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헌금을 드리기까지 많은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 헌금 내 자녀 학원 하나 보내면 더 훌륭하고 더 성공적인 생애를 살 것 같은 마음을 주님 앞에 묻은 자가 드리는 예물입니다. 내 자녀만 성공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이기주의가 오늘 우리 대한민국을 극도의 경쟁의 사회로 만들어 버렸고, 어린 아이를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당하는 화를 우리가 당해서 세계적인 권위 데이비드 콜먼조차도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이 대한민국을 건질 유일한 방법은 복음밖에 없고 교회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아버지 하나님, 이제는 헌금을 내 아이 학원 하나 보내면 더 잘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지도 않는 그런 나라 내 자녀가 잘 되는 만큼, 남의 자녀도 잘 되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공교육만 해도 얼마든지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이 오늘도 이 예물을 드릴 때에 우리 안에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다음 세대에는 남을 이기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복된 생애를 살아가도록 성령의 역사는 혈연과 연고를 넘어서는 영원한 가족 공동체임을 교회들마다 선포되게 하시고, 그 말씀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희망이 되는 사회를 물려주는 지혜로운 어른들이 될 수 있도록 순종의 마음 더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저 어린이주일이라는 명칭 한 번 예배 때 떠들다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후에 정말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네가 어느 집사님 아들이구나, 네가 어느 집사님 딸이구나 하고 아이들 머리 쓰다듬어 주고 기도해 줌으로 이 아이들이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 없어요.’라는 찬양이 입에서 절로 나오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네 어머니가 얼마나 훌륭한 줄 아느냐?’ 우리 어른들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옴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초라한 어머니 때문에 아이들이 기죽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성령님 오늘 말씀이 그저 귓전에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심비에 새겨지도록 ‘어린 소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함이다.’라는 말씀에 따라 내 아이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녀도 소중이 여기는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고, 이 예물이 정말 주님 몸 된 교회를 세워서 사회에서 걱정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조차도 교회 때문에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생수가 흘러넘치는 교회의 초석이 되도록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 되도록 지금도 성령을 보내어 주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어린 아이를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사 품에 안고 축복하시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망극하신 사랑하심과 우리 가운데 내주하여서 내 배 아파 난 자식만큼 다른 사람의 자식도 사랑하고 귀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사회 속에 화를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받기로 그 믿음을 허락하시는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도 내 자녀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자녀도 소중히 여겨서 자녀들 때문에 쓸데없는 사회적인 비용이 낭비되지 않으므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 지어다. 아멘. 김종웅 목사(쉼과회복이있는교회)
100% 복 받을 짓(2)/ 엡6:1-3/ 어버이주일설교/ 2015-05-10
100% 복 받을 짓(2) 엡6:1-3 하나님의 말씀 에베소서 6장입니다 신약 성경으로 316면이 되겠습니다. 우리 1절부터 3절 그냥 읽지 마시고, 마음에 새기시고 이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이 저와 여러분들 우리 사회에 가득 차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다 같이 읽습니다.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성경의 부모님: 경외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만 쓰는 단어인데 부모에게도 동일하게 씁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반열에 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기독교를 근본도 없는 불효자식이라고 말을 하지만은, 그건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레위기 19장 3절에 보면 부모님을 경외하라 이렇게 말합니다. 경외라는 단어는 하나님에게만 쓰는 단어인데 부모에게도 동일하게 씁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님을 하나님의 반열에 둔다고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십계명 가운데 약속이 있는 두 계명이 있는데요, ‘천대까지 잘 된다.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한다.’라고 하는 주석이 붙어 있는 여러분 계명은 2계명하고 5계명입니다. 2계명은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땅에서 잘 될 거다. 천 대까지 복을 누린다.’ 그러고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생명이 길리라.’ 이렇게 말한다고요. 1. 성경은 노부모도 공경을 중요시 여긴다.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백성은 아멘 하라. 하나님은 연세 들고 힘없고 병든 부모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만큼 성경은 부모 공경을 중요시 여기고, 또 우리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부모님에게 잘 하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또 한 가지 우리가 아셔야 되는 것이 부모님은 돈이 많고 힘 있고 건강한 부모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연세가 드시고 돈이 없고 건강이 여의치 못한 부모를 공경하라, 주안에서 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저 우리가 예수 믿는 것만 부모에게만 공경을 하라는데 주안에서 in Christ 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져 있어요. 부모님이 연세가 들고, 돈이 없고 나에게 짐이 될 때에도 그 부모님을 공경하라. 그러면서도 모세오경에 보면 출애굽기 21장 15절에 보면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를 치는 자는 반듯이 죽일지니라. 그리고 17절에 보면 ‘ 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듯이 죽일지니라.’ 그래요. 신명기에는 자식이 술을 먹고 방탕하고, 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 부모는 자식을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데리고 와서 타이르고 그 말을 듣지 아니하면 성읍 사람들이 전부 돌로 쳐 죽여라. 옛날 우리나라도 그랬지요, 마을에서 말 안 듣는 자식은 멍석에 말아서 멍석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면 모든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을 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루트도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이야기 했다고요. 오늘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어버이날인데 그저 하루 엄마 아버지 잠깐 생각하고, 눈물 흘리고 돌아가는 시간이 아니고, 우리나라가 지금 굉장히 어렵고 힘들고 여러분들의 삶이 팍팍한데 나라 경제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러분들의 가정의 삶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지난주 이번 주 이야기 했지요.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길 때 하나님이 복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아이를 영접하는 거다 이랬다고요. 오늘 성경 말씀도 우리 하나님은 연세 들고 힘없고, 병든 부모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믿어서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다시 경제적으로 일으키는 귀한 교회가 되고, 여러분들 자신이 복 받는 삶의 출발점이 되시는 귀한 주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쉬워요. 여러분 정말 좀 그러세요. 무역 잘하고 제도 잘하고 이런다고 해서 나라 사는 것 아닙니다. 2.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요. 어린이와 어른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복 받는 비결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복을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 대제사장이 중요한 직임.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이 예수님에서 완성된 것.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요. 어떻게 복을 주는가? 두 가지입니다. 어린아이 무시하지 않고, 연세 드신 어른과 부모님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이것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 설교 했지만 여러분들이 한 번 더 가슴에 좀 담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민수기 6장을 한번 펴 보세요. 204면입니다. 22절부터 204면 다 펴세요, 오늘 설교 핵심만 간단하게 할 텐데 22절에 보세요.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그러면서 27절에 보세요, 그들은 여기에 그들은 누구지요? 그 앞에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아론은 대제사장이고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이같이 23절에서부터 26절의 내용과 같이 “내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복을 빌어 줘라.” 곧, 대제사장이 하는 일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복을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 대제사장의 중요한 직임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뭐 여러분들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하나님이니까 “하나님 축복하소서.” 이러는데, 그 말은 참 잘못된 거지요. 하나님보다 더 높은 분에게 “복을 빌어 주소서.” 이런 말로 하는데,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보다 “예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이 말이 가장 정확한 말입니다. 그럼 왜 그런가 하면, 제 이야기가 아니고, 구약신학의 가장 권위자라 하면 칼델리치 주석을 말합니다.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 신약에서도 그러거든요.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그래요. 그래서 앞에서 죽인다 이런 말은 이야기했던 대로 시민법이고,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이 예수님에서 완성된 것을 말하거든요. 그러면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의미는 무슨 말이냐 하면은 주문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보좌 앞에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 은혜의 보좌 우편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 축복을 해 주시는 거예요. 요즘 좀 쉬운 말로 하면, 여러분들이 “우리 아들 서울 대학 가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를 하면, 무엇이든지 기도 되요. 성경에 그래 놨어요. 무엇이든지 기도해도 되는데, 그 기도를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받아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하나님에게 빌어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빈 대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고요. 3. 칼델리치가 말하기를 “예수님이 이 땅의 대제사장의 직임의 축복권을 삼직에게 위임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축복을 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두 번째 로 교사, 세 번째 담임 목사님에게 축복권을 위임하셨다.”라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흔히들 말할 때, 기도 응답은 4가지라 하지요. 하나는 yes라는 응답, no라는 응답, wait라는 응답, 그 다음에 change라는 응답이 있지요. “하나님, 우리 아들 서울대학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이 가만히 보니까 “부모님, 죄송합니다. 얘는 보니까 서울대학보다 백석대학 가는 게 훨씬 낫겠습니다.” 싶을 때, 예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저 사람이 서울대학 보내기를 원하는데, 하나님 쟤는 백석대학 가는 것이 자기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좋겠습니다.”라고 간구해 주기 때문에 기도가 뭐로 들어와요? 체인지, 바꾸어서 돌어온다고요. 그것도 응답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성경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기도할 때마다 No로 응답 받는 것이 좋습니까, Wait로 응답 받는 것이 좋습니까, Change로 응답 받는 것이 좋습니까? 예스로 응답 받는 것이 좋아요? 물론 예스로 받아야지요. 그러려면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바꾸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제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 거거든요.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의 동기까지 아신다고요. 자 그런데 칼델리치가 이야기하기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대제사장의 직임 축복권을 삼직에게 위임해 놨다는 거예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삼직의 첫 번째가 누구냐 하면 부모라는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이 여러분들 자녀를 향하여 축복을 할 때에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모님을 거역하거나 무시하면 안 돼요. 아무리 연세가 많아도. 그런데 우리 부모들끼리 비밀 하나 이야기 합시다. 입으로는 자식에게 복을 빌지만 어떤 자식에게는 내가 부모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빕니다. 하나님 이 마음 알아요. ㅎ ㅎ 우리 쉼과 회복이 있는 교회 성도 여러분, 또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이 부모님이 진심으로 복을 빌 수 있는 그런 자녀로 변화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잖아요, 부모도.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잖아요. 왜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해야 되는가? 진심으로 부모가 하나님께 복을 빌 수 있도록 그래야 돼요. 또 두 번째로 교사에게 있다는 겁니다. 다음 주에 우리 스승의 주일이지만, 우리나라가 지금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엄마들 회개해야 돼요. 아이들이 선생님을 존경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것 같아요. 정말 여러분 선생님이 자기의 제자들을 향하여 진심으로 복을 빌어 줄 때, 예수님에게서 위임 받은 권세로 복을 빌어 줄 때, 그 자녀가 복 받는 줄 아셔야 됩니다. 선생님이 못난 선생님일수록 잘 해 줘 보세요. 아무리 악하고 못난 선생님이라도, 한 아이 정도는 좋아하고 복 빌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요. 선생님 비판하지 마세요. 여러분. 우리 흔히 뭐 그런 것 있잖아요. 연예인들이 대부분 보니까 학교 다닐 때에 좀 문제 아이였더라고요. 그 애들이 제대로 그 길 들어간 것이 뭡니까? “그 사람이 보고 싶다” 이런 데 보면 그 말썽쟁이, 정말 우리 반에 이 아이만 없으면 하는 그 아이를 어떤 선생님이 축복해 주고 쓰다듬어 준 그 아이는 잘 된다고요. 우리가 지금 이것 회복해 내야 됩니다. 세 번째로 담임 목사님에게 했다는 겁니다. 저도 여러분 참 교수 생활도 10년 하고, 목회도 하고 아버지도 되고 했는데 정말 목사는 여러분들이 선생님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여러분들의 시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부모의 마음을 주세요.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복을 빌기를 원하지만 그래도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목사님도 인간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복 빌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4. 공경은 카베드라는 말인데 무겁게 여긴다는 말, 부모님의 말씀을 경홀히 가볍게 듣지 말고 무겁게 들으세요. 선생님의 말씀을 무겁게 듣도록 하세요.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사회의 통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무겁게 들을 때, 하나님께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 복 빌어 주고 싶은가? 오늘 보면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공경은 뭐냐 하면은요 공경은 카베드라는 말인데 무겁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부모님의 말씀을 경홀히 가볍게 듣지 마세요. 무겁게 들으세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 돌아가셨습니까, 교회에 어른들의 말을 무겁게 들으세요.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은 선생님의 말을 흩은 말씀도 무겁게 듣도록 하세요. 교회에 와서 여러분들이 설교를 여러분들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통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무겁게 들으세요. 그런 사람을 복 주지만, 여러분 우리 부모들 솔직히 이야기 해 봅시다, 어떤 자녀에게 진정으로 마음이 갑니까? 내가 흘려 가는 이야기도 마음에 새기고 무겁게 듣는 사람 아닙니까? 오늘 이 마음 회복해 내야 되요. 선생님도 마음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리 성질이 더럽고 나쁜 선생님도 자기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 학생이 아주 귀하게 여겨지거든요. 목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님에게 뭐 잘 하는 것, 설교 말씀을 무겁게 듣고, 교회의 광고를 무겁게 들을 때, 하나님께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런 겁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한달 전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우리 이태경 집사님이 오산에 병원을 하는데 이층이 늘 비어 있었는데 건강검진센터를 만들었잖아요. 내가 물어 보니까 거기엔 아직 적자가 많이 납니다. 이래서 제가 아 우리 교인들 가운데 국가에서 주는 건강 검진 받으러 가라고 교회에서 차까지 대절하고, 또 다 가면은 디시도 해 준다고 했는데, 그 말을 무겁게 들은 사람 한 사람 있습니다. 딱 한 명 갔어요, 누가 간줄 아세요? 우재만 장로님이 갔어요. 그런데 장로님이 가서 건강 검진 받았는데 대장에 용정이 여러 개 있는데 하나는 너무나 커서 여기서 안 된다고, 강동경희대 가라고, 갔는데 암이었어요. 그래서 조직 검사 결과 암으로 나왔는데 이틀 전에 저에게 와서 목사님 내일 결과 나오는데 하고, 자신이 무릎을 꿇고 안수 해 달라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연세도 저보다 많잖아요. 내일 모래 70이잖아요. 기도했는데 그 다음날 참 할렐루야 목사님 전이도 안 되고 깨끗하고 수술 잘 되었답니다. 여러분 저를 주목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들이 부모의 말을 중하게 듣고, 아이들에게 선생님 말을 중하게 듣고, 교회의 설교나 광고를 중하게 들으세요. 그것 어렵지 않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요 쉬운 것은 잘 안 들으려 하고 어려운 것만 주면은 그것 뭐 권위 있는 줄 안다고요, 예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 맡기는 거예요. 오늘도 여러분 보시면서 제가 참 우리 유치부 얘들이 복 받을게 제가 그랬잖아요. 아이들에게 명찰 달으라고, 왜 저도 이름 다 못 외우겠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도 그런 이야기 했지 않습니까? 아이들 명찰 달면 뭐 해주라고요? 또 다 잊어버렸나? 한 번 따라 합시다. “와 네가 박지훈 집사 아들이냐?” 왜 안 따라하나?ㅎ ㅎ 여러분 복도에서 그래 보세요. 우리 교회 정말 좋아집니다. 교회 뭐 여러분들이 전 재산 팔아 가지고 이러는 것은 이단이고요. 이것 작은 것 하나 못합니까? 그러면 정말 우리 교회 차고 넘쳐요. 오늘 그래서 제가 엘리베이터 내리는 데 박은세 해 놨더라고. 그 동안에 이름은 알았지만 얼굴은 몰랐거든요. 박지훈 해 놔서 내가 “아, 네가 박지훈 집사 딸이구나.” 하고 내가 손 여기로 줬잖아. 스마일. 5.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자기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다. 고려장 하려고 어머니 지고 갈 때 나뭇잎 따서 버리는 어머니 마음(아들이 돌아갈 길 잃어버릴까 봐). 고려장 시대 원나라 사신의 숙제, 통나무 밑동과 새끼 말? 어머니의 지식으로 나라의 큰일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 작은 것 한번 해 보자고요. 그리고 제가 한 대로 그대로 했어요? 내가, “야, 박지훈 집사님, 우리 교회 최고다. 얼마나 좋은데. 너 아빠 좋은 분 두어서 좋겠다.”고. 여러분, 이것이 우리나라 살리는 길이고, 자신이 사는 길임을 아셔야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해 보세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 다른 것은 몰라도 제가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이 참 편하게 하잖아요. 우리 김종대 목사님도 뭐 축도하겠지만, 이성근 장로님, 다른 교회에 일생 동안 해 왔지만 우리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잖아요. 이성근 장로님 여기에서 다른 데 가보세요. 은퇴하고 가보면 출석할 교인이 없어 눈물 흘린다고. 사람은 돈으로 경제적인 가치로 보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부모들에게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부모들은 자식에게요 신앙의 유산 물려주려고 해야 돼요. 그 신앙의 유산이라는 게 주일날 교회 가고 십일조 하라는 것만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 주세요. 왜 경외함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자기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해요. 그것 아세요? 또 하나님을 경외하면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겨요. 정말 그렇게 될 때, 우리나라 살아나는 겁니다. 어떠한 경제정책 쓸모없습니다. 이젠 여러분 수출 대한민국 아닙니다. 건설 대한민국 아닙니다. 이제는 사람을 귀하게 여길 때 우리나라 경제 살아나요. 누가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 하나님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이지요. 뭐 타 종교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야기 할게요, 여러분 우리 저도 뭐 요즘 등산 자주 가니까 절에 가보면 뭐 위패들 49제 지낸다고 쫙 해 놓은 것들 이래 보는데요, 여러분 우리나라 고려장이 어느 시대에 생긴 겁니까? 고려 시대입니다. 그 고려 시대는 불교의 가장 중흥 기였어요. 아시지요, 그 고려장 시절에 엄마 지게 지고 산에 어머니 버리러 가는데 엄마는 지게에서 나뭇잎 따서 뚝뚝 버립니다. 엄마 왜 그래요 하니까 너 돌아갈 길 잃어버릴까 봐, 그게 부모에요. 그것이 스승이고 목사의 마음이에요. 여러분 또 고려장 이야기 있잖아요, 중국 원나라에서 우리나라 고려장 힘들게 하려고, 사신이 와서 숙제 낸 것, 아시지요? 나무 한 통을 내놔 놓으면서 똑 같은 나무를 어느 것이 밑동이고 어느 것이 위냐? 사법 고시 수석 한 대신들이 모여서 그 문제 못 풀고 끙끙거릴 때, 어머니 고려장 하는 것 하지 못해서 다락방에 숨겨 놓은 대신이 근심 어린 눈빛 있으니까 엄마는 애들 눈빛만 봐도 알잖아요. “무슨 일이 있냐?” “예, 오늘 원나라 사신이 와서 이 숙제 냈는데 이것 풀지 못하면 나라 큰일 납니다.” 하니까 “뭔데?” “어머니, 보세요. 이 통나무가 어디가 밑이고 어디가 위인 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어허, 뭐 그런 것 걱정하냐? 그 통나무 물에 넣어 봐라. 가라앉는 쪽이 밑동이니라.” 이것은 스마트폰의 지식 가지고 되는 게 아니에요. 요즘은 참 세상이 거꾸로 돼 가지고 오래 산 사람이 짧게 산 사람에게 묻고 사니까 권위가 사라지는 것 같은데, 그 지식은 사용법은 없더라도, 삶의 지혜는 어른들에게 있어요. 그러고 나니까 또 원나라 사신이 말 두 마리를 가지고 왔는데 똑 같이 생긴 말보고 어느 것이 어미고 어느 것이 새끼냐? 사법 고시 수석 한 사람도 모른 거예요. 전전긍긍하니까 또 어머니에게 와 가지고 그렇다고 하니까 “뭐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느냐? 두 마리 앞에 말 여물을 갖다 놔 봐라. 먼저 먹는 말이 새끼니라.” 할렐루야. ㅎ ㅎ ㅎ 여러분, 옛날에 누가 그랬어요. “미안합니다, 이런 말해서. 똥은 먼저 누는 게 깔리지만, 사람은 먼저 나는 게 결코 깔리는 법이 없대요. 요즘은 수세식이라 그렇지도 않겠지만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금 어려운 것은 정말 모든 사람을 경제적인 논리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서, 여러분 참 젊은 사람들 어린 아이들도 존귀히 여김을 받는 교회, 또 이제 정말 내 한 자리 지키는 것도 힘든 연세 드신 분들 존귀히 여김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이 여러분들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에 넘쳐 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특별히 어머니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들 아이들에게 귀찮다고 스마트폰 주고, 텔레비 보게 하지 말고요, 성경을 읽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는 젊은 어머니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봉헌 기도◈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이 언제부터 머리 좋은 사람들만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이 예물 속에 있는 헌금의 정신이 잘 실천이 되어져서 머리는 좋지 못해도 몸 좋은 사람, 손재주 있는 사람 아니면 정말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장애우들까지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 땅이 되도록 드리는 헌금의 정신이 모든 사람들 속에 살아나는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축도◈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가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내게 비치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주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그들을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하나님의 말씀과 어버이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중하게 여겨서 순종함으로 자자손손 복을 받기를 원하는 믿음의 권속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 땅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김종웅 목사(쉼과회복이있는교회)
100%입니까?/ 행1:3-11/ 2011-07-29
100%입니까? 행1:3-11 얼마 전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한 여자 연극배우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녀는 ‘후배들이 무서워하던데 왜 그러냐’는 진행자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배우가 자신의 본업인 연극을 할 때 연기를 잘못하면 ‘100% 다 한거야?’라고 야단을 칩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행 1:4∼5).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며 성령의 권능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성도의 인생입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으로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되는 일입니다(행 1:8).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수님을 전하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해야 그 존재론적 목적을 다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불신자들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중요한 기관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애굽에서 바로 왕에게 노예로 학대를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데 10번째 재앙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먹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애굽 내 사람과 짐승 가운데 장자 모두를 죽이는 재앙이 내릴 때 그 집에는 재앙이 넘어가고 죽음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이 절기는 신약에서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언약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보면 예수님을 ‘유월절 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월절 양의 피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6장 27∼28절에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월절 양의 고기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성찬입니다. 세상에서 마귀의 종이 돼 있는 우리를 위해 양되신 예수께서 대신 죽으시고 그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시고 그의 찢어진 몸으로 영생의 양식이 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습니다(롬 5:8). 이 해방이 우리 자자손손으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얻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감격이 찬송입니다. 그 감격이 박수를 치게 하는 것입니다 손을 들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21절에서는 “그는 네 찬송이시오” 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해 주신 은혜가 나의 노래가 되고 내 노래의 가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송입니다. 출애굽기 12장은 모세가 출애굽을 하면서 홍해를 건너가 하나님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 또한 찬양을 합니다. 이 감격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감격을 전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장 9∼11)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시키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100% 순종하다가 재림하시는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이바울 목사(거창순복음교회)
100곱절 농사/ 눅8:4-15
100곱절 농사 눅8:4-15 유대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종려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 학교에 다닐 때면, 자라난 종려나무가 열매를 맺어 아이의 학비를 책임진다 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종려나무는 500년을 살면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니 좋은 나무 한 그루가 바로 심어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놀라게 됩니다. 시편1편 말씀은 하나님 말씀을 받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 합니다. 하나님 말씀 한 구절만 사람의 내면에 잘 심겨져도 그 사람의 생애가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 한 그루가 시냇가에 심겨질 때, 한 사람의 일생을 책임지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 한 구절이 잘 심겨지면 그 사람의 영생을 책임집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여러 동네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주님은 이런 모습을 보실 때,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저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많은 열매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100곱절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복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7:1을 보면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셨다\\\\\\\" 하십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묵상한 8:1에도 \\\\\\\"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런 모습 속에서 어떻게든 하나님 나라의 영생의 축복을 주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만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주제는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축복해주고 싶으셔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는 마음바탕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마음 밭이 좋아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마음 밭이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도 열매가 없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비를 주시지만 그 비를 받는 그릇이 엎어져 있으면 소용없다는 원리와 상통합니다. 오늘 말씀의 개요가 무엇입니까?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여러 곳에 떨어졌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길가에도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밟히기도 했습니다. 새들이 날아와서 먹었습니다.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 싹이 났지만 습기가 없으니 말라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습니다. 잘 자라나 싶더니 가시가 기운을 막아버립니다. 많은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나서 100배의 결을 맺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 비유를 인간의 머리에 비유해서 받아들였습니다. \\\\\\\'길가는 귓가요, 가시떨기는 두뇌요, 바위는 마음이요, 옥토는 영혼이다\\\\\\\' 흥미 있는 해석입니다. 영혼 깊숙이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의 생애를 움직인다고 받아들인 것이죠. 사도 바울은 풍랑이 2주간을 몰아갔지만 ,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지만, 그는 주님께서 그 영혼 깊이 담아주신 \\\\\\\'자신이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는 말씀을 신뢰하였으므로 그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을 확신하고 로마까지 달려갔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말씀을 영혼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영혼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영혼 깊은 곳에 종려나무와 같이 깊이 심겨진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1. 마음을 길처럼 방치하지 맙시다. 농부가 손으로 씨를 뿌릴 때는 좁은 길에도 씨가 뿌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 떨어진 씨는 당연히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농부들이 지나다닐 때에 그 발에 밟히거나 새들이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2) 예수님의 해석에 따르면, 이 사람도 말씀을 들은 자입니다. 다만 길가란 말이 의미하는 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곳이지 곡식이 자라는 곳은 아닙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너무 그 마음이 세속화 되어서 말씀이 역사할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발람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중심이 너무 세속화 되어 있어서 그 말씀이 전혀 그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나귀에게 꾸중을 들을 만큼 영적으로 어둡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 자기는 뭔가 하나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결국은 사탄의 손 안에서 놀아났을 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나라가 부요해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빼앗아 갑니다.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샹하이에서 닝포라는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는 배 위에서 피터라는 중국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수년 동안 살았던 사람이었고, 기독교에 대하여 조금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복음의 능력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허드슨 테일러가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려 힘쓰는 친절을 알고 있었습니다. 배가 성키양 시에 가까워졌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하선할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그때, \\\\\\\'첨벙\\\\\\\'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직감적으로 갑판으로 달려나가 피터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예, 저기 빠져버렸습니다.\\\\\\\" 사공들은 무심히 뱉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배를 멈추게 하고 물 속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해안 가를 빠져나가는 조류 때문에 그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절박한 그의 눈에 예인망 그물을 내리고 있는 어부들이 보였습니다. \\\\\\\"여보세요. 사람 좀 살려 주세요. 사람이 빠졌습니다.\\\\\\\" \\\\\\\"안됩니다. 우리는 고기를 잡느라 무척 바쁩니다.\\\\\\\" \\\\\\\"충분히 보상해 줄 테니 어서 와서 도와주세요.\\\\\\\" \\\\\\\"얼마나 주겠소?\\\\\\\" \\\\\\\"이야기만 하지 말고 빨리 구해주세요. $5 주겠소.\\\\\\\" \\\\\\\"$30이상 주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내게는 그만한 돈이 없어요. 있는 것 다 줄테니 빨리 구해주세요.\\\\\\\" \\\\\\\"얼마나 갖고 있소?\\\\\\\" 오! 맙소사 잘 모르지만 $14은 될거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물을 던져 물에 빠진 피터를 건져왔습니다. 그러나 피터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악한 자\\\\\\\'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마귀는 피터가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이토록 간교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이교도인 어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어두움의 영들의 역사 앞에서 마냥 당하고만 있을 수 없는 절박함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본다면,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영원한 죽음에 떨어져 가는 사람들은 단지 피터뿐이 아닙니다. 오늘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뿌려진채 오고 가는 마귀들의 밥이 되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주워서 좋은 밭에 심어줄 일꾼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길가와 같이 방치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마음을 활짝 열어두어서는 안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에는 하나님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밟아 버리며, 사탄이 새처럼 날아와서 말씀을 다 도적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발람처럼 세속화된 사람 안에서 마음대로 역사하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2. 마음을 바위처럼 갖지 마십시오.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자라지 못합니다. 밭에 바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바위 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을 수도 있구요. 그러나 이런 땅에서는 싹이 나서 조금 자랄 수는 있지만, 뿌리 밑에 수분이 부족하고 자양분이 없으므로 해만 뜨면(마 13:6) 곧 말라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12) 이 사람은 전자의 말씀을 들은 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사람입니다.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그에게 있는데 그것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아합이나 이세벨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엘리야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적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3년 가뭄 후에 기도를 통해 비가 내리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앙체험을 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 내면이 바윗덩어리 같아서 도무지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자아라는 덩어리가 바위와 같이 굳어 있어서 그 자아가 하나님 말씀이 역사하는 걸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해가 떠오르면, 그냥 시들고 말지요. 시험이 오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이런 사람의 신앙입니다. 바위 위에 뿌려진 씨는 시험 앞에 무너지는 사람처럼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의 뿌리가 없으니 시험을 받으면 배반합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어머니는 강한 자아를 깨뜨려 말씀을 받아들이 좋은 예가 됩니다. 그녀는 성경공부반에 들어갔다가 \\\\\\\'주님께서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시험이 닥쳐왔습니다. 그 남편이 일하는 도중 머리를 다쳐 죽게 된 것입니다. 혼수상태에 빠져 숨을 헐떡이는 그를 의사들은 모두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닫지 않았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불가능하다고 선포하고 물러갔는데도 그녀는 마음을 하나님께 열 었습니다. 마음을 믿음으로 잘 관리한 결과 그녀는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을 바위처럼 굳게 닫고 있었다면 그녀는 시험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과 같은 믿음의 용장도 그 가정에서 자라날 수 없었을 것이구요. 이 시대의 믿음의 용장 빌리 그레함은 시험을 이기는 어머니를 통해 믿음의 용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성장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위덩어리 같이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바위같은 마음은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는 하지만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잠깐 믿을 뿐 시험만 오면 끝장나고 맙니다. 내 마음이 바위와 같이 굳어질 때, 우리는 바위를 치우실 수 있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바윗덩어리 같은 나의 자아를 깨뜨리고 주님 을 좇을 수 있게 하옵소서!시험에 들지 않도록 제 마음 속의 바위를 녹여주 옵소서!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6,7) 마음이 굳어짐을 느낄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합시다. 3. 마음을 가시떨기로 무성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팔레스틴에는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들이 많이 자란답니다. 헥커 (Hacker)와 같은 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성경에는 가시나 가시 종류의 식물이 22종입니다. 그런데 가시 떨기 속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왕성한 성장력들 지닌 가시떨기에 자양분(滋養分)을 빼앗겨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14절)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기가 막힌 신앙입니다 1]\\\\\\\'이생의 염려\\\\\\\' 곧, 살아가는 염려에 막힙니다. 2]재리의 유혹에 막힙니다. 3]일락(逸樂), 곧 세상에서 육신을 즐기는 일에 막힙니다. 이런 일들이 가시가 되어 결실을 막아버립니다. 얼른 보기에는 움이 돋고 싹도 나서 자라는 것 같은데 결실을 못하게 합니다. 행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재리의 유혹에 막혀 실족하고 맙니다. 솔로몬 왕은 지혜와 신분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출중하였지만 일락에 기가 막혀 실족합니다. 행8장에는 시몬이 재리의 유혹에 빠져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을 봅니다.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여러 가지 장기들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기들이 제 구실을 잘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콜레스테롤이라고 하는 기름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제거하지 않으면 심장도 막힙니다. 제 기능을 못합니다. 동맥에 경화가 옵니다. 전신에 마비가 옵니다. 무엇이 우리 영혼의 기능을 막아버립니까? - 세상 염려가 막아요. - 재물의 욕심이 막습니다. - 세상에 즐길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육신의 즐거움(逸樂)들이 막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들어도 결실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막혀 있을 뿐입니다. 탕자가 왜 크게 낭패할 뻔했습니까? 재리와 일락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버지와의 모든 관계를 막아버렸습니다. 막힌 것입니다. 그는 이 막힘의 문제를 어떻게 뚫었습니까? 그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회복시키고 교제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가 재리의 유혹과 일락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입니다. 아버지께 감사하며,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면서 그분과의 교제를 회복할 때, 이 막힘의 문제를 뚫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을 경계합시다. 우리 시대엔 너무 돈들을 좋아합니다. 돈의 유혹에 중독되지 마세요. 재리의 유혹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스포츠를 비롯해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락거리들이 우리 마음에 온통 가득 자리하도록 방치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을 유념해야 합니다. 가시떨기와 같아서 결국 우리 안에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루터의 말대로 날아 다니는 새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새들이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맺 는 말 마음을 좋은 땅처럼 관리합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지면 나서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구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십시오 듣고 지키어 인내합시다. 반드시 결실이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에드 킴벌은 소심하고 신경이 예민한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구두 방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일하는 한 소년을 그의 주일학교로 초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구두를 만들어 파는 소년에게 좀처럼 호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그 소년이 학급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킴벌은 주님의 말씀을 그 소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얼마 후에 복음으로 세계를 흔든 D.L.무디였습니다. 무디가 유럽집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한 중년 신사 한분이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그 중년 신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그 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전생애를 중국과 인도, 아프리카에서 개척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가 바로 WEG의 창설자인 C.T. Studd입니다. 모다케이 함(Mordacai Ham)이란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그 또한 에드 킴벌에 의하여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전도집회를 인도하고 있었을 때, 젊은 운동 선수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왔습니다. 그 가 바로 빌리 그레함(Billy Graham)입니다. 빌리 그레함으로 인하여 유명한 감옥 전도자인 척 콜슨(Chuck Colson)이 주님 앞에 돌아 왔습니다. 좋은 밭에 심겨진,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의 예입니다.
100곱절 농사/눅8:4-15 2002-11-05 10:18:15 read : 2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유대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종려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 학교에 다닐 때면, 자라난 종려나무가 열매를 맺어 아이의 학비를 책임진다 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종려나무는 500년을 살면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니 좋은 나무 한 그루가 바로 심어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놀라게 됩니다. 시편1편 말씀은 하나님
100곱절 농사/눅8:4-15 2002-11-05 10:18:15 read : 2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유대인들은 아이를 낳으면 종려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 학교에 다닐 때면, 자라난 종려나무가 열매를 맺어 아이의 학비를 책임진다 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종려나무는 500년을 살면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니 좋은 나무 한 그루가 바로 심어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놀라게 됩니다. 시편1편 말씀은 하나님 말씀을 받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 합니다. 하나님 말씀 한 구절만 사람의 내면에 잘 심겨져도 그 사람의 생애가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 한 그루가 시냇가에 심겨질 때, 한 사람의 일생을 책임지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 한 구절이 잘 심겨지면 그 사람의 영생을 책임집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여러 동네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주님은 이런 모습을 보실 때,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저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많은 열매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100곱절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복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7:1을 보면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셨다" 하십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묵상한 8:1에도 "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런 모습 속에서 어떻게든 하나님 나라의 영생의 축복을 주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만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주제는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축복해주고 싶으셔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는 마음바탕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마음 밭이 좋아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마음 밭이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도 열매가 없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비를 주시지만 그 비를 받는 그릇이 엎어져 있으면 소용없다는 원리와 상통합니다. 오늘 말씀의 개요가 무엇입니까?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여러 곳에 떨어졌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길가에도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밟히기도 했습니다. 새들이 날아와서 먹었습니다.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 싹이 났지만 습기가 없으니 말라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습니다. 잘 자라나 싶더니 가시가 기운을 막아버립니다. 많은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나서 100배의 결을 맺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 비유를 인간의 머리에 비유해서 받아들였습니다. '길가는 귓가요, 가시떨기는 두뇌요, 바위는 마음이요, 옥토는 영혼이다' 흥미 있는 해석입니다. 영혼 깊숙이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사람의 생애를 움직인다고 받아들인 것이죠. 사도 바울은 풍랑이 2주간을 몰아갔지만 ,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지만, 그는 주님께서 그 영혼 깊이 담아주신 '자신이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는 말씀을 신뢰하였으므로 그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을 확신하고 로마까지 달려갔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말씀을 영혼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영혼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영혼 깊은 곳에 종려나무와 같이 깊이 심겨진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1. 마음을 길처럼 방치하지 맙시다. 농부가 손으로 씨를 뿌릴 때는 좁은 길에도 씨가 뿌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곳에 떨어진 씨는 당연히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농부들이 지나다닐 때에 그 발에 밟히거나 새들이 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2) 예수님의 해석에 따르면, 이 사람도 말씀을 들은 자입니다. 다만 길가란 말이 의미하는 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곳이지 곡식이 자라는 곳은 아닙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너무 그 마음이 세속화 되어서 말씀이 역사할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발람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중심이 너무 세속화 되어 있어서 그 말씀이 전혀 그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나귀에게 꾸중을 들을 만큼 영적으로 어둡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귀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 자기는 뭔가 하나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결국은 사탄의 손 안에서 놀아났을 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나라가 부요해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빼앗아 갑니다.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샹하이에서 닝포라는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는 배 위에서 피터라는 중국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수년 동안 살았던 사람이었고, 기독교에 대하여 조금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복음의 능력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허드슨 테일러가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려 힘쓰는 친절을 알고 있었습니다. 배가 성키양 시에 가까워졌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하선할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그때, '첨벙'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직감적으로 갑판으로 달려나가 피터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예, 저기 빠져버렸습니다." 사공들은 무심히 뱉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배를 멈추게 하고 물 속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해안 가를 빠져나가는 조류 때문에 그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절박한 그의 눈에 예인망 그물을 내리고 있는 어부들이 보였습니다. "여보세요. 사람 좀 살려 주세요. 사람이 빠졌습니다." "안됩니다. 우리는 고기를 잡느라 무척 바쁩니다." "충분히 보상해 줄 테니 어서 와서 도와주세요." "얼마나 주겠소?" "이야기만 하지 말고 빨리 구해주세요. $5 주겠소." "$30이상 주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내게는 그만한 돈이 없어요. 있는 것 다 줄테니 빨리 구해주세요." "얼마나 갖고 있소?" 오! 맙소사 잘 모르지만 $14은 될거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물을 던져 물에 빠진 피터를 건져왔습니다. 그러나 피터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악한 자'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마귀는 피터가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이토록 간교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이교도인 어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어두움의 영들의 역사 앞에서 마냥 당하고만 있을 수 없는 절박함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본다면,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영원한 죽음에 떨어져 가는 사람들은 단지 피터뿐이 아닙니다. 오늘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뿌려진채 오고 가는 마귀들의 밥이 되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주워서 좋은 밭에 심어줄 일꾼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길가와 같이 방치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이 왕래하도록 마음을 활짝 열어두어서는 안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에는 하나님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이 밟아 버리며, 사탄이 새처럼 날아와서 말씀을 다 도적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발람처럼 세속화된 사람 안에서 마음대로 역사하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2. 마음을 바위처럼 갖지 마십시오.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자라지 못합니다. 밭에 바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바위 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을 수도 있구요. 그러나 이런 땅에서는 싹이 나서 조금 자랄 수는 있지만, 뿌리 밑에 수분이 부족하고 자양분이 없으므로 해만 뜨면(마 13:6) 곧 말라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12) 이 사람은 전자의 말씀을 들은 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사람입니다.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가 그에게 있는데 그것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아합이나 이세벨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 사람인 엘리야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적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3년 가뭄 후에 기도를 통해 비가 내리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앙체험을 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들 내면이 바윗덩어리 같아서 도무지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자아라는 덩어리가 바위와 같이 굳어 있어서 그 자아가 하나님 말씀이 역사하는 걸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해가 떠오르면, 그냥 시들고 말지요. 시험이 오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이런 사람의 신앙입니다. 바위 위에 뿌려진 씨는 시험 앞에 무너지는 사람처럼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의 뿌리가 없으니 시험을 받으면 배반합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어머니는 강한 자아를 깨뜨려 말씀을 받아들이 좋은 예가 됩니다. 그녀는 성경공부반에 들어갔다가 '주님께서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시험이 닥쳐왔습니다. 그 남편이 일하는 도중 머리를 다쳐 죽게 된 것입니다. 혼수상태에 빠져 숨을 헐떡이는 그를 의사들은 모두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살아 계심'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닫지 않았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불가능하다고 선포하고 물러갔는데도 그녀는 마음을 하나님께 열 었습니다. 마음을 믿음으로 잘 관리한 결과 그녀는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을 바위처럼 굳게 닫고 있었다면 그녀는 시험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과 같은 믿음의 용장도 그 가정에서 자라날 수 없었을 것이구요. 이 시대의 믿음의 용장 빌리 그레함은 시험을 이기는 어머니를 통해 믿음의 용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성장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위덩어리 같이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바위같은 마음은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는 하지만 뿌리를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잠깐 믿을 뿐 시험만 오면 끝장나고 맙니다. 내 마음이 바위와 같이 굳어질 때, 우리는 바위를 치우실 수 있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바윗덩어리 같은 나의 자아를 깨뜨리고 주님 을 좇을 수 있게 하옵소서!시험에 들지 않도록 제 마음 속의 바위를 녹여주 옵소서!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6,7) 마음이 굳어짐을 느낄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합시다. 3. 마음을 가시떨기로 무성하게 해서도 안됩니다. 팔레스틴에는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들이 많이 자란답니다. 헥커 (Hacker)와 같은 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성경에는 가시나 가시 종류의 식물이 22종입니다. 그런데 가시 떨기 속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왕성한 성장력들 지닌 가시떨기에 자양분(滋養分)을 빼앗겨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14절)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기가 막힌 신앙입니다 1]'이생의 염려' 곧, 살아가는 염려에 막힙니다. 2]재리의 유혹에 막힙니다. 3]일락(逸樂), 곧 세상에서 육신을 즐기는 일에 막힙니다. 이런 일들이 가시가 되어 결실을 막아버립니다. 얼른 보기에는 움이 돋고 싹도 나서 자라는 것 같은데 결실을 못하게 합니다. 행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재리의 유혹에 막혀 실족하고 맙니다. 솔로몬 왕은 지혜와 신분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출중하였지만 일락에 기가 막혀 실족합니다. 행8장에는 시몬이 재리의 유혹에 빠져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을 봅니다.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여러 가지 장기들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기들이 제 구실을 잘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콜레스테롤이라고 하는 기름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기름을 제거하지 않으면 심장도 막힙니다. 제 기능을 못합니다. 동맥에 경화가 옵니다. 전신에 마비가 옵니다. 무엇이 우리 영혼의 기능을 막아버립니까? - 세상 염려가 막아요. - 재물의 욕심이 막습니다. - 세상에 즐길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육신의 즐거움(逸樂)들이 막습니다.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들어도 결실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막혀 있을 뿐입니다. 탕자가 왜 크게 낭패할 뻔했습니까? 재리와 일락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버지와의 모든 관계를 막아버렸습니다. 막힌 것입니다. 그는 이 막힘의 문제를 어떻게 뚫었습니까? 그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회복시키고 교제를 회복한 것입니다. 그가 재리의 유혹과 일락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입니다. 아버지께 감사하며,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면서 그분과의 교제를 회복할 때, 이 막힘의 문제를 뚫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을 경계합시다. 우리 시대엔 너무 돈들을 좋아합니다. 돈의 유혹에 중독되지 마세요. 재리의 유혹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스포츠를 비롯해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락거리들이 우리 마음에 온통 가득 자리하도록 방치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만악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을 유념해야 합니다. 가시떨기와 같아서 결국 우리 안에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루터의 말대로 날아 다니는 새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새들이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맺 는 말 마음을 좋은 땅처럼 관리합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지면 나서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구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십시오 듣고 지키어 인내합시다. 반드시 결실이 있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에드 킴벌은 소심하고 신경이 예민한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구두 방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일하는 한 소년을 그의 주일학교로 초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구두를 만들어 파는 소년에게 좀처럼 호감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그 소년이 학급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킴벌은 주님의 말씀을 그 소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얼마 후에 복음으로 세계를 흔든 D.L.무디였습니다. 무디가 유럽집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한 중년 신사 한분이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그 중년 신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그 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전생애를 중국과 인도, 아프리카에서 개척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가 바로 WEG의 창설자인 C.T. Studd입니다. 모다케이 함(Mordacai Ham)이란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그 또한 에드 킴벌에 의하여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전도집회를 인도하고 있었을 때, 젊은 운동 선수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왔습니다. 그 가 바로 빌리 그레함(Billy Graham)입니다. 빌리 그레함으로 인하여 유명한 감옥 전도자인 척 콜슨(Chuck Colson)이 주님 앞에 돌아 왔습니다. 좋은 밭에 심겨진,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의 예입니다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2006-01-02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주 속에는 수많은 혹성들이 있지만 지금까지는 생명체는 지구에만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얼마인가 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따라 다릅니다만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구에 있는 생명공동체에 이미 심각한 종말의 징후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현상과 오존층 파괴로 인한 기상의 이변과 생태계 파괴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가 지니고 있는 화석연료는 앞으로 50여 년간 사용할 분량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대체 에너지 개발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사막화 현상은 식량문제와 생태계의 보금자리를 위협해가고 있으며 수질오염과 토양산성화, 산소생산량 부족 등은 모든 생명체의 목을 죄어서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식품이 상품으로 둔갑하고 농사가 사업으로 변하면서, 온갖 독성약물과 성장촉진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며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상품을 생산함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독을 먹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환경호르몬의 폐해를 입으며 불안한 미래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앞으로 생명복제기술이 보편화되어서 인간복제까지 감행할 경우에 야기될 창조질서의 대혼란을 예상할 때 지구생명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예측은 현재까지 나타나고 있는 징후들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죄성(罪性)”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악마의 계략에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죽어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종말 을 재촉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일례로 나무들을 보면 나무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는 본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지 접붙이기를 하기 위해 돌감나무 밑동을 잘라버리면, 평소 같으면 싹이 나지 않을 부위이지만 그 밑동에서 싹이 나고 왕성하게 줄기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꺾꽂이를 하기 위해 나무로부터 나뭇가지 일부를 잘라내어 땅에 꽂아 두면 가지 밑 부분에서 뿌리가 생겨나는 것도 잃어버린 뿌리 부분을 복원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 즉,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나무의 본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나무의 성질을 이용해서 접붙이기도 하고 꺾꽂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본성, 이런 본능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동식물들에게는 종족유지 본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손상되어진 신체 부위가 다시 재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치가 빠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영구치아가 생겨납니다. 피부에 상처를 입어도 손상된 부분에 새 살이 돋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곧 우리의 생명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생기 즉 생령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그것을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탐욕 즉 인간이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의 영역을 탐하는 일로 그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았던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계곡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마른 뼈들입니다. 영적 죽음의 상태를 그렇게 묘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생기가 다시 불어와 마른 뼈들에 가죽이 덮이고 힘줄이 생기며 생명이 회복되어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본성을 주신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인간들에게는 흔적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 끊임없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명회복운동라이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는 생명목회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생명목회란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예수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의 일부를 아니 밑동을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아 회복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명회복 운동이나 생명목회는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다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곧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 지름길입니다. 생명목회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도 현대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란 항상 시대 시대마다 나타나는 문명 속에서 잘못되어진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룩해 온 문명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편리함과 안전함과 유익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명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문명이 아니라 죽이는 문명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유심히 보세요. 문명이 생명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물을 사먹습니다. 수돗물을 불신합니다. 음료로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수도는 약을 통해서 멸균되었지만 물맛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형광등은 밝지만 세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걷다가 우마차를 타다가 자전거를 탔고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탔습니다. 이제는 집은 없어도 차는 타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차는 빠르기는 하지만 걷기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걷기를 잃어버리니까 건강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이 또 다른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난1세기 동안 있었던 그 어떤 재난 보다 더 강력한 재난을 당한 모습을 매일 뉴스를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특히 2004년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겪었습니다. 미국과 중남미에는 4차례 대형 허리케인이 몰아쳐 플로리다에서만 가옥 2500채가 파괴됐고 아이티에서는 1500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일본에서도 10월 니가타 현 강진과 10차례의 태풍으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매년 그해의 세태를 압축해 나타내는 한자어를 선정해 온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지난해 12월 13일 일본 열도에서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災’를 2004년의 한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매스컴에서 해마다 선정하는 10대 뉴스가 선정되고 난 다음인 지난 12월 26일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부근 바다에서 발생한 8.9의 강진으로 인한 해일이 발생하여 여러 나라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사건은 세계 3대재앙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1970년에 방글라데시에 발생한 대홍수와 1976년 중국 탕산에 발생한 대지진, 그리고 이번 인도네시아의 지진과 해일로 인한 피해가 세 번째 큰 재앙이라고 합니다. 사망자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15만 명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그리고 자연재해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그리고 하나님이 예언해 주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인도네시아 대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 변화와 문명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21세기의 초유의 문명으로 인한 생명파괴 현장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반면에 사단은 생명을 죽이려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질병과 가난, 부정과 부패, 억압과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잘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온 세상을 함께 구원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살려야 하지만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자연의 생명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모든 생명을 나의 생명처럼 여기는 의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금년의 교회의 목표를 생명 살리는 일로 정했습니다. 100년의 은혜를 한해로 마무리하고 우리끼리 자축하는 것으로 끝맺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00년의 은혜는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교회의 금년 표어는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이미 정해놓고 보니 정말 표어를 잘 정했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친히 주관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목사를 통해서 표어를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어는 그냥 구호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말씀이 먼저 선행됩니다. 이 표어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인 10절입니다. 특히 하반절 말씀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은 양을 훔쳐가서 잡아먹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키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적은 양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물을 마시게 해서 살을 찌우게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마리라도 더 많이 키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파도 치료해 주고 오직 마음이 양에게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신 사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무한대의 사랑의 에너지로 병든 자를 고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미움을 사랑으로, 다툼을 평화로,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시며 온갖 이적을 베푸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며 치유하며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스스로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진피해를 입은 나라 백성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 살리는 일에 첫 번째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기 때문에 다음주일에는 특별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와 교회는 언제든지 나눌 수 있어야 하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내 자신을 끊임없이 자유낙하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보다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보다 더 높은 위치에 도달할수록 더 많은 운동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살리는 분이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생명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고 요한복음10장 1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이제 우리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함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모든 성도는 생명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금년 한해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지구상에서는 생명을 살리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을 앞장서서 해야 할 사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와 교회에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우리 교단의 생명살리기운동 10년 계획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만민에게 전파합시다. 둘째는 자연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합시다. 파괴된 자연에 창조의 새 질서를 가져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를 새롭게 하고 하나 되게 합시다. 교회의 삶에 일치와 갱신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넷째는 북한 동포와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분단된 조국에 평화통일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다섯째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의롭게 살아갑시다. 여섯째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일곱째 장애를 가진 이웃과 함께 살아갑시다. 여덟째 청소년의 꿈을 함께 가꾸고 이루어 갑시다. 아홉째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하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닫힌 사회에 열린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 열린사회를 만들어 포용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번째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약육강식의 대중사회에 생명살림의 새 문화를 창달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가장 우선이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 가운데서도 인간의 영혼을 먼저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동안 동성연애와 낙태지지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 운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다 같은 신앙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부시 앞에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현재의 부시 대통령과는 신앙관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낙태지지운동은 낙태를 합법화시키자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 낙태지지운동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켜서 실제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찰스 콜슨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싸움이 성공을 거두었군요.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낙태지지운동과 맞서서 성공을 거두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싸움의 승리는 반쪽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사회의 운동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정답 아닙니까? 사회운동으로 낙태지지 운동에 반대하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회운동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 영혼이 치유받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바로 영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사회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 중요합니다. 환경 살리기 운동도 해야 합니다. 불의한 것을 정의로움으로 바꾸는 운동도 해야 합니다. 보안법폐지도 중요하고 역사바로세우기도 중요합니다. 무슨 운동을 하든지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영혼구원과 직결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운동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생명운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합니다. 전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병원선교 중요합니다. 교도소 선교, 학원선교 등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구역별로 반드시 새 생명 전도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 구역이 두 사람 이상씩 반드시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세례를 주도록 최선을 다해 봅시다. 나는 값없이 영혼이 구원을 받아 소망가운데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로서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넓은 예배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채우라고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한 사람도 전도해보지 못한 분들은 금년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생명 살리는 해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도록 합시다.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은 곧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요10:10 2006-01-02 14:01:18 read : 15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주 속에는 수많은 혹성들이 있지만 지금까지는 생명체는 지구에만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얼마인가 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따라 다릅니다만 상당히 오래된 것으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요10:10 2006-01-02 14:01:18 read : 15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주 속에는 수많은 혹성들이 있지만 지금까지는 생명체는 지구에만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얼마인가 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따라 다릅니다만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구에 있는 생명공동체에 이미 심각한 종말의 징후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현상과 오존층 파괴로 인한 기상의 이변과 생태계 파괴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가 지니고 있는 화석연료는 앞으로 50여년간 사용할 분량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대체 에너지 개발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사막화 현상은 식량문제와 생태계의 보금자리를 위협해가고 있으며 수질오염과 토양산성화, 산소생산량 부족 등은 모든 생명체의 목을 죄어서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식품이 상품으로 둔갑하고 농사가 사업으로 변하면서, 온갖 독성약물과 성장촉진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며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상품을 생산함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독을 먹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환경호르몬의 폐해를 입으며 불안한 미래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앞으로 생명복제기술이 보편화되어서 인간복제까지 감행할 경우에 야기될 창조질서의 대혼란을 예상할 때 지구생명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예측은 현재까지 나타나고 있는 징후들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죄성(罪性)”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악마의 계략에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죽어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종말 을 재촉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일례로 나무들을 보면 나무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는 본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지 접붙이기를 하기 위해 돌감나무 밑동을 잘라버리면, 평소 같으면 싹이 나지 않을 부위이지만 그 밑동에서 싹이 나고 왕성하게 줄기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삽목을 하기 위해 나무로부터 나뭇가지 일부를 잘라내어 땅에 꽂아 두면 가지 밑 부분에서 뿌리가 생겨나는 것도 잃어버린 뿌리 부분을 복원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 즉,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나무의 본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나무의 성질을 이용해서 접붙이기도 하고 삽목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본성, 이런 본능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동식물들에게는 종족유지 본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손상되어진 신체 부위가 다시 재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치가 빠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영구치아가 생겨납니다. 피부에 상처를 입어도 손상된 부분에 새 살이 돋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곧 우리의 생명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생기 즉 생령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그것을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탐욕 즉 인간이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의 영역을 탐하는 일로 그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았던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계곡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마른 뼈들입니다. 영적 죽음의 상태를 그렇게 묘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생기가 다시 불어와 마른 뼈들에 가죽이 덮이고 힘줄이 생기며 생명이 회복되어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본성을 주신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인간들에게는 흔적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 끊임없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명회복운동라이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는 생명목회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생명목회란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예수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의 일부를 아니 밑동을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아 회복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명회복 운동이나 생명목회는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다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곧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 지름길입니다. 생명목회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도 현대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란 항상 시대 시대마다 나타나는 문명속에서 잘못되어진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룩해 온 문명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편리함과 안전함과 유익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명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문명이 아니라 죽이는 문명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유심히 보세요. 문명이 생명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물을 사먹습니다. 수돗물을 불신합니다. 음료로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수도는 약을 통해서 멸균되었지만 물맛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형광등은 밝지만 세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걷다가 우마차를 타다가 자전거를 탔고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탔습니다. 이제는 집은 없어도 차는 타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차는 빠르기는 하지만 걷기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걷기를 잃어버리니까 건강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이 또 다른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난1세기 동안 있었던 그 어떤 재난 보다더 강력한 재난을 당한 모습을 매일 뉴스를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특히 2004년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겪었습니다. 미국과 중남미에는 4차례 대형 허리케인이 몰아쳐 플로리다에서만 가옥 2500채가 파괴됐고 아이티에 서는 1500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일본에서도 10월 니가타 현 강진과 10차례의 태풍으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매년 그해의 세태를 압축해 나타내는 한자어를 선정해 온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지난해 12월 13일 일본 열도에서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災’를 2004년의 한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메스컴에서 해마다 선정하는 10대 뉴스가 선정되고 난 다음인 지난 12월 26일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부근 바다에서 발생한 8.9의 강진으로 인한 해일이 발생하여 여러 나라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사건은 세계 3대재앙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1970년에 방글라데시에 발생한 대홍수와 1976년 중국 탕산에 발생한 대지진, 그리고 금번 인도네시아의 지진과 해일로 인한 피해가 세 번째 큰 재앙이라고 합니다. 사망자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15만명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그리고 자연재해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그리고 하나님이 예언해 주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인도네시아 대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 변화와 문명의 위기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21세기의 초유의 문명으로 인한 생명파괴 현장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반면에 사단은 생명을 죽이려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질병과 가난, 부정과 부패, 억압과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잘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온 세상을 함께 구원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살려야 하지만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자 연의 생명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모든 생명을 나의 생명처럼 여기는 의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금년의 교회의 목표를 생명살리는 일로 정했습니다. 100년의 은혜를 한해로 마무리하고 우리끼리 자축하는 것으로 끝맺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00년의 은혜는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교회의 금년 표어는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이미 정해놓고 보니 정말 표어를 잘 정했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친히 주관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목사를 통해서 표어를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어는 그냥 구호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말씀이 먼저 선행됩니다. 이 표어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인 10절입니다. 특히 하반절 말씀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은 양을 훔쳐가서 잡아먹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키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적은 양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할수만 있으면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물을 마시게 해서 살을 찌우게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마리라도 더 많이 키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파도 치료해 주고 오직 마음이 양에게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신 사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무한대의 사랑의 에너지로 병든 자를 고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미움을 사랑으로, 다툼을 평화로,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시며 온갖 이적을 베푸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며 치유하며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스스로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진피해를 입은 나라 백성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살리는 일에 첫 번째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기 때문에 다음주일에는 특별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와 교회는 언제든지 나눌 수 있어야 하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내 자신을 끊임없이 자유낙하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보다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보다 더 높은 위치에 도달할 수록 더 많은 운동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살리는 분이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생명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고 요한복음10장 1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이제 우리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함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금년 한해 동안 모든 성도는 생명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금년 한해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지구상에서는 생명을 살리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을 앞장서서 해야 할 사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와 교회에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우리 교단의 생명살리기운동 10년 계획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만민에게 전파합시다. 둘째는 자연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합시다. 파괴된 자연에 창조의 새 질서를 가져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를 새롭게 하고 하나되게 합시다. 교회의 삶에 일치와 갱신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넷째는 북한 동포와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분단된 조국에 평화통일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다섯째 고난 당하는 이웃과 함께 의롭게 살아갑시다. 여섯째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일곱째 장애를 가진 이웃과 함께 살아갑시다. 여덟째 청소년(녀)의 꿈을 함께 가꾸고 이루어 갑시다. 아홉째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하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닫힌 사회에 열린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 열린사회를 만들어 포용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번째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약육강식의 대중사회에 생명살림의 새 문화를 창달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가장 우선이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 가운데서도 인간의 영혼을 먼저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동안 동성연애와 낙태지지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 운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다 같은 신앙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부시앞에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현재의 부시 대통령과는 신앙관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낙태지지운동은 낙태를 합법화시키자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 낙태지지운동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켜서 실제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찰스 콜슨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싸움이 성공을 거두었군요.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낙태지지운동과 맞서서 성공을 거두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싸움의 승리는 반쪽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사회의 운동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정답 아닙니까? 사회운동으로 낙태지지 운동에 반대하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회운동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 영혼이 치유받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바로 영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사회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 중요합니다. 환경살리기 운동도 해야 합니다. 불의한 것을 정의로움으로 바꾸는 운동도 해야 합니다. 보안법폐지도 중요하고 역사바로세우기도 중요합니다. 무슨 운동을 하든지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영혼구원과 직결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운동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생명운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합니다. 전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병원선교 중요합니다. 교도소 선교, 학원선교 등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구역별로 반드시 새생명 전도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 구역이 두 사람 이상씩 반드시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세례를 주도록 최선을 다해 봅시다. 나는 값없이 영혼이 구원을 받아 소망가운데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책망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로서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넓은 예배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채우라고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한 사람도 전도해보지 못한 분들은 금년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생명살리는 해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도록 합시다.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은 곧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100배로 보상하리라/막10:28-31 2004-04-24 14:51:22 read : 30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이 지금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집착돼서 믿는다고는 하는데 잘못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잘못 믿는다는 말은 어쩌면 믿지 않는 불신보다도 더 나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한양 가는 길을 모르면 출발을 하지 않습니다. 모르면서도 안다고 가다가
100배로 보상하리라/막10:28-31 2004-04-24 14:51:22 read : 30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이 지금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집착돼서 믿는다고는 하는데 잘못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잘못 믿는다는 말은 어쩌면 믿지 않는 불신보다도 더 나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한양 가는 길을 모르면 출발을 하지 않습니다. 모르면서도 안다고 가다가 길을 잘못 가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됩니다. 제가 집사람하고 워싱톤에서 뉴욕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차가 좀 이상이 있어서 중간에 잠깐 내렸다가 다시 출발했는데 한참 가는데 아무래도 뭐가 이상해요. 그 Feeling이 있잖아요? 그래서 중간 통행료 받는 곳에서 물어봤습니다. 내가 지금 워싱톤 쪽으로 가고 있는 것 맞느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아니 당신은 지금 뉴욕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요. 아까 중간에서 내렸다가 다시 고속도로를 탔을 때 이정표를 잘 봤어야 하는데 안다고 하다가 시간은 시간대로, 기름은 기름대로 허비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생각을 바꿔라’. 생각이 바뀌어야 근본이 바뀝니다. 근본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안 됩니다. 여러분, 천국은 변화된 사람만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힘은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교회에 이 힘이 없으면 교회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려면 교회가 자꾸 새로워져야 합니다. 구태의연해 가지고서는 교인들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더구나 없습니다.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목사 한 사람의 생각으로 되는 게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다 함께 그 생각이 자꾸 새로워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생각을 바꾸어라!’ 지금 여러분과 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참으로 우리 주일 예배를 온통 바꾸고 싶어요. 바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매달려 기도합니다. 때를 달라고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일 예배는 이게 천국 잔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 주일 예배가 어디 잔치 집 같습니까? 아니 좀 심한 말씀 같습니다만 초상 집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잔치 집은 흥이 나야합니다. 먹을 것이 풍성하고 노래와 춤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는 말씀이 풍성한 가운데 신바람이 불어야 해요. 신랑신부를 중심으로 해서 흥겨운 가락과 함께 어깨춤을 둥실둥실 추면서 신나는 한 마당을 벌려야 합니다. 그래야 신이 납니다. 신나는 게 뭡니까? 성령 충만 아닙니까? 염려 근심 싹 달아납니다. 신나는 데-----, 세상 일 다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신날 때 말씀을 들어야 그 말씀이 이 심령 속에서 쾅하고 폭발하면서 내가 깨지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되는 거죠. 한국 교회는 이게 안 되고 있어요. 저는 우리 코아 교회가 꼭 이런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매달려 기도합니다. 이제 때가 되면 성령께서 신바람을 불어 주실 줄 믿습니다. 기다립니다. 성령께서 신바람을 불어주실 때까지 열심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새롭게 되는 순간 성령께서 ‘지금이다’ 하시면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하긴 이 생각이 바뀐다는 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생각이 바뀐다는 말은 근본이 변한다는 말입니다. 저의 집사람이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걸핏하면 ‘사람의 성질은 안 고쳐져요’ 그럽니다. 그러다가 저한테 혼납니다. ‘무슨 소리, 사모가 그런 소리를 하면 못써요. 하나님이 고치시면 고쳐지는 것이지------’그만큼 근본이 바꿔지기 힘들다는 말이겠죠? 지금이야 덜 합니다만 제가 결혼할 때만 해도 그 집 근본을 많이 따졌습니다. 특히 며느리를 맞을 때에는 며느리의 어머니를 봤습니다. 딸은 거의 어머니 성질을 닮는다면서 말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생각은 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생각이 매일 매일 새롭게 변화돼서 삶 자체가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새롭게 변할 줄 믿습니다. 교회가 새롭게 변하면 사회가 새로워질 줄 믿습니다! II. 본문 강해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영생을 얻으려면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근심하면서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재산이 소용없다는 것이 아니라 재산은 선하게 사용될 때 재산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청년이 소유가 많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하고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 그렇게 영생의 길을 사모하지만 그 재물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재물 그 자체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그 재물을 관리하는 것은 받은 자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담에게는 삼라만상을 다 주셨습니다. 천하 만물을 다 주시면서 그것을 ‘다스리라’(창1:28)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다스리느냐?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다스림이 돼야 하고 관리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재물의 복을 주신 것은 그 재물을 잘 관리하고 잘 다스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재물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그 재물이 영생의 길을 가로 막는다면------, 차라리 재물이 없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21절 말씀은 바로 그 말씀입니다. 여기 본문의 그 청년은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생활은 믿음생활이 되지 못했습니다. 재물이 믿음생활에 걸림돌이 됐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믿음생활입니다. 믿음은 생활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재물이 축날까봐 불쌍한 이웃을 돌보지 못하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못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 청년은 재물을 잘 다스려 선하게만 사용했더라면 참 좋은 믿음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 자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1. 28절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마태복음 19장 27절에서는 이 뒤에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과 심지어는 아내까지도 남겨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요한 형제는 부친마저도 남겨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는 세관장의 자리를 버렸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버린 소유라야 뭐 별 것이 되겠습니까 부자 청년하고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희생은 그 희생의 양이 많으냐 적으냐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께 나 전부를 마치는 전적인 희생이냐 아니면 적당히 사람들 눈에나 띄게 하는 희생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상부상조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네 것 내 것 없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눠줬습니다. ‘바라바’라는 사람은 소유하고 있던 밭을 팔아서 교회에 내 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도 거기에 감동돼서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밭을 팔고 그 판돈을 교회에 내 놓으려고 하니까 아까웠습니다. 다 내놓기가 아까 웠습니다. 그래서 좀 떼어놓고 교회에 내 놨습니다. 그냥 내 놨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칭찬을 받았을 것인데, 내 놓으면서 내가 소유하고 있는 밭을 팔아서 다 가져왔습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면서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속으실 분입니까?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정말 다 내놓는 겁니까? 그럼요.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가져왔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또 한 번 물었을 것입니다. ‘정말 다 입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돈이 적어서 묻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죄를 깨닫게 해 주는 물음입니다. 이때라도 ‘사실은 좀 쓸데가 있어서 떼어 놨습니다’ 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네, 이것이 전부 다 입니다’ 계속 하나님을 속였고 주의 종을 속였습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런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쁨으로 소유를 버렸고 그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소유가 영생을 얻는데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버렸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길인 줄 믿고 오직 예수님만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31절 말씀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느니라’ 여러분,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내가 뭘 버렸다는 것조차도 버려야 진짜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잊어야 진짜 희생이 됩니다. 생각까지도 버리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잊어버리지 못하면 어느 때 불쑥 교만으로 나타나고 자기 자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 이것이 29절 30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 .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종종 ‘진실로 말하노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 말씀 ‘진실로 진실로’가 나오면 정신 바싹 차려야 합니다. 정신 차리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는 아멘 아멘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아멘 아멘 레고 후민). 예수님이 역동적인 진리를 말씀하실 때 이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선포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하시면 ‘아, 진리가 선포되는 구나’ 하고 긴장해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선포됩니다. 요한복음 3:3에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진리를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납니까? 이해가 안 됩니다. 니고데모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아담의 피로 태어난 죄인들을 하나님의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잖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요한복음 13:21에서도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말씀이 되는 소리입니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팔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멘, 아멘 하셨습니다. ‘내 말이 맞다 맞다’ 이겁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하늘에서 왔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고 선포하시면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펄떡 뒵니다. ‘아니 당신의 나이가 50도 안 됐는데 아브라함이 당신의 때를 보다니 ----미쳤구나 미쳤어!’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을 수 없죠? 30대의 예수님이 3000년 전의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시니까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신 것이 문제가 아니죠?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의 아멘, 아멘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아멘 속에 천국 비밀이 있습니다. 지금 29절 30절에서 예수님은 먼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입을 여시고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서 그 버린 것의 100배를 받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받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① 집이나 ② 형제나 ③ 자매나 ④ 어미나 ⑤ 아비나 ⑥ 자식이나 ⑦ 전토입니다. 이것을 크게 나면 혈연관계와 소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을 받기 위해서 형제 자매 부모 자식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반인륜적입니까? 패륜아가 되라고 가르친 것입니까 기독교가 반인륜적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하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아닙니까?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굽니까? 바로 자식과 부모, 형제 자매 아닙니까? 그런데 버려요? 여기서 우리말로 ‘버린다’는 말은 헬라말 ‘압히에미’로 ‘헤어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하니까 헤어질 수밖에 없잖습니까? 잠시 헤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잠시 헤어집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6:33절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헤어짐의 아픔이 왜 없겠습니까?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을 100배나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헤어짐의 아픔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심으로 보상하시고, 전토의 버림은 이 세상에서의 형통함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더 풍성히 해 주실 줄 믿습니다! III. 맺는 말 16세기 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 사업가에게 대영제국을 위해 외국에 대사로 나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그 사업가는 ‘아롭옵기 황송하오나 나라와 여왕 폐하를 위하여 대사로 나가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지만 제가 대사로 외국에 나가있는 동안 제 사업을 누가 맡아 줍니까? 폐하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그때 여왕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염려마시오. 당신이 외국에 있는 동안 당신의 사업은 나와 영국 정부가 책임지고 돌봐 주겠소’ 여러분, 대영제국과 여왕이 그 사업을 책임지고 돌보면 그 사업은 더욱 더 발전할 것이 뻔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나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면 백 배로 더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가정과 자녀와 재산과 사업을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100배의 결실/ 눅8:4-8/ 2007-09-12
100배의 결실 눅8:4-8 이제 열매의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농사짓는 분들은 유난히도 많이 온 비로 울상 지으며 보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추수하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감나무엔 탐스런 열매들이 맺었고, 여러 가지 열매들은 결실의 계절을 통하여 농부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실수는 때가 되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결실을 얻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 뿐 아니라 육적인 생활 속에서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매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한 동네에 가셨을 때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여러 의도를 가지고 나온 것을 알고 그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는 사람은 좋은 밭에 씨를 뿌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5절). 그러니까 싹이 나기도 전에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습니다. 길가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입니다. 사람 많은 곳은 마귀의 유혹도 많은 곳입니다. 여러분! 군중 좋아하지 말고, 인기 좋아하지 말고, 스타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휩쓸리다 보면 영혼이 밟히고, 영혼이 마귀에게 먹힐 수 있습니다.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6절). 금방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니까 다시 말랐습니다. 이는 금세 좋았다가 다시 식어지는 감정적인 신앙생활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멋진 것을 좋아하지 말고, 외모를 좋아하지 말고, 너무 분위기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신앙이 미지근하게 될 수 있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의 가장 큰 맹점이 무엇입니까? 습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합니다. 눈물 없는 신앙! 그것은 불행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도의 눈물, 헌신의 눈물, 십자가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고, 어떤 시험이 닥치고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습니다(7절). 그래서 가시와 함께 같이 자랍니다. 상당 기간 잘 자라는 듯 했습니다. 결실을 할 때쯤엔 가시 때문에 기운이 막혀 결실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가시가 무엇입니까? 14절에서 주님은 3가지, 즉 염려와 재리(돈)와 일락(일시적 쾌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 잘 성장하는 듯 하다가 영적인 가시에 찔려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부정적인 생각’과 ‘나눔에 인색한 삶’과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주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씨를 뿌리는 자가 목적한 바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열매 있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100배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밭이 좋아야 합니다.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밭은 무엇입니까? 1.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단순히 좋은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은혜로 변화된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이 좋아야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좋은 마음의 밭을 지녀야 합니다. 한마디로 성도는 예수의 좋은 사람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표현하는 대로 ‘나이스(nice)’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이스(nice)’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친절하고, 사려 깊고,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남을 높여줄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알고, 관대한 것입니다. 또한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고, 적절한 유머도 있고, 미소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넘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좋은 마음의 밭을 이루어야 합니다. 겔36: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좋은 마음을 가지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을 지니고 살지 못하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엡4:30-32) 오늘 우리의 사회가 안타까운 것은 나이스한 태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평하고, 너무 쉽게 분노합니다. 조금만 금전적으로 손해가 날 것 같으면 부모형제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남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좋은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행동을 분리시키지 말고, 늘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며칠 전의 신문을 보니 어느 식당에서 미군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 스테이크 등 음식 찌꺼기를 600g당 2000원씩 모두 1197kg을 400여만 원에 사들였습니다. 업주는 미군부대에서 ‘개 사료용’이라고 속여 빼돌린 음식찌꺼기를 재료로 만든 부대찌개는 무려 6만 명 분이나 팔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원조 부대찌개’라고 선전해 점심시간이면 손님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조사결과에 의하면 그 식당에서 압수한 스테이크와 소고기, 햄버거 고기 등에서는 대장균이 검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돈만 된다면 남을 속이고, 해치며, 부당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마음과 행동으로는 복된 열매를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마음 마음의 밭, 좋은 행동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좋은 마음, 좋은 행동으로 100배의 결실을 얻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마음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랑을 품는 마음입니다. 서로 축복하며,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도 좋은 마음입니다. 이런 좋은 마음을 가질 때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심령의 밭을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핵심 원리를 잊어버리고 이상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이상한 곳에서 축복을 찾고, 열매를 찾으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8절과 15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100배의 결실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지금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미신에 사로잡혀 점을 치러 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주님께 앞날을 맡기며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미신적 신앙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혼날짜, 개업날짜, 이사날짜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미신적으로 의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년 초에 토정비결을 봤는데 점괘에서 “물가에 가지 말라!”고 나왔답니다. 그래서 여름휴가도 물가로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경우는 중요한 날 수염을 깎으면 안 된다고 믿고 지저분한 얼굴로 나와 면접시험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잘 안되고 어려운 것이 집터 때문이고, 묏자리 때문입니까? 그래서 집을 이사하고, 묏자리를 이전하고, 이름을 바꾸면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어 집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어떤 미신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8:32). 말씀 안에 사는 자가 참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운명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 운명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축복의 원리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한 마음입니다. 미신을 믿으면 여전히 불안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평안을 얻게 됩니다. 행복과 기쁨이란 열매를 얻게 됩니다.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킬 때 가능한 것입니다. 3. 인내해야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됩니다. 좋은 열매가 주어지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약속의 소망을 바라며 인내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무릎은 축복을 날라주는 수레바퀴입니다. 기도할 때 흘리는 눈물은 그 수레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윤활유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눈물의 기도를 드릴 때 반드시 결실을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며, 열매 맺는 비결은 얼마나 인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조급합니다. 씨를 뿌린 다음에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쉽게 낙망합니다. 포기해 버립니다. 참된 기쁨과 열매의 행복은 십자가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좀 기다려 보십시오. 믿고 기다리면 열매가 있습니다. 어떤 노인이 정원에다 어린 나무를 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을 지나던 나그네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언제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70년쯤 후면 열리겠지요.’ 하고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그네는 또 ‘노인장께서는 그때까지 살아 계실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니오, 그때까지 살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게 아니라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집 과수원에는 많은 과일이 열려 있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부친께서 나를 위해 심어 놓으신 것이었지요, 나도 아버님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수확하지 못해도 인내하며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그럼 반드시 후대에 이르러서라도 그 열매는 얻을 수 있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는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주를 붙잡고 역경을 돌파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주를 향한 헌신이나 봉사도 좀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쉬면 좋을 듯해도 신앙도, 영혼도 죽게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인내하는 영혼이 결국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벧전1: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며, 원망, 불평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할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밝은 얼굴, 은혜의 태도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며 인내하는 신앙은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됩니다. 인내의 신앙, 참된 믿음의 사람은 천국미인이 됩니다. 즉 늘 미소가 있고, 친절하게 인사하는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긍정적이고 낙관적이어야 합니다. 지금 돌아가는 내 주변의 상황이 힘들고 비참해도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수록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인내를 통해 반드시 좋은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무화과는 열매가 많이 열립니다. 이스라엘에는 무화과나무를 길에 많이 심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지나던 사람, 배고픈 사람들이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열매를 위해서 무화과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으시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유실수에 열매가 없다면 존재 가치가 떨어집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도 주님이 기대하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열매의 계절을 맞이한 이때 내가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씀 안에서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100배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 좋은 마음의 밭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하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항상 나이스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조금 더 인내함으로 100배의 결실을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2001-08-24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생산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생산적인 것 중에서 제일 왕성한 것이 땅입니다. 대지는 별의 별 신기한 것들을 계속하여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들, 즉 갖가지 곡식들을 매년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생산해 주기에 지구 위의 수십억의 인구들이 살고 있습니다. 4월말과 5월 초에 땅에 심은 벼가 두어 달 된 지금 많이 자랐습니다. 앞으로 두어 달만 있으면 빨리 되는 것들은 추석의 잔칫상에 흰 쌀밥을 올려 줄 것입니다. 실로 땅의 고마움을 지방에 가보면 실감합니다. 각종의 채소들을 먹으면서 땅의 생산성을 실감합니다. 김을 맨 분들의 말에 의하면 여름엔 너무 빨리 잡초들이 자란다고 합니다. 그 무성한 풀들이 아무도 씨를 심은 적이 없는 데도 매년 돋아나서 무성하게 자랍니다. 겨울에 앙상했던 정원들이 봄에 푸릇푸릇 하더니 여름이 되어 시퍼렇게 녹음방초가 되는 것을 매년 보면서 대지의 생산성에 놀라곤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도 들판에서 밭에 씨를 뿌리는 한 농부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것을 비유로 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한동안 회당에서 주로 가르치셨는데 오늘의 본문부터는 장소를 바닷가로 옮긴 것을 봅니다. 첫째는 회당에서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예수님이 방해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당은 좁아서 사람들이 많이 못 들어오니, 차라리 바닷가로 나온 것이 썩 잘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밭에서 지금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예수님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보시오! 저 농부가 씨를 지금 뿌리지 않느냐? 그 씨들이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질 것이고, 어떤 것은 밑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는 흙이 얕은 곳에 떨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나무속에 끼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씨는 좋은 옥토에 떨어지는 행운을 얻을 것이다.” 힘차게 비유설교를 하셨습니다. 팔레스틴의 농사법은 우리나라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갈아엎은 후에 땅을 잘 정리하고 그리고 씨를 조심조심 심습니다. 그래서 길가나 돌밭에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한데 유대 나라는 이와는 반대로 먼저 씨를 부리고 다음에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때는 아무 곳에라도 우선 뿌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새 등에다가 씨를 담은 자루를 실어 놓고 그 아래쪽에 구멍을 조금 뚫어서 노새가 다니면서 씨가 땅에 떨어지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 씨는 길가나 돌작밭에 마구 떨어지게 됩니다. 물론 옥토에도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제자들은 다시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18절-23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악한 자 즉 마귀가 그 마음에 뿌린 씨를 달랑 먹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돌밭에 뿌리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인데 이유는 말씀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세 번째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네 번째의 옥토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잘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 사람인데 잘하면 백배 좀 못하면 60배 아무리 못해도 30배의 열매는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시는 진짜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우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열심으로 씨를 뿌렸지만 결과는 모두 100배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와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지만 이상하게도 소수만이 듣고 다수는 거부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에 저항하고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받는 밭, 즉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등등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습니다. 실로 길가 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좋아서 그 말씀을 받았는데 얼마 아니 가서 다시 옛것으로 돌아갑니다. 옆에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핍박하고 협박하니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돌밭입니다. 흙이 얇게 덮이고 아래에는 반석이 깔려있는 돌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좋아서 받습니다. 어느 정도 그 말씀의 나무가 자랍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염려와 물질의 욕심에 끌리어 말씀대로 살지 못하다 보니 어느 사이인가 기운이 막혀 시들어 집니다.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힌 밭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악조건을 승리하고 견뎌서 자랄 때까지 다 자라 열매를 맺는 씨들이 많은데 이들이야 말로 옥토에 떨어진 씨입니다. 100배 아니면 60배 적어도 30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이 네 가지 밭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도 제자들도 열심히 천국의 씨를 뿌렸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때로는 거부하고 저항하여 씨 뿌리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용기를 잃을 수 있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전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전도를 해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먹혀들고 어떤 사람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밭이 똑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도 씨를 잘못 뿌리기 때문인가라고 회의하기도 합니다. 제발 그런 걱정일랑 말고 열심히 전도하라고 이 비유를 주십니다. 물론 전도학이 있어서 기술을 좀 더 배워서 효과적인 전도 방법은 계속적으로 개발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밭이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어째서 그런 밭은 만들어 놨는가 묻는다면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어째서 아니 바꾸셨는가?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원죄성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론과 비슷합니다. 인간이 책임질 것은 인간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여 불복종한 인간을 하나님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이사야 55:11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고로 상대가 어떤 밭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되돌아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면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가급적 많은 밭에 씨를 뿌리면서 일해야 합니다. 혹시 말씀이 되돌아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크게 둘째로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마음이 어떤 밭인가를 고찰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좋은 밭인가를 깊이 반성하여야 합니다. 각자의 믿음의 성장 내용을 검토하시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즉 우리 자신들 안에 뿌리어진 복음의 씨가 잘 자라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길가 밭은 아닙니다. 길가 밭은 말씀의 씨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 마음이니 그런 사람은 여기 이 자리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왕이 그런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벨릭스 총독이 그런 마음을 소유했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몇 차례 듣고도 결국 회개하지 아니 했습니다.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 하다가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의 밭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듣고, 전도를 받고 곧 반응하여 예배당에 옵니다. 그런데 몇 번 교회에 나오다가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에 좌우되는 성격의 사람들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학습이나 세례 같은 의무가 주어질 때 피해 갑니다. 그러다가 영원히 천국의 문에서 멀어집니다. 6절에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해는 은혜를 가르칩니다. 막상 은혜의 기회가 올 때 도망하여 오히려 조금 핀 싹마저도 타 버리고 맙니다. 의무의 짐은 은혜의 기회인데 그것이 주어질 때 오히려 타져 버리고 만다면 이 얼마나 처량한 일입니까?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봉사를 시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 짐이 무거울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피하면 작은 믿음의 작은 싹마저 타 버리고 맙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종종 논의되곤 하는 것인데 교회 개축이나 신축 시에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은 공개적이기에 개중에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있다고 하여 교회의 큰일을 광고하지 않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광고를 하면 목사님이 돈 이야기를 한다고 빈정대면서 교회를 떠나간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여린 싹이 있기에 교회는 조심스럽게 일들을 추진하지만 때론 오해를 사기도 하고 상처를 받는 경우도 생겨서 조금 올라오던 싹이 해가 뜨면 타져 버리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목회자는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때는 늦습니다. 저의 목회 생활 30여 년 동안에 이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세 번째의 가시덤불 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의 싹이 제법 자라다가 가시덤불의 기운, 즉 세상에 대한 걱정과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 입니다. 이 경우는 세상을 향한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세상의 재미에 빠지고 세상의 일락에 도취하여 말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지고 놀 것 다 놀면서 예수를 믿고 싶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한손에는 세상을 붙들고 다른 손에는 천국을 소유하고 살고 싶어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오늘 배워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할 것 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좋은 시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밖으로 나가라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님을 명심시켰습니다.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하여 최소한의 염려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한데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염려는 생존의 염려가 아니라 부하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 하는 관심과 염려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리는 목숨 부지를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돈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 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고 착취하면서 까지 돈에 애착을 가지고 이를 탐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아니 자라던 믿음도 기운이 막혀 죽습니다. 여러분들은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그 말씀 그대로를 달게 받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어 버리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서 꿀꺽 꿀꺽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외쳤는데 말씀이 이토록 달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깊이 빠질 리가 없겠지요. 육신이 세상에 거주하는 동안에 필요한 최소한의 세상사를 빼고는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의무를 열심히 감당할 때 옥토가 됩니다.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적어도 길가 밭은 면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돌밭도 되어서는 안 되고 가시떨기 밭도 돼서는 안 됩니다. 옥토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옥토라고 여기는 분들은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30배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60배 정도로 좋아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100배를 추수합시다. 결실은 겉으로 드러납니다. 생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기도생활이나 전도생활에서 나타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몸 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 오늘 예배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은 옥토가 되어 100배의 결실을 맺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