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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도로 변화된 사람/ 몬1:10-20/ 2004-03-08
180도로 변화된 사람 몬1:10-20 우리 교회의 설립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최대의 명령은 전도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전도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마귀의 사람을 천국의 사람으로 180도 변화시켜 주십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어부 베드로를 복음의 순교적 사도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본문은 노예요 절도범인 오네시모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여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소아시아 골로새에 살고 있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 주변에는 6천만 가량의 노예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가지고 로마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오네시모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울도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날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9). 바울은 감옥이라는 악조건에서 언제나 기도하였습니다(10).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주님의 명령입니다. 감옥에서 오네시모는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잘 알고 있는 동역자 빌레몬(몬1:1)의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너무 좋아서 친필로 썼습니다(19절). 절도범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빌레몬의 집에서 값진 물건을 훔쳐 가지고 도망왔던 이가 다시 그집으로 돌아가서 영원한 종이 되어 다시 빌레몬을 섬기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15절)라고 말하였습니다. 노예생활이 지긋지긋하여 탈출한 이가 이제는 노예보다 더한 심복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전혀 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네시모를 이렇게 변화시킨 요소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어떤 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1. 누구와 같이 있느냐에 따라서 오네시모는 주인을 배반한 배반자였습니다. 주인의 물건을 훔친 절도범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있으면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 누구와 같이 있었느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누구와 같이 있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냐도 중요한 것입니다. 불경에 나오는 최고의 살인자는 알굴리말라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잘못된 스승을 만나 그릇된 가르침을 받습니다. \"1000명을 죽이면 천상에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살인 행각에 나서게 됩니다. 그는 칼을 휘둘러 만나는 이마다 죽입니다. 999명을 죽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명만 죽이면 되는데 한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자기가 죽인 아들을 찾아 나선 어머니였습니다. \"이제 저 여인만 죽이면 1000명 목표를 달성한다\" 이때 부처가 나타나서 \"너는 제 정신이 아니다. 한량없는 죄를 짓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알굴리말라는 그 때에서 제 정신을 차리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는 그 사람의 일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죄수들과 함께 있지 않고 바울과 함께 있었으므로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2.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이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먹었습니다. 억지로 감옥에 갇혔으니 바울과 같이 있으면서 바울의 말만 들으며 매일 아침 저녁 복음의 양식을 먹었습니다. 무엇을 먹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먹는 것에 따라서 달라지는 법입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바울에게 계속 예수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복음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사람으로 변회되었습니다. 무슨 양식을 먹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변화됩니다. 3. 어떻게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어떤 기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변화가 됩니다. 바울을 만나기 전에 오네시모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밤낮 쉬지 않고 생각한 것은 주인의 돈이었습니다. 매일 훔쳐갈 귀중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되면 빌레몬 주인의 값진 물건을 훔쳐 가지고 로마로 가서 멋지게 즐기며 살고 돈 꿈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즐기는 것만 생각만 하여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리하고 연구하다가, 드디어 어느날 기회를 잡았습니다. 빌레몬은 주인의 물건과 돈을 훔쳐가지고 로마로 달아 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참으로 넓고도 좁았습니다. 같은 감옥에 있는 바울은 자기가 섬기던 주인 빌레몬과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을 적극적으로 돕는 이였습니다. 어쩌면 바울에게 선교 헌금으로 주어야 할 물질을 오네시모가 훔쳐 갔는지도 모릅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으로 변화된 후 그의 기도 제목은 전혀 달라졌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종노릇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피해를 주고 도망간 오네시모를 회개시켜서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게 되었습니다. \"네게 저를 들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12) 오네시모가 가겠다고 하니까 돌려 보낸다고 한 것입니다. 복음적인 사람은 이렇게 변화됩니다. 당시 기록에 보면 그때에는 그 지역에 6천만명의 노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에 대한 법이 엄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노예를 부리기 좋게 하기 위하여 영혼이 없는 동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살아있는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두 발 가진 편리한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사유재산이기에 마음대로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도망간 노예가 잡히면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사지를 짤라서 죽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운이 좋은 노예는 라틴어 Fugitivus 즉 \'도망치라\'는 머릿글자인 F자를 이마에 찍어 일생 핍박당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오네시모는 회개하고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기도제목을 바꾼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하느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사람은 기도하는 대로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까? 4. 심복이 되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누구의 심복이 되느냐에 따라서 변화됩니다. 깡패의 심복이 되면 깡패가 됩니다. 정치가의 심복은 정치가가 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동역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심부름꾼이 된 것도 아닙니다. 심복이 되었습니다. 심복은 원어로 스플랑크나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내장이나 간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장이 없다면 살 수가 없습니다. 간장이 없다면 당장 죽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바울은 최고의 동역자를 오네시모로 여기고 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주의 종이 \"난 그 사람 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다\"라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에게는 자기를 사랑해 주고 용서하여 주는 사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바울이 얼마나 오네시모를 사랑하고 있는지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11절 저는 내게 유익하다. 12절 저는 내 심복이라. 13절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7절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 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절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니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개하라.오네시모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바울의 편지로 인하여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드렸을 것입니다. 빌레몬의 뜻은 \"사랑을 간직한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이였기에 어쩌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노예에서 해방시켰을지도 모릅니다. 오네시모는 잡혀 죽을까 두려워하던 암흑의 생활에서 깨어나 이제는 떳떳하게 광명속에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과 빌레몬의 용서는 오네시모를 전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오네시모라는 뜻은 \"유익한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오네시모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아니지만 외경중에 도마복음이 있습니다. 도마복음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회개란 무엇이냐? 그것은 동쪽이 서쪽이 되고, 서쪽이 동쪽이 되는 것이며, 남쪽이 북쪽이 되고 북쪽이 남쪽이 되는 것이다\" 오네시모는 회개하고 전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심복이 되고 나서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심복이 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엄청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된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언제 그렇게 많은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까? 1. 누구과 같이 있느냐에 따라서 2.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3. 어떻게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4. 누구의 심복이 되느냐에 따라서
가치의 변화/ 고후4:16-18/ 2008-05-30
가치의 변화 고후4:16-18 뉴욕에 한 재벌이 오래 동안 수많은 골동품을 모아왔습니다. 어느 날 6개월 동안 유럽 여행을 다녀와야 하는데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누가 골동품 훔쳐 가면 어떠하나?’ 그래서 최신 도난 방지기 시스템을 설치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곧 뉴욕 뒷골목 골동품상에 가서 많은 값산 골동품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골동품에다가 십만 달라, 이십만 달러, 삼십만 달러하며 기분이 내키는 대로 값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진품에다가는 아주 싼 가격을 붙여놓았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아니 다를까 집안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아끼는 진기한 골동품은 그대로 두고 생각대로 비싼 가격을 달아 논 가짜 골동품만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 도둑은 잘못된 가격표에 속아 가짜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뉴욕의 그 도둑처럼 모조품 가짜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무엇에 나의 삶을 바치고 있는가? 점검하므로 나의 신앙의 삶에 가치의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까? 예수 안에서 변화된 사람입니다. 즉 새롭게 된 사람입니다. 변화되지 않고는 어떤 은혜와 축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변해야 합니까? 의식과 생각이 변해야 합니다. 즉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나에게 가치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1.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해보세요(참조/4:1절) 바울은 복음의 일군의 영광과 더불어 그에 따르는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군으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는데 유달리 많은 고난과 시련이 뒤따랐습니다. 1)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세력의 생명의 위협을 가하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2) 자비량 선교를 하다 보니 물질적으로도 궁핍했습니다. 3) 자신의 육체에 사단의 가시라고 불리는 지병 때문에 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절에 [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 즉 핍박과 가난과 질병이 복음사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도리어 바울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행20:24절 나의 생명초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하며 행21:12절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비록 굶주리고 헐벗은 가운데서도 빌4: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며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비록 몸에 사단의 가시 같은 질병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여러 번 간구했지만 고후12:10절에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가장 강함이러라’ 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의 일군으로 사역을 감당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렇게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바울이 복음의 일군으로 사역을 감당하면서 고난 가운데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16절) 바울은 사역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4장에서 1절, 8절, 16절 세 번이나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고백합니다. 16절 [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한마디로 바울은 예수님 만나 가치관이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본래 바울은 빌3:4절 이하에 보면 육체를 신뢰하고 신앙의 전통과 가문을 앞세우고 자신의 영예를 위해 남을 짓밟아가며 출세가도를 달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행9장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육신의 눈은 깜깜해 지고 대신 영안이 뜨여져 자신의 인생에 가치관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사람보다 영의 사람 속사람을 더 귀중히 여기게 된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리차드 포스트>는 이 구절을 여러 가지 이유로 좋아한다. 우선 그 강인함이 좋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또 그 현실성이 좋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그 진보성이 좋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 구절이 영적이고 불가시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일에 우리는 인생을 바쳐야 한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새로워짐은 사람의 내적이고 영적인 본성이 새로워진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외적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적 사람입니다. 바울이 지금 강조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세월이 지나면 다 늙는다는 말씀도 되겠지마는 16절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교훈은 “ 나는 지금까지 썩어질 것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시들어 질 것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속사람을 위해 살겠습니다. 영혼을 살찌우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사람보다 속사람의 중요성을 아는 자만이 엡3:14절 말씀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하여져서 복음의 일군으로서 주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더 많은 대리석을 소비할수록 그만큼 석상은 완성되어 간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받는 고통과 겪는 아픔이 큽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속사람인 영혼은 더욱더 튼튼하고 위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속사람이 있습니다. 이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워졌습니다. 거듭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늦가을, 서리가 내리면 국화 꽃잎은 시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봄이 되면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겉사람이 꽃잎이라면 속사람은 뿌리인 셈입니다. 따라서 겉사람은 병들고 늙어가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했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믿음과 더불어 더욱 더 튼튼하게 자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의 육체는 늙고 병들어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낙심(落心)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롭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영혼(靈魂)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하다가 비록 육신이 낡아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날로 새로워질 줄 믿습니다. 본문말씀은 복음의 일군의 영광과 더불어 그에 따르는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고난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3. 왜 성도가 현세에서 받는 사역의 고난이 신앙의 귀중한 자산이 될까요?(17절) 왜? 17절에 [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즉 지금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은 신앙의 삶에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8:18절에도 [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여기에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바울 개인으로 볼 때, 그는 낙담할 요소들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수도 없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낙망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잠깐이고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환난은 분명히 인생에 있어 가시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픕니다. 슬픔이 옵니다. 고통이 옵니다. 그렇지만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만듭니다. 어두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믿음을 연단해 주는 것입니다. 발칸 반도의 장미는 향기로 유명합니다. 다른 장미들과 비길 수 없는 최고의 향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크릴멘이라는 사람이 이것에 대해 쓴 것이 있습니다. 그가 발칸 반도를 여행할 때였습니다. 왜 그곳의 장미향이 유독 아름다운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장미를 재배하고 채취하는 과정을 유심히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새벽 1시부터 2시 사이에 장미를 채취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가장 캄캄할 때에만 장미를 채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미신적인 관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상당히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장미의 향기가 낮에는 40%가 감소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발칸 반도의 장미의 아름다운 향기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어두운 야밤에야 비로소 최고의 향취를 품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주 고통과 씨름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암담한 상황이 그를 아름다운 향기를 뿜는 인격자로 만든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복음의 일군이 되어 섬기려고 하다보면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이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 주를 위해 당한 고난 천국에서 메달이 되고 훈장이 된다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 설교 중에 한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한 미국 선교사가 오래동안 아프리카에서 열정을 쏟아 선교를 했습니다. 선교지에서 풍토병으로 아내와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너무 힘에 겨워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미국행 배를 탔습니다. 그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즐기다가 돌아가는 대통령도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군악대의 예포 소리와 함께 팡파르가 울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환호하며 맞이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오자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도 걷히고 군악대의 연주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가 홀로 내려오는데 자신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주님 너무합니다. 사냥갔다 돌아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 받는데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돌아오는 선교사를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걸어 나오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가 아니라 천군천사 들러리 쓰고 내가 직접 맞이해 주마! 너는 끝까지 충성하라.” 하더랍니다. 이 음성을 들은 선교사는 충성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며 다시 돌아가 죽도록 충성하다가 그곳에 묻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현제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안겨다 줍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신앙의 삶의 시선은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 4. 성도의 신앙의 삶의 시선은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까?(18절) 18절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왜 우리가 주의 일하다가 낙심합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일 하면 뭔가 내가 하는 일들이 형통해야 할 텐데 되레 불통입니다. 그러다 보니 낙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습니다. 영적 세계는 육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덫에 걸려 현실세계, 물질세계가 전부인 줄로 착각할 우려가 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궁극적 실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 문화와 접촉하는 우리는 거의 매일 그런 유혹을 받는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였습니다. 높은 산에서 주님께 보여 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온 천하의 아름다운 것들과 부귀 영화였습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욕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요1서2:16절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 지금도 사단은 성도들을 이렇게 유혹합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부귀영화를 박람회처럼 펼쳐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눈과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보이는 것에서 여러분의 눈을 돌려야합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것에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썩어질 것에서 더 이상 소망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트렌취> 감독은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취어도 하나님의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삶이란 왜 이렇게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작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추구하는 아름다운 신앙인들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리차드 포스트>의 글에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불가시성(不可視性)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피해 숨을 수 있게 해준, 어떤 영구적 장치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침마다 전능자의 얼굴이 빤히 보인다고 가정해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그렇게 고정해 놓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와 협력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세계를 볼 수 없도록 안배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적 현실을 보기 원할 때까지, 마음을 다해 보기 원할 때까지, 목마른 사슴이 냇물을 찾듯 그것을 갈망할 때까지(시42:1),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 몸과 마음으로 부르짖을 때 적절한 시간이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현실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영적 현실을 신뢰하며 인생을 거기에 겁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불가시적 영적 세계를 알고 그렇게 아는 대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짐 엘리엇이 22살에 이런 말을 일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 휘튼 대학 시절 그가 남긴 일기에는 이런 글도 있습니다. “ 주여 쓸모없는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주소서, 그리고 주를 위해 타게 하소서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풍성한 삶을 살게 하소서 제 삶이 하나님을 아는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게 하소서 ” 영원한 것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가치의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태리 로마에 로마 대학교가 있는데 아주 명문이요, 유서 깊은 학교입니다. 로마대학 식당에 현판이 하나 걸려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에포이 에포이 에트르네타이 에테르네타이’ 오래 전에 그 학교 졸업식 때 천주교 신부가 와서 졸업 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졸업식 미사를 다 드린 다음에 학생들과 앉아서 대화를 하다가 어느 법과 대학생과 얘기를 했답니다. `자네는 법과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뭘 하려고 그러나?` `예, 이제 변호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그 다음에는 돈도 벌고 어려운 사람들을 변호하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결혼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을 낳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애들 학교 다 보내고 결혼을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저도 은퇴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내와 세계 여행을 하면서 여유 있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뭘 하려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죽는 것밖에 남은 게 없거든요. 그렇다고 `죽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고 해서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분명히 듣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야. 영원이야`라고 했습니다. 이태리 말로 `에포이 에포이 에트르네타이 에테르네타이`라고 말합니다. 이 학생이 그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뒤, 그는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자기가 졸업한 학교에 좋은 큰 식당을 하나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식당에서 제일 눈에 잘 띄는 데다가 `에포이 에포이 에트르네타이 에테르네타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많은 후배들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좀 지혜 있게 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변해야 복음을 위한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섬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 가치의 변화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5. 가치의 변화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참조/18절) 그건 바로 겉사람이고 현실이고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관에 변화가 잇어야만 우리는 복음의 일군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시테크에 관한 전문가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이 전문가가 강의 시간에 경영학과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테이블 밑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하나 꺼집어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먹만 한 돌을 꺼내 항아리 속에 넣기 시작 했습니다. 항아리가 가득하자 그가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찼습니가?” “예” 그러자 “ 정말입니까?” 하고 되 묻더니 다시 테이블 밑에 조그만 자갈을 한 웅큼 꺼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항아리에 집어 넣고는 흔들었습니다.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찼습니까?” 눈이 둥그래진 학생들은 “글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좋습니다” 라고 하고는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주머니를 꺼냈습니다. 모래를 항아리에 넣어 주먹만 한 돌과 자갈 사이의 빈틈에 가득 채운 후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찼습니까?” 학생들은 “아니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렇습니다.” 라고 말하며 주전자의 물을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 스케줄이 가득차 바뻐더라도 정말 노력만 하면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 실험의 요점은 그게 아니라 만약 당신이 큰 돌을 먼저 집어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할 것입니다.” 라는 것이라 했습니다. 인생의 우선 순위 정말 큰 돌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인생의 삶에 큰 돌이 무엇인가? 특히 성도로서 나의 신앙의 삶에 큰 돌이 무엇인가? 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겉사람보다 속사람을 먼저 챙기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보다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변모/ 마17:1-8/ 2009-03-02
거룩한 변모 마17:1-8 오늘 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건데 오늘 내가 찬양을 들으면서 하늘에서 오는 음성이 뭘까 봤더니 아까 아멘 찬송하셨는데 오늘 성경말씀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세 마디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을 데리고 갈릴리 언덕의 산으로 지금 올라갑니다. 성경말씀대로 하면 올라가서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광채로 빛나고 입은 옷도 하얀 옷으로 빛나면서 그 옆에 모세가 와 있고 엘리야가 와 있어서 세 사람이 오순도순 얘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심리적 착시 현상이 아니고 사람들이 보기에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께서 안으로부터 광채를 내시고 하얀 옷으로 빛내시고 말씀을 나누십니다. 말씀을 하시는데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봤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하는 말, “예수님, 당신이 곧 수난을 받고 죽으셔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라고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는 없는데 누가복음에 보면 이 구절이 나옵니다. 세 사람의 대화 내용은 곧 있을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셋이서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평소에 듣던 이스라엘 전체 역사, 유대교 전체 역사의 상징적 주인이신 모세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예언자 가운데서 최고의 예언자로 존경받는 엘리야, 살아서 승천했던 엘리야가 나타났다며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가 스승으로 섬기면서 존경하는 예수님 앞에서 삼자 대화를 이루는데 테마는 우리 사랑하는 예수님이 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베드로는 그 장면을 보고 즉석 제안을 합니다. “예수 선생님, 제가 오늘 집 세 채를 짓겠습니다.” 장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선생님을 위한 집이고, 또 하나는 모세를 위한 집이고,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한 집이고, 세 집 짓고 오순도순 사시지요. 우리도 시종들면서 살겠습니다.” 베드로는 보통 인간의 상식을 가진 제안을 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모세가 부활을 해서 나타난 겁니다. 아직은 다시 오지 않고 다시 온다고 약속했던 엘리야가 나타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살아서 승천한 사람은 엘리야 뿐 그 분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엘리야가 오실 때 이 땅이 종말이 된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엘리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에게 보인 것은 환상일까요, 현실일까요? 그런데 갑자기 산중에 하늘이 막히고 구름이 끼면서 구름 속으로 주시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예수라는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모세야, 엘리야야, 베드로야, 세상 모든 사람아, 예수의 말을 들어라.” 이 사건이 오늘 변화산 상의 핵심입니다. 베드로가 집을 지을 수가 없었죠. 그런데 마침 이 사건이 보도된 시간, 그 시간이 언제냐 하면, 유대교 명절 중에 중요한 축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초막절, 또는 장막절로 불리는 구절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도움을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살 때 집이 없어서 나뭇잎사귀를 가지고 벌판에서 살았던 40년입니다. 벌판에서 살던 40년, 이때를 기념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있는 나뭇잎사귀 가지고 지붕을 만들고 또는 볏잎으로 지붕을 만들어서 초막을 지어서 일주일 동안을 살았습니다. 일부러 살고, 일종의 텐트고 캠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신 것을 실제 몸으로 체험하면서 삽시다. 그 절기를 초막절, 장막절이라 이름합니다. 오늘 산에서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가 한참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점은 유대교 장막절의 절정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장막절에 세 분이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또 하나의 장막을, 아름다운 장막을 산에 세 채를 지으면 모세, 엘리야, 예수가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디자인 치고는 아름답죠?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우리한테 주는 메시지가 단순명료합니다. 이 변화산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주일 후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 죽기까지 고난당해야 할 수난을 예고하는 바로 그 시점에 이 사건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마음은 이럴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왔다고 했고, 축복의 길을 준다고 했고, 많은 사람에게 구원과 축복을 줘야 할텐데, 그렇게 설교했고 선포했는데 이젠 내가 죽어야 한다.’ 죽음을 미리 예측하는 사람, 죽음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 제자들 모아놓고 후손들 모아놓고 뭐라고 예언하면 좋습니까? 내가 곧 죽는다, 그러면 너희들은 남아서 유지를 받들기를, 이렇게 하라고 유언 남길 수 있습니다. 예수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상상을 안 합니다. ‘엘리야도 살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와 가지고 왜 죽는다고 해야 합니까? 죽음 없이 구원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믿던 기적의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는 나는 죽는다고 선포해야 하고요, 실제로 죽어야 합니다. 실제 죽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고 죽어야 산다고 하는 부활의 경험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은 괜찮은데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이야기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께서 오늘 산에 올라가서 이런 장면을 연출하십니다. 산에 자주 다니십니까? 저는 산에 자주 못 가는데 산이 너무 좋습니다. 우선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죠?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의 신선한 공기도 호흡할 수 있죠? 그것뿐만 아니라 세상에선 모르다가 산에 올라가보면 어찌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품이 아름다운지요? 그곳에 가면 하나님이 조금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오순도순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영적 대화가 가능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이야기하실 때 산에 가셨습니다. 산에 가셔서 유혹도 당했습니다. 산에 가셔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산에 가셔서 죽기 전에 피눈물나게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오늘처럼 하얀 얼굴로 변모하는 장소도 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서 죽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부활했습니다. 산은 자연의 한 현상이고 상징이지만 하나님과 조금 가까운 곳,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죽음도 있고 부활도 있는 곳, 조금은 세상보다 위에 있는 곳, 그 곳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디자인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랜드 디자인입니다. 하나님이 옛날 모세와 엘리야와 지금의 예수가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지 세상 사람들 좀 보십시오. 그림 같은 한 폭의 장면이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왜 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예수도 속한 이스라엘 전체 유대백성 전체 대표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입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최고의 조상의 말씀이고 모세가 한 일은 출애굽뿐 아니라 호렙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아 온 사람, 떨리는 가슴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받는 모세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다. 신을 벗어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는 율법을 받았습니다. 율법이란 그냥 법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행위, 신앙, 정치, 사회, 가정, 모든 것을 총괄하는 율법전서가 모세가 받은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가 오늘 예수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면 율법만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망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거역될 때, 반드시 등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입니다. 왜 율법을 안 지키느냐고, 왜 하나님을 멀리하느냐고, 심판도 예언하시고, 위로의 복음도 예언하시고, 하나님의 축제 때마다 말씀하시고, 예언과 율법이 동시에 두 기둥이 되어서 이 둘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있습니다. 그 예언의 대표자가 엘리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조금 더 읽어보면 “예수님, 세상 사람들 말이 엘리야가 빨리 오셔서 무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구세주가 오신다는데, 메시야가 오신다는데, 엘리야가 온다고 말씀하시는데 언제 오십니까? 이 엘리야가 언제 오십니까? 이 엘리야가 맞습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 엘리야는 구약시대 엘리야고, 지금 내 앞에 온 엘리야가 있다. 엘리야가 누구냐?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 예언잔데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다. 이미 왔지 않느냐? 지금 세례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온 그 사람이 새로운 엘리야다. 그러면 나는 누구냐? 옛날에는 율법을 받은 모세가 있었지만 오늘은 율법 그 자체인 나 예수가 있지 않느냐? 모세는 율법을 받았고 나는 바로 그 율법이니라. 그것도 새로운 율법이니라.” 그래서 성경말씀 전체를 보면 율법 자체인 예수는 율법이라 하지 않고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입니다. 율법은 모세가 받은 법전이지만 예수는 인간과 삶과 말과 행실 모든 것이 율법 그 자체요, 새로운 율법이요, 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사실이 우리한테 주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아니 모세와 엘리야의 하는 말이 “예수님의 수난절에, 죽음에 어떻게 우리가 동참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총괄한 율법은 당신의 십자가 사건에 어떻게 용해될 수 있습니까? 모든 예언은 오늘 십자가에서 달릴 주님의 수난에 어떻게 동참하면 됩니까?” 구약이 오늘 예수한테 뭉치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모든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예수십자가에 다 함몰되는 순간입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할 게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구약에 쓰여 있는 모든 역사, 지나간 역사, 그 자체로 우리한테 의미 있지 않습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를 창세기부터 보지 마시고 예수의 눈으로 구약을 보세요. 예수가 역사해석의 핵심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구약을 보세요. 예수의 눈으로 예언을 보세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과거에 이루었던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판단하시면 보람 있는 거 추리세요.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판단할 때, 역사가가 과거 지나온 역사를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내 삶에 중요하고 구원이 되는 것을 골라서 편집을 합니다. 역사가와 지난 세기의 대화, 만남,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요? 구약에 있는 모든 역사, 예수 이전의 모든 역사는 오늘 예수의 안경을 끼고 보십시오. 그리고 엘리야의 예언도 그렇게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예수와 모세가, 예수와 엘리야가 하나가 됩니다. 신약과 구약이 왜 하나가 됩니까? 왜 우리가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역사를 우리의 경전으로 받아들입니까? 예수의 눈으로 본 예수 이전의 하나님의 통치 역사입니다. 이렇게 구약을 보십시오. 예수가 안경입니다. 역사관의 이야기고, 신앙관의 이야기고, 신앙고백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본 역사는 이렇게 출애굽기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자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건넌 게 아니라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의 백성은 물이 갈라져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했던 이집트의 군사들은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홍해가 뭡니까? 예수의 십자가와 같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건 뭡니까? 그것은 예수님 십자가 다음에 온 작은 그러나 실제화 된 역사적 부활의 세계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봤더니 출애굽 사건 자체가 십자가 사건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있었습니다. 홍해는 자연적 사건이고, 상징적 사건입니다. 홍해가 십자가라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예수의 수난과 고난이라고 이름하는, 죽음이라 이름하는, 십자가를 건너온 우리는 부활이란 이름하는 새로운 가나안 땅, 새로운 예루살렘을 축복으로 본다는 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엘리야는 누굽니까? 엘리야는 모든 예언을 대표했습니다. 엘리야는 살아서 승천했다고 그랬습니다. 살아서 승천한 사람은 다시 와야 합니다. 다시 온 사람이 오늘 세례요한으로 와서 엘리야가 하는 말, 새로운 세례요한이 하는 말, “메시야가 오신다.” 그 메시야가 오늘 왔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엘리야를 비롯해서 모든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예언의 말씀을 예수의 십자가 부활의 힘으로 다시 해석합시다. 구약 성경 전체를, 인류의 모든 역사를, 창조역사를 십자가 부활의 힘으로 다시 해석해 봅시다. 해석해 보면, 구약의 모든 역사가 우리한테 생명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오늘 이 사실을 변화산 상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역사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가 죽습니다. 죽으면 죽음 다음에 올 부활의 역사가 우리한테 주어질 미래의 역사입니다. 내일 우리는 부활을 위해서 십자가로 갑니다. “나는 죽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만백성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 수난의 시절을 내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수난의 터널을 지나면, 수난의 홍해를 지나면 반드시 약속된 땅이 있다. 그 땅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여라. 그 땅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여라.” 그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서 오늘 변화산상에서 몸이 변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수난을, 구원의 길로 생각하십시오. 이 사건이 모세와 엘리야를 끌어안은 예수의 대화, 예수의 한 모임, 이 사실을 우리는 늘 경험해야 합니다. 지나간 역사는 예수한테 세례를 받습니다. 지나간 우리의 모든 조상들의 역사도 예수한테 세례를 받으면 다시 구원의 역사로 들어갑니다. 이 사실 하나를 분명히 인지하고 확인하십시다. 그러면 그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내려가자. 두려워마라. 일어나라.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새로운 가나안 땅이 여러분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실 때,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실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셨지만 듣는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 말씀 듣지 못하고 구름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기억하시죠?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해서 하는 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똑같은 말씀이 베드로후서에 베드로가 기록했습니다. 세례 받을 때 보지 못했지만 오늘 변화산 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베드로후서의 기록이에요.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세례받을 때 주어졌는데 오늘 변화산 상의 말씀은 이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 그 분의 말을 들읍시다. 그분의 행실을 따릅시다. 그런데 그 말씀이 구름 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옛날에 기록된 모든 예수의 말씀을 자연의 현상, 사례현상, 기후 현상을 합해서 분위기를 연출한 장면이 나오는데 구름 낀 역사는 독특한 역사입니다. 맑은 하늘에 대낮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항상 천둥을 동반한 속에서 구름 낀 속에서 암흑 속에서 하나님의 실낱같지만 관통하는 말씀을 해 주신 것이 구약 성서 전체의 기록입니다. 오늘 변화산 상에서 구름 속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내가 사랑하는 아들의 말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구름을 뚫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기도에 응답하실 때, 언제 하시느냐 하면, 잠잘 때도 응답하시고 일할 때도 응답하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건강하게 사시다가 병 들릴 때가 있지요? 사업이 잘나가다가 한 때 좌절될 때가 있지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구름 낀 날씨처럼 괴로울 때가 있죠? 나라가 잘 나가는 것 같은데 지금처럼 위기에 닥칠 때가 있지요? 구름은 하늘과 땅을 만나게 하는 중간지대이지만 구름은 햇빛도 아니고 암흑 천지도 아니고 중간쯤 생긴 불안, 질병, 좌절, 아픔, 또는 위기, 그 위기를 뚫고 아픔을 뚫고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의 말을 들어라.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가 좋아하는 아들, 그의 말을 들으면 산다.” 그의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내부로부터 나오는 얼굴이 너무 광채가 커서 부활을 담은 얼굴이 너무나 커서, 십자가의 구름을 뚫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너무나 커서 흰 옷입은 사람처럼 하얀 것으로 광채가 뒤덮였습니다. 우리한테 희망을 주시는 광채를 주시는 거룩함을 주시는 그 분이 구름을 뚫고 말씀하십니다. 역경을 뚫고 말씀하십니다. 위기를 뚫고 기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이 얻은 통로를 뚫고 여러분에게 진실된 삶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좋아한다. 제발 그의 말을 들어라. 이 위기를 살자.” 사는 방법은 꿰뚫고 사는 겁니다. 하늘에서 하늘의 음성이 꿰뚫고 내려오셨듯이 오늘도 내려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일어나라. 두려워말라. 이 길을 가자.” 수난절을 맞이합니다. 수난을 뚫고 가십시다. 그리고 위기를 맞으면 위기를 뚫고 가십시다. 예수와 함께 갑시다. 그러나 위기 때 수난 때 구름이 끼면 무릎을 꿇고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임해서 이 어려운 터널을 뚫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거룩한 변모/ 마17:1-8/ 2009-05-28
거룩한 변모 마17:1-8 오늘 산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건데 오늘 내가 찬양을 들으면서 하늘에서 오는 음성이 뭘까 봤더니 아까 아멘 찬송하셨는데 오늘 성경말씀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세 마디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을 데리고 갈릴리 언덕의 산으로 지금 올라갑니다. 성경말씀대로 하면 올라가서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광채로 빛나고 입은 옷도 하얀 옷으로 빛나면서 그 옆에 모세가 와 있고 엘리야가 와 있어서 세 사람이 오순도순 얘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심리적 착시 현상이 아니고 사람들이 보기에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께서 안으로부터 광채를 내시고 하얀 옷으로 빛내시고 말씀을 나누십니다. 말씀을 하시는데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봤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하는 말, “예수님, 당신이 곧 수난을 받고 죽으셔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라고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는 없는데 누가복음에 보면 이 구절이 나옵니다. 세 사람의 대화 내용은 곧 있을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셋이서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평소에 듣던 이스라엘 전체 역사, 유대교 전체 역사의 상징적 주인이신 모세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예언자 가운데서 최고의 예언자로 존경받는 엘리야, 살아서 승천했던 엘리야가 나타났다며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가 스승으로 섬기면서 존경하는 예수님 앞에서 삼자 대화를 이루는데 테마는 우리 사랑하는 예수님이 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베드로는 그 장면을 보고 즉석 제안을 합니다. “예수 선생님, 제가 오늘 집 세 채를 짓겠습니다.” 장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는 선생님을 위한 집이고, 또 하나는 모세를 위한 집이고,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한 집이고, 세 집 짓고 오순도순 사시지요. 우리도 시종들면서 살겠습니다.” 베드로는 보통 인간의 상식을 가진 제안을 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모세가 부활을 해서 나타난 겁니다. 아직은 다시 오지 않고 다시 온다고 약속했던 엘리야가 나타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살아서 승천한 사람은 엘리야 뿐 그 분이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엘리야가 오실 때 이 땅이 종말이 된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엘리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에게 보인 것은 환상일까요, 현실일까요? 그런데 갑자기 산중에 하늘이 막히고 구름이 끼면서 구름 속으로 주시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예수라는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모세야, 엘리야야, 베드로야, 세상 모든 사람아, 예수의 말을 들어라.” 이 사건이 오늘 변화산 상의 핵심입니다. 베드로가 집을 지을 수가 없었죠. 그런데 마침 이 사건이 보도된 시간, 그 시간이 언제냐 하면, 유대교 명절 중에 중요한 축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초막절, 또는 장막절로 불리는 구절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도움을 받아서 가나안 땅으로 입성하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살 때 집이 없어서 나뭇잎사귀를 가지고 벌판에서 살았던 40년입니다. 벌판에서 살던 40년, 이때를 기념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있는 나뭇잎사귀 가지고 지붕을 만들고 또는 볏잎으로 지붕을 만들어서 초막을 지어서 일주일 동안을 살았습니다. 일부러 살고, 일종의 텐트고 캠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신 것을 실제 몸으로 체험하면서 삽시다. 그 절기를 초막절, 장막절이라 이름합니다. 오늘 산에서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가 한참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점은 유대교 장막절의 절정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이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장막절에 세 분이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또 하나의 장막을, 아름다운 장막을 산에 세 채를 지으면 모세, 엘리야, 예수가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사자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디자인 치고는 아름답죠?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우리한테 주는 메시지가 단순명료합니다. 이 변화산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일주일 후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 죽기까지 고난당해야 할 수난을 예고하는 바로 그 시점에 이 사건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마음은 이럴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왔다고 했고, 축복의 길을 준다고 했고, 많은 사람에게 구원과 축복을 줘야 할텐데, 그렇게 설교했고 선포했는데 이젠 내가 죽어야 한다.’ 죽음을 미리 예측하는 사람, 죽음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 제자들 모아놓고 후손들 모아놓고 뭐라고 예언하면 좋습니까? 내가 곧 죽는다, 그러면 너희들은 남아서 유지를 받들기를, 이렇게 하라고 유언 남길 수 있습니다. 예수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상상을 안 합니다. ‘엘리야도 살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와 가지고 왜 죽는다고 해야 합니까? 죽음 없이 구원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믿던 기적의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는 나는 죽는다고 선포해야 하고요, 실제로 죽어야 합니다. 실제 죽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고 죽어야 산다고 하는 부활의 경험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은 괜찮은데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이야기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께서 오늘 산에 올라가서 이런 장면을 연출하십니다. 산에 자주 다니십니까? 저는 산에 자주 못 가는데 산이 너무 좋습니다. 우선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죠?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의 신선한 공기도 호흡할 수 있죠? 그것뿐만 아니라 세상에선 모르다가 산에 올라가보면 어찌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품이 아름다운지요? 그곳에 가면 하나님이 조금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오순도순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영적 대화가 가능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이야기하실 때 산에 가셨습니다. 산에 가셔서 유혹도 당했습니다. 산에 가셔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산에 가셔서 죽기 전에 피눈물나게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오늘처럼 하얀 얼굴로 변모하는 장소도 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서 죽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부활했습니다. 산은 자연의 한 현상이고 상징이지만 하나님과 조금 가까운 곳,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죽음도 있고 부활도 있는 곳, 조금은 세상보다 위에 있는 곳, 그 곳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디자인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랜드 디자인입니다. 하나님이 옛날 모세와 엘리야와 지금의 예수가 어떻게 구원을 이루시는지 세상 사람들 좀 보십시오. 그림 같은 한 폭의 장면이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왜 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예수도 속한 이스라엘 전체 유대백성 전체 대표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입니다. 율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최고의 조상의 말씀이고 모세가 한 일은 출애굽뿐 아니라 호렙산에 올라가서 율법을 받아 온 사람, 떨리는 가슴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을 받는 모세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다. 신을 벗어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는 율법을 받았습니다. 율법이란 그냥 법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든 행위, 신앙, 정치, 사회, 가정, 모든 것을 총괄하는 율법전서가 모세가 받은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입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가 오늘 예수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면 율법만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망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거역될 때, 반드시 등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입니다. 왜 율법을 안 지키느냐고, 왜 하나님을 멀리하느냐고, 심판도 예언하시고, 위로의 복음도 예언하시고, 하나님의 축제 때마다 말씀하시고, 예언과 율법이 동시에 두 기둥이 되어서 이 둘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있습니다. 그 예언의 대표자가 엘리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조금 더 읽어보면 “예수님, 세상 사람들 말이 엘리야가 빨리 오셔서 무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구세주가 오신다는데, 메시야가 오신다는데, 엘리야가 온다고 말씀하시는데 언제 오십니까? 이 엘리야가 언제 오십니까? 이 엘리야가 맞습니까?”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 엘리야는 구약시대 엘리야고, 지금 내 앞에 온 엘리야가 있다. 엘리야가 누구냐?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 예언잔데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다. 이미 왔지 않느냐? 지금 세례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온 그 사람이 새로운 엘리야다. 그러면 나는 누구냐? 옛날에는 율법을 받은 모세가 있었지만 오늘은 율법 그 자체인 나 예수가 있지 않느냐? 모세는 율법을 받았고 나는 바로 그 율법이니라. 그것도 새로운 율법이니라.” 그래서 성경말씀 전체를 보면 율법 자체인 예수는 율법이라 하지 않고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입니다. 율법은 모세가 받은 법전이지만 예수는 인간과 삶과 말과 행실 모든 것이 율법 그 자체요, 새로운 율법이요, 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사실이 우리한테 주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아니 모세와 엘리야의 하는 말이 “예수님의 수난절에, 죽음에 어떻게 우리가 동참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총괄한 율법은 당신의 십자가 사건에 어떻게 용해될 수 있습니까? 모든 예언은 오늘 십자가에서 달릴 주님의 수난에 어떻게 동참하면 됩니까?” 구약이 오늘 예수한테 뭉치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모든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예수십자가에 다 함몰되는 순간입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할 게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된 구약에 쓰여 있는 모든 역사, 지나간 역사, 그 자체로 우리한테 의미 있지 않습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를 창세기부터 보지 마시고 예수의 눈으로 구약을 보세요. 예수가 역사해석의 핵심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구약을 보세요. 예수의 눈으로 예언을 보세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과거에 이루었던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판단하시면 보람 있는 거 추리세요.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판단할 때, 역사가가 과거 지나온 역사를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내 삶에 중요하고 구원이 되는 것을 골라서 편집을 합니다. 역사가와 지난 세기의 대화, 만남,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요? 구약에 있는 모든 역사, 예수 이전의 모든 역사는 오늘 예수의 안경을 끼고 보십시오. 그리고 엘리야의 예언도 그렇게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예수와 모세가, 예수와 엘리야가 하나가 됩니다. 신약과 구약이 왜 하나가 됩니까? 왜 우리가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역사를 우리의 경전으로 받아들입니까? 예수의 눈으로 본 예수 이전의 하나님의 통치 역사입니다. 이렇게 구약을 보십시오. 예수가 안경입니다. 역사관의 이야기고, 신앙관의 이야기고, 신앙고백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본 역사는 이렇게 출애굽기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자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건넌 게 아니라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의 백성은 물이 갈라져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했던 이집트의 군사들은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홍해가 뭡니까? 예수의 십자가와 같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건 뭡니까? 그것은 예수님 십자가 다음에 온 작은 그러나 실제화 된 역사적 부활의 세계입니다. 예수의 눈으로 봤더니 출애굽 사건 자체가 십자가 사건과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있었습니다. 홍해는 자연적 사건이고, 상징적 사건입니다. 홍해가 십자가라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왔습니다. 예수의 수난과 고난이라고 이름하는, 죽음이라 이름하는, 십자가를 건너온 우리는 부활이란 이름하는 새로운 가나안 땅, 새로운 예루살렘을 축복으로 본다는 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엘리야는 누굽니까? 엘리야는 모든 예언을 대표했습니다. 엘리야는 살아서 승천했다고 그랬습니다. 살아서 승천한 사람은 다시 와야 합니다. 다시 온 사람이 오늘 세례요한으로 와서 엘리야가 하는 말, 새로운 세례요한이 하는 말, “메시야가 오신다.” 그 메시야가 오늘 왔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엘리야를 비롯해서 모든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예언의 말씀을 예수의 십자가 부활의 힘으로 다시 해석합시다. 구약 성경 전체를, 인류의 모든 역사를, 창조역사를 십자가 부활의 힘으로 다시 해석해 봅시다. 해석해 보면, 구약의 모든 역사가 우리한테 생명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눈으로. 오늘 이 사실을 변화산 상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역사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가 죽습니다. 죽으면 죽음 다음에 올 부활의 역사가 우리한테 주어질 미래의 역사입니다. 내일 우리는 부활을 위해서 십자가로 갑니다. “나는 죽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만백성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 수난의 시절을 내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수난의 터널을 지나면, 수난의 홍해를 지나면 반드시 약속된 땅이 있다. 그 땅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여라. 그 땅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여라.” 그 이야기를 하시기 위해서 오늘 변화산상에서 몸이 변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수난을, 구원의 길로 생각하십시오. 이 사건이 모세와 엘리야를 끌어안은 예수의 대화, 예수의 한 모임, 이 사실을 우리는 늘 경험해야 합니다. 지나간 역사는 예수한테 세례를 받습니다. 지나간 우리의 모든 조상들의 역사도 예수한테 세례를 받으면 다시 구원의 역사로 들어갑니다. 이 사실 하나를 분명히 인지하고 확인하십시다. 그러면 그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내려가자. 두려워마라. 일어나라.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새로운 가나안 땅이 여러분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실 때,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실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셨지만 듣는 사람들은 직접 하나님 말씀 듣지 못하고 구름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기억하시죠?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해서 하는 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똑같은 말씀이 베드로후서에 베드로가 기록했습니다. 세례 받을 때 보지 못했지만 오늘 변화산 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베드로후서의 기록이에요.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세례받을 때 주어졌는데 오늘 변화산 상의 말씀은 이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 그 분의 말을 들읍시다. 그분의 행실을 따릅시다. 그런데 그 말씀이 구름 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옛날에 기록된 모든 예수의 말씀을 자연의 현상, 사례현상, 기후 현상을 합해서 분위기를 연출한 장면이 나오는데 구름 낀 역사는 독특한 역사입니다. 맑은 하늘에 대낮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항상 천둥을 동반한 속에서 구름 낀 속에서 암흑 속에서 하나님의 실낱같지만 관통하는 말씀을 해 주신 것이 구약 성서 전체의 기록입니다. 오늘 변화산 상에서 구름 속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내가 사랑하는 아들의 말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구름을 뚫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기도에 응답하실 때, 언제 하시느냐 하면, 잠잘 때도 응답하시고 일할 때도 응답하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건강하게 사시다가 병 들릴 때가 있지요? 사업이 잘나가다가 한 때 좌절될 때가 있지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구름 낀 날씨처럼 괴로울 때가 있죠? 나라가 잘 나가는 것 같은데 지금처럼 위기에 닥칠 때가 있지요? 구름은 하늘과 땅을 만나게 하는 중간지대이지만 구름은 햇빛도 아니고 암흑 천지도 아니고 중간쯤 생긴 불안, 질병, 좌절, 아픔, 또는 위기, 그 위기를 뚫고 아픔을 뚫고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의 말을 들어라.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가 좋아하는 아들, 그의 말을 들으면 산다.” 그의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내부로부터 나오는 얼굴이 너무 광채가 커서 부활을 담은 얼굴이 너무나 커서, 십자가의 구름을 뚫고 하시는 그분의 말씀이 너무나 커서 흰 옷입은 사람처럼 하얀 것으로 광채가 뒤덮였습니다. 우리한테 희망을 주시는 광채를 주시는 거룩함을 주시는 그 분이 구름을 뚫고 말씀하십니다. 역경을 뚫고 말씀하십니다. 위기를 뚫고 기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이 얻은 통로를 뚫고 여러분에게 진실된 삶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좋아한다. 제발 그의 말을 들어라. 이 위기를 살자.” 사는 방법은 꿰뚫고 사는 겁니다. 하늘에서 하늘의 음성이 꿰뚫고 내려오셨듯이 오늘도 내려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일어나라. 두려워말라. 이 길을 가자.” 수난절을 맞이합니다. 수난을 뚫고 가십시다. 그리고 위기를 맞으면 위기를 뚫고 가십시다. 예수와 함께 갑시다. 그러나 위기 때 수난 때 구름이 끼면 무릎을 꿇고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임해서 이 어려운 터널을 뚫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고난이 가져온 변화/ 시119:65-72
고난이 가져온 변화 시119:65-72 오늘 읽어 드린 시편 말씀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 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인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잘못된 길로 가다가 고난을 통해서 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보듯이 고난은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만들 어 주는 쓴 약과 같습니다. 고난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긴장하게 되면서 창조적인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잡이를 하는 영국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북해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런던에까 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가지고 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어부들이 아무리 잘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 보 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한 어부만은 북해에서 잡은 청어들을 싱싱하게 산채로 런던에 가 지고 와서 큰 재미를 보았습니다. 동료 어부들은 이상하게 여겨 그 비법을 물었더니 그 어부가 고민 끝에 말하기를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어부들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모두 잡 아먹지 않소?\"라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만 두 세 마리밖에 못 먹지요. 그러나 그 통에 있는 다른 많은 청어들은 잡혀 먹지 않으 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열심히 헤엄치며 살려고 애를 쓰지요. 그래서 청어들 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청어를 잡아먹는 메기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청어를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인 것처럼, 이 세상에 고난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바른 삶, 건강한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이를 곧 깨닫게 됩니다. IMF의 시련이 닥쳐오자 우리 모두가 긴장하게 되고, 그 동안 헤프게 살아왔던 삶에서 거품을 빼고 알뜰하게 살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하며 지혜를 짜내게 되었습니다. 문어발처럼 한없이 확장만을 거듭하여 왔던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하게 되었고, 정부나 사회 각 기관이 모두 쓸데 없이 벌려 놓 았던 조직들을 재정비하여 효율성을 높이게 되었고, 힘들고 더러운 일들을 기피하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것저것 가 리지 않고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안하였던 직장에서 퇴직하거나 해고되면서 어떻게 하든지 살 아남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고 머리를 짜내어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 전체가 긴 장하여 모든 면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IMF는 우리 사회의 병 든 부분들을 수술해 내는 좋은 치료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앞으로 더 건강해질 것입니다. 더 창의적 이고 더 건전한 사회로 발전할 것입니다. 정치나 경제가 과거와는 다르게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것입니 다. 고난의 의미 이런 관점에서 고난을 볼 때 고난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 된 우리의 삶을 바로 잡아 주는 좋 은 치료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수술 받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수술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 것을 통해서 잘라 낼 것은 잘라 내고, 바르게 할 것은 바르게 함으로 병들었던 몸에 다시 건강을 얻게 해 줍니다. 오늘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병들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병들었기 때문에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 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병들었는데도 수술을 받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 는 부모라면 자식이 병들었을 때 즉시 그를 입원시켜 치료받게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병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고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병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부모는 강제로 그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하 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치료는 고통이지만, 그러나 그 치료를 통해서 비로소 그는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는 것 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병든 우리를 치료하시고 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깊이 병 든 우리를 보시고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것 같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려고 고난을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이며, 동시에 그 죄로 말미암은 병을 고치시려 는 사랑입니다. 자식의 잘못을 벌하는 아버지의 채찍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식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그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그 잘못을 돌이키게 함으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아버 지의 사랑이 바로 그 채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고난을 하나님의 구원의 한 도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 집트에서 구원하여 내시어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며 고난 당하게 하신 것도 그들을 그의 택한 민족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여름 카이로에서 냉방이 잘 된 자동차로 시내산을 거쳐 이스라엘 국경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이런 뜨거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곳에서 천막 생활을 하고 있는 베드윈족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저들은 얼마나 강인하고 인내성이 강할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런 혹독한 광야에서 단련시키므로 그들을 영적인 민족이 되게 하셨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질긴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 다져진 이스라엘 자손들이기에 오늘날에도 이 사막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 농업 부국을 이루어 살 고 있습니다. 저들은 몇 년을 연구한 끝에 사막에서 농업이 안되는 이유가 염분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흙 속에 있는 소금기로 인하여 작물이 자라지 않음을 알게 된 이스라엘인들은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소금기 있는 땅에서는 어떤 작물이 잘 자랄까?\" 이렇게 연구한 결과 오렌지가 소금기에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렌지 생산에 비용을 적 게 들여 국제 경쟁력이 있게 하느냐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연구 결과로 알게 된 것이 농가 당 50여 수의 젖소와 돼지를 길러 그 퇴비를 오렌지 밭에 주는 것이 효과적 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의 오렌지 재배와 젖소 사육이 이제는 세계적인 농업 부국을 이루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정말 강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의 역사 를 통해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겼고, 수많은 지혜의 책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난은 이스라엘을 구원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현대의 병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가운데 고난을 보내심은 우리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병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보여주신 창조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인간의 욕망대로 살아가는데 그 병의 원인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병은 물 질 문명의 병입니다. 인간의 육체만을 위하여 발전시킨 물질 문명이 바로 인간의 영을 병들게 하였고, 영이 병들면 결국 우리의 삶 전체가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의 한 부분이 아프면 그곳만 아픈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아프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 아픔 때문에 위축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영이 병들 때 우리는 전체적으로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참으로 많이 편해졌습니다. 집도 아주 편리하게 살 수 있도록 지어졌고, 냉장고를 비롯한 수많 은 가전제품들이 우리의 삶을 아주 편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들이 과연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옥 생활은 좀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옥이 편리하 게 지어진 아파트나 현대가옥보다 더 자연 친화적인 구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동선이 길고, 방문 을 열면 바로 바깥 공기를 접할 수 있는 이런 집이 건강에 더 좋은 집이 아닐까요? 수돗물을 틀어서 물을 쓰는 것보 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쓰는 것이 건강한 삶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아닐까요? 덜 움직이고 편안하게 사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약질인 까닭은 너무 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즈음 흙집이 건강에 좋다고 하여 그런 집을 짓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흙으로 벽과 바닥을 이루고 초가를 이은 납작한 집을 우리는 문명에 뒤떨어진 구 조라고 생각하였습니다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더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사는 지혜로운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 니다. 집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물질 문명의 발달에 따라 편리한 도시 생활을 이룩하였지만, 우리의 육체는 더 많은 병에 시달리고, 우리의 마음은 각박하여지고, 우리의 양심은 마비되었으며, 우리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겉으로는 풍요로워진 것 같지만 실상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가난뱅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이 무지를 일깨워 주 는 각성제(覺醒劑)입니다.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가 다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만들고 우리 의 육체적 건강을 헤쳐, 결과적으로 우리를 전체적으로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그런 문명의 이기들을 다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를 좀먹는 독소(毒素)임을 깨닫고 그것을 경계 하며 부지런히 우리의 영성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이 보내신 고난이 올 때 더욱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지난날들을 반성하면서 영적 각성을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길 우리가 이렇게 영적 각성을 위해 노력할 때 고난은 물러가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고난을 벗어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을 따라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거기 서 그는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흉년이 들게 되자 그는 먹을 것이 없게 되어 돼지 치는 사람에게 가서 그 돼지가 먹는 것들을 함께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주 극심한 고난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돌아가는 길만이 자기가 살길임을 알았던 것 입니다. 이 비유는 현대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의 자산들을 현대인들을 마구 개발하여 썼습니다.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한 탕자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물질 문명의 달콤함에 취하여 방탕하 게 살면서 하 나님의 자산들을 마구 낭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원의 고갈과 더불어 문명에 의한 자연의 파괴가 몰고 올 재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 될 것인가를 경고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정신을 차리지 않으 면, 흉년 곧 재앙의 날이 닥칠 때 우리는 돼지와 같은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IMF는 그 재앙의 전조(前兆)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탕자가 돼지우리에 내려가기까지 정신을 못 차린 것처럼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정신이 드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탕자는 제 정신이 들면서 자기가 살길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밑에 있을 때는 그것이 부자유인 줄 알았는데 이제 고난을 통하여 그것이 참 자유요, 그것이 참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 서 그는 찢기고 더러워진 몸을 이끌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시는 초청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우리가 살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주시기 위한 채찍입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제 멋대로 놀아나던 정치가 형편없이 몰락하여 버렸 는데, 그 정치가 살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정치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동안의 정권들이 행하였던 불의와 부정과 부조리들을 다 털어 버리고 정직함과 정의와 공평을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가 제 멋 대로 행하다가 오늘날과 같이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되었는데, 그 경제가 다시 사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 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방만(放漫)함과 절제할 줄 모르는 탐욕을 벗어버리고, 규모 있게, 신중하게, 정직하게, 자신 을 가다듬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자기 편의와 이익만을 추구하던 지난날의 욕심을 다 벗어버리 고, 겸손히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며 그릇되게 행하였던 삶에서 돌이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 길만이 바로 고난을 극복하는 길입 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고난은 끝나지 아니하고 우리를 계속 몰아붙일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될 때, 즉 교만과 어리석음을 벗어 던지고, 겸손과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로 나아가 그의 계명과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아갈 때 고난은 우리를 떠날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아버지는 그를 크게 환영하였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으며 큰 잔치를 벌렸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 뻐하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한 구원의 자녀로 영접하여 주실 것입니 다. 탕자가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통하여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그는 집에 돌아온 이후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을 하였을 것이며, 아버지 말씀이라면 무엇이나 그대로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되었을 것입 니다. 고난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고난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교만과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임과 동시에 우리를 그 병에서 건져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떠나 제 멋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을 회 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눈을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그를 두려워하면서 그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러면 고난은 물러가고 하나님이 우리를 병에서 구원하여 새사람 되게 하시고 우리를 그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게 하 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고난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겸손해져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사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문명의 때를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품인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이 물질 문명의 악마성을 똑 똑히 보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전진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요 구하고 계신 하나님의 채찍이며 사랑입니다. 욥이 까닭을 알 수 없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으나, 이 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라고 고백 한 것처럼, 여러분도 오늘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이론적으로, 머리 로만 알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직접 뵈오며, 가슴으로 받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고난이 여러분에게 이 런 변화를 가져온다면 이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은혜이며,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고난을 통해 믿음이 자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를 분명하게 보시며, 그 말씀을 좇아 아름다운 삶을 이룩 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이 가져온 변화/ 시119:65-72, 눅15:11-24
고난이 가져온 변화 시119:65-72, 눅15:11-24 오늘 읽어 드린 시편 말씀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인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잘못된 길로 가다가 고난을 통해서 바른 길로 들어섰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보듯이 고난은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치료하여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쓴 약과 같습니다. 고난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긴장하게 되면서 창조적인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잡이를 하는 영국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북해로부터 먼 거리에 있는 런던에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가지고 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어부들이 아무리 잘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 보면 청어들은 거의 이다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한 어부만은 북해에서 잡은 청어들을 싱싱하게 산채로 런던에 가지고 와서 큰 재미를 보았습니다. 동료 어부들은 이상하게 여겨 그 비법을 물었더니 그 어부가 고민 끝에 말하기를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어부들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모두 잡아먹지 않소?\\\"라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만 두 세 마리밖에 못 먹지요. 그러나 그 통에 있는 다른 많은 청어들은 잡혀 먹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올 때까지 모든 청어들은 열심히 헤엄치며 살려고 애를 쓰지요. 그래서 청어들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청어를 잡아먹는 메기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청어를 건강하게 만드는 비결인 것처럼, 이 세상에 고난이 있음으로써 우리의 삶은 바른 삶, 건강한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이를 곧 깨닫게 됩니다. IMF의 시련이 닥쳐오자 우리 모두가 긴장하게 되고, 그 동안 헤프게 살아왔던 삶에서 거품을 빼고 알뜰하게 살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하며 지혜를 짜내게 되었습니다. 문어발처럼 한없이 확장만을 거듭하여 왔던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하게 되었고, 정부나 사회 각 기관이 모두 쓸데 없이 벌려 놓았던 조직들을 재정비하여 효율성을 높이게 되었고, 힘들고 더러운 일들을 기피하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안하였던 직장에서 퇴직하거나 해고되면서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고 머리를 짜내어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 전체가 긴장하여 모든 면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IMF는 우리 사회의 병든 부분들을 수술해 내는 좋은 치료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앞으로 더 건강해질 것입니다. 더 창의적이고 더 건전한 사회로 발전할 것입니다. 정치나 경제가 과거와는 다르게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 이런 관점에서 고난을 볼 때 고난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 된 우리의 삶을 바로 잡아 주는 좋은 치료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수술 받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수술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잘라 낼 것은 잘라 내고, 바르게 할 것은 바르게 함으로 병들었던 몸에 다시 건강을 얻게 해 줍니다. 오늘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병들었음을 뜻합니다. 우리가 병들었기 때문에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병들었는데도 수술을 받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식이 병들었을 때 즉시 그를 입원시켜 치료받게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병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병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부모는 강제로 그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치료는 고통이지만, 그러나 그 치료를 통해서 비로소 그는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병든 우리를 치료하시고 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깊이 병든 우리를 보시고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것 같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려고 고난을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이며, 동시에 그 죄로 말미암은 병을 고치시려는 사랑입니다. 자식의 잘못을 벌하는 아버지의 채찍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식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은 그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그 잘못을 돌이키게 함으로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그 채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고난을 하나님의 구원의 한 도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여 내시어 광야에서 40년 동안 헤매며 고난 당하게 하신 것도 그들을 그의 택한 민족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여름 카이로에서 냉방이 잘 된 자동차로 시내산을 거쳐 이스라엘 국경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이런 뜨거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곳에서 천막 생활을 하고 있는 베드윈족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저들은 얼마나 강인하고 인내성이 강할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런 혹독한 광야에서 단련시키므로 그들을 영적인 민족이 되게 하셨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질긴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 다져진 이스라엘 자손들이기에 오늘날에도 이 사막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 농업 부국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저들은 몇 년을 연구한 끝에 사막에서 농업이 안되는 이유가 염분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흙 속에 있는 소금기로 인하여 작물이 자라지 않음을 알게 된 이스라엘인들은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소금기 있는 땅에서는 어떤 작물이 잘 자랄까?\\\" 이렇게 연구한 결과 오렌지가 소금기에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렌지 생산에 비용을 적게 들여 국제 경쟁력이 있게 하느냐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연구 결과로 알게 된 것이 농가 당 50여 수의 젖소와 돼지를 길러 그 퇴비를 오렌지 밭에 주는 것이 효과적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의 오렌지 재배와 젖소 사육이 이제는 세계적인 농업 부국을 이루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정말 강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의 역사를 통해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겼고, 수많은 지혜의 책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난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현대의 병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가운데 고난을 보내심은 우리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병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보여주신 창조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고, 인간의 욕망대로 살아가는데 그 병의 원인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병은 물질 문명의 병입니다. 인간의 육체만을 위하여 발전시킨 물질 문명이 바로 인간의 영을 병들게 하였고, 영이 병들면 결국 우리의 삶 전체가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의 한 부분이 아프면 그곳만 아픈 것이 아니라 전체가 아프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 아픔 때문에 위축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영이 병들 때 우리는 전체적으로 병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참으로 많이 편해졌습니다. 집도 아주 편리하게 살 수 있도록 지어졌고, 냉장고를 비롯한 수많은 가전제품들이 우리의 삶을 아주 편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들이 과연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옥 생활은 좀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옥이 편리하게 지어진 아파트나 현대가옥보다 더 자연 친화적인 구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동선이 길고, 방문을 열면 바로 바깥 공기를 접할 수 있는 이런 집이 건강에 더 좋은 집이 아닐까요? 수돗물을 틀어서 물을 쓰는 것보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쓰는 것이 건강한 삶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아닐까요? 덜 움직이고 편안하게 사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약질인 까닭은 너무 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즈음 흙집이 건강에 좋다고 하여 그런 집을 짓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흙으로 벽과 바닥을 이루고 초가를 이은 납작한 집을 우리는 문명에 뒤떨어진 구조라고 생각하였습니다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더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사는 지혜로운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물질 문명의 발달에 따라 편리한 도시 생활을 이룩하였지만, 우리의 육체는 더 많은 병에 시달리고, 우리의 마음은 각박하여지고, 우리의 양심은 마비되었으며, 우리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겉으로는 풍요로워진 것 같지만 실상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가난뱅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이 무지를 일깨워 주는 각성제(覺醒劑)입니다.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가 다 좋은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만들고 우리의 육체적 건강을 헤쳐, 결과적으로 우리를 전체적으로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그런 문명의 이기들을 다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를 좀먹는 독소(毒素)임을 깨닫고 그것을 경계하며 부지런히 우리의 영성을 깨워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이 보내신 고난이 올 때 더욱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지난날들을 반성하면서 영적 각성을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길 우리가 이렇게 영적 각성을 위해 노력할 때 고난은 물러가고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고난을 벗어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을 따라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흉년이 들게 되자 그는 먹을 것이 없게 되어 돼지 치는 사람에게 가서 그 돼지가 먹는 것들을 함께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주 극심한 고난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고 돌아가는 길만이 자기가 살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 비유는 현대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의 자산들을 현대인들을 마구 개발하여 썼습니다.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한 탕자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물질 문명의 달콤함에 취하여 방탕하게 살면서 하 나님의 자산들을 마구 낭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원의 고갈과 더불어 문명에 의한 자연의 파괴가 몰고 올 재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 될 것인가를 경고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흉년 곧 재앙의 날이 닥칠 때 우리는 돼지와 같은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IMF는 그 재앙의 전조(前兆)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탕자가 돼지우리에 내려가기까지 정신을 못 차린 것처럼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마지막 파멸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 정신이 드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탕자는 제 정신이 들면서 자기가 살길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아버지 밑에 있을 때는 그것이 부자유인 줄 알았는데 이제 고난을 통하여 그것이 참 자유요, 그것이 참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찢기고 더러워진 몸을 이끌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시는 초청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우리가 살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주시기 위한 채찍입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제 멋대로 놀아나던 정치가 형편없이 몰락하여 버렸는데, 그 정치가 살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정치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동안의 정권들이 행하였던 불의와 부정과 부조리들을 다 털어 버리고 정직함과 정의와 공평을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가 제 멋대로 행하다가 오늘날과 같이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되었는데, 그 경제가 다시 사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방만(放漫)함과 절제할 줄 모르는 탐욕을 벗어버리고, 규모 있게, 신중하게, 정직하게, 자신을 가다듬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자기 편의와 이익만을 추구하던 지난날의 욕심을 다 벗어버리고, 겸손히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며 그릇되게 행하였던 삶에서 돌이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 길만이 바로 고난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고난은 끝나지 아니하고 우리를 계속 몰아붙일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될 때, 즉 교만과 어리석음을 벗어 던지고, 겸손과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로 나아가 그의 계명과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아갈 때 고난은 우리를 떠날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도 아버지는 그를 크게 환영하였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으며 큰 잔치를 벌렸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한 구원의 자녀로 영접하여 주실 것입니다. 탕자가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통하여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그는 집에 돌아온 이후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을 하였을 것이며, 아버지 말씀이라면 무엇이나 그대로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고난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고난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교만과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임과 동시에 우리를 그 병에서 건져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떠나 제 멋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을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눈을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그를 두려워하면서 그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고난은 물러가고 하나님이 우리를 병에서 구원하여 새사람 되게 하시고 우리를 그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고난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겸손해져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사랑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문명의 때를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품인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이 물질 문명의 악마성을 똑똑히 보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전진해 가야 할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이런 변화를 요구하고 계신 하나님의 채찍이며 사랑입니다. 욥이 까닭을 알 수 없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으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라고 고백 한 것처럼, 여러분도 오늘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이론적으로, 머리로만 알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직접 뵈오며, 가슴으로 받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고난이 여러분에게 이런 변화를 가져온다면 이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은혜이며,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고난을 통해 믿음이 자라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를 분명하게 보시며, 그 말씀을 좇아 아름다운 삶을 이룩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강해(39)/ 부활 때에 변화하는 것들/ 고전15:50-58/ 정수환 목사/ 학운교회/ 2005-01-12
고린도전서강해(39)/ 부활 때에 변화하는 것들 고전15:50-58 Ⅰ.내용 분해와 조직 1.머리말 - 부활에 관하여 계속 언급하고 있는 바울은 우리 몸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그리고 그런 변화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본론 ①우리 몸의 영적 변화 ㄱ.썩어질 육신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a.살과 피로 이뤄진 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50) b.이 썩어질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이다(50) ㄴ.우리는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할 것이다. a.이제 신기하고 놀라운 비밀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우리는 다 죽지 않고 새 몸을 얻을 것이다(51) b.마지막 나팔을 울릴 때, 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52) c.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이다(52) ㄷ.그런 변화가 있을 때 성경말씀이 이루어지리라. a.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한다(53) b.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54) ②우리 인생의 의미 변화 ㄱ.죄와 율법이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다. a.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 b.죄, 곧 죽음을 가져오는 독침은 없어지고,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율법도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재판할 수 없을 것이다(56) c.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57) ㄴ.너희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으리라. a.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라(58) b.너희가 아는 대로 너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58) 3.맺는말 ①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나, 이제는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게 되었다. ②그런고로 우리는 믿음 위에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힘써 행해야 한다. Ⅱ.내용 연구와 삶의 적용 1.부활로 인한 육신의 변화 ①변화해야 이유 ㄱ.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50) ㄴ.썩어질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 없다(50) ②변화하는 모습 ㄱ.우리는 다 죽지 않고 새로운 몸을 얻을 것이다(51) ㄴ.마지막 나팔을 울릴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변화하게 될 것이다(52) ③변화가 주는 뜻 ㄱ.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한다(53) ㄴ.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54) 2.부활로 인한 인생의 변화 ①죽음의 독침과 율법의 효력이 사라진다. ㄱ.죽음 :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55) ㄴ.율법 : 우리의 죄를 폭로하던 율법이 우리를 더 이상 재판할 수 없을 것이다(56) ②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게 된다. ㄱ.수고 :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58) ㄴ.다짐 :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해야 한다(58) 3.삶의 적용 ①인간의 문제와 그 결과 ㄱ.살과 피를 가진 몸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ㄴ.아무리 수고와 노력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죽으면 그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ㄷ.썩어질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 없다. ②하나님의 치료와 섭리 ㄱ.우리 몸을 썩지 않을 영체로 변화시켜 주신다. ㄴ.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죄와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ㄷ.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경말씀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③인간의 응답과 실천 ㄱ.우리는 다 죽지 않고 새로운 몸을 얻을 것이다. ㄴ.이제 주님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었으니, 예수를 굳건히 믿고 의지해야 한다. ㄷ.믿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해야 한다. 현대어성경 50 나의 형제들이여, 이 점을 명심해 두십시오. 살과 피로 이루어진 땅 위의 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썩어질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입니다. 51 그러나 이제 신기하고 놀라운 비밀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다 죽지 않고 새로운 몸을 얻을 것입니다. 52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눈 깜짝 할 사이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들릴 때 죽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순식간에 결코 죽지 않는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살아남아 있는 우리들도 한순간에 새로운 몸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53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죽을 수밖에 없는 땅 위의 몸은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하늘의 몸으로 변화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54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승리가 죽음을 삼키리라’는 성경의 말씀이 사실이 될 것입니다. 55 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있느냐?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죄, 곧 죽음을 가져오는 독침은 없어지고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율법도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재판할 수 없을 것입니다. 56 (55절에 포함되어 있음) 57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어찌 이루 다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58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장래의 승리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니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에 항상 힘쓰십시오. 부활은 분명히 이루어지며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표준새번역 50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51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될 것인데, 52 마지막 나팔을 울릴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53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54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5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 골3:18-4:1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 골3:18-4:1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큰 행사들을 치루었습니다. 지난주일 낮에는 추수 감사 예배와 성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밤부터 새천년 생명 사랑 나눔 축제를 화요일 밤까지 가졌습니다. 처음 시도했지만 이번 기회에 태신자를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할 만큼 좋은 기회였습니다. 모두 527명이 초청되었고 그 가운데 약 50%에 해당하는 263명이 주님을 영접하겠다고 결신카드를 제출해 주셨습니다. 아주 감사할 만한 일입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 부목사로 오랫동안 지낸 분이 자기가 목회를 하면 제자훈련과 대각성 전도집회는 꼭 하겠다고 열심히 말하던 것을 이제 이해할만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계속해서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로 도와 주셔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도하신 분들이 4주 동안 양육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제 그 분들을 위해서 신앙의 첫 걸음을 내딛는 일을 돕도록 책임을 진 분들이 모두 연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새로 오신 분들을 그 자리에서 등록을 시키고 등록을 하신 분들께 꽃바구니를 주었습니다. 자리마다 꽃바구니가 놓여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감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피려고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당시 한 지붕아래 있는 식솔들의 관계가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속세를 떠난 삶이나 집안 일을 벗어난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지붕 아래서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혼자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잘 아는 관계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관계를 변화시키는 삶을 사는 것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사도가 가르치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식솔들 간의 관계에서 믿고 고백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17절의 대원리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위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특히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는 \"주\"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명령을 따르기 위한 동기 유발로서 \"주안에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모든 행동을 \"주께 하듯\"할 뿐 아니라 매사에 주를 두려워하고 또한 주님이 주시는 보상과 보응을 기억하고 행동하도록 요구합니다. 생각과 행동, 모든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삶의 어떤 영역도 주님의 통제 밖에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거룩한 영역이나 속된 영역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시간에도 우리는 주님을 의식해야하며 엿새동안 각자의 생업의 터전에서 일할 때도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당시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는 식솔들 상호 관계가 여기서는 모두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살피면 부부관계, 부모-자녀관계, 그리고 주종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제정하신 제도요 모든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관계이기에 부부관계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관계 중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와야 되는지 잘 모릅니다. 제일 첫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인간관계의 첫 획이 그어진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부모-자식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기본적 인간 관계를 전부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필 점은 부부관계와 부모-자녀관계는 한 문장씩 다뤄진 반면 주종관계, 특히 종과 관계된 내용에는 분량이 많은 것은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한 계층이요 격려가 필요한 계층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특별히 다가옵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여기에서 끝으로 우리가 살필 점은 왜 약자에게 먼저 권면하고 그 다음에 상대적으로 강자에게 권면했냐는 사실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라 쌍방을 향해서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명령도 뒤따르고 있는 다음 명령과 분리해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식솔을 이루고 있는 계층마다 창조 질서 내에서 그 고유한 위치가 있으며 특정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창조질서 내에서 고유한 위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에 따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먼저 부부관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어떻게 이 관계를 변화시켜야 할까요? 우선 18절, 19절을 읽어봅시다. 18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들이 읽어주시고 19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자들이 읽어주시겠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각각 관련자를 먼저 불러내고 두 개의 절로 구성된 문장으로 권면이 각각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권면은 주절과 종속절로 구성된 반면 남편에 대한 권면은 두 개의 대등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의 절은 긍정형이고 뒤의 것은 부정형입니다. 아내되신 여러분, 먼저 여러분이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남편의 통제 아래 두라는 뜻입니다. 즉 여러분을 낮추고 남편을 높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남편의 권위를 존종할 것을 명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주안에서 마땅하다고 설명합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주안에서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강조하는 것을 보아 당시 골로새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이미 익숙한 교훈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에베소서에는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 성도 여러분, 짧지만 강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남편 앞에서 낮추십시오. 그리하여 남편의 위신을 세워주십시오. 그것은 모든 아내들이 해야할 적합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필요하지 않고 더 이상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성경은 취합니다. 여러분의 복된 결혼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핵심적인 처방입니다. 대체로 여자 분들이 남자 분들보다 말씀들을 잘합니다만 남편을 향해서 \"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라고 소리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 보다는 다소곳이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신앙의 부인들에게 합당한 행동입니다.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상급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제 남편되신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사랑하라는 긍정형 명령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부정형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신 것은 당시의 사회가 워낙 아내를 쉽게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인을 쉽게 취할 수 있었던 문화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지금도 중요한 명령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아내를 더욱 더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아내를 계속 사랑과 연애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남편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아내를 대합니까? 저는 지난주간 하루 특별한 부부를 모시고 경주를 구경시켜드린 일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고신대학교에서 열린 한상동 목사 기념강좌에 강의를 맡아 남아공화국에서 오신 교수님 부부였습니다. 이 분은 몇 년 전 저희 울산 교회에서 에스겔 37장을 통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밤에 다시 한번 우리들과 말씀의 교제를 나누기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분들과 교제를 가진 것은 한 20년 가까이 됩니다. 제가 유학생이었을 때 크리스마스 휴가에 우리 한국 학생 가정들을 두 차례나 초청하여 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8년간 유학 생활을 했지만 그 중간에 고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질 처지가 되지 못되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휴가는 그곳 사람들에게는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절기였기에 우리 형편을 딱하게 여겨서 년 2주간 가지는 자기 휴가의 반을 우리 한국학생 가정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흑인을 위한 신학교 교수였으며 벤다부족을 위한 성경번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어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거기 있는 한 주간동안 이웃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이제 한국말도 하시겠네요\"라고 농담을 할 정도입니다. 영어, 독일어, 화란어, 프랑스어, 등 현대어들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을 해독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언어 실력뿐만 아니라 그 분의 반듯한 행동으로 인해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할 때와 \"아니요\"할 때를 분명히 구분하던 그의 행동은 감명 깊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속으로 아닌데 싶어도 관계 때문에 \"아니오\"라는 말을 선듯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닐 때는 \"아니오\"라고 하고 자신이 틀렸으면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너희 말을 \"예\"할 때는 \"예\"하고 \"아니오\"할 때는 \"아니오\"하라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간 경주에 모시고 가서 새로운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는 혼자 오셨고 이번에는 두 분이 함께 오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을 모시고 다니면서 하루지만 가까이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특히 교수님의 아내사랑에 대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분을 평소에도 존경했지만 이번에는 그 존경하는 목록에 최상의 것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여행 시작부터 동양을 처음 오는 부담 때문에 주저하는 부인을 설득했어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음식을 대해도 먹기를 주저하면 이런 저런 말로 달래서 먹게 하고, 경주에 볼거리가 한 두 개가 아닌데도 지난 번 자신이 보았던 곳을 꼭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에서 나는 아내 사랑이 무엇인지 새삼 배웠던 하루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렇다할 특별히 뛰어나 보이는 부분은 없어 보이지만 늙도록 자신이 선택한 아내를 그처럼 세심하게 챙기고 온갖 말로 격려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동했습니다. 사랑이란 지극히 평범한 아내를 극진하게 돌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라\'는 명령에 \'괴롭게 말라\'는 주문을 첨가합니다. 이것은 가사노동의 중압감과 관련해서라기보다는 아내의 인격과 마음을 소홀히 하는데 따른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수고를 덜어주어야 합니다만 그 보다 더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남편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앞서 말한 분의 예를 들겠습니다. 교수님은 아주 유머와 재치가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한국에 온 기념으로 사모님께서 처음에는 만 오 천원짜리 자수정 반지를 고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결국 만 오 천원짜리 반지를 두고 한참 고민을 하시다 옆에 있는 오만원짜리 반지가 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어지고 있는 아내를 보고 남편이 하시는 말씀이 \"당신은 5만 원짜리 반지를 끼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라고 망설이는 부인을 권해서 구입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환율 때문에 그것이 얼마인지 부인은 정확히 모르고 샀는데 나중에 값을 알고 얼마나 아까워하는지 앞으로 3주간 동안을 곱씹을 것이라고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서 제게 물었습니다. 반지가 어울리는지를! 그래서 예쁘다고 했더니 부인이 확인을 하면서 \"당신은 목사니까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라고 요청하여 \"정말이라\"고 제가 확인했더니 교수님이 급히 하시는 말씀,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당신 신혼 초기의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습니다. 신부였던 사모님이 서재에 커튼을 만들어 놓고 어떠냐고 물어서 그냥 느끼는 대로 예쁘다고 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를 말입니다. 그럴 때는 예쁘다고 해서는 안되고 \"너무 너무 예쁘다\"고 했어야 하는데 당시에 자기에게는 지혜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너무 솔직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하더군요. 글쎄요 아직도 저는 지혜가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잠자리에 누웠는데 어떤 강도사님 신혼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강도사님은 첫 날 밤에 자신과 아내 사이에 이불을 끼우고 잤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난 끼가 발동해서 \"우리도 그 사람처럼 사이에 이불 끼우고 잘까?\" 라고 했는데 웬걸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지더군요. 신혼 때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20년 넘게 살아도 사소한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배우기 위해 수업료 톡톡히 지불한 뒤에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아름다운 부부 관계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순종하고 사랑하십시오. 가장 핵심적인 명령를 지킬 때에 여러분의 가정은 변할 것입니다. 이 명령 앞에서는 아무런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상대가 안 하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이 잘못한다고 해서 내가 잘못해도 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제 두 번째 관계를 살펴봅시다. 가정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관계는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녀들에게 하는 권면과 부모들에게 하는 권면 모두 각각 명령과 그 이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형태는 권면의 일반적인 유형입니다. 아내와 남편에게 대한 권면도 헬라어로는 9개,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일정한 운율을 가지고 본문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비슷하게 아비들에 관한 권면도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녀들에 관해서는 13개의 단어가 사용되어 \"모든 일에\"라는 부사구가 특별히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순종하라\"는 말은 앞에 나온 \"복종하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상대방의 말을 주의해서 듣고 따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 부모님께 귀를 기울여서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자녀된 여러분이 해야할 그 어떤 일보다 이것은 우선입니다. 특히 \"모든 일에\"라는 부사구를 덧붙임으로 순종해야 할 영역은 자녀된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물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 그 자체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 외의 영역은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명령은 주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부모가 시키는 모든 일에 정말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자녀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신앙의 부모 여러분, 여러분을 향해서 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유교문화가 오랫동안 지배했던 우리 동양의 경우처럼 바울 당시에도 가정에서 부모, 특히 아버지의 권한은 대단했습니다. 이런 권위를 가진 부모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 때문에 분이 차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자녀로 분을 내게 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녀들이 어떤 경우에 화를 내는지 자녀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녀들은 특별히 자신이 이해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좌절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야단을 맞는다고 생각할 때 울분을 갖게 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절망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그렇게 낳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런 노력이 없이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 여러분,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세워주십시오. \'격노케\' 하는 것과 \'낙심\'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녀들은 쉽게 낙심하고 마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체의 부모에게 맡기신 그 분의 자녀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태어났고 내가 길렀지만 그들은 내 자녀이기에 앞서 하늘 아버지의 선물이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앞날에 대해서 여러분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앞날에 대해서 보장해 주시고 마지막 책임을 지어주실 분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잠시 내게 맡겨진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면 격노케하고 낙심하게 하는 일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분노하면 분노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의 책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녀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일은 부모의 몫일 것입니다. 흔들리는 자녀들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인식할 때 부모는 부모대로 주 안에서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의 마음이 낙심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앙의 부모들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되면 변화시켜야 하는 세 번째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보면 이것 역시 부부관계나 부모-자녀관계처럼 한 지붕 아래서 갖는 관계입니다. 오늘의 상황에서는 직장의 일터에서 갖는 인격적인 관계로 확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헬라어 단어 10개를 전후해서 사용하던 앞의 명령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구문의 일관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첫 문장에서는 호칭으로 시작하고 명령과 목적어 등으로 구성된 앞의 문장 패턴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라고 한 것과 동일한 명령을 듣습니다. 역시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의도적으로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를 것을 명령받지만 주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은 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 주인은 \"하늘의 상전\"과 대조해서 \"육체의 상전\"이라고 부릅니다. 어찌 되었든 이 세상 체제 아래서는 엄연한 상전입니다. 하늘의 주인을 섬긴다고 육체의 상전을 섬길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노동자는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모든 일에서 주인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눈가림\'으로 해서는 안 되고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직장생활을 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떻게 그 직장에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주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전파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거기에서 사람들을 감화시켜야만 합니다. 주인이 보일 때만 일을 하거나 주인에게 보일 심산으로만 하지말고 마음으로 성실하게 육체의 상전을 섬겨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2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자가 보이면 열심히 하는 척하고 없으면 불성실해 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로 알고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인정과 칭찬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과 상급을 바라고 무슨 일이든지 하라는 권면입니다. 사실 당시의 종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할 의욕이 있었겠습니까? 시키는 일이나 하고 주인이 있을 때나 하고 또 혼나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하는 것이 종들의 관례였을 것입니다. 일부러 애써 일하면 종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도 아래 있는 종들을 향해서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다하여\"하라는 명령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상식을 뒤엎는 권면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상식을 뒤엎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뒤엎는 사람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놀랍게도 오늘날 직장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밑의 직원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회사는 철저한 감시시스템을 가동시킵니다. 그래도 직원들은 빈틈을 살펴서 전화를 걸거나 인터넷을 접속시켜서 회사일과 관계없는 이곳저곳을 방문하곤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은 쉬지 말고 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눈치로 일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맡겨진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께 하듯 근무하면 이 땅에서 맡겨진 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그 상급은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5절). 성실한 삶을 사는 보상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그 어떤 일도 주님과 무관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주님이요 모든 이들의 주님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 매월 받는 월급이 끝이 아닙니다. 하늘의 유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눈가림만 하든지 아니면 성실한 마음으로 하든지 쉽게 구별도 되지 않고 공정한 보상도 없지만 땅에서 받는 월급이나 보너스가 마지막 보상이 아닙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주일날 봉사하는 교회 일 뿐만 아니라 생활 전선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일하면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결국 어떤 수고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불의를 행하는 자는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습니다. 주님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눈가림으로 일하는 사람은 하늘의 주인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종들을 향해서 하는 말을 마무리하는 위치에 있지만 동시에 주인들을 향해서도 경계하는 효과를 동시에 얻습니다. 종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눈가림으로 일하는 \"불의\"를 경고하는 동시에 주인이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대하지 않는 \"불의\" 역시 처벌될 것을 경고합니다. 종이거나 주인이거나 불문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는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은 표면적으로는 종에 대한 교훈을 마무리하는 위치이지만 실제로는 양쪽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주인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일을 하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대우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편애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에 따른 상급을 생각하면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명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공평이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퇴수회 때에 한 강사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목사 때 불평과 담임 목사 때 생각은 다릅니다. 수고한 사람의 수고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능력이나 외모로만 평가하니 않는 것은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삶이 가능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2000년 전 세상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약자들을 향해서만 명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그룹을 향해서도 하나님께서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양자 관계의 상호 보완적 명령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삼자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상호 관계는 또 다른 분이신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변화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종이 주인을 대할 때나 종이 주인을 섬길 때 그 사이에 하늘의 주인이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제 삼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의 시각으로 살필 수 있어야 공정해 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제 삼자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인간관계는 반드시 저울질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모든 관계는 아름답게 변화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들로 인해서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 골3:18-골4:1/ 2002-04-02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 골3:18-골4:1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큰 행사들을 치루었습니다. 지난주일 낮에는 추수 감사 예배와 성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밤부터 새천년 생명 사랑 나눔 축제를 화요일 밤까지 가졌습니다. 처음 시도했지만 이번 기회에 태신자를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할 만큼 좋은 기회였습니다. 모두 527명이 초청되었고 그 가운데 약 50%에 해당하는 263명이 주님을 영접하겠다고 결신카드를 제출해 주셨습니다. 아주 감사할 만한 일입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 부목사로 오랫동안 지낸 분이 자기가 목회를 하면 제자훈련과 대각성 전도집회는 꼭 하겠다고 열심히 말하던 것을 이제 이해할만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계속해서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로 도와 주셔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도하신 분들이 4주 동안 양육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제 그 분들을 위해서 신앙의 첫 걸음을 내딛는 일을 돕도록 책임을 진 분들이 모두 연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새로 오신 분들을 그 자리에서 등록을 시키고 등록을 하신 분들께 꽃바구니를 주었습니다. 자리마다 꽃바구니가 놓여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감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피려고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당시 한 지붕아래 있는 식솔들의 관계가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속세를 떠난 삶이나 집안 일을 벗어난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지붕 아래서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혼자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잘 아는 관계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관계를 변화시키는 삶을 사는 것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사도가 가르치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식솔들 간의 관계에서 믿고 고백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17절의 대원리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위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특히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는 \"주\"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명령을 따르기 위한 동기 유발로서 \"주안에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모든 행동을 \"주께 하듯\"할 뿐 아니라 매사에 주를 두려워하고 또한 주님이 주시는 보상과 보응을 기억하고 행동하도록 요구합니다. 생각과 행동, 모든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삶의 어떤 영역도 주님의 통제 밖에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거룩한 영역이나 속된 영역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시간에도 우리는 주님을 의식해야하며 엿새동안 각자의 생업의 터전에서 일할 때도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당시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는 식솔들 상호 관계가 여기서는 모두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살피면 부부관계, 부모-자녀관계, 그리고 주종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제정하신 제도요 모든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관계이기에 부부관계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관계 중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와야 되는지 잘 모릅니다. 제일 첫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인간관계의 첫 획이 그어진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부모-자식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기본적 인간 관계를 전부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필 점은 부부관계와 부모-자녀관계는 한 문장씩 다뤄진 반면 주종관계, 특히 종과 관계된 내용에는 분량이 많은 것은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한 계층이요 격려가 필요한 계층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특별히 다가옵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여기에서 끝으로 우리가 살필 점은 왜 약자에게 먼저 권면하고 그 다음에 상대적으로 강자에게 권면했냐는 사실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라 쌍방을 향해서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명령도 뒤따르고 있는 다음 명령과 분리해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식솔을 이루고 있는 계층마다 창조 질서 내에서 그 고유한 위치가 있으며 특정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창조질서 내에서 고유한 위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에 따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먼저 부부관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어떻게 이 관계를 변화시켜야 할까요? 우선 18절, 19절을 읽어봅시다. 18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들이 읽어주시고 19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자들이 읽어주시겠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각각 관련자를 먼저 불러내고 두 개의 절로 구성된 문장으로 권면이 각각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권면은 주절과 종속절로 구성된 반면 남편에 대한 권면은 두 개의 대등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의 절은 긍정형이고 뒤의 것은 부정형입니다. 아내되신 여러분, 먼저 여러분이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남편의 통제 아래 두라는 뜻입니다. 즉 여러분을 낮추고 남편을 높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남편의 권위를 존종할 것을 명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주안에서 마땅하다고 설명합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주안에서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강조하는 것을 보아 당시 골로새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이미 익숙한 교훈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에베소서에는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 성도 여러분, 짧지만 강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남편 앞에서 낮추십시오. 그리하여 남편의 위신을 세워주십시오. 그것은 모든 아내들이 해야할 적합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필요하지 않고 더 이상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성경은 취합니다. 여러분의 복된 결혼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핵심적인 처방입니다. 대체로 여자 분들이 남자 분들보다 말씀들을 잘합니다만 남편을 향해서 \"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라고 소리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 보다는 다소곳이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신앙의 부인들에게 합당한 행동입니다.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상급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제 남편되신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사랑하라는 긍정형 명령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부정형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신 것은 당시의 사회가 워낙 아내를 쉽게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인을 쉽게 취할 수 있었던 문화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지금도 중요한 명령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아내를 더욱 더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아내를 계속 사랑과 연애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남편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아내를 대합니까? 저는 지난주간 하루 특별한 부부를 모시고 경주를 구경시켜드린 일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고신대학교에서 열린 한상동 목사 기념강좌에 강의를 맡아 남아공화국에서 오신 교수님 부부였습니다. 이 분은 몇 년 전 저희 울산 교회에서 에스겔 37장을 통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밤에 다시 한번 우리들과 말씀의 교제를 나누기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분들과 교제를 가진 것은 한 20년 가까이 됩니다. 제가 유학생이었을 때 크리스마스 휴가에 우리 한국 학생 가정들을 두 차례나 초청하여 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8년간 유학 생활을 했지만 그 중간에 고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질 처지가 되지 못되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휴가는 그곳 사람들에게는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절기였기에 우리 형편을 딱하게 여겨서 년 2주간 가지는 자기 휴가의 반을 우리 한국학생 가정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흑인을 위한 신학교 교수였으며 벤다부족을 위한 성경번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어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거기 있는 한 주간동안 이웃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이제 한국말도 하시겠네요\"라고 농담을 할 정도입니다. 영어, 독일어, 화란어, 프랑스어, 등 현대어들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을 해독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언어 실력뿐만 아니라 그 분의 반듯한 행동으로 인해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할 때와 \"아니요\"할 때를 분명히 구분하던 그의 행동은 감명 깊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속으로 아닌데 싶어도 관계 때문에 \"아니오\"라는 말을 선듯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닐 때는 \"아니오\"라고 하고 자신이 틀렸으면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너희 말을 \"예\"할 때는 \"예\"하고 \"아니오\"할 때는 \"아니오\"하라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간 경주에 모시고 가서 새로운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는 혼자 오셨고 이번에는 두 분이 함께 오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을 모시고 다니면서 하루지만 가까이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특히 교수님의 아내사랑에 대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분을 평소에도 존경했지만 이번에는 그 존경하는 목록에 최상의 것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여행 시작부터 동양을 처음 오는 부담 때문에 주저하는 부인을 설득했어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음식을 대해도 먹기를 주저하면 이런 저런 말로 달래서 먹게 하고, 경주에 볼거리가 한 두 개가 아닌데도 지난 번 자신이 보았던 곳을 꼭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에서 나는 아내 사랑이 무엇인지 새삼 배웠던 하루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렇다할 특별히 뛰어나 보이는 부분은 없어 보이지만 늙도록 자신이 선택한 아내를 그처럼 세심하게 챙기고 온갖 말로 격려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동했습니다. 사랑이란 지극히 평범한 아내를 극진하게 돌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라\'는 명령에 \'괴롭게 말라\'는 주문을 첨가합니다. 이것은 가사노동의 중압감과 관련해서라기보다는 아내의 인격과 마음을 소홀히 하는데 따른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수고를 덜어주어야 합니다만 그 보다 더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남편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앞서 말한 분의 예를 들겠습니다. 교수님은 아주 유머와 재치가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한국에 온 기념으로 사모님께서 처음에는 만 오 천원짜리 자수정 반지를 고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결국 만 오 천원짜리 반지를 두고 한참 고민을 하시다 옆에 있는 오만원짜리 반지가 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어지고 있는 아내를 보고 남편이 하시는 말씀이 \"당신은 5만 원짜리 반지를 끼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라고 망설이는 부인을 권해서 구입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환율 때문에 그것이 얼마인지 부인은 정확히 모르고 샀는데 나중에 값을 알고 얼마나 아까워하는지 앞으로 3주간 동안을 곱씹을 것이라고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서 제게 물었습니다. 반지가 어울리는지를! 그래서 예쁘다고 했더니 부인이 확인을 하면서 \"당신은 목사니까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라고 요청하여 \"정말이라\"고 제가 확인했더니 교수님이 급히 하시는 말씀,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당신 신혼 초기의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습니다. 신부였던 사모님이 서재에 커튼을 만들어 놓고 어떠냐고 물어서 그냥 느끼는 대로 예쁘다고 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를 말입니다. 그럴 때는 예쁘다고 해서는 안되고 \"너무 너무 예쁘다\"고 했어야 하는데 당시에 자기에게는 지혜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너무 솔직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하더군요. 글쎄요 아직도 저는 지혜가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잠자리에 누웠는데 어떤 강도사님 신혼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강도사님은 첫 날 밤에 자신과 아내 사이에 이불을 끼우고 잤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난 끼가 발동해서 \"우리도 그 사람처럼 사이에 이불 끼우고 잘까?\" 라고 했는데 웬걸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지더군요. 신혼 때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20년 넘게 살아도 사소한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배우기 위해 수업료 톡톡히 지불한 뒤에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아름다운 부부 관계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순종하고 사랑하십시오. 가장 핵심적인 명령를 지킬 때에 여러분의 가정은 변할 것입니다. 이 명령 앞에서는 아무런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상대가 안 하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이 잘못한다고 해서 내가 잘못해도 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제 두 번째 관계를 살펴봅시다. 가정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관계는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녀들에게 하는 권면과 부모들에게 하는 권면 모두 각각 명령과 그 이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형태는 권면의 일반적인 유형입니다. 아내와 남편에게 대한 권면도 헬라어로는 9개,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일정한 운율을 가지고 본문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비슷하게 아비들에 관한 권면도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녀들에 관해서는 13개의 단어가 사용되어 \"모든 일에\"라는 부사구가 특별히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순종하라\"는 말은 앞에 나온 \"복종하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상대방의 말을 주의해서 듣고 따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 부모님께 귀를 기울여서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자녀된 여러분이 해야할 그 어떤 일보다 이것은 우선입니다. 특히 \"모든 일에\"라는 부사구를 덧붙임으로 순종해야 할 영역은 자녀된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물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 그 자체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 외의 영역은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명령은 주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부모가 시키는 모든 일에 정말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자녀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신앙의 부모 여러분, 여러분을 향해서 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유교문화가 오랫동안 지배했던 우리 동양의 경우처럼 바울 당시에도 가정에서 부모, 특히 아버지의 권한은 대단했습니다. 이런 권위를 가진 부모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 때문에 분이 차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자녀로 분을 내게 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녀들이 어떤 경우에 화를 내는지 자녀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녀들은 특별히 자신이 이해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좌절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야단을 맞는다고 생각할 때 울분을 갖게 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절망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그렇게 낳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런 노력이 없이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 여러분,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세워주십시오. \'격노케\' 하는 것과 \'낙심\'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녀들은 쉽게 낙심하고 마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체의 부모에게 맡기신 그 분의 자녀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태어났고 내가 길렀지만 그들은 내 자녀이기에 앞서 하늘 아버지의 선물이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앞날에 대해서 여러분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앞날에 대해서 보장해 주시고 마지막 책임을 지어주실 분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잠시 내게 맡겨진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면 격노케하고 낙심하게 하는 일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분노하면 분노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의 책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녀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일은 부모의 몫일 것입니다. 흔들리는 자녀들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인식할 때 부모는 부모대로 주 안에서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의 마음이 낙심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앙의 부모들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되면 변화시켜야 하는 세 번째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보면 이것 역시 부부관계나 부모-자녀관계처럼 한 지붕 아래서 갖는 관계입니다. 오늘의 상황에서는 직장의 일터에서 갖는 인격적인 관계로 확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헬라어 단어 10개를 전후해서 사용하던 앞의 명령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구문의 일관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첫 문장에서는 호칭으로 시작하고 명령과 목적어 등으로 구성된 앞의 문장 패턴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라고 한 것과 동일한 명령을 듣습니다. 역시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의도적으로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를 것을 명령받지만 주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은 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 주인은 \"하늘의 상전\"과 대조해서 \"육체의 상전\"이라고 부릅니다. 어찌 되었든 이 세상 체제 아래서는 엄연한 상전입니다. 하늘의 주인을 섬긴다고 육체의 상전을 섬길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노동자는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모든 일에서 주인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눈가림\'으로 해서는 안 되고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직장생활을 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떻게 그 직장에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주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전파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거기에서 사람들을 감화시켜야만 합니다. 주인이 보일 때만 일을 하거나 주인에게 보일 심산으로만 하지말고 마음으로 성실하게 육체의 상전을 섬겨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2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자가 보이면 열심히 하는 척하고 없으면 불성실해 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로 알고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인정과 칭찬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과 상급을 바라고 무슨 일이든지 하라는 권면입니다. 사실 당시의 종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할 의욕이 있었겠습니까? 시키는 일이나 하고 주인이 있을 때나 하고 또 혼나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하는 것이 종들의 관례였을 것입니다. 일부러 애써 일하면 종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도 아래 있는 종들을 향해서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다하여\"하라는 명령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상식을 뒤엎는 권면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상식을 뒤엎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뒤엎는 사람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놀랍게도 오늘날 직장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밑의 직원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회사는 철저한 감시시스템을 가동시킵니다. 그래도 직원들은 빈틈을 살펴서 전화를 걸거나 인터넷을 접속시켜서 회사일과 관계없는 이곳저곳을 방문하곤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은 쉬지 말고 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눈치로 일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맡겨진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께 하듯 근무하면 이 땅에서 맡겨진 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그 상급은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5절). 성실한 삶을 사는 보상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그 어떤 일도 주님과 무관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주님이요 모든 이들의 주님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 매월 받는 월급이 끝이 아닙니다. 하늘의 유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눈가림만 하든지 아니면 성실한 마음으로 하든지 쉽게 구별도 되지 않고 공정한 보상도 없지만 땅에서 받는 월급이나 보너스가 마지막 보상이 아닙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주일날 봉사하는 교회 일 뿐만 아니라 생활 전선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일하면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결국 어떤 수고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불의를 행하는 자는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습니다. 주님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눈가림으로 일하는 사람은 하늘의 주인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종들을 향해서 하는 말을 마무리하는 위치에 있지만 동시에 주인들을 향해서도 경계하는 효과를 동시에 얻습니다. 종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눈가림으로 일하는 \"불의\"를 경고하는 동시에 주인이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대하지 않는 \"불의\" 역시 처벌될 것을 경고합니다. 종이거나 주인이거나 불문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는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은 표면적으로는 종에 대한 교훈을 마무리하는 위치이지만 실제로는 양쪽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주인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일을 하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대우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편애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에 따른 상급을 생각하면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명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공평이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퇴수회 때에 한 강사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목사 때 불평과 담임 목사 때 생각은 다릅니다. 수고한 사람의 수고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능력이나 외모로만 평가하니 않는 것은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삶이 가능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2000년 전 세상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약자들을 향해서만 명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그룹을 향해서도 하나님께서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양자 관계의 상호 보완적 명령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삼자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상호 관계는 또 다른 분이신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변화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종이 주인을 대할 때나 종이 주인을 섬길 때 그 사이에 하늘의 주인이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제 삼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의 시각으로 살필 수 있어야 공정해 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제 삼자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인간관계는 반드시 저울질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모든 관계는 아름답게 변화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들로 인해서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 골3:18-골4:1/ 2002-04-02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 골3:18-골4:1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큰 행사들을 치루었습니다. 지난주일 낮에는 추수 감사 예배와 성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밤부터 새천년 생명 사랑 나눔 축제를 화요일 밤까지 가졌습니다. 처음 시도했지만 이번 기회에 태신자를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할 만큼 좋은 기회였습니다. 모두 527명이 초청되었고 그 가운데 약 50%에 해당하는 263명이 주님을 영접하겠다고 결신카드를 제출해 주셨습니다. 아주 감사할 만한 일입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 부목사로 오랫동안 지낸 분이 자기가 목회를 하면 제자훈련과 대각성 전도집회는 꼭 하겠다고 열심히 말하던 것을 이제 이해할만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계속해서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로 도와 주셔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도하신 분들이 4주 동안 양육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제 그 분들을 위해서 신앙의 첫 걸음을 내딛는 일을 돕도록 책임을 진 분들이 모두 연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새로 오신 분들을 그 자리에서 등록을 시키고 등록을 하신 분들께 꽃바구니를 주었습니다. 자리마다 꽃바구니가 놓여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감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피려고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당시 한 지붕아래 있는 식솔들의 관계가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속세를 떠난 삶이나 집안 일을 벗어난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지붕 아래서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혼자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잘 아는 관계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관계를 변화시키는 삶을 사는 것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사도가 가르치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식솔들 간의 관계에서 믿고 고백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17절의 대원리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위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특히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는 \"주\"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명령을 따르기 위한 동기 유발로서 \"주안에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모든 행동을 \"주께 하듯\"할 뿐 아니라 매사에 주를 두려워하고 또한 주님이 주시는 보상과 보응을 기억하고 행동하도록 요구합니다. 생각과 행동, 모든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삶의 어떤 영역도 주님의 통제 밖에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거룩한 영역이나 속된 영역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시간에도 우리는 주님을 의식해야하며 엿새동안 각자의 생업의 터전에서 일할 때도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당시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는 식솔들 상호 관계가 여기서는 모두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살피면 부부관계, 부모-자녀관계, 그리고 주종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제정하신 제도요 모든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관계이기에 부부관계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관계 중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와야 되는지 잘 모릅니다. 제일 첫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인간관계의 첫 획이 그어진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부모-자식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기본적 인간 관계를 전부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필 점은 부부관계와 부모-자녀관계는 한 문장씩 다뤄진 반면 주종관계, 특히 종과 관계된 내용에는 분량이 많은 것은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한 계층이요 격려가 필요한 계층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특별히 다가옵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여기에서 끝으로 우리가 살필 점은 왜 약자에게 먼저 권면하고 그 다음에 상대적으로 강자에게 권면했냐는 사실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라 쌍방을 향해서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명령도 뒤따르고 있는 다음 명령과 분리해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식솔을 이루고 있는 계층마다 창조 질서 내에서 그 고유한 위치가 있으며 특정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창조질서 내에서 고유한 위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에 따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먼저 부부관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어떻게 이 관계를 변화시켜야 할까요? 우선 18절, 19절을 읽어봅시다. 18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들이 읽어주시고 19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자들이 읽어주시겠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각각 관련자를 먼저 불러내고 두 개의 절로 구성된 문장으로 권면이 각각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권면은 주절과 종속절로 구성된 반면 남편에 대한 권면은 두 개의 대등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의 절은 긍정형이고 뒤의 것은 부정형입니다. 아내되신 여러분, 먼저 여러분이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남편의 통제 아래 두라는 뜻입니다. 즉 여러분을 낮추고 남편을 높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남편의 권위를 존종할 것을 명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주안에서 마땅하다고 설명합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주안에서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강조하는 것을 보아 당시 골로새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이미 익숙한 교훈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에베소서에는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 성도 여러분, 짧지만 강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남편 앞에서 낮추십시오. 그리하여 남편의 위신을 세워주십시오. 그것은 모든 아내들이 해야할 적합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필요하지 않고 더 이상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성경은 취합니다. 여러분의 복된 결혼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핵심적인 처방입니다. 대체로 여자 분들이 남자 분들보다 말씀들을 잘합니다만 남편을 향해서 \"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라고 소리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 보다는 다소곳이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신앙의 부인들에게 합당한 행동입니다.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상급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제 남편되신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사랑하라는 긍정형 명령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부정형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신 것은 당시의 사회가 워낙 아내를 쉽게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인을 쉽게 취할 수 있었던 문화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지금도 중요한 명령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아내를 더욱 더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아내를 계속 사랑과 연애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남편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아내를 대합니까? 저는 지난주간 하루 특별한 부부를 모시고 경주를 구경시켜드린 일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고신대학교에서 열린 한상동 목사 기념강좌에 강의를 맡아 남아공화국에서 오신 교수님 부부였습니다. 이 분은 몇 년 전 저희 울산 교회에서 에스겔 37장을 통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밤에 다시 한번 우리들과 말씀의 교제를 나누기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분들과 교제를 가진 것은 한 20년 가까이 됩니다. 제가 유학생이었을 때 크리스마스 휴가에 우리 한국 학생 가정들을 두 차례나 초청하여 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8년간 유학 생활을 했지만 그 중간에 고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질 처지가 되지 못되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휴가는 그곳 사람들에게는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절기였기에 우리 형편을 딱하게 여겨서 년 2주간 가지는 자기 휴가의 반을 우리 한국학생 가정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흑인을 위한 신학교 교수였으며 벤다부족을 위한 성경번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어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거기 있는 한 주간동안 이웃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이제 한국말도 하시겠네요\"라고 농담을 할 정도입니다. 영어, 독일어, 화란어, 프랑스어, 등 현대어들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을 해독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언어 실력뿐만 아니라 그 분의 반듯한 행동으로 인해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할 때와 \"아니요\"할 때를 분명히 구분하던 그의 행동은 감명 깊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속으로 아닌데 싶어도 관계 때문에 \"아니오\"라는 말을 선듯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닐 때는 \"아니오\"라고 하고 자신이 틀렸으면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너희 말을 \"예\"할 때는 \"예\"하고 \"아니오\"할 때는 \"아니오\"하라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간 경주에 모시고 가서 새로운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는 혼자 오셨고 이번에는 두 분이 함께 오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을 모시고 다니면서 하루지만 가까이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특히 교수님의 아내사랑에 대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분을 평소에도 존경했지만 이번에는 그 존경하는 목록에 최상의 것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여행 시작부터 동양을 처음 오는 부담 때문에 주저하는 부인을 설득했어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음식을 대해도 먹기를 주저하면 이런 저런 말로 달래서 먹게 하고, 경주에 볼거리가 한 두 개가 아닌데도 지난 번 자신이 보았던 곳을 꼭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에서 나는 아내 사랑이 무엇인지 새삼 배웠던 하루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렇다할 특별히 뛰어나 보이는 부분은 없어 보이지만 늙도록 자신이 선택한 아내를 그처럼 세심하게 챙기고 온갖 말로 격려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동했습니다. 사랑이란 지극히 평범한 아내를 극진하게 돌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라\'는 명령에 \'괴롭게 말라\'는 주문을 첨가합니다. 이것은 가사노동의 중압감과 관련해서라기보다는 아내의 인격과 마음을 소홀히 하는데 따른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수고를 덜어주어야 합니다만 그 보다 더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남편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앞서 말한 분의 예를 들겠습니다. 교수님은 아주 유머와 재치가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한국에 온 기념으로 사모님께서 처음에는 만 오 천원짜리 자수정 반지를 고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결국 만 오 천원짜리 반지를 두고 한참 고민을 하시다 옆에 있는 오만원짜리 반지가 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어지고 있는 아내를 보고 남편이 하시는 말씀이 \"당신은 5만 원짜리 반지를 끼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라고 망설이는 부인을 권해서 구입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환율 때문에 그것이 얼마인지 부인은 정확히 모르고 샀는데 나중에 값을 알고 얼마나 아까워하는지 앞으로 3주간 동안을 곱씹을 것이라고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서 제게 물었습니다. 반지가 어울리는지를! 그래서 예쁘다고 했더니 부인이 확인을 하면서 \"당신은 목사니까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라고 요청하여 \"정말이라\"고 제가 확인했더니 교수님이 급히 하시는 말씀,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당신 신혼 초기의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습니다. 신부였던 사모님이 서재에 커튼을 만들어 놓고 어떠냐고 물어서 그냥 느끼는 대로 예쁘다고 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를 말입니다. 그럴 때는 예쁘다고 해서는 안되고 \"너무 너무 예쁘다\"고 했어야 하는데 당시에 자기에게는 지혜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너무 솔직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하더군요. 글쎄요 아직도 저는 지혜가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잠자리에 누웠는데 어떤 강도사님 신혼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강도사님은 첫 날 밤에 자신과 아내 사이에 이불을 끼우고 잤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난 끼가 발동해서 \"우리도 그 사람처럼 사이에 이불 끼우고 잘까?\" 라고 했는데 웬걸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지더군요. 신혼 때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20년 넘게 살아도 사소한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배우기 위해 수업료 톡톡히 지불한 뒤에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아름다운 부부 관계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순종하고 사랑하십시오. 가장 핵심적인 명령를 지킬 때에 여러분의 가정은 변할 것입니다. 이 명령 앞에서는 아무런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상대가 안 하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이 잘못한다고 해서 내가 잘못해도 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제 두 번째 관계를 살펴봅시다. 가정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관계는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녀들에게 하는 권면과 부모들에게 하는 권면 모두 각각 명령과 그 이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형태는 권면의 일반적인 유형입니다. 아내와 남편에게 대한 권면도 헬라어로는 9개,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일정한 운율을 가지고 본문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비슷하게 아비들에 관한 권면도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녀들에 관해서는 13개의 단어가 사용되어 \"모든 일에\"라는 부사구가 특별히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순종하라\"는 말은 앞에 나온 \"복종하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상대방의 말을 주의해서 듣고 따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 부모님께 귀를 기울여서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자녀된 여러분이 해야할 그 어떤 일보다 이것은 우선입니다. 특히 \"모든 일에\"라는 부사구를 덧붙임으로 순종해야 할 영역은 자녀된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물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 그 자체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 외의 영역은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명령은 주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부모가 시키는 모든 일에 정말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자녀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신앙의 부모 여러분, 여러분을 향해서 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유교문화가 오랫동안 지배했던 우리 동양의 경우처럼 바울 당시에도 가정에서 부모, 특히 아버지의 권한은 대단했습니다. 이런 권위를 가진 부모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 때문에 분이 차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자녀로 분을 내게 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녀들이 어떤 경우에 화를 내는지 자녀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녀들은 특별히 자신이 이해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좌절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야단을 맞는다고 생각할 때 울분을 갖게 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절망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그렇게 낳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런 노력이 없이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 여러분,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세워주십시오. \'격노케\' 하는 것과 \'낙심\'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녀들은 쉽게 낙심하고 마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체의 부모에게 맡기신 그 분의 자녀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태어났고 내가 길렀지만 그들은 내 자녀이기에 앞서 하늘 아버지의 선물이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앞날에 대해서 여러분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앞날에 대해서 보장해 주시고 마지막 책임을 지어주실 분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잠시 내게 맡겨진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면 격노케하고 낙심하게 하는 일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분노하면 분노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의 책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녀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일은 부모의 몫일 것입니다. 흔들리는 자녀들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인식할 때 부모는 부모대로 주 안에서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의 마음이 낙심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앙의 부모들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되면 변화시켜야 하는 세 번째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보면 이것 역시 부부관계나 부모-자녀관계처럼 한 지붕 아래서 갖는 관계입니다. 오늘의 상황에서는 직장의 일터에서 갖는 인격적인 관계로 확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헬라어 단어 10개를 전후해서 사용하던 앞의 명령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구문의 일관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첫 문장에서는 호칭으로 시작하고 명령과 목적어 등으로 구성된 앞의 문장 패턴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라고 한 것과 동일한 명령을 듣습니다. 역시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의도적으로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를 것을 명령받지만 주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은 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 주인은 \"하늘의 상전\"과 대조해서 \"육체의 상전\"이라고 부릅니다. 어찌 되었든 이 세상 체제 아래서는 엄연한 상전입니다. 하늘의 주인을 섬긴다고 육체의 상전을 섬길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노동자는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모든 일에서 주인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눈가림\'으로 해서는 안 되고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직장생활을 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떻게 그 직장에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주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전파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거기에서 사람들을 감화시켜야만 합니다. 주인이 보일 때만 일을 하거나 주인에게 보일 심산으로만 하지말고 마음으로 성실하게 육체의 상전을 섬겨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2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자가 보이면 열심히 하는 척하고 없으면 불성실해 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로 알고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인정과 칭찬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과 상급을 바라고 무슨 일이든지 하라는 권면입니다. 사실 당시의 종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할 의욕이 있었겠습니까? 시키는 일이나 하고 주인이 있을 때나 하고 또 혼나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하는 것이 종들의 관례였을 것입니다. 일부러 애써 일하면 종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도 아래 있는 종들을 향해서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다하여\"하라는 명령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상식을 뒤엎는 권면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상식을 뒤엎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뒤엎는 사람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놀랍게도 오늘날 직장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밑의 직원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회사는 철저한 감시시스템을 가동시킵니다. 그래도 직원들은 빈틈을 살펴서 전화를 걸거나 인터넷을 접속시켜서 회사일과 관계없는 이곳저곳을 방문하곤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은 쉬지 말고 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눈치로 일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맡겨진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께 하듯 근무하면 이 땅에서 맡겨진 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그 상급은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5절). 성실한 삶을 사는 보상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그 어떤 일도 주님과 무관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주님이요 모든 이들의 주님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 매월 받는 월급이 끝이 아닙니다. 하늘의 유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눈가림만 하든지 아니면 성실한 마음으로 하든지 쉽게 구별도 되지 않고 공정한 보상도 없지만 땅에서 받는 월급이나 보너스가 마지막 보상이 아닙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주일날 봉사하는 교회 일 뿐만 아니라 생활 전선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일하면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결국 어떤 수고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불의를 행하는 자는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습니다. 주님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눈가림으로 일하는 사람은 하늘의 주인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종들을 향해서 하는 말을 마무리하는 위치에 있지만 동시에 주인들을 향해서도 경계하는 효과를 동시에 얻습니다. 종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눈가림으로 일하는 \"불의\"를 경고하는 동시에 주인이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대하지 않는 \"불의\" 역시 처벌될 것을 경고합니다. 종이거나 주인이거나 불문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는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은 표면적으로는 종에 대한 교훈을 마무리하는 위치이지만 실제로는 양쪽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주인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일을 하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대우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편애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에 따른 상급을 생각하면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명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공평이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퇴수회 때에 한 강사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목사 때 불평과 담임 목사 때 생각은 다릅니다. 수고한 사람의 수고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능력이나 외모로만 평가하니 않는 것은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삶이 가능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2000년 전 세상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약자들을 향해서만 명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그룹을 향해서도 하나님께서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양자 관계의 상호 보완적 명령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삼자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상호 관계는 또 다른 분이신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변화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종이 주인을 대할 때나 종이 주인을 섬길 때 그 사이에 하늘의 주인이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제 삼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의 시각으로 살필 수 있어야 공정해 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제 삼자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인간관계는 반드시 저울질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모든 관계는 아름답게 변화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들로 인해서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 골3:18-골4:1/ 2002-04-02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 골3:18-4:1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는 큰 행사들을 치루었습니다. 지난주일 낮에는추수 감사 예배와 성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밤부터 새천년 생명 사랑 나눔 축제를 화요일 밤까지 가졌습니다. 처음 시도했지만 이번 기회에 태신자를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할 만큼 좋은 기회였습니다. 모두 527명이 초청되었고 그 가운데 약 50%에 해당하는 263명이 주님을 영접하겠다고 결신카드를 제출해 주셨습니다. 아주 감사할 만한 일입니다. 서울 사랑의 교회 부목사로 오랫동안 지낸 분이 자기가 목회를 하면 제자훈련과 대각성 전도집회는 꼭 하겠다고 열심히 말하던 것을 이제 이해할만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계속해서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로 도와 주셔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도하신 분들이 4주 동안 양육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제 그 분들을 위해서 신앙의 첫 걸음을 내딛는 일을 돕도록 책임을 진 분들이 모두 연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새로 오신 분들을 그 자리에서 등록을 시키고 등록을 하신 분들께 꽃바구니를 주었습니다. 자리마다 꽃바구니가 놓여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감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살피려고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당시 한 지붕아래 있는 식솔들의 관계가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위엣 것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속세를 떠난 삶이나 집안 일을 벗어난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지붕 아래서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혼자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잘 아는 관계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관계를 변화시키는 삶을 사는 것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골로새의 이단들은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사도가 가르치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식솔들 간의 관계에서 믿고 고백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17절의 대원리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위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특히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는 \"주\"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명령을 따르기 위한 동기 유발로서 \"주안에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모든 행동을 \"주께 하듯\"할 뿐 아니라 매사에 주를 두려워하고 또한 주님이 주시는 보상과 보응을 기억하고 행동하도록 요구합니다. 생각과 행동, 모든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삶의 어떤 영역도 주님의 통제 밖에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거룩한 영역이나 속된 영역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시간에도 우리는 주님을 의식해야하며 엿새동안 각자의 생업의 터전에서 일할 때도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당시 한 지붕 아래서 살고 있는 식솔들 상호 관계가 여기서는 모두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살피면 부부관계, 부모-자녀관계, 그리고 주종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제정하신 제도요 모든 인간 관계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관계이기에 부부관계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관계 중에서 무엇이 가장 먼저 와야 되는지 잘 모릅니다. 제일 첫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관계를 맺음으로 인해 인간관계의 첫 획이 그어진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부모-자식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모든 기본적 인간 관계를 전부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필 점은 부부관계와 부모-자녀관계는 한 문장씩 다뤄진 반면 주종관계, 특히 종과 관계된 내용에는 분량이 많은 것은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한 계층이요 격려가 필요한 계층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특별히 다가옵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입니다. 여기에서 끝으로 우리가 살필 점은 왜 약자에게 먼저 권면하고 그 다음에 상대적으로 강자에게 권면했냐는 사실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니라 쌍방을 향해서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명령도 뒤따르고 있는 다음 명령과 분리해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식솔을 이루고 있는 계층마다 창조 질서 내에서 그 고유한 위치가 있으며 특정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창조질서 내에서 고유한 위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치에 따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먼저 부부관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어떻게 이 관계를 변화시켜야 할까요? 우선 18절, 19절을 읽어봅시다. 18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남자들이 읽어주시고 19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자들이 읽어주시겠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각각 관련자를 먼저 불러내고 두 개의 절로 구성된 문장으로 권면이 각각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권면은 주절과 종속절로 구성된 반면 남편에 대한 권면은 두 개의 대등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의 절은 긍정형이고 뒤의 것은 부정형입니다. 아내되신 여러분, 먼저 여러분이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남편의 통제 아래 두라는 뜻입니다. 즉 여러분을 낮추고 남편을 높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남편의 권위를 존종할 것을 명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주안에서 마땅하다고 설명합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주안에서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강조하는 것을 보아 당시 골로새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이미 익숙한 교훈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에베소서에는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 성도 여러분, 짧지만 강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남편 앞에서 낮추십시오. 그리하여 남편의 위신을 세워주십시오. 그것은 모든 아내들이 해야할 적합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필요하지 않고 더 이상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을 성경은 취합니다. 여러분의 복된 결혼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핵심적인 처방입니다. 대체로 여자 분들이 남자 분들보다 말씀들을 잘합니다만 남편을 향해서 \"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라고 소리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 보다는 다소곳이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신앙의 부인들에게 합당한 행동입니다.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상급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제 남편되신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사랑하라는 긍정형 명령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부정형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신 것은 당시의 사회가 워낙 아내를 쉽게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인을 쉽게 취할 수 있었던 문화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지금도 중요한 명령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아내를 더욱 더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아내를 계속 사랑과 연애의 대상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남편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아내를 대합니까? 저는 지난주간 하루 특별한 부부를 모시고 경주를 구경시켜드린 일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 고신대학교에서 열린 한상동 목사 기념강좌에 강의를 맡아 남아공화국에서 오신 교수님 부부였습니다. 이 분은 몇 년 전 저희 울산 교회에서 에스겔 37장을 통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밤에 다시 한번 우리들과 말씀의 교제를 나누기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분들과 교제를 가진 것은 한 20년 가까이 됩니다. 제가 유학생이었을 때 크리스마스 휴가에 우리 한국 학생 가정들을 두 차례나 초청하여 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8년간 유학 생활을 했지만 그 중간에 고국을 방문할 기회를 가질 처지가 되지 못되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휴가는 그곳 사람들에게는 가족들이 함께 만나는 절기였기에 우리 형편을 딱하게 여겨서 년 2주간 가지는 자기 휴가의 반을 우리 한국학생 가정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흑인을 위한 신학교 교수였으며 벤다부족을 위한 성경번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어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거기 있는 한 주간동안 이웃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이제 한국말도 하시겠네요\"라고 농담을 할 정도입니다. 영어, 독일어, 화란어, 프랑스어, 등 현대어들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을 해독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언어 실력뿐만 아니라 그 분의 반듯한 행동으로 인해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할 때와 \"아니요\"할 때를 분명히 구분하던 그의 행동은 감명 깊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속으로 아닌데 싶어도 관계 때문에 \"아니오\"라는 말을 선듯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닐 때는 \"아니오\"라고 하고 자신이 틀렸으면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너희 말을 \"예\"할 때는 \"예\"하고 \"아니오\"할 때는 \"아니오\"하라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간 경주에 모시고 가서 새로운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는 혼자 오셨고 이번에는 두 분이 함께 오셨습니다. 그래서 두 분을 모시고 다니면서 하루지만 가까이 살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특히 교수님의 아내사랑에 대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분을 평소에도 존경했지만 이번에는 그 존경하는 목록에 최상의 것을 추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여행 시작부터 동양을 처음 오는 부담 때문에 주저하는 부인을 설득했어야만 했습니다. 새로운 음식을 대해도 먹기를 주저하면 이런 저런 말로 달래서 먹게 하고, 경주에 볼거리가 한 두 개가 아닌데도 지난 번 자신이 보았던 곳을 꼭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에서 나는 아내 사랑이 무엇인지 새삼 배웠던 하루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렇다할 특별히 뛰어나 보이는 부분은 없어 보이지만 늙도록 자신이 선택한 아내를 그처럼 세심하게 챙기고 온갖 말로 격려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동했습니다. 사랑이란 지극히 평범한 아내를 극진하게 돌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라\'는 명령에 \'괴롭게 말라\'는 주문을 첨가합니다. 이것은 가사노동의 중압감과 관련해서라기보다는 아내의 인격과 마음을 소홀히 하는데 따른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수고를 덜어주어야 합니다만 그 보다 더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남편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앞서 말한 분의 예를 들겠습니다. 교수님은 아주 유머와 재치가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한국에 온 기념으로 사모님께서 처음에는 만 오 천원짜리 자수정 반지를 고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결국 만 오 천원짜리 반지를 두고 한참 고민을 하시다 옆에 있는 오만원짜리 반지가 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쪽으로 마음이 더 기울어지고 있는 아내를 보고 남편이 하시는 말씀이 \"당신은 5만 원짜리 반지를 끼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라고 망설이는 부인을 권해서 구입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환율 때문에 그것이 얼마인지 부인은 정확히 모르고 샀는데 나중에 값을 알고 얼마나 아까워하는지 앞으로 3주간 동안을 곱씹을 것이라고 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서 제게 물었습니다. 반지가 어울리는지를! 그래서 예쁘다고 했더니 부인이 확인을 하면서 \"당신은 목사니까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라고 요청하여 \"정말이라\"고 제가 확인했더니 교수님이 급히 하시는 말씀,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당신 신혼 초기의 이야기를 하나 해 주었습니다. 신부였던 사모님이 서재에 커튼을 만들어 놓고 어떠냐고 물어서 그냥 느끼는 대로 예쁘다고 했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를 말입니다. 그럴 때는 예쁘다고 해서는 안되고 \"너무 너무 예쁘다\"고 했어야 하는데 당시에 자기에게는 지혜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보고 너무 솔직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하더군요. 글쎄요 아직도 저는 지혜가 모자라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잠자리에 누웠는데 어떤 강도사님 신혼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강도사님은 첫 날 밤에 자신과 아내 사이에 이불을 끼우고 잤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난 끼가 발동해서 \"우리도 그 사람처럼 사이에 이불 끼우고 잘까?\" 라고 했는데 웬걸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지더군요. 신혼 때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20년 넘게 살아도 사소한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배우기 위해 수업료 톡톡히 지불한 뒤에야 잠들 수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아름다운 부부 관계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순종하고 사랑하십시오. 가장 핵심적인 명령를 지킬 때에 여러분의 가정은 변할 것입니다. 이 명령 앞에서는 아무런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상대가 안 하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이 잘못한다고 해서 내가 잘못해도 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명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이제 두 번째 관계를 살펴봅시다. 가정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관계는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녀들에게 하는 권면과 부모들에게 하는 권면 모두 각각 명령과 그 이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형태는 권면의 일반적인 유형입니다. 아내와 남편에게 대한 권면도 헬라어로는 9개,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일정한 운율을 가지고 본문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비슷하게 아비들에 관한 권면도 1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녀들에 관해서는 13개의 단어가 사용되어 \"모든 일에\"라는 부사구가 특별히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순종하라\"는 말은 앞에 나온 \"복종하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상대방의 말을 주의해서 듣고 따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여러분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먼저 부모님께 귀를 기울여서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자녀된 여러분이 해야할 그 어떤 일보다 이것은 우선입니다. 특히 \"모든 일에\"라는 부사구를 덧붙임으로 순종해야 할 영역은 자녀된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물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 그 자체는 타협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 외의 영역은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명령은 주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부모가 시키는 모든 일에 정말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 신앙의 자녀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신앙의 부모 여러분, 여러분을 향해서 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유교문화가 오랫동안 지배했던 우리 동양의 경우처럼 바울 당시에도 가정에서 부모, 특히 아버지의 권한은 대단했습니다. 이런 권위를 가진 부모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은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 때문에 분이 차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자녀로 분을 내게 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녀들이 어떤 경우에 화를 내는지 자녀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녀들은 특별히 자신이 이해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좌절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야단을 맞는다고 생각할 때 울분을 갖게 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절망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그렇게 낳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런 노력이 없이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 여러분,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세워주십시오. \'격노케\' 하는 것과 \'낙심\'하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녀들은 쉽게 낙심하고 마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육체의 부모에게 맡기신 그 분의 자녀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태어났고 내가 길렀지만 그들은 내 자녀이기에 앞서 하늘 아버지의 선물이고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앞날에 대해서 여러분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의 앞날에 대해서 보장해 주시고 마지막 책임을 지어주실 분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잠시 내게 맡겨진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면 격노케하고 낙심하게 하는 일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분노하면 분노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의 책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녀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일은 부모의 몫일 것입니다. 흔들리는 자녀들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인식할 때 부모는 부모대로 주 안에서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의 마음이 낙심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신앙의 부모들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이 되면 변화시켜야 하는 세 번째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상황 속에서 보면 이것 역시 부부관계나 부모-자녀관계처럼 한 지붕 아래서 갖는 관계입니다. 오늘의 상황에서는 직장의 일터에서 갖는 인격적인 관계로 확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헬라어 단어 10개를 전후해서 사용하던 앞의 명령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구문의 일관성이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첫 문장에서는 호칭으로 시작하고 명령과 목적어 등으로 구성된 앞의 문장 패턴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종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라고 한 것과 동일한 명령을 듣습니다. 역시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의도적으로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를 것을 명령받지만 주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는 것은 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 주인은 \"하늘의 상전\"과 대조해서 \"육체의 상전\"이라고 부릅니다. 어찌 되었든 이 세상 체제 아래서는 엄연한 상전입니다. 하늘의 주인을 섬긴다고 육체의 상전을 섬길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노동자는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모든 일에서 주인의 말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눈가림\'으로 해서는 안 되고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직장생활을 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떻게 그 직장에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주님의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복음전파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거기에서 사람들을 감화시켜야만 합니다. 주인이 보일 때만 일을 하거나 주인에게 보일 심산으로만 하지말고 마음으로 성실하게 육체의 상전을 섬겨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2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자가 보이면 열심히 하는 척하고 없으면 불성실해 집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도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로 알고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인정과 칭찬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과 상급을 바라고 무슨 일이든지 하라는 권면입니다. 사실 당시의 종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할 의욕이 있었겠습니까? 시키는 일이나 하고 주인이 있을 때나 하고 또 혼나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하는 것이 종들의 관례였을 것입니다. 일부러 애써 일하면 종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을 것입니다. 이런 제도 아래 있는 종들을 향해서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다하여\"하라는 명령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상식을 뒤엎는 권면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상식을 뒤엎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을 뒤엎는 사람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놀랍게도 오늘날 직장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밑의 직원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회사는 철저한 감시시스템을 가동시킵니다. 그래도 직원들은 빈틈을 살펴서 전화를 걸거나 인터넷을 접속시켜서 회사일과 관계없는 이곳저곳을 방문하곤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은 쉬지 말고 일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눈치로 일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맡겨진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께 하듯 근무하면 이 땅에서 맡겨진 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기에 그 상급은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5절). 성실한 삶을 사는 보상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그 어떤 일도 주님과 무관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주님이요 모든 이들의 주님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 매월 받는 월급이 끝이 아닙니다. 하늘의 유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눈가림만 하든지 아니면 성실한 마음으로 하든지 쉽게 구별도 되지 않고 공정한 보상도 없지만 땅에서 받는 월급이나 보너스가 마지막 보상이 아닙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은 우리가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주일날 봉사하는 교회 일 뿐만 아니라 생활 전선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일하면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결국 어떤 수고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불의를 행하는 자는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받습니다. 주님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눈가림으로 일하는 사람은 하늘의 주인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종들을 향해서 하는 말을 마무리하는 위치에 있지만 동시에 주인들을 향해서도 경계하는 효과를 동시에 얻습니다. 종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눈가림으로 일하는 \"불의\"를 경고하는 동시에 주인이 \"의와 공평\"으로 종들을 대하지 않는 \"불의\" 역시 처벌될 것을 경고합니다. 종이거나 주인이거나 불문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는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은 표면적으로는 종에 대한 교훈을 마무리하는 위치이지만 실제로는 양쪽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 주인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일을 하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대우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편애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에 따른 상급을 생각하면서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명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공평이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퇴수회 때에 한 강사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목사 때 불평과 담임 목사 때 생각은 다릅니다. 수고한 사람의 수고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능력이나 외모로만 평가하니 않는 것은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삶이 가능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2000년 전 세상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약자들을 향해서만 명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그룹을 향해서도 하나님께서 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양자 관계의 상호 보완적 명령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삼자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상호 관계는 또 다른 분이신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변화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종이 주인을 대할 때나 종이 주인을 섬길 때 그 사이에 하늘의 주인이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제 삼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의 시각으로 살필 수 있어야 공정해 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제 삼자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인간관계는 반드시 저울질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모든 관계는 아름답게 변화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간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들로 인해서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근본적 변화 - 검으로 존재하기/ 마10:34-39/ 이정배 교수/ 2001-09-02
근본적 변화 - 검으로 존재하기 마10:34-39 벌써 몇 년째 한해 한두번씩 중요한 절기나 계절이 바뀌는 때에 새길교회 성도님들과 만나왔습니다. 귀한 만남이란 생각이 들어 설교를 구상하고 작성하는 일에 신중을 기하곤 하였지요. 설교를 잘해 보겠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진실을 나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달이 바뀌고 가을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새길교회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 주제를 “변화“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아는대로 예수는 본래 이땅에 새 질서, 새바람을 일으키려 했던 분입니다. 1세기 초엽 유대 팔레스틴 사회내에 만연된 인습화된 유대문화, 소위 넓은 길은 비판하고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는 인간 삶의 새 토대를 꿈꾸셨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 인격의 내부에서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고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는 삶이 시작될 때 그로부터 우주의 질서가 바뀌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는 길을 열심히 알리셨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천국의 비유라는 말씀이 그것들이지요. 어떤 농부가 남의 밭을 가는 도중 밭에 묻힌 보화상자를 발견하였답니다. 그 농부는 놀라서 기뻐하며 그것을 잘 묻어두고 집에 돌아가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바로 이러한 농부의 전적인 행동을 예수는 천국을 발견한 자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진주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모으려 다니던 사람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좋은 진주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진주를 발견하였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지금까지 수집했던 다른 진주들은 팔고 가옥과 전답을 팔아 진품의 진주를 사고 너무도 흥겨워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천국,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일부분만을 가지고서는 얻을 수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백만장자라도 자기자신의 절반을 가지고는 천국을 살 수 없는 것이며 극빈자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면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찌 이것이 재물뿐이겠습니까? 지식, 감정, 자신의 생명까지를 다 바쳐 정말 소중한 것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즉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면 지금까지 귀하다 여기던 것을 스스럼없이 놓아버리는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최상의 가치인 천국을 소유한 자에게 오는 기쁨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이 없다면 복음은 복음이 아닐 것이며 더 이상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영의 인도로 인간내면 속에서 이런 기쁨이 용솟음 칠 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우주는 바로 그곳에 있으며 그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천국에 관한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이 인간의 심령 속에 임할 때 여기에는 필연코 격렬한 가치투쟁이 생겨납니다. 독일성서공회편 관주성경에 보면, 오늘 읽은 본문에 “예수 때문에 생기는 분열“이란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비와, 딸이 어미와 분쟁하도록 했고 집안 식구들 모두가 서로에게 원수가 되도록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검‘이란 본래 분열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더 깊게는 자기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큰 죽음, 곧 정신적 죽음을 죽어야만 분열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자신이 절대라고 믿고 생각했왔던 가치관, 인생관, 이데올로기 등이 그리스도께서 던지신 불로 인하여 사라지고 하나님 영으로 이 땅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봄날의 여린 꽃, 여름의 녹음, 가을하늘의 높고 청명함 그리고 겨울의 설경 등 외형적으로 아름답게 보이고, 화려하듯 보이는 자연, 그리고 부족함 없이 사는 듯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이면에는 아픔과 상처가 깃들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성서적 표현으로 말하거나 인간을 비롯하여 자연의 모든 것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기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롬 8:21-22). 인간을 비롯하여 식물과 동물 모두가 새 질서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천지, 개벽된 세계가 한 개인속에서 성취되고 가정과 국가 및 전우주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목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사실 풀이하기도 어렵지만 그 말씀의 뜻을 새겨 실천에 옮기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껏 여러 차례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하려 했으나 제 스스로 자신이 없어 본문으로 택하지 못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설교는 남에게 증거하기 이전에 자신의 실존과 대면하는 일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본문 말씀을 읽게 된 것은 탄생 100주년은 맞은 위대한 신앙인 김교신의 글을 묵상하고 난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44살, 조국이 해방되기 몇 달전에 노동자들과 함께 흥남부두에서 일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평신도 신학자 김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혼신의 믿음과 조선에 대한 사랑을 깊이 생각한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서와 자신의 조국 조선을 결코 둘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리선생이었던 그는 조선 땅에 성서를 올려놓고자 하고 일념으로 고독하게 이란 잡지를 만들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불태웠지요.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는 망가진 조국, 그러나 재래의 문화와 도덕 등 구습에 얽매어 스스로 종의 멍에를 걸머진 조선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정면으로 시비걸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망했던 것은 성서의 말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지 결코 서구신학이나 선교사들이 전달한 제도나 교리는 아니었습니다.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한 교회, 그들이 주도하는 소위 정통교회는 생명없는 형식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인의 비판을 받았던 무교회론이 시작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무교회주의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형식화되고 세속화된 교회를 인정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교회주의는 결코 기성 교회만을 항쟁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선민족이 살고 있는 일제하의 사회현실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교신은 일제로부터도, 서양선교사로부터도 그리고 조선의 교회들로부터 일제히 배척을 받았습니다. 실로 김교신의 생애 전체는 그리스도 영을 따라 살다 모두와 더불어 등진 인생이었습니다. 진정 오늘 본문 말씀처럼 조선교회와 민족을 위하여 검을 주려고 오신 분이었지요. 참으로 위로부터 주시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성서와 복음만을 알았던 김교신, 그래서 이 민족에서 참된 기쁨을 주기 위해 모든 거짓된 것과 싸웠던 그분의 삶이 주는 감동이 비로소 본문 말씀과 저 자신을 대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실제로 김교신 선생도 이 본문을 가지고 몇 차례 설교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2000년전 예수의 말씀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30년대 김교신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표현되었다면 이제 21세기를 맞는 한국의 새로운 상황속에서 이 말씀이 새길을 가려는 여러분과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구체화되어야 하겠습니다. 21세기를 준비해온 한 학자들의 모임에서 조만간 현실이 될 - 부분적으로 이미 현실이 되고 있는 - 한국사회 및 문화의 당면과제가 다음처럼 요약된 바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 논쟁의 종언과 함께 부상된 세계자유시장경제체제의 부산물들, 즉 경쟁의 와중에서 소외된 다수에 대한 사회적 배려의 문제, 통일을 앞둔 시점에서 남북, 남남간의 이념적 가치극복,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기술이 되어버린 상황속에서 테크놀로지에 대한 윤리적 평가, 환경호르몬을 위시한 생태환경의 파괴,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의 양식으로는 고쳐질 수 없다는 진단 - 마지막으로는 가부장제의 종식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당면한 현실앞에서 한국사회와 교회 그리고 우리 신앙인은 실상 얼마나 무력하였습니까? 시장경제논리에 세뇌되어 ‘많은 것이 좋다‘(more means better)는 논리에 예수 복음마저 잠식시켰고, 전대미문의 기술적 축복에 매료되어 즐기려고는 하고 오래 살려고는 하되 기술문명을 비판적으로 검증할 능력과 소양을 갖추지 못한채 살고 있습니다. 소비자로서만 살고 있기에 제반 삶의 존재양식이 환경친화적이 되지 못하였고 북한 동포에 대한 냉담함을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만연된 가부장적 가치관을 수용해온 현실 역시 고쳐야 될 사안이라고 믿습니다. 미래를 누구보다 앞서 준비해야 될 책임이 있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오늘날 현실속에 매몰되어 있다면, 이 시대와 화평하게만 지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형식적 종교인들이든지, 아니면 무신론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에서 본문 말씀은 우리 시대를 향해 우리 모두가 ‘날카로운 검‘으로 존재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와 더불어 정신적으로 싸우며 최상의 것을 위해 큰 죽음을 죽으라는 것입니다. 검으로 오신 예수처럼, 값비싼 보화를 발견한 농부처럼 살라는 것이지요. 한때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신부 일을 하다가 교육자로서, 문명비판가로서 활약하고 있는 이반 일리치란 사상가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낭만주의자, 더욱 혹독하게는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뒤따르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는 경쟁을 근거로 경제 활동이 진화할수록 인간정신이 퇴화되어가며, 그렇기에 경쟁의 속도를 줄이고 경제를 축소시켜 인간이 황폐화되는 것을 막자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우지수에 촉각을 세우고 환율변동에 혈안이 되고 있는 이때에, 한때 신부의 길을 가던 일리치의 주장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차량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우리 생활은 여유대신 더 바쁘게 되고, 안정된 쉴만한 공간이 사라지며, 가질수록 상대적 박탈감으로 고민하게 되며, 안정을 추구할수록 우리 주변에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뿌리 뽑혀진 삶이 가중되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초근 한 보도에 따르면, 미국따라잡기식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다수의 불행만이 가중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세게 인구의 절반이 넘는 30억의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 것이지요. 분명 경쟁을 토대로 경제적 가치가 여타의 가치를 독점하게 되면서, 인간 몸이 망가지고, 이웃간의 관계도 깨어지며 자연도 파괴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대신에 돈에 대한 신뢰가 우위를 점하면서 총체적 위기가 발생한다고 일리치는 보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2등의 존재의미를 인정치 않고 있는 이 시대에 일리치의 주장은 낭만주의적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 생각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은 변화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이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점에서 저는 창세기 33장 이하에 나오는 ‘절뚝거리는 야곱‘의 심정을 헤아려 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목적한 바를 위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2등의 운명을 1등으로 바꾸기 위해 어떤 경쟁, 대립,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았던 야곱, 그러나 모든 것을 얻었으나 자신의 근본문제, 곧 아버지와 형과의 화해를 이루지 않고서는 삶의 안정을 누릴 수 없었던 야곱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야곱은 압복강변에서 하나님 천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씨름하며 자신의 고뇌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야곱의 환도뼈는 부러졌고 그로 인해 절뚝거리며 걷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지요. 이로써 예전처럼 빠르게 달리지 못했고, 1등이 될 수 없었으며 처음으로 멈추어 설줄 아는 인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르게만 달려갔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형제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절뚝거림, 느림은 그에게 참된 은총이며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1등이 최고의 미덕이며 속도감의 마법에 걸려 있는 현대인들의 삶속에서 절뚝거리는 야곱의 후반부 인생을 날샌 검이 되어 세상의 풍조와 첨예하게 갈등토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홀로 저만치 앞서가고자 하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새 세계, 새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압복강변의 고뇌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 천사와의 씨름이 있어야 하고 절뚝거림의 아름다움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을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하나님 영의 활동공간이 되도록 내어 맡길 때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로써 우주의 새 질서가 생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 시대에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세상안에서 ‘검‘으로 존재하도록 부르십니다. 절뚝거리는 야곱의 삶으로 세계내에 새질서를 이루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새길‘이라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생겨나는 길일 것입니다.
근본적 변화-검으로 존재하기/ 마10:34-39
근본적 변화-검으로 존재하기 마10:34-39 벌써 몇 년째 한해 한두번씩 중요한 절기나 계절이 바뀌는 때에 새길교회 성도님들과 만나왔습니다. 귀한 만남이란 생각이 들어 설교를 구상하고 작성하는 일에 신중을 기하곤 하였지요. 설교를 잘해 보겠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진실을 나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달이 바뀌고 가을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새길교회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 주제를 “변화”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아는대로 예수는 본래 이땅에 새 질서, 새바람을 일으키려 했던 분입니다. 1세기 초엽 유대 팔레스틴 사회내에 만연된 인습화된 유대문화, 소위 넓은 길은 비판하고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는 인간 삶의 새 토대를 꿈꾸셨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 인격의 내부에서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고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는 삶이 시작될 때 그로부터 우주의 질서가 바뀌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는 길을 열심히 알리셨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천국의 비유라는 말씀이 그것들이지요. 어떤 농부가 남의 밭을 가는 도중 밭에 묻힌 보화상자를 발견하였답니다. 그 농부는 놀라서 기뻐하며 그것을 잘 묻어두고 집에 돌아가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바로 이러한 농부의 전적인 행동을 예수는 천국을 발견한 자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진주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모으려 다니던 사람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좋은 진주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진주를 발견하였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지금까지 수집했던 다른 진주들은 팔고 가옥과 전답을 팔아 진품의 진주를 사고 너무도 흥겨워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천국,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일부분만을 가지고서는 얻을 수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백만장자라도 자기자신의 절반을 가지고는 천국을 살 수 없는 것이며 극빈자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면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찌 이것이 재물뿐이겠습니까? 지식, 감정, 자신의 생명까지를 다 바쳐 정말 소중한 것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즉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면 지금까지 귀하다 여기던 것을 스스럼없이 놓아버리는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최상의 가치인 천국을 소유한 자에게 오는 기쁨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이 없다면 복음은 복음이 아닐 것이며 더 이상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영의 인도로 인간내면 속에서 이런 기쁨이 용솟음 칠 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우주는 바로 그곳에 있으며 그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천국에 관한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이 인간의 심령 속에 임할 때 여기에는 필연코 격렬한 가치투쟁이 생겨납니다. 독일성서공회편 관주성경에 보면, 오늘 읽은 본문에 “예수 때문에 생기는 분열”이란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비와, 딸이 어미와 분쟁하도록 했고 집안 식구들 모두가 서로에게 원수가 되도록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검’이란 본래 분열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더 깊게는 자기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지요. 큰 죽음, 곧 정신적 죽음을 죽어야만 분열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자신이 절대라고 믿고 생각했왔던 가치관, 인생관, 이데올로기 등이 그리스도께서 던지신 불로 인하여 사라지고 하나님 영으로 이 땅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봄날의 여린 꽃, 여름의 녹음, 가을하늘의 높고 청명함 그리고 겨울의 설경 등 외형적으로 아름답게 보이고, 화려하듯 보이는 자연, 그리고 부족함 없이 사는 듯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이면에는 아픔과 상처가 깃들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성서적 표현으로 말하거나 인간을 비롯하여 자연의 모든 것들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기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롬 8:21-22). 인간을 비롯하여 식물과 동물 모두가 새 질서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천지, 개벽된 세계가 한 개인속에서 성취되고 가정과 국가 및 전우주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목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사실 풀이하기도 어렵지만 그 말씀의 뜻을 새겨 실천에 옮기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껏 여러 차례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하려 했으나 제 스스로 자신이 없어 본문으로 택하지 못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설교는 남에게 증거하기 이전에 자신의 실존과 대면하는 일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본문 말씀을 읽게 된 것은 탄생 100주년은 맞은 위대한 신앙인 김교신의 글을 묵상하고 난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44살, 조국이 해방되기 몇 달전에 노동자들과 함께 흥남부두에서 일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평신도 신학자 김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혼신의 믿음과 조선에 대한 사랑을 깊이 생각한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서와 자신의 조국 조선을 결코 둘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리선생이었던 그는 조선 땅에 성서를 올려놓고자 하고 일념으로 고독하게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만들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불태웠지요.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는 망가진 조국, 그러나 재래의 문화와 도덕 등 구습에 얽매어 스스로 종의 멍에를 걸머진 조선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정면으로 시비걸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망했던 것은 성서의 말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지 결코 서구신학이나 선교사들이 전달한 제도나 교리는 아니었습니다.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한 교회, 그들이 주도하는 소위 정통교회는 생명없는 형식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인의 비판을 받았던 무교회론이 시작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무교회주의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형식화되고 세속화된 교회를 인정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교회주의는 결코 기성 교회만을 항쟁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조선민족이 살고 있는 일제하의 사회현실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교신은 일제로부터도, 서양선교사로부터도 그리고 조선의 교회들로부터 일제히 배척을 받았습니다. 실로 김교신의 생애 전체는 그리스도 영을 따라 살다 모두와 더불어 등진 인생이었습니다. 진정 오늘 본문 말씀처럼 조선교회와 민족을 위하여 검을 주려고 오신 분이었지요. 참으로 위로부터 주시는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성서와 복음만을 알았던 김교신, 그래서 이 민족에서 참된 기쁨을 주기 위해 모든 거짓된 것과 싸웠던 그분의 삶이 주는 감동이 비로소 본문 말씀과 저 자신을 대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실제로 김교신 선생도 이 본문을 가지고 몇 차례 설교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2000년전 예수의 말씀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30년대 김교신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표현되었다면 이제 21세기를 맞는 한국의 새로운 상황속에서 이 말씀이 새길을 가려는 여러분과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구체화되어야 하겠습니다. 21세기를 준비해온 한 학자들의 모임에서 조만간 현실이 될 - 부분적으로 이미 현실이 되고 있는 - 한국사회 및 문화의 당면과제가 다음처럼 요약된 바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 논쟁의 종언과 함께 부상된 세계자유시장경제체제의 부산물들, 즉 경쟁의 와중에서 소외된 다수에 대한 사회적 배려의 문제, 통일을 앞둔 시점에서 남북, 남남간의 이념적 가치극복,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기술이 되어버린 상황속에서 테크놀로지에 대한 윤리적 평가, 환경호르몬을 위시한 생태환경의 파괴,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의 양식으로는 고쳐질 수 없다는 진단 - 마지막으로는 가부장제의 종식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당면한 현실앞에서 한국사회와 교회 그리고 우리 신앙인은 실상 얼마나 무력하였습니까? 시장경제논리에 세뇌되어 ‘많은 것이 좋다’(more means better)는 논리에 예수 복음마저 잠식시켰고, 전대미문의 기술적 축복에 매료되어 즐기려고는 하고 오래 살려고는 하되 기술문명을 비판적으로 검증할 능력과 소양을 갖추지 못한채 살고 있습니다. 소비자로서만 살고 있기에 제반 삶의 존재양식이 환경친화적이 되지 못하였고 북한 동포에 대한 냉담함을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만연된 가부장적 가치관을 수용해온 현실 역시 고쳐야 될 사안이라고 믿습니다. 미래를 누구보다 앞서 준비해야 될 책임이 있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오늘날 현실속에 매몰되어 있다면, 이 시대와 화평하게만 지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형식적 종교인들이든지, 아니면 무신론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점에서 본문 말씀은 우리 시대를 향해 우리 모두가 ‘날카로운 검’으로 존재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와 더불어 정신적으로 싸우며 최상의 것을 위해 큰 죽음을 죽으라는 것입니다. 검으로 오신 예수처럼, 값비싼 보화를 발견한 농부처럼 살라는 것이지요. 한때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신부 일을 하다가 교육자로서, 문명비판가로서 활약하고 있는 이반 일리치란 사상가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낭만주의자, 더욱 혹독하게는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뒤따르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는 경쟁을 근거로 경제 활동이 진화할수록 인간정신이 퇴화되어가며, 그렇기에 경쟁의 속도를 줄이고 경제를 축소시켜 인간이 황폐화되는 것을 막자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우지수에 촉각을 세우고 환율변동에 혈안이 되고 있는 이때에, 한때 신부의 길을 가던 일리치의 주장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차량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우리 생활은 여유대신 더 바쁘게 되고, 안정된 쉴만한 공간이 사라지며, 가질수록 상대적 박탈감으로 고민하게 되며, 안정을 추구할수록 우리 주변에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뿌리 뽑혀진 삶이 가중되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초근 한 보도에 따르면, 미국따라잡기식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다수의 불행만이 가중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세게 인구의 절반이 넘는 30억의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인 것이지요. 분명 경쟁을 토대로 경제적 가치가 여타의 가치를 독점하게 되면서, 인간 몸이 망가지고, 이웃간의 관계도 깨어지며 자연도 파괴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대신에 돈에 대한 신뢰가 우위를 점하면서 총체적 위기가 발생한다고 일리치는 보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2등의 존재의미를 인정치 않고 있는 이 시대에 일리치의 주장은 낭만주의적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 생각을 수용할 수 없는 사람들은 변화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들이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점에서 저는 창세기 33장 이하에 나오는 ‘절뚝거리는 야곱’의 심정을 헤아려 보고 싶습니다. 자신의 목적한 바를 위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2등의 운명을 1등으로 바꾸기 위해 어떤 경쟁, 대립,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았던 야곱, 그러나 모든 것을 얻었으나 자신의 근본문제, 곧 아버지와 형과의 화해를 이루지 않고서는 삶의 안정을 누릴 수 없었던 야곱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야곱은 압복강변에서 하나님 천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씨름하며 자신의 고뇌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야곱의 환도뼈는 부러졌고 그로 인해 절뚝거리며 걷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지요. 이로써 예전처럼 빠르게 달리지 못했고, 1등이 될 수 없었으며 처음으로 멈추어 설줄 아는 인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르게만 달려갔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형제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절뚝거림, 느림은 그에게 참된 은총이며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1등이 최고의 미덕이며 속도감의 마법에 걸려 있는 현대인들의 삶속에서 절뚝거리는 야곱의 후반부 인생을 날샌 검이 되어 세상의 풍조와 첨예하게 갈등토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홀로 저만치 앞서가고자 하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새 세계, 새 질서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압복강변의 고뇌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 천사와의 씨름이 있어야 하고 절뚝거림의 아름다움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을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하나님 영의 활동공간이 되도록 내어 맡길 때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로써 우주의 새 질서가 생겨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 시대에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세상안에서 ‘검’으로 존재하도록 부르십니다. 절뚝거리는 야곱의 삶으로 세계내에 새질서를 이루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새길’이라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생겨나는 길일 것입니다.
근본적 변화의 은혜를 받은 사람/ 요8:11
근본적 변화의 은혜를 받은 사람 요8:11 경영학 이론에서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기업 업무의 과정과 절차를 완 전 원점에 놓고 근본적으로 재 설계하는 신 경영 기법을 말합니다. 첫째, 무엇이 근본적인 것인가를 생 각하는 물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왜 이 일을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관행이나 전통 보다 현재 반드시 있어야 하고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여 그것에 집중합니다. 근본문제부터 파악해 보자는 것입니다. 둘째, 변하려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임시변통 적인 변화가 아닌 낡은 것과 철저하게 결별하는 혁신운동입니다. 제도를 바꾸기보다, 근본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셋째, 극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경영 철학입니다. 부작용을 염려하여 항상 점진적이고 완만한 변화를 추구하다간 급변하는 경영환경 가운데서 생존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업무성과를 극적으로 (radical) 높이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강도 높은 변화를 시도하자는 것입니다. 그 렇습니다. 변하려면 근본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입니 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더니 인생의 근 본적인 변화와 극적인 Turning point를 이룬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BC와 AD가 혁명적으로 달라진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그런 인물 한 사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종 사촌 동생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세배대요, 어머니는 살로메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동생입니다(마가복음 16:1. 마태복음 27:56). 그는 예수님을 맨 먼저 만난 최초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제자 중에서 가장 연소자였습니다(요한복음 1:35-40. 마태복음 4:21-22). 그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으므로 그의 성품과 인격이 근본적으로 변화의 은혜를 받은 행운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인생의 BC와 AD가 혁명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 은혜를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근본이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사랑 받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받은 사 람,\" \"예수님께 사랑 받는 제자,\"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요! 그래서 영어권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 진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1980년대 미국의 통계만 보더라도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6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Thomas는 300만 명, James는 200만 명, Peter는 30만 명인데, John이라는 이름를 가진 자는 600만 명이 넘는답니다. 여하튼 요한은 예수님을 믿고 근본이 완전하게 달라지는 은혜를 받았 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받는 은혜 중에 가장 고급한 은혜는 변화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입니다. 소 위 인격갱신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중생, 갱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곧 요한 복음의 특징입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 만이 『거듭남의 변화』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몬(진흙)이 변하여 베드로(반석)가 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랍비 니고데모를 표증으로 \"사람은 반드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피력합니다. 이것은 곧 요한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임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메시지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을 통하여 근본이 변화되는 거듭남의 복음과,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성화가 이루어지는 은혜를 피력합니다. 『변화와 성화』이것이 요한의 자기 간증 주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생생한 자기 간증이 있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모두 근본이 달라 지는 은총이 있기를 원합니다. 1. 사나운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요한은 성격이 매우 급하고 과격한 다혈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son of thunder)이었습니다.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활화산 같은 성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51절부터 보면, 어느 날 요한은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마리아 지역 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어느 주막집에 들어가 요기하고 가려고 몇 몇 제자들을 먼저 사마리아의 한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동네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버럭 화를 내며, 얼마나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지요?(54절) \"주님, 하늘에서 날벼락을 내 려 저들을 즉사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성격이 벼락같다 보니까 보복도 벼락같이 합니다. 이처럼 매섭고 비정한 성격의 사람이 얼마나 놀랍게 변화되었습니까? 『사나운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 로』 변화 받은 것입니다. 근본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 믿고 어떤 변화의 은혜를 받고 계신가요? 사나운 성품이 사랑 의 성품으로! 얼마나 고급한 은총인가요? 포악한 성품이 포근한 성품으로! 얼마나 숭고한 은총인가요? 과격한 성품이 온유한 성품으로! 얼마나 참신한 은총인가요? 이처럼 요한은 인간의 고질적인 성품 중에 서도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변화와 성화를 이루었기에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서는 『사랑』을 50번 이상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 \"형제 들 간의 친밀한 사랑\"을 피력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사랑의 심성으로 변화와 성화를 이루는 은총이 있기를 바 랍니다. \"그 사람은 리더십이나 능력이 참 탁월한 사람이다\"라는 말보다도, \"그분은 참 사랑의 사람이다 \" 라는 존경스런 칭송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그가 거듭나기 전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나운 사람이었으나,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는 사 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갈수록 사나워지고 있나요, 사랑의 성품으로 성화 되어 가고 있나요? 오, 주님! 저에게도 사랑의 심성을 주옵소서! 2. 편협한 사람이 관대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요한은 나름대로 예수님께 충정을 다하는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서 전도 를 하는데, 이미 그 동네에는 어떤 낯선 전도자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요 한은 성격이 모가 나다보니까 그를 불러서 더 이상 전도를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였습니 다. 그는 우리 그룹이 아니라는 편협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49절). 즉 그는 우리 편이 아니라는 옹졸하 고 좁은 마음 때문에 괜히 좋은 일 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막 9:38-40). 그리고도 자기가 잘한 것으로 자화자찬하며 예수님께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옹졸한 질투심 때문 에 다른 사람들이 잘하는 일까지 방해를 놓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오히려 옹졸해질 수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 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편협해질 수가 있습니다. 소위 쩨쩨한 크리스챤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 초기의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보면 그들은 참으로 은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서로 시기하 고 질투하며, 마음이 옹색했습니다. 그래서 모이기만 하면 서로 경쟁하고 다투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서도 비슷한 현상이 빚어질 수 있습니다. 은사가 많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시기심과 질투가 많아요. 남이 잘하는 꼴을 못 봅니다. 그래서 여차하면 시비를 겁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호소합니다(고후 6:13).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한이 처음에는 편파적인 성품이 강했으나, 나중에 그는 예수님의 넓은 가슴을 최 대한 부각시키는 관대한 성품의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는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의 스토리도 보도해주며,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관한 사건보도에 있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제부터 다신 죄를 짓지 말라\"는 예수님의 넓은 가슴을 부각시켜줍니다(요 8:11). 그리고 요한은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됨을 이루어나가자\"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가장 장엄하 게 상기시켜줍니다(요 17장). 서로 개성이나 취향이 다르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하나되자고 역설합니다. 이만큼 그는 넓은 가슴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관대한 마음』은 21세기 새로운 리더십의 필수요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모 두 예수님의 넓은 가슴으로 본성이 달라지는 은총을 구하십시다. 누구든지 수용하고, 어떤 말이라도 포 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은혜를 함께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야심가가 헌신자로 변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이종사촌지간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입신양명에 대하여 대단한 야망을 품고 있 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5절을 보면 자기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자신들의 최고 권좌를 부탁드리 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최고의 권좌를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마태복음 20:20).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우리가 교회 나와 예수 믿는 목적이 자신의 입신양명에 국한되고 있지는 않 습니까? 출세, 진급, 진학, 사업성공, 가게 번영, 자신의 야망 달성을 위해 불공드리듯이 기도하고 있지 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인류의 구원을 위해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계 신데, 요한은 오로지 자신의 출세에만 혈안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 수를 잘못 믿으면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욕심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복 달라고만 비 는 대책 없는 욕심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요한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 가장 헌신적인 인생을 삽니 다. 그는 처음에 변화를 받기 전에는 편협하고 옹졸한 마음이어서 사마리아에 날벼락을 때려달라고 부탁 했던 사람인데, 나중에는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사마리아로 전도하러 갑니다(사도행전 8:14). 그리고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그는 소아시아의 소도시 에베소에 내려가 거기서 25년 동안 묵묵히 헌신 합니다. 그 다음에는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면서도 98년까지 초지일관 헌신합니다. 그는 특별히 성경을 세 권이나 씁니다. 요한복음, 요한서신, 계시록입니다. 여기서 그는 두 가지 존경스런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자신들의 이름을 30회 이상 밝히지만, 요한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요한 은 자기를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꼭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 이것이 자기 소개의 전부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영광만을 드러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과 권위, 영광, 승귀를 최대한 부각시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그야말 로, Not I, but Christ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나는 없고, 오직 예수님만 크게 나타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21세기는 근본문제를 중시하는 시대입니다. John B. Schiller가 말하듯이, \"사람들은 헌신하지 않는 지도자를 따르지 않습니다.\" \"헌신하지 않는 사 람은 최소한의 영향밖에 주지 못합니다.\" Jonn Maxwell 이 말하듯이,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려면, 당신의 마음속에 진정한 헌신이 있어야 합 니다.\" 세계는 야심가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는 사람에 의하여 영향을 받습니다. 4. 유약한 자가 담대한 자로 변합니다 요한은 열두 사도들 중에 가장 어린 자였고, 또 가장 유약한 자였습니다. 얼마나 의지가 약했던지 예수 님께서 마지막으로 성만찬을 하실 때 예수님의 품에 안겨 눕기도 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가실 때 그는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쳤습니다(마가복음 14:51).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 다는 소식을 듣고 그 묘지까지는 먼저 달려갔으나, 겁이 나서 무덤 속에는 들어가 확인을 하지 못했었습 니다(요한복음 20:4-5). 성격은 급했어도, 마음은 약했어요 그러나 그가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후에는 담대한 전도자로 바뀝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을 보면, 살기가 등등한 예루살렘 원로회 앞에서도 기탄 없이 전도합니다. 그들의 공갈과 협박 앞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사도행전 4:19-20). 그는 로마시대의 가장 포악 한 박해자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핍박으로 고도의 섬 밧모에 유배되어 가지만, 거기서도 그는 결코 위축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 승리를 힘차게 선포합니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를 믿 어야 한다』고 100번 이상 거듭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그는 성령 받은 후에 한번도 기죽지 않습니다. 초 지일관 용감하게 전도합니다.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다\"고 대범하게 선포합니다. \"생명과 심판의 메시지\"를 목숨걸고 외칩니다. 그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스런 신자로 살아갑니 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도들이 다 죽은 후에도 여전히 \"교회의 기둥\"으로 활약합니다(갈라디아서 2:9). 초대교회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기둥으로 큰 몫을 감당합니다. 믿음의 거목으로 역할을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성령 충만함으로 대범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디를 가서든지 신앙적 입지를 분명하게 표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1세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처신이 불분명한 자는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존경받지 못합니 다. 불신자들도 신앙적 입지가 확고한 자에게서 매력을 느낍니다. 어느 자리에서든지 담대한 믿음을 표 명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근본적인 변화의 은혜를 받는 만큼 이 시대의 사회와 교회의 \"기둥\"으로 쓰임 받을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근본적이면서도 극적인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과격한 성품에서 사랑의 심성으로, 편협한 마음에서 관대한 마음으로, 야심가에서 헌신자로, 유약한 믿음에서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근본 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21세기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주님, 저에게 참된 변화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 초청) (찬송가 209장)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과연 예수 믿고 어떤 근본적 변화를 이루어가고 계신가요? 나는 아직도 여전히 사나운 성질이 그대로 살아있지는 않은지요? 아직도 옹달샘처럼 편협한 마음, 쉽게 용납하지 못 하는 좁은 시샘이나 질투로 유린되는 나의 초라한 모습,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자 기 야욕적인 속셈을 드러내는 일차원적 나의 수준, 오, 주님!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누군가를 변 화시키기 전에, 먼저 저부터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저의 근본이 변화 받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심성으 로, 넓은 가슴으로, 헌신하는 양질의 삶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담대한 믿음을 표명할 수 있 는 근본적인 변화의 은총을 주옵소서!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일어킵니다/ 눅9:29, 마17:20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일어킵니다 눅9:29, 마17:20 당신은 기도의 파수군입니다. 당신은 기도를 아십니까? 기도는 성도의 액세서리가 아니라 생기요,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포기하는 순간 영적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당신이 기도의 맛을 아는 순간 삶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움직인 사람들은 다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오른 장중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가장 위대한 힘은 기도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교회를 마귀와 사단 권세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최대의 무기가 기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전입니다.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을 정복하여 후에 페르시아 제국 건설을 목전에 둔 바사제국의 아하수에로왕은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도를 치리 하는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하수에로왕을 조정하는 사람이 있었서니 그분이 바로 유대인 왕후 에스더였습니다. 에스더의 아름다운 미모는 왕을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왕후 에스더를 조종하는 영적 리모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바로 그의 삼촌 모르더개였습니다. 모르더개는 수산궁의 문지기로 있으나 바사제국을 실질적으로 조정하는 하나님의 오른 장중에 있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사제국의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기도의 사람 모르더개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변화산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특별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주님은 3년 공생애를 결산하는 여론조사를 실시해 보았습니다. 그때 세인들의 메시야관은 이러했습니다. 일명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도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시니이다\\\"(마태복음 16:16)고 했을 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7)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된 교회를 그의 신앙고백 위에 세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일주일이 지나고서 주님은 변화산에서 특별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오늘 우리 제단에 이러한 기도 운동이 일어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첫째: 기도 동산으로 올라갑시다. 읽을말씀☞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1) 당신은 따로 세우는 반열에 참여해야 합니다. 엿새 후는 가이사랴 빌립보 성회 이후를 말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헐몬산까지 와서는 산 기슰에 여장을 풀고는 아홉 제자들을 인근 마을 가까운 계곡에 쉬게 하고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기도의 동역자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피곤하나 주님과 동행하는 삶 자체가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이것이 따로 세움을 받는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따로 세움을 받는 자만이 고지를 정복하는 법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다 따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아브라함을 불러서 따로 세웠습니다(창세기 12:1). 하나님은 애굽에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바로의 왕궁에 있었던 모세를 불러서 따로 세웠던 것입니다(출애굽기 2:15).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바울과 바나를 따로 세우라고 했습니다(사도행전 13:2). 하나님이 불러서 따로 세운 자들은 존귀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특수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세상과 따로 세우는 선택이요, 교회 안에서 따로 세우시는 것은 특별한 사명을 맡기기 위한 부르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따로 세우는 반열에 참여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특별히 기도 그룹에 참여하는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기도하면 눈이 열립니다. 읽을말씀☞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2-3) 당신은 눈이 열여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데리고 산 정상에 올라가서 그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 앞에 하늘 세계가 열리고 말았습니다. 생전에 보지도 못한 사람인데 율법의 대변자 모세와 선지의 대변자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과 더불어 무엇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주님과 나누었을까? 저는 지금 사도들이 받은 성령의 영감을 의지하여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모세가 주께 말씀하시기를 「주님 제물 되신 메시야를 율법에서 가르쳤는데 백성들이 인자를 구주로 믿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인자가 오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메시야가 왔는데 어떠합니까?」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눈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바란 광야에 도착하여 가나안에 열두 정탐군을 보내었습니다. 그때 세속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과 언약에 눈이 열린 믿음의 사람들의 안목은 하늘과 땅같은 차이였습니다. \\\"여호와깨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수기 14:8)고 했습니다. 꼭같은 시간에, 꼭같은 장소에서, 꼭 같은 사물을 보았는데 언약에 대한 믿음에 따라서 보는 안목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눈이 열여야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것을 보게 됩니다. 셋째: 기도하면 귀가 열립니다. 읽을말씀☞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4-5) 하나님의 음성을 드는 영적인 귀가 열여야 합니다. 귀가 열여야 들을 것을 듣게 합니다. 신령한 안목이 열린 제자들은 감격했습니다. 황홀한 지경에 흥분한 나머지 베드로는 초막 헌납을 명세 합니다. 베드로가 초막셋을 짓겠다는 것은 대단한 헌신이요, 순교적인 각오와 결단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베드로의 서원을 중단시키시고 홀연한 순간에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우리의 헌신과 충성 이전에 복음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먼저 들어야 사역을 위한 바른 깨닫음이 오는 것입니다. 당신은 귀가 열였습니까?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헌신과 충성 이전에 복음에 대한 바른 경청을 원하십니다. 복음에 대한 바른 귀가 열리지 않고 행한 어떠한 충성이나 헌신도 주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했을 때 대접하기 위해 봉사하는 일에 분주한 마르다보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를 더욱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귀가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17). 넷째: 기도하면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읽을말씀☞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러워 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 두려워 말라 하신대\\\"(6-7) 당신은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것은 마귀와 사단의 권세입니다. 마귀와 사단 권세는 복음 앞에 항상 우리의 마음 문을 닫게 합니다.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진 것은 마음의 상태가 어두운 것을 말합니다. 어두운 마음은 마귀와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영적인 상태입니다. 마음의 문이 닫혔다는 것은 어두운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사단 권세가 도사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당신의 심적인 상태가 공허하고 불안합니까? 사단 권세가 진을 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당신의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을 몰아내고 평강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문을 닫고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 20:19)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도하여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을 극복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하시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고 했습니다. 다섯째: 기도하면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읽을말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8) 예수만 바라봅시다. 떠거운 기도가 끝나고 눈을 들어보니 조금 전에 나타난 환상은 다 사라지고 예수만 보일 뿐입니다. 율법의 모세도 살아지고 선지의 엘리야도 살아졌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를 들어내기 위한 사역자요 도구였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이상 모세와 엘리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만이 인생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소유한 자는 천하를 다 소유한 자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를 잃으면 천하를 잃은 자입니다. 주님은 역사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역사(history)를 그분의 이야기(he is story)라고 부릅니다. 그분이 역사의 중심에 오셔서 세속 역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일어 킵니다. 사도행전은 다르게 말하면 기도행전이요, 곧 성령행전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기도했을 때 성령으로 충만했고 그때 예수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은 기도의 파수군입니다. 기도 동산으로 올라갑시다. 눈이 열여야 합니다. 귀가 열여야 합니다. 마음에 평강이 넘쳐야 합니다. 예수의 사람이 됩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단6:10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단6:10 우리 모두 기도운동을 일어킵시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3월 10일-30일(21일간)까지 제3차 춘계특별새벽기도회을 가집니다. 교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기도할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연이어 땅까지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제2의 도약기로서 선교원을 개원케 하셨습니다. 선교원은 교회개척 못지 않게 중요한 사역입니다. 저는 밀알선교원에서 자라가는 새싹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적인 인재로 키우기 위해서 지금부터 장학금을 적립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도 기도할 문제가 많습니다. 환보사태로 인하여 국민경제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대선을 앞두고 여야의 지도자들의 정치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국력의 소모가 없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십이란 수는 고난에 대한 상징적인 수입니다. 모세의 광야 사십년이나 엘리야의 사십일 호렙산행이나, 주님의 사십일 금식은 다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부활주일 이전의 사십일을 주님의 고난과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세속적인 즐거움을 절제하면서 살고자 경건한 종들은 사순절을 지킵니다. 이러한 기간이 정해진 것은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부터입니다. 토마스 아켐퍼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주님의 기적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때에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축복을 받을 때에만 찬양합니다. 자기 위로와 만족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위하여 주님만을 사랑하는 어떠한 환난과 역경속에서도 항상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할지라도 변함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아멘」 다니엘의 기도를 배웁시다. 우리는 특별 기도주간에 앞서 다니엘에게 영적인 큰 도전을 받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다니엘의 기도운동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기도입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다니엘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역사하실 것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다니엘은 놀라운 역사를 일어켰습니다. 그러면 다니엘의 기도는 어떠했는가? 첫째: 어인이 찍혀서도 기도합시다.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했습니다. 그는 어인이 찍힌 것을 보고도 기도했습니다. 그 어인이 무엇인가? 다리오왕이 통치할 그 때에 전국을 120도로 나누고 도에는 방백을 세우고 그 위에 3총리를 두어 다스리게 하셨는데 다니엘은 그중에 한 사람이었으며, 그 세 총리 중에 가장 뛰어난 자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하여 죽일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달동안(31일간) 왕 외에는 다른 어떠한 신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만약에 이 법을 어기면 사자굴에 집어넣게 했습니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다니엘 6:9)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기도했습니다. 어인이 찍혀도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단은 당신이 기도하지 못하게 교묘하게 어인으로 묶습니다. 당신의 환경을 기도하지 못하게 묶습니다. 기도할 수 없도록 사건을 일어킵니다. 당신의 발과 건강을 묶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일어나야 합니다. 사단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악인의 꾀로 죄인의 길로 오만한 자의 자리를 앉게 하여 기도를 포기하게 합니다. 바울은 도무지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인데 기도했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사도행전 16:25-26)고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밤중이지요, 장소적으로 옥중이지요, 육체적으로는 피투성이가 된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합시다. 성전중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성전 중심의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 올 때부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할 것을 작정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우주의 중심이요, 모든 인간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잃어버린 인생은 중심을 잃은 자와 같습니다. 중심을 잃어버렸으니 환경따라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중심에 언약의 말씀이 있으니 환경을 극복할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인류의 소망은 천국이지만 지상 성도들의 중심은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구약의 성전이나 신약의 교회는 천국의 지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멜 백성들을 광야에서 훈련시킬 때 성막중심으로 생활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은 성민의 생활의 중심입니다. 성도의 삶의 중심은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1-2) 성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눈은 항상 산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산은 시온산입니다. 시온산에는 시온성이 있습니다. 그 시온성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는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가 있으며, 그 안에 언약궤가 있으며, 그 언약궤 위에 시은소 보좌가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바로 그는 그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셋째: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합시다. 담대하게 기도했습니다.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열린 창에서 기도했다는 것은 목숨을 건 기도입니다. 일생동안 부르짖어 기도하실 것인데 한달정도는 쉴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되 문을 닫고 기도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문을 열고 열린 창문에서 기도했을까? 이전에 하던 그 방법 그대로 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 올 때 이미 그 마음에 뜻을 정했습니다(다니엘 1:8). 우상제물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며,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이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할 것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는 변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뜻이 일정한 초지일관된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담대합니다. 오순절을 통과한 사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사도행전 4:19-20)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을 통과한 이후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성령은 비급한 자를 담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기쁨으로 순교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담대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넷째: 무릎꿇어 기도합시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항복했습니다. 겸손하게 낮아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고는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놀라운 역사를 일어 켰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담력은 왕의 권세도 두렵지 않고 굶주린 사자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겸손한 자는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담대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한 경우가 없습니다. 세상을 정복한 자들은 다 무릎으로 살았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무릎으로 아합과 그 무리를 정복했습니다. 갈멜산 기도는 무릎의 기도입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가라\"(열왕기상 18:42-43) 엘리야의 기도는 목숨을 건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다섯째: 감사함으로 기도합시다. 감사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감사의 사람입니다. 환경적으로 볼 때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같은 동료들의 중상과 모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직의 박탈과 함께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으니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할 조건을 찾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수십년 전에 포로로 잡혀올 때 십대의 몸으로 죽었을 몸인데 지금까지 산 것이 덤으로 산 것입니다. 그러니 오히여 감사할 뿐이며, 나아가서 이전에 함께 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도 함께 하실 것을 생각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감사는 하늘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한 개인의 운명이나 한 민족의 흥망성쇠가 하늘 문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하늘문을 닫으면 어찌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막아도 주님이 여시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하늘문을 여는 열쇠는 감사의 키입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생활철학이 감사였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 1:20-21)고 했습니다. 그에게 주신 어려운 삶이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과정일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어인이 찍혀서도 기도합시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합시다.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합시다. 무릎 꿇어서 기도합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꼭대기/ 마17:1-13/ 김기석 목사/ 산상변화주일설교/ 2002-02-15
꼭대기 마17:1-13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 엿새 뒤에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인 동시에 산상변화 기념주일입니다. 교회 전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직전 주일을 산상변화주일로 지킵니다. 올해는 설 연휴가 시작되는 18일이 재의 수요일입니다.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로 접어들기 전에 주님은 가까운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산이 안티레바논 산맥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해발 2814m의 헤르몬 산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근거는 없습니다.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그 산은 신성한 느낌을 주었을 테고, 후세 사람들은 예수님의 변화 사건을 그 산과 연결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산을 즐겨 찾습니다만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레저를 즐기기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 시인이며 학자인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가 방투산에 오른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1336년에 그는 방투산을 오르면서 아름다운 자연풍광에 연신 감탄했습니다. 산정에 오른 그는 배낭에 넣어온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꺼내 읽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읽은 대목은 사람들이 산과 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면서도 정작 자기 속에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함을 비탄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이후에 그는 크게 자극을 받아 인간의 내면을 치열하게 탐색하는 작가가 되었고, 르네상스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까닭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오른 것도, 이세벨을 피해 달아나던 엘리야가 호렙산에 오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산은 일상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 지친 이들이 바라보는 곳 혹은 찾아가는 곳입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시121:1) 히브리 시인의 노래도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비일상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그곳은 광야와도 통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오르신 산을 ‘높은 산’이라 특정하고 있습니다. 해발고도의 높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비상성非常性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본문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엿새 뒤’라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6은 불완전한 숫자입니다. 이레도 아니고 사흘도 아닌 엿새라는 것은 그 때가 위기의 시간임을 암시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처형장면을 다루면서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27:45)고 말합니다. 원문은 ‘제 육시로부터’인데 새번역성경은 유대인의 육시가 낮 열두 시를 의미하기에 친절하게 ‘낮 열두 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엿새’ 혹은 ‘육시’는 예수님과 관련된 어둠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엿새 뒤’라는 구절은 제자들 마음에 드리운 어둠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빛 앞에 서다 그런데 그 어둠의 시간에 주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변화되셨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17:2). 반전입니다. 어둠이 순식간에 빛으로 바뀐 것입니다. 마치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잠겨 있던 세상에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는 창세기의 기록처럼, 변화산에서 벌어진 사건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의 얼굴에 드러난 빛을 저는 태초의 빛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자들이 본 것은 바로 그 태초의 빛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어둠도 앗아갈 수 없는 빛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적대감도, 죽음의 위협도 그 빛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빛은 무정한 세상을 밝히는 사랑이고 하늘로부터 도래하는 평화입니다. 그 빛과 만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사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그 빛과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어쩌면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행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과정을 일컫는 말은 ‘변화’입니다. 믿음이 들어가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죄인이 성인으로 바뀌고, 박해하던 사람이 박해받는 사람으로 바뀌고, 높아지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어떤 이는 믿음의 길을 우화등선羽化登仙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애벌레와 고치의 상태를 지나 나비로 변하는 과정이라는 말일 겁니다. 세월이 가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바뀝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또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변화의 방향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맑아지고 깊어지고 넓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두워지고 낮아지고 좁아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낭비가 있을까요? 그 산 위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은 역사가 어둠에 잠겨 있을 때 나타나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춘 인물들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치하에서 야훼에 대한 믿음이 스러져가던 때 등장하여 백성들의 마음에 빛을 심어주던 사람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그들을 등장시킨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렇게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덤조차 남기지 않은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입니다. 사람들은 메시야의 때가 이르면 그들이 먼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넌지시 예수가 누구신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 하늘의 소리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세 분을 모시고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에 멀미를 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삶’을 그리워합니다. 민담 가운데도 이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나무를 하러 깊은 산에 들어갔던 초부樵夫가 큰 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고 있던 노인들을 보고 잠시 그 곁에 머물다 돌아왔는데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더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지요?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꾼 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이 그만큼 각박하기 때문일 겁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국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 일행의 모험담입니다. 그 가운데는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이 어떤 섬에 당도했을 때 벌어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은 다 착하고 친절했습니다. 그들은 ‘로터스’라는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열매를 받아먹은 부하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잊고 말았습니다. 가끔은 그런 열매를 좀 얻어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산정에 머물고 싶다는 베드로의 소망을 저는 나무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불운을 회피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직시를 통해 자기를 지키고 고난을 이겨내는 의지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 어디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가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말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선언 혹은 고백이 세 번 나옵니다. 세례 받으실 때 들려온 소리(3:17)가 그 하나이고, 변화산에서 들려온 소리가 그 둘(17:5)이고, 십자가 아래 있었던 백부장의 고백(27:54)이 그 셋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수난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때 들려온 소리가 온 세상의 고통을 당신의 몸과 마음으로 받아 안으시려는 주님의 마음과 잇닿아 있다면, 십자가 아래서의 백부장의 고백은 미움과 증오를 기어코 사랑으로 바꾸어내는 주님의 거룩하고 숭고한 마음과 잇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과 잇닿아 있습니다. 정교회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정교회에 가면 예수님의 생애의 결정적 장면을 보여주는 이콘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탄생 장면을 그린 것인데, 유심히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워계신 구유의 모양이 관 모양이라는 사실이 그 하나이고, 예수님의 몸을 감싸고 있는 속싸개가 수의의 모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정교회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난과 성스러움이 서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 앞에서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거룩함 앞에 선 사람의 당연한 반응이겠습니다만, 이것은 아직도 고난을 받아들이기를 저어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7) 여기서 사용된 ‘일어나거라’(rise, arise)라는 단어는 죽은 자의 일어섬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해 ‘일어나라’(막5:41) 하셨고,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해서도 ‘일어나라’(눅7:14) 명령하셨습니다. 변화산 위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일으켜 세우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구절이 뒤따라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부활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그들도 든든히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인내하는 사랑으로 제자들을 돌보십니다. • 일치를 향하여 산에서 내려오시던 주님은 제자들에게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말이 빚어내는 부질없는 혼란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이 신빙성이 있는지를 여쭙습니다. 주님은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라면서 고요하지만 단호하게 덧붙이셨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분이 세례자 요한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 가슴을 치게 만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를 알지 못하고’라는 구절과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이지만 예수님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아주 명료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0-11) 예수는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실을 추구하는 이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둠이 깊습니다. 인공의 불빛은 휘황하지만 태초의 빛 생명을 주는 빛은 가물거리는 세대입니다. 그 빛이 없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욕망의 벌판을 비틀걸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자기가 이 세상에 온 까닭조차 모른 채 시간에 등 떠밀리며 살아갑니다.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야 합니다. 그 ‘높은 산’에 올라야 합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더라도 그 산에 올라야 우리 삶의 전망이 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꼭대기’라는 말을 이렇게 재해석했습니다. 그 단어는 ‘조금도 틀림없이’를 뜻하는 ‘꼭’에 손을 대본다는 ‘대기’가 합쳐진 말이라는 것입니다. 꼭대기는 그러니까 진리가 있는 곳입니다. 사람은 그 꼭대기와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성공의 사다리 꼭대기 말고, 진리의 꼭대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절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마음에도 주님의 빛이 깃들기를 빕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김기석 목사(서울 청파감리교회)
나 한 사람의 변화!/ 합3:2-3
나 한사람의 변화! 합3:2-3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을 살펴보면, 선한 왕이 있는가 하면, 악한 왕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 고 믿음으로 살아서 나라가 부강하고 이웃 이방나라의 조공까지 받으면서 살아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를 일삼아 개인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타락하고 부패하며 전쟁에는 져서 이방나라의 포로로 잡혀가는 왕들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져서 남쪽 유다나라에 요시야 왕이 있을 때 에는 그가 하나님을 섬기므로 나라가 부강하고 번성하였다. 그러나, 요시야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유다 나라의 왕 이 되었는데 3개월 밖에 되지않아서 애굽에 납치되어 가자 그의 동생 여호야김이 왕위에 올랐다. 여호 야김은 애굽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백성들로 부터 부당한 세금을 거둬 들였고노동력을 착취했다. 결국, 여호야김은 부왕인 요시야 왕과는 달리 백성의 억울함을 무시하며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무고한 사 람이 죽어가고 나라 전체는 죄악이 난무하고 심히 혼란스런 상태가 되고 말았다. ● 렘 22:17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당시 여호야김을 가르켜 말씀하기를 \"네 눈과 마음은 탐람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강포를 행하려 할 뿐이라\"고 평하고 있다. 백성의 사정을 살피지 않는 왕, 무죄한 피를 흘리며 강포를 행하는 왕,그가 바로 여호야 김 이였습니 다. 그래서, 당시 선지자였던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 몸부림치는 호소와 탄원으로 주님 앞 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악하고 패역한 왕을 묵과하실 겁니까?.....\" \"언제까지 이 악하고 부패한 정치를 보고만 계실 겁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간절하게 탄원의 기도를 드렸다. 이러한 기도를 드릴때 하 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는데, 그 길은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 고 \"주여!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하고 기도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죄악이 관영한 세대에 산다고 하지만 바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우리 모두 가 사는 길임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성도는 1천만을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숫자는 4명이 길을 가면, 그 중에 1명는 기독 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은 누가 기독교인인지 알 수 없는 생활의 양태를 보이고 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성도이지만, 집으로 가고, 사회로 돌아가면, 성도가 아니라 다른 이방인과 조 금도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와 같이 부패하고 타락하며 죄악이 난무할 뿐만 아니라 결국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는 문민정부가 들어 서면서 개혁의 바람이 불고, 곳곳에 있는 부정 부패를 척결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변화 받고 주 앞에 올바로 서지 않는 한, 이 나라의 안 녕과 평안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아도 언제나 그 나라의 흥망성쇠는 영적인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 갔다. 그러므 로, 이 시간에는 \"나 한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나 한사람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가장 처음으로 외치신 말씀도 \"회개하라\"는 것이였다. ● 눅 5:32절에도 보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했다. ● 호 6:1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할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씀 하셨다. ● 요엘 2:12 -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다. ● 롬 3: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천국은 죄가 없는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이 가는 것이다. 반대로 지옥은 누가 가는가 하면, 죄있는 사람이 간다기 보다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진실로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를 범한 후에 지나친 변명 을 하는 것 보다 진실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편이 훨씬 낫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부흥운동을 꼽으라면 많은 신학자들은 1907년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꼽고 있 다. 여기서 우리는 성결교단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부흥운동은 한 선교사가 자신의 죄를 깊이 인 식하고 회개 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이 한사람의 회개 운동은 부흥회로 연결 되었고, 그것은 그 도시 전체로 퍼졌으며, 급기야는 유럽 전 지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때 \'카우만과 길보른\'이라는 두 사람이 이 집회에 참석하여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던 중에 동양의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강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고, 이들은 일본으 로 건너가서 [동경성서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인 김상준,정 빈 두 사람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전도만 하여 가까운 교회로 보냈으나, 차츰 세력이 커지게 되어서 결국, 교회를 짓고 교회가 늘어가자,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한국 성결교단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감리교 나 장로교나 침례교나 다른 모든 교단들은 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교단이 설립 되 었지만, 성결교는 유독 우리 한국인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출발 하였다는 점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 입니다. 당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전 세계에 퍼졌고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하고 수많은주의 종들이 성령이 충 만하여 세계 방방 곡곡에 복음을 들고 나아갔던 것 입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바로 한 선교사가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회개 하는데서 출발이 되었다. 이와같이 한 사람의 회개가 얼마나 중요하며 한 사람이 주님께 돌아올 때 얼마 나 큰 역사가 일어 나는가를 알 수 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올 때 우리 가정은 변화되고 맙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올 때 우리 교회는 변화됩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올 때 우리 사회가 변하고 이 나라가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갖고 진정으로 회개할 때, 주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 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죄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아담이후 죄의 결과는 온 세상을 불행하게 만든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 창 3:16-19절을 보면,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오게 되었고,남자에게는 이 마에서 땀을 흘려야 수고의 소산을 먹게되는 고통이 이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생고가 바 로 죄값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인류의 고통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뿐만아 니라, 사람이 범죄를 하니까 모든 자연계와 온 천하가 하나님 앞에 타락하게 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땅은 좋은 곡식과 화초와 과목과 곡식을 내는 곳이었는데 엉겅퀴와 가시와 잡초를 내게 되었습니다. 들짐승과 공중의 새, 바다의 물고기들까지도 양육강식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자연계와 이세상 전체가 어려운 세상으로 변해 버린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뿐만아니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니까, ● 딛 1:15에 보면, 양심이 어두워 졌다고 했습니다. ● 롬 11:25절에 보면, 영적인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신령한 복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소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 엡 4:8절을 보니까 우리의 마음과 총명이 어두워 졌다고 말씀했고, ● 요 8:34절에 보면, 죄의 종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 요 8:5절에 보면, 죄를 지은 인간은 추한 모습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죄가 세상에 들어오므로 우리 인류와 인간 자체가 하나님 앞에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 다. 뿐만아니라, ● 눅 7:41절에 보면, 죄는 마치 빚을 진것과 같아서 반드시 갚아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의 결과를 반드시 보응으로 받게 되어 있는 내용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 입니다. ● 민32:23절에 보니까, \"죄가 반드시 그 주인을 찾아 만나리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죄를 무서워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죄를 두려워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어야 하며, 죄를 가까이 하지 않는, 죄와 멀리하는, 하나님 앞에 축복 받는 자녀가 되어 야 할 줄 믿습니다. 죄라는 놈은 처음에는 즐겁고, 다음에는 쉽게 자라고, 다음에는 기쁘며,그 다음에는 번민해 지고, 그리 고는 습관적이 되고, 그다음에는 만성적이 된다. 그리고는 개전의 의지없이 더욱 완고하고, 다음에는 더 욱 완강해 지며,결코 돌이키지 않기로 결심하고, 마침내는 파멸에 이른다. 죄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죄가 흥정하는 삯은 생명과 쾌락과 이익이지만, 나중에 죄가 지불하는 삯은 사망과 고통과 파멸 뿐이다. 죄를 지은 나라가 망했습니다. 죄를 지은 국가가 망했습니다. 죄를 지은 도성이 무너지고, 죄를 지은 개인과 가정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옛날 소돔과 고모라성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그 이웃 도성과 함께 하나님 앞에 불로 형벌을 받은 사실 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폼페이 시가 죄로 말미암아 패망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그러했고, 로마가 그러했습니다. 죄를 지은 가정이 망합니다. 죄를 지은 개인이 망합니다. 죄를 지을 때 가정이 파괴되고, 죄를 지을 때 인격이 파괴되고,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죄가 있을 때 불행한 결과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의 값은 3-4대에 이르고 하나님의 은혜는 수천대에 이른다고 말씀했습니다. ● 여호수아서 7:17절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불행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을 점령해 들어갈 때에, 여리고성과 같은 큰성도 손쉽게 싸우지도 않고 함락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간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아이성의 싸움에서 패배를 했고 수 많 은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기도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런 명령을 하셨습니다. 즉, 너희 가운데 죄를 지은 사람을 처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은 결과, 유다지파 가운데 세라 가문이 뽑혔고, 세라 가문 가운데 삽디의 가족이 뽑혔고, 삽디의 집 가운데 아간이 결국 제비에 뽑 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과 금과 시날산의 외투 한 벌을 감추었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큰 어려움을 안겨다 준 사실을 우리가 잘 알게 되는 것 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적은 죄까지도 없이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은 죄라고 할지라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은 죄라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죄의 결과는 무서웁게 우리에게 나타나고 죄의 결과는 엄청나게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자 녀들과 온 세상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파멸시키는 것을 알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 하시고,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며, 엄하게 심판하시는가 하는것을 알아보려 면, 예수님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라 할 지라도 온세상의 죄를 짊어진 그 예수를 용서하시지 않고 십자가 상에서 죄 의 댓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수만 있다면 이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옵소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 리시나이까...,\"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번민하여도, 하나님은 죄를 짊어진 그 예수를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온 몸에는 채찍으로 살이 찢겼습니다.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온갖 고통과 저주와 멸시 천대를 받으셨 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모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결국 숨이 끊어져 죽음의 값을 치르시기 까지 하나님은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관용하는 법이 없습니다. 용서치 않 으십니다. 단호히 심판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서 없 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모든 죄값을 담당 하셨기 떠문에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서를 구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 의 사랑 이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주님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 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정결케 해 주실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 사 1: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 하셨습니다. \"나와같이 의논하자 네 죄가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눈보다 양털보다 더 희게 씻어 주마 \" 약속 하신 것 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 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화해가 가능합니다. 죄를 회개 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 을수 있습니다. 죄를 회개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 ● 행2:37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의 역사가 일 어났다. 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할때,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 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귀한 성도가 되셔야 하겠습 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사모하고, 받기를 원하 는 심정보다 더 간절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그 심정이 우리가 받고 싶어하는 심정보다도 더 간절하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회개 하기를 원 하십니다. 우리가 칠전팔기라는 말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한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 보다도,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 서는데 그 위대함이 있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에 깨끗한 심령이 되고, 비로소 은혜 받을만한 그릇이 준비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죄를 지었 어도 주님앞에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넓은 팔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였다. 바울이 되기 전 사울 은, 믿는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이기 까지 하는 일을 하면서도 사울은 이것이 정당한 일 이요, 오히려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그는 조상적부터 대대로 유일신 하나 님,여호와 만을 섬겼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하기를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신도 없는데, 도대체 예수가 누구란 말인가? 사울은 생각하기를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떠한 신도 용납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였으며, 이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을 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할 때,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죄악이 되는 가를 알아야 한다. 그날도 사울은 다메섹 지방에 있는 예수쟁이를 잡으러 영장을 받아 들고 용기 백배하여 말을 타고 갔 다. 그런데 다메섹 지방의 언덕길을 오를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빛줄기가 그를 에워 쌌고 그는 그 빛에 눈이 멀어 그 자리에 꼬끄라 지고 말았다. 같이 동행했던 사람들은 아무 음성도 듣지 못하는데, 오직 사울에게만 음성이 들리기를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렸다. 뉘시냐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말씀하셨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울은,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일생에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이 믿던 한 분 하나님은 곧 예수님이요, 그는 독 생자 예수로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감당하시려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그 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온다. 예수를 만난 사울은 생의 가치와 생의 자세가 완전히 바뀌어 졌 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자]라는 뜻인데, 사울은 이제 더이상 큰자가 아니요,하나님 앞에서, [작은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개종하여, 믿는자들을 핍박하던 자가 친히 핍박의 그 자리에 동참하고,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사도 바울 한사람의 회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과 온 유대와 유럽 전 지역에 복음의큰 물결을 일룰 수 가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오는것이야 말로 얼마나 중요 합니까! 바로,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면, 우리 가정은 평안하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면, 우리 교회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나라가 변한다. 주님이 나라와 민족 을 위해 기도 하셨다면, 우리는 더우기 열심으로 부르짖으며,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서업을위해서 기도 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각 기관을 위 해서기도해야 합니다.나라의 안녕을 위해서 기도하며 모든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부터는, 죄를 회개치 않고 무슨 일을 계획하거나 무슨일을 시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모두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할 때, 우리의 계획하는 것이 주의 뜻에 합당하며, 그래서 그 일이 주안에서 형통하고 승리하게 될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나 한사람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교회가 힘껏 주님께 부르짖어 간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께 감절 히 간구해야 할 것도, 역시 성령의 충만함이다. ● 갈5:16절에 보면, \"성령을 쫓아 행할 때에,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떠나는것이 내게 유익하다 내가 가면 또다른 보혜사 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했다. [또다른 보혜사] 그가 바 로 성령님 이시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아 항상 내 곁에 계신 분\"이란 뜻이다.\"나 를 돕기 위해서 나와 함께 하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성령님 이십니다. ● 고전 12: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수 없다\"고 했다. ● 롬 8:26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다. ● 갈 5:16절에 보면 \"성령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게 하신다\"고 했다. ● 요 3:5절에 보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에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살아 간다면 마치 구멍난 배를 타고 망망 대 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첫째도 성령의 충만이요, 둘째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험악한 이 세대에 주안에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길 축원 합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충만함이란, 이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실제적인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쉽게 말씀 드려서, 말씀 충만이다. ● 엡 6:17절에 보면, \"성령의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말씀 하심으로, 말씀과 성령을 동일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서 말씀의 충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공부시간, 말씀을 듣는 시간, 읽는 시간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시간이다. 에베소 교회는 당시 아볼로 라는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바라볼 때 마음에 영 기쁨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묻기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하고 물었다. 그때 사람들은 대답하기를 \"성령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 고 들어 보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당시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였으나, 요한의 세례 밖에 알지 못했다. 아볼로가 성령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도 성령에 대해서 들어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 행 18:24절 이하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의 체험이 없음을 깨닫 고, 그를 불러 차근 차근 성경을 풀어 주었다.그때 아볼로는 새롭게 성경을 깨닫고 성령을 받게 되었다. 아볼로가 깨달은 진리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볼로가 받은 성령, 오늘 우리에게도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의 진리를 새롭게 깨달음으로,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 지기를 축원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더럽고 추한 죄가 있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성령님은 역사하시지 못한다. 그러므로, 먼저는 죄를 회개할 때, 그리고 말씀이 충만할 때, 성령이 함께 하실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 하겠습니다. 나 한사람의 변화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 입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진정으로 돌아올 때, 우리 주변의 모든 상황은 확실히 달라질것 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한사람 한사람이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회개하는 것 입니다. 둘째는, 회개한 이후 말씀이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에 능력있는 삶을살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오늘 헌신예배로 드리는 2 남전도회는 물론이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에 게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라가 혼란 스럽고, 타락과 부패가 창일하고 ,시대가 어지러울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하였더니, 주께서 응답하시기를 교회가 부흥하는 길인 것을 말씀해 주셨고, 그래서 선지자는 \"주여!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하고 간구하였습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교회도 더욱 앞날에 큰 사명을 바라보고, 수년내에 부흥케 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이 바라는 모든 기도의 소원들이 아름답게 이루어 지기를 원 합니다. 먼저는 나 한사람, 한 사람이 죄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회개케 하시고, 말씀과 성령에 충만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바, 귀한 일꾼들로 다 쓰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나 한 사람의 변화/ 합3:1-3, 행2:1-
나 한 사람의 변화 합3:1-3, 행2:1-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을 살펴보면, 선한 왕이 있는가 하면, 악한 왕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서 나라가 부강하고 이웃 이방나라의 조공까지 받으면서 살아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를 일삼아 개인은 물론이요 온 나라가 타락하고 부패하며 전쟁에는 져서 이방나라의 포로로잡혀가는 왕들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져서 남쪽 유다나라에 요시야 왕이 있을 때 에는 그가 하나님을 섬기므로 나라가 부강하고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인 여호아하스가 유다 나라의 왕이 되었는데 3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애굽에 납치되어 가자 그의 동생 여호야김이 왕위에올랐습니다. 여호야김은 애굽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백성들로 부터 부당한 세금을 거둬 들였고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결국, 여호야김은 부왕인 요시야 왕과는 달리 백성의 억울함을 무시하며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무고한 사람이 죽어가고 나라 전체는 죄악이 난무하고 심히 혼란스런 상태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 렘 22:17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당시 여호야김을 가르켜 말씀하기를 \"네 눈과마음은 탐람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강포를 행하려 할 뿐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사정을 살피지 않는 왕, 무죄한 피를 흘리며 강포를 행하는 왕, 그가 바로 여호야 김 이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선지자였던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 몸부림치는 호소 와 탄원으로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악하고 패역한 왕을 묵과하실 겁니까?.....\" \"언제까지 이 악하고 부패한 정치를 보고만 계실 겁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간절하게 탄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릴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는데, 그 길은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여!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죄악이 관영한 세대에 산다고 하지만 바로, 교회가부흥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임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줄로믿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성도는 1천2백만을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숫자는 4명이 길을 가면, 그중에 1명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은 누가 기독교인인지 알 수 없는 생활의 양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성도이지만, 집으로 가고, 사회로 돌아가면, 성도가 아니라 다른 이방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와 같이 부패하고 타락하며 죄악이 난무할 뿐만 아니라 결국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새국민의정부가 들어 서면서 개혁의 바람이 불고, 곳곳에 있는 부정 부패를 척결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변화 받고 주 앞에 올바로 서지 않는 한, 이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아도 언제나 그 나라의 흥망성쇠는 영적인 사람들에 의해주도되어 갔다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나 한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여기에 촛점을맞추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나 한사람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가장 처음으로 외치신 말씀도 \"회개하라\"는것이였습니다. ● 눅 5:32절에도 보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했습니다. ● 호 6:1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할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 요엘 2:12 -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롬 3: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죄가 없는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이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누가 가는가 하면, 죄있는 사람이 간다기 보다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진실로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죄를 범한 후에 지나친 변명을 하는 것 보다 진실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편이 훨씬 나을줄 압니다. 우리나라에는 여러 교단들이 있습니다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순복음.성결교 등--------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부흥운동을 꼽으라면 많은 신학자들은 1907년에 미국에서있었던 일을 꼽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결교단의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부흥운동은 한 선교사가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회개 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한사람의 회개 운동은 부흥회로 연결 되었고, 그것은 그 도시 전체로 퍼졌으며, 급기야는 유럽 전 지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카우만과 길보른\'이라는 두 사람이 이 집회에 참석하여 뜨거운 은혜를 체험하던 중에 동양의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강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고, 이들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동경성서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인 김상준, 정 빈 이라는 두 사람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와복음을 전하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전도만 하여 가까운 교회로 보냈으나, 차츰 세력이 커지게 되어서 결국, 교회를짓고교회가 늘어가자,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날 한국 성결교단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감리교나 장로교나 침례교나 다른 모든 교단들은 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교단이 설립 되었지만, 성결교는 유독 우리 한국인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출발 하였다는 점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된다고 성결교단 목사님들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전 세계에 퍼졌고 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하고 수많은주의 종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세계 방방 곡곡에 복음을 들고 나아갔던 것 입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바로 한 선교사가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회개 하는데서 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한 사람의 회개가 얼마나 중요하며 한 사람이 주님께 돌아올 때 얼마나큰 역사가 일어 나는가를 알 수 있는 한국교회사의 모습을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올 때 우리 가정은 변화되고 맙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올 때 우리 교회는 변화됩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올 때 우리 사회가 변하고 이 나라가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갖고 진정으로 회개할 때, 주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죄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아담이후 죄의 결과는 온 세상을 불행하게 만든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 창 3:16-19절을 보면,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오게되었고,남자에게는 이마에서 땀을 흘려야 수고의 소산을 먹게되는 고통이 이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생고가 바로 죄값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인류의 고통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뿐만아니라, 사람이 범죄를 하니까 모든 자연계와 온 천하가 하나님 앞에 타락하게 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땅은 좋은 곡식과 화초와 과목과 곡식을 내는 곳이었는데 엉겅퀴와 가시와 잡초를 내게 되었습니다. 들짐승과 공중의 새, 바다의 물고기들까지도 양육강식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자연계와 이세상 전체가 어려운 세상으로 변해 버린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뿐만아니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니까, ● 딛 1:15에 보면, 양심이 어두워 졌다고 했습니다. ● 롬 11:25절에 보면, 영적인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신령한 복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소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 엡 4:8절을 보니까 우리의 마음과 총명이 어두워 졌다고 말씀했고, ● 요 8:34절에 보면, 죄의 종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 요 8:5절에 보면, 죄를 지은 인간은 추한 모습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죄가 세상에 들어오므로 우리 인류와 인간 자체가 하나님앞에 불행한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 눅 7:41절에 보면, 죄는 마치 빚을 진것과 같아서 반드시 갚아야될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의 결과를 반드시 보응으로 받게 되어 있는 내용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 입니다. ● 민32:23절에 보니까, \"죄가 반드시 그 주인을 찾아 만나리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죄를 무서워 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죄를 두려워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어야 하며, 죄를 가까이 하지 않는, 죄와 멀리하는, 하나님 앞에축복 받는 자녀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죄라는 것은 처음에는 즐겁고, 다음에는 쉽게 자라고, 다음에는 기쁘며, 그다음에는 번민해 지고, 그리고는 습관적이 되고, 그다음에는 만성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개전의 의지없이 더욱 완고하고, 다음에는 더욱 완강해 지며, 결코 돌이키지 않기로 결심하고, 마침내는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죄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죄가 흥정하는 삯은 생명과 쾌락과 이익이지만, 나중에 죄가 지불하는삯은 사망과 고통과 파멸 뿐입니다. 죄를 지은 나라가 망했습니다. 죄를 지은 국가가 망했습니다. 죄를 지은 도성이 무너지고, 죄를 지은 개인과 가정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옛날 소돔과 고모라성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그 이웃 도성과 함께 하나님 앞에 불로 형벌을 받은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폼페이 시가 죄로 말미암아 패망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그러했고, 로마가 그러했습니다. 죄를 지은 가정이 망합니다. 죄를 지은 개인이 망합니다. 죄를 지을 때 가정이 파괴되고, 죄를 지을 때 인격이 파괴되고, 개인이나 사회나국가나 죄가 있을 때 불행한 결과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의 값은 3-4대에 이르고 하나님의 은혜는 수천대에 이른다고 말씀했습니다. ● 여호수아서 7:17절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불행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을 점령해 들어갈 때에, 여리고성과 같은 큰성도 손쉽게 싸우지도 않고 함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간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아이성의 싸움에서 패배를 했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기도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런명령을 하셨습니다. 즉, 너희 가운데 죄를 지은 사람을 처치하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은 결과, 유다지파 가운데 세라 가문이 뽑혔고, 세라 가문 가운데 삽디의 가족이 뽑혔고, 삽디의 집 가운데 아간이 결국 제비에 뽑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과 금과 시날산의 외투 한 벌을 감추었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점령하는데 큰 어려움을 안겨다 준 사실을 우리가 잘 알게 되는 것 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적은 죄까지도 없이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은 죄라고 할지라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적은 죄라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죄의 결과는 무서웁게 우리에게 나타나고 죄의 결과는 엄청나게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자녀들과 온 세상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파멸시키는 것을 알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 하시고,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며, 엄하게 심판하시는가 하는것을 알아보려면, 예수님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라 할 지라도 온세상의 죄를 짊어진 그 예수를 용서하시지않고 십자가 상에서 죄의 댓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수만 있다면 이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옵소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번민하여도, 하나님은 죄를 짊어진 그 예수를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온 몸에는 채찍으로 살이 찢겼습니다.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온갖 고통과 저주와 멸시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모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결국 숨이 끊어져 죽음의 값을 치르시기 까지 하나님은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관용하는 법이 없습니다. 용서치 않으십니다.단호히 심판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서 없이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모든 죄값을 담당 하셨기 떠문에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서를 구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주님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정결케 해 주실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 사 1:18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 하셨습니다. \"나와같이 의논하자 네 죄가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눈보다 양털보다 더 희게 씻어 주마\" 약속 하신 것 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 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화해가 가능합니다. 죄를 회개 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 있습니다. 죄를 회개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 행2:37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할때, 베드로는말하기를\"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귀한성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사모하고, 받기를 원하는 심정보다 더 간절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그 심정이 우리가 받고 싶어하는 심정보다도 더 간절하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회개 하기를 원 하십니다. 우리가 칠전팔기라는 말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한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 보다도,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 서는데 그 위대함이 있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에 깨끗한 심령이 되고, 비로소 은혜 받을만한 그릇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죄를 지었어도 주님앞에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넓은 팔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던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였습니다.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은, 믿는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이기 까지 하는 일을 하면서도 사울은 이것이 정당한 일이요, 오히려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조상적부터 대대로 유일신 하나님, 여호와 만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신도 없는데, 도대체 예수가 누구란 말인가? 사울은 생각하기를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떠한 신도 용납될 수 없다고 믿었기떠문에 예수를 믿는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였으며, 이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을 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할 때,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죄악이 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날도 사울은 다메섹 지방에 있는 예수쟁이를 잡으러 영장을 받아 들고 용기 백배하여 말을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지방의 언덕길을 오를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빛줄기가 그를 에워 쌌고 그는 그 빛에 눈이 멀어 그 자리에 꼬끄라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같이 동행했던 사람들은 아무 음성도 듣지 못하는데, 오직 사울에게만 음성이 들리기를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뉘시냐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울은, 여기서 부활하신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일생에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믿던 한 분 하나님은 곧 예수님이요, 그는 독생자 예수로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감당하시려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그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예수를 만난 사울은 생의 가치와 생의 자세가 완전히 바뀌어 졌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자]라는 뜻인데, 사울은 이제 더이상 큰자가 아니요,하나님 앞에서, [작은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개종하여, 믿는자들을 핍박하던 자가 친히 핍박의 그 자리에 동참하고, 죽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한사람의 회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과 온 유대와 유럽 전 지역에 복음의큰 물결을 일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오는것이야 말로 얼마나 중요 합니까! 바로,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면, 우리 가정은 평안합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면, 우리 교회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나라가 변합니다. 주님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 하셨다면, 우리는 더우기 열심으로 부르짖으며,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서업을위해서 기도 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각 기관을 위해서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 기도하며 모든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부터는, 죄를 회개치 않고 무슨 일을 계획하거나 무슨일을 시행하지 마시기바랍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모두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할 때, 우리의 계획하는 것이 주의 뜻에 합당하며, 그래서 그 일이 주안에서 형통하고 승리하게 될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나 한사람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교회가 힘껏 주님께 부르짖어 간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께 감절히 간구해야 할 것도, 역시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 갈5:16절에 보면, \"성령을 쫓아 행할 때에,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떠나는것이 내게 유익하다 내가 가면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또다른 보혜사] 그가 바로 성령님 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아 항상 내 곁에 계신 분\"이란 뜻입니다. \"나를 돕기 위해서 나와 함께 하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성령님 이십니다. ● 고전 12: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수 없다\"고 했고. ● 롬 8:26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 갈 5:16절에 보면 \"성령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 요 3:5절에 보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에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살아 간다면 마치 구멍난 배를 타고 망망 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첫째도 성령의 충만이요, 둘째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험악한 이 세대에 주안에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길 축원 합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충만함이란, 이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실제적인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쉽게 말씀 드려서, 말씀 충만이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 엡 6:17절에 보면, \"성령의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말씀 하심으로, 말씀과 성령을 동일시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서 말씀의 충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시간이라든가 , 말씀을 듣는 예배시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시간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당시 아볼로 라는 목사님이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바라볼 때 마음에 영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묻기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대답하기를 \"성령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이 도대체 무엇인지알지도 못하고 들어 보지도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당시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였으나, 요한의 세례 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아볼로가 성령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성도들도 성령에 대해서 들어 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 행 18:24절 이하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의 체험이 없음을 깨닫고, 그를 불러 차근 차근 성경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때 아볼로는 새롭게 성경을 깨닫고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볼로가 깨달은 진리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볼로가 받은 성령, 오늘 우리에게도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의 진리를 새롭게 깨달음으로,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 지기를 축원합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듯이 더럽고 추한 죄가 있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의영,성령님은 역사하시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죄를 회개할 때, 그리고 말씀이 충만할 때, 성령이 함께 하실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 하겠습니다. 나 한사람의 변화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 입니다. 나 한사람이 주님께 진정으로 돌아올 때, 우리 주변의 모든 상황은 확실히 달라질것 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먼저, 나 한사람 한사람이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회개하는 것 입니다. 둘째는, 회개한 이후 말씀이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에 능력있는 삶을살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오늘 예배로 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라가 혼란 스럽고, 타락과 부패가 창일하고 ,시대가 어지러울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탄식하며 기도하였더니, 주께서 응답하시기를 교회가 부흥하는 길인 것을 말씀해 주셨고, 그래서 선지자는 \"주여! 수년내에 부흥케 하옵소서!\"하고 간구하였습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교회도 더욱 앞날에 큰 사명을 바라보고, 수년내에 부흥케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이 바라는 모든 기도의 소원들이 아름답게 이루어 지기를 원 합니다. 먼저는 나 한사람, 한 사람이 죄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회개케 하시고, 말씀과성령에 충만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바, 귀한 일꾼들로 다 쓰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나는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눅19:1-48/ 2002-01-05
나는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눅19:1-48 제가 20대 초였습니다. 조금씩 철이 들고, 인생이 진지해지기 시작하면서, 제 마음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그런 질문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말 변할 수가 있나? 내가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내 약점을 발견할 때 마다 이 질문은 늘 절 다시 괴롭힙니다. 나는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한 해가 다 지나가고 연말이 되면 새해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결심을 하죠. 내가 좀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그러나 저는 제 인생이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해의 한 주간이 흘러가게 되면 마치 이 속담을 입증하듯, 작심삼일이라는 속담을 입증하듯 새해의 결심이 다시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옛날의 내 모습으로 다시 내 삶이 돌아올 때 마다 이 질문은 다시 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할 수가 있나? 나는 정말 변할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무렵 저는 제 친구들의 초청을 받아서 선교사님을 모시고 성경 공부하는 어떤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때 모인 20,30명 남짓한 사람들은 성경을 가운데 열고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열띤 토론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 앞에 펼쳐진 성경 말씀이 누가복음 19장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교회 처음 나온 저는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도 예수 믿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났던 저에게는 매우 생소했던 이야기.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야기. 삭개오라는 인물이 예수님 만나고 변화되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거기 모인 내 또래의 사람들은 삭개오의 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삭개오의 얘기를 하면서 쭉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처럼 나도 변했다고. 삭개오처럼 나도 인생이 변화되었다. 그 중에는 제가 잘 아는 저의 친구 두, 세사람도 섞여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들의 얘기가 사실 그대로 정말 저들이 변해버린, 변화의 이야기라면, 나도 변할지 몰라. 어쩌면 나도 변할 수가 있을 거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변화의 희망을 걸었던 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우선 우리는 이 사람의 정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누구였는가? 그리고 둘째로 그를 변화시켰던 기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를 변화시켰던 그가 만날 수 있었던 기회. 그리고 세번째로 그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누구였습니까? 삭개오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성경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이하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이 먼저 삭개오였다고 말합니다. 삭개오. 삭개오라는 이름이 먼저 알고 보니까 청결하다는 뜻이예요. Clean 청결하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날 이 사람의 집에 들어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죄인의 집에 예수가 들어갔다. 청결하다는 이름의 뜻과 달리, 그는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이었습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까요. 꼭 제 얘기 같군요. 저도 아주 이름은 괜찮습니다. 제 이름으로 말하면 저희 어머니가 제 아버님이 무여독남 외아들이신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니까 귀한 집 자식이었죠.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막대한 요금을 지불하고 서울 시내에 이름을 제일 잘 짓는 사람 집에 가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제 이름을 지어 가지고 오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시원찮은 행동을 할 때마다, 이놈아 네 이름은 비싼 이름이야.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니? 이동원. 동녘 동자, 으뜸 원자. 동쪽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야. 근데 저는 이름하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기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대. 우리가 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자라나고 있잖아요.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아 주시고, 네게 좋은 이름을 붙여 주시면서, 좋은 인생을 살라고 주신 이름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기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회적 기대를 미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열등감을 저마다 다 갖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금을 거두고 다니는 사람들의 권력은 대단하죠. 장사하시는 분들 세금처리 되거나, 세금 국세청에서 조사 나오시면,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권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 권력은 사람들이 탐하는 것인지요. 권력. 니체라는 철학자는 인간이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의지가 권력에 대한 의지다. Will to Power 권력에 대한 의지. 권력은 정치인들만이 탐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집안에서 고부 싸움이 한창일 때, 거기에도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곳간 열쇠를 쥐는야. 이것도 권력에 대한 싸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권력에 대한 사모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장이니까! 그런데 권력이 이 사람을 행복하게 못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낯선 사람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또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랬습니다. 부자라. 부자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부자. 부자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십니까? 증권투자도 하고, 오르락, 내리락 증권에 얼마나 신경을 쓰십니까?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이 있다면 만물일 것입니다. 돈 입니다. 어떤 청년들이 모여서 지도자와 대화를 하면서, 서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청, 지도자가 질문을 던지기를 너희들은 인생을 사는데 뭐가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아마 남자들만 모였던 모양이예요. 한 청년이 대답하기를 뭐니 뭐니해도 머니죠. 돈이죠. 옆에 사람한테 물어봐죠. 옆에 사람 , 저는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여자. 저에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저는 돈과 여자가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대답하기를 그러면 돈, 여자를 가져 가라. 돈도 필요하고 여자도 필요하다면 돈, 여자를 가져가라.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입니까? 이 사람은 부자였어요. 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돈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어요. 돈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인생의 목적을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죽음 건너편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부자를 20분동안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일본에 암 수술을 받으러 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을 떠나 가셨습니다. 한국인의 부자의 대명사. 제가 그분을 만나면 이 질문을 오랫동안 묻고 싶었습니다. 제 가슴에 묻어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회장님 평안하세요? 근데 저는 이분의 뜻밖의 의외의 대답을 오랜 시간이 지나간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할 거예요. 아니 제가 살아 있는 한 잊어버리지 못할 겁니다. 평안이라니,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하오. 한국의 제일가는 부자의 대답이었어요. 제가 이 분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느 날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어요. 예수님, 하나님, 제가 이분에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권력도 부요함도 있었고, 또, 이런 사회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인생의 문제를 끌어안고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분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그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 기회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저 갈리리에서 요단강 저 동편의 데가볼리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변했다고 사람들이 소리치며 그를 따라다니는 저 예수. 예수가 우리 동네에 와서 우리 곁에 지나가신다.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면서,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재산을 탕진했지마는 그러나 고쳐지지 않는 병 때문에 인생에 대한 절망 속에 살던 한 여인이 지나가는 나사렛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자기 병이 순식간에 치료되었다고 소문난 치료자 예수, Healer Jesus! 예수가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가신다. 기회였습니다. 기회. 제가 지난 주일 저녁에 유승준을 만났습니다. 유승준. 온누리 교회에 갔다가 유승준이하고 한 15분 같이 차 마시면서 대화를 했습니다. 저는 정말 예수님이 좋아요 그러더라구요. 너 그 마음 변하면 안돼. 인기가 너에게 그런 진정한 삶을 줄 수가 없어. 같이 기도해 줬어요. 돈으로 인기로 살 수가 없었던 인생의 의미, 그런데 그런 인생의 의미에 굶주리고 있었던 삭개오에게 놀라운 기회, 천재일우의 기회. 놓칠 수 없는 기회. 기회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기회는 인생의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 그랬습니다. 기회. 누군가가 기회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 희랍에,그리스에 시락쿠스라는 거리에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 동상은, 그 동상은 날개가 있는데, 날개가 어깨 죽지에 와서 달린 것이 아니라, 발에 가서 달려있어요. 그리고 앞머리는 아주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고 사람이 머리 벗어지는 것도 여러가지죠. 어떤 사람은 뱅뱅 돌아가면서 머리가 벗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운데만 쏙 빠지시는 분이 있습니다. 속알머리가 없는 분이죠. 어떤 사람은 아무데나 빠집니다. 버르장 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분은 앞에 앞에 머리가 이렇게 많아. 뒤에 머리가 없고, 이 동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Appotunity 기회. 기회. 그대는 왜 날개를 발에 달고 있는가? 더 빨리 빨리, 빨리 날으고 싶어서. 걷고 싶어서. 그대의 앞머리는 왜 이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쉽게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대머리인가? 다시는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회는 그런 것입니다. 기회. 놀라운 기회. 예수가 지나가신다. 구원자 예수. 치료자 예수. 그를 만난 사람들마다 이상하게 인생이 바뀌었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가 있다고. 인생의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 놀라운 예수. 예수가 지나가신다. 놀라운 기회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왜 지나가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 얘기를 읽으면 성경의 이야기로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자기 권력과 자기 명예와 자기의 부를 가지고도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고. 그래서 예수를 기다리는 얘기라고.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한참동안 읽다보면 결론이 바뀝니다. 왜냐면요, 삭개오가 이렇게 아마도 이 사람은 키가 작았어요. 키가 작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들끓고 있었고, 그 군중 Crowd 속에서 키 작은 삭개오가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만나야만 했었습니다. 만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런 것을 구도의 갈증이라고 합니다. 구도의 열망.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만나고자,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세리장이 세무서장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면의 옷을 벗어 던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만나야 겠다.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반드시 만나야 겠다. 내가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죠. 근데 얘기를 읽다보면 성경 이야기는 이렇게 변합니다. 아마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예수님이 내 앞에 지나가봐라, 소리칠거야. 예수님. 그냥 이렇게 부르면 실례일거야. 앞에다 뭐라고 붙여야지. 인류의 위대한 스승 예수여. 그 말은 좀 형식적인가, 나사렛 예수여,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천하게 부르는 용어야. 어떻게 부를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렇게 부를까. 아니면 위대한 휴머니티안 예수여. 한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앞에 딱 뽕나무 앞에 오더니, 삭개오가 부르기 전에 삭개오를 올려다 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어. 이때 삭개오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저분이 내 이름을 알아. 나를 만나지도 않고 나를 이름을 부르는 저 예수. 예수는 누굴까? 아마 우리 자매님 같으면 어머 하고 놀랐겠죠. 어떻게 알아 저분이 내 이름을. 저는 성경을 읽다가 늘 저를 감동시키는 부분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마리아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자, 욕심 많았던 여자. 그래서 이름도 막 달라 마리아. 막 달라 마리야. 그래도 그 욕심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여자.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주시고, 성녀로 바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모른 체 동산에 묻혀있는 줄 알고, 예수님이 묻히신 동산에 올랐던 이 여인. 새벽이었는데, 동산 관리하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어디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야, 깜짝 놀라 보았어요.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죽은줄 알았던 예수의 음성.. 마리아야, 삭개오야, 나사로야,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예수, 그는 우리를 60억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인류 덩어리로 취급하지않고, 우리 개인개인을 알고 이해하고 찾아오십니다. 나의 좌절을 이해하시고, 나의 고독을 이해하시고, 나의 방황을 이해하시고, 나의 삶의 그런 슬픔을 이해하시고, 내 인생의 벽 같은 인생의 삶의 벽 앞에서 나갈 길이 없는 출구가 없는 벽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내 모습, 내 답답한 내 모습을 아시는 그 예수. 찾아와서 그는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빨리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와. 자, 여기쯤 읽으면 우리가 이 이야기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예요.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아마 이런 생각도 했을지 몰라요. 나도 예수라는 분을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고 싶어 하시는 것 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알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분의 미션을 그분의 사명을 설명하는 놀라운 대목마다 이런 말씀이 반복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이 대목마다 인자가 온 것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삭개오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동네까지 찾아 오신 것입니다. 삭개오를 찾으시던 주님은 오늘 이 밤에 당신을 찾습니다. 여러분을 찾습니다. 친구들에게 초대받아 오셨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초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그것 아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잃어버려다구요. 그렇습니다. 대답해 보실까요. 여러분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어디입니까? 살다가 살다가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모르신다고요. 그래서 인생은 방황이 아닙니까. 인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60억의 인구 가운데 인류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란 개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나를 아시는 분. 나를 이름으로 아시고, 나의 좌절과 내 눈물과 내 고독과 내 갈등을 이해하시며 내가 살아온 인생의 History와 나의 Carrier를 아시고 내 모든 삶의 발자취를 기억하시고, 아시는 그분.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 하시는 그 분.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오늘밤 당신 곁에 조용히 그분은 지금도 다가오십니다. 이 기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삭개오 곁에 지나가고 있었어요.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삭개오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었습니다. 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이리 내려 오너라. 삭개오야 이리 내려오라고. 근데 성경에 보시면 삭개오가 어떻게 응답을 했습니까? 6절에 보시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삭개오는 이렇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다시 한번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너라. 자, 삭개오는 어떻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예수님도 급하고, 삭개오도 급하십니다. 꼭 한국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다 급한 사람들 아닙니까? 바쁜 사람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의 결단도 그렇게 급하게 하실수록 좋아요. 신앙의 결단도 급할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급한데 신앙만은 자꾸 급하지 않게 미뤄 두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그래서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때고,바로 지금이 구원 받아아 할 시간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급할수록 좋아요. 어떤 빵집 운영하는 사람이 하도 가게가 안되니까, 꾀를 짜내서 이렇게 빵집 앞에 광고를 붙여 놓았습니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리겠습니다. IQ 낮은 멍청한 사람이 그 이튿날 와서 저 빵 거저 먹으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빵집 주인이 다시 읽어 보십시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립니다. 아니 어저께도 내일이었습니다만, 우리집 표어는 그 날, 그 날 유효합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다시 우리들에게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바로 지금이 구원 받을 만한 시간이예요. 급히 내려와서.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집에 영접한 거예요.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모셔드리면서, 이미 삭개오라는 사람은 자기 전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자기의 마음속으로, 자기의 영혼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 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집에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그러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떤 목사님이 교인 한 분이 교회에 나왔다, 안 나왔다. 그러시는 분이 있어요. 신앙이 참 신앙이 없으니까, 가끔 나왔다, 안 나왔다. 그래서 한번은 찾아 갔었요. 전화 걸어도 안되고, 밤에 가면 있겠지, 밤중에 아파트로 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개 목삽니다라고 문을 두드리니까, 목사님 음성을 듣자 마자, 갑자기 조용해 지더래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러니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이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성경구절을 하나 써놓았어요. 요한 계시록 3장 20절. 나중에 목사님 가시고 난 다음에 그 분이 문 열고 보니까 쪽지 하나가 있단 말이죠.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게 뭘까. 성경을 찾아보았어요.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좀 미안했겠죠. 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 교회에 갔어요. 그래도 차마 목사님 뵙기는 어색하고 그래서 목사님 사무실에다 이 교인이 쪽지 하나를 남겨놓고 갔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도 오늘 교회 다녀갑니다. 그 아래에다 창세기 3장 10절 그랬대요. 목사님도 희한하거든요. 교회는 가끔 나오는데 어떻게 창세기 3장 10절을 다 알까. 그래서 뭔가 목사님도 찾아 보았더니, 창세기 3장 10절에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문을 두드리시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내 마음속에 찾아오시겠다고,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예수님. 우리 박광현 형제가 Nock. Nock. Nock.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찬양했어요.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겠다. 삭개오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가정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이 집에 오시자 마자,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셔다 놓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업 잘한 사업가가 자기 재산의 한 4분의 1 정도를 환원하는 것은 훌륭한 사업가의 윤리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4분의 1 정도가 아니라,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변한 거죠. 이 사람은 굉장히 변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너 재산 절반 나눠.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 뭐 이렇게 소위 도덕적인 설교를 한 것이 아니예요. 너 이제부터 착한 사람 돼야 돼. 이런 말씀하신 것이 아니예요. 이런 도덕적인 윤리를 설교하지 않았는데도, 이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생을 바꾸겠다고, 선언합니다. 변한 것 아니예요. 무엇이 변화시켰을까요. 무엇이. 도덕이 변화시킨 것 아니예요. 도덕이. 여러분, 기독교는 도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적 종교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기독교가 부도덕한 종교라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에는 도덕이 포함되어 있지만 기독교의 수준은 도덕의 수준이 아닙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나갈 때, 기독교와 도덕이 비슷한 것으로 알았어요. 그냥 착한 사람으로 살면 되는 것 아니예요.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니예요. 모든 종교마다 선을 가르치는 것 아니예요. 그런데 성경을 공부해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제가 3년 동안 왔다 갔다 했는데, 교회를 그냥. 처음에 나가서 3년 동안은 그냥 왔다 갔다 그랬어요. 그런 어느 날 갈라디아서라는 성경을 공부하다가, 우리 교회 나가는 사람들의 말로 말하면 제가 깨졌습니다. 깨졌어요. 갈라디아서 2장 마지막절에서 우리가 이런 말씀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바울이라는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을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잘 이해가 안가더라구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가능하다면, 예수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잘 이해가 안가시죠. 저도 잘 이해가 안갔으니까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덕이라는 단어하고 성경에서 젤 비슷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율법이라는 말이예요. 율법. 왜냐하면, 율법은 많은 계명으로 이루어 진 것이 율법인데, 결국 율법은 두가지 이거든요. 두가지 예요. 아주 짤막하게 요약하면 두가지예요. 하라, 하지말라. 뭘 하라. 여호와를 공경하라. 하나님만 섬기라. 안식일을 지켜라. 뭐 하라,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하라. 하지말라 두가지. 근데 이 말씀의 뜻이 뭐냐하면 너희가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네 행동이 합격, 의롭다. 합격 받을 수가 있다면 예수는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다. 십자가에 갈 필요도 없었고, 돌아가실 필요도 없었다. 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라는 질문이 제 마음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그 말씀의 뜻을 더 생각하다가, 제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 누구나 도덕을 추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은 아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성경 조금 공부해 보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나는 다 했더라구요. 하지 말라는 것 이미 했어요. 성경에 보면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했다. 미움은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 살인의 시작이래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 음욕은 간음의 동기가 아니라 간음의 시작이래요. 나는 간음한 사람이예요. 나는 살인한 사람이예요. 나는 율법을 지켜야 할 자가 아니라, 이미 율법을 깨트렸어요. 그러니까 죄인이죠. 율법을 깨트렸고,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어요. 나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더라구요. 노력해도 발버둥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사람. 그래서 내 행동으로는 내 최선을 다해도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될 수가 없는 자, 그러나 이걸 깨닫는 그 순간, 그 순간 저에게 또 하나 깨달아진게 있어요. 맞아 내가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해도 내가 나를 고칠 수가 없고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거야. 예수는 나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신거야. 그 예수 믿으면 내가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는 거야. 갑자기 십자가의 사건이 제 마음속에서 깨달아 지더라구요. 아~~ 예수님이 그래서 오셨구나. 내가 나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물속에서 나를 스스로 구할 수가 있다면 구원자가 필요가 없어요. 근데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시고, 그는 죄 때문에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붉은 피를 철철 떨구시면서 나를 믿기만 하라. 네가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인 것입니다. Good News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자 마자 그래서 삭개오가 이 변화된 모습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그 말을 바꾸면 이런 얘깁니다. 오늘 네가 구원을 받았고, 오늘부터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의 딸이야. 네가 죄 용서받고 하나님이 아들과 딸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수가 있다. 삭개오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삭개오가 한 결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있다면 오늘 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이 자리를 떠나 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조용히 머리 숙여서 기도하는 이 시간에 제가 초청 받으신 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또 교회 그 동안 계속 나왔지마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실 수가 없었던 분들도 포함됩니다.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저도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정말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싶어요. 저도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변화되고 싶어요. 이런 마음이 생기시면 한번 손 올렸다 내려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손 번쩍이요. 네. 네. 네. 괜찮아요. 아주 부끄러운 손 아니거든요. 아주 거룩한 손, 아름다운 손. 결심의 손. 번쩍 다시 한번 올려주세요. 손 번쩍 괜찮아요. 괜찮아요. 번쩍 올리시고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서, 괜찮아요. 우리 많이 일어나, 다 일어나서요. 괜찮아요. 우리 많은 분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결심한 분들은 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자 다 일어나 주시고,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 오늘밤 우리들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 잔치를 열었어요. 여러분이 저희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오늘 이 잔치를 열었거든요. 자, 일어서신 분들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먼저. 저를 따라서. 제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의 기도와 같다면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아직 결심하지 않은 분도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괜찮아요.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우리 일어나서 저와 같이 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기도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같이 기도하고 싶으신 분 따라서 하세요. 하나님 아버지, 다른 우리 성도들도 같이 기도를 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성도님도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나님 앞에 와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변화되고 싶습니다. 구원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그 피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옵소서.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제 마음속에 오시옵소서.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저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밤 이웃 초청 생명의 잔치 첫날밤, 우리 많은 이웃들이 이렇게 주님앞에 나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기쁘시죠. 이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안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모든 죄가 다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졌다고, 말씀해 주시옵소서. 저들이 이제 용서받은 자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확증시켜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다. 이렇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마음속에 모든 의심은 다 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주님을 높여 드리며, 주님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저들을 축복합니다. 저들을 받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