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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23:1-6 2013-12-20 13:57:47 read : 4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는 인간이 물어왔던 수많은 질문들 가운데 가장 진지한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아직도 여전히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 자신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23:1-6 2013-12-20 13:57:47 read : 4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는 인간이 물어왔던 수많은 질문들 가운데 가장 진지한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아직도 여전히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 자신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진리의 근본을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인간이 되려면 인간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인간을 알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는 역사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해 가장 통찰력 있는 대답을 시도한 사람이 1600년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천재적인 철학자 파스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파스칼의 유명한 저서 팡세를 통해서 그의 빛나는 인간에 대한 성찰들을 대면해 볼 수가 있습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들어보겠습니다. 아마도 가장 많이 알려진 인간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런 것입니다. "인간은 한 줄기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실로 자연 가운데서도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을 분쇄하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을 가지고도 넉넉히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인간을 분쇄한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 더 고귀하고 위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진술이 있습니다. "인간이 보다 밝은 빛에 거하면 거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진실로 비참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실제로 비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동시에 그는 위대한 존재이다." 이런 진술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고, 또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그는 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천사를 흉내내야 할 인간이 짐승을 흉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파스칼의 인간에 대한 놀라운 성찰은 예외 없이 모두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팡세는 파스칼이 병고와 투쟁하면서 쓴 책으로 그의 만년에 자유사상가와 무신론자에게 기독교의 진리성을 변증하기 위해 집필한 책입니다. 팡세의 제1부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부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있는 인간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는 철저하게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한 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은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놀라운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인간의 실존에 관한 한 가장 예리한 설명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53장 6절의 말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에 스크린에 있는 이사야 53장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기에서 성경이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양과 같다고 한 것은 가장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죄인된 인간의 실존을 길을 잃어버린 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진주로 불리워지는 오늘 본문의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것은 인간이 양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양과 같은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목자로서 해답이 되어주신다는 선언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실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기에 앞서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가, 혹은 문제 속에 있는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양과 같은 인간, 그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첫째로, 인간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방향을 잃어버린 존재로서 결코 가지 말아야 할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양은 흔하지 않지만 이 양이 개나 소나 말과 같은 다른 짐승들과는 현저하게 차별화 되는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양이라는 동물은 순하기도 하지만 멍청합니다. 그래서 방금 갔던 길도 돌아오지 못하고 제 집도 못 찾아옵니다. 자기가 왔던 그 길을 쉽게 잃어버리고 헤맵니다. 조금만 집에서 떨어져도 집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양에게서는 언제나 시선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개도 소도 말도 집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집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라고 합니다. 파스칼이 말한 대로 인간에게는 생각할 줄 아는 위대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위대성의 근거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기에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인 것처럼 인간도 알고, 느끼고, 판단할 줄 아는 인격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인격적인 생각의 기능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날의 현대 문명이나 문화를 건설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현대 문명에서 가장 놀라운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속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나간 한 세기 동안 인간이 발달시켜온 교통의 수단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혹은 정보의 수단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통신의 수단들이 얼마나 눈부시게 발전해 왔습니까?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정보와 통신의 수단들은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공상과학 만화책에서나 나왔던 것들입니다. 그랬던 것들을 지금 우리는 현실 세계 속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빨리 빨리 전세계를 오고 갈 수 있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오늘 인간에게 부딪혀 있는 가장 절박하고도 중요한 문제는 더 이상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빠르게 오고 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를 누리고 있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이 방향의 문제는 아직도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대하지만 아직도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회사 직원이 미국 뉴욕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비행장에서 공항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가 택시를 타면서 제일 먼저 한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사람은 택시 기사에게 "빨리 빨리 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까, 그가 가야할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운전기사에게 물었습니다. "기사님, 어디로 가십니까?" 기사도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손님, 손님은 저에게 빨리 가자고만 말씀하셨지 어디로 가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출장을 갔던 이 한국인의 이야기는 현대 한국인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한때 인터넷에 이런 유머가 떴습니다. 유머의 제목이 "한국 국회의원들의 성적표"입니다. 거기에 보면, 한국 국회의원들이 유일하게 수를 받은 과목이 있는데 그것이 수학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들어오는 월급과 비자금 계산능력이 워낙 뛰어나고, 선거 날짜에 상당히 민감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를 받은 과목은 국어였다고 합니다. 말하기도 잘하고, 쓰기도 잘하고, 읽기도 다 잘했는데, 딱 하나 듣기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의 여론을 듣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를 받은 과목이 있는데 외국어라고 합니다. 국민들의 세금을 가지고 외국 여행을 잘 다니고 외제차를 좋아하지만 강대국에게는 약해서 외교 실력이 미미하기 때문에 미를 받았다고 합니다. 양을 받은 과목은 사회라고 합니다. 워낙 사회 봉사를 안 하다가 1년에 딱 한 번 명절에 나타나기 때문에 양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를 받은 과목은 윤리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배신과 거짓말, 싸움과 욕설에 아주 출중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혀 성적이 안나온 과목이 하나 있는데 체육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달리기였다고 합니다. 힘은 넘쳐나는데 전혀 엉뚱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방향을 잃어버린 우리의 정치와 국회를 풍자하는 유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국회의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빨리, 서둘러,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방향을 잘못 잡아서 엉뚱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경주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혹여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는지요?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닐까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것은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를 준비하고 있지만 우리는 방향을 잃어버린 채로 새해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양을 닮은 인간, 그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둘째로, 인간은 자구책이 없이 두려워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생물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자구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신체의 한 부분을 예리한 무기로 사용해서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신체의 색깔과 유사한 자연 환경을 찾아서 그 환경 속에 은거하고 숨음으로써 자연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는 일종의 보호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에게는 이런 자구책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도 양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이 다 양과 같아서 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오늘날의 눈부신 문명을 발전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꾸로 자신들이 만든 그 문명에 의해 위협을 받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핵무기를 만든 것이 누구였습니까?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그 핵무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서로 테이블에 앉아서 소리치며 서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우리 나라가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얼마나 축포를 터뜨리며 좋아했습니까? 그러나 그 자동차 덕분에 우리는 교통사고율 세계 제1위의 국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자동차 운전을 시작하면 부모들의 초조함과 두려움은 절정에 달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작은 종양이라도 발견되었다 싶으면 갑자기 힘이 빠져버리고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양은 유달리 겁이 많습니다. 인간도 참으로 겁이 많은 존재들입니다. 이런 인간의 두려움의 심리를 이용하여 발전한 현대적인 산업이 있다면 그것이 보험업입니다. 우리는 자동차 사고가 두려워서 자동차 보험에 가입합니다. 집이나 건물에 화재가 날 것을 두려워하여 화재 보험에 듭니다. 건강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의료보험에 가입합니다. 비행기를 탈 때 혹시나 어떻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항공보험에 가입합니다. 은퇴한 이후에 내 삶의 모습이 두려워 은퇴보험에 가입하기도 합니다. 축구 선수들의 자산은 발입니다. 그래서 발을 보호하기 위해 발보험에 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들의 자산은 손가락입니다. 그래서 손 보험에 든다고 합니다. 저는 무슨 보험에 들까를 생각하다가 주둥이 보험에 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모든 각종 보험에 들어놓고도 아직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가장 연약한 피조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지닌 이런 실존적인 두려움이 바로 인간 타락의 결과라고 가르칩니다.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를 하자마자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 이런 말입니다.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몇 주가 지나면 새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준비하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스스로 자구책을 만들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인간, 성경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간 인간의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사랑하는 여러분, 양과 같은 인간, 그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세 번째로, 인간은 너무나 쉽게 오염되는 존재입니다. 양은 멀리서 보면 아주 깨끗해 보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면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는 동물입니다. 인간도 똑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모두가 다 신사처럼 보입니다. 요조숙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면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가까이 하면 할수록 악취가 난다." 저한테도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냄새가 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각종의 모순과 죄악으로 가득 찬 어두운 내면의 갈등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고서도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양은 일단 더럽혀지면 스스로 깨끗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너무 쉽게 환경에 오염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다'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성경은 우리는 다, 예외 없이 다 그렇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보편적인 타락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 스크린에 있는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의롭다 할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으로도 결코 스스로를 의롭게 만들 수가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력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새롭게 할 수도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도덕적 무력감에 빠져 있는 죄인입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 인간은 죄악의 모습에 너무 쉽게 오염되어 버리는 존재들입니다. 선한 모습, 아름다운 모습은 닮아가기가 어려운데, 나쁜 모습, 타락한 모습에는 너무 쉽게 동화되어 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근사한 모습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왔지만 우리 안에는 죄책의 어두운 갈등이 있습니다. 방황의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무력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된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양과 같은 인간의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양과 같은 죄인의 실존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완벽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완벽한 해답은 바로 목자입니다. 목자만 곁에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목자가 그 양들이 갈 길을 보여주고 방향을 지시합니다. 목자가 곁에 있으면 목자는 양을 자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보호해 줍니다. 그리고 그의 필요를 성실하게 공급해 줍니다. 그리고 더럽혀진 양을 깨끗이 씻겨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해답은 목자입니다. 목자만 곁에 있으면 됩니다. 오늘의 시편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기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 대신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야훼', '여호와'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무려 7,000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뜻은 "스스로 있어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그분은 스스로 있어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인생들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일에는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나를 돕는 그 사람도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지금도 내일도 영원히 그대로 존재하시는 분, 그리고 사람과 계약을 맺으시면 그것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변하지 않는 여호와, 그 분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여호와 그 분은 길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목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어느 날 이 지상을 내려다보시다가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인생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목자 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분의 이름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는 어느 날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 10:11)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선한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목자에게 양이 100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다. 그는 99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 양을 찾자마자 자기의 어깨에 둘러매고 두 손으로 꽉 잡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잔치를 열었다. 잃은 양을 찾아가는 목자,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한 목자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나를 찾아오셔서 만져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그 분이 내 인생에 목자가 되신 것과 나의 구원자가 되신 것을 체험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 분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서 날마다 듣고 싶은 간증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목사님, 내 인생의 목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물질도 아니고, 세상의 어떤 친구도 아니고, 내 인생의 목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 고백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 소원이 어디 저만의 소원이겠습니까? 그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소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고백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 시점에 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호와가 여러분의 목자가 되셨습니까? 여호와가 정말 나의 목자가 되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좋으신 분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분,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면 우리는 상황이 좀 바뀌어도, 때로는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내 인생의 목자로 삼고 그 분의 인도함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내 인생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 그 분만이 내 인생의 모든 문제에 완벽한 해답이시며 그 분만이 나를 인도할 수 있다는 분명한 결단 속에 "하나님, 당신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고백하며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목자로 영접한 체험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삶을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계십니까? 정말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는 그의 기르시는 양으로 그 분의 인도를 받기를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 앞에서 영원토록 드려지고 싶은 것, 그리고 듣고 싶은 고백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세월이 빠릅니다./시90:1-17 2001-11-07 13:01:22 read : 28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의 집에 있는 벽시계가 어느날 멈추었습니다. 알고 보니 밧데리가 다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것으로 갈아끼우니 다시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흐르는 세월도 얼마간 멈추게 했다가 다시 가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린애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벌써 한달이 지나갔습니다.
세월이 빠릅니다./시90:1-17 2001-11-07 13:01:22 read : 28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의 집에 있는 벽시계가 어느날 멈추었습니다. 알고 보니 밧데리가 다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것으로 갈아끼우니 다시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흐르는 세월도 얼마간 멈추게 했다가 다시 가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어린애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벌써 한달이 지나갔습니다. 특별한 일을 하지 못하고 한달을 보낸 것 같아 아쉬움만 남습니다. 세월이란 너무 빠릅니다. 세월은 색깔이 있거나 어떤 냄새가 나는 것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 세월의 흐름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고 더 세월이 흐리면 노인이 되고 결국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세월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좋던 싫던 세월의 흐름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1. 세월은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습니다. 2절 말씀에"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 이시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시간이 시작되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시간은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습니다. 인간인 내가 시간을 주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월을 흐르게 하시는데 누가 막을 수 없습니다. 3절말씀에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5절 말씀에도 "주께서 저희를 쓸어 가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은 질병이나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욱더 사람의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떠나게 하시니 세상을 떠나서 어떤 사람은 천국가고 어떤 이는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태어남과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어느날 저의 아내가 얼굴 주위에 생긴 흰머리를 염색약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처음 시집올 때는 새색시였는데 어느듯 22년이 지나서 흰머리가 생긴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옛날 새색시로 돌려주고 싶었지만 세월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으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속에 살고 있으므로 모든 시간을 다 맡기고 최선의 삶을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2.빠른 세월 속에서 인생은 무상합니다. 본문 3-6을 보면 인생은 티끌로 돌아가는 인생 즉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홍수 같이 쓸려가는 존재요. 잠깐 자는 것 같은 존재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베이고 마르는 풀의 꽃과 같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다 했습니다. 세계적인 미국 헐리우드의 배우들도 빠른 세월앞에 어쩔 수 없이 늙은 노인들이 되었습니다. 백만장자나 가난한 자나, 유식자나 무식자나, 미인이나 추한자나, 성자나 죄인이나 모두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 겸손하게 살아야합니다. 여기 젊은이들도 어느새 노인이 될 것입니다. 정주영씨를 보니 누가 부축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대우그룹의 김우중씨는 국내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외국에 숨어있습니다. 강병도 원로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이 50만 되면 한번 해보겠는데" 하시면서 아쉬워 하셨습니다. 기장 죽성교회 서차률 장로님은 70세 은퇴식때에 "세월이 참 빠릅니다" 하시면서 아쉬워 하셨습니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우리 인생은 무상합니다. 소나무 한그루 보다도 오래 살지 못하고, 거북이 한마리 보다도 더 살지 못합니다. 권력도 얼마가지 못합니다. 인기도 얼마가지 못하고 돈을 가져도 얼마가지 못하는 무상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무상한 중에 무상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살때 무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의미있게 인생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빠른 세월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세월이 지난 후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9절말씀에 "우리의 일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순식간에 우리의 일생이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지난후를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두사람이 등장하는데 한사람은 부자인데 날마다 사람들과 잔치로 즐기며 살았고, 한사람은 거지 나사로인데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영원을 준비못한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고 비록 가난했으나 영원을 준비한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백두산 천지에서 물이 두갈래로 갈라집니다. 한 갈래는 압록강으로 흘러 서해로 가고, 한갈래는 두만강으로 흘러가 동해 바다로 들어갑니다. 출발은 같았지만 어떤 방향으로 흐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지만 세월이 지난 후 영 다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열매를 거두고 살 것이고 어떤 사람은 나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세상적으로 산 사람은 다르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게 산사람과 게으르게 산사람은 나중에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에릭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와 존재'에서 두가지 삶이 있는데 '소유적 삶과 존재적 삶'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더 많은 소유를 위해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삶에 의미를 두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빠른 세월속에 살면서 소유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않됩니다. 보람된 삶에 의미를 두고 살아야합니다. 서울여대 윤경은 총장이 금번 3월에 문을 여는 서울 디지털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었습니다. 배우는데는 대학총장이 따로없다는 생각에 도전을 하였습니다. 해운대 좌동에 사시는 올해66세의 이대봉 할아버지는 올해 부산 외국어 대학 중문과에 합격하여 손자뻘 되는 학생들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마냥 흘러만 가는데 세월탓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미래를 향하여 도전하고 세월이 지난후에 어떤 모습이 될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여러분 멀리보고 삽시다. 10년20,30년후를 내다보면 오늘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2)자기를 바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존재입니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고 했는데 자신에게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한번 물어 보십시요.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파스칼은 "인생은 생각하는 갈대" 라고 말했고, 과학자 뉴톤은 "인생은 기계" 라고 했습니다. 니체는 "인생은 배우"라고 했습니다. 정말 인생이 생각하는 갈대정도입니까? 인생이 기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까? 배우처럼 연기하다가 무대 뒤로 사라지는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위대한 존재요 이 세상에 나 같은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본문7-9을 보면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존재가 우리들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여러분 내가 스스로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실패하고 망하고 말 유한한 나를 알고 겸손히 기도하며 살아야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내 힘으로 사는 줄 자만하지 마십시오. 이 땅의 권세나 힘을 영원히 누릴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유한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더욱 순종하며 더욱 사랑하시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자기의 날을 계산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2절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낭비해버린 세월을 애통해하는 마음이 지혜요, 현재의 시간을 부지런히 활용하는 자세가 지혜요, 미래의 시간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나에게 남은 날이 얼마인지 생각해 보는 것은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고 바르게 살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남은 날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수년전에 장관을 세부서나 역임한 서울 후암교회 김일환 장로님은 두려운 것이 두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두렵고, 또 하나는 자식들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하지만 내 자식들이 얼굴을 들고 세상을 다니지 못할 것이니 그것도 대대로 물려질 것이니 자식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참 지혜는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의 날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4)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13-17까지를 보면 유한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구하여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없으면 유한한 우리가 한시도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갈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일을 할때나 공부를 할 때나, 헌신과 봉사를 할 때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내 힘으로 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철저하게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구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박물관에 가면 미이라실이 있는데 그곳에는 고대 애굽의 왕들인 파라오들과 왕비들의 미이라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모세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파라오의 미이라도 있습니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그들이었지만 흐르는 세월앞에 어쩔 수 없이 죽었고 미이라가 되어 관광객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 자기들의 몸이 그리될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저는 그 미이라 들을 보면서 인생은 유한하고 인생의 모든 것도 유한하고 하나님은 영원하다는 것을 더욱 느꼈습니다. 여러분 세월은 빠르고 인간은 유한합니다. 몇해전 서울 여의도 광장에 차를 몰아 여러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한 사람이 사건직후 더 많은 사람을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흉악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악한 그가 변하였습니다. 유족중에 신실한 기독교인이 있었는데 그가 그 범인을 면회하여 용서한다고 용서를 선포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흉악한 범인의 악한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여 새롭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빠른 세월 속에서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인간은 유한합니다. 유한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구하며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때만이 우리의 인생은 좋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아름다움이 남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와 함께 하는 자의 복/시73:20-28 2001-11-16 10:29:04 read : 2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 론」 본문 시편 73편은 시편 제3권에 속한 시로써 시편73편부터 83편까지의 11편의 시는 아십이 지은 시편을 모은 것입니다. 아삽은 성전에서 찬송하는 악사들의 수석에 있는 사람입니다. (대상25:1). 그는 다윗과 동 시대 사람으로 그 시대의 도덕적 부패속에서 사회의 윤리는 깨어지고 범법 행위와 죄악을 상식으
주와 함께 하는 자의 복/시73:20-28 2001-11-16 10:29:04 read : 26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 론」 본문 시편 73편은 시편 제3권에 속한 시로써 시편73편부터 83편까지의 11편의 시는 아십이 지은 시편을 모은 것입니다. 아삽은 성전에서 찬송하는 악사들의 수석에 있는 사람입니다. (대상25:1). 그는 다윗과 동 시대 사람으로 그 시대의 도덕적 부패속에서 사회의 윤리는 깨어지고 범법 행위와 죄악을 상식으로 여기면서도 그들의 생활이 부유와 평화와 건강하게 지내는 모습을 바라보고, 저의와 공정을 진리로 하시는 하나님께서 진정 살아계시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그토록 평안하게 복을 누리고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 속에서 진리를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이 복되다는 것을 감사하는 내용의 시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 여러곳에 있습니다. 하박국2장에서, 하박국 선지자로 하여금 세상의 되어져 가는 것이 불합리하고 불의와 불법이 정직하고 진실된 사람들을 억울케하고 짖누르면서 잘 살고 평안하게 되어진 것이 무슨 이유인지를 하나님 앞에 질문하고 성루 파수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렸더니 하박국2장4절에서 "...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대답을 주셨고, 예레미야12장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배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렘12:1)"라는 질문을 할 정도로 현실의 부조리한 일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시편기자는 악인의 형통을 보고 실족할 뻔했다고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호소했으나 본문17절에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신앙적인 면에서, 잘 깨닫게 된 후에 20절에서 "주여 사람이 저희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깬 후에는 깨닫지 못할 때"라는 것은 자는 것 같이 22절의 "우매무지"한 생각을 가졌을 때를 말하므로 하나님의 뜻은 져버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서 보이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상태를 말하고, 자는 상태에서 "깨어난 다음"이란 하나님의 뜻인 진리를 발견하게 된 후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주께서 깨신 후에"라는 것은 악행을 하는 자들을 가만히 묵과하고 계셔서 잠자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깨신 후에는 악인들에게 징벌을 내리실 때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순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깊은 의중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내용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토록 불의하고 불법한 세상에서도 하나님 앞에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까? 1.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3절) 악한 사람이 잘 살고 권세를 이용하고 불법과 폭력을 이용하고 악을 도모해서라도 자신의 안일을 이루려는 세상에서 지금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감사하며 살게된 것이 바로 무슨 원인인가? 하는 고백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들어 주셨기에 지금 내가 이 믿음을 간직하고 주안에서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주의 손이 이끌어 주신 예를 봅시다. 1) 요나가 스스로 범죄의 자리에 빠져들어 갔을 때에 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면서 기도하기를 요나2장6절에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주의 손이 요나를 붙들고 그를 파멸에서 끌어내사 사명을 다시 주었던 것입니다. 2) 야곱이 형과 아버지의 버림을 받아서 집을 떠나 메소포다미아의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하여 가는 중에 벧엘에서 외로이 머물러 있을 때에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비참한 처지와 참담한 지경에 빠질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변을 바라보아도 도와 줄 사람이 없고 의지할 것 없는 지경에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통하여 인격도, 자존심도, 인간적인 대우도 무시된체 남자 아이는 낳는 대로 죽이라는 법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출3장7-8절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놓아 버리고 죄악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죄악속에 빠져들어 갈 때에 주께서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외롭고 쓸쓸한, 홀로 있는 고독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혼자라고 여기짐 말라. 내가 너를 보호하고 붙들어 주리라 하시며 가장 처참한 처지에서 짖눌리고 멸시를 받으며 앞날에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이토록 버림 받은 상태의 사람을 구원시키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불한당을 만난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외면했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구하지 않았습니까? 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서 돌에 맞아 죽도록 되어진 여인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고 돌려보내신 예수님이 아닙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기새과 더불어 다 탕진하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된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올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진정 우리를 위한 참 사랑의 현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을 떠나 범죄에 빠져서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서 낙심하고 계시는 분이 없습니까? 우리의 생활속에서 절박한 상황에 빠져서 외롭고 쓸쓸한 고독한 상태에서 괴로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이 파멸에 이르고 인격도, 체면도, 자존심도 짓밟혀서 도저히 제기할수없는 절망에 빠져 있는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탕자와 같이 하나님을 떠났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오른팔을 붙들고 파멸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시91:11-12절에서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른손으로 붙들고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24절)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였을 때에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교훈으로 잘못되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진심을 깨닫게 될때에 시편기사는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그 결과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외의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24절)"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살필 때에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합니다. 1) "목자"라는 명사를 사용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해서 목자가 양무리를 인도하시는 상태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시편100편이고, 양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의 내용은 시편23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목자의 모습은 하나의 추상적인 상태로써 나타났으나 이것을 실제적으로 인도하신 사실은 광야생활 속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출 13장 21-22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2) 시편119편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자로써 나타나고 있으나 실제로 인도자는 성령이십니다. 행전8장29절에서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이라고 하신 사실을 보면 실제에 있어서 인도하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요16장13절에도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출20장2절에 "나는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고 했는데 애굽땅은 죄악 세상이라고 봅니다. 죄악세상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써 구원을 주신 분입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시편107편14절인데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인도하여 구원의 반열에 세우실 뿐만 아니라 마귀의 시험에서와 올무와 덧과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환난과 고난속에서 평강의 길로 인도하여 내시어서 우리의 가는 길에서 축복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토록 멸망에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신앙생활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인도대로 순종해서 사는 그 자체를 바로 믿음의 생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14장4절에서 장차 구속받은 자들이 사는 산에서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들의 신앙의 자격을 말할 때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생활 자체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 믿음 생활이고 따르는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전부를 맡기고 따른다는 전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의 길로, 진리의 길로, 선한 길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사는 자의 복(27-28절) 우리를 잘못된 자리에서 붙들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된 자리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늘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살도록 하시는데 이러한 자가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이 어떠한 길이겠습니까? 1)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간에 대화가 끊어지면 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엄청난 간격이 생깁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안에 나와있어도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어질 때에 하나님은 멀리 떠나 가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하는 은밀한 시간입니다. 2) 성령충만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몸을 전으로 삼으시고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한 생활이 바로 성령 하나님과 나와의 혼연일체가 되는 길입니다. 성령안에서 살며 성령에 의해 생활할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3) 말씀안에 사는 생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까이 하는 길이고, 성령충만은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는 길이라면 말씀안에 사는 생활은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시73:25-28 2002-03-14 09:21:06 read : 4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희 교회에 한 권사님이 작년 12월달에 63세된 할아버지를 전도하셔서 그분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번주간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별세하셨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을 당했지만, 그나마 권사님의 전도로 주님 품에 안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시73:25-28 2002-03-14 09:21:06 read : 4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희 교회에 한 권사님이 작년 12월달에 63세된 할아버지를 전도하셔서 그분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번주간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별세하셨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을 당했지만, 그나마 권사님의 전도로 주님 품에 안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까이 해야 할 것이 있고,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술주정뱅이와 가까이 하면 술주정뱅이가 되고, 노름꾼과 같이 하면 노름꾼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좋은 사람과 가까이 하면 신앙 좋은 사람이 되고,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면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됩니다. 양수리 수양관에 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그 가운데는 열심 있는 분들의 전도로 교회 나오게 된 사람은 목요철야에도 참여하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누구를 가까이 하는가는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까? 一.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십자가는 고난이요,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피를 다 쏟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등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롬8: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엡2:13절에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고 원수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피는 "보혈"입니다. 인간은 나면 죽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둘째 사망 영의 죽음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게 되면, 저주와 멸망과 죽음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二. 하나님은 자기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또한 죄를 지은 자는 지옥으로 보내십니다.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사망으로 떨어지지만 회개하고 찾아오는 자는 기뻐하시며, 안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영생으로 옮기십니다. 다윗이 시6:6절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며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행13:22절에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라는 말씀처럼 그를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시편 34:18절에 보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죄에는 세가지의 죄가 있습니다. 첫재는 하나님만 아는 죄입니다. 이것은 영의 죄입니다. 이것은 원죄입니다. 이 원죄는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릅니다.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아는 죄입니다. 둘째는 마음의 죄입니다. 이 죄는 자신만 아는 죄입니다. 아내도, 자식도 모르는 죄입니다. 셋째는 남이 아는 죄입니다. 이 죄는 육체의 죄입니다. 이 죄를 회개하는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됩니다.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용서받고 축복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三 .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듣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전5:1절에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에 듣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읽고, 듣고,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음성이요, 둘째 하늘의 소식이요, 셋째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요즘 신문과 방송을 보면 아프카니스탄과 미국의 전쟁이 대단합니다. 미국은 공습을 하고, 아프카니스탄은 탄저병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소식을 들어보면 얼마나 안타깝고 어두운 소식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식은 기쁨과 축복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四.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기도는 祈(기도할 기) 禱(빌 도)입니다. 빌고 빌어서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과거 I.M.F가 닥쳤을 때 한 집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한탄을 하시며,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7-8억이 되는데, 지금 3억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빚이 4억인데, 집을 팔아도 갚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돈을 턱쥐어주면서 "가서 해결하시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돈이 있어야지요... 그 집사님이 너무 힘들어서 새벽이 되면 가까운 교회가 있어서 그곳으로 새벽기도를 다녔답니다 .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이 새벽기도도 잘나오고 열심히 기도하니, 그에게 다가와서 사정이야기를 들어주더랍니다. 그러더니 그 목사님이 자신이 교회를 더 크게 짓기 위해 돈을 좀 모아둔게 있는데, 급한대로 이것을 쓰라면서 몇천만원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일년 반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저에게 말하는데, 문제는 그 자녀들이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고는 돈을 빨리 갚고 우리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더랍니다. 아이들이 이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 제가 돈만있으면 이런 어려운 사정이 있는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그에게 쥐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더 큰 도움을 주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시145:18절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며, 권능이 있는 분이며, 욥과같이 모든 것을 잃은 자에게 갑절의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고, 간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자에게 주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려움 당한 사람을 위한 기도는 그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이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구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마7: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 합니다. 기도에는 세가지의 기도가 있습니다 . 입술의 기도, 마음의 기도, 영의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마음의 기도, 영의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고전14:15절에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14절에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방언기도와 같은 은사를 통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가까이 나아가 축복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십시오 /시34:4-10 2018-08-21 01:32:12 read : 8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수도사가 수도원 뒷산을 오르며 정신수양을 하였습니다. 산 오름이 반복되면서 산을 오르며 계절마다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봄이 되면 산을 가득 채우는 진달래, 여름이 되면 흐르는 계곡, 가을이 되면 온통 산을 물들이는 단풍, 겨울이 되면 하얗게 산을 덮어버리는 눈..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십시오 /시34:4-10 2018-08-21 01:32:12 read : 8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수도사가 수도원 뒷산을 오르며 정신수양을 하였습니다. 산 오름이 반복되면서 산을 오르며 계절마다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봄이 되면 산을 가득 채우는 진달래, 여름이 되면 흐르는 계곡, 가을이 되면 온통 산을 물들이는 단풍, 겨울이 되면 하얗게 산을 덮어버리는 눈... 어느 한 계절 수도사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산을 오른지 5년이 되자 매일 오르는 산은 그렇게 아름답고 신비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변화하는 자연의 법칙에 익숙해지자 자연에 대한 신비나 감동도 점점 사라졌습니다. 수도사는 무엇인가 해야할 것 같아 일을 찾았습니다. 산에서 할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진달래로 술을 담그는 것을 보았습니다. 달래로 달래주로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머루로 머루주를 담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각종 야생과일과 약초를 모아 술을 담그면 약이 되는 술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하루 종일 산을 뒤져 몸에 좋다는 약초와 야생과일을 채취하였습니다. 홀로 하는 일이라 양은 많지 않았지만 여러 과일을 다양하게 섞어 술을 만들고 맛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같이 섞느냐에 따라 아주 독특한 향과 맛이 났습니다. 다양한 술을 만들어 맛을 보다보니 술에 익숙해졌습니다. 술마다 맛과 향이 독특했습니다. 등산을 하며 한 병씩 차고 올라갔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 잔씩 주었습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그 술맛을 잊지 못했습니다. 늘 만나는 등산객은 그 술을 만들어 특허를 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특허는 내지 않았지만 소량을 만들어 줄 터이니 팔라고 했습니다. 입소문을 통해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찾는 사람은 많고 수량은 많지 않으니 값은 점점 올라갔습니다. 술이 돈이 되자 수도사의 마음에 수도원을 새롭게 짓고자하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몇 년 동안만 술을 만들어 팔면 많은 돈을 벌어 수도원은 무난히 새건물로 지을 수 있을 것같았습니다. 수도원 술은 소문에 소문이 이어져 명품 술이 되었습니다. 술의 양은 점점 많아졌고 술이 많이 팔리는 만큼 수도원은 화려해졌습니다. 수도원이 화려해지자 점점 수도원을 찾는 수련생도 많아지고 방문객도 많아졌습니다. 수도원은 들어오는 많은 돈으로 어려운 노인들과 고아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수도원 원장의 이름은 세간에 널리 알려졌고 가끔 매스컴에도 선한 일을 많이 하는 분으로 소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술 빗는 수도사는 10년이 넘게 새로운 술을 만들기를 위해 맛을 보다 보니 이제 술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점점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수도원은 자신이 만든 술로 인해 벌어들이는 돈으로 명성이 자자해졌는데 정작 자신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자신 뿐 아니라 그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가정도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에서 만드는 독특한 약주는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모두가 그 맛에 취해 술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술값으로 인해 가정 경제는 말이 아니었고 술 중독으로 이혼하는 가정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수도사는 자신이 만드는 술의 결과에 대하여 알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 운영에는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그 술로 말미암아 수많은 가정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술 만드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술 만드는 것을 포기하면 가난한 이웃들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방만해진 수도원 경영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도원 식구들 생활에도 막대한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차례 포기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돈 맛을 안 수도원 원장이 강력하게 저지하였습니다. 그는 점점 술주정뱅이가 되어갔습니다.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은 수도원이 멋진 건물을 짓고 유명해진 것은 원장의 영적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수도원은 날로 번창되어갔지만 수도사는 술중독으로 정신도 육체도 심각하게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수도사는 자신이 수도원을 떠나는 것이 자신도 살고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도 사는 길인 것을 알았습니다. 술을 만들지 않는 길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처방책인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 차례 수도원을 떠나려 하지만 원장이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을 집회 장소를 찾아가 술주정을 부렸습니다. 술주정을 부리는 수도사를 원장은 더 이상 수도원에 머물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그가 추방되었지만 수도원에서 나오는 "회생주"는 여전히 입소문으로 전국에 퍼져갔습니다. 추방을 당했지만 그는 수도생활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술중독자로 인생을 마감하긴 싫었습니다. 산에 들어가 천막을 치고 침묵 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자신 때문에 망가진 가정을 위해 기도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돌 열 개씩을 치우며 밭을 일구었습니다. 마을에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산에 성자가 살고 있다고... 수도사는 그제야 깊고 참된 맛을 담고 있는 인생을 발견한 것입니다. 세상의 일들에는 나름대로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처음에는 대단한 것 같으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맛이 시들해지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흔히 맛 볼수 없는 아주 깊은 맛이 있습니다. 쉽게 맛을 알 수는 없지만 일단 한번 그 깊은 맛을 보면 세상의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은 맛을 보게 되는 그런 맛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믿는 맛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일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맛을 보셨습니까?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도 정작 그 맛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모릅니다. 병들어 몸이 약한 사람은 밥맛을 잘 모릅니다. 밥을 약먹듯 먹습니다. 반찬 투정이 심합니다. 밥을 먹으면서 맛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짜증을 냅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먹으면 밥맛이 같이 떨어집니다. 참으로 피곤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밥맛을 압니다. 밥이 맛있습니다. 투정이 없습니다. 불평이 없습니다. 함께 먹으면 덩달아 밥이 맛있어집니다. 먹는 일이 아주 즐겁습니다. 예수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건강한 사람은 예수 믿는 맛을 압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는 맛을 모릅니다. 예수를 약먹듯 인상을 쓰고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투정이 많습니다. 불평이 많습니다. 신경질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피곤해 집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예수 믿는 맛을 압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일이 아주 즐겁습니다. 투정이 없고 불평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예수 믿는 모든 일이 즐겁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맛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맛있게 믿는 삶을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깊은 맛을 알 때까지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맛을 알게 되면 자연히 예수님 이야기, 예수 믿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맛을 알게 되면 세상의 일들은 시시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확신에 차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다 알지어다"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맛보아'라는 말은 하나님을 체험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신에 대한 지식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만남이 있고 대화가 있고 사귐이 있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여 그분과의 관계를 누리며 신비한 맛을 즐기는 생활이 예수 믿는 삶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잘 믿는 길은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며 체험을 통한 감격, 감동, 감사, 간증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간증들과 그 은혜로 인한 예수님 찬양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결단의 이야기가 가득 찬 교회를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바로 그와 같은 이야기로 가득 차있는 것을 발견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야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간증들 그리고 그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와 찬송들로 가득 찬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습니까? 1. 기도하여 응답받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습니다.(4,6) 4절 이하에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자랑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간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기도에 일일이 응답해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6절에도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다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도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은 기도에 대한 간증이 남보다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시편에는 그와 같은 다윗의 간증들이 가득합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고 영광을 얻었습니다. 다윗은 5절에서도 '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멜렉에게 찾아가 귀화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의 용맹과 재주를 시기한 신하들이 다윗을 모함하여 적국의 용사이니 죽이자고 간청합니다. 죽을 위기에 처한 다윗은 갑자기 미친놈 연기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랬겠습니까? 속으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비멜렉이 죽이지는 않고 쫓아 버렸습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그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고 영광스럽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였습니다. 다윗은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하다가 두려움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에게 자기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환난중에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체육담당 기자 왜디 스폴스트라씨와 그의 아내 진은 둘다 80대인데 진은 3년동안 출혈성 심장쇠약으로 고생해 왔습니다. 그녀의 건강진단을 마친 후 담당의사는 "당신의 심장은 튼튼하고 폐도 깨끗합니다. 둘다 치유되는 과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왜디가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을 때 그 의사는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 부부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기도의 응답을 믿는군요. 제가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이 기도는 의학치료의 중요한 부분입니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기도와 환자치료가 관련이 있다고 의사가 인정하는 것을 듣는 것은 흥미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새로운 견해가 아닙니다 연구에 의하면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환자이든지 또는 다른 사람이든지 간에 치유과정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여러분 모두 부지런히 기도함으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됩니다.(9,10) 9절에는 자신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받은 축복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과 같이 부족함이 없는 복된 삶을 맛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9절-11절)' 다윗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늘 그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힘쓰고 노력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을 아주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아주 간단하고도 명료한 말로 간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젊은 사자가 궁핍하여 굶어 죽는 일이 일어날까요? 거의 불가능합니다. 늙은 사자나 어린 사자는 사냥이 미숙하거나 힘이 부족해 사냥에 실패하고 굶주릴 수 있습니다. 젊은 사자는 빠르고 지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냥에 실패할 확률이 아주 적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굶주릴 확률은 젊은 사자가 궁핍하게 되는 일보다 적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이야기입니까? 이 말을 하고 있는 다윗의 간증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더니 언제나 온갖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나님께서 복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고서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가정적으로 하나님이 좋은 것들을 넘치게 부어주심을 경험했습니다. 3년 반의 기근에 굶주릴 필요가 없는 젊은 사자 같은 아합왕도 물이 없이 고통을 겪을 때가 있었습니다.(왕상18:5) 그런데 홀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경외하였던 엘리야는 하나님이 그릿 시내에 숨기시고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먹이셨습니다.(왕상17:1-2) 그러다가 강물이 마르자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내십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기름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과 밀가루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기적으로 3년 반 기근의 기간동안 배불리 먹이시며 보호받게 하셨습니다.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기근 시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윗이 부럽지 않습니까? 저는 다윗이 부럽습니다. 나도 저런 말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감동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다가 좋은 복을 많이 받고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그런 간증을 하며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순종이 만드는 기적 /왕상17:8-16 2010-02-16 17:23:31 read : 29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는 지난 주 추수감사주일을 보냈습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요 감사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세 가지임을 배웠습니다. 에벤에셀, 임마누엘,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셨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1% 순종이 만드는 기적 /왕상17:8-16 2010-02-16 17:23:31 read : 29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는 지난 주 추수감사주일을 보냈습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요 감사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세 가지임을 배웠습니다. 에벤에셀, 임마누엘,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셨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앞으로 모든 삶의 구석구석까지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취감사, 절대감사, 전전후감사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우쩨 이런일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 하십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혹시 이 예배의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도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는 분도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어떻게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아마 따지고 싶은 마음이 계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적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는 어떻습니까?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 괜찮은 것입니까? 그것은 결과가 그랬다는 것이지 당사자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해도 너무하신 요구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임합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훈련하십니다. 엘리야는 삼 년 가뭄을 예언하고 요단 앞의 그릿 시냇가에서 시냇물을 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보내 주시는 떡과 고기를 먹고 지냅니다. 얼마 후 시냇물마저 말라 들어가자, 하나님은 한 과부에게 가서 식생활을 해결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사르밧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사는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녀는 엘리야가 사르밧에 갔을 때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 그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전부는 가루 한 움큼과 병에 조금 남아 있는 기름뿐입니다. 극심한 가뭄에 더 이상 버틸 기운이 없어서 생명처럼 아껴 두었던 마지막 남은 한 가루 한 움큼으로 최후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여인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아무리 봐도 초라하기 모습이라 처음에는 ‘물을 조금 달라’고 합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떡 한 조각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대답은 ‘만들어 먹고 죽을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요구하는 엘리야의 편에서 보면 왜 하필이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최후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하는 한 과부의의 집으로 인도하셨는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좀 넉넉한 집으로 보냈더라면 엘리야의 입장이나 요청받는 입장도 곤란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가뭄이 심하여 견디다 못해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물 좀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먼저 자기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라’고 하니 정말 해도 너무 한 상황입니다. 그것은 대접이 아닌 죽음을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입니다. 이 상황은 엘리야 선지자나 홀로 사는 여인 두 사람 모두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엘리야 선지자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하나님의 선지자이고, 주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지만 상황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형편이 좋은 집을 찾아가서 오히려 그 여인을 살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다함께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과연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 이렇게 담대하게 명령을 할 수 있을까? 저는 성격적으로나 믿음으로나 엘리야처럼 말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나님! 저는 도저히 제 양심상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굶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이 있고, 합리적 생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태도는 아닙니다. 믿음의 기준은 내 양심이나 정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내 의지나 결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기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이요 주의 종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고, 전하라하면 그대로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사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환경이나 사람에게 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명령하신 대로 순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사렙다 과부의 믿음과 순종, 헌신의 태도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이니까 그렇다쳐도 이 여인은 극심한 가뭄 속에서 아들과 함께 굶어죽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들으면 그럴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 자신의 문제라면 정말 순종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먼저 엘리야 선지자에게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줍니다. 사렙다 과부의 입장에서 작은 떡 한 개는 목숨입니다. 자신과 아들의 생명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1%의 희망이 바로 가루 한 웅큼과 바닥이 보이는 기름조금입니다. 100개 가운데 한 개 드리는 것은 맘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과 같은 1개를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여인은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14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여인은 엘리야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1%의 자신의 희망마져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그 마지막 1%의 양식을 드린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을 만듭니다. 16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아멘! 사르밧 여인의 1%의 순종의 믿음이 바닥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만듭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약한 자를 귀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시에 부요한 집, 권세 있는 집에 엘리야를 보내서 대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위기의 상황에서, 아무런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미련해 보이는 자를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부한 자나, 권세 있는 자나, 많이 배운 엘리트만이 인정받고 대접받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어느 정도는 이것이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미련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를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도 세상의 엘리트를 뽑지 않았습니다. 학식이 풍부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자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에 가장 미련하고 배우지 못한 어부들과 천대받는 세리를 택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통하여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을 통해서 강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폐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약한 나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통하여 부자를 부끄럽게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잘난 사람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못나고 가난한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지금도 연약한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부족하고 미련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함께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 드리기 원합니다. ♪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 내가 지금 약하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남보다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가난한 나를 부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영적 맹인과 같은 나를 어루만지셔서 다시 보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요 축복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먼저 순종하는 믿음을 보신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2700년 전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기적들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 비밀을 푸는 열쇠는 바로 ‘먼저’ 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협상을 시도하거나 거래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주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먼저 축복해 주시지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거래는 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분과 상업적인 거래(Deal)를 통해서 내 이익을 얻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이 먼저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축복의 삶, 기적의 삶은 내가 먼저 주님께 믿음을 드리고, 자신을 드릴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first)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먼저의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손에 붙잡고 있는 1%의 마지막 양식 그것을 먼저 내게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바로 마지막 1%의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내려놓을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인 1%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것을 먼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순종의 믿음이 바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만 뜨겁지 교인들의 가슴은 여전히 냉냉합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감동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시장에서 광주리 장사를 하던 여인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목사님께 찾아왔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 전 재산을 다 바치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녀의 가정생활 형편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님! 예수를 믿어도 이렇게 믿으면 안됩니다. 전 재산을 다 바치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요. 안됩니다. 이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만류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 성도님은 목사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받아주세요.” 목사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 재산을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면서 그녀는 이상하게도 감격에 넘쳐 찬송과 감사가 쏟아져 나옴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길목에 어떤 아이가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면서 사람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가서 기도해 주어라. 가서 기도해 주어라.” 너무나 뚜렷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기도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 받은 아이가 즉시로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그 뒤로 그 성도님이 기도해 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났고습니다. 기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녀에게 기도를 받는 자마다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한국교회 치유은사의 어머니로 살다 하나님 앞에 간 고 현신애 권사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순종이 바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잉태하게 한 것입니다. ‘JOY’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기쁨’ 이란 선교단체인데 그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영어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단체입니다. J는 Jesus first! O는 Others second! Y는 You third!입니다. 예수님을 제일 먼저, 이웃을 두 번째로, 자신을 세 번째로 두고 헌신하자는 선교단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첫째는 무엇입니까? 내가 첫째고, 예수님이 가장 마지막은 아닌지요? 내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1%를 먼저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순종의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기적은 오늘도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바닥나지 않는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에는 놀라운 뜻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믿음을 한 번 테스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순종할 때 언제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 여호와 이레의 역사가 임합니다. 밤하늘의 별과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창대케 하시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복덩이가 되게 하십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관을 벗어버리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손에 지팡이를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 홍해를 갈랐습니다. 반석을 치면 물이 솟는 기적이 임합니다. 출애굽을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기도의 여인 한나는 눈물로 얻은 사무엘을 나실인의 서원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 결과 가장 영적으로 어둔 밤과 같았던 사사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오늘 사렙다 과부의 생명을 건 순종의 신앙은 바닥이 나지 않는 놀라운 기적이 임합니다. 불란서에 레오날드 우드경(Sir. Leonard Wood)이 어느 날 왕의 초대를 받아 왕궁에 들어갔더니 반가워하며 내일 식사나 같이 하자고 초대를 했습니다. 레오날드 경은 다음날 왕궁에 들어갔더니 왜 왔느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저를 식사에 초대해서 왔습니다.”고 했더니 왕이 말하기를 “어제 식사에 초대할 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서 안 오는 줄 알았소.” 이 때 이런 명언을 말합니다. “폐하! 왕의 초대에는 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A King's invitation is never to be answered, but to be obeyed.) 왕의 명령 앞에 충성된 신하는 Yes, No가 필요 없습니다. 왕이 말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태도가 바로 레오날드 우드경의 대답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대답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대에 응답하는 자는 왕의 잔치 자리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판단 때문에 1%를 내려놓지 못하면 그 삶은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 속에서 고생하게 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 빛납니다. 험난한 항구일수록 등대는 더 빛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사렙다 과부의 현실처럼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나의 소중한 것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붙잡고 있는 줄은 썩은 줄입니다. 고무줄일 수 있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언젠가는 끊어집니다. 그러나 내 줄을 먼저 내려놓고 주님이 주신 줄을 붙잡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만사가 형통한 길로 인도받습니다.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축복이 임합니다. 오늘 1%의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먼저 드리는 순종으로 여러분의 지혜가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재물이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지금 약하다고, 어렵다고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내게 남겨주신 1%의 희망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1%를 먼저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바로 그 곳에 99%의 바닥이 나지 않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 1%의 순종이 하늘의 보고를 여는 축복의 열쇠가 되어 차고 넘치는 풍성한 기적으로 나타날 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나갑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후렴)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 예수 자유 주셨네
1%의 순종이 만드는 기적 / 왕상17:8-16 2010-07-02 10:16:34 read : 5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는 지난 주 추수감사주일을 보냈습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요 감사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세 가지임을 배웠습니다. 에벤에셀, 임마누엘,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셨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1%의 순종이 만드는 기적 / 왕상17:8-16 2010-07-02 10:16:34 read : 5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우리는 지난 주 추수감사주일을 보냈습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요 감사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세 가지임을 배웠습니다. 에벤에셀, 임마누엘,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셨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며, 앞으로 모든 삶의 구석구석까지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취감사, 절대감사, 전전후감사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우쩨 이런일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 해도 해도 너무 하십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혹시 이 예배의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도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는 분도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어떻게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아마 따지고 싶은 마음이 계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적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는 어떻습니까?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 괜찮은 것입니까? 그것은 결과가 그랬다는 것이지 당사자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해도 너무하신 요구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임합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훈련하십니다. 엘리야는 삼 년 가뭄을 예언하고 요단 앞의 그릿 시냇가에서 시냇물을 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보내 주시는 떡과 고기를 먹고 지냅니다. 얼마 후 시냇물마저 말라 들어가자, 하나님은 한 과부에게 가서 식생활을 해결하라고 명하십니다 .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사르밧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사는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녀는 엘리야가 사르밧에 갔을 때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그녀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전부는 가루 한 움큼과 병에 조금 남아 있는 기름뿐입니다. 극심한 가뭄에 더 이상 버틸 기운이 없어서 생명처럼 아껴 두었던 마지막 남은 한 가루 한 움큼으로 최후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여인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아무리 봐도 초라하기 모습이라 처음에는 ‘물을 조금 달라’고 합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떡 한 조각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대답은 ‘만들어 먹고 죽을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요구하는 엘리야의 편에서 보면 왜 하필이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최후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하는 한 과부의의 집으로 인도하셨는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좀 넉넉한 집으로 보냈더라면 엘리야의 입장이나 요청받는 입장도 곤란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가뭄이 심하여 견디다 못해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물 좀 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먼저 자기를 위하여 음식을 만들라’고 하니 정말 해도 너무 한 상황입니다. 그것은 대접이 아닌 죽음을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입니다. 이 상황은 엘리야 선지자나 홀로 사는 여인 두 사람 모두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엘리야 선지자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하나님의 선지자이고, 주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지만 상황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형편이 좋은 집을 찾아가서 오히려 그 여인을 살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다함께 1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과연 그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 이렇게 담대하게 명령을 할 수 있을까? 저는 성격적으로나 믿음으로나 엘리야처럼 말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나님! 저는 도저히 제 양심상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제가 굶는 편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이 있고, 합리적 생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태도는 아닙니다. 믿음의 기준은 내 양심이나 정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내 의지나 결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기준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이요 주의 종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고, 전하라하면 그대로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사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환경이나 사람에게 매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명령하신 대로 순종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사렙다 과부의 믿음과 순종, 헌신의 태도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이니까 그렇다쳐도 이 여인은 극심한 가뭄 속에서 아들과 함께 굶어죽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들으면 그럴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 자신의 문제라면 정말 순종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먼저 엘리야 선지자에게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줍니다. 사렙다 과부의 입장에서 작은 떡 한 개는 목숨입니다. 자신과 아들의 생명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1%의 희망이 바로 가루 한 웅큼과 바닥이 보이는 기름조금입니다. 100개 가운데 한 개 드리는 것은 맘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과 같은 1개를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준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여인은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14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여인은 엘리야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합니다. 1%의 자신의 희망마져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그 마지막 1%의 양식을 드린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을 만듭니다. 16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아멘! 사르밧 여인의 1%의 순종의 믿음이 바닥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만듭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약한 자를 귀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시에 부요한 집, 권세 있는 집에 엘리야를 보내서 대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위기의 상황에서, 아무런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미련해 보이는 자를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부한 자나, 권세 있는 자나, 많이 배운 엘리트만이 인정받고 대접받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어느 정도는 이것이 사실로 보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미련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를 통하여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도 세상의 엘리트를 뽑지 않았습니다. 학식이 풍부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자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에 가장 미련하고 배우지 못한 어부들과 천대받는 세리를 택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약한 자들을 통하여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을 통해서 강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폐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약한 나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통하여 부자를 부끄럽게도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잘난 사람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못나고 가난한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지금도 연약한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부족하고 미련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함께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 드리기 원합니다. ♪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 내가 지금 약하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남보다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가난한 나를 부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영적 맹인과 같은 나를 어루만지셔서 다시 보게 하시는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요 축복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먼저 순종하는 믿음을 보신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2700년 전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기적들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 비밀을 푸는 열쇠는 바로 ‘먼저’ 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협상을 시도하거나 거래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주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먼저 축복해 주시지요.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거래는 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분과 상업적인 거래(Deal)를 통해서 내 이익을 얻어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이 먼저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축복의 삶, 기적의 삶은 내가 먼저 주님께 믿음을 드리고, 자신을 드릴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first)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먼저의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손에 붙잡고 있는 1%의 마지막 양식 그것을 먼저 내게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바로 마지막 1%의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내려놓을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최후의 보루인 1%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것을 먼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순종의 믿음이 바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만 뜨겁지 교인들의 가슴은 여전히 냉냉합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감동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시장에서 광주리 장사를 하던 여인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목사님께 찾아왔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 전 재산을 다 바치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녀의 가정생활 형편을 잘 아시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도님! 예수를 믿어도 이렇게 믿으면 안됩니다. 전 재산을 다 바치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요. 안됩니다. 이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만류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 성도님은 목사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받아주세요.” 목사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 재산을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면서 그녀는 이상하게도 감격에 넘쳐 찬송과 감사가 쏟아져 나옴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길목에 어떤 아이가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면서 사람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가서 기도해 주어라. 가서 기도해 주어라.” 너무나 뚜렷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기도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 받은 아이가 즉시로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그 뒤로 그 성도님이 기도해 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났고습니다. 기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녀에게 기도를 받는 자마다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가 한국교회 치유은사의 어머니로 살다 하나님 앞에 간 고 현신애 권사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순종이 바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잉태하게 한 것입니다. ‘JOY’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기쁨’ 이란 선교단체인데 그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영어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단체입니다. J는 Jesus first! O는 Others second! Y는 You third!입니다. 예수님을 제일 먼저, 이웃을 두 번째로, 자신을 세 번째로 두고 헌신하자는 선교단체입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첫째는 무엇입니까? 내가 첫째고, 예수님이 가장 마지막은 아닌지요? 내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1%를 먼저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순종의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기적은 오늘도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바닥나지 않는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요구에는 놀라운 뜻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믿음을 한 번 테스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순종할 때 언제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 여호와 이레의 역사가 임합니다. 밤하늘의 별과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창대케 하시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복덩이가 되게 하십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관을 벗어버리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손에 지팡이를 들려주십니다. 그것은 막대기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 홍해를 갈랐습니다. 반석을 치면 물이 솟는 기적이 임합니다. 출애굽을 이끄는 지도자가 됩니다. 기도의 여인 한나는 눈물로 얻은 사무엘을 나실인의 서원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 결과 가장 영적으로 어둔 밤과 같았던 사사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오늘 사렙다 과부의 생명을 건 순종의 신앙은 바닥이 나지 않는 놀라운 기적이 임합니다. 불란서에 레오날드 우드경(Sir. Leonard Wood)이 어느 날 왕의 초대를 받아 왕궁에 들어갔더니 반가워하며 내일 식사나 같이 하자고 초대를 했습니다. 레오날드 경은 다음날 왕궁에 들어갔더니 왜 왔느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저를 식사에 초대해서 왔습니다.”고 했더니 왕이 말하기를 “어제 식사에 초대할 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서 안 오는 줄 알았소.” 이 때 이런 명언을 말합니다. “폐하! 왕의 초대에는 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A King's invitation is never to be answered, but to be obeyed.) 왕의 명령 앞에 충성된 신하는 Yes, No가 필요 없습니다. 왕이 말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태도가 바로 레오날드 우드경의 대답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대답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대에 응답하는 자는 왕의 잔치 자리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이나 판단 때문에 1%를 내려놓지 못하면 그 삶은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 속에서 고생하게 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 빛납니다. 험난한 항구일수록 등대는 더 빛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사렙다 과부의 현실처럼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나의 소중한 것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붙잡고 있는 줄은 썩은 줄입니다. 고무줄일 수 있습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언젠가는 끊어집니다. 그러나 내 줄을 먼저 내려놓고 주님이 주신 줄을 붙잡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만사가 형통한 길로 인도받습니다.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축복이 임합니다. 오늘 1%의 마지막 남은 양식을 먼저 드리는 순종으로 여러분의 지혜가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재물이 바닥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지금 약하다고, 어렵다고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내게 남겨주신 1%의 희망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1%를 먼저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바로 그 곳에 99%의 바닥이 나지 않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 1%의 순종이 하늘의 보고를 여는 축복의 열쇠가 되어 차고 넘치는 풍성한 기적으로 나타날 줄 믿습니다. 다시 한번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며 나갑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후렴)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 예수 자유 주셨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시23:1-6 2009-05-28 12:51:11 read : 33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스라엘의 왕(王)이며 시인(詩人)이며 가수(歌手)이며 목동(牧童)인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노래를 부른 지도 어언 3천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사용하고 남았던 물맷돌 4개나 양들을 치던 지팡이, 수금, 의복, 장신구 등은 오랜 세월 속에서 흙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을 향
1-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시23:1-6 2009-05-28 12:51:11 read : 33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스라엘의 왕(王)이며 시인(詩人)이며 가수(歌手)이며 목동(牧童)인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노래를 부른 지도 어언 3천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사용하고 남았던 물맷돌 4개나 양들을 치던 지팡이, 수금, 의복, 장신구 등은 오랜 세월 속에서 흙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읊었던 시(詩)만은 가고 오는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영감과 끊임없는 감동과 풍요로움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양치는 일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 만만했었지 않습니까? 어느 지형이, 또 어느 골짜기가 양들에게 더 유익한가를 잘 알아서 양들이 필요로 하는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로 적절하게 인도하였던 신실한 목동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양치는 목동으로서 많은 경험을 쌓은 후에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인생의 말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나온 자기의 일생을 회상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고백 중의 하나가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목동 시절 돌보든 양떼들에게 무조건으로 베풀었던 그 은혜와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목양 관계로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애독을 해 온 시로서 읽으면 읽을수록 신앙생활에 새로운 의욕을 주고 영감을 받기도 합니다. 웬만한 사람은 다 암송을 하는 내용으로서 전부는 암송을 못한다 할지라도 그 중의 한 부분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정도는 암송하고 있고 특별 예배 때 기원의 단골 메뉴로 등장(교독문 No. 09)합니다. 그러다 보니 시편 23편에 관한 본문과 설교 제목이 오늘 주보에 실려 있는 것을 보신 분은 아! 이 설교 잘 알고 있지, 이 본문 정도는 이라는 선입관을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잘 알고 계신다면 무척이나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그 선입관 때문에 어쩌면 내용의 깊이를 오히려 헤아리지 못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오늘부터 3주간에 걸쳐 본문의 내용에 들어있는 말씀의 깊은 뜻을 강론하려 합니다. 1. 시편 23편에 나타난 사상과 그 위치. ①신관(神觀). 하나님(여호와)은 나의 목자. ②인생관(人生觀). 양같이 유약한 존재와 연약한 인생, 그리고 어리석고 죄악에 물든 인생. ③세계관(世界觀). 결핍되어 있는 세계. 이러한 관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갈 때 인생관이 안전하고, 결핍되어 있는 세계관이 부족함이 없는 세계관으로 전환되어 진다는 뜻입니다. 시편은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의가 다윗이 읊어서 기록을 했기에 다윗의 시편이라고 부르며 그 중에 23편은 시편 전체의 본론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본론에 해당되는 시편 23편의 위치를 살펴보면 22편과 24편 즉 앞뒤를 연결시켜 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쓰인 위치에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22편은 01,15,16절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다윗이 성령님의 영감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에 대한 갈보리산의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0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24편은 03,07,08절에서 그 핵심을 찾아볼 수 있는데 역시 다윗이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통해서 영광의 왕으로서 시온산에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0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 고 0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 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0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그러니까 23편은 죽음과 재림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시로서 22편은 신약 시대에 응답되었고 24편은 장차 되어 질 일입니다. 즉 23편이야말로 양자의 사이 즉 십자가의 갈보리산과 재림의 시온산 사이에서 우리 성도들은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가의 생활을 즐기며 하나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아서 저 천국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 때를 노래한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현실에서 과연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또한 우리를 인도하실 그 분은 어떠한 분이신 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0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글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주권자 다윗 왕으로서 그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본 시 01절 즉 첫머리에 둠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신앙을 보여줍니다. 나의 목자시니. 이 비유는 당시 유목(遊牧) 사회였던 팔레스타인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으로 이를 다윗은 자신의 시에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또 목자라는 비유는 바위나 방패와 같은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고, 왕이나 구원자와 같이 권위적인 비유도 아니며, 상호간의 밀접한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내포하는 실제적 비유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은 어려서부터 목자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고 평원을 누비며 양들과 더불어 생활하던 시골의 노린내가 나는 사람 아닙니까? 그의 한 생애에 가장 큰 신앙의 영향을 끼친 중요한 시절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목자로 지내던 어린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양들에 대한 지식을 몸으로 터득하였기에 양들의 몸짓 하나, 소리 하나만 들어도 양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금방 알아차렸든 사람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여야 하는 것도 체험으로 알고 있었고, 이른 아침 그의 양떼를 우리에서 불러내어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여야 함도 알고 있었습니다. 약하고 병든 양이 있으면 가슴에 안고 치료도 해주며 무리를 떠난 길 잃은 양은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서 공동체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나, 사나운 짐승 곧 사자나 곰 늑대 등이 침입해 올 때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생명까지도 감수하여야 하는 목자의 임무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삼상 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다윗은 또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목양 관계를 자신에게 적용시켰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연약한 인생으로서 반드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그 분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윗이 말한 나의 목자가 오늘을 사는 현실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내가 어떻게 인정을 하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단어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할 때『나의』라는 소유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소유주가 되시고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로서 우리의 목자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밀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Sweeding(미국 시카고에 있는 Moody 신학교 총장 역임). 하나님은 손자가 없으시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가령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하고 부르면 인간의 경우로 말할 때 여러분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임에도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개인의 관계라는 말로서 즉 아버지의 목자도 어머니의 목자도 목사님의 목자도 말고 나의 목자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23편이 비록 여섯 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이지만 나와 관계된 말로서 나의, 나를, 내가, 나와, 내게라는 표현이 열 네 번이나 나오는데 이처럼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 대 일의 관계입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부모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을 승리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세요. 그렇게 하면 놀라운 은혜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행복의 조건은 목자가 함께하느냐? 성실히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러한 목자가 함께만 한다면 아무 염려가 없고 모든 것이 풍성해집니다. 옛날 히브리인의 가정에서는 종들의 이마에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인(印)을 쳤었는데 목자도 자기 양의 귀 끝에 소유 표시로서 화인의 표시를 해 둡니다. 그러한 원리를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할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면 내 심령 속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의 표시 십자가의 표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후 0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우리 가운데 지금 세상 생활이 너무 힘들어 시달림을 받는 분들이 계십니까? 다윗 왕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보십시오. 만일 목자장 되신 하나님이 안 계시고 양들만 있으면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겠지만 오직 목자장 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면 모든 염려를 그 분께 다 맡기고 나도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할 수가 있습니다. 목자의 역할은 인도와 자비로운 돌봄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적 속성을 광야 생활 40년 동안에 구체적으로 잘 보여 주신 것처럼 우리의 현실에서도 잘 보여주실 것입니다. 양들이 목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것처럼 나 자신의 생명과 재산과 미래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위탁된 삶을 살아보십시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의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한 연극배우가 어떤 연회석에서 명예 훈장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에 사회자가 그 배우에게 참석한 자들을 위해 어떤 대사를 암송해 줄 것을 부탁하자 쾌히 승낙하면서 무엇이든 신청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연로한 목사님께서 선생님 시편 23편을 한번 암송해 주시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친 후 목사님께서도 읊어 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그 배우는 감정을 잡으면서 너무나 인상적으로 암송했고 청중은 넋을 잃고 듣는데 암송이 끝났을 때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잠시 후 목사님도 암송을 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숙연해져 갔고 암송이 끝났을 때에는 그 방의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얼마간 침묵이 흐른 후 그 배우가 일어나서 말 하기를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귀를 울렸지만 여기 목사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저는 단지 이 시편을 알고 있었지만 목사님은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은 외형적인 시편 23편만 알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 나의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저 의미 없이 암송만 하는 그 자체로는 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가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나의 목자라는 그 고백은 바로 하나님의 양떼 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확실한 소속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누리게 합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는 다윗이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결과로서 그에게 부족함이 없는 까닭은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께서 충분한 것으로 공급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 대한 충분한 공급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중에서도 잘 나타난 바 있습니다. 신 02:0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공급을 다윗 왕은 알고 있었기에 환난 중에서도 요동치 않았고 결핍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2가지 형태의 모습을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습니다. ①욕구 불만의 인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은 언제나 모자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많은 것을 쥐어 주어도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 0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②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족하며 살아가는 인생. 다윗 왕에게는 생활환경의 변화가 무척이나 많았음에도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는 행복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한 때는 사울 왕의 사위임에도 핍박을 계속 당하여 피난처의 길을 다녔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심령 속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 0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01절에 이어 나의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현실에서 나와 여러분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다음주일에 이어집니다)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 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두 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 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두 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그리고 2/민13:26-14:10
10 그리고 2/민13:26-14:10 2003-07-02 20:02:53 read : 16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2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그리고 2/민13:26-14:10 2002-03-10 14:22:29 read : 9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
10 그리고 2/민13:26-14:10 2002-03-10 14:22:29 read : 9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2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대 2/민13:25-14:9 2004-04-28 12:38:36 read : 2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렴.” 아들은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앞 땅 바닥에 끝이 뾰족한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목욕탕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그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넘어지지는 않더라도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10 대 2/민13:25-14:9 2004-04-28 12:38:36 read : 2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렴.” 아들은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앞 땅 바닥에 끝이 뾰족한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목욕탕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그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넘어지지는 않더라도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치우는지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목욕탕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욕탕으로 들어갔지만, 한결같이 그 돌멩이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진 후, “에잇, 빌어먹을! 도대체 누가 여기에 돌멩이를 놔둔 거야?”라고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한참 동안 앉아서 이러한 광경을 보다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드디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돌멩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돌이 이런 곳에 박혀 있담!”라고 말하더니 단숨에 그 돌을 빼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목욕탕에 있는 사람의 수를 헤아리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지금 목욕탕엔 한 사람밖에 없던데요.” 아버지는 “잘 됐구나! 지금 목욕탕에 가자.”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던 목욕탕에 사람들로 북적대어 발 디딜 큼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이 녀석아, 이게 한 명이냐?”라고 말하자,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버지, 바로 전까지 목욕탕 앞에 뾰족한 돌멩이가 하나 있어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다치곤 했는데. 아무도 그 돌멩이를 치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돌멩이를 치우고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어요. 제 눈에는 오직 그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처럼 보여서 그렇게 말씀드린 거예요.” 저는 이 이야기가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많지만, 사람다운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아들의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라는 단어에 ’성도‘ 또는 ’크리스챤‘ 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도,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성도는 많지만 성도다운 성도는 별로 없다‘, ’크리스챤은 많지만 크리스챤다운 크리스챤은 별로 없다‘는 말로 바꾸어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다운 성도일까요? 우리는 과연 크리스챤다운 크리스챤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이 앞으로 정복해야 할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각 지파별로 12명을 선발하여 보내었습니다. 과연 그 땅이 어떠한 땅인가?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을 정탐하도록 스파이를 보내었습니다. 드디어 40일 동안 정탐한 스파이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먼저 10명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이때 그들 10명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밥이라는 것입니다. 당장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자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열 사람과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시각차>라고 합니다. 제가 자주 소개한 구두 세일즈맨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어느 구두 세일즈맨이 구두 판매 시장을 조사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그 부족 사람들이 모두 맨발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국내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습니다. "구두 주문 취소. 이 마을에는 구두시장 가능성 전혀 없음." 후에 다른 판매원이 동일한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가자마자 그는 즉시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습니다. "구두 주문 곱절로. 이 마을에는 구두시장 가능성 무한함." 두 세일즈맨이 똑같은 곳을 다녀왔지만, 이처럼 상반된 보고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각차이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두 사람은 똑같은 땅을 보고 왔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왔습니다. 똑같은 기간 동안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10명의 다른 정탐꾼들은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는 시각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1) 10명의 정탐꾼 먼저 10명의 정탐꾼들은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불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열명의 정탐꾼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처음 난 장남들이 다 죽어가는 애굽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의 장남들은 죽지 않고 애굽에서 탈출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기적을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배고픔을 해결하고, 항상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14장 11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신앙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을 보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창문 너머의 진흙탕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하늘의 별과 달을 보았고, 해를 보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진흙탕을 보면서 원망을 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보느냐’ 보다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떠한 것이 앞에 놓여 있느냐’ 보다, ‘어떠한 시각으로 앞에 있는 것을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25절부터 28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여 할 접속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라는 말은 앞에 서술하고 있는 말을 돌이키며 상황을 전환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40일 동안 정탐하고 난 10명의 정탐꾼들은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가 막힌 땅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 곳에서 가져온 과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기름진 땅이기 때문에 농사짓기도 좋고 살기도 좋으나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을 이기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곳이지만,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그러나>를 들먹이며 스스로 <그러나>의 올가미에 묶여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10명의 정탐꾼들처럼 <그러나>라는 올가미에 묶여 있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말로 스스로 한계를 지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1807년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에 커다란 증기선 한 척이 떠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배가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그런데 웬걸 그 큰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그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 배를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전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하다는 눈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전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본문에 나오는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긍정적인 눈이 아닌 부정적인 눈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1) 악평을 함 첫 번째로 그들은 악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열을 내며 외치던 10명의 정탐꾼들을 향해 ‘정확하게 판단했다, 일리 있는 관찰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악평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 못되고, 오히려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원과 능력만을 가지고 계산을 했을 뿐,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악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악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비판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워도 “아니 뉴질랜드가 춥다고 하더니 왜 이렇게 더운 거야?”라고 악평을 하고, 조그만 추워도 “아니 뉴질랜드가 지상에서 마지막 남은 천국이라고 하더니 날씨가 왜 이래. 이러다가 얼어 죽겠네.” 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입만 열면 악평과 비판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의 특징은 입만 열면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하여 이곳에 계시지 않지만,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하고 나서 날마다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던 모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 말에 의하면 등 떼밀어 자녀를 위해 유학을 가라고 한 남편에게, 밤마다 전화해서 있는 욕, 없는 욕을 바가지로 해대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대인기피증이 생겨,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교회에 전도되어 와서 새가족 모임과 개인양육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감사할 것밖에 없어요. 남들은 뉴질랜드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데, 우리 남편이 유학 다녀오라고 보내주고,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그 자매님에게 환경과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전과 똑같습니다. 아니 한국을 떠나온 지 더 오래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에게 믿음이 생기자 입술의 고백의 바뀐 것입니다. 그 자매님에게 믿음의 눈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눈이 생기면 삶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0명의 정탐꾼들과 같은 불신앙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악평을 일삼지 말고 믿음의 시각으로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평과 비판만 일삼는 열 명의 정탐꾼들이 아닌,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학을 함 믿음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가나안을 땅을 보니까 둘째로 자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스스로 보기에 자신들은 들판에 있는 메뚜기 같이 초라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한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외모 때문에, 가정 형편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과거의 아픈 상처 때문에 스스로 올가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다고? 뭐 내 주제에 뭐한다고? 나는 해보나 마나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스스로 메뚜기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이 말대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입술에서 나온 말대로 우리의 삶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자학하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농담이라도 열등감에 관계되는 말을 꺼내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교수로서, 저명한 상담학자로서, 또한 저술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헨리 나우웬(Henri J. Nouwen)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책에서 세상이 우리를 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눈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걸작품으로 평가합니다만, 세상은 우리를 별 가치 없는 존재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하시지만, 세상은 우리가 도저히 가망 없는 존재라는 메뚜기 정신을 끊임없이 주고 있습니다. “너는 별 볼일 없는 존재야. 네 까짓 게 뭐한다고 그래. 너는 이 땅에 잘못 태어났어.”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들과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본 훼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렌즈를 가지고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여러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가치관으로 여러분들을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3) 전염이 됨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시각은 전염병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져갔습니다. 14장 1절부터 3절을 보겠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차라리 애굽 땅이나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나았을 텐데, 왜 이곳까지 데려와서 가나안 사람들의 칼에 망하게 하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것은 전염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염병이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처럼 부정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먼저 그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가 친구를 사귈 때, 부정적인 친구를 만나고 있는지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에브라함 링컨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가 어릴 때 그의 어머니가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그들은 병균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병균이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그 부정적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도 오염시키기 때문에 병균이라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10명의 부정적인 사람들로 인해, 부정적인 색깔로 염색되어 그들 역시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단 한명도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이들을 보시고, 하루를 1년으로 기준하여 40일 정탐을 40년으로 계산하여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11일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임에도 40년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입성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 채,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의 중요성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입술이 원망과 불평과 부정적인 입술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격려의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망하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 대신, 긍정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 입술에 열매가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2) 2명의 정탐꾼 둘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10명의 정탐꾼들과 다른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 두 사람도 사실은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똑같은 기간 동안 똑같은 상황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백은 10명의 정탐꾼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메뚜기 정신으로 무장한 후, “우리는 그들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과 싸워 보았자 질 것이 뻔합니다. 해보나마나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갑시다.”라고 말한데 반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14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황량한 사막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그 땅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자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거인과 같은 가나안 거민들만 보였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계산에서 제외시켰던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계산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무리 그들이 거인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할 때는 ’도저히 승산 없음‘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계산에 포함시키자 ’능히 이길 수 있음‘이라는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10명의 정탐꾼들처럼 하나님을 제외한 채 계산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더하기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더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미즈노 겐조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입과 눈알만 움직이고 온 몸을 조금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눈짓으로 혹은 입술로 아이우에오를 짚어가며 쓴 시집이 있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일본에서는 그가 지은 대부분의 시에 곡을 부쳐 복음성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무려 10판을 거듭 인쇄하여, 일본 사람이 쓴 시집으로 보기 드물게 24,000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가 최근에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에 더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줄로 믿습니다. 캐나다에 가면 세인트로렌스라는 강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겨울, 어떤 사람이 그 강을 건너기 위해 얼어붙은 강 앞에 서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강이 얼마나 단단하게 얼어붙었는지 확신이 없어, 무릎을 꿇고 기어가다시피 하며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두려워 벌벌 떨며 간신히 얼어붙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마차가 자기 곁을 휙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무릎으로 벌벌 떨면서 기어온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고 초조한 인생을 살겠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부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불신앙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불투명했던 미래가 바로 여러분들의 밥으로 보일 것입니다. 밥은 클수록 좋습니다. 밥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여러분! 밥이 크다고 밥그릇 끌어 앉고 징징 짜며 우는 사람 보았습니까? 밥이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굶고 있다가 밥을 주니까 너무 감격해서 우는 거지를 옛날 시골에서 본 적은 있어도, 이 날 이 때까지 저는 밥이 무서워 우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밥을 먹다가 도저히 못 먹겠으면 남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10명의 정탐꾼들은 먹어 치워야 할 밥을 보고 두려워 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만들었습니까? 안경 때문입니다. 열 사람은 불신앙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불신앙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가나안 사람들을 바라보니까 그들이 밥으로 보인 것입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다른 10명의 정탐꾼들과 달리, 온전히 하나님을 좋았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불신앙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10명의 정탐꾼과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두 명의 정탐꾼과 같은 사람입니까? 10명의 정탐꾼과 같이 하나님을 제외한 채 계산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가나안의 거민들만 보고 스스로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하시는,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올라가서 먹어버립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목수 일을 하는 한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에게 못질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얘야, 못질을 잘 하려면 못에 네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단다. 그러면 점차 못만 크게 부각되어 보일 거야. 그러나 만일, 못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해 손등이나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오게 되면 십중팔구 네 손에 든 망치가 네 손을 내려치게 될 거야.”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목표에 집중할 때, 비로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크고 작은 목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비본질적인 목표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인기나 명예 등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것들이 본질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목표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작음 신응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항상 주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살아가는 2004년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 이 90 보다 크다/출18:13-27
10 이 90 보다 크다/출18:13-27 2011-08-23 21:18:48 read : 1 10 이 90보다 큽니다. 파레이드가 만든 법칙이 있습니다. 파레이드가 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하던 중에 분명히 본 것이 있습니다. 10%의 개미가 90%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10%가 90%의 일을 한다는 법칙을 <파레이드 법칙>이라고 합니다. 10%의 개미가 나머지 90% 개미보다 귀하였습니다. 10이 90보다 컸습니다. 백화점도 그렇습니다. 10% 단골 고객이 90% 매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중에 10% 부자들이 한국 돈의 90%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화 요금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에게 90% 전화 요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9시 뉴스도 그렇습니다. 초기 10% 시간에 보도하는 뉴스를 90% 사람들이 화제로 삼게 됩니다. 신문도 10% 앞 면에 90% 중요한 뉴스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유를 짜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람 열매를 모아놓고 누르기 시작합니다. 10% 정도만 받아 성전에서 사용합니다. d; 10% 감람유가 끄림이 생기지 않는 최상의 감람유입니다. 가장 비싸고 좋은 감람유입니다. 10% 감람유가 나머지 90% 감람유보다 비쌉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막은 378평입니다. 그런데 지성소 6평, 성소 12평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덮개 약 40평에 금값 600억을 다 사용합니다. 10%에 투자하는 비용이 90%가 넘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이 90% 일을 합니다. 10% 사람이 90% 물질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수 백명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고 모세 혼자 밥도 못 먹고 상담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이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출18;17-23)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말을 듣고 조직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모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일이 능률적이 되었고 수월하였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1. 십부장 60,000명 2. 오십부장 12,000명 3. 백부장 6,000명 4. 천부장 600명 이는 모두 78,600명입니다. 인구조사를 하며 보니 603,550명이었습니다. 이는 약 10%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12.9%입니다. 이드로도 모세에게 10% 일군을 뽑아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0%가 90%의 일을 하며 광야 40년을 지냈습니다. 10애 90보다 큽니다. 1. 시간 하루 24시간이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새벽 시간 10%가 나머지 시간 90%보다 큰 시간입니다. 일찍 일어나 두 시간 가량을 영적인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정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습관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39-44) 예수님은 감람산에 나가셔서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붙어 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새벽 시간을 값지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큰 일을 하였습니다. 소위 새벽형 인간이 큰 사람이 됩니다. 나는 지난 주간 <백만불 짜리 습관>이라는 책을 대하였습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트레이시 인터내셔널>사 회장입니다. 세계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이자 전략 전문가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좋은 직장을 갖지 못 하고 오늘은 이 회사, 내일은 저 회사로 옮겨 다니며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참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졌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할까?> <왜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안 될가?> 어느 날 그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기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100만불짜리 습관이었습니다. 이 습관이 괴물이 되어 자기를 길러 주었습니다. 마침내 세계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벽 첫 시간은 하루 24시간중에 가장 귀중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새벽 두 시간은 나머지 22시간보다 큽니다. 2. 물질 10%의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 물질이 나머지 90% 물질보다 큽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0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나머지 90% 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3. 일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 때에 10%의 일군들은 나머지 90%의 사람들보다 중요하고 컸습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이 어느 곳에서 일하든지 10% 안에 드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개미가 떼를 이루어 살아도 10% 개미가 90%의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 문도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 명 제자들도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가룟유다를 뺀 12명입니다. 120명중에 12명 10%가 온 세계를 복음화시켰습니다. 나머지 108명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도 그리고 성경 밖에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모두 한 가지씩 일을 맡아 하는 중요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하면 10%안에 드는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다음과 같은 일군들이 교회에 있어야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됩니다. (1) 계시 일군 교회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되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민주화되면 안 되고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민주화의 특징은 다수결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독제주의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성막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99%의 사람들이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결단은 모세가 하여야 했습니다. 모세는 민주화 목회를 하지 않고 복음화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무엇을 원하는 지 하나님으로 받는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대개 목회자와 계시 일군은 일치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찬양대내에서 찬양대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갈 찬양의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 중에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계시받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 일군 한 명은 다른 90%보다 중요합니다. 200만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광야에 나왔습니다. 200만명중에 오직 한 명 모세에게만 계시를 주셨습니다. 기도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군은 큰 일군입니다. 교회가 잘못 하게 되면 잘 지적하여 교회가 잘 나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일군이 계시일군입니다. 중요한 일군입니다. 성경의 뒷 이야기를 보면 12지파 족장 일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와서 모세는 <그만 가지고 오라>라고 광고할 정도였습니다. 이 광고를 듣고 12 족장들은 모세에게 와서 거칠게 항의하였습니다. 자기들은 헌금을 독려하러 다니느라고 헌금을 드릴 시간이 없어서 드리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지 못 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미 물질이 너무 많아 그만 하면 된다고 헌금을 거절하였습니다. 12 족장들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계시를 주옵소서. 우리도 헌금할 수 있는 기회를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제사장복에 들어가는 12 보석이 아직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족장이 한 개씩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하여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가를 늘 기도하고 계시받는 일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개씩 드리고 나니 너무나 허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너무나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드릴 것이 없나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막을 나르려면 수레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수레와 그것을 끌 수 있는 소를 헌금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모세도 생각지 못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핫자손들에게는 분명히 어깨에 메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게르손과 므라리에게는 메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다 .혹시 저들이 바치겠다고 하는 것들이 게르손과 므라리에게 사용하라고 되어지는 헌금인가?>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12 족장들로부터 수레와 소를 받아라. 고핫자손들만 어깨에 메고 나르고 게르손과 므라리는 수레에 실어서 나르도록 하여라. 그리고 12 족장들이 생각하여 낸 아이디어를 칭찬하여라. 멋진 아이디어 헌금이라고 말해 주어라. 그들에게 수레를 헌금하여 성막을 나르는 것은 전 세계를 나르는 것이라고 칭찬하여라. 전 세계를 얹어서 나르는 것을 헌금하였으니 내가 기뻐하시고 있다고 말해 주어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이디어,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런 계시 일군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10% 일군들은 기도일군들이었습니다. (2) 물질 일군 교회에서 하나님을 직접할 수 없기에 직장생활하면서, 또 개인 사업을 잘 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잘 드리는 물질 일군도 중요한 일군입니다. 교회를 잘 운영되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돈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은 죄는 아니지만 명예도 아닙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선교사업에 헌금하는 물질 일군도 교회에서는 중요한 일군입니다. 나는 지난 주간 부산 감림산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신기한 분을 만났습니다. 노 교인 목사, 노 기현 집사 형제를 만났습니다. 형 노 교인 목사님이 온 세계를 복음화시키려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뉴질란드 왕가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형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형이 선교하다가 순교하는 장면을 환상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형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고 편하게 하여 주려고 최대한으로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행기도 일등표만 구하여 주었습니다. 호텔도 가장 좋은 호텔에 가장 좋은 방만을 예약하여 드렸습니다. 선교비도 풍족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였습니다. <내 신장을 팔아 선교비를 대리라. 그리고 그 다음은 간을 팔리라. 그 다음은 눈을 팔리라....팔 수 있는 장기를 다 팔리라. 그리고 나는 형님의 선교를 위하여 조용히 무덤으로 들어 가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전에 형님 얼굴을 마지막 한 번 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뉴질란드로 들어 갔습니다. 거기에서 인도네시아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유전을 가지고 있는 데 개발을 못 하고 있는 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만 소원을 주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3;13) 하나님은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그러라고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하였습니다.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돈 벌어 하나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개발을 하지 못 하고 있던 중에 자기가 20%를 갖기로 하고 유전을 주었습니다. 엄청난 일을 하고 있습니다. 63 빌딩 58층이 그의 것입니다. 여수 개발을 6조원 들여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노 기현집사님과 밤 4시까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양복을 보여 주는 데 3천만원짜리였습니다.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크리스챤 재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할려고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물질 일군도 일군입니다. 10%의 일군들은 물질 일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물질을 투자하는 이들이었습니다. (3) 몸 일군 기도로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 가게 하는 일군들은 몸으로로 일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어야 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장로, 속장, 선교회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이 몸 일군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몸 일군입니다. 안내, 주차 관리부에서 일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게 하려고 청소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10%의 일군들은 이같이 기도 일군, 물질 일군, 몸으로 봉사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 10%는 나머지 90%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10% 안에 들 수 있을 가요? 어떻게 10%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1. 일군의 눈에 띄이면 일군이 됩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할 만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12 명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가룟 유다만 빼놓고 모두 순교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알하는 사람은 일군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찾아냈습니다. 광야 최고의 일군 모세의 눈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유난히 눈에 띄였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비젼이 있는 일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일군이 되려면 일군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2. 일군이 되겠다고 결정하면 일군이 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마음은 행동의 키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2-23) 3. 일하면 일군이 됩니다. 말만 하십시오. 말꾼이 됩니다. 말썽을 부리십시오. 말썽꾼이 됩니다. 놀기만 하십시오. 놀이꾼이 됩니다. 기도만 하십시오. 기도꾼이 됩니다. 노래만 하십시오. 가수가 됩니다. 일하십시오. 일꾼이 됩니다. 일군이 되고 싶으면 간단합니다. 일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여야 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일군들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일군이 되어야 우리 교회가 민족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선 우리 교회가 실력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300석이 세 번 정도는 차야 합니다. 9월 셋째주 <한 사람이 한 사람> 모시고 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운동에 다 동참하셔서 우리 교회가 한 차원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10 안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손기정 마라톤 우승자 한 분을 이야기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815 광복절을 맞았습니다. 손기정 이야기가 주된 화제로 인터넷을 장식하였습니다. 1936년 당시는 사람은 2시간 30분 안에 마라톤 코스를 달릴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벽을 깬 사람이 손 기정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 벽을 깨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손 기정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일본 선수로 출전하였습니다. 두 달 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현지 적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일본 일장기가 달린 선수복을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회까지 유니폼을 더럽히기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일장기를 보이기 싫어서였습니다. 마라톤에 일등한 후 금메달리스트들이 모여 독일 국빈들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싸인 할 때에도 <손 기정 Korea>라고 썼습니다. 수많은 신문 기자들이 어떻게 훈련하여 일등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손기정이 대답하였습니다. <독립군들이 바지에 모래 주머니를 만들어 달고 훈련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달리는 연습을 하였지요.>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할려고 하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1946년 베를린 우승 10주년 기념식에서 백범 김 구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ㅈ니다. <나는 자네 때문에 세 번 울었네. 첫째 나라 없는 청년이 우승하였다는 서러움에 울었지. 둘째 일본 사람들이 자네가 필리핀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죽었다는 소문을 내서 울었지. 셋째 독립이 안 되었으면 자네 우승이 영원히 묻힐 뻔 하여 독립하며 감격하여 울었지.> 그렇습니다. 할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10 이 90 보다 크다/출18:13-27 2008-01-17 01:01:55 read : 2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0 이 90보다 큽니다. 파레이드가 만든 법칙이 있습니다. 파레이드가 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하던 중에 분명히 본 것이 있습니다. 10%의 개미가 90%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10%가 90%의 일을 한다는 법칙을 <파레이드 법칙>이라고 합니다. 10%의 개미가 나머지 90% 개미보다 귀하였습니다.
10 이 90 보다 크다/출18:13-27 2008-01-17 01:01:55 read : 26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0 이 90보다 큽니다. 파레이드가 만든 법칙이 있습니다. 파레이드가 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하던 중에 분명히 본 것이 있습니다. 10%의 개미가 90%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10%가 90%의 일을 한다는 법칙을 <파레이드 법칙>이라고 합니다. 10%의 개미가 나머지 90% 개미보다 귀하였습니다. 10이 90보다 컸습니다. 백화점도 그렇습니다. 10% 단골 고객이 90% 매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중에 10% 부자들이 한국 돈의 90%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화 요금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에게 90% 전화 요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9시 뉴스도 그렇습니다. 초기 10% 시간에 보도하는 뉴스를 90% 사람들이 화제로 삼게 됩니다. 신문도 10% 앞 면에 90% 중요한 뉴스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유를 짜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람 열매를 모아놓고 누르기 시작합니다. 10% 정도만 받아 성전에서 사용합니다. d; 10% 감람유가 끄림이 생기지 않는 최상의 감람유입니다. 가장 비싸고 좋은 감람유입니다. 10% 감람유가 나머지 90% 감람유보다 비쌉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막은 378평입니다. 그런데 지성소 6평, 성소 12평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덮개 약 40평에 금값 600억을 다 사용합니다. 10%에 투자하는 비용이 90%가 넘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이 90% 일을 합니다. 10% 사람이 90% 물질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수 백명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고 모세 혼자 밥도 못 먹고 상담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이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출18;17-23)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말을 듣고 조직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모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일이 능률적이 되었고 수월하였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1. 십부장 60,000명 2. 오십부장 12,000명 3. 백부장 6,000명 4. 천부장 600명 이는 모두 78,600명입니다. 인구조사를 하며 보니 603,550명이었습니다. 이는 약 10%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12.9%입니다. 이드로도 모세에게 10% 일군을 뽑아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0%가 90%의 일을 하며 광야 40년을 지냈습니다. 10애 90보다 큽니다. 1. 시간 하루 24시간이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새벽 시간 10%가 나머지 시간 90%보다 큰 시간입니다. 일찍 일어나 두 시간 가량을 영적인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정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습관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39-44) 예수님은 감람산에 나가셔서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붙어 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새벽 시간을 값지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큰 일을 하였습니다. 소위 새벽형 인간이 큰 사람이 됩니다. 나는 지난 주간 <백만불 짜리 습관>이라는 책을 대하였습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트레이시 인터내셔널>사 회장입니다. 세계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이자 전략 전문가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좋은 직장을 갖지 못 하고 오늘은 이 회사, 내일은 저 회사로 옮겨 다니며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참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졌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할까?> <왜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안 될가?> 어느 날 그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기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100만불짜리 습관이었습니다. 이 습관이 괴물이 되어 자기를 길러 주었습니다. 마침내 세계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벽 첫 시간은 하루 24시간중에 가장 귀중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새벽 두 시간은 나머지 22시간보다 큽니다. 2. 물질 10%의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 물질이 나머지 90% 물질보다 큽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0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나머지 90% 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3. 일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 때에 10%의 일군들은 나머지 90%의 사람들보다 중요하고 컸습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이 어느 곳에서 일하든지 10% 안에 드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개미가 떼를 이루어 살아도 10% 개미가 90%의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 문도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 명 제자들도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가룟유다를 뺀 12명입니다. 120명중에 12명 10%가 온 세계를 복음화시켰습니다. 나머지 108명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도 그리고 성경 밖에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모두 한 가지씩 일을 맡아 하는 중요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하면 10%안에 드는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다음과 같은 일군들이 교회에 있어야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됩니다. (1) 계시 일군 교회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되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민주화되면 안 되고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민주화의 특징은 다수결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독제주의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성막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99%의 사람들이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결단은 모세가 하여야 했습니다. 모세는 민주화 목회를 하지 않고 복음화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무엇을 원하는 지 하나님으로 받는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대개 목회자와 계시 일군은 일치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찬양대내에서 찬양대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갈 찬양의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 중에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계시받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 일군 한 명은 다른 90%보다 중요합니다. 200만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광야에 나왔습니다. 200만명중에 오직 한 명 모세에게만 계시를 주셨습니다. 기도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군은 큰 일군입니다. 교회가 잘못 하게 되면 잘 지적하여 교회가 잘 나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일군이 계시일군입니다. 중요한 일군입니다. 성경의 뒷 이야기를 보면 12지파 족장 일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와서 모세는 <그만 가지고 오라>라고 광고할 정도였습니다. 이 광고를 듣고 12 족장들은 모세에게 와서 거칠게 항의하였습니다. 자기들은 헌금을 독려하러 다니느라고 헌금을 드릴 시간이 없어서 드리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지 못 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미 물질이 너무 많아 그만 하면 된다고 헌금을 거절하였습니다. 12 족장들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계시를 주옵소서. 우리도 헌금할 수 있는 기회를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제사장복에 들어가는 12 보석이 아직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족장이 한 개씩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하여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가를 늘 기도하고 계시받는 일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개씩 드리고 나니 너무나 허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너무나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드릴 것이 없나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막을 나르려면 수레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수레와 그것을 끌 수 있는 소를 헌금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모세도 생각지 못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핫자손들에게는 분명히 어깨에 메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게르손과 므라리에게는 메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다 .혹시 저들이 바치겠다고 하는 것들이 게르손과 므라리에게 사용하라고 되어지는 헌금인가?>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12 족장들로부터 수레와 소를 받아라. 고핫자손들만 어깨에 메고 나르고 게르손과 므라리는 수레에 실어서 나르도록 하여라. 그리고 12 족장들이 생각하여 낸 아이디어를 칭찬하여라. 멋진 아이디어 헌금이라고 말해 주어라. 그들에게 수레를 헌금하여 성막을 나르는 것은 전 세계를 나르는 것이라고 칭찬하여라. 전 세계를 얹어서 나르는 것을 헌금하였으니 내가 기뻐하시고 있다고 말해 주어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이디어,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런 계시 일군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10% 일군들은 기도일군들이었습니다. (2) 물질 일군 교회에서 하나님을 직접할 수 없기에 직장생활하면서, 또 개인 사업을 잘 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잘 드리는 물질 일군도 중요한 일군입니다. 교회를 잘 운영되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돈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은 죄는 아니지만 명예도 아닙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선교사업에 헌금하는 물질 일군도 교회에서는 중요한 일군입니다. 나는 지난 주간 부산 감림산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신기한 분을 만났습니다. 노 교인 목사, 노 기현 집사 형제를 만났습니다. 형 노 교인 목사님이 온 세계를 복음화시키려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뉴질란드 왕가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형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형이 선교하다가 순교하는 장면을 환상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형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고 편하게 하여 주려고 최대한으로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행기도 일등표만 구하여 주었습니다. 호텔도 가장 좋은 호텔에 가장 좋은 방만을 예약하여 드렸습니다. 선교비도 풍족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였습니다. <내 신장을 팔아 선교비를 대리라. 그리고 그 다음은 간을 팔리라. 그 다음은 눈을 팔리라....팔 수 있는 장기를 다 팔리라. 그리고 나는 형님의 선교를 위하여 조용히 무덤으로 들어 가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전에 형님 얼굴을 마지막 한 번 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뉴질란드로 들어 갔습니다. 거기에서 인도네시아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유전을 가지고 있는 데 개발을 못 하고 있는 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만 소원을 주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3;13) 하나님은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그러라고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하였습니다.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돈 벌어 하나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개발을 하지 못 하고 있던 중에 자기가 20%를 갖기로 하고 유전을 주었습니다. 엄청난 일을 하고 있습니다. 63 빌딩 58층이 그의 것입니다. 여수 개발을 6조원 들여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노 기현집사님과 밤 4시까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양복을 보여 주는 데 3천만원짜리였습니다.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크리스챤 재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할려고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물질 일군도 일군입니다. 10%의 일군들은 물질 일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물질을 투자하는 이들이었습니다. (3) 몸 일군 기도로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 가게 하는 일군들은 몸으로로 일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어야 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장로, 속장, 선교회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이 몸 일군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몸 일군입니다. 안내, 주차 관리부에서 일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게 하려고 청소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10%의 일군들은 이같이 기도 일군, 물질 일군, 몸으로 봉사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 10%는 나머지 90%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10% 안에 들 수 있을 가요? 어떻게 10%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1. 일군의 눈에 띄이면 일군이 됩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할 만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12 명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가룟 유다만 빼놓고 모두 순교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알하는 사람은 일군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찾아냈습니다. 광야 최고의 일군 모세의 눈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유난히 눈에 띄였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비젼이 있는 일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일군이 되려면 일군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2. 일군이 되겠다고 결정하면 일군이 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마음은 행동의 키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2-23) 3. 일하면 일군이 됩니다. 말만 하십시오. 말꾼이 됩니다. 말썽을 부리십시오. 말썽꾼이 됩니다. 놀기만 하십시오. 놀이꾼이 됩니다. 기도만 하십시오. 기도꾼이 됩니다. 노래만 하십시오. 가수가 됩니다. 일하십시오. 일꾼이 됩니다. 일군이 되고 싶으면 간단합니다. 일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여야 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일군들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일군이 되어야 우리 교회가 민족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선 우리 교회가 실력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300석이 세 번 정도는 차야 합니다. 9월 셋째주 <한 사람이 한 사람> 모시고 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운동에 다 동참하셔서 우리 교회가 한 차원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10 안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손기정 마라톤 우승자 한 분을 이야기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815 광복절을 맞았습니다. 손기정 이야기가 주된 화제로 인터넷을 장식하였습니다. 1936년 당시는 사람은 2시간 30분 안에 마라톤 코스를 달릴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벽을 깬 사람이 손 기정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 벽을 깨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손 기정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일본 선수로 출전하였습니다. 두 달 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현지 적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일본 일장기가 달린 선수복을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회까지 유니폼을 더럽히기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일장기를 보이기 싫어서였습니다. 마라톤에 일등한 후 금메달리스트들이 모여 독일 국빈들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싸인 할 때에도 <손 기정 Korea>라고 썼습니다. 수많은 신문 기자들이 어떻게 훈련하여 일등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손기정이 대답하였습니다. <독립군들이 바지에 모래 주머니를 만들어 달고 훈련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달리는 연습을 하였지요.>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할려고 하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1946년 베를린 우승 10주년 기념식에서 백범 김 구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ㅈ니다. <나는 자네 때문에 세 번 울었네. 첫째 나라 없는 청년이 우승하였다는 서러움에 울었지. 둘째 일본 사람들이 자네가 필리핀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죽었다는 소문을 내서 울었지. 셋째 독립이 안 되었으면 자네 우승이 영원히 묻힐 뻔 하여 독립하며 감격하여 울었지.> 그렇습니다. 할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100만명에 한 명인 사람/민13:21-33 2004-03-18 23:03:25 read : 1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스승이 자기 제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자가 반가워서 뜯어 보았더니 "사람, 사람, 사람, 사람 그리고 사람"이라고 사람이라는 말만 5번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석하려고 하여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가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대답하기를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100만명에 한 명인 사람/민13:21-33 2004-03-18 23:03:25 read : 1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스승이 자기 제자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자가 반가워서 뜯어 보았더니 "사람, 사람, 사람, 사람 그리고 사람"이라고 사람이라는 말만 5번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해석하려고 하여도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가서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대답하기를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운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200만 명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할 때였습니다.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 정탐을 위하여 보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탐꾼을 파송할 때에 이런 뒷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정탐꾼을 보내어 모든 정보를 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이런 여론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팽배하였습니다. 이런 여론에 모세는 놀랐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말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려고 하느냐?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분명히 저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느냐."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무가내로 정탐꾼을 꼭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최종 결정은 하나님께 물어 보고하겠다고 성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모세야! 백성들이 정탐꾼을 보내자고 하는데 너도 동의하느냐" 모세가 "하나님! 나는 하나님께서 저 땅을 주신다고 하셨기에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탐꾼을 보내지 않아도 하나님은 주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런 모세의 대답을 하나님은 들으시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보내라." 그래서 12지파에서 한 명씩을 선택하였습니다. 레위 지파만은 정탐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 지파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40일간 정탐한 정탐꾼들은 BC 2449년 아브월 8일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12명이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명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이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 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왔는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명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100만 명에 한 명인 사람입니다. 특별한 사람입니다. 두 명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1. 꿈을 보았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같이 떠나 같이 다니며 같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같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10명은 가지 말자고 하였고, 2명은 가자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정반대의 말을 하게 하였을까요? 다름 아닌 꿈의 차이였습니다. 10명은 꿈이 없었습니다.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서 노예로 살던가, 광야에서 살던가였습니다. 노예가 무슨 꿈이 있습니까? 광야에서 무슨 꿈이 있습니까? 그러나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7 거민들은 강한 사람들입니다. 전쟁하면 질 것 같은 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가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명은 달랐습니다. 성이 견고하였습니다. 아낙 자손이었습니다. 그들에 비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10명과 다른 점은 꿈이 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새롭게 민족을 형성할 땅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실 땅이었습니다. 과거 430년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으나 이제 해방되어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꿈을 보았습니다. 더구나 분명한 꿈은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이었습니다(창15:12-16). 아브라함이 되기 전에 아브람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① 정말 이방의 객이 되었습니다. ② 400년만에 풀려 나왔습니다. ③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애굽을 징치하셨습니다. ④ 큰 재물을 이끌고 나왔습니다. ⑤ 아브람이 평안히 조상에게 돌아가 장사 지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예언 하나는 '이 땅으로 돌아 오리라'는 말씀 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5가지가 이루어졌고 한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한가지를 믿을 수 없겠습니까? 그래서 두명은 그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꿈을 향하여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중표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한국 신학대학을 졸업하면서 교문에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 교문을 나선 사람 중에 가장 큰 교회를 이루는 목회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한 지 35년만에 기장에서는 가장 큰 교회를 이루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한 꿈을 가진 사람은 특별한 일을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꿈 때문에 가자고 외쳤습니다. 200만명 중에 두 명이었습니다. 100만명 중 한 명이었습니다. 토마스 에드워드는 영국 청교도 혁명기 때에 성직자로서 큰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1627년 날카로운 비판으로 당국에 체포되어 투옥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하여 3일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꼬박 기도하였습니다. "제게 뉴잉글랜드를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강대상에 올라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들은 그가 말도 하기 전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의 꿈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큰 축복속에 살았습니다. 실로 남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의 동행을 보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10명의 보고를 듣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울며 통곡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냥 외친 것이 아니라 옷을 찢으며 말했습니다(민14:6-9). 두 명이 가자고 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못 할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계시는 데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100만 명의 한 사람이 된 비결이 있습니다.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리빙스턴이 선교사로 떠날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다른 한 선교사가 찾아와서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은 대답하였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도 좋다" 리빙스턴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100만명 중에 한 사람이 됩니다. 3. 미래를 보았습니다. 두 명의 정탐꾼은 어제를 본 것이 아니라 내일을 보았습니다. 애굽을 본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보았습니다. 땅을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보았습니다. 지금 200만 명이 다 광야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가나안을 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메시야를 보내 주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게 됩니다. 오늘은 고생스러워도 내일을 건설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자고 하였습니다. 10명 말을 들으면 지금은 편하고 후손은 애굽으로 돌아가면 다시 노예이고 광야에서 생활하면 유목민이 됩니다. 그러나 두 명의 말을 듣고 가나안으로 가면 1세들은 고통이지만 자손들이 축복 속에 살게 됩니다. 편안한 오늘보다 고생스러운 내일을 택하는 이가 미래지향적인 사람입니다. 100만 명에 한 명이 되려면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합니다.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자력에 이용하는 핵원료인 라듐의 모체가 되는 우라늄에 대하여 1945년에 쓴 영어 사전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희고 무거운 금속"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우라늄이야 말로 원자핵 분열을 일으키는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원료이며 이 우라늄의 발견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발견이라고 고쳐 쓰게 되었습니다. 미래는 바뀝니다. 달라집니다. 그 날 좋도록 오늘 고생스러워야 합니다. 그래야 100만 명 중에 한 명이 됩니다. 어미 원숭이가 두 마리의 새끼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편애하였습니다. 한 마리는 늘 품에 안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른 새끼는 제대로 돌보지 않고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원숭이는 혼자서 다니면서 먹이를 자급자족하였고,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새끼는 늘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에 겨워 어머니 품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느날 다른 지역의 원숭이들이 급습하였습니다. 어미 원숭이는 사랑하는 새끼 원숭이를 안고 이 나무 저 나무로 돌아 다녔습니다. 나중에 보니 새끼 원숭이는 숨막혀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혼자 살던 원숭이는 자기 할 일 자기가 알아서 하면서 숨어 있다가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과보호는 비극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 고생스럽게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100만 명 중에 하나가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200만 명 중에 두 명입니다. 100만 명 중에 한 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꿈이 달랐습니다.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2001-08-24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생산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생산적인 것 중에서 제일 왕성한 것이 땅입니다. 대지는 별의 별 신기한 것들을 계속하여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들, 즉 갖가지 곡식들을 매년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생산해 주기에 지구 위의 수십억의 인구들이 살고 있습니다. 4월말과 5월 초에 땅에 심은 벼가 두어 달 된 지금 많이 자랐습니다. 앞으로 두어 달만 있으면 빨리 되는 것들은 추석의 잔칫상에 흰 쌀밥을 올려 줄 것입니다. 실로 땅의 고마움을 지방에 가보면 실감합니다. 각종의 채소들을 먹으면서 땅의 생산성을 실감합니다. 김을 맨 분들의 말에 의하면 여름엔 너무 빨리 잡초들이 자란다고 합니다. 그 무성한 풀들이 아무도 씨를 심은 적이 없는 데도 매년 돋아나서 무성하게 자랍니다. 겨울에 앙상했던 정원들이 봄에 푸릇푸릇 하더니 여름이 되어 시퍼렇게 녹음방초가 되는 것을 매년 보면서 대지의 생산성에 놀라곤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도 들판에서 밭에 씨를 뿌리는 한 농부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것을 비유로 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한동안 회당에서 주로 가르치셨는데 오늘의 본문부터는 장소를 바닷가로 옮긴 것을 봅니다. 첫째는 회당에서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예수님이 방해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당은 좁아서 사람들이 많이 못 들어오니, 차라리 바닷가로 나온 것이 썩 잘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밭에서 지금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예수님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보시오! 저 농부가 씨를 지금 뿌리지 않느냐? 그 씨들이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질 것이고, 어떤 것은 밑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는 흙이 얕은 곳에 떨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나무속에 끼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씨는 좋은 옥토에 떨어지는 행운을 얻을 것이다.” 힘차게 비유설교를 하셨습니다. 팔레스틴의 농사법은 우리나라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갈아엎은 후에 땅을 잘 정리하고 그리고 씨를 조심조심 심습니다. 그래서 길가나 돌밭에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한데 유대 나라는 이와는 반대로 먼저 씨를 부리고 다음에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때는 아무 곳에라도 우선 뿌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새 등에다가 씨를 담은 자루를 실어 놓고 그 아래쪽에 구멍을 조금 뚫어서 노새가 다니면서 씨가 땅에 떨어지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 씨는 길가나 돌작밭에 마구 떨어지게 됩니다. 물론 옥토에도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제자들은 다시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18절-23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악한 자 즉 마귀가 그 마음에 뿌린 씨를 달랑 먹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돌밭에 뿌리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인데 이유는 말씀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세 번째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네 번째의 옥토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잘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 사람인데 잘하면 백배 좀 못하면 60배 아무리 못해도 30배의 열매는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시는 진짜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우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열심으로 씨를 뿌렸지만 결과는 모두 100배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와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지만 이상하게도 소수만이 듣고 다수는 거부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에 저항하고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받는 밭, 즉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등등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습니다. 실로 길가 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좋아서 그 말씀을 받았는데 얼마 아니 가서 다시 옛것으로 돌아갑니다. 옆에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핍박하고 협박하니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돌밭입니다. 흙이 얇게 덮이고 아래에는 반석이 깔려있는 돌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좋아서 받습니다. 어느 정도 그 말씀의 나무가 자랍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염려와 물질의 욕심에 끌리어 말씀대로 살지 못하다 보니 어느 사이인가 기운이 막혀 시들어 집니다.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힌 밭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악조건을 승리하고 견뎌서 자랄 때까지 다 자라 열매를 맺는 씨들이 많은데 이들이야 말로 옥토에 떨어진 씨입니다. 100배 아니면 60배 적어도 30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이 네 가지 밭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도 제자들도 열심히 천국의 씨를 뿌렸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때로는 거부하고 저항하여 씨 뿌리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용기를 잃을 수 있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전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전도를 해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먹혀들고 어떤 사람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밭이 똑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도 씨를 잘못 뿌리기 때문인가라고 회의하기도 합니다. 제발 그런 걱정일랑 말고 열심히 전도하라고 이 비유를 주십니다. 물론 전도학이 있어서 기술을 좀 더 배워서 효과적인 전도 방법은 계속적으로 개발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밭이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어째서 그런 밭은 만들어 놨는가 묻는다면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어째서 아니 바꾸셨는가?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원죄성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론과 비슷합니다. 인간이 책임질 것은 인간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여 불복종한 인간을 하나님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이사야 55:11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고로 상대가 어떤 밭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되돌아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면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가급적 많은 밭에 씨를 뿌리면서 일해야 합니다. 혹시 말씀이 되돌아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크게 둘째로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마음이 어떤 밭인가를 고찰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좋은 밭인가를 깊이 반성하여야 합니다. 각자의 믿음의 성장 내용을 검토하시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즉 우리 자신들 안에 뿌리어진 복음의 씨가 잘 자라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길가 밭은 아닙니다. 길가 밭은 말씀의 씨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 마음이니 그런 사람은 여기 이 자리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왕이 그런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벨릭스 총독이 그런 마음을 소유했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몇 차례 듣고도 결국 회개하지 아니 했습니다.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 하다가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의 밭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듣고, 전도를 받고 곧 반응하여 예배당에 옵니다. 그런데 몇 번 교회에 나오다가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에 좌우되는 성격의 사람들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학습이나 세례 같은 의무가 주어질 때 피해 갑니다. 그러다가 영원히 천국의 문에서 멀어집니다. 6절에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해는 은혜를 가르칩니다. 막상 은혜의 기회가 올 때 도망하여 오히려 조금 핀 싹마저도 타 버리고 맙니다. 의무의 짐은 은혜의 기회인데 그것이 주어질 때 오히려 타져 버리고 만다면 이 얼마나 처량한 일입니까?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봉사를 시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 짐이 무거울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피하면 작은 믿음의 작은 싹마저 타 버리고 맙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종종 논의되곤 하는 것인데 교회 개축이나 신축 시에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은 공개적이기에 개중에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있다고 하여 교회의 큰일을 광고하지 않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광고를 하면 목사님이 돈 이야기를 한다고 빈정대면서 교회를 떠나간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여린 싹이 있기에 교회는 조심스럽게 일들을 추진하지만 때론 오해를 사기도 하고 상처를 받는 경우도 생겨서 조금 올라오던 싹이 해가 뜨면 타져 버리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목회자는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때는 늦습니다. 저의 목회 생활 30여 년 동안에 이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세 번째의 가시덤불 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의 싹이 제법 자라다가 가시덤불의 기운, 즉 세상에 대한 걱정과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 입니다. 이 경우는 세상을 향한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세상의 재미에 빠지고 세상의 일락에 도취하여 말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지고 놀 것 다 놀면서 예수를 믿고 싶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한손에는 세상을 붙들고 다른 손에는 천국을 소유하고 살고 싶어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오늘 배워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할 것 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좋은 시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밖으로 나가라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님을 명심시켰습니다.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하여 최소한의 염려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한데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염려는 생존의 염려가 아니라 부하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 하는 관심과 염려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리는 목숨 부지를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돈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 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고 착취하면서 까지 돈에 애착을 가지고 이를 탐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아니 자라던 믿음도 기운이 막혀 죽습니다. 여러분들은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그 말씀 그대로를 달게 받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어 버리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서 꿀꺽 꿀꺽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외쳤는데 말씀이 이토록 달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깊이 빠질 리가 없겠지요. 육신이 세상에 거주하는 동안에 필요한 최소한의 세상사를 빼고는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의무를 열심히 감당할 때 옥토가 됩니다.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적어도 길가 밭은 면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돌밭도 되어서는 안 되고 가시떨기 밭도 돼서는 안 됩니다. 옥토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옥토라고 여기는 분들은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30배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60배 정도로 좋아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100배를 추수합시다. 결실은 겉으로 드러납니다. 생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기도생활이나 전도생활에서 나타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몸 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 오늘 예배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은 옥토가 되어 100배의 결실을 맺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0배의 결실을 바라십니까? /창26:1-25 2017-03-26 20:12:52 read : 1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다. 추석을 앞두고 있는 결실의 계절이다. 누구나 씨를 뿌리면서 많은 결실을 바란다. 그러나 씨를 뿌린다고 해서 누구나 많은 결실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농사를 했는데 100배의 결실을 맛보았다고 하였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100배의 결실을 바라십니까? /창26:1-25 2017-03-26 20:12:52 read : 1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다. 추석을 앞두고 있는 결실의 계절이다. 누구나 씨를 뿌리면서 많은 결실을 바란다. 그러나 씨를 뿌린다고 해서 누구나 많은 결실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농사를 했는데 100배의 결실을 맛보았다고 하였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기서 농사하여 100배의 결실을 맛보았다는 것은 숫자적으로 100배라는 뜻이 아니라 풍성한 결실을 의미한다. 최대의 결실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말씀하셨다. 그기서 100배의 결실이라는 것은 사람이 거둘수 있는 최대의 결실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삭이 그런 최고, 최대의 결실을 이루었다는 것은 엄청난 성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삭이 거둔 엄청난 성공, 100배의 결실은 좋은 환경에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가장 나쁘고 힘든 환경에서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고 성공이었기 때문에 놀라운 결과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삭이 100배의 놀라운 결실은 어떤 환경에서 이루어진 결실이었고, 성공이었나? 1) 흉년의 때에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었다. (1)“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얼마나 흉년이 심했으면 이삭도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피난가려고 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흉년의 때였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리지 않았다면 이삭은 흉년이 없는 땅 애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삭은 흉년이 만연한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농사하기 힘든 흉년의 때에 이룩한 100배의 결실이었기에 놀라운 것이다. 2) 실수 투성이의 이삭이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었다.(6-11) 본문에서 소개하는 이삭의 신앙은 특별히 깊은 신앙이라고 할수 없다. (6-11절)에서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애굽에서 한 것처럼 자기 아내를 아내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하였다가 이방인 아비멜렉 왕에게서 크게 창피를 당하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아직 이삭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강하고 깊은 신앙이 아니라 세상이 무서워 이런 저런 수단을 쓰는.... 소심하고 약한 모습을 보게된다. 즉 이삭이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란 이런 실수를 저지러는 이삭에게 일어난 놀라운 결실이었다. 즉 실수 투성이 이삭이다. 아직 허물 많은 이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 많은 이삭에게 일어난 놀라운 결실이다. 3) 많은 대적들, 방해꾼들 속에서 일어난 100배의 결실이었다.(12-25절) 본문12절-25절에 보면 이삭 주위에는 이삭이 잘 되는 꼴을 그냥 못보고 있는 못된 블레셋 사람들이 계속 이삭을 따라다니며 방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는 농사를 하거나 목축을 하려면 우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고, 우물이 없으면 농사도 할수 없는 그런 땅이었다. 그래서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는데 이삭이 우물을 파놓으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그 우물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우물을 흙으로 메우는 못된 짓을 하였다. 그렇게 이삭의 대적들과 방해꾼들이 계속해서 이삭을 노리고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100배의 결실을 거두었느니 대단한 성공인 것이다. 이렇게 이삭은 3가지 불리하고 어려운 조건들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100가지 결실이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그런 어려운 조건들을 극복하고 100배라는 놀라운 성공을 누렸을까? 1. 이삭은 아버지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2-5) 이삭이 어려운 환경을 다 이기고 100배의 결실을 누린 것은 한마디로 아버지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아들 이삭이 놀라운 결실을 누린 것이다. 흉년이 되어 이삭이 애굽으로 피난가려고 하자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나안 땅에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주는 이유를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삭이 불모지 땅에 살아도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잘 믿고 잘 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이 세상의 복, 이 세상의 성공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 즉 복의 근원이 어디 있나? 그것은 환경에 있지 않다. 하나님에게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이삭같이 흉년에 가나안 땅에 살아도 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환경에 상관없이 복을 받는다. 그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복된 환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오늘 사건은 복의 근원이 좋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믿음으로 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에게 복된 환경을 물려주려면? 복된 환경을 찾아 헤매지 말고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잘 믿으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여러분의 자손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받는 방법? 아버지가 하나님께 복 받을만한 사람이면 그 자녀는 저절로 복을 받는 사람이 된다. (예)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간증 (이찬수 목사는 한국 기독교 차세대 리더로서 주목받는 목사이다. 나는 이찬수 목사가 복받은 이유가 궁금했는데...그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고신 교단에서 목회하시던 목사님으로 정말 경건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셨다. 조그만 개척교회의 담임목사였는데, 교회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그만 17일째 되던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교회를 불같이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으시고 그 담임목사를 데려가시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당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분은 하나님도, 아버지도 아닌 바로 우리 어머니였다. 목사인 남편이 그토록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데, 보통 사람 같으면 ‘목사’라는 직분에 대해 회의감이 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자꾸 나에게 “네가 커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너희 아버지는 교회를 정말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금식기도 하시는 중에 돌아가셨단다. 하나님께서 너무 빨리 부르셔서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셨지. 그러니 자식인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중략) 끈질긴 어머니의 기도로 서른 살 때 내가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기도만 하고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도의 열매를, 교회를 향한 그 기도의 열매를 자식인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찬수 목사가 받는 복은 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뿌린 열매를 거두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가 복받는 방법? 100배의 결실의 방법? 내가 복 받는 아버지(어머니)가 되면 된다! 2. 이삭은 생산적인 일에 힘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우물을 파는 사람, 우물을 메꾸는 사람이다...우물을 계속해서 파는 이삭은 생산적인 사람이고, 이삭을 시기하여 우물을 계속해서 메꾸는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비생산적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물을 계속해서 파는 사람이 성공하고 복을 받을까? 아니면 우물을 계속해서 메꾸는 사람이 복을 받을까? 우물을 파는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은 너무나 뻔하다. 이렇게 이삭이 100배의 성공을 거둔 것은 이삭은 생산적인 일에 힘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복을 받는 사람들은 이런 생산적인 사람들이다. 왜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신20:19-20)“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 전쟁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일이다.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하면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 모든 것 파괴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여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전쟁 가운데서도 필요하면 수목은 찍어내어도 되는데 절대 과목은 찍어내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즉 맹목적인 파괴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생산적인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전쟁 중에도 명심하라는 것이다. (예)마트에 가면 우유제품에 ‘대니쉬 우유’가 있다. 대니쉬란 덴마크 우유를 말한다. 세계에서 최고 품질의 우유는 덴마크 유유이다. 덴마크 젓소는 세계 최고의 우유를 생산할뿐 아니라 생산량도 세계 최고이다. 이렇게 덴마크가 세계 제일의 낙동국가가 된 이유? 생산적인 일에 전 국민이 땀을 흘렸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구룬트비와 달가스 덴마크는 원래 바이킹의 종주국이었다. 그러나 줄곧 전쟁에 패하면서 국토도 잃고, 인구도 줄어들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랑스에 가담했다가 노르웨이를 잃었고, 프로이센과의 싸움에 패해 국토의 1/3과 40%의 인구를 잃었다. 거기다가 기름진 남부지방마저 독일에 빼앗겨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은 땅은 차고 습한 서북풍이 끊임없이 불어오는데다가 여름에도 가끔 서리가 내리는 악천후 때문에 폐병과 소아마비가 만연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전쟁으로 남은 것이라고는 황무지와 섬 밖에 없게 된 이때에 ‘그룬트비(1783-1872)’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주장했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하여 식목사업, 협동조합 운동, 국민체육 운동을 주장하였다. 그룬트비 이후는 ‘달가스(1826-1894)’라는 지도가가 계속하여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고 하며 덴마크의 남은 국토...모래땅에 나무심기를 계속 하였다. 그리하여 거친 국토를 녹색으로 바꾸어 나갔다. 그 결과 덴마크를 가장 좋은 땅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결코 처음부터 덴마크는 낙동하기 좋은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산적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예)중국의 한가족(이제팡이라는 여성)이 일본에서 사업으로 근무중 대학 다니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보상금을 타서 내몽고 사막에 나무심기 운동을 전개...10년 만에 1만 묘(약 6.667㎢...경상북도 1/3면적, 제주도 3.6배의 면적)의 숲을 조성하는데 성공하고 계속 식수운동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믿는 사람은 파괴적인 사람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머물기 때문이다. 3. 이삭은 끈질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 끈질긴 사람이다. 끈질긴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 이삭을 보라...블레셋 사람들이 계속 따라다니며 우물을 메우며 방해했지만 이삭은 끈질기게 우물 파는 작업을 계속하고 생산적인 일에 몰두한다. 결국 끈질긴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다. (예)일본에 ‘판매의 신’이라고 불리는 겐조 도루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기획해서 책을 내 놓으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성공을 하였는가? 그가 잘하는 비결은 ‘압도적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압도적 노력’이란?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남들은 ‘무리다’, ‘불가능하다’라며 남들이 포기하는 일을 선택해 정복해내는 것이다. 남들이 포기했다 해도 나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것...그것이 압도적 노력인데 이런 압도적인 노력은 당연한 말이지만 지극히 고통스럽다고....하지만 그는 압도적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끈질기게 노력하니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압도적 노력을 계속하는 사람과 내팽개치는 사람.... 끈질긴 사람이 결국 무언가 해내는 사람인데 이삭은 끈질긴 사람이었다. 이삭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끈질김이 결국 100배의 결실을 가져왔던 것이다. 믿음의 인물이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끈질긴 노력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적)년초에 결심한 헌신...계속 하라. 년초에 결심한 기도생활....계속 하라. 년초에 결심한 예배생활 계속하라...믿음도 끈질긴 믿음이 결국 하나님 축복을 받는다. 이찬수 목사 모친처럼 끈질긴 헌신이 결국 자녀를 복되게 만든다. 4.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온유한 사람이 땅에서도 성공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온유한 사람은 모든 일에 손해만 보다가 결국 망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온유한 사람이 반드시 땅을 차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렇다고 온유를 모든 것 양보만하다가 결국 포기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온유란 양보를 잘하는 사람이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온유를 악과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된다. 악과 타협은 온유가 아니라 비겁함이다. 온유란 진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은 통크게 양보할줄 아는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유란 결국 혀처럼 부들부들하지만 결코 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들부들하면서 강한 것 그것이 온유이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안에서 온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삭이 그렇다. 블레셋이 시비걸어 오면 맞서 싸우지 않고 양보하고 물러갔다. 우물 자체가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사나 목축을 포기하지는 아니했다. 끈질기게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파고 농사하고 목축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진리 안에서 온유한 이삭에게 100배의 결실이란 풍성한 복을 주신 것이다. (서영수 목사)
100배의 결실을 바라십니까? /창26:1-25 2017-03-26 20:12:52 read : 1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다. 추석을 앞두고 있는 결실의 계절이다. 누구나 씨를 뿌리면서 많은 결실을 바란다. 그러나 씨를 뿌린다고 해서 누구나 많은 결실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농사를 했는데 100배의 결실을 맛보았다고 하였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100배의 결실을 바라십니까? /창26:1-25 2017-03-26 20:12:52 read : 13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다. 추석을 앞두고 있는 결실의 계절이다. 누구나 씨를 뿌리면서 많은 결실을 바란다. 그러나 씨를 뿌린다고 해서 누구나 많은 결실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농사를 했는데 100배의 결실을 맛보았다고 하였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기서 농사하여 100배의 결실을 맛보았다는 것은 숫자적으로 100배라는 뜻이 아니라 풍성한 결실을 의미한다. 최대의 결실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말씀하셨다. 그기서 100배의 결실이라는 것은 사람이 거둘수 있는 최대의 결실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삭이 그런 최고, 최대의 결실을 이루었다는 것은 엄청난 성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삭이 거둔 엄청난 성공, 100배의 결실은 좋은 환경에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가장 나쁘고 힘든 환경에서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고 성공이었기 때문에 놀라운 결과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삭이 100배의 놀라운 결실은 어떤 환경에서 이루어진 결실이었고, 성공이었나? 1) 흉년의 때에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었다. (1)“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얼마나 흉년이 심했으면 이삭도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피난가려고 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흉년의 때였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리지 않았다면 이삭은 흉년이 없는 땅 애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삭은 흉년이 만연한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농사하기 힘든 흉년의 때에 이룩한 100배의 결실이었기에 놀라운 것이다. 2) 실수 투성이의 이삭이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었다.(6-11) 본문에서 소개하는 이삭의 신앙은 특별히 깊은 신앙이라고 할수 없다. (6-11절)에서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애굽에서 한 것처럼 자기 아내를 아내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하였다가 이방인 아비멜렉 왕에게서 크게 창피를 당하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아직 이삭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강하고 깊은 신앙이 아니라 세상이 무서워 이런 저런 수단을 쓰는.... 소심하고 약한 모습을 보게된다. 즉 이삭이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란 이런 실수를 저지러는 이삭에게 일어난 놀라운 결실이었다. 즉 실수 투성이 이삭이다. 아직 허물 많은 이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 많은 이삭에게 일어난 놀라운 결실이다. 3) 많은 대적들, 방해꾼들 속에서 일어난 100배의 결실이었다.(12-25절) 본문12절-25절에 보면 이삭 주위에는 이삭이 잘 되는 꼴을 그냥 못보고 있는 못된 블레셋 사람들이 계속 이삭을 따라다니며 방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는 농사를 하거나 목축을 하려면 우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고, 우물이 없으면 농사도 할수 없는 그런 땅이었다. 그래서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는데 이삭이 우물을 파놓으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그 우물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우물을 흙으로 메우는 못된 짓을 하였다. 그렇게 이삭의 대적들과 방해꾼들이 계속해서 이삭을 노리고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100배의 결실을 거두었느니 대단한 성공인 것이다. 이렇게 이삭은 3가지 불리하고 어려운 조건들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100가지 결실이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그런 어려운 조건들을 극복하고 100배라는 놀라운 성공을 누렸을까? 1. 이삭은 아버지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2-5) 이삭이 어려운 환경을 다 이기고 100배의 결실을 누린 것은 한마디로 아버지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아들 이삭이 놀라운 결실을 누린 것이다. 흉년이 되어 이삭이 애굽으로 피난가려고 하자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나안 땅에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주는 이유를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삭이 불모지 땅에 살아도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잘 믿고 잘 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이 세상의 복, 이 세상의 성공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 즉 복의 근원이 어디 있나? 그것은 환경에 있지 않다. 하나님에게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이삭같이 흉년에 가나안 땅에 살아도 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환경에 상관없이 복을 받는다. 그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복된 환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오늘 사건은 복의 근원이 좋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믿음으로 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에게 복된 환경을 물려주려면? 복된 환경을 찾아 헤매지 말고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잘 믿으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여러분의 자손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받는 방법? 아버지가 하나님께 복 받을만한 사람이면 그 자녀는 저절로 복을 받는 사람이 된다. (예)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간증 (이찬수 목사는 한국 기독교 차세대 리더로서 주목받는 목사이다. 나는 이찬수 목사가 복받은 이유가 궁금했는데...그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고신 교단에서 목회하시던 목사님으로 정말 경건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셨다. 조그만 개척교회의 담임목사였는데, 교회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그만 17일째 되던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교회를 불같이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으시고 그 담임목사를 데려가시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당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분은 하나님도, 아버지도 아닌 바로 우리 어머니였다. 목사인 남편이 그토록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데, 보통 사람 같으면 ‘목사’라는 직분에 대해 회의감이 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자꾸 나에게 “네가 커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너희 아버지는 교회를 정말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금식기도 하시는 중에 돌아가셨단다. 하나님께서 너무 빨리 부르셔서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셨지. 그러니 자식인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중략) 끈질긴 어머니의 기도로 서른 살 때 내가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기도만 하고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도의 열매를, 교회를 향한 그 기도의 열매를 자식인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찬수 목사가 받는 복은 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뿌린 열매를 거두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가 복받는 방법? 100배의 결실의 방법? 내가 복 받는 아버지(어머니)가 되면 된다! 2. 이삭은 생산적인 일에 힘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우물을 파는 사람, 우물을 메꾸는 사람이다...우물을 계속해서 파는 이삭은 생산적인 사람이고, 이삭을 시기하여 우물을 계속해서 메꾸는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비생산적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물을 계속해서 파는 사람이 성공하고 복을 받을까? 아니면 우물을 계속해서 메꾸는 사람이 복을 받을까? 우물을 파는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은 너무나 뻔하다. 이렇게 이삭이 100배의 성공을 거둔 것은 이삭은 생산적인 일에 힘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복을 받는 사람들은 이런 생산적인 사람들이다. 왜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신20:19-20)“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 전쟁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일이다.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하면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 모든 것 파괴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여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전쟁 가운데서도 필요하면 수목은 찍어내어도 되는데 절대 과목은 찍어내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즉 맹목적인 파괴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생산적인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전쟁 중에도 명심하라는 것이다. (예)마트에 가면 우유제품에 ‘대니쉬 우유’가 있다. 대니쉬란 덴마크 우유를 말한다. 세계에서 최고 품질의 우유는 덴마크 유유이다. 덴마크 젓소는 세계 최고의 우유를 생산할뿐 아니라 생산량도 세계 최고이다. 이렇게 덴마크가 세계 제일의 낙동국가가 된 이유? 생산적인 일에 전 국민이 땀을 흘렸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구룬트비와 달가스 덴마크는 원래 바이킹의 종주국이었다. 그러나 줄곧 전쟁에 패하면서 국토도 잃고, 인구도 줄어들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랑스에 가담했다가 노르웨이를 잃었고, 프로이센과의 싸움에 패해 국토의 1/3과 40%의 인구를 잃었다. 거기다가 기름진 남부지방마저 독일에 빼앗겨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은 땅은 차고 습한 서북풍이 끊임없이 불어오는데다가 여름에도 가끔 서리가 내리는 악천후 때문에 폐병과 소아마비가 만연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전쟁으로 남은 것이라고는 황무지와 섬 밖에 없게 된 이때에 ‘그룬트비(1783-1872)’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주장했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하여 식목사업, 협동조합 운동, 국민체육 운동을 주장하였다. 그룬트비 이후는 ‘달가스(1826-1894)’라는 지도가가 계속하여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고 하며 덴마크의 남은 국토...모래땅에 나무심기를 계속 하였다. 그리하여 거친 국토를 녹색으로 바꾸어 나갔다. 그 결과 덴마크를 가장 좋은 땅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결코 처음부터 덴마크는 낙동하기 좋은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산적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예)중국의 한가족(이제팡이라는 여성)이 일본에서 사업으로 근무중 대학 다니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보상금을 타서 내몽고 사막에 나무심기 운동을 전개...10년 만에 1만 묘(약 6.667㎢...경상북도 1/3면적, 제주도 3.6배의 면적)의 숲을 조성하는데 성공하고 계속 식수운동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믿는 사람은 파괴적인 사람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머물기 때문이다. 3. 이삭은 끈질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 끈질긴 사람이다. 끈질긴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 이삭을 보라...블레셋 사람들이 계속 따라다니며 우물을 메우며 방해했지만 이삭은 끈질기게 우물 파는 작업을 계속하고 생산적인 일에 몰두한다. 결국 끈질긴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다. (예)일본에 ‘판매의 신’이라고 불리는 겐조 도루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기획해서 책을 내 놓으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성공을 하였는가? 그가 잘하는 비결은 ‘압도적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압도적 노력’이란?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남들은 ‘무리다’, ‘불가능하다’라며 남들이 포기하는 일을 선택해 정복해내는 것이다. 남들이 포기했다 해도 나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것...그것이 압도적 노력인데 이런 압도적인 노력은 당연한 말이지만 지극히 고통스럽다고....하지만 그는 압도적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끈질기게 노력하니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압도적 노력을 계속하는 사람과 내팽개치는 사람.... 끈질긴 사람이 결국 무언가 해내는 사람인데 이삭은 끈질긴 사람이었다. 이삭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끈질김이 결국 100배의 결실을 가져왔던 것이다. 믿음의 인물이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끈질긴 노력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적)년초에 결심한 헌신...계속 하라. 년초에 결심한 기도생활....계속 하라. 년초에 결심한 예배생활 계속하라...믿음도 끈질긴 믿음이 결국 하나님 축복을 받는다. 이찬수 목사 모친처럼 끈질긴 헌신이 결국 자녀를 복되게 만든다. 4.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온유한 사람이 땅에서도 성공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온유한 사람은 모든 일에 손해만 보다가 결국 망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온유한 사람이 반드시 땅을 차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렇다고 온유를 모든 것 양보만하다가 결국 포기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온유란 양보를 잘하는 사람이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온유를 악과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된다. 악과 타협은 온유가 아니라 비겁함이다. 온유란 진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은 통크게 양보할줄 아는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유란 결국 혀처럼 부들부들하지만 결코 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들부들하면서 강한 것 그것이 온유이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안에서 온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삭이 그렇다. 블레셋이 시비걸어 오면 맞서 싸우지 않고 양보하고 물러갔다. 우물 자체가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사나 목축을 포기하지는 아니했다. 끈질기게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파고 농사하고 목축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진리 안에서 온유한 이삭에게 100배의 결실이란 풍성한 복을 주신 것이다. (서영수 목사)
100배의 복 /창26:12-13 2014-04-11 16:08:54 read : 2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믿음으로 살아도 시험이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복을 받은 사람도 흉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복덩어리인 아브라함도 흉년을 만났고, 이삭도 흉년을 만났고, 야곱도 흉년을 만났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흉년을 만나도 복이 됩니다. 저주를 받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을 알 수 있
100배의 복 /창26:12-13 2014-04-11 16:08:54 read : 2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믿음으로 살아도 시험이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복을 받은 사람도 흉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복덩어리인 아브라함도 흉년을 만났고, 이삭도 흉년을 만났고, 야곱도 흉년을 만났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흉년을 만나도 복이 됩니다. 저주를 받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창 12장에 보면 아브라함 때에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살길을 찾아서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창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졌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만났을 때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야곱 역시 흉년이 들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에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아들 요셉을 오래 전에 애굽에 내려가게 하셨고 그곳에서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야곱은 흉년 중에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애굽에서 가장 풍성한 땅인 고센에서 풍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창 26장은 이삭이 만난 흉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삭 시대에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이삭은 가족과 모든 가축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가나안에 머물면 죽을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랄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100배나 거두었습니다. 이삭이 너무나 잘 되니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합니다. 그래서 이삭에게 그랄에서 떠나달라고 하니 이삭이 그곳을 떠납니다. 그랄에서 나온 이삭이 우물을 파니 그랄 사람들이 빼앗아 버립니다. 이삭은 우물을 그랄 사람들에게 주고 다른 곳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우물을 팝니다. 역시 그랄 사람들이 와서 우물을 달라고 하니 이삭이 그들에게 우물을 주고 또 떠납니다. 그리고 이삭은 다른 곳에 가서 다시 우물을 파고 또 팝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흉년을 만났는데 농사를 지어 100배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 우물은 요즘으로 말하면 큰 기업체와 같은 재산 가치가 있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이삭이 어떤 복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될 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풍년 때에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흉년을 만나도 함께 하십니다. 내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있을 때에도 함께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밝은 낮에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캄캄한 밤에도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잘 될 때에도, 잘 안 될 때에도 언제나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넘어져도 금덩어리를 줍는데 나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니 하나님은 내게 불공평하게 역사를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을 때는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기차여행을 하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과 마주보는 앞 자석에 앉은 백인 아가씨가 목사님을 자꾸 쳐다보면서 웃더랍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별, 이상한 사람 다 있다’라고 생각하고는 눈을 감고 잠을 잤습니다. 목사님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앞좌석의 아가씨는 없어졌고 목사님의 무릎에 메모지가 한 장 있더랍니다. 메모지에는 ‘거울 좀 보세요’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거울을 보니 목사님의 얼굴에 밥풀 2개가 붙어 있더랍니다. 그 때 목사님이 깨달았답니다. ‘내가 문제이지 세상이 문제가 아니구나.’ 여러분! 이삭이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복이 가장 큰 복일까요? 부자가 되는 복일까요?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재물의 노예가 아니라 재물의 청지기로 살기를 바랍니다. 부자라고 다 복 받은 것은 아닙니다. 부자이지만 하나님께 교만하고 자기가 재물의 주인이 되어 산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권세가 가장 큰 복일까요? 저는 우리교인들 가운데서 올바른 권세자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도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권세가 좋은 것이지만 세상에는 권세를 잘못 사용하여 권세를 가지고 죄를 짓고 권세 때문에 망한 사람도 많습니다. 사울 왕은 권세가 없을 때는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된 후에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에게는 권세가 오히려 저주가 되었습니다. 암에 걸려서 치료를 받았다면 큰 은혜를 입은 것이지만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그것도 변두리 복입니다. 신앙생활을 해서 가문이 좋아졌다면 그것도 귀한 복이지만 역시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이 될 수 있고, 세계적인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지붕 위의 풀과 같습니다. 지붕 위의 풀은 금방 쑥쑥 자라는 것 같지만 곧 시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복을 받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복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복처럼 보이는 저주인 것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최고의 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그랄의 왕 아비멜렉의 고백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의 제목을 “100배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이 아니라 100배의 복입니다. 왜 이렇게 제목을 정했을까요? 그 이유는 세상이 하도 어렵다 어렵다 하니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세상에 속아서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할까봐 염려가 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공급자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40년 동안 했습니다.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합쳐서 최소 200만 명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먹이셨습니다. 그 숫자를 4일 먹이는 것도 기적인데 4개월이나 4년이 아니라 40년을 먹이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시냇가로 보내셔서 물을 공급하셨고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기근으로 시냇물이 마르니 샘이 깊은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보내셔서 살게 하셨고 그 집에 가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셨고 기름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 7:9입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는 굳게 서지 못합니다. 우리가 굳게 믿어야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을 받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서 100배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에게 이런 복이 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을 받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큰 복을 받은 사람은 큰 복을 받을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라고 말씀합니다. 29절에 보면 “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이 복을 받은 원인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이삭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생각하셔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나 조상의 믿음 때문이라는 것은 전제로 하고 이삭에게서 3가지 원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이삭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이삭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만날 때는 들판에서 기도하다가 만났습니다. 이삭이 결혼 후에 20년이 되어도 자식이 생기지 않으니 기도하여 자식을 갖게 됩니다. 아내 리브가가 임신을 하였는데 쌍둥이였습니다. 그런데 쌍둥이가 엄마 뱃속에서 하도 싸우니 이삭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기도는 하는 기도가 있고 듣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삭은 하는 기도도 잘 했고, 듣는 기도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2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시고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합니다. 이삭은 듣는 기도도 잘했던 사람입니다. 기도응답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겠다.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기도 응답은 즉시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대학원시험을 봐야 하는데 전공공부를 못해서 여관에서 잠을 자기 전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점으로 가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기도응답에 순종해서 서점으로 갔다가 목사님이 시험을 보려고 하는 대학원의 같은 학과를 졸업한 청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이 추천해준 책으로 그 청년이 밑줄을 쳐준 부분을 공부해서 대학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안 주신다면 안 주시는 것도 응답입니다. 왜 안 주실까요? 해로우니까 안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3살 짜리 딸이 청양고추를 먹고 싶다고 해서 장난으로 주었는데 아이가 먹고 기절해서 응급실로 실려 갔다고 합니다. 아이가 아무리 달라고 해도 청양 고추는 안주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잘못된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응답으로 응답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때가 되어야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싶어도 때가 아니기 때문에 기다리게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사모님과 사이가 너무 좋습니다. 하루는 10살 먹은 딸이 엄마 아빠가 사이가 너무 좋으니까 자기도 시집 보내달라고 울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10살에요? 아니요. 15년을 기다린 후에 시집을 보냈습니다. 작은 일도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뭐, 그런 하찮은 것을 구하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주 기뻐하십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 당당하게 구하십시오. 자식은 부모에게 무한대의 빚을 지고 있지만 언제나 당당합니다. 왜요?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종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의 장소에 가셨던 것처럼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참석한 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분들에게 말씀으로 인한 깨달음이 있었고, 감동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보다 더 중요한 은혜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좋은 습관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해서 흥분하는 것은 길어야 2주입니다. 그런데 습관을 바꾸는 것은 평생을 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습관을 가지면 평생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할 때 단순하고 직접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십시오. 지나치게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기도하는데 형용사가 많고 수식어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한이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은혜의 하나님...” 이런 식으로 말을 꾸미는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육군참모총장이라면 그 아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시어 일찍이 직업군인의 뜻을 정하시고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육군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시고 생도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시더니 육군 소위로 임관 하시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시며 승승장구하시더니 영광스러운 장군이 되시고 지금은 육군 참모총장이 되신 아버지”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뭐라 하겠습니까? “너, 지금 뭐하냐?” 그냥 아버지 하면 됩니다. 아들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표현은 지나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형식을 따라 하는 기도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요 16:24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삭은 기도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2. 이삭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복을 받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큰 복을 받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하나님의 복이 넘쳤던 것입니다. 창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번제는 제물의 머리를 자르고 각을 뜨고 내장을 발라내고 불살라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니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숫양을 준비하셔서 이삭 대신 드리게 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안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제물로 드리려는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고 자신을 내준 이삭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20세 가까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20세 가까운 혈기왕성한 나이였습니다. 만약 이삭이 아버지에게 반항했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이삭은 죽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한 것입니다. 기근이 들었습니다. 가나안에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물을 구하지 못하면 모든 가축이 풀을 먹지 못하고 물을 마시지 못해서 죽을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들과 자신의 생명도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이삭은 자기의 목숨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우리의 목숨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질을 요구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재산을 다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청지기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 내 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줄 알고 나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자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셔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잃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운 교인들 때문에 헌금 설교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 생각을 바꿔놓으신 응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로 감동을 주셨습니다.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던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한 움큼의 가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그 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아들에게 먹이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곳에 보내셔서 마지막 가루로 주의 종 엘리야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마지막 가루로 엘리야를 공궤했습니다. 그 결과 과부가 죽었습니까?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솟아나서 기근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드린 것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복이 되었습니다. 우리교인들이 어렵기는 하지만 사르밧 과부만큼 어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으시는 것이 아니라 심게 하셔서 열매를 주시는 것입니다. 갈 6:7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기독교인은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를 제외한 모든 돈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게 들어온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것이 있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실 때 심게 하셔서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후 9:10에 보면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은 심는 씨가 있고 먹을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먹을 양식은 우리가 먹게 하시는 것이고 심을 씨는 심게 하셔서 우리를 풍성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어느 모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유대인 자매 2명이 한국에 와 있는데 한 자매가 음식이 맞지 않아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에 한 끼의 식사 대접을 해주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제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서 잠시 갈등을 했지만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했더니 며칠 후에 120만원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심거거두는 것과 상관없이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돈을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5만원을 심으면서 그 열매를 주목해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열매를 주셔서 저를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고 그분의 음성에 철저하게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3.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그랄에서 나가게 하니 이삭은 두 말 없이 그랄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는데 그 때마다 그랄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아버립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물러섭니다. 인간적으로 바보 같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온유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그랄 사람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물러설 수 있었던 것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우리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강한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자가 차지합니다. 사람이 부드러우면 손해를 볼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부드러운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드러운 혀와 단단한 이의 싸움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평소에는 단단한 이가 부드러운 혀를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는 빠져도 혀는 남는 것입니다. 혀가 승리합니다. 온유함은 너그러움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너그러움을 훈련하시길 바랍니다. 동안교회를 섬기셨던 송치헌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송목사님이 지하철을 타고 회의를 하러 가는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한 여자 분이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급하게 들어오면서 그만 송목사님의 발등을 하이힐로 찍어버렸습니다. 송목사님은 발등이 얼마나 아프던지 그만 “쌍~”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0~” 소리를 겨우 절제하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발등을 찍은 분이 “동안교회 목사님 아니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분이 교회를 나오는 분은 아닌데 목사님이 이웃집에 심방 가셨을 때 보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님이 “0~”을 하셨으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이 부인이 발등을 찍히고도 감사하는 목사님의 인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안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후에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발등을 찍은 것이 미안해서 8년 동안 계절마다 송목사님과 부교역자들의 구두를 사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삭처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양보하며 온유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이 넘칠 것입니다. 사실 이삭의 모습은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늘 기도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도 기도하는 생활을 합시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렸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목숨도, 물질도 아까워말고 드립시다. 우리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도 온유한 성품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