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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9일 수14:9-12 행복을 베푸는 사람 2017-11-21 23:54:36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문에 난 기사 가운데 한 글을 생각합니다. "그는 참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 해 주라는 권유를
2001년 9월9일 수14:9-12 행복을 베푸는 사람 2017-11-21 23:54:36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문에 난 기사 가운데 한 글을 생각합니다. "그는 참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도 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교회를 대물림 해 주라는 권유를 를 뿌리치고 바보같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먼 외국으로 쫓아 버렸습니다. 새까만 후배들이 통일운동에 앞장선다면서 가로막힌 북녘땅을 제집 드나들 듯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릴 때도 그는 참 바보처럼 "저 많은 실향민들이 고향엘 가지 못하는데 어찌 나 혼자만 가겠는가"라면서 그리운 고향 땅을 한번도 밟아 보지 못했습니다. 사자후 같은 명 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몰랐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입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을 가졌던 이 바보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한 경직 목사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마음으로 사십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사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양보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줄로 믿습니다. 교인중에는 유치한 신앙심을 갖고 있는데 유치한 신앙인은 4가지 특징이 있답니다. 내가 해당이 돼나 안돼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①첫번째 예수 믿으면 결코 고난과 고통이 없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고통과 어려움은 저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도 내게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징계의 매를 드신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유치한 신앙인은 ②고난을 불행으로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은 불행과 고난이라도 불평하지 아니하고 인내할 줄 아는 신앙인입니다. 세 번째 유치한 신앙인은 ③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기도는 다 들어주신다고 믿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초조해 하고 속상해 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내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 원 대로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욕심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은 내 소원을 간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처럼 주님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쩨 유치한 신앙인은 ④언제나 모든 분야에서 우두머리가 되고 승리만 해야 한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무조건 이겨야 되고 평지만을 고집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는 오늘 갈렙처럼 평지보다 산지를 달라고 하는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내 뜻 보다는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신앙이며 평지보다 산지를 달라고 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갈렙은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로서 출애굽 2년에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뽑힌 12명중에 유다 지파의 대표로 뽑힌 사람입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면서 그 땅이 어떠한지, 거민은 어떠한지,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오는 중에 그가 40일 만에 돌아오면서 가나안 땅의 포도 한 송이를 꺾어 왔는데 그 송이가 얼마나 큰지 두 사람이 막대기에 메고 왔을 정도로 탐스러운 광일 이었습니다. 12명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 와서 보고하는데 10명은 가나안 정복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땅의 백성들은 모두 거인과 같고 우리는 그 앞에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보고를 할 때에 온 회중이 통곡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너무 좋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자,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라고 설득하였으나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을 돌로 치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불신앙의 부정적인 나약한 믿음을 가졌던 20세 이상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정복하고 이제 12지파가 땅을 제비뽑기로 나누는 아주 심각한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누가 공적이 큰가에 따라서 땅을 나누겠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비뽑기를 해서 공평하게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전날 모두 한숨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앴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농사짓기 좋은 땅을 배분 받을 것인가, 이왕이면 강이 있고 살기 좋은 땅을 차지할까 하는 심정으로 나와서 제비뽑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묵이 흐르고 긴장된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보시오" 라고 손을 들고 크게 외쳐대는 노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갈렙이었습니다. "나는 저기 높은 산지를 내게 주시요!" 모든 사람들이 원치 않는 헤브론 산지에 땅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헤브론 땅은 헤브론은 산지였습니다. 헤브론에는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고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로 가나안 땅을 정탐 할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낙 자손들은 네피림의 후손들로 용맹스러운 부족이었으며 그들의 성읍은 크고 견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정탐꾼들이 벌벌 떤 이유도 이 아낙자손들과 그들의 견고한 성읍을 보고 기가 질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 험악한 땅 헤브론을 달라는 것이었다. 갈렙은 여호수아 다음으로 2인자였다. 갈렙이 가나안 땅 중에서 가장 좋은 땅을 달라고 했어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남들이 갖기 가장 싫어하는 땅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헤브론을 받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아낙자손들을 쫓아내고 내 땅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인데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싫어하니 내가 힘든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 이만한 아량과 포부와 믿음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공(功)이 있으면, 그의 합당한 대우를 해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사람이 나이 들면 힘들어 편히 쉬고 싶을 텐데 갈렙은 그의 나이가 85세 인데도 고생스런 일을 자청한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그들을 쫒아내리이다." 이것이 갈렙의 신앙적 삶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험악한 아낙자손과도 싸워서 이길 수가 있으니 이 산지를 내게 달라는 것입니다. !" 수14:9에 보면 모세가 갈렙에게 약소한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는 갈렙에게 "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민13:32) 갈렙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수고를 하였기 때문에 그가 밞은 가나안 땅을 마음대로 차지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갈렙은 이미 옥토를 약속을 받았음으로 고생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갈렙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자기에게 돌아올 옥토를 차지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지의 옥토는 다른 11지파에게 주고 점령하기 어려운 산지를 갖겠다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즘 세상은 자신은 평안한 것을 택하고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것을 맏기는 것이 요즘 세상인데 갈렙은 이와는 정반대로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갈렙을 통해서 기쁨을 남에게 베풀고 자기는 희생하는 고매한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기 조카 롯에게 그렇게 했습니다.(창13:1-18) 이삭도 우물을 빼앗는 그랄 사람들에게 자기를 희생하고 다 양보합니다.(창26:17-22) 나 하기 싫은 일을 남편이나 며느리 시키지 말고 내가 해야 합니다. 나 하기 어려운 일을 다른 사람을 시키지 말고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가정은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부흥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산지를 찾을 때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렙의 신앙이 여러분의 신앙에 모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맨날 평지만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한번 산지를 달라고 해 보십시오. 남들이 하기 싫은 일 화장실 청소,주방 봉사를 자청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불평하고, 무엇 때문에 섭섭해 합니까? 내가 남보다 힘든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너무 쉬운 것만 찾지 마십시오. 나 하기 어려운 일을 다른 사람을 시키지 말고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나 하기 싫은 일을 남편이나 며느리 시키지 말고 내가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가정은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사회는 밝아질 것입니다. 오늘 갈렙은 그 산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갈렙은 어떤 믿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신앙으로 산지를 달라고 했습니까? 1.갈렙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과 꿈이 마음속에 언제든지 가득 채워 있었습니다. 7절에 보면 "성실한 마음으로..." 9절에는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라고 갈렙의 신앙을 기록하였습니다. 갈렙은 성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신앙인 입니다. 갈렙은 평소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 만을 쫒는 신앙인 었다는 것입니다. 40세 때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을 때의 마음이나 45년이 지난 지금! 85세 때의 마음이나 여호와를 쫒는 변함없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일들로 때로 낙심하고 좌절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45년 동안의 갈렙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향하여 충성된 마음으로 변치 않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 전쟁의 승리자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남과 북은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남북 모두 누구나 다 "하나님 우리편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편이 되게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링컨은 그 자신이 하나님편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을 쫒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기도처럼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여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편한 것을 구하기 보다 힘든 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갈렙은 남에게 기쁨을 베푸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고 주인공이 되고 싶은 시대인데 갈렙은 그 모든 영광과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갈렙이 "나는 1등 공로자니까 내가 제일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하겠소" 라고 말한다면 여호수아의 입장이나 백성들의 신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주연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조연이 없으면 주연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되려면 수많은 조연이 필요한 것처럼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에서도 조연이 필요합니다. 갈렙의 위대한 점은 그가 무대 뒷편에서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모세가 있게 된 것은 그 배후에 아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협력이 없었다고 하면 모세는 그 큰 일을 감당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갈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특별한 직책을 맡은 일이 없이 평범한 족장이었습니다. 그래도 갈렙은 불평없이 여호수아를 잘 받들어 주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간 숨은 지도자였습니다. 여호수아가 훌륭한 지도자가 된 것은 바로 갈렙과 같이 묵묵히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극이 상연되려면 주연도 중요하고 조연도 있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람들은 무대 뒤에서 조명도 해주고 분장도 해주고, 효과, 음향 등 보이지 않는 손길들이 있음으로 한편의 연극이 상연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받아야 할 영광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때 쉽게 질투하거나 섭섭해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레오날드 번스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무엇입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히기를 "제 2 바이올린입니다. 제 1 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제 2 바이올린을 연주하려는 사람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무도 제 2 연주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면 아름다운 음악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우리는 모두 칭찬 받고 박수 받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갈렙과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사람이 되십시오. 묵묵히 무대 뒷편에서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 가십시오 기쁨을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농장 주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진 후 농장의 가축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 잔칫상에 올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모여서 회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황소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이 농사일을 돕는데 기여합니다. 논을 갈고 밭을 갈뿐 아니라 짐을 실어 나릅니다. 그러니 나는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랬더니 개가 가 말하기를 "나도 도둑이 들어오면 짖고 막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고양이도 말했습니다. "나는 곡식을 훔쳐먹는 쥐를 잡아 먹습니다. 닭도 한마디 했습니다. "나는 새벽을 알리고 날마다 알을 낳습니다." 그러나 돼지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죄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돼지가 죽음으로서 그 주인집 딸의 결혼식 피로연은 훌륭하게 치룰수가 있었지만 누구하나 돼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청소원은 지저분한 직업이지만 청소하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세상이 더럽겟습니까? 여러분 세상에는 이와같이 이름도 빛도 없이 수고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정말 우리가 가야할 산지가 어디입니까? 겸손과 양보의 산지입니다 일제와 공산 치하에서 민족 해방을 위하여 싸운 조만식 장로님은 일제하에서 때때로 여러 번 투옥된 일이 있었습니다. 옥중 생활 중에서 좁은 감방 안에 14인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밤에는 14명이 함께 누워 잘 수가 없어서 7명씩 교대로 누워서 자는데 7명이 먼저 자고 나머지 7명이 뒤에 잡니다. 그런데 조장로님은 일년여 동안 단 하루 밤도 누워서 자는 일이 없었답니다. 그가 누워서 잘 시간에 몸이 허약한 사람이 보여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고 자기는 앉아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희생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3.갈렙은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12절 "그곳에는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쫓아 내리이다." "여호와께서 함게 하시면?"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그들을 쫒아내고 승리자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승리하는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실수를 하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간음죄를 짓고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눈물로 간구하며, 회개하고 주님만 찾으니까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땅으로 내려가고, 이스마엘을 낳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주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하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지만 주님은 그 마음을 아시고 찾아가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시고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베드로를 다시 감싸 안으시고 높여주신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자존심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3가지 있다고 합니다. 1) 첫째는 "좀더 참았으면 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참지 못해서 나 자신이나 남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2) 둘째는 "좀더 베풀며 살 걸..."이라고 아쉬워 한 답니다. 자식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 왜 좀더 효도하지 못했나 후회한다고 합니다. 재산을 잃어 버리고 나면 내가 있을 때에 좀더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지 못했나 후회한다고 합니다. 베푸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셋째로 "좀더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살걸..."하는 것입니다. 돈버는 것, 살림하는 것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큰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를 감사와 기쁨으로 오손도손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후회하는 이유는 끝까지 열심히 충성스럽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방송인으로 크게 성공한 에디 켄터라는 사람은 수첩에 이런 글귀를 새겨놓고 일할 때 마다 자신을 되돌아 보곤 했다고 합니다. 1)"내가 지금 하는일이 내 재산과 내 야심을 이루기 위한 일인가 아니면 더 가치있는 값진 보람있는 일인가, 2)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남을 섬기기 위한 것인가' 내가 아무리 성공해도 내 야심을 이루는 것으로 그치면 인생의 패배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신앙의 목표는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그것이 갈렙의 신앙입니다. 갈렙은 성공한 자이지만 그는 성공보다 믿음에 승리자로 당당히 여러 사람들 앞에 나타 났습니다. 갈렙은 꿈과 비전의 갖고 믿음의 승리자요 용기있는 승리자입니다. 우리 인생이 후회없는 인생이 되려면 끝까지 맡은 일에 믿음으로 열심으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왕국" 에서 보니까 한 마리의 사자가 사슴을 쫓고 있습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았을까요? 못 잡았습니다. 이유는 사자는 한끼의 식사를 위하여 달렸고 사슴은 생사를 걸고 달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환경이 안 좋아도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온 열성을 다하고 전심전력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본문 13절에는 남에게 기쁨을 베푸는 갈렙에게 주어진 결과가 무엇인지 결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읽는다). 여호수아는 그가 받은 축복권으로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갈렙을 축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갈렙의 용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크게 뜹시기 바람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를 읽는 성도가 되시기 바람니다. 갈렙처럼 성실하게 사시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시기 바람니다. 불굴의 신앙 용기를 가지고 고난을 극복합시다. 인간은 늙고 변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갈렙을 더 많이 축복하시기 위하여 믿음의 산지를 주시고 크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렙에게 꿈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었기에 갈렙은 산지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갈렙을 더 축복하시기 위하여 갈렙에게 산지를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도 꿈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여러 모양의 산지를 주셨습니다. 감사하시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람니다. "하나님이 주신 산지를 통하여 더 큰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조심/약4:11-12 2001-12-06 15:23:16 read : 1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곤충학자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암거미는 자주 과부가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암거미가 만나는 것들은 다 먹어 치워버리기 때문이랍니다. 만약 파리가 거미줄에 걸려들면 온전한 형체를 보존하는 것 같지만은 결국은 내장이 다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는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거미는 위가 없으므로 자기 몸 안에서 소화시킬 수가 없습
말조심/약4:11-12 2001-12-06 15:23:16 read : 1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곤충학자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암거미는 자주 과부가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암거미가 만나는 것들은 다 먹어 치워버리기 때문이랍니다. 만약 파리가 거미줄에 걸려들면 온전한 형체를 보존하는 것 같지만은 결국은 내장이 다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는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거미는 위가 없으므로 자기 몸 안에서 소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조그만 침을 통하여 파리 몸으로 소화액을 집어넣어서 파리의 내장이 다 녹아서 죽같이 되게 한 후에 거미는 그것을 빨아먹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한 비유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서로간의 영혼 안에다가 죄의식, 미움, 각자의 주관, 난폭한 애정 등등의 미묘하고 쓴 효소들을 집어넣고서는 요리된 그 결과를 즐기는 수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아주 능란한 거미 같은 자라서 우리가 살아 있다고 앉아서 웃고 있는 동안에 속을 다 문 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는 나쁜 말의 파괴적인 효과를 잘 말해 주는 비유입니다. 말은 우리의 장기나 신경계통을 녹아버리게 하지는 않지만은 그러나 영혼을 녹여내어 영혼이 없는 빈 껍데기로 우리를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걸어 다니는 관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영혼들이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하여 녹여지고 빨아 먹혔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현상을 성령님께서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으며 그래서 악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명령과 함께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명령은 수식 없이 간단합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방하다는 이 말은 원문에서는 더 넓은 의미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즉 문자적으로 "형제들이여 남을 깎아 내리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뜻입니다. 비방이란 원 뜻은 원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남을 깎아 내리는 나쁜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 원문의 명령은 "남을 깎아 내리는 것은 비록 그것이 옳은 말이든 틀린 말이든 간에 하지 말라"는 이것입니다. 정녕 어떤 기독교인도 다른 사람의 명예를 틀린 사실로써 깎아 내리고 먹칠하려고 의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혹자는 이런 행동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더욱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100% 사실일지라도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고 깎아 내린다면 자제하라고 하는 이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이 진실이면 부정적인 정보라도 알게 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면 파괴적인 진실을 퍼뜨리는 것도 부도덕한 것입니까? 어찌 보면 이는 도덕적 책임이라고까지 생각되어집니다. 이런 논리로 보면 남의 등뒤에서 남을 비판하는 것은 그 비판이 진실인 한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다른 사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진실이라는 것을 그 허가서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지어서 어떤 이는 등뒤가 아니고 면전이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잘못을 알게 해줘야 한다는 도덕적 강박관념을 갖기도 합니다. 잘못에 대한 지적은 자기의 영적 은사인줄로 알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약점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잘못을 지적할 때는 그 당자는 너무나 고통받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지적은 그 지적 받는 자의 덕이나 성취감을 축소시키므로 이런 지적하는 자가 있으면 그 당하는 자의 실제 장점들이나 재능이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이게 됩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죄악된 요소들을 짚어볼 수가 있는데 남을 비방하는 것은 어떤 복수심에서 유발될 때가 많습니다. 비판과 모략 같은 것들이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만심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비슷하겠지만 이런 일은 우리 스스로를 올려놓고 싶을 때도 일어납니다. 바리새인같이 다른 죄인들과 세리들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할 때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고보 선생의 명령이 초대교회에만 국한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이 명령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라고 말입니다. 우선 11절 후반에 보면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비판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 선생이 말씀하는 것을 좀더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크리스챤들은 무조건 다른 사람을 절대로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즉 크리스챤도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성인들은 결코 어떤 사람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이유로 대면서 그들이 애용하는 구절 마태복음 7장 1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를 인용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행동을 감히 판단한다면 하나님과 큰 문제가 생긴다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말씀의 내용자체를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판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약한 죄인들이 비판을 할 때 그들 자신의 삶에 있는 죄들을 처리하는 것은 무시하고 비판만을 일삼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 사실인즉슨 비판을 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의무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마태복음 7:15).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들의 행동을 판단해 보지 않고 어떻게 거짓 선지자를 가려냅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7장 16절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는 것은 조심스런 판단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해서 요한복음 7장 24절 에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비판만능주의를 금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것들을 깎아 내리는 못되고 저질 스런 판단을 물리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주 point는 동료 기독교인을 사랑없이 무자비하게 판단하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는 야고보서 2장 10절 말씀처럼 전체 율법을 다 어기는 것이 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무효이고 필요 없다는 판단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는 율법의 재판자가 되고 율법 바깥에 그리고 율법 위에 자신을 앉힌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의견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낫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기회가 주어지면 우리도 율법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톨스토이같이, 나는 하나님의 형님이다라고 발언하게 됩니다. 이는 모두 바보스런 교만입니다. 다음으로 12절에 보면 이 비판하는 마음은 하나님보다도 자기 스스로를 높인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시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 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강한 톤으로 반문합니다. 성경은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여러 번 말씀합니다. 신명기 32장 39절에 보면 "이제는 나 곧 내가 그 인줄 알라...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한나도 사무엘상 2장 6절의 기도에서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욥기 40장 7절에서 10절에도 폭풍가운데서 말씀하시면서 영광의 하나님을 욥에게 보여주심을 보게 됩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 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제자들에게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의 논리는 바로 죽이고 살리는 자는 단지 하나님뿐이므로 하나님만이 판단할 권리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피조물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탈취한다는 논리입니다. 즉 비판만능주의는 교만임과 동시에 불경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질문은 더욱 강합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겠다는 거냐?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은 조금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의 속마음은 전연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미묘한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4장 5절에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죄인이라서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이란 다 모두 우리의 타락에 의해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죄인된 동료에 의해 우리가 판단 받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판단 받는다는 이 사실을 말입니다. 대체적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죄라는 것을 시인합니다만 야고보 선생은 오늘 본문에서 가장 나쁜 죄라고 직접적으로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율법보다 자신을 높이기 때문이요 더 나쁘게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인식합시다. 철저히 각오합시다. 비판하는 것은 엄청난 죄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이런 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살아야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거미 이야기를 드립니다. 파리도 없고 아무 먹을 것이 없으면 어미거미는 자신의 몸에 그 독을 쏘아서 자신을 녹여서 새끼를 먹입니다. 살모사와 같이 말입니다. 거미의 행동은 본능이요 도덕적인 면을 논할 수 없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행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주님이 지신 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파도처럼 주님을 겹겹이 덮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로써 어미거미같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양식입니다. 이 양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6장 53절과 5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가까이 가면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신 희생적 그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갑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같이 중상모략을 당해도 보복하지 않고 위협하지도 않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그분께 의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됩니다. 물고 뜯는 것이 아닌 낫게 하고 고쳐주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삶을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벧전2:9-10 당신의 신분은 무엇인가? 2002-02-24 19:21:22 read : 1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작성자 [ 김재열목사 ] 오늘 저의 설교 제목은 원래는 '당신의 신분은 무엇입니까?'(What's you're Status?'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교민들에게는 이 제목이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고 아픈 상처를 건드릴 것이 틀림없어서 '우리의 아이덴티는 무엇입니까?'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저는 질문합니
벧전2:9-10 당신의 신분은 무엇인가? 2002-02-24 19:21:22 read : 1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작성자 [ 김재열목사 ] 오늘 저의 설교 제목은 원래는 '당신의 신분은 무엇입니까?'(What's you're Status?'입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교민들에게는 이 제목이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고 아픈 상처를 건드릴 것이 틀림없어서 '우리의 아이덴티는 무엇입니까?'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저는 질문합니다. '당신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시민권자이십니까? 아니면 영주권자이십니까? 아니면 듣기조차도 싫은 불법 체류자이십니까? 어떤 분이 시민권이고 어떤 분이 불법체류자인가를 분별하는 방법이 있답니다. 커피 마시는 습관을 보고 이를 알아 맞춘다고 합니다. 전에는 레귤러 커피를 마시는 분들이 -한국에서의 습관을 따라서- 불법체류자였는데 요즘은 바꿨다고 합니다. 요즘은 오히려 불법체류자들이 시민권자인 것처럼 블랙 커피를 마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도 블랙커피를 마십니다. 그럼 제 신분은 무엇이겠습니까? 불법체류자?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뉴욕에서 와서 절차를 몰라서 적어도 몇 달은 불법으로 체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주권 신청을 할 때 꽤나 많은 벌금을 물었고 영주권을 받기까지 3년 이상을 기다렸습니다. 이 때에 저는 영주권이 없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불편하십니까? 미국 밖을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시는 분들의 심정을 조금은 압니다. 저도 가까운 캐나다 한 번 가려고 여행허가를 받는데 어떤 날은 그 추운 겨울 꼭두 새벽에 맨해튼의 이민국에 가서 줄서기를 몇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9시간을 기다렸다가 헛탕 치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에 부담이 되십니까? 여행은 고사하고라도 심지어 사랑하는 부모가 죽었는데도 가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교민들의 심정을 시민권자들이, 영주권자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북하면 이런 글도 쓴 교민이 있습니다. 불법체류자 '광야'라는 LA에서 발행되는 조그만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제목은 '불법 체류자'입니다. 'LA동물원에 갔다. 굵은 쇠창살 울안에 갇힌 동물들 / 거의 외국서 수입된 불법체류자였다 / (중략) 연어나 철새들은 제 좋은 곳으로 / 이동하며 살고 있어도 시비가 없는데 / 만물의 영장은 종이 한 장의 서류가 없다고 / 불법체류자라는 빨간 이름표를 붙인다 / 이 지상의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는 누구냐? / 우리는 또 한 번의 체류지를 변경해야 하는 똑같은 운명인데 / 계집아이들 땅따먹기 하듯 / 금 그어 논 국가라는 개념으로 체류신분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마땅치 않아 / (중략) 에라! 어떤 신분인들 무슨 상관이랴! *우리의 소망은 마지막 체류지 변경으로 도달하는 하늘나라에서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되고 싶을 뿐' (송석증-CA문인-광야2000.10)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신분이 무엇이던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잠시 잠간이면 하늘 나라의 신분으로 바뀔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그래도 영주권이 빨리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분들에게 송구함을 드립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진정한 우리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는데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오늘 베드로전서는 바로 어떤 분들에게 주신 편지인지 아십니까? 1;1로 가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Peter, an apostle of Jesus Christ, To God's elect, strangers in the world, scattered throughout Pontus, Galatia, Cappadocia, Asia and Bithynia, 예!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믿음으로 독재자인 로마의 황제의 핍박과 박해를 피해서 여러 나라 여러 지방으로 유대의 본국을 떠나 낯선 이방의 나라 곳곳에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불법체류자인 나그네의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초조하고 불안한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신분의 중요성 신분은 곧 사람을 결정합니다. 신분은 곧 인생을 결정합니다. 신분은 곧 인격을 결정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언어문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한국을 떠나 남미에서 살다가 미국에 온 청년의 경우- 한국말을 아주 농담까지도 구사할 줄 아는 비결은? 남미에서는 꼬레아노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월감이 한국말을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에 어렸을 때에 온 청년들의 경우에는 한국에 대한 부끄러움과 부모들의 서툰 영어에 부끄럼을 느겼고 한국민족의 아이덴티에 대해서도 수치감을 가졌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배우다 보니 한국말도 못하는 민족의 정체감 속에서 갈등과 후회를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영적인 신분이 결여된 그리스도인들! 영적으로도 꼭 같은 원리가 작용된다고 믿습니다. 우리들이 믿으면서도 좌절하고 무기력하고 용기를 잃고 사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행복하고 모자람이 없는 그리스도인 같은데 내적으로 토해내는 사연을 들어보면 죽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자신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요? 그렇습니다. 영적인 아이덴티 결핍증입니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 나는 누구인가?> 나눠드린 성구들을 부지런히 읽고 음미해보십시오. 이 글은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선언하신 영적 아이덴티 회복 선언입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마5;13) / 나는 세상의 빛이다. (마5;14)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요1;12) / 나는 참 포도나무의 가지요, 그리스도의 생명의 통로이다.(요15;1,5) / 나는 그리스도의 친구이다.(요15;15) / 나는 열매를 맺도록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사람이다.(요15;16) / 나는 의의 종이다.(롬6;18) / 나는 하나님께 종이 된 자이다.(롬6:22) /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롬8:14,15 갈3;26,4;6) / 나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요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이다.(롬8;17) / 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의 영과 그의 생명이 내 안에 거하신다.(고전3;16,6;19) / 나는 주와 연합되었고 그와 한 영이다.(고전6;17) /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고전12;27, 엡5;30) /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 나는 하나님과 화목되었으며 하나님은 나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후5;18,19) /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갈3;26,28) /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이다.(갈4;6,7) / 나는 성도이다.(엡1;1, 고전1;2, 빌1;1, 골1;2) /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일을 하도록 거듭났다.(엡2;10) / 나는 성도와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엡2;19) / 나는 그리스 안에서 갇힌 자이다.(엡3;1,4;1) / 나는 의롭고 거룩하다.(엡4;24) / 나는 하늘의 시민이요, 하늘에 앉히운 자이다.(빌3;20,엡2;6) /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인 자이다.(골3;3) /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의 생명의 표현이다.(골3;4) / 나는 빛의 아들이요 어둠의 자식이 아니다.(살전5;5) / 여러분! 영적으로 자신이 없습니까? 영적인 아이덴티티를 회복하고 싶으십니까? 이 글들을 계속 읽고 묵상하고 암송해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우리 예수님이 친히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환영하는 이들이 없고 안정된 삶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이 말씀 속에서 우리의 영적인 신분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의 본문에서 우리의 주시는 3가지 아이덴티는 무엇입니까? 1)부르심을 받은 선택된 백성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차별을 받고 당당한 권리와 특혜를 누리지 못하지만 그러나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다같이 1;2절을 읽어보십시오! 미국 정부는 우리를 구분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공립학교에서는 우리의 자녀들을 차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심"(1;3)이라고 하셨습니다. 2:9를 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But you are a chosen people) 조선민족은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택한 민족이랍니다. 왜냐구요? 조선을 영어로 하면 'Chosen'이라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든 한국인을 선택한 백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 선택된 백성들입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아담의 후손의 죄악을 십자가에 걸머지고 몸을 찢고 피를 흘려 그 죄악을 사하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셔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주로 하나님께서 제시해 놓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종교가라도 철학가라도 군자라도 인물이 뛰어나고 지식이 많을 지라도 하나님 은 그런 사람은 택하지 않습니다. 영적 선민을 택하는 조건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믿는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5절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 그 외에 어떠한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른 종교들과 정치나 경제, 문화 또는 자연 보호 같은 것에는 협력할 수 있어도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는 결코 타협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를 택하여서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다 택함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택함을 받아 하나님이 특별히 관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항상 알아야할 것은 "나는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다. 이 세상 수많은 사람 중에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선택하사 하늘과 땅의 모든 영광을 허락하시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고 마음속에 큰 자부심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2)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의 두 번째의 아이덴티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의 3대 성인 김이박(金李朴)씨의 족보를 따져보면 모두 다 그들의 시조들이 왕이었습니다. 김씨는 김수로왕의 후손들입니다. 이씨는 어느 왕의 후손들입니까? 박씨는 박혁거세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재밋는 것은 지금 조상들의 신분 자랑하는 사람치고 변변한 사람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에 와서 과거의 신분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현재의 신분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현재 신분을 베드로 사도는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자! 우리가 어떻게 제사장이 되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구약시대의 첫 번째 제사장은 누구였습니까? 아론이었습니다. 아론이 부름 받을 때의 형편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완전 무결한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지파인 조상인 레위를 보십시오. 한마디로 잔혹한 저주 아래 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창세기 49;5-7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Simeon and Levi are brothers--their swords are weapons of violence. Let me not enter their council, let me not join their assembly, for they have killed men in their anger and hamstrung oxen as they pleased. Cursed be their anger, so fierce, and their fury, so cruel! I will scatter them in Jacob and disperse them in Israel. 이것이 아론의 조상들의 족보였습니다. 그럼 아론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모세가 계명을 받으로 시내산에 올라가 40일을 비워둔 사이에 백성들을 주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불러 쓰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셨습니까?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셨습니까? 이것 저것 해봐도 안되니까- 에이 예수나 믿어보자! 그래서 믿게 되었습니까? 좋습니다. 동기야 어떤 동기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족속>으로 소속돼 있어야 합니다. 택하신 족속의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족속이란? '한 혈통'을 뜻합니다. 김씨 가문에 피를 받아야 김씨네 족속이 되는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을 보십시오! 그는 한때 젊어서 술 중독과 마약을 끊지 못했던 버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미국의 왕(대통령)이 됐을까요? 그의 어머니 바바라여사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을지라도 이제 보십시오! 주안에서 신실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과거를 하나님은 묻지 않으십니다. 주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라도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릴 택하신 성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도는 누구의 혈통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피흘리심으로-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아가 예수의 피에 내 죄를 씻어 버린 자들이 바로 <택하신 족속>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육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함 이스라엘 족속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제사장의 위임절차(출29장) 먼저 몸을 씻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습니다. 흉패와 판결의 관을 씁니다. 관유을 붓습니다. 그 후에 죄사함의 나타내는 속죄제사를 드리고 헌신에 뜻을 가진 번제를 드리고 난 후 사역을 위임받는 위임제사를 드리는데 한 번이 아니라 7일간 계속 반복해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복잡한 절차들을 설정했을까요? 하나님은 아무라도 임의로 자기들이 방법대로 섬기기를 원치 않았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피에 씻음 받지 않고는 헌신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철저하게 헌신된 자에게 직분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선포하셨습니다.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우리를 뭐라고 부른다고요? 예! 왕! 왕으로 대우하십니다. 그렇다면 왕은 왕의 신분에 맞도록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왕의 체통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왕은 거드름을 피고 교만이 극에 달한 사람들이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왕은 겸손의 왕입니다. 3)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 나라마다 민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국민의 의식과 수준>이 있습니다. 어떤 나라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나라의 수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마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 백성들은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구분하면서 살아가는 나라 백성들도 있습니다. 분수가 있고 절제가 있습니다. <거룩한 나라 백성은 누굽니까?> 하나님을 향해 성별된 사람들이 모여 나라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거룩한 나라 백성들이 지켜야할 규약이 있습니다. 언행심사가 거룩해야 합니다. 백성들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들이 제사장이요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결론 우리가 이 땅에서의 신분이 무엇이던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신분을 확립하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입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긍휼을 입은 자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Jun.10.'01)
천국의 열쇠 11/마16:13-20 2005-01-10 13:07:27 read : 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울 어느 교회에 장군 출신 장로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명예와 자리를 탐하지만 누구 못지않게 그에 대한 욕심이 많으신 장로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 장로님이 꿈을 꾸셨답니다. 꿈에 천당엘 갔는데 천당에 가보니 그곳에 면류관들이 잔뜩 있더랍니다. 사람마다 자기 면류관을 찾아서 하나씩 쓰고 나가는데 아무리 찾아보
천국의 열쇠 11/마16:13-20 2005-01-10 13:07:27 read : 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서울 어느 교회에 장군 출신 장로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명예와 자리를 탐하지만 누구 못지않게 그에 대한 욕심이 많으신 장로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 장로님이 꿈을 꾸셨답니다. 꿈에 천당엘 갔는데 천당에 가보니 그곳에 면류관들이 잔뜩 있더랍니다. 사람마다 자기 면류관을 찾아서 하나씩 쓰고 나가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장로님 면류관은 없었습니다. 면류관이 하나 밖에 남지 않게 되자 그 장로님은 급한 나머지 임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 그 면류관을 낚아 채 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쓰고 보니 그 면류관은 개털로 된 면류관이었습니다. 창피하여 그것을 벗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개털 면류관은 머리에 꼭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답니다. 밤새 애를 쓰다 꿈을 깼는데, 장로님은 그 꿈이 하나님의 교훈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면 많이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별명을 ‘개털 장로’라 하시고는 여러 곳에서 그와 같은 간증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원죄가 있습니다. 원죄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부터 우리에게 유전처럼 전해지게 된 죄인데,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사탄은 그것을 따 먹으면 네가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원죄를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죄 된 본능’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죄 된 본능’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원죄를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정말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좇을 수 없고, 하나님을 좇아 살지 않으면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거나 역사를 돌아보아도 언제나 자신과 사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언제나 실패하고 언제나 망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참으로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소위 계급에서 황제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남달리 유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남달리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 ‘내 사전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말을 하게 되자 그는 결국 인생의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의 핍박에 굴하지 않고 승리하여 드디어 로마의 국교가 되었던 천주교는 박해 때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국교가 되고 교황의 권위가 권력이 국가의 황제보다 높고 컸을 때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셨던 이승만 박사는 참으로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애국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자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독재자가 되었을 때 그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4.19 때 꽃과 같은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하는 재앙의 뿌리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게 되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여야만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독재를 싫어합니다. 독재자가 정치를 하는 나라치고 나라가 잘 되는 법이 없습니다. 독재자 한 사람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고 약할 때 한국교회는 오히려 강하고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고 부요해 졌을 때, 유명한 스타 목사들이 나오면서부터 교회는 오히려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서울대학교 총장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여러분 혹시 서울 대 병원 병원장이 누구신지는 아십니까? 아니면 혹시 그 유명하다는 삼성의료원이나 현대중앙병원의 병원장이 누구신지는 아십니까? 혹시 여러분 여의도 순복음교회 담임목사가 누군지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소망교회 담임목사님이 누구신지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광림교회 원로목사님이 누구신지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여의도 순복음 교회나 소망교회 그리고 광림교회의 목사님들 모두가 다 훌륭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에 서울대학교 총장님이나 위에서 이야기한 병원의 병원장님들이 그 목사님들 보다 못하신 분들은 아니실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개 총장님이나 병원장보다도 크고 유명한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을 더 잘 알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회의 저명인사보다 교회의 목사들이 더 유명해져있는 세상이 좋은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총장과 병원장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대학과 병원이 담임목사와 원로목사가 누군지 다 아는 교회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튼튼하고 장래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 혹 아십니까? 서울대학교의 총장은 대단한 자리임에 틀림이 없으나 서울대학교에는 지금 총장 말고도 얼마든지 총장직을 감당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교회 안에는 그 목사님을 대신할만한 인물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상을 통하여 교회가 세상의 그 어떤 조직보다 더 권력지향적이고 봉건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학교와 병원은 총장과 병원장이 바뀌어도 별 큰 문제없이 돌아가지만 교회는 목사가 바뀌면 교회 전체가 왔다갔다 할 만큼 큰 몸살을 해야만 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면을 생각하면서 한 사람의 자리와 영향력이 사람의 욕심으로 커지게 될 때 얼마나 조직의 체질을 오히려 약화시키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우리의 앞길을 막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막다가 막을 수 없다고 생각되면 전략을 바꾸어서 우리의 앞길을 필요 이상으로 밀어 줍니다. 띄워 줍니다. 스타가 되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과속하게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가 교만하여지게 되면 그 교만이라는 장애물에 부딪혀 즉사하게 하는 전략을 쓰는 것입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저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위하여 제가 앞으로 힘써 싸워야 할 것은 더 유명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은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낮추는 것입니다. 부인하는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겸손해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숨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도 살고 교회도 사는 길입니다. 전에 있던 동안교회에서 교회를 건축 할 때 안식년을 할 타이밍이 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교회 건축 중에 담임목사가 안식년을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왜 하나님이 안식년이라는 제도를 만드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6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짓다보면 자기가 농사를 짓기 때문에 사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기 때문인지가 오락가락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농사를 쉬라 하십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사람이 한해 농사를 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년을 지키라 하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저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으신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먹고 사는 일이 너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한 6년 동안 열심히 목회를 하다보니, 그리고 교회가 제법 성장하고 큰 예배당도 건축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 져서 교회가 나 때문에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꽉 차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안식년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네가 없어도 교회는 된다’ 그리고 ‘네가 없어도 교회가 되어야 정말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안식년을 하여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안식년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가 없다고 예배당도 짓지 못할 교회라면 차라리 예배당을 짓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당회에 내놓게 되었고 당회에서도 그와 같은 저의 생각을 받아주어 건축 중에 안식년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완공 6개월을 앞두고 6개월 안식년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절반짜리 믿음이었습니다. 예배당을 완공한 후에는 시무를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꼭 그러지 않아도 좋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그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인데 하는 마음이 듭니다. 교회 건축 중이라 안식년 비용을 많이 쓸 수가 없어서 국내에서 넉 달을 있었습니다. 천안 사과 농장에 있는 별장을 빌려 넉 달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때 제가 안식년을 하던 그 사과 농장이 이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수련원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달을 미국과 카나다 그리고 중남미를 다니며 밀린 숙제를 하듯 집회를 하였습니다. 카나다에 있을 때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아내까지 함께 집을 떠나 있을 때였는데 걱정이 되어 병원으로 전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전화를 받으신 분이 바로 남국치 장로님이셨습니다. 안식년을 하면서 저는 일부러 교회에 전화도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하면 또 이것 저것 의논을 할 것 같아 참으로 궁금하고 걱정이 되면서도 도 닦는 심정으로 전화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전화가 장로님들과의 첫 전화인 셈이었습니다. 제 전화를 받자마자 남 장로님이 하신 첫 마디를 저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 이상 무’ 처음에 조금 섭섭했습니다. 제가 속으로 은근히 기대하던 말은 ‘목사님이 안 계시니까 교회가 엉망입니다. 목사님 좀 빨리 오실 수 없으시겠습니까?’였습니다. 그러나 장로님의 ‘목사님 교회 이상 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이 옳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안식년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가 없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기간에 담임목사가 안식년을 한 것이 동안교회를 약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강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를 상당히 겸손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장로님들의 6년 단임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동안교회에서는 그것을 시행하기 어려워 우선 장로님들의 안식년제를 시행했었습니다. 6년 시무하시고 일년을 안식년을 하시라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장로님들이 그것을 불편해 하셨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왜 꼭 안식년을 하라 하십니까?’라고 저에게 물으시기에 서슴치 않고 장로님에게 대답해 드렸습니다. ‘장로님이 시무하지 않으셔도 교회가 아무 문제없이 잘 된다는 것을 배우시라고요...’ 어느 장로님이 저에게 ‘목사님 장로교니까 장로가 주인 아닙니까?’라고 질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답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 이분이 장로교를 prebyterian church로 이해하지 않고 elder"s church로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장로교를 장로교 정치를 하는 교회로 이해하지 않고 장로들이 주인 노릇하는 교회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로님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 목사들 중에는 교회를 목사가 주인인 pastor"s church로 이해하는 사람도 적지 않게 많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사와 장로들이 서로 교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파워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서로 타협하며 목사와 장로의 자리를 높여 나가고 넓혀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문제는 비단 목사 장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우리 한국교회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더니 우리 한국교회는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이고 한번 장로는 영원한 장로입니다. 양재동에 있는 어느 미션 스쿨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장로님이신데 선생님들에게 존경을 받으시는 훌륭한 교장이시라는 소문이 있기에 일부러 집회 후 그 장로님과 차를 한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대화 중 평생의 잊을 수 없는 귀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평생의 삶의 목표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있으나 마나 한 교장이 되려고 힘씁니다’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은 그냥 가만있으면 되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하여 힘을 쓴다는 것은 그냥 있으나 마나한 사람과는 다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을 넘어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받은 감동은 이루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힘써야 되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너무나 많으십니다. 그와 같은 분들 때문에 우리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는 오늘 바로 그와 같은 분들 때문에 다시 몰락하고 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분이 없어지게 되었으니(은퇴 혹은 사망) 교회는 당연히 안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 훌륭한 신앙인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사람이 된 후 겸손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재빨리 자기가 없어도 되는 교회와 세상을 만들어야만 합니다. 후배를 세워주고 자기는 슬며시 역사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바나바가 좋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첫 어른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에 비하면 새카만 후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최초의 선교사로 세우고 파송을 했고 바나바와 바울은 함께 선교여행을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은 선교사로 세웠을 때 굳이 이야기하자면 바나바가 주연이었고 바울은 바나바를 돕는 조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늘 성경에도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어느 날부터 바나바와 바울의 역할이 바뀌게 됩니다. 바울이 점점 주연이 되고 바나바는 조연이 됩니다. 결국엔 이름도 바나바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라고 씌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나바가 그에 대하여 아무런 불평과 원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세우며 잠잠히 조연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한국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바나바를 배워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훌륭한 후배를 찾아내고 그를 자기 앞에 세우며 그의 길을 열어주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호수아를 세워주고 자기는 느보산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죽은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자신과 세상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세상의 주인임을 인정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실력을 가진 후 스스로 있으나마나한 사람의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기득권을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절대로 손해나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잘 버리셨습니다. 앞으로도 그와 같은 계급 같은 직분에 연연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오직 우리 하나님만 높여 드리며,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시게 해 드리며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장로나 목사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장로와 목사의 책임과 실력을 부인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을 계급으로, 권력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되십니다. 처음부터 있으나마나한 사람이 되지는 마십시다. 그러나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 끝까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의 자리에 있지 마십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슬그머니 느보산으로 올라가는 모세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다. 새카만 후배 바울을 세우고 그를 섬기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십시다. 그와 같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상으로 주시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열고 닫으며 사는 복을 받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로마전선의 거룩한 불꽃되어(5),영혼의 오아시스 발견하는 비결/롬3:9-31 2001-12-06 17:20:06 read : 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형집행이 시행되기 직전에 집행관이 사형수에게 마지막 소원을 묻는단다. 그때 십중 팔구는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싶다"고 한단다. 담배를 바아든 사형수는 몇 모금 담배를 피우게 되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손에 받아든 담배가 다 타들어가서 필터까지 올라오는데 달달 떠는 손
로마전선의 거룩한 불꽃되어(5),영혼의 오아시스 발견하는 비결/롬3:9-31 2001-12-06 17:20:06 read : 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형집행이 시행되기 직전에 집행관이 사형수에게 마지막 소원을 묻는단다. 그때 십중 팔구는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싶다"고 한단다. 담배를 바아든 사형수는 몇 모금 담배를 피우게 되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손에 받아든 담배가 다 타들어가서 필터까지 올라오는데 달달 떠는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차마 땅에 버리질 못한단다. 그러나 확정된 죽음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비결이 있다. 영혼의 오아시를 발견할수 있는 비결이 있다.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자. 찬미예수 43장 주께 감사하세 주께 감사하세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라 주께 감사하세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 주를 찬송하세 / 주께 경배하세 / 주께 기도하세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포함해서 "온 인류는 다 죄인이다"라고 선포하며 모든 인간을 법정에 세우고 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3:20)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롬3장 23절) 그러나 전에는 율법아래에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은혜아래서 자유한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신앙생활에서 많은 혼동을 일으킨다. 오늘은 분명하게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도 은혜를 받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시청각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세 가지사건 현장으로 가서 직접 경험해 보자. 첫 번째 사건은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사건이다. 출애굽기 15장 22-27절에 보면 마라의 사건이 나온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던 쾌거가 기록되어 있다, 15장으로 넘어가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를 만들어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의 찬송을 드렸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자신들이 건너온 홍해의 물결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홍해에 수장된 바로의 추격대를 생각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홍해를 건넌 그들은 수르 광야에 들어섰다. 그리고 3일간 행군을 계속했다. 따라서 목이 마른 그들은 물을 찾았지만 광야에 물이 있을 리 없었다. 다시 행군하여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물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물은 써서 먹지 못하는 물이었다. 주석가 팔머는 "사막에는 평균 1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마다 샘이 하나씩 있긴 하지만 그 샘물은 염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마실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원망이 시작되었다. 홍해를 건넜던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여 민족 대합창을 부른 지 3일만이었다. 이제는 그들이 원망의 대 합창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마라의 고민을 살펴 보라. 마실만한 물이 없었다. 물은 물인데 사람을 살리는 물이 아니었다. 이 모든 동물들은 물이 없으면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25절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 나무를 지시해 주셨고 모세는 그 나무를 물에 던졌다. 그랬더니 물이 변했다. 모세가 나무를 던지긴 했지만 모세가 고른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고 지시하신 나무이다. 학자 베이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평과 불만의 쓴 물을 달게 만드는 마라의 나무이다"라고 했다. 메튜 핸리는 "십자가는 모든 고통을 주는 쓴 물을 달게 만든다"고 했다. 다시말하면 마라의 쓴물은 율법으로 백성들의 마음속에 물의 필요성에대한 절실함을 더욱더 일깨워주는 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나 짐승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지는 못하는 물이었던 것이다. 율법이 이와 같은 것이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죄로 깨닫게는 할 수 있지만 죄를 해결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한 나무가지와 같은 십자가를 골고다에 세워주시고 율법에 의해 드러난 죄를 보혈로 덮으셨다. 마라의 나무가지 사건이 있은 뒤에 백성들은 진정으로 오아시스를 만나게 된다. 27절에 보면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오아시스를 준비해 주셨던 것이다. 물은 물이지만 사람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물, 이것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도 말씀이요, 복음도 말씀이지만 율법은 죄를 해소할 수 없다. 오직 십자가의 피묻은 복음만이 죄를 해결하실 수 있다. 두 번째 사건은 소돔성과 니느웨성을 비교해볼 때 율법과 복음의 기능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두 성은 율법아래서 멸망이 작정된 도시들이었다. 결국 소돔성은 망하고 니느웨 성은 망하지 않았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가? 소돔성 사람들은 두 증인의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죄를 지적받았으면서도 십자가앞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천사가 억지로 끌어내야 할 만큼 영성이 무기력해 져 있었던 것이다. 소돔성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소원조차 없었던 것이다.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인이 없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했던 사람 요나는 복음을 들고 사흘동안 니느웨성을 초토화시켰던 것이다. 요나3장 4절에 보면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복음으로 온 국민을 무릎꿇게 하였고, 왕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통곡하며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도록 했다. 5절에 보면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니느웨 대각성운동이 단 삼일만에 완벽하게 끝난 것이다. 그 결과 멸망과 저주의 심판이 멈추고 사랑과 화해의 잔치가 열렸던 것이다. 10절에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소돔성은 백성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려졌지만, 다시 말해서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가 드러났지만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니느웨성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드러났을 때, 배옷을 입고 복음이신 예수님의 보혈이 흐르는 십자가 밑으로 찾아 온 것이다. 세 번째 사건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고소사건이다. 요한복음 8장 1-11절 말씀에 보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들려 주님 앞에 끌려온 여인의 사건이 나온다. 본문에서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이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되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범죄가 드러나 벌벌 떨고 있는 여인같은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여인을 정죄하며 돌을 들어 죽이려는 구경꾼부류다. 이 구경꾼들은 이 여인을 미끼로 예수를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남의 허물은 크게 보고 자기의 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죄로 인하여 부끄러워하는 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군중들 속에 혹시 내 얼굴은 보이지 않는가? 군대생활을 하면서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배고픈 것이었다. 물론 정량이 나오지만 금방 소화가 되어 버린다. 한번은 동료가운데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드러누운 친구가 있었다. 아파서 밥도 못 먹는 것이었다. 그가 먹지 못한 밥한 그릇이 우리들에게 주어졌을 때, 모두 반갑게 먹었다. 그것을 먹으면서 하나같이 바라는 마음은 "이 친구가 오래 아팠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사람은 잔인하다. 어쩌다 다른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때면 주님의 몸이 찢어지듯 우리 가슴이 아파야 한다.그런데 구경꾼처럼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정죄하며 비난하며, 말로는 동정하지만 속마음으로는 구경꾼마음을 가지고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을 읽고 계신 주님은 아무 말씀없이 땅바닥에 무언가를 쓰셨다.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요한복음 8장) 무슨 글을 쓰셨는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다. 그런데 학자들은 본문 해석을 이렇게 한다. 주위에 둘러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목을 낱낱히 쓰셨다는 것이다. "김서기관 당신은 1999년 3월에 이런 짓을 하지 않았더냐?, 최장로 당신은 20년전에 이렇게 하지 않았더냐! 이 집사 너도 캄캄한 밤에 첫눈오던 날 어디에 가지 않았더냐!"... 이렇게 계속 적으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여인에게만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율법대로 하면 너희들이 든 돌들로 너희들의 머리통을 먼저 내려쳐야 한다... 자신들도 모두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율법의 범법자들임을 거울처럼 보여주셨던 것이다.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자 군중들은 다 돌아가고 여인만 혼자 남았다. 영국에서 한 청년이 장난 삼아서 런던의 유명인사 20명을 뽑아서 명단을 만든 다음에 일제히 똑같은 시간에 꼭 같은 전문을 발송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모든 것이 탄로났으니 속히 피신하기 바람"이라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 이튿날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영국의 유명한 인산 20명이 거의 같은 시각에 일제히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한 말씀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 죄인을 죄인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죄를 죄로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이 여인의 죄를 보고서 자신의 죄를 발견해야만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인다면 구경꾼들은 복음이신 예수님 앞에서 그들의 살인죄를 가중해서 처벌받아야 한다. 율법의 돌들을 들고 죽이려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데 그 돌들을 사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살리는 산 돌이 바로 앞에 서 계셨기 때문이다. 산 돌이신 예수님! 이사야 28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랏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베드로전서 2장 1-5절을 보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이 여인을 바라보시는 주님은 구경꾼들과는 전혀 다른 돌이셨다. M.R 디한 박사는 율법과 은혜를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지만 은혜는 현재 이 모습 그대로 초대하신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지만 은혜는 우리를 구속하신다.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고 무거운 짐을 지워주지만 은혜는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율법은 돌에 새겨졌으나 은혜는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 율법은 십일조를 바칠 때 10분의 1을 드렸다고 하나 은혜는 십일조를 드림으로 10분의 9를 내가 받았다고 생각한다. 율법은 우리를 속박하지만 은혜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율법이 산 돌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셨고, 그 죽으심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기에 내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셨다. 율법이 예수님을 사형언도를 받게 했고, 율법이 예수를 갈보리에서 죽게했다. 한 사람이 법에 의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사형장에서 교수형을 시켰다. 의사의 사망진단서도 발급되었다.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된 사흘 후 이른 아침에 바로 그 사람이 살아서 나타난 것이다. 틀림없이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그 사람을 또 법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 예수께서 사심과 동시에 우리가 살았다. 로마서 10장 4절을 보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 율법의 마침표를 찍어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모세의 시내산에서 은혜의 갈보리 동산으로 옮겨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자신의 죽음을 맛볼 때에 비로소 은혜의 동산에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죄 사람의 확신을 얻는다. 은혜로 살게 되었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은혜로 얻어진 구원과 믿음으로 얻게된 영생을 말하다보면 생활이 나태해지고 죄에 대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순간 새 계명으로 살게 된다. 시내산의 율법이나 십계명이 아니라 새로운 계명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법이다. 사랑이 클수록 율법은 작아진다. 사랑이 작아지면 율법은 자연히 크게 자리잡는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가? 멸망받을까 두려워서 지키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율법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은혜에서 하는 행위가 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이 통치하는 곳에는 율법이 필요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된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무엇보다 귀한 자녀 6/엡6:4 2005-01-10 14:30:59 read : 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제껏 살아오면서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말과 일들이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말과 삶의 모습에서 나온 것들인데 제가 설교 중에 늘 자주 인용하는 것들입니다.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꼽자면 아무래도 임택진 목사님이신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분의 삶과 말씀들이 저에게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
무엇보다 귀한 자녀 6/엡6:4 2005-01-10 14:30:59 read : 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제껏 살아오면서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말과 일들이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사람들의 말과 삶의 모습에서 나온 것들인데 제가 설교 중에 늘 자주 인용하는 것들입니다.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꼽자면 아무래도 임택진 목사님이신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그 분의 삶과 말씀들이 저에게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벌써 여러 번 설교 중에 말씀드렸던 일들입니다만 오늘 다시 그 중 몇을 반복하려고 합니다. 임 목사님이 시무 중 큰 교회의 청빙을 받고 교회를 떠나시려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교인들이 그와 같은 사실을 눈치 채고 목사님을 막았습니다. 교인의 대표로 선임 장로님이 목사님을 만나셨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목사님을 만류하시다가 ‘목사님, 큰 교회에 가시면 월급을 많이 드릴 터인데 만일 그것 때문이라면 가지 마십시오. 우리교회도 다음 달부터 목사님 생활비 올려 드리겠습니다.’ 그때 제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목사님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소시장의 소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값이 올라도 가고 내려도 가지만, 나는 소시장의 소 가 아니요> 정말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명언 중의 명언으로 저는 기억하고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임 목사님 목회 하실 때는 한국 교회가 다 어려웠을 때였습니다. 특히 자녀들이 많으셨던 임 목사님 가정은 참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사셨습니다. 목사님 가정이 경제적으로 힘들면 가장 고생을 하시는 분은 아무래도 사모님이십니다. 임 목사님 사모님은 정말 경제적으로 빠듯한 살림 때문에 그 누구 못지않게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의 하신 말씀 중에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명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진 않아. 다시 이렇게 살라면 살지 뭐.> 어느 부자에게서 찾을 수 없는 삶의 당당함과 멋을 느끼게 하는 정말 명언 중의 명언입니다. 가난이 싫지만 무섭진 않다는 사모님이나 그와 같은 가난 속에서도 소시장의 소로서는 안 살겠다는 목사님의 말씀과 삶이 저에게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1981년 12월 마지막 주일 목사님은 65세로 은퇴를 하셨습니다. 임 목사님은 우리 한국교회에 정년 제도를 주창하신 분이십니다. 목사님은 65세 정년을 주창하셨지만 총회에서 의논하던 중 70세 정년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총회에서는 70세로 결정이 되었지만, 65세를 주장하던 사람이 70세까지 정년을 할 수 없다며 그냥 65세에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때 까지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삶을 사셨고, 그때까지 막내가 대학을 다니고 있는 중이어서 교회를 그만 두시면 정말 경제적으로 막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저런 생각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은퇴 식 중에 드디어 목사님이 인사를 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23년 동안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정말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시고 은퇴하시는 목사님이셨기 때문에 마지막 말씀이 참 많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인사는 참으로 어이없을 만큼 간결하였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는 누가복음 17장 9절과 10절의 말씀을 암송하신 후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는 인사만 드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강단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멋있고 근사하였습니다. 저도 은퇴 식 때 꼭 그렇게 인사를 하고 교회를 떠나고 싶습니다.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저는 빨리 은퇴를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농담인 줄 알지만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 그와 같이 근사한 말고 은퇴를 하고 싶어서 은퇴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근사한 은퇴 인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청량리 중앙교회는 제가 어려서부터 자라난 모교회입니다. 남달리 사랑하고 애착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임 목사님 때 건축하였던 예배당을 허물고 새로 건축을 하려고 하였을 때 저는 마음으로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을 새로 지을 만큼 교인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예배당을 새로 지을 만큼 예배당이 낡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임 목사님 댁을 찾아가 임 목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 나도 모르게 ‘그거 왜 쓸데없이 멀쩡한 예배당을 허물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리면 임 목사님도 최소한 ‘그러게 말이야’라고 맞장구를 쳐 주셔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임 목사님에게서 나온 말씀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내 교횐가 뭐?> 어떻게 청량리 중앙교회가 당신의 교회가 아니시라는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인생과 청춘을 다 바쳐 섬기신 교회인데 어떻게 그 교회가 당신 교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은퇴를 하시면서 목사님은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평생 목회해 오시던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시려고 하는데 목사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깨끗하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놓는 분을 이제껏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흔히 ‘큰 나무 밑에는 그늘이 크다’는 말을 합니다. 임 목사님은 정말 큰 나무셨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그늘이 없는 큰 나무였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에는 김익명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장로님 이십니다. 주일 장년 출석이 500명 정도 되던 때 교회 재정의 1/3을 혼자서 헌금 하시던 분이십니다. 제가 요즘 화폐가치로 대충 계산을 해 보았더니 일년에 최소한 2억 원 정도를 헌금하신 셈이 됩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하여도 그렇게 헌금을 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교육전도사를 하고 있을 때 그 장로님이 주일학교 부장이셨습니다. 저를 가족같이 아껴주시는 분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참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당회에 건의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서 그 장로님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로님은 정중하게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정말 평생 잊을 수 없는 명언을 남겨 주셨습니다. <전도사님이 알다시피 제가 교회에 헌금을 좀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당회에 가서 말 잘 안합니다. 말을 많이 하든, 연보를 많이 하든, 둘 중에 하나만 많이 해야지 둘 다 다 많이 하면 좋지 않습니다.> 연보를 많이 하기 때문에 말은 많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 생각처럼 쉬운 것 아닙니다. 세상에 돈처럼 힘이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돈을 헌금하면서도 그 힘을 교회에서 쓰지 않으려고 그와 같은데 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쉽습니까? <연보를 많이 하든, 말을 많이 하든, 둘 중에 하나만 해야 한다>는 말씀은 제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근사한 명언 중의 명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제가 인용하려고 하는 말은 제가 ‘무엇보다 귀한 자녀(5)’에서 인용하였던 장 훈 선수의 말입니다. 자기를 죠센징이라고 놀리며 ‘죠센징 가라, 죠센징 가라’를 웨치는 일본 관중을 향하여,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라고 큰 소리를 질러대고 일본 투수가 던지는 공을 담장 밖으로 처 버렸던 장 훈 선수의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라는 말 또한 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명언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제 삶에 영향을 끼친 명언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니오>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가난이 무섭진 않아>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내 교횐가 뭐?> <말을 많이 하든지, 연보를 많이 하든지>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 이 여섯 개의 말은 크게 두개의 유형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유형은,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니오>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진 않아>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 입니다. 둘째 유형은,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내 교횐가 뭐?> <말을 많이 하든지, 연보를 많이 하든지>입니다. 첫째 유형의 말들은 ‘약할 때에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함’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약해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을 때 참 근사해 집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하다고 비굴해지고 치사해질 때 추해 지는 것입니다. 둘째 유형의 말들은 ‘강할 때에도 지나치지 않고 겸손함’ ‘자기의 힘과 권리를 함부로 주장하지 아니함’ ‘약한 자들을 배려함’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강하기 때문에 근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는 강함에도 불구하고 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강하다고 교만하거나, 함부로 자기의 힘과 권리를 주장하거나, 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 욕심만 부리는 사람은 절대로 근사하지 않습니다. 훌륭하지 않습니다. 추합니다. 그러나 강하고 부할 때 겸손하고 자기의 힘과 권력을 함부로 주장하지 아니하고, 약하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고 배려하는 강자는 참으로 근사하고 훌륭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녀를 위한 그의 기도문에서 그것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녀를 주시옵소서> <승리에 겸손한 자녀를 주시옵소서> 여러분은 지금 강자이십니까? 아니면 약자이십니까? 여러분이 만일 지금 현재 강자가 아니고 약자라면, 그리고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라면,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이전에 먼저 ‘약하고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무조건 강자와 부자를 시기하며 빈정거리고 부정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가난하고 약하지만 늘 당당하고 긍정적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일 강하고 부하신 상태에 있으시다면, ‘겸손하게 해 주시옵소서, 자신의 힘과 권리를 자신만을 위하여 주장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친구 될 수 있게 해 주시고 저들을 늘 배려하는 큰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 최일도 목사님이 섬기시는 다일교회의 모임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저는 거기서 부자들만 모인다고 하는 강남의 대형교회들이 별로 건강한 교회가 아니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는 부자도 오고, 가난한 자들도 와야 좋은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두들 아멘하며 수긍을 하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런 의미에서 다일교회도 강남에 있는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건강치 못한 교회라고 용기 있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깜짝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강남의 소위 부자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오기가 불편한 교회이기 때문에 건강치 못하다면, 다일 교회는 부자들이 오기 불편한 교회이기 때문에 건강치 못한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강남 교회에는 자가용이 없는 교인들이 좀 더 많아져야 좋은 교회가 되고, 다일 교회는 자가용 그것도 고급 자가용을 탄 교인들이 아주 많아져야 좋은 교회가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는 조금(?) 좋은 교회 같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교회도 부자 교횐 줄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부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에는 가난한 교인도 많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부자 교회 되는 것 싫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우리 교회가 가난한 교회 되는 것도 싫습니다. 부함과 가난함이 전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바로 그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자끼리만 모이는 교회, 가난한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교회는 오히려 쉽습니다. 그 힘든 일이 가능해 지려면, 교인들이 <당당하고도 긍정적인 약자>와 < 겸손하고도 강자의 책임을 다할 줄 아는 강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약자에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당당함과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자에게 가장 힘든 일은 겸손히 강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힘든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게 하기 이전에 먼저 당당하고 긍정적이게 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시장의 소가 아니요> <나는 가난이 싫어, 그러나 무섭진 않아>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와 같은 근사한 말을 하며 사는 근사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강하고 부한 자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강하고 부할 때, <명한대로 행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내 교횐가 뭐?> <말을 많이 하든지, 연보를 많이 하든지>와 같은 근사한 말을 하며 사는 정말 근사한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약하고 가난해도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당당하고도 긍정적이며 밝은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하고 부해도 <승리에 겸손한> 정말 근사한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아더 장군의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녀를 주시옵소서> <승리에 겸손할 줄 아는 자녀를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사60:1-22 참된 소망이 동터 옵니다 2002-02-21 12:08:44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인도자 정인수 목사 말씀 우리가 사는 지구의 미래를 예측하며 희망과 절망이 엇갈리는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정보 사회, 과학 기술 사회로 인하여 인류는 점점 나아지고, 인간 사회는 나날이 발전되어 질 것이라는 주홍빛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의 일각에서는 오히려 인류가 만들어 나가는 이 정보 혁명 사회와
사60:1-22 참된 소망이 동터 옵니다 2002-02-21 12:08:44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인도자 정인수 목사 말씀 우리가 사는 지구의 미래를 예측하며 희망과 절망이 엇갈리는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정보 사회, 과학 기술 사회로 인하여 인류는 점점 나아지고, 인간 사회는 나날이 발전되어 질 것이라는 주홍빛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의 일각에서는 오히려 인류가 만들어 나가는 이 정보 혁명 사회와 유전자 공학이 인간들을 파멸로 빠뜨릴 수는 있는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유전자의 혁명은 가공할만한 복제 인간을 만들어 인류가 대혼돈에 몰아갈 그런 위험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고도의 지능을 가진 로버트의 출현으로 인해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어둠의 진단도 나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예전과 달리 큰 홍수, 큰 지진, 큰 기상의 이변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지구에는 기상의 대재앙이 도래 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 낙원을 건설하고자 애를 쓰지만 인간도 예측할 수 없는 불행의 그림자가 덮어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인간들에게 불행이 찾아오는 것일까요? 왜 인류는 자기 파멸의 모순을 안고 있습니까? 오직 성경만이 그 해답을 줍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등지고, 그 뜻을 어기고 인간의 욕심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서가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 주려는 진리는 바벨론의 포로 생활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자기들이 정한 목표를 향하여 살아 나가고자 할 때 그들에게 바벨론 포로와 같은 국가적인 고통과 수치가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제멋대로 기계를 만지다가 고장을 일으키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해도 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기는 틀렸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5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통회 자백하고 있습니다. 59:12의 말씀을 통하여, "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그렇습니다. 유다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갈 때만이 그들에게 소망이 찾아 옵니다. 그들에게 은혜가 주어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심령도, 나의 가정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사회도, 우리의 나라도, 이 인류도 오직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때만이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실 때만이 구원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0절 말씀). 죄과를 알고, 그 죄과로부터 떠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합니다. 오늘 본문 60장은 바로 어제 59장 20절의 은혜를 자세히 상술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자의 오심을, 그 시온이 얼마나 큰 영광으로 나타날 것인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이사야 40-55장을 제 2이사야에 의해 씌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56-66장은 제 3이사야에 의해 씌여졌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56-66장의 정확한 역사적 배경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이스라엘로 귀환을 시작한 시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상 자기들의 그렇게 그리던 본향으로 귀향해 보니 너무도 막막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너무도 황폐해 있고, 너무도 무너져 있었습니다. 돌 하나 제대로 서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절망을 느꼈습니다. 고레스로부터 해방이 되어 시온으로 돌아 갈 때는 기쁨과 소망을 안고 갔는데 눈 앞에 나타난 현실은 너무나도 참담하였습니다.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였습니다. 오늘 이 처절한 절망의 현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비젼을 꿈꾸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앙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비젼을 잃어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절망의 잿더미에 탄식하던 이사야 선지자에게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신비한 소망이 동터 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처절한 절망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유토피아가 비젼으로 와 닿게 되었습니다. 새하늘과 새 땅의 놀라운 비젼들이 움돋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의 고도,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하늘로부터 신령한 영감을 받고,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젼을 써 내려갔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치 독일의 가스 처형소에서 죽음의 시간을 통과한 유명한 성서학자 클라우스 웨스트만은 그 때의 경험을 되살리며, 요한 계시록 주석서를 써 내려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소망은 이 세상에 대한 완전한 절망으로부터 솟아 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탕자와 같이 이 세상에 대해 가졌던 모든 꿈과 미련이 다 깨어지고 절망을 만날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새로운 소망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후서 1:8, 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가 주는 선물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어떤 것으로부터도 우리는 소망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소망, 인간의 욕망을 따른 기대나 꿈은 언제나 절망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소망을 주는 자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욕망을 따라 나가는 자들은 미련한 자입니다. 결국 그 모든 꿈이 무산이 됩니다. 절망에 빠져서 결국 하나님께 돌아 오는 것입니다. 참된 소망은 절망을 맛본 후 자기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이킬 때 동터 옵니다. 59장에서는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의 잘못, 자기 공동체의 허물을 고백합니다. 그러할 때 '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리라"는 새로운 소망의 비젼을 받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명이 주어집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1-6절의 본문 말씀은 보통 주현절, 빛의 절기에 읽어 가는 말씀입니다. 절망 속에서 흔들리는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소망의 빛을 던져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나오는 인생에게,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공동체에게는 새로운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 나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 오는 수많은 회심자들은 그들이 꿈에서, 그들이 환상에서, 하나님의 그 환한 빛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것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감히 눈을 뜨지 못하는 하나님의 환한 빛이 그들에게 다가 왔다는 간증들입니다. 오늘 어두움이 유다 백성들에게 가득차 있습니다. 2절 보십시다.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는 약속이 주어졌을 때 한 줄기 빛이 그들이 어두움을 관통하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두움은 그들의 절망의 상황입니다. 그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뚫고 지나갑니다. 선지자는 빛의 도래를 선언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이 지구상에 가장 어두움의 시간을 살아 간 사람은 욥입니다. 욥은 칠흑과 같은 암흑의 시간에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을 뚫고 그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욥은 이런 신앙 고백을 합니다. "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리라. 나의 가죽, 이것이 ::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기 19:25,26) 절망 가운데 있던 유다 백성들이 보았던 그 소망을 욥은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두움의 시간에, 고통의 단애에 섰을 때, 소망은 더 뚜렷하고 선명하게 다가 오는 법입니다.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거기에 소망의 빛이 The아져 들어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비젼은 계속 됩니다. 4-11절에 먼 여행을 떠났던 백성들이 가득 선물을 안고 돌아 오고 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백성들은 가진 것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회복을 근근한 자재 하나도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백성들은 그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집니다. 감사하며 찬송하며 나아 갈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부어 주시라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13절, " 레바논의 영광 곧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이 함께 네게 이르러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게 할 것이며, 내가 나의 발 둘 것을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예기치 않고, 기대치 않은 곳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셔서 그들이 넉넉히 예루살렘을 복구할 물질과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 6절, "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하는 자"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 7절,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자들, 9절에 이스라엘 거룩한 자에게 드리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간에 맺어진 언약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전을 지어 나갈 때 우리 자신 스스로를 돌아 보면 부족한 것 뿐입니다. 물질도 부족하고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집시다. 하나님께서는 예기치 않는 손길들을 통해 부어 주실 것입니다. 어차피 성전 건축이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크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송축하십시다. 그 분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나아갑시다. 약속을 믿으며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나아갑시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그 이름을 찬양하십시다. 그 때 레바논의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 질 것입니다. 풍성한 건축의 자재,잣나무와 소나무, 황양목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멘하십시다. 사실 이들은 한 때 버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미움을 당한 자입니다. 아무도 포로로 끌려 가던 유다 백성들을 긍휼히 여긴 자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 이제는 내가 너로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리니"(15절) 하나님의 백성들의 비젼은 계속됩니다. 17-22절은 그들이 그리는 하나님의 도성의 비젼을 보고 있습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 가장 고통의 시간에 가장 찬란한 영원한 도성의 꿈이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곳은 해와 달이 지지 아니하는 여호와의 영영한 빛이 계속되며, 슬픔의 날이 마치는 그러한 영광의 날의 도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 속에 있던 백성들이 묻습니다. 언제 이 영원한 도성이 우리에게 오게 됩니까?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22절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그렇습니다. 그 날은 여호와의 주권에 속한 날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에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절망 시간에도, 고난의 시간에도 그 분은 여전히 언약적인 사람으로 성실하게,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그 확신을 갖는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시련은 우연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데 필요한 필수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련 가운데서도,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면서 ' 일어나 빛을 발하는 '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앞당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서원/창28:20-22 2001-12-07 18:22:56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좀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장자인 에서에게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의 축복을 자로챈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약성경 맨 마지막권인 말라기서 1장2절 이하에 보면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사
야곱의 서원/창28:20-22 2001-12-07 18:22:56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을 읽어가다 보면 좀 납득이 안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장자인 에서에게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의 축복을 자로챈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가 하는 점입니다. 구약성경 맨 마지막권인 말라기서 1장2절 이하에 보면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13절에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적인 그의 행위를 볼 때 야곱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에서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장손이요 이삭의 첫 아들입니다. 창27장31절에 보면 인간성이 관후하고 효성이 있는 성품을 볼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비하여 야곱은 이름대로 간사하여 노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외삼촌을 속인 거짓말쟁이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삭이 육십세에 쌍둥이를 얻었는데 후동으로 나면서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음으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고 그 이름의 뜻이 <발꿈치를 잡음>, <거짓말쟁이>라고 창25장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어떻게 하여 "에서"를 제쳐놓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는가요?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야곱을 지지하시고 편애한 것인가요? 그러나 말씀의 핵심을 잘 가려서 다시 한번 주목을 하게되면 결코 하나님의 편애가 아니었고 실제로는 부도덕한 야곱이 심판받는 말씀으로 이어져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야곱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형의 분노를 사고 외삼촌댁으로 피신하여 혈혈단신의 피난생활과 노동착취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보낸 야곱의 피신생활은 결코 축복의 삶이 아니라 속임을 당하고 노동착취를 당하는 외로운 나그네의 삶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1:40에 있는 말씀에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그렇게 20년 세월의 청춘을 보내야 했습니다. 후일에 아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로 있고 야곱과 그 자제들이 극적으로 상면한후 이집트의 왕에게 야곱이 인사하는 장면을 보면 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년이니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이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렇습니다. 결코 야곱의 인생은 하나님의 편애가운데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고 살아온 것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 신음하며 매우 힘든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서원하여 그것을 지키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는 자기 백성을 외침을 외면하실 수 없으시고,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관용과 긍휼로 구원하시는 그 놀라운 멧세지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핵심인 것 입니다. 아무튼 파란만장한 야곱의 20년 나그네 삶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베델광야에서 돌베게를 베고자다 꿈에 하나님을 만나 축복을 받고 감격하여 일어나 베고자던 돌을 세워 하나님께 서원한 기도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은 야곱이 노부와 형을 속이고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챈 후 형의 원한을 사서 목숨에 위협을 느끼자 브엘세바를 떠나 외가가 있는 밧단아람(하란)으로 도피해 가던 중 베델벌판에서 곤비한 몸을 돌베게에 의지하고 누어 자다가 몽중에 하나님을 만나 놀라운 축복을 받고 나서 일어나 단을 쌓고 서원하는 장면입니다. 베델은 허허벌판입니다. 뒤로는 형 에서가 언제 쫓아와서 자기를 위협할지 모르고 앞의 가는 길은 고생길이라 그의 마음이 얼마나 착찹하였겠습니까? 뒤로는 되돌아 갈수는 없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데 그 길이 험난하니 갈등과 번민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찼을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가 꿈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허허 벌판에 그저 돌덩이 하나를 의지하여 베게로 삼아 잠을 자는 그가 하나님을 꿈속에서 뵌 것입니다. 그가 집을 떠날 때 가지고 나온 것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 뿐이었습니다. 그것만을 머릿속에 가슴속에 넣고 그것만을 생각하며 왔음이 틀립없습니다. 교우여러분! 특별히 최근에 오신 여러분! 어쩌면 이곳이 허허벌판 베델광야일수도 있습니다. 의지할 것이 없는 광야입니다. 뒤엣 것은 돌아 볼 수는 없고, 앞 일을 생각하자니, 좀 망망대해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하나님의 꿈을 꿀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십시오. 이삭에게 받은 축복내용은(창27:27-29)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빛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스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땅의 축복과 열국의 왕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삭의 축복은 족장의 전형적인 축복기도입니다. 거기에 비하여 야곱 이 베델광야 꿈 속에서 받은 축복은 한 차원 높은 축복입니다. 모든 족속이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받는 다고 합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게 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합니다. 베델의 꿈에 받은 축복을 보면 창세기 28:13-15 "나는 여호와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로다 하신지라" 얼마나 엄청난 꿈입니까?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왕에 꿈을 꿀 바에는 야곱처럼 꿈을 꾸어야 합니다. 이왕에 축복을 받으려면 야곱과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그저 시시하고 째째한 꿈을 꿀 것이 아니라 우리 자손으로 인하여 이 땅에 사는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십시다. 어디를 가든지 지켜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약속을 얻어냅시다. [세가지 서원기도] 야곱이 하나님으로 받은 땅의 촉복 자손의 축복 임마누엘의 축복을 약속을 받고 너무도 감격스러워 하나님께 세가지 서원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를 보면 참 아릅답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축복가운데서 겸손하게도 땅의 축복과 자손의 축복은 생략을 합니다. 그저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며...(20절)" 본래 야곱의 성격으로 보면 하나님의 약속을 한자도 놓치지않고 재확인 하였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이미 변화 되었습니다. 겸손한 자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씨스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어느날 제자 한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 기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성자와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프란시스가 대답합니다. "간단하지, 어느날 하나님이 지구를 내려다 보시고 가장 추한 사람이 누구인가, 가장 불결한 삶으로 고통받고 고민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으셨네. 하나님의 눈길이 나에게 머물렸지. 나를 본 순간 하나님은 박수를 치셨다."저 사람이야" 내가 저 사람을 붙들어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놀랍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줘야지"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라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신 이유는 우리가 휼륭해서가 아닐 겁니다. 어쩌면 나약하고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택하셨는지도 모릅니다. 1. 신앙고백 야곱의 서원기도는 세가지 서원으로 이어집니다. 서원이라는 것은 원하는 것을 위해 서약한다는 뜻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앞서 전한대로 하나님께서 야곱과 동행하사 그의 가는 길을 지키주시고 의식주를 해결해주시고 평안히 돌아오게 해주십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바라면서 서약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첫째는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이것은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하나님중심으로 살아가겠다는 삶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교우여러분! 기독교는 철저하게 신본주의입니다. 사람중심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란? 어려울 때든 좋은 때든 의지하고 감사할 줄 아는 신앙입니다. 어려울 때 만난 하나님은 좋은 때도 만나야 합니다. 어려울 때 의지했던 하나님은 좋은 때도 의지해야 합니다. 신명기 말씀에 보면 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노예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에 이르기 까지 40년 동안 훈련을 하였는가?하면 그들이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잊고 제멋대로 살기 때문에 신앙의 연단을 시켜서 마침내 복을 주려 하셨음입니다. 2.예배의 삶 두 번째 야곱의 서약은 22절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그는 베고 자던 돌을 세우고 그위에 기름붓고 그곳을 베델이라 합니다. 베델은 하나님의 전, 하나님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된다는 것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드린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위로하시니 내가 절대로 하나님을 잊지않고 하나님을 심기겠다는 의지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야곱은 그 가족과 함께 베델로 올라가자는 구호를 외치고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철저히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곳이 베델입니까? 여러분이 베고자던 돌덩이를 어느곳에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약속하십니까? 3.십일조 서원입니다. 세 번째 서약은 22절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십일조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십일조 생활은 모세 율법에 성문화된 이후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귀한 축복을 받습니다. 말라기 3장8-12절에 이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기를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히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존 위슬레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일입니다. 목사님은 "첫째 우리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라고 설교하십니다. 그때 교인 중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크게 은혜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이 계속하여 "둘째 우리는 절약하고 저축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더니 그는 얼마나 좋았던지 옆에 앉은 사람의 옆구리를 치면서 "설교 잘하시지요?" 라고 옆사람의 동의를 얻어가면서 크게 칭찬하더란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셋째 우리는 그렇게 벌어 모은 돈을 선하게 사용해야 됩니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그만 혀를 끌끌차면서 "아까운 설교 다 망쳐버렸네"라고 하더랍니다. 프랑스 카뮤는 노벨문학상으로 받은 상금으로 파리근교에 좋은 별장을 사고 그리로 차를 몰고 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노렙평화상을 탄 슈바이쳐나 테레샤수녀는 병원을 세우고 어려운 자들을 돌보아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위와같은 야곱의 세 가지 서약은 오늘 이곳에서 이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야곱의 세 가지 서원이 우리 자신의 서원이 되셔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가운데 십분의 일을 드리셔서 하늘의 창고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은총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질그릇에 담길 보화 2004-03-09 13:17:13 read : 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구약의 말씀: 출애굽기 3: 13 ~ 15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질그릇에 담길 보화 2004-03-09 13:17:13 read : 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구약의 말씀: 출애굽기 3: 13 ~ 15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계신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전서 4:6 ~ 10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 스스로와 아볼로에게 적용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라" 한 격언의 뜻을 우리에게서 배우게 하여, 어느 한 쪽을 편들고 다른 쪽을 얕보면서 뽐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별다르게 보아 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놓고 왕이라도 된 듯이 다스리려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처럼 다스리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으나,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 복음서 16:1 ~ 9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다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주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채 끝내지 않았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서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너희는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하셨다. -------------------------------------------------------------------------------- 오늘 복음서 본문인 마태복음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야고보의 동생인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기록에 보면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입은 옷은 하얗게 빛나게 되셨고, 그리고 그 옆에 보니 모세와 엘리야가 같이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황홀하고 좋아서, 베드로가 예수께 간청을 합니다. “선생님, 아예 여기서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초막 세 개를 지어서, 예수님은 수제자인 제가 모시고, 모세는 야고보가 모시고, 엘리야는 그 동생 요한이 모시겠습니다. 우리 셋이 몸종이 되겠습니다.” 하고 제안을 합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겠습니까? 이 광경은 예수께서 나중에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의 광경과 똑같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 듣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세 제자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같이 산을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산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아픈 군중들, 소외당해서 울고 있는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병자들에게로 가자는 것입니다. 이 얘기가 오늘 마태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산 위에는 광채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광경이 있습니다. 산 아래에는 괴롬과 아픔과 힘든 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산에 머물겠습니까? 산 아래로 내려가겠습니까? 저라도 당연히 산꼭대기에 궁전 하나 짓고 거기서 살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이 대목이 아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굉장히 감동적이었나 봅니다. 이 마태복음 17장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서 칭송받는 화가가 있습니다. 이태리의 유명한 라파엘이라는 화가입니다. 이 화가는 15세기 말에 태어나서 16세기 초반, 그러니까 종교개혁 초반에 르네상스 문명이 한창 부흥하고 있을 때 활동한 화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서른일곱 살에 죽었는데, 재미있는 건 서른일곱 살 되던 해의 생일날에 숨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4월 달에. 그런데 라파엘은 죽기 3년 전에, 당시 교황청으로부터 마태복음 17장에 있는 변화산 상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3년이나 걸려서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라파엘은 바로 그 그림을 완성해놓고서 죽었습니다. 자기 생일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티칸 궁에서 교황이 직접 장례식을 주관하고, 라파엘이 3년간 그린 이 그림을 관 앞에 놓고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장례식에서 이 그림을 해석했습니다. 이 그림에 관한 해석은 나중에 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림 제일 윗부분에는 빛나는 얼굴의 예수가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부분에는 황홀경에 빠져 초막을 짓겠다는 세 제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아래쪽에는 산 아래에 있는 군상들을 그려놓았습니다. 귀신들린 아이, 그 아이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아버지, 배고픈 사람들, 수많은 군중들,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이렇게 삼등분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7장을 그대로 그려낸 그림입니다. 산위에서는 예수님이 율법을 대변하는 모세, 모든 예언자들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를 합니다. 율법과 예언은 구약 전체를 상징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한 모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엘리야, 구약의 전 역사와 신약시대를 여는 예수님과 대화를 합니다. 대화의 내용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장면이 엄청난 태양의 빛과 은빛과 광채로 둘러싸여 있어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그 거룩함을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곳에 초막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맨션을 지어가지고 거기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을 짓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산 아래로, 고통의 현장으로 내려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린 라파엘이 천주교에서는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오늘도 화가 중의 화가로 칭송을 받습니다. 이 그림을 생각하면서 출애굽기의 말씀으로 한번 가보십시다. 오늘 읽어드린 출애굽기 3장에는 비슷한 모습의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호렙 산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가시떨기에 불이 활활 붙어 있는데 가시떨기는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가시떨기 나무에 이상한 불이 타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얼굴, 광채가 너무 빛나서, 너무나 거룩해서,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성서에서 읽는 ‘거룩’이란 인간의 말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의 상상과 표현과 사상을 뛰어넘습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곳은 진실로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신을 벗고 엎드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서 너희 백성에게로 가라.” 그때 아마 모세도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한 그 산에 머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노역과 곤고함과 위협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런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고 하시는데, 그들이 당신을 보낸 분이 누구냐고 물을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왜 내 이름을 묻느냐 그 말입니다. 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왜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만들려고 그러느냐? 인간의 이데올로기에 나를 맞추려고 하느냐? 왜 인간의 언어로 나를 규정하려고 하느냐? 나는 나다. 그런 뜻입니다. I am that I am. 나는 나다. 인간의 역사와 상관없이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모세가 청합니다. “그래도 백성들이 물을 것 아닙니까? 당신의 하나님은 누구냐고.”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에서 경험한 하나님, 그들의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신 하나님, 그분을 만났던 민족과 가정과 인간 개개인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만 말하라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서 휘황찬란하게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땅에 내려와서 우리와 만난 하나님을 말해야 합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이스라엘 가운데 스스로를 나타내셨고, 예수도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제가 아까 변화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변화산 사건이 있기 바로 전인 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그 고백을 하고서 그 뜻을 모른 채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라파엘은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십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신 하나님.” 그로부터 250년이 지난 뒤에 우리에게도 아주 유명한 음악가가 한 명 등장했습니다. 그 음악가를 유명한 한 신학자가 소개한 적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적 지도자라고 하면 마르틴 루터를 떠올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20세기에 전 세계의 신학을 이끌었던 사람이 누구냐 물으면, 여러 사람 중에서도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칼 바르트를 들게 됩니다. 바르트가 1956년, 70회 생일을 맞았을 때, 마침 그해에 프랑스 파리에서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음악회에서 당대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에게 헌사를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바르트는 이런 헌사를 드립니다. 제가 헌사 내용 중 몇 개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신학을 하는 나를 이끌어준 안내자는 다른 어느 신학자가 아니고 모차르트 당신입니다. 당신의 음악은 강요하지 않고서도 나를 감동시켜서 당신 안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당신은 하늘과 더불어 재미있게 노래하는 어린아이처럼 노래를 하는데, 나는 그 노래에 흠뻑 빠져듭니다.” 바르트의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자기의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총과 은혜의 바다, 엄청난 바다 속에 푹 빠져서 기쁨을 느끼고 있는데, 이런 희열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모차르트 당신은 지금 하늘에 있겠지요?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찬양을 드릴 텐데 틀림없이 바흐의 곡을 연주하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이게 유럽의 정통입니다. 경건하고 웅장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성가, 교회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만든 성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이 끝나고 나면 천사들끼리 모여서 신나고 기쁜 마음으로 자기들끼리 노래하고 춤출 텐데 그때는 분명히 모차르트 당신의 곡을 연주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 연주를 듣고 오셔서 함께 어울리시겠지요. 하늘나라에 가서 그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오늘 당신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렇게 느낍니다.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태양은 장렬히 빛납니다. 그 태양을 쳐다봐도 제 눈이 부시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둥근 모양을 하고 온 땅을 비취고 있지만, 땅을 누르지도 않고 짓밟지도 않습니다. 땅은 하늘 아래 있지만 하늘에 저항하거나 반란할 일 없이 편안합니다. 하늘도 평안하고, 땅도 평안합니다. 땅 속에는 암흑과 혼란과 죽음과 지옥이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평안을 깨지 못합니다. 좌와 우와, 상과 하가 서로간의 경계를 지키면서,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경계를 지키면서 서로 만나니, 이 자유와 평안이 하늘과 땅에 넘쳐납니다. 당신은 그것을 음악으로 보여줍니다. 마치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으로 서로 자유하면서 만나는 은총의 바다, 이 바다를 당신을 음악을 통해 봅니다.” 이렇게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까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전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트도 이 이야기를 합니다. “모차르트여, 당신은 광채 가운데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산꼭대기에 서 있었던 예수의 이름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지요? 아뉴스 데이(Agnus Dei). 그 하나님의 어린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주님, 세상 죄를 없애주시는 주님이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당신은, ‘종교개혁을 한 지 2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개신교 신자들’이라며 욕한 일이 있으시죠. 산 위에서 광채에 휩싸여 부활의 영광을 보이셨던 그분, 그분은 세상 죄를 대신 지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이라 했던 당신의 말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하고 헌사를 바쳤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광채로 뒤덮인 산에 머물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늘의 영광은 땅 속에서 빛나야 하며, 하늘의 자유는 땅 속에서 꽃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생명은 죽어가는 세상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피워낸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진리입니다. 오늘 라파엘이 그렸던 마태복음 이야기, 모차르트가 노래했던 하나님의 어린양 이야기와 오늘 서신서 본문인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로 관통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셔서 인간은 알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분이지만, 그러나 그분은 썩어빠진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스스로 모든 죄악을 걸머지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질그릇처럼 깨질 수밖에 없는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우리의 보잘것없는 가정과 역사 속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보화가 담깁니다. 하늘의 보화는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하늘까지 가지 않아도 땅 위에 널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질그릇이라도 좋습니다. 이 보화를 담으십시오!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따라 고통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음악도, 미술도 신학도 그것을 증언합니다. 하늘의 영광은 땅에 임하고 싶어 하십니다. 땅을 구원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질그릇 된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하늘을 너희 그릇에 담아라. 우리 함께 구원의 길을 가자. 박종화 목사
축복을 얻는 비결 2004-03-09 13:01:08 read : 1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명기 6장 4-15절 < 광야 40년 역사의 교훈 > 성경 민수기(民數記)는 말 그대로 '백성들의 수를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 2장을 보면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의 싸울 수 있는 20세 이상 된 남자가 603,550명이었고 하나님의 일을 맡은 레위인들은 1개월 이상 된 남자의 수가 22,273명이었습니다(민 3:43). 그리고 광
축복을 얻는 비결 2004-03-09 13:01:08 read : 14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신명기 6장 4-15절 < 광야 40년 역사의 교훈 > 성경 민수기(民數記)는 말 그대로 '백성들의 수를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 2장을 보면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의 싸울 수 있는 20세 이상 된 남자가 603,550명이었고 하나님의 일을 맡은 레위인들은 1개월 이상 된 남자의 수가 22,273명이었습니다(민 3:43). 그리고 광야생활 40년 후에 민수기 26장을 보면 그 수가 601,730명으로 1,820명이 줄었고 레위인은 23,000명으로(민 26:62), 727명이 늘었습니다. 이 숫자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12명의 가나안 정탐꾼 중에 10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왜 출애굽 시켰느냐?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게 낫다!"고 불평해서 20세 이상 된 남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광야에서 죽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민 26:65). 그래서 약 40년 동안 20세 이상 된 남자 603,548명이 이런 저런 이유로 신비하게 죽어갔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하는 말에는 미래의 축복과 저주가 다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입으로 "나는 가나안에 갈 수 없다!"고 하면 가나안에 들이지를 않습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게 하십니다. "나는 행복할 수 없다!"고 하면 행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죄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을 잃지 않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어떤 모습으로 주어지든지 반드시 있습니다. 때로는 더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죄 때문에 그 축복이 현저히 삭감되는 것도 일종의 형벌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는 있지만 죄에 대한 형벌은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약 40년 동안 603,548명이 죽었지만 전체 20세 이상 된 남자는 1,820명밖에 줄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예 근성을 가진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은 다 죽이셨지만 그래도 새로운 믿음의 일꾼을 그만큼 일으키셔서 가나안 땅을 준비하게 하시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아무리 광야와 같은 환경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실망하지 않고 전진하면 반드시 가나안의 행복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인구가 줄었지만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의 인구는 오히려 늘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지파였고, 유다 지파는 광야 행진 때 제일 앞장서서 행군하며 어려운 일은 도맡아서 했던 지파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유다 지파는 거대한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가장 험지인 헤브론 땅을 달라고 했던 헌신과 도전 정신이 넘치는 지파였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앞서 헌신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은 좋아하지만 문제는 무엇이 축복이고, 어떻게 축복 받는지 모르고 축복만 받겠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축복 받는 원리는 외면한 채 축복에 집착하니까 마음의 허전함과 불안함은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새 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그 불안함 속에 사단은 틈타게 됩니다. 점쟁이에게 가면 항상 하는 말이 "얼굴에 마(魔)가 꼈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대부분 놀라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눈을 감고 중얼중얼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말합니다. 그 말 패턴이 거의 유사합니다. "남쪽으로 가지 말라! 물을 조심하라! 무덤을 옮겨라! 집터가 쎄다! 몇 년 안에 초상을 치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백 만원 들여 굿을 하게 하고, 부적을 사게 합니다. 그런데도 점치는 것 좋아하는 사람은 사사건건 점을 칩니다. 왜 그렇게 점에 매달립니까? 가장 큰 이유를 두 가지 들라고 하면 하나는 죄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욕심 때문입니다. 죄와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과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 축복을 얻는 3대 비결 > 오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방황한 후 축복의 땅 가나안을 눈 앞에 두게 되었을 때 모세가 죽기 전에 행한 고별설교의 일부분입니다. 이 고별설교에는 우리가 축복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3가지 비결이 나와 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축복 받는 3가지 비결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4절과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은 오직 하나님만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우상을 반드시 빼앗깁니다. 돈을 우상으로 삼으면 돈을 빼앗기고, 권력을 우상으로 삼으면 권력을 빼앗기고, 자녀를 하나님보다 앞세운 우상으로 삼으면 자녀도 빼앗깁니다. 그런데 오늘날 돈과 권력과 자녀보다 더 무서운 우상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자기를 지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우지 않으면 진짜 능력 있는 삶, 진짜 축복된 삶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도의 스승인 비노바 바베는 사람들이 길에 배설한 분뇨 치우는 일을 일종의 예배와 기도로 여기고 단 하루도 그 일을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꼭 해야 하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은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에서도 청소하는 일, 설거지하는 일, 남이 싫어하는 천한 일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축복의 재료입니다. 왜 흐르는 강이 썩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앞 물결이 뒷 물결에게 자리를 내주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기를 지울 줄 알아야 영혼이 건강하게 되고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도 맑아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에고(ego)'가 살아있는 한 결코 진정한 축복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시험과 문제를 허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에 알튼 링크 레터란 박사 학위를 열 개 가진 천재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고문으로 디즈니랜드의 모든 설계를 계획한 분입니다. 대통령도 그를 귀하게 여겼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습니다. 그렇게 부와 명성을 얻으면서 그는 어릴 때부터 믿던 예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사랑하는 14세 된 딸이 가출하며 이런 편지를 남겼습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살게요." 그리고 며칠 후에 딸의 자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딸의 시체를 안고 통곡했습니다. 그는 딸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떠났더니 딸도 자기 곁을 떠났다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그는 교회로 돌아왔고, 그후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상처를 극복하고 전보다 더 기쁘고 보람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주 신앙강연을 다녔는데 그때마다 네 가지 성공 비결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 네 가지 성공비결이란 겸손, 인내, 용기, 하나님의 인도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우리는 있을수록 더 겸손하고, 엄청난 시련이 있어도 인내해야 하며, 내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용기 있게 일어서고,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앞세우며 살아야 합니다. 축복을 얻는 비결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전심으로 사랑할 때 진정한 축복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도 예뻐지고, 생각도 예뻐지고, 얼굴도 예뻐질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축복은 결코 피해가지 않을 것입니다. 웃어도 복이 오지만 사랑하면 반드시 복이 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멀리 하고 진정한 축복을 받는 길은 없습니다. 17세기 미국 신앙부흥 운동을 일으킨 요나단 에드워드 부부는 12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이백 년 후에 보니까 그들의 후손 팔백 명 중에 600명 이상이 미국을 움직이는 정치가와 경제인 등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종학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가문이 되었는가?" 하고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유전자 때문도 아니고, 교육 때문도 아니고 사랑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산다면 그처럼 위대한 가문의 창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본문 6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이 말은 말씀 중심적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말씀 중심적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씀 중심적으로 살려고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바로 미래의 축복의 씨앗이 됩니다. 그 말씀 중심적인 삶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7절 말씀대로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치는 삶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이자 최대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이 선물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자녀들을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에고(ego)'에 부모들이 따라갑니다. 아이들을 조금만 야단치면 어떤 어머니는 말합니다. "왜 남의 아이를 기죽이세요." 심지어는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 자기 자녀를 야단쳐서 기분 나쁘다고 교회에 안 나오는 분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상하고 불행한 행동이 그런 행동입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의 영혼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래서 야단을 친다면 "내가 부모로서 져야 할 십자가를 저분이 지고 있구나! 정말 감사한 일이다. 젊은 선생님이지만 정말 존경해 드려야지!"라고 생각해야 정상이 아닙니까? 부모들은 어린아이의 기를 살리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올바르게 키우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8절과 9절을 보면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명령합니다. 그처럼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부담이 되는 것 같아도 그것이 인생 전체의 짐을 더는 길이고, 말씀을 멀리하면 부담은 없는 것 같아도 인생길은 더욱 고단하게 됩니다. 요새처럼 시대가 불안하고 혼란할 때에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 속에서만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그 사람과 한참 상담을 한 후에 처방을 내렸습니다. "특별한 증세는 없고 안정이 필요하니 조용한 산에서 며칠 쉬세요." 그리고 편지 봉투를 하나를 주며 "산에서 뜯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산에 가서 편지를 뜯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Listen carefully(신중히 들어보시오)." 그래서 신중히 들어보니까 바람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등이 귓가에 들렸습니다. 그런 소리 속에서 이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동시에 자기의 병을 자기의 병을 발견했습니다. 자기의 병은 '마음 문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 병'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면 불안은 떠나지 않고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불편한 환경이고 불행한 환경이라도 말씀을 붙들고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범인들이 인질을 붙잡고 돈을 요구하다 대개 돈도 못 얻고 결국 총에 맞아 죽습니다. 남미의 어떤 사람은 성당에 들어가 마리아 상을 인질로 붙잡고 돈을 요구하다가 결국 감옥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을 붙잡고 돈을 요구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마치 내 행복과 축복을 위한 인질처럼 끈질기게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가장 복된 길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말은 이렇게 하고 행동은 저렇게 하는 믿는 사람의 이중적 생활이 전도를 얼마나 막는지 모릅니다. 신경질을 잘 내는 어떤 교인에게 누군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너는 신경질이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말은 말씀을 장식처럼 달고 다니라는 말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은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10-12절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고 배부르게 하시면 그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인가 조금 가지게 되었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다면 그 가진 것은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축복을 받았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한다면 그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한 때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일 년에 몇 번밖에 목욕탕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몇 개월 묵은 때를 벗길 때 본전 생각난다고 이태리 타월로 심하게 비벼 몸 전체가 빨갛게 되었던 일이 바로 얼마 전의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았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말 잘한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잘 믿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지난 5천년 역사 중에 어느 때보다 잘 살게 되었는데, 저는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금방 불평이 나옵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하나님은 모든 축복을 앗아가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범사에 감사할 때 지속적인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또한 어떤 것을 잃어도 감사하는 삶만은 잃어서는 안됩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에도 찬미하고 가셨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죽음의 길에서도 찬미하고 갔는데, 어떤 분은 십자가는커녕 변변치 않은 개나리 봇짐 하나만 져도 불평과 원망이 많습니다. 그것은 받은 은혜를 너무 적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크게 생각하면 어떤 고통에서도 감사가 나올 것입니다. 어떤 분은 두 아이가 다 말썽꾸러기입니다. 한 아이는 수시로 가출을 합니다. 또 한 아이는 집에는 붙어있지만 공부가 가장 밑바닥입니다. 이쯤 되면 웬만한 가정에서는 죽느니 사느니 하는 소리가 나올 만한데 그분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옛날에 몸을 팔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자기의 허물을 생각하면 남편을 만나 결혼까지 하고 자식도 얻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했기에 어떤 상황도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보고 감사를 체질화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감사는 축복을 진짜 축복으로 만들고 회복과 치유를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10명의 문둥병자가 다 치유 받았지만 그 중에 한 명만 감사하러 왔습니다. 9명은 육신은 치유 받았지만 영혼과 인격은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러 온 한 명은 영혼과 인격까지 치유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는 삶은 치유의 완성이요, 축복의 완결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도 닷새만 되면 주인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을 위해 "비전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비전을 가지는 삶'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초적인 것이 바로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 축복을 나누며 사십시오 > 오늘 축복을 얻는 비결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받은 축복을 이웃과 나누는 자세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진정한 내게 주어진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와 구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최대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분야입니다 전도란 복음을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복음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과 함께 축복도 나눠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진리는 "내 것을 퍼내지 않으면 반드시 내 안에서 썩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내 것을 나눠주어야 내가 더 깨끗해지고, 결국 더 많이 얻게 됩니다. 축복을 나눠주면 나눔 받는 사람도 복을 받지만 나눠주는 사람이 더 복을 받게 됩니다. 독일의 어떤 수도원에 무대 체질이 아닌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설교 테스트가 있는데 이 수도사는 수도원장에게 설교 시험만은 빼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장은 이 젊은 수도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설교를 시켰습니다. 난생 처음 설교하던 날, 강단에 올라가 수많은 동료들의 얼굴을 훑어보니 도저히 설교할 자신이 없어서 물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지 아십니까?" 모든 청중들이 고개를 흔들며 모르겠다고 하자 이 수도사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히 사시길 바랍니다." 하고 강단을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끝내자 원장이 이 수도사에게 다음날 다시 설교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강단에 올라간 이 수도사는 다시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지 아십니까?"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시를 하니까 이 수도사는 "여러분이 다 아시는데 제가 무슨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까? 아는 대로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하고 강단을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원장이 펄펄 뛰면서 다음날도 또 하라고 했습니다. 다음날에도 이 젊은 수도사는 강단에 올라서자마자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지 아십니까?" 그러자 절반은 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절반은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 수도사는 "아는 분은 모르는 분에게 가르쳐주시길 바랍니다." 하고 강단을 내려왔습니다. 그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주라!"는 이 한 마디가 그 수도원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문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나누어주시기를 원합니다. 또한 '축복을 받은 자'가 '축복을 받아야 할 자'에게 받은 축복을 나누어주시기를 원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함으로 축복 많이 받으시고 그 받은 축복을 나눠주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롬8:28-30 2001-12-04 15:36:41 read : 8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무를 쪼아서 벌레를 잡아 먹는 딱다구리를 잘 아실줄 압니다. 딱다구리는 나무를 쪼는데 1초에 15번을 쫀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초에 15번. 이것은 기관단총의 두 배에 해당하는 횟수라고 합니다. 한편 1초에 15번을 쪼으려면 아주 빠른 속도로 머리가 움직여야 하는데 딱다구리의 머리가 움직이는 속도는 총알속도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롬8:28-30 2001-12-04 15:36:41 read : 8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무를 쪼아서 벌레를 잡아 먹는 딱다구리를 잘 아실줄 압니다. 딱다구리는 나무를 쪼는데 1초에 15번을 쫀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초에 15번. 이것은 기관단총의 두 배에 해당하는 횟수라고 합니다. 한편 1초에 15번을 쪼으려면 아주 빠른 속도로 머리가 움직여야 하는데 딱다구리의 머리가 움직이는 속도는 총알속도의 두 배이상의 빠르기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 총알의 두 배 속도로 1초에 15번씩 움직이려면 머리가 감당해야 할 충격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자동차가 갑자기 정지하려면 많은 충격이 가해지는데 자동차보다 훨씬 빠른 속도, 아니 총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1초에 15번씩 방향을 바꿉니다. 그러니 머리 안에 생기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딱다구리 부리와 머리 뼈 사이에 이제까지 인류가 고안해 낸 그 어느것 보다도 우수한 충격흡수장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딱다구리에게는 머리가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유지될 수 있도록 고안된 특수근육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일 같이 수십년 동안을 나무를 쪼아대도 뇌진탕 하나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나무를 쪼아서 그 안에 벌레를 발견하면 액체가 묻어있는 긴 혀로 벌레를 끄집어 냅니다. 그 런데 딱다구리 입 공간은 이 긴 혀를 둘 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부리 밑에 있는 작 은 구멍을 통해 두개골 위로 돌려서 말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 용합니다. 만일 입에다 그 큰 혀를 다 보관하려면 딱다구리는 예쁜 새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입 니다. 기독교 주간지 중에 '크리스챤 저널'이라는 신문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문 중의 하나인데 매주 '창조과학컬럼'이 있어서 신비스러운 자연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신문이 오면 이 '창조과학컬럼'을 빠짐없이 늘 읽고 있습니다. 딱다구리에 대한 이야기도 이 컬럼을 통해서 알 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온도계를 가진 새가 소개 되었는데 호주에 사는 Mallow fowl이라는 새는 바깥 온 도를 직접 자기 몸으로 재면서 알들을 낙엽 밑에서 부화시킨다고 합니다. 하여튼 저는 매주일 이 컬럼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창조섭리에 감탄하곤 합니다. 이 신비하게 창조된 동물세계를 늘 접하며 지내다가 한번은 우리 인간의 신비는 어디에 있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도 자세히 살펴보면 꽤나 신비스럽게 창조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반동물과 비 교하면 그 신비함이 덜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빨리 뛰어봤자 말이나 개보다도 못하고, 제아무리 눈과 귀가 좋아봤자 고양이나 올빼미 보다도 못합니다. 지구력이 있어봤자 사막의 낙타보다도 못합니다. 사실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어느 동물보다도 약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오래 있다가 태어 나고 태어난 후에도 제 발로 서기에는 1년 이상이 걸리고 걷기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고 20년 이 지나야 겨우 성인이 되서 혼자 독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생각해보면 가장 신비스럽지 못하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간 같습니다. 단지 머리가 좋다는 이 유 하나로 어찌보면 만물의 영장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에게도 신비한 축복이 다른 동물처럼 주어져 있지 않을까요? 인간이 누리는 신비스러운 축복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본문말씀을 통해 한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임한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를 만끽하며 살았던 사도바울은 다 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 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스러운 세계를 자신의 삶 안에서 누렸던 분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되어졌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신비스럽게 조화를 이루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신체적 조건 가운데서 신비한 축 복을 찾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 가운데서, 인생 가운데서 임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축복을 발견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창 조주의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곧 인간의 신비스러운 축복은 일반 피조물과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 는 신비스러운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모든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 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의 옷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풍성한 영광 가운데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독특한 영광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엄청난 인생의 신비함을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크리스챤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로 인해 온 세상에 새로이 만들어 지는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가 크게 영광을 받습니다. 아울러 크리스챤 각자가 날로 자기에게 주시는 영화로 덧입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리는 축복된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된 삶을 누리시고 계십니까?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낙관적인 사람이었고 다른 아들은 염세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교육시킬 겸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주었습니다. 비관적인 아들 방에는 많은 좋은 장난감을 채워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낙관적인 아들에게는 거름 섞인 흙더미로 방을 가득 채워 주었습니다. 두 아들이 크리스마스 아침에 각기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장난감이 가득찬 방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아버지는 문을 열고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왜 울고 있어? 장난감이 마음에 안들어?" 아들이 대답합니다. "저는 이 장난감이 좋아요.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친구들이 와서 놀거예요. 그 리고 그 아이들이 이 장난감을 망가뜨릴거예요. 또 어떤 아이는 이 장난감을 훔쳐 갈거예요." 아버지는 우는 아들을 달랜 후 나왔습니다. 잠시 후 거름이 가득 찬 방에서 기뻐 웃는 소리가 흘러 나옵니다. 문을 열어보니 아들이 거름더미 위에서 거름을 손에 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 다. "너 뭐하니?" 아들이 대답합니다. "흙거름 더미가 이처럼 있는 것을 보니 조랑말이 어디엔가 있 을거에요." 거름 흙더미를 보고 어디엔가 조랑말이 있을거라 기뻐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겠습 니까? 아버지가 조랑말을 선물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장난감을 손에 쥐고 그 장난감을 갖고 놀기는커녕 언젠가는 없어지겠지 생각하며 애태우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을 사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하여 신비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빈 흙더미를 보면서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 시니 분명히 이 빈 흙더미 사이에 보물을 숨겨 놓으셨을꺼야!'라고 믿는 자들이 아닐까요? 거름 흙더미를 손에 쥐고 기뻐하는 자가 바로 참으로 인생을 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 습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신비한 삶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흙 거름더미를 보면서 모 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고 기뻐할 때 우리는 신비한 삶에 동참케 됩니다. 우리는 신비한 삶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 동물들은 신비한 축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믿음으 로... 그러므로 우리는 장난감을 손에 쥐었을 때 물론 감사하여야 합니다. 아울러 빈 흙더미를 손에 쥐고도 더 큰 선물을 기대하며 기뻐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이러할 때 진정코 신비스러운 삶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지난주 Littleton, Colorado의 작은 마을에서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 생겼습니다. 두 수재고등학 생들이 폭탄을 장치하고 자동소총으로 13명의 학생을 즉사시키고 많은 학생을 부상 입혔습니다. 저녁 어느 뉴스 프로그램에서 아들을 잃은 한 흑인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이것저것 대담한 후 방송인이 앞으로 어떻게 슬픔을 극복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금방 대답하기를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나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그 이유가 있는 줄 압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지 이틀 만에 그는 벌써 이와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분명히 아들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슬픔의 거름더미 사 이에 하나님의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는 분명히 놀라운 선 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아니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보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또 다른 아들을 얻을 수 있을까요? 잃은 아들로 인해 부귀영화를 얻게 될까요? 사도바울은 본문 29절에서 이 분이 받을 축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저는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남아있는 두 자녀가 있고 또 사랑하는 부인이 있습니다. 아마도 언젠가는 남은 4가족이 모두 전보다 더 그리스도에 가까워진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서 주 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멋진 가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상상할 수 없이 멋진 사람들 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저의 이 생각을 초월한 아름다운 축복이 그 가정에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것보다 더 신비스러운 일이 어 디 있습니까? 자연세계를 창조주께서 신비스럽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그분의 신비스러운 모습에 직접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처럼 되는 길의 시작은 주어진 흙 거름더미로 인 해 감사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영국의 성녀 Julian of Norwich라는 분이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분을 Saint로 추대하였습니 다. 이분은 마지막 인생 길을 교회 안에 작은 골방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많은 사람을 위로하며 보냈습니다. 이 분은 남들 보기에 구차한 삶을 살았는데 이 분이 늘 보는 사람들에게 하여준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거야(All will be well)."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거야."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말을 하였습니다. 이 단순한 신앙이 그를 위대한 성녀로 만들어 갔 던 것입니다. 그를 그리스도를 닮은 여인으로 가꾸어 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그리스도의 신비에 동참하는 길은 아주 쉽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꺼야 (All will be well)" 되뇌일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지난주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지난 주일도 예수님을 닮아 가셨 습니까? 아니 이번 주일은 어떻게 보내실 것입니까?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고 기뻐할 때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세상 가운데 새로운 그 리스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으로 주님을 닮아 가는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본문 30절에 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 시고 의롭게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하나하나 특유한 영광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영광은 신비한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믿으며 주 어진 흙 거름더미로 인해 감사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신비스러운 축복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ay)라는 유명한 성서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성서 주석은 세계에 서 가장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귀가 거의 먹었었습니다. 보청기를 껴야 겨우 이웃 사람의 말을 알아듣습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은 바클레이(Barclay)가 그처럼 훌륭한 성서학자가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보청기만 빼면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잡소리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요란한 아무 소리도 그의 귀를 통해서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는 그로 인해 도 리어 아무 잡념없이 성서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바클레이는 자기의 흙 거름더미를 감사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위대한 성서학자 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귀가 안 들리는 것이 그로 인해 도리어 영화로운 삶을 살게 했던 것입니 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하나님은 영화로운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길 원하십니다. 영화로운 삶은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흙더미를 손에 들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비한 축복으로 갚으십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장난감이 주어집니다. 때로는 흙더미가 주어집니 다. 우리는 장남감도 필요하고 흙더미도 필요합니다. 장난감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기쁨으로 감사 드리십시다. 흙더미가 주어졌을 때에도 우리는 더욱 감사를 드리십시다. 신비한 축복의 삶이 우리 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피아노에 하얀 건반도 있어야 하지만 까만 건반도 있어야 합니다. 하얀 건반, 까만 건반이 아름 답게 조화를 이루며 연주될 때 신비스러운 음악이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까? 피아노 연주가가 까 만 건반을 싫다고 건드리지 않고 하얀 건반만 건드린다면 그 결과는 어떻까요? 우리의 삶에서 좋은 일, 궂은 일을 기쁨과 감사로 맞이하십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신비스러운 삶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신비스러운 축복의 삶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신비한 축복의 선물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을 자들에게는 모든 것 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롬12:1-2 2001-11-30 18:44:31 read : 10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남북 전쟁 때에 링컨 대통령은 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져서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 집무실에서 하나님께 두 세시간씩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열심히 기도를 하는 모습을 장관들이 보고서 그들도 집무실 밖에서 기도합니다. 대통령이 기도를 마치고 집무실에서 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롬12:1-2 2001-11-30 18:44:31 read : 10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남북 전쟁 때에 링컨 대통령은 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져서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 집무실에서 하나님께 두 세시간씩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열심히 기도를 하는 모습을 장관들이 보고서 그들도 집무실 밖에서 기도합니다. 대통령이 기도를 마치고 집무실에서 나오자 장관들이 송구한 마음으로 링컨에게 말을 합니다 “우리도 밖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이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요? 나는 지금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섰는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참 유명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기도하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2절을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아멘. 첫째로, 하나님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세상의 방법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생각을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하고, 공부를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하고, 일을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소속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고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인데, 세상 사람들은 반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며 물질 중심으로 삽니다. 욕구 충족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대단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열매가 다릅니다. 가치가 다릅니다. 근본 목적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따라갑니다. 물결치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살아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고래라고 해도 죽으면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떠다닙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송사리라고 해도 생명이 있으면 거대한 파도를 뚫고 자기가 원하는 목적지로 갑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심령이 죽었기 때문에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세상의 파도치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들은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전 세계를 방황하며 살아왔던 민족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쳤고,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성경에서 먹지 말라고 한 음식은 먹지 않았고, 이방인의 풍습도 따르지 아니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음식만을 먹었고,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문화를 바꾸었습니다. 누가 그러대요. 비행기를 타면 유대인들이 먹는 음식이 제공될 정도가 되었을 정도라고요. 세상이 이스라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인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답답해 보이고 세상 물정 모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Thanksgiving 연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연휴 기간에도 주일에는 자기가 섬기는 제단에 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것이 앞뒤가 꽉꽉 막혀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답답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알게 되겠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고, 예배가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참된 승리자는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인생을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명예와 권력과 부를 가졌어도 승리자가 아닙니다. 혹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을 승리한 인생이라고 불러 줄지도 모르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은 죽을 때에 나타납니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임종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세상에서 큰 소리를 치고 권력과 명예와 물질을 누리며 자기만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더 큰 권력을 누려보고, 더 높은 명예를 얻어 보고,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고 옳지 못하게 살았던 것을 후회합니다. 자신은 인생의 승리자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서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야단 맞을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당당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았기에 하나님 만나는 것이 기다려집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제가 하나님께 먼저 갑니다. 우리 자식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해 주세요. 천국에서 뵙지요.”이렇게 말하고 죽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바울은 죽기 직전에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앞으로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며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있고 당당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자식은 부모를 기쁘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은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화없이 새로운 출발이 없습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빛으로 나와야 새로운 출발이 있게 되고,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와야 새로운 출발이 있게 됩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마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본질상 죄인의 자식인 우리가 빛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있어서 큰 기쁨은 아이가 자란다는 것입니다. 성장하여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입었던 옷이 금년에는 맞지가 않습니다. 작년에 신었던 신발이 금년에는 작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변화하는 것을 부모는 굉장히 좋아합니다. 모든 부모는 아이가 커졌기 때문에 옷을 사는 것과 신발을 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커졌다고 변화되었다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부모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한 부모는 진짜 부모가 아닙니다. 가짜 부모입니다. 아이가 성장하여 변화될 때에 부모는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아이가 커 가면서 생각이 자라고 말이 달라질 때에 부모는 더 없이 좋아합니다. 아이 수준에서 멋있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좋아하는 지 모릅니다. 여느 아이들이나 모두 그렇게 말하는데 말입니다. 어떤 부모는 우리 가문에 천재 났다고 말을 합니다. 이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큰 기쁨은 성도들인 우리가 자란다는 것입니다.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며 예배를 드리며 믿음이 자라고, 기도가 자라고 헌신이 자랍니다. 그래서 작년에 입었던 믿음의 옷이 금년에는 맞지 않습니다. 작년에 드렸던 기도를 금년에 보니까 부족합니다. 작년에 드렸던 헌신이 금년에 보니까 아무것도 않게 보입니다. 작아 보입니다. 그만큼 내 자신이 큰 것입니다.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근심하실 때는 믿음이 자라지 않아서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볼 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정말로 답답한 사람은 변화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5년 10년 믿어도 그대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믿음이 자라지 않아서 성도들과 영적인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이야기나 연속극 이야기를 하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을 하지만,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시간이 지나가도 기도의 수준이 만날 그대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신이 제자리걸음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맨날 10분 늦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주 나오고 한 주 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고 늘 그타령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답답합니다. 갑갑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믿음이 자라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입니다. 심한 사람은 한번 연구할 필요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모습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대로 있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솰라”라는 것인데, 이 말은 “신의 뜻,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 자체는 굉장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인솰라” 그럽니다. 사람을 만나도 인솰라, 비가 오지 않아도 인솰라, 이사를 가도 인솰라 그럽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아요.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늦게 와도 인솰라, 가난한 생활을 해도 인솰라 그럽니다. 한 남자가 여러 명의 부인과 함께 사는 일부다처제인데, 그것도 인솰라 입니다. 어느 가정은 짐승과 함께 살면서 짐승 냄새를 맡고 살면서도 인솰라 그럽니다. 가난을 이기려고 하지를 않아요. 가난을 퇴치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 된다고 해서 인솰라 그러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인간의 무능함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게을러서 변화되지 않고 인솰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변화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에 무엇이든지 알고 보면 쉽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변화 받기를 원하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됩니다.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 예배에 집중하면 되고, 찬양을 하면 찬양을 뜨겁게 부르면 됩니다. 성경을 읽으라면 성경을 읽으면 됩니다. 모이자고 하면 하나님을 위한 모임에 시간을 투자하면 됩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변화를 받는 것은 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간과 생각을 자기 중심에다가 맞추어 놓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하나님이 동조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압니다. 열매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뜻에 맞추는 것은 미신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을 혼동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마음에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했다고 하면서 영혼이 즐겁고 기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어느 길을 선택한 뒤에 그 길을 갑니다. 그런데 마음이 불안합니다. 영 좋지 않은 예감이 듭니다. 마음이 찜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손해냐 이익이냐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익을 보면서도 마음이 찜찜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손해를 보면서도 마음이 즐겁고 기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은 이렇게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있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는 새생명 축제가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창립 2주년을 맞이하여 계획하고 있는 부흥회입니다. 이번 축제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이사야 49장 8절의 말씀처럼 이번 주는 은혜의 때입니다. 새생명 축제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은혜를 받고 변화되기 위하여 몇 가지를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생각해야 합니다. 어릴 때에 보면 장사하는 분들이 동네마다 다니면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엿장수도 그렇고, 옷장수도 그러한 말을 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입니다. 도시에는 상점이 있어서 어느 때든지 가기만 하면 물건을 구입할 수가 있지만, 시골에는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장사하는 분들이 물건을 가지고 와야만 구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그 기회에 와서 물건을 사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말이 이상한 것 같지만, 좋은 교회에서 하는 이러한 특별한 집회는 ‘날이면 날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날이면 날마다 이런 기회를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2년 동안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귀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벌써부터 기도하고 홍보하고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집회에는 삼일입니다. 그것도 주일을 제외하면 이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번 축제에는 지금부터 일정을 조정해야 합니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 때에 가서 바빠서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하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회를 준비하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각오를 단단히 하면 할수록 사탄도 역시 각오를 단단히 합니다. 사탄은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작전을 세웁니다. 그래서 이일 저일을 만들어서 여러분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사탄의 작전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기회를 선용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주신 찬스에 강합니다.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 기회를 붙잡아 풍성한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겠지만, 목사와 성도들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외부에서 은혜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본 교회의 교우들과 목사와의 마음이 하나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집회는 외부에서 오는 강사가 아니라, 담임목사가 강사입니다. 보통의 교인들은 외부에서 강사가 오면 신경을 많이 쓰고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본 교회의 담임목사가 집회를 인도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이번 집회는 교인들과 목사의 마음이 어느 정도로 하나가 되었느냐에 따라서 새생명축제의 은혜가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으실 지 모르지만, 저는 23살에 처음으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인데,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3일 동안 집회를 계획하고 저를 첫날 강사로 세웠습니다. 첫날은 제가 강사이고, 둘째 날은 김성일 장로님이 강사였습니다. 이 분은 당시에 권사님이셨는데, 대우그룹에 이사이시면서 소설도 쓰시는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셋째 날은 이름은 잊었는데, 이름 있는 어느 방송 작가였습니다. 저를 제외한 강사들이 쟁쟁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집회에 제가 첫날을 맡았습니다. 대체로 집회는 첫날에 좌우됩니다. 첫날 강사가 죽을 쑤면 둘째 날 교인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있어서는 부담이 더했습니다. 그 때에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준비된 원고를 가지고 읽고 또 읽고 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면서 4-500명은 되어 보이는 교인들이 얼마나 아멘을 열심히 하고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매주일 마다 훌륭하신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23살의 학생 전도사가 와서 하는 설교에 뭐가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마음의 자세가 준비 되어있었기에 아멘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설교하는 이나 말씀을 받는 이나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집회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본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것이 처음이 아닙니다. 먼저 담임을 하던 교회에서도 했습니다. 그 때에 교인들이 얼마나 부흥회를 열심히 준비했는지 모릅니다. 담임목사가 강사가 되어 부흥회를 한다고 장로님과 속장들이 주축이 되어 담임목사를 위하여 새벽마다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또한 전교인이 빠지지 않게 연락하고 열심히 참석하였습니다. 어느 교인은 직장에 휴가를 제출하고서 집회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에 어느 강사가 와서 인도하는 부흥회보다도 은혜가 넘쳤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나 말씀을 듣는 교인 모두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새롭게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새생명축제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각자 맡은 사역이 있습니다. 한 사람도 소홀히 하지 말고 책임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후에는 축제 전단지를 가지고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마켓으로 나갑니다. 모든 분들이 기쁨으로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변화 받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무 때나 변화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계기와 사건이 변화를 하게 만듭니다. 책을 통해서나 위대한 스승을 통해서나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변화를 받습니다. 그냥 변화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되는 교회의 특징은 특별한 사건과 계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었다든지, 뜨겁게 찬양을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든지, 기도회가 있었다든지, 부흥회가 있었다든지, 하여튼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부흥이 되지만, 성령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아서 변화 받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성령을 사모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에게 역사하기를 바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우리 중에 사도 바울과 같이 율법적으로 열심이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은 바울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역사하셨던 것은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나에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주시는 말씀으로 내가 변화되어야 하겠다는 각오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으로 변화되어서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도 즐거워하는 그런 멋진 새생명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에게 한 영혼 한 영혼을 구원하는 새생명축제의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축제에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가 새롭게 부흥되는 계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0.1달란트도 사용하면 강해진다/ 막6:7-13/ 2014-12-09
0.1달란트도 사용하면 강해진다 막6:7-13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비교하여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쓰여진 책입니다. 한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되는 7개의 구절의 말씀은 마태복음에서 23개의 구절에 해당됩니다. 행적과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진 마가복음에서는 “곧”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며 행동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실천을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번 배운 바와 같이 제자들을 풍랑 가운데 인도하여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배운 배운 것을 실행하기 위해 전도여행을 보내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가지 시각에서 접근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한가지 시각은 복음 전하는 제자들의 시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복음 받아 들이는 자들의 시각입니다. 먼저 복음 전하는 제자들의 시각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1.작은 능력도 사용하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과도한 교육, 즉 over education의 문제입니다. 싱가포르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고등학교 교육만 받아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너나 없이 대학 가고 더 나아가 대학원, 유학까지 갑니다. 배운 이후 써 먹을 것 생각하여야 합니다. 배운 것은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것도 쓸 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어린아이가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내어 놓았을 때 비로소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중 크게 칭찬 받은 빌라델피아 교회도 계시록 3장 8절 말씀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씀처럼 적은 능력 받았음에도 지키며 받은 것 가지고 충성하였기 때문에 칭찬받았습니다. 1994년 나온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는 교훈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는 IQ가 75밖에 되지 않았으며 몸도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달란트가 아니라 0.1달란트도 겨우 받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주위로부터 많은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불량배의 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도망하다 보조기구의 나사가 풀리고 보조기구가 다 떨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보조 기구가 없이도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얽매이고 있는 장애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 포레스트 검프에게서와 같은 시험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계속하여 불량배가 자동차를 타고 포레스트를 공격하는 장면이 전개됩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이를 피하기 위해 죽을 힘 다해 뛰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너무나 잘 뛴 나머지 미식축구부로부터 스카우트됩니다. 그리고는 스카우트된 알리바마대학 미식축구부에서도 맹활약하여 전미 슈퍼볼 대회에 우승하였습니다. 캐네디 대통령과 악수까지 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는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워 전쟁영웅이 되었습니다. 0.1달란트 밖에 안 받은 자가 뛰는 것 하나 잡고 사니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 손대다 아무것도 못하는 인생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영화에는 딘 중위가 등장합니다. 그는 명문 군인 가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두다리 잃자 좌절하고 낙심하였습니다. 장애인이었던 포레스트 검프가 도리어 그의 영적 스승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해도 되는 것과 안해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 하다 시간낭비하지 말고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 붙잡으십시오. 가장 중요한 그 한가지는 바로 예배입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하여 24절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하나 붙드는 인생이 될 때 그 인생에는 큰 부흥이 있습니다. 영적 부흥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새벽기도입니다. 경제적 부흥을 위해 필요한 것은 십일조입니다. 새벽기도는 밤문화를 깨고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더욱 부지런히 살게 합니다. 한편 십일조는 우리를 경제적 축복을 받게 만듭니다. 우리 자녀로 하여금 경제를 알 때부터 십일조를 가르칩시다. 예배는 인생의 기초입니다. 새벽기도와 십일조의 인생을 살 때 불꽂 같은 인생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못배우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지만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0.1달란트 받았지만 충성하니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도 비록 연약하였지만 작은 강점 하나 붙잡고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 말씀을 듣는 자의 시각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영접하는 자가 될 때 축복이 있습니다 ====================================== 본문 11절 말씀은 마태복음 10장 14~15절 말씀에 해당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영접하지 않는 자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비판하고 거부하고 벽치는 자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것 배우십시오. 성경은 손대접 하고 환대할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영접하면 형제자매도 품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창세기 18장에는 하나님이 두 천사를 데리고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이야기입니다. 1절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영접”하였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송아지까지 잡아 대접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절대절명의 꿈인 아들을 주겠다는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잘 영접하고 환대하면 그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참된 복음 들어간 곳에는 영접하는 것 배우게 됩니다. 영접 잘하면 그 영접 받은 자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 주고 갈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엘리야와 사르밧의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굶주린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에게 갈 것을 명합니다.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 한줌과 기름 한방울을 그의 아들과 함께 먹고 죽겠다 말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을 자신에게 대접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는 정말 잔인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는 순종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라야는 그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않고 그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겠다는 축복의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접의 영성 가지고 있는지 테스트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접의 영성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프레스트 검프 영화로 돌아오겠습니다. 장애인이었던 프레스트 검프가 버스를 탔을 때 다른 사람이 못 앉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여자친구 제니가 그를 옆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별 볼일 없던 제니는 그와 결혼하게 되었으며 그의 인생이 꽂피게 되었습니다. 한편 바바라라는 한 흑인도 그를 영접하여 앉게 하였습니다. 바바라도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하였습니다. 검프가 거부가 된 후 자신을 영접해 주었던 바바라의 유족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 구하십시오. 빈방 두고 손님 영접하십시오. 이 사회는 적대사회입니다. 그러나 그 적대의 사회를 환대의 사회로 바꿉시다. 영접의 영성 가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한 축복 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끝. 홍정길 목사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 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두 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2002-03-10
10 그리고 2 민13:26-민14:10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송하였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땅을 둘러보고 와서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2명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들의 보고가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경은 아주 상세하게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은 말이나 글이 되어 나옵니다. 정탐꾼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로 나타냅니다. 10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반면에 2명은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말의 차이로 나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왔다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갈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복과 저주입니다. 삶과 죽음입니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은 생각 때문에 벌어지는 믿음과 불신,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축복과 저주,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살펴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잘못된 생각의 결과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행동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로 엄청난 재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할 때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중에 아비멜렉이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자신이 범할 뻔하게 만드느냐고 추궁을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창20:11)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그의 아들 이삭도 아버지의 전철(前轍)을 밟습니다. 사실을 들킨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26: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내라고 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짓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옳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부자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아내를 고지 곧 대로 아내라고 하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 된 생각은 잘못된 행동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다닐 때 블레셋으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윗은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블레셋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으로 가야만 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머물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과 힘을 합해야 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믿음과 불신 오늘 본문에는 12명의 정탐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두 무리로 갈렸습니다. 가서 보고 온 땅은 같습니다. (민13:27)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합니다. 10명은 부정적 생각이고 2명은 긍정적 생각을 합니다. (26-29, 31-33절)은 10명의 보고입니다.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다고 생각합니다.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네피림 후손으로 모두 장수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기에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통곡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 반응은 원망과 불평 그것입니다.(14:1-4) (30, 14:6-9)은 2명의 보고입니다. 땅은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그들의 생각을 말합니다. (9절)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아주 긍정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똑 같은 것을 보고 와서 이렇게 다른 말을 할까요? 그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은 없습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만 말합니다. 그러나 2명의 말에서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만 말합니다. 10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자신들입니다. 그러나 2명의 보고서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절)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생각의 차이의 결과 2명과 10명의 근본적 차이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불신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과 불신은 생각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즉, 생각의 차이가 곧 믿음과 불신의 차이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10명의 정탐꾼과 2명의 정탐꾼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생각의 차이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성경은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순종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든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 열심인 사람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2명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고 10명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축복과 저주는 고사하고 더 나아가서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민26:64-65)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오직 2사람, 하나님의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천국의 상징인데, 천국과 지옥의 희비가 바로 생각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 다윗은 모두 훌륭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한 때 생각을 잘못함으로 과오를 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주님의 생각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행동의 변화는 없습니다. 생각의 변화 없이 축복이나 천국은 없습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순간 그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도 매 시간마다 이런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정탐꾼 10명과 2명의 차이는 결국 생각의 조그만 차이입니다. 여러분의 장래도 결국 생각에 의해 갈려질 것입니다. 조그만 생각의 차이를 결코 가볍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10명과 2명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믿음과 불신의 단서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할렐루야!
10 대 2/ 민13:25-민14:9/ 2004-04-28
10 대 2 민13:25-민14:9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렴.” 아들은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앞 땅 바닥에 끝이 뾰족한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목욕탕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그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넘어지지는 않더라도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치우는지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목욕탕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욕탕으로 들어갔지만, 한결같이 그 돌멩이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진 후, “에잇, 빌어먹을! 도대체 누가 여기에 돌멩이를 놔둔 거야?”라고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한참 동안 앉아서 이러한 광경을 보다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드디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돌멩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돌이 이런 곳에 박혀 있담!”라고 말하더니 단숨에 그 돌을 빼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목욕탕에 있는 사람의 수를 헤아리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지금 목욕탕엔 한 사람밖에 없던데요.” 아버지는 “잘 됐구나! 지금 목욕탕에 가자.”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던 목욕탕에 사람들로 북적대어 발 디딜 큼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이 녀석아, 이게 한 명이냐?”라고 말하자,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버지, 바로 전까지 목욕탕 앞에 뾰족한 돌멩이가 하나 있어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다치곤 했는데. 아무도 그 돌멩이를 치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돌멩이를 치우고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어요. 제 눈에는 오직 그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처럼 보여서 그렇게 말씀드린 거예요.” 저는 이 이야기가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많지만, 사람다운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아들의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라는 단어에 ’성도‘ 또는 ’크리스챤‘ 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도,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성도는 많지만 성도다운 성도는 별로 없다‘, ’크리스챤은 많지만 크리스챤다운 크리스챤은 별로 없다‘는 말로 바꾸어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다운 성도일까요? 우리는 과연 크리스챤다운 크리스챤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이 앞으로 정복해야 할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각 지파별로 12명을 선발하여 보내었습니다. 과연 그 땅이 어떠한 땅인가?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을 정탐하도록 스파이를 보내었습니다. 드디어 40일 동안 정탐한 스파이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먼저 10명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이때 그들 10명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밥이라는 것입니다. 당장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자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열 사람과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시각차>라고 합니다. 제가 자주 소개한 구두 세일즈맨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어느 구두 세일즈맨이 구두 판매 시장을 조사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그 부족 사람들이 모두 맨발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국내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습니다. \"구두 주문 취소. 이 마을에는 구두시장 가능성 전혀 없음.\" 후에 다른 판매원이 동일한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가자마자 그는 즉시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습니다. \"구두 주문 곱절로. 이 마을에는 구두시장 가능성 무한함.\" 두 세일즈맨이 똑같은 곳을 다녀왔지만, 이처럼 상반된 보고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각차이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두 사람은 똑같은 땅을 보고 왔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왔습니다. 똑같은 기간 동안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10명의 다른 정탐꾼들은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는 시각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1) 10명의 정탐꾼 먼저 10명의 정탐꾼들은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불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열명의 정탐꾼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처음 난 장남들이 다 죽어가는 애굽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의 장남들은 죽지 않고 애굽에서 탈출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기적을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배고픔을 해결하고, 항상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14장 11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신앙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을 보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창문 너머의 진흙탕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하늘의 별과 달을 보았고, 해를 보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진흙탕을 보면서 원망을 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보느냐’ 보다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떠한 것이 앞에 놓여 있느냐’ 보다, ‘어떠한 시각으로 앞에 있는 것을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25절부터 28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여 할 접속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라는 말은 앞에 서술하고 있는 말을 돌이키며 상황을 전환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40일 동안 정탐하고 난 10명의 정탐꾼들은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가 막힌 땅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 곳에서 가져온 과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기름진 땅이기 때문에 농사짓기도 좋고 살기도 좋으나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을 이기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곳이지만,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그러나>를 들먹이며 스스로 <그러나>의 올가미에 묶여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10명의 정탐꾼들처럼 <그러나>라는 올가미에 묶여 있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말로 스스로 한계를 지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1807년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에 커다란 증기선 한 척이 떠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배가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그런데 웬걸 그 큰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그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 배를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전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하다는 눈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전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본문에 나오는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긍정적인 눈이 아닌 부정적인 눈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1) 악평을 함 첫 번째로 그들은 악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열을 내며 외치던 10명의 정탐꾼들을 향해 ‘정확하게 판단했다, 일리 있는 관찰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악평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 못되고, 오히려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원과 능력만을 가지고 계산을 했을 뿐,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악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악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비판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워도 “아니 뉴질랜드가 춥다고 하더니 왜 이렇게 더운 거야?”라고 악평을 하고, 조그만 추워도 “아니 뉴질랜드가 지상에서 마지막 남은 천국이라고 하더니 날씨가 왜 이래. 이러다가 얼어 죽겠네.” 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입만 열면 악평과 비판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의 특징은 입만 열면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하여 이곳에 계시지 않지만,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하고 나서 날마다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던 모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 말에 의하면 등 떼밀어 자녀를 위해 유학을 가라고 한 남편에게, 밤마다 전화해서 있는 욕, 없는 욕을 바가지로 해대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대인기피증이 생겨,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교회에 전도되어 와서 새가족 모임과 개인양육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감사할 것밖에 없어요. 남들은 뉴질랜드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데, 우리 남편이 유학 다녀오라고 보내주고,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그 자매님에게 환경과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전과 똑같습니다. 아니 한국을 떠나온 지 더 오래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에게 믿음이 생기자 입술의 고백의 바뀐 것입니다. 그 자매님에게 믿음의 눈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눈이 생기면 삶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0명의 정탐꾼들과 같은 불신앙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악평을 일삼지 말고 믿음의 시각으로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평과 비판만 일삼는 열 명의 정탐꾼들이 아닌,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학을 함 믿음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가나안을 땅을 보니까 둘째로 자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스스로 보기에 자신들은 들판에 있는 메뚜기 같이 초라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한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외모 때문에, 가정 형편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과거의 아픈 상처 때문에 스스로 올가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다고? 뭐 내 주제에 뭐한다고? 나는 해보나 마나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스스로 메뚜기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이 말대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입술에서 나온 말대로 우리의 삶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자학하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농담이라도 열등감에 관계되는 말을 꺼내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교수로서, 저명한 상담학자로서, 또한 저술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헨리 나우웬(Henri J. Nouwen)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책에서 세상이 우리를 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눈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걸작품으로 평가합니다만, 세상은 우리를 별 가치 없는 존재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하시지만, 세상은 우리가 도저히 가망 없는 존재라는 메뚜기 정신을 끊임없이 주고 있습니다. “너는 별 볼일 없는 존재야. 네 까짓 게 뭐한다고 그래. 너는 이 땅에 잘못 태어났어.”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들과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본 훼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렌즈를 가지고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여러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가치관으로 여러분들을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3) 전염이 됨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시각은 전염병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져갔습니다. 14장 1절부터 3절을 보겠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차라리 애굽 땅이나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나았을 텐데, 왜 이곳까지 데려와서 가나안 사람들의 칼에 망하게 하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것은 전염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염병이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처럼 부정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먼저 그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가 친구를 사귈 때, 부정적인 친구를 만나고 있는지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에브라함 링컨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가 어릴 때 그의 어머니가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그들은 병균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병균이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그 부정적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도 오염시키기 때문에 병균이라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10명의 부정적인 사람들로 인해, 부정적인 색깔로 염색되어 그들 역시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단 한명도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이들을 보시고, 하루를 1년으로 기준하여 40일 정탐을 40년으로 계산하여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11일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임에도 40년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입성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 채,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의 중요성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입술이 원망과 불평과 부정적인 입술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격려의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망하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 대신, 긍정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 입술에 열매가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2) 2명의 정탐꾼 둘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10명의 정탐꾼들과 다른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 두 사람도 사실은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똑같은 기간 동안 똑같은 상황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백은 10명의 정탐꾼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메뚜기 정신으로 무장한 후, “우리는 그들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과 싸워 보았자 질 것이 뻔합니다. 해보나마나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갑시다.”라고 말한데 반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14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황량한 사막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그 땅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자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거인과 같은 가나안 거민들만 보였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계산에서 제외시켰던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계산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무리 그들이 거인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할 때는 ’도저히 승산 없음‘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계산에 포함시키자 ’능히 이길 수 있음‘이라는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10명의 정탐꾼들처럼 하나님을 제외한 채 계산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더하기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더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미즈노 겐조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입과 눈알만 움직이고 온 몸을 조금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눈짓으로 혹은 입술로 아이우에오를 짚어가며 쓴 시집이 있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일본에서는 그가 지은 대부분의 시에 곡을 부쳐 복음성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무려 10판을 거듭 인쇄하여, 일본 사람이 쓴 시집으로 보기 드물게 24,000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가 최근에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에 더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줄로 믿습니다. 캐나다에 가면 세인트로렌스라는 강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겨울, 어떤 사람이 그 강을 건너기 위해 얼어붙은 강 앞에 서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강이 얼마나 단단하게 얼어붙었는지 확신이 없어, 무릎을 꿇고 기어가다시피 하며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두려워 벌벌 떨며 간신히 얼어붙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마차가 자기 곁을 휙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무릎으로 벌벌 떨면서 기어온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고 초조한 인생을 살겠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부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불신앙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불투명했던 미래가 바로 여러분들의 밥으로 보일 것입니다. 밥은 클수록 좋습니다. 밥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여러분! 밥이 크다고 밥그릇 끌어 앉고 징징 짜며 우는 사람 보았습니까? 밥이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굶고 있다가 밥을 주니까 너무 감격해서 우는 거지를 옛날 시골에서 본 적은 있어도, 이 날 이 때까지 저는 밥이 무서워 우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밥을 먹다가 도저히 못 먹겠으면 남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10명의 정탐꾼들은 먹어 치워야 할 밥을 보고 두려워 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만들었습니까? 안경 때문입니다. 열 사람은 불신앙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불신앙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가나안 사람들을 바라보니까 그들이 밥으로 보인 것입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다른 10명의 정탐꾼들과 달리, 온전히 하나님을 좋았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불신앙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10명의 정탐꾼과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두 명의 정탐꾼과 같은 사람입니까? 10명의 정탐꾼과 같이 하나님을 제외한 채 계산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가나안의 거민들만 보고 스스로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하시는,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올라가서 먹어버립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목수 일을 하는 한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에게 못질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얘야, 못질을 잘 하려면 못에 네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단다. 그러면 점차 못만 크게 부각되어 보일 거야. 그러나 만일, 못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해 손등이나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오게 되면 십중팔구 네 손에 든 망치가 네 손을 내려치게 될 거야.”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목표에 집중할 때, 비로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크고 작은 목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비본질적인 목표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인기나 명예 등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것들이 본질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목표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작음 신응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항상 주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살아가는 2004년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를 탈출하라/ 마26:13-25/ 2008-03-21
10%를 탈출하라 마26:13-25 지난주에는 긍정적인 20%를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100% 중에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20% 들어가지 못하고 방관하고 안주하고 부정적인 10%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하면 20%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10%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인간의 방법과 수단, 생각으로 살아가는 유형으로 모든 면에서 파괴적이며 비생산적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0%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긍정적20%안에 들어가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한 여인이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가룟유다는 향유를 팔아서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에게 나누어주면 좋을 텐데 하면서 아쉬워했지만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다고 말하면 여인의 착한 행실을 온 천하 다니면서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룟유다가 말한 저변에는 물질에 대한 탐심이 가득함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 14절과 15절에 그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은 삼십을 받고 팔 계획을 세우는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즉 가룟유다는 물질에 의지하는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물질로 스승인 예수를 팔아치우는 어리석은 일을 감행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을 들먹이고 예수님을 믿는 척 하지만 그들의 본심은 예수님을 자기의 목표를 위해 이용하는 자입니다. 적당한 예배, 적당한 예물, 적당한 헌신, 내세우기 위한 봉사 등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를 예수님을 은 30냥에 파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10%의 사람으로 교회를 파괴하는 자입니다. 단적인 예로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가룟유다 한 사람을 통해서 제자들의 분위기를 불신과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10%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파괴적이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10%에 탈출하여 20%안에 들어가고 영원한 천국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 부정적인 삶 10% 속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3:2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말을 할 때에는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고 실수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을 통해서 우리를 굴레 씌울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으로 굴레를 씌워 그 인생을 부정적인 삶을 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나는 승리할 수있다. 나는 건강해진다. 나는 행복하다라고 항상 긍정적인 굴레를 씌우면 그인생은 그대로 긍정적인 삶을 살줄 믿습니다. 삶 가운데에서도 긍정적인 사람과 사귀어야 하고 그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눈 막고 귀막고 입막아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생활을 해야 합니다.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올무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파괴와 염려와 근심 절망과 공포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부정적인 사고에서 감금되었던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예수님의 거룩한 보혈로 씻음 받아 항상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둘째로, 불순종의 삶 10% 속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삶은 개인에게, 민족에게, 국가에게 복을 내려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이 항상 동일하고 약속하신 것은 그대로 시행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고 행했던 일과 순종하지 않았던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적극적인 삶의 모습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축복의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심령골수를 찔러쪼겐다\\\"(히4: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이유나 자기 변호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요나 한사람 즉 10%가 교회에서 온전히 회개하면 세상적인 광풍이, 영적인 강풍이불어도 안전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삶은 바로 말씀 안에서 일어납니다. 온전한 순종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은 자유다! 자유다!\\\'하는데 은밀히 말해서 이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법을 지킬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결단코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치료받고 능력을 행하고 하는 문제는 바로 내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는냐 다시 말해서 신앙인으로서 생활 가운데 순종의 삶을 살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고 예수님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순종의 자리에서 진리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환경적, 물질적, 생활적, 사회적으로 10%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가난한 삶 10% 속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난은 자랑거리가 안됩니다. 가난은 은혜가 아니고, 저주이며, 부끄러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부유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부유해져야 합니다. 또한 물질이 부유해야합니다. 육체도 부유해야 합니다. 만약 이 자리에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있어 여기, 저기서 서성이면서 영적으로 걸식하는 성도가 있다면 이것은 영적 거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한곳에 뿌리를 내려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적인 복을 받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난은 미덕이 아니라 병입니다. 이 병을 능력의 하나님 말씀으로 치료받고 영혼육이 건강함을 얻고 물질의 저주에서 질병의 저주에서 탈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부유한 교회입니다. 말씀이 풍성한 부유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부유한 교회입니다. 영육간에 건강해지는 교회(마4:23,10장 참조)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므로 누구 나가 하나님께 구하고 간구하면 가난의 저주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중독증의 삶 10% 속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요즘 사회는 중독의 사회입니다. 과중한 업무로 인한 일의 중독, 술의 중독,담배에 중독, 또한 여성분들은 텔레비전앞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는 것 또한 중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컴퓨터통신, 인터넷의 자료검색, 오락등으로 인해서 많은 청소년들이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꼬박 밤을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문화가 점점 우리 기독교 세계에 침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끊어 버리게 하는 사탄의 전술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삶에 희망을 잃어버리게 함으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고 세상을 비관하여 끝내는 자살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러한 중독에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탈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회를, 사람을 국가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항상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하고 긍정적인 20%는 어떠한 환경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포기 없이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중 첫째 계명에는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20: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중독증의 증세입니다. 물질과 명예와 정욕을 위한 삶이 바로 중독의 삶입니다. 거룩하게 주일예배를 드리고 물질과 육신으로 봉사와 충성을 다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귀한 성도가 되는 것이 바로 중독증의 증세에서 이겨 나가는 길입니다. 이세상의 문화는10%의 잘못된 사람들이 만든 저질문화이고 간밤에 원수 마귀가뿌려 놓은 가라지 문화인데 이러한 세상문화에 젖어들지 말고 하나님만 따르며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15:10)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즉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 섬기고 그분이 원하는 삶으로 사는 것이 중독증에서 10% 탈출하는 길입니다. 아멘.
100%가 아니라 120%로 살아야 한다/ 신7:1-11/ 김동수 목사/ 2012-03-18
100%가 아니라 120%로 살아야 한다 신7:1-11 [ 마음 열기 ] 1.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 대한민국 인구의 반이 살다보니 하루에도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 현실적으로 제일 크게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 바로 <주차 문제>입니다. 사택이 있는 곳도 그렇습니다. 아파트가 아니면 <지정된 주차 장소>가 늘 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늘 주차문제로 시끄럽습니다. 2) 언성도 많이 높입니다. 2. 이사 가고 나서 제일 먼저 신경 쓴 것도 주차문제입니다. **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하여 주차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신경을 쓰다보니 매번 주차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방식은?> 1)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것입니다. 2) 먼저 대면 어떤 모양으로 대든 <나 아니면 말지>입니다. ** <나는 목사입니다> 그럴 때가 <제일 난감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혜롭게 이야기>하느냐는 것입니다. <만나서 잘 이야기 하려면? 얼굴부터 찡그리고 나오는 사람에게 제가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상도 역에 위치한 주원 교회 목사입니다> ** 이렇게 제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신분을 밝힘으로 내 자신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함입니다. 2)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회 현상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피력하기 위함입니다. 3) 내 자신이 목사이기에 드러내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Q – 하나님은 언제나 저에게 120%를 요구하십니다. ** 남들처럼 100%로 산다면 분명히 잘 산 것이고 정상적으로 산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100%로 사는 것이 아니라, 120%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그리스도인의 이미지가 실추된 이때에? 100%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120%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 120%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어떡해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이 120% 있어야 합니다. (1) 세상에 살지만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 내실 때에…> 1.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그러나 <관계>도 <관계> 나름입니다. <관계>는 <모인 목적>에 따라 <그 결과>나 <삶의 열매>가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민족입니까? 1) 아브라함이 약속한 <언약의 백성>입니다. ** 아직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2) 애굽에서 고통 가운데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친히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 구원하였지만 아직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 습성은? <편안했던 애급의 생활>과 <애급의 다신 종교 사상>이였습니다. 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셔서 새롭게 하시며 광야에서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1)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2) 내가 약속했기 때문에 내가 반드시 그 약속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3) 내 안에 거하며 사는 참된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고 나를 사랑하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Q – 그냥 대충 살아서 될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열국 가운데서 하나님이 불러낸 민족이기에, 하나님이 불러낸 자들이기에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3. 그러나 현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 우리도 구별 받은 백성으로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세상에 살지만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7족속의 이름을 밝히시면서 쫓아 낼 것과 딸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강조하시면서 철저히 분리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 <뿌리를 무시 못합니다> 1) 헷 족속 – 노아의 손자요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공포)의 후손. ** 소아시아 수리아 지방에 정착해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히타이드 족속> 2) 기르가스 족속 – <우상의 이름 – 게쉬신의 부하>라는 뜻. 3) 아모리 족속 –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후예로서 <요단 강 서편 산악 지대>에서 정착. 4) 가나안 족속 –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후예로서 <해안 지역과 요단 계혹 지역과 평야>에 걸쳐 살았다. 5) 브리스 족속 - <시골 뜨기>, <농부>라는 뜻을 가진 족속 6) 히위 족속 – 가나안의 아들 <히위>의 후손이며, 레바논 산지와 헤르몬 산맥에 거하였고, <후에 이스라엘인들과 섞여 살면서 나무를 패거나 물을 긷는 자들이 됨> 7) 여부스 족속 – 가나안의 아들 여부스의 후손이며,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 살았다., Q – 자세히 살펴 보십시요. 뿌리가 <선하지 못한> 존재이며, <악한 사람들>이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1) 가나안 사람들은? <구별된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습니다. 2)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 이 마음 곧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의 방식>을 포기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삶의 원리>,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사는 원리>가 있습니다. ** 겉에서 보면 흥왕 합니다. 모든 것을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죄가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그런데 전쟁에 휘말리고 피곤한 인생이 됩니다. Ex)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롯의 삶을 보십시요. <다 가나안 지역>입니다. ** 반면에 기근도 있고, 아브라함 처럼 아내를 빼앗기는 일도 있고, 때로는 부족한 것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따라 사는 구별된 삶의 원리>를 살아가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Q – 가나안의 족속들과 사귀지 말아라. 결혼하지 말아라. 분리 된 삶을 살아라. **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별된 사람으로 살기 원하시고, 그렇게 또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1)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고 살면 안 됩니다. 2) 타협이 아니라 받아들일 것이 있고,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있어야 합니다. 3)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기를 주저하면 안 됩니다. Q – 가나안 전쟁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셨던 3가지 구별됨. 1)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라. - <관영한 죄에 대하여 선을 그어라> 2) 여호와 신앙의 유일성 강조 -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 믿음의 뿌리는 중요하지만 쓴 뿌리는 아픔을 줍니다> 3) 선민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결하라.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힘쓰는 거룩한 싸움을 싸우라. (2) 헤렘 – 거룩한 삶을 살아야 120%입니다.(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1. 성경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말씀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구절입니다. **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수행하였고, 하나님은 땅을 정복할 때 거기 거하는 가나안 족속들과 그들의 종교를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진멸> - <헤렘> 1) 헤렘은? 하나님이 약속한 거룩한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2) 쉽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 회복>입니다. **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일하게 산 것이 무엇입니까? <막벨라 굴>입니다. 막벨라 굴에 장사된 이가 바로 <사라>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찾게 하시고, 회복하게 하십니다. 3) (신 7: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 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 ** <거룩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4)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못하는 것들? ** 그것이 어린 아이가 되었든, 부녀자가 되었든, 노약자가 되었든, 짐승이 되었든 간에 진멸하는 것입니다. Ex) 거룩하게 바쳐지는 모든 것들은? 정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더러운 것에 손을 대면 깨끗한 것도 더러워집니다. 그러나 더러운 것은 깨끗한 주님께 손이 닿을 때 깨끗하여 집니다> 2. 거룩하기에 바쳐진 물품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 성도들 역시 <거룩하게 바쳐진 자>들입니다. (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헤렘 전쟁>을 잘 수행하였습니까? ** 잘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1) 여호수아에서 보면? 많은 경우 점령해야 할 땅을 남겨두고 전쟁을 중지합니다. 2) 이방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음으로 나중에 이방인들이 <가시>가 됩니다. 3) 아간은? <헤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사유화>함으로 거룩한 전쟁을 더럽혔습니다. **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1) 다시 땅을 잃어 버립니다. 2) 종국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공격으로 그들이 마땅히 취하고 다스려야 할 땅을 잃어버립니다. 3. 이 <헤렘> 전쟁에서 <잔인하게 죽이는 현상>에 몰두하면 안 됩니다. **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1) 가나안 족속들을 <감성적>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2) 죄와 우상에 오염된 백성들과의 관계는? <오염된 관계>를 갖게 되고 <오염된 결과>.를 낳습니다. **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삶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올무를 벗고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120%로 삽니다.(3절-4절)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 임이니라.> (1) 세상을 대적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1. 단순한 <결혼 금지> 이야기가 아닙니다. ** 우리가 살면서 느끼지만 <신앙생활의 절대 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1) 주일을 잘 성수해야 축복이 임합니다. 2) 성도들과의 관계가 좋아야 하고, 목사와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불신자와 결혼하면 <과정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입장에서도 <30년 된 인생이 개인적으로 살다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기적입니다. ** 생각이 다릅니다. 습관이 다릅니다. 행동도 다릅니다. 문제에 대한 반응도 다릅니다. 하물며,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상을 아는 것>과 <무신론>에 대한 태도는 매우 큰 비중입니다. 2.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 100% 로 사는 사람은? <사회 생활>은 잘합니다. 그러나 120%로 살지 못하면 <거룩한 영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신앙이 바알 신앙과 가나안 신앙과 혼합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1) 솔로몬이 100%였을 때와 120%일 때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 120% 때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역대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100%일 때 <다른 왕들이 하는 것처럼, 정략 결혼하여 여자가 1000명으로, 이방 신도 1000개가 되었습니다> 2) 엘리야도 120%였을 때 850:1 싸워서 승리하였습니다. ** 100%일 때 이세벨의 저주 섞인 말을 듣고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3) 베드로 120%였을 때 <바다 위>로 뛰어 들어 주님께로 갔습니다. ** 100%였을 때 <자기 방법>으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100%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100%는 세상 사람들이 정하는 기준의 최고의 윗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120%의 하나님이 정해주신 최고의 윗선을 따라 가며 살아야 합니다.> 3. 어두우니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 세상이 악하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달콤하기에 <세상과 벗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100%의 세상 사람들은? 1) 세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채우며 발산하고 삽니다. 2) 자신의 권세와 부를 누리며 삽니다. 3)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하여 헛된 즐거움을 따라 다닙니다> Ex) 술 문화, 가라오케 문화, 문화 (대학로 여 제자와 교수), 숨어서 익명으로 살아갑니다. Q – 사도 요한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120%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1) 전에는, 육신의 욕심을 하나님 앞에 놓았지만 이제 하나님을 귀히 여기며 가장 앞자리에 세웁니다. 2)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유일한 행복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준행>하는데 전념합니다. 3) 날마다 밥을 먹고 살 듯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며, 주님 없이는 기도하지도 기뻐하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살지도 못합니다. (2) 세상을 사랑하는 120%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1. 귀담아 들으세요. 비밀이 있습니다. (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 세상 – 헬) <코스모스> - (장소적이고 공간적 의미) 2) 창조 기사의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곳>으로 <하나님이 복 주신 곳>입니다. ** 아담도 하와도 즐거워하였고, 걱정도 근심도 없었던 곳입니다. <무엇이든지 준비되어 있는 공간 – 먹을 것등……..> 3) 그러나 우리가 죄지음으로 타락하여 <사단의 통치권이 영향을 미치는 곳>이 되는 순간 <하나님이 거저 주신 축복>을 사람이 수고하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4)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 <준비되어진 것>이 이제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 전부 인간적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등등………. 2. 그런데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다고 합니다. **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지금은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는, 죄 지은 인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전부 <정욕>대로 살지만? 다른 하나는, <예수의 마음>으로 <성령의 마음>으로 <자기를 죽이고 예수 안에서 보면> 생명이 거기서 나옵니다. 1) 필요 할 때만 죽는 것도 아니고, 2) 필요 할 때만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3) 날마다 매일 24시간 전부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호흡하며, 성령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Q –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주저하지 말고, 올무가 될 만한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1) 당신을 힘들게 하는 올무가 무엇입니까? 2)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면 120%의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깨어 주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기준은 선착순이 아닙니다. (6절-7절)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1.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가 세상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생각하며 지극 정성을 다합니다. ** 우리가 볼 때 <고슴도치 새끼>는 <가시 투성>이요, <다리도 짧고>, 사실 <예쁜 구석>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슴도치 어미>는 다릅니다. 만약에 <인간의 말>을 알아 듣는다면? <자기 새끼>를 못 생기다고 말하는 인간에게 <가시>를 세웠을 것입니다. <자기 새끼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시고 <성민>이라고 명하셨습니다. ** <성민> - <구별 된 자>, <거룩한 자>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소유물>이라는 것입니다. <소유물>을 보면 <주인>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특권>도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막중한 <책무>를 지닙니다. 100%로 살아서는 <막중한 책무>를 다할 수 없습니다. 120%로 살아야 합니다. 3. 세상은 앞서가는 사람만 기억하고 <관심>을 갖습니다. ** 누가 <권력>이 많고, 누가 <부자>이며, 누가 지금 <1등>으로 달리고 있는지만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눈>을 가지신 분입니다. 1) 가장 소외되어 있고, 가난하며, 뒤 떨어진 자를 보시고, 뒤에서 가슴 아파하면서 슬퍼하는 자를 보십니다. 2) 하나님의 기준은 <선착순>이 아니라, <은혜요, 긍휼이요, 사랑>입니다. Q –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삼은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 다른 민족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2) 다른 사람보다 잘 난 것도 없습니다. **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에서 제일 적은 민족이며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의>를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없습니다. <선착순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아야합니다> (2) 속량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8절-9절)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 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 하나님에게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 <약속하신 언약>이 관계를 맺은 당사자만으로 끝나거나, 관심 밖의 일로 뒷짐 지시고 보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행하신 <맹세와 축복>을 지금 이시대까지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 모세가 말합니다.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낸 사건 즉, <너희가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다> 1) <속량> - <히:파다> - <끊다>, <몸 값을 받고 석방하다>, <속전을 치르다> 2)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를 해방시키는 조건으로 <몸값>을 지불합니다. 3)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마지막 재앙>인 <죽음의 사신>을 피하기 위하여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속량 제물>이였지요. 4) 예수님 또한 인간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5) 예수님의 <피>는?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축복입니다. 2. 속죄함을 받은 사람은? **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져 있던 모든 <담>들이 허물어진 사람입니다. 1) 허물과 죄로 죽었다가 이제 다시 살아 났습니다. 2) 주인과의 관계가 회복 되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짝하며 <죄악>가운데 <내가 주인인 양> 내 맘대로 살면 안 됩니다. 3) 100%로 살아서 <도덕적 양심>을 깨끗하게 살았어도 <마음>과 <중심>과 <동기>가 120% 하나님께 올려진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 거기서 <영향력>이 나옵니다. 거기서 <신앙적 파워>가 나옵니다. 기독교는 <나만> 변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변하여 다른 사람도 변할 수 있도록 파급 효과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파급 효과, 은혜의 파급 효과, 기쁨의 파급 효과, 평안의 하급 효과> Ex) 김동호 목사 - <현대 종교 후원 이야기> 1) 이단과 싸우다가 <모욕죄>에 걸려 <1억원 배상 판결> 2) 사무실까지 경매에 넘어가는 상황입니다. 3) 탁명환 소장은 피습 받아 돌아가시고, 아들이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4) 몇몇 교회가 4,000만원, 김동호 목사님 교회가 4,000만원(분립하여도), 페이스북 교회가 2,000만원 덤으로 더 넘치게 해결 됨. Q – 이 파급 효과가 무엇인가? 이 끈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의 속량 때문입니다>, <속량의 은혜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은혜가 넘칩니다> <이것이 바로 120%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120%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계명 지키기며 120%로 사는 사람은? 천대까지 누리는 언약의 축복을 주십니다. 당신이 그 주인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불성실하면 안 됩니다. (10절-11절)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1.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신다고 하십니다. ** <하나님을 미워한다는 말은? (신성 모독)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불 성실하게 <이행>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2) 곧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 <말씀에 대하여 불성실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3) <당장에>? - <그들의 면전에서>, <즉각적으로>,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살아있는 동안>,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2. 제일 중요한 것은? ** 100%와 120%의 차이는? <성실함>입니다. 1) 하나님께 성실하고, 사람에게 성실하고, 그리고 나에게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20% 차이라 얼마 크지 않을 것 같지만? <결과>는 크게 다릅니다. **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칩니다. <성실하게 일하라> 1) <건축 회사>에 다니던 사람이 <퇴직>을 얼마 앞두고 사장으로부터? < \"마지막으로 집 하나 지어 주시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 <회사>도, <하는 일>도 그만두게 된다고 생각하던 이 사람은 모든 일을 <대충 대충>했다. 2) <재료>도 좋은 것을 쓰지 않고 <감독과 시공>도 철저하게 하지 않았다. ** 그저 겨우 <준공 검사>를 넘길 정도로 <지어놓은 집이 거의 완성될 무렵>, <사장>이 이 사람에게 찾아와 말했다. <\"이 집은 바로 당신 것입니다. 당신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나의 선물입니다.\"> 3)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킹슬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 <\"매일 아침 일어났을 때 당신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만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일을 능력을 다해 수행한다면 당신의 내면에 자제력, 근면함, 만족감 등 게으른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하는 수많은 덕이 쌓여질 것입니다.\"> 4) 당신은 당신의 일에 얼마나 충실하십니까? ** <죤 밀턴>은 더 나은 시를 쓰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십시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골3:23)하면 주님은 우리의 수고를 통하여 우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까지도 채워 주실 것입니다.>
100년 후에도 지속되는 신앙 유산/ 창24:1-8/ 신앙유산 물려주기 서약예배설교/ 2007-06-24
100년 후에도 지속되는 신앙 유산 창24:1-8 미국 남북전쟁 이후에 경제적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미국의상황은 몹시 불안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865년, 링컨이 암살을 당하고 전국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통령으로 있던 앤드류 존슨이 대통령직을 이어 받고 2년 뒤인 1867년에 러시아로부터 심각하고 고민스러운 제의를 하나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알래스카 지역의 땅을 미국이 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오늘날에야 「알래스카」하면 앵커리지가 떠오르고 지하자원과 모든 자원의 보고라고 얘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눈과 어름으로 덮인 넓은 벌판, 아무 쓸데없는 땅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땅을 영토로 지키기 위해서 국가에서 지출되는 경비는 쓸데없는 낭비로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땅으로 인식되었기에 그당시 미국의회나 정치가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땅은 구입할 가치도 없고, 필요도 없는 땅이라고 할 때 앤드류 존슨 대통령은 이 땅을 구입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땅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 이 땅을 구입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720만불이라는 적은 돈에 구입합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이 땅은 버려진 땅, 눈으로 덮여진 땅이 아니라 눈 속에 숨겨져 있는 보배로운 땅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엄청난 지하자원, 관광자원, 그리고 임업자원 군사적 요충지로서 미국을 풍요롭게 하는 땅이라는 것을 몇십년이 지나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국가나 가정이나 한 시대 한 사람의 결정이 후손들과 나라와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부요를 누리는 미국을 두고 이야기했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나의 삶은 혼자 어딘가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육체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신앙적인 모든 것들을 물려받아 그것을 가지고 오늘 내가 존재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말을 바꾸어 말하면 지금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던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어떠한 모습이든 유산을 남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 수 있지만 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웃과 후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 유산을 자녀들에게 대대로 계승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유산을 자녀 세대에 계승하는데 성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자신의 대에서 끝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축복을 얻기위하여 우상을 섬기던 가문의 전통을 단절시키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유산을 이삭과 야곱에게 넘겨주는데 성공했던 사람입니다. 신앙 유산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일에 성공했기에 복의 근원이 되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와 크리스천 가정에서 올바른 신앙의 유산을 자녀 세대에 넘겨주는 일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을 자녀 세대에 넘겨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문이 되기위하여서 우리의 신앙이 단대에서 끊어지는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 후대로 흘러 내려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같이 믿음과 축복이 계속 후대로 흘러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유산을 이어내려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문이 축복받는 길이고 우리 자녀들의 생명이 사는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입니다. 온갖 생명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물은 헐몬산 꼭대기의 하얀눈이 녹아 내림으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는 요단강을 통하여 물을 사해로 흘려 보냅니다. 요단이라고 하는 통로를 통하여 물은 사해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데 갈릴리의 깨끗한 물을 받은 사해는 죽은 바다(Dead Sea)로 변합니다. 살아있고 깨끗한 물이 사해로 들어오면 죽은 물, 아무 생물도 살 수 없는 짠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해의 물이 죽은 물로 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받은 물을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의 모습도 있습니다. 경기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시화호는 1994년 동양 최대의 간척 사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현재 이곳은 수많은 물고기들과 철새들이 함께 어우러져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화호는 1997년도만 하드라도 공업용수로 쓰기 힘들 정도로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었던 곳이었습니다. 폐사한 물고기가 속수무책으로 떠올랐고 악취가 심해 주민들의 삶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 습니다. 또한 수천만평 갯벌은 어패류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 담수호 정책을 포기하고 굳게 닫혀 있던 수문을 열어 썩은 물이 넓고 넓은 서해바다로 쏟아져 나가게 하고 조수를 따라 맑은 바닷물이 밀려들어 올 수 있도록 수문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화호는 다시 생명이 넘쳐나는 호수로 변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호수, 사람들과 온갖 종류의 동식물들이 찾아오는 호수가 되려면 지속적으로 깨끗한 물을 외부로부터 공급받을 뿐 아니라 그 물이 다른 곳으로 계속 흘러가도록 할 때 가능합니다. 물이 계속 갇혀있던지 혹은 외부로부터 물을 공급받아도 흘려보내지 않고 있다면 그 물은 누구도 사용할수 없는 죽은 물이 되어 외면당하고 버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늘 사모하며 받을 수 있어야 하지만 받은 은혜를 이웃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 흘러감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족과 후손들이 앞으로 살아갈 신앙의 모습에 책임지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신앙이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세대를 이어가는 신앙이 되게하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받은 축복이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본이 되도록 하여 그들도 복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이 후손으로 흘러 내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으로 끝나는 복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가는 축복입니다, 아비의 복이 자식에게, 그리고 그자식이 손자, 손녀들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가는 것이 축복의 원리입니다. 창 12: 1-3을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축복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은 계속 흘러가서 각 시대와 그 후손들에게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수천 년 전에 말씀하신 말씀은 오늘도 동일하게 성취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계속 살아있는 말씀이고, 흘러가고 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말씀이 살아있고, 흘러감은 말씀을 받은 개인을 통로로 해서 후손에게 이어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축복의 말씀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이 축복이 다음 세대로 흘러가도록 해야 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중요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축복의 계승자가 되며 다음세대로 축복이 흘러가게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녀와 우리 가문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해 보셨습니까? 세상에 중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믿음을 신앙의 유산으로 자녀에게 물려주는 일보다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일에 모두 성공하는 부모님들이 되시고 하나님께 축복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람니다. 그럼 이시간 어떻게하면 우리의 자녀들에게 세상의 물질보다 신앙의 값진 유산을 물려 줄수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올바른 신앙 유산을 자녀들에게 넘겨주어 축복받은 가문이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었는데 아브라함의 모습속에서 몇가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행함으로 절대 신앙의 본을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최절정은 창세기 22장에 나타납니다. 100세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사건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이 명령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쉬운 일들도 순종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칩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앞에 아브라함은 묵묵히 순종합니다. 창세기 22:3절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앞에 아브라함과 이삭은 침묵으로 묵묵히 행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간적인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어떻게 고뇌하고 번민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고민하고 번민한 끝에 신앙적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앞에 나의 생각과 나의 환경과 나의 이성적 사고를 넘어 무모하고 어리석다 싶을 정도로 순종하는 신앙의 자세가 절대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당시 이삭은 번제로 사용할 나무를 지고 갈 정도로 장성했습니다(창22:6).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삭의 나이가 25세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성한 아들, 이삭은 신앙적 결단을 내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쳤습니다. 그는 행함으로 절대 신앙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행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절대 신앙의 유산을 이삭에게 계승했던 것입니다. 2. 올바른 신앙의 터전을 남겨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남겨준 것은 절대 신앙의 본을 보여준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후손에게 올바른 신앙의 근거지를 남겨 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고 지시한 목적지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상중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기업을 삼게 하려고 주시는 땅이었습니다(창15:7).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이 살아야 하고, 이삭이 살아야 하며, 야곱과 그 후손들이 살아야 할 땅이었습니다. 창 17:8.을보면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대한 믿음은 확고했습니다. 가나안 땅만이 자기가 살아야 할 곳이며, 자녀들이 살아야할 터전이며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에 확고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창세기 24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고향 땅 하란으로 엘리에셀을 보냅니다. 그때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 가리이까”(창24:5) 엘리에셀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창24:6-7) 이 말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삭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그와 그 후손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야 할 약속의 터전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삭은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6장을 보면 이삭은 가나안 땅, 남방 지역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는 아비멜렉과 지속적으로 다투었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살았던 지역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사용한 우물들을 다시 파서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창26:2; 26:24),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창26:3; 12, 22), 하나님을 섬겼습니다(창26:25). 그리고 야곱역시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만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후 야곱의 후손들은 450년 만에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굽 땅이 아무리 기름지고 좋아도 그곳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을 수가 없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만이 약속의 땅이며 축복의 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넘겨줘야하는 올바른 신앙의 터전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살아가야 할 축복의 땅이 어디입니까?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문화가 아닙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혼합주의가 팽배한 세상의 이념이나 사고가 아닙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축복의 장소입니다.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리고 그 후손들이 교회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3. 올바른 신앙의 문화를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배필을 찾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삭의 배필을 고향 땅에서 찾도록 합니다. 가나안 땅에 얼마든지 많은 처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토 친척 가운데에서 이삭의 배필을 찾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고대 근동사람들의 문화 풍습으로 오늘날도 중동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풍습의 핵심은 동일한 문화와 동일한 혈통과 한 하나님만 섬기려는 유일 신앙에서 나왔다고 볼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7: 1-4을 보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가장 강조했던 것이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와 종교를 모방하거나 답습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냉정하고 가혹했던 이유는 혼합 문화와 혼합 종교를 배격하기 위해서입니다. 혼합 문화와 혼합종교를 통해서는 올바른 신앙 유산을 계승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 종교와 혼합될때, 그들은 끝없는 죄악의 구렁텅이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는 컴퓨터나 TV 모니터 안에 세상에 모든 것들이 다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 안에 세상의 온갖 문화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와 교회가 올바른 신앙의 문화를 남겨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을 우리의 자녀와 그 다음 세대의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여러분의 믿음이 100년 후에도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계승되기를 원하십니까? 다음 세대에 올바른 신앙의 문화를 남겨주기 위해 제단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문이 되는 뿌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100년 후에도 믿음이 계승되게 하는 출발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절대 신앙 유산을 후손에게 남겨주는 기초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신앙 유산을 다음 세대에 남겨 줄 것을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서약하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무웅 목사(서울 강북구 우이동 우이제일교회)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2006-01-02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요10:10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주 속에는 수많은 혹성들이 있지만 지금까지는 생명체는 지구에만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구의 나이가 얼마인가 하는 것은 과학자들에 따라 다릅니다만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구에 있는 생명공동체에 이미 심각한 종말의 징후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현상과 오존층 파괴로 인한 기상의 이변과 생태계 파괴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가 지니고 있는 화석연료는 앞으로 50여 년간 사용할 분량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대체 에너지 개발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구촌의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사막화 현상은 식량문제와 생태계의 보금자리를 위협해가고 있으며 수질오염과 토양산성화, 산소생산량 부족 등은 모든 생명체의 목을 죄어서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식품이 상품으로 둔갑하고 농사가 사업으로 변하면서, 온갖 독성약물과 성장촉진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며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상품을 생산함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독을 먹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환경호르몬의 폐해를 입으며 불안한 미래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앞으로 생명복제기술이 보편화되어서 인간복제까지 감행할 경우에 야기될 창조질서의 대혼란을 예상할 때 지구생명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예측은 현재까지 나타나고 있는 징후들과 지금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죄성(罪性)”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려는 악마의 계략에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죽어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종말 을 재촉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일례로 나무들을 보면 나무에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는 본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지 접붙이기를 하기 위해 돌감나무 밑동을 잘라버리면, 평소 같으면 싹이 나지 않을 부위이지만 그 밑동에서 싹이 나고 왕성하게 줄기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꺾꽂이를 하기 위해 나무로부터 나뭇가지 일부를 잘라내어 땅에 꽂아 두면 가지 밑 부분에서 뿌리가 생겨나는 것도 잃어버린 뿌리 부분을 복원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 즉,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한 나무의 본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나무의 성질을 이용해서 접붙이기도 하고 꺾꽂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본성, 이런 본능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동식물들에게는 종족유지 본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손상되어진 신체 부위가 다시 재생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치가 빠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영구치아가 생겨납니다. 피부에 상처를 입어도 손상된 부분에 새 살이 돋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곧 우리의 생명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생기 즉 생령을 불어넣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그것을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탐욕 즉 인간이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의 영역을 탐하는 일로 그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보았던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계곡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마른 뼈들입니다. 영적 죽음의 상태를 그렇게 묘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생기가 다시 불어와 마른 뼈들에 가죽이 덮이고 힘줄이 생기며 생명이 회복되어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본성을 주신 것 같습니다. 아니 우리 인간들에게는 흔적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 끊임없이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생명회복운동라이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는 생명목회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생명목회란 바로 이와 같은 일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잃어버린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예수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바울 사도는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내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신의 일부를 아니 밑동을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자아 회복을 위한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명회복 운동이나 생명목회는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다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주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곧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는 지름길입니다. 생명목회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도 현대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란 항상 시대 시대마다 나타나는 문명 속에서 잘못되어진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룩해 온 문명은 분명히 인간들에게 편리함과 안전함과 유익을 준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문명은 결국 생명을 살리는 문명이 아니라 죽이는 문명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유심히 보세요. 문명이 생명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물을 사먹습니다. 수돗물을 불신합니다. 음료로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수도는 약을 통해서 멸균되었지만 물맛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형광등은 밝지만 세포를 파괴합니다. 우리가 걷다가 우마차를 타다가 자전거를 탔고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탔습니다. 이제는 집은 없어도 차는 타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차는 빠르기는 하지만 걷기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걷기를 잃어버리니까 건강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명이 또 다른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난1세기 동안 있었던 그 어떤 재난 보다 더 강력한 재난을 당한 모습을 매일 뉴스를 통해서 듣고 있습니다. 특히 2004년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겪었습니다. 미국과 중남미에는 4차례 대형 허리케인이 몰아쳐 플로리다에서만 가옥 2500채가 파괴됐고 아이티에서는 1500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일본에서도 10월 니가타 현 강진과 10차례의 태풍으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매년 그해의 세태를 압축해 나타내는 한자어를 선정해 온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지난해 12월 13일 일본 열도에서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災’를 2004년의 한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매스컴에서 해마다 선정하는 10대 뉴스가 선정되고 난 다음인 지난 12월 26일에 발생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부근 바다에서 발생한 8.9의 강진으로 인한 해일이 발생하여 여러 나라에 걸쳐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사건은 세계 3대재앙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1970년에 방글라데시에 발생한 대홍수와 1976년 중국 탕산에 발생한 대지진, 그리고 이번 인도네시아의 지진과 해일로 인한 피해가 세 번째 큰 재앙이라고 합니다. 사망자가 얼마나 늘어날지는 모르지만 15만 명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지진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그리고 자연재해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그리고 하나님이 예언해 주신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인도네시아 대지진으로 인한 해일 피해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시대적 변화와 문명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21세기의 초유의 문명으로 인한 생명파괴 현장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반면에 사단은 생명을 죽이려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질병과 가난, 부정과 부패, 억압과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잘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온 세상을 함께 구원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생명을 살려야 하지만 인간의 생명과 관계되는 자연의 생명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무엇인가? 모든 생명을 나의 생명처럼 여기는 의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금년의 교회의 목표를 생명 살리는 일로 정했습니다. 100년의 은혜를 한해로 마무리하고 우리끼리 자축하는 것으로 끝맺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00년의 은혜는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교회의 금년 표어는 “100년의 은혜로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이미 정해놓고 보니 정말 표어를 잘 정했다는 생각과 함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친히 주관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목사를 통해서 표어를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어는 그냥 구호로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말씀이 먼저 선행됩니다. 이 표어를 뒷받침하는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인 10절입니다. 특히 하반절 말씀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은 양을 훔쳐가서 잡아먹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기 위해서입니다. 자기가 키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적은 양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생명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꼴을 먹이고 좋은 물을 마시게 해서 살을 찌우게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마리라도 더 많이 키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파도 치료해 주고 오직 마음이 양에게 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신 사역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무한대의 사랑의 에너지로 병든 자를 고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미움을 사랑으로, 다툼을 평화로, 죽임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시며 온갖 이적을 베푸셨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며 치유하며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스스로 낮아지는 자가 높아지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베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진피해를 입은 나라 백성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 살리는 일에 첫 번째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기 때문에 다음주일에는 특별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와 교회는 언제든지 나눌 수 있어야 하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내 자신을 끊임없이 자유낙하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보다 더 많은 재화를 소유하고 보다 더 높은 위치에 도달할수록 더 많은 운동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생명을 살리는 분이 아니라 선한 목자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생명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고 요한복음10장 1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이제 우리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함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모든 성도는 생명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금년 한해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지구상에서는 생명을 살리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을 앞장서서 해야 할 사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와 교회에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우리 교단의 생명살리기운동 10년 계획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만민에게 전파합시다. 둘째는 자연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합시다. 파괴된 자연에 창조의 새 질서를 가져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를 새롭게 하고 하나 되게 합시다. 교회의 삶에 일치와 갱신을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넷째는 북한 동포와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분단된 조국에 평화통일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다섯째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의롭게 살아갑시다. 여섯째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일곱째 장애를 가진 이웃과 함께 살아갑시다. 여덟째 청소년의 꿈을 함께 가꾸고 이루어 갑시다. 아홉째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하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닫힌 사회에 열린 대화의 문화를 만들어 열린사회를 만들어 포용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 번째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문화를 건설합시다. 약육강식의 대중사회에 생명살림의 새 문화를 창달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가장 우선이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 가운데서도 인간의 영혼을 먼저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동안 동성연애와 낙태지지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 운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다 같은 신앙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부시 앞에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현재의 부시 대통령과는 신앙관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낙태지지운동은 낙태를 합법화시키자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 낙태지지운동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켜서 실제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찰스 콜슨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싸움이 성공을 거두었군요.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낙태지지운동과 맞서서 성공을 거두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싸움의 승리는 반쪽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사회의 운동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정답 아닙니까? 사회운동으로 낙태지지 운동에 반대하긴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회운동으로 해결될 게 아니라 영혼이 치유받기 전에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바로 영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사회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 중요합니다. 환경 살리기 운동도 해야 합니다. 불의한 것을 정의로움으로 바꾸는 운동도 해야 합니다. 보안법폐지도 중요하고 역사바로세우기도 중요합니다. 무슨 운동을 하든지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영혼구원과 직결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운동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생명운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합니다. 전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병원선교 중요합니다. 교도소 선교, 학원선교 등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구역별로 반드시 새 생명 전도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 구역이 두 사람 이상씩 반드시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세례를 주도록 최선을 다해 봅시다. 나는 값없이 영혼이 구원을 받아 소망가운데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책망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로서의 아름다운 예배당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넓은 예배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채우라고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한 사람도 전도해보지 못한 분들은 금년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생명 살리는 해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도록 합시다. 그 생명을 살리는 것은 곧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