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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2015-02-12
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성경 창세기에는 3사람의 조상이 등장합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 그들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만을 따먹고 선한 인류가 번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야 말았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타락하므로 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롬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한 말씀대로 입니다. 노아는 아담이 타락 후에 제2의 조상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홍수 심판 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에게 축복하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시의 가장 완전한 의인이었던 노아를 세웠으나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위로 돌아가고 홍수의 심판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원죄로 타락하고 범죄로 파괴된 인간을 구원할 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뿐이었습니다. 여기에 세움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진리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 원리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등장합니다. 창12:2,3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아담이나 노아에게 축복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창15:4,5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라는 나이 늙고 경수도 끊어진 아기 낳을 소망이 없는 노경의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무덤과 같은 사라의 태속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역사할 때 언약의 자식인 아들을 낳게 돈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결국 이삭은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낳은 자식이 되었습니다.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잉태하였으니 아브라함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 되는 원리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은 하와가 죄와 율법의 노예가 된 죽은 자를 낳았고 신약은 사라와 마리아가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할 자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잉태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따라 잉태케 하사 언약의 자식을 낳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죽은 자 아담의 후손이 아니요 성령으로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축복의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한 성경의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에게 믿음으로 많은 축복의 자식을 낳게 하는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100세에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하며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1. 축복의 말씀의 씨를 나의 마음 배에 잉태케 하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잉태한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잉태되는 기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쫒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축복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말씀을 잉태한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2천 년 전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를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성령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배속에 잉태시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배속에 성령으로 잉태시킬 수 있는 씨앗입니다. 벧전1:16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의 씨는 우리의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큰 사건을 계획하시고 성취시키려고 할 때에는 먼저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게 될 때 큰 결과 열매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생각이나 환상이나 감정에서 된 것이 아니라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먼저 임하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하여 축복의 말씀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받아 자기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나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요 나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천하 만민이 나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건지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삼기 위하여 호렙산 가시 떨기 밑에서 축복의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거듭 말씀하여 축복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잉태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 심령 속에 살아 잉태될 때 비로소 큰 사건으로 이루게 됩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사건을 이룬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두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었던 것입니다. 세계사를 움직인 신앙의 사람들도 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된 후에 그대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고아의 왕 조지 뮬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시81:10에 “나는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 말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어지고 무엇이든지 간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짓고 모든 필요한 것을 기도로 해결하였습니다.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때마다 필요한대로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3천명의 고아를 살렸고 평생에 풍성한 축복을 누렸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되기만 하면 그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생활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잉태케 하는 성령을 언제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서 범사에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기를 바랍니다. 2.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십시오. 말씀이나 생각이 마음뱃속에 잉태된 다음에 믿음으로 그것이 자라나는 꿈을 그리며 그 꿈을 마음 뱃속에 설레도록 채우고 자나 깨나 꿈이 이루어진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나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말씀하시고 그를 밖으로 인도하시고 밤하늘의 별들을 헤아리게 하시고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게 하셨고 가나안을 상속으로 주시기 전에 멀리서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므로 가나안땅을 분명하게 소유하는 꿈틀거리는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잉태한 사람은 자나 깨나 꿈을 꾸며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그 씨를 자라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말씀이나 아이디어가 잉태되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진 모습을 그리십시오. 그 씨가 마음 뱃속에 가득히 채우고 꿈틀거리게 하십시오. 우리 마음뱃속에 가득 찬 꿈은 계속 꿈틀거리게 하면 자라나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군에 입대하면서 큰 꿈을 가지고 군 생활을 하였으며 그 꿈을 거의 다 이루었습니다. 저는 우리 일신교회에 대한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에 대한 큰 꿈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 큰 꿈은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우리 일신교회에 오도록 되였을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매일새벽에 기도하며 성경읽기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 영광 보리라” 요11:40말씀이 노래로 터져 나왔습니다. “일신 일신 할렐루야 -----------일신 일신 일신 성도들이여 영광을 보리라” 그때 저는 군종병 이선목이라고, 이호문 목사님 아드님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복음성가 가수입니다. 그와 함께 곡을 맞추면서 하루 종일 매일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에 와서는 벽에다 크게 써 붙여 놓고 우리 식구가 모두 함께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11:을 펴서 성경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때 제 가슴이 뜨거워지며 말씀에 은혜가 되고 “하나님 영광을 보리라” 설교 말씀을 단숨에 써내러 가게 되었습니다. 일신교회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저는 그때 확신하였습니다. 지금도 확신합니다. 제게 이 말씀이 마음 배 속에 잉태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음배속에서 꿈틀거리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시면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천상의 24장로님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금 면류관을 다시 벗어서 주님 보좌에 던지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전개 될 것입니다. 믿는 대로 될 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입으로 해산 하십시오. 그리고 기고, 걷고, 뛰어다니게 하십시오. 롬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입으로 말하고 시인하게 될 때 창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우리의 언어를 통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살아 역사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 봉사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입술로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상태의 믿음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지 않는 믿음은 잠자는 믿음입니다. 속에만 있는 믿음-죽은 상태에 있거나 잠자는 상태에 있는 믿음은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할 때 이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음을 입으로 해산하게 하여 살아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으로, 사래는 사라-열국의 어미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게 했습니다. 말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것이 말로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해산하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사라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 열국의 아비여!” 또 아브라함이 “사라-열국의 어미여!”하고 서로 불러댔습니다. 90,100세 꼬부라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런 말하기가 굉장히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사라는 그들의 마음 배 속에 잉태된 것을 입을 통하여 해산을 하였습니다. 믿음을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들은 이웃사람은 자식도 없는 늙은 주제에 열국의 아비 어미라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고 비웃었습니다. 노망이 들어도 보통 들은 것이 아니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사라는 일단 잉태된 것을 해산 해 놓고 보니 시원했고 그것이 기어 다니고, 걷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게 되고 더 힘을 얻어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입으로 믿음을 시인하게 되자 그들의 믿음은 더욱 살아 움직였고 축복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1년이 지난 후 정말 하나님 축복의 말씀의 씨앗-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 감격 했겠습니까? 100년 묵은 썩은 고목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기적이 하나님 말씀의 씨를 받아 마음 배속에 잉태하고 자라게 한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사람들 대열에서 낙오자 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4. 어려운 잉태 어려운 해산을 통하여 얻은 것 모두를 하나님 앞에 내 놓으십시오. 그 이상의 것을 도루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어렵게 아이를 잉태하였고 어렵게 해산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일생일대에 중대한 시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약속과 언약으로 베풀어 주신 모든 축복을 다 거두어 가 버리는 절망적인 순간이요 또 자신과 그토록 사랑스런 아들과 함께 죽어버리는 비장한 결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날을 번득이는 순간 그 생애의 전부를 희생하는 순간이며 또한 자신이 제물이 되어 죽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영원한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일시적인 사랑을 죽이는 결단을 내렸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인간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준비하신 양을 잡아 축복의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축복의 새장이 펼쳐지게 아브라함의 손을 계속 잡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였던 것입니다. 그는 승리한 것입니다. 그는 죽고 다시 산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은 6대주 5대양에 믿음의 후손을 거느린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말씀대로 되였습니다. 약2:21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이요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자신에게서 산 믿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축복의 말씀에 신앙을 가집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해산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던 그 축복이 우리의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12제자를 세우신 예수님(1)/막3:1-19
12제자를 세우신 예수님(1)/막3:1-19 2003-05-27 11:46:30 read : 8 지난 주일에는 저희들이 우리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인 것을 공부했습니다. 저희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씀인지 형용할 수가 없어요. 저희들은 죄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도저히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병든 자에게, 병들어도 보통 병이 아니라, 문둥병과 같은 아무도 고칠 수 없는 골수 병들은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을 고치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네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장애물을 승리해서 소망 없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 온 그 믿음을 기뻐하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고, 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세리 마태를 부르시어 세상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미움받고 업신여김을 받는 이 약한 세리들, 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한 자리에서 같이 음식을 드시며 기뻐하셨어요. 그들과 같이 음식을 드시며 기뻐하시는 예수님, 그런 예수님을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쳐다보기만 하면 벌써 얼굴이 굳어지고 얼굴에 미움이 도는 이런 매국노들과 같이 식사하시면서 기뻐하시는 예수님. 진실로 우리 주님은 죄인의 친구시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인 것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12 제자를 세우신 예수님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12 제자를 세우셨는가? 예수님이 계시던 그 시대의 배경을 우리가 먼저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12 제자를 세우신 그 때가 어떠한 때며, 왜 세우셨는지, 또 어떤 사람들을 세우셨는지, 거기에 깊은 뜻이 있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은 어떠했는가? 결론적으로 그 당시의 지도자들, 종교적인 지도자와 정치적인 지도자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악했습니다. 한 나라가 잘 되려면, 한 가정이 잘 되려면, 한 교회가 잘 되려면, 지도자가 옳아야 됩니다. 지도자가 악하니 어떻게 그 시대에 소망이 있었겠어요? 또 그 당시의 백성들은 어떠했는가? 그 당시의 백성들을 보면 모두 목자 잃은 양들과 같습니다. 이 미련하고 연약한 양들, 방향을 모르고 이리저리 헤매는 양들. 모두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어요. 마음을 보면 모두 답답하고 슬프고 운명적이고 팔자 타령이고 한숨만 짖고, 모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장 30절에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리워져서 어두우리라. 진실로 어두운 세상이라고 했는데, 흑암과 고난뿐이고 빛은 구름에 가리어져서 소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절망적인 이런 시대에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들은 절망하거나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인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시대에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가슴 깊이 깨닫고, 머뭇거리지 말고 이런 일을 시작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통해서 오늘은 두 가지를 공부하겠어요. 그 시대에 지도자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또 그 시대에 백성들의, 양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시작하셨는가? 1절과 6절을 보면, 그 시대의 지도자 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종교적 지도자들, 종교적 지도자는 민족의 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지도자는 민생을 돌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종교적 지도자는 영적인 양심의 문제, 정치적 지도자는 육신의 문제를 관할하는데, 정치적 지도자가 양심이 올바르지 아니 하면, 거듭나지 아니 하면, 육신의 문제를 돌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지도자가, 그 나라의 종교가 썩으면 양심도 없고, 지도자도 썩으니까 나라가 썩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 가셨어요. 회당에 들어가니까, 1절,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병신이올시다. 여러분들은 병신이 되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저는 국민학교 다닐 때에 손 OO 이라는 오른손이 없는 친구가 있었어요. 오른손에 손가락이 다 없고 조그마한 손가락이 두 개만 이렇게 있었어요. 이름이 OO 인데 참 친했어요. 그 아이는 언제나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왼손으로 그림도 잘 그리고 노래도 잘 부르는데, 오른손은 꼭 주머니에 넣고 다녀요. 누가 손을 좀 보자고 하면 막 악을 부립니다. 나하고는 친하니까, "동명아!" "왜?" "내가 왜 오른손을 이렇게 넣고 다니는지 알아?" "몰라." "너는 내 친구니까 내가 보여줄게" 하고 보여 주는데, 아! 얼마나 불쌍한지. 이 청년도 손이 말려서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열등의식 속에 '나는 무슨 팔자로 이렇게 병신이 되었을까?' 하고 얼마나 운명을 저주했을 것이며, 사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그는 그래도 안식일에 하나님을 찾아서 회당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2절에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6절에 보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이에요. 이 바리새인들은 이 불쌍한 청년을 불쌍히 보기는 커녕, 자기들의 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용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권력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명성이 자꾸 올라가니까 이 불쌍한 사람을 미끼로 해서 예수님을 제거하는 도구로 쓰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양들을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모든 지도자의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런 영적 지도자들이 방황하는 양 무리의 길잡이가 되어서 앞서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터인데, 신음하는 양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지는 못하고 불쌍한 양 무리를 이용해 먹으려는 이 일을 볼 때에, 이는 정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어요.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으나 이들이 믿는 것은 종교입니다. 이건 종교예요. 이건 의식입니다. 설교하는 것도 의식이에요. 기도하는 것도, 금식하는 것도, 의식이요 형식입니다. 형식으로는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져요. 칼 막스(Karl Marx)는 '종교는 아편이다' 라고 했어요. 염불을 외우고, 미사를 올리고, 주기도문을 따르륵 욉니다. 주기도문을 따르륵 외우면 무얼 합니까? 주기도문을 따르륵 외우면 축복을 받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의식, 자기들의 형식, 자기들의 종교, 그런 것들을 자꾸 범하시니까, 예수님이 나쁜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니까, 이 지도자들의 마음을 보시는, 더구나 이 한 손 마른 사람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막 아파 죽겠어요.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서라."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 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노라.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질문하십니다, 4절,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줄 아느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들에게 '안식일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안식일을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분명한 분별력을 깨우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종교는 무엇인가? 참 종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종교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이들은 하나님을 몰랐어요.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걸 몰라요.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십계명을 지킨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냥 회당에 가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렇게 하는 것인 줄만 알아요. 그건 형식입니다. 금식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양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줄 아세요?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죽은 걸 가지고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뭡니까?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행하시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것은 거짓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주신 것도 우리가 안식일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선과 악의 분별력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분별력을 잃고 악한 일만 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자기를 모르는 이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고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잘 하는데, 기도하고 금식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선한 일을, 전도를, 정말 선한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엉터리 기도예요. 그건 고쳐야 됩니다. 성경 열심히 공부하고 지식만 많고 선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그건 엉터리 공부한 겁니다. 그건 종교예요, 종교. 행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내려 오셨어요?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답을 못 합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해요. 왜? 선악의 분별력이 없으니까. 선입관에 꽉 차서 그저 금식을 안 하면 악한 사람인 줄 알고 말이죠. 금식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은 말이죠, 금식을 더 많이 해요. 왜냐 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내가 선한 일을 하여야 할텐데, 너무나 부족하거든. 내가 선한 일을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정말 사랑을, 원수까지 다 사랑을 하여야 할텐데, 그걸 못 하니까 금식을 더 한단 말이죠. 이거 금식을 해야지, 어떻게 하겠어? 그러니까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은 금식 잘 합니다. 새벽 기도도 더 많이 나오고요.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데, 그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 잘 안되니까 기도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금식 기도도 하고, 철야 기도도 해야 하는 거예요. 아멘! 그런데 그것이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에요. 기도 안 하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인간이 어떻게 되겠어요?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집에서 불쌍한 사람을 짓밟고 불쌍한 자들을 이용하는 이들을 보시고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시고 노하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좀처럼 노하시지 않습니다. 이들은 엉터리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보니까 예수님은 자유 주의자 같아요, 엉터리 같아. 이상한 여자들이나 세리들하고 음식을 함께 하신단 말이에요. 에수님께서는 이들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십니다. 이들의 마음이 왜 이렇게 딱딱했어요? 이들의 마음이 왜 이렇게 완악했습니까?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어요.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다고 하면서도, 이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경배를 드리는 것인데, 똑바로 경배를 드려야죠.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몰랐습니다. 십계명이 뭡니까? 처음 네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켜야 되는 계명인데 그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제 오 계명부터 제 십 계명은 인간에게 지켜야 될 법인데 그건 뭡니까? 그건 지키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부모도 공경하고, 정말 사랑하면 살인이 뭡니까? 미워도 못 하고, 정말 사랑하면 간음도 못 하고, 정말 사랑하면 도적질도 못하게 되잖아요? 정말 사랑하는 것이 문제야.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만 믿고, 우상도 못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말씀 공부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안식일에 일하면 안되고, 병 고치는 것도 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몰랐어요.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습니다. 이들은 안식일도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것인 줄 모르고 있었어요. 이들은 한 손이 오그라져서 슬픔과 열등의식에서 헤매고 있는 이 사람의 심정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불쌍히 보시고 이를 구원하시길 원하시는지, 탕자를 그렇게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잃어버린 양을 찾도록 찾으시는 아버지의 심정, 이 불쌍한 이 병신의 그 찌든 마음에서부터 이를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 종교 지도자들이 모르고 있었어요. 양 무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이들을 보셨을 때 심히 근심하시고 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시고 원수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당당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그를 고치셨습니다.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이신 고로, 그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정말 그래요, 이건 그냥 말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을 정말로 공부한 사람들은 능력을 만나서 거듭나요, 달라져요. 말씀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엉터리 말씀을 배우니까 거듭 나지 않지. 말씀에게 기회를 안 주니까 말씀의 능력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원수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기를 책잡아 송사 하려는 것인 줄 아시면서도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웁니까? 불쌍한, 무시 받고 있는, 소외당하고 있는, 마음에 막 진통을 하고 있는 한 영혼을 불쌍히 보십니다.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절대로 무시하지 않으시고 관심을 두실 뿐 아니라 사랑하셔서 자기의 목숨을 걸고 원수들이 무어라고 하든지 이 불쌍한 영혼을 도우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신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기만 하면 목숨을 걸고 우리를 고쳐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니까,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합하여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본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이 헤롯당과 결탁을 해요. 왜? 예수님이 이 두 당의 공통된 원수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지도자인데, 헤롯당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헤롯당은 당시 유대인의 분봉왕 헤롯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헤롯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침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이 헤롯은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고 양들을 무력으로 막 잡아먹는, 사정없는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목자입니다. 정치를 잘 해서 힘이 없는 양들을 잘 다스리고 백성들의 복지 생활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정치 지도자들의 일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백성들의 영혼의 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는 영혼의 문제, 정치 지도자는 육신의 문제를 다루지만, 정치가들도 영혼이 있으니까 모두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모두가 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당시의 지도자들은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첫째, 선악의 분별력이 없었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생명의 존엄성이 없었습니다. 약자를 이용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해요. 왜 이런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참 사랑이 있어야지, 왜 사랑이 없는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원수까지 사랑한다고 그랬는데. 초대 교인들은 죽으면서도 사자를 풀어서 운동장에서 자기를 잡아죽이는 그 원수들을 축복해 주고 그들을 용서해 주었잖아요? 스데반도 그랬잖아요?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이왕 죽을 바엔 "악 악" 하면서 죽으나 "죽여라!" 하면서 죽는 것보다는 할렐루야!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이왕 죽을 것, 100살에 죽으나 50살에 죽으나 20살에 죽으나 다 마찬가집니다. 쌀 몇 가마니 더 먹고 죽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예수님은 정말로 죄인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죄인을 구하는 분이다. 정말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정말로 깨달은 사람은 죄인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했다가도 '어이쿠, 정신 차려야지' 하면서 또 회개해요. 아내와 마구 싸우다가도 '어이쿠, 차렷! 어이쿠, 목사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돼요? 싸우다가도 뚝 끊고 "잘못했어. 잘못했어." "전에도 그러더니 뭐!" "잘못했어. 그때도 잘못했어. 다 잘못했어." "앞으로 또 그럴 거야?" "잘못했어." 잘못했다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어? 속으로는 '야, 내 남편이 달라졌다. 내가 못 됐지. 난 뭐 잘 났나? 나도 못 된 것이 괜히 내 남편을 말이야, 잘못했다고 하는 것을 자꾸만 구박하지.' 예, 할렐루야! 싸움은 이렇게 이기는 것입니다. 그럼요. 예수님을 보세요. 얼굴에 침을 받고도 '저들의 죄를 용서 해 주시옵소서.' 사도 바울 보세요.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 모습은 이러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십니까? 세 가지 일을 하셨어요. 7절과 8절을 보니까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았어요.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메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 오는지라.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 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무엇을 하셨어요? 첫째, 예수님은 한 생명을 목숨을 걸고 사랑하시고 도우시고 관심을 두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회당 안에서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원수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을 다 아시면서,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이 결탁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내 사는 목적이 뭔데? 나만 실컷 먹다가 죽는 건가? 나는 이 일을 위해 왔노라.' 지난 번에 배웠지요? 분명합니다. '내가 이일을 위해 왔노라!' 무슨 일인가? 이들을 구원하는 것, 이들을 가르치는 것, '이 일을 위해 왔노라.' 그 악한 지도자들에게도 가르쳐 주려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구원하는 것과 망하게 하는 것, 어느 것이 좋으냐?' 가르칩니다. 뿐 만 아니라 불쌍한 한 영혼, 무시 받는 한 영혼을 도우십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에도 외롭고 답답하고 마음에 멍들은 심령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어요. 세리들도 돈은 많이 벌었지만 마음은 공허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나아 오는 거예요. 한 영혼에 관심을 두시니까, 결사적으로 도우시니까 많은 무리가 옵니다. 7절 이하를 보니까,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품으셨어요. 많은 무리들이 모여듭니다. 많은 무리들이 따라 다니는데 예수님은 귀찮아하지 않아요, 피곤해 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보니까 모두 질병에 허덕이고 귀신들렸어요. 심령에 병들었다는 뜻이에요. 신음합니다. 모두 보기 흉합니다. 이들은 모두 병들고 모두 냄새나는 꼴불견들인데, 이들은 그 냄새나는 손을 내밀어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피하시지 않으세요. 이들을 모두 영접해 주십니다. 모두 불쌍히 여기십니다. 도와주시고 고쳐 주십니다. 병들은 심령들, 병들은 육신들을 모두 품어 주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얼마나 예수님과 같은 목자가 필요한지를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들어요. 예수님과 같은 참 목자가 얼마나 필요한가? 연약한 한 영혼을 존중히 여기고 크고 깊은 관심을 가진 목자, 고생하는 한 사람 뿐 아니라 고생하는 많은 무리를 귀찮게 여기지 않고 품에 안고 어루만져 주는 사람, 또 원수들의 위험과 미움과 죽음과 수단, 모든 모략을 무릅쓰고 이 불쌍한 자들을 마음에 품는 참 목자, 선악을 바로 판단하는 사람, 생명의 존엄성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이 불쌍한 병신, 불구자, 영혼의 병신을 인도할 참 목자가 필요해요. 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사셨는가? 원수들이 그런다고 '종교 지도자도 모두 엉터리이고 악함에 꽉 매인, 정치 지도자도 악함에 꼭 붙잡힌 이런 악하고 깜깜한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해? 나만 적당히 살다 가야지,' 그게 아니란 말씀이죠.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니까,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시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편인 것을 믿으니까 잠자코 계시지 않아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어떤 사람이 주의 일을 하는지 아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주의 일을 할 수 있어요. 첫째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것이 진짜'라는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둘째는 '내가 남을 가르치고 증거하고 사랑해 보니까 되더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에요. 변화를 받아요. 할렐루야! 사도 바울이 왜 로마에 가겠다고 그랬는지 아세요? 사도 바울이 뭐 맨 처음부터 성령이 충만해서 로마에 가겠다고 그런지 아세요? 물론 사도 바울이 성령 충만했지만, 그게 아니에요. 사도행전을 잘 읽어보면 참 재미있어요. 사도행전을 잘 읽어보니까, 사도 바울이 맨 처음에는 유대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했어요. 그런데 에베소 같은 데에서 이방인에게도 전도해 보니까 우상을 섬기고 만들던 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도시가 뒤집혀요. '야! 이것 봐라. 난 유대 사람들만이 구약의 배경(background)이 있어서 예수를 전하면 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로구나. 이방인들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전하니까 다 거듭나는데!' 사람들이 우상을 집어 내 버리고, 또 우상을 안 사니까 그 우상 만드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어요. 노동자들이 나와서 스트라이크(strike) 일으켰던 것 기억하세요, 에베소서? 참 재미있어요. 사도 바울이 전도해 보니까 되거든. '야!' 그래서 빌립보에도 가고 구라파에도 가고 그런 거예요. 뭐 괜히 마구 간 줄 아세요? 말씀이 올바르고 정말 내가 용서받은 탕자의 심정이 되어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야, 정말로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로구나'하고 그 복음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는 약자의 귀한 한 심령을 존중히 여기는, 크고 깊은 관심을 가지는 그런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고생하는 한 심령 뿐 아니라 고생하는 많은 무리, 우리 사천만, 이북의 이천만, 전세계의 60억을 품에 안고, 이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고 내 마음이 이들을 안타까워하고 이들을 품고 기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위험과 미움과 죽음, 희생을 무릅쓰고 선악의 분별, 판단을 바로 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가진 참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옛날 유대인들이 헌 가죽 부대에 새 술을 담으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새 술이시고 새 생명이시며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저희들이 알고, 우리가 정말로 새 가죽부대에 새롭게 모든 것을 시작하는 저희들이 되어서, 이 시대에 정말로 알차게 주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바로 이루어 드리는 저희들이 되도록 축복하시옵소서. 아버님, 저희들인들 완전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심정을 바로 깨닫는 것이 심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오니, 오늘 주님의 심정,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 어떻게 한 영혼을 주님이 섬기시며 또한 많은 무리를 섬기시고, 거기에 그치지 아니하시고 혼자 일을 하다가 그만 두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참 목자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저희들이 배워서, 본 교회가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의 마음을 깨달아서, 예수님 같이 이 일을 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시고, 이 일에 축복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2제자를 세우신 예수님(2)/막3:13-19
12제자를 세우신 예수님(2)/막3:13-19 2003-05-27 19:04:48 read : 13 저희들이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왜 열 두 제자를 세우셔야만 하셨는지, 그 배경을 공부했습니다. 저희들이 이 배경 공부에서 깨달은 것은 당시의 지도자들의 모습과 또 일반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한 시대에 한 나라가 잘 되려면 지도자가 좋아야 합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종교적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 사회에 양심이 되는 종교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또 정치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우리의 안녕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돕기 위해서 정치적 지도자들이 있는데, 이 정치적 지도자들도 영적으로 바로 서지 않으면 이 일을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도자라고 하면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 부모들이 지도자입니다. 우리 선생님들이 지도자입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우리 형님들이 지도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 자신들도 모두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우리들이 하는 모든 것을 보고서 우리를 따라 해요. 이 지도자란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시니까, 그 지도자들이 첫 째로 모두 선악의 분별력이 없었어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몰랐어요. 생명의 존엄성이 없었습니다. 영혼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요. 마구 취급합니다. 약한 자를 짓밟고 이용합니다. 뿐 만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권모술수에 능해요.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지도자들을 보시고 심히 분노하셨어요. 또 근심하셨습니다. 이들의 밑에 있는 군중들을 보니까, 영육으로 상처를 받고 목자 잃은 양들과 같이, 고아들과 같이 보였습니다. 고아 정도가 아니라, 악한 부모님 밑에 있는, 술주정뱅이 부모님 밑에 있는 애들과 같이, 고아 정도가 아닌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군중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아프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절망하시거나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그들을 꾸중으로 비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동양의 속담 중에 '어두움을 보고 점잖은 것 보다 성냥개비 하나라도 켜는 것이 좋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두움을 저주하기만 해서는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성냥개비라도 켜서 어두움을 밝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을 구하시려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하면 죽이려고 하는 데도 예수님은 죽어 가는 가운데에서 한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도와 주셨어요. 예수님은 한 생명뿐 아니라, 많은 무리들이 자기를 찾아오고 도움을 구하고자 예수님께 왔을 때에, 예수님은 자기 사생활도 있을 터인데도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이 많은 무리를 도우려고 애쓰셨습니다. 이들을 감당하고자 전력을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소망이 없는 시대에 새 소망의 일꾼을 불러야 되겠다.' 새 소망의 일꾼, 열 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니까,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 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둘을 부르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 그냥 열 둘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니까, 산에 오르셨다고 했습니다. 이 산에 오르신 것, 그 뜻이 무엇인가? 그 설명이 누가복음 6장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을 펴시기 바랍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세우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느냐? 예수께서 홀로 기도하시러 산으로 오르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열 두 제자를 부르셨어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어요. 밤을 새며 기도하셨어요.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이 열 둘을 택하는 이 때,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에 얼마나 중요한 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중 전도를 시작하실 때에도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너무나 암담한 상황, 지도자들과 양무리의 상태를 보실 때에, 이 불쌍한 자들을 내버려두고 '아유! 할 수 없다'고 절망하며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이들을 구원하여야 하겠다' 하셨어요. 그러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냥 자기 혼자서 덤비지 아니 하시고 산에 올라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그리고 열 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왜 그런가? 예수님의 생각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졌어요. 예수님의 생각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제자 훈련이다. 제자 양성이다.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다.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 거예요.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상황을 보니까, 예수께서 하시려는 일은 너무나 혁명적이에요. 당시에도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를 가졌습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 말씀을 배우지만, 하나님의 영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랬기 때문에 그건 종교예요. 그건 예식이올시다. 안식일을 지켜라, 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안식일을 내리셨는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내리신 것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참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안식일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안식이 무엇인가? 내 마음에 고민이 있고 내 마음에 죄가 있고 우리 가정에 싸움이 있다면,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안식을 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지내기 위해서는 안식을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셨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해요. 그러면 모든 고민이 없어져요. 감사, 감사가 넘쳐요! 병신을 고쳐야 돼요. 예수님께서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일, 지난주에 공부했죠? 이 병신의 마음속이 얼마나 쓰라린가? 열등의식에 얼마나 죽고 싶을까? 얼마나 사는 것이 부담돼요? 안식이 없어요. 안식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을 주기 원하셨어요. 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니까 그 당시의 종교가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다 어긴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다 자기들의 예배 형식이 있습니다. 예식이 있습니다. 교리가 있습니다. 이상한 교리들을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교리가 중요하기는 합니다. 우리들도 교리를 공부해야 해요. 그렇지만 교리가 무엇 때문에 교리입니까? 구원을 하고 안식을 주기 위해서 교리가 있는 것이고 축복을 주기 위해서 교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교리를 공부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교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배웁니다. 그것은 화석화된 종교예요.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는 것이야.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인들을 사랑하시니까, 그 당시에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적 의식은 다 떠나고 이상하니까, 예수님을 이단자로 모는 거예요. 그 당시에 이단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얼마 안 있다가 십자가에 죽을 것을 의식하시고 '내가 죽으면 누가 사람을 정말로 살리고 안식하는 일을 계속하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이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안식을 주시려고 율법도 주시고 모든 것을 주셨는데, 하루 이틀에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고 역사의식을 가지고 영원히, 또 영원히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이 하나님의 복음, 정말로 복음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하시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이 있듯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지혜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나라가 행복하고 잘 되려면, 우리에게 좋은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좋은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가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누가 만들어 줍니까? 왜 지도자를 기다립니까? 우리가 키워야지. 지도자가 뭐 특별한 사람입니까? 우리 얘들이 지금부터 30년 후에 무엇이 될 지 어떻게 압니까? 사무엘이 지도자가 될 줄, 누가 알았어요?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하루 빨리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지도자를 키우셨어요. 대통령이 지도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남에게 영향을 주니까, 우리 민중들도 다 지도자예요. 우리를 키운다면 우리가 지도자를 만드는 겁니다.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이 뭡니까? 공부 잘하라고 과외 보내는 겁니까? 물론 과외도 보내야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키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고 제자 훈련을 시작하셨어요. 제자 훈련은 성경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는 것이 제자 훈련입니다. 바로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부셨는가? 여기 보니까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사람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그 사람의 인간 조건입니다. 인간 조건, 머리가 좋은지, 뭐 어떤지.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머리가 좋은지, 인간 조건을 보시지 않으시고 자기가 원하는 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럼 자기가 원하시는 자를 택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건 자기 마음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은 내가 키울 수 있다'고 생각되시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키울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 키우시기 원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키울 수 있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나아 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나아 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 부르시고 예수님은 누구나 다 지도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 구원하길 원하시고 예수님은 누구나 다 원하십니다. 원하시지만 예수님도 어떤 사람만 제자를 삼으실 수 있느냐 하면, 부름에 응해서 나아 오는 사람만 제자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면 쓸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감정적이고 경솔하고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아 왔습니다. 나아 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예수님에 끌려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끌려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든다"고 하시니까 베드로는 고기도 배도 모두 다 내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어야 해요. 거듭나야 돼. 둘째, 거듭나서 예수님께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 배우려고 용감한 사람.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희생을 무릅쓰고 배워야 되겠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이고 이단자라서 박해를 받는다. 그래도 나는 예수님이 좋다. 따른다. 예수님께 배우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매질을 하신다고 해도 나는 배우기를 원한다'고 하는 사람. 배우기를 원해서 시간을 내고 희생을 하는 사람.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처음에는 예수님을 배우지 않아도, 예수님께 시간을 많이 내지 않아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해서 예수님 앞에 나아 오기만 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에게 더 배우기를 원하게 되고 예수님을 신앙으로 의식하게 되고 달라져요. 예수님께 나아 오는 자, 부르심에 응하는 자입니다. 모든 인간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참 이상해요. 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요.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알게 되면 자꾸 부르심을 받아요. 자꾸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아요. 끓는다 이거야. 예수님이 막 잡아당기는데, 불가항력이에요. 모세를 보세요.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 살았어요. 여러분, 바로의 궁전 생활이 얼마나 좋았겠어요? 눈만 끔뻑이면 다 가져다 주고, 옷도 가져오고, 머리 빗는 것도 가져오고, 얼마나 좋았겠어요? 누구나 다 원할 만큼 좋았겠죠?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고 엄마 품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신앙이 조금 자라니까, 이 궁전 생활이 귀찮고 남이 부러워하는 것도 유치해 보이고 그래서 철이 들어 집을 나가는 겁니다. 바울을 보세요. 세상의 지위를 다 가질 수 있었지만 감옥에 들어가요. 주님의 사랑으로 거듭났어요. 그 정도의 용기가 있습니다. 부르심에 응해서 온갖 핍박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부족하지만 주님께 가르침을 받으려고 각오하고 헌신하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내 꼴이 모두 한심스러워요. 베드로도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괜히 까불다가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창피만 당했어요. 자기가 예수님 따라 다닌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겠어요?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떠들기만 했지, 모두 미리 다 도망갔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부인도 못 했어요. 베드로가 부인한 것도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따라 갔기 때문에 부인 할 수 있었지, 다른 사도들은 다 도망갔는데 무슨 부인을 할 수 있었겠어요? 다른 사도들은 입으로만 사랑하고 다 부인했는데, 베드로는 괜히 그 약한 것이 사랑은 있어 가지고 주제넘게 따라 갔잖아요? 따라가니까 붙들려서 "너도 예수 믿지?" 그러니까 겁이 나서 안 믿는다고 부인했어요. 그래도 책임을 다 했잖아?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는 믿음이 있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베드로만한 신앙도 없으니까 부인할 자격도 없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그래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창피했겠어요? '나는 사도의 자격이 없어. 나는 고기잡이나 또 해야지.'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갈릴리 바닷가에 가서 고기잡이를 또 나갔어요. 고기들도 업신여겨서 고기도 안 잡혀. 어쨌든 이 베드로가 얼마나 고민했겠어요? 그 베드로를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신 거예요.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이 패배의 연속 같지만, 예수님은 '패배해도 괜찮다. 나에게 오기만 해라. 나만 믿어라' 하십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많아요. '예수께 나아 오라! 실패했지? 나아 오라!' 그러면 실패가 거름이 되어서 충성이 되고 거꾸로 십자가에 죽어. 베드로는 닭이 울 때에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일생 동안 닭소리만 들리면 통곡을 했다고 해요. 닭이 울기만 하면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그렇겠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인한 베드로를 보실 때에 업신여기신 것이 아니고 '내가 다 안다. 너는 나를 생각하고 너는 나를 따르고 너는 나를 따라 죽기를 원하지만 네가 약해서 그렇지. 나는 네 마음을 다 안다. 낙심하지 말아라. 난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제자다. 나는 네게 실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도 네게 실망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부인하는 베드로를 보셨다고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그 눈초리를 보고 '내가 심히 통곡했다'고 했어요. 예수님을, 그 예수님의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 했어요. 그것이 탕자를 용서하는 하나님. 자! 나아 오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목적은 14절에 있는데 첫째, '자기와 함께 하시고,' 둘째는 '또 보내시어 전도도 하며,' 셋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목적입니다. 첫째는 '자기와 함께 하시고.' 왜? 예수님의 말씀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거 동락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배우기 위해서. 예수님과 공동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활 자체가, 정신 자체가 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져서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산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도 말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며 교회에 나오고 예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예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예수님의 심정이 어떤지 모르면, 그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모르면, 그건 단지 종교적인 습관, 교회, 목사, 교단, 다른 교인들, 이런 것들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을 배워라.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라. 예수님의 인격을 배워라. 배워야 한다.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종교적 습관을 따르면 안 된다. 주님은 이것을 원하시는가를 따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성경 공부도 안 하면서 뭐가 뭔지 어떻게 알아? 따져야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늘 가르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과 같이 있어서 예수님의 심정,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철학, 예수님의 인생관, 예수님의 세계관, 예수님의 성품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것은 형식이 아니다. 성가대는 무엇 때문에 성가대를 하는가? 괜히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성가대가 잘 하면 성가 들으려고 교인들이 많이 옵니다. 교인들이 많이 오라고? 헌금 많이 내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뭐 그러면 좋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게 아닙니다. 성가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 찬송이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몰라요. 찬송 듣고 감동되어서 주님 영접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교회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씀 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성가대가 정말 은혜롭게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깨달아 찬송할 때 성령이 같이 역사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성가대 지휘자가 성가대를 위해서 한 주에 여덟 시간씩 쓴대, 여덟 시간 씩. 그래서 내가 '야, 그 사람은 목사의 자격이 있다'고 했어요. 목사가 여덟 시간동안 설교를 준비하면 설교가 잘 됩니다. 정말 그랬대. 성가 대원들도 그래요.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목이 메어서 찬송을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아, 어......" 그러면 자기는 좋다고 하지만 그건 제가 좋아서 그러는 것이지, 주님이 좋아 하셔야지? 예수님께서 음악이 좋으면 음악회 가시지, 교회에 오실 것이 뭐 있어요? 뭐냐 하면 성가대도 노래를 잘 불러야 되지만, 형식이 아니라 예배가 뭔가를 배운 후에. 둘째는 제자들을 보내서 전도하기 위해서. '이들을 보내사 전도도 하며.' 전도해야 된다 그 말씀입니다. 왜 전도해야 되는가? 로마서 10장에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길 수 있을까? 나도 저 사람처럼 믿음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믿음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기적적으로 꿈에 무엇이 나타나서, 뭐 어떻게 돼서, 믿음이 생기는 줄 알아요.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는 줄 알아요. 어려움이 있으면서 믿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지만 어려움 때문에 믿음이 없어지는 사람도 있어요. 믿음을 얻기 위해서 왜 이왕이면 어려움을 당해야 합니까? 어려움이 그렇게 좋아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 때문에 믿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어려움 때문에 믿음이 생기는 것은 없어요.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 때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 말씀을 올바로 공부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전도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에게 올바른 말씀을 배워 가지고 또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듣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참 진정한 믿음을 원하는데, 우리 교회가 이 말씀 공부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 공부하려면 말씀이 무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 이걸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먼저 이 말씀을 배우고 그리고 전도해야 합니다. 셋 째는 뭡니까?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리라' 그랬어요. '귀신을 내어쫓는다.' 이걸 신학적으로 생각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병난 것은 귀신이 들린 것으로 생각해요. 왜 신학적으로 생각합니까? 제가 지난번에 얘기했지요? 어떤 목사님은 '모든 병은 귀신이 들린 것이라'고 하는데, 무슨 귀신이 아스피린을 먹으면 나가? 그런 귀신이 어디 있어요? 또 수술하면 귀신이 나가고. 그렇다면 뭔가? 그 말이 그렇다는 말이야. 어떤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괜히 히스테리를 부리고 얘들도 못 살게 굴고, 남편도 못 살게 굴면 귀신들렸다고 하잖아요? 그 때 나쁜 정신이 들었다 그거지, 괜히 생사람을 귀신들렸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걸 너무 신학적으로, 모든 병은 귀신이 들린 것이라고, 귀신이 있다 없다 하면서, 그런 것 논 할 필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좋아하니까 돈 귀신이 들리고, 도박을 좋아하니까 도박 귀신이 들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모든 병은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귀신을 내 쫓는다고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 그런 단 말이지. 그래서 나가는 것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귀신이 나가는 것은 어떻게 나가는가? 그 마음속에 나쁜 여러 가지 성품이 있을 때,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이 그 안에 채워지면 그런 나쁜 것이 다 나가게 되고, 예수님의 아름다운 영이, 말씀이 그 안에 들어가면 그런 것이 다 태워 없어지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아는 기쁨이 넘치게 되면 이상한 성격이 다 없어지고 고쳐지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죠. 병자들을 고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위로해 주고 말씀으로 은혜를 주고 사랑을 주고 나음을 받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일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택하셨는가? 이름을 죽 나열했어요. 열 두 사람의 이름을 보면 별로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베드로도 문젯거리지만, 또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들은 신경질이 많아서 '우뢰의 아들'이라고 화를 벌떡 벌떡 잘 내는 사람들입니다. 문제가 많아요. 또 빌립이라는 사람은 계산만 빠른 그런 사람입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죠. 마태는 세리, 수전노였죠? 가나안인 시몬은 테러 당원입니다. 정치 당원, 열심당이라고, 테러를 통해서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자는 테러당입니다. 여기에 보면 별로 종교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를 하나도 택하지 않으셨어요. 왜? 이 종교인들이 비뚤어지게 되면 고치기가 더 힘들어요. 형식만 취하니까 그것도 어려워요.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이 세상의 어떤 다른 기성 종교에 물들지 않은 그런 사람을 택하셔서 새롭게 시작하길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이건 사랑과 진실이다. 진리다! 진리를 따르면 된다.' 억지로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실수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격려하시고 계속 나아 오게 하셨습니다.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닌 소망 때문에, 핍박 가운데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떨어졌다가는 또 나아 오고, 또 나아 오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좋은 리더를 두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입니다. 이들은 좋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따랐습니다. 좋은 부모를 두었다면 얼마나 좋아요? 좋은 친구를 가졌다면 행복합니다. 하물며 나의 인생의 길잡이가 될 좋은 스승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좋은 지도자가 될 기회입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복된 일입니다. '예수님께 나아 오라. 배우기를 원했다.' 예수님께 배우기를 원했다는 것이 나아 왔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을 따르면 많은 고생이 따릅니다. 말씀을 못 깨달을 때도 있고 실수도 많고 잘못도 하고 꾸중도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3년 동안 따라 다녔어요. 부족해도 예수님을 사랑했어요. 베드로가 됐어요. 위대한 사도들이 됐어요. 여기에서 우리가 놀라운 사실, 진리를 알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 역사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도우시기도 하지만 이끌어 주신다는 겁니다. 이끌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방법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깜깜한 믿음이 없는 세상에 75살의 소망 없는 노인,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셨는데 아브라함이 부르심에 응해서 나아 왔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할아버지를 25년 동안 키우셨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기 힘들고 훈련하기 힘든 야곱, 그 재수 없는 야곱을 20년 동안 키우셨어요. 키우셔서 야곱을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으로 삼으셨어요. 열 일곱 살 먹은 소년 요셉을 13년 동안 키우셨어요. 지도자로, 총리 대신으로, 목자로 삼으셨어요. 애굽 사람도 구하고 형님들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어요.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키우셨어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방법은 백년 대계, 영원을 생각하는 계획입니다. 그 지혜는 크고 크십니다. 크리스천이 마땅히 해야 할 제일 큰 일이 무엇인가?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까?' 여러 가지 의심도 되고 방황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될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럴 때에 많은 할 일을 물리치시고 열 두 제자를 키우셨습니다. 우리도 이 일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한 가정의 소망은 아이들에게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돈 또는 하는 일 때문에 자녀를 바로 키우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또 교회만 의지하거나 학교만 의지한다면, 우리 가정은 소망이 없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올시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어려운 때에 열 두 제자를 키우신 그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배워야 됩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키우셨는데 이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영광스런 일입니다. 주님의 제자에게는 축복이 있습니다. 가장 보람있는 삶이올시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뭐예요? 행복을 원하지요. 어떤 행복을 바랍니까? 사랑 받는 것을 제일 좋아해요. 누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사랑 받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랑 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면 실망을 얻고 마음이 삐뚤어지고 마음이 좁아지고 불만만 가득하게 돼요. 사랑 받기를 원하는데 사랑을 안 주거든. 자꾸 불평 불만이 커져요. 가정에서도 사랑을 받기만 원하니까 문제가 많은 것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셔서 '나와 같이 사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부어 주셨어요. 제자들이 그걸 깨닫고 '아!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이 이렇게 좋으니, 내가 남에게 사랑을 줄 때 그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해서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니까 자꾸 회개하게 됩니다. 사랑 주기가 힘들어서 또 회개하게 됩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니까 이상해요. 사랑을 자꾸 심으니까 사랑을 자꾸 받게 돼요. 내가 사랑을 받기 원하지요? 받기 원하면 못 받아.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자기와 같이 두시고 사랑을 심는 사람,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만드셔서 이들은 가장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이 열 두 제자가 일생을 회고할 때에 '아! 나 같은 것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에 나도 남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서 얼마나 축복을 받는가?' 세상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불행한지 아세요? 친구가 없어서 불행해요. 참 동지가 없어요. 정말 마음을 탁 터놓고 얘기 할 사람이 없어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내 속의 정말 답답한 마음을 내 남편에게, 내 아내에게 말할 수 있어요? 이 열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게 되니까 예수님 안에서 동지가 됐어요. 전에는 다 경쟁 상대였어요.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과 동거 동락하는 삶을 살 때에, 이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동지가 됐어요. 옛날 다윗과 요나단도 그랬어요. 동지가, 친구가 됐어요. 기쁨을 나눌 수 있고 슬픔을 나눌 수 있고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동지가 됐어요. 전 새누리 공동체가 동지가 되길 원해요. 가장 보람찬 얘기입니다. 가장 축복된 삶이 무엇인가? 가장 보람찬, 이 놀라운 사랑을 주는 일, 동지가 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또한 열 두 제자들에게 주의 사항을 주셨어요. '너희들이 내 제자가 되는데 너희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 마태복음 10장 5절 이하를 보니까 제자들을 택하시고 난 후에,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변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것이 무슨 뜻인가? 첫째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며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란 무엇인가? 이것은 이방인에게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첫 번째 주의 사항;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라. 둘째, 전대에 무엇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거추장스러운 것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거추장스러운 것을 버려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요. 우리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너무 많아요. 너무 거추장스러운 것이 많으면 하나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보상을 기대하지 말라. 이 주의 사항을 제자들에게 주셨어요. 주님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가까운 데서부터 하라. 둘째는 너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치워 버려라. 셋째, 보상을 바라지 말라.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바라면 마음이 좁아져요. 열 두 제자를 세우신 예수님. 그 배후에 예수님의 깊은 기도가 있고 '아!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 혁명을 일으키는 이 어두운 세상을 고치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지혜로구나.' 그것입니다. 본 교회에서는 그것을 실천합시다. 그것이 우리 교회에 주일 학교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뜻을 깨닫고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실천하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정말로 헤매는 이 인류를 정말로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그 방법에 대해서, 그 지혜에 대해서 저희들이 공부했습니다. 아버지, 예수님과 같이 저희도 사랑의 사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저희로부터 부족하지만 사랑을 주는 저희들이 되어서 정말로 그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저 사랑을 주는 것으로 결국은 저희들이 축복을 얻는 지혜를 깨닫고 이 일을 아끼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오며, 저희들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 일을 시작하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저희들이 되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저희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2제자를 세우신 예수님(2)/막3:13-19
12제자를 세우신 예수님(2)/막3:13-19 2003-11-26 10:57:54 read : 3 저희들이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왜 열 두 제자를 세우셔야만 하셨는지, 그 배경을 공부했습니다. 저희들이 이 배경 공부에서 깨달은 것은 당시의 지도자들의 모습과 또 일반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한 시대에 한 나라가 잘 되려면 지도자가 좋아야 합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종교적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 사회에 양심이 되는 종교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또 정치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우리의 안녕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돕기 위해서 정치적 지도자들이 있는데, 이 정치적 지도자들도 영적으로 바로 서지 않으면 이 일을 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도자라고 하면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 부모들이 지도자입니다. 우리 선생님들이 지도자입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우리 형님들이 지도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 자신들도 모두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우리들이 하는 모든 것을 보고서 우리를 따라 해요. 이 지도자란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시니까, 그 지도자들이 첫 째로 모두 선악의 분별력이 없었어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몰랐어요. 생명의 존엄성이 없었습니다. 영혼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요. 마구 취급합니다. 약한 자를 짓밟고 이용합니다. 뿐 만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권모술수에 능해요.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지도자들을 보시고 심히 분노하셨어요. 또 근심하셨습니다. 이들의 밑에 있는 군중들을 보니까, 영육으로 상처를 받고 목자 잃은 양들과 같이, 고아들과 같이 보였습니다. 고아 정도가 아니라, 악한 부모님 밑에 있는, 술주정뱅이 부모님 밑에 있는 애들과 같이, 고아 정도가 아닌 이와 같은 상태에 있는 군중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아프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절망하시거나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그들을 꾸중으로 비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동양의 속담 중에 '어두움을 보고 점잖은 것 보다 성냥개비 하나라도 켜는 것이 좋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두움을 저주하기만 해서는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성냥개비라도 켜서 어두움을 밝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을 구하시려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범하면 죽이려고 하는 데도 예수님은 죽어 가는 가운데에서 한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도와 주셨어요. 예수님은 한 생명뿐 아니라, 많은 무리들이 자기를 찾아오고 도움을 구하고자 예수님께 왔을 때에, 예수님은 자기 사생활도 있을 터인데도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이 많은 무리를 도우려고 애쓰셨습니다. 이들을 감당하고자 전력을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소망이 없는 시대에 새 소망의 일꾼을 불러야 되겠다.' 새 소망의 일꾼, 열 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니까,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 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둘을 부르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는가? 그냥 열 둘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니까, 산에 오르셨다고 했습니다. 이 산에 오르신 것, 그 뜻이 무엇인가? 그 설명이 누가복음 6장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을 펴시기 바랍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세우시기 전에 무엇을 하셨느냐? 예수께서 홀로 기도하시러 산으로 오르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열 두 제자를 부르셨어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어요. 밤을 새며 기도하셨어요.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이 열 둘을 택하는 이 때,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에 얼마나 중요한 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중 전도를 시작하실 때에도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너무나 암담한 상황, 지도자들과 양무리의 상태를 보실 때에, 이 불쌍한 자들을 내버려두고 '아유! 할 수 없다'고 절망하며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어찌하든지 이들을 구원하여야 하겠다' 하셨어요. 그러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냥 자기 혼자서 덤비지 아니 하시고 산에 올라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그리고 열 두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왜 그런가? 예수님의 생각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졌어요. 예수님의 생각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제자 훈련이다. 제자 양성이다.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다.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 거예요. 왜 그런가?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상황을 보니까, 예수께서 하시려는 일은 너무나 혁명적이에요. 당시에도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를 가졌습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 말씀을 배우지만, 하나님의 영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랬기 때문에 그건 종교예요. 그건 예식이올시다. 안식일을 지켜라, 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안식일을 내리셨는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내리신 것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참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안식일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안식이 무엇인가? 내 마음에 고민이 있고 내 마음에 죄가 있고 우리 가정에 싸움이 있다면,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안식을 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지내기 위해서는 안식을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셨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해요. 그러면 모든 고민이 없어져요. 감사, 감사가 넘쳐요! 병신을 고쳐야 돼요. 예수님께서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일, 지난주에 공부했죠? 이 병신의 마음속이 얼마나 쓰라린가? 열등의식에 얼마나 죽고 싶을까? 얼마나 사는 것이 부담돼요? 안식이 없어요. 안식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을 주기 원하셨어요. 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니까 그 당시의 종교가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을 다 어긴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다 자기들의 예배 형식이 있습니다. 예식이 있습니다. 교리가 있습니다. 이상한 교리들을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교리가 중요하기는 합니다. 우리들도 교리를 공부해야 해요. 그렇지만 교리가 무엇 때문에 교리입니까? 구원을 하고 안식을 주기 위해서 교리가 있는 것이고 축복을 주기 위해서 교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교리를 공부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교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배웁니다. 그것은 화석화된 종교예요.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는 것이야.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인들을 사랑하시니까, 그 당시에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적 의식은 다 떠나고 이상하니까, 예수님을 이단자로 모는 거예요. 그 당시에 이단자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얼마 안 있다가 십자가에 죽을 것을 의식하시고 '내가 죽으면 누가 사람을 정말로 살리고 안식하는 일을 계속하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이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안식을 주시려고 율법도 주시고 모든 것을 주셨는데, 하루 이틀에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고 역사의식을 가지고 영원히, 또 영원히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이 하나님의 복음, 정말로 복음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하시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이 있듯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지혜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나라가 행복하고 잘 되려면, 우리에게 좋은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좋은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가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누가 만들어 줍니까? 왜 지도자를 기다립니까? 우리가 키워야지. 지도자가 뭐 특별한 사람입니까? 우리 얘들이 지금부터 30년 후에 무엇이 될 지 어떻게 압니까? 사무엘이 지도자가 될 줄, 누가 알았어요?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하루 빨리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지도자를 키우셨어요. 대통령이 지도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남에게 영향을 주니까, 우리 민중들도 다 지도자예요. 우리를 키운다면 우리가 지도자를 만드는 겁니다.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이 뭡니까? 공부 잘하라고 과외 보내는 겁니까? 물론 과외도 보내야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키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고 제자 훈련을 시작하셨어요. 제자 훈련은 성경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는 것이 제자 훈련입니다. 바로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부셨는가? 여기 보니까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사람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그 사람의 인간 조건입니다. 인간 조건, 머리가 좋은지, 뭐 어떤지.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머리가 좋은지, 인간 조건을 보시지 않으시고 자기가 원하는 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럼 자기가 원하시는 자를 택하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건 자기 마음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은 내가 키울 수 있다'고 생각되시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키울 수 있으니 예수님께서 키우시기 원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키울 수 있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나아 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나아 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 부르시고 예수님은 누구나 다 지도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 구원하길 원하시고 예수님은 누구나 다 원하십니다. 원하시지만 예수님도 어떤 사람만 제자를 삼으실 수 있느냐 하면, 부름에 응해서 나아 오는 사람만 제자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면 쓸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감정적이고 경솔하고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아 왔습니다. 나아 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예수님에 끌려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끌려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든다"고 하시니까 베드로는 고기도 배도 모두 다 내어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이어야 해요. 거듭나야 돼. 둘째, 거듭나서 예수님께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 배우려고 용감한 사람.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희생을 무릅쓰고 배워야 되겠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이고 이단자라서 박해를 받는다. 그래도 나는 예수님이 좋다. 따른다. 예수님께 배우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매질을 하신다고 해도 나는 배우기를 원한다'고 하는 사람. 배우기를 원해서 시간을 내고 희생을 하는 사람.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처음에는 예수님을 배우지 않아도, 예수님께 시간을 많이 내지 않아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해서 예수님 앞에 나아 오기만 하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에게 더 배우기를 원하게 되고 예수님을 신앙으로 의식하게 되고 달라져요. 예수님께 나아 오는 자, 부르심에 응하는 자입니다. 모든 인간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참 이상해요. 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요.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알게 되면 자꾸 부르심을 받아요. 자꾸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아요. 끓는다 이거야. 예수님이 막 잡아당기는데, 불가항력이에요. 모세를 보세요.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 살았어요. 여러분, 바로의 궁전 생활이 얼마나 좋았겠어요? 눈만 끔뻑이면 다 가져다 주고, 옷도 가져오고, 머리 빗는 것도 가져오고, 얼마나 좋았겠어요? 누구나 다 원할 만큼 좋았겠죠?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고 엄마 품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신앙이 조금 자라니까, 이 궁전 생활이 귀찮고 남이 부러워하는 것도 유치해 보이고 그래서 철이 들어 집을 나가는 겁니다. 바울을 보세요. 세상의 지위를 다 가질 수 있었지만 감옥에 들어가요. 주님의 사랑으로 거듭났어요. 그 정도의 용기가 있습니다. 부르심에 응해서 온갖 핍박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부족하지만 주님께 가르침을 받으려고 각오하고 헌신하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내 꼴이 모두 한심스러워요. 베드로도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괜히 까불다가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창피만 당했어요. 자기가 예수님 따라 다닌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겠어요? 다른 사도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떠들기만 했지, 모두 미리 다 도망갔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부인도 못 했어요. 베드로가 부인한 것도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따라 갔기 때문에 부인 할 수 있었지, 다른 사도들은 다 도망갔는데 무슨 부인을 할 수 있었겠어요? 다른 사도들은 입으로만 사랑하고 다 부인했는데, 베드로는 괜히 그 약한 것이 사랑은 있어 가지고 주제넘게 따라 갔잖아요? 따라가니까 붙들려서 "너도 예수 믿지?" 그러니까 겁이 나서 안 믿는다고 부인했어요. 그래도 책임을 다 했잖아?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는 믿음이 있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베드로만한 신앙도 없으니까 부인할 자격도 없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그래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창피했겠어요? '나는 사도의 자격이 없어. 나는 고기잡이나 또 해야지.'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갈릴리 바닷가에 가서 고기잡이를 또 나갔어요. 고기들도 업신여겨서 고기도 안 잡혀. 어쨌든 이 베드로가 얼마나 고민했겠어요? 그 베드로를 예수님은 버리지 않으신 거예요.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이 패배의 연속 같지만, 예수님은 '패배해도 괜찮다. 나에게 오기만 해라. 나만 믿어라' 하십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많아요. '예수께 나아 오라! 실패했지? 나아 오라!' 그러면 실패가 거름이 되어서 충성이 되고 거꾸로 십자가에 죽어. 베드로는 닭이 울 때에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일생 동안 닭소리만 들리면 통곡을 했다고 해요. 닭이 울기만 하면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그렇겠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인한 베드로를 보실 때에 업신여기신 것이 아니고 '내가 다 안다. 너는 나를 생각하고 너는 나를 따르고 너는 나를 따라 죽기를 원하지만 네가 약해서 그렇지. 나는 네 마음을 다 안다. 낙심하지 말아라. 난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제자다. 나는 네게 실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도 네게 실망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부인하는 베드로를 보셨다고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그 눈초리를 보고 '내가 심히 통곡했다'고 했어요. 예수님을, 그 예수님의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 했어요. 그것이 탕자를 용서하는 하나님. 자! 나아 오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목적은 14절에 있는데 첫째, '자기와 함께 하시고,' 둘째는 '또 보내시어 전도도 하며,' 셋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목적입니다. 첫째는 '자기와 함께 하시고.' 왜? 예수님의 말씀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거 동락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배우기 위해서. 예수님과 공동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활 자체가, 정신 자체가 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져서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산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도 말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며 교회에 나오고 예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예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예수님의 심정이 어떤지 모르면, 그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모르면, 그건 단지 종교적인 습관, 교회, 목사, 교단, 다른 교인들, 이런 것들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을 배워라.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라. 예수님의 인격을 배워라. 배워야 한다.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종교적 습관을 따르면 안 된다. 주님은 이것을 원하시는가를 따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성경 공부도 안 하면서 뭐가 뭔지 어떻게 알아? 따져야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늘 가르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과 같이 있어서 예수님의 심정,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철학, 예수님의 인생관, 예수님의 세계관, 예수님의 성품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것은 형식이 아니다. 성가대는 무엇 때문에 성가대를 하는가? 괜히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성가대가 잘 하면 성가 들으려고 교인들이 많이 옵니다. 교인들이 많이 오라고? 헌금 많이 내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뭐 그러면 좋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게 아닙니다. 성가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 찬송이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몰라요. 찬송 듣고 감동되어서 주님 영접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교회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씀 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성가대가 정말 은혜롭게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깨달아 찬송할 때 성령이 같이 역사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성가대 지휘자가 성가대를 위해서 한 주에 여덟 시간씩 쓴대, 여덟 시간 씩. 그래서 내가 '야, 그 사람은 목사의 자격이 있다'고 했어요. 목사가 여덟 시간동안 설교를 준비하면 설교가 잘 됩니다. 정말 그랬대. 성가 대원들도 그래요.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목이 메어서 찬송을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아, 어......" 그러면 자기는 좋다고 하지만 그건 제가 좋아서 그러는 것이지, 주님이 좋아 하셔야지? 예수님께서 음악이 좋으면 음악회 가시지, 교회에 오실 것이 뭐 있어요? 뭐냐 하면 성가대도 노래를 잘 불러야 되지만, 형식이 아니라 예배가 뭔가를 배운 후에. 둘째는 제자들을 보내서 전도하기 위해서. '이들을 보내사 전도도 하며.' 전도해야 된다 그 말씀입니다. 왜 전도해야 되는가? 로마서 10장에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길 수 있을까? 나도 저 사람처럼 믿음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믿음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기적적으로 꿈에 무엇이 나타나서, 뭐 어떻게 돼서, 믿음이 생기는 줄 알아요. 어떤 사람들은 어려움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는 줄 알아요. 어려움이 있으면서 믿음이 생기는 사람도 있지만 어려움 때문에 믿음이 없어지는 사람도 있어요. 믿음을 얻기 위해서 왜 이왕이면 어려움을 당해야 합니까? 어려움이 그렇게 좋아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 때문에 믿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어려움 때문에 믿음이 생기는 것은 없어요.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 때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경 말씀을 올바로 공부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전도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에게 올바른 말씀을 배워 가지고 또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듣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참 진정한 믿음을 원하는데, 우리 교회가 이 말씀 공부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말씀 공부하려면 말씀이 무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 이걸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먼저 이 말씀을 배우고 그리고 전도해야 합니다. 셋 째는 뭡니까?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리라' 그랬어요. '귀신을 내어쫓는다.' 이걸 신학적으로 생각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병난 것은 귀신이 들린 것으로 생각해요. 왜 신학적으로 생각합니까? 제가 지난번에 얘기했지요? 어떤 목사님은 '모든 병은 귀신이 들린 것이라'고 하는데, 무슨 귀신이 아스피린을 먹으면 나가? 그런 귀신이 어디 있어요? 또 수술하면 귀신이 나가고. 그렇다면 뭔가? 그 말이 그렇다는 말이야. 어떤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괜히 히스테리를 부리고 얘들도 못 살게 굴고, 남편도 못 살게 굴면 귀신들렸다고 하잖아요? 그 때 나쁜 정신이 들었다 그거지, 괜히 생사람을 귀신들렸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걸 너무 신학적으로, 모든 병은 귀신이 들린 것이라고, 귀신이 있다 없다 하면서, 그런 것 논 할 필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좋아하니까 돈 귀신이 들리고, 도박을 좋아하니까 도박 귀신이 들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모든 병은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귀신을 내 쫓는다고 '예수 이름으로 나가라' 그런 단 말이지. 그래서 나가는 것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귀신이 나가는 것은 어떻게 나가는가? 그 마음속에 나쁜 여러 가지 성품이 있을 때, 예수님의 아름다운 성품이 그 안에 채워지면 그런 나쁜 것이 다 나가게 되고, 예수님의 아름다운 영이, 말씀이 그 안에 들어가면 그런 것이 다 태워 없어지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아는 기쁨이 넘치게 되면 이상한 성격이 다 없어지고 고쳐지는 겁니다.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죠. 병자들을 고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위로해 주고 말씀으로 은혜를 주고 사랑을 주고 나음을 받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일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택하셨는가? 이름을 죽 나열했어요. 열 두 사람의 이름을 보면 별로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베드로도 문젯거리지만, 또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들은 신경질이 많아서 '우뢰의 아들'이라고 화를 벌떡 벌떡 잘 내는 사람들입니다. 문제가 많아요. 또 빌립이라는 사람은 계산만 빠른 그런 사람입니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죠. 마태는 세리, 수전노였죠? 가나안인 시몬은 테러 당원입니다. 정치 당원, 열심당이라고, 테러를 통해서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자는 테러당입니다. 여기에 보면 별로 종교적으로 신령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를 하나도 택하지 않으셨어요. 왜? 이 종교인들이 비뚤어지게 되면 고치기가 더 힘들어요. 형식만 취하니까 그것도 어려워요. 예수님께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이 세상의 어떤 다른 기성 종교에 물들지 않은 그런 사람을 택하셔서 새롭게 시작하길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이건 사랑과 진실이다. 진리다! 진리를 따르면 된다.' 억지로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실수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격려하시고 계속 나아 오게 하셨습니다.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닌 소망 때문에, 핍박 가운데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떨어졌다가는 또 나아 오고, 또 나아 오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좋은 리더를 두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입니다. 이들은 좋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따랐습니다. 좋은 부모를 두었다면 얼마나 좋아요? 좋은 친구를 가졌다면 행복합니다. 하물며 나의 인생의 길잡이가 될 좋은 스승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좋은 지도자가 될 기회입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복된 일입니다. '예수님께 나아 오라. 배우기를 원했다.' 예수님께 배우기를 원했다는 것이 나아 왔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을 따르면 많은 고생이 따릅니다. 말씀을 못 깨달을 때도 있고 실수도 많고 잘못도 하고 꾸중도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3년 동안 따라 다녔어요. 부족해도 예수님을 사랑했어요. 베드로가 됐어요. 위대한 사도들이 됐어요. 여기에서 우리가 놀라운 사실, 진리를 알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 역사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도우시기도 하지만 이끌어 주신다는 겁니다. 이끌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방법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깜깜한 믿음이 없는 세상에 75살의 소망 없는 노인,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셨는데 아브라함이 부르심에 응해서 나아 왔어요. 하나님께서는 이 할아버지를 25년 동안 키우셨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기 힘들고 훈련하기 힘든 야곱, 그 재수 없는 야곱을 20년 동안 키우셨어요. 키우셔서 야곱을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으로 삼으셨어요. 열 일곱 살 먹은 소년 요셉을 13년 동안 키우셨어요. 지도자로, 총리 대신으로, 목자로 삼으셨어요. 애굽 사람도 구하고 형님들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어요.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키우셨어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방법은 백년 대계, 영원을 생각하는 계획입니다. 그 지혜는 크고 크십니다. 크리스천이 마땅히 해야 할 제일 큰 일이 무엇인가? 사람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까?' 여러 가지 의심도 되고 방황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될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럴 때에 많은 할 일을 물리치시고 열 두 제자를 키우셨습니다. 우리도 이 일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한 가정의 소망은 아이들에게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돈 또는 하는 일 때문에 자녀를 바로 키우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또 교회만 의지하거나 학교만 의지한다면, 우리 가정은 소망이 없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올시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어려운 때에 열 두 제자를 키우신 그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배워야 됩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키우셨는데 이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장 영광스런 일입니다. 주님의 제자에게는 축복이 있습니다. 가장 보람있는 삶이올시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뭐예요? 행복을 원하지요. 어떤 행복을 바랍니까? 사랑 받는 것을 제일 좋아해요. 누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사랑 받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랑 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면 실망을 얻고 마음이 삐뚤어지고 마음이 좁아지고 불만만 가득하게 돼요. 사랑 받기를 원하는데 사랑을 안 주거든. 자꾸 불평 불만이 커져요. 가정에서도 사랑을 받기만 원하니까 문제가 많은 것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셔서 '나와 같이 사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부어 주셨어요. 제자들이 그걸 깨닫고 '아!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이 이렇게 좋으니, 내가 남에게 사랑을 줄 때 그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해서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니까 자꾸 회개하게 됩니다. 사랑 주기가 힘들어서 또 회개하게 됩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니까 이상해요. 사랑을 자꾸 심으니까 사랑을 자꾸 받게 돼요. 내가 사랑을 받기 원하지요? 받기 원하면 못 받아.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자기와 같이 두시고 사랑을 심는 사람,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만드셔서 이들은 가장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어요. 이 열 두 제자가 일생을 회고할 때에 '아! 나 같은 것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에 나도 남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서 얼마나 축복을 받는가?' 세상 사람들이 왜 이렇게 불행한지 아세요? 친구가 없어서 불행해요. 참 동지가 없어요. 정말 마음을 탁 터놓고 얘기 할 사람이 없어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내 속의 정말 답답한 마음을 내 남편에게, 내 아내에게 말할 수 있어요? 이 열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게 되니까 예수님 안에서 동지가 됐어요. 전에는 다 경쟁 상대였어요.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과 동거 동락하는 삶을 살 때에, 이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동지가 됐어요. 옛날 다윗과 요나단도 그랬어요. 동지가, 친구가 됐어요. 기쁨을 나눌 수 있고 슬픔을 나눌 수 있고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동지가 됐어요. 전 새누리 공동체가 동지가 되길 원해요. 가장 보람찬 얘기입니다. 가장 축복된 삶이 무엇인가? 가장 보람찬, 이 놀라운 사랑을 주는 일, 동지가 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또한 열 두 제자들에게 주의 사항을 주셨어요. '너희들이 내 제자가 되는데 너희들이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 마태복음 10장 5절 이하를 보니까 제자들을 택하시고 난 후에,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변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것이 무슨 뜻인가? 첫째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며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란 무엇인가? 이것은 이방인에게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첫 번째 주의 사항;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라. 둘째, 전대에 무엇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거추장스러운 것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거추장스러운 것을 버려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요. 우리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너무 많아요. 너무 거추장스러운 것이 많으면 하나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보상을 기대하지 말라. 이 주의 사항을 제자들에게 주셨어요. 주님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가까운 데서부터 하라. 둘째는 너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치워 버려라. 셋째, 보상을 바라지 말라.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바라면 마음이 좁아져요. 열 두 제자를 세우신 예수님. 그 배후에 예수님의 깊은 기도가 있고 '아!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 혁명을 일으키는 이 어두운 세상을 고치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지혜로구나.' 그것입니다. 본 교회에서는 그것을 실천합시다. 그것이 우리 교회에 주일 학교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뜻을 깨닫고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실천하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라 마지않습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정말로 헤매는 이 인류를 정말로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그 방법에 대해서, 그 지혜에 대해서 저희들이 공부했습니다. 아버지, 예수님과 같이 저희도 사랑의 사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저희로부터 부족하지만 사랑을 주는 저희들이 되어서 정말로 그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저 사랑을 주는 것으로 결국은 저희들이 축복을 얻는 지혜를 깨닫고 이 일을 아끼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오며, 저희들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 일을 시작하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저희들이 되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저희들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2제자를 택하신 예수님/막3:7-19
12제자를 택하신 예수님/막3:7-19 2003-11-26 10:35:35 read : 4 오래 전에 영국에 괴짜 바이올린이스트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희귀하고 비싼 바이올린을 많이 모으고 소장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바이올린 주에서 가장 비싼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겠다." 많은 사람들 모였고 그것으로 훌륭한 연주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하고 환호성을 올리는데 이 바이올린이스트가 갑자기 그 바이올린을 던지고 발로 밟고 부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자 그 사람이 또 다른 바이올린을 가지고 나와서 연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회자가 멘트하기를 "지금 이 분이 연주한 바이올린은 최고가품이 아니라 20파운드 짜리 싸구려 바이올린이었습니다. 이제 지금 가장 본격적인 고가의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겠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훌륭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습니다. 열광적인 박수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20파운드짜리 바이올린 연주나 고가품의 바이올린 연주가 별로 차이를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 기행을 통해서 우리는 한가지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음악은 악기 때문 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다. 위대한 결과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다. 제자는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사람이라는 전략을 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두 제자를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 시고 또 보내어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 제자를 삼는 사역은 예수님께서는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축복을 주신 일이었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은 열두 사람을 택하여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드시고, 그들과 함께 주 무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고생하셨고 그들과 함께 전도하셨습니다. 이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 닙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자기 생애 전체를 다 쏟아 불어넣으시고, 그의 인격, 그의 능력, 거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삶까지도 다 주셨습니다. 제자란 세움을 받은 자들, 즉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제자란 우리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 이 아니요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한 서기관이 "주여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나는 당신을 따르겠나이다"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을 거절하셨습니다. 거절이 있어야 선택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나 제자로 받아 주시 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다는 말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시간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을 다 내려놓고 "나는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나?"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자 "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요 뜻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라는 형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되었 습니다. 내가 교회에 와서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부름심때문이 라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에게는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바쳐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 이 누구의 부탁입니까? 체면 때문에 하려는 것입니까? 습관적으로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이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름이라고 믿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름과 선택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원망과 불평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해를 하든지 못하든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대가를 바라고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체면 때문에 봉사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에 일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면 이해를 시켜 가며 일합니다. 사람들이 화를 내면 화를 견디어 가면서 일합니다. 못하게 하여도 계속 일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1.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4절에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하였습니다. 주님이 우리 를 택하신 것은 우리와 함께 있으시기 원함이셨습니다. 왜 주님은 우리와 같은 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을까요? 그것은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은 같이 있는 기회를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 키시기를 원하십니다. 같이 있는 기회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기대를 전달하시고 주님의 삶 을 보여 주시고 그래서 우리를 주님처럼 살아가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같이 있지 않고는 어떻게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같이 있지 않고는 어떻게 그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까? 같이 있지 않고는 어떻게 그분의 삶을 볼 수가 있습니 까? 같이 있지 않고는 어떻게 그분을 따라갈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훈련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가지고 훈련을 시키나요? 두 가지를 가지고 훈련시키십니다. 바로 말 씀 훈련과 기도 훈련입니다. 내가 성경말씀을 펼칠 때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 하면 서 말씀에 대한 애정이 없다. 성경공부에 관심이 없다하면 이것은 병든자입니다. 교회에 드 나들면서 무릎꿇고 싶은 심정이 없다. 기도에 대한 목마름이 없다 이것 역시 병든자입니다. 우리의 말씀 훈련기도 훈련을 통해서 주님이 나에게 기대하는 일체의 모습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의 훈련에는 밸런스가 필요합니다. 균형이 필요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말씀은 보는데 기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성도는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성경 공부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례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한다고 하면 자기의 남의 말도 들어야 하지만 자기의 마음도 오픈 하여서 말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남의 말을 듣는데 자기의 마음은 열어 놓지 않습니다. 답답하지요. 이런 사람과 친해 지기 어렵습니다. 주님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지만 나의 말도 해야 합 니다. 주님의 말씀을 떠나있는 기도, 그것은 잘못하면 이기적인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 도가 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도하느냐 말씀을 읽어가면서 기도해야 그 기도가 좋 은 기도가 됩니다. 기도가 다 좋은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후 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는 말했습니다.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한다." 왜 우리의 기도 내용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욕심만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정욕적인 기도 이런 기도는 응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앵무새를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왜 길렀느냐 자기 교회 목사님이 앵무새를 기르니까 나도 앵무새를 기를까해서 기르겠다고 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앵무새가 꼭 한마디만 할 줄 아는데 그 말이 주인을 얼마나 당황하게 만드는 줄 모릅니다. 꼭 한 마디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키스해 주세요" 시도 때도 없이 키스 해 주세요 하니까 찾아오는 손님들한테 얼마나 미안합니까? 잘못하면 오해를 받게 생겼잖아 요. 그래서 목사님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앵무새는 경건한 말을 한다는데 제 앵무새를 보낼 테니까 트레이닝을 좀 시켜주세요. 훈련을 좀 시켜주세요" 목사님이 거 문제없다고 보내라고 그래서 목사님 댁에 이 앵무새를 보냅니다. 목사님 앵무새가 주인이니 까 먼저 인사를 합니다. 사실 목사님댁 앵무새도 꼭 한마디만 하는데 그게 뭐냐면 "다같이 기도합시다." 목사님 앵무새가 주인이니까 먼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그러니 새로 들어온 앵무새가 한 마디 말을 하드래요. "키스해주세요." 그랬던 목사님 앵무 새가 전에 없던 말을 한마디 하더래요. "주님 드디어 내 기도를 응답해주셨습니다." 밤낮 무 엇을 기도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기도하느냐 성경을 보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느 냐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균형을 통해서 우 리는 주님과 친해 질 수 있고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주님의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성경을 펴십시오.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무릎을 꿇으 시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 생활의 연륜이 흘러가는데 아직도 성경을 몰라요. 아직도 성경을 닫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덮어놓고 믿자. 정말 덮어놓고 믿어요.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제자가 된다. 2. 주님이 우리를 보내사 전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14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친교와 훈련을 넘어서서 그 다음에 행할 모습은 우리를 보내사 전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여기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목사나 선교사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내가 좋은 위치, 좋은 자리에서 행복하게 안일하게 살고 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가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이는 곳이 동시에 흩어지 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 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마가복음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 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입니다. 누가복음 20장 48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요한복음의 결론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 전에 들어가자 마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제자와 교회의 최대의 사명은 예 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통 하여 변화를 시킵니까? 전도만이 인간을 바꿀수 있습니다. 전도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습 니다. 전도만이 세상을 바꾸고 온 역사를 바꿀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려야 합니 다. 우리는 사람들을 살려야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살릴 수 있습니까? 전도만이 세상을 살 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최대의 비극이 무엇일까요? 그 교회 안에 전도하는 교인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최대의 비극입니다. 전도하기를 원 하는데 도무지 전도할 줄 을 모릅니다. 이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한 군인이 총을 쏠 줄 모릅니다. 군인들이 싸울 줄 모릅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전쟁할 줄 모른다. 총을 쏠 줄 모른다. 전도할 줄 모른다 이것은 큰 비극입니다. 전도란 간단한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전하는 순간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그가 예수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전도자로 사용하 시기 위해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3. 능력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제자의 요건은 지식이나 재력,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특별히 귀신을 제 압하는 영적 능력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제자로 부 르셨다면 우리에게 반드시 이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받고도 사용하지 않 기 때문에 안 받은 것 같이 생각을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탄을 물리칠 능력이 있습니다. 보 혈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귀신을 무서워 하기 때문에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 능력을 활용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속에 있는 귀신부터 쫓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보혈을 믿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들이 특권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데 있습니 다.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귀신을 꾸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은 피해나갈 것입니다. 귀신을 좇고 제압하는 능력이 생기면 다음에 하나님은 더 놀라운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을 병 고치는 능력입니다.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 능력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치유는 육신의 병만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치유될 것입니다. 그것도 치유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남을 믿습니다. 마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에게 전도와 사명을 주셨다면 그들에게 귀신들을 제압하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귀신을 제 압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심방 가서 기도해주십시오. 치유하는 기도를 해 주십시오. 그 영혼이 치유 받기 시작할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육신의 치료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소유한 초자연적 인 영적인 권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의 권위나 세상의 권위나 재력의 권위나 사회적인 권위를 가지고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사는 사 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택하신 열두 명을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별로 없습니다. 학력도 높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 는 것도 아닙니다. 도덕적인 종교적인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어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들은 아주 사나왔습니다. 자존심이 강하고 교만했습니다. 믿음도 부족했습니다. 한번은 귀 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 니다. 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이런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능력도 헌신도 부족했 습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베드로, 말고의 귀를 잘랐던 베드로 그러나 예수의 죽음 앞에 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변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이 예수님께 훈련을 받고 보냄을 받고 능력을 받으니까 점점 변화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능력을 행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마다 회심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한 번 설교를 하니 삼천명이 회개를 하였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은 줄 아십니까?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를 피해 나가려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로 마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똑바로 못 박혀 돌아가셨으니 자기는 거꾸로 죽어야 한다고 거꾸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예루살렘 에서 참수형을 당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은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으나 죽지 않아서 밧모섬으로 귀양을 갑니다. 거기서 계시록을 씁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의 마드라에서 X형 십자가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교수형을 당했다고 하기도 하고 돌에 맞아 죽었다고도 합니다. 바돌로매는 알메니아에서 피부가 벗겨져 참수를 당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다 대오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돌과 몽둥이 로 맞았으나 다시 살아 톱으로 잘려 순교하였습니다. 시몬은 페르시아 만에서 폭도들의 습 격을 받아 죽었습니다. 단지 가롯 유다만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살하였습니다. 이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이처럼 영웅적으로 죽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찮은 인물들이 예수 님의 손에 잡히니 이처럼 순교하는 영웅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부여받으니 이렇 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순교자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 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에 붙들리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영웅적인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가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끌어 가는 영웅적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very common misconceptions about Jezebel (이세벨에 대한 2가지 일반적인 오해)/2Kings 9:30(왕하9:30)
2 very common misconceptions about Jezebel (이세벨에 대한 2가지 일반적인 오해) 2Kings 9:30(왕하9:30) When we think of Jezebel (as loyal believers in God and as Christians) there are two images that immediately spring to our minds. (1) we are convinced that she is a seductive temptress, so we kind of figure her to look like this young woman pictured here and we imagine our sons and/or women\'s husbands being \"led astray\" by them, as she ensnares them with her super-naturally enhanced charms. Well, this image has more to do with Hollywood\'s 1930\'s film \"Jezebel\" than with Biblical reality. Jezebel was definitely very \"seductive\" and \"Adulterous\" - but mostly in the spiritual sense. She led king Ahab away from the worship of God, and to Baal worship, then started systematically killing off God\'s prophets and removing all vestiges of worship of God from Israel. Look for that attempt in women who you have contact with - not at their appearances! The other image we conjure up in our minds, is based on what we feel she looks like if we could see her with \"spiritual eyes\". (2) we find her so repugnant that in our minds we conjure up images of her looking like some sort of evil, heinous monster, and as such we imagine someone who looks a lot like this photo below of a woman munching on a scorpion (My apologies to the lady in this picture who probably is quite a sweet person once you get to know her - at least she probably is someone with a good sense of humor although I\'d have to say she is someone with rather questionable tastes in food) - anyhow, if we think of this woman as representative of what Jezebel likely looks like ... we would be very very wrong! However, if we could \"see\" her spirit, this scorpion-muncher would easily win the beauty contest when competing against Jezebel. The last person we would suspect (based on sheer looks alone) would be a beautiful lady dressed in white - almost angelic looking, like Ms Tymoshenko (below) who happens to have once been the Prime Minister of the Ukraine, and who is determined to get back into power. She was President Yushchenko\'s most fervent ally in the Orange Revolution, became his prime minister — and then a nemesis. Yushchenko fired her after just seven months in office, saying: \"She often worked with the aim of solving her own problems rather than the state\'s.\" Tymoshenko, known for her steel will and hunger for power, is likely to try to get most of the key seats in the Cabinet for her party (Some ally - no give and take here) pushing Yushchenko\'s allies into less important positions. Her party\'s strong showing makes her a likely tough candidate in the 2009 presidential election. So remember, Looks can be very deceiving! We must judge them by their actions, not by their looks! (Photo of Jezebel\'s strategic alliance) Jezebel-forges-strategic-alliances-with powerful people - but watch your back! Pretty soon a \"power-play\" turns the tables ... Here the President is kissing the prime minister\'s hand - one he appointed. He is dressed in Black, she in white. He has acne scars, her skin is silky smooth. He is graying, she has naturally perfect blond hair. She used him to leverage herself to power - she looks good, he looks bad. She gets into power, he loses it. She takes over the throne, he is cast aside. Clearly this is not an alliance worth making! This exact scenario is playing out now in the Ukraine - so we have \"ring-side\" seats in watching it all unfold. Posted by Learn from Elijah Attack like Jehu ! Cast Jezebel out, then follow Jesus! at 15:31 Labels: Jezebel is often times quite beautiful.
21C 예수 생명 운동/ 계22:1-2
21C 예수 생명 운동 계22:1-2 과학문명의 드높은 만세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과 정보의 혁명, 생명 공학의 실험, 갖가지 창의와 도전이 21세기의 벽두에 세상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21세기의 3D라고 부르는 디지털(Digital), DNA, 디자인(Design)의 세 가지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더욱 풍요하고 행복하며 건강 장수할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복된 생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치 이러한 시대에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말하거나 사죄 구원의 심판 주이신 예수님을 말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시대착오의 사람으로 내몰리기 쉬운 말세지말에 당도하여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는 분명히 \\\'예수 생명 운동\\\'의 세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전국 교회가 고려신학교 주일을 지키며 신학교를 기억하고 그 사명의 귀중함을 되 새기는 복된 날입니다. 유일한 생명수이자 생명나무이신 예수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말씀에 의지하여 ‘21세기 예수 생명 운동’이란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1. 인간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자기 마음대로 제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자주장 하에 모든 인생들은 이 땅에 태어났고 그분의 주재 하에 쓰이다가 결국 본래의 흙으로 되돌려지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인생에게 주어진 생명과 호흡의 시간과 누릴 수 있게 된 만물도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소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해 『 …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 90:9)라고 절절히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인생이 유한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 2000년경에 동방에 살았던 의인 욥은 이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욥 7:6-7)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한한 생의 애통함을 잘 묘사한 곳은 욥기 14장외에 달리 없을 것입니다. 꽃의 쇠함과 같고 그림자 같은(욥 14:1-2) 인생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짤막한 경구로 이런 말씀으로 새기고 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바로를 만난 야곱은 나이를 묻는 그에게 『내 나그네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창 47:9)하고 회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 90:90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하면서 ‘밤의 한 경점’같은 인생의 허무를 뚜렷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만일 기독교의 진리가 그저 시편 기자의 노래처럼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 89:47) 하는 한탄에 머무는한 그것은 유대교나 마호멧교보다 나을 것도 없고, 도교나 유교, 불교나 힌두교 등과도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현대 문명의 어떤 이론이나 사상보다도 나을 것이 없을 터이므로 어느 종교학자의 말처럼 기독교가 쇠퇴하여 없어질는지도 모릅니다. 정작 21세기에 사람들이 찾아가야 할 것은 디지털 혁명이나, DNA 실험이나 디자인 개발에 의한 생활의 편리함이나, 복지나 장수촌 건설이 아니라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리 앞에 놀라며 그 하나님의 비밀한 생명 진리를 알아가고, 하나님의 진리이신 예수 생명 운동을 전개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명을 만드신 분이시요,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복을 주셨다고 창세기 1장 28절에 일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언약(창 2:16-17)을 불순종하는 범죄 행위를 함으로써 모든 인류가 죄의 삯인 사망의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무라도 예외 없이 죄값인 사망의 저주의 굴레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인애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죄인된 인생에게 양식을 주시며, 심판의 날까지 율법 아래 살도록 보존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과 약속을 저버리고, 자의 자행하며 죄악의 종노릇을 하다가 수없이 많은 징벌을 당했습니다.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대표되는 각종 재앙이 인류사회를 엄습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위에는 전쟁과 자연 재해와 질병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는 인생에게는 그 존재 의미가 결국 허무와 절망입니다. 평생 썩을 양식을 위해, 한낱 썩어짐의 종노릇만 하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무가치한 인생, 불쌍한 영혼들이 세상에 가득 차 있습니다. 구원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인생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해결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던 이가 구원 역사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단지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조건 한 가지로 영생(요 3:15-16)하게 되는 은혜의 새 언약이 성취된 것입니다. 육신에 거하며 땅 위의 것만 찾던 자들에게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천국의 부활 영생을 발견하게 하신 분이 예수이십니다. 1세기 말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에게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계시하셨던 주님은 그의 재림 심판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다시금 천국의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은 사실 앞에, 죽었던 죄인을 다시 살리사 새 생명 얻게 하신 주님 앞에, \\\"예수 생명을 받아\\\" 감격하며 눈물짓는 거듭난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상실한 생명이 회복되어 예수 생명의 길, 구원 진리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3. 성도는 복음 전파의 사명 때문에 삽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결국 죽기 위해 헛되이 삽니다. 죽기 위해 밥 먹고 옷 입고, 죽기 위해 병 고치고 돈벌고 즐기고, 죽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쉬고 하며 살아갑니다. 죽고 마는 그것이 인생의 도착점이요, 종착역인 줄로 압니다. 그 이유는 심판과 지옥 영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신자들은 비록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로운 성결의 삶으로 나아가므로 생의 목적과 지향점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라는 말씀에 따라 살고 생업의 목표가 생계나 일신을 위한 것에 머물지 않으며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것으로 일대전환을 하게 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고 했습니다. 이제 영생의 양식이신 예수를 위한 삶으로 바뀐 성도는 부활하신 주님의 최대 명령을 따라 삽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전파의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새 삶은 전도의 사명, 선교의 목적으로 생의 행로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생명수 강물이 흐르는 길입니다. 만국을 소성케 하는 생명의 실과가 달린 생명나무의 길입니다. 에덴 동산에 있었던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의 회복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5절에 『가라사대데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도 이 지상 명령이 마지막 당부로 새겨 있고, 사도행전 1장 8절에도 명기되어 있는 생의 절대 명령(생명)입니다. 성도의 사명은 복음 전파입니다. 예수 생명 얻은 자의 삶의 목적은 택자 구령 운동입니다. 성도의 사명인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복된 증거입니다. 성도는 복음 증거하고 전파하는 사명 때문에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고려신학교는 바로 21세기의 예수 생명 운동의 보루입니다. 이곳에서 여러분의 목사가 나왔고 전도자가 양성되었으며 또한 내일의 일꾼인 선지생도가 훈련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 전파에 앞장서는 효율적인 방법은 신학교를 통해 예수 운동의 지도자를 배출시키는 일입니다. 전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물질의 후원으로 고려신학교는 21세기 세계를 선도할 개혁주의 신학교, 예수 십자가의 신학교, 구속 운동의 산실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교회는 신학교를 재정적으로 책임지고 직영해 나가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예기치 못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지난해 개혁주의 본산이라고 하는 화란에서는 지난날 크게 명성을 날리던, 425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레이든 대학교 신학부와 리델보스(H.Riddelbos)가 교수로 있었던 캄펜 신학대학교와 암스텔담 대학교 신학부가 문을 닫았습니다. 그 첫째 이유가 신학교를 교회가 지원하지 아니하고 정부가 지원하도록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둘째 이유는 신학이 교회 목회 현장과 거리가 먼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신학교를 위한 헌금을 하지 아니하니 신학교가 성경의 원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정부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신학은 원칙적으로 재정, 행정, 인사 여타의 것을 정부와 관계해서는 안됩니다. 고려신학교의 미래는 우리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직언하면 얼마나 좋은 신학생들을 신학교로 보내느냐는 문제와 얼마만큼 신학교를 지원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따라서 21세기 예수 생명 운동은 고려신학교 후원 운동과 맥을 같이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가정마다 기도로 지원하는 선지 생도들이 생기고, 섬기시는 교회마다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모임이 커지며, 각 노회마다 신학 교수들을 책임지고 뒷받침하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21세기 예수생명 선교/계22:1-22
21세기 예수생명 선교/계22:1-22 2003-06-20 16:45:28 read : 5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륜과 섭리 속에 새 천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는 바야흐로 '황금시대'를 구가할 듯이 보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과 정보의 혁명, 생명과학의 실험, 갖가지 창의와 도전이 21세기의 벽두에 세상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소위 21세기의 3D라고 부르는 디지털, DNA, 디자인의 세 가지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더욱 풍요하고 행복하며 건강 장수할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복된 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러한 시대에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말하거나, 사죄 구원의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말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시대착오의 사람으로 내몰리기 쉬운 말세지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 진리는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대 최고의 학문과 사상이 만발한 아테네의 거리에서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였을 때 헬라의 문화 시민들이 바울의 '새 교'를 기롱하였던 장면(행17:16-31)을 연상케 합니다. "가장 새로된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았던"(행16:21) 아레오바고의 아덴 사람들처럼 '범사에 종교성'을 부여하는 풍조와 '알지 못하는 신'과 우상들을 위한 제단을 쌓아 가는 혼란이 거듭되는 때인 것입니다. 바울이 초대교회 시대에 펼쳤던 예수 생명운동을 이제 다시금 맹렬히 전개할 시점에 도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21세기는 분명히 '예수 생명 운동'의 세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전국교회가 '고려신학교 주일'을 지키며 신학교를 기억하고 그 사명의 귀중함을 되새기는 복된 날입니다. 유일한 생명수이자 생명나무이신 예수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말씀에 의지하여 '21세기 예수 생명 운동'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인간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자기 마음대로 제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자주장 하에 모든 인생들은 이 땅에 태어났고, 그 분의 주재 하에 쓰이다가 결국 본래의 흙으로 되돌려지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인생에게 주어진 생명과 호흡의 시간과, 누릴 수 있게 된 만물도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소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이 나그네 여로에서 향유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순간적인 것입니까? 6000년의 인간역사를 살고 갔던 수많은 영웅호걸, 재사가인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참으로 인간의 생명은 짧은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해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9)라고 절절히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인생이 유한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전 2000년경에 동방에 살았던 의인 욥은 이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나의 날은 베들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욥7:6-7). 유한한 생의 애통함을 잘 묘사한 곳은 욥기 14장외에 달리 없을 것입니다. 꽃의 쇠함과 같고 그림자 같은(욥14:1-2) 인생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짤막한 경구로 이런 말씀을 새기고 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그야말로 구름 같은 인생, 한낱 그림자 같고 꿈같은 인생마저 수고와 슬픔, 그리고 험악한 일들로 채워질 뿐인 것이 유한한 우리 인생의 본 모습입니다. 애굽의 바로를 만난 야곱은 나이를 묻는 그에게 "내 나그네의 세월이 일백 삼심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창47:9)라고 회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중에 실려있는 다음구절은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라는 인생의 허무를 또렷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젊은 시대는 이런 말이 별다른 의미 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요. 왜냐하면 그만한 세월을 살아본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무상한 인생이니 어쩌니 하는 것에 대해 사색하거나 해답을 구하는 일 자체에 무관심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젊은이들은 "세월을 아끼라"(엡5:16)는 말씀을 그저 어른들의 잔소리쯤으로 넘겨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의 유한성이나 허무함에 대해서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나 철학 사상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심하게 지나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한갓 생의 정서로써 표현하고 말거나, 절망과 불안으로 아예 회피할 수만도 없는, 이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해 답하고 있는 진리가 있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세상은 여전히 혼잡 속에 방황하며, 허락된 시간과 생명과, 위임된 소유와 존재를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의 진리가 그저 시편 기자의 노래처럼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89:47)라는 한탄에 머무는 한 그것은 유대교나 마호멧교보다 나을 것도 없고, 도교나 유교, 불교나 힌두교 등과도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현대 문명의 어떤 이론이나 사상보다도 나을 것이 없을 터이므로 어느 종교학자의 말처럼 기독교가 쇠퇴하여 없어질는지도 모릅니다. 정작 21세기에 사람들이 찾아가야 할 것은 디지털 혁명이나, DNA 실험이나 디자인 개발에 의한 생활의 편리함이나, 복지나 장수촌 건설이 아니라,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리 앞에 놀라며, 그 하나님의 비밀한 생명 진리를 알아가고, 하나님의 진리이신 예수 생명 운동을 전개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명을 만드신 분이시요,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복을 주셨다고 창세기 1장 28절에 일러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하여 그 땅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게 하셨다고 창세기 2장 8-9절이 밝혀 놓고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동산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으며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게 지어진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1) 죄의 값은 사망 그런데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언약(창2:16-17)을 불순종하는 범죄 행위를 함으로써 모든 인류가 죄의 삯인 사망의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무라도 예외 없이 죄값인 사망의 저주의 굴레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인애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죄인된 인생에게 양식을 주시며, 심판의 날까지 율법아래 살도록 보존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과 약속을 저버리고, 자의 자행하며 죄악의 종노릇을 하다가 수없이 많은 징벌을 당했습니다.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대표되는 각종 재앙이 인류사회를 엄습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위에는 전쟁과 자연 재해와 질병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악과 그로 인한 저주와 징치 아래 고생하는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때마다 끊임없이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하나님은 예언자들의 말로 선포하였습니다. 2) 돌아오라 부르심 하나님의 것인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라는 지엄하신 명령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 영원히, 주님 오실 때까지 유효한 축복의 명령입니다. 구원의 메시아이신 예수는 바로 이 위대한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성육신 하셨고, 십자가 고난으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려졌느니라"(호14:1).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2-13). 하나님의 부르심, 구원에의 초청입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렇듯 간절하게 책망과 경고와 함께 선민 이스라엘의 회심을 촉구하였습니다. 결과는 완악한 인생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멸망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는 인생에게는 그 존재 의미가 결국 허무와 절망입니다. 평생 썩을 양식을 위해, 한낱 썩어짐의 종노릇만 하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무가치한 인생, 불쌍한 영혼들이 세상에 가득차 있습니다. 구원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인생의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단번에 영원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수이자 생명의 떡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나셔서 하나님의 본체를 알 수 있게 하신 기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마11:5,눅7:22) 이적과 기사의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던 이가 구원역사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단지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조건 한가지로 영생(요3:15-16)하게 되는 은혜의 새 언약이 성취된 것입니다. 육신에 거하며 땅위의 것만 찾던 자들에게,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천국의 부활 영생을 발견하게 하신 분이 예수이십니다. 1세기말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에게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계시하셨던 주님은 그이 재림 심판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다시금 천국의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예수를 믿는 신자로서 이 환상적 장면이 자기 삶의 비전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소경일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성도는 또한 성령의 일깨우심에 의해 천국을 바라보며 걸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천국 문에 이르도록 구원의 서정을 가는 동안 기쁨과 소망, 찬양과 감사의 경건생활을 지속해 줍니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은 사실 앞에 죽었을 죄인 다시 살리사 새 생명 얻게 하신 주님 앞에 감격하며 눈물짓는 "예수 생명을 받은" 거듭난 생을 살게 됩니다. 상실한 생명이 회복되어 예수 생명의 길, 구원 진리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3. 성도는 복음 전파의 사명 때문에 삽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결국 죽기 위해 헛되이 삽니다. 죽기 위해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죽기 위해 병 고치고, 돈벌고, 즐기고, 죽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죽고 마는 그것이 인생의 도착점이요, 종착역인 줄로 압니다. 심판과 지옥 영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신자들은 비록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로운 성결의 삶으로 나아가므로 생의 목적과 지향점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생업의 목표가 생계나 일신을 위한 것에 머물지 않게 되며,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것으로 일대 전환을 하게 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 이제 영생 양식이신 예수를 위한 삶으로 바뀐 성도는 주님의 최대 명령을 따라 삽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전파의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새 삶은 전도의 사명, 선교의 목적으로 생의 행로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생명수 강물이 흐르는 길입니다. 만국을 소성케 하는 생명의 실과가 달린 생명 나무의 길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수 강가 생명나무의 회복인 것입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하였고,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영어를 왜 배우고 있습니까? 외국어를 열심히 배워 국제 무역을 잘해서 돈을 잘 벌어 하나님 나라 사업에 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과 재능으로 하나님 영광 위해 살라고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컴퓨터는 왜 배웁니까? 세계로 네트워크된 인터넷 공간을 최대 활용하여 GOOD NEWS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의 영생 복음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사명은 복음 전파입니다. 예수 생명을 얻은 자의 삶의 목적은 택자 구령운동입니다. 성도는 이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어집니다. 예수가 나의 구주 되심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21세기에도 하나님은 예수 생명 운동을 명하고 계십니다. 먼저 믿고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 생명을 더욱 힘쓰라고 재촉하십니다. 고려신학교는 바로 21세기의 예수 생명운동의 보루입니다. 이곳에서 여러분의 목사가 나왔고, 전도자가 양성되었으며, 또한 세계를 향해 돌진하는 선교사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의 일꾼인 선지생도들이 훈련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 전파에 앞장서는 효율적인 방법은 신학교를 통해 예수 운동의 지도자를 배출시키는 일입니다. 전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물질의 후원으로 고려신학교는 21세기 세계를 선도할 개혁주의 신학교, 예수 십자가의 신학교, 구속운동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고려신학교는 명실공히 21세기 예수 생명운동의 산실이요, 요람이며, 목회와 선교와 신학의 본부로 기틀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실을 다지며 조국과 아시아와 세계를 향해 웅비할 때입니다. 예수 세계화 운동의 전초 기지가 되며 정병의 양성소가 되도록, 전국 교회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사업과 직장이 고려신학교를 통한 예수 생명 운동으로 말할 수 없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새로 맞이한 21세기는 이전 세기보다 더욱 복음의 생명력을 요구하는 시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만이 영생의 유일한 통로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사는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들입니다. 고려신학교는 오직 성경진리만을 가르치고 배우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살고자 하는 주님의 제자 훈련소임을 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마다 기도로 지원하는 선지 생도들이 생기고, 섬기시는 교회마다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모임이 커지며, 각 노회마다 신학교수들을 책임지고 뒷받침하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1세기 예수생명 선교/계22:1-22
21세기 예수생명 선교/계22:1-22 2003-07-21 10:32:59 read : 13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륜과 섭리 속에 새 천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는 바야흐로 '황금시대'를 구가할 듯이 보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과 정보의 혁명, 생명과학의 실험, 갖가지 창의와 도전이 21세기의 벽두에 세상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소위 21세기의 3D라고 부르는 디지털, DNA, 디자인의 세 가지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더욱 풍요하고 행복하며 건강 장수할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복된 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러한 시대에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말하거나, 사죄 구원의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말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시대착오의 사람으로 내몰리기 쉬운 말세지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 진리는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대 최고의 학문과 사상이 만발한 아테네의 거리에서 '예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였을 때 헬라의 문화 시민들이 바울의 '새 교'를 기롱하였던 장면(행17:16-31)을 연상케 합니다. "가장 새로된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았던"(행16:21) 아레오바고의 아덴 사람들처럼 '범사에 종교성'을 부여하는 풍조와 '알지 못하는 신'과 우상들을 위한 제단을 쌓아 가는 혼란이 거듭되는 때인 것입니다. 바울이 초대교회 시대에 펼쳤던 예수 생명운동을 이제 다시금 맹렬히 전개할 시점에 도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21세기는 분명히 '예수 생명 운동'의 세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전국교회가 '고려신학교 주일'을 지키며 신학교를 기억하고 그 사명의 귀중함을 되새기는 복된 날입니다. 유일한 생명수이자 생명나무이신 예수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말씀에 의지하여 '21세기 예수 생명 운동'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인간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자기 마음대로 제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자주장 하에 모든 인생들은 이 땅에 태어났고, 그 분의 주재 하에 쓰이다가 결국 본래의 흙으로 되돌려지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인생에게 주어진 생명과 호흡의 시간과, 누릴 수 있게 된 만물도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소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이 나그네 여로에서 향유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순간적인 것입니까? 6000년의 인간역사를 살고 갔던 수많은 영웅호걸, 재사가인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참으로 인간의 생명은 짧은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해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9)라고 절절히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인생이 유한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전 2000년경에 동방에 살았던 의인 욥은 이에 대해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나의 날은 베들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욥7:6-7). 유한한 생의 애통함을 잘 묘사한 곳은 욥기 14장외에 달리 없을 것입니다. 꽃의 쇠함과 같고 그림자 같은(욥14:1-2) 인생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짤막한 경구로 이런 말씀을 새기고 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그야말로 구름 같은 인생, 한낱 그림자 같고 꿈같은 인생마저 수고와 슬픔, 그리고 험악한 일들로 채워질 뿐인 것이 유한한 우리 인생의 본 모습입니다. 애굽의 바로를 만난 야곱은 나이를 묻는 그에게 "내 나그네의 세월이 일백 삼심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창47:9)라고 회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중에 실려있는 다음구절은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라는 인생의 허무를 또렷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젊은 시대는 이런 말이 별다른 의미 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요. 왜냐하면 그만한 세월을 살아본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무상한 인생이니 어쩌니 하는 것에 대해 사색하거나 해답을 구하는 일 자체에 무관심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젊은이들은 "세월을 아끼라"(엡5:16)는 말씀을 그저 어른들의 잔소리쯤으로 넘겨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의 유한성이나 허무함에 대해서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나 철학 사상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심하게 지나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한갓 생의 정서로써 표현하고 말거나, 절망과 불안으로 아예 회피할 수만도 없는, 이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해 답하고 있는 진리가 있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세상은 여전히 혼잡 속에 방황하며, 허락된 시간과 생명과, 위임된 소유와 존재를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의 진리가 그저 시편 기자의 노래처럼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89:47)라는 한탄에 머무는 한 그것은 유대교나 마호멧교보다 나을 것도 없고, 도교나 유교, 불교나 힌두교 등과도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니 현대 문명의 어떤 이론이나 사상보다도 나을 것이 없을 터이므로 어느 종교학자의 말처럼 기독교가 쇠퇴하여 없어질는지도 모릅니다. 정작 21세기에 사람들이 찾아가야 할 것은 디지털 혁명이나, DNA 실험이나 디자인 개발에 의한 생활의 편리함이나, 복지나 장수촌 건설이 아니라,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리 앞에 놀라며, 그 하나님의 비밀한 생명 진리를 알아가고, 하나님의 진리이신 예수 생명 운동을 전개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명을 만드신 분이시요,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복을 주셨다고 창세기 1장 28절에 일러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하여 그 땅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게 하셨다고 창세기 2장 8-9절이 밝혀 놓고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동산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으며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게 지어진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1) 죄의 값은 사망 그런데 사단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선악과 언약(창2:16-17)을 불순종하는 범죄 행위를 함으로써 모든 인류가 죄의 삯인 사망의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무라도 예외 없이 죄값인 사망의 저주의 굴레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인애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죄인된 인생에게 양식을 주시며, 심판의 날까지 율법아래 살도록 보존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과 약속을 저버리고, 자의 자행하며 죄악의 종노릇을 하다가 수없이 많은 징벌을 당했습니다.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대표되는 각종 재앙이 인류사회를 엄습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위에는 전쟁과 자연 재해와 질병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악과 그로 인한 저주와 징치 아래 고생하는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때마다 끊임없이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하나님은 예언자들의 말로 선포하였습니다. 2) 돌아오라 부르심 하나님의 것인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라는 지엄하신 명령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 영원히, 주님 오실 때까지 유효한 축복의 명령입니다. 구원의 메시아이신 예수는 바로 이 위대한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성육신 하셨고, 십자가 고난으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려졌느니라"(호14:1).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2:12-13). 하나님의 부르심, 구원에의 초청입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렇듯 간절하게 책망과 경고와 함께 선민 이스라엘의 회심을 촉구하였습니다. 결과는 완악한 인생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멸망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는 인생에게는 그 존재 의미가 결국 허무와 절망입니다. 평생 썩을 양식을 위해, 한낱 썩어짐의 종노릇만 하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무가치한 인생, 불쌍한 영혼들이 세상에 가득차 있습니다. 구원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인생의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단번에 영원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수이자 생명의 떡이신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나셔서 하나님의 본체를 알 수 있게 하신 기적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마11:5,눅7:22) 이적과 기사의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4)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던 이가 구원역사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단지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조건 한가지로 영생(요3:15-16)하게 되는 은혜의 새 언약이 성취된 것입니다. 육신에 거하며 땅위의 것만 찾던 자들에게,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천국의 부활 영생을 발견하게 하신 분이 예수이십니다. 1세기말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에게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계시하셨던 주님은 그이 재림 심판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다시금 천국의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예수를 믿는 신자로서 이 환상적 장면이 자기 삶의 비전이 되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소경일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성도는 또한 성령의 일깨우심에 의해 천국을 바라보며 걸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천국 문에 이르도록 구원의 서정을 가는 동안 기쁨과 소망, 찬양과 감사의 경건생활을 지속해 줍니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은 사실 앞에 죽었을 죄인 다시 살리사 새 생명 얻게 하신 주님 앞에 감격하며 눈물짓는 "예수 생명을 받은" 거듭난 생을 살게 됩니다. 상실한 생명이 회복되어 예수 생명의 길, 구원 진리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3. 성도는 복음 전파의 사명 때문에 삽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결국 죽기 위해 헛되이 삽니다. 죽기 위해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죽기 위해 병 고치고, 돈벌고, 즐기고, 죽기 위해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죽고 마는 그것이 인생의 도착점이요, 종착역인 줄로 압니다. 심판과 지옥 영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신자들은 비록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로운 성결의 삶으로 나아가므로 생의 목적과 지향점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생업의 목표가 생계나 일신을 위한 것에 머물지 않게 되며,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것으로 일대 전환을 하게 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 이제 영생 양식이신 예수를 위한 삶으로 바뀐 성도는 주님의 최대 명령을 따라 삽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전파의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새 삶은 전도의 사명, 선교의 목적으로 생의 행로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생명수 강물이 흐르는 길입니다. 만국을 소성케 하는 생명의 실과가 달린 생명 나무의 길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수 강가 생명나무의 회복인 것입니다.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하였고,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영어를 왜 배우고 있습니까? 외국어를 열심히 배워 국제 무역을 잘해서 돈을 잘 벌어 하나님 나라 사업에 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과 재능으로 하나님 영광 위해 살라고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컴퓨터는 왜 배웁니까? 세계로 네트워크된 인터넷 공간을 최대 활용하여 GOOD NEWS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의 영생 복음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사명은 복음 전파입니다. 예수 생명을 얻은 자의 삶의 목적은 택자 구령운동입니다. 성도는 이 거룩한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계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어집니다. 예수가 나의 구주 되심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21세기에도 하나님은 예수 생명 운동을 명하고 계십니다. 먼저 믿고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 생명을 더욱 힘쓰라고 재촉하십니다. 고려신학교는 바로 21세기의 예수 생명운동의 보루입니다. 이곳에서 여러분의 목사가 나왔고, 전도자가 양성되었으며, 또한 세계를 향해 돌진하는 선교사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의 일꾼인 선지생도들이 훈련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 전파에 앞장서는 효율적인 방법은 신학교를 통해 예수 운동의 지도자를 배출시키는 일입니다. 전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물질의 후원으로 고려신학교는 21세기 세계를 선도할 개혁주의 신학교, 예수 십자가의 신학교, 구속운동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고려신학교는 명실공히 21세기 예수 생명운동의 산실이요, 요람이며, 목회와 선교와 신학의 본부로 기틀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실을 다지며 조국과 아시아와 세계를 향해 웅비할 때입니다. 예수 세계화 운동의 전초 기지가 되며 정병의 양성소가 되도록, 전국 교회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사업과 직장이 고려신학교를 통한 예수 생명 운동으로 말할 수 없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새로 맞이한 21세기는 이전 세기보다 더욱 복음의 생명력을 요구하는 시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만이 영생의 유일한 통로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사는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들입니다. 고려신학교는 오직 성경진리만을 가르치고 배우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살고자 하는 주님의 제자 훈련소임을 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마다 기도로 지원하는 선지 생도들이 생기고, 섬기시는 교회마다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모임이 커지며, 각 노회마다 신학교수들을 책임지고 뒷받침하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1세기의 엘리사가 됩시다/ 왕하2:1-15/ 2006-06-20
21세기의 엘리사가 됩시다 왕하2:1-15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길을 가다가 한곳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에는 한 젊은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그런 모양을 바라보던 엘리야가 동연 겉옷을 벗어 젊은이에게 던졌습니다. 그러자 젊은이가 모든 것을 버리고 노인에게로 달려갔는데 이 청년이 우리가 잘 아는 엘리사입니다. 대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첫 만남의 장면입니다. 한 사람의 평범한 농부는 이렇게 해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의 전권대사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엘리사라고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어떻게 하다가 수 많은 기적과 승리와 축복의 월계관을 획득하였는가를 밝히고자 합니다. 그는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인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살고 간 생애의 모습에 층격을 받아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할때 엘리사 시대와 같은 기적적 능력이 현재 우리의 생애에도 재현 될줄 믿습니다. 첫째로: 그는 모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소 열 두 겨리를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장래가 양양한 푸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청년이었습니다. 정의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아합 왕의 탈선된 정치에 불만을 품고 마음속으로 고독한 늙은 선지자 엘리야를 존경하고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흠 잡을수 없는 모범적 청년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철저한 헌신 자 였습니다. 열왕기상19:20절에 보면 그는 엘리야 선지자의 부름을 받은 즉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를 따랏던 것입니다. 소망 있는 젊은이가 추호의 망설임이 없이 절대적인 복종을 한 것입니다. 그는 순교를 각오한 헌신 자였습니다. 그 당시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아합 의 정책으로 모든 선지자들이 처형을 당하고 엘리야 선지자만 홀로남아 산으로 들로 피해 다녔습니다. 3년 반 동안 헤메이던 생활로 옷은 낡아 찢기우고 머리는 산발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광대뼈만 남아있어 그야말로 늙은 거지 이거나 정신이상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대도 엘리사는 그가 누구인가 알아보았습니다. 꿈에도 그리워하고 사모했던 영적지도자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사는 열두 겨리의 소와 모든 재산을 버리고 기쁨으로 엘리야를 따라 나섯습니다. 엘리야를 따라 선지자로서 몸을 바치면 자기도 언제 붙잡혀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무서운 환경인데도 엘리사는 기쁨으로 순종하였다는 사실은 순교를 각오한 결심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엘리사 그는 완전한 헌신 자 였습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아내 자식을 포기했습니다. 친구와 이웃을 포기하고 농토와 모든 재산을 포기하였습니다. 소를 잡아 동내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완전하게 가정과 재산을 정리하였습니다. 고려해볼 여지도 없이 단 한순간에 과거의 모든 것을 미련없이 끊어 버린 것입니다. 명성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결단은 힘들 것인데 순교를 각오 해야만 하는 고독한 정의의 길을 자초하고 나서는 엘리사의 순종은 가히 완전한 헌신이었습니다. 성도가 물질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다보면 신앙에 승리할수 없습니다. 교역자도 너무 물질에 집착하거나 재물에 집착하다보면 목회에 대한 목적이 희석 될 수도 있고 영적으로 퇴보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할 때 그러한 목회자를 값있고 능력 있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강 건너 마을에 사는 세 명의 청년이 이웃마을 결혼잔치에 갔다가 술에 잔득 취하여 집에 돌아 갈려고 나룻터에 까지 왔습니다. 배는 매어져있는데 사공이 없어 세명의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배를 몰기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세 사람이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20분이면 강 건너 편에까지 갈 수 있는 거리인데 1시간이 지나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노 젓기를 멈추지 않고 손바닥이 부르트고 온몸에 땀이 흥건이 흐를 정도로 수고를 하였습니다. 몆 시간을 노를 젓다보니 날이 훤히 밝았고 술도 깼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가 막히게도 배는 어제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노를 저었는데 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을까요? 원인은 배를 묶고있는 닻 줄을 풀지 않고 배를 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묶여진 배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수 있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 믿은지 오래고. 집사가 된지 오래고. 권사가 된지 오래고. 장로가 된지 오래고. 직분을 받아 사명자가 된지 오래지만 아직도 세상의 줄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믿기전에 가지고 있던 옛 구습의 줄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의 줄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명예와 욕심과 탐심의 줄을 끊어버리지 못 하고.물질의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세상적인 방법의 줄을. 자기방법의 줄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주님 뜻대로 산다고 애써보았자 애초의 빈털터리 신앙생활에서 한 발자욱도 앞서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헌신하는 그 사람은 바보같고. 어리석은 것 같고. 실패한 것 같으나 결국은 승리롭게 목적지에 다달을수 있는 진정 현명한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는 주의 종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오늘날 엘리야가 엘리사를 향하여서 여러 가지로 권면하고 권고 하는 중에 “내가 가는 길은 험하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험난한 길이니 너는 이제 여기 머물라 나는 갈 길을 가야겠다”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내가 여호와의 사심과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끝까지 스승님을 끝까지 따라 가겠습니다” 하고 따라갔습니다. 길갈에 도착하자 스승이 또다시 입을 엽니다. “엘리사야 너는 길갈에 머물러라 나는 벹엘로 가야 되겠다” “내가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길갈은 양식이 풍부한 기름진 땅입니다. 그곳에 머물르면 부자로 잘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부귀와 영화를 바라지 않았고 끝까지 부름 받은 주의 종의 뒤를 따라 가겠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벧엘로 갔습니다. “너는 벧엘에 머물러라 나는 여리고로 가야겠다” 그래도 엘리사의 결심은 꺽이지 않았습니다. 죽어도 스승을 따라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벧엘은 옛날 야곱이 하늘문이 열리고 신령한 사다리가 내려와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하던 광경을 목격한 신비로운 체험의 장소입니다. 그들은 여리고로 갔습니다. 여리고는 불행한 장소입니다. 악하고 사나운 사람들이 들끓어 잘못 하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수밖에 없는 험악한 곳인데 엘리사는 두려움이 없이 스승을 따라갔습니다. “나는 이제 요단으로 가겠다 너는 여기 머물러라” “당신은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 하겠나이다”엘리사의 결단은 대단합니다. 요단강은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죽음의 장소입니다. 최후의 생명. 마지막 그 순간까지 동행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 보다도 더 큰 능력을 행한 것이 바로 여기에 원인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피할수도 없고 도망 할수도 없는 것입니다. 겨울이 와도 눈보라가 쳐도 환난의 구렁텅이에 수없이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도 다시일어서야 합니다. 인생의 가파른 고개턱을 넘느라 땀과 눈물로 피투성이로 얼룩진 나날을 보내게 될때 우리는 낙심하지 맙시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고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라면 어떤 난관이라도 끝까지 따라 가겠다는 엘리사의 결심이 필요한 것 입니다. 현재보다 10배 이상 실패하고 병들고 가난해도 주님 날 버리지 않으니 나 또한 주님 버리지 않는다 하고 끝까지 그 길을 따라가며 부르짖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기사와 이적을 주실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성도들도 기왕 예수를 믿을 바에야 끝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주님 뒤를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그는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요단에 당도한 엘리야가 끝까지 따라온 엘리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네가 길갈과 여리고를 거쳐 요단까지 나를 따라왔으니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부귀. 영화. 권세. 다 버리고 빈털터리 인 체로 나를 쫒아온 목적이 무엇이냐”?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어라고 아뢰겠습니까? 정확하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까? 엘리사는 스승의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예 당신의 영감이 내게 갑절이나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을 갑절이나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기도입니다. 오직 이 한 목표를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죽음의 골짜기 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오면 돈 백불씩 나눠 주겠다고 신문에 광고 하면 아마 몰려오는 인파로 교회가 미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가봐야 수입도 없고 오히려 부담만 느끼니까 돈벌이나 나가야겠다고 주일날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정 21세기 엘리사가 될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재물과 명예가 눈앞에 아른 거려도 이 모든 것 뿌리치고 오로지 성령충만 받기위해서 눈이오나 비가 오나 성전에 나와 목적이 분명한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무엇 때문에 갑절의 성령받기를 그렇게 원했을까요? 엘리야 선지자가 떠난후 자기가 져야할 사명의 막중함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늘의불. 하늘의 비를 동원시키는 지구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적과 능력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엘리사가 바톤을 이어받아 거룩하고 귀한 성직을 감당해야 할텐데 엘리야 보다 갑절의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는 절대로 올바른 후계자의 대를 이을수 없다는 사명감에서 였습니다. 또한 거짓말 하는 영에 사로잡힌 거짓 선지자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거짓선지자 400명의 문제를 해결 짖지 못하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자기가 해결해야 되는데 그러기위해서는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을 받아야 400대1의 싸움에서 승리할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창설한 신학교의 학생들이 50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자유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탈선된 신학생들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로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가 종교와 정치가 극도로 부패 되어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려면 시시한 능력과 인간의 수단으로는 될 수 없고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나라의 앞길은 절망이다 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엘리야에게 나타난 갑절의 영감을 받아야 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듯 악한 영들과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갑절의 영감이 필요한 것입니다. 각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와 세계는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실날이 갑절이나 가까워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는 우리는 과거 역사속에 사라져 가신 수많은 종들보다 성령의 능력을 갑절이나 받지 않고서는 승리할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목적이 분명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실때“주여 보기를 원 하나이다”라고 목적이 분명한 기도를 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당신이 내게 축복하시기 전에는 절대로 놓을수 없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져도 매달려 간구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불과 비를 달라고 창자가 끊어지는 기도를 했습니다. 어떤 부인이 생활이 궁핍하니까 남편만 들어오면 깨진바가지를 박박 긁어댑니다. 입만 열면 쌀 걱정. 아이들 등록금 걱정으로 시작하여 이런걱정. 저런걱정. 저런걱정 이런걱정. 끝이 없이 불평만 늘어놓는데 남편은 가만히 듣고만 있습니다. 더욱 화가난 부인은 더욱 화가 나서 “아니 왜 아무말도 못해요” 하고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뭘 그리 늘어놓소 간단하게 말하면 될 것을”.... “그 많은 사정을 어떻게 다 말해요? 당신이 간단하게 말해보구려”그랬더니..남편이 간단하게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다 돈이 없는 탓이요” 이랬다는 것입니다. 무슨 할말이 더 있겠습니까? 우리가 걱정거리가 많은 것도 다 성령의 권능이 없는 탓입니다. 성령충만 받아 갑절의 영감을 얻게 되면 모든 것 다 초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자들에게 더 좋은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성령받기위한 분명한 목적을 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로: 그는 능력의 두루마기를 받아 입었습니다. 엘리사가 자기의 겉옷을 찢어 버렸을때 하늘에서 권능의 두루마리를 내려 보내 그것을 입었습니다. 그러면서 엘리사는 이제 하나님께 인증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다섯가지 인증을 받아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것을 양심이 인증하고. 둘째는: 가족들이 인중하고 셋째는: 남들이 인증하고 넷째는: 마귀조차 인증하고 다섯째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인증받는 것입니다. 땅엣 것을 찢어버리고 위엣것을 바라볼때 이런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 질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열왕기하2:13-14절에 보면 이 권능의 옷을 가지고 강물을 치니까 강이 쫙 갈라졌습니다. 이제는 막혔던 시험의 대로가 열리고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한 기도는 모든 막힌 것 들이 뚫리고 하늘로부터 인간세상까지 형통한 복이 내려진줄 믿습니다. 빈 그릇이 차고 넘치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열왕기하4장에 나오는 한 신학생의 가정이 부채 때문에 처자가 몽땅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선지생도의 부인이 엘리사를 찾아와 호소하니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병의 기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동네에 있는 모든 빈병을 빌려다가 남은 한 병의 기름을 거기에 따르라” 그 말에 순종하여 그대로 하니 그릇그릇마다 기름이 가득차 그것을 팔아 모든 부채를 갚게 해주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사가 행한 능력의 역사는 이 짧은 시간에 다 열거할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놀랄만한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기왕 예수를 믿을 바에 갑절의 성령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기적들을 남에게 보여주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엘리사의 갑절의 영감과 기사와 이적의 역사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속에 확실히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2인자 의식으로 최고가 된 요한/막9:38-40
2인자 의식으로 최고가 된 요한 막9:38-40 예수님의 제자는 4명씩 3개의 그룹으로 grouping되어 있음. 1그룹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었으며 2그룹은 빌립과 바돌로메,도마와 마태였음. 그리고 3그룹은 야고보, 유다, 다데오, 시몬과 유다였음. 오늘은 첫번째 그룹 마지막 제자인 요한을 보기로 함. 요한은 야고보와 더불어 보아누게(우뢰의 아들)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성격이 불 같았으며 공명심이 강하였음. 그의 어머니는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아들은 오른편, 한아들은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할 정도로 역시 공명심 있었으며 오늘날의 소위 치맛바람을 일으켰음. 요한은 이같이 1등이 되고자 하는 경쟁심이 강하였으며 또한 편협하였음, 오늘 본문은 어떤 자가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자 요한이 펄펄뛰며 그를 금하려 하였음.(38절)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금하지 말라(39절) 말씀하셨음. 원칙을 사용할 때에 두가지 접근이 있음. 하나는 그 원칙을 다른 사람 배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접근방향이 있는 반면, 다른 하나는 그 원칙을 적용할 떄 할 수만 있다면 품으려고 하는 접근방향임. 예수님은 이 중 후자로 접근하셨음. 우리도 이같이 넓은 사람 되어야 함.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성격 나쁜 사람 만나게 하시는 것은 폭넓은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임. 나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은 비전이 아님. 하나님 나에게 주시는 비전을 주실 때는 나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역자와 함께 이룰 수 있는 비전을 주심. 그러므로 넓은 마음 갖지 않으면 크게 쓰이지 못함.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내가 원하지 않은 사람이 당선될 수 있음.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50% 이상 지지를 얻지 못할 것임. 그러나 우리는 누가 대통되더라도 그를 지지하고 후원할 수 있어야 함. 그리할 때 정치와 경제가 발전하고 우리나라도 발전 할 수 있음. 요한은 작은 사람이었으나 예수님 만나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변화되었음. 요한복음의 내용과 요한서신의 내용은 너무나 다름. 자유주의 신학자는 이를 두고 두 복음은 저자가 서로 다르다고 말하지만 이는 기독교가 변화의 종교임을 놓치고 하는 주장임. 그럼 예수님 만난 이후 요한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두가지로 분석해 보기로 함. Ⅰ.철저한 2인자 의식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음 --------------------------------------------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섬기는 사람이 되었음. 그는 1등 콤플렉스에 있었으나 사도행전에 들어와서 점점 변화되었음. 베드로 밑에서 베드로의 그림자 노릇을 하였음. 2인자 자리로 만족하였음. 적극적 성격의 베드로를 보완하며 잘 조화를 이루었음. 그는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세우고 잘 되는 것을 기뻐하였음. 사이판에는 1000년된 나무가 있음. 그나무가 1000년이나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또한 뿌리가 깊기 때문임. 이같이 구부러진 모습과 강한 뿌리, 바로 요한의 모습임. 우리도 “실력은 높게 자세는 낮게”라는 마음이 필요함.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요한은 이 세가지 다 갖추고 있음. 믿음은 요한복음에서, 소망은 계시록에서 그리고 사랑은 요한 1~3서에서 잘 보여주고 있음. 그는 이같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었기에 뿌리가 있었음. 연예계의 20년전 톱 스타(예 : 유지인 등)들은 지금 다 사라지고 없지만 조연(예 : 강부자)은 아직까지 건재하고 있음. 초대 교부 이레니우스는 요한이 AD 98년까지 살았다 함. 그가 롱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섬기는 자세, 2인자 의식이 있었기 때문임. 미국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30만이지만 요한이라는 이름은 600만명이나 된다고 함. 온유한 자가 땅을 다 차지함. 여러분도 이같이 섬기는 삶, 돕는 삶을 살기 바람. 연예계에 있어 그가 있으므로 주연이 빛나는 사미자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람. “주여! 2인자로 잘 섬기게 하옵소서” Ⅱ.사랑의 사람이 되었음 --------------------- 자유주의 신학자는 복음서의 저자와 계시록의 저자가 다르다고 주장함.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 만난 이후 변화되었으며 사랑의 사도가 되었음.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음. 최후의 만찬때에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음식을 먹었음. 그는 그때 10대였다 함. 그는 이같이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이후 요한 서신을 썼음. 그는 요한 1서 4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음. 사랑을 받으면 두려움이 없어짐. 게세마네 동산에서 로마 군병들이 왔을 때 다 도망하였으나 다시 돌아온 사람은 요한이었음. 요한은 대제사장의 뜰까지 따라왔음.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가까이까지 따라와 예수님의 마지막 말을 다 들었음.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어머니를 그에게 부탁하였음. 그래서 마태,마가,누가복음에 나오지 않은 말이 요한복음에는 나옴. 대표적으로 십자가상 7언 중 “내가 목마르도다”, “다 이루었도다”라는 말은 요한복음에만 나옴.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물이 나오는 것도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음. 요한 1서 4장 18절에서 “사랑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 하는 자는 사랑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음. 내가 어려움 당할 때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떠나게 됨.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끝까지 남음. 사랑이 내안에 가득해야 주님 따라감. 피아니스트가 아무리 연습하고 노력해도 100의 경지 중 80까지밖에 도달할 수 없다 함. 음악을 사랑하고 피아노를 사랑할 때 나머지 20 이 채워질 수 있다고 말함. 목사가 사랑이 있을 때 성도를 살릴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으며 과학자가 사랑이 있을 때 사람을 살릴 수 있음. 교사도 마찬가지임. 직장에서 사랑이 들어가야 사람을 살리고 직장을 변화시킬 수 있음. 미국에서 환생한 에디슨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 딤 케이먼이라는 발명가가 있음.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당뇨병 환자를 위해 인슐린 펌프를 발명했으며, 계단 올라가는 휠체어, 아프리카의 오염된 물을 정수하는 정수기를 발명하였음. 발명의 원동력도 사랑임. 요한이 이러한 사랑을 가졌음. 아무리 실력과 능력 갖췄을지라도 마지막 절정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이 있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 요한과 같이 변화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원함. 끝.
365년간 산 에녹/ 창5:21-24/ 2009-05-09
365년간 산 에녹 창5:21-24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에녹가정을 생각합니다. 에녹은 3백65세를 살았습니다.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나, 65년간 세상사람과 다른바 없는 타락한 가정으로 살았고, 하나님 없는 가정, 우상 섬기는 가정, 귀신의 지배받은 가정, 저주아래 처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여 신앙성공하였고, 가정식구까지 신앙성공케 하였고, 후대인들에게 큰 예언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유1:14) 一. 동행을 아십니까? 에녹의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하였으니, 24절에 “하나님과 동행 하더니” 하였습니다. 동행이란 무슨 말입니까? 둘이 같이 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부간에 둘이 같이 가니, 동행한다고 말하나, 이혼하려 가는데 동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음과 뜻이 하나되어 갈 때에 동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이혼하려 갈 때에는 동행이 아니라 이행(離行)입니다. 동행은 일치되어 가는 것이니, 영과 양심과 마음과 몸과 생활이 하나되어 가는 것을 몸의 동행이라고 합니다. 동행 할라크(ꗗꗥꕘ) 는 “삶의 방식을 따르다”(시26:3, 잠20:7) “하나님 뜻에 맞추다” 뜻입니다. 결혼으로 한 몸을 이룬 것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맞추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뜻(주장)은 완전이요, 표준이요, 기준이요, 표본이요, 성공이므로 거기에 맞추어 가야 합니다. 동행은 사람과 사람이 같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 본문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으니, 하나님 원하시는 삶에 맞추간다는 뜻입니다. 같이 간다는 뜻 아니라 맞춰간다는 뜻입니다. •신학교 학장과 학생들이 같이 남산으로 올라갑니다. 동행이라 할 때에는 진리동질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그 다음에 학장, 그다음에 학생들이 진리 동질화 동성화 되어 갈 때에 동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과 같이 헬몬산으로 갔으나, 진리동질 되지 못한 가룟유다는 동행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 동질화 동성화 된 것만 동행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십일조 드려라 하셨습니다. 그 십일조 드리는 것에 맞추어가는 것이 동행입니다. 물질적 동행으로 창고에 넘치는 축복을 받습니다. •주님이 주일 지키라, 하셨으니, 지켜가야 동행입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먼저 할 동행이니, 학생이 학교출석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인이 출석을 안 하면, 근본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주일 지키는 자에게 야곱의 업으로 먹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일, 교사 일하라 하시니, 그 일을 하므로 동행합니다. 내 영광, 자랑, 기쁨, 면류관이 만들어집니다.(살전2:19-20)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어디에서 모리아산에서, 명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3일간 가야 하는 먼 길인데, 그 말씀에 맞추어 갔습니다. 이삭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동행이요, 신앙성공입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홍수 심판이 온다하실 때에, 방주를 매일 매일 지었습니다. 이것이 동행이요, 살아나는 구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아만 문둥병든 장군은 요단강에 가서 7번 씻으라, 그 하나님말씀에 맞추어서 가야 합니다. 놀라운 치료 효과를 체험했습니다. 우리도 이행하지 말고,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한 육체 이스라엘백성 앞에는 불레셋 길과 비하이롯 길이 놓였습니다. 하나님은 비하이롯길로 가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비하이롯길을 가야, 하나님께 맞춘 것이며, 동행한 것입니다.(출14장) •혼자 사는 독신자는 누구와 동행하겠습니까? 어떤 분에게 맞추어야 합니까? 사람과 동행할 자가 없으니, 혼자 살아도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일에 맞춰야 합니다. 목사도 하나님께 맞추고 여러분도 하나님께 맞추어 가는 동행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느부간네살왕에게 맞추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맞추었으니, 동행했습니다. 받은 축복은 죽지 않고 살았고, 총리의 삶을 일생 살았습니다. •에스더는 왕과 하나님 뜻과 두 가지가 왔을 때에,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하나님 뜻을 이루려고 했으니, 동행은 민족을 살렸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누구에게 맞추었는가? 사람에게, 자기에게, 애굽법에 마춘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말씀에 맞추어 살아서 동행의 큰 복을 얻었으니, 총리요, 이스라엘국가를 만드는 복을 받았습니다. 동행은 같이 간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에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할렐루야! 二 . 에녹의 동행을 구체적으로 증거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는데, 어떤 면에서 동행하였는가?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첫째:가장 입니다. 한 가정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남자가 신앙성공하기 어려운 환경과 사회에서, 신앙동행하였습니다. 가장을 보면, 신앙이 앞선 자가 적습니다. 부인 따라 교회오고, 뒤에서 끌려오는 정도입니다. 한 가정에 가장이 앞장서야 합니다. 에녹이 가장으로서 신앙에 앞장 서셔 살았습니다. 이것이 정상이요, 여자가 앞장서면 비정상입니다. 엡5:23절에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하셨으니, 부부가 인권에는 동등이지만 교회 사역면에서는 앞서서, 머리(지도자, 앞선자)사역을 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가장이 힘쓰면 아내와 자식이 신앙성공하고, 가장이 뒤서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신안생활에 구주 일을 해야 합니다. 에녹은 머리의 사명을 감당했고, 몸에 구주 일을 했습니다. 가장으로 신앙성공했습니다. 둘째:세상직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가족을 먹이고 살리면서, 동행했습니다. 타락한 사회 속에서 불신자와 부닥치면서 신앙성공했습니다. 세속화 되지를 않았습니다. 타락한 문화 불신 사람을 만나서 상거래를 하여도, 오염되지 안했고, 속화되지 않았고, 불신 풍습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굳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셋째:이 땅을 떠나는 순간까지, 300년 긴 기간 동행했습니다. 중간에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롯도 중간에 타락하였고, 사울왕도 중간에 타락하였고, 우리들도 중간에 타락하여 교회오니, 안 오니, 섭섭하다 하고, 주일날에만 나오고 저녁예배는 나오지 않는 집사가 생겼고, 수년 믿었으나, 새사람이 커지지 못하고 옛사람이 커졌습니다. 에녹은 땅을 떠나는 마지막 발걸음까지도 하나님께 맞추는 삶이였습니다. 넷째:가족전체를 하나님과 동행하게 했습니다. 한분 장로님은 주일학교부장, 아내 집사는 피아노반주, 큰아들은 중등부 중간교사, 작은 아들 주일학교 중간교사입니다. 주일날은 1시간 이상 자동차로 와야 되는 먼 거리에 살지만 한끼 금식하면서 일찍이 식구들이 와서 일하고 늦게 귀가합니다. 에녹은 가족 전체를 하나님께 맞추는 동행을 하게 했으니, 신앙성공한 가정입니다. 동행할 때에 봄, 여름, 가울, 겨울, 지나가고, 희로애락이 교차하지만, 여러 가지 환경을 이기고 동행했습니다. 남자 혼자만 교회 나오는 사람도 있으니, 아내 자식은 버려두고 어떻게 혼자서 교회 올수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다섯째:에녹은 예언자의 사역을 했습니다. 유1:14절에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예언하셨으니, 오실 재림주님을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가서 재림주님을 만날 것이, 순간적으로 죽음이 와서, 만날 것을 붙잡고 살아야 하니, 개인종말을 붙잡고, 순간순간이 종말이라는 절박한 종말신앙을 에녹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후대인에게 예언이 되니, 개인종말을 붙잡고 살아야합니다. 여섯째:천국에 들어간 것을 증거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니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들어간 것을 보증했습니다. 천국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으며, 하늘나라 영광을 차지하는 이력을 만들어 갔습니다. 내가 만든 이력이 따라 옵니다. 나쁜 이력을 만들었다면 그 나쁜 이력도 따라오고, 좋은 이력도 따라 오고, 선악간에 대우를 받겠습니다. 계14: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죽음에 장례를 치렀는데, 천국 갔는지?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고, 그 사람의 신앙생활을 수년간 본 목사로서, 기독교장례를 치루지만, 구원을 받았는지? 천국에 들어갈지? 의문을 가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에녹같이 하나님의 증거가 확실해야 하겠습니다. 막연하게 좋은 곳에 갔겠지? 하고 부모장례 치루는 자가 있습니다. 안믿고, 죽었는데, 목사가 장례를 치루면 천국갈수 있는 줄 알고, 부탁하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불신은 지옥이요, 목사는 천국 인도할 능력이 없습니다. 연옥이 있다고 하는 자는 이단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증거 하여 주고 갔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동행은 같이 가는 것이 아니고, 맞추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맞추어 가는 것을 동행(할라크(ꗗꗥꕘ) 이라 했습니다. 에녹은 구체적으로 동행한 내용은 가장으로 하나님께 맞추었고, 사회인으로 하나님께 맞추었고,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께 맞추었고, 가족전체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맞추었고, 천국과 지옥의 진리를 증거하였고, 천국에 이끌러 갔습니다. 찬송가 456장 4절만 부르겠습니다. “옛날 선지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 올라갈 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에녹의 축복을 우리도 받기를 주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38년 된 병자가 증거 한 예수/ 요5:1-18/ 2001-10-24
38년 된 병자가 증거 한 예수 요5:1-18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확실하고 자신 있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볼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깨끗함 받았을 때 주저치 않고서 유대인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님이시라(요 5:15)고 확실하게 증거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38년 된 병자와 같이 담대하게 또한 자신 있게 만나는 분들에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거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롬 1:1)고 하였습니다. 설교 제목을 \\\"38년 된 병자가 증거한 예수\\\"라고 정하였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같이 은혜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38년 된 병자는 절망적이며 누구에게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시는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요한 복음 5장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셨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절망적이며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에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 못에 대한 전설이 있었는데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이 동할 때에 병자들이 그 못에 들어가면 어떠한 병이든지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못 주위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내려와 베데스다 못을 동하게 하면 물이 동할 때 병자들이 그 못에 뛰어 들어가면 병자들이 깨끗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이 동할 때 다른 병자들은 뛰어 들어가지만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못으로 뛰어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못에 모여든 무리 중에서 누구 한 사람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고서 그를 베데스다 못까지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 복음 5장 6절에 있는 말씀대로 38년 된 병자가 많은 사람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이 절망 중에서 누워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절망 중에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랑이 없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이 동할 때에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으로 인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과(요 5:7) 또한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랑이 없었다는 것은 도적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피해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보아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눅 10:31~32) 38년 된 병자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유대인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분은 예수님이시라(요 5:15)고 확실히 증거 했습니다. 에릭 프롬 박사는 사랑은 불행한 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무관심은 죄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또한 38도선을 경계로 이북과 이남에 있는 칠천 만 우리 동포들에게도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연약한 분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분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시는 예수를 증거할 것입니다. 둘째로,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육신의 병을 고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유대인에게 증거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 때 당시에 가난한 사람의 자리는 밤에 잠잘 때 사용하든 꼭 있어야 할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 당하던 병자를 주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곧 고치셨습니다. 일찍이 벵겔 박사는 \\\"주님은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으로 데려가지 않고 고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사보다 더 위대하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병 고침을 받은 것을 너무 감격해서 유대인에게 친히 가서 \\\"나를 고친 이는 예수라\\\"(요 5:15)고 힘주어 증거 했습니다. 저는 담석 수술도 하였고 디스크로 병원에 20일 간 입원도 하였고 피부병의 하나인 헤루페스 때문에 15일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북한에서 유신리 감리교회에서 목회 할 때, 두 달 동안이나 불면증으로 설교도 심방도 제대로 못할 때가 가장 어려웠으며, 한 번은 병원까지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원장님께서 제 집사람에게 \\\"사모님 명 목사님께서 두 달 동안이나 불면증으로 제대로 자지 못한 관계로 정신적 타격이 심하여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집사람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때만 하여도 불면 증세에 복용하는 약도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날이 갈수록 불면 증세는 완쾌되기 시작하여 설교도 하게 되였으며 심방 하는데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불치의 병자였던 38년 된 병자를 일으켰듯이 병원 원장님께서 희망이 없다고 하였던 제 불면 증세를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으로 깨끗이 낫게 하셨습니다. 육신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결코 낙심치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병도 예수께서 깨끗케 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 유대인에게 가서 \\\"예수께서 나의 불치의 병을 고치셨습니다.\\\"라고 증거 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병이 약을 복용하여서 낫게도 되었지만 주님의 권능으로 불치의 병이 깨끗해졌으니 주님께 영광 돌릴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에게 \\\"나의 병을 깨끗케 하신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힘있게 증거 할 것입니다. 셋째로, 38년 된 병자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를 구원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유대인에게 증언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에게 가서 위와 같이 증거한 것은 크리소스톰과 그로티어스 박사가 주장 한대로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들로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이끌기 위함 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고 하셨는데 헬라어 원어로 \\\"일어나라\\\"고 한 것은 명령으로 되여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는 주님의 명령의 말씀을 듣고서 그가 곧 나아서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일어나라\\\"는 것은 헬라어로는 그 뜻이 육신의 연약한 중에서 일어난다는 뜻이 있지만 죽음에서 일어난다고 할 때 쓰여지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38년 된 병자는 그의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던 자였었고 또한 그의 죄로 그가 38년 동안이나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육적으로 병신 된 몸이요. 또한 영적으로 죄인이며 죄로 죽은 자였다 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의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났을 때 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고 경고하신 말씀에서 그가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받음은 그의 죄지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어떻든 38년 된 병자는 죄로 죽었던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육으로 죽고 영으로 죽었던 몸이 다시 일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이로써 완전히 그는 구원받았다고 하겠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육으로 병들고 죄로 죽었던 상태에서 주님의 권능으로 일어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5장 9절에 있지만 38년 된 병자가 주님의 말씀으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육신의 병은 물론이고 죄악에서 구원받은 것은 참으로 기적의 사실이요.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이같이 그가 삼십 팔 년 동안이나 앓던 병이 나았으며 또한 죄에서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요한 복음 5장 9절에 \\\"나았다.\\\"라는 것은 헬라어 원어에는 휴기에스라고 하는데 깨끗하다는 뜻도 되지만 믿음으로 온전케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아-멘 하고 받아들였으므로 비로소 삽십 팔 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 당하던 그가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께서 일어나라는 명령대로 순종하였으며 예수를 구주로 믿었기에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주님의 권능으로 육신의 병과 영적인 죄 된 병 나음을 얻은 후에 곧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드리려고 성전으로 갔습니다.(요 5:14) 그는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또한 우리의 믿음으로 육신의 병과 특히 영적인 죄 된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았으니 주님께 감사함으로 성전으로 향하여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유대인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같이, 만나는 사람에게 육신의 병만 아니라 죄로 죽었던 쓸모 없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거 할 것입니다. 넷째로, 38년 된 병자는 유대인에게 가서 자기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고친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실 것을 아셨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셨기 때문에 그를 고치셨습니다. 예레미야 17장 27절에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는 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엄히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신 것을 공관 복음서에서도 찾게 되지만 특히 요한 복음서에서 찾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셨습니다.(요 3:1~7, 19:39~40)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여자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 여인으로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였으며, 38년 된 병자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고쳤으며,(요 5:7~8) 또한 나면서 눈먼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고치셨습니다.(요 5:9~12) 예수께서는 돼지 이천 마리보다도 귀신들린 불행한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거라사 동리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사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고 유대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요 5:16) 38년 된 병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나 자신입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나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여서 십자가 위에서 귀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하려고 온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죄와 죽음에서 구원코자 험한 산골짜기에 있는 동리에 찾아가서 예수를 구주로 믿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민족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고 복음을 증거한 결과로 선교한지 백년이 지난 오늘엔 한국 교회가 세계에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국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는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모를 죽이고 남편을 독살하고 어린이를 유괴하고 부자만 골라서 죽이는 악한 자들의 행위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누구든지 예수께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키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인 대신 목숨까지 버리신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신 주님의 사랑 그대로 본받아서 우리도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볼 것이며 좀더 나아가서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예수를 증거한 것같이 성도 여러분께서도 만나는 분들에게 확실히 ① 불행에 처한 여러분에게 관심을 두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② 여러분의 육신의 병을 깨끗케 하신 능력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③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④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고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끝내 38년 된 병자 한 사람을 깨끗케 하신 것같이 여러 성도님께서도 한 분의 생명을 귀히 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고 그 한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증거 한 예수/ 요5:1-18/ 2001-10-24
38년 된 병자가 증거 한 예수 요5:1-18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확실하고 자신 있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볼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깨끗함 받았을 때 주저치 않고서 유대인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님이시라(요 5:15)고 확실하게 증거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38년 된 병자와 같이 담대하게 또한 자신 있게 만나는 분들에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거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롬 1:1)고 하였습니다. 설교 제목을 \\\\\\\"38년 된 병자가 증거한 예수\\\\\\\"라고 정하였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같이 은혜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38년 된 병자는 절망적이며 누구에게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시는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요한 복음 5장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셨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절망적이며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에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 못에 대한 전설이 있었는데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이 동할 때에 병자들이 그 못에 들어가면 어떠한 병이든지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못 주위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내려와 베데스다 못을 동하게 하면 물이 동할 때 병자들이 그 못에 뛰어 들어가면 병자들이 깨끗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이 동할 때 다른 병자들은 뛰어 들어가지만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못으로 뛰어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못에 모여든 무리 중에서 누구 한 사람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고서 그를 베데스다 못까지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 복음 5장 6절에 있는 말씀대로 38년 된 병자가 많은 사람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이 절망 중에서 누워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절망 중에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랑이 없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이 동할 때에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으로 인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과(요 5:7) 또한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랑이 없었다는 것은 도적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피해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보아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눅 10:31~32) 38년 된 병자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유대인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분은 예수님이시라(요 5:15)고 확실히 증거 했습니다. 에릭 프롬 박사는 사랑은 불행한 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무관심은 죄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또한 38도선을 경계로 이북과 이남에 있는 칠천 만 우리 동포들에게도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연약한 분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분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시는 예수를 증거할 것입니다. 둘째로,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육신의 병을 고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유대인에게 증거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 때 당시에 가난한 사람의 자리는 밤에 잠잘 때 사용하든 꼭 있어야 할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 당하던 병자를 주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곧 고치셨습니다. 일찍이 벵겔 박사는 \\\\\\\"주님은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으로 데려가지 않고 고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사보다 더 위대하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병 고침을 받은 것을 너무 감격해서 유대인에게 친히 가서 \\\\\\\"나를 고친 이는 예수라\\\\\\\"(요 5:15)고 힘주어 증거 했습니다. 저는 담석 수술도 하였고 디스크로 병원에 20일 간 입원도 하였고 피부병의 하나인 헤루페스 때문에 15일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북한에서 유신리 감리교회에서 목회 할 때, 두 달 동안이나 불면증으로 설교도 심방도 제대로 못할 때가 가장 어려웠으며, 한 번은 병원까지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원장님께서 제 집사람에게 \\\\\\\"사모님 명 목사님께서 두 달 동안이나 불면증으로 제대로 자지 못한 관계로 정신적 타격이 심하여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집사람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때만 하여도 불면 증세에 복용하는 약도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날이 갈수록 불면 증세는 완쾌되기 시작하여 설교도 하게 되였으며 심방 하는데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불치의 병자였던 38년 된 병자를 일으켰듯이 병원 원장님께서 희망이 없다고 하였던 제 불면 증세를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으로 깨끗이 낫게 하셨습니다. 육신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결코 낙심치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병도 예수께서 깨끗케 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 유대인에게 가서 \\\\\\\"예수께서 나의 불치의 병을 고치셨습니다.\\\\\\\"라고 증거 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병이 약을 복용하여서 낫게도 되었지만 주님의 권능으로 불치의 병이 깨끗해졌으니 주님께 영광 돌릴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에게 \\\\\\\"나의 병을 깨끗케 하신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힘있게 증거 할 것입니다. 셋째로, 38년 된 병자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를 구원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유대인에게 증언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에게 가서 위와 같이 증거한 것은 크리소스톰과 그로티어스 박사가 주장 한대로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들로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이끌기 위함 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고 하셨는데 헬라어 원어로 \\\\\\\"일어나라\\\\\\\"고 한 것은 명령으로 되여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는 주님의 명령의 말씀을 듣고서 그가 곧 나아서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일어나라\\\\\\\"는 것은 헬라어로는 그 뜻이 육신의 연약한 중에서 일어난다는 뜻이 있지만 죽음에서 일어난다고 할 때 쓰여지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38년 된 병자는 그의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던 자였었고 또한 그의 죄로 그가 38년 동안이나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육적으로 병신 된 몸이요. 또한 영적으로 죄인이며 죄로 죽은 자였다 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의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났을 때 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고 경고하신 말씀에서 그가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받음은 그의 죄지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어떻든 38년 된 병자는 죄로 죽었던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육으로 죽고 영으로 죽었던 몸이 다시 일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이로써 완전히 그는 구원받았다고 하겠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육으로 병들고 죄로 죽었던 상태에서 주님의 권능으로 일어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5장 9절에 있지만 38년 된 병자가 주님의 말씀으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육신의 병은 물론이고 죄악에서 구원받은 것은 참으로 기적의 사실이요.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이같이 그가 삼십 팔 년 동안이나 앓던 병이 나았으며 또한 죄에서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요한 복음 5장 9절에 \\\\\\\"나았다.\\\\\\\"라는 것은 헬라어 원어에는 휴기에스라고 하는데 깨끗하다는 뜻도 되지만 믿음으로 온전케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아-멘 하고 받아들였으므로 비로소 삽십 팔 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 당하던 그가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께서 일어나라는 명령대로 순종하였으며 예수를 구주로 믿었기에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주님의 권능으로 육신의 병과 영적인 죄 된 병 나음을 얻은 후에 곧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드리려고 성전으로 갔습니다.(요 5:14) 그는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또한 우리의 믿음으로 육신의 병과 특히 영적인 죄 된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았으니 주님께 감사함으로 성전으로 향하여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유대인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같이, 만나는 사람에게 육신의 병만 아니라 죄로 죽었던 쓸모 없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거 할 것입니다. 넷째로, 38년 된 병자는 유대인에게 가서 자기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고친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실 것을 아셨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셨기 때문에 그를 고치셨습니다. 예레미야 17장 27절에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는 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엄히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신 것을 공관 복음서에서도 찾게 되지만 특히 요한 복음서에서 찾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셨습니다.(요 3:1~7, 19:39~40)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여자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 여인으로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였으며, 38년 된 병자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고쳤으며,(요 5:7~8) 또한 나면서 눈먼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고치셨습니다.(요 5:9~12) 예수께서는 돼지 이천 마리보다도 귀신들린 불행한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거라사 동리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사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고 유대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요 5:16) 38년 된 병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나 자신입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나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여서 십자가 위에서 귀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하려고 온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죄와 죽음에서 구원코자 험한 산골짜기에 있는 동리에 찾아가서 예수를 구주로 믿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민족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고 복음을 증거한 결과로 선교한지 백년이 지난 오늘엔 한국 교회가 세계에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국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는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모를 죽이고 남편을 독살하고 어린이를 유괴하고 부자만 골라서 죽이는 악한 자들의 행위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누구든지 예수께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키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인 대신 목숨까지 버리신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신 주님의 사랑 그대로 본받아서 우리도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볼 것이며 좀더 나아가서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예수를 증거한 것같이 성도 여러분께서도 만나는 분들에게 확실히 ① 불행에 처한 여러분에게 관심을 두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② 여러분의 육신의 병을 깨끗케 하신 능력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③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④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고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끝내 38년 된 병자 한 사람을 깨끗케 하신 것같이 여러 성도님께서도 한 분의 생명을 귀히 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고 그 한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증거한 예수/요5:1-18
38년 된 병자가 증거한 예수/요5:1-18 2003-06-29 17:00:54 read : 28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확실하고 자신 있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볼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깨끗함 받았을 때 주저치 않고서 유대인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님이시라(요 5:15)고 확실하게 증거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38년 된 병자와 같이 담대하게 또한 자신 있게 만나는 분들에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거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롬 1:1)고 하였습니다. 설교 제목을 "38년 된 병자가 증거한 예수"라고 정하였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같이 은혜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38년 된 병자는 절망적이며 누구에게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시는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요한 복음 5장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셨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절망적이며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에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 못에 대한 전설이 있었는데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이 동할 때에 병자들이 그 못에 들어가면 어떠한 병이든지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못 주위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내려와 베데스다 못을 동하게 하면 물이 동할 때 병자들이 그 못에 뛰어 들어가면 병자들이 깨끗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이 동할 때 다른 병자들은 뛰어 들어가지만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못으로 뛰어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못에 모여든 무리 중에서 누구 한 사람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고서 그를 베데스다 못까지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 복음 5장 6절에 있는 말씀대로 38년 된 병자가 많은 사람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이 절망 중에서 누워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절망 중에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랑이 없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이 동할 때에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으로 인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과(요 5:7) 또한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랑이 없었다는 것은 도적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피해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보아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눅 10:31~32) 38년 된 병자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유대인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분은 예수님이시라(요 5:15)고 확실히 증거 했습니다. 에릭 프롬 박사는 사랑은 불행한 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무관심은 죄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또한 38도선을 경계로 이북과 이남에 있는 칠천 만 우리 동포들에게도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연약한 분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분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시는 예수를 증거할 것입니다. 둘째로,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육신의 병을 고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유대인에게 증거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 때 당시에 가난한 사람의 자리는 밤에 잠잘 때 사용하든 꼭 있어야 할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 당하던 병자를 주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곧 고치셨습니다. 일찍이 벵겔 박사는 "주님은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으로 데려가지 않고 고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사보다 더 위대하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병 고침을 받은 것을 너무 감격해서 유대인에게 친히 가서 "나를 고친 이는 예수라"(요 5:15)고 힘주어 증거 했습니다. 저는 담석 수술도 하였고 디스크로 병원에 20일 간 입원도 하였고 피부병의 하나인 헤루페스 때문에 15일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북한에서 유신리 감리교회에서 목회 할 때, 두 달 동안이나 불면증으로 설교도 심방도 제대로 못할 때가 가장 어려웠으며, 한 번은 병원까지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원장님께서 제 집사람에게 "사모님 명 목사님께서 두 달 동안이나 불면증으로 제대로 자지 못한 관계로 정신적 타격이 심하여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집사람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때만 하여도 불면 증세에 복용하는 약도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날이 갈수록 불면 증세는 완쾌되기 시작하여 설교도 하게 되였으며 심방 하는데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불치의 병자였던 38년 된 병자를 일으켰듯이 병원 원장님께서 희망이 없다고 하였던 제 불면 증세를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으로 깨끗이 낫게 하셨습니다. 육신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결코 낙심치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병도 예수께서 깨끗케 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 유대인에게 가서 "예수께서 나의 불치의 병을 고치셨습니다."라고 증거 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병이 약을 복용하여서 낫게도 되었지만 주님의 권능으로 불치의 병이 깨끗해졌으니 주님께 영광 돌릴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에게 "나의 병을 깨끗케 하신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힘있게 증거 할 것입니다. 셋째로, 38년 된 병자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를 구원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유대인에게 증언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에게 가서 위와 같이 증거한 것은 크리소스톰과 그로티어스 박사가 주장 한대로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들로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이끌기 위함 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고 하셨는데 헬라어 원어로 "일어나라"고 한 것은 명령으로 되여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는 주님의 명령의 말씀을 듣고서 그가 곧 나아서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일어나라"는 것은 헬라어로는 그 뜻이 육신의 연약한 중에서 일어난다는 뜻이 있지만 죽음에서 일어난다고 할 때 쓰여지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38년 된 병자는 그의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던 자였었고 또한 그의 죄로 그가 38년 동안이나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육적으로 병신 된 몸이요. 또한 영적으로 죄인이며 죄로 죽은 자였다 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의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났을 때 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고 경고하신 말씀에서 그가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받음은 그의 죄지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어떻든 38년 된 병자는 죄로 죽었던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육으로 죽고 영으로 죽었던 몸이 다시 일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이로써 완전히 그는 구원받았다고 하겠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육으로 병들고 죄로 죽었던 상태에서 주님의 권능으로 일어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5장 9절에 있지만 38년 된 병자가 주님의 말씀으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육신의 병은 물론이고 죄악에서 구원받은 것은 참으로 기적의 사실이요.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이같이 그가 삼십 팔 년 동안이나 앓던 병이 나았으며 또한 죄에서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요한 복음 5장 9절에 "나았다."라는 것은 헬라어 원어에는 휴기에스라고 하는데 깨끗하다는 뜻도 되지만 믿음으로 온전케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아-멘 하고 받아들였으므로 비로소 삽십 팔 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 당하던 그가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께서 일어나라는 명령대로 순종하였으며 예수를 구주로 믿었기에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주님의 권능으로 육신의 병과 영적인 죄 된 병 나음을 얻은 후에 곧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드리려고 성전으로 갔습니다.(요 5:14) 그는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또한 우리의 믿음으로 육신의 병과 특히 영적인 죄 된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았으니 주님께 감사함으로 성전으로 향하여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유대인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같이, 만나는 사람에게 육신의 병만 아니라 죄로 죽었던 쓸모 없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거 할 것입니다. 넷째로, 38년 된 병자는 유대인에게 가서 자기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고친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실 것을 아셨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셨기 때문에 그를 고치셨습니다. 예레미야 17장 27절에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는 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엄히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신 것을 공관 복음서에서도 찾게 되지만 특히 요한 복음서에서 찾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셨습니다.(요 3:1~7, 19:39~40)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여자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 여인으로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였으며, 38년 된 병자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고쳤으며,(요 5:7~8) 또한 나면서 눈먼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고치셨습니다.(요 5:9~12) 예수께서는 돼지 이천 마리보다도 귀신들린 불행한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거라사 동리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사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고 유대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요 5:16) 38년 된 병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나 자신입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나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여서 십자가 위에서 귀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하려고 온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죄와 죽음에서 구원코자 험한 산골짜기에 있는 동리에 찾아가서 예수를 구주로 믿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민족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고 복음을 증거한 결과로 선교한지 백년이 지난 오늘엔 한국 교회가 세계에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국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는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모를 죽이고 남편을 독살하고 어린이를 유괴하고 부자만 골라서 죽이는 악한 자들의 행위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누구든지 예수께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키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인 대신 목숨까지 버리신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신 주님의 사랑 그대로 본받아서 우리도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볼 것이며 좀더 나아가서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예수를 증거한 것같이 성도 여러분께서도 만나는 분들에게 확실히 ① 불행에 처한 여러분에게 관심을 두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② 여러분의 육신의 병을 깨끗케 하신 능력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③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④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고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끝내 38년 된 병자 한 사람을 깨끗케 하신 것같이 여러 성도님께서도 한 분의 생명을 귀히 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고 그 한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8년 된 병자가증거한 예수/요5:1-18
38년 된 병자가증거한 예수/요5:1-18 2003-06-29 16:39:20 read : 4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확실하고 자신 있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돌이켜 볼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깨끗함 받았을 때 주저치 않고서 유대인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님이시라(요 5:15)고 확실하게 증거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38년 된 병자와 같이 담대하게 또한 자신 있게 만나는 분들에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거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롬 1:1)고 하였습니다. 설교 제목을 "38년 된 병자가 증거한 예수"라고 정하였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과 같이 은혜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38년 된 병자는 절망적이며 누구에게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시는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요한 복음 5장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셨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절망적이며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에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 못에 대한 전설이 있었는데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물이 동할 때에 병자들이 그 못에 들어가면 어떠한 병이든지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못 주위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내려와 베데스다 못을 동하게 하면 물이 동할 때 병자들이 그 못에 뛰어 들어가면 병자들이 깨끗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이 동할 때 다른 병자들은 뛰어 들어가지만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못으로 뛰어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못에 모여든 무리 중에서 누구 한 사람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고서 그를 베데스다 못까지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 복음 5장 6절에 있는 말씀대로 38년 된 병자가 많은 사람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이 절망 중에서 누워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절망 중에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랑이 없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이 동할 때에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으로 인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과(요 5:7) 또한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랑이 없었다는 것은 도적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피해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보아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눅 10:31~32) 38년 된 병자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유대인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분은 예수님이시라(요 5:15)고 확실히 증거 했습니다. 에릭 프롬 박사는 사랑은 불행한 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무관심은 죄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두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또한 38도선을 경계로 이북과 이남에 있는 칠천 만 우리 동포들에게도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연약한 분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분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사랑의 손을 펴시는 예수를 증거할 것입니다. 둘째로,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육신의 병을 고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유대인에게 증거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 때 당시에 가난한 사람의 자리는 밤에 잠잘 때 사용하든 꼭 있어야 할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 당하던 병자를 주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곧 고치셨습니다. 일찍이 벵겔 박사는 "주님은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으로 데려가지 않고 고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천사보다 더 위대하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의 병 고침을 받은 것을 너무 감격해서 유대인에게 친히 가서 "나를 고친 이는 예수라"(요 5:15)고 힘주어 증거 했습니다. 저는 담석 수술도 하였고 디스크로 병원에 20일 간 입원도 하였고 피부병의 하나인 헤루페스 때문에 15일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북한에서 유신리 감리교회에서 목회 할 때, 두 달 동안이나 불면증으로 설교도 심방도 제대로 못할 때가 가장 어려웠으며, 한 번은 병원까지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원장님께서 제 집사람에게 "사모님 명 목사님께서 두 달 동안이나 불면증으로 제대로 자지 못한 관계로 정신적 타격이 심하여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집사람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때만 하여도 불면 증세에 복용하는 약도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날이 갈수록 불면 증세는 완쾌되기 시작하여 설교도 하게 되였으며 심방 하는데도 지장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불치의 병자였던 38년 된 병자를 일으켰듯이 병원 원장님께서 희망이 없다고 하였던 제 불면 증세를 주님께서는 주님의 능력으로 깨끗이 낫게 하셨습니다. 육신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결코 낙심치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병도 예수께서 깨끗케 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을 때 유대인에게 가서 "예수께서 나의 불치의 병을 고치셨습니다."라고 증거 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병이 약을 복용하여서 낫게도 되었지만 주님의 권능으로 불치의 병이 깨끗해졌으니 주님께 영광 돌릴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에게 "나의 병을 깨끗케 하신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힘있게 증거 할 것입니다. 셋째로, 38년 된 병자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를 구원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유대인에게 증언하였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에게 가서 위와 같이 증거한 것은 크리소스톰과 그로티어스 박사가 주장 한대로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들로 예수를 구주로 믿도록 이끌기 위함 이였습니다. 예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고 하셨는데 헬라어 원어로 "일어나라"고 한 것은 명령으로 되여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는 주님의 명령의 말씀을 듣고서 그가 곧 나아서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일어나라"는 것은 헬라어로는 그 뜻이 육신의 연약한 중에서 일어난다는 뜻이 있지만 죽음에서 일어난다고 할 때 쓰여지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38년 된 병자는 그의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던 자였었고 또한 그의 죄로 그가 38년 동안이나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육적으로 병신 된 몸이요. 또한 영적으로 죄인이며 죄로 죽은 자였다 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의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났을 때 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고 경고하신 말씀에서 그가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받음은 그의 죄지은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어떻든 38년 된 병자는 죄로 죽었던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육으로 죽고 영으로 죽었던 몸이 다시 일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이로써 완전히 그는 구원받았다고 하겠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육으로 병들고 죄로 죽었던 상태에서 주님의 권능으로 일어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5장 9절에 있지만 38년 된 병자가 주님의 말씀으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육신의 병은 물론이고 죄악에서 구원받은 것은 참으로 기적의 사실이요.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이같이 그가 삼십 팔 년 동안이나 앓던 병이 나았으며 또한 죄에서 구원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요한 복음 5장 9절에 "나았다."라는 것은 헬라어 원어에는 휴기에스라고 하는데 깨끗하다는 뜻도 되지만 믿음으로 온전케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38년 된 병자는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아-멘 하고 받아들였으므로 비로소 삽십 팔 년 동안이나 병으로 고통 당하던 그가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께서 일어나라는 명령대로 순종하였으며 예수를 구주로 믿었기에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주님의 권능으로 육신의 병과 영적인 죄 된 병 나음을 얻은 후에 곧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드리려고 성전으로 갔습니다.(요 5:14) 그는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또한 우리의 믿음으로 육신의 병과 특히 영적인 죄 된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았으니 주님께 감사함으로 성전으로 향하여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유대인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같이, 만나는 사람에게 육신의 병만 아니라 죄로 죽었던 쓸모 없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증거 할 것입니다. 넷째로, 38년 된 병자는 유대인에게 가서 자기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고친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실 것을 아셨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셨기 때문에 그를 고치셨습니다. 예레미야 17장 27절에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라"는 말씀이 있는 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엄히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신 것을 공관 복음서에서도 찾게 되지만 특히 요한 복음서에서 찾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셨습니다.(요 3:1~7, 19:39~40)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여자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 여인으로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였으며, 38년 된 병자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고쳤으며,(요 5:7~8) 또한 나면서 눈먼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고치셨습니다.(요 5:9~12) 예수께서는 돼지 이천 마리보다도 귀신들린 불행한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고 그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거라사 동리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사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고 유대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요 5:16) 38년 된 병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나 자신입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나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시여서 십자가 위에서 귀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하려고 온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죄와 죽음에서 구원코자 험한 산골짜기에 있는 동리에 찾아가서 예수를 구주로 믿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민족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고 복음을 증거한 결과로 선교한지 백년이 지난 오늘엔 한국 교회가 세계에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국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 사회 일각에서 일어나는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모를 죽이고 남편을 독살하고 어린이를 유괴하고 부자만 골라서 죽이는 악한 자들의 행위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누구든지 예수께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키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죄인 대신 목숨까지 버리신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신 주님의 사랑 그대로 본받아서 우리도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볼 것이며 좀더 나아가서 한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예수를 증거한 것같이 성도 여러분께서도 만나는 분들에게 확실히 ① 불행에 처한 여러분에게 관심을 두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② 여러분의 육신의 병을 깨끗케 하신 능력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③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하신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것이며, ④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고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끝내 38년 된 병자 한 사람을 깨끗케 하신 것같이 여러 성도님께서도 한 분의 생명을 귀히 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한 사람의 생명을 귀히 보고 그 한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층으로 오신 예수/ 마1:18-25
3층으로 오신 예수 마1:18-25 성육신하신 예수 하나님이 천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아기예수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인류역사 상 최대의 뉴스입니다. 이 사건을 성육신이라고 부르며 이 사건을 기리고 축복 받는 날이 곧 성탄절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그 순간부터 우리와 같은 46개의 인간염색체를 지닌 배아가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기예수로 이 땅에 오신 후, 우리와 같은 체격, 체력, 체질로 자라났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 어떤 부분도 생략하지 않고 처음부터 인간과 똑같은 삶의 과정을 성실하게 밟으셨습니다. 잉태부터 출생까지, 출생부터 성체로의 성장까지 그 어느 한순간도 인간이 아닌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삶이었고 성부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4복음서 중,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해서 가장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우리 교회의 이름인 임마누엘에 관한 말씀도 나옵니다.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실 것이라는 예언은 이사야서 7장 14절을 포함하여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예언 되고 예표되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생애는 크게 세 층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제 1층은 소년예수로서의 삶입니다. 제 2층은 목수로서의 예수님의 삶입니다. 제 3층이 바로 그리스도, 구세주로서의 공생애 3년간의 삶입니다. 소년예수 아기예수님은 점점 자라나고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였고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위에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눅 2:40). 소년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소년시절의 예수님을 대표하는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2장(41~52)에 나와 있습니다. 열두 살 때의 예수님, 우리 초등학교 6학년 나이의 예수님 모습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12살 때 부모와 떨어져 성전에서 사흘을 지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여러 선생들과 함께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는데, 그 때 함께 한 자들이 소년예수의 지혜와 대답에 놀랐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고생하여 아들을 찾아낸 부모에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친 마리아는 소년예수의 모든 말과 있었던 일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소년예수는 그길로 부모와 함께 내려가서 나사렛에 이르러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효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살 때의 예수님은 심신은 여느 소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영혼과 신앙은 엄청나게 높은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어린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었습니다. 목수예수 청소년, 청년시절의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요셉이 목수인 점으로 보아 필경 목수 일을 하셨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늘 기도하고 묵상하는 삶에 생업인 목수 일에 성실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수인 요셉의 인간됨을 보고 그리스도로 공생애를 사시기 이전의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약혼녀인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잉태된 것이 나타났을 때, 그는 약혼녀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몰랐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으로는 그런 약혼녀의 부정은 고발과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것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관용과 온유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마리아와 헤어지기를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요셉에게 이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고,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최근 시사주간지 타임은, 성탄절을 앞두고 새삼 요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면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요셉에게 ‘힘없는 노인’ ‘보호자’ ‘성인’ 등 다양한 캐릭터가 부여돼왔다고 보도했습니다. 요셉은 예수가 18세 때, 111세의 노인으로 별세했다고 기록한 책도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며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왕으로부터 예수와 마리아 등 가족을 구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만 묘사돼 있을 뿐입니다. 14세기에 들어 유럽이 기근과 백년전쟁, 흑사병 등으로 극도로 피폐해지면서 요셉에게 ‘가장’이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지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왕을 피해 예수와 산모 마리아를 이집트까지 이끈 ‘보호자’ ‘양육자’라는 캐릭터가 더욱 부각된 것입니다. 요셉의 나이도 이에 맞도록 재조정됐습니다. 즉, 예수가 태어났을 때의 요셉의 나이가 36세로 다시 계산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55년 교황 비오 12세는, 요셉을 가족을 부양한 ‘노동자’로 묘사하여 5월1일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제정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요셉이 ‘의인’이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2살 때의 소년예수의 모습으로 보아 분명 30세 이전의 청년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시되, 거룩성-영원불변성-전지전능성-무소부재성-완전성 등의 신성을 지닌 1인2성격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니시며 목수로서 요셉의 일을 성실히 도왔을 것입니다. 다만 세상을 구원하러 나설 때를 기다리면서 성부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범적으로 사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오신 목적 이제 제 3층의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3층으로 왜 오셨습니까? 성령으로 잉태-아기예수-소년예수-청장년예수를 거쳐 드디어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고 우리들을 사랑하시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독생자를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신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받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사랑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선물을 주시려고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얻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다 얻는 것보다 큰 축복입니다. 성탄절에 회복해야 할 이 시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194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르만 헤세는 인간의 본질적인 정신을 찾기 위해 문명의 기존 양식들을 벗어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그의 작품 ‘어거스터스’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부가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해 몹시 애타게 자식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바라던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온 집안이 기뻐하며 아기의 이름을 ‘어거스터스’로 불렀습니다. 그날 밤에 신비한 노인이 이 산모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 그 한 가지 소원은 내가 꼭 들어주마.\\\" 산모는 귀하게 얻은 자식을 위해 참으로 많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소원만 말해야 하기 때문에 오래 오래 생각하다 드디어 그 소원을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신비한 그 노인은 \\\"그래, 네 소원을 들어 주마\\\" 대답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 소원대로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님의 사랑, 형제의 사랑,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고 이웃의 사랑까지도 독차지하며 많은 칭찬을 받으며 자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사랑을 받기만 할 뿐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노년은 비참하고 쓸쓸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노인이 다시 어거스터스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어거스터스, 너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지. 그대는 진정 행복하냐?\\\" 어거스터스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내 마음은 너무 허전합니다. 외롭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새롭게 축복해 주십시오. 남을 섬기며 살 수 있도록, 그리고 남을 도와주며 살 수 있도록, 대접받기 보다는 대접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 귀한 성탄절에 우리는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하고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1)주는 사랑, 베푸는 삶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남에게 줄 때 기쁨을 얻으며 보람을 느끼며 행복을 얻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줌으로써 참으로 받으며 베풂으로써 참으로 기쁨을 얻게 창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바로 주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우리를 위해 다 쏟아 부어주시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베푸는 삶이 참으로 아름다운 삶입니다. 행복한 삶입니다. 이 성탄절에 내가 먼저 손내밀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고 내가 먼저 사랑을 베푸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버리는 삶, 맡기는 삶 항상 부족한 것 없는 환경에서 인정과 사랑만 받은 사람일수록 한 번의 실패에 무너져 버리기 쉽습니다. 날마다 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들로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늘 성공만 해온 사람은 단 한 번의 실패에도 낙심과 원망과 혈기로 생을 마감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출세와 성공이 아니라 그 내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가 영생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막 10:29∼30).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식구들, 내 맘에 안 드는 형제자매나 이웃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집, 내 부모형제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돈 많은 부모도, 돈 없는 부모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모범생 자녀도, 속 썩이는 자녀도 똑같이 사랑과 구원의 대상입니다.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배우자 자녀에게 내밀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의 손길은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의 짐을 내게 맡기어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먼저 사랑하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살아라.” 강대준 목사
3층으로 오신 예수/ 마1:18-25/ 2009-12-25
3층으로 오신 예수 마1:18-25 하나님이 천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아기예수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인류역사 상 최대의 뉴스입니다. 이 사건을 성육신이라고 부르며 이 사건을 기리고 축복 받는 날이 곧 성탄절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그 순간부터 우리와 같은 46개의 인간염색체를 지닌 배아가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기예수로 이 땅에 오신 후, 우리와 같은 체격, 체력, 체질로 자라났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 어떤 부분도 생략하지 않고 처음부터 인간과 똑같은 삶의 과정을 성실하게 밟으셨습니다. 잉태부터 출생까지, 출생부터 성체로의 성장까지 그 어느 한순간도 인간이 아닌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삶이었고 성부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4복음서 중,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해서 가장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우리 교회의 이름인 임마누엘에 관한 말씀도 나옵니다.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실 것이라는 예언은 이사야서 7장 14절을 포함하여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예언 되고 예표되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생애는 크게 세 층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제 1층은 소년예수로서의 삶입니다. 제 2층은 목수로서의 예수님의 삶입니다. 제 3층이 바로 그리스도, 구세주로서의 공생애 3년간의 삶입니다. 소년예수 아기예수님은 점점 자라나고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였고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위에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눅 2:40). 소년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소년시절의 예수님을 대표하는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2장(41~52)에 나와 있습니다. 열두 살 때의 예수님, 우리 초등학교 6학년 나이의 예수님 모습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12살 때 부모와 떨어져 성전에서 사흘을 지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여러 선생들과 함께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는데, 그 때 함께 한 자들이 소년예수의 지혜와 대답에 놀랐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고생하여 아들을 찾아낸 부모에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모친 마리아는 소년예수의 모든 말과 있었던 일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소년예수는 그길로 부모와 함께 내려가서 나사렛에 이르러 부모에게 순종함으로 효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살 때의 예수님은 심신은 여느 소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영혼과 신앙은 엄청나게 높은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어린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었습니다. 목수예수 청소년, 청년시절의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요셉이 목수인 점으로 보아 필경 목수 일을 하셨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늘 기도하고 묵상하는 삶에 생업인 목수 일에 성실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목수인 요셉의 인간됨을 보고 그리스도로 공생애를 사시기 이전의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약혼녀인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잉태된 것이 나타났을 때, 그는 약혼녀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을 몰랐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으로는 그런 약혼녀의 부정은 고발과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것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관용과 온유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마리아와 헤어지기를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요셉에게 이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고,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최근 시사주간지 타임은, 성탄절을 앞두고 새삼 요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면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요셉에게 ‘힘없는 노인’ ‘보호자’ ‘성인’ 등 다양한 캐릭터가 부여돼왔다고 보도했습니다. 요셉은 예수가 18세 때, 111세의 노인으로 별세했다고 기록한 책도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요셉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며 아기 예수를 죽이려는 헤롯왕으로부터 예수와 마리아 등 가족을 구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만 묘사돼 있을 뿐입니다. 14세기에 들어 유럽이 기근과 백년전쟁, 흑사병 등으로 극도로 피폐해지면서 요셉에게 ‘가장’이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지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왕을 피해 예수와 산모 마리아를 이집트까지 이끈 ‘보호자’ ‘양육자’라는 캐릭터가 더욱 부각된 것입니다. 요셉의 나이도 이에 맞도록 재조정됐습니다. 즉, 예수가 태어났을 때의 요셉의 나이가 36세로 다시 계산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955년 교황 비오 12세는, 요셉을 가족을 부양한 ‘노동자’로 묘사하여 5월1일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제정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요셉이 ‘의인’이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2살 때의 소년예수의 모습으로 보아 분명 30세 이전의 청년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시되, 거룩성-영원불변성-전지전능성-무소부재성-완전성 등의 신성을 지닌 1인2성격의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니시며 목수로서 요셉의 일을 성실히 도왔을 것입니다. 다만 세상을 구원하러 나설 때를 기다리면서 성부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범적으로 사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오신 목적 이제 제 3층의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3층으로 왜 오셨습니까? 성령으로 잉태-아기예수-소년예수-청장년예수를 거쳐 드디어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고 우리들을 사랑하시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독생자를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신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받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사랑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선물을 주시려고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얻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다 얻는 것보다 큰 축복입니다. 성탄절에 회복해야 할 이 시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194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헤르만 헤세는 인간의 본질적인 정신을 찾기 위해 문명의 기존 양식들을 벗어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그의 작품 ‘어거스터스’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부가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해 몹시 애타게 자식을 기다렸는데 드디어 바라던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온 집안이 기뻐하며 아기의 이름을 ‘어거스터스’로 불렀습니다. 그날 밤에 신비한 노인이 이 산모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 그 한 가지 소원은 내가 꼭 들어주마.\\\\\\\\\\\\\\\" 산모는 귀하게 얻은 자식을 위해 참으로 많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소원만 말해야 하기 때문에 오래 오래 생각하다 드디어 그 소원을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신비한 그 노인은 \\\\\\\\\\\\\\\"그래, 네 소원을 들어 주마\\\\\\\\\\\\\\\" 대답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 소원대로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님의 사랑, 형제의 사랑,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고 이웃의 사랑까지도 독차지하며 많은 칭찬을 받으며 자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사랑을 받기만 할 뿐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노년은 비참하고 쓸쓸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노인이 다시 어거스터스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어거스터스, 너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지. 그대는 진정 행복하냐?\\\\\\\\\\\\\\\" 어거스터스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내 마음은 너무 허전합니다. 외롭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새롭게 축복해 주십시오. 남을 섬기며 살 수 있도록, 그리고 남을 도와주며 살 수 있도록, 대접받기 보다는 대접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 귀한 성탄절에 우리는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하고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1)주는 사랑, 베푸는 삶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남에게 줄 때 기쁨을 얻으며 보람을 느끼며 행복을 얻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줌으로써 참으로 받으며 베풂으로써 참으로 기쁨을 얻게 창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바로 주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우리를 위해 다 쏟아 부어주시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베푸는 삶이 참으로 아름다운 삶입니다. 행복한 삶입니다. 이 성탄절에 내가 먼저 손내밀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고 내가 먼저 사랑을 베푸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버리는 삶, 맡기는 삶 항상 부족한 것 없는 환경에서 인정과 사랑만 받은 사람일수록 한 번의 실패에 무너져 버리기 쉽습니다. 날마다 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들로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늘 성공만 해온 사람은 단 한 번의 실패에도 낙심과 원망과 혈기로 생을 마감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출세와 성공이 아니라 그 내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가 영생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막 10:29∼30).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식구들, 내 맘에 안 드는 형제자매나 이웃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집, 내 부모형제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돈 많은 부모도, 돈 없는 부모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모범생 자녀도, 속 썩이는 자녀도 똑같이 사랑과 구원의 대상입니다.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배우자 자녀에게 내밀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의 손길은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보다 더 큰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의 짐을 내게 맡기어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먼저 사랑하고 베풀고 섬기는 삶을 살아라.”
40일을 기다리신 예수/ 행1:3/ 2001-09-17
40일을 기다리신 예수 행1:3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즉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40일간을 이땅에 더 머무르시면서 사도들에게 자주 나타나시어 여러 가지 확실한 증거로서 당신이 여전히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셨으며,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려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부활절 다섯째 주일이니까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땅에 머물르시던 기간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께서 40일동안이나 이 땅에 더 머물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처럼 이땅에 대한, 삶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 취한 모습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땅에 사십일이나 더 있어야 했던 분명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더 있어야 했던 이유는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 사십일 동안 믿음없는 제자들 때문에 예수님은 무척 바쁘셨습니다. (눅24:13)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엠마오라는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에수님께서는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갈릴 리가 아니라 정반대의 엠마오길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함께 동행하였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찾아가 주셔서 말씀으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실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저희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인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속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열한사도들에게 주님의 살아나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과는 정반대로 절망과 낙망에 빠져 엠마오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절망의 삶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40일동안이나 이땅에 계셔야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시 우리들 절망과 낙망의 길을 걸어간다고 할지라도. 곁에 주님께서 동행하심을 발견하고, 절망과 낙망의 길에서 벗어나 기쁨이 충만한 삶을 걸어가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바 말씀은 도마에 관한 말씀입니다. 도마는 믿음이 참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땅에 40일동안 계시지 않았더라면, 도마는 믿음이 없는 제자가 되고 말뻔하였습니다. 처음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니까 도마는 말하기를 내가 그손에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일이 있은 후, 팔일이 지났을 때, 또다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누가 이런 도마의 이야기를 말해 준 사람이 없었을 터인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도마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가 그 손가락으로 정말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 보았는지 아니면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이 너무나 창피해서 넣어 보지 않았는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도마는 손가락을 넣어 보지 못했습니다 넣어보지 않고, 본문 28절 말씀에 보면 즉시 \\\"나의 주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떤 심장이 강한자라도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와 같이 믿음이 없는 제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40일 동안 머무르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40일이 없었더러라면 도마는 일평생을 부활의 믿음없는 사람으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 40일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으시러 갈릴리 바닷가로 찾아가셨습니다. 거기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는데 마음의 갈피를 찾지 못하고 무엇을 해야 되지도 모르는채, 예수님을 만나기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절 말씀에 보면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리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옛일로 돌아간 제자들에 찾아오셔서, 손수 잡은 고기로 조반을 만들어 주시며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땅에 40일이나 머물르시면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하루에도 몇번씩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여보 나사랑해. 자기 나 사랑해하고 묻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면, 베드로에게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대답하고 또 대답해도 예수님을 계속해서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바로 하늘로 올라가시지 않으시고 이땅에 40일을 더 머물르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의 절망과 낙망을 소망과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하여 그러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 그리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사랑없음을 사랑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 그리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아직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절망과 낙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과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소망의 자리로 자리바꿈하는 것입니다. 보아야 하는 믿음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아야 하는 믿음은 연약한 믿음입니다. 흔들리는 믿음입니다. 확신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은 확실한 믿음입니다. 상급을 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주예수보다 사랑스러운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전에 즐기던 세상일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이 낙망의 자리에서 소망의 자리로 돌아오기 까지 믿음없는 자리에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기 까지. 이전에 즐기던 세상일을 사랑하던 자리에서 예수님만 사랑하는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40일 기다리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더 이상 절망으로 살지않고 소망으로 살기위해서 우리가 불신앙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위해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예수님만 사랑하는 마음이 들기까지 예수님을 얼마나 더 기다리셔야 할까요? 제자들은 40일을 기다리면 되었지만. 우리를 향하여서 어쩌면 주님을 평생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닙니다. 누가복음 13장 6절로 7절 말씀에 보면, 한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 하였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더 기다리지 않도록 우리들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주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중적인 예수 증거/ 요5:31-39
4중적인 예수 증거 요5:31-39 < 서 론 > 예수님은 폭탄 선언을 하신 후 4중적인 증거를 하신다. 자신이 자신을 증거 하면 참되지 아니하므로 예수님은 증거자를 내세운다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증거라는 단어가 12번 나오고 있다. 증거에 대해서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신17:6] 증거자를 두명이나 세명을 내세우라고 했다. 세상 법정에서도 증거자가 두명 이상이어야 한다. 한 명의 증인으로는 미약하다. 두 명 이상일 때 그 증거는 효력을 타나낼 수있다.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을 염두에 두고 계신 주님은 그들에게 확실한 증인들을 내세우지만 유대인들은 주님 말씀을 믿지 아니한다. 믿지 아니한 그들에게 주님은 강하게 책망하신다 43절 =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 46-47절 =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 하시니라 \\\\\\\"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십니까 ? 아직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오늘 확실하게 예수를 증거 하는 자들을 만나보고 예수가 어떤 분이신 가를 확실하게 믿으시기를 바란다. 나에게 예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우리들 또한 예수의 증거자가 될 것이다. 증인은 아무나 증인이 되는 게 아니다 거짓으로 증인하면 위증죄가 되듯이 우리들도 거짓으로 예수를 증거할 수는 없다. 확실한 증거자가되기를 축원합니다. 첫 번째 : 세례요한의 증거 31-35절 ==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였느니라............\\\\\\\" < 관 찰 >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증거하지 못해서 안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증거해도 저들이 믿지 못할 것을 잘 알고 계신 주님은 스스로 자신을 증거할려고 하지 아니했다. 31-32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증거하지 아니해도 자신을 증거 해줄 수 있는 증거자들이 있기 때문에 할 필요를 느끼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자신을 증거하는 자 세례요한의증거를 말씀하신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 했다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 자신을 진리로 말씀하고 계신다. < 해 석 > 세례 요한의 증거는 요1장 부터 계속 살펴보았다. 요한의 증거는 생명을 내어놓고 한 증거였다. 33절 = 진리에 대하여 증거 == [요14:6] \\\\\\\"내가 곧 길이요 ! 진리요 ! 생명이니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34절 =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 하나님께서 예수 자신에게 직접 증거하고 계셨기 때문에 인간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요한의 증거는 예수 자신을 위하기보다는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증거였다고 볼 수 있다. 35절 = \\\\\\\"요한은 커셔 비취는 등불이라\\\\\\\" 히브리어에는 빛을 의미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는데 \\\\\\\"해.달.별\\\\\\\" 과 같은 광채를 가리키는 \\\\\\\"마오르\\\\\\\"가 있고 빛 자체를 가리키는 \\\\\\\"오르\\\\\\\"가 있다. 뤼크로스 = 옮길 수 있는 등.‘조명기구, 양초, 뜻한다 세례요한은 빛 그 자체가 아니었다. 잠시 비추는 빛이었다. < 적 용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 한 분을 증거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3:30) 증거자의 참 모습이 아닌가 ? 우리 또한 그런 증거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증거자의 참모습은 증거 할 수 있는 것을 온전히 증거 하는 것이다. 증거 할 것을 증거하지 못한다면 증거자가 아니다. 세례요한이 참되게 증거를 했다. 예수님이 요한은 진리를 증거 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진리를 증거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까 거짓 것들이 진리인줄 알고 증거 한다. 예수님 초림 때 수많은 종교인들이 있었고 유대인 모두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기도가 있었고 말씀이 있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있었다. 그런데 메시아가 유대 땅에 오셨것만 그 메시아를 증거하는 자는 몇 사람에 불과했다. 그 중에서도 세례 요한은 예수만을 증거 하러 이 땅에 온 자다 요한은 오직 예수 한 분만을 증거 했다. [요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요1:29] \\\\\\\"보라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 \\\\\\\" [요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 [요1:33-44]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예수를 증거 하다가 젊은 삶을 마감했다. 예수를 위해서 순교한 것이다. 그 요한에게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중에 제일 큰 자라고 하셨다. 세례요한의 진실된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요한의 증거보다 세례요한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세례 요한의 설교에 의해 지도자들보다 약한 백성들이 최고도로 영광적이었다 \\\\\\\"고 진술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메시아 인줄로 착각했다. 요한은 참 빛이 아니었다. 어두운 세상에 잠시 비추어 주는 등불의 역할을 요한은 한 것이다 요한은 자기를 메시아로 알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소리쳤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 뒤에 오시는 그가 그리스도이시다\\\\\\\" 세례 요한의 모습은 성경을 볼 때마다 요한의 태도와 마음을 칭찬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주님도 요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아니한 것이다. 증거자의 참 모습이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깊은 교훈을 주는 요한의 모습이다. 오늘날 예수를 증거 한답시고 얼마나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호의호식하고 있는 증거자들이 많은지 모른다. 주님을 이용해서 먹고사는 거짓 종들의 모습이다. 증거자는 절대 빛이 아니다. 잠깐 빛의 역할을 할뿐이지 참 빛은 아니다. 아무리 밝은 전등불이 켜져 있어도 태양이 떠오르면 불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듯이 우리 또한 증거자로서 잠시 세상에 빛의 역할은 하지만 참 빛은 아니다. 참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참된 증거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 예수님이 나타내신 증거. 36절 =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 < 관 찰 > 예수님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증거 하셨다. 그 증거는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동안 사람들에게 보이신 표적으로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셨다. 사람들에게 가장 뚜렷이 증거할 수있는 증거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증거를 보고도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지 아니했다. < 해 석 >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 == 요한은 말로 증거 했다면 예수는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했다. 공생애 기간 얼마나 많은 표적을 보였는가? 짧은 한 구절 속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표현을 무려 5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자신의 증거를 강하게 나타내고 계신다. [요10:25]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 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 예수님의 증거에도 믿지 아니한 저들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 적 용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사도 요한은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얼마나 많은 기적을 보였습니까? 주님은 죽은지 나흘이 된 나사로 무덤 앞에서 기도하시기를 [요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그리고 예수님은 소리쳤다. \\\\\\\"나사로야! 나오라 ! \\\\\\\" 그 누구도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 그 표적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 주었다.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이러한 주님의 외침에도 저들은 믿지 아니했다.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지 않습니까 ? 오늘날도 얼마나 주님이 기적을 나타내 주십니까 ? 병원도 못 고칠 병을 예수님이 치료해 주었건만 예수를 온전히 믿지 아니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병원에서도 병명을 모르는 병을 예수님이 고쳐주었것만 저들은 예수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살고 있다. 눅17:12이하에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께 나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 하소연했다. 예수님은 열 문둥이를 다 치료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명만 예수께 나와서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 (눅17:17) 오늘날도 이 아홉 명의 모습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은 그러한 증거를 보고도 자신을 믿지 아니한 유대인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하고 믿음이 없다고 책망 하셨다. (마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 [마17:17]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 주님의 증거를 보고도 믿지 아니한다면 그것처럼 악한 자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여 주었는데도 믿지 아니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치셨다. 또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한 갈릴리 지역에 사람들에게도 무서운 책망을 하셨다. [마11:20-24]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 얼마나 지독한 유대인들인가 ?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성경이 예언한 주님의 증거가 곳곳에서 나타날 것이지만 사람들은 더욱 예수를 멀리 할 것이다. 이제 한달 후면 예수님 성탄절이 온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는가 ? 우리는 그 증거를 본 자들이고 믿는 자들이다. 이제 우리는 그 증거를 해야 할 자들이다. 증거를 보았고 그 증거를 믿는다면 우리는 이제 그 증거를 증거 해야 할 것이다 . 주님은 우리가 증거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세 번째 : 하나님의 증거(證據) 37-38절 =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 \\\\\\\" < 관 찰 >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를 증거 하셨다. 하나님의 증거 역시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들려주었고 직접 나타나셨지만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실 것을 말씀하셨고 계획하고 계셨다. 그러나 그 말씀을 깨닫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나님의 증거를 깨닫는 자들의 삶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른 자들의 삶과는 달랐다. 증거를 본 자들은 다른 삶을 살수밖에 없다. < 해 석 >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 == 하나님 자신이 직접 예수를 증거 하셨다.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 하나님은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치셨다. [마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 하나님을 보여주었는데도 몰라보았다.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 영적인 귀와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말씀과 모습을 보았것만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영적 소경이었고 영적 귀머거리였다. < 적 용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저 유대인들을 보면서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 생각한다. 구약에서부터 오시리라고 약 360번 말씀하셨던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기다리는 했지만 영접하지는 안했다. 하나님 말씀대로 정확히 베들레헴에 예수가 태어나셨건만 또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까지 펼쳐서 헤롯에게 보여주면서도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을 몰라보았다. 구약에서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 다니엘.등 모든 선지자들은 오실 예수를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그렇게 나약한 믿음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드리려고 칼로 아들 이삭을 내려칠 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부르시는 음성에 아브라함의 귀와 눈은 영적인 귀와 눈이 되어버렸다.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수풀에 뿔이 걸린 양을 대신 하나님께 바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아브라함은 그 후로 다시는 나약한 믿음생활을 하지 아니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모세도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구약에서부터 예수에 대한 증거를 들었다. 그 증거를 듣고 깨닫는 자는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했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짐승보다 못한 자로 취급했고 심판을 했다. 예수님이 하나님 증거대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유대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 말씀은 알았지만 그 증거를 믿으려 하지 아니했다. 극히 소수만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영접했다. 예루살렘 성전의 그 타락한 속에서도 시므온과 안나 같은 선지자는 예수를 알아보았고 예수를 찬양하고 영접했다. 어떻게 이 소수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 하나님의 증거를 믿었기 때문이다. 천한 목동들에게 하나님은 증거 하셨다. [눅2:11-12]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 천한 목동들은 하나님의 증거를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저 악한 유대인들은 동방박사들이 와서 직접 하나님의 증거를 들려주어도 믿지 아니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증거는 계속되고 있다. 구약에 오시리라고 하신 예수는 말씀 그대로 오셨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증거는 다 끝난 게 아니다 이제 예수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증거가 남아있다. 초림에 오시겠다는 말씀이 360번 기록되어 있지만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증거의 말씀은 무려 1560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무엇을 더 증거하고 계신가? 많은 사람들은 초림에 예수가 오실 때 영접 아니 했던 것처럼 재림 예수가 곧 오신다고 증거해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올 테면 와보라\\\\\\\" 는 식으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인들조차도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 많다. \\\\\\\"잘 믿기만 하면 되지... 무슨 재림이고 종말인가!\\\\\\\" 해버린다. 하나님의 증거를 두려워하지 않은 다는 것은 말씀을 외면하는 것이고 말씀을 모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다시오 실 예수의 대해서 깊이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땅에종말의 징조가 마구 드러나고 있는데도 우리는 너무나 평안한 가운데 살고 있다. (살전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 세상은 갈수록 편안하고 즐기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과학과 문명은 발달되고 지식은 날로 증가하겠지만 지구는 반대로 다 썩어져 갈 것이다. 하늘도. 땅도. 바다도. 공기도. 인간들의 마음까지도 다 썩을것이다. 초림에 이 땅에 예수가 오셨을 때 저희들이 예수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마지막 때도 그럴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장차 이 땅에 있을 일을 얼마나 많이 증거하고 있는가? 증거를 모르고서는 증거자가 될 수 없다. `` 외면한 자에게 오는 것은 멸망과 심판뿐이다. [계14:9-11]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 세상에는 참된 증거와 거짓 증거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된 증거보다는 거짓 증거에 더 관심을 쏟고 더 재미있어 한다. 물건도 보면 가짜가 더 아름답고 이쁘다. 사기꾼도 말을 더 잘하고 더 신사다. 참된 증거를 들을 수 있는 영적 귀와 눈이 열려져야 한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들을 잘 가르치는데 그 공부가 공부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듣고 아는데서만 끝나버리면 비극이다. 하나님의 증거를 알았으면 이제 그 증거를 믿고 그 증거대로 살아가는 게 믿음이고 신앙이다. 왜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셨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증거를 믿으십니까? 보았습니까 ? 이제 그 증거를 나도 해야만 한다. \\\\\\\"내 증인이 되라\\\\\\\"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란다. 네 번째 : 성경이 증거. 39절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 관 찰 >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읽고 암송하고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씀과 가까이 살았지만 그 성경이 모두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보고 있었다. 당시에 그들이 본 성경은 모두 구약 성경이었다. 구약 성경에서 예수를 무시하고 본다면 그것은 한 나라의 역사 이야기이고 고전 문학 책에 불과 한 것이다. < 해 석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에 따라서 영생을 얻는다고 믿었다. \\\\\\\"성경을 상고\\\\\\\" = 성경을 보고 무엇을 깨달으려고 할게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었다. \\\\\\\"성경\\\\\\\" == 구약 성경을 말한다. 모든 구약의 사건과 말씀이 예수 한 분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우리도 성경을 그렇게 보면 안된다.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꼭 복을 받기 위해서 지켜서는 안된다 < 적 용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구약성경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증거하고 있다. 창3:15 == 여자의 후손으로 올 것과. 레위기서에 재물로 바쳐지는 모든 짐승들의 피가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 흘리실 예수의 모습이었다. 광야의 반석이 예수였고. 만나가 예수였고. 불기둥. 구름기둥이 예수였다. 모세와 다윗이 예수 예표였고. 모든 선지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미가서 5:2에서 예수님 탄생할 곳까지 성경은 증거하고 있고 사9:2 = 예수가 이방의 빛이 될 것을 증거 했다. 사53장에서는 예수님이 멸시받고 천대받고 고난을 당할 것을 증거 했다. `` `` 예수님이 병자도 치료 해주실 것을 증거 했다. ``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까지 증거하고 있다. 부자의 무덤에 장사 될 것과 부활 할 것까지 증거하고 있다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니엘 9장. 스가랴 14장에서는 예수가 다시 재림하실 것을 증거하고 있다. 구약에서 예수를 빼고 성경을 배우고 읽는다면 아무런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시대도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보고 읽기는 한다. 또 성경에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는 것을 복을 받기 위해서 지키는 자들이 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차원에서 말씀을 지키고 복을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경을 준 것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 66권을 모두 다 암송하고 매일 말씀 속에서 살아가고 철저히 말씀을 지키고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로 거듭나지 못한다면 영생은 얻을 수 없다. 우리 주위에 보면 성경 지식을 목사보다도 더 많은데 그의 삶은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한 모습을 본다. 절대로 그 사람은 성경을 잘 아는 게 아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성경 공부를 열심히 가르치는데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어떤 복이나 받기 위해서 내 지식이나 쌓기 위해서 배운다면 절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성경을 알고 배우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함이다. 예수를 자세히 알아서 우리가 예수의 증인들이 되기 위해서 성경을 배우는 것이다. 주님은 부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필히 먼저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배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깨워있지 아니한 자들이 배우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성경을 제대로 배우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무엇을 증거 하시기 원하는가 ? 나 혼자만 알고 내 지식만 쌓게 하려고 한 것일까 ?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을 배우고 안다면 성경이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을 증거 해야만 할 것이다. \\\\\\\"말씀을 가감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 (계22:18-19) 성경이 증거 하고자 하지 않은 것을 증거할 때 그런 자에게는 거룩한 성에 참예함이 제하여 질 것이다. \\\\\\\"성경이 가는데 까지 가고 멈추는데 멈추어라\\\\\\\"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우리도 증거하자 ! 마지막 때는 말씀을 떠난 가르침이 판을 칠 것이다. [마24:4]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사람의 미혹은 사람의 말에 많은 사람이 미혹 될 것이라는 주님의 예언이다. 성경을 성령충만한 가운데서 영으로 보고 배워서 오직 예수 한 분만을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결 론 > 주님의 부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내 증인이 되라\\\\\\\" 고 하셨다. 다른 증인이 되면 안된다. 예수의 증인만 되면 된다. 하나님. 세례요한. 성경. 모두다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 한 생애를 예수를 뜨겁게 믿고 간 사람들을 모두 한결같이 예수 한 분만을 증거 하다가 이 땅을 떠났다. \\\\\\\"조 베일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광고 회사에 복음을 맡기지는 않으셨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맡기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광고판을 세우고 광고 용지를 돌리라 명령하시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에게 자신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다 \\\\\\\"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는 것은 예수의 증거자가 되라는 것이다. 예수가 증거될 때 이 땅에 흑암의 세력들이 물러갈 것이다. 성령충만 받아서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배워서 예수의 증거자의 삶을 살아가자. (잠21:28)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 오 직 예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