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2001년 9월9일 수14:9-12 행복을 베푸는 사람 2017-11-21 23:54:36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문에 난 기사 가운데 한 글을 생각합니다. "그는 참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 해 주라는 권유를
2001년 9월9일 수14:9-12 행복을 베푸는 사람 2017-11-21 23:54:36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문에 난 기사 가운데 한 글을 생각합니다. "그는 참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 해 주라는 권유를 를 뿌리치고 바보같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먼 외국으로 쫓아 버렸습니다. 새까만 후배들이 통일운동에 앞장선다면서 가로막힌 북녘땅을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릴 때도 그는 참 바보처럼 "저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엘 가지 못하는데 어찌 나 혼자만 가겠는가"라면서 그리운 고향 땅을 한번도 밟아 보지 못했습니다. 사자후 같은 명 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몰랐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입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을 가졌던 이 바보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한 경직 목사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마음으로 사십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사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양보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줄로 믿습니다. 교인중에는 유치한 신앙심을 갖고 있는데 유치한 신앙인은 4가지 특징이 있답니다. 내가 해당이 돼나 안돼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①첫번째 예수 믿으면 결코 고난과 고통이 없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고통과 어려움은 저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도 내게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징계의 매를 드신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유치한 신앙인은 ②고난을 불행으로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불행과 고난이라도 불평하지 아니하고 인내할 줄 아는 신앙인입니다. 세 번째 유치한 신앙인은 ③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기도는 다 들어주신다고 믿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초조해 하고 속상해 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내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원 대로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욕심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은 내 소원을 간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처럼 주님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쩨 유치한 신앙인은 ④언제나 모든 분야에서 우두머리가 되고 승리만 해야 한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무조건 이겨야 되고 평지만을 고집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는 오늘 갈렙처럼 평지보다 산지를 달라고 하는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내 뜻 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신앙이며 평지보다 산지를 달라고 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갈렙은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로서 출애굽 2년에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뽑힌 12명중에 유다 지파의 대표로 뽑힌 사람입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면서 그 땅이 어떠한지, 거민은 어떠한지,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오는 중에 그가 40일 만에 돌아오면서 가나안 땅의 포도 한 송이를 꺾어 왔는데 그 송이가 얼마나 큰지 두 사람이 막대기에 메고 왔을 정도로 탐스러운 광일 이었습니다. 12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 와서 보고하는데 10명은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땅의 백성들은 모두 거인과 같고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보고를 할 때에 온 회중이 통곡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너무 좋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설득하였으나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돌로 치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불신앙의 부정적인 나약한 믿음을 가졌던 20세 이상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정복하고 이제 12지파가 땅을 제비뽑기로 나누는 아주 심각한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누가 공적이 큰가에 따라서 땅을 나누겠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비뽑기를 해서 공평하게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전날 모두 한숨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앴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농사짓기 좋은 땅을 배분 받을 것인가, 이왕이면 강이 있고 살기 좋은 땅을 차지할까 하는 심정으로 나와서 제비뽑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묵이 흐르고 긴장된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보시오" 라고 손을 들고 크게 외쳐대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갈렙이었습니다. "나는 저기 높은 산지를 내게 주시요!" 모든 사람들이 원치 않는 헤브론 산지에 땅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헤브론 땅은 헤브론은 산지였습니다. 헤브론에는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고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로 가나안 땅을 정탐 할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낙 자손들은 네피림의 후손들로 용맹스러운 부족이었으며 그들의 성읍은 크고 견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정탐꾼들이 벌벌 떤 이유도 이 아낙자손들과 그들의 견고한 성읍을 보고 기가 질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 험악한 땅 헤브론을 달라는 것이었다. 갈렙은 여호수아 다음으로 2인자였다. 갈렙이 가나안 땅 중에서 가장 좋은 땅을 달라고 했어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남들이 갖기 가장 싫어하는 땅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헤브론을 받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아낙자손들을 쫓아내고 내 땅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인데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싫어하니 내가 힘든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이만한 아량과 포부와 믿음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공(功)이 있으면, 그의 합당한 대우를 해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사람이 나이 들면 힘들어 편히 쉬고 싶을 텐데 갈렙은 그의 나이가 85세 인데도 고생스런 일을 자청한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그들을 쫒아내리이다." 이것이 갈렙의 신앙적 삶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험악한 아낙자손과도 싸워서 이길 수가 있으니 이 산지를 내게 달라는 것입니다. !" 수14:9에 보면 모세가 갈렙에게 약소한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는 갈렙에게 "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민13:32) 갈렙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수고를 하였기 때문에 그가 밞은 가나안 땅을 마음대로 차지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갈렙은 이미 옥토를 약속을 받았음으로 고생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갈렙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자기에게 돌아올 옥토를 차지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지의 옥토는 다른 11지파에게 주고 점령하기 어려운 산지를 갖겠다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즘 세상은 자신은 평안한 것을 택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것을 맏기는 것이 요즘 세상인데 갈렙은 이와는 정반대로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갈렙을 통해서 기쁨을 남에게 베풀고 자기는 희생하는 고매한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기 조카 롯에게 그렇게 했습니다.(창13:1-18) 이삭도 우물을 빼앗는 그랄 사람들에게 자기를 희생하고 다 양보합니다.(창26:17-22) 나 하기 싫은 일을 남편이나 며느리 시키지 말고 내가 해야 합니다. 나 하기 어려운 일을 다른 사람을 시키지 말고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가정은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부흥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산지를 찾을 때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렙의 신앙이 여러분의 신앙에 모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맨날 평지만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한번 산지를 달라고 해 보십시오. 남들이 하기 싫은 일 화장실 청소,주방 봉사를 자청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불평하고, 무엇 때문에 섭섭해 합니까? 내가 남보다 힘든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너무 쉬운 것만 찾지 마십시오. 나 하기 어려운 일을 다른 사람을 시키지 말고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나 하기 싫은 일을 남편이나 며느리 시키지 말고 내가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가정은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사회는 밝아질 것입니다. 오늘 갈렙은 그 산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갈렙은 어떤 믿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신앙으로 산지를 달라고 했습니까? 1.갈렙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과 꿈이 마음속에 언제든지 가득 채워 있었습니다. 7절에 보면 "성실한 마음으로..." 9절에는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라고 갈렙의 신앙을 기록하였습니다. 갈렙은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신앙인 입니다. 갈렙은 평소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 만을 쫒는 신앙인 었다는 것입니다. 40세 때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을 때의 마음이나 45년이 지난 지금! 85세 때의 마음이나 여호와를 쫒는 변함없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로 때로 낙심하고 좌절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45년 동안의 갈렙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향하여 충성된 마음으로 변치 않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 전쟁의 승리자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남과 북은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남북 모두 누구나 다 "하나님 우리편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편이 되게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링컨은 그 자신이 하나님편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을 쫒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기도처럼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여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편한 것을 구하기 보다 힘든 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갈렙은 남에게 기쁨을 베푸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고 주인공이 되고 싶은 시대인데 갈렙은 그 모든 영광과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갈렙이 "나는 1등 공로자니까 내가 제일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하겠소" 라고 말한다면 여호수아의 입장이나 백성들의 신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주연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조연이 없으면 주연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되려면 수많은 조연이 필요한 것처럼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에서도 조연이 필요합니다. 갈렙의 위대한 점은 그가 무대 뒷편에서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모세가 있게 된 것은 그 배후에 아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협력이 없었다고 하면 모세는 그 큰 일을 감당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갈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특별한 직책을 맡은 일이 없이 평범한 족장이었습니다. 그래도 갈렙은 불평없이 여호수아를 잘 받들어 주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간 숨은 지도자였습니다. 여호수아가 훌륭한 지도자가 된 것은 바로 갈렙과 같이 묵묵히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극이 상연되려면 주연도 중요하고 조연도 있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람들은 무대 뒤에서 조명도 해주고 분장도 해주고, 효과, 음향 등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있음으로 한편의 연극이 상연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받아야 할 영광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때 쉽게 질투하거나 섭섭해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레오날드 번스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무엇입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히기를 "제 2 바이올린입니다. 제 1 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제 2 바이올린을 연주하려는 사람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무도 제 2 연주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면 아름다운 음악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우리는 모두 칭찬 받고 박수 받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갈렙과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사람이 되십시오. 묵묵히 무대 뒷편에서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 가십시오 기쁨을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농장 주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진 후 농장의 가축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 잔칫상에 올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모여서 회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소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이 농사일을 돕는데 기여합니다. 논을 갈고 밭을 갈뿐 아니라 짐을 실어 나릅니다. 그러니 나는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랬더니 개가 가 말하기를 "나도 도둑이 들어오면 짖고 막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고양이도 말했습니다. "나는 곡식을 훔쳐먹는 쥐를 잡아 먹습니다. 닭도 한마디 했습니다. "나는 새벽을 알리고 날마다 알을 낳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죄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돼지가 죽음으로서 그 주인집 딸의 결혼식 피로연은 훌륭하게 치룰수가 있었지만 누구하나 돼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청소원은 지저분한 직업이지만 청소하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세상이 더럽겟습니까? 여러분 세상에는 이와같이 이름도 빛도 없이 수고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정말 우리가 가야할 산지가 어디입니까? 겸손과 양보의 산지입니다 일제와 공산 치하에서 민족 해방을 위하여 싸운 조만식 장로님은 일제하에서 때때로 여러 번 투옥된 일이 있었습니다. 옥중 생활 중에서 좁은 감방 안에 14인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밤에는 14명이 함께 누워 잘 수가 없어서 7명씩 교대로 누워서 자는데 7명이 먼저 자고 나머지 7명이 뒤에 잡니다. 그런데 조장로님은 일년여 동안 단 하루 밤도 누워서 자는 일이 없었답니다. 그가 누워서 잘 시간에 몸이 허약한 사람이 보여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고 자기는 앉아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희생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3.갈렙은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12절 "그곳에는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쫓아 내리이다." "여호와께서 함게 하시면?"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그들을 쫒아내고 승리자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승리하는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실수를 하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간음죄를 짓고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눈물로 간구하며, 회개하고 주님만 찾으니까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땅으로 내려가고, 이스마엘을 낳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주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하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지만 주님은 그 마음을 아시고 찾아가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시고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베드로를 다시 감싸 안으시고 높여주신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자존심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3가지 있다고 합니다. 1) 첫째는 "좀더 참았으면 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해서 나 자신이나 남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2) 둘째는 "좀더 베풀며 살 걸..."이라고 아쉬워 한 답니다. 자식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왜 좀더 효도하지 못했나 후회한다고 합니다. 재산을 잃어 버리고 나면 내가 있을 때에 좀더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지 못했나 후회한다고 합니다. 베푸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셋째로 "좀더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살걸..."하는 것입니다. 돈버는 것, 살림하는 것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큰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를 감사와 기쁨으로 오손도손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후회하는 이유는 끝까지 열심히 충성스럽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방송인으로 크게 성공한 에디 켄터라는 사람은 수첩에 이런 글귀를 새겨놓고 일할 때 마다 자신을 되돌아 보곤 했다고 합니다. 1)"내가 지금 하는일이 내 재산과 내 야심을 이루기 위한 일인가 아니면 더 가치있는 값진 보람있는 일인가, 2)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남을 섬기기 위한 것인가' 내가 아무리 성공해도 내 야심을 이루는 것으로 그치면 인생의 패배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신앙의 목표는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그것이 갈렙의 신앙입니다. 갈렙은 성공한 자이지만 그는 성공보다 믿음에 승리자로 당당히 여러 사람들 앞에 나타 났습니다. 갈렙은 꿈과 비전의 갖고 믿음의 승리자요 용기있는 승리자입니다. 우리 인생이 후회없는 인생이 되려면 끝까지 맡은 일에 믿음으로 열심으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 에서 보니까 한 마리의 사자가 사슴을 쫓고 있습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았을까요? 못 잡았습니다. 이유는 사자는 한끼의 식사를 위하여 달렸고 사슴은 생사를 걸고 달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환경이 안 좋아도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온 열성을 다하고 전심전력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본문 13절에는 남에게 기쁨을 베푸는 갈렙에게 주어진 결과가 무엇인지 결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읽는다). 여호수아는 그가 받은 축복권으로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갈렙을 축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갈렙의 용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크게 뜹시기 바람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를 읽는 성도가 되시기 바람니다. 갈렙처럼 성실하게 사시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시기 바람니다. 불굴의 신앙 용기를 가지고 고난을 극복합시다. 인간은 늙고 변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갈렙을 더 많이 축복하시기 위하여 믿음의 산지를 주시고 크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렙에게 꿈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었기에 갈렙은 산지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갈렙을 더 축복하시기 위하여 갈렙에게 산지를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꿈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여러 모양의 산지를 주셨습니다. 감사하시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람니다. "하나님이 주신 산지를 통하여 더 큰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1달란트도 사용하면 강해진다/ 막6:7-13/ 2014-12-09
0.1달란트도 사용하면 강해진다 막6:7-13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비교하여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한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되는 7개의 구절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23개의 구절에 해당됩니다. 행적과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진 마가복음에서는 “곧”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며 행동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실천을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 배운 바와 같이 제자들을 풍랑 가운데 인도하여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배운 배운 것을 실행하기 위해 전도여행을 보내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가지 시각에서 접근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한가지 시각은 복음 전하는 제자들의 시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복음 받아 들이는 자들의 시각입니다. 먼저 복음 전하는 제자들의 시각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1.작은 능력도 사용하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과도한 교육, 즉 over education의 문제입니다. 싱가포르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고등학교 교육만 받아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너나 없이 대학 가고 더 나아가 대학원, 유학까지 갑니다. 배운 이후 써 먹을 것 생각하여야 합니다. 배운 것은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도 쓸 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어린아이가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내어 놓았을 때 비로소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중 크게 칭찬 받은 빌라델피아 교회도 계시록 3장 8절 말씀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씀처럼 적은 능력 받았음에도 지키며 받은 것 가지고 충성하였기 때문에 칭찬받았습니다. 1994년 나온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는 교훈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는 IQ가 75밖에 되지 않았으며 몸도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달란트가 아니라 0.1달란트도 겨우 받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주위로부터 많은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불량배의 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도망하다 보조기구의 나사가 풀리고 보조기구가 다 떨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보조 기구가 없이도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얽매이고 있는 장애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 포레스트 검프에게서와 같은 시험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계속하여 불량배가 자동차를 타고 포레스트를 공격하는 장면이 전개됩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이를 피하기 위해 죽을 힘 다해 뛰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너무나 잘 뛴 나머지 미식축구부로부터 스카우트됩니다. 그리고는 스카우트된 알리바마대학 미식축구부에서도 맹활약하여 전미 슈퍼볼 대회에 우승하였습니다. 캐네디 대통령과 악수까지 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는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워 전쟁영웅이 되었습니다. 0.1달란트 밖에 안 받은 자가 뛰는 것 하나 잡고 사니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 손대다 아무것도 못하는 인생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영화에는 딘 중위가 등장합니다. 그는 명문 군인 가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두다리 잃자 좌절하고 낙심하였습니다. 장애인이었던 포레스트 검프가 도리어 그의 영적 스승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해도 되는 것과 안해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 하다 시간낭비하지 말고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 붙잡으십시오. 가장 중요한 그 한가지는 바로 예배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하여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하나 붙드는 인생이 될 때 그 인생에는 큰 부흥이 있습니다. 영적 부흥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새벽기도입니다. 경제적 부흥을 위해 필요한 것은 십일조입니다. 새벽기도는 밤문화를 깨고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더욱 부지런히 살게 합니다. 한편 십일조는 우리를 경제적 축복을 받게 만듭니다. 우리 자녀로 하여금 경제를 알 때부터 십일조를 가르칩시다. 예배는 인생의 기초입니다. 새벽기도와 십일조의 인생을 살 때 불꽂 같은 인생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못배우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지만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0.1달란트 받았지만 충성하니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도 비록 연약하였지만 작은 강점 하나 붙잡고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 말씀을 듣는 자의 시각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영접하는 자가 될 때 축복이 있습니다 ====================================== 본문 11절 말씀은 마태복음 10장 14~15절 말씀에 해당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영접하지 않는 자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비판하고 거부하고 벽치는 자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것 배우십시오. 성경은 손대접 하고 환대할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영접하면 형제자매도 품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창세기 18장에는 하나님이 두 천사를 데리고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이야기입니다. 1절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송아지까지 잡아 대접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절대절명의 꿈인 아들을 주겠다는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잘 영접하고 환대하면 그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참된 복음 들어간 곳에는 영접하는 것 배우게 됩니다. 영접 잘하면 그 영접 받은 자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 주고 갈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엘리야와 사르밧의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굶주린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에게 갈 것을 명합니다.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 한줌과 기름 한방울을 그의 아들과 함께 먹고 죽겠다 말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을 자신에게 대접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는 정말 잔인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는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라야는 그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않고 그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겠다는 축복의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접의 영성 가지고 있는지 테스트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접의 영성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프레스트 검프 영화로 돌아오겠습니다. 장애인이었던 프레스트 검프가 버스를 탔을 때 다른 사람이 못 앉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여자친구 제니가 그를 옆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별 볼일 없던 제니는 그와 결혼하게 되었으며 그의 인생이 꽂피게 되었습니다. 한편 바바라라는 한 흑인도 그를 영접하여 앉게 하였습니다. 바바라도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하였습니다. 검프가 거부가 된 후 자신을 영접해 주었던 바바라의 유족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 구하십시오. 빈방 두고 손님 영접하십시오. 이 사회는 적대사회입니다. 그러나 그 적대의 사회를 환대의 사회로 바꿉시다. 영접의 영성 가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한 축복 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끝. 홍정길 목사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 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두 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2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대 2/ 민13:25-민14:9/ 2004-04-28
10 대 2 민13:25-민14:9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렴.” 아들은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앞 땅 바닥에 끝이 뾰족한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목욕탕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그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넘어지지는 않더라도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치우는지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목욕탕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욕탕으로 들어갔지만, 한결같이 그 돌멩이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진 후, “에잇, 빌어먹을! 도대체 누가 여기에 돌멩이를 놔둔 거야?”라고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한참 동안 앉아서 이러한 광경을 보다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드디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돌멩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돌이 이런 곳에 박혀 있담!”라고 말하더니 단숨에 그 돌을 빼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목욕탕에 있는 사람의 수를 헤아리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지금 목욕탕엔 한 사람밖에 없던데요.” 아버지는 “잘 됐구나! 지금 목욕탕에 가자.”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던 목욕탕에 사람들로 북적대어 발 디딜 큼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이 녀석아, 이게 한 명이냐?”라고 말하자,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버지, 바로 전까지 목욕탕 앞에 뾰족한 돌멩이가 하나 있어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다치곤 했는데. 아무도 그 돌멩이를 치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돌멩이를 치우고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어요. 제 눈에는 오직 그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처럼 보여서 그렇게 말씀드린 거예요.” 저는 이 이야기가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많지만, 사람다운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아들의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라는 단어에 ’성도‘ 또는 ’크리스챤‘ 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도,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성도는 많지만 성도다운 성도는 별로 없다‘, ’크리스챤은 많지만 크리스챤다운 크리스챤은 별로 없다‘는 말로 바꾸어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다운 성도일까요? 우리는 과연 크리스챤다운 크리스챤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이 앞으로 정복해야 할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각 지파별로 12명을 선발하여 보내었습니다. 과연 그 땅이 어떠한 땅인가?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을 정탐하도록 스파이를 보내었습니다. 드디어 40일 동안 정탐한 스파이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먼저 10명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이때 그들 10명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밥이라는 것입니다. 당장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자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열 사람과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시각차>라고 합니다. 제가 자주 소개한 구두 세일즈맨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어느 구두 세일즈맨이 구두 판매 시장을 조사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그 부족 사람들이 모두 맨발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국내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습니다. \"구두 주문 취소. 이 마을에는 구두시장 가능성 전혀 없음.\" 후에 다른 판매원이 동일한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가자마자 그는 즉시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습니다. \"구두 주문 곱절로. 이 마을에는 구두시장 가능성 무한함.\" 두 세일즈맨이 똑같은 곳을 다녀왔지만, 이처럼 상반된 보고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각차이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두 사람은 똑같은 땅을 보고 왔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왔습니다. 똑같은 기간 동안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10명의 다른 정탐꾼들은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는 시각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1) 10명의 정탐꾼 먼저 10명의 정탐꾼들은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불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열명의 정탐꾼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처음 난 장남들이 다 죽어가는 애굽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의 장남들은 죽지 않고 애굽에서 탈출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기적을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배고픔을 해결하고, 항상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14장 11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신앙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을 보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창문 너머의 진흙탕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하늘의 별과 달을 보았고, 해를 보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진흙탕을 보면서 원망을 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보느냐’ 보다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떠한 것이 앞에 놓여 있느냐’ 보다, ‘어떠한 시각으로 앞에 있는 것을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25절부터 28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여 할 접속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라는 말은 앞에 서술하고 있는 말을 돌이키며 상황을 전환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40일 동안 정탐하고 난 10명의 정탐꾼들은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가 막힌 땅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 곳에서 가져온 과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기름진 땅이기 때문에 농사짓기도 좋고 살기도 좋으나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을 이기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곳이지만,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그러나>를 들먹이며 스스로 <그러나>의 올가미에 묶여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10명의 정탐꾼들처럼 <그러나>라는 올가미에 묶여 있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말로 스스로 한계를 지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1807년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에 커다란 증기선 한 척이 떠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배가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그런데 웬걸 그 큰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그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 배를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전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하다는 눈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전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본문에 나오는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긍정적인 눈이 아닌 부정적인 눈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1) 악평을 함 첫 번째로 그들은 악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열을 내며 외치던 10명의 정탐꾼들을 향해 ‘정확하게 판단했다, 일리 있는 관찰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악평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 못되고, 오히려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원과 능력만을 가지고 계산을 했을 뿐,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악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악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비판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워도 “아니 뉴질랜드가 춥다고 하더니 왜 이렇게 더운 거야?”라고 악평을 하고, 조그만 추워도 “아니 뉴질랜드가 지상에서 마지막 남은 천국이라고 하더니 날씨가 왜 이래. 이러다가 얼어 죽겠네.” 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입만 열면 악평과 비판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의 특징은 입만 열면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하여 이곳에 계시지 않지만,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하고 나서 날마다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던 모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 말에 의하면 등 떼밀어 자녀를 위해 유학을 가라고 한 남편에게, 밤마다 전화해서 있는 욕, 없는 욕을 바가지로 해대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대인기피증이 생겨,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교회에 전도되어 와서 새가족 모임과 개인양육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감사할 것밖에 없어요. 남들은 뉴질랜드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데, 우리 남편이 유학 다녀오라고 보내주고,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그 자매님에게 환경과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전과 똑같습니다. 아니 한국을 떠나온 지 더 오래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에게 믿음이 생기자 입술의 고백의 바뀐 것입니다. 그 자매님에게 믿음의 눈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눈이 생기면 삶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0명의 정탐꾼들과 같은 불신앙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악평을 일삼지 말고 믿음의 시각으로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평과 비판만 일삼는 열 명의 정탐꾼들이 아닌,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학을 함 믿음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가나안을 땅을 보니까 둘째로 자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스스로 보기에 자신들은 들판에 있는 메뚜기 같이 초라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한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외모 때문에, 가정 형편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과거의 아픈 상처 때문에 스스로 올가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다고? 뭐 내 주제에 뭐한다고? 나는 해보나 마나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스스로 메뚜기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이 말대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입술에서 나온 말대로 우리의 삶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자학하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농담이라도 열등감에 관계되는 말을 꺼내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교수로서, 저명한 상담학자로서, 또한 저술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헨리 나우웬(Henri J. Nouwen)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책에서 세상이 우리를 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눈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걸작품으로 평가합니다만, 세상은 우리를 별 가치 없는 존재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하시지만, 세상은 우리가 도저히 가망 없는 존재라는 메뚜기 정신을 끊임없이 주고 있습니다. “너는 별 볼일 없는 존재야. 네 까짓 게 뭐한다고 그래. 너는 이 땅에 잘못 태어났어.”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들과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본 훼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렌즈를 가지고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여러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가치관으로 여러분들을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3) 전염이 됨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시각은 전염병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져갔습니다. 14장 1절부터 3절을 보겠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차라리 애굽 땅이나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나았을 텐데, 왜 이곳까지 데려와서 가나안 사람들의 칼에 망하게 하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것은 전염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염병이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처럼 부정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먼저 그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가 친구를 사귈 때, 부정적인 친구를 만나고 있는지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에브라함 링컨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가 어릴 때 그의 어머니가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그들은 병균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병균이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그 부정적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도 오염시키기 때문에 병균이라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10명의 부정적인 사람들로 인해, 부정적인 색깔로 염색되어 그들 역시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단 한명도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이들을 보시고, 하루를 1년으로 기준하여 40일 정탐을 40년으로 계산하여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11일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임에도 40년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입성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 채,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의 중요성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입술이 원망과 불평과 부정적인 입술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격려의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망하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 대신, 긍정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 입술에 열매가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2) 2명의 정탐꾼 둘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10명의 정탐꾼들과 다른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 두 사람도 사실은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똑같은 기간 동안 똑같은 상황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백은 10명의 정탐꾼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메뚜기 정신으로 무장한 후, “우리는 그들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과 싸워 보았자 질 것이 뻔합니다. 해보나마나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갑시다.”라고 말한데 반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14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황량한 사막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그 땅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자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거인과 같은 가나안 거민들만 보였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계산에서 제외시켰던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계산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무리 그들이 거인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할 때는 ’도저히 승산 없음‘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계산에 포함시키자 ’능히 이길 수 있음‘이라는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10명의 정탐꾼들처럼 하나님을 제외한 채 계산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더하기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더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미즈노 겐조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입과 눈알만 움직이고 온 몸을 조금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눈짓으로 혹은 입술로 아이우에오를 짚어가며 쓴 시집이 있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일본에서는 그가 지은 대부분의 시에 곡을 부쳐 복음성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무려 10판을 거듭 인쇄하여, 일본 사람이 쓴 시집으로 보기 드물게 24,000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가 최근에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에 더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줄로 믿습니다. 캐나다에 가면 세인트로렌스라는 강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겨울, 어떤 사람이 그 강을 건너기 위해 얼어붙은 강 앞에 서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강이 얼마나 단단하게 얼어붙었는지 확신이 없어, 무릎을 꿇고 기어가다시피 하며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두려워 벌벌 떨며 간신히 얼어붙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마차가 자기 곁을 휙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무릎으로 벌벌 떨면서 기어온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고 초조한 인생을 살겠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부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불신앙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불투명했던 미래가 바로 여러분들의 밥으로 보일 것입니다. 밥은 클수록 좋습니다. 밥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여러분! 밥이 크다고 밥그릇 끌어 앉고 징징 짜며 우는 사람 보았습니까? 밥이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굶고 있다가 밥을 주니까 너무 감격해서 우는 거지를 옛날 시골에서 본 적은 있어도, 이 날 이 때까지 저는 밥이 무서워 우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밥을 먹다가 도저히 못 먹겠으면 남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10명의 정탐꾼들은 먹어 치워야 할 밥을 보고 두려워 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만들었습니까? 안경 때문입니다. 열 사람은 불신앙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불신앙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가나안 사람들을 바라보니까 그들이 밥으로 보인 것입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다른 10명의 정탐꾼들과 달리, 온전히 하나님을 좋았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불신앙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10명의 정탐꾼과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두 명의 정탐꾼과 같은 사람입니까? 10명의 정탐꾼과 같이 하나님을 제외한 채 계산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가나안의 거민들만 보고 스스로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하시는,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올라가서 먹어버립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목수 일을 하는 한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에게 못질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얘야, 못질을 잘 하려면 못에 네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단다. 그러면 점차 못만 크게 부각되어 보일 거야. 그러나 만일, 못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해 손등이나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오게 되면 십중팔구 네 손에 든 망치가 네 손을 내려치게 될 거야.”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목표에 집중할 때, 비로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크고 작은 목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비본질적인 목표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인기나 명예 등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것들이 본질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목표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작음 신응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항상 주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살아가는 2004년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를 탈출하라/ 마26:13-25/ 2008-03-21
10%를 탈출하라 마26:13-25 지난주에는 긍정적인 20%를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100% 중에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20% 들어가지 못하고 방관하고 안주하고 부정적인 10%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하면 20%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10%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인간의 방법과 수단, 생각으로 살아가는 유형으로 모든 면에서 파괴적이며 비생산적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0%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긍정적20%안에 들어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한 여인이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가룟유다는 향유를 팔아서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에게 나누어주면 좋을 텐데 하면서 아쉬워했지만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다고 말하면 여인의 착한 행실을 온 천하 다니면서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룟유다가 말한 저변에는 물질에 대한 탐심이 가득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14절과 15절에 그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은 삼십을 받고 팔 계획을 세우는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즉 가룟유다는 물질에 의지하는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물질로 스승인 예수를 팔아치우는 어리석은 일을 감행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을 들먹이고 예수님을 믿는 척 하지만 그들의 본심은 예수님을 자기의 목표를 위해 이용하는 자입니다. 적당한 예배, 적당한 예물, 적당한 헌신, 내세우기 위한 봉사 등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를 예수님을 은 30냥에 파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10%의 사람으로 교회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단적인 예로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가룟유다 한 사람을 통해서 제자들의 분위기를 불신과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10%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파괴적이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10%에 탈출하여 20%안에 들어가고 영원한 천국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 부정적인 삶 10% 속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3:2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말을 할 때에는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고 실수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을 통해서 우리를 굴레 씌울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으로 굴레를 씌워 그 인생을 부정적인 삶을 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나는 승리할 수있다. 나는 건강해진다. 나는 행복하다라고 항상 긍정적인 굴레를 씌우면 그인생은 그대로 긍정적인 삶을 살줄 믿습니다. 삶 가운데에서도 긍정적인 사람과 사귀어야 하고 그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눈 막고 귀막고 입막아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생활을 해야 합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올무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파괴와 염려와 근심 절망과 공포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부정적인 사고에서 감금되었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예수님의 거룩한 보혈로 씻음 받아 항상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둘째로, 불순종의 삶 10% 속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은 개인에게, 민족에게, 국가에게 복을 내려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이 항상 동일하고 약속하신 것은 그대로 시행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고 행했던 일과 순종하지 않았던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적극적인 삶의 모습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축복의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심령골수를 찔러쪼겐다\\\"(히4: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이유나 자기 변호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요나 한사람 즉 10%가 교회에서 온전히 회개하면 세상적인 광풍이, 영적인 강풍이불어도 안전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삶은 바로 말씀 안에서 일어납니다. 온전한 순종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은 자유다! 자유다!\\\'하는데 은밀히 말해서 이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법을 지킬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결단코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치료받고 능력을 행하고 하는 문제는 바로 내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냐 다시 말해서 신앙인으로서 생활 가운데 순종의 삶을 살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고 예수님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의 자리에서 진리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환경적, 물질적, 생활적, 사회적으로 10%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가난한 삶 10% 속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난은 자랑거리가 안됩니다. 가난은 은혜가 아니고, 저주이며, 부끄러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부유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부유해져야 합니다. 또한 물질이 부유해야합니다. 육체도 부유해야 합니다. 만약 이 자리에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있어 여기, 저기서 서성이면서 영적으로 걸식하는 성도가 있다면 이것은 영적 거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한곳에 뿌리를 내려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적인 복을 받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난은 미덕이 아니라 병입니다. 이 병을 능력의 하나님 말씀으로 치료받고 영혼육이 건강함을 얻고 물질의 저주에서 질병의 저주에서 탈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부유한 교회입니다. 말씀이 풍성한 부유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부유한 교회입니다. 영육간에 건강해지는 교회(마4:23,10장 참조)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므로 누구 나가 하나님께 구하고 간구하면 가난의 저주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중독증의 삶 10% 속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요즘 사회는 중독의 사회입니다. 과중한 업무로 인한 일의 중독, 술의 중독,담배에 중독, 또한 여성분들은 텔레비전앞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는 것 또한 중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컴퓨터통신, 인터넷의 자료검색, 오락등으로 인해서 많은 청소년들이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꼬박 밤을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문화가 점점 우리 기독교 세계에 침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끊어 버리게 하는 사탄의 전술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삶에 희망을 잃어버리게 함으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고 세상을 비관하여 끝내는 자살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러한 중독에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탈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회를, 사람을 국가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항상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하고 긍정적인 20%는 어떠한 환경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포기 없이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 첫째 계명에는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20: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중독증의 증세입니다. 물질과 명예와 정욕을 위한 삶이 바로 중독의 삶입니다. 거룩하게 주일예배를 드리고 물질과 육신으로 봉사와 충성을 다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귀한 성도가 되는 것이 바로 중독증의 증세에서 이겨 나가는 길입니다. 이세상의 문화는10%의 잘못된 사람들이 만든 저질문화이고 간밤에 원수 마귀가뿌려 놓은 가라지 문화인데 이러한 세상문화에 젖어들지 말고 하나님만 따르며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15:10)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즉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 섬기고 그분이 원하는 삶으로 사는 것이 중독증에서 10% 탈출하는 길입니다. 아멘.
100%가 아니라 120%로 살아야 한다/ 신7:1-11/ 김동수 목사/ 2012-03-18
100%가 아니라 120%로 살아야 한다 신7:1-11 [ 마음 열기 ] 1.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 대한민국 인구의 반이 살다보니 하루에도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 현실적으로 제일 크게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 바로 <주차 문제>입니다. 사택이 있는 곳도 그렇습니다. 아파트가 아니면 <지정된 주차 장소>가 늘 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늘 주차문제로 시끄럽습니다. 2) 언성도 많이 높입니다. 2. 이사 가고 나서 제일 먼저 신경 쓴 것도 주차문제입니다. **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하여 주차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신경을 쓰다보니 매번 주차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방식은?> 1)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것입니다. 2) 먼저 대면 어떤 모양으로 대든 <나 아니면 말지>입니다. ** <나는 목사입니다> 그럴 때가 <제일 난감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혜롭게 이야기>하느냐는 것입니다. <만나서 잘 이야기 하려면? 얼굴부터 찡그리고 나오는 사람에게 제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상도 역에 위치한 주원 교회 목사입니다> ** 이렇게 제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신분을 밝힘으로 내 자신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2)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회 현상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피력하기 위함입니다. 3) 내 자신이 목사이기에 드러내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Q – 하나님은 언제나 저에게 120%를 요구하십니다. ** 남들처럼 100%로 산다면 분명히 잘 산 것이고 정상적으로 산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100%로 사는 것이 아니라, 120%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그리스도인의 이미지가 실추된 이때에? 100%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120%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 120%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어떡해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이 120% 있어야 합니다. (1) 세상에 살지만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 내실 때에…> 1.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그러나 <관계>도 <관계> 나름입니다. <관계>는 <모인 목적>에 따라 <그 결과>나 <삶의 열매>가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민족입니까? 1) 아브라함이 약속한 <언약의 백성>입니다. ** 아직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2) 애굽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친히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 구원하였지만 아직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 습성은? <편안했던 애급의 생활>과 <애급의 다신 종교 사상>이였습니다. 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셔서 새롭게 하시며 광야에서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1)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2) 내가 약속했기 때문에 내가 반드시 그 약속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3) 내 안에 거하며 사는 참된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고 나를 사랑하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Q – 그냥 대충 살아서 될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열국 가운데서 하나님이 불러낸 민족이기에, 하나님이 불러낸 자들이기에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3. 그러나 현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 우리도 구별 받은 백성으로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세상에 살지만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7족속의 이름을 밝히시면서 쫓아 낼 것과 딸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강조하시면서 철저히 분리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 <뿌리를 무시 못합니다> 1) 헷 족속 – 노아의 손자요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공포)의 후손. ** 소아시아 수리아 지방에 정착해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히타이드 족속> 2) 기르가스 족속 – <우상의 이름 – 게쉬신의 부하>라는 뜻. 3) 아모리 족속 –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후예로서 <요단 강 서편 산악 지대>에서 정착. 4) 가나안 족속 –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후예로서 <해안 지역과 요단 계혹 지역과 평야>에 걸쳐 살았다. 5) 브리스 족속 - <시골 뜨기>, <농부>라는 뜻을 가진 족속 6) 히위 족속 – 가나안의 아들 <히위>의 후손이며, 레바논 산지와 헤르몬 산맥에 거하였고, <후에 이스라엘인들과 섞여 살면서 나무를 패거나 물을 긷는 자들이 됨> 7) 여부스 족속 – 가나안의 아들 여부스의 후손이며,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살았다., Q – 자세히 살펴 보십시요. 뿌리가 <선하지 못한> 존재이며, <악한 사람들>이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1) 가나안 사람들은? <구별된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2)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 이 마음 곧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포기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삶의 원리>,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사는 원리>가 있습니다. ** 겉에서 보면 흥왕 합니다. 모든 것을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죄가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그런데 전쟁에 휘말리고 피곤한 인생이 됩니다. Ex)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롯의 삶을 보십시요. <다 가나안 지역>입니다. ** 반면에 기근도 있고, 아브라함 처럼 아내를 빼앗기는 일도 있고, 때로는 부족한 것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따라 사는 구별된 삶의 원리>를 살아가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Q – 가나안의 족속들과 사귀지 말아라. 결혼하지 말아라. 분리 된 삶을 살아라. **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별된 사람으로 살기 원하시고, 그렇게 또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1)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살면 안 됩니다. 2) 타협이 아니라 받아들일 것이 있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3)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기를 주저하면 안 됩니다. Q – 가나안 전쟁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셨던 3가지 구별됨. 1)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라. - <관영한 죄에 대하여 선을 그어라> 2) 여호와 신앙의 유일성 강조 -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 믿음의 뿌리는 중요하지만 쓴 뿌리는 아픔을 줍니다> 3) 선민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결하라.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힘쓰는 거룩한 싸움을 싸우라. (2) 헤렘 – 거룩한 삶을 살아야 120%입니다.(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1. 성경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말씀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구절입니다. **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수행하였고, 하나님은 땅을 정복할 때 거기 거하는 가나안 족속들과 그들의 종교를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진멸> - <헤렘> 1) 헤렘은? 하나님이 약속한 거룩한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2) 쉽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 회복>입니다. **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일하게 산 것이 무엇입니까? <막벨라 굴>입니다. 막벨라 굴에 장사된 이가 바로 <사라>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찾게 하시고, 회복하게 하십니다. 3) (신 7: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 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 <거룩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4)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못하는 것들? ** 그것이 어린 아이가 되었든, 부녀자가 되었든, 노약자가 되었든, 짐승이 되었든 간에 진멸하는 것입니다. Ex) 거룩하게 바쳐지는 모든 것들은? 정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더러운 것에 손을 대면 깨끗한 것도 더러워집니다. 그러나 더러운 것은 깨끗한 주님께 손이 닿을 때 깨끗하여 집니다> 2. 거룩하기에 바쳐진 물품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 성도들 역시 <거룩하게 바쳐진 자>들입니다. (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헤렘 전쟁>을 잘 수행하였습니까? ** 잘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1) 여호수아에서 보면? 많은 경우 점령해야 할 땅을 남겨두고 전쟁을 중지합니다. 2) 이방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음으로 나중에 이방인들이 <가시>가 됩니다. 3) 아간은? <헤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사유화>함으로 거룩한 전쟁을 더럽혔습니다. **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1) 다시 땅을 잃어 버립니다. 2) 종국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공격으로 그들이 마땅히 취하고 다스려야 할 땅을 잃어버립니다. 3. 이 <헤렘> 전쟁에서 <잔인하게 죽이는 현상>에 몰두하면 안 됩니다. **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1) 가나안 족속들을 <감성적>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죄와 우상에 오염된 백성들과의 관계는? <오염된 관계>를 갖게 되고 <오염된 결과>.를 낳습니다. **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삶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올무를 벗고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120%로 삽니다.(3절-4절)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 임이니라.> (1) 세상을 대적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1. 단순한 <결혼 금지> 이야기가 아닙니다. ** 우리가 살면서 느끼지만 <신앙생활의 절대 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1) 주일을 잘 성수해야 축복이 임합니다. 2) 성도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고, 목사와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불신자와 결혼하면 <과정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도 <30년 된 인생이 개인적으로 살다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기적입니다. ** 생각이 다릅니다. 습관이 다릅니다. 행동도 다릅니다. 문제에 대한 반응도 다릅니다. 하물며,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상을 아는 것>과 <무신론>에 대한 태도는 매우 큰 비중입니다. 2.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 100% 로 사는 사람은? <사회 생활>은 잘합니다. 그러나 120%로 살지 못하면 <거룩한 영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신앙이 바알 신앙과 가나안 신앙과 혼합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1) 솔로몬이 100%였을 때와 120%일 때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 120% 때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역대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100%일 때 <다른 왕들이 하는 것처럼, 정략 결혼하여 여자가 1000명으로, 이방 신도 1000개가 되었습니다> 2) 엘리야도 120%였을 때 850:1 싸워서 승리하였습니다. ** 100%일 때 이세벨의 저주 섞인 말을 듣고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3) 베드로 120%였을 때 <바다 위>로 뛰어 들어 주님께로 갔습니다. ** 100%였을 때 <자기 방법>으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100%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100%는 세상 사람들이 정하는 기준의 최고의 윗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120%의 하나님이 정해주신 최고의 윗선을 따라 가며 살아야 합니다.> 3. 어두우니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 세상이 악하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달콤하기에 <세상과 벗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100%의 세상 사람들은? 1) 세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채우며 발산하고 삽니다. 2) 자신의 권세와 부를 누리며 삽니다. 3)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하여 헛된 즐거움을 따라 다닙니다> Ex) 술 문화, 가라오케 문화, 문화 (대학로 여 제자와 교수), 숨어서 익명으로 살아갑니다. Q – 사도 요한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120%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1) 전에는, 육신의 욕심을 하나님 앞에 놓았지만 이제 하나님을 귀히 여기며 가장 앞자리에 세웁니다. 2)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유일한 행복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준행>하는데 전념합니다. 3) 날마다 밥을 먹고 살 듯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며, 주님 없이는 기도하지도 기뻐하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살지도 못합니다. (2) 세상을 사랑하는 120%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1. 귀담아 들으세요. 비밀이 있습니다. (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 세상 – 헬) <코스모스> - (장소적이고 공간적 의미) 2) 창조 기사의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곳>으로 <하나님이 복 주신 곳>입니다. ** 아담도 하와도 즐거워하였고, 걱정도 근심도 없었던 곳입니다. <무엇이든지 준비되어 있는 공간 – 먹을 것등……..> 3) 그러나 우리가 죄지음으로 타락하여 <사단의 통치권이 영향을 미치는 곳>이 되는 순간 <하나님이 거저 주신 축복>을 사람이 수고하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4)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 <준비되어진 것>이 이제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 전부 인간적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등등………. 2. 그런데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다고 합니다. **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지금은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는, 죄 지은 인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전부 <정욕>대로 살지만? 다른 하나는, <예수의 마음>으로 <성령의 마음>으로 <자기를 죽이고 예수 안에서 보면> 생명이 거기서 나옵니다. 1) 필요 할 때만 죽는 것도 아니고, 2) 필요 할 때만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3) 날마다 매일 24시간 전부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호흡하며, 성령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Q –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주저하지 말고, 올무가 될 만한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1) 당신을 힘들게 하는 올무가 무엇입니까? 2)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면 120%의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깨어 주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기준은 선착순이 아닙니다. (6절-7절)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1.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가 세상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생각하며 지극 정성을 다합니다. ** 우리가 볼 때 <고슴도치 새끼>는 <가시 투성>이요, <다리도 짧고>, 사실 <예쁜 구석>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슴도치 어미>는 다릅니다. 만약에 <인간의 말>을 알아 듣는다면? <자기 새끼>를 못 생기다고 말하는 인간에게 <가시>를 세웠을 것입니다. <자기 새끼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시고 <성민>이라고 명하셨습니다. ** <성민> - <구별 된 자>, <거룩한 자>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것입니다. <소유물>을 보면 <주인>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특권>도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막중한 <책무>를 지닙니다. 100%로 살아서는 <막중한 책무>를 다할 수 없습니다. 120%로 살아야 합니다. 3. 세상은 앞서가는 사람만 기억하고 <관심>을 갖습니다. ** 누가 <권력>이 많고, 누가 <부자>이며, 누가 지금 <1등>으로 달리고 있는지만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눈>을 가지신 분입니다. 1) 가장 소외되어 있고, 가난하며, 뒤 떨어진 자를 보시고, 뒤에서 가슴 아파하면서 슬퍼하는 자를 보십니다. 2) 하나님의 기준은 <선착순>이 아니라, <은혜요, 긍휼이요, 사랑>입니다. Q –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은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 다른 민족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2) 다른 사람보다 잘 난 것도 없습니다. **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에서 제일 적은 민족이며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의>를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습니다. <선착순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아야합니다> (2) 속량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8절-9절)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 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 하나님에게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 <약속하신 언약>이 관계를 맺은 당사자만으로 끝나거나, 관심 밖의 일로 뒷짐 지시고 보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행하신 <맹세와 축복>을 지금 이시대까지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 모세가 말합니다.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낸 사건 즉, <너희가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다> 1) <속량> - <히:파다> - <끊다>, <몸 값을 받고 석방하다>, <속전을 치르다> 2)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조건으로 <몸값>을 지불합니다. 3)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마지막 재앙>인 <죽음의 사신>을 피하기 위하여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속량 제물>이였지요. 4) 예수님 또한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5) 예수님의 <피>는?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축복입니다. 2. 속죄함을 받은 사람은? **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져 있던 모든 <담>들이 허물어진 사람입니다. 1)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이제 다시 살아 났습니다. 2) 주인과의 관계가 회복 되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짝하며 <죄악>가운데 <내가 주인인 양> 내 맘대로 살면 안 됩니다. 3) 100%로 살아서 <도덕적 양심>을 깨끗하게 살았어도 <마음>과 <중심>과 <동기>가 120% 하나님께 올려진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 거기서 <영향력>이 나옵니다. 거기서 <신앙적 파워>가 나옵니다. 기독교는 <나만> 변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변하여 다른 사람도 변할 수 있도록 파급 효과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파급 효과, 은혜의 파급 효과, 기쁨의 파급 효과, 평안의 하급 효과> Ex) 김동호 목사 - <현대 종교 후원 이야기> 1) 이단과 싸우다가 <모욕죄>에 걸려 <1억원 배상 판결> 2) 사무실까지 경매에 넘어가는 상황입니다. 3) 탁명환 소장은 피습 받아 돌아가시고, 아들이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4) 몇몇 교회가 4,000만원, 김동호 목사님 교회가 4,000만원(분립하여도), 페이스북 교회가 2,000만원 덤으로 더 넘치게 해결 됨. Q – 이 파급 효과가 무엇인가? 이 끈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의 속량 때문입니다>, <속량의 은혜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은혜가 넘칩니다> <이것이 바로 120%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120%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계명 지키기며 120%로 사는 사람은? 천대까지 누리는 언약의 축복을 주십니다. 당신이 그 주인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불성실하면 안 됩니다. (10절-11절)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1.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신다고 하십니다. ** <하나님을 미워한다는 말은? (신성 모독)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불 성실하게 <이행>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2) 곧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 <말씀에 대하여 불성실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3) <당장에>? - <그들의 면전에서>, <즉각적으로>,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살아있는 동안>,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2. 제일 중요한 것은? ** 100%와 120%의 차이는? <성실함>입니다. 1) 하나님께 성실하고, 사람에게 성실하고, 그리고 나에게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20% 차이라 얼마 크지 않을 것 같지만? <결과>는 크게 다릅니다. **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칩니다. <성실하게 일하라> 1) <건축 회사>에 다니던 사람이 <퇴직>을 얼마 앞두고 사장으로부터? < \"마지막으로 집 하나 지어 주시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 <회사>도, <하는 일>도 그만두게 된다고 생각하던 이 사람은 모든 일을 <대충 대충>했다. 2) <재료>도 좋은 것을 쓰지 않고 <감독과 시공>도 철저하게 하지 않았다. ** 그저 겨우 <준공 검사>를 넘길 정도로 <지어놓은 집이 거의 완성될 무렵>, <사장>이 이 사람에게 찾아와 말했다. <\"이 집은 바로 당신 것입니다. 당신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나의 선물입니다.\"> 3)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킹슬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 <\"매일 아침 일어났을 때 당신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만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일을 능력을 다해 수행한다면 당신의 내면에 자제력, 근면함, 만족감 등 게으른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수많은 덕이 쌓여질 것입니다.\"> 4) 당신은 당신의 일에 얼마나 충실하십니까? ** <죤 밀턴>은 더 나은 시를 쓰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골3:23)하면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통하여 우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까지도 채워 주실 것입니다.>
100년 후에도 지속되는 신앙 유산/ 창24:1-8/ 신앙유산 물려주기 서약예배설교/ 2007-06-24
100년 후에도 지속되는 신앙 유산 창24:1-8 미국 남북전쟁 이후에 경제적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미국의상황은 몹시 불안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865년, 링컨이 암살을 당하고 전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통령으로 있던 앤드류 존슨이 대통령직을 이어 받고 2년 뒤인 1867년에 러시아로부터 심각하고 고민스러운 제의를 하나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알래스카 지역의 땅을 미국이 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오늘날에야 「알래스카」하면 앵커리지가 떠오르고 지하자원과 모든 자원의 보고라고 얘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눈과 어름으로 덮인 넓은 벌판, 아무 쓸데없는 땅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땅을 영토로 지키기 위해서 국가에서 지출되는 경비는 쓸데없는 낭비로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땅으로 인식되었기에 그당시 미국의회나 정치가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땅은 구입할 가치도 없고, 필요도 없는 땅이라고 할 때 앤드류 존슨 대통령은 이 땅을 구입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땅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이 땅을 구입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720만불이라는 적은 돈에 구입합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이 땅은 버려진 땅, 눈으로 덮여진 땅이 아니라 눈 속에 숨겨져 있는 보배로운 땅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엄청난 지하자원, 관광자원, 그리고 임업자원 군사적 요충지로서 미국을 풍요롭게 하는 땅이라는 것을 몇십년이 지나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국가나 가정이나 한 시대 한 사람의 결정이 후손들과 나라와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부요를 누리는 미국을 두고 이야기했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나의 삶은 혼자 어딘가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육체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신앙적인 모든 것들을 물려받아 그것을 가지고 오늘 내가 존재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말을 바꾸어 말하면 지금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던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어떠한 모습이든 유산을 남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 수 있지만 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웃과 후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 유산을 자녀들에게 대대로 계승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유산을 자녀 세대에 계승하는데 성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자신의 대에서 끝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축복을 얻기위하여 우상을 섬기던 가문의 전통을 단절시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유산을 이삭과 야곱에게 넘겨주는데 성공했던 사람입니다. 신앙 유산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일에 성공했기에 복의 근원이 되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크리스천 가정에서 올바른 신앙의 유산을 자녀 세대에 넘겨주는 일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을 자녀 세대에 넘겨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문이 되기위하여서 우리의 신앙이 단대에서 끊어지는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 후대로 흘러 내려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같이 믿음과 축복이 계속 후대로 흘러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유산을 이어내려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문이 축복받는 길이고 우리 자녀들의 생명이 사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입니다. 온갖 생명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물은 헐몬산 꼭대기의 하얀눈이 녹아 내림으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는 요단강을 통하여 물을 사해로 흘려 보냅니다. 요단이라고 하는 통로를 통하여 물은 사해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깨끗한 물을 받은 사해는 죽은 바다(Dead Sea)로 변합니다. 살아있고 깨끗한 물이 사해로 들어오면 죽은 물, 아무 생물도 살 수 없는 짠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해의 물이 죽은 물로 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받은 물을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도 있습니다. 경기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시화호는 1994년 동양 최대의 간척 사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현재 이곳은 수많은 물고기들과 철새들이 함께 어우러져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화호는 1997년도만 하드라도 공업용수로 쓰기 힘들 정도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었던 곳이었습니다. 폐사한 물고기가 속수무책으로 떠올랐고 악취가 심해 주민들의 삶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 습니다. 또한 수천만평 갯벌은 어패류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 담수호 정책을 포기하고 굳게 닫혀 있던 수문을 열어 썩은 물이 넓고 넓은 서해바다로 쏟아져 나가게 하고 조수를 따라 맑은 바닷물이 밀려들어 올 수 있도록 수문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화호는 다시 생명이 넘쳐나는 호수로 변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호수, 사람들과 온갖 종류의 동식물들이 찾아오는 호수가 되려면 지속적으로 깨끗한 물을 외부로부터 공급받을 뿐 아니라 그 물이 다른 곳으로 계속 흘러가도록 할 때 가능합니다. 물이 계속 갇혀있던지 혹은 외부로부터 물을 공급받아도 흘려보내지 않고 있다면 그 물은 누구도 사용할수 없는 죽은 물이 되어 외면당하고 버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늘 사모하며 받을 수 있어야 하지만 받은 은혜를 이웃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 흘러감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족과 후손들이 앞으로 살아갈 신앙의 모습에 책임지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신앙이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세대를 이어가는 신앙이 되게하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받은 축복이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본이 되도록 하여 그들도 복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이 후손으로 흘러 내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으로 끝나는 복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가는 축복입니다, 아비의 복이 자식에게, 그리고 그자식이 손자, 손녀들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가는 것이 축복의 원리입니다. 창 12: 1-3을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은 계속 흘러가서 각 시대와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수천 년 전에 말씀하신 말씀은 오늘도 동일하게 성취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계속 살아있는 말씀이고, 흘러가고 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말씀이 살아있고, 흘러감은 말씀을 받은 개인을 통로로 해서 후손에게 이어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축복의 말씀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이 축복이 다음 세대로 흘러가도록 해야 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중요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축복의 계승자가 되며 다음세대로 축복이 흘러가게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우리 가문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해 보셨습니까? 세상에 중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믿음을 신앙의 유산으로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보다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일에 모두 성공하는 부모님들이 되시고 하나님께 축복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람니다. 그럼 이시간 어떻게하면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상의 물질보다 신앙의 값진 유산을 물려 줄수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올바른 신앙 유산을 자녀들에게 넘겨주어 축복받은 가문이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었는데 아브라함의 모습속에서 몇가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행함으로 절대 신앙의 본을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최절정은 창세기 22장에 나타납니다. 100세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사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이 명령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쉬운 일들도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칩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앞에 아브라함은 묵묵히 순종합니다. 창세기 22:3절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앞에 아브라함과 이삭은 침묵으로 묵묵히 행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간적인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어떻게 고뇌하고 번민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고민하고 번민한 끝에 신앙적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앞에 나의 생각과 나의 환경과 나의 이성적 사고를 넘어 무모하고 어리석다 싶을 정도로 순종하는 신앙의 자세가 절대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당시 이삭은 번제로 사용할 나무를 지고 갈 정도로 장성했습니다(창22:6).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삭의 나이가 25세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성한 아들, 이삭은 신앙적 결단을 내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쳤습니다. 그는 행함으로 절대 신앙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행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절대 신앙의 유산을 이삭에게 계승했던 것입니다. 2. 올바른 신앙의 터전을 남겨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남겨준 것은 절대 신앙의 본을 보여준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후손에게 올바른 신앙의 근거지를 남겨 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고 지시한 목적지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상중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기업을 삼게 하려고 주시는 땅이었습니다(창15:7).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이 살아야 하고, 이삭이 살아야 하며, 야곱과 그 후손들이 살아야 할 땅이었습니다. 창 17:8.을보면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가나안 땅만이 자기가 살아야 할 곳이며, 자녀들이 살아야할 터전이며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에 확고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창세기 24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고향 땅 하란으로 엘리에셀을 보냅니다. 그때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 가리이까”(창24:5) 엘리에셀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창24:6-7) 이 말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삭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그와 그 후손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야 할 약속의 터전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삭은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은 가나안 땅, 남방 지역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아비멜렉과 지속적으로 다투었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살았던 지역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사용한 우물들을 다시 파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창26:2; 26:24),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창26:3; 12, 22), 하나님을 섬겼습니다(창26:25). 그리고 야곱역시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후 야곱의 후손들은 450년 만에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굽 땅이 아무리 기름지고 좋아도 그곳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수가 없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만이 약속의 땅이며 축복의 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넘겨줘야하는 올바른 신앙의 터전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살아가야 할 축복의 땅이 어디입니까?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문화가 아닙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혼합주의가 팽배한 세상의 이념이나 사고가 아닙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축복의 장소입니다.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리고 그 후손들이 교회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3. 올바른 신앙의 문화를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배필을 찾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삭의 배필을 고향 땅에서 찾도록 합니다. 가나안 땅에 얼마든지 많은 처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토 친척 가운데에서 이삭의 배필을 찾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고대 근동사람들의 문화 풍습으로 오늘날도 중동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풍습의 핵심은 동일한 문화와 동일한 혈통과 한 하나님만 섬기려는 유일 신앙에서 나왔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7: 1-4을 보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가장 강조했던 것이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와 종교를 모방하거나 답습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냉정하고 가혹했던 이유는 혼합 문화와 혼합 종교를 배격하기 위해서입니다. 혼합 문화와 혼합종교를 통해서는 올바른 신앙 유산을 계승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 종교와 혼합될때, 그들은 끝없는 죄악의 구렁텅이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는 컴퓨터나 TV 모니터 안에 세상에 모든 것들이 다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 안에 세상의 온갖 문화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와 교회가 올바른 신앙의 문화를 남겨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을 우리의 자녀와 그 다음 세대의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여러분의 믿음이 100년 후에도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계승되기를 원하십니까? 다음 세대에 올바른 신앙의 문화를 남겨주기 위해 제단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문이 되는 뿌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100년 후에도 믿음이 계승되게 하는 출발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절대 신앙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주는 기초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신앙 유산을 다음 세대에 남겨 줄 것을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서약하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무웅 목사(서울 강북구 우이동 우이제일교회)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2006-01-02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주 속에는 수많은 혹성들이 있지만 지금까지는 생명체는 지구에만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얼마인가 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따라 다릅니다만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구에 있는 생명공동체에 이미 심각한 종말의 징후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현상과 오존층 파괴로 인한 기상의 이변과 생태계 파괴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가 지니고 있는 화석연료는 앞으로 50여 년간 사용할 분량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대체 에너지 개발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사막화 현상은 식량문제와 생태계의 보금자리를 위협해가고 있으며 수질오염과 토양산성화, 산소생산량 부족 등은 모든 생명체의 목을 죄어서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식품이 상품으로 둔갑하고 농사가 사업으로 변하면서, 온갖 독성약물과 성장촉진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며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상품을 생산함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독을 먹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환경호르몬의 폐해를 입으며 불안한 미래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앞으로 생명복제기술이 보편화되어서 인간복제까지 감행할 경우에 야기될 창조질서의 대혼란을 예상할 때 지구생명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예측은 현재까지 나타나고 있는 징후들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죄성(罪性)”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악마의 계략에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죽어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종말 을 재촉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일례로 나무들을 보면 나무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는 본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지 접붙이기를 하기 위해 돌감나무 밑동을 잘라버리면, 평소 같으면 싹이 나지 않을 부위이지만 그 밑동에서 싹이 나고 왕성하게 줄기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꺾꽂이를 하기 위해 나무로부터 나뭇가지 일부를 잘라내어 땅에 꽂아 두면 가지 밑 부분에서 뿌리가 생겨나는 것도 잃어버린 뿌리 부분을 복원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 즉,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나무의 본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나무의 성질을 이용해서 접붙이기도 하고 꺾꽂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본성, 이런 본능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동식물들에게는 종족유지 본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손상되어진 신체 부위가 다시 재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치가 빠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영구치아가 생겨납니다. 피부에 상처를 입어도 손상된 부분에 새 살이 돋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곧 우리의 생명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생기 즉 생령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그것을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탐욕 즉 인간이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의 영역을 탐하는 일로 그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았던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계곡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마른 뼈들입니다. 영적 죽음의 상태를 그렇게 묘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생기가 다시 불어와 마른 뼈들에 가죽이 덮이고 힘줄이 생기며 생명이 회복되어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본성을 주신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인간들에게는 흔적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 끊임없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명회복운동라이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는 생명목회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생명목회란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예수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의 일부를 아니 밑동을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아 회복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명회복 운동이나 생명목회는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다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곧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 지름길입니다. 생명목회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도 현대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란 항상 시대 시대마다 나타나는 문명 속에서 잘못되어진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룩해 온 문명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편리함과 안전함과 유익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명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문명이 아니라 죽이는 문명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유심히 보세요. 문명이 생명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물을 사먹습니다. 수돗물을 불신합니다. 음료로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수도는 약을 통해서 멸균되었지만 물맛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형광등은 밝지만 세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걷다가 우마차를 타다가 자전거를 탔고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탔습니다. 이제는 집은 없어도 차는 타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차는 빠르기는 하지만 걷기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걷기를 잃어버리니까 건강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이 또 다른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난1세기 동안 있었던 그 어떤 재난 보다 더 강력한 재난을 당한 모습을 매일 뉴스를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특히 2004년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겪었습니다. 미국과 중남미에는 4차례 대형 허리케인이 몰아쳐 플로리다에서만 가옥 2500채가 파괴됐고 아이티에서는 1500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일본에서도 10월 니가타 현 강진과 10차례의 태풍으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매년 그해의 세태를 압축해 나타내는 한자어를 선정해 온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지난해 12월 13일 일본 열도에서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災’를 2004년의 한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매스컴에서 해마다 선정하는 10대 뉴스가 선정되고 난 다음인 지난 12월 26일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부근 바다에서 발생한 8.9의 강진으로 인한 해일이 발생하여 여러 나라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사건은 세계 3대재앙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1970년에 방글라데시에 발생한 대홍수와 1976년 중국 탕산에 발생한 대지진, 그리고 이번 인도네시아의 지진과 해일로 인한 피해가 세 번째 큰 재앙이라고 합니다. 사망자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15만 명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그리고 자연재해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그리고 하나님이 예언해 주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인도네시아 대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 변화와 문명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21세기의 초유의 문명으로 인한 생명파괴 현장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반면에 사단은 생명을 죽이려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질병과 가난, 부정과 부패, 억압과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잘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온 세상을 함께 구원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살려야 하지만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자연의 생명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모든 생명을 나의 생명처럼 여기는 의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금년의 교회의 목표를 생명 살리는 일로 정했습니다. 100년의 은혜를 한해로 마무리하고 우리끼리 자축하는 것으로 끝맺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00년의 은혜는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교회의 금년 표어는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이미 정해놓고 보니 정말 표어를 잘 정했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친히 주관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목사를 통해서 표어를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어는 그냥 구호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말씀이 먼저 선행됩니다. 이 표어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인 10절입니다. 특히 하반절 말씀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은 양을 훔쳐가서 잡아먹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키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적은 양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물을 마시게 해서 살을 찌우게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마리라도 더 많이 키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파도 치료해 주고 오직 마음이 양에게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신 사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무한대의 사랑의 에너지로 병든 자를 고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미움을 사랑으로, 다툼을 평화로,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시며 온갖 이적을 베푸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며 치유하며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스스로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진피해를 입은 나라 백성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 살리는 일에 첫 번째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기 때문에 다음주일에는 특별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와 교회는 언제든지 나눌 수 있어야 하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내 자신을 끊임없이 자유낙하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보다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보다 더 높은 위치에 도달할수록 더 많은 운동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살리는 분이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생명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고 요한복음10장 1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이제 우리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함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모든 성도는 생명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금년 한해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지구상에서는 생명을 살리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을 앞장서서 해야 할 사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와 교회에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우리 교단의 생명살리기운동 10년 계획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만민에게 전파합시다. 둘째는 자연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합시다. 파괴된 자연에 창조의 새 질서를 가져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를 새롭게 하고 하나 되게 합시다. 교회의 삶에 일치와 갱신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넷째는 북한 동포와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분단된 조국에 평화통일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다섯째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의롭게 살아갑시다. 여섯째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일곱째 장애를 가진 이웃과 함께 살아갑시다. 여덟째 청소년의 꿈을 함께 가꾸고 이루어 갑시다. 아홉째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하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닫힌 사회에 열린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 열린사회를 만들어 포용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번째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약육강식의 대중사회에 생명살림의 새 문화를 창달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가장 우선이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 가운데서도 인간의 영혼을 먼저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동안 동성연애와 낙태지지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 운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다 같은 신앙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부시 앞에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현재의 부시 대통령과는 신앙관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낙태지지운동은 낙태를 합법화시키자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 낙태지지운동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켜서 실제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찰스 콜슨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싸움이 성공을 거두었군요.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낙태지지운동과 맞서서 성공을 거두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싸움의 승리는 반쪽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사회의 운동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정답 아닙니까? 사회운동으로 낙태지지 운동에 반대하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회운동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 영혼이 치유받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바로 영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사회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 중요합니다. 환경 살리기 운동도 해야 합니다. 불의한 것을 정의로움으로 바꾸는 운동도 해야 합니다. 보안법폐지도 중요하고 역사바로세우기도 중요합니다. 무슨 운동을 하든지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영혼구원과 직결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운동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생명운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합니다. 전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병원선교 중요합니다. 교도소 선교, 학원선교 등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구역별로 반드시 새 생명 전도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 구역이 두 사람 이상씩 반드시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세례를 주도록 최선을 다해 봅시다. 나는 값없이 영혼이 구원을 받아 소망가운데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로서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넓은 예배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채우라고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한 사람도 전도해보지 못한 분들은 금년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생명 살리는 해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도록 합시다.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은 곧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할렐루야!
100배의 결실/ 눅8:4-8/ 2007-09-12
100배의 결실 눅8:4-8 이제 열매의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농사짓는 분들은 유난히도 많이 온 비로 울상 지으며 보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추수하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감나무엔 탐스런 열매들이 맺었고, 여러 가지 열매들은 결실의 계절을 통하여 농부의 마음을 달래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실수는 때가 되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결실을 얻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 뿐 아니라 육적인 생활 속에서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매 맺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한 동네에 가셨을 때 수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여러 의도를 가지고 나온 것을 알고 그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씨를 뿌리는 사람은 좋은 밭에 씨를 뿌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5절). 그러니까 싹이 나기도 전에 밟히고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습니다. 길가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입니다. 사람 많은 곳은 마귀의 유혹도 많은 곳입니다. 여러분! 군중 좋아하지 말고, 인기 좋아하지 말고, 스타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휩쓸리다 보면 영혼이 밟히고, 영혼이 마귀에게 먹힐 수 있습니다. 어떤 씨는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6절). 금방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니까 다시 말랐습니다. 이는 금세 좋았다가 다시 식어지는 감정적인 신앙생활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멋진 것을 좋아하지 말고, 외모를 좋아하지 말고, 너무 분위기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신앙이 미지근하게 될 수 있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의 가장 큰 맹점이 무엇입니까? 습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면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합니다. 눈물 없는 신앙! 그것은 불행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도의 눈물, 헌신의 눈물, 십자가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고, 어떤 시험이 닥치고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떤 씨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졌습니다(7절). 그래서 가시와 함께 같이 자랍니다. 상당 기간 잘 자라는 듯 했습니다. 결실을 할 때쯤엔 가시 때문에 기운이 막혀 결실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가시가 무엇입니까? 14절에서 주님은 3가지, 즉 염려와 재리(돈)와 일락(일시적 쾌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 잘 성장하는 듯 하다가 영적인 가시에 찔려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부정적인 생각’과 ‘나눔에 인색한 삶’과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주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씨를 뿌리는 자가 목적한 바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열매 있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100배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밭이 좋아야 합니다.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밭은 무엇입니까? 1.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도는 단순히 좋은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은혜로 변화된 사람을 말합니다. 마음이 좋아야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좋은 마음의 밭을 지녀야 합니다. 한마디로 성도는 예수의 좋은 사람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표현하는 대로 ‘나이스(nice)’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이스(nice)’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친절하고, 사려 깊고,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남을 높여줄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알고, 관대한 것입니다. 또한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고, 적절한 유머도 있고, 미소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넘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좋은 마음의 밭을 이루어야 합니다. 겔36: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좋은 마음을 가지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을 지니고 살지 못하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엡4:30-32) 오늘 우리의 사회가 안타까운 것은 나이스한 태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평하고, 너무 쉽게 분노합니다. 조금만 금전적으로 손해가 날 것 같으면 부모형제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남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좋은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행동을 분리시키지 말고, 늘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행동을 해야 합니다. 며칠 전의 신문을 보니 어느 식당에서 미군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 스테이크 등 음식 찌꺼기를 600g당 2000원씩 모두 1197kg을 400여만 원에 사들였습니다. 업주는 미군부대에서 ‘개 사료용’이라고 속여 빼돌린 음식찌꺼기를 재료로 만든 부대찌개는 무려 6만 명 분이나 팔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원조 부대찌개’라고 선전해 점심시간이면 손님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조사결과에 의하면 그 식당에서 압수한 스테이크와 소고기, 햄버거 고기 등에서는 대장균이 검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돈만 된다면 남을 속이고, 해치며, 부당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마음과 행동으로는 복된 열매를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마음 마음의 밭, 좋은 행동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좋은 마음, 좋은 행동으로 100배의 결실을 얻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마음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랑을 품는 마음입니다. 서로 축복하며,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도 좋은 마음입니다. 이런 좋은 마음을 가질 때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심령의 밭을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2.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핵심 원리를 잊어버리고 이상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이상한 곳에서 축복을 찾고, 열매를 찾으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8절과 15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100배의 결실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지금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미신에 사로잡혀 점을 치러 다니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합니다.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주님께 앞날을 맡기며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미신적 신앙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혼날짜, 개업날짜, 이사날짜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미신적으로 의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년 초에 토정비결을 봤는데 점괘에서 “물가에 가지 말라!”고 나왔답니다. 그래서 여름휴가도 물가로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경우는 중요한 날 수염을 깎으면 안 된다고 믿고 지저분한 얼굴로 나와 면접시험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우리가 잘 안되고 어려운 것이 집터 때문이고, 묏자리 때문입니까? 그래서 집을 이사하고, 묏자리를 이전하고, 이름을 바꾸면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어 집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어떤 미신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8:32). 말씀 안에 사는 자가 참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운명에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라, 운명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축복의 원리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킬 때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한 마음입니다. 미신을 믿으면 여전히 불안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삶을 살아갈 때 평안을 얻게 됩니다. 행복과 기쁨이란 열매를 얻게 됩니다.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킬 때 가능한 것입니다. 3. 인내해야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됩니다. 좋은 열매가 주어지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약속의 소망을 바라며 인내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무릎은 축복을 날라주는 수레바퀴입니다. 기도할 때 흘리는 눈물은 그 수레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윤활유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눈물의 기도를 드릴 때 반드시 결실을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며, 열매 맺는 비결은 얼마나 인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조급합니다. 씨를 뿌린 다음에 열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쉽게 낙망합니다. 포기해 버립니다. 참된 기쁨과 열매의 행복은 십자가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좀 기다려 보십시오. 믿고 기다리면 열매가 있습니다. 어떤 노인이 정원에다 어린 나무를 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을 지나던 나그네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언제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70년쯤 후면 열리겠지요.’ 하고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그네는 또 ‘노인장께서는 그때까지 살아 계실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니오, 그때까지 살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게 아니라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집 과수원에는 많은 과일이 열려 있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부친께서 나를 위해 심어 놓으신 것이었지요, 나도 아버님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수확하지 못해도 인내하며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그럼 반드시 후대에 이르러서라도 그 열매는 얻을 수 있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는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주를 붙잡고 역경을 돌파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주를 향한 헌신이나 봉사도 좀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쉬면 좋을 듯해도 신앙도, 영혼도 죽게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더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인내하는 영혼이 결국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벧전1: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며, 원망, 불평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할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밝은 얼굴, 은혜의 태도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며 인내하는 신앙은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됩니다. 인내의 신앙, 참된 믿음의 사람은 천국미인이 됩니다. 즉 늘 미소가 있고, 친절하게 인사하는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긍정적이고 낙관적이어야 합니다. 지금 돌아가는 내 주변의 상황이 힘들고 비참해도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수록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인내를 통해 반드시 좋은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무화과는 열매가 많이 열립니다. 이스라엘에는 무화과나무를 길에 많이 심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지나던 사람, 배고픈 사람들이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열매를 위해서 무화과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으시는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유실수에 열매가 없다면 존재 가치가 떨어집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도 주님이 기대하시는 열매가 있습니다. 열매의 계절을 맞이한 이때 내가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씀 안에서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100배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 좋은 마음의 밭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하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항상 나이스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실천하며, 조금 더 인내함으로 100배의 결실을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2001-08-24
100배의 결실 사55:10-11, 롬8:18-25, 마13:1-9 생산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생산적인 것 중에서 제일 왕성한 것이 땅입니다. 대지는 별의 별 신기한 것들을 계속하여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들, 즉 갖가지 곡식들을 매년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생산해 주기에 지구 위의 수십억의 인구들이 살고 있습니다. 4월말과 5월 초에 땅에 심은 벼가 두어 달 된 지금 많이 자랐습니다. 앞으로 두어 달만 있으면 빨리 되는 것들은 추석의 잔칫상에 흰 쌀밥을 올려 줄 것입니다. 실로 땅의 고마움을 지방에 가보면 실감합니다. 각종의 채소들을 먹으면서 땅의 생산성을 실감합니다. 김을 맨 분들의 말에 의하면 여름엔 너무 빨리 잡초들이 자란다고 합니다. 그 무성한 풀들이 아무도 씨를 심은 적이 없는 데도 매년 돋아나서 무성하게 자랍니다. 겨울에 앙상했던 정원들이 봄에 푸릇푸릇 하더니 여름이 되어 시퍼렇게 녹음방초가 되는 것을 매년 보면서 대지의 생산성에 놀라곤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도 들판에서 밭에 씨를 뿌리는 한 농부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것을 비유로 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한동안 회당에서 주로 가르치셨는데 오늘의 본문부터는 장소를 바닷가로 옮긴 것을 봅니다. 첫째는 회당에서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게 예수님이 방해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점에서는 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당은 좁아서 사람들이 많이 못 들어오니, 차라리 바닷가로 나온 것이 썩 잘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밭에서 지금 씨를 뿌리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예수님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보시오! 저 농부가 씨를 지금 뿌리지 않느냐? 그 씨들이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질 것이고, 어떤 것은 밑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는 흙이 얕은 곳에 떨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나무속에 끼게 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씨는 좋은 옥토에 떨어지는 행운을 얻을 것이다.” 힘차게 비유설교를 하셨습니다. 팔레스틴의 농사법은 우리나라와는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땅을 갈아엎은 후에 땅을 잘 정리하고 그리고 씨를 조심조심 심습니다. 그래서 길가나 돌밭에 떨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한데 유대 나라는 이와는 반대로 먼저 씨를 부리고 다음에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때는 아무 곳에라도 우선 뿌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노새 등에다가 씨를 담은 자루를 실어 놓고 그 아래쪽에 구멍을 조금 뚫어서 노새가 다니면서 씨가 땅에 떨어지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 씨는 길가나 돌작밭에 마구 떨어지게 됩니다. 물론 옥토에도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제자들은 다시 비유의 뜻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18절-23절에 있습니다. 첫째로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악한 자 즉 마귀가 그 마음에 뿌린 씨를 달랑 먹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돌밭에 뿌리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인데 이유는 말씀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세 번째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네 번째의 옥토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잘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 사람인데 잘하면 백배 좀 못하면 60배 아무리 못해도 30배의 열매는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시는 진짜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우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열심으로 씨를 뿌렸지만 결과는 모두 100배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현실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와서 천국의 복음을 전하지만 이상하게도 소수만이 듣고 다수는 거부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에 저항하고 죽이려고 까지 합니다. 뿌리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받는 밭, 즉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 등등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지 않습니다. 실로 길가 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좋아서 그 말씀을 받았는데 얼마 아니 가서 다시 옛것으로 돌아갑니다. 옆에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핍박하고 협박하니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돌밭입니다. 흙이 얇게 덮이고 아래에는 반석이 깔려있는 돌밭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의 말씀을 듣고 좋아서 받습니다. 어느 정도 그 말씀의 나무가 자랍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염려와 물질의 욕심에 끌리어 말씀대로 살지 못하다 보니 어느 사이인가 기운이 막혀 시들어 집니다.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힌 밭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악조건을 승리하고 견뎌서 자랄 때까지 다 자라 열매를 맺는 씨들이 많은데 이들이야 말로 옥토에 떨어진 씨입니다. 100배 아니면 60배 적어도 30배의 결실을 맺는 옥토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이 네 가지 밭이 모두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도 제자들도 열심히 천국의 씨를 뿌렸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때로는 거부하고 저항하여 씨 뿌리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용기를 잃을 수 있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전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전도를 해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먹혀들고 어떤 사람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밭이 똑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도 씨를 잘못 뿌리기 때문인가라고 회의하기도 합니다. 제발 그런 걱정일랑 말고 열심히 전도하라고 이 비유를 주십니다. 물론 전도학이 있어서 기술을 좀 더 배워서 효과적인 전도 방법은 계속적으로 개발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밭이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어째서 그런 밭은 만들어 놨는가 묻는다면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어째서 아니 바꾸셨는가? 라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원죄성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론과 비슷합니다. 인간이 책임질 것은 인간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못하여 불복종한 인간을 하나님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 이사야 55:11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고로 상대가 어떤 밭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되돌아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노력하면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가급적 많은 밭에 씨를 뿌리면서 일해야 합니다. 혹시 말씀이 되돌아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크게 둘째로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마음이 어떤 밭인가를 고찰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좋은 밭인가를 깊이 반성하여야 합니다. 각자의 믿음의 성장 내용을 검토하시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즉 우리 자신들 안에 뿌리어진 복음의 씨가 잘 자라고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길가 밭은 아닙니다. 길가 밭은 말씀의 씨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 마음이니 그런 사람은 여기 이 자리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왕이 그런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거부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벨릭스 총독이 그런 마음을 소유했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몇 차례 듣고도 결국 회개하지 아니 했습니다.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 하다가 결국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의 밭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듣고, 전도를 받고 곧 반응하여 예배당에 옵니다. 그런데 몇 번 교회에 나오다가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정에 좌우되는 성격의 사람들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학습이나 세례 같은 의무가 주어질 때 피해 갑니다. 그러다가 영원히 천국의 문에서 멀어집니다. 6절에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해는 은혜를 가르칩니다. 막상 은혜의 기회가 올 때 도망하여 오히려 조금 핀 싹마저도 타 버리고 맙니다. 의무의 짐은 은혜의 기회인데 그것이 주어질 때 오히려 타져 버리고 만다면 이 얼마나 처량한 일입니까?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봉사를 시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 짐이 무거울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피하면 작은 믿음의 작은 싹마저 타 버리고 맙니다.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종종 논의되곤 하는 것인데 교회 개축이나 신축 시에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교회의 일은 공개적이기에 개중에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있다고 하여 교회의 큰일을 광고하지 않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광고를 하면 목사님이 돈 이야기를 한다고 빈정대면서 교회를 떠나간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여린 싹이 있기에 교회는 조심스럽게 일들을 추진하지만 때론 오해를 사기도 하고 상처를 받는 경우도 생겨서 조금 올라오던 싹이 해가 뜨면 타져 버리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목회자는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지만 때는 늦습니다. 저의 목회 생활 30여 년 동안에 이런 경우를 겪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세 번째의 가시덤불 밭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의 싹이 제법 자라다가 가시덤불의 기운, 즉 세상에 대한 걱정과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 입니다. 이 경우는 세상을 향한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시덤불의 기운에 막혀있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세상의 재미에 빠지고 세상의 일락에 도취하여 말씀이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질 것 다 가지고 놀 것 다 놀면서 예수를 믿고 싶으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한손에는 세상을 붙들고 다른 손에는 천국을 소유하고 살고 싶어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예수님이 오늘 배워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할 것 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좋은 시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밖으로 나가라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님을 명심시켰습니다.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하여 최소한의 염려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한데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염려는 생존의 염려가 아니라 부하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 하고 높아지려고 하고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 하는 관심과 염려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리는 목숨 부지를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돈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보다 더 많이 갖고 싶어 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고 착취하면서 까지 돈에 애착을 가지고 이를 탐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자라지 못합니다. 아니 자라던 믿음도 기운이 막혀 죽습니다. 여러분들은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그 말씀 그대로를 달게 받아 먹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어 버리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서 꿀꺽 꿀꺽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맛있게 삼켜야 합니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외쳤는데 말씀이 이토록 달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깊이 빠질 리가 없겠지요. 육신이 세상에 거주하는 동안에 필요한 최소한의 세상사를 빼고는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긍지와 의무를 열심히 감당할 때 옥토가 됩니다.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싹이 나고 잘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성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적어도 길가 밭은 면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돌밭도 되어서는 안 되고 가시떨기 밭도 돼서는 안 됩니다. 옥토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옥토라고 여기는 분들은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30배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60배 정도로 좋아하지 마세요. 이왕이면 100배를 추수합시다. 결실은 겉으로 드러납니다. 생활로 드러나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기도생활이나 전도생활에서 나타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몸 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여기 오늘 예배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은 옥토가 되어 100배의 결실을 맺어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0배의 복을 받은 사람/ 창26:12-25/ 2010-05-13
100배의 복을 받은 사람 창26:12-25 어느 분이 10만원 투자하여 60억이 넘는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떠들썩합니다. 세금을 제하고도 5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한탕주의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땀흘려 수고하고 주께서 주신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이 임합니다. 영육간에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여러분과 가정 그리고 사업 위에 더욱 큰복으로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을 \'잘 사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돈도 귀하지만 예수님 믿는 것은 훨씬 귀합니다. 성도들에게도 돈은 필요하지만 돈에 목숨걸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돈을 우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매사에 예수님을 앞세우는 철저한 신앙 안에서 돈도 벌고, 사업도 잘 하고, 인간관계도 잘 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12-13) 이삭이 농사하여 백 배의 결실을 거둔 내용이 나옵니다. 이삭은 한마디로 백 배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삭과 같은 백 배의 복이 임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백 배의 복을 받은 이삭처럼 살 수 있습니까? 1. 포기하지 않고 양보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목민들에게는 육축을 먹일 우물이 큰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랄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빼앗아 메워버렸습니다.(15절) 그러나 이삭은 포기하지 않고 또 팠습니다. 이삭의 별명은 \'우물 파는 사람\'입니다. 그는 계속 포기하지 않고 우물을 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은 힘든 것이지만 지나고 보면 유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72절 말씀에는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기도생활도 게을러지고, 충성심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그저 피하려고 하지말고, 고난 중에서 큰 은혜가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다 보면 어려움도 생깁니다. 장애물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을 잃는 것은 약간을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지만, 용기를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찾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이가 아프면 밤새 지켜보시는 어머니처럼 기도하는 자녀를 하나님은 사랑으로 돌보시고 함께 하십니다.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그래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죽을 것 같은 상황입니까? 이것은 오히려 고난의 끝이 왔다는 표시입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축복된 상황이 오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는 포기하지 않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가면 지난날의 실패와 고난을 딛고 더욱 복된 일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포기하지는 말되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삭은 100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시기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14) 남을 시기하면 자기 영혼이 망하게 됩니다. 남이 잘 되는 모습을 보면 축하해 주고,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이웃이 잘 되면 축하해 주고, 본받아야 합니다. 만일 앉아서 헐뜯고 시기한다면 정말 초라하고 형편없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정적인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을 보면 같이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의 미래가 열려지는 것입니다. 그저 시샘하고 헐뜯고 있으면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고 했습니다. 시기심이 참 무섭습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광야에서 우물은 큰 재산이자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물을 흙으로 메웠습니다. 이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태도입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땅을 내 놓으라!\"는 말입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양보했습니다. 정말 손해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보하는 자에게 큰복을 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파자 샘이 터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양보(讓步)하면 진보(進步)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이 와서 또 그랄 골짜기의 우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20절) 그래서 또 양보하고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그가 비굴하거나 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며 마침내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평화를 맺자!\"고 제의해 옴으로 결론이 나게 되었습니다.(28-29절) 이처럼 하나님은 양보하는 자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양보하는 자는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복으로 채워주시는 은혜를 보게 됩니다. 이삭은 어떤 일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양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삭에게 100배의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2. 창조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삭이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척정신(창조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가서 새롭게 개척하자!\"는 생각으로 양보한 것입니다. 개척정신이 없는 사람은 남이 이루어 놓은 것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수고도, 헌신도, 눈물도 없이 그저 열매만 따려고 합니다. 그러나 개척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이 넉넉합니다. 양보합니다. 수고와 땀을 많이 흘렸지만 그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정신을 가지고 한해를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초라한 존재가 아닙니다. 무한한 가능성 있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하나님의 큰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는 가운데, 한 해 동안 곳곳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결코 여러분이 타락의 도구가 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자, 시기하는 자로 전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작아도 할 일은 많습니다. 개척정신을 가지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할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남들이 다 이루어 놓은 큰 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어떤 것이 진정한 복인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복된 생명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래서 기대하십니다. 여러분이 샘물교회의 가족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샘물교회를 통하여,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닌 재능과 시간으로, 건강과 물질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1억, 2억과 바꿀 수 없습니다. 건강하지 못해도, 물질이 없어도, 많이 배우지 않았어도 여러분은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구원받은 천국백성입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고 산다면 결코 소극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개척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어떤 난관이 와도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이렇게 개척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눈물, 땀, 고난은 있어도 반드시 놀라운 축복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이삭처럼 100배의 복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샘물교회는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교회도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큰 꿈이 있습니다. 큰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이삭처럼 백 배의 결실이 있는 성도와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뛰어야 합니다. 개척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년처럼 살았던 갈렙처럼 꿈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개척정신입니다. 남들은 다 이루어 놓은 것을 편하게 차지하려 하지만, 우리는 꿈과 소망을 가지고 만들어가야 합니다. 개척정신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도 낙심한 모습으로 살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2003년도에는 확신 있는 믿음으로 한번도 이루어보지 못한 복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삭처럼 백 배의 복을 받는 주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외쳐봅시다. 금년 한해는 내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해가 될 것이다. 아멘. 3. 이삭처럼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이삭은 예배 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르호봇에서 다툼이 멈추었습니다. 이삭은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22)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브엘세바로 올라갔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삭은 그곳에서 예배의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장막을 쳤습니다.(24) 예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는 이삭에게 하나님은 100배의 복을 주셨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원래 이삭의 직업은 축산업입니다. 그런데 그가 농사를 지어 백 배의 결실을 얻어 거부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증거입니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열심, 비전 그리고 환경도 중요하고, 위치도 중요하고, 모든 여건이 잘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일터가 바뀌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복된 존재가 되니 100배로 복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된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 LA에 사는 김용규 장로님 간증이 실렸습니다. 그분은 원래 태권도 사범이었는데 부상 때문에 도장 운영을 포기했습니다. 85년에 LA에서 봉제공장을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잘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 부인이 기도해서 잘 되는 것이다\"라고 했지만 장로님은 \"내가 수완이 있어서 잘되는 것이지 무슨 기도 때문이냐!\"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반품 문제로 큰 부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수완을 발휘해도 부도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손을 들었습니다.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그곳에서 신명기 8장 17-18절 말씀으로 철저히 깨졌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그는 이제까지 자기가 잘해서 부자가 된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셔서 잘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회개했습니다. 마음도 비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업하고 베풀며 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와 구조조정을 하고, 직원들을 믿는 사람으로 바꾸고,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결국 위기를 극복하고 사업은 더욱 번창하게 되었고 마침내 나이키 회사의 의류 납품권까지 따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간증을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복주시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축산업자인 이삭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농사일로 전업하고도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태권도 사범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니까 봉제일로 전업하고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반드시 백 배의 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성실함도 수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완으로는 2배의 결실을 얻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백 배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작은 부자는 본인이 노력하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부자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2003년에는 영육간에 큰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삭처럼 백 배의 결실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확신하며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생활의 중심에 두고 모든 삶의 계획표를 진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내가 잘못된 길을 택하여 어려움과 위기에 처하고서는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2003년에는 세상의 일을 버립시다. 오직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와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가야 합니다. 복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온갖 고생과 수고를 해서 우물을 팠습니다. 시간도 많이 들였습니다. 땀도 물질도 많이 들였습니다. 여러 곳을 파느라고 아픔과 희생도 있었습니다. 빼앗기면 양보하고 또 팠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앞세우고 나아가 우물을 얻었고, 100배의 복을 누렸습니다. 2003년 한해는 이삭처럼 예배중심으로 삽시다. 개척정신, 도전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며 살아갑시다.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말고, 은혜의 마음으로 양보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중에 이삭처럼 100배로 복을 받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2015-02-12
100세에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창21:1-8 성경 창세기에는 3사람의 조상이 등장합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 그들입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만을 따먹고 선한 인류가 번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야 말았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타락하므로 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롬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한 말씀대로 입니다. 노아는 아담이 타락 후에 제2의 조상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홍수 심판 후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에게 축복하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시의 가장 완전한 의인이었던 노아를 세웠으나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무위로 돌아가고 홍수의 심판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원죄로 타락하고 범죄로 파괴된 인간을 구원할 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뿐이었습니다. 여기에 세움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진리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 원리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등장합니다. 창12:2,3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아담이나 노아에게 축복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창15:4,5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100세 사라는 90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라는 나이 늙고 경수도 끊어진 아기 낳을 소망이 없는 노경의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무덤과 같은 사라의 태속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역사할 때 언약의 자식인 아들을 낳게 돈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결국 이삭은 믿음으로 성령을 따라 낳은 자식이 되었습니다.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을 따라 잉태하였으니 아브라함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 되는 원리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은 하와가 죄와 율법의 노예가 된 죽은 자를 낳았고 신약은 사라와 마리아가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할 자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잉태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따라 잉태케 하사 언약의 자식을 낳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죽은 자 아담의 후손이 아니요 성령으로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축복의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한 성경의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지금도 우리에게 믿음으로 많은 축복의 자식을 낳게 하는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100세에 아들을 낳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생각하며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1. 축복의 말씀의 씨를 나의 마음 배에 잉태케 하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잉태한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잉태되는 기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쫒아갔습니다. 그리하여 축복의 말씀을 믿음으로 의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말씀을 잉태한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2천 년 전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를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성령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배속에 잉태시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배속에 성령으로 잉태시킬 수 있는 씨앗입니다. 벧전1:16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의 씨는 우리의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큰 사건을 계획하시고 성취시키려고 할 때에는 먼저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게 될 때 큰 결과 열매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떤 생각이나 환상이나 감정에서 된 것이 아니라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먼저 임하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성경에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하여 축복의 말씀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받아 자기 마음 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나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요 나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천하 만민이 나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건지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삼기 위하여 호렙산 가시 떨기 밑에서 축복의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거듭 말씀하여 축복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잉태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 심령 속에 살아 잉태될 때 비로소 큰 사건으로 이루게 됩니다. 성경에서 위대한 사건을 이룬 인물들을 보십시오. 모두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 되었던 것입니다. 세계사를 움직인 신앙의 사람들도 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된 후에 그대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고아의 왕 조지 뮬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시81:10에 “나는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 말씀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어지고 무엇이든지 간구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뱃속에 잉태케 하였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짓고 모든 필요한 것을 기도로 해결하였습니다. 고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때마다 필요한대로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3천명의 고아를 살렸고 평생에 풍성한 축복을 누렸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축복의 말씀이 마음 뱃속에 잉태되기만 하면 그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생활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잉태케 하는 성령을 언제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서 범사에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기를 바랍니다. 2.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십시오. 말씀이나 생각이 마음뱃속에 잉태된 다음에 믿음으로 그것이 자라나는 꿈을 그리며 그 꿈을 마음 뱃속에 설레도록 채우고 자나 깨나 꿈이 이루어진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만민이 나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말씀하시고 그를 밖으로 인도하시고 밤하늘의 별들을 헤아리게 하시고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게 하셨고 가나안을 상속으로 주시기 전에 멀리서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므로 가나안땅을 분명하게 소유하는 꿈틀거리는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잉태한 사람은 자나 깨나 꿈을 꾸며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며 그 씨를 자라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말씀이나 아이디어가 잉태되면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진 모습을 그리십시오. 그 씨가 마음 뱃속에 가득히 채우고 꿈틀거리게 하십시오. 우리 마음뱃속에 가득 찬 꿈은 계속 꿈틀거리게 하면 자라나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 군에 입대하면서 큰 꿈을 가지고 군 생활을 하였으며 그 꿈을 거의 다 이루었습니다. 저는 우리 일신교회에 대한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교회에 대한 큰 꿈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 큰 꿈은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제가 우리 일신교회에 오도록 되였을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매일새벽에 기도하며 성경읽기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 영광 보리라” 요11:40말씀이 노래로 터져 나왔습니다. “일신 일신 할렐루야 -----------일신 일신 일신 성도들이여 영광을 보리라” 그때 저는 군종병 이선목이라고, 이호문 목사님 아드님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복음성가 가수입니다. 그와 함께 곡을 맞추면서 하루 종일 매일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에 와서는 벽에다 크게 써 붙여 놓고 우리 식구가 모두 함께 부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11:을 펴서 성경을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때 제 가슴이 뜨거워지며 말씀에 은혜가 되고 “하나님 영광을 보리라” 설교 말씀을 단숨에 써내러 가게 되었습니다. 일신교회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저는 그때 확신하였습니다. 지금도 확신합니다. 제게 이 말씀이 마음 배 속에 잉태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음배속에서 꿈틀거리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으시면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천상의 24장로님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금 면류관을 다시 벗어서 주님 보좌에 던지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전개 될 것입니다. 믿는 대로 될 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배에 잉태된 축복의 말씀의 씨를 자라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입으로 해산 하십시오. 그리고 기고, 걷고, 뛰어다니게 하십시오. 롬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입으로 말하고 시인하게 될 때 창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믿음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우리의 언어를 통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살아 역사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교회 봉사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입술로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상태의 믿음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지 않는 믿음은 잠자는 믿음입니다. 속에만 있는 믿음-죽은 상태에 있거나 잠자는 상태에 있는 믿음은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도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할 때 이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음을 입으로 해산하게 하여 살아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으로, 사래는 사라-열국의 어미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게 했습니다. 말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것이 말로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해산하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사라가 “아브라함-민족의 조상, 열국의 아비여!” 또 아브라함이 “사라-열국의 어미여!”하고 서로 불러댔습니다. 90,100세 꼬부라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런 말하기가 굉장히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사라는 그들의 마음 배 속에 잉태된 것을 입을 통하여 해산을 하였습니다. 믿음을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들은 이웃사람은 자식도 없는 늙은 주제에 열국의 아비 어미라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고 비웃었습니다. 노망이 들어도 보통 들은 것이 아니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사라는 일단 잉태된 것을 해산 해 놓고 보니 시원했고 그것이 기어 다니고, 걷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게 되고 더 힘을 얻어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입으로 믿음을 시인하게 되자 그들의 믿음은 더욱 살아 움직였고 축복의 말씀위에 굳게 서서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1년이 지난 후 정말 하나님 축복의 말씀의 씨앗-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 감격 했겠습니까? 100년 묵은 썩은 고목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기적이 하나님 말씀의 씨를 받아 마음 배속에 잉태하고 자라게 한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사람들 대열에서 낙오자 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4. 어려운 잉태 어려운 해산을 통하여 얻은 것 모두를 하나님 앞에 내 놓으십시오. 그 이상의 것을 도루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어렵게 아이를 잉태하였고 어렵게 해산을 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일생일대에 중대한 시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약속과 언약으로 베풀어 주신 모든 축복을 다 거두어 가 버리는 절망적인 순간이요 또 자신과 그토록 사랑스런 아들과 함께 죽어버리는 비장한 결단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칼날을 번득이는 순간 그 생애의 전부를 희생하는 순간이며 또한 자신이 제물이 되어 죽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영원한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일시적인 사랑을 죽이는 결단을 내렸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인간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준비하신 양을 잡아 축복의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축복의 새장이 펼쳐지게 아브라함의 손을 계속 잡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였던 것입니다. 그는 승리한 것입니다. 그는 죽고 다시 산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은 6대주 5대양에 믿음의 후손을 거느린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말씀대로 되였습니다. 약2:21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였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이요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자신에게서 산 믿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축복의 말씀에 신앙을 가집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해산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던 그 축복이 우리의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10km만 더 갔으면/ 출15:22-27/ 2002-09-16
10km만 더 갔으면 출15:22-27 오늘 말씀 22절을 보세요.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배타고 건넌 것도 아니고, 헤엄쳐서 건넌 것도 아니고, 바다가 좍 갈라진 사이를 걸어서 건넜습니다. 무섭게 추격해 오던 바로 왕의 군대는 바닷물 속에 다 휩쓸리고, 잠겨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전 백성들이 찬송을 부를 만한, 감격적이고, 감동적이며, 신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격과 기쁨이 사흘을 못 가서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물이 다 떨어져 버렸고, 어디에서도 물을 얻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가운데, 고통스럽게 길을 걸어서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 그 곳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푸른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어요.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허겁지겁 달려가 물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지간하면, 목마른 처지에 뭐든 일단 마시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마라에 있는 물은 아무리 눈 딱 감고 먹으려 해도 먹을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장 필요한 물은 미네랄이 녹아 있는 물이거나, 생수이거나, 산골 약수가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이니 제일 좋은 물을 먹어야 한다는 사치스럽고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장 눈앞에 닥쳐 있는 갈증을 해결하는 것만으로 만족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참 묘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생각에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할 때, 그 열기가 식어지지 않도록, 계속 좋은 일을 만들어 주고, 더 잘 보살펴 줄 것 같은데, 하나님은 물이 다 떨어져 가는데도, 즉각 샘을 만나게 해 주거나, 비를 내려 물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길을 걸어 간신히 마라에 도착했을 때, “수고했구나.” 하면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게 있어서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아도 홍해를 건너고 사흘을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잘못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습니다. 테스트하셨다는 말입니다. 25절 끝 부분을 보세요.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쌔…….” 시험은 연단입니다. 훈련입니다. 그리고 시험은 내 주제를 파악하게 만듭니다. “네 주제를 알라.”는 국어 선생님이 그러면 수학 선생님은 “네 분수를 알라.” 지리 선생님은 “네 자리를 알라.” 미술 선생님은 “네 꼬라지를 알라.”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사람이 목표입니다. 일을 고치고, 일을 보수하고, 일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고치고, 변화시키려는 목표가 있으시기 때문에 홍해를 걸어서 건너게 하는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만들기도 하시지만, 종종 일을 더 나빠지게 만드시고, 일을 포기하게도 만드시며, 지연시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다 된 일을 망가트리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사람을 찾으시고,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통해서 내가 어디에서 부족한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자기의 약점을 알게 되고, 보완해야 할 부분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가장 쉽게 넘어지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원망”의 감정이었습니다. 24절을 보세요. “백성이 모세에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든 원인과 잘못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불평하는 것이 원망입니다. 자기 관점에서 보고 말하며, 판단하는 것이 원망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던 입에서, 찬송하는 입에서 환경이 어려워지고, 상황이 달라지니 곧장 원망이 나왔습니다. 너무 쉽게 변하고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원래 사람이란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인심은 조석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연단 시켜서 “인심은 조석 불변이다”를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일단 변함이 없으신,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을 기억하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주목하세요. 26절 끝 부분을 보시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십니다. 쓰디 쓴 마라의 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단물로 고쳐주셨습니다. 써서 먹을 수 없던 물을, 그냥 민물이 아닌 다디단 물로 고쳐주셨으니 극에서 극으로 바뀐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시는 까닭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으시죠? 복 주시는 여호와, 무슨 일이든 내가 하는 일, 잘 되게 해 주시는 여호와 그러면 참 좋은데, 난데없이 나를 치료하신 다니 무슨 말입니까? 마치 갑자기 수술하자면서 칼을 들고 달려드는 격 아닙니까? 아니 내가 언제 나 고쳐 달라고 했나요? 그리고 내가 어디가 어때서 배 째자고 달려드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잘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치료하신다는 것은, 원래 좋은 것이고, 건강한데, 괜히 손대서 성형수술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서 버리게 될 것을 고쳐서 쓰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들은 늘 새것만 원하고, 조금 낡은 것은, 내가 언제 봤냐는 식으로 홱 집어 던지지만 그런, 비정함과 야속함이 하나님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 여름에 아버님께 내려갔더니, 아버님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녀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여름휴가가 되어 내려올 자녀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준비하고 계셨어요. 선풍기를 한 대 여섯 개는 내 놓으시면서 너 맘에 드는 대로 골라서 가져가라는 거예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 구닥다리예요. 아니 어디서 이런 고물을 가져 오셨나……. 그러는데 옆에서 어머니는 아주 흐뭇한 얼굴로 “너의 아버지가 여기 저기 내 버린 선풍기를 주워 오셔서 이렇게 말짱하게 새것으로 고치셨단다. 얼마나 재주가 좋으시냐? 이번 여름 늬들 시원하게 보내게 되었다”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에게 말씀하세요.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다. 너는 나에게 치료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쓰레기장으로 가지 않는다. 나의 성격, 너의 고집, 너의 교만, 너의 어리석음 다 고쳐서 새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러시는 겁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님이 기술이 좋아서 고장 난 선풍기 잘 돌아가게는 수리하셨지만, 모델만은 고치지 못하셨지요. 그래서 모양은 볼품없고, 구닥다리였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기술은 너무 대단하셔서 우리를 완전히 신 모델로 바꾸십니다.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것, 완전 신형, 신품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어떤 일을 통해서 여러분을 테스트하시고 그 결과를 알려주셨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수준이 어떤 상태인지 홍해사건에서는 안 드러났지만 마라의 쓴 물 앞에서는 당장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테스트, 시험하시고, 너희들 이런 수준이다 “앞으로 내가 너희를 고쳐야 한다.”를 말씀하신 사건이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안 믿고, 안 받아들이니까, 또 다시 이런 사건, 저런 일을 통해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그릇인지 진단해서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께 나를 맡기셔야 해요. 치료해 달라고 말이지요. 고침 받고, 치료받아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해요. 자유, 평화, 기쁨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테스트가 끝난 후,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샘이 열두 개, 시원한 그늘을 만드는 종려나무 칠 십 주가 있었습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10km 떨어진 곳입니다. 마라에서 조금만 참았으면, 견디어 냈으면,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가지고 반나절만 더 갔으면 엘림의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원망과 불만을 터트리며, 모세를 공격하고 비난했습니다. 마라를 만났더라도 조금만 더 가면 엘림이라는 오아시스가 있다. 그걸 바라 볼 수 있고, 마음 속에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참고 견디는 겁니다. 고난과 어두움은 길지 않아요. 10km만 더 가면 엘림이 있어요. 근데 그걸 못 참으니까, 나는 지금도 계속 마라에서 머물고 있는 거지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쓴 물, 마라만 보는 사람은 어때요?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자” 라고 덤비는 거지요. 이 성품, 이 약한 마음, 이 부족한 인간성이 고쳐져야 해요. 그래서 내일을 바라보고, 모레를 소망하며, 오늘 이 어둠을 헤치고 나가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0원/ 롬14:7-8/ 2002-08-07
10원 롬14:7-8 어떤 이야기이든 이해가 잘 되는 것이 복인 경우가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복이 될 수도 있다. 이해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선 사람과는 다른 문제이지만, 악하고 더럽고 추하고 불 신앙적인 일들에 이해가 되지 않는 복이 있기를 바란다. 이해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우리들의 사랑이다. 사업 상 중국으로 출장을 간 사업가가 그만 실수를 했다. 함께 간 여직원들과 한 호텔을 쓰게 되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으나 한 방에 투숙한 이유로 고소가 되었다. 절대로 그럴 인격이 아니라고 믿었던 분이기에 충격이 컸고, 그 일로 고소를 당하고 7,000만원이나 되는 위자료를 물게 되었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쓰게 된 것도 극심한 손해이지만, 그 가족에게 그 일은 평생토록 씻지 못할 상처를 준 일이 되었다. 아마 그는 자식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게 될 것이고, 아내에게도 평생 부끄럽게 살 것이다. 그의 전 재산을 버린 일은 아닐 수 있으나 그는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가정적으로 신앙적으로 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경우에 따라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을 수 있다. 재수가 없었다는 식으로 치부해서 곧 잊어버릴 수도 있다. 많은 돈을 잃었지만 경찰에서 풀려나는 순간 곧 잊어버릴 수 있다. 누구나 실수를 한번씩 하는 것이고,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가수가 마약을 해서 구치소에 수감이 되었었다. 꽤 오랜 기간 구치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이런 저런 사회봉사를 하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을 통해 용서를 받을 것이다. 벌금을 1,500만원이나 물었지만, 그까짓 것은 금방 잊을 수 있다. 사람들은 원하지 않지만 많이 망한다. 그리고 많은 부분 자신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해서 망한다. 실수와 잘못으로 망하기도 하지만, 또 다시 일어난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견고한 신앙과 인생이 되기도 한다. 국민일보에 연재된 모 장로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20년 간의 대한항공 기장으로 비행기를 운행하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많이 체험했다. 그 분이 섬기던 교회가 선교센터를 지으려고 하는데, 돈이 모자랐다. 그 장로는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노후에 살려고 했던 집 한 채를 팔아서 바쳤다는 것이다. 헌금을 하느라고 평생을 모아온 재산을 다 날린 것이다. 그래서 망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었기에 후회하지도 않고 뉘우칠 것도 없는데, 어쨌거나 그 일을 통해 그는 망한 것이다. 세상은 대부분 재산을 날린 것을 망했다고 하는데, 분명히 그는 평생을 모은 재산을 포기한 것이니 망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신문에서 일부러 망한 그 사건을 자랑하고 있다. 그의 고백은 이런 것이다. 평생을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이 날 이때까지 기적을 보며 살았는데, 그의 인생에 하나님을 위해서 스스로 망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는지, 이제 황혼의 나이가 되어, 전보다 더 풍요로워졌고,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가 보고할 내용이 있다는 것이 그토록 기쁘다는 것이다. 인생에 성공만 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실수와 절망은 자기 탓인데, 자기 탓이라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잘 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탓이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도 복을 받는 것에는 언제나 전제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늘 복을 받기를 원하시고, 또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는 많은 내용들이 있다.“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 5∼6) 그런데 모든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는 전제조건이 있다.“네가 만일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그 무한대의 복을 주시고,“만일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신 28:15) 그와는 반대로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종이라는 것이 때로는 완전하게 나를 비우는 것, 다시 말하면 거의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하지만, 망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갈등을 빗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부자 록펠러는 이 말씀대로 순종하여 큰복을 받았다. 그는 세계 최고의 부자, 석유왕, 자선가로 불렸다. 그는 세계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낸 시카고대학을 비롯, 24개의 명문대학을 양성했고 4928개의 교회를 지었다. 그는 언제나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출석했으며 그가 받은 용돈 20센트에서 꼭 십일조를 바쳤다. 또 교회에선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지켰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후손들이 부모의 아름다운 신앙을 기념해 뉴욕에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리버사이드교회를 봉헌하였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생각했고, 그 순종은 하나님을 위해 언제든지 내 것을 다 드릴 수 있다는 것, 얼마든지 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멋진 하나님의 역사엔 전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멋진 순종이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자기 힘으로 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어서 오히려 망한다. 성경은 물질이 사라지는 것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끊기는 것이 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질을 드리기 전에 마음을 드리라고 한다. 오늘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에 마음전체를 하나님께 드린 적이 얼마나 있었나? 요즘 우리 금요기도회에 무명으로 헌금을 바치는 손길들이 이어지고 있다. 누구인지 전혀 눈치 못 차리게 하는 헌금인데 꽤 많은 액수의 헌금들이다. 얼마 전에도 몇 백 만원의 헌금을 아무 내용도 없이 누군가가 하였다. 돈의 액수에 놀라기도 했지만, 유독 내 눈을 끈 것은 그 헌금 액수의 마지막 숫자였다. 그것은 몇 백 몇 십만...10원이었다. 자기가 현재 같고 있는 모든 액수를 바친 듯 하다. 누구나 자기 살 궁리를 하고 남을 도우며 헌금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0원까지 바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대책 없는 믿음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이 대책 없는 믿음을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않을 것이란 커다란 확신을 가졌다. 앞으로 그 인생에 일어날 일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분명히 그 일을 기억하실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망하도록 하지 않으시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내게 있는 전부를 드렸다는 신앙의 고백을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10원을 원하신다. 숨겨놓은 10원, 아무도 볼 수 없는 정성, 마지막 내가 살아야하는 쌀 한 줌까지 전적으로 드리는 헌신을 받으시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전심으로 드리는 그 전적인 순종과 헌신을 원하는 것이다. 믿음을 드리면 의심 없이 드려라. 기도와 찬양을 드려도 전적으로 최선을 다해 드리는 것이다. 그토록 사모하고 기대했던 언약궤가 이스라엘 성에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다윗이 기뻐 춤출 때 미갈은 비웃었다. 같은 집안에 살던 사람이다. 다윗이 열왕들과 비교해 위대한 것은, 그는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한번도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아무데나 가서 절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주의 종을 두려워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했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며 비웃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나, 성경은 비웃는 미갈이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가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대상15:29) 성경의 관점은 분명한 것이다. 주께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춤추는 것을 보며 멸시하는 것은 이미 망했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 마지막 10원을 바치는 것을 보며, 지혜롭지 못하다 현실감각이 없다, 광신적이다 심중에 업신여기는 마음이 들면 회개해야 한다. 그것은 사울 왕가처럼 이미 망해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하나님 사랑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어야지 남은 것으로, 비루한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반듯하고 정직하면 망해도 된다. 믿음이 반듯하면 망하거나 흥하거나 하는 것이 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내 믿음이 그 분을 향해 100%가 될 때 역사 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하는 순교자의 신앙이 될 때 부흥과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왜 기쁨이 없고, 왜 예수 믿는데도 능력이 없고 풀리지 않고 피곤하고 힘들어지는가? 마음을 100%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적인 신뢰가 없이 항상 하나님의 땅에서 다리 하나를 빼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에는 다함께 망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성령 받은 그들은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내 전 재산과 온 인생이 복음전파를 위해 쓰여지는 것에 하나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의 것을 다 팔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다. 소유를 공유했으며 전적인 헌신과 봉헌은 불같은 복음의 전파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다른 이들과 같지 않게 50%만을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만 저주를 받아 즉사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100%를 못 드려 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이다. 100% 드리는 공동체에 50% 드려 정직하지 못한 것이 정직하고 신실한 공동체에 끼어 드는 것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그 50% 때문에 불같은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를 꺼지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죽이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50% 드려 일어나는 믿음의 역사는 사람이 만드는 역사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100% 드릴 때,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드릴 때 역사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은 100%였다. 노아가 120년 간 아라랏 산에서 방주를 짓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아낌없이 다 드리는 것, 바로 그가 가진 10원을 드리는 것이다. 사렙다 과부의 마지막 밀가루와 기름, 과부의 두 렙돈은 바로 10원이었던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복음전도자 마가는 이디오피아에서 온몸이 밧줄에 묶인 채 짐승에 끌려 다니며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마지막 10원까지 드리고 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망한 곳에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 망해서 없어진 곳, 내 욕심과 정욕과 탐욕이 완전하게 망해서 사라진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가 되었으며, 노아는 멸망하는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다. 과부의 밀가루와 기름통은 끊어지거나 마르지 않았으며, 비참하게 죽어간 그 곳에 흘린 피가 부활하기 시작해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분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받은 인생임을 믿는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왜 구원하셨을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당신을 왜 창조하셨을까? 그리고 지금 당신의 위치에 왜 있게 하셨을까? 여러분에겐 특별한 사명이 있음을 믿기 바란다. 그리고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낮선 곳에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은 자신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대단하지 않았다. 이름 모를 땅에서 예수의 이름을 전하다 죽은 선교사 한 사람이 세상 사람들에게 귀한가? 사람들에겐 그저 그냥 10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김없이 철저하게 드리는 헌신이다. 여러분이 드리는 10원, 여러분의 최선, 그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크지 않다. 그러나 그 10원이 일으키는 놀라운 생명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그 생명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생명 같은 10원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이다. 믿음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라. 성경은 계속해서 인생이 그렇게 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영원한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 친지들 간에 돌아볼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즐기고 싶은 것도 많지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라고 말한다. 우리가 누리고 즐기고 마음을 둔 그 모든 것들은 바람같이 사라질 것이고, 영원한 세상은 우리 눈앞에 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주의 것이기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이 내 문제가 아니라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내가 형통하면 주가 형통하는 것이고, 내가 망하면 주가 망하는 것인데, 주가 계획하셔서 망하게 하시던 흥하게 하시던 그 분의 계획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면 나는 이미 믿음으로 승리한 것이다. 망해도 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우리가 갖는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위해 바친 우리의 생명을 확인하고 있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니,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주께 영광을 드리기 원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써서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사라질 것에 마음을 두면 둘수록 인생은 비참해지고 고달파진다. 무엇이 잘된다고 잘난 척 하고 교만하고 요동할 것도 없다. 무엇이 안 된다고 고민하고 죽을 것도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10원을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죽어도 좋고 망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그 정성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히 여러분의 삶을 망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나, 그것을 통해 횡재하려는 계산과 거래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망해도 좋다. 주의 피묻은 복음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에 전파되는 것이라면, 죽어 가는 영혼이 살아나는 곳에 내 인생에 쓰여진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는 그 믿음을 하나님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번의 실패도 안 해 본 사람은 없다. 한번도 손해본적이 없거나 망해보지 않은, 태어나서 날마다 승승장구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실패해 보고 시행착오라 해서 그런 실패들을 통해 더 견고해지기도 하고 든든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한번도 일부러 망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하느라고 했는데, 안되었고, 꼭 넘어가고 극복해야 하는 유혹들에 무너져 망한 일들이 있는 것이다. 모두 나의 잘못과 실수로 망한 것들인데,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주셨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한번 망해보겠다는 결심이 있기를 바란다. 바울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망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망하겠다는 결심으로 사는 사람들을 세워 주시고, 바로 그들을 통해서만 놀라운 일들을 허락하신 것을 깨달아라. 길지 않은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의 남은 10원까지 바치는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전적인 믿음과 헌신으로 여러분 때문에 교회가 복을 받고, 주의 복음이 땅 끝을 향해 전진하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10원리/ 교회 세우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라/ 딤후3:15-16/ 추석설교/ 2005-09-18
10원리/ 교회 세우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라 딤후3:15-16 오늘은 추석명절입니다. 모든 곡식이 무르익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계절에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는 풍요한 절기가 되기를 바람니다. 오늘도 독서의 계절을 맞이하여서 지난주일 이어서 성경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따르는 교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지가 다 없어 진다하드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없고 정확무오한 진리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제4차 전도여행을 하기 까지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었습니다. 특히 딤후 4: 10-12을보면 순교직전에(A.D65-68) 데마와, 그레스게와, 디도와, 두기고는 바울을 버리고 다른길로 떠났습니다. 외로운 전도여행도 힘들었지만 복음때문에 투옥을 당하면서 바울은 외로왔고 그래서 아들같이 따랐던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당시 네로황제의 박해가 너무 심하여 교회를 염려하면서 데모데에게 복음을 지키고(딤후1:14) 그 안에서 흔들리지 말고 더욱 견고하여(딤후3:14), 어떤 피박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견디라(딤후1:8, 2:3)고 부탁을 하였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죽음을 앞에 놓고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절규의 복음, 유언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사도 바울은 성경은 이런 것이라고 정확하게 성경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회상하며 설명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3:11을 보면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핍박 가운데 있을 때, 그 고난을 극복하고 이겼던 비밀은 주께서 자신을 건져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핍박과 고난의 때에 무엇을 붙잡고 있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딤후 3:12-14을 보면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성경의 말씀에 확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든지 넘어지고 핍박을 이기지 못하며 고난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이 어떤 시기이며 세상의 흐름이 어떠할지에 대해 미리 예견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에 패배하지 않고 사는 방법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고 확신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시대는 너무나 빠르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살면서 사람들의 사는 목적이 점점 타락이되고 어리석은 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성경의 말씀과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위험의 시대입니다. 교회 안에 흐르는 의식도 점점 세속화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한 대로 이제는 돌아서야 합니다(turn away). 너무 인간적인 생각이나 세상의 흐름에 묻혀 그냥 함께 굴러가는 인생이 되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향하던 발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마치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가 방향을 잘못 가는것 같으면 가던길을 턴하고 돌이키듯이 세상에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을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울은 종말의 때를 설명하면서 말하길 경건의 모양(form of godliness)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power of godliness)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대상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길이 능력 있게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성경으로 돌아와야 합니까? 그 대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교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5대 사역이며 사명이며 목적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람을 만드는 유일한 교과서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기록하신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성경에 담아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경에 가득 채워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성경의 말씀들은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을때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병을 고치고 믿을때 치료하고 변화시키며 기쁨을 주며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된 교회,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온전히 지배받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소설이나 수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흡이 담겨진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여기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활동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5:10-11을 보십시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지 그것이 해야 할 역사를 이루십니다. 말씀은 결코 빈 것으로 뒤돌아 오지 않습니다. 말씀은 무의미하거나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마치 비와 해빛이 모든 식물에 싹을 나게 하고 에네지를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활력을 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메신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민첩하게 움직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뛰어다닙니다. 그래서 시편 147:15에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성취하십니다. 비와 눈처럼 항상 생산을 일으킵니다. 신명기 8:3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생명의 떡”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사람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며, 사람을 성장하게 하며,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사역에 첫째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말하길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을 이루는 능력으로 사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크 힐스(Oak Hills)교회를 섬기며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영성학자이기도한 맥스루카도(Max Lucado)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고 불태우고 비웃고 조롱했다. 학자들은 성경이 유치하다며 우롱했고, 왕들은 성경을 불법으로 낙인찍었다. 무덤을 파고 성경을 묻은 뒤 승전가를 불렀지만 그래도 한사코 성경은 무덤에 머물지 않았다. 성경은 살아남을 정도가 아니라 날이갈수록 번창했다. 역사를 통틀어 가장 널리 보급된 책은 단연 성경이다. 라고 말했다. 18세기에 불란서에 볼테르라고하는 계몽주의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이사람은 성경을 가르켜 죽은책이라고 혹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성경을 읽을 사람이없어 박물관에 가야 찾아볼수 있을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볼테르의 집이 성경을 출판하는 성서 공회의 사무실이 되였고 그가 앉아서 큰소리를 치던 바로 그 자리가 성경을 천정까지 쌓아놓는 성경창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은 책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전세계 가장많이 읽혀지는 베스트셀러는 성경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성경의 기록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는 것으로 우리를 영생의 길로 안내해주는 하나님의 가장 귀한 보물지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15을보면 성경은 너에게 지혜를 주고 그 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깨닫게해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복음에 대하여 아주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이 말씀 가운데 한 가지 주목해야만 하는 핵심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매개체입니다.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20장 31절에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다시 한번 영원한 생명은 기록된 말씀,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진리의 출처이며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진리의 안내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7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구절의 핵심은 말씀이 구원을 이루어 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저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군가가 나가서 진리를 외쳐야만 하는 전도의 이유입니다. 로마서 10:13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르며, 듣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믿으며, 전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듣겠으며, 보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찌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딤후4:2). 비록 보내심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드시 들어야만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역시 성경말씀이 구원을 가져오는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19장 7절에보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영혼을 소성케 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사람의 영혼을 소성케 만드는 능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도 보면 흑암속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신앙회복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수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에스라학사에게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에스라학사는 율법 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모든 회중 앞에 섰습니다. 새벽부터 오정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며 읽을 때 많은 백성들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나무 강대상에 서서 에스라학사가 율법 책을 펼 때 사람들은 그 앞에 일어섰고 말씀을 낭독할 때 사람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며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깨닫고 말씀앞에 모두 다 울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슬퍼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들을때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맹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한 행동은 사람들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사람들을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도 누가복은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똑같은 사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만약 좋지 못한 땅이나 길가의 흙처럼 딱딱하다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믿지를 않기 때문에 마귀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다빼앗아 가므로 결과적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짝밭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는 기쁨으로 받지만 그들은 뿌리가 견고하지 못하여 잠시 동안 믿을뿐 고난이 닥치고 시험이 오면 넘어지고 실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속에 묻혀사는 사람들이기에 이생의 염려와 재리에 막혀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준비되지 않은 땅에 떨어질때 가시덤불과 딱딱한 흙이나 돌들로 결실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옥토가 있습니다. 열려있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결실을 맺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생산을 일으키는 땅입니다. 말씀의 수확이 이루어지는 땅이며 말씀이 능력을 발휘하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은 준비되어진 마음에 떨어졌을 때 구원을 이루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23에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씨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씨가 좋은 밭에 심겨질 때 구원을 이루어 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마음에 준비를 하도록 가르쳐야만 합니다. 만약 친구와 이웃들을 효과적으로 전도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도록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이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기도와 말씀입니다. 너무 복잡하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논쟁을 피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알고있는 세상적 지식으로는 구원의 도리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좌우에 날선 어떤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엡 5:26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깨끗게 씻는 물과 같아서 우리를 거룩하고 정결하게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헤럴드 럿셀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서 두팔이 완전히 잘린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쓸모없는 인생이 되였구나 낙심과 절망가운데 몇 번을 죽으려고 자살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하고 병상에서 성경을 읽다가 구원의 도리를 깨닫고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불구자로써 “우리생애의 최고의 해”라는 영화에 출연하여 아카데미상을 받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하고 우둔한자를 지혜롭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은 구원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진리입니다. 우리 교회는 구원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회가 진리를 고집하고 진리를 따르는 이유는 오직 살아있는 성경말씀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구원케하는 능력이있고 그들의 영혼을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진실로 성경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면 이제부터 생명을 살려내는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무웅 목사(서울 강북구 우이동 우이제일교회)
10원리설교/ 리더십/ 리더로 행동하는 8가지 핵심 원리/ 느2:10-20/ 2005-08-07
10원리설교/ 리더십/ 리더로 행동하는 8가지 핵심 원리 느2:10-20 오늘의 시대는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어려운때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어느 시대보다도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들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리더십이 있어야 이 세상을 이끌어 갈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리더십은 리더(Leader)에 의해 영향이 나타납니다. 탁월한 리더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약하면 리더십도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리더십이 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목사를 포함하여 모든 성도들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반 목사와 리더 목사가 다른 것처럼 일반 성도와 리더 성도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리더 목사, 리더 장로, 리더 권사, 리더목자, 리더 집사, 리더 젊은이가, 세워지는 교회가 되어야 이 시대에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이제일교회는 일인 일사역 운동을 통하여 전교인 사역자화 운동을 하고있습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역은 어떤 특정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교인 모두가 리더가 되어서 맡겨준 자리에서 함께 일할 때 힘이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리더는 무엇인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보통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성경은 리더들의 기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리더로서 당당하게 주의 일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저는 8월달 한달을 리더를 통해서 교회가 튼튼히 세워지기를 원해서 리더에 대한 씨리즈 설교를 합니다. 특히 오늘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리더십을 발휘하여 남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일을 해낸 느헤미야를 소개하겠습니다. 그가 어떻게 리더의 역할을 수행했는지 그리고 그는 어떠한 리더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보면 느헤미야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갈 때, 전쟁에 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희망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성이 무너진지 90년이 지나는 동안 두 번 성을 재건하려 시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90년 동안 무너진 성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같은 절망의 때에 그리고 대적들이 예루살렘 주변에 상존하고있는 상황에서 모든 백성들을 재결집 시켰으며 움직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민첩하게 재건하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90년 동안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실패한 이 일을 느헤미야는 어떻게 성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에게는 위대한 리더십이있는 리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큰일을 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부여의 원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사람들을 이끌어 그 위대한 일들을 이루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되는 원리들은 여러분들의 삶 모든 곳에서 실제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유익한 원리들인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려 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도자로서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는 리더가 될수 있는가? 8가지의 핵심원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반대를 예견하십시요. 한 가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은,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시도하려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 “자 성벽을 세웁시다!” 말하면 사단은 “자 일어나 반대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들을 들어 변화를 반대합니다. 때문에 지도자들은 이러한 반대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2장 10절을 보십시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여기에서 느헤미야는 두 명의 반대파 지도자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느헤미야 전체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산발랏은 사마리아 지역의 통치자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비야는 아모리 사람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도 전에 반대하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 때를 기다리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변화를 독려하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때와 시기”입니다. 때와 시기가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본문11절에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지 삼일에”, 느헤미야는 3일 동안 일을 멈추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화려한 입성도 환영식도, 깃발도, 그리고 백마를 타고 입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왔습니다!”라고 선포하지도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벽돌을 만들고 성을 쌓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왜 예루살렘에 자신이 왔다는 사실 조차도 알리지 않았을까요? 그는 3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3일 동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느혜미아는 낙타 등에 몸을 실고 사막길을 가로질러 오는 긴 여행속에서 피곤을 풀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리더십의 원칙은 “피곤한 상태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곤함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그리고 느혜미아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획을 수립하면서 자신의 전략을 검토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혜미야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려 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보호아래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3일을 지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은 “그가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이지? 그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3일 동안 사람들 사이에 여러 가지 추축들이 난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일이 지난이 후 모든 사람들은 느헤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3일이 지나는 동안 심리적으로 사람들은 궁금증이 더해갔고 그 결과 느헤미야가 자신의 계획을 말할 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을 것입니다. 전도서 3:7에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전도서 8:6에 “ 무슨 일에든지 시기와 때가 있다” 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때” “시기” 라는 말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만약 여러분들이 어떤 중대한 변화를 시도한다면 반드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3. 사실을 직시하십시오. 본문 12-16절을 보시면 야밤에 예루살렘 성을 둘러보는 느헤미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12-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 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그리고 성경은 계속해서 무너진 성벽을 둘러보는 느헤미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들은 본문에 나타난 느헤미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해야만 하는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확인하고 점검하며 자신의 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로운 일이며 반드시 지도자가 스스로 감당해야만 하는 고난입니다. 14절에는 무너진 돌들이 너무 많아 길이 없어 말을 타고 통과하지 못해 내려서 걸어야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순간부터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문제가 참심각하구나!” “내가 왜 이 일을 자청했지?” “나는 언제 건물을 지어본 경험이 없었는데 어떻게하지?” 16절에 보면 느혜미야는 은밀하게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은밀하게 성을 둘러보았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져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무산되는 것을 피하려 했던 것입니다. 90년 동안 백성들에게는 부정적인 생각이 흘러왔으며 그는 아직 정확한 사실들에 대하여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좋은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쉬울까요? 아니면 좋은 생각을 사장시키는 것이 쉬울까요? 부정적인 사람들이 긍정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말이 많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느헤미야는 아직 모든 상황파악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계획도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리더십 원칙이 있습니다. 계획이 수립과정에서 무산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4. 동질성을 가지십시오. 훌륭한 리더는 동질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과 교제합니다. 느헤미야 자신을 “너희 가운데 한사람” 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17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느헤미야는 “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부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번도 예루살렘에 와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너희들은 다 실패한 사람들이다. 너희들은 결코 성벽을 재건할 수 없다. 90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았느냐”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리더가 사람들을 비난하면 사람들의 동기부여를 감소시킬 것이지만 리더가 사람들의 약한점을 수용하고 이해하여주면 리더는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더하게 하여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을 유능한 외부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성을 재건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구원자가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나는 여러분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문제가 바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동기부여에 있어서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리더십의 중요한 법칙은 좋은 생각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다라고 하는 동질성을 갖는 것입니다. 5.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를 직시하게 하십시오. 느헤미야는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둘러서 모호하게 말하기 보다는 문제를 핵심화 했으며, 극적으로 표현하고,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하고.” 여기에서 느헤미야는 감정에 호소하는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불타고....... 우리는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그는 이 중대한 문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느헤미야 앞에 서있는 사람들은 그 곳에서 수년 동안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무너진 예루살렘은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무감각해져 버리는 것이 사람입니다. 만약 여러분 집에 물건이 하나 고장 났다고 합시다. 처음 1주나 2주는 무척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감각해지기 마련입니다. 6개월이 지나도 고장 난 상태 그대로 있게 되면. 사람은 환경에 쉽게 적응해 버리고 시간이 지나면 무관심해지기 마련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느헤미야의 리더쉽의 방법은 문제를 극적으로 그리고 강조하여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을 직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학교나 직장, 가정, 또는 일에 변화를 시도하려 한다면 먼저 여러분들이 문제를 직시하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를 직시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들이 처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일에 만족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변화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 일을 진행했습니까? 그는 두 가지를 자극했습니다. 한가지는 자존심을 자극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함께 나가서 성벽을 다시 세웁시다. 지금우리는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이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살고 있겠습니까? 도시는 훼파되었습니다. 성벽은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느헤미야의 말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신선한 외침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자존심보다 더 깊고 더 고차원 적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느헤미야는 언급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단지 유대인들의 수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치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 조롱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불쌍한 유대인들이여! 만왕의 왕을 섬긴다며 자기들이 거하는 도시의 성벽하나 재건하지 못하는 불쌍한 유대인들이여! 돌무더기 사이에 거하는 유대인들이여!” 그래서 느헤미야는 말하기를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벽을 재건합시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합시다. 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을 위해서 성을 재건합시다.” 그는 가장 효과적인 요소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동기를 유발시켰습니다. 이무웅 목사
10의 9조/ 눅17:11-19/ 방성재 목사/ 2005-05-30
10의 9조 눅17:11-19 본문의 말씀은 예루살렘 도상에서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문둥병 자들의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명을 고쳐 주셨지만 돌아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단 한 명 이었음을 안타까워하시며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사실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은 지금 그 아홉의 위치를 확인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돌아와 감사하며 영광을 돌려야 할 그들이 돌아오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시고 있는 것 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함으로 축복을 받는 “십일조 헌금”과 나머지 “10의 9조”의 용도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십의 일조에 관하여 1. 십의 일조의 종류1) 일반적 십일조 (레 27:30, 민수기 18:21):일반적인 십의 일조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명해진 것으로 매년 소산의 10%를 당시 자기의 개인적 기업이 없었던 레위인들(오늘 날의 주의 종) 위해 드려졌다. 2) 하나님 안에서의 교제를 위한 십일조(신 14:22-27):이 매년 드리는 소산의 10%는 하나님이 정하신 곳(오늘 날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축제를 열어 교제를 나누는 곳에 사용 되었다. 3) 구제를 위한 십일조(신 14:28-29):이 특별한 10%는 매 3년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드려졌으며 이 십의 일조에는 만사형통의 축복이 약속 되어있습니다.(오늘 날의 선교 헌금) 구약에 나타난 세 종류의 십의 일조를 합하면 사실상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매년 소산의 20.3%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바칠 것을 요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십의 일조’는 우리가 드릴 최소한의 정성인 것 입니다. 2.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십일조를 받으시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말 3:10) 3.십일조는 신약시대의 교인들에게도 해당되는가 예수님은 외식하는 당시의 종교인들에게 십의 일조는 물론 해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3:23)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십의 일조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감사의 표시이며 돌아와 영광을 돌린 열 명중 한 명의 문둥병 자와 같은 것 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의 모든 의무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돌아오지 않은 10의 9조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둘째, 십의 구조에 관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을 명상하며 저는 혹시 돌아오지 않은 우리의 90%는 마치 우리의 것인 양 하나님이 원치 않는 곳에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90%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정말 중요 합니다. 사랑하는 벧엘 가족 여러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의 10의 9조도 너의 10의 1조처럼 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고 있느냐?”
10이 90보다 크다/ 출18:13-27/ 2008-01-17
10이 90 보다 크다 출18:13-27 10이 90보다 큽니다. 파레이드가 만든 법칙이 있습니다. 파레이드가 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하던 중에 분명히 본 것이 있습니다. 10%의 개미가 90%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10%가 90%의 일을 한다는 법칙을 <파레이드 법칙>이라고 합니다. 10%의 개미가 나머지 90% 개미보다 귀하였습니다. 10이 90보다 컸습니다. 백화점도 그렇습니다. 10% 단골 고객이 90% 매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중에 10% 부자들이 한국 돈의 90%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화 요금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에게 90% 전화 요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9시 뉴스도 그렇습니다. 초기 10% 시간에 보도하는 뉴스를 90% 사람들이 화제로 삼게 됩니다. 신문도 10% 앞 면에 90% 중요한 뉴스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유를 짜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람 열매를 모아놓고 누르기 시작합니다. 10% 정도만 받아 성전에서 사용합니다. d; 10% 감람유가 끄림이 생기지 않는 최상의 감람유입니다. 가장 비싸고 좋은 감람유입니다. 10% 감람유가 나머지 90% 감람유보다 비쌉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막은 378평입니다. 그런데 지성소 6평, 성소 12평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덮개 약 40평에 금값 600억을 다 사용합니다. 10%에 투자하는 비용이 90%가 넘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이 90% 일을 합니다. 10% 사람이 90% 물질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수 백명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고 모세 혼자 밥도 못 먹고 상담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이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출18;17-23)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말을 듣고 조직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모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일이 능률적이 되었고 수월하였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1. 십부장 60,000명 2. 오십부장 12,000명 3. 백부장 6,000명 4. 천부장 600명 이는 모두 78,600명입니다. 인구조사를 하며 보니 603,550명이었습니다. 이는 약 10%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12.9%입니다. 이드로도 모세에게 10% 일군을 뽑아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0%가 90%의 일을 하며 광야 40년을 지냈습니다. 10애 90보다 큽니다. 1. 시간 하루 24시간이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새벽 시간 10%가 나머지 시간 90%보다 큰 시간입니다. 일찍 일어나 두 시간 가량을 영적인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정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습관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39-44) 예수님은 감람산에 나가셔서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붙어 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새벽 시간을 값지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큰 일을 하였습니다. 소위 새벽형 인간이 큰 사람이 됩니다. 나는 지난 주간 <백만불 짜리 습관>이라는 책을 대하였습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트레이시 인터내셔널>사 회장입니다. 세계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이자 전략 전문가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좋은 직장을 갖지 못 하고 오늘은 이 회사, 내일은 저 회사로 옮겨 다니며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참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졌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할까?> <왜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안 될가?> 어느 날 그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기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100만불짜리 습관이었습니다. 이 습관이 괴물이 되어 자기를 길러 주었습니다. 마침내 세계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벽 첫 시간은 하루 24시간중에 가장 귀중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새벽 두 시간은 나머지 22시간보다 큽니다. 2. 물질 10%의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 물질이 나머지 90% 물질보다 큽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0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나머지 90% 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3. 일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 때에 10%의 일군들은 나머지 90%의 사람들보다 중요하고 컸습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이 어느 곳에서 일하든지 10% 안에 드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개미가 떼를 이루어 살아도 10% 개미가 90%의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 문도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 명 제자들도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가룟유다를 뺀 12명입니다. 120명중에 12명 10%가 온 세계를 복음화시켰습니다. 나머지 108명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도 그리고 성경 밖에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모두 한 가지씩 일을 맡아 하는 중요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하면 10%안에 드는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다음과 같은 일군들이 교회에 있어야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됩니다. (1) 계시 일군 교회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되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민주화되면 안 되고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민주화의 특징은 다수결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독제주의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성막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99%의 사람들이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결단은 모세가 하여야 했습니다. 모세는 민주화 목회를 하지 않고 복음화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무엇을 원하는 지 하나님으로 받는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대개 목회자와 계시 일군은 일치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찬양대내에서 찬양대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갈 찬양의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 중에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계시받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 일군 한 명은 다른 90%보다 중요합니다. 200만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광야에 나왔습니다. 200만명중에 오직 한 명 모세에게만 계시를 주셨습니다. 기도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군은 큰 일군입니다. 교회가 잘못 하게 되면 잘 지적하여 교회가 잘 나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일군이 계시일군입니다. 중요한 일군입니다. 성경의 뒷 이야기를 보면 12지파 족장 일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와서 모세는 <그만 가지고 오라>라고 광고할 정도였습니다. 이 광고를 듣고 12 족장들은 모세에게 와서 거칠게 항의하였습니다. 자기들은 헌금을 독려하러 다니느라고 헌금을 드릴 시간이 없어서 드리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지 못 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미 물질이 너무 많아 그만 하면 된다고 헌금을 거절하였습니다. 12 족장들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계시를 주옵소서. 우리도 헌금할 수 있는 기회를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제사장복에 들어가는 12 보석이 아직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족장이 한 개씩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하여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가를 늘 기도하고 계시받는 일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개씩 드리고 나니 너무나 허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너무나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드릴 것이 없나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막을 나르려면 수레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수레와 그것을 끌 수 있는 소를 헌금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모세도 생각지 못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핫자손들에게는 분명히 어깨에 메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게르손과 므라리에게는 메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다 .혹시 저들이 바치겠다고 하는 것들이 게르손과 므라리에게 사용하라고 되어지는 헌금인가?>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12 족장들로부터 수레와 소를 받아라. 고핫자손들만 어깨에 메고 나르고 게르손과 므라리는 수레에 실어서 나르도록 하여라. 그리고 12 족장들이 생각하여 낸 아이디어를 칭찬하여라. 멋진 아이디어 헌금이라고 말해 주어라. 그들에게 수레를 헌금하여 성막을 나르는 것은 전 세계를 나르는 것이라고 칭찬하여라. 전 세계를 얹어서 나르는 것을 헌금하였으니 내가 기뻐하시고 있다고 말해 주어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이디어,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런 계시 일군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10% 일군들은 기도일군들이었습니다. (2) 물질 일군 교회에서 하나님을 직접할 수 없기에 직장생활하면서, 또 개인 사업을 잘 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잘 드리는 물질 일군도 중요한 일군입니다. 교회를 잘 운영되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돈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은 죄는 아니지만 명예도 아닙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선교사업에 헌금하는 물질 일군도 교회에서는 중요한 일군입니다. 나는 지난 주간 부산 감림산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신기한 분을 만났습니다. 노 교인 목사, 노 기현 집사 형제를 만났습니다. 형 노 교인 목사님이 온 세계를 복음화시키려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뉴질란드 왕가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형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형이 선교하다가 순교하는 장면을 환상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형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고 편하게 하여 주려고 최대한으로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행기도 일등표만 구하여 주었습니다. 호텔도 가장 좋은 호텔에 가장 좋은 방만을 예약하여 드렸습니다. 선교비도 풍족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였습니다. <내 신장을 팔아 선교비를 대리라. 그리고 그 다음은 간을 팔리라. 그 다음은 눈을 팔리라....팔 수 있는 장기를 다 팔리라. 그리고 나는 형님의 선교를 위하여 조용히 무덤으로 들어 가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전에 형님 얼굴을 마지막 한 번 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뉴질란드로 들어 갔습니다. 거기에서 인도네시아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유전을 가지고 있는 데 개발을 못 하고 있는 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만 소원을 주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3;13) 하나님은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그러라고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하였습니다.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돈 벌어 하나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개발을 하지 못 하고 있던 중에 자기가 20%를 갖기로 하고 유전을 주었습니다. 엄청난 일을 하고 있습니다. 63 빌딩 58층이 그의 것입니다. 여수 개발을 6조원 들여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노 기현집사님과 밤 4시까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양복을 보여 주는 데 3천만원짜리였습니다.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크리스챤 재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할려고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물질 일군도 일군입니다. 10%의 일군들은 물질 일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물질을 투자하는 이들이었습니다. (3) 몸 일군 기도로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 가게 하는 일군들은 몸으로로 일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어야 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장로, 속장, 선교회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이 몸 일군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몸 일군입니다. 안내, 주차 관리부에서 일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게 하려고 청소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10%의 일군들은 이같이 기도 일군, 물질 일군, 몸으로 봉사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 10%는 나머지 90%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10% 안에 들 수 있을 가요? 어떻게 10%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1. 일군의 눈에 띄이면 일군이 됩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할 만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12 명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가룟 유다만 빼놓고 모두 순교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알하는 사람은 일군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찾아냈습니다. 광야 최고의 일군 모세의 눈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유난히 눈에 띄였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비젼이 있는 일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일군이 되려면 일군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2. 일군이 되겠다고 결정하면 일군이 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마음은 행동의 키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2-23) 3. 일하면 일군이 됩니다. 말만 하십시오. 말꾼이 됩니다. 말썽을 부리십시오. 말썽꾼이 됩니다. 놀기만 하십시오. 놀이꾼이 됩니다. 기도만 하십시오. 기도꾼이 됩니다. 노래만 하십시오. 가수가 됩니다. 일하십시오. 일꾼이 됩니다. 일군이 되고 싶으면 간단합니다. 일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여야 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일군들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일군이 되어야 우리 교회가 민족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선 우리 교회가 실력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300석이 세 번 정도는 차야 합니다. 9월 셋째주 <한 사람이 한 사람> 모시고 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운동에 다 동참하셔서 우리 교회가 한 차원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10 안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손기정 마라톤 우승자 한 분을 이야기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815 광복절을 맞았습니다. 손기정 이야기가 주된 화제로 인터넷을 장식하였습니다. 1936년 당시는 사람은 2시간 30분 안에 마라톤 코스를 달릴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벽을 깬 사람이 손 기정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 벽을 깨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손 기정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일본 선수로 출전하였습니다. 두 달 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현지 적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일본 일장기가 달린 선수복을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회까지 유니폼을 더럽히기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일장기를 보이기 싫어서였습니다. 마라톤에 일등한 후 금메달리스트들이 모여 독일 국빈들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싸인 할 때에도 <손 기정 Korea>라고 썼습니다. 수많은 신문 기자들이 어떻게 훈련하여 일등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손기정이 대답하였습니다. <독립군들이 바지에 모래 주머니를 만들어 달고 훈련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달리는 연습을 하였지요.>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할려고 하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1946년 베를린 우승 10주년 기념식에서 백범 김 구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ㅈ니다. <나는 자네 때문에 세 번 울었네. 첫째 나라 없는 청년이 우승하였다는 서러움에 울었지. 둘째 일본 사람들이 자네가 필리핀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죽었다는 소문을 내서 울었지. 셋째 독립이 안 되었으면 자네 우승이 영원히 묻힐 뻔 하여 독립하며 감격하여 울었지.> 그렇습니다. 할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10이 90보다 크다/ 출18:13-27/ 강문호 목사/ 2016-07-10
10이 90보다 크다 출18:13-27 10이 90보다 큽니다. 파레이드가 만든 법칙이 있습니다. 파레이드가 개미들을 자세히 관찰하던 중에 분명히 본 것이 있습니다. 10%의 개미가 90%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10%가 90%의 일을 한다는 법칙을 <파레이드 법칙>이라고 합니다. 10%의 개미가 나머지 90% 개미보다 귀하였습니다. 10이 90보다 컸습니다. 백화점도 그렇습니다. 10% 단골 고객이 90% 매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중에 10% 부자들이 한국 돈의 90%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화 요금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에게 90% 전화 요금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9시 뉴스도 그렇습니다. 초기 10% 시간에 보도하는 뉴스를 90% 사람들이 화제로 삼게 됩니다. 신문도 10% 앞 면에 90% 중요한 뉴스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유를 짜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람 열매를 모아놓고 누르기 시작합니다. 10% 정도만 받아 성전에서 사용합니다. d; 10% 감람유가 끄림이 생기지 않는 최상의 감람유입니다. 가장 비싸고 좋은 감람유입니다. 10% 감람유가 나머지 90% 감람유보다 비쌉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막은 378평입니다. 그런데 지성소 6평, 성소 12평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덮개 약 40평에 금값 600억을 다 사용합니다. 10%에 투자하는 비용이 90%가 넘습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10%의 사람이 90% 일을 합니다. 10% 사람이 90% 물질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어느 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수 백명이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고 모세 혼자 밥도 못 먹고 상담하고 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이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 일을 감당하고 이 모든 백성도 자기 곳으로 평안히 가리라>(출18;17-23)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말을 듣고 조직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모세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일이 능률적이 되었고 수월하였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직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습니다. 1. 십부장 60,000명 2. 오십부장 12,000명 3. 백부장 6,000명 4. 천부장 600명 이는 모두 78,600명입니다. 인구조사를 하며 보니 603,550명이었습니다. 이는 약 10%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12.9%입니다. 이드로도 모세에게 10% 일군을 뽑아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0%가 90%의 일을 하며 광야 40년을 지냈습니다. 10애 90보다 큽니다. 1. 시간 하루 24시간이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새벽 시간 10%가 나머지 시간 90%보다 큰 시간입니다. 일찍 일어나 두 시간 가량을 영적인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인생을 정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습관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그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39-44) 예수님은 감람산에 나가셔서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붙어 있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새벽 시간을 값지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큰 일을 하였습니다. 소위 새벽형 인간이 큰 사람이 됩니다. 나는 지난 주간 <백만불 짜리 습관>이라는 책을 대하였습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트레이시 인터내셔널>사 회장입니다. 세계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이자 전략 전문가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좋은 직장을 갖지 못 하고 오늘은 이 회사, 내일은 저 회사로 옮겨 다니며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참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졌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할까?> <왜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안 될가?> 어느 날 그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기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면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즉각 행동을 옮기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100만불짜리 습관이었습니다. 이 습관이 괴물이 되어 자기를 길러 주었습니다. 마침내 세계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벽 첫 시간은 하루 24시간중에 가장 귀중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새벽 두 시간은 나머지 22시간보다 큽니다. 2. 물질 10%의 하나님을 향한 십일조 물질이 나머지 90% 물질보다 큽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0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나머지 90% 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고 드려야 합니다. 3. 일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 때에 10%의 일군들은 나머지 90%의 사람들보다 중요하고 컸습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이 어느 곳에서 일하든지 10% 안에 드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개미가 떼를 이루어 살아도 10% 개미가 90%의 일을 해내지 않습니끼?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 문도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12 명 제자들도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가룟유다를 뺀 12명입니다. 120명중에 12명 10%가 온 세계를 복음화시켰습니다. 나머지 108명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도 그리고 성경 밖에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안에서도 모두 한 가지씩 일을 맡아 하는 중요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하면 10%안에 드는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다음과 같은 일군들이 교회에 있어야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됩니다. (1) 계시 일군 교회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되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민주화되면 안 되고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민주화의 특징은 다수결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독제주의 단체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성막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99%의 사람들이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결단은 모세가 하여야 했습니다. 모세는 민주화 목회를 하지 않고 복음화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무엇을 원하는 지 하나님으로 받는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대개 목회자와 계시 일군은 일치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찬양대내에서 찬양대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갈 찬양의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들 중에 계시 일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계시받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계시 일군 한 명은 다른 90%보다 중요합니다. 200만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광야에 나왔습니다. 200만명중에 오직 한 명 모세에게만 계시를 주셨습니다. 기도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군은 큰 일군입니다. 교회가 잘못 하게 되면 잘 지적하여 교회가 잘 나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일군이 계시일군입니다. 중요한 일군입니다. 성경의 뒷 이야기를 보면 12지파 족장 일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와서 모세는 <그만 가지고 오라>라고 광고할 정도였습니다. 이 광고를 듣고 12 족장들은 모세에게 와서 거칠게 항의하였습니다. 자기들은 헌금을 독려하러 다니느라고 헌금을 드릴 시간이 없어서 드리지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지 못 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미 물질이 너무 많아 그만 하면 된다고 헌금을 거절하였습니다. 12 족장들은 같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계시를 주옵소서. 우리도 헌금할 수 있는 기회를 주옵소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제사장복에 들어가는 12 보석이 아직 없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족장이 한 개씩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일을 하여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가를 늘 기도하고 계시받는 일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개씩 드리고 나니 너무나 허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너무나 초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드릴 것이 없나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막을 나르려면 수레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수레와 그것을 끌 수 있는 소를 헌금하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모세도 생각지 못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핫자손들에게는 분명히 어깨에 메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게르손과 므라리에게는 메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다 .혹시 저들이 바치겠다고 하는 것들이 게르손과 므라리에게 사용하라고 되어지는 헌금인가?> 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12 족장들로부터 수레와 소를 받아라. 고핫자손들만 어깨에 메고 나르고 게르손과 므라리는 수레에 실어서 나르도록 하여라. 그리고 12 족장들이 생각하여 낸 아이디어를 칭찬하여라. 멋진 아이디어 헌금이라고 말해 주어라. 그들에게 수레를 헌금하여 성막을 나르는 것은 전 세계를 나르는 것이라고 칭찬하여라. 전 세계를 얹어서 나르는 것을 헌금하였으니 내가 기뻐하시고 있다고 말해 주어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이디어,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이들을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런 계시 일군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10% 일군들은 기도일군들이었습니다. (2) 물질 일군 교회에서 하나님을 직접할 수 없기에 직장생활하면서, 또 개인 사업을 잘 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잘 드리는 물질 일군도 중요한 일군입니다. 교회를 잘 운영되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돈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입니다. 가난한 것은 죄는 아니지만 명예도 아닙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선교사업에 헌금하는 물질 일군도 교회에서는 중요한 일군입니다. 나는 지난 주간 부산 감림산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신기한 분을 만났습니다. 노 교인 목사, 노 기현 집사 형제를 만났습니다. 형 노 교인 목사님이 온 세계를 복음화시키려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뉴질란드 왕가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형을 위하여 기도하는 데 형이 선교하다가 순교하는 장면을 환상중에 보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형이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고 편하게 하여 주려고 최대한으로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행기도 일등표만 구하여 주었습니다. 호텔도 가장 좋은 호텔에 가장 좋은 방만을 예약하여 드렸습니다. 선교비도 풍족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였습니다. <내 신장을 팔아 선교비를 대리라. 그리고 그 다음은 간을 팔리라. 그 다음은 눈을 팔리라....팔 수 있는 장기를 다 팔리라. 그리고 나는 형님의 선교를 위하여 조용히 무덤으로 들어 가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하기 전에 형님 얼굴을 마지막 한 번 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뉴질란드로 들어 갔습니다. 거기에서 인도네시아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유전을 가지고 있는 데 개발을 못 하고 있는 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꾸만 소원을 주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3;13) 하나님은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그러라고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하였습니다. 그 유전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돈 벌어 하나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개발을 하지 못 하고 있던 중에 자기가 20%를 갖기로 하고 유전을 주었습니다. 엄청난 일을 하고 있습니다. 63 빌딩 58층이 그의 것입니다. 여수 개발을 6조원 들여서 개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노 기현집사님과 밤 4시까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양복을 보여 주는 데 3천만원짜리였습니다. 놀랐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크리스챤 재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할려고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물질 일군도 일군입니다. 10%의 일군들은 물질 일군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물질을 투자하는 이들이었습니다. (3) 몸 일군 기도로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 가게 하는 일군들은 몸으로로 일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어야 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장로, 속장, 선교회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이 몸 일군입니다. 전도하는 것도 몸 일군입니다. 안내, 주차 관리부에서 일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게 하려고 청소하는 이들도 몸 일군들입니다. 10%의 일군들은 이같이 기도 일군, 물질 일군, 몸으로 봉사하는 일군들이었습니다. 그 10%는 나머지 90%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10% 안에 들 수 있을 가요? 어떻게 10% 일군들이 될 수 있을 가요? 1. 일군의 눈에 띄이면 일군이 됩니다. 일하는 사람은 일할 만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12 명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가룟 유다만 빼놓고 모두 순교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알하는 사람은 일군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찾아냈습니다. 광야 최고의 일군 모세의 눈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유난히 눈에 띄였습니다. 항상 긍정적이고 비젼이 있는 일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일군이 되려면 일군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2. 일군이 되겠다고 결정하면 일군이 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마음은 행동의 키입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2-23) 3. 일하면 일군이 됩니다. 말만 하십시오. 말꾼이 됩니다. 말썽을 부리십시오. 말썽꾼이 됩니다. 놀기만 하십시오. 놀이꾼이 됩니다. 기도만 하십시오. 기도꾼이 됩니다. 노래만 하십시오. 가수가 됩니다. 일하십시오. 일꾼이 됩니다. 일군이 되고 싶으면 간단합니다. 일 하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민족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여야 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일군들이 많이 생겨야 합니다. 나는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일군이 되어야 우리 교회가 민족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선 우리 교회가 실력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300석이 세 번 정도는 차야 합니다. 9월 셋째주 <한 사람이 한 사람> 모시고 와서 같이 예배드리고 운동에 다 동참하셔서 우리 교회가 한 차원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10이 90보다 큽니다. 10 안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손기정 마라톤 우승자 한 분을 이야기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815 광복절을 맞았습니다. 손기정 이야기가 주된 화제로 인터넷을 장식하였습니다. 1936년 당시는 사람은 2시간 30분 안에 마라톤 코스를 달릴 수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 벽을 깬 사람이 손 기정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 벽을 깨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손 기정은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일본 선수로 출전하였습니다. 두 달 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여 현지 적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일본 일장기가 달린 선수복을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회까지 유니폼을 더럽히기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일장기를 보이기 싫어서였습니다. 마라톤에 일등한 후 금메달리스트들이 모여 독일 국빈들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싸인 할 때에도 <손 기정 Korea>라고 썼습니다. 수많은 신문 기자들이 어떻게 훈련하여 일등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손기정이 대답하였습니다. <독립군들이 바지에 모래 주머니를 만들어 달고 훈련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달리는 연습을 하였지요.>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할려고 하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1946년 베를린 우승 10주년 기념식에서 백범 김 구 선생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ㅈ니다. <나는 자네 때문에 세 번 울었네. 첫째 나라 없는 청년이 우승하였다는 서러움에 울었지. 둘째 일본 사람들이 자네가 필리핀 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죽었다는 소문을 내서 울었지. 셋째 독립이 안 되었으면 자네 우승이 영원히 묻힐 뻔 하여 독립하며 감격하여 울었지.> 그렇습니다. 할려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강문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