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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 Spirit/ 영문으로 된 성령에 대한 글 모음/ 2015-05-23
Holy Spirit/ 영문으로 된 성령에 대한 글 모음 HOLY SPIRIT "So I say, live by the Spirit, and you will not gratify the desires of the sinful nature. " Galatians 5:16 The baptism of the Holy Ghost makes us witnesses to Jesus; Not wonder workers. The witness is not to what Jesus does, but to what he is. -Oswald Chambers- God commands us to be filled with the Spirit, and if we are not filled, it is because we are living beneath our privileges. -Dmdght L. Moody- We must not be content to be cleansed from sin; we must be filled with the Spirit. -John Fletcher- Living one day in the Spirit is worth more than a thousand lived in the flesh. -Richard Owen Robeits- The true Christian ideal is not to be happy but to be holy. -A. W. Tozer- The Spirit-filled life is no mystery revealed to a select few, No goal difficult of attainment. To trust and to obey is the substance of the whole matter. -Victor Raymond Edman-
기독교 교육과 성령의 역사/ 2015-05-23
기독교 교육과 성령의 역사 1) 교사로서의 성령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기독교 교육은 교사가 성령의 역사를 보여줌으로 그 영향력을 크게 나타나게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 교육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생활을 향상시켜 거룩하게살도록 하는 힘이 있다. 일반 교육은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나 기독 교 교육은 성령의 역사를 존중하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교사에게 격려하여 주고 힘을 북돋아 주며 교사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 또 성경의 교훈을 받아들여 마음속 깊이 움직여 생활에서 실천케 하기도 한다. 성렬께서 교사에게 능력을 채워주시여 유능한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과 날마다의 생활에 새로운 힘을 주어 생활의 큰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하나님게서 배우고 가르치는 법을 창조하셨고, 가르침의 선물을 주셨다. 그리고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저 하시는 일을 사역하신다. 교사로 하여금감화력 있는 교훈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교사를 사용하여 말하게 하고,배우고, 가르치게 한다. 성령께서 친히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안내와 교훈 그리고 지식도 공급해 주신다. 2).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기독교 교육 교회 학교도 일반 학교나 다름없이 학교마다 성공할 수 있는 확실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학교에서 학년을 담임한 교사나 다름없이 교회 학교에서도 반담임교사로서 각 반의 교육목표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 교육의 주요한 목표는 학생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성경 말씀을 가르쳐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가완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즉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교사가 그런 교육의 목표를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교사 중의 교사는성령이시다. 기독교 교육은 성령과 학생들의 일상생활과 연관성이 매우 깊다. 기독교 교육은 현대의 일반 교육과 다름없이 학생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기독교 교육은 학생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느끼고 행해야 할 것을 돕는것과 까깊은 관계가 있다. 기독교 교육도 학생들로 하여금 학과를 배울 때마다 그 학과의 내용을 자 기생활과 연관시켜 이행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도 배운다는것은 사람의 요구와 능력에 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 교육은 사람마다가정, 사회, 직장 그리고 교회 등 모든 생활을 성경 진리에 다 연관시키게 하는것이다. 이러한 관련성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이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비록 기독교 교육의 중심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할찌라도 기독교 교육의 적용은 사회적으로 되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한세계에 살고 있지만 동거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요한복 음 15:19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 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 교육도 학생들이 모두 어떻게 살고,일하고, 놀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기독족 신사, 숙녀의특성인 사회적 도덕을 배우게 하는 것도 기독교 교육이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성령의 조명 아래 해석되어 진다. 기독교 교육은 학생들이 어느 곳에서나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사회적인 관계에까지도 성경적 원리를 적용시키는 것이다. 3). 성경에 기초를 둔 기독교 교육 기독교 교육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다 둔다. 성경은 하나님, 사람, 세상에대한 진리의 근본적 원천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비춰지며 해석되어 진다.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 까닭은 성경 진리는 정확 무오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 지겠으나 내 말은없어지지 아니하니라"(마24:35)고 하셨다. (1) 성경에 기초한 교육의 표준 기독교 교육은 외모, 행위 훈련의 표준도 갖고 있어야 한다. 날마다 변해 가는 세상의 표준과 달리 기독교 교육은 만고불변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고로 성경에 기초를 둔 기독교 교육은 절대적인 진리를 주고 있으므로 성경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까닭에 절대적이다. 인간인 교사의 힘만으로는 성경이 보여주는 이상을 성취할 수 없다. 오로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일반 교육과는 달리 기독교 교육은 성령의 역사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만이 절대적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 그 진리는 영원 불변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자신이 밝히고 있다. 즉요한복음 14:6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셨다. (2)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교육은 성경적 진리에 기초한 (하나님의 피조물) 모든 물질 세계와 활동을 감안하여 교육한다. 기독교 교육이 다루는 모든 교육 내용은 성경적 원리에 의거해야 되며,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표준을 두지 아니하는 한 기독교 교육에서는 어떠한주제, 내용,방법, 실제활동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 교육은 기도로 준비하며, 시작하고 진행시키고, 끝을 맺는다. 기도없는교육은 기독교 교육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이 무엇 인지 더 잘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신실한 교사 들이라면 기도로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경을 가르치며 학생들을 대하며, 사회적 적응을 시킨다. 기도하는 교사는 기독교 교육의 진의를 바로 이해하게 된다.
기독교교리문답/ 제1과 성령의 구속/ 2015-05-23
기독교교리문답/ 제1과 성령의 구속(29-30) A. 읽을 말씀 롬3:23-24 B. 요리 문답 29. 우리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에 참여하게 하시는가? 답: 우리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구속을 효력있게 적용하심을 인함이다(요1:12-13, 3:5-6, 딛3:5-6). (1) 성령의 활동으로, (요16:7-8). (2)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요1:12-13, 22:17) 30.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셨는가? 답: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또 효력있는 부르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는 것이다(엡2:8,요15:55,고전6:17,고전1:9,벧전5:10,엡4:15-16,갈2:20) (1) 믿음을 일으키심,(엡2:8). (2) 부르심,(엡2:18-20). (3)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심,(요6:37-39). C. 문답해설 1. 구속에 참여하게 하시는 성령 (1) 구속은 "푼다"는 말에서 나왔고, 그 교리는 구약의 출애굽이나 (출6:6, 15:13), 신약 당시의 노예를 사서 해방 시켜 주는데서 그 뜻을 찾을 수 있다. (2) 불신자는 모두 죄의 노예가 되어 있고,(요8:34-36), 예수님은 그 피로서 댓가를 치루시고 사서 참 자유를 주신 것이다.(엡1:7, 골1:14). (3) 유월절 양의 피는 애굽에서 장자를 죽음에서 구출하였다. 곧 그리스도의보혈은 "범죄한 자는 죽으리라"(겔18:4,20,창20:17,롬6:23)고 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범죄자를 위해 지불되었다. (4)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피로사신 구속에 참여하게 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것은 영이다(요3:5-6).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 할 수 없다"(고전12:3)고 주장한 것이다. 2. 구속을 효력있게 하시는 성령 (1) 요리문답 제29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예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제30은 성령 께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을 어떻게 어떻게 적용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 구속을 효력있게 적용하시는 일은 성령의 중요한 사역이다.(요1:12, 3:5-6, 6:57, 7:39, 행2:32, 롬8:26). 곧 성령은 성도안에 계셔서,(고전3:16,롬8:9), 거듭나게 하시며 (딛3:5, 요3:3),예수를 믿게 하신다.(고전12:3,9,살후2:13). (3) 그리고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게 하시며,(롬8:16, 갈4:4)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갈5:22-23). 3.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는 성령 (1) 성령은 믿음으로 일으키신다.(롬15:3, 엡1:19-20) 그래서 그리스도를우리의 구주로 믿게 하신다.(고후3:17, 엡4:30) (2)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매는 줄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비유가 여럿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요15:1-5,롬11:16-24),몸과 머리(엡2:15-16), 남편과 아내(엡2:20-22) 등이다. (3)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이다.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생명을 잃는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 안에서만 생명의 열매 를 맺을 것이다 (요15:7-8). D. 연 구 문 제 1.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연구하라. 2.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연구하라.
기독교교리문답/ 제2과 성령의 소명/ 2015-05-23
기독교교리문답/ 제2과 성령의 소명 제2과 성령의 소명 (31) A. 읽을 말씀 엡1:18-19 B. 요리 문답 31. 효력있는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답: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일이니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고 또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권하사 능히 복음 중에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하는 것이다.(딤후1:8-9,엡 1:18, 엡1:18-20, 행2:37, 26:18, 겔11:19, 36:26-27, 요6:44-45,엡2:5,살후2:13,빌2:13) (1)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함 (요16:8). (2) 영안을 밝게 하심 (엡1:18, 계3:17-18, 행26:18). (3) 의지를 새롭게 함 (겔11:19). (4)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 (빌2:13). C. 문답해설 1. 부르시는 성령 (1)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다.(엡1:18-19, 딤후1:9). 그런데 부르심에는 보통 부르심(외소)과 효력있는 부르심(내소)의두 가지가 있다. (행16:14, 마22:14) (2) 외적 부르심은 모든 인간에게 선포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와 그를 믿고 구원 얻으라는 열렬한 권고요, 내적 부르심은 택함받은 사람에게 임하는 특별한 부르심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외적 부르심을 효력있게 하는 것이다 (요6:37). 2. 깨닫게 하시는 성령 (1)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부르시고 부르신 후에는 인간의 죄와 죄로 인한 인간의 비참을 깨닫게 하신다.(행2:37-38). 때문에 구약의 다윗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회한 것이다.(시51:4). (2)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청중이 어찌하여 "마음에 찔려","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했다.성령을 떠난 진정한 회개는 불가능한 것이다.(행2:37-38) 3. 알게 하시는 성령 (1) 성령은 어두운 심령의 눈을 밝히는 영이시다. 따라서 우리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다. (행26:18, 빌3:8, 계3:17). 때문에 바울도 그렇게 되기를 위하여 간구했다(엡1:18). (2) 성령은 죄로 어두워진 눈을(롬1:24) 밝히사(사3:5, 42:7), 어두운 생활에서(엡5:18), 빛되신 하나님(요일 1:9, 8:12, 요일1:5)의 세계로 돌아오게하신다 (롬13:11-14). 4. 새롭게 하시는 성령 (1)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는다 (엡4:24). (2) 이렇게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 (딛3:6-7) 따라서 세리장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눅19:9)이 된 것이다. 중생은 성령이 이루시는 일이요(요3:5),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다.(요1:13) 5. 믿게 하시는 성령 (1)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하사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고전12:3). 그리스도의 에 w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롬8:9). (2)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다 (롬6:23). 실로 믿음만이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요1:12). D. 연 구 문 제 1. 성령의 부르심에 대하여 연구하라. 2.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대하여 연구하라.
명언 / 예화
명언 / 예화 -------------------------------------------------------------------------------- 조지 스위팅 어떤 곳을 채우려면 먼저 그곳을 비워야 한다. 당신의 인생이 무기력하다 면 그것은 당신이 완전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C.G.괴니 - 미국의 부흥사,교육가 성령 충만을 받는 일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가장 근본적이요 중요한 일이다. 힐티 - 스위스의 철학자, 법학자 성령을 대항할 수는 있으나 대항하여 이긴 자는 없다. 무디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만한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만일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특권 이하로 살고 있는 것이다 무디 만일 당신이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이라면, 당신은 억지로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 하나님을 섬기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딕슨 우리가 조직에 의존한다면,조직이 해내는 것을 얻는다. 우리가 교육에 의존한다면,우리는 교육이 해내는 것을 얻는다. 웅변에 의존한다면,우리는 웅변이 해내는 것을 얻는다. 역시 우리가 성령에 의존한다면,우리는 하나님이 해내는 것을 얻는다. 워렌 위즈베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우리를 사용하신다. 힐티 - 스위스 철학자, 법학자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부어지면 성령은 그 사람의 외면도 완전히 성숙하게 한다. 제레미 테일러 자기를 돕는 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유념하는 자는 절대로실망하지 않는다. 워렌 위즈베 우리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우리를 사용하신다. 헨리 발리 세상은 아직도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완전히 속하게 되면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어떤 것을 하실 것인지는 모른다. -------------------------------------------------------------------------------- 제목:무디의 체험 뉴욕에서의 어느날 - 아, 그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입 밖에 내기조차도 조심스럽다. 그것 은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하며, 나는 단지 하나님 이 그의 자태를 나에게 드러내셨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나는 너무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손길이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말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나는 전도 를 계속했다. 설교는 전과 거의 같았고 그렇다고 해서 새로 운 진리를 표현한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다. 나는 결코 축복의 체험 이전의 나날들로 되돌아 가지는 않을 것이다. 제목:담수화 공장 중동 산육국들은 지하수에 염분과 석회분이 많아서 그대로 식수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담수화 공장을 많이 세운다고 한다. 이는 물이 흐르는 큰 수도관 속에 화덕 같이 뜨거운 불이 흐르는 작은 철관을 여러개 지나가게 하여 수도관의 물을 뜨겁게 하여 물이 증발되게 하는데 물을 더욱 증 발시키기 위하여 한쪽에서 강한 바람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렇게 증발된 수증기를 냉각하여 증류수를 만들고 여기에 약품을 가미하여 식수로 쓴다는 것이다. 염수나 더러운 물이 아무리 담수가 되려고 해도 스스로는 되지 못하는 것 같이 죄로 더러워진 인간의 영혼은 성령의 뜨거운 열과 강한 바람을 통해야만 죄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 영혼이 도저히 죄에서 놓임받을 수 없다. 또한 성령은 곧 능력이시다. 주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후 기쁨과 능력이 충만하여 초인적인 힘으로 복음을 전했다. 제목:특별감지기능 세상에는 특별감지기능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각, 촉각, 미각, 청각, 취각 등 오감만으로는 감지할 수 없고 판단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하여 과학적 기계를 가지고 감지하는 것이다. 북극의 자력을 감지하는데는 나 침판이 있고, 먼 곳에 오는 전파는 레이다를 가지고 감지한다. 먼 별에서 날아오는 에너르기는 레이다 망원경으로 감지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특별감지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계를 통하여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만일 인 간이 가지고 있는 오감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려 한다면 그는 현대의 인간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오감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없다하여 하나님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 거하는 성령을 모신 자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는 특별감지기능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바울의 성령론/ 2015-05-23
바울의 성령론 성령에 대하여 바울은 다른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으로 권능을 받았던 것처럼 그도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할 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였다. 이는 주께서 택한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며, 실증이였다.( 성령은 주님의 약속, 고후1:20-22 (참고 눅24:49, 행1:4-5).)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 행2:38; 롬3:15 (참고 약1:17, 요4:10).) 확신한다. 또한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이 생기게 하는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임하신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를 입증하여 로마서 10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였으며,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와같이 바울은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서 성령을 받음을 입증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가 보내신 복음의 메시지에 대하여 사람들이 믿음으로 받아 드릴때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하였다.( 믿음으로 성령받음 엡1:13; 갈3:2 (참고 롬1:16, 고전1:18).) 이러한 성령의 실상에 대해서 바울은 성령이란 하나님의 대언자로 알았고, 또한 성령은 교회의 영적 평안과 발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약속에 따라 성령은 그리스도의 승천후 영원한 대언자로서 몸된 교회의 상징이 되었다.( 성령은 몸된 교회 상징 엡2:22 (참고 요14:2615:26, 요일2:1).)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능력) 롬8:9-11; 고후3:17 (참고 요6:63, 3:24); 고전1:24.) 이와같이 복음안에서 바울과 같이 성령의 본질과 임재 및 그 직분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한 사람은 없다. 바울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A. 성령의 인격성 성령의 인격성은 믿는 자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는 역사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즉 성령은 택함 받은 자가 소유해야 할 필연적인 인격이다. 성령은 모든 때와 모든 방법으로 보혜사로 역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라" 하였으며, 요한일서 2장 1절에는 "보혜사는 대언자라" 하였다. 이로 볼 때 성령은 계시하는 데에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사실이다. 즉 성령은 외견상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시는 대행자이며 내면적으로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인격자요 능력이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고, 이해하도록 마음을 밝히는 하나님의 중보자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깨달아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며,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아들 되도록 인도하는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의 인도 롬5:58:142627.) 뿐만 아니라,이와같이 성령은 허락한 자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깊은 것도 통달하게 하신다.( 성령의 가르침 고전2:1310.) 또한 성령은 택하신 자의 행할것을 지시하신다.( 성령의 지시 행9:3-613:2-3,16:6-7.) 또한 성령은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하며,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 성령의 증거 롬8:26-278:16; 갈4:6.) 이와같은 바울의 많은 서신들을 통해 볼 때, 바울은 성령을 온전히 하나님의 인격으로 받아 드리고 있으며, 또한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소유해야할 인격임을 주장하였다.( 성령은 하나님의 인격 고전6:17; 고후1:21-22; 엡4:30; 갈6:8.) B. 성령의 신성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바울은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이란 구절들을 성령으로 설명하였다.( 성령의 신성 행28:25 (참고 사6:5-10).) 고린도후서 3:17 에서 "주는 영이시니" 그 본질, 목적, 권능에 있어 성령은 그리스도와 동일시 되고 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롬8:911 (참고 요6:6312:49-50, 요일5:7, 요17:17).)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설립 자체가 성령의 신성임을 증명하고 가르쳤다.( 성령과 교회 고전3:166:19, 엡3:10-11; 딤전3:15.) 이러한 성령의 신성은 성령의 인격성을 주관 역사하신다고 믿었다.( 성령의 역사는? 고전12:4-7; 롬8:9-10; 고전2:10, 12-14; 갈5:22-23; 고후3:17-18; 엡2:223:16.) C. 성령의 동등성(성부,성자)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등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삼위로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삼위는 일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삼위일체인 성령 엡4:4-6; 고후13:13.) 이와같이 바울의 주장은 그이 교리와 신학적 기초를 그리스도 안에 형성하고 있으며, 그의 교리가 인간을 죄에서 구속시키는 게획과 개념을 주관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0-22절에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연합하여 성전이 되어가며,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감을 주장하고 있다. ● 이러한 연합은 ① 영적 연합이며 한 성령의 머리와 지체의 연합이며, 실재적인 것으로 우리는 예수의 몸에 지체인 것이다.( 영적 연합 고전12:12-1327; 롬12:5; 엡4:151630.) ② 신비적인 관계이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이요, 또한 성령의 전이다.( 성령의 전 고전3:166:19.) 항상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믿고,( 내 안에 예수 갈2:20; 롬8:1-29; 고후13:5.) 우리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되어,( 그리스도로 옷 입음 롬13:14; 갈3:27; 골3:10.)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 새로운 피조물 고후5:17; 엡4:23-24, 신령한몸 고전15:4449.) ③ 영원한 관계이다. 한마디로 이 영원한 관계는 생명의 원천을 이루는 연합으로서,( 영원한 관계 롬8:38-39; 히5:8-9 (참고 요일2:24-25).)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의해 보호된 모든 은혜에 동참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에까지 동참할 수 있는 연합 관계이다.( 연합 관계 롬6:2-10; 고후4:10-11.) 이 연합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의 인간의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계속 역사할 때 구원의 성취를 얻게된다.( 구원의 성취 엡2:8-103:16-19 (참고 요1:12-14, 마10:2224:13).)
방언이 성령역사의 결정적 요소인가?/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성결대학교/ 2010-09-21
방언이 성령역사의 결정적 요소인가?/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한국교회 안에 방언에 대한 관심도 높지만 논란 또한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요. 방언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그동안 어떻게 평가해 왔나요? 그리고 방언에 대한 찬반양론이 많은 가운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신학적으로 정리해야 할까요? A) 신앙생활하면서 방언에 대한 질문이나 궁금한 점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는 방언 말하기를 사모하고 있는 분도 계실 것이고, 또 방언을 하고는 있지만 과연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선 교회사적으로 방언 문제에 대한 이해를 하신 후, 이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방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시작된 것은 1930년대 전후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방언에 대한 체험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특히 1900년도 초부터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기간 중에 은혜 받은 성도들 가운데 각양각색의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는데, 유독 방언만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당시의 기록 자료들을 볼 때 방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이유는, 대부분 장로교와 감리교 계통의 선교사들이었던 이들은 방언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교단 교리적인 이유로 인해 방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급한 대로 우리 나라에서는 1930년대에 방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특히 1930년대 전후의 ‘방언파’라고 지탄을 받던 이들에게서 가장 먼저 나타났습니다. 방언파란 1928년부터 한국에 와서 활동한 미국과 영국의 오순절교단 선교사들의 방언 강조로 인해 붙여진 말입니다. 이들은 방언을 성령세례의 가장 뚜렷한 증거로서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은 안타깝게도 1930년대의 이단들인 황국주, 유명화, 백남주 등이 거짓 계시와 방언, 예언을 동반하는 혼합주의적 영성운동을 확산하던 것과 연관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던 중국인 신학자 가옥명(賈玉銘)이 쓴 「성령론」이라는 책에서도 방언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방언 자체가 성령세례의 표적이라고 보는 오순절적 견해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세례 받은 증거로서 방언보다 더 명확한 증거들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賈玉銘, 「성령론」, 103-4). 문맥이나 어법상으로 볼 때 방언을 절대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강조점은 성령의 열매와 함께 ‘봉사의 능력’(power for service)에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노선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교계에는 방언 문제로 인해 크게 물의가 일어나고 신학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로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 교수들 사이의 신학 논쟁으로 확산되어갔습니다. 그래서 중생 이후의 성령세례 경험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오순절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장로교 신학자들은 예언, 방언, 신유와 같은 특별 은사는 사도시대까지로 중지되었기 때문에 현대 교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성결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결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세례 받은 표적으로서의 방언에 대해 명백히 부정했으며, 성령세례의 결과를 ‘정화와 능력’(purity and power)으로 보았습니다. 그러자 오순절교단의 방언 운동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기존 교단들로부터 강도 높은 비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빈야드운동을 중심으로 한 ‘제 3의 물결’의 영성이 한국 교계와 신학계의 큰 논제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제 3의 물결’에서는 방언이 필수적인 성령세례의 표적이 아니라, 어떤 영적 사역이나 효과적인 기도를 위해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라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 오순절파 교회의 신자와 목회자들 사이에 점차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편,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교리적 입장을 취해 온 장로교나 감리교나 성결교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방언에 대해 크게 수용하고 있는 목회적 현실입니다. 이 같은 목회적 현상은 그 동안 각 교단 교리적 노선에서 취해 온 입장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에는 오순절교단의 젊은 목회자들 사이에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첫 표적이라고 보기보다는 성령의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견해가 점차 일반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순절교회들이 1980년대 이후 ‘제 3의 물결’로 인해 방언을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보는 영향을 많이 받은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오순절교회인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가 지속적으로 타 교단 신학자들을 초청해 신학적 교류를 많이 해 온 까닭에, 방언에 대한 해석이 좀 더 일반화되어 가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복음적 신앙의 핵심은 성령의 역사의 결정적인 요소가 방언, 신유, 입신과 같은 은사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삶의 변화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적 성결이라는 핵심은 기독교 이천 년 역사상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며, 적어도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복음적 성령론의 변함없는 기반이기도 한 것입니다. 은사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은사주의나 무분별한 은사 사용은 언제나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온 것일 뿐 아니라 성령론의 핵심 사항이라기보다는 부차적 사항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모든 복음주의 교회들은 하나님 말씀의 정신 안에서 분별력을 날카롭게 하여 은사 사용의 잣대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2015-05-23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감람산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9).이것은 4.800미리 초망원 렌즈로 촬영한 것이다.가운데 솟아 있는 [승천탑]너머로 태양이 떠오른다.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각도는 1년 중 11월의 2.3일 정도이다. 승천과 일출의 조화 가운데 놀라운 상징성을 발휘한다. 사도행전은 특히 성령의 사역이 부각되고 있는 책이다. 실로 성령의 사역이 본서를 지배하고 있다. 본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행전"으로 불리우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인격체이신 제3위 하나님 성령 성령이 인격체이신 사실이 본서에서 분명해진다. 이는 그가 인격체만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친히 말씀하셨고(1:16,8:29,10:19등)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셨다(2:4,4:8,31등).그는 증거하셨고(5:32).그리스도의 일꾼들을 파송하셨으며(13:4),사도들을 교회의 직분에 세우기도 하셨다(20:28).그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계시며(15:28)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분명히 받아들여지셨다(5:3,9). 그리스도의 사자 사도행전 1:1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통해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셨음을 암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선물이며 (2:23)."예수의 영"으로 불리우신다(16:7).그는 또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으로도 불리우신다(1:4). 교회의 창설자 현재 우리는 아는 교회는 오순절날에 창설되었다.바람과 불(2:2-3)은 한나님의 임재의 대한 구약성경의 상징들이다(출19:18,왕상 19:11-12을 보라). 방언의 은사(2:4-13)는 갖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게 될 교회의 궁극적인 보편성을 상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선정하여 베푸신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령께서는 사랑과 연합의 교제를 창조하셨고(2:43-46) 또 기독교 메시지의 응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이 약속되었다(2:36,5:32도 역시 보라). 확장되어가는 교회를 하나로 묶는 힘 누가는 실제로 성령의 사역을 통한 복음의 진보와 그 결과적인 확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오순절날의 교회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 (따라서 그들은 마치 유대인인 것처럼 계수되고 있다.2:10) 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혼합된 인종과 분리된 종교의 문제로 인하여 사마리아인들을 증오하였으나 사도행전 8:14-17에서 성령은 사마리아 신자들에게도 임하신다. 이 일이 (유대인)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한 후에야 일어난 것은 사도들 편에서의 그들에 대한 사랑과 교제의 자세를 암시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요4:22)는 사실을 확증해주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은 사도행전 10:44-48(11:1-18도 역시 보라)에서 베드로의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전파를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순절날의 현상이 다시 나타났을 때 무너졌다.서영에 대한 약속이 처음으로 제시된 것은 세례요한을 통해서였다(마3:11-12 행1:5,11:16을 보라).그러므로 누가는 일단의 요한의 제자들도 역시 성령을 받게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19:1-7). 이 구절들은 성령께서 이 각각의 무리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으시고 이탈을 막으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증인들 배후의 권능 성령이 교회에 선물로 주어진 것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8,4:33과 비교하여 보라).교회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이방인들을 복음화할 선교사로 파송하였다(13:1-4). 그것은 앞서 베드로에게 지시하여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경우와 같았다(10:19이하,8:29,16:6-7과도 역시 비교하여 보라).성령의 충만을 입은 그들은 능력있게 말하였고(4:8,31,6:10) 새교회의 생명과 증거의 여러 다양한 국면들 담대히 소개하였다(6:3,5,11:22-24).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말과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타낼 능력을 주셨다. 교회의 생명 하나님의 영은 각처 교회의 내적 생명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9:31).교회의 감독자(장로)들을 세우셔서 파수꾼으로 삼으신 이가 바로 성령이셨다(20:28).새 시대는 교회의 설립과 육성(15:32)및 장차 올 일들에 대한 예언(11:28,21:4) 에 관심을 갖는 예언의 시대(2:17-18)가 될 것이었다. 교회의 회의는 성령의 지도를 추구하였고 또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으로 믿었다(15:28). 이와 같이 사도행전은 성령의 인격과 역할을 계시함에 있어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본서는 또한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되는 완성 혹은 성취를 기록한 책이다. 구약의 예언들과 성령에 대한 주 예수의 약속들은 오순절날에 온전히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전파하셨고 또 서신서들에 명백히 증거된 새 시대, 곧 성령의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그로간(G.W. GROGAN)
성령 (영과 성령)
성령 (영과 성령) -------------------------------------------------------------------------------- 성령 (히)루아흐 (라)Spiritus Sanctus (영)Holy Spirit (독)HeiligerGeist 삼위일체의 제3위격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영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전쟁의 용기와 힘, 예언과 재판, 뛰어난 기술과 지혜 등은 하나님의 영의 은사였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고, 예수를 광야로 인도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하나님이 뜻을 이루셨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곳에서는 예수의 생애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예수께서 구주이심을 확신하게 되고 현재도 살아 계신 주로서 앙망하게 된다. 성령에 의해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 주어지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신자 서로의 교제와 일치된다. 따라서 사랑이 성령의 은사 중에 최고이다. 그리고 종말의 소망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에 의해 시작된 구원이 마침내 신자들에게 완성되는 일의 보증이 되신다. 바울은 방언과 같은 황홀한 상태가 성령역사의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교회 전체의 건덕과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하나님이 자녀로서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 영과 성령 [라] Spiritus Santus [영] Holy Spirit [독] heliger Geist [불] Saint-esprit 희랍어 프뉴마는 관계되는 의미를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다. 성서에서 이 의미는 특수한 인간생활에 대한 용어와 하나님의 역동적인 활동에 대한 용어로 구분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영(루아흐)으로 창조시에 역사하 시고, 지도자들에게 힘을 주시고,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영은 세상에서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였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활력을 주면 그 사람은 영을 가졌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후 영은 인간의 특수한 능력(지식.감정.의지)에 대한 용어가 되었고, 인간의 행동과 생활의 중심이 되는 용어인 "영혼"과 "마음"과 동의어가 되었다. 신약성서에서 프뉴마는 거의 같은 의미인 인간 생명의 특수한 성질과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으로 사용되었으나 후자가 우위를 차지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그리고 신앙을 통해서 기록 되었고, 기록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은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독특한 존재를 지적하기 위하여 다른 용어들(: 몸, : 혼, : 정신, : 마음)과 함께 프뉴마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속적인 능력에 대해서,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 이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 프뉴마를 사용했다. 성령에 관하여 신약성서의 많은 기록자들의 강조점은 여기서 논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다. 일반적으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생애와 부활에서 역사하신 능력이었으며, 기적과 기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역사하신 기 적적인 능력이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역사하시며, 자연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속박에서 해방된 삶을 사는 신실한 사람들에 게 주어지는 선물이며, "그리스도의 영"으로 역사하시며, 기쁨.평안.인내. 양선.신실.관용.자제가 특징인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며, 예언.가르침.방언과 같은 특수한 은사를 주시며, 특히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어 교회의 연합의 기초가 되신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약성서에는 성령의 교리가 없다. 그러나 성령에 관한 특수한 언어가 후에 신학적 저작을 위한 자료가 되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기독론에 관하여 논쟁했다. 그러나 정통신앙을 가진 학자들은 성령이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person)임을 믿었다. 성령의 교리는 4세기 말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로고스에 관하여 논쟁할 때 마케도니우스 주의자들과 성령이단론자라고 불리우는 신학자들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했다. 그들의 견해는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정죄되었고, 한하나님 안에서 세 동등한 위격이라는 신조는 서방에서 정통신앙으로 인정되었다. 성령과 다른 두 위격의 관계는 후에 동방과 서방의 기독교 세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참고항목] 계보. 귀속. 군주신론. 발출. 삼위일체. 상호충만. 양식론. 영혼. 위격. 친자관계. 필리오케. 휴포스타시스.
성령 세례에 관하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오순절회/ 2015-05-23
성령 세례에 관하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오순절회 What about Baptism in the Holy Spirit? 성령 세례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 우리의 확실한 원칙 The Assemblies of God : Our Distinctive Doctrine 성령 세례 만큼 문제를 일으키고 토론의 대상이 된 교리도 없다. 그 논쟁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 기적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그 사건을 본 사람들은 질문을 하였고 베드로는 대답을 하기 위하여 설교를 하였다. 그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성령에 관하여 눈을 뜨도록 구약성서의 한 예언을 상고하게 하였다. 교회 역사 내내 성령의 바람은 그친 적이 없다. 2세기의 Tertullian, 10 세기의 Symeon, 18세기의 John Wesley, 19세기 미국의 부흥사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가 20세기 초반에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완벽하게 체험하기를 원하던 사람들이 모인 소 수의 작은 신앙 모임들에서 성령의 역사가 다시 나타남을 목격하였다. 그들은 회합 중에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같은 기적들을 체험하였다. 성령 세례를 경험한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였고, 예언을 하며, 병자 치유의 은사를 보였고 곧 전세계에 이르는 선교사 파송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 1960년대에 또 다른 부흥의 물결이 오순절의 축복을 퍼뜨렸다. 많은 루터교 신자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치유의 은사를 보였 다. 많은 로마 카톨릭 신자들은 경배 중 그들의 손을 들었으며 성령 안에서 기도하였다. 장로교,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형제회, 그리스도의 사도 교회 위에 성령의 바람이 불었다.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하나님을 친밀하게 섬기도록 심령을 이끄는 것만이 모든 질문에 가장 좋은 답을 하고 모든 논쟁을 가라 앉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이 간단한 역사적 회고에서 떠나서 몇 가지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구해 보도록 하자.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임하신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부가적이며 뚜렷한 체험으로서 권능을 받는 은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구원 받았을 때 성령을 받는가 ? 그렇다면 이 경험과 성령 세례의 다른점은 무엇인가 ? 그렇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는 그들의 삶에 큰 일을 시작하신다. 성령은 그들이 죄인임을 알게 하시고 정의를 깨우치시며 그들 안에 거하신다.(요한복음 6장 44절, 14장 17절, 로마서 8장 9절, 고린도전서 12장 13절) 성령의 이 은혜로운 역사 없이는 누구도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성령 세례라고 불리우는 성령의 부가적이며 뚜렷한 은사가있다. 성령 세례는 모든 신자에게 약속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권능을 주시는 은사이다. (마태복음 3장 11절, 누가복음 11장 13절, 24장 49절, 사도행전 2장 33절 38절) 성령은 기독교인이 신성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새롭게 헌신하도록 하고 예수님을 매우 실제적이고 가치있게 한다. 성령 세례의 기본적인 목적은 복음 증거하는 큰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사도행전 1장 8절) 또 다른 유익으로는 영적 예배를 드림으로 더 큰 기쁨을 느끼며, 세계선교에 대한 높은 의식을 갖게 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고도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나 ? 영생을 얻는 것은 성령 세례를 받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한 은사에 의해 얻어지기 때문이다.(하박국 2장 4절, 요한복음 6장 28, 29절, 갈라디아서 3장 5절, 5장 6절, 에베소서 2장 8절)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로 사신 선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 선물을 받는 것 뿐이다. 예수님 옆에 못박혔던 회개한 도둑이 바로 그 날에 낙원에 들어감을 확신하였듯이 우리는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하늘 나라에 하나님 아버지 옆 자리가 마련되어 있음을 확신한다. "방언을 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말은 성경에 어긋난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성령 충만은 모든 세대, 모든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차원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약속이다. 누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신자들이 오순절 날 기도회에 모였을 때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을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한사람도 그냥 남겨 두지 않으셨다. 성령 충만된 사람들은 단지 사도들 뿐 아니라 그 곳에 모인 120명의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들을 포함했다. 그때 사도 베드로가 구경꾼들을 보고 그들도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니라." (사도 행전 2장 39절) 베드로가 말한 대로 성령 충만은 모든 세대, 모든 신자들 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차원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약속이다. 한 개인이 성령 충만을 받고자 할 때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해 그의 삶이나 환경을 준비하려면 무엇을 해야할까 ? 신자가 해야 하는 한가지 일은 성령 충만을 구하려 말고 성령 충만을 시켜 주실 분을 찾는 것이다.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주실 분은 예수님이시다. 구하는 자들은 한 가지 단편적 경험보다는 예수님께 그들의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령 충만을 구하는 자들을 도와 줄 다른 단계들이 있다. (1)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이해하라. 우리는 그것을 주신 분께 감사하며 받아야 하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벌어서 구하거나 상으로 받을 수는 없다. 오로지 열린 마음,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 (2) 성령 충만은 성경적으로도 교리상으로도 완전히 옳다고 믿으라. (3) 당신이 생활하다 지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올바른 삶을 살도록 결심 하라. (4) 찬양과 찬미의 표현으로 주를 경배하기 시작하라. (5) 성령 충만 주시는 자, 주 예수께 그의 영광을 위해 성령 충만 받기를 원함을 표현 하라. (6) 당신의 심령 안에 있는 담을 허물고 당신은 모르나 하나님께는 의미있는 방언으로 찬양하고 찬미하고 경배하는 표현을 하고자 하는 당신 내부의 격동하는 힘에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라. 초기 신자들이 성령 충만하였을 때, 그들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였고, 오늘 날에도 그러하다. 전 세계에 있는 수 백만명의 신자들이 똑같은 증거를 나눈다. 그들이 처음으로 성령 충만되었을 때 그들은 방언을 말하였다. 방언으로 말하지 않고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 오순절 날 성령께서 회중에 내려오셔서 " 저희가 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장 4절) 후에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사도행전 10장 44절, 46절) 다시 바울 사도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안수할 때 "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사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사도행전 19장 6절) 바울 자신 또한 성령 충만하였고 방언을 말하였음은 확실하다.(고린도전서 14장 18절) 이러한 성경 문구들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 충만됨의 첫 신체적 징후임을 확실히 보여 준다. 초기 신자들이 성령 충만하였을 때, 그들은 다른 방언으로 말하였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전 세계에 있는 수 백만명의 신자들이 똑같은 증거를 나눈다. 그들이 처음으로 성령 충만되었을 때 그들은 방언을 말하였다. 이것은 오순절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사실이다. 베드로에 의해 입증된 (사도행전 2장 16절17절) 요엘의 예언 (요엘서 2 장 28절, 29절)은 오순절날 성령 충만을 받았던 사람들과 오늘날 성령 충만을 받은 신자들을 연결한다. 방언을 말하는 현상으로 처음 나타나는 성 령의 충만함은 모든 사람이 기쁨으로 축복할 보편적 경험이다. 방언을 말해본 적이 없는 사람 중에서도 인생의 전환점이 된 성령과의 만남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적 관점에서는 그들이 성령 충만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령 충만과 방언을 말하 는 것은 위에서 자적한 대로 필수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이 진리를 확인하고 가르친다. 우리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우월한 영성의 증거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쓰여있고 우리 삶 속에서 실행되는 귀중한 약속이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커다란 축복을 잃는 것이고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 받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방언을 말하는 성령 충만의 넘치는 증거를 보고 주를 믿도록 고무되어야 한다.
성령/ 2015-05-23
성령 I.구약 성서에 나타난 성령 1.일반적인 성령의 일 2. 성령의 구원 사역 II. 신약성서에 나타난 성령 1. 서론 2. 예수와 성령 3.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1) 서론 2) 오순절 4. 바울서신 속에 나타난 성령 5. 바울서신 외에 신약성서 나타난 성령론 6. 결론 III. 성령의 신학적 문제와 교회생활 1. 성령과 삼위일체 2. 성령을 거스리는 죄 3. 성령과 영적 은사 4. 방언의 은사 5. 세례와 성령 6. 성령과 안수 7. 성령과 성서 8. 성령의 내적 증거 9. 성령과 교회의 선교 I.구약 성서에 나타난 성령 1.일반적인 성령의 일 하나님의 영과 주의 영이란 말은 구약 성서의 여러 곳에서 반복하여 언급되어 있다. 구약에서는 이 영을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인격으로는 결코 보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이나 성령을 삼위일체의 삼위로 믿고 있는데, 이는 주의 성육신과 오순절의 사건들에서 확실히 입증되었다. 구약성서에서 영이라는 말은 \"거룩하다\"는 뜻이었다(참고. 시51:7). 그것은 그 분이 성부와 성자와는 구별되는 \"성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에게 속하고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생명의 원동력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이 생명의 원동력은 그의 피조물인 세상과 창조의 극치인 인간과 특별히 관계되어 있다. 자연의 세계는 태초에(창1:1) 하나님의 영이 마치 둥우리에서 알을 품고 있는 새처럼 아무 것으로부터 없는 태고의 혼돈 속에 있었다. 따라서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잡히게 되었다. 모든 에너지와 생명의 근원으로서 성령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무에서 말씀으로 질서를 잡으시고 그 질서를 유지케 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창조는 완성되었다. 바로 그 영은 자연계에 있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새롭게 하고 성취하셨다(욥33:4,시33:6104:30). 니케아 신조에서 성령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살게 하시는 분\"이라는 통칭은 바로 이 구약성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창세기 2: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놓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하여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생기에 달려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유일무이한 힘들의 배후에 있다. 바로 그 점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하나님의 영이라든지 호흡은 인간의 이성의 원천으로서(욥32:8). 인간의 재주와 재능의 원천으로서 (창41:38, 출28:3). 브사렐의 경우에서처럼 그가 가진 기술들의 원천으로서(출36장).여호수아가 전쟁에서 본을 보여준 능수 능란함의 원천으로서(신34:9).사자 솔로몬 왕이 행한 지혜의 원천으로서(왕상3:28), 시인들과 예언자들의 영감에서 보여진 종교적, 윤리적 통찰의 원천으로서(민11:1725f,29, 삼하23:2, 왕상22:24, 겔11:5, 단4:89), 의로운 자들의 능력과 회개에서 보여준 것으로서 정결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절들로 미루어 보아 어떤 악한 사람들에게 심판자로서 보내어진 \"악령\"이 (삿 9:23,삼상16:1418:10) 형벌의 위탁을 수행하는 성령이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더욱이 그러한 생각은 거짓말을 하거나 질투하게 하는 악령까지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완수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루터가 한 말, 곧 \"악마도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마다\"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2. 성령의 구원 사역 신약의 성령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구약은 성령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다. 초창기 사사 시대에는 구원이 주의 영에 의하여 이스라엘에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은 미리부터 준비나 저항의 가능성도 없이 무명의 농부의 아들들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여서 위대한 행동들을 용기 있게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므로 이스라엘은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받았다(삿3:1011:2914:6,삼상11:6). 선택받는 마지막 의식으로서 왕들은 기름부음을 받았다(삼상 16:13). 그 예식은 그들에게 거룩한 권위를 주는 것으로서 영의 활동이 영원히 머문다는 표징이었다(삼상 26:11). 이스라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원수로부터 구출하도록 능력을 부여받은 사사들이나 왕들에게만 의존하지 않았다. 역시 천부적인 재능과 최고의 통제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귀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그들의 백성들에게 해석해 주었다. 처음에 백성들을 가르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포함한 유일무이한 문서를 소유하게 되었다(삼하 23:2,겔2:23:1214, 미3:8, 특히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서는 \"야웨께서 이렇게 말하기를\"이라는 서식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초기의 왕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언제나 성실하거나 이스라엘에 평화와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가장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은 백성들이 목이 곧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렘17:19-23).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도 그의 메시지를 믿지 않음을 책망했다(사53:1).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예언자, 제사장, 왕의 역할을 아울러 갖고 있는 분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영을 부여받은 분이어야 했다. 바로 그 분이 메시야,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와서 뿌리에서 이 가지가 나와(사11:1) 충만하게 영의 재능들을 받은 분이었다(사11:242:116:1).따라서 예수는 인간으로서는 잴 수 없는 영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상적인 예언자와 왕이 되었다. 바로 이 사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든 것이다. 구약성서는 메시야가 올 때는 생기가 마른 뼈에 들어갔던 것과 같이(겔37장) 이 땅에 생명을 주는 비처럼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을 예언해 주었다(사32:15). 이러한 성령의 개입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영접하도록 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고 자발적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사59:21, 시143:11).성령 시대의 이러하 sghks상은 원칙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현실이 아니라 희망으로 기억되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배반했고 슬프게 했으므로 그가 그들의 원수가 되셨다(사63:10). 이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인격으로 나타내셨다. 다음 성령구절에서 이 사실이 분명해진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게 하신다\"(사64:1). 외경과 유대문학에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어떤 다른 의미를 첨가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 문학에서는 하나님의 영의 활동을 지혜와 연관시켜 이행하셨다. 이 사실은 필로(Philo)의 저작에서 밝히 나타나 있다. 그 영은 환상을 보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능력을 증진시켜 주는 영으로 생각했다. II. 신약성서에 나타난 성령 1. 서론. \"영\"이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프뉴마이다. 그것은 헬라어 동사 프네오세에서 나온 말로써 \"숨을 쉬다\", \"바람이 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뜻과 상이한 히브리어는 루하이다. 신약성서에서 자주 나오는 이 용어는 \"성령\"또는 단순히 \"영\"이라는 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 \"주님의 영\" \"아버지의 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다. 이 용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다소 차이가 있다. \"성령\"이라는 구절은 구약성서에서 단지 시편 51편과 이사야 63장에서만 나온다. 그렇지만 신약성서에서는 80-90회나 나온다. 신약성서에서 다른 용어들은 \"너의 아버지의 영으로서\"(마10:20). \"그의 아들의 영\"(갈4:6). \"예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행16:7, 롬8:9, 빌1:19, 벧전 1:11)으로서 나와 있어 전적으로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그 영이 지금 그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표현으로 기대되는 인격적 이는 또 \"위로자\"또는 \"보혜사\" 이다(요14:16-26, KJV,ASV). 2. 예수와 성령 복음의 시대는 성령의 특별한 활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메시야보다 앞서서 온 선구자 세례 요한은 그의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기술되어 있다 (눅1:1580). 성령의 힘을 입어 시몬은 아기 예수의 인격 속에서 메시야의 임재를 예언했다. 천사로부터 그의 아들이 \"성령으로\"(마1:18). 그 영은 새 인간성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활동적이었고 인간 부패의 흔적을 없이 해 주었다(동정녀로부터 나온 분은 \"거룩하다\"눅1:35).참으로 흠 없는 잉태는 동정녀가 잉태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30세쯤 되었을 때 그는 세례를 받았다.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예수가 성령에 의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례 받을 때도 예수는 바로 그 영에 의하여 메시야임을 확인 받았다. 그 영이 비둘기의 형태로 그에게 내려 왔다(마 3:16,눅3:22).그것은 \"평화 중의 평화\"로서 오신 분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었다. 베드로는 이 사건에 대하여 그럴듯한 언급을 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갈릴리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의 첫 번 설교에서 예수는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던 분으로 설교하였다(행10:38). 요한복음 3:34 절에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되 충만하게 주신다는 것을 강조하여 한 말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후부터 예수의 삶은 성령의 표현으로 가득 찼다. 요단 강으로부터 올라온 후 곧 바로 예수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나갔다 (막1:12 f.그리고 병행귀절들). 둘째 아담으로서 참 하나님인 예수는 승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으로 악령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셨다. 그후 주께서 성령으로 다른 더러운 영을 내쫓으셨다(마12:28). 그 영은 그의 가르침에도 해당한다. 누가복음 4:18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선포했다. 예수 안에 역사하던 놀라운 능력에 대해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행하신 활동을 살펴보면 더 훌륭하게 알 수 있다. \"예수의 친족들이 예수가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붙들러 나갔다(막3:21).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율법학자들과 같지 않고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막1:22). 그는 때때로 육적 배고픔을 잊으셨다(요4:31),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악마에 사로잡힌 자라고까지 생각했다(요8:48). 70인인 전도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 왔을 때 누가는 어떻게 예수가 성령으로 기쁨이 충만했는가를 잘 말해 준다(눅10:21). 만약 예수가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라면 왜 성령의 힘이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했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예수가 성육신했을 때 받았던 실제적 인간성의 측면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예수는 신이기 때문에 마치 그가 신의 전능을 인간의 약점으로 가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단순한 하나의 인간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영으로 만들었던 이래 인간은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여 살았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가 인류와 하나인 것처럼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의존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구원의 섭리 가운데서 왜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의 역할을 맡았는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자신이 메시야임과 신적 절대적 권위를 알고 있었다. 예언자들이 그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야웨께서 이렇게 말하신다\"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말했다. 3.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1) 서론 세례요한은 예수가 그 영을 충만히 받을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성령과 관련시켜 말했다. 요한복음 1:33절에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론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라고 하여 예수와 세례와 성령을 관련시켜 설명하였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일어난 두 사건은 제자들에게도 주님의 능력과 은사를 주기 위함이었다. 첫째는 부활 바로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고 \"성령을 받으라\"(요20:22) 고 했을 때 일이었고 둘째는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의 임하심이다(행2장). 이 두 사건들을 조화시기 위해서 전자 사건은 마치 \"너희는 머지않아 성령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었던 것처럼 후자는 이 전자의 말을 입증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쉬었을 때 그 영이 실제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제자들은 50일이 지나서 다락방에 사도들과 함께 모여 믿는 자들의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내쉰 것은 창세기 2:7절에 하나님이 생기를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신 활동과 같은 것이었다. 또 이것은 부활의 새 생의 시작을 의미하며, 제자들과 몇몇 무리를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실제적으로 살아야 할 새 삶의 원리를 부여한 것이었다. 2) 오순절 오순절은 지나치게 강조될 수 없는 사건이다. 성육신의 사건과 같이 오순절의 사건은 역사 속에서 중요한 질서의 사건이었다. 성령을 강하고 급한 바람으로 상징한 것은 영이라는 말<루하>숨)의 기본적인 의미에서도 볼 수 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성령도 이와 같다\"라는 요한복음 3:8절의 구절 속에서 니고데모에게 한 예수의 말에서도 물론 명백하다. 동시에 불의 혀처럼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머물렀다. 바로 이 사실은 예수는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에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마3:11). 불같은 혀들이라는 말은 어느 누구도 그를 통하지 않고는 성령의 새 시대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영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고전12:11). 성령의 선물은 교회의 전체나 개인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집합적이면서도 개인적이다. 성령에 의하여 권능을 부여받고 사도들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팔디아(parthia)나 혹은 로마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의 말로 하나님의 능하신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행2:7-12). 베드로의 성령에 감동된 설교에 대한 반응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 결과 초대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성령을 부어 주신 이 오순절 사건과 더불어 소위 \"성령을 나누어 주심\"(dispensation of the Spirit)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실 것이라는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욜2:28 이하). 또는 성령이 오시면 친히 제자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도 성취되었다(막 13:11, 눅 12:12).성령님의 오심에 대한 주님의 교훈의 가장 정교한 내용은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 사이에 있다. 이 내용이 명백히 보여 주는 말씀을 전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여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역사가 오순절 사건과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에 의한 사도들의 전파로써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다(요16:8,행2:37). 사도행전에 의하면 오순절로 시작하여 결국 보편적 교회를 세우게 된 모든 역사적 운동은 성령의 세례에서 시작되었고(행1:58),성령의 지시와 통제하에 있었다. 성령의 임재는 기독교 사회의 독특한 표식이 되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구스 내시에게 가라고 지시하셨고 그 후에 \"빌립을 이끌어\"(빼앗아,caught up)갔다 (행8:2939).욥바에서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였고 그를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 인도해 주셨다(10:19,11:12). 성령께서는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우는 일에 함께 하셨고(13:2) 그 선교에서 야기된 중요한 문제를 협의하는데 있어서 교회를 지도하셨다(15:29). 성령께서는 바울이 아시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고(16:6) 특별히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꾀하는 악한 의도에 대해 바울을 경고하였다(20:23,21:11).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성령께서 그 교회를 돌보도록 그들로 감독자를 삼으셨다고 했는데(20:28). 아마 바울은 모든 교회에 대해 이 사실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나이는 성령의 나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 이전의 시기는 성령이\"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한 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요7:39). 비록 그 절대적 의미를 글자 그대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오순절 사건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매우 엄청나기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에서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다. 4. 바울서신 속에 나타난 성령 바울 서신은 신약성서에서 성령론에 대해 충분히 다루었다. 성령에게 탁월한 지위를 부여해 준 사도행전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영적인 능력(살전 1:5)과 내적인 기쁨(살전 1:6)과 도덕적 정결함(살전4:4-8)과 종교적인 거룩하게 하심(살후 2:13)과 더불어 관련시켰다.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은사를 무시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예언의 은사를 멸시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령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삼가라고 권면하였다(살후2:12). 이러한 중요한 문제 뿐만 아니라 바울은 다른 곳에서 명백하게 표현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계시로 간주할 수 있는 성령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며(롬8:16)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 분(롬8:15,갈4:6)은 성령이시다. 그들의 기도를 도와 주신다고 되어 있다(롬8:26). 성령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 중에 좀 더 어려운 면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께 대한 성령의 관계에 관한 그의 개념이다. 후에 더 언급하게 되지만 교회의 보편적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은 성삼위 한 분으로서 신성의 구별된 한 인격(Person, 혹은 위이시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 바울이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성령이 상호 관련된 방법에 대한 \"형이상학적\"문제가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로마서 8:9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그리스도\"를 서로 바꿀 수 있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성령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 모든 표현은 광의로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즉 성령은 신자가 사는 삶의 영역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해방] 시켜 준 새로운 능력의 삶의 영역이다(롬8:2).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 가운데 나타나실 때 그는 단순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인가? 우리는 바울이 말한 바를 상기해야 했다. 어떤 학자는 이 문장을 뒤집어 [성령은 주시니]라고 읽으므로써 성령의 주권과 신성을 확증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주]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다. 주이신 그는 바로 성령 그 자신이시다(18절의 끝맺음을 보라). 따라서 바울의 사상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과 [성령 안]이라는 두 관용적 표현 사이에 어떤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성령이 그의 교회 안에 임재해 계시고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한에서 성령은 영광을 얻으신 주 곧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바울은 그가 전도한 회심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고통하심\"(고후13:13)을 기원했는가? 삼위 하나님의 축도를 tkdydg함으로써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이 곤란한 문제에 대한 최상의 해결책은 바울서신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도 불리웠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3:16). 혹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라고 했다.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로 생각하였다. 성령께서 거하시고 일하시는 곳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이 인간의 일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일을 알기 때문이다 (고전2:11). 이것은 바울의 심중에 그가 성부로 보여준 하나님과 신자의 마음 가운데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하시는 성령으로서의 하나님 사이에 아무 구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이 주님과 사람으로 하여금 주 예수를 부르게 하는 분, 곧 성령 사이에 아무런 구별을 두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했다고 추측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전 12:3).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의 표현은 이들 사이의 동일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역학적인(dynamic)동일시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그의 교회 안에 거하시고 신자들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라는 관용적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로서 같은 뜻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성령에 대한 대부분의 참고 구절들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성령께서 한 사람 안에 \"거하실\"(indwells)때 그 사람의 생활 속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성령의 전으로 삼아 주는 이러한 덕성과 은혜와 더불어(고전3:16) 부활에 대한 확고한 소망이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리라\"(롬8:11). 바울이 인간의 영(spirit)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관해 이야기하는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 아래 있는 인간의 영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특히 이러한 어려움은 육체와 성령을 대조시키는 구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육체적 욕망은 성령(혹은 영)을 거스리고 성령(혹은 영)은 육체를 거스린다(갈5:17).육체(flesh)는 인간성의 약하고 죄된 면으로서 이해할 수 있고 이에 반하여 영(spirit)은 인간의 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즉 육체적 욕망과 더불어 싸울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능력을 준 인간의 영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육체와 더불어 싸우는 영의 사람은 영(혹은 성령)을 좇아 영(혹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다(롬8:5). 이와 유사한 대조를 고린도전서 3:1절 이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신령한 자\"들과 \"육신에 속한 자\"들 사이를 구분하였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의 저급한 본성의 지배를 받은 사람이다. 반대로 신령한 자(영적인 사람)는 성령이 지도하고 다스리는 영(spirit),즉 고등한 본성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다.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성령은 그 작용에 있어서 동일하다(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바울은 신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주도권을 인정하여 삶의 매 순간에 성령의 인도와 돌보심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그는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인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다(롬14:17).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넘치는 사람이다(롬15:13). 보통 웨슬레(Wesleyan) 전통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신약성서 개념에 아주 기본적이기 때문에 그 교리는 결코 곡해될 수 없는 기독교적 메시지이다. \"완전주의\"의 모든 형태에 대해 반감을 느끼는 사람도 물론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할 수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비록 그 나무의 뿌리는 볼 수 없게 감추어져 있지만 그 열매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열려 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그의 서신의 수신자들을 권면하였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맏으라\"(엡 5:18). 만일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하였다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그렇다면 술취함의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구속적 능력으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삶 가운데 성령께서 이루어 놓으신 차이점도 그들이 알아 볼 수 없겠는가? 올바른 태도를 취하기 위해 신중을 기해야 랄 점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소위 \"더 높은 수준의\"(higher) 혹은 \"승리하는\"(victorious)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이 \"완전\"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결코 어떤 용이한 법칙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러한 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지만(롬 8:2) 아직도 여전히 또 다른 율법이 남아 있다(7:21절 이하). 이 음흉하고 사악한 \"죄의 법\"의 세력에서 구원받는 것은 어떤 완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즉석의 순간적이며 극적인 사건이 아니다. \"육신\"(육체)과 \"영\"(성령)의 개념 배후에 있는 또 다른 대조는 바울이 영과 의문(the letter)사이에 묘사하는 대조이다. 우리는 율법(기록된 법전)d 대하여 죽었으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죽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고 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을 \"새 언약의 일군\"으로 묘사하면서 말하기를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6)고 했다.그러나 율법을 영적으로 무가치하다고 본 것이 아니라(\"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롬7:14)인간이 그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의 외적인 법적으로 보았으므로 율법은 단지 사망을 집행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할 뿐이지 그 죄로부터는 결코 구원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롬3:20).유대주의자가 이해하는 바 대로 생각해 볼 때 그 율법은 성령을 대적하고 성령은 그 율법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구원의 방법으로 그 율법에 대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다.\"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5:18). 성령에 관한 바울의 교훈을 끝맺기 전에, 성령과 교회에 대하여 언급해야 할 말이 있다. 성령은 진정한 교회의 표식 중에 하나로 여겨지는 보편적 연합의 띠이다(엡4:3).여기서 바울의 사상을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그의 상징과 연결 시키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전 12:12-27).성령은 그 몸에 생명을 불어 놓는 분이시다. 한 성령으로 모두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전 12:13).이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고전14:2).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골1:8). 그들은 성령 안에서 교제한다(빌2:1).그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빌3:3).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더불어 지어져 가는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엡2:22). 따라서 교회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고후3:3). 5. 바울서신 외에 신약성서 나타난 성령론 신약의 다른 기록들이 성령에 대해 자유로이 언급하고 있지만 바울의 교훈에 별로 보태는 바가 없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성경의 영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을 인용할 때 종종 마치 그 말씀이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인 것처럼 인용하였다. 성령은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말씀하는 분이고 성령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말하고 있다(히3:79:810:15).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서 우리는 개인적 범주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친숙한 구절을 이해야 한다. 그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까지 뚫고 들어가서 그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감찰(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히4:12). 이 능력은 그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해 영감된 말씀에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영감시킨 성령께서 듣는 자를 책망하여 뉘우치게 하는 방편으로서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것이다(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으로 묘사한 구절을 참고하라,엡6:17). 베드로도 히브리서 저자와 동일한 입장에서 성경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표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 선지자들 중에 계셨으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장차 올 영광에 대해 증거하였다고 했다(벧전1:11). 히브리서 저자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성경 기록에 있어서 그 우선권을 인간 저자가 아니라 성령께 드렸다. 어떠한 예언도 사람의 뜻으로 나온 것이 아니며,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었다(벧후1:21). 히브리서에서는 주님의 속죄적 죽음에 대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는데(히9:14) 이것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그리스도 자신의 영(Hisown Spirit)을 영원하시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최상의 해석일 것이다. 짐승으로 드린 희생 제사와는 달리 주님은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으며 따라서 성부의 구속적 목적에 묵묵히 순종하였다(그리스도를 \"살려 주는 영\"[life-giving spirit]으로 표현한 바울의 묘사를 참고하라, 고전 15:45).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성령에 대해 구약 예언에 있어서 그가 차지한 역할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계시록의 저자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처럼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in the spirit)하였고(계1:10). 그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기록하였다(계2:7).천사는 말하기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이라\"(계19:10)고 했다. 즉 그 선지자들을 영감시켰던 동일한 성령께서 그 천사로 하여금 요한에게 그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게 하셨고 또한 요한으로 하여금 그 사실들을 보고 기록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 천사는 요한의 동료 수종자였다. 요한계시록은 거듭해서 하나님의 \"일곱 영\"에 대해 말하였다(계1:43:14:55:6). 일곱이란 숫자는 일반적으로 교회에 미치는 성령의 우주적 효력의 충분함과 완전함에 있어서 그의 완전성의 상징으로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해석은 유명한 라틴 찬송가(Vent, Creator Spiritus)에 있는 구절의 기초가 되었다. 성령이여 오소서 하늘의 불로써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키시켜 밝혀 주소서 당신은 기름을 부어 주시는 성령이시니 일곱배(seven-fold)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나이다. 성령께서 교회에 대해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요청하는데 있어서 교회와 더불어 그는 목소리를 발하였다(계22:7). 6. 결론 성경은 성령의 신성을 계시해 준다(아리우스가 주장한 것과는 다르다. 그는 성령의 천사보다 월등히 뛰어난 피조된 지성이나 성자보다 열등하다고 했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동일하게 언급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과 구별하였게 언급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과 구별하였다. 그 사역에 있어서 성령은 만물의 창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만물을 보존하고 있는데 특히 생명의 호흡을 하는 피조물들을 돌보고 있다. 또한 성령은 인간의 구속 사역에도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그는 도덕적 정결함으로 이끄는 장본인이며 또한 선지자들을 감동시켜 장차 오실 구주에 대해 예언하게 하신 성령이시다. 때가 이르매 구주에게 부으시고 모든 충만함으로 그에게 머물러 계셨던 분도 성령이시다. 마지막 날에 성령께서는 그의 은사들을 전세계에 널리 확대시킴으로써 새 이스라엘, 택한 백성, 보편적 교회를 일으켜 세우신 후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개인의 심령을 새롭게 변화시킴으로써 성취되는데 성령께서 친히 그들의 심령 가운데 내주하시고 그들을 그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내적으로 정결케 하신다. 또한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의 싸움에서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께 대한 열망에 더욱 불붙여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능하신 능력으로 성령께서는 마지막 날에 성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인데 이 성도들은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는 자로서 저희의 행한 일이 저들을 따르는 자들이다(계14:13). III. 성령의 신학적 문제와 교회생활 성령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의 문제들은 위에서 서술한 개요에서 간단하게 다루어졌다. 그 문제들은 좀더 특별히 다루기 위해 보류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중요성이나 난해성 때문이며 혹은 기독교회가 나뉘게 되었던 문제이거나 특별한 관심사와 관련 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1. 성령과 삼위일체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거룩하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제 삼위\"로서의 성령에 대한 교리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양식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크고 다양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 술어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고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의 성경적 근거를 다루는 것이 꼭 필요하다. 구약성서에서는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성령에 대해 아무 교리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구약성서의 성령이 모호하고 비인격적인 어떤 세력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성령은 인격적 속성을 지니고 있고 인격적 행동을 수행한다. 인격적 하나님의 살아 있는 에너지로서 성령은 곰곰히 생각하고 통치하고 인도하고 격려하고 움직이신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바로 그 곳에 그가 인격적으로 임재해 계신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스라엘이 반역할 때 성령께서는 근심하셨다 (사63:10). 이러한 의인화시킨 표현에 비추어 볼 때 예수께서 그가 떠난 후(요16:7) 성부께서 다른 보혜사(Paraclete), 곧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약속(요14:1628)은 성령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약속이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한 인격으로서 교제하셨기 때문에 성령이 그의 위치를 대신한다는 말씀이 암시하는 바는 그 성령도 그 자신과 같은 한 인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주님이 떠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경우 그 보혜사에 대한 약속은 제자들에게 거의 위로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오순절 사건 이전에 이 문제에 대해 명백하게 알지 못했으나 그 위대한 계시적 사건이 주어진 후 그들은 성경과 주님 자신에게서 배운 바에 의해서 준비되어졌다. 즉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나 어떤 애매모호한 영향력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 나타나심으로서의 성경에 관하여 배우 srjt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느 sgksksla이신 성령께 거짓말하는 아나니아를 책망할 수 있었다(행5:34). 성육신과 오순절에 대한 이러한 측면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와 성부와 구별되는 분으로서 성령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자로서(행1:9) 성부로부터 성령에 대한 약속을 받으셨다(2:33). 성령의 이러한 인격적 혹은 실체적 구별은 고린도 교회 성도에 대한 바울의 삼중의 축도에서 볼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신약성서 가운데 삼위일체적 표현이 가장 명백하게 서술된 곳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하신 곳인데,\"....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다. 교회의 논의 가운데 크게 부각되었던 성령에 관한 한 구절은 요한복음 15:26절이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proceeds from the Father)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삼위일체 교리에 관련된 한에 있어서 이 구절은 고전적으로 성령의 발현(procession)에 대한 교리를 세우는데 사용되어 왔다. 성자는 성부의 \"나신\"(begptten of) 자이므로 보편적 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발현(proceeds from)되신다고 고백한다(어거스틴의 영향 아래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함한 모든 서구 교회는 성령이 성자에게서 발현되신다(filioque)고 고백하였으나 이것은 성령에 명백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두 절에 주목해야 한다. 성자가 보내려고 하는 분은 보혜사이며 성부에게서 발현(proceeds from)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앞의 구절은 분명히 성결케 하는 자(Sanctifier)로서의 그의 역할(직분)로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실 것을 언급하는 듯하다.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당시에 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은 아직 미래사였으므로 주님은 미래 시제를 사용하여(\"I will send\")그가 보내실 분으로서의 성령에 대해 언급하였다. 전문적인 신학 용어에서 이것은 \"섭리적\"(economical)의미의 구절이다. 즉 이 구절은 구속의 \"섭리\"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who proceed from the Father)이라는 뒤의 구절은 대조적으로 성령 자신의 본성을 묘사하고 있다. 즉 이것은 \"본체론적\"(ontological)절이다. 성령은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proceeds from)이다 이 마지막 견해에 대해서는 모든 학자가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학자는 성령을 보내시는 것을 모두 오순절의 성령 강림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하곤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오순절에 성부와 성자께서 교회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다는 명백하게 계시된 사실에 근거하여 성부와 성자에 대한 성령의 신비적인 삼위일체적 상호 관련성을 어떤 유추적 방법으로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오순절에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세상에 들어오신 것에 대한 유추에 따라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영원히 나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2. 성령을 거스리는 죄 비록 신약성서는 자비와 용서와 화목의 메시지, 곧 복음의 메시지가 충만하지만 어떤 냉정하거나 진지한 구절도 지니고 있다. 즉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5:16)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하므로 하나님의 형벌을 초래하는 죄(히10:29)와 성령을 훼방하는 죄(막3:2829절과 그 밖의 병행 구절)가 있는데 이 죄는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도 결코 사하심을 얻지 못할 죄라고 했다. 복음서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표현된 이 특별한 죄는 귀신을 쫓아 내는 예수의 능력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힘입은 것으로 돌림으로써 마치 예수 자신이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것처럼 취급한 것이었다. 이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 약간의 견해 차이가 여러면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죄가 지닌 용서 받지 못할 성격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 자비로운 사역을 마귀적 능력의 것으로 간주할 정도로 진리에 대해 눈이 어두운 의곡되고 타락한 소망없는 도덕성과 관련되어 있고, 구속의 은혜에 무감각할 정도로 뿌리 깊은 악의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한 듯 하다. 기독교회가 오류없이 이러한 죄를 인지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으며 더군다나 이러한 죄에 대해 파문을 선고할 권세가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이러한 경고는 그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과 마땅히 하나님을 고려해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타락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히6:4절 이하 10:29)함으로써 배교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배교자는 거짓이라고 말하는 자이며 그의 본래의 신앙 고백에 따라 살지 않는 자이며 그의 본래의 신앙 고백에 따라 살지 않는 자이며 그의 생활로써 그가 성경이 말하는 바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자이다. 이러한 변절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저는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라볼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지른 죄의 심각성(행5장)과 그들에게 즉시 내린 심판에 대해 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사건은 성령께서 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우리는 어떤 영향력에 대해 범죄할 수 없다. 죄는 인격적 차원 안에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매우 악한 형태의 죄이기 때문에 그 범죄에 결과는 명백한 것이다. 그 죄는 가장 신성하고 거룩한 신성의 인격에 대한 죄이다. 3. 성령과 영적 은사 \"카리스마\"(charisma)란 단어는 주로 바울서신에서 사용된 전문 용어이다. 그는 교회의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바울 서신에 열거된 어떠한 명단도 철저한 것은 못된다. 그러나 그 여러 본문을 대조하고 결합시킴으로써 영적 은사의 쓸모 있는 명단을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은사들은 말씀의 선포와 진리의 보존과 가르침에 관계되어 있다(예언,롬12:6.고전12:10,영 분별,고전 12:28,방언과 통변, 고전12:102830,이적 12:10,28,29,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12:8).다른 은사는 봉사하는 일과 관계가 있고 어떤 것은 성격상 아주 현세적인 것이고 또는 그리스도인의 형제애와 관련된 것이다(병고침, 고전 12:92830, 다스리는 것,12:28,돕는 것,12:28).이러한 은사의 범위는 신약성서에 의해서 성령이 한 몸으로서의 전 교회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으므로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분명히 사도들은 이 모든 은사들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마치 대부분의 경우에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 성령의 뜻에 따라(12:11) 그 은사들이 교회원 개개인 중에 부여된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하였다(12:4절 이하) 교회원은 감사함으로 이 은사를 받아야 하며 신중한 자세로 이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신중한 자세로 이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은사들은 믿음이나 소망이나 사랑(고전13:13)처럼 여우연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성령의 정상적인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인데 이러한 열매들은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만들어 준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요3:8)라고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성령의 주권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 은사가 주어지는 어떤 획일적인 절차나 방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제자들이 기대하는 자세로 모여 있었을 때, 오순절 날 성령의 주도적인 부어 주심에 있어서 갑자기 성령은 강한 바람이 돌진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임하였고 각 사람 위에 머문 불 같은 혀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른 경우에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동안 성령이 고넬료의 집안이 임하였다(행 10:44).또 다른 경우에서는 말씀 전파가 아니라 안수를 통해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 사마리아에서 빌립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은사(charismata<카리스마>)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는 귀신을 쫓아 내고 병든 자를 고쳤는데(행8:78), 그 당시에 믿고 세례를 받았던 신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와서 그들에게 안수해 줄 때까지 성령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행8:17).에베소에서도 바울의 안수를 통해서 세례 요한의 제자인 12사람이 성령을 받았다(19:1-7). 안수는 기독교회에서 용인된 관례가 되었다. 신앙의 확증이나 성직 임명에 있어서 성령의 전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이러한 영적 교제 가운데 은사의 부여가 추구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는 일은 안수와 동반되었다. 손은 언제나 사람들에게서 뜻 있게 사용되었는데 고대로부터 안수하는 것은 축복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창 48:13-16,막10:16).안수하는 것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최상의 축복을 받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족히 받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족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영적 은사의 배열에 있어서 그것은 능력의 가장 뚜렷한 표현으로부터 낮고 천한 것으로 배열되어 있다. 사도행전 19:12절은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어서 그 병을 고친 일을 서술하였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자들 중에 \"돕는 것\"(helpers)과 \"다스리는 것\"(administrators)을 언급하였다(고전 12:28). 그러나 이 은사가 어떤 뚜렷하고 기적적인 것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실제적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지혜가 있고 그의 영적인 능력으로 연약한 지혜가 있고 그의 영적인 능력으로 연약한 자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는 신자들이 교제 가운데 있는 은사들은 교회를 세워 나가나는데 쓰임을 받도록 성령으로부터 선물로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역의 영감적인 면은 점점 쇠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장로와 집사직의 형태로 된 조직을 따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도 사라져 갔다. 교회를 빈약하게 만든 이러한 경향과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적 영감의 사실과 더불어 교회가 인간 사회 안에서 단순히 제도적 기구로 전락되지 않으려는 투쟁은 기독교회의 전 역사에 걸쳐서 계속적인 요인으로 남았다. 오늘날의 오순절 운동의 등장과 급속한 성장은 영적 갱신을 바라는 제도적 교회의 요청을 강력히 증거해 주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을 때 교회는 단순히 하나의 사회적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4. 방언의 은사 은사를 주시는 성령의 주권과 교회의 갱신과 은사(카리스마)의 폭넓은 배열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방언의 은사에 관한 문제보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한 견해의 차이를 보다 빠르게 보여 주는 제목은 결코 없다.이 주제에 대해 오늘날 새로이 관심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성령론을 일반적 관점에서 간단히 논의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어떤 학자는 바울이 이 은사의 곤란한 점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사도직이 제일 먼저 나오는 명단(고전 12:28)에서 이 은사를 맨 끝에 두었고, 그 독자로 하여금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였으며(고전 12:31),일만 마디 방언보다 교회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다섯 마디의 말 더 낫다고(14:19) 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방언의 은사에 대한 문제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살펴볼 때 사도들 중에 으뜸인 바울이 이 은사를 성령이 주신 은사로 인정하였다는 사실도 명백하다(12:11).또한 바울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방언 또한 바울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방언을 말한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14:18).더우기 방언의 은사는 성령의 오순절 사건과 기독교회의 설립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순절 사건 당시의 최초의 방언의 은사가 후에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것인지의 여부는 전혀 명백하지 않다. 동일한 단어 \"글로싸\"(glossa)가 이 두 경우에 모두 사용되었고 성령의 동일한 영감이 전제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사도들이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며 비난 하였고(행2:13)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정신 이상자로 간주하게 된지도 모른다고 염려하였다(고전 14:23).그러나 사도행전에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그들 본토의 방언으로 말하는 사도들의 말을 들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행2:8). 그 소리는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방언\"(tongue)으로 묘사되었음에 반하여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언어\"(language)로 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의 경우가 아니다. 그린도 교회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묘사된 현상이 있었다. 왜냐하면 듣는 자를 깨우치기 위해서 통역자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열매를 맺지는 않지만 영으로 기도하는 방언의 황홀한 체험에 대해 바울이 이야기한 것(고전 14:14)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그 고린도 교회의 은사는 결코 \"언어\"가 아니며 단지 횡설수설하는 말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문법적으로 아주 조악한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어떤 학자는 매우 애매모호한 언어의 의미에서 그 방언이 알 수 없는 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언어의 분석은 이 학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불신앙은 이 모든현상을 단순히 어떤 열정적인 상태로 기각시킬 것이며 따라서 그 현샹을 설명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것의 힘을 빌릴 필요가 전혀 없다. 사랑과 분노의 표현 가운데분비선이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과 같이 방언의 사용에 있어서 감정이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용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경험조차도 분비선의 분비물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도 감정 이상의 것일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감정일 것이다. 고대 교회와 오늘날의 어떤 교파에서 이 은사가 인기 있었던 까닭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황홀경(ecstasy)에 빠져 들어 갈 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그의 영을 느끼며 따라서 그는 강하게 하나님의 은총 중에 있는 상태를 알고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교제 중에 있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체험을 반대하는 법은 확실히 아무 것도 없으며,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하는 (고전 14:28) 그리스도인의 권리를 부인하는 것은 공허한 편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 은사는 드러나게 나타나는 허식적인 것이었고 개인적인 탁월함을 갈망하는 사람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 은사에 대한 고전적 평가에 있어서(고전 12-14장) 바울은 방언을 하나님이 주신 신적 은사로 인정하였고(12:10) 그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서 이 은사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현하였다.(14:18). 그러나 이 은사는 결코 절대 긴요한 것은 아니었고 더 나은 방법은 사랑의 방법이었다(12:31). 사랑없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같은 것이다(13:1).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을 포기하고 몸된 교회의 덕을 위해야 한다(14:4). 이러한 규칙이 준수될 때 방언을 하는 것이 천박해질 이유가 전혀 없다. 문제가 있는 개인이나 교회 생활의 영적 능력의 결핍이 특별한 은사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운동이 전 교회에 대하여 외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대신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이 단지 사도 시대 당시만을 위한 것이라고 입증된 적이 있었는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의 등한시된 은사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한 삶이 나타내야 할 최상의 유일한 의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5. 세례와 성령 좀 더 제도화 된 형태의 교회가 성령 임재의 뚜렷한 증거에 벌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신학이 세례에 대한 신학과 밀접하게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 신학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는다고 가르치며 따라서 그 밖의 성령 체험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 것이다. 첫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이러한 교훈이 성경과 어긋난 것 같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그의 물 세례와 그의 계승자 (그리스도)가 수행할 성령과 불로 주는 세례를 분명하게 대조시켰기 때문이다(마 3:11; 그 밖의 병행 구절).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이 분명하게 대조시킨 이 두 세례를 어떻게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결합시킬 수 있는가? 첫째로 불과 성령으로 주는 세례에 대한 예언은 오순절에 성취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는 불의 혀같이 나타나서 제자들 위에 임하였다(행 1:5). 어떤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 경험을 물 세례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자상 사역 기간 중에 있었다(요4:1). 게다가 베드로가 성령의 세례(행 11:6)라고 칭한 고넬료 가정에서의 성령의 부어 주심은 물세례와는 독립적으로 물세례 이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명백하게 성령 세례와 물세례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 준다. 물 세례에 대한 성령과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성령 세례(baptism in the Holy Spirit)라는 표현이 지닌 의미를 정의내릴 필요가 있다. \"성령 세례는 교회 창릷 당시에 유일하고 독특한 사건을 묘사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체험을 추구해야 하는가? 본 필자의 판단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교회에 대한 성령의 최초의 은사에 대해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막 1:8)과 부활하신 주님(행 1:5)이 모두 사용한 그 용어는 명백히 오순절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오순절은 분명히 구속 역사에 있어서 독특한 것이다(이 독특한 사건은 교회력에 있어서 성령강림일에 기념하나다). 그러면, \"성령으로 세례\"받았다고 말한 사도행전 11:16절의 고넬료의 가정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독특하게 누가만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 최초의 사건이었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장로들 앞에서 그 사건을 되풀이해 말할 때 그는 성령이 \"처음에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행 11:15) 이방에게 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오순절의 최초의 성령 강림과 이 사건의 유사성을 직접 연결시켰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사건을 인정하고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행 11:18)고 했다. 따라서 이방인에 대해 복음의 문을 연 것은 오순절 사건의 완성이었다. 왜냐하면 \"하늘 아래 모든 나라에서\"온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성령의 새로운 시여에 대한 축복과 특권에 포함되어 있음을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두 사건을 모두 \"성령의 세례\'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사건들에 대해 유일하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성령의 세례는 단순히 성령께서 초대 교회에 새롭고 영구적인 방법으로 임하신 것을 묘사한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성령께서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한정된 영역에서 역사하신 것과 대조를 이룬다. 성령께서는 최종적이며 충만한 나타나심으로 임하셨기 때문에 개인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성장 및 교회의 선교 사업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모든 영적인 은사와 추복을 주시려고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 가운데 현존해 계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영원히 교회와 더불어 거하시려고 임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행하며\"(갈 5:16) \"성령으로 충만하라 \"(엡 5:18)는 명령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음\"(카리스마)이 있다고 했다(요일 2:20-27). 그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기업의 \"보증\"(arrabon〈알라본〉)이시다(엡 1:14). 이
성령강림 주일 음악/ 2015-05-23
성령강림 주일 음악 예수께서 부활하신지 50일이 되는 날, 즉 부활 후 7번째 되는 주일은 성령께서 직접 우리에게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주일 이다. 이날은 부활 후 50일째가 되기 때문에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한다. 기독교가 세계를 향하여 선교를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 부터이다. 따라서 이날을 교회의 시작으로 보고 또한 선교의 시작으로 본다.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신것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제한적인 존재였던 그리스도가 승천으로 인하여 초 공간적인 실존으로 바뀐 실증 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존재로 세례를 통하여 우리 속에 들어 오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키우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인 답게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신다. 승천 이후로 부터 성부와 성자는 성령의 새로운 형태로 이 세상에서 역사 하시고 섭리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존재이다. 성령이 직접 임하신 날에 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순절이 되자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혀처럼 생긴 불이 나타나더니 그것이 갈 라져 각 사람위에 와 닿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그들도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 하였다." (행 2:1-4 공동번역)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에 불같은 성령이 무리에게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알지도 못하는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하였고, 모든 외국사람들이 언어의 장벽을 깨고 서로 대화 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바벧탑을 쌓을 때 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은 통일된 언어를 사용 하였었다. 바벨탑에서 한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던 언어의 통일이 인간들의 교만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여러 방언으로 갈라졌었는데, 오순절에 처음으로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인 예수의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을 각기 제 나라 말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언어의 재통일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이는 분명히 예수가 세상의 죄를 깨끗게 하신 표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독교의 오순절은 유대교의 오순절과도 같은 시기에 온다. 유대교의 오순절은 주로 보리농사에서 얻은 첫 곡식을 가지고 드리는 감사절(맥추절)이다. 그러나 유대교의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히브리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날로도 기념한다. 이와같은 유대전통의 오순절을 기독교의 오순절로 바꾸기 위하여는 교리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신학적 해석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계명을 주신 것과 꼭 같이 신약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새로운 섭리에 의한 은총의 선물로 예수를 따르는 자 들에게 성령을 주셨다"라고 말 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얼마 안가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란 말씀에 의거하여 이 기간에는 세례식이 거행 되었는데 보통 오순절의 첫날인 부활주일과 마지막 날인 성령강림 주일에 세례식을 더 많이 가졌었다. 본래 사순절을 통해서 세례를 준비하고, 부활절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성령강림 주일에 부활절과 꼭 같은 세례식을 5세기 부터 실시해 왔으나, 지금은 성령강림 주일에 더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날 사람들이 모두 흰 옷을 입고 세례를 받기 때문에 이날을 "흰옷 입는 날"이라고 하여 White Sunday(또는 Whitsunday)라고 부르는 관습이 생겼다. 1549년 {The First Book of Edward VI}에서 처음으로 Whitsunday라고 쓰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성령강림 주일을 Whitsunday라고 부른다. 성령강림 주일에는 성령의 불과, 구주의 보혈과, 또 순교자의 흘린 피를 상징하는 의미헤서 붉은 색이 사용되고, 빨간 장미로 성단이나 교회 입구를 장식하는 것이 통례이다. 빨간 장미는 서양에서 신부(新婦)들이 결혼식에 드는 화환으로써 신부된 교회가 신랑인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는 표증 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령강림 주일을 경시하고 지나가는 수가 많다. 음악목회자들도 찬양을 성령강림에 맞추지 못하고 경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좋은 찬양곡 중에 성령에 관한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준비에 어려움이 없는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Thomas Tallis가 작곡한 "진리의 성령이 너와 함께 하리..."라든가, William Gaither작곡의 "성령이여, 내게 오소서...", Harold W. Friedell의 "주의 성령이여 오소서, 두세사람 모여도..." 등의 노래는 성령강림 주일 찬양곡으로 적당한 곡들이다. 정소영
성령강림절 교독문/ 2015-05-23
성령강림절 교독문 63.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다같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성령강림주일예배 참고자료/ 2015-05-23
성령강림주일예배 참고자료 기도의 나눔 <묵도> 저 크고 넓은 바다에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헤아릴 수 없이 우글거립니다. 물 위로는 배들도 오가며, 주님이 지으신 리워야단도 그 속에서 놉니다.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 먹고, 주께서 공급하여 주시면 그들은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립니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주의 영광은 영원하다. 주님은 친히 행하신 일로 기뻐하신다. 주님이 굽어보기만 하셔도 땅은 떨고, 주님이 산에 닿기만 하셔도 산이 연기를 뿜는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 때까지 시를 읊어서, 하나님을 노래할 것이다. 내 기도를 주님이 기꺼이 받아 주시면 좋으련만! 그러면 나는 주의 품 안에서 즐겁기만 할 것이다. (시104:25-34) <찬송> 181장 진실하신 주 성령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시여,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바르게 볼 수 있는 눈을 새롭게 뜨게 해 주십시오. 문명의 전환 점에서 우리가 새로운 의식을 갖게 해 주십시오. 낡은 사고의 틀과 옷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틀을 갖추게 해 주십시오.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시여, 오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십시오.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보살피고 섬 기는 힘을 갖추게 도와 주십시오. 온 생명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능력으로 지탱하게 이끌어 주십시오. 지혜의 영이시여, 오셔서, 우리를 진리로 세워 주십시오. 우리의 오만과 편견으로 찌들은 언어를 버리고, 오직 성령이 시키는 말로 사랑과 희망을 함께 나누는 새로운 언어사건을 엮어 나가게 도와 주십시오. 그래서 온 생명으로, 온 삶으로 부활의 능력을 역사의 한 가운데서 증언하게 도와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찬송>:주기도문 <성경본문> 사도행전 2:1-21 <해설>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은 벅찬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교회의 탄생이 비롯된 사건이요, 새로운 언어사건이기 때문입니 다. 특히 바벨탑 사건으로 빚어진 언어의 혼돈과 공동체의 와해가 뒤집어져 회복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 스도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것이 바벨에서 비롯된 의식의 혼돈과 언어의 불통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능력이 증거되는 것은 성령 강림에서 비롯된 새로운 의식과 성령이 시키는 말, 곧 새 언 어사건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만큼 성령강림과 새 언어사건은 바벨탑의 배경에 비추어 읽고 생각하게 됩니다. 분열이 일치로 바뀝니다. 이기심이 공동선으로 바뀝니다. 경쟁심이 자극되면서 더 커지고 높아 지려는 마음이 협동심으로 바뀌어 서로 겸손해지며 공동체를 이루어 갑니다. 성령이 오시는 모습을 설명한 데서도 바로 이런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성령이 세 찬 바람이 부는 듯한 모습으로는 공동체에게 오시며,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각 사람위에 내려앉으며 개인 에게 각기 오십니다. 이와 같이 개체성과 공동체성을 아우르시며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이 바로 '새로운 공동체인' (New Person-in-community)들을 창조해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느껴집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성령이 시키는 말이 시작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새 언어로 말하듯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할 만 합니다. 이 모든 현상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감동적으로 나타납니다. 새 시대에 새 비젼을 보고 성령이 시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바 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부활이 지닌 변화의 능력을 온 몸으로 증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공동연구> 1. 본문을 각기 다른 번역으로 비교하며 낭독하십시오. 2. 각자가 개인적으로 눈을 감고 잠시 명상하십시오. 3. 그들이 모두 한 곳에서 모여 있었다는 것과 성령이 오시는 모습을 묘사한 글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4. 성령이 시키는 대로 말하는 사람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5. "새 술에 취하였다"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내는 뜻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6.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게 하려면 우리는 오순절 설교를 어디에 촛점을 맞춰서 해야 할까요? 3. 사랑의 나눔 <찬송> 171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봉헌>: 우리는 날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며 문명의 전환점에서 새로운 비젼 을 제시하며 살려는 결단으로 봉헌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 로 기도합니다. 아멘. <중보기도> (1) (2) <폐회기도> :인도자 4.생활나눔 및 사귐 지난 한 주일 동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신앙적 성찰의 시간을 가집시다.
성령과 설교자/ 2015-05-23
성령과 설교자 신약에 나오는 몇몇 본문을 통해 설교의 능력을 위해서 성령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살피고 능력있는 설교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을 이 강의의 목적으로 한다. 1. 성령의 절대적 필요성과 자유로움의 요소 설교의 궁극적 목표가 정보의 제공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면케 하는 일이 이상 우리 시대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절실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다운 반응은 성령의 사역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자연인은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성령이 역사하기 까지는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하는 동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 자유로이 내맡겨야 한다. 성령의 역사 하심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완벽하게 준비해야 하지만 항상 자유로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 원고 없이도 매일 수 있지만 설 교자는 자신의 원고에 매여 있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설교하는 동안에도 영감을 주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설교하는 동안 반드시 성령께서 계속적인 영감을 주실 여지가 마 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로이드존스는 "내가 설교한 말 중에 최상의 것 은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 - 설교 준비 중에 생각도 못한 것이 실제로 설교 하는 가운데 주어졌다."고 고백한다. 영적 마음을 가진 성도들로부터 무엇 을 전달받을 수 있다. 성도들의 열심과 반응이 설교를 가끔 새롭게 살아나 게 만드는 것은 설교자의 일반적인 경험이다. 성령이 주권적으로 역사하는 부흥기간 동안에는 쉽게 설교가 가능해지고, 눌변이 달변으로 바뀌기도 하는 비상한 자유를 설교자들이 누리기도 한다. 설교하는 도중 발전되는 설교는 놀람, 감사,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을 설교자에게 가져다 준다. 설교 하는 도중 성령님께 개방되어 있지 못하면 설교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런 경험을 놓칠 수도 있다. 설교 중에 역사 하시는 성령을 소멸치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요단강 성령강림과 예수님의 설교의 권위(누가복음 3장 21-22절). 1) 누가복음 3장21-22절은 3장 1-20절, 즉 앞 문단의 클라이막스로 이해해 야만 한다. 시기적으로는 예수님과 요한의 사역은 서로 겹치지만(눅 7:19이하, 요 3:22이하) 누가는 이 사건을 요한이 한 모든 사역의 절정 뿐 아니라 그의 세례활동의 절정으로 기술한다(cf Marshall,1978:150). 다시말해 세례 요한의 사역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품으로 완성된다. 지금 세계요한에 의해서 준비를 하신 구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막 착수하시게 된다. 2) 이 부분을 흔히 예수의 세례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마태나 마가의 기록에는 상당히 적절하지만 누가복음에는 문장 구조상 실제 세례는 종속적인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는 완전히 그 사건은 사라지고 있다) 강조점은 세례에 뒤따른 하늘이 열리는 초자연적 사건에 놓여 있다. 주 문장은 세개의 등위에 부정사와 함께 주동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가가 이 등위 부정사를 다루기 전에 부정사구와 함께 삽입시키므로 다음 행동의 배경을 서술한다. 그리고 두개의 분사로 구성된 속격 절대 구문을 삽입하고 있다. 마샬에 의하면 (Marshall,1978,54,152) 이러한 구조의 효과 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강조하는 반면 부수적인 지상사건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기도하실 동안에 일어난 일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3) 주 문장에 나오는 세개의 등위 부정사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여준다. 첫 부정사(열리며) 는 하나님의 계시가 곧 일어날 것을 표시하고 다른 두 부정사(강림하시더니,소리가 나기를)는 이들 초자연적인 현상의 두가지 측면을 설명한다. 4) 하늘이 열리므로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형체로 비둘기같이 내려오셨다. 이를 예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눅 4:18)으로 이해하셨고 초대교인들도 그 렇게 믿었으며(행4:27) 베드로 역시 그렇게 설교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 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행 10:38) 이 성령의 기름부음은 능력의 기름부음으로 예수님께 메시야로서 사역을 감당케 능력을 구비시킨 사건이다. 5) 성령의 기름부음은 하늘의 음성과 동반되었다. 아버지께서 아들과 유별 한 관계임을 강조하심으로 아들 되심을 입증하시고 하나님이 택한 종으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출발점에 서신 그를 향한 아버지의 계속적인 기쁨을 나타내심으로 메시야되심을 입증하신 것이다. 6) 요한의 세례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눅 7:29-30) 이상으로 주님의 경우에도 세례 받으심은 그를 향한 구체적인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세례 받음으로 주님께서 대속적인 구속을 이루실 백성 들과 하나되셨다. 그리하여 순종하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특별한 기쁨이 표현되고 있다(cf Hend-riksen,1979:216-217,219). 7) 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예수님은 또한 인치심으로 이해하시고 설교하셨다. "인자는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7). 주님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눈으로 보이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귀로 들리는 아버지의 선언으로 아들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인치셨다. 그의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께서 필요로 했던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관계와 그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아버지의 인정에 대한 이중확신(adouble assurance)이다. 이 인침에 의해 예수께서는 임무를 맡으셨을 뿐 아니라 구비되셨다. 8) 성령의 기름부음과 인치심이 기도하는 순간에 일어났다. 이 사실을 강조함으로 누가는 그런 상황에 "성도가 따라야 할 모범"(Marshall,1978:152)으로 특히 공사역을 수행할 설교자들을 위한 모범으로 암시하고 있다. 9) 누가의 계속된 기록을 보면 요단강으로부터 돌아오실 때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4:1) 을 입었고 "성령의 권능으로"(4:14)갈릴리사역을 감 당하셨다.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나타나는 "권세"(4:32)로 인해서 놀랐다.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는 류의 반복되는 복은서에 기록된 반응은 예수님의 설교의 권위를 요단강 성령강림 사건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다. 3. 오순절 성령강림과 사도들의 설교의 능력 (행 1장 4-582장4절:33,38-39절을 중심으로) 우선 사도행전의 처음 두장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약속의 회상(1:4-11). 2) 약속의 고대(1:12-26). 3) 약속의 성취 (2:1-4). 4) 약속의 설명 (2:14-36). 5) 약속의 제시 (2:37-39). 이 부분 (행 1:4-2:42) 전체의 주제는 아버지의 약속 성취로서 이는 사도행전이 기록된 주요 목적 중의 하나이다. 누가는 이 아버지의 약속 - 성령세례에 관한 약속 성취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첫문단 (특히 행 1:4-8)에서 예수께서 (행 1:4-5)그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눅 24:48,렘 32:36이하,33:6 이하 참조).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도록(1) 자신의 가르침(요14:15-31)과 (2) 요한의 증거를(눅 3:16이하,요 1:2633) 회상시키셨다. 한번 더 예수께서는 (행 1:7-8)그의 제자들에게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7절)보다 약속의 즉각적인 성취에 관심을 쏟아서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에서부터 세상 끝까지 증인이 되기를 엄숙히 명하신다. 둘째문단 (행 1:12-26)은 제자들이 약속 성취를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준다. 그들은 기도했고 또한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음으로 자신 들을 정결케 했다. 특별한 관심을 '마음을 같이 하여 '(14절)라는 단어에 쏟아야 한다. 현대 번역 성취를처럼 "그룹으로 기도한 것"(GNB)이나 "함께" (NEB,NIV)기도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마음으로"(KJV,NASB)기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여전히 더나은 번역으로, 이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의미 하고, 흔히 모든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행 4:24참조)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주어진 기도"를 의미한다. 이말로써 누가는 그들의 기도의 특성을 묘사 하려고 한다. 성령세계를 경험하기 의해서 전적으로 지배되는 기도"(Calvin,1859:58,Nicoll.n.d:61)를 의미한다. 동시에 누가는 이 단어를 부 흥기의 성도의 교제의 특성을 묘사하는데 사용한다(행 2:465:1225 참조).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5절)는 것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는"(눅24:49)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8절에 분명히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세례는 중생이나 성화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셋째문단(행 2:1-4)에서 최소한 몇가지 점을 언급해야 한다. 외적 표시와 함께 (2-3절) 내적 실체로서 (4절) 성령은 임하셨다. 성령으로 세례받은 결과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는 말로 묘사된다. 이 표현은 잇따라 일어난 체험을 묘사하는데 항상 사용되고 있다(Marshall,1983:69).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할 때 권능(행1:8)은 나타났다. 성령으로 충만한 영향을 사도행전 4장 31절과 33절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로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성령세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권능은 구변에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해야 한다. 또한 "이미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특정 임무를 위해서 새로운 충만이니 계속적인 충만을 받을 수 있다 "(Marshall 1983,69)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 문단(행 2:14-36)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세 대지로 나눌 수 있다. (1) 부정적으로 성령이 임한 현상은 인간 경험으로 설명될 수 없다(15절). (2) 긍정적으로 이 현상은 성경적 약속 성취로 설명해야 한다(16-21절). (3) 보다 정확히 말하면,이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결과로 설명해야만 한다(22-36). 베드로가 한 설교의 핵심은 33절에서 발견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높아지신 예수의 행위로써 설명될 수밖에 없다. 그가 (1) 아버지의 오른편에서 높아지신 후 (2) 아버지로부터 약속한 성령을 받은 다음 "너희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으니라" 마지막 문단의 핵심은 베드로의 대답(행 2:37-39)에서 있다. 베드로는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선포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문제의 핵심을 보는데 실패하고 있다. 때로는 성령의 선 물에 대해 아무런 설명조차 거의 하지 않고 있다.대표적인 경우로 그로사이드(Grosheide,1942:87-90)를 들 수 있다. 38절에 대해 거의 세페이지를 할 애해서 설명하면서도 성령의 선물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질적 설명을 하지않고 있다. 상당히 많은 주석가들이 그들의 신학적인 편견에 의해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브루스는 한편으로는 오순절이 '단회적'(Bruce, 1976:76)이라고 생각하면 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한 두시간 전에 사도들 자신에게 부어진 (Bruce,1976:75) 성령의 선물을 베드로가 청중에게 받도록 제안했다고 바로 설명한다. 베드로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성령의 선물을 다음과 같은 설명과 함께 청중들에게 받도록 제안하고 하고 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의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아버지의 약속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있던 처음 120명의 성도들에서만 한정되거나 정경의 완성전에 살았던 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오순절날 유효했던 것처럼 계속 유효하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맨 마지막 사람에게까지도 역시 유효했다. 모든 성도는 물론 모든 설교자는 아버 지의 약속의 유효성을 인식해야만 참으로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있다. 틀림없이 오늘날 강단의 상태는 이 점을 분명히 보지 못한데 그 무기력한 원인이 있다. 4.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서 바울의 설교 (고전 2장 1-5절). 설교에 대한 바울의 엄숙한 결단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1) 설교의 내용에 대한 결단 1-2절. (2) 설교의 전달에 대한 결단 3-5절 1절과 3절 초두에 나오는 같은 구절은 이런 구분이 타당한 것을 보여준다(cf De Klerk,1983:192).각 부분은 긍정과 부정을 이중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각 부분은 접속사를 두 번째 대조앞에 둠으로 첫 부분의 이유와 목적을 밝히고 있다. 설교의 내용에 대한 바울의 결단은 (1)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2)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기로 한 그 이유는 (1) 다른 아무 것도 설교하지 아니하고 (2)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 전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아덴에서 그의 실패에 대한 부담 때문에 "(pace Grosheide,1979:59)그의 임무에 대한 재고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숙한 결단에 대한 보다 나은 이유를 제공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고전 1:18-31) 사실에 입각해서, 바울은 세상 지혜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증거를 선포키로 작정하였다. "하나님의 증거"(Van der Walt 1986,1986A:197)란 설교전반에 관한 바울의 정의이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바울이 내린 결단은 그가 어디서나 했던 결단은 그가 어디서나 했던 결단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을 알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그의 설교의 내용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기초를 놓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닦아둔터에 해당한다(고전 3:1016). 경우에 따라서 특정형태와 소재는 바뀔 수 있으나 그의 근본 메시지는 동일하다. 설교의 방법에 대한 바울의 결단:그의 말과 그의 설교가 (1)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2)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그 뿌리를 (1)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2) 하나님의 능력에 내리도록 위함(5절 초두)이다. 바울은 1절 2절의 진리에 입각해서 3절의 설교 방법에 관한 엄숙한 결단을 내렸다. 그의 설교 내용에 일치하는 설교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설교 내용에 관한 지식과 그에게 맡겨진 임무에 중대함에 대한 인식이 그로하여금 두려워하며 심히 떨게 했다.그의 염려는 맡은 사역이 너무 큰 반면 자신의 무능함을 의식하는데서 나온 "(Ho-dge,1983:31) 것이다. 믿음의 순종을 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노력을 할 때 바울은 자신의 변론이나 설득 기술에 의뢰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 있는 나타남"(Hodge, 1983:32)에 의지했다. 바울은 오직 설교에 성령의 강력한 나타남만을 굳게 믿었다. 그것만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살전 2:13)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전적 의존심은 자신을 의뢰하지 않는 것을 배우기 시작할 때 비로소 갖게 된다. "설교에 있어서 설교자는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말씀하시도록 (벧전 4:11)하는 일이기 때문이다"(Van der Walt 1986A:193-4) 5. 성경적인 증거로 부터의 몇가지 고찰 성경적 증거의 연구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에 관한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일반적이고 간접적인 고찰을 할 수 있다. (1) "성령에 의한 세례"와 같은 것이 아니다. 흔히 "성령세례"를 고린도전저 12장 13절에 나오는 '성령에 의한 세례'로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로이드존스는 두가지를 서로 구분한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성령세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12장의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 관한 주제입니다. 13절에서 그(바울)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성령으로 그 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 앞에 분쟁과 나뉨이 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죽 위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정확히 똑 같이 그 몸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혀 '성령세례'가 아닙니다.(1975D:314). 또한 로이드존스에 의하면 (1975D :314-315) 바울은 고린도전소 12장 13절에서 성령의 사역을 다루고 있다. 달리말해 바울이 다루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성령의 활동입니다. 성령께서는 나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세례를 주었습니다'.그것은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에 의한 세례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그리스도께로 결속시키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1979A:66) 그러나 성령세례는 세례요한이 예언했던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의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로이드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세례입니다. 그가 우리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습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성령 자신이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 몸 안으로 세례를 베푸셨다고 가르칩니다"(1975D:315). 로이드존스는 이 모든 혼란이 '세례를 준다'는 같은 말이 쓰여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1975d:315). 그러나 그 단어는 신약에서 여러가 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성령에 의한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신분에 관여하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시에 그리스도아 연합시키는 세례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주로 우리에게 증인이 되는 능력을 주시는 우리의 활동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가끔 능력 세례라고도 불리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이같은 구별을 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혼란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성령충만'과 다르다. 이 성령세례는 중생과 혼돈될 뿐만 아니라 성화와도 혼돈되고 있다. 성령세례와 에베소서 5장 18절에 나오는 성령충만과를 구별하는 로이드존스의 입장은 옳다. 성령세례는 항상 '성령충만'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 이상이다. 로이드존스는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러분은 성령충만하게 되지 않고는 성령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령세례를 경험하지 않고도 성령충만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구별되고 구체적이고 특별한 경험인 반면에 충만은 계속적인 상태에 한 사람이 항상 처해있는 조건을 의미합니다(1975C:42). 에베소서 5장 18절에 나오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점진적인 성화의 전과정속에 주어진 명령이요 권고이다. 그것을 로이드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술에 취할 것인지 말지한 사람이 결정하고 통제 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서 통제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습니다 (1975C:49). 반면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은 구체적인 경험이다.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이빈다. 그가 우리에게 하신 일입니다"(1975C:49). 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커다란 차이는 이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권면입니다. 반면에 성령세례에 대한 모든 구절은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며 우리가 통제하지 않는 일입니다 "(1984A:77). 로이드존스가 하는 이 구별은 타당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세례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중생이나 성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능력입니다. 증거하는 능력입니다 "(1982C:308). 이 점에서 판 데르발트가 했던 것처럼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Van derWalt,JJ.983A:15). (3) "이상한 새 교리"로 여겨서는 안된다 성령세례는 '이상한 새 교리'나 오순절 계통에서 가르치는 '열광적인 가르침'으로 간주해서 안된다. 신자의 삶에 구별된 경험으로서 성령세례나 성령의 인침은 흠정역 성경번역자들과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서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cf18장) 그 뿐만 아니라 로이드존스는 수많은 청교도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 경험에 대한 증인으로서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 왜 신약서신서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에 주어져 있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역사적인 정황의 빛 속에서 신약서신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사도들은 커다란 부흥의 상태에 있는 교회에 속했고 위대한 하나님이 방문을 받은 시대에 살았다. 그래서 그 구성원 대부분이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상태에 있는 교회에서 편지를 썼다. 서신에서는 "....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기독교 메시지를) 저희와 함께 증거하시느니라"(히 2:4-5)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를 받은 소위 제2세대의 기독교인을 포함한 당시의 교회들이 보편적인 상태엿다. 있는 교회들을 향해 편지를 쓸때는 성령세례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사도행전(8:15,19-2)에는 특정한 그룹의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에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는 것이 사도들의 관습이었다. (4) 설교를 위한 특별한 능력의 수여이다. 로이드존스는 성령의 '기름부음'이라고 할 때 요한일서 2장 20절이나 27절에서 말하는 기름부음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이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이 말로 설교를 위한 특별한 능력주심을 의미한다. 그는 이와같이 일반적인 정의를 한다. 그것은 특별한 방식으로 설교자에게 내려오시는 성령이십니다. 그것은 능력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설교자에게 인간의 노력을 능가한 위치로 향상시켜서 사역을 하게 하십니다. 성령에 의해서 설교자가 사용하시는 도구가 됩니다(1982C:305). 로이드존스는 이 기름부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성경적, 역사적 증거들을 제공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세곳의 중요한 성경 구절에 근거해서 그 논지를 살피고 있다. 6.성경적 증거로부터의 특별한 강조점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서연구로부터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나 '성령세례'나'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표현되든지 상관없이 설교를 참 설교로 만들고 설교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메시야 예수의 경우나 사도들의 경우에 둘 다 성령의 능력주심은 설교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미리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바울의 경우에는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순간이 있었다(행 9:17). 자부쉬는 동일한 진리를 이와같이 묘사한다."여러분은 그 특별한 느낌을 체험해보았습니까? 그것은 '이상한 내적인 느낌'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의 경우에 그것이 그들의 설교사역의 시작이었다고 주장합니다"(Ja-busch,1981:104).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다 철저한 성령의 사역과 활동에 관한(cf 1984A:66) 일반적 연구와 성령의 능력주심에 대한 특별한 연구가 긴급하게 요청된다. 종교개혁 운동은 복음주의적인 신앙의 활성과 신약의 행위를 회복하고자하는 진지한 노력을 했지만 한정된 의미에서 신학적인 회복을 성취했다.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말하고 성경의 영감과 중생과 성화에 관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말했지만 아데에모가 입증한대로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에 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남겨 두었다.(Adeyemo,1982,10-11). 이면에 관한 아데예모의 종교개혁의 평가는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첫째, 성령의 오심이 비일상적이고 독특한 사건이라는 인식고, 이것이 창조하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인식이 불충분했다. 개혁자들은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가리켜주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가리키신다는 것과 또한 성령의 오심이 일련의 하나님의 능하신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세 사건이라는데 대한 진리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듯 하다. 둘째로,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구조적 경직으로부터 충분히 자유할 수 없었다. 로마교의 압제로부터 많은 일을 개혁자들이 했지만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고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그의 뜻을 수행하는 교회의 은사들을 회복시키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셋째, 개혁자들은 성령의 은사적 선물(Charismata)에 대해 적절한 파악이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칼빈의 태도이다.그는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적적인 능력과 놀라운 사역은 멈추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만 지속된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복음의 새로운 전파와 하나님의 새 왕국은 전에 듣지 못한 비일상적인 기적으로 밝히나타나고 확장되는 것은 필요했다. " 이런 태도가 바로 성령의 원시적 역동에 대한 맹점이었음을 지적하고 싶다(Adeyemo,1982:10). 그러므로 구원과 성화에 관한 성령 역사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반적 삶에 능력을 주시는 일과 설교자에게 특별히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의 사역도 강조해야 한다. 설교의 내용과 관련해서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전하는 것은 설교자가 성경을 매일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연구할 때 성취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성경만으로(sola SCreiptura)나 성경 전부로(tota Scriptura)라는 개혁자들의 구호는 다만 입으로만 하는 찬사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진정한 개혁주의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로마교 수도사의 경고에까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고도의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잘 받았고 많은 여행도 했고 풍부한 경험도 가지고 있으며 독서도 충분히 했습니다. 우리는 인류학자들과 성과학자, 정치가,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릅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어디에서 발견해야 할지를 모릅니다(Kelly,1979:260). 우리의 마음은 다양한 이 세상의 '지혜'로 오염이 되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암 8:1) 기갈 상태에 많은 신자들이 처해 있다. 설교자들에게 가장 긴급한 임무는 성령을 통해서 성경 안에 있는 예수를 아는 일이다. 제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설교의 방법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지혜-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는 하나님의 능력-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만이 전달될 수 있다. 칼빈은 이 진리를 단순하게 표현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말씀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Calvin 1975A:499). 그러므로 보렌의 말은 주의할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학은 성령의 고찰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Bohren,1974:72-73)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설교방법에 대한 긴박한 재검토를 해야 한다. 설교학에 관해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들은 교회가 세상을 받아들이고 그 방법이 우리의 강단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고 지배하는지 그 사실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인간적인 지혜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런 책들을 보면 경쟁이나 하듯이 세속적인 방법을 채용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방법을 따르도록 설득하고 있다. 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오늘날에도 바울이 했던 것과 동일한 결단을 해야 하는가? 이 결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무력하고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결단을 하기보다는 많은 설교학자들에 의해서 오히려 반대적은 방법을 택하도록 잘못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7. 능력있는 설교를 위한 기도의 지원의 필요성(6장:18-20 분해). (1)본문을 두 부분으로 분해할 수 있다. 1) 기도에 대한 바울의 일반적 교훈(18a 018c) 기도에 대한 바울의 일반적 부탁 18d 2) 설교를 위한 바울의 기도 부탁 (2) 에베소 성도를 향한 설교자로서 자신을 위한 기도 부탁을 보면 그의 설교관이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타난다. 1) Sermon 2) Preaching (3) 바울의 생각 속에는 설교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과정과 그 메시지를 청중하게 전달하는 과정이 구별된다. 바울은 이 양 과정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타남을 위해서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so that" God Will give me a message (GNB) "and that" in prochaiming it I amy Speak boldly(NASB) (4) "나로 입을 벌려" 말하는 순간에 그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로서 이해한다. "What I begin to speak"(Zer-wick 1981) (가무가 1983). 바울은 결코 자신이 메시지를 통제한다고 감히 생각 못했다. 오히려 말하는 순간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 이 실제로 설교하는 순간 그가 말한 최선의 것이 주어진다"는 로이드존스의 말은 바울로서는 이상할 것이 없다. (5) 둘째 기도제목 중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란 단어는 자유롭게 확신 가운데 말하는 것을 뜻한다. 앞절에 같은 요소가 나왔다. "완전한 확신으로 말미암은 자유로움"은 매우 중요한 바울 역시 설교 전달 과정에서 이 자유로움을 주요 요인으로 강조한다. (6) 기고의 일반저기 교훈과 비교해 보면 바울은 앞 부분의 기도에 대한 일반적인 교훈에서 기도로 기도되게 하는 신적 요인(The divine agent) 인 성령을 언급한다. 뒷 부분 설교자를 위한 기도의 부탁에서는 설교를 설교되게 하는 신적 요인을 언급하는 대신 그런 설교의 특징-담대히-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만이 담해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다. 바울 역시이 요인을 거듭강조하며 성령으로만 가능하다고 이해하고 있다 바울은 이를 위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1) 성령 안에서 설교의 자유로움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는 선물로서 이해하고 있다. (2) 기도의 응답으로 또한 설교원고 작성 때도 메시지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자신의 이를 위해 기도하는 동시에 성도들의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설교를 위한 평신도의 기도 지원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겸손히 섬기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8. 성령의 기름부음을 위한 삶 (1) 순종의 삶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설교를 위한 지름길은 없다. 성령의 능력으로 설교하는 문제는 어떻게 기도하느냐와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삶전반에 대한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설교의 기름부음을 위해서 설교자의 일상 생활에서 경건에 이르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훈련의 궁극적 목표는 순종이다. 일상생활의 경건 훈련이 먼저 되고 나서 설교에 임하는 특별한 기름부음의 간구가 바른 순서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힘든 연구와 준비의 대책물이 아니다 이것은 양자 택일이 아니고 상호 보완이다. 이 축복을 위한 기도는 지속적인 간구이며 간절하고 긴급한 간구이다(눅 11:5-13). (2) 기도의 삶 설교의 기름부음은 기도를 통해 얻는 축복이다. 패커(Packer)는 성령 세례를 개별적 경험으로 보는데도 유보적 태도를 취하지만 이 문제에서만은 동 의한다. "이는 기도로서 구해지는 선물"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이나 능력 그 자체만 구해서는 안되며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자해야 한다. [ 결론 ] 참 설교를 위해서 성령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복음주의 설교자는 아무도 이것을 이론적으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에 잇어서 없어도 될 것처럼 설교하지 않는지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론이든 실제에 있어서든 이를 부인할 때 참설교와는 멀어지게 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지는 설교에 잇어서 자유로운 요소가 강조되지 않으면 설교학의 다른 제 원리가 무효화 된다. 해석학적,강해적 원리는 능력있는 전달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노력과 설교학적 방법에는 신경을 쓰지만 거룩하고 간절한 기도에 얼마나 종사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공중 앞에서 하는 연설은 숙련 될 수 있는 기술이지만 설교는 거룩한 삶으로부터 나온다. 설교자는 언제나 성경 본문과 씨름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해야 한다. 능력 있는 설교는 반드시 거룩한 삶을 사는 자에게서 기대될 수 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나니..."
성령관련 그림/ 2015-05-23
성령관련 그림 그리스도의 수세 (마3:13-17, 막1:9-11, 눅3:21-22). 5세기 중엽의 모자이크로 라벤나 대성당 부속 세례당의 원개에 있다. 이 그리스도의 수세는 세례당 장식의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왼쪽에 서있는 세례 요한은 보석으로 장식된 십자가를 왼손에 쥐고 있고 오른손으로 그리스도에게 물을 뿌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있다. 오른손에는 요단강의 화신으로 보이는 노인이 물속에서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으며 식물을 들고있는 인간의 형태로 보아서 고대 민속신앙의 잔재가 여기에도 남아 있음이 엿보인다. 주위에 12사도가 서 있는 인물의 표현은 고대풍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나 정확한 기하학적 구도로 보아 기독교 시대가 성숙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수세 971-984년에 윈체스터파에 의해 제작된 <성 에델오르도의 사교용 전례서>의 사본화로 런던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후기 앵글로 색슨파의 사본화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헌사에 의하면 이 사본은 윈체스터의 모든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본은 총 28매의 전면 삽화가 실려있다. 이 그리스도의 수세 장면에는 요단강의 화신이 항아리를 기울여 물을 흐르게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이 반 정도 잠겨있다. 주위에는 천사들이 날고 있으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있다. 그리고 네 모퉁이에 있는 복잡한 꽃잎모양의 장식 십자가는 카로링 왕조의 사본들에서 그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앵글로 색슨 초기 문양 예술의 전통을 재흥시키려는 의도와 새로이 사실주의적인 표현방식이 가미된 것으로 해석된다. -------------------------------------------------------------------------------- 성령의 강림 캔버스 유화. 341*174cm 치비코 박물관 소장. -------------------------------------------------------------------------------- 감람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9).이것은 4.800미리 초망원 렌즈로 촬영한 것이다.가운데 솟아 있는 [승천탑]너머로 태양이 떠오른다.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각도는 1년 중 11월의 2.3일 정도이다. 승천과 일출의 조화 가운데 놀라운 상징성을 발휘한다. 요단강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막 1:9-10). 요단강은 갈릴리바다에서 사해로 이어지는 강으로 낙차가 크며. 심한 사행천을 이루고 있다. 유대광야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 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마4:13). 이것은 새벽에 촬영한 것으로 명암이 드러나 황량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막이나 산에서 위대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다. 행 2:1-13
성령세례에 관한 고찰/ 2015-05-23
성령세례에 관한 고찰 근래에는 오순절 사건에 대한 해석문제, 성령세례와 중생과의 관계, 성령 세례와 성령충만의 문제가 성령론에서 주된 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로 극단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서 성령론은 심한 혼란과 혼동의 와중에 빠져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학설을 성경에 조명하여 옳고 그름 을 밝히고 바른 이해를 정립함이 신학적으로나 목회적 측면에서 절실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제들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의미와 성령세례의 단어의 어의를 고찰함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A. 성령세례의 의미 여러 학자들이 성령세례의 의미를 다양하게 말하고 있다. 가핀은 "성령세례는 한마디로 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오순절 사건은 약칭 성령세례, 성령강림, 혹은 성령선물등으로 불려지며, 또한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있는 동시에 성령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가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라는 뜻이다" 고 말했다. 핀녹은 성령세례의 용어에 대하여 특수한 용어가 아니라 융통성 있는 은유적 용어라 말하고 있다. 즉 성령의 임함을 말하는 통칭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때로는 성령충만의 동의어로 볼수 있으며 회심의 경우를 말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영복 교수는 오순절날에 각 사람위에 '성령이 임한 것'을 가리켜 '성령의 세례'라고 말함이 타당하다고 했고 박영선 목사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와 성령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를 구분했다. 또한 우희영 목사는 "성령세례란 성령속에 잠기며 성령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름 붓듯, 혹은 물 붓듯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로이드 죤스는 "성령의 보증" 혹은 "성령의 인침"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했고 부루너(Fredick Bruner)는 세례 받는 것이 곧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위스 개혁신학자 파디(Ren'e Pache)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책에서 동일한 견해를 표현하였다 고 하겠다. 칼빈 또한 물 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일시 했다. 이러한 모든 견해는 대체로 두가지 주장으로 분류 될 수 있다. 즉 오순절파와 웨슬레안 및 케직파의 견해와 개혁주의(칼빈주의)의 학설이 그것이다. 전자는 중생후에 받는 이차적 경험으로서의 체험을 성령세례라 해석하며 후자는 중생시에 받는 어떤 것으로서의 성령세례를 말한다. 이렇듯 성령세례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주의깊게 고찰되지 않으면 그 실체를 분간하기 어렵다. 신 구약 전체를 통하여 성령세례라는 말이 7회 나타나고 있다.(마 3:11,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 여기에 인용된 성구들을 살펴보면 복음서의 성구는 세례요한이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고 말한 예언적 내용이다. 그리고 행 1:5의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후에 승천하시기 전 사도와 같이 모인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 자신의 예언이며 행 11:16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쓴것이고 고전 12:31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었던 교훈에 포함되어 있다. 먼저 성령세례가 직접 언급된 복음서와 사도행전 1:5을 살펴보면 성령세례는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세례요한에 의해 예언되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약속된(행1:5) 성령세례가 오순절날에 성취된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여 이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명백히 한다. Sanders도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은혜를 가르쳤던 것이다 고 말했다. 또한 문법적으로 약속된 세례의 태가 수동태인 것은 성령세례가 받은 자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동시에 예언과 약속의 성취임을 말해준다 오순절 사건의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자. 첫째, 오순절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 다. 이는 전혀 없었던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은 오순절 이전에도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계셨고 사역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인간을 위한 성령의 주된 사역이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주도적 사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역사성을 가진다. 렌스키도 마태복음 3장 11절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순절 전에는 성령이 없었고, 오순절 후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아니다. 만 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순절 전에는 한 영혼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이는 구속 사역이 실제로 완성되기 전에는 성령의 사역이 제한된 예비적이였으나, 그후에 이르러 성령의 충만이 있었다는 차이다. ." 렌스키 역시 오순절 사건이 성령의 주도적 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입장인 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사건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것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성령의 시대의 시작이다. 고든(Gordon) 또한 오순절 사건을 성령시대의 도태의 축으로 해석했다. 둘째로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성역초기에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이라고 말한 다음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고 말함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일이 어떤 일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상에 구속성취를 이루시고 그 구속을 받아들이는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 그 구속을 배척하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베드로는 요엘 2:28-32을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면서 요엘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 비추어 인용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후에'를 '말세에'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행 2:17) "저희가 예언을 할것이요"(행 2:18)를 첨가하여 인용하였다. 그 이유는 오순절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아울러 말세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의 오심과 자신의 죽음을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6:7-8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의 생각의 방향은 자신이 죽음과 부활, 승천을 거쳐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에 있음을 본다. 예수님 자신이 죽으신후 부활해야만 보혜사가 오실 것을 명백히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때 오순절 사건은 구속적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성취된 사건이며 다른 구속 사건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 수난, 죽음, 부활, 승천과함께 고려되어져야 한다. 스타트(Stott)와 개핀(Gattin)도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의의를 구속사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개핀은 오순절의 의의를 3가지 차원에서 조명하였는데, 기독론적 차원, 교회론적 차원, 그리고 경험적 차원이다. 기독론적 차원에서 볼때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는 자는 바로 성자이시다. 오순절은 약속의 성령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날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적이며 기능적이며 종말론적인 섭리사건이다.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성자의 사역의 절정이었다. 세째, 오순절 사건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가시적 현상의 체험이다. 바람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과 방언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먼저 상징적 의미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예언과 약속이 성취되었고 새로운 언약시대의 도래가 이루어 졌다는 확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곳에 가시적 현상이 나타날 수는 있겠으나 모든 경우와 간구에 의해 이러한 동일 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합당치 않다고 하겠다. 성령행전 이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성령의 끊임없는 역사가 상존했던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 방언을 비롯한 가시적 현상이 교회선교사역에 반복되었다는 제시가 없다. 오순절 사건의 가시적 현상들은 주의깊에 언급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네째, 성령의 충만을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았고 특별한 능력이 임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되고 능력의 은사가 임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한 후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와 전혀 기도에 힘쓴(행 1:14)의지의 순종이 막 주도적 사역을 시작하시는 성령님을 그들속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역사했던 능력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예정과 인정하심에 의한것 이지만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은사와 능력이 나타낮다고 봄이 더욱 보편적이며 일괄성이 있다고 하겠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언어적 의미를 고찰 해보면 성령세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먼저 세례라는 말의 헬라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상태 또는 이전의 환경이나 상태와의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사람이나 사물을 그외에 어떤 것과 결합 시켜 놓거나 새로운 환경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으로 정의되며 그 번역은 로 들여놓다. 또는 로 끌어들이다 라고 K.S 위스트는 설명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의 31절에서 "성령으로"는 수단을 말하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또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영역에서의 세례를 뜻하며, 성령은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 K.S 위스트는 말한다. 또한 믿는 자를 예수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결합으로 이끄는 것이지 성령에 의한 세례가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 말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와 생명적인 결합으로 들어가는것,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으신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 믿는 죄인을 주 예수께서 살아계신 머리가 되신 그 신비체에 들여놓거나 이끌어 들이는 것을 뜻한다. 렌스키와 칼빈도 요 1:33과 행 1:5을 주해하면서 세례라는 개념을 구속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이상근 박사 또한 성령의 세례는 위에서 오는 선물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살아 그의 몫이 되는 것이라 하여 성령세례가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는 연합으로 해석했다. 또한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역사적이든 개인적이든 단회적 사건이다. 막 1:18, 마 3:11에서 "세례를 주실 것이리라"는 뜻이 단어 (배티세이)는 미래능동채 3인칭 단수 동사로서 한번 이루어질것이 예언되었기에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라 할 수 있다. 요 1:33의 "세례를 주는" 단어 (배티죤) 역시 현재 분사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동사로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전 12:3절 마찬가지로 그 동사는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는 과거 시제이며 단 한번만의 행동을 가리키는 부정과거이다. 이와같이 성령세례에 관한 주석가들의 해석과 언어적인 의미를 고찰해 보았을때 성령세례는 죄씻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표식으로서의 역활과 생명이 임하는 단일성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상의 고찰로 알수 있는 사실은 성령세례는 어떤 능력이나 은사의 체험이 중심이 아닌 역사적 구속사적인 사건이요 예수그리스도의 몸과의 결합이 며 단회적 사건으로 성령충만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실임을 알수 있다. 성도가 성령의 은사는 마땅히 사모해햐 하겠지만 성령세례를 사모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박정인
성령신학의 현대적 의미/ 2015-05-23
성령신학의 현대적 의미 I. 들어가는 말 1. 성공회 신학자 John Macquarie는 "현대의 생명 있는 신학은 오늘 현재 인간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21 세기를 코 앞에 두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기술 정보화시대, 시장경제체제 시대, 우주과학 시대, 미래화 시대, 지구촌 시대. 미래의 충격을 예고하는 지표들도 한 두가지가 아니다. - 인구 폭발, 핵 폭발, 자원고갈, 식량 절대 감소, 생태계 파괴, 지구멸망 등. 과연 성령신학이 현대에 의미를 줄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때 성령신학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도대체 성령신학이란 무엇인가? 2. 1983년 캐나다 벵쿠버에서 열린 WCC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 이었다. 그 당시 논의 되었던 것은 군국주의의 팽창과 무기의 위협, 기계 문명에 의한 인간 부재현상, 자본주의에 의한 제 3세계의 종속관계 등이었다. 세상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숙지하고 그 세상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 속에서 내 걸은 주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오늘도 그 문제들은 해결되 지 않은 채 무서운 현실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성령신학은 오늘 현대 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 속에 뛰어들어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생명"을 이땅위에 구현시키는 일에 봉사할 것이다. 3. 여기서 필자는 "성령신학"이 바로 "삶의 신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본 소고는 우선 "이성 중심" 속에서 기형적으로 발전한 현대 를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그리고나서 "생명 중심"의 성령신학의 특성을 생각해 보고, 마지막으로 성령신학의 실천적 의미로, 우리의 이웃, 즉 동료인간, 공동체, 자연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생명 존중"에 대하여 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다가오는 21세기 신학을 전망하는 일도 될 것이다. II. 현대의 형성과 문제점 1. "현대"(Modern Times) - 그것은 어떻게 형성 되었으며,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만난 소위 "현대성"(Modernity)이란 개념은 신화의 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옮겨 가면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anthropos metron panton)라고 함으로 써 인간 존재를 "자율적 이성"으로 파악했다. 17세기에 데카르트(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를 통해 인간을 존재의 기초와 지식의 근거로 삼아 자아의식이 활발하게 싹트도록 했다. 18세 기 이르러 이성의 발전은 더욱 더 인간 중심적 사고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칸트(I.Kant)는 그의 책 "계몽주의란 무엇인가?"(Was ist Erkl rung?)에서 계몽이란 인간이 어떤 외적 권위에 매임이 없이 자신 속에 있는 이성의 소리를 따라 모든 것을 세워 나가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이성은 어떤 보편성 내지는 합목적적 의식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성의 이러한 절대적 보편성 내지 합목적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윤리와 도덕을 비롯한 삶의 규칙 전반에 많은 공헌을 하 기도 했지만 그 자체에 이미 문제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이성의 가치 평가는 19세기 문화 개신교(Kultur- protestantismus) 아래서 극도에 달했다. 이성의 극대화는 신이라든지 모든 궁극적 문제들이 인간성에 정초하게 되어 세계와 인간은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몰고가는 운전수와도 같았다. 결국 그러한 자율적 사고는 세계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두번의 세계대전을 치루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이성 중심의 현대성(Modernity)이 보여준 낙제점의 예다. 2.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성을 매개로 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자연을 탈 마술(Entzauberung)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현대화, 산업화, 도시화를 만들어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는 것 같았으나, 동시에 그것은 그 자체의 많은 문제성을 안고 있었다.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경제적 블록현상이라든지, 생태계 파괴가 그것이다. 또한 현대는 고도의 성장과 발전으로 우주정복, 전자공학 발달, 인 조로봇, 심지어는 인조 생명(복제 인간)까지 만들어 그 자체의 병리 현상을 목도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인간성 상실이라는 큰 위기에 부닥치고 있다. 더 우기 그러한 성장과 발전의 뒷편에는 전쟁, 기아, 소외, 핵무기, 질병(Aids, 암, 피부질환 등) 등으로 인해 현대인은 사회적 심리적 불안과 갈등을 겪고 있다. 3. 이제 이러한 병든 현대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사고의 전환, 즉 이성 중심의 사고에서 "생명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는 일이 급선 문제다. 그것은 "더 많 은 발전", "더 많은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현대성(Modernity)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실천만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성장 과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현대성"을 주도해 왔던 "이성적 합리적 사고 방식"을 바꾸고(Shift!), 새로운 길, 즉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그 생명의 길은 현대를 넘어선 탈/후기 현대사회(Postmodern Society)에서 시작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 중심인 성령신학에서 기대한다. III. 성령신학의 특성 1. 한글판 성서에서 "영" 혹은 "성령"은 희랍어 "프뉴마"( )와 히브리어 "루아흐"( ), "네페쉬"( )의 번역으로서 "육"( )이나 "물질"과 상반된 개념이다. 구약성서에서 "루아흐"와 "네페쉬"나 신약성서에서 "프뉴마"가 힘, 숨, 입김, 기운, 생기, 바람으로 표현 되었을 때, 성령은 "인디비디움(Individuum)으로서 인격"의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을 하느님의 영으로 보아 "인격을 가지신 영"(롬8:26), "예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으로 고백할 수 있다. "루아흐"와 "네페쉬"가 "하느님의 기운"으로써 세계 창조와 그 운행의 원동력이듯이 "프뉴마"도 성서문자, 성례전 그리고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 또는 역사 전체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기운이다. 성령은 역사를 변혁케 하는 영이다. 2. 성령의 자유성은 우선 내재적 삼위일체의 "신성 안에서 자유"와 경세적 삼위일체에서 "세상을 위한 자유"로 특징지어 진다. 하느님의 자유는 인간의 어떤 개념이나 유비적 지식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분이다. 우리에게 그 분은 신비이며, 예배의 대상일 뿐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이 인간에 의하여 조작 되거나 통제 되거나 지배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령은 마치 바람이 불 고 싶은데로 불듯이 그렇게 임한다(요3:8). 인간이 "바람아 바람아 불어라"고 외친다 하더라도 그 말 따라 바람이 불지 않는 것처럼 성령을 주문 외우듯이 부른다고 해서 성령이 임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인간의 이성으로 조작 될 수 있는 영이 아니다. 3. 바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질서와 법칙은 "바람아 불어라"고 외치는 인간 의 소리와는 다르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데로 분다." 성령의 역사, 위력, 개입도 전적으로 성령 자신의 주권이다. 성령은 전문가가 있어 성령이여 오시 옵소서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 폭발"이란 슬로건을 통해서 성령이 폭발 하는 것도 아니다. 최대의 기능과 행정력을 발휘하고 질서 정연하게 프로그램 을 계획적으로 그리고 완전무결하게 진행한다고 해서 성령의 폭발이 오는 것도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에 결코 끌려 다니지 않는다. 성령은 독 자적이요, 절대적으로 자유하다. 성령은 자체의 원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고 그 질서에 따라 개입하고 역사하고 스며든다. 성령은 바람처럼 임한다. 그리고 둘 러싸며 스며든다. 큰 바람이 생명을 앗아가고 재산을 파괴시키는 것처럼, 성령 은 위력을 가진다. 그러나 성령은 바람처럼 비 인격적인 힘은 아니다. 성령은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고, 인간의 삶을 보존하고 촉진해주는 인격적인 영이다. 그러나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4. "나는 내 영혼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욜 3:1-4)라고 말한 요엘의 예 언(BC 830년경)은 약 900년동안 침묵을 했다. 그 예언의 바람은 너무나 오랫동 안 불지 않았다. 오랫동안 암담한 환경과 처지에도 그저 바람은 잠자코 있었 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했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는데도 바람 은 불지 않았다. 그런데 약 900년이 지난후 어느날 "갑자기" 성령이 강한 바람 처럼 "성도들의 모임"인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임한 것이다(행2:16-21). 이 "갑 자기"란 말 한 마디는 거기 모인 사람의 무엇 때문이나 인간의 무엇에 자극되 어 임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필요성과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서 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성령 강림"이라고 한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도 사멸할 수 밖에 없다. 성령은 "성도들의 모임" 을 통해 교회(Gemeinde)를 탄생 시킨다. 5. 성령 체험을 한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다"는 복음을 온 갖 박해와 환난과 죽음 속에서도 전파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한 후 예수께서 분부하신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 음의 증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의 성령 체험은 바로 생명의 주님을 만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생명이었다. 그들 은 세상의 종교와 권력이 그를 죽였지만 그는 다시 부활한 생명체이었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성령신학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고, 모든 사 람을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선포를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해 준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 )는 것을 실현하신 분은 인간답지 않은 모 양으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성령신학은 인간성 회복에 기 초가 되는 신학이다. 6. 성령은 "태풍"처럼 절대주권을 가지고 오신다. 태풍은 바람 자체가 지닌 큰 힘을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발휘한 예다. 그러나 성령은 태풍의 무자비 한 비 인격성과는 달리 "좋으신 하느님의 영"으로서 기존의 악과 불의로 가득 찬 질서를 뒤짚어 덮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매우 위력 있으나 온건하다. 그것은 마치 봄바람이 앙상한 겨울나무들과 마른 풀들을 변화시켜 새 생명이 약동하게 만들듯이 하느님의 영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조용하게 임한다. 성령은 폭력의 영이 아니라, 조용한 변화와 "부드 러운 혁명"을 이르는 영이다. 7. 자유의 영으로서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유에 참여할 수 있 도록 허락 하신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는 혁명가들의 구호나 열광주의자들의 무질서와는 다르다. 인간은 하느님의 영을 통해 실현되는 이 자유를 자기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한다. 주체로서 행동하시는 하느 님은 인간에게 고유한 주체적 자유를 선물로 주셨다. 인간의 자유는 노력해서 획득된 자유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자유다. 그래서 Augstinus는 "하 느님께 예속되는 것이 최고의 자유다"라고 했고, E. K semann은 "인간의 자유 는 선사된 자유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섬김 속에서 확증할 수 있는 자유다"고 했다. 8. 자유의 영으로서 성령은 인간에게 새로운 사고와 행동에 대한 기쁨을 일깨워준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인이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것에 완전히 책임있는 종이며, 모든 것에 얽매인다"(M. Luther).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욕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 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갈5:13; Paulus). 바 울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욕심에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사랑으로 "종"이 되도록 섬기는 데 있다고 했다. 따라서 성령 이 주시는 자유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자유케하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역사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생명운동, 인권운동, 정의운동, 평화 운동 등과 연대를 하며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성령의 역사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건으로 역사에 임한 다. 따라서 성령신학은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는 신학이며, 하느님의 사건신학 이다. IV. 성령신학의 실천적 의미 1. 성령신학이 제대로 소개되고 있는가?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성령신학은 소홀히 되거나 아니면 교리나 경건의 수단으로 축소 내지는 왜곡되어 소개되곤 했다. 소위 정통주의를 내세우는 교회들은 교리적으로 성령을 강조함 에도 불구하고 운동으로서 성령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오순절이나 순복음 계통의 교회 등의 소종파형의 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 신유 등의 체험으로 좌절과 불안에서 해방되고, 병에서 해방되는 일종의 해방 사 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율법화 되고 경직화된 보수 교회에 대한 반발 현상이라 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유형의 교회들에서 종종 성령이라는 이름 하에 인간의 이기심이 관철되고 이용되어 문제점을 야기시키곤 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들은 "성령의 자유성"을 남용한 것이다. 반면에 기존의 교회의 문제점은 성령을 교회의 예배나 성서문자 혹은 성례전 등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교 육하기 때문에 성령의 자유성을 특수한 영역에 국한시켜 신학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점이다. 2. 전통적 기존 교회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땅의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 지극히 피상적이거나 소홀히 하고 있는데 반해,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황신학 (Kontext-Theologie)은 땅의 현실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가운데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정치신학, 흑인신학, 생태학적 신학, 평화신학, 혁명 신학, 그리고 한국에서 민중신학 등이 있고, 또한 아프리카 신학, 아시아 신학, 여성 신학, 토착화 신학, 포스트모던 신학 등이 있다. 이러한 신학들은 현실 상황의 문제점을 직시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윤리적 시도들이다. 필자는 이러한 신학적 태도를 "수평적 신학"이라고 우선 명명하고자 한다. 3. 나는 여기서 "수평적 신학"을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차원의 신학 즉 "수직 적 신학"의 지평 속에서 전개하고 싶다. 말하자면 수평과 수직 즉 현실과 초월 을 동시에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수평이 인간의 현실 문제를 말한다면 수직은 하느님과 관련된 예배를 말한다. 여기서 성령신학이란 이 두 신학을 각각 두 개의 촛점으로 하여 만들어진 타원형과 같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사는 것은 성령의 현실 속에서 사는 삶을 말한다. 성령신학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세상, 성서와 신문을 구별하면서도 분리시키지 않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구현하도록 안내한다. 4. 성령신학은 "더불어 사는 삶" 즉 "호프-신학"(Hof-Theologie)에서 실천적 의미가 나타난다("호프신학"에 대하여서는 {기독교사상}, 1995년 5월호, pp.145-154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인간의 삶은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을 범주로 하는 "삶의 마당"(Hof)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성 자체의 문제를 내 포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적 삶은 "나"는 물론 우 리가 사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성령은 나로 하여금 이웃이 있고, 그리고 "나" 주위에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생태계도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참 안식을 주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케 한다. "호프"신학은 인간이 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는 신학이다. 그것은 마치 자석을 모 래에 놓으면 자석 주위로 쇳가루가 모여들어 자기장의 모양이 생기는 것처럼 "나"는 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여 나와는 다른 피조물인 동료 인 간과 그리고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여기서 성령신학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다시 말하면 나-하느님-이웃-자연을 잇는 "마당"(Hof)을 형성하면서 삶의 질을 향상 시킨다. 5. 이 세계는 어디에나 "삶의 마당"(Hof des Lebens)이 있고, 그리고 그 삶의 마당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희망"(Die Hoffnung der Welt)으로 나타나야 하는 과제가 있다. 성령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희망, 기쁨, 생명"이라는 전제 하에 기쁨과 희망과 생명이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결단에 동참하여 "복음"(Good News)을 전파하도록 역사한다. 그것은 현대성(Modernity)이라는 그늘 속에서 강도 만난 우리의 이웃과 연대(Solidarit t)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받은 사람은 절대 빈곤 속에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차별받는 흑인과 여성, 착취받는 민중, 파괴된 생태계 문제를 위하여 함께 연대하는 자들이다. 만약 우리가 오직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 의적으로만 생활한다면, 거기에는 삶이 없다. 20세기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칼 바르트는 "개인적 실존은 도둑놈 실존이다"(Privatexistenz ist R uberexistenz)고 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성령신학(삶의 신학, "호프" 신학) 에서 "네가 구원 받아야 내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유기적 상호 관계하는 삶속에서 연대하는 삶을 배울 수 있다. 6. 나는 혼자 살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실존하고 있다. 나 주위에는 "나와는 다른 네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지 않는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가족 공동체, 함께 일하고 있는 직장 공동체, 믿음의 삶을 나누고 있는 교회 공동체, 내가 매일 만나는 마을 공동체, 그리고 크고 작은 익명의 공동체들이 있다. 성령신학은 이 공동체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안내해 준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대로 빛이어야 하고, 소금이어야 한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빛을 발하기 시작할 때, 그 공동체에 있었던 어두움은 사라지고 온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기쁨을 경험한다. 한 그리스도인이 살 맛이 없는 공동체에 소금이 될 때, 그 공동체는 작은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7. 어떻게 그것이 현실성으로 나타날까?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그 기적은 위에서부터 내려온 성령이 임할 때다. 성령은 나 안에, 공동체 안에 거하여 사고의 축을 바꾸도록 역사하신다. 그 사고의 축이 바로 성령신학이 말하는 "성 령 중심적 사고"(Pneumatisches Denken)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깊은 반성없이 이성 중심의 사고의 틀 속에서 갇혀서 오히려 비 이성적이고,비 인간적인 "현대주의"(Modernism)를 건설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식하고 그 길 에서 돌아서서 성령 중심의 사고를 하기 시작해야 한다.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꾸어야(Shift) 한다! 그것이 회개다. 8. 성령신학은 자연과 인간이 다함께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떨어질 수 없는한 조(Set)로 지음받은 공동 운명성을 지닌 생태계 신학을 지시한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세계는 참으로 조화롭고 아름다왔다(창1:31). 하느님께서 자연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런 다음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자연은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한 원천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전달자(시19:1)이며, 또한 우리 자신의 보잘 것 없음과 동시에 끝없는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해주도록 하기 때문이다(시8:3-4). 따라서 생태계의 보호와 조화를 생각하는 성령신학은 자연과 인간이 불가 분리의 피조물의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생태계 구원에 참여케 한다. 그것을 우리는 생 명보존의 신학, 생태학적 신학, 환경보존의 신학 등으로 부르고 있다. 9. 현대의 기술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생태계 파괴의 촉진을 가져왔고, 결국 그로 인해 모든 피조의 세계가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가령 각 개인 스스로가 환경 오염을 무의식적으로 승인한다면, 그는 환경 파괴에 대한 다수의 무의식적 합의를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성령신학은 이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생명 중심의 사고"로 전환을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만의 구주가 아니라 만물의 구주다(골1:18-20). 그는 타락한 인간을 찾아가는 것은 물론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그 강가에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 거하게 하신다. 성령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 화친하는 삶을 살도록 "사고의 전환"(Umdenken)을 일깨워 주는데, 그것은 예를 들면 개개인의 생활 습관, 가치 기준, 신념들이 "생명 중심의 사고"로 변화된 "삶의 전환"(Umleben) 속에서 현실화 된다. 10. 나아가서 성령신학은 환경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소극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적극적 관심에서 참다운 인류의 해방을 위해 생태학의 정립을 위한 범 지구적 관심을 설정해 나아가야 한다. 성령신학은 생명의 신학으로서 네 "이웃" 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웃의 개념을 지구 공동체로 확대하여, 이기적인 "인간 중심적 이성적 사고"에서 탈피해서 "성령론적 생명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여 그 자리매김을 한다. 그것은 이미 파괴되었고 지금도 파괴 되어가고 있는 지구를 보존하기 위한 환경 회복 선언을 의미한다. 환경 회복의 관심은 우리가 매일 숨쉬고 살아가야 할 장소, 즉 땅과 바다와 공중에 서 인간이 자연 경험에 기초된 새로운 유기체적 실재관을 통해 우주적 차원의 생명 중심에서 표현된다. 가령 먹이사슬 문제가 발생하여 생태계가 균형이 깨 져 나아가는 것을 경험하고 실천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성 이 더욱 깊다면 나무 한 그루가 병들어가는 것을 내 몸 어딘가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것과 일치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11. 성령신학은 "생명 운동의 신학"으로서 하느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과 뜻을 인류에게 전달하며, 인간은 그 자연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이끌어준다. 성서는 끊임없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 았던 자연"을 말하고 있으나 인간 중심적 신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자연적인 것 모두를 경시하고 발전과 성장에 촛점을 맞추었다. 결 국 자연은 황폐화 되기 시작했고 그것은 인간성 자체의 문제로 드러났다. 여기에 반해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의 세계에서만 하느님의 능력과 임재를 추구한 나 머지 결과적으로 자연과 환경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정복하려는 종교가 되어 버렸고, 신도들은 현대라는 괴물 앞에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을 잃고 초자연적 기적만을 추구하는 나약한 신앙인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성령신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는 신학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새 일을 하게 한다. 성령 은 나에게, 우리의 공동체에,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에 "생명의 영"으로서 거하여 맨 처음 하느님께서 지으시고 아름답다고 하신 세계를 재 창조하시고자 하신다. 이 일을 시작하는 첫 출발은 "창조주 성령이여, 오소서!"하고 간구하는 일로 시작된다. V. 맺는 말 1. 우리는 성령신학의 현대적 의미를 밝히기 위해 오늘의 현대성(Modernity)의 근원을 따져 보았다. 그것은 "이성" 중심의 세계였다. 인간의 이성을 존중 하여 발전한 현대는 기술 혁신과 과학의 발달이 첨예화 되었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세계는 점점 더 비 인간화 되어갔고, 생태계 파괴로 인해 지구가 병들어 갔음을 알았다. 여기서 성령신학은 "이성"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패러다임(Paradigm)의 전이(Shift)를 의미했다. 성령신학은 한편으로는 현대성을 주도해 온 인간의 자율성에 문제점을 던지고, 또 다른 편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Dimension)의 인간의 자율성을 내세웠다. 그 자율성은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선물로서 나 안에, 우리 안에 거하여 우선 "예수그리스도-세상의 구원"이라는 것을 고백케 하고, 그런 다음에 성령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케 한다는 것을 말했다. 2. 성령신학이 현대에 어떠한 의미를 줄 수 있을까를 정리하면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성령신학은 " 나-하느님-동료 인간-자연"이 "호프"(Hof: 마당)를 이루면서 산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성령신학은 "호프"의 신학이다. 둘째, 성령신학은 "공동체적 사고의 신학"으로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빛과 소금이도록 인도하는 신학이다. "개인적 실존은 도독놈 실존이다". "네가 구원 받아야 내가 구원 받을 수 있다". 셋째, 성령신학은 인간의 생명은 물론 "생태계 보호"를 위한 "생명의 신학"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병들면 나의 몸 어딘가에 병이 들고 있다." -성령 신학은 삶의 신학이다- 최종호 교수(부산신학교)
성령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성령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 아버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며(요 1:18), 아들 하나님은 보이도록 나타난 분이십니다.(요 1:14-18)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속에서 역사하는 분이십니다.(요 16:8:, 고전 6:19-20) 성령은 성부, 성자와 함께 삼위의 하나님이신데, 성령은 거룩한 영(Holy Spirit) 으로서 모든 성도들에게 역사하는 "내적인 생명"입니다. 즉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1. 하나님(신성)의 모습) 1) 영원하십니다(히 9:14) 2) 전지, 전능,편재하십니다.(고전 2:10-11, 롬 8:11, 고전 2:11, 시 139:78) 3) 거듭나게 하십니다. (눅 11:13) 4) 창조에 참여하셨읍니다.(욥 33:4, 시 104:30) 5) 구원하십니다. (고전 6:11) 6) 생명을 주십니다. (요 6:63) 7)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 3:5-6) 8) 부활케 하십니다.(롬 8:11) 9) 축도에 나옵니다. (고후 13:13) 2. 인격(인성)의 모습 1) 지성을 가지고 있읍니다.(롬 8:27) 2) 의지력을 가지고 있읍니다.(고전 12:11) 3) 사랑을 가지고 있읍니다. (롬 15:30) 4) 말씀하십니다.(계 2:7)( 5) 인도하십니다.(롬 8:14)( 6) 기도하십니다.(롬 8:26)( 7) 가르치십니다.(요 16:13)( 8) 도우십니다.(롬 8:26))( 9) 책망하십니다.(요 16:8)
성령에 대한 성구/ 2015-05-23
성령에 대한 성구 1. 성령의 의미 겔11:19 - 속에 새 신을 줌 겔37:10 - 생기가 살리는 것 시33:6 - 하나님의 입기운 요3:8 - 바름의 의미 롬8:9 - 하나님의 영 롬8:15 - 양자의 영 2. 성령의 상징적 표현 (1) 불 출13:22 - 인도와 어두움을 밝히는 광명의 불 말3:2-3 - 깨끗하게 하는 불 말4:2 - 치료하는 불 행2:3 - 은사자의 불 (2) 바람 행2:2 - 강한 바람 겔37:10 - 생기에 바람 (3) 물 겔36:25 - 더러운 것을 씻는 물 요4:14 - 목마르지 않는 물 요7:38 - 엡5:26 - 깨끗하게 하는 말씀의 물 (4) 기름 행10:38 -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5) 비둘기 마3:16 -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3. 성령이 하시는 일(직무) (1) 택한 자로 새로나게 하심 - 시51:10, 고전6:11, 엡5:26, 딛3:5 (2) 인치심 - 고후1:22, 엡1:13, 엡4:30 (3)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하심 - 요15:26, 고전2;4, 고전2:10, 고전2:13, 고전12:3, (4) 성도와 함께하시는 일 - 요14:16, 마28:20, (5)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 - 요16:13 (6)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함 - 롬8:16 (7)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심 - 롬8:26 (8)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심 - 갈5:22-26 4. 성령을 받으려면 (1) 하나님 편에서 사44:3 - 하나님의 신을 주심 겔2:2 -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함으로 갈4:6 -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므로 (2) 교회 편에서 삼상16:13 - 기름 부음을 받을 때 행4:31 - 한 곳에 모여 기도하므로 행10:44 - 말씀을 들을 때 (3) 자신에게 미2:7 - 행위가 정직한 자에게 눅2:25 - 의롭고 경건한 자에게 행2:38 -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야 함 행11:24 - 착실히 믿는 자에게 행13:2 - 금식하므로 5. 성령 받은 증거 시51:12 - 구원을 얻은 즐거움이 있음 고전2:10 -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알게 됨 고전12:3 -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됨 겔36:27 - 여호와의 율례를 행함 겔11:19 - 돌 같은 마음이 제하여 짐 요일4:13 - 주 안에 있음을 알게 됨 6. 성령 받은 자의 생활 갈5:2223 - 열매 맺는 생활 행1:8- 예수 증거, 행4:32 - 물건 서로 통용, 롬8:13 - 육체의 소욕 죽임 롬14:17 - 평강과 희열 고후6:6 - 성령. 감화 갈6:8 - 영생, 엡5:1819- 찬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