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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배, 60배, 100배/ 막4:1-8/ 교사헌신예배
30배, 60배, 100배 막4:1-8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실 때에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큰 무리\\\'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군중을 뜻합니다. 아마 디베랴 바닷가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던 때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것을 의미하겠지요. 예수님이 계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강론하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막 1:21). 바닷가에서도, 육로에서도, 산 위에서도(막 3:13) 큰 무리가 운집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에게 있는 영적 생명력 때문이었습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의 매력 때문이었습니다(막 2:27). 사람들의 본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생명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선생님들께도 예수님의 생명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배 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바닷가에 운집하고 있는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눈은 갈릴리 바다 서북쪽의 비옥한 밭에서 파종을 하고 있는 농부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보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밭이란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비유로 나타낸 \\\'마음 밭\\\'(心田)을 의미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습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길가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4). 여기에서 \\\'길가\\\'는 농로를 뜻합니다. 나귀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밭이랑 사이에 만들어진 길로서 단단해진 땅을 뜻합니다. 이런 곳에 떨어진 씨앗은 흙에 묻힐 수 없어서 새들이 와서 주어먹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막 4:4). 이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버리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막 4:15). 마태는 \\\'악한 자\\\'(마 13:19), 누가는 \\\'마귀\\\'(눅 8:12)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즉각적이요 결정적인 거부를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흙이 얇은 돌밭에 씨앗이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5). 바닥은 돌인데, 그 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기 때문에, 싹이 곧 나오지만, 해가 돋으면 돌이 열을 받아 뿌리가 곧 말라버린다고 하였습니다(막 4:6). 이런 경우는 복음을 들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복음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는 뿌리가 없으므로 곧 넘어져 버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막 4:16-17). 즉,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종류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누가는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하였는데(눅 8:6), 대체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이 없으므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금방 쓰러지는 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경우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7). 가시떨기는 당시 팔레스타인 농경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시떨기는 곡식보다 성장력이 왕성하고 활발해서 곡식이 흡수할 양분을 빼앗을 뿐 아니라, 그 무성함이 햇빛을 막아서 곡식의 성장과 결실을 방해하였습니다. 논에 가보면 가라지들이 벼보다 더 크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육체의 소욕들이 복음의 빛을 가로막아 결실치 못하는 상태라고 하셨습니다(막 4:19). 네 번째 경우는 좋은 땅, 옥토(沃土)에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막 4:8). 좋은 땅은 쟁기질이 잘 되어 있어 부드럽고, 통풍이 잘 되고, 습기가 충분하여 지력(地力)이 보존된 토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 좋은 땅의 경우에 나타나는 몇 가지 특색을 말하고 있습니다. ① 듣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막 4:20). 여기 \\\'듣다(ajkouvw/의 동직현능3복, 듣고 hear ajkouvousin)\\\' 라는 말은 \\\'주의 깊게 듣고\\\', \\\'바로 이해하며\\\', 또한 \\\'순종심이 있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마 13:23). ② 받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막 4:20). \\\'받아(paradevcomai의 동직현주복, 받아 receive it, paradevcontai)\\\'라는 말은 \\\'그 가치를 인정하며 즐거이 기쁨으로 영접함\\\'을 뜻합니다. ③ 깨닫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23).(sunivhmi suniwvn의 동분현능주남단, 깨닫는 understandeth) ④ 지키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 보화처럼 소중히 굳게 붙잡는 마음을 뜻합니다.(katevcw의 동직현능3복, 지키어 keep it, katevcousin ) ⑤ 인내하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uJpomonh의 명여여단, 인내patience, uJpomonh\\\'/) ⑥ 결실이 있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4: 8절에는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와 마태도 \\\'결실\\\'이라고 하였습니다(눅 8:15, 마 13:23).(karpoforew의 동직현능3복, 결실하는 bring forth fruit, karpoforou\\\'sin ) 결실이란, 주인의 곡간에 들여져 소유물이 되는 상태까지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적인 수확\\\'을 뜻하고 있습니다. 연중무휴의 수확상태를 뜻합니다. 우리들이 지도하고 있는 어린이들은 어떠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 선생님들은 먼저 어린이들의 마음상태를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미음 밭을 일구어 복음의 씨앗이 싹트고 자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딱딱하고 단단하게 굳어 있는 마음은 기경하여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고, 돌짝 밭 같은 마음은 돌멩이들을 모두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어서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맺을 수 있는 옥토가 되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교사는 농부와 같은 심정으로 교육에 임해야 합니다. 농부와 같은 열심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농부와 같은 인내심으로 결실을 기다려야 합니다. 약 5:7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가복음 4: 8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3: 23절에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결실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의 마음(밭)에서 일어납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은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축복입니다(막 4:8, 마 13:23). 문제는 \\\'좋은 땅\\\'입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 앞에 말씀을 빼앗겨버려 뿌리조차 내려보지 못한 마음입니다. 환난과 핍박 때문에 넘어져버린 마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돌짝 밭 같은 마음입니다. 또한 결실을 맺는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모든 욕망에 덜미를 잡혀버린 가시떨기 같은 마음도 아닙니다. 이런 마음에는 아무런 생산이나 희망이나 창조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마음은 버림당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그 결과 사망의 열매로만 가득 찬 마음입니다(롬 1:28-32). 옥토는 처음부터 옥토가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 9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롬 3:1-12). 그러면 어디에서 좋은 땅이 생겼습니까? \\\'좋은 땅\\\', 곧 \\\'착한 마음\\\', \\\'좋은 마음\\\'(눅 8:15)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언약의 백성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백성, 곧 저희 죄에서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친 백성(마 1:21, 요 13:1)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 \\\'자기 밭\\\'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24).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행 13:48)들의 마음은 좋은 마음(땅)이요, 착한 마음(땅)인데(눅 8:15), 성령께서 천국복음을 듣게 하시고, 받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지키게하시며, 인내하여 결실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요 1:12-13, 3:5, 벧전 1:23-25), 회개하고 믿게 하여(행 2:38, 16:14, 30-31),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 마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엡 4:23, 롬 12:1). 우리 교회학교 교사들은 이번 성경학교를 맞이하여, 영생을 얻기로 작정된 어린이들에게 좋은 마음(땅), 착한 마음(땅)이 되도록, 말씀을 듣게 하고, 받게 하고, 깨닫게 하고, 지키게(붙잡게) 하고, 인내하게 하고, 결실하도록 힘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 결실은 \\\'좋은 씨\\\'에서 시작됩니다. \\\'씨\\\'는 \\\'천국 말씀\\\'이요(마 13:19), \\\'하나님의 말씀\\\'(막 4:14, 눅 8:11)입니다. 여기에서 \\\'천국 말씀\\\'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에 의해서 선포되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씨\\\'는 결실의 인자(因子)가 됩니다. 씨 속에는 생명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4-5). 그는 참 빛이요, 각 사람을 비추는 세상의 빛(요1:9)이요, 생명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요 8:12). 씨 속에 있는 생명의 힘이 움을 터뜨리게 합니다. 순이 나게 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자라나는 성장의 힘이 됩니다. 꽃이 피게 하고, 향기를 발하게 하며, 벌과 나비를 불러, 마침내 열매 맺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은 썩어질 씨가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 23). 세세토록 있는 말씀, 곧 우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1: 25).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히 4:12). 말하자면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자기 확장, 자기 폭발, 자기 성장, 자기 발전, 자기 진보, 자기 창조, 자기 결실을 그 속에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씨는 위대한 미래와 축복의 미래를 품고 있습니다.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이 품고 있는 씨앗이 발아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자기 확장, 자기 폭발, 자기 성장, 자기 발전, 자기 진보, 자기 창조, 자기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결실은 뿌리는 자에 의해서 진행이 됩니다. 세 복음서에는 똑같이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갔다\\\"고 하였는데(마 13:3, 막 4:3, 눅 8:5), 여기에 \\\'씨 뿌리는 자\\\'는 우선 예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37). 그리고 모든 시대에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모든 전도자와 특별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마 5:13, 14, 28:19, 막 16:15). 씨를 뿌리는 농부의 행위는 바로 복음전파 행위를 뜻합니다.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던 그리스도의 사역은, 2000년 동안이나 계속 되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강하게, 더 뜨겁게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씨\\\'를 뿌려야 하는데, 좋은 씨 곧 천국의 복음을 뿌려야 합니다. 그것도 좋은 밭에 뿌려야 하며, 적절한 시기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면 원리에 따라서 많이 뿌려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땅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각종 농약과 생활하수, 산업폐수, 화학비료들에 의하여서 토양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토양오염에 의한 영향은, 오염물질의 먹이 연쇄를 통한 오염물질이 다시금 인간에게 유입되고, 농산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게 되며, 산성비의 원인이 되어, 토양내 산도증가와 이에 따른 식물의 생육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제 자연 친화적 농업이 필요합니다. 환경을 살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각양 세속적인 문화의 오염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아이들을 말씀으로 치료해주고, 말씀으로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농부는 농사에 대하여 전문가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우리 교사들은 말씀에 대하여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연구하고, 부지런히 준비하여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결과는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하여야 합니다. 마가는 30배, 60배, 100배의 순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막 4:8). 마태는 100배, 60배, 30배의 순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마 13:23). 어느 편의 표현이든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한 알의 종자(씨)가 땅에 떨어져 맺는 엄청난 축복의 결과입니다. 30배, 60배, 100배라고 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① 한 알의 씨가 맺을 수 있는 결실의 결과는 모두 일정치 않다는 뜻입니다. 어떤 씨는 30배, 어떤 씨는 60배, 어떤 씨는 100배로 각각 차이 있는 결실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전도(선교) 현장에서 이러한 현실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결실을 맺는 데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② 살아있는 씨, 생명의 씨는 결코 그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요 12:24). 씨앗은 30배든, 60배든, 100배든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③ 이것은 또한 증가의 법칙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30배, 60배, 100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2).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5).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요 15:8). 즉, 열매맺음으로 인하여 다음해에 다시 그 씨앗들은 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와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은 21세기의 주인공들입니다. 21세기 역사의 현장은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큰 농장이요, 큰 밭입니다. 21세기의 역사의 현장은 곡식이 익어 희어져버린 마지막 추수기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십니다(요 4:35).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귀 기울여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고 하십니다(막 4: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막 4:9). 이제 성경학교를 맞이하여서, 우리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먼저 좋은 밭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씨앗을 받아들여 싹 틔우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도록 양육해야만 합니다. 21세기의 주인공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로서, 마지막 추수기의 충성된 일꾼으로 양육하는 귀한 시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우리들 모두가 좋은 일꾼들이 다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가르칠 것을 가르치라/ 잠22:6/ 주일학교교사헌신예배
가르칠 것을 가르치라 잠22:6 ● 우리가 주일학교 교사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로서 무엇에 헌신해야겠습니까? 교사는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것에 헌신해야 합니다. 비단 주일학교 교사들만 가르치는 일을 합니까? 아닙니다. 구역을 맡고 있는 구역장님들 또한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더불어 한 가정에서 부모 역시 자녀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걸음을 먼저 걸으신 분들이 늦게 신앙의 길에 들어선 분들을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일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특별히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가르치라 = 훈련시키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22:6) 여기서 “가르치라”는 말씀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가르치라”는 원문의 의미는 “가르치다”는 의미와 더불어 “훈련시키다. 헌신하게 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훈련”의 의미가 더 담겨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가르치다\"라는 단어인 \"Teach\"라는 단어 대신에“훈련”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Train”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훈련시킨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몸에 배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는 어린아이들이나, 학생들 또는 청년들이 몸에 배이도록 훈련시키는 일이 주일학교 교사들이 헌신해야할 부분입니다.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은 지식의 가르칩니다. 그러나 주일학교 교사들은 몸에 배이도록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훈련시키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교사가 먼저 가르치려고 하는 것에 전문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골프선수인 타이거 우즈와 아마추어 골프 선수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얼마나 골프에 대해서 전문가냐 하는 것과 그것이 얼마나 몸에 배어 있느냐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1.1 무엇을 가르치느냐 문제는 무엇을 가르치느냐? 무엇을 몸에 배이도록 훈련시키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일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런데 무엇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까?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공과공부를 하며 성경공부를 합니까? ▶ 성경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이유를 디모데후서3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 어떻게 할 때요? 성경을 가르칠 때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하는 것입니까? ▶ 아담을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노아를 가르치고, 아브라함을 가르치고, 왜 다윗을 가르치고, 바울을 가르칩니까? 왜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도록 가르칩니까? 왜 감사하라고 가르칩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늙어서도 떠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잠언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9: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우리가 가르쳐야할 마땅히 행할 일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더불어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이 인생 말년에 기록한 전도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1.2 하나님을 경외 = 코람데오 교사로서 우리가 가르쳐야할“마땅한 행할 일은 하나님을 경외 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성경을 가르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경외”라는 단어 자체는 “두렵고 떨림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공포가 아니라 존경의 두려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늘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칼빈 선생님은 “코람데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인데, 칼빈은 늘 하나님 앞에서 있다는 마음으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한 마을에 고아로 자란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 던 형제들이었습니다. 몇 칠을 굶었는지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동네 어귀에 있는 과수원 있었습니다. 형은 동생을 데리고 과수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일렀습니다. “여기서 누가 오나 잘 보고 있다가 누가 오면 형에게 소리쳐” 그리고 형은 과수원 주인 몰래 사과를 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소리칩니다. “형 누가 보고 있어” 그러자 형은 가지고 있던 사과를 팽개치고 동생을 손을 잡고 막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참을 달린 후에 숨을 몰아쉬며 동생에게 묻습니다. “누가 보고 있었는데...” “하나님... 교회 선생님이 그러셨거든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신다고”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이들이 늙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훈련시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모든 교사들과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헌신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사로 헌신되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 무엇보다 주일학교 교사는 경건에 이르기를 날마다 애써야 합니다. 딤전4:7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하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칼빈선생님은 말씀하기를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경건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늘 인식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경건이 내 몸에 배일 때 제대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훈련시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가르치는 교사가 어설프면, 아이들도 어설픈 신앙이 배일 수밖에 없고, 어설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세상 것에 휘둘릴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시기가 어설프다는 겁니다. 어느 곳에 써야할지 고민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 콩나물 무침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먼저 콩나물을 잘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콩나물을 삼다가 자꾸 뚜껑을 열다보면 콩나물이 어설프게 익어 비린내가 납니다. 그러면 먹을 수 없지요. 날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셔서 하나님을 경외 하는 삶을 사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아이들이 되도록 훈련시키시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사로 헌신되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2. 나에게 배움을 받는 아이들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잠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 저희 아이들이 다니는 영어 학원이 있습니다. 학원에 오면 왔다고 핸드폰으로 문자가 옵니다. “귀댁의 자녀가 몇 시 몇 분에 등원했습니다.” 학원이 끝나고 나오면 또 문자가 옵니다. “귀댁의 자녀가 몇 시 몇 분에 수업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자주 원장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아이들 실력이 어느 정도입니다. 수업태도는 어떻습니다. 일이 있어서 빠지게 되면 바로 전화 옵니다. “어디가 아픈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물론 원장 눈에는 우리 아이들이 돈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열심을 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주일학교 교사는 아이들의 영어 실력보다 더 중요한 영혼을 다루는 고귀한 분들입니다. 비록 학원 원장처럼 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의 모든 것을 부지런히 살피며, 그 아이를 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전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심방가지 않겠습니까? 건강은 어떤지, 영적 상태는 어떤지, 가정환경은 어떤지,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않겠습니까? ▶ 이런 마음을 갖기 위해서 취해야할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아비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아비의 심정을 가지고 부지런히 아이들을 살피며, 마음에 두시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교사헌신예배로 오후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늙어서도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땅히 행할 일”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이들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교사들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경건에 이르도록 날마다 애를 쓰는 것”이고, “아비의 심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부지런히 살피며,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훈련시킬 때에 분명한 것은 나에게 배운 아이들이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게 교사의 보람 아니겠습니까? 교사로서 바르게 헌신하셔서 많은 믿음의 인재들을 양성하시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 빌3:17-21/ 차용철 목사/ 2007-07-08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 빌3:17-21 <序言>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바른 신앙을 교란하는 자들을 유대의 교사들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율법 관습과 전통을 강조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혼돈되게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끼고 그들을 멀리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자들이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고 하늘에 속한 자신과 자신의 동역들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本論> 1.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17)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전11:1). 뿐만 아니라 17절 뒷부분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동역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암시합니다 (2:25,29).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뿐 아니라 신실한 동역자들을 본받는 자들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를 위해 헌신하려는 생애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얻고 발견되기 위해 세상의 자랑하던 이전 것을 다 버렸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었고 그 안에서 주어질 하나님의 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범사에 양심을 따라 행하는 자였습니다 (행23:1). 오늘날 자기 양 떼를 향해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자신의 신앙, 자신의 윤리적 삶을 모방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목자일 것입니다. 2. 십자가의 원수들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18-19) 바울이 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모범과 반대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개탄입니다. 그들은 3:2부터 바울이 유대인들을 대적자들로 염두에 두었음을 생각할 때 본문의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는 유대인들을 주고 한 말 같습니다. 로마서9:1-5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에 대해 표현하는 슬픔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동족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구원을 먼저 얻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므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율법에 의해 저주받은 죽음이라고 하고 (신21:23),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자는 교훈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조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일 수 밖에 없습니다 (19절). 그들은 믿지 않는 자에게 가해질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들의 윤리적 가치관을 지적합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19절). ‘저희의 신은 배’라는 말은 그들의 율법적 범주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정결법 특히 뱃 속에 무엇이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가 우상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는 말은 할례를 두고 한 말입니다 (3:2). 부끄러움의 헬라어 아이스퀴네(αισχυνη)는 사람의 벌거벗음이나 사람의 은밀한 곳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들의 할례는 남자 아이의 8일만에 성기의 표피를 돌칼로 베는 의식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의 운동경기는 옷을 벗고 했고, 로마 문화 자체가 목욕문화였으며 노동하는 종들을 거의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성들의 할례한 모습은 놀림거리가 되었고 정욕적인 사람들로 멸시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에 동화된 자들은 수술하여 할례 자국을 없애려 하기도 했습니다. 할레 문제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꺼려 했기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논쟁을 통해 이방인이 그리스도교에 들어올 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동의를 얻어냅니다 (행15장). 유대인들은 그 부끄러운 것을 자랑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민이라고 자랑하고 그것을 행해야 구원 얻는다고 합니다. 바울을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는 말은 뒤에 나오는 20절의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는 말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들은 종말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 삶을 목표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않는 자는 먹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돈을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육욕을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말세에 사람들이 온통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디모데후서3:1-5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3.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20-21) 빌립보시(市)는 마게도냐에 속한 지역입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입니다. BC356년 마게도냐(마케도니아)왕 빌립2세(Philip∥,BC359-336)가 이웃하고 있는 야만인들의 나라 드라케에서 나라를 빼앗아 새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 곳 이름을 자기 이름을 본따 ‘빌립보’라고 칭했습니다. BC168년에 로마에 의해 정령당해 로마에 편입되었습니다. BC42년 로마에 내전이 일어났는데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승리를 하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을 종식하고 황제가 되어 빌립보에 안토니우스의 해산된 군대와 퇴역한 자기 군대를 정착시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은 이탈리아 본토 로마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시작합니다. 빌립보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고 로마 시민으로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곧 빌립보는 로마에서 떨어져 야만세계에 있으면서도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그림에 하늘나라와 기독교인들의 관계를 대입시키고 있습니다. 빌립보시가 로마에서 떨어져 야만 세계에 있으면서도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권위와 혜택을 누리며 로마의 일부인 것에 자부를 갖고 사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하늘을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이고 정욕적이고 세속적이고 마귀적인 세상 문화와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 나라의 법과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생각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복종케 하실 분입니다 (고전15:27-28). 그의 재림 때에는 만물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4:16-17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의 약한 몸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42-44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도 하늘에 시민권이 있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는 당연히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 피나는 싸움을 합니다. 그 싸움을 해 본 사람은 피곤합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 속에 도저히 뿌리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님이 오셔서 만물을 굴복시키고 우리 몸을 굴복시킬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을 고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롬7:15-25). <結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배로 신(神)을 삼고 부끄러운 것을 영광삼고 땅의 일만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인생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원수되는 삶입니다. 저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를 닮아 가려 합니다. 그래서 그의 영광에 참여하려 합니다.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 고후11:1-15/ 2001-11-01
거짓 교사와 거짓 가르침 고후11:1-15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던 후 현대시대라고 합니다. 이성과 합리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세상이 많이 좋아졌고 편리해 졌습니다. 그것이 현대 사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후 현대 사회로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이성의 발달과 과학의 발달로 생활이 많이 편리해 졌지만 자기의 정체감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어떤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생활은 많이 편리해 졌는데 사람들이 많이 무력해 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 발달한 미국의 정신병자들을 상담하는 것을 보면 거의 65%이상이 우울증 환자입니다. 그렇게 사회가 편해졌고 살기 좋아졌지만 그들의 내적으로는 더욱 공허해 졌습니다. 이성과 합리가 채워질 수 없는 것 과학과 기술이 채워줄 수 없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부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권을 추구합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추구하는 시대로 점점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후 현대사회의 특징입니다. 진리와 윤리의 상대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더 이상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고 절대 윤리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로 넘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치관에 혼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윤리가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윤리적이다 비윤리적이다 판단할 수 있는 기준과 잣대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도덕성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이러한 영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뉴에이지 운동입니다. 이름을 달리해가면서 사회 각 분야에 아주 무서운 속도로 퍼져갔고, 또 이미 퍼져가고 있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입니다. 그 안에 내용이 “네 안에 영성을 개발하라. 너도 신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초월적인 명상을 하고 음악이나 미술이나 모든 분야에서 자기 안에 있는 잠재력과 통찰력을 개발하고 자극하기 위해서 너도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사람들을 격려하고 더 많은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소위 말하는 동기부여를 하는 강사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듣게 하는데요, 동기부여를 하는 그 사람들의 학문과 영성이 많은 경우에 뉴에이지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당신도 신적인 능력으로 이런 것을 감당해 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영성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이런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됨으로 영성이나 직감이나 감성에 관심을 갖으면서 종교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옵니다. 교회에 와서 그런 갈증 속에 주님을 만나고 그 영의 만족을 누리고 하는 축복의 길을 걷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종교집단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됩니다. 아주 전형적인 예가 한국에서 발생했던 천존회입니다. 7월 초에 이것이 사회문제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초에 현대직장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이런 스트레스 해소나 또 무기력한 것을 회복하기 위한 기 훈련을 하면서 시작된 모임입니다. 이런 것이 점점 발달하면서 거기에 잘못된 영성이 끼어들고 90년도에 들어가면서 시한부 종교회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기 단련을 하는 것도 무언가 힘을 얻어서 능력 있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드러난 내용을 보면 대출사기로 비롯한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이제까지는 사회에 소외된 계층들이 어떤 돌파구를 찾다보니깐 이런 사이비 집단에 연루되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뚜껑을 열어보니깐 소위 말하는 화이트칼라 계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급 장교들, 변호사, 의사, 교사, 회계사, 기자, 은행원들이 거기에 연루되어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통해서 가정이 파탄되고 개인이 파탄되고 하는 그런 경우를 겪게 됩니다. 지금 후 현대사회를 들어가면서 영적으로 더 혼탁해져 갑니다. 이런 시대가운데 교회역시 그런 사회적인 변화 속에 거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의 좋지 않는 영향으로 교회도 타락해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풍조와 기독교의 교리와 교묘하게 혼합되어서 교회가운데 이상하게 몰고 가는 그런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건전한 교회가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변해져 버리는 그런 일들도 자주 봅니다. 지난 화요일부터 앞으로 며칠 동안 아침마다 우리 교회가 고린도후서 10-13장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주요 하는 내용이 이야기가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변증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사도라고 하는 자신의 공명심 때문에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그런 개인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자신의 사도됨을 그렇게 주장하고 또 잘못된 가르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런 이유가 사도 바울이 전했던 은혜의 복음과 건강하게 세워진 그 교회가 자칫하면 거짓교사와 거짓 가르침에 의해서 이단화 되어버릴 수 있는 그런 위험이 있기 때문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사도권이 인정되고 또 다시 인정되면서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그 복음이 올바르게 세워지고 교회를 세워야 했기에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이 사도권을 주장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거짓교사와 거짓가르침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거짓교사 거짓가르침이 어떤 모습을 띄는지 나누어 보고 우리가 이 시대가운데 거짓교사와 거짓가르침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 그래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우리 가정을 보호하고 이 사회와 교회를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올바른 교육과 올바른 영성은 교회가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책임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다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거짓교사와 거짓 가르침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2-3절까지의 말씀을 참조해서 보면 거짓교사와 거짓 가르침은 예수그리스도를 교회로부터 떨어지게 만듭니다.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하게 하고 그런 가르침을 하게 됩니다. 2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어떤 곳에서 예수님은 모퉁잇돌이다. 교회는 그 모퉁잇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있는 그런 존재이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 땅의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보았을 때 교회와 예수그리스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향해서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또 교회의 주인이 예수그리스도이며. 교회의 창시자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완성자와 교회를 계속 세워 가시는 분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에 나타난 베드로의 고백을 보고 기뻐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그 반석위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니” 이런 뜻입니다. 그런 것을 보았을 때 교회의 시작과 교회를 계속해서 세워나가게 하시는 분은 예수그리스도라는 분이십니다. 오늘 여기서 사도 바울이 썼던 것처럼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입니다. 또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만나야 합니다.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썼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옵니다. 들어와서 신부되어 있는 교회의 정결함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중매한다는 것은 에스코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딸을 잘 키워서 정결하고 깨끗하게 잘 키워서 결혼을 시킬 때, 신랑에게 정결하게 키운 딸을 에스코트에서 넘겨주듯이 사도바울이 자기의 임무를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개척한 교회를 잘 양육하고 진리로 정결하게 잘 보존해서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께 잘 에스코트하고자 하는 그런 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열심은 자세하게 말해서 질투입니다. 혹시라도 거짓된 것이 와서 교회를 더럽히고 교회가 예수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향해가는 관심을 조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돌릴까봐 이끌어 가는 그런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진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진실함과 깨끗함에 대한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여기서 “진실함” 이것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추적해 보면 “한 방향으로 행해서 배가 향해가다”라는 단어로 연유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방향을 향하서 온 정성과 온 마음과 뜻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가는 그런 헌신을 방향을 흐트러뜨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깨끗함”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여기에서의 거룩함은 우리의 생활에서의 거룩함을 말하지만 교리의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 처녀가 마치 자기의 정조를 지키면서 신랑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교회가 교리적으로 정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결함에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런 교회이어야 하는데 거짓교사들이 들어와서 예수님께 가야할 헌신과 영광과 마음을 살짝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자리를 잘 잡은 미국에서도 아직까지도 그런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자칭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10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예수라고 재림주라고 하는 분이 10명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자기가 교주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황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말씀을 듣는 자나 전하는 자가 다 굴복해야 하는데 교주는 자기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절대적인 자신을 절대화 하고 신격화 하고 더 높이 신봉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이나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마음껏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교리를 만들어 내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교육을 합니다. 그런 것들은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단의 역사를 보면 아주 정통적인 역사가 있죠. 존 스미스 2세가 몰몬교를 시작했는데 아무리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고, 제가 JMS 정명석 모임에 한번 가 보았거든요. 거기에 따라 다니는 대학생들이 많습니다. 저도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직장 다닐 때 가보자고 해서 한번 가보았어요. 정명석이 사람들 앞에서 뭐라고 중얼중얼 해요. 그러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저 분이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고, 말도 저렇게 어눌한데, 굴에 들어가서 성경을 100독인지 200독인지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근거로 성경을 자신들의 견해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는 예수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정명석을 올려놓고 그들을 자신의 선생님이라고 추종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안 보입니다. 전형적인 이단의 특성입니다. 어느 교회를 갔는데 예수가 잘 보이지 않는다, 메시지에 예수가 없다라고 한다면 물음표를 달아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멀어지게 하고 예수를 가리고 교회를 교회답지 않게 하는 것이 이단적인 가르침이고 이단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정말 교회 가운데 경계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가운데 가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냐면, 목사의 권위가 교회 전체를 주관하는 교회는 위험한 교회입니다. 그 분이 올바르게 주님 앞에 서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잘못된다면 교회에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교회안에 분명한 영적인 질서와 권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권위주의는 교회 안에 뽑혀 나가야 됩니다. 두 번째로 거짓교사들은 교회의 건강한 교리를 혼돈 시키는 그런 일을 합니다. 중복되는 말씀이지만 자세하게 나누어 보길 원합니다. 4절 말씀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여기에서는 조롱조로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참 잘도 받는구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사도 바울이 전하지 않는 예수에 관해서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지 않는 성령과 복음을 전했습니다. 진리를 혼동하게 합니다. 교회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런 방법가운데 자칫 자신이 예수의 위치에 올라가는가 하면 다른 예수를 소개함으로 올바른 예수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예수, 본문에는 또 다른 예수라고 말하고 있는데 언어를 보면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와 라이벌이 되는 다른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참된 예수님의 대한 교리를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교리는 지금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양성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있어서 특이한 분이셨습니다. 100% 하나님이시면서 100%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수치를 이야기 하면 틀린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이단적인 가르침입니다. 여기에 가르쳤던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 바울학자나 많은 신학자들이 연구를 해서 발표를 하고 합니다. 바울 신학의 아주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F. S. 브루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브루스가 고린도교회가 거짓교사로서 배웠던 예수가 어떠한 예수인가 추정을 하면서 영지주의적 예수였을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영지주의라고 하면 그 당시에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이분화 된 영적인 세계 이데아를 바탕으로 참된 것이고 거룩한 것이지만 메타나 물질의 세게는 추악한 것이고 포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와 연합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했느냐면 영적인 것은 다 선하고 아름답고, 육적인 것은 천하고 더러운 것이다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지고 영지주의자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했느냐면 거룩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믿는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 인간의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어떻게 입을 수 있었겠는가 하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육의 몸으로 존재한 것은 잠깐 나타났을 것이고 현현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육을 입고 30년 동안 존재했던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입니다. 그런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쳤습니다. 또 왈프 마틴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이 부분을 아주 자세하게 일곱 가지의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을 하는 것을 제가 읽어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예수그리스도는 걸어 다니면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소개했을 거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당시에 보면 돌아다니면서 예언을 이야기 하고 기적을 일으키면서 그들로부터 사례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런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걸어 다니면서 예언을 하고 병을 고쳐주고 기적을 일으키는 디바인 맨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 디바인 맨이라고 하였을 때 100% 인간이며, 100% 신이라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사람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포지션을 취하던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그리스도와 다르게 이야기 했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100% 하나님, 100% 인간, 200의 예수 그리스도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그러합니다. 이것이 정통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난 것은 어떠한 아름다움과 어떠한 기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영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영이라고 할 때 왈프 마틴의 말을 빌어보면 사도바울이 전한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령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이런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일으키는 영을 가르쳤을 거라고 그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영, 우리가 영성을 추구할 때 잘못된 영을 추구할 때가 많습니다. 또 겉에 드러난 영을 쫓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또 제가 봤습니다. 저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룩한 진리 밖에서 이러한 능력만 쫓아다니다가 사단의 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영도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고 예언을 말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이단의 특징을 보면 새로운 가르침을 한 다음에 꼭 나타나는 것이 있는데, 거의 대부분 신유와 기적과 표시입니다. 그런 기적을 일으키면서 이상한 가르침을 하니깐 사람들이 현혹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문제에 급급해서 그것을 쫓아다닙니다. 다른 영을 받는지도 모르고서 말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과 악력의 차이는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은 능력을 주셔서 병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죄에 대해서, 의의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깨우치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의 복음과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듣지만 이성적으로 다 받아들일 수 없기에 성령께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게 하고 믿게 하고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의 해결책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런 다음에 복음에 견고한 역사 후에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신유도 허락해 주시고 성령의 은사들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건전한 성령의 역사가 빠져 있고 능력만 쫓아다니다가는 패가망신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때가 점점 악해져 가고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자기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급급해서 능력을 쫓아다닌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가 파괴되는 결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또 다른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에 의해서 우리의 행위가 조금도 끼어서는 안 되는 오히려 그것은 복음을 오염시키고 구원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내가 구원 받는데 내 행위가 첨가되어야 만이 속이 편하거든요. 내가 뭔가를 공헌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그래야만이 안도감을 위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인간의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이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몰래 들어온 사람이 이 구원의 뭔가의 행위를 첨가해야만 구원을 받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단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구원 받고 우리가 진심으로 거듭났다면 우리가 현재 사는 모습이 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과 이러한 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행위를 자꾸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못할 때 구원을 잃어버린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내가 뭔가 하지 않으면 강박관념 속에 박히게 됩니다. 헌금이라도 많이 해야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순수한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행위의 문제는 구원 이후에 문제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사람들을 초청할 때 담배 끊고 오라고 하지 마세요. “피면서 오십시오, 교회 들어올 때만 잠깐 꺼 주시면 됩니다.”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담배 피고 술 먹는 것 때문에 자꾸 복음을 못 듣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이후에 문제입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아도 구원 받습니다. C. 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평신도신학자이자, 교수였던 그는 평생 골초였습니다. 그래도 다 구원 받고 하늘나라 갑니다. 청교도적인 우리의 신앙은 참 좋습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신앙을 정경하게 하기 때문에 참 좋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모습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복음으로 나가는데 많은 경우에 방해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에게 강요할 문제이지 구원 받기 이전의 사람에게 강조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복음의 순수성을 우리가 잘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네 가지를 보면서 정통적으로 이단을 규명하는 기준과 잣대가 있습니다. 네 가지의 잣대가 있습니다. 여기서 벌써 2가지가 나왔습니다. 하나는 기독론에 있어서 벗어나면 이단입니다. 기독론은 이전에 말한 양성론입니다. 100% 하나님, 100% 인간. 종교혁명가로서 인성만 강조하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신론만 강조하던지 하면 이단입니다. 동일하게 신성과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 정통 기독론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상 나타났던 이단이 여기에서 넘어졌습니다. 두 번째가 삼위일체론입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 안에 삼위일체에 대한 혼란이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한 학기를 공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섬기는데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공동체로 함께 존재하는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세분이십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하시면서, 한 목적과 하나의 뜻과 한 목표대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입니다. 우리가 구약 창세기에 보면 벌써 그때 “우리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벌써 그때 함께 협력해서 창조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목표를 잡고 아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게 하시고 깨달게 하신 공동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하나님, 동등한 위치로 일하십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이단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 같은 데서 유일신을 믿는 그들이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같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새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번역해 내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요한복음 일장에 예수그리스도가 나오는데 거기에 예수그리스도를 소문자 god로 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대문자 GOD가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하나님, 유일신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고 그 가운데 위치로서 예수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이단입니다. 아주 미묘하지만 명백한 이단입니다. 삼위일체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사용할 때도 성령을 어떤 에너지 정도로 봐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오는 어떤 능력으로 본다면 이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성령을 쓸 때 인격명사를 썼습니다. 성령이 감성을 가지고 통곡하는 하나님 성령입니다. 성령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골고루 동일한 위상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단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이런 부분에서 분명하게 신학적으로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또 세 번째로 구원론입니다. 십자가 이외에 다른 구원을 이야기 하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아버지께로 올 수 있는 것은 나를 통해서만이라는 것을 말씀하셨고 또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적이 없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다원주의에 관해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지금 종교의 다원주의가 굉장히 급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잘 받아들여집니다. 실제로 우리 생각에 좋으신 하나님이 종교생활을 잘하는 모든 분들을 다 구원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종교를 무명의 익명의 예수그리스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익명의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휴머니스트적이고 쉽게 받아들여지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것을 보면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 저도 인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사악하게 사는 사람들은 둘째 치고 다른 어떤 종교에서 신실하고 착하게 이타적으로 사는 사람들, 다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고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하나님은 구원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고민을 했습니다. 저의 생각과 성경의 생각과 어떤 것을 취할 것인가.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성경의 생각 중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의 생각을 취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은 그렇습니다. “하나님 그들을 다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한번도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은 다 지옥 갑니까?” 그에 대한 정답은 “나는 모릅니다.”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너희의 알 바 아니다.” 선하신 하나님, 절대적인 하나님이 구원할 자는 구원하고 멸할 자는 멸하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침묵하는데 자기는 끝까지 알려고 하니깐 이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꾸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거든요. 자기의 이성적인 호기심을 계속 추구하다 보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않는 것을 계속해서 추정하다 보면 이단으로 빠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만큼만 믿으면 됩니다. 대단한 겸손이고 진리의 순결함을 유지하는 그런 방법입니다. 성경에서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정경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는데 이 외에 다른 것을 성경의 권위와 함께 놓으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아무리 하늘이 열어주고 성경보다 더 위대한 말을 받아서 기록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지 성경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고린도 전서 후서 중간에 잃어버린 성경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썼던 잃어버린 편지가 있습니다. 지금 그것이 사해 사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합시다. 보니깐 이 고린도 전서 후서보다도 더 은혜로운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 같아요, 그러면 이것을 성경에 끼어 넣어야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단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이 이상으로 성경에 추가될 내용은 없다. 구원에 이르는데 충분하고 이 땅을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교육하기에 충분하다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 성경이외에 다른 것을 경으로 인정하거나 성경의 말씀보다도 권위를 준다면 다 이단입니다. 교주의 말이 아무리 뛰어났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에서 아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가 이 네 가지의 잣대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가 타락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거짓의 교사들은 마치 자신들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서 사단의 일을 합니다. 사단이 흉측하게 “나는 사단이다.”라고 절대 일하지 않습니다.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납니다. 교회를 가장 좋아하고 교회를 가장 위하는 것처럼 하면서 교회를 망가트리는 것이 사단의 일입니다. 자칫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에 쓰임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단의 영향권 앞에 우리가 깨어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순수함과 정결함을 유지하고 신랑 되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은 성도의 공동체입니다. 건강한 진리를 배우고 지키는 일에 힘쓰므로 이단 사설에서 우리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교사 교육의 가치/ 시14:1-4/ 황영복 목사/ 2006-07-11
교사 교육의 가치 시14:1-4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 하는 도다.” 본문 시편 14편 1절 말씀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라고 다윗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 소위 '무신론자'를 가리켜서 혹은' 무신론'을 가리켜서 '어리석다.'라는 표현을 다윗은 선언했습니다. '어리석다'라는 말은 희브리어의 본래 '나발'이라는 말입니다. '나팔'이 아니라 '나발'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보시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사무엘 상 25장에 나옵니다. 그가 다윗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평화롭게 살자! 이런 제안을 했는데 이 '나발'이라는 부자였기 때문에 혹시 다윗과 함께 살면 자기 재산에 축이 나고 손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악하게 대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그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아내 '아비가일'의 구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비참하게 죽습니다. 성경은 사무엘 상 25장 3절에 보시면 그에 대하여 그는 완악하고 악한 사람이었다. 이름처럼 악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나발이라는 말은 단순히 어리석다는 것뿐만 아니라 악하다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단순히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난님을 불신하고, 거역하는 거다란 죄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신론자에 대해서 오늘 시편 14편 4절에 보시면 동시에 '죄악을 행하는 자'라고??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엡스키'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서운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다. 이 말은 모든 질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선언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컴퓨터 기업으로 유명한 IBM은 ‘엘빈토플러’를 고문으로 모신 그런 회사였습니다. 이 토플러 는 1965년에 소위 “미래의 충격”이 라고 하는 “future socke”라는 책을 섰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제3의 물결”이라는 책 그리고 90년대에 와서는 “권력이 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면 서 그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를 했는데 어찌 보면 그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상당한 부분에 서 맞아 들어가고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론에서 “우리가 쇼크 흔히 말하는 충격을 왜 받는가 하면 그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변화가 너무 크기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크지 않아도 어느 날 우리가 옷만 바꿔 입고 와도 충격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이 변화라는 것이 우리 에게 굉장한 위기가 되기도 하고 유익이 되기도 하는데 이제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변화가 너무 커서 그 변화의 급류에 우리가 이루어 놓은 좋은 문화와 가치 체계들이 함께 떠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우리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우리가 잘 이루어 놓은 것도 그 변화의 급류 속에 떠내려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퇴보하고 다음에는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충격 속에서 우리가 더 무섭게 여겨야 할 충격적인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다는 사실을 마치 진짜요. 사실인 것처럼 조성해 낸다는 것입니다. 이 세속적 변화의 급류 속에서 하나님 없는 문화, '무신론 문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사신 문화' 즉, '신은 죽었다.'는 거짓 진리가 난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충격들에 대해 적응력을 잃어버리고 현실을 부정하거나 현실을 도피하거나 도덕을 파괴시키고, 문화를 파괴시키는 무감각하고 돌발적이고, 발작적인 이러한 삶의 형태들이 오늘 우리 주변 에 많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좀 염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앞으로 우리가 경제는 좀 회복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정신문화를 바르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 라는 점은 불투명하기에 이제는 심각하게 염려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위험 수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겠구나?”를 깊이??깨달았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창조해놓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께 도전했다가 실패함으로써 땀 흘리는 수고와 해산하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고 흑암이 세상을 뒤덮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아브라함도 위기에 처하자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했습니다. 다윗도 역시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을 신중히 돌아보게 됐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없다며 교만해질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했지만 망하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자들도 ‘진짜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시대에도 악한 자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했는데 이것은 가장 무서운 저주입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저주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점점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탓에 악령에 사로잡혀 결국 비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삶, 그런 인생의 모습은 결국 '바다가운데 표류하고 있는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데 문제는 그런 이론과 인식과 접하는 일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삶, 현대인들에게 무섭고도 위험한 사탄의 계책이요, 멸망으로 달려가는 길이기에 인류에게 가장 큰 위기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고”, 구원받은 영혼까지 미혹하여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마귀, 사탄이 어떠한 모습으로 신앙인들을 넘어지게 할지 모릅니다. 동시에??사탄의 유혹에 빠져 어떤 불행과 위기를 더 가져다줄지 우리로서는 미래가 예측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통곡과 한탄의 기도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패와 타락과 죄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한 가운데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참 다윗은 인품이나 신앙이나 지도력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입장이나 자기의 처지나 자기의 권력이나 자기의 어떤 정치적 출세나 그런 입지를 위해서 하나님께 한탄 하며, 통곡하며 눈물 흘려 기도한 것 이 아니라 이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데 이 백성 속에 점점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고, 존재자체를 부인하는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한탄하며 통곡하며,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 없는 것으로 자꾸만 굴러가고 있다고 하는 것 입니다. 한번 교독하십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 하는 도다.” 본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에서 '어리석은 자'는 다윗이 본시에서 자세히 규명하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발'(* )은 그저 지혜가 부족한 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전체에서 살펴볼 때, 이는 외면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의로운 자의 생명을 위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 기준 없이 마음대로 행하는 자를 가리키며,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를 가리킵니다(Craigie). 하나님 없는 모습에 대 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모습은 부패했습니다. 그야 말로 썩었습니다. 소행이 가증 하고 위선과 더러움이 가득합니다.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는 모습은 '다 치우쳐있다.'는 말씀에서 이 치우쳐 있다는 것은 '다른 길로 빠졌다.'는 뜻입니다. 한계를 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교사의 책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오늘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교회가 신앙교육의 가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특별히 교사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교사 여러분들은 자신의 신앙과 스스로 어떤 가치관을 정립해 놓고 어린이들에게 교육을 가르치고 계십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우리가 이 시간 짧은 시간 이지만 정말 무엇이 우리 교육의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 지 '교육의 가치'를 되새겨 보는 그런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교회의 교육, 우리가 정의 중심, 가치관 세계관 이것의 당연한 논리가 무엇입니까???어린이의 영혼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 가르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바집니다. 즉, 지옥에 떨어집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운전을 하는 사람이 중앙선을 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우리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마치 중앙선을 넘는 모습과 같은 일들이 너무나 쉽게 자주 드러나고 있습니다. 쉽게 쉽게 중앙선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고 적당하게 함께 더러워져가 고 있고 함께 썩어져 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오늘 다윗은 하나님이 없는 자. 어리석은 자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고 사람들이가 지고 있는 보편적 조성에 대해 지적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을 부정하면서 이런 죄악성은 더욱 크게 기승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없을 때 어리석음과 악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리석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지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 대하여 무지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악행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의로움에 대해 정의에 대해 거절하며,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의적으로 하나님 없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고의적으로 하나님 없는 것으로 하 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뇨?”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하나님에 대해 무식 하는가? 아니라는 얘 기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없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 기도하는데 찬송하는데 실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실천 적 무신론자”라고 얘기합니다. 혹은 “크리스천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언젠가도 제가 한번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고 싸웁니다. 기도했으면 안 싸워야 하는데 싸우기에 ‘왜 기도하고 싸우느냐?’고 했더니 기도하고 힘 얻어서 싸운다고 하더랍니다.??하나님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아서 되겠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데 실제적으로는 실천적으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 정말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삶의 가치가 내 속에 분명히 있는 것인가? 여러분 어떤 신앙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 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하 나님을 없는 것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말하고 기도하면서도 개가 없고, 헌신이 없습니다. 화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합니다. 혹시 오늘 우리들이 이런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 신앙의 교육 가정의 교육의 가치는 바로 이 하나님이 없음을 배격하고, 하나님 계심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깨우치고 증거 하는 것이 교회요. 가르치는 분이 주일학교 교사인 것입니다. 교회는 학원이 아닙니다. 여기는 친교장소가 아닙니다. 여기서 식사하고 교제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는 하나님 살아 계심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심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곳입니다. 그것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깃발이 꽂혀져 있는 곳입니다. 다른 세상의 깃발과 사람의 깃발이 꽂혀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사실 기념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의 신앙의 전통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계심을 증거하고 가르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본문 3절에서“치우쳤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르'(* )는 '제 고집대로 행하다.', '완고하고 반항적이다.'라는 뜻입니다(출 32:8). 저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제 고집대로 행한 것입니다. 나 자신은 물론 이거니와 내 가정 속에 내 자녀들에게 교사들은 어린 심령에게 우리의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가르쳐야겠습니까?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 와 내 가정 속에 내 자녀들에게 또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릴 수 있겠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Significance). 몇 가지를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자연이 저절로 생겼습니까? '진화론'에 근거해서 설명하는 이치는 그럴지 모릅니다만 사실 자연 이 제멋대로 입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자연 속에는 질서와 규칙이 있습니다. 조화가 있습니다. 기능이 있습니다. 자연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아야하고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물론 때때로 불완전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자녀들과 여행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에서 신비함과 위대한 창조적 능력을 발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은 불완전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시려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게서 죽으심을 뛰어넘어 부활, 승천하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영생의 완성을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한 사건을오 구원받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 여러분들은 어린이들에게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계심을 알아차리게 하도록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어린 생명들이 되도록 신앙 교육을 '구세주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인도'를 철저하게 잘 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 앞의 신앙인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생각의 핵심이 ‘구속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그 구원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에 우리는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 교사,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과 사람을 만나게 해 주는 중매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교사는 이 귀한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부모님이 아직 믿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중매쟁이 역할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이 믿지 않으셔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에게 정말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할 수 있는 신실한 뜨거운 중매쟁이가 되어야 참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교사 사명의 완성이요. 예수님을 만나는 생명이 되도록 인도하는 교사가 '사랑의 빚진 자'로써, '성령 받은 자'로서 '직분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는 구원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는 것이 교사의 가장 귀한 본연의 사명임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보다 교사로서의 더 큰 가치와 목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적인 증언입니다. 계속 확신을 갖게 하는 공급처, 근원이 됩니다. 따라서 교사가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길, 하나님을 찾는 것, 하나님을 만나는 법, 하나님의 심판을 예비하는 것,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는 자와 지키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교사 여러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고 어린 생명들에게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가감 없이 성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고 계십니까? 나중에 우리 아이들은 반드시 그 가르침을 받은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오. 하나님은 반석이시오. 하나님은 요새요. 하나님은 전능자요. 하나님은 임마누엘이시며, 여호와 이레가 되시며, 여호와는 평강(샬롬)이 되시며,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고 사랑의 아버지이시라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확신 있게 증거 해야 합니다. 설교를 할 때 간혹 교사들이 ‘그럴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걸요?’ 이렇게 전하는 불행하고, 불확실한 신앙을 가진 교사는 자신의 영혼도, 맡겨준 어린 생명들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결국 잡아먹히게 됩니다. 분명히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흔들림이 없이 분명하게 전해야 합니다. 네번 째 기도의 사람이 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복음을 전하되 능력 있게 전하고 성경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지식 전달로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을 변화 시키려면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이 통로는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가르치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내게 맡겨주신 어린 영혼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전화선, 수도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가 하나님과 먼저 기도의 불통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에 게으르면 하나님을 아는 관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기도를 중단하게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나타내는 것을 중단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낮 예배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응답과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할 때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어린 생명들을 면화시켜 주시고, 역사해 주십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 진리의 말씀이 듣는 심령들에게 깨달아지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그야말로 통로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린 생명들을 위해 교사들이 결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미스바교회 교사 여러분들이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여 몸 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위대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어제 제가 육군훈련소에 3,500명을 세례주고 왔습니다. 설교하러 초청된 이재완 총회장, 세례 문답을 한 국방부 군종실장은 교사와 주일학생 사이였습니다. 어릴 때 입가에 거품과 침이 가득하면서 열정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시더니 총회장이 되었고, 그 가르침 덕분에 한국 군종목사단의 총수가인 군목으로 함께 영광 돌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사의 사명을 참으로 위대합니다. 한 영혼의 운명과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귀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미스바교회 교사 여러분! 몸속의 심장 혈관 통로는 작은 것 하나라도 막히면 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기도는 심장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뇌의 혈관이 막히면 두뇌 세포가 죽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막히면 영적으로 맡겨주신 어린 생명들의 영혼들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이 우리의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강권해서 구원해 주신 것처럼 교사들의 기도를 통해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전하는 말씀에 성령께서 강권하여 권세 있게 역사하심으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의 살아계심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우리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교사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사신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봉사와 섬김과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교사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집사, 권사, 장로님들이 저렇게 헌신하시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계심이 분명하다.’라고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일에 우리 미스바교회 교사들과 모든 분들이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 했습니까? 100세에 나은 독자 이삭을 바침으로 한나는 서원하여 나은 사무엘을 주의 종으로 바침으로, 엘리사벳은 사도요한을 제사장이 아닌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바침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하심을 증거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의 봉사와 헌신 과 희생은 어린 자녀들과 주일학생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교육은 단순한 교육활동이 아닙니다. 교육은 물론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이라고 해서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육은 인간을 지배하는 폭군이다.”, ”교육은 더욱 똑똑한 사기꾼과 악마를 만들 뿐이다.”, “무식한 사람은 칼을 가지고 한 사람을 죽이지만 유식한 사람은 펜을 가지고 수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육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교육의 가치추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지적해 주는 말들입니다. 참되고, 올바른 교육의 가치를 알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교육을 통해 폐해를 막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인간이 가져야 하는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며, 최고의 가치가 무엇이며, 최고의 삶은 무엇인가?’를 가쳐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 교육을 통해 알려주지 못하는 자기 생명을 구원하게 하는 구원의 교육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계심의 교육을 통해 ?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시켜야 하는 귀한 사명이 교회 교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말씀과 기도와 예수그리스도와 봉사와 헌신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 계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교육의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치가 있을 때 질서, 조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뒤죽박죽되면 모든 것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여러분 영어로 산다는 것을 “LIVE”라고 합니다. 그러나 단어의 배열을 거꾸로 해보면 “EVIL”이 됩니다. 즉, ‘악’이라는 뜻이 됩니다. 모든 인생들은 생명과 악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인간은 언제든지 악하게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가리치고, 구원의 복음이 필요하며, 교사들은 이 귀한 진리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미스바교회 교사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이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귀한 일꾼으로 세우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불완전하기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중매쟁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가르치시되 기도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권세 있게 귀한 생명들을 변화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로 더욱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변화시키고,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귀한 교사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앙적인 교육으로 멸망으로 향할 수 있는 귀한 어린 생명들을 살려내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아울러 이 시간 충성된 교사 여러분들에게 최선을 다해 주시는 헌신에 감사드리며, 복된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사(Teacher)/ 딤후4:1-2
교사(Teacher) 딤후4:1-2 교회 성장학의 거장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목사님은 현대를 가르켜 \'지도자 부재의 시대\'라고 선언하면서 지도자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꿈을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향해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을 감화시켜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특별히 훈련시키는 사람이다\"라고 정의를 하였습니다. 미국의 지도자론의 대가인 로버트 크린톤(Robert Clinton)목사님은「지도자 만들기」란 책을 통하여 지도자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지도자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켜 나가도록 도와주는 자가 지도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대는 참된 지도자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원하시고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교육에 있어서 학생들의 양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원 고갈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식수부족, 공기오염등으로 매일 수만명의 사람들이 건강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에너지나 천연자원의 고갈보다도 더 심각한 지도자의 부재시대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 안에서 지도자를 발굴할 지도자 또는 교사가 부족한 것은 더욱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 사람을 통해 일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말을 여러분에게 적용을 한다면 하나님은 교사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 여기에 앉아 있는 선생님들을 통하여 역사하신 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영혼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통하여 또 다른 영혼이 변화될 것이고 사회가 나아가서는 국가가 변화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러분들의 직분을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직분이 얼마나 감사하고 중요한 직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12주동안 교사대학으로 저와 같이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가 단순 지식의 습득만을 가져온다면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같이 공부하면서 반드시 염두해 두어야하는 사실은 여러분의 지식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심령이 살아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같이 읽은「딤후4:1∼8」을 통하여 그리고 다른 성경의 구절을 통하여 \'교사\'라는 제목으로 교사란 누구이며, 교사의 사명은 무엇이며 또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며 같이 은혜받기를 소원합니다. 교사란 누구인가? \"교사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자기의 정체성을 읽는데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을 상투적이고 사무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무런 대답을 찾을 수 없지만 이 질문을 조심스럽게 상고한다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앞에 선 사람(1절) 1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하는 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하는 말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언하여 하는 말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입니다. 교사는 하나님앞에 선 사람입니다. 이것이 의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교사는 하나님에게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보냄을 받았듯이 교사는 자신이 맡은 양들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교사의 기원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심령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보냄을 받은 이 시대의 선지자가 바로 여러분 교사들입니다. 둘째,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교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첫째번과 의미가 상통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교사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말입니다. 교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교사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측면에서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교사는 자기 양들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교사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그렇다면 학생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는 말도 성립이 됩니다. 특별히 나이가 어린 유초등부 학생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학생들은 교사 여러분들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학생들은 교사 여러분들을 통하여 올바른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학생들은 교사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느기께 됩니다. 학생들은 교사 여러분들을 통하여 영생의 삶을 소유하게 됩니다. 학생들은 교사 여러분들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무에 대해 거룩한 감정이나 열정을 가져 본적이 있습니까? 아니 적어도 자신의 이 거룩한 직무에 대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직무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볍게 생각할 지라도 여러분들만은 그렇치 말아야 합니다. 교사는 전하는 사람(2절) 오늘 본문 2절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느 때와는 달리 강한 어조로 분명하게 명하고 있는 있습니다. 무엇이락 하였습니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警責)하며 경계하라\"라고 합니다. 교사는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계시의 책입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됩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사명이요, 신약의 사도들의 사명입니다. 선자자들은 타락한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소망을 전하였고, 신약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교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 시대의 선지자요, 사도들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럼 이것을 전하는 교사의 자세는 어떠 해야 합니까? 2절에서 살펴보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최선입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직무가 최선을 다해야 할 만큼 중요한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내입니다. 2절에 오래참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가르침의 사역은 오랜 인내가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교육의 효과는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도입니다. 교사는 기도로 반(班)목회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반목회의 성장이 교사의 기도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홀로 산을 택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더더욱 기도에 승부를 거어야 합니다. 맡은 영혼들의 성장과 보호를 위해서 관심과 사랑으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교사의 길은 주님이 가신 길과 같습니다. 교사의 반목회는 곧 주님의 목회 사역의 위임입니다. 위대하신 교사였던 주님이 기도하시면서 사역을 감당하셨듯이 교사된 우리도 기도로 반목회를 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명심하서야 합니다. 반드시 명심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기도의 떡과 기도의 눈물로 먹인다면 여러분의 반은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예) 부산의 박집사님(10명 → 6개월만에 50명) 교사는 보는 사람(3절∼4절) 교사는 보는 사람입니다. 보긴 보되 아무것이나 보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보아야 할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럼 무엇을 보는 사람입니까? 첫째,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는 세상을 보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사 여러분은 세상을 볼 때 다른 이들과 같이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적인 흐름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한 자의 영을 따르는 것을 보고 학생들에게 경계토록 해야 합니다. 본문에도 말하기를 5절에 때가 이르리니... 라고 하면서 디모데에게 바울은 자신이 본 세상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영적 싸움터임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안이 열러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며 학생들이 처하고 있는 현대의 문화적인 환경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둘째, 학생들을 보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학습자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나 잘 이해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체질까지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학생들을 바로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교회나오기 싫어하고 찬양하기 싫어하고 순종하기 싫어하는 것이 성격이나 재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단정을 짓기 전에 이것이 사악한 영의 역사 때문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교사가 양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심방을 하고, 상담을 하고,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적을 알아야 전쟁에서 이기듯이 양을 알아야 잘 지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든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될 일이기도 합니다. 예) 예수님의 경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마음을 아심 → 적절히 대처하심 교사는 배우는 사람(딤후3:14∼17) 교사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평생 배우는 존재이지만 교사는 더더욱 배워야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맡은 그 거룩한 직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명 수행의 과정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성경신학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과목은 성경해석학, 구약개론, 신약개론, 신구약중간사 등이 있습니다. 둘째는 실천신학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반목회를 하는데 필요한 과목을 말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과목은 예배, 심방, 기도, 상담, 공과교수법, 청소년 이해 등이 들어갑니다. 셋째는 기타 과목으로 역사관, 세계관, 문화관, 윤리관, 이성관, 사회관, 국가관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11주라는 기간동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학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학습의 기간을 잘활용하여 여러분의 반목회에 풍성한 열매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양서를 통하여 여러분의 심령을 풍성하게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기신 교사라는 직무는 거룩한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직무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업는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와 눈물로 양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유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이유는 올바른 배움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수고하는 여러분에게 준비된 거시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어떠한 보상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시겠습니까? 7절과 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읽고....) 무엇이라고 되어있습니까? 면류관, 의로운 싸움.
교사가 가져야 할 자아상/ 요14:12, 딤전4:7/ 2007-01-26
교사가 가져야 할 자아상 요14:12, 딤전4:7 김남준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교사 리바이벌」이라는 책이 있지요? ○○○교회 교사 선생님들은 일류 교사들이시니까 다 읽어보셨을 줄로 압니다. 그 책 서론에 보면, 오늘날 교회교육의 현장을 둘러싼 우리의 논의는 너무 환경 중심적인데, 이런 환경 중심적 논의를 속히 그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 교회학교의 성공은 교사들의 영적 건강함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기에, 무엇보다 먼저 교사들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해서, 교사들을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목회자가 한 사람이 교회 부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듯이, 잘 세워진 교사 한 사람이 교회학교를 크게 좌우합니다. 영적으로 잘 세워진 교사 한 사람이 한 어린 영혼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학교 교사들은 누구보다도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근심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는 산모의 젖을 먹으면 갓난아기는 설사를 한답니다. 주전자 속에 흙을 집어넣고 물을 부으면 흙탕물밖에 안 나오듯이, 건강치 못한 자아상을 가진 교사로부터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을 듣고 보는 학생이 설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고귀한 사명을 가진 교사는 누구보다도 더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자아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견을 의미합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평가하는가? 아니면 무가치한 존재로 평가하는가? 자신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가? 아니면 능력이 없는 자로 보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견이 바로 자아상입니다. 내가 어떤 자아상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좌우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쓴 책 가운데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화실 근처의 길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화가가 그의 창문을 통해 패배감에 젖어 절망의 계곡에 떨어진 그 거지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중요한 변화를 주면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 변화란, 초점이 없이 허공 중에 박힌 그 거지의 눈을 생기 있고 활기에 넘치는 의욕에 찬 사람의 번쩍이는 눈으로 바꾸어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가는 또한 맥이 풀린 그 거지의 힘없는 얼굴을 강철같은 굳은 의지의 결단성이 강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 화가는 거지를 불러 자기가 그린 그 그림을 보게 하였습니다. 거지는 그 그림 속의 모델이 바로 자신이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게 누구입니까?\\\" 그 거지가 물었을 때 화가는 조용히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여 그를 가리켰습니다. 그 거지는 다시 초상화를 보면서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의심했습니다. \\\"저 그림의 사람이 바로 저란 말인가요? 저 그림의 사람이 도대체 저일 수가 있을까요?\\\" 거지는 머뭇거리면서 힘없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가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당신을 보고 그린 그림이 저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거지는 그 순간 그의 어깨를 똑바로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본 내가 바로 저 그림 속의 사람이라면, 나는 앞으로 저 그림의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냐? 거지로 생각하면 거지같이 살고, 10명의 정탐꾼 같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부정적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아상이 올바르면 나의 인생은 밝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또한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을 때 내가 가르치는, 만나는 사람들 앞에도 얼마나 긍정적이고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올바른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1. 잘못된 자아상 여기 잘못된 자아상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자기 스스로 평가한 대로 보는 자아상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겪는 경험들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믿는 깊은 자기 확신, 이건 잘못된 자아상입니다. 어느 학자가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지요. 한 용기에다가 벼룩을 집어넣고는 마음껏 뛰놀게 하다가 어느 순간 10cm 높이에 유리벽을 설치합니다. 벼룩은 평상시에는 30-40cm를 뜁니다. 아주 잘 뛰는 놈은 1m도 뛴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리벽을 설치하면 처음엔 평상시와 같이 힘껏 뜁니다. 그러면 유리벽에 탁 부딪힙니다. 그 실험을 계속 하게 되면 이 벼룩이 이런 경험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아, 이거 이상 뛰어봤자 진짜 벼룩이네. 이 이상은 나는 뛸 수가 없구나!\\\' 그래서 이제는 유리벽을 치워도 벼룩은 10cm 높이 정도 이상으로는 뛰지 않습니다. 실패의 마인드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진정 더 잘할 수 있는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잠재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리 시달리고 저리 시달리고 어려움을 겪고 낙심하게 되면 그 다음은 진짜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반복된 경험들을 통해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고 그대로 믿는 거지요. 이런 자아상을 가진 사람에게 위대한 미래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②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기준과 판단에 묶여버린 자아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온 나에 대한 평가, 거기에 묶여 \\\'그래, 나는 그런 놈이야.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돼!\\\', 이래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자아상입니다. 어떤 학생 하나가 \\\'너는 어째 그리 공부를 못 하냐?\\\' 그 소리만 늘 듣고 자랐어요. 거기다가 부모님에게 맨날 책망할 때마다 \\\'아이구, 빌어먹을 놈!\\\' 그 소리 듣고 자랐어요. 그러니 그 학생의 마음 속엔 항상 소리가 들려와요.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나는 공부 못해! 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이야.\\\' 공부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학생이 예수님을 만났어요. 은혜를 크게 받았어요. 자아상이 달라졌어요. 이젠 공부하고 싶어 야단났습니다. \\\'나도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만했어요. 졸업 땐 전교 10등으로 졸업했어요. 그 학생이 접니다. 여러분, 나의 자아상이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기준과 판단에 묶여 있는 한 더 나은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교사, 성도가 가져야 할 자아상은 무엇입니까? C. S 루이스는 말하기를 \\\"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댄 스니드가 쓴 책 가운데 「하나님이 만드신 참 좋은 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어보세요. 정말 귀한 책입니다. 스니드는 그 책에서 \\\"건강한 자아개념을 형성하는 첫 단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에 대해 진정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창조주 되시고, 나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가, 66권 성경 곳곳에서 구원받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내가 나를 평가하는 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나, 그걸 나의 자아상을 삼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있어요? 하나님보다 나를 더 완전하게 평가할 사람 있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고 평가했는데, 내가 아니다 그러면 어리석지요? 더 이상 나 자신의 평가를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나를 나의 자아상을 삼아야 하겠습니다. ①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나는 첫째,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즘은 가면 갈수록 여자분들은 얼마나 기가 사는지, 옛날에는 뭐 간 큰 남자 시리즈 이야기를 했는데요, 요즘은 이런 답니다. 여자들이 외출하면서 냉장고 문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가는데, 뭐라고 써놓는 줄 아세요? \\\"까불지마라.\\\" 이래 써놓는답니다. 무슨 뜻인 줄 아세요? 까-가스조심 / 불-불조심 / 지-지프조심(자꾸 조심) / 마-마누라 찾지 마라 / 라-라면 끓여먹고 기다려! 여러분, 기죽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으로, 구주로 믿는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제가 거제도에 10년 있었는데, ○○○ 대통령 아들을 몇 번 봤어요. 그는 대통령의 아들일 뿐이지, 대통령이 아니에요. 그런데 대통령의 아들 온다 그러니까 난리 나더라고요. 당당하게 걸어다닙디다. 예수 믿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입니까? 좀 당당하게 삽시다. 특히 남자들이 좀 당당해집시다. 교사 여러분, 교사의 일이라는 게, 그래요. 요즘 가르친다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좀 어렵다고 기죽어 살지 맙시다. 당당하게 사십시오. 그런 자세, 그런 태도로 사는 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②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여러분, 하루에 거울을 몇 번 보십니까?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하십니까? 황수관 박사님 강의를 들어보면, 웃음이 안 나오면 거울 쳐다보랍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 보면, 세상에 안 웃을 수가 없대요. 여러분, 거울을 보면 내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살아온 나의 내적 이미지도 떠오릅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말입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면서, 너는 어찌 그리 못 생겼냐? 참 이상하게도 생겼다. 어이구, 너라는 인간은 참 구제불능이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평소에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자기 자아상입니다. 그러나 거울을 볼 때마다 세상에 그 거울 속에 그렇게 멋있는 남자가 들어있을 수 있어요? 그래 거울 쳐다볼 때마다 자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특별하게 보는 사람,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그만큼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그러거든요. 거울을 볼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이 듣는 앞에서, \\\'야 거울 속에 장동건 같고 배용준 같은 멋있는 남자 들어있네. 이래 멋있을 수 있어!\\\' 그러면 뒤에서 다 넘어집니다. 넘어지든지 말든지, 저는 저 자신을 볼 때마다 그래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포함하여 자신의 존재나 인생에 만족하고 있지 못한다 그러지요? 이런 불만족은 자신을 비관하는 병적인 열등감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의 말을 귀담아 들으세요.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광활한 태양과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경탄하면서 정작 가장 경탄해야 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탄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지어진 오묘한 존재이며 걸작 중의 걸작품임을 인정하십시오. 당당한 자신감으로 걸작품답게 살아가는 것이 교사가 가져야 할 자세인 줄 믿습니다. ③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시8편 4절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셨는데, 여러분, 내가 천지 우주만물을 지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저주의 대상이 아니요, 영원히 형벌 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요, 애정의 대상자요, 관심의 대상자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보면 어떻습디까? 저는 제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아보니까, 밥 안 먹어도 배부르더라고요.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저주의 대상, 미워하시는 대상으로 보시지 않고 사랑의 대상자로 삼아주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④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교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1장 11절에 보면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하십니다. 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가 하고 싶어 교사합니까? 달란트와 은사가 있어서 합니까? 오늘 저는 목사가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달란트와 은사가 있어서 목사 된 것 아닙니다. 오늘도 제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목회 하려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셨고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데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기에, 오늘 이 시대, 저 교회로 나를 부르셨기에, 그래서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기에 최선을 다해 목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웠다. 나를 부르셨다. 이것이 내가 일해야 될 이유, 충성해야 될 이유로 알고, 나를 교사로 부르신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교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⑤나는 성령 안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한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겠다는 말씀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을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3대 사역, 즉 예수님이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셨듯이 성령 안에서 나도 그 일을 계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하겠다는 것은 질적, 본질적 이야기가 아니라 선교적 개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마침내 실행될 대대적인 세계 복음화의 위대한 비전을 바라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예수님보다도 더 멀리, 더 넓은 지역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오늘 본문 전후 문맥을 살필 때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나도 할 수 있고, 내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우리 교사들이 가져야 할 자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단한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지금보다 10배 더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 나도 한 영혼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교사가 가르칠 때 얼마나 힘있고,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있는 가르침이 되겠습니까?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고 가르치게 될 때 학생들에게 긍정적 마음을 심어주고, 꿈을 심어주고,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심어주고, 가능성을 심어주는, 정말 탁월한 교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교사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교사 여러분과 성도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주안에서 더 복되고 은혜로운 열매 많이 남기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신6:4-9/ 2001-10-18
교사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신6:4-9 서기 70년, 로마의 성난 군대가 그동안 포위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을 향해 물밀듯이 몰려 들어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요아난 벤 자카이라는 존경받는 위대한 랍비이자 스승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몰래 성을 빠져나가 로마 장군을 만나서 \\\"마을의 작은 집 한채가 있는데 그 집만 파괴하지 않겠다면 성문을 열어 주겠습니다\\\" \\\"무슨 집이요?\\\" \\\"예, 그 집은 바로 도서관입니다.\\\" 장군은 동의를 했고 요하난은 돌아가 성문을 열었고 백성들 사이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으나 백성을 향해 요하난은 \\\"울지 마십시오. 로마 군대는 모든 것을 다 약탈해도 저 오두막의 책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소, 우리 자녀들은 오두막의 책을 통해 하나님을 배워 반드시 우리의 조국을 회복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한 사회를 지키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육이 바로 서고 존경받을 만한 스승이 있는 사회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푸른교회는 스승의 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스승의 주일은 어린이 주일이나 어버이 주일 같이 우리 한국 교회가 공식적으로 지키는 절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푸른교회는 특별히 교육을 중히 여기고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하는 교회\\\'를 설립 목적으로 정한 교회인 만큼 푸른교회는 오늘, 오월 셋째 주일을 스승의 주일로 지키고 이를 통해서 참된 기독교 교육의 의지를 다지고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의 노고를 기리고자 합니다. 우리 푸른 교회와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올바른 기독교 교육뿐임을 기억하며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사명과 역할에 푸른교회 교육부서의 교장인 제가 모든 성도님들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부모의 교육적 역할 \\\"들어라!\\\"라는 명령으로 시작되는 이 본문은 하나님의 준엄한 가르침의 명령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교육의 대헌장인 \\\'쉐마\\\'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교육적 사명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뭐라고 그럽니까?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강론하라고 그러고 있습니다. 이 가르치고 강론하는 일을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셨는데 \\\"네 자녀에게\\\"라고 했으니 먼저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부모가 먼저 자녀를 책임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국가와 사회의 인물로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부모를 \\\'호림\\\', 하나님의 말씀을 \\\'토라\\\'라고 하는데 호림과 토라는 둘 다 교육을 뜻하는 \\\'야라\\\'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부모나 교육은 그 어원이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란 히브리어로 보면 \\\"가르치는 자, 교훈하는 자, 어떤 모양으로 만드는 자\\\"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가정은 단순히 집만이 아니라 더 큰 의미를 가져서 가정일 뿐 아니라 회당이요, 학교요, 배움의 터전이었습니다. 집에서 글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배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 일을 부모가 감당을 하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훌륭한 부모란 바로 훌륭한 교사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솔선수범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술 담배를 하면서 자녀들에게 금주, 금연하라는 교육이 얼마나 허약한 가르침인지 알고 계십니까? 자신들은 비윤리적으로 살면서 올바르고 정직하라고 가르치는 가르침이 얼마나 자녀들의 경멸거리가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자신들은 주일에 아무거나 사고 팔고 사먹고 즐기고 놀면서 자녀더러 주일엔 꼭 교회 가라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신앙을 강요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 자기 자녀들을 부모가 철저하게 신앙으로 책임을 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전도\\\'라는 말이 없습니다. 내가 낳은 아이는 내가 책임을 지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부모의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낳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학교 보내고, 과외 시키는 것이 부모의 일차적인 책임이라고 믿는 우리의 풍토와는 너무나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녀들은 부모를 부모 이전에 먼저 스승으로 대합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만이 전부가 아니라 나를 사람되도록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도록 가르쳐 주신 스승으로 존경하고 받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버지를 소개할 때는 언제나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의 스승이셨던 나의 아버지는....\\\" 만약에 그냥 \\\"나의 아버지는....\\\"이라고 말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버릇없는 불학무식한 자로 낙인찍힙니다. 그 만큼 부모의 교육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 존경 이스라엘은 작은 학교인 회당을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열 가정만 되면 회당을 만듭니다. 그리고 큰 회당이나 작은 회당이나 회당의 교사는 가장 똑똑하고 진실하고 유능한 사람을 택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과거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분들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는 밝고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가 돈으로 모든 평가하는 천박한 사회가 되더니 선생님의 권위조차도 그런 식으로 평가하고 신랑감 후보로 몇위인가를 따지고 그러다가 선생님을 월급장이로 이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교육이 낙후되고 훌륭한 선생님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교사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랍비(선생님)가 온다고 하면 어머니들이 전부 자기 아기를 다 들쳐업고 나옵니다. 우리 아이를 축복해 달라고 말입니다. 남자들은 모자를 벗어 랍비에게 경의를 표하고 심지어 아버지와 랍비가 물에 빠지면 반드시 랍비를 먼저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선생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선생님을 불신하고 심지어 선생님이 야단치면 112에 신고하는 한심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와 우리 사회가, 특히 학부모인 우리가 우리 자녀들의 교육 현장을 황폐화시키고 스승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 앞에서 지도자인 선생님의 흉을 아무 스스럼없이 내뱉습니다. 텔레비젼에도 선생님의 부끄러운 모습이 아무런 여과 없이 보도됩니다. 이제 교육 현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임금님이 가장 위대한 사람을 찾아서 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추천되었는데 재력가, 의사, 법률가, 학자 등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에 아주 늙고 초라한 백발의 할머니가 끼어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여기 잘못 온 것이 아닌가?\\\" 그러자 신하들이 \\\"마마, 여기 있는 이 훌륭한 재력가, 의사, 법률가, 학자들은 모두 바로 이 분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입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고 임금님은 이 할머니에게 자신의 왕관을 벗어 씌워 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 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푸른 교회는 교사 선생님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교육이 세상을 살린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교육입니다. 4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참 마음으로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유대인들의 교육의 근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아무리 크게 성공했다해도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은 배신자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성공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당당함이 결국 이스라엘을 1등 국가로 만드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보면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문설주와 문에 붙이는 율법 상자를 \\\'메주자\\\'라고 하는데 유대인의 집들에는 말할 것도 없고 히브리 대학의 강의실에는 모든 강의실에 이 메주자가 붙어 있습니다. 히브리 대학은 세계 10위권에 드는 매우 오래되고 유서 깊은 대학입니다. 이 대학에서 수십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냈습니다. 그런 대학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공경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배운 사람들이 바로 서면 나라가 삽니다. 그러므로 바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사명은 너무나도 큰 것입니다. 8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것을 네 손목에 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테플린\\\'이라고 하는데 이 것을 통해 유대인들은 나의 손과 발과 입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살겠다는 결단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중에 어느 나이 어린 병사가 부상으로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군목이 곁에서 임종을 지키고 있는데 끊어져 가는 목소리로 \\\"목사님, 어머니와 절 가르쳐 주신 고향마을 주일학교 선생님께 어릴 적부터 가르치신 대로 진실한 크리스챤으로 살다 죽었다고 전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군목은 그 어린 병사의 유언대로 이 사실을 전했는데 얼마 후 그 병사의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난달 수십 년이나 해오던 주일학교 교사직을 사표 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사로서 하는 일이 너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의 편지를 받고 그 동안의 제가 한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다시 교사의 일을 계속하려 합니다. 앞으로는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된 교사가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하도 작아 큰 열매가 안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이 사역이 교회를 교회되게하고, 교회로 하여금 참된 생명체가 되게하는 가장 소중한 사역임을 깨닫고 여러분의 생명을 바쳐 헌신하는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21세기에 주인공인 어린 학생들을 훌륭하게 길러 이 나라와 교계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는 교회되기를 다시 한번 축원 드립니다!
교사는 멘토다/ 딤후1:11/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교사는 멘토다 딤후1:11 멘토(mentor)가 교회학교 교사의 이미지의 한 대안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멘토란 말은 호머의 일리 어드에 나오는 용어로 그리스의 오딧세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출정할 당시 아들 텔레마쿠스를 멘토라 는 이름의 친구에게 맡긴데 유래한다. 멘토는 오딧세우스가 자리를 비운 10년동안 텔레마쿠스를 성실하게 지도해 그를 훌륭한 후계자로 만든다. 이 같은 유래에 따라 사심을 버리고 영적 자녀를 위해 헌신적인 양육과 교육을 실시한 사람 을 멘토, 제자를 멘토리 혹은 멘티라 부른다. 달라스 신학교의 헨드릭스 교수는 이런 내용을 기초로 \\\"멘토는 다른 사람을 성숙시키고 또 계속 성숙해 가도록 도와주며 그가 자신의 생의 목표를 발견하도 록 도와주는데 자신을 헌신한 사람이다\\\" 라고 정의했다. 이와 같이 멘토는 다른 사람의 성장과 장래 에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는 스승을 말한다. 바로 교회학교 교사는 멘토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성숙해 가도록 도와야 하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가야 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를 구약의 모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가까이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세워갔다. 그 결과 자기의 뒤를 이 어 이스라엘을 지도해 갈 위대한 지도자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또 다른 예를 신약의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까이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세워갔다. 그 결과 훌륭한 초대 교회 지도자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그러면 멘토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1. 멘토는 우선 후원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멘티의 든든한 후원자로 멘티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도 록 후원해야 한다. 밀어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면서 든든한 버팀목으로 후원해 가야 한다. 2. 멘토는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한다. 멘티가 나아가야 할 길을 일러 주고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마치 등대가 한 밤에 배의 진로를 안내하듯이 갈 길 몰라 방황하는 멘티의 앞길 을 안내해 가야 한다. 3. 멘토는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 멘티가 앞을 향해 나아갈 때 수많은 대적들을 만나게 되고 걸림돌을 만나게 된다. 그 때마다 멘토는 보호자로서 막아주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4. 멘토는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 멘티가 때로 게을러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때마다 멘토는 자극하고 격려하면서 분발하도록 촉진해 나아가야 한다. 또한 멘티가 자기 성숙이 더딜 때가 있다. 그 때도 열심을 내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교회학교 교사들은 반의 아이들 전체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 한 아이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다. 그들이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져 가는 일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사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딤후1:10-14/ 2003-03-25
교사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딤후1:10-14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頒布者)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0-11). 어느 정도 신앙의 연륜이 쌓이게 되면 누군가로부터 \\\"주일 학교 교사 좀 맡아 주세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교사의 말과 행동에 따라 아이들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교사들이 되는대로 말하고 되는대로 행동합니다. 당신은 다음 네 가지 사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첫째, 명령과 지시하는 투로 말을 한다(불평하지 말고 조용히 들어 !). 둘째, 경고하고 위협하는 식의 말을 자주 한다(너처럼 떠드는 아이는 예수님이 싫어하셔 !). 셋째, 늘 충고하는 투로 말을 한다(네가 할 일은 정직하게 말하는 거야 !). 넷째, 판단하고, 비난하고, 탓하는 말을 한다(너는 왜 그렇게 게으르니 ? 너는 왜 그렇게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니 ?). 이런 말은 한 영혼에게 크나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사라면 적어도 생각할 줄 아는 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교사라는 직함으로 수많은 잘못을 범해 온 저희를 용서하시고, 저희로 사명감 있는 교사가 되게 하시 옵소서.\\\" 당신이 만약 주일 학교 교사라면, 자신이 몇 점 정도의 교사라고 생각하십니까 ? \\\"너희들 조용히 해 !\\\"라고 말하는 것은 \\\"나 공과 준비 안 해 왔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은 다 좋은 교사입니다. 먼저 자아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사로 부름 받은 것은 내가 완전해서 가르치는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선생(先生)이란 먼저 태어난 자로서 앞에 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앞서가는 자가 다음 세대를 위하여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가는 자가 잘못 인도하면 따르는 무리들이 소경을 따르는 격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선생된 자의 사명이 실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르치는 사명을 받고 보면 그로 인하여 나 자신을 바로 세워 가는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사명이 주는 유익함입니다. 특별히 유아기의 상태는 아직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미완성의 백지상태입니다. 여기에는 교사가 그림을 그리는 대로 작품이 완성됩니다. 마치 빈 그릇에 무엇을 담는 것과 같습니다. 옥토에 심긴 씨앗은 심은 그대로 결실 합니다. 영국의 길벗 하이츠의 교육 이론입니다. 그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① 교사는 가르치는 과목에 정통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과목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강의를 잘 하시는 유명한 교수들은 원고를 다 외워서 나옵니다. ② 학생 개개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관심은 이름을 불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얼굴과 의상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교해서 우열을 가릴 것이 아니라 개성을 살려주어야 합니다. ③ 가르치는 자체를 좋아해야 합니다. 삶의 모든 과정이 교육의 소재이어야 합니다.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격의 전수가 되어야 합니다. ④ 전공 외에 다른 과목도 좋아해야 합니다.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양성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⑤ 유머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유머는 생활의 활력소입니다. 유머는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스승과 제자와 동역자 간에 친밀감을 더해 줍니다. 1. 소명의식과 사명감이 투철해야 합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11) 모든 사물에는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을 상실하면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 강단에 존재하는 몇 가지 성물이 있습니다. 마이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목사의 음을 담아서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여기에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종은 예배를 위하여 신호기능을 하는 존재합니다. 아무리 당겨도 소리가 나지 않으면 여기에 둘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사명은 무엇인가?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는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목적을 상실하고 살아간다면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했습니다. 인생은 지구에 관광객이나 구경꾼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망각하고 사는 자는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린 무익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사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 세상에서 불러내어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를 다시 불러서 교사의 사명을 맡겨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주일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장성한 성인보다는 청소년기의 교육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청소년기보다는 유년기 시절의 교육이 더 좋습니다. 이 보다는 태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백지상태에 그림을 그리는 그림은 일평생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입증해 보여줍니다. ① 모세가 유아기 때 받은 히브리 교육입니다. 그는 출생한 후 3개월부터 젖 때기까지 그 어머니 품에서 히브리민족의 성민교육을 받았습니다. 후에 그가 사십에 이르기까지 애굽의 모든 학문을 다 배웠으나 유아기의 히브리 민족교육을 능가하지를 못했습니다. ② 사무엘의 성전교육입니다. 그 어머니 한나는 서원한대로 아들 사무엘을 젖을 뗀 후에 성전의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유아기부터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어떠한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도 사무엘만한 위대한 인물이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③ 디모데의 가정교육입니다. 그는 바울 스승을 만나기 전에 가정에서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 밑에서 청결한 양심훈련과 눈물의 기도훈련과 거짓 없는 믿음훈련을 어려서부터 받아 왔습니다. 바울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으나 디모데만한 제자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항상 그의 유아시절의 교육을 칭찬했습니다. 2. 철저하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하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2) 하나님은 훈련된 종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예외 없이 다 훈련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나 광야의 지도자 모세나 열왕의 대표인 다윗이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다 훈련을 통해서 사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로크 보우먼씨가 말하기를 \\\"교회학교에 시한 폭탄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훈련된 교사가 부족하다\\\"것입니다. 교회학교 교육에 가장 큰 문제점은「선생이 학생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학생은 날마다 배우고 자라는데 선생은 연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안됩니다. 교사는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인생은 일평생 배우는 학생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자는 남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교사는 복음의 핵심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자라나는 이들의 마음 판에 인같이 도장같이 새겨 주어야 합니다. ① 독생자 예수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요 3:16).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 없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죄인의 구주는 죄 없는 독생자 예수만이 가능합니다. ② 밀 알 되신 예수를 증거 해야 합니다(요 12:24). 독생자 예수는 한 알입니다. 유일한 한 알이요 존귀한 한 알이요 특별한 한 알입니다. 다른 어떠한 이름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유일한 이름은 예수뿐입니다. ③ 예수는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요 1:9). 예수만이 참된 빛입니다. 참빛 되신 주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취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의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하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어두운 그림자가 다 물러갑니다. ④ 예수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요일서 4:8).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모든 것을 주신 희생의 십자가인 아가폐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때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⑤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를 증거 해야 합니다(요 14:6). 예수만이 천국에 이르는 길이요 예수만이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요 예수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들 예수가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으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인생이 호흡을 멈추고 살아갈 수 없음같이 성도가 기도를 쉬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호흡을 하는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자는 누구든지 호흡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하나님과 항상 교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는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했습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엡 6:18)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사역인 것입니다. 단순한 눈을 감고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3. 앞서가며 본을 보여야 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른 말을 본 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3-14) 주님은 가장 좋은 교사입니다. 교육의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뒤에서 매로서 훈계하는 교정형이고, 다른 하나는 앞에서 본을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앞서가며 본을 보여준 선한 목자였습니다(요 10장). ① 학생 개개인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 교사는 학생 개개인의 개성을 중시하여 개개인과 인격적인 교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② 앞서 본을 보입니다. \\\"자기 양을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며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4) 교사는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특히 경건 생활에 본이 되어야 교사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③ 교사는 학생을 먹일 꼴이 풍성해야 합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9-10) 교사는 학생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적절히 공급할 수 있는 풍성한 꼴을 준비해야 합니다. 손님을 만이 끌어들이는 점포는 진열된 상품보다 창고에 많은 것이 보관되어 있어야 합니다. ④ 교사는 희생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 교사는 학생의 영혼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희생을 할 줄 알아야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교사는 먼저 듣고 마음에 새긴 것을 전해야 합니다. 선생은 학생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6)고 했습니다. 교사는 먼저 마음에 새긴 것이 있어야 전할 말이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이 지상명령으로 부탁한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마 28:19),고 했으며,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좋은 교사가 됩시다. ① 교사는 설계사입니다. 교사는 인생을 설계할 줄 아는 철학을 가지고 교육을 해야 합니다. 모든 건물은 설계대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격형성도 교육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② 교사는 정원사입니다. 정원수는 정원사의 손에 쥐어진 가위에 따라서 그 모양과 형태가 달라집니다. 정원사의 생각에 따라서 나무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③ 교사는 화가입니다. 그림은 화가의 손에서 그리는 대로 형태가 나오며, 그 위에 입히는 물감에 따라서 색상이 달라집니다. ④ 교사는 요리사입니다. 요리사의 손에 지어진 양념에 따라 음식의 맛이 달라집니다. 내울 수도 있고, 짤 수도 있고, 얼큰한 맛을 낼 수도 있습니다. 좋은 교사는 좋은 학생들을 키웁니다. 끝으로, 오늘 취임하시는 교사 여러분! 나는 세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1.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2.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3. 책임을 져야 합니다. ①기도로 돌봐야 합니다. ②관심으로 돌봐야 합니다. ③바른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교사 여러분의 충성스러운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교사란 어떤사람인가?/ 딤후41-8/ 이무웅 목사/ 우이제일교회/ 교사주일설교/ 2008-05-18
교사란 어떤 사람인가? 딤후41-8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제일먼저 하신일이 12명을 선택하셔서 함께 숙식을 같이하시며 3년동안을 양육하고 가르키신 교육하는 일이였다. 그러므로 사람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은 가장 가치가있고 보람이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망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양을 먹이고 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양육하고 키워낸다는 것은 오늘 이시대에 가장 소중하고 보람된 일인것입니다. 교회성장학의 거장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목사님은 현대를 가르켜 참된 사람을 찾기 힘든 ‘지도자 부재의 시대’라고 선언하면서 지도자란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꿈을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향해 기쁜 마음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을 감화시켜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특별히 훈련시키는 사람이다“라고 정의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지금 이때는 바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켜 나가도록 도와주는 지도자” 얼마나 멋이있는 하나님의 일꾼입니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참된 지도자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원하시고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교육에 있어서 학생들의 양육을 담당하는 교사는 지금 가장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자원 고갈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국제 곡물 가격이 배로 뛰고 있고 국제유가는 배럴당 130달러가 넘는 고유가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식수오염, 공기오염, 환경공해, 등으로 매일 수만명의 사람들이 건강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에너지나 석유나 천연자원의 고갈보다도 더 심각한 지도자의 부재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 안에서 지도자를 발굴할 지도자 또는 교사가 부족하다는 것은 더욱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하실 때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을 통해 일을 하십니다. 이 말을 여러분에게 적용을 한다면 하나님은 교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에 앉아 있는 선생님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영혼을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통하여 또 다른 영혼이 변화될 것이고 사회가, 나아가서는 국가가 변화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의 힘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러분들의 직분을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 주신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 직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 네직무를 다하라고 하였습니다. 학교 공부는 단순이 지식전달로 교사의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수 있지만 교회교육은 지식전달이 아닙니다. 머리로 아는 지식 전달만을 가져온다면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반드시 염두해 두어야 하는 사실은 여러분의 지식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성이 살아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전인격을 가르치고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본문「딤후4:1~8」을 통하여 교사란 누구이며, 교사의 사명과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럼 먼저 교사란 누구인가? “교사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자기의 정체성을 읽는데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을 상투적이고 사무적으로 이해한다면 아무런 대답을 찾을 수 없지만 이 질문을 조심스럽게 상고한다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1. 하나님앞에 선 사람(1절) 1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하는 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언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하는 하나님의 말입니다. 교사는 하나님앞에 선 사람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교사는 하나님에게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하기위해 보냄을 받았듯이 교사는 자신이 맡은 양들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교사의 기원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보냄을 받은 이 시대의 선지자가 바로 여러분 교사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교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교사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양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사는 자기 양들을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실체를 그려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학생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본다는 말도 성립이 됩니다. 특별히 나이가 어린 유초등부 학생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학생들은 교사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늘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학생들은 교사 여러분들을 통하여 올바른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학생들은 교사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되고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교사 여러분들을 통하여 영생의 삶을 배우게되고 소유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사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직무에 대해서 얼마나 교사직이 중요하다는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아니 적어도 자신의 이 거룩한 직무에 대해서 감격해하며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직무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볍게 생각할 지라도 여러분들만은 그렇치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가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직을 제의받았습니다. \\\"당신의 탁월한 경영솜씨를 발휘해 체신부장관직을 맡아주시오\\\" 워너메이커는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나는 교회학교 교사라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가합니다. 만약 장관을 맡아서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장관직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은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때서야 그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며 비행기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한번은 기자들이 워너메이커에게 장관직이 교회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동안 해야할 본업입니다. 그러나 장관직은 한두해 하다가 말 부업이지요\\\" 하였다는 것입니다. 명성을 얻기위해 산것이 아니라 소신과 사명감을 갖고 인생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부와 명성을 얻을 기회가 자연스럽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2. 교사는 전하는 사람(2절) 오늘 본문 2절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여느 때와는 달리 강한 어조로 분명하게 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警責)하며 경계하라”라고 합니다.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계시의 책입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됩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사명이요, 신약의 사도들의 사명입니다. 선자자들은 타락한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과 잘못을 전하였고, 신약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교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이 시대의 선지자요, 사도들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럼 이것을 전하는 교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2절에서 살펴보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최선입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직무가 최선을 다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내입니다. 2절에 오래 참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가르침의 사역은 오랜 인내가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교육의 효과는 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기도입니다. 교사는 기도로 반(班)목회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반목회의 성장이 교사의 기도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금식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더더욱 기도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맡은 영혼들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서 관심과 사랑으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스펄전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가였는데 스펄전이 16세이던 1850년 콜체스터의 한 교회에서 조그만 모임이 있었고 스펄전은 이 집회에서 복음을 접하고 큰 변화를 받았다 그런데 이날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이었다. 이날 교회학교의 한 교사는 날씨가 나빠도 교회에 미리 나와 조금 후에 온 17명을 위해 열정을 다해 복음을 가르켰다. 그 결과 스펄전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교회사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결실은 최선의 성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교사의 길은 주님이 가신 길과 같습니다. 교사의 반목회는 곧 주님의 목회 사역의 위임입니다. 위대하신 교사였던 주님이 기도하시면서 사역을 감당하셨듯이 교사된 우리도 기도로 어린영혼을 위하여 목회를 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기도의 떡과 기도의 눈물을 먹인다면 여러분의 반은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3. 교사는 보는 사람(3절~4절) 교사는 보는 사람입니다. 보긴 보되 아무것이나 보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보아야 할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럼 무엇을 보는 사람입니까? 첫째,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이는 세상을 보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사 여러분은 세상을 볼 때 다른 이들과 같이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영적인 흐름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한 자의 영을 따르는 것을 보고 학생들에게 경계토록 해야 합니다. 본문에도 말하기를 5절에 때가 이르리니... 라고 하면서 디모데에게 바울은 자신이 본 세상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영적 싸움터임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안이 열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며 학생들이 처하고 있는 현대의 문화적인 환경이 어떤 모습을 띄고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둘째, 학생들을 보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학습자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을 너무나 잘 이해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체질까지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학생들을 바로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교회 나오기 싫어하고 찬양하기 싫어하고 순종하기 싫어하는 것이 성격이나 재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단정을 짓기 전에 이것이 사악한 영의 역사 때문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교사가 양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심방을 하고, 상담을 하고,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적을 알아야 전쟁에서 이기듯이 양을 알아야 잘 지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든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이것은 이해했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어떠한 반응과 공격에도 적절히 대처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자기가 맡은 학생들을 잘알아야 합니다. 4. 교사는 배우는 사람(딤후3:14~17) 교사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배워야 남을 가르킬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평생 배우는 존재이지만 교사는 더더욱 배워야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맡은 그 거룩한 직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명 수행의 과정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어린이를 지도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여기에 해당되는 공과교수법, 청소년 이해등을 배워야 합니다 셋째 기독교 역사관, 세계관, 국가관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사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다루어야 할 과목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교사대학을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학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학습의 기간을 잘활용하여 여러분의 어린이 목회에 풍성한 열매를 가져올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좋은 책을 통하여 여러분의 심령을 풍성하게 가굴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여러분에게 맡겨진 교사라는 직무는 거룩한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직무를 위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직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사의 직책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직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와 눈물로 양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유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이유는 올바른 배움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양들을 바르게 양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수고하는 여러분에게 준비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어떠한 보상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시겠습니까? 7절과 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마치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하나님의 양들을 위임받아 목양하는 선생님의 사역을 두고 위의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선한싸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길 선생님들의 사역을 두고 선한 싸움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악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한싸움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절에서는 또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합니다.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날에 하나님이 선생님들을 향하여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교사란 적어도 자신의 사역을 하면서 이 땅의 것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 천국을 사모하며 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선생님들이여...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 의의 면류관을 사모하며 그날에 주실 상급을 바라보며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며 양들을 목양하는 거룩한 교사의 직무를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교사로 부르심/ 고전4:16-20/ 2004-06-05
교사로 부르심 고전4:16-20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되 꼭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사람들을 들라하면, 첫 번째는 부모요, 두 번째는 배우자요, 세 번째는 선생님이라 합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과 연관해 교회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하시는 분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다. 아마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존경하는 선생님을 마음에 품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생각해 보면, 아름답고 친절했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홍옥표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첫 번째 만난 선생님이라 그런지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더 나가서 말을 직설적으로 하셨지만 꼭 필요한 말을 하셨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김종현 선생님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교회학교 선생님으로는 초등부 때의 박혜영 선생님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반대로 제가 중등부 2학년 교사로 봉사할 때 개구쟁이 학생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좋은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선생님이 많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의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사랑하고 신실한 사람을 교사로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세운 고린도교회의 일을 다 감당하지 못할 때 그는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파송된 목회자요 교사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디모데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도 바울의 행사 곧 그가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바로 파송된 목회자요 교사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한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요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끝까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신앙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믿는 그대로 고백하고 행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디모데는 그러한 면에서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감옥에 갇히는 등 많은 고난을 당할 때 다른 사람들은 떠났어도 그는 끝까지 바울 곁에 있던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변함없이 신앙을 지켜나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목회자요 교사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꾸준히 사람을 키우고 있습니다. 빌립보에서 불림을 받은 디모데는 바울을 따라다니던 사람에서 파송을 받는 사람으로 성장하였고 마지막에는 사도 바울의 일을 전적으로 맡아 일하는 속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의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정성을 다해 양육했으면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키우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적 전승을 받아 오늘도 노회는 목사를 각 교회에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 정신이 우리 한국장로교회에서는 매우 약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정신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목사는 그 교회에서 많은 교사들을 세우고 파송합니다. 각 교회학교 부서 부서에 파송을 합니다. 그러므로 교사되시는 분들은 물론 자신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파송을 받은 분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신실한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요, 이를 우리는 하나님의 복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사람을 키우는 일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더욱이 현대 경영학에 있어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손욱 삼성인력개발원장은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1960년대 경영목표가 무엇(what)을 할 것인가였다면, 1980년대는 어떻게(how)할 것인가였고, 1990년대는 기업 경영의 강조점이 누가(who),할 것인가로 변화했다. 잘 나가는 기업치고 인재경영을 강조하지 않는 기업은 없다. … 세상 흐름이나 기술발전이 현기증 나게 빠르기 때문에 무슨 기술전략을 어떻게 짜기보다 변화에 척척 대응하는 뛰어난 인재를 발굴해 키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훌륭한 인재를 키우는 일이 어찌 오늘의 문제이기만 하겠습니까? 똑같이 교회에서도 사람을 양육하여야 합니다. 다만 이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에서 양육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훌륭한 백성으로 양육하는 것이지요. 더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 수 있는 목자요 교사로 양육하는 일입니다. 이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꼭 감당하여야 할 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뜻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교사의 개념을 좀더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장년이 되면 교회학교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배만 드리고 가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비록 몸은 다 성장하였고 또한 지적인 힘은 왕성하다 하더라도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성장하여야 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주로 목회자를 중심으로 해서 교회가 움직여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부흥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컸습니다. 그리고 지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역량 속에서 주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즈음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는 평신도지도자들을 많이 세우는 일입니다. 주일에 모이는 교회에서 주중에 흩어진 교회가 될 때 바로 평신도지도자들이 목자요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면으로만 교회가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법칙을 보면, 기적과도 같은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은 후에는 훈련과 노력을 통해 성장하도록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몇몇 교회 모임에서 언급한 바 우리교회는 목회자로부터 말씀을 듣는 면에서는 아주 좋은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신도를 지도자로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뒤져있다고 사료됩니다. 교회의 앞날을 염려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 한국교회가 앞으로 계속 존속하고 성장해 나가려면, 성숙된 평신도지도자들을 얼마나 잘 세우느냐에 달려있다고까지 말하곤 합니다. 이러한 점은 아마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예로 비숫한 시기에 있었던 두 목사님의 경우를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힐데만 목사님은 설교계의 거물이요 이름난 문필가였습니다. 그 분이 뉴욕제일침례교회에서 목회할 때 전국에서 교인이 제일 많았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교회는 영광의 뼈대만 남고 주일예배에 200명도 모이지 않는 초라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텍사스주의 달라스제일교회에는 트루엣 목사님이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 역시 설교에 있어서는 둘째라 하면 서운한 분이었습니다. 트루엣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교회도 이제 사그러져 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회학교 조직을 통해 말씀 교육을 철저히 하였기 때문에 목사님이 바뀌어도 계속 교세를 유지하며 발전하였습니다. 이같이 개인도 교회도 말씀으로 내린 뿌리가 든든해야 합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을 말씀에 있어 교사와도 같이 키우는 일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평신도를 지도자로 키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달할 교사로 양육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 감당하여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도 이러한 점의 중요성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몇 년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함께 키워나가야 합니다. 목사는 평신도들의 신앙성숙을 위해 말씀 선포자로 교사로 또한 섬기는 자로 일하여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는 또한 목사를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고 도울 뿐만 아니라 같은 평신도를 양육할 수 있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분명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교사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잘 전하라는 말씀에 담겨져 있지요. 바울이 전하고 가르친 것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훌륭한 교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남겨주신 명령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도 마태복음 28:19에서 자신이 가르친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할 때 거기에는 진정 사명을 다하는 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교사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칩니다. 또한 인격을 키워줍니다. 더 나가서 사회성을 길러줍니다. 하지만 교회의 교사는 영성을 길러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도록 인도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보다 말이 많아지는 사람은 진정 십자가를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교사가 될 사람도 아니요 평신도 지도자가 될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도 보면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도 달변가일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걱정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목소리만 크고 사랑의 능력은 없는 목사가 되지 않을까 매우 염려합니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분들은 말보다는 묵묵히 일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들은 필요한 곳을 찾아 자기가 희생할 것을 감당합니다. 그러면서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묵묵히 일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말보다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죄인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슬비전도 방법도 택하고 있습니다. 이슬비전도를 통해 우리는 우선 전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들을 양육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또한 누군가를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우리 인생여정에서 쉬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감사하고 또한 존경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에게 끼치는 은혜입니다. 유안진씨는 ‘잊을 수 없는 말 한 마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인간에게만 있는 귀중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현재의 자신을 키워 준 은혜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을 안 잊는다는 것이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여러분, 여러분들을 가르친 선생님들이 있기에 오늘의 여러분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은혜를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사는 것이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길입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못드렸던 선생님께 안부전화라도 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 홀로 성장하고 성숙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영향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선생님을 기억하시고 좋은 선생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상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사로 세움을 입었노라/ 딤후1:10-14
교사로 세움을 입었노라 딤후1:10-14 = 참고성구 = 데살로니가후서 2:8 로마서 16:26,고린도전서 15:26,욥기 33:30, 로마 서 2:7, 디모데후서 2:9, 디모데후서 2:8,로마서 2:20.디모데후서3:14 바울사도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2번째 편지 속에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저는 지극히 소박하고 지극히 단순 한 교육철학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로 듣는 사람마다 고개를 크게 끄떡끄덕하며 동감하는 것을 많 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결코 여러분의 동의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도대체 박승일 목사 당신이 가진 그 교육철학이 무엇이냐고요? 말씀드리지요. 보고 싶은 선생님! 오고 싶은 교회학교! 바로 이것입니다. 한마디로 매력있어야 한다 그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교회학교 교육은 적어도 50%는 성공이라고 생각합 니다. 여러분! 우리 잠깐 역설적 가상법을 사용하여 우리의 위치를 재조명하여 봅시 다.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흰 것을 검은 것으로, 검은 것을 흰 것으로! 가상해 보는 방법 말입니다. 만약 이 세계 모든 교회에서 현재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시는 모든 교 사들이 하나같이 썰물처럼 다 사라져 버렸다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일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멋지고 보람찬 일이라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으리 무조건 깔보는 교만한 사 람이 없는 일이라고 비관.좌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 이 도덕적으로 하나도 거리낄게 없는 일인데도 수입이 적다든가, 남들 이 그다지 알아주지 않는 직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주눅이 들어 있는 사람을 보면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의 [교사관]내지 의식구조, 의식경향은 어떤 편일까 요? 위에 예를 든 두가지가 다 바른게 아닙니다. 교만이 아닌 긍지! 비관이 아닌 소망! 의무가 아닌 소명감! 이것으로 하여야 할 일이 바로 교회학교 교사노릇이 아닐까요? 이것으로 하여야 할 바로 이 교회학교 교사노릇이 아닐까요? 함석헌 선생은 \"가르치지 않는 것도 죄다.\"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것 가르치지 않는 게 죄라는 말이지, 도둑질, 쓰리하는 것 가르 치지 않는 게 죄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가르쳐야 될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좋은 것이라는 의미 속엔 귀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며, 예쁜 것, 견고한 것, 영원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그중에서도 생각하는 사람들은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사 람답게 사는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찾는다는 것은 진리를 찾 아 탐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 복되고 영원한 생명 그것이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길! 이 진리! 이 생명! 이것을 가르치는 자가 교회학교 교사이고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획 교 교육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학교 교사직은 봉사직입니다. 봉사의 근본 정신이 무엇입니까? 첫째, 서비스 즉 무료입니다. 무료도 돕는다는 정신입니다. 둘째, 진실입니다. 거짓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셋째, 인내입니다. 꾹꾹 참으며 묵묵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희생입니다. 손해 볼 각오하고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은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문 방송에 떠들썩 광고내며 하는 것 아닙니다. 교회학교 교사직에는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습니다.쉽게 말해서 월급 이나 사례비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번쩍번쩍 빛나는 영광의 훈장도 없 습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1945년 8월 15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1개에 20만명이 죽었 습니다.지금은 핵폭탄 하나에 1,000만명이 죽어 나가게 된다고 합니 다. 현재 세계적으로 핵무기 보유량은 TNT(폭약) 으로 환산하여 600억톤 이라 하며 세계 인류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15톤씩이나 올려져 있는 처지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위기입니다. 불안의 시대입니다. 번민의 시대입니다. 들려오는 소문마다 겁주는 내용으로 만재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20세기 말 초대의 전도자 빌리 그래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번민의 95%가 성경을 읽지 않는데서 온다.\"고 갈파하였습니다. 핵폭탄 의 위기도,불안도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는 거뜬히 해결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노라.라고 선언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핵폭탄의 위협을 뛰어 넘는 생명!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까?죽어도 살겠고!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성경에 기록된 복된 소식을 널리 반포하고 가르치기 위한 일로 세 움 입은 자가 교사라고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확신에 차서 내가 교사가 된 것은 복음때문이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 이런 선언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왜 교사가 되었습니까? 교회에서 임명했기 때문입니까? 부장이 추천해서입니까? 친구의 권유로해서입니까? 교회에 교사가 모자라 마구 징발하는데 억지로 휩싸여 징발되었습니 까? 아니면 천만다행으로 교사의 자격을 완비하고 정규 코오스를 마쳤 기 때문입니까? 소질이 있어서입니까?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이런 류의 대답은 기독교 교육, 교회학교 교육을 담당할 교사의 응답 으로써는 합창치 않습니다. 충분히 않다는 말입니다. 그게 우선 순위 에 들지 않습니다. 복음! 복음 때문에 교사가 된 교사! 그런 교사가 하는 교회교육! 그것이 바 른교사요, 그것이 바른 기독교 교육이라 그 말씀입니다. 복음은 너무 귀합니다. 원자폭탄,수소폭탄, 미사일이 머리 위르리 빙빙 돌고 우리네 머리 하 나에 TNT 15톤씩 올려져 있는 현재도 복음은 너무 귀하고 귀합니다. 죽음을 정복한 복음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또한 부활이 있는 이 복음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기 모이신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이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언제, 어디서든지 나는 복음 때문에 교사가 되었다.고 확신하시는 교사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렇게 복음때문에,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가르치 기 위하여 나선 교사 맨 처음 환영하며 나와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 니까? 돈보따리요? 아닙니다. 자자한 칭찬과 박수갈채요? 아닙니다.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를 인하여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 교회학교 교사가 처음 맞부디치게 되는 그것! 그게 뭣니까?고난! 이 것입니다. 교사 노릇하는 신자와, 교사 노릇 안하는 신자! 어느 편이 편안하겠 습니까?교사에게는 시간을 더 내야하고,정열을 더 기울어여 하는 고난 이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려면 아픔이 따르고 손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아픔, 이 손해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고,억울해하지 말 아야 합니다. 우리들 교사가 지켜야 할 수칙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있습니까? 13-14절에 기록되어 있어여.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바른말을 본받아 지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밖에 있는 믿음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밖에 있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교육에 임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 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첫째 믿음으로서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맙니다.하나님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기쁘시게 못하면 헛 일 이 아니겠습니까? 둘째 사랑으로서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살리고, 감화를 줍니 다. 예수님 교훈의 총 집약은 사랑입니다. 셋째, 바른 말을 본받아 지켜야 합니다. 정직한 말, 진실한 말을 해 야 합니다. 거짓말 하면 못씁니다. 진실하신 예수님 가르치며 거짓말 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넷째, 성령으로서 아름다운 것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육은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지성인이라 하여도 교회학교 교육은 맡을 수도, 맡길수도 없 습니다. 지식 가지고 하는 것 아닙니다. 세상 지식뿐 아니라 신학지식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교, 신학대학 100군데를 나왔어도 성령 없이는 못하는 교육이 교회학교 교육입니다. 또 경험만 있다고 누구나 다 하는 교육도 아닙니다. 교직 경력 50년, 100년이 되었어도 교회학교 교육 맡을 수 없습니다. 국민학교,중.고등학교,대학교에서 장기간 교육 경력 쌓았다 하여도 교 회학교 교육 맡길 수 없습니다. 교수법의 기술만 가지고 되는 교육이 아닙니다. 어떤 법칙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공식에 대입해 풀면 풀어지 는 수학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 이것 없어도 불가능한 교육이 바로 교회학교 교육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 없이 읽으면 뜻도 모르고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가르쳐 보았자 열매 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여 성령의 감동하 심을 요청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가르쳐야 하는 교육이 교회 학교 교육입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여러분! 이것은 대 원칙입니다. 여기에 부수적인 소원칙 좀 덧붙일까요? 그것 은 교육방법이 좋을때, 한결 더 그 효과가 극대화를 될 수 있으므로, 교육방법을 개선해 나가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느 교회나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회에 있는 학교보다 교육방 법이 너무 고루하고 낙후된 느낌을 많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로 강의식, 이야기식,주입식 방법으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회의 학교 교육은 그 기회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빈번한 대 비하여 교회학교의 교육기회는 겨우 주일 하루뿐인 경우가 대부분 이므로 교육기회가 1/6에 지나지 않습니다. 1/6의 시간으로 똑같은 효과, 내지 더 큰 효과를 거둬야 하는만큼 교 회학교 교육의 방법은 최소한 6배나 더 앞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 립될 수 있습니다. 교육자료의 확충입니다. 개발하기로 하면 얼마든지,다양하게 풍부하게 개발할 수 있을 것입니 다. 웬만한 기자재 예컨대 환등기, 영사기 오버헤드, 타자기, 복사기, 산진기 등등은 교회 예산이 허락되는 한 구입하여 그 용법을 지도 받 아 원활히 사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와 교사에게 인도상,생일 선물 등등을 줄때도 교육적인 배려를 행정적으로 지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육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 향으로 말입니다. 가령 학용품으로 사다 주거나 손수건, 허리띠 같은 것을 선물로 쓰는데 그러지 말고 그 값어치의 기독교 교육도서나 팜프 렛을 사서 시장품으로 썼으면 좋겠어요. 여름성경학교, 여름 수양회 하면 똑같은 런닝이나 T셔츠를 3,000원 -5,000원씩 들여서 입히는데 그런 외향적, 전시적 목적하에 경비를 지 출하지 말고 반 영구적인 교육자재를 사는 실속있게 투자하는 지혜를 가지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1,000-1,500원짜리 가방을 해 준다든가 스 카프를 기념물로 준다는 것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되겠는데 비록 개인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없어서 허전할지 모르나 긴 장래, 알찬 교육 을 위해 기자재를 구입하여 교회 안의 모든 기관이 유용하게 쓰게 한 다는 것을 슬기로움은 될지언정 낭비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어린이 , 학생에게 구호가 프린팅된 T셔츠나 가방을 주는 것은 무조건 낭비다라 고 단언할 수 없는 없겠지만, 한국 교회학교의 장래를 위하여 이점 꼴 강조하고 싶은 생각 간절합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이런 교사가 계시지 않겠지요? 공과책도 읽어보지 않고, 반 아이들 위해 기도한번 해 보지 않고 성 경 한번 펴 보지 않고, 그대로 어린이와 학생 앞에 나서는 교사! 준비 없이 서는 교사! 이거 곤란합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어느 모임에서 이런 소리를 듣고 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가지고 있던 성경 주석을 3-4가지, 아니 그 이 상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더라는 소식입니다. (이크, 전도사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3종류나 주석을 더 샀습니 다. 공부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고 싶은 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오고 싶은 교회 학교가 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매력있는 교사, 매력있는 교회학교가 될 수 있을까요? 믿음있는 교사가 매력을 가집니다.자기 자신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 다면 복음을 매력있게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사가 매력을 가집니다. 말씨, 행동에 사랑있는 자가 어린 이, 학생에게 어필합니다. 쌀쌀맞고 불친절한 교사는 환영받지 못합니 다. 사랑이 없고는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바 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 다른 성 도들보다 더 큽니까?사랑이 더 풍부합니까? 우리가 하는 말마다 오직 진실한 말한 할례받은 혀였습니까?우리가 성령충만 했습니까? 우리가 모두 부지런했습니까? 우리가 모두 남다른 매력을 가졌습니까? 하지만! 낙심하고 포기하고 주저 앉지 맙시다. 다시 새롭게 분발합시다. 새 각오로 힘차게 전진합시다. 로마서 2:7에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는 핑계되지 맙시다.무슨 핑계가 되었든지 핑계는 대지 맙시다. 로마서 16:26에 이런 약속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타나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 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 실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복음을 위해 교사가 된 여러분에게 성령의 약속대로 복음이 여러분을 능히 견고케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교사 중에 한 사람도 견고케 되지 못하는 교사가 한명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복창해 주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교사로 새움을 입었노라. 이와 교사로 세움 받았으니 어린이가 학생들이 보고 싶어하는 교사가 됩시다! 감사합니다.
교사로 세움을 입었노라/ 딤후1:10-14
교사로 세움을 입었노라 딤후1:10-14 = 참고성구 = 데살로니가후서 2:8 로마서 16:26,고린도전서 15:26,욥기 33:30, 로마 서 2:7, 디모데후서 2:9, 디모데후서 2:8,로마서 2:20.디모데후서3:14 바울사도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2번째 편지 속에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저는 지극히 소박하고 지극히 단순 한 교육철학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로 듣는 사람마다 고개를 크게 끄떡끄덕하며 동감하는 것을 많 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결코 여러분의 동의를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도대체 박승일 목사 당신이 가진 그 교육철학이 무엇이냐고요? 말씀드리지요. 보고 싶은 선생님! 오고 싶은 교회학교! 바로 이것입니다. 한마디로 매력있어야 한다 그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교회학교 교육은 적어도 50%는 성공이라고 생각합 니다. 여러분! 우리 잠깐 역설적 가상법을 사용하여 우리의 위치를 재조명하여 봅시 다.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흰 것을 검은 것으로, 검은 것을 흰 것으로! 가상해 보는 방법 말입니다. 만약 이 세계 모든 교회에서 현재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시는 모든 교 사들이 하나같이 썰물처럼 다 사라져 버렸다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일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멋지고 보람찬 일이라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으리 무조건 깔보는 교만한 사 람이 없는 일이라고 비관.좌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 이 도덕적으로 하나도 거리낄게 없는 일인데도 수입이 적다든가, 남들 이 그다지 알아주지 않는 직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주눅이 들어 있는 사람을 보면 좀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의 [교사관]내지 의식구조, 의식경향은 어떤 편일까 요? 위에 예를 든 두가지가 다 바른게 아닙니다. 교만이 아닌 긍지! 비관이 아닌 소망! 의무가 아닌 소명감! 이것으로 하여야 할 일이 바로 교회학교 교사노릇이 아닐까요? 이것으로 하여야 할 바로 이 교회학교 교사노릇이 아닐까요? 함석헌 선생은 \"가르치지 않는 것도 죄다.\"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것 가르치지 않는 게 죄라는 말이지, 도둑질, 쓰리하는 것 가르 치지 않는 게 죄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가르쳐야 될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좋은 것이라는 의미 속엔 귀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며, 예쁜 것, 견고한 것, 영원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그중에서도 생각하는 사람들은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사 람답게 사는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찾는다는 것은 진리를 찾 아 탐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 복되고 영원한 생명 그것이 진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길! 이 진리! 이 생명! 이것을 가르치는 자가 교회학교 교사이고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교획 교 교육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학교 교사직은 봉사직입니다. 봉사의 근본 정신이 무엇입니까? 첫째, 서비스 즉 무료입니다. 무료도 돕는다는 정신입니다. 둘째, 진실입니다. 거짓으로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셋째, 인내입니다. 꾹꾹 참으며 묵묵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희생입니다. 손해 볼 각오하고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은밀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문 방송에 떠들썩 광고내며 하는 것 아닙니다. 교회학교 교사직에는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습니다.쉽게 말해서 월급 이나 사례비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번쩍번쩍 빛나는 영광의 훈장도 없 습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1945년 8월 15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 1개에 20만명이 죽었 습니다.지금은 핵폭탄 하나에 1,000만명이 죽어 나가게 된다고 합니 다. 현재 세계적으로 핵무기 보유량은 TNT(폭약) 으로 환산하여 600억톤 이라 하며 세계 인류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15톤씩이나 올려져 있는 처지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위기입니다. 불안의 시대입니다. 번민의 시대입니다. 들려오는 소문마다 겁주는 내용으로 만재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20세기 말 초대의 전도자 빌리 그래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번민의 95%가 성경을 읽지 않는데서 온다.\"고 갈파하였습니다. 핵폭탄 의 위기도,불안도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는 거뜬히 해결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교사로 세움을 입었노라.라고 선언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핵폭탄의 위협을 뛰어 넘는 생명!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까?죽어도 살겠고!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성경에 기록된 복된 소식을 널리 반포하고 가르치기 위한 일로 세 움 입은 자가 교사라고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확신에 차서 내가 교사가 된 것은 복음때문이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 이런 선언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왜 교사가 되었습니까? 교회에서 임명했기 때문입니까? 부장이 추천해서입니까? 친구의 권유로해서입니까? 교회에 교사가 모자라 마구 징발하는데 억지로 휩싸여 징발되었습니 까? 아니면 천만다행으로 교사의 자격을 완비하고 정규 코오스를 마쳤 기 때문입니까? 소질이 있어서입니까?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이런 류의 대답은 기독교 교육, 교회학교 교육을 담당할 교사의 응답 으로써는 합창치 않습니다. 충분히 않다는 말입니다. 그게 우선 순위 에 들지 않습니다. 복음! 복음 때문에 교사가 된 교사! 그런 교사가 하는 교회교육! 그것이 바 른교사요, 그것이 바른 기독교 교육이라 그 말씀입니다. 복음은 너무 귀합니다. 원자폭탄,수소폭탄, 미사일이 머리 위르리 빙빙 돌고 우리네 머리 하 나에 TNT 15톤씩 올려져 있는 현재도 복음은 너무 귀하고 귀합니다. 죽음을 정복한 복음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또한 부활이 있는 이 복음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기 모이신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이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언제, 어디서든지 나는 복음 때문에 교사가 되었다.고 확신하시는 교사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렇게 복음때문에,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가르치 기 위하여 나선 교사 맨 처음 환영하며 나와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 니까? 돈보따리요? 아닙니다. 자자한 칭찬과 박수갈채요? 아닙니다.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를 인하여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 교회학교 교사가 처음 맞부디치게 되는 그것! 그게 뭣니까?고난! 이 것입니다. 교사 노릇하는 신자와, 교사 노릇 안하는 신자! 어느 편이 편안하겠 습니까?교사에게는 시간을 더 내야하고,정열을 더 기울어여 하는 고난 이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려면 아픔이 따르고 손해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아픔, 이 손해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고,억울해하지 말 아야 합니다. 우리들 교사가 지켜야 할 수칙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있습니까? 13-14절에 기록되어 있어여.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바른말을 본받아 지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밖에 있는 믿음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밖에 있는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교육에 임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 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첫째 믿음으로서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맙니다.하나님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기쁘시게 못하면 헛 일 이 아니겠습니까? 둘째 사랑으로서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살리고, 감화를 줍니 다. 예수님 교훈의 총 집약은 사랑입니다. 셋째, 바른 말을 본받아 지켜야 합니다. 정직한 말, 진실한 말을 해 야 합니다. 거짓말 하면 못씁니다. 진실하신 예수님 가르치며 거짓말 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넷째, 성령으로서 아름다운 것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육은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지성인이라 하여도 교회학교 교육은 맡을 수도, 맡길수도 없 습니다. 지식 가지고 하는 것 아닙니다. 세상 지식뿐 아니라 신학지식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교, 신학대학 100군데를 나왔어도 성령 없이는 못하는 교육이 교회학교 교육입니다. 또 경험만 있다고 누구나 다 하는 교육도 아닙니다. 교직 경력 50년, 100년이 되었어도 교회학교 교육 맡을 수 없습니다. 국민학교,중.고등학교,대학교에서 장기간 교육 경력 쌓았다 하여도 교 회학교 교육 맡길 수 없습니다. 교수법의 기술만 가지고 되는 교육이 아닙니다. 어떤 법칙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공식에 대입해 풀면 풀어지 는 수학문제가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 이것 없어도 불가능한 교육이 바로 교회학교 교육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 없이 읽으면 뜻도 모르고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가르쳐 보았자 열매 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여 성령의 감동하 심을 요청해야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가르쳐야 하는 교육이 교회 학교 교육입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여러분! 이것은 대 원칙입니다. 여기에 부수적인 소원칙 좀 덧붙일까요? 그것 은 교육방법이 좋을때, 한결 더 그 효과가 극대화를 될 수 있으므로, 교육방법을 개선해 나가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느 교회나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회에 있는 학교보다 교육방 법이 너무 고루하고 낙후된 느낌을 많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로 강의식, 이야기식,주입식 방법으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 사회의 학교 교육은 그 기회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빈번한 대 비하여 교회학교의 교육기회는 겨우 주일 하루뿐인 경우가 대부분 이므로 교육기회가 1/6에 지나지 않습니다. 1/6의 시간으로 똑같은 효과, 내지 더 큰 효과를 거둬야 하는만큼 교 회학교 교육의 방법은 최소한 6배나 더 앞에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 립될 수 있습니다. 교육자료의 확충입니다. 개발하기로 하면 얼마든지,다양하게 풍부하게 개발할 수 있을 것입니 다. 웬만한 기자재 예컨대 환등기, 영사기 오버헤드, 타자기, 복사기, 산진기 등등은 교회 예산이 허락되는 한 구입하여 그 용법을 지도 받 아 원활히 사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와 교사에게 인도상,생일 선물 등등을 줄때도 교육적인 배려를 행정적으로 지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육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 향으로 말입니다. 가령 학용품으로 사다 주거나 손수건, 허리띠 같은 것을 선물로 쓰는데 그러지 말고 그 값어치의 기독교 교육도서나 팜프 렛을 사서 시장품으로 썼으면 좋겠어요. 여름성경학교, 여름 수양회 하면 똑같은 런닝이나 T셔츠를 3,000원 -5,000원씩 들여서 입히는데 그런 외향적, 전시적 목적하에 경비를 지 출하지 말고 반 영구적인 교육자재를 사는 실속있게 투자하는 지혜를 가지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1,000-1,500원짜리 가방을 해 준다든가 스 카프를 기념물로 준다는 것도 마찬가지 이야기가 되겠는데 비록 개인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없어서 허전할지 모르나 긴 장래, 알찬 교육 을 위해 기자재를 구입하여 교회 안의 모든 기관이 유용하게 쓰게 한 다는 것을 슬기로움은 될지언정 낭비는 안될 것입니다. 물론 어린이 , 학생에게 구호가 프린팅된 T셔츠나 가방을 주는 것은 무조건 낭비다라 고 단언할 수 없는 없겠지만, 한국 교회학교의 장래를 위하여 이점 꼴 강조하고 싶은 생각 간절합니다. 사랑하는 교회학교 교사 여러분! 이런 교사가 계시지 않겠지요? 공과책도 읽어보지 않고, 반 아이들 위해 기도한번 해 보지 않고 성 경 한번 펴 보지 않고, 그대로 어린이와 학생 앞에 나서는 교사! 준비 없이 서는 교사! 이거 곤란합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어느 모임에서 이런 소리를 듣고 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가지고 있던 성경 주석을 3-4가지, 아니 그 이 상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더라는 소식입니다. (이크, 전도사가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3종류나 주석을 더 샀습니 다. 공부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고 싶은 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오고 싶은 교회 학교가 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매력있는 교사, 매력있는 교회학교가 될 수 있을까요? 믿음있는 교사가 매력을 가집니다.자기 자신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 다면 복음을 매력있게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사가 매력을 가집니다. 말씨, 행동에 사랑있는 자가 어린 이, 학생에게 어필합니다. 쌀쌀맞고 불친절한 교사는 환영받지 못합니 다. 사랑이 없고는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바 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믿음이 다른 성 도들보다 더 큽니까?사랑이 더 풍부합니까? 우리가 하는 말마다 오직 진실한 말한 할례받은 혀였습니까?우리가 성령충만 했습니까? 우리가 모두 부지런했습니까? 우리가 모두 남다른 매력을 가졌습니까? 하지만! 낙심하고 포기하고 주저 앉지 맙시다. 다시 새롭게 분발합시다. 새 각오로 힘차게 전진합시다. 로마서 2:7에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는 핑계되지 맙시다.무슨 핑계가 되었든지 핑계는 대지 맙시다. 로마서 16:26에 이런 약속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타나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 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 실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복음을 위해 교사가 된 여러분에게 성령의 약속대로 복음이 여러분을 능히 견고케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에 속한 모든 교사 중에 한 사람도 견고케 되지 못하는 교사가 한명도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복창해 주십시오. 예수님으로부터 교사로 새움을 입었노라. 이와 교사로 세움 받았으니 어린이가 학생들이 보고 싶어하는 교사가 됩시다! 감사합니다.
교사로서의 예수님과 그 자격/ 마4:23-25
교사로서의 예수님과 그 자격 마4:23-25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세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23상).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 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해석과 설명입니다. 즉 교사로서의 예수님 을 말씀합니다. 두번째는, 예수님의 전파하심입니다(23중).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 그 차체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이적의 역사, 십자가에 죽으 심, 부활, 승천, 보좌에 앉으심, 재림차체를 선포합입니다. 즉 설교자로서의 예수님 을 말씀합니다. 세번째는, 예수님의 고침이십니다(23하). 예수님은 백성중에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이는 영적치료인 복음전파와 가르침과 정비례하여 육신적인 고통을 치료하십입니다. 즉 의사로서의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1. 교사로서의 예수님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교육론을 연구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과연 진정한 교육자이시 며 교육을 하시려고 오신 교사였는지 반문이 제시될 것이며 또한 그 물음에 답이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대하여 선생이라는 호칭을 여러차례 부르고 있 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선생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키텔의 신약신학사 전은 예수님 자신이 적접 선생이라는 용어를 29번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 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서 전체에서 계속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선생의 입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교육시켰습니다. 예 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과 특별한 추종자들도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 다. 니고데모와 같은 관원들도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을 반대했던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율법사, 헤롯당원들까지도 예수님을 선생 님이라고 호칭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분명히 당시 유대사회에서 선생으로 인정 되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2) 공관복음 기자들은 동일하게 예수님의 전도활동을 갈릴리 회당에서부터 시 작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님은 회당에서 유대인의 풍속과 습관대로 성경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회당은 그 당시 민중학교로서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선교활동은 회당에서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그 당시 진지한 종교적인 사 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그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길이 거기에만 개방되었기 때문이라 고 합니다. 바클레이는 \\\"예수님은 복음서 전체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음을 말하며 예수님 의 계시는 곳에는 언제나 가르치는 활동이 전개되었고 심지어는 걸어가면서도 가르 쳤다\\\"고 교사의 활동을 강조했습니다. 3) 예수님이 교사로서 호칭되었고 교사로서 활동했음은 틀리없는 사실이나 문 제는 예수님이 본질상 교육자로서 정의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육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사상은 그의 전체의 전도활동을 가능케한 방법이 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틀림없는 교사의 활동은 하였으나 순수한 교육을 하기위한 독립적인 교 사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매개와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했으며 그러한 의미로서의 교육을 하는 교사 였습니다. 2. 예수님의 교사자격을 살펴 보겠습니다. 복음 서에서 제시된 예수님의 교사자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1) 예수님의 인격적인 준비입니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신체적으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든 방면에서 완전히 성숙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적인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장모습을 누가 복음 2장 52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 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에서 예수님의 인간적 발달 모습을 볼 수 있 습니다. \\\"키가 자라며\\\"에서 신체적 발달과 성숙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가 자라며\\\"에서 지적 정서적 발달과 성숙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사랑스러워가며\\\"에서 사회적 요소의 발달과 성숙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철저한 인격 준비를 하시었습니다. 따라서 교사는 먼저 인격적 준비가 철저히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기도의 준비입니다. 예수님은 30세가 지난 후 세례를 받고 기도와 준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40일 간 금식기도(마4:2)로 철저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3번 철야기 도 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눅6:12, 9:28∼36, 22:39∼46). 특별히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활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새벽에 일찍이 일어나시어 한적한 곳에 가셔서 새벽기도를 하신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막1:35). 예수님은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것이 습관화 되었습니다(눅22:39).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로 준비하셨고 기도로 본을 보이셨고 기 도로 전도활동을 하셨고 기도로 교육을 하시기도 하시었습니다. 오늘날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격은 기도의 훈련을 쌓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사들이 기도의 훈련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지력과 말 재간으로 아동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에 실 패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기도의 준비가 없는 교육은 인간 교육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기도의 준비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혜와 말로는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한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고전2:1∼5, 13). (3) 예수님의 지식의 준비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말씀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는 이미 12세에 성 전에 올라갔을 때 성경에 대한 지식을 그 당시 선생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리틀은 예수님의 성경지식에 대하여 말하기를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서 아주 익 숙하여 가르치실 때에는 그것을 자유로이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또는 간접적으로 인 용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생의 어려운 고비를 당하셨을 때 성경은 선택과 결정을 하 게 하였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대하서 개인적으로 친숙하기 때문에 성경의 풍부 한 종교적 경험과 영적 통찰력을 자유로 활용하였다\\\"고 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구약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만큼 그는 성경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인간성에 대한 지식과 자연과 생의 전체에 관한 지식도 충분히 갖 추었음을 그의 가르침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가진 지식을 말하기를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 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 실 필요가 없음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생활의 모든 허식을 사랑과 식별의 눈으로 살피셨습니다. 그 사람 들이 여러가지의 입장에서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대하여 알기도 했습니다. 그의 가 르침에 있어서 가장 고조된 것은 행위를 지배하는 내적인 태도였습니다. 그가 사람 들을 대한 방법은 학생들의 행동을 자아내게한 동기를 돌보는 것에 필요하다는 것 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준비는 한마디로 요약하여 충분한 실력을 완비했다고 볼 수 있 습니다. 그는 성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기 위 한 교육활동을 위해 30년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인간적인 여건, 기도의 준비, 성경에 관한 지식, 인간과 자연에 관한 지식등 충분한 실력을 준비하였습니다. 2) 예수님은 모본의 교사였습니다. 예수님의 교사로서의 가장 위대한 자격은 무엇보다 그의 생활전체에서 증명해주 고 있습니다. 골덴이 지적한 것처럼 예수님은 가르치기 전에도 이미 행동하셨고 가르치시는 것 은 그대로 실천하셨고 앞으로 가르치실 것도 미리 행동하시고 계섰습니다. 브레드 스리는 예수님의 교사자격에 대하여 가르침의 모델 인물로써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 니다. ⑴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쳤고 가장 기도를 많이 하심으로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 밖에 없는 줄 알고 눈물로 기도하는 교사가 되어야합니다(막9:29). ⑵ 예수님은 사랑을 가르치면서 실제로 사랑의 사람이 되었고 끝까지 사람과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요13:1). 모든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 사랑과 정성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분신으로 주님의 모습으 나타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전도하기를 부탁하신대로 전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막1:38∼ 39). 우리는 구원의 감격속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하늘나라의 소망속에 기쁨을 가지 고 주님의 지상명령인 영혼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교훈의 특별한 능력을 지적하기를 \\\"사람들은 그의 교훈에 놀라 니 이는 그의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생활과 행동을 통하여 권위있는 예수님의 교육은 제자들에게 깊 은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마큐리스는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은 교리가 아니라 삶의 영향력이었다. 그들의생애의 마지막 시간까지 그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이 위대한 일었다\\\"고 말했습니다. 생활과 삶을 통한 인격적 교육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 교육자들은 기술적인 문 제와 방법론적인 연구에는 치중하나 인격적 감화력이나 삶과 생활을 통한 교육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러한 교사의 자격론 문제는 앞으로 계속하여 연구되 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같이 예수님은 과연 위대한 선생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 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매개와 수단으로서의 교육을 하는 교사였습니다. 그리고 충분한 인격적인 준비와 기도의 준비와 지식의 준비를 갖추 셨고 기도의 본과 사랑의 본과 전도의 본을 보인 모본의 교사였습니다. 애청자 여 러분들은 교육의 달을 맞이하여 교사로서의 예수님과 그 자격을 갖추어 여름성경학 교와 하기 수련회를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사의 사명/ 마18:5-7
교사의 사명 마18:5-7 (마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18: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오늘은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지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더 관심을 갖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반 학교에서의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모두들 귀하게 생각하지만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선생님에 대해서는 성도들 조차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학교 선생님들께는 부모님들이 가끔 찾아뵈면서 인사도 하고 자녀들을 잘 부탁하기도 하지만, 교회 선생님들에게 찾아와서 자녀들을 잘 부탁하는 분들은 별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학문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저들의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교육보다도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해서 출세하고 잘 살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간혹 보면, 어떤 교사는 구원의 확신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말고 다른데 말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도 힘든 사람이 교사의 일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런 분은 자신도 고달프지만 그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아이들도 제대로 신앙이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어린 심령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사명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일학교 교사 뿐만이 아니라, 구역회에 구역강사라든지, 각기관의 임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기회가 많으므로 역시 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오래되고 신앙이 좋은 분들은 신앙이 연소하고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역시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의 사명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교사가 되려면 여러가지 자질과 자격의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①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고 ② 신앙의 본이 되어야 하며 ③ 영적인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④ 생명이 천하보다 귀함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⑤ 항상 기도하며 ⑥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윤리적인 면으로는 ① 단정한 용모를 갖추고 ② 다정한 음성으로 전하며 ③ 웃는 얼굴로 대하고 ④ 화합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⑤ 칭찬 받는 사람 ⑥ 시간에 철저한 교사 ⑦ 윗사람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⑧ 아랫사람에게 존경받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① 공과의 교안을 일찍이 준비하고 검토하며 ② 알아듣기 쉬운 말로 전하고 ③ 학생들의 환경과 상태를 이해할뿐 아니라 ④ 그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⑤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한 교사 ⑥ 시청각 자료들을 활용하는 교사 ⑦ 보충자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⑧ 모범적인 교사를 관찰해서 본을 삼으며 ⑨ 경험있는 교사나 지도자의 조언을 잘 듣고 따르는 교사 ⑩ 기독교 교육에 관한 연구를 하며 그에 대한 서적을 읽는 교사 강습회나 교사 지도회에 참석하기를 좋아하므로 자기 개발에 힘쓰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등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교사는 영적인 면이나 윤리적인 면에서나 기술적인 면에서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교사로써 최소한 꼭 지켜야 할 것 3가지를 강조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신령한 영의 귀가 열려져서 성령께서 친히 각 사람에게 놀라운 깨달음과 은혜로 역사하셔서 교사의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사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고 말씀하시면서 7절에서는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마18:7)\\\\\\\"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사의 사명은 실로 막중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지 않기 위해서.....,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종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한 종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친히 우리를 불러 주시고, 나를 인정하셔서 나에게 맡겨주신 교사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만 하겠습니까? 첫째로, 교사는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딤후2:20-21절 말씀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즉, 교사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이 그릇에 묻어 있으면 음식을 담을 수 없듯이,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는 그릇이므로 우리는 먼저 깨끗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질그릇이든지 금그릇이든지, 귀하게 쓰이든지 천하게 쓰이든지...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놈은 우리를 더럽히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우리의 사명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죄를 가진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 하실 수 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5:4절에 보면,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멸망하는 것이요 저주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대하25:4절에는 \\\\\\\"오직 각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욥21:19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고 하셨고, 민14:18절에서는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했습니다. 민32:14절에는 \\\\\\\"죄는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한다\\\\\\\"고 했고, 삼하7:14절에서는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끝까지 찾아다니며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더 큰 죄와 협상하게 되고, 마귀는 하나님께 참소합니다. 눈을 감아도 그 죄는 우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잠을 자도 편치 못합니다. 맥박이 뛰고 심장이 마구 뜁니다. 가지가지 병을 가져다 줍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에 가서 은둔하여도, 비행기를 타고 멀리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민32:23절에 보면,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했습니다. 욥20:27절에서는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51:3절에 보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스9:7절에 보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 뿐만아니라 왕들과 제사장들을 다른나라 왕들의 손에 붙여서 칼에 죽고 사로잡히고 노략을 당하여 심히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느1:8절에서는 \\\\\\\"열국 중에 흩을 것이라\\\\\\\"했고, 시40:12절에는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시66:18절에는 기도를 해도 \\\\\\\"주께서 듣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시125:5에 보면, \\\\\\\"죄를 짓는 자에게는 안되고 망하고 안 풀리는 재수없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렘5:25절에서는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했습니다. 렘8:14절에는 \\\\\\\"죄로 인하여 멸하시며 독한 물을 마시우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렘17:3절에서는 \\\\\\\"죄로 인하여 재산과 모든 보물을 도적질 당하고 노략을 당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렘31:30절에서는 \\\\\\\"신 포도를 먹으면 그 이가 심과 같이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겔18:4에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저주 아래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께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준비해서 말씀을 전하여도...., 아무리 좋은 미사어구를 써서 기도할지라도 허공을 칠 뿐입니다. 죄악을 간직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가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는 상관이 없이 항상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죄를 위한 유혹을 하지도 말고 당하지도 말아야 하며, 죄의 자리에 앉지도 말고 서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1:1에 보면,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교사 여러분! 그리고 앞으로 교사가 될 여러분!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죄하고는 상관이 없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만 자신은 물론이고, 가르침을 받는 영혼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우리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권속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교사는 모든 공예배에 열심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십계명에 보면 분명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성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교사들은 얼마나 주일을 성수하고 있습니까? 주일은 하나님의 날로 구별해 놓은 날입니다. 그래서 주일입니다. 뿐만아니라 교사는 주일을 성수할 뿐만아니라, 모든 공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약2:10절에 보면, 10가지 계명중에 하나의 계명을 범하면 10개의 계명을 범한 것과 똑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만일 여러분의 가정에 10개의 문이 있는데 10개의 문을 모두 다 잠가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10개 중에 9개의 문은 단단히 잠갔는데, 1개의 문이 열렸다고 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계명 중에 하나라도 범하면 모든 계명을 범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는 것은 6법전서에 나오는 모든 죄를 다 져서가 아닙니다. 1개, 2개 많아야 3개 정도 죄를 지어서 재판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일을 성수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남들이 그러니까.... 형편이 그러니까.... 이 정도 나가 줬으면 됐지 뭐..... 무슨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남을 위해서 믿는 것처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상의 행위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불의한 일을 당한다 해도, 급한 볼일이 발생한다 하여도 예배시간은 지켜야 합니다. 일상적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는 그 시간만큼 급하고 신속을 요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주일성수는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기본이고, 모든 공예배에 열심으로 참여를 해야만... 자신의 신앙이 자라가게 되고, 그래야만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도 안 지키고 안 나오면서 어떻게 주일성수를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겠습니까? 그 말씀은 허공을 칠 뿐입니다. ex} 제가 아는 어떤 여집사님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분의 생각에는 격려도 좀 받고, 도움을 받고 싶어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몇 가지 제목을 정하고 40일 작정 기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봤습니다. \\\\\\\"집사님 주일 성수는 잘 하십니까? 공예배는 빠짐없이 참석하십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주일 오전 예배는 참석하는데 저녁예배는 가끔 간다는 것입니다. 수요일이나 금요일은 말할 것도 없이 기분이 내키면 가고 보통은 안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집사님, 40일 작정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해야 할 것은 주일을 잘 성수하고 공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시면서 작정기도를 해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제 생각에는 별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분의 형편과 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반은 야단도 치고 설득도 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주일날.... 집에 있으면서도 주일 저녁예배도 안나가고 공예배도 안 갑니까!.......\\\\\\\" 사실 이 분은 직장에 다니는 맞벌이 부부입니다. 어린아이가 둘씩이나 됩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남들처럼 피곤하여 쉬고도 싶을 것입니다. 들로 산으로 놀러도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분은 40일을 작정하여 기도하고 싶은 열망과 마음의 갈급함은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40일 작정기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성수하고 공예배에 열심히 참석을 하는 것이 더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조금만 성의가 있고 열의가 있다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다 경건의 연습이 덜 되어 있어서 어색하고, 불편하고, 이상한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이 분만의 얘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분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겁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주님이 내게 말씀하신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성도의 기본입니다. 기본...... 그리고 공예배도 열심히 참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후로는 주일 낮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시간에는 다른 계획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는 일에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선생된 자는 주일성수와 모든 공예배에 참석해야 만이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고 더욱 성숙한 성도가 되어서 맡은바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레10:1-11절에 보면, 예배는 기독교인의 의무입니다. 이제.... 예배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나아가서 진지하게 오늘의 예배와 자신과 예배 인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새로운 은혜를 맛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교사는 죽도록 충성하고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때와 여건이 다 맞아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고, 충성하고 싶어도 충성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직 젊었을 때, 아직 힘이 있을 때, 물질이 있을 때, 재능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민수기 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레위인들 가운데 고핫자손과 게르손 자손, 므라리 자손들을 성막의 봉사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30세 이상부터 50세 이하의 남자들만 소집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연령을 제한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30세라면 청소년의 혈기나 서투름에서 벗어날 만한 시기입니다. 즉, 성숙한 자라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일에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신앙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연령을 제한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는 힘이 있어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미숙하다거나, 혹은 너무 연로해서도 안됩니다. 30세에서 50세라고 정하신 것은... 그 시기는 정신 활동이나 체력에 있어서 가장 왕성할 때 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황금기에 자신을 위해서 살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고,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전12:1절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하고 말씀합니다. 시110:3절에서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인생의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아무런 낙이 없다고 할 때가 되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새벽 이슬처럼 영롱하고 순결한 청년의 정신과 활력이 있을 때...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전12:1,시110:3).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더 늦기 전에.... 자기에게 주어진 힘과 기회를 선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껏 사용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주님앞에 충성을 하고서도 종된 우리는 자랑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6:2절에 보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지 말라. 즉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마구 떠벌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눅6:35절에서도 \\\\\\\"아무 것도 바라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교사를 하면서... 혹은 다른 직분을 감당하면서... 어떤 댓가나 칭찬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고 상급을 받는다면 주님앞에 가서 받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눅17:7-10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종입니다. 종은 사례를 받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그런데 때로 우리는 겸손한 척하면서도 우리의 공로를 내세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그래도 갚지 못할 빚입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주님을 따라 가게 하신 것.... 이런 모든 것들이 다... 거져 받은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눅17:10절의 말씀은 얼마나 진리입니까?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하십시오!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리고는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태도, 이러한 신앙의 인격.... 이런 자세는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런 사람들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일을 할 때,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강력한 행위를 통한 증거요, 전도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이런 섬기는 자세가 나타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회학교 교사만 선생이 아니라,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들.... 신앙의 연륜이 있고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을 행해서 성서는 \\\\\\\'선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5:12절 말씀에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같은 성도가 아니죠. 신앙의 연륜이 있고 직분을 받은 성도는 마땅히 나중에 믿은 초신자들에게 선생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5:12절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선생이 되지 않고 항상 초보적인 신앙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먼저 믿은 사람들... 신앙의 연조가 있는 사람들.... 먼저 직분을 받고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고 헌신한 경력이 있는 성도들은 마땅히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에게 본이 되고, 말씀으로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교사의 길을 가야하고 마땅히 교사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가르치는 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 초보적인 신앙에 있는 분들을 믿음으로 잘 이끌어 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앙의 연조가 많은 사람들, 직분을 받고 사명을 부여받은 성도들은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모두에게 빛난 면류관이 예비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무익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희들을 교사로 불러 주시고, 천사도 흠모할 여러가지 직분을 맡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서 생명의 면류관 받는 그 날까지.....,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고, 또 신앙이 연소한 자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한 교사가 되기 위해서.... 죄와는 상관이 없는 깨끗한 그릇이 되어서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예배시간마다 열심히 참석하여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더욱 풍성하여 지며,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할 줄 아는 교사, 이러한 성도가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교사의 사명과 축복/ 출2:1-10/ 2002-09-15
교사의 사명과 축복 출2:1-10 ♠ 본문말씀 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0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 서론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전도 캠프의 축복을 누립시다.\\\" 성도는 애굽에서 나와, 광야 40년 길을 지나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저는 신앙 생활을 할 때 애굽에서 나오는 것에만 매여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하나님의 자녀인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영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광야 40년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가듯이, 신앙 생활 속에서 날마다 불신앙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의 삶의 방향이 무엇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방향과 목적 없이 신앙 생활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애굽에서 빠져 나오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메시야가 나실 가나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혹시 애굽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빠져 나오시기를 바라고, 광야 길에 있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보면서 승리하시기를 바라고, 우리의 현장과 지역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길을 가는 동안에 몇 가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첫째는 유월절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을 잡게 하셨습니다. 양을 잡는 날 완전히 빠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광야 길에서 계속 어린양을 잡도록 했습니다. 저주에서 해방 받는 완전한 길, 재앙에서 빠져 나오는 길, 사단의 손에서 빠져 나오는 길을 깊이 심어주기 위해서 양의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만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을 해야 하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현장에서 누려야 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이름을 잠깐 놓치는 순간 실패에 빠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 피의 비밀을 잠깐 놓치는 순간 사단의 권세가 우리를 속이고 실패 가운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길 가는 동안에 언약궤 안에 있는 세 가지 비밀을 붙잡고 승리하라고 언약궤를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비와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십계명의 두 돌비는 광야 40년 길 가는 동안 말씀 따라 가라는 것이고, 만나 담은 항아리는 하나님이 삶의 모든 것을 인도하시니 걱정하지 말고 따라가라는 것이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두신 것은 썩은 나무에서 싹이 나듯이 인간이 못하는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길 가는 동안에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으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갈 길을 책임져 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믿으시면 승리합니다.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야길 가는 동안 언약궤를 맨 사람이 가면 따라 가고, 서면 함께 서듯이 우리는 믿음으로 언약궤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계속 광야길 가는 동안에 세상 속에 살면서 교회와 나의 사명과 본문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학교, 회사, 병원, 삶의 현장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이는 지교회당을 세워서 지역을 살려내라고 하십니다. 넷째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략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못 깨닫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말로 하면 전도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모르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이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유월절의 비밀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을 놓치고, 교회의 사명을 모르고 살면 사는 동안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는 동안 유월절의 비밀을 알고, 내가 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깨닫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정복해 나간다면 세계복음화의 축복, 지역을 장악하는 능력을 누릴 것이며, 삶 속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민13:1-16절에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열두 지파를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열두지파를 나누고, 열한 지파에게 정복할 땅을 배분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민13:17-20절에 12명의 정탐꾼을 뽑아서 그 현장을 분석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가나안 땅의 분배된 땅의 인구조사, 생활정보, 현장 분석이었습니다. 13:25-35절에 포럼현장이 나옵니다. 가나안의 삶과 젖과 꿀,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거인 아낙자손이 살고, 7족속 31왕이 사는 지역은 어떻고 그런 포럼을 하였습니다. 민14:1-10절에 열지파 사람들이 불신앙을 합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우리를 붙여 주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옷을 찢으면서 호소했습니다. 민수기가 전도캠프의 조직을 짰다면, 여호수아는 전도캠프의 움직임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현장을 복음화할려고 생각만 해도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응답 받게 조직만 짜도 응답이 일어납니다. 복음 전하기 위해 움직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전도 캠프입니다. 이미 가나안 땅을 장악하기 이전에 다 갖추도록 하신 후에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 캠프한다는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저는 전도 캠프를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처음에 전도 캠프하러 갔을 때 팀이 구성되어 들어갔습니다. 아파트에 연고자가 별로 없어서 연결도 안되고,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면서 방문 전도를 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시켰습니다. 제 생각은 현장에 제자를 붙여 주시고, 갈급한 심령을 붙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동을 다 돌았는데도 제가 생각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시간은 다 지나가고 포럼하러 가야 하는데, 마지막 통로가 남았습니다. 어느 집에 문이 열렸습니다. 어느 남자가 문을 열면서 강서로 교회에서 전도하러 왔는데 복음에 대해서 듣고 싶냐고 하니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교회를 다녔던 사람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사업을 했습니다. 교회의 중직자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어떤 지역에 전도 캠프를 가니 거의 다 천주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영접할 사람인지 아닌지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집사님이 불신자들은 일단 예수님을 영접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일단 믿든지 안 믿든지 영접을 시켜 놓으니 그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여 일이 터져서 교회에 나오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믿음으로 만나는 천주교 신자마다 영접을 시켰습니다. 어떤 지역에 가니 천주교 세력이 굉장히 강해서 들어가는 집마다 불구가 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아이들 가운데 다락방 문이 열렸습니다. 지난번에는 영등포 전도 캠프에 갔는데, 피아노 학원 원장, 태권도 사범, 테니스 코치가 영접을 했습니다. 상류층인 사람들도 영적으로는 무지했습니다. 캠프를 통해 귀신들린 사람, 종교인, 각종 질병 가진 자, 어린이, 방황하는 청소년에게 다락방이 열렸습니다. 영접 180명, 다락방 70군데, 지교회로 3명이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도 캠프를 통해서 들어가는 현장에 빛을 발하는 순간 숱한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는 엄청난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본문의 말씀처럼 일어나서 빛을 발해서 모든 현장의 어두운 세력들이 무너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본론 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온통 절망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약한 자를 억압하는 풍조가 만연한 사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회개하라고 권고했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손에 붙여져서 성전은 무너지고,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7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는 이 때에 이사야를 부르사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빛을 발하면 됩니다. 절망 속에서 주저앉아 포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죽은 자와 같고 멸망의 현장에 서 있는 자들에게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절망된 상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염려와 수단을 다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10:1, 막3:15절에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미 모든 권세를 다 주었으니까 일어나서 빛을 발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사60장에 말씀하십니다. 빛을 발하라는 말은 전도 캠프의 축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사60장 1절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아 이제 일어나 환한 얼굴로 기뻐하며 네 얼굴에서 광채가 빛나게 살아라! 내가 네게로 다시 왔나니 네 빛은 바로 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내 영광이 너를 환하게 비추어 태양과 같이 밝을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일어나서 빛을 발해야 합니까? 2절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어두움이 점점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는 이 때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어두워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캄캄해지고, 죄악이 관영해지고, 무당의 세력은 강해지고, 음란과 타락의 물결이 홍수같이 밀어닥치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 노아, 엘리야, 사무엘과 같이 구약 때부터 빛을 발하는 사람은 다 승리했습니다. 빛을 발하기만 하면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현장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주님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빛을 발한다는 말은 어두움에 사로잡힌 불신자를 건져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비추어서 새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라. 창조의 빛되신 주님의 빛을 비추어서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라. 말씀 운동 가운데 제자를 찾아내면 가정에 가정 교회를 세우고, 현장에 전문 교회를 세우고, 지역에 지교회를 세워서, 지역에 흑암 세력을 꺽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20지교회당을 세운다는 것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빛을 발해서 어둠과 캄캄함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파트에 살면 행복한 줄 알았습니다.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도 캠프를 들어가서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영적인 문제, 가정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고, 알 수 없는 질병 속에 고통 당하는 사람이 있고, 자녀 문제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되는 것이고, 생명되신 주님이 함께 해야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전달하는 빛의 사명을 가진 축복을 가진 사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즉 지교회당을 세우는 것은 온역을 없애는 것입니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30:12) 온역은 저주의 병입니다. 성막을 지으면 온역이 없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출19:31) 여러분이 전혀 교회당이 없는 마을에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지역에 전도 캠프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남묘 호랑개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넘어가 버렸습니다. 남묘 호랑개교 두세 사람이 가서 기도를 하니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기도해 주니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보다 남묘 호랑개교가 낫다는 것입니다. 남묘 호랑개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내 마음과 영혼을 당신께 바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루에 3시간씩 3번씩 정시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내 영혼을 당신께 바치니 우환을 없애달라는 것입니다. 집에 찾아가니 병자들이 다 있었습니다. 낫기를 바라고 앉아서 외치는 사람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교회 없는 지역은 온역이 가득한 지역입니다. 저는 옛날에 무당집을 무서워했습니다. 귀신이 들렸으니까 머리에 뿔이 달리고 눈은 찢어져서 뭔가를 다 아는 줄 알았습니다. 어느 날 무당 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무당 전문사역을 하는 전도사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때 저는 무당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당들 거의가 집안과 개인에게 어려움이 닥치니까 어쩔 수 없이 귀신을 받았습니다. \\\'온역이 없게 하려는 것이라.\\\' 귀신 섬기는 집은 온역이 가득하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서는 지역은 온역이 물러갈 줄 믿습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강서로 교회를 통하여 이 지역에 온역이 없게 해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석구석 세워서 더 이상 온역이 없게 해 주옵소서.\\\' 교회를 세우는 현장에, 성막을 짓는 현장에 온역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전도 캠프를 하는 것은 온역이 없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행6:7절에 마가 다락방에서 교회가 세워지니 예루살렘 전역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올바른 안디옥 교회가 서니 세계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은 올바른 교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올바른 제자가 나오니 고린도 전 지역이 살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니 전 아시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소문난 교회로 인정받았습니다 . 빌립보 교회와 같은 교회를 세웠더니 그 지역에 하나님의 산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비밀 가진 주의 종, 일군이 직장 안에 있으면 온역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루디아와 같이 그리스도 언약을 붙잡은 한 사람이 있으면 빌립보 지역에 온역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주의 일군 하나만 있으면 그 지역에 온역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역에 그리스도 없이 사단에게 종노릇하는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 받고, 더 이상 온역이 없는 축복의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 전도 캠프의 걸음입니다. 움직이기만 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저주가 물러갑니다. 2. 빛을 발하면 받는 축복, 즉 전도 캠프의 축복 하나님의 교회와 언약 붙잡은 성도가 빛을 발할 때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3절). 저는 옛날에는 \\\'내가 잘나서 뛰어나서 잘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아브라함이 믿음이 뛰어나고, 모세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축복가운데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열심히 믿음을 키우고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열방은 네 빛으로 나올 것이고,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빛 되신 그리스도를 밝히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빛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5절은 주님의 빛을 발하는 사람에게 모든 축복을 다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또 9절은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불신자들은 질그릇 자체를 꾸미기를 원합니다. 질그릇이 좀더 아름답고, 남한테 잘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 신자는 내 안에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로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 질그릇이 좀 희석이 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질그릇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지갑안에 1천만원이 있는데 그것이 시궁창에 빠졌다고 그냥 내버려 둘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갑 안에 들어있는 1천만원 때문에 그 지갑을 시궁창에서라도 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순간 아무리 질그릇이 보잘 것 없게 보일지라도 질그릇은 귀하게 여김받게 될 것입니다. 질그릇은 보배를 드러낼 때만 귀하게 여김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보배를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보배를 드러내는 순간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를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빛만 발하면 됩니다. 오늘 이 상황은 절망입니다.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서 인생의 소망이 없다고 할 때에 주님이 비전을 준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18-22절은 빛을 발하는 교회를 통해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면 안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빛을 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21-22절에 약속하셨습니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작아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작은 자로 천을 이루고, 약한 자로 강국을 이루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발하면 됩니다. 강서 지역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게 해주시고, 서울에 빛을 비추게 하시고, 수도권에 빛을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특히 강서로 교회를 통해서 20개 지역에 빛을 발하는 등대가 세워지게 하시고, 개인 가정 직장 삶의 현장에 빛을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에게 종노릇하고 절망과 저주와 온역에 사로잡힌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빛 때문에 회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에게 주의 빛을 비출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 결론 유월절의 비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 교회의 사명, 세계복음화의 전도의 시간표를 모르면 실패합니다. 그러나 유월절의 비밀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교회의 사명을 알고, 세계 복음화의 성경적 전략을 두고 기도하면서 현장에서 빛을 비추기만 한다면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교구, 지역, 기관마다 전도 캠프의 빛을 비추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현장에서 모든 것이 살아나고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올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불신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실패의 자리에 있다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으니 일어나서 전 세계에 하나님의 빛,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다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빋은 축복, 데살로니가의 야손, 빌립보에 루디아가 받은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창조의 빛과 생명의 빛을 내 속에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포로 생활과 노예 생활로 실패와 좌절과 넘어짐의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빛으로 박차고 일어나게 하시며, 일어나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이제 믿음으로 일어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며, 온 교회와 기관들이 지역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며 지역이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고, 온 지역에 온역이 없어지는 주의 축복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교사의 사명과 축복/ 출2:1-10/ 2002-09-15
교사의 사명과 축복 출2:1-10 ♠ 본문말씀 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0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 서론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전도 캠프의 축복을 누립시다.\\\" 성도는 애굽에서 나와, 광야 40년 길을 지나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저는 신앙 생활을 할 때 애굽에서 나오는 것에만 매여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하나님의 자녀인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영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광야 40년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가듯이, 신앙 생활 속에서 날마다 불신앙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의 삶의 방향이 무엇인가?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방향과 목적 없이 신앙 생활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애굽에서 빠져 나오게 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메시야가 나실 가나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혹시 애굽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빠져 나오시기를 바라고, 광야 길에 있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보면서 승리하시기를 바라고, 우리의 현장과 지역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길을 가는 동안에 몇 가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첫째는 유월절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을 잡게 하셨습니다. 양을 잡는 날 완전히 빠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광야 길에서 계속 어린양을 잡도록 했습니다. 저주에서 해방 받는 완전한 길, 재앙에서 빠져 나오는 길, 사단의 손에서 빠져 나오는 길을 깊이 심어주기 위해서 양의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만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을 해야 하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현장에서 누려야 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이름을 잠깐 놓치는 순간 실패에 빠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 피의 비밀을 잠깐 놓치는 순간 사단의 권세가 우리를 속이고 실패 가운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길 가는 동안에 언약궤 안에 있는 세 가지 비밀을 붙잡고 승리하라고 언약궤를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비와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습니다. 십계명의 두 돌비는 광야 40년 길 가는 동안 말씀 따라 가라는 것이고, 만나 담은 항아리는 하나님이 삶의 모든 것을 인도하시니 걱정하지 말고 따라가라는 것이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두신 것은 썩은 나무에서 싹이 나듯이 인간이 못하는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길 가는 동안에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으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갈 길을 책임져 주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믿으시면 승리합니다.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야길 가는 동안 언약궤를 맨 사람이 가면 따라 가고, 서면 함께 서듯이 우리는 믿음으로 언약궤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막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계속 광야길 가는 동안에 세상 속에 살면서 교회와 나의 사명과 본문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학교, 회사, 병원, 삶의 현장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워 나가는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이는 지교회당을 세워서 지역을 살려내라고 하십니다. 넷째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략을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못 깨닫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말로 하면 전도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모르면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이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유월절의 비밀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을 놓치고, 교회의 사명을 모르고 살면 사는 동안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는 동안 유월절의 비밀을 알고, 내가 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깨닫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정복해 나간다면 세계복음화의 축복, 지역을 장악하는 능력을 누릴 것이며, 삶 속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민13:1-16절에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열두 지파를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열두지파를 나누고, 열한 지파에게 정복할 땅을 배분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민13:17-20절에 12명의 정탐꾼을 뽑아서 그 현장을 분석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가나안 땅의 분배된 땅의 인구조사, 생활정보, 현장 분석이었습니다. 13:25-35절에 포럼현장이 나옵니다. 가나안의 삶과 젖과 꿀,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거인 아낙자손이 살고, 7족속 31왕이 사는 지역은 어떻고 그런 포럼을 하였습니다. 민14:1-10절에 열지파 사람들이 불신앙을 합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우리를 붙여 주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옷을 찢으면서 호소했습니다. 민수기가 전도캠프의 조직을 짰다면, 여호수아는 전도캠프의 움직임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현장을 복음화할려고 생각만 해도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응답 받게 조직만 짜도 응답이 일어납니다. 복음 전하기 위해 움직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전도 캠프입니다. 이미 가나안 땅을 장악하기 이전에 다 갖추도록 하신 후에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 캠프한다는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저는 전도 캠프를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처음에 전도 캠프하러 갔을 때 팀이 구성되어 들어갔습니다. 아파트에 연고자가 별로 없어서 연결도 안되고,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면서 방문 전도를 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시켰습니다. 제 생각은 현장에 제자를 붙여 주시고, 갈급한 심령을 붙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동을 다 돌았는데도 제가 생각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시간은 다 지나가고 포럼하러 가야 하는데, 마지막 통로가 남았습니다. 어느 집에 문이 열렸습니다. 어느 남자가 문을 열면서 강서로 교회에서 전도하러 왔는데 복음에 대해서 듣고 싶냐고 하니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교회를 다녔던 사람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사업을 했습니다. 교회의 중직자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사기를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어떤 지역에 전도 캠프를 가니 거의 다 천주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영접할 사람인지 아닌지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집사님이 불신자들은 일단 예수님을 영접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일단 믿든지 안 믿든지 영접을 시켜 놓으니 그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여 일이 터져서 교회에 나오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믿음으로 만나는 천주교 신자마다 영접을 시켰습니다. 어떤 지역에 가니 천주교 세력이 굉장히 강해서 들어가는 집마다 불구가 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아이들 가운데 다락방 문이 열렸습니다. 지난번에는 영등포 전도 캠프에 갔는데, 피아노 학원 원장, 태권도 사범, 테니스 코치가 영접을 했습니다. 상류층인 사람들도 영적으로는 무지했습니다. 캠프를 통해 귀신들린 사람, 종교인, 각종 질병 가진 자, 어린이, 방황하는 청소년에게 다락방이 열렸습니다. 영접 180명, 다락방 70군데, 지교회로 3명이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도 캠프를 통해서 들어가는 현장에 빛을 발하는 순간 숱한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는 엄청난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본문의 말씀처럼 일어나서 빛을 발해서 모든 현장의 어두운 세력들이 무너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본론 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온통 절망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약한 자를 억압하는 풍조가 만연한 사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회개하라고 권고했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손에 붙여져서 성전은 무너지고, 이방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7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는 이 때에 이사야를 부르사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빛을 발하면 됩니다. 절망 속에서 주저앉아 포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 죽은 자와 같고 멸망의 현장에 서 있는 자들에게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절망된 상태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염려와 수단을 다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10:1, 막3:15절에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미 모든 권세를 다 주었으니까 일어나서 빛을 발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사60장에 말씀하십니다. 빛을 발하라는 말은 전도 캠프의 축복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사60장 1절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아 이제 일어나 환한 얼굴로 기뻐하며 네 얼굴에서 광채가 빛나게 살아라! 내가 네게로 다시 왔나니 네 빛은 바로 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내 영광이 너를 환하게 비추어 태양과 같이 밝을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일어나서 빛을 발해야 합니까? 2절에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어두움이 점점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는 이 때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말씀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세상은 어두워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캄캄해지고, 죄악이 관영해지고, 무당의 세력은 강해지고, 음란과 타락의 물결이 홍수같이 밀어닥치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 노아, 엘리야, 사무엘과 같이 구약 때부터 빛을 발하는 사람은 다 승리했습니다. 빛을 발하기만 하면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현장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주님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빛을 발한다는 말은 어두움에 사로잡힌 불신자를 건져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비추어서 새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라. 창조의 빛되신 주님의 빛을 비추어서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켜라. 말씀 운동 가운데 제자를 찾아내면 가정에 가정 교회를 세우고, 현장에 전문 교회를 세우고, 지역에 지교회를 세워서, 지역에 흑암 세력을 꺽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20지교회당을 세운다는 것은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빛을 발해서 어둠과 캄캄함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파트에 살면 행복한 줄 알았습니다.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도 캠프를 들어가서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영적인 문제, 가정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고, 알 수 없는 질병 속에 고통 당하는 사람이 있고, 자녀 문제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행복의 기준은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되는 것이고, 생명되신 주님이 함께 해야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전달하는 빛의 사명을 가진 축복을 가진 사람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즉 지교회당을 세우는 것은 온역을 없애는 것입니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30:12) 온역은 저주의 병입니다. 성막을 지으면 온역이 없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출19:31) 여러분이 전혀 교회당이 없는 마을에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지역에 전도 캠프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남묘 호랑개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넘어가 버렸습니다. 남묘 호랑개교 두세 사람이 가서 기도를 하니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기도해 주니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보다 남묘 호랑개교가 낫다는 것입니다. 남묘 호랑개교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내 마음과 영혼을 당신께 바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루에 3시간씩 3번씩 정시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내 영혼을 당신께 바치니 우환을 없애달라는 것입니다. 집에 찾아가니 병자들이 다 있었습니다. 낫기를 바라고 앉아서 외치는 사람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교회 없는 지역은 온역이 가득한 지역입니다. 저는 옛날에 무당집을 무서워했습니다. 귀신이 들렸으니까 머리에 뿔이 달리고 눈은 찢어져서 뭔가를 다 아는 줄 알았습니다. 어느 날 무당 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무당 전문사역을 하는 전도사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때 저는 무당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당들 거의가 집안과 개인에게 어려움이 닥치니까 어쩔 수 없이 귀신을 받았습니다. \\\'온역이 없게 하려는 것이라.\\\' 귀신 섬기는 집은 온역이 가득하지만 하나님의 교회가 서는 지역은 온역이 물러갈 줄 믿습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강서로 교회를 통하여 이 지역에 온역이 없게 해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석구석 세워서 더 이상 온역이 없게 해 주옵소서.\\\' 교회를 세우는 현장에, 성막을 짓는 현장에 온역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전도 캠프를 하는 것은 온역이 없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행6:7절에 마가 다락방에서 교회가 세워지니 예루살렘 전역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올바른 안디옥 교회가 서니 세계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은 올바른 교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올바른 제자가 나오니 고린도 전 지역이 살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니 전 아시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소문난 교회로 인정받았습니다 . 빌립보 교회와 같은 교회를 세웠더니 그 지역에 하나님의 산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비밀 가진 주의 종, 일군이 직장 안에 있으면 온역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루디아와 같이 그리스도 언약을 붙잡은 한 사람이 있으면 빌립보 지역에 온역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달은 주의 일군 하나만 있으면 그 지역에 온역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역에 그리스도 없이 사단에게 종노릇하는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 받고, 더 이상 온역이 없는 축복의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 전도 캠프의 걸음입니다. 움직이기만 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저주가 물러갑니다. 2. 빛을 발하면 받는 축복, 즉 전도 캠프의 축복 하나님의 교회와 언약 붙잡은 성도가 빛을 발할 때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3절). 저는 옛날에는 \\\'내가 잘나서 뛰어나서 잘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아브라함이 믿음이 뛰어나고, 모세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축복가운데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열심히 믿음을 키우고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열방은 네 빛으로 나올 것이고,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빛 되신 그리스도를 밝히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빛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5절은 주님의 빛을 발하는 사람에게 모든 축복을 다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또 9절은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불신자들은 질그릇 자체를 꾸미기를 원합니다. 질그릇이 좀더 아름답고, 남한테 잘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 신자는 내 안에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로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 질그릇이 좀 희석이 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질그릇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지갑안에 1천만원이 있는데 그것이 시궁창에 빠졌다고 그냥 내버려 둘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갑 안에 들어있는 1천만원 때문에 그 지갑을 시궁창에서라도 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순간 아무리 질그릇이 보잘 것 없게 보일지라도 질그릇은 귀하게 여김받게 될 것입니다. 질그릇은 보배를 드러낼 때만 귀하게 여김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보배를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보배를 드러내는 순간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를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빛만 발하면 됩니다. 오늘 이 상황은 절망입니다.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서 인생의 소망이 없다고 할 때에 주님이 비전을 준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18-22절은 빛을 발하는 교회를 통해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면 안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빛을 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21-22절에 약속하셨습니다.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작아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작은 자로 천을 이루고, 약한 자로 강국을 이루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발하면 됩니다. 강서 지역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게 해주시고, 서울에 빛을 비추게 하시고, 수도권에 빛을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특히 강서로 교회를 통해서 20개 지역에 빛을 발하는 등대가 세워지게 하시고, 개인 가정 직장 삶의 현장에 빛을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에게 종노릇하고 절망과 저주와 온역에 사로잡힌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빛 때문에 회복되게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에게 주의 빛을 비출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 결론 유월절의 비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 교회의 사명, 세계복음화의 전도의 시간표를 모르면 실패합니다. 그러나 유월절의 비밀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교회의 사명을 알고, 세계 복음화의 성경적 전략을 두고 기도하면서 현장에서 빛을 비추기만 한다면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교구, 지역, 기관마다 전도 캠프의 빛을 비추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현장에서 모든 것이 살아나고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올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불신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실패의 자리에 있다면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으니 일어나서 전 세계에 하나님의 빛,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다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빋은 축복, 데살로니가의 야손, 빌립보에 루디아가 받은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창조의 빛과 생명의 빛을 내 속에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포로 생활과 노예 생활로 실패와 좌절과 넘어짐의 자리에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빛으로 박차고 일어나게 하시며, 일어나서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이제 믿음으로 일어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며, 온 교회와 기관들이 지역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며 지역이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고, 온 지역에 온역이 없어지는 주의 축복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교사의 신앙고백/ 행20:22-24/ 2001-10-26
교사의 신앙고백 행20:22-2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의 평안이 성도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야드 바쉠 박물관이 있습니다. ?기억의 집?(과거를 잊지마라)이라고도 불리우는 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제2차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군들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한 유대인의 학살현장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기념관 밖에는 작은 동산이 있고, 그 중앙에는 이 기념관을 대표하는 인상적인 하나의 동상(선생님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선생님의 동상입니다. 독일의 나치군대가 폴란드를 침략합니다. 폴란드에 살고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한 유대인 학교를 급습합니다. 학교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릅니다. 비명을 지르고 뛰어나오는 아이들을 강제로 트럭에 태우기 시작합니다. 트럭에 타지않고 달아나는 아이들을 향해서는 가차없이 기관총을 난사합니다. 아이들은 총탄에 맞고 길바닥에 나뒹굴며 현장에서 즉사합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모두다 공포에 질려 울면서 트럭에 올라 탑니다. 그리고 그길이 인생의 마지막 길이요, 죽음의 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현장에서 학생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조용히 학생들에게 다가갑니다.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죽음의 공포로 부들부들 떨고있는 어린 학생들을 양팔로 감싸 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트럭에 오릅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수용소까지 좇아갑니다. 죽음의 독가스실까지 따라갑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은채 함께 어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 선생님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는 폴란드인입니다. 독일군의 표적이 아닙니다. 유대인 아이들과 함께 죽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독일군인들이 그를 막았지만 그는 아이들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살려달라는 아이들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살아갈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트럭위에서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생명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곁에서 아이들을 위로하다가, 아이들과 함께 영원한 하늘나라로 올라 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온몸으로 아이들을 사랑하신 선생님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생활로, 삶으로, 인격으로 가르치신 선생님입니다.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전쟁의 시기에 생명의 말씀으로 아이들을 살려낸 신앙의 선생님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한 스승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이렇게 동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뚝서서 그 박물관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은 기계(컴퓨터, 핵무기, 전쟁)가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은 선생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동물로 태어난 인간을 사람으로 만드는 이가 바로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교사(스승, 선생님)가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초등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불학무식한 12제자들을 모두다 훌륭한 인격자로, 문학가로, 전도자로, 사명자로, 교사로 양육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1. 가장 흠이 많은 제자 베드로를 가장 훌륭한 예수님의 수제자로 키웁니다. 2. 우뢰의 아들, 불화산 같은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변화됩니다. 3. 야망에 눈먼 야고보를 위대한 최초의 순교자로 믿음을 지킵니다. 4. 수줍고 나서지 못하는 숨은 일꾼 안드레를 평생 흔들림없는 강인하고 도전적인 사도가 됩니다. 5. 계산과 이해관계에 민감한 빌립을 나누어주고 구제하는 제자로 성장합니다. 6. 이상 세계를 꿈꾸었던 망상가 제자 바돌로메를 사랑을 실천하는 행동주의자가 됩니다. 7. 동족의 혈세를 강탈하고 착취하는 비열한 수전노 세리마태를 위대한 하나님의 복음전도자로 바꿉니다. 8. 불신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정신불안자 도마를 위대한 믿음의 사도로 우뚝섭니다. 9. 성경에 단순히 이름만 올려진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온유하고 충성스러운 일꾼 됩니다. 10.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은 가나안인 시몬을 가슴속에 아름다운 공의의 나라가 불타오르는 열심당 출신의 신실한 제자로 변화됩니다. 11. 여인의 가슴이라는 의미를 지닌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다대오를 조용하면서도 사려깊은 위대한 주님의 제자로 성장합니다. 12.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뻔한 가룟유다를 끝까지 미워하지 않고 그 넓은 가슴으로 포용한 위대한 스승(선생님)이 예수님입니다.   (1)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최고의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2)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유언대로 열심있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3) 우리 모든 성도들은 교사의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7)   우리 봉산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목자(제자, 교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을 알지못하는 자들에게 주의 복음을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사된 우리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은 교사된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수 있는가, 예수님 기쁘시게 해드리는 교사의 신앙고백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순종의 고백입니다. 삼상 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이스라엘 전성기를 열어가는 시대의 예언자가 됩니다. 사무엘의 가르침을 받고 이스라엘 최초의 왕정이 시작됩니다. 최초의 이스라엘 왕 사울이 사무엘에 의해 탄생됩니다. 이내 이스라엘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룬 다윗왕이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교사가 위대한 인물을 키워냅니다.   불란서 파리에 앙뜨완느라는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파리 개선문 대로에 쭈그리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합니다. 그때 아르노라는 한 중년의 신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 매일 동전을 집어줍니다. 그러나 어느날 걸인이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매우 꾸짖기 시작합니다. ?당신처럼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구걸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당신 자신의 인생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아니라 하나님께도 영광스러운 일이 되지 못합니다. 나도 한때는 이거리에서 당신처럼 구걸하는 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충고로 리어카를 끌고 마을을 다니며 헌책과 종이를 모아 제지소에 팔았습니다. 지금은 그 돈으로 제지공장을 세워 사장이 되었습니다. 젊은이 부탁합니다.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기 바랍니다.? 그날부터 화려한 개선문 거리에서 앙뜨완느의 모습이 사라집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세월이 한 10년쯤 흘렀습니다. 하루는 아르노씨가 파리의 한 서점에 우연히 들렀더니 서점 주인이 다가와 절을 하며 말을 합니다. ?아르노씨 아닙니까? 제가 10년전 파리의 걸인입니다. 선생님의 따끔한 충고를 받아들여 새로운 인생을 출발했습니다. 지금은 50명의 직원을 거느린 이 서점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인생을 바꾸어주신 좋으신 선생님입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순종하는 자가 인생의 성공자가 됩니다(축복된 인생을 살수 있습니다). 인생최고의 스승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평생토록 인생최고의 축복을 소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절대신뢰의 고백입니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에게 고난이 닥칩니다. 10명의 자녀들이 눈앞에서 죽어갑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을 저주하며 집을 나갑니다. 수천마리의 소떼 양떼들이 하루아침에 죽어갑니다. 욥의 육체는 악질에 걸려 온몸이 고름투성이가 됩니다. 날카로운 기와장 조각으로 피를 내며 긁어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매일매일이 죽음의 고통이요 절망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이 걸어가는 인생길을 아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홍수가 일어나면 죽은 것들이 떠내려 갑니다. 죽은 가축(돼지, 소, 개, 닭)들이 떠내려 갑니다. 심지어 물에사는 물고기라도 죽으면 떠내려 갑니다. 그러나 생명있는 물고기, 살아있는 물고기는 탁류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생명의 물줄기를 찾아냅니다. 생명의 물줄기 맑은 물에 알을 낳습니다. 생명의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욥이 그렇습니다. 욥에게 닥친 고난의 풀무불은 죽음의 풀무불이 아니라 연단과 생명의 풀무불입니다. 풀무불을 거친 욥은 오히려 정금처럼 신앙이 단련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교사는 새로운(승리의, 영광의, 축복의) 인생을 창출해 냅니다.   한번은 기자가 IBM의 설립자인 톰 왓슨(Tom Watson)에게 성공비결을 질문합니다. 그때 그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기업 최고의 자산이라고 말합니다. 기업의 성공은 돈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경험담을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날 젊은 부사장이 매우 모험적인 신제품 개발계획을 보고합니다. 톰 왓슨은 과연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부사장은 위험부담이 큰 사업일수록 큰 수익을 올릴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합니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신제품 개발사업은 실패합니다. 회사에 1000만달라가 넘는 막대한 손해만 입히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톰 왓슨이 부사장을 불렀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온 부사장의 손에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는 듯이 사직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책임을 통감합니다. 사재를 털어서라도 보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떠한 징계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여기 사직서를 제출합니다.?바로 그때 톰왓슨이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무슨 소린가. 나는 자네를 교육하는데 무려 1000만달라를 들였다네. 큰 인물을 키우려면 큰 돈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라네. 이제 시작일세. 다시 도전해보게. 1000만달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자넬세. 1000만달라를 잃어버려도 자네를 잃어버릴 수는 없네? 사장의 격려에 고무된 부사장은 새로운 각오로 신프로젝트를 만들어냅니다. 다시한번 도전해서 신제품개발에 성공합니다. 손실 1000만달라의 100배가 넘는 10억달라 이상의 순이익을 창출합니다. 세계최대의 기업으로 도약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실수했을 때 비난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입니다. 비난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실수했을 때 한마디 격려는 위대한 성공을 만들어냅니다. 인생실패자를 인생성공자로 바꿉니다. 죽어가는 영혼이라도 살려냅니다. 실수했을때의 한마디 격려는 성공했을때의 열마디 칭찬보다 큰 힘을 발휘합니다. 실패라고 하는 월사금, 교육비를 물어야 성공의 징검다리를 건널수 있는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교육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줄 아는 교사, 학생을 위해 땀흘릴줄 아는 교사, 학생의 정신적 발달을 위해 노력하고 연구하는 교사,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출줄 아는 교사, 학생들의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할 수 있는 교사, 학생들이 성장하면서 겪어야 할 인생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체휼하는 교사,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줄 아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스승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뭐라고 하든, 스승은 스승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산처럼 묵묵히 스승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들은 언제나 아침에 눈을 뜨면 앞에 우뚝 서있는 앞산을 바라보고 성장합니다. 그래서 큰 인물이 많이 성장합니다. 대구의 앞산처럼 언제나 변함없는 스승, 언제나 늘 푸르고, 언제나 늘 고고하고, 언제나 늘 인생의 사표가 되는 교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앞에 드려야 할 우리 봉산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사의 열정이 주일학교를 살린다/ 딤후3:14-15/ 2005-11-23
교사의 열정이 주일학교를 살린다 딤후3:14-15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주일학교를 위해서 수고하시는 교사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쏟아지는 아침잠과 싸워야 하고 몰려오는 피곤함을 뒤로 한 채 교사라고 하는 직분 때문에 주일도 쉼이 없고 아침 일찍 교회로 달려 와야 하니까요? 그러나 결코 여러분의 수고가 허되지 않음인 줄 믿습니다. 고전 15: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이 시간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수고하는 선생님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며 축복하기를 위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가 교사여러분들에게 큰 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한국교회의 주일학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교사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지 몰라 방황합니다. 도대체 급격히 변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각 교회 주일학교 리더자들은 나름대로 원인을 분석하고 그 이유를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너무 구식이어서 신세대들을 이해하지 못해요. 담임목사님의 목회가 어른들 치중이라서 .... 뭔가 아이들을 위해 해볼려고 해도 돈이 없어요. 매주일 비싼 간식사주고 해야 하는데 교회에서 지원을 많이 해 주지 않아서 주일학교 이렇게 되고 있다고. 돈 많이 들인다고 해서 아이들이 많이 몰려올까요. 우리 교회는 인재가 없어요. 젊은 선생님들이 너무 게을러 터져서... 주일학교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우리 교회는 시설문제를 가지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영상시설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고 지금 주일학교는 영상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뽕 가게 하는 프로그램이 어디 있어야죠. 이렇게 수도 없이 주일학교가 부흥되지 않은 많은 원인이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정말 이런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영적으로 죽어 가는 것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습니다. 정말 이런 것 때문인가? 제가 내린 결론은 \\\"NO, 아니오\\\"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죽어가고, 교사가 아이들에게 상처받고 교사의 직분을 내팽개쳐버리는 등 주일학교의 근본적인 붕괴를 가져온 원인은 다른 데 있다고 봅니다. 참신한 프로그램이 없어서, 재정지원이 적어서도 아닙니다.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서 오늘 우리 모두가 자녀 교육과, 우리의 후세대에 대한 신앙교육과 주일학교의 부흥을 위해서 함께 고민하며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어 보고자 합니다. 먼저 교사들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일학교 교사들이여! 비전이 있는 교사입니까? 가르쳐도 변화하지 않고 따라오지 않는 주일학교 아이들 때문에 고민하시는 교사들이여! 먼저 우리의 가슴에 꿈을 품으십시다. 내 속에 꿈이 없으면 나 자신도 살수 없을뿐더러 내게 배우는 아이들 역시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이들을 어떻게 살릴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교사 자신이 살아나지 않으면 아이들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꿈을 품어 봅시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위대한 하나님의 꿈을 품어 봅시다. 그 꿈이 우리가 맡은 아이들에게 전달되어 열매를 맺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풍성해지는 비전을 품어 봅시다. 그리고 그 비전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 봅시다. 꿈은 나눌 때 더욱 커 집니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세워집니다. 나누지 않으면 공상에 그치고 말뿐이지만 함께 품고 기도하면 현실이 되는 것이 꿈의 속성입니다. 오늘 우리 교사들 속에 무슨 꿈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미래는 달라집니다. 우리 교사들의 가슴속에 품은 꿈이 바로 우리 교사들과 아이들을 살리는 씨앗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신앙의 가정들의 자녀 교육을 들어다 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점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온전치 못하다면, 자식들에게라도 올바른 신앙을 가르쳐 주어야 할 터인데, 교회 직분자들부터 아이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은 뒷전이고, 오로지 일류대학 진학만이 살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신앙생활은 일류대학에 합격한 후에나 하라고 호통을 칩니다. 어떤 지도자는 이를 더 부추기기까지 합니다. 주일학교 사역자들에게 적당히 하라고 훈계하면서, 교회가 입시 학원이라도 되는 양 고3때 주일학교 몇 번 나와서도 서울 대학 들어갔다면 우리교회에서 서울 대학 몇 명 들어갔다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디모데처럼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쳐서 지혜를 얻게 하고 하나님의 꿈을 꾸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피 묻은 복음을 통한 순수한 비전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서도 피 묻은 복음을 통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매주일 격식에 따라 예배를 드리지만, 그 속에는 갖가지 사심과 욕심이 얼룩져 있습니다. 매주일 강단에서 메시지는 선포되고 있지만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며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어주는 설교자가 더 인기 있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결한 신앙을 지키라고 말씀하는 목사나 전도사는 시대를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낙인이 찍히고 맙니다. 강단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실력이, 학교성전이, 돈이, 명예가 너희들의 인생을 책임진다는 가르침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보다 학교성적인 우선이라는 생각과 가르침이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부모들도 또 어떻습니까? 주일학교 예배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아이들을 그렇게 오래 붙잡아 두어서야 언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겠느냐고 항의합니다. 토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제자훈련이라도 할려고 하면 교회가 자기 아이들을 망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교회 수련회나 성경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을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예배를 드립니까? 성경에는 예배를 드리다가 망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가인은 한마디로 예배를 통해 은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은 열납 하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물에만 은혜를 베푸시자 그는 화가 잔뜩 났습니다. 왜 하나님이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겠습니까? 가인이 예배에 임하는 자세와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원인이 자신의 부족한 정성과 진실하지 못한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 미움만 쌓아갔습니다. 급기야 들에서 동생을 쳐죽이는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에도 가인의 전철을 밟아 가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시기, 질투, 미움만 잔뜩 쌓아 가지고 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서쪽보고 왔다가 동쪽 보가 나가야 할테인데 북쪽 보고 가는 성도들이 이외로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인처럼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릴 뿐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임하는 지세와 마음가짐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회는 다니지만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결코 그분께 자신과 자신의 자녀, 가족을 맡길 마음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예배가 소중하지 않는데 자녀들이 드리는 예배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들에게 교회는 단지 악세사리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은 교양인이 되기 위한 자격증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습관에 따라 예배는 드리지만, 지루하고 따분하고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입니다. 설교가 조금만 길어져도 막 화를 내는 사람들 있습니다. 아이들의 신앙을 위해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을 대단히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학교공부에 방해가 되는 모든 행위를 저주합니다. 비록 그것이 교회 안의 신앙생활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믿지 않아도 학교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돈은 무서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와 행복을 바라지 않아도 세상이 가져다주는 잠시잠깐의 달콤한 쾌락은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신앙보다 공부가 우선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교회에서 대단히 열심히 봉사합니다. 중요한 직분도 맡은 사람입니다. 남들 보기에 믿음만 가지고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분 역시 남들 앞에서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은혜로운 말만합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다릅니다. 곁과 속이 다릅니다. 자녀들에게 신앙보다 공부가 우선이라고 가르칩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모여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도 체면상 공식적으로 주일예배만은 나가도록 허락합니다. 이 아이가 결국 자기 엄마를 \\\"위선자\\\"라고 저주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교회에 가지말고 공부하라고 혼을 내던 도중 교인에게서 전화가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바꾸고 웃음을 띠면서 \\\"집사님, 안녕하세요....\\\" 하며 전화를 받는답니다. 그리고 \\\"신앙이 어쩌고저쩌고....\\\"한답니다. 이런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는 자녀의 마음에 어떤 마음이 들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많은 수의 크리스천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찾아 쓰시는 사람이 되는 이을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우리의 자녀가 세상이 찾아 쓰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제가 왜 비전이야기를 하다 말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꿈을 가졌지만 잘못된 꿈, 잘못된 비전을 갖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복음의 비전으로 피 흘려 세운 위대한 한국교회를 서서히 무너뜨린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 없는 비전을 가르친 일부 성공주의 사역자들이며, 하나님 없는 꿈에 열광한 일부 성도들입니다. 남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말하고, 자녀들에게는 세상이 가져다주는 성공을 강요하는 부모 말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비전의 초점은 바로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선배들이 피 흘려가며 세운 교회를 다시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다시금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않으며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섬기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자식들에게 공부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마음속에 품게 하는 일이 절실한 때라 말입니다. 주일학교가 무너져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울상을 짓습니다. 대안이 없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챙겨야 하느냐고 남감해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향한 비전을 회복하십시오. 거짓과 위선, 욕심을 버리고 순결한 비전을 회복하십시오. 교회 안에 순결한 비전의 외침이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라면 마땅히 자기 자녀에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순결한 비전을 물려주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나는 과연 열정이 있는 교사인가를 고민해 보셨습니까? 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아이들이 두렵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겉잡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학교 선생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과연 교회 선생님이라고 다르게 보일까요. 어쩌면 그들 눈에는 학원 선생님이 제일 나아 보일지도 모릅니다. 교회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이들은 설교가 끝나자마자 도망갑니다. 장담하건대 아이들은 앞으로 더 무서워질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아이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마약으로 찌든 아이들, 공부 스트레스로 정신이 이상해진 아이들, 밤새워 포르노를 보다가 선생님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게임에 중독되어 사람들을 볼 때마다 살인기술을 생각하는 아이들, 신앙과 삶이 다른 부모 밑에서 자라 교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이들, 부패한 사회를 애써 외면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 혈기 끓는 눈길을 보내는 아이들, 우리는 이런 아이들이 무섭기만 합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오랜 경력을 가진 의사들은 그들이 펼치는 의술 인생 동안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의학적으로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기도하여 병을 고치는 일처럼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기적을 경험하고, 또 몇몇 의사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강의실에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이 늘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사도 늘 그것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의사라도 자신이 가진 의술부터 최선을 다해 펼치는 것이 그의 우선적인 도리이자 사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교육은 어떻습니까? 의사가 사람의 육체적 생명을 다루는 것이라면, 교육은 인간의 인격과 가치관, 그리고 정신적 깊이를 다룹니다. 교사가 의사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입술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가르침의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안간힘을 다해 아이들을 품에 안으려고 합니까? 내가 가르친 말씀이 생명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 말씀을 가지고 삶 속에서 씨름하기보다는 그저 주일 때우기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매순간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저 아이는 장차 회개할 거야\\\", \\\"바로잡아주실 거야\\\", \\\"구원해 주실 거야\\\" 하면서 기적만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서 역사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잘 전달하고 모범을 보이도록 하라는 사명을 받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열정이 없고, 사명감도 없고, 인간적으로 노력하는 의지조차 없고, 더러운 찌끼가 가득 찬 관처럼 세상의 찌끼로 꽉막혀 있다면 과연 아이들에게 무엇이 전달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시는 데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즉, 질서와 규칙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연일 기적을 남발해가며 우주를 다스리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만일 일정한 질서 없이 그렇게 다스리신다면 어디 불안해서 살수 있겠습니까? 내일은 또 이 지구가 어떻게 움직일까 불안해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내일은 기적적으로 서쪽에서 뜬다면, 또 다음 날도 기적적으로 남쪽에서 뜬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해나기 원하십니다. 정상적인 방법이란 무엇입니까? 교육이라는 방법으로 아이들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가르치며, 본을 보이는 교육, 품어주고, 용서하고, 닦아주며, 싸매 주고, 눈물 흘려주는 교육,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날 아침에 좀더 잠을 자지 못해 짜증이 난 얼굴로, 아니면 늦게라도 나와주니 고맙다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합니다. 사랑도 없고 눈물도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도 맨송맨송하기만 합니다. 부장집사님 \\\"저희 반에는 착하고 성실한 아이만 보내주세요\\\"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즉, 별도로 신경 쓰거나 관리하지 않아도, 기도해 주지 않아도 탈나지 않는 아이들만 달라는 것입니다. 앉아서 거저먹겠다는 식이지요. 그리고 근근이 기적만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해도 하나님이 아쉬우시면 기적을 베푸셔서 장차 아이들을 고쳐주시겠지!\\\" 이런 교사들을 볼 때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보다보다 못해서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아이들이 불쌍해서 차마 두고 보실 수 없어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공로라는 듯 즐거워합니다. \\\"내가 뭐랬어? 시간이 약이라니까, 애들은 다 저만할 때, 그런 과정을 겪는 거야.\\\" 그러나 이 점도 잊지 마십시오. 참다못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적 가운데는 또 하나의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교사를 바꾸시는 기적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사들이여 회개합시다. 솔직히 주일학교가 부흥하지 못하는 이유, 아이들이 변화하지 않는 이유가 누구 때문입니까? 목사님, 장로님 때문입니까? 아예 예수님 때문이라고 하시지요? 예수님이 우리 교회를 축복해 주지 않으셨고, 큰 교회가 못 되게 하셨고, 우리 교회에 인재도 보내주지 않으셨으니 이 모양이라고 따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게으른 것이 문제입니다. 교사들에게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재가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에 끓어오르는 열정이 없기 때문에 주일학교가 침체하는 것입니다. 피 묻은 복음의 열정이 식었기 때문에 주일학교가 침체하고 교회가 문을 닫는 것입니다. 가슴을 모두 태울 만큼 아이들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르고 있습니까? 적어도 이런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할 때 눈에서 눈물이 흐르던가요?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했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나십니까?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불쌍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복받쳐오지 않습니까? 괴로워서 잠이 오지 않지 않습니까? 사람에게는 무엇인가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역경에 직면해도, 누가 목숨을 위협해가며 나의 길을 막아서더라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있는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사람을 보십시오. 불의한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가 화를 당한다고 해도 그 일을 수행합니다. 바로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운동에 대한 열정과 소신이 있는 사람을 보십시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환경정책을 비판하다가 직장을 잃는 한이 있어도 그는 꼭 그 길을 고집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가 월급을 따로 주는 것도 아닌데, 그는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환경재해에 대한 경고와 함께 환경보호 운동을 벌입니다. 그 사람의 가슴에는 환경과 자연에 대한 열정, 생명에 대한 열정이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사라면 어떤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사람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 열정을 품어야 합니다. 그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 아이가 공부를 못해서 가정에서 포기하고, 학교에서도 꼴찌를 도맡아 하는 아이라도 주일학교 교사만큼은 그 아이에 대한 소망과 열정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그 아이가 반의 분위기를 흐리는 아이라고 해도, 습관적으로 가출을 해서 문제아 취급을 당한다고 해도, 상습적으로 아이들을 괴롭히고 못된 짓만 골라 한다고 해도 그 아이를 위해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가슴에 품은 불을 가지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는 교사는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열정이 샘솟는 교사는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를 대적하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낙심하거나 상처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용기를 북돋습니다. 교회가 돈이 없으면 자기 주머니를 털고, 시설이 부족하고 시간이 부족하면 사랑과 눈물로 아이들을 껴안습니다. 아이들은 호텔 같은 시설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자기들을 향해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는 모습에 더 감동합니다. 교사들이 열정만 있어도 아이들은 감동합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마음을 엽니다. 당신의 마음에 생명에 대한 열정이 숨쉰다면,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이 죄악의 세상 가운데서 죽어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열정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무릎을 끓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아이들을 향한 열정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열정만 회복되어도 우리가 맡은 반은 부흥할 것입니다. 열정의 불길만 솟아올라도 주일학교는 차고 넘칠 것입니다. 열정의 불길만 솟아올라도 기관이 구역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매주 불같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실 것입니다. 교사들이 먼저 무릎을 꿇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십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르쳐 디모데와 같은 좋은 인물들이 많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주의 길을 가리 #3 1. 비바람이 갈 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길 이 길은 승리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후 렴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2.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고난의길 이 길은 생명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