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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 창8:15-22
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 창8:15-22 오랜 동안의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은 생물들과 함께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물론 모두 주님의 명령 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노아에게 예전에 사람을 만들고 주셨던(창1:22) 약속을 주십니다. (17절) \\\"…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십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번제의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땅이 사시사철이 있고 쉬지 않는 주님의 돌보심 속에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후 9장에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신앙인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에 들어간 노아(창7:16)는 나올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1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씀이 바로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오게 한 말씀입니다. 그토록 지루하고 힘든 방주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노아의 애타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명령하시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노아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노아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만 움직이는 걸 볼 때 결코 주인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맘대로가 아니라 주님 맘대로 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배 오른편 깊은데 그물을 내리라고 하실 때 순종한 것과 같은 장면입니다.(요21장) 홍수 이후 1년이 훨씬 지난 세월을 방주에서 생활한 노아는 방주에 대하여는 이미 통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명령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을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두 나오게 하시곤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즉, 방주의 문은 다는 것도 여는 것도 주님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게 이루어집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인간은 구원에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 가장 좋은 신앙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시길 바랍니다. 목적을 따라 일하시는 질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명령은 질서가 있습니다. (창8: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나오는 순서입니다. 이것은 (창6:18)이나 (창7:7)과 순서가 다릅니다. 노아, 아들들, 아내, 자부들 순서가 어느새 노아, 그의 아내, 아들들, 자부들 순서로 바뀐 것입니다. 이 이유에 대하여 방주로 들어갈 때는 \\\'죽음의 시기\\\'였기 때문이고, 나올 때는 새로운 생장을 위한 부부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라도 해석합니다. 방주로 들어갈 때는 다만 홍수의 대환란을 피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부관계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방주에서 나올 때는 숭고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8:17)의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게 믿음입니다. 노아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을 때 이해돼서 순종했습니까?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실 때 이해돼서 따랐습니까? 이해돼지 않아도 따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어서 노아로 시작하여 자부들로 그 순서를 말씀하십니다. 아들들부터나 그의 아내부터, 혹은 그 자부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시되, 질서 있게 일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감사의 제단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노아가 어떤 신앙인인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좋은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그 시작과 끝을 보면 압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시작은 잘했다가 끝이 안 좋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신앙적으로 시작합니다. 마칠 때도 신앙적으로 마칩니다. 오늘 노아가 그것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그간 힘들고 지겨운 홍수 속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걸 깨닫고 구원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담 때부터 단을 쌓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는 있어왔습니다.(창3:21) [번제] (히, 올라)는 \\\'올라간다\\\'는 뜻을 가지며 희생제물을 불태워 드림으로 향기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흠향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이건 당연한 제사의 원리입니다. 더러운 것이나 흠 있는 것은 아예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제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아가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기에 기뻐 받으셨습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제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기쁘게 흠향하신 하나님은 그 결과로 노아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창8:21-22)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아담 범죄 이후 원래가 악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다시는 인간으로 인하여 멸망을 만들지 않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죗값을 치르고자 하신다면 남아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이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게 인간의 어떤 행동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해될 수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 사항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만 가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발생한 홍수 사건은 자연질서의 파괴와 모든 생태계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파괴된 세계를 향하여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창8:21-22)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런 약속은 곧 성취되었습니다. (시74:16-17)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사시사철이나 낮과 밤이 쉬지 않고 운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입니다. 변함 없는 주님의 섭리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은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9장에 더욱 상세히 이어집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과 8장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 인간의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공의 : 하나님의 사랑, 노아의 가족과 선택받은 짐승의 구원 : 새 생명 전체의 구원,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예표, 하나님의 보호 강조 : 구원받은 자의 삶\\\"이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순종하여 믿음을 보이는 성도들이 됩시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노아가 감사의 제단을 쌓아 귀한 약속들을 받듯이, 여러분도 감사를 생활화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 창8:15-22/ 2002-03-17
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 창8:15-22 오랜 동안의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은 생물들과 함께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물론 모두 주님의 명령 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노아에게 예전에 사람을 만들고 주셨던(창1:22) 약속을 주십니다. (17절) \"…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십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번제의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땅이 사시사철이 있고 쉬지 않는 주님의 돌보심 속에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후 9장에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신앙인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에 들어간 노아(창7:16)는 나올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1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씀이 바로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오게 한 말씀입니다. 그토록 지루하고 힘든 방주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노아의 애타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명령하시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노아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노아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만 움직이는 걸 볼 때 결코 주인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맘대로가 아니라 주님 맘대로 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배 오른편 깊은데 그물을 내리라고 하실 때 순종한 것과 같은 장면입니다.(요21장) 홍수 이후 1년이 훨씬 지난 세월을 방주에서 생활한 노아는 방주에 대하여는 이미 통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명령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을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두 나오게 하시곤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즉, 방주의 문은 다는 것도 여는 것도 주님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게 이루어집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인간은 구원에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 가장 좋은 신앙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시길 바랍니다. 목적을 따라 일하시는 질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명령은 질서가 있습니다. (창8: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나오는 순서입니다. 이것은 (창6:18)이나 (창7:7)과 순서가 다릅니다. 노아, 아들들, 아내, 자부들 순서가 어느새 노아, 그의 아내, 아들들, 자부들 순서로 바뀐 것입니다. 이 이유에 대하여 방주로 들어갈 때는 \'죽음의 시기\'였기 때문이고, 나올 때는 새로운 생장을 위한 부부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라도 해석합니다. 방주로 들어갈 때는 다만 홍수의 대환란을 피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부관계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방주에서 나올 때는 숭고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8:17)의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게 믿음입니다. 노아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을 때 이해돼서 순종했습니까?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실 때 이해돼서 따랐습니까? 이해돼지 않아도 따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어서 노아로 시작하여 자부들로 그 순서를 말씀하십니다. 아들들부터나 그의 아내부터, 혹은 그 자부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시되, 질서 있게 일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감사의 제단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노아가 어떤 신앙인인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좋은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그 시작과 끝을 보면 압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시작은 잘했다가 끝이 안 좋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신앙적으로 시작합니다. 마칠 때도 신앙적으로 마칩니다. 오늘 노아가 그것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그간 힘들고 지겨운 홍수 속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걸 깨닫고 구원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담 때부터 단을 쌓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는 있어왔습니다.(창3:21) [번제] (히, 올라)는 \'올라간다\'는 뜻을 가지며 희생제물을 불태워 드림으로 향기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흠향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이건 당연한 제사의 원리입니다. 더러운 것이나 흠 있는 것은 아예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제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아가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기에 기뻐 받으셨습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제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기쁘게 흠향하신 하나님은 그 결과로 노아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창8:21-22)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아담 범죄 이후 원래가 악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다시는 인간으로 인하여 멸망을 만들지 않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죗값을 치르고자 하신다면 남아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이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게 인간의 어떤 행동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해될 수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 사항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만 가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발생한 홍수 사건은 자연질서의 파괴와 모든 생태계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파괴된 세계를 향하여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창8:21-22)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런 약속은 곧 성취되었습니다. (시74:16-17)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사시사철이나 낮과 밤이 쉬지 않고 운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입니다. 변함 없는 주님의 섭리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은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9장에 더욱 상세히 이어집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과 8장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 인간의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공의 : 하나님의 사랑, 노아의 가족과 선택받은 짐승의 구원 : 새 생명 전체의 구원,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예표, 하나님의 보호 강조 : 구원받은 자의 삶\"이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순종하여 믿음을 보이는 성도들이 됩시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노아가 감사의 제단을 쌓아 귀한 약속들을 받듯이, 여러분도 감사를 생활화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창8:15-22
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창8:15-22 2003-05-21 14:04:51 read : 335 오랜 동안의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은 생물들과 함께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물론 모두 주님의 명령 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노아에게 예전에 사람을 만들고 주셨던(창1:22) 약속을 주십니다. (17절) "…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십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번제의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땅이 사시사철이 있고 쉬지 않는 주님의 돌보심 속에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후 9장에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신앙인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에 들어간 노아(창7:16)는 나올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1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씀이 바로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오게 한 말씀입니다. 그토록 지루하고 힘든 방주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노아의 애타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명령하시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노아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노아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만 움직이는 걸 볼 때 결코 주인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맘대로가 아니라 주님 맘대로 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배 오른편 깊은데 그물을 내리라고 하실 때 순종한 것과 같은 장면입니다.(요21장) 홍수 이후 1년이 훨씬 지난 세월을 방주에서 생활한 노아는 방주에 대하여는 이미 통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명령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을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두 나오게 하시곤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즉, 방주의 문은 다는 것도 여는 것도 주님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게 이루어집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인간은 구원에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 가장 좋은 신앙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시길 바랍니다. 목적을 따라 일하시는 질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명령은 질서가 있습니다. (창8: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나오는 순서입니다. 이것은 (창6:18)이나 (창7:7)과 순서가 다릅니다. 노아, 아들들, 아내, 자부들 순서가 어느새 노아, 그의 아내, 아들들, 자부들 순서로 바뀐 것입니다. 이 이유에 대하여 방주로 들어갈 때는 '죽음의 시기'였기 때문이고, 나올 때는 새로운 생장을 위한 부부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라도 해석합니다. 방주로 들어갈 때는 다만 홍수의 대환란을 피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부관계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방주에서 나올 때는 숭고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8:17)의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게 믿음입니다. 노아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을 때 이해돼서 순종했습니까?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실 때 이해돼서 따랐습니까? 이해돼지 않아도 따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어서 노아로 시작하여 자부들로 그 순서를 말씀하십니다. 아들들부터나 그의 아내부터, 혹은 그 자부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시되, 질서 있게 일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감사의 제단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노아가 어떤 신앙인인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좋은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그 시작과 끝을 보면 압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시작은 잘했다가 끝이 안 좋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신앙적으로 시작합니다. 마칠 때도 신앙적으로 마칩니다. 오늘 노아가 그것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그간 힘들고 지겨운 홍수 속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걸 깨닫고 구원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담 때부터 단을 쌓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는 있어왔습니다.(창3:21) [번제] (히, 올라)는 '올라간다'는 뜻을 가지며 희생제물을 불태워 드림으로 향기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흠향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이건 당연한 제사의 원리입니다. 더러운 것이나 흠 있는 것은 아예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제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아가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기에 기뻐 받으셨습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제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기쁘게 흠향하신 하나님은 그 결과로 노아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창8:21-22)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아담 범죄 이후 원래가 악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다시는 인간으로 인하여 멸망을 만들지 않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죗값을 치르고자 하신다면 남아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이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게 인간의 어떤 행동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해될 수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 사항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만 가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발생한 홍수 사건은 자연질서의 파괴와 모든 생태계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파괴된 세계를 향하여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창8:21-22)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런 약속은 곧 성취되었습니다. (시74:16-17)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사시사철이나 낮과 밤이 쉬지 않고 운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입니다. 변함 없는 주님의 섭리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은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9장에 더욱 상세히 이어집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과 8장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 인간의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공의 : 하나님의 사랑, 노아의 가족과 선택받은 짐승의 구원 : 새 생명 전체의 구원,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예표, 하나님의 보호 강조 : 구원받은 자의 삶"이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순종하여 믿음을 보이는 성도들이 됩시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노아가 감사의 제단을 쌓아 귀한 약속들을 받듯이, 여러분도 감사를 생활화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창8:15-22
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창8:15-22 2003-07-19 17:28:00 read : 65 오랜 동안의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은 생물들과 함께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물론 모두 주님의 명령 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노아에게 예전에 사람을 만들고 주셨던(창1:22) 약속을 주십니다. (17절) "…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십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번제의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땅이 사시사철이 있고 쉬지 않는 주님의 돌보심 속에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후 9장에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신앙인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에 들어간 노아(창7:16)는 나올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1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씀이 바로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오게 한 말씀입니다. 그토록 지루하고 힘든 방주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노아의 애타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명령하시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노아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노아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만 움직이는 걸 볼 때 결코 주인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맘대로가 아니라 주님 맘대로 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배 오른편 깊은데 그물을 내리라고 하실 때 순종한 것과 같은 장면입니다.(요21장) 홍수 이후 1년이 훨씬 지난 세월을 방주에서 생활한 노아는 방주에 대하여는 이미 통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명령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을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두 나오게 하시곤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즉, 방주의 문은 다는 것도 여는 것도 주님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게 이루어집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인간은 구원에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 가장 좋은 신앙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시길 바랍니다. 목적을 따라 일하시는 질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명령은 질서가 있습니다. (창8: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나오는 순서입니다. 이것은 (창6:18)이나 (창7:7)과 순서가 다릅니다. 노아, 아들들, 아내, 자부들 순서가 어느새 노아, 그의 아내, 아들들, 자부들 순서로 바뀐 것입니다. 이 이유에 대하여 방주로 들어갈 때는 '죽음의 시기'였기 때문이고, 나올 때는 새로운 생장을 위한 부부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라도 해석합니다. 방주로 들어갈 때는 다만 홍수의 대환란을 피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부관계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방주에서 나올 때는 숭고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8:17)의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게 믿음입니다. 노아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을 때 이해돼서 순종했습니까?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실 때 이해돼서 따랐습니까? 이해돼지 않아도 따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어서 노아로 시작하여 자부들로 그 순서를 말씀하십니다. 아들들부터나 그의 아내부터, 혹은 그 자부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시되, 질서 있게 일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감사의 제단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노아가 어떤 신앙인인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좋은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그 시작과 끝을 보면 압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시작은 잘했다가 끝이 안 좋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신앙적으로 시작합니다. 마칠 때도 신앙적으로 마칩니다. 오늘 노아가 그것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그간 힘들고 지겨운 홍수 속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걸 깨닫고 구원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담 때부터 단을 쌓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는 있어왔습니다.(창3:21) [번제] (히, 올라)는 '올라간다'는 뜻을 가지며 희생제물을 불태워 드림으로 향기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흠향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이건 당연한 제사의 원리입니다. 더러운 것이나 흠 있는 것은 아예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제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아가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기에 기뻐 받으셨습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제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기쁘게 흠향하신 하나님은 그 결과로 노아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창8:21-22)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아담 범죄 이후 원래가 악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다시는 인간으로 인하여 멸망을 만들지 않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죗값을 치르고자 하신다면 남아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이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게 인간의 어떤 행동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해될 수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 사항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만 가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발생한 홍수 사건은 자연질서의 파괴와 모든 생태계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파괴된 세계를 향하여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창8:21-22)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런 약속은 곧 성취되었습니다. (시74:16-17)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사시사철이나 낮과 밤이 쉬지 않고 운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입니다. 변함 없는 주님의 섭리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은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9장에 더욱 상세히 이어집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과 8장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 인간의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공의 : 하나님의 사랑, 노아의 가족과 선택받은 짐승의 구원 : 새 생명 전체의 구원,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예표, 하나님의 보호 강조 : 구원받은 자의 삶"이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순종하여 믿음을 보이는 성도들이 됩시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노아가 감사의 제단을 쌓아 귀한 약속들을 받듯이, 여러분도 감사를 생활화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창8:15-22
감사의 단을 쌓은 노아/창8:15-22 2011-07-15 20:25:08 read : 3 오랜 동안의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은 생물들과 함께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물론 모두 주님의 명령 대로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노아에게 예전에 사람을 만들고 주셨던(창1:22) 약속을 주십니다. (17절) "…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십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번제의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땅이 사시사철이 있고 쉬지 않는 주님의 돌보심 속에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후 9장에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신앙인입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방주에 들어간 노아(창7:16)는 나올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1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라는 말씀이 바로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오게 한 말씀입니다. 그토록 지루하고 힘든 방주 생활을 청산하는 것이 노아의 애타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명령하시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노아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노아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만 움직이는 걸 볼 때 결코 주인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경험과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맘대로가 아니라 주님 맘대로 이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배 오른편 깊은데 그물을 내리라고 하실 때 순종한 것과 같은 장면입니다.(요21장) 홍수 이후 1년이 훨씬 지난 세월을 방주에서 생활한 노아는 방주에 대하여는 이미 통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명령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하나님은 노아와 가족들, 그리고 짐승들을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두 나오게 하시곤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즉, 방주의 문은 다는 것도 여는 것도 주님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게 이루어집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인간은 구원에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 가장 좋은 신앙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처럼 순종하는 신앙인이시길 바랍니다. 목적을 따라 일하시는 질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명령은 질서가 있습니다. (창8: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나오는 순서입니다. 이것은 (창6:18)이나 (창7:7)과 순서가 다릅니다. 노아, 아들들, 아내, 자부들 순서가 어느새 노아, 그의 아내, 아들들, 자부들 순서로 바뀐 것입니다. 이 이유에 대하여 방주로 들어갈 때는 '죽음의 시기'였기 때문이고, 나올 때는 새로운 생장을 위한 부부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라도 해석합니다. 방주로 들어갈 때는 다만 홍수의 대환란을 피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부관계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방주에서 나올 때는 숭고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8:17)의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는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게 믿음입니다. 노아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을 때 이해돼서 순종했습니까?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 하실 때 이해돼서 따랐습니까? 이해돼지 않아도 따를 때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어서 노아로 시작하여 자부들로 그 순서를 말씀하십니다. 아들들부터나 그의 아내부터, 혹은 그 자부들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시되, 질서 있게 일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따라야 합니다. (고전14: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감사의 제단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노아가 어떤 신앙인인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좋은 신앙인인지 아닌지는 그 시작과 끝을 보면 압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시작은 잘했다가 끝이 안 좋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 반대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신앙적으로 시작합니다. 마칠 때도 신앙적으로 마칩니다. 오늘 노아가 그것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그간 힘들고 지겨운 홍수 속에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걸 깨닫고 구원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담 때부터 단을 쌓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는 있어왔습니다.(창3:21) [번제] (히, 올라)는 '올라간다'는 뜻을 가지며 희생제물을 불태워 드림으로 향기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흠향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이건 당연한 제사의 원리입니다. 더러운 것이나 흠 있는 것은 아예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제물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아가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기에 기뻐 받으셨습니다. 신앙인의 최고의 제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기쁘게 흠향하신 하나님은 그 결과로 노아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창8:21-22)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인간은 아담 범죄 이후 원래가 악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다시는 인간으로 인하여 멸망을 만들지 않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죗값을 치르고자 하신다면 남아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이 우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게 인간의 어떤 행동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해될 수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 사항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만 가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발생한 홍수 사건은 자연질서의 파괴와 모든 생태계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파괴된 세계를 향하여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창8:21-22)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런 약속은 곧 성취되었습니다. (시74:16-17)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사시사철이나 낮과 밤이 쉬지 않고 운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입니다. 변함 없는 주님의 섭리가 계속될 것이라는 약속은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9장에 더욱 상세히 이어집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장과 8장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 인간의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공의 : 하나님의 사랑, 노아의 가족과 선택받은 짐승의 구원 : 새 생명 전체의 구원,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예표, 하나님의 보호 강조 : 구원받은 자의 삶"이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순종하여 믿음을 보이는 성도들이 됩시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노아가 감사의 제단을 쌓아 귀한 약속들을 받듯이, 여러분도 감사를 생활화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과학과 노아의 홍수/ 과학과 성경/ 창6:1-, 창9:1-/ 2004-02-08
과학과 노아의 홍수/ 과학과 성경 창6:1-, 창9:1- 창세기 6-9장에는 노아의 홍수로 인해 지구상에 대변혁이 일어났다는 기 록이 나온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던 동물과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과 인 간이 온 땅을 휩쓴 큰 홍수로 멸망당했는데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 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창세기 6:12)는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징 벌이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그 거대한 홍수는 지구 전체를 뒤덮고 황폐화시켰다 고 한다. 그러나 혹자는 지구를 뒤덮은 홍수를 \'지역적인 홍수\'혹은 지구 전체의 \'고요한 홍수\'로 보기도 한다. 이는 지질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볼 때 지구 전체의 대홍수로 풀이하기 어려운점이 많기 때문에 빚어진 결 론 같다. 대부분의 성경 비판론자들은그 기록을 하나의 평범한 전설로 여 기고 있다. 노아의 홍수 -- 지구의 대변혁 그러나 만약 성경 자체를 편견없이 살펴보려면, 독자들은 전세계적인 홍 수를 기록하신 분에 대해 새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다음의성경 말씀을 상고해보자.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 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창세기 6:17)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모든 생물 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 (창세기 7:4)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창세기 7:19-20)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 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창세기 7:23)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아니할 것이라... (창세기 9:11) 성경에는 노아의 홍수가 지구의 역사에서 매우 큰 사건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는 적어도 30여 곳이나 기록되어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 큰 사건을 \'지역적인 홍수\' 혹은 \'고요한 홍수\'등으로 해석하려고 드는 신학자들이 있다면 학계나 종교계에서 그들의 업적이 아무 리 귀하다 해도 그들은 십중팔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있거나 혹은 알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려는 자이다. 노아의 홍수에 대한 성경 말씀은 창세기의 앞부분에 언급되어 있을뿐 아니라, 신/구약성경에서도 빈번히 보인다. (시편 29:1-11, 104:5-9, 이사 야 54:9, 마태복음 24:37-39, 누가복음 17:26-27, 히브리서11:7, 베드로전 서 3:19-20, 베드로후서 2:5, 3:3-5 등등)게다가 방주가 머무른 아라랏 산 을 포함한 그 가까이에 있는 모든산들이 물에 150일 동안이나 잠겨 있었 던 것(창세기 7:17-8:5)으로보아도, 이 홍수가 일정한 지역에서만 있었다 고 믿는 견해는 호소력이 없다. 노아의 방주는 다른 산봉우리들이 나타나 보이기 전에 높이가 5,100미터인 아라랏 산에 두달 반 동안이나 놓여 있었 다. 또 방주안에 있던 생물체들이 뭍으로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줄어 들기까지도 넉달 반이 더 걸렸다. 일년여 동안에 벌어졌던 이 사태를 상상 해 볼 때, 5,100미터 높이의 홍수가 지역적인 범람이라고 하는 것은오히려 상식에서 벗어난 추측이다. 만약 이것이 국지적인 홍수였다면 노아의 홍수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하 나의 어리석은 우화가 된다. 방주 안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나갈수 있도록 그렇게 세세히 오랫동안 준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가 침범하지 않을 근처 지역으로 옮겨가도록 기꺼이 경고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고는 결코 없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배를 건조하였으며, 명령에 따라동물 들과 새들을 불러모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만약 창세기의 그홍수가 단 순히 지역적인 것이었다면 이러한 홍수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말이 된다. 창세기에 대한 한 작가의 주석서 [The Genesis Record] (Baker, 1976)에는 성경적이고 과학적인 견지에서 창세기의 홍수를 파악하고, 그것이 전세계적인 대변혁이었음을 입증하는 100여 가지의 이유 가 나열되어 있다. 하물며 전세계적인\'조용한 홍수\'라는 표현은 전세계적인 조용한 폭발과 같이 그럴싸한표현이다. 그러나 그 용어 자체부터가 명백한 모순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 홍수가 전세계적이었다 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과학적인 견지, 특히 역사 지리학 및 고고학 분야에서 그 사실이 입증되고 있기때문이다. 성경 의 기록을 보면 노아의 홍수에 대한 물리적인 요인을두 가지로 보고 있다. 대기적(하늘의 창들이 열림) 요인과 지질학적(큰 깊음의 샘이 터짐)요인 이다. 이러한 대변혁으로 말미암아 두말할것도 없이 지층과 지표의 형상은 심하게 변형되었다. 그래서 오늘을살고있는 우리들이 대홍수 이전에 지구 에 발생했을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해서는 어떠한 확실한 근거를 갖고 지질 학적으로 분석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퇴적암이나 화석이 함유 되어 있는 지층을대홍수설로 다시 풀이하게 된다면 화석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은 취소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 화석들이 진화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면, 생명체가 진화되었다는 설도 무용지물이 된다. 결과적으로 또 어쩔 수 없이 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인종학적,언어 학적, 고고학적 및 지질학적인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나오는 전 세계적인 대홍수가 일어난 적이 없다고 고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독교 인들이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진화론을 주장하는 지성인들과 좋은 관계 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지성적인 신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지역적 홍수라든가 \'고요한 홍수\' 같은 이론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원받는 노아의 가정/ 창8:13-22
구원받는 노아의 가정 창8:13-22 노아의 가정은 특별한 축복을 받은 가정이다. 천하인간과 생물이 다 하나님의 물심판을 받았는데 노아와 그의 식구들과 방주에탄 모든 생물들만이 구원을 얻었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은 죽음과 파괴와, 멸망인 동시에 부활과 생명의 그림자요 구원의 그림자요 상징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120년간 방주를 지었으며 노아의 가정은 비오기 7일전에 방주에 들어갔다. 비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오기 시작하여 150일 동안 물이 땅을 덮었으며 방주는 7월17일에 아라랏산에 정착하게되었다. 노아가 601세 되던 해 1월1일에 방주의 뚜껑을 제쳤으며 그리고 방주에서 나왔으니 노아의 가정은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 1.방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1)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다 #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공사를 명하실 때의 죄악은 어떠했는가? 1)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합한 죄이다. 행6:1-2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아벨 계통의 후손인 셋의 계통으로 영에 속한 신령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상징한다 시73: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신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다. 사람의 딸들은 가인계에[속한 육체에 속한 후손들 즉 불신자들을 말한다. 이것은 엄청난 비극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우상)이 합할 수 없다, 즉 신앙과 불신앙이 결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노아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신앙자들과 혼합함으로 죄악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이 죄악의 세상과 구별시키고 세상을 멸하기 위하여 방주를 만들도록 명한 것이다. 2)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말았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끊어져버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다 육체만 남게되었다. 3)인간들은 항상 악을 도모하는 자들이 되었다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코자 방주를 예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백성을 구원코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으며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2)방주는 믿음으로 의인된 자의 구원의 상징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으며 그 때문에 방주는 노아의 믿음에 대한 구원의 상징으로 주셨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의 방주가 되심을 예표한 것이다 (3)방주는 하나님께서 지정한신 피난처이다 창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에 칠하라 방주---\\\"테바\\\"라고 하는데 하나님만이 운행하는 배를 말한다. 방주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피난처이다. 창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언약을 세울지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방주는 절대 안전한 하나밖에 없는 피난처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만이 절대 안전보장임을 말한다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노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이 방주에 들어간 것이다. 노아의 믿음의 의를 보시고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문을 닫으셨다. 방주로 들어간 노아는 생명의 보호를 받았다 방주 안에는 자유가 없었으나 참된 자유가 있는 것이니 그것은 영원한 자유인 것이며 영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리는 축복이다. 2.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왔다. (1)노아는 방주에서 나오도록 다시 명령을 받았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가 임하도록 56일 동안이나 기다렸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야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왔다. 창 8:15 - 16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를 건조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갔으며 방주에서 나오라는 명령을 기다렸다가 나왔다 여기서 노아의 철저한 신앙과 인내를 배울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를 받았다. 노아는 스스로 방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노아는 절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한 것이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다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면서 끝까지 인내해야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세하시고 세밀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이 떨어지지 않고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서 기억하시고 보호하신다. 사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을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리를 항상 기억하고 계시지만 노아의 경우와 같이 참고 기다리라는 교훈을 주시는 때가 많은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는 날은 전혀 비밀로 되어있었다. 고난 중에 신앙으로 견디는 성도에게는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날이 오는 것이다. 시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우리는 철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행동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세시고 그 걸음 인도하신다. (2)노아와 식구들이 방주에서 나옴으로서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방주 밖의 사람들은 다 죽었다. 땅의 육체를 다 죽였다고 하였으며 코로 숨쉬는 모든 것을 다 죽였으며 모든 생물이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니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결국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리라 롯의 가족들은 소돔 성이 멸망을 당할 때 다 떠나지 못하였다(사위들) 그러나 노아의 가족 8식구는 구원을 받고 함께 동행하였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동고 동락하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가 믿는 예수님을 안 믿겠다면 아내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겠는가?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온 가족이 같은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온 가족이 에수님을 믿고 함께 구원을 받고 하나님만 섬기면서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하는 것은 최고, 최대, 최상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들의 가정의 식구들이 함께 구원받고 다함께 예배드리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란다. 노아의 가정처럼 의인의 가정으로 성별 되게 살다가 모두 구원받으시기 바란다. (3)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느 편에 서겠는가?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가 함께 공존한다. 지금은 무엇이 의인지 무엇이 불의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는 분별이 되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 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데려가는 자와 버려두는자, 불충한자와 충성한자는 심판 때에는 엄격하게 구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판결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고 주님의 보좌 앞인 것을 알아야한다. 물심판 때에 노아의 가정이 의인의 가정이요, 구원받은 가정인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우리의 가정도 의인의 가정으로 들어날 재림 심판 때를 생각하고 온 가족들이 믿음으로 살기 바란다. 3.노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다. (1)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다. 20 -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번제는 제물을 불로 태워서 향기를 드리는 제사이며, 제일 오래된 제사인데 온전한 희생의 제사이니 헌신의 제사이다.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먼저 드린 제사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아들 이삭도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복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우니 먼저 예배를 철저하게 드리자. 모든 예배는 똑같이 중요한 것이며 온 가족이 함께 드려야 한다. \\\"너는 기도해라, 나는 돈벌테니 하고 아내에게만 대표로 예배하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사를 드린 것이다. 20-모든 정결한 짐승, 정결한 새를 취하여 정성스럽게 하나님을 위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노아가 드린 감사와 헌신의 제사를 받으셨다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라고 하였는데 여기 그 향기는 만족의 향기,즐거움의 향기이다 흠향하시다--노아가 드린 번제의 향기를 숨을 들여마신 것처럼 믿음과 정성으로 먼저 드린 노아의 제사와 제물을 하나님이 열납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이 열납하시도록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출20:23 -24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하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으로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면 용서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1)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였다(21절) 2) 전과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셨다 3) 땅이 지속되는 동안은 계절과 주야가 계속될 것이라는 언약을 하셨다 이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사는 길이요 복받는 길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이제는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하기를 축원한다 그러기에 불신가족을 위하여 끈임 없는 기도가 있어야한다. 온가족이 구원받고 형통한 복과 승리하는 복을 새해에는 받아야 하겠다.
구원받는 노아의 가정/ 창8:13-22/ 2002-03-17
구원받는 노아의 가정 창8:13-22 노아의 가정은 특별한 축복을 받은 가정이다. 천하인간과 생물이 다 하나님의 물심판을 받았는데 노아와 그의 식구들과 방주에탄 모든 생물들만이 구원을 얻었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은 죽음과 파괴와, 멸망인 동시에 부활과 생명의 그림자요 구원의 그림자요 상징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120년간 방주를 지었으며 노아의 가정은 비오기 7일전에 방주에 들어갔다. 비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오기 시작하여 150일 동안 물이 땅을 덮었으며 방주는 7월17일에 아라랏산에 정착하게되었다. 노아가 601세 되던 해 1월1일에 방주의 뚜껑을 제쳤으며 그리고 방주에서 나왔으니 노아의 가정은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 1.방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1)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다 #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공사를 명하실 때의 죄악은 어떠했는가? 1)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합한 죄이다. 행6:1-2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아벨 계통의 후손인 셋의 계통으로 영에 속한 신령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상징한다 시73: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신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다. 사람의 딸들은 가인계에[속한 육체에 속한 후손들 즉 불신자들을 말한다. 이것은 엄청난 비극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우상)이 합할 수 없다, 즉 신앙과 불신앙이 결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노아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신앙자들과 혼합함으로 죄악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이 죄악의 세상과 구별시키고 세상을 멸하기 위하여 방주를 만들도록 명한 것이다. 2)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말았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끊어져버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다 육체만 남게되었다. 3)인간들은 항상 악을 도모하는 자들이 되었다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코자 방주를 예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백성을 구원코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으며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2)방주는 믿음으로 의인된 자의 구원의 상징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으며 그 때문에 방주는 노아의 믿음에 대한 구원의 상징으로 주셨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의 방주가 되심을 예표한 것이다 (3)방주는 하나님께서 지정한신 피난처이다 창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에 칠하라 방주---\\\\\\\\\\\\\\\"테바\\\\\\\\\\\\\\\"라고 하는데 하나님만이 운행하는 배를 말한다. 방주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피난처이다. 창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언약을 세울지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방주는 절대 안전한 하나밖에 없는 피난처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만이 절대 안전보장임을 말한다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노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이 방주에 들어간 것이다. 노아의 믿음의 의를 보시고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문을 닫으셨다. 방주로 들어간 노아는 생명의 보호를 받았다 방주 안에는 자유가 없었으나 참된 자유가 있는 것이니 그것은 영원한 자유인 것이며 영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리는 축복이다. 2.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왔다. (1)노아는 방주에서 나오도록 다시 명령을 받았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가 임하도록 56일 동안이나 기다렸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야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왔다. 창 8:15 - 16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를 건조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갔으며 방주에서 나오라는 명령을 기다렸다가 나왔다 여기서 노아의 철저한 신앙과 인내를 배울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를 받았다. 노아는 스스로 방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노아는 절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한 것이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다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면서 끝까지 인내해야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세하시고 세밀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이 떨어지지 않고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서 기억하시고 보호하신다. 사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을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리를 항상 기억하고 계시지만 노아의 경우와 같이 참고 기다리라는 교훈을 주시는 때가 많은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는 날은 전혀 비밀로 되어있었다. 고난 중에 신앙으로 견디는 성도에게는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날이 오는 것이다. 시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우리는 철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행동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세시고 그 걸음 인도하신다. (2)노아와 식구들이 방주에서 나옴으로서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방주 밖의 사람들은 다 죽었다. 땅의 육체를 다 죽였다고 하였으며 코로 숨쉬는 모든 것을 다 죽였으며 모든 생물이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니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결국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리라 롯의 가족들은 소돔 성이 멸망을 당할 때 다 떠나지 못하였다(사위들) 그러나 노아의 가족 8식구는 구원을 받고 함께 동행하였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동고 동락하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가 믿는 예수님을 안 믿겠다면 아내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겠는가?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온 가족이 같은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온 가족이 에수님을 믿고 함께 구원을 받고 하나님만 섬기면서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하는 것은 최고, 최대, 최상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들의 가정의 식구들이 함께 구원받고 다함께 예배드리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란다. 노아의 가정처럼 의인의 가정으로 성별 되게 살다가 모두 구원받으시기 바란다. (3)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느 편에 서겠는가?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가 함께 공존한다. 지금은 무엇이 의인지 무엇이 불의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는 분별이 되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 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데려가는 자와 버려두는자, 불충한자와 충성한자는 심판 때에는 엄격하게 구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판결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고 주님의 보좌 앞인 것을 알아야한다. 물심판 때에 노아의 가정이 의인의 가정이요, 구원받은 가정인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우리의 가정도 의인의 가정으로 들어날 재림 심판 때를 생각하고 온 가족들이 믿음으로 살기 바란다. 3.노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다. (1)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다. 20 -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번제는 제물을 불로 태워서 향기를 드리는 제사이며, 제일 오래된 제사인데 온전한 희생의 제사이니 헌신의 제사이다.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먼저 드린 제사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아들 이삭도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복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우니 먼저 예배를 철저하게 드리자. 모든 예배는 똑같이 중요한 것이며 온 가족이 함께 드려야 한다. \\\\\\\\\\\\\\\"너는 기도해라, 나는 돈벌테니 하고 아내에게만 대표로 예배하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사를 드린 것이다. 20-모든 정결한 짐승, 정결한 새를 취하여 정성스럽게 하나님을 위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노아가 드린 감사와 헌신의 제사를 받으셨다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라고 하였는데 여기 그 향기는 만족의 향기,즐거움의 향기이다 흠향하시다--노아가 드린 번제의 향기를 숨을 들여마신 것처럼 믿음과 정성으로 먼저 드린 노아의 제사와 제물을 하나님이 열납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이 열납하시도록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출20:23 -24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하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으로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면 용서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1)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였다(21절) 2) 전과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셨다 3) 땅이 지속되는 동안은 계절과 주야가 계속될 것이라는 언약을 하셨다 이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사는 길이요 복받는 길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이제는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하기를 축원한다 그러기에 불신가족을 위하여 끈임 없는 기도가 있어야한다. 온가족이 구원받고 형통한 복과 승리하는 복을 새해에는 받아야 하겠다.
구원받는 노아의 가정/창8:13-22
구원받는 노아의 가정/창8:13-22 2003-07-19 16:05:27 read : 23 노아의 가정은 특별한 축복을 받은 가정이다. 천하인간과 생물이 다 하나님의 물심판을 받았는데 노아와 그의 식구들과 방주에탄 모든 생물들만이 구원을 얻었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은 죽음과 파괴와, 멸망인 동시에 부활과 생명의 그림자요 구원의 그림자요 상징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120년간 방주를 지었으며 노아의 가정은 비오기 7일전에 방주에 들어갔다. 비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오기 시작하여 150일 동안 물이 땅을 덮었으며 방주는 7월17일에 아라랏산에 정착하게되었다. 노아가 601세 되던 해 1월1일에 방주의 뚜껑을 제쳤으며 그리고 방주에서 나왔으니 노아의 가정은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 1.방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1)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다 #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공사를 명하실 때의 죄악은 어떠했는가? 1)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합한 죄이다. 행6:1-2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아벨 계통의 후손인 셋의 계통으로 영에 속한 신령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상징한다 시73: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신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다. 사람의 딸들은 가인계에[속한 육체에 속한 후손들 즉 불신자들을 말한다. 이것은 엄청난 비극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우상)이 합할 수 없다, 즉 신앙과 불신앙이 결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노아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신앙자들과 혼합함으로 죄악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이 죄악의 세상과 구별시키고 세상을 멸하기 위하여 방주를 만들도록 명한 것이다. 2)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말았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끊어져버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다 육체만 남게되었다. 3)인간들은 항상 악을 도모하는 자들이 되었다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코자 방주를 예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백성을 구원코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으며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2)방주는 믿음으로 의인된 자의 구원의 상징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으며 그 때문에 방주는 노아의 믿음에 대한 구원의 상징으로 주셨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의 방주가 되심을 예표한 것이다 (3)방주는 하나님께서 지정한신 피난처이다 창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에 칠하라 방주---"테바"라고 하는데 하나님만이 운행하는 배를 말한다. 방주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피난처이다. 창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언약을 세울지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방주는 절대 안전한 하나밖에 없는 피난처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만이 절대 안전보장임을 말한다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노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이 방주에 들어간 것이다. 노아의 믿음의 의를 보시고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문을 닫으셨다. 방주로 들어간 노아는 생명의 보호를 받았다 방주 안에는 자유가 없었으나 참된 자유가 있는 것이니 그것은 영원한 자유인 것이며 영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리는 축복이다. 2.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왔다. (1)노아는 방주에서 나오도록 다시 명령을 받았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가 임하도록 56일 동안이나 기다렸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야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왔다. 창 8:15 - 16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를 건조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갔으며 방주에서 나오라는 명령을 기다렸다가 나왔다 여기서 노아의 철저한 신앙과 인내를 배울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를 받았다. 노아는 스스로 방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노아는 절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한 것이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다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면서 끝까지 인내해야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세하시고 세밀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이 떨어지지 않고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서 기억하시고 보호하신다. 사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을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리를 항상 기억하고 계시지만 노아의 경우와 같이 참고 기다리라는 교훈을 주시는 때가 많은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는 날은 전혀 비밀로 되어있었다. 고난 중에 신앙으로 견디는 성도에게는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날이 오는 것이다. 시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우리는 철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행동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세시고 그 걸음 인도하신다. (2)노아와 식구들이 방주에서 나옴으로서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방주 밖의 사람들은 다 죽었다. 땅의 육체를 다 죽였다고 하였으며 코로 숨쉬는 모든 것을 다 죽였으며 모든 생물이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니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결국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리라 롯의 가족들은 소돔 성이 멸망을 당할 때 다 떠나지 못하였다(사위들) 그러나 노아의 가족 8식구는 구원을 받고 함께 동행하였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동고 동락하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가 믿는 예수님을 안 믿겠다면 아내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겠는가?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온 가족이 같은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온 가족이 에수님을 믿고 함께 구원을 받고 하나님만 섬기면서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하는 것은 최고, 최대, 최상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들의 가정의 식구들이 함께 구원받고 다함께 예배드리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란다. 노아의 가정처럼 의인의 가정으로 성별 되게 살다가 모두 구원받으시기 바란다. (3)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느 편에 서겠는가?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가 함께 공존한다. 지금은 무엇이 의인지 무엇이 불의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는 분별이 되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 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데려가는 자와 버려두는자, 불충한자와 충성한자는 심판 때에는 엄격하게 구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판결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고 주님의 보좌 앞인 것을 알아야한다. 물심판 때에 노아의 가정이 의인의 가정이요, 구원받은 가정인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우리의 가정도 의인의 가정으로 들어날 재림 심판 때를 생각하고 온 가족들이 믿음으로 살기 바란다. 3.노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다. (1)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다. 20 -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번제는 제물을 불로 태워서 향기를 드리는 제사이며, 제일 오래된 제사인데 온전한 희생의 제사이니 헌신의 제사이다.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먼저 드린 제사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아들 이삭도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복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우니 먼저 예배를 철저하게 드리자. 모든 예배는 똑같이 중요한 것이며 온 가족이 함께 드려야 한다. "너는 기도해라, 나는 돈벌테니 하고 아내에게만 대표로 예배하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사를 드린 것이다. 20-모든 정결한 짐승, 정결한 새를 취하여 정성스럽게 하나님을 위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노아가 드린 감사와 헌신의 제사를 받으셨다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라고 하였는데 여기 그 향기는 만족의 향기,즐거움의 향기이다 흠향하시다--노아가 드린 번제의 향기를 숨을 들여마신 것처럼 믿음과 정성으로 먼저 드린 노아의 제사와 제물을 하나님이 열납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이 열납하시도록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출20:23 -24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하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으로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면 용서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1)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였다(21절) 2) 전과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셨다 3) 땅이 지속되는 동안은 계절과 주야가 계속될 것이라는 언약을 하셨다 이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사는 길이요 복받는 길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이제는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하기를 축원한다 그러기에 불신가족을 위하여 끈임 없는 기도가 있어야한다. 온가족이 구원받고 형통한 복과 승리하는 복을 새해에는 받아야 하겠다.
구원받는 노아의 가정/창8:13-22
구원받는 노아의 가정/창8:13-22 2003-08-13 19:51:52 read : 6 노아의 가정은 특별한 축복을 받은 가정이다. 천하인간과 생물이 다 하나님의 물심판을 받았는데 노아와 그의 식구들과 방주에탄 모든 생물들만이 구원을 얻었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은 죽음과 파괴와, 멸망인 동시에 부활과 생명의 그림자요 구원의 그림자요 상징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120년간 방주를 지었으며 노아의 가정은 비오기 7일전에 방주에 들어갔다. 비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오기 시작하여 150일 동안 물이 땅을 덮었으며 방주는 7월17일에 아라랏산에 정착하게되었다. 노아가 601세 되던 해 1월1일에 방주의 뚜껑을 제쳤으며 그리고 방주에서 나왔으니 노아의 가정은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 1.방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1)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다 #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공사를 명하실 때의 죄악은 어떠했는가? 1)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합한 죄이다. 행6:1-2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아벨 계통의 후손인 셋의 계통으로 영에 속한 신령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상징한다 시73: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신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다. 사람의 딸들은 가인계에[속한 육체에 속한 후손들 즉 불신자들을 말한다. 이것은 엄청난 비극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우상)이 합할 수 없다, 즉 신앙과 불신앙이 결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노아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신앙자들과 혼합함으로 죄악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이 죄악의 세상과 구별시키고 세상을 멸하기 위하여 방주를 만들도록 명한 것이다. 2)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고 말았다. 창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끊어져버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다 육체만 남게되었다. 3)인간들은 항상 악을 도모하는 자들이 되었다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코자 방주를 예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백성을 구원코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으며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2)방주는 믿음으로 의인된 자의 구원의 상징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으며 그 때문에 방주는 노아의 믿음에 대한 구원의 상징으로 주셨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의 구원의 방주가 되심을 예표한 것이다 (3)방주는 하나님께서 지정한신 피난처이다 창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에 칠하라 방주---"테바"라고 하는데 하나님만이 운행하는 배를 말한다. 방주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피난처이다. 창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언약을 세울지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방주는 절대 안전한 하나밖에 없는 피난처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만이 절대 안전보장임을 말한다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노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이 방주에 들어간 것이다. 노아의 믿음의 의를 보시고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문을 닫으셨다. 방주로 들어간 노아는 생명의 보호를 받았다 방주 안에는 자유가 없었으나 참된 자유가 있는 것이니 그것은 영원한 자유인 것이며 영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리는 축복이다. 2.노아와 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왔다. (1)노아는 방주에서 나오도록 다시 명령을 받았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가 임하도록 56일 동안이나 기다렸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야 그의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왔다. 창 8:15 - 16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를 건조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갔으며 방주에서 나오라는 명령을 기다렸다가 나왔다 여기서 노아의 철저한 신앙과 인내를 배울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를 받았다. 노아는 스스로 방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노아는 절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한 것이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다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후회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면서 끝까지 인내해야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세하시고 세밀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이 떨어지지 않고 머리털까지 세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서 기억하시고 보호하신다. 사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을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리를 항상 기억하고 계시지만 노아의 경우와 같이 참고 기다리라는 교훈을 주시는 때가 많은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는 날은 전혀 비밀로 되어있었다. 고난 중에 신앙으로 견디는 성도에게는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응답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날이 오는 것이다. 시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우리는 철저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행동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세시고 그 걸음 인도하신다. (2)노아와 식구들이 방주에서 나옴으로서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방주 밖의 사람들은 다 죽었다. 땅의 육체를 다 죽였다고 하였으며 코로 숨쉬는 모든 것을 다 죽였으며 모든 생물이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니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결국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요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리라 롯의 가족들은 소돔 성이 멸망을 당할 때 다 떠나지 못하였다(사위들) 그러나 노아의 가족 8식구는 구원을 받고 함께 동행하였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동고 동락하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가 믿는 예수님을 안 믿겠다면 아내를 진정 사랑하는 것이겠는가?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온 가족이 같은 취미생활을 하는 것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온 가족이 에수님을 믿고 함께 구원을 받고 하나님만 섬기면서 찬양하고 감사하며 예배하는 것은 최고, 최대, 최상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들의 가정의 식구들이 함께 구원받고 다함께 예배드리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란다. 노아의 가정처럼 의인의 가정으로 성별 되게 살다가 모두 구원받으시기 바란다. (3)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느 편에 서겠는가?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성령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가 함께 공존한다. 지금은 무엇이 의인지 무엇이 불의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는 분별이 되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 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데려가는 자와 버려두는자, 불충한자와 충성한자는 심판 때에는 엄격하게 구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판결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고 주님의 보좌 앞인 것을 알아야한다. 물심판 때에 노아의 가정이 의인의 가정이요, 구원받은 가정인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우리의 가정도 의인의 가정으로 들어날 재림 심판 때를 생각하고 온 가족들이 믿음으로 살기 바란다. 3.노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다. (1)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다. 20 -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번제는 제물을 불로 태워서 향기를 드리는 제사이며, 제일 오래된 제사인데 온전한 희생의 제사이니 헌신의 제사이다.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먼저 드린 제사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아들 이삭도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복을 주셨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우니 먼저 예배를 철저하게 드리자. 모든 예배는 똑같이 중요한 것이며 온 가족이 함께 드려야 한다. "너는 기도해라, 나는 돈벌테니 하고 아내에게만 대표로 예배하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노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사를 드린 것이다. 20-모든 정결한 짐승, 정결한 새를 취하여 정성스럽게 하나님을 위한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노아가 드린 감사와 헌신의 제사를 받으셨다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 하시고"라고 하였는데 여기 그 향기는 만족의 향기,즐거움의 향기이다 흠향하시다--노아가 드린 번제의 향기를 숨을 들여마신 것처럼 믿음과 정성으로 먼저 드린 노아의 제사와 제물을 하나님이 열납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이 열납하시도록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출20:23 -24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하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으로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면 용서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1)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였다(21절) 2) 전과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셨다 3) 땅이 지속되는 동안은 계절과 주야가 계속될 것이라는 언약을 하셨다 이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사는 길이요 복받는 길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이제는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하기를 축원한다 그러기에 불신가족을 위하여 끈임 없는 기도가 있어야한다. 온가족이 구원받고 형통한 복과 승리하는 복을 새해에는 받아야 하겠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창6:5-8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창6:5-8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님께서, 대신들과 학자들에게 이 세상의 지혜를 모아, 유익한 책을 만들어, 백성들로 읽게 하라고 하셨다. 대신들과 학자들을 열심히 지혜를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책은 자그마치 수레 10대 분량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임금님께서는 이 많은 책들을, 할 일 많은 백성들이 언제 읽겠느냐? 쉽게 읽도록 줄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줄이고 줄여서, 10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임금님께서는 더 많이 줄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아직도 많으니, 더 줄이라고 하자, 학자들은 세상의 지혜를 한 줄로 적어 왔다. 무슨 내용을 적어 왔을까요? 그 말은 바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을, 심은 대로 거두게 만드셨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을 철학적으로 인과율(因果律)이라 한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은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이기에, 세상 끝 날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된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지 않는다. 팥을 심었는데 호박이 나지 않는다.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감이 열리지 않는다. 반드시 심은 대로 열매를 맺는다. 학생 때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좋은 열매를 먹게 된다. 우리가 나무를 막 베어서 땔감으로 쓰게되면, 북한처럼 비가 오면 홍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공해물질을 버려서는 안 되나? 우리가 공해물질을 다시 먹게 되기 때문이다. 심는 대로 거둔다. 오늘 우리가 뿌린 씨앗은, 언젠가 우리가 다시 거두게 된다. 오늘 우리는 어떤 씨앗을 뿌리는가? 행복의 씨앗인가? 불행의 씨앗인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 심은 종류대로 거두고, 심은 양대로 거둔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기에, 교만의 씨를 심게 되면, 패망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좋은 열매를, 많이 심으시기 바란다. 1.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 이렇게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법칙이 율법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하고, 죄 값으로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 때문이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죄악의 씨를 수없이 뿌렸다. 얼마나 죄가 많았는지 죄악이 관영했다(5). 관영( , 크고 많다)은 가득 차고 넘쳤다는 말이다.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행동이 항상 악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죄악으로 가득 찼다. 좋은 면이 하나도 없이, 죄악으로 충만했고, 항상 악했다. 11절을 보면,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 니팔, 부패하다, 썩다)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고 했다. 한마디로 무법천지가 되어, 죄악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는 말이다. 노아 시대의 죄를 대표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내용이, 1-4절의 내용이다. 즉 \\\\\\\\\\\\\\\\\\\\\\\\\\\\\\\'음행의 문화\\\\\\\\\\\\\\\\\\\\\\\\\\\\\\\'와 \\\\\\\\\\\\\\\\\\\\\\\\\\\\\\\'영웅주의\\\\\\\\\\\\\\\\\\\\\\\\\\\\\\\'라 할 수 있다. (1) 음행문화(1-3)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요구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2)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선택받은 셋의 후손들을 말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아내들로 만들었다. 요즘 식으로 스와핑을 했다. 여자들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따라서,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를 취하였다. 이러한 세상의 원리로, 극도로 성적인 타락이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묻지 않고, 자기들 생각대로 움직이자,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3)고 하셨다. \\\\\\\\\\\\\\\\\\\\\\\\\\\\\\\'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의 신이 사람 안에서 다스리지 않는다, 또는 \\\\\\\\\\\\\\\\\\\\\\\\\\\\\\\'나의 신이 사람들과 함께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생기를 가진 영적 인간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타락한 존재가 되어서, 사람에게 주었던 심판하는 권세를 잃어버린다는 선언하신다. (2) 영웅주의(4) 4절의 \\\\\\\\\\\\\\\\\\\\\\\\\\\\\\\"네피림( )\\\\\\\\\\\\\\\\\\\\\\\\\\\\\\\"은 거인으로, \\\\\\\\\\\\\\\\\\\\\\\\\\\\\\\"떨어진 사람들, 또는 습격하고 공격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4下)고 했다. 여기서 용사는 좋은 의미로 들리지만, 본래의 뜻은 \\\\\\\\\\\\\\\\\\\\\\\\\\\\\\\"폭군\\\\\\\\\\\\\\\\\\\\\\\\\\\\\\\"이다. 원색적으로 하면 깡패라는 말이다. \\\\\\\\\\\\\\\\\\\\\\\\\\\\\\\"고대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는 표현도, 한 마디로 히틀러 같은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이 아니라, 자신들이 구원자가 되려고 하자 악명 높은 폭군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며, 유일한 보호자신데, 하나님 중심으로 모이지 않고, 사람 중심, 영웅 호걸들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뢰함에서 떠나, 사람 영웅을 의지하게 되자, 힘있는 깡패들이, 영웅 대접을 받는 시기가 되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남성의 힘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옛날처럼 힘센 장수가 이 시대를 지배하지 않지만, 오늘날도 동일하게 힘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같다. 그 힘의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요즘은 무엇이 힘입니까? 물질적인 능력이 최고이다. 물질적인 능력이 없으면, 장가가기도 힘든 세상이다. 물질적 능력이 있는 남자 앞에, 많은 여성들이 자기 육체의 아름다움을 기꺼이 바치고 있다. 옛날 방식과 표현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 세상이 추구했던 정신은, 오늘날에도 하나 다를 바 없다.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만, 오히려 창4:23-24의 라멕 같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신의 호색과 잔악함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육체의 아름다움이, 곧 물질의 부와 연결되어 있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따라, 자기 좋을 대로 아내를 취하는 시대, 여성의 외적인 아름다움이, 남성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 성이 상품화되고 있다. (3) 육체를 위해 심으면 망한다(5-7). 이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과, 심판의 작정함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였다고 했는데, \\\\\\\\\\\\\\\\\\\\\\\\\\\\\\\'신인동형론적 표현법\\\\\\\\\\\\\\\\\\\\\\\\\\\\\\\'이다. 인간의 표현법을 빌어 하나님을 표현하였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죄를 심었다.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오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율법도 무시할 수 없는 축복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육체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성령의 씨앗을 심는다. 육체의 씨앗은, 더러운 음행과 호색, 우상숭배와 술수, 원수맺음, 분쟁과 시기,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또는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 방탕함(갈5:19-21)을 심고 있지만, 그러면 망한다. 성도는 사랑과 희락, 화평과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심어야 한다(갈5:22). 어떤 사람이 밉다고, 미움을 심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랑을 심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심은 대로 거둘 수 있기에, 물질의 풍요를 위해서라면, 물질을 심어야 한다. 세계적인 재벌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십일조를 바치면서 \\\\\\\\\\\\\\\\\\\\\\\\\\\\\\\"만일 내가 처음에 교회에 갔을 때, 이 말씀을 듣고 그 당시 내 월급 6달러에서, 십일조 60센트를 천국 밭에 심지 않았다면, 내가 오늘 100만 달러를 십일조로 바칠 수 없었다.\\\\\\\\\\\\\\\\\\\\\\\\\\\\\\\"고 간증하였다. 록펠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못 다녔다. 남의 집에 가서 점원 일을 하면서, 하루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데 \\\\\\\\\\\\\\\\\\\\\\\\\\\\\\\"십일조란 축복의 씨앗을 하늘나라 농장에 심으라\\\\\\\\\\\\\\\\\\\\\\\\\\\\\\\"는 말씀이었다. 그가 얼마나 큰 감동이 되었던지, 당시 쥐꼬리만한 월급 6달러에서 십일조를 떼서 바쳤다. 그리고 그는 성실히 교회 다니면서, 저축을 하였다. 오랫동안 저축한 것이, 조금마한 사업을 할 정도의 액수가 되었다.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광산에 손을 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하여, 금이 있다는 산을 사서 금광을 캐기 시작했다. 금은커녕 투자한 돈을 다 날려보냈다. 알고 보니 사기꾼에게 속아서,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그는 어느 날, 광산 어느 구석에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펴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어김없는 진리지요. 어린 제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 가난이 한이 되어서, 가난을 떨쳐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주의 말씀대로 믿고,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거지만도 못한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오리까?\\\\\\\\\\\\\\\\\\\\\\\\\\\\\\\"하며,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때 마음속에 \\\\\\\\\\\\\\\\\\\\\\\\\\\\\\\"더 깊이 파 보라\\\\\\\\\\\\\\\\\\\\\\\\\\\\\\\"는 음성이 들려 왔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광부들을 총동원하여, 더 깊이 팠다. 파고 또 팠다. 그랬더니 나오라는 금은 안나오고, 이상한 시커먼 물줄기가 확 터져 나왔는데 석유였다. 석유매장량이 엄청났다. 그리하여 그는 망한 것이 아니라, 일약 거부가 되었다. 그는 역대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제2의 록펠러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시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2. 심은 것보다 더 거둠이 은혜다(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보호받는 은혜를 입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심판 받아 마땅했다. 그들의 행동이 악했을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악했다(5).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 나가면 죽는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이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임박한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노아였다. 노아는 죄가 없기에 멸망치 않음이 아니다. 노아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도 따라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율법과 은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심을 의미하고, 율법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함을 의미한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기는 불가능하다. 은혜는 우리의 공로로 얻음이 아니다. 또한 공로가 없다고, 잃어버릴 수도 없다. 우리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 은혜다. 우리의 공로로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 은혜를 입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데, 일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여, 그는 제일 가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까지도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그 은혜를 이렇게 감격스럽게 간증한다. 고전15:8에 자신은 부족한 죄인인데도,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와 만나주셨다고 했다. 이처럼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로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조건 없는 일방적인 호의, 일방적인 친절이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이 될 수 있었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9). 하나님의 은혜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변화시킨다. 성도는 환란의 날에도 보호를 받고, 심판의 날에도 보호를 받는다. 은혜를 입어야 한다. 그 시대 사람과 차이점은,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은혜를 입으면 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원문은 노아는, 하나님의 눈들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했다고 했다. 오직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생명과 사망을 구분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눈을 자세히 보라! 은혜를 베풀고자 안타까워하시는, 그분의 본심이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가?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이렇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어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 2004년도에 우리가 주님께 잘못했다고, 포기하지 말자.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구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신다. 망할 짓을 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고 하셨다. 3.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나? 성경이 은혜를 강조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단어는 믿음이다. 믿음은 주님이 존재함을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일을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과도 같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미국 Andrew Jackson 대통령 당시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서부 텍사스에 살인이 하도 많이 일어나서,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어느 날, 한 술집에서 한 청년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강도를 만나 그만 다투는 도중 권총으로 쏴 죽였다. 이 사람은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언제나 이웃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청년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구명 운동을 시작했다. 지역주민의 간곡한 바램이 담긴 연판장을,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탄원서를 읽은 대통령은 감동을 받아, 청년의 죄를 용서해 주려고 사면증서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청년은 사면증서를 받자마자, \\\\\\\\\\\\\\\\\\\\\\\\\\\\\\\'이것이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느냐?\\\\\\\\\\\\\\\\\\\\\\\\\\\\\\\' 하면서, 찢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청년은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판사는 명판결을 내렸다. 이 사면증은 종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쓰여진 내용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당신은 이 사면증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사형이다. 결국 사면증을 받아들이지 않아, 사형되고 말았다. 여러 사람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죄 용서받을 수 있었던 그는, 큰 은혜를 저버리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하려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기에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우리가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깨닫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받을 때, 구원을 얻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 한 일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심을, 믿음의 눈을 들어서 바라보시기 바란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창6:5-8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창6:5-8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님께서, 대신들과 학자들에게 이 세상의 지혜를 모아, 유익한 책을 만들어, 백성들로 읽게 하라고 하셨다. 대신들과 학자들을 열심히 지혜를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책은 자그마치 수레 10대 분량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임금님께서는 이 많은 책들을, 할 일 많은 백성들이 언제 읽겠느냐? 쉽게 읽도록 줄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줄이고 줄여서, 10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임금님께서는 더 많이 줄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아직도 많으니, 더 줄이라고 하자, 학자들은 세상의 지혜를 한 줄로 적어 왔다. 무슨 내용을 적어 왔을까요? 그 말은 바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을, 심은 대로 거두게 만드셨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을 철학적으로 인과율(因果律)이라 한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은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이기에, 세상 끝 날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된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지 않는다. 팥을 심었는데 호박이 나지 않는다.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감이 열리지 않는다. 반드시 심은 대로 열매를 맺는다. 학생 때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좋은 열매를 먹게 된다. 우리가 나무를 막 베어서 땔감으로 쓰게되면, 북한처럼 비가 오면 홍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공해물질을 버려서는 안 되나? 우리가 공해물질을 다시 먹게 되기 때문이다. 심는 대로 거둔다. 오늘 우리가 뿌린 씨앗은, 언젠가 우리가 다시 거두게 된다. 오늘 우리는 어떤 씨앗을 뿌리는가? 행복의 씨앗인가? 불행의 씨앗인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 심은 종류대로 거두고, 심은 양대로 거둔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기에, 교만의 씨를 심게 되면, 패망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좋은 열매를, 많이 심으시기 바란다. 1.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 이렇게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법칙이 율법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하고, 죄 값으로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 때문이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죄악의 씨를 수없이 뿌렸다. 얼마나 죄가 많았는지 죄악이 관영했다(5). 관영( , 크고 많다)은 가득 차고 넘쳤다는 말이다.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행동이 항상 악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죄악으로 가득 찼다. 좋은 면이 하나도 없이, 죄악으로 충만했고, 항상 악했다. 11절을 보면,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 니팔, 부패하다, 썩다)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고 했다. 한마디로 무법천지가 되어, 죄악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는 말이다. 노아 시대의 죄를 대표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내용이, 1-4절의 내용이다. 즉 \\\'음행의 문화\\\'와 \\\'영웅주의\\\'라 할 수 있다. (1) 음행문화(1-3)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요구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2)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선택받은 셋의 후손들을 말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아내들로 만들었다. 요즘 식으로 스와핑을 했다. 여자들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따라서,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를 취하였다. 이러한 세상의 원리로, 극도로 성적인 타락이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묻지 않고, 자기들 생각대로 움직이자,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3)고 하셨다. \\\'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의 신이 사람 안에서 다스리지 않는다, 또는 \\\'나의 신이 사람들과 함께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생기를 가진 영적 인간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타락한 존재가 되어서, 사람에게 주었던 심판하는 권세를 잃어버린다는 선언하신다. (2) 영웅주의(4) 4절의 \\\"네피림( )\\\"은 거인으로, \\\"떨어진 사람들, 또는 습격하고 공격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4下)고 했다. 여기서 용사는 좋은 의미로 들리지만, 본래의 뜻은 \\\"폭군\\\"이다. 원색적으로 하면 깡패라는 말이다. \\\"고대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는 표현도, 한 마디로 히틀러 같은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이 아니라, 자신들이 구원자가 되려고 하자 악명 높은 폭군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며, 유일한 보호자신데, 하나님 중심으로 모이지 않고, 사람 중심, 영웅 호걸들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뢰함에서 떠나, 사람 영웅을 의지하게 되자, 힘있는 깡패들이, 영웅 대접을 받는 시기가 되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남성의 힘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옛날처럼 힘센 장수가 이 시대를 지배하지 않지만, 오늘날도 동일하게 힘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같다. 그 힘의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요즘은 무엇이 힘입니까? 물질적인 능력이 최고이다. 물질적인 능력이 없으면, 장가가기도 힘든 세상이다. 물질적 능력이 있는 남자 앞에, 많은 여성들이 자기 육체의 아름다움을 기꺼이 바치고 있다. 옛날 방식과 표현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 세상이 추구했던 정신은, 오늘날에도 하나 다를 바 없다.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만, 오히려 창4:23-24의 라멕 같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신의 호색과 잔악함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육체의 아름다움이, 곧 물질의 부와 연결되어 있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따라, 자기 좋을 대로 아내를 취하는 시대, 여성의 외적인 아름다움이, 남성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 성이 상품화되고 있다. (3) 육체를 위해 심으면 망한다(5-7). 이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과, 심판의 작정함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였다고 했는데, \\\'신인동형론적 표현법\\\'이다. 인간의 표현법을 빌어 하나님을 표현하였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죄를 심었다.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오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율법도 무시할 수 없는 축복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육체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성령의 씨앗을 심는다. 육체의 씨앗은, 더러운 음행과 호색, 우상숭배와 술수, 원수맺음, 분쟁과 시기,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또는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 방탕함(갈5:19-21)을 심고 있지만, 그러면 망한다. 성도는 사랑과 희락, 화평과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심어야 한다(갈5:22). 어떤 사람이 밉다고, 미움을 심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랑을 심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심은 대로 거둘 수 있기에, 물질의 풍요를 위해서라면, 물질을 심어야 한다. 세계적인 재벌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십일조를 바치면서 \\\"만일 내가 처음에 교회에 갔을 때, 이 말씀을 듣고 그 당시 내 월급 6달러에서, 십일조 60센트를 천국 밭에 심지 않았다면, 내가 오늘 100만 달러를 십일조로 바칠 수 없었다.\\\"고 간증하였다. 록펠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못 다녔다. 남의 집에 가서 점원 일을 하면서, 하루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데 \\\"십일조란 축복의 씨앗을 하늘나라 농장에 심으라\\\"는 말씀이었다. 그가 얼마나 큰 감동이 되었던지, 당시 쥐꼬리만한 월급 6달러에서 십일조를 떼서 바쳤다. 그리고 그는 성실히 교회 다니면서, 저축을 하였다. 오랫동안 저축한 것이, 조금마한 사업을 할 정도의 액수가 되었다.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광산에 손을 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하여, 금이 있다는 산을 사서 금광을 캐기 시작했다. 금은커녕 투자한 돈을 다 날려보냈다. 알고 보니 사기꾼에게 속아서,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그는 어느 날, 광산 어느 구석에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펴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어김없는 진리지요. 어린 제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 가난이 한이 되어서, 가난을 떨쳐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주의 말씀대로 믿고,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거지만도 못한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오리까?\\\"하며,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때 마음속에 \\\"더 깊이 파 보라\\\"는 음성이 들려 왔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광부들을 총동원하여, 더 깊이 팠다. 파고 또 팠다. 그랬더니 나오라는 금은 안나오고, 이상한 시커먼 물줄기가 확 터져 나왔는데 석유였다. 석유매장량이 엄청났다. 그리하여 그는 망한 것이 아니라, 일약 거부가 되었다. 그는 역대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제2의 록펠러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시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2. 심은 것보다 더 거둠이 은혜다(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보호받는 은혜를 입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심판 받아 마땅했다. 그들의 행동이 악했을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악했다(5).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 나가면 죽는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이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임박한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노아였다. 노아는 죄가 없기에 멸망치 않음이 아니다. 노아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도 따라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율법과 은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심을 의미하고, 율법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함을 의미한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기는 불가능하다. 은혜는 우리의 공로로 얻음이 아니다. 또한 공로가 없다고, 잃어버릴 수도 없다. 우리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 은혜다. 우리의 공로로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 은혜를 입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데, 일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여, 그는 제일 가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까지도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그 은혜를 이렇게 감격스럽게 간증한다. 고전15:8에 자신은 부족한 죄인인데도,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와 만나주셨다고 했다. 이처럼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로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조건 없는 일방적인 호의, 일방적인 친절이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이 될 수 있었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9). 하나님의 은혜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변화시킨다. 성도는 환란의 날에도 보호를 받고, 심판의 날에도 보호를 받는다. 은혜를 입어야 한다. 그 시대 사람과 차이점은,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은혜를 입으면 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원문은 노아는, 하나님의 눈들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했다고 했다. 오직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생명과 사망을 구분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눈을 자세히 보라! 은혜를 베풀고자 안타까워하시는, 그분의 본심이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가?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이렇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어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 2004년도에 우리가 주님께 잘못했다고, 포기하지 말자.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구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신다. 망할 짓을 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고 하셨다. 3.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나? 성경이 은혜를 강조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단어는 믿음이다. 믿음은 주님이 존재함을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일을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과도 같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미국 Andrew Jackson 대통령 당시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서부 텍사스에 살인이 하도 많이 일어나서,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어느 날, 한 술집에서 한 청년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강도를 만나 그만 다투는 도중 권총으로 쏴 죽였다. 이 사람은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언제나 이웃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청년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구명 운동을 시작했다. 지역주민의 간곡한 바램이 담긴 연판장을,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탄원서를 읽은 대통령은 감동을 받아, 청년의 죄를 용서해 주려고 사면증서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청년은 사면증서를 받자마자, \\\'이것이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느냐?\\\' 하면서, 찢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청년은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판사는 명판결을 내렸다. 이 사면증은 종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쓰여진 내용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당신은 이 사면증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사형이다. 결국 사면증을 받아들이지 않아, 사형되고 말았다. 여러 사람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죄 용서받을 수 있었던 그는, 큰 은혜를 저버리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하려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기에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우리가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깨닫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받을 때, 구원을 얻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 한 일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심을, 믿음의 눈을 들어서 바라보시기 바란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창6:5-8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창6:5-8 2011-07-14 23:14:24 read : 5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님께서, 대신들과 학자들에게 이 세상의 지혜를 모아, 유익한 책을 만들어, 백성들로 읽게 하라고 하셨다. 대신들과 학자들을 열심히 지혜를 모아서, 책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책은 자그마치 수레 10대 분량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임금님께서는 이 많은 책들을, 할 일 많은 백성들이 언제 읽겠느냐? 쉽게 읽도록 줄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줄이고 줄여서, 10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왔다. 임금님께서는 더 많이 줄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1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아직도 많으니, 더 줄이라고 하자, 학자들은 세상의 지혜를 한 줄로 적어 왔다. 무슨 내용을 적어 왔을까요? 그 말은 바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을, 심은 대로 거두게 만드셨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을 철학적으로 인과율(因果律)이라 한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은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이기에, 세상 끝 날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된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지 않는다. 팥을 심었는데 호박이 나지 않는다.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감이 열리지 않는다. 반드시 심은 대로 열매를 맺는다. 학생 때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좋은 열매를 먹게 된다. 우리가 나무를 막 베어서 땔감으로 쓰게되면, 북한처럼 비가 오면 홍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공해물질을 버려서는 안 되나? 우리가 공해물질을 다시 먹게 되기 때문이다. 심는 대로 거둔다. 오늘 우리가 뿌린 씨앗은, 언젠가 우리가 다시 거두게 된다. 오늘 우리는 어떤 씨앗을 뿌리는가? 행복의 씨앗인가? 불행의 씨앗인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 심은 종류대로 거두고, 심은 양대로 거둔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기에, 교만의 씨를 심게 되면, 패망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좋은 열매를, 많이 심으시기 바란다. 1.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 이렇게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법칙이 율법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하고, 죄 값으로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해야 한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 때문이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죄악의 씨를 수없이 뿌렸다. 얼마나 죄가 많았는지 죄악이 관영했다(5). 관영( , 크고 많다)은 가득 차고 넘쳤다는 말이다.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행동이 항상 악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죄악으로 가득 찼다. 좋은 면이 하나도 없이, 죄악으로 충만했고, 항상 악했다. 11절을 보면,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 니팔, 부패하다, 썩다) 강포가 땅에 충만하였다고 했다. 한마디로 무법천지가 되어, 죄악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는 말이다. 노아 시대의 죄를 대표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내용이, 1-4절의 내용이다. 즉 '음행의 문화'와 '영웅주의'라 할 수 있다. (1) 음행문화(1-3)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요구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2)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선택받은 셋의 후손들을 말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아내들로 만들었다. 요즘 식으로 스와핑을 했다. 여자들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따라서,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를 취하였다. 이러한 세상의 원리로, 극도로 성적인 타락이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묻지 않고, 자기들 생각대로 움직이자, 하나님께서는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3)고 하셨다. '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의 신이 사람 안에서 다스리지 않는다, 또는 '나의 신이 사람들과 함께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생기를 가진 영적 인간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타락한 존재가 되어서, 사람에게 주었던 심판하는 권세를 잃어버린다는 선언하신다. (2) 영웅주의(4) 4절의 "네피림( )"은 거인으로, "떨어진 사람들, 또는 습격하고 공격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4下)고 했다. 여기서 용사는 좋은 의미로 들리지만, 본래의 뜻은 "폭군"이다. 원색적으로 하면 깡패라는 말이다. "고대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는 표현도, 한 마디로 히틀러 같은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이 아니라, 자신들이 구원자가 되려고 하자 악명 높은 폭군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이며, 유일한 보호자신데, 하나님 중심으로 모이지 않고, 사람 중심, 영웅 호걸들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다. 하나님을 의뢰함에서 떠나, 사람 영웅을 의지하게 되자, 힘있는 깡패들이, 영웅 대접을 받는 시기가 되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남성의 힘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옛날처럼 힘센 장수가 이 시대를 지배하지 않지만, 오늘날도 동일하게 힘을 추구하는 점에서는 같다. 그 힘의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요즘은 무엇이 힘입니까? 물질적인 능력이 최고이다. 물질적인 능력이 없으면, 장가가기도 힘든 세상이다. 물질적 능력이 있는 남자 앞에, 많은 여성들이 자기 육체의 아름다움을 기꺼이 바치고 있다. 옛날 방식과 표현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 세상이 추구했던 정신은, 오늘날에도 하나 다를 바 없다. 잘못을 회개해야 하지만, 오히려 창4:23-24의 라멕 같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겼다. 자신의 호색과 잔악함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육체의 아름다움이, 곧 물질의 부와 연결되어 있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따라, 자기 좋을 대로 아내를 취하는 시대, 여성의 외적인 아름다움이, 남성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가 되어서, 성이 상품화되고 있다. (3) 육체를 위해 심으면 망한다(5-7). 이에 대한 하나님의 근심과, 심판의 작정함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였다고 했는데, '신인동형론적 표현법'이다. 인간의 표현법을 빌어 하나님을 표현하였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죄를 심었다.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오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율법도 무시할 수 없는 축복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육체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성령의 씨앗을 심는다. 육체의 씨앗은, 더러운 음행과 호색, 우상숭배와 술수, 원수맺음, 분쟁과 시기,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또는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 방탕함(갈5:19-21)을 심고 있지만, 그러면 망한다. 성도는 사랑과 희락, 화평과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심어야 한다(갈5:22). 어떤 사람이 밉다고, 미움을 심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랑을 심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심은 대로 거둘 수 있기에, 물질의 풍요를 위해서라면, 물질을 심어야 한다. 세계적인 재벌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십일조를 바치면서 "만일 내가 처음에 교회에 갔을 때, 이 말씀을 듣고 그 당시 내 월급 6달러에서, 십일조 60센트를 천국 밭에 심지 않았다면, 내가 오늘 100만 달러를 십일조로 바칠 수 없었다."고 간증하였다. 록펠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도 못 다녔다. 남의 집에 가서 점원 일을 하면서, 하루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데 "십일조란 축복의 씨앗을 하늘나라 농장에 심으라"는 말씀이었다. 그가 얼마나 큰 감동이 되었던지, 당시 쥐꼬리만한 월급 6달러에서 십일조를 떼서 바쳤다. 그리고 그는 성실히 교회 다니면서, 저축을 하였다. 오랫동안 저축한 것이, 조금마한 사업을 할 정도의 액수가 되었다. 어떤 친구가 찾아와서, 광산에 손을 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하여, 금이 있다는 산을 사서 금광을 캐기 시작했다. 금은커녕 투자한 돈을 다 날려보냈다. 알고 보니 사기꾼에게 속아서,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그는 어느 날, 광산 어느 구석에 무릎을 꿇고 성경을 펴들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도 어김없는 진리지요. 어린 제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 가난이 한이 되어서, 가난을 떨쳐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저는 주의 말씀대로 믿고,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거지만도 못한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오리까?"하며,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때 마음속에 "더 깊이 파 보라"는 음성이 들려 왔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광부들을 총동원하여, 더 깊이 팠다. 파고 또 팠다. 그랬더니 나오라는 금은 안나오고, 이상한 시커먼 물줄기가 확 터져 나왔는데 석유였다. 석유매장량이 엄청났다. 그리하여 그는 망한 것이 아니라, 일약 거부가 되었다. 그는 역대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제2의 록펠러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주시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2. 심은 것보다 더 거둠이 은혜다(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보호받는 은혜를 입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심판 받아 마땅했다. 그들의 행동이 악했을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악했다(5).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 나가면 죽는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이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임박한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노아였다. 노아는 죄가 없기에 멸망치 않음이 아니다. 노아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도 따라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율법과 은혜의 차이는 무엇인가?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심을 의미하고, 율법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함을 의미한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기는 불가능하다. 은혜는 우리의 공로로 얻음이 아니다. 또한 공로가 없다고, 잃어버릴 수도 없다. 우리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 은혜다. 우리의 공로로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 은혜를 입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데, 일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여, 그는 제일 가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까지도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그 은혜를 이렇게 감격스럽게 간증한다. 고전15:8에 자신은 부족한 죄인인데도,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와 만나주셨다고 했다. 이처럼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로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조건 없는 일방적인 호의, 일방적인 친절이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의인이 될 수 있었고, 완전하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9). 하나님의 은혜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삶을 변화시킨다. 성도는 환란의 날에도 보호를 받고, 심판의 날에도 보호를 받는다. 은혜를 입어야 한다. 그 시대 사람과 차이점은,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은혜를 입으면 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원문은 노아는, 하나님의 눈들 안에 있는 은혜를 발견했다고 했다. 오직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생명과 사망을 구분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눈을 자세히 보라! 은혜를 베풀고자 안타까워하시는, 그분의 본심이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거절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가?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이렇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어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다. 2004년도에 우리가 주님께 잘못했다고, 포기하지 말자.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구하면서, 주님께 나아가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신다. 망할 짓을 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고 하셨다. 3.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나? 성경이 은혜를 강조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단어는 믿음이다. 믿음은 주님이 존재함을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일을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과도 같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미국 Andrew Jackson 대통령 당시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서부 텍사스에 살인이 하도 많이 일어나서,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어느 날, 한 술집에서 한 청년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강도를 만나 그만 다투는 도중 권총으로 쏴 죽였다. 이 사람은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언제나 이웃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청년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구명 운동을 시작했다. 지역주민의 간곡한 바램이 담긴 연판장을,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탄원서를 읽은 대통령은 감동을 받아, 청년의 죄를 용서해 주려고 사면증서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청년은 사면증서를 받자마자, '이것이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느냐?' 하면서, 찢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 청년은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판사는 명판결을 내렸다. 이 사면증은 종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쓰여진 내용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당신은 이 사면증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사형이다. 결국 사면증을 받아들이지 않아, 사형되고 말았다. 여러 사람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죄 용서받을 수 있었던 그는, 큰 은혜를 저버리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하려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기에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우리가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깨닫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받을 때, 구원을 얻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 한 일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심을, 믿음의 눈을 들어서 바라보시기 바란다.
그러나 노아는/ 창6:1-/ 2002-04-08
그러나 노아는 창6:1- 창세기 5장 마지막 창세의 시점에서 우리는 에녹,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 그리고 그 아들 라멕, 또 그 아들 노아 4대 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4대의 삶에서 우리는 완전히 대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에녹은 하나 님과 동행하다가 이 땅에서 죽지 아니하고 승천한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의 자리입니다. 죽었는가 죽지 않 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죽는 가운데 승천했다는 영광을 맛보았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각별 한 은총을 받았다는 자체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면 서 모든 사람을 다 쓸어버릴 때 구원해주신 두 번째로 이 땅의 처음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4대 중 두 사람인 므두셀라와 라멕은 어떠하였습니까?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 다. 이런 이름을 두고 그 아버지 에녹은 그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늘에 들림 받았습니 다.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은 후 자신의 삶을 정비하였을 것이고 므두셀라의 손자 노아 역시 할아버지 이름을 생각하면서 삶을 정비하면서 바르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므두셀라는 자신의 이 름에 자기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의 삶에 대해서 별다른 이야기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므두셀라가 구백육십구 세에 죽은 그 해 홍수가 일어났지만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보아도 적어도 홍수 가 일어난 그 순간 그가 홍수에 쓸려죽었다는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므두셀라는 적어도 홍수가 일어나고 방주에 들어가는 그 순간 이미 삶을 마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면서 아버지 에녹의 삶을 닮지 못 하였고 거룩한 삶을 산 노아와 함께 산 육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산 노아의 삶과 같은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해보면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아버지 므두셀라가 죽기 5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라멕 역시 이 세상에 서의 삶에서 거룩하게 살았다든지 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든지 즉 에녹이나 노아에게 주었던 수식이 하나도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도 느끼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경로를 통해 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축복의 산과 저주의 산중에서 누구든지 골라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축복의 산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주의 산으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똑 같습니다. 자기 이름이 그렇 게 불리어지면서도 종말론적인 삶을 살지 못했던 므두셀라를 생각하게 됩니다. 창세기 5장에서 한 집안 안에서 이렇게 나뉘어지는데 반해 6장에서는 한 집안을 벗어나서 한 공동체 안에서 사람이 사 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가 살았던 그 시대, 그 마을에서 노아가 600년 동안 므두셀라와 함께 살 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동안 그렇게 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노아가 산 위에서 배를 짓는 어리석은 일을 아주 오랫동안 할 때 그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배를 짓고 우둔하게 사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객관적으로 그들의 판단이 옳았는지 모릅 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똑똑하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아니하는데 왜 너만 그렇 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답을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비웃었지만 노아는 홀로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배를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니다. 백이면 아흔 아홉 사람이 그 길이 정답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원칙이며 철학이고 삶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외에는 어떤 권세있는 사람이 이야기했다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이 야기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한 결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삶을 살아가면서 즉 자녀들을 교 육시키거나 사회에서 경제활동할 때, 가정에서 부부가 함께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까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그렇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설사 내 삶의 4/5를 살았다고 할지 라도 심지어 9할을 다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제라도 내가 살던 대로가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대로 살아갈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우둔하고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비웃는다고 할 지라도 내가 말하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방법이 옳았는가를 비록 여러분이 지금까지 성공하면서 살았다고 할지라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은 그 길이 아니라 거룩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길 이외는 정답이 없습니다. 므두셀라를 아들로 불렀던 에녹, 아버지로 불렀던 라멕, 할아버지로 불렀던 노아의 삶이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판단대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잘 아실 것은 자기가 판단하고 선택한대로 삶을 살았다고 할지 라도 그 책임 또한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기가 져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그 계시의 길을 제시하 셨다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많은 상담을 하면서 목사가 길을 정해주 면 그 길대로 가겠다고 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목사에게 떠넘기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로 하여금 책임적인 존재로 서게 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지 않고 선택하도록 합니다. 어차피 선 택하면 그 결과는 본인이 책임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어떤 인간도 당신 대신 책임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는 책임지실 수 있는 능력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 길을 제시하여 주신다고 자신있게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 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오늘 6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2절)라고 죄악의 명세서가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사람의 딸들이라는 뜻을 굳이 설명하기 전에 이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소 원하시는 방법인가? 이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좋은 것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인가를 끊임없이 조명해야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조명하고 십자가 앞에 가지고 와서 조명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대면하여 조명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 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분명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상당히 많이 받는데 충분히 그럴만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서 나의 욕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소원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판단 했다면 나의 판단이 어떠한가를 생각할 필요없이 그냥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기준은 정직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정직하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정직하게 대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신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라고 생각하고 나갑니다.\\\' 하고 나가십시오. 설사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합 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일일이 그것이 하나님의 답인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정답도 없을뿐더러 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된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합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소리나는 곳에서, 바람 부는 곳에 서, 불길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당하게 나아갑니다. 가끔 결혼하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날짜를 잡아두고 그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그렇지 않은 것 같 은 느낌이 든다하여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결정을 함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것은 마음을 흔들어놓으려고 하는 어두운 영들의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당당하게 밀고 나가 라고 말합니다. 살다보면 그런 일은 또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결혼했는데 잘못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도 그것은 하나님과 나를 떼어놓기 위한,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하는 어두운 영들의 짓이므로 밀 고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밀고 나가야만 하나님께서 그런 조그마한 아픔들을 통해서 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만약 그런 일이 있다할지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말라고 덧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니(3절)..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시는 그러한 방향으로 사람들이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빨리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참고 기다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개인 개인의 종말은 일백 이십 년을 기다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개인적은 종말, 사 회적인 심판 그리고 우주적인 종말을 다 생각하시고 계시면서도 우리가 돌아올 것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계시면서 참고 견 디어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참고 기다리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강팍해지고 점점 더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자기 뜻만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속이 상 하시고 가슴이 많이 아프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절실하게 요청되는 바는 이 기다림, 나 개인의 종말, 작은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님의 심판과 우 주적인 종말 등을 여러 가지로 보여주실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바라심이 무엇인가를 빨리 알아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늦어집니다. 문닫으라고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노란 불을 켜시고 여러 가지로 경고하시면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기대를 채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늦어집니다. 때가 되기 전에 하나님의 기대를 채워 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요망됩니다.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종말적인 삶을 생 각하면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마치 집합적 으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 같아도 그러나 구할 자는 구해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지침이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파멸시키는 그 때에도 노아만은 건져주셨습니 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의롭게 살았으며 당세의 완전한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여러분, 나라 가 어렵고 또 우주적인 어떤 어려움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만이라도 바로 서십시오.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정이 다 바로 서면 좋겠지만 설사 다 바로 서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한 사람만이라도 바로 서십시 오. 그러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을 구원하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고 당세에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 다. 이것이 오늘 8절 말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 하나님께 은혜입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 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힘쓰고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축복은 내가 지금 은혜를 사모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받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가? 여기에 축 복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창6:1-/ 2002-04-08
그러나 노아는 창6:1- 창세기 5장 마지막 창세의 시점에서 우리는 에녹,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 그리고 그 아들 라멕, 또 그 아들 노아 4대 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4대의 삶에서 우리는 완전히 대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에녹은 하나 님과 동행하다가 이 땅에서 죽지 아니하고 승천한 첫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의 자리입니다. 죽었는가 죽지 않 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죽는 가운데 승천했다는 영광을 맛보았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각별 한 은총을 받았다는 자체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면 서 모든 사람을 다 쓸어버릴 때 구원해주신 두 번째로 이 땅의 처음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4대 중 두 사람인 므두셀라와 라멕은 어떠하였습니까?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 다. 이런 이름을 두고 그 아버지 에녹은 그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늘에 들림 받았습니 다.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은 후 자신의 삶을 정비하였을 것이고 므두셀라의 손자 노아 역시 할아버지 이름을 생각하면서 삶을 정비하면서 바르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므두셀라는 자신의 이 름에 자기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의 삶에 대해서 별다른 이야기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므두셀라가 구백육십구 세에 죽은 그 해 홍수가 일어났지만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보아도 적어도 홍수 가 일어난 그 순간 그가 홍수에 쓸려죽었다는 이야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므두셀라는 적어도 홍수가 일어나고 방주에 들어가는 그 순간 이미 삶을 마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면서 아버지 에녹의 삶을 닮지 못 하였고 거룩한 삶을 산 노아와 함께 산 육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산 노아의 삶과 같은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해보면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아버지 므두셀라가 죽기 5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라멕 역시 이 세상에 서의 삶에서 거룩하게 살았다든지 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든지 즉 에녹이나 노아에게 주었던 수식이 하나도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도 느끼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경로를 통해 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축복의 산과 저주의 산중에서 누구든지 골라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축복의 산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주의 산으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똑 같습니다. 자기 이름이 그렇 게 불리어지면서도 종말론적인 삶을 살지 못했던 므두셀라를 생각하게 됩니다. 창세기 5장에서 한 집안 안에서 이렇게 나뉘어지는데 반해 6장에서는 한 집안을 벗어나서 한 공동체 안에서 사람이 사 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가 살았던 그 시대, 그 마을에서 노아가 600년 동안 므두셀라와 함께 살 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동안 그렇게 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노아가 산 위에서 배를 짓는 어리석은 일을 아주 오랫동안 할 때 그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배를 짓고 우둔하게 사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객관적으로 그들의 판단이 옳았는지 모릅 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똑똑하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아니하는데 왜 너만 그렇 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답을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비웃었지만 노아는 홀로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배를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니다. 백이면 아흔 아홉 사람이 그 길이 정답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원칙이며 철학이고 삶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외에는 어떤 권세있는 사람이 이야기했다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이 야기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한 결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삶을 살아가면서 즉 자녀들을 교 육시키거나 사회에서 경제활동할 때, 가정에서 부부가 함께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까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그렇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설사 내 삶의 4/5를 살았다고 할지 라도 심지어 9할을 다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제라도 내가 살던 대로가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대로 살아갈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우둔하고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라고 비웃는다고 할 지라도 내가 말하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방법이 옳았는가를 비록 여러분이 지금까지 성공하면서 살았다고 할지라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은 그 길이 아니라 거룩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길 이외는 정답이 없습니다. 므두셀라를 아들로 불렀던 에녹, 아버지로 불렀던 라멕, 할아버지로 불렀던 노아의 삶이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판단대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잘 아실 것은 자기가 판단하고 선택한대로 삶을 살았다고 할지 라도 그 책임 또한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기가 져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그 계시의 길을 제시하 셨다면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많은 상담을 하면서 목사가 길을 정해주 면 그 길대로 가겠다고 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목사에게 떠넘기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로 하여금 책임적인 존재로 서게 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지 않고 선택하도록 합니다. 어차피 선 택하면 그 결과는 본인이 책임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어떤 인간도 당신 대신 책임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는 책임지실 수 있는 능력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 길을 제시하여 주신다고 자신있게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 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오늘 6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2절)라고 죄악의 명세서가 나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사람의 딸들이라는 뜻을 굳이 설명하기 전에 이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소 원하시는 방법인가? 이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좋은 것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인가를 끊임없이 조명해야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조명하고 십자가 앞에 가지고 와서 조명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대면하여 조명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사 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분명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질문을 상당히 많이 받는데 충분히 그럴만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서 나의 욕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소원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판단 했다면 나의 판단이 어떠한가를 생각할 필요없이 그냥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기준은 정직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정직하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정직하게 대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신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라고 생각하고 나갑니다.\\\' 하고 나가십시오. 설사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합 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일일이 그것이 하나님의 답인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정답도 없을뿐더러 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된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합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소리나는 곳에서, 바람 부는 곳에 서, 불길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당당하게 나아갑니다. 가끔 결혼하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날짜를 잡아두고 그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가 다시 그렇지 않은 것 같 은 느낌이 든다하여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결정을 함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것은 마음을 흔들어놓으려고 하는 어두운 영들의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당당하게 밀고 나가 라고 말합니다. 살다보면 그런 일은 또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결혼했는데 잘못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에도 그것은 하나님과 나를 떼어놓기 위한,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하는 어두운 영들의 짓이므로 밀 고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밀고 나가야만 하나님께서 그런 조그마한 아픔들을 통해서 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만약 그런 일이 있다할지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말라고 덧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니(3절)..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시는 그러한 방향으로 사람들이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빨리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참고 기다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개인 개인의 종말은 일백 이십 년을 기다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개인적은 종말, 사 회적인 심판 그리고 우주적인 종말을 다 생각하시고 계시면서도 우리가 돌아올 것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계시면서 참고 견 디어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참고 기다리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강팍해지고 점점 더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자기 뜻만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속이 상 하시고 가슴이 많이 아프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절실하게 요청되는 바는 이 기다림, 나 개인의 종말, 작은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님의 심판과 우 주적인 종말 등을 여러 가지로 보여주실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바라심이 무엇인가를 빨리 알아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늦어집니다. 문닫으라고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노란 불을 켜시고 여러 가지로 경고하시면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기대를 채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늦어집니다. 때가 되기 전에 하나님의 기대를 채워 가는 것이 우리들에게 요망됩니다.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종말적인 삶을 생 각하면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마치 집합적 으로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 같아도 그러나 구할 자는 구해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지침이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파멸시키는 그 때에도 노아만은 건져주셨습니 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의롭게 살았으며 당세의 완전한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습니다. 여러분, 나라 가 어렵고 또 우주적인 어떤 어려움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만이라도 바로 서십시오.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정이 다 바로 서면 좋겠지만 설사 다 바로 서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한 사람만이라도 바로 서십시 오. 그러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을 구원하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고 당세에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 다. 이것이 오늘 8절 말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절).. 하나님께 은혜입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 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힘쓰고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축복은 내가 지금 은혜를 사모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받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가? 여기에 축 복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창6:1-8
그러나 노아는 창6:1-8 노아 시대는 장차 올 종말의 표상입니다. (마 24 : 37 - 39)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예수께서 말세를 설명하실 때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말세의 특성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즉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일에 몰두하여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절대 필요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일상 생활에만 몰두하다보면 그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인 감각, 즉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려 \\\'왜 사는 지\\\'를 모르고 그냥 무의미하게 살며, 한 술 더떠서 \\\'될 대로 되라\\\'하며 삽니다. 이것이 종말이 가까운 삶의 특성입니다. 본문 말씀에도 노아 시대를 휩쓸었던 종말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부패성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일상 생활과 부패한 생활가운데 깊은 죄악의 잠에 빠져, 그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나팔 수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악 된 생활에 눈이 멀어 있을 때에 홀로 깨어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8절 말씀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노아의 경건한 사람을 강조하였습니다. 노아는 종말이 다가오는 이 어두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노아의 모습을 통해 오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1.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호의,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친절입니다. \\\'은혜\\\'의 반대 개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판\\\'입니다. \\\'심판\\\'이란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결과\\\'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호의가 베풀어지는 사건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도 역시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5절 말씀은 그들의 행동이 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조차 악하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임박한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노아에게는 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만 죄가 있는데 있지 않습니다. 노아가 한치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9장 20-21절에 노아가 저지른 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과 노아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노아는 의인이고, 다른 이들은 다 죄인입니까?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과 노아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냐의 여부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노아와 같이 은혜를 입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은혜를 강조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입2:8)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입니다. 은혜를 입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 앞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죠? 심판 받는 이유는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차이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고, 안 받고 합니다. 미국 서부 개척 당시 텍사스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텍사스에서는 살인이 하도 많이 일어나,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어느 날, 한 술집에서 청년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청년이 권총으로 옆에 앉은 친구를 쏴 죽였습니다. 이 청년은 그 자리에서 잡혀서 경찰서로 갔습니다. 신원조회를 해보니 이 청년은 평소에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언제나 이웃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구명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간곡한 바램이 담긴 사연과 도장이 찍힌 탄원서를 주지사에게 제출했습니다. 탄원서를 읽은 주지사는 큰 감동을 받아 자신이 직접 그 청년을 만나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경찰서로 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살인을 하고 나서 성격이 변했습니다. 자포자기한 생각으로 난폭한 행동과 욕을 거침없이 하였습니다. 주지사가 사면장을 들고 그를 면회하려 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여러 사람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던 그는 그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창차 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려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기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했던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우리를 살려야 한다고 대신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우리를 위해 피와 땀과 눈물로 쓴 탄원서를 내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사면장을 들고 우리에게 오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면회를 거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될 대로 되라\\\'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그 사면장을 받으시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주님만 만나면 됩니다.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깨닫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받을 때, 구원을 얻습니다. 2. 의로운 사람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이 구절에서 \\\"의인\\\"과 완전한 자\\\"는 노아의 사람됨을 강조하기 위한 동의어입니다. 여기서 \\\"완전한 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사람\\\'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당세에\\\"라는 표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 시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노아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사 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의인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 종이 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해 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9절 말씀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으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은 유유상종하게 마련입니다. 비슷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의 비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인들과 어울린 일입니다. 물론 믿는 사람들이 선교를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 세상사람들과 어울릴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린 목적은 선교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백성들과 어울린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성경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이고, 사람의 딸들은 누구냐? 는 의문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하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UFO를 타고 온 우주인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사람\\\'이었던 \\\'셋의 후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이라 합니다. 셋의 혈통을 이은 경건한 자손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인의 후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던 경건한 사람들이, 불경건한 사람들인 네피림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네피림\\\'은 \\\'떨어진 사람들\\\', \\\'타락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딸들과 어울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니 그들을 \\\'용사\\\'라고 했습니다. 용사란 말이 좋은 의미로 들리는데, 여기서의 용사란 \\\'폭군\\\'이나, \\\'깡패\\\'라는 말입니다. 또한 \\\"고대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는 표현도 좋게 보이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악명 높은 사람들\\\'이었다는 표현입니다. 그 결과 노아가 살던 시대는 갈수록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부패하고 악해졌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까지 불경건한 사람들과 어울려 죄악에 빠져있는 시대에도 \\\"그러나 …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죄악의 물결 속에서 세상과 영합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의 모습을 본받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8절 말씀에 노아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백영기)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그러나 노아는/ 창6:1-8/ 2002-04-08
그러나 노아는 창6:1-8 노아 시대는 장차 올 종말의 표상입니다. (마 24 : 37 - 39)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예수께서 말세를 설명하실 때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말세의 특성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즉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일에 몰두하여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절대 필요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일상 생활에만 몰두하다보면 그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인 감각, 즉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려 \\\'왜 사는 지\\\'를 모르고 그냥 무의미하게 살며, 한 술 더떠서 \\\'될 대로 되라\\\'하며 삽니다. 이것이 종말이 가까운 삶의 특성입니다. 본문 말씀에도 노아 시대를 휩쓸었던 종말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부패성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일상 생활과 부패한 생활가운데 깊은 죄악의 잠에 빠져, 그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나팔 수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악 된 생활에 눈이 멀어 있을 때에 홀로 깨어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8절 말씀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노아의 경건한 사람을 강조하였습니다. 노아는 종말이 다가오는 이 어두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노아의 모습을 통해 오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1.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호의,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친절입니다. \\\'은혜\\\'의 반대 개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판\\\'입니다. \\\'심판\\\'이란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결과\\\'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호의가 베풀어지는 사건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도 역시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5절 말씀은 그들의 행동이 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조차 악하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임박한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노아에게는 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만 죄가 있는데 있지 않습니다. 노아가 한치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9장 20-21절에 노아가 저지른 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과 노아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노아는 의인이고, 다른 이들은 다 죄인입니까?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과 노아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냐의 여부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노아와 같이 은혜를 입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은혜를 강조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입2:8)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입니다. 은혜를 입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 앞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죠? 심판 받는 이유는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차이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고, 안 받고 합니다. 미국 서부 개척 당시 텍사스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텍사스에서는 살인이 하도 많이 일어나,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어느 날, 한 술집에서 청년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청년이 권총으로 옆에 앉은 친구를 쏴 죽였습니다. 이 청년은 그 자리에서 잡혀서 경찰서로 갔습니다. 신원조회를 해보니 이 청년은 평소에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언제나 이웃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구명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간곡한 바램이 담긴 사연과 도장이 찍힌 탄원서를 주지사에게 제출했습니다. 탄원서를 읽은 주지사는 큰 감동을 받아 자신이 직접 그 청년을 만나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경찰서로 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살인을 하고 나서 성격이 변했습니다. 자포자기한 생각으로 난폭한 행동과 욕을 거침없이 하였습니다. 주지사가 사면장을 들고 그를 면회하려 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여러 사람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던 그는 그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창차 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려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기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했던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우리를 살려야 한다고 대신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우리를 위해 피와 땀과 눈물로 쓴 탄원서를 내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사면장을 들고 우리에게 오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면회를 거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될 대로 되라\\\'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그 사면장을 받으시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주님만 만나면 됩니다.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깨닫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받을 때, 구원을 얻습니다. 2. 의로운 사람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이 구절에서 \\\"의인\\\"과 완전한 자\\\"는 노아의 사람됨을 강조하기 위한 동의어입니다. 여기서 \\\"완전한 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사람\\\'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당세에\\\"라는 표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 시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노아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사 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의인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 종이 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해 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9절 말씀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으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은 유유상종하게 마련입니다. 비슷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의 비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인들과 어울린 일입니다. 물론 믿는 사람들이 선교를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 세상사람들과 어울릴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린 목적은 선교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백성들과 어울린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성경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이고, 사람의 딸들은 누구냐? 는 의문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하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UFO를 타고 온 우주인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사람\\\'이었던 \\\'셋의 후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이라 합니다. 셋의 혈통을 이은 경건한 자손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인의 후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던 경건한 사람들이, 불경건한 사람들인 네피림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네피림\\\'은 \\\'떨어진 사람들\\\', \\\'타락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딸들과 어울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니 그들을 \\\'용사\\\'라고 했습니다. 용사란 말이 좋은 의미로 들리는데, 여기서의 용사란 \\\'폭군\\\'이나, \\\'깡패\\\'라는 말입니다. 또한 \\\"고대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는 표현도 좋게 보이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악명 높은 사람들\\\'이었다는 표현입니다. 그 결과 노아가 살던 시대는 갈수록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부패하고 악해졌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까지 불경건한 사람들과 어울려 죄악에 빠져있는 시대에도 \\\"그러나 …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죄악의 물결 속에서 세상과 영합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의 모습을 본받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8절 말씀에 노아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백영기)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그러나 노아는/창6:1-8
그러나 노아는/창6:1-8 2003-05-21 11:22:19 read : 20 노아 시대는 장차 올 종말의 표상입니다. (마 24 : 37 - 39)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예수께서 말세를 설명하실 때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말세의 특성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즉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일에 몰두하여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절대 필요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일상 생활에만 몰두하다보면 그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인 감각, 즉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려 '왜 사는 지'를 모르고 그냥 무의미하게 살며, 한 술 더떠서 '될 대로 되라'하며 삽니다. 이것이 종말이 가까운 삶의 특성입니다. 본문 말씀에도 노아 시대를 휩쓸었던 종말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부패성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일상 생활과 부패한 생활가운데 깊은 죄악의 잠에 빠져, 그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나팔 수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악 된 생활에 눈이 멀어 있을 때에 홀로 깨어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8절 말씀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노아의 경건한 사람을 강조하였습니다. 노아는 종말이 다가오는 이 어두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노아의 모습을 통해 오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1.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호의,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친절입니다. '은혜'의 반대 개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판'입니다. '심판'이란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결과'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호의가 베풀어지는 사건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도 역시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5절 말씀은 그들의 행동이 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조차 악하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임박한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는 노아에게는 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만 죄가 있는데 있지 않습니다. 노아가 한치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9장 20-21절에 노아가 저지른 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과 노아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노아는 의인이고, 다른 이들은 다 죄인입니까?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과 노아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냐의 여부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노아와 같이 은혜를 입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은혜를 강조할 때, 반드시 따라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은혜의 방편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입2:8)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입니다. 은혜를 입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 앞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죠? 심판 받는 이유는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차이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고, 안 받고 합니다. 미국 서부 개척 당시 텍사스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텍사스에서는 살인이 하도 많이 일어나,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어느 날, 한 술집에서 청년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청년이 권총으로 옆에 앉은 친구를 쏴 죽였습니다. 이 청년은 그 자리에서 잡혀서 경찰서로 갔습니다. 신원조회를 해보니 이 청년은 평소에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언제나 이웃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구명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간곡한 바램이 담긴 사연과 도장이 찍힌 탄원서를 주지사에게 제출했습니다. 탄원서를 읽은 주지사는 큰 감동을 받아 자신이 직접 그 청년을 만나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경찰서로 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살인을 하고 나서 성격이 변했습니다. 자포자기한 생각으로 난폭한 행동과 욕을 거침없이 하였습니다. 주지사가 사면장을 들고 그를 면회하려 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여러 사람의 구명 운동에 힘입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던 그는 그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창차 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려고 이 땅에 오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기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했던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우리를 살려야 한다고 대신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우리를 위해 피와 땀과 눈물로 쓴 탄원서를 내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사면장을 들고 우리에게 오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면회를 거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될 대로 되라'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그 사면장을 받으시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주님만 만나면 됩니다.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깨닫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받을 때, 구원을 얻습니다. 2. 의로운 사람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이 구절에서 "의인"과 완전한 자"는 노아의 사람됨을 강조하기 위한 동의어입니다. 여기서 "완전한 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사람'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당세에"라는 표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 시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노아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사 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노아가 의인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 종이 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부족하고 죄 많은 인간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해 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9절 말씀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으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은 유유상종하게 마련입니다. 비슷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의 비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인들과 어울린 일입니다. 물론 믿는 사람들이 선교를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 세상사람들과 어울릴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린 목적은 선교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백성들과 어울린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성경에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이고, 사람의 딸들은 누구냐? 는 의문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하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UFO를 타고 온 우주인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사람'이었던 '셋의 후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이라 합니다. 셋의 혈통을 이은 경건한 자손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가인의 후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던 경건한 사람들이, 불경건한 사람들인 네피림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네피림'은 '떨어진 사람들', '타락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딸들과 어울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니 그들을 '용사'라고 했습니다. 용사란 말이 좋은 의미로 들리는데, 여기서의 용사란 '폭군'이나, '깡패'라는 말입니다. 또한 "고대의 유명한 사람들이었다"는 표현도 좋게 보이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악명 높은 사람들'이었다는 표현입니다. 그 결과 노아가 살던 시대는 갈수록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이 부패하고 악해졌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까지 불경건한 사람들과 어울려 죄악에 빠져있는 시대에도 "그러나 …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죄악의 물결 속에서 세상과 영합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답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의 모습을 본받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8절 말씀에 노아 대신 자신의 이름을 넣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백영기)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까마귀가 노아 방주에 보낸 메시지/ 창8:1-12
까마귀가 노아 방주에 보낸 메시지 창8:1-12 찬송: 40장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 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 4 칠월 곧 그달 십칠 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5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 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 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입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12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방주를 짓게 하실 때 노아에게 명하신 설계를 살펴보면 창이 옆으로 나 있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향해서만 나 있어서 방주 안에 일단 들어가게 되면 세상 물정을 도무지 알 수 없도록 했고, 그저 위로 하늘만 쳐다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방주에 노아의 가족을 이끌어 들이실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들도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을 우리의 예측과 같이 정결한 짐승들만 방주 속에 태우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깨뜨리고 오히려 정결한 짐승 일곱 쌍에다 부정한 짐승 둘을 넣어서 비유를 7대2로 하라고 그렇게 앞서 7장 2절에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7장 2절 말씀을 보면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또 새들도 그렇게 하라 라고 말씀을 해서 방주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깨끗한 것만 있은 것이 아니라, 정결한 짐승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타고 있어서 거기에는 까마귀도 돼지도 다 들어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 하늘에 창을 내시고 물을 쏟아 내리셨습니다. 원래 처음 천지를 창조할 때 내리셨던, 그 있게 하셨던 적당한 물의 양이 아니라 추가로 하늘로부터 물을 쏟아 내림으로서 이제는 산을 덮을 수 있는 물의 양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물의 분량 어느 정도, 육지가 어느 정도 드러나도록 이렇게 적당하게 하시지만 그 전체에 죄악이 가득한 사람들을, 그리고 짐승들을 멸하시려고 물 내리실 때에는 추가된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늘을 통해서 창을 내고 추가로 물을 쏟아 붓기는 40주야(晝夜)를 그렇게 하니 세상에서 가정 높은 산도 그냥 물 속에 다 잠기게 되어 버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 잠기고 나서 물이 창일하게 될 때 하늘 문을 닫았고, 땅속에서 솟아오르던 물을 일단 막으셔서 그쳤습니다만 그 많이 내렸던 물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가 과학적으로든지 어떤 면으로든지 생각해 볼 때 물은 줄어들 수가 없습니다. 한번 부어졌으면 세상 끝 날까지 물은 담고 있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날씨가 더워져서 증발하지요. 증발하면 이슬과 안개로 증발되어 구름이 됩니다. 구름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반드시 다시 내려옵니다. 여러분께서 비행기를 타보신 분들은 알지만 비행기 위로는 절대로 물이 올라가지 못합니다. 못 올라갑니다. 아무리 큰비의 큰 구름이라도 비행기 밑에 있습니다. 우리 국내선정도로 구름 밑으로 비행기가 가기도 하지만 적어도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 구름이 비행기 위에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행기타고 올라가면 흐린 날이 도무지 없습니다. 아래쪽은 번개를 치고 야단이라도 언제나 태양뿐입니다. 그래서 물이 위로 올라간다 하더라도 결코 일정거리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서 비로 내려오든지, 안개로 이슬로 결국 다 내려오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있기 조금 전에 7장 24절에 보면 \\\"물이 일백 오십 일을 땅에 창일 하였더라\\\" 했는데 이렇게 엄청난 모든 산까지 다 덮어버린 창일 했던 물이 어디로 갔기에 지금 우리가 산을 보며 이 들에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신기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무조건 틀려도 믿어야 되고, 맞아도 믿어야 되고, 그냥 하나님 말씀이니까 믿어야 된다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만큼 과학이나 지식이 못 갔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지 이 모든 우주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섭리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움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지으신 말씀 안에 다 있습니다. 결국 발견해보면 하나님이 이미 하신 대로를 발견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 많은 물이 어떻게 되었느냐에 대해서 무리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매우 과학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 창세기 8장 1절-5절을 보면 이 물은 없어질 수 없을 만큼 하늘에서 추가로 쏟아졌는데 이 추가로 쏟아진 물은 한편으로 몰아붙였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성경을 보실까요? 8장 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짐승들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창8:1-3) 어떻게 물이 물러가고 또 점점 물러갔겠는가? 바람으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노아의 사건은 많이 읽고 있지만 바람이 물을 갖고 갔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신경 쓰지 않고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큰 사건, 물의 큰 이동이라든지 이 지구를 붙잡고 있는 것은 바람에 의하고 있다 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다음에 있는 출애굽기 14장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저 홍해에 있던 큰 바다가 둘로 갈라지고 그 속에 사람들이 육지처럼 건너가게 된 것도 바람의 역할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바람이 있다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바람은 특수한 바람이지요. 왜 특수하냐 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바다를 둘로 쪼갤 정도로 바람이 분다면 그리고 그 바다가 합쳐지지 않을 만큼 큰 물 벽을 만들 정도로 큰바람이 바다를 둘로 갈라 붙여서 밤새도록 밀어 붙였다면 그 속에 지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날라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속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치마 자락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은 그 천사들을 큰바람으로, 우레 소리로, 번개로 사용하시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것인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도 이 바람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다 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에 바람이 어떻게 될 것인지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한번 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약 마지막 성경 요한 계시록 7장을 열어 주십시오. 요한계시록 7장 1절부터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땅에 되어질 것을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당겨서 장래에 되어질 것을 보여주었는데 \\\"땅 네 모퉁이에…\\\" 이 우주의 네 모퉁이에 큰 힘센 천사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했더니 바람입니다. 바람인데 이 천사들이 \\\"지금 놓을까요? 언제 이것을 놓아야 될까요\\\" 하나님께서 \\\"아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기다려라\\\" 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이스라엘의 인맞은 자의 수가 십 사만 사천에 이르고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내 가족으로, 천국시민으로 구원받아 들어오기까지 기다려라. 땅을 날리면 안된다.\\\" 합니다. 그래서 그 수가 차서 인자의 날에 내가 말하면 그때는 네가 그 잡고 있는 바람을 놓아 버리면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듯이 날라 갈 것이며, 이 땅이 뜨거운 체질에 녹듯 녹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확 풀어지면 안에 불덩이만 나오는 것이지요. 이 땅속은 물 덩이지요. 그러니까 이 큰 바람을 하나님의 큰 천사들에 의해서 붙들어서 오늘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은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붙들고 있으라 하는 날까지만 존재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그 동일한 말씀으로 이 땅을 끝내신다 하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영원히 살 곳으로 여기지 말고 여기에 붙어있는 날 동안 하늘에 저축을 하도록 우리는 하늘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 8장으로 돌아가서 창조(創造)에 대해서 공부 좀 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8장 3절을 보니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무엇에 의해서 물러갔다고요? 바람에 의해서 물러갔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점점 물러가니까 어떻게 되었느냐? 이제 바다가 솟아날 정도로 되었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 물위라고 하는 것은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쪽으로 밀어붙인다고 한쪽으로 물이 가서 붙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물러가고 물러갔으면 반드시 다시 흘러야 될텐데, 한번 다시 나온 산은 그대로 산이요. 그리고 다시 나온 들은 계속해서 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과학을 하고 가장 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들은 \\\"이것은 참 이해 안되는 불가사이한 일이 있다. 저 남극에 있는 북극에 있는 빙산, 얼음산의 물이 다 녹아진다면, 얼음이 깨뜨려진다면 그 물의 양이 온 세상을 덮고도 남을만한 큰 물의 양인데 이 빙산이 녹으면 큰 일이다.\\\" 해서 지구의 온난화를 막아야 된다 라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가 조금씩 조금씩 온도가 높아가면서 그런데 사실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이 땅이 열을 받은 것 같아요. 열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희가 어릴 때 굉장히 추웠거든요. 굉장히 추웠어요. 그런데 이 남쪽이라도 바다 물이 종종 얼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는 별로 추운 줄 모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아하, 전에는 못 먹고 못 살아서 배속에 기름끼가 없으니까 조금 추워도 덜덜 떨었던 것이 아닌가? 지금은 시설도 좋고, 난방 온방 다 되고 배에 기름이 있으니까 그저 추위를 못 타서 그런가?\\\' 하지만 실제적으로 지구의 온도는 올라가고 있어서 제일 큰 걱정이 \\\'그 얼음이 녹으면 어떡하느냐?\\\' 그렇게 걱정을 한다는데, 그 얼음의 물의 양은 지구의 모든 산을 덮고도 남을 양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파악을 해서 수치적으로 과학자들이 또 그것을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 때에 하늘에 창을 내어서 물을 추가로 내려 부어버리니 온 땅이 물 속에 들어가서 그 산위로 배가 돌아다녔다는데, 그런데 그 물을 하나님이 바람으로 밀고밀고. 그러니까 이 바람은 마치 동풍으로 홍해를 가르던 그 바람이 아니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물을 밀어가지고 나갈 정도면, 조금 해일일어 나는 것, 한 1m정도 바다물이 불어나게 하는 바람이어도 사라호 태풍 같은 큰 태풍이어야 됩니다. 그러니 바다를 가른 바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치마 자락도 흔들리지 않게 했다면 그것은 특수한 바람이고, 지금 노아 때의 이 엄청난 물을 몰고 갔다면 이것은 홍해 때보다 훨씬 큰 것인데 어떻게 방주가 날라 가지 않았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이 하나님의 바람이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볼 수 있느냐? 갈라진 홍해로서도 알 수 있지만 또 한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제 이 바람이 몰고 간 물이 어디 있느냐? 이 바람이 몰고 간 그 물의 위치를 우리가 찾아본다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알 수 있을 것인데, 이 지구를 이제 파악할 만큼 다 파악해서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이 있다면 남극과 북극에 큰 얼음덩이로 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그러면 끌고 가서 얼음을 만드셨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많이 쏟아졌다는 말자체가 거짓말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 쉽겠지요. 성경을 보면 그렇습니다. 바로 그 빙산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리고 그 빙산을 만들기 위해서 이쪽 끝과 저쪽 끝으로 물을 바람으로 끌어간 사실을 성경에서 확실히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 욥기를 한번 찾아보시겠습니다. 구약성경 욥기서 제37장 제가 가진 성경은 797페이지입니다. 욥기 37장 5절-13절까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기이히 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비로 그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짐승들은 숨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 굴에 머물며 남방 밀실에서는 강풍이 이르고 북방에서는 찬기운이 이르며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지느니라\\\"(욥37:5-10) 그러니까 북방 이쪽 끝과 저쪽 끝으로 찬 기운을 하나님이 불어내니까 바람에 의해서 몰려온 이 물들이 그냥 다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얼음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니 물의 면적이 적어져버렸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는 물의 면적이 바람에 밀려가고서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밀려가고서는 되돌아오지 않으니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그 북방에 찬 기운을 내어서 밀어 얼려버리니까 이 얼음이 덩어리가 되어 있으니, 이리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니 물이 바람에 의해서 밀려갔던 쪽에서는 넓이가 줄어져버렸다. 그렇게 해서 지금 얼음으로 이 물을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과학적으로 무엇을 발명했다 무엇을 발명했다 하지만 욥기 37장에 나온 이 연대를 볼 것 같으면 아문젠이 어디를 발견하고, 리빙스턴이 어디를 발견하고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남극과 북극을 발견하고 지구가 둥글다고 안 것도 갈릴래오 시대, 바로 얼마 전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언제 것을 지금 기록했습니까? 창세 때의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것을 발견하는데 불과한 것이지 없는 것을 창조는 못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하나님께서 이 우주가운데 담아둔 모든 것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아무리 인간이 많이 나가도 하나님께서 한 것을 발견하는데 불과한 것이지, 이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오늘날 이렇게 전파가 날라 다니고, 컴퓨터 시대가 될 것을 이미 창세기 때부터 다 써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면 하나님이 창조 해 놓은 것을 앞으로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을 어찌 믿지 않겠느냐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이 만물 가운데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참으로 무식하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배신적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게되면 어떻게 해여 아랍 쪽에, 그 사막 밑에 그 큰 기름 탱크가 있어서, 유전이 있어서 그렇게 온 세상이 기름을 뽑아 쓸 수 있는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유전이 생겼는지 유전이라는 것이 뭡니까? 기름입니다. 그 기름이 어떻게 거기에 다 있게 되었는가 성경 보면 다 나옵니다. 또 성경을 보면 지금 세상이 이렇게 모두 평화하자 평화하자 하면 평화쪽으로 몰려갑니다. \\\"이제는 이념싸움하지 말고 서로 행복하게 살자.\\\" 국제화 시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계화 시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미국, 유럽이 잘 살면 우리도 같이 살고, 우리가 만든 것 너희가 쓰고, 너희가 만든 것 우리가 쓰고 잘 살아보세. 같이 잘살아보세. 이제 무기를 꺾어버리세\\\' 이런 시대가 옵니다. 그 말은 곧 무엇입니까? 때가 가까워온 줄 알아야 되는데, 이 제한된 덩어리 속에 살면서 네 귀를 붙잡고 있는 바람에 의해서, 아직 놓이지 않아서 붙어사는 이 땅에 살면서 영원히 행복할 시대가 계속 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바로 지금의 시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알 것을 바로 알아야 된다 하는 바로 그런 것이지요. 또 한가지 이 말씀이 기왕에 나왔으니 11절부터 봅시다. 욥기 37장입니다.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신즉 구름이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세계상에 이루려 함이라 혹 징벌을 위하며 혹 토지를 위하며 혹 긍휼 베푸심을 위하여 구름으로 오게 하시느니라\\\"(욥37:11-13) 이제 중,고등부나 성도님들이나 청년들이 무슨 야외행사를 나갈 때 \\\'주여, 좋은 일기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면 어른들이 생각하기를 \\\'임마 네 기도한다고 되는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지, 비가 올 것 같으면 우비를 갖고 나가면 되는 것이지, 기도한다고 이놈아 올 비가 안 오고 그렇게 되느냐?\\\'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자연스러운 것은 곧 하나님스러운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자연스러운 것은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없다 라고 하려고 하는데, 모든 자연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해 나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징벌을 위하여 가던 구름을 돌릴 수 있다.\\\" 그랬습니다. \\\"복을 주기 위하여 안 가던 구름을 돌려서 이슬과 이른비와 늦은비를 내릴 수 있다.\\\" 분명히 성경이 그랬습니다.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하늘에 창이 나서 쏟아진 이 엄청난 물을, 온 세상을 덮은 물을 바람으로 이끌어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오늘 욥기 37장 11절-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징벌을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구름을 돌릴 수도 있다.\\\" 라는 겁니다. 만약에 자연 그대로 자연스럽게만 된다면 일기예보를 우리는 100% 믿어도 될 것인데, 분명히 비가 온다고 하다가 안 올 때가 많습니다. 바람이 이리로 갈 것이라고 했는데 획 방향을 바꿀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바꾸는 것 보고 바꾸었습니다 그럽니다.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이 온도는 어떻고, 계절이 어떻고 하면 꼭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그렇게 안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렇게 발달된 시대에도 구름이 움직이는 것, 바람의 방향을 누구든지 예측을 미리 못합니다. 거의는 자연스럽게 되지만 특수한 환경이 발생하는 것은 누구도 예측을 못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징벌을 위하여서도 구름을 돌릴 수도 있고, 복을 위하여서도 구름을 돌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여, 좋은 날씨를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 당연합니다. 들어주시는 것과 안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 뜻에 있지만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뜻밖에 구름이 끼고 날씨가 안좋다고 했는데 주의 이름으로 일하러 나갔더니 그날 기후가 아주 좋아서 잘 지냈을 때 하나님께서 좋은 일기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댄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을 때야 어차피 좋은 날을 가지고 하나님 찾네 할지 모르겠지만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졌다 라는 것입니다. 원래 아합의 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을 가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딴 길로 가는 것을 보고서 \\\"이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할 것이다\\\"고 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비 내리려고 가던 자연스러운 구름을 하나님께서 그 종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 계속 돌려버렸어요. 3년 6개월을 돌려버리니 늘 와야되는 비가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이 죽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비를 주십시오. 비를 주십시오.\\\" 했더니 \\\"비를 못 오게 한 엘리야가 다시 비가 오도록 기도한다면 비를 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줄 수 없다\\\" 해서 엘리야를 모셔다가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3년6개월이나 지나 이제 마음이 변해서 기도를 하니까, 손바닥만한 구름이 없던 것이 착 나타나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몰고 오는도다. 빨리 수레를 타고 큰비가 내릴 테니 집으로 빨리 들어가시오, 피하시오.\\\" 이렇게 되어서 그 땅에 비가 내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어렵게 하려고 했던 나라에, 이삭의 아내를 범하려고 했던 나라를 하나님께서 기분 나쁘게 여기시고 그 나라 온 여성의 태를 닫아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태를 열어 우리가 민족을 이어가게 해 주소서\\\" 기도했을 때 \\\"이것은 내 마음대로 지금 하지 않겠다. 내가 누구누구 어려움 당한 것 때문에 닫았으니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빌어준다면 내가 풀어주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과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움직이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결정과 우리의 결정하는 것, 이것을 해야 되겠다 라고 결정하는 것도 잘되는 쪽으로만 갈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실패할 때만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움직이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겠습니다만 한번 어딘가 모처럼 관광을 나갔다든지, 무엇인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원래 모든 일기예보대로라면 그냥 다 망쳤을 것인데, 그런데 가는 곳, 자기가 가는 날마다 기후가 좋아서 저 멀리까지 관광을 했다 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일기마저 조정해 주셨다면,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고, 저에게도 크고 작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구름마저 움직여 주신 것을 경험한 경험이 많고, 제 주위에 있는 분들이 \\\"어찌 목사님 오시는 날에는 어떻게 이런 현상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라는 것을 매번, 왜냐하면 저는 가는 곳마다 겨울에, 여름에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일기가 불순하나 마나 가는데, 갈 때마다 이런 얘기는 거의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자주 얘기 하다보면 필요이상의 해석들을 할까봐 말씀을 안드립니다만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깨닫는 바 하나님께서 이토록까지 붙들어 주십니까 하고 감사할 수 있는 때가 많았던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여러분 항상 앞에 있게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큰 역사, 오늘 이 성경을 통해서 창조과학(創造科學)을 얘기하다 보니까 주제를 떠나서 한참 공부할 것 같아서 이제 창조과학 그만하고 주제로 돌아갑시다. 오늘 주제가 뭡니까?「까마귀가 노아 방주에 보낸 메세지」이런 주제로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40주 40야, 그러니까 창세기 7장 12절에 보면 40주40야를 비가 내렸고, 또 7장 24절에 보면 그 비내린 후에 150일을 창일했습니다. 그리고 그 150일이 지난 40일 후, 8장 6절에 보면 40일 후에 이제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습니다. 창이 위로밖에 나와 있지 아니하니 세상 물정을 알 수가 없어서 이 까마귀를 내어 보내는데, 우리는 이 까마귀와 비둘기에 대해서 평가를 극과 극으로 합니다. 역시 부정한 놈, 까마귀 이놈은 까마귀 같아. 이놈은 나가서 돌아오지도 않아. 배은 망덕한 놈이야! 그런데 비둘기는 돌아와서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어다 주었으니 역시 정한 정결한 짐승은 달라. 어디가 달라도 달라. 이렇게 말하면서 이 짐승들에 대해서 상당히 의미를 부여하고 이 하찮은 짐승에게까지 의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제가 볼 때에는 짐승은 짐승일 뿐입니다. 까마귀는 까마귀 같고, 비둘기는 비둘기 같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까마귀를 그렇게 욕하지 않습니다. 노아도 그렇게 욕하지 않습니다. 노아 가정이 지금 이 까마귀를 내어 보낼 때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기를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이 까마귀를 내어 보낼 때의 시기는 언제입니까? 그 갑갑한 방주에 들어간지 230일이 지나는 그런 때입니다. 그런 때에 지금 혹시 우리가 육지로 가야 되겠는데, 언제 육지가 우리에게 올지, 수 백일이 지나고 보니 육지가 몇 십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하늘로서 쏟아진 물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온 세상을 덮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특수한 능력의 바람으로 물을 남극과 북극으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제 까마귀를 내어 보내봅니다. 이 까마귀는 높은 산이든지 어디든지 발붙일 때만 있으면 안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아는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비둘기는 지금 보내봤자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온 천지에 물인데 저 산꼭대기 하나라도 발붙일 곳이 있는가를 찾으려면 까마귀가 적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내어보냅니다. 제아무리 잘 나르고 잘 날라도 이틀 사흘 계속 날수는 없는 겁니다. 이 까마귀가 멀리 날수 있는 짐승이지만 발붙일 곳이 없으면 반드시 날라 올 것입니다. 이 까마귀를 내어놓는 노아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제발 까마귀 네가 안 돌아올 수만 있었다면 네가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곧 상륙할 수 있을 것인데\\\' 해서 까마귀를 내어 보내놓고 문은 열고 있습니다. 안 돌아오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산 봉오리가 나타났구나. 할렐루야!\\\" 이 노아에게는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최고의 기쁨이요, 최고의 메시지였습니다. 까마귀가 오히려 만약에 훨훨 날라서 까마귀가 되돌아서 돌아왔으면 \\\"이 자식들아, 이 며느리들아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지 모르겠네. 우리는 여기에서 이제 먹을 것도 다 떨어져 가는데 희망이 없네\\\" 할텐데 까마귀가 안 돌아오니까 그냥 잔치가 일어날 판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짐승은 짐승입니다. 짐승의 특성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까마귀가 안 돌아 왔다고 b면 \\\"물이 자꾸만 자꾸만 빠지는 모양이니 일주일을 더 기다려보세.\\\" 해서 그 다음에 비둘기를 내어 보냅니다. 이 노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산꼭대기가 관심이 아닙니다. 노아의 관심은 땅이 드러나야 됩니다. 그래야 씨를 뿌리고 포도를 심을 수가 있습니다. 땅이 드러나기를 바라는데, 그 다음에 비둘기를 보내봅니다. 이 비둘기가 나가더니 활활 돌아다니더니 그냥 들어옵니다. 성경을 보면 그때 아무 것도 안 물고 들어왔어요.들어오니까 노아가 실망하지요. \\\"아이구, 이 비둘기가 안 돌아와야 우리가 살수 있을 텐데, 일주일쯤 더 있어보자.\\\" 더 있어봅니다. 지금 완전히 수심을 제는 겁니다. 일주일을 더 기다렸다가 비둘기를 내어보냈더니 이 비둘기가 돌아다니다가 잎사귀가 파란 것이 있어서 살 것 같아서 나무 위에 앉으려다 보니까 감람나무 잎사귀는 높은 산에 없습니다. 산 중허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감람나무 잎사귀를 입에 따고 물고서 가지에 앉으려고 하니까 물이 쑥 빠지니까 날아서 입에 문체로 다시 들어옵니다. 노아가 생각하기를 \\\'물이 감하였구나. 산허리가 나타났구나. 감람나무 있는 잎사귀가 나타났구나. 그러나 아직 더 살수 없어!\\\' 일주일을 더 기다립니다. 물이 속히 빠져갑니다. 그때에는 무엇입니까? 그때에는 물이 점점 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으로 바람으로 북극으로 끌고 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북극에서는 찬 기운을 내어서 얼게 합니다. 냉동실치고는 최고의 냉동실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얼게 합니다. 그래서 물이 점점 감하여 가는데 다시 일주일을 기다렸습니다.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보냈더니 돌아왔습니까? 안 왔습니다. 자기 먹고 살 형편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돌아옵니까? 그래서 이 비둘기도 세번째 내어보냈더니 안 돌아왔습니다. 안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이제 우리가 나가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짐승은 짐승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짐승을 놓고서 \\\'까마귀는 의리 없는 놈이고…\\\' 까마귀는 까마귀일 뿐이지 무슨 의리가 있겠어요? \\\'비둘기는 의리 있는 짐승이고…\\\' 아니 비둘기는 비둘기일 뿐이지 무슨 의리가 있겠어요? 사람에게서 의리를 찾고 하나님에게 신의를 지켰어야지, 이런 짐승을 보고 의리 찾고 훌륭한 짐승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우상 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짐승은 짐승일 뿐입니다. 이 노아는 까마귀를 활용했고, 비둘기를 활용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했으니 우리가 비둘기에게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비둘기를 부려먹으시기를 바랍니다. 까마귀에게 악평을 보낼 것이 아니라 까마귀는 제 사명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아라는 남자는 까마귀의 속성을 알고, 그리고 까마귀가 거닐 수 있는 위치를 알고, 비둘기 속성과 그 위치를 앎으로서 산 봉오리 드러난 것과 허리 드러난 것과 그리고 땅이 드러난 것과 바다의 수심이 어느 정도 물러갔다는 것을 이 짐승을 통해서 다 재고 나왔으니 우리는 까마귀를 나쁜 짐승이라고 사람 취급할 것이 아니고, 그저 까마귀도 사명을 다 했구나. 성경은 까마귀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노아는 까마귀를 통해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백 몇십 일만에 뭍이 드러났다는 소식을 이 까마귀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열려진 하늘만 쳐다보고 주여주여 하고 살다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 도무지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속에는 까마귀도 실었고 비둘기도 실어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되겠습니까? 까마귀를 통해서도 하나님 하시는 일을 발견하고, 비둘기를 통해서도 하나님 하시는 일을 발견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메시지는 여러분께서 들으시면서 \\\'아, 물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갔구나. 바람이 불어가지고 옮겨갔고, 그리고 저 북방에서 찬 기운을 내어서 얼려 버리니까 지금 되돌아오지 않고 있구나\\\' 여기에서 끝나지 마시고 누가 그리 하셨는지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를 시험케 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나, 너희를 시험할 수 있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나….\\\" 그랬어요. 그것은 뭡니까? 바울의 몸에 가시가 있었어요. 바울의 몸에 실례할 일이 있었어요. 성도들 보기에 참 민망한 것이 있었어요. \\\"하나님, 이 가시가 내게서 떠나가지 아니하면 내가 목회 할 수 없겠사오니 이 가시를 물리쳐 주시옵소서\\\" \\\"네 은혜가 족하도다 그러나 그것이 네 몸에 있을 뿐이지 나는 너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제어보리라. 그가 믿는지, 못 믿는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까마귀가 있을지라도 까마귀를 지칭하여 나무라기에 앞서지 마시고, 까마귀가 보이거든 내가 어디 있는가? 까마귀를 통해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발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노아의 홍수가 어떠하고, 물이 어디로 가고 하는 과학적인 데에만 머물지 마시고, 지금 적은 바람 큰바람, 큰비 적은비 올 때, 지진이 오고 전쟁의 소식 일어날 때, 평화 합시다 평화 합시다 하고 사방에서 \\\'태평양 지역도 평화 합시다 유럽지역도 평화 합시다, 미국 남미와 북미도 평화 합시다, 동아시아도 평화 합시다\\\' 평화 평화하자고 할 때 평화만 보지 마시고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셔야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 저주를 받았다, 누군가가 실패했다는 것은 그 실패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의 입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체크하시겠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아는데 까마귀를 없었으면 되지 않습니다. 부정한 것이 없었으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땅이 드러난 것을 아는데 이 비둘기가 없었으면 되지 않습니다. 짐승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우리의 이웃들의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형편에 서 있는가를 자신을 돌아보는 이런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과 저것과 여러 가지로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네 위치가 어디 있다는 것을 항상 가르쳐 주고 계신데, 그것을 모르고 이웃 사람들이나 평가하고 정죄하고, 그저 내가 부자다 하는 것만 보고 있다면 그의 내일이 어찌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구름도 필요 없으면 돌려주시고, 필요하면 옮겨주시는 일이 있게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입니다. 지금도 분명히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을 위하여 건강의 훈풍을, 성공의 훈풍을 몰아올 수도 있고, 복 줄을 미리 떠나가게도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후에 뒷 북을 칠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어쩔 수 없이 누가 하라고 그래서 싫은데도 붙잡아 놓았더니 갑자기 이제 돈이 올라갔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될 줄 알고 전 재산 투자해서 넣었더니 딱 내가 등기하고 나니까 홀랑 내려 가버렸다 라고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결정까지도 하나님이 주관 하시나니 하나님의 손에 여러분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주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졌고 그리고 그에 의해서 축복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돈을 쫓아갈 것이 아니라 돈이 쫓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항상 있도록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니 한 사건 한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방주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답답한 곳이었습니다. 답답하지 아니하고 방주가 천국 같았으면 왜 나오려고 까마귀 내어 보내고, 왜 나오려고 비둘기 내어 보내고 하겠습니까? 왜 답답합니까? 부정한 것이 섞여 있으니까 답답하지요. 부정한 것이 섞여 있으니 안 맞지요. 그래서 뛰쳐나가고 싶지요. 왜 부정한 것을 함께 실어놓았을까요? 뛰쳐나가고 싶어서, 뛰쳐나가고 싶도록 했어요. 이 방주는 무엇입니까? 큰 죽음의 재난을 잠시 면하는 배였습니다. 그리고 전에 보다 더 좋은 신천신지(新天新地), 죄도 없고 악도 없는 신천신지에 감람나무 새 잎이 나오는, 새 포도주를 먹을 수 있는 땅이 올 때에는 나가야 하는 것이 방주였습니다. 신천신지가 이루어졌는데도 나가지 않고 방주 속이 좋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방주는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곳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이 교회는 사랑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곳입니다. 이 교회는 죄인이라도 의인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 속에는 의와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내가 어느 짐승의 역할을 할 것인가? 그것은 자기가 하면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답답하기 때문에 더 좋은 천지만 온다면, 이 부정한 것이 없어질 수만 있다면 하고서 뛰쳐나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교회로부터 구원을 받으십시오. 질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으십시오. 사망으로부터 영생을 얻으십시오. 가난으로부터 부요를 얻으십시오. 불행으로부터 행복을 얻으십시오. 그러나 더 좋은 세계가 이 방주선에 도달하게 될 때에는 방주를 미련 없이 떠나실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여러분이 생각하는데 이 방주는 천년만년 살 곳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언제까지 필요한 것인가? 방주를 타지 아니하면 새 천지가 오기 전에 죽고 맙니다. 신천신지가 이루어 질 때까지는 방주가 싫어도 방주 속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천신지가 이루어졌다는, 그리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산 봉오리가 드러나고, 물이 물러가고 또 물러간다 그랬습니다. 또 물러가고 또 물러가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부정한 짐승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정결한 짐승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끝 날이 되어간다는 것을 이 교회 안에 있으면서 발견하시고 주님의 날, 인자의 날, 신천신지라고 하니까 \\\'아이구, 세상이 더 행복하다\\\' 여러분, 세상은 사망입니다. 방주보다 좋은 곳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자의 날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살 곳인데, 그곳이 오는데도 이 속에 있으려 하지 마시고 뛰어 나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라야 튀어나갈 수 있습니까? 만족하지 못해야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족하지 못할 때에는 무엇을 기다립니까? 만족한 나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그러나 여러분 중에, 이 교회 중에 답답함을 주는 사건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 교회는 천국에 이르기 전까지는 뛰쳐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함께 버티다가 새 하늘과 새 땅, 내가 발을 디뎌도 될 주님의 나라가 여러분 앞에 오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방주에 머물지 말고, 방주를 뒤돌아보지도 말고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사는 방주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방주에서는 사모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는 나의 영혼이 거할 곳이 못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야 됩니다. 이 세상은 죽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 나라여 내게 임하시옵소서! 속히 오시옵소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는 것이 되어야 될텐데. 비만 봅니까, 바람만 봅니까, 까마귀만 봅니까, 비둘기만 봅니까? 여러분, 비둘기를 통해 하나님 보시고, 까마귀를 통해 하나님 보시고, 비를 통해 하나님 보시고, 물이 물러감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까마귀가 노아 방주에 보낸 메시지/ 창8:1-12/ 2001-08-28
까마귀가 노아 방주에 보낸 메시지 창8:1-12 찬송: 40장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 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 4 칠월 곧 그달 십칠 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5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 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 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입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12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방주를 짓게 하실 때 노아에게 명하신 설계를 살펴보면 창이 옆으로 나 있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향해서만 나 있어서 방주 안에 일단 들어가게 되면 세상 물정을 도무지 알 수 없도록 했고, 그저 위로 하늘만 쳐다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방주에 노아의 가족을 이끌어 들이실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들도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을 우리의 예측과 같이 정결한 짐승들만 방주 속에 태우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깨뜨리고 오히려 정결한 짐승 일곱 쌍에다 부정한 짐승 둘을 넣어서 비유를 7대2로 하라고 그렇게 앞서 7장 2절에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7장 2절 말씀을 보면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또 새들도 그렇게 하라 라고 말씀을 해서 방주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깨끗한 것만 있은 것이 아니라, 정결한 짐승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타고 있어서 거기에는 까마귀도 돼지도 다 들어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 하늘에 창을 내시고 물을 쏟아 내리셨습니다. 원래 처음 천지를 창조할 때 내리셨던, 그 있게 하셨던 적당한 물의 양이 아니라 추가로 하늘로부터 물을 쏟아 내림으로서 이제는 산을 덮을 수 있는 물의 양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물의 분량 어느 정도, 육지가 어느 정도 드러나도록 이렇게 적당하게 하시지만 그 전체에 죄악이 가득한 사람들을, 그리고 짐승들을 멸하시려고 물 내리실 때에는 추가된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늘을 통해서 창을 내고 추가로 물을 쏟아 붓기는 40주야(晝夜)를 그렇게 하니 세상에서 가정 높은 산도 그냥 물 속에 다 잠기게 되어 버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 잠기고 나서 물이 창일하게 될 때 하늘 문을 닫았고, 땅속에서 솟아오르던 물을 일단 막으셔서 그쳤습니다만 그 많이 내렸던 물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가 과학적으로든지 어떤 면으로든지 생각해 볼 때 물은 줄어들 수가 없습니다. 한번 부어졌으면 세상 끝 날까지 물은 담고 있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날씨가 더워져서 증발하지요. 증발하면 이슬과 안개로 증발되어 구름이 됩니다. 구름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반드시 다시 내려옵니다. 여러분께서 비행기를 타보신 분들은 알지만 비행기 위로는 절대로 물이 올라가지 못합니다. 못 올라갑니다. 아무리 큰비의 큰 구름이라도 비행기 밑에 있습니다. 우리 국내선정도로 구름 밑으로 비행기가 가기도 하지만 적어도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 구름이 비행기 위에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행기타고 올라가면 흐린 날이 도무지 없습니다. 아래쪽은 번개를 치고 야단이라도 언제나 태양뿐입니다. 그래서 물이 위로 올라간다 하더라도 결코 일정거리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서 비로 내려오든지, 안개로 이슬로 결국 다 내려오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있기 조금 전에 7장 24절에 보면 \\\"물이 일백 오십 일을 땅에 창일 하였더라\\\" 했는데 이렇게 엄청난 모든 산까지 다 덮어버린 창일 했던 물이 어디로 갔기에 지금 우리가 산을 보며 이 들에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신기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무조건 틀려도 믿어야 되고, 맞아도 믿어야 되고, 그냥 하나님 말씀이니까 믿어야 된다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만큼 과학이나 지식이 못 갔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지 이 모든 우주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섭리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움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지으신 말씀 안에 다 있습니다. 결국 발견해보면 하나님이 이미 하신 대로를 발견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 많은 물이 어떻게 되었느냐에 대해서 무리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매우 과학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 창세기 8장 1절-5절을 보면 이 물은 없어질 수 없을 만큼 하늘에서 추가로 쏟아졌는데 이 추가로 쏟아진 물은 한편으로 몰아붙였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성경을 보실까요? 8장 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짐승들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창8:1-3) 어떻게 물이 물러가고 또 점점 물러갔겠는가? 바람으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노아의 사건은 많이 읽고 있지만 바람이 물을 갖고 갔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큰 신경 쓰지 않고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큰 사건, 물의 큰 이동이라든지 이 지구를 붙잡고 있는 것은 바람에 의하고 있다 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다음에 있는 출애굽기 14장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저 홍해에 있던 큰 바다가 둘로 갈라지고 그 속에 사람들이 육지처럼 건너가게 된 것도 바람의 역할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바람이 있다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바람은 특수한 바람이지요. 왜 특수하냐 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바다를 둘로 쪼갤 정도로 바람이 분다면 그리고 그 바다가 합쳐지지 않을 만큼 큰 물 벽을 만들 정도로 큰바람이 바다를 둘로 갈라 붙여서 밤새도록 밀어 붙였다면 그 속에 지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날라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속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치마 자락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은 그 천사들을 큰바람으로, 우레 소리로, 번개로 사용하시기도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것인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도 이 바람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다 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에 바람이 어떻게 될 것인지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한번 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약 마지막 성경 요한 계시록 7장을 열어 주십시오. 요한계시록 7장 1절부터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땅에 되어질 것을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당겨서 장래에 되어질 것을 보여주었는데 \\\"땅 네 모퉁이에…\\\" 이 우주의 네 모퉁이에 큰 힘센 천사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했더니 바람입니다. 바람인데 이 천사들이 \\\"지금 놓을까요? 언제 이것을 놓아야 될까요\\\" 하나님께서 \\\"아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기다려라\\\" 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이스라엘의 인맞은 자의 수가 십 사만 사천에 이르고 그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내 가족으로, 천국시민으로 구원받아 들어오기까지 기다려라. 땅을 날리면 안된다.\\\" 합니다. 그래서 그 수가 차서 인자의 날에 내가 말하면 그때는 네가 그 잡고 있는 바람을 놓아 버리면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듯이 날라 갈 것이며, 이 땅이 뜨거운 체질에 녹듯 녹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확 풀어지면 안에 불덩이만 나오는 것이지요. 이 땅속은 물 덩이지요. 그러니까 이 큰 바람을 하나님의 큰 천사들에 의해서 붙들어서 오늘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은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붙들고 있으라 하는 날까지만 존재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그 동일한 말씀으로 이 땅을 끝내신다 하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영원히 살 곳으로 여기지 말고 여기에 붙어있는 날 동안 하늘에 저축을 하도록 우리는 하늘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 8장으로 돌아가서 창조(創造)에 대해서 공부 좀 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8장 3절을 보니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무엇에 의해서 물러갔다고요? 바람에 의해서 물러갔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점점 물러가니까 어떻게 되었느냐? 이제 바다가 솟아날 정도로 되었습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 물위라고 하는 것은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쪽으로 밀어붙인다고 한쪽으로 물이 가서 붙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물러가고 물러갔으면 반드시 다시 흘러야 될텐데, 한번 다시 나온 산은 그대로 산이요. 그리고 다시 나온 들은 계속해서 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과학을 하고 가장 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들은 \\\"이것은 참 이해 안되는 불가사이한 일이 있다. 저 남극에 있는 북극에 있는 빙산, 얼음산의 물이 다 녹아진다면, 얼음이 깨뜨려진다면 그 물의 양이 온 세상을 덮고도 남을만한 큰 물의 양인데 이 빙산이 녹으면 큰 일이다.\\\" 해서 지구의 온난화를 막아야 된다 라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가 조금씩 조금씩 온도가 높아가면서 그런데 사실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이 땅이 열을 받은 것 같아요. 열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희가 어릴 때 굉장히 추웠거든요. 굉장히 추웠어요. 그런데 이 남쪽이라도 바다 물이 종종 얼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는 별로 추운 줄 모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아하, 전에는 못 먹고 못 살아서 배속에 기름끼가 없으니까 조금 추워도 덜덜 떨었던 것이 아닌가? 지금은 시설도 좋고, 난방 온방 다 되고 배에 기름이 있으니까 그저 추위를 못 타서 그런가?\\\' 하지만 실제적으로 지구의 온도는 올라가고 있어서 제일 큰 걱정이 \\\'그 얼음이 녹으면 어떡하느냐?\\\' 그렇게 걱정을 한다는데, 그 얼음의 물의 양은 지구의 모든 산을 덮고도 남을 양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파악을 해서 수치적으로 과학자들이 또 그것을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 때에 하늘에 창을 내어서 물을 추가로 내려 부어버리니 온 땅이 물 속에 들어가서 그 산위로 배가 돌아다녔다는데, 그런데 그 물을 하나님이 바람으로 밀고밀고. 그러니까 이 바람은 마치 동풍으로 홍해를 가르던 그 바람이 아니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물을 밀어가지고 나갈 정도면, 조금 해일일어 나는 것, 한 1m정도 바다물이 불어나게 하는 바람이어도 사라호 태풍 같은 큰 태풍이어야 됩니다. 그러니 바다를 가른 바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치마 자락도 흔들리지 않게 했다면 그것은 특수한 바람이고, 지금 노아 때의 이 엄청난 물을 몰고 갔다면 이것은 홍해 때보다 훨씬 큰 것인데 어떻게 방주가 날라 가지 않았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이 하나님의 바람이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볼 수 있느냐? 갈라진 홍해로서도 알 수 있지만 또 한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제 이 바람이 몰고 간 물이 어디 있느냐? 이 바람이 몰고 간 그 물의 위치를 우리가 찾아본다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알 수 있을 것인데, 이 지구를 이제 파악할 만큼 다 파악해서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이 있다면 남극과 북극에 큰 얼음덩이로 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그러면 끌고 가서 얼음을 만드셨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많이 쏟아졌다는 말자체가 거짓말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 쉽겠지요. 성경을 보면 그렇습니다. 바로 그 빙산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리고 그 빙산을 만들기 위해서 이쪽 끝과 저쪽 끝으로 물을 바람으로 끌어간 사실을 성경에서 확실히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 욥기를 한번 찾아보시겠습니다. 구약성경 욥기서 제37장 제가 가진 성경은 797페이지입니다. 욥기 37장 5절-13절까지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기이히 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비로 그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짐승들은 숨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 굴에 머물며 남방 밀실에서는 강풍이 이르고 북방에서는 찬기운이 이르며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지느니라\\\"(욥37:5-10) 그러니까 북방 이쪽 끝과 저쪽 끝으로 찬 기운을 하나님이 불어내니까 바람에 의해서 몰려온 이 물들이 그냥 다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얼음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니 물의 면적이 적어져버렸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는 물의 면적이 바람에 밀려가고서는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밀려가고서는 되돌아오지 않으니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그 북방에 찬 기운을 내어서 밀어 얼려버리니까 이 얼음이 덩어리가 되어 있으니, 이리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니 물이 바람에 의해서 밀려갔던 쪽에서는 넓이가 줄어져버렸다. 그렇게 해서 지금 얼음으로 이 물을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과학적으로 무엇을 발명했다 무엇을 발명했다 하지만 욥기 37장에 나온 이 연대를 볼 것 같으면 아문젠이 어디를 발견하고, 리빙스턴이 어디를 발견하고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남극과 북극을 발견하고 지구가 둥글다고 안 것도 갈릴래오 시대, 바로 얼마 전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언제 것을 지금 기록했습니까? 창세 때의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것을 발견하는데 불과한 것이지 없는 것을 창조는 못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하나님께서 이 우주가운데 담아둔 모든 것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아무리 인간이 많이 나가도 하나님께서 한 것을 발견하는데 불과한 것이지, 이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오늘날 이렇게 전파가 날라 다니고, 컴퓨터 시대가 될 것을 이미 창세기 때부터 다 써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면 하나님이 창조 해 놓은 것을 앞으로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을 어찌 믿지 않겠느냐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이 만물 가운데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참으로 무식하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배신적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게되면 어떻게 해여 아랍 쪽에, 그 사막 밑에 그 큰 기름 탱크가 있어서, 유전이 있어서 그렇게 온 세상이 기름을 뽑아 쓸 수 있는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유전이 생겼는지 유전이라는 것이 뭡니까? 기름입니다. 그 기름이 어떻게 거기에 다 있게 되었는가 성경 보면 다 나옵니다. 또 성경을 보면 지금 세상이 이렇게 모두 평화하자 평화하자 하면 평화쪽으로 몰려갑니다. \\\"이제는 이념싸움하지 말고 서로 행복하게 살자.\\\" 국제화 시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계화 시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미국, 유럽이 잘 살면 우리도 같이 살고, 우리가 만든 것 너희가 쓰고, 너희가 만든 것 우리가 쓰고 잘 살아보세. 같이 잘살아보세. 이제 무기를 꺾어버리세\\\' 이런 시대가 옵니다. 그 말은 곧 무엇입니까? 때가 가까워온 줄 알아야 되는데, 이 제한된 덩어리 속에 살면서 네 귀를 붙잡고 있는 바람에 의해서, 아직 놓이지 않아서 붙어사는 이 땅에 살면서 영원히 행복할 시대가 계속 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바로 지금의 시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알 것을 바로 알아야 된다 하는 바로 그런 것이지요. 또 한가지 이 말씀이 기왕에 나왔으니 11절부터 봅시다. 욥기 37장입니다.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신즉 구름이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세계상에 이루려 함이라 혹 징벌을 위하며 혹 토지를 위하며 혹 긍휼 베푸심을 위하여 구름으로 오게 하시느니라\\\"(욥37:11-13) 이제 중,고등부나 성도님들이나 청년들이 무슨 야외행사를 나갈 때 \\\'주여, 좋은 일기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면 어른들이 생각하기를 \\\'임마 네 기도한다고 되는가?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지, 비가 올 것 같으면 우비를 갖고 나가면 되는 것이지, 기도한다고 이놈아 올 비가 안 오고 그렇게 되느냐?\\\'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자연스러운 것은 곧 하나님스러운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자연스러운 것은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없다 라고 하려고 하는데, 모든 자연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해 나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징벌을 위하여 가던 구름을 돌릴 수 있다.\\\" 그랬습니다. \\\"복을 주기 위하여 안 가던 구름을 돌려서 이슬과 이른비와 늦은비를 내릴 수 있다.\\\" 분명히 성경이 그랬습니다.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하늘에 창이 나서 쏟아진 이 엄청난 물을, 온 세상을 덮은 물을 바람으로 이끌어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오늘 욥기 37장 11절-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징벌을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구름을 돌릴 수도 있다.\\\" 라는 겁니다. 만약에 자연 그대로 자연스럽게만 된다면 일기예보를 우리는 100% 믿어도 될 것인데, 분명히 비가 온다고 하다가 안 올 때가 많습니다. 바람이 이리로 갈 것이라고 했는데 획 방향을 바꿀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바꾸는 것 보고 바꾸었습니다 그럽니다. 자연을 연구하는 사람이 온도는 어떻고, 계절이 어떻고 하면 꼭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그렇게 안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렇게 발달된 시대에도 구름이 움직이는 것, 바람의 방향을 누구든지 예측을 미리 못합니다. 거의는 자연스럽게 되지만 특수한 환경이 발생하는 것은 누구도 예측을 못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징벌을 위하여서도 구름을 돌릴 수도 있고, 복을 위하여서도 구름을 돌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여, 좋은 날씨를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 당연합니다. 들어주시는 것과 안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 뜻에 있지만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뜻밖에 구름이 끼고 날씨가 안좋다고 했는데 주의 이름으로 일하러 나갔더니 그날 기후가 아주 좋아서 잘 지냈을 때 하나님께서 좋은 일기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댄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을 때야 어차피 좋은 날을 가지고 하나님 찾네 할지 모르겠지만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졌다 라는 것입니다. 원래 아합의 이스라엘 땅에 3년 6개월을 가물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딴 길로 가는 것을 보고서 \\\"이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할 것이다\\\"고 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비 내리려고 가던 자연스러운 구름을 하나님께서 그 종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 계속 돌려버렸어요. 3년 6개월을 돌려버리니 늘 와야되는 비가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백성이 죽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비를 주십시오. 비를 주십시오.\\\" 했더니 \\\"비를 못 오게 한 엘리야가 다시 비가 오도록 기도한다면 비를 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줄 수 없다\\\" 해서 엘리야를 모셔다가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3년6개월이나 지나 이제 마음이 변해서 기도를 하니까, 손바닥만한 구름이 없던 것이 착 나타나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몰고 오는도다. 빨리 수레를 타고 큰비가 내릴 테니 집으로 빨리 들어가시오, 피하시오.\\\" 이렇게 되어서 그 땅에 비가 내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어렵게 하려고 했던 나라에, 이삭의 아내를 범하려고 했던 나라를 하나님께서 기분 나쁘게 여기시고 그 나라 온 여성의 태를 닫아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태를 열어 우리가 민족을 이어가게 해 주소서\\\" 기도했을 때 \\\"이것은 내 마음대로 지금 하지 않겠다. 내가 누구누구 어려움 당한 것 때문에 닫았으니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빌어준다면 내가 풀어주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과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움직이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결정과 우리의 결정하는 것, 이것을 해야 되겠다 라고 결정하는 것도 잘되는 쪽으로만 갈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실패할 때만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움직이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겠습니다만 한번 어딘가 모처럼 관광을 나갔다든지, 무엇인가 일을 하려고 하는데 원래 모든 일기예보대로라면 그냥 다 망쳤을 것인데, 그런데 가는 곳, 자기가 가는 날마다 기후가 좋아서 저 멀리까지 관광을 했다 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일기마저 조정해 주셨다면,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고, 저에게도 크고 작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구름마저 움직여 주신 것을 경험한 경험이 많고, 제 주위에 있는 분들이 \\\"어찌 목사님 오시는 날에는 어떻게 이런 현상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라는 것을 매번, 왜냐하면 저는 가는 곳마다 겨울에, 여름에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일기가 불순하나 마나 가는데, 갈 때마다 이런 얘기는 거의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자주 얘기 하다보면 필요이상의 해석들을 할까봐 말씀을 안드립니다만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깨닫는 바 하나님께서 이토록까지 붙들어 주십니까 하고 감사할 수 있는 때가 많았던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여러분 항상 앞에 있게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큰 역사, 오늘 이 성경을 통해서 창조과학(創造科學)을 얘기하다 보니까 주제를 떠나서 한참 공부할 것 같아서 이제 창조과학 그만하고 주제로 돌아갑시다. 오늘 주제가 뭡니까?「까마귀가 노아 방주에 보낸 메세지」이런 주제로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40주 40야, 그러니까 창세기 7장 12절에 보면 40주40야를 비가 내렸고, 또 7장 24절에 보면 그 비내린 후에 150일을 창일했습니다. 그리고 그 150일이 지난 40일 후, 8장 6절에 보면 40일 후에 이제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습니다. 창이 위로밖에 나와 있지 아니하니 세상 물정을 알 수가 없어서 이 까마귀를 내어 보내는데, 우리는 이 까마귀와 비둘기에 대해서 평가를 극과 극으로 합니다. 역시 부정한 놈, 까마귀 이놈은 까마귀 같아. 이놈은 나가서 돌아오지도 않아. 배은 망덕한 놈이야! 그런데 비둘기는 돌아와서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어다 주었으니 역시 정한 정결한 짐승은 달라. 어디가 달라도 달라. 이렇게 말하면서 이 짐승들에 대해서 상당히 의미를 부여하고 이 하찮은 짐승에게까지 의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제가 볼 때에는 짐승은 짐승일 뿐입니다. 까마귀는 까마귀 같고, 비둘기는 비둘기 같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까마귀를 그렇게 욕하지 않습니다. 노아도 그렇게 욕하지 않습니다. 노아 가정이 지금 이 까마귀를 내어 보낼 때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기를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이 까마귀를 내어 보낼 때의 시기는 언제입니까? 그 갑갑한 방주에 들어간지 230일이 지나는 그런 때입니다. 그런 때에 지금 혹시 우리가 육지로 가야 되겠는데, 언제 육지가 우리에게 올지, 수 백일이 지나고 보니 육지가 몇 십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하늘로서 쏟아진 물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온 세상을 덮었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특수한 능력의 바람으로 물을 남극과 북극으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제 까마귀를 내어 보내봅니다. 이 까마귀는 높은 산이든지 어디든지 발붙일 때만 있으면 안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아는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비둘기는 지금 보내봤자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온 천지에 물인데 저 산꼭대기 하나라도 발붙일 곳이 있는가를 찾으려면 까마귀가 적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내어보냅니다. 제아무리 잘 나르고 잘 날라도 이틀 사흘 계속 날수는 없는 겁니다. 이 까마귀가 멀리 날수 있는 짐승이지만 발붙일 곳이 없으면 반드시 날라 올 것입니다. 이 까마귀를 내어놓는 노아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제발 까마귀 네가 안 돌아올 수만 있었다면 네가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곧 상륙할 수 있을 것인데\\\' 해서 까마귀를 내어 보내놓고 문은 열고 있습니다. 안 돌아오기를 학수고대(鶴首苦待)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산 봉오리가 나타났구나. 할렐루야!\\\" 이 노아에게는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최고의 기쁨이요, 최고의 메시지였습니다. 까마귀가 오히려 만약에 훨훨 날라서 까마귀가 되돌아서 돌아왔으면 \\\"이 자식들아, 이 며느리들아 얼마나 더 있어야 할지 모르겠네. 우리는 여기에서 이제 먹을 것도 다 떨어져 가는데 희망이 없네\\\" 할텐데 까마귀가 안 돌아오니까 그냥 잔치가 일어날 판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짐승은 짐승입니다. 짐승의 특성을 이용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까마귀가 안 돌아 왔다고 b면 \\\"물이 자꾸만 자꾸만 빠지는 모양이니 일주일을 더 기다려보세.\\\" 해서 그 다음에 비둘기를 내어 보냅니다. 이 노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산꼭대기가 관심이 아닙니다. 노아의 관심은 땅이 드러나야 됩니다. 그래야 씨를 뿌리고 포도를 심을 수가 있습니다. 땅이 드러나기를 바라는데, 그 다음에 비둘기를 보내봅니다. 이 비둘기가 나가더니 활활 돌아다니더니 그냥 들어옵니다. 성경을 보면 그때 아무 것도 안 물고 들어왔어요.들어오니까 노아가 실망하지요. \\\"아이구, 이 비둘기가 안 돌아와야 우리가 살수 있을 텐데, 일주일쯤 더 있어보자.\\\" 더 있어봅니다. 지금 완전히 수심을 제는 겁니다. 일주일을 더 기다렸다가 비둘기를 내어보냈더니 이 비둘기가 돌아다니다가 잎사귀가 파란 것이 있어서 살 것 같아서 나무 위에 앉으려다 보니까 감람나무 잎사귀는 높은 산에 없습니다. 산 중허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감람나무 잎사귀를 입에 따고 물고서 가지에 앉으려고 하니까 물이 쑥 빠지니까 날아서 입에 문체로 다시 들어옵니다. 노아가 생각하기를 \\\'물이 감하였구나. 산허리가 나타났구나. 감람나무 있는 잎사귀가 나타났구나. 그러나 아직 더 살수 없어!\\\' 일주일을 더 기다립니다. 물이 속히 빠져갑니다. 그때에는 무엇입니까? 그때에는 물이 점점 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으로 바람으로 북극으로 끌고 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북극에서는 찬 기운을 내어서 얼게 합니다. 냉동실치고는 최고의 냉동실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얼게 합니다. 그래서 물이 점점 감하여 가는데 다시 일주일을 기다렸습니다.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보냈더니 돌아왔습니까? 안 왔습니다. 자기 먹고 살 형편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돌아옵니까? 그래서 이 비둘기도 세번째 내어보냈더니 안 돌아왔습니다. 안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이제 우리가 나가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짐승은 짐승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짐승을 놓고서 \\\'까마귀는 의리 없는 놈이고…\\\' 까마귀는 까마귀일 뿐이지 무슨 의리가 있겠어요? \\\'비둘기는 의리 있는 짐승이고…\\\' 아니 비둘기는 비둘기일 뿐이지 무슨 의리가 있겠어요? 사람에게서 의리를 찾고 하나님에게 신의를 지켰어야지, 이런 짐승을 보고 의리 찾고 훌륭한 짐승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우상 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짐승은 짐승일 뿐입니다. 이 노아는 까마귀를 활용했고, 비둘기를 활용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했으니 우리가 비둘기에게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비둘기를 부려먹으시기를 바랍니다. 까마귀에게 악평을 보낼 것이 아니라 까마귀는 제 사명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아라는 남자는 까마귀의 속성을 알고, 그리고 까마귀가 거닐 수 있는 위치를 알고, 비둘기 속성과 그 위치를 앎으로서 산 봉오리 드러난 것과 허리 드러난 것과 그리고 땅이 드러난 것과 바다의 수심이 어느 정도 물러갔다는 것을 이 짐승을 통해서 다 재고 나왔으니 우리는 까마귀를 나쁜 짐승이라고 사람 취급할 것이 아니고, 그저 까마귀도 사명을 다 했구나. 성경은 까마귀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노아는 까마귀를 통해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백 몇십 일만에 뭍이 드러났다는 소식을 이 까마귀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열려진 하늘만 쳐다보고 주여주여 하고 살다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 도무지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속에는 까마귀도 실었고 비둘기도 실어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되겠습니까? 까마귀를 통해서도 하나님 하시는 일을 발견하고, 비둘기를 통해서도 하나님 하시는 일을 발견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메시지는 여러분께서 들으시면서 \\\'아, 물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갔구나. 바람이 불어가지고 옮겨갔고, 그리고 저 북방에서 찬 기운을 내어서 얼려 버리니까 지금 되돌아오지 않고 있구나\\\' 여기에서 끝나지 마시고 누가 그리 하셨는지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를 시험케 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나, 너희를 시험할 수 있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나….\\\" 그랬어요. 그것은 뭡니까? 바울의 몸에 가시가 있었어요. 바울의 몸에 실례할 일이 있었어요. 성도들 보기에 참 민망한 것이 있었어요. \\\"하나님, 이 가시가 내게서 떠나가지 아니하면 내가 목회 할 수 없겠사오니 이 가시를 물리쳐 주시옵소서\\\" \\\"네 은혜가 족하도다 그러나 그것이 네 몸에 있을 뿐이지 나는 너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제어보리라. 그가 믿는지, 못 믿는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까마귀가 있을지라도 까마귀를 지칭하여 나무라기에 앞서지 마시고, 까마귀가 보이거든 내가 어디 있는가? 까마귀를 통해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발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노아의 홍수가 어떠하고, 물이 어디로 가고 하는 과학적인 데에만 머물지 마시고, 지금 적은 바람 큰바람, 큰비 적은비 올 때, 지진이 오고 전쟁의 소식 일어날 때, 평화 합시다 평화 합시다 하고 사방에서 \\\'태평양 지역도 평화 합시다 유럽지역도 평화 합시다, 미국 남미와 북미도 평화 합시다, 동아시아도 평화 합시다\\\' 평화 평화하자고 할 때 평화만 보지 마시고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셔야 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 저주를 받았다, 누군가가 실패했다는 것은 그 실패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의 입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체크하시겠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아는데 까마귀를 없었으면 되지 않습니다. 부정한 것이 없었으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땅이 드러난 것을 아는데 이 비둘기가 없었으면 되지 않습니다. 짐승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우리의 이웃들의 모든 좋고 나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형편에 서 있는가를 자신을 돌아보는 이런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과 저것과 여러 가지로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네 위치가 어디 있다는 것을 항상 가르쳐 주고 계신데, 그것을 모르고 이웃 사람들이나 평가하고 정죄하고, 그저 내가 부자다 하는 것만 보고 있다면 그의 내일이 어찌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구름도 필요 없으면 돌려주시고, 필요하면 옮겨주시는 일이 있게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입니다. 지금도 분명히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을 위하여 건강의 훈풍을, 성공의 훈풍을 몰아올 수도 있고, 복 줄을 미리 떠나가게도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후에 뒷 북을 칠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어쩔 수 없이 누가 하라고 그래서 싫은데도 붙잡아 놓았더니 갑자기 이제 돈이 올라갔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될 줄 알고 전 재산 투자해서 넣었더니 딱 내가 등기하고 나니까 홀랑 내려 가버렸다 라고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결정까지도 하나님이 주관 하시나니 하나님의 손에 여러분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주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졌고 그리고 그에 의해서 축복은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돈을 쫓아갈 것이 아니라 돈이 쫓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항상 있도록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니 한 사건 한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방주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답답한 곳이었습니다. 답답하지 아니하고 방주가 천국 같았으면 왜 나오려고 까마귀 내어 보내고, 왜 나오려고 비둘기 내어 보내고 하겠습니까? 왜 답답합니까? 부정한 것이 섞여 있으니까 답답하지요. 부정한 것이 섞여 있으니 안 맞지요. 그래서 뛰쳐나가고 싶지요. 왜 부정한 것을 함께 실어놓았을까요? 뛰쳐나가고 싶어서, 뛰쳐나가고 싶도록 했어요. 이 방주는 무엇입니까? 큰 죽음의 재난을 잠시 면하는 배였습니다. 그리고 전에 보다 더 좋은 신천신지(新天新地), 죄도 없고 악도 없는 신천신지에 감람나무 새 잎이 나오는, 새 포도주를 먹을 수 있는 땅이 올 때에는 나가야 하는 것이 방주였습니다. 신천신지가 이루어졌는데도 나가지 않고 방주 속이 좋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방주는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곳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이 교회는 사랑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곳입니다. 이 교회는 죄인이라도 의인 취급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 속에는 의와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내가 어느 짐승의 역할을 할 것인가? 그것은 자기가 하면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답답하기 때문에 더 좋은 천지만 온다면, 이 부정한 것이 없어질 수만 있다면 하고서 뛰쳐나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교회로부터 구원을 받으십시오. 질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으십시오. 사망으로부터 영생을 얻으십시오. 가난으로부터 부요를 얻으십시오. 불행으로부터 행복을 얻으십시오. 그러나 더 좋은 세계가 이 방주선에 도달하게 될 때에는 방주를 미련 없이 떠나실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여러분이 생각하는데 이 방주는 천년만년 살 곳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언제까지 필요한 것인가? 방주를 타지 아니하면 새 천지가 오기 전에 죽고 맙니다. 신천신지가 이루어 질 때까지는 방주가 싫어도 방주 속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천신지가 이루어졌다는, 그리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산 봉오리가 드러나고, 물이 물러가고 또 물러간다 그랬습니다. 또 물러가고 또 물러가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부정한 짐승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정결한 짐승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끝 날이 되어간다는 것을 이 교회 안에 있으면서 발견하시고 주님의 날, 인자의 날, 신천신지라고 하니까 \\\'아이구, 세상이 더 행복하다\\\' 여러분, 세상은 사망입니다. 방주보다 좋은 곳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자의 날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가 살 곳인데, 그곳이 오는데도 이 속에 있으려 하지 마시고 뛰어 나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라야 튀어나갈 수 있습니까? 만족하지 못해야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족하지 못할 때에는 무엇을 기다립니까? 만족한 나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그러나 여러분 중에, 이 교회 중에 답답함을 주는 사건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 교회는 천국에 이르기 전까지는 뛰쳐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함께 버티다가 새 하늘과 새 땅, 내가 발을 디뎌도 될 주님의 나라가 여러분 앞에 오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방주에 머물지 말고, 방주를 뒤돌아보지도 말고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사는 방주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방주에서는 사모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는 나의 영혼이 거할 곳이 못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야 됩니다. 이 세상은 죽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 나라여 내게 임하시옵소서! 속히 오시옵소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는 것이 되어야 될텐데. 비만 봅니까, 바람만 봅니까, 까마귀만 봅니까, 비둘기만 봅니까? 여러분, 비둘기를 통해 하나님 보시고, 까마귀를 통해 하나님 보시고, 비를 통해 하나님 보시고, 물이 물러감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