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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독 속의 작품
김장독 속의 작품 2008-01-04 14:26:58 read : 18 김장독 속의 작품 한국의 선교 초기에 있었던 일화입니다. 한 선교사가 시골 초가집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배가 아파 볼일을 보아야 하겠는데, 화장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중이라 주인을 깨울 수도 없고 고민이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밤, 달빛 아래서 화장실을 찾던 이 선교사는 마당에 있는 여러 개의 항아리 뚜껑을 발견했습니다. '옳거니, 이것이 틀림없는 조선의 화장실이렸다'하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냄새가 코에 확 풍겨 오는 것이 틀림없는 화장실이었습니다. 확신에 찬 선교사는 김장독에다가 실례를 하고 들어와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인 여집사가 선교사님에게 맛있는 김치를 대접하려고 김장독 뚜껑을 열었다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습니다. 누가 김장독에 보기 좋게 작품 하나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러시아 대제에게만 속해 있을 뿐이오/ 2016-10-25
나는 오직 러시아 대제에게만 속해 있을 뿐이오 러시아의 병사가 나폴레옹 군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군사들은 붙잡은 러시아 병사의 팔에 N자를 강제로 새겼습니다. 러시아 병사는 물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오?\" \"N자는 네가 오늘부터 나폴레옹 황제에게 속했다는 표시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러시아 병사는 칼을 뽑아 자기의 팔을 잘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기의 팔을 내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한 주인만 있을 따름이요. 내게 두 주인은 없소. 나는 오직 러시아 대제에게만 속해 있을 뿐이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웠던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학자인 랍비 아끼바의 이야기입니다.
대학자인 랍비 아끼바의 이야기입니다. 2013-04-18 16:01:58 read : 13 유대인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꼭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학자인 랍비 아끼바의 이야기입니다. 아끼바는 어느 부잣집에 머슴살이로 들어가서 일하던 중 주인집 딸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발각되어 주인은 딸과 아끼바를 쫓아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쫓겨나서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끼바의 부인은 남편의 무식에 크게 한탄하였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지금부터라도 학교에 다니라”고 권하였으나 아끼바는 “나이 40이 넘어서 어떻게 공부할 수 있겠느냐?”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아끼바는 계속 양 치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중, 어느 날 목이 말라 개울에 엎드려 물을 마시다가 눈앞에 있는 바위를 바라보니 물이 흘러 떨어진 곳이 움푹 패어 있었습니다. 아끼바는 그 바위를 보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물 한 방울은 약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흐를 때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후에 그는 ‘나도 오랫동안 꾸준히 노력하고 배우면 된다.’는 신념으로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한 랍비가 되어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는 인물이 되고...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아끼바 부인은 남편을 돈 많이 벌어오라고 채근하지 아니하고...남편을 공부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주므로...그처럼 남편이 유명한 랍비로 명예를 얻도록 한 여인이었습니다.
라과디아(Laguardia) 뉴욕 시장과 노인
라과디아(Laguardia) 뉴욕 시장과 노인 만족감은 받는 데서 오지 않고 사실은 주는 데서 온다. 받는 기쁨만을 아는 경우를 속어로 거지 근성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참 기쁨은 없다. 주는 데에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한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명 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Laguardia) 씨였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되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 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의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 씨에게 주며 말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불들도 나처럼 그 동안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그곳에서 거둬진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라과디아(Laguardia) 뉴욕 시장의 그 동안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
라과디아(Laguardia) 뉴욕 시장의 그 동안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 뉴욕의 역대 시장 중 가장 명 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Laguardia)였다. 그가 뉴욕 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되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을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 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 씨에게 내주며 말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그 동안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을 내시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넣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라구아디아의 현명한 재판/ 2010-06-19
라구아디아의 현명한 재판 뉴욕에 국제 공항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죤 F 케네디 공항이고. 다른 하나는 라구아디아 공항입니다. 역대 뉴욕 시장 중에 가장 유명한 시장이 라구아디아입니다. 라구아디아는 시장이 되기 전에 판사였습니다. 그가 판사로 있는 동안 언제나 사람들을 사랑하였기에 시장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남의 빵을 훔쳐 먹다 잡힌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구아디아가 물었습니다. \"왜 남의 빵을 훔쳤습니까?\" \"배가 고팠습니다.\" \"10불 벌금입니다.\" 그리고 라구아디아는 자기 모자를 벗어 들고 말했습니다. \"이 노인이 배고파하는 동안 나는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나는 그 벌금으로 10불을 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배고픈 사람이 있는 데 배부르게 먹었다면 벌금을 내세요.\" 그리고 모자를 돌렸습니다. 노인은 10불 벌금을 내고 47불을 손에 들고 나가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라마에서 통곡하는 소리 마2:18
라마에서 통곡하는 소리 마2:18 승리에는 희생이 반드시 따른다. 희생 없는 승리는 없다. 값진 승리일수록, 그 희생도 값지다. (사도 마태가 '라마에서 통곡하는 소리'를 마태복음에 특별히 인용한 이유를 나름대로 캐어 보았습니다. 앞으로 더 좋은 해석이 나올 줄 믿습니다. 편집자.) ▲예수님의 탄생 시에 통곡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2:18 헤롯이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하자, 마태는 예레미야 31:15절(마2:18절)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즐겁게 지내는 성탄절이지만, 맨 처음 오리지널 성탄절 기간은 사실 피비린내 나는 살벌한 기간이었다. 왜 예수님 탄생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이 무수히 희생당해야 했었나? 그 이유는, 값진 승리일수록, 값진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희생 없는 승리는 없다. 있다면 가짜 승리이다. 값진 승리일수록, 값진 희생이 요구된다는 것은... 세상사는 이치가 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자유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것은, 50년 전에 이 땅에서 피 흘린 수 만 명 유엔군과 수 십 만 국군의 희생 덕분이며, 30년 전에 이 땅의 근대화를 위해서 땀 흘린 산업화의 역군들 때문이며 20년 전에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고생한 사람들 때문이다. 짐승들조차도 살아서 자기 생명을 영위하는 것은, 그보다 더 약한 짐승들이, 자기 생명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당시의 통곡 예수님 탄생 때, 졸지에 아들을 잃은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하며 통곡했다. 약 6백 년 전에, 베들레헴 인근 라마에서도 비슷한 통곡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렘31:15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 베들레헴은 남쪽의 인접 도시들이다.) 예레미야 당시에도, 라마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있었다. 그 이유는, ‘라마’가 예루살렘 인근 도시인데, 바벨론이 포로를 잡아갈 때, 라마가 ‘포로집결지’였던 탓이었다. 렘40:1참조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의 늙은 어머니들이 라마에 모여서 포로로 감금되어 바벨론으로 후송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아들들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였다. 이들은 사실, 전 이스라엘을 ‘대표한’ 포로 몇 만 명이었다. 모든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서 받아야 할 벌을 이들이 대표로 받았다. 그런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갔다.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즉, 통곡한 어머니들의 자손들이.. 새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그들 어머니들의 통곡은, 포로로 잡혀가는 자녀들이 잘 되기를 간절히 빌지 않았을까! 그 통곡의 절규가 다 이루어졌다는 뜻. ▲라헬의 통곡 예레미야 당시의 비통한 늙은 어머니들은(잡혀간 자녀들이 주로 청장년들) 그 비통함을 통곡하였는데, 그 때 그들은, 자신들의 울부짖는 형편을 통해서, 조상 라헬의 통곡을 기억했다. 렘31:15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창35:19 (이곳이 라마일 것으로 신학자들은 추정한다. 삼상10:2참조) 라헬은, 평생 자식 때문에 통곡이 많았던 여인이었다. 언니 레아에 비해, 자기의 출산이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둘째 베냐민을 낳을 때, 출산하다가 그만 자기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 라헬은 자녀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통곡한’ 비운의 여인이었다. ▲통곡과 희생을 통해서 역사가 이루어진다. ①엄마 라헬의 통곡은, 자녀 요셉과 베냐민의 성공을 간절히 비는 통곡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죽음으로써 자기 자녀들을 축복했을 것이다. 죽어가는 엄마의 통곡이 자녀들의 장래를 비는 간절한 기도... 당연하지 않는가! ②라마에서 포로로 잡혀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통곡했다. 그 통곡의 결과, 비록 70년이 걸리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귀환해서 다시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이어갔다. 이스라엘의 회복의 새 역사는, 포로기간을 거친 사람들이었고, 아니 그 이전에 벌써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그들과 함께 옮겨 가셔서, 거기서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등과 함께 하시며, 바벨론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가셨다. 통곡의 자식들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간다는 뜻이다. 운좋게, 편안하게, 이스라엘에 남아있던 자들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③예수님이 태어날 때도 베들레헴 인근 여인들의 통곡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많은 자녀들이 사탄으로부터 구원받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의 일부 자녀들이 사탄(헤롯에게 역사한)에게 희생을 당했다.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12:4 그 여인들의 절규하는 희생과 통곡은, 여호와께, '메시아를 보내사 이 불의한 나라를 속히 구원해 달라는 애간장이 끊어지는 통곡과 탄원'이었다. 그들의 탄원과 그들 자녀들의 희생을 통해서, 아기 예수는 이집트로 무사히 피난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성공적으로 단계적인 성취를 이루어가게 되었다. 그때 당시 엄마들은 그 내막을 다 알지는 못했겠지만... 아기 예수님의 성장과 안전에는, 그들 엄마들의 통곡과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다... ▲적용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안다. 그들의 통곡과 희생이 있어야... 자기 자녀들이 잘 될 줄 안다. 그런데, 이 사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통곡하고 희생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일차적으로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귀한 자기 자원을 낭비하는 것처럼 어리석게 보인다. 그렇지 않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는, 누군가의 희생과 통곡을 통해서 건설되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이다. 라마에서 그 자식을 위하여 통곡하는 소리는, 오늘날에도 들려져야 한다. 그런 통곡하는 가정, 그런 공동체, 그런 사회가 결국에 승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라마에서 통곡하는 섭리로 이끌어 가신다. 누가 통곡을 원하랴? 그래서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통곡으로 몰아가실 때도 있다. 금년 7월에도 해외에서 일어난 순교로, 한국에 전국적인 통곡이 한 번 있었다. 물론 그 외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통곡도 여러 곳에서 있었을 것이다... 금년에 당신이 크게 통곡한 적이 있으신가?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당신은 크게 통곡할 일이 없으셨는가? 그것도 평탄해서 나름대로 좋기는 하다.
라면
라면 라면은 연간생산량 35억 개로 국민 1인당 80개 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 공산주의를 능가하는 열과 서구의 진리
라오디게아 교회/ 공산주의를 능가하는 열과 서구의 진리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덥지도 않아 토해 버리고 싶은 교회다. 자기 스스로는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 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계3:17) 불감증 크리스천이다. 오늘의 서구는 98%가 교회에 등록한 크리스천이지만 그 중 평균 2%밖에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다. 가장 미온적이고 중성적이며 회색적 크리스천의 상징이다. 이에 반해서 러시아 공산주의는 예수에 대해서 박해와 선동과 증오로 대하는 전투적 무신론자이다. 부부관계에서 사랑을 뒤집어 보면 증오가 되는 것처럼 소련은 불이고 칼이고 행동이고 의지고 열정과 희생이 있다. 불은 빛과 열의 두 가지 성질이 있는데 공산주의는 빛 즉 진리가 없고 서구는 진리는 있어도 이 열정이 없다. 한국교회의 영적 다이내미시즘즘(dynamicism)은 공산주의를 능가하는 열과 서구의 진리를 공유해야 하겠다.
라오디게아/ 성지순례/ 2005-04-12
라오디게아/ 성지순례/ 2005-04-12 옛 라오디게아 도시 복원 중 라오디게아에서 보이는 히에라볼리 파묵칼레(온천수) 라오디게아의 양떼(모피가 유명한 곳) 온천수를 공급하던 수로(오는 도중 미지근해졌다)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 교회 추정 라오디게아 교회 안내판 라오디케아는 현재명도 라오디케아 이다. 라오디게아는 리커스 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이며,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셀레우시드 왕가의 안티오쿠스 2세가 그의 부인 라오디세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 불렀다고 한다. 300m 언덕 위에 위치한 도시인 이 곳에는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 목욕탕 등의 유적이 있으나 고고학적 발굴은 신통치 않다. 라오디게아 교회 터는 유적지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나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교회라 추정되는 이유는 교회에서 사용되었을 만한 십자가 문양이 있는 돌들이 늘려있기 때문이다. 성경(계 3:14)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1710년과 1899년의 대지진 때 완전히 파괴되었으며,이곳에서 운동장과 원형극장 터가 발견되었다. 당시 라오디케아는 양모가 풍부하고 안약 등 의약품이 유명했으므로 재물의 유혹과 생활의 편안함으로 미지근한 교회로 책망을 받았다. 특히 라오디케아 지역은 물이 좋지않아 멀리 히에라볼리 파묵칼레로 부터 관을 통해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또한 골로새로부터는 냉수를 공급받았으나 오는 도중 물이 식어 미지근 하게 되었다.
라오콘의 비애/ 거짓말/ 렘40:3/ 2008-03-25
라오콘의 비애/ 거짓말 렘40:3 약 4,000여 년 전의 일이다. 에게해 연안 언덕에 견고한 성을 쌓고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던 트로이라는 한 도시국가가 있었다. 이 성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요, 세계 제일의 미녀로 소문난 헬레네라는 여인을 납치하여 자기의 아내로 삼은 것이 원인이 되어 트로이와 그리스 연합군 사이에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트로이 전쟁이다. 기라성 같은 영웅들과 수많은 군병으로 구성된 그리스 연합군이었다. 그들은 간단히 트로이 성을 함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성은 무려 9년의 세월이 흘러도 끄떡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 연합군 안에서는 차츰 불평 불만이 고조되어 갔고, 아울러 군의 사기 또한 형편없이 저하되어 가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중지난으로 파멸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에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창안으로 거대한 목마 하나를 헬레스폰트 해변에 남겨둔 채 전원 사라져버렸다. 적 없는 해변에 우뚝 선 한 필의 목마, 트로이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거기로 집중되었다. 이 때 그리스 도망병 하나가 붙들려 왔다. 사실은 그리스의 스파이로서 도망병으로 위장한 그가 말한다. “만약 해변에 서 있는 저 목마가 이 성 안으로 들어오면 트로이 성은 여신 아테네의 가호를 받아 영원히 함락되지 않고 행복과 번영을 끝없이 누리게 될 것“이라고. 이 말에 유혹을 받은 사람들이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때다. 아폴로를 섬기는 제사장이요, 노 예언가인 라오콘은 “흉포한 그리스 사람들이 우리에게 유리한 물건을 남겨 두고 갈 이유가 없으니 저 목마를 바다에 처넣든지 아니면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전쟁에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잔뜩 자만에 빠진 트로이 사람들은 목이 터지게 부르짖는 그의 말을 외면하고 스파이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목마를 성 안으로 옮겼다. 그 때문에 9년 동안이나 공격을 받고도 건재했던 성문은 그들의 손으로 허물어졌고 성 안은 축제 분위기가 지나쳐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성 안에 들어온 목마의 뱃속에서 오디세우스, 메넬라오스 등 희대의 영웅과 함께 100명의 용사들이 튀어나왔고, 아울러 미리 약속된 군호에 맞추어 바다에서 되돌아온 그리스 군대는 트로이를 완전히 멸망시켜버리고 말았다.
라이벌을 칭찬한 이유/ 2013-05-29
라이벌을 칭찬한 이유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군 총사령관인 로버트 리 장군이 하루는 자기를 심하게 비난하고 있는 다른 장군에 대해 대통령에게 좋게 말하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부하가 깜짝 놀라 말했다. “장군님, 장군님이 지금 그토록 칭찬하고 계신 그 분은 장군님에게는 최악의 적입니다. 그분이 기회만 있으면 장군님을 헐뜯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장군이 대답했다. “물론 알고 있지. 그런데 대통령께서는 그 분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내 의견을 물으셨어요. 대통령께서는 나에 대한 그분의 의견을 물은 것이 아니란 말이오” 이런 장군들 때문에 미국이 좋은 나라가 된 것 같다. 성경에 있는 다윗과 같이 원수를 사랑한 인물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해야할 것만 하면 된다.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악을 행하는가는 그분과 하나님과의 문제이다.우리는 원수를 축복한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라이안의 투병 자세/ 감사/ 2009-08-01
라이안의 투병 자세/ 감사 “세계2차대전,” “너무나 먼 다리,” “가장 길었던 날” 등 대작을 쓴 문학가 코넬리어스 라이안은 5년간 암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 투병 기록을 아내가 책으로 엮은 것이 “가장 긴 밤” (The longest night)인데,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편은 ‘또 하루 좋은 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는 짧은 기도로 매일 아침을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무엇이 그토록 좋은 날이냐?’고 물었다. 남편은 자기가 암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었을 터인데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남편은 평소에 생각해 두었던 것처럼 ‘새 날을 맞이하는 기쁨’을 다섯 가지로 척척 말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하루가 좋은 이유는 첫째, 아내를 또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며, 셋째, 병들어 눕기 전에 마지막 작품인 가장 길었던 날을 탈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넷째, 병과 싸울 의지의 힘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며, 다섯째, 주님은 언제나 저기에 계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라이어 라이어/ 거짓말/ 2008-03-24
라이어 라이어/ 거짓말 얼마 전의 개봉작 중에 짐 캐리 주연의 \'라이어 라이어\'라는 영화가 있다. 한 편의 설교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짐 캐리는 밤낮 거짓말만 하는 변호사이다. 자신이 말한 것을 지켜 본 적이 없고, 임기응변의 거짓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다.그런데 그의 아들이 생일 케이크의 불을 끄면서 하나님께 \"아빠가 하루만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 도한다. 진짜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해주셨다. 그래서 짐 캐리가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일어나는 소동들이 영화의 내용이다. 짐 캐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재판도 할 수 없고, 사회생활도 해나갈 수가 없었다. 온통 소동이 일어났다. 무슨 말인가? 이 사회가 얼마나 거짓으로 도색되어 있는 사회인가를 고발하는 것이다. 그 러나 결국 짐 캐리는 진실만을 말함으로써 재판에서 승리한다. \"진실도 이 사회 속에서 승 리할 수 잇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였다. 거짓이 판치는 모습을 본 수 많은 사람들이 정직한 갱신세력의 등장을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당연히 기대해야 할 교회 에 대해서는 세상이 기대감을 품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이 우리가 통곡할 일이다.
라이언 킹 2012년 05월 18일
라이언 킹 2012년 05월 18일 작성자 장혜숙 떠도는 코메디가 아니고 실제 있었던 일, 정말 웃기는 일이었지만 적지않은 깨달음이 있었던 일이다. 얼마 전 가끔 가는 죽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끼니 때가 아니니 손님은 한 명도 없고 죽집 아주머니는 친구분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내가 주문한 죽을 준비하러 주인은 주방으로 들어가고, 친구분은 언제 것인지 모를 신문을 뒤적거리셨다. 식당에 앉은 친구분과 주방에서 죽을 데우는 주인의 대화내용이다. “라이언 킹이 뭐래?” “사자가 왕이라는 뜻이지. 라이언은 사자, 킹은 왕이라는 뜻이잖아.” “호랑이가 동물의 왕이라고들 하는데 사자가 동물의 왕인가…?” “그럼, 사자도 동물의 왕이 되지. 호랑이나 마찬가지지.” 식당과 주방에서 주고받는 대화니 목소리도 높이며 큰 소리로 하신 이야기 내용이다. <라이언 킹> 나는 웃을 수도 없고,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도 어렵고, 찬물을 천천히 마시며 웃음을 참느라고 애썼다. 내게 죽을 내다준 후 두 분은 다시 다른 대화를 시작했고, 웃음이 진정된 나는 천천히 죽을 떠먹으며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상황이 왜 그렇게 우스운 것일까? 다른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알고있는 <라이언 킹>이라는 이야기를 죽집의 두 분들이 전혀 모른 채 엉뚱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웃음이 폭발하려 했던 것이다. 내가 아는 사실과 동떨어진 해석 때문에 나는 웃음을 참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그 분들이 <라이언 킹>을 모르는 사실이 그렇게 웃을 일이란 말인가? 그런 이야기 몰라도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을. 가족들과 한 식탁에서 나는 죽집에서 있었던 라이언 킹에 대한 상황을 이야기했고, 우리 식구들은 역시 크게 웃었지만, 어느 상황에서는 우리가 그런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데는 모두가 동감을 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부분은 얼마나 많으며, 내가 아는 것은 얼마나 지극히 적은 부분인가, 어느 자리에서 나는 죽집 아주머니처럼 또 하나의 <라이언 킹> 코메디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어느 자리에선가 그 자리의 문외한으로 연출해내는 나의 <라이언 킹> 코메디를 만난 사람들은 죽집에서의 나처럼 웃음을 참느라고 애쓰겠지……… 내가 아는 것을 가늠해보면 많은 것도 같고, 좀 더 꼼꼼히 셈을 해보면 안다고 꼽을 수 있는 분야가 극히 적은 것도 같고, 그렇게 따져 들어가보면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바보일 뿐이다. 죽집 아주머니, 그리고 친구 분께 사과드린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제가 웃음이 나왔던 것은 아니 그것도 모르나 하는, 당연히 <라이언 킹>쯤은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인데 그것도 모르는구나 하는 그런 마음에 웃음이 나왔던 것 같아요. 무시하고 얕잡아 본 것은 아니었는데 그냥 웃겼을 뿐인데, 어쨌든 두 분을 상대로 웃어서 죄송해요. 나는 날마다 여기저기서 <라이언 킹 코메디>를 연출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이제 누가 무엇을 모르더라도 웃지 않을 것이다. (<라이언 킹>은 디즈니 만화영화의 제목이고, 사자가 동물의 왕이라는 뜻은 아니다.)
라이트 목사의 부활 신앙/ 2013-04-02
라이트 목사의 부활 신앙 1827년 스코트랜드의 항구에서 배에 올라탄 노인 목사가 있었다. 성 안드레 교회에서 50년간 설교한 라이트 목사 (Henry Francis Lyte)였다. 건강을 위하여 따뜻한 곳에 살아야 하겠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 프렌치 리비에라로 떠나는 길이었다. 첫번 기항지인 프랑스의 북부 항구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아침 출항 시간에도 라이트 목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여관방을 열었더니 노인 목사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책상에는 밤사이에 쓴 시 한 편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전세계가 애송하는 찬송가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Abide with me, 531장)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날은 빨리 저물고 어둠이 짙어가는데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을 때 오직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주여, 나와 함께 거하소서 작은 인생은 썰물처럼 멀어가고 땅의 기쁨과 영광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주님의 축복이 내 곁에 있으면 병도 힘을 못쓰며 눈물도 쓰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죽음도 무덤도 승리의 개가가 되리이다 내 눈을 감기 전에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 하늘의 새벽이 밝아올 때 허망한 땅의 그늘은 사라질 것이오니 사나 죽으나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라이트(Henry Francis Lyte) 목사
라이트(Henry Francis Lyte) 목사 1827년 스코틀랜드의 항구에서 배에 올라탄 노인 목사가 있었습니다. 성 안드레 교회에서 50년간 사역한 ‘라이트’(Henry rancis Lyte)목사였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따뜻한 곳에 살아야 하겠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 ‘프렌치 리비에라’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첫 번 기항지인 프랑스의 북부 항구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아침 출항 시간에도 라이트목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원이 여관방을 찾아갔더니 노인 목사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책상에는 밤사이에 쓴 시 한 편이 놓여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전 세계가 애송하는 찬송인 “때 저물어 날 이미어두니” (Abide with me, 531장)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날은 빨리 저물고 어둠이 짙어 가는데,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을 때, 오직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주여, 나와 함께 거하소서. 작은 인생은 썰물처럼 멀어가고, 땅의 기쁨과 영광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주님의 축복이 내 곁에 있으면 병도 힘을 못 쓰며, 눈물도 쓰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죽음도 무덤도 승리의 개가가 되리이다. 내 눈을 감기 전에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 하늘의 새벽이 밝아올 때, 허망한 땅의 그늘은 사라질 것이오니, 사나 죽으나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너무나 평안하고 신뢰로 가득 찬 시입니다.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2009-05-27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우리 시대의 명저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권장 수업 시간:2시간(100분) 대상 도서:고교독서평설 12월호 「우리 시대의 명저」 참고 자료:존 롤스 지음, 『정의론』(이학사) 하승우 지음,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책세상)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청하) 학습 목표:① 개인과 사회의 윤리가 대립하는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본다. ② 사회 정의 실현에 관해 니부어와 롤스가 어떻게 다른지 이해한다. ③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가 사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지 토론해 본다. ④ 집단의 윤리가 개인의 윤리에 비해 도덕성이 떨어지는 이유를 살펴본다. ⑤ 집단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니부어의 대안과 ‘관용’을 비교해 본다. ⑥ 집단 간의 갈등에 대해 국가나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토론해 본다. 집필자:권희정_ 상명 사대 부속 여고 철학 교사 들어가는 글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다양성과 복잡성을 들 수 있다. 서로 다른 집단이 모여 있으니 다양한 갈등과 충돌이 벌어지고, 이를 조절하기 위해 국가뿐 아니라 국제 사회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이나 쓰레기 소각장 같은 혐오 시설이 유치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으레 해당 지역 주민들의 거센 저항이 뒤따르곤 한다. 그러면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고취해야 한다거나 사회적 약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며 각계각층의 전문가들 역시 목소리를 높인다. 2003년 전라 북도 부안군 위도의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유치를 둘러싸고 발생했던 문제처럼 갈등이 증폭되어 폭력 사태로 발전하면,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절차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곤 한다. 이처럼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거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이해 갈등을 조절하는 절차적 합의 등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풀어 가는 데 중요한 키 워드가 되고 있다. 하지만 니부어가 보기에 이러한 접근 방식들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그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개인은 이타적일 수 있지만 그 개인이 모인 사회 집단이 반드시 이타적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책임 의식이나 관용처럼 윤리 의식을 고취하는 방식으로는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또 다수결이나 토론 등 절차적 합의를 거쳐 갈등의 해소를 주장하는 것도 군중 심리나 강자의 이해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이처럼 도발적이고 독창적인 니부어의 주장은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의 갈등뿐만 아니라, 윤리와 정치의 갈등을 보여 준다는 측면에서 주목해 볼 만하다. 심화 자료 니부어의 생애와 사상 1892년 미주리 주(州) 라이트 시티에서 태어난 라인홀트 니부어는 엘름허스트대, 에덴 신학교, 예일대를 거치면서 사회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1915년 니부어는 예일대 박사 과정을 그만두고, 자동차 산업이 번창하던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로 건너가 목회 활동을 벌였다. 13년간 이곳에 머물며,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의 자동차 공장에서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목격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키워 나갔다. 니부어는, 경건함과 도덕적 이상주의가 특징인 신학으로는 인간을 기계로 전락시키는 대량 생산 산업 제도의 야만성을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포드 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1923년 세미나 참석차 유럽을 방문한 니부어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독일의 비참한 현실과 영국의 노동 복지 정책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 민주주의가 기독교적 이상(理想)에 가장 근접한 정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계기로 미국의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1928년 니부어는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 종교 철학 조교수로 부임했다. 2년 뒤인 1930년에 응용 신학 교수가 된 그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독교 사회 윤리를 강의하면서, 윤리학자이자 신학자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이 온 세상을 뒤흔들자 니부어는 사회주의자로 변신하여 미국 사회의 자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30년에 구소련을 다녀온 뒤로는 공산주의 정치 제도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그는 독일과 구소련의 전체주의에서 초래될 위험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이때부터 니부어는 순수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 민주주의’야말로 세계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운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사상적 변화에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시행한 뉴딜 정책의 성공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뒤 1971년 사망할 때까지 니부어는 공산주의를 비난하면서,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책임을 고양시키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대변자로 나섰다. 디트로이트의 노동자를 위해 목회 활동을 하던 자유주의 신학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한 그는 사회 복음과 현실 문제를 함께 고민했던 신학자이자 실천가였다. 대표 저서로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 외에도 『문명은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1927), 『인간의 본질과 운명』(1943),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1944), 『신앙과 역사』(1949),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1952), 『자기와 역사의 드라마』(1955), 『국가와 제국의 구조』(1959) 등이 있다. 니부어의 도덕관 니부어는 세상을 개인과 사회라는 두 가지 중심 축으로 나누어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 정의 문제에 대하여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쳤다. 니부어가 말하는 ‘사회’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민 사회가 아니라 개인과 대비되는 모든 집단을 뜻한다. 곧 민족, 계급, 국가 등이 포함된다. 그는 사회 집단의 실체를 도덕성의 차원과 연결시켜 파악하려 하였다. 그 연구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다. 이 책에서 니부어가 다루는 주제는, 개인의 도덕적·사회적 행위는 사회 집단(민족 집단이건 경제 집단이건 간에)의 도덕적·사회적 행위와 엄격하게 구별된다는 것이다. 니부어가 보기에, 인간 개개인은 자신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도 생각할 줄 알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더 존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덕적이다. 이렇게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은 개인들이 서로 같다는 의식을 갖고 공감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또 공감대의 범위는 교육으로 얼마든지 넓혀질 수 있다. 곧 이성을 가진 개인은 교육을 통해 정의감을 기를 수 있다. 그 결과 개인은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이기적인 마음의 요소들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니부어는 개인들은 도덕성이나 정의감을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사회나 집단에서는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훨씬 얻기 어려운 것으로 보고 있다. 니부어의 도덕관은 책 제목처럼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로 요약된다.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사람도 집단에 속하기만 하면 이기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 집단 자체가 이기적, 비도덕적인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니부어는 도덕가, 사회학자, 교육가 같은 도덕주의자들에 대해 비판적이다. 도덕주의자들은 모든 인간 사회와 집단들이 타협이나 합리적인 조정으로 서로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니부어가 보기에 이들은 인간의 집단적 행동 속에 있는 야수성과 이기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회는 여러 가지 수준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니부어는 ‘개인’에 대비되는 ‘사회’의 수준을 크게 국가(니부어는 편의상 한 국가는 한 민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국가는 곧 민족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관계없다.)와 계급으로 나누어 보았다. 이때 계급은 자본가·귀족을 중심으로 한 특권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구분된다. 니부어의 사회 구분이 의미하는 것은 각 사회 집단이 또 다른 사회 집단과 갈등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곧 국가는 또 다른 국가라는 사회 집단과, 특권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사회 집단과 갈등 관계에 있다. 그러면, 여기서 국가라는 사회 집단과 계급이라는 사회 집단이 왜 도덕적이지 못한지 살펴보자. 니부어는 국가가 개인과는 달리 이기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동정심과 정의가 국가로 옮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곧 개인이 가지고 있는 ‘희생’이라는 이타주의적 덕목은 국가에 대하여는 충성심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국가의 도덕성을 말살시키는 결과를 낳고 국가의 이기심을 확대시킨다. 무리가 되어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되면 개인의 도덕성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집단의 논리가 개인의 도덕성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모여 있는 국제 사회는 각국의 이기성이 충돌하는 잠재적인 전쟁터인 셈이다. 1815년 빈 회의❶ 이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유럽 사회는 각국의 힘이 팽팽히 유지되면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불안정한 평화의 시기였다.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동안 각국은 적어도 겉으로는 적대적 태도를 최대한 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각국은 국제 사회에서 자기 나라가 선 의지(善意志)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니부어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특징을 위선(hypocrisy)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니부어가 국제 사회의 국가 간 관계를 이기성이 충돌하는 갈등의 상태로 본 것은 계급 간의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귀족·자본가로 대표되는 특권 계급 층의 태도는 국가의 태도와 다를 것 없다는 것이다. 18, 19세기의 특권 계급이었던 신흥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노동 계급에 비해 특권을 가지는 것은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에 대한 정당한 보수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곧 자본가 계급이라는 위치는 인격, 근면, 겸손, 절약 정신에서 얻어진 것이고, 이런 덕목을 갖추면 누구든지 자신들처럼 될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사회(국가, 계급)의 정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니부어는, 사회를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正義)이고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利他性)이라고 말하고 있다. 국가를 중심에 놓고 보면 국제 사회에서의 정의는 주로 강대국들의 폭력에 의존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위선적 태도로 그들의 의지를 가장하고 있다. 니부어는 국가의 이기성과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개별 국가를 초월하고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 공동체의 출현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 니부어는 계급 갈등 문제에 있어 정의에 이를 수 있는 대안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혁명을 통한 정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치적 힘에 따른 정의이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불러오기 때문에, 지지자가 많더라도 실행 단계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주춤하게 된다. 폭력에 대한 도덕성이 갈등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니부어는 선한 동기와 궁극적인 목적 사이에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은 윤리적 영역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영역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혁명에 뒤따르는 폭력도 반드시 비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니부어가 폭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올바른 사회 제도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굳이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니부어는 혁명을 통한 정의보다는, 정치적 힘에 따른 정의에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다. 니부어가 예를 든 것은 독일의 사회주의자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이 주장한 점진적인 의회 사회주의다. 니부어가 의회 사회주의에 가능성이 많다고 본 것은 자본가도 노동자도 아닌 중간층과 농민들이 사회적으로 큰 세력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노동자의 힘만으로 대대적인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대신 의회주의적인 방법 곧 노동자 당을 만든 뒤 중간층과 농민들을 끌어들여 의회에서 많은 의석 수를 장악하는 것이 낫다. 기존의 법과 제도를 이용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가능성과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부어는 의회 사회주의 역시 기존 정치 세력과의 관계에서 흥정과 타협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혁명을 통한 정의에 대하여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 이상의 세 제시문은 도정윤, ‘니부어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고교독서평설〉 2000년 4월호 「명저」)에서 인용 롤스의 『정의론』 정의(正義)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올바르고 마땅함’을 뜻한다. 올바르고 마땅한 사회, 곧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올바르고 마땅한 것일까? 하버드 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철학을 가르치고 연구한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는 『정의론』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 정의란 분배의 공정성, 곧 분배적 정의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공정한 분배 기준은 한 사회의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신념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또 정의의 기준을 선택할 때에도 구성원 각자를 특별히 이타적이라거나 도덕적 존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하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고, 문화적 생활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하면서 다양한 재화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식량, 옷, 주택 등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투표권, 피선거권, 사회적 지위, 인간관계, 자아실현의 기회, 타인의 인정, 더 나아가 자긍심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재화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롤스는 재화란 단지 경제적인 부나 물질적인 자원만을 뜻한다고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자긍심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 중 하나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재화를 혼자서 생산할 수는 없다. 효율성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 비단 효율성 측면이 아니더라도, 사회가 발전하면서 정치·경제·사회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게 마련이라, 사람들과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각 개인이 필요로 하는 재화를 협동으로 생산했다면, 그 다음은 구성원들 간에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 결국 사회 정의란, 힘을 합쳐 생산한 재화가 공정하게 분배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화가 많아지면 사람들은 남보다 더 가지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단순히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근시안적인 이기주의자라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과 타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합리적인 이기주의자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눈앞의 불이익을 참을 줄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한 분배의 기준은, 단순히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근시안적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합리적인 이기심을 전제로 마련되어야 한다. …(중략)… 결국 롤스의 『정의론』은 개인의 이기심을 인정하여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나 자유 경쟁을 허용하면서, 자연적·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하고 평등을 실현하려는 사회주의적 이상과 철학으로 조화시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사회적인 약자와 소외 계층에 대한 복지 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 표정훈, ‘롤스의 『정의론』’(〈고교독서평설〉 2004년 3월호 「우리 시대의 명저」에서 인용) 수업 활동 터 잡기 1.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과 윤리가 대립하는 현상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가며 발표해 보자. ◎ 토론 가이드_ 님비(NIMBY) 현상은 집단 이기주의의 전형적인 예로 자주 등장한다. 가령 쓰레기 소각장을 받아들일 경우 지역 환경이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집 값이 떨어져 경제적 손실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반대 집회와 시위를 벌이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사회가 다양해지고 민주화가 빠르게 진전되면서 ‘양심적 병역 거부’ 논란처럼 소수자의 가치관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 어느 가치가 우선하는가에 대한 논쟁도 거세지고 있다. 학생들이 이러한 경우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발표하도록 유도한다. 2. 집단의 윤리가 개인의 윤리에 비해 도덕성이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 토론 가이드_ 집단의 도덕성이 개인의 그것보다 떨어지는 이유는, 집단 내에서는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구성원에게 강제력을 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사적인 사회 집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직들은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어렵다. 집단에 속한 개인은 강제력에 굴복해 개인의 도덕성보다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르기 쉬운 탓이다. 그러니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도덕성과는 자연히 거리가 멀어지고, 집단의 이해에 따라 이기적인 충동에 쉽게 휩쓸리고 만다. 따라서 집단들의 관계에서는 윤리보다 정치적인 속성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니부어가 가장 말하고 싶어했던 부분으로, 이미 본책에서 설명했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발표하는 토론 수업도 좋지만, 본책을 펼쳐 놓고 해당 부분을 찾아서 직접 쓰도록 유도해 보는 방법도 좋을 듯하다. 3. 사회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니부어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보자. ◎ 토론 가이드_ 우리는 자살이나 테러 등의 방법으로 소수의 입장을 표출하거나, 사회 정의를 위해 극단적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 경우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의 정당성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니부어는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는 인간의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올바르지만, 사회 도덕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고 했다. 그는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를 비교함으로써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정치적 기반을 등에 업은 간디는 비폭력주의와 영국 면화에 대한 불매 운동으로 영국의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고발하는 효과를 얻었다. 반면 귀족 출신이었던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농노제를 비판했음에도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기반이 약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니부어는 개인의 신념과 사회 정의를 위해서는 그 정당성에 대한 설득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정치적 힘의 관계도 면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니부어가 현실적인 권력, 예를 들어 다수의 의견이 사회 정의의 측면에서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간디와 톨스토이를 비교하면서 니부어가 강조한 것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면 개인적 차원의 윤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사회적 차원의 대책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펼치기 1. 개념 잡기 (1) 니부어가 주장하는 개인과 사회, 종교의 도덕적 원천을 살펴보자. 차원 도덕의 원천 도덕을 실현하는 방법 개인의 도덕적 이상 이타심 이성을 통한 무지의 계몽 사회의 도덕적 이상 정의 종교의 도덕적 이상 사랑 종교를 통한 자애심의 함양 (2) 사회 윤리 형성에 있어서 니부어가 말하는 도덕적 합리주의, 공리주의, 종교적 이상주의의 긍정적 역할과 한계를 살펴보자. 사회 윤리에 미치는 장점 사회 윤리에 미치는 단점 도덕적 합리주의자 · 도덕의식을 함양하고 이기심을 억제하려면 이성을 계몽시킬 필요가 있다. · 인간의 이성은 도덕 법칙을/를 세우는 데에만 기여할 뿐이며 인간의 본성상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는 없다. 공리주의자 ·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 정의을/를 조화시키려면 개인의 욕망을 조절해야 한다. · 개인의 이기적 목적은 사회 정의가 아니라 사회의 이기적 목적으로 바뀐다. 종교적 이상주의자 ·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회적 이타심을 발현해야 한다. · 종교적 이상주의는 일시적으로 약자를 돕는 효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이는 사회 갈등의 원인도 치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무관심을/를 낳는다. 2. 원문읽기 (1) 다음 글의 핵심어를 찾고,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인간 사회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제반 문제를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사회의 요구와 양심의 요청 사이에는 여간해서 화합되기 힘든 지속적인 모순과 갈등이 발견된다. 간단히 정치와 윤리의 갈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모순과 갈등은 도덕 생활의 이중적 성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인데, 그 하나는 개인의 내면적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생활의 요구이다. 사회를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이다. 그리고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과 같이 도덕성이 높은 사람들로부터 전혀 도덕적 승인을 얻어 낼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게 될지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은 자신보다 뛰어난 것을 보고서 자신감을 잃기도 찾기도 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실현해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인 입장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지도 않는다. ○ 핵심어_ 개인의 내면세계와 사회생활 사이의 갈등과 모순 ○ 주장하는 내용_ 니부어는 개인의 가치관과 사회 윤리의 갈등에 대한 성찰이 개인 윤리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가 추구하는 정의와 개인이 추구하는 이타성은 명확히 구분될 수 없다는 점도 함께 지적한다. 특히 이타성과 달리 사회 정의의 문제는 애초에 윤리적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 사회 집단은 그 특성상 이기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부어는 이타성과 사회 정의라는 윤리적 난점은 도덕적 성찰뿐만 아니라 정치적 통찰을 거쳐 융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2) 다음 글의 핵심어를 찾고,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이제 우리는 사회적 불의를 대가로 지불하고서 개인 생활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를 세울 수 없으며, 인간사의 방탕과 부패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 이런 일을 하는 데 가장 적당한 사람들은 낡은 환상들을 새로운 환상들로 바꾼 이들일 것이다. 이 환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집단생활이 완전히 정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현재 매우 가치 있는 환상이다. 왜냐하면 이런 환상이 사람들의 영혼을 부추겨 숭고한 광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정의란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광기를 갖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사악한 권력 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정신적 사악’에 대항해서 싸울 수 없을 것이다. 환상이 위험한 것은 맹렬한 환상주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철저하게 이성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환상이 그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앞서 이성이 그것을 파괴해 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핵심어_ 사회 정의와 이성의 통제 ○ 주장하는 내용_ 니부어는 사회 정의가 개인적인 도덕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 문제로 보았다. 그는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폭력 혁명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공산주의가 사회적 평등과 정의의 실현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폭력 혁명은 사회 정의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폭력적 수단에 매몰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이성으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꿈과 노력을 막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 정당이 현실과 타협해 그들 자신의 주장을 몰살시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사회 민주당은 국제적으로 전쟁에 반대하기로 결정해 놓고도 우파와 손잡고 애국주의 전쟁이라며 전쟁에 참여했다. 니부어는 현대 사회가 복잡한 양상을 띠는 만큼 하나의 이론이나 원칙으로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할 수 없으므로, 윤리적 사회 목표를 이룰 정치적 방안을 찾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3. 토론하기 (1)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의 각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결집하여 정치 과정에 반영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그러나 최근 우리 나라에서는 ‘참여의 폭발’이라 할 정도로 각 집단이 자신의 이익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국가나 정부는 어떻게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이익들을 조절해야 하는지 토론해 보자. ○ 토론 가이드_ 이 문제는 2004학년도 숙명 여자 대학교 1학기 수시 모집에 출제되었던 문항이다. 우선 우리 사회에서 집단 이기주의를 보여 주는 사례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자.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국가와 시민 단체가 주체가 되어 공익 광고나 캠페인 등 교육을 통한 의식 개혁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할 것이다. 서로 간의 이해와 갈등을 조절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의 견해와 지식을 존중해 결정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한편 최근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선정 과정처럼 이해 당사자 간의 의사 소통이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고, 결정 과정에서 절차의 민주성이 확보되면 그 속에서 결정된 내용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니부어는 이러한 견해들도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없기에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라며 비판했다. 그는 전문가의 의견은 물론 존중되어야 하지만, 전문 지식이 국가의 공정성과 정의를 보장해 주리라는 생각은 이성 자체의 공정성과 전문가의 이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성을 제아무리 확보한 절차일지라도 다수의 횡포에 휘둘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연 다수의 선택이 사회 정의에 적합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 니부어의 비판을 통해 집단 이기주의의 문제점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고, 각각의 대안이 갖는 장단점이 무엇인지 토론해 보자. (2) 니부어의 문제의식은 개인적 이익과 사회 정의의 간극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에 관한 내용을 롤스의 『정의론』에서 살펴보고 토론해 보자. ○ 토론 가이드_ 시대가 변하면서 ‘정의’는 사회 정의 문제로 집중되었고,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분배 정의 또한 중요한 과제로 등장했다. 니부어가 사회 도덕의 이념으로 정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롤스는 공정함으로 정의의 문제를 제기했다. 롤스는 사람들이 ‘이기심’ 때문에 각자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운다면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니부어와 달리 개인들 간의 사회 공정성을 보장하는 조건, 곧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 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게 만드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가리키는 자연 상태와 같은 원초적 상태를 이론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롤스의 제1원리는 ‘자연 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 체계와 양립 가능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2원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고, 기회 균등이라는 공정한 조건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개방된 직책과 지위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두 원리 가운데 롤스는 제1원리가 제2원리에 앞서고,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리가 차등의 원리에 앞선다고 주장했다. 제1원리가 평등을 위한 형식적 조건이라면, 제2원리는 평등을 위한 실질적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롤스는 평등과 자유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제1원리에 제2원리가 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등의 실현은 어디까지나 같은 출발선 앞에 서게 하는 것이지 결승점에 함께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는 ‘기회의 균등’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할 것을 강조하는 롤스의 사회적 평등관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마무리하기 (1) ‘관용’으로 사회 집단 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지에 토론해 보자. ○ 토론 가이드_ 1980년대 말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발전이 시대의 화두로 거론되었다. 권력에 억눌려 있던 각계각층의 요구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지역 갈등이나 노사 갈등, 진보와 보수의 대립 등이 수면 위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종 ‘관용’이 그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다. 집단 이기주의를 다루는 이번 주제에 맞추어 ‘관용’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이 니부어가 제기한 집단의 윤리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대안이 될 수 있을지 토론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관용’을 지칭하는 ‘tolerance’는 미국에서와 프랑스에서 그 개념이 구분된다. 이 둘은 발음만 차이 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우선 미국식의 ‘톨러런스’는 시장 원리를 중시하는 경제적 관점을 담고 있고, 그 틀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집단 간의 갈등을 조절하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 또 경쟁하는 이익 단체들 사이에서 ‘타협’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집단 간 세력의 불균형 자체를 개선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톨러런스는 갈등을 빚는 이익 집단들을 조절해 주는 ‘도구’이지, 공공선이나 정의를 위해 사회 구조를 재편하는 ‘원리’가 아니다. 반면 프랑스식의 톨레랑스는 대립하는 주장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주장을 위해 격렬하게 논쟁한 뒤 도저히 상대의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별수 없이 ‘차이를 인정’하는 식이다. 논쟁은 힘이 아니라 토론과 설득을 통해 진행된다. 하지만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공정한 토론이 어렵기 때문에, 톨레랑스는 토론의 공정성을 위해서라도 불평등한 현재 상황을 바로잡도록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그래서 갈등하는 집단 간의 이익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조건을 개선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서로 연대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톨레랑스는 약자가 강자에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집단이 약자에게 행사할 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불평등한 조건을 개선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도록 하는 톨레랑스는 집단 간의 다양성과 갈등을 해결하는 새로운 원리로 제시되고 있다. 니부어는 현대 사회에서는 지나치게 혁신적 방법을 취하기보다 점진적인 접근에 만족하고, 계급 간의 강제력을 완전히 없애기보다 최소로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단 간의 주장을 힘의 우위로 통합하려 하지 않고 차이를 드러내어 사회적 모순을 개선하려는 톨레랑스 역시 이 같은 니부어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빈 회의_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유럽 열강이 나폴레옹 제국을 무너뜨린 뒤 전후 처리를 위해 1814년 9월에서 1815년 6월 사이에 빈에서 가진 국제회의.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관한 것으로,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군주 중심 국가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전통주의와 보수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1815년 빈 의정서가 조인됨에 따라 유럽 각국의 왕조와 영토 대부분이 혁명 이전 상태로 회복되었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복고·반동적인 빈 체제가 들어섰다.
라일락 향기 짙어질 때/ 배성식 목사/ 용인 수지영락교회/ 국민일보/ 겨자씨
라일락 향기 짙어질 때 어둠이 덮고 있는 밤, 숲으로 가는 길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산비탈에 심어진 라일락 때문입니다. 밤의 숲으로 오면 어둠 속을 인도하는 향기 때문에 라일락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둠은 온 세상을 모두 덮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향기는 가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둠이 모든 것을 가릴 때일수록 향기는 더욱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숲으로 오면 어둡다고 길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눈을 감고 길을 안내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향기를 붙잡고 숲으로 들어갑니다. 인생에도 앞길이 보이지 않고 미래가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어둠 속에 더욱 짙어지는 주님의 향기를 따라가는 인생이 돼야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는 가만히 그곳에 머물러 눈을 감고 우리를 인도하는 주님의 향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향기를 따라갈 때 어느덧 어둠은 사라지고 새로운 새벽은 밝아 올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어둠이 짙어질 때도 언제나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람파보네 동네 사람들
람파보네 동네 사람들 2002-07-31 10:00:38 read : 50 제 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의 람파보네라는 조그만 동네에 나치스 군대가 들어 왔습니다. 그들은 이 동네에 숨어있는 유태인들을 잡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많은 희생을 당하면서도 선한 양심에 의해서 유태인들의 생명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켰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많은 유태인들이 그 작은 동네에서 살아 나왔습니다. 그 때 기자들이 그 동네 사람들을 찾아가 \"어떻게 그렇게 영웅적인 일을 해 낼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소박한 그 동네 교인들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영웅심도 없는 그저 소박한 농부들입니다. 우리는 주일 마다 성전에 가서 선한 결실을 맺어야 된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것이 습관화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대로 습관화 된것을 그대로 행한 것 뿐입니다.\" {교훈} 선한 습관을 가진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씨앗을 심고 선한 결실 을 맺는 우리들이 될 때에 명예로운 크리스챤의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과 존경과 선한 양심을 가진 인격자, 선한 결실을 맺는 명예 로운 크리스챤의 삶이 계속되시기를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