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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생명의 씨/ 사6:1-13/ 정용섭 목사/ 대구샘터교회/ 주현절설교/ 2010-02-07
거룩한 생명의 씨 사6:1-13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사야의 활동 시기는 웃시야 왕이 죽은 기원전 734년입니다. 웃시야 왕은 유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은 몇 안 되는 왕 중의 한 사람인데, 병으로 왕위에서 물러나 있다가 죽은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나라가 분단되어 있었으니 그 상황이 얼마나 불안했을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기원전 721년에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남왕국도 목숨을 부지했으나 구차스럽게 지냈습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기원전 587년에는 남왕국마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이사야의 오늘 예언이 있고 난 뒤에 남북왕국은 점점 쇄락의 길을 갔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의 예언은 보기 드물게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남북왕국의 몰락을 예감한 이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면 조국의 멸망을 막아보고 싶었겠지요.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스랍들의 찬양을 듣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이사야는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사실 앞에서 경험하는 두려움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자기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그의 뜻을 세상에 알릴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위기에 처한 조국이 살아날 길을 이번 기회에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살 길을 주신다는 말씀을 들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 끝까지 주님의 증거자가 되리라는 ‘비전’을 안고 “나를 보내소서.”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사야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게 아니라 아예 관심을 끄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9절)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말씀의 신비와 인간 인식의 한계가 동시에 작용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처세술이 아닙니다. 단순히 종교적 위로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영적 현실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런 쪽으로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마치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문을 닫아둘 때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은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막힌 귀와 닫힌 눈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성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명령을 이사야에게 주십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10절) 정말 이해할 수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말씀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뎌진 영성을 회복시키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예언자를 그들에게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걱정이라니요, 하나님이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다니요. 이런 상황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그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거 아닐까요? 이런 경우는 구약성서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려야겠다는 모세의 요구를 이집트의 바로는 거절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아홉 번이나 거절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서기자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욥기에는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이 사탄에게 극심한 시험을 당합니다. 재산은 물론이고 자식도 모두 잃습니다. 성서기자는 사탄이 하나님에게 허락을 받고 욥을 시험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바로나 사탄의 잘못이 결국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성서를 그렇게 읽으면 곤란합니다. 성서기자는 지금 인간과 인간 삶에서 벌어지는 고통, 불행, 죄의 뿌리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고한지, 얼마나 무감각한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완악한 마음은 인격을 도야하거나 심리치료를 받아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양의 차원과도 다른 것입니다. 너무나 뿌리가 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현대인들이 빠진 물질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 소유와 소비지향주의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생각해보면 성서기자들의 이런 표현이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명령을 들었을 때 이사야의 심정이 어땠을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민족 구원을 위해서 “나를 보내소서.” 하고 나선 이사야의 선교비전이 완전히 허물어진 것입니다. 독 안의 쥐처럼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버리신 것처럼 느껴졌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억지로라도 하나님의 생각을 바꿔야할까요?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할까요? ‘나를 죽이고 대신 민족을 살려 달라.’고 매달려야할까요? 예언자마다 반응은 다를 겁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성전에서 경험한 하나님 임재 현상에서 분명했습니다.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그가 하나님의 뜻 앞에서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사야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족의 절망적인 영적 상태가 오래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나는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사야는 속으로 그렇게 오래지 않아서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거라고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1년, 아니 10년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길게 잡아서 희년의 세월인 50년으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 끝나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지요. 기대가 허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11절) 될 때까지라고 말입니다. 이런 정도면 막가자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회개할 틈도 주지 않으면서 망할 때까지 가야 한다는 말씀이니까요. 이런 하나님을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어찌 회개할 기회를 송두리째 막아버리겠습니까? 그가 왜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의인만이 아니라 죄인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가능성까지 완전히 부정하셨다는 이사야의 진술은 그의 영적 고민과 통찰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몇 가지 사회제도나 종교습관을 고쳐서 새로워질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렸습니다. 이사야는 바로 그 사실 앞에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우리가 지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 멸망당한 고모라와 소돔과 비슷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악한 시대, 악한 나라, 악한 지역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지금 절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우리보다 질적으로 훨씬 악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당시에도 이만 하면 모든 게 좋은 거 아니냐 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전해대는 예언자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이사야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런 이들과 다른 영적인 통찰력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그럴 듯해도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불신앙과 무관심이 팽배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사야가 오늘 한국교회의 목사라고 한다면 어떻게 설교를 할까요? 한동대학교 법대에 있다가 몇 년 전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옮긴 김두식 교수는 최근에 펴낸 책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 교회의 세속화를 비판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이 아프지만 사실입니다. 그가 희망을 거는 교회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회, 교회의 본질을 찾아가는 교회, 실험적인 교회가 그것입니다. 그의 비판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 한국교회를 절망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분적인 개혁으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집단이 되었습니다. 수년 전에 장로교 통합측을 대표하는 목사님들이 영락교회 예배당에서 삭발식을 했습니다. 사학법 개정 반대를 위한 퍼포먼스였습니다. 노무현 정권 당시에 목사님들 중에 어떤 분들은 좌파 정부다, 빨갱이가 정부에 숨어 있다는 식으로 설교 시간에 정치적인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논조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런 분들의 눈에는 저도 좌파 목사로 보일 겁니다. 오늘 목사들이나 일반 신자들이나 모두 자신들 교회의 성장만을 최고의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학대학교 교수들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포기했습니다. 대형교회의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이사회에 찍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절망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저는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귀를 막고 눈을 감겨 놓고 아무 것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게 하신 게 아닐는지요. 남아있는 그루터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몰락의 길을 속히 갔습니다. 남유대와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제사도 없고 율법도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자기나라 말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거의 문자의 차원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예언은 저주라는 말인가요? 하나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민족의 운명을 이렇게 제멋대로 파괴하는 잔인한 분이신가요? 그런 하나님 앞에서 공포에 떨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유한 영적 시각으로 이스라엘과 주변 세계의 역사를 뚫어보았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근거는 역사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두 손을 들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니 그럴 때만 하나님은 행동하신다는 겁니다. 이사야는 바로 그 사실을 ‘그루터기’라는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나무를 베어내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습니다. “거룩한 씨가 이 땅이 그루터기니라.”(13절) 거꾸로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입니다. 그루터기와 씨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보잘 것 없어도,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여도 때를 만나면 온갖 조화로운 생명 현상이 거기서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망해도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포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그루터기 개념은 구약성서가 말하는 또 하나의 다른 개념인 ‘남은 자’와 비슷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세상처럼 보여도 하나님을 신신하게 믿는 사람들이 바로 ‘남은 자’이며, 믿음의 그루터기입니다. 이런 남은 자, 또는 그루터기로 비유되는 사람들의 신앙은 낭만적인 게 결코 아닙니다. 일단 그들은 소수입니다.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지도 못합니다. 실제로 교회와 세상을 바꿀 힘이 없습니다. 때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미자립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들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남은 자는 그렇게 존재해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더 엄격하게 말해서 다른 업적을 이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지 않고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야만 합니다. 땅속에 묻힌 씨가 봄이 오기 전에 싹을 내겠다고 서두르면 안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의 눈에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열어 가십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또는 한국사회에서 누가 남은 소수자일까요? 누가 거룩한 생명의 씨일까요? 작은 교회가 바로 남은 자일까요? 큰 교회일까요? 작은 교회만 기독교 진리와 맞닿아 있다고 무조건 말할 수도 없고, 거꾸로 큰 교회는 잘못이라고 무조건 말할 수도 없습니다. 최소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일까요? 아니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일까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일까요? 어두운 현실 앞에서 기도마저 포기한 사람일까요? 그걸 단정적으로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짜도 있겠지요. 허풍쟁이도 있겠지요.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는 ‘남은 자’라는 겁니다. 그 남은 자가 바로 하나님이 숨겨놓은 거룩한 생명의 씨이겠지요. 사실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씨인가에 대해서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 우리의 인식 능력을 벗어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구원 역사를 끌어가시는지에 눈을 떠야 합니다. 모든 나무가 베어져서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분만의 고유한 능력으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요?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요?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요? 우리의 절망이 오히려 하나님의 기회라니 말입니다. 우리의 침묵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라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절망의 막장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웃음거리요,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야말로 참되고 거룩한 생명의 씨였습니다. 그것만이 그루터기였습니다. 거기서 부활의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전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수고를 좀 내려놓아도 되겠지요. 대신 그분이 어떻게 구원을 일으키셨는지, 앞으로 완성하실지 마음을 열고 기대해 봅시다.
구원의 말씀/ 행13:25-43/ 주현절설교/ 2001-01-10
구원의 말씀 행13:25-43 성탄절 이후 교회력의 첫 절기인 주현절(Epiahany)이 시작되었습니다. 顯現節이라고도 불리는 이 절기는 지난 6일부터 사순절 전까지 약 8주간 계속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보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고 느끼는 기간입니다. 동방박사들에 의해 묘사된 이방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념하는 축제이자 성육신의 의미를 살린 축제인 주현절은 신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을 통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를 표현하고 동방박사에게 나타났던 별이 주요 상징입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담은 세 개의 작은 상자들 혹은 세 개의 왕관,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성령 임하신 것을 상징하는 날아 내려오는 비둘기도 이 절기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초록색과 흰색의 휘장이나 제단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초록색은 삶의 승리와 도약, 사랑, 선행을 통한 영혼의 갱신 혹은 희망을 의미하며 흰색은 순결한 영혼, 거룩한 삶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주로 그리스도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경배, 그리스도의 세례 때 임한 성령의 역사, 가나의 결혼식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 등 예수님의 세 가지 특징적인 나타나심을 선포하고 강조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주현절 기간에는 이방에 보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최소한 5분 정도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 그리고 오늘 바울의 설교를 잘 읽고 연구하면 전도할 때 특히 5-10분 설교의 좋은 자료를 가지고 전도에 사용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나 베드로의 설교도 유명했지만 바울의 설교는 참으로 설교의 진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은 모인 사람들에게 짧은 시간 동안에 아브라함과 야곱의 씨와 출애굽의 엄청난 역사와 그리고 광야 40년 생활을 간략하게 설명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한 여호수아에 대해서 밝혀주셨습니다. 사사시대의 훌륭한 사사들의 신앙과 왕 중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이었던 다윗 왕의 신앙의 계대를 드러내어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을 말하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바울은 세례 요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그 분의 고난과 부활을 말하면서 그 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요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 놀랄 정도로 짤막한 설교 중에 그리스도인의 씨로부터 시작되어서 영생케 되어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에 대해서 설교를 했다는 것은 역시 바울의 특이한 설교 기법이었습니다. 바울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설교할 수가 없는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 서기오 바울이 은혜받았고, 이 말씀을 듣고 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이 설교를 듣고서 시기와 투기를 일으킨 유대사람들도 잘못을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 행 13장의 바울의 설교를 자꾸 읽고 또 읽고 들어서 믿고 그 말씀대로 신앙생활할 때 크나큰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데반의 설교도 대단했으나 설교하고 나서 돌에 맞아 죽는 설교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도 한 번 설교에 큰 충격을 받아서 믿는 사람들이 3천명 5천명이 생겼지만 결국 유대 사람들의 반발심과 복수심을 갖게 되어져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잡혀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는 서기오 바울 같은 총독과 많은 이방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돌이켜서 개종할수 있는 설교였고, 참으로 은혜를 끼치고, 충분한 신학적인 교리가 다 들어 있어서 듣는 자가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도록 되어진 설교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 말씀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가치판단을 하도록 되어있고, 선택의 목적을 찾을 수 있도록 설교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도 공부를 끊임없이 많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의 중요한 핵심은 구원의 설교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말씀이 되어져야지 상처를 입는 말씀으로 들어도 안 되고, 들려져도 안 됩니다. 또한 감정을 갖고 듣거나 감정을 일으켜도 안 됩니다. 감화만 받아도 안 됩니다. 비록 감화와 감동은 없을지라도 이 말씀을 믿으면 구원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대한 설교입니다. 설교는 눈물이 나오게 하는 설교가 좋은 것 같지만 그것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 설교가 가슴이 찡하도록 하는 설교가 좋은 것 같아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즐거움을 주는 것도 설교가 아닙니다. 또 아! 참 시원하다.. 그 말씀 들으니까 속이 다 뚫리는 것 같다. 이렇게 시원한 설교가 좋은 설교가 아닙니다. 효과는 있을는지 몰라도 문제는 구원을 주지 않으면 설교가 제대로 된게 아닙니다. 그 말씀대로 구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구원이 되지 않으면 설교가 아닙니다. 아무리 옥구슬이 쟁반에 굴러가듯 하는 설교라도 구원이 되지 않으면 즉 나와 관계되지 않는 설교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손짓을 하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제스쳐가 없습니다. 표현력이 부족합니다. 동양사람과 서양사람이 길에서 대화하는 걸 멀리서 보면 동양사람들은 무슨 말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렇지만 서양사람은 말소리를 안 들어도 그냥 몸짓 손짓 발짓까지 하기 때문에 벌써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단일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이나 중국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외국사람하고 별로 접촉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다른 유럽나라들은 워낙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많이 섞여서 살았기 때문에 말이 잘 안 통합니다. 미국도 많은 인종 약 150인 종이 섞여서 산다고 합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각기 쓰는 말이 다르니까 손짓 발짓 해야 의사소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스쳐가 참 많이 발달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설교하고 있는 안디옥도 별의 별 나라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울이 설교하게 되었을 때 손짓을 하면서 설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말보다 표현을 빨리해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을 영접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우리도 빨리 의사전달을 해야하는 데 말이 잘 안 나오면 말보다 손짓으로, 얼굴로, 몸짓으로 먼저 하지 않습니까? 반드시 이 복음을 올바로 전해야 겠다는 열정 때문에 바울이 손짓을 하며 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복음에 대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바울의 복음 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바울을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바나바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바나바는 참 훌륭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왜냐 하면 사실 바울을 키워내고 살려내고 끌어내서 하나님의 사역자로 만든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바울을 앞장 세웠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바나바보다 말도 능하고 아는 것도 능하고 모든 면에서 능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남을 세워주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의 덕목입니다.\\\" 세상은 자기보다 능하고 잘난 사람을 보면 짓밟으려고 하고, 크지못하도록 하는데 바나바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바울을 앞장 세워서 복음을 전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인정해 줄줄 아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부인이 남편을 인정해줄 때, 또 남편이 부인을 인정해줄 때, 성도 간에 서로 인정해줄 때 기쁨과 신뢰가 쌓여지게 되고 교회가 은혜로워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같이 다니던 마가라는 요한이 싫어했습니다. 아니? 바울 지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어? 그래 우리 삼촌을 제쳐놓고 자기가 다해? 이런 생각 때문에 마가의 마음 속에 분개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이런 분개를 느끼면 안 됩니다. 전도하는데 감정이 섞이면 안 됩니다. 어째서 우리 삼촌이 바울한테 밀리고 뒤로 쳐져서 왜 저렇게 하느냐? 요한의 마음속에 이런 감정이 개입되니까 심신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힘도 들게 되고 고생도 되니까 버가로 가는 도중에 말도 없이 혼자서 예루살렘으로 가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참 조심해야 할 것은 여러분들은 다 설교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은사교권자들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교회 와서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지만 밖에 나가서는 목사 대신 안 믿는 사람들에게 설교해야 할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설교자입니다. 설교가 무엇입니까?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입으로, 몸으로, 행동으로, 생활로 설교를 해 주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들려주어서 그들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중대한 책임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모든 것이 안정되어 부흥할수 있는 준비가 되어져 있습니다. 이제 전도함으로 배가운동을 하고 전도운동을 펼쳐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설교를 많이 해라야 합니다. 어떤 설교를 해 주어야 하겠습니까? 분개심과 적개심 주는 설교보다 사랑으로 예수 사랑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새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구원의 말씀이 되도록 전해야 합니다. 어릴적부터 구원의 말씀으로 자란 아이는 훗날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십니다. 말씀은 중생의 말씀으로서, 거듭나는 역사를 이루시는 동시에 또한 중생한 영혼을 양육하시는 역사도 감당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양육의 말씀 혹은 양식으로서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중생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허약하고 맥이 빠진 그런 인생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건강하고 활기있고 그리고 용기있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거 자기 친히 음식을 장만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 즉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벧전 2:1절 이하의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는 특히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생한 주님의 크신 은혜를 단지 맛본 자들이 아니라 감격으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 우리 인생을 세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육신을 세우는 일에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참된 삶의 목표는 이 세상이나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고 천국의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우리 인생을 세워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꾸려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 7:24-27절의 말씀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자라야 하고 양육받아야 할 목표는 얼마나 높고 얼마나 거대한지 모릅니다.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엡 4:13절은 우리에게 그 목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에 똑바로 서야 합니다. 터전이 다저지지 않으면 건물이 바로 설 수 없고 자세가 바로 되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정상적인 성장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위해서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자신을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골 1:28-29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그가 걸음을 옮기면 나도 옮겨야 합니다. 그가 멈추시면 나도 멈추어야 합니다. 그가 울면 나도 울고 그가 웃으면 나도 웃어야 합니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은 성도의 최대의 삶의 목표입니다. 일찍이 경건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 캠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그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는 들어도 그 말씀을 본받아 살려고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성령을 가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가지려는 사람은 그의 전 생활을 그리스도에게 조화시키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서 자라야 합니다. 자라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가 있습니다. 자라지 않은 아이나 자라지 않는 영혼은 모두가 똑같이 부모의 근심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이것을 탄식한 일이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19절입니다. 성장하는 속도는 모두가 다를 수는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야 한다는 것은 성도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대가 만일 단 한 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속에 완전히 들어가 그 불타는 사랑이 주는 무엇을 맛본 일이 있다고 하면 그대 자신의 유익과 손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친 경건자의 외침을 부끄럽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한 번만이라도 그의 심장 속에서 타는 사랑을 맛볼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지금같이 앉아서 안이하게 영혼의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가 있습니까?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자라는 아이는 부모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자라는 성도는 하늘 아버지의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자라야 합니다. 자라되 말씀으로 자라야 합니다. 건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말씀은 중생시키는 말씀입니다. 한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이룹니다. 그리고 구원의 말씀은 양육시키는 말씀입니다. 거듭난 영혼이 자라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험한 세상을 거쳐 천국을 향해서 걸어갈 때,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저 악한 대적을 어떻게 물리치며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목적을 위해서 구원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목적의 말씀을 \\\"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성령의 검\\\"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승리하기 위한 완전 무장을 갖추기 위해서는 \\\"성령의 검 곧 말씀의 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지키는 많은 방어용 무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공격용 무기는 오로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칼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가까운 적들을 쳐 부수는 무기가 됨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화살이라고 할 때 그것은 멀리서 노리거나 공격해 오는 적들을 쳐부수는 데 사용되는 무기가 됨을 의미합니다. 방망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적이나 적의 무기가 숨겨져 있는 참호들을 때려 부수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이나마이트일 때 그것은 적의 성문과 성채를 파괴시키는 무기가 됨을 말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결함이 없는 완전한 무기로 원수 마귀들을 공격해서, 승리하며 사탄의 나라를 정복하고 복음으로 땅 끝까지 행군해 나가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이나 어느 때에나 완전한 승리를 보장해 주는 무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으로 완전 무장하여 어떠한 사탄의 공격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이 말씀이 주는 놀라운 승리를 감격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에서 바로 이 구원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먼저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그런데 저들은 그 말씀을 바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죽일 죄를 찾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의 손을 빌려서 죽였다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의 성취일뿐이라고 설교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도리어 죄인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고 부활하시며 이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바울의 설교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본문 38절과 3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믿는 자마다\\\" 라는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오순절 첫 번째 설교에서 이미 선언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놀라운 구원의 말씀을 받았는지,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도 놀라운 구원에 동참하게 되었는지 참으로 생각하면 놀라울 뿐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구원얻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먹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받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으로 승리하며 살도록 우리 손에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완전하고 능력이 충만한 하나님의 말씀, 구원의 말씀이 내게 있으니 아무 염려 없을 줄 믿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라는 베드로의 대답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말씀을 굳게 잡고 절대로 이 믿음에서 떨어지지 말고 주님과 함께 걸어 가셔서 말씀의 축복을 감격적으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의 비밀/ 엡3:1-13/ 정용섭 목사/ 주현절설교/ 2007-01-07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의 비밀 엡3:1-13 예루살렘 공동체와 이방인 공동체 예수님이 오늘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그런 공동체를 설립할 생각이 있었는지, 그걸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는지는 우리가 지금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예수님의 생애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특히 여기서 사도들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실천이 오늘 교회의 뿌리라는 말씀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연루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초기 기독교 안에 두 가지 큰 세력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 기독교 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는 물론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즉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생들이 지도자로 활동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공부를 할 때 짚은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유대교로부터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평생 살았던 유대교의 한 지파로 남아 있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가 있듯이 나사렛파로 자처했으며, 가능한 유대교와의 충돌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그대로 준수했습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 5:17,18) 이에 반해 이방인 공동체는 율법과의 단절을 시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이 보도하고 있는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의 의무를 벗겨주었습니다. 율법 문제로 인해서 이방인 공동체는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로부터 계속적으로 트집을 잡혔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방인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과의 병행이 아니라 자기들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전파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역사에 살아남은 교회의 뿌리입니다. 그 당시에 주류로 자처하던 예루살렘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역사에 살아남은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의 대표자는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역사적 기독교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오늘과 같은 교회의 모습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게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과 직접 생활했던 사도들의 교회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예수님을 직접적으로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대신 다마스쿠스 도상에서의 환상으로만 예수님을 경험했던 바울에 의해서 역사적 교회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우들에게 쓴 편지인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매우 중요한 신앙과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처인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그리스에 복음을 전한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려서 말씀을 전하다가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로 큰 저항을 받은 곳입니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도들을 불러 고별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행 19,20장 참조) 현재 터키의 서안에 위치한 에베소는 지역적으로 유럽과 이스라엘 중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유럽도 아니고 중동도 아닌 곳에 자리한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이 편지에서 유독 ‘일치’를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일치하는 공동체야말로 바울이 꿈꾸던 교회의 참된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바울의 신앙이며, 신학이었습니다. 그걸 깨달은 바울은 평생 이 일에 매진했으며, 그 열매가 곧 오늘의 교회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오늘 우리는 그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야겠습니다. 우선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심오한 계획을 나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은 헬라어 ‘무스테리온’을 가리킵니다. 영어로 ‘미스터리’라고 하는 그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끌어가는 단어는 바로 이것 무스테리온입니다. 개역성서는 비밀이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심오한 계획이라고 번역했고, 마틴 루터는 ‘게하임니스’라고 번역했는데, 모두 비슷한 뜻입니다. 은폐되어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은 이런 단어를 들으면 조금 당황하실 겁니다. 바울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밀을 전수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물론 그는 특별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가 깨달았다는 말은 점쟁이들이 점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바둑에서 남이 모르는 깊은 수를 발견하는 사건에 가깝습니다. 새로운 수는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비밀이지요. 그러나 드러나면 모든 사람이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바울은 무엇을 하나님의 무스테리온, 즉 비밀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비밀은 곧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획하신 일이 바로 그 비밀입니다. 그 내용은 6절입니다. “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신비로운 비밀을 기대했던 분들은 바울의 이런 진술 앞에서 실망할 겁니다. 여러분들이 늘 듣던 이야기입니다. 시시하게 들리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이 진술은 천기누설에 해당됩니다.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것,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던 것을 그는 지금 말하는 중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한 몸의 지체가 된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힘든 주장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실감 있게 이해하라고,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인과 기독교인이 모두 한 몸의 지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말로 바꿔놓고 들어보세요. 오늘 한국교회가 타종교에 대해서 얼마나 배타적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모두 사탄의 자녀들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마당에 타종교인도, 또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과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누가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지금 종교다원주의가 옳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이 그 당시에는 아주 혁명적인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턱대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지난밤 꿈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일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복음’입니다.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라는 바울의 진술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은 곧 율법과 대척점에 놓인 개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한 구원을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그걸 근본적으로 해체했습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이미 우리가 햇빛과 공기 안에서 살아가듯이 하나님은 생명을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셨고, 궁극적으로 완성될 그 생명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업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우리에게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적인, 도덕적인 의로움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매사에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으로 믿고 평생 동안 십일조 헌금을 꼬박꼬박 드린 사람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 아니라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평생 동안 반공주의에 물들어 살던 사람에게 비록 실패했지만 공산주의도 역시 사람답게 살만한 인류 공동체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바울은 지금 서로 적대적이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지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보았습니다. 그걸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건 바로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울에게는 보였으니 비밀이 분명합니다. 이런 바울의 신앙 때문에 역사적 교회가 출현할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비밀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전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전혀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이런 일들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걸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감춰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과거에 감추고 계시던 심오한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려 주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감춰졌던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이 이제 바울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온 세상에 전파된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렇게 되어 결국 하늘에 있는 권세의 천신들과 세력의 천신들까지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까지 더 볼까요?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내세워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입니다.” 조금 복잡한 문장을 우리는 위에서 읽었습니다. 바울은 하느님의 비밀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비밀은 감춰졌던 것인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비밀을 전하는 사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의 그 사명이 곧 오늘 교회에 주어진 동일한 사명입니다. 이 교회의 사명을 바울은 묵시문학적인 표상으로 설명합니다. 하늘에 있는 권세의 천신들과 세력의 천신들은 그 당시 제국의 군왕들을 가리킵니다. 황제들은 무소불위한 힘을 갖고 있는 하늘의 세력들과 똑같았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비밀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비밀, 하나님의 지혜를 이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알리는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밀과 그 지혜를 모릅니다. 유대인들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과 그 지혜의 간수자들입니다. 간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날까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비밀과 지혜의 간수자이며 증언자로 남을 수 있을까요? 앞서 저는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그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전체 인류가 일치하는 사건을 상징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전 인류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오늘의 교회도 역시 이걸 추구해야 합니다. 피부색, 성의 차이, 빈부의 차이가 없어지고, 궁극적으로 종교형식의 차이도 없어지는 일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종교적, 도덕적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거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걸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생산한 온갖 차이와 차별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서는 일입니다. 남북일치, 흑백일치, 노동현장에서의 일치가 필요하겠지요. 더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과의 일치까지 필요하겠지요.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권세자들은 교회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울 겁니다. 그러나 현실교회는 어떻습니다.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분리 아닌가요?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사회를 부정하고 타종교를 억누르고 있지 않나요? 자기가 잘났다는 걸 자꾸 확인하려고 들지 않나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그런 공동체와, 그런 대상과 일치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너울을 벗어라/ 출33:21-23, 고후3:14-17, 눅9:28-31/ 주현절제7주일설교/ 2006-02-19
너울을 벗어라 출33:21-23, 고후3:14-17, 눅9:28-31 구약의 말씀: 출애굽기 33:21~23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아멘.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후서3:14~17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9:28~31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아멘 제가 지난 번 설교했던 1월 두 번째 주일은 주현절이 시작되었던 날입니다. 주현절이 시작된 날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다음 주일은 주현절이 끝나는 주일로, 예수님이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위에 올라가서 얼굴이 변모했던 날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여성학자 도로테 죌레는 예수님의 일생을 ‘왕로(가는 길)’, 즉 요단강에서부터 산에서 변화한 것과 ‘귀로(돌아오는 길)’라고 표현한 광야의 시험에서 십자가의 죽음까지의 고난의 길,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데, 그의 얼굴과 옷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와서 서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너무나 기뻐서 이 세분을 모시고 속세를 떠나서 영원히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곳에 장막 세 개를 짓고 세 분을 모시고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 ‘너희는 내 사랑하는 아들의 말만 들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엘리야와 모세는 사라져 버리고 예수만 혼자 남았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종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광야로 데려나오고, 호렙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가장 하나님 가까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 온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과 매우 가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자신들이 목숨을 바쳐 섬겨 온 하나님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던 야훼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명상, 가부좌, 기도를 하고 결국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기 전에는 볼 수 없습니다. 상향적이 아니라 하향적입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의 깊은 본능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은 종교적인 리비도(libido)가 있습니다. 이런 본능으로 여러 가지 종교가 발생했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되어 과거에는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우주공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노공학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매우 작은 것들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은 볼 수 없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 앞에 나타났고, 예수의 얼굴이 햇빛처럼 빛납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의 얼굴이 보여진 것입니다.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logos)에 의해 창조되고, 율법이 주어지고, 예언으로 나타났지만, 그 말씀이 나타난 것은 바로 ‘예수’입니다. 즉, 로고스가 성육신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조차 그 분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 보면 빌립이라는 제자가 예수께 하나님을 한 번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는 이에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끝까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구원의 역사를 받기 위해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1)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말씀이 예언만 했던 구약, (2)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에 대한 복음서, (3)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인 사도들의 증언, 이 세 가지를 합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고, 예수의 사건도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라디오나 TV에서 유명한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을 때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이루어진 구약의 약속, 예수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왔다는 복음서의 말씀, 그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을 말해주는 사도서신을 모두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개 성경을 한 군데만 읽는데, 이런 설교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이나 율법은 마태복음 5장 17절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가 완성시키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장막을 짓고 세 분을 모두 모시고 싶다고 하자, 모세와 엘리야는 사져 버리고 예수만 남았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산에서 모시고 살면서 속세를 떠나서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것, 산에서 기도를 많이 하고 신비한 무엇을 보고 좋아만 하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는 산에서 환하게 빛난 후에 결국 산 아래로 내려와 수많은 고난의 길을 걷고, 햇빛처럼 빛나던 얼굴은 십자가에서 피땀으로 얼룩진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기독교신자 중에는 세속을 떠나서 산 속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 세상 속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만 지는 운동권의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반쪽 신자들입니다. ‘왕로’와 ‘귀로’를 함께 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이러한 성경의 진리를 보면서 가장 잊지 못하는 사람이 미국에서 흑인해방운동을 해다가 총을 맞아 죽은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그가 노예취급 받는 흑인들을 해방하기 위해서 워싱턴을 향해 20만 명의 흑인들과 함께 행진을 했습니다. 그때 했던 설교의 제목이 ‘나는 변화산에 다녀왔다’입니다. 나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흑인들을 이대로 둘 수 없고 이들이 백인들과 얼싸안고 노래하는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 행진해 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그 길에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전민족적으로 그의 생일을 공휴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그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장례식에는 전직 미국 대통령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얼싸안고 자유의 노래를 부르는 설교를 하며 미국의 역사를 만들던 이 킹 목사의 정신은 미국에서 아직까지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던 바로 그 변화산 꼭대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햇빛같이 변했던 예수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얼굴에서 나오던 태양 같은 빛을 내가 받아들일 때 내가 그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입니다. 여러분께서 이곳에 오실 때와 나가실 때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예수의 햇빛 같은 얼굴을 보고 그 빛을 받아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이 빛은 어떻게 반사됩니까.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이 빛을 받을 때 얼굴에서 너울이 벗어진다고 했습니다. 너울을 쓴 얼굴은 생각은 완고해져서 모세와 옛 약속인 율법을 읽을 때 그들의 말이 그 너울에 벗겨지지 않으며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온다고 할지라도 크리스천이 아닌 것은 얼굴에 너울을 벗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린도후서를 쓴 사도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율법학자였습니다. 그가 율법을 깊이 공부하다보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없애버리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나 눈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면서 율법을 통해서 보던 예수에서 환하게 변화된 그리스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신약성서의 13개 서한을 쓴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경동교회 이 자리에서 빛나는 예수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 증거는 내 얼굴의 너울이 벗겨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너울이 벗겨지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입니다. 내 삶의 초점은 변화산에서 환하게 변한 예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얼굴이며, 이 빛이 반사되면서 내 너울이 벗겨집니다. 너울을 벗었다는 의미는 자유가 오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랑이 생깁니다. 내가 내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봐서는 사랑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내 너울을 벗고 예수 얼굴의 빛에 반사된 눈으로 볼 때에 비로소 사랑과 평화가 생겨납니다. 예수의 태양빛 같은 얼굴, 겟세마네동산에서 피 흘리던 얼굴, 갈보리산에서 가시관을 쓴 얼굴은 결국 부활로 나타납니다. 환한 하나님의 얼굴로 나타나서 승천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주전체가 그의 죽음, 부활,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되어지는 ‘우주적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꽃 한송이를 보아도 예수의 얼굴을 보게 되고, 길거리에서 돼지를 모는 이를 보아도 예수의 얼굴을 봅니다. 우리가 이 예배를 마치고 역사의 현장에 나가서 산다는 것은 너울을 벗은 채 세상을 보고 많은 고난을 겪는 사람들 속에서 고난을 함께 겪어 가는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불교를 대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 난 기독교인이고 너는 우상숭배를 하므로 나는 가까이 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둘째, 나는 기독교인이고, 너는 불교인으로서 서로 다른 점을 이야기 해보자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은 기독교라는 너울을 벗어 버리고 불교도를 불교도로서 대하는 태도인데 이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듯 미식축구의 영웅이 된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는 기지촌에서 흑인하고 같이 살고 흑인아이를 낳은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건너가 아들을 키우는데, 가는 곳마다 천대를 받았습니다. 교회에서도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 아이를 키워낸 이 여성의 말들이 도인 같습니다. 올라가면 내려올 때가 있다, 겸손하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그 어머니의 얼굴과 하인스 워드의 얼굴에서 항상 웃음을 보았습니다. 한국말도 잊은 워드가 제일 먼저 했던 말은 “어머니 사랑합니다” 였고, 상금으로 한국인 유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위해 어머니 성함으로 재단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기지촌의 이 여성을 바라보았던 시각은 천대 아니면 동정이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 여성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별명 중 하나가 “창녀의 벗”이었습니다. 스승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벗’이었습니다. 창녀를 내 눈으로 보면 너울이 썼으므로 창녀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우선 정치를 보십시오. 장관 다섯 명을 임명하면서 청문회를 했습니다. 야당은 전부 부적격하다고 하고, 여당은 전부 적격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대통령은 그 다음날 다섯 명 전부를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청문회는 왜 합니까? 여당사람들은 열린우리당이라는 너울을 쓰고 보고, 야당은 반대하는 너울을 쓰고 봅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너울을 벗어버린 얼굴로 보는 것입니다. 나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내 눈을 변화산 위에서 햇빛처럼 빛나는 예수의 얼굴만 보고 그 눈의 반사체로써 교회, 사회, 역사, 정치의 모든 것을 봐야합니다. 그렇게 가는 우리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은 고난의 길입니다. 앞으로 6주 동안 그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내 너울을 벗어버리고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사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일한다는 것은 이 교회에서 예수의 얼굴과 예수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예수가 간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로 향하는 고난의 길이지만, 부활과 온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지는 길을 사순절 기간 동안 함께 가는 신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강원용 목사(서울 경동교회)의 살아 생전 마지막 설교
삶의 깊은 곳으로/ 행19:1-10/ 김기석 목사/ 주현절설교/ 2002-01-11
삶의 깊은 곳으로 행19:1-10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바울은 높은 지역들을 거쳐서, 에베소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몇몇 제자를 만나서,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는데,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서 믿으려 하지 않고, 온 회중 앞에서 이 ‘도’를 비난하므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서, 날마다 두란노 학당에서 강론하였다. 이런 일을 이태 동안 하였다.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 주현절의 소명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1월 6일 소한은 몹시 추웠습니다. 사실 그날은 교회 절기상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었습니다. ‘주인 주’에 ‘나타날 현’ 자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날을 별로 중시하지 않지만 교회 전통에서 이 날은 매우 중요합니다. 서방교회는 주현절을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예물을 바친 날로 기념합니다. 동방교회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심을 보았던 사건을 기념합니다. 세계 교회는 이 두 전통을 통합하여 주현절인 1월 6일은 서방교회 전통을 따라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념하고, 주현절 첫째 주일은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 예수님의 세례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공적으로 증언된 날입니다. 주현절기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까지 계속됩니다. 주현절과 주현절 첫 번째 주일, 그리고 주현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산상변화 주일의 강단색은 흰색이고, 그 나머지 약 4-6주간은 초록색입니다. 흰색은 영광과 기쁨이고 초록색은 성장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주현절기 동안 주님의 공생애를 묵상하면서 주님과 함께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성실문화>, 81호 참고)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한 일화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의 고원지대를 지나 마침내 에베소에 이르렀습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서남부에 있는 도시인데, 바울 당시에는 아시아주의 수도였습니다. 에게해에 면한 항구도시였는데, 위도상으로 보면 아테네와 마주보는 곳이었습니다. 그리스와는 뱃길로 멀지 않은 탓에 내왕이 잦았다고 합니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판-이오니아 경기가 거행되기도 했습니다. 에베소는 한창 물 만난 도시였습니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지만 에베소의 도서관이나 신전 유적들, 극장과 원형 극장은 그곳이 얼마나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발달한 곳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곳은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말미에 이곳에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에게 더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돌아오겠다(행18:21)고 약속한 후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대로 에베소로 돌아온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몇몇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 세례와 성령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1세기의 지중해 세계 도처에는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있든 토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욕망에 따라 흥청망청 살아가는 이들이 보기에는 낯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낯설었기에 배척을 당하기도 했지만, 높은 도덕성과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매료된 이들도 더러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이들은 회당에 와서 율법을 배웠고, 친분이 쌓이면서 유대인들의 정착생활을 지원하는 협력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경건한 사람들’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이들입니다(행13:43, 50, 17:4).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 때 만났다는 ‘제자들’ 역시 그런 이들을 지칭하는 말일 겁니다. 그들은 대개 알렉산드리아 출신 학자인 아볼로를 통해 유대교에 입문한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바울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즉시 그들이 진리 안에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바울은 망설임 없이 묻습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이 질문은 좀 뜬금없어 보입니다. 친교를 위해서는 조금 더 부드럽고 친절하고 우회적으로 물어야 하는 법인데, 바울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입니다. 제자들은 당황하며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대화를 통해 바울은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요한의 세례가 그들의 지난날의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이지만,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요한도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배움에 열정이 있던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장면을 머리에 그리는 순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자 사울은 예언자의 무리와 함께 춤추며 소리를 지르면서 예언을 하였다고 합니다(삼상10:10).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는 체험은 그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도와달라고 각지에 사람을 보냈지만 누구도 선뜻 그들을 도우러 나서지 못했습니다. 사울에게 그 소식이 들려왔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그때 사울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습니다(삼상11:6).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뭔가를 깨웁니다. 때로는 신명을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불의에 대해 분노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권능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는 말을 저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 있는 유서 깊은 교회들은 세례반洗禮盤 제작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세례를 위해 별도의 세례당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세례를 중시했다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 대개 세례반이나 세례당은 8각형 구조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 철학자인 피타고라스 이후 숫자는 세계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숫자 상징이 많습니다. 3이 하늘의 완전을 뜻한다면 4는 지상의 완전을 상징합니다. 그 결합수인 7과 12라는 수 역시 완전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8은 뭘까요? 그것은 세속의 시간을 지난 이후의 시간, 곧 부활의 시간입니다. 세례반이나 세례당을 8각으로 만드는 것은 세례를 통해 옛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상징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상징하지만, 예수의 세례는 회개를 넘어 부활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 영성이란 무엇인가? 예수의 세례가 성령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령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시켜줍니다. 여러 해 전부터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탁월한 원로 신학자이신 김경재 박사님은 최근 한 신문에 보낸 특별 기고문에서 영성이 무엇인지를 깔끔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그 중의 몇 가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영성은 지성, 감성, 덕성을 아우르면서 세계를 전일성과 상호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마음의 능력이다.” “영성은 하늘과 땅과 사람, 그 셋이 구별되면서도 상호 내주하고 회통관계 속에 있음을 자각하는 깨어난 의식이다.” “영성은 우주에 편만하면서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는 신비한 실재가 자비, 사랑, 충서忠恕[참 마음과 용서]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능력이다.” (한겨레신문, 2015년 1월 9일자 30면, <생태론적 영성과 영적 치매> 중에서) 조금 어려운가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영성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까 세상에 나와 무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깊음을 체험한 사람의 삶은 자비, 사랑, 참 마음과 용서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해지기를 소원합니다. 요즘은 많이 부르지 않았는데 이전에는 즐겨 부르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302장입니다. 주 하나님의 넓고 큰 은혜가 큰 바다보다 깊으니, 이제는 망설임을 떨치고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가보라는 내용입니다. 3절이 기가 막힙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우리는 정말 얕은 물가에서 자박거리기만 할 뿐 진리의 깊은 바다에 몸을 던질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두렵더라도 물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수영을 배울 수 없는 것처럼, 더 큰 세계에 나를 던지지 않으면 영적으로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력을 신뢰할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와 하나님의 마음에 잇대어 살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성령 받았다고 사람들 앞에 떠벌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순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 체험을 특권으로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합니다. 종교 체험을 자기 강화 혹은 이익의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미혹된 자들입니다. 그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 두란노 학당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바야흐로 하나님 나라의 꿈이 에베소에서도 영글어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나 방해는 있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완고해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온 회중 앞에서 그 ‘도’를 비난했습니다. 아직 기독교라는 말이 정착하지 않은 탓에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그 도’라고 말했고, 믿는 이들을 가리켜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행9:2)’로 불렀습니다. 도는 길이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걸어가신 길을 걷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길은 걷기 위해 있는 것이지, 고백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회당 안에 있는 적대자들과 다투기보다는 배울 마음이 있는 이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두란노 학당을 빌어 날마다 강론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두란노 학당’이 어떤 곳인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두란노는 원래 사람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공공 교육 시설이 없었기에 배우려는 이들은 스승이 될 만한 이들을 찾아가서 개인교습을 받곤 했습니다. 제자들이 많이 몰리는 스승들은 학당 혹은 서원을 만들어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제일 잘 알려진 것은 역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일 겁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학생들이 주로 배우려 했던 것은 철학, 수사학, 수학 등이었습니다. 두란노는 에베소에서 꽤 유명했던 철학자였다고 하는데, 그가 죽은 후 뒤를 이어갈 사람이 없어서 학당이 비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학당을 빌어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햇수로 이 년이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공들여 가르치는 사람과 최선을 다해 배우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찹니다. 그들은 단순히 지식만을 전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배우고 익혔을 것입니다. 나찌가 교회를 황폐화시키고 있을 때 디트리히 본회퍼가 운영했던 핑켄발데 신학교가 떠오릅니다. 그는 그곳에서 학생들과 함께 살면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진리 공부를 하면서 엄혹한 시기의 빛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도 이런 학당이 필요합니다.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에베소에서는 참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을 통해 많은 병자들이 낫고 귀신들이 쫓겨났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신도가 된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누가는 에베소 선교의 성과를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행19:20)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바로 만나야 합니다. 말씀과 만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과 만날 때 성령이 임합니다. 말씀과 만날 때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사는 이들은 삶의 깊이의 차원과 만나기 참 어렵습니다. 욕망과 충족과 권태의 쳇바퀴를 돌리느라 온통 마음을 쓰는 동안 우리 영혼은 파리해집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야 하니 늘 자극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삶을 담담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랑의 능력도, 공감의 능력도 줄어듭니다. 조롱과 냉소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합니다. 이제 정말 깊은 곳을 향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꽃을 꺼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현절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 마음에 하늘의 빛이 비쳐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 목사(서울 청파감리교회)
예레미야의 소명/ 렘1:4-10/ 정용섭 목사/ 주현절설교/ 2007-01-28
예레미야의 소명 렘1:4-10 아나돗의 예언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1:1-3절에 예레미야의 신상에 대한 몇몇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그는 아나돗에 사는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아나돗은 제사장 아비아달이 솔로몬의 왕위 등극 이후 추방당한 곳입니다. 몰락한 제사장들이 유배당했던 지역인 셈입니다. 이곳 출신 예언자들은 당연히 사독 계통의 후손들이 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있던 예루살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었겠지요. 예레미야가 야훼의 말씀을 받기 시작한 것은, 즉 신탁(神託)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요시야재위 13년이 되던 때였다고 합니다. 7세기 초입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멸망당했고,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기 얼마 전입니다. 예레미야가 요시아 왕과 나이가 비슷하니까 대충 20살 안팎의 나이에 야훼의 말씀을 받기 시작해서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킴이 왕위를 물려받은 시기와 또 다른 아들인 시드키야가 왕위를 다시 물려받고, 결국 유대귀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던 기원전 587년 전후까지 그는 매우 오랫동안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이런 설명을 들은 여러분은 예레미야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실 겁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예언자로 활동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옳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집단인 예언자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기 말아야 할 사실은 예레미야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역사 과정에서 등장한 예언자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확고한 영적인 권위를 확보하고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일관성을 확보하지도 못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점쟁이 비슷한 역할도 했고, 국가와 왕을 종교적으로 보위하는 역할도 했고, 때로는 사람들을 거짓말로 선동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금 더 냉정하게 본다면 오늘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발견하는 예언자들보다는 사이비 예언자들의 활동이 그 왕성했습니다. 다행히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몇몇 참된 예언자들이 역사에 등장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예언자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예언자 전통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여러 세력의 각축을 통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역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예레미야라는 예언자의 소명 장면을 읽었습니다. 그 자리에,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야훼 하나님의 선택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내렸다고 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났습니까? 예레미야는 야훼 하나님이 예정하고 세우신 특별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옳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더 실제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야훼는 무슨 방법으로 예레미야에게 말을 걸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는 야훼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을까요? 아니면 예레미야의 주관적인 깨달음일까요? 어느 순간에 그에게 임한 확신일까요? 모차르트는 무슨 소리를 듣고 작곡했을까요? 이런 걸 분간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요즘도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처럼 말하고 다닙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가 들은 야훼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맙시다. 그것은 예레미야의 고유한 체험이기 때문에 우리가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대신 그가 들은 말씀의 내용으로 들어가는 게 좋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 문제가 조금씩 해결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5a절 말씀은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뽑아 세웠다고 합니다. ‘뽑아 세웠다’는 히브리어 ‘야다’는 ‘안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지적인 앎을 넘어서는 총체적인 인식을 가리킵니다. 이런 일들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5b절은 야훼께서 예레미야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예언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한 인격체가 구체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야훼가 그를 예언자로 삼았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야훼 말씀을 자신의 개인적인 실존 경험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야훼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삶을 초월하는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런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들립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삶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결국 자기가 잘되기 위한 것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고 기도 많이 해서 복 받고 살자는 것입니다. 복 받지 못한다면 말씀도 없고, 봉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어서 활동하는 야훼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야훼의 말씀과 대면했습니다. 아! 야훼 나의 주님 자신을 예언자로 삼았다는 야훼의 말씀을 경험한 예레미야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6절) 예레미야는 ‘아!’라고 탄식합니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외침입니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아이이며, 다른 하나는 말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레미야의 나이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스무 살 안팎이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겠지만 스무 살의 나이는 한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어려보이는 걸 분명합니다. 그는 말솜씨가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렇게 타고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레미야가 나이가 든 다음에 말을 잘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대중들이 그의 예언을 듣기 싫어했다는 걸 보면 그가 대중을 쥐락펴락할만한 연설솜씨가 없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의 소명은 여기에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예언자의 일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는데, 야훼의 말씀은 자기에게 압박해 들어옵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딜레마는 오늘도 많은 설교자들이 당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실존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딜레마는 단지 설교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려는 여러분이 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잘 모릅니다. 물론 고민하지 않고 단순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고 봉사하면서 사는 것 말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모든 일들이 이런 방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그대로 살기 어렵다는 사실과 더 근본적으로는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갈등을 겪습니다. 이런 갈등이 없다는 것은 이미 도사가 되었든지 아니면 어떤 것에 완전히 세뇌당한 것이겠지요. 야훼의 소명을 받은 예레미야는 지금 어린 나이와 어눌한 말솜씨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와 말솜씨 자체가 핵심은 아닙니다. 그는 당대에 아무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리와 직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나이가 어리다거나 말솜씨가 없다는 이유로, 즉 예언을 할 만한 외적인 권위가 없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했습니다. 어린 예언자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저하고 있는 예레미야를 향해서 주신 야훼의 말씀인 7,8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사람들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7,8절) 17b절에서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인들에게 두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레미야처럼 위대한 예언자도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서 제국의회가 있는 보름스에 갈 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마귀가 제국의회 건물의 기왓장처럼 많더라도 나는 가서 진리를 말하리라.” 그만큼 두려움이 컸다는 말이겠지요. 어리다는 이유로, 말솜씨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예레미야를 휩쌌습니다. 포퓰리즘 예레미야가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두려움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야훼의 명령이 훨씬 강력한 경험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말씀,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야한다는 말씀이 그의 실존 전체를 사로잡았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예레미야에게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야훼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요? 당연히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위대성입니다. 이런 선택이 겉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참으로 어려운 부분입니다. 성서에는 자세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예레미야는 여기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는 가능한대로 소명을 피하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예언자들처럼 민중들을 적당하게 위로해주고 “다 잘될 거다.” 하고 예언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습니다. 민중들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어 하거든요. 예레미야 시대의 대다수 예언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예언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바벨론을 물리쳐주실 거라고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것과는 정반대로 예루살렘이 초토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예언은 웬만하면 하기 싫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어렵기도 합니다. 제가 지난 몇 년 동안 진행한 설교비평 작업에서 젊은 설교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서텍스트에 충실한 설교를 하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대중추수주의(포퓰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퓰리즘는 바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예레미야처럼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인, 요즘 설교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삶의 무게를 놓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갑니다. 만약에 사람들의 평판과 눈치를 넘어설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영과 훨씬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야훼의 말씀 우리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무인도에 가든지 산골짜기에 가지 않는 한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눈치를 직간접적으로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결국 야훼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어느 정도로 사로잡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7b절을 보실까요?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예레미야의 영혼을 울린 야훼의 말씀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두렵지만 야훼의 말씀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씀이 자신의 실존 전체를 휘감았습니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떤 황홀한 빛에 휩싸이듯이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듯이 그 소리를 따라서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영적인 상태에서 그는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문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8절) 우리 기독교인들은 역할은 다를지라도 모두 예레미야처럼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소명을 받았다는 건 야훼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히 채운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야훼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이 말씀은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훨씬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참된 생명 사건인 이 부활과 말씀의 빛이 여러분의 영혼을 환하게 비추기 바랍니다.
예수는 빛이다/ 마4:12-22/ 정용섭 목사/ 대구샘터교회/ 주현절설교/ 2011-01-23
예수는 빛이다 마4:12-22 오늘 설교 본문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뒤에 시작된 예수님의 활동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근거해서 해명한 이야기이고(마 4:12-17),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어부였던 네 명의 청년을 제자로 부른 이야기입니다.(막 4:18-22) 이 이야기는 3장과 4장의 전체 주제와 연결됩니다. 그것은 주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사건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씀 선포,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 받은 사건,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 전에 당한 세 가지 시험, 오늘 설교 본문의 두 가지 이야기, 마지막으로 23-25절에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유대 전 지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보도입니다. 세례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선포는 똑같습니다.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선포했고,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선포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이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이유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가 특수하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출생 순간부터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양쪽의 출생은 모두 천사에 의해서 예고되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임신 중에 서로 만난 일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뒤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똑같이 증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흑암과 빛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기대했지만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의 앞길을 예비할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와 메시아는 격이 다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태가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도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메시아를 증언하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사 9:2절을 인용한 본문 마 4:1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소위 제1 이사야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기원전 8세기 초에 활동했습니다. 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습니다. 그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당했고(BC 721), 남유다도 크게 위협을 받던 때였습니다. 총체적으로 불안한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틈틈이 하나님의 구원을 전했습니다. 평강의 왕이 와서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외침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이사야가 외친 평강의 왕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가 말하는 ‘흑암을 비추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흑암, 사망의 땅과 그늘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사야는 물론 당시의 어려운 정치 사회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처한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 지배 아래에 있을 때입니다. 종교적으로도 흑암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세례 요한에게 민중들이 몰려나갔다는 것은 민중들의 영혼이 흑암 가운데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몰려드는 민중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28) 여기서 짐은 종교적인 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이사야나 마태복음 시대와 다르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생존의 위기를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아직 남북이 대치하고 있고,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먹을 게 넘치고,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지만 않는다면 그런대로 삶을 즐기면서 지낼 만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오늘 우리의 행복 지수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조사방식에 따라서 약간 다른 결과가 나오겠지만, 별로 높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보다도 못합니다. 행복한지 아닌지의 척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긴장의 강도입니다. 수억 원의 주식을 사 놓고 매일 긴장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긴장하면서 삽니다. 심한 경우에는 유치원 시절부터 긴장합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는 말이 바로 우리를 가리키는 게 아닐는지요. 복지제도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개인의 인생관이 건강하게 자리를 잡으면 흑암이라는 우리의 실존이 모두 해결될 수 있을까요? 북유럽 국가들처럼 요람에서 무덤까지 긴장하지 않고 삶을 즐기면서 여유 있게 살아가면 빛이 필요 없어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특별히 돈이 신처럼 추앙받는 이 시대는 우리를 모두 그쪽으로 몰아갑니다. 돈, 명예, 건강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런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무엇으로도 우리의 내면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삶의 조건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는 약간만이라도 삶을 통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기자들도 그 사실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서가 어떻게 진단하는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생명과의 단절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것으로 채워도 우리 생명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비슷합니다. 흑암 속에서 시력이 좋아지는 연습을 하거나 약을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흑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빛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은 곧 그를 통해서 생명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 생명의 완성이 구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 사실에 토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이 그 토대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약간 다른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생명과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흑암에 사는 것 같습니다. 아직 내면이 불안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기초적인 대답은 영성이 아직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음악 공부나 시 공부와 비슷해서 깊이 있게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면 분명히 다른 삶의 경지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성이 깊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죽기 전에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것처럼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통해서 생명의 완성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라 마태복음 기자는 그런 삶을 두 번 째 사건에서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과 가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당시 서른 살 정도 되었다면 제자들은 그보다 어렸겠지요. 처음에 보자마자 곧 부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겠지만 성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빛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제자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냥 감정적으로, 충동적으로 나서는 게 아닙니다. 첫 눈에 반한 여자나 남자가 서로 끌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럴 때만 제자의 삶은 가능합니다. 생명의 빛인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말 그대로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따르는 게 아니라 예수처럼 살자고 주장합니다. ‘예수살기’라는 모임도 있습니다. 값싼 은혜에 빠져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신앙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으로도 세상에서 모범을 보일 필요도 있긴 합니다. 요즘처럼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상의 판단이 부정적인 때는 더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를 대신할 것처럼 나서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모범을 보여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세상이 변하지도 않습니다. 인간과 세상을 낭만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쉽게 부패하고, 이기주의에 떨어지고, 자기도취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빛을 반사시킬 뿐입니다. 사실 빛을 반사하는 것조차도 우리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빛을 받아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피조물입니다. 오죽 했으면 바울이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헬라인이나 모두 총체적으로 죄에 빠졌다고 말했겠습니까. 빛을 향해 영혼의 촉수를 뻗치는 게 최선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영적 태도입니다. 둘째,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로 그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만 제자가 되고 나가서는 제자가 아닌 것처럼 산다면 예수님을 빛으로 아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전체 삶이 제자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직장, 가정, 이웃과의 모든 관계에서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건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존재의 변화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이 모든 것이 변화된 것입니다. 사람이 무슨 방식으로도 손을 댈 수 없는 차원에서,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한 차원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삶 전체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자나 깨나 기도하고, 말씀 읽고, 전도하고, 가능하면 교회생활에 매달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걸 원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탈속적으로 살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으로 사셨습니다. 시장에서 시장 사람들과 만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살아내셨습니다. 여러분이 굳이 종교적인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실제로 빛으로 경험했다면 여러분은 어디서나 온전히 제자로 자리를 잡게 될 겁니다. 오늘은 주현절후 셋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것을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이것처럼 놀랍고 위대한 사건은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이고 구원이고 빛입니다. 마태가 인용한 이사야의 예언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빛이십니다. 아멘.
오직 예수님/ 마17:1-8/ 주현절제1주일설교/ 2011-01-07
오직 예수님 마17:1-8 -우리교회는 2011년 새해 표어를 ‘다음 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3대 목표로 교육, 전도, 나눔으로 정하고, 새해에는 온 교회가 힘을 모아 이 표어와 목표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교회와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 중심의 신앙으로 힘을 모을 때 금년의 표어와 목표를 이루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월 흘러 갈수록 우리들의 눈에는 예수님만 보여 지고...우리들의 가슴은 예수님으로 만 가득 채워지고...예수님만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하는데...어인 일인지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간 곳 없고... 오직 세상적인 것들만 우리들의 마음을 가득하게 메워 옵니다. -이것은 종말을 사는 성도들의 믿음이 아닙니다. -2011년도 새해는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는 이태리가 낳은 천재적인 화가요, 조각가요, 건축가요, 과학자입니다. 그의 나이가 43세가 되었을 때에 밀라노의 \\\\\\\\\\\\\\\'로드비코\\\\\\\\\\\\\\\' 공(公)이 예수님 최후의 만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서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12제자가 세 사람씩 그룹을 지어 양쪽에 6명씩 앉아있고...중앙에는 예수님이 오른손에 은잔을 들고 계시는 그림이었습니다. 작품이 완성되면 절친한 친구를 불러서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림의 잘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이 어디 있는가 의견을 듣는 것이 당시 화가들의 관례였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친구에게 그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림을 본 친구가 깜짝 놀랍니다. 아직까지 그런 그림을 본 일이 없는 최대의 걸작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특별히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있는 은잔(銀盞)이 너무나 섬세해서 그 잔에서 눈을 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붓을 들어 은잔을 지워버렸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시선을 끌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눈길을 끌어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세심하게 잘 그린 은잔을 지워버리고...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투박한 잔을 들고 있는 그림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완성된 것이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님\\\\\\\\\\\\\\\' 만 보이는 종교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 보이면 됩니다. 예수님만 보고 믿으면 그 안에 구원이 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도록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금년에는 다른 것은 다 안 보여도 예수님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장차 이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 나라...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데... 오직 예수... 그 분 한 분만 있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먹을 때에도... 마실 때에도..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이제 하려고 하는 일에도... 오직 주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을 할 때에도...길을 걸어 갈 때에도...쉴 때에도...\\\\\\\\\\\\\\\'오직 예수님\\\\\\\\\\\\\\\' 을 외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인생은 가장 복된 사람이 됩니다. /할렐루야..! -\\\\\\\\\\\\\\\'오직 예수님\\\\\\\\\\\\\\\' 만 바라보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 자기 자신이 너무 크게 보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 자신이 너무나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자기의 성공이 크게 보이고...자기의 재산이 크게 보이고...자기의 학벌이 너무 크게 보이고...자기의 미모가 크게 보이고...자기의 자리가 크게 보이면...그런 성도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예수님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변화 산의 세 제자들도... 자신들이 다른 제자들 보다 더 크게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12제자 중에 3제자... 자기들만 예수님이 산 기도에 데리고 오셨고...또 이런 주님의 변모하시는 영광스런 광경까지 보게 되었으니...그 자리에 못 온 10명의 제자들 보다 자기들이 더 크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산 아래 10제자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여, 아예 여기다 초막 셋을 짓고 주님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남다른 특별대접을 받으면 자부심이 생기게 됩니다...그것이 좀 도가 지나치면...교만한 마음이 생기면서...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고... 더 지나치면... 예수님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지경까지 가게 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내리막길이 됩니다. -내리막길 정도가 아니라 사정없이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시각이 달라지고...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겸손해 집니다. -자신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존중해 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며... 바울처럼...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성도가 됩니다. -여러분..! 새해 우리 중에도 “누가 더 크냐?” 하면서 제자들처럼 도토리 키 재기식 다툼을 하면서...내가 너보다 더 크고...너보다 더 낫다는 식의 인생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우리들 눈에 \\\\\\\\\\\\\\\'오직 예수님\\\\\\\\\\\\\\\' 만 보이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겸손을 배우고, 그 분의 넉넉한 사랑의 가슴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교회 생활을 함께 하다보면... 성도들끼리 부딪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서... 많은 교인들이 상처를 받고 시험이 드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여러분 새해에 우리 성도님들은 \\\\\\\\\\\\\\\'오직 예수님\\\\\\\\\\\\\\\' 만 바라보면서...상처를 입히는 일도... 상처를 받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은혜보다 법이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3-4절을 읽어보십시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본문을 눈여겨보면... 제자들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이 제일 먼저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연대를 따진다면...모세가 가장 먼지이고...다음이 엘리야입니다. -예수님은 세분 중에 맨 나중 분이십니다. -율법주의자들, 바리새인들인들...제사장들, 서기관들의 시각으로 보면...예수는 맨 나중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모세\\\\\\\\\\\\\\\'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율법이 가장먼저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능력 있었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들의 대표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서 자행자지 한다고 책망하면서...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율법, 규례, 법도와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복음을 전하신 분이십니다. -율법이 법과 관습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것이라면...복음은 은혜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은... 법이 어떻고...규범이 어떻고...전통과 관습이 어떻고 하면서...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새로운 것을 증오하고...과거에 집착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만 바라보는 사람은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는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율법으로 교인들을 정 죄 해서는 안 됩니다. -전통이니.. 규범이니.. 관습이니 고집하면서...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신세대 교인들을 꾸짖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변화를 시도하려는 운동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새 술은 새 가죽 부대에 넣으려는 젊은 세대들을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은혜의 새 물결이 넘쳐흐르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새 시대가 오고... 새 문화가 물밀 듯이 엄습해 오는데...우리는 모세 시대의 율법적 과거에 얽매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면 교회성장이 정체됩니다. -부흥의 불길이 꺼집니다. -성령의 은혜와 복음이 설자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들 때문에 아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교회가 금년에 ‘다음 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젊은이들을 이해하고, 청소년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어른들이 되고,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것들은 왜 저모양이야..! -이렇게 신세대들을 나무라면 안 됩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우리를 따라오도록 강요하지 말고...우리 어른세대들이 젊은이들을 따라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으로 펼쳐지는 세월은 다 젊은이들의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교회는...은혜보다 율법이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용서보다 정 죄가 앞서 서는 안 됩니다.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었듯이...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오늘도 주님의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가 젊은 세대로 변화되어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 사명의 자리보다 안주의 자리가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산 위에서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한 세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자리에서 받은바 은혜만 유지하면서 예수님 모시고 그곳에서 평안히 지내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변화 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놀라운 영광의 광경을 보여 준 것은 전혀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3자 회담을 하신 것은... 바로 \\\\\\\\\\\\\\\'십자가\\\\\\\\\\\\\\\'를 의논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는 ‘십자가’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통하여 뜻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산 위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정하고 계시는 데... 무지한 3 제자들은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읍시다..”고 주장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평안히 안주(安住) 하다가...갈 때가 되면 천국 가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성도들의 \\\\\\\\\\\\\\\'무사안일주의 신앙\\\\\\\\\\\\\\\' 을 대변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초막 세 채를 짓자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예수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베드로, 야고보, 요한... 모두가 어부출신들입니다. 배는 잘 젓고, 고기는 잘 잡지만... 집 짓는 일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수 출신입니다. 그러니 집 짓는 일을 시작하였다가는 목수 출신인 예수님 혼자 일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애들아, 산 아래로 내려가자..” 고 말씀하셨답니다. -초막을 짓자고 제안하는 3 제자들의 저의(底意)가 무엇인지...주님이 꿰뚫어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잘 믿는 척... 은혜 받은 척... 사명 있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을 제자들의 모습을 알고 계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스개 소리로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요즘 교인들은 교회에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 싫어합니다. 희생과 수고와 땀 흘리며 충성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냥 이 한 몸 평안하게...부담 없이...교회에서 있는 듯 없는 듯...예배 출석이나 하고...조용히 예수 믿다가...갈 때가 되면 천국 가고 싶은 것이 오늘의 교인들의 태도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교인들 많습니다. -직분 맡고... 교회를 섬기고... 땀 흘리고... 십자가를 지고...수고롭게 충성하는 것... 귀찮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일 만사가 귀찮고 골치만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한 한 맡고 싶지 않습니다. -선교회임원 하는 것조차 싫고 귀찮습니다. -그냥 차라리 돈으로 하라 하면 하겠다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이런 교인들 여러분..! -분명히 아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교인들 천국 오는 것 귀찮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지...천국은 왜 오려고 하는지... 너희들이 나의 일을 귀찮아하는 것처럼 나도 너희들이 귀찮다고...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도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34-38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며... 산 아래로 내려가자...하시면서 변화 산에서 문제 많고, 일 많은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오직 예수\\\\\\\\\\\\\\\' 만 바라보는 성도들은 사명使命의 자리보다 안주安住의 자리가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이양덕 목사
오직 예수님/ 마17:1-8/ 주현절제1주일설교/ 2011-01-12
오직 예수님 마17:1-8 -우리교회는 2011년 새해 표어를 ‘다음 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3대 목표로 교육, 전도, 나눔으로 정하고, 새해에는 온 교회가 힘을 모아 이 표어와 목표를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교회와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 중심의 신앙으로 힘을 모을 때 금년의 표어와 목표를 이루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월 흘러 갈수록 우리들의 눈에는 예수님만 보여 지고...우리들의 가슴은 예수님으로 만 가득 채워지고...예수님만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하는데...어인 일인지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간 곳 없고... 오직 세상적인 것들만 우리들의 마음을 가득하게 메워 옵니다. -이것은 종말을 사는 성도들의 믿음이 아닙니다. -2011년도 새해는 \'오직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는 이태리가 낳은 천재적인 화가요, 조각가요, 건축가요, 과학자입니다. 그의 나이가 43세가 되었을 때에 밀라노의 \'로드비코\' 공(公)이 예수님 최후의 만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서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12제자가 세 사람씩 그룹을 지어 양쪽에 6명씩 앉아있고...중앙에는 예수님이 오른손에 은잔을 들고 계시는 그림이었습니다. 작품이 완성되면 절친한 친구를 불러서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림의 잘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이 어디 있는가 의견을 듣는 것이 당시 화가들의 관례였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친구에게 그 그림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림을 본 친구가 깜짝 놀랍니다. 아직까지 그런 그림을 본 일이 없는 최대의 걸작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는 특별히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있는 은잔(銀盞)이 너무나 섬세해서 그 잔에서 눈을 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붓을 들어 은잔을 지워버렸습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시선을 끌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눈길을 끌어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세심하게 잘 그린 은잔을 지워버리고...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투박한 잔을 들고 있는 그림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완성된 것이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직 예수님\' 만 보이는 종교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 보이면 됩니다. 예수님만 보고 믿으면 그 안에 구원이 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도록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금년에는 다른 것은 다 안 보여도 예수님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장차 이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 나라...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데... 오직 예수... 그 분 한 분만 있으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먹을 때에도... 마실 때에도..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이제 하려고 하는 일에도... 오직 주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을 할 때에도...길을 걸어 갈 때에도...쉴 때에도...\'오직 예수님\' 을 외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 인생은 가장 복된 사람이 됩니다. /할렐루야..! -\'오직 예수님\' 만 바라보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 자기 자신이 너무 크게 보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 자신이 너무나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자기의 성공이 크게 보이고...자기의 재산이 크게 보이고...자기의 학벌이 너무 크게 보이고...자기의 미모가 크게 보이고...자기의 자리가 크게 보이면...그런 성도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예수님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변화 산의 세 제자들도... 자신들이 다른 제자들 보다 더 크게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12제자 중에 3제자... 자기들만 예수님이 산 기도에 데리고 오셨고...또 이런 주님의 변모하시는 영광스런 광경까지 보게 되었으니...그 자리에 못 온 10명의 제자들 보다 자기들이 더 크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산 아래 10제자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여, 아예 여기다 초막 셋을 짓고 주님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남다른 특별대접을 받으면 자부심이 생기게 됩니다...그것이 좀 도가 지나치면...교만한 마음이 생기면서...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고... 더 지나치면... 예수님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지경까지 가게 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내리막길이 됩니다. -내리막길 정도가 아니라 사정없이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시각이 달라지고...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겸손해 집니다. -자신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존중해 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며... 바울처럼...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성도가 됩니다. -여러분..! 새해 우리 중에도 “누가 더 크냐?” 하면서 제자들처럼 도토리 키 재기식 다툼을 하면서...내가 너보다 더 크고...너보다 더 낫다는 식의 인생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우리들 눈에 \'오직 예수님\' 만 보이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겸손을 배우고, 그 분의 넉넉한 사랑의 가슴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교회 생활을 함께 하다보면... 성도들끼리 부딪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서... 많은 교인들이 상처를 받고 시험이 드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여러분 새해에 우리 성도님들은 \'오직 예수님\' 만 바라보면서...상처를 입히는 일도... 상처를 받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은혜보다 법이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3-4절을 읽어보십시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본문을 눈여겨보면... 제자들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이 제일 먼저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연대를 따진다면...모세가 가장 먼지이고...다음이 엘리야입니다. -예수님은 세분 중에 맨 나중 분이십니다. -율법주의자들, 바리새인들인들...제사장들, 서기관들의 시각으로 보면...예수는 맨 나중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모세\'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율법이 가장먼저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능력 있었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들의 대표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서 자행자지 한다고 책망하면서...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율법, 규례, 법도와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복음을 전하신 분이십니다. -율법이 법과 관습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것이라면...복음은 은혜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은... 법이 어떻고...규범이 어떻고...전통과 관습이 어떻고 하면서...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새로운 것을 증오하고...과거에 집착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만 바라보는 사람은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는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율법으로 교인들을 정 죄 해서는 안 됩니다. -전통이니.. 규범이니.. 관습이니 고집하면서...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신세대 교인들을 꾸짖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변화를 시도하려는 운동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새 술은 새 가죽 부대에 넣으려는 젊은 세대들을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은혜의 새 물결이 넘쳐흐르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새 시대가 오고... 새 문화가 물밀 듯이 엄습해 오는데...우리는 모세 시대의 율법적 과거에 얽매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면 교회성장이 정체됩니다. -부흥의 불길이 꺼집니다. -성령의 은혜와 복음이 설자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들 때문에 아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교회가 금년에 ‘다음 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젊은이들을 이해하고, 청소년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어른들이 되고,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것들은 왜 저모양이야..! -이렇게 신세대들을 나무라면 안 됩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우리를 따라오도록 강요하지 말고...우리 어른세대들이 젊은이들을 따라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앞으로 펼쳐지는 세월은 다 젊은이들의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교회는...은혜보다 율법이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용서보다 정 죄가 앞서 서는 안 됩니다. -변화산 위에서 예수님의 몸이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었듯이...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오늘도 주님의 교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가 젊은 세대로 변화되어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 사명의 자리보다 안주의 자리가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산 위에서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한 세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자리에서 받은바 은혜만 유지하면서 예수님 모시고 그곳에서 평안히 지내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변화 산 위에서 세 제자들에게 놀라운 영광의 광경을 보여 준 것은 전혀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3자 회담을 하신 것은... 바로 \'십자가\'를 의논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는 ‘십자가’가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을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통하여 뜻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산 위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정하고 계시는 데... 무지한 3 제자들은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읍시다..”고 주장합니다. -은혜의 자리에 평안히 안주(安住) 하다가...갈 때가 되면 천국 가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성도들의 \'무사안일주의 신앙\' 을 대변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초막 세 채를 짓자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예수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베드로, 야고보, 요한... 모두가 어부출신들입니다. 배는 잘 젓고, 고기는 잘 잡지만... 집 짓는 일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수 출신입니다. 그러니 집 짓는 일을 시작하였다가는 목수 출신인 예수님 혼자 일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애들아, 산 아래로 내려가자..” 고 말씀하셨답니다. -초막을 짓자고 제안하는 3 제자들의 저의(底意)가 무엇인지...주님이 꿰뚫어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잘 믿는 척... 은혜 받은 척... 사명 있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을 제자들의 모습을 알고 계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스개 소리로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요즘 교인들은 교회에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 싫어합니다. 희생과 수고와 땀 흘리며 충성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냥 이 한 몸 평안하게...부담 없이...교회에서 있는 듯 없는 듯...예배 출석이나 하고...조용히 예수 믿다가...갈 때가 되면 천국 가고 싶은 것이 오늘의 교인들의 태도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교인들 많습니다. -직분 맡고... 교회를 섬기고... 땀 흘리고... 십자가를 지고...수고롭게 충성하는 것... 귀찮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일 만사가 귀찮고 골치만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한 한 맡고 싶지 않습니다. -선교회임원 하는 것조차 싫고 귀찮습니다. -그냥 차라리 돈으로 하라 하면 하겠다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이런 교인들 여러분..! -분명히 아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교인들 천국 오는 것 귀찮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지...천국은 왜 오려고 하는지... 너희들이 나의 일을 귀찮아하는 것처럼 나도 너희들이 귀찮다고...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도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34-38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며... 산 아래로 내려가자...하시면서 변화 산에서 문제 많고, 일 많은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오직 예수\' 만 바라보는 성도들은 사명使命의 자리보다 안주安住의 자리가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고전13:1-13/ 정용섭 목사/ 대구샘터교회/ 주현절설교/ 2010-01-31
온전한 것과 부분적인 것 고전13:1-13 고린도전서 13장은 소위 ‘사랑 장’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에 대한 찬가입니다. 세계 문학의 역사에서도 사랑에 대해서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렇게 깊이 있게 묘사한 글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실천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반응은 본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실천은 아예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다른 것을 말하는 중입니다. 본문은 고전 12장과 14장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12장은 은사에 대한 이야기이고, 14장은 방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방언은 여러 은사 중에서 고린도교회를 시끄럽게 만든 대표적인 은사입니다. 바울이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사랑을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결국 은사와 사랑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하려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은사의 상대화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모든 은사를 상대화합니다. 그는 이 문제를 세 묶음으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방언과 천사의 말입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은 이상한 언어들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독일어나 프랑스어는 방언입니다. 서울사람에게는 제주도사람들의 말이 방언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그런 일상적인 외국어나 심한 사투리 같은 방언만이 아니라 언어 구조를 넘어서는 신비한 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런 소리를 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교도의 예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아주 고도의 정신적 상태에 빠질 때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했습니다.(13:1) 둘째는 예언과 비밀과 지식과 믿음입니다. 바울은 이런 은사를 방언보다는 나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방언은 개인의 유익에 속하지만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섯 마디 전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했습니다.(고전 14:19)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신유와 축귀 능력이 여기에 해당될 겁니다. 많은 신자들이 원하는 그런 은사들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런 것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고전 13:2) 셋째는 구제와 불사름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극한의 자기희생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일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기 소유를 모두 포기하면서 남을 돕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는 말은 순교를 불사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서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능력도 은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소유를 나눠주고 살신성인의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13:3) 위에서 언급한 은사들은 모두 귀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은사들도 그것 자체로는 궁극적인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선 여기서 오해는 없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은사들을 부정하는 은사 냉소주의는 교회 안에서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은사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입니다. 알기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 봉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귀한 은사입니다. 청소,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등등, 모든 섬기는 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 은사들이 우리에게 더 풍요로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귀한 은사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화할 뿐입니다. 은사들은 사랑과 연결되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은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가 됩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은사들은 사랑이 없이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비밀, 지식, 믿음, 구제, 순교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사랑 없이 목사로 살 수 있고, 신자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 없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고, 구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우리의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아내 생일에 꽃다발을 사올 수 있습니다. 자기만족으로 그게 가능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그런 일에 더 매달릴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젊었을 때 빼고는 아내의 생일에 꽃다발 선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변명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기만족에 빠지기 위해서 얼마든지 그럴듯한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들은 상대적인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모든 은사가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고전 13: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은, 즉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예언이 성취되면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예언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방언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히 계시될 때 이런 신비로운 방식은 무의미합니다. 지식도 그렇습니다. 지식(그노시스)은 하나님에 대한 감추어진 것을 아는 힘입니다. 철학, 물리학, 고고학, 경제학 등,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 더 이상의 역할이 없습니다. 은사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몇 가지 다른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부분적’이며, ‘어린 아이’와 같으며, ‘희미한’ 것입니다. 특히 어린아이 같다는 표현이 재미있기도 하고 실감이 가기도 합니다. 고전 13:11절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어린 아이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방언을 비롯한 은사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은사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거기에 자신들의 신앙을 완전히 걸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동네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행태와 비슷합니다. 그 결과는 분쟁과 파당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갈렸고, 누구의 은사가 더 큰가 하는 문제로 싸웠습니다. 심지어 성찬식 문제로 서로 마음이 찢겼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인격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은사 자체의 한계입니다. 그것으로는 일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얼마나 진지하고 과도하게 은사중심으로 작동되는지를 아는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사람이 해야 할 일만 강조됩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주일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보내기가 일쑤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은사중심주의입니다. 모두 좋은 것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일시적인 것들이고, 희미한 것들이고, 그래서 어린 아이의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 끝장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 온전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 앞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은사는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은 누구인가?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모든 가치 있는 은사를 상대화한다는 말인가요? 바울은 사랑만이 절대적이며, 온전하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고전 13:4-7절까지 묘사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총 15개 항목입니다. 사랑을 묘사하는 헬라어는 형용사가 아니라 모두 동사라고 합니다. 사랑은 단순히 머리에서 맴도는 사유나 관념이 아니라 행위라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겠지요.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고전 13장을 오해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어떤 도덕적 가치로 여기는 오해 말입니다. 4-7절이 묘사하는 사랑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겉모양이 아니라 동기에서도 완전힌 순수해야만 가능한 사랑을 누가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능력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할 수 없듯이 사랑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스스로 우리에게 임할 뿐이지 우리가 사랑을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끊임없이 사랑에 실패한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15가지 사랑의 속성이 우리 삶에서 반복해서 훼손됩니다. 4절이 언급하는 다섯 가지 항목만 생각해보십시오. 오래 참는 게 아니라 너무나 쉽게 화를 냅니다. 온유한 게 아니라 거칩니다. 시기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시기심에 불탑니다. 자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합니다. 교만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교만덩어리입니다. 우리는 사랑과는 정반대로 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에서 늘 실패합니다. 성인들은 좀 다르지 않느냐고 볼 수도 있겠지요. 성인들은 이타적으로 살았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합니다. 또 이 세상에서 그래도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어머니일 겁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성인들과 어머니들이 보여주는 사랑이 아무리 지고하다고 하더라도 사랑 자체는 아닙니다. 모든 소유로 남을 구제하고, 순교의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한 바울의 말은 빈 말이 아닙니다. 성인들과 어머니에게서 볼 수 있는 귀한 마음과 행위들은 은사입니다. 그런 은사로는 사랑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각종 은사는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사랑은 온전한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으로는 온전한 것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사랑이 완전히 실천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껏 해봐야 아름다운 퍼즐 한 조각에 불과한 사람이 어찌 퍼즐 전체 그림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욕심을 부릴 때마다 절망감만 느낄 뿐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사랑의 능력이 없다면 아예 사랑의 실천을 포기해야 할까요? 은사로 인해서 교회가 시끄러워진다면 은사 자체를 포기해야만 할까요? 이게 어려운 질문입니다. 딱 떨어지는 대답을 찾기도 힘듭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오죽 심각했으면 바울이 은사 문제를 세 장에 걸쳐서 길게 설명했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방향을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삶의 능력과 영적 수준에 따라서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는 신앙적인 방향은 우리의 일상과 신앙생활에서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인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온전한 것은 속으로 숨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목사는 부분적으로만 알고, 부분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은사입니다. 설교라는 언어와 문자에 하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임재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설교라는 형태만 봅니다. 이렇게 형태에만 머물러 있을 때 설교에 하나님이 은폐의 방식으로 임재 하는지를 분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다면 이를 구분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부분적인 것을 부분적인 영역에 두고, 온전한 것을 온전한 영역에 둔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부분적인 것을 온전한 것에 의존시킨다는 뜻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한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우리가 감당해야 할 교회봉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한 것입니다. 교회봉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의존적이어야 합니다. 이것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봉사 자체를 하나님이라고 믿으니까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으니까요. 온전한 것에 대한 시각이 강렬하지 못하니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의 결론인 고전 13:13절에서 온전한 것을 고린도교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세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들입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2절이 말하는 산을 옮길 만한 능력과는 다른 온전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그런 신뢰에 근거해서만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계시하시는 그 때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존재이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영원합니다. 부분적인 것으로 인해서 우리의 영혼이 손상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다른 이들의 영혼에 손상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처럼 무례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면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능력에 휩싸인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때만 우리는 순전한 마음으로 참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종말과 현재에 우리 삶의 참된 능력이십니다.
우리 주님의 변화/ 단7:13-14, 계1:4-8, 요18:33-37/ 주현절설교/ 2012-01-17
우리 주님의 변화 단7:13-14, 계1:4-8, 요18:33-37 <주석> 제 1주제 : 열왕기 하 2:1-12 우리의 본문은 예언자의 계승 이야기로 엘리야로부터 엘리사에게로 능력이 전이되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것은 엘리사와그의 일편단심의 이야기와 같이 엘리야와 그의 신비한 떠남에 대한 바로 그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엘리야의 마지막 여행으로, 그 여행은 죽음으로가 아닌 승천의 여행이었다(1절. 눅 9:51 참조). 그의 제자 엘리사와 동반하면서 엘리야는 길갈에서 벧엘로, 그리고 거기에서여리고로, 그리고 요단으로 여행한다. 길을 따라가면서 세 번이나 엘리야는 그의 동반자로 하여금 그를 혼자 있게끔 해 달라고요구한다(2,4,6절). 그러나, 매번 엘리사는 엄숙하게 그의 주인을 떠날 수 없다고 맹세한다(2,4,6절). 벧엘과 여리고에서 예언자 무리가 엘리사에게 여행의 목적과 목표를 기억나게 한다(3,5절). 가능한한 그들의 충고의 암시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는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야의 승천은 하나의 신비이고, 아무에게도 증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예언자들에게 조용히 남아 있을 것을 요구하며, 그리고 엘리야와함께 그의 여행을 계속한다. 그들이 요단에 도착했을 때에, 엘리야는 물을 갈라지게 하는 모세의 기적을 재생한다(8절. 출14:16, 21-22 참조). 그리고, 거기에서 둘은 마른 땅을 걸어 강을 건너간다. 이 묘기는 멀리서 다섯 사람의 예언자에 의해 확인되었다(7절). 요단 강의 다른 편에서 엘리야는 마침내 그의 꾸준한 동반자가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의\\\\\\\\\\\\\\\"갑절의 몫\\\\\\\\\\\\\\\"(double share)을 요구한다(9절). 이 요구는 장자에대한 법적 근거에 의한 것이며(신 21:17), 그리고 그것은 엘리야의 수제자가 되고자 하는 엘리사의 결단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응답으로 엘리야는 신적 의지에 대한 그의 제자의 욕망의 만족을남겨 준다 : 엘리사는 엘리야의 신비한 승천의 광경이 가치있게보여진 것이다(10절). 즉시로 엘리사는 불회오리 바람 속에서 승리에 찬 승천을 하는 그의 선생을 증거한다(11절). 살아 승천한자의 목격자로서 엘리사는 마침내 엘리야의 겉 옷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광을 확실히 목격하는 보상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끝까지 그의 선생의 길을 여행했기 때문이다. 그여행은 그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준비시키는 데 기여했다. 요단동편 광야에서 엘리야의 신비한 산체로 승천한 것은 유대인과 기독교 전통에 꼭같이 그의 재림의 개념을 불러일으켰다. 묵시주의영향 아래서 엘리야는 종말론적 선구자의 역할을 부여받았다(말4:5 참조). 공관서 전승은 그를 승천 장면의 장소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세례 요한과 동일시 하고 있다. 제 2주제 : 고린도 후서 3:12-4:2 우리의 본문은 바울의 적대자들에 대한 방향으로서 출애굽기34:2-35절에 대한 미드라쉬(Midrash)이다. 고린도 후서에 있어서반대적인 신학의 특성에 대한 최근의 조사는(S.슐츠, D.죠지) 우리가 지금까지 가능한 것보다는 더욱 정확히 바울의 논점을 따르도록 해 준다. 출애굽기 34:29-35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모세는 그의 얼굴에 면사포를 썼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광경이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얼굴 표면이 빛났다.\\\\\\\\\\\\\\\"왜냐하면, 그는 시내 산의 신비 속에 직접적인 통찰을 얻었다. 그 전도자들은 그들 자신을 단지 영을 소유한 자로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모세처럼 그들이 그들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현존을 반영하도록 시내 산의 영광을 인정한 것이다. 이전 전도자들에 반하여, 바울은 이스라엘인들이 그의 얼굴 위에 반사되고 있는 그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실감하는 것을 막으려고 면사포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세의 면사포는 영광의 불충분한 성질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보호적인 장치가아니고 옛 계약의 불완전성을 감싸 주는 데 사용되는 속임 수단이다(12-13절). 이 논쟁과 함께 바울은 계시에 관한 그의 적대자들의 기본 자료, 즉 모세와 그의 시내 전승을 거부한다. 모세의얼굴을 숨겼던 면사포는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덮여 있다(14-15절). \\\\\\\\\\\\\\\"마음\\\\\\\\\\\\\\\"에 대한 준거는(15절:수건이 그들의 정신이 아닌 마음을 덮었다.) 능력의 외적 증거에 대한 적대자들의 주장에대해 논쟁화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밖으로 영광스럽게 해도, 안으로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해방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5:12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불완전한 면사포는 벗겨지고성서 속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16절). 17절의 어려움은 하나님의영처럼 홀로 그들의 영에 관한 전도자들의 정의에 대한 논쟁이다. 바울은 주님, 즉 예수와 함께 그것을 동일시하므로서 성령에대한 그들의 독선적인 주장을 깨어 버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18절:그리고 우리들 모두가) 소수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거울 속에서 비취는 것이다. 그러므로,아무도 존재론적 본체로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소유하지 못하며,차라리 누구나 변화 과정에서 그 안에서 자라 갈 뿐이다(18절).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의 모세와 옛 계약에 대한 관여를 끊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런 위치는 그리스도에 관한 피상적이고 독선적인 이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복음서 주제 : 마가복음 9:2-9 변형 장면은 산상에서 있었고, 복음서에서는 산들의(3:13,6:46,13:3), 그것은 단지 \\\\\\\\\\\\\\\"높은산\\\\\\\\\\\\\\\"(high mountain)이다(2절). 계시의다른 정상 위에 우뚝 솟아서, 예수와 세 제자에 의해 올라갈 그\\\\\\\\\\\\\\\"높은 산\\\\\\\\\\\\\\\"은 모든 현현들의 현현으로서 변형을 가르키고 있다. 예수의 변화된 모습은 그의 옷의 증거에 의해 기술된다(3절). 종말의 색인 흰색(계 6:2,7:9,14:14 참조)은 현현된 예수에 대한종말론적 특질을 알리고 있다. 구름은 하나님의 현존의 전통적인명시이며(출 24:16 참조), 구름으로부터 나온 소리는 다름아닌하나님의 목소리였다(7절). 이 하늘의 목소리는 예수님의 사역에있어서_세례로부터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표시하고 있다. 예수의 초기에 하나님은 유사한 방법으로 그리고 거의 동일한 말씀으로 주도권을 취하셨다. 세례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종말론적 왕의 직무에 않히셨다. 그러나, 취임식은 은밀히 집행되었다. 아무도 심지어 세례자 자신까지도 영의 종말론적 돌입을 증거하지 못했다. 변형으로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미래적취임식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변형은 세례를 뒤따라 가깝게 되어진 것으로 예수가 묵시적 충만성, 즉 그의 재림(Parousia)을 기대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다른 모든 현현들과는 다르게 그 변형은 그의 최종적 드러냄의 날을 제공하고 있다(9절). 그것은 사람의 아들의 부활 때까지는 덮여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는 변형된 예수와는 동일하지 않다. 차라리 부활은 예수의 변형의 영광 의 실현과 관련된 종말 이후(terminus post quem)를 표시하고 있다. 변형은 예수의 부활 이후_그의 영광 속의 재림 속으로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다. 마가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변형은 예외가 없었다. 두려움과 혼돈 속에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을 것을 제안한다(5-6절). 그의 생각은 미래의 예상을의미하는 것만을 붙잡아 두려는 충동에 의해서 비롯한 것이다. 베드로는 현재에 대한 미래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변형은 설교자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러가지 주제를 제공한다. 현재를 보는 것은 확실히 종말적인 것이며, 그것은 현재에다가그것의 변형된 희망을 준다(고후 12:2 \\\\\\\\\\\\\\\"그 때는 우리가 그런 희망을 갖게 된 것을 보리라.\\\\\\\\\\\\\\\" 참조). 마가의 설명에서 제자들은고통과 부활 이후까지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활절 이쪽의 우리들을 위하여 변형은 그 미래와 목표의 빛 아래서 우리의현재 상황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에 의해 그것을 해방하는 갱신의 기회인 것이다. 듀보스(W.P.DuBose)는 그의 저서 [신약의 구속론](Steriology of the Testament)에서 그것의 목적(또는 글최종적 원인)을 포함하지 아니하고는 정의가 완전할 수 없다고주장했다. 사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누구나 무엇을 위해 있고, 그것이 무엇이었으며, 그 의도와 운명을계속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멍키 렌취에서 사람에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진실이라고 하겠다. 파이프 렌취가 무엇을위해 있느냐를 설명하지 않고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아이들에게설명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끔우리는 역시 그의 목적과 종국을 포함하여 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포함시키지 않고서, 단순히 그의 존재의 근거 위에서한 인간의 동일성을 보게 된다. 현재를 분별하는 변형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관한 사실상 하나의 움직이는 실례가 라 맹샤의 사람(Man of La Mancha) 속의 돈키호테의 모습 안에 있다. 이 희극적 모습을 끈기있게 존재하는것(\\\\\\\\\\\\\\\"is\\\\\\\\\\\\\\\")은 \\\\\\\\\\\\\\\"되어질 것\\\\\\\\\\\\\\\"(what will be) 위에 최종적인 전례를 취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는 매춘부 알돈자를 \\\\\\\\\\\\\\\"나의 부인 둘키니아\\\\\\\\\\\\\\\"라고 부르고, 이름짓고, 말로 표현하고, 보기를 고집한다. 연극의 종막에 가서 돈키호테는 죽어가고, 그리고 그의 동료 산초판자는 알돈자에게 말한다. 그녀는 그에게 조용히 그러나 힘있는어조로 \\\\\\\\\\\\\\\"나의 이름은 둘키니아입니다.\\\\\\\\\\\\\\\"고 대답한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Jr.)은 워싱톤 D.C.에서의그의 위대한 연설문 \\\\\\\\\\\\\\\"나는 산정에 갔다왔다....\\\\\\\\\\\\\\\"에 대한 그의 영감과 환상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 변형의 산정에서부터였다. 그의 환상은 과거에 가졌으나 또는 현재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환상이었다. 사물의 종국과 운명에 관한 이 환상은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해방시키고 그러나역시 고통 속에도 적용된다. 마가복음에 관한 학자들은 여기서 이 비밀의 목적이 단순히 기적 속에 나타나는 아들의 능력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역시 그의수난에서 나타나는 아들의 고통 위에 강조를 두고 있다. 고통의신비는 어떤 설교를 위해서나 의욕적인 제목이 된다. 그러나, 변형에 의한 변화는 어떤 접근에 관해서나 중요한 부분이 되어져야할 것이다. 수 년 동안 \\\\\\\\\\\\\\\"개혁의 때\\\\\\\\\\\\\\\"(The Protestant Hour)에 관해 선포된 모든 설교에 있어서 가장 요구된 대본은 존 레드헤드(John Redhead)에 의하면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이 제 목에 대한 주의력을 환기시키는 데 문제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고통의 원인을 연루시키든지간에 모두가 그는 모든 고통 위에 계신 주님이라는 데 어떤 경우이든지 동의할 것이다. 로마서18:18에서 바울은 변형의 영광을 우리가 지금 어떤 고통을 보게할 수 있는 길과 연결시키고 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 영광은 세 본문에 공통된다. 바울을 위하여 모세의 사역은영광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 계약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모세의 얼굴을 내리덮는 면사포는 율법의영광의 제한을 숨긴다. 심지어 지금도 그의 적들의 심장을 덮고있는 면사포는 그들로부터 그 새롭고 더욱 영광스런 봉사를 숨긴다.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이나 고린도에서의 더욱 교활한의욕에 대한 바울의 논쟁은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시대 속으로 계속되어지고 있다. 요한 웨슬레는 그의 회개 후에윌리암 로우(William Law)에게 그가 그에게 이 새롭고 더욱 영광스런 목사의 직무에 대해 결코 가르쳐 주지 않았던 사실을 불평하는 비난의 편지를 썼다. 누구나 옛 계약으로 그의 마음이 가리워져 있고, 그리고 이 의의 자유함에 대해 낯선 자들을 아직도고집하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책임 해제, 용서, 그리고 의로움에관한 어떤 선포를 쓸데 없이 찾고 있으면서 어떤 전통적인 경건의 글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고후 3:17 참조). 둘째 본문의 12절은 간과해서는 안 될 \\\\\\\\\\\\\\\"그러므로 그런 희망을가지고....\\\\\\\\\\\\\\\"라는 중요한 가정을 갖고 시작한다. \\\\\\\\\\\\\\\"정죄\\\\\\\\\\\\\\\"(condemn-ation)의 반대는 \\\\\\\\\\\\\\\"의\\\\\\\\\\\\\\\"(righteousness)라는 사실은 많은 교인들에게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직분은 더욱 넘치리라\\\\\\\\\\\\\\\"(9절). 여기서 \\\\\\\\\\\\\\\"의\\\\\\\\\\\\\\\"라는 단어는 \\\\\\\\\\\\\\\"의인\\\\\\\\\\\\\\\"(義認, justification)과 같은 것이며, 그리고 의인의 교리는 최근에 \\\\\\\\\\\\\\\"용납\\\\\\\\\\\\\\\"이나 혹은 성서적인 용어로 \\\\\\\\\\\\\\\"의\\\\\\\\\\\\\\\"와 일치하지 않는 묵인으로서 해석되어진다. 다른 한편, 각 시대와 회중 속에 정죄와반대되는 이 의의 지식으로부터 막이 쳐진 마음이 남아 있다. 그 때, 우리는 옛 봉사의 정죄로부터 새로운 봉사의 의와 자유로 움직여 가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18절에 나타난 대로 \\\\\\\\\\\\\\\"영광\\\\\\\\\\\\\\\"으로 보인다. 주님의 영광을 봄으로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영광이고, 그리고 우리의 통일성은 주님의 영에 의해 \\\\\\\\\\\\\\\"영광에서 영광으로\\\\\\\\\\\\\\\" 움직여 간다. 우리의 영광이 우리자신 안에서 온다고 세상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거짓이 있다. 햄릿에서 \\\\\\\\\\\\\\\"그대 자신에게 진실인 것\\\\\\\\\\\\\\\"이라고 러트스(Laertes)에게한 플로니우스 충고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현대음악 희곡 페핀(Peppin)에서(\\\\\\\\\\\\\\\"그러나 내가 내였을 뿐이다\\\\\\\\\\\\\\\"라고) 죽음을당기는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바울은 그들도 우리도 하나님과우리의 종말론적 주체, 우리의 진정한 의도, 운명, 그리고 목적이 둘 다 표현된 모습이신 그에게 봉사하지 아니하고는 우리가누구인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봉사\\\\\\\\\\\\\\\"(diakanos)란 단어는 흠정역(King James)의 \\\\\\\\\\\\\\\"직무\\\\\\\\\\\\\\\"(minis-tration)나 NEB의 \\\\\\\\\\\\\\\"처방\\\\\\\\\\\\\\\"(dispensation)에 의해서는 애매해질 뿐이다(9절). 엘리야가 만일 엘리사가 그 떠남을 본다면, 그가 요구했던 것이 허락될 것이라고 엘리사에게 대답했을 때에, 능력의 전이는신적 의지로 남겨 놓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제자들에 의하여 오른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구의 기대였고, 그리고 이것은 그가 주는 것이 아니고 그가 마실 잔을 기꺼이 마시는 것과관련되어 있었다(막 10:38). 엘리야의 사역을 따른 자로서 엘리 사의 꾸준함은 엘리야의 능력을 받는 경우이다. 비슷하게 예수의길을 따른 자로서 제자들의 꾸준함이 그들의 능력을 부여받는 경우였다. 오늘날도 그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봉사를 행함이 우리의 영광의 경우이다(그의 은혜와 말씀이 그 원인이듯). 변형되신 예수의 진정한 의미를 붙잡지 못한 베드로는 모든 사건을 본 길로서 그것을 보려는 것보다는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하여 초막을 짓기를 원하고 있다. 베드로처럼 교회조직은 항상그 희망의 능력에 의해 사건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환상을 고착시키고 기억하려는 시험을 항상 받고 있다. W.B.Yeats의 시집(New York : MacMillan, 1956), p.211. Soren Kierkegaard, quotes in J.Baillie, A Diary ofReadings(London : Oxford University Press, 1955), p.341. Quoted from John Baillie, A Diary of Readings(London:Oxfo-rd University Press, 1955), p.284. The Hymnal(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1940).no.320.
웃음을 낳는 한 해/ 창21:1-7/ 조한우 목사/ 주현절설교/ 2002-01-06
웃음을 낳는 한 해 창21:1-7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얼굴 한번 활짝 펴고 웃으면서 살고 싶다.’라는 것일 겁니다. 그만큼 우리네 삶이 고생스럽고, 또 우리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한해는 정말로 웃을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바램입니다. 아울러서 우리 조은 교회도 금년에는 하루 속히 정상 괘도에 올라서서 교회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금년 교회 표어를 ’전도하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 말씀을 기초로 해서 우리 교회가 올 한 해 동안에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성령의 위로를 따라서 성도들의 수가 많아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다 같이 따라하시겠습니다. ”전도하는 교회” ”능력이 있는 교회” ”웃음이 있는 교회” 금년 한해 동안 웃음이 가득한 우리 교회를 만들어 나갑시다.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웃음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억지로 무게를 잡는다고 해서 거기에서 무슨 대단한 능력이 나오는 것이냐? 아닙니다. 오히려 밝은 웃음 속에서, 해맑은 미소 속에서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笑면 萬福來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웃으면 복이 와요.....(옆 사람을 쳐다 보고 한 번 웃어 봅시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는 마음이 어둡고 무거웠어도 예배를 드리고 나면 기분이 밝아지고 분위기가 가벼워지고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령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 꿈을 가지고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을 두고 이루고자하는 소망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꿈들 가운데에는 이룰 수 없는 것들도 사실 많이 있습니다. 적어도 남들이 볼 때에는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평생 소원을 가지고 사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요즘은 남북 관계가 유연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능성도 있습니다마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가지고 있었던 꿈은 도저히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이 고희를 넘겼습니다.(고희가 뭔지 알죠? 70살!) 나이 일흔 다섯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무작정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시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든이 되어도, 그리고 아흔이 되어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흔 아홉..... 드디어 백살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아들을 안겨 주셨습니다.(할렐루야!)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자기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을 철썩 같이 믿은 겁니다. 자기 나이가 백세나 되어서 이미 자기 몸은 죽은 송장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만, 믿음이 연약해지거나, 믿음이 없어지거나,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에 더 견고하게 섰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것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니까 그저 그대로 믿은 겁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본문 1절을 읽어보면 아주 귀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다 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자, 이제 저를 주목하세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권고하심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성령으로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이삭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끔 예수님의 모형으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처녀가 남자 없이 아기를 가졌다는 것이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가 됩니까? 그럼 한 단계 낮춰서 생각해 봅시다. 연세가 아흔 살이나 되신 할머니하고, 백 살이나 되신 할아버지 사이에서 아기가 생겼다? 글쎄요? 그것도 쉽진 않지만..... 이게 쉽게 이해가 되느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런 역사가 일어남으로 인해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에서 예수님이 오실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게 될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적은 이삭과 예수님, 단 두 분에 한정된 사건이었습니다. 이삭이 ”그 말씀하신 대로” 태어났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자의 몸 속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켜서 임신을 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말씀으로 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앉으신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태어날 수 없는 고장난 사람들입니다.그런데 말씀으로 다시 태어났단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 음성을 들을 수조차 없는 고장난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담이 범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죄악에 빠진 이래로 우리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고장난 존재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고치시고 다시 태어나게 하시려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멀쩡한 텔레비전은 그림이라도 나오고 소리라도 들리지만, 아예 고장난 텔레비전은 방송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는 모두 고장난 텔레비전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예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접할 때까지는 고장난 텔레비전처럼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도 없었잖아요. 그러다가 고장난 부분이 고쳐지니까 말씀이 들려집니다. 뭔가 뿌옇게 보입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귓가를 때립니다. 무엇인가가 희미하게 눈에 비쳐집니다. 그러나 아직도 깨닫지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깨달아지기 시작하는데 ”아, 내가 죄인이로구나...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구나!! 내가 부족하지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라는 것이 느껴지고, 믿어지고, 고백되어질 때에 그때 비로소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상관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역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은 이 시간에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시기 바랍니다. 이미 말씀으로 거듭나신 분들은 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습니다. 웃음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 오해가 생기기 쉽습니다. 신비주의에 빠져서 신앙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잉태하였으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 임신 기간을 다 채워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매우 신비로운 방법으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지만, 예수님도 임신 기간 10개월을 다 채우고 태어나셨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우리가 말씀으로 태어난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란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되다니? 나 같은 죄인이!!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인간이 예수를 믿고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났어요. 그러나 거듭난 이후의 삶은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게 되다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신비로운 세계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크게 잘못된 사람입니다. 자꾸 환상을 보기를 원하고, 기도로써만 병을 고치겠다고 고집하고...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 그런 신비로운 일들을 빼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장을 하는 거예요.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체험하기 위해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고 사람이 이상해질 수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현실 가운데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열심히 사는 겁니다. 가끔은 하루 종일 기도를 하거나, 산 속에 들어가서 죽어라 부르짖다가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대부분의 경우는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통해서, 공동체적인 예배를 통해서 말씀으로 은혜를 받게 되고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겁니다. 신비주의자들의 맹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상식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마땅히 책임져야할 현실 세계를 외면하고 신앙을 핑계삼아서 산 속으로 도망을 가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은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후에는 정상적으로 밥 먹고,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에도 충실하고 사업에도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주신’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삭이란 이름은 아브라함이 지은 이름은 아닙니다. 벌써 아기가 생기기 전에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뭡니까?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아브라함에게 보내셔서 이삭의 출생에 대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네 아내의 이름을 사래라고 하지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17:15-16)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엎드려서 웃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백살이나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라는 구십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복을 받고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정녕 제게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어라. 내가 이삭하고 약속을 세워서 이삭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할 것이다. 내 이 약속은 내년 이맘 때 사라가 이삭을 낳으면 그 이삭과 단독으로 언약을 세울 것이다.”라고 창세기 17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8장에서도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같은 약속을 다시 재확인합니다. 사라가 장막 문 뒤에서 천사의 말을 듣고 웃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었고 우리 주인 양반도 늙었는데 내게 무슨 낙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진지 오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말합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다 같이 따라합시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 되니까 아브라함도 웃고 사라도 웃었습니다. 그 웃음의 쓴 웃음, 낙심의 읏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까 그때에는 기쁨의 웃음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할렐루야!) 예수님께서 한번은 어느 부자의 예를 들어서 천국에 대해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차라리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야 그것으로 구제를 많이 해서 선행을 많이 쌓고...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돈 많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차라리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으니 난리가 난 겁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3-26) 지금 여러분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어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믿음이 가지 않아서 쓴 웃음을 짓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시고 약속하신 기한이 이르면 반드시 은혜가 넘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가면 반드시 기쁨의 웃음을 웃게 될 겁니다.(할렐루야!) 이제 개척 6개월밖에 안된 조은교회가 머지않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큰 교회가 될 것을 믿으십니까? 지금은 믿어지지 않아서 쓴 웃음을 지어도 하나님의 기한이 이르게 되면 반드시 기쁨의 웃음을 짓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할렐루야!) 금년 한해는 웃음을 낳는 한 해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치료하는 광선이 되어서 우리 심령의 깊은 곳에 있는 상처까지 다 고침을 받아서 새롭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 28)
일어나라/ 사60:1-6/ 이천진 목사/ 주현절예배설교/ 2013-01-06
일어나라 사60:1-6 Ⅰ 01. 암탉이 한 주 동안 조류독감을 앓은 후, 옹달샘에서 물을 먹고 있었습니다. 숲속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호랑이가 암탉을 잡아먹으려고 하였습니다. 암탉은 호랑이에게 나를 먹으면 조류독감에 전염된다고 하면서 나보다 더 맛있는 것을 소개하겠다고 하면서 호랑이를 연못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호랑이 꼬리를 물에 담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생선이 꼬리를 문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호랑이는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면서 연못의 물은 얼어버렸습니다. 호랑이는 연못에 갇힌 채,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나의 믿음이 주저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02. 1944년 7월 20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에 반대하는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라고 불립니다.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사용했습니다. 폭탄이 터진 회의장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즉사했습니다. 히틀러도 얼굴이 새까맣게 탔고, 다리에 화상과 고막 파열, 그리고 팔에 나무 파편이 박혔습니다. 회의장 밖에 있던 <카이텔>(Wilhelm Keitel)이 뛰어 들어와 불길을 헤치며 히틀러를 끌고 나왔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어 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했습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도 1945년 4월 9일에 처형당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비밀국가경찰>(Geheime Staatspolizei)인 <게슈타포>(Gestapo)에게 사형을 당한 인물 중에 <괴들러>(Goedler)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라이프치히>의 시장이었습니다. 나치가 권력을 잡은 후 시장 직에서 사임했습니다. 히틀러 암살이 성공할 경우 수상으로 내정돼 있었습니다. 그의 수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잠을 잘 이룰 수가 없다. 개인의 운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과연 있는가? 나는 그것을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수 십 만의 사람들이 공포와 절망 속에서 미쳐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수 백 만의 사람들이 공포의 풀무불 속에 떨어져 허우적거릴 때 손 끝 하나 꼼짝하지 않고 죽게 버려두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Ⅱ 01. 히브리인들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의 침략 앞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습니다. 이때 히브리인들은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바벨론의 신, 마르둑(Marduk)보다 못한 신인가? 둘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는 신인가?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신앙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기원전 539년에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히브리인들은 제2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내면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신앙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젤린 포러>(Selin-Fohrer)는 에서 제2성전 시대의 상황을 세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신앙적 해이함 둘째, 종교혼합주의 셋째, 지도력의 약화>입니다. 신앙적 해이함을 가져온 원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02. 이사야 60장 1절-2절의 말씀입니다.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신앙적 해이함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성전이 회복되었지만,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성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어둡고 캄캄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히브리어로 <카보드>입니다. 무게, 중요성, 비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개입하지 못하는 나약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 하나님이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03. 이사야 60장 4절-5절의 말씀입니다. <4)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주저앉아 있는 믿음이 일어나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주저앉아 있는 믿음이 일어나면, 마음이 화창해지고, 부와 재물도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김철호씨는 사업을 하는 분입니다. 아이엠에프 때 회사가 부도가 났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부인은 우울증으로 입원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숙대입구역 앞에서 호떡을 팔았습니다. 노점상이지만, 양복을 입고 <꿀떡개비>라는 브랜드를 붙여 장사를 했습니다. 지하철 티켓 살 돈이 없어 역무원에게 통사정을 할 정도로 형편은 어려웠지만 꿋꿋이 버텼습니다. 2002년 봄, 죽 전문점을 열기로 했습니다. <죽쒀서 개준다> 주위에서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조리가 까다로운 죽이야말로 <블루오션>이란 확신이 들어서 부인 최복이씨와 6개월 동안 죽을 쑤며 연구한 끝에 대학로 서울대병원 옆 부근에 네 차례나 망한 곳이어서 아주 최저가격으로 죽집을 시작했습니다. <본죽> 1호점입니다. 창업 8년 만에 가맹점 1000개로 늘어났습니다. 그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맺는 독실한 신앙인입니다. 연세의료원에 의료선교 기금 10억을 기부했습니다. 믿음이 일어나면, 마음이 화창해지고, 부와 재물도 돌아옵니다. Ⅲ 01. 김민기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같이/ 욘3:5-10, 막1:14-15, 고전7:29-35/ 주현절설교/ 2003-12-22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같이 욘3:5-10, 막1:14-15, 고전7:29-35 오늘은 주현절 다섯째주일입니다. 주현절이라는 말은 주님이 나타났다는 말보다는 공생애를 시작하며 역사의 구세주로 나타났다는 말에 가깝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인데 예수님은 메시야로서의 등극식을 바로 요단강에서 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나라의 선포식이 오늘 마가복음 본문입니다. 아주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방향을 완전히 바꾸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받으라는 말은 자기중심적으로 율법중심으로 사는 삶이 사랑과 기쁨의 삶으로 변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죽어서 가는 나라로 생각하기보다는,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와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막 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는 오고 있는데 우리는 반대편 방향으로 서있으므로 돌아 서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회개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오늘 본문인 구약의 요나얘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미워하는 앗시리아를 하나님이 멸망시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회개시키고 구원하기 위해 요나를 보냈던 것입니다. 요나는 삐딱하게 생각을 했지만, 결국 앗시리아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의 니느웨는 누구이고 오늘의 요나는 누구입니까? 얘기를 한반도로 한정시켜 봅시다. 북한문제를 봅시다. 우리나라의 괴상한 애국자들은 하나님이 능력만 있으면 이북을 모조리 다 멸망시키지 저대로 두느냐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유대교적 사고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잘못된 것을 바꾸고 축복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남쪽의 문제는 한편 더 심각합니다. 일일이 말씀을 안드려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을 아실겁니다. 6.25보다 더 심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시련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든, 우리 스스로가 가해자라는 점과 계층적으로 고난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저는 동의합니다. 일부는 고난을 받지만 일부는 이걸 계기로 돈을 더 벌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고, 세상과 함께 있고, 세상을 위해 있지만, 세상의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초월한 자리에서 세상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지난 12월에는 우리나라가 파산하여 완전히 가버릴 뻔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속에서 정권교체를 하게 되었고, 노사정합의를 이루어 냄으로써 세계가 우리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지금 큰 태풍을 만나 바닥에 구멍난 배와 같습니다. 이제 가까스로 바닥의 구멍은 막았을지언정 아직 오랜 시간 계속될 태풍권내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니느웨를 버리지 않겠다고 요나를 설득하신 하나님이 우리도 버리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모두 힘을 합하고 기도하여 이 태풍권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상황속에서 해야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니느웨 온 백성들과 왕이 무릎을 꿇고 베옷을 입은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만 합니다. 지금도 많이들 반성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은 회개하기 보다는 움추려 있고 빠져 있으려고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내 자신이 생활태도를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게 받은 봉급으로 절약하며 살거나 돈을 더 벌어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늘 바울사도의 말씀의 요지는 \\\\\\\"너희 믿는 사람은 가진 것이 있어도 없는 사람같이 살아라\\\\\\\"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디트리히 본회퍼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고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의 예배당에 다른 것은 다 없어도 큰 십자가를 달아 놓은 것은 오늘 우리의 역사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겪는 주님을 우리가 생각하고 그 주님안에 하나님이 와 계시고 바로 그 분안에 있는 사랑의 영이 우리를 향해 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태속에서 직장을 잃고, 쫓겨나고, 실업자가 되고, 봉급이 줄어들고 그보다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느 사람들에게 주님이 와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와 계시는 데, 우리는 그 자리에 없고 편한 곳에 있다면 어찌 그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저는 정말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즉, \\\\\\\"돌이켜라, 네 마음을 완전히 비워라. 다 사라질 것에 집착하지 말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없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서 괴로운 것입니다. 다 던져버리고 완전히 없는 자처럼 될 때 그 빈자리에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고통을 겪는 사람과 고난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다는 생각하는 것들은 소유물이건 감정이건간에 내 안에서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볼 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립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금욕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고 찬송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고난의 나눔에서 오는 기쁨, 바로 은총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우리나라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썩어버린 나라가 이 정도로나마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야할 길은 가까운 길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호를 분명히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사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재벌들이 구조조정얘기를 하지만 저에게는 지금의 위기를 살살 빠져나가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그들은 다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도 살고 우리도 사는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철저한 개혁입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니느웨와 같은 썩고 타락한 성도 하나님의 구원이 오게되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빠른 시기에 내 자신도, 내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진정 이러한 하나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이 깊은 어둠에서 새벽에 동터오른 화사한 햇빛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은 이미 그 햇빛과 함께 우리 앞에 와있기 때문에, 즉, 때가 찾다, 하나님나라가 오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선포의 말씀을 깊이 기억하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역사속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를 바르게 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 높고 푸른 하늘/ 신18:15-22, 고전7:32-35, 막1:21-28/ 주현절후 제4주일설교/ 2010-01-23
저 높고 푸른 하늘 신18:15-22, 고전7:32-35, 막1:21-28 <주석> 제 1주제 : 신명기 18:15-20 신명기서는 단지 법조문이 아니며 오히려 율법과, 정결의식과,계약과, 축복과 저주의 혼합체임과 동시에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 책은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전 율법과 지혜에 대한 개론과 요약\\\\\\\\\\\\\\\\\\\\\\\\\\\\\\\"을 서술하고 있다(Luther). 신명기는 종종유대의 요시야 왕(640-609 B.C.)에 의해 수행된 개혁 운동과 연관되고 있다(왕하 22-23). 그러나, 그 문서가 어느 정도 요시야왕의 개혁 운동의 도움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대부분은 북왕국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각각 떨어져 있던 자료의 마지막 편찬자로서의 신명기 기자는 왕조 시대의 이스라엘을향해 그의 신학을 발표하고 있다. 신명기는 7세기의 사람들에게말하고 있으면서 모세의 설교인 것으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출애굽 후 40년이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모압 평야에서 모세가 한 고별 설교인 것처럼 가장하여 나타나고 있다(1:1-5). 신명기 기자는 그 이전의 전승들을 편집하므로서, 먼과거의 인물인 모세를 출애굽과 점령의 시대로부터 수 세기 이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잇슈들을 토의하는 야웨의 대변자로서 삼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18:15-20은 예언(18:9-22)의 주제적인 내용을 더 넓은문맥 속으로 이끌고 있다. 모든 형태의 점술과 마술을 금지하고있음에 따라(9-14절)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예언을 왜곡하는 자들을 판단하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15-20절).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식별을 위한 기준이 다음에 추가되어 있다(21-22절). 약속된 예언자(15,18절)가 모세의 방법과 능력으로서 야웨와백성 사이를 중개 할 것이다. 야웨로부터의 특별한 법령 대신에신명기 기자는 성서적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16-18절). 옛날의시내 전승은 야웨의 직접적인 현현 앞에서 죽지 않기를 바라는이스라엘 백성의 소원을 나타내고 있다(신 5:22-27). 야웨께서는중재자로서의 예언자의 역할을 수립하시므로서 이 요청을 수락하시고 계신다. 예언자로서의 직무는 꼭 미래적이며, 메시야적인약속으로서만 이해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예언자적 직위를 확립하는 것을 도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귀절은 어떻게 야웨께서 모세를 통하여 예언의 직무를 수행하였느냐? 하는 것을 설명한다. 야웨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예언의 존재를 예견하시며 또한 승인하고 계신 것이다. 그 직위의 엄중함을 야웨에 대한 예언자의 충성과 같은(20절) 백성들의 예언자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19절). 쿰란(Qumran)공동체 및 초대 기독교인들 모두는 신명기18:15-20의 미래적 경향을 예언자적 약속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참조: 4Q Testimonia 5-8,행 3:22-23, 7:37). 제 2주제 : 고린도 전서 8:1-13 \\\\\\\\\\\\\\\\\\\\\\\\\\\\\\\"우상의 제물\\\\\\\\\\\\\\\\\\\\\\\\\\\\\\\"의 잇슈는(1절) 우리들을 헬라 시대의 신비한 제사와 희생적 제의로 인도한다. 많은 종교적 예배들의 동물의 희생을 포함하고 있다. 고기의 어떤 부분은 제단 위에서 태워지기도 하고 그 다른 나머지 부분은 시장에 팔리기도 하고, 연회에제공되어지기도 한다. 전반적인 고린도 사람들은 이 고기를 먹는것에 있어서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가지지 않았었다. 바울은 1절과 4절에서 그들 행동의 이론적 근거를 드러내면서 각 경우에 있어 \\\\\\\\\\\\\\\\\\\\\\\\\\\\\\\"우리가 안다.\\\\\\\\\\\\\\\\\\\\\\\\\\\\\\\"라는 절(節)을 통하여 당시 고린도에 유포되어있는 종교적인 고백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바라\\\\\\\\\\\\\\\\\\\\\\\\\\\\\\\"는 말은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는 확신을 내포하고 있으며그 이유로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다.\\\\\\\\\\\\\\\\\\\\\\\\\\\\\\\"는 말을 하게 되는것이다. 유일신론의 과격한 적용은 헬라주의적인 신들의 세계를쳐부수는 월등한 지식으로서의 의미를 낳는 것이다. 한 신(a god)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는 이러함에 문제거리로도 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신들의 존재에 대한 고린도인들의 개명(開明)한 부인을거부하고 있다(5절). 초자연적인 힘들은 실로 존재하는 것이다(바울의 사탄론으로서, 10:19-22 참조). 그러나, 창조자인 하나님과 창조물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이런 신들은 사람에 대한 그들의 모든 능력을 잃어 버린다(6절).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힘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7절). 그러나 만약에 있어구원의 지식이 이 \\\\\\\\\\\\\\\\\\\\\\\\\\\\\\\'더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인식에 있어 결함이 있고 부족한 것이 되는 것이다(2절). 그리스도 사건의 우상 타파적인 힘을 인정한다면(8절), 그새로 얻어진 지식은 법칙으로서 만들어지지 말아야 하며 사람에게 해롭게 사용되어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지식은 \\\\\\\\\\\\\\\\\\\\\\\\\\\\\\\"거만하게 하는 것\\\\\\\\\\\\\\\\\\\\\\\\\\\\\\\"으로(10절), 그것은 충분한 지식이 없는자들을 희생시키는 결과만 낳는 것이다. \\\\\\\\\\\\\\\\\\\\\\\\\\\\\\\"사랑\\\\\\\\\\\\\\\\\\\\\\\\\\\\\\\"이 바로 월등한지식과 성숙치 못한 자유를 고집하는 고린도인들에 대한 바울의수정안인 것이다(3장 참조). 사랑의 본질은 더 약한 형제를 세우고(1절)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데 있는 것이다. 아직도 희생제물에 대하여 강한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다면 모두는 먹는 것을 금하여야 한다(7-13절). 왜냐하면, 어떤 한 사람의 견해가 신들에 대한 신앙에 의해 지배받는다면, 신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에게 죄악과 번민의 감정만 낳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곧,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굴레의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바울의 윤리는 논리적 일관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자들을 위한 양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복음서 주제 : 마가복음 1:21-28 네 제자를 부른 후의 예수의 첫째 공적 행동은(1:16-20) 축귀(逐鬼)사건이었다. 그가 가버나움의 회당으로 들어가셨을 때에그는 그 자신이 적대적 힘에 의해 마주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다. 마가복음 1:21-28의 축귀 장면은 힘의 투쟁인 것이다. 처음엔 예수의 교훈이 강하게 강조되어진다(21-22절, 27절 참조). 그것의 의미가 비록 또렷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서기관들과같지 않는(22절) 권세 있는 가르침으로(22절) 특징지워 지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위임에 의지하여 예수의 메시지는 생의 현질서에 대해 과격한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소개한 우선 순위의 새로운 구조는 그의 선포적인 왕국에 대한 메시지와 필수 불가결한 관계를 맺고 있다(1:14-15). 그가 이 땅위에 하나님의 통치를 가르침과 축귀와(또한 병고침)의 수단을 통하여 수립하시고 계신다. 예수의 권위있는 말씀에 자극받은 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소리치고 있다 :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24절) 그 악한 영은아마도 예수의 선교의 능력과 목적을 인식한 것이겠다. 예수는나사렛의 사람인 동시에(24절) 하나님의 거룩한 자(24절)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악한 영 하나를 쫓아내러 왔을 뿐만 아니라,그 사탄의 세력 구조 그 자체를 진멸하려 오신 것이다. 그 악한영의 쓰라린 고백에 응답하여 예수께서는 그를 \\\\\\\\\\\\\\\\\\\\\\\\\\\\\\\"꾸짖으시고\\\\\\\\\\\\\\\\\\\\\\\\\\\\\\\" 계신다(25절). 그러나 \\\\\\\\\\\\\\\\\\\\\\\\\\\\\\\"꾸짖음\\\\\\\\\\\\\\\\\\\\\\\\\\\\\\\"과 \\\\\\\\\\\\\\\\\\\\\\\\\\\\\\\"비난\\\\\\\\\\\\\\\\\\\\\\\\\\\\\\\"으로 epitimao, 벌을 준다는 것은 적당치 못한 것이다. 이 동사는 축귀적 언어의 기술적인용어로, 적으로부터 힘을 못쓰게 하는 도전적인 행동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8:32-33 참조). 예수께서는 악한 영으로부터 그의권위를 빼앗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로부터 그의 힘의 근거를 탈취하고 있는 것이다(25절). 그 영의 패배는 도망가는 순간의 그남자의 경련과 큰 소리지름으로 알 수 있다(26절). 주변의 무리들은 어리둥절 하였으며 그 사건의 종말적 성격을 알아차리게 되었다(27절). 이리하여, 예수의 명성이 갈릴리 지방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28절). 예수의 가버나움에서의 축귀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왕국 사이의 충돌을 야기(惹起)하는 것이다. 그 사건의 근본적인내용은 두 왕국의 투쟁 바로 그것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새로운 말씀의 능력으로 삶의 인습적 질서에 도전하고 어두움의 세력을 때려 부수고 있다. 사탄의 부하인 더러운 영과의 대면에서하나님의 왕국은 이 땅 위에 실재화되고 있다. 이 힘의 투쟁의과정 속에서 예수의 모습이 그 대적의 입으로부터 드러나고 있는것이다. 그 분은 악의 영을 정복하신 성령이 충만한 아들이신 것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한 예언자가 올 것에 대한 약속이 신명기서에서 모든 형태의마법과 점술에 대한 혹평에 뒤이어 나오며, 이 둘은 그리하여 서로 대비를 이룬다. 둘째 본문은 우상에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에대한 바울의 충고로 되어 있다. 그 본문은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기는 아니다. 초월적인 악마의 힘은 존재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사역을 더러운 영에 대한 축귀 사건과 더불어 시작하고 있다. 현대의이성으로서 악한 세력의 악의 있는 존재에 관한 성서의 내용을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겠다. 마법의 이야기들은 \\\\\\\\\\\\\\\\\\\\\\\\\\\\\\\"17세기 말까지\\\\\\\\\\\\\\\\\\\\\\\\\\\\\\\" 마술과 미신적 행동에 대한 언급이 서양에 있어 나타날 정도로 풍부한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주의와 19세기의 산업혁명 및20세기의 기계문명에 영향을 받은 우리들 중의 어떤 이들은 문명인의 생각의 변두리로 쫓겨나간 불가사이한 일들을 아마 최근에이르러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아디슨(Joseph Addison)의 유명한 찬송 \\\\\\\\\\\\\\\\\\\\\\\\\\\\\\\"저 높고 푸른 하늘과\\\\\\\\\\\\\\\\\\\\\\\\\\\\\\\"(1712)는 시편 19편에 의한 것으로, 우주의 근본적으로 합리적인성격에 대한 높은 신념의 아름다운 예인 것이다. 초대교회는, 미신은 \\\\\\\\\\\\\\\\\\\\\\\\\\\\\\\"창조의 주\\\\\\\\\\\\\\\\\\\\\\\\\\\\\\\"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뜻하는 신명기적 예언을 재해석하였고, 실로 이 예언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면,그렇게 많은 세기 동안 기독교 세계에 잔존하여 왔었던 주술과,점술과, 마법을 역사적으로 추방시키기 위하여 아디슨(Addison) 위의 자연에 관한 이 신념을 가결하였다. 아디슨의 신앙, 곧 그신앙만이 오로지 그로 하여금 그렇게 쓰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마음의 귀를 열으면 영광의 찬송들린다. \\\\\\\\\\\\\\\\\\\\\\\\\\\\\\\"우리를 지어 내신 이 대주재 성부 하나님\\\\\\\\\\\\\\\\\\\\\\\\\\\\\\\" 그러나, 우리는 18세기의 그렇게 많은 것들을 특징지운 인간과자연에 대한 본질적으로 합리주의적인 그 자신있는 생각들을 위하여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였다. 그 댓가는 계시가 그것의 답인질문을 하는 것을 멈춘 이신론(理神論, deism)이었으며, 그것은또한 인간과 자연 모두의 비합리적인 양상에 대해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예언자가 신명기서 속에서 대신하여야만 하는 \\\\\\\\\\\\\\\\\\\\\\\\\\\\\\\"주님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의 증오와,\\\\\\\\\\\\\\\\\\\\\\\\\\\\\\\" 주술과, 점술과, 마법의 재흥(再興)의 서구문명 속에서 다소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한목사가 말한바와 같이 \\\\\\\\\\\\\\\\\\\\\\\\\\\\\\\"모든 영이 다 성령이 아니다.\\\\\\\\\\\\\\\\\\\\\\\\\\\\\\\"라는 투의말들을 발견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으로서 왔다. 영의 구별은 가장 필요한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예수의 더러운 영에 대한 분별과 축귀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춘 설교를 위하여 몇몇의 지침을 제공한다. 한 면에 있어서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보이지 않는 영들의 지배를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비성서적인 것이며, 그리고 18세기의 실수를 재차 범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반면, 미신에 대한 로고스가 주어진 회의(the Logos-given skepticism)를 포기하고, 또는 자연과 인간 본질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성령에 대한 신념은 미신과,어두움과, 죽음이 기묘한 세계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한 예언자가 나타나리라는 신명기의 약속은 마침내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어 진다. 아들됨(filioque)에 관한 신학적 주장은 참으로 복잡하기는 하나, 실제적인 문제 중의 하나에 있어서는 그 문장 덕택으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영을 식별하는 것이다.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에의하여 판정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자기 도취적인 섹트(sects)와 이상한 무리들의 분명히 향상된 성장과 영향에대해 설교자가 설교할 때에 있어 도움되는 지침이 될 수 있을 것같다. 그의 완전한 겸손은 인간의 어떤 것을 파괴하는 인간됨의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비난하는 것이다. \\\\\\\\\\\\\\\\\\\\\\\\\\\\\\\"은혜는 결코 본질을 파괴치 않는다.\\\\\\\\\\\\\\\\\\\\\\\\\\\\\\\" 구원은 파괴가 아니라 완성이다. 그의 충만하신 신성은 우리를 자기 도움(self-help)과 자기 의적인(self-righteous) 종교적 해결책의 불완전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한다. 이 분은 더 열심히 노력하였거나, 더 영리한 서기관이었거나 \\\\\\\\\\\\\\\\\\\\\\\\\\\\\\\"그의 시대 전에\\\\\\\\\\\\\\\\\\\\\\\\\\\\\\\" 통찰력을 가졌던, 어떤 영웅과 같은 분이아니었다. 이 분은 \\\\\\\\\\\\\\\\\\\\\\\\\\\\\\\"그 자신과 세계 사이를 화해시키려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취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를 또한 파악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린도에서 뽑은 우상에 바쳐진 음식에 대한 문제는 언뜻보면구체적인 질문인 것 같아 보일런지 모른다. 서양에 있어서는 그고린도 교회같은 수렁에 빠져 고민하는 교회가 거의 없기는 하나, 그것은 비기독교 문화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참여 할 수 있느냐 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언급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축제들이 기독교 정신과는 다르게 끝나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믿음이 강한 신자가들어갈 수는 있으나, 그것 때문에 다른 교인들의 신앙에 해로울지도 모를 행사들과, 모임과, 클럽들이 있는 것이다. 사랑의 의무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한 사람의 권리나 자유보다 우선적이라는 것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한 것은, 이 증가되는 세속화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선택에 적용되는 것 같아 보인다. 성 프란시스(St.Francis)의 이야기 중에 하나는 그와 몇몇 친구들이 긴 시간 동안 금식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 그 일원들 중한 명이 그 금식이 상당히 고통스러웠으며, 또한 프란시스는 그형제의 배가 밤새도록 아팠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그 고통이 참을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형제가금식을 포기치 않으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자신의 약속을 깨버리고, 그 형제와 함께 음식을 먹었다. 프란시스, 그 스스로는 바울의 이 귀절의 우선 순위에 따라 그의 금식을 하고 안하는 것에자유로왔으며,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의 자유를 선택치 아니하고약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의 금식을 계속하는 것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자기 도취적인 극적인 행동이 우선 순위와 예수 교훈의 중요한주제를 모호하게 하지 말아야만 한다. 성서는 이상하리만큼 그교훈의 내용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것은 왕국과 관련되어 있으며 성서에 상당히 의존하였고, 그리고 그는 \\\\\\\\\\\\\\\\\\\\\\\\\\\\\\\"서기관과같지 않은 권위를 가진 자\\\\\\\\\\\\\\\\\\\\\\\\\\\\\\\"로서 가르치셨다. 그가 메시야로서 알려지기 전에 신명기에 약속된 예언자로서 전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의하여 알려지기를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던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 모두는 이스라엘을 마법과 자연 숭배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St.Clement)의 인상 깊은 출입구가 있다. 십자가의 팔 아래로 교회로 들어가는 양편에예배자들의 통로에 따라 한 면에는 모세와 율법을 그린 벽화가있고, 다른 면에는 인간들이 율법을 순종하는 것에의 불가능성을나타내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벽화가 있다. 여기에 미술적이며 건축학적인 구약의 묘사와 신약에 대한 그것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명기의 교훈과 마가 사이의 연관을 설명하고 있다. W.H.Auden, Collected works(New York : Random House,1945),p.426. C.S.Lewis, The Fur Loves(New York : Harcourt Brace, 1960). 개편 찬송가 20장(3절 3,4단)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요21:1-14/ 정용섭 목사/ 주현절설교/ 2007-04-22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요21:1-14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느냐, 혹은 아느냐 하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말이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보도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부활 현상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입니다. 부활 사건 직후에는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요 20:9절에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은 빈무덤을 보았지만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요 24-29절에는 토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어떤 집에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예수님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던 토마도 말만 듣고는 믿지 못한다고 했는데, 현대인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만약 어떤 종교 전략가가 기독교를 창설했다면 부활 이야기는 제쳐놓았을 겁니다. 부활 없이도 예수님에게는 우리가 배우고 따를만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귀한 가르침들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키고 삭개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런 것만 해도 공자나 석가 못지않은 존경을 받을 만합니다. 부활은 오히려 현대 지성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사건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병이 낫는다거나 도덕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모든 기독교적인 삶은 무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배수진과 같습니다. 티베리야 호숫가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부활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할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이에 관한 복음서의 설명도 별로 논리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과 분명히 죽어서 무덤에 묻히셨던 분이 제자에게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만이 단편적으로 보도됩니다. 이런 증거만 놓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찜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20장으로 이미 일단락된 복음서에 21장을 보충합니다.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기술된 20:30,31을 읽어보면 요한복음이 원래 20장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순전히 예수님의 부활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21장을 보충한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21장의 저자를 다른 사람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두 장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다루고 있는 20장과 21장 사이에는 시공간적으로 차이가 큽니다. 약간 어색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20장에는 세 번의 부활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난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물론 그곳은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근처의 아리마태아 요셉의 가족 묘지입니다. 2) 그날 저녁에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3) 여드레 후에 앞서 언급한대로 주님은 토마가 포함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이곳도 예루살렘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 21:1-14절의 배경은 20장과 전혀 다릅니다. 이곳은 가나안의 남쪽 지역인 유대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북쪽 지역인 갈릴리의 티베리아 호숫가입니다. 일곱 명의 제자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10절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이 갈릴리로 간다는 말씀이 있지만 그것이 곧 일곱 명의 제자들이 티베리아 호숫가로 몰려온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일상생활로 돌아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동료들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그들이 모두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그들이 확실하게 믿었다면 지금 한가하게 고기를 잡으러 다닐 때가 아닙니다. 또한 그건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걸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여전히 그들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 보아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일어난 사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베드로의 제안에 따라서 고기를 잡으러 나선 이들은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에 부활의 주님은 호숫가에 서 계셨지만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무엇을 좀 잡았나 하고 물었고, 제자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일렀습니다. 그 말을 따르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장면에 대한 보도인 누가복음 5장(1-11절)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직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기 이전인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날 밤에도 시몬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그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고, 그물이 찢어질 지경으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두 이야기가 비슷한 이유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든지 아니면 각각의 서로 다른 전승이 우연하게 맞아떨어졌다는 데에 있겠지요. 오늘 우리가 그 모든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경험은 제자가 된다는 것과 긴밀히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잘 돌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나타난 현상이라는 사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제 본문이 새롭게 발전됩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을 받던 제자인 요한이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물에 많은 고기가 잡힌 걸 보고 처음 베드로가 제자로 부름 받던 그 순간을 기억한 것인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그 특유의 성격으로 몸에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제자들은 그물을 챙긴 후 배를 끌고 뭍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육지에 숯불, 생선, 빵이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물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려 고기를 헤아리자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숫자가 베드로에 의해서 전도된 사람들의 숫자라고 말하기도합니다. 12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일상적인 말씀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티베리아 호숫가의 사건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고 각주(脚註)를 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처음 나타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가 아니어서 숫자에서 제외된 것 같습니다. 묻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그 흐름이 별로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거리가 백 미터쯤 떨어진 탓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자들이 허겁지겁 육지로 가서 예수님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성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분명히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가 매장까지 당하신 선생님이 다시 자기들 앞에 나타나셨다면 무언가 질문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들은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무덤에 있었던 삼일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인지, 정말 부활하신 건지, 당신이 바로 그 예수님이신지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기자는 그 이유를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해명합니다.(12절) 여러분, 지금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원초적 자리로 들어온 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두 가지 분명한 사실에 근거합니다. 첫째,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진술에 논리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사건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예수님의 부활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근거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뉴턴의 기계적 역학은 그 이전의 이론에 의해서 이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이론인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연과학이 별로 신빙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 부분적인 진리인식이라는 뜻입니다. 자연과학을 말이 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말이 안 되는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현현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제자 자신들도 부활을 믿을 수 없었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것만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그럴듯한 말로 꾸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뒤가 딱 떨어지는, 알리바이가 되는 이야기로 각색하지 않고, 거칠지만 자신들의 경험을 그대로 전하기만 했습니다. 자신들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꼼꼼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었지만, 죽었던 예수님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것만은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를 비롯한 여러 편지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사실을 그대로 믿습니까? 믿을 수 있나요? 믿기 전에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는 그렇게 믿기 쉽지 않습니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면 믿는 시늉을 하겠지만 정말 그런가 하고 따지고 들면 믿지 못할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말이 안 되는 것을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고 단지 제자들의 경험만 있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이기도 합니다. 말이 안 되는 사건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분명한 경험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말이 안 되는 걸 믿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말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을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에 가서 모든 창조의 비밀이 드러나게 될 그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요령껏 설명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이 완성된 종말로부터 거꾸로 돌입한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그 종말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어떤 사건을 경험한 것뿐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을 아주 평범한 제자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떤 소년이 혼자서 UFO를 만난 것과 비슷한지 모르겠군요. 여러분은 성서에 근거한 저의 이런 설명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즉 종말의 생명이 어떻게 현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좋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영인 성령에게 자기의 삶을 의존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부활생명을 환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그 생명의 놀라움 앞에서 기쁜 노래를 부를 날일 올 것입니다. 본문 7절에 요한의 외마디가 여러분의 입에서 터져 나올 것입니다. “저분은 주심이십니다.”
주는 영이시다/ 고후3:12-18/ 정용섭 목사/ 대구샘터교회/ 주현절설교/ 2010-02-14
주는 영이시다 고후3:12-18 바울의 반대자들 우리는 오늘 신약성서 중에서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대목 중의 한 대목을 읽었습니다. 마지막 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구절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처럼 들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삶이 무엇인가요? 학생들은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어른들은 돈을 버는 일에 모든 힘을 쏟습니다. 자녀들을 키우는 문제도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인간관계도 힘이 듭니다. 심지어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늘 긴장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우리가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지금 대학, 취업, 결혼, 사업이 잘 돼서 기분이 좋거나 잘 안 돼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마당에 영광이라니요. 그게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바울의 이 말을 지레짐작하지 마십시오. 그는 뜬구름을 잡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구체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그걸 알아야만 이 말씀이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의 반대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자들이라고 해서 조폭이거나 사이비이단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이 정통으로 인정을 받지만 당시는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반대자들이 정통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권위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열두 사도의 권위는 어디서나 최고의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전에 함께 생활하고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었으니, 그런 권위는 당연합니다.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사도의 권위를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서 추천서를 받은 일단의 설교자들이 고린도교회에 와서 설교하고 신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사도의 추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약점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각각의 교단에서 정식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과 그런 것 없이 복음에 심취해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비교하면 됩니다. 전자는 목사 자격증이 있고, 후자는 그것이 없습니다. 신자들이 누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까요? 초기 기독교 제도권에서 바울은 별로 이렇다 할 자리를 잡기 힘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들과 달리 예수님의 생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니 누가 그걸 인정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을 노골적으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심으로 경계한 것은 그럴만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반대자들과 투쟁했습니다. 자신의 사도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반대자들이 사도들에게서 받은 기득권인 추천서를 별 거 아닌 거라고 주장합니다. 고후 3: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바울은 사람이 종이에 쓴 추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으로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마음에 쓴 추천서가 있다는 겁니다. 종이에 쓴 추천서는 돌 판에 쓴 것이고, 영으로 쓴 추천서는 마음 판에 쓴 것입니다.(고훈 3:3b) 바울의 이런 주장은 옳은가요? 혹시 사도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기 열등감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닌가요? 이걸 판단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바울도 사람이기에 기분에 따라서 뭔가 다른 말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바울은 당시 교회를 대표하는 베드로를 핀잔한 적도 있다는 사실에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의 추천서를 들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자랑하는 바울의 반대자들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어느 쪽이 진리에 속했는가 하는 겁니다. 바울은 아주 분명한 진리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돌판과 마음판 바울은 추천서에 대해서 말하는 마지막 단락에서 돌판과 마음판을 거론했습니다. 그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의 적대자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적입니다. 돌판은 십계명을 받은 모세 전승의 핵심입니다. 율법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 율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게 좀 이상할 겁니다. 그들은 사도의 추천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그대로 가르쳤다면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충실한 대변자들입니다. 사도들도 여전히 율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던 바울의 반대자들은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예수를 믿되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들과 바울이 여기서 대립됩니다. 당시에 그런 대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갈라디아서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것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거라고 독하게 말했습니다.(갈 1:10) 여기서 말하는 다른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추천서를 받은 사람들이 전한 내용입니다. 사도들이 왜 예수를 믿되 율법을 더불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율법은 사도들에게 아주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습니다. 요즘 모태신앙인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사도들은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가 있듯이 나사렛파로 자리했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는 바울의 반대자들은 이런 사도의 입장을 그래도 반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영’입니다. 추천서를 언급하면서 자기의 추천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후 3:6) 제가 설교 머리에서 인용한 고후 3:18절에서도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것이 모두 영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진리의 근거로 말하는 영은 무엇일까요? 영이 눈에 보일 정도로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특별한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어떤 비밀 가득한 것일까요? 영(靈)은 헬라어 ‘프뉴마’의 번역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루아흐’입니다. 신구약성서를 막론하고 성서는 이 영을 생명과 연결해서 사용합니다. 영은 생명의 힘입니다. 살리는 힘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여기서 주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예수님이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힘이며, 그가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생명의 영과 일치되셨고, 바로 거기에서만 우리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아는 사람만이 자유로워지니까요.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던 바울의 반대자들은 위의 사실을 분명하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여전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증거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문제를 비판하는 중입니다. 고후 3:15절에 따르면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습니다. 율법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바울은 수건에 관한 이야기를 출 34:29-35절에서 인용했습니다. 십계명을 새긴 돌 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광채였습니다. 모세는 말씀을 전한 다음에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를 보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이야기를 다르게 해석합니다.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에 쓴 것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입니다.(고후 3:13) 출애굽기 기자는 수건으로 가린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반면에 바울은 소극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어떤 다른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수건 사건을 인용할 것뿐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는 바울의 반대자들도 여전히 수건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율법의 한계를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이제 수건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입니다.(고후 3:14) 언제들이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고후 3:16)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에게 돌아가면 율법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수건을 가린 채 율법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당장 율법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롬 3:20) 그것은 ‘정죄의 직분’입니다.(고후 3:9) 율법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율법도 나름으로 역할이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수건을 가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율법의 한계를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복음과 동시에 필요한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태양과 손전등 비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손전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기도 없고 어두운 곳에서 나름으로 필요합니다. 아침이 되어 밝은 태양이 떴습니다. 어떤 사람이 밝은 대낮에 손전등을 키고 다니면서 그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고 있습니다. 모양이 얼마나 이상합니까? 그들은 수건으로 그림자를 만들어놓고 손전등을 거기에 비추면서 손전등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직 세상이 어둡다고 외칩니다. 손전등은 태양이 없을 때만 일시적으로 필요합니다. 이미 태양이 떴는데도 손전등을 계속 비추고 다닌다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의 그 반대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태양과 같은 빛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드러났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손전등에 불과한 율법을 더불어서 지켜야 한다고 더 이상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실을 알 게 하는 이가 바로 영이십니다. 그 영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고후 4:6절에서 이것을 정확하게 전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 비추셨느니라.” 빛을 창조하신 분이 우리에게 참된 인식의 빛을 비추신다는 겁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바울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영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것이 이해가 되시나요? 물론 우리는 영이 무엇인지 그림을 그리듯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듯이 영의 활동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의 추천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영의 추천서를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사도의 추천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영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믿습니다.” 하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겠고, 잘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겠지요. “믿습니다.” 하고 큰 소리를 쳐도 실제로는 이런 영적인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고, 잘 모르겠다고 말해도 실제로는 이미 그런 세계에 들어간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건 제 삼자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영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 사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한 말씀만 보충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궁극적인 생명 사건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그의 운명에서 무상하지 않는 참된 생명이 실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시어 모든 이들에게 부활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주님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과 똑같은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와 동일한 부활의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를 대라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 증거는 성서입니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영입니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운행하며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열어가는 그 영을 피조물인 인간이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영이 우리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겨주기를 기도할 뿐이겠지요. 그렇게 수건이 벗겨진 사람들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신비한 생명의 세계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겠지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영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영으로 쓴 편지이듯이 말입니다.
창조의 빛, 인식의 빛/ 고후4:1-6/ 정용섭 목사/ 주현절설교/ 2009-02-22
창조의 빛, 인식의 빛 고후4:1-6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을 기리는 절기인 주현절(主顯節)은 1월6일입니다. 그 다음의 첫 주일을 주현절 첫 주일이라고 부르는데, 사순절이 시작되는 성회 수요일 전까지 계속됩니다. 주현절의 길이는 매년 달라집니다. 작년에는 네 주간이었고, 금년에는 일곱 주간입니다. 이렇게 달라지는 이유는 부활절이 유대교의 유월절 절기와 연관되는 반면에 주현절의 뿌리인 성탄절이 일반 태양력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주현절을 ‘빛의 축제절’이라고도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셨다는 의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성탄절도 빛과 연관됩니다.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나고 낮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는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설명했습니다.(요 1:9) 이 빛은 생명이었습니다. 이 세상 만물 안에 있는 생명은 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빛, 생명, 예수님을 신앙의 차원에서 한 묶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빛이 생명이라는 사실은 기독교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고대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건 물리학에서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생명의 가장 밑바닥에는 빛, 탄소, 물에 의한 광합성 현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빛이 없다면 생명도 불가능합니다. 빛보다 물이 더 본질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 그래도 빛은 생명 현상에서 필요불가결한 요소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닙니다. 특히 고대인들에게는 빛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빛이 주는 밝음과 열은 생명의 절대 조건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빛이며, 생명이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 인식이 옳은가요? 인식의 빛 오늘 설교의 본문인 고후 4:1-6절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것을 아는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쳐주셨다고 합니다. 진리를 아는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 스스로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는다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니까 그렇게 생각 할만도 합니다. 그러나 머리가 좋으면 계산을 잘 할 뿐이지 진리를 깨닫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림 그리는 솜씨가 좋다고 해서 모두가 위대한 화가가 되는 건 아닙니다. 말을 잘 한다고 해서 모두가 위대한 시인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진리는 내가 노력해서 터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진리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시인 오인태의 <아버지의 집>이라는 시집에 “시가 내게 왔다”라는 시가 실려 있습니다.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위에 파르르 떤 달 빛 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없이 시가 내게 왔다. ‘시가 내게 왔다’는 표현은 성령이 내게 왔다거나 하나님의 계시가 내게 왔다는 성서적 표현과 일맥상통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인식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것입니다. 거꾸로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빛이 비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요 1:5) 나무를 보십시오. 빛이 비추지 않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어둠에 빠지면 그 나무는 죽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명석한 두뇌가 있다고 하더라도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인식할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참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 길들여진 사람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를뿐더러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빛의 세계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에 답답해하기만 합니다. 마치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살리에리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음악적 재능이 부족해서 모차르트 앞에서 자기의 운명을 한탄했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신앙 세계에서도 이런 일들은 자주 일어납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했다고 말입니다.(고후 4:4) 하나님이 따로 있고 세상의 신이 따로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신은 욥을 시험하거나 공생애 출발 전의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처럼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세력이라는 뜻입니다. 그 세력은 너무 강력해서 마치 신의 능력처럼 보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런 악한 능력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복음에 가려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악한 신에 사로잡혀 마음이 혼미해졌고, 그래서 복음의 광채에 비추임을 당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세상의 신을 언급한 이유는 복음이 가려진 이유를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외모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가문도 아니었습니다. 아무 것도 그것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 못됩니다. 이와 반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는지, 우리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는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알 수 있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췄다는 바울의 고백을 그대로 따를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 빛은 창조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시작은 바로 그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있어야만 생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물의 인식이 가능합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서는 사물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빛을 가장 나중에 창조했다면 그 이전의 창조는 무의미했을 겁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이 빛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인식의 근원입니다. 바로 그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췄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결코 복음을 인식할 수 없었다는 바울의 말은 옳습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인식의 근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앞서 하나님의 빛이 먼저 우리 마음을 비추었다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철부지 아이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철이 나야 합니다. 철이 난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근본을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철이 일찍 나는 아이가 있고, 좀 늦는 아이가 있고, 죽을 때까지 철이 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날까요? 진리의 빛이 그 아이의 마음을 비추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을 인식하는 것도 이처럼 하나님의 빛이, 그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출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 하나님의 영광 신앙적 인식이 일상에서 철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두 인식이 똑같은 차원은 아닙니다. 신앙의 인식은 훨씬 근본적이고 본질적입니다. 훨씬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는 그 인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이기(고후 4:6)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고후 4:4b)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지적인 능력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얼굴을 아무리 자세하게 뜯어봐도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문신처럼 그려지거나 글자로 새겨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예수님이 하나님처럼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전 영국의 어떤 학자가 예수님의 실제 모습을 컴퓨터로 복원해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노동자로 살던 서른 살 내외의 일반적인 유대 남자를 추정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초상화로 나온 그림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이 초상화는 긴 머리에 지성적이고 영적인 느낌이 넘치는 매력적인 백인 남자였지만, 컴퓨터가 과학적인 근거로 찾아낸 그림은 아주 평범한 고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그를 믿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말할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얼굴은 외모가 아니라 그분의 인격을 가리킵니다. 인격은 그의 모든 삶을 가리킵니다. 그의 가르침, 그의 행위, 그의 믿음, 그의 운명을 모두 통틀어서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이 실행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하나님의 구원이 현재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믿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식의 빛을 주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상한 말로 들리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거기로 돌아서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더 심하게 거절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아무런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쪽으로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메타노이아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런 신앙을 유치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와는 구별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필요로 한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만 묶여 있었던 탓에 예수님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도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아무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당시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당시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던 바리새인이나 바울과 대립하던 사람들이 어딘가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원만하고 균형 감각이 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옳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생각하고 경험한 신앙의 차원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옳다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증거를 대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잘 믿고 있으니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거절한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리라고 봅니다. 그러기를 바라고,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좀더 진지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실제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거절한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종교적 욕망을 믿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마음에 창조의 빛이 비쳐지지 않은 사람들이며, 더 심한 경우로 세상의 신에 의해서 마음이 여전히 혼미해진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또는 이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닐는지요. 예수를 통한 구원 신비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와 참된 인식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희미하게 비친다는 뜻일까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려면 생각 전체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와 그 미래를 향해서 돌아서는 게 회심이듯이 우리의 생각 전체를 바꾸는 것이 회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이 비춰진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핵심에는 생명이 놓여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완전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소유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지난 금요일에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한 종교 지도자의 죽음이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킨 경우도 드믑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추기경이자 세계에서 최연소로 추기경이 되었으며, 그의 소박한 삶과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군사독재와의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어려운 시절에 한국 민중들이 존경할만한 지도자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요. 어제 김 추기경이 1미터 깊이의 땅에 묻히는 장면도 생생하게 공중파 텔레비전을 통해서 방영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이나 별 볼일 없는 이나 죽으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좋은 관에 담기든지 허술한 관에 담기든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몸은 조금 후에 완전히 해체됩니다. 거기까지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손 쓸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거기로부터, 즉 인간의 절대 한계상황으로부터 그것을 거슬러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하셨습니다. 그 변화가 궁극적인 구원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더불어 예수님의 운명에서만 완전한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식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출 때만 가능합니다. 그창조 하나님, 저희 마음을 비추소서. 아멘!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고전12:12-31/ 정용섭 목사/ 주현절설교/ 2007-01-21
카리스마의 영적 원리 고전12:12-31 고린도교회 그리스는 우리나라나 이탈리아처럼 반도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 지형이 개미의 몸처럼 가운데가 잘록합니다. 북쪽 본토와 남쪽 펠레폰네소스를 연결하는 지협의 서남단에 고린토라는 도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건축양식 중의 하나인 ‘코린티안’이 이 도시의 이름을 딴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고린도를 거쳐야 하며, 동쪽 바다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려고 해도 역시 고린도를 거쳐야 합니다. 네로가 이 지협을 뚫는 운하건설을 추진하다가 포기하고, 근대로 넘어와 1893년에야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교통의 요지였던 고린도는 고대시대에 이미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따르면 바울은 2차 선교여행 후반부에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들 부부는 로마에서 비교적 크게 사업을 하다가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에 따라서 로마를 쫓겨나 이곳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직업이 바울과 똑같은 가죽가공업이었던 때문이지 바울은 이들과 쉽게 친해졌습니다. 바울은 이들 부부를 포함해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의 전도 효과는 상반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심하게 반대했지만 이방인, 즉 고린도 사람들은 비교적 우호적이었습니다. 다행히 회당장인 그리스보와 여러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바울은 3,4년이 지난 후에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식을 에베소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 소식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는 클로에 집안사람들에게서 들은 소식입니다.(고전 1:11) 둘째는 스테파나와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에게서 들은 소식입니다.(고전 16:17) 셋째는 고린도 교회가 직접 바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한 소식입니다.(고전 7:1)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우리가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고린도서를 통해서 그 교회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크게 보아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린도시민들에게서 영향 받은 부도덕성입니다. 5-8장에 그 내용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문란한 성윤리, 교우 사이의 재판, 결혼, 자유인과 노예의 문제, 우상 앞에 놓인 음식에 대한 문제 등등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당파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했습니다. 1장12절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당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만 일어난 게 아니라 교회의 직분과 봉사활동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사도, 예언자, 교사, 기적행위자, 신유능력자, 행정가, 방언자 등등이 서로 자기들의 일을 앞세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이들의 활동을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끝없는 분열과 시기와 반목이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명제는 이런 점에서 무조건 옳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쨌든지 바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린도 교회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여러 편의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후서 이외에 다른 편지도 있는데, 그것은 분실되어서 신약성서 안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카리스마의 원천 바울이 이 분열을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신학적인 것입니다. 핵심적으로는 교회론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고 본질적인 신학적 진술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지금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의 몸은 우리와 똑같은 단백질로 이루어진 이런 몸을 가리키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이후에 현실성이 된 영적인 몸을 가리킵니다. 이걸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 구성원들은 모두 지체라는 뜻입니다. 이건 눈에 보이는 설명이 아니라 신학적인 진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우리의 머리는 아니지요. 우리가 서로 연결된 지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경험되지도 않습니다. 대개의 신앙생활은 자기의 종교적 욕구에 묶여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수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지는 몰라도 수평적으로 신자들 사이의 관계는 무의미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열정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이지만 교회의 일치라는 점에서는 낙제점수를 면키 어렵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즉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들의 영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배워야합니다. 고전 12:1-11절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은총의 선물”과 “성령”입니다. 은총의 선물은 곧 카리스마를 뜻합니다. 제가 언젠가 이 카리스마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은사’, 즉 은혜로운 선물을 가리킵니다. 은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고린도전서 전체가 자주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8,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28절에 의하면 이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교사 등이 포함됩니다. 말하자면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거리와 직무들이 카리스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초능력적인 힘을 가진 사람에게 이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쓰지만, 성서 헬라어 개념으로 본다면 아주 평범한 일과 평범한 직책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모든 카리스마의 원천은 성령입니다. 카리스마는 성령이 주신다는 말씀이 12:1-11절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바로 위에서 짚은 대로 병을 고치는 능력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이고, 말씀을 전하는 것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입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성가대의 활동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은사, 즉 카리스마이고, 교회청소도 역시 성령이 주시는 카리스마입니다. 카리스마의 원천은 곧 성령입니다. 이런 말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여러분이 알고 있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매우 포괄적이기도 하고, 제가 다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느 정도로 말씀드려야 할지 조금 망설여집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시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대답하기가 망설여지지요? 도대체 성령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데, 그것 받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생각이 많을 겁니다. 어떤 용감한 사람은 무조건 “아멘” 하고 대답하겠지요.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관심이 없는 사람은 솔직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힘이며, 생명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지금 목숨이 붙어 있다는 건 곧 어떤 방식으로든지 성령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그걸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성령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다만 오늘 설교의 주제와 연결해서 다시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받고 있는가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겠지요. 그것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다면 이미 그 은사의 범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겠군요. 여러분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교회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했다면, 참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카리스마를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지금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즘 집사람이 주일에 함께 나눌 먹을거리를 준비하는데, 그것도 역시 성령의 선물인 은사입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어린아이처럼 작은 공동체래서 여러 활동들이 없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일들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해야만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성령과 연결됩니다. 아주 사소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과 연결되는 매우 귀중한 기회입니다. 유기적 공동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실제 몸을 비유로 들면서 카리스마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은사의 원천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 말은 곧 모든 은사는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은사가 한 성령에서 온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은사는 똑같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학적 착상이며,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목사나 사찰이나 다른 게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장로나 주일학교 선생이나 똑같다는 말입니다. 물론 행위 자체가 똑같다는 건 아닙니다. 15절부터 바울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눈의 역할과 귀의 역할은 다릅니다. 위의 역할과 손의 역할도 다릅니다. 목사의 역할과 성가대의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할은 동일하게 카리스마일 뿐입니다. 성령에게서 온 카리스마는 비록 기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엘리제를 위하여”나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이나 모두 베토벤이 작곡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엘리제를 위하여”는 소품이니까 수준이 낮고 합창 교향곡은 수준이 높다고 말한다면, 또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사람에 비해서 합창교향곡을 지휘하는 사람이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면 그는 음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단지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카리스마가 동일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교회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누가 교회에서 화장실 청소나 하면서 자신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카리스마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이게 참으로 현실교회가 일으켜 세워야 하고, 극복해야 할 카리스마의 영성입니다. 만약 우리의 능력과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역할의 높고 낮음에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인은 이런 점에서 매우 약하기 때문에 카리스마의 영성은 개인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공동체 전체가 꾸준하게 확보해 나가야 합니다. 그 방향은 아주 분명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어떤 직책이든지 개인을 높이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공동체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니까요. 어떻게 교회공동체가 사람이 아니라 생명의 영인 성령이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그 구체적인 문제는 각각의 교회가 처한 형편에서 깊이 성찰해서 결정해야 하겠지만, 오늘 바울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더 요긴하게 생각해야 하며,(22절) “변변치 못한 부분”을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24절) 이런 카리스마의 영적인 원리는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전체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가 오히려 소중하게 인정받는 세상이 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세상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일들은 누구에게 강요받는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카리스마의 원천인 성령 안에서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하고 신뢰할 때만 조금씩 그 가능성이 열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이런 일을 위한 징표(symbol)로 자리매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요2:1-12/ 정용섭 목사/ 주현절설교/ 2007-01-14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요2:1-12 가나 혼인잔치 오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한편의 삽화입니다. 갈릴래아의 가나라는 곳에 혼인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날 잔칫집을 상상해보십시오. 국수, 부침이, 떡, 돼지고기, 막걸리, 온갖 과일 등, 먹을거리가 넘쳐납니다. 잔치는 한 집안만이 아니라 동네 전체가 벌이는 축제입니다. 이 혼인 잔치에 예수님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잔치 주인이 예수님의 친척일까요? 예수의 어머니까지 그 자리에 온 걸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또 예수의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신랑이 예수의 친구나 제자일도 모르겠습니다. 잔치가 진행되는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손님이 예상보다 많이 온 탓인지, 손님들 중에서 두주불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든지, 또는 포도주를 충분히 장만하지 못할 정도로 집주인이 가난했든지, 여하튼 잔칫집으로서는 매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습니다. 마리아의 태도를 보면 집주인과 마리아의 관계가 아주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포도주가 떨어진 걸 알 까닭이 없으며, 떨어진 것을 알았다 한들 그걸 예수에게 전할 까닭이 없습니다. 물론 마리아가 오지랖이 넓은 여자래서 그런 일까지 참견하고 나섰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대목에 대해서 성서기자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 이런 대답만 보면 조금 민망합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너무 냉정하게 대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5절)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하리라고 믿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의 대화는 오늘 우리에게 흡사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2천 년 전 요한복음 기자의 시각으로 보도된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상하게 들리는 건 당연합니다. 이 사건의 진행을 조금 더 따라갑시다. 성서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정결예식 때 사용하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그 집에 놓여 있었습니다. 원래 물이 부족한 지역이기 때문에 항아리 숫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 부엌에도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동네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그 항아리에 담아두고 썼습니다. 지금보다 불편하긴 했지만 물 항아리가 놓인 부엌이라, 생각만 해도 정감이 어립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거부한 것 같았던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7절)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자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일렀습니다. “이제는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8절)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자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이야기의 중요한 줄거리입니다. 물론 그 뒤로 잔치 맡은 이의 말이 나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이 사람은 포도주 맛을 보더니 신랑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오!”(10절) 간혹 술집 주인들이 술 취한 손님들에게 가짜 양주를 내놓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일은 이미 2천 년 전부터의 관행이군요. 잔치 맡은 사람의 이런 진술은 앞서 일어난 사건, 즉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보충 설명입니다. 디오니시우스 여러분들은 오늘의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듭니까?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가능합니다. 첫째 반응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둘째 반응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은 2천 년 전 미숙한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지 오늘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요한복음 기자의 보도는 사실입니까, 아니면 단지 신앙적인 해석에 불과합니까?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이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대세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사실을 일단 전제하고 그 사건에서 신앙적인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첫 기적을 행하신 곳이 혼인잔치 집이라는 사실은 곧 교회가 잔칫집과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듯이 우리도 변해야 한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우리의 삶이 물에서 포도주로 변한다. 여러분은 이런 것 이외에 더 많은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히 부으라고 하셨으니까 우리도 교회를 가득히 채워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또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우리에게는 늘 기적이 일어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나중 포도주의 맛이 더 좋았듯이 기독교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처음보다 나중으로 갈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은 나쁠 건 없지만 본문의 중심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선 가나의 포도주 사건이 요한복음의 독자전승이라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는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서는 똑같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 말씀인데, 왜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만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될까요?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맙시다. 이 본문은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는 요한복음 기자의 고유한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 차이점은 근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은 네 복음서 중에서 헬라철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은 헬라 사상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흔적들이 요한복음에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포도주 사건 이야기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의 성서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이미 헬라 신화에 나옵니다. C.K. 바레트의 설명에 따르면 디오니시우스 신(神)은 포도나무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적들은 디오니시우스 예배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기원전 5세기의 고고학 연구에서 이런 것들의 증거들이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이런 신화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들이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신화를 채용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말인가, 하고 언짢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확실한 겁니다. 또한 복음서의 보도에는 순수하게 기독교적이지 않은, 또는 그 역사성을 완전하게 증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최선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을 통해서, 비록 그것이 헬라신화와 연관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신학적 영성이기도 합니다. 성서본문이 말하는 핵심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는 영성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물이 포도주가 변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미 헬라신화에 등장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오늘 우리는 이 사건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을 수 있습니까? 기적과 영광 요한복음 기자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전한 다음에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문장에서 첫 번째 ‘기적’과 당신의 ‘영광’이 중요합니다. 아니 포도주 사건 전체에서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첫 번째 기적은 헬라어 “아르켄 톤 세메이온”입니다. 성서에는 기적이 많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도 기적입니다. 무로부터 무엇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대망하는 새 하늘과 새 땅도 역시 기적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사이에 얼마나 많은 기적 이야기가 보도되고 있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서를 펼쳐들기만 하면 나오는 이런 기적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서를 오해하기도 합니다.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자기 인생이 기적적으로 좋아지리라는 야무진 꿈을 기독교 신앙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큰 착각입니다. 성서기자들은 기적 자체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마술사입니다. 성서는 비록 기적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마술이 아닙니다. 성서 기자들이 보도하는 기적 이야기는 그야말로 “sign”, 즉 “표징”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기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중요한 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 손가락에 매달립니다. 당신,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성서가 말씀하는 걸 그대로 믿으면 되지 거기서 무슨 손가락과 달 이야기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서언어가 가리키는 근원적인 생명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성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성서 기자들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요한은 이 기적이 “첫 번째”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아르케는 순서에 따른 첫 번째라는 뜻만이 아니라 근원적인, 일차적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첫 번째 행한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본질적인 사건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바로 예수님의 “영광”(독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적을 중심으로 한 ‘호기심 천국’이 아닙니다. 기적, 꿈, 비전, 선교 등등,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예수의 영광이 중심입니다. 이런 말이 여러분의 생각을 더 복잡하게 하는 것 같군요. 도대체 예수의 영광이라니, 손에 잡히지 않지요? 당연합니다. 2천 년 전 기독교 공동체들이 경험하고 인식한 예수의 영광을 우리가 쉽게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운 것에만 눈독을 들입니다. 기적현상에만 심취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네, 하는 소문만을 퍼뜨립니다.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무슨 뜻인가요? 포도주 사건이 가리키고 있는 그 예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영광이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됩니다. 지금은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도 있지만, 원래 성서 언어에서 사람에게는 사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현시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마리아의 요청에 대해서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신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그리고 예수님을 모두 알아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 현시가 완전하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포도주 사건으로 부분적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게 현시되었습니다. 유대교의 정결의식에 사용되던 물이 생명을 살리는 포도주로 변화된 것처럼 예수님은 생명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신앙 안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현시하셨다는 신앙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나타나는 구원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 같은 존재론적인 변화가 가능합니다. 가장 궁극적인 변화는 우리가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쳐집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운명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