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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귀와 승천/ 행1:9-11
승귀와 승천/행1:9-11 2001-10-20 15:07:20 read : 84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의 승귀의 신분에 대하여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정통신앙입니다. 오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신 승천 곧 예수님의 승귀의 신분 중 승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의 증언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확실합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 16:19).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이와 같이 성경은 일제히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승천을 믿고 고백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이 신앙을 꼭 지키고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승천의 성격 승천의 성격은 어떤 것입니까? 자세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의 승천은 그의 영혼만 승천하신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그의 육신까지 승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승천은 독특한 것이며 신령한 것입니다. 이런 승천은 앞으로 우리에게 있을 승천을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둘째, 그의 승천은 가시적이고 문자적인 승천입니다. 즉 그의 승천은 달리 해석할 필요가 없이 다만 부활하신 그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즉 그의 승천은 가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본문에서는 단순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9)고 하였고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행 1:10)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에 달리 해석을 부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승천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고 또 가시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셋째, 그의 승천은 장소적인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 하늘 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하늘\"이라는 단어가 세 번나옵니다. 그것은 그가 하늘로 가신 것을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늘은 구름이 떠있는 하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하늘 나라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요 16:28). 그는 분명히 이 땅의 생활을 청산하고 하늘 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정리하면 하늘에서 내려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감람산 언덕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님의 강림을 기다릴 것과 성령이 임하시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신 후 하늘로 올리워 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 루터파의 견해 한국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도 많고 교인도 많습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약간 성장이 멎었을뿐 아니라 I.M.F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적인 것은 많은 교회에서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면서 내적으로 굳건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특징은 평신도 교육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배우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성경교재를 그대로 취급하고 있으나 많은 교회에서 실시하는 [베델 성서]는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벧엘 성서]는 루터파에서 나온 교재이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하면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루터파는 우리 개혁주의 신앙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파의 신앙은 우리와 다른 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 교재를 취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종종 루터파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는데, 오늘 승천의 문제도 많은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말씀을 나누고 있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하여도 루터파에서는 우리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루터파에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부활하신 그가 이 땅에서 하늘로 가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상태가 변한 것 뿐 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인성과 육체는 부활과 동시에 예수님의 신성 즉 하나님의 성품에 완전히 흡수되어 영화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성은 없어졌고, 완전히 하나님이 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것이 아니라 무소부재의 상태로 이 지상에 그대로 남아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하였는데, 하나님 우편은 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마음의 왕좌에 모시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 우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우편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오셨다가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다시 올라 가셨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요 16:28). 승천은 상태의 변화가 아니라 부활하신 신령한 몸으로 하나님이 계신 하늘 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승천의 이유 예수님은 왜 승천하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본향은 하늘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본향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죽으면 하늘나라로 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영혼의 본향이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가신 이유는 이 땅에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그는 먼저 자신이 이루어 놓은 구원사역이 완성되었음을 하나님께 고하고 또 한편 하늘의 보좌 앞에 있는 하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드리는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제사를 통하여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신 것입니다. 그가 승천하시어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 구원의 근거가 생겼고, 우리는 영원한 구속을 받게 되었으며, 죄의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셋째로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속이 우리들 하나 하나의 마음에 심겨지고 구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 대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이와 같이 성령님이 오시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 들여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 가셔야 했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승천은 신자들에게 하늘로 갈 수 있다는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다섯째로 우리의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이 말씀은 조심스럽게 읽고 해석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던 펄시 콜레라는 사람은 그가 천국엘 가보니 우리가 있을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하늘 나라는 온통 아파트 공사로 뒤덥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자의 수가 예상외로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에 천국을 확장하고 새 아파트를 건축하지 않으면 믿는 사람들을 모두 다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에 보석 공장을 차려 놓고 매일 보석을 생산해 내고 앞서간 성도들은 천국 신도시에 고층 아파트를 건축하기에 여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왕국 자리는 아직도 구획 정리도 되어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늘 나라는 영의 세계이기 때문에 장소에 구애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면 처소를 예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미국에 여행을 하려면 그 나라 영사가 발행하는 입국 비자가 필요합니다. 하늘나라도 이런 비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위한 그런 수속을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하늘 나라의 비자는 어떤 것입니까? 첫째, 예수님이 먼저 자신의 피로 드리는 속죄의 피가 하늘 제단에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있을 곳을 마련하시기 위하여 가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고 회개하여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며 처소를 예비하십니다. 셋째,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고 삶이 성화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되고 인격이 성숙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처소를 예비하시는 주님의 역할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데는 두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성화이고 둘째는 사명의 완성입니다. 일할 것이 남은 사람은 결코 부르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시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두가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조건이 성숙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뜻은 공간을 확보하신다는 뜻이 아니고 신앙의 조건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숙되면 언제라도 오시어 우리를 데려 가십니다. 그러니 이것을 위해 우리는 항상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이런 진리를 확실히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준비하였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응답하면서 그분이 계신 하늘 나라에 참여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승천 이후/ 잠30:4, 눅24:50-53
승천 이후 잠30:4, 눅24:50-53 예수 그리스도는 감람산 근처의 베다니에서 승천하셨다. 그곳은 그 리스도의 고난이 시작된 동산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심히 고민하고 기도하며 계셨던 곳이다.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우리에게 천 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난과 고뇌하는 삶을 거쳐서 마침내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고 할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것 은 주님의 부활은 나중에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님이 승천하시는 것은 그들이 직접 목격했다. 한편 생각하면 주님의 승천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승천을 목격하도록 했을 것이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서 제자들을 축복하였다. 주님은 일어서자 곧 그의 능 력으로 말미암아 하늘로 올라 가셨다. 비록 주님은 육신으로는 떠나가 셨지만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했다. 예수의 승천은 예수의 영광에 대한 새 로운 표시이다. 즉 예수님은 성육신으로써 자기를 비하하였고 승천으 로써 영광을 회복하였다. 승천이란 중보자의 인격이 그의 인성에 의하여 땅에서부터 하늘로 유형적으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승천은 부활의 보충적 요소이며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즉 승천은 하나님인 그리스도께서 부 활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을 끝내시고 유형한 임재에 관한 한 그들을 떠나 다른 세계로 옮겨가셔서 거기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시게 되신 것 을 의미한다. 이러한 승천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승천은 그리스도의 제사가 하나님께 드린 제사 즉 지성소에서 그 에게 드리셨던 제사였다는 선언을 구체화하였다. 2. 승천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앉은 그리스도인들과 영원 히 그와 함께 있도록 예정된 신자들의 승천을 예언하였다. 3.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는 일에 있어서 도구적이었다. 주님은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려 고 아버지께로 가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바 있었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직접 권능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 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동안 교회를 통치하시고 보호하시며 자기 백 성의 이익을 위하여 우주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신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제사를 성부에게 드리며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 함으로써 교회의 이익을 효과 있게 하시며 안전케 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되 단순히 신적 권세, 위엄, 영광을 피동적으로 받아 누리시는 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의 중보적 사역을 계속하신 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의 3직임으 로써 행사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사후 제자들이 보여주었던 태도와 승천시 보여 준 태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어 떤 자세로 신앙생활에 임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예수의 승천 을 바로 보는 예수의 제자들을 본문을 통해서 알고자 한다. 52절에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 렸을 때 대부분의 제자들은 멀리서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당시 제 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깊은 절망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예 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 가까이서 예수님으로부터 축복 기 도를 받았으며 예수께 경배했다. 예수의 죽음이나 승천이나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난 것은 마찬가지인데 이와 같은 대조적인 태도의 원인은 무 엇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사신 것을 보여주었고 성경 말씀을 통해 다시 오실 것을 보증해 주셨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을 영접하고 예수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는 제자들처럼 예수의 승천을 담대하게 오히려 경배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 의 구속자가 되시는 예수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인 것이다. 52절에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진실로 슬픔이 큰 기쁨으로 바꿜 성도들은 예수의 지상 대명령(마태 28:18-20)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예수가 죽음을 맞을 때는 그렇게 슬퍼하고 절망 했던 제자들이 이제는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기쁨을 맞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부활과 승천은 제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슬픔이 기쁨이 되게 했고 자기 고향으로 가던 제자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했으며 자기 일을 하려던 것을 예수의 일을 하게 만들었다. 죄 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주를 위한 일이요 헌신 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었다. 더 나아 가서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다. 받은바 은혜를 알리지 않고 는 견딜 수 없어서 감사함으로 복음 전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53절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 예수가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늘 성전에 모여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을 보내 시고 불쌍한 인생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대한 제자들 의 당연한 답례였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성취되기를 기도했 고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했다. 때문에 제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 곧 하나님의 집에 모여 찬양했던 것이다. 성전에서 찬양한 제자들처럼 찬양하는 삶은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리고 슬픔 대신 기쁨과 소망이 자 리잡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기쁨의 찬양은 그리스도인이 은혜의 보좌 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약속 이 성취될 때까지 예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기쁨과 찬양으로 기다리 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결코 소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항 상 우리를 돌보시고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성 령님을 통해 이 땅을 주관하시고 또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살아 갈 수 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제 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각자 복음의 증인으로서 맡은 바 사역에 충성했듯이 오늘 우리 역시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 당하면서 승천 이후 예수 다시오 실 재림의 날을 소망해야 한다.
승천(昇天)의 복음/ 엡4:7-10
승천(昇天)의 복음 엡4:7-10 역사 가운데 숨쉬고 있는 참된 기독 교회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고 하는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기를 2,000년 동안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고백은 로마서 8장 34절에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 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 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는 영감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복음이고, 그의 대속의 죽으심이 복 음이고, 그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복음인 동시에, 부활한지 40 일만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산채로 하늘로 올라 가셨음이 복음이라고 알려 오고 있습니다.> Ⅰ. 성경에는 세상에서 산채로 하늘로 옮긴 사람이 있습니 다. 1. 에녹의 승천입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 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 이후 경건한 셋 자손의 계보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계시 표현의 특색 중에 하나가 낳고(출생), 향수하고(살 고), 죽었다는 표현입니다. 셋의 7대손이었던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자녀를 낳았 습니다(창 5:22). 그는 365세를 향수하고(창 5:23),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 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5:24). 에녹의 경우 다른 사람의 기록에 따라다니던 「…죽었더라」는 말 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더 라」고 하는 확실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데려가다\'( )라는 말 은 \'옮기다\'(carry away)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사실에 대 해서 히브리서 11장 5절은 더 확실하게 말하기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 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 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 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였 습니다(히 11:6). 참으로 대단한 장면입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반짝이고 있는 별을 보는 기분입니다. 쓸쓸한 해변에서 빛나는 진주를 줍는 기분입니다. 에녹이 믿 음으로 300년이 넘도록 하나님과 동행을 하더니, 하나님 편에서 아예 죽음 과 관계없이 영원히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2.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에 사용된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종을 「머리위로 취 하신다」\'는 말은 열왕기하 2장 3절, 5절, 9절, 10절에 반복되고 있습니 다. 여기에 하나님이 \'취하신다\'는 말은 에녹을 \'데리고 갔다\'는 창세기 5 장 24절의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위로 취하신다」는 이 말 은 예수의 승천 모습을 보여주는 사도행전 1장 10절에 사용된 「올라가실 때」( )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투사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계획하였습니다(왕 하 2:1). 그는 그의 제자 엘리사와 함께 그가 경영하던 선지학교를 마지막 으로 순방하던 길이었습니다. \'길갈\' 선지학교에서 \'벧엘\' 선지학교로, \'여리고\' 선지학교로 그리고 \'요단\'에 있는 선지학교를 마지막으로 순방하 였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엘리야를 좇는 엘리사나 여러 지역에 있던 선 지 생도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산채로 하늘로 승천시키고자 하시는 사 실을 거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가는 곳마다 엘리사는 선지 생도들에게 엘리야 승천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중대한 것은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산채로 하늘로 옮겨졌다는 사실 입니다. 그는 그에게 임한 홀연한 불수레와 불말들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떼어놓고, 엘리야는 회리바람 가운데 실려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불수레와 불말\'들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 행위를 말합니 다(시 104:4). \'회리바람\'( )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초 자연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회리바람 가운데\'를 뜻합니다. 이는 비를 수반하지 않는 폭풍을 의미하는데 하나님 자신의 불가항력적 임재의 상징 이었습니다(욥 38:1, 40:6, 겔 1:4, 슥 9:14). 그래서 그는 세상에 다시 있지 아니했습니다. 3. 예수의 승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 습니다(고전 15:3-4). 그리고 40일 동안 세상에 부활하신 몸으로 머무시면 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자신의 부활을 입증하였습니다(행 1:3). 그리고 저희 보는 데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위대한 영광의 승천 은 성경에 가득차게 빛나고 있습니다(눅 24:50-53, 행 1:6-11, 막 16:19, 엡1:20, 4:8-10, 딤전 3:16, 히 1:3, 4:14, 9:24, 행 2:32, 33, 34-35). 예수께서 자신이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다는 사실을 그의 생전에 여러 번 반복하면서 예언해 주었습니다(요 6:62, 14:2, 12, 16:5, 10, 17, 28, 17:5, 20:17).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거듭거듭 예언하듯이 자신이 부 활 이후에 하늘로 다시 올라갈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는 부활의 몸 그 대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승천의 복음입니다. Ⅱ. 승천의 복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그(에녹)를 데리고 가셨다고 하였습니다(창 5:24).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였습니다(왕하 2:1). 회리바람으로 올리고자 하였습니다(왕하 2:1). 그리고 자신의 계획대로 엘리야를 회리바람에 태워 세상에서 하늘로 옮기고 말았습니다(왕하 2:11). 바울은 예수의 승천을 말할 때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 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 력이 예수를 성육신시켰습니다(눅 1:35, 마 1:20).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렸다고 하였습니다(롬 1:4).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영광 가운데 올리우게 하였습니다(딤전 3:16).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시게 하 였습니다(히 1:3). 그 결과 만물을 충만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엡 4:10). 바로 만물 충만 의 장소가 지상에 세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결과로 나타난 놀라운 성령의 산물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선물이라고 하였 습니다. 교회는 바로 만물 충만의 센터입니다. 만물 충만의 본질적 내용은 택자 구원의 완성입니다(엡 1:20-23).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하늘에 오르게 하사 보 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지상에 교회를 탄생시킨 것입니 다. 그러므로 승천의 복음은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행위입 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Ⅲ. 승천의 복음은 이 세상 밖에 더 좋은 세계 곧 천국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에녹의 경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고 하였습니다(창 5:24). 세상에 살던 에녹을 이 세상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데려감)는 뜻입니 다. 엘리야의 경우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서 세상에 있을 엘리사와, 그 의 머리 위로 취하실(데려감) 엘리야를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님은 엘리야를 회리바람 가운데 태우고 다른 곳으로 그를 데려가고 말았습 니다(왕하 2:11). 결코 에녹이나 엘리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말았다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계가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예수님은 이 사실을 자주 자주 반복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62절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 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 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 하반절에는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6장 5절에 는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간다」고 하였습니다(요 16:10, 17). 요한복음 16장 28절에는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는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 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는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 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1절에는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에는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 에 앉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는 「위로 올라가실 때에…」 라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전 성경은 내세에 대한 다른 경우들을 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살던 에녹을 데리고 가신 다른 곳이 바로 천국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에 태워 데리고 가신 곳 이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자신이 하늘로 옮기 우사 좌정하신 보좌가 천국 곧 자신의 아버지 집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이 세상에서 다른 곳 곧 천국으로 옮기실 때도 그 몸을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시켰을 것입니다. 바로 주 예수께서 부활하사 확실한 많은 증거로 증거하시고, 하늘로 오르신 그 몸은 영화로운 실체의 몸입니 다. 그래서 예수의 승천은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세상에 소망을 주는 종교인가? 과연 기독교가 세상에 복음을 주는 종교인가? 이 대답은 확실하고 또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답은 \'기독교만이 이 세상에 소망을 주는 복음의 종교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큰 이유는 기독교만이 속죄의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 교만이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이 영원한 실존의 미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이 세상에서 하늘로 올라가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고 계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승천의 복음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모든 잠자는 자들의 장래 부활의 첫 열매가 되듯이(고전 15:20), 그의 승천은 장래 인류 승천의 선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분명히 「내 아버지 집」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그곳\'에 \'간 다\'고 하였습니다(요 14:2). 「가서」(요14:3),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한다」고 하였습니다(요 14:3). 그리고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 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4:3).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4:4). 이렇게 천당은 분명히 장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 천당의 장 소성을 나타내는 \'처소\'( )란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또 \'곳\'( )이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간다\', \'가서\',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하는 말들은 모두 천당의 장소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심은 결코 신화일 수 가 없고, 어떤 심미적 이상 세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계의 인류에게 소망의 복음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인생의 본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지닌 본질적인 문제는 정치나 경제, 과학, 의학, 사회, 문화, 교 육, 예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심리학이나 철학적 이상세계가 아닙 니다. 고상하고 고매한 사색적 세계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생에게 수반되는 부분적인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러 한 것을 가리켜 이 세상 초등학문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상한 지식의 세계를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문제입니다. 인생이 인생된 것은 종교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종교문제는 인생자체의 구원문제입니다. 그 구원문제는 바로 인생이 욕구하는 \'영생문제\'입니다. 바로 이 영생문 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기독교만의 일입니다. 예수는 인생의 죄 문제를 위 하여 자신이 십자가에서 속건제물(배상물)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 하여 예수 자신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장래 우 리 부활의 첫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유한의 세상이 아닌 영원의 세계 곧 천국, 아버지 집으로 승천하므로 인생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로 옮겨지는 영생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복음인 것입니다. 성탄의 복음, 대속의 복음, 부활의 복음, 승천의 복음, 영생의 복음인 것입니다. 바로 인류의 미래를 밝게 비 추어 주는 별의 복음인 것입니다. 바로 별들의 전쟁의 주제인 것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의 소리가 세상에 들려올 동안, 세상은 암흑 중에라도 저 세상 곧 에녹과 엘리야가 산채로 옮겨지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향하는 빛나는 별의 안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 들의 전쟁이란 하늘가는 밝은 길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복음운동인 것입니 다. 우리 모두 복음의 별이 됩시다. - 아 멘 -
승천(昇天)의 복음/ 엡4:7-10
승천(昇天)의 복음 엡4:7-10 역사 가운데 숨쉬고 있는 참된 기독 교회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고 하는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기를 2,000년 동안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고백은 로마서 8장 34절에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 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 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는 영감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복음이고, 그의 대속의 죽으심이 복 음이고, 그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복음인 동시에, 부활한지 40 일만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산채로 하늘로 올라 가셨음이 복음이라고 알려 오고 있습니다.> Ⅰ. 성경에는 세상에서 산채로 하늘로 옮긴 사람이 있습니 다. 1. 에녹의 승천입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 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 이후 경건한 셋 자손의 계보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계시 표현의 특색 중에 하나가 낳고(출생), 향수하고(살 고), 죽었다는 표현입니다. 셋의 7대손이었던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자녀를 낳았 습니다(창 5:22). 그는 365세를 향수하고(창 5:23),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 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5:24). 에녹의 경우 다른 사람의 기록에 따라다니던 「…죽었더라」는 말 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더 라」고 하는 확실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데려가다\'( )라는 말 은 \'옮기다\'(carry away)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사실에 대 해서 히브리서 11장 5절은 더 확실하게 말하기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 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 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 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였 습니다(히 11:6). 참으로 대단한장면입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반짝이고 있는 별을 보는 기분입니다. 쓸쓸한 해변에서 빛나는 진주를 줍는 기분입니다. 에녹이 믿 음으로 300년이 넘도록 하나님과 동행을 하더니, 하나님 편에서 아예 죽음 과 관계없이 영원히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2.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 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에 사용된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종을 「머리위로 취 하신다」\'는 말은 열왕기하 2장 3절, 5절, 9절, 10절에 반복되고 있습니 다. 여기에 하나님이 \'취하신다\'는 말은 에녹을 \'데리고 갔다\'는 창세기 5 장 24절의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위로 취하신다」는 이 말 은 예수의 승천 모습을 보여주는 사도행전 1장 10절에 사용된 「올라가실 때」( )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투사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계획하였습니다(왕 하 2:1). 그는 그의 제자 엘리사와 함께 그가 경영하던 선지학교를 마지막 으로 순방하던 길이었습니다. \'길갈\' 선지학교에서 \'벧엘\' 선지학교로, \'여리고\' 선지학교로 그리고 \'요단\'에 있는 선지학교를 마지막으로 순방하 였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엘리야를 좇는 엘리사나 여러 지역에 있던 선 지 생도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산채로 하늘로 승천시키고자 하시는 사 실을 거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가는 곳마다 엘리사는 선지 생도들에게 엘리야 승천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다. 중대한 것은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산채로 하늘로 옮겨졌다는 사실 입니다. 그는 그에게 임한 홀연한 불수레와 불말들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떼어놓고, 엘리야는 회리바람 가운데 실려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불수레와 불말\'들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 행위를 말합니 다(시 104:4). \'회리바람\'( )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초 자연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회리바람 가운데\'를 뜻합니다. 이는 비를 수반하지 않는 폭풍을 의미하는데 하나님 자신의 불가항력적 임재의 상징 이었습니다(욥 38:1, 40:6, 겔 1:4, 슥 9:14). 그래서 그는 세상에 다시 있지 아니했습니다. 3. 예수의 승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 습니다(고전 15:3-4). 그리고 40일 동안 세상에 부활하신 몸으로 머무시면 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자신의 부활을 입증하였습니다(행 1:3). 그리고 저희 보는 데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위대한 영광의 승천 은 성경에 가득차게 빛나고 있습니다(눅 24:50-53, 행 1:6-11, 막 16:19, 엡1:20, 4:8-10, 딤전 3:16, 히 1:3, 4:14, 9:24, 행 2:32, 33, 34-35). 예수께서 자신이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다는 사실을 그의 생전에 여러 번 반복하면서 예언해 주었습니다(요 6:62, 14:2, 12, 16:5, 10, 17, 28, 17:5, 20:17).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거듭거듭 예언하듯이 자신이 부 활 이후에 하늘로 다시 올라갈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는 부활의 몸 그 대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승천의 복음입니다. Ⅱ. 승천의 복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그(에녹)를 데리고 가셨다고 하였습니다(창 5:24).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였습니다(왕하 2:1).회리바람으로 올리고자 하였습니다(왕하 2:1). 그리고 자신의 계획대로 엘리야를 회리바람에 태워 세상에서 하늘로 옮기고 말았습니다(왕하 2:11). 바울은 예수의 승천을 말할 때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 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 력이 예수를 성육신시켰습니다(눅 1:35, 마 1:20).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렸다고 하였습니다(롬 1:4).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영광 가운데 올리우게 하였습니다(딤전 3:16).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시게 하 였습니다(히 1:3). 그 결과 만물을 충만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엡 4:10). 바로 만물 충만 의 장소가 지상에 세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결과로 나타난 놀라운 성령의 산물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선물이라고 하였 습니다. 교회는 바로 만물 충만의 센터입니다. 만물 충만의 본질적 내용은 택자 구원의 완성입니다(엡 1:20-23).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하늘에 오르게 하사 보 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지상에 교회를 탄생시킨 것입니 다. 그러므로 승천의 복음은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행위입 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Ⅲ. 승천의 복음은 이 세상 밖에 더 좋은 세계 곧 천국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에녹의 경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고 하였습니다(창 5:24). 세상에 살던 에녹을 이 세상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데려감)는 뜻입니 다. 엘리야의 경우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서 세상에 있을 엘리사와, 그 의 머리 위로 취하실(데려감) 엘리야를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님은 엘리야를 회리바람 가운데 태우고 다른 곳으로 그를 데려가고 말았습 니다(왕하 2:11). 결코 에녹이나 엘리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말았다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계가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예수님은 이 사실을 자주 자주 반복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62절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 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 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 하반절에는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6장 5절에 는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간다」고 하였습니다(요 16:10, 17). 요한복음 16장 28절에는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 는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 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는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 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1절에는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에는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 에 앉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는 「위로 올라가실 때에…」 라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전 성경은 내세에 대한 다른 경우들을 수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세상에 살던 에녹을 데리고 가신 다른 곳이 바로 천국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에 태워 데리고 가신 곳 이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자신이 하늘로 옮기 우사 좌정하신 보좌가 천국 곧 자신의 아버지 집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이 세상에서 다른 곳 곧 천국으로 옮기실 때도 그 몸을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시켰을 것입니다. 바로 주 예수께서 부활하사 확실한 많은 증거로 증거하시고, 하늘로 오르신 그 몸은 영화로운 실체의 몸입니 다. 그래서 예수의 승천은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세상에 소망을 주는 종교인가? 과연 기독교가 세상에 복음을 주는 종교인가? 이 대답은 확실하고 또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답은 \'기독교만이 이 세상에 소망을 주는 복음의 종교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큰 이유는 기독교만이 속죄의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 교만이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이 영원한 실존의 미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이 세상에서 하늘로 올라가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고 계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승천의 복음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모든 잠자는 자들의 장래 부활의 첫 열매가 되듯이(고전 15:20), 그의 승천은 장래 인류 승천의 선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분명히 「내 아버지 집」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그곳\'에 \'간 다\'고 하였습니다(요 14:2). 「가서」(요14:3),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한다」고 하였습니다(요 14:3). 그리고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 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4:3).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4:4). 이렇게 천당은 분명히 장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 천당의 장 소성을 나타내는 \'처소\'( )란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또 \'곳\'( )이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간다\', \'가서\',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하는 말들은 모두 천당의 장소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심은 결코 신화일 수 가 없고, 어떤 심미적 이상 세계일 수가없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계의 인류에게 소망의 복음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인생의 본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지닌 본질적인 문제는 정치나 경제, 과학, 의학, 사회, 문화, 교 육, 예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심리학이나 철학적 이상세계가 아닙 니다. 고상하고 고매한 사색적 세계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생에게 수반되는 부분적인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러 한 것을 가리켜 이 세상 초등학문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상한 지식의 세계를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문제입니다. 인생이 인생된 것은 종교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종교문제는 인생자체의 구원문제입니다. 그 구원문제는 바로 인생이 욕구하는 \'영생문제\'입니다. 바로 이 영생문 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기독교만의 일입니다. 예수는 인생의 죄 문제를 위 하여 자신이 십자가에서 속건제물(배상물)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 하여 예수 자신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장래 우 리 부활의 첫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유한의 세상이 아닌 영원의 세계 곧 천국, 아버지 집으로 승천하므로 인생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로 옮겨지는 영생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복음인 것입니다. 성탄의 복음, 대속의 복음, 부활의 복음, 승천의 복음, 영생의 복음인 것입니다. 바로 인류의 미래를 밝게 비 추어 주는 별의 복음인 것입니다. 바로 별들의 전쟁의 주제인 것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의 소리가 세상에 들려올 동안, 세상은 암흑 중에라도 저 세상 곧 에녹과 엘리야가 산채로 옮겨지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향하는 빛나는 별의 안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 들의 전쟁이란 하늘가는 밝은 길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복음운동인 것입니 다. 우리 모두 복음의 별이 됩시다. - 아 멘 -
승천(昇天)의 복음/ 엡4:7-10
승천(昇天)의 복음 엡4:7-10 역사 가운데 숨쉬고 있는 참된 기독 교회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 운데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 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 신다」고 하는 사도신경을 함께 고 백하기를 2,000년 동안 계속하고 있 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고백은 로마서 8 장 34절에 「…죽으실 뿐 아니라 다 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 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 라」는 영감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 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 생이 복음이고, 그의 대속의 죽으심 이 복음이고, 그의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복음인 동시에, 부 활한지 40일만에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산채로 하늘로 올라 가셨음이 복 음이라고 알려오고 있습니다.> Ⅰ. 성경에는 세상에서 산채로 하늘로 옮긴 사람이 있습니다. 1. 에녹의 승천입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에녹이 하 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 더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 이후 경건한 셋 자손의 계보를 열거하고 있습니 다. 여기에 나타난 계시 표현의 특 색 중에 하나가 낳고(출생), 향수하 고(살고), 죽었다는 표현입니다. 셋의 7대손이었던 에녹은 300년 을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창 5:22). 그는 365세를 향수하고(창 5:23),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5:24). 에녹의 경우 다른 사람의 기록에 따라다니던 「…죽었더라」 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 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 더라」고 하는 확실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데려가다\'라는 말은 \'옮기다\'(carry away)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5절은 더 확 실하게 말하기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 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 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 거를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히 11:6). 참으로 대단한 장면입니다. 캄캄 한 밤하늘에 반짝이고 있는 별을 보 는 기분입니다. 쓸쓸한 해변에서 빛 나는 진주를 줍는 기분입니다. 에녹 이 믿음으로 300년이 넘도록 하나님 과 동행을 하더니, 하나님 편에서 아예 죽음과 관계없이 영원히 동행 해 주신 것입니다. 2. 엘리야의 승천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 「두 사람 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 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 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에 사용된 \'여호와 께서 오늘날 당신의 종을 「머리위 로 취하신다」\'는 말은 열왕기하 2 장 3절, 5절, 9절, 10절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취하신 다\'는 말은 에녹을 \'데리고 갔다\'는 창세기 5장 24절의 단어와 같은 것 입니다. 그리고 「머리위로 취하신 다」는 이 말은 예수의 승천 모습을 보여주는 사도행전 1장 10절에 사용 된 「올라가실 때」라는 단어와 동 일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투사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계획하였습니다 (왕하 2:1). 그는 그의 제자 엘리사 와 함께 그가 경영하던 선지학교를 마지막으로 순방하던 길이었습니다. \'길갈\' 선지학교에서 \'벧엘\' 선지학교 로, \'여리고\' 선지학교로 그리고 \'요 단\'에 있는 선지학교를 마지막으로 순방하였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엘리야를 좇는 엘리사나 여러 지역 에 있던 선지 생도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산채로 하늘로 승천시키고 자 하시는 사실을 거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가는 곳마다 엘리사는 선지생도들에게 엘리야 승 천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된 것입니 다. 중대한 것은 엘리야는 죽음을 보 지 않고 산채로 하늘로 옮겨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에게 임한 홀연 한 불수레와 불말들이 엘리야와 엘 리사를 떼어놓고, 엘리야는 회리바 람 가운데 실려 회리바람을 타고 승 천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불수레와 불말\'들 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 행위를 말합 니다(시 104:4) \'회리바람\'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초자연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회리바람 가 운데\'를 뜻합니다. 이는 비를 수반하 지 않는 폭풍을 의미하는데 하나님 자신의 불가항력적 임재의 상징이었 습니다(욥 38:1, 40:6, 겔 1:4, 슥 9:14). 그래서 그는 세상에 다시 있 지 아니했습니다. 3. 예수의 승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 신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고전 15:3-4) 그리고 40 일 동안 세상에 부활하신 몸으로 머 무시면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자신 의 부활을 입증하였습니다(행 1:3). 그리고 저희 보는 데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위대한 영광의 승천은 성경에 가득차게 빛나고 있 습니다(눅 24:50-53, 행 1:6-11, 막 16:19, 엡1:20,4:8-10, 딤전3:16, 히1:3,4:14,9:24, 행2:32,33,34-35) 예수께서 자신이 하늘로 다시 올 라가신다는 사실을 그의 생전에 여 러 번 반복하면서 예언해 주었습니 다(요 6:62, 14:2,12,16:5,10,17, 28, 17:5,20:17). 그는 자신의 죽음 과 부활을 거듭거듭 예언하듯이 자 신이 부활 이후에 하늘로 다시 올라 갈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는 부 활의 몸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셨습 니다. 참으로 놀라운 승천의 복음입 니다. Ⅱ. 승천의 복음은 하나님의 초 자연적 사역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그(에녹)를 데리고 가 셨다고 하였습니다(창 5:24) 하나님 이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였 습니다(왕하 2:1). 회리바람으로 올 리고자 하였습니다(왕하 2:1). 그리 고 자신의 계획대로 엘리야를 회리 바람에 태워 세상에서 하늘로 옮기 고 말았습니다(왕하 2:11). 바울은 예수의 승천을 말할 때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 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 히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했 다」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성육신시켰 습니다(눅 1:35, 마 1:20).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렸다고 하였습니다 (롬 1:4).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를 영광 가운데 올리우게 하였습니다 (딤전 3:16).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 시게 하였습니다(히 1:3). 그 결과 만물을 충만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엡 4:10). 바로 만물 충 만의 장소가 지상에 세운 교회입니 다. 교회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 천하신 결과로 나타난 놀라운 성령 의 산물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선물 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바로 만 물 충만의 센터입니다. 만물 충만의 본질적 내용은 택자 구원의 완성입 니다(엡 1:20-23).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하 늘에 오르게 하사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지상에 교 회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천의 복음은 인류구 원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행 위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Ⅲ. 승천의 복음은 이 세상 밖에 더 좋은 세계 곧 천국이 있다는 증 거입니다. 에녹의 경우 「하나님이 그를 데 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라」고 하였습니다(창 5:24). 세상에 살던 에녹을 이 세상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데려감)는 뜻입 니다. 엘리야의 경우 불수레와 불말 들이 나타나서 세상에 있을 엘리사 와, 그의 머리 위로 취하실(데려감) 엘리야를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그 리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회리바람 가운데 태우고 다른 곳으로 그를 데 려가고 말았습니다(왕하 2:11). 결코 에녹이나 엘리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말았다 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세 상이 아닌 또 다른 세계가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예수님은 이 사실을 자주 자주 반복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 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 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 62절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 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고 하였 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 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 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 도 있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요 한복음 14장 12절 하반절에는 「…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6장 5절에는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간다」고 하였습니다(요 16:10,17). 요한복음 16장 28절에는 「내가 아 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 서는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 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는 「…예수 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1 절에는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 리우)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마 가복음 16장 19절에는 「주 예수께 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 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라고 하였 습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는 「위 로 올라가실 때에…」라고 하였습니 다. 그 외에도 전 성경은 내세에 대 한 다른 경우들을 수없이 말하고 있 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살 던 에녹을 데리고 가신 다른 곳이 바로 천국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 서 엘리야를 회리바람에 태워 데리 고 가신 곳이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자신이 하늘로 옮기우사 좌정하신 보좌가 천국 곧 자신의 아버지 집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이 세상에서 다 른 곳 곧 천국으로 옮기실 때도 그 몸을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시켰을 것입니다. 바로 주 예수께서 부활하 사 확실한 많은 증거로 증거하시고, 하늘로 오르신 그 몸은 영화로운 실 체의 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승천 은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세상에 소망을 주 는 종교인가? 과연 기독교가 세상에 복음을 주 는 종교인가? 이 대답은 확실하고 또 확실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답은 \'기독교만이 이 세상에 소망을 주는 복음의 종교 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큰 이유는 기독교만이 속죄의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 독교만이 부활의 복음을 가지고 있 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이 영원한 실존의 미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 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이 세상에서 하늘로 올라가사 하나 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고 계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승천의 복음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모든 잠자는 자들 의 장래 부활의 첫 열매가 되듯이 (고전 15:20), 그의 승천은 장래 인 류 승천의 선구자가 되기 때문입니 다. 예수는 분명히 「내 아버지 집」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는 자 신이 \'그곳\'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요 14:2). 가서」(요14:3),「너희 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한다」고 하 였습니다(요 14:3). 그리고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요 14:3). 「내가 가 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였습니다(요 14:4). 이렇게 천당은 분명히 장소가 있 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 천당의 장소성을 나타내는 \'처소\'란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또 \'곳\'이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간 다\', \'가서\', \'다시와서\', \'나 있는 곳에\' 하는 말들은 모두 천당의 장 소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심은 결코 신화 일 수가 없고, 어떤 심미적 이상 세 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계의 인류에게 소망 의 복음을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인 생의 본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지닌 본질적인 문제는 정 치나 경제, 과학, 의학, 사회, 문화, 교육, 예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심리학이나 철학적 이상세계가 아닙니다. 고상하고 고매한 사색적 세계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생에게 수반 되는 부분적인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가리켜 이 세상 초등학 문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상한 지식의 세계를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문제입니다. 인생 이 인생된 것은 종교문제를 갖고 있 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종교문제는 인생자체의 구원문제입니다. 그 구원문제는 바로 인생이 욕구 하는 \'영생문제\'입니다. 바로 이 영 생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기독교 만의 일입니다. 예수는 인생의 죄 문제를 위하여 자신이 십자가에서 속건제물(배상물)이 되셨습니다. 그 것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예수 자신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장래 우리 부활의 첫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유한 의 세상이 아닌 영원의 세계 곧 천 국, 아버지 집으로 승천하므로 인생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지는 영생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 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복음인 것입니 다. 성탄의 복음, 대속의 복음, 부활 의 복음, 승천의 복음, 영생의 복음 인 것입니다. 바로 인류의 미래를 밝게 비추어 주는 별의 복음인 것입 니다. 바로 별들의 전쟁의 주제인 것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의 소리가 세상에 들려올 동안, 세상은 암흑 중에라도 저 세상 곧 에녹과 엘리야 가 산채로 옮겨지고, 예수께서 승천 하신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향하는 빛나는 별의 안내를 받게 될 것입니 다. 그러므로 별들의 전쟁이란 하늘 가는 밝은 길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복음운동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복 음의 별이 됩시다. - 아 멘 -
승천과 성찬/ 마28:20, 막16:19/ 2015-05-15
승천과 성찬 마28:20, 막16:19 (참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6-49문답) 서론 지난 5월 14일 목요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승천절”(昇天節, Ascension) 이라고 부르는 날입니다. ‘승천절’이란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입니다. 서구의 많은 나라들은 오랫동안 ‘승천기념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날을 공휴일로 지키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40일 동안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파하시다가 비로소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죽음 후 3일만의 부활, 그 후 40일 뒤의 승천. 그래서 부활절 이후 40일이 되는 날을 승천절로 지킵니다. 지난 4월 12일을 많은 교회들이 부활절로 지켰습니다. 그러니 그 날로부터 40일째 되는 5월 14일이 승천기념일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절을 지켰다면, 승천기념일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부활만이 아니라 주님의 승천도 중요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절기를 이상하게 지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주로 “성탄절-부활절-맥추절-추수감사절” 등을 지키는데, 그러나 제대로 지키려면 “성탄절-부활절-승천절-성령강림절” 등의 순서로 바르게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우리는 특별히 주님의 승천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침 오늘은 성찬이 있는 주일이기에 승천과 성찬의 관계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찬을 주님의 죽음과만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성찬은 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의 모든 것을 이 성찬 안에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찬은 주님의 죽음 뿐 아니라 주님의 승천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의 승천과 성찬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은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곧 성찬에 함께 하신다.”입니다. 본론 Ⅰ. 성경에서 승천(昇天, ascension)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6장 19절을 보시면,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승천을 잘 기록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러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은 다른 구절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1절을 보시면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승천 사실을 기록한 누가는 자신이 쓴 또 다른 책인 사도행전에서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2절 이하에 보면 “(2)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라고 언급한 뒤에 9절에서 “(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해서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일 뿐 아니라 부활 후 승천까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유일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분의 몸과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지금 현재 땅에 계시지 않으시고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오늘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에 오르셨고”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늘에 오르셨고”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몸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승천으로 인하여 분명해 진 것은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셨고, 그 올라가심을 분명하게 확증하시기 위하여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임재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하신 말씀에서는 분명히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마가복음 16장 19절 말씀의 앞부분을 살펴보면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그 말을 하신 것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곧바로 ‘너희’들인 제자들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입니까?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 예수님이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난을 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거짓을 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니, 거짓을 말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은 하지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죄를 범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시지만 죄를 범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분의 신성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듯이 예수님에게는 2개의 구별되는 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 하나의 위격에 2개의 본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신성)이시면서 사람(인성)이십니다. 신성과 함께 인성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2개의 구별되는 본성을 가지신 예수님. 우리 주님은 그분의 인성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지만, 그분의 신성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약속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Ⅱ. 신앙고백서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49문답의 가르침 지금까지의 내용을 우리의 신앙고백에서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18주일’은 사도신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늘에 오르셨고”라는 부분, 즉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46문답에서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바로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유익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제47-48문답에서 다른 내용을 먼저 다룬 뒤에 제49문답에 와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유익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유익에 대해 설명하기 전 제47-48문답에서는 어떤 내용을 다룹니까? 바로 좀 전에 제가 오늘 우리가 읽은 설교 본문을 통하여 말씀드린 내용을 그대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제47문답을 보십시오. 47문: 그렇다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4) 마 28:20 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그 근거구절이 바로 마태복음 28장 20절입니다. 누가 봐도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분명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했는데 올라가셨으니 이런 질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하기를 답: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성(人性)으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그의 신성(神性)divinity과 위엄majesty과 은혜grace와 성령Spirit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5) 마 26:11; 요 16:28; 17:11; 행 3:21; 히 8:4 6) 마 28:20; 요 14:16-18; 16:13; 엡 4:8,11 라고 해서 예수님의 두 본성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48문답에서 두 본성에 관한 내용을 좀 더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자들 역시 예수님의 승천과 그분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모순점을 바로 예수님의 두 본성으로 해답을 찾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에 따라 예수님의 함께 계신 약속이 바로 그분의 신성으로 임재하심을 통하여 이 땅 가운데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요약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비록 그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로 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신적 위격에 2개의 서로 구별되는 본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이 비록 하늘로 올라가셨으나, 그분의 신성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니, 예수님의 약속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은 지금 오늘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그의 신성으로 우리들의 교회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심으로 오히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보다 더 풍성하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신 말씀은 헛되지 않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임재의 방식 그렇다면, 이렇게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좀 더 공식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1) 교회 공동체 먼저, 교회 중에 임하심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자주 부릅니다. 이 교회 공동체가 바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아주 중요한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들은 반드시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함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면, 교회에 속하지 않고 나 혼자서 집에서 생활한다고 한다면 주님의 임재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하여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산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하여 있으므로 인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소망합니다. 2) 성찬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심을 잘 보여주는 것 중에 또 다른 하나,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성찬입니다. 성찬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성찬은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드러냅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성찬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는 더 나아가 성찬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먹고 마십니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가 곧 주님의 몸임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이렇게 성찬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이 땅 가운데서 드러내는 중요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찬은 곧 하늘에 계신 몸을 땅에서 체험하는 예식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 몸을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체험하는 예식이 바로 성찬입니다. 앞서 설교의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성찬을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과만 결부시킵니다. 그것만을 의미하고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그의 죽으심과 함께 그의 부활과 승천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의 몸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썩어 없어진 몸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주님의 몸을 말입니다. 승천하신 그 분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신령한 떡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요 6:33,51,58). 설교의 주제 되새김 이제 오늘 설교의 주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분은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곧 성찬에 함께 하신다.”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한길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늘에 계시지만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억합니다. 드러냅니다. 경험합니다. 온 몸과 영혼으로 느낍니다. 성찬은 단순히 상징이 아닙니다. 영적 실재입니다. 인성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의 신성으로는 온 세상에 충만하셔서 당신의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시며, 그 공동체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과 함께 계심을 성찬을 통해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의 몸인 교회가 다함께 그의 몸을 먹음으로 그 분의 임재하심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Ⅲ. 교회사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그리고 신조인 요리문답서를 통하여서 오늘의 주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교회사 속에서 이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동안 제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성경의 어떤 주제에 대하여 우리가 살펴나가는 순서에 있어서 “성경 - 신앙고백 - 교회사” 라는 순서로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것과 연결됩니다. 교회사 속 성찬 논쟁 교회 역사에 보면 성찬과 관련하여 중요한 논쟁이 있습니다. 크게 4가지의 서로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화체(化體)설(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하는데, 이 주장은 성찬을 행할 때에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의 본질과 같은 본질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 피니라”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 빵과 포도주의 본질에 형이상학적 변화가 일어나서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substance)로 변하게 된다(trans-)는 견해입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임재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루터파의 주장은 공재(共在)설(consubstantiation, 문자적으로 with the substance)이라고 하는데, 이 주장은 빵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빵과 포도주 안에(in), 그것들과 함께(with), 그리고 그 아래(under),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 한다는 주장입니다.1)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시에 장소적으로 임재(local presence)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견해는 화체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쯔빙글리의 주장은 기념설(Symbolic Representation)이라고 하는데,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상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의 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성찬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할 뿐이라고 봅니다. 이 모든 견해에 반대하여, 칼뱅은 실제적 영적 임재설(Real Spiritual Presence)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는데,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 사역 곧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고 믿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장소적으로 성찬 시에 임재 하시지는 않지만, 그 능력과 권능 가운데 자기의 임재를 보여주시며, 마치 몸으로 계신 것처럼 언제나 자기 백성 중에 계시며, 그들에게 자기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그들 속에 사시며 그들을 지탱시키시고 강건하게 하시고 활력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주장 중에 어느 것이 맞겠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칼뱅이 주장한 ‘실제적 영적 임재설’의 주장을 따릅니다. 왜 그럴까요?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의 주장은 예수님의 인성이 성찬 가운데 함께 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분의 승천과 관련하여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인성이 어떻게 성찬 가운데 함께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이 두 주장은 아예 깊이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념설은 왜 틀렸을까요?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분명 성찬을 행할 때에 예수님을 기념하지 않습니까? 다함께 고린도전서 11장 24-25절을 보십시다.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라는 말이 24절과 25절에 각각 한 번씩 해서 두 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이 구절만 보면 마치 기념설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찬에 있어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우리는 성찬에서 예수님을 기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념설이 잘못되었다고 믿는 것은 기념하는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념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기념설은 여기에 계시지 않은 예수님을 기념합니다2) 기념설은 예수님의 인성이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마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념설을 넘어 “실제적 영적 임재”를 믿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신성이 성찬 가운데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분명 주님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성찬은 단순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수준을 넘어, 그분의 신성에 함께 참여하는 예식입니다. 비록 그분의 인성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만, 그분의 편만한 신성이 성찬에 함께 하여 우리가 그것을 먹고 마실 때에 실제적으로 영적으로 임재하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실제적 영적 임재를 믿는 것은 그분의 승천이 그분의 신성마저도 다 올라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성찬 가운데 실제로 임재하시는 주님의 신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 계시지 않은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하시는 구주 예수님을 기념하며 그분의 영적 임재를 체험합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성찬은 죽으신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영광중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지만 땅에도 계신 예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찬은 단순한 기념의 식사가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의 식사입니다. 함께 성찬을 나누는 성도들과의 교제 이전에, 여기에서 당신의 신성으로 임재하신 주님과의 교제의 식사입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지금 여기 계시는 주님과 교제합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께서 지금 막 승천하신 것처럼 그리고 잠시 후에 곧 다시 오실 것처럼 임하되 또한 동시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 논쟁의 본질 그렇기에 종교개혁 당시에 있었던 성찬에 관한 논쟁은 겉으로 볼 때에는 성찬에 관한 논쟁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성찬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주님의 두 본성에 관한 논쟁입니다. 이 논쟁의 본질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성찬에 임하시느냐?” 하는 문제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과연 어디에 계시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인성이 마치 지상에서도 임하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반면, 쯔빙글리의 주장은 그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하여, 예수님의 인성이 여기에 없다는 것을 잘 강조하였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부분을 다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칼뱅은 예수님의 인성은 편재하신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늘에 계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또 다른 본성인 신성이 성찬에 함께 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가 성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주님의 승천과 성찬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오늘 주님의 승천과 성찬에 대해 함께 살피는 것은 매우 성경적일 뿐 아니라 신학적이며, 나아가 교회사적 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리고 그것들을 성찬과는 연결시키면서 정작 주님의 승천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승천을 성찬과 연관 짓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승천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승천과 성찬을 연관시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승천에 관하여 제46문답에서부터 제49문답에까지 총4개의 문답에서 다루고 있으니, 주님의 부활에 관한 부분은 제45문답 단 하나에서 다루고 있는 것과 아주 다릅니다3) Ⅳ. 적용 사랑하는 한길교회 성도 여러분~!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당신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 교회로 하여금 당신의 임재를 기억케 하는 성찬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일 때에 성찬을 행함으로 하늘에 계신 주님의 몸이 여기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육체적인 몸이 아니라 신성으로서의 주님을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의 몸과 땅의 몸이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하늘에 계십니다.4) 그의 인성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47문답). 그러나 그의 몸인 교회가 다함께 그의 몸을 먹음으로 그 분의 임재하심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인성의 편재성(Ubiquity)이 아니라 신성의 편재성이 성찬에 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은 우리가 매주일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통하여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늘에 오르셨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신성, 즉 신적인 본성(Divine Nature)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교회에 함께 하시며, 주님의 만찬에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말씀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성찬을 행함으로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확인합니다. 그 약속이 절대로 거짓이 아님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셨지만 그의 제자들과 이 땅 위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역사의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찬은 주님의 고난을 물론이요 부활과 승천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재림까지도 함께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찬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 단순히 성찬에 관한 논쟁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논쟁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성찬에 영적으로 임재하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성찬이 진정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살찌우는 영적 음식임을 기억함으로 우리에게 실질적인 유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일입니다. 이 날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주님의 부활 뿐 아니라 주님의 승천하심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주일에 우리 모두가 다함께 성찬에 참여함으로 교회와 성찬 가운데 충만하시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을 경험하면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입시다. 우리는 그 몸을 생각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 몸을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는 그저 일반적으로 우리가 식사시간에 먹는 떡이나 세상 사람들이 마시는 포도주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그 몸을 생각하면서 먹고 마실 때에 떡과 포도주는 이 땅에서 누리는 하늘의 몸이 될 것입니다. 승천하셨으나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 그 주님을 이 성찬을 통하여 맛봅시다. 아멘. 설교 질문 1. 오늘 설교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2. 마가복음 16장 19절; 누가복음 24장 51절; 사도행전 1장 9절 말씀에 있는 내용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3. 앞의 질문에 나온 내용과 마태복음 28장 20절의 모순은 무엇이며, 그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4. 당신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5. 교회 역사에 있었던 성찬과 관련된 중요한 논쟁을 정리해 봅시다. 6. 승천과 성찬의 관계를 정리해 봅시다. 7. 오늘 우리가 성찬에 임할 때에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정리해 봅시다. =====================================================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9장 7절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70문답은 “안에 함께, 혹은 아래에in, with, or und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2) 유해무, 『개혁교의학』(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521. 3) 이는 종교개혁 당시의 루터파와 칼뱅파의 예수님의 위격과 관련한 논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Fred H. Klooster, A Might Comfort: The Christian Faith according to the Heidelberg Catechism (Grand Rapids: CRC Publications, 1990), 이승구 역, 『하나님의 강력한 위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나타난 기독교 신앙』(서울: 토라, 2004 개정역), 102. 이와 관련해 자세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Fred H. Klooster, Our Only Comfort: A Comprehensive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vol 1, (Grand Rapids: CRC Publications, 2001), 592-5. 4) 칼뱅은 institutes, Ⅳ. xvii. 12. 16-18. 26-31에서 공재설을 비판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은 강하게 비판하면서도(HC 78, 80문답) 형제 교회의 가르침인 루터의 공재설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47,48,76문답에서 루터가 말하는 그리스도 인성의 편재론은 명백히 부인한다. 손재익 목사(한길교회)
승천의 비밀/ 왕상8:26-30
승천의 비밀 왕상8:26-30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의 종인 제 아버지 다윗 임금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나 하니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 나의 하나님, 주님의 종이 드리는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오늘 주님의 종이 주님 앞에서 부르짖으면서 드리는 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주님께서 밤낮으로 눈을 뜨시고, 이 성전을 살펴 주십시오. 이곳은 주님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주님의 종이 이 곳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때에, 이 종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종인 나와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주님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는 대로 용서해 주십시오. 아멘. 서신서의 말씀: 요한게시록 1:5~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에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24:50~53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 아멘 ----------------------------------------------- 오늘은 교회절기로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승천하신 날을 기념하는 승천기념주일입니다. 승천이 하나님께는 좋을지 모르나 저희들한테는 서글픈 헤어짐입니다. 서글픈 마음이나 승천하신 주님이 주시는 말씀 으로 승천의 비밀, 승천에 담긴 주님의 귀한 뜻을 듣고자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만났다가 헤어집니다. 만날 때의 기쁨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헤어질 때의 경우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어느 한 헤어짐도 우리한테 아쉬움과 슬픔을 안주는 헤어짐이 없습니다. 그래서 헤어질 때 웃고 헤어지는 경우 거의 못 봤습니다. 헤어질 때는 울음이 솟아나옵니다. 저희 남북이 분단 되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이산가족들이 서울에서 평양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남 뒷이야기를 들었더니 이런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만나기 전에 설레었던 마음으로 막상 가서 만났더니 할 말도 별로 없다고 합니다. 말을 많이 한 것으로 만남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가슴이 만나면 되지 않습니까? 헤어져 오신 다음에 막상 만나고 보니 몸의 헤어짐 마음의 헤어짐이 너무나 슬퍼서 나이 드신 어르신들 중에 예상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부름 받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건 헤어짐이 주는 충격이지 않을까 생각이듭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북쪽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북쪽의 헤어진 가족들을 만났더니 사람밖에 안 만났지만 아니면 평양에 가서 며칠 동안밖에 안 살았지만 거꾸로 평양에 계신분이 함경도 계신분이 서울에 와서 이산가족 만나서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는 북쪽에 관해서 상당부분 알게 됐습니다. 북쪽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쪽에 계신 분들은 남쪽의 사는 모습과 남쪽의 맛을 그걸 통해서 보았습니다. 북쪽 맛을 보았더니 너무 슬퍼서 내떨어진 혈육이 끊어져 있지만 북쪽에서 고생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아마 가슴 졸여 살다가 빨리 하나님께 부름 받아서 간 것 같습니다. 거꾸로 북쪽에 살던 사람들은 남쪽이 너무나 생각이상으로 잘살고 좋아서 천국 같아서 밤마다 그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드리는 말씀은 남이든 북이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가 다시 헤어짐은 아픈 과정인데 중요한 것 하나는 그걸 통해서 우리는 일부분이긴 하지만 북쪽을 알게 됐습니다. 북쪽에선 일부분이지만 남쪽을 알게 됐습니다. 이미 알았습니다. 알고 났더니, 알고 난 것에 대한 관심과 아픔과 슬픔이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우리 교인들도 해외여행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 해외여행 어느 나라 하셔도 괜찮습니다. 일단 해외여행을 하고 나시면 며칠 하셨던지 몇 달 하셨던지 아니면 오랫동안 사셨던지 그 나라와 국민들을 이미 경험을 한겁니다. 그래서 이미 그 나라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습니다. 좋은 건 좋은 데로 나쁜 건 나쁜 데로 다 기억하기 때문에 이미 알았습니다. 알았다고 하는 얘기는 굉장히 중요한 얘깁니다. 알았기 때문에 안 것을 포기 할 수도 없고 경험한 것을 포기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여행이 주는 아름다운 교훈입니다.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상당 부분은 알게 됐습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그렇게도 사랑하고 우리를 아껴주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란 분이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도 주었습니다. 눈물 흘린 자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우리한텐 너무 가까웠던 그분 그리고 그분이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가면 병자가 낫듯이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고 그러는데 그 하나님 나라 이야기 현실을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서 접했습니다. 경험했습니다. 들었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와 헤어져서 다시 하늘나라로 간다고 합니다. 가시면 언제 옵니까? 지금 가신 그대로 오신답니다. 우리한테 하늘나라를 전해줬던 그 양반이 지금은 잠깐 맛볼 수밖에 없었지만 다시 오실 때는 하나님나라를 가지고 온답니다. 하나님나라가 열매를 맺을 시절이 되면 그 시절이 성경말씀에는 종말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열매 맺고 완숙이 되면 그때 그분이 구름타고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우리한테 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가 오는지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 이 세상에 슬픔이 없어 졌다고 생각될 때. 그때 오시는 분은 우리가 보았던 우리와 얘기했던 우리와 만났던 그분이 똑같은 모습대로 온다고 합니다. 우리는 장래 언제 이루어질지에 대해서 막연하지만 누가 올지에 관해선 분명히 압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었던 사람, 처참하게 창에 찔렸던 사람, 눈물 흘렸던 사람,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부활했던 사람, 그분이 종말에 다시 오십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고 우리와 함께 했던 분이고 성탄절에 나셨던 분이고 그분이 다시 오시게 됩니다. 이 중요한 사실 하나는 승천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헤어짐에도 불구하고 다시 오실 그분에 대한 확고부동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가시면서 약속을 하십니다. 나대신 성령을 보내마. 성도여러분! 성령과 함께 약속된 하늘나라를 계속해서 넓게 더 깊게 더 높게 하나님나라를 맛보시고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지금 시점은 예수께서 구름타고 승천하셔서 자기 나라로 가신 후, 다시 오실 그때까지 승천과 재림사이 시간을 우리가 지금 살아갑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울었다는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많이 울었을 겁니다. 울고 나서 승천하신 다음 그리고 사람들이 다시 성전에 모여서 매일같이 기도하고 찬양하기를 힘을 쏟습니다. 이것이 오늘 누가복음서의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승천하신 그분이 다시 오실 약속을 믿고 우리는 성전에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나라 약속을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모였습니다. 제가 오늘 성전이야기를 거꾸로 돌아가면서 설명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성전은 이렇게 지어졌습니다. 오늘 열왕기의 이야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통일국가로 만들어준 최초의 왕이 다윗 임금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임금이나 같습니다. 출애굽 한 다음에 혼란이 있었죠. 각자 흩어지고 싸우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하나의 나라로 통일시킨 사람이 다윗임금입니다. 통일 왕. 다윗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한테는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왕만 되게 하지 마시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성전도 제 손으로 짓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다윗 너에게는 내가 축복을 주되 통일까지만 축복 주노라. 통일 이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 건축은 다윗의 손을 벗어나 너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주겠다. 하나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통일 하느라고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다윗의 손에서 피가 너무 많이 묻었다. 그 손으로는 나의 거룩한 성전을 짓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기대를 넘어서지만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하나님의 것을 맘대로 맡기시지는 않습니다. 다윗이 훌륭하지만 훌륭한 다윗에게는 통일왕국의 지도자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는 통일왕국 다음에 펼쳐질 신앙의 나라. 통일된 다음에 신앙이 아름다움으로 승화하여 문화와 예술이 찬란하게 펼쳐질 그 나라는 미안하지만 다윗의 손이 아니고 그 아들 솔로몬에게 맡겼습니다. 용맹 대신 지혜의 왕. 피 묻히는 싸움대신 아름다운 문화를 즐기게 하는 왕. 그래서 솔로몬에게 그런 일을 맡기고 하나님의 성전을 맡기십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여 나라를 부강 시키게 하는 책임은 다윗에게 주었고 창세기 기록대로 하면 마지막 날 하나님도 쉬고 인간도 쉬고, 축제가 벌어지고 즐거움이 만끽되는 날 안식일 날의 축제는 솔로몬에게 맡겼습니다. 솔로몬이 그래서 성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해서 만사를 다 맡기시지는 않습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만큼 하나님이 계획하신 만큼 사람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만들고 나서 하나님이 오늘 축복의 구절이 오늘 읽어드린 열왕기상에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모신 지성소를 성전에 만들었습니다. 성전 안쪽에 지성소를 만들어놓고 당신께서 모세에게 준 율법을 담은 언약궤를 지성소에 모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언약궤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 돼서 이 땅에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언약궤를 보며 당신이 거기 계심을 믿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쟁터에 나가도, 어디로 이사해 나가도, 언약궤만은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가지고 다녔습니다. 언약궤 속에 계신 하나님 당신이 언약궤를 통해서 우리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시옵소서. 성전에 올 때마다 지성소에 보관된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주춧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히 받았습니다. 성전에 오는 모든 기도하는 사람들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언약궤를 통해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전의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언약궤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산 증거가 되셨는데 솔로몬의 고백은 당신이 언약궤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말이 히브리말로 임마누엘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은 높은데 계셔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 약하고 너무 죄를 많이 지었고 이스라엘도 죄를 지었고 하나님은 그런 방식대로 통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성소에 앉아계신 방법으론 이스라엘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성소를 깼습니다. 하늘에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율법으로 온 게 아니라 직접 사람으로 오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게 아니고 지성소에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이 되서 우리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사셨고 우리를 고쳐주셨고 함께 우셨고 함께 웃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상징적 행위 하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 죄를 다 사했다고 했을 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열었다고 하셨을 때 그때 상징적인 사건이 뭐냐 하면 언약궤를 모셨던 솔로몬이 만든 성전에서 지성소에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갈라진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졌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이제는 높은데 계신 하나님으로 우리와 만나지 않고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육과 육이 만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방식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성전 휘장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한테 하나님이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믿게 되었고, 부활을 통해서 믿게 되었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대들과 항상 함께 있겠지만 이제는 언약궤 방식으로는 항상 같이 있지 않겠다. 성령을 보낸 대신 성령을 통해서 나는 그대들의 가슴속에 있고 싶다. 그대들의 마음 중심에 있고 싶다. 그대들 마음을 돌이켜 보아라. 그대들 가슴에 내가 항상 함께 있겠다. 단 그대들도 내 가슴에 있어야한다. 오늘 우리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어떤 방식으로 계십니까. 여러분 가슴속에 하나님을 다 안고 오셨습니다. 이 가슴이 상징적으로 십자가로 표현합니다.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모습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 성전 휘장이 찢겨지고 직접 만날 수 있는 하나님. 제 가슴속에 계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우리가 오늘 모시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뭡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와서 모신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삶의 이야깁니다. 누구의 얘기를 듣던 간에 모든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모은 것을 역사라 이름 합니다. 역사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가정의 이야기, 나라의 이야기, 우리 사회이야기, 저 개인의 이야기 하나하나를 다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내 가정이 하나님과 내 나라가 함께 만드는 우리들의 이야기 이것이 진실 된 역사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올 때 하나님이 이곳에 계셔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내가 만든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일이 예배의 핵심입니다. 말씀, 찬양, 기도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서로 나눕니다. 오늘 오셔서 하나님과 오순도순 이야기 하셔야 됩니다. 중보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가실 때 무슨 이야기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예배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란 단어이며 또 하나는 섬김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외국 말씀 양해하십시오. 영어의 worship 그러면 별로 의미가 없는 번역인데 독일 말에 (고테스딘스트) 그렇게 말합니다. 딘스트라는 것은 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신다. 섬김 받은 우리는 그 섬김이 너무 감사하여 다시 하나님께 섬기는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 이 두 가지가 응축된 것이 예배입니다. 다른 말로 번역해보겠습니다. 섬긴다니까 너무 고상하고 거창하지요. 요즘 영어로 제가 service란 말을 쓰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한테 service 반드시 행하신다. 받아보셨습니까? 예배가 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server하신다. 하나님의 service를 받았더니 전 너무 감격하고 고마워요 제가 하나님께 제 service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예배는 service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service입니다. 하나님의 service받아보셨습니까? 받아볼 필요가 없습니까? service 라는 말을 써서 너무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진짜로 하나님은 우리한테 service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사라고 하십니다. 값없이 젖과 꿀을 사라.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내가 피와 몸을 바쳐 그대를 server할 테니 죄수까지 구해 줄 테니 내 service를 받아라. 받아서 감사하면 나한테도 service 해라. 사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셨을 때 담임목사는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오셔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득 찼으니 감사합니다. 예배가 복되길 바랍니다. 근데 한편으로 하나님은 저보고 이렇게 말씀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service 안 받은 사람은 미안하지만 나중에 나오십시오. 왜? service도 안 받았는데 감사할일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service를 받고 너무 감사한 것이 있으면 감사한 마음 가지고 와서 오늘 하나님께 service에 대한 감사를 합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예배입니다. 감사 없는 삶. 혹시 살아계시면서 분노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의 service 안 받으신 겁니다. 하나님의 service는 열려있다고 합니다. 열어 놓을 테니 와서 맘대로 가져가라. 왜 인간들이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하면서 자기 혼자 해결하려고 합니까? 왜 심한 고통을 나 혼자 끌어안아야 됩니까? 오늘 승천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service를 받아라. 받고 고마우면 모여서 나와 함께 우리들의 이야기 털어놓고 하고 서로 service를 교환하자.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가 오늘 우리들의 예배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보내십니다. 이 성령을 끌어안고 매일같이 예배하면서 사십시오. 오늘 드리는 예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service는 주일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축복주신다고 시편에 써있습니다. 제가 일할 때도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service를 항상 받으시고 받는 즉시 항상 감사하시고 그것을 오늘 합쳐서 주일날 오늘 예배로 드립니다. 사실 예배드리는 날이 주일날만은 아닙니다만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이 예배의 순간들입니다. 그렇게 사시면 헤어짐의 주님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 분 그런 분이고 싶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오늘 하나님이 가져다 주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 통해서든 성령을 통해서든 이 하나님나라 맛보십시오. 기꺼이 드리겠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법궤를 통해서도 함께 하셨고요 예수님을 통해서 몸으로 함께 하셨고요 지금은 성령을 통해서 가슴으로 마음으로 얘기하신답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입니다. 그분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신다. 아니 천지창조 때도 계셨고 천지가 다 완성될 미래에도 계시고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항상 계신답니다. 단 그분은 항상 service하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service 받으십시오. 무료입니다. 결단만 필요합니다. 그 service에 우리가 감사로 응답하면 됩니다. 오늘 예배가 하나님의 service를 받고 감사로 응답하는 우리의 service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에녹의 승천/ 창5:21-24
에녹의 승천 창5:21-24 에녹은 65세에 무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는데 그는 이런 육신의 생 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히 11:5)으로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의 데려가심을 입었으니 육신으로 승천(휴거) 하였습니다. 에녹의 경건한 생활과 그가 죽지 않고 육신으로 승천하였다는 사실은 마치 거치른 사막 중에 오아시스처럼 아 름다운 역사입니다. 에녹이 자녀를 낳고 가정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니 금욕주의나 신비주의 은둔주의도 아니요 그야 말로 현실을 초월하는 고상하고 경건한 신앙 생활입니다.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오랜 역사를 지내며 살았으니 오직 에녹 한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 였으니 과연 승천할만하고도 남음이 있는 신앙입니다. 1.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을 했습니다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본문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두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은 사람과 동행하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광명을 등지고 흑암으로 정의를 등지고 지옥으로 달음질치던 때입니다. (마 7:13-14)에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서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 는 문은 좁고 길이 험하여 찾는 자가 적으니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이 좁은 길을 홀로 걸으면서 하나님과 동행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마음에 합해야 하고 흰옷을 입어야 하고 빛 가운데로 행해야 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행위를 에녹은 했다는 말입니다. 성만찬을 그린(성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주후 450년경 사람입니다. 그가 성만찬식 성화를 그리기 위하 여 1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는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모델로 택한 인물을 고르기 위하여 여러 나라 여러 교 회를 순회하였습니다. 그리다가 파리 어느 장로교 성가대장이라는 어느 청년을 모델로 택하여 주님의 형상으로 그렸던 것입니다. 그는 성화의 주인격이 주님의 형상을 그리고 만족하게 생각하고 곧 그 성화를 마친줄로 여겼으나 가룟 유다가 아직 그려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정작 가룟 유다의 형상을 그리고자 하니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 간교하고 악독 하고 철면피요 죄인의 괴수 사탄의 모습 간악한 얼굴을 그리기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가룟 유다의 모델역이 될 얼굴을 찾아 헤메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다 보니 벌써 도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해서 고민하고 파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뒷골목의 어둠침침한 죄악거리 골목길에 앉아서 가고 오는 사람의 얼굴을 낱낱이 주시하고 있었는데 때 마침 한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사람 이야말로 가룟 유다의 모델로 적격인물 임을 알아 차렸습니다. 10년간 모델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모델로 선정하고 그림을 그리는 중에 보니 그가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 사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10년전 어느날 교회에서 예수님 의 모델로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린 생각이 나서 과거를 회상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는 10 년전에 예수님의 모델이 된 평화스럽고 고귀한 얼굴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타락하여 고귀한 얼굴은 사라지고 가장 간악하고 악한 자의 대표가 될만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 거할 때는 누구 나 평화스러운 얼굴을 소유하게 되나 악을 행할 때는 악한 성품이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타락할 소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려는 자는 처음 결심하고 믿는 신앙을 끝까 지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에녹의 승천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바쁘시게 하는 믿음에 생활이었다 (히 11:5)에 \\\\\\\"에녹은 옮기 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으며\\\\\\\"라고 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생애는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생애였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믿음으로 사죄함을 받았고 믿음으로 외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에 녹은 어떤 특수한 은사와 재능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그 자신 안에 있는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영적 생활의 출발도 믿음이요 영적 생활의 최고 절정도 믿음입 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와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만 가능 합니다. 영적 생활의 최고 표준도 영적 최저 표준도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일을 죄입니다. 에녹 은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에녹과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내 언행, 심사, 사업, 일상생활을 통해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하는 것(눅 15:7), 온전한 믿음(히 11:56), 경외하는 것(시 147:11), 온전한 행실(잠 11:20), 정직한자의 기도(잠 15:8), 자비(마 11:7), 산 제사(롬 12:1), 순종(삼상 15:22), 헌금(빌 4:18), 거룩하고 깨끗함(살전 4:1-3), 복음 전파(살전 2:4), 인내(벧전 2:20) 등이니 성도들은 이 말씀을 잘 준행하며 하나 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3. 시종이 여일한 믿음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용두사미는 부당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시작할 때는 굉장한 의욕을 가지고 과대선전하며 시작하지만 나중에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회 때나 특별 기도회 때 은혜를 받고 새로운 결심으로 새 출발한다 고 하나님과 대중 앞에서 간증까지 하지마는 얼마 안가서 그만 헤이 해져 오히려 전보다도 못한 사람이 있는데 이는 시종여일치 못한 증거입니다. 심지어 상품도 처음 나올 때는 우량품으로 제조하다가 선전이 잘된 후면 처음 만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상술로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십일조 헌금을 했으면 반드시 약속 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 언제나 불변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이 꾸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루 이틀 믿고 말 것이 아니고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시종일관의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번 옳다고 시인하고 기도한 일은 시종여일 끝까지 성공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조금 어려워서 그만 두고 고난이 있다 하여 그만 두고 핍박이 있다고 힘이 든다고 그만 두면 성공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여 변치 말고 꾸준히 좁은 길로 걸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계속 하나님과 동행하며 시종여일하게 나가는 자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우리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4. 죄를 멀리하고 성결의 생활을 한 자입니다 에녹이 사는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이때는 홍수 심판 직전이므로 인구도 많았고 문화도 다양하게 발달된 동시에 물질 문명의 영향으로 벌써 이 시대는 사회가 부패하고 죄악으로 충만한 시대였습니다. 일부일처 윤리는 깨진 시대요 살인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양심이 없는 시대로 하나님 영광을 더럽히며 오직 만사를 정욕으로 살았고 그 시대 사조라고 하는 것은 성도덕의 문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를 살면서 에녹은 속화를 물리치고 시대의 사조를 거스르며 깨끗한 절개와 견고한 신앙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맹모삼천지교도 이런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에녹이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함은 종교의 힘이요 신앙의 바 른 생활입니다. 연꽃은 진흙 가운데서 아름답게 피는 것같이 오리는 탁수에서 헤엄치나 물들지 아니하는 것같이 우리 신자는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롬 12:2)에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독신생활을 하여야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거나 신부나 중처럼 은둔생활을 하여야 의로운 생활 경건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함은 잘못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가정을 가지고 사회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의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 도 현 시대를 도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적응하면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에녹은 당시의 사회 생활에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에 만사형통의 복을 받았으며 사망의 두려움을 이겼던 것입니다. 5. 모든 인생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 그를 데려 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했습니다. 이 세 상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할 것 없이 떠나고 마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떠나셨습니 다.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불가 학력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인간의 후예들은 늙지 않으려고 해도 늙고 죽지 않으려고 해도 죽는 것입니다. 이같은 길은 인간의 재능과 힘으로는 막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인은 한 손에 막대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지켰 더니 백발이 제일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하였습니다. (히 2:15)에 \\\\\\\"사람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한 여왕 「엘리자벳」은 이상한 고함을 치면서 죽었습니다. 곧 나를 한치만 더 살게 해주면 몇 백만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을 많이 죽인 프랑스왕 찰스 9세는 \\\\\\\"나는 망하였구나\\\\\\\" 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죽기 를 원치 않지만 죽음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이는 한번 죽는 것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녹은 죽지를 아니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데려 가시었으니 우리도 에녹과 같이 데려감을 당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언젠가는 떠나는데 죽어서 떠나는 것보다는 이제 불원하여 주님 재림하시게 될 것인데 그 때에 공중 에 끌리어 감을 당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곧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의 동행의 생활입니다. 6. 에녹은 죽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태어나서 죽어보지를 아니했습니다. (요 11:26)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 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에녹은 주님이 말씀하신 신앙을 가지고 늘 생활을 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저의 이같은 믿음은 너무나 귀한 믿음인 것입니다. (히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했는데 에녹은 죽지 아니하고 승천하 기를 바라면서 살았기에 승천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녹과 같은 승천의 믿음이 지금도 있는 신자가 나오기를 주님 은 요망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죽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다 구원받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고(요 11:43) 나인성 과부의 독자도 살리시고 (눅 7:14) 회당장의 딸도 살리신(막 5:41)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과거사가 아니고 현재도 죽지 아니하기를 원하십니다. (벧후 3:8-9)에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노라\\\\\\\"고 했 으니 주님은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같이 기다리시는 것은 사망으로 망하지 않고 다 구원받아 살기 위하심 이라고 생각합니다. 7. 남보다 의로운 생활을 한 증거입니다 (롬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죄 를 범한 자의 보상은 사망입니다. 반면에 의로운 생활자의 상급은 구원과 영생입니다. 이로 보건대 에녹은 언제 나 의로운 생활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고전 15:55-56)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서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죄가 사해지면 사망은 쏘는 것을 상실해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죄가 처리되지 않은 곳에서는 사망이 유독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건대 에녹은 죽지를 아니했으니 죄와는 관계없이 지내면서 하나님만 향하 는 생활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오늘 모든 성도 취할 자세이며 태도입니다. 에녹과 같이 의로운 생활을 하면서 주님에 섭리만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에녹은 죽지 아니하고 승천을 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에 사는 성도들은 예수님 재림하시면 에녹과 같이 승천하 게 되며 그전에 세상을 떠나면 부활하여 승천하게 되는데 이 때에 이와 같은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서는 재림하시는 주님을 대망하면서 성결의 생활을 그날까지 잘하는 것뿐입니다.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2:1-2,6-14/ 정용섭 목사/ 대구샘터교회/ 2010-06-27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2:1-2,6-14 엘리야와 엘리사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름이 가장 크게 알려진 예언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주로 말씀을 선포했다면 엘리야는 기적적인 사건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유별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갈멜 산에서 있었던 바알 예언자들과의 싸움입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아합이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통치하던 때입니다. 아합은 바알을 섬기는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은 뒤로 아주 열심히 바알을 섬겼습니다. 이세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아합은 엘리야와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비판하는 엘리야를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갈멜 산에서 여호와의 예언자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 450명이 일전을 벌였습니다. 장작더미 위에 송아지의 각을 떠서 올려놓은 후 각자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불러 그 번제물을 태우게 하는 싸움이었습니다.(왕상 18장)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신을 불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모든 걸 태웠다고 합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엘리야에게는 많이 일어났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그런 일들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묘사로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왕하 2:1) 여기에 등장하는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입니다. 엘리사도 엘리야 못지않을 정도로 영적 카리스마가 넘친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이제 죽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벧엘 성지로 가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제자인 엘리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여기에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왕하 2:2a) 사람은 죽을 때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이들을 불러 모읍니다. 유언도 하고, 마지막 정도 나누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엘리야는 달랐습니다. 제자마저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좀 다릅니다. 죽음 앞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엘리사는 스승의 말과는 반대로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왕하 2:2b) 이런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6절에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엘리야는 어쩔 수 없이 엘리사를 데리고 죽을 장소로 갔습니다. 마침 요단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엘리야는 겉옷을 벗어 말아서 물을 쳤습니다. 그러자 물이 갈라지고 마른 땅처럼 되었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약성경의 역사를 어느 정도 공부한 분이라면 이와 비슷한 사건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출애굽 당시에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홍해 위로 내밀자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처럼 되었고, 가나안 입성 당시에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서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요단 물을 발로 밟자 요단강이 갈라졌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는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고대인들에게는 자연스러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꽃과 나비가, 그리고 토끼와 새들이 서로 대화하는 동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대인들은 이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어떤 능력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겠지요. 어느 쪽이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요단강을 마른땅처럼 지나갔습니다. 그 순간에 이 두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엘리야는 바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마치 코끼리가 죽을 때 자리를 찾아간다는 말처럼 그는 그곳을 향해서 가는 중입니다. 엘리사는 이제 곧 하늘처럼 따르던 스승을 잃어야할 절박한 순간입니다. 앞으로 스승이 없는 현실을 자신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분단된 조국 이스라엘의 상황은 여전히 암담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이런 상황을 뚫어보고 있었을 겁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유언을 하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자신이 죽기 전에 무엇을 도와주랴, 하는 말입니다.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왕하 2:9) 당시 예언자 전통은 성령의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 영은 엘리야의 평생을 관통하면서 놀라운 일을 많이 행하게 했습니다. 제자가 이런 성령의 능력을 스승에게서 이어받겠다는 말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능력을 이어받으면 그때서야 제자의 권위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능력을 이어받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고 대답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할지 아닐지 엘리야조차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약속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대로 전수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한 가지 단서를 엘리사에게 일러줍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왕하 2:10) 스승의 죽는 순간을 보는 제자에게 성령의 능력이 전수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엘리야가 혼자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했지만 엘리사가 굳이 함께 따라가겠다고 한 걸 보면 어쩌면 엘리사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임했던 성령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들고 돌아오는 길에 요단 물을 내리치자 물이 갈라졌다고 합니다.(왕하 2:14) 불과 바람 엘리야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본문 11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속 길을 가는 중에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서 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 장면은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아마 이 장면을 주제로 하는 성화도 많을 겁니다. 엘리야는 보통 사람들처럼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을까요? 구약인물 중에서 두 사람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엘리야고, 다른 한 사람은 에녹입니다. 히 11:5절은 에녹이 죽지 않고 옮겨졌다고 말합니다. 실제 에녹에 대한 이야기인 창 5:24절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다고만 말하지 죽지 않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갔다는 말은 곧 죽었다는 말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에녹에 대한 창세기의 설명을 오해했거나 아니면 히브리서의 진술이 다른 뜻이었을지 모릅니다. 엘리야 이야기도 그와 같습니다. 그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무조건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다고 보는 건 정확한 해석이 아닙니다. 성서기자는 엘리야가 죽었다는 사실을 당시의 문학적 방식으로 묘사한 것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입니다. 죽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성서기자는 엘리야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것처럼 착각할 수 있도록 이 장면을 묘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서기자가 독자들을 일부러 착각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당시의 이야기 방식으로 그 사실을 전한 것뿐입니다. 착각은 독자들의 잘못입니다. 성서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특별한 능력에 대한 강조입니다. 엘리야에게는 죽는 순간까지 이런 능력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불수레와 불말과 회오리바람으로 문학적인 옷을 입었습니다. 불과 바람은 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임재를 경험하는 특별한 통로였습니다. 행 2:1-4절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도 불과 바람이 매개로 작용했습니다. 불과 바람이 그들에게 이렇게 특별한 현상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고대인들의 눈으로 불을 보십시오. 불은 모든 물질을 근원적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입니다. 숲도 불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금광석에서 금을 제련해낼 수 있는 힘도 불에서 나옵니다. 불은 열과 빛을 냅니다. 불은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불이라는 현상에서 고대인들이 신적 능력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람도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생명을 가능하게 하도, 거둬들이기도 하는 능력이 바람에게 있습니다. 바람은 곧 호흡이기도 합니다. 숨을 못 되면 죽고 숨을 쉬면 삽니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바람, 숨, 공기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현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람을 영이라는 뜻의 ‘루아흐’라고 불렀습니다.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열왕기하 기자는 엘리야라는 특출한 예언자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성령의 능력이, 즉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다는 사실을 불과 바람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묘사했습니다. 성서기자가 단순히 엘리야에게 임한 놀라운 능력만을 전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엘리야의 운명에서 이미 이런 사건들은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굳이 죽음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모세 같은 사람은 엘리야와는 정반대입니다. 홍해를 가를 정도로 영적인 카리스마가 뛰어났던 모세는 죽을 때 평범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신 34:5) 그를 무덤에 장사지냈지만 아무도 그 무덤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이 모세의 죽음을 크게 기념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마지막이 평범했다고 해서 그가 엘리야보다 더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엄격하게 따지면 이렇게 죽거나 저렇게 죽거나 그것 자체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번듯한 후손이 많아서 그럴듯하게 장례를 치르고 호화판 무덤에 묻히거나, 아니면 혼자 초라하게 죽어서 수목장으로 처리되거나 어떤 쪽이든지 죽음 앞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이 드라마틱하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에 호기심을 두지 마십시오. 그 장면을 더 세심하게 보십시오. 불수레와 불말들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불과 바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이제 불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불이 되었고, 바람이 되었습니다. 저도 살만큼 살다가 불이 되고 바람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불과 바람이 된다고 해도 억울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 큰 상급을 받아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불과 바람이 된다는 사실이 몹시 불편하게 들릴 겁니다. 그런 불편한 생각은 모두 인간 중심에서 나온 겁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에게 철저하게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낯설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가 직접적으로 불과 바람이 된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불과 바람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은유적 표현입니다. 불과 바람이 된다는 말은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 생명의 근원을 실증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서 무엇으로 변하든지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불과 바람으로 변형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일치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멀게 느껴지나요? 우리가 부활하여 다시 만나 즐겁게 살아갈 것을 달콤하게 꿈꾸고 있는 여러분에게 찬물을 끼얹는 설명처럼 들리시나요?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여러분들에게 죽음 이후의 삶이 허무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한 조건들을 머리에서 지워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참된 영적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처럼 우리의 마지막 순간도 불과 바람이 사로잡을 겁입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하늘로 올라갈 겁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죽는 순간만 기다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엘리야는 세상을 떠났지만 엘리사는 세상에 남아야 합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 방식으로 역사는 종말까지 진행됩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은 이제 세상에서의 책임을 벗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사람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떠나면 그의 제자가 그 사명을 이어받아야겠지요. 기독교 역사도 이런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의 뒤를 이어서 속사도들이, 그리고 교부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뒤로 수천 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이끌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역할에 따라서 역사는 달라집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어 세상에 살아남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할 엘리사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역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근거도 성령강림 체험이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일어났던 기적적인 사건과만 연결시키지 마십시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삶 전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영적 촉수에 분명하게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의 과도한 물질적인 욕망이 줄어들고 영적인 갈망이 강렬해집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능력에 눈이 뜨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그의 통치가 분명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염려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바로 예수님의 영이, 그 부활의 영이, 창조와 종말의 영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엘리야의 승천(1)/ 영광의 피날레(finale)/ 왕하2:11
엘리야의 승천(1)/ 영광의 피날레(finale) 왕하2:11 우리가 사는 세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 중 하나가 ‘우주시대’라는 말입니다. 드높은 우주과학의 만세소리들이 합창하는 시대입니다. 1960년 7월 2일 미국 정부의 건의와, 그로부터 27일 후 미 항공우주국(NASA)의 아폴로 발사계획 발표 그리고 1961년 5월 25일 케네디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시발로 머큐리(Mercury) 위성 계획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69년 7월 20일에 아폴로 11호를 발사하여 암스트롱, 알드린, 콜린스 등이 달 정복의 첫 개가를 올렸습니다. 그에 앞서 아폴로 계획을 추진하여 제4호에서 12호까지의 시험비행을 성공리에 마친 이후였습니다. 그 후 1972년 4월 16일에는 다섯 번째인 16호를 발사하여 성공하였고, 다시 17호까지 발사계획을 세웠습니다. 소련에서도 무인 우주선을 달에 착륙시켰습니다. 그리고 유인위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일본, 중공, 서독,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들이 우주계획의 경쟁에 돌입하였습니다. 참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이상할 정도입니다. 사람이 달나라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우주시대라고 부릅니다. 우주선인 인공위성을 타고 공간세계를 왕래하는 사람을 우주인이라 부르면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영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야흐로 우주여행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하면서 달을 그리워하고 명상에 잠기던 이태백의 시정(詩情)이나, 저 희랍의 시인들이나, 역사상의 유명한 문인들의 감상들은 멀리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우리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죽음을 보지 않고 세상에서 데리고 갔다는 기록입니다. 그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산채로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갔다고 하였습니다(창 5:22, 24). 그는 가정을 가지고 자녀를 낳으며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에는 선지자 엘리야를 하나님이 회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옮겼다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왕하 2:11). 그리고 신약에 보면 바울은 계시를 받기 위해 삼층천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2:2). 그렇다면 성경은 벌써부터 우주시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녹이나 엘리야 그리고 바울이 우주인(?)이 아니었던가? 엘리야는 요단강가를 우주발사기지로 하고, 하나님의 로케트인 회리바람을 추진로케트로 하고, 불수레와 불말들이 끄는 우주선에 올라 대기권을 향해 높이 치솟아 하늘나라의 새 세계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분명히 엘리야는 사람이 조작한 인공위성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사용하시는 신공위성을 타고 대기권을 넘어 하나님의 세계까지 비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은 열왕기하 2장 1절에서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의 산물이나 방법이 전혀 아닌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이고 초물리적인 방법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왔던 사람들 중에 에녹과 엘리야는 신공위성의 우주인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장래의 승천사건을 예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승천! Ⅰ.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실 때’였습니다. 열왕기하 2장 1절에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2장 2절 중에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그때는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영광의 끝맺음을 하게 하였을 때입니다. 말하자면 엘리야가 받은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 끝났을 때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광의 피날레(finale)였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의 시대를 끝맺게 하실 때였습니다. 1. 그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를 알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시느니라…」(왕하 2: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만사에 때가 있게 하였습니다(전 3:1). 엘리야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시는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발탁을 받고 인생의 파란곡절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를 세상에 더 머물게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하늘로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절차를 밟지 않고 산채로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찰머(Chalmers)라는 사람의 평생소원은 60살을 살고, 60-70년 사이를 안식년으로 보고 그 어간에 세상을 떠나 인생의 피날레를 장식했으면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보니페스 Ⅲ세는 ‘여우처럼 와서 사자처럼 다스리고 개처럼 죽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불처럼 뜨거웠고, 담대했고, 끈덕졌으며, 그의 입에서 토해진 말은 등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불처럼 와서 불처럼 역사(役事)하다가, 이제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비행에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장하기 짝이 없는 피날레였습니다. 아름다운 피날레였습니다. 그는 자기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승천할 것을 예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시느니라…」(왕하 2:2)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영감의 사람은 예감이 있습니다. 사건감각과 시대감각과 시간감각에 예민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영광스러운 홈 컴잉(Home Coming)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나를 길갈로, 벧엘로, 여리고로,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고 연발하고 있습니다(왕하 2:1, 2, 4, 6). 2. 하나님은 그에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길갈로 보내고(왕하 2:1), 벧엘로 보내고(왕하 2:2), 여리고로 보내고(왕하 2:4), 요단으로 보내셨습니다(왕하 2:6). 마지막 엑소도스(Exodus)의 준비였습니다. 그래서 승천 직전에 그는 자신이 경영하고 있던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에 있는 선지학교(신학교)를 마지막으로 순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이 세상을 떠나 영광의 승천을 하기 전에 그의 사역지를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선지생도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며 축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선지학교를 세웠던 장소들은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는 곳들이었습니다. ‘길갈’은 요단 건너편 첫 거점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처음으로 유월절을 지키고, 마지막으로 만나를 먹었던 곳이었습니다(수 4:19, 5:10-12). 벧엘은 저 유명한 저들의 조상 야곱이 사닥다리 계시를 받았던 곳이었습니다(창 28:10-22). 여리고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 요단강을 건넌 후 첫 승리를 맛본 곳이었습니다(수 3:, 6: ). 또 요단은 바로 엘리야 자신이 승천하고 엘리사에게 마지막 진리운동을 계승하던 장소였습니다(왕하 2:6-11). 이 여러 둥지에서 진리를 배우던 당시 선지생도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선생 엘리야를 하늘로 취하여 가신다고 하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3.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그의 진리 운동을 엘리사에게 계승하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종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그 시점에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떠나는 엘리야를 놓치지 않고 결사적으로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까지 하면서 자기 선생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고 소리쳤습니다(왕하 2:2, 4, 6). 그래서 두 사람은 요단을 건너기까지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요단강가에서 엘리야는 겉옷을 취하여 물을 쳤습니다. 그때 물이 이리저리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마른 요단강을 발로 밟으면서 육지처럼 건넜습니다(왕하 2:8). 이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그의 선지자직의 권위요 상징이었습니다(왕상 19:19). 그때 요단강 물이 갈라진 것은 그가 하나님의 참 선지자임을 입증해주는 하나님의 자기 능력의 표징이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는 그의 지팡이를 사용하였습니다(출 14:16, 21).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는 하나님의 법궤가 선행하였습니다(수 3:13). 그렇다면 모세의 지팡이, 여호수아가 앞세운 법궤, 엘리야의 두루마기는 그 자체에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도구(수단)였음을 보여줍니다. 이 기막힌 장면을 선지생도 50명이 멀리서 친히 목격을 하고 있었습니다(왕하 2:7).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너온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말을 합니다.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왕하 2:9)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세상의 영화와 부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구했습니다.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이는 장자가 받는 배(倍)의 기업을 뜻합니다(신 21:17). 엘리사는 다른 선지생도보다 배나 더한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엘리야가 남겨두고 가는 여러 선지학교 교육에도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시대, 자기에게 부여된 사명수행에도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시대의 세상과 접전하고 승리로 이끄는 데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자기 선생 엘리야가 그의 시대를 승리로 이끌었던 결정적인 비결이 하나님의 영감,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 선생이고, 그 제자가 아닌가? 정말 멋있는 진리운동의 계승이 아닌가? 영에서 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계승이 아닌가? 그는 학위를 구하지 아니하고 영감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육을 구하지 아니하고 영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보이는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구하였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왕하 2:10)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갑절의 영감은 엘리야 자신이 주장할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요구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왕하 2:10). 하나님이 엘리야 자신을 하늘로 옮기게 되면, 엘리사에게도 갑절의 영감을 주실 것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는 엘리야 자신의 믿음이었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사실상 신공위성의 발사기지가 되는 요단 건너편 강가에 섰습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면 가나안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통 요단강을 죽음의 강에 비유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면 천국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엘리야는 이 요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습니다. 그는 요단강을 가르고, 세상에서 그를 갈라놓을 하나님의 불수레와 불말들이 대기하고 있는 순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불수레와 불말들은 엘리야를 실을 우주선이 되는 것입니다(왕하 2: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주일에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 후 40일이 지난 다음에 하늘로 산채로 올리움을 당하신 예수의 승천을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은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의 사람, 곧 선지자로 발탁(소명)이 되어 장한 인생, 멋진 인생, 선지자로서의 인생을 살다가 이제 하나님에 의해 죽음없이 산채로 하늘로 옮겨지고 있는 엘리야의 영광스러운 최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신공위성으로, 영광스러운 우주비행으로 피날레를 장식해 주려고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인생을 최종적으로 카운트 다운 하는 장면을 보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회리바람을 추진로케트로 삼아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로 날을 엘리야는 끝까지 영광스러운 맺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최후를 준비했습니다. 엘리야도 이 기막힌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야로 하여금 마지막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사명지를 순방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행하던 진리운동의 사역을 엘리사에게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요단강을 겉옷으로 가르게 하였습니다. ‘요단강아, 내가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길을 내어라.’고 소리라도 치는 듯한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병사들이 파도 중에 떨고 있을 때 ‘대왕이 타고 있는데 무엇을 떨고 있느냐?’라고 호령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 병사들에게는 파도와 싸울 수 있는 기쁨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요단을 건너야 하나님이 진행시킬 우주비행이 가능함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기쁨을 요단강 물을 가름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신공위성을 타고 이륙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누가 하나님께로 올라갈 사람인가? 마지막까지, 최후순간까지 일하는 사람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99%의 땀과 1%의 영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일이란 시간으로 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성취되었는가를 갖고 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웨슬레는 이런 생활신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모든 방도로, 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할 수 있는 때에,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자.’라고 하는 생활신조였습니다. 이 세상에 자리잡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서 이 지구까지 발사하신 하나님의 신공위성입니다. 그 발사추진 로케트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입니다(요 3:16).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세상에 와서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남겨두고, 산채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언젠가 하늘로 영화롭게 승천할 신공위성입니다. 지금은 개인적 종말을 맞이한 영혼들이 요단을 건너 하나님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교회의 우주적 승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영과 육이 영생체, 불사체의 몸으로 완전히 승천할 약속입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한 영화로운 세계입니다. 이 엄청난 미래의 약속을 믿고 즐기며 세상을 살아가는 자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 아 멘 -
엘리야의 승천(2)/ 영광의 피날레(finale)/ 왕하2:11
엘리야의 승천(2)/ 영광의 피날레(finale) 왕하2:11 우리는 보통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그것이 어디에서(공간), 언제(시간) 일어났는가를 생각하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차원과 시간의 관계라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인류과학은 보통 3차원의 세계를 궁구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발표와 함께 4차원의 세계까지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1차원이라 할 때는 점(¶)으로 된 세계입니다. 이것은 짐승들의 생활영역에 속하는 저속하고 에고이스틱한 생활을 말합니다. 이것은 직선의 차원을 말합니다. 2차원의 세계란 선으로 된 평면세계입니다. 길이와 넓이가 있는 평면차원입니다. 왔다가 갔다가 먹고 일하고 자는 육에 속한 삶의 반복을 말합니다. 땅의 범주에 속한 삶입니다. 길이와 넓이의 영역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면의 차원입니다. 3차원의 세계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길이와 넓이에 높이와 깊이를 가미한 입체생활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우주공간을 날아갑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이상세계, 고상하고 심오한 것을 느끼고 추구합니다. 세상적으로 문명인, 예술인, 과학인들의 모험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계의 사모함이 여기에 속합니다. 말하자면 입체의 차원입니다. 높이와 깊이의 차원입니다. 4차원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 위에 시간까지도 가미한 차원입니다. 더 확실히 말하면 시공세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사는 삶의 추구를 말합니다. 성경은 이 4차원의 세계를 하나님의 초자연적 세계라고 합니다. 세상과 사망을 호령하면서 하늘로 승천할 마지막 날의 영화로운 교회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주과학은 과학의 힘으로 이 4차원의 세계를 해결해줌으로 인류에게 영생을 약속하겠다는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스꽝스러운 바램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4차원의 세계를 체험하는 성경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Ⅰ. 하나님 자신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신 일(승천)이라고 하였습니다. Ⅱ. 하나님의 불수레와 불말들 그리고 회리바람으로 승천시켰습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엘리야가 영광의 하늘로 올리움을 당하게 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에 들려 하나님의 나라로 영광의 개선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껍질을 벗고, 한 많은 세상을 뒤로하고, 승리의 개선을 한 셈이 됩니다. 우주인 암스트롱이 달의 첫 착륙을 위하여 하늘을 날 때 바하, 헨델, 베토벤의 노래를 들으면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보르작의 ‘신세계를 위한 교향곡’과 호프만의 ‘달로부터의 음악’을 틀어놓고 들으면서 우주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가는 영광의 개선을 하면서 승리의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불수레와 불말들 그리고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불수레와 불말 그리고 회리바람의 정체가 무엇인가? 1. 불수레와 불말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신공위성입니다. 여기 나타난 ‘불수레와 불말들’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의 표입니다. ‘불’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상징하였습니다. 불수레와 불말 역시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호위하는 천군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 중에 보면 엘리사가 아람군대의 포위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그의 종을 위하여 기도할 때도, 그 응답으로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하였습니다(왕하 6:17). 이런 경우 그 불병거와 불말들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와 그를 호위하는 천군들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불수레와 불말들은 하나님 자신의 권능과 보호와 안전과 인도를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실 때 불로 나타나셨음을 봅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이사야도, 에스겔도(출 3:. 24:17, 신 9:3, 사 29:6, 겔 1:4, 27, 시 18:8)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아예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체험했습니다. 이런 경우 그 불은 저들을 적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와 안전과 인도의 힘이었습니다(출 40:38, 출 13:21-22). 그렇다면 엘리야 승천 때 나타난 그 불수레와 불말들은 그의 승천을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종의 신공위성입니다. 그는 그 불수레와 불말들 속에서 불타지 않고 안전보호를 받으면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인공위성의 우주선(아폴로의 경우)은 그 부속품이 자그만치 560만 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99.9999%의 안전을 위해서 5개 전문 공장에서 세밀한 테스트를 거쳐 제작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공위성이란 문자 그대로 인간두뇌의 공작품입니다. 옛날 임금들은 말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행차하였습니다. 이것은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로케트를 상징하는 엔진이 달린 승용차를 타고 행차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신앙의 왕이요 진리의 투사였던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수레와 불말들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개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부속품이나 복잡한 기계장치나 안전한 우주복 따위가 전혀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인 산물, 신공위성인 불수레와 불말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날고 있는 것입니다. 2. 회리바람은 하나님의 로케트 곧 전능이었습니다. 보통 우리가 아는 힘 가운데는 인조력이 있습니다. 자연력이 있습니다. 또 무력, 필력, 금력, 지력 등이 있습니다. 베이컨은 ‘지식은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헌트는 ‘인내와 온유가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여 하늘을 치솟아 오르고, 별나라 달나라의 신비를 찾아 헤매는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번개를 진정시키고, 바위를 부수고 있습니다. 원자의 숨은 힘을 이용하여 TNT 백만톤의 3배의 파괴력을 가진 원자탄, 수소탄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인간들은 세계를 정복하여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식물계, 동물계, 광물계, 지하, 수중, 지상, 곤충세계의 법을 타개하여 그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불멸의 말을 글로 옮겨 오랜 세대에 남깁니다. 실로 놀랄만한 인간 힘의 혁명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이 달나라에 갔다오는 우주시대를 맞으면서, 그 무거운 우주선을 들어올리는 데에는 새턴 로케트의 추진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선에 사용한 강력한 로케트는 125만 파운드의 추진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 추진단계는 1단계, 2단계, 3단계를 거쳐 우주선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습니다. 실로 가공할만한 사람들의 걸작품들입니다. 사람의 힘, 지식의 힘이 인력(引力)의 법칙을 이기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세기는 힘의 세기입니다. 힘의 대결, 힘의 균형 등 힘이 과시되는 시대입니다. 우주인들이 달나라에 올라간 것도 로케트의 힘입니다. 저 미국 케이프 케네디에서 이륙하는 우주선은 새턴 V호 로케트 힘으로 거대한 총탄처럼 하늘로 올라갑니다. 역사 이래로 사람들이 하늘로 날고 싶은 욕망은 그동안 인력(引力)이라고 하는 장벽 때문에 좌절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해결해 준 것이 로케트입니다. 727보잉제트기가 인천국제공항을 뜰 때도 보십시오. 네 개의 제트엔진이 폭음을 내면서 활주로를 달리다가 그 커다란 쇠붙이가 새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들은 그리고 독수리는 아무런 로케트장치도 없이 창공을 치솟고 있음을 봅니다. 문제는 엘리야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로 우주비행을 했는데, 그를 하늘로 들어올린 힘은 사람의 작품으로 만든 로케트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인력이 아닌 신력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엘리야를 이 세상에서 하늘로 들어올린 힘은 회리바람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사용하신 폭풍이었습니다. 신공로케트였습니다. 여기 회리바람이란 단어 ‘뻬쎄아라’(hr:[;S]Be)는 가운데를 의미하는 단어 ‘베(be)’와 회리바람이라는 단어 ‘쎄아라(hr:[;S])’의 합성어입니다. 그 뜻은 ‘난폭하게 흔들어댄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요동이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강풍, 폭풍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이 회리바람을 하나님의 권능을 표시하는데 사용했습니다(욥 37:9, 38:1, 겔 1:4). 그의 파괴력(시 58:9, 잠 1:27, 호 13:3, 단 11:40, 슥 7:14), 신속성(사 5:28, 66:15, 렘 4:13), 하나님의 진노(렘 23:19), 형벌(겔 30:23) 등을 상징하였습니다. 본문 성경에는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불수레와 불말들이 이끄는 신공위성(우주선) 속에서,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회리바람의 추진력을 받으면서 하늘로 들리움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용하신 회리바람의 추진력을 받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회리바람이라고 하는 로케트의 추진력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승천의 전체 영광을 불수레와 불말들 그리고 회리바람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초점은 인력이 아니고 신력입니다. 만유인력이 아니고 신유인력이었습니다. 3. 엘리야가 간 곳이 어디인가? 여호와의 불수레와 불말들 그리고 여호와의 회리바람이 엘리야를 싣고 밀어부친 곳이 어디일까? 성경에 ‘승천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두말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바람이 그를 하늘로 밀어부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유인력으로 그를 하늘로 끌어당긴 것입니다. 역시 볼 수 있었던 승천이었습니다(왕하 2:12, 15). 공개적 승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적적 승천이었습니다. 불가항력적 승천이었습니다. 4. 엘리야의 승천은 성도 승천의 예표입니다. 예수 부활은 성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 예수 승천은 성도 승천의 예표였습니다(행 1:11, 살전 4:17). 엘리야 승천도 바로 그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야의 승천은 우리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줍니다. 1) 엘리야의 승천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엑소도스(탈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고 살아가지만 우리에게 임할 죽음의 때는 아무도 모르고 홀연히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소리없이 문을 두드립니다. 불수레와 불말과 회리바람은 홀연히 엘리야에게 다가와 그를 태우고 이 세상에서 하늘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2) 그것은 불가피하게 임하는 엄숙한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 엘리사와 엘리야를 떼어놓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을 격하고…」(왕하 2;11)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남겨두고 엘리야만 불수레에 싣고 회리바람으로 하늘로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임하고 있는 엄숙한 이별의 순간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홀연히 임할 죽음은 우리를 세상에서 떼어놓고 말 것입니다. 3) 승리로 가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떠남이 결코 슬픔이나 절망이나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개선임을 보여줍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진 엘리야의 죽음만이 승리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 그 영혼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천국)으로 들어가게 되고, 마지막날 부활을 약속받은 모든 신자들의 마지막은 확실히 승리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4) 확실히 천국이 실존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사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였습니다(롬 8:34). 바로 엘리야가 회리바람의 추진력에 의해 올라간 장소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입니다. 결코 상상의 세계가 아닌 실존의 세계입니다. 바로 오늘 신자들이 이 천국의 실존을 믿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보증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5: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1차원의 세계를 사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것은 비이성적인 동물들의 세계입니다. 사람은 결코 2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만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먹이를 위해서 움직이는 평면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만도 아닙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 말하자면 깊이와 높이의 이상세계와 정신세계인 3차원의 세계를 추구하는 피조물입니다. 거기에다 사람은 그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영원화 하고 싶은 4차원을 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영원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에녹이 승천하고 엘리야가 승천한 세계입니다. 이 4차원의 세계를 벗어나면 5차원(?)의 세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세계, 영생세계라고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결코 인류의 지식이 이 세계를 책임지고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가 한결같이 염원하고 동경하는 영생문제는 예수님만이 만족스럽게 대답해주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였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하였습니다. - 아 멘 -
엘리야의 승천(3)/ 낮은 몸, 영광의 몸/ 왕하2:11
엘리야의 승천(3)-낮은 몸, 영광의 몸 왕하2:11 Ⅰ. 우주인 랑데부 우리가 사는 시대에 와서 과학문명이 낳은 걸작 중에 하나는 이른바 우주시대를 출생시킨 것입니다. 사람이 달나라를 갔다오는 일로 인하여 마침내 우주과학은 드높은 만세소리를 부르게 된 것입니다. 미·소 양대국은 우주인 탄생과 함께 닉슨 대통령의 소련방문을 계기로(1972. 5. 24.) 우주 공동개발을 위한 국제협정에 조인하였습니다. 1975년에는 미·소 우주선 결합, 우주인의 랑데부, 공동비행 등을 실시한다고 발표한바 있습니다. 우주과학이 낳은 작품 중 가장 스릴 있는 장면 중에 하나는 바로 우주인들의 랑데부입니다. 랑데부(rendezvous)란 두 개의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서로 만나는 것으로 궤도 랑데부(orbital rendezvous) 혹은 우주 랑데부(univacal rendezvous)라고 부릅니다. 이때 하나는 목적물(objective) 또는 타게트선(target vehicle)이 되고, 또 다른 하나는 추적선(pursuit vehicle) 또는 중간선(intercepter vehicle)이 됩니다. 현재까지 이 우주선의 랑데부가 필요한 것은 우주선의 엔진에 화학연료의 힘을 공급해주기 위함입니다. 마치 공중에서 전투 제트기가 공중 급유를 함과 같은 내용입니다. 랑데부를 통하여 재 급유와 재 비행을 위함입니다. 이때 우주비행장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미 우주 도킹 랑데부는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 랑데부 행위에 가장 중대한 것은 타게트선(목적물)과 추적선이 같은 궤도와 같은 속도를 유지하고 정확히 돌면서 연료를 공급하는 일입니다. 중대한 것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는 과학의 진보가 우주선을 타고 드높은 우주공간에서 서로 궤도를 돌면서 말을 하고, 얼굴을 보고, 또 더 나아가 우주궤도를 도는데 필요한 연료를 제공하고, 그 속도와 위치를 조종하고 컨트롤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꿈꾸는 앞으로의 우주도시 건설과 우주생활을 하게 되는 전조적 작업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지식의 산물인 과학 작업은 사람이 시간과 공간세계를 벗어나고 그 제한을 벗어남으로, 오늘 존재의 영원을 추구함에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주인 랑데부를 예언했고, 실제로 나타내주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야 됩니다. 그리고 장차 그리스도인에게 이루어질 승천과 랑데부를 말하고 있음에 크게 유의해야 합니다. Ⅱ. 그것은 낮은 몸을 벗은 다음에 받을 영광의 몸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21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낮은 몸’이 나옵니다. 이 ‘낮은 몸’은 현재 지상에 있는 우리의 몸을 가리킵니다. 가벼운 몸, 잠깐 동안의 몸, 겉사람, 후패할 사람, 땅에 있는 사람, 무너질 장막(고후 4:16-5:1)을 가리킵니다. 나약한 것, 썩을 몸, 욕된 몸, 약한 몸, 육의 몸(고전 15:42-44)을 가리킵니다. ‘영광의 몸’은 부활하신 주의 몸을 가리킵니다. 산채로 하늘로 옮기우신 그 영화로운 몸인데 예수님 자신이 재림할 때 현재의 우리의 낮은 몸이 주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신령한 몸, 불사의 몸, 영생의 몸, 말하자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받을 부활의 몸을 가리킵니다(고전 15:42-44).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몸,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몸, 다시 말하면 사망을 호령할 몸을 가리킵니다(고전 15:52-54). 그 몸은 주님 재림의 나팔 소리를 들을 때 순식간에 부활을 받아 변화될 영화로운 몸을 가리킵니다(고전 15:51). 바로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세상에서 옮길 때 받은 그 몸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불수레와 불병거 그리고 회리바람을 타고 들리움(올리움)을 받을 때 받은 그 몸입니다. 실로 영광의 몸이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그 영광의 몸은 4차원의 세계를 지나 5차원(?)의 세계에서 살 몸이 아닌가? 완전히 시공을 초월하는 부활의 실체가 아닌가? 영광의 실체가 아닌가? 주와 더불어 랑데부 할 몸! 그 몸은 바로 ‘낮은 몸’이 아닌 ‘영광의 몸’인 것입니다. Ⅲ. 변화산의 랑데부를 봅니다. 마태복음 17장 1-3절 중에 보면, 예수님은 변화산상에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면서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의 형태로 변모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뜻밖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거기에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있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 놀라운 사실을 직접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천만뜻밖의 일입니다. 기상천외한 일입니다. 이런 경우 저들이야말로 일종의 신공위성 우주인들의 랑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타게트선(목적물)인 예수를 중심하고 나타난 추적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거기에서 주님과 도킹하여 랑데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누가복음 9장 3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나타난 신공위성 우주인들의 도킹의 주제는 바로 예수 십자가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예수께 나나났다고 하였습니다(눅 9:31).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는 육신의 죽음을 보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영광 중에 사람의 모양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산채로 승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언자(선지자)의 대표였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저들이 예수께서 올라가신 변화산상에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확실한 인격적 실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서 이 세 분을 모시려고 주께 긴급제안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하늘로부터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이 놀라운 장면 앞에 엎드러져 심히 두려워하여 죽은 자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얼굴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그동안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져 버리고 오직 예수만 남은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마 17:4-8). 모세와 엘리야는 다시 하늘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기막힌 변화산의 신공위성 우주인들의 장면을 새기기를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라고 하였습니다(벧후 1:16-17). 저들이야말로 종횡무진으로 초물리적 활동을 한 사람들입니다. 홀연히 하늘에서 지구까지 날아오고, 또 홀연히 지구에서 하늘로 올라가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낮은 몸’이 아니라,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의 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사람은 신비적 영광의 피조물입니다. Ⅳ. 종말의 날에 우주적 랑데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① 언제인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17절에서 대답하고 있습니다.「주 강림하실 때」라고 하였습니다(살전 4:15).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라고 하였습니다(살전 4:16). ② 그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주적 랑데부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는 자들(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살전 4:16). 이것을 생명의 부활이라고 하였습니다(요 5:29). 이는 사실상 둘째 부활인 것입니다. 마지막 부활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죽음을 보지 않고 저들과 함께 변화된 몸, 영화로운 몸, 불사의 몸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살전 4:17). ③ 그리고 전 우주적으로 랑데부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재림과 함께 죽은 자들과 살아있는 자들이 함께 영화로운 몸을 받는 즉시 구름 속으로 끌어올림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의 몸은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당할 몸입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와 항상 함께 있을 곳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 아버지의 집입니다(요 14:1-2). 그렇다면 구원받은 무리의 상징적 총수인 14만 4천 명(계 7:4, 14:1), 곧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는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 또 다른 말로 유대인의 충만한 수(롬 11:12)와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를 합친 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롬 11:26)가 주와 함께 공중 랑데부를 이루어 아버지의 집으로 우주비행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기로 작정된 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이 예수를 중심하고 공중 랑데부를 이루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신공(神工) 우주비행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지경이야말로 5차원의 세계가 아닌가? 불사와 불멸의 세계가 아닌가? 영원의 세계, 영생의 세계가 아닌가? 무죄세계, 영광의 세계가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그 최절정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창 1:26). 하나님은 사람에게 존재세계의 모든 만물을 개발할 선지자적 능력을 주셨습니다. 다스릴 왕적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 바칠 제사장적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이 축복의 직능을 가지고 땅과 바다와 하늘을 관장할 사명을 받았습니다(창 1:28). 더욱이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할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살았을 때보다 죽었을 때 더 가치가 있고 효과가 있고 돈이 됩니다. 식물계나 동물계가 모두 그러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으면, 오히려 돈을 들여 그 시체를 버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본래 사람은 하나님이 죽지 않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도록 만든 영생적 피조물이 죽음을 만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부패였습니다. 악취였습니다. 또 그 몸은 장차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끊어져 버린 것이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다음에 육신까지 죽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는 살고자 하는 생욕(生慾)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생욕을 가지고 영생을 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우주과학이 추구하는 4차원의 세계입니다. 유전자 생명공학(DNA)이 추구하는 세포연장운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헛된 희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들의 약속에 희망과 믿음을 걸고, 불확실한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인간들의 소행은 바벨이요, 바벨 공사라고 말합니다. 영생운동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운동입니다. 영생운동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시작하신 운동입니다. 사람이 영육간에 죽음을 만난 것은 죄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결코 사람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을 인간의 지식이나 자연이 사람에게 영생을 약속할 수가 없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면 곧 영생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사망의 값을 지불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죄와 부활과 승천과 영생을 약속해 주신 일입니다(롬 4:25). 교회는 이 영생운동을 위임받은 단체입니다. 교회는 이 영생소망을 위임받은 복음의 단체입니다. 이것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교회된 전부입니다. 에녹의 승천! 엘리야의 승천! 예수의 승천! 그리고 저들의 우주 랑데부는 우리에게 승천신앙을 보장하는 소망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이 ‘낮은 몸’은 지금 탄식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8:23). 그것은 장차 부활받을 몸, 영광의 몸을 덧입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낮은 몸보다 1,000배나 더한 영광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고 사는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낮은 몸에서, 장래에는 현재보다 1,000배나 나은 공중 랑데부를 할 영생의 몸을 약속받고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할렐루야! - 아 멘 -
예수 승천과 의미/ 시68:18, 행1:6-11/ 승천주일설교/ 2014-05-17
예수 승천과 의미 시68:18, 행1:6-11 오늘 주일은 부활 후 여섯째 주일을 맞는 예수 승천주일이다. 제자들에게 마지막 지상 명령까지 주신 예수는 부활후의 40일 동안 머무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셨다. 특히 누가는 그 장소를 “베다니 앞까지”라고 밝힘으로써 예수의 승천 장소가 감람산 기슭이었음을 알려준다. 실로 예수는 이 감람산 기슭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였고, 이제는 하나님으로 부터 영광을 입고 승천하셨다. 특별히 여기에서 예수가 하늘로 들려 올림을 받았다는 수동적 표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영광을 받으셨음을 강조해 준다. 즉 예수는 인성을 입으시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겟세마네 기도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고 하늘로 올림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결코 소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가 항상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성령님을 통해 이 땅을 주관하시고 또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재림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의 도전을 물리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각자 복음의 증인으로서 맡은바 사역에 충성했듯이 오늘 우리 역시 맡겨진 하나님나라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서 예수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을 소망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가 승천하시기 직전까지 열심히 모여 주의 말씀을 듣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언제냐고 물었다. 이 질문을 볼 때 그들에게는 아직도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보는 잘못된 신앙관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는 승천한 후 성령이 오셔서 저희를 가르치시면 쓸데없는 기대는 사라지게 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때와 기한을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주께서 재림하시고 또 당신의 왕국을 완성하실 그때와 그날은 성부 하나님에게 속한 문제로서(마24:34) 인간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요 교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 자신을 방임하지 말고 오직 깨어 기다리는 마음을 견지해야만 한다. 주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책망만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특별히 “오직”이라는 접속사가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말은 바로 앞말의 부정적인 내용에서 대역전하여 긍정적인 내용으로 일대 전환함을 암시한다. 결국 이는 “때와 기한을 정녕 알려고 하지 말고 성령을 받아 주의 증인 되는 일에 힘쓰고 또 힘쓰라”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과 같이 이제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그들이 감당해야 할 임무를 저버리지 말라고 하는 교훈을 하고 계신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주의 제자 된 우리들은 자신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주의 영 곧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진정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에 힘입지 않고서는 결단코 이 땅에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 임하시면’ 비로소 증인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지상에서의 최후의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이 보는 데서 올리어 가셨다. 당신의 본연의 자리 곧 하늘 영광의 보좌로 승귀 하셨다. 바로 이 순간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며 망연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오른 이 예수를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하였다.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간곡히 당부하신 땅 끝까지의 복음 선교에 대해 열심을 다해 매진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의 재림은 단지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자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이 분부하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자에게 더 벅찬 감격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지상의 메시야 왕국에 온통 관심을 쏟고 있던 제자들의 심령을 돌이키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 제자들에게 지상 사명을 주셨다. 하나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분부이시다. 참으로 마태복음의 대 명령(The Great commission, 마28:18-20)과 상통하는 본 절의 말씀은 주님의 유언적 성격을 띤 말씀으로서 사도행전 전체의 대 주제요, 요약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의 증인이 될 전도자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정녕 복음전도의 일을 주장하는 분은 성령님이기에 성령님과 함께 하지 않는 복음전파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잘못될 수밖에 없으며 세상 세력과 싸워 이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는 복음의 증인으로 나시기 전에 먼저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또 하나는 재림의 소망을 가지고 살라는 분부이시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지상의 대 사명을 주신 예수는 마침내 지상의 모든 사역을 최종 마무리 짓고 제자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결국 인류 구속의 대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성육신하신 예수는 33년간의 생애와 부활 후 40일간의 활동을 모두 마치시고 예루살렘의 감람산에서 천사들의 호위 속에 구름을 타고 승천하신 것이다. 그런 고로 이 승천의 사실은 자신을 비하시켜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후 이제 본래의 성자의 영광을 온전히 회복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 천사들은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오르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천사의 이 말은 바로 재림의 소망을 일깨워 주는 소중한 메시지이다. 그리고 천사의 말 속에서 우리는 다른 그 누구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그 예수께서 친히 다시금 이 땅에 오신다는 재회의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승천은 그리스도인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절망의 사건이 결코 아니다. 보다 더 영광스러운 재림을 바라보도록 하는 소망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승천이 갖는 의미 몇 가지를 여기에 정리한다. 1.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고난과 비하의 자리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로서 영광과 승리의 자리로 오른 것을 의미한다(엡1:20-23, 빌2:9). 2. 성자 예수님의 승천은 이제 보혜사로서 제 3위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오신 믿는 자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 성령님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 일하실 것이다(요16:8-11). 3. 예수 그리스도 승천은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도 함께 하늘로 올리어 하늘보좌에 앉힐 것을 시사한다(엡2:6, 골3:1-3). 4. 예수 그리스도 승천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 더욱 힘 있게 아버지 하나님께 중보기도하시라는 사실을 의미한다(히4:14-16). 5. 예수 그리스도 승천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다시 말해 승천은 재림을 전제로 하는 필수적 사건으로서 올라가신 대로 이 땅에 다시 내려올 것을 시사해 주는 사건이다(행1:11). Donald W. Burdick는 “승천 없이는 재림이 있을 수 없고, 재림 없는 승천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하나님나라의 일/ 행1:1-11/ 승천기념주일설교/ 2003-06-03
하나님 나라의 일 행1:1-11 오늘이 6월 첫째 주일인데 다음주일이 교회력으로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성령강림절입니다. 그러면 지나간 목요일(성령강림절 열흘 전)이 교회력으로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승천 기념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맞는 첫 주일로서 승천기념주일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예수님의 승천기사(9절)가 아주 간략하게 한 절로 묘사되어 있고 이어서 그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의 반응(10절)도 덧붙여 있습니다. 제자들이 목격한 예수님의 승천 광경은 사람이 가히 표현할 수 없는 놀랍고 신비로운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늘로 사라진 예수님께서 혹시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흰옷 입은 두 사람(천사)이 곁에 서서 말했습니다. 11절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으로 강림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최후 심판의 날)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마 24:30, 막 13:26, 눅 21:27).” 그러므로 천사들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던 재림의 예언을 상기시켜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자신의 재림에 관한 구절이나 지금 천사들이 말한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승천하신 후로는 더 이상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는 일을 반복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강림하실 터인데 그때부터는 예수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지내실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 재림이 날로서 우리에게는 최후승리의 날이요 악한 자들에게는 최후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제자들과 교회는 더 이상 예수님을 육체로 만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왜 승천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승천의 의미를 묻는 질문입니다. 승천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승천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행 2:34-36을 보세요.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명백한 증거였다는 것입니다. ‘주’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주 만물의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이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새롭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다윗을 비롯하여 많은 선지자들에게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만유의 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저리로서(거기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구원주이시며 심판주이십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께서 온 만유의 주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승천의 또 한 가지 의미는 사도들과 신약 교회의 활약상을 예수님께서 신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를 대신하여 너희들이 일할 차례다! 나의 소원은 너희들이 내가 하던 일을 이어 받아 그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물론 너희들이 그 일을 잘 하도록 내가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주도해야 할 자들은 너희들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천은 거룩한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교회에 위임장을 수여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위임장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과 교회에 맡기신 일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행 1:3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까지 40일 동안 이따금씩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제자들과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 무엇인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세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이 7-8절입니다. 1:7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와 기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아서 정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너희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8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최후의 말씀으로서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이 최후 약속은 주께서 제자들을 당신의 증인으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증인 되게 하셔서 주님이 이루고 싶으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회복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은 온 세상의 회복과 관련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고 관심사가 온 세상의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정도가 아닙니다. 땅 끝까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세상의 회복’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실천입니다. 구약성경은 세상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획하시고 준비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신약성경은 세상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실행하신 일에 관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회복을 위하여 결정적으로 일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아들을 보내신 일입니다.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세상과 만물을 근원적으로 회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재창조 혹은 새 창조의 사역입니다. 죽음이 지배하던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새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 자신이 천국을 갖고 이 땅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천국을 이 땅에 갖고 오셨습니까? 그것이 세상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회복하는 일을 사람들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를 통한 이 세상의 회복입니다. 사람이 왜 세상을 회복할 수 없습니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세상의 회복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을 회복하겠다고 나설 때 오히려 세상을 어둡게 하고 부패를 가중시키기가 쉽습니다. 잘 해야 부패를 조금 지연시키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출해내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으려면 사람 편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선포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해야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에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서 하신 말씀이 회개와 관련된 말씀이었습니다. 눅 24:47을 보세요. 제자들이 전하게 될 복음이 바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회개할 때 모든 족속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에서 가장 중심 되는 주제는 죄의 보편성과 회개의 필요성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므로 회개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하나님께 진 빚이 너무나도 엄청나기 때문에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알고 단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심령의 상태를 말합니다. 세리가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살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금방 보았던 눅 24:47 말씀대로 그(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의 은혜가 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죄 사함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적 복음의 기초요 교회가 전해야 할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얻은 사람은 그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생의 목적과 태도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집중됩니다. 그래서 삶이 달라집니다. 이것을 가리켜 회개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새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비로소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에게 능력 있게 일하라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있습니다. 그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8절을 다시 보세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권능을 주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는다는 것은 먼저 자신이 일할 일터를 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서서 그 비전의 실현을 위하여 사명지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성령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로 하여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게 하십니다. 거기서 예수의 증인으로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는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는 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받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의 강림을 기다렸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열흘쯤 지났을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성령이 그들 가운데 충만히 부어졌습니다. 그들이 받았던 성령 세례는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것과 같은 동일한 성령 세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셨을 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던 것처럼 바로 그 동일한 성령이 제자들에게 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도 예수님처럼 성령의 권능으로 힘차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들만 그리 했던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성도들도 역시 자기 위치에서 힘 있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들이 받았던 동일한 성령을 그들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초로 성령께서 세상에 강림하신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할 바로 그 때에 즉시 성령의 세례를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그 즉시로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사람이 되면 원리적으로 또한 실제적으로 예수님처럼 능력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과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예수 믿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집중했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회복입니다. 세상의 회복은 죄 사함의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죄 사함은 하나님께서만 죄인들에게 주실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 사함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죄 사함의 길로 우리가 들어서는 길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길입니다.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죄를 사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일하게 하십니다. 그 일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궁극적인 뜻인 세상을 회복하는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일은 먼저 우리 자신의 진정한 회개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회개했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성령의 은혜로 회복되었습니까? 그리고 회복되고 있습니까?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날마다 회복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충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심령이 회복되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의 회복에 대하여도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성령 받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오늘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후편입니다. 일차로 보낸 편지가 또 있었습니다(1절, ‘먼저 쓴 글’). 그것이 누가복음입니다. 왜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두 편의 글을 보내었을까요? 누가복음에는 데오빌로에게 각하라는 호칭이 붙어있습니다. 아마도 로마의 고위관리였던 것 같습니다. 데오빌로는 세상적으로는 출세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누가의 관심은 데오빌로의 세상적인 지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지위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다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중한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두 편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데오빌로가 아직 회심하지 않았다면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영혼에 대한 끈질긴 관심과 풍성한 투자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지금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의 바른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열심이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분에게 정말 기뻤던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 믿고 죄 사함 받았을 때가 아닙니까? 그때를 회상해보세요! 그때 온 세상이 달라보였습니다. 풀들과 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고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우리의 입가에는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왜 우리가 그러한 기쁨으로 충만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변화를 보고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l 눅 15:7 예수님께서 100마리 양 중에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l 바로 이어 나오는 탕자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눅 15:22-24).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여러분, 우리에게도 지금 이런 기쁨이 회복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에 여러분이 동참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의 일이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련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세상의 회복입니다. 세상의 회복은 사람들의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언제 사람이 회복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진정한 기쁨과 생의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집에 실린 예화입니다. 어느 병원 영안실에 시체 세 구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체들이 하나같이 웃고 있었습니다. 검사관이 하도 이상해서 시체 관리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시체들이 웃고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예, 첫 번째 사람은 로또복권 일등에 당첨됐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웃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입니다.” “둘째 사람은 자기 애가 학교에서 늘 꼴찌를 맴돌고 있는데 일등 했다는 성적표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죽었습니다.” “셋째 사람은 벼락을 맞아서 죽었습니다.” 검사관이 이해가 안 돼서 묻습니다. “어찌 벼락을 맞았는데 웃었을까요?” “사진 찍는 줄 알고 웃었답니다.” 번갯불이 번쩍 비취는 것을 사진기 플래시 터지는 줄 알고 웃는 표정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유머는 우리 사회의 헛된 웃음을 풍자한 것입니다. 얼마나 웃을 일이 없으면 이런 것으로 웃는 것입니까? 여러분, 참된 기쁨, 영원한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때 옵니다. 세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가 사명감을 갖고 뛰어들 때 우리에게 먼저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는 자들의 심령에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중앙 희년을 맞아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 나라의 일과 관련될 때만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 나라의 일의 핵심입니까?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 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일이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그래서 중앙희년의 행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로 ‘2003 중앙희년, 새 생명 축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10월 말로 계획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중앙희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오늘 ‘새 생명 축제’를 공식적으로 선포합니다. 이미 당회에서는 준비 팀의 운영위원들을 선정했습니다. 6/8: 다음 주일, 성령강림절을 맞아 새 생명 축제 발대식을 할 것입니다. 이날 우리는 전체일정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태신자 카드를 받을 것입니다. 태신자 카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가족들과 친구들 및 이웃들을 선택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까지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가슴에 품고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서약서입니다. 6/15, 22: 1차 태신자 카드를 제출합니다. (태신자 카드는 10월 초까지 3차에 걸쳐 제출하고 새 생명 축제 기간이 임박하게 되면 초청에 응답한 자들의 명단이 확정될 것입니다.) 6/22: 1차 전도 간증과 특강이 있습니다. (의사 전도왕 이병욱 장로 초청) (8월 말에 2차 전도 간증 및 특강이 있을 것입니다.) 7월부터는 매월 한 차례씩 새 생명 축제를 위하여 영상으로 광고할 것이며 수시로 전도 훈련을 실시할 것입니다. 이때 효과적인 전도용 자료들을 배부할 것입니다. l 새 생명 축제 기간: 10월 26(청년들과 일반인 대상), 10월 27일(종묘의 노인들 대상), 11월 17일(쪽방과 노숙자 대상) l 새 생명 축제 준비 기간: 6월부터 당일까지 l 목적: 1) 구원의 감격과 구령의 열정 회복 2) 가까운 친지 전도 3) 가두 및 축호 전도를 통한 전도의 생활화: 종묘 노인, 쪽방 거주자들, 종로의 노숙자들, 대학로의 학생 및 청년들 l 목표: 태신자 1000명 작정, 당일 초청 인원 500명, 영접 250명. l 영접한 신자들을 충실하게 관리하여 거주지에 가까운 교회 혹은 우리교회의 정식 멤버로 정착하게 함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로서 충성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했습니다. 사도들이 사라진 후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사도적 사명을 위임 받았습니다. 사도적 사역의 계승자가 교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고 사도들이 했던 일도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오늘의 교회들이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가 집중해야 할 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일의 핵심은 세상의 회복입니다. 세상의 회복은 먼저 우리 자신의 심령이 새롭게 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고 우리교회가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헌신할 때 참 보람과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의 충성된 일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끝) 찬송 27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