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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의 감사 /눅17:11-19/ 이영무목사 2015-09-23 18:38:30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병환자로 산다는 것은 고통과 외로움이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시대에 나병은 천형으로 알려졌습니다. 치유가 불가능한 병,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고 외딴 곳에 거주해 격리되어 생활할 수 밖에 없는 외롭고 고통의 사람들이 그 당시의 나병환자들이였습니다. 열병의 나병환자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
10%의 감사 /눅17:11-19/ 이영무목사 2015-09-23 18:38:30 read : 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병환자로 산다는 것은 고통과 외로움이였습니다. 특히 예수님시대에 나병은 천형으로 알려졌습니다. 치유가 불가능한 병,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고 외딴 곳에 거주해 격리되어 생활할 수 밖에 없는 외롭고 고통의 사람들이 그 당시의 나병환자들이였습니다. 열병의 나병환자가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나사렛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어떤병이든 고칠수 있고 죽은자까지 일으킬 수 있다는 능력의 소문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고대하며 소망했는데 어느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께서 갈라디아와 사마리아 중간지방을 거쳐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나병환자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보고 달려가서 소리지릅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소리질러서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제 너희몸을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 제사장은 그 당시에 종교적인 일도 행하지만 의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판단해서 당신은 나병이 다 나았소하면 그는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병은 문둥병자,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서 제사장에게 달려가는 도중에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나은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간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해서 갔습니다. 이것도 위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당장 문둥병이 나은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제사장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뭔가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해 가다가 보니까 병이 나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중 9명은 병이 나은 사실에 감격하고 너무너무 좋아서 기뻐하지만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 한사람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사마리아인만은 내게 이 선물을 주신 그 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병 고침받은 것도 기쁘지만 내게 나병을 고치게 하신 근원되신 그분에게 내가 가서 감사해야 되겠다 그래서 한 사람은 가던길을 뒤돌아서 다시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했다. 예수님은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열사람이 나음을 입었는데 이방인 한사람외에는 감사할 줄 모르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느냐 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하시면서 그에게 온전한 구원을 선물해 주신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감사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아는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몇가지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는 감사하는자가 적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무엇입니까? 10%의 감사. 다시말하면 10명 전체가 감사했더라면 100%의 감사가 되었을텐데 10명중에 한사람만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10%의 감사입니다. 무엇입니까? 감사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흉내는 낼지언정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그리많지 않다하는 것입니다. 자수성가한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중견기업을 이끌어가는데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자신이 어렸을 땐 너무 가난했습니다. 학교갈 처지가 안됐습니다. 그런데 정말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그 선생님이 때로 책가방도 사주고 교과서도 사주고 수업료도 내주고 자기를 격려해서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 은혜를 깨달으니까 그냥 있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어렸을 때 자기를 그렇게 격려해주셨던 선생님께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선생님의 돌보심이 아니였다면 선생님의 은혜가 아니였다면 제가 여기까지 올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면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얼마후에 이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답장이 뭐냐면 여보게 자네의 감사편지를 받고 나는 너무너무 기뻤다네. 내 교직 40년만에 이런 기쁨을 맛보기는 처음이야. 왜냐하면 내가 많은 가정이 어려운 학생들한테 수업료도 내주고 책가방도 사주고 교재도 사줬지만 나에게 감사편지를 보낸사람은 자네게 유일한 사람일세. 나는 내 교직 40년의 보람과 긍지를 자네 때문에 갖게 되었어.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제자에게 보냈더라는 것입니다. 감사란 그렇게 쉬운게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1860년 미국 미시건 호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람선 한척이 호수를 지나가다가 암초를 만나서 침몰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헤엄을 못치고 휩쓸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스펜서라는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뛰어들어서 정신없이 구조했는데 17명이나 구조했습니다. 죽을 사람들을 살려낸 것입니다. 그래서 스펜서의 이름이 대서특필되고 많은 사람에게 영웅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스펜서가 연로한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한 기자가 와서 묻습니다. 스펜서선생님 당신이 오래전에 17명의 생명을 구조한 일이 있죠. 그렇죠. 그런데 그 중 몇 명이나 당신에게 감사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스펜서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네 그중 단한사람 어린 소녀만이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는 내게 감사편지를 보내고 매년 성탄절만 되면 내게 감사카드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17명중에 단 한명이. 생명을 구조한 은혜에 대해서도 단 한명만이 감사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현 주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만 하나님이 어느날 천수 둘에게 바구니하나씩 들려서 세상에 내려보냈습니다. 너희가 가서 한바구니에는 기도의 내용을 담아가지고 오고 또 한바구니에는 감사의 내용을 담아가지고 오너라. 이 두천사가 각기 길을 떠났습니다. 한달후 그들이 돌아왔는데 기도의 바구니를 들고간 천사는 끙끙대면서 올라오는데 거기에 기도의 내용을 가득담아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 이것도 해주세요, 저것도 해주세요, 복도 주세요. 그런데 감사의 바구니를 들고온 천사는 덜렁덜렁 올라오는데 감사의 내용이 세장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다급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다급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응답받은후에 감사하는 자가 적다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얼마나 절박했을까요. 이 죽음의 자리에서 건짐받는 것, 고침받는 것, 기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막상 고침받고나니까 그들은 핑계가 많았습니다. 갈길이 바쁘다. 가족에게 가야되겠다. 제사장에게 먼저가야 되겠다. 그들은 감사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중 한명 사마리아인만이 모두에게 멸시받고 소외된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 시대에 감사하지 못하는 군상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종말의 시대에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릅니다. 그 영광을 내가 다 가로채 버립니다. 그리고 감사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보니까 종말의 사람들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만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자랑하기 좋아하고 교만하고 남 헐뜯기 좋아하고 비방하고, 부모에게 거역하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거룩하지도 못합니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하는 것입니다. 영신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이 본문에서 주시는 깨달음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감사할 수 있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같이 하지만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있고 집사님 권사님 몇십년 신앙생활해도 은혜가 뭔지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양은 그럴듯한데 진정한 감사의 소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15절에서 18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덮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어찌보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섭섭함이 있습니다. 이 이방인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자가 없느냐 너 외에 나머지 아홉명은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질문이십니다. 감사하는 자가 많지않다. 그러면 누가 감사할 수 있는가.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는 더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더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마음이 닫히고 굳어져서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던 사람들, 자칫하면 우리도 그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릴때부터 예수믿었는데 신앙의 연륜은 자랑하지만 그 마음에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이미 돌같이 굳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눈물이 없습니다. 돌같이 굳어진 마음 안타까운 것입니다. 어찌보면 유대인들의 마음이 그와같은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사마리아 이방인은 마음이 순수합니다. 그는 이 놀라운 감동앞에서 감동받을 수 밖에 없었고 이 은혜를 깨닫고 주님앞에 달려와서 엎드려 감사했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은혜를 깨닫는 자와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자와 배은망덕한 사람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에 속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은혜를 깨다는 것은 신앙의 철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말을 종종 합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이 철좀들은 것 같습니다. 같이 40년을 살아도 몰랐는데 요즘 남편이 달라졌습니다. 철이 든것 같습니다. 겁난다고 합니다. 철들면 빨리돌아가신다고. 우리도 신앙의 철이 들어야 합니다. 가정에 보면 3남매도 있고 5남매도 있고 7남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합니까. 공부잘하고 학벌이 좋은 자녀가 효도하나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번 자녀가 효도합니까? 꼭 그렇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러면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효도합니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떤집은 장남이 최고라고 장남한테만 쏟아붓습니다. 차남은 찬밥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장남은 효도 안합니다. 오히려 괄시받은 차남이 부모모시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꼭 그런거 아니었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합니까? 은혜를 깨달은 사람, 부모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 부모님은 역시 부모님이야 부모님이 없이는 내가 여기 있을 수 없지. 마음에 우러나는 효도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흉내는 다 냅니다. 그러나 누가 진심으로 부모를 생각하고 효도하는지는 부모님은 다 압니다. 말안해도 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다 압니다. 저 아무개 형식적으로 감사하는구나. 흉내만 하는구나. 체면처리하는구나. 그러나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어떤분들은 심방하면 그럽니다. 목사님 저는 너무나 감사할게 많은데 제가 생활이 어려워서 더 감사하지 못하는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런분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떤분들을 보면 너무너무 풍족한데 감사헌금하는 걸 보면 너무너무 미안합니다. 이것은 우리교회에서 제일 어려운분이 하는 감사정도입니다. 제일 부유한 사람인데. 이것이 마음이 담긴 감사일까요. 그건 아직 철이 안든 감사입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한 감사입니다. 성경은 은혜를 깨달은 자를 향해서 너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을 보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아버지께 감사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감사를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다윗이였습니다. 시편 116편 12절에 보면 다윗이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그는 은혜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고민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이게 고민입니다. 시편을 지어서 고백하고 찬양으로 고백하고 물질을 드려 고백하고 성전을 짓는데 자신의 전재산을 드려서 고백하고 그의 고민은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고 갚을 수 있을까. 다윗은 은혜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도 보십시오. 그는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였기 때문에 지하감옥에 갇혀도 매를 맞아도 억울한 오해를 받아도 하나님앞에 변함없이 찬양하고 변함없이 감사하고 기도합니다.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고 그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할수 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깊은 신앙에 감사의 비밀을 깨닫는 감사의 은혜를 깨닫는 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마지막으로 생각할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감사는 더 큰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더 큰 축복의 통로입니다. 19절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오늘 사마리아인에게 뭐라고 축복하십니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는 육신의 질병을 치료받은 것도 감사한데 영혼까지 구원받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목할게 하나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신기합니다. 그 사람이 와서 감사했으면 네 감사가 너를 구원했다라고 해야 할텐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보시기에 감사와 믿음은 같다는 것입니다. 믿음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건 잘못된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감사하는 성숙한 신앙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다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믿음이 축복의 조건이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 배후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뱃새다 광야에서 오천명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들을 돌려보내는데 모두가 굶주려 있습니다. 굶주린 무리들을 그냥 돌려보낼수가 없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것을 주어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빌립같은 사람은 회의적인 사람인데 와서 그럽니다. 선생님 여기에 이 많은 사람을 먹일 빵이 어디 있습니까. 또 떡이 있다고 한들 그 떡을 할 이백데나리온의 돈이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그는 매우 회의적인 발언을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떡이 어디있고, 돈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 안드레는 주님의 마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회중석을 비집고 다니다가 한 소년의 오병이어 도시락을 가져온것을 알았습니다. 오병이어라는 것은 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 아주 가난한 소년의 점심도시락입니다. 그걸 들고 예수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도시락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누가복음 9장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그랬습니다. 놀랍게도 오병이어를 가지고 감사기도를 했는데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광주리가 남는 그런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바로 감사의 능력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축사하셨다는 것은 원어로 감사했다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기적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나 바클레이 같은 인본주의적인 설교자들은 반대로 해석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기도해서 나타난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자기 도시락내놓으니까 어른들이 그것을 보고 자기 먹을거 다 숨겨놨다가 미안해서 자기것을 다 내어놓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것은 산처럼 쌓여서 오천명이 먹고도 열두광주리가 남았다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해석이며 인본주의적인 해석입니다. 비신앙적인 해석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손을 들어 감사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한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바로 감사의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1절에 보면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뭍혔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조금만 더 일찍 도착하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안죽어도 되었을 텐데 하면서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함께 무덤에 가자 무덤에 가서 무덤문을 열어라 했더니 무덤문을 왜 치우라고 합니까 지금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서 냄새까지 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돌문을 치우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감사기도를 합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순님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기도를 하시고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럴때 죽었던 나사로가 생명을 회복하고 걸어나온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들어 감사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시고 나사로를 향해 명령하실 때 나사로가 걸어나왔다 감사는 기적의 조건이요 축복의 통로인 줄 믿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스펄전목사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촛불앞에 감사하면 촛불을 놓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등을 주십니다. 전등을 놓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빛을 주십니다. 달빛을 놓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더 밝은 햇빛을 주십니다. 햇빛을 놓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햇빛보다 더 밝은 천국을 주십니다. 작은것에 감사하면 하나님은 점점 더 우리에게 큰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우리를 종말의 삶으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파멸의 삶으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에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는데 10명은 와서 매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땅은 성읍은 견고하고 키는 장대같이 크고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와 같고 잘못된 보고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평합니다. 여기까지 데리고 온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향해 돌을 들어 쳐서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징계하시는데 불평하던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음으로 고백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외에는 장년들은 다 죽었습니다. 한사람돌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었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종말은 죽음입니다. 파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너희에게 응답할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린 여기서 다 죽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땅에 들어간줄 믿습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낳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우리를 파멸의 길로 불행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감사하되 풍성함으로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8장6절에 보니까 이것은 곧 적게 심는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진정 내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앞에 예물을 드리는 그 예물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입술로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물질을 드려서 우리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넉넉해서 감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박국기자의 감사는 감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박국 3장 10절 이하에 보면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해도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밭에 먹을 것이 없어도 우리에 양이 없어도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는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주앞에 감사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표현하고 주를 찬양하고 주와동행하는 행복하고 능력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0% 성공의 투자 /마25:14-30/ 이한배 목사 2018-01-26 10:33:04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서 론 오늘은 제가 일년에 한번 헌금에 관하여 설교하는 날입니다. ① 처음 오신 분들은 시험에 들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 말씀 때문에 여러분들도 평생 물질의 복을 받으며 사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 우리 성도님들은 과연 내가 바르게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고 바르게 고치는
100% 성공의 투자 /마25:14-30/ 이한배 목사 2018-01-26 10:33:04 read : 1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서 론 오늘은 제가 일년에 한번 헌금에 관하여 설교하는 날입니다. ① 처음 오신 분들은 시험에 들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 말씀 때문에 여러분들도 평생 물질의 복을 받으며 사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 우리 성도님들은 과연 내가 바르게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고 바르게 고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게 되었읍니다. 그는 “자기의 소유”를 모두 종들에게 맡기고 갔읍니다. 주인은 종들의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서 떠났읍니다. 그러나 언제 돌아온다는 말은 하지 않고 떠났읍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읍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와 같이 하였읍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읍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는 종들과 회계를 했읍니다. 그러자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는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보고를 했읍니다. 그러자 주인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을 했읍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똑같은 보고를 하고 칭찬을 받았읍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와서는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했읍니다. 여기에서 “굳은”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은 hard man이라고 번역을 했읍니다. hard가 사람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될 때에는 이것은 “격렬한, 엄한, 매몰한, 냉혹한, 무정한”이란 뜻입니다. 또한 방언으로는 구두쇠라는 뜻이 있입니다. 여기에서는 구두쇠라는 말로 보는 것이 좋읍니다. 그러면 그 다음 말이 쉽게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도 모운다”고 했읍니다. 즉 이 주인은 씨도 안뿌린 데서도 거두려고 하고, 헤치지 않는데서도 모우려고 한다고 했읍니다. “헤치지 않는다”는 말은 키질도 하지 않은데서 거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농사 짓는 일의 시작인 뿌리는 일과 마지막 일인 키지하는 일도 하지 않고 얻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주인은 매우 나쁜 자가 됩니다. 즉 불한당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으냐 !(나를 불한당으로 알았느냐 !)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고 하면서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아서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라고 하면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읍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하여 하시려고 한 말씀은 무엇일까요 ? ①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투자하는 자는 착하고 충성되고 유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자들이 칭찬을 받는 자들입니다. ②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투자하지 않는 자는 악하고 게으르며 무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투자의 문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귀한 달라트가 있읍니다. 그것은 투자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투자의 능력을 주셨읍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하나님과 같이 투자하여 이익을 남길 수가 있읍니다. 다른 피조물은 투자할줄 모릅니다. 그냥 주는대로만 먹고 삽니다. 이세상에 씨를 뿌리고 거두는 다른 피조물을 봤읍니까 ? 모아 두는 일은 할 수 있으나, 뿌리는 투자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투자의 능력을 주셔서 투자하여 하나님과 같이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읍니다. 이렇게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투자하는 삶을 사느냐 투자하지 않는 삶을 사느냐가 인생에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투자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삶은 놀랍게 달라집니다. 디모데 덱스터(Timothy Dexter)라는 자가 1747년에 메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다. 20세에 그는 대략 9$ 정도 되는 자기가 저축한 돈 전부를 가지고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뉴베리포트(Newburyport)로 이사를 갔다. 그는 거기에서 돈 많은 31살의 과부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자기가 훌륭한 사업가라고 생각을 한 덱스터는 자기 아내의 돈을 갖고, 그 당시에 다른 사업가들이 하던 것과 같이, 주식을 샀다. 그러나 그는 어떤 주식을 사야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한 가장 싼 주식을 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주식의 가치는 올라가게 되었고 그는 그것을 팔아서 많은 이익을 봤다. 덱스터는 자기의 운을 자기의 능력으로 자랑을 했고, 마을에 있는 다른 사업가들을 그를 귀찮은 존재로 보기 시작을 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에게 바보스럽기 그지없는 사업 정보들을 주면서 그를 놀리는 것을 즐기기 시작을 했다. 한 사업가는 당시에 식미지화의 붐이 일고 있는 웨스트 인디스(West Indies)는 난상기(Warming pan)와 벙어리 장갑과 성경이 매우 부족하다고 덱스터에게 말했다. 그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은 덱스터는 나가서 4만 개의 난상기와 4만 개의 벙어리 장갑과 4만 개의 성경을 사서는 배에 실어서 보냈다. 덱스터는 웨스트 인디스는 극단적으로 더운 지역이라 그 지역을 아는 자들에게는 그가 투자한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지를 못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의 배가 웨스트 인디스에 도착을 했을 때 거기에는 교회가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을 100%의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였다. 그때에 러시의 상선들이 웨스트 인디스에 들어 왔고 그들은 대리인들을 시켜서 벙어리 장갑을 모두 샀다. 그런데 난상기는 너무 더운 지역이라 창고에 썩고 있었다. 그런데 한 창의력이 뛰어난 이민자가 그것은 당밀을 큰 통에 퍼담는데 요긴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난상기도 많은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이 믿기지 않는 장사로 덱스터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다른 장사군들은 덱스터를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기 시작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를 망하게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재산을 갖고 유연탄을 사서 배에 싣고 영국의 뉴캐슬로 가게 했다. 그들은 덱스터에게 확신을 심어주었고 그래서 덱스터는 많은 배를 빌려서 거기에 버지니아산 무연탄을 가득 실었다. 그리고 영국의 뉴캐슬로 보냈다. 덱스터는 영국의 뉴캐슬이 석탄 광산의 중심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기들의 석탄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석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덱스터는 망하는 대신에 놀라운 행운을 잡았다. 그의 배들이 도착하기 전에 뉴캐슬에서는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광부들은 하나도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탄광 중심지에서 탄이 모자라는 아이러니가 생겼다. 그래서 덱스터의 배가 도착 했을 때 그의 탄은 많은 이익을 남기고 다 팔려나갔다. 그는 전보다 배의 부자가 되었다. 그가 18세기의 미국의 운 좋은 사업가로 알려진 디모데 덱스터다. 이 덱스터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 일반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① 투자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② 운이 좋았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을 이렇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특별한 능력, 아니면 운을 우리는 중요시 여깁니다. 그러나 덱스터의 삶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가 투자를 했기 때문에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투자를 했기 때문에 돈을 번 것이지, 아무리 재주가 있고 운이 좋아도 투자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돈을 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투자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투자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거둘 수가 있겠읍니까 ? 그래서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다 투자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에 투자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투자가 아닙니다. 보험도 투자 입니다. 자식 교육도 투자 입니다. 결혼도 일종의 투자 입니다. 신앙생활도 일종의 투자 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만 투자의 달란트를 주셔서 사람들은 투자를 하며 삽니다. 그런데 투자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 입니다. 아무도 어떤 투자가 좋은 투자가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투자에는 위험성이 있읍니다. 투자에는 이렇게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있읍니다. 이렇게 불확실성이 있고 위험성이 있다고 투자를 안하면 안됩니다. 그는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 됩니다. 삶에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있어도 인간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스릴 입니다. 삶에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인생에는 살맛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없으면 그런 삶에 무슨 살맛이 나겠읍니까 ? 그러면 이렇게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있는 투자 중에 100% 성공하는 투자는 없을까요 ? 그러면 어떤 투자가 100% 성공하는 투자일까요 ? 그것은 하나님께 하는 투자입니다. 하나님께 하는 투자는 다 100% 성공의 투자 입니다. 사람에게, 세상에 투자하는 것은 불확실하고 위험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은 100% 성공하는 투자 입니다. II. 본 론 그러면 100% 성공하는 투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오늘 100% 성공하는 투자인 하나님께 하는 투자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첫열매의 투자입니다.(잠3:9-10)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100% 성공하는 투자는 첫열매의 투자입니다. 솔로몬은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했읍니다. 첫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득히 차고 넘치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첫열매의 투자가 100% 성공의 투자 입니다. 첫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 그것은 하나님을 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첫열매는 가장 귀한 분에게 드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첫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첫열매를 드려서 하나님을 가장 귀중히 여기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그에게 하나님도 가장 귀한 복, 최고의 복, 최초의 복을 주십니다. 복을 가장 많이 주십니다. 가득히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러면 오늘날 첫열매는 뭘까요 ? 우리의 첫번째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시간의 첫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요. 머리의 첫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리고 세상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처음 번 것은 하나님께 드리세요. 장사해서 처음 번 것은 하나님께 드리세요. 첫번째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첫열매입니다. 하나님께 첫열매를 투자를 해서 여러분의 삶에 가득히 차고 넘치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십일조의 투자입니다.(말3:10) 하나님은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는 것은 그만큼 분명한 것이란 뜻입니다. 100%로 확실한 것이란 뜻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반드시 하늘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야말로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100% 성공하는 투자입니다. 십일조의 원리를 알기 위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창고를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라고 했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주신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로 하나님의 집을 섬길 때에는 하나님의 복이 계속 됩니다. 약 100년 전에 헨리 크로웰(Henry P. Crowell)이 폐결핵에 걸렀다. 그는 목사가 되려는 그의 야망을 결코 이룰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였기 때문에 그는 크게 실망을 했다. 그런데 하루는 무디 선생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에 대하여 청지기가 되는 것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크로웰은 그가 만약 목사가 될 수 없다면 그는 좋은 사업가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에게 돈을 벌게 해주시면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다고 기도했다. 의사는 크로웰에게 밖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를 했다. 그는 그 충고를 따랐다. 그리고 7년째 되는 해에는 건강을 다시 되찾았다. 그러자 그는 오하이오주의 라베나(Ravenna)에 있는 멈춰선 퀘이커 방앗간(Quaker Mill)을 샀다. 그의 사업은 번창을 했다. 그는 하나님께 한 약속에 충실했다. 10년 안에 그의 사업은 잘 알려진 회사 이름이 되었다. 크로웰은 40년 동안 그의 수입의 60~70%를 하나님 나를 위하여 드렸다. 그 회사가 바로 미국의 유명한 오토밀 회사인 Quaker Oats Mills이다. 크로웰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의 회사가 평생에 40년 동안 번성케 하셨고, 지금도 번성하게 하셨읍니다. 이렇게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의 집에 물질이 넘치게 하면 하나님은 계속하여 우리에게 더 많은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리의 집만 섬기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물질의 복을 걷어가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리 집만 섬기는 것이 바로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1달란트 받은 자와 같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입니다. 주인은 그에게 주었던 달란트를 빼앗았읍니다. 하나님도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셨던 물질의 복을 거두어 가십니다. 우리나라의 사업장들이 단명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읍니다.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집을 채우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라디오 방송 설교로 유명한 토니 에반스(Tony Evans)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이런 예를 들었다. 만약에 당신이 2백만 달러의 유산을 받았다고 하자. 당신은 그 돈을 증권회사에 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증권회사에 가보니 사무실이 검소하고 그러나 성실해 보이는 회사가 있었다. 직원들은 옷도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믿음직스러워서 그 회사에 돈을 맡겼다. 일년이 지났다. 그러자 증권회사에서 편지가 왔는데 아직 아무런 이익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증권회사에 가보았다. 그러자 회사는 이사를 갔다. 새로 이사를 간 곳에 가보니 초호화 사무실을 꾸몄다. 자기의 돈을 맡은 직원이 나오는데 모두 명품에다 온 몸도 최고의 유행의 집에서 꾸몄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까 ? 여러분은 “이 사람들이 내 돈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배만 채웠구나 ! 이 사람들에게 더이상 내 돈을 맡길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리고 즉시 여러분의 돈을 찾아갈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갖고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지 않고 자기의 배만 채우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신하고 즉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재물을 거두워 가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2012년 오늘부터 온전한 십일조를 평생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투자입니다.(잠8:17) 투자 중에는 사랑의 투자도 있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나 가장 귀한 투자 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투자가 100% 성공의 투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주실까요 ?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고간에 채우게 하려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고간을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100% 성공의 투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 ①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질이 없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고 하시지 말고, 여러분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하나님이 고간을 채워주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10년 후 당신의 모습은? /마7:7-12/ 오주철 목사 2016-04-06 13:43:14 read : 4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먼저 여러분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10년 이후의 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10년 후에 여러분들은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 10년 후에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 같습니까? 10년 후에 누구와 있을 것 같고, 10년 후에 여러분의
10년 후 당신의 모습은? /마7:7-12/ 오주철 목사 2016-04-06 13:43:14 read : 4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먼저 여러분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10년 이후의 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10년 후에 여러분들은 어디에 있을 것 같습니까? 10년 후에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 같습니까? 10년 후에 누구와 있을 것 같고, 10년 후에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10년 후에 여러분의 자녀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 것 같습니까? 10년 후에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들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가 생명같이 아끼며 존경하며 따르는 우리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고, 우리가 함께 모인 하나님의 성전인 언양 영신 교회는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기도가 미래를 결정합니다. 오늘의 내 기도가 10년 후의 내 모습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흐트러졌던 꿈을 다시 꾸십시오. 다시 그 속에 사랑이 철철 넘치게 하십시오. 다시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붙드십시오.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감사한 일입니다. 나는 새벽기도를 못하지만 어느 새벽엔가 주의 종의 입에서, 어느 집사님의 입에서, 어느 교우의 입에서 내 아이들과 내 자신을 위해서 내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큰 위안과 지원이 되겠습니까? 기도 이상 더 큰 지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리는 기도이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의 강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의 장례식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주철 목사의 장례가 났다. 아무개 집사, 아무개 성도의 장례가 났다. 그 장례식 앞에서 누가 제일 슬퍼하겠습니까? 누가 제일 안타까워하겠습니까? 누가 제일 허둥지둥 달려오겠습니까? 여러분의 장례에 어느 목사님이 집례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남겨 놓을 수 있는 유산의 목록은 어떤 것입니까? 또 그 유산이 과연 어떻게 정리가 되고 어떻게 쓰여지기를 원하십니까? 제주도에는 돌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제주도에 가면 무덤이 있는데 이들 무덤이 육지의 무덤과는 형태가 다릅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제주 시내로 진입하다 보면, 곳곳에 무덤들이 있습니다. 무덤 주위에는 돌들이 무덤 주위를 둘러서 경계선 내지는 담장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무덤에는 주위에 돌들이 3줄, 4줄, 혹은 그 이상으로 많이 쌓여져 있는가 하면, 어떤 무덤에는 돌들이 1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적게 쌓여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살았을 때 평소에 이웃과 사람들에게 얼마나 덕을 많이 베풀면서 살았느냐에 따라서 돌들이 많고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인이 죽었을 때 장례식에 왔던 사람들이 그 사람을 아주 좋게 평가를 하면 그들이 그 고인을 생각하면서 돌을 무덤 주위에 하나씩 놓고 간다는 것입니다. 무덤 주위에 돌들이 많고 적음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낸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이 대목에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고자 합니다. 만약에 지금 내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그렇다면 장례식에 몰려온 사람들이 여러분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를 할 것 같습니까? 뭐라고 말 할 것 같습니까? 제주도식으로 말하자면, 여러분의 무덤에는 어느 정도의 돌들이 놓여져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한 토막을 섬겼던 이 교회, 나와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나와 함께 하나님 앞에 수긍하는 그런 고백과 기도를 했던 그 분들이 교회에서 나를 향해 뭐라고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까? 교회는 내 장례식을 어떻게 지내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한 번씩 어떤 충격요법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옷을 입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 몸 안에 있는 것을 더 좋은 것이라고 하는 그런 감격 속에서 늘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것은 보람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 밖에 있는 물건들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몸 밖에 있는 물건들은 내 몸 안에 있는 것들과 비교될 때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서로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내 몸 안에는 더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내 겉사람은 날로 낡아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날마다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축복하십시오. 서로를 축복하십시오. "하나님이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짧은 목회의 경험 속에서 정말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마십시오. 우리는 너무 사소한 말, 사소한 일에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는지 후회가 됩니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 한 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를 했으면 어떻고, 이야기를 안 했으면 또 어떻습니까? 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감사하며 사십시오. 고마워하며 사십시오. 찬양하며 사십시오. 기도하며 사십시오. 웃으며 사십시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너무 심각하면 안됩니다. 여기 이곳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의 자녀된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거룩이라는 이름 하에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그렇게 외식하는 자들의 삶을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놀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예배란 아버지와 즐겁게 노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집에 오신 여러분, 웃으십시오. 어느 젊은 장학사가 어떻게 하면 지역 내의 학교를 한 번 새롭게 하고 아이들에게 꿈과 믿음을 줄 수 있을까 해서 그냥 정신없이 좇아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장학사로 부임하자마자 지난 주간에 영화초등학교로 달려갔습니다. 간다는 말도 안 하고 가니까 학교에서는 장학사가 온 지도 모릅니다. 어느 4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보니까 손지호가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더랍니다. 그 옆에는 선생님도 있고, 교실 안에 화초도 있고, 또 거기에는 지구본이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 장학사가 손지호를 붙들고 물었다고 합니다. "얘야, 이 지구본이 보이니?" "예" "이 지구본이 왜 이렇게 옆으로 기울어져 있는 지 아니?" 그랬더니 손지호가 얼굴이 굳어지더니 정색을 하면서 "아저씨, 그거 제가 고장낸 거 아니에요. 제가 안 했어요"라면서 울먹거리더랍니다. 그래서 당황한 장학사는 옆에 있는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지호 담임 선생님이 지구본을 보더니, "아저씨, 그것은 제가 확실히 아는데, 이 학교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학교에 장학사가 온 것이 알려져서 교장 선생님이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달려오더니 하는 이야기가 "아니, 장학사님. 말씀을 하고 오셔야지. 그리고 오면 제 방부터 오셔야지. 거기에 다 준비해 놓았는데 여길 오면 어떻게 합니까? 죄송합니다." 어이가 없어진 장학사님은 교장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 지구본 이야기가 웬일입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장학사님도 잘 아시면서 뭘 그럽니까? 그게 국산품이라서 그렇습니다." 웃어보자고 한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Made in korea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교회에 대한 콤플렉스, 자기 삶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문제입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또 인간이 젊은 나이에 실수들을 다 딛고 일어서서 성숙해지면 성숙해질수록 깨닫게 되는 하나의 사실은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보는 내 방식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것 하나만 제대로 붙들어도 예수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 창조적이고 건강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문제는 내가 붙잡아야할 하나님의 약속이요, 사명이 됩니다. 반면에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내가 회피해야 할 무거운 짐이 되고, 고통이 되고, 아픔이 되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똑 같은 문제이지만 그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부흥 2000을 작곡한 고형원 전도사님이 있습니다. 하루는 이 전도사님이 아들과 함께 놀이터에 놀러 갔습니다. 그 놀이터에서 전도사님이 아들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릅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이 전도사님은 아들에게 동요를 불러준다는 것이 그만 찬송가를 부르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을 아들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고형원 전도사님은 입만 열었다고 하면 찬송가를 부른다고 합니다. 습관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습관이 미래를 결정하듯 지금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하십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믿으십니까? 그래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립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힘드십니까? 곤고하십니까? 여러 상황이 나로 하여금 스트레스가 팍팍 쌓이게 하고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낙심하지 말고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문을 두드리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셔야 됩니다.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은 행복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입니다. 같은 환경에 살면서도 불평과 원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같은 환경에 살면서도 마음의 상태가 바뀌니까 갑자기 행복해져서 '여보, 고마워!' '얘들아, 고마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에 얽매여 현재의 삶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과거의 아픈 상처를 한없이 되씹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기억일 뿐입니다.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삶의 어리석은 낭비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의 제일 첫 번째 특징은 과거로부터 해방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래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바라보면서 중단 없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탄이 공격하는 것을 자세히 보면 사탄은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끝없이 이용하고 또 이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의 과거를 끝없이 물고 늘어지고 이용하는 모습을 보신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속에 영적인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기억일 뿐입니다. 과거가 뭐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기억에만 남아 있는 것을 왜 붙들고 있느냐 말입니다. 인간은 과거의 회상력에서 일어나는 힘보다는, 미래의 환상에서 일어나는 힘이 훨씬 더 강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미래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하나님도 과거를 고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를 향한 꿈을 꾸는 자를 쓰십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만을 줄기차게 믿고 따라갔던 사도 바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을 줄기차게 따라갔기에 거센 풍랑 가운데서 살아났습니다. 독사에게 물려도 줄기차게 하나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하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는 복음을 증거 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가 착고에 차여 죄수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죄수의 신세로 로마라고 하는 재판의 광장을 향하여 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캄캄한 밤에 폭풍우가 그냥 끝없이 14일 동안이나 진행됩니다. 그 배 안에는 276명이라고 하는 백부장을 비롯한 많은 군사들과 주민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조그마한 배에 14일 동안 거센 풍랑이 휘몰아치는 데에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른 것은 하나입니다. 믿는 사람은 속수무책인 가운데서도 기도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불평합니다. 내가 참 믿음인가 아닌가는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시기합니다. 투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어디에나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인 이곳 언양 영신교회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세상에서 문제가 없는 유일한 곳은 공동묘지입니다.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엎드려 기도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그 문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짜증을 냅니다. 결국에는 그 문제가 짐이 되고 부담이 되어서 떠나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가 보이십니까? 그러면 엎드려 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싸여 두려워하고 있는 그 풍랑 가운데서도 바울은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에 응답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기도하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했습니다. 이 배는 풍랑에 다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276명인 우리의 생명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구원해 주신다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 났는 줄을 아십니까? 놀라운 것은 죄수로 끌려가던 사람이 그 풍랑과 함께 지도자가 되고, 죄수로 끝없는 탄압과 견디기 힘든 고생을 시키던 로마 군인들은 오히려 죄수를 의지해야 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믿음의 역사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 속에서 지금도 일어나는 돌변적인 사건들을 얼마든지 증거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간증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만 일어나면, 하나님의 개입만 일어나면 인간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웃지 못할 그런 놀라운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보십시오. 끌려가던 자가 지도자가 되고, 잡혀가던 자가 지도자가 됩니다. 죄수를 감시하던 자가 그 죄수를 의지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말카라고 하는 섬에 겨우 도착했습니다. 도착하고 나니까 얼마나 춥습니까? 옷은 다 젖었습니다. 14일을 거의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마침 섬에 있던 토인들이 몰려왔습니다. 불을 피우고 먹을 것을 갖다 주면서 융숭한 대접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옷을 말리면서 추위를 견뎌냅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흩어져 있는 나뭇가지들을 모읍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에 있던 뱀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더니 사도 바울의 손을 덥석 물었습니다. 토인들은 소리를 치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 사람이 살인자다. 이 사람이 무서운 죄인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뱀이 물었으니 틀림없이 하나님이 징계를 했다. 바다에서는 어쩌다 살아났는지 모르지만 뱀에 물렸으니 이제 곧 죽으리라.'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손을 물었던 뱀을 툭툭 털어 가지고 집어서 불 속에 집어넣어 뱀이 터져 죽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모습은 태연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 광경을 본 토인들이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신이 이 섬에 왔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만히 보면 우리가 당한 불행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혈기와 감정과 자기 재주로 인생을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한 불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의 가는 길마다 살아 역사하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믿는 자를 통하여 살아 계심을 증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어떠한 사건이든지 어떤 불행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 입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어떤 풍랑 가운데 내 몰렸다고 할지라도 믿음 없는 자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믿음 없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무릇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에 취한 사람은 어떠한 사건이든지 어떤 불행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 입에서 하나님의 예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면 사람을 만날 때에도 제일 먼저 한 일이 예언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성격은 몹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천방지축이었습니다. 그의 외모에 무슨 희망이 있었고, 그 속에 무슨 기대할 만한 게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처음 본 순간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여기에서 게바는 바위 또는 반석을 아람어로는 게바라고 하고, 그리스어로는 베드로라고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3년 후의 베드로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3년 후에 너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반석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장차 너는 세상에 복음을 싣고 갈 수 있는 반석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격이나 외모에서 어떠한 기대와 희망을 찾아 볼 수 없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을 만나면서 3년 후에 '너는 게바가 되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이 사람은 장차 큰 일을 할 사람이라는 기대를 가지십시오. 내 아이들에게도 '너는 장차 하나님과 이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할 것이다'는 기대를 심어 주십시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예언입니다. 3년 후에 나는 이 성전에서 반석이 되리라는 예언을 하십시오. 3년 후에 나는 이 성전에서 하늘의 천사도 흠모할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자기 예언을 하십시오.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제발 너절너절하게 종교놀이를 하지 마십시오. 편협된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수용성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신앙과 신념은 다릅니다. 자기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직 속에 자기 방식, 자기 생각을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반석 같은 인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부정적인 자기 파괴의 습성들을 뱀을 떼어내듯이 이 시간 하나님의 전에서 다 털어 버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그래서 10년 후에 내 삶의 이야기를 내 놓았을 때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나보다 더 많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내 삶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 것은 내 힘만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최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나 한 조직에게 절대로 모든 것을 주지 않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에 도움을 요청하며 사는 것, 그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어설픈 관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나약한 관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부끄러운 관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신뢰할 수 없는 관계를 거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데 지나가는 학생이 좇아오더니 '돈 만원만 주세요' 라고 요청을 합니다. 주실 겁니까? 안 줍니다. 그런데 집 앞에 거의 가까이 왔는데 어느 아이가 좇아오더니 '돈 만원!' 하니까 묻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줍니다. 누굽니까? 내 아들입니다. 왜? 관계가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주세요, 주세요' 하면 줄 것 같습니까? 주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어디를 가던지, 지금 내가 어느 상황에 처해 있든지, 설령 아무리 불행의 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만을 끈질기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럴수록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꿈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미래가 재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환상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이 땅에는 두 가지 창조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신적 창조이고 또 하나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창조입니다. 정신적 창조는 언제나 물질적 창조에 우선 합니다. 가령, 우리가 집을 짓는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집을 짓는데 무조건 자재부터 사옵니까? 땅부터 들고파고 봅니까? 시멘트 블록부터 만들어 옵니까?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의 그림을 그립니다. 안방은 어디에다 놓을까. 아이들 방은 어디에다 놓을까. 부엌은 어디에다 놓을까. 창은 어디로 내며, 대문은 어디에다 낼까. 정신의 지도가 물질의 집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칙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오느냐? 습관적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감과 은혜를 받으며 정신적인 지도를 만드는 겁니다. 정신적 창조의 힘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지도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지도를 그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떠나지 마십시오. 10년 후, 10년 후에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 10년 전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10년 전에 저는 집사람과 어린 아이들이랑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이곳에 교회를 개척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래도 몇 날, 몇 일을 밤 새워도 지칠 줄 모르는 때였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머리도 이만큼은 안 빠졌습니다. 지금은 흰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을 뒤덮고 있지만 그때는 흰 머리카락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10년 후, 어쩌면 앞으로 10년 후에 우리 중에는 다시 볼 수 없는 인생 길을 떠나서 하나님의 품에 안긴 분도 계실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10년 후, 여러분의 자녀들 가운데는 대학에 진학한 아이도 있을 것이고, 또 진학을 놓고 고민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10년 전부터 하루 1시간씩만 계속해서 어떤 일을 했더라고 하면 지금 어떤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지금 내 생애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것 같습니까? 뭔가는 모르지만 지금보다는 확실히 달라졌을 겁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혹여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목사님, 제가 10년 전에 이 말씀을 들었더라면 좀 더 확실하게 살아왔을 텐데 말입니다. 10년 전에 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루 한 시간씩만 어떤 일을 했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에게는 앞으로 10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10년을 주셨습니다. 10년 안에 자신의 모습을 설계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10년 후 사람들이 나를 아름답게 다시 평가해 줄 것을 그려보십시오. 정신적 창조는 물질적 창조에 언제나 선행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꿈을 꿉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예언을 합니다. 입이 열려 예언을 합니다. 10년 후 자신의 모습들을 예언하십시오. 여러분 자녀들의 모습을 예언하십시오. 회사의 모습을 예언하십시오. 내 사업의 모습을 예언하십시오. 내가 섬기는 영신 제단의 모습도 예언하십시오. 환상을 보십시오. 꿈을 꾸십시오. 만일 지속적으로 10년 동안 한 가지 일을 실행한다고 하면 자신의 삶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그 한 가지 일에 이제부터 목표를 정하십시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적인 신앙생활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이 아닙니다. 감정적인 신앙을 하고 끝나고 맙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을 때는 신앙도 좋습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쌓이고 기분이 나쁠 때는 신앙도 내리막길입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 금실이 좋을 때는 교회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다가 사이가 나빠지면 싸늘하게 돌아서 버립니다. 그렇게 꿈이 없는 신앙의 모습으로 살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7가지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 7가지 역할과 관계된 중요한 인물과 그 이름과 그 관계를 머리 속에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어느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나약한가? 지금 어디와의 관계가 제일 든든하지 못한가?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유산을 남기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습니까? 아들 딸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까? 천국에 가서 우리 주님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싶습니까? 내가 섬기는 내 교회의 형제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다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지 않고 그 꿈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도하지 않고 그 꿈을 인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키지 않고 그 꿈을 지킵니다. 꿈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꿈이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꿈이 없으면 결국 폐기처분 되고 맙니다. 하나님, 이 영혼에 꿈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환상을 보십시오. 예언을 하십시오. 10년 후의 당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꿈을 꾸십시오.
10월 4주-겨울이 오기전에 /딤후4:9-22/ 임영수목사 2014-12-15 08:21:32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그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리면서 겨울이 오기전에 자기에게로 오라는 당부와 함께, 올 때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과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올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10월 4주-겨울이 오기전에 /딤후4:9-22/ 임영수목사 2014-12-15 08:21:32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그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리면서 겨울이 오기전에 자기에게로 오라는 당부와 함께, 올 때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과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올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는 이미 인생의 겨울인 노년기에 있었고, 자연의 계절로는 겨울을 얼마 앞둔 시기에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두꺼운 겉옷이 필요하였고 인생의 겨울과 다가오고 있는 순교의 시간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그에게 필요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그러한 부탁을 했을 것입니다. 본문에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가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겨울 전의 계절인 가을에서 겨울을 내다보며 다가오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준비에는 단지 계절적인 준비만이 아닌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위한 준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한편 현실에서 앞으로 다가오는 자신의 미래의 시간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삶입니다. 바울이 내다본 그의 미래는 죽음이 아닌 죽음의 장벽 뒤에 있는 영원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영원의 시간에 그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현재의 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가 아니고 영원으로 잇대어지는 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현재는 더욱 소중했습니다. 이러한 진실은 바울에게만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한 순간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반드시 경제적인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우리의 생의 계절을 놓치지 않고 보다 충만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자연계에 사 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생에도 사 계절이 있습니다. 자연계의 사 계절에 각각 그 특성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 인생의 계절에도 그 나름대로 독특한 특성이 있습니다. 자연의 봄의 특성이 새롭게 태어남과 성장이라면 인생의 봄 역시 태어남과 성장이 그 특성입니다. 자연계의 여름이 열매의 계절이면 인생의 여름 역시 열매와 결실을 위한 준비의 계절입니다. 여름 다음에 오는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며, 그 다음에 오는 겨울은 모든 것을 마감하는 휴면의 절기입니다. 인생의 가을,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는 생의 봄에 사는 분·생의 여름·가을·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계절적으로 좀 늦었지만 가을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생의 계절 가운데 가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인생의 가을은 새로운 적응의 계절입니다. 이 시기는 생의 봄, 여름과는 달리 더 이상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며 생의 겨울을 내다보는 시점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새로운 적응이 필요합니다. 이 시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신적 갈등을 극복해 가기 위해서는 철저히 현실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젊은 시절과 같이 이상과 꿈을 갖고 살아갈려고 하면 많은 갈등을 갖게 되고 그러한 갈등은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현실적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며,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생의 계절에서 생의 봄과 여름을 상실해온 사람의 경우 생의 가을을 현실적으로 받아드리기 어렵습니다. 생의 가을을 현실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어렵지 않으려면 그 전 계절을 상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생의 가을을 원만하게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일수록 생의 가을에 와서 나름대로 소유한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소유는 물질적인 것이라기 보다 정신적인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사랑을 원만하게 받아온 사람, 젊은 시절 자기 자신을 바르게 실현해 온 사람인 경우 생의 가을을 받아드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드리는 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자기가 성취하지 못한 이상이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과거나 미래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으로 인생의 가을은 또 한 번의 선택의 시기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선택이란 새로운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진행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정리해야 할 것은 정리를 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전연 새로운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절대적 원칙은 없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하되 어디까지나 자신의 남은 생을 보다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그러한 선택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일의 선택도 있을 수 있고, 젊은 시절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는 선택도 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 박사는 어느 날, 한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부인은 영국의 글래스고우의 유명한 여학교에서 교사일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교육계에서 명예있는 오랜 경력을 완수하고 은퇴하였습니다. 그 편지에 의하면, 그는 신약 성경을 그리스 말로 읽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배우지 못했다가 이제는 은퇴하였으므로 그럴 시간이 있다고 하면서, 학생으로서 바클레이 박사의 고전어 강의 시간에 참석하여도 좋겠는가라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바클레이 박사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부인을 맞이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며 명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 학기부터 바클레이 박사의 강의에 다른 젊은 학생들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바클레이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배우는 일에 벌써 늦었다고 할 필요는 없다." 다음으로 인생의 가을은 책임의 시기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자연계에 가을에서 우리는 모든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산이나 들에 있는 각종 식물들은 그것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자기의 열매와 색깔을 나타냅니다. 봄·여름에 잘 구분이 되지 않았던 것들도 가을이 되면 자기의 고유성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러한 현상을 인간의 생의 책임과 정체성을 비유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은,`사람은 중년기에 자기의 얼굴 모습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했습니다. 중년기에 그 사람의 얼굴 모습은 지금까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가을에 와서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거나, 책임전가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리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성숙입니다. 어느 성형외과 의사의 글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자기에게 성형수술이 잘못되어 고치러온 한 부인이 있었는데, 그의 얼굴 모습은 이 십대의 젊은이인데 그의 몸매와 손은 중년 부인의 것이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부인은 중년이라는 자신의 생의 현실을 받아드릴 수 없는 정신적인 깊은 사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계절은 생을 보다 단순하게 깊이 있게 살아가야 할 시기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갈릴리 바닷가를 거닐다가 어부 시몬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습이 매우 피곤하고 허탈한 것을 보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가을을 깊이 있게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깊은 신앙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생의 계절에서 보다 생의 가을에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가을에 찾아오게 되는 정신적 공허와 허무를 극복해 가기 위해서입니다. 자연계의 가을에 모든 생태계는 거의 다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맞이하는 생의 가을은 그것과는 반대입니다. 인생의 가을은 쓸쓸함·외로움·정신적 공허·허무라는 원치 않는 손님이 찾아오는 계절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들을 잘 극복해 가기 위해서는 영적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가을에 영적으로 잘 충전되지 않으면 생의 겨울을 맞이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말씀의 묵상과 영적 독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의 가을을 보다 풍성하게 살아가는 지혜는 생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데 두는 것입니다. 유럽에 아들러라는 유명한 정신의학자에게 어느 날 중년부인이 찾아와서 자신에게 찾아온 우울증의 고통을 털어놓았습니다. 아들러 부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그에게 일 주일 분의 약을 지어주면서 그가 지켜야 할 한 가지 삶의 원칙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약을 먹으면서 하루에 한 가지씩 반드시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된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돌아가서 의사의 지시대로 충실히 약도 복용하고 하루에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 한 가지씩 했습니다. 한 주 후에 부인은 아주 명랑한 얼굴을 아들러를 찾아와서 자신의 병이 다 나았다고 하면서 약의 효과를 감탄했습니다. 그때 아들러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부인,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은 약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그 약은 소화제에 불과하고, 부인이 나은 것은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관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의 계절을 후회 없이 완전하게 향유해 갈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현재 자기가 있는 생의 계절에서 다음 계절로 넘어설 때에는 후회·갈등·두려움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의 계절을 완전하게 후회없이 실현해 가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것과 죄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생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해 가지 못하게 하고, 허무한 것, 무의미한 것에 집착하게 하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에는 언제나 후회·허무·갈등이 따라 다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상실한 생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용서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씻어내고, 우리의 허무와 후회를 씻어냅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은 어느 한 생의 계절만이 유일하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의 모든 계절이 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의 계절은 다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생의 각 계절은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신의 생의 계절을 다 살지 못하고 질병으로, 불의 사고로 생의 과정이 단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한 생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마지막 부활의 때에 다 보상됩니다. 자연계의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며 수확의 계절입니다. 가을이 되면 아무리 생각이 무딘 사람도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생을 돌이켜 보며 반성하게 됩니다. 한편 인생의 가을에서 결실과 수확의 의미는 적응·선택·책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깊이 있게 살아가야 할 계절이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이 생을 잘 살아간다는 것은 생의 각 계절을 상실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생의 계절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따라야 합니다. 인간의 성숙은 어느 한 계절만을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성숙은 인생의 전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생의 전 과정에서 저는 생의 가을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나, 부정적인 면에서 가을을 우리를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가을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끝으로 김남조 씨의 `가을의 기도'를 읽어드리면서 저의 설교를 끝맺겠습니다. "신이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못내 당신 앞에 벌받던 여름은 가고 기도와 염원으로 내 마음 농익는 지금은 가을 노을에 젖어 고개 수그리고 긴 생각에 잠기옵느니 여기 이토록 아름차게 비워진 나날 가을엔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신이여 가을엔 기도드리게 하옵소서 바람 속에서 바람에 불리우다 불현 듯 더워오는 눈시울 주체할 길 바이 없으니 이제금 홀로인 그분과 나와 가을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신이시여 가을엔 사랑하게 하옵소서 경건히 보다 경건히 요적의 눈빛으로 마주 바라보는 계절은 가을 신이시여 당신과 나 사이에 그분과 나 사이에 한 아름의 들국화를 두게 하옵소서 보라빛 흰빛의 소담스런 국화가 피어도 있고 피면서도 있게 하옵소서 가을은 돌아가는 계절 푸른 하늘 아래 나도 몰래 내가 멈춰서는 계절 문득 멈춰서서 다시 보면 나는 혼자인 나 가을은 제각기 혼자인 계절 신이시여 얼굴을 이리 돌리옵소서."
11시의 사람 /마20:1-16/ 이한배 목사 2018-01-09 01:54:49 read : 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설교요약 제 목 : 11시의 사람 본 문 : I. 서 론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농부가 있었읍니다. 포도 수확하는 계절이 돌아왔읍니다. 농부는 이른 아침에 - 지금으로 하면 아침 6시에, 장터에 나가서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군을
11시의 사람 /마20:1-16/ 이한배 목사 2018-01-09 01:54:49 read : 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설교요약 제 목 : 11시의 사람 본 문 : I. 서 론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 농부가 있었읍니다. 포도 수확하는 계절이 돌아왔읍니다. 농부는 이른 아침에 - 지금으로 하면 아침 6시에, 장터에 나가서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군을 사서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읍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가 보니 주인의 애간장이 녹았읍니다. 왜냐하면 포도가 다 익으면 빨리 수확을 해야하고, 추수 때를 놓치면 큰 손해를 보는데, 일군이 너무 부족해서 수확을 제때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농부는 제3시 - 지금으로 하면 아침 9시에 다시 장터로 일군을 구하러 갔읍니다. 장터에 가보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읍니다. 그래서 농부는 일한만큼 삯을 주겠다고 하고는 데려다가 포도원에 들여 보내어 포도를 따게 했읍니다. 그런데도 포도 수확을 제때 다 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제6시 - 지금으로 하면 12시에 다시 그렇게 했읍니다. 그런데도 포도 수확을 제때 다 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제9시 - 지금으로 하면 오후 3시에 또 그렇게 했읍니다. 그런데도 오늘 따야할 포도를 다 딸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제11시 - 지금으로 하면 오후 5시에 또 그렇게 했읍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읍니다. 오후 5시에 일하러 온 자들이 약 1시간을 일하자 해가 넘어가고, 주인은 일군들에게 품삯을 나눠주었읍니다. 그런데 주인은 5시에 와서 약 1시간 일을 한 사람에게 1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였읍니다. 그러자 먼저 온 자들은 자기들은 더 받을 줄로 알았읍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오후 5시에 와서 일한 자나 오후 3시에 와서 일한 자나, 12시에 와서 일한 자나, 아침 9시에 와서 일한 자나, 아침 6시에 와서 일한 자나 다 똑같이 1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였읍니다. 그래서 먼저 온자가 주인에게 “나 중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을 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셨나이다”하고 원망을 했읍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중 한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내가 너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 ?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 -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나 ?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고 했읍니다. 일한 시간이 각각 다른데 품삯을 똑같이 준다는 것은 합리적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말도안되는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하여 하시려고 하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하여 하신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알려면 먼저 분명하게 해야할 것이 있읍니다. ① 이 말씀은 노동법에 관하여 말씀하거나, 품삯에 대하여 말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의 일을 말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천국의 일을 말씀하려고 한 것입니다. ② 몇시에 온 사람들에게 촛점을 마추느냐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몇시에 온 사람들에게 촛점을 마추느냐에 따라 그 뜻이 전혀 달라집니다. 그러면 언제 온 사람들에게 촛점을 마추어야 할까요 ? 아마도 제일 먼저 온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제일 나중에 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온 사람들은 주인에게 원망을 하다가 책망을 들었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려 한 사람들은 제일 먼저 온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려고 한 사람들은 제일 마지막에 온 11시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메세지를 알려면 이 비유가 천국에 관한 비유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11시에 온 사람들에게 촛점을 마추어야 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 메시지를 이야기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이 비유를 생각하는 것이 좋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11시에 택함을 받아 포도원에 일하러간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려고 한 말씀은 무엇일가요 ? II. 본 론 1. 찾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우리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요15:1)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다”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특징은 일군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농부는 일군을 찾기 위하여 이른 아침,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5시 이렇게 다섯번이나 장터에 나갔읍니다. 장터에 일군을 구하기 위하여 하루에 5번씩이나 나가는 사람은 없읍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5번이나 일군을 찾기 위하여 장터에 나갔읍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열심히 집을 나간 자들을 찾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읍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자들을 얼마나 열심히 찾고 계신가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은 눅15입니다. 눅15장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자들을 찾으시는 비유가 3가지 나옵니다. ① 100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는 목자가 1마리의 양을 잃어버리자 나머지 99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도록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눅15:3-7) ② 10드라크마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 한 드러크마를 잃어버리면 등불을 커고 집을 쓸며 “찾도록 찾는다”는 것입니다.(눅15:8-10) ③ 탕자의 비유인데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렇게 열심히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라”(벧후3:9)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심히 길 잃은 양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혀 불가능한 자들도 구원을 하십니다. 성경의 시간에서 11시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11시라는 말은 여기 외에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어디에도 다시는 나오지 않읍니다. 제 3시는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제6시와 제9시도 성경에 있어서 중요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는 기도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제3시, 제6시, 제9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루 3번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제11시는 성경에서 아무런 일도 없는 시간입니다. 장터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제11시에 일군을 찾는 자들을 본적이 없읍니다. 즉 이 시간에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시간에까지도 잃은 양을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지옥 가는 강도를 불러서 구원하셨읍니다. 길 잃은 양을 이렇게 간절하게 찾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도 열심히 하나님의 길 잃은 양들을 찾으셨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자를 찾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① 포도원 밖에 있는 자를 찾으십니다. 포도원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밖에 있는 자들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지 못하 자들을 오늘도 열심히 찾고계십니다. ② 가장 쓸모없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찾고 있는 11시의 사람은 가장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의 쓸모의 도는 그들이 부름을 받은 시간에 비례합니다. 제일 쓸모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대신에 가장 쓸모없는 사람은 제일 나중인 11시에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일을 시키고 싶어서 부른 것이 아니라, 찾다가 찾다가 사람이 없어서 부른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런 쓸모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쓸모없는 사람이 가장 쓸모있는 사람,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은 자와 똑같은 삯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군의 하루의 품삯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읍니다. 이것은 이 사람도 정상적인 사람과 똑같이 가치있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 모든 사람이 다 가장 쓸모있는 자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중 온 자에게 너와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세상 사람들은 다 쓸모없다고 포기하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만 하면, 가장 귀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귀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11시의 사람은 어떤 자이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그 귀한 가치를 주셨을까요 ? ① 이 사람은 하나님과 흥정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른 아침에 온 자는 주인과 품삯을 흥정을 했읍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주인과 품삯을 흥정하지 않았읍니다. 즉 하나님과 계산을 따지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계산이 없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는 계산이 없는 관계입니다. ② 감사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감사만이 있읍니다. 자기와 같이 11시의 사람, 즉 가장 쓸모없는 자를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감사하지 않겠읍니까 ? 그래서 이런 자들은 오직 감사뿐입니다. 그래서 꼴찌들이 목회를 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꼴찌를 한 자들은 자기들과 같은 자들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서 목숨을 바쳐가며 목회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자들이 목회에 크게 성공을 합니다. ③ 모든 것을 주인에게 맡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주인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없읍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주인에게 맡긴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가정, 사업, 생명, 자녀까지도 다 하나님께 맡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속아주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정확하게 심판하신다면 누가 하나님 앞에 서겠읍니까 ? (시130:3-4)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데 주여 누가 서리이까 ?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다 살피신다면 주님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눈감아 주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원 주인이 11시에 만난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섰느뇨 ?”하고 묻자, 그들은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읍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 사람들을 일군으로 쓰는 자들이 없어서 이들이 그때까지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이들이 사는 장터는 얼마 되지 않으며, 그날 포도원 주인은 사람이 부족해서 일군을 구하느라고 혈안이 되어있었고, 그날 장터에 이미 4번이나 나갔었읍니다. 이미 주인이 4번이나 일군이 없어서 정신없이 일군을 찾았는데, 그들이 일찍 일하러 나왔다면 어찌 이 주인의 눈에 띄지 않았겠읍니까 ? 이들은 분명이 12시가 넘도록 늦잠을 자고, 늦게 오후에 아침을 먹고, 그리고 사우나에 가서 사우나 하고, 그리고 밤이 되자 “어디 죄 질곳 없는가?” 하고 어슬렁 어슬렁 기어나온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있느냐 ?”하고 묻자 그들은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자가 없음이니다”라고 능청을 떨었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주인은 자기가 오늘 4 번이나 장터을 이 잡듯이 찾았을 때 이들은 분명히 장터에 없었던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내 일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말에 속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자를 쓸모있는 자로 만들기 위하여 알면서도 속아주셨읍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잃은 양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다 아시면서도 속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이 책망하실 때, “하나님 잘 못했읍니다. 다시는 안그러겠읍니다”라고만 하면, 다시 또 죄를 범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속아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이렇게 수없이 속여왔읍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하여 속아주셨읍니다. 하나님은 언젠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가 올 것을 믿으며 알면서도 또 속아주십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우리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게 되면 다시는 죄를 짓지않게 됩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에게 책을 산다고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돈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돈을 가지고 다방 가서 차 마시고, 극장 구경하고, 데이트 비용으로 다 씁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른 친구의 책을 빌려가지고 와서 엄마에게 책 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책이 아들이 산 책이 아니라는 것을 다 압니다. 왜냐하면 몇 일 지난 후에 아들 방을 치우다가 책상을 보면 그 책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머니가 우리의 속임수에 속은 줄 알고 돈이 필요하면 또 책 산다고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지난 번에 우리가 어머니를 속인 것을 들쳐내며 우리를 책망하시지 않고 똑 속아주십니다. 알면서도 똑 속아주십니다. 노는데 정신이 팔린 우리는 어머니가 우리의 속임수에 속은 줄 알고서 계속하여 어머니를 속여 먹읍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어머니가 내 책꽂이를 잘 정리한 것을 보다가 정신이 번쩍듭니다. 어머니가 내 책꽂이를 다 정리하고 계시는구나. 그러면 내가 그동안 어머니를 속인 것을 다 알고 계셨을 터인데, 그런데도 어머는 모른척하고 속아주셨구나 ! 어머니의 이 사랑을 깨닫는 순간 아들은 철이듭니다. 그러면 다음날 부터는 어머니가 용돈을 주셔도 그것을 쓰지 못하고 모았다가 책을 삽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머니들은 그날이 올 것을 믿으며, 알면서도 우리에게 속아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렀읍니다. 우리가 분명히 거짓말 하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속아주십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속아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하지 않고, 오직 선한 일에 힘 쓸 그날이 올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거짓말에 속아주십니다. 우리에게 속아주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는 이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시려고 했던 말씀을 우리가 분명히 알 수는 없읍니다. 그런데 이 비유 바로 앞에 나오는 (마19:30)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이 나오고, 오늘 본문의 비유의 마지막 말씀인 (v.16)에도 이와 똑같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이 비유를 통하여 이 말씀을 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그러면 이 비유를 통하여 하시려고하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이 희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기회를 주시고 있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은 어떤 것일까요 ? ① 세상은 저녁 5시에 경기에 뛰어드는 자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읍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늦은 자들에게는 희망을 주지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혀 기회가 없는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기 있을 수 없는 자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모든 자들이 다 희망이 있읍니다. ② 비록 세상이 저녁 5시에 경기에 참여하기 원하는 자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하더라도, 세상에서는 그런 자가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없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아무리 늦게 참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승리할 가능성이 많이 있읍니다. 그래서 (마19:30)을 보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형편이 어떠하던 간에, 끝까지 다 희망이 있읍니다. 그래서 주인은 11시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삯을 주었읍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끝까지 희망이 있읍니다. ③ 이 비유에 나오는 11시의 사람은, 당시 지도자들이였던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 암하아레쯔(Anhaarez)라고 불렀던 아웃사이더(outsider)들이였읍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평생 가도 기회가 오지 않았읍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잘해도 기회가 오지 않았읍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기회가 있을 수 없는, 가장 절망적인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시고, 그들에게도 가장 훌륭하고 가장 조건이 좋은 자들에게와 똑같은 상급을 주셨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모든 자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가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기도하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나원에 있으리라”(눅23:41-43)고 말씀하시면서, 인류의 최악의 사람에게 인류 최고의 사람이였던 예수님과 똑같은 보상을 주셨읍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어떤 상황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기회를 주시는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 은혜가 우리 모든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120의 의미 /행1:14-16/창6:1-3/ 이성희목사 2015-01-23 13:53:34 read : 127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우리교회가 창립 12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주일입니다. 오랜 성상을 우리교회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먼저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교회가 창립된 1894년은 한반도에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던 격동기였습니다. 그 해는 조선건국 503년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이전에는 ‘갑오경장’이라고 불리던 ‘동학
120의 의미 /행1:14-16/창6:1-3/ 이성희목사 2015-01-23 13:53:34 read : 127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우리교회가 창립 12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주일입니다. 오랜 성상을 우리교회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먼저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교회가 창립된 1894년은 한반도에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던 격동기였습니다. 그 해는 조선건국 503년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이전에는 ‘갑오경장’이라고 불리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해였고, 친일 개화파였던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된 해였고, 고종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청군을 조선에 끌어들인 해였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도 청나라와 전쟁을 계획하여 조선에 파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이 해는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설립된 해였고, 일본군이 야욕을 가지고 경복궁을 점령한 해였고, 청일전쟁이 공식 선포된 해였습니다. 또 이 해에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 초등교육기관인 교동소학교(교동초등학교)가 개교한 해입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이곳 연못골에 연동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장의 한 요인으로 적절한 시기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나라와 종교와 사회제도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나라의 종교였고 승려가 사회의 제1계급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유교가 나라의 종교가 되자 선비가 제1계급이 되어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사회제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될 때가 조선말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전래는 조상제사나 축첩제도 등으로 문화충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바뀌면 종교도 바뀌는 게 좋다는 종교 심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기독교의 전파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한국 땅에 기독교가 전래되었고, 우리교회도 이런 시대적 영향 속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 우리교회는 한국개신교의 산 증인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10년 후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국장로교의 초대장로를 배출하였습니다. 우리교회는 한국교회의 주일학교의 효시인 연동부용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사회적 공헌을 하였고 민족교회로 자라 사회적 교회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개화기에도 지금처럼 보혁갈등이 심각했습니다. 수구세력과 진보외세협력 세력이 심한 대치상태에 있었고 한반도는 세계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사회적 기관입니다. 사회라는 교회의 못자리를 떠나서는 교회가 있을 수 없고, 교회의 존재가치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버그(David Moberg)는 ‘사회적 기관으로서의 교회’(A Church as a Social Institution)라는 책에서 교회의 사회적 기능들을 열거합니다. 그 중에는 ‘사회적 안정장치(stabilizer)로서의 교회’, ‘사회 개혁의 대행자로서의 교회’, ‘복지 기관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박애 기관(philanthropic institution)으로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기관이라는 것은 교회가 이런 기능들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교회도 이런 사회적 기능을 줄 수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사회성이 아주 뛰어난 교회입니다. 초대에는 사회교육에 앞장 선 교회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일학교를 제일 먼저 만들어 교회교육을 통하여 사회를 개화시켰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교회가 독립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많은 독립지사들을 배출하였고, 특히 ‘애국부인회’는 거의 우리교회의 여성들이 중심역할을 하였습니다. 군사독재시절에는 사회정의와 평화통일 운동의 메카였습니다. 그 때는 통일 말만 꺼내도 빨갱이로 몰린 때인데 원로목사님을 중심으로 하여 독재에 대항하는 교회였습니다. 제가 부임하였을 때는 문민정부시대입니다. 이제는 우리교회의 사회성을 사회복지와 사회봉사 그리고 끊임없이 세계화와 미래를 연구하여 미래사회에 적응하여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한국교회에 제시하였습니다. 교회 창립 12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교회는 보이는 축하행사로 교회를 전면적으로 리노베이션하였습니다. ‘카이로스 120’이라는 창작 뮤지컬을 공연하였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행사를 계획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행사는 보이는 행사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릅니다. ‘연동교회 생활규범’을 제정 공포하여 우리의 새로운 삶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갱신에 앞장서는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12월에 있을 ‘게일 기념강좌’ 세미나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이런 모든 행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신명기 34:7에는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40년을 일하다가 12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교회가 창립 80주년을 맞았을 때인 1974년에는 원로목사님께서 시무하실 때이며 구예배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예배당은 화재로 소실하여 1978년에 현재의 예배당을 헌당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교회가 2014년 창립 120주년을 맞으면서 현재의 예배당을 새롭게 단장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우리교회는 과거의 오랜 역사를 잘 보존하는 교회이며 동시에 미래를 예측하여 미래에 대응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과거와 미래를 잘 아우른 교회라고 자부합니다. 미래를 보는 눈과 기력이 쇠하지 않는 우리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창립 120주년을 맞이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 기쁨을 사회와 이웃과 함께 나눌 은총이며 복으로 생각합니다. 오랜 역사 가운데서 늙지 않고 건강하며, 과거에 매달리는 교회가 아니라 앞을 향하여 미래가 있는 교회로 우뚝 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허락하신 120이란 수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교회 창립 120주년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빈틈이 없는 찬 숫자를 의미합니다. 창세기 6:3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멸망시키신 것은 영이어야 할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령으로 만드신 사람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육적 존재가 된 인간의 수명이 120세가 되었습니다. 만약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원히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에게 수명의 제한은 오히려 은총입니다. 죄를 지은 상태에서 영원히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120이란 수는 꽉 찬 숫자입니다. 하늘의 수 3을 땅의 수 4로 곱한 수가 12입니다. 12는 완전한 수인데 완전한 수의 10배이니 완전한 수입니다. 그래서 120은 완전수입니다. 빈틈이 없는 하나님의 수입니다. 사람의 수는 항상 빈틈이 있습니다. 아무리 완전하게 한다고 해도 빈틈이 있게 마련입니다. 순금을 24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순금이라도 보증서를 보면 100라고 하지 않고 99.9라고 합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 외에 완전한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샘 백성은 12지파입니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 숫송아지 12마리와 숫양 12마리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하여 엘림에 도착하였을 때 거기에 물 샘 12개와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시고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먹고 남은 것을 12바구니에 거두었습니다.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12문이 있다고 합니다. 12이란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빈틈이 없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채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라도 기억하지 못하고, 의미 없이 지나고, 상실한 시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한 순간도 의미 없는 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시간이 꽉 찬 소중한 시간입니다. 어떤 이가 쓴 글을 보니 “심장의 고동도 멈춘 채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이 흘렀다”라고 합니다. 너무 힘든 시간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의미 없이 흐르는 시간, 멈춘 시간은 없습니다. 모든 시간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입니다.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특별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만드신 시간 속에 늘 임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놓치지 않으시는 것은 잠시도 잠들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4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지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을 빈틈없이 지키십니다. ‘전지’(omni-science), ‘전능’(omni-potence) 그리고 ‘전재’(omni-presence)를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빈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wholeness)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의 역사에 빈틈이 없이 개입하고 계십니다. 최근에는 ‘통전’(wholistic)이란 말을 순우리말로 ‘온’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7:25에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부족이 없고, 한 치도 빈틈없고, 한 순간도 하나님 없는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의 역사에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우리교회의 역사를 한 사람이 다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교회의 역사를 한 사람이 다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를 다 기억하시고, 다 경험하시고, 다 개입하시고, 온전히 이끄신 분입니다. 역사의 모든 회전은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의 축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 없이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러나 역사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역사의 주인이 아니며,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존 웨슬리는 “하나님은 그 일꾼은 매장하시나 그 일은 계속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에 수많은 일꾼들이 한 시대를 위해 일하다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결 같이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일하십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세요.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인간의 시조로 등장합니다. 900세 이상을 살았던 10명의 고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여호수아가 한 시대에 등장합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을 잘하는 사람으로 가나안을 정복하였는데, 이번 인천 아시아게임에서는 여호수아가 달리기를 아주 잘합디다. 그리고 사사들이 등장하고,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역사의 한 시대에 잠시 쓰임을 받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으며, 지금 우리 역사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2000년에 ‘Life Counts’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책에 보면 태초부터 2000년까지 태어난 인간의 총수가 약 1,060억 명이라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아담 이후 지금까지 구원 받은 사람이 700억 명이라고 합니다만 구원받은 자의 수를 알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는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이름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전 역사에 빈틈없이 살아계시고, 다스리셨습니다. 사람은 긴 역사의 한 부분만을 살다가 죽습니다. 사람은 몇 년 만 지나면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모든 순간에 빈틈없이 주인이십니다. 우리교회가 창립된 것은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지만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셔서 시간을 이끄십니다. 우리교회를 120년 동안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은혜를 주시는 숫자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15에는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라고 합니다. 120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수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곳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빈틈이 없이 꽉 차야 은혜를 주십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후 자살해버렸습니다. 사도들은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를 선택하여 사도의 한 사람으로 세웠습니다. 맛디아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이 유스도라는 요셉과 함께 가룟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후보였지만 제비뽑기에서 맛디아가 사도의 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사도의 수가 12로 찼을 때에 비로소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11사도이면 어때서 성령도 숫자가 차야 강림하십니까? 하나가 빈 곳에 성령강림은 불가합니다. 숫자가 차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숫자가 완전해야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의 선물이나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때나 주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주십니다. 사람의 준비가 끝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모여 기도할 때가 완벽한 때였습니다. 그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은혜를 주셨습니다. 120은 완전한 숫자이며, 120명이 모인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이며,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 가장 절실한 일이었습니다. 시간이란 단어는 헬라어에 여러 개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라는 시간은 객관적 시간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시간이며, 누구에게나 같은 양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주관적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모두에게 다른 양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이며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마가복음 1:15에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4에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합니다. ‘때가 차다’라는 말은 또 다른 시간인데 ‘플레루’(pleroo)라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어떤 것이 완전히 완성되거나 끝이 났음을 가리키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는 어떠한 과업이나 열매를 결실하기 위한 기회를 가리킨다면 플레루는 그것이 성취됨을 의미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이 차면 당신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인간의 준비가 끝나고, 하나님의 시간이 맞아 떨어져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도서 3:1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타이밍이란 ‘동작의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나는 순간’을 말합니다. 적기(適期)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승기(勝機)를 포착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타이밍입니다. ‘졸탁동시’(& 36388 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즐탁동기’라고도 합니다. 어미닭이 21일 동안 알을 품은 후에 병아리가 부화합니다. 껍질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을 ‘졸’이라고 합니다. 어미닭이 껍질을 쪼는 것을 ‘탁’이라고 합니다. ‘졸’과 ‘탁’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생명이 탄생합니다. 타이밍이 잘 맞아야 생명은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보세요. 애급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우성을 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우성을 들으시고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을 짝을 짓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아우성인데 미리암이 태어나고 아론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모세가 테어났는데 40년을 궁중에서 생활하고 다시 40년을 미디안의 목자로 지내고 그제야 애급으로 가서 백성을 이끌어냅니다. 그런데 또 40년을 광야에서 생활하고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더딘 것 같지만 정확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타이밍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400년 중간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때입니다. 말씀을 전할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고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하셨지만 아직도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더디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타이밍입니다.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선지자와 갈멜산에서 전쟁 같은 사투를 벌립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제단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때가 찰 때 오십니다. 120명이 모여 간절하게 기도하고 성령님을 맞을 준비가 끝나면 그 때 성령님께서 오십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전하는 말씀이 무르익었을 때에 성령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타이밍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주실 하나님의 시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시간이 차면 예비하신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을 때를 정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죽을만한 때에 모세를 부르셔서 40년을 더 일하게 하시고 눈도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던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곡식이 싹이 날 때가 있고 익어 추수할 때가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질 때가 있습니다. 사계절이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변하는 때를 만드시고, 자연이 정하신 법대로 운행하는 때를 정하셨습니다. 저의 아들이 물리학을 공부하고 지금 대전의 ‘표준과학연구원’에 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연구원에서 하는 일이 한국의 표준시간을 정한다고 합니다. 표준시간을 어떻게 정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설명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아들이 정하는 시간이 한국의 표준시간이고 이 시간을 가지고 방송국이나 텔레콤 회사가 표준시간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표준시간을 사람이 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연의 운행에 따라 하나님이 이미 다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크로노스’입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하나님이 직접 시행하십니다. 교회창립 120주년이라는 것은 1894년부터 우리교회의 시간이 흘러서 이곳까지 왔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빈틈이 없이 꽉 찬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는 시간입니다. 고린도후서 6:2에는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구원의 날입니다. 은혜의 날입니다. 축복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맞은 창립 120주년기념일은 우리의 날이나 우리의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날이며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축하받을 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날입니다. 결론 시간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달력상의 시간(calendar time)입니다. 이 시간은 천문학적 시간입니다. 지구의 회전과 태양과의 관계에서 정해진 시간입니다. 둘째는 생물학적 시간(biological time)입니다. 이 시간은 생물 속에 부착되어 있는 시간(built-in time)입니다. 기러기가 시간에 맞추어 날아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시간이며, 연어가 바다로 강으로 이동하는 시간이며 사람이 나고 죽는 시간입니다. 달력상의 시간은 남의 시간입니다. 생물학적 시간은 나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셋째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나의 시간은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무제한적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란 나의 시간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교회의 창립 120주년은 달력상의 시간입니다. 생물학적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120으로 제한된 시간이 아닙니다. 120년 이후시대로 열린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셨듯이 우리교회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우리교회에 주신 이 모든 것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120년 이후에도 하나님의 시간을 잘 관리하여 영광스런 우리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12월 31일 /벧전4:7-11/ 안효관목사 2017-12-28 18:03:16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 12월 31일 저녁 11시 59분 59초와 1월 1일 0시 0분 0초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12월 31일 23시 59분 59초와 1월 1일 0시 0분 0초는 단 일초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숨 한번 들어쉬었다 내쉬는 시간도 안 되는 ‘1초’라는 짧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두 시간은 엄청난 역
12월 31일 /벧전4:7-11/ 안효관목사 2017-12-28 18:03:16 read : 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여러분, 12월 31일 저녁 11시 59분 59초와 1월 1일 0시 0분 0초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12월 31일 23시 59분 59초와 1월 1일 0시 0분 0초는 단 일초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숨 한번 들어쉬었다 내쉬는 시간도 안 되는 ‘1초’라는 짧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두 시간은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지나온 시간의 역사를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눕니다. 영어로 하면 BC와 AD로 나누는 것이지요. BC는 ‘Before Christ’의 약자로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을 말하는 시간이고, AD는 라틴어로 ‘Anno Domini’의 약자로 ‘주님이 오신 이후’를 말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BC(기원전)에서 AD(기원후)로 바뀌는 순간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1년? 한 달? 아닙니다. 단 1초입니다. 단 1초 차이로 엄청난 새로운 역사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12월 31일입니다. 오늘 하루만 지나가면 2007년이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다른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 같지만 결코 평범한 하루는 아닙니다.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있는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 바로 오늘이라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2006년 마지막 날입니다.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여느 다른 날과 다른 의미를 가진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만들어 줍니다. 마지막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결산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는 우리의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한 결산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는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말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는 그 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온 모든 날들의 무게만큼이나 중요한 때가 바로 그 마지막 때입니다. 오늘은 2006년 마지막 날입니다. 여러분은 지는 1년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만일 오늘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 정리하고 결산하자고 심판대 앞에 부르신다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지난 1년을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쁘게 살아왔든, 힘들게 살아왔든 2006년의 시간은 역사 뒤로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2007년 새해를 맞게 됩니다. 2006년 마지막의 순간에 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지난 1년의 삶을 결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12월 31일 - 2006년 마지막 자리에 서서 우리는 가장 먼저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크고 작은 어려움도 있었고, 불만스럽거나 후회스러운 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 대체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낸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많은 것으로 베풀어주신 한 해였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해를 되돌아 볼 때 감사한 일들이 더 많았습니까?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더 많았습니까? 우리 인간은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더 잘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마운 일보다는 불쾌했던 일을 더 오래 기억하고, 기뻤던 일보다는 슬펐던 일을 더 많이 기억합니다. 좋은 일과 감격스러운 일보다는 가슴 아팠던 일을 더 오래 기억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것 속에 감추어진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서 감사하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보면, 작은 부분들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늘 함께하였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행복은 찾아야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감사와 행복의 조건들이 보이지 않는 작은 삶의 순간들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조건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첫째는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를 지니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신이 이룬 일을 사람들이 다 알아주지 못하고 절반 정도만 알아주는 명예를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고, 넷째는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을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며, 다섯째는 청중의 절반은 박수를 치지 않을 정도의 말솜씨를 가지고 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적당히 자신에게 모자란 것이 있을지라도 그 모자란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모자란 것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노력하는 그 성실한 생활에 행복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 해를 살아오면서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많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좀 부족한데...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생각되는 그 때가 가장 행복한 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의 네 모습이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최고요 최선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음성을 듣고 사도 바울은 병을 안고 살아가야 할 자신의 모습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그 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부족하고 약한 것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우리가 좀 모자란 것이 있어야 그것을 통해서 도우심과 은혜의 손길이 우리의 삶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많은 한 해였다 하더라도 감사함으로 한 해를 결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6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31일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정당들은 정당들대로 우리나라의 이 어려움이 ‘네 탓’이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책임지는 모습이 없습니다. 갈수록 우리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보고가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정치인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내년이라고 우리나라의 경제가 풀릴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정치인들만의 책임이겠습니까?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새롭게 만들어야겠다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국가 청렴도지수가 하위권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뇌물이 통하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지난 12월 19일 국가청렴위원회가 304개 공공기관에 대해 청렴도를 측정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중앙행정기관 중에 가장 청렴도가 낮은 곳이 검찰청이었다고 합니다. 가장 깨끗하고 정직해야 할 기관이 검찰청인데, 그곳이 가장 부패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생각해봅시다. 왜 검찰청이 부패해 있습니까? 누가 검찰청을 부패하게 만들었습니까? 우리 국민들입니다. 국민들이 부정한 방법을 통하지 않고 정직하게 일을 처리하려 했다면 검찰청이 부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그러니 부패해질 수밖에요. 다른 사람에게만 잘못했다고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나라가 정직한 사회, 미래가 있는 희망찬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려하면 어려움도 겪을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살려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정직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깨끗한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조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만은 포기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통하여 더 아름답고 좋은 것을 안겨 주실 또 하나의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나온 한 해 어려움이 많이 있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해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을 통과해 가도록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의 생각이나 이성으로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섭리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환난의 때요 고난의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러기에 어려운 때일수록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의 눈으로 보려는 신앙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때에 교회가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그래서 1950년에 중국 교회는 모두 문을 닫게 되었고, ‘선교 중지령’까지 내려졌습니다. 그 때가 중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참혹한 때였고, 가장 어려울 때였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제 중국에서 기독교가 말살되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염려와는 달리, 외부의 탄압으로 문을 닫은 중국의 교회가 숨을 죽이며 지하교회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82년 중국이 개방되면서 종교의 자유가 일부 허락되었는데, 그 때 조사한 것에 의하면 기독교인 수가 6,000만 명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1950년 교회의 문이 닫힐 때에는 300만 명이었었는데, 32년이 지난 1982년에는 약 20배가 증가한 6,000만 명으로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32년 동안에 중국에서 모든 신자들이 말살당한 줄로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지하에서 더 강렬한 신앙운동을 통해서 신앙인들을 늘려 가셨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핍박을 받을 당시에는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히려 큰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우리는 어려움 그 자체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볼 줄 아는 사람은 현재의 고통이나 고난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해를 살아오면서 혹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었다면,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나와 가족에, 혹은 내 주위에 일어났다면,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 않나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때 우리는 올 한해를 그 어느 해보다도 의미 있고 뜻 깊게 보낼 수 있습니다. 12월 31일에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마지막’이라는 말입니다. 이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참 의미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에서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열심으로 사랑하라.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내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항상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의 때를 가르쳐주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언제나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같이 살아야 합니다. 12월 31일은 우리에게 다시금 ‘마지막 때’의 경각성을 알려주는 날입니다. 물론 내일 아침에는 2007년 새해 첫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 오늘 밤에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는 한 2007년 새해는 다시 열립니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오늘 저녁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후에 새해 해맞이를 갑니다. 그러나 오늘이 지나면 영영 2006년은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2006년의 시간은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 없습니다. 2006년의 마지막 날인 오늘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만 오늘로 내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단 하루 오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오늘을 지낼 것입니다. 그 동안 못다 한 일들을 다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게 마지막이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도 언젠가 그렇게 예고 없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이나 젊은이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언젠가는 그 ‘마지막’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노인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죽은 이 노인이 하나님 앞에 가서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부르면 어떻게 합니까? 부르려거든 어떤 암시 주든지, 사전에 경고를 해 주어야지, 준비도 없이 갑자기 부르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항의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어의없는 표정으로 “무슨 소리냐? 내가 몇 번씩 경고를 했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노인이 더 큰 소리를 항의를 합니다. “경고는 무슨 경고를 주었다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설명해 주었답니다. “내가 네 번이나 네게 경고를 보냈다. 첫 번째는 네 눈 밑에 잔주름으로 경고했고, 두 번째에는 네 귀밑에 흰머리로 경고했고, 세 번째로는 네 입가에 잔주름으로 경고했고, 네 번째로는 네 목에 주름으로 경고했다. 그렇게 네 번씩이나 경고를 해도 네가 눈치 채지 못 하길래, 마지막으로 네 뱃가죽을 당기면서 30cm나 늘어나게 해 놓았는데도 네가 눈치 채지 못했지 않느냐?” 여러분, 눈 밑에 잔주름이 있으신 분, 첫 번째 경고입니다. 흰머리가 나고 얼굴과 목에 주름이 있으면 하나님이 부르실 마지막 때가 곧 가까이 온다는 경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경고해 주실 때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이라고 알려주실 때에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해 주시는데도 그 말씀을 흘려버리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는 언젠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들을 때가 올지 모릅니다. 기회는 항상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경고해 주실 때가 기도할 때요, 사랑할 때요, 봉사할 때입니다. ‘나중에 할께요.’ 그게 없습니다. ‘나중에 한다.’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봉사하실 때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때에 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라고 생각할수록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하고, 마지막 때라고 생각될 때에 더욱 뜨겁게 사랑해야 하고, 마지막 때라고 생각될 때에 더욱 힘써 봉사해야 합니다. 오늘은 2006년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올 마지막 날에 지나온 한해를 되돌아 볼 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바쁘게-열심히 살아오신 분들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쁜 꿀벌은 근심할 틈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 늘 충실한 삶을 살아온 분들은 자신의 삶에 후회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일할 수 있었는데도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웠다든지, 더 열심히 신앙생활할 수 있었는데 열심을 내지 못한 한해였다면, 아쉽거나 후회스러운 것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2006년도에 우리에게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 후회스러운 삶을 보충하도록 2007년 새해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6년을 후회스럽게 살았다면 새롭게 다가올 2007년은 후회하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사시기 바랍니다. - 2006년도에 열심히 기도하지 못했다면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2006년도에 열심히 사랑하지 못했다면 2007년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 2006년도에 열심히 봉사하지 못했다면 새롭게 다가올 2007년 새해에는 후회 없도록 열심히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12월 31일에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12월 31일은 과거를 잊는 날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잊어버려야 할 과거사 중에서 후회스럽기 때문에 잊혀 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일들에 대해서는 새해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새롭게 결단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몇 시간 남지 않은 2006년 12월 31일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올해 열심 하지 못해서 후회스러운 것들이 있거든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하도록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년 후인 2007년 12월 31일에는 올해보다 더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올해보다는 덜 후회스러운 마지막을 맞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제자 비젼에 대한 예수님의 집착 /막3:3-9/ 임현수목사 2018-11-12 13:41:13 read : 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896년 초여름 새벽에 33세 된 한 사나이가 미국 미시간주 자기 집을 개조한 실 험실에서 지난 몇 달에 걸쳐 만든 자전거 바퀴에 자신이 직접 만든 2기 통짜리 휘발유 엔진을 장착하고 4륜 마차의 차대를 얹은 괴물 자동차를 끌고 나와 거리 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성공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
12제자 비젼에 대한 예수님의 집착 /막3:3-9/ 임현수목사 2018-11-12 13:41:13 read : 1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896년 초여름 새벽에 33세 된 한 사나이가 미국 미시간주 자기 집을 개조한 실 험실에서 지난 몇 달에 걸쳐 만든 자전거 바퀴에 자신이 직접 만든 2기 통짜리 휘발유 엔진을 장착하고 4륜 마차의 차대를 얹은 괴물 자동차를 끌고 나와 거리 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성공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동차의 이름을 포드1호라 고 명명했습니다. 이사람이 바로 헨리 포드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발명에 대한 축하연이 열렸을 때 그는 인사에서 "앞으로 한 세기 내에(20세기) 미국의 모든 집집마다 한 대씩 이런 자동차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 말 만은 농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그 는 "만일 우리가 대량생산과 생산 기술 혁신을 이루어 낸다면 한 세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미국 디트로이트 포드 뮤지엄의 현관 입구 에는 "헨리 포드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의 꿈의 결과를 누리면서 교회에 오셨을 것입니다. 꿈을 꾸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꿈을 실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는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을 개꿈(견몽)이라고 말합니다. 비전과 개꿈의 차이는 비전의 결과가 이웃에 대한 유익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고 비전의 실현을 위한 전략과 헌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헨리 포드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비전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발 명의 결과가 이웃에게 축복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는 항상 이웃의 유익을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활용한 대량생산의 전략을 구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마 침내 온 세상은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비저너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비전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에 오게 하는 일 곧,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 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고, 교회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 나라 의 가치관을 받아드리고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위해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을 훈련시켜 그 제자들을 재생산하시기로 전략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12제자 비전"이 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그 비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과 제가 그의 제자로서 할 일은 무엇입니 까?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의 마지막 명령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또 다른 이들에 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명령에 대 한 보다 효율적인 순종을 위하여 세 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생각해 보며 동일한 비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1. 무엇 때문에 열두 제자를 부르셨는가? 9:36이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정치 가는 사람을 볼 때 한 표로 보고, 사업가는 돈으로, 의사는 환자로 보실 것입니 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떻게 보셨을까요? 병들고 약한 자들로 보신 것입니 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민망하다는 단어는 영어로는 compassion입니다. 상대방의 상태를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상태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까? 35절에 의하 면 병들고 약해진 상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6절에 의하면 돌봄을 경 험하지 못하고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자 없 는 양의 상태가 무엇입니까? 목자 없는 양은 방황합니다. 보호받지 못하고 두려 워합니다. 쉽게 더럽혀 집니다. 이런 양들의 상태는 목자만 곁에 있어주면 해결 됩니다. 목자가 방향을 지시합니다. 보호합니다. 씻어 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자가 될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방황하는 양들에게 목자 되어 주도록 12제자를 부르셨다는 것입 니다. 그들을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자, 마가복음 본문 3:13절은 이렇게 시작을 합 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여기 보 시면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그가 원하셨던 자들의 자격이 이렇게 열거되어 있지 않아요. 그냥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고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전 적으로 주님의 주권적인 선택 때문이었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이것 입니다. 그분이 제자들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의 기준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사람을 선택하는 세속적인 기준과는 매우 달랐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에 16절 이하에 보면 제자들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이 명단들을 열람해 보십시오. 무엇을 느끼십 니까?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별 볼일 없었던 사람들이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적으로 굉장히 내세울 만한 뭘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예요. 그리고 천대 받던 그 당시 에 세리들 이런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 무슨 메시지가 있을까요? 아마도 이런 메시지가 있을 거예요. 이 평범한 사람들이라도 주님께 붙들림을 받았을 때 그들이 비범한 일을 할 수 가 있다, 이런 메시지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 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것 은 그의 대표적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붙여 주셨던 매우 휴머러스한 별명에서도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들에게 는 별명을 주셨 어요. 예컨대 자, 16 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 고” 자 그러니까 베드로의 본명은 무엇입니까? 본명은 시몬입니다. 베드로는 별명이 예요. 본명은 시몬입니다. 별명 이 베드로인데 베드로의 뜻이 뭡니까? 반석, 반석이라는 것은 시몬에 게는 전혀 어울리지않는 별명이라 고 할 수가 있 습니다. 베드로는 아주 성질이 급하고 변덕스럽고 아침 저녁으로 잘 변하고, 불 안정하고 그러나 반석, 육중한 반석의 이미지는 베드로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 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사람을 변화시켜 반석처럼 쓰시겠다. 초대 교 회가 세워지는 기초로 이 사람을 쓰시겠다. 다시 말하면 이 별명 속에는 이 사람을 향한 주님의 기대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 다. 전혀 불안정한 사람을 세워서 안정된 하나님의 기둥같은 존재로 쓰시 겠다 는 하나님의 의지가 별명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다혈질이고 불 같은 성격이어서 사고치기 쉬운 사람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 입니다. 17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 벼락, 생각해 보면 아주 파괴적이죠? 이것은 파괴 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서 학자들은 사실상 야고보, 요한의 성격이 벼락 같았다. 실제로 누가복 음 9장 54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라는 마을에 들어가십니다. 사마리아라는 마을에 들어 가셨을 때 사마리아 동 네 사람들이 예수와 제자들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당신들 이 마을에 들 어오지 마십시오, 쫓아 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누가 제일 화가 났을까요?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가 제일 화가 났어요. 그래서 어떤 제안을 했습니까? ‘선생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이 사람들을 벼락을 쳐 버리십시다.’ 벼락같 은 사람 들이예요. 이 사람들이. 그러니까 어울리는 별명이지요. 그러나 그들 이 주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았을 때 정말 주의 메시지를, 하늘의 메 시지를 천 둥처럼 증거하는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베드로와 함께 초대교회를 세우는 위대 한 사도의 생애를 이들이 살게 되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자, 이 사람들은 약점 이 많은 사람들이죠. 그러나 여기서 메시지가 뭐예요? 그들의 약점 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부 르셨다. 그것이 촛점이예요. 가롯 유다 같은 사람도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 나 그는 베드로처럼 회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한 마디로 가룟 유다를 생각할 때 이 사람은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었 다. 이 유다는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능성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돌 아오질 못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회개가 있었습니다. 자기 약점을 직면 하면서 그 약점 앞에 눈물 을 뿌리고 회개하고 고치면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때 그의 실패, 그의 약점 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베드로는 약점을 극복했지만 유다는 약점을 극복하 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자, 누구나 내가 가진 약점에 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고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 다. 만약 나의 약점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십자가 앞에 내 약점 을 내 려 놓고 주님의 다루심을 기꺼이 받겠다는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 러분, 약점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제자들을 선택하신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렛 슨은 이것입니다. 내가 가진 약점, 내가 가진 허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 준비만 되어 있다면 주님은 나같은 사람도 쓰실 수가 있다. 우리도 쓰실 수가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을 필 요로 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즉각적으로 내 한 몸 추스르기에도 힘들고, 나도 상처투성이인 데 어떻게 다른 영혼들까지도 책임 질 수 있느냐고 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 나 본문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이 일을 순종하여 하고자 한다면 나머지 는 내가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마10:1막3:15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가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그 일 감당할 능력을 주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능력도 주시는 것 입니다. 2. 왜 하필이면 열두 제자를 부르셨는가? 이 중요한 사역을 위해서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왜 하필이면 12명을 부르셨을까 요? 13명도 아니고 120명도 아니고 12명을 부르셨을까요? 저는 숫자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 하심에는 분명한 어떤 이유가 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거기에는 확실한 성경 적, 그리고 사회적 의미가 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우선 성경적 의미를 생각해 보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12 지 파로 나누어 다스린 것이나, 솔로몬 왕이 통일 이스라엘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12관장을 두신 것(왕상4:7)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일찍이 일년을 열두 달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요한 계시록 21 장에 보면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갈 새 하늘 새 땅은 모두 12개의 수로 이루어진 나라인듯한 인상을 받습니다.--열두 보석, 열두 기초석, 열두 문--그 위에 열두 지파 의 이름과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묘사됩니다. 그 래서 성경학자들은 열두 수를 대표 수 혹은 충만 수라고 일컫습니다. 더 중요한 의미는 사회적 의미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심리학자들은 소그룹에 서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그룹은 12명 미만이라고 합니다. 12명 이상 이 되면 상호 영향력은 지극히 미미하다고 합니다. 저는 초대교회가 세상을 변 화시킨 저력이 집집마다 모인 12명 미만의 가정교회들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모인 이유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본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 국교회의 상상 못 할 놀라운 부흥의 비결도 가정교회에 있습니다. 그래서 셀목회 연구가들은 이런 12명 이내로 구성된 소그룹 교회를 성경의 기초 공동체(basic community)라고 부릅니다. 저는 최근에 이 평범한 12제자 비전을 적용하여 세상을 주목시키고 있는 한 비범한 교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교 회는 마약, 부패, 살인, 게릴라 전투로 알려진 나라인 남미 콜롬비아 보고타에 존재하는 ICM선교교회 (International Charismatic Mission Church)의 이야기입 니다. 이 교회의 지도자는 쎄자르 카스텔라노스 목사인데, 그는 전통교회의 한 계를 느끼고 1990년에 셀교회 전환을 선언합니다. 당시에 셀 그룹이 70개였는 데 8년 만에 24,000개에 달하게 됩니다.(10명이 모이면 24만명)(토요일 청년예 배에만 18,000명) 그러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교회를 통해 이 나라가 변화의 소망을 갖 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 조엘 코메스키가 이 교회를 찾아가기 위해 택시 를 타고 "왜,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에 모입니까?"고 물었을 때 믿지 않는 택시 기사가 "그 교회가면 사람들이 변화됩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최근에 이 교 회 교인들은 적극적으로 나라의 치유와 변화를 위해 정계로 진출을 시작하고 있 다고 알려 집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교회 교인들은 모두가 12제자 비전을 꿈 꾸며 살고 있고, 이 교회 목자들은 평균 1년 1회의 셀을 배가하고, 지도자 들은 2회 이상의 배가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12제자 삼 기'에 인생을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교회 식구들이 저와 함께 동일한 12제자 비전을 꿈꾸게 되시기를 도전하고자 합니다. 3. 그는 어떻게 열두 제자를 훈련하셨나?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선포하고 가르치시는 일이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중적인 방법 말고 12명의 소그룹 제자를 훈련시키신 주목해야 할 그분의 방법이 있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그것은 '기도함'과 '함 께 함' 이었습니다. 본문9:38에 보면 이 일을 위해 먼저 할 일은 '기도하는 일'이라고 기록합니다. 눅6:12-13에 보면, 그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 12제 자를 선택하십니다. 다음 마가3:14에 보면,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었습니 다. 함께 하시면서 어떻게 기도하는지, 사랑하는지를, 전도하는지를 자연스럽 게 보여 주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14 절 다시 읽습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자기와 함께 있도 록 하기 위하여’ 그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의 중요한 목적이 친교적 목적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 다. 주님 우리와 친교 하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있고 싶어 하십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역사의 주님. 이 놀라우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그리스도 가 저와 여러분과 함께 있고 싶어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저와 여러분을 그 분 은 사랑의 대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인격적 교제의 대상. 사귐의 대상. 같이 있고 싶어해서 부르셨다. 그가 우리를 부르신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가 함께 있 고 싶어하십니다. 감동되지 않으세요? 나 같은 사람. 이 허물 많은 사람. 이 약 점 많은 사람. 그런데 주님이 나와 더 불어 친교를 나누고 싶어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9절 에서 이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우리를 불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 님은 미쁘시도다.’ ‘미쁘시도다..’ 신실하시는 것 입니다. 나 같이 불성실한 인간을 불러 교제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 하나님은 얼 마나 신 실하신 분. 얼마나 놀라운 분인가? 이게 바울의 고백이예요. 또 하나, 같이 있고 싶어한다는 얘기는 같이 있는 기회를 통해서 우리를 훈련하 고 싶어하신다. 저는 훈련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있는 기회. 자연스럽게 있는 기회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전 달하시고 주님의 삶을 보여 주시고 그래서 우리도 주님처럼 살아가기를 주님은 기대하셨다. 훈련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있지 않고는 어떻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요? 같이 있지 않고는 그분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을 수가 있어요? 같이 있지 않고는 그분의 삶의 모습 을 어떻게 볼 수가 있어요? 같이 있지 않고는 어떻게 그분을 따라갈 수가 있을 까요? 훈련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있는 방법이 뭡니까? 어떻게 주님과 같이 있을 수가 있어 요? 두 가지 방편밖에 없다고 생각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함께 할 수 가 있습 니다. 모든 제자훈련의 가장 기본적인 방편은 이 두가지 훈련이예요. 말씀훈련 과 기도훈련. 내가 성경 말씀을 펼칠 때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 니다. 기도함으로 나는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거예 요. 여러분 내가 제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말씀에 대한 애정이 없 다. 성경공부에 관심이 없어요.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저는 이건 병든 제자라고 생각 합니다. 교회 들락들락하면서 무릎 꿇고 싶은 맘 이 없다. 기도의 목마름이 없다. 기도의 갈증이 없다. 저는 이거 병든 제자라 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라면 어렵게 느끼실지 모르지만 "기도하고 함께 하는 일"-그것도 못하시겠습니까? 우선, 내가 사랑하고 함께 할 12제자를 위해 기도하십시오.(교회에서 배당될 사 람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들과 마음으로, 삶으로 함께 할 준비 를 하십시오. 그것이 제자훈련의 시작입니다. 전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훈련의 목적은 전도하는 것 입니다. 막3:14절입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꼐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자! 함께 있는 기회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친교 합니다. 또 함께 있는 기회에 주님에게 훈련을 받습니다. 친교! 훈련! 중요합니 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친교와 훈련을 넘어서서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과 대화하고, 또 주님께 배우고 그래서 마지막에 해야 할 궁극 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를 보내사 전도하게 하시려고 -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우리가 참 순종하게 되면 주님은 전도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그것이 15절 의 말씀이예요.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 전도하고 자 하는 이에게 전도하는 능력, 전도할 수 환경, 전도할 수 있는 권능도 내가 준다. 궁극적인 목적은 전도하게 하려하심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님의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전도 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 마지막 명령이 뭐예요? 마태복음 28장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도전은 너희 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 복음 전도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는 것 입니다. 저는 제자들에게 프라이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이 시 대를 살아가는 크스챤들의 자존심, 전도하는 사람들의 자존심, 이것 때문에 전 도하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전도만이 인간을 바꿀 수가 있다. 전도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이 프라이드가 있어야 해요. 전도만이 이 세상을 바꾸고 온 역 사를 바꿀 수가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은 그 교회 안에 전도하는 교인이 별로 없다. 또 전도하기를 원하는 데 도무지 전도할 줄을 모른다. 이것은 마치 이런 얘기입 니다. 한 군대안에 총 쏠 줄을 모른다. 군인들이 싸울 줄을 모른다. 이 얼마나 비극이예요? 이 얼마나 커다란 비극입니까? 군인이 총을 사용할 줄을 모른다. 전도할 줄을 모른다. 이 얼마나 비극이예요? 어느 소년이 자기 집 근처에 목공 실이 있어서 자주 놀러가서 목수 아저씨가 일 하시는 모습을 관찰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소년의 눈에 제일 신기한 것이 있었 다면 목수 아저씨의 정확하게 못박는 모습이어서 자기도 흉내를 내어 보았습니 다만 빈번히 빗나가 자신의 손등을 때리게 되자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 다. "아저씨와 제가 일하는 차이가 무엇이에요?" 목수는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 니다. "너는 못질할 때 이 못과 네 손을 번갈아 보고 있지만, 난 못밖에 보지 않아!" 이것을 집중의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명 한 음악가(금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요 작곡가) 루빈스타인에게 누군가가 "당신 의 성공의 원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뜻밖에 "무관심이지요"했답니 다. 무슨 뜻이냐고 반문하는 그에게, '난 음악이외의 모든 다른 일에 무관심하 기로 했습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직 음악에만 열중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 에 오신 목적은 한마디로 제자 삼는 일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목회도 이제 오직 한가지 목표에만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서 일하고자 하십니다. 고통받는 이웃들의 상처를, 그 아 픔을 느끼며 그들에게 찾아가는 주님의 손이 내 손이 될 수 가 있을까요? 그들 의 아픔을 짊어 지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손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들에게 전 해줄 메시지를 위해서 말씀을 붙드는 손 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 복음 을 가지고 찾아가는 손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 때 비로소 주님 은 우리를 통해 서 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이 그리스도의 손이 될 때 우리를 통해 서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열두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세우셨습니다. 동일한 목적으 로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세우십니다. 주님이 집착 하셨던 제자삼는 일에 우리 교회가 집착 할 수 있다면 분명히 한가 지 약속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 서시는 그 날 후회 없이 인생 을 마무리하며 하늘의 영원한 상급을 받으실 것을 약속해 드릴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열두 제자의 비전을 함께 꿈꾸어 보시겠습니까?
1318, 청소년 희망의 숫자 /창49:22-25/ 이하준목사 2018-08-31 02:01:18 read : 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청소년의 위기 1318 여러분, 반갑습니다. 청소년들은 다 알아듣지만 어른들 중에는 “1318? 그게 뭐야?” 하는 분도 계실 것 같아서 설명 드리면 1318, 13살부터 18살까지 우리 중고등학생 청소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은 바로 여러분 1318 청소년들을 초청해 함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1318, 청소년 희망의 숫자 /창49:22-25/ 이하준목사 2018-08-31 02:01:18 read : 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청소년의 위기 1318 여러분, 반갑습니다. 청소년들은 다 알아듣지만 어른들 중에는 “1318? 그게 뭐야?” 하는 분도 계실 것 같아서 설명 드리면 1318, 13살부터 18살까지 우리 중고등학생 청소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은 바로 여러분 1318 청소년들을 초청해 함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사실 요즘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청소년 여러분 아닙니까? 인생이 바빠요. 그런데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데 왜 바쁜 여러분을 불러 어른들이 함께 예배하자고 하는가? 별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여러분 얼굴을 보고 싶고, 또 여러분과 1년에 한 번이라도 같이 예배드리고 싶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 1318 청소년들을 만나 예배하며 격려하고 축복하고 싶어서 부른 거에요. 그러므로 오늘 여기 계신 어른들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청소년들과 함께 예배하면서 좀 더 이 친구들에게 관심을 갖고 격려하고 축복해 주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어른들에게 ‘청소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좀 수준 높은 어른들은 오늘 설교제목처럼 ‘1318’이 떠오른다, ‘꿈’ ‘미래’ 등 대답을 했지만 어른들의 대답 중에 1위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문제’였습니다. 붙여서 읽으면 ‘청소년 문제’지요. 그 다음 2위는 ‘비행’이요. 붙여 읽으면 ‘비행 청소년’입니다. 당연히 “날아다니는 청소년”이라는 뜻이 아니라 “비행을 저지르는 아주 문제 많은 청소년”을 뜻하는 말이지요. 3위는 ‘질풍노도’입니다. 물론 어른들이 다 걱정돼서 한 대답이겠지만 이런 대답은 오늘날 어른들이 우리 청소년들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어떤 눈으로 보고 있으냐? ‘청소년’ 하면 ‘청소년 문제’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청소년들을 마치 비행집단, 아주 골치 아프고 위험한 집단으로 보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어 참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런 반응을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요즘 신문을 보세요. 뉴스를 한 번 보세요. 우리 1318 세대에 관해 나오는 뉴스는 딱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대학입시에 관한 뉴스, 대학입시가 또 바뀌었다 어쨌다 하는 뉴스고, 또 하나는 청소년 문제, 오늘 또 어떤 청소년이 사고를 쳤다 하는 뉴스뿐이잖아요? 그러니 어른들이 어찌 우리 청소년들을 걱정 안 하겠습니까? 실례로 최근 나온 뉴스 두 개를 잠시 소개할까요? 전라남도의 학 고등학교에서 담배를 피다가 걸린 학생 9명이 벌로 노인요양시설에 봉사활동을 나갔는데 거기 누워계신 거동이 불편한 노인에게 “여봐라. 네 이놈.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하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을 핸드폰 동영상에 찍어 올렸다가 아주 난리가 났답니다. 문제가 커지자 해당 학생들은 “장난으로 그런 건데 뭐 그리 큰 문제”냐고 반응했고 학교는 선도위원회를 열어 퇴학 조처 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요즘 인터넷 카페에는 청소년들이 부모나 선생님을 욕하는 내용이 자주 올라오고 있다는데 심지어 서로 누가 누가 심한 욕을 더 잘 하나 욕설 배틀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뉴스는 이현호라는 프로농구 선수가 담배 피는 청소년을 야단치다가 입건된 사건입니다. 이 농구선수는 밤 8시에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동네 놀이터에 갔다가 거기서 담배를 피우는 중고등학생, 그 중에는 여중생도 있었는데 “왜 놀이터에서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냐”고 했다가 그 아이들이 욕설을 하며 대들자 홧김에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가 아이들이 경찰을 부르는 바람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청소년들 중 세 명의 부모는 처벌을 원치 않는다며 돌아갔지만 두 명의 부모가 끝까지 처벌을 원해서 입건되고 법정에 서서 약식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선고유예 2년에 벌금 10만원입니다. 선고유예는 범행이 경미한 경우 일정한 기간 같은 범행을 저지르지 않는 경우 형의 선고를 면하게 하는 것이므로 이현호 선수는 2년 동안 같은 범행을 저지르지 않을 경우 10만원의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정에서 판사가 물었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무섭지 않았느냐?” 그러자 이현호 선수는 “욱하는 성격 때문에 바른 소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했을 뿐”이라고 답했고, 이에 판사는 “머리를 가볍게 때리는 행위도 폭행에 해당한다”고 주의를 주었답니다. 사건 직후 인터넷은 이 문제를 놓고 뜨겁게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는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부분 “용기 있는 행동을 한 어른”이라는 의견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뉴스를 보면 걱정이 안 됩니까? 당연히 걱정 되지요. “요즘 애들 참 큰일이구나”, 나아가 무섭지 않습니까? “어휴, 요즘 애들이 다 저렇구나, 조심해야지 괜히 나섰다가 나도 낭패 볼라” 하고 말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이 있어요. 밤거리를 여럿이 몰려다니는 청소년을 보면 괜히 겁이 나요. 옛날에는 으슥한 곳에서만 그랬지만 요즘은 아예 길거리에서 교복 입고 담배 피는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야단치고 싶다가도 괜히 저 애들 건드렸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피해 간 적도 있어요. 여러분은 아닙니까? 물론 이런 아이들은 일부분에 불과하지요. 대다수의 아이들은 오늘 여기 있는 아이들처럼 착하고 순진하고 좋은 아이들이지요. (안 그렇니 얘들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요즘 1318 청소년들이 우리 어른들과 부모들에게 걱정스러운 존재, 나아가 겁나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이집트 피라미드에 쓰여 있는 상형문제를 해독해 보니 이렇게 쓰여 있더랍니다. “요즘 애들 버릇이 없어!”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른들이 보는 요즘 애들은 똑같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어른들이 “요즘 애들 무서워”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정말 큰 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왜 그럴까요? ❚위기가 아닌 희망을 말하자! 저는 이렇게 오늘날 우리 1318 청소년들이 걱정스러운 대상이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 청소년들이 사랑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은 자녀는 잘못된 길로 가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반드시 다시 돌아옵니다. 부모의 진정한 사랑, 어른들의 진정한 사랑, 주변 사람들의 진정한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자란 자녀들은 반드시 문제아가 아니라 건강하고 바른 자녀로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부모와 어른들은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자녀들에 대해, 특히 우리 청소년들에 대해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부어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걱정 대신 격려를, 질타와 야단 대신 칭찬을, 사랑을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부어주면 반드시 우리 1318 청소년들, 우리 자녀들 잘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 청소년들이 사랑을 받지만 잘못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요즘 애들이 왜 사랑을 못 받아? 옛날에 비해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고 풍족한데? 부모가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잘 해주는데 사랑을 너무 받아서 문제지 왜 사랑을 못 받아?”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부모나 어른들이 사랑을 하지요. 그런데 그 사랑이 잘 못 된 거에요. 맹목적인 사랑이고, 나아가 자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실상은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자녀 뒤에는 반드시 잘못된 부모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청소년들도 어른이 훈계하고 쥐어박았다고 경찰을 부르고 부모가 쫓아와 감히 내 귀한 자식 손찌검 했다고 끝까지 고소를 취하하지 않잖아요? 자식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가 있는 한 그 자녀는 바른 길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맹목적인 사랑, 또 사랑을 빙자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어른과 부모가 있는 한 우리 자녀들은, 우리 청소년들은 영원히 ‘문제’ 혹은 ‘비행’이라는 말을 떼버리지 못하는 걱정스러운 존재, 겁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부모와 어른 여러분,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위기 대신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자꾸 위기다 위기다 하면서 청소년들이 마음껏 자라나가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너희가 지금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반드시 잘 될 것”이라며 희망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청소년들에게 지적 대신 축복을 해주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하는 축복, 부모들이 하는 축복은 그대로 우리 자녀와 청소년들에게 이루어져 반드시 그들의 앞날이 복된 날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가정에 미래가 있고, 우리 나라, 우리 교회에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이 살아야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축복, 우리의 축복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온 야곱의 축복은 부모가 자녀에게, 어른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해주는 가장 아름다운 축복의 모델이 되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임종 직전 열두 아들을 축복합니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야곱은 이제 눈을 감을 때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열두 아들들에게 각자 축복의 말을 마지막 유언처럼 남기고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창세기 49장 전체에 들어 있습니다. 어른 여러분, 부모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유산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동산인가요? 현금이 들어있는 은행 통장인가요? 아니면 부모가 누린 명예와 지위인가요? 아닙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만 의지하는 분명한 믿음입니다. 부모와 우리 어른 세대들은 이 믿음에 의지해 자녀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야곱의 축복처럼 우리 어른들과 부모들은 우리 자녀들을, 특별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믿음으로 축복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의 열두 아들이 다 축복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길고 진한 축복을 받은 자녀는 열두 아들 중 유다와 요셉 두 명입니다. 그 중에 우리에게 <야곱의 축복>이라는 복음성가(오늘 설교 후 부를 노래) 가사로도 잘 알려진 요셉에 대한 축복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그 내용을 한번 살펴봅시다. 첫째로,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22절 말씀 함께 읽읍시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야곱은 이렇게 요셉을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고 축복하는데 이 말은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이 점점 더 번성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현재의 축복을 말한 것입니다. 저도 이 시간 우리 청소년들과 자녀들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잘 될 겁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처럼 번성하고 잘 될 줄로 믿고 축복합니다. 아멘! 둘째로,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점점 더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다시 22절을 보면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즉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점점 성장해 담장을 넘어 쭉쭉 뻗어나가듯 요셉과 자손들은 지금도 번성할 것이지만 앞으로 점점 더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축복한 것입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현재의 번성을 뜻한다면 이 말은 바로 미래의 희망을 말한 것이지요. 저도 이 시간 우리 청소년들과 자녀들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잘 될 것이지만 미래에는 더 잘 될 겁니다. 여러분의 앞날이 점점 더 잘 되고 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셋째로, 아버지 야곱은 ‘보호의 축복’을 선언합니다. 23절과 24절을 함께 읽읍시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여기서 활쏘는 자란 대적을 뜻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공격하고 넘어뜨리려는 그 어떤 대적과 원수의 공격에도 요셉이 도리어 굳세게 잘 견뎌내고 그들을 이겨낼 것이라고 축복한 것입니다. 요즘 얼마나 청소년들과 자녀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까? 얼마나 죄 지을 일이 많고 또 이들을 넘어뜨리려는 악한 세력이 많습니까? 우리 자녀들은 또 얼마나 많은 비난과 오해를 받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지켜주시고 청소년들을 지켜주시면 어떤 원수의 공격도 이겨내고 승리할 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시간 우리 청소년들과 자녀들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이겨낼 줄 믿습니다. 그 누가 여러분을 넘어뜨리고 해치려 들어도 하나님이 반드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여러분을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런데 말입니다. 이 모든 복은 도대체 누가 주는 겁니까? 야곱이요? 야곱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꼭 기억하세요. 축복은 아버지 야곱이 하지만 그렇다고 복을 야곱이 주는 게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25~ 26절을 읽읍시다.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예, 복은 네 아버지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요셉을 도우실 것이고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그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요셉에게 모든 복을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축복은 누가 한다? 야곱이다. 즉 우리 부모들이,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복을 빌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청소년들을, 우리 자녀들을 비난하거나 야단치지 말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망할 놈” 하고 저주하면 진짜 망하고, 문제아라고 야단치면 그대로 문제아가 됩니다. 하지만 희망을 말하고 복 받을 것이라고 축복하면 우리 자녀들, 우리 청소년들 그대로 축복 받고 잘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축복은 이렇게 부모가 하고 어른이 하지만 복은 누가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을, 내가 부모인 내가 책임진다? 아니란 말이에요. 청소년들을 우리 어른들이 책임진다? 아니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어른들, 부모들은 야곱처럼 자녀들을, 청소년들을 마음껏 축복하고 희망을 말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 청소년들, 1318 세대들을 초청하고 우리 어른 세대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약속을 해야 합니다. “얘들아 걱정 마라, 우린 너희를 믿는다!” “얘들아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너희를 책임져 주실 거야!” “얘들아 너희는 희망이야, 너희가 우리의 미래야, 그러니까 힘내라! 팍팍 밀어줄께!” 어른들, 부모님들 제가 하는 말 그대로 따라 하세요. “너희들은 반드시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팍팍! 밀어줄께!” 어른들이 바로 이런 마음을 품으면, 부모들이 이런 자세를 가지면 이 아이들 잘 됩니다. 반드시 잘 될 것입니다.
1아비멜렉의 비극이 주는 교훈 /삿9:7-15/ 오주철 목사 2016-04-12 14:54:11 read : 5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인간의 행복은 욕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고 욕심을 다스리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욕망이 천하보다 큰 것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천하를 가져다가 부어도 인간의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욕
아비멜렉의 비극이 주는 교훈 /삿9:7-15/ 오주철 목사 2016-04-12 14:54:11 read : 5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인간의 행복은 욕심을 채우는 데 있지 않고 욕심을 다스리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욕망이 천하보다 큰 것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천하를 가져다가 부어도 인간의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욕심은 채우면 채울수록 커집니다. 그래서 바다의 깊이는 있어도 인간 욕심의 깊이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길은 천하보다 크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욕심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을 절제해야 한다고 하니까 모든 욕심을 다 절제하고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성경에서 경계하고 있는 욕심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금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욕망인 식욕과 성욕, 성취욕, 영원을 갈망하는 영적인 욕구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발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본적인 욕망을 말살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욕망이 지나칠 때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탐욕은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단테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람이 몰아치는 산길을 여행하는 사람에 비유했습니다. 여행을 시작했을 때 그는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산길을 얼마간 올라갔을 때 사나운 늑대가 숲에서 뛰쳐나와 그를 물어 찢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욕망을 늑대로 비유한 것으로써 젊은이의 가장 큰 시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면 그는 중년의 시기를 맞이하는데 그 때 거대한 호랑이가 그를 덮칩니다. 이것은 중년의 시험인 지위와 명예, 그리고 권력의 자만을 의미합니다. 마침내 그가 정상에 가까워지자 이번에는 털이 수북한 사자가 그의 앞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노후의 가장 큰 시험인 재물과 재정적인 안정을 의미합니다. 단테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유혹을 벗어날 수 있는 시기나 수준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유혹이든 그 유혹을 대면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비멜렉입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세겜의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였습니다. 그는 이복 형제 7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기드온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은 결코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아비멜렉이 아버지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는 왕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 세겜 땅에 사는 외척의 도움을 빌려서 일종의 청부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70명의 형제들이 한 반석에서 참혹한 변을 당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막내였던 요담입니다. 요담은 매우 용감하였습니다. 그는 이복 형제였던 아비멜렉이 왕이 된 후에 세겜을 찾아갔습니다. 자기 형제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던 세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는 세겜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이 산의 맞은편에는 에발산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두 산이 만나는 계곡은 일종의 원형 극장과도 같은 모양이 되었습니다. 세겜이 바로 그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형상 마이크가 없어도 산 위에서 소리를 치면 산 아래에서 다 들을 수가 있습니다. 요담은 아버지 기드온의 기대와는 달리 왕을 세웠던 세겜 사람들을 향해 유명한 설교를 합니다. 이 설교는 일종의 풍유적인 설교입니다. 이름하여 그의 설교 제목은 “가시나무의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담은 이 설교를 통해 부당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던 아비멜렉의 비참한 종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격언에 보면 두 사람이 나란히 여행을 할 때 동행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거나 악한 사람이거나 두 경우 모두 똑같이 교훈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착한 사람과 동행할 때는 “나도 저 사람처럼 인생을 살아야지”라고 다짐을 하게 됩니다. 반면에 악한 사람과 동행을 할 때는 “나는 저 사람처럼 살지는 말아야지”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는 아비멜렉의 비극을 보면서 “나는 아비멜렉처럼 인생을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의 비극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정리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본분을 망각한 이기적인 욕망의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존재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이런 대답을 유도해 내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 예수님은 이 율법사의 대답을 승인하면서 그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람이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본분을 망각하면 남는 것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의 말씀을 보면 숲의 나무들이 감람나무를 찾아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이때 감람나무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 주의를 기울여서 들어보십시오. 본문 9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감람나무는 자신의 본분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그 일을 그만두고 왕 노릇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감람나무는 자신의 본분이 더 중요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다음으로 찾아갔던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도 역시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나무들의 왕이 될 수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본문 13절에 기록되고 있는 포도나무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1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무화과나무는 달고 맛있는 열매를 맺어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자신이 존재하는 중요한 본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포도나무도 자신에게서 나는 술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일은 할 수가 없다고 거절합니다. 나무들의 임금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무엇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그가 가진 권력은 사람을 학대하고 죽이는 도구로 사용할 것입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본분을 잊어버리면 수많은 재산은 방탕과 타락의 도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임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는 한결같이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1인칭이 먼저입니다. ‘내’(I)가 최우선입니다. ‘상대방’(You)은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그’(He, She)는 3인칭으로 맨 뒷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그분,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입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들이고, 제일 마지막에 와야 할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는 정반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대학생 선교단체 가운데 「JOY」라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선교단체의 목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JOY」는 영어 철자의 첫 글자를 가지고 만든 것인데, ‘J’는 “Jesus First”이고, ‘O’는 “Others second”입니다. 그리고 ‘Y’는 “You third”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가장 먼저이고, 그 다음이 이웃들이며, 마지막이 당신, 즉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Joy’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기쁘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위해 살고, 남을 위해 살고, 나를 위해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인생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평생 ‘나’ 밖에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기심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평생 자기만을 위해,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위에는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과 자녀들의 성공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나만 복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가 전부입니다. 이웃을 망각한 채 자신만을 위해 살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와 같은 삶은 결코 예수님이 사셨던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해 보십시오.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 얽혀진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 누구에도 고백할 수 없는 고통을 간직한 사람들, 사업이 망하여 미래가 막막한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기도하면 “어서 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손짓하는 이웃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무더운 지역에서 선교하는 분들,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공산권에서 수고하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이슬람 국가에서 목숨을 걸고 선교하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자신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감춘 채 하루 하루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와 전혀 상관없게 느껴지던 지구 저 반대편의 나라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내 이웃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중보의 기도는 이웃을 발견하게 합니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의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생활 태도가 변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면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러한 삶은 인생을 낭비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면 자기를 찾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0장 39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오늘 본문의 아비멜렉은 자기만을 위해 인생을 살았습니다. 인생을 소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인생의 본분, 삶의 목적을 상실한 허무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살지 못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 본분을 잊어버린 아비멜렉은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것은 더 비참한 비극의 서막이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비극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둘째로, 지배욕에 사로잡힌 비극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도록 힘과 정성을 기울여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기여하시겠습니까? 감람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감람나무는 기름을 생산합니다. 그 기름으로 어두움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어떻습니까? 무화과나무는 맛있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서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어 줍니다. 포도나무는 어떻습니까?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어서 새 술을 냅니다. 중동 지방에서 포도주는 음료수로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들 세 나무들이 대답하는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거기에는 자신들이 다른 나무로부터 받아야 할 조건들이 있습니까? 자신들이 이처럼 소중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저 자신을 주고 섬기는 이야기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시나무는 무엇으로 기여를 합니까? 가시가 하나님과 사람들을 기쁘게 합니까? 본문 15절 말씀에 다른 나무들이 와서 왕이 되어 달라고 하니까 가시나무가 대답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는 말은 “내 지배를 받아라, 내가 너희를 다스리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지배욕만을 채우려는 속셈입니다. 그리고 가시나무의 대답에서 중심이 되는 단어는 ‘나’라고 하는 1인칭입니다. 이웃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처사입니다. 결국 스스로 비극을 자초하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공부를 잘하라는 말만 하지 않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사람으로 태어나서 역사에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보람있는 삶이다. 그러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다. 남에게 뒤지지 않고 출세를 하려면 일류대학에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어떤 가치관을 심어주십니까?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도록 가르친다면 그는 자라서 아비멜렉과 같은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지배욕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 날이 되면 한 아들은 주님의 오른편에 앉혀주시고, 다른 한 아들은 왼편에 앉혀주십시오.” 마가복음 10장 37절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께 자신들의 권좌를 청탁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에 대한 욕망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욕심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을 하십니까? 마가복음 10장 44절과 4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예수님은 종처럼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출세를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다스리고 빼앗는 지배욕을 추구했던 아비멜렉의 삶은 비극이었습니다. 묻습니다. 혹여 당신은 이런 비극의 현장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 안에는 아비멜렉처럼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마음은 없습니까? 아비멜렉의 비극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셋째로, 파괴를 지향한 삶의 비극이었습니다. 가시나무는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아무 것도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70명이나 되는 자기 형제들을 참혹하게 살해했습니다. 자신의 출세욕과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방해가 되는 모든 존재들을 다 제거해 버렸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배욕에 사로잡힌 비극적인 결과는 파괴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지나온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가시나무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꼭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남을 찌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감람나무는 기름을 생산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새 술을 공급합니다. 모두 유익한 생산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만은 생산해 내는 것이 없습니다. 가시나무의 삶은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파괴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삶은 생산적입니까, 아니면 파괴적입니까? 당신의 삶의 자세가 생산적인지 파괴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대화 중에 어떤 사람이 거론되었을 때 나타내는 태도와 자세를 점검해 보면 됩니다. 폭력을 휘둘러서 상처를 입히고 생명을 빼앗는 것만이 파괴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악담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그 사람을 매도하고 비판하고 헐뜯는 것이 가시로 찌르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자는 제안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도와줄 방안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미래에 변화될 가능성을 찾아보는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들을 죽이겠다고 날 뛸 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 일에 동참했던 세겜 땅의 사람들처럼 부화뇌동하면 안 됩니다. 주변에서 남을 중상하고 시기하고 헐뜯는 사람을 보게 되면 이것을 말리지는 못할 망정 한 술 더 떠서 상대를 비난하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서로 세우라”는 것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이웃을 허는 사람입니까, 세우는 사람입니까? 아비멜렉의 비극은 이웃을 헐고 파괴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사기 9장 53절에 보면, 아비멜렉의 최후의 모습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여기에 보면, 아비멜렉은 참으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져 죽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계산한 심판입니다. 그가 받아야 할 당연한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모름지기 이웃에게 덕을 베풀면 덕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에게 악을 베풀면 그 악은 고스란히 내가 거두게 됩니다.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파괴를 일삼았던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음을 기억하십시오. 계속해서 사사기를 읽어보면,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아비멜렉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9장 5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아비멜렉은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보다는 여자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앞섰습니다. 이것은 그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비멜렉과 같이 양심에 화인 맞은 자의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이 추악한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죽은 아비멜렉의 비극은 인생의 목적을 잊어버린 데 있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범죄하고 이웃을 파괴하며 사는 인생은 결국 자기 자신까지도 비참하게 만드는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기자는 자신이 관찰해 본 결과 많은 불경건한 사람들이 장수하면서 잘 살다가 편하게 죽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시 73:4-5).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일이 정말 무슨 소용이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볼 때 신자들은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인 반면, 경건하지 못한 못된 죄인들은 성경 말씀의 지배나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껏 즐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이러한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현실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실제로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와 같은 마음의 갈등을 뿌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순간 지금까지 품었던 그와 같은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실토를 합니다. 시편 73편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시편 기자는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마지막 종말의 때에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비멜렉은 왕으로서 그 자리에 앉아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 자신을 왕으로 세웠던 세겜 사람들의 반란과 세겜의 여인에 의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지만 악인의 수명은 짧다”(10:27)고 했습니다.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진다”(13:9)고 했습니다. 19세기 영국 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찰스 시므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익한 인물들은 명예욕에 휩쓸리고, 현명하고 착한 사람들은 명성을 회피한다.” 이 말씀은 어느 시대에서나 해당되는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찰스 시므온은 계속해서 이런 말로 오늘의 저와 여러분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크게 되려 하기 보다는 선하게 되려고 힘쓰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는지에 대해 머리에 떠오를 것입니다. 이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는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냥 단순히 듣고 흘러버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 앞에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단을 했다면 그렇게 살아가도록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기 위하여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을 당신의 몸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수고가 생명에 이르고, 우리의 소망은 즐거움을 주는 삶을 이루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약함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고후12:5-10/ 안효관목사 2018-01-25 14:27:07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얀테의 법칙’은 스칸디나비아 반도(半島)에서는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활의 법칙인데, 덴마크가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고 있을 때 이 생활법칙을 그 여러 나라에 퍼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덴마크
약함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고후12:5-10/ 안효관목사 2018-01-25 14:27:07 read : 3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얀테의 법칙’은 스칸디나비아 반도(半島)에서는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활의 법칙인데, 덴마크가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나라를 지배하고 있을 때 이 생활법칙을 그 여러 나라에 퍼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덴마크 출생의 노르웨이 작가 악셀 산데모세(Aksel Sandemose, 1899-1965)가 1933년에 쓴 『도망자, 지나온 발자취를 다시 밟다』라는 소설에서 얀테라는 마을의 주민들이 스스로 지키는 원칙으로 언급된 이후부터라고 합니다. ‘얀테의 법칙’은 다음 10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1. 당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You're not to think you are anything special.) 2. ​당신이 다른 사람처럼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마라.(You're not to think you are as good as we are.) 3.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You're not to think you are smarter than we are.) 4.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났다고 확신하지 마라.(You're not to convince yourself that you are better than we are.) 5.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You're not to think you know more than we do.) ​6.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You're not to think you are more important than we are.) 7. ​당신이 무엇이든 잘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You're not to think you are good at anything.) 8. 다른 사람을 비웃지 마라.(You're not to laugh at us.) 9. 누군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You're not to think anyone cares about you.) 10.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든 가르치려 들지 마라.(You're not to think you can teach us anything.) 이런 10개의 계명에 하나가 더 첨가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당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Perhaps you don't think we know a few things about you?)는 것입니다. 조금 더 직역하면 ‘우리가 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말입니다. 덴마크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만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다른 사람을 깔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우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특별한 존재이지만, 나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합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그런 인간의 잘못된 생각을 미리부터 바로 잡아주었습니다. 나만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다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도 그런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생각에 마치 자신이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서 성경 곳곳에서 우리를 아주 귀한 존재라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만 귀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귀한 존재입니다. 나만 특별하다고, 나만 귀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교만에 빠지고 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생각이 얼마나 비신앙적인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열두 명의 제자들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예수님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의 종교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는 데 엄청난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복음이 퍼져나가도록 힘썼던 가장 위대한 사도이기도 합니다. 그는 오늘 본문 바로 앞인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이 자랑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자랑할 거리가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실제로 자랑 거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출생에서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미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역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특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로마 시민권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서 로마에서 파송한 군인의 최고통수권자인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을 갖기 위해서 많은 돈을 주고 그 로마 시민권을 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돈 하나 들이지 않고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익혔습니다. 당시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한다면 어쩌면 사도 바울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바리새파에 속하여 어려서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자기 스스로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율법을 잘 지킨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예수 믿는 사람이 된 이후로도 그는 어느 사도 못지 않게 복음에 열정을 가지고 사역하던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수없이 많이 매를 맞았고, 심지어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가 행한 공로로 따진다면 사도 바울만큼 큰 공을 세운 사람도 없고, 사도 바울만큼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유대교에 있을 때에나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나 그는 어느 누구 앞에서든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바로 앞인 고린도후서 12:1절 이하에 보면, 그는 셋째 하늘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신령한 영적 경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출신 배경에서나 학문에서나 열정에서나 어느 것 하나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습니다. 자랑할 거리를 찾는다면 그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꿀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배경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구보다도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노라고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자랑할 때 자신의 모자람이나 약점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사람의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강점과 남들보다 튀어난 점을 자랑하려 하는데, 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졌고, 더 많이 누리고 있는 것을 자랑하려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것 자랑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몸이 굉장히 약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게 정확하게 무슨 병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학자들 중에는 ‘아마도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강렬한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안질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 바울은 평생 간질로 고생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병이든지 간에 사도 바울은 그 병으로 평생 고생을 해야 했고, 그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 여러 차례 하나님께 기도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병든 몸이 아니라 건강한 몸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 훨씬 더 활동하기 좋을 것입니다. 먼 길을 다닐 때도 그렇거니와 건강한 몸으로 복음을 전해야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고쳐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자신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병을 고침받고 건강하면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겠다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병을 고쳐주시지 않은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네 병을 고쳐주지 않겠다. 내 은혜가 이미 네게 족하다.’ 그렇게 말씀하신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님께로부터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합니다.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독특한 경험을 하려고 하고, 그래서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은 스펙을 많이 쌓으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외모가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성형수술을 통해서라도 그 능력을 키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그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온전해 지는 것은 그가 가진 재능이나 학벌이나 배경이 아닙니다. 재능이나 학벌이나 배경으로 따진다면 사도 바울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그의 능력을 가지고는 그가 온전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주님의 일을 해야 하는 사도 바울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의 능력으로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내게 아무리 많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우리를 온전한 사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덧입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에만 우리는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능력은 우리가 약할 때 나타납니다. 우리 스스로 내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약하게 만드신 이유는 그 약함을 통해서 사도 바울에게 능력을 주시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신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온전하게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한 후에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주님의 능력이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도 자신을 잘 압니다. 자신이 약하지 않았다면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이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능력으로 일하려고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약점입니까? 여러분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처럼 건강입니까? 우리가 건강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능력의 사람으로 쓰십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게 약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부흥운동가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는 가난하게 자란 탓에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 헌신한 후에 그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내게 있는 약점을 탓하지 말고, 그 약점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우리를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본문 10절 마지막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우리가 약할 때 바로 그 때가 우리에게는 가장 강할 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병을 고쳐주지 않겠다.’는 응답을 받은 사도 바울이 깨달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약점이 있지 않다면 내가 너무 자만해질 것이 분명하다.’는 자기 인식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너무 과신합니다. 다른 사람이 죄를 짓고 유혹에 넘어갈지라도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잠언 14:9절에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죄를 심상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죄를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저 정도의 죄는 내가 이길 수 있어. 저런 죄가 나를 어떻게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유혹하는 죄를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게 미련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향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약점이 있을 때 우리는 그런 미련한 자로 살지 않게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건강이 온전치 못한 것이 약점인데, 그 약점 때문에 자신은 자만에 빠지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은 사람들 앞에 자랑할 것을 내세운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하고, 그를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이 머리를 듭니다. ‘너는 이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야. 너는 이렇게 큰일을 한 사람이야. 너는 충분히 사람들에게 박수 받을 자격이 있어. 너는 어깨에 힘줘도 될 만큼 큰 사역을 감당했잖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생각이 자꾸만 자신을 지배하려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내 안에 있는 거짓된 자아는 ‘너는 그렇지 않을 거야. 너는 정직한 사람이잖아.’라고 말할지라도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인 정직한 자아는 ‘너도 인간이야. 너도 충분히 교만해질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야.’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들을 줄 안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구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덴마크 사람들의 교훈처럼,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의 좋은 점만 보려고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으로만 작용하면 좋을 텐데, 그것이 때로는 우리를 자만하게 만듭니다. 남들 앞에서 으스대게 만들기도 합니다. 교만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죄성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 죄성이 자꾸만 우리를 죄 아래로 끌어가려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마음을 품고 살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자꾸만 우리에게 악한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되뇌여 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에 ‘저 사람이 먼저 너에게 손 내밀어야 하는 거야. 너는 사랑받아야 할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랑의 손을 내밀려다가도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와 주기를 기다립니다.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바꿔주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약점입니다. ‘나도 이렇게 부족한 사람인데...’라는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자만의 덧에 걸려 거짓된 인생을 살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약점을 통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 약점을 통해서 못난 우리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점을 안고 살도록 하신 이유는 우리로 절망하고 낙심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보고 ‘너는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야!’라는 생각을 갖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비굴하게 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된 신앙은 우리에게 약점이 있음은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약점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 약점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약점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아니 약점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고, 그런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됩니다.
2007년이 우리에게 준 유산 /왕상2:1-4/ 안효관목사 2018-01-02 17:42:29 read : 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며칠 전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재미있는 기사를 발표했습니다. 세계적인 호텔체인 힐튼(Hilton)의 창업주이자 현재 최고경영자인(CEO) 배런 힐튼((William Barron Hilton I)이 자신이 가진 재산이 약 23억 달러(2조원)인데 그 재산의 97%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는 기사였습니
2007년이 우리에게 준 유산 /왕상2:1-4/ 안효관목사 2018-01-02 17:42:29 read : 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며칠 전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재미있는 기사를 발표했습니다. 세계적인 호텔체인 힐튼(Hilton)의 창업주이자 현재 최고경영자인(CEO) 배런 힐튼((William Barron Hilton I)이 자신이 가진 재산이 약 23억 달러(2조원)인데 그 재산의 97%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배런 힐튼이 자신의 재산 거의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사실보다는 그의 재산을 상속받을 여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배런 힐튼의 재산을 상속받을 여인은 그의 손녀딸인 올해 26살의 패리스 힐튼(Paris Whitney Hilton)입니다. 지금까지는 패리스 힐튼이라는 여인이 할아버지의 재산 대부분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제 그녀가 재산을 전혀 상속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할아버지 힐튼이 손녀딸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손녀딸이 지금까지 난잡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한 번 입은 옷은 두 번 다시 입지 않고, 애완견인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기 위해서 산 가방이 300만 원 짜리 명품가방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사생활이 너무 난잡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패리스의 사생활이 너무 난잡해 말로 표할 수 없는 치욕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무면허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되어 말썽을 일으키는가 하면 이미 19살 때에는 섹스비디오를 찍어 난잡한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손녀딸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차라리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할아버지 배런 힐튼의 이번 결정은 어떻게 보면 바른 정신으로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식이나 후손들이 어떻게 되든지 유산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는 멋진 결정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애써 벌어 놓은 막대한 재산을 물려줌으로써 그들의 미래가 불행해지고 그들의 인생이 파탄을 맞게 될게 뻔한데 그럼에도 그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니지요? 우리가 고생한 것처럼 고생하지 않고 그래도 안정적으로 생활하도록 돕기 위해서 무언가를 물려주려고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나 후손들이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 유산을 물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유산은 단지 재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아름다운 신앙과 삶을 개척하는데 필요한 도전적인 정신을 물려주는 것은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유산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를 의지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삶을 책임질 줄 아는 책임감을 심어주는 것,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베풀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 그런 것 역시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이 넓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비전과 꿈을 심어주는 것 역시 귀한 유산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2007년이라는 귀한 1년의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1년을 돌아볼 때에 후회가 더 많습니까? 감사한 일이 더 많습니까? 슬펐던 일이 더 많이 기억에 남습니까? 기뻤던 일이 더 기억에 많이 남습니까? 보람된 일을 했다는 따뜻한 마음이 더 많습니까? 아니면 질투하고 분쟁했던 가슴 아팠던 일이 더 많았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감사할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기뻤던 순간만 있을 수도 없고, 늘 보람된 일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으면 기뻤던 순간도 있고, 가슴 아팠던 순간이 있었으면 눈물 나도록 고마웠던 순간도 있습니다.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일들도 있었을 것이고 정말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추억거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았던 일이건 좋지 않다고 생각되었던 일이건 2007년 한 해를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그 모든 것은 소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엄청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에 있었던 모든 순간들이 다 소중한 유산입니다. 기뻤던 일이든 가슴 아팠던 일이든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이라고 불리는 다윗왕이 자신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는 장면입니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오면서 왕이 된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간략하게 몇 가지를 유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한 첫 번째 말은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 마지막에서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너는 강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남자가 되어라.’ 그런 뜻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말을 근거로 해서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 왕이 된 솔로몬의 나이가 아주 어렸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아마도 12살에서 14살 정도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채 20살도 되지 않는 솔로몬에게 다윗이 왕위를 물려주면서 첫 번째 유언으로 한 말은 ‘힘써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런 말은 한 것은 비단 솔로몬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말씀을 이렇게 연결시킵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 대장부가 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대장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다윗과 같이 유언하고 다윗과 같은 귀한 유산을 물려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잘 지켜 행하는 것만큼 인생을 담대하게 사는 방법이 없단다.’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담대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겁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 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우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당시 여호수아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자기 곁에 없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역할을 다 끝내고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이제 모세가 했던 일을 자신이 해야 합니다. 자신은 모세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합니다. 광야 40년 동안 모세 곁에서 모세가 해 온 일들을 지켜보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잘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6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여간 부담이요 두려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내가 모세를 통해 말하신 그 말씀만 잘 지켜 행하면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네 힘이나 네 지혜로 이 백성을 인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단지 내 일꾼일 뿐이다. 내 말만 잘 듣고 지키면 내가 형통의 길로 인도해 주마.’ 오늘 본문에서 다윗도 아들 솔로몬에게 그렇게 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네가 어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너의 길을 형통함으로 인도해 주실 거다. 걱정하지 마라. 마음을 담대히 하라. 대장부답게 담대하라.’ 여러분, 2007년 한 해를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이 형통의 길이요 축복의 길임을 깨달으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2007년에 최고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하셨다면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길만이 여호수아의 길처럼, 또 솔로몬의 길처럼 형통의 길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이틀 남은 2007년이 지금까지 살아온 363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 훨씬 더 중요한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한 두 번째 내용은 진실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며 솔로몬에게 이렇게 전달해 줍니다. 본문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실한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뿐만 아니라 네 후손에게도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진실된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안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범한 죄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입니다. 남의 아내를 범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충신이었던 우리아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세운 모든 계획이 완벽하여 자신의 범죄가 감추어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의 죄악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자신의 범죄와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구차하게 변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하나님 앞에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3,6,10)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대로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도 직접 경험했습니다. 자신은 한 명의 남의 아내를 범했지만 그 사건 후에 자신은 두 배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딸 다말이 아들 암논에게 당했고, 자신의 후처가 백주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에게 당하는 꼴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자신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 한 사람을 죽였지만, 그 사건 후에 그는 아들 둘을 잃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진실된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의 삶 가운데 혹 실수하고 죄를 지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내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는다면 나의 실수와 잘못은 나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지난 1년을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완벽하게 살았다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 하나도 없이 깨끗한 삶을 살았노라고 장담하실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실수합니다. 죄와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감추고 덮어두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또 감추고 싶은 허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깨끗이 용서받고 성숙한 신앙으로 새로운 해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그런 실수와 잘못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2007년의 세밑에 모두 묻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잘못과 실수들이 오히려 내 삶 가장 밑바닥에서 묻혀져 썩음으로 해서 2008년을 더욱 성숙하게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다 묻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2007년도에 우리가 행했던 실수와 잘못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큰 믿음의 유산이 될 것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들도 있었고, 가슴 졸이게 한 사건들도 많았습니다. - 지난 4월에는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한국계 학생이 쏜 총기난사로 33명이 목숨을 잃었던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 지난 7월에는 분당 샘물교회에서 보낸 아프간 봉사단이 탈레반에게 피랍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두 명은 살해되고 나머지는 전원 무사히 귀환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석방을 위해 가슴 졸이며 기도했고, 그 사건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 전 동국대 교수였던 신정아씨의 학력 위조 사건을 시작으로 불거진 학계와 연예계 심지어 종교계까지 번진 학력 위조 사건은 우리 시대의 도덕성을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 또 최근에 발생한 서해안 기름유출사고는 바다뿐만 아니라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우리 후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 그렇게 우리를 슬프게 했던 사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월세를 살면서 지금까지 40억 원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돈을 사회에 기부했던 아름다운 신앙인 가수 김장훈씨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가슴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 또 지난 19일에 새로운 대통령이 뽑히면서 우리에게 2008년과 앞으로의 5년에 새로운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기대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들이 단순히 지나간 역사의 한 사건으로만 남는다면 그건 역사를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좋지 않는 사건 속에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고, 아름다운 미덕을 통해서도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야 할 시대적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사건이든 나라나 세계적인 사건이든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배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수를 통해서도 아름답게 살아갈 삶의 방법과 방향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서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한 많은 일들을 통해서 2008년을 살아가야 할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건 2007년이 우리에게 남겨준 아름다운 유산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바로 이어 5-9절에서 개인적인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7절에서 다윗은 바실래의 아들들을 잘 돌보아 주라고 부탁합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바실래(또는 바르실래)가 다윗을 도와주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 길을 도와주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궁으로 돌아올 때에 다윗이 그 은혜가 고마워 바실래를 왕궁으로 데리고 가려 했지만, 80세의 노인이었던 바실래는 다윗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합니다. 다윗은 그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하고 솔로몬에게 ‘비록 바실래는 죽었지만 그 아들들에게 네가 내 대신 은혜를 갚아다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5-6절, 8-9절에서는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먼저 요압 장군에 대해서 말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훌륭한 장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자신의 권력을 지나치게 남용하여 다윗의 또 다른 충성된 신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로 인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통치 시대를 평안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다윗의 그런 노력과 계획들이 요압으로 인해 방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직접 그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지 않고 넘겨 왔지만 ‘솔로몬 네가 그 죄에 따라 처리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8-9절에서는 시므이에 대한 복수를 부탁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몸을 피신할 때에 다윗을 저주했던 사람입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자 다윗과 함께 가던 신하들이 당장 칼을 빼 시므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지금 치루고 있다고 생각했고, 시므이의 저주가 단순한 그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을 앞에 두고 그 때 시므이가 했던 그 말 - 저주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므이를 네가 대신 죽여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어쩌면 성군 다윗답지 않는 유언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비록 자신이 임종을 맞게 되지만 자신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고마움의 감정과 분노의 감정들을 다 털어버리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마지막에 후회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2007년을 보내고 있는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원수를 갚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도 우리 마음에 풀어내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있다면 2007년이 다 가기 전에 다 털어버리자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귀한 사랑과 은혜가 있다면 감사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정말 힘들었을 때에 누군가가 다가와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며 용기를 주었던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에 두려움과 고민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로 위로해 주었던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 조용히 다가와 내게 힘을 실어주고 용기를 내도록 나를 도와준 사람이 있습니까? 울적할 때 내게 미소를 짓도록 웃음을 선사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까? 올해가 가기 전에 그분들에게 ‘그 땐 정말 고마웠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선물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말로, 또는 전화로 고마웠다고 내 마음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2007년은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와 마음 상한 일이 있다면 내년까지 가져가지 마시고 다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일지라도, 내게 손해를 끼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불편한 감정을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복수하는 것만이 감정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는 오히려 더 큰 복수의 감정만 남길 뿐입니다. 화해하는 것만이 상한 감정과 분노의 감정을 이겨낼 수 있는 해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그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향하여 화해의 손길을 내 밀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 가운데서도 우리의 죄와 허물을 따져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내가 살기 위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우리를 향해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다시금 십자가의 못 박는 끔찍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저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너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으시고 그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고 내 마음에 상처를 준 것 못지 않게, 우리도 주님을 힘들게 하고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앙갚음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조금만이라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내가 먼저 찾아가서 ‘우리 이제 서로 화해하자’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먼저 눈길 주면서 ‘옛날의 모든 서먹서먹하고 소원했던 마음을 다 털어버리자’고 말하고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2007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2007년은 단 이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이틀의 시간이면 지나온 한 해를 살았던 우리의 삶에서 아름다운 유산을 찾아낼 수도 있고, 더 아름다운 유산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던 이 2007년 한 해를 결코 헛된 날들로 버리지 않도록 2007년 마무리를 잘 하시고, 희망과 기쁨 가운데 2008년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3.1절/ 능하신 하나님께로 /사10:12-21/ 안효관목사 2019-05-22 00:46:46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던 시절, 독립을 간절히 갈망하던 우리 선조들은 일본의 총칼 앞에서도 ‘대한 독립’을 외치며 거대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1운동입니다. 3.1만세운동이 시작되고 난 직후 기독교인들에게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문서가 배포되었습니
3.1절/ 능하신 하나님께로 /사10:12-21/ 안효관목사 2019-05-22 00:46:46 read : 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던 시절, 독립을 간절히 갈망하던 우리 선조들은 일본의 총칼 앞에서도 ‘대한 독립’을 외치며 거대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1운동입니다. 3.1만세운동이 시작되고 난 직후 기독교인들에게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문서가 배포되었습니다.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것은 1919년 3.1운동 당시 뉴욕의 ‘대한인독립단’(The Korean Independent League)에서 작성하여 3월 3일 전국에 배포한 것으로 일종의 ‘3.1운동 행동강령’과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존경하고 고귀한 독립단 여러분이여, 어떤 일이든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니, 독립의 주의를 손상할 뿐이니 행여 각각 주의할지며, 신자는 매일 세 차례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을 돌아가며 다 읽을 것이라.” 여러분, 3.1만세운동은 철저한 비폭력 저항운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일본이 미웁더라도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는 것은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고,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시 우리 국민들이 추구했던 독립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데 오히려 그 정신과 의도를 손상할 뿐이기 때문에 폭력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정직한 정부나 대외세력에 대한 시민들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3.1운동을 시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일본에 항거하는 중국의 5.4운동과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인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에 이어, 1960년대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을 펼치며 비폭력 저항운동을 했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3.1만세운동이 비폭력 투쟁운동의 효시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비폭력저항 운동에는 엄청난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비폭력저항 운동의 효시인 3.1만세운동 때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엄청나게 희생당했습니다. 일본의 공식 통계로는 사망자가 7,500명이라고 발표했지만, 박은식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2만 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일본은 부상자는 1만5천 명이라고 했지만 부상자 역시 그보다도 훨씬 더 많았을 것이고, 붙잡혀 감옥에 갇힌 사람이 무려 5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희생을 치른 3.1만세운동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독립을 얻어낸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3.1만세 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아주 큽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해인 1918년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대열에 서면서 우리나라에서 독립에 대한 어떤 움직임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신민지체제가 완전히 완성된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1919년 3.1운동을 통해서 조선은 결코 일본의 일부일 수 없고, 엄연한 자주국이 되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오랜 후이지만 1943년 카이로 선언에 ‘조선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밟아 독립시킨다.’는 문구가 포함된 것도 3.1운동을 통해서 촉발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을 세계가 알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단 통고문’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성도들은 매일 세 차례씩 기도하고, 주일에는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권고하면서 월요일에는 오늘 본문이 포함된 이사야 10장을 읽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한 이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여 년 전에는 중동 지역의 대부분을 앗수르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중국에 비견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가 앗수르 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앗수르 제국은 잔인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 앗수르에 의해서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통치할 때까지만 해도 비록 영토는 크지 않았지만 주변의 어느 나라도 쉽게 넘보지 못하는 힘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쳐 잘 보이고 싶을 정도로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성했던 이스라엘이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둘로 나눠지고 말았습니다. 북쪽 열 개 지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북이스라엘이고,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남 유다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눠지면서 이스라엘은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북이스라엘은 나라가 세워진 지 200년 만인 주전 721년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만 것입니다. 성경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말씀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이었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려고 했던 북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은 그 기세를 몰아 남 유다까지 멸망시키기 위해서 남 유다를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당시 남 유다는 거대한 앗수르 제국에 맞서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의 침입에 남 유다 백성들은 두려워 떨 뿐입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앗수르를 물리쳐 주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본문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벌하신 이유는 (쉬운 표현으로 말한다면) 앗수르가 너무 건방지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오만방자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13-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중동지역을 비롯한 세계 각 나라를 점령한 것이 자기들의 힘이 강해서 라는 것)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여러 약한 나라들을 점령하여 자기들의 손아귀에 다 넣었다는 것)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자신이 마치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한 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모두 굴복시켰다는 것)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주변 나라들을 점령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고 재물을 빼앗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는 것) “ 여러분, 얼마나 건방진 말입니까? 자신의 힘으로 세상 모든 나라를 제 손아귀에 넣었다고 뻐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임에도,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능력,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앗수르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앗수르는 얼마 못되어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십니다. 거만한 사람을 반드시 꺾으십니다. 오만에 가득한 권력은 아무리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특별히 자신들이 가진 힘이나 권력을 이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기들의 욕망과 이익을 갈취하는 사람이나 민족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세상은 자기도취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권력을 손에 쥐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인 양 권력을 휘드릅니다. 강대국들이 약소국가를 경제적으로 압력을 주면서 압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2,700년 전의 앗수르처럼, 오늘날 강대국들이 약소국에 대해 압력을 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처럼 자기들의 힘을 가지고 힘없는 사람, 힘없는 나라들을 압박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독립단 통고문’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앗수르의 모습에서 일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랬기에 매주 월요일이 되면 이사야 10장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교만한 목이 꺾일 일본을 생각했습니다. 오만한 권력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리쳐 주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그 어떤 세상 권력도, 강대국도 하나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이나 된 듯이 건방지게 굴며, 힘없는 나라들을 괴롭히는 나라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물리치십니다. 3.1운동 100주년 맞는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을 기억하며, 오만한 자를 물리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역사는 강대국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만방자한 세상의 권력을 꺾으시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까지는 그 권력의 힘이 여전히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믿음의 사람입니다. 내 삶이 평안하고 아무런 걱정이나 근심되는 일이 없을 때에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힘들수록 더욱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길로 갈수록 우리는 더욱 확고한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이것이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들을 의지했습니다. 그 강대국들에게 잘못 보이면 해를 당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을 둘러싼 강대국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남쪽 애굽을 기대어 북쪽의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북쪽의 강대국인 앗수르 제국이나 바벨론 제국을 잘 섬겨야 살아남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느 편에 서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백성들이 두 패로 나뉘어져 서로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고 다투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통적인 강대국인 남쪽의 애굽의 손을 빌어 안녕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북쪽의 강대국인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에게 잘 보여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해답은 있습니다. 해답은 남쪽의 애굽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쪽의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해답을 제시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에게 잘 보이려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애굽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아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앗수르의 침략에도 살아남았던 남 유다도 결국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북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가 남 유다를 침공해 들어왔을 때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그 앗수르 제국과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선택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방법은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의 군대 185,000명을 하루아침에 송장이 되게 하심으로 남 유다를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만을 붙잡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런 역사적 경험이 있는데도 어리석은 남 유다 백성들은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 놓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긴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놓고 갈팡질팡하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1945년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게 하심으로 일본의 제국주의를 우리나라에서 물러가게 해 주셨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힘으로 일본으로부터 독립되고 해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독일과 일본을 패망하게 하심으로 우리는 어부지리로 독립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수없이 많은 독립운동이 있었고, 엄청난 독립운동가들이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분들의 수고와 희생도 기억하셨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 땅에 자유를 주시라고 기도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때문에 우리에게 독립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선택에도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27일)과 목요일(28일)에 북미 정상회담이 베트남에서 열립니다. 두 번째로 열리는 이번 회담에서 한반도에 평화의 기틀이 놓여지는 중요한 성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미국이 자기들의 힘으로 비핵화와 평화구축이라는 역사적인 큰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미국도 자기들에게 이익이 없다면 언제든지 일을 틀어버릴 수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누구입니까? 사업가 출신입니다. 철저하게 사업적 마인드로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한반도를 위해서 희생해줄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우리가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 한국교회가 그리고 한국교회 성도들이 더욱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중국이나 미국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냐 세상의 힘이냐’를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을 의지한다고 우리나라가 평화를 되찾는 것도 아니고, 신흥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과 더 친해져야 우리가 살아남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 그렇습니다. 미국이 아닙니다. 중국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앗수르의 손아귀에서 남 유다를 건져주시면 살아남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살아남을 자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매를 맞고 난 후에 살아남은 자는 당연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매를 맞기 전에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더 큰 고난과 더 큰 시련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아니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힘들었을 때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앙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너무나도 풍요로워진 시대에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지지 않았습니까? 너무나도 살기 좋은 시대가 되어서 이제는 신앙생활을 목숨 걸고 하는 시대는 지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이 취미생활 정도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난 후에 예배를 드립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한 후에 봉사도 하고 섬기는 일도 합니다. 내 시간 다 빼놓은 다음 시간이 나면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에 절박함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없습니다. 하나님보다는 돈을 더 신뢰하고 돈을 더 좋아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남은 방법은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돈을 붙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여러분, 남북이 화해무드가 되고 평화정착을 위한 로드맵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안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사회를 흔드는 여러 가지 혼란을 생각해 보십시다. 빈부격차가 날로 심각해지면서 생겨난 빈부갈등, 노인과 젊은이의 세대갈등, 남자와 여자의 성(姓) 갈등,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 오랫동안 우리를 갈라놓은 지역갈등 등 우리 사회를 평안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갈등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다. 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으십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우리를 맡기십시다.
3.1절과 애국애족 /느1:4-11/ 이기복목사 2018-04-04 09:35:00 read : 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3월 첫 주일이고, 3.1절 9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주일입니다. 3.1절, 우리 대한민국 역사가 존속하는 한 길이 남을 3.1절 독립운동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그 정신이 명시되어 있으며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 중의 유산입니다. 우리나라에 해방일인 8.15 광복의 기쁨과 감격도 3.1독립운동과
3.1절과 애국애족 /느1:4-11/ 이기복목사 2018-04-04 09:35:00 read : 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은 3월 첫 주일이고, 3.1절 9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주일입니다. 3.1절, 우리 대한민국 역사가 존속하는 한 길이 남을 3.1절 독립운동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그 정신이 명시되어 있으며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 중의 유산입니다. 우리나라에 해방일인 8.15 광복의 기쁨과 감격도 3.1독립운동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3.1독립운동의 정신은 지금까지 불의에 대하여는 분연히 일어나 항거하고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위기가 왔을 때마다 모든 국민이 단결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야 할 시기입니다.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경제위기가 우리의 생각보다 심각한 현실이고 북한의 핵위협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때 우리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북한 지도자들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국민들은 절반이 다 굶어 죽어 가는데 핵무기가지고 위협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는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싸움질만 하고 있습니다. 3.1절 당시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때였습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는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애국지사들과 종교인들은 분연히 일어나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1. 3.1운동당시의 상황 기미년(己未年) 3월 1일 오후 2시, 종로의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점화된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1년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황제를 일본이 독살하였다는 풍문이 돌아 민심이 요동하였고 더구나 그해에 흉년까지 겹쳐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운동은 3월 1일부터 3개월 동안의 일제측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에서 집회횟수가 1542회, 참가 인원수가 202만 3000명, 사망자 수가 7,509명, 부상자가 15,9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의 살아 있는 불씨가 되어 그해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있습니다. 특히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은 전체가 종교인이었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이 제일 많아 절반에 가까운 16명이었습니다. 16명 중 목사가 10명, 전도사가 3명, 평신도가 3명이었습니다. 비록 일본의 무차별한 무력 앞에 진압되고 독립은 이루지 못했지만 위대한 한민족의 자주의식과 독립의식을 세계만방에 드러내게 되었고 대내적으로 민족의 결속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볼 때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애국 애족하는 길은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저한 신앙인이었으며 애국자였던 느혜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2.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느혜미야(1:1-11) 선지자 느혜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몇몇 사람들을 통하여 조국의 형편이 말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이 황폐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느혜미야는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말씀했습니다. 수일 동안을 슬퍼하며 금식하여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치욕을 당하고 모든 것을 다 빼앗겼을 때 기독교인들은 소수였지만 금식 하고 철야를 하며 죽음을 무릎 쓰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나라 잃고 방황하는 불쌍한 백성들은 오직 교회를 의지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3.1절을 맞아 기도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 3.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예레미야(2장) 위기를 맞이한 조국을 위해 기도한 느혜미야는 기도로 그친 것이 아니고 자신을 바쳐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느혜미야는 신흥 강대국 페르시아 왕국의 고위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소원은 오직 애국 애족이었습니다. 왕에게 “자기를 유다 땅 예루살렘에 보내 무너진 성을 재건하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왕이 조서를 내려 느혜미야를 예루살렘에 보내면서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군대장간과 마병을 보내어 느혜미야와 함께 하게 하였습니다(느 2:9). 뿐만 아니라 성을 재건하고 성전을 수축하는 일에 사용할 재목까지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요 특별하신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금식하며 기도한 느혜미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성전과 성을 건축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허락하해 주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적입니다. 4. 동족을 사랑하고 동고동락(同苦同樂)한 느혜미야 폐허된 성을 재건하고 불탄 성전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 이었지만 느혜미야는 백성들과 동고동락하길 원했습니다. 모세도 에스더도 동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이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그 것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진정 애국자입니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애국지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마든지 편하게 대우 받으며 살 수 있는 길을 거부하고 동족과 함께 고난당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고 오늘의 세계적인 강대국이 된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이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동족과 동고동락을 함께 나누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끝으로 이 시대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느혜미야는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동족이 느혜미야의 재건운동을 방해하고 모함하는 상황에서 그들과 싸워 결국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근대사 100년동안 한국교회는 이 사명을 감당하여 왔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정말 위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부끄러운 치부를 많이 들어냅니다. 이제 분연히 일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90년전 3.1운동 당시의 그 정신과 희생과 사랑을 다시 불 지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사야 60:1절의 말씀과 같이 “한국교회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3.1절에서 얻은 교훈 /레19:13-14/ 이정익목사 2015-05-19 16:29:42 read : 2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놓고 얘기했습니다. "6·25때 얼마 나 배가 고팠는지 아느냐, 밥이 없 어서 사람들이 굶기를 밥먹듯 했단 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 리며 되물었습니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지 왜 굶었어요", 그러자 할 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밥도 없는데 어떻게
3.1절에서 얻은 교훈 /레19:13-14/ 이정익목사 2015-05-19 16:29:42 read : 2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놓고 얘기했습니다. "6·25때 얼마 나 배가 고팠는지 아느냐, 밥이 없 어서 사람들이 굶기를 밥먹듯 했단 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 리며 되물었습니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지 왜 굶었어요", 그러자 할 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밥도 없는데 어떻게 빵이 있었겠느냐". 그러자 아이는 또 "그러면 라면 먹 으면 되지 않아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그 시절의 배고픔 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며칠 전에 3·1절 81돌 기 념일을 보냈습니다. 3·1절은 이제 옛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흐려져 가고 우리네 관심 속에서도 지워져가고 있습니 다. 그 역사가 벌서 81년이나 되었 습니다. 어떤 아버지들은 3·1절이 무슨 날이냐고 아이들이 물으면 "일 제 때 우리 조상들이 탑골 공원에서 독립 만세 부른 날이다."라고 대답 해 주는 게 전부입니다. 특별한 관 심도 없고 역사적인 의의도 없습니 다. 그런데 이 날은 그렇게 쉽게 잊 을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근대역사 가운데 두드러 진 날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3·1절이고 또 하나는 8·15 입니 다. 이 두 날은 우리 신앙인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 이 이 민족의 역사 가운데 깊이 섭 리하신 날이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련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두 날 은 우리 기독교가 꼭 되새기고 교훈 을 받고 넘어가야 할 날입니다. 3·1절이나 8·15는 모두 자유와 평등과 관계가 있는 날입니다. 인간 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입니다. 약자는 반드시 보 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성경말 씀의 정신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들 을 기록한 아주 소중한 책입니다. 여기 보면 "부약사상(扶弱思想)"이 나오고 있습니다. 약한 자를 도우 라는 정신입니다. 성경 속에는 이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강 자에게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없 습니다. 다만 약자에게는 "이렇게 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 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말씀입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 탈하지 말며 품삯을 떼먹지 말며 너 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며 네 하나님 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이 "부약사상"입니다. 이를테면 "약자 보호사상" 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한가지 경고가 들어 있습니 다. 그것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고 핍박하면 내가 심판하겠다"는 경고 입니다. 일본사람들이 36년 동안 우리민족 을 아주 가혹하게 압제했고 지배했 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우리의 주권 과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이름과 성 과 이 땅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약한 나라라고 얕잡아보고 통째로 우리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했습니 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부약사상을 깡그리 무시한 것입니다. 그런 일본이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 왕이 있어서 는 안됩니다. 그래서 고종을 독살하 려고 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밥을 먹을 때마다 항상 개를 옆에 두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개에게 음식을 먹여서 별 이상이 없 으면 그제서야 안심하고 먹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위협을 당하면서 살 았습니다. 일본이 당시에 한일합병을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민비였습니다. 민비 는 아주 똑똑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냥 밀어붙이면 뜻대로 될 줄 알았는 데 똑똑한 여인 하나 때문에 가로막 혔습니다. 그래서 민비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고 군인들을 그 방에 집어 넣었습니다. 군인들은 민비가 자고 있는 침실에 군화발로 들어가 민비 를 칼로 찌르고 썰고 찢었습니다. 그리고는 시체를 녹지원으로 끌고 나와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기름을 붓고 불태웠다고 합니다. 일본이 이렇게 잔학하게 우리를 압 제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무시했습 니다. 인권이고 주권이고 모든 것을 약탈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 을 하나님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하 나님이 명령하신 이 부약사상을 송 두리째 무시해 버린 그들을 하나님 이 심판해서 그 나라가 잿더미로 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이같은 압제를 받다가 견디지 못하 여 들고 일어난 것이 3·1 운동입니 다. 지금 그 1세대들이 모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역사 를 통해서 들은 얘기입니다. 그렇지 만 우리는 이 날을 그냥 지나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3·1절이라는 지 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 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고난은 때로 사람으로 하 여금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입니 다.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난을 거치면 사 람이 다듬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성 경 전도서 7:14절을 보면 "너희는 곤고하거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은 사람은 생각이 성숙해집니다. 어른스러워집니다. 고 난을 겪고 나면 상상도 못했던 생각 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고난이 지 혜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독립선언문을 보면 참 문장이 아름 답습니다. 문학적으로도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그 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책 상 앞에 앉아서 학문적으로 연구하 고 다듬어서 나올 수 있는 글이 아 닙니다. 그 글 속에 절절한 고난이 배어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과한 후에 나오는 인간의 가장 소중하고 근본적인 외침이 거기에 담겨져 있 습니다. 우리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지금 3 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시인이 다 됐습니다. 어른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집에 있으면 상상도 못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소중함, 집의 소중함, 음식의 소중 함,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구구절절 이 철든 편지를 썼습니다. 철없던 아이가 군대에 가서 고생을 조금 맛 보더니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삶에 서 오는 어려움과 고난은 이렇게 사 람을 변화시킵니다.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보면 아들 에 대한 부성애가 절절이 흐르고 있 습니다. 그 기도문은 어느 날 번뜩 생각나서 쓴 기도문이 아닙니다. 전 장(戰場) 터에서 수많은 아픔과 죽 음을 보면서 체험한 것을 쓴 것입니 다. 보통 때는 그런 기도문이 나오 질 않습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남자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절실 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기도문 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을 보면 절절 이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 랑, 헌신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것 도 그가 참담한 방탕생활을 했기 때 문에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불 후의 명작으로 우리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존 밀턴의 "실낙원"을 말합니다. 이 작품들도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이 암 흑과 같은 인생의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가면서 쓴 책들입니다. 한 사람 은 감옥의 고난을 겪으면서, 또 한 사람은 노년에 시력을 상실하는 아 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의 산물로 만 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흑인영가를 들어보면 심금 을 울리는 호소력이 들어있다는 것 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흑 인들에게 탁월한 음악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노예생활을 하면 서 아픔을 당하고 압제를 당하면서 그 영혼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고백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것입 니다. 그래서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 각하게 만듭니다. 3·절이 일어나기 까지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곤혹을 치렀습니까. 이 날은 우리 민족이 아픔을 당하면서 겪은 것의 발로입 니다. 유순했던 민족성으로 보아 우 리 선조들이 어지간하면 봉기를 일 으킬 사람들이 아닙니다. 너무 압제 를 당하니까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많은 생각 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3·1운동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 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3·1절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 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상들 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날입니다. 평등, 자유는 하나님의 생 각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최 남선의 글을 보면 "평등, 자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는 그 말 을 기독교에서 배웠다고 고백했습니 다. 최남선이 살아가던 그 시대는 평등, 자유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 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그 개념이 퍼지게 된 것 입니다. 기독교를 통해서 그 말과 개념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리입니다. 평등이 없고 자유 가 없는 것은 짐승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노예의 세계입니다. 짐승의 세계에는 힘만 있을 뿐 자유가 없습 니다. 죄인들의 세계에도 자유가 없 습니다. 평등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 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자유부터 박 탈합니다. 짐승, 노예, 죄인은 이렇 게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자격 이 없습니다. 인간을 무자비하게 압제하고 자유 를 뺏고 억압하면 그 억압자를 하나 님이 심판하십니다. 역사를 보십시 오. 독재자는 그 권세가 하나같이 길지 못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 님의 심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독재자들의 말로를 보면 하나 같이 비참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 셔서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군의 삯을 떼먹지 말라, 귀먹은 자를 조롱하지 말라. 소경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모두 부 약사상, 즉 약한 자를 억압하거나 어려움을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거나 억압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 입니다. 힘없는 사람의 돈을 떼먹으면 당장 은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일군의 품삯을 떼어먹으면 당장은 돈이 쌓 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먼 인생 길을 살다보면 하나님이 반드시 몇 배로 심판하십니다. 힘없는 사람 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무시하면 하 나님이 대신 그 억울함을 갚으십니 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상입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무자비하게 억 압하고 짓밟았습니다. 우리 민족을 아주 우습게 여겼습니다. 밟으면 아 무 소리 못하고 밟힐 줄 알았습니 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용렬하고 무지해도 밟으면 일어나게 되어 있 습니다. 들풀도 밟으면 죽지 않고 되살아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 신 정신이고 생명력입니다. 하물며 인간이 그렇게 쉽게 꺾이고 죽겠습 니까. 그래서 억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억압당하는 자 에게는 힘을 더해주십니다. 억압자 는 심판하고 당하는 자에게는 하나 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억압당하고 살던 우리 선조 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입니다. 모두 흥분하니까 삽을 들고 곡괭이를 들 고 작대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본이 깜짝 놀랐습니 다. 참 무서운 민족입니다. 우습게 여겼는데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 주 무섭게 나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3·1운동입니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 3·1절은 알아주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지난 역사를 조용히 되돌아 보면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생각해 보면 3·1운동은 우리 선조들이 일 으킨 운동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 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서 3.1절은 그냥 넘길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약자가 압제 당하면 대 신 소리지르는 사람이 있다"는 점 입니다. 누가복음 19:40에 "이 사람들이 소 리지르지 아니하면 돌들이 소리지르 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소리 질 러야 할 사람을 소리지르지 못하게 하면 대신 다른 사람들이 소리지른 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압 제하고 억압하면 대신 다른 사람들 이 소리질러 돕게 만드십니다. 내가 소리지르지 못할 상황이면 누군가가 대신 소리를 질러 준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소리질렀습니까. 그러면 일본은 쫓아다니며 소리지르 지 못하게 감시하고 윽박질렀습니 다. 그래서 세상 누구도 우리의 아 픔을 몰랐습니다. 모두 소리지르다 지쳐서 쓰러지고 낙심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던 스코필드 선교사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리 민족의 참상들을 사 진에 담아 외국통신에 전해주었습니 다. 우리에게 언로가 막히고 길이 막히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을 들어 쓰시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렇 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또 우리들이 소리지를 기운도 없을 때 대신 소리질러준 사람이 있습니 다. 그 사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 입니다. 그는 세계 만국평화회의에 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해 주었습니 다. 우리가 하지 못하니까 그 사람 이 우리를 대신해서 소리를 질러 준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세계 여 러 나라가 비로소 우리 나라에 관심 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용기를 얻어서 3·1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가만히 보면 약자들이 소리 를 질러도 누구 하나 들은 척도 하 지 않습니다. 재벌들이 꿈쩍도 안 합니다. 권력자들이 관심도 갖지 않 습니다. 그러니까 대신 소리질러 주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시민 단체들입니다. 약자들이 권력자나 재벌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호소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까 시민 단체들이 나서서 벌떼같이 소리를 질러줍니다. 그들이 들고일어나니까 재벌들도 권세를 가진 정치가들도 무시 못하고 들어주지 않습니까. 3·1운동은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시민운동입니다. 몇 사람 안 되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는데도 세계에 메아리쳐 되돌아온 운동이었 습니다. 그래서 나는 3·1절, 8·15 만 되면 괜히 흥분하게 됩니다. 그 래서 나는 매년 이 두 날이 되면 빼 놓지 않고 설교를 합니다. 그만큼 그 날들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면서 늘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 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떼먹으면 잠시는 이익입니다. 그런 데 하나님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당장은 수지 맞는 것 같지만 멀리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릅 니다. 더구나 약자, 가난한 자의 돈 을 떼먹으면 그 심판은 더 커집니 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을 무시하면 그 것도 심판 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 들의 그 아픔과 참상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약자가 보호되고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 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 들에겐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시고 약한 자들에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오늘 성경은 그 점을 말씀하고 있 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군의 삯을 떼먹지 말라, 귀 먹은 자를 무시하지 말라, 소경 앞 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나는 여호 와니라" 이 말은 이렇게 약한 자를 억압하고 무시하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81년 전에 일어 났던 3·1운동을 통해서 배우는 교 훈입니다.
30세 총리 요셉의 현명한 통치 /창41:46-57/ 이상호목사 2017-03-02 08:42:48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께 우리 하나님의 평강이 넘치시길 소망합니다. 창세기의 족장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어두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언약(言約)은 별처럼 빛나고 정확히 성취됨을 확인합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족장 요셉의 생애도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언약 성취를 태양처럼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함
30세 총리 요셉의 현명한 통치 /창41:46-57/ 이상호목사 2017-03-02 08:42:48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께 우리 하나님의 평강이 넘치시길 소망합니다. 창세기의 족장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어두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언약(言約)은 별처럼 빛나고 정확히 성취됨을 확인합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족장 요셉의 생애도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언약 성취를 태양처럼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형통케하니 30세의 중죄수요 약소국가의 노예인 요셉을 애굽의 바로가 즉시 총리로 세웁니다. 바로가 요셉보다 높음은 보좌뿐이라며 최고로 높이고 극진한 대접을 하며 44절에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하고 전권을 맡깁니다. 45절에 바로로서는 가장 영광스런 이름과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종교지도자의 딸과 최고의 예우로 결혼까지 시킵니다. 인간상식으로는 있기 어려운 일을 이렇게 바로가 기쁨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바로까지도 사용하시는 것을 보며 우주의 주권자인 하나님을 새롭게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증조부 아브라함 때 언약 가운데 창15:13에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客)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출 12:40, 41, 행 7:6, 갈 3:17)를 이루어가고 계심입니다. 요셉은 기나긴 13년의 좌절의 기간, 아니 신앙과 총리의 훈련기간을 거쳤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억울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요셉의 13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 답답한 기간에도 더욱 신앙에 힘썼고 성실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요셉을 통하여 복을 받고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습니다. 그러면 시련의 기간도 즐겁고 밝은 날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 30세 총리 요셉의 현명한 통치(46∼49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요셉의 통치는 대낮의 통치요 앞날의 대비가 자기 방 드나들 듯 쉽습니다. 바로의 절대적인 신임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방법을 따라 7년 동안 대풍작 때에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곡식을 앞으로 닥칠 7년 흉년을 위하여 쌓아놓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지도해 주시고 미리 보여 주신대로 7년 대풍년이 드니 그 통치는 땅 짚고 헤엄치는 것보다도 더 쉽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훈련하시되 역경으로도 형통으로도 하십니다.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역경에 굳건하고 형통에 겸손하게 됩니다. 2. 므낫세, 에브라임 믿음의 두 아들을 얻음(50∼52절) 비록 우상의 바다 애굽에 살지만 요셉은 우상과 이방문화에서 초연하게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장자 '므낫세'(잊어버림)는 51절에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고, 아버지 어머니 얼굴도 볼 수 없는 먼 타국에 그것도 노예로 팔려, 종 생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충실했습니다. 과거의 고통과 어려움을 잊어버리고 훌훌 털어버렸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꼭 잊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 죄의식, 아픈 상처들을 잊어버리지 못하면 심령에 고통이 찾아오고, 온갖 스트레스는 가중될 수 있습니다. 삶의 의욕이 상실되며, 인생을 비관하고 모든 것이 싫어지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인생의 패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잊어야 할 것은 요셉처럼 잊어버려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옵니다.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망각의 은혜입니다. 성도가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과거의 모든 괴로운 고난을 다 잊어버리도록 하시고 대신 은혜로 가득 채워 주시고 모든 상처를 싸매주시고 위로와 평강의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52절에 차자 "에브라임"(창성함)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하며 신앙적인 히브리식 이름으로 그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과거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자에게 평안으로 대신 채워주시고, 새로운 일을 행하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과거를 접어두고, 과거를 잊어버리고,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는 자에게 앞날에 새로운 사건과 놀라운 일을 예비해 주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빨리 잊어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잊어야 할 것은 이 시간에 깨끗이 잊어버립시다. 요셉의 신앙은 정말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믿으니 조금도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나 누구도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에게는 가나안기업 두 몫을 분깃으로 받았습니다(겔47:13, 48:5-6) 성도는 어디서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열정을 더해갈 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이 더 풍성하여 형통한 삶을 누립니다. 요셉의 통치에서 복받은 가정의 일을 기록함은 요셉의 20여 년간의 시련의 삶에서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이 신분상 총리의 복을 주시고 통치상 국가가 풍성한 복을 받고 단란한 가정의 복을 겸하여 받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든 복도 언약의 성취요 그 과정입니다. 창 37:5∼11에 17세 소년 요셉이 꿈에 그 부모와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고 말하므로 미움을 받아 팔려갔지만 하나님은 그 꿈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창41:55∼57 온 세상에 심한 기근이 듭니다. 창 42장에 야곱이 양식을 구하러 요셉의 형 10명을 애굽으로 보냅니다. 마침내 창 46:3,4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야곱의 가족 70명(46:28)이 요셉이 통치하는 애굽에 이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요셉에게 절하는 꿈은 이뤄집니다. 형들은 지난날 요셉에게 지은 죄가 계속 두려웠으나 요셉은 신앙에 근거하여 위대한 용서를 합니다. 창 45:5∼8에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위로했고 수년 뒤 야곱이 즉은 다음에도 형들이 두려워할 때 창 50:15∼21에 "당신들은 나를 해(害)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善)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했습니다. 3. 기근과 현명한 대처 - 성공을 경영하라(53-57절) 요셉은 미래를 대비한 정치를 했습니다. 7년의 풍년이 지나면, 이어서 7년의 흉년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미래를 대비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철저하게 미래를 대비하는 정치를 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위대한 점입니다. 우리도 하늘나라 갈 준비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아니 성공을 잘 경영하면 불황, 기근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성공했을 때를 잘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질병 속에서 고침받은 분이 계십니까? 주변에 질병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성공자입니다. 영적 어둠의 세계에서 구원받으셨습니까? 구원의 기쁨에 도취해있지 마시고 아직도 흑암의 세계에서 고통하는 이웃을 품고 그들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하십시오. 그것이 사명입니다. 죄에서 자유함, 치유함을 받았다면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성공을 다스리고 경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인생의 성공된 삶을 사십니까? 그 자리에서 더 많이 섬기십시오! 평안과 축복 속에 있습니까? 영원한 미래를 바라보며 준비하십시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상처가 치유함을 받았습니까? 치유자가 되십시오! 상처 때문에 원망하지 마시고 그 상처를 품고 상처받은 자의 치유자가 되십시오! 그럴 때 인생의 진정한 성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거기엔 시련과 형통이 함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언약(성경)을 성취시키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누려가시기 바랍니다.
3가지 하나님의 약속 /단3:16-18/ 이재철목사 2015-07-27 16:22:39 read : 9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인도의 설화(說話) 중,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용한 마술사가 하루는 생쥐 한 마리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그 생쥐가 하도 안절부절못하기에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언제 고양이가 덮칠지 모르는데,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마술사는, 생쥐의 처지를 딱히 여겨 고양이로
3가지 하나님의 약속 /단3:16-18/ 이재철목사 2015-07-27 16:22:39 read : 9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인도의 설화(說話) 중,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용한 마술사가 하루는 생쥐 한 마리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그 생쥐가 하도 안절부절못하기에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언제 고양이가 덮칠지 모르는데,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마술사는, 생쥐의 처지를 딱히 여겨 고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고양이가 되어 큰대(大)자로 활보하던 쥐가 얼마 안 돼, 또 겁에 질려 떨기에 마술사가 이유를 묻자, “거대한 개가, 언제 날 물어버릴지 모르는데 어떻게 맘이 편하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술사는 고양이를 다시 큰 개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마술사는 생쥐를 고양이로, 고양이를 개로, 개를 호랑이로까지 만들어주었습니다. 언제나 처음엔 만족하다가, 얼마 안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고 마술사가 말합니다. “너는 다시 쥐로 돌아가거라!” 여러분은 지금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이것만, 이번에만, 이 문제만! 해결되면 안 두려우실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음을 앞두고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을 통해 자신의 꿈을 해석하게 했던 느브갓네살 왕은, 그때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꿈 꾼대로 30m나 되는 큰 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백성에게 그 앞에 절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3:6) 이 명령을 어긴 세 친구는 펄펄 끓는 용광로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16절) ‘불속에 던져져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주실 것이고...’ (17절)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말합니다.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이고 원칙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괴롭히는 제국 바빌로니아! 그러나 이 바벨론을 단순히, 역사상 존재했던 하나의 제국으로만 봐선 안 됩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세력이자, 무리입니다. 바벨론은 영혼을 사냥하는 니므롯이라는 힘센 장사에게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창10:8~9) 그 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높이려고 하늘 꼭대기까지 닿는 탑을 쌓는 일명 ‘바벨탑 사건’이 벌어지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습니다. (창11:1~9)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보십시오. 아벨은 믿음을 제사를 드리며 제단을 쌓아, 축복의 통로가 되었지만 동생 아벨을 죽이고 에덴에서 쫓겨난 가인은 에녹성, 즉 자기만의 성(城)을 쌓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기만의 ‘성’을 쌓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의 문화요, 실체입니다. 바벨론 문화는 엄청난 위력으로, 사람들을 혼미케 하고 파멸의 늪으로 인도하나, 결국 주님의 심판으로 망하고 만다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기록돼 있습니다. (계18장) 계시록에 기록된 666은 바벨론문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계 17:17~18) 7은 하나님의 숫자로 완전한 수입니다. 그러나 7에서 1이 모자란 6은, 하나님 행세를 하는 마귀의 수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666이 등장합니다. 3장1절에, 금 신상의 높이가 60자, 높이가 6자, 5절에, 신상 앞에 절할 때 연주되던 악기가 6가지! 이것을 조합하면 666이 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문화는 무엇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까? 첫째, 느브살네살이 세운 금 신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며 광야에서 만들었던 황금송아지... 황금, 즉 물질입니다, 돈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돈에 미쳐 돈만 쫓아다지 않습니까? 둘째, 음란함과 쾌락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모든 제국이 멸망할 때는 이 두 가지 요소 때문에 망했습니다. 황금이 우상이 되어 부정부패가 만연할 때, 음란함과 쾌락으로 밑바닥까지 타락했을 때, 결국 강대국들도 망했습니다. 세상의 안목적이고, 정욕적인 모든 문화는 바벨론문화입니다. 황금과 쾌락에 끌려가는 인생은 이미,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었던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바벨론의 우상 앞에 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절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이 믿음의 확신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입니다. ◈ 타락한 바벨론문화를 극복하려면 ① 두려움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십시오. (16절) 두려움이 앞을 가로막아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 앞에서 당당히 신상 앞에 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직면해서 부딪쳐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보운전자의 경우, 복잡한 시내나, 고속도로, 눈비 오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운전을 해보고 나면, 놀랍게 담대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험을 강행했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의 신신하신 약속을 믿으십시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이 주신 3가지 약속 ① 하나님 뜻을 따르려고 할 때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고난은 모든 결과의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의 역사를 이루시기 전에, 먼저 십자가 고난을 짊어져야하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고통을 통해서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돼 있습니다. ② 고난의 때에는 언제나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25절) 우리가 주님 뜻에 순종하다 고난을 만나게 되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그 늪에서 건져주십니다. 쇠붙이를 녹이는 용광로 속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모두 결박이 풀린 채로 화덕 안에서 걷고 있고,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가 없다! 더욱이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과 같다!’ (25절) 넷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이 곁에서 그들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③ 반드시 고난에서 건져 높여주십니다. (30절) 용광로 속에서 무사히 나온 다니엘의 세 친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빌론 지방에서 번영을 누리면서 살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황금과 쾌락의 바벨론 문화 앞에서 당당해지십시오. 때로 두려움에 휩싸일지라도, 용광로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지켜주셨던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고난을 직면하십시오. 그 고난이 축복으로 바뀔 것입니다.
3년의 기근 /삼하21:1-14/ 이양덕 2015-10-17 08:25:06 read : 8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정학적으로...우리나라는 북상하는 태평양 기단氣團 과...남하하는 시베리아 기단氣團이 무상하게 교차하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기후변화가 다양하고...때로는 홍수가 나고...또 때로는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이 오기도 합니다. -역사의 기록에 보면...신라 2대왕인 남해 왕 때...가뭄이 극심했다는 기록이 있고...신
3년의 기근 /삼하21:1-14/ 이양덕 2015-10-17 08:25:06 read : 81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정학적으로...우리나라는 북상하는 태평양 기단氣團 과...남하하는 시베리아 기단氣團이 무상하게 교차하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기후변화가 다양하고...때로는 홍수가 나고...또 때로는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이 오기도 합니다. -역사의 기록에 보면...신라 2대왕인 남해 왕 때...가뭄이 극심했다는 기록이 있고...신라 5대왕인 파사왕 때에도...봄과 여름에 걸쳐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굶주린 백성들이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씨조선 태종 재위 15년-16년에...나라 안에 몹시 가뭄이 있었는데...하륜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제도를 많이 바꾼데 대한 천심의 노여움이라고 하여...민심이 술렁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재상 하륜이 죽은 후에도...가뭄이 계속되자...태종은 재상이 죽었는데도 재앙이 생기니 이는 재상의 허물이 아니라...군왕인 나에게 덕이 없는 까닭이라고 자책을 하면서...천단天壇을 쌓고 그 위에 올라앉아 스스로 채찍으로 등을 쳐서 피를 내면서 민심이 뭣인가를 살폈다고 합니다. -군왕이 이러했을 때...방백수령들은 반찬수를 줄이고...술을 마시지 않으며...가족들은 채색 옷을 입지 않고...나들이를 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라 안에 기근이나 큰 재앙이 일어나면 통치자와 나라의 지도자들은...크게 자신들의 실책이나 잘못을 반성하면서...기근과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 왕 때에도 3년 동안 기근이 있었다고 합니다. ☐ 3년간 계속된 기근 -1절을 다 같이 읽읍시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다윗이 왕이 된지 얼마가 지나지 않았는데...년이어 3년이나 비가 내리지 않고 극심한 가뭄이 계속 된 것입니다. -요즘에도 1년만 기근이 들면...국가의 경제가 흔들리고...백성들의 생활이 아주 힘들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비상식량이라든지, 공산품, 보조식품. 이런 것들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한 해 농사가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당장 모든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이 살던 이런 시기라면 어떻겠습니까?...지금과 같은 보조식품이나...공산품 같은 것도 없는 시절이기 때문에...기근은 곧 바로 백성의 굶주림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3년 동안 계속해서 기근이 들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가난한 백성들은 거의 아사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나라 형편이 이르자...다윗은 군왕으로서 백성들의 굶주림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라는 말씀은...얼마나 다윗이 간절하게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시기를 기도하며 간청했다는 뜻입니다. -지도자로서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또 나라에 기근이나 큰 재앙이 있을 때...지도자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게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처럼...나라가 직면한 재앙을 놓고...나라를 맡은 지도자들이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을....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해결됩니다. -해결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기도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신문이나 tv뉴스 어느 한 곳도...‘세월호’ 사건을 놓고...나라의 지도자 중에 어느 누구도 기도했다는 기사를 접해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은...모두가 다 “누구 탓이다”...“누구의 잘못이다”...라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증가를 하고... 비판을 하는 소리들뿐입니다. -다윗처럼...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면...하나님께로부터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모두가 다 남의 탓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십시오. -3년간 계속되는 기근을 놓고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로 간구하니...하나님께서 기근의 원인이 무엇인지...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땅에 3년이나 기근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고통당하게 된 원인은 이렇습니다. ☐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1절 중간 부분부터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기브온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여호수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요단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갈 때 기브온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간교한 연극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화친을 위한 사절을 보낼 때...다 헤어진 전대와...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다 낡은 신을 신고...다 헤어진 옷을 입고...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내어 보이면서 자기들은 멀리서 왔으며...자기 백성들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고 죽이지 않을 것을 조약해 달라고 매어 달렸습니다. -여호수아는 경솔하게 그들의 외모만을 보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한 채...그들의 요구대로 화친의 언약을 맺었습니다. -여호수아 9:14-15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그러나 삼일이 지난 후에 기브온 사람들의 말이 거짓임이 드러났지만...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 것이기 때문에...그 조약은 유효한 것이 되었고 기브온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브온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서 맺은 조약이기 때문에 무효가 되어야 하는데도...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약을 자자손손 지켜야만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으나...그 기브온 자손들이 사울 왕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함께 살고 있었는데...사울은 이방민족이 이스라엘 선민과 함께 사는 그것이 못마땅하여...무죄한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로 말하자면...‘인종청소’ 를 한 것입니다. -어느 민족보다 민족주의民族主義가 강한 이스라엘 백성들은...사울 왕의 그와 같은 처사에 대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고...다 좋게 생각하고...다윗 때까지 넘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그 일에 대해서 침묵해 오시다가..왜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지나간 과거사를 다시 되돌려...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년이나 거듭 기근의 재앙을 내리신 것일까요? -그것은 사울 왕만의 죄가 아니라...그 시대에 동참하고 있던...다윗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에 방관자요 동참자로서...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그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조차...비로소 3년 기근이 연속된 후에야...기도 중에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요? -분명히 내가 그 사람을 추대하였고...그 현장에 내가 있었고...그 일을 내가 목격하였고 동참하였음에도 불구하고...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느끼거나 나누려고 하지 않는 무책임이...공동체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다윗은 그것이 왜 내 책임이냐고?...하나님께서 흉년을 내리시려거든 사울 왕 때 내리시지 않고 왜 이제 와서 나에게 그 책임을 물으시는가?...라고 원망 불평해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시인하고 그 대책을 강구하였습니다. -기도 중에...3년간의 기근의 원인이 무엇인지를...하나님이 다윗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잘못한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잘못된 것을 다윗의 일방적인 생각대로 처리하지 않고...약소민족인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한을 풀어 주면 되겠는지?...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물어 보았을 때...비로소 기브온 사람들은 그동안 마음 속 깊이 품고 있던 그들의 억울함을 드러내 놓았습니다. -4절을 다 같이 읽읍시다.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니라,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그것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을 죽인 사울 왕의 자손들에게...-이는 이로, 눈으로 눈으로- 갚아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울이 생전에 다윗을 그렇게 괴롭혔지만...다윗은 사울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그의 사울의 가문을 멸하지 아니하고...지켜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이...그 사울 왕가의 가족들의 생명을 요구하였을 때...다윗은 어느 쪽을 선택해야 만할까요? -약소민족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사울 왕 가문을 살려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왕의 자손 7명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어 주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기 민족을 학살한...사울왕의 후손 그 일곱 명을 처단하였습니다. ☐ 무고한 생명 살해는 반드시 보응됩니다. -9절을 읽읍시다.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기니 기브온 사람이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이 동시에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엘리사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은 사마리아 왕궁 곁에 있는 ‘나봇’ 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탐이 났습니다...그래서 나봇을 불러...돈은 원하는 대로 줄 터이니까 포도원을 내게 팔라고 제안을 했습니다...그러나 나봇은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기업인 포도원을 팔 수 없다고 거절을 합니다...거절을 당한 아합 왕은 자존심이 상하여 자리에 들어 눕습니다...그 사실을 안 악한 왕후 이세벨이 신하를 시켜 나봇과 그의 가족을 다 죽이고...포도원을 빼앗아 아합 왕에게 주어 채소밭을 삼게 하였습니다. -열왕기 상 21:17-24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 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든...무고한 피를 흘려... 사람의 생명을 해한 사람에 대하여는 반드시 그 죄 값을 물으시고...응징하십니다. -고의적으로 했던...간접적으로 했든지 간에...하나님은 반드시 그 희생당한 무고한 생명에 대하여 죄 값을 찾으시고...형벌하십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일으켜 채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생명들과 무고한 생명 304명을 진도 앞바다에 생매장 시킨...저 이단집단 구원파와...유병언 일당을 하나님을 반드시 응징하시고 심판 하실 것입니다. -수백망명을 굶어 죽게 만들고...정치범으로 몰아 죽이고 숙청하는 저 북한의 공산집단 김일성-김정일-김정은 가문을 하나님은 반드시 몇 날 후에 응징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악인들의 형통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의 손길이...무고한 생명을 학살한...사울 왕과 그 가족에게...아합왕과 그 가족에게 심판을 행하신 것처럼...유병언과 그 가족에게...김일성-김정일-김정은과 그 가족에게...반드시 정의로운 공의의 칼날로 그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 결 론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성도님들은 오늘 본문의 기근문제가...바로 내 삶의 기근으로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잘 나가던 내 인생이 가로막힌 부분이 없습니까? -믿음생활에 가로막힌 부분이 없습니까? -가정에 가로막힌 부분이 없습니까? -내 사업이나 직장에 가로막힌 부분이 없습니까? -내 심령에 영적으로 가로막힌 부분이 없습니까? -그러면 그 이유와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다윗처럼 기도하면...풀리지 않는 내 인생의 문제...그 원인도..그 해결책도 알게 됩니다. -왜 내가 실패하고 있는지...그 이유도 알게 됩니다. -왜 우리가정에 불행이 오는 지도 알게 됩니다. -왜 몸에 병이 오게 되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왜 궂은 일이 자꾸만 내게 일어나는지도 그 원인을 알게 됩니다. -다윗이 3년 동안 나라 안에 기근이 계속되자...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그 이유를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처럼...우리가 기도하면...우리의 인생의 기근의 이유를 하나님이 알려 주십니다. -또 해결책도 보여 주십니다. -내 개인의 불행...가정의 불행...나라와 민족의 불행...을 남의 탓 타령만 하지 말고...우리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러면...하나님께서...원인도 가르쳐 주시고...또 해결책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길이 열립니다. /할렐루야!
3일 간의 침묵 /창22:1-19/ 이양덕 2015-10-27 23:36:45 read : 8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침묵 -토마스 칼라일 “언어는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위대하다.” -잠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이 성공비법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속내를 털어놓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라
3일 간의 침묵 /창22:1-19/ 이양덕 2015-10-27 23:36:45 read : 8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침묵 -토마스 칼라일 “언어는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위대하다.” -잠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이 성공비법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속내를 털어놓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것이었다. -대인관계의 3·2·1 법칙이 있다. -그것은 3분간 경청하고, 2분간 맞장구쳐주고, 1분간 말을 하라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으로 가는 비결이다. -하박국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 에서 잠잠 할지니라 하시니라..’ -교인들이 하나님의 성전聖殿 인 교회에 올라오면 말을 너무 많이 하시면 안 된다. -우리가 교회 오는 것은 하나님께 말하기 위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오는 것이다. -구약 모세 5경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백성들은 경청하게 하셨다. -교회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선포되던지 경청하고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이러 쿵, 저러 쿵, 해서는 안 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께 너무 자기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간단명료하게 요약을 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형편과 사정과 필요를 아뢰고...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기도는 내가 말하는 시간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듣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한다. -어떤 교인은 1시간, 2시간 쉬지 않고 자기만 말하고...어떤 교인은 밤새도록 자기만 말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시간은 전혀 안 드리는 교인들이 있는데...이런 교인들은 기도를 잘하는 것 같지만...사실은 기도를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말로 ‘기도’를 -‘히트파레르’-라고 한다. 그 말뜻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달아본다.’ 는 뜻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는지...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상을 좋게 만드는 일에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 일했는지...말씀의 저울대 위에 자기를 올려놓고 자신을 달아 보는 것을 ‘기도’-‘히트파레르’-라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그렇게 정의하는 것이다. -현대의 영성 가들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도록 하는 것이 더 훌륭한 기도이고...더 영성이 있는 기도라고 가르친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통로이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얼음공장에서 일하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톱밥이 쌓여 있는 곳에서 값비싼 시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동료 와 함께 2시간 이상이나 시계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어떤 어린소년이 그의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꼬마야, 그 시계 어디서 찾았니?" "예, 제가 톱밥 위에 앉아 있는데 시계 소리가 `째깍 째깍'하 고 들렸어요." -그렇다. 하나님의 음성은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인적이 없는 산속이나 피정避靜의 집 같은 고요한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 ☐ 본문 이야기 -1-2절을 읽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아들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거기서 아들을 번제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다. -번제란...양이나 염소, 송아지를 잡아 제단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그 연기를 하늘로 올려 보내는 화제火祭를 말한다. -하나님은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가서 그 번제를 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지 시험하시는 것이다. -너무나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묵묵히 순종하였다. -아들과 번제에 필요한 제구祭具 를 나귀에 싣고 3일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산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기도하면서 자세히 읽고 묵상해 보면...아브라함이 모리아산까지 3일 길을 가면서...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3일간의 침묵’...그는 이 기간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깊은 고뇌, 번민,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품고...너무나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져서 3일 동안 말문을 막고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정말 그랬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 것 뿐이었을까? -본문의 전후사정을 다 읽어 보면...아브라함의 번민과 고뇌, 망설임 그리고 아픔...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3일 동안 자기의 번민과 고뇌에만 사로 잡혀 있었다고 생각하면...그 사람은 성경을 깊이 읽는 분이 아니다. -‘그 3일간의 침묵’...아브라함은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앞으로 인류구원을 위하여 가슴에 품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사용하고 계신다는...하나님의 음성을 그는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3일간의 침묵’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여러 곳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 3일간의 침묵’에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음성은 바로 ‘십자가’十字家 이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 한 세상을 하나님의 독생자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그 십자가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 되는지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4절을 읽자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3일 길을...아들이삭을 데리고 걸어와서...눈을 들어 멀리 바라본 곳은...'모리아 산' 이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그 곳을 멀리 바라보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아브라함이 ‘멀리 바라본 곳’은...거리적으로 멀리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멀리바라보고, 하나님의 계획적으로 멀리 바라다 본...먼 후일의 골고다 언덕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리아’는...‘모리’-스승, ‘야웨의 축약형’-야..가 합쳐진 단어로...그 뜻은 ‘여호와가 나의 스승 되심’이라는 뜻이다. -또는, ‘마르에’-선택, 지정. ‘야웨의 축약형’-야...가 합쳐져서 ‘여호와가 친히 지정하셨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이삭을 데리고 3일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앞으로 그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성전이 세워지고, 그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고 교훈하실 인류의 스승이 될 예루살렘성전이 세워질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지리학적으로 예루살렘성전은 구약의 모리아산에...후에 지명이 바뀌어 시온산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먼 후에 일어날 ‘십자가 사건’은 바로 이 모리아 산에서 이라고 장소를 지정해 주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짐을 짊어지시고...바로 이 모리아산 즉 후에 골고다로 불리 우는 이 산에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것은 놀랍고도 정확한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다...그 비밀한 미래의 사건은 아브라함이 ‘그 3일간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께 들었던 것이다./할렐루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칠 그 아들이삭을 가리켜...‘네 사랑하는 독자’ 라고 말씀하신다./2절 -마찬가지로 먼 후일 인류의 죄를 위하여 그 골고다 산에서 십자가를 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자’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의 등에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게 했다고, 6절에 기록하는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그 모리아산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그 등에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나무 형틀을 그 등에 지고 올라가실 것을...‘그 3일간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또 7절을 읽어보면...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는가?..”고 물어 본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고 8절에서 대답한다. -이삭은 자신이 아닌...-번제에 쓸 어린양이 어디 있는가?- 고 묻고 있는데....영적으로 보면 그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삭은 자신을 그 죽음에서 건져주고 구원해 줄 메시아를 찾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은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고 8절에 말씀하시는데...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독생자를 어린양의 제물로 준비하고 계신다는 예언이다. -이것도 아브라함은 ‘그 3일간의 침묵’에서 하나님께 들었던 음성이었다. -이 모든 사건은 바로 십자가 사건을 아브라함에게 예표로 보여주신 사건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들, 사랑하는 독자를 인류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내어 주실...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 것 인지를...자기 아들이삭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고...그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내용이다. ☐ 결 론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비밀한 음성은...아브라함처럼...‘침묵할 줄 아는 사람’에데 들려주신다는 것이다. -너무 소란한 세상 속에서...세상의 기계톱니바퀴와 더불어 정신없이 돌아가는 오늘의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음성듣기가 매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처럼 ‘3일간의 침묵’의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에 들어가는 신앙생활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모든 성경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아무리 성경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설교해도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빠지면...그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교의 핵심은 십자가이어야 하고, 십자가 있는 설교를 들어야 바로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것이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처럼...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나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는 사람에게만...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한 그 십자가의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을 점검해 보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모델이라고 하신다. -우리 원일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고 따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를 본받아」-토마스 아 켐피스- 는 다음과 같은 권면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예수님과 그 하늘의 왕국을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거니와, 이 땅 위에서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와 함께 잔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와 함께 기쁨을 누리기는 원하나, 그를 위하여 즐겨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떡을 나누는 일에는 큰 군중이 따랐으나, 그의 고난의 잔을 마심에 같이 한 자는 적습니다. 그의 기적을 경탄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의 십자가의 겸손을 따르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40일을 지난 후 /창8:6-12/ 이동원 목사 2014-11-29 07:45:38 read : 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의 본문은 “40일을 지나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준비의 시간 혹은 고통과 방황의 시간을 의미하는 숫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방황의 시간이 40년이었고, 엘리야는 밤낮으로 40일 길을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했습니다. 모세도 40일 간
40일을 지난 후 /창8:6-12/ 이동원 목사 2014-11-29 07:45:38 read : 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의 본문은 “40일을 지나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준비의 시간 혹은 고통과 방황의 시간을 의미하는 숫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방황의 시간이 40년이었고, 엘리야는 밤낮으로 40일 길을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했습니다. 모세도 40일 간 시내산에서 금식하며 율법을 전달 받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한 두 명의 정탐꾼도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했습니다. 예수님도 40일간 유대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사단과 의 영적인 전쟁을 치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노아 시대 40일간 밤낮으로 호우가 내려 홍수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이 비가 시작된 때를 창세기의 기자는 2월 17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7:12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 졌더라.” 그러나 홍수 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고통과 불편은 계속되었습니다. 먼저 150일간 그러니까 약 5개월간 홍수 직후의 물이 빠지는 시간이 지나갑니다. 창8:3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 오십일 후에 줄어들고” 그때가 10월 1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40일이 지나간 것입니다. 11월 10일 드디어 40일 지난 후 희망의 새날이 밝아 오기 시작합니다. 진실로 지난여름은 무덥고도 고통스런 시간이었습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 초래한 아열대의 밤으로 우리는 잠 못 이루는 고통의 여름을 보냈습니다. 유달리 비가 많이 내린 여름이기도 했습니다. 이 큰 비로 허리 짤린 조국의 절반인 북한 땅에서는 역사상 유례없는 큰 홍수 피해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여름 단기 선교중인 이웃 교회 샘물 교회 23명의 아프간 피납 사건으로 우리는 어느 해 여름 보다 무덥고도 고통스런 여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샘물 교회 박 은조 목사님과 함께 미국 콜로라도 목회자 수련회장에서 아프간 소식을 함께 접하고 함께 기도를 시작했기에 거의 이 사건의 당사자가 된 심정으로 고통의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40일이 지나 드디어 우리는 복음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두 명의 희생자를 내기는 했지만 드디어 21명의 소중한 이웃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지난주일 설교를 통해 이미 드린 말씀처럼 저는 이번에 아프간에서 희생당한 두 분이 사도행전의 순교자 스테반과 야고보처럼 한국 교회 부흥의 불씨가 될 것을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사건의 막을 내리면서 그러나 저는 지난 40일의 의미를 노아와 그의 가족이 겪은 40일의 의미에 비추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고통의 40일에서 배우는 레슨은 무엇입니까? 1. 어떤 고통에도 끝남의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시간관을 일컬어 종말론적 시간관이라고 일컫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고 동시에 끝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허무한 종말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완성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인생을 살면서 고통과 시련의 밤을 지나갑니다. 그러나 저는 한 사람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고통과 시련을 견디는 일에 있어서 좀 더 강인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고통에는 끝이 있고 그 끝은 희망이고 완성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 뚜껑열린 하늘에서 쏟아 붓던 장마 비도 끝났습니다. 홍수도 물러갔습니다. 틀림없이 노아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그 장마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장마였습니다. 온 지면을 덮던 창일한 홍수의 기세도 결코 꺽일 것 같지 않은 홍수였습니다. 그러나 8:2을 보십시오.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하지 않았습니까? 드디어 비는 그쳤습니다. 8:3을 보십시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하지 않았습니까? 드디어 그 넘쳐나던 홍수의 물도 물러갔습니다. 오늘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인생의 40일을 지나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비는 곧 그칠 것입니다. 홍수도 물러갑니다. 이 모든 상황의 반전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비밀은 8: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이 읽으실까요?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여기 비밀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의 한 밤중을 지날 때 우리는 아무도 내 고통을 내 마음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아무도 내 고통 내 인생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없고 내 마음을 알아 줄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욥의 친구들처럼 내 상처를 더 깊게 하는 자객들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단 한분 당신의 밤을 함께 아파하며 기억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그리고 그 분이 기억하고 계시기에 이 고난은 끝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더 견디십시오. 그리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종 종 이런 고통의 시간을 보낼 때 우리가 기다리는 것 빼놓고는 아무 것도 할일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도 그랬습니다. 본문의 10절을 보십시오. 어떤 말씀으로 시작됩니까?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또 칠일을 기다려--” 그렇습니다. 그들이 한 일, 우리가 할 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왕에 기다릴 바엔 잘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곧 이 고통이, 고난이 끝날 것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2. 고통이후 축복의 새 날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가 7일을 방주에서 기다리다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홍수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나 또 땅이 다 말랐나 나가서 살만한가를 테스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 합니까? 땅의 물이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이제 식물들이 활동을 제대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 밖으로 나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만큼 여건이 충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7일을 더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12절에 보면 비둘기는 다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둘기와 인생이 활동 할 새로운 세상이 준비된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올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8:17에서 말씀하시는 주의 약속을 주목하십시오.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9:1의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제 새로운 시대, 번영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비온 후에 맑은 날이 기다리듯, 환난 후에 축복의 새 날이 예비 되었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비바람, 길고 지루한 홍수와 같은 역경의 시절이 지나가면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축복의 날을 준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주님은 그 시대를 사는 당신의 백성들이 또다시 그렇게 홍수로는 고통 받지 않을 것을 언약하고자 9장 8절 이하에 보면 하늘에 무지개를 걸어놓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누군가가 무지개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지개는 하늘 위에서 보면 완전한 둥근 원(circle)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땅에서 보면 반원입니다. 그래서 무지개는 하나님과 인간이 반반씩 나누어 낀 사랑의 반지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하니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위에 계신 그분과 우리사이에 말입니다. 자, 노아 식구가 보낸 고통의 40일에서 배우는 레슨은 무엇입니까? 3. 예배함으로 축복의 새 날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일이 무엇입니까? 8:20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드렸더니” 그렇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새 날을 열기 위해서는 정결한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이번 아프간 봉사에서 희생된 두 분은 한국 교회의 새 시대 선교의 장을 열기 위한 순교의 제물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간 역사 속에 있었던 모든 순교 사건들이 당시에는 비극이었습니다. 대동강변에 셔먼호를 타고 입국하다가 생명을 버린 토마스 선교사의 사건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희생으로 오늘의 한국, 그리고 한국 교회가 있었다면 그의 희생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열기 위한 거룩한 제물이 아니었던가요? 그러나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아프간 선교단도 아니고, 토마스 선교사도 아닌 여러분과 저 자신입니다. 우리가 바칠 정결한 제물은 무엇입니까? 이번 아프간 사건을 둘러싸고 교회밖 사람들의 교회를 향한 문자 그대로 홍수처럼 넘쳐나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제가 QT시간에 “주님, 이 엄청난 비난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물었더니 주님의 단순하고도 고요한 응답이 되돌아 왔습니다. 제가 들은 그분의 세미한 음성은 이랬습니다. “네 마음은 알겠는데 억울한 것은 내게 맡기고 잘못한 것은 고치면 되지 않겠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고 한국 교회가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워지는 계기를 삼을 수 있다면 이런 회개 운동이야 말로 우리가 그렇게 사모하는 ‘어게인 1907년 부흥운동’의 새 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심을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교만을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탐욕을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시기심과 질시를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허영심을 회개하십니다. 우리의 이중성을 회개하십시다. 가정에서의 직장에서의 우리의 불성실을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거짓말을 회개하십시다. 정결한 제물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주께 드리십시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예배의 본질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우리가 다시 거룩한 예배로 우리의 인생을 드리기 시작한다면 노아시대 새로운 축복의 날을 여시던 주께서 다시 한번 이 땅에 그리고 한국 교회의 미래에 축복의 새 날을 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연탄길의 저자인 이 철환 님이 최근에 ‘반성문’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저자는 친절하게 자신의 책 첫 페이지에 들국화 꽃을 접착하여 자신의 싸인과 함께 그의 책을 선물로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공감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저도 많이 반성했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그의 책은 이런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준 상처가 더 많았습니다. 나는 뒤늦게야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마음은 아팠지만 뉘우침은 나를 밀고 갔습니다. 올바른 것도 진실이지만 뉘우침도 진실이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고는 한 움큼의 진실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부정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고백의 절정에서 이렇게 기도를 토해냅니다. “하나님, 저는 나비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촛불 속으로 몸을 던지는 나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내와 딸아이에게 혈기를 부리고 막말을 하고 죽이고 싶도록 제가 싫어 당신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했을 때 당신은 끝끝내 제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세요. 저를 믿을 수 없어서 당신을 믿었습니다.” 그의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런 고백의 시어로 끝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둠이다./ 어둠은 빛이다. /어두워야만 빛나는 것들이 있다./고통은 대문처럼 입구이면서 동시에 출구이다./ 아픔도 길이 된다. 슬픔도 길이 된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달팽이가 되어 그 길을 달려가리라. 불빛처럼/ 불빛처럼/” 그렇습니다, 40일은 지났습니다, 우리가 만일 노아처럼 이 철환님처럼 절절한 반성으로 회개의 무릎을 꿇고 주님을 경배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오늘 저녁 해가 지기 전 무지개를 볼 것입니다. 그분과 우리의 새로운 사랑의 정표로 빛나는 언약의 무지개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