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 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두 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 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두 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그리고 2/민13:26-14:10
10 그리고 2/민13:26-14:10 2003-07-02 20:02:53 read : 16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2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이 90 보다 크다/출18:13-27
10 이 90 보다 크다/출18:13-27 2011-08-23 21:18:48 read : 1 10 이 90보다 큽니다. 파레이드가 만든 법칙이 있습니다. 파레이드가 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하던 중에 분명히 본 것이 있습니다. 10%의 개미가 90%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10%가 90%의 일을 한다는 법칙을 <파레이드 법칙>이라고 합니다. 10%의 개미가 나머지 90% 개미보다 귀하였습니다. 10이 90보다 컸습니다. 백화점도 그렇습니다. 10% 단골 고객이 90% 매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중에 10% 부자들이 한국 돈의 90%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화 요금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에게 90% 전화 요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9시 뉴스도 그렇습니다. 초기 10% 시간에 보도하는 뉴스를 90% 사람들이 화제로 삼게 됩니다. 신문도 10% 앞 면에 90% 중요한 뉴스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유를 짜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람 열매를 모아놓고 누르기 시작합니다. 10% 정도만 받아 성전에서 사용합니다. d; 10% 감람유가 끄림이 생기지 않는 최상의 감람유입니다. 가장 비싸고 좋은 감람유입니다. 10% 감람유가 나머지 90% 감람유보다 비쌉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막은 378평입니다. 그런데 지성소 6평, 성소 12평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덮개 약 40평에 금값 600억을 다 사용합니다. 10%에 투자하는 비용이 90%가 넘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이 90% 일을 합니다. 10% 사람이 90% 물질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수 백명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고 모세 혼자 밥도 못 먹고 상담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이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출18;17-23)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말을 듣고 조직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모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일이 능률적이 되었고 수월하였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1. 십부장 60,000명 2. 오십부장 12,000명 3. 백부장 6,000명 4. 천부장 600명 이는 모두 78,600명입니다. 인구조사를 하며 보니 603,550명이었습니다. 이는 약 10%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12.9%입니다. 이드로도 모세에게 10% 일군을 뽑아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0%가 90%의 일을 하며 광야 40년을 지냈습니다. 10애 90보다 큽니다. 1. 시간 하루 24시간이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새벽 시간 10%가 나머지 시간 90%보다 큰 시간입니다. 일찍 일어나 두 시간 가량을 영적인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정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습관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39-44) 예수님은 감람산에 나가셔서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붙어 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새벽 시간을 값지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큰 일을 하였습니다. 소위 새벽형 인간이 큰 사람이 됩니다. 나는 지난 주간 <백만불 짜리 습관>이라는 책을 대하였습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트레이시 인터내셔널>사 회장입니다. 세계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이자 전략 전문가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좋은 직장을 갖지 못 하고 오늘은 이 회사, 내일은 저 회사로 옮겨 다니며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참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졌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할까?> <왜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안 될가?> 어느 날 그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기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100만불짜리 습관이었습니다. 이 습관이 괴물이 되어 자기를 길러 주었습니다. 마침내 세계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벽 첫 시간은 하루 24시간중에 가장 귀중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새벽 두 시간은 나머지 22시간보다 큽니다. 2. 물질 10%의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 물질이 나머지 90% 물질보다 큽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0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나머지 90% 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3. 일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 때에 10%의 일군들은 나머지 90%의 사람들보다 중요하고 컸습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이 어느 곳에서 일하든지 10% 안에 드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개미가 떼를 이루어 살아도 10% 개미가 90%의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 문도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 명 제자들도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가룟유다를 뺀 12명입니다. 120명중에 12명 10%가 온 세계를 복음화시켰습니다. 나머지 108명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도 그리고 성경 밖에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모두 한 가지씩 일을 맡아 하는 중요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하면 10%안에 드는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다음과 같은 일군들이 교회에 있어야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됩니다. (1) 계시 일군 교회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되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민주화되면 안 되고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민주화의 특징은 다수결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독제주의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성막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99%의 사람들이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결단은 모세가 하여야 했습니다. 모세는 민주화 목회를 하지 않고 복음화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무엇을 원하는 지 하나님으로 받는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대개 목회자와 계시 일군은 일치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찬양대내에서 찬양대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갈 찬양의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 중에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계시받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 일군 한 명은 다른 90%보다 중요합니다. 200만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광야에 나왔습니다. 200만명중에 오직 한 명 모세에게만 계시를 주셨습니다. 기도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군은 큰 일군입니다. 교회가 잘못 하게 되면 잘 지적하여 교회가 잘 나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일군이 계시일군입니다. 중요한 일군입니다. 성경의 뒷 이야기를 보면 12지파 족장 일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와서 모세는 <그만 가지고 오라>라고 광고할 정도였습니다. 이 광고를 듣고 12 족장들은 모세에게 와서 거칠게 항의하였습니다. 자기들은 헌금을 독려하러 다니느라고 헌금을 드릴 시간이 없어서 드리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지 못 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미 물질이 너무 많아 그만 하면 된다고 헌금을 거절하였습니다. 12 족장들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계시를 주옵소서. 우리도 헌금할 수 있는 기회를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제사장복에 들어가는 12 보석이 아직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족장이 한 개씩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하여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가를 늘 기도하고 계시받는 일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개씩 드리고 나니 너무나 허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너무나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드릴 것이 없나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막을 나르려면 수레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수레와 그것을 끌 수 있는 소를 헌금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모세도 생각지 못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핫자손들에게는 분명히 어깨에 메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게르손과 므라리에게는 메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다 .혹시 저들이 바치겠다고 하는 것들이 게르손과 므라리에게 사용하라고 되어지는 헌금인가?>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12 족장들로부터 수레와 소를 받아라. 고핫자손들만 어깨에 메고 나르고 게르손과 므라리는 수레에 실어서 나르도록 하여라. 그리고 12 족장들이 생각하여 낸 아이디어를 칭찬하여라. 멋진 아이디어 헌금이라고 말해 주어라. 그들에게 수레를 헌금하여 성막을 나르는 것은 전 세계를 나르는 것이라고 칭찬하여라. 전 세계를 얹어서 나르는 것을 헌금하였으니 내가 기뻐하시고 있다고 말해 주어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이디어,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런 계시 일군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10% 일군들은 기도일군들이었습니다. (2) 물질 일군 교회에서 하나님을 직접할 수 없기에 직장생활하면서, 또 개인 사업을 잘 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잘 드리는 물질 일군도 중요한 일군입니다. 교회를 잘 운영되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돈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은 죄는 아니지만 명예도 아닙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선교사업에 헌금하는 물질 일군도 교회에서는 중요한 일군입니다. 나는 지난 주간 부산 감림산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신기한 분을 만났습니다. 노 교인 목사, 노 기현 집사 형제를 만났습니다. 형 노 교인 목사님이 온 세계를 복음화시키려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뉴질란드 왕가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형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형이 선교하다가 순교하는 장면을 환상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형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고 편하게 하여 주려고 최대한으로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행기도 일등표만 구하여 주었습니다. 호텔도 가장 좋은 호텔에 가장 좋은 방만을 예약하여 드렸습니다. 선교비도 풍족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였습니다. <내 신장을 팔아 선교비를 대리라. 그리고 그 다음은 간을 팔리라. 그 다음은 눈을 팔리라....팔 수 있는 장기를 다 팔리라. 그리고 나는 형님의 선교를 위하여 조용히 무덤으로 들어 가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전에 형님 얼굴을 마지막 한 번 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뉴질란드로 들어 갔습니다. 거기에서 인도네시아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유전을 가지고 있는 데 개발을 못 하고 있는 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만 소원을 주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3;13) 하나님은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그러라고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하였습니다.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돈 벌어 하나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개발을 하지 못 하고 있던 중에 자기가 20%를 갖기로 하고 유전을 주었습니다. 엄청난 일을 하고 있습니다. 63 빌딩 58층이 그의 것입니다. 여수 개발을 6조원 들여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노 기현집사님과 밤 4시까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양복을 보여 주는 데 3천만원짜리였습니다.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크리스챤 재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할려고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물질 일군도 일군입니다. 10%의 일군들은 물질 일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물질을 투자하는 이들이었습니다. (3) 몸 일군 기도로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 가게 하는 일군들은 몸으로로 일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어야 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장로, 속장, 선교회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이 몸 일군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몸 일군입니다. 안내, 주차 관리부에서 일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게 하려고 청소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10%의 일군들은 이같이 기도 일군, 물질 일군, 몸으로 봉사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 10%는 나머지 90%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10% 안에 들 수 있을 가요? 어떻게 10%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1. 일군의 눈에 띄이면 일군이 됩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할 만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12 명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가룟 유다만 빼놓고 모두 순교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알하는 사람은 일군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찾아냈습니다. 광야 최고의 일군 모세의 눈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유난히 눈에 띄였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비젼이 있는 일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일군이 되려면 일군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2. 일군이 되겠다고 결정하면 일군이 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마음은 행동의 키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2-23) 3. 일하면 일군이 됩니다. 말만 하십시오. 말꾼이 됩니다. 말썽을 부리십시오. 말썽꾼이 됩니다. 놀기만 하십시오. 놀이꾼이 됩니다. 기도만 하십시오. 기도꾼이 됩니다. 노래만 하십시오. 가수가 됩니다. 일하십시오. 일꾼이 됩니다. 일군이 되고 싶으면 간단합니다. 일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여야 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일군들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일군이 되어야 우리 교회가 민족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선 우리 교회가 실력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300석이 세 번 정도는 차야 합니다. 9월 셋째주 <한 사람이 한 사람> 모시고 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운동에 다 동참하셔서 우리 교회가 한 차원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10 안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손기정 마라톤 우승자 한 분을 이야기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815 광복절을 맞았습니다. 손기정 이야기가 주된 화제로 인터넷을 장식하였습니다. 1936년 당시는 사람은 2시간 30분 안에 마라톤 코스를 달릴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벽을 깬 사람이 손 기정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 벽을 깨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손 기정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일본 선수로 출전하였습니다. 두 달 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현지 적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일본 일장기가 달린 선수복을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회까지 유니폼을 더럽히기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일장기를 보이기 싫어서였습니다. 마라톤에 일등한 후 금메달리스트들이 모여 독일 국빈들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싸인 할 때에도 <손 기정 Korea>라고 썼습니다. 수많은 신문 기자들이 어떻게 훈련하여 일등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손기정이 대답하였습니다. <독립군들이 바지에 모래 주머니를 만들어 달고 훈련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달리는 연습을 하였지요.>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할려고 하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1946년 베를린 우승 10주년 기념식에서 백범 김 구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ㅈ니다. <나는 자네 때문에 세 번 울었네. 첫째 나라 없는 청년이 우승하였다는 서러움에 울었지. 둘째 일본 사람들이 자네가 필리핀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죽었다는 소문을 내서 울었지. 셋째 독립이 안 되었으면 자네 우승이 영원히 묻힐 뻔 하여 독립하며 감격하여 울었지.> 그렇습니다. 할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2001-08-24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생산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생산적인 것 중에서 제일 왕성한 것이 땅입니다. 대지는 별의 별 신기한 것들을 계속하여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들, 즉 갖가지 곡식들을 매년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생산해 주기에 지구 위의 수십억의 인구들이 살고 있습니다. 4월말과 5월 초에 땅에 심은 벼가 두어 달 된 지금 많이 자랐습니다. 앞으로 두어 달만 있으면 빨리 되는 것들은 추석의 잔칫상에 흰 쌀밥을 올려 줄 것입니다. 실로 땅의 고마움을 지방에 가보면 실감합니다. 각종의 채소들을 먹으면서 땅의 생산성을 실감합니다. 김을 맨 분들의 말에 의하면 여름엔 너무 빨리 잡초들이 자란다고 합니다. 그 무성한 풀들이 아무도 씨를 심은 적이 없는 데도 매년 돋아나서 무성하게 자랍니다. 겨울에 앙상했던 정원들이 봄에 푸릇푸릇 하더니 여름이 되어 시퍼렇게 녹음방초가 되는 것을 매년 보면서 대지의 생산성에 놀라곤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도 들판에서 밭에 씨를 뿌리는 한 농부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것을 비유로 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한동안 회당에서 주로 가르치셨는데 오늘의 본문부터는 장소를 바닷가로 옮긴 것을 봅니다. 첫째는 회당에서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예수님이 방해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당은 좁아서 사람들이 많이 못 들어오니, 차라리 바닷가로 나온 것이 썩 잘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밭에서 지금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예수님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보시오! 저 농부가 씨를 지금 뿌리지 않느냐? 그 씨들이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질 것이고, 어떤 것은 밑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는 흙이 얕은 곳에 떨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나무속에 끼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씨는 좋은 옥토에 떨어지는 행운을 얻을 것이다.” 힘차게 비유설교를 하셨습니다. 팔레스틴의 농사법은 우리나라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갈아엎은 후에 땅을 잘 정리하고 그리고 씨를 조심조심 심습니다. 그래서 길가나 돌밭에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한데 유대 나라는 이와는 반대로 먼저 씨를 부리고 다음에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때는 아무 곳에라도 우선 뿌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새 등에다가 씨를 담은 자루를 실어 놓고 그 아래쪽에 구멍을 조금 뚫어서 노새가 다니면서 씨가 땅에 떨어지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 씨는 길가나 돌작밭에 마구 떨어지게 됩니다. 물론 옥토에도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제자들은 다시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18절-23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악한 자 즉 마귀가 그 마음에 뿌린 씨를 달랑 먹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돌밭에 뿌리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인데 이유는 말씀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세 번째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네 번째의 옥토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잘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 사람인데 잘하면 백배 좀 못하면 60배 아무리 못해도 30배의 열매는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시는 진짜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우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열심으로 씨를 뿌렸지만 결과는 모두 100배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와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지만 이상하게도 소수만이 듣고 다수는 거부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에 저항하고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받는 밭, 즉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등등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습니다. 실로 길가 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좋아서 그 말씀을 받았는데 얼마 아니 가서 다시 옛것으로 돌아갑니다. 옆에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핍박하고 협박하니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돌밭입니다. 흙이 얇게 덮이고 아래에는 반석이 깔려있는 돌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좋아서 받습니다. 어느 정도 그 말씀의 나무가 자랍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염려와 물질의 욕심에 끌리어 말씀대로 살지 못하다 보니 어느 사이인가 기운이 막혀 시들어 집니다.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힌 밭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악조건을 승리하고 견뎌서 자랄 때까지 다 자라 열매를 맺는 씨들이 많은데 이들이야 말로 옥토에 떨어진 씨입니다. 100배 아니면 60배 적어도 30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이 네 가지 밭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도 제자들도 열심히 천국의 씨를 뿌렸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때로는 거부하고 저항하여 씨 뿌리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용기를 잃을 수 있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전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전도를 해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먹혀들고 어떤 사람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밭이 똑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도 씨를 잘못 뿌리기 때문인가라고 회의하기도 합니다. 제발 그런 걱정일랑 말고 열심히 전도하라고 이 비유를 주십니다. 물론 전도학이 있어서 기술을 좀 더 배워서 효과적인 전도 방법은 계속적으로 개발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밭이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어째서 그런 밭은 만들어 놨는가 묻는다면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어째서 아니 바꾸셨는가?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원죄성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론과 비슷합니다. 인간이 책임질 것은 인간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여 불복종한 인간을 하나님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이사야 55:11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고로 상대가 어떤 밭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되돌아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면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가급적 많은 밭에 씨를 뿌리면서 일해야 합니다. 혹시 말씀이 되돌아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크게 둘째로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마음이 어떤 밭인가를 고찰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좋은 밭인가를 깊이 반성하여야 합니다. 각자의 믿음의 성장 내용을 검토하시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즉 우리 자신들 안에 뿌리어진 복음의 씨가 잘 자라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길가 밭은 아닙니다. 길가 밭은 말씀의 씨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 마음이니 그런 사람은 여기 이 자리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왕이 그런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벨릭스 총독이 그런 마음을 소유했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몇 차례 듣고도 결국 회개하지 아니 했습니다.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 하다가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의 밭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듣고, 전도를 받고 곧 반응하여 예배당에 옵니다. 그런데 몇 번 교회에 나오다가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에 좌우되는 성격의 사람들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학습이나 세례 같은 의무가 주어질 때 피해 갑니다. 그러다가 영원히 천국의 문에서 멀어집니다. 6절에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해는 은혜를 가르칩니다. 막상 은혜의 기회가 올 때 도망하여 오히려 조금 핀 싹마저도 타 버리고 맙니다. 의무의 짐은 은혜의 기회인데 그것이 주어질 때 오히려 타져 버리고 만다면 이 얼마나 처량한 일입니까?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봉사를 시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 짐이 무거울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피하면 작은 믿음의 작은 싹마저 타 버리고 맙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종종 논의되곤 하는 것인데 교회 개축이나 신축 시에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은 공개적이기에 개중에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있다고 하여 교회의 큰일을 광고하지 않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광고를 하면 목사님이 돈 이야기를 한다고 빈정대면서 교회를 떠나간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여린 싹이 있기에 교회는 조심스럽게 일들을 추진하지만 때론 오해를 사기도 하고 상처를 받는 경우도 생겨서 조금 올라오던 싹이 해가 뜨면 타져 버리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목회자는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때는 늦습니다. 저의 목회 생활 30여 년 동안에 이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세 번째의 가시덤불 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의 싹이 제법 자라다가 가시덤불의 기운, 즉 세상에 대한 걱정과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 입니다. 이 경우는 세상을 향한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세상의 재미에 빠지고 세상의 일락에 도취하여 말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지고 놀 것 다 놀면서 예수를 믿고 싶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한손에는 세상을 붙들고 다른 손에는 천국을 소유하고 살고 싶어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오늘 배워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할 것 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좋은 시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밖으로 나가라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님을 명심시켰습니다.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하여 최소한의 염려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한데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염려는 생존의 염려가 아니라 부하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 하는 관심과 염려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리는 목숨 부지를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돈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 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고 착취하면서 까지 돈에 애착을 가지고 이를 탐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아니 자라던 믿음도 기운이 막혀 죽습니다. 여러분들은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그 말씀 그대로를 달게 받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어 버리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서 꿀꺽 꿀꺽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외쳤는데 말씀이 이토록 달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깊이 빠질 리가 없겠지요. 육신이 세상에 거주하는 동안에 필요한 최소한의 세상사를 빼고는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의무를 열심히 감당할 때 옥토가 됩니다.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적어도 길가 밭은 면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돌밭도 되어서는 안 되고 가시떨기 밭도 돼서는 안 됩니다. 옥토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옥토라고 여기는 분들은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30배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60배 정도로 좋아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100배를 추수합시다. 결실은 겉으로 드러납니다. 생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기도생활이나 전도생활에서 나타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몸 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 오늘 예배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은 옥토가 되어 100배의 결실을 맺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0배의 복을 받은 사람/창26:12-25
100배의 복을 받은 사람/창26:12-25 2003-05-27 20:02:02 read : 818 어느 분이 10만원 투자하여 60억이 넘는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떠들썩합니다. 세금을 제하고도 5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한탕주의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땀흘려 수고하고 주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이 임합니다. 영육간에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사업 위에 더욱 큰복으로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을 '잘 사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돈도 귀하지만 예수님 믿는 것은 훨씬 귀합니다. 성도들에게도 돈은 필요하지만 돈에 목숨걸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돈을 우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매사에 예수님을 앞세우는 철저한 신앙 안에서 돈도 벌고, 사업도 잘 하고, 인간관계도 잘 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12-13) 이삭이 농사하여 백 배의 결실을 거둔 내용이 나옵니다. 이삭은 한마디로 백 배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삭과 같은 백 배의 복이 임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백 배의 복을 받은 이삭처럼 살 수 있습니까? 1. 포기하지 않고 양보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목민들에게는 육축을 먹일 우물이 큰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랄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빼앗아 메워버렸습니다.(15절) 그러나 이삭은 포기하지 않고 또 팠습니다. 이삭의 별명은 '우물 파는 사람'입니다. 그는 계속 포기하지 않고 우물을 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은 힘든 것이지만 지나고 보면 유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72절 말씀에는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기도생활도 게을러지고, 충성심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그저 피하려고 하지말고, 고난 중에서 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다 보면 어려움도 생깁니다. 장애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을 잃는 것은 약간을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지만, 용기를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찾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이가 아프면 밤새 穉紀맒척?어머니처럼 기도하는 자녀를 하나님은 사랑으로 돌보시고 함께 하십니다.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죽을 것 같은 상황입니까? 이것은 오히려 고난의 끝이 왔다는 표시입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축복된 상황이 오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는 포기하지 않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가면 지난날의 실패와 고난을 딛고 더욱 복된 일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포기하지는 말되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삭은 100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시기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14) 남을 시기하면 자기 영혼이 망하게 됩니다. 남이 잘 되는 모습을 보면 축하해 주고,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이웃이 잘 되면 축하해 주고, 본받아야 합니다. 만일 앉아서 헐뜯고 시기한다면 정말 초라하고 형편없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정적인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을 보면 같이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의 미래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그저 시샘하고 헐뜯고 있으면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이 잘 풔?꼴을 보지 못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고 했습니다. 시기심이 참 무섭습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광야에서 우물은 큰 재산이자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물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이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태도입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땅을 내 놓으라!"는 말입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양보했습니다. 정말 손해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보하는 자에게 큰복을 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파자 샘이 터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양보(讓步)하면 진보(進步)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이 와서 또 그랄 골짜기의 우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20절) 그래서 또 양보하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그가 비굴하거나 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며 마침내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평화를 맺자!"고 제의해 옴으로 결론이 나게 되었습니다.(28-29절) 이처럼 하나님은 양보하는 자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양보하는 자는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복으로 채워주시는 은혜를 보게 됩니다. 이삭은 어떤 일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양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삭에게 100배의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2. 창조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삭이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척정신(창조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가서 새롭게 개척하자!"는 생각으로 양보한 것입니다. 개척정신이 없는 사람은 남이 이루어 놓은 것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수고도, 헌신도, 눈물도 없이 그저 열매만 따려고 합니다. 그러나 개척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이 넉넉합니다. 양보합니다. 수고와 땀을 많이 흘렸지만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정신을 가지고 한해를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무한한 가능성 있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큰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는 가운데, 한 해 동안 곳곳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결코 여러분이 타락의 도구가 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자, 시기하는 자로 전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작아도 할 일은 많습니다. 개척정신을 가지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할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남들이 다 이루어 놓은 큰 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어떤 것이 진정한 복인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복된 생명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래서 기대하십니다. 여러분이 샘물교회의 가족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샘물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닌 재능과 시간으로, 건강과 물질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1억, 2억과 바꿀 수 없습니다. 건강하지 못해도, 물질이 없어도, 많이 배우지 않았어도 여러분은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구원받은 천국백성입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고 산다면 결코 소극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개척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어떤 난관이 와도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이렇게 개척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눈물, 땀, 고난은 있어도 반드시 놀라운 축복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삭처럼 100배의 복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샘물교회는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꿈이 있습니다. 큰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이삭처럼 백 배의 결실이 있는 성도와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뛰어야 합니다. 개척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년처럼 살았던 갈렙처럼 꿈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외쳐야 합니다. 이것?바로 개척정신입니다. 남들은 다 이루어 놓은 것을 편하게 차지하려 하지만, 우리는 꿈과 소망을 가지고 만들어가야 합니다. 개척정신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도 낙심한 모습으로 살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2003년도에는 확신 있는 믿음으로 한번도 이루어보지 못한 복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삭처럼 백 배의 복을 받는 주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외쳐봅시다. 금년 한해는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해가 될 것이다. 아멘. 3. 이삭처럼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삭은 예배 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르호봇에서 다툼이 멈추었습니다. 이삭은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22)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브엘세바로 올라갔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삭은 그곳에서 예배의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장막을 쳤습니다.(24) 예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는 이삭에게 하나님은 100배의 복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원래 이삭의 직업은 축산업입니다. 그런데 그가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얻어 거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증거입니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열심, 비전 그리고 환경도 중요하고, 위치도 중요하고, 모든 여건이 잘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일터가 바뀌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복된 존재가 되니 100배로 복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 LA에 사는 김용규 장로님 간증이 실렸습니다. 그분은 원래 태권도 사범이었는데 부상 때문에 도장 운영을 포기했습니다. 85년에 LA에서 봉제공장을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잘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 부인이 기도해서 잘 되는 것이다"라고 했지만 장로님은 "내가 수완이 있어서 잘되는 것이지 무슨 기도 때문이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반품 문제로 큰 부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수완을 발휘해도 부도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손을 들었습니다.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그곳에서 신명기 8장 17-18절 말씀으로 철저히 깨졌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그는 이제까지 자기가 잘해서 부자가 된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셔서 잘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회개했습니다. 마음도 비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하고 베풀며 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와 구조조정을 하고, 직원들을 믿는 사람으로 바꾸고,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위기를 극복하고 사업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고 마침내 나이키 회사의 의류 납품권까지 따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간증을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복주시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축산업자인 이삭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농사일로 전업하고도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태권도 사범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니까 봉제일로 전업하고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반드시 백 배의 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성실함도 수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완으로는 2배의 결실을 얻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백 배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작은 부자는 본인이 노력하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부자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2003년에는 영육간에 큰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삭처럼 백 배의 결실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확신하며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생활의 중심에 두고 모든 삶의 계획표를 진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잘못된 길을 택하여 어려움과 위기에 처하고서는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2003년에는 세상의 일을 버립시다.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와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가야 합니다. 복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온갖 고생과 수고를 해서 우물을 팠습니다. 시간도 많이 들였습니다. 땀도 물질도 많이 들였습니다. 여러 곳을 파느라고 아픔과 희생도 있었습니다. 빼앗기면 양보하고 또 팠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앞세우고 나아가 우물을 얻었고, 100배의 복을 누렸습니다. 2003년 한해는 이삭처럼 예배중심으로 삽시다. 개척정신, 도전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며 살아갑시다.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말고, 은혜의 마음으로 양보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중에 이삭처럼 100배로 복을 받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2015-02-12
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성경 창세기에는 3사람의 조상이 등장합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 그들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만을 따먹고 선한 인류가 번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야 말았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타락하므로 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롬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한 말씀대로 입니다. 노아는 아담이 타락 후에 제2의 조상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홍수 심판 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에게 축복하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시의 가장 완전한 의인이었던 노아를 세웠으나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위로 돌아가고 홍수의 심판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원죄로 타락하고 범죄로 파괴된 인간을 구원할 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뿐이었습니다. 여기에 세움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진리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 원리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등장합니다. 창12:2,3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아담이나 노아에게 축복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창15:4,5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라는 나이 늙고 경수도 끊어진 아기 낳을 소망이 없는 노경의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무덤과 같은 사라의 태속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역사할 때 언약의 자식인 아들을 낳게 돈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결국 이삭은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낳은 자식이 되었습니다.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잉태하였으니 아브라함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 되는 원리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은 하와가 죄와 율법의 노예가 된 죽은 자를 낳았고 신약은 사라와 마리아가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할 자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잉태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따라 잉태케 하사 언약의 자식을 낳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죽은 자 아담의 후손이 아니요 성령으로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축복의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한 성경의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에게 믿음으로 많은 축복의 자식을 낳게 하는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100세에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하며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1. 축복의 말씀의 씨를 나의 마음 배에 잉태케 하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잉태한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잉태되는 기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쫒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축복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말씀을 잉태한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2천 년 전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를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성령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배속에 잉태시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배속에 성령으로 잉태시킬 수 있는 씨앗입니다. 벧전1:16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의 씨는 우리의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큰 사건을 계획하시고 성취시키려고 할 때에는 먼저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게 될 때 큰 결과 열매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생각이나 환상이나 감정에서 된 것이 아니라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먼저 임하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하여 축복의 말씀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받아 자기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나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요 나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천하 만민이 나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건지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삼기 위하여 호렙산 가시 떨기 밑에서 축복의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거듭 말씀하여 축복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잉태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 심령 속에 살아 잉태될 때 비로소 큰 사건으로 이루게 됩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사건을 이룬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두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었던 것입니다. 세계사를 움직인 신앙의 사람들도 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된 후에 그대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고아의 왕 조지 뮬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시81:10에 “나는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 말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어지고 무엇이든지 간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짓고 모든 필요한 것을 기도로 해결하였습니다.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때마다 필요한대로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3천명의 고아를 살렸고 평생에 풍성한 축복을 누렸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되기만 하면 그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생활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잉태케 하는 성령을 언제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서 범사에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기를 바랍니다. 2.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십시오. 말씀이나 생각이 마음뱃속에 잉태된 다음에 믿음으로 그것이 자라나는 꿈을 그리며 그 꿈을 마음 뱃속에 설레도록 채우고 자나 깨나 꿈이 이루어진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나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말씀하시고 그를 밖으로 인도하시고 밤하늘의 별들을 헤아리게 하시고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게 하셨고 가나안을 상속으로 주시기 전에 멀리서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므로 가나안땅을 분명하게 소유하는 꿈틀거리는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잉태한 사람은 자나 깨나 꿈을 꾸며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그 씨를 자라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말씀이나 아이디어가 잉태되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진 모습을 그리십시오. 그 씨가 마음 뱃속에 가득히 채우고 꿈틀거리게 하십시오. 우리 마음뱃속에 가득 찬 꿈은 계속 꿈틀거리게 하면 자라나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군에 입대하면서 큰 꿈을 가지고 군 생활을 하였으며 그 꿈을 거의 다 이루었습니다. 저는 우리 일신교회에 대한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에 대한 큰 꿈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 큰 꿈은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우리 일신교회에 오도록 되였을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매일새벽에 기도하며 성경읽기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 영광 보리라” 요11:40말씀이 노래로 터져 나왔습니다. “일신 일신 할렐루야 -----------일신 일신 일신 성도들이여 영광을 보리라” 그때 저는 군종병 이선목이라고, 이호문 목사님 아드님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복음성가 가수입니다. 그와 함께 곡을 맞추면서 하루 종일 매일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에 와서는 벽에다 크게 써 붙여 놓고 우리 식구가 모두 함께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11:을 펴서 성경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때 제 가슴이 뜨거워지며 말씀에 은혜가 되고 “하나님 영광을 보리라” 설교 말씀을 단숨에 써내러 가게 되었습니다. 일신교회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저는 그때 확신하였습니다. 지금도 확신합니다. 제게 이 말씀이 마음 배 속에 잉태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음배속에서 꿈틀거리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시면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천상의 24장로님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금 면류관을 다시 벗어서 주님 보좌에 던지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전개 될 것입니다. 믿는 대로 될 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입으로 해산 하십시오. 그리고 기고, 걷고, 뛰어다니게 하십시오. 롬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입으로 말하고 시인하게 될 때 창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우리의 언어를 통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살아 역사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 봉사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입술로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상태의 믿음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지 않는 믿음은 잠자는 믿음입니다. 속에만 있는 믿음-죽은 상태에 있거나 잠자는 상태에 있는 믿음은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할 때 이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음을 입으로 해산하게 하여 살아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으로, 사래는 사라-열국의 어미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게 했습니다. 말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것이 말로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해산하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사라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 열국의 아비여!” 또 아브라함이 “사라-열국의 어미여!”하고 서로 불러댔습니다. 90,100세 꼬부라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런 말하기가 굉장히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사라는 그들의 마음 배 속에 잉태된 것을 입을 통하여 해산을 하였습니다. 믿음을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들은 이웃사람은 자식도 없는 늙은 주제에 열국의 아비 어미라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고 비웃었습니다. 노망이 들어도 보통 들은 것이 아니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사라는 일단 잉태된 것을 해산 해 놓고 보니 시원했고 그것이 기어 다니고, 걷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게 되고 더 힘을 얻어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입으로 믿음을 시인하게 되자 그들의 믿음은 더욱 살아 움직였고 축복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1년이 지난 후 정말 하나님 축복의 말씀의 씨앗-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 감격 했겠습니까? 100년 묵은 썩은 고목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기적이 하나님 말씀의 씨를 받아 마음 배속에 잉태하고 자라게 한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사람들 대열에서 낙오자 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4. 어려운 잉태 어려운 해산을 통하여 얻은 것 모두를 하나님 앞에 내 놓으십시오. 그 이상의 것을 도루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어렵게 아이를 잉태하였고 어렵게 해산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일생일대에 중대한 시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약속과 언약으로 베풀어 주신 모든 축복을 다 거두어 가 버리는 절망적인 순간이요 또 자신과 그토록 사랑스런 아들과 함께 죽어버리는 비장한 결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날을 번득이는 순간 그 생애의 전부를 희생하는 순간이며 또한 자신이 제물이 되어 죽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영원한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일시적인 사랑을 죽이는 결단을 내렸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인간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준비하신 양을 잡아 축복의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축복의 새장이 펼쳐지게 아브라함의 손을 계속 잡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였던 것입니다. 그는 승리한 것입니다. 그는 죽고 다시 산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은 6대주 5대양에 믿음의 후손을 거느린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말씀대로 되였습니다. 약2:21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이요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자신에게서 산 믿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축복의 말씀에 신앙을 가집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해산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던 그 축복이 우리의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100점은 없다/ 욥20:21
100점은 없다 욥20:21 요절 :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 (욥20:21) 본문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환란을 겪고 있는 욥에게 친구 소발이 한 말이나 그런데 욥에게는 해당치 않는 것으로서 소발이 큰 오류를 범하고 있음입니다. 그러나 악인에 대한 원론적인 내용은 맞는 말임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이 됩니다. (21절), 어느 누구에게도 100점짜리 인생은 없습니다. 100점짜리 인생은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100점짜리 생을 소유하고자 함에 범사가 불만족이며, 삶의 기쁨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불만족Ⅰ : 건강 인간의 육신은 기계와 같고, 흙으로 지어진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생을 살아가노라면 이런저런 질병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사람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벽하게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무슨 병이라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100점짜리 건강은 없습니다. 두통, 당뇨, 고혈압, 저혈압, 설사, 변비, 허리디스크, 목디스크, 온몸이 저리고 쑤심, 안질, 골다공증, 정신병, 무좀, 습진, 귀, 입, 간, 장, 치아, 피부... 이루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희귀병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건강은 중요하고도 필요합니다. 해서 건강에 주의도 해야 하고, 관심도 가져야 합니다. 허나 내 몸의 어디도 고장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질병이 생길 수 있고, 갖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몸에 좀 이상 라도(이상이 생겨도) ‘이럴 수도 있지 뭐 사람인데... ’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이는 바울이 자기 몸의 찌르는 가시, 곧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구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십니다. 이후, 바울은 자신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니 그의 몸은 병이 없어야 하고, 혹시 병에 걸렸더라도 고쳐주셔야만 합니다. 헌데 그의 몸에는 병이 있었고, 하나님께선 고쳐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도 그의 간구는 인간의 욕망을 위한 재물, 권력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병을 낫게 해달라는 것이었건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니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버리신 것일까요? 외면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플루머(Plummer)의 말을 빌립니다. “바울의 기도는 거절당했으나 더 큰 선물을 받았다” 인간은 고통과 약함을 통하여 영이 완전해 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약함을 알고 겸손히 자기를 낮춤은 하나님의 능력이 발현되는 가장 좋은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100점짜리 완전한 건강을 바라지 말고, 지금의 건강에 만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100점 건강을 갖고자 안달을 하면 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과 육이 합성된 존재임으로 영적 건강으로 내적인 질병을 정복해야 합니다. 건강한 영으로 50의 아픔을 20, 10, 5로 줄여야 합니다. 50의 아픔을 80, 90, 95로 만듦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몸을 사랑하되 내 몸을 우상화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완전한 건강을 바라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간구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도리어 기뻐했고,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라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찌르는 가시를 통하여 머물게 했고, 모든 기독교인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머물게’라는 헬라어 ‘에피스케노세’는 ‘장막을 펴고 확고부동하게 머문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동의 은혜를 자신에게 머물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100점짜리 건강이 없음을 알고 지금 내 몸의 아픈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도와, 믿음으로 고통을 줄이고, 기쁨으로 힘있게 살아야 합니다. 건강에 대한 불만족을 버리시고 지금의 건강에 만족하며 사십시오. 병이 있어도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 바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건강이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좋은 상태이거나 아무런 병도 없고 또는 약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에 있는 말입니다. 불만족 Ⅱ : 사람 부모, 자녀, 부부, 형제자매, 교우, 이웃, 직장의 상하... 사람은 사람,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부딪치며 생활하고 있고, ‘너’에게서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너’가 ‘나’에게 100점짜리가 되어주길 원합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100점짜리는 없습니다. ‘너’도 ‘나’도 100점짜리는 아닙니다.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사장, 내 친구, 내 동료, 내 목사, 내 교인에게서 100점을 원해서는 아니됩니다. ‘너’에 대한 ‘나’의 불평불만은 ‘너’에게서 ‘내’가 기대하는 100점을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없는 것을 찾으니 불평이 나오고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너’에게서 부족함이 보이면 ‘나’에게도 부족함이 있음을 보고 자족해야 합니다. ‘너’가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주어야만 됩니다. “너에게서 필요를 찾으려 말고 ‘내’가 ‘너’의 필요가 되어주라” 제 결혼 주례사입니다. 예수님께선 내어주신 사랑을 하셨습니다. 생명까지 내어놓으시고 우리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너와 나, 우리는 언제나 받으려는 사랑에 주려 있기에 항상 불만족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불만이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면서도 ‘너를 위해서’라고 위장하기도 합니다. ‘나’라는 존재 의미를 상대에게서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바라고, 지나친 욕구충족의 추구 때문에 미움이 생기고, 싸움이 발생하며,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떻다구요? 아내가 어떻다구요? 내 자식은 왜 이 모양이냐구요? 내 이웃이 싫다구요? 없어졌으면 좋겠다구요? 없어보십시오. 무인도에 가서 살아 보십시오. 불만이 제거되는 그 순간부터 가슴을 치고, 외롭고, 슬플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 100점짜리 찾지 않으셨습니다. 하나같이 근량미달이었습니다. 그러나 100점짜리로 만드시려고 3년 동안 이끌고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다듬으셨습니다. 사람을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서 관계하면 할수록 불만족의 덩어리는 더 커지며, 기쁨의 삶은 더 멀어집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자매, 내 교인, 내 목사, 우리사장, 내 직원을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100점짜리는 없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일 뿐, 가까이 가서 보면 내 것보다 더 작습니다. 어떤 부인이 주님께 자기를 한번 만나달라고 늘 기도했답니다. 그녀의 끈질긴 청원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네 소원을 들어주마 3가지만 말해라. 더는 아니된다” “지금의 남편과 도저히 못살겠으니 그를 죽게 하고 더 좋은 남편과 살게 해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 소원은 즉시 성취되었습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데 문상객들이 모두 남편의 온갖 좋은 점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너무 성급했음을 후회했습니다. 해서 주님께 “그만한 남편도 없는데 제가 미련했으니 다시 살려 주세요”라고 간구, 두 번째 청도 즉각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이제 딱 한번밖에 기회가 없는데 무엇을 구할까? 영생불사?, 돈?, 권력?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좋은데... 궁리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구할 것이 너무 많아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여인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제 마지막인데 무엇을 청원할까요? 제발 가르쳐 주세요” 주님께서 껄껄 웃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살다가 무슨 일을 당하여도, 누구를 만나도, 항상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달라고 청하거라” 불만족 Ⅲ : 축복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이 땅위의 누구에게도 결코 100점짜리 축복이 없습니다. ‘쌍가마에도 근심이 있다’ 우리의 속담입니다. ‘풍족할 때에도 곤액이 이르리니(22절)’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20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 한결같이 100점짜리 복이 없음을 말씀하심입니다. 인간의 대표적 탐욕은 돈, 물질입니다. 헌데 이에 대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 절대적 필요충족을 할 수 없습니다. 스토아학파는 “당신이 만약 누구를 행복하게 하고자하면 소유물을 증가 시켜주지 말고 그의 욕심을 제거해주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학설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욕망을 없앨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욕망 제거가 자급자족이 아니됨을 알았습니다. 신급자족,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것을 배웠습니다(빌4:1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내 복을 타인과 비교, 행복해지려고 하면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다. 까닭은 죽을 때까지 찾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복, 나의 행복은 지금 여기, 내 안에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복을 받았고 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행복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불만족, 불행은 내가 복을 받았고, 행복한 사람임을 모르거나, 사단에게 빼앗겨서 와지는 것입니다. 100점짜리 완전한 복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족 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은 파멸을 초래합니다. 놀만 빈센트 피일(N.V.Peale) 목사가 발리(Bali)섬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갔습니다. 큰 산업 시설도, 재미있는 오락시설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가 ‘그런데 왜 그들이 행복하게 살까?’ 라는 의문을 갖고 일주일 동안 섬 주민들과 인터뷰한 결과입니다. 1,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We have nothing). 2,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Our life simple). 3,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We like each other). 4,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We have enough to eat). 5,우리는 아름다운 섬에서 살고 있습니다(We live on a beautiful island). ‘nothing\\\' \\\'simple\\\' \\\'enough\\\' \\\'like\\\' \\\'beautiful\\\', 주목해야 할 단어들입니다. 이란 왕 팔레비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중의 왕’을 자처하며 2500년전 누렸던 페르샤 왕국의 영화를 다시 이루겠다고 천명, ‘백색혁명’을 주도,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칭송까지 받았습니다. 허나 장기집권을 함에 따라 비밀경찰이 생겼고, 정치는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저녁 파티 비용으로 1억달러, 전용 비행기 화장실까지 순금으로 장식, 600명의 호위병...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회교 혁명이 일어났고, 그는 왕좌에 축출, 모로코에서 바하마로, 바하마에서 멕시코, 미국, 파나마로 떠돌다가 1980년 7월 2일 카이로의 한 육군병원에서 임파선암으로 죽었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육체의 악에 물들여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 플라톤(Platon)의 말입니다.
10가지 재앙 /출11:1-3
10가지 재앙 /출11:1-3 2011-08-22 23:35:30 read : 4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 장대한 스케일, 수많은 등장인물들,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스토리 구성, 그리고 상상을 초월한 통쾌한 장면들... 하나님께서 시나리오를 쓰시고, 하나님께서 감독하시고, 하나님께서 제작하신 하나의 우주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적 드라마 출애굽기는 내용적으로 볼 때 크게 세 편의 연속된 사건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출애굽을 위한 준비 사건입니다.(1-6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라는 한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둘째는 출애굽 사건입니다.(7-18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셋째는 출애굽 이후 사건입니다.(19-40)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본문 말씀은 두 번째 사건의 한 부분입니다. 출 7:14-11:10까지 이어지는 소위 “열 재앙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8:1) 물론 바로가 보낼 리 만무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리 없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장정만 60만입니다. 남녀노소 전체를 합하면 200만 정도의 인구입니다. 저들이 노예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 막대한 노동력을 잃어버린다면 애굽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맛보기로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입니다. 이쯤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선선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요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보입니다. 그것을 본 바로가 거절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매를 드셨습니다. 바로 애굽 땅에 재앙을 퍼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려 10차례나 계속됩니다. 바로 왕이 버티다 버티다 결국 두 손을 듭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냅니다. 10차례 재앙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피 재앙입니다. 애굽의 모든 강과 하수가 피로 변했습니다. 둘째,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가 애굽의 온 땅을 덮었습니다. 셋째, 이 재앙입니다. 땅의 티끌들이 이로 변했습니다. 넷째, 파리 재앙입니다. 애굽의 온 천지가 파리로 뒤덮였습니다. 다섯째, 악질 재앙입니다. 애굽의 가축들이 악질로 죽었습니다. 여섯째, 악성 종기 재앙입니다 . 애굽 사람들과 짐승들이 지독한 피부병인 악성 종기에 고통을 겪습니다. 일곱째, 우박 재앙입니다. 애굽 전국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여덟째, 메뚜기 재앙입니다. 애굽 전역에 메뚜기 떼가 창궐했습니다. 아홉째, 흑암 재앙입니다. 흑암으로 애굽 전체가 어둠에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다 끔찍한 재앙들입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재앙들입니다. 이 재앙들 10가지가 쏟아짐으로써 바로가 항복을 선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냈습니다. 이 10가지 재앙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1. 하나님을 나타내심 출애굽기의 10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7:5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7: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8:22를 보면 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그리고 9:14, 9:16, 8:10 등을 보면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이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함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실제로 10가지 재앙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심판하시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것들은 참신이 아님을 만천하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피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나일 강은 생명의 젖줄입니다. 나일 강은 사막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애굽은 땅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이 사막인 애굽 땅에 사람들이 살고 대제국이 세워졌습니다. 전적으로 나일 강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애굽인들은 나일 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닐루스’(Nilus)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신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일 강이 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 죽음의 자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일 강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생사는 나일 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관하신다는 엄숙한 선포입니다. 다음으로 흑암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은 사막입니다. 사막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태양입니다. 구름 한 점 없이 1년 365일 대낮에는 태양이 저 하늘에 떠서 온 천하를 호령합니다. 당연히 고대 애굽 사람들은 저 태양을 신 중에 최고의 신으로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이 바로 태양신 ‘라’(Ra)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대낮에도 3일 간이나 애굽 온 천지가 흑암으로 뒤덮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태양 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태양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태양이 사람들의 생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10 가지 재앙이 모두가 다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던 것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이 사건으로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호 4:1, 6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망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6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나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6: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이점을 잘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힘써서 여호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확인시키심 이 10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시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시키신 바가 있습니다. 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시고 이 점을 다시 확인시키셨습니다. 7: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백성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바로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이 일방적인 선택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 10가지 재앙 사건을 조금 세심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 가지 재앙 중에 치명적인 재앙들은 애굽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재앙, 악질 재앙, 우박 재앙, 흑암 재앙, 그리고 장자 재앙입니다. 이 재앙들은 애굽 땅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고센 땅에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재미있는 관점으로 설명했습니다. 렘 31:31-3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셔서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혼인 서약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택하셔서 결혼 예식을 올리기 위해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혼 예식장은 저 시내산인데 지금 그곳으로 데리고 나가시려고 바로에게 이 재앙을 내리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아주 특별한 사랑]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난 정말 많이 공부했어. 하나님에 대해 말야.“ 자신 있게 말하지만, 누군가를 인정할 수 없어서 누군가 부럽다 못해 미워져서 혹은 자신이 못마땅해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는 당신. 부드러운 미소와 섬김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당신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친 손에 반지를 끼우고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주시고 고운 옷을 당신에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 잠겨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심 이 10 가지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재앙이 임하자 처음에 바로는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그러다 재앙의 강도가 심해지자 한 발 물러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말을 뒤집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바꾸셔서 보낼 마음을 바꾸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재앙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9:12, 10:20, 10:27에 반복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바로가 악성 종기 재앙이 임했을 때, 메뚜기 재앙이 임했을 때, 그리고 흑암 재앙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생각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셔서 바로가 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이 10가지 재앙의 최종 목표가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자 재앙까지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자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 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출 12:21-2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한 마디로 유월절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 죽음의 재앙을 피할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리고 그 집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그 집은 유월 곧 넘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살았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고 심판에서 구원받고 이 땅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10 재앙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심을 깊이 느끼고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새 이스라엘인 우리를 위해 놀랍게 역사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가지 재앙 /출7:14-11:10
10가지 재앙 /출7:14-11:10 2011-08-22 23:12:09 read : 4 2011년은 교회 표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정하였고, 이 표어를 따라 복음의 내용을 무엇으로 담을 것인가에 대하여 계속 출애굽기를 통해 강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개인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하나님 나라를 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왕을 말해야 하고, 그 왕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면 역시 필시 왕의 권세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전의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왕의 권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성경에는 옛 하나님 나라와 새 하나님 나라의 경영이 나타나 있습니다. 옛 하나님 나라는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한 나라입니다. 신약의 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그 나라 왕은 누구며, 어떤 권세를 가졌는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전파의 내용에 이러한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지금 전해야 하는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 왕의 권세와 비교하여 신약의 하나님 나라 왕의 권세가 얼마나 더 크고 강한 것인지 나타내 증거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여호와의 강한 손의 권세는 일반 세계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강한 나라의 왕이 가졌던 권세와 비교하면 그 힘과 능력을 비슷하게 말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바로 왕을 항복시키고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 아들의 권세는 이런 세상 나라의 권세와 다릅니다. 그가 가진 권세에 대하여 성경은 죄사함의 권세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세를 가진 왕은 인류 역사에 어느 누구도 없었습니다. 로마와 징기스칸의 원나라, 그리고 중국의 당나라이든지 이런 권세를 가진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의 내용에 담아야 할 것은 바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이 권세입니다. 오늘 본문이 상대적으로 다른 주일보다 분량이 매우 많았지요? 이는 10가지 재앙을 하나씩 강론하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10재앙 전체를 보고 말씀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직접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출애굽기 문맥을 다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하여 세워진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애굽에 내려간 70인의 야곱 후손들이 씨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레위 지파의 아들인 모세를 불러 애굽 바로 왕에게 보내어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어 시내산에서 처음 세워졌습니다. 모세에게 형 아론을 함께 하도록 하여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였다고 출애굽기 5장-6장이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가서 이스라엘을 내보내어 달라고 하자 바로 왕은 듣지 않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더 학대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는 모세에게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실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구원하심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7장-1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강한 손을 출애굽기는 어느 특정한 형식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킨 일이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10가지 재앙과 전체적으로 한 세트가 된다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10가지 재앙의 결정적인 재앙은 유월절 재앙으로 이 유월절로 말미암아 애굽 바로 왕이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전초전의 성격을 가진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성경에서 자주 되풀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여리고성 전투를 들었습니다. 여리고성의 승리는 나머지 모든 가나안 땅의 성읍을 차지하는 전투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항상 이렇게 서론에 가까운 승리가 있고 이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전쟁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평양전쟁을 들 수가 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말미암아 미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항복을 얻기까지 미국은 계속 일본의 본토까지 진격하며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와 같이 10재앙도 애굽을 융단폭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10재앙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냥 10재앙이 무엇이 있었는가를 아는 정도 그칩니다. 정작 모세가 10재앙을 기록한 의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10재앙을 전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세가 기록한 방식을 추적해 가면 모세의 기록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주보의 설교개요란에 써놓은 것처럼 10재앙을 9+1로 보았습니다. 이유는 앞의 9가지 재앙을 기록한 것과 10번째 재앙을 기록한 것이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게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이처럼 모세는 10번째의 재앙을 아주 특별하게 기록했습니다. 9가지 재앙에다 한 가지 더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9가지 재앙도 그냥 첫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 나열해서 보지 말아야 합니다. 9가지 재앙을 3+3+3=9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10재앙 전부를 수식으로 나타낸다면 (3+3+3)+1=10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3가지 재앙씩 동심원과 같이 반복되며 점차 확대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재앙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7:15절에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2번째, 3번째 재앙에는 나오지 않고, 4번째 재앙에 나옵니다. 8:20절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고 합니다. 이 말이 5번째, 6번째 재앙에는 나오지 않다가 다시 7번째 재앙에 나옵니다. 9:13절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8번째, 9번째 재앙에는 이런 말이 없어요. 그러면 왜 3재앙씩을 끊어 말하려고 하는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10재앙을 보시는데 또다른 기록방식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1번째, 2번째 재앙에는 애굽의 요술사들도 모세와 아론이 행하는 재앙에 맞섭니다. 그러다가 3번째 재앙에 때는 달라집니다. 8:18, 19절을 보십시다.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이렇게 3번째 재앙 때는 요술사들도 맞서서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 여호와의 권능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는 태평양전쟁을 살펴보아도 같습니다. 비록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했더라도 육군과 해군력을 동원하여 미국과 맞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전세는 기울게 되고 많은 장수들을 전장에서 잃게 되고, 다른 장수들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게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3번째 재앙까지는 나일강을 시작으로 애굽의 모든 식탁에 그리고 애굽 온 땅으로 재앙이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4째 재앙부터는 말이 바뀝니다. 어떤 식으로 바뀌냐면 애굽 땅 애굽 사람에게는 재앙이 내리지만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다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즉 재앙을 내려도 여호와의 소유인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시켜 보호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8:22절을 보십시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이렇기 때문에 3번째 재앙과 4번째 재앙 사이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7번째 재앙을 보면 또다른 기록방식이 등장합니다. 우박 재앙을 내릴 때 9:14절을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온 천하게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니” 그리고 9:18절에도 보면 “애굽 나라가 세워진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애굽 땅에서 경험하지 못하였던 재앙이라고 반복하며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서 볼 때 3재앙씩 반복되면서 점점 더 강한 재앙으로 애굽을 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점 더 강한 재앙이 애굽에 임하는 가운데 10:7절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드디어 애굽의 신하들도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면 누가 굴복하겠습니다. 요술사들이 굴복했고 신하들이 굴복했습니다. 그럼 당연히 바로 왕이 항복할 차례입니다. 이러한 순서는 거의 모든 나라의 전쟁역사를 살펴보면 거의 같게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양 나라의 대표적인 장수가 나와 일전을 벌입니다. 그러다 한 쪽이 패하게 되면 전세는 기울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곧바로 항복하지는 않습니다. 끝까지 대항하다가 많은 군사들을 거의 다 잃고 나서야 왕이 비로서 항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10재앙을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그냥 의미가 없는 10재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3재앙씩 점점 더 강하게 내리다가 마지막 10재앙 때는 결정적인 원 펀치를 먹여 상대를 KO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예로 든 태평양전쟁에서도 역시 같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미드웨이 해전 후 큰 전쟁의 승리를 과달카날 섬에서 미군을 얻습니다. 이 섬의 비행장에 관한 싸움입니다. 그런제 태평양전쟁 때 일본은 전술적인 면에서도 미국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이미 중일 전쟁을 치렀고 동남아시아에서도 전쟁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상대적으로 진주만 기습을 당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 들었으니 전술적인 면에서도 매우 약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세를 과달카날 섬의 전투에서 뒤집어 버립니다. 미국이 전술적이 면에서도 일본을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미드웨이 해전은 해군력만의 싸움이라고 한다면 과달카날 섬의 전투는 육해공의 싸움이었습니다. 과달카날 섬이 전략의 요충지였는데 이 섬을 탈환함으로 비로서 미국은 확실한 공격적인 전술을 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달카날 섬을 일본이 빼앗긴 것은 애굽의 요술사들이 굴복한 것과 어쩌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많은 섬들을 빼앗기며 점점 후퇴하게 된 일본군의 모습은 마치 애굽 바로 왕의 신하들이 굴복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끼나와의 본토로 진격한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이는 유월절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다 멸하신 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이 항복학 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10재앙을 통해 여호와의 강한 손이 어떻게 애굽에 나타났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교리처럼 10가지 재앙을 읽게 되면 첫 번째 재앙도 예수님의 공로로 연결시켜 버리고, 두 번째 재앙도 역시 예수님의 죄사함으로만 읽게 되어 결국 모세가 말하고자 한 것을 다 놓치게 됩니다. 10재앙에 대하여 하나 더 생각해 보십시다. 첫 번째 재앙은 나일 강을 피로 만든 것이고, 9번째 재앙은 흑암으로 애굽 땅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창조의 시작은 창세기 1:2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면서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며 흑암에 빛이 있게 된 창조를 말하였습니다. 이를 연상하면서 보면 애굽 땅에 흑암이 있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땅에는 빛이 있다고 했습니다. 10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할 때 애굽 온 땅에 임한 재앙을, 그 다음에는 그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과 가축, 동식물을 칩니다. 이것도 창조에서 땅을 만드시고 그 땅에 모든 동식물을 가득 채웠던 것과 대비가 됩니다. 그러니까 나일 강에서 즉 물에서 재앙이 시작되고, 이 물에서 나온 개국리가 애굽 모든 집의 식탁과 반죽그릇에까지 올라가고, 3째 재앙에는 이가 애굽 온 땅을 점령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7번째 재앙인 우박은 집 안에 들어간 것은 치지 않았지만 집 밖에 있는 것은 식물이나 가축을 다 멸했습니다. 우박 재앙 때는 삼과 보리가 아직 나기 전이었다고 하여 모든 식물이 다 멸절당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8번째 재앙인 메뚜기는 모든 식물을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갉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박 재앙보다 메뚜기 재앙이 더 무섭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처음에 저는 별로 믿고 싶지가 않았더랬습니다. 그런데 펄벅의 대지를 읽으니까 중국의 메뚜기 재앙을 기록한 것이 있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가끔 보도도 되고 있지요. 아예 먹을거리가 없도록 싹까지 완전히 먹어치워 다음 해에 농사지을 종자까지 없애버립니다. 이러한 재앙들은 최근에 일본 지진으로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 일에 대하여 세계가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 바다 물이 지구의 모든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일본 근해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바다가 오염이 될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 방사능 재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출애굽기의 10재앙을 기록한 방식을 따라 보면 그 의미를 더 확실하게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마가복음을 강론하면서 출애굽기와 병행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마가복음을 보면 1장의 내용과 병행합니다. 막 1:29-45절을 보십시다. “ ... ” 여기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일, 많은 병자와 귀신들을 쫓아내신 일, 그리고 나병환자를 고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본문만 보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신비한 능력으로 병을 고쳤다라는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마가는 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한 일을 기록하는지 여간해서는 알 수가 없지요. 마가복음의 특성상 짧고 간결하게 기록하는데, 이 열병 치료는 전후 문맥에서 무얼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게 볼 때 이 열병 치료에 대하여 어떤 부가설명이 없으므로 아주 단순하게 예수님의 치료능력으로만 볼 것입니다. 마가가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원어를 찾고 문법을 따라 단어 하나까지 사전으로 추적하여 그 의미를 세밀하게 연구하더라도 이 자체로는 마가가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것은 제가 여러 번 여러분 앞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출애굽기가 아니면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우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셨고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여기서 ‘저물어 해질 때’라고 하고, 35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라고 하는 표현들은 출애굽기의 ‘아침에 일찍이’라는 말과 병행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2-34절에는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다고 하고, 39절에는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럼 이건 어떤 점진적인 모습을 나타냅니까? 장모의 집에서 시작하여 동네로 그리고 온 갈릴리로 확대가 되는 형식입니다. 즉 이것은 애굽의 온 땅으로 재앙이 점차 확대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면 읽어도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인도하며 보호한다면 그 백성 중에 누구를 가장 먼저 책임을 지고 보호해야 하겠습니까? 그건 가장 가까운 심복의 가족을 돌보는 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하들의 가족을 편안하게 해야 신하가 왕을 위하여 충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애굽에 재앙이 내릴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애굽 땅과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의 땅과 사람과 구별시키셨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낸 권세 있는 새 교훈은 궁극적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알리시려 함을 통해 하나님 아들의 권세가 무엇인지 나타냅니다. 그러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과 많은 병자와 귀신을 쫓아낸 일과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은 죄사함의 권세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애굽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은 이방인인 애굽에 재앙을 내림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죄사함의 권세로 하나님의 아들이 귀신과 병을 고치신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중간에 보면 주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결박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굽 바로 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하나님 아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왕으로 오셔서 죄사함의 권세를 나타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들이 가장 가까운 제자의 가정을 돌아보셨고, 그 동네 사람을 치료하셨으며, 온 갈릴리에 전도하며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럼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갈릴리가 마치 애굽의 고센 땅처럼 구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방인처럼 천하게 여김을 받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주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가복음의 전체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천하고 가난한 이방인들이 주님의 나라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마가복음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갈릴리는 이방의 땅이고, 흑암에 앉은 백성이 거기 거하며, 사망의 땅과 그늘진 땅입니다. 이곳에 여호와의 강한 손이 아닌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가 임하여 구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여호와의 성막에 들어가지 못했던 부정한 자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로부터 배제되었던 불쌍한 자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 아들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자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다고 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가정, 갈릴리 땅의 사람들, 나병환자 등과 같은 이방 땅에 거하며 죄인된 사람들을 의인이라 여기는 유대인으로부터 구별시켜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장의 이런 사건들 속에 어려운 난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알면 이건 쉽게 해결됩니다. 출애굽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이 구원하심을 나타내 여호와를 알리려 하신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도리어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시거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까지 하셨고 소문이 나니까 동네에도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난 속에서 그는 입을 열지 않으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침묵하시었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으신다고 이사야 42:2절에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을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을 박히실 때 그 아래 있던 자들이 ‘너 자신을 십자가에서 구원하여 보라’고 조롱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자신의 권세를 온 천하에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권세를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도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겸손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 안에서 변방인 유대 땅 그것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산에서 11명의 천한 어부들과 함께 그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나라를 갈릴리 산에 세웠노라고 마가복음은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약하심을 죽었다고 고린도후서는 말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즉 베드로의 장모처럼, 갈릴리 온 땅의 비천한 이방인들처럼, 문둥병자처럼, 불쌍한 죄인들을 죄사함의 권세로 건지시러 오셨다고 마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과 저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베드로와 같이 주님의 제자의 가족입니까? 갈릴리 땅에 거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나병환자처럼 그런 병자였습니까? 우리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정말 빛이 없었고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대 땅에서 거리로 말하자면 정말 멀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더 큰 죄인이요 하나님께 대한 악한 오랑캐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저는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 보다 더 천하고 무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들을 구별하사 구원하시고 세상의 유명한 자들과 부한 자들과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 말했던 것처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들이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신 자들로 교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불러 부활의 몸인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며 성찬상에서 먹고 마심으로 참으로 권세있는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으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땅에 있어도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죄사함의 권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권능은 소리를 높여 거리에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은 천하가 알도록 하여 두려워 떨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권세는 그렇게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이 시대 가운데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교회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강남에 교회를 짓는데 2,000억원의 공사라고 합니다. 교회를 이렇게 크게 건축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 교회 담임목사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이제 교회도 세상에 대하여 말할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큰 교회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구약의 솔로몬 성전에는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주님의 몸된 성전에는 젼혀 맞지 않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다려 돌아가실 때 옷 한 벌 입지 못하셨고, 그 있는 것도 찢기워 제비 뽑았습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주님의 몸으로 새 성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권력이나 세력을 형성하려고 하려고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겸손함으로 낮아져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은 너무 쉽고 세상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교회를 이루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면 이건 성령이 함께 하는 교회요, 죄사함의 권세가 함께 하는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에 약한 자들이 들어오고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 들어올 때 교회는 더욱 기뻐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천한 자들이 들어온다고 부담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들을 내 몸으로, 내 생명으로 여겨 보호하고 지켜내어 교회의 권세를 나타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권세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이 함께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때 귀한 상급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상가에 세를 들어 504호에 거하는 저희 교회가 비록 작아도 세상을 이긴 믿음과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도록 함께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가지 재앙/ 출11:1-3/ 2009-08-12
10가지 재앙 출11:1-3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 장대한 스케일, 수많은 등장인물들,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스토리 구성, 그리고 상상을 초월한 통쾌한 장면들... 하나님께서 시나리오를 쓰시고, 하나님께서 감독하시고, 하나님께서 제작하신 하나의 우주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적 드라마 출애굽기는 내용적으로 볼 때 크게 세 편의 연속된 사건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출애굽을 위한 준비 사건입니다.(1-6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라는 한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둘째는 출애굽 사건입니다.(7-18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셋째는 출애굽 이후 사건입니다.(19-40)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본문 말씀은 두 번째 사건의 한 부분입니다. 출 7:14-11:10까지 이어지는 소위 “열 재앙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8:1) 물론 바로가 보낼 리 만무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리 없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장정만 60만입니다. 남녀노소 전체를 합하면 200만 정도의 인구입니다. 저들이 노예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 막대한 노동력을 잃어버린다면 애굽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맛보기로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입니다. 이쯤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선선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요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보입니다. 그것을 본 바로가 거절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매를 드셨습니다. 바로 애굽 땅에 재앙을 퍼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려 10차례나 계속됩니다. 바로 왕이 버티다 버티다 결국 두 손을 듭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냅니다. 10차례 재앙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피 재앙입니다. 애굽의 모든 강과 하수가 피로 변했습니다. 둘째,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가 애굽의 온 땅을 덮었습니다. 셋째, 이 재앙입니다. 땅의 티끌들이 이로 변했습니다. 넷째, 파리 재앙입니다. 애굽의 온 천지가 파리로 뒤덮였습니다. 다섯째, 악질 재앙입니다. 애굽의 가축들이 악질로 죽었습니다. 여섯째, 악성 종기 재앙입니다 . 애굽 사람들과 짐승들이 지독한 피부병인 악성 종기에 고통을 겪습니다. 일곱째, 우박 재앙입니다. 애굽 전국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여덟째, 메뚜기 재앙입니다. 애굽 전역에 메뚜기 떼가 창궐했습니다. 아홉째, 흑암 재앙입니다. 흑암으로 애굽 전체가 어둠에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다 끔찍한 재앙들입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재앙들입니다. 이 재앙들 10가지가 쏟아짐으로써 바로가 항복을 선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냈습니다. 이 10가지 재앙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1. 하나님을 나타내심 출애굽기의 10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7:5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7: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8:22를 보면 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그리고 9:14, 9:16, 8:10 등을 보면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이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함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실제로 10가지 재앙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심판하시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것들은 참신이 아님을 만천하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피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나일 강은 생명의 젖줄입니다. 나일 강은 사막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애굽은 땅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이 사막인 애굽 땅에 사람들이 살고 대제국이 세워졌습니다. 전적으로 나일 강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애굽인들은 나일 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닐루스’(Nilus)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신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일 강이 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 죽음의 자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일 강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생사는 나일 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관하신다는 엄숙한 선포입니다. 다음으로 흑암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은 사막입니다. 사막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태양입니다. 구름 한 점 없이 1년 365일 대낮에는 태양이 저 하늘에 떠서 온 천하를 호령합니다. 당연히 고대 애굽 사람들은 저 태양을 신 중에 최고의 신으로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이 바로 태양신 ‘라’(Ra)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대낮에도 3일 간이나 애굽 온 천지가 흑암으로 뒤덮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태양 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태양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태양이 사람들의 생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10 가지 재앙이 모두가 다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던 것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이 사건으로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호 4:1, 6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망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6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나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6: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이점을 잘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힘써서 여호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확인시키심 이 10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시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시키신 바가 있습니다. 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시고 이 점을 다시 확인시키셨습니다. 7: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백성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바로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이 일방적인 선택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 10가지 재앙 사건을 조금 세심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 가지 재앙 중에 치명적인 재앙들은 애굽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재앙, 악질 재앙, 우박 재앙, 흑암 재앙, 그리고 장자 재앙입니다. 이 재앙들은 애굽 땅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고센 땅에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재미있는 관점으로 설명했습니다. 렘 31:31-3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셔서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혼인 서약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택하셔서 결혼 예식을 올리기 위해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혼 예식장은 저 시내산인데 지금 그곳으로 데리고 나가시려고 바로에게 이 재앙을 내리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아주 특별한 사랑]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난 정말 많이 공부했어. 하나님에 대해 말야.“ 자신 있게 말하지만, 누군가를 인정할 수 없어서 누군가 부럽다 못해 미워져서 혹은 자신이 못마땅해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는 당신. 부드러운 미소와 섬김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당신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친 손에 반지를 끼우고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주시고 고운 옷을 당신에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 잠겨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심 이 10 가지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재앙이 임하자 처음에 바로는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그러다 재앙의 강도가 심해지자 한 발 물러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말을 뒤집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바꾸셔서 보낼 마음을 바꾸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재앙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9:12, 10:20, 10:27에 반복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바로가 악성 종기 재앙이 임했을 때, 메뚜기 재앙이 임했을 때, 그리고 흑암 재앙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생각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셔서 바로가 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이 10가지 재앙의 최종 목표가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자 재앙까지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자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 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출 12:21-2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한 마디로 유월절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 죽음의 재앙을 피할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리고 그 집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그 집은 유월 곧 넘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살았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고 심판에서 구원받고 이 땅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10 재앙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심을 깊이 느끼고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새 이스라엘인 우리를 위해 놀랍게 역사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가지 재앙/ 출7:14-25/ 2003-06-23
10가지 재앙 출7:14-25 어제는 선교부장이신 추교철장로님과 함께 논산 훈련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여 논산에서 훈련 받은지가 23년이 되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훈련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 군복음화 선교회 후원으로 4,953명의 훈병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푸른 잔디 위에 질서 정연하게 앉아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 주님께서 벳새다 들에서 줄을 맞추어앉은 5,000명의 장정들을 먹이셨던 오병이어의 그 기적을 생각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느라 아침도 점심도 걸렀습니다. 2시?동안 세례식을 베풀고 나니까 4시가 되었습니다. 하루종일 굶었지만 훈병들은 우리가 가기 전 12시에 이미 연병장에서 세례 예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장장 4시간 동안이나 그 뜨거운 잔디밭 위에서 세례식에 참석한 형제들을 보니 배고픔도 잊고 기쁨과 감격만이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논산 틔체年?우리 나라 최대의 훈련소입니다. 한해에 약 20만 가까운 장정들이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그중에 ⅓ 넘는 숫자가 논산을 통해서 훈련을 받게 됩니다. 95년` 1월부터 99년 3월까지 훈련소에서 실시한 총 75회의 진중세례예식을 통해 세례받은 장명의 수는 총 266,979명으로 훈련소 입대 장병의 65%가 진중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 젊은이들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했든지 관계없이 지금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고 다짐한 후 세례를 받은 일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참으로 가슴 벅찬 하루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바로와의 1차, 2차 대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했던 바로에게 이제는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강팍한 바로를 압박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손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서 네 백성을 보내기를 거절하니 너는 아침에 하숫가에 가서 바로를 만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명의 자리에 일찍 나가 준비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5,000명의 장병들, 120명의 세례를 주는 목사님들, 그리고 약 100여명의 성가대원들 전체가 다 같은 마음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는 그 형제들이 일찍 나와서 세례 연습을 한 것 같아요. "자, 이제 문답을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5,000명이 일제히 손을 탁 드는데 멋있더라구요. 첫째,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주인 것을 믿습니까?"그러니까 "믿습니다!" 하면서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다시 내리는데 그것이 한두번 연습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세례를 주는 목사님이 명찰을 보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깨에 명찰을 하나 더 만든 일 등 준비한 모습이 철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준비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은혜롭게 진행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명의 자리에 일찍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네가 바로가 나가기 전에 너희들이 먼저 하숫가에 가 있어라" 무슨 일을 해도 끌려다니기 보다는 앞장서서 일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인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왜 재앙을 내려야 하는가를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 하나님이 참으로 은혜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하시기로 결정했으면 그냥 시작하시면 될터인데 다시 모세와 아론을 하숫가에 보내 바로를 만나게 하시고 다시한번 왜 하나님이 당신에게 재앙을 내려야 하는지, 당신이 지금 어떠한 위치에 서 있는지를 한번 더 설명하고 그래서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4-25절 말씀에 보면 "마땅히 주의 종은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힘바 되어 그 뜻을 쫓게 하실까 함이라" 이제는 더 이상 안되겠다고 결정해놓으시고도 한번 더 주의 종을 보내서 깨달은과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7번 말씀하신 중 첫 번째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자신을 향해서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의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용서를 빌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70번씩 7번,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를 원합니다.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를 설명했으나 바로는 듣지 않았습니다. 싫어했습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출애굽기 4장 17절에 보면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양떼를 몰고 다니면서 자기 몸을 의지하기도 했고, 양떼에 해를 끼치는 여러 짐승들을 쫓기도 하던 막대기가 주님을 만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팡이가 나올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그를 부르시는 그 시간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의 지팡이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 지팡이에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팡이를 보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능력과 전능의 하나님, 엘솨다이를 기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하수를 치는 모세와 아론을 생각합니다.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하지 않았던 계시록 2장의 두아디라 교회, 이세벨을 용납함을 책망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완악함으로 인해서, 음행함으로 인해서, 교만함으로 인해서 회개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하시기를 부탁합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바로는 그 마지막 기회까지도 거절을 했습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쳤습니다. 물이 다 피로 변했습니다. 애굽에 있는 온 땅의 물이 나무 그릇과 돌 그릇에 있는 물까지도 피로 변했습니다.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자 마실 물이 없어진 애굽 사람들이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적 속에는 보다 깊은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단순히 물이 변해서 피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술객들도, 일정 부분의 물을 피가 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물이 변해서 피가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애굽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일강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일강을 숭배했습니다. 이집트를 보면 대부분의 국토가 사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케냐에서 발원된 나일강이 쭉 내려오면서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 지중해로 빠져나갑니다. B.C 2000년 전후 시대에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세우면서 그 인간의 능력을 자랑했던 파라오 시대도 대부분 나일강변 주변에서 문명의 꽃을 피우고 인간의 힘을 자랑했었습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를 보아도 모두가 강 주변이었습니다. 황하가 그렇고, 티그리스, 유프라데스, 나일강이 그렇습니다. 세계 어느 도시를 보아도 강을 빼 놓고 도시가 형성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물은 중요하지요. 그러나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일강은 좀 더 특별한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생명을 주관하는 신인 '오시리스'가 애굽 사람들을 위해 나일강을 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일강을 신적인 존재로 숭배했습니다. 생명을 주관하는 신 '오시리스'가 애굽을 불쌍히 여겨서 내려준 거룩한 강 나일, 그런데 그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고기가 썩고, 냄새가 나서 마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나일강이 피로 변했다고 하는 그런 모습보다도 한걸음 더 나아가 우상숭배의 근본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상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우리의 삶의 모습들, 그것을 근본적으로 깨뜨리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시리스' 신이 주었다고 하는 나일강을 숭배했던 애굽 사람들 마음속의 우상을 깨뜨리시는 우리 주님, 오늘 이 시대에 우리 속에 존재하는 우상,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우상들이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가 가진 특징을 성경에서는 강팍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 말하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교만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떤 사람의 좋은 충고도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의 고통은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그저 자신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사람이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은총의 보금자리에 있다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내가 겸손에 거하면 다른 사람들도 은혜의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말씀합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겸손하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인해서 여기에까지 왔지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으로 분노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이제는 주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제는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모든 역사 속에 언제나 주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의 완악함과 나의 강팍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떠나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떠나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사망이요, 죽음이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애굽 백성들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의 이 깊은 뜻을 헤아리면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보다 겸손하며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겸손의 미덕을 갖는 성도의 생활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져버렸던 우리의 완악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 내 마음을 열기를 원합니다.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시며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주님, 이제 우리의 교만을 버리고, 완악함을 버리며,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어지는 그러한 삶을 원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결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바로의 완악함 같은 그러한 모습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0배나 나은 비전의 사람/단1:17-21
10배나 나은 비전의 사람/단1:17-21 2003-06-09 09:30:21 read : 15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로, 또 내일을 맞이할 때는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크던 작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적은 것을 보게 됩니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도전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남자는 그냥 집 안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래리 월터즈(Larry Walters) 라는 사람은 트럭 운전수라고 하는데 그의 평생 꿈은 비행기를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하였지만, 시력이 나빠서 조종사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는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는 헬륨가스 통과 기상관측에 사용하는 대형 풍선 45개를 사왔습니다. 그는 헬륨 가스를 그 풍선에 넣고, 풍선의 줄을 의자에 매달아 하늘을 날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 50-60미터를 날아갈 때에 엽총으로 풍선 한 두 개를 떨어뜨리면 지상으로 내려올 줄 알았습니다. 그는 지프차에 고정시킨 줄을 끊고 하늘에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공중으로 날아오른 풍선은 순식간에 3,300m 상공으로 올라가서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공군에서는 국제선 여객기로부터 어떤 이상한 비행선이 국제 항공들이 날아가는 항로에 떠다니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밤이 되니 월터즈의 비행선은 바다 쪽으로 움직여 갔습니다. 공군에서는 헬리콥터를 보내 구출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구출하는 긴 이야기는 드리지 않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를 구출하여 땅으로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그는 땅으로 내려오자마자 당국에 불법 비행이라는 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수갑을 찬 채로 끌려갈 때에 방송국 기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월터즈씨 왜 그런 일을 저질렀나요?" 래리 월터즈는 가던 길을 멈추고서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남자가 그냥 집에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남자가 그냥 집에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신앙 생활하신다는 분들이 그냥 집에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고통은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피아노의 속에는 강한 철판에 240 가닥의 철사들이 팽팽하게 걸려 있습니다. 철사들이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란 여간 긴장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강렬한 고통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고통은 마침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아서 새로운 도전과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다는 것은 그의 신앙을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일생 수동적인 신앙, 일생 그냥 앉았다고 돌아가는 신앙이라면 너무나 부족합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정말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을 들어보라고 하면 다니엘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일전 제가 목회칼럼에서 "다니엘 학습법"이라는 책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2000년도에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동환 씨가 다니엘 학습법이라는 책이 장안의 화제가 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4년 간 평균 99.26점을 획득하여 전교 수석을 차지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독한 신앙의 어머니로부터 어찌 들으면 황당한 말 같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말아라. 성경 읽지 않으면 공부하지 말아라"는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다. 너는 너를 위하여 살려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어떤 일도 하나님의 영광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김동환이라는 분은 구약 잠언 1:7의 말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 말씀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구약의 다니엘이란 분은 뜻을 정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유다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었을 때에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고 성전에서 사용하던 금은 그릇들을 빼앗아갔습니다. 그 때에 포로로 잡혀온 사람 중에 다니엘이라는 청년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세계국가를 꿈꾸고 있던 사람으로 그가 세계를 통일하여 지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민족을 통합하고 등용하는 정책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은 환관장 아스브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출신에서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세울 만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갈대아 즉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선발되면 왕이 지정한 음식과 포도주를 공급하면서 완전 국비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후에는 전원 공무원으로 임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 가운데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이란 청년은 벨드사살이라고 하였고, 하나냐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사랴는 아벳느고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새 이름으로 부른다고 하는 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름을 지어주는 이는 주인이고, 이름을 받는 사람은 종이라는 관계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소년들을 바벨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들의 신에 관계된 이름으로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게 될 때는 이름을 바꾸어주었던 것을 봅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이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뜻인데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눈동자 아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판단에 합격하도록 살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국립 왕정학교에 들어가서 기숙사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을 따라 뜻을 정하였습니다. 저들은 바벨론 왕정 학교에 들어오는 영예를 누렸지만 혼을 빼앗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종교로 개종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이라는 청년을 참으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한참 배고프고 먹고 싶은 것들이 많을 때에 왕이 내려주는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환관장에게 채식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이 내려주는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는 나쁜 음식이냐 하면 다 같은 음식이요, 왕 앞에 갔다왔다는 것뿐이지 음식이 잘못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도 있고, 자기가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바벨론 왕은 바벨론의 가장 높은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왕이었지만, 그들 종교의 가장 높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왕이 내려주는 음식은 대부분이 그들의 신전에 올려졌다고 내려오는 제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이기에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이 내려주는 진미를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환관장은 이들 유다의 소년들 때문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유다에서 잡아왔지만 왕족들이요 귀족 출신이었고, 세계 대제국인 바벨론에서 양성하는 공무원들인데 얼굴이 초췌해지고 다른 소년들보다 못해 보이면 왕 앞에 자기의 자리가 위태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년들이 원하는 10일 간 시험해본 것입니다. 유다 소년들에게는 채식을 위주로 하였고, 포도주 대신에 그냥 물을 공급해준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채식이라고 함은 주로 콩과식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콩이라는 식물이 몸에 좋은 것 같습니다.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년들보다 채식을 위주로 하는 유다의 소년들이 얼굴이 더욱 아름다웠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좋아 보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채식이 육식보다 더 좋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들에게 학문을 주셨습니다. 모든 서적을 읽으면 깨닫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외에 다니엘에게는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아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20절 말씀에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들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고 했습니다. 10배나 나은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학교를 다녔고 같은 교수님들에게 배웠는데 누구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어떤 이는 10배나 나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에게 주어진 모습대로 살아야 하고 그에게 주어진 기능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나무를 예로 들면 사과나무가 배나무가 될 수 없고, 배나무가 감나무로 바뀔 수 없습니다. 돈을 예로 들면 돈이란 조폐공사에서 찍어내는데, 같은 규격의 같은 재질이지만 어떤 종이는 1000원짜리가 됩니다. 어떤 종이는 5000원짜리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10000원짜리가 됩니다. 그러니 10,000원짜리는 1,000 원짜리의 10배가 되는 가치를 지닙니다. 종이는 아무런 힘도 없고, 소원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 위에 그려지는 것으로 유통될 뿐입니다. 어떤 그림이 새겨지느냐에 따라 돈의 가치, 자신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와 열정에 따라서 1000원짜리의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고, 10,000원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들인데도 다 다르게 살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들이 다른 것을 보게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렇게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품은 생각이 그의 위인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이 생각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고상하면 그의 인생도 고상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32:8에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구역에 따르면 "고상한 자는 고상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상한 일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 분의 일생에 10배나 나은 인생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현재보다 10배는 나은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까? 뜻을 굽히지 말고 뜻을 정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약소국가의 포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정학교를 나왔고, 공무원에 임용되어 지내다가 그는 느브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왕을 거치면서 세계대제국 바벨론의 총리를 지냈습니다. 다니엘은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4)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이방나라인 바벨론 사람들이 보기에도 흠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흠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율법과 종교를 가지고 흠잡아 죽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인사청문회라는 것이 도입되면서 흠을 들춰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흠 없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면 좀 나을 것 같아 추천하였지만, 더 많은 흠이 발견될 뿐입니다. 좀 배우고 앞장서 있다는 이들마다 도덕적으로 흠이 얼마나 많고 돈에 깨끗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인사청문회는 그 사람의 잘한 점은 다 덮어두고 그의 가능성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흠만 들춰내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언론에서도 사람의 가능성을 보지 않고 흠만 들춰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벨론 정부가 망하고 페르시아제국으로 넘어갔을 때에도 다니엘이란 분은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으면 그를 총리로 앉히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한 일이 아니며,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인품이 훌륭하고 청렴하였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까? 그러니 얼마나 정적들이 뒷조사를 하고 그의 흠을 들춰내고 캐고 다녔을 것입니까? 약80년 동안 그는 두 나라와 여러 왕들을 거치면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오직 흠 없이 살려는 그의 일관된 삶의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하는 정적들은 다니엘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다니엘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심문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의 어음발행과 신용관계, 영주증 처리하는데 혹 뇌물이라도 받은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흠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의 청탁도 들어준 적이 없었고, 오직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비전을 말하지만, 비전과 인격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저는 인격을 선택할 것입니다. 정직하고 곧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의 삶은 일정한 방향이 있는 것입니다. 잠언 11:3에는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격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머리를 치켜들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과의 교제에 충실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 생활은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직장에서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아보셨습니까? 돈이라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생각을 건전하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 분이 가장 요긴한 자리로 몰아넣고 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시는데 누가 말할 것입니까? 다니엘은 열심히 배운 사람입니다. 공부하였다는 말입니다. 왕궁에서는 유다 소년들을 선발하여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당시 갈대아의 학문이란 세계 정상의 학문이었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훈련받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교육도 필요 없고, 훈련을 받지 않아도 저절로 잘 믿을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역점을 두신 것이 교육이요, 훈련이었습니다. 제자훈련이었습니다. 자녀는 태어나지만 제자는 훈련으로 됩니다. 열심히 배우는 사람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에게는 믿음의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함께 거하면서 함께 공부하였고,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고 밀고 나가는데도 함께 힘을 합하였습니다. 일생 좋은 인간관계를 가졌고,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인데, 경쟁의 대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한 자세로 친구관계를 떼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다가 친구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 도움 받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함께 가려고 해야 합니다. 잠언27:17에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시대에 친구들이 잘 되는 것으로 함께 빛이 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다니엘은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무시하고 기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 것 같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외국에 있었지만, 결코 외국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척 콜슨이라는 분이 대학에서 연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라고 하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학생 하나가 화가 나서 콜슨의 말을 끊으면서 말했습니다. "이봐요, 콜슨, 세상에는 죽을 가치가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콜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자네가 무언가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내 생각에는 자네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일도 아무 것도 없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이냐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 것이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죽을 일이 없다고 하면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 사업 모두를 총동원하여 사용하다가 마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에디오피아라는 나라에 1936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전도한 결과 48명의 신자를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이탈리아 군대에 의하여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48명의 신자들은 고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체포되고 매를 맞아야 했으며, 교회는 불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행정부 관리인 도게사라는 사람은 기독교 지도자인 완다로라는 사람을 체포하였습니다. 밧줄로 묶고 숫한 고문을 가하였습니다. 완다로는 외쳤습니다. "이 밧줄은 마지막 심판이 아니요, 이것은 사람이 나를 묶은 것에 불과하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죄에 해방될 것입니다." 도게사라는 사람은 완다로를 채찍질하였습니다. "외국인들은 떠났다. 그들은 더 이상 너를 돕지 않을 것이야. 신앙을 포기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협도 완다로의 신앙을 흔들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선교사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소. 그분이 나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5명의 남자들이 완다로를 때렸습니다.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니 대나무 감옥에 1년 간 가두어 놓았습니다. 드디어 외국의 여론 때문에 완다로가 석방되었습니다. 완다로가 석방되자마자 먼저 한 일은 여러 성도들을 모아 가지고 전날에 그렇게 핍박하던 정부 관리 도게사라는 사람의 밭에 가서 추수를 도와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사랑입니까? 그 큰 사랑과 헌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42년에 다시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였을 때에 48명이었던 성도들은 1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확신과 헌신과 사랑의 열정은 48명 성도들을 1만명으로 끌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을 영접하는 완다로는 환한 얼굴로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다시 이곳에 보내신 것은 새신자들을 양육하라는 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초기 성도들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은 수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뜻을 정하고, 흠이 없고 훈련에 정진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결심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일에는 일원 한푼도 쓰지 않겠다고 하는 결심이 있어야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사람은 모든 학생들 위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학문을 주셨고, 모든 책을 읽으면 깨닫는 지혜를 주셨고, 다니엘은 한 단계 뛰어넘어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앞에 섰을 때에 왕이 묻는 말에 거침없이 대답하였고, 바벨론의 모든 학자들이나 술객들보다 10배는 나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은 세상의그 어더한 사람들보다 10배나 나은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20년의 세월/창6:1-22
120년의 세월/창6:1-22 2003-05-21 11:20:25 read : 18 ( 서 론 ) 창세기 2장의 모습과 3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고 또 3장과 4장의 모습 또한 너무나도 상반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다른 모습은 창세기 5장과 6장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5장은 하나님의 피의 언약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믿음의 조상들이었는데 6장에서는 노아와 노아 식구들 이 외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있는 자들이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5장에서 믿음의 후손들의 생명을 굳게 지켜준 반면에 6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아니한 모든 자들을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하루 아침에 작정된 것입니까 ? 무려 약 천년동안 하나님은 셋의 후손들을 통해서 경고를 하시면서 인간들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지만 인간들은 천년의 세월 동안 무섭게 타락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셋의 후손들 마져도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갔고 그토록 소중한 하나님의 언약도 셋의 후손들에게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은 무섭게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들 셋의 후손들이 뱀의 후손들에게 먹혀서 거룩한 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래도 바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120년의 시간을 인간들에게 주시면서 노아를 통해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120년 동안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겼고 조금도 회개할 기미가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노아의 홍수를 멸망의 심판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경건한 거룩한 씨를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였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벧전3:20)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는 이 120년 동안에 인간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 곧 이것은 오늘날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1- 첫 번째 : 120년의 기간은 회개의 기간입니다. (창6:1-7)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 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 본문에는 당시에 세상의 모습과 인간들의 생활 상태와 영적 상태와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세상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찬 상태였습니다.(5절)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 사람들의 마음의 모든 생각과 계획이 악했습니다.(5절) 이러한 가운데서 그들의 생활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 성적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타락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2절)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들 즉 셋의 후손들이 사람의 딸들 즉 가인의 후손 들의 매력에 빠져서 성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셋의 후손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 하나님의 신이 떠나버린 육체를 위해서 살아가는 가인의 후손들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3절) 이러한 거룩함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 하나님이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한탄하셨다는 말씀이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신 하나님은 그래도 바로 심판하실 수 없어서 120년의 기간을 주시고 셋의 후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 2 -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호흡이 있는 모든 것들을 물로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동일한 방법으로 셋의 후손들에게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해서 타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노아의 홍수 심판은 마지막 때에 심판의 예표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눅17:26-27)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노아의 때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 노아의 때와 같지 않다고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이렇게 많고 그리스도인들이 1200만이 넘는다고 하는데도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본문에 나온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해석하는 자들이 있지만 본문 그 어디에도 천사를 두고 하는 말씀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1-7절까지 매 절마다 사람이라는 단어가 7번 나오고 있습니다. 천사는 결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마22:30)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을 뜻하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즉 셋의 후손들은 세상 것들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하나님의 언약도 사랑도 여호와의 이름도 다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노아 시대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것에 취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지 않고 있고 하나님의 보여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앞에서도 감격이 없습니다. 거룩한 자와 악한 자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보세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찬 시대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 또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과 모든 계획이 얼마나 악합니까 ? 마지막의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3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120년의 마지막 기간을 정해주시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하나님 은 오늘날도 택함을 받은 자들이 회개하고 거룩한 모습을 되찾기 바라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깨어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회개의 삶을 게으르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노아 때처럼 그 날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회개할 수 있을 때 회개하지 못하면 회개할 기회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노아 때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 1.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피의 제사에 대한 약속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토록 1600년 동안 전해 내려온 피의 제사에 대한 약속을 사탄은 셋의 후손들에게 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예수의 피를 뼈저리게 소중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 내 죄가 예수의 피로 씻음 받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그리스도인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 주님 오시는 그 날 까지 피의 언약에 대해 잊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히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2.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약 천년 동안 에녹을 통해서 므두셀라를 통해서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는데도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이런 좋은 날에 무슨 홍수라니 미친 소리 하지 말아라"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소리에 "이렇게 좋은 세상에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 합니다. (살전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언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 4 - 3.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가인의 후손들과 피를 섞은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몰랐고 하나님의 거룩한 씨를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자신들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가 탄생한다는 사실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은 모두 악했고 세상이 온통 죄악 투성인데도 셋의 후손들은 전혀 죄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지 못한 자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모두 옳게 생각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서도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하였듯이 오늘날도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자기의 유리한 쪽으로 해석합니다. 사람을 죽이고서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몇 일 전 며느리가 병든 시어머니를 굶어죽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0일 동안 밥을 주지 않은 며느리는 어머니가 방에서 밥을 해서 먹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죄를 깨닫고 죄 앞에 몸부림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19:19)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무슨 말씀입니까 ? 농사법이나 직조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서는 구별된 삶 거룩한 삶 살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회개하지 않는 셋의 후손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한탄하셨듯이 오늘날 죄악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회개하지 아니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한탄이 무엇을 이어집니까 ? 무서운 심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회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세상 끝 날이 언제 일지는 모르지만 나의 인생의 끝 날은 그렇게 많은 세월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직 젊다고 자랑하지 마시고 언제 이 땅을 떠날지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회개할 수 마음과 시간이 항상 주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 5 - 두 번째 : 믿음 갖기를 원하는 기간입니다. (창6:8-1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 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 120년의 기간은 회개하고 믿음 갖기를 원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 속에서 그 어디에서도 믿음 있는 자를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노아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고 먼저 기록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는 것은 노아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할 때 하나님과의 그 어떤 관계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다시 한번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노아가 의인이 될 수 있었고 완전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 때문에 된 것입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노아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은 오직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5장에서 죽음의 대행진이 노아로 끝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5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 10명의 믿음의 조상 속에 노아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노아는 이미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라멕은 노아를 낳고 예언적인 이름을 지었습니다. 노아 즉 "위로" 라는 뜻은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이름이었습니다 라멕의 이런 신앙은 아버지 므두셀라에게서 받았을 것이고 므두셀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아버지 에녹에게서 받았을 것입니다. - 6 - 또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할아버지의 예언을 외치신 모습도 보았고 에녹이 승천하는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노아는 할아버지 므두셀라와 아버지 라멕에게 증조부 에녹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노아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하나님의 메시야에 대한 약속 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믿음은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좀 힘들면 믿음이 식어져 버리고 조금 은혜 받으면 금방 뜨거워지는 그런 냄비 믿음은 마지막 시대에 참으로 위험한 믿음입니다. (롬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하루 아침에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므로 교회에 열심히 나와서 말씀을 듣고 믿음을 키워가야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히11:6) 믿음이 없이는 타락한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요일5:4)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노아가 무섭게 타락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하면 가인의 후손에게 미혹되어 버린 셋의 후손들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기 힘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눅18:8)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믿음이 무엇입니까 ?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내가 바라보는 것이 이루어 진 것처럼 바라보고 보지 못한 것들을 본 것처럼 증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노아는 조상들로부터 들었던 피의 언약에 대해서 이루어 질 것을 바라보았고 본 것처럼 증거했고 하나님의 심판 또한 본 것처럼 믿었고 증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직접 본 것처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사건을 본 것처럼 증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 7 -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누구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요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에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예수를 증거하지 못하면 반쪽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다면 그 예수를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또한 세상의 심판이 곧 올 것을 믿고 증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노아의 시대는 최후 심판을 앞두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예표입니다.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믿음 갖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 가는 우리들에게 강한 믿음을 가지며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믿는 자는 많은데 믿음을 보기 힘든 시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기도해 주시고 하신 말씀이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중풍 병자는 자기가 일어서서 걷게 될 것을 믿었고 소경은 자기 눈이 떠질 것을 믿었고 구원받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피의 제사를 통해 자신의 죄가 사함 받을 것을 믿고 드렸기 때문에 제사가 열납되었습니다. 에녹 또한 피의 언약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이삭을 드릴 때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게 되었고 기생 라합도 믿음으로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히11:33-34)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믿음 갖기를 바랍니다. 강한 믿음만이 내가 구원받고 그 믿음을 통해 내 가족이 내 이웃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 8- 세 번째 : 120년 기간은 방주를 만드는 기간입니다. (창6:13-22)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 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은 믿음의 아들 노아를 택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방주를 누구를 위하여 지으라고 하였습니까 ? "너를 위하여 지으라"고 (14절) 하였습니다. 그러나 방주의 설계자는 누구십니까 ? 하나님이십니다. 즉 방주의 제작은 노아가 해야 하지만 그 설계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1. 방주의 재료는 잣나무로 해라. 2. 배 안에 여러 방을 만들고 안팎으로 역청을 칠해라. 3. 문은 하나만 만들고 창은 위로 향하여 만들어라. 4. 배의 크기는 길이가 300 규빗, 폭이 50 규빗, 높이가30 규빗으로 짓고 상 중 하 삼층으로 만들어라. 노아 당시 한 규빗의 길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늘날 길이 계산법하고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계산법으로 하면 길이가 135m, 폭이 23m 높이가 14m로 큰 상자 모양의 배였습니다. 농구장의 20배 정도의 크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3층으로 된 이 배는 한 층이 약 940평 정도로 계산이 나오지만 이보다 훨씬 더 큰 배였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5. 방주 안에 들어갈 것들을 지시하였습니다. 짐승 한 쌍씩을 이끌여 들여 생명을 보존케 하라고 하셨고 노아의 식구들을 개인적으로 택하여 방주에 들어가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 9 -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 속에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방주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간 곳입니다. 방주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 구원의 방주는 오늘날 교회의 모형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만이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라고 다 구원의 방주는 아닙니다. 반드시 잣나무로 지어진 교회여 만이 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 잣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잣나무가 잘라지고 벗겨지고 희생한 가운데 방주가 지어졌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믿고 의지한 교회만이 세상 속에서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역청으로 안팎을 발라서 물이 새는 것을 막았듯이 교회는 세속적인 방법과 수단으로서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역청은 아스팔트 재료였는데 역청의 말의 의미는 "덮는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미혹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예수의 피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 씻음 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의 피가 아니고 서는 사함 받을 길이 없습니다. (히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의 피를 안팎으로 바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피의 능력을 교회 안에서만 외치면 안됩니다. 세상에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으라고 외쳐야 합니다. 성도 또한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세를 했다면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 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아 교회의 방주에 들어오시오 구원받을 수 있는 이 길 뿐입니다" 외쳐야 합니다.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하나뿐 이였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은 교회의 머리이시고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 10 - (행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방주 준비를 잘하고 있습니까 ?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 것은 내가 방주를 열심히 짓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방주를 지으면서 잣나무가 아닌 내 방법으로 쉽고 편하게 지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적당히 지은 날림 공사는 언제인가는 드러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가르침의 따르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방법대로 편하게 방주를 지었다면 방주는 거대한 홍수 속에서 버티지 못하고 파선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교회가 오직 예수 신앙이 되지 않는다면 사탄의 강력한 세력 앞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성도 또한 분명한 교회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모두 다 사탄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 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노아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방주를 지으는 동안 노아는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방주를 노아 혼자서는 만들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는 아내와 세 아들들과 세 자부들과 함께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들을 설득하기 쉽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10년 20년 아니고 120년 동안 지으면서 가족들 간에 갈등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내 가족을 교회로 데리고 나오도록 설득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시키기 위해서는 계속 설득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있다면 성도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참으로 힘듭니다. 여러분을 바라보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저 사람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꾼이 될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옛날에 저의 어머니가 저를 보고하시는 말씀이 언제 저 놈이 자랄까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밖에서 돌아온 저를 우물가에서 등에 물을 끼엊어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 어깨가 떡 벌어졌구나" 하면서 대견해 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편하게 교회 다니려고 하지 마십시오. 편하게 적당히 방주 지으려고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11 - 종이 배로. 널판짝으로 지은 배는 마지막 때 살아남지 못합니다. 내 시간 있을 때만 교회 나오고 크고 편한 교회 택해서 편하게 신앙 생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노아가 그냥 방주 지은 것 아닙니다. 120년 동안 많은 시간과 물질을 쏟으면서 지었습니다. 수모와 핍박을 당하면서 미친놈이라는 소리 들으면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반드시 잣나무로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를 바라보고 철저한 예수 신앙 가지고 교회 다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언약"이라는 말씀이 처음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최초의 언약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처음 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하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내가 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는 것들은 지켜주리라" 언약을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피 값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행20:28) (마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교회 안에 있는 자에게는 사탄의 권세에서도 세상의 어떤 미혹에서도 지켜주신다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성도 여러분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노아처럼 묵묵히 튼튼한 방주를 지어가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결 론 ) 5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예언한대로 세상은 이제 물로 심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예언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믿지 아니하고 세상에 빠져서 귀담아 듣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 가인의 후손들이 그러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의 후손인 믿음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소리에 외면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오실 때도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마24:37-38)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 - 12 - 오늘날 이 시대 노아 시대와 너무나도 똑같지 않습니까 ? 온통 사람들이 육을 위해 살아가는 자 들뿐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있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향기가 납니까 ? 육을 위해서 예수를 믿고 있고 육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나 자신은 어떠한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셋의 후손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던 사탄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의 눈과 마음이 세상을 바라보는데 많은 시간 투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짝할 때 우리는 믿음은 식어지고 타락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택하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수를 원하지 않습니다.(고전10:5) 믿음 있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시고 원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은 짐승처럼 천하게 여기십니다. 거룩한 씨를 보존하기 위해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하나님의 행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노아의 모습 속에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있다는 성경의 예언을 가볍게 여기며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이제 마지막 때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벧후3:10)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나의 인생의 끝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굳건한 믿음 속에서 회개의 신앙을 가지며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 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여러분 모두 노아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20세에 돌아온 아들/창35:27-29
120세에 돌아온 아들/창35:27-29 2003-06-17 01:08:09 read : 279 충북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신석마을에 사는 박태영(朴泰榮·91) 할아버지. 그는 아침식사를 마치면 쌍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집에서 1㎞쯤 떨어진 부모 묘소를 찾습니다. 6·25전쟁 때 다리를 다쳐 불편한데다 고령이어서 묘소로 가는 데는 40분 가량 걸립니다. 그러나 그는 71년째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71년간 ‘시묘(侍墓)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고 있는 그는 어버이날인 8일 국민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0살이 되도록 불효자로 살다가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돌아온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야곱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60세 때에 낳았고(창25:27) 180세에 돌아갔으니 이 때 그의 나이는 120세였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야곱의 효도 실패를 통해 교훈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1.신앙에만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넘겨 받았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재산이 탐나서라기보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신 믿음의 상속권을 어어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못지않은 신앙의 열정가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에서는 장자권을 팔죽 한 그릇보다 하찮게 여긴 육적인 사람이었으니 야곱은 형을 업신 여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신앙의 열정을 위하여 형을 속이고 가로채는 방식을 당연시하였습니다. 이것이 에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고 둘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형제간에 원수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불효한 일입니까? 우리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지요. 믿지 않는 형제들, 그들은 조상 제사에 목숨을 걸고, 주일 날이면 놀러가고 행사를 치루고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헌신하는데 얼마나 걸림돌이되는지요. 피치못하게 그들과 담을 쌓아야 하고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앙에는 열심인데 형제간에 불화하는 성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불신 형제일지라도 그들과 화목하는 것이 참 효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앙적인 면에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으나 인간적인 면에서 그들에게 낮은 태도,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소유했다해도 그것이 내 자랑일 수 없는 주님의 베푸신 은혜입니다. 야곱은 그 은혜를 받지 못한 형을 향해 자비하고 긍휼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에서는 분노하였고 급기야 원수되어 두 사람은 20년이나 등을 돌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가족 일가친척 대에 이단에 빠진 형제들이나 타종교인, 심지어 무속에 심취한 자일지라도 그 인격을 존중히 여기고 화목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의 열정 때문에 형제와 불화한 것, 그로인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한 것, 아무리 정당화해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2.자식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본의 아니게 4명의 부인을 두고 12명의 아들에 1명의 딸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이 13명의 자식들을 너무 너무 사랑했지요. 창33:12-14절을 보면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라고 야곱은 형 에서의 길 인도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야곱이 제일 사랑한 것이 자식이요, 다음이 재산(가축떼)요, 다음이 부인이요 마지막이 부모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면 그 자식들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들어주게 됩니다. 야곱 일행이 도착한 곳은 벧엘로 가기 전 중간 지점은 세겜성이었습니다. 창 33:18-2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도대체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인 야곱 일행이 갈 곳이 아닙니다. 누가 그 성으로 가자고 했습니까? 야곱일까요? 그 부인들일까요? 이들은 이미 120세를 가까이하는 노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젋은이들인 그 자녀들입니다. 제일 큰 아들이 20세 밖에 안된 이 젊은이니 그들의 등쌀에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단을 쌓았습니다. . 젊은이들은 세상 문화를 좋아하고 잘 따라 갑니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세상 문화에 금방 젖는 세대는 것이 젊은 세대들입니다. 결국 34장을 보면, 고명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의 아름다운 화장과 유행을 좋아하다가 그 땅의 오랜지 족 세겜의 유혹에 걸려들어 몸을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그들의 요구대로 다 들어주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약점입니다. 가끔 심방 중에 성도들의 자녀들의 방에 보면 연예인의 사진이 즐비하고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 채팅, 음란 사이트가 난무하고 "엽기"가 판을 칩니다. 세상이 음란 문화가 폭력과 자살과 엽기 문화가 그리스도인의 안방까지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식들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그래그래, 오냐오냐" 하다가 딸 디나를 망치고 아들을 살인자가 되게한 야곱의 실수 입니다. 그렇게 자식만 사랑하다가 아버지 찾아 뵙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독거노인들이 많은 시대, 어느 한 외로운 노인은 혼자 사시다가 아프다가 돌아가셨는데, 보름 뒤에나 발견되었습니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자식들을 찾아가시지요"라고 제안하면 "제 새끼 이뻐서 정신 없는데 내가 왜 구걸합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내리 사랑 올리 효도」입니다. 자식 사랑은 절로 되나 부모 효도는 노력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사랑스러울지라도 그 때문에 부모를 소홀히 여기는 일은 부모에게 불행하고 자신에게 불행하고 자식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손주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3.부모와 하나님의 상관 관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 가족을을 이끌고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 성에 머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잊었고 부모님도 잊었습니다. 거기서 자녀들로 부끄럽고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망연자실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은 그 말씀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자식들이 세겜 성의 유행을 따른 옷을 벗기고 몰래 숨겨놓은 우상의 신상을 버리게 하고 다시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야곱이 다시 하나님께로 나갔다는 말이다. 야곱은 20년전 하나님께 약속하였던 제단을 쌓았고 예물을 드려 하나님께 돌아가니 부모님이 생각났고 벧엘에서 부모님이 사시는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벧엘"=>하나님의 집 집이라면 좋은 건물을 생각하는데, 집은 부모님입니다. 집에 간다는 것은 부모님께로 간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아파트에 산다해도 부모없이 사는 아이는 집없는 아이입니다. 집은 울타리와 내실로 구성되지요, 아버지는 울타리고 어머니는 내실(시128:3)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바깥 양반이라하고 어머니를 집 사람 안 사람이라고 합니다. 집이 안방만 있으면 두렵고, 울타리만 있으면 허전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양친 부모가 있어서 양육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벧엘이 하나님이 집이라는데 겨우 돌기동 하나만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온 우주를 사용해도 모자랍니다. 하나님은 집, 성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갈 수있다는 것은 하늘에 장소와 건물. 보석과 금으로 만든 건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로 간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가는 것을 잊고 세겜 성에 안주하려했을 때, 그는 하나님도 잊고 부모님도 잊었습니다. 하늘 부모님을 잊고 세겜 성에 머문 결과는 딸 디나가 몸을 더렵혀 오라버니들의 복수극에 온 성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늘 부모님인 하나님을 다시 찾은 야곱은 땅의 부모인 이삭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늘 부모의 모형인 땅의 부모님을 공경할 것입니다. 결언: 180세의 죽기 직전의 이삭은 60세에 낳은 아들, 100세에 집을 떠난 아들 야곱을 만나고 천국에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120살난 아들은 20년 만에 잊었던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120살에 돌아온 아들 야곱을 본 아버지 이삭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천사들의 인도하에 천국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마터면 영원히 불효자가 될 뻔한 아들 야곱을 120년 만에 회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120세에 돌아온 아들/창35:27-29 | -창35장-
120세에 돌아온 아들/창35:27-29 | -창35장- 2011.11.04 15:24 말머리없음 꺼벙이(hy0172) 카페매니저 http://cafe.naver.com/hy0172/133947 충북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신석마을에 사는 박태영(朴泰榮·91) 할아버지. 그는 아침식사를 마치면 쌍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집에서 1㎞쯤 떨어진 부모 묘소를 찾습니다. 6·25전쟁 때 다리를 다쳐 불편한데다 고령이어서 묘소로 가는 데는 40분 가량 걸립니다. 그러나 그는 71년째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71년간 ‘시묘(侍墓)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고 있는 그는 어버이날인 8일 국민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0살이 되도록 불효자로 살다가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돌아온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야곱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60세 때에 낳았고(창25:27) 180세에 돌아갔으니 이 때 그의 나이는 120세였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야곱의 효도 실패를 통해 교훈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1.신앙에만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넘겨 받았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재산이 탐나서라기보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신 믿음의 상속권을 어어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못지않은 신앙의 열정가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에서는 장자권을 팔죽 한 그릇보다 하찮게 여긴 육적인 사람이었으니 야곱은 형을 업신 여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신앙의 열정을 위하여 형을 속이고 가로채는 방식을 당연시하였습니다. 이것이 에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고 둘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형제간에 원수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불효한 일입니까? 우리에게도 같은 문제가 있지요. 믿지 않는 형제들, 그들은 조상 제사에 목숨을 걸고, 주일 날이면 놀러가고 행사를 치루고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 헌신하는데 얼마나 걸림돌이되는지요. 피치못하게 그들과 담을 쌓아야 하고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신앙에는 열심인데 형제간에 불화하는 성도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불신 형제일지라도 그들과 화목하는 것이 참 효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앙적인 면에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으나 인간적인 면에서 그들에게 낮은 태도,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소유했다해도 그것이 내 자랑일 수 없는 주님의 베푸신 은혜입니다. 야곱은 그 은혜를 받지 못한 형을 향해 자비하고 긍휼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에서는 분노하였고 급기야 원수되어 두 사람은 20년이나 등을 돌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가족 일가친척 대에 이단에 빠진 형제들이나 타종교인, 심지어 무속에 심취한 자일지라도 그 인격을 존중히 여기고 화목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의 열정 때문에 형제와 불화한 것, 그로인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한 것, 아무리 정당화해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2.자식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본의 아니게 4명의 부인을 두고 12명의 아들에 1명의 딸을 얻었습니다. 야곱은 이 13명의 자식들을 너무 너무 사랑했지요. 창33:12-14절을 보면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라고 야곱은 형 에서의 길 인도 제안을 거절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야곱이 제일 사랑한 것이 자식이요, 다음이 재산(가축떼)요, 다음이 부인이요 마지막이 부모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면 그 자식들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들어주게 됩니다. 야곱 일행이 도착한 곳은 벧엘로 가기 전 중간 지점은 세겜성이었습니다. 창 33:18-2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도대체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인 야곱 일행이 갈 곳이 아닙니다. 누가 그 성으로 가자고 했습니까? 야곱일까요? 그 부인들일까요? 이들은 이미 120세를 가까이하는 노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젋은이들인 그 자녀들입니다. 제일 큰 아들이 20세 밖에 안된 이 젊은이니 그들의 등쌀에 야곱은 세겜 성 앞에 장막을 치고 단을 쌓았습니다. . 젊은이들은 세상 문화를 좋아하고 잘 따라 갑니다. 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세상 문화에 금방 젖는 세대는 것이 젊은 세대들입니다. 결국 34장을 보면, 고명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들의 아름다운 화장과 유행을 좋아하다가 그 땅의 오랜지 족 세겜의 유혹에 걸려들어 몸을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그들의 요구대로 다 들어주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약점입니다. 가끔 심방 중에 성도들의 자녀들의 방에 보면 연예인의 사진이 즐비하고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 채팅, 음란 사이트가 난무하고 "엽기"가 판을 칩니다. 세상이 음란 문화가 폭력과 자살과 엽기 문화가 그리스도인의 안방까지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식들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 "그래그래, 오냐오냐" 하다가 딸 디나를 망치고 아들을 살인자가 되게한 야곱의 실수 입니다. 그렇게 자식만 사랑하다가 아버지 찾아 뵙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독거노인들이 많은 시대, 어느 한 외로운 노인은 혼자 사시다가 아프다가 돌아가셨는데, 보름 뒤에나 발견되었습니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자식들을 찾아가시지요"라고 제안하면 "제 새끼 이뻐서 정신 없는데 내가 왜 구걸합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내리 사랑 올리 효도」입니다. 자식 사랑은 절로 되나 부모 효도는 노력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무리 사랑스러울지라도 그 때문에 부모를 소홀히 여기는 일은 부모에게 불행하고 자신에게 불행하고 자식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손주를 사랑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가 120살이 되도록 부모님께 근심을 끼쳤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3.부모와 하나님의 상관 관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 가족을을 이끌고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세겜 성에 머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잊었고 부모님도 잊었습니다. 거기서 자녀들로 부끄럽고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망연자실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은 그 말씀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자식들이 세겜 성의 유행을 따른 옷을 벗기고 몰래 숨겨놓은 우상의 신상을 버리게 하고 다시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야곱이 다시 하나님께로 나갔다는 말이다. 야곱은 20년전 하나님께 약속하였던 제단을 쌓았고 예물을 드려 하나님께 돌아가니 부모님이 생각났고 벧엘에서 부모님이 사시는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벧엘"=>하나님의 집 집이라면 좋은 건물을 생각하는데, 집은 부모님입니다. 집에 간다는 것은 부모님께로 간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아파트에 산다해도 부모없이 사는 아이는 집없는 아이입니다. 집은 울타리와 내실로 구성되지요, 아버지는 울타리고 어머니는 내실(시128:3)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바깥 양반이라하고 어머니를 집 사람 안 사람이라고 합니다. 집이 안방만 있으면 두렵고, 울타리만 있으면 허전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양친 부모가 있어서 양육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벧엘이 하나님이 집이라는데 겨우 돌기동 하나만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온 우주를 사용해도 모자랍니다. 하나님은 집, 성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갈 수있다는 것은 하늘에 장소와 건물. 보석과 금으로 만든 건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로 간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가는 것을 잊고 세겜 성에 안주하려했을 때, 그는 하나님도 잊고 부모님도 잊었습니다. 하늘 부모님을 잊고 세겜 성에 머문 결과는 딸 디나가 몸을 더렵혀 오라버니들의 복수극에 온 성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러나 하늘 부모님인 하나님을 다시 찾은 야곱은 땅의 부모인 이삭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늘 부모의 모형인 땅의 부모님을 공경할 것입니다. 결언: 180세의 죽기 직전의 이삭은 60세에 낳은 아들, 100세에 집을 떠난 아들 야곱을 만나고 천국에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120살난 아들은 20년 만에 잊었던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120살에 돌아온 아들 야곱을 본 아버지 이삭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천사들의 인도하에 천국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마터면 영원히 불효자가 될 뻔한 아들 야곱을 120년 만에 회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12월의 묵상(4)/ 침상의 경배/ 창47:27-31/ 2003-12-20
12월의 묵상(4)/ 침상의 경배 창47:27-31 고려의 충숙왕 때 <우탁>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늙어 가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그렇습니다. 막을 수 없는 것이 세월입니다.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 1월은 12월이 되고, 아이가 노인이 됩니다. 2003년도를 시작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오늘 벌써 송년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의 감회는 어떠하십니까? 참 세월은 빠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한 노인은 세월의 짧음을 원망하면서 좀 더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힘들고 길었습니다. 저에게 더 오래 살라고 해도 더 살 힘이 없고, 이젠 사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사람은 믿음의 족장 가운데 한 분인 야곱입니다. 그가 <하나님, 이 정도 산 것도 충분합니다. 이제 더 많은 세월은 저에게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의 맨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때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침상의 경배란 달리 말하면 야곱의 생애 <마지막 경배> 였습니다. 침상 머리에서 경배했다는 것은 기력이 다했음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1장 21절은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했는데, 노쇠한 탓에 침상에서 경배할 때도 지팡이를 의지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는 지팡이도 짚고, 자녀들의 부축도 받아서 간신히 생애 마지막 경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 침상의 경배를 드리는 야곱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야곱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을 맞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임종의 순간일 것입니다. 길고 긴 인생의 여정을 끝맺는 때가 오면 야곱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시간 우리는 비록 임종의 시간은 아니지만, 그 어떤 때보다 야곱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지금 이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마지막 예배이기에, 그 <마지막>이 주는 느낌을 야곱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침상의 경배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옵니까? 이 침상의 경배는 야곱의 마음 속에 가득한 감사를 보여줍니다. 감사 가운데 최고의 감사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죽을 위기에서 건짐을 받아 살게 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의 경배를 드렸습니다. 또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손에 쥐게 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손에 있던 모든 것을 놓게 되는 순간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이 경건한 <침상의 경배>에서 추호의 원망이나 불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살아야겠다는 몸부림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충분합니다. 하나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저의 마지막 경배를 받으시옵소서>라는 고백만 읽을 뿐입니다. 이런 감사는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하여 배우는 사람이요, 참으로 강한 자는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요, 참으로 부자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자요, 참으로 멋있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시험치는 학생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학생은 침착하고 성실하게 답안을 써넣고 나갑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종이 울릴 때까지 시험지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앉아 있다고 해서 시험지를 채운 것은 아닙니다. 답을 써넣지 못한 빈자리가 많습니다. 빈칸은 많고,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종이 울려 어쩔 수 없이 시험지를 내고 나가는 학생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어져 있습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그런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해 동안 시험지를 붙잡고 살아온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답안지에 별로 정답을 써넣지 못한 채로 한 해가 흘렀습니다. 이젠 답안지를 제출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빈칸이 너무 많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허송세월만 했어. 왜 제대로 한 게 이렇게 없을까? 정말 헛살았어. 벌어놓은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고, 몸만 축나고, 세월만 까먹었어> 이런 가슴저린 후회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탈무드의 구절은 <참으로 강한 자는 자신을 다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 마음의 불만과 원망을 가라앉힐 시간입니다. 또 지금 우리는 손에 쥔 게 별로 없는 데 대하여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직장과 가정에서 열심히 살았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크게 발전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 해를 정리하는 마음이 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탈무드의 구절은 <참으로 부자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6장 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에 만족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환하게 웃어주는 가족들, 이웃들, 먹고 입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한 해가 허무하게 가고 있지만, 붙잡아 둘 수 없음에 대하여 원망할 수 있습니다. 끝내야 한다는 데 대한 불만이 가득합니다. 우세한 경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대 0으로 지고 있는 축구 선수들이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심판의 호각 소리에 화가 난 표정으로 볼을 걷어차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의 호각 소리에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운동장에서 나와야 한다는 데 대한 감사도 배워야 합니다. 이런 감사의 훈련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은 한 해를 끝내고 있지만, 언젠가 1년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끝내야 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그라운드에서 우리를 불러낼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불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나는 아직 퇴장할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난 좀 더 살아야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소리소리 지르겠습니까? 아니면 <충분합니다. 하나님, 그 동안 먹이시고 입히시고, 좋은 사람들을 주셔서 참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나오시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퇴장에 대한 감사도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이 시간 침상 머리에서 인생의 마지막 경배를 드리던 야곱의 그 감사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곱이 인생의 마지막 경배를 드리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는 아직 마음을 다 비운 게 아닙니다. 그 순간까지도 그의 마음을 붙잡는 게 있었습니다. 이것을 <야곱의 인생 최후의 집념>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까지 매달렸던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야곱은 임종의 때가 다가옴을 알고 아들 요셉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죽거든 나를 이 애굽에 묻지 말고,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영에 장사하라> 야곱에게는 가족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일찍이 그의 조부인 아브라함이 마련한 <막벨라 굴>을 말합니다. 그 무덤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라헬이 묻혀 있었고, 야곱도 아내 레아를 이미 그 곳에 묻었습니다. 야곱은 자신도 그 곳에 묻히길 원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에 대하여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 맹세했습니다. 야곱은 아들의 맹세를 들은 후에 침상에서 하나님 앞에 경배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침상의 경배는 조상들이 묻혀있는 선영에 묻힐 수 있게 된 데 대한 감사입니다. 선영에 묻히겠다는 야곱의 마지막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요셉에게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맹세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명 <환도뼈 맹세>라고 불리던 고대 근동의 엄숙한 서약 의식입니다. 환도뼈는 생명의 근원과 권위를 상징하는데, 여기에 손을 얹고 맹세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맹세를 지키겠다는 표시였습니다. 사실 야곱이 임종을 맞는 애굽 땅과 그의 가족 무덤이 있는 가나안은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 옛날에 시신을 거기까지 운구하여 장례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야곱은 아들로 하여금 아무리 힘들어도 꼭 그렇게 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는 마당에 묻히는 장소가 뭘 그리 중요하다고 그렇게까지 집념을 가진 것일까요? 이것은 그가 자신의 고향을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거기서 자랐습니다. 한 때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기도 했고, 흉년을 피해 아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애굽에 와서 17년의 세월을 살았지만, 이젠 돌아갈 때임을 알았습니다. 돌아가야 했습니다. 왔던 곳으로. 몸뚱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마치 집을 나갔던 아이가 엄마 품으로 돌아오듯, 야곱은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길고도 긴, 그리고 멀고도 먼 여정을 끝내고 돌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면 좋을까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엄마 품에서 출발했습니다. 엄마 없이 출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의 따스한 가슴이 우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기는 더 이상 엄마 품에 머물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금 자라자 엄마 품에서 뛰어내려 아장아장 마당을 걷더니, 학교에 들어갔고, 청년이 된 후에는 넓은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활개치며 다녔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여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엄마 품을 잊었습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엄마 품을 잊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안식처를 상실했습니다.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고, 반드시 돌아가야 할 그 품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던 세상이 자신을 박대할 때, 길거리를 비틀거리다가 쓰러집니다. 왜 그럴 때 언제든지 대문 열고 기다리는 엄마 품으로 가지 않는 것일까요?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존재들입니다. 우리 생명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어 세상에 보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건 너무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품이야말로 우리가 돌아가 안겨야 할 고향입니다.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가족의 품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객사>하는 사람을 가장 불쌍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은 가족의 품에서 맞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지막도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맞이해야 합니다. 비록 중간에는 다른 곳을 쏘다녔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엔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2003년도의 이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길 기원합니다. 엄마 품을 떠나 세상을 돌아다니던 그 아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많은 설움을 당하던 그 아들이 어린 아이처럼 통곡하면서 엄마 품에 안겨 울 듯이, 지난 1년 동안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힘들게 살던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 울어야 합니다. 이토록 따스한 가슴이 있음을 잊고, 세상에서 방황한 것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집념을 가져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리라! 이것이 마지막 주일에 가질 집념입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 저를 받아주옵소서> 이것이 마지막 주일 우리의 기도입니다. 19세기 미국에 <포리>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부도 많이 하고, 저서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가장 사랑하던 딸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슬픔 가운데서 고백했습니다. <딸을 보내면서 저는 머리로만 배우던 신학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신학을 배웠습니다> 그의 아내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비록 나 자신이 죽음과 임종에 대해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딸이 떠나는 순간 모든 정답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눈물뿐이었습니다> 그 슬픈 순간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따스한 품뿐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마지막 주일에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 동안 바쁜 생활 속에서 어머니를 잊고 살 듯이, 하나님의 품을 잊지는 않으셨습니까? 거기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입니다. 이젠 그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모든 피곤한 짐을 내려놓고, 사연을 벗어버리고, 그 넓은 사랑의 가슴으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이 시간 우리가 고쳐 부를 단어가 있습니다. 신선동 산복도로에 가면 버스 종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노선 버스들이 돌아가는 마지막 장소를 <종점>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곳은 종점이라고만 불러서는 안됩니다. 달리 생각하면 거기서 버스들이 출발하기 때문에 그 곳은 종점인 동시에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곳이 우리 인생의 종점일 뿐만 아니라, 시발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는 사람만이 영원한 새 세상의 삶을 출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품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은 이 세상이 아닌, 저 천국의 새로운 삶을 출발합니다. 그래서 종점은 출발점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이 마지막 주일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의 품은 우리에게 2004년도를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실 것입니다. 버스 기사들이 그 종점에서 쉬면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출발하듯이, 하나님의 품은 우리를 쉬게 하고, 필요한 것은 공급하여 출발할 힘을 줄 것입니다. <길을 잃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 이것이 등산의 원리입니다. 일년을 살면서 혹시 길을 잃었다면, 그래서 방황했다면 이제 출발점이었던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우리 모두 오늘 하나님의 품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그 가슴을 떠나 방황했던 삶을 회개합시다. 그리고 그 품에서 충분히 쉬고, 다시 2004년도를 출발합시다. 하나님의 품이 언제든지 우리가 쉴 종점이자 출발점이 되길 원합니다.
13년만의 성공/창37:1-11
13년만의 성공/창37:1-11 2003-06-17 01:31:48 read : 304 지난 해 1999년 1월의 뉴욕 타임즈의 표지인물로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 이집트 왕자의 주인공 모세로 선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표지 인물로는 일본의 만화영화 포켓 몬스터의 주인공인 피카츄를 선정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화영화의 주인공보다 인기를 누리는 사람이 없고, 만화영화 주인공보다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읽은 성경말씀에 나타나는 인물 요셉은 그 당시 수많은 나라들이 굶주림에 허덕일 때에 주린 배를 채워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없는 애굽은 망했을 것입니다. 그가 없는 그의 가족들은 모두 굶어죽었을 것입니다. 그는 17살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집을 떠나왔다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는 노예로, 죄수로 살았지만 13년 후 30살에 그는 애굽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13년만의 성공 영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소설과 같은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성공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첫째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셋째로 유명해진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 건강하고 오래살며 자녀가 다 잘 된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과 비교한다면 요셉 역시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위에서 말한 것 중에 한가지만 있어도 성공한다고 하지만 요셉은 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왕 빼고는 그의 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총리라는 지위를 가졌고, 그 지위에서 오는 부를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굽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까지 유명한 총리였습니다. 그는 건강했고, 110살까지 살았고, 자녀들 또한 성공적으로 자라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요셉처럼 30살 이전에 성공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 가면 20대 박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벤쳐 기업으로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 30살도 채 안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 번역 프로그램 칵테일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고 회사 사장까지 된 사람도 20대 초반의 젊은이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세상 사람들과의 성공의 차이는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한 성공이고 저 세상의 성공자들은 하나님이 없는 성공자들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한 부자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부자는 많은 땅과 하인들을 거느린 사람입니다. 그는 농사가 잘 되어 수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여기 저기서 소작농들이 추수한 곡식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더 많은 창고를 지었고,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찼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 영혼아 이제는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배를 두드리며 룰루랄라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없이 성공했다고 자처하는 그 부자에게 어리석은 부자여 내가 오늘밤 네 영혼을 찾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재산은 다 어떻게 됩니까? 그의 행복은 다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없는 성공은 불완전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바로 믿고 주님이 함께 하는 성공자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해서 13년만에 성공했을까요? 1. 요셉은 정직하게 살았기에 성공하게 되었습니다.(2, 5) 본문 2절에 보면 요셉은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위로 형이 10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그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는 아들이었습니다. 형들에게 요셉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5절에도 보면 요셉은 자기가 꾼 꿈을 형들에게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꿈은 꾸고도 말하지 말아야지요. 말하면 기분이 나쁠 것이라는 눈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눈치가 없었는가 봅니다. 이걸 보면 요셉은 어렸을 때는 지혜롭지는 못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정직했습니다. 속이지 못하고 감춰두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애굽에 팔려가서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겉옷을 벗어두고 도망하지 말고, 잘 둘러데서 피하면 감옥갈일이 없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정직한 그의 성격은 죄짓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기에 무조건 피해버린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해도 정직한 사람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잔머리 잘 굴리고, 남을 잘 속여먹어야 잘 살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에서도 이제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정치가가 될 수 없습니다. 국민들이 속지 않는 시대입니다. 방송과 신문이 있기에 속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거래와 기업활동에서도 정직하지 못한 기업은 망하게 됩니다. 벨기에에서 수입한 쇠고기가 세균에 감염되었다 하니까 전국민이 수입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어떤 회사가 라면에 몰래 공업용 기름을 넣었다 하니까 그 회사 라면이 안팔리고 반품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악해져 가는 시대이지만 그러나 정직한 사람을 알아주고, 정직한 개인과 기업이 성공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것을 도덕성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2. 요셉은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성공했습니다(13, 39:4). 오늘 읽은 말씀을 계속 읽으면 13절에서 아버지가 요셉에게 형들이 양을 치는 곳까지 심부름을 보냅니다. 가서 형들이 잘 있고, 양들은 잘 있는지 가보고 오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간 곳이 우리 교회에서 수색역 정도의 거리가 아닙니다. 그 당시 야곱의 가족들이 살던 곳은 헤브론이고 그 형들이 양떼를 데리고 간 곳은 세겜이란 곳인데 그 거리가 약 100km나 되는 거리입니다. 아마 서울에서 천안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그런 거리를 그 당시 자가용이 있습니까? 좋은 신발이 있습니까? 가다가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이 있습니까? 17살짜리 소년이 그 먼 곳을 혼자 여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시는 마을이 흔치 않았고, 도적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들판에는 무서운 들짐승들도 있었을텐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그곳에 가보니 형들은 거기서 또 떠나 약 30km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끝까지 책임완수를 위해서 찾아가는 요셉입니다. 요즘 학생들은 일을 잘 안하려고 합니다. 누가 나에게 뭘 시키는 것을 싫어합니다. 지난번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여러분의 선배인 결혼한 형제가 저에게 말합니다. 청년부 형제 자매들이 의자 정리를 하고, 강단과 마이크 등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는, "목사님, 저런 것은 과거에 제가 학생부일 때 저렇게 했는데 지금은 청년부가 계속 합니까? 이상해요" 그 말이 여러분은 이해가 안갈지 몰라요. 제가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앉아있는 여러분의 선생님들이 학생부일 때 교회에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뒷처리는 늘 학생부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학생들이 교회에서 무슨 일좀 하자고 하면 잘 안하려고 합니다. 조금 하면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말하기를 "요즘 애들은 체격은 커졌는데 체력은 약해졌다"고 말합니다. 오죽하면 3D업종이란 말이 생겼고, 그 업종에는 한국 사람보다 외국 근로자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힘을 들여 일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작은 일에 힘을 쓰지 않는 사람은 큰 일을 주어도 못합니다. 요셉은 노예 생활도 충실히 했고, 감옥에서 죄수로 있으면서도 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책임감있게 하는 요셉에게 하나님은 애굽이란 나라 전체를 맡긴 줄로 믿습니다. 허황된 꿈을 가진 사람과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을 가진 사람의 차이는 꿈 차이가 아니고, 그의 삶의 차이입니다. 허황된 꿈을 가진 사람은 현재 주어진 일은 거들떠도 안보고 큰 것만 찾아다닙니다. 내가 이런 것 할 사람인가, 내가 이런 것 먹을 사람인가, 내가 저런 애들하고 어울릴 사람인가 하며 주어진 작은 기회는 다 차버리고 오지도 않는 큰 기회만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평생가도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십대의 시기에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3. 요셉이 13년 만에 성공한 것은 그가 성결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39:9,10). 요셉은 한참 혈기왕성하고 유혹받기 쉬운 시절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절에도 결코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늘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우리의 십대 여러분도 유혹받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술과 담배와 이제는 이 나라에도 마약과 같은 약물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영화와 비디오, 만화, 소설, 잡지 우리 주위에 조금만 딴 생각하면 우리들을 더럽힐 것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클린턴이 미국을 잘 살게 했고,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미국을 더 높였어도, 그가 성적인 스캔들을 일으킨 것은 그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다윗이 훌륭한 왕이었으나 그이 생애에 단 한번의 성적 범죄는 자녀들이 서로 싸우는 피바람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십대의 성결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맑은 이슬같은 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좋은 것을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머리에 담기를 바랍니다. 더러운 것을 담으면 우리 자신이 자꾸 더러워져만 갑니다. 흰 우유에 잉크 한 방울 만 떨어뜨려도 그 우유는 흰빛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결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런 사람이 노아입니다. 그런 사람이 에녹입니다. 그런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사무엘입니다. 이런 13년만의 성공의 비결 그 모든 것을 합하여 한 마디로 말한다면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성공자들과 요셉의 성공과 다른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실패가 있을 수가 없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알기에 요셉은 거짓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는 모든 힘든 일도 성실하게 순종하며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질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여러분도 13년만의 성공을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늘 내 곁에 계심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직하고, 성실하며, 성결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방학에 놀 것 많고, 즐길 것 많고, 유혹 많으나 요셉과 같이 그런 모든 유혹에서 이기고 새로운 천년의 계획을 멋지게 세우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1차 전 상황 종료/삼상4:12-22
1차 전 상황 종료/삼상4:12-22 2003-07-03 01:58:34 read : 12 [성경본문] 바로 그 날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끼얹은 채 전쟁터에서 달려와 실로에 도착하였다. 이때 엘리는 하나님의 궤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몹시 걱정하며 길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전쟁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전쟁터에서 온 그 사람이 성 안에 들어오면서 일어난 일을 다 말하자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엘리는 성 안이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이게 무슨 소리냐?' 하고 물었다. 이때 엘리의 나이는 98세였는데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그 사람이 엘리에게 급히 와서 `내가 오늘 전쟁터에서 도망하여 이 곳까지 줄곧 달려왔습니다.' 하자 엘리는 `여보게, 전쟁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스라엘군이 블레셋군에게 패하여 수많은 병사가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으며 살아 남은 자들은 도망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습니다.' 성전 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있던 엘리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 그만 나자빠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이것은 그가 나이 많아 늙은 데다가 살까지 쪄서 몸이 무거웠던 탓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다스렸다. 엘리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산기가 가까왔을 때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일과 시아버지와 자기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진통을 겪다가 아이를 낳고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죽기 바로 직전에 옆에 섰던 여자들이 `정신 차려라. 아들이다!' 하고 말해 주었으나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가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다. 그녀가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녀의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이었다.(삼상 4:12-22/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하늘이 얼마나 큰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기도 하고, 또 우리가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사랑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모든 상황은 우리의 인생에 등장하는 모든 상황과 환경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결과입니다. 이것을 믿음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환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큰 뜻과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 환경으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힘 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개를 들고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현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을 신뢰하는 것, 현실로 낙심하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 블레셋의 신들과 하나님의 1차 전의 상황이 종료가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수치는 곧 하나님의 수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패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각기 자기의 집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법궤는 빼앗겼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는 넘어져 죽었습니다. 또 이 소식을 들은 엘리의 자부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하고 죽었습니다. 겉으로 하나님은 패했습니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은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낙심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믿음을 소유함 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낙심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법궤는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법궤에 묶여 있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법궤가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교회가 곧 예수님의 몸과 똑같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든 법궤와 하나님을 통일시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법궤와 하나님을 통일시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전에서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패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사람들과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보다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389장 3절에 '세상나라들은 멸망 받으나 예수 교회 영영 왕성하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떻게 왕성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강하고, 세상의 도전에서 안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이 현상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상보다 목적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지금의 수치를 수치로 여기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잡을 때와 포기할 때, 고개를 들 때와 고개를 숙일 때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목적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위해서 바벨론 신에게 졌다는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목적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그것을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길 원하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롬 8:32). 바울은 "하나님은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아낄 것이 없습니다."고 증언합니다. 왜 낙심합니까? 우리가 낙심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 상황이 급박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심을 알고는 있는데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 이렇게 가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을 느껴집니다. 그래서 낙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 때를 알고 있다면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을 생각합니다. 아니 조금 덜 낙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이 목적은 그 궁극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바로 현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입니다. 그래서 현재로 인해서 낙심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 믿음이 '문제로 나를 낙심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비록 벼랑 끝에 서 있어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구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더욱 주님을 주목하는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마치 자녀를 위해서 "주여 믿음이 없음을 용서하소서, 저에게 믿음을 주소서"(막 9:24)라고 기도한 부모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주신 분입니다.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더 아끼겠습니까? 따라서 이 사실을 믿고 항상 최선을 다하십시오. 오늘 하루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2000년 8월의 축제/시126:1-6
2000년 8월의 축제/시126:1-6 2003-09-02 12:38:49 read : 8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 쓰는 여러 말들 가운데 축제(祝祭)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경축(慶祝)을 뜻합니다. 기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잔치를 말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축제, 가정적인 축제, 사회적, 국가적, 민족적 성격의 축제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전세계적인 성격의 축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 성탄의 축제, 예수 부활의 축제, 예수 재림의 축제 같은 것들입니다. ※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축제란 그 자체가 하나님이 베푸신 무한한 은사와 선물에 대한 보은적 감사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마음의 감사와 입술의 고백과 노래로 그리고 육체적 여러 행동과 물질적 감사로 고백하는 감사행위입니다. Ⅰ.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축제를 생각합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여러 종류의 축제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을 기념하는 유월절 잔치(축제)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받은 맥추절은 여름의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추수의 마지막 절기는 사실상 가을의 축제였습니다. 성경은 '그 절기'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슥 14:16, 민 29: ). 또한 유대인의 대적 아각 사람 하만의 계교에서 극적인 구원을 받은 왕후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전 유대인들이 잔치를 벌인 이른바 부림의 축제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에서는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에서 해방을 받아 시온의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를 회상하는 환희의 축제를 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해방의 축제입니다. 하나님은 세계적인 권력자로 새롭게 등장한 고레스로 하여금 선민 이스라엘에게 해방령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귀국령을 내리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까지 명하고, 심지어 백성들에게 은과 금과 기타 물건까지 도와주며, 저들의 신변의 안전과 교통수단까지도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스 1:1-4). 저들은 1차, 2차, 3차에 걸쳐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 이스라엘의 땅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1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 놓았던 일의 성취였습니다. 또 포로지 바벨론에서 에스겔이 받은 환상을 통하여 저들에게 예언했던 일들의 성취였습니다. 이때 저들의 마음은 감동이 충만하여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노래하며, 믿기 어려운 기사(奇事) 같은 현실을 토로하고 있습니다(시 126:1). 저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저들의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차 버렸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방 여러 나라들도 이스라엘의 해방을 보고 감탄하기를 이는 여호와께서 저들을 위하여 행하신 '대사(大事)'라고 하였습니다(시 126:2). 이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라고 하였습니다(시 126:3). 저들은 다시 미래적 축제를 기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여러 포로지에 남아 있는 자들의 완전 귀국을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저들은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라고 하였습니다(시 126:4). 여기 '남방 시내'란 남방 네게브 지역의 시내로서 평소에 이곳은 말라서 물이 없으나, 가을 우기철에는 물이 가득하게 흐르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노래한 말입니다. 이제 포로지에 남은 동족들이 마치 하나님께서 남방 시내에 물을 채워 돌림같이 그렇게 돌아오게 하시기를 확신하고 기원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랜 포로생활 중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생하던 때가 얼른 지나가고, 필경은 고국에서 함께 만나는 기쁨이 있게 해달라고 기원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한 미래적 소원을 노래한 축제였습니다(시 126:5).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축제는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와 보은의 축제였습니다. 그 축제의 내용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대사(大事)였습니다. 곧 해방과 자유의 축제였습니다. 그 축제의 방법들은 마음의 감사와 기쁨, 입술의 웃음과 혀의 찬양들이었습니다. 소고치고 북치며 춤추는 축제였습니다. 전 이스라엘의 민족적 축제였습니다. Ⅱ. 우리가 맞은 2000년 8.15의 축제입니다. 1. 기억하는 축제, 과거를 생각하는 축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1945년 8월 15일이라고 하는 역사 속에 묻혀 있는 날과 사건을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기뻐하고 춤추는 축제입니다. 적어도 이날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만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우리나라와 민족이 일본의 통치 아래서 받아오던 36년 간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과 역사가 존재할 동안에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우리의 현재가 잘 되고 부강해지면 부강해질수록 역사 속에 묻혀 있는 1945년 8월 15일을 기억하고, 되찾아 감격하고, 감사하는 축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날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날인 삼일절이나 민족해방의 날인 8.15 광복절을 국경일로 정하고, 이날을 기념하며 기쁨으로 경축하는 것입니다. (1) 8. 15 해방은 무엇보다도 민족사적으로는 정치적 해방과 자유를 경축하는 축제일입니다. ① 빼앗긴 땅(국토)을 도로 찾은 기쁨, ② 빼앗겨버린 인권(국민)을 도로 찾은 기쁨, ③ 그리고 우리의 주권(통치)을 도로 찾은 기쁨입니다. (2) 더욱이 종교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되찾은 일을 감사해야 할 날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민족적인 수난과 함께 기독교인이어서 받아야 하는 신앙적 수난을 겸하여 받았습니다. 빼앗긴 나라와 민족과 역사를 되찾아야 된다고 하는 애국과 애족심뿐 아니라 일본의 이른바 천조대신(태양신의 아들) 숭배와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결과 1938년 당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을 하는 교회사적 치욕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 주기철 목사를 위시한 많은 진리의 종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정면으로 부딪혀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200여 교회가 폐문이 되고, 2000여 신도가 투옥이 되고, 50여 명의 교직자들은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된 것입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제의 교회 탄압은 극에 달하여,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되었습니다. 1942년에는 일제의 강요로 각 교파가 모두 고유한 명칭을 버리고 소위 교단(敎團)이라고 하는 일본 교파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일에는 신교 교파를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시켜 명실공히 일본 기독교 교단에 완전히 소속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법적, 비신앙적 강요에 응하지 않는 인물들은 투옥을 하거나 강단에서 추방하고 금족령, 함구령을 내려 실제적 신앙활동이나 포교활동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다수의 교회를 폐합시키고, 예배시간의 제한, 주일 교인 근로 동원, 주일 선(先) 신사참배, 후(後) 교회 예배를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뜻있는 신도들은 암혈과 토굴 그리고 산속으로 피하여 흩어져 은둔하며 은밀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때 70만을 헤아리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수는 그 반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로마 천주교는 이러한 신사참배를 무조건 수락하고 일본 정책에 순응하였기 때문에 박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교, 특히 장로교는 그것이 성경과 신조와 교리와 신앙양심에 위배된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핍박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45년 8월 17일 밤을 기하여, 전 한국에 산재하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교회 지도자와 거기에 동조하는 책임자들을 모두 함께 몰살시키라는 무서운 지령을 내려, 이것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위하여 그 환난의 날을 사흘 감하고, 원자탄을 이용하여 일본을 불로 심판하시고야 만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8.15 해방이고 보면 우리 민족 전체는 물론이고, 특별히 기독 신자들에게 찾아온 8.15는 더욱 감격스러운 날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S.F.C. 20년사」를 쓰면서 1945년 8월 15일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 통치에서 자유와 해방을 받은 날이요, 특별히 기독교에 있어서 종교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20세기 극동 아시아의 새 출애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금년, 2000년 8월 15일도 예외없이 우리 민족에게는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의 축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기억의 축제란 바로 해방의 축제, 자유의 축제입니다. 2. 오늘의 축제, 곧 현재의 축제가 있습니다. 새 천년을 시작하는 첫해인 금년 2000년은 우리에게 실로 기록적인 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흥분하고 있는 평화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이었습니다. 이 땅에 6.25 동란이 일어난지 꼭 50년만이고, 해방된 지 55년이 되는 해의 경사입니다. 이 남북한 정상회담을 현실로 나타내기 위해 바로 지난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장관급으로 구성된 제1차 실무회담을 이미 서울에서 개최하고, 6개 사항의 합의문을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① 남북 장관급 회담 정례화 ② 8.15를 계기로 96년 11월에 중단된 판문점 연락 사무소의 기능 재개 ③ 8.15를 즈음하여 남북한 화해주간 설정 및 축하행사 ④ 경의선 철도 복구 ⑤ 일본 조총련 동포 고향방문 추진 ⑥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평양에서 장관급 회담 개최 등을 결정하여 공동 보도문으로 발표하였습니다(2000. 7. 31). 정말 작년 8.15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닙니까? 바야흐로 민족 대화합과 통일의 꿈이 이제 현실처럼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태산 같은 문제가 남아 있지만 시작이 반이요,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로 2000년 6월은 6.25 동란이 일어났던 동족상잔의 달일 뿐만 아니라 6.15평화선언이 발표된 달이었습니다. 2000년 8월은 해방의 감격만 되새기는 달이 아니라, 남북간에 화해의 잔치가 벌어진 달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8.15를 전후하여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만날 수 있도록 만남을 위한 일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로 꿈 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축제, 현재의 축제, 2000년 8월의 축제는 평화로 가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저 시편 성도가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리소서…」(시 126:4)라고 하며 남은 백성들의 귀국을 생각하며 기원의 축제를 올리듯이, 앞으로 계속하여 남북한의 화해축제, 평화로 가는 축제, 통일로 가는 축제가 일어나기를 기원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2000년 8월은 해방 감격의 축제 위에 남북평화의 축제가 더해진 달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제란 사실상 기쁨 극치의 돌파구입니다. 축제의 정신적 요소는 기적 같이 일어난 사건 앞에 감사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축제란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사건을 전인을 동원하여 밖으로 노출시키는 기쁨의 최대 발로입니다. 우리가 받은 2000년 8월의 축제는 결코 우연에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이 8월의 축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에 아무런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큰 이유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이기 때문입니다(시 127:1).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않는 온갖 인간의 경제 수단도 결국은 헛것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가정의 행복이란 생각조차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시 127:2-5, 128: ). 국가와 민족의 흥망이 절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딤전 2:2).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의 마지막 성사는 하나님 자신의 결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통치주요, 섭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기쁨이나 슬픔이나 축복이 우리에게 올 수가 없습니다. 무의미의 반복이나 역사적 진화론이나 맹목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 2000년 8월은 우리에게 축제의 달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는 이 달을 1945년 8월 15일을 회상하고, 기억하고, 감격하고, 되새기는 해방의 축제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2000년의 8월은 현재를 감사하는 축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50년만의 남북이산가족이 만나기 시작하는 감격과 기쁨의 잔치가 이루어지는 만남의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6.15 선언을 실천하기 위하여 남북한의 장관급 회담이 서울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또 8월 말에 평양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평화로 가는 축제, 화해로 가는 축제입니다. 이 아름다운 평화로 가는 축제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평화시대로 가는 길을 걷는 자들은 평화시대를 사는 값을 해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의 때를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주인이 더디 온다고 착각하고 방종해서는 안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교회가 받은 종말 세계 선교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아는 교회 그리고 자기의 존재적 사명이 확실한 교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고야 말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교회, 그 신자들을 붙잡고 하나님 자신의 마지막 일을 해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2000년 8월의 축제를 세계선교의 수단으로 선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