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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행복하게 /잠15:13-24/ 이상호목사 2016-12-20 11:13:47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교회 표어 두 번째 '가정을 행복하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가정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소유와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즉 소유가 행복과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유를 통하여 잠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
가정을 행복하게 /잠15:13-24/ 이상호목사 2016-12-20 11:13:47 read : 6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교회 표어 두 번째 '가정을 행복하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가정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을 소유와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즉 소유가 행복과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유를 통하여 잠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행복을 주는 요소는 아닙니다. 어떤 이는 무소유가 행복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 버리고 산으로 들어갑니다. 수행과 득도함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전 공학 자들은 또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사람에게는 행복을 느끼는 뇌가 있어 그것을 조작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약물로 행복해지기 원합니다. 그래서 마약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정의 참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정이 행복해 지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16절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소유나, 외적인 그 무엇에 있지 않고 오직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행복의 첩경입니다. 잠언에서 많이 말씀하고 있는데 지혜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어디서 옵니까? 잠9: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이십니다. 또 건강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건강이 누구로부터 옵니까? 잠10: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고 했으니 건강하여 장수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니 하나님이 행복의 첩경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자녀가 잘 되는 것이 부모의 행복이요,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누가 줍니까? 잠14:26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고 하셨으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이들은 물질과 은사와 풍성함이 가정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어디로 옵니까? 약1:17절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하셨으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추구합니다. 사실 돈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편리합니다. 그러나 꼭 행복과 정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설사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라고 할지라도 그 물질을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잠19:2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으니 여호와 경외하는 것이 재물을 얻는 비결입니다. 잠22:4절에서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최대의 불행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인은 세 가지로 인하여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교통사고나 병, 재난, 천재지변 등으로 인해서 죽음을 당하므로 이로 인해서 불행해지고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인생의 허무감입니다. 무엇을 이루어 놓으면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명예나 권력, 혹은 어떠한 목표를 이루어 놓으면 사람들은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허탈감과 허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살기가 어려운 나라에서 자살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이 풍요를 누리는 나라에서 자살율이 높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목표가 없으니 의욕이 있을 수 없고, 의욕이 없으니 권태와 허무와 허탈감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낙엽 떨어져 뒹구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무상함을 느끼고, 그래서 허무하고 허전하여 옷을 입어도 어딘가 모르게 허전함이 엄습하는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낙엽은 떨어지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곧 꽃피고 새우는 새봄이 되면 다시 예쁜 싹이 돋아 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인생의 허무감이 행복을 빼앗아 가고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죄책감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와 회개하고 자백하기만 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워 주시고, 또 인정도 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다윗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롬4:6-8절에 말씀하였습니다. 때문에 폴 틸리히가 걱정하는 현대인들의 불안과 불행은 우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행복은 만들어진 완제품도 아니고, 유산도 아니고, 은사도 아니며, 더구나 운명도 아닙니다. 행복한 가정은 세워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함이 충만하기만 하면 행복한 사람이 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환경을 보고 낙심하지 마시고, 불행한 환경을 운명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D, 큐랜(Curran)은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연구하기 위해서 500여명의 전문가들(학교장, 교도교사, 일반교사, 교회목사, 교육담당 전도사, 소아과의사, 가정의사, 정신과의사, 사회사업가, 간호사, 가족상담 및 가족치료사, 자원봉사단체 지도자)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응답한 건강한 가정의 특징을 요약하면 10가지입니다. 1)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공통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는 가정, 2)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자발적이고 진솔하게 대화하는 가정, 3)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인정하고 지지해 주는 가정, 4)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가질 줄 아는 가정, 5)가족 구성원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6)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점을 존중하고 개성을 인정해 주는 가정, 7)가족 구성원들이 동일한 전통과 풍습을 공유하고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하는 가정, 8)가족 구성원들에게 이웃과 인류에 대한 봉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가정, 9)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공동책임을 자각하고 감당하는 가정, 10)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문제를 인정하고 도움을 청할 만큼 열린 가정이 건강한 가정의 특징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행복한 가정의 첫 번째 순서는 바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의 요소와 상관없는 삶을 살기에 남다른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2. 마음에 즐거움이 있는 가정 13절, 15절입니다.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즐거우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생각과 근거에 차이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면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락을 함으로 즐거움을 누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미 우리는 기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근심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었습니다. 인간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무엇을 소유해서 기쁨을 얻는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이 계시고, 그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요16:22) 다윗의 고백이 하나님을 자기 옆에 모시고 살 때 참으로 기뻤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6:8-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니 마음도 기쁘고 영혼도 기쁘고 육체도 편안하다고 했으니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 하나님을 모실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관계로 인해서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고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받고 기쁨을 빼앗긴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잊을 것은 빨리 잊어야 하고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해야 합니다. 경제적 문제로 마음의 기쁨을 빼앗기고 사는 가정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돈을 잃는다고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잃고 신앙을 회복하고! 잃었던 하나님을 더욱 붙잡게 되었다면 그 잃은 돈은 나의 은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빼앗기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우리 믿음의 가정 식구들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까? 물질의 풍요도, 자녀들의 출세도, 가문의 명예도 아닙니다. 성경을 몇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뻐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는 합3:17-18절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둘째는 기도 응답으로 기뻐하여야 합니다. 요16: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기도하여 응답받은 한나는 노래하기를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 에9:22절에 에스더는 기도가 응답될 때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기뻐하여야 합니다. 시19:8에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좀 특별한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입니다.(요16:22) 전에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행13:52) 행5:41절에는 사도들이 예수 이름으로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자유 하는 자들에게 권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곤욕스러운 채찍이 우리 속에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하였습니다.(고후8:1-2) 이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하시고 유지하시고 빼앗기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3. 가장 가까운 식구들끼리 더욱 사랑하는 가정(:17) 17절입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가정 공동체는 남남이 모여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있는 대로! 생긴 대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내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잖습니까?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생긴 대로 할 수 있는 것만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이기 때문에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연장자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동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어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 무엇이 최대의 이단이냐? 최대의 이단은 교의상의 이단이 아니라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이단이다." 라고 했습니다. 다른 집을 부러워 할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무식하여도 내 아버지 내 어머니요,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내 아들 내 딸입니다. 아무리 못났어도 내 사위이고, 내 며느리입니다. 아무리 형편없이 가난하여도 내 남편이고 아무리 못생겼어도 내 아내입니다. 내가 어려움 당하고 내가 고난에 처하면 이웃집 그 누가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내 식구요, 내 가족입니다. 가족끼리 먼저 사랑하여야 합니다. 성경도 말씀하기를 모든 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식구들에게 이 선을 행하되 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 했으니 성도들이 먼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1)마땅히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삿16:15, 삼상18:1)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라고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생명같이 사랑했는데 이때 그들의 마음과 마음이 연락되었다고 했습니다. 2)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여야 합니다.(창29:20, 34:19 살전1:3) 야곱이 라헬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라헬을 위하여 수고하는 칠 년을 수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창 29:20) 3)목숨까지 주어야 합니다.(살전2:8, 요15:13, 갈2:20) 사랑하면 목숨까지 줄 수 있게 됩니다.(살전 2:8) 주님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15:13) 9일 동안 천국 만들기 어느 날, 한 부인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나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 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예!” 하자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 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청소 좀 할래?”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나님이 다시 와서 말했습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애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끼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볼래?”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 부탁 하나 하자!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번 돌아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이 말했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그때 부인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볼래요!” ‘9일 동안 천국 만들기’의 기적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희생의 길은 행복으로 가는 밝은 길입니다. 희생의 짐을 지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나 너를 위해 모든 것을 걸 때, 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겁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삽니다. 더 나아가 죽이고자 하면 죽고, 살리고자 하면 삽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잘 소화하는 소화력이 있을 때 행복의 키가 부쩍 자라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우리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충심으로 경외하고 주님이 주신 기쁨을 잃지 마시고 오직 무조건 사랑하셔서 가정을 행복하게 이루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군대 귀신들린 사람 /눅8:26-30, 눅8:38-39/ 이동원목사 2014-12-04 15:55:57 read : 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77년 미국 오히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3명의 여성에 대한 납치와 강간으로 체포된 빌리 밀리건(Billy Milliga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의외로 무죄판결을 받고 대신 정신 병원에 수감됩니다. 그가 진단받은 병명은 ‘다중 인격 장애’(multiple
군대 귀신들린 사람 /눅8:26-30, 눅8:38-39/ 이동원목사 2014-12-04 15:55:57 read : 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1977년 미국 오히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3명의 여성에 대한 납치와 강간으로 체포된 빌리 밀리건(Billy Milliga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의외로 무죄판결을 받고 대신 정신 병원에 수감됩니다. 그가 진단받은 병명은 ‘다중 인격 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였습니다. 다중 인격 장애는 한마디로 한 사람 안에 여러 인격들이 존재하면서 행동을 지배하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스토리는 ‘빌리 밀리건-스물 네 개의 인격을 가진 사나이’ 라는 책으로 소설화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담당자인 변호사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 빌리가 다중인격임을 확신하게 되어 그를 변호하게 됩니다. 변호사는 검사 앞에서 빌리의 다중 인격이 나타나는 모습을 재현하는데 성공합니다. 빌리의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격은 나중에 무려 24명으로 밝혀지지만 재판당시에는 10명 정도가 중심인물들로 부각됩니다. ‘빌리’는 핵심인격으로 자신이 다중인격임을 알고 괴로워하면서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레이건’이란 이름의 인격은 거칠고 폭력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앨런’은 사기꾼으로 탁월한 말솜씨로 타인들과의 협상을 담당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강간사실을 부정하다가 나중에 ‘에이들라나’가 등장하여 강간 범행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선생’이라는 인격이 등장하여 다른 여러 인격들을 통합하는 조정 기능을 담당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다중인격은 일종의 방어기제로 예를 들어 어렸을 때 경험한 학대나 외로움, 혹은 성폭행 같은 상처로 시작되는데 이런 충격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을 때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안에서 여러 다양한 인격들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 소개된 주인공이 바로 이런 다중인격 장애인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유사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갈릴리 바다 맞은편 거라사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주인공은 본래 도시에 살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질병으로 인해서 집을 떠나 무덤사이를 방황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은 도시 문명의 전형적인 피해자일 가능성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요르단 성지순례에서 거라사를 다녀오며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이미 예수님 당시에 거라사(제라쉬, 움께이스)는 거대한 문명을 자랑하던 도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본문의 주인공을 진단하며 그가 군대 귀신들에 의해 즉 많은 귀신들이 그안에 거하며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심리학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정신적 상처가 깊어가는 도시의 현대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늘 날 이런 다중인격적 장애증상들을 보이며 방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런 사람들에게도 치유의 희망이 있을까요? 물론 그 희망은 예수뿐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이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는 그 변화의 과정을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신의 정직한 상태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모든 치유는 직면에서 시작됩니다. 자기의 문제를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하는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중인격 장애를 위시해서 대부분의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은 자기가 병자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을 앓는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알콜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 성 중독자가 자신을 중독자라고 인정하시는 것을 본적이 있으십니까? 인정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을 만나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질문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질문을 하십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의 이름을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그는 이 질문을 통해서 그가 자신을 직면하도록 자기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30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그는 스스로를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하나가 아닌 여러 존재들이 군대처럼 자기 안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의 자가 진단이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경험하는 상태를 적어도 그는 진실하게 묘사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치유의 시작이며 치유의 희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명함에 적혀 있거나 주민 등록에 적혀 있는 이름 말고 당신의 깊은 내면에서 소리치고 있는 당신의 진정한 이름들은 무엇입니까? 요한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우리들의 인생 구도여정에서 만나는 이웃들의 이름이 아닌 우리 자신들의 이름들이 아닌가요? 크리스챤씨, 전도자씨, 고집쟁이, 온순씨, 선의씨, 자만씨, 악의씨, 적의씨, 무자비씨, 겁쟁이, 회의씨, 허례씨, 위선씨, 질투씨, 아첨씨, 경멸씨, 믿음씨, 수다쟁이, 허영씨, 절망씨, 심약씨, 두려움씨, 무지씨, 구두쇠, 소망씨--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당신의 이름은 하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중인격 장애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내 이름도 혹시 군대가 아닌가요? 치유를 원하신다면 이제라도 자신의 정직한 상태를 직면하십시오. 예수님의 치유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2. 치유의 주이신 예수의 발치에 앉히십니다. 본문을 읽어 내려가며 감사하고 또 감사한 것은 예수께서 이 사람을 마침내 예수의 발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눅8:35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물론 본문의 상황은 그가 치유된 직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그가 치유되기 전에도 본문 28절에 보면 그는 예수를 보고 그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 앞에 엎드렸고 그리고 마침내 예수의 발치에 앉히신바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요 축복입니까?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2-3주후엔 이웃 사랑 축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 우리의 VIP들에게 베풀어야 할 도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하여 예수 앞에 엎드리게 하고 마침내 그들로 예수의 발치에 앉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치유를 경험할 것입니다. 온전해 질 것입니다.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부터 순순히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할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군대 귀신 들린 이 사람도 처음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는 내 인생에서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의 발치에 앉아 주를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를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 없이 살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새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리, 가장 편안한 자리를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의 발치아래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아래 앉아 세상 모든 것을 얻은 행복한 자였습니다. 이번 이웃 사랑축제에 이런 행복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VIP들을 치유의 주님이신 예수의 발치아래 앉도록 인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3. 집으로 돌아가 예수를 전파하게 하십니다. 이제 이런 놀라운 치유, 행복한 치유를 경험한 이 사람에게 주께서 명하신 마지막 부탁은 무엇이었는가를 주목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자기를 변화시켜준 예수님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38절입니다.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다음절 3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나 홀로만의 신앙이 아닙니다. 나 홀로 치유받고--나 홀로 구원받고--나 홀로 은혜받고--나 홀로 행복해지고의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 이웃들과 이 은혜를, 이 행복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이 기쁜 소식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39절의 하반절입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이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마침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 군대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왜 주께서는 기적을 체험한 그에게 주님을 따라오기보다 먼저 자기 집, 자기 마을로 가서 전도하기를 요구하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그에 대한 주님의 기대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전도의 명에 순종해본 일이 없는 성도들이 계시다면 지난 달의 추천도서 ‘진돗개 전도왕’을 꼭 읽어 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은지 얼마 안되는 저자 박병선 집사님은 믿은 첫해에 무려 750명을 주께로 인도합니다. 그냥 전도만 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정착시킨 것입니다. 그 비결은 진돗개처럼 전도하는 것입니다. 한번 물면 결코 놓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물고 흔드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 예수 믿겠다고 상대방이 고백하게 될 때까지 계속 그에게 전하고 또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전도가 주의 가장 중요한 명이기 때문에 주의 일에 충성하면 주께서 내 모든 일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으로 전도의 명에 순종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본래 전남 순천시청에서 26년간을 근무한 공무원이었는데 그가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되어 명예퇴직하고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한참 믿음이 뜨거운 시절이어서 나름대로 원칙을 정하고 선거에 나섰는데 그 원칙은 “전도는 내가 선거운동은 하나님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전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면 “한표 부탁합니다가 아니라 예수 믿읍시다”였다고 합니다. 선거 사무실에서는 “선거 운동은 안하고 전도만 할거냐” “전도는 시의원 당선되고 난 후에 해도 되지 않느냐” “정말 하나님이 선거운동을 해주시겠느냐” “하나님만 너무 믿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지 모르겠다”등등의 우려가 많았지만 그는 전도에만 열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2년 6.13 지방선거의 결과는 전남 최다 득표 당선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시의원이 된 후 다시 동료 시의원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하여 22명중 20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순천시 복음화에 앞장서는 시의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책 머리말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세상적인 여러 가지 일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취미 생활이라고도 할수 있겠지요. 처음에 사진 촬영, 그 다음엔 수석, 그러다가 어느 날 진돗개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진돗개는 어느 개보다도 영리하여 충성심이 강한 개입니다. 얼마나 진돗개를 좋아하고 사랑했던지 진돗개를 훈련시키는 1급 훈련사 자격증을 소유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MBC특집 ‘진돗개 사랑’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저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돌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식당이든 길거리든 그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찾아가서 전도했습니다. 한번 만나서 안 되면 두 번,세 번, 아니 어떤 경우에는 한달이고 두 달이고 찾아다니면서 전도하여 끝내 그 영혼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드디어 진돗개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 마치 본문에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이제는 복음의 군병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변신이 갈망되지 않으시나요? 언제 까지 군대의 영들에 매여 노예 된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를 얻으실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나아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실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언제까지 내 문제에만 빠져 사시겠습니까? 이젠 이웃들을 구원하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라! /롬6:1-4/ 이삼규 목사 2017-06-14 06:59:19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4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라! /롬6:1-4/ 이삼규 목사 2017-06-14 06:59:19 read : 2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오늘 봉독해 올린 말씀 가운데 3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해드리겠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꿈에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정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 중 감리교인은 몇 명이나 됩니까?” 천사는 천국에 들어온 사람들의 명부를 한참 뒤진 후에 말했습니다. “감리교인은 한 명도 없군요.” 웨슬레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장로교인은 몇 명이나 왔나요?” 그러자 천사가 또 장부를 훑어보더니 “장로교인도 없군요.” 웨슬레는 매우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천사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국에 온 사람은 누구란 말입니까?” 천사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천국에 온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로마서는 논쟁적인 글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성도가 품었을 법한 의문들을 가져와 독백 적으로 문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질문은 3:8절에 나옵니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라는 질문과 유사합니다. 여기에서는 “은혜가 더욱 임하게 하도록 죄악을 더욱 행해야 하지 않겠느냐?”(사역)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5장의 논의를 훌륭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의 능력에 대해서 세세하게 논증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은혜가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범죄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질문을 통해서 사도는, 그럼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방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행할 것인가?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이 이야기는 심리적으로는 방종의 가능성까지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랑엔 언제나 이러한 허점이 있고 맹점이 있습니다. 우리도 늘 경험하는 바이지만 사랑에는 사랑대로 반드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면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사랑처럼 애매하고 무력하고 맹랑한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용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계속 용서하게 되면 무질서를 낳는 것 같고, 죄도 묵인하면 범죄를 가능케 하는 것을 측면에서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죄를 지으면 당장 심판하고 꼬집고 바로, 비판을 해야지 용서하면 더 많은 죄를 범하게 하는 결과가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즉, 관용은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은혜를 믿어서 더 죄짓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믿고 더 방종하며, 은혜를 더하려고 죄를 더하는 것이 아냐 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우리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즉,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무슨 뜻입니까? ‘죽음’이란 ‘ajpoqnhvskw( 아포쓰네스코)’ ‘죽다, 죽음에 직면하다, 죽기 마련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들이 누구와 불화할 때 “내가 죽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한 번 더 죽으면 됩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불만이 있고 원망이 있는 것은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전에 제가 성도님들 초상 치를 때 염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돌아가신 분들은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도 말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원망이 없습니다. 사랑 앞에 모든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참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집이 센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한 번만 물러나고 한 번만 죽어보면 자신이 생깁니다. 죽고 보면 죄에 대한 매력을 잃게 됩니다.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다는 뜻입니다. 죽어지내면 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죄가 죽은 자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사탄도 시체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귀도 죽은 자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고 교만해야 마귀가 가까이 갑니다. 어느 면으로든지 살아 있으면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죽음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성격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 죽음을 말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죽음을 간혹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극기를 통해서 나를 이기는 것, 혹은 망각 상태, 잃어버린 상태, 그리고 강한 절제로써 힘든 고행 생활 등을 가리켜 죽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혼자 고행하며 혼자 죽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세례로 설명합니다. 세례는 왜 우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이유를 그 속에 담고 있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baptivzw(밥티조) ’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세례(침례)를 베풀다/ baptize’입니다. 동사 밥티조는 밥토(bavptw, 잠그다, 물들이다)의 강의형으로 (a) '담그다' (b) (사람을 물에 빠뜨리거나 배를 침몰시킴으로) '멸망시키다'를 뜻합니다. 침례교 같은 곳에서는 세례탕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침례를 베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요단강에서 해야 된다고 요단 강 물을 직접 가져와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세례의 뜻, 즉 잠근다는 것은 물속에 완전히 잠기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물속에서 죽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우리가 죄의 나라에서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죄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죄 안에서 행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익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돌아다니는 유령처럼 이미 죽었던 데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났기’(7절)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는 죄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풀려나온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는 어리석음은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것입니다.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세례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에 부응하지 않고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죽여야 합니까?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두 가지 의미에서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을 죽이고 또 죄로 향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옛사람 혹은, 예수 없는 사람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옛사람을 죽여야 하며, 또한 죄 된 나(즉, 죄에 대하여 매력을 지니고 있는 나)를 죽여야 합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 죽은 자는 욕심이 없습니다. 세상적 욕심이 있을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죽는 모습을 세례라고 말합니다. 결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여자가 결혼하면 ‘출가외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결혼한 후에 친정에 자주 내왕하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혼해 살면서 친정생각을 많이 하면 결혼 생활에 지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과거를 깨끗이 잊으라는 말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도 옛사람이 죽어야 성공합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동창 가운데 첫 사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장성하여 서로 잊고 가정을 꾸려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창회에 나갔는데 첫 사랑이 참석하였더랍니다. 그래서 첫 사랑이라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 물으니 결혼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런데 남편은 죽고 이제 혼자 산다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첫 사랑을 잊지 못하고 집에 돌아 와서 아내에게 자기 첫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 여자를 그냥 버려둘 수 없다고 그 첫 사랑에게 가겠다고 하니 여자가 그러면 이혼하자고 해서 이혼을 했답니다. 이분은 서울대학까지 나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첫 사랑을 잊지 못하고 가정이 깨지고 그렇다고 그 첫 사랑과 잘 되었느냐 하면 그렇게 되지도 못하였답니다. 결혼 생활도 옛사람이 죽어야 편안합니다. 처녀 생활이 죽어야 하고, 친정생활이 죽어야 하며, 이제 신랑과 함께 새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이 결혼식입니다. 옛 말에 오죽하면 그 집의 귀신이 되라고 하였겠습니까? 세례도 이와 같습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옛 생활은 완전히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 피지족이 있습니다. 그 원주민이 사는 동네 한 가운데는 killing stone이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는 우리나라 단두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바위입니다. killing stone은 죽이는 바위로써 아주 무서운 사형 방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죄가 많은 죄인은 이 큰 바위에 묶어 놓고 머리를 짓눌러서 죽이며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참혹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죄에 대한 경고를 대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선교사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하고 세례를 줄 때, 그 죽이는 바위 앞에서 주었습니다. 그 바위에서 피를 보게 하고 “자, 옛사람은 이렇게 죽습니다.”하며 세례의 의미를 지혜로운 방법으로 인식시켜주었습니다. 이 선교방법이 대표적인 케이스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옛사람이 완전히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세례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나는 벌써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벌써 죽은 사람이요, 지금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생이므로 나를 위한 생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처럼 나를 위하여 죽으신 자를 위해 사는 것으로 나는 벌써 죽었습니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에게는 사망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생명력을 지닌 새로운 존재로 살게 됩니다. 부활의 생명력은 단지 먼 미래에 유보된 능력이 아니라, 현재 이 땅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죄의 사망권세를 이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능력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살게 하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육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살게 하고 영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살게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자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새 생명을 얻은 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성도에게 귀중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부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가게 만드는 거룩함의 능력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부패한 인간이 육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거룩한 삶을 사는 비결은 부활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인간을 지배하던 죄의 권세를 꺾으셨으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자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자임을 역설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께 대해 사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로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로 여겨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롬 6: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해서 하나님께 대해 살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이전과 다른 삶의 방식, 즉 하나님이 주신 영생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여전히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여전히 죽은 자입니다. 죄에 속한 옛사람은 죽고 죄의 권세를 벗어나 새사람으로 거듭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죄와 완전히 결별한 자입니다. 죄를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계속 죄 가운데 살아가려는 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잊은 자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성도가 자기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자가 아니며 의의 도구로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게 성별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새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은 거룩함의 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거룩함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몸이 죄의 지배를 받는 자는 이 같은 신성한 의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성도의 거룩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다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거룩한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깨끗한 교회 /대하34:14-21/막11:15-18/ 이성희목사 2015-01-19 10:08:50 read : 12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브라질 단기 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멀고 힘든 길이지만 모두가 기도해 주시는 덕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의료 선교도, 이미용 선교도 효과적이었고 많은 열매가 있을 줄을 믿습니다. 주성염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여 한인 목회를 하면서 원주민 선교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아주
깨끗한 교회 /대하34:14-21/막11:15-18/ 이성희목사 2015-01-19 10:08:50 read : 12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브라질 단기 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멀고 힘든 길이지만 모두가 기도해 주시는 덕으로 모든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의료 선교도, 이미용 선교도 효과적이었고 많은 열매가 있을 줄을 믿습니다. 주성염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여 한인 목회를 하면서 원주민 선교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절한 선교정책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와 영어와 한국말을 다 잘해서 아주 효율적인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도 우리 연동교회의 교우들을 하나님이 보내시고 우리가 갔을 때에 반갑게 맞아 주시고 환대를 받았습니다. 특히 강성극집사님께서 이민자로서 성공적으로 생활하시고 계셨습니다. 김영철집사님도 아주 사업에 성공하여 잘 지내고 계십니다. 우리 일행을 그 집에까지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교우들에게 문안드려 달라고 하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선교 일정을 마치고 이과수폭포에 가 보았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나이아가라폭포에 가 본적이 있습니다만 정말 그들이 말하는대로 불쌍한 나이아가라입니다. 우리가 간 날은 아주 더운 날이었지만 더운 것이 기억이 되지 않을만큼 그 광경이 머리에 꽉 차 있습니다. 이 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세 나라의 국경에 인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여러번 지도가 바뀌다가 파라과이의 것이었지만 브라질과의 전쟁에 패하여 브라질의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이나 파라과이는 자기의 것이었다가 주인이 바뀌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볼 때는 누구의 것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로 말하면 주인은 바뀐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폭포의 주인이셨습니다. 세계인이 공유하고 함께 즐기고 관리할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도 사람이 수없이 지나가고,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인인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하고 깨끗하심처럼 깨끗해야합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원망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갈등 없는 공동체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회학자 스캇펙은 갈등 없는 공동체는 ‘유사 공동체’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공동체란 갈등이 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해 나갑니다. 초대교회는 갈등 때문에 성장한 교회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초보자들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갈등은 교회의 성장의 요인이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면 성장했습니다. 갈등은 해결하면 더 이상 갈등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봉헌 때문에, 구제 때문에, 할례 때문에, 지역 때문에 갈등이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성장의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화해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기만 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신문사나 전화국은 소식을 받아 전해 주는 곳이지만 교회는 결코 그래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단순히 그 말씀 때문에 몰려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의 갑남을녀가 모여 전혀 새로운 사회적 완전체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며 역사에 의미를 세우는 일입니다. 갈등이 있고, 불결하고, 문제가 있는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 할 일은 교회는 이런 문제를 깨끗케 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깨끗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공히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교회는 신비로우면서도 늘 혼란이 함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를 겸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실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장에는 공생애 초기에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으로 나와 있고, 그리고 복음서는 공생애 말기에 다시 깨끗케 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두번의 성전 숙정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를 보며 성경을 통하여 우리 교회도 깨끗케 됨을 배워 깨끗한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우리 교회가 깨끗케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깨끗하게 하신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첫째, 상업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성전 내의 상업주의, 물질주의는 주님이 채찍을 드신 이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까지도 상업주의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장사꾼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전에 드릴 제물이 성전에서 팔렸습니다. 제사장들이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았습니다. 이런 당시의 성전을 예수님은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최근에도 상업주의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큰 건물과 화려한 장식과 교인의 수가 교회의 판단 기준이 되었습니다. 시장의 논리라고 말하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교회까지도 지배합니다. 자본주의는 다윈이즘을 기초로 하는 정글법칙입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적자생존의 법칙이 교회에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전을 가만히 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에 강도들이 득실거린다는 말입니다. 강도는 힘으로 돈과 목숨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돈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빼앗는 곳이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내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덕을 보겠다고 교회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됩니다. 항상 내가 손해보고 교회가 덕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도 우리가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43에는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책망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가지고 높은 자리를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함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그 때에 사마리아의 시몬이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20에는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지금도 그런 죄, 죄인이 있습니다.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으로 교회를 꾸려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으로 은혜를 조작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때 미국의 텔레비전 선교를 이끌어가던 짐 베이커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PTL이라는 엄청난 그룹을 거느린 PTL 왕국의 총수였습니다. 수억불에 해당되는 재산을 가지고 크리스천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사기협의로 구속되어 45년형을 받고 복역중입니다. PTL이란 “Praise the Lord” 즉 “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리더십의 그림자”란 책에 보면 이 분은 리더십의 그림자인 어두운 부분을 극복하지 못한 예로 나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지는 어릴 때의 열등의식과 자신의 왜소함 등을 엉뚱한 방향으로 해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는 잘못 살았다’(I was Wrong)이란 책에서 자신이 번영의 신인 금송아지를 숭배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금송아지에게 우리를 인도하라고 하는 광야의 실패는 지금도 교회에 잔재하고 있는 교회의 실패 요인입니다. 면죄부도 상업주의의 한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로마 교회는 성베드로 성당이라는 엄청난 대작을 도모하였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을 지을만한 재원을 마련해야 하는데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팔아서 성당 건축의 재원을 마련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일에 앞장선 신부 테젤(Tezel)이 면죄부를 팔러 갔습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면죄부를 사면 지난 죄를 다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앞으로 지을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테젤은 “하나를 더 사면 앞으로 지을 죄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테젤이 면죄부를 팔고 로마로 돌아오다가 강도를 만나 돈을 다 털렸습니다. 테젤은 이 돈이 면죄부를 판 돈이라고 하였지만 강도는 그 손을 다 털어갔습니다. “면죄부를 판 돈을 훔쳐가면 지옥의 밑창에 들어간다”하고 테젤이 말하자 강도는 면죄부 두 장을 보이며 “앞으로 지을 죄도 면죄 맏는다고 그러지 않았소”하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런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의 산물이 성베드로 성당입니다. 이런 상업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분주함은 물질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도 교회도 분주함은 이제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분주함의 저변에는 물질이라는 맘몬의 신이 있습니다. 물질만능을 반영하는 돈버는 책이 홍수를 이룹니다. “돈버는 법을 한 수 가르쳐 주마”라고 사람들을 꼬입니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어제 뉴스에는 유럽에도 로또 열풍으로 사람들이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테레사수녀가 한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이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물질주의와 상업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둘째, 교권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권리로 성전을 장사하는 자리로 빌려주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의 권리로 이용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타락하고 더러워지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를 보세요. 천하 만국을 다 보이며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니 절하라”고 합니다. 천하 만국이 하나님의 것이며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에게 주인 아닌 마귀가 보이며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처럼 위장하고 이용하는 것은 마귀의 짓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교권주의에 빠지게 되면 마귀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당시 종교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제사장의 직은 세습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일하고 권력 행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성직자가 안일해지고 권력 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타락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직자의 안일과 권력 행사 그 자체가 타락입니다. 또 여기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 맛에서 헤어나기 힘들다고 합니다. 구약의 종교개혁이 요시야시대에 일어납니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성전을 깨끗케 하고 그 후로는 성전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요시야 왕의 성전숙정으로 성전에서 쓰레기 밑에 쳐박혀 있는 성경 두루마리를 발견하였습니다. 힐기야 대제사장이 무얼했단 말입니까? 힐기야는 안일한 권력형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대하여 아무 책임감이 없고 자신의 세속적 권리만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속적 권력에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교회의 힘을 세속적 힘과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의 힘은 거룩한 힘입니다. 거룩한 힘은 구별된 힘인 것입니다. 신령하고 거룩한 힘은 세상을 지배하고 야합하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힘입니다. 예수님도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29에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은 세상을 세속적으로 지배하려는 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가지고 세속적 명예나 권력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힘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힘보다 훨씬 더 강해야 하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가 힘의 상징이 되면 교회가 부패하였습니다. 중세의 교회는 정말 힘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였습니다. 교회의 힘이 가장 강할 때가 교황 이노센트 3세 때일 것입니다. 그는 1198년부터 1216년까지 교황으로 재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황제를 임명했습니다. 또 영국의 존 왕이 교황청이 임명한 켄터베리 대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4차 십자군을 선포하였습니다. 결국 존 왕이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전체가 교황청의 봉토가 되었고 매년 1천 마르크의 봉토세를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이런 교회의 권력이 결국 종교개혁의 불을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가장 어두운 시대라고 합니다. 이 때는 성직자가 가장 부유한 계급이었습니다. 수도원이 가장 재산을 많이 거느린 기관이었습니다. 돈을 주고 성직을 사는 성직 매매가 성행하였습니다 . 최근 한국 교회의 화두는 기독교 정당 창당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직자 가운데도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정치는 성직자의 몫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직자가 현실 정치에서 잘못되면 교회에 직접적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당이란 어디까지나 정치적 차원에서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적 차원에서 정당이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와 같은 진흙탕에서는 성경적 원리와 신앙적 양심을 지켜가면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교회가 정당을 창당할 것이 아니라 기독 의원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여 정치가 교회를 이롭게 하고 선교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가짜 박사학위 소동입니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다시 이 문제가 고개를 드는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정부의 부패방지위원회는 우리 나라의 가짜 박사학위를 뿌리뽑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당자 가운데는 목사가 제일 많다고 합니다. 저도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걸 꼭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불편할 때가 많아요. 누가 뭘 물어보면 멋지게 대답해도 박사니까 그 정도는 알아야 하지 하면서 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르면 “박사가 그것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사가 인정받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박사학위 없으면서 실력 있는 것이 더 훌륭한 것 아니겠습니까? 목사들이 이런 욕심을 가지는데는 성도들의 잘못도 있다고 봅니다. 자기 교회의 목사가 가짜라도 박사학위 하나쯤은 있는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조리한 필요와 충족의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부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교권의 침해라고 봅니다. 이런 데서부터 우리는 자유로와야 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셋째, 혼합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예수님 당시까지 예루살렘의 성전은 세 번 건축되었습니다. 첫째는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포로민이 귀환할 때에 스룹바벨이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헤롯 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이 유대인에게 환심 사기 위하여 세워놓은 성전입니다. 제사장들이 그걸 미끼로 성전을 지어주는 것을 묵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를 세워준 것입니다. 이 성전을 완공하기 위하여 제사장들은 헤롯에게 결탁하고 온갖 아양을 다 떨었을 것입니다.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혼동되고 혼합된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을 기뻐하실리가 없습니다. 성전은 혼합되지 않고 깨끗해야 합니다. 신명기 22:9에는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고 합니다. 10절는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라고 합니다. 11절에는 또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왜요? 이렇게 혼합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신을 혼돈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혼합주의를 배격하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집단 무의식과 정서가 상당히 혼합적입니다. 그래서 생활에서 보면 혼돈과 혼합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집단 무의식은 식사문화와 일치한다고 합니다. 밥을 먹을 때도 보면 비빔밥과 국밥이 주류입니다. 비벼먹고 말아먹는 것은 모두 혼합된 음식입니다. 섞어찌개라는 것도 있고 부대찌개라는 것도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전부 집어 넣어 끓여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콜라와 사이다도 섞어서 마십니다. 그게 맛있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술을 마셔도 섞습니다. 말썽많은 폭탄주를 보니까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서 마십디다. 그래야 기분좋게 취한다나요. 섞으면 폭탄이 되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내 곤하게 잠이 드셨습니다. 그 때에 심한 바람이 불어 물결이 요동하고 물이 배에 들어와 배가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는 물 위에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불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은 언제나 붑니다. 문제는 물이 배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물은 배 밖에 있어야 하고, 배 밑에 있어야 하는데 배 안에 들어왔기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에 존재합니다. 세상에는 항상 바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의 물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혼합되고 심지어 야합하게 되면 교회는 문제가 발생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리 채프먼은 그의 책 ‘하나님이 쓰시는 사랑의 언어’에서 “문화적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들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여깁니다. 겉은 기독교인이지만 속은 세속 문화가 혼란스럽게 혼재해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일반적으로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순결하지 못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기에 확실하지 못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화적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적 불교 신자나 힌두교도, 유대인, 무슬림이나 다를바가 전혀 없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형편없는 사람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더럽고 어지러운 교회도 깨끗하게 하십니다. 교회를 보면 비판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합니다. 깨끗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들은 나 때문에 더러워진 부분입니다. 교회가 고쳐야 할 부분은 알고 보면 내가 고쳐야 할 부분들입니다. 내가 고쳐지면 교회가 절로 깨끗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최근 어느 책에서 희망적 글을 읽었습니다. 윌리엄 헨드릭스의 ‘이탈자 인터뷰’에서 상처 받고 환멸을 느껴 교회를 떠났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영적 성장을 계속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잘 명심해야 합니다.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고독자가 돼야 합니다. 의식 있는 소수가 돼야 합니다. 지배적 양심으로 우뚝 서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아름다워지고, 깨끗하게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란 거름과 같습니다. 거름은 한 곳에 쌓아두면 이웃에게 악취를 풍깁니다. 그러나 땅에 골고루 뿌리면 세상을 비옥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때문에 세상이 더러워졌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없다면 이 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깨끗한 교회를 위하여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인 하나님의 집에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특정한 사람의 집이 아니라 만민의 집이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교회가 온갖 상인들이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시려고 채찍을 드십니다. 전도서 5:1에는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교회가 깨끗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산에서 신을 벗는 모세의 심정으로 우리의 세속적인 더러움을 벗고 교회를 들어옵시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집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나를 정결케 합시다. 깨끗한 하나님의 집에는 깨끗한 사람들이 들어올 자격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어가는 깨끗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손을 힘 있게 하소서 /느6:7-9/막3:1-5/ 이성희목사 2015-01-18 18:00:17 read : 11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런던 장애인올림픽이 오늘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최선을 다해 경기하는 모습이 올림픽 못지않게 감동을 줍니다. 지난 주간에 사격 입사 경추장애 결선에서 금메달을 딴 강주영선수는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부인인 이윤경씨가 보조요원으로 함께 참여하여 기쁨이 배가 되
내 손을 힘 있게 하소서 /느6:7-9/막3:1-5/ 이성희목사 2015-01-18 18:00:17 read : 118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런던 장애인올림픽이 오늘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도 최선을 다해 경기하는 모습이 올림픽 못지않게 감동을 줍니다. 지난 주간에 사격 입사 경추장애 결선에서 금메달을 딴 강주영선수는 세계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는 부인인 이윤경씨가 보조요원으로 함께 참여하여 기쁨이 배가 되었습니다. 손을 마음대로 못 쓰는 경추장애선수들에게는 실탄장전 등의 도움을 주는 보조요원이 함께 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강선수는 대학생 때 사고로 경추를 다쳐 하반신을 쓰지 못합니다. 오른손도 쥐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왼손으로 사격을 합니다. 경추에 장애를 입었는데 손을 쓰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에 뇌에 손상을 입으면 손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손이 아니라 다른 곳이 탈나도 손을 못 쓰게 됩니다. 손을 쓰기 위해서는 손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고쳐야 할 때가 많습니다. 손을 쓸 줄 안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homo sapiens)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쓸 줄 아는 사람(homo habilis)입니다. 손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도구를 만들 줄 아는 사람(homo faber)입니다. 사람이 생각한다는 것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의 숙련은 두뇌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손 솜씨는 두뇌에서 비롯됩니다. 아이들이 손으로 무엇을 만들고 색종이를 접는 놀이를 많이 하면 두뇌가 좋아집니다. 손은 두뇌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머리와 손은 항상 짝을 이룹니다. 결국 손은 마음의 대행자입니다. 손에 대한 전설이나, 신화나, 이야기 등은 한 결 같이 손을 힘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손재주도 알고 보면 손의 힘입니다. 손의 섬세함도 다 손의 힘입니다. 손은 그 자체로 힘이 있고, 또 손은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국의 ‘아서왕의 전설’에 의하면 수면에 선 아서는 호수에서 손이 올라와 명검 엑스캘리버(Excalibur)를 양도받고, 죽을 때에 부하 베디비아를 통하여 다시 호수에 던져서 돌려주자, 물속에서 나타난 손이 칼을 받아서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호수의 손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손입니다. 손의 힘이란 관리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무기로 변합니다. 권세를 얻기 위해 남을 할퀴고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목을 죄고, 쾌락을 위해 상대를 유혹하는 손이 됩니다. 반면에 손은 잘 다스리면 은혜의 도구로 쓰입니다. 우리의 손을 잘 쓰면 하나님의 손안에 든 연장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에게 매일 손을 쓰는 일 하라고 지시합니다. 손을 쓰는 일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통입니다. 사람은 손을 써야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손은 그 자체로 많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신 가운데 보면 손이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시바신은 천수천족(千手千足)의 신입니다. 인도나 네팔 등지의 힌두 신전에 가보면 신들이 있는데 힌두의 신은 많은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의 신들은 그 많은 손으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한 손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야훼 하나님과 모세의 첫 만남을 보세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대화 가운데 모세에게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손에 있는 지팡이를 보이자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네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에 나병의 흔적이 생겼습니다. 모세가 놀라자 하나님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의 만남을 손을 가지고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힘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손을 힘 있게 하십니다. 느헤미야는 귀환기의 영웅입니다. 평신도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아 돌아와 일을 시작했지만 방해자들이 있었습니다. 산발랏, 게셈, 도비야라는 사람들이 계속 일을 방해하며 맥 빠지게 합니다. 느헤미야의 일을 조롱했습니다. 산발랏의 다섯 번째 편지에 대하여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고 청합니다. 이 기도는 느헤미야에게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기도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도 가장 절실한 기도가 바로 이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렵게 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 6:9 상반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이라고 합니다. 방해자들이 느헤미야와 함께 일하는 사람을 두렵게 하려고 합니다. 겁을 주려고 합니다. 그들이 왜 두렵게 하고자 합니까? 실상은 자기들이 두려우니까 그 두려움을 느헤미야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야곱과 그 가족이 애급으로 이주하여 400년을 살았습니다. 오랜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와서 히브리백성을 종이 되게 하여 심한 노역을 하게 하고 구박합니다. 왜 히브리 사람을 구박하는지 아십니까? 히브리 사람의 번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왕이 “히브리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 아들이면 죽이라”고 합니다. 왜 죽이라고 합니까? 히브리 사람이 두려우니까 죽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을 죽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하여 모압을 지나게 되었을 때 모압의 발락왕은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백성을 저주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왜 저주하라고 하였습니까? 두려우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출애급기 15:15에는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급이 변방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두려워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가데스에서 에돔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에돔의 밭이나 포도원을 해치지 않을 것이며, 우물물도 마시지 않고 지나가기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에돔 왕은 “안 된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을 경유하지 못하고 다른 길로 돌아서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에돔왕도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말씀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서기관과 같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두려워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위협하고, 돌로 치려 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허위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였습니다. 신약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끊임없이 외부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우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사도행전에서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씀을 전하다가 공회에 잡혀 왔습니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책잡을만한 것을 찾지 못하자 “위협하여 놓으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였습니다. 사실은 사도들을 두려워하여 위협한 것입니다. 스데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을 이기지 못하자 위협하였고, 그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자 귀를 막고 돌로 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 출신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위협과 핍박이 많았겠습니까? 성경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바울의 생명 있는 복음을 두려워하여 그를 두렵게 하였던 것입니다. 생명을 전하면 누구나 이런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허드슨 연구소의 연구원인 유대인 마이클 호로비츠의 관찰에 의하면 “유럽의 역사를 살펴볼 때 지금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섬뜩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의 숫자에 버금가는 것이다.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15만 9천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순교하며, 2억에서 2억 5천만 명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4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실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예수를 믿고 있으니 모두가 편안하게 예수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순교는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요즘에도 순교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재작년 한해에 2,175명이 순교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국제오픈도어선교회의 발표에 의하면 나이지리아에서 종교 폭동으로 2,000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라크에서 90명이 순교하였습니다. 파키스탄과 라오스에서 2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집트와 인도에서 각각 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순교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교도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도 이런 위협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과 억울함과 비난이 있습니다. 이런 불쾌하고 힘든 일들을 만날 때에 조금도 섭섭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교에 비교해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는 왜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경외’란 말은 거룩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경외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 찬양, 우선순위를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두렵게 하고, 위협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섬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 섬김은 그냥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신앙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섬깁니다. 열대 아메리카 산의 짖는 원숭이는 정글에서 가장 소리가 큰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리는 가장 크지만 가장 힘세지는 않습니다. 동물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원숭이가 두려울 때 소리를 크게 지른다고 합니다. 두려운 개가 크게 짓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사람을 두렵게 하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손을 힘 있게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6:9 하반절에는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고 합니다. 산발랏의 다섯 번째 편지 내용에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와서 페르시아 왕실에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전혀 근거가 없는 모함을 한 것입니다. 산발랏의 무고한 모함이 아닥사스다왕에게 전해질 경우, 느헤미야는 곤란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손을 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는 간구는 ‘하나님께 담대한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을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아말렉과 첫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준비되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손이 높이 들렸기 때문에 승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높이 들린 모세의 손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그 손이 내려오지 않게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이 높이 들리게 힘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그 손은 승리의 손이었습니다. 모세는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모세의 팔이 높이 올라가 있어서 이겼지만 ‘모세 닛시’가 아닙니다. 모세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고,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삼손은 성경에서 가장 힘센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나실인이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특별하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큰 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충동을 통제할 만큼 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그는 여자에게 약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둘째는 혼자서 성공하려면 실패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항상 혼자서 싸웠습니다. 혼자 싸울 때는 멋지게 이길 수 있었지만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사랑하던 여인 들릴라가 “당신을 결박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여러번 거짓으로 가르쳐 주었지만 결국 들릴라에게 천기누설을 하고 맙니다. 그의 머리털을 밀어버리자 그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힘이 없어진 삼손의 두 눈을 뺐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다곤 신전에 데려가 재주를 부리게 하였습니다. 삼손은 두 기둥 사이에 서서 손으로 기둥 잡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신전이 파괴될 때에 3,000명이 죽었습니다. 성경은 이 때 죽은 자의 수가 삼손이 살아 있을 때 죽인 자 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삼손의 손을 힘 있게 하여 그가 원수를 갚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에는 내과, 안과, 일반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신경정신과 치유가 다 있습니다. 그 중에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손이 말랐던 그 사람은 원래 이름 난 석수였다고 합니다. 돌을 깨고 다듬는 직업을 가진 석수가 손이 말라 있으면 그는 직업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시고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에게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손에 힘만 있으면 만사가 풀립니다. 다시 석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마른 손이 풀려 손을 힘 있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의 손은 권위와 힘의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손을 얹음”(laying on of hands)이란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손을 얹었다는 것은 여러 경우에 등장합니다. 첫째는 어떤 직분을 주어 임직할 때입니다. 둘째는 치유할 때입니다. 셋째는 범죄자를 돌로 칠 때입니다. 넷째는 짐승을 제물로 잡을 때입니다. 다섯째는 신약에서 축복할 때입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에 손을 얹은 것은 주의 종의 손을 힘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입니다. 마가복음 16:18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원수의 손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사람의 손에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치유의 권능을 하나님의 사람의 손을 이용하여 나타내 주십니다. 하나님이 힘 있게 하는 손은 주먹 쥔 손이 아니라 열린 손, 편 손입니다. 열린 손은 주먹 쥔 손보다 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린 손은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열린 손은 평온함을 주는 손입니다. 열린 손의 반대는 주먹입니다. 주먹을 쥐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억지로 움켜쥐려고 합니다. 주려고 하기보다 빼앗으려고 합니다. 주먹은 전쟁을 일으키며 항상 누군가와 대적합니다. 진정한 힘은 주먹을 쥐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린 손으로만 얻을 수 있고, 열린 손으로 진정한 소원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주먹 쥔 손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 수 없습니다. 이미 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얻으려면 손을 열어야 합니다. 손을 쫙 펴야 합니다. 한국인의 손은 기계보다 정밀한 손이라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세계가 우리의 손에 찬사를 보냅니다. 쇠 젓가락으로 콩을 집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가전제품이나, 조립 공정이나, 생명공학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손이 우리의 손입니다. 우리민족은 손으로 하는 일은 잘 하는 민족입니다. 운동도 손으로 하는 운동을 발로 하는 운동보다 잘 하는 민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민족에게 하나님이 손에 힘을 주셔야 합니다. 손의 힘이 필요합니다. 결론 얼마 전 이라크의 ‘회교혁명 평의회’에서는 포고령 통해 새로운 형벌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이미 범죄자들에게 ‘손목절단형’을 집행하고 있는 이라크에서는 최근 범죄가 급증함에 따라 귀를 자르는 형벌을 실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수족을 절단당한 전과자에게는 이마에 문신을 명령했습니다. 수족을 절단 당한 것과 및 문신을 숨기려고 성형수술을 하거나 그렇게 하도록 그 행위를 도와주는 사람들 역시 손과 귀가 잘리게 됩니다. 이슬람의 법은 참 무섭습니다. 손을 자르는 형벌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성경도 손을 자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의하여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을 위하여 자릅니다. 마태복음 5:30에는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합니다. 왜요? 손을 더 힘 있게 하려고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6:3에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고 합니다. 왜요? 손을 더 힘 있게 하려고 모르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원수들의 위협이나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원수들을 이기게 하시려고 우리 손에 하나님의 힘을 실어주십니다. 느헤미야를 괴롭히던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손에 힘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의 공사가 잘 끝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손을 하나님이 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시23:5/ 오주철 목사 2016-04-11 09:30:27 read : 4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결혼을 앞둔 손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처음 시집 오셔서 할아버지를 뭐라고 부르셨어요? 처음에는 영감이라고 안 하셨지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물론이지 처음에는 나도 당신이라고 했지"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손녀가 다시 "요즈음은 어떻게 부르세요?"라고 하니까 할머니
내 원수의 목전에서 /시23:5/ 오주철 목사 2016-04-11 09:30:27 read : 42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결혼을 앞둔 손녀가 할머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처음 시집 오셔서 할아버지를 뭐라고 부르셨어요? 처음에는 영감이라고 안 하셨지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물론이지 처음에는 나도 당신이라고 했지"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손녀가 다시 "요즈음은 어떻게 부르세요?"라고 하니까 할머니가 지체없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응, 요새는 웬수라고 해."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는 유달리 원수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3편에서도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23편 5절을 북한에서 번역된 성경에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쑤를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을 각 지방 버전으로 이렇게 번역되고 있습니다. 경상도 버전입니다. "내 라이벌 죽일 놈의 문디 자슥들 앞에서 내 대가리에 지름을 바르고/ 낼로 팍팍 키와 주시니 내사 뭔 걱정이 있겄노 말이다." 충청도 버전입니다. "주님께서 지 웬수의 면전에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잔치를 여시구 / 지름으로 지 머리에 발라주시니 지가 몸둘바를 모르겠네유. 시방두 지 잔이 넘치네유" 전라도 버전입니다. "아따! 주께서 저 싸가지 없는 놈들 앞에서 내게 밥상을 챙겨주시고 내 대그빡에 지름칠해 주싱께로 / 참말로 나가 기뻐블그마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궁극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그 원수는 바로 사탄 마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탄'이라는 원래의 뜻이 'enemy'라고 해서 '원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탄 마귀라는 말은 원수 마귀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할 때, 혹은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 끊임없이 우리의 삶과 사고의 영역 속에 도전하며 인간들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하는 존재가 바로 원수 마귀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귀의 공격에서 자유로운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약속하기를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들에게 상을 차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수들 두 눈뜨고 쳐다보는데 보란 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다시 말하면, 원수들이 두 눈뜨고 쳐다보고 있는 그 앞에서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첫째로, 그 은혜는 풍성한 공급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여정이 결코 낭만적인 산책로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시편 23편에서 묵상한 것처럼 하나님의 양들인 우리도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반드시 지나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도 시련과 고통에서 예외가 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과 시련에서 면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사탄 마귀는 우리의 마음속에, 특별히 예수를 믿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를 믿으면 어쩐지 인생에서 내가 손해를 볼 것 같고, 신앙생활이 고통의 길일 것 같은 그런 어두운 마음의 그림을 그려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전도를 해 보면 솔직하게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저는 믿고 싶은데요, 그런데 믿었다가 우리 집안에 우환이 생길까봐 믿지 못하겠어요." 예수를 믿고 싶지만 믿었다가 우리 집안에 풍파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길까봐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 보셨습니까? 전도를 해 봤어야 만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원수의 목전에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여기에서 도둑은 원수 마귀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파괴시킵니다. 마귀는 빼앗는 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가져가고, 가치를 왜곡시키는 자, 그것이 원수 마귀입니다. 원수 마귀가 하는 일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의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흔히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좀 고생을 하지만 죽을 때는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구원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는 양들이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간신히 구원만 받아서 고생하다가 죽을 때 천당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풍성한 생명, 풍성한 기쁨, 풍성한 의미, 풍성한 감격을 누리는 삶이 가능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더 풍성한 기쁨을 누리십시오. 더 더 풍성한 감격을 누리십시오. 더 더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를 믿고 이런 풍성한 삶을 체험한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에 어느 한 날 반드시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주님, 예수를 믿고 보니까 제 잔이 넘치네요." 아직도 이 고백을 못해 보신 분은 죄송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보지 못한 분이십니다. 실제로 중동 지방의 양들을 관찰해 보면, 그 양들이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가 양들을 데리고 골짜기를 따라 고원지대의 방목장으로 올라가는 시기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목자들은 봄철에 미리 그 고원지대를 답사한다고 합니다. 여름철을 지날 때 양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를 미리 올라가서 답사를 하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양들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대부분 목자들이 양들을 위해서 준비한 고원지대의 목초지는 바위가 편편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풀들이 있습니다.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맹수들이나 야수들의 공격에서 쉽게 양떼들을 지킬 수 있고, 따스한 햇빛이 있고 편편한 넓은 바위가 있는 곳을 미리 답사하여 준비해 둡니다. 그리고 이런 지역을 가리켜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일반적으로 "메사"(MESA)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목자들은 양떼들을 데리고 골짜기를 지나서 고원지대로 올라갑니다. 일단 거기에 도착하게 되면 "메사", 편편한 바위가 있는 주변 지역을 깨끗이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웅덩이나 샘물들을 잘 관리해서 양떼들이 쉽게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주변에 독풀들을 제거하고 좋은 풀들을 먹을 수 있는 환경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맹수들의 불의의 습격에 대비하여 울타리나 둑을 만들어 자기의 양들이 마음껏 안심하고 향연을 즐기게 합니다. 이것을 일종의 "메사"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양떼들이 골짜기를 지나서 고원지대를 향해 올라가다가 지치고 힘들어하는 그 순간, 드디어 "메사"라고 하는 고원지대의 방목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시편 기자가 고백하고 있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Table)을 차려 주시고" 편편한 바위가 있고, 물이 있고, 싱싱하게 푸른 식물이 있습니다. 이런 천연의 잔치 자리인 고산의 목초지에서 긴 여정에 지친 양들이 오랜만에 실컷 먹고 마시며 쉬었을 때 양들이 느끼는 소감은 어떤 소감일까요? 이런 소감일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도 어려움 속에 있지만 당시에 고난을 받고 있었던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런 메시지를 계속해서 되풀이합니다. "여러분, 기뻐하세요. 좀 어려움이 있어도 기뻐하세요.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기뻐하세요." 이것이 빌립보서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앞에 스크린에 띄워져 있는 빌립보서 4장 1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풍성한 삶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양들이 목자에게 이끌림을 받아 골짜기를 올라가면서 힘들고 지쳐갈 때 종종 목자는 양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양들아, 힘들지? 그러나 조금만 견뎌. 조금만 더 올라가면 메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여정에는 이런 메사의 은총, 혹은 풍성한 공급의 은총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여정이 조금은 힘들고 피곤해도 저 높은 곳, 고원의 목초지에 예비된 향연을 기대하신다면 우리는 오늘의 시련을 견딜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앞에 주께서 예비하신 잔치 자리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과거에 모두가 다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다렸던 유일한 희망은 동네 잔치였습니다. 우리 집 잔치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동네 잔치만 열리면 그 날은 내 잔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잔이 넘치는 날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잔치집과 같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 잔치 날이 다가옵니다. 그날 원수의 목전에서 누리게 될 그 풍성한 공급의 은혜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암울한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잔치집의 비전을 보여주시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기다려. 우리는 곧 메사에 도착할 거야. 거기에 가면 우리는 실컷 먹고 마실 수 있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우리가 지금 인생의 고난과 고통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건너편에 있는 비전을 바라볼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길 수가 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내일의 잔치날을 그릴 수만 있다면 오늘의 고통은 좀 힘들고 어렵지만 그러나 넉넉히,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향연의 자리를 준비하시고, 상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공격해 들어오는 신랄한 어둠과 고통의 한복판 속에서도 오늘의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어느 날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향연을 베풀어주실 그분을 바라보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시련이고, 어둠이고,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미래에 주님께서 준비하신 그 잔치와 향연의 비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시는 은혜, 그것은 첫째로 풍성한 공급의 은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는, 완벽한 치유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원수의 목전에서 어느 날 경험하게 될 놀라운 은혜 가운데 하나가 완벽한 치유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삶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살아도 상처는 피할 수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여정에도 상처는 있습니다. 상처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상처를 받습니다. 문제는 이 상처에서 속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료를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 상처 때문에 무너집니다. 그 상처 때문에 좌절하고, 그 상처 때문에 포기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안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치료받는 것입니다. 한때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가 나중에 목사가 되었던 필립 켈러는 양들이 골짜기를 지나 고원지대를 향할 때, 그리고 고원에 도착할 때 양떼들을 위협하는 최대의 원수는 파리떼라고 합니다. 그는 양떼들을 공격하는 파리떼의 다양한 종류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쇠파리, 말파리, 발뒤꿈치 파리, 코파리, 허리파리, 사슴파리, 진디파리, 등에, 모기, 각다귀, 날개 달린 각종 해충파리 등" 수많은 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양들은 코파리에게 약하다고 합니다. 코파리가 양떼들 주변에서 윙윙거리기 시작하면 양떼들은 갑자기 긴장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코파리의 목적은 일단 양들의 코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의 코에 덮힌 촉촉하고 끈끈한 점막 안에 알을 낳으려고 기회를 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공격해서 양들의 머리까지 진격해 들어온다고 합니다. 만일 코 파리가 알을 낳기에 성공하면 며칠 안에 부화되어 작고 가느다란 벌레와도 같은 유충이 콧구멍을 통해 양의 머리 속까지 파고 들어가 각종 염증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코파리가 이 머리를 점령하게 되면 양들은 격렬한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 양들은 그 머리를 바위에 부딪치고, 나무에 부딪치면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때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기름병을 준비합니다. 제일 좋은 것이 올리브 기름입니다. 목자는 그 기름병을 가지고 있다가 양의 코를 마구 비벼줍니다. 코 속에 기름을 집어넣기도 하고, 귀를 비벼주기도 합니다. 목을 비벼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에 계속 발라 줍니다. 그러면 양들이 시원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고통을 당하는 양이 있으면 기름병이 아니라 기름통을 가지고 있다가 아예 양들의 머리를 거기에다 푹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꺼냅니다. 그때 양들은 비로소 치료를 느끼면서 표정이 환해진다고 합니다. 평안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배경에서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본문 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제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면 옆에 있는 분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야고보서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영적 지도자들에게 병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그냥 기도가 아니라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장에 보면, 메시아의 예언이 나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예언하면서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래서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십니까?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며,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메시아가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아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치료할 그분의 사역을 상징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고통과 슬픔 속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가 찾아와서 내 상처를 만져주며 나와 함께 있어줄 때 우리는 얼마나 위로를 느낍니까? 그렇지만 사람의 위로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나의 고통을 이해해도 그 이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완벽하게 아시는 분, 나의 처절한 외로움과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 존재의 깊은 곳에 숨겨진 고통과 상처를 이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그분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셔서 내 존재의 깊은 곳을 만져주실 때 비로소 우리의 치료는 완벽한 것입니다. 인간의 상처의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영, 그 영의 기름 부으심만이 완벽한 치유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 강원도에 정착해 살면서 예수원을 설립하여 많은 영성을 끼쳤던 대천덕 신부이신 R. A. 토레이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그의 할아버지인 루벤 토레이는 무디와 함께 사역했을 뿐만 아니라 무디 성경학교 교장을 지냈던 유명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침에 일어날 때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성령으로 내게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 성령의 만지심이 우리를 완벽하게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지나간 밤에 어제의 고통을 치유하고 오늘 하루를 새롭게 살수 있는 준비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어제는 어제를 위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했습니다.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삶에서 오늘 내가 견뎌내야 할 삶의 고통과 억압 앞에 도전하기 위해서 오늘 이 순간 내게 임하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어제의 기름 부으심만으로 오늘의 상처를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매일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성령으로 내게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저는 오늘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추상적인 소리로 들릴 것 같지만 그러나 이것만이 우리 민족이 서로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말들을 많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말들이 해결될 것 같지만 말이 많으면 말이 많습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유달리 상처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우리가 공격적이고 비판적이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과거에 내가 받은 상처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유달리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받은 상처가 그만큼 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상처 받은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기도로 주님 앞에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의 도우심을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만이 완벽한 해답이라고 믿습니다. 남북 분단의 상처도 깊은 상처인데, 그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남남갈등입니다. 대통령을 향해 욕설을 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우리의 국론이 분열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고 공격하는 이런 대립의 관계가 계속된다면 이 깊은 상처는 어떻게 치료할 수가 있겠습니까? 서로의 다른 정치적 입장 때문에 감정적인 비난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남북 분단의 고통에다가 남남갈등의 또 다른 상처를 추가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하나님 앞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상처와 죄들을 꺼집어내고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져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치유를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민족의 새로운 날을 전망하고 바라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기름 부어 주시면 마음이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고, 슬픔에 잠겨 있던 사람들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날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이렇게 고백하며 치유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번째로, 그것은 새로운 사역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치유 받은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는 치유만이 아니라 이제는 치유를 받았으니 새로운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로 하여금 새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기름 부으심은 새로운 사역에로의 은혜입니다. 구약에 보면, 어떤 자리에 임명될 때 기름 부음을 받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왕이 왕의 자리에 취임할 때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임명될 때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그 자리에 취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역사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새로운 왕이 취임할 때마다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왕과 새로운 선지자를 기다립니다. 가짜 선지자에 질리면서 그들은 새로운 선지자들을 기다립니다. 새로운 제사장을 기다립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실망하면서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세 가지 기능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주시는 한 분이 역사에 나타날 것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아람어입니다. 이 메시아라는 말을 헬라어로 바꾸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똑 같은데 그 뜻은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약에서 일어난 최대의 사건이 무엇인 줄을 아십니까? 아니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최대의 사건이 무엇인 줄을 아십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날 가장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따라다니고 있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라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작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습니다. 상처를 치료 받고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작은 그리스도로 삼고, 우리 주변에 아직도 예수님을 모른 채 더 깊은 고통과 상처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저와 여러분들이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상처받은 이웃들을 위해 그들의 상처를 만져주는 작은 목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은 단순한 자기 만족의 고백이 아닌 사명을 이루는 자의 감격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먹을 것을 풍성하게 가진 배부른 사람이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자기 만족의 고백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사명을 이룬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을 거룩하게 성취할 수 있었던 사람만이 드릴 수 있었던 고백이 바로 이 고백이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이 단순히 자기 만족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사역의 자리에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 이 거룩한 영적인 일에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뿌리를 내리지만 사람의 의지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죄성에 오염된 우리 인간은 지금 사는 그 방식에 아주 절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식 그대로 살아가려는 유혹에 이끌리게 됩니다.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싫어합니다. 양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노력, 뭔가 지금보다는 달라지고자 하는 어떤 구체적인 노력이 없다면 결코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그 방식 그대로 한다면 지금보다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보다는 뭔가 달라져야만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의지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역을 붙잡고 최선의 노력을 하십시오. 거룩한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신앙이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 은혜를 그의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되어지기 위해서는 사역의 자리에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역의 자리에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나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에게 찾아오시고 나를 만져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은혜를 보다 구체적으로 누리기를 원하신다면 기억하십시오. 사역의 자리에로 들어가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오늘의 시편 기자가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밤에 예수께 온 VIP /요3:1-7/ 이동원목사 2014-11-29 19:46:26 read : 1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금 우리나라 에서도 차기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한 대선 무대가 열리고 있습니다만, 1975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의 절정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지미 카터는 자신을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I am a born again Christian')고 고백하여 그가 한 말이 전 미국인의 화제와 관심
밤에 예수께 온 VIP /요3:1-7/ 이동원목사 2014-11-29 19:46:26 read : 1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금 우리나라 에서도 차기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한 대선 무대가 열리고 있습니다만, 1975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의 절정에서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지미 카터는 자신을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I am a born again Christian')고 고백하여 그가 한 말이 전 미국인의 화제와 관심사로 등장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당시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도대체 거듭남은 무슨 뜻이며,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의식의 심층에서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만은 없다는 생각, 그래서 나도 좀 새롭게 변화되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인생을 다시 새롭게 살고 싶다는 거룩한 갈망이 있지 않습니까? 거듭남의 초점은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고 다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가 쉽지 않은 이유는 과거가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서 해방이 되어야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해 전 한 선배 목사님을 모시고 그분의 지난날 이야기를 듣던 중 아주 흥미로운 고백을 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우리나라에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학교 학생이었는데 자기가 살던 마을 자기가 다니던 중학교가 비행기 폭격을 맞고 불타는 광경을 보고 너무 좋아서 춤을 덩실 덩실 추었다고 합니다.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래서 왜 도대체 무엇이 그리 좋으셨느냐고 물었더니 이분 대답이 “학교에 있을 자기 성적표 불탈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좋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의 깊은 의식과 무의식의 내면에는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라는 레코드를 찢고 내 인생의 역사를 다시 쓰고 싶다는 그런 열망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은 그런 체험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체험을 ‘거듭남’, 영어로 ‘born-again'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요한복음 3장에는 당당했던 자신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회적 VIP가 자기 인생의 변화의 새벽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런 질문을 공개적으로 예수님에게 묻기에는 자기의 신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는 한 밤중에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는 정녕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이 사람과의 대화를 성찰하면서 우리 인생을 운명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1)누가 거듭나야 하는가? 2)왜 거듭나야 하는가? 3)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1. 누가 거듭나야 하는가? 우리는 거듭난다 하면 “그래 저 뒷골목 어둠의 인생을 살아온 조폭이나 사기꾼은 거듭나야 하고 창녀도 거듭나야 하지만 나같이 평균 인생을 남에게 큰 해 끼치지 않고 살아온 나와는 상관없는 명제야”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이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였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 1절을 함께 읽어 보실까요?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우선 그는 유대인 지도자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에는 70명으로 구성된 산혜드린 공의회라는 일종의 우리나라 국회와 같은 조직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멤버였습니다. 이 의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우리나라 국회의원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3:10에 보면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이스라엘 선생이 아니더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종교와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정녕 한 사회의 정신적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던 사회적 VIP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만나시자마자 “그대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이 거듭 날 필요가 있었다면 당신과 나는 거듭 날 필요가 없을까요? 자, 지금 우리는 ‘누가’ 거듭나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영어로 ‘누가-WHO’?라는 글자를 생각하면 늘 연상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 미국에 와서 사시는 한국 노인 분들을 섬기기 위해 교회에서 영어 회화 반을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인 분들도 미국 생활에 적응하시려면 기초 회화라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분들은 배워 놓고도 용기가 없어도 활용을 못하시는 것이 대부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호남에서 오신 용기 있는 노인부부께서 우리 둘 부부 사이에서라도 일단 영어를 사용하자라고 합의하셨다고 합니다.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밖에 나가셨다 다시 아파트에 돌아오셔서 초인종을 눌렀더니 할머니가 할아버지인줄 아시고도 영어 연습차 물으셨다고 합니다. “Who여?”--했더니 할아버지 가라사대-“Me랑께!” 하셨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정말 중요한 질문을 드리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누가(Who)거듭나야 합니까? 자, 이제 호남 식으로 대답하면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맞습니다. “Me랑께”입니다. 내가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2. 왜 거듭나야 하는가?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읽어 보시면 예수님은 이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 거듭남의 명제가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인생이 시작된다는 말씀이지요. 이제는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기대를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거듭나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더 쉽게 말씀을 드릴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첫 번째 태어날 때 우리는 이 땅의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육체적인 탄생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면, 즉 한번 더 태어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탄생인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 ‘거듭 난다’는 말은 달리 번역하면 ‘위로부터 태어난다’(born from above)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땅의 부모의 자녀로 육으로 태어나듯 저 위에 계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영적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VIP 여러분은 만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신 일이 없으신가요? 여러 해전 미국에 앤 그루델이라는 심리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태어날 때에 언청이 그러니까 구순열 소녀여서 늘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지금은 간단한 수술로 교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분이 태어나 자라날 때만해도 그런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늘 부모를 원망하고 지친 부모도 끝내는 이 딸을 기피하게 되고 친구도 기피하고 소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을 하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소녀가 다니던 학교에서 청각 테스트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실 한 가운데 칸막이를 설치하고 칸막이 저편에 있는 담임선생님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반복하게 하여 얼마나 정확하게 경청하는가를 알아보는 지금 생각하면 원시적인 테스트였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요” 하면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앤이라는 소녀 차례가 되었을 때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에게 하던 말과 전혀 다른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뜻 밖에 “나는 네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어”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앤은 선생님의 말을 반복하는 대신 “선생님, 정말이셔요?”라고 물었고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린 선생님은 “그럼 그렇고 말고 나는 정말 네가 나의 딸이었으면 좋겠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이 이 소녀의 일생을 바꾸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을 아십니까? “나는 네가 나의 아들, 나의 딸이었으면 좋겠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3.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기록한 이 책을 요한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3장에 도달하기 전 이미 요한1:12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해답을 증거하고 이제 3장에서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실례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인격적으로 자기 마음과 인생 안에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라는 질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면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동일한 하나님을 우리도 아버지로 부르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경험하는 모든 특권가운데서 이 보다 더한 특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과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그분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다는 것, 죄 많던 우리가 그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며 그분의 제자와 자녀가 되어 인생을 살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분이 인도해 주시는 새 인생의 길을 걸어 갈수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이 예수를 가르쳐 구원의 주님, 곡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수를 내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하고 새 인생을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거듭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저는 오늘의 설교를 전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의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소개하는 것으로 메시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975년 지미 카터가 대선 후보로서 공개적으로 이 고백을 하던 순간 또 한 분이 “그렇습니다, 지미 카터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주신 바로 그 하나님이 저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을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선 출마자가 아닌 방금 감옥에서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은 킹 메이커로서 과거 닉슨 대통령을 재선시키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닉슨 대통령의 집무실 바로 옆 오피스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정치계의 무서운 브레인으로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위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이 사건의 책임을 져야 할 7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수감되자 평소에 그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들이 감옥에 넣어준 C.S.루이스 교수의 ‘단순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고 차디찬 감옥에서 한 밤중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듬해인 1976년 “Born Again/거듭나다”(백악관에서 감옥까지)라는 책을 발간하여 충격적인 센세이숀을 일으키게 됩니다. 1978년 이 책은 영화로 만들어지고 그는 감옥의 경험을 바탕으로 감옥에서 고생하는 수인들을 선교하고 섬기는 사역으로 밤의 인생을 벗고 빛의 새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는 권력을 잃은 대신 미국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시민이 되고 마침내 종교 노벨상인 템플톤 상을 받게 됩니다. 닉슨의 보좌관이었던 촬스 콜슨(Charles Colso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본문에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처럼 문자 그대로 거듭 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니고데모 뿐 아니라, 촬스 콜슨 뿐 아니라, 저와 당신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거듭남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이지 당신에게는 이런 거듭남이 사모되지 않으시나요? 인생의 밤이 지루하지 않으신가요? 거듭남의 새벽을 맞이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교회 /요10:10/ 안효관목사 2017-12-27 16:27:50 read : 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한 초등학교 학생이 아버지를 따라 어른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려운 말씀을 하시는데도 설교시간 내내 이 아이는 진지하게 목사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아버지가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들은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얘기해 봐라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교회 /요10:10/ 안효관목사 2017-12-27 16:27:50 read : 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한 초등학교 학생이 아버지를 따라 어른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어려운 말씀을 하시는데도 설교시간 내내 이 아이는 진지하게 목사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아버지가 아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들은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얘기해 봐라.” 그랬더니 아이는 ‘목사님의 말씀 어려워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아니,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몸도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열심히 앞을 쳐다보고 있었니?”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설교말씀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강단 뒤 벽에 더하기 표가 있잖아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라는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에는 절대로 마이너스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플러스만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덕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적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기 위해서 옵니다. 값나가는 보석도 빼앗아가고 돈도 빼앗아갑니다. 가정에 평화도 빼앗아가고 기쁨도 빼앗아갑니다. 때로는 강도로 변하여 생명을 빼앗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니라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주셨고,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더 풍성한 것들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더하기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마이너스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예수 믿는 것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더해 주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가져야 할 것, 누려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것은 물질이나 명예나 그 어떤 큰 권세보다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 생명은 이 세상 그 어떤 물질적 대가를 지불하고서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생명을 거져 주셨습니다.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2: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졌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나 축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부인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여고생 시절에 점을 쳤더니 ‘당신은 40대가 되면 대통령 부인이 될 신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그 때부터 ‘나는 영부인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꿈에서도 대통령 부인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천하게 보이고 은근히 무시하시도 했습니다. 몸가짐도 신중하게 했답니다. 나중에 영부인 될 사람이라는 잠재의식 때문에 행동 하나 하나도 영부인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 남편은 대통령이 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차츰 꿈이 깨어지던 순간에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영부인쯤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딸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대통령 부인이 되는 것보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더 기쁘고 흥분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더 없이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까? 대통령 부인은 안 되었어도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딸이 되었기 때문에 더 기쁘고, 큰 기업을 하는 회장님이나 사장님의 사모님은 되지 못했어도 세상을 모두 가지신 하나님의 딸이 되었느니 기쁘고... 여러분, 그런 감격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때로 사업에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힘들어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 등 뒤에 계신데 뭐가 걱정입니까?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당했거나 취직이 되지 않아서 잠시 놀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잠시 휴가 얻었다고 생각하세요. 그 어떤 회장님보다 더 큰 회사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신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잠시 쉰다고 뭔가 큰 일 나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5, 17) 잠시 고난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고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 품에 큰 영광을 안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모든 영광과 모든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후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걱정입니까? 정말 불쌍한 것은 예수의 생명 없이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1977년 미국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비지스 앤디깁’(Andy Gibb)이라는 가수가 있었습니다. “I Just Wanna Be Your Everything”이란 유명한 노래를 불렀던 그는 열아홉 살에 호주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음반을 냈습니다. 그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첫해엔 2백만 달러, 이듬해엔 1백만 달러를 벌었다. 최고의 영예인 그레미 상을 두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물 한 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약을 시작했고 정확히 10년 후에 1백50만 달러의 빚을 지고 외로이 죽어갔습니다. 친구들은 그의 사망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그는 공허했다. 영혼이 텅 비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영혼은 텅 비어 있을 뿐입니다. 그 빈 공간에는 그 어떤 명예나 권세로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수많은 돈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공허한 마음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불어넣어 줍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2006년 한 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 귀한 생명과 생명의 은혜 안에서 복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없이 부자가 되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기쁨과 최고의 복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큰 축복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은 뭔들 우리에게 안 주시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풍성한 생명의 은혜로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고 살면 우리의 삶에 자꾸만 더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과 축복을 다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난에 찌들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늘의 기업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부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에게 우리의 축복을 나누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건강하여서 주님을 찬양하고 건강한 몸으로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면서 헌신된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온갖 걱정에 파묻혀 힘들게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기쁨의 찬송을 부르며 승리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을 본문 바로 앞 절인 9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우리가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양을 노리는 이리의 밥이 되고 맙니다. 목자의 품을 떠난 양은 온 산과 들을 헤매며 가시에 찔리고 큰 바위 아래로 떨어져 고통을 당하곤 합니다. 그게 양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난 순간 우리 인간은 영혼이 핍절하고 세상 풍파에 시달려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참 평안도 누리지 못하고 인생의 기쁨과 행복도 잃어버린 채 방향을 잃어버린 돛단배와 같은 운명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 답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있는 풍성한 복을 보지 못하고 그 품을 벗어나야 행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유산을 미리 물려받고 아버지 품을 떠나 멀리 타국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살던 탕자처럼 말입니다. 그 탕자처럼 처음에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더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더 행복하고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결코 오래 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쾌락을 즐기며 살던 탕자가 곧 돼지 치는 머슴으로 전락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얻을 수 없어 배를 골아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죄의 종이 되어 세상에서 거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재산은 많고 쾌락은 즐길지라도 영혼의 거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마귀의 밥이 되어서 마귀의 조종을 받으며 사는 비참한 마귀의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여러분, 2006년 한 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의 품을 떠나지 마시고 그 안에서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품 안에는 풍성한 복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온갖 행복과 기쁨이 그 안에 있습니다.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꼴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듯이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며 그 안에서 꼴을 얻을 때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품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꼴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꼴을 먹을 때 우리 영혼이 살찌고 우리는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 안에 하늘의 축복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 인생을 승리로 살아가는 비결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 실패에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말씀 안에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궤계를 무찌를 수 있는 무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여러분, 주님 은혜 안에서 형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축복을 내 것으로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으로 양식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복을 얻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꼴을 먹으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될 것”(신 28:3-6)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생명의 은혜를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은혜와 축복은 나눌수록 더욱 커지는 법입니다. 은혜와 축복을 내 안에만 감추어두면 그것은 나 한 사람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누면 나눌수록 그 은혜와 축복은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며 커져갑니다. 한 어린아이의 손에 있는 작은 도시락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 손에 들려졌을 때 5,000명이 먹고도 남은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그 작은 도시락은 자신의 손에 꼭 쥐고만 있었다면 그런 엄청난 축복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나눠주기 위해 예수님께 드려졌을 때에 기적이 베풀어졌습니다. 우리가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도 남을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 안에만 감추어둔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만 구원받고 우리만 축복을 누리며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이유는 그를 통해서 모든 족속과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과 똑같은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게 하신 이유는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은혜와 축복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와 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우리 가정에 있음으로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우리 회사에 있음으로 나 때문에 우리 회사와 직장에 복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이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내가 있기에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요셉 때문에 복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도 그 교회를 통해서 교회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방황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전주남성교회를 여기에 세우신 것은 우리 교회를 통해서 동서학동·서서학동이 복을 받고, 더 나아가 전주가 복을 받고 우리나라가 복을 받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2006년도에도 우리 교회는 나누며 섬기는 일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지난 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년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우리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지난 해 연초에 우리 교회가 1년 예산을 세울 때 4억 5100만원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1년을 지내고 보니 5억 2600여 만 원을 결산할 수 있었습니다. 연초 계획보다 약 20% 가량 넘치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우리 교회가 이웃에게 베풀고 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한 해 우리 교회는 어려운 교회를 돕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어려운 이웃들 돌보는 일에 작지만 열심을 냈습니다. 갈수록 우리 교회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도움을 주어야 하고, 더 많은 선교와 구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교회가 더욱 축복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작된 2006년은 우리가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나누는 해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을 나누는 전도에 더욱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래서 올 한 해에는 꼭 한 사람이 한 생명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축복 나눔이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영적인 갈급함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영혼을 풍성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뭇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삶에 베푸신 은혜와 복을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누고 섬기는 일에 헌신하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2006년 한 해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가슴에 가득 안고 사십시다. 세상의 그 어떤 재물과 명예와 부귀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주셨음에 감사하고 그 생명의 은혜를 최고로 생각하며 사십시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지 말고 그 안에서 믿음으로 이겨나가고, 날마다 말씀의 꼴을 먹으며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생명의 은혜와 생명의 풍성함을 우리의 이웃과 나누며 사는 복된 한 해로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습니다! /시63:1-2/ 이삼규 목사 2016-11-10 11:44:09 read : 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지난 첫 주일에 드린 말씀의 제목을 기억하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습니다! /시63:1-2/ 이삼규 목사 2016-11-10 11:44:09 read : 4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지난 첫 주일에 드린 말씀의 제목을 기억하십니까? “먼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소원하십니다. 그 영광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왜 창조하셨을까요? 창조의 첫째 목적은 도덕적 존재를 영적으로, 또한 지적으로 준비시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드는데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고 성도들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이것을 풍성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구원받았습니다!” 믿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하신 모든 것, 그리고 지금 하고 계시는 모든 것은 바로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자들 내 삶 속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면 나는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주일에 참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월요일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주일예배는 결국 진정한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주일에 기쁨으로 찬양을 부르며 예배드린 후 월요일과 화요일에 사업상의 문제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린다면 주일 예배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관을 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드리는 것이 내 안에 없어야 비로소 나의 예배가 그분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의 매력이 무엇입니까? 예배의 매력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이후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이루어진 모든 위대한 일들은 예배를 지극히 사모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예배를 사모하고 갈망했던 사람들이 큰일을 이루어내었습니다. 아름다운 찬송가를 남긴 위대한 성도들의 신앙을 살펴보면 그들 역시 예배의 성공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현대교회는 부족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을 참되고 거룩하게 드리려는 결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예배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예배 자들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종교 프로젝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 개개인이 활력이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위해 기꺼이 일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자는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자가 주를 위하여 일하면 그의 사역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자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불태우시는 날, 그때 타버리고 말 나무와 건초와 그루터기에를 쌓아놓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올바른 예배 위에 쌓은 것이 아니라면 나무나 짚이나 풀과 같은 재료로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위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본래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참 예배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리는 것이 즐겁습니까? 지겹습니까? 예배를 지겨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참 예배를 다시금 회복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자신들이 성도,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체감하며, “정말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태도, 즉 마음의 상태가 한결같을 때 참예배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숭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참 예배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요4:24). 하나님은 예배를 인간들의 손에 맡겨 두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겸손히 예배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려는 사람의 마음은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한 마귀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없듯이 교만한 사람도 그분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형식이 다른 여러 가지 찬송가를 부르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배에 온전히 몰두하는 사람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편저자 다윗과 같은 갈망이 필요합니다. 시 63: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예배는 예배하는 자와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다윗, 이사야, 바울이 이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열망에 불탔던 사람들은 모두 이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참 예배를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찾아오셔서 예배의 영을 허락하셔야 우리가 참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보다 예배가 먼저다 사도 바울 이후로 지금까지 영적으로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은 모두 영적인 체험을 통해 참예배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기만 하다가 결국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는 ‘종교적인 춤을 추는 다람쥐’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예배 자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선 우리가 예배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일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거룩한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연속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셨으며, 은혜 위에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치 ‘박동하는 심장’처럼 그 중심이 되었던 것 역시 믿음과 사랑과 예배였습니다. 예배는 감탄과 경외를 겸손히 기쁨으로 느끼고 그 느낌을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교만한 마귀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듯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예배할 수 있으려면 우선 마음속에 ‘겸손’이 생겨야 합니다. 또한 예배에는 ‘신비’라는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신비가 없다면 예배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분을 예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원하지 않으시지만 그런데도 원하시는 것이 바로 예배자들입니다. 그분은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런데도 우리가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배는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예배가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소수의 사람만이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배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죽음의 고통을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을 예배자로 바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뜨거운 예배를 통해서 힘을 얻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순서를 바꾸어서 일부터 하려고 드는 아마추어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갖기보다 예배자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자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원하시는 것은 예배자입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운영되어야 합니까?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운영하고 이끌고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과거 총회장을 지내신 김창인 목사님은 장로님들이 새벽기도를 나오지 않으면 공 예배 기도를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배하라! 예배의 요소 중 한 가지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오늘날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런저런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이사야 선지자처럼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사 6:1)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신뢰가 없으면 존경심도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할 수 없고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예배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예배는 그분의 속성과 부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분의 본질에 따라 예배해야 하며, 그것을 벗어나서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1)예배의 첫 번째 요소는 ‘영성’입니다. 영성이 없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아무리 많이 예배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헛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차라리 드리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2)예배의 두 번째 요소는 ‘진실성’입니다. 진실성이라 함은 겉치레인 형식이나 거짓된 가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에 치우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3)예배의 세 번째 요소는 ‘정직’입니다. 모든 기도에는 정직이 내재해야 합니다. 정직은 단순히 ‘점잖게 예의를 지키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절대적으로 정직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가 말해주는 진리이자 예배의 매력입니다. 조지 휘필드,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성 버나드 같은 사람들은 진정한 예배자였습니다. 4)예배의 네 번째 요소는 ‘지식’입니다. 우리가 공식적인 신조가 없어도 예배를 드리는 일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예배하려는 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없이는 그분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지식이 공식적으로 명문화되었든 아니든 간에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조입니다. 우리는 신령과 진정(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진리는 명문화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명문화한 것이 곧 신조입니다. 5)예배의 다섯 번째 요소는 ‘경이(驚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룩한 경이감에 사로잡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얼굴을 가렸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요한은 교회들 사이에서 거니시는 예수님을 뵈었을 때 엎드려서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6)예배의 여섯 번째 요소는 ‘사랑’입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은 전심으로 사랑하고, 온전히 신뢰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그리스도처럼 거룩하게 되기 위해 애쓰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요, 또한 우리 이성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부가 아닌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주를 갈망하고 앙모하십니까? 그러나 우리만이 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갈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갈망이란 하나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높이겠다고 영원히 결단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갈망입니다. 그분은 이런 사람들을 땅과 바다의 모든 보화보다 더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분은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한 놀라운 인자하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런 갈망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예배자로 설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눅1:26-38/ 이삼규목사 2016-11-02 10:59:15 read : 4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이 이 땅에 탄생하실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15절을 ‘최초의 복음’(원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은 틀림없는 남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갈4:4 때가 차매 하나
은혜를 받은 자여! /눅1:26-38/ 이삼규목사 2016-11-02 10:59:15 read : 4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이 이 땅에 탄생하실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15절을 ‘최초의 복음’(원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은 틀림없는 남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것을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가브리엘 천사가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처녀인 마리아에게 나타난 때가 언제인가? “여섯째 달”입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잉태한지 6개월째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눅 1: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은혜를 받은 자 마리아는? 1>그녀의 이름은 모세와 아론의 누이의 이름인 ��미리암��과 동일한 뜻을 가진��마리아��입니다. ‘존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2>그녀는 다윗의 직계 후손으로(눅3:23-27) 왕가의 딸이었으며, 본인이나 친구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각각 서로 다릅니다. 마태는 다윗으로부터, 생물학적인 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가 되는 요셉까지 내려가는 하향식 계보를 보여 줍니다. 반면에 누가가 기록한 계보는 특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누가는 서두에서가 아닌 3장에서 요셉 쪽 계보가 아닌 마리아 쪽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다윗과 아브라함 그리고 아담과 하나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 위로 요셉의 아버지가 아닌 마리아의 아버지 헬리를 기록해 놓은 사실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마1:16) 마리아와의 혼인을 통해 헬리의 아들(사위)이 되었습니다. 3>그녀는 순결하고 흠이 없는 “처녀”였습니다. 이 말씀은 700년 전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한 말씀의 성취를 보여 줍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리아가 선택을 받은 것은 단지 처녀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주의 어머니가 되는 큰 영광을 얻을 젊은 여자를 선택하실 때, 제 멋대로 살며 바람을 피우는 그러한 세속적인 여자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며 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복종하려고 애쓰는, 경건하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택하셨습니다. 4>그녀는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사람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왕좌는 그의 것이었는데도, 그는 목수로서 벌이를 하며 궁색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다윗의 자손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무시를 당하면서 사람들 가운데서 떠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실제로는 예수의 아버지가 되도록 되어 있지 않았으나, 법적으로는 그의 아버지로서 인정을 받도록 되었으니, 이는 그가 그 처녀의 놀라운 아이가 나기 전에 그녀와 정혼했으며, 따라서 그의 이름으로 그녀의 보호막이 되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5>그녀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살았습니다(눅2:4;마2:23;요1:45,46&). 나사렛 동네는 종교적으로나 학문으로나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요, 멸시천대를 받는 사람들이 살던 동네이다. 그래서 그곳을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리워졌던 곳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엄청난 일이 은혜라는 이름으로 다가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사가 그녀에게 건넨 인사를 보십시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은혜가 마리아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도 이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때 핍박 자였습니다. 그는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오직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여러분, 은혜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으십니까? 은혜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궁궐 지붕에서 길을 가는 유명한 성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사람을 보내서 그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듣자 하니 하나님께서 그대의 영혼을 빛나게 하시고, 그대 또한 위대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성자가 대답합니다. “그건 간단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지금 길을 가는 지극히 천한 한 백성인 저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를 임금님 곁에 앉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만약 임금님이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고, 저를 부르지 않으셨고, 여기 앉게 하지 않으셨다면 저 같이 천한 백성은 이 궁궐 안에 감히 들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임금님, 이젠 그 비결을 아시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빛을 발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그 자신의 노력과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오게 하셔서 당신 앞에 앉게 하시고, 아들과 딸로 삼으셔서 대화하고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주시고, 우리는 받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은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내가 받습니다. 받아서 내 영혼의 호주머니에 넣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족을 주셨습니다. 재물을 주셨습니다. 기쁨을 주셨습니다. 행복을 주셨습니다. 다 주셨고, 우리는 받아서 부자가 됩니다. 그래서 은혜는 받으면 받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은혜는 이름하여 “플러스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시고, 우리는 받아서 날마다 더해지는 은혜입니다. 더 많이 받아, 더 많이 가지고, 더 풍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만약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한 은혜가 이런 은혜라면 왜 마리아가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왜 놀랄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기뻐하고 환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는데도 두려워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천사가 말한 그 은혜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은혜와는 성격이 다른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색다른 은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그 차원과 질이 전혀 다른 별종의 은혜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시간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초점입니다. 마리아가 받은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고 마리아는 받는 게 아니라, 마리아가 하나님께 내 드려야 할 은혜였습니다. 그 주고받는 방향이 반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마리아의 생애 전체를 요구하셨습니다. 곧 결혼할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있는 처녀의 행복을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네 인생 전부를 달라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네가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은혜”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행복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처녀에게 아기를 낳으라는 것입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또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장 파혼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은혜라고 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마리아의 은혜는 아기 예수님을 낳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낳은 것으로 만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뒷바라지하면서 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장성한 예수님이 집을 나가셨고, 들려오는 소문은 불길한 소문 들 뿐이었습니다. 예수가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고 그 율법에 도전하고 있다, 성전의 권위에도 도전한다, 제사장들도 안중에 없다, 이제 제사장들이 예수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또 그는 이상한 왕국이 온다고 가르치고 있다, 로마 제국이 알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아마 정신 나간 게 아니면 이런 일을 벌릴 리가 있느냐? 미친 게 틀림없다는 등 등의 말이 들려올 때 그 어머니는 가슴을 졸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그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 비극적 날이 왔을 때, 그 어머니 마리아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로 말라 버렸을 것이며,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고통은 본문의 소위 “은혜”가 임하면서부터 생긴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형벌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은혜라면 거부하고 싶은 은혜였습니다. 이걸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성경은 마리아를 가리켜 은혜를 받은 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네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씀들은 은혜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때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고통이 은혜임을 말해 줍니다. 십자가가 은혜임을 말해 줍니다. 가슴 졸이는 것이 은혜임을 알려 줍니다. 눈물과 땀이 은혜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받아서 부요하게 되는 게 아니라, 내 것을 내 놓는 것이 은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시집갈 처녀의 행복을 내 놓는 것입니다. 생애를 내 놓는 것이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내 놓는 것>, <부담을 지는 것>, <눈물 흘리는 것>,...이런 은혜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도 은혜라고 말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은혜입니까? 1)하나님이 믿어주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너는 내가 믿을 수 있다. 너 정도면 내가 내 놓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너만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줄 믿는다. 너 밖에 없어서 네게 명령한다. 이로서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마리아가 들은 그 엄청난 소식은 예루살렘의 고관 집무실에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제단 앞에 서 있는 대제사장에게 전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의 서재에 전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부유한 부인의 사치를 즐기는 고관 집 아낙네들의 그 안방에 전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소식은 세상의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나사렛 한 모퉁이의 보잘 것 없는 평범한 처녀 마리아에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신뢰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은혜였습니다. 2)그의 능력을 인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 농사하던 많은 이들이 도시로 와서 공장 근로자가 되었습니다. 영세 수공업자들도 다 실패하고 대기업의 노동자로 취직했습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해졌습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간신히 삶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죠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레로 시작된 부흥 운동은 도시의 소외된 근로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가장 가난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리자 이 세상에서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 세계 인류보다 더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이 세상 최악의 극빈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들이 마른 빵과 영양가 없는 스프를 먹고 있을 때, 주님은 굶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기름이 찌들은, 떨어진 작업복을 입고 있을 때, 주님은 그 옷마저 벗기운 채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약해지는 육신을 매만지면서 탄식할 때, 주님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음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오주여, 저는 너무 부자입니다. 저는 너무 많이 가졌나이다. 우리의 것을 받으옵소서!” 저도 낼 수 있습니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즉석에서 1불씩 모았습니다. 한 달 생활비가 겨우 50불인 것을 생각한다면 당시의 1불은 대단한 금액이었습니다. 1불의 눈물과 1불의 믿음, 1불의 감사와 1불의 경건, 1불의 절제하는 삶이 모아졌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그 돈은 아프리카의 검은 사람들에게로 보내졌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그들의 1불은 가치를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나타내었습니다. 암흑의 땅에 돈으로 살 수 없는 빛을 비추었습니다. 리빙스턴과 같은 불멸의 선교사들을 파송한 런던 선교회의 선교비의 대부분은 이름 있는 몇 사람의 몫 돈 헌금보다는 노무자들의 1불의 눈물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1불을 내면서 자신들도 무의미하게 스러질 존재가 아니라, 가치 있게 쓰여 질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도 자신이 할 수 있음에 놀랐습니다. 1불을 선물 받을 때의 기쁨 보다 1불을 낼 때의 기쁨이 더 컸습니다. 자신들의 주머니는 비어도 영혼은 채워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3)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를 생각해 보세요. 그가 모세의 시종일 때 그는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저 모세를 따라 다니기만 하면 충분했습니다. 모세의 그 고뇌, 모세가 민족을 위해 허덕이는 모습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큰 짐을 지고 애를 쓸 때, 그는 옆에서 작은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고 모세가 지던 짐이 여호수아의 어깨로 넘어 왔습니다. 그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상한 은혜를 그에게 베푸시는 순간 그는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덕에 그는 요단강이 갈라지고 물이 멈춰 설 때 그 기적의 현장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리고성에서는 어떠하였습니까? 그의 신호가 떨어지자 백성이 함성을 외쳤고, 그 순간 견고하던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순간 여호수아는 자신이 엄청난 기적의 한 복판에 주인공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영광이요, 명예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알려면 일을 맡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명을 붙들고 씨름을 하는 중에 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일을 맡지 않은 사람은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일을 맡은 사람은 무거운 부담감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그 무거운 짐이 그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되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 능력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 일군된 것이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4)우리를 진정으로 명예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마리아가 이 은혜를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녀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 땅에 무수하게 많은 마리아 중의 한 명으로, 그녀가 요셉과 결혼하든, 뒷집 야곱과 결혼하든, 옆 동네 시몬과 결혼하든 아무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 놀라운 은혜에 아멘 하는 순간 마리아는 우리 앞에 위대한 신앙의 대선배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복종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복종은 놀라운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의 종으로 생각했습니다. 종이란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녀는 주인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 결심했어!」 처녀가 임신을 했을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을 조롱과 비난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결심을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정혼한 요셉이 자신을 부정한 여자라고 취급하여 세상에 이러한 사실을 밝힐 경우 그녀는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은 일사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비록 마리아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믿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의 길을 주께 의탁하고, 주를 의지하며, 주가 가장 좋은 것을 행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시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경건한 사람, 순종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오늘은 성탄 전날입니다. 내일은 아기 예수님의 복된 성탄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된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마리아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은혜, 내놓는 은혜, 십자가를 지는 은혜를 받는 성도들이 되어 성탄의 축복이 우리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능력을 받자! /행2:1-4/ 오주철 목사 2016-04-05 15:47:55 read : 49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국의 영화 배우요, 한 때 세기의 미인으로 불렸지만 36살의 꽃다운 나이에 인생을 마감했던 마를린 먼로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권력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남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를린 먼로가 매일 매일 쓴 일기장의 마지막에 그녀는 이렇게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능력을 받자! /행2:1-4/ 오주철 목사 2016-04-05 15:47:55 read : 49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국의 영화 배우요, 한 때 세기의 미인으로 불렸지만 36살의 꽃다운 나이에 인생을 마감했던 마를린 먼로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권력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남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마를린 먼로가 매일 매일 쓴 일기장의 마지막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somewhere, somebody, please love me." "어딘가, 누군가, 제발 나 좀 사랑해 주세요." 그렇게 많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알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삶이라는 것이 참으로 외롭습니다. 두려움과 걱정과 염려와 근심, 괴롭고 힘든 삶, 권태롭고 지루한 밤을 보내면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somewhere, somebody, please love me. please help me." "어딘가에, 누군가가, 제발 나 좀 사랑해 주세요. 제발 나 좀 도와주세요." 군중 속에 고독이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아가면서도 오늘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어느 시대보다 더 외로워합니다. 더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이 외로움과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지루한 밤을 벗어나기 위해서 불나방처럼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어딘가에 내가 사랑 받을 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딘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도와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하는 한없는 기대와 그리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찾고 또 찾았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더 깊은 외로움과 방황이라는 것입니다. 매일 물을 길러 나왔지만 영혼 깊은 곳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갈증으로 괴로워했던 수가성의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도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 영혼의 방황으로 사회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영혼을 살리는 길이 없습니까? 이 땅의 가정을 세우고, 사회를 세우는 길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모든 삶의 우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모든 따분한 삶으로부터 생기 있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이곳,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곳, 하나님의 성전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디가 길이냐?"고 울부짖는 영혼들을 향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셔야 합니다. 내 이웃과 형제 자매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때로 실패도 합니다. 남다른 슬픔과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처절한 배신을 당해보기도 합니다. 새가 날아가듯 그렇게 생명같이 귀하게 모았던 명예도, 재산도, 건강도 하루아침에 다 날려보낼 수도 있습니다. 욥처럼 어느 날 눈을 뜨고 나니까 하나님과 나만을 한편으로 하고, 모두가 다 적이 되어 있는 기가 막힌 그런 경험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꼬이고 엉키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긴장과 아픔으로 아침도 아프고, 저녁도 아프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하나님의 급한 소식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안에는 어떤 생명도 살아나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은 발걸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살 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내가 사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내 가족이 사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을 믿는 자는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붙잡는 가족은 반드시 일어나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시위하게 될 것입니다. "주여! 나에게도, 내 가정에도 그런 날을 보게 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신약성경 288 쪽을 한번 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을 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크게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주는 영이시니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오 자유 / 오 자유 /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 오늘 진정한 자유를 사모하며 주님의 전을 찾아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이든, 여러분 속에 어떤 일이 있든, 여러분의 심령이 어떻든, 어떤 권태와 외로움을 가지고 나왔든, 어떤 낙심과 실패를 가지고 나왔든,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마십시오. 여기는 하나님의 영이 물같이 불같이 바람같이 구름같이 운행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모든 문제와 낙심과 외로움과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이 혼돈과 어두움의 세상을 향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강하게 외쳐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골목마다 거리마다 집안마다, 흔들리는 자녀들의 품속에, 방황하는 자녀들의 가슴속에, 그 영혼 속에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예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또 한번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구약성경 748 쪽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 13장 31절을 다같이 찾아서 읽겠습니다.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 부모님을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 어머니를 기억하사 힘을 주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 아버지를 기억하사 그 기업을 일으켜 주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나라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뼈가 문질러지고, 비록 우리의 힘줄이 다 말라 가는 것 같고, 소망이 끊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믿음의 입을 크게 여십시오. 믿음의 입을 크게 열어 선언하십시오. 예언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른 신앙은 "주시옵소서!"가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예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기도 속에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은 아주 지극히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이다!" "주 여호와의 능력으로 이루어질지어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 이루어질지어다!" 예언을 하라고 했지, 어린아이처럼 보채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꾸 선언을 하십시오. 선포를 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신앙이 성숙의 단계에 이르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언제나 특별한 것을 요청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돈을 가지고 나오라고 그러더라" 놀랍게도 교회에 왜 안 나가느냐 하면 헌금하라고 해서 안 나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가 바쁘고 내가 힘들다고 해서 선한 일, 귀한 일, 바른 일에 돈을 쓰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밥 한끼 안 먹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굿을 하는 무당이나 절에 바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보다 저들이 죽은 우상 앞에 바치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그 인생의 삶을 인색하게 굴지 말고 시각을 바꾸십시오. 바빠서 내가 못하는 것, 내가 성전에 드려서 여기서 고아나 과부와 어려운 것과 세상을 돌보는 일에 쓰는 것,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에 적극적인 인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지 교회에 나가니까 돈 달라고 그러더라 그러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에 인색한 사람은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불쌍하고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돈을 따라간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부터 돈을 따라가 보리라!"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부자가 되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고 해서 돈을 모은다고 해도 욥처럼 어느 날 갑자기 바람이 불면 그 모은 재산이 바람처럼 다 날아가고 맙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기를 쓰고 아둥바둥 재산을 모아도 어느 한 곳에 구멍이 나면 그 모든 재산은 한 순간에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돈을 따라가면 안됩니다. 돈이 나를 따라와 줘야 합니다. 만물의 주인이시며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돈을 붙여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재물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러자면 하나님 앞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내가 인색한 만큼 하나님도 나에게 인색하실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그 마음만큼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매 시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재단에 감사의 예물을 올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바른 신앙은 모든 예배에 감사의 예물이 올려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감사한 일이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감사해서 감사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감사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지금은 비록 감사할 것이 없어도 앞으로 감사할 것이 더 넘치고 풍성할 것으로 믿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의 마음에는 햇빛보다 더 밝은 하늘의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하면 달빛도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면 햇빛도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면 그 햇빛도 소용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햇빛을 주신 은혜는 잊어버리고 별빛이 없음을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보십시오. 분명히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감사는 하늘의 축복을 여는 열쇠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돈을 가지고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인격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격이니 도덕률이니 하는 것이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믿을만한 것이 못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능력에 붙잡혔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바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훈련된 지성이나 훈련된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 절대 권능에 생포된 결과입니다. 24시간 365일 생포 당하고 가면 그런 삶과 그런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끝없이 요청 받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입니다. 산을 옮길 믿음, 큰 믿음, 영웅적인 믿음을 가져라!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실개천 같은 믿음이라도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더 큰 믿음, 더 강한 믿음을 얻기 위해 주 앞에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약해진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능력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이 약해진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나약해지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일을 할 때에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이 일을 못합니다. 네 믿음대로 되느니라.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 네 믿음을 내놔라.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네 믿음을 내놔라!"고 했지, "네 도덕률을 내놔라." "네 윤리를 내놔라." 그런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간 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의 모든 기적은 믿음이라는 터널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막아야 할 것은 믿음의 부패를 막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음식이 부패하면 썩습니다. 음식이 썩으면 거기에는 악취가 나고, 파리 떼들이 모여듭니다. 아무리 깨끗한 곳에도 썩은 음식을 갖다 놓으면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파리 떼들이 벌떼처럼 몰려듭니다. 하나도 없던 파리 떼들이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지 모여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령의 썩음을 막아야 됩니다. 심령이 부패하면 이상한 것이 몰려듭니다. 이상한 세력들이 몰려옵니다. 어두운 세력들이 몰려옵니다. 귀찮은 것들이 내 영혼을 뜯어먹으려고 달려듭니다. 온갖 추하고 더러운 냄새가 납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아주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야! 네가 차지도 덥지도 않으니 내가 너를 토해내리라!" 이 '라오디게아'라는 말은 '냄새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말입니다. '냄새나는 도성의 인간들' 그런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냄새가 나면 안됩니다. 돈 냄새가 나면 안됩니다. 명예 냄새가 나면 안됩니다. 탐욕의 냄새가 나면 안됩니다. 세속적인 냄새가 나면 안됩니다. 내 생명의 영혼에 추하고 더러운 냄새가 나면 안됩니다. 언제 냄새가 납니까?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으면 냄새가 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썩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끓이면 됩니다. 펄펄 끓이는 곳에는 절대 썩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짝 얼려서 얼음을 만들어 보십시오. 수 천년을 내려온 빙하는 절대로 썩지 않습니다. 반대로 미지근하면 큰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땅이 자꾸 정신병자의 병동처럼 사람들이 미지근해 가고 있습니다. 사랑도 미지근합니다. 삶도 미지근합니다. 기왕 사랑을 하려면 끝까지 좀 화끈하게 사랑하십시오.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우리의 신앙 생활도 기왕에 믿을 바에야 화끈하게 믿으십시오. 뜨겁게 믿으십시오. 그렇게 믿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 당신의 전부를 맡기십시오. 가만히 보면, 나는 절대적으로 믿지 못하면서 하나님 더러 절대적으로 책임을 지라고 합니다. 나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더러 뜨겁게 자신만을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만큼 잘못된 신앙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어거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생떼를 부리는 것입니다. 생떼를 부리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것이 세 번 네 번 자꾸 늘어가면 하나님도 역정을 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다른 것은 몰라도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 이미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역사해서 우리의 심령의 물줄기들이 이미 방향 전환이 온 것을 믿습니다. 요즘 썩어서 오염된 강을 되살리는 운동이 한창입니다. 그래서 많은 강들이 살아나고 있습니다. 울산의 태화강도 과거 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심하게 오염되어서 악취가 심하게 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화되어서 그곳에서 매년마다 수영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강도 살리는데 왜 내 심령을 내가 못 살립니까? 살릴 수 있습니다. 살릴 수 있습니다. 다 살릴 수 있습니다. 오염된 강, 다 오염된 것 같아도 어떻게 삽니까? 인간이 아무리 정화해도 인간이 하는 것은 부분적인 것입니다. 오염된 강이 근본적으로 살릴 수 있는 것은 그 오염된 강의 상류를 따라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 보십시오. 깊은 곳에서 태산 준령 저 태백 간두의 거기 깊은 곳에 올라가면 맑고 깨끗한 물줄기들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는 절대로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깨끗합니다. 깊은 곳에 올라가면 삽니다. 올라가면 살 길이 있습니다. 올라가면 생명의 줄기를 만나는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산 물고기를 보십시오. 물 속에서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반면에 죽은 물고기를 보십시오. 물위를 둥둥 떠내려갑니다. 떠다니지 말아라!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속에서 그렇게 떠다니지 마십시오. 깊게 스며들며 사십시오. 지금이 아무리 감각 문화라고 할지라도 인생에는 그보다 깊은 곳이 있습니다. 그보다 냄새가 안 나는 살아있는 신선한 곳이 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생명의 강줄기가 있어서 그 잔 줄기, 가느다란 바위 속에서 나오는, 그 나무 속에서 나오는 그런 잔 줄기가 있어서 그 강이 정화되고 삽니다. 한 나무에도 저 깊은 곳에 내려가면 연약하고 깜깜한 어두운 그곳에 잔뿌리들이 있어서 이 큰 나무가 삽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살기를 원하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닌 내 영혼의 깊은 실핏줄, 내 영혼의 깊은 잔뿌리가 하나님의 생기와 접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살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약 600년 전, 주전 597년으로 학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민족이 짐승처럼 석 달 동안을 줄줄이 끌려 다니며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썩어 넘어지는 토막들처럼 그저 강가에 제멋대로 던져져서 슬프디 슬픈 삶을 산 적이 있습니다. 울고 울어도, 밤을 새워 울어도 만족이 당한 치욕과 분통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의식 있는 사람들은 이미 손을 다 놓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민족의 뼈들까지 말라가고 모든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삶의 생기도 삶의 의욕도 다 떠난 지 오래입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이라는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절망의 나락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이 내리더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땅이 바로 그 때가 아닙니까? 지금 세계적인 경제난 속에서 이 땅의 백성들은 극심한 혼란과 혼돈과 깊음과 낙심과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혼란과 혼돈과 깊음과 낙심이라고 하는 것은 정지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운행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면 또 다른 축복의 비상구가 열립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신이 혼란과 혼돈과 깊음이 가득했던 땅 위의 수면 위에 충만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잊지 마십시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어렵고 힘든 역사적인 시대 속에서 '그루터기'라고 하는 소위 남긴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숨겨 놓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한때를 위하여 선별하며 깊이 깊이 다루는 생명도 있고 제단도 있고 기업도 있습니다. 원래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역사의 한 때를 위해서, 하나님의 충족한 한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성별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시군요" 하는 말은 그런 하나님의 역사의 충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한 때를 위하여 성별해 놓은 기업, 성별해 놓은 자손, 성별해 놓은 나라, 성별해 놓은 민족입니다. 보십시오. 이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렸습니다. 이 남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내렸습니다. 저는 오늘 이런 믿음이 옵니다. 이 성별된 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리고 있습니다. 입을 크고 넓게 열어서 예언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생기가 너희에게 들어가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가족이 살리라! 너희 기업이 살리라!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너희 나라와 민족이 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미래란 하나님의 생기의 영에 취하여서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 해, 내 남은 인생을 그렇게 그냥 보내지 마십시오. 오늘 이곳에서 하나님의 영에 취하여 내 마음속에 성령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미래란 그 마음의 그림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냥 왔다가 그냥 돌아가지 마시고 아들을 향하여 딸을 향하여 자신을 향하여 기업을 향하여 다시 그림들을 그리십시오. 생기가 없이 사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죄악입니다. 당신의 미래에 당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여러분의 미래에 여러분의 운명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생령으로 다시 놀라운 변화를 시도해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문제나 고난들은 그런고로 위장한 하나님이 준 기회일 뿐입니다.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한 사람의 노고에 대한 하나님이 가장 큰 보상은 그 일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했기 때문에 얼마를 달라'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이 일을 했으니 이만큼 주시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보상은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이렇게 된다. 하나님의 기뻐하는 인물들이 된다. 실패든 성공이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일로 우리를 몰고 갈 뿐이지,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썩은 돈에 대해 관심 없습니다. 돈 받은 것은 하나님께 보상받은 것이고, 사람의 됨됨이는 보상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세상에 그런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네가 그 돈과 함께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크고 작은 실패를 했다고 할지라도 잠시잠깐의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또 우리가 돈을 벌고 뭔가 보상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상급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이 일을 통해서 이런 사람이 됐다고 하는 감격, 감사, 고마움이 여러분 속에 철철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사는 인생 길은 울퉁불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아스팔트를 깔아주리라! 하나님을 믿으면 꽃길을 깔아주리라.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다 울퉁불퉁한 길을 삽니다. 인생은 어려움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올라갈 때도 감사하고 떨어질 때도 감사하고, 올라가는 길이 있기에 떨어지는 길이 있지만 다시 올라간다고 하는, 그래서 생명의 하나님의 생수를 찾아 올라가는 작업, 이것이 감격이 아닙니까? 이것이 고마움이 아닙니까? 그러니 믿음을 붙드십시오. 다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내 놓을 수 있는 믿음을 붙드십시오. 믿음의 돌비들을 여러분의 심령에 세우십시오. 훗날 여러분의 자손들이, 여러분의 후대들이 "아버지!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자녀들에게 그 믿음의 돌비를 설명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 앞에 이야기 거리들을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우리 심령 어딘가에 아직도 조그마한 기적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도 그 심령 깊은 곳에는 아직도 하나님의 기적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만 들어가면 아무리 부정적인 경험도 새로운 각도로 해석을 할 수 있는 인생의 여유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동산에 지금 내가 이렇게 있다고 하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진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축복의 말을 건네시기 바랍니다. "집사님만 보면 정말 기분이 솟아납니다." 지금 이 땅에 존재한다고 하는 그 사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교인들을 보면 서로 안아주고 싶고, 축복해 주고 싶은 그런 삶의 기쁨이 내 가슴 깊은 곳에 충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기쁨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름다움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십시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내가 외로운 너희를 힘든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횃불과 촛불은 다릅니다. 촛불은 혼자 늑대처럼 그냥 혼자 애쓰고 타다가 순간적으로 바람이 불면 맥없이 죽고 맙니다. 그런데 횃불은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열심히 움직이더니 가서 태우고 태우고 또 태웁니다. 여러분, 촛불로 살지 말고 횃불로 사시기 바랍니다. 자꾸 움직여서 불을 붙이십시오. 성도들 가운데 참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촛불로 삽니다. 저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아둥바둥 거립니다. 혼자 들어앉아 가지고 저 혼자만 깨끗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잘못된 겁니다. "주여! 나는 깨끗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 공기가 더러운데 문 열면 금방 더러워집니다. 별거 아닙니다. 아무리 밝게 빛나는 촛불도 문을 열면 맥없이 꺼집니다. 그냥 꺼지는 것이 아니라 시꺼멓게 연기를 피우면서 꺼집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 가운데 시꺼멓게 꺼져온 사람들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의 심령에는 갑자기 일어나는 일들이 많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심령에 혼미하고 강한 아주 강력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능력을 받아서 예루살렘 온 도성을 복음화 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곳 하나님이 전에 하나님의 생기의 바람이 운행하고 있습니다. 물같이, 불같이, 바람같이, 기름같이, 비둘기 같이 하나님이 생령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늘의 능력이 여러분의 심령 위에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마른 뼈들에게 생기야 들어가라! 생령아 들어가라! 에스겔 골짜기를 살렸던 이 생령의 바람이 2천년 전 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 저들을 통하여 역사를 변화시켰던 그 생명의 역사가 오늘 이곳에서도 강하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입니다. 2천년 전에 예루살렘의 작은 다락방에 일어났던 그 생기의 바람이 지금 우리들 속에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이 급하고 강한 하늘의 바람 앞에 모든 미움적인 삶이 불타고 있습니다. 진부하고 어설픈 생활이 불살라지고 있습니다. 권태롭고 무의미한 맥빠진 신앙이 생활의 생기와 감격과 기쁨과 감동과 환희와 증거로 가득 차고 있습니다. 당신의 집안을 든든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형제와 자매를 주님 앞에 증거하기 위하여, 이 땅의 도성을 복음화 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능력을 받으십시오. 사람을 강권하여 이 전에, 주님 앞에 데려오기 위하여 능력을 받으십시오. 내 가정을 살리기 위하여 살리는 영이신 성령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분열되고 갈라진 불쌍한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능력을 받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성령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힘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시대입니다. 강력한 능력, 다이너마이트 같은 성령의 강한 능력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영혼을 구원하는 주역이 되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이 땅을 복음화 하는 주님의 강한 제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이여! 나에게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우리들에게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장애인에게 다가가신 예수님 /마4:23-25/ 이상호목사 2017-03-03 09:28:31 read : 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얼마 전 신문에서 참 놀라운 기사를 읽었습니다. 기사의 제목은 “생각만으로 휠체어 움직이게 하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 최규완 박사팀이 개발한 ‘뇌-기계 인터페이스’라는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합니다. 팔다리가 마비된 장애인도 생각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장애인에게 다가가신 예수님 /마4:23-25/ 이상호목사 2017-03-03 09:28:31 read : 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얼마 전 신문에서 참 놀라운 기사를 읽었습니다. 기사의 제목은 “생각만으로 휠체어 움직이게 하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 최규완 박사팀이 개발한 ‘뇌-기계 인터페이스’라는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합니다. 팔다리가 마비된 장애인도 생각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른손을 생각하면 휠체어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꺾이고, 왼손을 생각하면 왼쪽으로 꺾인다고 합니다. 두 발로 걷는 생각을 하면 휠체어는 앞으로 전진합니다. 인간이 생각을 할 때 뇌파가 발생하고 그 뇌파를 컴퓨터로 분석한 후에 휠체어에 명령하는 원리라고 합니다.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오늘은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장애인을 둔 가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식구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밝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워서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 가엾다고 동정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식구 중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밝히기 꺼려합니다. 동정 받는 것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 동정이라는 것은 하는 사람도 부담스럽고 받는 사람도 부담스러운 것이 동정입니다. 그래서 장애인이 있어도 그냥 쉬쉬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장애인 사역이 핵심 사역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비장애인 사역을 하시고 나서 시간이 남고 돈이 남으면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장애인 사역이 핵심 사역이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체적으로 교회를 볼 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거의 다 비장애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고 그 다음에 여유 있으면, 시간되고, 돈이 되면 장애인들에게 신경을 쓰는 그런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셨던 방법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 보니까 예수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구별하지 않고 장애인 사역을 당신의 핵심 사역으로 생각하시면서 병고치고 장애인들을 치유하는 이 사역이 처음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어요. 2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동정이라는 것은 사실 거꾸로 말하면 차별입니다. 대등한 관계에서는 동정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가 장애인이라는 주제가 나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감정이 동정이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장애인을 대하는데 매우 서툴고 미숙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또 받는 사람도 동정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부담스러워요. 그러니까 주는 사람도 부담스럽고 받는 사람도 부담스러우니까 서로 아예 피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은 장애인 사역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이 나와서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고, 말씀 들을 수 있는 교회를 원합니다. 예수님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셨어요. 그뿐 아니라 처음부터 일부러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장애인들을 찾아가셨어요. 요즘에는 장애인을 ‘핸디캡(handicap)’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핸디캡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장애인들을 ‘챌렌지(challenge)’라고 부릅니다. 핸디캡이라는 것은 불구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불구라는 용어를 쓰지 않아요. 챌렌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뭐예요. 도전적이다 그말이죠. 장애우들은 도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하고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불구가 아니고 조금 더 우리 보다는 도전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 사람들. 조금 더 삶의 도전이 많은 사람들일 뿐이지 전혀 우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핸디캡이란 말을 쓰지않고 챌렌지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개념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바꾼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장애인들은 특별한 대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대등한 기회를 원할 뿐입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들이 장애인들을 대할 때 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하니까 이것이 동정심에서 나오는 거예요. 대등한 관계에서 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고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대등한 기회를 우리가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뭔가 부족하고 모자란 분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동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니까 결국 장애인들이 이런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사실 정상인이란 말은 틀린 말입니다. 누가 정말 핸디캡이고 누가 정상인 입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우리가 아담의 원죄 때문에 영적으로는 다 장애인이예요. 예수님의 흠없고 의로운 보혈로 덮어지지 않고서는 우리는 온전하게 될 수 없는 사람들이예요. 그게 복음이고 그게 기독교인데 사실 우리가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정상인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다 장애인들입니다. 그런 용어를 쓴다는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비장애인들이 교회 들어올 때 계단이 필요한 것처럼 장애인들에게는 교회 들어올 때 경사로가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계단을 만드는 것은 전혀 특별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경사로를 만드는 것은 아주 특별하게 대우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비장애인들이 계단을 쓰는 것과 장애인들이 경사로를 통해서 올라오는 것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가지는 정상으로 생각하고 다른 것은 특별한 대우를 해준다고 생각을 하면서부터 부담감이 생기기 시작하고 부담감이 생기면서부터 서로 피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거야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의 숫자가 더 많으니까 그렇죠. 아무래도 숫자 많은 쪽으로 우리가 더 물질과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예요.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존엄성을 숫자로 따진다면 그것은 복음의 원리하고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복음의 메시지하고는 맞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장애인들은 동정보다는 대등한 기회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 골프선수 중에 다리를 저는 장애인 선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선수가 자기도 골프 시합에 나가서 비장애인 선수들과 시합을 하고 싶은데 다리를 절기 때문에 자기는 꼭 카트를 타야만 시합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미국 프로 골프 협회에다 카트를 타고 시합을 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거절당했어요. 프로 골프 협회에 회칙을 보면 선수들은 카트를 타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걸어야 되요. 그래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대법원에다가 고소를 했어요. 왜 장애인도 정상인들과 같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느냐? 그럼 장애인들은 영원히 골프시합에 나가지 말라는 말이냐? 이래가지고 고소해서 겼어요. 참 이상한 나라예요. 왜 이겼냐? 미국 헌법에 보면 모든 인간에게는 차별없이 3가지 권리가 주워진다. 생존권, 자유권, 그 다음에 행복 추구권이예요. 모든 인간은 생존할 권리가 있다. 생명을 보호 받을 권리예요. 그 다음에 자유권리가 있어요. 자유를 보호 받을 권리. 그 다음에 세번째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행복추구권에 의해서 비장애인들만 행복 추구할 권리가 있냐? 그래가지고 헌법이 프로골프 협회의 회칙보다 더 위 아닙니까? 그래서 프로골프 협회 회칙이 내규가 위법이라 그 사람에게 카트를 타고 시합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번도 못 이겼어요. 이기고 지는 것은 자기 실력이예요. 그러나 기회는 줘야되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 장애인들이 교회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은혜 받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본인의 문제예요. 그러나 장애우들이 교회에 나와서 말씀 들을 수 있는 기회, 예배드릴 수 있는 기회는 동등하게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이런 어떤 차원에서 생각을 해야지 동정한다는 그런 차원에서 생각을 하면 풀리지 않습니다. 동정 받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동정 받고 싶어합니까?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로 동정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등한 기회는 달라는 거죠. 저는 그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동을 주셨어요. 그래 교회도 장애인들을 위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하고 화장실 등 적어도 장애인들이 교회에 와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믿음생활, 은혜생활, 말씀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은 우리가 만들어줘야 하겠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이제는 네가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내가 만들어 주리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을 데리고 어디를 갔냐면 장애인들에게 가셨습니다. 뭐를 말하는 겁니까? 네가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기 위해서는 과거에는 네가 어부로써 물고기를 잡으면 병든 물고기는 다 버렸지만 네가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기 위해서는 절대로 병든 사람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맨 처음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장 맨 처음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께서 병든 물고기는 버려도 병든 사람은 절대로 버리지 말라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주입시키기 위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직후에 바로 비장애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볼 때 소위 가장 차별대우 받는 가장 불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찾아 가셨다는거죠. 이게 제자의 제일 첫번째 자격이예요. 제일 첫번째 되는 조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보라는 거죠. 우리 교회는 장애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교회입니다. 말씀이 떨어지면 반로 후속조치와 사랑이 따라야 되고 행동이 따라야죠. 행동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장애인이 한사람도 앉아있지 않은 것은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가릴 것 없이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흘려주셨다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우리가 장애우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동정, 불쌍해서가 아니라 사랑스러워서 예수님의 보혈로 그 사람들도 예수님의 보혈로 자녀 삼아 주신 장애우들을 위해서도 똑 같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장애우들을 위해서도 그 흠없는 피가 나에게 흘려진 것처럼 똑같이 흘려졌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계속 인간적으로 동정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인간적으로 동정하는 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원죄로 다 장애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불쌍한 사람들 입니다. 우리 공주세광교회는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안고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신적 고통이 엄습할 때 1 : "우울증과 조울증" /시42:1-11/ 이하준목사 2018-09-14 10:10:48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정신건강에 빨간 불이 여러분, 요즘 여러분이 가장 관심 있는 일이 뭡니까? 돈이요? 물론 돈 중요하고 꼭 필요합니다. 명예나 지위요?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 많이 들으셨지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지위와 명예가 아무리 높아도 이게 없으면 다 소용 없다. 뭘까요
정신적 고통이 엄습할 때 1 : "우울증과 조울증" /시42:1-11/ 이하준목사 2018-09-14 10:10:48 read : 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정신건강에 빨간 불이 여러분, 요즘 여러분이 가장 관심 있는 일이 뭡니까? 돈이요? 물론 돈 중요하고 꼭 필요합니다. 명예나 지위요?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 많이 들으셨지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지위와 명예가 아무리 높아도 이게 없으면 다 소용 없다. 뭘까요? 바로 건강입니다. 그렇지요. 건강하지 못하면 돈이 무슨 소용이며 명예 지위 권력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래서 수많은 운동방법, 운동기구, 건강보조식품 등 온통 우리 사회는 ‘건강, 건강’ 이 말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사람들이 이렇게 건강에 관심이 많고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그렇게 노력하는데도 점점 더 병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 2010년 우리나라 암환자 수가 100만을 넘어섰습니다. 국민 50명 당 한 명이 암환자이고, 성인 인구 중에 거의 5명 당 한 명이 암환자라는 겁나는 통계입니다. 암의 원인은 잘못된 식생활, 환경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과거보다 훨씬 잘 먹고 살기 좋아졌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정신건강에 그야말로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오늘부터 세 주 동안 “정신적 고통이 엄습할 때”라는 주제로 정신건강에 관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그만큼 요즘 정신적인 질병 문제가 정말 심각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도 심각합니다. 집사님도, 권사님도, 장로님도, 심지어 목사와 사모까지 심각합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정신적 질병, 가장 흔한 질병이 우울증입니다. 우리나라에 우울증 환자는 몇 명이나 될까요? 2011년 우울증이라는 병명으로 치료를 받은 사람은 53만 명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53만 명이라는 숫자 믿으면 안 됩니다. 다른 병에 비해 우울증은 자기가 스스로 우울증이라고 느끼기도 어렵고 알아도 치료를 받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보다 환자가 몇 배 많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전 국민의 11%, 장년층(45~59세)의 22%가 우울증 환자라고 하네요. 또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 환자가 2배고, 70세 이상의 80퍼센트, 50대의 절반 가까이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해마다 환자가 급증해 우리나라는 급기야 OECD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낳게 되었습니다. “왠지 우울하고 자꾸 기분이 다운 된다.” 약한 우울증이지요. 이게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생활에 지장이 온다. 우울증이 심해진 것이지요. 조울증은 우울증보다 심각한 질병입니다. 왜 조울증이냐? ‘조증’과 ‘울증’이 번갈아가며 나타나거든요. 기분이 좋으면 너무 업 되서 ‘방방’ 뜨며 오버하는 게 ‘조증’이고, 반대로 갑자기 기분이 다운되면 사정없이 우울해지는 게 ‘울증’입니다. 문제는 이 조증과 울증이 번갈아가며 수시로 나타나다 보니 조울증이 되면 이건 심각한 병입니다. 이 때문에 일상생활과 인간관계에 심각한 지장이 올 뿐 아니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로 가기도 합니다. ❚나는 안전한가? 여러분, 여러분은 우울증이나 조울증 없습니까? 정말 없는 분도 계실 테고, 있는데 잘 모르고 사는 분도 있을 테고, 분명히 있는데 “난 절대 아니다.” 하고 극구 부인하며 사는 분도 계실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릴까요? 전 국민의 10분의 1이 우울증이나 조울증이랍니다. 그렇다면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 중에 열 명 중 하나는 우울증이나 조울증 환자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증 환자가 2배랍니다. 70세 이상의 80퍼센트, 50대의 절반 가까이가 우울증이랍니다.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얘기입니다. 이런 얘기 들으니 여러분 마음이 ‘급’ 우울해 지지요? 그런데 여러분, 위로가 되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 하세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우울할 때가 있었다!”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성격을 자세히 연구해본 학자들은 그가 전형적인 우울질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이렇게 담대하게 위대한 일을 해낸 모세가 우울질이라고? 바로 이게 문제입니다. 직장생활도 유능하게 잘 하고, 남들이 깜짝 놀랄 만큼 담대하고 통이 커 보이는데, 아니 그렇게 보이려고 애를 쓰는데 실은 그 내면에 아주 깊은 우울증이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 바로 모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항하고 거부할 때 어쩔 줄 몰라 하며 몹시 우울하고 힘들어 하다가 종종 하나님께 “차라리 날 죽여 달라.”고 말하곤 합니다. 가장 권능 있는 선지자 로 위대하고 쓰임 받은 엘리야도 갈멜 산에서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과 850:1의 승부를 벌인 직후 아합 왕에게 쫓겨 광야로 도망갔을 때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모세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할 때는 정말 엄청나게 업 되었다가, 그 직후에 엄청나게 다운되는 것을 볼 때 우울증 증세를 넘어서 조울증 수준까지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갖 인생의 고통을 다 겪은 욥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한 후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시 51편),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 요한도 전형적인 우울질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이런 말씀을 합니다.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너무 고민과 슬픔이 깊어져 죽을 지경까지 되셨다면 이게 우울증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우울할 때가 있었고, 심지어 예수님도 잠시 우울증을 앓으셨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위대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도 설교 중에 “나는 너무나 두려운 우울증의 표적이기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내가 겪는 비참함을 경험하는 이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해 사람들이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저도, 효자교회 담임목사도 우울할 때 많습니다. 고민이나 힘든 일이 많아지면 우울한 정도가 아니라 심각한 마음의 병으로까지 발전해 우울증 증세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여러 해 전 큰 문제를 겪으며 우울증이 심해져 몇 달 동안 공황장애 증세까지 겪었다고 말씀 드린 적 있지요? 그래요. 누구든지 이럴 수 있습니다. 사람인데요? 누구도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정신적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도 다 연약한 인간인데요? ❚하나님의 응원 오늘 본문은 시편 42편, 너무 유명한 시편입니다. 시편 맨 앞 ‘표제’에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나온 것을 보니 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한 고라 자손들이 지어 부른 찬송임을 알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지은 찬송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 하나는 이 시편 42편을 지은 시인은 아주 심각한 우울증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1~4절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우울증 맞지요? 아니 조울증 수준인지도 몰라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시인은 지금 성전에 나갈 수 없습니다. 요즘 말로 치면 병이 들었든지, 사업에 실패했든지, 가정에 큰 환난이 닥쳐왔든지 이런 이유로 해서 교회에 가서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정말 교회 가고 싶은데, 정말 교회 가서 성도들과 함께 마음껏 찬양하며 예배하고 싶은데 갈 수 없어서 그저 집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겁니다. 내가 실패하고 아프고 힘드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고, 네가 이렇게 망가졌는데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하나님이 진짜 있으면 너를 이렇게 내버려 두겠어?” 이 말 들으니 더 마음 아프고 괴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죽고 싶습니다. 밤낮 눈물만 납니다. 옛날 성도들과 함께 교회 마음껏 다닐 때 생각하면 너무 기쁘고 좋지만 지금 현실을 생각하면 저 지옥 밑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조울증 맞지요. 그럼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이 깊은 고통과 우울증 속에서 찾아낸 해결방법 세 가지가 나옵니다. 이 방법은 우리도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정신적 고통이 엄습해 올 때 해결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정말 중요하지요. 첫째, 찬송입니다. 찬송은 우리 성도들이 지닌 가장 위대한 무기입니다. 5절 읽읍시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환난과 문제 앞에서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우리를 깊은 우울증과 조울증, 절망과 좌절에 빠뜨립니다. 낙심될 때 불안할 때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제가 힘들고 우울할 때마다 부르는 이 찬양처럼 우리가 힘들고 낙심되고 불안할 때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미리 주실 은혜와 응답에 감사할 때 주님은 내 마음의 모든 불안감과 고통과 문제를 씻은 듯이 제해주시고 위로와 능력을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억입니다. 6절 말씀 읽읍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힘들고 불안할 때 사람들은 기억할 것은 기억 못하고 기억하지 않아야 할 것만 기억하곤 합니다. 예전의 나쁜 기억들, 실패했던 일들, 최악의 상황, 자꾸 이런 것만 기억하고, 좋았던 기억, 잘 해결되었던 일들은 기억 못합니다. 결국 우리의 기억력이 문제입니다. 시인은 이 힘든 때 잊을 건 싹 다 잊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과의 좋은 추억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예전에 베푸신 은혜들, 나를 도와주셨던 일들, 덕분에 모든 일이 잘 해결된 경우, 이런 것들을 기억해내며 용기를 얻고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도 잊을 것은 잊고, 씻을 것은 씻고, 정말 꼭 필요한 것들은 기억해서 이 문제, 이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시길 축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는 기도입니다. 당연하지요. 기도만이 우리의 능력입니다. 8절 볼까요?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힘들면 낮에 집에 있을 때 참 우울합니다. 조용한 밤이 되면 더 우울해집니다. 그런데 시인은 낮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밤에는 찬송하며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힘이 납니다. 기도하면 능력이 생기고, 응답이 옵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풀어줄 열쇠입니다. 요즘 우울하시다고요? 자꾸 두렵다고요? 예,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람이니까요. 저도 그렇다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잊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남에게 없는 게 있지 않습니까? 찬송입니다. 기억입니다. 기도, 우리에게는 이 세 가지 놀라운 무기가 있지 않습니까? 콜린스(Collins)라는 사람은 우울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특징은 ‘사실주의’다.” 오늘 시편 42편처럼 성경은 자신이 겪는 고통과 두려움을 숨기지도 부인하지도 않고 너무도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적 절망은 확실한 희망과 대조된다. 신앙의 사람들은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 해결하고 새롭고 영원한 기쁨을 경험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이다.” 아멘! 이번에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며 제 마음 속에 계속 맴도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응원’이라는 말입니다. 얼마 전 어떤 사모님을 저희 부부가 만났는데 요즘 정말 힘들다고 괴롭다고 하는 하소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얘기하는데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고 참 답답했습니다. 그냥 잘 들어줄 뿐이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헤어지기 전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모님! 제가 응원합니다. 우리 부부가 응원하겠습니다. 힘내세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요즘 힘드지죠? 우울하시죠? 제가 응원합니다. 성도들 모두가 응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이 응원하십니다. 여러분도 이 응원을 받고 비록 지금 현실은 힘들고 두렵지만 우리가 그 고통과 문제를 이겨냄으로 누리게 될 풍성한 삶을 소망하며 오늘도 승리하는 성도들 되기 바랍니다.
지금은 갑절의 영감이 필요한 때 /왕하2:1-11/ 오주철 목사 2016-03-30 10:10:52 read : 4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 좋은 소식이 있어요." "뭔데?" "이번 시험에서 80점 이상 받으면 제게 10만원 주신다고 했지요?" "그럼, 그랬지." "그 돈 아버지 쓰세요!" 아버지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은 자식에게 10만원을 주는 겁니다. 이것이
지금은 갑절의 영감이 필요한 때 /왕하2:1-11/ 오주철 목사 2016-03-30 10:10:52 read : 44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 좋은 소식이 있어요." "뭔데?" "이번 시험에서 80점 이상 받으면 제게 10만원 주신다고 했지요?" "그럼, 그랬지." "그 돈 아버지 쓰세요!" 아버지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은 자식에게 10만원을 주는 겁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를 다 받으시고 더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사실,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과의 관계를 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지고 오는 것이라고는 모조리 쓰레기들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모두 받아주시고 대신 우리들에게는 더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언짢아하시거나 짜증을 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즐거워하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절망, 미움과 원망, 분노의 쓰레기를 다 받아주시고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고는 평안과 행복, 희망과 사랑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한국 교회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가짜 예배에 굶어 죽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어떤 기도의 응답도, 기도의 능력도 체험하지 못하는 가짜 기도에 굶어 죽어 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나약한 성도들 때문에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이 무기력한 교회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저래가지고 교회가 제대로 될까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에 붙잡히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이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능력 있는 성도가 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서 세상을 염려하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결코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신앙의 주역이 되십시오. 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주역이 되십시오. 때마다 일마다 묘한 방법으로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간증하는 축복의 사람이 되십시오. 살아있는 믿음과 칭찬 받는 믿음과 소문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돌려서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 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의인 한 사람이 없어서 멸망당했던 예루살렘보다 더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세상은 수만 가지 악이 독버섯처럼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 패역한 시대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이 고난의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길도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이 썩고 무너지는 세상을 고칠 수 있는 힘은 성령의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교회에 영적인 역사를 일으키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소문난 증인이 되십시오. 어디에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소문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땅에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심정으로 광야 같은 인생을 울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며 신앙 생활을 한다지만 탕자의 형처럼 집 밖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아버지의 심정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탕자의 형을 보십시오. 그는 동생처럼 아버지의 집을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모범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기뻐할 때에 함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불평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원망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미움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잔치의 자리를 외면했습니다. 그는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결국 그는 병든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 형처럼 병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없습니까? 믿음이 병들면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강퍅한 마음이라는 것은 심령이 굳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몸에 마비가 오면 꼬집어도 모르고 깨물어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심령이 강퍅한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심령이 마비되면 아무리 영양가 있는 좋은 음식을 먹어도 소화시키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강퍅한 심령, 완악한 자신의 심령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좋은 집도, 아무리 좋은 논밭도 그대로 버려 두면 못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인격, 좋은 인품도 그대로 두면 잡초가 우거져서 금방 못쓰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심령이 완악하지 않도록 기도하십시오. 심령이 열려있는 사람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꿀송이 보다 더 달아서 심령에 감동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강퍅한 심령을 그대로 버려 두지 말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끝없이 받으십시오. 그래서 심령의 강퍅함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만하지 마십시오. 교만하면 심령이 강퍅해집니다. 교만하면 완악해 집니다. 교만은 인생에 문둥병과 같습니다. 교만하면 그 인생은 썩어버립니다. 통증도 없이 썩어 내리게 하는 것이 교만이라는 병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때때로 돈 때문에 교만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정말로 돈이 많은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안다는 것 때문에 교만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제대로 많이 배운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정쩡한 사람이 교만합니다. 돈도 조금 있으려고 하는 사람이 교만합니다. 있는 척 하려고 말입니다. 조금 아는 사람이 교만합니다. 아는 척 하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돈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돈을 거두어 가십니다. 지위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언젠가 그 지위를 거두어 가십니다. 학벌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언젠가 그 자신을 가장 어리석은 자의 자리에로 내려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한 마음을 다 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교만 때문에 내게 있는 것조차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교만함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비참함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은 능력입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개념 자체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는 기사와 이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죽었던 우리의 심령이 살아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생기의 바람을 맞아 여러분의 심령에 기쁨과 감격이 살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생기의 바람이 불어서 심령이 뜨거워지고, 잃어버렸던 꿈과 비전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은 분명히 은혜의 시대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시대입니다. 작은 거인이 일어나는 능력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땅의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외면하고 있습니다. 외면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무식한 교인이라고 치부를 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지식을 강조합니다. 앎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우리를 향한 사탄의 계략임을 기억하십시오. 지금까지 사탄은 우리를 속였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많이 알아야 한다고 속였습니다. 앎에 대한 신앙으로 우리를 무능력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기독교는 앎의 종교가 아니라 체험의 종교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과 마귀가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속였던 능력과 권세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만방에 선포하십시오. 성령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만방에 간증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온 땅에 선포하십시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이름의 권세를 모르는 사람들은 직무 유기자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직무 유기자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모르는 성도는 직무 유기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무익한 종이라고 했습니다. 무익한 종이 차지할 땅은 바깥 어두운 곳입니다. 그리고 무익한 종이 취할 행동은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이 시대, 악의 권세에 갇혀 신음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패역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과 권세를 가진 사람을 쓰십니다. 능력과 권세를 가진 교회를 쓰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기를 원하신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제자도 있었고, 아예 팔아버린 제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하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거기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비겁했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에 떨었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락방 문을 걷어차고 예루살렘 거리를 뛰어다니며 복음을 외쳤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과 초조와 근심에 쌓여있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복음의 열정이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실 때에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고 서로 대접을 받으려는 공동체도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찬양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광채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새 시대를 향한 소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대제사장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해 보라고 외쳤습니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전 생애를 쏟아 헌신하는 것은 자신의 기쁨이었습니다. 모든 재산과 물질을 드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투자했습니다. 예루살렘 시내가 난리가 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새술에 취했다고 말입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예수쟁이들의 영향력은 염병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사람의 용기만으로 되는 것입니까? 사람의 지식으로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의 입을 빌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성령님이여, 이 시간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우리의 심령에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뜨겁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곳에 성령의 불이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에서 엘리사는 그의 스승인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내게 갑절의 영감을 주옵소서" 여기에서 영감이라는 말은 영적인 감각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루아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루아흐라는 말은 성령입니다. 따라서 영감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성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는 지금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엘리야가 행했던 성령의 능력을 갑절로 달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안에서 거룩한 욕심을 품으십시오. 더 잘 믿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십시오. 더 많은 성령의 능력을 받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십시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포기하십시오. 그런 사람을 우리 주님께서는 토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사가 이처럼 갑절의 영감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이렇게 요구했던 것은 어두운 시대에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이 시대를 밝혀줄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엘리사의 시대는 엘리야의 시대보다 더 패역한 세대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패역했다고 한다면, 엘리사의 시대에는 그 패역함이 온 백성들에게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간 시대가 정치적인 타락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엘리사의 시대에는 그 타락이 종교와 생활 전반에까지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엘리사 시대의 문제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받고 산길을 내려오는데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 선지자를 조롱했습니다. 어른을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도 문제지만, 이것은 영적 지도자를 존경할 줄 모르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잃고 방황하는 한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단의 영이 역사하는 사람의 특징은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령한 세계를 모릅니다. 그래서 갑절의 영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실하게 매달립니다. "내게 갑절의 영감을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끔찍한 범죄의 행태들은 더 이상 어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음주, 흡연, 강간, 살인이 청소년들로부터 연령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습니다. 어제 토요일자 신문에 보니까, 창원에서 음란사이트를 개설해서 241억원을 벌어들인 사이트 운영자가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사이트에서 '얼굴 노출 없이 고수익이 보장된다'는 말에 현혹되어 불특정 다수의 남성들에게 자신의 음란 행위를 보여준 여성이 20여만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성 회원이 130여만명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갈대로 갔습니다. 영성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이 영적 감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얼굴을 구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자기 욕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자기 욕심에 온갖 시선을 집중하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요구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칠갑절의 영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제대로 쓰임 받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갑절이 아니라 100갑절의 영감을 요구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큰 등불이 필요하듯이 시대가 악할수록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성령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들이어야 합니다. 엘리야나 엘리사를 보면 그들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족보가 화려한 것이 아니고, 학력이 찬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소위 세상의 어떤 백그라운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12마리 소로 밭을 갈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무신론자였던 니이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인생의 걸레쪽지들 같은 사람들만 선택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약자의 종교로 전락했다고 혹평했습니다. 어쩌면 니이체의 평가는 바른 평가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이 땅의 걸레쪽지 같은 사람들이라도 불러서 하나님 나라의 면류관으로 삼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람을 쓰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겠다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즉시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쓰셨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부름 앞에 주저 없이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매여있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당당히 달려갈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베드로와 주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엘리사가 그랬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황소 두 마리를 잡고 쟁기를 부수어 그 고기를 구워 사람들을 대접한 후에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령한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와 감격이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과 이웃들을 보더라도 안타까움이 없습니다.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은 발달했지만 영성은 죽어있습니다. 신령함과 이적과 기사를 모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많이 모인다고 해도 그들의 주변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썩은 신앙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 초비상이 걸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중단되고 있습니다. 복음의 전파는 메아리만 되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행여 주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향해서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땅의 촛대를 옮기시는 것은 아닌지 저는 시간마다 때마다 걱정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성령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마시옵소서." 젊은이들이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날로 악해져만 가고 어두워져만 가고 있습니다. 복음의 영감을 상실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갑절의 영감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할 제목이 있다면 그것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 예배에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주여, 내게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찬송 한 곡을 불러도 하나님의 은혜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진 사람은 기도해도 가슴이 답답합니다. 찬송을 불러도 장송곡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예배는 또 왜 그렇게 지겨운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때마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사모하십시오.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갑절의 영감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엘리사는 길갈에서, 벧엘에서, 여리고에서 엘리야로부터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대답하면서 끝까지 따라갑니다. 그는 길갈이든, 벧엘이든, 여리고든, 요단강이든 엘리야를 놓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으로 따라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자리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러한 각오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탤런트 김수미 씨가 쓴 책 가운데 보면 그의 일곱 살 때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를 따라서 들에 나가게 됩니다. 아버지가 막내딸인 자기 이상으로 아끼는 송아지를 어린 딸에게 맡기면서 개울에 멱감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송아지를 맡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큰성 시집갈 밑천이여, 잘 먹여라!" 얼마 후에 갑자기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온 천지가 깜깜해졌습니다. 얌전히 풀을 뜯던 송아지가 천둥소리에 놀라 언덕 아래로 뛰어갑니다. 어린 수미는 밧줄을 팔에 감았습니다. 송아지가 언덕 아래 자갈길에 도착하자 수미는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갈밭을 뒹굴며 질질 끌려갑니다. 손이 터져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가냘픈 옷은 찢겨졌고 배에서 가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달려왔는지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댑니다. 천둥소리만큼이나 큰 소리로 "밧줄 놔 버려!" 그러나 어린 수미는 가시덤불에 팔뚝이며 배가 쓸려서 시뻘건 피를 흘리면서도 소리를 질러댑니다. "못 놔유, 죽어도 못 놔유! 우리 성 시집 못 가유!" 구르다시피 뒤쫓아온 아버지는 송아지를 멈춰 세웠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찢겨져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아버지도 딸도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못 놔유! 못 놔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 외침과 절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주님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못 놓겠습니다. 주님을 놓치고 나면 내 가정이 망합니다. 주님을 놓치면 우리 민족이 망합니다. 내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나는 죽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성령의 임재를 잃어버리면 망합니다. 주님, 절대로 못 놓습니다. 놓을 수가 없어요. 야곱이 천사를 붙들고 씨름합니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 가운데도 놓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기 전까지 나는 당신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이 매달림 때문에 자신도 살고 가족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이 매달림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 매달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 쓰시겠다는 약속을 주시기 전까지 나는 절대로 못 놓습니다. 내게 갑절의 영감을 주시기 전에는 절대로 놓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울부짖어야 할 기도 제목입니다. 지금 우리는 갑절의 영감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 수준이 갑절이나 높아져야만 내 가정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수준이 갑절이나 높아져야만 내 민족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신앙의 부흥이 갑절이나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갑절이나 몸부림치며 뜨겁게 기도해야 될 성도들의 기도가 요청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갑절이나 더 뜨거운 열심이 필요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갑절이나 더 헌신과 충성이 필요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왭니까? 세상이 배나 악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탄이 배나 더 몸부림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가 배나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는 갑절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갑절의 권세가 필요합니다. 갑절의 영감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영감이 우리에게 갑절이나 임하게 되면 우리는 가정을 축복의 가정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 악한 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탄의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습니다. 악한 어둠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영감을 사모하십시오.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몸부림치며 기도하십시오. 엘리사처럼 갑절의 영감이 임하지 않으면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매달리십시오. 지금은 갑절의 영감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너무 어두워졌습니다. 영적 무관심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 악함이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복음이 왜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집니까?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신음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러한 영적 무관심과 무기력함과 무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지금은 나라를 생각할 때입니다! /딤전2:1-2-/ 오주철 목사 2016-04-11 10:45:40 read : 5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나온 인류 역사에서 서기 999년 12월 31일은 세상이 발칵 뒤집힌 날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서기 1000년을 앞두고 요한계시록 20징에 나오는 백보좌 심판과 함께 천년 왕국이 열린다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세상은 온통 대 혼란이 일어나면서 광란의 종교 행위가 일어났
지금은 나라를 생각할 때입니다! /딤전2:1-2-/ 오주철 목사 2016-04-11 10:45:40 read : 51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지나온 인류 역사에서 서기 999년 12월 31일은 세상이 발칵 뒤집힌 날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서기 1000년을 앞두고 요한계시록 20징에 나오는 백보좌 심판과 함께 천년 왕국이 열린다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당시 세상은 온통 대 혼란이 일어나면서 광란의 종교 행위가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농민들은 교회의 십자가 주위에 몰려들었고 평생 동안 했던 기도 가운데 가장 간절한 최후의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같은 시간 예루살렘에는 신성한 종말을 맞이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부가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의 반년간은 매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면서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후에 역사가들은 당시의 상황을 놓고 이렇게 평가를 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없는 시대는 없었다." "그렇게 소망이 없는 시대도 없었다." "그렇게 사랑이 없는 시대도 없었다." "두려움과 혼란과 혼돈과 공포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시대였다." 당시에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땅에는 온통 두려움과 슬픔에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슬픔과 혼란의 때를 우리가 어떻게 견디어 나갈까? 저는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일어나야 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미국의 갑부였던 카네기의 전집에 보면, 그의 재산 목록 제1호가 벽에 걸린 아주 남루한 그림 한 장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앞에 띄워져 있는 이 그림입니다. 친구들이 이 그림을 보면서 "저것이 무엇이냐? 왜 저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었고 골동품적인 가치가 있는 그런 그림도 아니었습니다. 보시듯이 커다란 나룻배와 배를 젖는 노가 썰물 때에 밀려서 모래사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그림입니다. 무척이나 절망스럽고 처절하기까지 보이는 그런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오면 떠오르리라!" 카네기는 이것을 붙잡았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마치 이 그림과 같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세월호의 사건으로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 전체에 믿음의 때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반드시 믿음의 때가 오면 다시 떠오를 것입니다. 믿음의 때가 오면 슬픔을 당한 자가 기쁨을 노래하게 될 것이며, 낙심하던 자가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언제나 좋은 분이십니다. 때로 우리들에게 닥쳐오는 시련과 고통들 앞에서 하나님께 따져보고 싶은 그런 충동들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우리는 언제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과 고통과 시련들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고통과 시련을 바라보면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내 심층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접속을 하십시오. 그러면 이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그렇습니다. 시련의 때일수록 입을 여십시오. 곤고할 때일수록 더 크게 입을 여십시오.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입만 열면 됩니다. 진리를 향하여 입을 여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입을 크게 여십시오. 이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 가운데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길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내 발이 닿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백성은 위대한 백성들입니다. 우리 백성은 현명한 백성들입니다. 우리 백성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내세울만한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 백성을 이끌고 온 지도자들에게 있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고 환난을 당할 때 자신의 생명을 걸고 이 나라를 지켰던 것은 이름 있는 지도자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결국 백성들의 도덕적 수준보다 못한 지도자들이 앞장섰다고 하는 것이 우리 나라가 가지고 있는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하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탄식은 이 시대에 바른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거창하게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국가가 어려운 시련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참된 지도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참된 지도력 부족의 위기가 오늘 우리 나라가 당면한 문제요, 우리 백성들의 비극입니다. 잠언 11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그러니까 지도자의 입이 정직하면 온 도성과 나라가 번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지도자의 입이 부정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습니다. 지극히 옳은 말씀입니다. 100여년 전 우리 나라는 잘못된 지도자들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습니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 오백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주권을 진상하듯이 다른 나라에 갖다 바친 나라는 우리 민족, 우리 나라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잘못된 지도자들 때문에 힘없는 백성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의롭지 못한 지도자들 때문에 국가의 미래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정치라고 하면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유머가 생각이 납니다. 어느 날 서울 한강에 수녀님하고 국회의원 두 사람이 빠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조대원이 들어가더니 수녀님을 먼저 건질 줄 알았는데 국회의원을 건지더랍니다. 그래서 한 시민이 화를 내면서 물었습니다. "어쩌자고 수녀님은 안 건지고 국회위원을 건집니까? 힘있는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그런 것입니까?" 그랬더니 구조대원이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아니, 국회의원을 그대로 놔두면 한강 물이 오염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인식에 공감대를 나타내는 하나의 유머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일반 백성들의 의식 밑바탕에는 정치는 매우 더러운 것이고 정치에서 멀어질수록 우리의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참사가 일어났지만 정부를 향해 비난만 할 뿐이지 실종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충격을 받은 백성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울어줄 정치인들이 없습니다. 구호는 난무하는데 눈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일변도로만 생각을 한다면 결국 정치의 장을 누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정치인들을 뽑는 것은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 우리 백성들입니다. 결국 정치라고 하는 것은 외면할 수도 없고 또 외면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교회는 이럴 때일수록 더 나라를 생각하고 염려해야 합니다. 무너져 가는 이 민족을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향해서 목회에 대한 지혜를 가르치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냥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정치나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사도 바울은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세계를 여행하며 세계를 선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어느 도시를 가든지 자기 민족의 회당을 먼저 찾았고 거기서부터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민족들에게도 그들이 그들의 나라와 역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우리 나라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워졌고, 지금의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까? 그런데 하나의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것만 해도 가슴 아픈 일인데, 어쩌면 지금 우리는 분단보다 더 단단한 사상과 이념의 장벽으로 이 땅이 갈갈이 찢겨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아픈 고난의 역사를 생각해서라도 우리 나라가 분열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국난의 심각한 어려운 징후들을 겪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먼저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상당히 분명한 대답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들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나라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땅의 백성들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절과 2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우리가 임금들을 위해서, 혹은 대통령과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고요하다, 평안하다'는 것은 모두 형용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요하다, 평안하다'는 표현들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의 일반적인 삶의 정황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고요하다는 말은 소요스러움이 없는 외적인 삶의 정황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평안하다는 말은 불안이 없는 내적인 삶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안으로 불안하지 않고, 밖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삶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런 환경을 요구하고, 이런 환경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 그저 편안히 먹고 살자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더 중요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에 앞서서 강조하고 있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과 단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경건과 단정." 이 두 단어는 매우 유사하면서도 강조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경건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닮아 가는 삶의 태도와 덕목을 강조할 때 쓰여집니다. 그 다음에 단정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쓰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질서 있는 삶의 모습을 가리켜서 성경은 '단정하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또 이웃들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고요하고도 평안한 삶의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지금 나라의 지도자를 위한 기도 속에서 하고 있습니까? 지도자의 역할, 정치인의 역할, 다시 말하면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그 결정은 바로 우리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 어떻게 되느냐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들입니다. 보십시오. 외국에서는 수명이 다해서 사용하지도 못하는 배를 우리 나라에서는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든 것은 정치인들입니다. 외국에서는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를 엄격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도 엄격하게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배의 전체 무게만을 적용하게 함으로써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인 물을 빼 버리고, 화물의 무게를 더 실을 수 있도록 법을 만든 것이 누구입니까? 정치인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인들의 정치적인 행동에 전혀 무관심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누가 정치를 하느냐 에도 무관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그리고 이웃들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한 평생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런 정치의 영역 속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의 가르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정치에 결코 무관심한 민족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정치에 대해 가졌던 관심은 매우 소극적인 관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한 정치 사회학자가 한국인의 정치 의식이 건강하게 발전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는 집단의식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공공의식으로 발전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집단의식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공공의식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무슨 말입니까?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집단의식이 있습니다. 우리 집, 우리 나라, 우리 학교. 이런 집단의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집단의식의 영역이 매우 좁습니다. 우리 집, 우리 식구들. 여기에는 피가 썩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집에 살아도 우리 가족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집 울타리, 우리 집 울타리를 딱 벗어나면 넓은 우리 집에 대한 의식은 희박합니다. 그래서 집 안에서는 자기 물건들을 아주 아끼던 사람들이 일단 공공 장소에 가게 되면 이것은 우리 집하고 상관이 없으니까 물건을 마음대로 흥청망청 씁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교회에서도 예외 없이 그대로 발휘되고 있습니다. 내 집 앞은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데, 1cm만 벗어나면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 집 앞에 있는 쓰레기를 1cm 옆으로 다 밀쳐버립니다. 그러니까 좁은 의미에서의 우리 의식만 있지 넓은 의미에서의 우리 의식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집 안에서만 우리 가족, 우리 의식을 갖지만 넘어서면 큰 영역에서의 나라를 생각하는 일에는 아주 희박합니다. 이 글을 썼던 사회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한국 사람이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나라를 제일 잘 생각하는 때는 언제냐? 나라가 거의 망할 때나, 나라가 망한 다음에. 그 다음에 한국인들의 애국심은 발휘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1997년 말에 IMF가 터졌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IMF가 터지는 순간까지도 우리 국민들은 호화생활을 했습니다. 사치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지고 나라가 부도난다고 생각을 하니까 금을 모으자고 난리였지 않습니까? 솔직히 IMF가 터진 그 당시만큼이나 우리 국민들의 마음이 하나가 된 적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전 국민이 다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정신은 100여년 전인 1910년에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될 때도 그랬습니다.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고스란히 넘어갔지만 서울에서는 어떤 데모나 항의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완전히 일본에 빼앗기고 나서야 나라를 되찾겠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3·1운동이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지 9년이 지난 1919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1905년에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에 14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안타깝지만 그 전에 미리 준비를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미리 넓은 사회를 생각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거의 망할 때 가서, 혹은 망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한국인들의 애국의 투혼이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좁다란 우리를 넘어서서 커다란 영역의 민족과 나라를 생각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왜 중요합니까? 민족의 미래는 나의 미래와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민족의 미래는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도 결코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일종의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까? 그것이 우리의 삶, 우리의 평안의 미래, 또 우리의 고요함의 미래, 우리의 복된 삶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의 영향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의 영역에 무관심 할 수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를 생각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라를 위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라고 하면서 "첫째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첫째로라는 말은 첫째, 둘째, 셋째라고 할 때의 논리적인 순서를 가르치기 위한 첫째로가 아닙니다. 둘째가 없습니다. 여기서 첫째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우선 순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많은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의무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여러 가지 기도의 형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 그러니까 바울은 여기에서 모든 방법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사용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형태의 기도의 방법들을 다 동원해서 기도하십시오. 누구를 위해서?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러나 2절에 가서는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땅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분은 제게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한 일이 뭐가 있는데 기도해야 합니까? 저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모두 싹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비판이나 비난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입만 벌리면 됩니다. 우리가 쉽게 비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는 일종의 노동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기도를 믿으십니까? 우리의 기도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바울은 그래서 그것이 우리가 첫째로 할 중요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나라를 생각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도에 따르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에 따르는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컨대 주기도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기도한 다음에 가만히 계십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 반드시 믿는다면 하나님이 내게 양식을 주실 것이다. 어디에서 양식을 줄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줄 것인가? 일 자리를 찾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땅히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 기도에 합당한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합니다. 같은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도 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이 이 나라에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옵소서." 우리가 참으로 이것을 위해서 기도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요구됩니까? 저는 오는 6월 4일, 지방선거라는 중요한 역사적 시점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들 중에 또 하나는 바른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투표하는 참여 자체가 나라를 위하는 애국적인 우리의 행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고 지방선거에 참여한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이 선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세워진다면 저는 우리 민족은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앞에 내가 따르겠다는 것이 기도의 마지막 열매입니다. 지상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기도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기도를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면 우리는 선거를 위해서 기도할 때에도 먼저 우리의 선입관을 비울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후보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한 번 다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원하십니까?"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역에 대한 편견을 넘어설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지방에 속해 있기 때문에 누구를 찍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설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더 중요하고, 더 완벽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만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 땅 위에 이룰 수 있는 길이라면 내 개인이 가진 편견과 생각을 뛰어 넘고 지방색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파당을 뛰어넘고 자기 이익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방선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나라를 깊이 염려하고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은 결코 이 민족을 버리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이 민족은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안목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국민은 투표라는 행동으로 이 땅의 정치를 정화시켜야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할 때 일입니다. 영국 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때 영국 황실과 윈스턴 처칠 수상은 전쟁이 발발하던 그 날, 영국 교회에 일제히 온 교회에서 같은 시간에 종을 울리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심기 위한 희망의 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동시에 영국 황실은 영국 성공회의 존경받는 주교였던 윌리암 템플 주교에게 전 국민에게 보내는 방송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템플 주교는 그의 역사적 설교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대영제국의 국민 여러분, 잠시 후 이 땅에 모든 교회는 종을 울릴 것입니다. 종소리를 듣거든 우리 모두 교회로 나가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십시다. 역사의 주인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우리 나라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간절히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은 세월호의 침몰로 고통받는 실종자들과 유가족들이 하루 빨리 아픔과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월호의 사건으로 무너지고 있는 서민 경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월호의 침몰에만 주목하고 있지만 그러나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한 서민 경제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국민들은 애도의 기간이라고 해서 주머니를 닫아버렸습니다. 그 여파는 하루 하루 벌어서 먹고 사는 서민들이 고스란히 떠 안아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경제가 다시 회복되기를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을 치유하고, 이 민족을 다스리도록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역사의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서 허용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인도 없이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이나 해방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 /신4:5-6/롬11:33-36/ 이성희목사 2015-01-21 20:26:35 read : 10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서야 그 날개를 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헤겔의 ‘법철학’ 서문의 글입니다.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으로 제우스의 머리에 잉태되어 제우스는 두통이 시달립니다. 대장간 신인 헤파이투스는 도끼로 제우스의 머리를 절개하여 태어나게 하였다고 합니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 /신4:5-6/롬11:33-36/ 이성희목사 2015-01-21 20:26:35 read : 101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서야 그 날개를 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헤겔의 ‘법철학’ 서문의 글입니다.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으로 제우스의 머리에 잉태되어 제우스는 두통이 시달립니다. 대장간 신인 헤파이투스는 도끼로 제우스의 머리를 절개하여 태어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멍청한 머리를 도끼로 깨고 그 속에 지혜를 불어넣어주는 여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부엉이 한 마리를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부엉이를 통하여 지혜를 얻었습니다. 부엉이가 무슨 지혜가 있습니까? 밤에 활동하는 부엉이는 밤이 되면 부엉이의 날개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지혜란 밤의 부엉이의 날개처럼 자연스럽게 활용될 때 멋과 참다움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혜는 수 없이 말하지만, 지혜를 자연스레 활용하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지혜를 얻는가의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지혜를 얻는 법을 세상은 주지 못합니다. 성경은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은 어떤 백성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 될 수 있을까요? 플라톤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 네 가지 덕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은 문화, 예술, 철학, 지식을 얻으려고 늘 애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 지혜와 지식을 어떻게 얻게 되는가를 말합니다. 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3:8에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지혜와 지식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고의 지혜, 참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통하여 자비로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비로소 자신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모르면 바보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것이 지혜가 없는 일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지혜의 시작은 죄의 고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다음 자기를 부정하고 백성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저주받을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난 초대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아 어찌할꼬?”라고 통회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지혜는 먼저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알고,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9:7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갖 지식과 지혜의 보고(寶庫)입니다. 성경을 보면 영혼이 살고, 성경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도 똑똑해지고, 성경을 보면 세상을 사는 지혜를 얻습니다. 신명기는 광야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명령하신 규례와 법도를 설명합니다. 이것이 지혜와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규례와 법도,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하는 백성이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입니다. 우리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지켜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 지혜요 지식입니다. 신명기 4:6 상반절에는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고 합니다. 신구약 성경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이며 지혜라는 것입니다. 잠언 1:7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방법은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4에는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합니다. 지혜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히브리말로 ‘하캄’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나면서부터 똑똑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심이며, 도덕적 성품을 말합니다. 지혜란 분별력입니다.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력이 지혜입니다. 반면에 지식이란 히브리말로 ‘빈’이라고 합니다. 지식이란 배워서 얻어지는 지성에 근거한 이해력, 분별력, 통찰력 등의 종합적 사고력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배우며, 배우면 지식이 쌓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는 이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심도, 세상을 분별하는 사고력도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것이 우리의 영적 삶 뿐만 아니라 육적 삶에도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잠언 2:6에는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라고 합니다. 지혜는 신령한 것으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와야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이 주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꾀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적 꾀가 많은 사람을 “잔머리 굴린다”, “꾀가 많다” 혹은 “꼼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며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람의 방법으로 그 말씀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사라가 이미 임신하지 못하는 사실을 안 아브라함과 사라는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위의 계획보다 아래의 꾀로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이 일은 아브라함의 일생에 가장 괴로웠던 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인간의 꾀로 이룬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두 아들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의 계획보다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아래의 꾀로 두 사람이 다 꾀에 걸려 넘어집니다. 에서는 그 꾀로 소중한 장자권을 잃어버렸고, 야곱도 꾀로 얻은 것 때문에 평생 큰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야고보서 3:17에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지혜가 위로부터 와야 완벽한 지혜가 됩니다. 세상에서 온 꾀는 항상 거짓되고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아래 즉 세상에서 얻는 지혜인 꾀는 다른 사람에게 비난을 듣고, 불편하고, 해롭게 됩니다. 결국 이런 꾀는 자기 올무가 될 때가 많습니다. 논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자가 15세가 되면 지학(志學)이라고 하여 학문에 뜻을 세웁니다. 20세는 약관(弱冠)이라 하여 성인이 됩니다. 30세에 이립(而立)하여 자립하게 됩니다. 40세에 불혹(不惑)이라 하여 미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50세에는 지천명(知天命)이라 하여 하늘의 뜻을 압니다. 60세에는 이순(耳順)이라 하여 귀에 거슬림이 없습니다. 70세에는 종심(從心)이라 하여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요즘에는 어떻습니까? 유치원 때 학문에 뜻을 세우지 않으면 이미 늦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성인이 되어 성인들이 하는 것들 다 따라합니다. 30세가 되면 자립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에는 30세에도 캥거루족이 많습니다. 40세에는 유혹이 가장 많습니다. 50세에 되어 하늘의 뜻을 알 때쯤 되면 명예 퇴직해야합니다. 60세에는 귀에 거슬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귀에 거슬리는 것이 많아 60대 문제도 이혼도 많습니다. 70세에는 마음대로 해도 어긋남이 없다고 하지만 70세가 되어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논어에는 40세가 되면 지혜가 풍성해야 하는데 정말 지혜가 풍성합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지혜는 세상의 지식으로 얻지 못합니다. 지혜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는 것이 지혜입니다.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호칭은 요란하기 그지없습니다. “전 세계 노동자의 지도자이며 스승, 인민의 어버이, 소련인민의 지혜와 지식의 수령, 전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군사지도자, 전 과학 분야를 종합하는 지휘자, 레닌혁명이론의 헌신적인 계승자” 등등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 데 지혜와 지식의 수령이라고요? 누구나 원하는 지혜와 지식인데 그러나 누구나 다 얻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와 지식은 근본이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상 2:3에는 “지식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1에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지식 즉 과학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지혜와 지식이 풍성합니다. 하나님께 그 근거를 둔 지혜와 지식이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풍성합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것이 지혜이며 지식입니다. 우리 백성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기를 바랍니다. 둘째, 큰 나라 사람은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입니다. 신명기 4:6 하반절에는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고 합니다. 어떤 나라가 큰 나라입니까? 국토가 넓은 나라가 큰 나라입니까? 국민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입니까? 국가 총생산(GDP)과 국민소득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입니까? 큰 나라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큰 나라는 그런 기준으로 따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성경은 지혜와 지식이 있는 나라가 큰 나라라고 합니다. 아무리 물리적인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적 지혜와 지식이 없으면 큰 나라가 아닙니다. “이 큰 나라”한 것은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지금도 작은 국토와 적은 국민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큰 나라로 비친 까닭이 무엇입니까? 영토나, 군사력이나, 경제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은 나라지만 큰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성도가 큰 나라 백성입니다. 이런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살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두려움 없이 든든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지리적으로는 러시아가 제일 큰 나라입니다. 그 다음이 캐나다, 중국, 미국, 브라질 순입니다. 인구로 보면 중국이 단연 제일 큰 나라입니다. 그 다음이 인도, 미국, 인도네시아 순입니다. 지리적, 인구별로 큰 나라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반드시 대국은 아닙니다. 정보시대는 물리적 힘에서 정보와 지식의 힘으로 힘이 이동한 시대입니다. 아무리 지리적으로 크고, 인구도 많고, 자본도 있다고 하더라도 정보나 지식이 없으면 큰 나라가 못 됩니다. 세계화 시대의 큰 나라는 정보와 지식과 경쟁력을 갖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을 가진 나라는 스위스, 룩셈부르크, 싱가폴 등이랍니다. 우리나라도 경쟁력이 있는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헬라식 지식(How)과 히브리식 지혜(Why)가 하나가 되어야 올바른 지식, 올바른 지혜가 된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지혜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여우와 고슴도치’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경, 시인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싸웠던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아는 게 많지만 고슴도치는 딱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고 하였습니다. 고슴도치는 세상에 단 하나의 빛, 최상위에 있는 개념만을 해석합니다. 여우는 이론 따위에 집착하기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경험을 원하며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는 고슴도치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세익스피어, 괴테는 여우입니다. 영국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벤 맥킨타이어의 주장에 의하면 “오늘날의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여우가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지성보다 감성을 추구하고, 지혜보다 지식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요즘이야 말로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로마서 11:33에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풍성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얻기를 간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꾀에 의존하는 자는 마치 자기 꼬리를 물고 죽은 방울뱀과 같습니다. 스스로 올무를 만들고, 스스로 함정을 파고, 스스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꾀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 유포되었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TAM 항공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50대 여성이 비행기를 타려고 비행기에 올라 자기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자기 옆자리에 흑인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본 여인은 화가 나서 스튜어디스를 불렀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스튜어디스의 물음에 여인은 “보면 몰라요? 옆자리에 흑인남자가 있잖아요. 다른 자리로 주세요”. 비행기의 이코노미석이 빈자리가 없어서 자기를 옮겨줄 수가 없다고 한 다음 기장에게 가서 한 번 상의해 보겠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돌아온 스튜어디스의 말은 똑 같았습니다. 이코노미석에는 빈자리가 없고 빈자리는 일등석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코노미 승객을 일등석 자리로 보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스튜어디스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손님을 불쾌한 사람 옆에 앉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하더니 흑인남자에서 “짐을 챙겨서 저를 따라 일등석으로 가시지요” 하면서 흑인남자를 일등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다른 승객들이 박수하며 환호를 보내며 심지어 기립 박수하는 승객도 있었습니다. 지혜가 부족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면 편견을 가집니다. 교만하고 아집이 강합니다. 이기심이 생겨 남을 배려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은 자기는 똑똑한 척 하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탈무드에는 “가난하다고 해서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 좋다. 학문이 있는 사람이 많다.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말라. 그들의 셔츠 속에는 영민한 지혜의 진주가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힘을 가진 자가 강자가 아닙니다. 지혜 있는 자가 진정한 강자입니다. 신명기의 주제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11:18에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삶,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지혜롭게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프랑스의 어느 여배우가 버나드쇼에게 구혼하였습니다. 쇼는 여인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아름다고 완벽한 육체를 가졌습니다. 당신은 둘도 없는 지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당신의 두뇌를 닮고, 나의 육체를 닮은 완벽한 아이가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버나드쇼는 “결과가 반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낳는다면 나의 육체에 당신의 두뇌를 닮은 아이를 낳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지성과 지혜, 육체의 건강과 아름다움,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와 지식이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큰 사람이 되지 못하며, 큰 나라가 되지 못합니다. ‘청소부 밥’이란 책에는 인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한 지침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지쳤을 때 재충전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족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투덜대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배운 것을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소비하지 말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삶의 지혜를 후대에게 물려주라는 것입니다. 지혜를 후대에게 물려주는 삶은 가치 있는 삶입니다. 우리 백성들이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성경의 지식과 지혜를 후대에게 잘 전달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지혜와 지식아 있는 큰 나라, 하나님께 복 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축복 받아 주의 일에 충성하자! /신28:1-14/ 오주철 목사 2016-03-27 21:25:25 read : 48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자 찾으시는 바로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류 역사의 모든 복이나 성공은 어떤 원칙을 따른
축복 받아 주의 일에 충성하자! /신28:1-14/ 오주철 목사 2016-03-27 21:25:25 read : 48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자 찾으시는 바로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인류 역사의 모든 복이나 성공은 어떤 원칙을 따른 결과이지, 결코 우연히 나타난 결과가 아닙니다. 모든 복은 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더 큰 것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는 모든 혼돈과 흑암과 공허가 다 물러갈 것입니다. 인생 여정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막다른 생각, 막다른 선택의 골목에 다다랐을 때에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꿈을 가지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힘들고 어렵고 곤고한 일이 있더라도 나를 향한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셔야 합니다. 믿음은 모든 환경을 초월합니다. 극한 상황일수록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십시오. 믿음과 꿈은 오늘과 내일을 잇는 다리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강한 자로 일어서게 될 나를 꿈꾸십시오. 장차 크게 복을 받아 부요하게 될 나를 꿈꾸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렇게 축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믿음과 꿈은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감정과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믿음의 원칙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가진 자는 언제나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목표가 없는 삶은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이고, 세상을 죽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과 가족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한 번 더 큰 꿈을 가지고 일어나십시오.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미래가 누구에게나 복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준비하는 자에게만 복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믿음의 여정을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달려간 허다한 증인들이 구름같이 둘러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셔서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보면 시작도 괴롭고 끝도 한없이 괴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작은 한없이 불행하고 나빴으나 끝이 좋은 축복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시간 인생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끝이 더 좋은 축복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믿음의 기적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날마다 때마다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우리의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았다"는 복된 삶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믿음의 사람은 끝이 더 좋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믿음의 기적은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는 강한 기반이 됩니다. 믿음의 기적은 행동하는 설교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다른 어떤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난 믿음의 기적이 분명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자녀의 불행은 부모의 불행이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불행은 곧 하나님의 불행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잘되기를 가장 바라는 분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그림을 그리십시오. 미래에 있어질 가장 아름다운 날들을 그려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에게 소원을 주셔서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주시는 감동과 말씀과 생각을 따라서 소원과 꿈과 비전을 가지고 축복된 미래의 그림들을 그려나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받아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십시오. 은혜를 받아야 영광도 있고 하늘의 복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주신 사명도 기쁘게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오래 참습니다. 참을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습니다.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합니다. 순종을 위하여 자기를 포기합니다.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음을 알고 충성되게 사명을 감당합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십시오. 지금 받아야 합니다. 이후의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받아야 합니다. 내일은 내 날이 아닙니다. 내일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동일하시지만, 그러나 내일은 내 날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성령께서 주시는 강 같은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십시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은혜를 받아서 주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죽어서 구원받아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복이라고 말할 때에는 추상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의 복은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했을 때에 그 복이라고 하는 것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에 그 복은 자녀의 복이었습니다. 민족의 복이었습니다. 땅의 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복이었습니다. 야곱이 복을 받았다고 했을 때에도 물질적인 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의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복을 받아야 할까? 물론 여러 가지의 복이 있겠지만 오늘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의 복을 받자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건강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건강입니다. 독일의 격언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다.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건강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병든 몸에는 좋은 집도 귀찮습니다. 병든 몸에는 높은 명예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혹여 내 몸에 병이 들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병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아닙니다. 물론 병 때문에 축복도 받고 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하십시오. 건강을 잃어버린 제 경험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건강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뭐니 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한 평생 건강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고 있다면 큰 복을 받았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그러나 건강을 잃어버리신 분은 하나님께 건강한 몸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병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쳐주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소경을 눈뜨게 하셨습니다. 각색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병을 고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병을 고치면서 건강을 구원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할 때에 내 영혼이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병에서 고침 받는 것도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해야 합니다. 혹여 우리들 가운데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질병에서 고침 받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건강한 자의 것입니다. 행복도 건강한 자의 것입니다. 축복도 건강한 자의 것입니다. 천국도 건강한 자의 것입니다. 영혼이 병들면 천국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건강한 자의 선물입니다. 심령이 병들면 아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병들면 권력도, 명예도, 영광도 소용이 없습니다. 병들면 진수성찬도 소용이 없습니다. 건강이 없으면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인생이 큰짐과 고통이 됩니다. 사람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굳이 말씀을 드리 않아도 몸이 아파 본 사람은 다 아실 것입니다. 속담에 "창백한 뱀꾼이 병든 왕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영육간에 강건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건강해야 건강한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있습니다. 건강해야 건강한 예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건강해야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건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요즘 보면, 건강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별의 별 운동을 다 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건강은 경건함에서 시작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건강이라는 단어가 영어로 'Health'입니다. 그런데 'Health'라는 단어의 어원은 'Holy'라는 거룩함, 신성함에서 왔습니다. 결국 건강은 경건함에서 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에게 육체의 건강도 올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다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건강의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영육간에 강건하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옛날 왕들의 수명을 집중 연구해 본 결과 인간의 모든 영화와 부귀를 한 몸에 지니고 살았던 로마 황제들의 평균 수명이 35세였습니다. 중국에서 불로초, 불사약을 먹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황제의 평균 수명은 39.2세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조선 왕조 시대의 왕들의 평균 수명은 43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산다고 해서 장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야 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해야 됩니다. 그의 삶이 경건해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한 믿음 생활을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어떤 조사에 의하면 주일 성수를 잘 하는 사람이 장수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건강한 육체는 건강한 정신에서,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영혼에서 비롯됩니다. 건강한 영혼은 결국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하면 그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화려한 집이나 값비싼 음식에서 건강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건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건강의 복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내게 건강의 복을 주옵소서." 우리가 건강해야 건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건강해야 건강한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건강해야 주의 일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해야 할 일을 못하는 그런 분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마음에도 원하고 육신으로도 더 주의 일에 감당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건강할 때 더 주님의 일에 헌신하십시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건강할 때에는 세상 속에서 허랑 방탕하다가 건강을 잃어버린 후에야 두 손을 들고 주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나왔으니까 다행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건강을 잃어버린 몸으로 주 앞에 나와서 남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건강할 때 더 힘써서 주님의 일에 충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재물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보면 영은 신령하고 거룩하며 육신을 포함한 물질은 모두가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라고 가르친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철저히 물질을 멀리하며 육체를 죄악시하며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부 신자들 중에는 물질의 축복을 별로 안 좋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복신앙이라고 말하면서 매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질의 복을 말한다고 해서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복이라고 할 때에도 언제나 일차원적인 물질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복의 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을 때에도 일차원적인 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질을 터부시하지 마십시오. 저는 예수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에게 더 많은 물질의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강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서 여러분의 생업이 풍성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정의 평화를 말합니다. 들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직장생활에서 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네 몸의 자녀가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잘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자녀들이 잘 자라고 때에 따라 그 시기를 놓치지 아니하고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은 참으로 큰 복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네 토지와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는 일마다 다 잘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만사가 형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복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사는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하여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침에 출근할 때에 웃으면서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에 웃으면서 들어올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우리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수많은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하여서는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우리가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해야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이 모든 복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늘의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하락하시고 약속하신 복을 이 땅에서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만 누릴 것이 아니라 내 자녀들이 받아 누릴 것입니다. 내 자녀들만 받아 누릴 것이 아니라 내 자녀의 자녀가 받아 누릴 것입니다. 내 자녀의 자녀의 자녀가 받아 누릴 것입니다. 그래서 자손 천대에까지 누리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은혜와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다 잘되기를 축복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12편 1절과 3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부요와 재물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어서 이 땅에서도 축복을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병든 몸보다는 건강하여 건강을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히야 합니다. 가난보다는 물질의 축복을 받아서 물질의 복을 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목적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목적대로 사용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안에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축복을 받아서 주의 일에 더욱 충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요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아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하나님께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야곱이 자기 힘으로 거부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비록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니까 맨손으로 시작해서도 거부가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복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재물의 복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재물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도 망신이고, 여러분 자신도 망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아서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녀들도 다 잘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꾸어줄찌라도 여러분은 꾸지 않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주의 일에 더 힘써서 충성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는 평안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어느 가정에 들어가든지 그 가정이 평안하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가정에 평안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보십시오. 아무리 건강해도 평안이 없으면 그 건강이 무슨 복이 될 것입니까?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가정에 평안이 없으면 그 재물이 무슨 복이 될 것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주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평안해야 우리가 주의 일에도 더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안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참 평안은 오직 주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아- 내맘속에 참된 평화 있네 주 예수가 주신 평화/ 시험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네 아 귀하다 이 평안함"♬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평안을 얻으려고 나옵니다. 주 안에서 마음의 평안, 가정의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미국의 한 아이가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어머니가 세 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는데 늘 따라다니면서 가정불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평안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나는 겁니다. 거기서 아이가 거칠어지게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문제 있는 아가씨와 만났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아이가 24살 되는 해에 미국 대통령이 지나가는 것을 총을 쏘아 암살하게 됩니다. 이 아이가 바로 케네디 대통령를 암살한 '오스왈드'입니다. 가정이 붕괴되면 항상 거기에서 상처받은 아이가 나와 사회를 온통 괴롭게 하고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같은 상처를 받은 가정에서 자라났을지라도 주님에게로만 인도하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소망이 있고 여유가 있고 인류를 위해서 봉사를 하고 큰 일을 합니다. 같은 상처를 받아도 주님을 떠나면 이 상처가 자기도 망치고 사회를 향하여 온통 혼란을 가져다주는 문제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아서 내 영혼에 평안을, 가정에 평안을, 그리고 이 민족에 평화를 만들어 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에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도 좋게 하고, 똑같은 것도 즐겁게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그래야 육체도 건강해집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흔들리고 재미가 없고 짜증이 나면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웃을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요, 웃어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일입니다. 웃는 남편은 착한 남편입니다. 웃는 아내는 가정을 행복하게 합니다. 웃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대궐 같은 집에서 살아도 평안함이 없다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을 위해서 노력하십시오.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받아 누리십시오. 평안은 주 안에서 우리가 누려야 할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아 주의 일에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 이성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합니다. 내 경험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합니다. 과학이 검증하지 못해도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순종을 원하십니다. 이런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런 사람을 들어서 쓰십니다. "선생님, 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말씀에 의지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그물이 찢어지도록 축복하십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 하나님 손에 붙들려 크게 쓰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사십시오. 가정생활도 믿음으로, 직장생활도 믿음으로 사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일에 더 충성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재물의 복을 주십니다. 건강의 복을 주십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있는 모습 그대로 주 앞에서 더 헌신하고 충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주시면 주의 일에 앞장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 기억으로는 그래서 건강을 찾은 사람들이 주의 일에 헌신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의 복을 주시면 주 앞에 더 많이 드리고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물을 주셨지만 주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내 가정을 평안하게 하면 주님의 일에 열심히 충성하겠다고 말하지만 평안하니까 세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속이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섬기는 척, 드리는 척만 하고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어느 한 날에 하나님께서는 건강과 재물과 평안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까지 정성을 다해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정성과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가 남은 그 마지막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자 했을 때에 그 중심으로 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손에 있는 것으로 주의 일에 충성하십시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내게 건강의 복을 주옵소서. 내게 재물의 복을 주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나와 내 가정과 직장과 사업에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으로 주의 일에 더욱 힘써서 충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름다운 중심을 보시고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에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큰일을 행하시는 예수님 /막5:1-20/ 이삼규목사 2016-10-14 12:05:20 read : 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떤 교회 옆에 술집이 성업 중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그 술집이 문을 닫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소문이 술집에까지 알려지자 교회와 술집은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갈수록 술집영업이 안됩니다. 급기야 술집은 문을 닫았고, 화가 난 술집주인이 목사와 장로들을 고발했습니다. 술집이
큰일을 행하시는 예수님 /막5:1-20/ 이삼규목사 2016-10-14 12:05:20 read : 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떤 교회 옆에 술집이 성업 중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그 술집이 문을 닫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소문이 술집에까지 알려지자 교회와 술집은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갈수록 술집영업이 안됩니다. 급기야 술집은 문을 닫았고, 화가 난 술집주인이 목사와 장로들을 고발했습니다. 술집이 망한 원인은 교회가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판사 앞에 술집주인과 교회대표들이 나란히 섰습니다. 술집주인은 한결같이 우리가 망한 것은 당신들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대표들은 무엇이라고 방어했을까요? 우리가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기도한 것 때문에 망했겠느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판사의 판결이 났습니다. “술집이 기도 때문에 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목사, 장로보다 술집 주인이 믿음이 더 좋은 것은 어찌된 일이냐?”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과연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보다 믿음이 더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믿는 믿음! 그 믿음은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더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성경만큼 확실하게 가르치는 책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이 확실한 진리인 것처럼 사탄과 그 졸개들인 귀신이 존재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사탄의 충돌을 여러 번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사람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고,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시 8:5-6)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인간은 다른 만물과 같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발아래 다스리는 영광과 존귀를 주셨음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왜 천사의 자리에서 악마의 자리로 타락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방에 이르자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하며, 쇠사슬과 고랑으로 매어 놓아도 소용없이 괴상한 소리만 질러대는 광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이렇게 황폐화된 것은 그가 귀신들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는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유의해서 보실 것은 이러한 탈무드에서 말하는 특징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한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분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낮에 열심히 다니시고 밤에는 일찍 집에 들어가시고 일찍 주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낮에 활발하게 활동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것도 정오였습니다. 베드로도 정오에 기도하다가 고넬료를 만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침에 요한계시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로 낮에 계시를 받았고 활발하게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밤을 좋아합니다. 귀신이 내린 병을 신병이라 하는데 신병에 걸려서 무당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낮에는 멀쩡하다가 밤만 되면 부스스 일어나서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겁니다. 밤새 해매고 다닙니다. 이처럼 귀신은 어두운 것, 죄악된 것을 좋아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병리적인 사회를 보십시다. 얼마나 밤의 문화가 발달되었는지 모릅니다. 흥청망청 모조리 밤의 문화들로 인해서 흐느적거리고 있습니다. 밤에 이루어지는 일 치고 별로 좋은 일없고, 더구나 거룩한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분명히 바로 보아야 합니다. 둘째, 무덤에 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굴처럼 생겼습니다. 그 속에 시신을 넣어 두는데 그 속에 들어가 함께 자는 것입니다. 죽은 시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시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귀신의 특징입니다. 귀신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꾸만 낙심하게 만듭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나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유명 연예인이 자살하고 재벌들도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게 만듭니다. 성도 여러분! 자꾸만 낙심이 되고 절망 가운데 빠지게 될 때에는 그것이 귀신의 소행임을 분명히 아시고 믿음 가운데 말씀으로 이기고, 기도로 이기면서 소망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늘 함께 계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셋째, 옷을 찢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아름다운 것을 모르는 실로 난처한 모습입니다. 요즘은 일부러 옷을 찢어서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없이 살아서 무릎에 구멍이라도 나면 창피하였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멋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많이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매매특별 방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아직도 성을 상품화해서 그것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최소한으로 갖추어야할 예절과 도덕을 파괴하고 양심을 마비시키며 쾌락 그 자체가 삶인 양 만들어 결국은 파멸로 전락시키는 수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것을 모르고 아름다운 것을 모르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넷째, 선물을 주면 곧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보내는 사람의 마음과 사랑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자마자 부수어 버린다는 것은 고마운 것을 고마운 줄 모르고, 사랑을 받아도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르고, 도무지 어떤 것도 가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런 말을 쓰는데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간이지 동물 중에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이라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그 가치를 모릅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육신의 향락을 즐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 영혼을 귀한 줄 모르고, 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귀신들린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밤의 문화, 어두운 죄악의 문화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소망보다는 절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지, 또한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고귀하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의 가치를 모르고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이요, 귀신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①무덤사이에서 살았습니다. 무덤의 죽음, 이런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다시 말하면 ‘Identify’(동일시하다) 시키므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이 귀신의 전략입니다. ②무서운 힘을 가졌습니다. 쇠사슬로도 그를 묶어둘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가진 그 초자연적인 힘은 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힘을 가진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쇠사슬과 고랑으로 손발을 묶어 놓아도 그것을 끊어 버릴 정도의 초인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힘으로 결국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제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자제력은 제동장치와 같은 것이어서 인간의 생명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인은 이런 제동장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단이 하는 짓입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인 클린턴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는 28세의 떠돌이 아버지와 20세의 식당 종업원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불행한 환경을 딛고 학문적으로는 세계 최고의 명문 예일대학을 나왔고, 하버드대학을 나온 미모의 여인 힐러리와 결혼을 하였으며, 권력으로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를 다스리는 막강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며, 아칸소라는 작은 주가 다시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대통령직을 쟁취한 능력의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 대해서 20년 간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한 친구는 “무절제와 방탕으로 얼룩진 토요일 밤을 보낸 후, 주일 아침이면 경건하고 책임감 있는 크리스천으로 변하는 이중인격자”라고 지적했습니다. 그와 스캔들을 일으킨 르윈스키는 방송 인터뷰에서 “클린턴은 종교적 신념으로 자제하려 하지만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다.”고 클린턴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약점을 철부지 처녀가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클린턴으로 하여금 종교적 신념으로도 자제할 수 없게 하였다는 것은 지성도 권력도 심지어는 종교적 신념도 사단의 유혹 앞에서는 무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는 이러한 자제력을 상실한 광인들로 말미암아 엄청난 상처를 입었습니다. 정치적 폭력을 일삼은 네로, 히틀러, 스탈린 등은 역사의 광인들입니다. 그들은 역사에 상처를 주었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비극으로 인해 자신마저도 망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③밤낮으로 무덤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괴성을 질러댔다고도 합니다. 소리는 메시지를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메시지가 없는 소리는 괴성이요, 들을 사람 없는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미친 사람이 하는 짓입니다. 현대인 중에서도 괴성을 지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치인, 언론인, 심지어는 설교도 그렇습니다. 메시지도 없고 청중도 없습니다. 요즘은 소리 없는 괴성도 많이 있습니다. 소위 사이버 공간에서 펼쳐지는 온갖 악의 퍼레이드는 이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괴성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괴성 가운데 작아지는 참 의미 있는 소리를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가 시내산 동굴에서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결코 괴성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것입니다. 교회가 괴성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도록 예배당은 정적을 회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④귀신의 특징은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적 존재의 특성을 인간보다 확실히 알았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그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사단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절을 봅시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꾀임에 빠져 사단의 종이 되어버린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단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인생도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인생! 참으로 비참한 인생입니다 이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타락한 인간상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거처할 곳은 가정입니다. 가정의 생명은 사랑과 순결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과 순결이 사라진 가정을 무덤이라 말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무덤과 같이 사랑과 순결이 사라진 가정에서 살고 있는 광인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상실케 한 것은 사단이고, 사단의 무기는 타락과 이기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한 소망은 없습니다. 2.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오늘 본문을 보면 현대인의 영적 무능력에 비해 귀신의 반응은 얼마나 민첩한지를 보여줍니다. 1)"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6절) 이 귀신은 멀리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기 보다 더 강력한 분이 나타났음을 보고 달려와 절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굴복치 않던 악한 귀신이 예수님이 등장하자 달려와 절했습니다. 능력자인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소리쳤습니다. 2)"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7절) 이 귀신의 소리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귀신이지만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귀신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임을 외쳤습니다. 귀신에게도 지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이기에 영의 세계를 잘 알았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을 때입니다. 물론 귀신의 이 고백은 신앙적이 고백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탄식입니다. 3)"나를 괴롭게 마옵소서!"(7절) 왜 이런 고백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등장 그 자체가 이 귀신을 두렵고 떨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또 이 귀신을 향해 던졌던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가 고문이요, 위협이요, 고통입니다. 여기 '괴롭게 마옵소서!'라는 말은 영어로는 '고문'한다는 말입니다(NIV). 예수님의 말씀에 이 귀신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8절)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면서 지체 없이 귀신을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은 귀신이 인간을 괴롭게 하고 황폐케 하는 것을 한시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앞 장, 4;35-41절을 보면 인간을 괴롭히는 자연계를 다스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풍랑이 불어와 제자들이 탄 배를 뒤집어 업으려 할 때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영계를 다스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인간을 괴롭게 하고 인간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잡아주려 오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속박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수님이 내 인생을 예수님 맘대로 주장할 것 같아 자신의 삶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 삶에 많은 손해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풍성하고 유익하게 해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우리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삶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모든 것을 없애주시기 원하십니다. 이 일은 예수님 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귀신과 인간을 구분해서 대했습니다. 명령할 때도 귀신을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귀신과 귀신들린 사람을 구별하셨습니다. 인간은 귀한 존재요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자이기 때문에 인간을 다룰 때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데가볼리 사람들은 이것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귀신들린 인간을 귀신 그 자체로 취급해서 상대를 안 해버렸습니다. 인간이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은 저주하시고 좇아내셨지만 인간은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비록 귀신들린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창조되었기에 인간은 귀중한 것입니다. 귀신에 의해서 많은 부분이 망가지고 부셔졌지만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남아있는 한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 우리의 상태, 환경이 어떻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우리는 사랑 받기 충분한 사람이고, 예수님은 이런 나를 돕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5)"네 이름이 무엇이냐? 군대니이다."(9절) 군대라는 말은 “레게온”이라는 말인데 로마 군대의 군단을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의 1개 군단 병력은 6천명의 보병, 120명의 기병과 지원특수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약 6천 마리의 귀신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청 센 귀신이 붙은 것입니다. 이렇게 센 귀신들이 붙었으니 누가 해보겠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자유케 하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6천 마리의 귀신들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6천 마리의 귀신들이 나가버렸습니다. 능력 있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많은 숫자'라는 것은 무의미 한 것이었습니다. 이 절망과 무기력의 현장에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합니다. 기세당당하던 귀신은 무서워하고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귀신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께 하는 하소연을 들어보십시오. 7절, 나를 괴롭게 마소서 10절,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지금 이 장면은 예수님과 귀신이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여러분이 주의 할 것은 이 때 귀신들린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이 말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귀신이 그 사람의 입을 빌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예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생각보다 영리하고 영악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길 줄도 알고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귀신은 변신의 천재입니다. 불리하면 자신의 모습을 바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본문에서도 보시면 미친 듯이 무덤사이에서 날뛰던 이 귀신이 예수님이 등장하자 당장 달려와 엎드려 절하며 사정하고 있습니다. 저자세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이제 예수님께 사정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강한 자에게는 사정하지만 약한 자에게는 강하게 나갑니다. 특히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12절입니다.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귀신들 스스로 자기들을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들어가는 것도 귀신들 맘대로 못하고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돼지에게 들어가고 싶어 했을까요? 그것은 마귀와 돼지가 서로의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더러움'입니다. 2절, 8절, 13절에서 귀신을 말할 때 항상 '더러운'이라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귀신은 더러운 존재요, 더러운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향과 돼지의 성향이 같습니다. 자기 똥에서 뒹굴고 그것을 몸에 묻히고 삽니다. 씻어줘도 그때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두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1>귀신은 더러운 상태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어떤 더러움에 있으면 귀신이 그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귀신이 머물기에 가장 좋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마음, 더러운 욕심, 더러운 습성에 빠지면 귀신이 들리기 쉽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가 들어가자 예수를 팔 생각을 했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거룩한 생각, 아름다운 생각, 깨끗한 생각을 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면 귀신은 다가오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2>귀신이 들어가면 사람이 더러워집니다. 멀쩡하던 사람도 귀신이 들어가면 더러운 생각, 행동, 습성에 빠져들게 됩니다. 여기 본문의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이 들어가면서 옷을 벗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무덤사이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의 더러운 부분을 씻어주고 거룩케 만들어 주십니다. 3.거라사 광인의 사명 예수님과 귀신이 만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귀신은 떠나고 이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있습니다. 세 가지로 회복된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옷을 입었다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릴 줄 알았다는 것이요, 더러움에서 깨끗함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온전하였다는 것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자기포기에서 자기회복을 했다는 말입니다. 앉아있다는 말은 삶의 방황이 끝나고 안정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귀신의 만남을 통해 귀신은 떠나고 한 인간의 황폐된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둠의 권세와 싸우고 귀신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싸움을 통해 망가진 영혼들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중보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함으로, 사랑의 섬김을 통해 우리는 마귀의 권세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고침 받은 후, 거라사 광인의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그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져서 앉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성이 회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원리가 되게 할 때에 일어나는 가장 확실한 변화는 나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수치를 알아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져 삶의 논리를 찾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 보람과 가치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는, 행동만 있고 사고가 없는 사람이 이제는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회복의 모습입니다. 이 광인은 배를 타고 떠나시는 예수님께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가장 바른 신앙인의 모습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한 사람은 떳떳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불편함보다는 함께 살 때 임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큰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함께하기를 구하는 고침 받은 사람에게 예수님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막 5:19). 고침 받은 자가 해야 할 사명은 주의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은 어마어마한 기적입니다.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어떤 사람이 군대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거라사의 광인에게는 귀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불쌍히 여겨주셨는가를 친속에게 고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들이라도 그 부모는 떳떳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불편을 주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정상인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누가 정상인이 되도록 회복시켜 주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거라사의 광인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니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큰일을 행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큰일을 행하시는 주님을 증거 하는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의 기쁨 /신10:14-15/요삼11-12/ 이성희목사 2015-01-22 10:51:32 read : 119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참일 때에 북군 참모들이 링컨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링컨이 그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우
하나님께 속한 자의 기쁨 /신10:14-15/요삼11-12/ 이성희목사 2015-01-22 10:51:32 read : 119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참일 때에 북군 참모들이 링컨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링컨이 그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기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우리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 우리 편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성경은 여러 번 확인합니다. 시편 118:6-7에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성경의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줄서기는 피곤하지만 잘만 서면 엄청난 덕을 입습니다. 세상의 아무개가 권력을 잡게 되면 서로 눈치 보면서 줄서기를 합니다. 줄을 잘 서면 덕을 보고, 줄을 잘못 서면 해를 입습니다. 하나님께 줄을 서고, 속하여 수지맞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입니다. 요즘 말도 많은 ‘편가르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 편과 마귀 편, 이것만은 갈라야 합니다. 그러나 화합, 통합, 일치, 세계화 시대에 모두가 한 편이며 세계인이 적이 없이 동지이며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연(三緣)을 말합니다.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혈연, 지연, 학연을 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소속감과 연대감이 사회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생활에서도 삼연은 굉장히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래서 반대 경향을 가진 사람을 쉽게 비난합니다. 반대편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벌떼같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하면서 소속된 모임이 얼마나 될까요? 알게 모르게 20개 내지 30개는 다 소속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이상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가입된 모임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속감입니다. “나는 소속되어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속감은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철수라는 5 살배기 아이가 엄마와 지하철을 탔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너무 떠들어 엄마가 “철수야, 엄마가 어떤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지?”라고 했습니다. 그 때 철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빠!”라고 하더랍니다. 요즘 유머에 보면 아빠가 엄마 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죠? 우리 모든 가정에서 아빠가 엄마 편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좋은 가정입니다. 우리는 내 편이기만 해도 괜히 좋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합니다. 내가 응원하는 편이 이기기만 해도 신나는데 하나님이 내 편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선을 행합니다. 11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 속한 자가 선을 행합니까? 왜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뵙지 못합니까? 그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이 아니시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사람은 선인 하나님을 뵙지 못합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100:5에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이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선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내게 행하시옵소서. 당신께서 행하시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라도 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악을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선함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가 선하지 않다는 것은 이율배반적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악인이 없으며, 마귀에게 속한 선인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2:35에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3:11에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고 하고, 3:12에는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께 속한 자는 절대로 악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사람도 별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교회 나오면서도 못된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마저도 예수님을 안 믿어 보세요. 형편없을 사람입니다. 기독교가 아무리 타락하고,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미래학자들은 미래의 사회, 정치, 경제 이 모든 것을 기독교가 이끌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건강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하면 조화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몸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정신과 육체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한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건강을 말할 때 정신 건강, 육체 건강, 사회 건강, 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한 가지 더 첨가하여 영의 건강까지를 건강의 내용으로 말합니다. 영이 건강해야 선합니다. 영이 건강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비행기를 탈 일이 있었습니다. 아동부전국연합회가 경주에서 열렸는데 제가 강의를 한 시간 맡아서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에 옆의 같은 줄에 앉은 외국인이 저보고 먼저 내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아닙니다, 당신이 먼저 내리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분이 다시 저에게 먼저 내리라고 해서 제가 웃으면서 당신의 자리는 30C이고 내 자리는 30D니까 당신이 먼저 내려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야 웃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제 앞서 나갔습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작은 선을 행하고 나오니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오는데 어떤 부인이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부인에게 계단 밑에 까지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가방을 들고 계단 아래까지 내려갔습니다. 작은 선은 또 다른 선을 불러일으킵니다. 선을 행하면 그 자체가 재미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게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네요. 자신의 속에 악이 있는 자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재미있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 선이 있는 자는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닌 선한 사람으로 꾸미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선한 존재로 다듬어주시고, 꾸며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선하게 꾸며지게 되고, 선을 행하게 되고, 선한 사람으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선을 행하는 자’ 혹은 ‘악을 행하는 자’는 베드로전서에 많이 말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베드로전서 3:17에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을 두려워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갈라디아서 6:9에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합니다. 선인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악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아세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4:7에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결은 단지 악을 피하는데 있지 않고 선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 용어 가운데 ‘GIGO’란 말이 있습니다. ‘Garbage In, Garbage Out’란 말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란 말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밖에 나올 게 더 있습니까? ‘GIGO’란 이 말을 다른 말로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Good In, Good Out’입니다. ‘좋은 것이 들어가면 좋은 것이 나옵니다’. 우리 속에 좋은 것들이 들어가면 우리를 통하여 좋은 것들이 나옵니다. 좋으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면 좋은 것이 나옵니다. 선이 나옵니다. 선을 행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속한 자는 뭇사람과 진리에게 증거를 받습니다. 12절에는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니”라고 합니다. 데메드리오가 누구입니까? 에베소 교인으로 본서를 가지고 간 사람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디오드레베와 한 교회의 교인으로 구제에 힘쓰다가 추방된 사람이란 추측도 있습니다. 어쨌든 디오드레베와 대조적인 선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의 약칭 혹은 애칭이 데마라고도 합니다. 그의 선한 일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선행은 인정받고 증거를 받습니다. “속한 자”란 말의 속함이란 ‘에크’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란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데 하나님 편 아니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배에서 나온 자녀입니다. 낳았다고 하지만, “내 배에서나 나왔지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라고 하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들 맞아”라는 말도 합니다. 부모에게 속한 자는 속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7에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교회의 감독은 교회 밖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선한 증거를 얻어야 합니다. 선한 사람을 선한 증거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31에서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모든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증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대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누가 우리에 싸움을 걸 수가 있습니까? 여자 연예인이 밖에서 들키지 않고 다니는 방법을 아세요? 화장을 지우면 된답니다. 화장기 없는 ‘쌩얼’이 유행이라니 어디 두고 보면 알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감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속의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증거가 되고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가 억지로 자기를 증거하려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가 아닌 내 자신을 보이려니 얼마나 고달픕니까? 내면에 풍성함을 가진 사람들은 짙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자신감이 넘칩니다. 내면이 풍성한데 외모가 그리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근래에 웬 ‘된장녀’가 갑자기 유행합니까? ‘된장녀’는 미니스커트는 기본이랍니다. 명품 핸드백에 외제 커피를 마시고, 전공 서적을 옆에 끼고 다니는 여성을 말합니다. ‘된장녀’는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몰지각한 여성을 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의 품격이 고상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명품을 걸치고 들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명품이 되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루이 뷔똥’ 가방을 들고, ‘빈센트앤코’ 시계를 차도 된장 냄새밖에 더 나겠습니까? ‘된장녀’ 얘기가 나오니까 요즘은 ‘고추장남’ 이야기도 있습디다. ‘된장녀’의 짝꿍인가 봐요. 지난 번 가짜 명품 시계 소동이 났을 때 보니 하나에 1억씩 하는 가짜 명품 시계를 산 연예인들 가운데는 드라마 출연료가 회당 2천만 원이 넘는 연예인도 있었지만 수재의연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답니다. 겉에 아무리 명품을 걸치고 다닌다고 해도 속에 선한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면 명품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최고의 명품인데 무슨 다른 명품이 필요하겠습니까?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 중의 하나가 어디엔가 속하고 싶은 욕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면 소속감 그 자체가 안정되게 하고 자랑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알고 보면 소속 자체가 아니라 어디에 소속되어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 우리의 욕구가 되고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이 우리는 이미 가장 중요한 욕구를 다 채운 것입니다. 이 세상은 5만 명에 의하여 바뀝니다. 다윗은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 하는 자 오만 명을 택하였습니다(대상12:33). 이 세상에는 5만 명까지 필요 없습니다. 7천명만 있어도 바뀝니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놓으셨습니다(왕상19:18). 이 세상은 7천명이 아니라도 300명에 의해 바뀔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가지고 세상을 바꾸었습니다(삿7:7). 700명이 아니라 120명에 의해 세상은 완전히 바뀔 수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이 이 세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행2:1). 세상은 50명에 의해 바뀔 수도 있습니다. 1917년 로버트 스피어는 회중 가운데 거룩한 기도의 장소를 가지고 하나님께 체험적인 기도의 열정에 사로잡힌 자 50명만 있으면 교회의 역사는 바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10명만 있어도 바뀝니다. 드와이트 무디는 만일 10명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헌신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2명에 의하여 바뀝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면 들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8:19-20). 하나님께 속한 한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바랍니다. 결론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하르모디오스라는 가문이 있었습니다. 이 가문은 오랜 동안 존경을 받는 집안이었습니다. 한 번은 하르모디오스 가문의 후손이 정적이었던 이피크라테스에게 천한 구두쟁이 아들 주제에 뭐하느냐고 모욕을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피크라테스는 그 모욕에 대하여 “당신과 나의 차이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내 가문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당신의 가문은 당신에게서 끝난다는 것이다”가고 대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가문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가문이 잘 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베푼 선이 뭇 사람에게서 증거가 되고 인정받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받으시고, 하나님의 선이 인정받고, 하나님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 선한 사람을 쫓아내는 디오드레베가 아닌 선한 삶이 인정을 받는 데메드리오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들 /시116:1-19/ 이한배 목사 2018-01-11 00:09:46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서 론 잠언에 보면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다”(잠30:24)고 했읍니다. 그중의 하나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이라고 했읍니다. 토끼는 매우 약하지만 그러나 바위틈에 집을 지면 사자나 호랑이가 와도 두렵지 않읍니다. 왜냐하면 바위가 그를 지켜주기 때문입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들 /시116:1-19/ 이한배 목사 2018-01-11 00:09:46 read : 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I. 서 론 잠언에 보면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다”(잠30:24)고 했읍니다. 그중의 하나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이라고 했읍니다. 토끼는 매우 약하지만 그러나 바위틈에 집을 지면 사자나 호랑이가 와도 두렵지 않읍니다. 왜냐하면 바위가 그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동물이라 아니할 수 없읍니다. 그런데 이런 지혜자도 있읍니다. 우리는 종종 잘 어울리지않는 부부를 볼 때가 있읍니다. 남편은 인물도 훌륭하고 사회적인 지위도 높은데, 아내는 외모적으로 볼 때 도저히 그런 남편의 아내가 될 수 없는 것 같은데 아내가 되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분명히 그런 남편의 아내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아내가 되었읍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렇게 부족한 여자가 저렇게 훌륭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읍니다. 그중의 하나는 그 여인이 그 남자에게 너무너무 사랑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 남자를 희생적으로 사랑했읍니다. 그녀가 그 남자를 희생적으로 사랑할 때는 주위에서 다 바보라고 했읍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어 그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 되고나니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여인이 되었읍니다. 이런 여인이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자기보다 더 능력있고 훌륭한 남자를 사랑하여 그를 남편으로 맞이하는 여인은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그런데 (잠8:17)에 매우 단순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진리의 말씀이 하나있읍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물론 지혜를 의인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귀영화을 같이 누리게 됩니다. 훌륭한 남편이 아내가 되면 그 남편의 부귀영화를 같이 누리게 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잠8:17-21)을 보면 하나님은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고간에 채우게 하려함이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부귀와 영와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 오늘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살펴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본 론 잘 알려진 작가 미상의 영어 찬송가 중에 이런 찬송가가 있읍니다. I love Thee, I love Thee, I love Thee, my Lord; I love Thee, my savior, I love Thee, my God; I love Thee, I love Thee, and that Thou dost know; But how much I love Thee my actions will show. 이 찬송가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나의 행동들로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로만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깨달은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살펴보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받은 시편기자는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면서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라고 다짐을 했읍니다. 이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 1)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뒤에서 행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못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 보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2)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행하겠다고 다짐하는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읍니다. 사랑하는 하는 자 앞에서 사랑하는 자를 슬프게 하고, 기분 나쁘게할 자가 어디 있겠읍니까 ?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 1) 악의 유혹을 이기게 됩니다. 악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을 합니다. 할수만 있으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유혹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까지도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유혹을 받았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악이 우리를 유혹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우리는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읍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금 보고 계시는데, 악의 유혹에 빠질 자가 있겠읍니까 ?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자들은 악의 유혹을 이길 수 있읍니다. 2) 힘들 때에도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는 힘든 일을 만날 때가 있읍니다. 그리고 힘들 때에는 꾀를 부리고도 싶읍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읍니다. 우리가 아무리 피곤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는데 힘들다고 꾀를 부릴 수가 있겠읍니까 ? 나에게 그렇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앞에서 어찌 꾀를 부릴 수 있겠읍니까 ?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면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우리는 힘들 때에도 최선을 다할 수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vs. 13, 17)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받은 모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고 했읍니다. 그러면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그것은 구원의 잔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동물로 드릴 때는 술을 같이 제물로 드렸읍니다. 이것이 바로 전제(奠祭)입니다.(출29:40; 레23:37; 신32:38; 겔20:28)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드릴 때 술을 드리는 것은 다 이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예배드리는 모형을 가르쳐주실 때 예수님의 몸과 함께 포도주를 주심으로 예배드릴 때는 제물과 술이 함께함을 가르쳐주셨읍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의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 1)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요4:24)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배에 대하여 대화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 말씀에는 예배에 관한 귀한 진리들이 들어있읍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려면 먼저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셨읍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요한복음의 3대 확언입니다. ① 하나님은 빛이시다. ②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③ 하나님은 영이시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3대 선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영이시란 것은 무슨 뜻인가요 ? 우리가 영을 생각할 때 크게 두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① 육과 적대 관계 있는 영(사31:3; 롬8:7) 이것은 히브리적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② 물질과 적대 관계 있는 영 이것은 희랍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영은 비물질적인 것이란 것입니다. 영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나, 예수님이 우리가 예배드리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영이라고 하신 것은 이런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뜻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올 필요도 없고, 또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필요도 없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육도 아니며, 물질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① 우리의 본성의 최고의 부분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최고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르야 합니다. ② 예배는 하나님의 실제에 근거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보이신다고 안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것을 느끼며 의식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안보인다고 하나님이 안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예배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2) 우리의 몸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롬12:1)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란 것입니다. 제물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제물은 다 죽여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산 것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가 없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내가 죽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는 나의 생각도 판단도 없읍니다. 온전히 나의 모든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제물은 다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은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다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 내 자신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으면 예배가 끝난 후에도 내 자신은 다시 살아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가 끝난면 다시 자아가 살아나는 자들이 있읍니다. 그것은 진정한 제물로 자기 자신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죽은척하고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읍니다. 예배는 예배를 드릴 때 내 자신을 죽여서 드릴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도 내 자신은 다시 살아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기뻐받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사랑하십니다. 3)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했읍니다. 감사제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예배를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격이 감사하는 성격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하게 하는 예배입니다. 3.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vs. 14, 18)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상기하면서 두번이나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라고 노래했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갚겠다고 했읍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갚겠다는 것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갚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약속을 하셨으며, 지금도 많은 약속을 하고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약속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고, 관계가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하는데, 우리는 약속하지 않으면 관계가 깊어질 수가없읍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꼭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민23:19)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人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말씀하셨읍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꼭 지켜야 합니다. (신23:21)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성산에 거할 자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자”(시15:4)고 했읍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것은 우리에게 손해가 나고, 내게 해롭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갚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서원한 것이 해로울지라도 갚는 자를 사랑하시며 그에게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엘가나라는 사람에게 두 아내가 있었읍니다. 첫째 부인은 한나고 둘째 부인은 브닌나였읍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자식을 낳았는데,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했읍니다. 그래서 작은 부인 브닌나에게 오랜동안 많은 약올림을 당한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합니다. “만약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1) 그런데 하나님은 주의 종 엘리 제사장을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그녀에게 아들 사무엘을 주셨읍니다. 그런데 한나는 이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 사무엘을 젖을 떼었을 때에 실로의 엘리 제사장을 찾아가서 평생을 하나님께 드렸읍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서원을 하나님께 갚자 하나님은 한나에게 3남 2녀를 더주셨읍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훌륭한 영적이고 정치적인 지도자로 삼아주셨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해로울지라도 갚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인도에서 전해는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배를 타고 해외 여행을 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큰 풍랑을 만났다. 겁이난 이 사람은 자기들의 신에게 ‘만약 살아서 돌아게만 해 주시면, 살진 소 10마리를 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다. 그후 폭풍이 지나가고, 바다는 조용해 졌다. 그 사람은 항구에 내리기 전에 그가 한 서원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신은 5마리만 드려도 좋아하실 것 같았다. 그래서 5마리를 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그는 다시 한번 그가 서원한 것을 생각했다. 그랬더니 5마리도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안전하게 집에까지만 돌아가면 2마리의 황소를 제물로 드리겠다고 생각을 했다 무사히 집에 돌아온 그 사람은 그가 한 맹세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그냥 자고 내일 아침에 살진 황소 한마리를 잡아서 자기가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드리며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제물을 드리기도 했다. 그런데 밤에 자다가 생각하니, 한 마리도 너무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황소 대신에 염소새끼를 드리기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아내에게 염소 한마리를 자기들의 신에게 제물로 드리겠다고 하자, 아내가 벌쩍 뛰면 반대를 했다. 지금 그 염소가 하루에 1리터씩 우유를 내는데, 어떻게 그런 염소를 제물로 드릴 수 있게느냐면 반대를 했다. 그래서 그 남자는 하는 수 없이 땅콩을 한 바께스 갖다가 드리기도 했다. 그리고는 짐승보다는 그 열매를 자기들의 신이 더좋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땅콩을 한 바께스 담아서 그들의 성전으로 가지고 갔다. 그런데 가다가 보니, 그가 땅콩을 먹어본지가 꽤 오래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땅콩을 하나 까먹었다. 그랬더니 맞이 좋았다. 그는 성전에 가는 동안 내내 그 땅콩을 까먹었다. 성전에 가서 제물을 드리려고 보니, 땅콩껍데기만 남았다. 인도 남쪽 지방에 사는 한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 교회에는 교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교인이 장티푸스에 걸려서 고열로 죽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당시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150년이나 된 낡은 교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교인들이 너무 많아서 장소가 너무 비좁았다. 교인들은 점점 늘어나고, 수중에는 겨우 2,000 라이스(Rs.)밖에 없었다. 그때 그 장티푸스로 죽어가던 교인이 ‘만약 자기를 하나님이 살려 주시기만 하면 큰 교회를 짓겠읍니다’라고 서원을 했다. 그후 죽어가던 자가 살아 났다. 그런데 사단이 그를 유혹하여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하게 했다. 큰 교회를 지려면 많은 돈이 든다고 유혹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서원을 지켰다. 그는 큰 교회를 짓고는 그 건물 이름을 “베다니”(Bethany) 즉 “가난한 자들의 집”이라고 졌다. 그 교회는 그의 서원을 갚은 것일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가면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 성도는 그의 서원을 갚은 후에 더욱더 건강해졌고, 그의 사업은 더욱더 번창을 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겠읍니까 ?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 하나님을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지혜롭고 복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