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14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창24:50-60 2009-06-03 15:46:25 read : 1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혼시키기 위하여 신부감을 구하러 종 엘리에셀을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의 성으로 보내었습니다. 엘리에셀이 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물에서 처녀를 만나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여 그 처녀가 자신에게도 물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사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신붓감으로 알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창24:50-60 2009-06-03 15:46:25 read : 1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혼시키기 위하여 신부감을 구하러 종 엘리에셀을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의 성으로 보내었습니다. 엘리에셀이 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물에서 처녀를 만나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여 그 처녀가 자신에게도 물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사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신붓감으로 알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윽고 성 밖 우물곁에 낙타를 꿇리고 신붓감을 기다리는데 마침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옵니다. 그중에 아리따운 한 처녀에게 물을 달라고 했더니 자신에게도 물을 주고 낙타에게도 모두 물을 줍니다. 그래서 엘리에셀이 그에게 누구의 딸인가 물었더니 놀랍게도 아브라함의 조카 브두엘의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 찾아가 청혼을 하니 그들이 허락하여 신붓감을 데려와 이삭과 결혼하게 되었고 그녀가 바로 야곱의 어머니가 되는 리브가였습니다. 그 오라비가 그를 보내면서 내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하고 축복했는데 과연 그 축복대로 리브가는 천만인의 어미가 되는 복된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좋은 신붓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신붓감은 좋은 가정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좋은 신붓감을 배출하는 브두엘의 가정의 모습을 소개하며 우리 북실교회의 모든 가정이 이런 가정으로 축복받기를 소망하며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말씀을 들으시고 브두엘의 가정같이 사셔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천만인의 어미와 아비가 되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브두엘과 라반은 리브가의 뒤를 따라 들어온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을 통하여 청혼을 받습니다.엘리에셀은 먼저 아브라함의 가정의 소식과 형편을 전하고 이어서 자신이 왜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감으로 점찍었는지 설명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인의 명령을 받고 그 어려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이 우물에서 만난 신붓감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자신에게도 물을 주고 무릎 꿇린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사람으로 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하였는데 놀랍게도 리브가가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인줄로 믿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하였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주인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당부한 모든 일과 자신이 오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완벽한 하나님의 섭리이니 리브가를 아브라함 가정에 시집보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브두엘과 라반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그대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대로 그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창24:50-51)엘리에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 자신들이 가타부타할 수 없고 그 뜻을 무조건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브두엘과 라반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뜻을 따르겠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짱짱하게 보여집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가정의 신랑도, 신랑감의 아버지의 이야기도 아니고 낯모르는 그 집의 종의 이야기인데도 그들이 이렇게 결정한 것은 모든 일을 자신의 생각이나 뜻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중심의 가정에서 리브가 같은 좋은 인물이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이 브두엘의 가정같이 모든 일과 행동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목사님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조용히 아빠 옆에 와서 이야기 하더랍니다.“아빠! 정말 이상해” “왜 그러는데?” 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제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그 아이는 자신의 반에서 언제나 일등하는 친구랍니다, 집에 가보니 작은 부처를 모셔놓은 방이 있고 커다란 탱화도 방 한쪽에 걸려있고 어머니는 보살이라 불릴 정도여서 목사님 딸에게는 그것이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정말 복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어째 목사 딸이 1등해야지 부처 믿는 보살의 딸이 1등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 어린아이의 고민뿐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고민을 너무도 많이 하고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 더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되고 건강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볼 때에 착하고 하나님 잘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오고 시련과 역경이 얼마나 많으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가 닥칠 때에 왜 이런 일 들이 일어나는가 하고 그것을 규명하고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그런 어려운 일을 뛰어넘어 믿어지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행할 성도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행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 안 믿으면 아들 죽일 일도 없습니다. 고통 받을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어려움을 뛰어넘어 아들을 드리는 참 헌신을 행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고 아들을 드리지 않고도 아들을 드린 자의 복을 받아 여호와 이레를 이루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살았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체포하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벌벌 떨었습니다. 참 만사형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참된 만사형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에 비늘이 떨어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어 참 삶을 바라보게 되자 그 앞에는 환난이, 핍박이, 죽음이, 그를 힘들게 하였고 멸시와 천대와 옥에 갇힘의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다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고난주시고, 핍박주시고, 죽음의 위기와 옥에 갇힘의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더 힘차게 이루어가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아브라함같이 바울같이 그리고 본문의 브두엘 같이 언제나 하나님중심의 참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정하였다면, 하나님의 섭리라면 가타부타할 필요도 없다 라고 결정하고 그 하나님 중심의 복된 삶을 살아 여러분의 자녀들 중에서 리브가 같이 천만인의 어미가 되는 놀라운 자녀를 이루어내는 복된 가정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합리적인 가문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엘리에셀의 이야기를 듣고 그게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달은 브두엘과 라반은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집에 시집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에셀이 내일 신부감을 데리고 떠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열흘 정도 머무르며 신부 집의 형편을 맞추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에셀은 학수고대하며 기다릴 아브라함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브두엘이 얼마나 난감했겠습니까? 이제는 사랑하는 딸을 오늘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얼마나 섭섭하고 아쉽겠습니까? 며칠 동안 있으면서 맛있는 것도 해먹이고 예쁜 옷도 지어 입히고 보내고 나서 아쉽고 더 못해준 것이 안타깝지 않도록 하고 싶은데 내일 바로 딸을 데리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때 브두엘과 라반이 행한 행동이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과 깨달음을 줍니다. 그들은 당사자에게 물어보고 그가 허락하면 우리도 따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창24:57-58)리브가에게 지금 된 일들을 설명하고 물었더니 리브가가 엘리에셀을 따라가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꺾고 리브가와 종자들을 엘리에셀과 함께 떠나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 따라야 한다고 결정하였으면서도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 최종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옛날에는 결혼 당사자보다 부모의 의견이 훨씬 강했습니다. 그래서 결혼 날까지 신랑의 얼굴도 모르고 결혼한 사례도 옛날 어른들에게서 들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통 때문에 지금도 당사자와 부모의 의견이 틀려서 결혼을 앞두고 가정에 큰 분란이 있는 것을 연속극 같은데서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런데 브두엘과 라반은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인 그때에도 당사자 리브가의 의견을 물어보았고 그가 가겠다고 하자 자신들의 의견을 접고 딸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합리적인 가정의 모습이고 그런 가정에서 천만인의 어미가 되는 리브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기준을 정해놓고 우리 자녀들이나 가족들에게 그 정도 선까지 따라오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공부라든지 효도라든지 하는 부분에서 어떤 기준을 내가 정해놓고 자녀들이 그렇게 안 할 때 종종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이 정도 밖에는 안 되는가” 하면서 마음상해하고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또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기준을 정하고 그것에 맞추어주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기준을 정한 나 자신도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가정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멍청한 3형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한자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막내가 그것을 읽기를 ‘월 화 수 목 김 토 일’ 이라고 읽었습니다. 금자를 김자로 읽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둘째가 “너는 왜 그리 멍청하냐” 하면서 “이렇게 읽는 거야” 하고 읽었습니다. ‘월 화 수 목 금 사 일’ ‘토’ 자를 ‘사’ 자로 읽은 것입니다. 그러자 맏이가 둘째를 향하여 “너도 똑같이 멍청하구나” 하면서 ‘월 화 수 목 금 토 월’ 하고 읽었습니다. 클수록 점점 더 멍청해지는데 서로 멍청하다고 하며 자신은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가 “야 이놈들아 그렇게 한자를 모르냐 왕편 가지고 와 봐” 했답니다. 한문사전을 옥편이라고 하는데 옥자는 왕자 안에 점이 있는데 옥자와 왕자를 몰라서 나온 말입니다. 아들들도 멍청하지만 아버지도 별로 똑똑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기준을 정한다면 그것이 옳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멍청이 시리즈 하나 더 할까요? 형제 둘이 별을 바라보면서 동생이 형에게 묻습니다. “형! 하늘의 별이 백개도 넘지?” 그랬더니 형이 “이 바보야! 이 백개도 넘어”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버지가 “에이! 바보 같은 녀석들 오백개도 넘는다” 했답니다. 전에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중고청 수련회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학생들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한 학생이 하는 말이 “그거 목사님하고 예찬이 예성이가 이야기한 것 아닙니까?” 해서 폭소가 터졌습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브두엘의 가정의 하나님 중심의 기준을 정하고 순종하는 모습과 결혼 당사자인 리브가에게 물어보고 모든 일을 정하는 지혜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도 하나님 중심이라는 영적 기준은 분명히 세우고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지만 그 밖의 것들은 내가 세우고 내가 정하지 말고 온 가족들에게 물어보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해해서 함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는 복된 가문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축복하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먼 길을 떠나는 리브가를 바라보며 오라비 라반이 큰소리로 축복합니다.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24:59-60)천만인의 어미가 되기를 네 자녀가 원수의 성문을 얻는 승리의 축복이 있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3천년도 더 된 옛날이었으니 그 당시 중동 전 지역을 합쳐도 천만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가문을 다 합쳐도 400명이 안될 때인데 이런 축복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집가는 딸에게 “남편에게 잡혀 살지 말고 잡고 살고 기죽지 말고 살아라, 아들 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아라” 하고 세상적인 당부하지 않고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자녀가 승리하는 자녀의 복을 받아라“ 하고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브두엘의 가정에서 배울 세 번째 지혜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부모들이 축복권자였습니다 . 그래서 이삭이 야곱에게 별미를 먹고 축복하며 너는 하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의 복을 받고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며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라 하고 축복하였고 과연 그 축복대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누렸고 그 아들 요셉이 애굽과 전 열방을 다스리는 놀라운 축복이 실현되었습니다. 민수기 6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제사장들 즉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축복의 기도도 알려주십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며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6:24-26) 그리고 축복을 당부하신 후에는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7)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오늘의 제사장인 담임목사가 손을 들고 여러분을 축복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시대에 와서는 축복권자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범위를 넓혀서 누구나 축복하라고 하십니다.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우리의 가정에 이런 축복이 있어서 아내가 남편을 축복하고 남편이 아내를 축복하고 부모가 자녀를 축복하는 가정이 될 때 리브가 같은 천만인의 어미가 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들을 위해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질서를 깨고 아무나 안수해서 문제를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분들은 반드시 담임목사의 지도아래 행해야 교회가 평화롭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분량이 어떠하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안수하고 기도해도 괜찮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가 자기 자식을 위하여 안수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건 목사님 허락 안 받아도 됩니다. 집사도 아니고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어도 괜찮습니다. 언제든지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기도대로 됩니다. 그 말대로 됩니다. 우리가 한 말은 반드시 그 결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밤낮 한 말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며 “우리를 이 모래사장에 장사지내려고 애굽에서 끌고 왔느냐” 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대로 모두 광야에 모래사장에 장사지내졌습니다. 는 충청도에와서 제일 많이 들은 욕이 “지랄하네 망할놈” 저는 그 소리를 너무도 많이 들어서 지금도 그게 욕같이 안 들리고 구수한 생각이 나게 합니다. 말대로 된다면 모든 자식들이 망할 사람이었는데 가끔 우리 할머니가 코를 흘리면 수건을 가지고와서 “흥해라 흥해라” 하고 코를 깨끗이 닥아 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지랄하고 망하지 않고 지금 흥하여 휼륭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북실교회 성도여러분! 서로 축복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향하여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내 자식들을 향하여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북실교회 자녀들 중에서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천만인의 아비가 되어 요셉처럼 애굽 사람도 구하고 중동 사람도 구하고 자신의 부모와 형제도 구하는 복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는 복된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를 이어 부흥하는 신앙가문 /창48:8-16 2011-04-21 15:40:15 read : 3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금으로부터 30여전에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교육학자였던 존 웨스트 호프3세(John H.Westerhoff III)가 이런 책을 썼습니다.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이 가능한가?”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 이름은 “교회의 신앙교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국교회가 30년 전에 자신들의 상황을 향하여 심각하게 던졌던 이 질문
대를 이어 부흥하는 신앙가문 /창48:8-16 2011-04-21 15:40:15 read : 3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금으로부터 30여전에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교육학자였던 존 웨스트 호프3세(John H.Westerhoff III)가 이런 책을 썼습니다.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이 가능한가?”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 이름은 “교회의 신앙교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국교회가 30년 전에 자신들의 상황을 향하여 심각하게 던졌던 이 질문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를 향하여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이 가능한가?” 웨스트 호프 3세가 당시 미국교회들의 교회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 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교육이 지나치게 학교-교수형의 교육 이해에 의해 희생되고 있으며, 그 적용범위 안에 잡혀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교육의 장을 학교조직에 한정하고 그 방법과 수단을 오직 지식교수와 동일시하고 있음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교회학교의 문제가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학교도 지나치게 연령별로 구분하여 부서를 나누고 교과학습을 지식위주가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는 심리학이 한 몫을 했습니다. 발달심리학적 측면에서 그렇게 연령별로 나눔이 필요하지만 교회교육은 신앙교육입니다. 즉 지식교육이 아닌 영적 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성령을 받으면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를 하고 은사를 받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첫째주일에 말씀을 전할 때 우리교회교육에 대한 컨설팅을 받은 자료를 언급을 했습니다만 지금 불신자 가정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학생들은 전체에서 20%내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가정의 자녀들은 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때 ‘아니요’라고 대답할 가정은 얼마가 되겠습니까?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우선 믿음의 가정에서 대를 잇는 신앙훈련이 필요합니다. 다음세대의 부흥을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교회학교 교육을 활성화 해서 불신가정의 자녀들이 많이 믿도록 하는 것과, 믿음의 가정들의 자녀들이 반드시 신앙의 대를 잇도록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믿음의 가정들에게는 자녀의 수를 불신의 가정보다도 한두 명 많아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세대의 부흥을 가져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때 미국 교회는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믿음을 계승하도록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미국교회는 이런 심각한 고민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미국교회는 고령화되어 가고 있고 교회가 텅 비어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민은 유독 미국교회나 유럽교회만의 고민이 아닌 바로 오늘 우리의 고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때 한국교회에는 어른들보다 어린이들이 더 많은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이 되어 어른들보다 어린이들이 더 많이 모이는 교회를 찾아보기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대를 이은 신앙계승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 세대의 신앙계승이 가능한가?”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아볼까요? 구역성경의 시작은 창조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이야기를 하면 족장 역사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족장 역사에서 가계도를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집니다. 야곱은 네 명의 아내로부터 12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로부터 얻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인데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속사를 계속 이어갑니다. 요셉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두 아들 중 장남이 므낫세이고 차남이 에브라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셉은 사람들로부터 아버지 야곱이 병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고서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병상을 찾았습니다. 야곱은 아들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 억지로 병상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하여 가문이 계속 번성할 것을 약속받은 이야기를 요셉에게 하면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를 이어가는 신앙의 가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교회는 어차피 역사가 오래된 유럽교회와 미국의 교회들의 뒤를 이어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구가 전체 인구중에서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아이들의 수가 청장년의 수보다 더 감소하고 어른대비 아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더욱 심각합니다. 물론 1985년부터 1995년 사이에 전체 기독교 교인들의 수는 빠른 속도로 증가했지만 아동들의 경우는 1985년 890,760명에서 1995년 936,614명으로 늘었지만 전체 교인수 대비 아동 수의 비율은 1985년 13.7%에서 1995년에는 10.7%로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 크게 우려할 문제입니다. 1995년부터 2005년 사이에는 전체 교인수도 줄어들고 아동수도 줄었습니다. 1995년 936,614명에서 2005년 887,360명으로 줄어들고, 전체교인 수 대비 아동 수의 비율도 10.7%에서 10.3%로 줄었습니다. 우리교단의 경우를 보면 1995년 302,179명의 아동이 2005년도에는 269,911명으로 약 3만여명이 줄었습니다. 1년 평균 3천명씩 줄어든 것입니다. 아동수가 전체 교인들에게 차지하는 비율이 1995년 약 14.4%, 2000년에는 12.2%, 2005년에는 10.6%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교인 연령별 분포도를 보면 완전히 역삼각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비전이 있으려면 삼각형 형태나 아니면 마름모꼴이어야 하는데 역삼각형이 되었다는 것은 다음세대 부흥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교회학교 교육에 있어서 신앙의 대를 잇는 이스라엘의 쉐마 교육이 필요합니다. 유대민족은 믿음의 대를 잇기에 성공한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종교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이들의 최우선 과제는 신앙계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것도 믿음의 힘이요, 오늘날 비록 작은 나라, 작은 민족이지만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민족이 된 것도 믿음의 힘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지배하는 것도 유대인들입니다. 세계의 경제와 과학분야를 지배하는 것도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영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쉐마교육입니다. 믿음의 대를 잇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율법을 가르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신앙의 상상력을 가르쳐 줍니다. 학교는 학교대로 말씀의 토대 위에 일반 학문이 세워지도록 합니다. 쌍둥이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하지만 유대인들의 가정에는 세대차가 없다고 합니다.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 온지가 120년이 지났습니다. 초대교회의 믿음의 가정에는 4대, 5대 믿음을 이어가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우리 대구칠곡교회가 세워진 1904년은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들어온지 20년만입니다. 그때 전도함을 받아 믿었던 조분이 성도의 후손이 이상철 장로님과 이상수 장로님, 이상영 장로님, 이상도 집사님입니다. 증조모니까 4대, 그리고 장로님 들의 아들 딸이 5대 손자 손녀들이 6대째입니다. 이런 믿음의 대가 이어져오다가 지금 신앙의 대잇기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사회가 급변하고 개인주의와 상대주의적인 사상이 범람하고, 세속적인 가치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믿음의 대잇기에 균열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지만 자녀들은 믿음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믿음의 대잇기에 대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은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이지 강조한다고 되나요?” “부모의 종교를 자녀에게 강요할 수 없잖아요?” 어떻게 보면 배운 사람답고, 세련되고, 문화적인 사람의 태도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으나 대단히 위험한 신앙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믿어도 되고 안믿어도 되는 선택사항입니까? 상대적인 것입니까? 절대적인 것입니다.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영생의 길입니다. 영생의 길 밖에는 영멸의 길이요, 영벌의 길입니다. 구원받느냐 못받느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만약 성도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위험천만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국관이 분명치 않는 신앙관이요, 현세구복적 신앙관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즉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은 모르겠고 그저 세상에 살면서 마음 편하게 살고, 하는 일 잘되길 바라며 복을 추구하는 정도의 믿음 말입니다. 저는 금년 여름 성경학교와 중고등부 수련회를 보면서 특히 고등부의 경우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매주일 고등부 출석이 90여명이 됩니다. 그런데 절반도 안되는 4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우리교회통계를 보면 약20%가 부모가 믿지 않는 가정일 때 그들은 참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30%-40%는 부모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듯이 사연이 있고 이유가 있겠지만 신앙의 대잇기를 게을리 하다가 피눈물 나는 일이 발생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녀의 믿음생활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점점 잊혀져가는 옛날이야기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대학 입시를 위해서는 밤을 새우고 끼니를 굶어가면서 기도하면서 믿음을 가진 자녀로, 그 믿음을 지키는 자녀로 만들기 위한 신앙적 노력은 점점 시들해져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어느 부모치고 자식들이 부모보다 더 잘되는 것을 시기하거나 싫어할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부모보다 더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신앙보다도 더 잘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보다 더 잘 믿고, 나보다 더 큰 복 받고, 나 보다 더 영광스럽게 쓰임받는 후대를 길러내어야 합니다. 믿음을 버린 자녀를 믿음을 회복하게 만들고, 교회를 떠났던 자녀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만들고, 믿음을 가지지 않고 있는 자녀가 있다면 믿음을 갖게 만드는 일을 위하여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가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기업이 기울어지고 기업이 망하는 길에 들어서 있는데 잠이 옵니까? 우리 가정을 믿음의 명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부모인 여러분들이 먼저 이름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 좋은 분으로 소문이 나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대를 이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우리 부모들의 꿈이 되고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달콤한 유혹 앞에서, 세상의 온갖 시련과 역경 앞에서 믿음을 지키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벌써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습니다만 1999년4월20일 미국과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던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으로 12명의 희생자를 내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당시에 유명한 이름으로 남아 있는 캐시 버널이라는 한 소녀의 이야기는 당시에 듣는 우리들에게, 특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감동과 함께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녀가 총격을 받기 전에 남학생이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yes"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짧은 대답 한마디로 인해 총격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이 총격을 받던 그 날 친구에게 건넨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어. 진심이야. 힘들고 두렵겠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또 다른 한 기록은 죽기 전해였던 1998년으로 표시된 한 노트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나는 내가 가야할 방향으로 떼밀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나를 실망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또한 보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위해 죽고 싶다. 나는 나의 믿음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다."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을 믿느냐고 했을 때 “yes"라고 답할 수 있었던 것이 평소에 늘 마음속으로 되새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대답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언제 묻든지 ‘하나님을 믿느냐?’고 했을 때, ”예, 믿습니다“라는 대답을 쉽게 할 수 있는 훌륭한 믿음의 자녀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아 12지파로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갔을 때 야곱은 두 손자에게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두 손자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드릴 때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고백이 있습니다. (15-16절). 1)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2)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3) 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대를 잇는 모습의 고백이 첫 번째 고백입니다. 조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곧 야곱 자신의 하나님이므로 출생부터 지금까지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지만 길러주신 하나님이 열두 아들을 주셨고 그 중에서도 라헬로부터 얻은 아들 요셉과 함께 하셔서 7년 흉년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던 그 하나님이 이제는 손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하나님이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고백을 보면 야곱 자신의 모른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은 기근 때에 70명의 식솔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와 현재까지 살게 된 것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가정임을 드러내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고백을 갖고서 두 손자에게 축복한 내용은 16절입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씀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구원의 언약을 맺으신 것처럼, 그리고 야곱 자신과도 구원의 언약을 맺은 것처럼 이 두 손자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도록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며”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축복을 빌은 것입니다. 믿음의 대를 잇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3: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했습니다. 29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9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빌은 복은 16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이 세상에서 살 때에 잘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복으로 영적으로 복을 받아 세상에서도 번성하고 번영하기를 축복했습니다. 물질적 축복을 하신 것입니다. 미국의 한 도시에 잇는 통나무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져 있습니다. “이 집은 작습니다. 하지만 이 집은 위대한 집입니다. 왜냐하면 이 집의 후손들에 의해 오늘의 미국이 빛을 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 주인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라입니다. 한 가문의 가계 흐름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청교도의 훌륭한 인물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후손을 추적하여 가계를 연구했습니다. 이 부부는 12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중의 한 명은 죽고 11자녀가 성장해서 계속 후손을 보았는데, 그 후손 전체가 조사 당시까지 873명으로서 조사되었습니다. 여러 대에 걸쳐 내려오는 가문에는 1명의 부통령과 대학 총장을 지낸 사람이 12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성직자 100명, 군인 75명, 저술가 85명, 변호사 100명, 판사 30명, 공무원 80명, 하원의원 3명 상원의 원2명 그리고 260명의 평범한 신앙인으로 지냈음이 조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어릴 때 친구 맥스 쥬크라는 친구의 가문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맥스 쥬크는 어느 날 부터 신앙생활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후손은 1,292명인데 유아사망 309명, 거지 310명, 불구자 440명, 매춘부 50명, 도둑60명, 살인자 70명, 별 볼일 없이 지낸 사람이 53명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신앙의 유전인자가 이처럼 놀라운 차이를 빚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거룩한 DNA를 만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종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품이 온화한 가문에서 온화한 사람이 태어나고 헌신하는 가문에서 헌신자가 태어납니다. 불효자가운에서는 불효자가 태어나고 믿음 좋은 가문에서 믿음 좋은 후손이 태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거룩한 유전인자가 축복받은 유럽을 만들었고 청교도들의 거룩한 유전인자가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습니다 . 서구사람들은 성공적인 가정의 비결로 이른바 3B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 Built on the word of God / 하나님 말씀위에 세워진 가정, 둘째, Brought up by the godly parent / 경건한 부모들에 의해 양육 받은 가정, 셋째, Bound with church / 교회생활에 익숙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잘살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멋있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은 어느 가정이든 영적으로 좋은 유전인자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인한 사랑의 유전인자, 능력의 유전인자, 기도와 헌신의 유전인자, 생명의 유전인자, 복의 유전인자, 믿음과 비전의 유전인자가 생성되어야 합니다. 항상 어른들은 야곱처럼 요셉처럼 조상이 믿었던 하나님을 전하고 그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가문은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살아야 합니다. 잘 살아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미국의 라이언 일가에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 세 명이 그만 전사하고 맙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의 아들마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나머지 한 아들만이라도 그의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자고 결론을 내렸고, 그 임무를 존 밀러 대위를 비롯한 여덟 명의 군인들에게 맡깁니다. 결국 밀러 대위는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적진 한 가운데서 제임스 라이언 일병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대위를 비롯한 여덟명의 군인들이 독일군의 총에 죽고 말았습니다. 밀러 대위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라이언, 꼭 살아서 돌아가. 그리고 잘 살아야 돼!" 어느덧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라이언씨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고, 부인을 비롯한 많은 자녀들과 자손들이 다복한 모습으로 자기를 살리기 위해 싸우다 죽은 밀러 대위의 묘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말합니다. "대위님! 다리에서 하신 말씀을 매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잘 살려고 노력했고,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대위님의 눈에, 대위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 보였기를 바랍니다." 이상은 '라이언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죄에서 살리시려고, 불의한 재판에 굴하시면서 까지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버리신 예수님 때문에 새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잘 살아야 해! 잘 살아야 해!" 이 다음에 천국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 당신의 죽으심의 희생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잘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어떠셨는지요?" 하고 라이언 일병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음세대의 부흥을 위해서라도 먼저 우리 믿음의 가정에 신앙의 대를 이어 부흥하는 가문이 되시기 바랍니다.
뒤집기 /창25:21-26 2012-09-25 16:16:03 read : 1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람들은 늘 1등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1등을 하면 누구나 다 신이 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1등은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1등만 당선되고, 2등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2등은 늘 서럽습니다. 때로는 패배감에 휩싸이고, ‘나는 중심이 아닌 주변에 있다’는 자조적인 생각을 할 때도
뒤집기 /창25:21-26 2012-09-25 16:16:03 read : 1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람들은 늘 1등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1등을 하면 누구나 다 신이 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1등은 많은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1등만 당선되고, 2등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2등은 늘 서럽습니다. 때로는 패배감에 휩싸이고, ‘나는 중심이 아닌 주변에 있다’는 자조적인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1등이 되려고 안간힘을 써봅니다. 하지만, 1등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둘째의 서러움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 자매 중에 둘째로 태어난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너무 화가 나서 부모님께 투정을 부렸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합니다. 언니랑 싸우면 “너는 조그마한 것이 왜 까불고 대드냐?”고 야단맞고, 동생과 싸우면 “아니, 넌 언니가 돼서 동생을 그렇게 함부로 야단치고 때리냐?”고 또 꾸중을 받는 것이 섭섭했다는 것입니다. 두 아이를 키운 어머니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녀는 첫째와 둘째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너무나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첫째아이 임신 중에는 카페인 음료를 결코 마시지 않았고, 클래식 음악을 애청했습니다. 그런데 둘째아이 임신 중에는 카페인 음료를 쉽게 마셨고 좋아하는 가요를 즐겨 들었습니다. 첫째아이 때는 매일 한 번 정성껏 목욕탕에 들어가서 체온에 맞게 물 온도를 재어가며 목욕을 시켰는데, 둘째아이 때는 3일에 한 번 목욕을 시켜도 괜찮았습니다. 첫째아이 옷을 살 때는 무조건 새것을 샀지만, 둘째아이 때는 중고를 입혀도 괜찮으려니 생각했습니다. 또 첫째아이 때는 낳자마자부터 10일, 50일, 100일, 200일, 300일, 첫 돌, 이렇게 수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둘째아이 때는 돌이 가까워서야 모처럼 사진을 찍었습니다. 첫째아이는 작은 기침만 해도 병원에 달려갔지만, 둘째아이는 고열이 날 때나 겨우 병원을 찾았습니다. 둘째로 태어난 자의 설움을 실감케 하는 이야기입니다. 형과 동생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합니다. 형과 동생은 친구이자 영원한 경쟁자입니다. 때로는 마치 원수와도 같은 대적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인생은 결국 투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러합니다. 부부도 1년, 2년이 지나면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고, 부모와 자녀도 힘겨루기를 합니다. 형제지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형과 동생과의 치열한 투쟁이야기를 곳곳에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재물이 받아드려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아무 죄 없는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이는 첫 번째 살인자가 됐습니다. 아브라함의 서자였던 이스마엘은 어느 날 동생 이삭을 조롱하다가 이삭의 어머니 사라의 꾸중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형제간의 다툼이 어떠한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형제는 태어나기도 전인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다투었습니다. 서로 치고 받고, 발길질을 했습니다. 한 배에서 쌍둥이 형제가 자꾸만 싸우는 것을 어머니 리브가는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투정하듯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창세기 25:22) 에서와 야곱의 숙명적인 투쟁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놀랍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세기 25:23) 하나님은 예정하신 야곱과 에서의 미래를 보여 주십니다.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두 형제의 삶을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우리를 당혹스럽게도 합니다. 이것을 듣고 있으면, ‘신앙이라는 것이 이미 예정된 것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숙명론과 운명론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기독교는 운명론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예정을 말하기에 운명론을 지지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운명론과 숙명론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숙명이라고 여기며 낙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것에 반기를 듭니다. 오히려 신앙은 역동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고정된 틀 속에 갇혀 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뛰어 넘기를 바라십니다. 참된 신앙이란, 그래서 늘 도전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고, 옛것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일상성을 뛰어넘고, 억압받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계급사회를 거절합니다. 성별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돈이나 지위가 없는 사람이 멸시당하는 사회를 거부하고 혐오합니다. 하나님은 변화 없는 고정된 사회를 싫어하십니다. 약한 자는 높아지게 하시고, 높은 자는 낮은 자를 감싸 앉고 보호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높은 산은 낮아지고, 깊은 골짜기는 돋우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23절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예정에 대한 교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지입니다. 운명론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불공평의 표지가 아니라 이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다시 묵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늘 말하는 예정이 도대체 뭘까? 하나님께서 왜 여기서 야곱을 이렇게 이야기하셨을까? 왜 에서를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만약 이 말씀이 거꾸로 되었다면 어떨까요? ‘작은 자는 큰 자를 섬길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자들은 가득히 가진 자들을 섬길 것이다. 작은 자는 결코 큰 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셨다면, 이것이야말로 불공평 중에 불공평인 것입니다. 이것은 약육강식하는 세상의 법칙과도 같은 것입니다. 있는 자들은 더 떵떵거리며 큰 소리를 치고, 없는 자는 머리 둘 곳이 없어서 도망을 치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법칙을 깨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의 논리를 뒤집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 하늘의 영광과 하늘의 존귀를 누리고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고 연약한 자리, 가장 비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우리같이 낮고 천한 사람들을 세워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읽어 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의 고정된 삶의 자리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틀들을 깨뜨려버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도이고,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예정은 세상을 역전시키기 위한 은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세상의 원리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역전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역전의 사건들을 신문이나 TV에서 크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서 인생역전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기득권자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貧益貧)입니다. 부자는 더 부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 지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입었습니까?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맺힘이 있었습니까?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왜 이런 분일까 질문해 보신 적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나의 생각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들이 있습니다. 선천적인 것들, 바로 삶의 환경과 조건이 그러합니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내가 택하려고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가 부자여서 나도 부자가 되고, 내 아버지가 가난해서 나도 가난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 삶에 이미 주어진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기생각과 상관없이 운명처럼 다가온 이러한 것들에 저항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바꿔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진 것에 그냥 만족하지 않고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나가서 투쟁도 해보지 않았습니까? 왜입니까? 바로 내 마음속에도 야곱과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방법은 세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남이 잘나가는 것, 남이 높아지는 것을 끌어내리는 방법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움켜잡으려고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움켜잡았던 야곱의 이름이 ‘움켜잡다’는 뜻인 것도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형이 배고파하는 것을 알고, 그 기회를 타서 팥죽을 만들어주고 대신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로 아버지와 형을 속이면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냥 꽝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첫째가 되기를 원해서 형의 발꿈치를 잡았지만, 그는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장자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 속 그는 계속 차자였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를 장자로 여기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신분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까지 받았지만, 오히려 그 순간부터 야곱의 인생에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한 형의 눈을 피해서 집에서 쫓겨나가게 됩니다. 장자권을 받았지만 그것은 그에게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의 연속이 된 것입니다.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고난의 역사를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내가 그토록 움켜잡으려고 했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을 다 차지하리라 생각했지만 인생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고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인생에 기회를 주십니다. 무너진 현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막막한 광야에서 외톨이가 된 그에게, ‘네 가정과 네 삶에 축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뒤집기를 열어놓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이고, 긍휼의 표지였습니다. 이런 각도에서 예정을 보게 되면, 그것은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고 긍휼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세 전부터 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예정 선택의 핵심가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다시 말해 인생에 역전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같습니까? 에서와 비슷합니까, 아니면 야곱과 비슷합니까? 만약 야곱처럼 별 볼일 없는 자라고 여겨진다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별 볼일 없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자라고 세워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이 믿음의 성도인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미련한 자를 택하셨다. 하나님이 비천한 자를 택하셨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자를 택하셨다. 그래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아무것도 없는 자를 택하심으로 은혜의 사건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택하셨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의 특권을 주셨기 때문에, 나 같이 못난 사람을 예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은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가지고 있는 감사고,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이 뒤집기를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야곱이 아니라 에서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가진 자와 누리는 자에게 이 예정은 하나님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고 감사함으로 누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시겠다는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가질수록 더 겸손한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없어도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 축복을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까 겸손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그 축복을 지속시키실 것입니다. 또한 야곱처럼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어질 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안달복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지금 하는 일을 즐거워하면 하나님의 뒤집기가 일어날 것입니다. 뒤집기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여러분, 이 땅에는 영원한 약자도 영원한 강자도 없습니다. 영원히 가난한 사람도, 영원히 부자인 사람도 없습니다. 영원히 비천한 자도, 영원히 고귀한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이고, 풍요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버려진 연약하고 소외됐던 사람들을 회복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도 그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태복음19:3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약자입니까? 잃어버린 자입니까? 늘 둘째라는 서러움 속에서 고통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삶을 빨리 포기하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우리 인생에 뒤집기의 은혜를 주시는 것을 기다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십시오. 그러다보면, 어느 날 내 속에 있었던 설움과 열등감이 사라질 것입니다. 족쇄처럼 메어 ‘너는 둘째다’라고 짓누르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딸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기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 세상에서 받은 모든 차별과 슬픔, 탄식을 뛰어넘는 기쁨과 감사의 노래가 우리의 영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화해와 용서 /창31:43-55 2012-03-21 14:47:47 read : 28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불편한 진실 한 부인이 수첩에 항상 남편의 사진을 넣고 다녔습니다. 친구들이 그 이유을 묻자 “골치 아픈 문제가 있을때마다 이 사진만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그토록 남편을 사랑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대답을 합니다. “그런게 아니라, 이 사진을 볼때마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세상에 또 있을까
화해와 용서 /창31:43-55 2012-03-21 14:47:47 read : 28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불편한 진실 한 부인이 수첩에 항상 남편의 사진을 넣고 다녔습니다. 친구들이 그 이유을 묻자 “골치 아픈 문제가 있을때마다 이 사진만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그토록 남편을 사랑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대답을 합니다. “그런게 아니라, 이 사진을 볼때마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어 금방 해결된다”고 했습니다. 한 집에서 한 솥밥 먹고 살면서도 원수처럼 남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그 프로그램 가운데 「불편한 진실」이란 코너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친한 척 대화를 하지만 속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는 가식적 대화와 관계를 말합니다. 라반과 야곱은 장인과 사위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 동안 서로 속고 속이는 불편한 진실관계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앞에서는 그리고 겉으로는 친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갈등하고 서로 미워합니다.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 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서로 비난할 말이 많습니다. 또 문제의 책임은 항상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이런 「불편한 진실」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라반 모르게 야반 도주합니다. 그러나 곧 라반에게 추적당해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라반은 야곱을 공격하려고 마음먹지만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선악간 말하지 말라” 즉, 서로 잘 잘못을 따지지 말고 용서하라고 명합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개입에 무릎을 꿇습니다. 야곱이 한없이 미웠으나 용서하고 화해하기로 결정합니다. 43절을 보십시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감정을 가라앉히고 나니 상황이 제대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주시니 야곱은 적대시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사위이며 가족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야곱이 자기 가족이요 사위라는 사실을 왜 20년 동안이나 잊고 있었을까요? 야곱에게 속한 것, 즉 야곱의 아내는 라반의 딸들이며 야곱의 자식들은 라반의 손자들이었고 야곱의 양 떼들도 모두 라반이 약속대로 품삯으로 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주시니 이 가족개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원수가 보입니까? 사탄이 내 눈에 있는 겁니까? 사랑이 보이고 친구가 보이고 가족이 보입니까? 성령님이 내 눈에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이 신령한 눈을 뜨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미워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있는 대상들은 다 우리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서로 싸우고 죽이는 관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원수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바로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가 한없이 사랑했던 사람들이며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라반이 말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라반은 화해의 몸짓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언약을 세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합니다. 야곱도 이 시점에서는 갈등을 멈추고 싶었는데 마침 라반이 그런 제안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화해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먼저 말하지 못해서 화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용덕 씨의 “내가 먼저”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가족처럼 지내던 친구와 사소한 의견차이로 서로 상처를 주고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어느날 밤 성령님이 이 사실을 아프게 하셨습니다. 그날밤 친구를 찾아가 화해하고 친구와 함께 만든 노래라고 합니다. 1.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고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채로 2.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나의 입술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고 서 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채로 II. 두 개의 돌기둥 45-46절을 보십시오.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야곱은 즉시로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고 해서 큰 돌무더기를 세웁니다. 그들이 돌무더기를 다 만들어 놓고 ‘먹었더라’는 이야기는 그들이 온전히 화해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가족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세운 이 돌기둥은 그의 생애에 있어 두 번째 세우는 돌기둥입니다. 그가 첫 번째로 세운 돌기둥은 창세기 28잘 18절에 나옵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도망하던 중 들녘에서 하룻밤을 지내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복을 받고는 잠에서 깨어나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기름을 붓고 예배를 드리며 서원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세운 첫 번째 돌기둥입니다. 첫 번째 돌기둥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라면 두 번째로 세운 돌기둥은 인간끼리의 화해의 언약으로 세워졌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는 두 개의 돌기둥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해의 돌기둥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세워지는 화해의 돌기둥입니다. 오래전 상영된 영화 「밀양」은 하나님과의 화해 돌기둥은 세웠는데 두 번째 돌기둥 즉 사람과의 화해와 용서라는 돌기둥을 세우지 못한 고뇌와 아픔을 그린 영화입니다. 세상에는 남을 용서하는 사람도 있고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나 동료, 가족과 다투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 용서를 하면 마음에 평강과 안정을 되찾게 되지만, 용서하지 못하면 분노로 괴로워하거나, 복수를 위해 고민하기도 하고, 한 평생 원수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사람들에게 늘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아파하고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쥐약은 자기가 먹고 상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요.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용서 프로젝트’의 설립자이자, ‘용서학’ 교수인 프레드러스킨(Pred Ruskin) 박사는 수년동안 심리학과 의학을 접목시킨 과학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용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용서할 때 스트레스와 분노가 감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여 건강하고 행복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당신이 남에게 복수하면 그 기쁨은 잠깐이지만 당신이 남을 용서하면 그 기쁨은 영원하다”라고 했습니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용서로 치유받는 최초의 그리고 많은 경우,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자이다... 진실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준다. 그러고 나면 자기가 풀어 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세상 살다보면 독한 화살에 맞을 때가 있지요. 친구에게 남편을 빼앗긴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돈을 사기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심한 모욕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집단 따돌림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 화살 맞은 사람입니다. 이때 화살을 빼고 상처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떤 놈이 화살을 쏘았어. 저 놈이 내게 활을 쏘아!” 그리고는 원수를 찾아 다닙니다. 원수를 독과 함께 품고 삽니다. 결국 자기가 죽습니다. 바보같은 사람들입니다. III. 용서 그러나 용서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병든 몸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고 흐트러졌던 인격을 가다듬어 주는 위대한 힘이 있으며 또한 우리의 영혼을 풍성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를 약탕에 넣어서 풀풀 끓여 봅니다. 그러면 마지막 엑기스 한 방울이 똑하고 떨어지면서 “용서”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용서”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용서요 복음의 내용이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용서요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을 표현해 본다면 용서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게 없습니다. 십자가로부터 용서를 제하고 나면 나무토막만 남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마쳐지는 종교입니다. 누구나 다 교회에 처음 찾아나오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땅에 생이 마감되고 천국문이 열려질 때에 용서의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용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문 앞에서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용서받았느냐? 그리고 모두를 용서하고 여기 왔느냐?” 이 강단은 하나님의 용서의 선포장이요 목사는 용서의 대언자요 교회는 용서를 파는 곳입니다. 용서의 능력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주님 전에 찾아나올 때마다 용서를 사 가지고 가셔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의 알림장이요, 십자가는 용서의 영수증이요, 성령은 용서의 전파자요, 선교는 용서의 전달식입니다. 1. 왜 그렇게 용서가 중요합니까? 역설적으로 말하면 용서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용서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용서를 체험했다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내 몸으로 기적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아가다가 이웃들에게 오해당하고 거절당하고 비판과 냉대를 받으며 고발당하고 억울함이 있을 때에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내게 결정적인 상처를 남기고 떠났던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 땅에 용서받지 못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으며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입니까? 용서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평안도 천국도 없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지금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의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분이 원하든 원지않든 이미 사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 그리고 사탄과 영혼이 묶여 살아가는 Soul-Tie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기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인 것입니다.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2. 어떻게 용서가 가능해 질까요?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 용서가 가능해 집니다. 나 혼자 상처를 받은 것 아닙니다. 나도 상처를 주었습니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가슴으로 보십시오.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고 얘기할 것입니다. 왜?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이해할 때에 용서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프듯이 그 사람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 용서는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용서는 권면이 아닙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나의 성품을 나누어 주었노라. 나는 너희에게 용서의 씨앗을, 용서의 권능을 너희에게 나누어 주었노라. 너희는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따라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마음이 있을 때만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기분과 느낌이 있을 때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 의지를 따라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 노력으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따라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 “하나님, 저 사람에게 진노를 내리시옵소서. 지금까지 모진 세월 살아오면서 내게 아픔을 남겼던 저사람에게 벼락을 내리시옵소서.”라고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못난 사람들이지요. 신약성경에서 “용서하다”란 동사를 현재진행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예. 순종하겠습니다.” 일뿐입니다. 순종은 의지적인 것입니다. 용서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 기분이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인 동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가장 먼저 용서하라고 사랑해라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게 됩니다. 4. 용서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이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깨끗하게 용서받고 누군가를 깨끗하게 용서하고 주님 앞에 서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 죽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USA투데이지에 “용서 잘하는 사람이 건강하다”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대게 잔병이 많은 사람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장수의 삶을 살게 됩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사 MGM(Metro Goldwin Mayer)의 설립자 메이어는 어렸을 적에 친구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그럴때마다 메이어는 집으로 돌아와서 화를 내며 그 친구를 욕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메이어를 산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친구 욕을 실컷 하라고 했습니다. 메이어는 산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야, 이 나쁜 놈아. 못된 놈아.” 그런데 이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자신에게 10배의 큰 소리로 되돌아왔습니다. 메이어는 겁이 났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제 친구를 축복하며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신다”고 외쳐보라고 했습니다. 메이어가 그렇게 말하자, 동일하게 메아리가 자신에게 10배의 큰 축복의 말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때 메이어는 ‘남을 향해 한번의 욕을 하면 그것이 10배로 돌아오고, 남을 한번 축복하면 10배로 축복이 되돌아 온다’는 것을 깨닫고 친구를 용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떤 사람이든지 비판하지 않고 칭찬하고 축복했습니다. 그 결과 매년 매출 12억 달러(1조2천억원)의 세계적인 MGM 영화사를 설립하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유없이 가끔 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대게 그 마음속에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답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손과 발이 마비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병이 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암세포가 꾸준히 생성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마음속에 분노의 문제, 갈등의 문제, 이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경통, 위궤양, 밥만 먹으면 이유없이 설사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대개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IV. 용서의 장애물 우리가 화해를 할때에 제일 큰 장애물은 자존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사과하면 나도 화해하겠다.” 자신은 절대로 먼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존심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조금 창피를 당해야 합니다. 명분이 상처를 받아야 합니다. 갈등과 미움을 버리고 화해하는데 있어서 두 번째 장애물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협상은 하겠다. 그러나 손해는 보지 않겠다”라고 다짐합니다.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화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다 죽는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보면 오히려 더 이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가 사실인 줄 알면서도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감정과 자존심에 손해를 보십시요. 화해를 하려면 두 가지를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자존심과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야곱과 라반이 화해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또 하나 발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를 하셔야 합니다.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는 화합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양쪽을 치유해 주시고 복을 주셔야 화해는 영원히 지속됩니다. 본문 54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함께 제사를 드리고 떡을 나누고 밤을 샜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55절을 보십시오.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 전날 밤에는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입니다. 라반은 밤새도록 야곱의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회포를 풀고 딸을 부탁하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헤어집니다. 라반의 눈에 눈물이 고였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의 가정에 있기를 원합니다. 부모, 부부, 또는 직장에서의 갈등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와 소공동체안에 이런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믿음의 선조였던 손양원목사님의 딸 손동희권사님(부산대연교회)은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학비가 없어서 낮에는 신문배달, 만두장사를 해서 야간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머니와 결혼 후에 1937년 7월14일에 나병환자 수용소인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 했는데, 그때 나병 환자 수는 1200명 이었습니다. 나환자를 너무 사랑한 아버지는 "오 주여! 이들을 사랑하되 내 처자식보다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버지와 나환자들은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이어져서 행복한 나날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40년 9월25일(수)) 일본 형사들 둘이 들이 닥쳐 아버지를 체포하여 갔습니다. 아버지의 죄목은 신사참배 거부였습니다. 아버지가 첫 감옥에 끌려 가셨을 때 나이는 39살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모진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감옥의 한 겨울은 너무나 추워서 발이 얼고 얼다가 또 얼고 이것이 반복 되다가 나중에 열 개 손톱과 발톱이 짓물러서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의 출소일이 되어서 어머니께서 형무소에 가셨습니다. 한 시간쯤 후에 돌아오시는 어머니는 이럴 수 없다며 통곡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형무소 소장과의 면담에서 소장이 "신사참배하면 될텐데 당신은 헛 수고 했소"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헛수고는 당신이 했소. 신사 참배 할 것 같으면 내가 왜 감옥 생활을 했겠소. 우상 숭배하는 나라는 망하오. 그래서 일본도 망할것이요"라고 답변하자, 다시 재판해서 종신형을 언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큰 오빠가 군대를 가야한다는 영장이 나왔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 가정에 가장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군대는 신사 참배가 의무화 되어 있었으며, 만약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총살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7식구는 흩어져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만주로, 어머니와 어린 동생은 남해 깊은 산골짜기로, 그리고 나와 또 어린 동생은 고아원으로, 오빠들은 나환자들이 사는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고생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한국에 복음을 전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했던 일본 정부는 전쟁패전의 원인을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과 목사 때문이라 하여,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을 전부 죽이기로 결정 했는데, 그 날짜가 바로 8월 17일 이었습니다. 이렇게 해방이 되어서 아버지는 감옥에서 출소하게 되었고, 그토록 그립던 우리 가족은 옛날에 살던 애양원 사택으로 돌아와서, 한 가족이 오랜만에 한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난 1948년 10월 19일, 내 나이 16세 되던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공산주의사상에 물든 청년들이 여수, 순천에서 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폭동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어, 결국 참혹한 양민학살의 유혈극을 몰고 왔습니다. 이 작은 도시에서 1주일간 죽은 사망자 숫자는 3500명이며, 500명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이 때 큰오빠 나이는 25살 작은 오빠는 19살 이었는데, 난데없이 오빠의 같은 학교 학우들인 좌익학생들이 문을 박차고 들이 닥쳤습니다. 그들은 두 오빠를 끄집어내어 땅바닥에 엎어 놓고는 얼굴이고 머리고 닥치는 대로 짓밟았습니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두 오빠를 끌고 사형집행장인 순천경찰서로 갔습니다. 오빠들은 소위 ‘인민 재판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죄목은 ‘예수쟁이’와 큰 오빠가 미국 유학을 꿈꾸었다고 해서 ‘미제국주의 앞잡이’였습니다. 순천 경찰서 뒤들에 사형대를 설치 해놓고 오빠들을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인이! 너 지금이라도 그 지독한 예수사상 뽑아 버리고 우리 공산주의를 받아드려. 우리와 같이 협력 할 수 있으면 살려준다 어떻게 할 테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큰 오빠의 대답은 "그건 할 수 없다. 왜 같은 동족이 꼭 이렇게 해야만 하나. 너희들도 이러 악한 짓 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이 나라가 복을 받는다. 너희들은 비록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다"고 하자 누군가 ‘할 수 없군’ 하며 큰오빠의 두 눈을 수건으로 가린 후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큰 오빠는 찬송을 한곡 부르고 죽겠다하며 ‘하늘가는 밝은 길이’ 찬송을 부르고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하는 순간 날아오는 총알을 받고 쓰러졌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작은 오빠는 피를 흘리고 쓰러진 큰오빠 시체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대성통곡하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좌익 학생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입니까? 나도 내형이 간 천국에 가겠다. 내 신앙도 형님의 신앙과 같다."하며 양팔을 펴들고 "자 총을 맞을 테니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쏠 테면 쏘아라!" 하고 외치자, 수발의 총탄이 날아와서 작은 오빠마저 큰오빠 곁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두 오빠의 시체는 애양원 나환자촌에 운반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두 오빠의 시체를 끌어 안고 "동인아, 동신아"하며 울다가 울다가 결국 기절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졌습니다. 온 애향원 나환자들도 두 오빠 시체를 앞에 놓고 애향원이 떠나가도록 통곡 하였습니다 두 오빠 장례식에서 우리 아버지 손양원목사님은 모든 눈물을 속으로 삼킨 채 장례식 답사를 통해 9가지 감사 신앙고백을 드렸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다섯째,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臥席終身)하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여섯째,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심을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神愛)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말로만 표현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주일에 감사헌금을 1만원이나 드렸습니다. 당시에 목사님 생활비는 80원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에게 분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두 오빠의 장례식이 마치고 1주일이 지났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오빠들을 죽인 사람을 잡았다는 소문이 들려 왔고, 그 범인은 마침내 오빠와 같은 학교 3학년 학생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은 내 생각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실제로 따르려고 하셨습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결국 아버지는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전 아버지 뜻에 크게 반발하고, 펄펄 뛰며 울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습니까? 하늘 아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아버지는 항상 별난 에수를 믿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저를 설득하며 말했습니다. "동희야! 날 쳐다보아라. 내 어차피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감옥에서 고생했고, 너희들까지 고생 시켰는데, 그 학생을 안 잡았으면 모르되, 일단 그 학생을 잡았단 말을 듣고는 이대로 모른 척 할 수 없구나.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째서 저 명령은 순종하고 이 명령은 순종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모순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 만일 안 지킬 것 같으면, 과거 5년간 감옥살이 헛살았고, 너희들 5년간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 시킨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 없구나!" 아버지는 최고 악성으로 분류되어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던 그 학생을 극적으로 구하여 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어이 내 오빠가 되었습니다. 화해하십시오. 자존심을 버리고 손해 보기로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화해를 신청하십시오. 용서를 구하십시오. 함께 식사를 나누며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여러분이 먼저 찾아가십시오. 전화 오기 기다리지 말고 여러분이 먼저 전화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를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손해를 보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손해를 보지 않고는 화해가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 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두 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 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두 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그리고 2/민13:26-14:10
10 그리고 2/민13:26-14:10 2003-07-02 20:02:53 read : 16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2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이 90 보다 크다/출18:13-27
10 이 90 보다 크다/출18:13-27 2011-08-23 21:18:48 read : 1 10 이 90보다 큽니다. 파레이드가 만든 법칙이 있습니다. 파레이드가 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하던 중에 분명히 본 것이 있습니다. 10%의 개미가 90%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10%가 90%의 일을 한다는 법칙을 <파레이드 법칙>이라고 합니다. 10%의 개미가 나머지 90% 개미보다 귀하였습니다. 10이 90보다 컸습니다. 백화점도 그렇습니다. 10% 단골 고객이 90% 매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중에 10% 부자들이 한국 돈의 90%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화 요금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에게 90% 전화 요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9시 뉴스도 그렇습니다. 초기 10% 시간에 보도하는 뉴스를 90% 사람들이 화제로 삼게 됩니다. 신문도 10% 앞 면에 90% 중요한 뉴스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유를 짜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람 열매를 모아놓고 누르기 시작합니다. 10% 정도만 받아 성전에서 사용합니다. d; 10% 감람유가 끄림이 생기지 않는 최상의 감람유입니다. 가장 비싸고 좋은 감람유입니다. 10% 감람유가 나머지 90% 감람유보다 비쌉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막은 378평입니다. 그런데 지성소 6평, 성소 12평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덮개 약 40평에 금값 600억을 다 사용합니다. 10%에 투자하는 비용이 90%가 넘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이 90% 일을 합니다. 10% 사람이 90% 물질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수 백명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고 모세 혼자 밥도 못 먹고 상담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이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출18;17-23)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말을 듣고 조직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모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일이 능률적이 되었고 수월하였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1. 십부장 60,000명 2. 오십부장 12,000명 3. 백부장 6,000명 4. 천부장 600명 이는 모두 78,600명입니다. 인구조사를 하며 보니 603,550명이었습니다. 이는 약 10%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12.9%입니다. 이드로도 모세에게 10% 일군을 뽑아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0%가 90%의 일을 하며 광야 40년을 지냈습니다. 10애 90보다 큽니다. 1. 시간 하루 24시간이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새벽 시간 10%가 나머지 시간 90%보다 큰 시간입니다. 일찍 일어나 두 시간 가량을 영적인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정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습관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39-44) 예수님은 감람산에 나가셔서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붙어 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새벽 시간을 값지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큰 일을 하였습니다. 소위 새벽형 인간이 큰 사람이 됩니다. 나는 지난 주간 <백만불 짜리 습관>이라는 책을 대하였습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트레이시 인터내셔널>사 회장입니다. 세계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이자 전략 전문가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좋은 직장을 갖지 못 하고 오늘은 이 회사, 내일은 저 회사로 옮겨 다니며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참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졌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할까?> <왜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안 될가?> 어느 날 그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기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100만불짜리 습관이었습니다. 이 습관이 괴물이 되어 자기를 길러 주었습니다. 마침내 세계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벽 첫 시간은 하루 24시간중에 가장 귀중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새벽 두 시간은 나머지 22시간보다 큽니다. 2. 물질 10%의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 물질이 나머지 90% 물질보다 큽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0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나머지 90% 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3. 일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 때에 10%의 일군들은 나머지 90%의 사람들보다 중요하고 컸습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이 어느 곳에서 일하든지 10% 안에 드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개미가 떼를 이루어 살아도 10% 개미가 90%의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 문도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 명 제자들도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가룟유다를 뺀 12명입니다. 120명중에 12명 10%가 온 세계를 복음화시켰습니다. 나머지 108명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도 그리고 성경 밖에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모두 한 가지씩 일을 맡아 하는 중요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하면 10%안에 드는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다음과 같은 일군들이 교회에 있어야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됩니다. (1) 계시 일군 교회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되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민주화되면 안 되고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민주화의 특징은 다수결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독제주의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성막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99%의 사람들이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결단은 모세가 하여야 했습니다. 모세는 민주화 목회를 하지 않고 복음화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무엇을 원하는 지 하나님으로 받는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대개 목회자와 계시 일군은 일치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찬양대내에서 찬양대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갈 찬양의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 중에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계시받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 일군 한 명은 다른 90%보다 중요합니다. 200만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광야에 나왔습니다. 200만명중에 오직 한 명 모세에게만 계시를 주셨습니다. 기도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군은 큰 일군입니다. 교회가 잘못 하게 되면 잘 지적하여 교회가 잘 나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일군이 계시일군입니다. 중요한 일군입니다. 성경의 뒷 이야기를 보면 12지파 족장 일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와서 모세는 <그만 가지고 오라>라고 광고할 정도였습니다. 이 광고를 듣고 12 족장들은 모세에게 와서 거칠게 항의하였습니다. 자기들은 헌금을 독려하러 다니느라고 헌금을 드릴 시간이 없어서 드리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지 못 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미 물질이 너무 많아 그만 하면 된다고 헌금을 거절하였습니다. 12 족장들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계시를 주옵소서. 우리도 헌금할 수 있는 기회를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제사장복에 들어가는 12 보석이 아직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족장이 한 개씩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하여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가를 늘 기도하고 계시받는 일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개씩 드리고 나니 너무나 허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너무나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드릴 것이 없나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막을 나르려면 수레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수레와 그것을 끌 수 있는 소를 헌금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모세도 생각지 못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핫자손들에게는 분명히 어깨에 메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게르손과 므라리에게는 메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다 .혹시 저들이 바치겠다고 하는 것들이 게르손과 므라리에게 사용하라고 되어지는 헌금인가?>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12 족장들로부터 수레와 소를 받아라. 고핫자손들만 어깨에 메고 나르고 게르손과 므라리는 수레에 실어서 나르도록 하여라. 그리고 12 족장들이 생각하여 낸 아이디어를 칭찬하여라. 멋진 아이디어 헌금이라고 말해 주어라. 그들에게 수레를 헌금하여 성막을 나르는 것은 전 세계를 나르는 것이라고 칭찬하여라. 전 세계를 얹어서 나르는 것을 헌금하였으니 내가 기뻐하시고 있다고 말해 주어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이디어,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런 계시 일군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10% 일군들은 기도일군들이었습니다. (2) 물질 일군 교회에서 하나님을 직접할 수 없기에 직장생활하면서, 또 개인 사업을 잘 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잘 드리는 물질 일군도 중요한 일군입니다. 교회를 잘 운영되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돈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은 죄는 아니지만 명예도 아닙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선교사업에 헌금하는 물질 일군도 교회에서는 중요한 일군입니다. 나는 지난 주간 부산 감림산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신기한 분을 만났습니다. 노 교인 목사, 노 기현 집사 형제를 만났습니다. 형 노 교인 목사님이 온 세계를 복음화시키려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뉴질란드 왕가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형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형이 선교하다가 순교하는 장면을 환상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형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고 편하게 하여 주려고 최대한으로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행기도 일등표만 구하여 주었습니다. 호텔도 가장 좋은 호텔에 가장 좋은 방만을 예약하여 드렸습니다. 선교비도 풍족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였습니다. <내 신장을 팔아 선교비를 대리라. 그리고 그 다음은 간을 팔리라. 그 다음은 눈을 팔리라....팔 수 있는 장기를 다 팔리라. 그리고 나는 형님의 선교를 위하여 조용히 무덤으로 들어 가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전에 형님 얼굴을 마지막 한 번 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뉴질란드로 들어 갔습니다. 거기에서 인도네시아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유전을 가지고 있는 데 개발을 못 하고 있는 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만 소원을 주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3;13) 하나님은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그러라고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하였습니다.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돈 벌어 하나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개발을 하지 못 하고 있던 중에 자기가 20%를 갖기로 하고 유전을 주었습니다. 엄청난 일을 하고 있습니다. 63 빌딩 58층이 그의 것입니다. 여수 개발을 6조원 들여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노 기현집사님과 밤 4시까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양복을 보여 주는 데 3천만원짜리였습니다.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크리스챤 재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할려고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물질 일군도 일군입니다. 10%의 일군들은 물질 일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물질을 투자하는 이들이었습니다. (3) 몸 일군 기도로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 가게 하는 일군들은 몸으로로 일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어야 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장로, 속장, 선교회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이 몸 일군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몸 일군입니다. 안내, 주차 관리부에서 일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게 하려고 청소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10%의 일군들은 이같이 기도 일군, 물질 일군, 몸으로 봉사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 10%는 나머지 90%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10% 안에 들 수 있을 가요? 어떻게 10%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1. 일군의 눈에 띄이면 일군이 됩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할 만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12 명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가룟 유다만 빼놓고 모두 순교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알하는 사람은 일군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찾아냈습니다. 광야 최고의 일군 모세의 눈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유난히 눈에 띄였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비젼이 있는 일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일군이 되려면 일군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2. 일군이 되겠다고 결정하면 일군이 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마음은 행동의 키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2-23) 3. 일하면 일군이 됩니다. 말만 하십시오. 말꾼이 됩니다. 말썽을 부리십시오. 말썽꾼이 됩니다. 놀기만 하십시오. 놀이꾼이 됩니다. 기도만 하십시오. 기도꾼이 됩니다. 노래만 하십시오. 가수가 됩니다. 일하십시오. 일꾼이 됩니다. 일군이 되고 싶으면 간단합니다. 일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여야 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일군들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일군이 되어야 우리 교회가 민족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선 우리 교회가 실력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300석이 세 번 정도는 차야 합니다. 9월 셋째주 <한 사람이 한 사람> 모시고 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운동에 다 동참하셔서 우리 교회가 한 차원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10 안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손기정 마라톤 우승자 한 분을 이야기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815 광복절을 맞았습니다. 손기정 이야기가 주된 화제로 인터넷을 장식하였습니다. 1936년 당시는 사람은 2시간 30분 안에 마라톤 코스를 달릴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벽을 깬 사람이 손 기정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 벽을 깨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손 기정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일본 선수로 출전하였습니다. 두 달 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현지 적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일본 일장기가 달린 선수복을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회까지 유니폼을 더럽히기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일장기를 보이기 싫어서였습니다. 마라톤에 일등한 후 금메달리스트들이 모여 독일 국빈들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싸인 할 때에도 <손 기정 Korea>라고 썼습니다. 수많은 신문 기자들이 어떻게 훈련하여 일등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손기정이 대답하였습니다. <독립군들이 바지에 모래 주머니를 만들어 달고 훈련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달리는 연습을 하였지요.>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할려고 하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1946년 베를린 우승 10주년 기념식에서 백범 김 구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ㅈ니다. <나는 자네 때문에 세 번 울었네. 첫째 나라 없는 청년이 우승하였다는 서러움에 울었지. 둘째 일본 사람들이 자네가 필리핀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죽었다는 소문을 내서 울었지. 셋째 독립이 안 되었으면 자네 우승이 영원히 묻힐 뻔 하여 독립하며 감격하여 울었지.> 그렇습니다. 할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2001-08-24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생산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생산적인 것 중에서 제일 왕성한 것이 땅입니다. 대지는 별의 별 신기한 것들을 계속하여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들, 즉 갖가지 곡식들을 매년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생산해 주기에 지구 위의 수십억의 인구들이 살고 있습니다. 4월말과 5월 초에 땅에 심은 벼가 두어 달 된 지금 많이 자랐습니다. 앞으로 두어 달만 있으면 빨리 되는 것들은 추석의 잔칫상에 흰 쌀밥을 올려 줄 것입니다. 실로 땅의 고마움을 지방에 가보면 실감합니다. 각종의 채소들을 먹으면서 땅의 생산성을 실감합니다. 김을 맨 분들의 말에 의하면 여름엔 너무 빨리 잡초들이 자란다고 합니다. 그 무성한 풀들이 아무도 씨를 심은 적이 없는 데도 매년 돋아나서 무성하게 자랍니다. 겨울에 앙상했던 정원들이 봄에 푸릇푸릇 하더니 여름이 되어 시퍼렇게 녹음방초가 되는 것을 매년 보면서 대지의 생산성에 놀라곤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도 들판에서 밭에 씨를 뿌리는 한 농부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것을 비유로 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한동안 회당에서 주로 가르치셨는데 오늘의 본문부터는 장소를 바닷가로 옮긴 것을 봅니다. 첫째는 회당에서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예수님이 방해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당은 좁아서 사람들이 많이 못 들어오니, 차라리 바닷가로 나온 것이 썩 잘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밭에서 지금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예수님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보시오! 저 농부가 씨를 지금 뿌리지 않느냐? 그 씨들이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질 것이고, 어떤 것은 밑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는 흙이 얕은 곳에 떨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나무속에 끼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씨는 좋은 옥토에 떨어지는 행운을 얻을 것이다.” 힘차게 비유설교를 하셨습니다. 팔레스틴의 농사법은 우리나라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갈아엎은 후에 땅을 잘 정리하고 그리고 씨를 조심조심 심습니다. 그래서 길가나 돌밭에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한데 유대 나라는 이와는 반대로 먼저 씨를 부리고 다음에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때는 아무 곳에라도 우선 뿌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새 등에다가 씨를 담은 자루를 실어 놓고 그 아래쪽에 구멍을 조금 뚫어서 노새가 다니면서 씨가 땅에 떨어지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 씨는 길가나 돌작밭에 마구 떨어지게 됩니다. 물론 옥토에도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제자들은 다시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18절-23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악한 자 즉 마귀가 그 마음에 뿌린 씨를 달랑 먹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돌밭에 뿌리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인데 이유는 말씀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세 번째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네 번째의 옥토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잘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 사람인데 잘하면 백배 좀 못하면 60배 아무리 못해도 30배의 열매는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시는 진짜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우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열심으로 씨를 뿌렸지만 결과는 모두 100배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와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지만 이상하게도 소수만이 듣고 다수는 거부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에 저항하고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받는 밭, 즉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등등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습니다. 실로 길가 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좋아서 그 말씀을 받았는데 얼마 아니 가서 다시 옛것으로 돌아갑니다. 옆에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핍박하고 협박하니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돌밭입니다. 흙이 얇게 덮이고 아래에는 반석이 깔려있는 돌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좋아서 받습니다. 어느 정도 그 말씀의 나무가 자랍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염려와 물질의 욕심에 끌리어 말씀대로 살지 못하다 보니 어느 사이인가 기운이 막혀 시들어 집니다.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힌 밭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악조건을 승리하고 견뎌서 자랄 때까지 다 자라 열매를 맺는 씨들이 많은데 이들이야 말로 옥토에 떨어진 씨입니다. 100배 아니면 60배 적어도 30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이 네 가지 밭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도 제자들도 열심히 천국의 씨를 뿌렸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때로는 거부하고 저항하여 씨 뿌리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용기를 잃을 수 있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전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전도를 해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먹혀들고 어떤 사람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밭이 똑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도 씨를 잘못 뿌리기 때문인가라고 회의하기도 합니다. 제발 그런 걱정일랑 말고 열심히 전도하라고 이 비유를 주십니다. 물론 전도학이 있어서 기술을 좀 더 배워서 효과적인 전도 방법은 계속적으로 개발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밭이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어째서 그런 밭은 만들어 놨는가 묻는다면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어째서 아니 바꾸셨는가?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원죄성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론과 비슷합니다. 인간이 책임질 것은 인간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여 불복종한 인간을 하나님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이사야 55:11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고로 상대가 어떤 밭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되돌아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면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가급적 많은 밭에 씨를 뿌리면서 일해야 합니다. 혹시 말씀이 되돌아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크게 둘째로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마음이 어떤 밭인가를 고찰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좋은 밭인가를 깊이 반성하여야 합니다. 각자의 믿음의 성장 내용을 검토하시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즉 우리 자신들 안에 뿌리어진 복음의 씨가 잘 자라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길가 밭은 아닙니다. 길가 밭은 말씀의 씨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 마음이니 그런 사람은 여기 이 자리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왕이 그런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벨릭스 총독이 그런 마음을 소유했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몇 차례 듣고도 결국 회개하지 아니 했습니다.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 하다가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의 밭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듣고, 전도를 받고 곧 반응하여 예배당에 옵니다. 그런데 몇 번 교회에 나오다가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에 좌우되는 성격의 사람들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학습이나 세례 같은 의무가 주어질 때 피해 갑니다. 그러다가 영원히 천국의 문에서 멀어집니다. 6절에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해는 은혜를 가르칩니다. 막상 은혜의 기회가 올 때 도망하여 오히려 조금 핀 싹마저도 타 버리고 맙니다. 의무의 짐은 은혜의 기회인데 그것이 주어질 때 오히려 타져 버리고 만다면 이 얼마나 처량한 일입니까?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봉사를 시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 짐이 무거울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피하면 작은 믿음의 작은 싹마저 타 버리고 맙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종종 논의되곤 하는 것인데 교회 개축이나 신축 시에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은 공개적이기에 개중에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있다고 하여 교회의 큰일을 광고하지 않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광고를 하면 목사님이 돈 이야기를 한다고 빈정대면서 교회를 떠나간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여린 싹이 있기에 교회는 조심스럽게 일들을 추진하지만 때론 오해를 사기도 하고 상처를 받는 경우도 생겨서 조금 올라오던 싹이 해가 뜨면 타져 버리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목회자는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때는 늦습니다. 저의 목회 생활 30여 년 동안에 이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세 번째의 가시덤불 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의 싹이 제법 자라다가 가시덤불의 기운, 즉 세상에 대한 걱정과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 입니다. 이 경우는 세상을 향한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세상의 재미에 빠지고 세상의 일락에 도취하여 말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지고 놀 것 다 놀면서 예수를 믿고 싶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한손에는 세상을 붙들고 다른 손에는 천국을 소유하고 살고 싶어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오늘 배워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할 것 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좋은 시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밖으로 나가라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님을 명심시켰습니다.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하여 최소한의 염려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한데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염려는 생존의 염려가 아니라 부하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 하는 관심과 염려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리는 목숨 부지를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돈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 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고 착취하면서 까지 돈에 애착을 가지고 이를 탐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아니 자라던 믿음도 기운이 막혀 죽습니다. 여러분들은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그 말씀 그대로를 달게 받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어 버리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서 꿀꺽 꿀꺽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외쳤는데 말씀이 이토록 달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깊이 빠질 리가 없겠지요. 육신이 세상에 거주하는 동안에 필요한 최소한의 세상사를 빼고는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의무를 열심히 감당할 때 옥토가 됩니다.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적어도 길가 밭은 면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돌밭도 되어서는 안 되고 가시떨기 밭도 돼서는 안 됩니다. 옥토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옥토라고 여기는 분들은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30배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60배 정도로 좋아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100배를 추수합시다. 결실은 겉으로 드러납니다. 생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기도생활이나 전도생활에서 나타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몸 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 오늘 예배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은 옥토가 되어 100배의 결실을 맺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0배의 결실을 바라십니까? /창26:1-25 2017-03-26 20:12:52 read : 1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다. 추석을 앞두고 있는 결실의 계절이다. 누구나 씨를 뿌리면서 많은 결실을 바란다. 그러나 씨를 뿌린다고 해서 누구나 많은 결실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농사를 했는데 100배의 결실을 맛보았다고 하였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100배의 결실을 바라십니까? /창26:1-25 2017-03-26 20:12:52 read : 13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다. 추석을 앞두고 있는 결실의 계절이다. 누구나 씨를 뿌리면서 많은 결실을 바란다. 그러나 씨를 뿌린다고 해서 누구나 많은 결실을 맛보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농사를 했는데 100배의 결실을 맛보았다고 하였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기서 농사하여 100배의 결실을 맛보았다는 것은 숫자적으로 100배라는 뜻이 아니라 풍성한 결실을 의미한다. 최대의 결실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말씀하셨다. 그기서 100배의 결실이라는 것은 사람이 거둘수 있는 최대의 결실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삭이 그런 최고, 최대의 결실을 이루었다는 것은 엄청난 성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삭이 거둔 엄청난 성공, 100배의 결실은 좋은 환경에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가장 나쁘고 힘든 환경에서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고 성공이었기 때문에 놀라운 결과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삭이 100배의 놀라운 결실은 어떤 환경에서 이루어진 결실이었고, 성공이었나? 1) 흉년의 때에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었다. (1)“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얼마나 흉년이 심했으면 이삭도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피난가려고 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흉년의 때였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리지 않았다면 이삭은 흉년이 없는 땅 애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삭은 흉년이 만연한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농사하기 힘든 흉년의 때에 이룩한 100배의 결실이었기에 놀라운 것이다. 2) 실수 투성이의 이삭이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었다.(6-11) 본문에서 소개하는 이삭의 신앙은 특별히 깊은 신앙이라고 할수 없다. (6-11절)에서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애굽에서 한 것처럼 자기 아내를 아내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하였다가 이방인 아비멜렉 왕에게서 크게 창피를 당하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아직 이삭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강하고 깊은 신앙이 아니라 세상이 무서워 이런 저런 수단을 쓰는.... 소심하고 약한 모습을 보게된다. 즉 이삭이 이루어낸 100배의 결실이란 이런 실수를 저지러는 이삭에게 일어난 놀라운 결실이었다. 즉 실수 투성이 이삭이다. 아직 허물 많은 이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 많은 이삭에게 일어난 놀라운 결실이다. 3) 많은 대적들, 방해꾼들 속에서 일어난 100배의 결실이었다.(12-25절) 본문12절-25절에 보면 이삭 주위에는 이삭이 잘 되는 꼴을 그냥 못보고 있는 못된 블레셋 사람들이 계속 이삭을 따라다니며 방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는 농사를 하거나 목축을 하려면 우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고, 우물이 없으면 농사도 할수 없는 그런 땅이었다. 그래서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는데 이삭이 우물을 파놓으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그 우물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우물을 흙으로 메우는 못된 짓을 하였다. 그렇게 이삭의 대적들과 방해꾼들이 계속해서 이삭을 노리고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100배의 결실을 거두었느니 대단한 성공인 것이다. 이렇게 이삭은 3가지 불리하고 어려운 조건들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100가지 결실이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그런 어려운 조건들을 극복하고 100배라는 놀라운 성공을 누렸을까? 1. 이삭은 아버지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2-5) 이삭이 어려운 환경을 다 이기고 100배의 결실을 누린 것은 한마디로 아버지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아들 이삭이 놀라운 결실을 누린 것이다. 흉년이 되어 이삭이 애굽으로 피난가려고 하자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나안 땅에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주는 이유를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삭이 불모지 땅에 살아도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잘 믿고 잘 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이 세상의 복, 이 세상의 성공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 즉 복의 근원이 어디 있나? 그것은 환경에 있지 않다. 하나님에게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이삭같이 흉년에 가나안 땅에 살아도 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환경에 상관없이 복을 받는다. 그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복된 환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오늘 사건은 복의 근원이 좋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믿음으로 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에게 복된 환경을 물려주려면? 복된 환경을 찾아 헤매지 말고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잘 믿으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여러분의 자손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받는 방법? 아버지가 하나님께 복 받을만한 사람이면 그 자녀는 저절로 복을 받는 사람이 된다. (예)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간증 (이찬수 목사는 한국 기독교 차세대 리더로서 주목받는 목사이다. 나는 이찬수 목사가 복받은 이유가 궁금했는데...그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수 있다.) 나의 아버지는 고신 교단에서 목회하시던 목사님으로 정말 경건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셨다. 조그만 개척교회의 담임목사였는데, 교회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그만 17일째 되던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교회를 불같이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으시고 그 담임목사를 데려가시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당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분은 하나님도, 아버지도 아닌 바로 우리 어머니였다. 목사인 남편이 그토록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데, 보통 사람 같으면 ‘목사’라는 직분에 대해 회의감이 들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자꾸 나에게 “네가 커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너희 아버지는 교회를 정말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금식기도 하시는 중에 돌아가셨단다. 하나님께서 너무 빨리 부르셔서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셨지. 그러니 자식인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중략) 끈질긴 어머니의 기도로 서른 살 때 내가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기도만 하고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도의 열매를, 교회를 향한 그 기도의 열매를 자식인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찬수 목사가 받는 복은 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뿌린 열매를 거두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가 복받는 방법? 100배의 결실의 방법? 내가 복 받는 아버지(어머니)가 되면 된다! 2. 이삭은 생산적인 일에 힘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우물을 파는 사람, 우물을 메꾸는 사람이다...우물을 계속해서 파는 이삭은 생산적인 사람이고, 이삭을 시기하여 우물을 계속해서 메꾸는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비생산적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물을 계속해서 파는 사람이 성공하고 복을 받을까? 아니면 우물을 계속해서 메꾸는 사람이 복을 받을까? 우물을 파는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은 너무나 뻔하다. 이렇게 이삭이 100배의 성공을 거둔 것은 이삭은 생산적인 일에 힘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복을 받는 사람들은 이런 생산적인 사람들이다. 왜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신20:19-20)“너희가 어떤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그 성읍을 쳐서 점령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 곳의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 이는 너희가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들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 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너희와 싸우는 그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쓸지니라” 전쟁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일이다.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하면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을 하면 모든 것 파괴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여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전쟁 가운데서도 필요하면 수목은 찍어내어도 되는데 절대 과목은 찍어내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즉 맹목적인 파괴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생산적인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전쟁 중에도 명심하라는 것이다. (예)마트에 가면 우유제품에 ‘대니쉬 우유’가 있다. 대니쉬란 덴마크 우유를 말한다. 세계에서 최고 품질의 우유는 덴마크 유유이다. 덴마크 젓소는 세계 최고의 우유를 생산할뿐 아니라 생산량도 세계 최고이다. 이렇게 덴마크가 세계 제일의 낙동국가가 된 이유? 생산적인 일에 전 국민이 땀을 흘렸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구룬트비와 달가스 덴마크는 원래 바이킹의 종주국이었다. 그러나 줄곧 전쟁에 패하면서 국토도 잃고, 인구도 줄어들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랑스에 가담했다가 노르웨이를 잃었고, 프로이센과의 싸움에 패해 국토의 1/3과 40%의 인구를 잃었다. 거기다가 기름진 남부지방마저 독일에 빼앗겨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은 땅은 차고 습한 서북풍이 끊임없이 불어오는데다가 여름에도 가끔 서리가 내리는 악천후 때문에 폐병과 소아마비가 만연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전쟁으로 남은 것이라고는 황무지와 섬 밖에 없게 된 이때에 ‘그룬트비(1783-1872)’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주장했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하여 식목사업, 협동조합 운동, 국민체육 운동을 주장하였다. 그룬트비 이후는 ‘달가스(1826-1894)’라는 지도가가 계속하여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고 하며 덴마크의 남은 국토...모래땅에 나무심기를 계속 하였다. 그리하여 거친 국토를 녹색으로 바꾸어 나갔다. 그 결과 덴마크를 가장 좋은 땅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결코 처음부터 덴마크는 낙동하기 좋은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산적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예)중국의 한가족(이제팡이라는 여성)이 일본에서 사업으로 근무중 대학 다니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보상금을 타서 내몽고 사막에 나무심기 운동을 전개...10년 만에 1만 묘(약 6.667㎢...경상북도 1/3면적, 제주도 3.6배의 면적)의 숲을 조성하는데 성공하고 계속 식수운동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믿는 사람은 파괴적인 사람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머물기 때문이다. 3. 이삭은 끈질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 끈질긴 사람이다. 끈질긴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 이삭을 보라...블레셋 사람들이 계속 따라다니며 우물을 메우며 방해했지만 이삭은 끈질기게 우물 파는 작업을 계속하고 생산적인 일에 몰두한다. 결국 끈질긴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다. (예)일본에 ‘판매의 신’이라고 불리는 겐조 도루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기획해서 책을 내 놓으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성공을 하였는가? 그가 잘하는 비결은 ‘압도적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압도적 노력’이란?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 남들은 ‘무리다’, ‘불가능하다’라며 남들이 포기하는 일을 선택해 정복해내는 것이다. 남들이 포기했다 해도 나만큼은 포기하지 않는 것...그것이 압도적 노력인데 이런 압도적인 노력은 당연한 말이지만 지극히 고통스럽다고....하지만 그는 압도적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끈질기게 노력하니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 압도적 노력을 계속하는 사람과 내팽개치는 사람.... 끈질긴 사람이 결국 무언가 해내는 사람인데 이삭은 끈질긴 사람이었다. 이삭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끈질김이 결국 100배의 결실을 가져왔던 것이다. 믿음의 인물이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끈질긴 노력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적)년초에 결심한 헌신...계속 하라. 년초에 결심한 기도생활....계속 하라. 년초에 결심한 예배생활 계속하라...믿음도 끈질긴 믿음이 결국 하나님 축복을 받는다. 이찬수 목사 모친처럼 끈질긴 헌신이 결국 자녀를 복되게 만든다. 4.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8복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온유한 사람이 땅에서도 성공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온유한 사람은 모든 일에 손해만 보다가 결국 망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온유한 사람이 반드시 땅을 차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렇다고 온유를 모든 것 양보만하다가 결국 포기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온유란 양보를 잘하는 사람이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온유를 악과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된다. 악과 타협은 온유가 아니라 비겁함이다. 온유란 진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은 통크게 양보할줄 아는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유란 결국 혀처럼 부들부들하지만 결코 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들부들하면서 강한 것 그것이 온유이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안에서 온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삭이 그렇다. 블레셋이 시비걸어 오면 맞서 싸우지 않고 양보하고 물러갔다. 우물 자체가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사나 목축을 포기하지는 아니했다. 끈질기게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파고 농사하고 목축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진리 안에서 온유한 이삭에게 100배의 결실이란 풍성한 복을 주신 것이다. (서영수 목사)
100배의 복 /창26:12-13 2014-04-11 16:08:54 read : 2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믿음으로 살아도 시험이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복을 받은 사람도 흉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복덩어리인 아브라함도 흉년을 만났고, 이삭도 흉년을 만났고, 야곱도 흉년을 만났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흉년을 만나도 복이 됩니다. 저주를 받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을 알 수 있
100배의 복 /창26:12-13 2014-04-11 16:08:54 read : 29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믿음으로 살아도 시험이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복을 받은 사람도 흉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복덩어리인 아브라함도 흉년을 만났고, 이삭도 흉년을 만났고, 야곱도 흉년을 만났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흉년을 만나도 복이 됩니다. 저주를 받는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창 12장에 보면 아브라함 때에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살길을 찾아서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창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졌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만났을 때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야곱 역시 흉년이 들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에 내려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아들 요셉을 오래 전에 애굽에 내려가게 하셨고 그곳에서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야곱은 흉년 중에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애굽에서 가장 풍성한 땅인 고센에서 풍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창 26장은 이삭이 만난 흉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삭 시대에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이삭은 가족과 모든 가축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가나안에 머물면 죽을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랄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100배나 거두었습니다. 이삭이 너무나 잘 되니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합니다. 그래서 이삭에게 그랄에서 떠나달라고 하니 이삭이 그곳을 떠납니다. 그랄에서 나온 이삭이 우물을 파니 그랄 사람들이 빼앗아 버립니다. 이삭은 우물을 그랄 사람들에게 주고 다른 곳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우물을 팝니다. 역시 그랄 사람들이 와서 우물을 달라고 하니 이삭이 그들에게 우물을 주고 또 떠납니다. 그리고 이삭은 다른 곳에 가서 다시 우물을 파고 또 팝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흉년을 만났는데 농사를 지어 100배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 우물은 요즘으로 말하면 큰 기업체와 같은 재산 가치가 있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이삭이 어떤 복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될 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풍년 때에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흉년을 만나도 함께 하십니다. 내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있을 때에도 함께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밝은 낮에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캄캄한 밤에도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잘 될 때에도, 잘 안 될 때에도 언제나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은 넘어져도 금덩어리를 줍는데 나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니 하나님은 내게 불공평하게 역사를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을 때는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기차여행을 하다가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과 마주보는 앞 자석에 앉은 백인 아가씨가 목사님을 자꾸 쳐다보면서 웃더랍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별, 이상한 사람 다 있다’라고 생각하고는 눈을 감고 잠을 잤습니다. 목사님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앞좌석의 아가씨는 없어졌고 목사님의 무릎에 메모지가 한 장 있더랍니다. 메모지에는 ‘거울 좀 보세요’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거울을 보니 목사님의 얼굴에 밥풀 2개가 붙어 있더랍니다. 그 때 목사님이 깨달았답니다. ‘내가 문제이지 세상이 문제가 아니구나.’ 여러분! 이삭이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복이 가장 큰 복일까요? 부자가 되는 복일까요?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재물의 노예가 아니라 재물의 청지기로 살기를 바랍니다. 부자라고 다 복 받은 것은 아닙니다. 부자이지만 하나님께 교만하고 자기가 재물의 주인이 되어 산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권세가 가장 큰 복일까요? 저는 우리교인들 가운데서 올바른 권세자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도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권세가 좋은 것이지만 세상에는 권세를 잘못 사용하여 권세를 가지고 죄를 짓고 권세 때문에 망한 사람도 많습니다. 사울 왕은 권세가 없을 때는 겸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된 후에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에게는 권세가 오히려 저주가 되었습니다. 암에 걸려서 치료를 받았다면 큰 은혜를 입은 것이지만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그것도 변두리 복입니다. 신앙생활을 해서 가문이 좋아졌다면 그것도 귀한 복이지만 역시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이 될 수 있고, 세계적인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지붕 위의 풀과 같습니다. 지붕 위의 풀은 금방 쑥쑥 자라는 것 같지만 곧 시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복을 받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복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복처럼 보이는 저주인 것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최고의 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그랄의 왕 아비멜렉의 고백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의 제목을 “100배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이 아니라 100배의 복입니다. 왜 이렇게 제목을 정했을까요? 그 이유는 세상이 하도 어렵다 어렵다 하니 저와 여러분이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세상에 속아서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할까봐 염려가 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공급자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40년 동안 했습니다.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합쳐서 최소 200만 명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먹이셨습니다. 그 숫자를 4일 먹이는 것도 기적인데 4개월이나 4년이 아니라 40년을 먹이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시냇가로 보내셔서 물을 공급하셨고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기근으로 시냇물이 마르니 샘이 깊은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보내셔서 살게 하셨고 그 집에 가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셨고 기름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 7:9입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는 굳게 서지 못합니다. 우리가 굳게 믿어야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을 받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서 100배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에게 이런 복이 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을 받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큰 복을 받은 사람은 큰 복을 받을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라고 말씀합니다. 29절에 보면 “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이 복을 받은 원인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이삭에게 복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생각하셔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나 조상의 믿음 때문이라는 것은 전제로 하고 이삭에게서 3가지 원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이삭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이삭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만날 때는 들판에서 기도하다가 만났습니다. 이삭이 결혼 후에 20년이 되어도 자식이 생기지 않으니 기도하여 자식을 갖게 됩니다. 아내 리브가가 임신을 하였는데 쌍둥이였습니다. 그런데 쌍둥이가 엄마 뱃속에서 하도 싸우니 이삭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기도는 하는 기도가 있고 듣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삭은 하는 기도도 잘 했고, 듣는 기도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2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시고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합니다. 이삭은 듣는 기도도 잘했던 사람입니다. 기도응답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겠다.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기도 응답은 즉시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대학원시험을 봐야 하는데 전공공부를 못해서 여관에서 잠을 자기 전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점으로 가라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기도응답에 순종해서 서점으로 갔다가 목사님이 시험을 보려고 하는 대학원의 같은 학과를 졸업한 청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이 추천해준 책으로 그 청년이 밑줄을 쳐준 부분을 공부해서 대학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안 주신다면 안 주시는 것도 응답입니다. 왜 안 주실까요? 해로우니까 안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3살 짜리 딸이 청양고추를 먹고 싶다고 해서 장난으로 주었는데 아이가 먹고 기절해서 응급실로 실려 갔다고 합니다. 아이가 아무리 달라고 해도 청양 고추는 안주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잘못된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무응답으로 응답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때가 되어야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싶어도 때가 아니기 때문에 기다리게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사모님과 사이가 너무 좋습니다. 하루는 10살 먹은 딸이 엄마 아빠가 사이가 너무 좋으니까 자기도 시집 보내달라고 울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딸을 시집보냈습니다. 10살에요? 아니요. 15년을 기다린 후에 시집을 보냈습니다. 작은 일도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뭐, 그런 하찮은 것을 구하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주 기뻐하십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 당당하게 구하십시오. 자식은 부모에게 무한대의 빚을 지고 있지만 언제나 당당합니다. 왜요?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종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습관을 따라 기도의 장소에 가셨던 것처럼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부흥회를 갔습니다. 참석한 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그분들에게 말씀으로 인한 깨달음이 있었고, 감동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보다 더 중요한 은혜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좋은 습관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흥회를 해서 흥분하는 것은 길어야 2주입니다. 그런데 습관을 바꾸는 것은 평생을 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습관을 가지면 평생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할 때 단순하고 직접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십시오. 지나치게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기도하는데 형용사가 많고 수식어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한이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은혜의 하나님...” 이런 식으로 말을 꾸미는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육군참모총장이라면 그 아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시어 일찍이 직업군인의 뜻을 정하시고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육군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시고 생도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시더니 육군 소위로 임관 하시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시며 승승장구하시더니 영광스러운 장군이 되시고 지금은 육군 참모총장이 되신 아버지”라고 한다면 아버지가 뭐라 하겠습니까? “너, 지금 뭐하냐?” 그냥 아버지 하면 됩니다. 아들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런 표현은 지나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형식을 따라 하는 기도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요 16:24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삭은 기도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2. 이삭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복을 받는 사람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큰 복을 받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하나님의 복이 넘쳤던 것입니다. 창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번제는 제물의 머리를 자르고 각을 뜨고 내장을 발라내고 불살라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니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숫양을 준비하셔서 이삭 대신 드리게 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안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제물로 드리려는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고 자신을 내준 이삭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20세 가까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20세 가까운 혈기왕성한 나이였습니다. 만약 이삭이 아버지에게 반항했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이삭은 죽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한 것입니다. 기근이 들었습니다. 가나안에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물을 구하지 못하면 모든 가축이 풀을 먹지 못하고 물을 마시지 못해서 죽을 것입니다. 심지어 가족들과 자신의 생명도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애굽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랄에 머물렀습니다. 이삭은 자기의 목숨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우리의 목숨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질을 요구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재산을 다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청지기의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 내 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줄 알고 나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자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셔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잃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운 교인들 때문에 헌금 설교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 생각을 바꿔놓으신 응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로 감동을 주셨습니다.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던 엘리야 시대에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한 움큼의 가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그 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아들에게 먹이고 죽음을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곳에 보내셔서 마지막 가루로 주의 종 엘리야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마지막 가루로 엘리야를 공궤했습니다. 그 결과 과부가 죽었습니까?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솟아나서 기근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드린 것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복이 되었습니다. 우리교인들이 어렵기는 하지만 사르밧 과부만큼 어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으시는 것이 아니라 심게 하셔서 열매를 주시는 것입니다. 갈 6:7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기독교인은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를 제외한 모든 돈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게 들어온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것이 있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실 때 심게 하셔서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후 9:10에 보면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은 심는 씨가 있고 먹을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먹을 양식은 우리가 먹게 하시는 것이고 심을 씨는 심게 하셔서 우리를 풍성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에 어느 모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유대인 자매 2명이 한국에 와 있는데 한 자매가 음식이 맞지 않아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에 한 끼의 식사 대접을 해주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제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서 잠시 갈등을 했지만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했더니 며칠 후에 120만원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심거거두는 것과 상관없이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돈을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5만원을 심으면서 그 열매를 주목해 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열매를 주셔서 저를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식하고 그분의 음성에 철저하게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3.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그랄에서 나가게 하니 이삭은 두 말 없이 그랄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 이삭이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는데 그 때마다 그랄 사람들이 우물을 빼앗아버립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물러섭니다. 인간적으로 바보 같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온유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그랄 사람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물러설 수 있었던 것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우리 주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강한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자가 차지합니다. 사람이 부드러우면 손해를 볼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부드러운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드러운 혀와 단단한 이의 싸움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평소에는 단단한 이가 부드러운 혀를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는 빠져도 혀는 남는 것입니다. 혀가 승리합니다. 온유함은 너그러움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너그러움을 훈련하시길 바랍니다. 동안교회를 섬기셨던 송치헌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송목사님이 지하철을 타고 회의를 하러 가는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한 여자 분이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급하게 들어오면서 그만 송목사님의 발등을 하이힐로 찍어버렸습니다. 송목사님은 발등이 얼마나 아프던지 그만 “쌍~”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0~” 소리를 겨우 절제하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발등을 찍은 분이 “동안교회 목사님 아니세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분이 교회를 나오는 분은 아닌데 목사님이 이웃집에 심방 가셨을 때 보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님이 “0~”을 하셨으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이 부인이 발등을 찍히고도 감사하는 목사님의 인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안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후에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발등을 찍은 것이 미안해서 8년 동안 계절마다 송목사님과 부교역자들의 구두를 사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넉넉한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삭처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양보하며 온유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이 넘칠 것입니다. 사실 이삭의 모습은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늘 기도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도 기도하는 생활을 합시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드렸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목숨도, 물질도 아까워말고 드립시다. 우리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도 온유한 성품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100배의 복을 받은 사람/창26:12-25
100배의 복을 받은 사람/창26:12-25 2003-05-27 20:02:02 read : 818 어느 분이 10만원 투자하여 60억이 넘는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떠들썩합니다. 세금을 제하고도 5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한탕주의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땀흘려 수고하고 주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이 임합니다. 영육간에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사업 위에 더욱 큰복으로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을 '잘 사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돈도 귀하지만 예수님 믿는 것은 훨씬 귀합니다. 성도들에게도 돈은 필요하지만 돈에 목숨걸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돈을 우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매사에 예수님을 앞세우는 철저한 신앙 안에서 돈도 벌고, 사업도 잘 하고, 인간관계도 잘 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12-13) 이삭이 농사하여 백 배의 결실을 거둔 내용이 나옵니다. 이삭은 한마디로 백 배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삭과 같은 백 배의 복이 임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백 배의 복을 받은 이삭처럼 살 수 있습니까? 1. 포기하지 않고 양보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목민들에게는 육축을 먹일 우물이 큰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랄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빼앗아 메워버렸습니다.(15절) 그러나 이삭은 포기하지 않고 또 팠습니다. 이삭의 별명은 '우물 파는 사람'입니다. 그는 계속 포기하지 않고 우물을 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은 힘든 것이지만 지나고 보면 유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72절 말씀에는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기도생활도 게을러지고, 충성심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그저 피하려고 하지말고, 고난 중에서 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다 보면 어려움도 생깁니다. 장애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을 잃는 것은 약간을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지만, 용기를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찾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이가 아프면 밤새 穉紀맒척?어머니처럼 기도하는 자녀를 하나님은 사랑으로 돌보시고 함께 하십니다.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죽을 것 같은 상황입니까? 이것은 오히려 고난의 끝이 왔다는 표시입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축복된 상황이 오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는 포기하지 않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가면 지난날의 실패와 고난을 딛고 더욱 복된 일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포기하지는 말되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삭은 100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시기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14) 남을 시기하면 자기 영혼이 망하게 됩니다. 남이 잘 되는 모습을 보면 축하해 주고,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이웃이 잘 되면 축하해 주고, 본받아야 합니다. 만일 앉아서 헐뜯고 시기한다면 정말 초라하고 형편없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정적인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을 보면 같이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의 미래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그저 시샘하고 헐뜯고 있으면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이 잘 풔?꼴을 보지 못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고 했습니다. 시기심이 참 무섭습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광야에서 우물은 큰 재산이자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물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이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태도입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땅을 내 놓으라!"는 말입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양보했습니다. 정말 손해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보하는 자에게 큰복을 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파자 샘이 터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양보(讓步)하면 진보(進步)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이 와서 또 그랄 골짜기의 우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20절) 그래서 또 양보하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그가 비굴하거나 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며 마침내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평화를 맺자!"고 제의해 옴으로 결론이 나게 되었습니다.(28-29절) 이처럼 하나님은 양보하는 자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양보하는 자는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복으로 채워주시는 은혜를 보게 됩니다. 이삭은 어떤 일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양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삭에게 100배의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2. 창조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삭이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척정신(창조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가서 새롭게 개척하자!"는 생각으로 양보한 것입니다. 개척정신이 없는 사람은 남이 이루어 놓은 것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수고도, 헌신도, 눈물도 없이 그저 열매만 따려고 합니다. 그러나 개척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이 넉넉합니다. 양보합니다. 수고와 땀을 많이 흘렸지만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정신을 가지고 한해를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무한한 가능성 있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큰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는 가운데, 한 해 동안 곳곳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결코 여러분이 타락의 도구가 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자, 시기하는 자로 전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작아도 할 일은 많습니다. 개척정신을 가지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할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남들이 다 이루어 놓은 큰 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어떤 것이 진정한 복인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복된 생명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래서 기대하십니다. 여러분이 샘물교회의 가족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샘물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닌 재능과 시간으로, 건강과 물질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1억, 2억과 바꿀 수 없습니다. 건강하지 못해도, 물질이 없어도, 많이 배우지 않았어도 여러분은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구원받은 천국백성입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고 산다면 결코 소극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개척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어떤 난관이 와도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이렇게 개척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눈물, 땀, 고난은 있어도 반드시 놀라운 축복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삭처럼 100배의 복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샘물교회는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꿈이 있습니다. 큰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이삭처럼 백 배의 결실이 있는 성도와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뛰어야 합니다. 개척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년처럼 살았던 갈렙처럼 꿈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외쳐야 합니다. 이것?바로 개척정신입니다. 남들은 다 이루어 놓은 것을 편하게 차지하려 하지만, 우리는 꿈과 소망을 가지고 만들어가야 합니다. 개척정신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도 낙심한 모습으로 살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2003년도에는 확신 있는 믿음으로 한번도 이루어보지 못한 복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삭처럼 백 배의 복을 받는 주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외쳐봅시다. 금년 한해는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해가 될 것이다. 아멘. 3. 이삭처럼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삭은 예배 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르호봇에서 다툼이 멈추었습니다. 이삭은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22)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브엘세바로 올라갔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삭은 그곳에서 예배의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장막을 쳤습니다.(24) 예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는 이삭에게 하나님은 100배의 복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원래 이삭의 직업은 축산업입니다. 그런데 그가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얻어 거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증거입니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열심, 비전 그리고 환경도 중요하고, 위치도 중요하고, 모든 여건이 잘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일터가 바뀌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복된 존재가 되니 100배로 복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 LA에 사는 김용규 장로님 간증이 실렸습니다. 그분은 원래 태권도 사범이었는데 부상 때문에 도장 운영을 포기했습니다. 85년에 LA에서 봉제공장을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잘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 부인이 기도해서 잘 되는 것이다"라고 했지만 장로님은 "내가 수완이 있어서 잘되는 것이지 무슨 기도 때문이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반품 문제로 큰 부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수완을 발휘해도 부도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손을 들었습니다.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그곳에서 신명기 8장 17-18절 말씀으로 철저히 깨졌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그는 이제까지 자기가 잘해서 부자가 된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셔서 잘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회개했습니다. 마음도 비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하고 베풀며 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와 구조조정을 하고, 직원들을 믿는 사람으로 바꾸고,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위기를 극복하고 사업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고 마침내 나이키 회사의 의류 납품권까지 따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간증을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복주시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축산업자인 이삭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농사일로 전업하고도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태권도 사범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니까 봉제일로 전업하고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반드시 백 배의 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성실함도 수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완으로는 2배의 결실을 얻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백 배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작은 부자는 본인이 노력하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부자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2003년에는 영육간에 큰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삭처럼 백 배의 결실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확신하며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생활의 중심에 두고 모든 삶의 계획표를 진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잘못된 길을 택하여 어려움과 위기에 처하고서는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2003년에는 세상의 일을 버립시다.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와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가야 합니다. 복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온갖 고생과 수고를 해서 우물을 팠습니다. 시간도 많이 들였습니다. 땀도 물질도 많이 들였습니다. 여러 곳을 파느라고 아픔과 희생도 있었습니다. 빼앗기면 양보하고 또 팠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앞세우고 나아가 우물을 얻었고, 100배의 복을 누렸습니다. 2003년 한해는 이삭처럼 예배중심으로 삽시다. 개척정신, 도전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며 살아갑시다.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말고, 은혜의 마음으로 양보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중에 이삭처럼 100배로 복을 받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00배의 축복/ 창26:12-15/ 신년축복주일설교/ 2012-01-03
100배의 축복 창26:12-15 창세기 26장에는 복(福)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창26:3, 4, 12, 24, 29).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3, 4). "이삭이 그 땅에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창 26:12).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 지라"(창 26:24). 확실히 히브리 민족과 우리 한민족은 '복(福)'을 좋아하고 '복'을 사랑하는 복의 민족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복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천지창조의 역사 중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최초로 하신 말씀은 복(福)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福)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인간에게 복(福)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류 역사는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복을 빌어주면서 한 해를 시작합니다. 우리 민족은 복을 사랑하고 복을 빌어주는 복의 민족입니다. 그러면 복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복은 어디에서 옵니까? 1. 하나님은 복(福)의 근원이십니다. 꼭 올해에는 평소보다 백배의 복을 받도록 노력합시다. 인간에게 받은 복은 속히 빠져나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은 속히 떠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제가 성경학교 졸업 설교를 마치고 기차 안에서 수요일 설교 준비를 하면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한 중년 신사가 내 곁에 와서 말하기를, "선생님은 교인인 모양인데 세상에는 복이란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꺼칠한 손을 내게 내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이 손으로 많은 돈을 벌었소. 그래서 좋은 집도 사고 가게도 확장하고 많은 종업원도 두고 많은 재산을 모았소." 이 신사는 5.16 당시에 금은방을 경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화폐개혁 바람에 금값이 몇 배나 뛰는 바람에 갑자기 거부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으로 자기의 외딸이 병석에 누웠습니다. 뒤를 이어 아내가 건강을 잃고 눕고 마침내는 자신마저도 건강을 잃고 불과 2-3년 만에 전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했으나 한 칸의 전세방도 얻지 못할 형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절로 들어온 복이 저절로 나가는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절로 들어온 복은 저절로 다 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결코 하나님의 허락 없이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한번은 어느 여집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방에 내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나 봐 주세요! 내 다이아몬드 반지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난데없는 반지 때문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자는 아이들을 깨고 베개를 털고 이불을 뒤지고 야단이 났습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 반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오쯤이 되어서 그 집사님이 잃었던 반지를 찾아서, 기쁘게 돌아오면서 몇 번이고 "목사님,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자기가 오던 길을 자세히 살펴보고 가는데 시장통 큰길에 떨어진 반지를 누가 흙 위에서 발로 밟고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시장통에 던져 놔도 가져가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 주님이 축복의 문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계3:7).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1). 그러므로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올해에는 우리도 이삭처럼 백배의 복을 받읍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누가 감히 하나님의 허락 없이 그 복을 가져갈 수 있습니까?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이 백배의 복(福)을 주십니까? 창세기를 보면,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세 번 들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러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12:10). 이삭 때에 두 번째 흉년이 들었으며(창 26:1), 야곱 때에도 가나안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창42:1, 2). 사람에게 있어서 뭐니 뭐니해도 배고픈 설움만큼 큰 설움은 없습니다. 이삭은 흉년의 굶주림을 면하려고 당시 세계의 곡창지대로 유명한 애굽 땅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떠나는 이삭을 하나님께서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삭아! 이삭아!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경우,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내친걸음에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더 이상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가던 발걸음을 중지하고 그랄 땅에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백배의 복을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백배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모리아산으로 향하던 이삭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은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을 오르면서 아브라함에게,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창 22:6, 7). 아브라함은 말하기를,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손에 불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바칠 때도 이삭은 반항 없이 순종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 117세요, 이삭의 나이는 17세입니다. 하나님은 확실하게 순종하는 자에게 백배의 복을 주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애굽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나라입니다. 우상숭배의 나라입니다. 죄와 불신으로 가득 찬 나라입니다. 범죄와 타락의 장소입니다. 특히 도덕적으로 문란한 곳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애굽에 가서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겼던 곳입니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白鷺)야 가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나안은 교회요 애굽은 이방 세상입니다. 성도는 비록 흉년이 들어도 하나님의 교회를 떠나 애굽과 같은 세상에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3. 하나님은 약속을 굳게 믿는 자에게 백배의 복(福)을 주십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두 번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1)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3) 2)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어 천하만민이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4) 기독교는 언약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두 개의 언약입니다. 구약(舊約)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신약(新約)은 메시야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언약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믿는 것입니다. 이삭이 약속된 언약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해에 백배의 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손입니다. 믿음은 축복을 받는 손입니다. 믿음이란 손이 없으면 은혜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비처럼 내려주시는 축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랄 땅에 내려가 첫해에 농사를 지어 백 배의 소출을 내었습니다. 그가 평소에 십 배의 수확을 올렸다면 그 해는 천 배의 소출을 냈다는 말입니다. 그가 너무도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 농사하여 그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창 26:12-14).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되 이방인이 시기하리만큼의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어느 나라나 일인당 국민소득이 오천 불 이상이 되면 사람들이 점차 교회를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제가 풍요로워지자 한국교회도 이런 의미에서 적신호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건강한 믿음으로 무장해서 경제적 풍요 가운데서도 주님을 더 의지하고 더 열심히 전도하고 더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며 모이기를 힘쓰겠다고 다짐하며 결심합시다. 이삭은 하나님의 복(福)으로 이방에 와서 이방인이 시기하리만큼 거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삭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우물도 파서 샘의 근원을 얻었습니다. 샘의 근원이란 복의 근원이란 의미입니다. 사막에서 샘 근원을 얻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샘 근원을 가지고 있으면 성주가 될 수 있고, 추장이 될 수 있고, 지주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사막의 샘 근원은 현대의 유전보다 더 큰 재산이었습니다. 이삭은 이와 같은 백배의 복(福)을, 하나님을 순종함으로, 그리고 언약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도 올해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백배의 복을 받아서 지난날의 부족과 손실을 모두 채우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2015-02-12
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성경 창세기에는 3사람의 조상이 등장합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 그들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만을 따먹고 선한 인류가 번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야 말았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타락하므로 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롬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한 말씀대로 입니다. 노아는 아담이 타락 후에 제2의 조상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홍수 심판 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에게 축복하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시의 가장 완전한 의인이었던 노아를 세웠으나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위로 돌아가고 홍수의 심판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원죄로 타락하고 범죄로 파괴된 인간을 구원할 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뿐이었습니다. 여기에 세움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진리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 원리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등장합니다. 창12:2,3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아담이나 노아에게 축복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창15:4,5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라는 나이 늙고 경수도 끊어진 아기 낳을 소망이 없는 노경의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무덤과 같은 사라의 태속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역사할 때 언약의 자식인 아들을 낳게 돈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결국 이삭은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낳은 자식이 되었습니다.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잉태하였으니 아브라함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 되는 원리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은 하와가 죄와 율법의 노예가 된 죽은 자를 낳았고 신약은 사라와 마리아가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할 자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잉태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따라 잉태케 하사 언약의 자식을 낳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죽은 자 아담의 후손이 아니요 성령으로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축복의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한 성경의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에게 믿음으로 많은 축복의 자식을 낳게 하는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100세에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하며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1. 축복의 말씀의 씨를 나의 마음 배에 잉태케 하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잉태한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잉태되는 기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쫒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축복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말씀을 잉태한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2천 년 전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를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성령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배속에 잉태시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배속에 성령으로 잉태시킬 수 있는 씨앗입니다. 벧전1:16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의 씨는 우리의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큰 사건을 계획하시고 성취시키려고 할 때에는 먼저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게 될 때 큰 결과 열매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생각이나 환상이나 감정에서 된 것이 아니라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먼저 임하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하여 축복의 말씀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받아 자기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나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요 나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천하 만민이 나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건지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삼기 위하여 호렙산 가시 떨기 밑에서 축복의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거듭 말씀하여 축복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잉태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 심령 속에 살아 잉태될 때 비로소 큰 사건으로 이루게 됩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사건을 이룬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두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었던 것입니다. 세계사를 움직인 신앙의 사람들도 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된 후에 그대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고아의 왕 조지 뮬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시81:10에 “나는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 말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어지고 무엇이든지 간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짓고 모든 필요한 것을 기도로 해결하였습니다.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때마다 필요한대로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3천명의 고아를 살렸고 평생에 풍성한 축복을 누렸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되기만 하면 그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생활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잉태케 하는 성령을 언제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서 범사에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기를 바랍니다. 2.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십시오. 말씀이나 생각이 마음뱃속에 잉태된 다음에 믿음으로 그것이 자라나는 꿈을 그리며 그 꿈을 마음 뱃속에 설레도록 채우고 자나 깨나 꿈이 이루어진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나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말씀하시고 그를 밖으로 인도하시고 밤하늘의 별들을 헤아리게 하시고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게 하셨고 가나안을 상속으로 주시기 전에 멀리서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므로 가나안땅을 분명하게 소유하는 꿈틀거리는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잉태한 사람은 자나 깨나 꿈을 꾸며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그 씨를 자라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말씀이나 아이디어가 잉태되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진 모습을 그리십시오. 그 씨가 마음 뱃속에 가득히 채우고 꿈틀거리게 하십시오. 우리 마음뱃속에 가득 찬 꿈은 계속 꿈틀거리게 하면 자라나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군에 입대하면서 큰 꿈을 가지고 군 생활을 하였으며 그 꿈을 거의 다 이루었습니다. 저는 우리 일신교회에 대한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에 대한 큰 꿈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 큰 꿈은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우리 일신교회에 오도록 되였을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매일새벽에 기도하며 성경읽기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 영광 보리라” 요11:40말씀이 노래로 터져 나왔습니다. “일신 일신 할렐루야 -----------일신 일신 일신 성도들이여 영광을 보리라” 그때 저는 군종병 이선목이라고, 이호문 목사님 아드님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복음성가 가수입니다. 그와 함께 곡을 맞추면서 하루 종일 매일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에 와서는 벽에다 크게 써 붙여 놓고 우리 식구가 모두 함께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11:을 펴서 성경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때 제 가슴이 뜨거워지며 말씀에 은혜가 되고 “하나님 영광을 보리라” 설교 말씀을 단숨에 써내러 가게 되었습니다. 일신교회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저는 그때 확신하였습니다. 지금도 확신합니다. 제게 이 말씀이 마음 배 속에 잉태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음배속에서 꿈틀거리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시면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천상의 24장로님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금 면류관을 다시 벗어서 주님 보좌에 던지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전개 될 것입니다. 믿는 대로 될 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입으로 해산 하십시오. 그리고 기고, 걷고, 뛰어다니게 하십시오. 롬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입으로 말하고 시인하게 될 때 창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우리의 언어를 통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살아 역사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 봉사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입술로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상태의 믿음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지 않는 믿음은 잠자는 믿음입니다. 속에만 있는 믿음-죽은 상태에 있거나 잠자는 상태에 있는 믿음은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할 때 이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음을 입으로 해산하게 하여 살아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으로, 사래는 사라-열국의 어미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게 했습니다. 말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것이 말로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해산하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사라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 열국의 아비여!” 또 아브라함이 “사라-열국의 어미여!”하고 서로 불러댔습니다. 90,100세 꼬부라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런 말하기가 굉장히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사라는 그들의 마음 배 속에 잉태된 것을 입을 통하여 해산을 하였습니다. 믿음을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들은 이웃사람은 자식도 없는 늙은 주제에 열국의 아비 어미라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고 비웃었습니다. 노망이 들어도 보통 들은 것이 아니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사라는 일단 잉태된 것을 해산 해 놓고 보니 시원했고 그것이 기어 다니고, 걷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게 되고 더 힘을 얻어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입으로 믿음을 시인하게 되자 그들의 믿음은 더욱 살아 움직였고 축복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1년이 지난 후 정말 하나님 축복의 말씀의 씨앗-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 감격 했겠습니까? 100년 묵은 썩은 고목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기적이 하나님 말씀의 씨를 받아 마음 배속에 잉태하고 자라게 한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사람들 대열에서 낙오자 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4. 어려운 잉태 어려운 해산을 통하여 얻은 것 모두를 하나님 앞에 내 놓으십시오. 그 이상의 것을 도루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어렵게 아이를 잉태하였고 어렵게 해산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일생일대에 중대한 시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약속과 언약으로 베풀어 주신 모든 축복을 다 거두어 가 버리는 절망적인 순간이요 또 자신과 그토록 사랑스런 아들과 함께 죽어버리는 비장한 결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날을 번득이는 순간 그 생애의 전부를 희생하는 순간이며 또한 자신이 제물이 되어 죽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영원한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일시적인 사랑을 죽이는 결단을 내렸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인간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준비하신 양을 잡아 축복의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축복의 새장이 펼쳐지게 아브라함의 손을 계속 잡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였던 것입니다. 그는 승리한 것입니다. 그는 죽고 다시 산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은 6대주 5대양에 믿음의 후손을 거느린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말씀대로 되였습니다. 약2:21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이요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자신에게서 산 믿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축복의 말씀에 신앙을 가집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해산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던 그 축복이 우리의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100점은 없다/ 욥20:21
100점은 없다 욥20:21 요절 :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 (욥20:21) 본문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환란을 겪고 있는 욥에게 친구 소발이 한 말이나 그런데 욥에게는 해당치 않는 것으로서 소발이 큰 오류를 범하고 있음입니다. 그러나 악인에 대한 원론적인 내용은 맞는 말임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이 됩니다. (21절), 어느 누구에게도 100점짜리 인생은 없습니다. 100점짜리 인생은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100점짜리 생을 소유하고자 함에 범사가 불만족이며, 삶의 기쁨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불만족Ⅰ : 건강 인간의 육신은 기계와 같고, 흙으로 지어진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생을 살아가노라면 이런저런 질병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사람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벽하게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무슨 병이라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100점짜리 건강은 없습니다. 두통, 당뇨, 고혈압, 저혈압, 설사, 변비, 허리디스크, 목디스크, 온몸이 저리고 쑤심, 안질, 골다공증, 정신병, 무좀, 습진, 귀, 입, 간, 장, 치아, 피부... 이루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희귀병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삶에서 건강은 중요하고도 필요합니다. 해서 건강에 주의도 해야 하고, 관심도 가져야 합니다. 허나 내 몸의 어디도 고장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질병이 생길 수 있고, 갖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몸에 좀 이상 라도(이상이 생겨도) ‘이럴 수도 있지 뭐 사람인데... ’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이는 바울이 자기 몸의 찌르는 가시, 곧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구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십니다. 이후, 바울은 자신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니 그의 몸은 병이 없어야 하고, 혹시 병에 걸렸더라도 고쳐주셔야만 합니다. 헌데 그의 몸에는 병이 있었고, 하나님께선 고쳐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것도 그의 간구는 인간의 욕망을 위한 재물, 권력을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병을 낫게 해달라는 것이었건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니요? 하나님께서 바울을 버리신 것일까요? 외면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플루머(Plummer)의 말을 빌립니다. “바울의 기도는 거절당했으나 더 큰 선물을 받았다” 인간은 고통과 약함을 통하여 영이 완전해 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약함을 알고 겸손히 자기를 낮춤은 하나님의 능력이 발현되는 가장 좋은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100점짜리 완전한 건강을 바라지 말고, 지금의 건강에 만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100점 건강을 갖고자 안달을 하면 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과 육이 합성된 존재임으로 영적 건강으로 내적인 질병을 정복해야 합니다. 건강한 영으로 50의 아픔을 20, 10, 5로 줄여야 합니다. 50의 아픔을 80, 90, 95로 만듦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몸을 사랑하되 내 몸을 우상화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완전한 건강을 바라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간구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도리어 기뻐했고, 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라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찌르는 가시를 통하여 머물게 했고, 모든 기독교인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머물게’라는 헬라어 ‘에피스케노세’는 ‘장막을 펴고 확고부동하게 머문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동의 은혜를 자신에게 머물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100점짜리 건강이 없음을 알고 지금 내 몸의 아픈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도와, 믿음으로 고통을 줄이고, 기쁨으로 힘있게 살아야 합니다. 건강에 대한 불만족을 버리시고 지금의 건강에 만족하며 사십시오. 병이 있어도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 바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건강이란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좋은 상태이거나 아무런 병도 없고 또는 약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에 있는 말입니다. 불만족 Ⅱ : 사람 부모, 자녀, 부부, 형제자매, 교우, 이웃, 직장의 상하... 사람은 사람,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부딪치며 생활하고 있고, ‘너’에게서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너’가 ‘나’에게 100점짜리가 되어주길 원합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100점짜리는 없습니다. ‘너’도 ‘나’도 100점짜리는 아닙니다.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사장, 내 친구, 내 동료, 내 목사, 내 교인에게서 100점을 원해서는 아니됩니다. ‘너’에 대한 ‘나’의 불평불만은 ‘너’에게서 ‘내’가 기대하는 100점을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없는 것을 찾으니 불평이 나오고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너’에게서 부족함이 보이면 ‘나’에게도 부족함이 있음을 보고 자족해야 합니다. ‘너’가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주어야만 됩니다. “너에게서 필요를 찾으려 말고 ‘내’가 ‘너’의 필요가 되어주라” 제 결혼 주례사입니다. 예수님께선 내어주신 사랑을 하셨습니다. 생명까지 내어놓으시고 우리를 만족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너와 나, 우리는 언제나 받으려는 사랑에 주려 있기에 항상 불만족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에 대한 불만이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면서도 ‘너를 위해서’라고 위장하기도 합니다. ‘나’라는 존재 의미를 상대에게서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바라고, 지나친 욕구충족의 추구 때문에 미움이 생기고, 싸움이 발생하며,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이 어떻다구요? 아내가 어떻다구요? 내 자식은 왜 이 모양이냐구요? 내 이웃이 싫다구요? 없어졌으면 좋겠다구요? 없어보십시오. 무인도에 가서 살아 보십시오. 불만이 제거되는 그 순간부터 가슴을 치고, 외롭고, 슬플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 100점짜리 찾지 않으셨습니다. 하나같이 근량미달이었습니다. 그러나 100점짜리로 만드시려고 3년 동안 이끌고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다듬으셨습니다. 사람을 자기 욕망의 대상으로서 관계하면 할수록 불만족의 덩어리는 더 커지며, 기쁨의 삶은 더 멀어집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자매, 내 교인, 내 목사, 우리사장, 내 직원을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100점짜리는 없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일 뿐, 가까이 가서 보면 내 것보다 더 작습니다. 어떤 부인이 주님께 자기를 한번 만나달라고 늘 기도했답니다. 그녀의 끈질긴 청원에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네 소원을 들어주마 3가지만 말해라. 더는 아니된다” “지금의 남편과 도저히 못살겠으니 그를 죽게 하고 더 좋은 남편과 살게 해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 소원은 즉시 성취되었습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데 문상객들이 모두 남편의 온갖 좋은 점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너무 성급했음을 후회했습니다. 해서 주님께 “그만한 남편도 없는데 제가 미련했으니 다시 살려 주세요”라고 간구, 두 번째 청도 즉각 이루어졌습니다. 그녀는 이제 딱 한번밖에 기회가 없는데 무엇을 구할까? 영생불사?, 돈?, 권력?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좋은데... 궁리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구할 것이 너무 많아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여인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제 마지막인데 무엇을 청원할까요? 제발 가르쳐 주세요” 주님께서 껄껄 웃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살다가 무슨 일을 당하여도, 누구를 만나도, 항상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달라고 청하거라” 불만족 Ⅲ : 축복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이 땅위의 누구에게도 결코 100점짜리 축복이 없습니다. ‘쌍가마에도 근심이 있다’ 우리의 속담입니다. ‘풍족할 때에도 곤액이 이르리니(22절)’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20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 한결같이 100점짜리 복이 없음을 말씀하심입니다. 인간의 대표적 탐욕은 돈, 물질입니다. 헌데 이에 대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 절대적 필요충족을 할 수 없습니다. 스토아학파는 “당신이 만약 누구를 행복하게 하고자하면 소유물을 증가 시켜주지 말고 그의 욕심을 제거해주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학설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욕망을 없앨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욕망 제거가 자급자족이 아니됨을 알았습니다. 신급자족,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것을 배웠습니다(빌4:1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내 복을 타인과 비교, 행복해지려고 하면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다. 까닭은 죽을 때까지 찾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복, 나의 행복은 지금 여기, 내 안에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복을 받았고 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행복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불만족, 불행은 내가 복을 받았고, 행복한 사람임을 모르거나, 사단에게 빼앗겨서 와지는 것입니다. 100점짜리 완전한 복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족 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은 파멸을 초래합니다. 놀만 빈센트 피일(N.V.Peale) 목사가 발리(Bali)섬 사람들이 세계에서 제일 행복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갔습니다. 큰 산업 시설도, 재미있는 오락시설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가 ‘그런데 왜 그들이 행복하게 살까?’ 라는 의문을 갖고 일주일 동안 섬 주민들과 인터뷰한 결과입니다. 1,우리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We have nothing). 2,우리는 단순하게 삽니다(Our life simple). 3,우리는 서로 좋아합니다(We like each other). 4,우리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We have enough to eat). 5,우리는 아름다운 섬에서 살고 있습니다(We live on a beautiful island). ‘nothing\\\' \\\'simple\\\' \\\'enough\\\' \\\'like\\\' \\\'beautiful\\\', 주목해야 할 단어들입니다. 이란 왕 팔레비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중의 왕’을 자처하며 2500년전 누렸던 페르샤 왕국의 영화를 다시 이루겠다고 천명, ‘백색혁명’을 주도,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칭송까지 받았습니다. 허나 장기집권을 함에 따라 비밀경찰이 생겼고, 정치는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저녁 파티 비용으로 1억달러, 전용 비행기 화장실까지 순금으로 장식, 600명의 호위병...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 회교 혁명이 일어났고, 그는 왕좌에 축출, 모로코에서 바하마로, 바하마에서 멕시코, 미국, 파나마로 떠돌다가 1980년 7월 2일 카이로의 한 육군병원에서 임파선암으로 죽었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육체의 악에 물들여 있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 플라톤(Platon)의 말입니다.
10가지 재앙 /출11:1-3
10가지 재앙 /출11:1-3 2011-08-22 23:35:30 read : 4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 장대한 스케일, 수많은 등장인물들,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스토리 구성, 그리고 상상을 초월한 통쾌한 장면들... 하나님께서 시나리오를 쓰시고, 하나님께서 감독하시고, 하나님께서 제작하신 하나의 우주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적 드라마 출애굽기는 내용적으로 볼 때 크게 세 편의 연속된 사건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출애굽을 위한 준비 사건입니다.(1-6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라는 한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둘째는 출애굽 사건입니다.(7-18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셋째는 출애굽 이후 사건입니다.(19-40)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본문 말씀은 두 번째 사건의 한 부분입니다. 출 7:14-11:10까지 이어지는 소위 “열 재앙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8:1) 물론 바로가 보낼 리 만무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리 없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장정만 60만입니다. 남녀노소 전체를 합하면 200만 정도의 인구입니다. 저들이 노예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 막대한 노동력을 잃어버린다면 애굽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맛보기로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입니다. 이쯤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선선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요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보입니다. 그것을 본 바로가 거절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매를 드셨습니다. 바로 애굽 땅에 재앙을 퍼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려 10차례나 계속됩니다. 바로 왕이 버티다 버티다 결국 두 손을 듭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냅니다. 10차례 재앙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피 재앙입니다. 애굽의 모든 강과 하수가 피로 변했습니다. 둘째,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가 애굽의 온 땅을 덮었습니다. 셋째, 이 재앙입니다. 땅의 티끌들이 이로 변했습니다. 넷째, 파리 재앙입니다. 애굽의 온 천지가 파리로 뒤덮였습니다. 다섯째, 악질 재앙입니다. 애굽의 가축들이 악질로 죽었습니다. 여섯째, 악성 종기 재앙입니다 . 애굽 사람들과 짐승들이 지독한 피부병인 악성 종기에 고통을 겪습니다. 일곱째, 우박 재앙입니다. 애굽 전국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여덟째, 메뚜기 재앙입니다. 애굽 전역에 메뚜기 떼가 창궐했습니다. 아홉째, 흑암 재앙입니다. 흑암으로 애굽 전체가 어둠에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다 끔찍한 재앙들입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재앙들입니다. 이 재앙들 10가지가 쏟아짐으로써 바로가 항복을 선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냈습니다. 이 10가지 재앙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1. 하나님을 나타내심 출애굽기의 10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7:5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7: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8:22를 보면 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그리고 9:14, 9:16, 8:10 등을 보면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이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함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실제로 10가지 재앙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심판하시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것들은 참신이 아님을 만천하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피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나일 강은 생명의 젖줄입니다. 나일 강은 사막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애굽은 땅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이 사막인 애굽 땅에 사람들이 살고 대제국이 세워졌습니다. 전적으로 나일 강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애굽인들은 나일 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닐루스’(Nilus)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신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일 강이 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 죽음의 자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일 강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생사는 나일 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관하신다는 엄숙한 선포입니다. 다음으로 흑암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은 사막입니다. 사막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태양입니다. 구름 한 점 없이 1년 365일 대낮에는 태양이 저 하늘에 떠서 온 천하를 호령합니다. 당연히 고대 애굽 사람들은 저 태양을 신 중에 최고의 신으로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이 바로 태양신 ‘라’(Ra)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대낮에도 3일 간이나 애굽 온 천지가 흑암으로 뒤덮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태양 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태양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태양이 사람들의 생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10 가지 재앙이 모두가 다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던 것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이 사건으로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호 4:1, 6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망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6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나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6: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이점을 잘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힘써서 여호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확인시키심 이 10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시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시키신 바가 있습니다. 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시고 이 점을 다시 확인시키셨습니다. 7: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백성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바로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이 일방적인 선택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 10가지 재앙 사건을 조금 세심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 가지 재앙 중에 치명적인 재앙들은 애굽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재앙, 악질 재앙, 우박 재앙, 흑암 재앙, 그리고 장자 재앙입니다. 이 재앙들은 애굽 땅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고센 땅에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재미있는 관점으로 설명했습니다. 렘 31:31-3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셔서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혼인 서약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택하셔서 결혼 예식을 올리기 위해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혼 예식장은 저 시내산인데 지금 그곳으로 데리고 나가시려고 바로에게 이 재앙을 내리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아주 특별한 사랑]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난 정말 많이 공부했어. 하나님에 대해 말야.“ 자신 있게 말하지만, 누군가를 인정할 수 없어서 누군가 부럽다 못해 미워져서 혹은 자신이 못마땅해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는 당신. 부드러운 미소와 섬김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당신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친 손에 반지를 끼우고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주시고 고운 옷을 당신에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 잠겨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심 이 10 가지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재앙이 임하자 처음에 바로는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그러다 재앙의 강도가 심해지자 한 발 물러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말을 뒤집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바꾸셔서 보낼 마음을 바꾸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재앙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9:12, 10:20, 10:27에 반복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바로가 악성 종기 재앙이 임했을 때, 메뚜기 재앙이 임했을 때, 그리고 흑암 재앙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생각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셔서 바로가 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이 10가지 재앙의 최종 목표가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자 재앙까지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자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 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출 12:21-2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한 마디로 유월절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 죽음의 재앙을 피할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리고 그 집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그 집은 유월 곧 넘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살았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고 심판에서 구원받고 이 땅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10 재앙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심을 깊이 느끼고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새 이스라엘인 우리를 위해 놀랍게 역사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가지 재앙 /출7:14-11:10
10가지 재앙 /출7:14-11:10 2011-08-22 23:12:09 read : 4 2011년은 교회 표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로 정하였고, 이 표어를 따라 복음의 내용을 무엇으로 담을 것인가에 대하여 계속 출애굽기를 통해 강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개인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하나님 나라를 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 나라의 왕을 말해야 하고, 그 왕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면 역시 필시 왕의 권세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전의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왕의 권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매우 부족했습니다. 성경에는 옛 하나님 나라와 새 하나님 나라의 경영이 나타나 있습니다. 옛 하나님 나라는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인도한 나라입니다. 신약의 새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그 나라 왕은 누구며, 어떤 권세를 가졌는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전파의 내용에 이러한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지금 전해야 하는 복음전파의 내용에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 왕의 권세와 비교하여 신약의 하나님 나라 왕의 권세가 얼마나 더 크고 강한 것인지 나타내 증거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여호와의 강한 손의 권세는 일반 세계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강한 나라의 왕이 가졌던 권세와 비교하면 그 힘과 능력을 비슷하게 말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바로 왕을 항복시키고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 아들의 권세는 이런 세상 나라의 권세와 다릅니다. 그가 가진 권세에 대하여 성경은 죄사함의 권세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권세를 가진 왕은 인류 역사에 어느 누구도 없었습니다. 로마와 징기스칸의 원나라, 그리고 중국의 당나라이든지 이런 권세를 가진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전파의 내용에 담아야 할 것은 바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이 권세입니다. 오늘 본문이 상대적으로 다른 주일보다 분량이 매우 많았지요? 이는 10가지 재앙을 하나씩 강론하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10재앙 전체를 보고 말씀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직접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출애굽기 문맥을 다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하여 세워진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애굽에 내려간 70인의 야곱 후손들이 씨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레위 지파의 아들인 모세를 불러 애굽 바로 왕에게 보내어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어 시내산에서 처음 세워졌습니다. 모세에게 형 아론을 함께 하도록 하여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였다고 출애굽기 5장-6장이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가서 이스라엘을 내보내어 달라고 하자 바로 왕은 듣지 않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더 학대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는 모세에게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실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바로 그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구원하심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7장-1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 강한 손을 출애굽기는 어느 특정한 형식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 요술사들의 지팡이를 삼킨 일이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10가지 재앙과 전체적으로 한 세트가 된다고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10가지 재앙의 결정적인 재앙은 유월절 재앙으로 이 유월절로 말미암아 애굽 바로 왕이 항복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전초전의 성격을 가진 아론의 지팡이 사건은 성경에서 자주 되풀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여리고성 전투를 들었습니다. 여리고성의 승리는 나머지 모든 가나안 땅의 성읍을 차지하는 전투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항상 이렇게 서론에 가까운 승리가 있고 이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전쟁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평양전쟁을 들 수가 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말미암아 미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항복을 얻기까지 미국은 계속 일본의 본토까지 진격하며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와 같이 10재앙도 애굽을 융단폭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10재앙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냥 10재앙이 무엇이 있었는가를 아는 정도 그칩니다. 정작 모세가 10재앙을 기록한 의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10재앙을 전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세가 기록한 방식을 추적해 가면 모세의 기록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주보의 설교개요란에 써놓은 것처럼 10재앙을 9+1로 보았습니다. 이유는 앞의 9가지 재앙을 기록한 것과 10번째 재앙을 기록한 것이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게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이처럼 모세는 10번째의 재앙을 아주 특별하게 기록했습니다. 9가지 재앙에다 한 가지 더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9가지 재앙도 그냥 첫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 나열해서 보지 말아야 합니다. 9가지 재앙을 3+3+3=9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10재앙 전부를 수식으로 나타낸다면 (3+3+3)+1=10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3가지 재앙씩 동심원과 같이 반복되며 점차 확대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재앙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7:15절에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2번째, 3번째 재앙에는 나오지 않고, 4번째 재앙에 나옵니다. 8:20절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고 합니다. 이 말이 5번째, 6번째 재앙에는 나오지 않다가 다시 7번째 재앙에 나옵니다. 9:13절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8번째, 9번째 재앙에는 이런 말이 없어요. 그러면 왜 3재앙씩을 끊어 말하려고 하는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10재앙을 보시는데 또다른 기록방식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1번째, 2번째 재앙에는 애굽의 요술사들도 모세와 아론이 행하는 재앙에 맞섭니다. 그러다가 3번째 재앙에 때는 달라집니다. 8:18, 19절을 보십시다. “요술사들도 자기 요술로 그같이 행하여 이를 생기게 하려 하였으나 못 하였고 이가 사람과 가축에게 생긴지라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이렇게 3번째 재앙 때는 요술사들도 맞서서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 여호와의 권능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는 태평양전쟁을 살펴보아도 같습니다. 비록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했더라도 육군과 해군력을 동원하여 미국과 맞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점차 전세는 기울게 되고 많은 장수들을 전장에서 잃게 되고, 다른 장수들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게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3번째 재앙까지는 나일강을 시작으로 애굽의 모든 식탁에 그리고 애굽 온 땅으로 재앙이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4째 재앙부터는 말이 바뀝니다. 어떤 식으로 바뀌냐면 애굽 땅 애굽 사람에게는 재앙이 내리지만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이 내리지 않았다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즉 재앙을 내려도 여호와의 소유인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시켜 보호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8:22절을 보십시다.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이렇기 때문에 3번째 재앙과 4번째 재앙 사이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7번째 재앙을 보면 또다른 기록방식이 등장합니다. 우박 재앙을 내릴 때 9:14절을 보시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온 천하게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니” 그리고 9:18절에도 보면 “애굽 나라가 세워진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고 말합니다. 일찍이 애굽 땅에서 경험하지 못하였던 재앙이라고 반복하며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서 볼 때 3재앙씩 반복되면서 점점 더 강한 재앙으로 애굽을 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점 더 강한 재앙이 애굽에 임하는 가운데 10:7절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드디어 애굽의 신하들도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면 누가 굴복하겠습니다. 요술사들이 굴복했고 신하들이 굴복했습니다. 그럼 당연히 바로 왕이 항복할 차례입니다. 이러한 순서는 거의 모든 나라의 전쟁역사를 살펴보면 거의 같게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양 나라의 대표적인 장수가 나와 일전을 벌입니다. 그러다 한 쪽이 패하게 되면 전세는 기울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곧바로 항복하지는 않습니다. 끝까지 대항하다가 많은 군사들을 거의 다 잃고 나서야 왕이 비로서 항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10재앙을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그냥 의미가 없는 10재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3재앙씩 점점 더 강하게 내리다가 마지막 10재앙 때는 결정적인 원 펀치를 먹여 상대를 KO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예로 든 태평양전쟁에서도 역시 같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미드웨이 해전 후 큰 전쟁의 승리를 과달카날 섬에서 미군을 얻습니다. 이 섬의 비행장에 관한 싸움입니다. 그런제 태평양전쟁 때 일본은 전술적인 면에서도 미국에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이미 중일 전쟁을 치렀고 동남아시아에서도 전쟁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상대적으로 진주만 기습을 당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 들었으니 전술적인 면에서도 매우 약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약세를 과달카날 섬의 전투에서 뒤집어 버립니다. 미국이 전술적이 면에서도 일본을 능가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미드웨이 해전은 해군력만의 싸움이라고 한다면 과달카날 섬의 전투는 육해공의 싸움이었습니다. 과달카날 섬이 전략의 요충지였는데 이 섬을 탈환함으로 비로서 미국은 확실한 공격적인 전술을 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달카날 섬을 일본이 빼앗긴 것은 애굽의 요술사들이 굴복한 것과 어쩌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많은 섬들을 빼앗기며 점점 후퇴하게 된 일본군의 모습은 마치 애굽 바로 왕의 신하들이 굴복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끼나와의 본토로 진격한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이는 유월절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의 처음 난 것들을 다 멸하신 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이 항복학 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10재앙을 통해 여호와의 강한 손이 어떻게 애굽에 나타났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교리처럼 10가지 재앙을 읽게 되면 첫 번째 재앙도 예수님의 공로로 연결시켜 버리고, 두 번째 재앙도 역시 예수님의 죄사함으로만 읽게 되어 결국 모세가 말하고자 한 것을 다 놓치게 됩니다. 10재앙에 대하여 하나 더 생각해 보십시다. 첫 번째 재앙은 나일 강을 피로 만든 것이고, 9번째 재앙은 흑암으로 애굽 땅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창조의 시작은 창세기 1:2절에 말하는 바와 같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면서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고 하시며 흑암에 빛이 있게 된 창조를 말하였습니다. 이를 연상하면서 보면 애굽 땅에 흑암이 있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땅에는 빛이 있다고 했습니다. 10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할 때 애굽 온 땅에 임한 재앙을, 그 다음에는 그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과 가축, 동식물을 칩니다. 이것도 창조에서 땅을 만드시고 그 땅에 모든 동식물을 가득 채웠던 것과 대비가 됩니다. 그러니까 나일 강에서 즉 물에서 재앙이 시작되고, 이 물에서 나온 개국리가 애굽 모든 집의 식탁과 반죽그릇에까지 올라가고, 3째 재앙에는 이가 애굽 온 땅을 점령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7번째 재앙인 우박은 집 안에 들어간 것은 치지 않았지만 집 밖에 있는 것은 식물이나 가축을 다 멸했습니다. 우박 재앙 때는 삼과 보리가 아직 나기 전이었다고 하여 모든 식물이 다 멸절당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8번째 재앙인 메뚜기는 모든 식물을 하나도 남김이 없이 다 갉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박 재앙보다 메뚜기 재앙이 더 무섭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처음에 저는 별로 믿고 싶지가 않았더랬습니다. 그런데 펄벅의 대지를 읽으니까 중국의 메뚜기 재앙을 기록한 것이 있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메뚜기 재앙은 가끔 보도도 되고 있지요. 아예 먹을거리가 없도록 싹까지 완전히 먹어치워 다음 해에 농사지을 종자까지 없애버립니다. 이러한 재앙들은 최근에 일본 지진으로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에 오염된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 일에 대하여 세계가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 바다 물이 지구의 모든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일본 근해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바다가 오염이 될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 방사능 재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출애굽기의 10재앙을 기록한 방식을 따라 보면 그 의미를 더 확실하게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마가복음을 강론하면서 출애굽기와 병행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라 마가복음을 보면 1장의 내용과 병행합니다. 막 1:29-45절을 보십시다. “ ... ” 여기에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일, 많은 병자와 귀신들을 쫓아내신 일, 그리고 나병환자를 고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본문만 보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신 의미를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신비한 능력으로 병을 고쳤다라는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에 마가는 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한 일을 기록하는지 여간해서는 알 수가 없지요. 마가복음의 특성상 짧고 간결하게 기록하는데, 이 열병 치료는 전후 문맥에서 무얼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게 볼 때 이 열병 치료에 대하여 어떤 부가설명이 없으므로 아주 단순하게 예수님의 치료능력으로만 볼 것입니다. 마가가 연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원어를 찾고 문법을 따라 단어 하나까지 사전으로 추적하여 그 의미를 세밀하게 연구하더라도 이 자체로는 마가가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것은 제가 여러 번 여러분 앞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출애굽기가 아니면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우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셨고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여기서 ‘저물어 해질 때’라고 하고, 35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라고 하는 표현들은 출애굽기의 ‘아침에 일찍이’라는 말과 병행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2-34절에는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다고 하고, 39절에는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럼 이건 어떤 점진적인 모습을 나타냅니까? 장모의 집에서 시작하여 동네로 그리고 온 갈릴리로 확대가 되는 형식입니다. 즉 이것은 애굽의 온 땅으로 재앙이 점차 확대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면 읽어도 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인도하며 보호한다면 그 백성 중에 누구를 가장 먼저 책임을 지고 보호해야 하겠습니까? 그건 가장 가까운 심복의 가족을 돌보는 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하들의 가족을 편안하게 해야 신하가 왕을 위하여 충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애굽에 재앙이 내릴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애굽 땅과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의 땅과 사람과 구별시키셨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낸 권세 있는 새 교훈은 궁극적으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알리시려 함을 통해 하나님 아들의 권세가 무엇인지 나타냅니다. 그러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과 많은 병자와 귀신을 쫓아낸 일과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은 죄사함의 권세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애굽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은 이방인인 애굽에 재앙을 내림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죄사함의 권세로 하나님의 아들이 귀신과 병을 고치신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중간에 보면 주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결박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굽 바로 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하나님 아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왕으로 오셔서 죄사함의 권세를 나타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아들이 가장 가까운 제자의 가정을 돌아보셨고, 그 동네 사람을 치료하셨으며, 온 갈릴리에 전도하며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럼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갈릴리가 마치 애굽의 고센 땅처럼 구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이방인처럼 천하게 여김을 받던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주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가복음의 전체 내용과도 일치합니다. 천하고 가난한 이방인들이 주님의 나라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마가복음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갈릴리는 이방의 땅이고, 흑암에 앉은 백성이 거기 거하며, 사망의 땅과 그늘진 땅입니다. 이곳에 여호와의 강한 손이 아닌 하나님 아들의 죄사함의 권세가 임하여 구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여호와의 성막에 들어가지 못했던 부정한 자였습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로부터 배제되었던 불쌍한 자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 아들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자는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다고 하신 것과 일치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가정, 갈릴리 땅의 사람들, 나병환자 등과 같은 이방 땅에 거하며 죄인된 사람들을 의인이라 여기는 유대인으로부터 구별시켜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장의 이런 사건들 속에 어려운 난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를 알면 이건 쉽게 해결됩니다. 출애굽에서 여호와의 강한 손이 구원하심을 나타내 여호와를 알리려 하신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도리어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시거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까지 하셨고 소문이 나니까 동네에도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여호와의 종이 받는 고난 속에서 그는 입을 열지 않으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침묵하시었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으신다고 이사야 42:2절에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을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을 박히실 때 그 아래 있던 자들이 ‘너 자신을 십자가에서 구원하여 보라’고 조롱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자신의 권세를 온 천하에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권세를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에도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그는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겸손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 안에서 변방인 유대 땅 그것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산에서 11명의 천한 어부들과 함께 그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겨자씨와 같이 아주 작은 나라를 갈릴리 산에 세웠노라고 마가복음은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권세를 과시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약하심을 죽었다고 고린도후서는 말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즉 베드로의 장모처럼, 갈릴리 온 땅의 비천한 이방인들처럼, 문둥병자처럼, 불쌍한 죄인들을 죄사함의 권세로 건지시러 오셨다고 마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과 저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베드로와 같이 주님의 제자의 가족입니까? 갈릴리 땅에 거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나병환자처럼 그런 병자였습니까? 우리는 그런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정말 빛이 없었고 소망이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대 땅에서 거리로 말하자면 정말 멀리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더 큰 죄인이요 하나님께 대한 악한 오랑캐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저는 마가복음 1장에 나오는 어떤 사람들 보다 더 천하고 무능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들을 구별하사 구원하시고 세상의 유명한 자들과 부한 자들과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에 말했던 것처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들이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하신 자들로 교회를 함께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불러 부활의 몸인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며 성찬상에서 먹고 마심으로 참으로 권세있는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으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땅에 있어도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죄사함의 권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권능은 소리를 높여 거리에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은 천하가 알도록 하여 두려워 떨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권세는 그렇게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이 시대 가운데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교회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강남에 교회를 짓는데 2,000억원의 공사라고 합니다. 교회를 이렇게 크게 건축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 교회 담임목사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이제 교회도 세상에 대하여 말할 힘이 필요하기 때문에 큰 교회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구약의 솔로몬 성전에는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주님의 몸된 성전에는 젼혀 맞지 않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다려 돌아가실 때 옷 한 벌 입지 못하셨고, 그 있는 것도 찢기워 제비 뽑았습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주님의 몸으로 새 성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권력이나 세력을 형성하려고 하려고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겸손함으로 낮아져 섬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은 너무 쉽고 세상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교회를 이루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면 이건 성령이 함께 하는 교회요, 죄사함의 권세가 함께 하는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교회에 약한 자들이 들어오고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 들어올 때 교회는 더욱 기뻐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천한 자들이 들어온다고 부담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이들을 내 몸으로, 내 생명으로 여겨 보호하고 지켜내어 교회의 권세를 나타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권세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이 함께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다시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때 귀한 상급을 얻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상가에 세를 들어 504호에 거하는 저희 교회가 비록 작아도 세상을 이긴 믿음과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도록 함께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가지 재앙/ 출11:1-3/ 2009-08-12
10가지 재앙 출11:1-3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마치 한 편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 장대한 스케일, 수많은 등장인물들, 반전을 거듭하는 탄탄한 스토리 구성, 그리고 상상을 초월한 통쾌한 장면들... 하나님께서 시나리오를 쓰시고, 하나님께서 감독하시고, 하나님께서 제작하신 하나의 우주적인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적 드라마 출애굽기는 내용적으로 볼 때 크게 세 편의 연속된 사건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첫째는 출애굽을 위한 준비 사건입니다.(1-6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라는 한 개인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둘째는 출애굽 사건입니다.(7-18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셋째는 출애굽 이후 사건입니다.(19-40)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저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는 사건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본문 말씀은 두 번째 사건의 한 부분입니다. 출 7:14-11:10까지 이어지는 소위 “열 재앙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셔서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8:1) 물론 바로가 보낼 리 만무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저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리 없습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장정만 60만입니다. 남녀노소 전체를 합하면 200만 정도의 인구입니다. 저들이 노예였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 막대한 노동력을 잃어버린다면 애굽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필사적으로 버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맛보기로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입니다. 이쯤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고 선선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요술사들도 같은 이적을 보입니다. 그것을 본 바로가 거절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매를 드셨습니다. 바로 애굽 땅에 재앙을 퍼부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려 10차례나 계속됩니다. 바로 왕이 버티다 버티다 결국 두 손을 듭니다.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냅니다. 10차례 재앙은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피 재앙입니다. 애굽의 모든 강과 하수가 피로 변했습니다. 둘째,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가 애굽의 온 땅을 덮었습니다. 셋째, 이 재앙입니다. 땅의 티끌들이 이로 변했습니다. 넷째, 파리 재앙입니다. 애굽의 온 천지가 파리로 뒤덮였습니다. 다섯째, 악질 재앙입니다. 애굽의 가축들이 악질로 죽었습니다. 여섯째, 악성 종기 재앙입니다 . 애굽 사람들과 짐승들이 지독한 피부병인 악성 종기에 고통을 겪습니다. 일곱째, 우박 재앙입니다. 애굽 전국에 우박이 내렸습니다. 여덟째, 메뚜기 재앙입니다. 애굽 전역에 메뚜기 떼가 창궐했습니다. 아홉째, 흑암 재앙입니다. 흑암으로 애굽 전체가 어둠에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하나하나가 다 끔찍한 재앙들입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재앙들입니다. 이 재앙들 10가지가 쏟아짐으로써 바로가 항복을 선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 보냈습니다. 이 10가지 재앙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1. 하나님을 나타내심 출애굽기의 10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7:5를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7: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8:22를 보면 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그리고 9:14, 9:16, 8:10 등을 보면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이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참 신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함을 보이고자 하셨습니다. 실제로 10가지 재앙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을 심판하시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즉 그것들은 참신이 아님을 만천하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피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나일 강은 생명의 젖줄입니다. 나일 강은 사막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애굽은 땅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이 사막인 애굽 땅에 사람들이 살고 대제국이 세워졌습니다. 전적으로 나일 강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애굽인들은 나일 강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닐루스’(Nilus)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신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일 강이 피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이 죽음의 자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일 강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생사는 나일 강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관하신다는 엄숙한 선포입니다. 다음으로 흑암 재앙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은 사막입니다. 사막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태양입니다. 구름 한 점 없이 1년 365일 대낮에는 태양이 저 하늘에 떠서 온 천하를 호령합니다. 당연히 고대 애굽 사람들은 저 태양을 신 중에 최고의 신으로 추앙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이 바로 태양신 ‘라’(Ra)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대낮에도 3일 간이나 애굽 온 천지가 흑암으로 뒤덮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평생 처음 보는 광경입니다. 태양 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태양이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태양이 사람들의 생사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10 가지 재앙이 모두가 다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던 것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선포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라는 선포입니다. 이 사건으로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호 4:1, 6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망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6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나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6: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이점을 잘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힘써서 여호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확인시키심 이 10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시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시키신 바가 있습니다. 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시고 이 점을 다시 확인시키셨습니다. 7:1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백성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은 바로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이 일방적인 선택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 10가지 재앙 사건을 조금 세심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 가지 재앙 중에 치명적인 재앙들은 애굽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파리 재앙, 악질 재앙, 우박 재앙, 흑암 재앙, 그리고 장자 재앙입니다. 이 재앙들은 애굽 땅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고센 땅에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지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재미있는 관점으로 설명했습니다. 렘 31:31-3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셔서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혼인 서약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택하셔서 결혼 예식을 올리기 위해 애굽에서 데리고 나가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혼 예식장은 저 시내산인데 지금 그곳으로 데리고 나가시려고 바로에게 이 재앙을 내리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당신의 신부로 아주 특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아주 특별한 사랑]이란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난 정말 많이 공부했어. 하나님에 대해 말야.“ 자신 있게 말하지만, 누군가를 인정할 수 없어서 누군가 부럽다 못해 미워져서 혹은 자신이 못마땅해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는 당신. 부드러운 미소와 섬김으로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는 당신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친 손에 반지를 끼우고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주시고 고운 옷을 당신에게 입히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 잠겨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심 이 10 가지 재앙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재앙이 임하자 처음에 바로는 완강하게 버텼습니다. 그러다 재앙의 강도가 심해지자 한 발 물러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다시 말을 뒤집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바꾸셔서 보낼 마음을 바꾸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재앙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9:12, 10:20, 10:27에 반복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바로가 악성 종기 재앙이 임했을 때, 메뚜기 재앙이 임했을 때, 그리고 흑암 재앙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생각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셔서 바로가 보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이 10가지 재앙의 최종 목표가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장자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자 재앙까지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장자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 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장자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출 12:21-2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한 마디로 유월절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자 죽음의 재앙을 피할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리고 그 집 안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그 집은 유월 곧 넘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살았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을 면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 땅에서도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점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장자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 받고 심판에서 구원받고 이 땅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10 재앙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심을 깊이 느끼고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새 이스라엘인 우리를 위해 놀랍게 역사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가지 재앙/ 출7:14-25/ 2003-06-23
10가지 재앙 출7:14-25 어제는 선교부장이신 추교철장로님과 함께 논산 훈련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여 논산에서 훈련 받은지가 23년이 되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훈련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 군복음화 선교회 후원으로 4,953명의 훈병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푸른 잔디 위에 질서 정연하게 앉아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 주님께서 벳새다 들에서 줄을 맞추어앉은 5,000명의 장정들을 먹이셨던 오병이어의 그 기적을 생각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느라 아침도 점심도 걸렀습니다. 2시?동안 세례식을 베풀고 나니까 4시가 되었습니다. 하루종일 굶었지만 훈병들은 우리가 가기 전 12시에 이미 연병장에서 세례 예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장장 4시간 동안이나 그 뜨거운 잔디밭 위에서 세례식에 참석한 형제들을 보니 배고픔도 잊고 기쁨과 감격만이 넘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논산 틔체年?우리 나라 최대의 훈련소입니다. 한해에 약 20만 가까운 장정들이 군에 입대하게 되는데 그중에 ⅓ 넘는 숫자가 논산을 통해서 훈련을 받게 됩니다. 95년` 1월부터 99년 3월까지 훈련소에서 실시한 총 75회의 진중세례예식을 통해 세례받은 장명의 수는 총 266,979명으로 훈련소 입대 장병의 65%가 진중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 젊은이들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했든지 관계없이 지금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고 다짐한 후 세례를 받은 일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참으로 가슴 벅찬 하루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바로와의 1차, 2차 대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했던 바로에게 이제는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강팍한 바로를 압박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손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서 네 백성을 보내기를 거절하니 너는 아침에 하숫가에 가서 바로를 만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명의 자리에 일찍 나가 준비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5,000명의 장병들, 120명의 세례를 주는 목사님들, 그리고 약 100여명의 성가대원들 전체가 다 같은 마음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는 그 형제들이 일찍 나와서 세례 연습을 한 것 같아요. "자, 이제 문답을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5,000명이 일제히 손을 탁 드는데 멋있더라구요. 첫째,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주인 것을 믿습니까?"그러니까 "믿습니다!" 하면서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다시 내리는데 그것이 한두번 연습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세례를 주는 목사님이 명찰을 보기가 쉽지 않으니까 어깨에 명찰을 하나 더 만든 일 등 준비한 모습이 철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준비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은혜롭게 진행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사명의 자리에 일찍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네가 바로가 나가기 전에 너희들이 먼저 하숫가에 가 있어라" 무슨 일을 해도 끌려다니기 보다는 앞장서서 일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인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왜 재앙을 내려야 하는가를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 하나님이 참으로 은혜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10가지 재앙을 하시기로 결정했으면 그냥 시작하시면 될터인데 다시 모세와 아론을 하숫가에 보내 바로를 만나게 하시고 다시한번 왜 하나님이 당신에게 재앙을 내려야 하는지, 당신이 지금 어떠한 위치에 서 있는지를 한번 더 설명하고 그래서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4-25절 말씀에 보면 "마땅히 주의 종은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힘바 되어 그 뜻을 쫓게 하실까 함이라" 이제는 더 이상 안되겠다고 결정해놓으시고도 한번 더 주의 종을 보내서 깨달은과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7번 말씀하신 중 첫 번째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자신을 향해서 조롱하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의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용서를 빌고 있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70번씩 7번,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를 원합니다.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를 설명했으나 바로는 듣지 않았습니다. 싫어했습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제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출애굽기 4장 17절에 보면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양떼를 몰고 다니면서 자기 몸을 의지하기도 했고, 양떼에 해를 끼치는 여러 짐승들을 쫓기도 하던 막대기가 주님을 만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팡이가 나올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그를 부르시는 그 시간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의 지팡이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 지팡이에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팡이를 보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능력과 전능의 하나님, 엘솨다이를 기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하수를 치는 모세와 아론을 생각합니다.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하지 않았던 계시록 2장의 두아디라 교회, 이세벨을 용납함을 책망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완악함으로 인해서, 음행함으로 인해서, 교만함으로 인해서 회개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하시기를 부탁합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바로는 그 마지막 기회까지도 거절을 했습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쳤습니다. 물이 다 피로 변했습니다. 애굽에 있는 온 땅의 물이 나무 그릇과 돌 그릇에 있는 물까지도 피로 변했습니다.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자 마실 물이 없어진 애굽 사람들이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적 속에는 보다 깊은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단순히 물이 변해서 피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술객들도, 일정 부분의 물을 피가 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물이 변해서 피가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애굽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일강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일강을 숭배했습니다. 이집트를 보면 대부분의 국토가 사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케냐에서 발원된 나일강이 쭉 내려오면서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 지중해로 빠져나갑니다. B.C 2000년 전후 시대에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세우면서 그 인간의 능력을 자랑했던 파라오 시대도 대부분 나일강변 주변에서 문명의 꽃을 피우고 인간의 힘을 자랑했었습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를 보아도 모두가 강 주변이었습니다. 황하가 그렇고, 티그리스, 유프라데스, 나일강이 그렇습니다. 세계 어느 도시를 보아도 강을 빼 놓고 도시가 형성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물은 중요하지요. 그러나 애굽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일강은 좀 더 특별한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생명을 주관하는 신인 '오시리스'가 애굽 사람들을 위해 나일강을 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일강을 신적인 존재로 숭배했습니다. 생명을 주관하는 신 '오시리스'가 애굽을 불쌍히 여겨서 내려준 거룩한 강 나일, 그런데 그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고기가 썩고, 냄새가 나서 마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나일강이 피로 변했다고 하는 그런 모습보다도 한걸음 더 나아가 우상숭배의 근본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상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우리의 삶의 모습들, 그것을 근본적으로 깨뜨리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시리스' 신이 주었다고 하는 나일강을 숭배했던 애굽 사람들 마음속의 우상을 깨뜨리시는 우리 주님, 오늘 이 시대에 우리 속에 존재하는 우상,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우상들이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가 가진 특징을 성경에서는 강팍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 말하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교만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어떤 사람의 좋은 충고도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의 고통은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그저 자신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사람이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은총의 보금자리에 있다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내가 겸손에 거하면 다른 사람들도 은혜의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은 말씀합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겸손한 자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겸손하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인해서 여기에까지 왔지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으로 분노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이제는 주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제는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모든 역사 속에 언제나 주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의 완악함과 나의 강팍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떠나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떠나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사망이요, 죽음이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애굽 백성들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의 이 깊은 뜻을 헤아리면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보다 겸손하며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겸손의 미덕을 갖는 성도의 생활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져버렸던 우리의 완악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 내 마음을 열기를 원합니다.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시며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주님, 이제 우리의 교만을 버리고, 완악함을 버리며,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어지는 그러한 삶을 원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결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바로의 완악함 같은 그러한 모습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0배나 나은 비전의 사람/단1:17-21
10배나 나은 비전의 사람/단1:17-21 2003-06-09 09:30:21 read : 15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로, 또 내일을 맞이할 때는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크던 작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적은 것을 보게 됩니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도전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남자는 그냥 집 안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래리 월터즈(Larry Walters) 라는 사람은 트럭 운전수라고 하는데 그의 평생 꿈은 비행기를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하였지만, 시력이 나빠서 조종사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는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는 헬륨가스 통과 기상관측에 사용하는 대형 풍선 45개를 사왔습니다. 그는 헬륨 가스를 그 풍선에 넣고, 풍선의 줄을 의자에 매달아 하늘을 날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 50-60미터를 날아갈 때에 엽총으로 풍선 한 두 개를 떨어뜨리면 지상으로 내려올 줄 알았습니다. 그는 지프차에 고정시킨 줄을 끊고 하늘에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공중으로 날아오른 풍선은 순식간에 3,300m 상공으로 올라가서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공군에서는 국제선 여객기로부터 어떤 이상한 비행선이 국제 항공들이 날아가는 항로에 떠다니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밤이 되니 월터즈의 비행선은 바다 쪽으로 움직여 갔습니다. 공군에서는 헬리콥터를 보내 구출작전에 들어갔습니다. 구출하는 긴 이야기는 드리지 않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를 구출하여 땅으로 내려오게 하였습니다. 그는 땅으로 내려오자마자 당국에 불법 비행이라는 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수갑을 찬 채로 끌려갈 때에 방송국 기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월터즈씨 왜 그런 일을 저질렀나요?" 래리 월터즈는 가던 길을 멈추고서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남자가 그냥 집에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남자가 그냥 집에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신앙 생활하신다는 분들이 그냥 집에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고통은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피아노의 속에는 강한 철판에 240 가닥의 철사들이 팽팽하게 걸려 있습니다. 철사들이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란 여간 긴장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강렬한 고통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고통은 마침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아서 새로운 도전과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다는 것은 그의 신앙을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일생 수동적인 신앙, 일생 그냥 앉았다고 돌아가는 신앙이라면 너무나 부족합니다.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정말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을 들어보라고 하면 다니엘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일전 제가 목회칼럼에서 "다니엘 학습법"이라는 책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2000년도에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동환 씨가 다니엘 학습법이라는 책이 장안의 화제가 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4년 간 평균 99.26점을 획득하여 전교 수석을 차지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독한 신앙의 어머니로부터 어찌 들으면 황당한 말 같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말아라. 성경 읽지 않으면 공부하지 말아라"는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다. 너는 너를 위하여 살려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 어떤 일도 하나님의 영광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김동환이라는 분은 구약 잠언 1:7의 말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 말씀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구약의 다니엘이란 분은 뜻을 정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유다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었을 때에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고 성전에서 사용하던 금은 그릇들을 빼앗아갔습니다. 그 때에 포로로 잡혀온 사람 중에 다니엘이라는 청년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세계국가를 꿈꾸고 있던 사람으로 그가 세계를 통일하여 지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민족을 통합하고 등용하는 정책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은 환관장 아스브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출신에서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세울 만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갈대아 즉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선발되면 왕이 지정한 음식과 포도주를 공급하면서 완전 국비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후에는 전원 공무원으로 임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 가운데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이란 청년은 벨드사살이라고 하였고, 하나냐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사랴는 아벳느고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새 이름으로 부른다고 하는 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름을 지어주는 이는 주인이고, 이름을 받는 사람은 종이라는 관계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소년들을 바벨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들의 신에 관계된 이름으로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게 될 때는 이름을 바꾸어주었던 것을 봅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의 뜻이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뜻인데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눈동자 아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 하나님의 정의로우신 판단에 합격하도록 살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국립 왕정학교에 들어가서 기숙사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을 따라 뜻을 정하였습니다. 저들은 바벨론 왕정 학교에 들어오는 영예를 누렸지만 혼을 빼앗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종교로 개종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이라는 청년을 참으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한참 배고프고 먹고 싶은 것들이 많을 때에 왕이 내려주는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환관장에게 채식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러면 왕이 내려주는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는 나쁜 음식이냐 하면 다 같은 음식이요, 왕 앞에 갔다왔다는 것뿐이지 음식이 잘못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도 있고, 자기가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바벨론 왕은 바벨론의 가장 높은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왕이었지만, 그들 종교의 가장 높은 제사장이었습니다. 왕이 내려주는 음식은 대부분이 그들의 신전에 올려졌다고 내려오는 제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이기에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이 내려주는 진미를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환관장은 이들 유다의 소년들 때문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유다에서 잡아왔지만 왕족들이요 귀족 출신이었고, 세계 대제국인 바벨론에서 양성하는 공무원들인데 얼굴이 초췌해지고 다른 소년들보다 못해 보이면 왕 앞에 자기의 자리가 위태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년들이 원하는 10일 간 시험해본 것입니다. 유다 소년들에게는 채식을 위주로 하였고, 포도주 대신에 그냥 물을 공급해준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채식이라고 함은 주로 콩과식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콩이라는 식물이 몸에 좋은 것 같습니다. 육식을 위주로 하는 소년들보다 채식을 위주로 하는 유다의 소년들이 얼굴이 더욱 아름다웠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좋아 보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채식이 육식보다 더 좋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들에게 학문을 주셨습니다. 모든 서적을 읽으면 깨닫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외에 다니엘에게는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아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20절 말씀에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들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고 했습니다. 10배나 나은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학교를 다녔고 같은 교수님들에게 배웠는데 누구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어떤 이는 10배나 나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에게 주어진 모습대로 살아야 하고 그에게 주어진 기능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나무를 예로 들면 사과나무가 배나무가 될 수 없고, 배나무가 감나무로 바뀔 수 없습니다. 돈을 예로 들면 돈이란 조폐공사에서 찍어내는데, 같은 규격의 같은 재질이지만 어떤 종이는 1000원짜리가 됩니다. 어떤 종이는 5000원짜리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10000원짜리가 됩니다. 그러니 10,000원짜리는 1,000 원짜리의 10배가 되는 가치를 지닙니다. 종이는 아무런 힘도 없고, 소원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 위에 그려지는 것으로 유통될 뿐입니다. 어떤 그림이 새겨지느냐에 따라 돈의 가치, 자신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와 열정에 따라서 1000원짜리의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고, 10,000원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들인데도 다 다르게 살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들이 다른 것을 보게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렇게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품은 생각이 그의 위인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이 생각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고상하면 그의 인생도 고상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32:8에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구역에 따르면 "고상한 자는 고상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상한 일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 분의 일생에 10배나 나은 인생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현재보다 10배는 나은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까? 뜻을 굽히지 말고 뜻을 정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약소국가의 포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정학교를 나왔고, 공무원에 임용되어 지내다가 그는 느브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왕을 거치면서 세계대제국 바벨론의 총리를 지냈습니다. 다니엘은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4)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이방나라인 바벨론 사람들이 보기에도 흠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흠이 없으면 이스라엘의 율법과 종교를 가지고 흠잡아 죽이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인사청문회라는 것이 도입되면서 흠을 들춰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흠 없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면 좀 나을 것 같아 추천하였지만, 더 많은 흠이 발견될 뿐입니다. 좀 배우고 앞장서 있다는 이들마다 도덕적으로 흠이 얼마나 많고 돈에 깨끗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인사청문회는 그 사람의 잘한 점은 다 덮어두고 그의 가능성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흠만 들춰내는 모임이 되었습니다. 언론에서도 사람의 가능성을 보지 않고 흠만 들춰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벨론 정부가 망하고 페르시아제국으로 넘어갔을 때에도 다니엘이란 분은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으면 그를 총리로 앉히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한 일이 아니며,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인품이 훌륭하고 청렴하였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까? 그러니 얼마나 정적들이 뒷조사를 하고 그의 흠을 들춰내고 캐고 다녔을 것입니까? 약80년 동안 그는 두 나라와 여러 왕들을 거치면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오직 흠 없이 살려는 그의 일관된 삶의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하는 정적들은 다니엘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다니엘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심문하였습니다. 그들은 그의 어음발행과 신용관계, 영주증 처리하는데 혹 뇌물이라도 받은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흠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의 청탁도 들어준 적이 없었고, 오직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비전을 말하지만, 비전과 인격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저는 인격을 선택할 것입니다. 정직하고 곧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의 삶은 일정한 방향이 있는 것입니다. 잠언 11:3에는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격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머리를 치켜들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과의 교제에 충실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 생활은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직장에서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아보셨습니까? 돈이라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생각을 건전하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 분이 가장 요긴한 자리로 몰아넣고 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시는데 누가 말할 것입니까? 다니엘은 열심히 배운 사람입니다. 공부하였다는 말입니다. 왕궁에서는 유다 소년들을 선발하여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당시 갈대아의 학문이란 세계 정상의 학문이었습니다. 공부하지 않고 훈련받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교육도 필요 없고, 훈련을 받지 않아도 저절로 잘 믿을 것이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역점을 두신 것이 교육이요, 훈련이었습니다. 제자훈련이었습니다. 자녀는 태어나지만 제자는 훈련으로 됩니다. 열심히 배우는 사람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에게는 믿음의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함께 거하면서 함께 공부하였고,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고 밀고 나가는데도 함께 힘을 합하였습니다. 일생 좋은 인간관계를 가졌고, 좋은 친구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인데, 경쟁의 대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한 자세로 친구관계를 떼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다가 친구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 도움 받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함께 가려고 해야 합니다. 잠언27:17에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시대에 친구들이 잘 되는 것으로 함께 빛이 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다니엘은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위협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무시하고 기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 것 같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외국에 있었지만, 결코 외국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척 콜슨이라는 분이 대학에서 연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라고 하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학생 하나가 화가 나서 콜슨의 말을 끊으면서 말했습니다. "이봐요, 콜슨, 세상에는 죽을 가치가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콜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자네가 무언가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내 생각에는 자네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일도 아무 것도 없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이냐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 것이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죽을 일이 없다고 하면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 사업 모두를 총동원하여 사용하다가 마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에디오피아라는 나라에 1936년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전도한 결과 48명의 신자를 얻었습니다. 그리고는 이탈리아 군대에 의하여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48명의 신자들은 고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체포되고 매를 맞아야 했으며, 교회는 불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행정부 관리인 도게사라는 사람은 기독교 지도자인 완다로라는 사람을 체포하였습니다. 밧줄로 묶고 숫한 고문을 가하였습니다. 완다로는 외쳤습니다. "이 밧줄은 마지막 심판이 아니요, 이것은 사람이 나를 묶은 것에 불과하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들은 죄에 해방될 것입니다." 도게사라는 사람은 완다로를 채찍질하였습니다. "외국인들은 떠났다. 그들은 더 이상 너를 돕지 않을 것이야. 신앙을 포기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협도 완다로의 신앙을 흔들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선교사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소. 그분이 나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5명의 남자들이 완다로를 때렸습니다.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니 대나무 감옥에 1년 간 가두어 놓았습니다. 드디어 외국의 여론 때문에 완다로가 석방되었습니다. 완다로가 석방되자마자 먼저 한 일은 여러 성도들을 모아 가지고 전날에 그렇게 핍박하던 정부 관리 도게사라는 사람의 밭에 가서 추수를 도와주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사랑입니까? 그 큰 사랑과 헌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42년에 다시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였을 때에 48명이었던 성도들은 1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확신과 헌신과 사랑의 열정은 48명 성도들을 1만명으로 끌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을 영접하는 완다로는 환한 얼굴로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다시 이곳에 보내신 것은 새신자들을 양육하라는 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초기 성도들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은 수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뜻을 정하고, 흠이 없고 훈련에 정진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결심이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일에는 일원 한푼도 쓰지 않겠다고 하는 결심이 있어야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사람은 모든 학생들 위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학문을 주셨고, 모든 책을 읽으면 깨닫는 지혜를 주셨고, 다니엘은 한 단계 뛰어넘어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앞에 섰을 때에 왕이 묻는 말에 거침없이 대답하였고, 바벨론의 모든 학자들이나 술객들보다 10배는 나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은 세상의그 어더한 사람들보다 10배나 나은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