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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 신34:1-8/ 2001-12-04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 신34:1-8 방금 우리가 읽은 신명기 34장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장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 제일 앞부분을 차지하는 5권의 책인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 장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이 되어서 광야를 40년 헤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모세가 죽기 전에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안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모세가 34장에서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서 멀리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그의 120년간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 가는 여호수아서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생애 마지막 장면을 봅니다. 그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안타까운 그런 모습의 죽음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밟아보지 못하고 모세는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가나안 땅이 있는 요단강 건너편만을 바라보기만 했어야 됐습니다. 모세 눈앞에는 지금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는 깊은 감동에 젖었을 것입니다. 길르앗에서 단에 이르는 넓은 지역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북쪽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요단강이 보입니다. 그리고 요단강 넘어 종려나무가 많이 있는 성읍인 여리고 성이 보이기도 합니다. 비옥한 납달리 땅 그리고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지중해의 모습도 멀리 보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세우고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한 땅이다. 내가 너의 눈으로 이 땅을 보게는 해 준다마는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할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결국 거기에서 죽고 맙니다. 그는 모압 땅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장사되었다고 전하는데, 이 성경이 기록될 때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접하면서 한가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지도자였고, 종이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기 가나안땅 앞까지 인도한 이 모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이 모세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죽어야만 되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에 우리의 의문이 남습니다. 1. 파란 만장한 모세의 삶의 흔적 모세는 120년의 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에는 크게 3등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40년은 바로의 궁중에서 생활했던 모세의 전반기 생애입니다. 그 다음 40년은 모세의 중반기 생애인데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생활을 하면서 보냈던 40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후반기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나이 광야를 헤쳐 나왔던 험난한 40년의 생애였습니다. 1) 출생과 애굽의 궁정생활 40년 모세가 태어날 때 이스라엘은 한 민족 국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민족이었습니다. 바로 왕의 강압정책에 의해서 모세는 태어난 지 3개월만에 결국 강물에 버려짐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이 미리암의 기지로 말미암아서 바로 궁정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는 40년을 보냅니다. \\\'물에서 건져낸 자\\\'라는 그런 뜻으로 그의 이름이 \\\'모세\\\'라고 붙여지게 되었고 그는 애굽의 정치와 문화와 경제 모든 면에 대해서 아주 고등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 요게벳의 노력으로 모세의 마음속에는 히브리 민족의 혼이 점점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십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 민족인 히브리 민족을 돕기 위해 애쓰다가 애굽 사람을 쳐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살인자의 신세가 되어서 그는 애굽을 떠나고 맙니다. 그의 40년 바로 왕궁의 궁중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합니다. 2) 미디안 망명생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그의 망명생활 40년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는 미디안에 거하면서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그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거기에서 이름도 없이 광야에 묻혀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 인생의 전반기에 비해서 이 중반기 40년은 참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운 40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철두철미하게 미디안 광야 40년을 통해서 모세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인간에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의 영성을 잘 개발해서 정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기간이었고 연단 시키는 기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어느 날 그가 호렙산 기슭에 양을 치고 있을 때 가시떨기 불꽃가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에게 그에 발에 신은 신발을 벗으라고 명하십니다. \\\"너에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너의 발에 신을 벗어라.\\\" 그리고 모세를 땅에 엎드리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실 것을 사명으로 맡깁니다. 모세가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아론을 붙여서 이집트로 들여보내게 되고 그는 이집트에 들어가서 자기 백성들을 구출해서 이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제 40년을 다시 모세는 인생의 후반기를 살게 됩니다. 3) 광야 지도자의 생활 40년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그리고 광야생활의 고통과 고충 등 그 많은 어려움을 헤치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430년 훨씬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조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이제 눈앞에 두고 요단강 건너편인 모압 평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진을 쳤습니다. 그때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서서 멀리 요단강 건너 펼쳐진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종으로써 그의 사명을 다 완수한 이 모세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엄청난 징벌을 내렸다는 겁니다. 정말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세만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해줘야 되지 않을까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2.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1) 안타까운 모세의 죽음 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모세는 기력이 다해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다가 쓰러져서 모압 땅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여러분 한번 봅시다. 모세가 죽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우리처럼 안경을 끼었다든지 돋보기를 사용한다든지 그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해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허리가 휘어진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압 땅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므리바의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신명기 32장 51절 5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 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징벌인지 모릅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이 므리바 물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반석에 명하여 물이 나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방법대로 하고 맙니다. 민수기 20장 5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나무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하면서 그들의 갈증을 탄식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0장 11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모아놓고 손을 들어서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을 내리칩니다. 물이 반석에서 콸콸 쏟아져 나왔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짐승들이 그 반석에 솟아나는 물을 마시고 갈증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과 연결해서 민수기 20장12절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모세의 혈기 부린 결과 모세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8절에 \\\"반석에게 명하여\\\"라고 하였는데, 11절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래도 순종하여 반석에게 명하지 않고 \\\"반석을 두 번 치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가 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어야 된 이유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민수기 20장 10절을 보면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원망과 불평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지금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패역한 너희여 들어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 물을 내랴 하고\\\" 지팡이를 들어서 반석을 휘두릅니다. 그는 성내며 분노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자기 모두를 내어 줄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앞에 그는 마음의 분노를 느끼게도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이 모세와 같이 때때로 분노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 남편이, 아내가, 자녀들이, 부모가, 이웃사람이, 직장상사가 나를 분노하게 할 수도 있고, 직장부하직원이 나를 화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때 잘 참아 왔습니다. 참고 또 참았습니다. 모세가 이 사건 이전에 크게 화냈던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일간 주야로 기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돌 판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과 더불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세는 그 돌 판을 바닥에 내 팽개치면서 의분을 폭발시켰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난 뒤에 다시 모세가 산에 올라갑니다. 시내 산에 올라가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저는 신구약 성경전체 성경구절 가운데 출애굽기 32장 32절 말씀을 제일 좋아합니다. 제가 그렇게 되기를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게 못된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이런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서 이런 말씀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32장 32절에 이런 내용입니다. 모세의 기도가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 이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들에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만약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지 않으신다면 원컨대 하나님의 기록한 생명 책에서 구원에 책에서 내 이름을 제하여 주옵소서.\\\" 내 이름이 구원의 책에서, 생명의 책에서 빠지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모세의 간절한 마음을 우리는 거기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금 분기탱천해서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두 번 내리치는 모습 백성들을 향해서 반석을 내리치는 혈기를 부리는 모세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혈기를 부릴 수가 있습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가 혈기를 부리고 분노를 터트리고, 아내 앞에서 남편이 분노를 터트리고 혈기를 부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런 분노 혈기를 부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원래 분기탱천했던 사람이 아니라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런 증언이 나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가 화를 잘 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그 심령이 온유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화 자주 내는 사람은 별 것 아닌데 온순한 사람이 화 한번 내면은 물 불 안 가립니다. 혹시 아내 되는 분들 우리 신랑 화나면 무서워요 이러면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이렇게 분노를 터트리고 나면 내 마음은 후련하고 시원한데 그 뒷감당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너무나 무서운 대가를 치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같은 분노 이걸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나면 한 평생 땅을 치고 통곡해도 회복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자기자신을 빠트릴 수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두 번 들고 바위를 두 번 내리칠 때 지팡이 안 부러 졌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는 너희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는데 너희는 나를 믿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인간적으로 대응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이 분노를 잘못 관리하면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어느 날 집어치워 버리기도 합니다. 단란했던 가정이 깨어지고 쪼개지기도 합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선배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신학교 공부를 할 때 우리보다 몇 년 선배이기 때문에 \\\"저분은 참 목회를 잘하고 성공할 것이다.\\\" 우리 후배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실력도 대단했습니다. 그 학생시절부터 아주 똑똑하고 유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그분은 목회자로서 어쩌면 실패자가 되었다 할만큼 이 교회 저 교회를 많이 옮겨 다녔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은 남편에 대해서 불만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내가 무슨 세상에 죄가 많아 가지고 이 남편 만나 가지고 이렇게 정처 없이 끌려 다니나.\\\" 그런데 그 목사님은 참 성격이 온순하고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면 그 분노를 당회 하다가도 못 참고 제직회 하다가도 못 참고 그래서 경상도 사투리로 \\\"차뿌라! 나, 안한다\\\" 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주일날도 \\\"차뿌라!\\\" 설교 안하고 화가 나니까 어디 기도원에 가서 앉아 계시다 내려오면 교회에서 우리 목사님 내 보내자 결정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려 목회를 하면서 10번 이상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 교회에 가서 평균수명이 2년 길면 3년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 좋은 재능, 그 실력들 다 갖추었으면서도 말입니다. 여러분, 목사들에게 비슷한 나쁜 습관이 하나 있는데 제가 고백을 하나 하지요. 교인들에게는 웃고 다 잘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 목사들의 분노는 참 관리하는데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집에 가면 화를 잘 내요 저도 집에 가서 화를 한번씩 내고 난 뒤에는 회개를 합니다. 만만한 게 사모고 만만한 게 자식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화를 내어도 큰 무리가 되지 않지만 교회에 화를 내면 문제가 생기지만 집에 가서 화를 내곤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교역자 가정에 사모나 자녀들이 굉장히 상처를 많이 입고 어려워하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습니다. 이 감정을 적절하게 발산을 해야됩니다. 웃고싶을 때 웃고 울고싶을 때 울고 정말 분노를 느낄 때는 분노를 발하기도 해야 됩니다. 이게 시간과 장소를 따라서 해야 되는데 이 시간과 장소가 안 맞으면 이게 문제가 되어지고 자기도 상처를 입고 다른 사람도 상처를 주는 그런 경우들이 사실 많지 않습니까! 아마 여러분들도 이 일에 많이 실패해 보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책방에 가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참 재미있는 책을 샀습니다. \\\'스펀지 목회\\\' 스펀지처럼 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그것을 사서 읽으면서 제가 참 많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화를 안낼 수도 없고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의분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우리가 그렇게 반응을 한다면 아마 못살 겁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 자식 데리고 이민 가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가운데 분노를 잘 처리하지 못해서 \\\"내가 이 한국 땅을 떠나노라.\\\" 어떤 사람들을 뉴스시간에 누가 나오면 \\\"TV 꺼\\\"라고 하다가 이민을 떠난 분도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독일에 있을 때 땡전 뉴스가 보기 싫어서 독일로 왔다는 대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실패했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국립대학 음대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9시 뉴스만 틀면 \\\"무슨 대통령께서--\\\"라고 시작합니다. 대통령 기사가 나올 때 우리 국민들 삼천만, 사천만, 오천만이 다 보고도 참고 견디는데 그분은 못 견딘 것입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 가지고 직장도 집어치우고 왔던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 가는데 여러분 참 깊이 생각 해 보아야 됩니다. \\\"우리 학교가 무너지고 교육이 무너진다\\\"고 신문에서 대서 특필하고 너무 과장하는데, 여러분 외국 한번 가 보십시오. 한국보다 좋은 점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던 아이가 거기 가서 적응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말 부모들이 도박하고 있는 겁니다. 내 아이를 가지고 도박하면서 바보짓을 하고 있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이민을 가서, 조기유학을 가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아마 5%미만일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대한민국 정부에서 유학시험을 치르고 막 그렇게 어렵게 해서 유학을 내 보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들어서기 전에 그렇게 어려운 유학시험과정을 치고 외국어를 여기서 어느 정도하고 자격을 갖추고 갔어도 유학에 성공하는 사람, 학위를 성공하는 사람은 10%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지금 다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들이 어떻게 거기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일류대학은 미국도 어렵고 한국도 어렵지 않습니까? 자기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노력하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늘 학교에 갔다오면서 늘 불평합니다. \\\"아, 담임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어. 수학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어. 영어선생님이 우리를 비인격적으로 대해.\\\" 그때 부모들이 맞장구 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들이 더 들떠 가지고 한국교육이 어떻고 전부 교육학자가 다되고 문교부 장관 시키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이 큰소리 빵빵 칩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문제는 나를 분노케하는 주변의 환경 나로하여금 짜증스럽게 하는 나로하여금 혈기를 부리지 않으면 안되도록 하는 이 환경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내가 거기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 착한 남편 데리고 사는 아내가 다 좋은 것 같습니까? 착한 남편 데리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잔소리하고 더 남편을 못살게 구는 아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환경은 훨씬 좋은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 정말 천사 같은 아내를 데리고 사는 남편들 가운데도 정말 인간 같지 않는 짓을 하고 다니는 남자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네가 아니고 주변환경이 아니고 내 자신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계십니까? 무엇에 대해서 확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까? 우리 남성들은 직장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마음속으로 쓰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확 엎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함께 눈앞에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려서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가는 우리 동지들이 없습니까? 아마 많을 겁니다 . 여러분 그 점을 우리 아내 되시는 분들은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남편들은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집에 기진맥진해서 들어오는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가지를 걸 그면서 남편을 못살게 군다면 그러면 남편은 과연 어디에 발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던 아내들이 요즘 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수천년전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이렇게 말함니다. \\\"다투고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났다\\\"는 고백을 했던 그런 사람이 잠언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직장을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는 남편을 가진 아내들은 참 고달픕니다. 누구는 뒤집고 싶지 않아서 안 뒤집고 삽니까? 누구는 집어치우지 않고 싶어서 좋아서 하는 줄 아십니까? 더럽고 아니꼽고 추해도 참고 어떻게 하든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때때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고 여러분을 괴롭힐 수도 있고 정말 다 포기하고 어딘가 떠나고 싶게 만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여러분은 파괴적인 반응을 하지 마시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내 인생의 십자가를 자꾸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주변의 사람 바라보고 내 마음이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부정적으로 분노를 터트리고 혈기를 부리고 이렇게 시작하면 아마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 되시는 분들은 특별히 남편들을 많이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또 남편 되시는 분은 이 못난 남편하나 바라보고 사는 아내를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그런 관계성 속에서 가정이 평안해야만 그 사람이 직장에 나가면 직장도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면 그 사람이 나가서 일하는 직장도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그랬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어야 됐던 이유를 보면서 하나님이 너무 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어쩌면 우리는 모세보다도 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여러분 마음을 다시 한번 잘 추스리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남편, 아내, 이웃, 다른 사람이 아니고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고, 문제는 내가 변하는 것, 내 마음을 치료하는 것, 문제는 내 자신이 바뀌는 것이라는 것. 그래야 만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래야 만이 가나안 복지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후서 1장 10절-11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분노하고 혈기를 부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을 다 송두리째 쏟아버리는 그런 실패하는 실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말 스펀지같이 여러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생산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신34:1-8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신34:1-8 2003-06-07 14:37:53 read : 13 방금 우리가 읽은 신명기 34장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장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 제일 앞부분을 차지하는 5권의 책인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 장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이 되어서 광야를 40년 헤매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모세가 죽기 전에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안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모세가 34장에서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서 멀리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그의 120년간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 가는 여호수아서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생애 마지막 장면을 봅니다. 그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 안타까운 그런 모습의 죽음입니다. 꿈에도 그리던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밟아보지 못하고 모세는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가나안 땅이 있는 요단강 건너편만을 바라보기만 했어야 됐습니다. 모세 눈앞에는 지금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는 깊은 감동에 젖었을 것입니다. 길르앗에서 단에 이르는 넓은 지역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북쪽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요단강이 보입니다. 그리고 요단강 넘어 종려나무가 많이 있는 성읍인 여리고 성이 보이기도 합니다. 비옥한 납달리 땅 그리고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지중해의 모습도 멀리 보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세우고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한 땅이다. 내가 너의 눈으로 이 땅을 보게는 해 준다마는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할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결국 거기에서 죽고 맙니다. 그는 모압 땅 벧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장사되었다고 전하는데, 이 성경이 기록될 때까지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접하면서 한가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지도자였고, 종이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기 가나안땅 앞까지 인도한 이 모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이 모세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죽어야만 되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에 우리의 의문이 남습니다. 1. 파란 만장한 모세의 삶의 흔적 모세는 120년의 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에는 크게 3등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40년은 바로의 궁중에서 생활했던 모세의 전반기 생애입니다. 그 다음 40년은 모세의 중반기 생애인데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생활을 하면서 보냈던 40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후반기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나이 광야를 헤쳐 나왔던 험난한 40년의 생애였습니다. 1) 출생과 애굽의 궁정생활 40년 모세가 태어날 때 이스라엘은 한 민족 국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민족이었습니다. 바로 왕의 강압정책에 의해서 모세는 태어난 지 3개월만에 결국 강물에 버려짐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누이 미리암의 기지로 말미암아서 바로 궁정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는 40년을 보냅니다. '물에서 건져낸 자'라는 그런 뜻으로 그의 이름이 '모세'라고 붙여지게 되었고 그는 애굽의 정치와 문화와 경제 모든 면에 대해서 아주 고등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 요게벳의 노력으로 모세의 마음속에는 히브리 민족의 혼이 점점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십이 되었을 때 그는 자기 민족인 히브리 민족을 돕기 위해 애쓰다가 애굽 사람을 쳐죽이게 됩니다. 그래서 살인자의 신세가 되어서 그는 애굽을 떠나고 맙니다. 그의 40년 바로 왕궁의 궁중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는 제 2의 인생을 시작합니다. 2) 미디안 망명생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그의 망명생활 40년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는 미디안에 거하면서 미디안의 제사장이었던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그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거기에서 이름도 없이 광야에 묻혀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 인생의 전반기에 비해서 이 중반기 40년은 참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운 40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철두철미하게 미디안 광야 40년을 통해서 모세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인간에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그의 영성을 잘 개발해서 정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기간이었고 연단 시키는 기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어느 날 그가 호렙산 기슭에 양을 치고 있을 때 가시떨기 불꽃가운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에게 그에 발에 신은 신발을 벗으라고 명하십니다. "너에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너의 발에 신을 벗어라." 그리고 모세를 땅에 엎드리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실 것을 사명으로 맡깁니다. 모세가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아론을 붙여서 이집트로 들여보내게 되고 그는 이집트에 들어가서 자기 백성들을 구출해서 이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제 40년을 다시 모세는 인생의 후반기를 살게 됩니다. 3) 광야 지도자의 생활 40년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그리고 광야생활의 고통과 고충 등 그 많은 어려움을 헤치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430년 훨씬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조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이제 눈앞에 두고 요단강 건너편인 모압 평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진을 쳤습니다. 그때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 서서 멀리 요단강 건너 펼쳐진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종으로써 그의 사명을 다 완수한 이 모세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엄청난 징벌을 내렸다는 겁니다. 정말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세만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해줘야 되지 않을까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2.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1) 안타까운 모세의 죽음 왜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요? 모세는 기력이 다해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다가 쓰러져서 모압 땅에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여러분 한번 봅시다. 모세가 죽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우리처럼 안경을 끼었다든지 돋보기를 사용한다든지 그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해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허리가 휘어진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압 땅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므리바의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신명기 32장 51절 5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 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징벌인지 모릅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이 므리바 물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서 반석에 명하여 물이 나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방법대로 하고 맙니다. 민수기 20장 5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나무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하면서 그들의 갈증을 탄식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0장 11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모아놓고 손을 들어서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을 내리칩니다. 물이 반석에서 콸콸 쏟아져 나왔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짐승들이 그 반석에 솟아나는 물을 마시고 갈증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과 연결해서 민수기 20장12절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2)모세의 혈기 부린 결과 모세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8절에 "반석에게 명하여"라고 하였는데, 11절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래도 순종하여 반석에게 명하지 않고 "반석을 두 번 치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가 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어야 된 이유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민수기 20장 10절을 보면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원망과 불평을 들으면서 마음속에 지금 분노가 가득 찼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패역한 너희여 들어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 물을 내랴 하고" 지팡이를 들어서 반석을 휘두릅니다. 그는 성내며 분노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자기 모두를 내어 줄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앞에 그는 마음의 분노를 느끼게도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이 모세와 같이 때때로 분노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 남편이, 아내가, 자녀들이, 부모가, 이웃사람이, 직장상사가 나를 분노하게 할 수도 있고, 직장부하직원이 나를 화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때 잘 참아 왔습니다. 참고 또 참았습니다. 모세가 이 사건 이전에 크게 화냈던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40일간 주야로 기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돌 판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과 더불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세는 그 돌 판을 바닥에 내 팽개치면서 의분을 폭발시켰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난 뒤에 다시 모세가 산에 올라갑니다. 시내 산에 올라가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저는 신구약 성경전체 성경구절 가운데 출애굽기 32장 32절 말씀을 제일 좋아합니다. 제가 그렇게 되기를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게 못된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이런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서 이런 말씀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32장 32절에 이런 내용입니다. 모세의 기도가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 이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들에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만약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지 않으신다면 원컨대 하나님의 기록한 생명 책에서 구원에 책에서 내 이름을 제하여 주옵소서." 내 이름이 구원의 책에서, 생명의 책에서 빠지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달라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모세의 간절한 마음을 우리는 거기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금 분기탱천해서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두 번 내리치는 모습 백성들을 향해서 반석을 내리치는 혈기를 부리는 모세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혈기를 부릴 수가 있습니다. 남편 앞에서 아내가 혈기를 부리고 분노를 터트리고, 아내 앞에서 남편이 분노를 터트리고 혈기를 부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런 분노 혈기를 부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원래 분기탱천했던 사람이 아니라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런 증언이 나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가 화를 잘 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그 심령이 온유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순한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화 자주 내는 사람은 별 것 아닌데 온순한 사람이 화 한번 내면은 물 불 안 가립니다. 혹시 아내 되는 분들 우리 신랑 화나면 무서워요 이러면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이렇게 분노를 터트리고 나면 내 마음은 후련하고 시원한데 그 뒷감당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너무나 무서운 대가를 치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같은 분노 이걸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나면 한 평생 땅을 치고 통곡해도 회복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자기자신을 빠트릴 수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두 번 들고 바위를 두 번 내리칠 때 지팡이 안 부러 졌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는 너희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했는데 너희는 나를 믿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인간적으로 대응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이 분노를 잘못 관리하면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어느 날 집어치워 버리기도 합니다. 단란했던 가정이 깨어지고 쪼개지기도 합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선배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신학교 공부를 할 때 우리보다 몇 년 선배이기 때문에 "저분은 참 목회를 잘하고 성공할 것이다." 우리 후배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실력도 대단했습니다. 그 학생시절부터 아주 똑똑하고 유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그분은 목회자로서 어쩌면 실패자가 되었다 할만큼 이 교회 저 교회를 많이 옮겨 다녔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은 남편에 대해서 불만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내가 무슨 세상에 죄가 많아 가지고 이 남편 만나 가지고 이렇게 정처 없이 끌려 다니나." 그런데 그 목사님은 참 성격이 온순하고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면 그 분노를 당회 하다가도 못 참고 제직회 하다가도 못 참고 그래서 경상도 사투리로 "차뿌라! 나, 안한다" 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주일날도 "차뿌라!" 설교 안하고 화가 나니까 어디 기도원에 가서 앉아 계시다 내려오면 교회에서 우리 목사님 내 보내자 결정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려 목회를 하면서 10번 이상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 교회에 가서 평균수명이 2년 길면 3년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 좋은 재능, 그 실력들 다 갖추었으면서도 말입니다. 여러분, 목사들에게 비슷한 나쁜 습관이 하나 있는데 제가 고백을 하나 하지요. 교인들에게는 웃고 다 잘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 목사들의 분노는 참 관리하는데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집에 가면 화를 잘 내요 저도 집에 가서 화를 한번씩 내고 난 뒤에는 회개를 합니다. 만만한 게 사모고 만만한 게 자식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화를 내어도 큰 무리가 되지 않지만 교회에 화를 내면 문제가 생기지만 집에 가서 화를 내곤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교역자 가정에 사모나 자녀들이 굉장히 상처를 많이 입고 어려워하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습니다. 이 감정을 적절하게 발산을 해야됩니다. 웃고싶을 때 웃고 울고싶을 때 울고 정말 분노를 느낄 때는 분노를 발하기도 해야 됩니다. 이게 시간과 장소를 따라서 해야 되는데 이 시간과 장소가 안 맞으면 이게 문제가 되어지고 자기도 상처를 입고 다른 사람도 상처를 주는 그런 경우들이 사실 많지 않습니까! 아마 여러분들도 이 일에 많이 실패해 보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책방에 가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참 재미있는 책을 샀습니다. '스펀지 목회' 스펀지처럼 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그것을 사서 읽으면서 제가 참 많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화를 안낼 수도 없고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의분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우리가 그렇게 반응을 한다면 아마 못살 겁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 자식 데리고 이민 가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가운데 분노를 잘 처리하지 못해서 "내가 이 한국 땅을 떠나노라." 어떤 사람들을 뉴스시간에 누가 나오면 "TV 꺼"라고 하다가 이민을 떠난 분도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독일에 있을 때 땡전 뉴스가 보기 싫어서 독일로 왔다는 대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실패했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국립대학 음대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9시 뉴스만 틀면 "무슨 대통령께서--"라고 시작합니다. 대통령 기사가 나올 때 우리 국민들 삼천만, 사천만, 오천만이 다 보고도 참고 견디는데 그분은 못 견딘 것입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 가지고 직장도 집어치우고 왔던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 가는데 여러분 참 깊이 생각 해 보아야 됩니다. "우리 학교가 무너지고 교육이 무너진다"고 신문에서 대서 특필하고 너무 과장하는데, 여러분 외국 한번 가 보십시오. 한국보다 좋은 점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던 아이가 거기 가서 적응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말 부모들이 도박하고 있는 겁니다. 내 아이를 가지고 도박하면서 바보짓을 하고 있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이민을 가서, 조기유학을 가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아마 5%미만일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대한민국 정부에서 유학시험을 치르고 막 그렇게 어렵게 해서 유학을 내 보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들어서기 전에 그렇게 어려운 유학시험과정을 치고 외국어를 여기서 어느 정도하고 자격을 갖추고 갔어도 유학에 성공하는 사람, 학위를 성공하는 사람은 10%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지금 다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들이 어떻게 거기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일류대학은 미국도 어렵고 한국도 어렵지 않습니까? 자기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노력하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늘 학교에 갔다오면서 늘 불평합니다. "아, 담임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어. 수학선생님이 마음에 안 들어. 영어선생님이 우리를 비인격적으로 대해." 그때 부모들이 맞장구 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들이 더 들떠 가지고 한국교육이 어떻고 전부 교육학자가 다되고 문교부 장관 시키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이 큰소리 빵빵 칩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문제는 나를 분노케하는 주변의 환경 나로하여금 짜증스럽게 하는 나로하여금 혈기를 부리지 않으면 안되도록 하는 이 환경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지만 문제는 내가 거기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 착한 남편 데리고 사는 아내가 다 좋은 것 같습니까? 착한 남편 데리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잔소리하고 더 남편을 못살게 구는 아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환경은 훨씬 좋은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정말 천사 같은 아내를 데리고 사는 남편들 가운데도 정말 인간 같지 않는 짓을 하고 다니는 남자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문제는 네가 아니고 주변환경이 아니고 내 자신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계십니까? 무엇에 대해서 확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까? 우리 남성들은 직장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마음속으로 쓰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확 엎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함께 눈앞에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모습이 어른거려서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살아가는 우리 동지들이 없습니까? 아마 많을 겁니다. 여러분 그 점을 우리 아내 되시는 분들은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남편들은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집에 기진맥진해서 들어오는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가지를 걸 그면서 남편을 못살게 군다면 그러면 남편은 과연 어디에 발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던 아내들이 요즘 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수천년전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이렇게 말함니다. "다투고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났다"는 고백을 했던 그런 사람이 잠언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직장을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는 남편을 가진 아내들은 참 고달픕니다. 누구는 뒤집고 싶지 않아서 안 뒤집고 삽니까? 누구는 집어치우지 않고 싶어서 좋아서 하는 줄 아십니까? 더럽고 아니꼽고 추해도 참고 어떻게 하든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때때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고 여러분을 괴롭힐 수도 있고 정말 다 포기하고 어딘가 떠나고 싶게 만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여러분은 파괴적인 반응을 하지 마시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내 인생의 십자가를 자꾸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주변의 사람 바라보고 내 마음이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부정적으로 분노를 터트리고 혈기를 부리고 이렇게 시작하면 아마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 되시는 분들은 특별히 남편들을 많이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또 남편 되시는 분은 이 못난 남편하나 바라보고 사는 아내를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그런 관계성 속에서 가정이 평안해야만 그 사람이 직장에 나가면 직장도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면 그 사람이 나가서 일하는 직장도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그랬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어야 됐던 이유를 보면서 하나님이 너무 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어쩌면 우리는 모세보다도 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여러분 마음을 다시 한번 잘 추스리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남편, 아내, 이웃, 다른 사람이 아니고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고, 문제는 내가 변하는 것, 내 마음을 치료하는 것, 문제는 내 자신이 바뀌는 것이라는 것. 그래야 만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래야 만이 가나안 복지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후서 1장 10절-11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분노하고 혈기를 부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을 다 송두리째 쏟아버리는 그런 실패하는 실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말 스펀지같이 여러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생산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라 모세/ 출3:7-12/ 2001-10-16
가라 모세 출3:7-12 내 백성의 고통의 현실 앞에 가라 히브리 민족이 430년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seen)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들으시고(heard) 그들의 근심을 아시고(know) 모세를 불러 바로에게로 내려가서 내 백성을 건져 내라고 하셨다. 고난과 치욕과 슬픔의 노예살이에 지치고 곤고한 그들의 현실에 가라고 하셨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낸 자\\\"이다. 건짐받은 모세는 수렁에 빠진 백성을 건져낼 사명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죄악에서 건짐받은 성도로서 내가 가야할 곳을 알아야 하겠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 바로 앞에 가서 서는 것을 두려워한 모세에게 바로 앞에 서는 것으로 사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내는 것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정의로운 말을 하고 구별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해야 될 일을 행동에 옮기는 실천적인 삶이어야 한다. 형제나 자매 중에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약 2:15-17) 해방은 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적인 헌신에서 이루어진다. ·얽매임에서 참된 자유를 선포하라 노예와 자유인은 공존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를 얽어매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에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어버렸는가? 케이 힐티는 우리를 지배하는 세가지 힘이 있는데 돈과 명예와 향락이라고 했다. 이러한 세가지 힘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 참된 자유는 없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신 주님을 의지하고 따를 때 진정한 자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하셨다. 광복 54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광복절은 「빛을 다시 찾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름 그대로 빛을 다시 찾은 날이 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해방된지 반세기가 넘어서인지 우리는 그때의 감격도 잊었습니다. 잊었다기보다는 모르고 있습니다. 광복의 감격이 없는 것은 일제 치하의 아픔과 비극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누리는듯 하나 자유를 뺏기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나라도 국민도 생각지 않는 정치인,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타락한 기업윤리, 이것은 식민지 문화의 잔재입니다. 해방된 것 같으나 또다른 노예생활을 하는 현실을 마음아프게 바라보면서 오늘도 억눌린 자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해방하시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대륙에 노예로 팔려갔던 아프리카 흑인들이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흑인들이 부르는 교회음악의 한 장르가 생겨 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흑인영가라고 하는 흑인들만의 독특한 리듬과 멜로디의 노래입니다. 아프리카의 원시적인 리듬에다가 노예생활의 서러움과 고난을 담은 구슬픈 멜로디의 이 흑인영가는 오늘날 흑인들 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교회가 즐겨 부르며 신앙의 활력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흑인영가로 된 성가곡과 복음성가들이 많이 불려지고 있습니다. 흑인영가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곤고한 노예살이에서 건져주시고 그 압제자들의 손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구하는 찬양\\\"입니다. 이 흑인영가 중에 대표적인 것이 \\\"가라 모세\\\"(Go down Moses)입니다. 이 노래는 누군가 흑인 중에서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나와서 자신들의 얽매임에서 해방시켜 줄 날을 바라보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흑인영가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가라 모세 저 에집트의 파라오에게 가서 내 백성을 해방하도록 지시하라 모세야 가거라 가서 파라오에게 말하라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 이러한 흑인영가는, 노예생활의 치욕과 슬픔과 곤고함을 노래로서 자신들을 위로하며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430년간 애굽에서 노예살이 하던 때를 기억하면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이, 흑인노예들인 자신들에게도 해방을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들은 그 비극적인 노예생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흑인들의 철저한 구속신앙입니다. 히브리 민족과 흑인들처럼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지 36년간 온갖 수치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해방을 얻고져 했습니다. 이번 중국선교지 방문때 돌아오는 길에 상해에 들러 임시정부 청사를 잠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나라와 주권을 뺏긴 그때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국가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히브리 민족처럼, 미국의 흑인노예들처럼 오직 하나님이 일본을 꺾으시고 식민정책에서 우리를 건져줄 것을 믿으며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우리 신앙의 줄기가 되는 구속사 신앙은 바로 이 출애굽 사건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근심을 아신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해방을 주셨다고 믿는 구속사적 신앙입니다. 해방기념주일을 맞으면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분명한 구속사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얽매임과 비극적인 현실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해방시켜 참자유를 주실 분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해방의 도구로 쓰시는 방법은 여러가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를 해방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일어나 고통받고 신음하는 삶의 자리에 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엄청난 실상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히브리 민족은 그들의 해방절인 유월절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유월절이 짧게 잡아도 3,300년이 지난 사건이지만 그들은 단 한해도 유월절 사건, 즉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잊지 않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면 쓴 나물과 누룩없는 무교병과 양고기를 먹으면서 유월절 사건을 생생히 재연합니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 민족이, 우리의 선조들이 당했던 참극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일본의 잔악한 식민정책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군수물자를 위해 뺏아간 공출은 식량과 지하자원과 삼림과 심지어는 집안의 솥과 숟가락, 교회의 종까지 탈취해 갔습니다. 보이는 물질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와 성과 이름까지 빼았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노동자로 끌려간 징용제도는 수많은 생명을 착취하였고 이 땅의 젊은 생명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습니다. 여성들도 예외없이 근로정신대라 해서 많은 공사장에 강제동원 했으며 처녀는 물론 아이가 딸린 유부녀들까지 일본군의 성적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전선으로 끌고가 종군위안부로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일제 36년간 강제로 동원된 한국인이 700만이 넘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지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강제노동으로 끌려가 죽은 한국인이 홋카이도에서만 철도에 깔린 굉목보다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과거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정신대 위안부로 끌려가 일생을 좌절과 고통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데도 보상은 커녕 고통을 더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제 방송된대로 일제는 소록도에서 불치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갖가지 생체실험을 했으나 거기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일들을 잊고 있으며 무관심해서는 안될 역사에 대해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당했던 아픔과 질곡의 역사를 기억하며 광복절을 맞아야 합니다. 이 역사가 주는 교훈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빼앗고 유린하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현장에 \\\"일어나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부탁을 받았을 때 겁을 먹고 두려워 계속 변명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며 항변합니다. 권력이 대단한 바로 앞에 서는 것도 두려운데 어떻게 그 손에서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을 이끌어 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말을 한다거나 정의를 부르짖는 것도 어렵지만 그러나 말하는 것은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재난과 온갖 압제로 고통당하는 이웃과 형제들을 건져내고 도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탈북자를 돕는 것과 수재민을 실의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한국신장협회 대구지부장께서 하시는 말씀이 \\\'대구에만 5,000여명의 신장투석자가 있는데 신장기증자는 한명도 없다\\\'고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죄에 억눌리고 사탄의 종이 된 형제와 이웃, 가족과 친구를 구원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내야 하며 저들의 영혼과 육체에 해방과 참 자유를 누리게 도와야 합니다. 반세기 전 8中15에는 우리가 정치적 해방을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하신 섭리로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유의 가치를 모르고 방종하였습니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망각하였고 방종과 자유를 혼돈하고 있었기에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2년 뒤에 6中25라는 무서운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후에 경제성장의 축복을 주셨지만 은혜를 알지 못하고 선히 사용하지 못할 때 또다시 무서운 세력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억압당하게 되었습니다. IMF나 WTO 이런 세력이 우리의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선서하기를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고 하지만 대통령이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왜 구조조정을 하며 수백만의 실업자를 내야 합니까? IMF라는 괴물이 우리를 억압하고 자기들 유익한대로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자유도, 정치적 자유도, 경제적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얻은 것 같으나 사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된 자유,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노예와 자유인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위하여 남북전쟁을 치를 때입니다. 어느날 노예해방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장관들이 찾아와 링컨을 협박했습니다. \\\"당신이 노예 해방운동을 계속 한다면 우리 내각은 총사퇴할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갔습니다. 링컨은 기도실에 들어가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의로운 길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분명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각료들을 불러놓고 링컨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노예해방운동을 중단없이 밀어 붙였습니다.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는 나라는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얼마나 비참한 노예가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 지배를 받을 때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칼 힐티(Karl Hilt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세가지 힘이 있다. 그것은 돈과 명예와 향락이다\\\"고 했습니다. 이 세가지 돈과 명예와 향락과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할 때는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다녀도 진정한 자유는 없습니다. 말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신앙에 의해서 얻은 자유만이 참 자유이며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있을 때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루스벨트가 말한 3대 자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둘째는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셋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첫째는 육체적 자유이며 둘째는 정신적 자유이며 셋째는 영적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가 없이는 참된 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영육간 모든 자유를 다 주셨습니다. 이 참된 자유를 누리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하셨습니다. 가라 모세 - 모세가 누구입니까?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입니다. 건짐받은 사람, 저와 여러분입니다. 죄악의 강물에서 건짐받은 우리들이며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짐받은 우리들입니다. 가야 할 모세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바로보다 더 포악한 압제자가 많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질병과 가난에서, 정치적 억압에서, 불안과 근심에서 건짐받아야 할 우리의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가야 할 사람은 우리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나 자매 중에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면서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약2:15-17)고 하셨습니다. 해방을 위해 몸소 희생하고 실천해야 됨을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에 필요한 모세가 되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에 순종하며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안겨주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라 모세/ 출3:7-12/ 2001-10-16
가라 모세 출3:7-12 내 백성의 고통의 현실 앞에 가라 히브리 민족이 430년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seen)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들으시고(heard) 그들의 근심을 아시고(know) 모세를 불러 바로에게로 내려가서 내 백성을 건져 내라고 하셨다. 고난과 치욕과 슬픔의 노예살이에 지치고 곤고한 그들의 현실에 가라고 하셨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낸 자\\\"이다. 건짐받은 모세는 수렁에 빠진 백성을 건져낼 사명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죄악에서 건짐받은 성도로서 내가 가야할 곳을 알아야 하겠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 바로 앞에 가서 서는 것을 두려워한 모세에게 바로 앞에 서는 것으로 사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내는 것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정의로운 말을 하고 구별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해야 될 일을 행동에 옮기는 실천적인 삶이어야 한다. 형제나 자매 중에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약 2:15-17) 해방은 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적인 헌신에서 이루어진다. ·얽매임에서 참된 자유를 선포하라 노예와 자유인은 공존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를 얽어매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에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어버렸는가? 케이 힐티는 우리를 지배하는 세가지 힘이 있는데 돈과 명예와 향락이라고 했다. 이러한 세가지 힘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 참된 자유는 없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신 주님을 의지하고 따를 때 진정한 자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하셨다. 광복 54주년을 맞는 주일입니다. 광복절은 「빛을 다시 찾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름 그대로 빛을 다시 찾은 날이 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해방된지 반세기가 넘어서인지 우리는 그때의 감격도 잊었습니다. 잊었다기보다는 모르고 있습니다. 광복의 감격이 없는 것은 일제 치하의 아픔과 비극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누리는듯 하나 자유를 뺏기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나라도 국민도 생각지 않는 정치인,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타락한 기업윤리, 이것은 식민지 문화의 잔재입니다. 해방된 것 같으나 또다른 노예생활을 하는 현실을 마음아프게 바라보면서 오늘도 억눌린 자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해방하시는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대륙에 노예로 팔려갔던 아프리카 흑인들이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흑인들이 부르는 교회음악의 한 장르가 생겨 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흑인영가라고 하는 흑인들만의 독특한 리듬과 멜로디의 노래입니다. 아프리카의 원시적인 리듬에다가 노예생활의 서러움과 고난을 담은 구슬픈 멜로디의 이 흑인영가는 오늘날 흑인들 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교회가 즐겨 부르며 신앙의 활력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흑인영가로 된 성가곡과 복음성가들이 많이 불려지고 있습니다. 흑인영가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곤고한 노예살이에서 건져주시고 그 압제자들의 손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구하는 찬양\\\"입니다. 이 흑인영가 중에 대표적인 것이 \\\"가라 모세\\\"(Go down Moses)입니다. 이 노래는 누군가 흑인 중에서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나와서 자신들의 얽매임에서 해방시켜 줄 날을 바라보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흑인영가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가라 모세 저 에집트의 파라오에게 가서 내 백성을 해방하도록 지시하라 모세야 가거라 가서 파라오에게 말하라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 이러한 흑인영가는, 노예생활의 치욕과 슬픔과 곤고함을 노래로서 자신들을 위로하며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430년간 애굽에서 노예살이 하던 때를 기억하면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이, 흑인노예들인 자신들에게도 해방을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들은 그 비극적인 노예생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흑인들의 철저한 구속신앙입니다. 히브리 민족과 흑인들처럼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지 36년간 온갖 수치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해방을 얻고져 했습니다. 이번 중국선교지 방문때 돌아오는 길에 상해에 들러 임시정부 청사를 잠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나라와 주권을 뺏긴 그때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국가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히브리 민족처럼, 미국의 흑인노예들처럼 오직 하나님이 일본을 꺾으시고 식민정책에서 우리를 건져줄 것을 믿으며 부르짖었습니다. 지금 우리 신앙의 줄기가 되는 구속사 신앙은 바로 이 출애굽 사건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근심을 아신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해방을 주셨다고 믿는 구속사적 신앙입니다. 해방기념주일을 맞으면서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분명한 구속사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얽매임과 비극적인 현실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해방시켜 참자유를 주실 분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해방의 도구로 쓰시는 방법은 여러가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를 해방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일어나 고통받고 신음하는 삶의 자리에 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엄청난 실상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히브리 민족은 그들의 해방절인 유월절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유월절이 짧게 잡아도 3,300년이 지난 사건이지만 그들은 단 한해도 유월절 사건, 즉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잊지 않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면 쓴 나물과 누룩없는 무교병과 양고기를 먹으면서 유월절 사건을 생생히 재연합니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 민족이, 우리의 선조들이 당했던 참극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일본의 잔악한 식민정책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군수물자를 위해 뺏아간 공출은 식량과 지하자원과 삼림과 심지어는 집안의 솥과 숟가락, 교회의 종까지 탈취해 갔습니다. 보이는 물질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와 성과 이름까지 빼았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노동자로 끌려간 징용제도는 수많은 생명을 착취하였고 이 땅의 젊은 생명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습니다. 여성들도 예외없이 근로정신대라 해서 많은 공사장에 강제동원 했으며 처녀는 물론 아이가 딸린 유부녀들까지 일본군의 성적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전선으로 끌고가 종군위안부로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일제 36년간 강제로 동원된 한국인이 700만이 넘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지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강제노동으로 끌려가 죽은 한국인이 홋카이도에서만 철도에 깔린 굉목보다 많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과거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정신대 위안부로 끌려가 일생을 좌절과 고통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데도 보상은 커녕 고통을 더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제 방송된대로 일제는 소록도에서 불치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갖가지 생체실험을 했으나 거기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일들을 잊고 있으며 무관심해서는 안될 역사에 대해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당했던 아픔과 질곡의 역사를 기억하며 광복절을 맞아야 합니다. 이 역사가 주는 교훈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빼앗고 유린하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현장에 \\\"일어나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가 없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부탁을 받았을 때 겁을 먹고 두려워 계속 변명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며 항변합니다. 권력이 대단한 바로 앞에 서는 것도 두려운데 어떻게 그 손에서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을 이끌어 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말을 한다거나 정의를 부르짖는 것도 어렵지만 그러나 말하는 것은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재난과 온갖 압제로 고통당하는 이웃과 형제들을 건져내고 도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탈북자를 돕는 것과 수재민을 실의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한국신장협회 대구지부장께서 하시는 말씀이 \\\'대구에만 5,000여명의 신장투석자가 있는데 신장기증자는 한명도 없다\\\'고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죄에 억눌리고 사탄의 종이 된 형제와 이웃, 가족과 친구를 구원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내야 하며 저들의 영혼과 육체에 해방과 참 자유를 누리게 도와야 합니다. 반세기 전 8中15에는 우리가 정치적 해방을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특별하신 섭리로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유의 가치를 모르고 방종하였습니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망각하였고 방종과 자유를 혼돈하고 있었기에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2년 뒤에 6中25라는 무서운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후에 경제성장의 축복을 주셨지만 은혜를 알지 못하고 선히 사용하지 못할 때 또다시 무서운 세력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억압당하게 되었습니다. IMF나 WTO 이런 세력이 우리의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선서하기를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고 하지만 대통령이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왜 구조조정을 하며 수백만의 실업자를 내야 합니까? IMF라는 괴물이 우리를 억압하고 자기들 유익한대로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자유도, 정치적 자유도, 경제적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얻은 것 같으나 사실 보이지 않는 무서운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된 자유,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노예와 자유인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위하여 남북전쟁을 치를 때입니다. 어느날 노예해방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장관들이 찾아와 링컨을 협박했습니다. \\\"당신이 노예 해방운동을 계속 한다면 우리 내각은 총사퇴할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갔습니다. 링컨은 기도실에 들어가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의로운 길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분명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각료들을 불러놓고 링컨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노예해방운동을 중단없이 밀어 붙였습니다.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는 나라는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얼마나 비참한 노예가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 지배를 받을 때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칼 힐티(Karl Hilt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세가지 힘이 있다. 그것은 돈과 명예와 향락이다\\\"고 했습니다. 이 세가지 돈과 명예와 향락과 관계를 완전히 끊지 못할 때는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다녀도 진정한 자유는 없습니다. 말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신앙에 의해서 얻은 자유만이 참 자유이며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있을 때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루스벨트가 말한 3대 자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둘째는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셋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첫째는 육체적 자유이며 둘째는 정신적 자유이며 셋째는 영적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가 없이는 참된 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영육간 모든 자유를 다 주셨습니다. 이 참된 자유를 누리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하셨습니다. 가라 모세 - 모세가 누구입니까?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입니다. 건짐받은 사람, 저와 여러분입니다. 죄악의 강물에서 건짐받은 우리들이며 사망의 골짜기에서 건짐받은 우리들입니다. 가야 할 모세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바로보다 더 포악한 압제자가 많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질병과 가난에서, 정치적 억압에서, 불안과 근심에서 건짐받아야 할 우리의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가야 할 사람은 우리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나 자매 중에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면서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약2:15-17)고 하셨습니다. 해방을 위해 몸소 희생하고 실천해야 됨을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에 필요한 모세가 되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에 순종하며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안겨주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룟유다와 맛디아/ 행1:12-26/ 2016-07-10
가룟 유다와 맛디아 행1:12-26 예수님의 승천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은 가슴 벅찬 환희와 감동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설립되고 선교가 시작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기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기도의 위력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오순절 성령 강림을 가능케 했던 다락방 기도회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다락방 기도회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예루살렘 그 곳은 자신들을 죽이고자 살기등등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곳은 또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리라고 예언된 약속의 도성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안전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중히 여겨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신들의 생명이 위태로운 그 곳이었지만, 예수님의 명령과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용기 있는 믿음은 자신의 안전보다 주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신앙에서만 나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왕에게 나아간 에스더와 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믿음으로 담대히 풀무 불을 택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설령 손해가 예상되고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담대히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귀하게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제자들은 주님의 승천을 목격한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을 포함해서 120명이 되었는데, 그들이 모두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합심 기도의 가장 큰 유익은 하늘 보좌를 움직여 기도의 응답을 속히 받는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들은 요나가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자 즉시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 심지어 육축까지도 식음을 전폐케 하고 하나님께 회개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기로 계획하셨던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에스더는 유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삼촌인 모르드개와 수산 성의 전 유대 민족에게 삼 일간 금식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리하여 온 유대 민족이 합심 기도한 결과 풍전등화와 같이 멸망 직전에 있었던 유대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악랄한 헤롯은 야고보를 잡아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때 행 12:12에 보면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도들의 간절한 합심 기도로 마침내 그들의 지도자 베드로를 감옥으로부터 무사히 구출해 냈습니다. 이처럼 합심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대단한 위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만인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무엇보다도 기도의 불이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다락방 기도회를 통해 탄생되었으며, 능력 있는 교회로 도약했습니다. 그것도 베드로와 요한 등 위대한 교회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백 이십 여명 성도들의 합심 기도에 의해 비롯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합심 기도의 힘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보잘 것 없지만, 모여서 함께 합심으로 기도할 때,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에는 개인의 깊은 골방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심령을 기르기 위해서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건설하며 부흥시키는 일에는 모든 성도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전심전력으로 기도하는 합심 기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의 음악 등에 있어서는 초대 교회에 비할 수 없으나, 현대 교회는 기도가 부족하여 능력을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가 2000명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려면, 먼저 새벽 기도회나 금요 기도회에 그 10/1인 200여 명씩 모여서 합심 기도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결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2. 가룟 유다의 비참한 종말 16-20절은 가룟 유다의 비참한 종말에 대한 기록입니다. 베드로는 불행한 옛 동료인 가룟인 유다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한 때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제자들의 반열에 올랐던 가룟 유다였지만, 이제는 그 사람이라 불림을 받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그는 더 이상 ‘사도’나 ‘성도’로 불리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재정을 맡고 있던 제자였습니다. 유다는 남달리 계산에 밝았지만 언제나 자기중심적이었고 이기적이었습니다. 무엇이 선한 일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무엇이 내게 유익한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희생보다는 자기 보호에 힘쓰고, 협력보다는 이권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마리아가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때에, 유다는 말하기를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고 힐난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이렇게 말함은 정말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돈에 대한 탐심을 극복하지 못했던 유다는 결국 스승인 예수를 은 30에 팔아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 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유다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다는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후회하였으나 목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뉘우침과 회개는 다릅니다. 회개를 하면 용서를 받지만, 뉘우치는 것으로 그치면 용서가 없습니다. 이렇게 유다는 뉘우쳤을 뿐 회개가 없었습니다. 유다는 힌놈의 골짜기 위에 솟아 있는 절벽에서 나무에 목을 매었으나, 그 줄이 끊어지고 또는 나뭇가지가 꺾어져, 예리한 바위에 부닥쳐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반역자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이리하여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 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저희 갈 곳을 갔나이다’ 한 것은 대단히 두려운 말입니다. 유다가 직분을 버리고 갔다고 했으니, 누가 가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는 곳은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 직분을 다하여 천국에 가는 길이요, 하나는 제 직분을 버리고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할 그가 세상의 출세를 위해 예수를 따라 다니다, 실망하여 사도직을 버린 것입니다. 유다는 영광스런 사도의 직을 버리고 비참한 멸망의 곳으로 갔습니다. 그 곳이 그의 갈 곳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또한 하나님의 교회가 맡겨 주신 거룩한 직분을 부담스럽거나 명예욕으로 받는 사람은 없습니까? 교회에서 주는 직분을 가볍게 알고, 조금만 힘들거나 불만 요소가 생기면 직분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직분을 버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세워 반드시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손해는 하나님과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저버린 바로 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어지는 일이 비록 사람이 보기에는 하찮을지라도, 이 일은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임을 믿고, 그 분 보시기에 착하고 충성된 일군으로 인정받으실 수 있도록 힘쓰고 애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다와 같이 직분을 빼앗기고 영원한 저주의 자리에 머물지 말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했다가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축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맛디아의 보선 제자들은 가룟 유다로 인하여 공석이 된 한 사도의 자리를 충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뽑게 되는데, 베드로는 자격을 다음과 같이 이릅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이처럼 교회의 직분자에게는 일정한 자격이 필요합니다. 초대 교회는 직분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직분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집사들을 택할 때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을 택하였습니다. 목사와 장로의 자격도 엄격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일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믿은 지 얼마 안 된 자에게도 직분을 줍니다. 우리 주위에는 신앙의 연약함으로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져 상처받는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대로 직분을 남발하지 말아야 하며, 성도는 성도대로 믿음도 없고 사명감도 없이 명예에만 눈이 어두워 직분을 원해서도 안 됩니다. 이 시간 모든 직분자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직분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각자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유다를 대신할 사도의 자격을 요한이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해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 곁에서 동고동락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그러한 사람이라고 하면 매우 신실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말하자면 열두 제자와 똑같이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예수 뒤만 따라다녔다는 말인데, 이는 신실한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한 때 사람 앞에서는 가리어지고 숨겨지더라도,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역사에 전면에 등장시키시고야 맙니다. 진정한 사도의 자격이,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동고동락한 사람이어야 했듯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매일매일 예수와 함께 생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직책은 유능한 사람,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 맡는 것이 대체적인 흐름이지만, 하늘의 직책은 이처럼 믿을 만한 사람 충직한 사람이 맡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독교회는 유능한 사람 똑똑한 사람보다는, 이처럼 충실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람에 의해 부흥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보다는, 신실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다섯 달란트를 열 달란트로, 두 달란트로 네 달란트를 만든 종에게 ‘능력 있는 종아’ ‘똑똑한 종아’ 라고 하지 않으시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직분을 맡을 자의 보다 더 중요한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본받아 살면서, 그의 거룩하심을 이루는 것입니까? 물론 맞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바른 대답은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부활은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신앙이다. 터툴리안은 ‘우리의 소망의 표본이요, 무덤의 열쇠다. 칼빈-복음의 총제목이다. 멜랑톤-교회의 특별한 음성이다. 그렇습니다! 사도와 교회, 성도의 최대 최고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교회의 표어대로 전성도 전도인이 되고, 전 성도 선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후보로 두 사람이 추천되었습니다.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고, 또 한 사람은 맛디아였습니다. 바사바와 요셉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안식일의 아들’이란 뜻이고, ‘유스도’는 로마식 이름으로 ‘정의’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면에 ‘맛디아’는 ‘여호와의 선물’이란 뜻을 가졌습니다. 이들 모두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줄곧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좇으며 신앙의 터를 쌓아 온 믿음이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후보 둘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동고동락하며 신임 받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줄 꿈에도 몰랐던 일입니다. 사도들은 사람의 판단과 선택보다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도하기를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를 보이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우리는 모든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그 뜻을 묻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맛디아가 제비 뽑혀 선택되었습니다. 바사바는 별명을 둘씩이나 가지고 또 먼저 이름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모든 면에서 보다 유력한 후보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보다 이름이 나지 않고 소박한 맛디아를 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잠 16:33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직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우리가 직분을 받는 것이 사람의 판단에서 하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맛디아의 보선에서 보는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생각지 말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다락방 기도회를 통하여 합심 기도의 교훈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서 합심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던 120문도처럼,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교회 부흥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들 중에 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다처럼 안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도라는 영광스러운 반열에 속하였지만, 항상 돈에 대한 탐심을 극복하지 못하다가 은 30에 주님을 팔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유다처럼 안 되기 위해서, 돈주머니에 대한 회개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늘 오늘 바로 살고, 현재에 바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전날 영광된 사도의 반열에 있었던 가룟 유다와 같이, 화려한 과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늘입니다. 또한 언제나 자신의 분수를 알아 겸손하기를 힘쓰십시오! 정녕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유다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계속되듯이, 우리 한 사람 없어도 주님의 교회는 다른 사람이 내가 하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겸손히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직분자는 그 직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충성을 다하고 있는지, 각자 여러분의 직분을 조용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본래 열두 제자의 수효 중에 들었던 유다였지만, 나중에는 그 영광스러운 반열에서 탈락하고 말았듯이, 본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수만 채우다가 주님의 날에 참 그리스도인으로써 참여하지 못하고, 버림받는 영혼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유다 대신 맛디아를 보선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그렇습니다! 맛디아의 선택은 선택받은 성도들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나 같은 죄인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여 주신 것,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함에 있는 것을 명심하시고, 특별히 총동원 전도 주일을 앞둔 이 시기에, 충성된 주님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가룟유다와 맛디아/ 행1:15-26/ 2016-03-06
가룟 유다와 맛디아 행1:15-26 조선시대의 유명한 상인이었던 임상옥 씨 삶의 이야기를 소설화시켜 낸 책 “상도”에 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임상옥이가 유명한 상인으로서 성공을 거둔 과정에 있었던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시에 궁궐의 치안을 맡아 있는 벼슬로서 요즘 말로 하면 수도경비사령부 또는 청와대 경호실장과 같은 직책을 가진 사람 박종경 대감이 하루는 문제를 내었습니다. “숭례문(지금 남대문)을 하루 동안 통행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를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를 맞히는 사람에게는 큰 벼슬을 내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문제를 맞힌 사람이 바로 임상옥입니다. 하루 동안 숭례문을 드나드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라고 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박종경은 “이 두 사람의 성씨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임상옥이는 “예, 이(利)씨와 해(害)씨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출입하더라도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부류는 대감께 이로움을 주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害(해)를 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운 사람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정직한 사람, 둘째는 성실한 사람, 셋째는 ‘박학다문’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해로운 사람은 첫째 아첨하는 사람, 둘째는 신용 없이 간사한 사람, 셋째는 진실한 견문이 없이 감언이설 하는 사람입니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반드시 두 부류의 사람입니다. 한 부류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인생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삶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급적이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후회를 하더라도 가장 적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임종을 앞에 두고 있으면 착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종을 앞두고 있으면 마지막으로 세 가지를 뉘우친다고 합니다. 즉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남에게 베풀지 못하고 산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참지 못한 것을 뉘우친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참았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던고,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세 번째는 좀 더 행복하게 살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입니다. 오늘 말씀에 두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인생에 오점을 남긴 사람으로서 인생을 후회하면서 자살까지 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의 욕망으로 인해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고 자살을 한 후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여러 가지로 부활하신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다가 결국 하나님의 보좌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그런데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이들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제자들과 여인들과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과 함께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때 모인 사람들이 약12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가룟 유다가 제자들 가운데 있던 자로서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없으므로 대신에 한 사람을 세워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날까지 같이 다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사도들은 당시에 두 사람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유스도, 또는 바사바라고도 하는 요셉과 다른 한 사람은 맛디아입니다. 이 두 사람을 놓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제비를 뽑으니 맛디아가 뽑혔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에는 잘 된 사람입니다. 우선 유다의 이름을 말할 때 지명인 가룟을 앞에 붙였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아들 유다와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가룟’은 무엇인가? ‘그리옷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옷 사람 유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옷’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유대지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자 12명 중 유일하게 유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공동체 재정을 보았습니다.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부가 향유 한 옥합을 깨트렸을 때 유다가 여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였다’고 했습니다. 보세요, 가룟 유다가 얼마나 명석했는지를 말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의 값이 매겨졌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주 대단한 의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이 여인이 한 일에 대해 평가하기를 낭비였다고 지적했습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받은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3년 동안 예수님과 다른 동료 제자들을 도왔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팔아먹고 결국 자살해버리는 안타까운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큰 걸림돌로 살다가 정말 해만 끼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았을 때 그 은혜를 잘 누리시기 바랍니다. 복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이미 받은 복을 잘 누리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또 다른 문제점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되었는가?   가룟 유다는 탐욕에 눈에 어두웠습니다. 돈을 좋았습니다. 여러분, 돈이란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없다고 해서 억지로 있게 하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12장에 보면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요한은 가룟 유다가 여인이 나드 한 옥합을 깨트렸을 때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낫겠다고 한 말에 대해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배경을 6절에서 밝힙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룟 유다를 도적이라 표현했습니다. 만약에 가룟 유다가 그런 일을 안했는데 요한이 이 말을 했다면 이것은 명예훼손죄에 해당됩니다. 그가 얼마나 세상의 것을 추구한 자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보면 탐욕에 눈에 어두워서 그렇게도 좋은 직장을 잃어버리거나 사업을 넘어지게 만드는 경우들을 봅니다. 엊그제도 경찰 고위 간부 두 명이 돈 문제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청와대 비서관 중 한 사람이 요즘 문제가 되는 어떤 회사와 부적절한 거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증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즉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은 30을 받은 가룟 유다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앞에 나타나 그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14장44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여러분 스승을 팔아넘기는데 가장 사랑하는 인사인 입맞춤을 이용했다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런 짓입니까? 얼마나 이중적인 인격자인지 모릅니다. 곧바로 알아버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대단히 사랑하는 척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마음에 증오를 하고 가장 잘해주는 척 하면서도 뒤에서 해를 끼치는 아주 가증스런 모습이 가룟 유다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완악해지면 의에서 멀리 떠난 자가 된다고 이사야46장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하게 됩니다. 악을 행하는데 는 굉장히 발이 빠릅니다. 잠언 1:16말씀 “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로마서3:15말씀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 가룟 유다는 모의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모의한 내용을 보면 치밀하게 했습니다. 마가복음14장10-11에 보면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그 후 44-45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기도하지 않고 졸고 있는 모습을 세 번째로 목격하면서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가룟 유다와 공모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종들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있을 때에 누가 예수님인지를 알려주는 방법으로 입을 맞추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공모를 잘합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모의를 잘합니다. 문제를 항상 일으킵니다. 어떤 목사님과 대화를 하는데 자신의 말을 잘 안 들으면 인터넷에 올려서 망신을 시켜버린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섬뜩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못된 짓이자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인데 어떻게 목사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유감입니다’라고 했더니만 그 방법은 그렇지요, 그것은 잘못되었네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도록 할게요. 예수 믿는 성도가 좋은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회를 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경건회를 하며, 부흥회를 열고 거기에 참여하는 일을 해야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어떻게 하면 목사를 넘어뜨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몰아내려고 하는 모의를 일삼는다면, 그런 일을 위해서 전화를 사용하고 그런 것을 위해 인터넷을 사용한다면, 그리고 유인물을 돌린다면 그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다면 가룟 유다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어떤 해가 미치더라도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불신앙의 모습이요, 이런 불신앙의 모습은 유다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27장 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넘겨질 때에 예수님을 판 유다가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이때 그들이 유다에게 말하기를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하니까,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를 회개할 줄 모를 때입니다. 가룟 유다가 잘못을 저지른 것도 물론 잘못했지만 가장 나쁜 것은 회개할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할 때 용서해주심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제 오후에 50사단에 가서 세례를 베풀고 교회에 와서 로뎀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있을 때 연세가 많은 노인이 로뎀 문을 열면서 들어오셨습니다. ‘목사님 되십니까?’하면서 걸어오셨습니다. 그때 ‘제가 담임목사입니다’라고 하니까 자신의 소개를 간단히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최근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목사를 보낸 몇 분의 장로들이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볼 때 너무 가슴이 아프시다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얘기를 하셨습니다. 자신은 오래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체험을 해서 교회나 가정에 무슨 큰 일이 있으면 이전에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종종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말씀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을 그렇게도 어렵게 만들든 장로님들 중에 한 분이 아프지도 않고 새벽기도 마치고 운동가신다고 갔는데 사늘한 시신으로 병원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분들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너무 안타깝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 왕에 대해 자주 말씀드리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성군이 되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잘못도 잘 저질렀지만 회개도 즉각 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와 간통한 사건도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을 때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눈물로 요를 적시면서까지 말입니다. 또한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지고 전쟁을 치루지 않고 인구조사를 해서 군사력으로 하려고 했지만 결국 벌을 받고서는 회개하여 제사를 드린 후에는 재앙이 멈추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렇듯 교회에는 가룟 유다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해가 되는 부류의 성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분명히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탐욕에 눈에 어두웠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증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즉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악의가 있는 모의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가룟 유다를 가리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26:24말씀,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한 이런 사람이 되면 되겠습니까?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 해놓고서 이것이 웬 말입니까? 탐욕 때문에,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영적인 것,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하나님은 남은 열 한명의 제자들을 통해서 가룟 유다 대신에 대타를 선택하도록 하였고 그들은 베드로의 통솔 하에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맛디아였습니다. 맛디아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주심’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입니다. 가룟 유다 대신에 직무를 감당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신 나온 대타를 선택할 때 어떤 사람을 추천했습니까? 첫째는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22절에 보면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활동을 같이 보고 느낀 사람, 예수님을 증언하기에 충분한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열두 제자 속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미 제자인 사람 중에서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세우실 때 하나님의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를 깊이 알자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 봉사의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이 가룟 유다 대신에 뽑을 때 그들에게 맡길 직무에 대해 2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봉사의 직무를 대신할 자”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자기의 길로 갔기 때문에, 대신 그 일을 감당할 사람을 선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내게 맡겨진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지 않으면 그 일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세우십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봉사할 기회를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기회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예비하신 복 받을 기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봉사의 직무를 잘 감당하십시오. 셋째, 맛디아는 사도의 직무를 잘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5절 말씀에 보면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선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그 직무를 버리고 갔기 때문에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선축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도의 직무가 무엇입니까? 22절은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 대신에 한 사람을 보충할 것을 제안을 할 때 한 말입니다. 그 말을 보면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부활의 증언자로서 가르치는 것은 사도의 역할입니다. 맛디아가 선출되었다는 것은 그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선택하시고 불러 세웠습니다. 무엇하기 위함입니까? 봉사의 직무와 사도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합니다. 이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버리십니다. 자기 스스로가 떠나버립니다. 우리도 맛디아처럼 대신이라도 선출될지언정 가룟 유다처럼 버림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봉사와 사도의 직을 감당하지 않고 세상에 눈이 어둡거나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있으면 가룟 유다같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우리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서로 봉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한 유명한 말이 기억납니다. “국민들은 국가에 무엇을 바라기 전에, 먼저 국가에 의무를 하고 말하라.” 이 말을 인용해서 적용해볼까요? “교인들은 교회에 무엇을 바라기전에 먼저 교회를 위하여 의무를 다하고 봉사하라”교회는 한 사람이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교회는 모두가 서로를 위해 섬기며 봉사해야 합니다. 권리만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의무를 먼저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면 이제는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여러 지체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각 지체들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감당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든든히 서갑니다. 록펠러는 암에 걸려 1년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았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곧 세상을 떠날 텐데 네 마음껏 자선 사업이나 하고 가렴” 록펠러는 그때부터 자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아낌없이 주니 가슴이 확 트이면서 마냥 행복해졌습니다. 결국 록펠러는 의사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 무려 4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상 시한부 인생입니다. 언젠가는 \\\'세상소풍\\\'을 마치고 떠나야만 합니다. 소풍을 마치는 그날까지 자기가 가진 것을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나누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봉사는 물질을 나누는 것만이 아닙니다. 시간, 재능, 마음을 나누는 것도 이 시대의 큰 봉사입니다. 지난 월요일에는 이 목사가 얼마나 큰 감동을 먹었는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교회가 새 예배당으로 입당한지 2년이 다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큰 교회건물 전체를 청소하고 관리하는데 외부의 전문 인력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가 성도 가운데 자원봉사자들입니다. 10여명이 넘는데 그 중의 몇 분은 월급 받고 나오시듯이 매일은 아니지만 주중에 4-5일 정도 나오셔서 구석구석을 다니시면서 청소합니다. 화단을 가꿉니다. 얼마나 수고를 하시는지 모릅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계속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책당회를 앞두고 의사를 타진해 보았습니다. 봉사하시는 분 중에 한 분에게 물었더니 이제 내년부터는 아마도 전문 용역업체에 맡겨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에 청소하러 나오신 분들과 대화를 하는데 모두가 내년에도 봉사하기로 봉사지원서를 써서 제출했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가룟 유다가 본래 감당해야 할 일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감당해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돈에 눈이 어두워서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먹은 후에 결국 맛디아에게 그 아름다운 봉사의 직을 물려주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당신은 반드시 맛디아가 될지언정 가룟 유다 같은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한 가지 이상씩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4:12절 말씀에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0:16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 할렐루야! 봉사하는 직무를 포기한 가룟 유다가 아니라 대신에 들어가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게 된 맛디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사랑받은 막달라 마리아/ 막16:9-11/ 2010-09-12
가장 사랑받은 막달라 마리아 막16:9-11 오늘 읽어드린 성경말씀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우리 인간들의 죄를 걸머지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만나주셨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 아래서 처절하게 절규하며 울부짖었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으며, <베드로-야고보-요한>등과 같은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아닌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과연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1. 그녀는 가장 죄가 많은 여자였습니다. 눅 8:2절을 보면, 그 여인은 흉악한 일곱 귀신이 들려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눅 7:37에 나오는 죄많은 한 여인은 바로 이 <막달라 마리아>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그녀의 살고 있던 <막달라>라는 동네는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지역으로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남달리 음란하고 타락한 여인이었으며, 게다가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길거리를 미친듯이 방황하던 가장 불쌍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그 여인은 가장 많은 용서를 받았던 여자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로부터 그 모든 죄들을 한꺼번에 용서받은 여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느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먼 발치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말씀들은 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으며, 들어보지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말씀이었습니다. 자기처럼 부정하고 죄많은 여자는 그저 그럭저럭 세상을 살다가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비참하게 버려지게 될 것이고, 지옥에나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로만 생각해 왔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로 새롭고 깜짝 놀랄만한 말씀들이었던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같이 깨끗하게 해 주리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나 필요한 것처럼 나는 죄인들을 부르러 왔노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해 주겠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전혀 새로운 말씀이었으며, 버려진 존재로 비참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한 충격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모두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을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그녀를 못살게 괴롭히던 더러운 일곱 귀신들이 예수님의 권능앞에 맥없이 빠져 나갔으며, 영육간에 새로운 건강과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와같은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후로 그녀는 전혀 180도로 달라진 삶과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루 하루를 희망과 기쁨속에서 즐겁게,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순간의 실수와 잘못된 판단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여러분들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께로 나아와 여러분들의 잘못과 실수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여러분들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모셔 들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크신 사랑으로 용서해 주실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실 줄 확신합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감격과 기쁨가운데서 살아가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승리하는 앞날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간절한 모세의 교훈/ 신4:15-28/ 2003-10-01
간절한 모세의 교훈 신4:15-28 본문 <24절>에 보면 < 여호와는 소멸하시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이 잘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질투하신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석 가들은 말하기를 이 말씀은 <神人同感同情論>적 표현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같고 계신 것처럼 표현하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대화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신령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요4:24>에서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질투하시도록 사랑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질투란 사랑의 극치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화염 중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상하면서 자기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이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려하면서 몇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가나안에 들어가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모세는 본문 <16-19>까지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중 그 첫째와 둘째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본문 <16-19>에서 우상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고, 땅 위에 짐승의 모양이나 하늘에 나는 새의 모양이나, 그리고 땅 아래 사는 물고기 형상이나, 또 하늘에 있는 일월성신의 어떤 모양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우주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므로 피조물이 창조자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우상이 제일 많은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인도에 가면 3억3천의 우상과 신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모세가 금지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선 인도에는 소가 우상입니다. 코프라, 뱀이 우상입니다. 코끼리가 우상입니다. 사람도 죽은지 3년만 되면 우상으로 섬김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10년 전에 인도에 갔을 때 일입니다. 뉴델리 시가지에 소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차들이 서서 \\\"소님\\\"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가 길 한 가운데 오물을 배설했습니다. 어디선가 한 여인이 바구니를 들고 달려와 그 더러운 똥을 손으로 바구니에 주워 담아 가지고 갔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까 소의 똥은 말려서 땔감으로 쓰던가 집을 지을 때 흙을 적당히 섞어서 벽을 바르는데 쓴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인도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나라입니다. 그러나 인도는 세계에서 3번째로 가난한 나라입니다. 3억 3천의 신들이 인도를 잘살게 하지 못한 이유는 모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진노만 격발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절대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 중에는 인도 사람들과 같은 짐승의 모양이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많은 우상들이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지식을 더 신뢰하므로 믿음에 자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 우상이 되어 그 물질을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고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이 혹시 우상이 되지 않았나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이유는 아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어떤 우상이 있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자에게 절대로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둘째로, 언약을 잊어버리지 말라 ! 본문 <23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 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운 언약이 무엇입니까? <출19:1-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켜 행하며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아니하면 <너희는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배가 고플 때 생각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개구리는 올챙이 적 생각을 하지 못한다\\\" 속담이 있습니다. 본문 <4:9>에 보면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너 아들과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부분은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매 시간마다 내가 지금 말씀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자신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5-6년 전에 연변에 가서 이곳을 다녀간 예술단 어린아이들에게 다음의 요지로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짐승과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냐? 짐승은 본능대로만 사는 것이고, 사람은 이성으로 본능을 절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개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떤 학생이 제게, \\\"목사님 저는 목사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 같은 사람이 되지 않고 사람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놀고 싶어도 자신을 절제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받고 많이 감격했습니다. 연변의 아이들은 내 말을 듣고 5-6년이 지나도록 그 말을 명심하고 있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명심하며 사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에 들은 말씀을 일주일 내내 생각하면서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상고할수록 더 은혜롭습니다. 모세의 염려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평안해 지면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죄 가운데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도 여호와의 언약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속히 망한다. 본문 <25절하>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나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또 <26-27>에 보면 만일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죄를 지으면 <너희 날이 길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내실 것이라 >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과 결혼하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역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솔로몬 때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고, 그 후 바벨론 포로와, 메데 파사와, 알렉산더 왕의 헬라의 속국이 되었다가 BC 64년에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진노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20세기초에는 유럽 통일의 꿈을 가졌던 히틀러에게 6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스실에서 독살을 당했으며, BC 606년에 자주권을 잊어버리고 2천5백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세계에 흩어져 살다가 2,554년만인 1948년에 겨우 그 나라를 회복하였으나 아직도 이스라엘의 죄과는 끝나지 않아서 팔레스타인과의 싸움 가운데 휘말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면 당장은 잘 되는 것 같고 평안한 것 같지만 오늘 말씀대로 그 평안이 길지 못하며, 속히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데 그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망하게 하는 방망이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서 떠나지 않도록 날마다 그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말씀에서 떠났는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날마다 자신을 관찰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우상을 몰아내고, 말씀을 지키므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복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간절한 모세의 교훈/신4:15-28
간절한 모세의 교훈/신4:15-28 2011-12-31 11:51:24 read : 2 본문 <24절>에 보면 < 여호와는 소멸하시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씀이 잘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질투하신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석 가들은 말하기를 이 말씀은 <神人同感同情論>적 표현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같고 계신 것처럼 표현하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대화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신령한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요4:24>에서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질투하시도록 사랑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질투란 사랑의 극치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호렙산에서 화염 중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상하면서 자기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이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려하면서 몇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가나안에 들어가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모세는 본문 <16-19>까지의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중 그 첫째와 둘째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모세는 본문 <16-19>에서 우상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고, 땅 위에 짐승의 모양이나 하늘에 나는 새의 모양이나, 그리고 땅 아래 사는 물고기 형상이나, 또 하늘에 있는 일월성신의 어떤 모양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우주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므로 피조물이 창조자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우상이 제일 많은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 아십니까? 인도에 가면 3억3천의 우상과 신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모세가 금지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선 인도에는 소가 우상입니다. 코프라, 뱀이 우상입니다. 코끼리가 우상입니다. 사람도 죽은지 3년만 되면 우상으로 섬김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10년 전에 인도에 갔을 때 일입니다. 뉴델리 시가지에 소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차들이 서서 "소님"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가 길 한 가운데 오물을 배설했습니다. 어디선가 한 여인이 바구니를 들고 달려와 그 더러운 똥을 손으로 바구니에 주워 담아 가지고 갔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까 소의 똥은 말려서 땔감으로 쓰던가 집을 지을 때 흙을 적당히 섞어서 벽을 바르는데 쓴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인도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나라입니다. 그러나 인도는 세계에서 3번째로 가난한 나라입니다. 3억 3천의 신들이 인도를 잘살게 하지 못한 이유는 모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진노만 격발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절대로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 중에는 인도 사람들과 같은 짐승의 모양이나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많은 우상들이 가득 차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지식을 더 신뢰하므로 믿음에 자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 우상이 되어 그 물질을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고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이 혹시 우상이 되지 않았나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이유는 아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어떤 우상이 있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자에게 절대로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둘째로, 언약을 잊어버리지 말라 ! 본문 <23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 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운 언약이 무엇입니까? <출19:1-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켜 행하며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아니하면 <너희는 열국 중에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배가 고플 때 생각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는 "개구리는 올챙이 적 생각을 하지 못한다" 속담이 있습니다. 본문 <4:9>에 보면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너 아들과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부분은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매 시간마다 내가 지금 말씀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자신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5-6년 전에 연변에 가서 이곳을 다녀간 예술단 어린아이들에게 다음의 요지로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짐승과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냐? 짐승은 본능대로만 사는 것이고, 사람은 이성으로 본능을 절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개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떤 학생이 제게, "목사님 저는 목사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 같은 사람이 되지 않고 사람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놀고 싶어도 자신을 절제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받고 많이 감격했습니다. 연변의 아이들은 내 말을 듣고 5-6년이 지나도록 그 말을 명심하고 있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명심하며 사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에 들은 말씀을 일주일 내내 생각하면서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상고할수록 더 은혜롭습니다. 모세의 염려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평안해 지면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죄 가운데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도 여호와의 언약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속히 망한다. 본문 <25절하>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나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또 <26-27>에 보면 만일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죄를 지으면 <너희 날이 길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내실 것이라 >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과 결혼하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역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솔로몬 때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고, 그 후 바벨론 포로와, 메데 파사와, 알렉산더 왕의 헬라의 속국이 되었다가 BC 64년에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진노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20세기초에는 유럽 통일의 꿈을 가졌던 히틀러에게 6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스실에서 독살을 당했으며, BC 606년에 자주권을 잊어버리고 2천5백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세계에 흩어져 살다가 2,554년만인 1948년에 겨우 그 나라를 회복하였으나 아직도 이스라엘의 죄과는 끝나지 않아서 팔레스타인과의 싸움 가운데 휘말려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면 당장은 잘 되는 것 같고 평안한 것 같지만 오늘 말씀대로 그 평안이 길지 못하며, 속히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데 그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망하게 하는 방망이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서 떠나지 않도록 날마다 그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말씀에서 떠났는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날마다 자신을 관찰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우상을 몰아내고, 말씀을 지키므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복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거절당한 모세의 소원/ 신3:23-27/ 2005-11-18
거절당한 모세의 소원 신3:23-27 중남미 현지 목회자 320명이 이번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원로 목사님과 함께 기독교의 진리를 철저히 현지 목회자들에게 강의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남미 일대 목회자들의 신학적 지식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열정은 대단합니다. 보통 예배드렸다 하면 3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찬송을 많이 하고 예배가 일찍 끝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한국 목회자들이 웬만하면 체력을 못 견디게 되는데 하루 종일 강의를 해도 계속 하라고 합니다. 낮은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열정 때문에 세계 지도력 개발원에서 주최하는 세미나가 아주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제 세계 지도력 개발원 사역은 현재까지 31회째 실시했습니다. 본래는 세계로 흩어져있는 한국인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알리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이것이 외국 목회자들에게 알려졌고 요청이 많아져서 지금은 우리 한국 목회자들 중심이 아닌, 외국인 현지 목회자들 중심의 지도력 개발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32회는 다음 달에 목포 지역에서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원로 목사님께서도 오실 것입니다. 제가 갈 때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현지 목회자들을 잘 대접하고 원로 목사님도 아주 잘 대접해드리고 왔습니다. 또한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신명기는 모세 5경 중에서 제일 마지막입니다. 신명기 기록 전체는 모세를 설교자로 세워 하나님이 설교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이 선포되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의 고난 역사를 거의 다 끝마치고, 아브라함 조상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 입구에 와 있을 때의 기록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이 빤히 쳐다보이는 지점까지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아주 매우 흥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조상에게 약속받은 축복의 대지가 어디인가? 이제 농사짓고 행복하게 정착 생활해야 되겠다.\\\\\\\' 광야 40년 동안 아주 지긋지긋하게 만나만 먹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눈앞에 자기들의 희망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브라질 농업 이민을 많이들 갔습니다. 배를 타고 두 달씩 걸려서 캘리포니아에 가서 사람들을 태우고, 인도네시아에 가서 또 태우고, 그 후에 브라질로 향해했습니다. 그때 이민 가신 분들을 제가 중남미에 집회 다니면서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두 달 동안 배 안에서 날마다 바다만 바라보고 지나가니까 어쩌다가 섬 하나라도 나타날 때는 사람들이 모두 흥분해서 갑판 위로 올라와서 \\\\\\\"어서 우리가 살 땅에 도착했으면 좋겠다!\\\\\\\"하면서 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두 달 만에 도착한 목적지에서 사람들이 어찌나 흥분을 하는지 전부 눈을 크게 뜨고 \\\\\\\'아! 내가 살아야 할 땅이 여기인가?\\\\\\\' 흥분해서는 감격으로,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약간의 불안으로 \\\\\\\'여기서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달도 그렇게 지루하고 힘이 드는데 40년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출애굽할 당시 한살이었던 아이가 이제 40세가 되었고, 그때 80세이었던 모세는 120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자나 깨나 듣던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이는 흥분 속에 있고, 모세도 비스가산에 올라가 들어갈 땅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향해 오랫동안 고난을 이긴 것은 마지막 열매를 얻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땀 흘리는 농부는 수확의 가을을 가슴에 품고 봄에 파종을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사회생활 합니다. 한 달 동안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 저녁까지 열심히 자기 사명의 온갖 지혜와 에너지를 투자하면서 일을 합니다. 한 달이 지나면 수고한 열매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사람은 약속만 분명하면 어떤 고난도 이겨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그렇게 믿고 있는 성경의 진리와 일반적 진리를 역행하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40년 전에 모세에게 약속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약속이 얼마나 화려한지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너는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 있는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땅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줄 것이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고 먹고 배부르게 되는 땅이라. 그리로 가라. 너희들은 거기에 가서 성읍에 가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내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게 얼마나 화려한 약속입니까?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히브리 문학으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가장 화려한 표현으로 온갖 좋은 것을 모두 나열한 것이 바로 이 약속입니다. \\\\\\\"세계 만민이 너를 보고 두려워할 것이며 네 창고가 넘치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보장이 주어질 것이니라.\\\\\\\" \\\\\\\"너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꾸어줄지라도 꾸이지 아니할 것이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모세는 이 약속을 믿고 40년 고난을 이겼습니다. 이제 성취는 눈앞에 손에 잡히는 지점까지 와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민수기 성경에 나타난 역사는 한마디로 줄여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모세의 말 중 성경에 제일 많이 기록된 단어가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가로되\\\\\\\"라는 말입니다. 40년 동안 온갖 원망을 한 몸에 다 받으면서 모세가 일을 해왔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환경을 만나도 불평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환경이 좋아질수록 불만이 더 커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문명국 사람일수록, 배운 사람일수록 더 이기주의로 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박 4일 또는 일주일 정도의 수양회를 교회에서 여러 번 진행합니다. 일 년에 우리 주일학교에서 20회 이상 늘 다녀옵니다. 요즘 수양관 시설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갈 때도 에어컨 시설이 되어있는 최고로 좋은 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리고 가서도 영양가 높은 식사에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침대에서 잠을 자고 경치 좋은 곳에서 최고의 학문으로 수련된 강사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수양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항상 불평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오히려 덜 합니다. 어른들 데리고 가면 더 불평이 많습니다. 만약 우리 갈보리교회의 6,000~7,000명이 한꺼번에 여기서 부산까지 한 달만에 간다고 합시다. 못 견딥니다. 불평 때문에 누구도 못 견딥니다. 모세는 불평이 많은 백성들 때문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민수기 11장 15절에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백성들이 고기 달라고 아우성칠 때 모세가 기도한 것입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죽는 것이 제일 행복해진 모세! 사실 백성들이 봐도 모세가 고기를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니까 죽여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모세는 그의 생에 두 번 행복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애굽의 왕자 책봉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애굽은 세계사에서 그 당시로는 세계 최강국입니다. 세계 3대 문명의 발상지가 나일강 문명이라고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지금도 카이로 박물관에 가보시면 세계 5대 박물관으로서 가장 인류의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볼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나일강에 떠내려가다가 바로의 공주가 건져 궁중에서 성장했습니다. 바로의 뒤를 이어 왕이 되면 평생을 왕궁에서 지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라고 해서 이런 생각을 안했을 리가 없습니다. 모세도 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입니다. 40년 궁중 음식에 입이 길들여진 사람인데 만나만 먹으면서 지내는게 아마 제일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록 처가살이는 했지만 이드로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장인이 물려주는 축산 농가에서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조용하게 할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딸인 십보라와 결혼을 했고, 게르솜이라는 아들이 생겼고, 그대로 살다가 거기서 조용히 죽으면 아마 제일 좋은 생애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주시키는 지도자 역할은 절대로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도 끈질기게 요구하시고 화려한 약속을 주시니까 마지못해 나선 일입니다. 자신은 애굽 혈통이 아니라 학대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의 역사를 나서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던 민족 지도자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악조건 속에서 사람들을 가장 훌륭하게 이끈 사람은 모세입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모세 같은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80세의 나이에서 120세까지 4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 노예 신분의 백성을 사막으로 끌고 나가 외적과 싸우면서 기어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했던 세상에 둘도 없던 하나님이 선출하신 위대한 지도자! 그는 이제 자기 사명의 완수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40년 동안 그리던 가나안 땅을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가 모세의 소원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일의 진행으로 본다면 이러한 기도는 필요 없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마 우리의 문화대로 본다면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서 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셔도 마땅히 그가 왕이 될 사람이요, 넉넉히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의 능력을 평가하면 그보다 인류 역사에 훌륭한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본래 그는 애굽의 왕자 책봉을 받은 사람입니다. 혈통이 다르지만 바로가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사람입니다. 국민들이 투표를 한다 해도 모세를 당할 야당 지도자가 있겠습니까? 90퍼센트 이상의 압도적 승리를 할 수 있는, 당연히 왕이 될 사람입니다. 아마 오히려 그렇게 되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혼란기 역사가 없이 일찌감치 정착할 수 있는 문화가 더 빨리 형성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모세가 마지막 소원으로 기도했던 내용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면 \\\\\\\"모세야! 그동안 참 내 일을 위해서 네가 고생 많이 했다. 네가 소원하는 것은 이제 내가 다 들어주겠다. 이제 너는 안식의 시간이다. 그 땅에 들어가서 존경받고 왕이 되고 다스리고 넉넉히 먹고 누리거라!\\\\\\\" 이렇게 말씀하셔야 상식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의 소박한 소원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은 \\\\\\\"안 된다. 그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모세가 지금 설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여러 소리 말라. 너는 안 된다. 건너가지 못한다.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다 들어가지 못해도 모세는 들어가야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공로자입니다. 오늘 말씀 27절에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아니, 기껏 산꼭대기에 올려 보내서 다 보라고 하시고는 \\\\\\\"너는 못 들어간다.\\\\\\\" 하나님이 모세를 약 올리시는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운명적으로 산에서 시작해서 산에서 끝이 납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만났습니다.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계약 백성의 표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비스가산 위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들어가지 못하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느보산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의 종이 간절히 소원하는 그 쉬운 문제를 거절하셨는가? 우리가 이 뜻을 알아야만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을 거절하십니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므리바 반석에서 물 터진 사건에서 모세는 잠시나마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손을 대서 물 터지게 하는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선언한바 있습니다. 그때 물은 터졌으나 하나님은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정적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리에 오는 것을 금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왜 죄 아래로 떨어져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하와가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고유의 영역에 파렴치한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했을 때, 이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이 들으시기에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인간이면서 내가 예수라고 말하고 그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나라에만 해도 내가 예수라고 말한 사람이 수십 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수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온 세계 다녀보면 어느 나라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 재산까지 모두 다 바칩니다. 평생을 노동하고 헌신하는 그런 집단들이 지금 한 나라에서 굴지의 기업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만도 예수가 된 자가 수십 명인데 모세는 넉넉히 하나님의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네가 이미 내 자리에 앉았었느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섬기는 야훼 종교가 아닌 모세 종교가 생기게 됩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하나님은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보매 하나님 같더라.\\\\\\\" 또, 하나님도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아론을 네 입의 대변자로 삼으라.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하나님도 그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왜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합니까?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얼굴이 광채로 빛이 났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이 아닌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얼마나 인간적 실수가 많은 사람인가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살인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 혈기를 참지 못하고 살인을 해버렸습니다. 자수하지도 아니하고 공소시효가 지날 때까지 도망간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리 큰 괴로움이 와도 다른 사람이 듣는 공중 기도에서 \\\\\\\"하나님이여 즉시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즉시로 나를 죽이시어\\\\\\\" 얼마나 혈기가 많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100살이나 된 사람이 첩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에티오피아 구스 여자를 취해서 아론과 미리 암의 원망을 사는 등 실수천지입니다. 이 일로 모세는 고난을 많이 겪었는데 하나님의 용서가 어렵지 않았던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모세의 편에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침해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가혹한 심판을 내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인간의 거룩한 예배의 대상입니다. 실제로 광야 40년의 민족 이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모세는 심부름꾼으로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가나안 입성을 비스가산에서 막으신 것입니다. \\\\\\\"너는 안 된다. 네가 내 자리에 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많이 했다고 반드시 지상에서의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상업주의 문화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심리에서는 누구든지 \\\\\\\"투자는 적게 하고 수확은 많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똑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손익을 계산해서 만나고 헤어집니다. 나의 목적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주변에 두려는 작업을 열심히 합니다. 투기사업이라는 문화는 그래서 생긴 말입니다. 적은 투자로 수없이 많은 열매를 수확해야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마저도 현대인들에게는 손익을 따지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무엇을 얼마나 얻으리이까? 보소서. 우리가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런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한층 더 위대한 생각을 했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 거룩한 역사에 쓰임을 받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어찌 나 같은 인간을 선택하셔서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셨나이까? 내 순례의 길에 남긴 자취마다 하나님의 숨결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의 소원은 하나님 곁으로 조용히 가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거두어주소서.\\\\\\\" 나중에 모세는 이렇게 깨닫고 가지 않습니까? 그는 가나안을 바라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군중들의 행복한 앞날을 마음의 청사진으로 새기면서 조용히 돌아서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영혼의 부름을 받기 위해 120세의 지친 노구를 이끌고 느보산을 오르는 사명의 완수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가 얻은 것은 지상의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영적 가나안 땅, 하늘나라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타산적 계산속에 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많은 보상을 바라기도 하고, 그렇게 많이 받은 영적 은혜는 다 무시하고 지상주의적 공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더 나를 쓰시옵소서. 만약 내가 순교의 자리에 나가야 될 그러한 사명이 있다면 나를 그곳에 보내소서. 내게 주어진 것이 필요하시다면 주께 드리겠나이다. 내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쓰임 받는 이 하나로 내 영혼은 만족하나이다. 저 건너편 열매 맺는 저 아름다운 땅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옵소서.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나이다.\\\\\\\" 이 진솔한 고백 기도가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모세같이 훌륭하게 일을 끝낸 자도 지상의 보상은 없었습니다. 다만 평생을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은 그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을 저희가 기억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지상에서 그렇게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내게 하나도 오지 아니해도 쓰임 받는 자체 하나로서 하나님 앞에 만족하고 진솔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능력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거절당한 모세의 소원/신3:23-27
거절당한 모세의 소원/신3:23-27 2011-12-31 11:37:47 read : 1 중남미 현지 목회자 320명이 이번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원로 목사님과 함께 기독교의 진리를 철저히 현지 목회자들에게 강의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남미 일대 목회자들의 신학적 지식은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열정은 대단합니다. 보통 예배드렸다 하면 3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찬송을 많이 하고 예배가 일찍 끝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래서 한국 목회자들이 웬만하면 체력을 못 견디게 되는데 하루 종일 강의를 해도 계속 하라고 합니다. 낮은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열정 때문에 세계 지도력 개발원에서 주최하는 세미나가 아주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제 세계 지도력 개발원 사역은 현재까지 31회째 실시했습니다. 본래는 세계로 흩어져있는 한국인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알리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이것이 외국 목회자들에게 알려졌고 요청이 많아져서 지금은 우리 한국 목회자들 중심이 아닌, 외국인 현지 목회자들 중심의 지도력 개발원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32회는 다음 달에 목포 지역에서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원로 목사님께서도 오실 것입니다. 제가 갈 때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현지 목회자들을 잘 대접하고 원로 목사님도 아주 잘 대접해드리고 왔습니다. 또한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신명기는 모세 5경 중에서 제일 마지막입니다. 신명기 기록 전체는 모세를 설교자로 세워 하나님이 설교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이 선포되던 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의 고난 역사를 거의 다 끝마치고, 아브라함 조상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 입구에 와 있을 때의 기록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이 빤히 쳐다보이는 지점까지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아주 매우 흥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조상에게 약속받은 축복의 대지가 어디인가? 이제 농사짓고 행복하게 정착 생활해야 되겠다.' 광야 40년 동안 아주 지긋지긋하게 만나만 먹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눈앞에 자기들의 희망이 보이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브라질 농업 이민을 많이들 갔습니다. 배를 타고 두 달씩 걸려서 캘리포니아에 가서 사람들을 태우고, 인도네시아에 가서 또 태우고, 그 후에 브라질로 향해했습니다. 그때 이민 가신 분들을 제가 중남미에 집회 다니면서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두 달 동안 배 안에서 날마다 바다만 바라보고 지나가니까 어쩌다가 섬 하나라도 나타날 때는 사람들이 모두 흥분해서 갑판 위로 올라와서 "어서 우리가 살 땅에 도착했으면 좋겠다!"하면서 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두 달 만에 도착한 목적지에서 사람들이 어찌나 흥분을 하는지 전부 눈을 크게 뜨고 '아! 내가 살아야 할 땅이 여기인가?' 흥분해서는 감격으로,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약간의 불안으로 '여기서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달도 그렇게 지루하고 힘이 드는데 40년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출애굽할 당시 한살이었던 아이가 이제 40세가 되었고, 그때 80세이었던 모세는 120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자나 깨나 듣던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이는 흥분 속에 있고, 모세도 비스가산에 올라가 들어갈 땅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향해 오랫동안 고난을 이긴 것은 마지막 열매를 얻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땀 흘리는 농부는 수확의 가을을 가슴에 품고 봄에 파종을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사회생활 합니다. 한 달 동안 아침 일찍 일터에 나가 저녁까지 열심히 자기 사명의 온갖 지혜와 에너지를 투자하면서 일을 합니다. 한 달이 지나면 수고한 열매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사람은 약속만 분명하면 어떤 고난도 이겨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그렇게 믿고 있는 성경의 진리와 일반적 진리를 역행하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40년 전에 모세에게 약속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약속이 얼마나 화려한지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너는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 있는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땅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줄 것이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고 먹고 배부르게 되는 땅이라. 그리로 가라. 너희들은 거기에 가서 성읍에 가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내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게 얼마나 화려한 약속입니까?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히브리 문학으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가장 화려한 표현으로 온갖 좋은 것을 모두 나열한 것이 바로 이 약속입니다. "세계 만민이 너를 보고 두려워할 것이며 네 창고가 넘치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보장이 주어질 것이니라." "너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꾸어줄지라도 꾸이지 아니할 것이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모세는 이 약속을 믿고 40년 고난을 이겼습니다. 이제 성취는 눈앞에 손에 잡히는 지점까지 와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민수기 성경에 나타난 역사는 한마디로 줄여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모세의 말 중 성경에 제일 많이 기록된 단어가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가로되"라는 말입니다. 40년 동안 온갖 원망을 한 몸에 다 받으면서 모세가 일을 해왔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환경을 만나도 불평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환경이 좋아질수록 불만이 더 커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문명국 사람일수록, 배운 사람일수록 더 이기주의로 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박 4일 또는 일주일 정도의 수양회를 교회에서 여러 번 진행합니다. 일 년에 우리 주일학교에서 20회 이상 늘 다녀옵니다. 요즘 수양관 시설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갈 때도 에어컨 시설이 되어있는 최고로 좋은 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리고 가서도 영양가 높은 식사에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침대에서 잠을 자고 경치 좋은 곳에서 최고의 학문으로 수련된 강사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수양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항상 불평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오히려 덜 합니다. 어른들 데리고 가면 더 불평이 많습니다. 만약 우리 갈보리교회의 6,000~7,000명이 한꺼번에 여기서 부산까지 한 달만에 간다고 합시다. 못 견딥니다. 불평 때문에 누구도 못 견딥니다. 모세는 불평이 많은 백성들 때문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민수기 11장 15절에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백성들이 고기 달라고 아우성칠 때 모세가 기도한 것입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죽는 것이 제일 행복해진 모세! 사실 백성들이 봐도 모세가 고기를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니까 죽여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모세는 그의 생에 두 번 행복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애굽의 왕자 책봉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애굽은 세계사에서 그 당시로는 세계 최강국입니다. 세계 3대 문명의 발상지가 나일강 문명이라고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지금도 카이로 박물관에 가보시면 세계 5대 박물관으로서 가장 인류의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볼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나일강에 떠내려가다가 바로의 공주가 건져 궁중에서 성장했습니다. 바로의 뒤를 이어 왕이 되면 평생을 왕궁에서 지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라고 해서 이런 생각을 안했을 리가 없습니다. 모세도 고기를 먹고 싶은 사람입니다. 40년 궁중 음식에 입이 길들여진 사람인데 만나만 먹으면서 지내는게 아마 제일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록 처가살이는 했지만 이드로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장인이 물려주는 축산 농가에서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조용하게 할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딸인 십보라와 결혼을 했고, 게르솜이라는 아들이 생겼고, 그대로 살다가 거기서 조용히 죽으면 아마 제일 좋은 생애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주시키는 지도자 역할은 절대로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도 끈질기게 요구하시고 화려한 약속을 주시니까 마지못해 나선 일입니다. 자신은 애굽 혈통이 아니라 학대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사명의 역사를 나서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던 민족 지도자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악조건 속에서 사람들을 가장 훌륭하게 이끈 사람은 모세입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모세 같은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80세의 나이에서 120세까지 4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 노예 신분의 백성을 사막으로 끌고 나가 외적과 싸우면서 기어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했던 세상에 둘도 없던 하나님이 선출하신 위대한 지도자! 그는 이제 자기 사명의 완수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40년 동안 그리던 가나안 땅을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가 모세의 소원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일의 진행으로 본다면 이러한 기도는 필요 없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마 우리의 문화대로 본다면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가서 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셔도 마땅히 그가 왕이 될 사람이요, 넉넉히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의 능력을 평가하면 그보다 인류 역사에 훌륭한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본래 그는 애굽의 왕자 책봉을 받은 사람입니다. 혈통이 다르지만 바로가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사람입니다. 국민들이 투표를 한다 해도 모세를 당할 야당 지도자가 있겠습니까? 90퍼센트 이상의 압도적 승리를 할 수 있는, 당연히 왕이 될 사람입니다. 아마 오히려 그렇게 되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혼란기 역사가 없이 일찌감치 정착할 수 있는 문화가 더 빨리 형성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모세가 마지막 소원으로 기도했던 내용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면 "모세야! 그동안 참 내 일을 위해서 네가 고생 많이 했다. 네가 소원하는 것은 이제 내가 다 들어주겠다. 이제 너는 안식의 시간이다. 그 땅에 들어가서 존경받고 왕이 되고 다스리고 넉넉히 먹고 누리거라!" 이렇게 말씀하셔야 상식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의 소박한 소원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은 "안 된다. 그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모세가 지금 설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여러 소리 말라. 너는 안 된다. 건너가지 못한다.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다 들어가지 못해도 모세는 들어가야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공로자입니다. 오늘 말씀 27절에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아니, 기껏 산꼭대기에 올려 보내서 다 보라고 하시고는 "너는 못 들어간다." 하나님이 모세를 약 올리시는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운명적으로 산에서 시작해서 산에서 끝이 납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가시덤불 불꽃 가운데서 만났습니다.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계약 백성의 표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비스가산 위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들어가지 못하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느보산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사랑하신 하나님의 종이 간절히 소원하는 그 쉬운 문제를 거절하셨는가? 우리가 이 뜻을 알아야만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결정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을 거절하십니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므리바 반석에서 물 터진 사건에서 모세는 잠시나마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손을 대서 물 터지게 하는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선언한바 있습니다. 그때 물은 터졌으나 하나님은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정적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리에 오는 것을 금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왜 죄 아래로 떨어져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하와가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고유의 영역에 파렴치한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했을 때, 이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은 인간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이 들으시기에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인간이면서 내가 예수라고 말하고 그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나라에만 해도 내가 예수라고 말한 사람이 수십 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수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온 세계 다녀보면 어느 나라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 재산까지 모두 다 바칩니다. 평생을 노동하고 헌신하는 그런 집단들이 지금 한 나라에서 굴지의 기업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서만도 예수가 된 자가 수십 명인데 모세는 넉넉히 하나님의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네가 이미 내 자리에 앉았었느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섬기는 야훼 종교가 아닌 모세 종교가 생기게 됩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하나님은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보매 하나님 같더라." 또, 하나님도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아론을 네 입의 대변자로 삼으라.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하나님도 그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4장에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왜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합니까?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얼굴이 광채로 빛이 났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이 아닌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얼마나 인간적 실수가 많은 사람인가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살인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 혈기를 참지 못하고 살인을 해버렸습니다. 자수하지도 아니하고 공소시효가 지날 때까지 도망간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리 큰 괴로움이 와도 다른 사람이 듣는 공중 기도에서 "하나님이여 즉시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즉시로 나를 죽이시어" 얼마나 혈기가 많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100살이나 된 사람이 첩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에티오피아 구스 여자를 취해서 아론과 미리 암의 원망을 사는 등 실수천지입니다. 이 일로 모세는 고난을 많이 겪었는데 하나님의 용서가 어렵지 않았던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모세의 편에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침해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가혹한 심판을 내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인간의 거룩한 예배의 대상입니다. 실제로 광야 40년의 민족 이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모세는 심부름꾼으로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가나안 입성을 비스가산에서 막으신 것입니다. "너는 안 된다. 네가 내 자리에 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 다음에 두번째는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많이 했다고 반드시 지상에서의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상업주의 문화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심리에서는 누구든지 "투자는 적게 하고 수확은 많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똑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손익을 계산해서 만나고 헤어집니다. 나의 목적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주변에 두려는 작업을 열심히 합니다. 투기사업이라는 문화는 그래서 생긴 말입니다. 적은 투자로 수없이 많은 열매를 수확해야 됩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마저도 현대인들에게는 손익을 따지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무엇을 얼마나 얻으리이까? 보소서. 우리가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런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한층 더 위대한 생각을 했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 거룩한 역사에 쓰임을 받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어찌 나 같은 인간을 선택하셔서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셨나이까? 내 순례의 길에 남긴 자취마다 하나님의 숨결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의 소원은 하나님 곁으로 조용히 가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거두어주소서." 나중에 모세는 이렇게 깨닫고 가지 않습니까? 그는 가나안을 바라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군중들의 행복한 앞날을 마음의 청사진으로 새기면서 조용히 돌아서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영혼의 부름을 받기 위해 120세의 지친 노구를 이끌고 느보산을 오르는 사명의 완수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모세가 얻은 것은 지상의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영적 가나안 땅, 하늘나라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타산적 계산속에 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많은 보상을 바라기도 하고, 그렇게 많이 받은 영적 은혜는 다 무시하고 지상주의적 공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더 나를 쓰시옵소서. 만약 내가 순교의 자리에 나가야 될 그러한 사명이 있다면 나를 그곳에 보내소서. 내게 주어진 것이 필요하시다면 주께 드리겠나이다. 내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쓰임 받는 이 하나로 내 영혼은 만족하나이다. 저 건너편 열매 맺는 저 아름다운 땅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옵소서.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나이다." 이 진솔한 고백 기도가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모세같이 훌륭하게 일을 끝낸 자도 지상의 보상은 없었습니다. 다만 평생을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은 그 자체가 복이 되는 것을 저희가 기억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지상에서 그렇게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내게 하나도 오지 아니해도 쓰임 받는 자체 하나로서 하나님 앞에 만족하고 진솔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능력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공의의 사자(使者) 미가 2002-03-29 14:34:28 read : 7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가 6:6-8) 1. 이름과 배경 미가[Micah]는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는 뜻이다. 이사야나 호세아와 동시대인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에 활동한 12소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모레셋 농촌 사람이요 미가서의 저자이다(미1:1). 당시의 상황은 (왕하15-20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암울하고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
공의의 사자(使者) 미가 2002-03-29 14:34:28 read : 7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미가 6:6-8) 1. 이름과 배경 미가[Micah]는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는 뜻이다. 이사야나 호세아와 동시대인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에 활동한 12소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모레셋 농촌 사람이요 미가서의 저자이다(미1:1). 당시의 상황은 (왕하15-20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암울하고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에 대고 예언한다. 고난의 시대에 희망을, 억압의 시대에 자유를, 혼돈의 시대에 확실한 약속을 제시하는 메시지를 말한다. 미가서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서 장차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름 없는 성 베들레헴을 성도로 예언하고 있다. 그것은 후에 사실로 드러났다. 그는 시골 출신이라 화려한 도시, 예루살렘을 좋아하지 않았다. 미가는 언어구사가 뛰어나며 때로는 예언의 실효를 위해서 문자를 독창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예언자로서 문장의 간결함과 신앙의 진수를 표현함에 있어서 다른 예언자가 감히 따를 수 없었다. 2. 사회의 부패상을 지적한 미가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고자 하시는데, 사마리아는 돌무더기로 만들고 예루살렘도 오래지 않아 적군의 침략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 이유는 유다의 상류계급이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방백은 침상에서 악을 도모하고 간사한 일을 계획하며, 지주들은 가난한 사람의 집과 토지를 억지로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대하였으며, (2:1-2)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이 사람과 그 집 사람과 그 산업을 학대하도다." 또, 부녀자들과 어린 자녀에게서까지 탈취하였다고 말한다. (2:9)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바른 말은 듣기 싫다고 예언자들을 향하여 예언하지 말라고 위협하였다. (2:6)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실업가들은 부정한 이익을 탐하여 저울추를 위조하고 거짓말을 밥먹듯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6:10-11) "악인의 집에 오히려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착한 사람이 세상에서 끊겨졌고 정직한 자가 없고 형제를 그물로 잡으며 재판관은 뇌물을 요구하고 큰 사람들은 사욕을 발하여 한패가 되었다(7:1-4). 이웃이 서로 의지할 수 없었고, 부부가 서로 신뢰할 수 없으며, 골육의 친척이 서로 멸시하며 헐뜯는 세태였다. (7:5-6)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니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3:11)고 하며, 평안이 그 가운데 없는 데도 오히려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거짓으로 위안하였다. 이렇게 온 백성이 부패하였으므로 여호와는 외적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황폐케 하고자 작정하신 것이다. 겉은 그럴 듯 하지만 속은 썩어문드러진 상태, 그것이 바로 그 시대의 상황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타락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어 두지 않으신다는 경고가 미가의 말씀이다. 3. 참 종교란 무엇인가? 미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나가는 길이 무엇인가 설명하며 보여 주었다. 미가 예언의 절정은 오늘 우리가 읽은 6장 6-8절의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어떤 것이 좋은 것이며 계약을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여호와, 그 분 앞에 나가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으며, 하나님의 요구는 형식적인 종교가 아니라 선한 것임을 보여 주었다. 천천의 수양보다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보다는 공의와 인자와 사랑을 요구하신다. 주께서는 선한 행위만을 요구하신다. 당시의 부패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도 떠나고 있었다. 이때 홀로 미가만이 하나님께 나가는 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었다. 바른 종교의 특성, 신께 용서를 구하는 길이 무엇이며 신 앞에 무엇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것은 수천의 희생제물로 치러지는 양도 아니다. 넘쳐흐르는 고가의 향유도 아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불태워 드리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물질적 희생제사를 드린다고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께 나가는 길은 세 가지뿐이다. 정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님의 참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외친 이가 미가 선지자였다. 4. 배울 점 1) 사회악을 지적하는 용기 (미3:1-3)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예리한 통찰력과 불의를 보고 견디지 못하는 정의감이 묻어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악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수밖에 없다.'는 도덕 불감증은 하나님 앞에 안 통한다. 2) 절망 중에 희망을 준다. 죄악상만 늘어놓는 것은 지혜로운 모습이 아니다. 비판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은 좋은 하나님의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그렇듯이 싸매시고 용서하시는 것을 알린다. (미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죄를 주께 아뢸 때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미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3) 약속의 선포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미가 선지자의 메시야 예언은 아주 유명한 것이다.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 예언은 마태가 예수님 탄생을 전하는 대목에서 인용한다. (마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2002-03-29 15:08:12 read : 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말라기 ― 1. 인적 사항 ① 말라기는 '나의 사자', '나의 천사'라는 뜻. ② 말라기 선지자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음. ③ 소선지서 말라기서의 저자(말 1:1). 2. 시대적 배경 말라기는 B.C. 444년 제3차 바벨론 포로 귀환 때로부터 자신의 예언서를 기록한 연대로 추정되는 B.C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2002-03-29 15:08:12 read : 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말라기 ― 1. 인적 사항 ① 말라기는 '나의 사자', '나의 천사'라는 뜻. ② 말라기 선지자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음. ③ 소선지서 말라기서의 저자(말 1:1). 2. 시대적 배경 말라기는 B.C. 444년 제3차 바벨론 포로 귀환 때로부터 자신의 예언서를 기록한 연대로 추정되는 B.C.430년까지 주로 활동한 선지자이다. 제3차 포로 귀환을 주도한 유대 총독 느혜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첫 번째 사명으로 생각한 것은 먼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통해 제1차 포로 귀환(B.C.537년) 이후로 재건되기 시작한 신정 국가의 정치적 위상을 드높이고 또 종교 개혁을 통해 선민의 면모를 쇄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말라기 선지자는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의 부패와 십일조와 헌물규례의 정비, 이방 여인들과의 통혼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하여 책망함으로써 종교적 부흥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3. 성품 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깊은 불신감을 불식시킨 것을 볼 때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뛰어난 변론자(말 1:2-5). ② '보라', '기억하라', '명령하노라' 등의 감탄사와 명령문이 많은 그의 예언을 통해 볼 때 매우 열정적이고 활기에 넘치는 신앙의 소유자(말 1:9 ; 2:1). ③ 모든 백성들이 성전 재건 이후 그 신앙이 나태하고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부패한 때에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예언을 확신 있게 선포한 것으로 볼 때 내세에 대한 소망이 분명한 자(말4:1-3). 5. 구속사적 지위 ① 구약 시대 마지막 선지자로서 메시야의 도래에 앞서 세례 요한이 올 것을 예언함(말3:1; 4:4-6). 이로써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교량 역할을 한 자. ② 제2성전 재건 후에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즉각적으로 도래하지 않는 사실에 회의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자들에게 장차 임할 메시야 나라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소망을 선포한 선지자(말 4:1-3). ③ 예배 의식의 내적인 면을 강조한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외적 제사와 의식의 철저한 준수도 강조한 예언자(말 1:6-2:9 ; 3:7-12). ④ 구약 성경의 예언서 중 가장 변론적인 예언서의 저자. 6. 평가 및 교훈 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선지자들의 에언 대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자 많은 백성들은 절망과 회의, 그리고 영적 나태함에 빠져들어갔다. 이렇듯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다가도 즉각적으로 성취되지 않으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절망과 불신의 깊은 늪에 빠져 버리는 한계성을 자주 보인다. 그러나 말라기는 이처럼 절망에 빠져 회의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 과거에 베푸신 은혜 등을 돌아보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며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는 실로 오늘날 세속적인 욕망에 쉽게 유혹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기 쉬운 우리 자신들에게 더욱 적절한 권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② 말라기는 성의 없이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는 성전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낫다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외칠 만큼 겉치레뿐인 형식적인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열심 있는 정직한 의식 준수를 강조하였다(1:6-2:9).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경외와 순종이 어울러진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것인가를 돌아볼 일이다. 7. 핵심 성구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
구원자 모세를 예비하심/출2:1-
구원자 모세를 예비하심/출2:1- 2011-08-20 16:32:47 read : 1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다. 뭐냐면 그냥 차례대로 읽어 가면서 해석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완결된 계시를 가지고 있고 역사의 정점에서 앞뒤로 해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출애굽기가 완전히 기록된 책으로 주어졌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의 전체적인 윤곽을 가지고 부분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부분을 해석할 때 다른 길로 가지를 않을 수가 있다. 2장을 해석하면서 그런 점들을 보겠다. 히브리 원문 성경에서는 2장의 분해가 제일 끝에 있는 23-25절 거기는 다른 문단으로 분해되어 있어도 1-22절까지는 그냥 한 문단으로 되어 있다. 그래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혁 성경의 구분도 내용상 잘 구분된 것이니까 그 구분법을 따랐다. 여기 2장에 있는 이야기는 너무 잘 아니까 달리 읽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 바로 해석을 하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남자아이를 다 죽이라고 그랬는데 그 때 모세가 낳다. 그래서 모세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2장에 있는데 여기 보니까 처음에 모세 구원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모세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모세의 어머니하고 모세의 누나 이야기만 쭉 나오고 모세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러니까 모세에 대해서 강조 점을 두어서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 그 다음 2장 11절부터는 모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다가 사람을 죽인 기사가 있고 그 다음에 그 일에 실패하고 미디안 가서 장가간 이야기가 있고 그리고 끝에 구원의 때가 가까웠다 그런 하나님의 기록이 있다. 어떤 의미로 구원의 때가 가까웠는가? 바로 왕은 죽었다. 여기서 죽었다는 기사가 어디서 나오냐면 4장에서 나온다. 모세를 파송할 때 너를 찾는 자들이 죽었느니라. 거기서 나온다. 여기서 이미 먼저 기록하고 있다. 그 왕은 죽었고 그리고 백성은 고난 중에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나서 구원자 모세를 부르신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은 모세 개인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기가 쉬운데 출애굽기는 물론 모세가 중요한 인물이지만 출애굽기에서는 레위 지파가 중요한 지파다. 그래서 여기 보면 레위 족속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갔는데 이러이러한 자를 낳았다. 레위 지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모세를 보냈을 때 레위 지파 족보를 말하고 있다. 6장에 보면 족보를 말하고 있는데 레위의 위치를 말하면서 르우벤 시므온 그 다음 레위 르우벤 시므온은 나이가 기록이 안되고 그냥 단순한 아들 낳는 이야기만 기록이 되어 있는데 르우벤에 가서는 누구는 누구를 낳고 몇 살 때 죽고 쭉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레위 지파 뿐이다. 그리고 십계명에 두 돌판이 깨뜨려지고 언약을 새롭게 했을 때 그 때 하나님께서 헌신한 지파가 레위 지파다. 하나님이 집을 짓고 레위 지파로 봉사하도록 했다. 구약의 교회는 레위 지파다. 하나님의 출애굽기에서 언약 체결은 어떻게 보면 레위 지파를 위한 언약 체결처럼 되어 있다. 나머지는 레위 지파에게 포함되어 있다. 레위 지파 나중에 장자를 대신해서 성별이 되니까 그래서 출애굽기는 주로 레위 지파가 중점적으로 강조가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 구원자 모세를 말했을 때도 레위 지파가 장가를 갔는데 거기서 아들을 낳았다. 레위 지파에 있는 구원자 또 레위 지파에 대언 자가 있다. 모세를 대신한 아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레위 지파에는 항상 모세가 하나님의 구원의 중보자요. 레위 지파인 아론이 바로 모세의 말을 자기 백성에게 말하는 자요 이 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냈다. 그렇게 성경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모세 개인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언약 체결이 중심인데 그것은 모세를 대언자로 세웠어도 결국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는 지파는 레위 지파다. 그런데 구원도 레위 지파의 구원자요. 제사장도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요 전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관점에서 부분을 볼 때만 어느 지엽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그 말이다. 읽으면서 해석하겠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과 구원과 언약 체결에서 중요한 인물은 모세와 아론이며 여호와께서 속한 자로 봉사한 지파는 레위 지파이며 족보와 나이가 기록된 지파도 레위 지파다. 레위 지파에 대한 언급은 중요한 전환점에서 나타나는데 여기 2장1절에 레위 지파의 부부의 활동이 나타나 있고 그리고 4장 14절의 레위 지파의 아론이 말 잘하는 줄 내가 알지 않냐? 그가 네 대언 자가 되리라. 거기서도 나타나 있고 6장에 레위 지파의 족보가 있는데 거기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구원자는 모세와 아론이다. 그들이 모세는 나이가 80세고 아론은 83세였다고 나이까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32장 언약을 새롭게 체결할 때도 레위 지파고 38장에 성소에를 지을 때도 레위 지파가 쓸 물건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시내 산에 언약이 출애굽기에 목표인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으로 언약을 체결하는데 있어서 출애굽기는 처음부터 레위 지파에 초점을 둔다. 우리는 구원에 열렬한 장면에 매력을 두는데 그것은 실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새로운 단계로 진행시키는 일이다. 어떻게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심으로 그것이 구원의 일이지 그냥 애굽에서 구원했다 거기다가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런데 그 언약 체결에서 초점은 레위 지파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모세를 예비함에 있어서 레위 지파의 결혼을 먼저 언급하고 레위 지파의 여자들이 믿음으로 여호와를 봉사한 사실을 기록한다. 이스라엘의 구원자 모세를 기록한 사실은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석달을 숨겼더니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매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를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더라 그런 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 앞에는 산파들의 믿음의 봉사가 있었지요? 그 이전에 요셉도 죽고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죽었다. 요셉의 시대는 탁월하게 애굽에서 능력을 행했던 시대다. 그 시대 사람도 다 죽었다. 그리고 번성하고 번성했을 때 큰 핍박을 받았는데 산파들이 믿음으로 봉사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예비하는데 누가 봉사했느냐? 레위 지파가 봉사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권 적으로 일을 하셔도 항상 사람과 관계 아래서 일하신다. 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떠나서 일하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보니까 레위 지파 여자들이 봉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신약 성경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히11:23절에는 믿음으로 모세가 낳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을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으며 그렇게 되어 있고 그 다음 행19장21절에 보면 바로가 어린아이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할 때 그 때 모세가 낳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달을 기르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의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다. 신약 성경에 이 기록을 언급하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러면 믿음으로 봉사했는데 모세가 낳았을 때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달을 숨겼다. 그렇게 히브리서는 되어 있고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석달을 숨겨서 길렀다. 그렇게 되어 있다. 모세를 숨긴 신앙의 동기는 모세의 아름다움을 보고인데 모세는 그 부친이 보기에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라고 기록한다. 그 부친이 보기에 아름답다는 말은 여기 출애굽기에 기록이 되어 있고 히브리서에 기록이 되어 있고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 하는 말은 사도행전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모들이 그 아이를 살린 것은 그 준수함을 보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준수함을 보았다 하는 말은 요새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보는 것하고 다르다. 성경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관련되어 아름다움이 묘사된 인물은 다윗이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삼하16장12절을 보면 그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 그를 묘사할 때 그렇게 묘사한다. 여기서 모세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이것을 그 부모들이 보았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이다.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예비하신 자를 위해서 그 부모들이 봉사했다 그런 말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보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렇게 되어 있고 이 본문은 그 부모들이 보기에 준수했다. 그렇게 되어 있고 히11장에는 그 부모들이 보기에 아름다운지라. 그리고 보기에 아름다워서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석달을 숨겨 길렀다. 우리 같으면 너무 너무 예쁘니까 이 자식은 내놓지 안해야 되겠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데 실은 부모들은 그런 자식도 정이 있지만 아픈 자식에게 정이 더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런 문제보다도 성경에서 아름답다 특별히 지목해서 묘사했을 때는 그냥 우리들이 생각하는 쌍카풀이 졌느니 그런 문제들이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아이에게 주신 은혜가 있다. 그 은혜를 부모들이 파악했다 그 말이다. 그래서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안했다. 모세를 더 이상 숨겨서 키울 수 없게 되었을 때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갈대 상자의 넣어 바로의 딸이 목욕하는 나일강에 두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멀리서 그 결과를 살폈다. 그리고 나서 바로의 딸이 그 아이를 발견하고 상자 뚜껑을 여니까 아이가 울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겼다. 그가 히브리인의 아이로다.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미리암이 나타나서 그러면 내가 히브리 여인 중에 유모를 구해다 드릴까요? 그렇게 해서 자기 어머니를 소개했는데 젖떼기까지 어머니가 길렀다. 바로의 딸이 하는 말이 나를 위해서 이 어린아이를 젖 먹여라 내가 삯을 주리라. 이렇게 해서 길렀다. 그리고 아이가 젖을 떼니까 바로의 딸에게 데려갔는데 그래서 바로의 딸의 아들의 되었는데 그가 이름을 붙이기를 그를 물에서 건져냈다 해고 모세라고 불렀다. 그렇게 해서 애굽의 왕자로 교육을 받았다. 이 출애굽기에서 그가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10절에 그의 아들이 되니라. 물론 이런 것은 구약의 장면들을 보면 노아의 방주도 이 갈대 상자의 같은 단어로 되어 있고 그도 물로부터 나와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고 하는 것과 물론 비교할 수가 있다. 또 이런 것을 갈대 상자를 역청으로 칠하고 나무진을 칠하고 했는데 노아의 방주도 역청으로 안팎으로 칠하고 했으니까 똑 같구나. 그러니까 유형론에 조심하라 그 말이다. 비슷한 장면이 있다고 막 연결하는 것을 조심하라 그 말이다. 그런데 방주가 교회다. 그냥 역청을 칠하지 안했으면 물이 들어와서 다 가라 앉았을 것인데 역청을 칠해서 가라앉지 안했다. 역청은 무엇이냐? 안팎으로 칠한 보혈이다. 그러니까 물들어 온 교회 물 안 들어온 교회 그래서 물 안 들어 온 교회가 무엇이냐?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면 물이 안 들어 교회다. 그러면 영혼이 산다. 그래가지고 이것이 교회의 모형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이 문제보다는 나일강의 심판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만 전부 장자가 죽었는데 그런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의 죽음이다. 거기서 유일하게 살아난 사람이 모세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살아났는가? 자기 어머니와 누이의 수고를 통해서 처음에는 생명을 건짐을 받았는데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니까 나일강에 버렸다 그렇게 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해석은 그렇게 되어 있다. 부친의 집에서 석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에 가져다가 자기의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그러니까 나일강에 버렸을 때는 더 이상 키울 수 없었기 때문에 버린 것이고 버렸는데도 자기 누나가 따라가서 대책을 세운 것을 보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실은 모세가 살았다. 그런데 그 때부터 모세는 젖뗀 후로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았고 그리고 애굽의 모든 학술과 행사에 능했다. 애굽 사람으로 길림을 받은 것이다. 그런 의미로 모세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물에서는 건짐을 받았지만 히브리 정신은 완전히 죽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컸고 애굽의 모든 학문에 능통했으니까. 왜 제가 해석을 그렇게 하냐면 사도행전을 보니까 나이 사십이 되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기더니 그렇게 기록하고 있고 처가살이 사십년 한 것도 사십 년이 차매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고 그 모세가 사십 년을 그 백성을 인도했는데 그들이 사십 년을 하나님을 배반하고 죽었다. 그것이 행7장에서 이스라엘의 배교 역사를 쭉 스데반이 처음부터 말했을 때 했던 말이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사십 살이 되매 사십 년이 차매 하고 사십에 대해서 강조 점을 두고 모세의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그런 스데반의 해석 가운데서 봤을 때 여기 모세가 물에서 건짐을 받아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그가 양육을 받았다 하는 것을 해석을 해야 하겠다 그 말이다. 더 읽고 해석을 하자. 그러나 모세는 장성하여 나이 사십이 도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은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한 것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의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였다. 지금 출애굽기와 함께 사도행전의 해석을 지금 읽고 있는 것이다.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 화목 시켜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헤아려 하느냐? 그 동무를 헤하려는 사람이 그 동무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것같이 또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다. 그 이름의 뜻은 여기서 객이 되었다. 그 뜻이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 큰 제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이는 것 같이 참았으며 말씀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이 시기를 나이 사십이 되매 하고 기술하고 출애굽기 2장을 두 번의 사십 년의 기간으로 나눈다. 물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는 애굽 궁전에서 사십 년 미디안에서 나그네로 사십년 그리고 이스라엘을 광야 사십 년 동안 인도하였다. 행730절 이하를 보면 사십 년이 차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냐 하는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 떨기 나무 가운데서 보이사 천사의 손을 의탁 하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그렇게 기록한다. 왜 제가 이것을 이렇게 해석을 하냐면 이제까지 우리들이 이 부분을 해석할 때 아 모세가 처음에는 멋모르고 날뛰었다. 내가 내 힘으로 이 백성을 구원하리라. 하나님이 아직 부르지도 안했는데 그러다가 큰 실수를 했다. 아유 뜨거워하고 도망쳤지요? 그리소 사십 년이 되어 가지고는 하나님이 불러도 자꾸 못 가겠다고 사양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언제 자기 종을 부르느냐? 멋모르고 날뛸 때는 안 썼다가 나중에 자기가 다 꺾어지고 하나님의 능력만 일할 수 있나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 불러 쓰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자기를 관원으로 세우지도 안했는데도 자기가 재판장이나 되는 것처럼 살인을 했지않냐? 그런 살인자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겠느냐? 하고 도덕적으로 푼다거나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와 사도행전은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히려 사십 년이 차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에 생겨서 억압받는 자기 백성을 구원했는데 그 다음날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너를 우리의 관원으로 세웠기에 나를 죽이려고 그러느냐? 이 모세를 거절했다. 그가 미디안에서 사십 년 나그네 생활을 했는데 그를 거절했던 모세를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부르셔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속량하는 자와 관원으로 세우셨다. 이스라엘이 거절한 그를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세우셨다. 그가 사십 년을 너희들을 인도했는데 너희들이 그 때는 모세의 말을 들었더냐? 지금 그 말이다. 그것을 행7장에서 말하고 있다. 행7장은 성경을 도덕적인 교훈 모세의 인격이 살인을 했니 그런 말은 전혀 없고 모세를 불렀는데 사람이 너무 덜돼서 사람되게 하려고 사십 년 기다렸다 그런 말이 없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경은 도덕적인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책이다. 더구나 구약에서는 윤리적인 성취를 풀어서는 안된다. 윤리적인 성취는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신약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도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는 윤리적인 관계로 접근해서는 안되다. 모든 것은 창조와 새 창조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접근을 해야 되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도덕적인 법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격이 얼마나 되면 부르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자기 백성들의 믿음의 봉사를 통해서 일하셔도 그것을 도덕적인 방식으로 되었냐 아니냐로 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 구약의 사사들을 보면 나중에 도덕적으로 형편없다. 제일 삼손이 그렇다. 몇 번 여자 좋아하다가 눈 빠지고 죽었다. 그래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가 죽었을 때 살아서 한일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셨다. 도덕적인 문제들은 거론하지 않는다. 그런 성경이 비윤리적인 하나님이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은 드디어 신약 때 완전한 빛으로 드러난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온전한들 어린아이의 도덕으로 모든 시대를 가르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누가 심부름 잘하고 말 잘 듣더라. 물론 그것도 다 컸을 때 어른의 도덕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아이 때 도덕이지 그것을 모든 시대에 사람이 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줄긋기를 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도덕적인 방식으로 풀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모세가 사람이 되었냐 덜되었냐 이런 것은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어떻게 하나님이 예비하셨고 그 구원자의 어떤 특성이 있는가? 거기다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든 백성이 다 죽었을 때 하나님이 레위 지파 사람을 구원했다. 왜 레위 지파가 앞에 보면 장자로 삼았다. 그 장자를 구원함에서 그 전체를 구원할 약속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리고 장자 지파에 속한 자를 자기 얼굴 앞에 세움으로 전체를 자기 얼굴 앞에 세울 약속을 진행시키고 있다. 그러니까 그 완결된 빛가운데서 그 부분들을 보라 그 말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뒤에는 아직 안 나타났으니까 차례대로 읽을란다 해 가지고 느닷없는 신약 때 완결된 도덕으로 풀려고 그런다. 그것은 더 안 맞다 그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겠는가? 조금 더 읽고 보겠다. 마지막 문단이다. 여러 해 후에 모세의 생명을 찾던 바로는 죽었다. 그것을 4:19절에서도 말씀한다. 너를 찾는 자들이 죽었으니 애굽으로 가라. 그런데 그 말이 있기 전에 여기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바로 여러 해 후에 애굽왕 바로는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극심한 고난 중에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셨다. 어떻게 드디어 모세를 불렀다.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 여러 해 후에 모세의 생명을 찾던 바로는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조상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돌아보셨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예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의 때를 여셨다. 그러니까 2장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예비한 기사다 그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할 대표자를 부르는 기사가 3장부터 진행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석된 역사 기록이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해석된 역사 기록이다. 이제 문제를 풀면서 설명을 하겠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아가 사살될 때 구원된 자는 모세인데 그는 레위 지파다. 나중에 보면 레위 지파가 장자 지파요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는 지파다. 그러니까 온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어서 장차 하나님을 봉사할 레위 지파에 속한 자를 구원해서 그로 모든 백성의 구원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대표 원리다. 모세는 누구의 활동으로 구원되었는가? 레위 지파의 여자들의 봉사를 통해서 구원된 것이다. 모세가 40년 동안 바로의 궁에서 양육 받은 의미는 그는 바로의 아들로 양육을 받은 것이고 애굽의 모든 학문과 행사에 능하더라. 그는 애굽 사람으로 양육을 받은 것이다. 나중에 이렇게 양육하려고 한 사람이 다니엘서에 보면 있었다. 귀족들을 뽑아다가 바벨론의 모든 학문으로 양육을 시키고 그 때 장학금을 받았지요? 바벨론의 궁전에서 거기서 먹으면서 나중에 특별 전형 시험을 보려고 양육을 받은 천재들이 몇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바벨론 궁전에 잡혀가서도 바벨론 궁전의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았고 하나님의 그들에게 몇 배가 더 되는 지각을 주셔서 바벨론 궁전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도록 하셨다. 모세는 실은 나일강에 던져졌을 때 죽은 것과 같다. 그는 버려진 것이다. 누가 데려갔다구요? 사도행전에서는 가져다가 그렇게 번역해 놨다.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길렀다. 그러니까 히브리인의 아들이 히브리인의 가정에서 히브리인의 교육을 못 받고 바로의 궁전으로 옮겨져서 그 아들로 양육을 받고 애굽의 모든 학문과 행동에 능하도록 양육을 받았을 때 그는 애굽의 왕자의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모세에게 있는 히브리 정신은 죽어야 되겠지요? 사십 년은 이 때까지 다 죽음의 숫자였다. 노아 홍수 40년도 노아의 옛 세계가 죽음에 빠져 있는 그런 숫자요 물론 그런 의미로 노아에게는 믿음의 시련의 시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도 다 죽음의 의미들이고 특별히 다시 올라가서 40일을 굶었을 때 그 의미는 잘 드러난다. 그런데도 모세에게는 다른 시련의 시기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시거든 요? 그런데 여기서도 사십 년을 바로의 궁전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왕자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드디어 나이 사십이 되매 자기 백성을 돌아 볼 마음이 생겼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종살이했어도 거기 하나님께 소망을 둔 믿음의 산파와 믿음의 레위인이 있는 것처럼 레위인 중에 모세를 구원했는데 모세를 사십 년 동안 애굽의 궁전에서 바로의 왕자로 길렀는데도 그는 사십 년 동안에 그런 의미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싸우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에서는 돌아 볼 마음이 생겼고 그 일을 위해서 그는 바로의 공부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애굽의 보화를 거절하고 고난받는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기뻐했다. 그리고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멀리 탈출해서 멀리 떠났으면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 것처럼 하고 참고 기다렸다.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애굽 떠난 것을 출애굽에서만 보면 안된다. 우리는 40년 동안 모세가 완전히 애굽을 잊은 줄로 알고 있다. 나그넨 뒤로 그런데 이름을 붙였을 때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노라 게르솜이라 이름하였다. 그의 모든 소망은 애굽에 즉 하나님의 약속에 있었다. 그래서 이 출애굽기는 2장 끝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셨더라 하면서 모세를 부르고 있다. 모세는 그것이 이전에 자기가 왕자의 유혹을 받았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구원 베푼 줄을 알도록 했는데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모세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다.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40년을 늦추었어도 하나님은 모세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모세를 세우셨다는 말을 처음부터 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를 세우 신줄 백성들이 안줄 알았는데 모르고 거절했다. 그 거절한 모세를 하나님은 다시 부르셨는데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이 반드시 필요한 줄 안다. 그런 의미로 어떻게 봐서는 새로운 구원자를 예비하신 것과 같다. 그전에는 단순히 레위 지파의 구원자면 여기서는 친히 하나님이 구원자로 가신 것과 같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항상 출애굽기를 보면 언약 갱신 적인 의미가 나타난다. 두 돌 판도 첫째 돌 판은 깨뜨리고 다음 돌 판을 성소에 두고 메도록 되어 있다. 첫째 돌 판은 깨뜨려졌다. 중보자도 첫 모세 중보는 실패했었다. 그 다음 모세의 구원은 성공했다. 첫 번 구원자는 레위 지파의 구원자다. 그런데 두 번 째 모세를 보냈을 때는 그보다 더 확실한 언약을 한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가서 건져내리라. 너는 나를 위해서 가라 그런 방식으로 구원자에 대한 약속이 더 진행되어 있다. 그런데도 그는 누구냐? 그들이 거절했던 모세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옛 언약 백성의 실패와 그리고 새로운 구원자에게 있는 완성들을 이런 문제를 같이 초점을 맞추어서 진행시키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모세 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서 주지 못한 것을 새로운 모세 새로운 이삭을 보내셔서 하늘의 질서로 완성하셔서 영원한 구원을 주셨고 신약의 이스라엘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실패로 끝난 이스라엘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그런 완성된 교회를 세우셨다. 그렇게 항상 언약 체결에 있어서는 첫 언약과 함께 언약의 갱신 문제를 항상 담고 진행되고 있다. 나중에 보면 항상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 그런 일을 봐야 한다. 그래서 여기 모세가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양육을 받는 의미는 바로의 왕자로 양육을 받은 것이고 애굽의 모든 학문과 행사로 양육을 받은 것이고 그런 의미로 그는 애굽화 되도록 양육을 받은 것이다. 실은 그 시기에 모세는 죽어야 되는데 실은 죽지 않고 있다. 히브리 정신이 죽지 않고 있다. 그래서 40년이 차매 모세가 압제받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한 일의 성격은 구원자의 성격이다. 그래서 압제자로부터는 구원하고 형제끼리는 화목하고 하는 일을 그가 할려고 했다. 화목케 하려는 모세를 어떤 근거로 거절했는가? 누가 너를 우리 위에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세웠느냐? 너는 우리의 왕이 아니다고 했는데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그렇게 성경은 해석한다. 모세의 미디안 40년의 의미는 나그넨 40년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아들이 이름을 게르솜이라 붙였고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다 그렇게 하고 있다. 처가살이 40년이다. 그리고 3장 처음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모세가 자기 장인의 양을 끌고 시내 산에 이르렀더니 그렇게 하고 있겠지요? 모세는 40년을 살았어도 그 땅에 정착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장가가서 아들을 두었어도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노라. 어디로부터 자기 친족으로부터 떠나 있다. 소망은 항상 자기 백성에게 있었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그런데 40년이 찼을 때 그 40년 동안에서 모세 안에 있는 히브리 정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의 봉사하는 정신은 사라지지 안했다. 그래서 애굽의 40년 궁전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꺼진 법이 없고 그리고 자기 백성을 비림을 받고 이방 땅에서 4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했어도 모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꺼진 법이 없었다. 그를 하나님이 구원자로 세우셨다. 그렇게 해서 레위 지파에 있는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집에 영접을 받은 이유는? 누가 너희들은 목자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느냐? 그렇게 해서 영접은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가지 백성으로부터는 거절을 당했는데 이방 제사장의 집에서는 아주 큰 인물로 영접을 받았다. 자기 딸들만 일곱 있는데 목자들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줬다. 그런 사람을 영접해야 되겠지요? 나중에 모세가 애굽에서 영접을 받았을 때도 구원자로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그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자기 백성으로부터는 거절을 받았는데 미디안 제사장의 집에서는 그 집안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영접을 받고 있었는데도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 되었노라. 자기 조상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세웠다. 미디안에서 모세가 처음 낳은 아들의 이름은 게르솜이지요? 이스라엘의 출애굽기의 시기가 임하였음을 말하는 기록은 제일 끝에 있는 문단이다. 그 핍박하는 왕은 죽었고 그리고 이스라엘은 고난 중에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언약 성취를 위해서 돌아 보셨다. 원수가 죽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 언약을 기억 하사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는 의미 그런 의미들이 출애굽이 임하였다는 그런 의미들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기의 의미는 하나님의 약 속의 성취이다. 조상들에게 하신 약 속의 성취로 그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으로 성별을 시킨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모세의 이 식기를 나이 사십이 되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기더니 나이 사십 년이 차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부르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누가 너를 우리의 임금을 삼았냐? 거절당한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속량자와 구원자로 세우셨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신학교에서 설교를 많이 한다. 당신이 구원받았으면 형제를 구원해라. 모세는 구원받았으니까 아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했겠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냐 하고 사명감이 불탔다. 그래서 모세와 우리를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 말이 아니고 레위 지파에 있는 구원자 레위 지파중에서 하나님이 구원자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자로 은혜를 입히고 아름답게 했을 때 그는 사십 년을 애굽 궁정에서 양육을 받고 그런 의미로 애굽화 되도록 버려졌는데도 그 안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 하나님에 약속에 대한 것은 꺼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백성은 그를 거절했는데 그는 나그네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적이 없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다. 그렇게 해서 처음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자에 대한 문제를 레위 지파와 연결시키고 있고 처음 구원자의 실패와 그 다음 구원자의 성공을 말함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갱신하는 문제들을 처음부터 깔고 진행하고 있다 그 말이다. 나중에 이 모세는 죽는다.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여호수아가 대신하고 있다. 첫돌 판도 깨뜨려지고 다음 돌 판을 받아서 그것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첫 언약은 폐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그런데 나중 이 모세를 보냈을 때는 그냥 하나님이 모세를 세웠다는 정도가 아니라 뒤에 보니까 내가 친히 가리라.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나타나 있고 그리고 친히 보이신 이적으로 자기 백성들에서 자기가 함께 계심을 이적으로 나타내신다. 그렇게 해서 두 번 째 구원자를 보냈을 때는 하나님이 친히 함께 가신 방식으로 더 탁월하게 증거 되고 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출애굽기의 돌 판을 받았을 때도 처음에는 굶은 것만 나타나는데 나중에 계명을 받았을 때는 나는 여호와라 여호와로라. 거듭 자기 이름으로 모세에게 자기를 선포하고 그리고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했을 때 손으로 모세를 덮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모세가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 첫 언약을 주셨을 때는 그런 영광을 보지를 못했다. 빽빽한 구름으로 있었고 안식일날 모세가 들어갔다. 빽빽한 구름이 전면에는 강조되어 있는데 그 다음 두 번째 언약을 받았을 때는 그런 구름은 강조되지 않고 언약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름으로 직접증거 되고 돌 판을 깨뜨려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언약궤 안에 보존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메고 함께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애굽에서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자로 세우신 것을 깨달으리라.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를 거절했다. 그 다음에는 거절하지 못할 증거를 주셨다. 그런데 모세는 어떤 사람인가? 40년을 애굽 궁전에서도 40년의 미디안 생활에서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약속의 확실한 소망을 품고 있다. 그가 누군가? 레위 지파 중에서 택하신 구원자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구원 역사요 자기 백성 중에 믿음의 백성들을 분별해서 동행하는 역사지 느닷없이 누구를 건져내서 나와 같이 가자 이렇게 하신 적은 없다. 그 말이다 그리고 이 레위 지파가 법궤를 메고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지파로 구약이 진행이 된다. 이 레위 지파 없이 구약은 없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해석되기 전에 바로 모세와 우리를 연결시키면 안된다 그 말이다. 모세 행동이 아무리 영웅스러워도 막 연결시키면 안된다. 그 다음 우리는 이보다 더 확실한 빛이 있다. 더 확실한 빛가운데서 부른다. 우리는 모세처럼 부르지 않는다. 우리의 모세는 새로운 모세다. 그분은 모세에게 내가 친히 함께 가리라 하신 그분이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바로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정도가 아니라 어둠의 권세에서 영단번에 깨뜨리셨다. 그리고 우리를 그 군대로 부르지 우리를 모세처럼 구원자처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모세가 서 있는 삶이 우리의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의 군병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니 우리는 모세보다 더 확실한 빛가운데서 믿음으로 봉사를 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시대적인 사명이 다르고 시대적인 위치가 다르다. 모세가 영웅스러우니까 막 우리에게 줄긋기를 해서 우리 종교적인 감정을 일으킨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의 부르심은 아니다. 모세는 구원자에 대한 이야기지 우리보다 영웅을 닮아라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여기 보니까 이 영웅의 봉사는 믿음의 봉사인데 바로 믿음의 용장과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셨다. 그 믿음은 40년의 애굽 생활에서도 40년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 이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됐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조금만 세상에서 무슨 일을 당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 영광을 추구하고 그쪽 사람으로 동화된다. 특별히 처녀들이 멋있는 청년이 나타나면 그 집에 시집가서 전도하자. 더구나 아들까지 낳으면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셨구나. 그 아이 기르느라고 정신이 없다. 남편도 안보일 뿐만 아니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완전히 세속화되어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이 감사하게 우리를 굶게 하니까 죽자살자 기도해야 하거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모세는 그렇게 양육을 안 받았다. 핍박을 해서 죽인 정도면 그것은 핍박도 엉터리 핍박이고 모세를 건져다가 특별 양육을 시켜 버렸다. 여기서는 히브리 정신을 완전히 잊기 좋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를 죽이려고 한 것처럼 완전히 죽기 쉽다. 그래도 모세는 그 모든 것을 벼렷다. 그리고 고난받는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기뻐하고 그리고 애굽 궁전을 떠나는 것을 전혀 두려움이 없이 떠났다. 그리고 40년이 차매 하나님이 불렀을 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참다운 구원자로 삼으셨다. 그랬는데 그 구원자를 너희들이 순종했던가? 아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지으셨다. 그리고 성소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집을 지었는데 그 집에 무슨 하나님의 집이었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완전히 창기의 소굴로 삼아 버렸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다 그렇게 하고 있다. 예수님이 새로운 성전 질서로 오셨다. 그것이 스데반이 하고 있는 것이다. 스데반에게서는 오히려 성전의 빛을 떠나는 것이 더 확실하다. 왜 본래 그들은 이방 땅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다. 바벨론 포로 때 성전은 불타 없어지고 그리고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지었지만 흩어진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성전은 의미가 더욱 멀어졌고 회당 제도다. 일년에 세 번씩은 올라와도 회당 제도다. 그래서 옛 제도의 끝남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제도가 완성된 것을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 땅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의 대표로 스데반이 설명을 한다. 그래서 그들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고 성전은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스데반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이 정도 핍박했을 때는 조금 그랬다 가도 나중에 그냥 업고 가면 나를 이처럼 높여 주었는데 나쁠 것이 뭐여. 자기를 중심 해서 무엇이든 해석해 버리기 쉽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는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했다. 이 믿음의 용장과 함께 하셨다. 우리는 이 보다 더 큰 영광이 있다. 예수의 부활의 영광보다 더 큰 상급이 어디 있소? 이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상급으로 주셨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야고보서에서 참다운 지혜를 얻어라 한 것처럼 조금만 좋은 것이 생기면 그것을 따라 자기를 해석하면 그것은 어둠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돈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대 환영하고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멸시하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옳은가? 야고보가 이야기하고 있다. 참다운 지혜를 구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완전한 빛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님의 전쟁에 참여자로 불러내신 것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도 조금만 영광스러우면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그전에 백화점에 황제였던 사람이 미국의 상무 장관할 때 주일은 시골 자기 교회 가서 주일학교 가르치기로 하고 그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기서 보면 핍박이 두면에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하냐면 하나님이 모세를 쓰시려고 그래도 쓰시려면 일반 교육도 잘 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무식해서는 안되니까 하나님이 애굽궁전으로 하나님이 섭리 중에 보내셨다. 가서 특별 교육을 잘 받고 나오니까 이런 지도자가 없잖아요? 이는 능히 애굽의 왕도 될 수 있는 지도자거든. 그렇게 양육을 잘 받았는데 드디어 하나님이 쓰려고 했는데 이 사람이 멋모르고 날뛰었다. 이쯤 되면 될 것이 아니냐 했는데 하나님이 실컷 고생해 보고 네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아라. 하고는 40년을 들판에 돌려버렸더니 자기 나라말도 잊어버릴 만큼 말도 잘못하고 더듬더듬 한다. 요새 미국 교포들 오면 그런 사람 있지요? 하나님이 불러서 너 말해라 하니까 내가 어떻게 이런 말로 설교할 수 있겠냐고 그래서 완전히 k. o시켜 버렸다. 하나님 나는 못 갑니다 몇 번이나 모세가 사양한다. 그쯤 되어야 쓸만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은 40년이 차매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고 애굽의 보화를 그는 벼렷다. 그가 어떻게 양육 받았는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을 지도했을 때도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계명으로 양육했지 애굽에서 배운 지도력으로 한 것이 아니다. 모세가 그렇게 지도한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도 조금 똑똑한 목사들이 생겨야 되겠다. 해 가지고 목사 부른데다가 적용을 시킨다. 목사는 대학교도 나와야 되겠고 그러나 배웠다고 교만하면 안되니까 겸손해야 되겠고 그리고 젊은 전도사가 좀 설치거든. 대학 나왔다고 목사는 지금 대학을 안 나온 목사인데 그러면 이 본문을 다 읽고 설교한다. 그런데다가 자기가 묘한 대학 나와서 사각모자 쓰고 사진 찍어서 벽에 걸어 놨거든. 목사 되고 나서 밤에 살살 다닌 대학 있다. 딱 붙여 놓고 양쪽을 공격하는 것이다. 교인들 무식하니까 배워야 한다 목사처럼 그것도 너무 껍죽껍죽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먼저는 핍박했는데 레위 지파의 여자의 봉사로 살았고 그를 애굽에 궁전에 버렸는데 그는 그 모든 영화로 양육을 받고도 자기 백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하고 그가 쫓겨났을 때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하고 나그네 된 땅에서 참았다. 언제가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때가 되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불렀다. 그전처럼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위탁해서 보냈다. 내가 함께 가리라. 그렇게 해서 건져내셨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사보다 더 큰 예수를 설교할 수 있는데 우리한테 적응성이 있어야 하겠다고 하고 예수님을 설교하면 적응성이 없어지고 목사나 반사를 말하면 적응성이 있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이 완성되게 때문에 드디어 우리를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적응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에 예수 안에서 역사가 완성되지 못하면 우리가 한 번 용장이 되어 보리라 해도 그 부름은 불안한 부름이고 진정한 부름도 안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정한 부르심을 받을 수가 있고 우리는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영광도 버리고 죽음을 이기고 걸어갈 수가 있다. 이런 용장들에 대해서 능히 세상이 저희를 감당하지 못했다. 히11장은 결론을 맺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만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믿고 세상을 봉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모세 인격을 설교할 필요가 없다. 질문에 대한 답. 어느 때는 르우엘 어느 때는 이드로 또 다른데 서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이제 그 이름들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버지 이름하고 손자 이름하고 같거든. 우리는 그렇지 않아서 그냥 아는데 그렇게 이름이 같은 이름들이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장인인지 진짜 아버지인지 아니면 처남인지 잘 모른다. 나중에 보면 호밥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그렇게 잘 모른다. 그래도 우리가 그 계통을 잘 몰라도 불안하지 않다. 만일에 그런 이름이 해석되어 있어 가지고 이름을 다시 언급하면 왜 여기서는 이런 이름이고 저기서는 저런 이름인지 우리가 연구를 해봐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않고 단순히 이름이 여기 저기 불려졌을 때는 그냥 그런 이름으로 불린가 보다 하면 된다. 이제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장인이냐 처남이냐 하고 따지면 헛된 족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고 딤전에서 말하고 있다. 족보를 풀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풀면 그것은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더구나 야곱 같으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꿔졌다. 그러니까 이름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봐야 한다. 아브람도 이름을 바꿔 주셨다. 그런 이름의 변화는 중요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름을 불렀을 때도 여수룬 이렇게 부른다. 그런 이름들은 중요하다. 그 문맥을 보면 이름들이 해석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조항들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름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면 된다. 주석들에서도 그 이름이 틀린 것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근거가 빈약한 가운데서 논리를 전개시키니까 받을 필요는 없다. 만일에 그 당시 배경을 알아서 이 의미를 해석해 내도 성경 해석에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 그러니까 여기는 그런 이름으로 불린가 보다 하고 지나치면 된다. 이것을 가지고 모세가 이방 혼을 했느니 그런 것 따져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녀들이다. 가나안 족속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방혼 했느니 해서도 안되고 오히려 자기 동족으로 버림을 받았는데 자기 동족 밖에서는 자기 딸들을 구원해 준 사건에서 영접을 받았다. 그래도 그는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있고 항상 언약의 성취를 앙모하고 있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모세를 죽이려고 한 사람도 죽었고 그리고 이스라엘이 핍박 중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의 그들을 돌아보셨다. 모세를 통해서 그렇게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셉도 제사장의 딸을 얻었다. 그 때 애굽은 전부 요셉에게 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요셉을 팔았고 거절했다. 그런 면에 있어서 항상 구원자에 대한 약속과 연결은 된다. 그래서 모세가 그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불렀다. 영접은 받았는데도 약속의 본 영역은 언약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40년이 차매 다시 불렀다. 아까 이름은 장인 이름을 이야기 한 것이다
구원자 모세를 준비하신 하나님/ 출2:1-25
구원자 모세를 준비하신 하나님 출2:1-25 복음이 들어갔다가 망한 흔적이 출1장에 나온다. 출1장은 복음을 놓친 비참함을 보여주고, 복음받고 요원을 못남긴 결과를 보여준다. 1. 원래 인간의 모습(창1:27-28) 1) 창1:27 -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음 ; 마16:13-20 = 생명 하나님 만나서 하나님 누리고, 인도와 축복을 받는 자격을 가졌다. 2) 창1:28 - 자연스럽게 세계정복하는 능력을 갖는다 ; 마28:16-20 = 사명 3) 창2:17 - 그러나, 하나님 떠나면 죽게된다. 2. 근본문제 - 사건이 터짐(창3:1-20) 1) 창3:1-6 - 인간이 하나님을 버림 2) 롬3:23 -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최는 하나님을 버린 죄이다. 3) 요일3:8 - 하나님을 버린 인간을 사단은 그냥 두지 않았다. 장악해 버렸다. 이상 3가지가 인간이 망하는 근본 원인이다. 그 결과 사람에게는 ① 창3:1-6-20 - 고통, 질병, 죽음이 찾아왔다. ② 계14:10 - 결국은 지옥 ③ 고전10:20 - 후손에게 멸망의 유산을 남긴다. 이같은 인간의 근본문제는 다른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은사운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은사운동을 계속하면 결국은 허무에 빠진다. 그리고 이 근본문제는 철학, 윤리, 도덕, 수준으로 해결이 안된다. 3. 해결책 - 언약을 주심(창3:15) 우리가 이 창3:15절을 잘 알지만 문제는 체질이 안되는 것이다. 예) 검도- 초보자도 죽도를 들고, 3년, 6년 훈련한 사람도 죽도를 든다. 겉으로 보면 잘 모른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창3:15절은 임마누엘의 축복으로서 누려 보아야 만이 제대로 알게 된다. 하나님을 만날려는 자기 노력은 결국 출20:4-5절에 빠진다. 우리가 아무리 모자라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므로 감사한 것이다. 1) 사7:14 - 창3:15절의 여자의 후손은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시는 분이시다. 2) 롬8:2 - 그 여자의 후손이 죄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다(해방자) 하나님의 크신 뜻을 주시기 위해 문제와 위기를 주신다. 언약이 있으므로 반드시 위기와 문제는 축복의 기회가 된다. 3) 요일3:8 - 창3:15절의 여자의 후손은 사단 권세를 깨뜨려 주셨다. 가룟유다의 마음속에 마귀가 ‘예수님을 팔 마음을 넣은 장본이다.’ 우리 가정을 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 마귀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기는 것이 창3:15절이다. <언약을 잊어버렸을 때> ① 포로가 된다. - 애굽, 앗수루, 바벨론, 로마, 2000년 나라없이 방황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 우상 섬기게 되고 - 이 죄로 자녀가 멸망(출20:4-5) ② 사단이 자꾸만 공격해 온다 - 시험에 든다 5. 친히 준비하신 구원자 모세(출2장) 이스라엘이 듣고 살아갈 내용을 말할 자, 창3장 문제 해결자를 준비했다. 그것이 출애굽기 2장이다. 1) 믿음의 집안에서 믿음으로 준비(출2:1-2) 2) 하나님이 준비한 인물(출2:2) - 남자 아이들을 죽이게 되어있는데 죽이지 못한다. 3) 사명자 준비(출2:3-5) - 더 이상 모세를 숨길 수 없을 때, 준비하심 공주의 아들 - 가장 안전하게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가 자라도록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이 준비한 인물이 있다. 4) 어머니 품에서 자람(출2:9-10) 따라서 시대를 살릴 사명자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불신자 중에 하나님이 예비한 사명자가 있다. 루디아, 야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다. 복음을 못들어서 가슴에 한맺혀 있는 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예) 구미에 새신자(권현정) 오빠 권영호씨는 그 지역에서 까꾸리 도사로 통했다. 신통하다고 육영수 여사가 점치러 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제자 점쟁이 199명이 있었더고 한다. (중학교 때에 귀신과 대화, 실제로 죽은 자가 나타난다고 함, 이런 이야기 하면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은 영적으로 많이 시달렸음, 그런데 이번에 복음 받고 영접하게 되었단다. 6. 이스라엘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 1) 세상이 막아도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시킬 수 없다. ① 정치를 해도 못막는다(출2:1) ② 환난, 박해가 일어나도 못막는다 -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기회다 ③ 경제, 학문, 왕궁이 못막는다 - 오히려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기회가 되었다. 2) 가정 상태 ① 아직 레위지파를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선택됨(광야에서 선택받는다) ② 레위 지파이지만 피의 위력이 희미한 상태였다(복음이 약했다) - 모세가 나타날 때까지 희미했다. 그러니 400년 고생한다. ③ 반면에 율법은 강했다. - 피의 언약, 즉 복음은 희미하면서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의식만큼은 확실하게 해서 자란다. 3) 그래서 드디어 모세가 실패한다. ① 창3장 사건은(저주,노예) 창3:15절(피 언약, 복음)에서 해결된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의 패기, 학문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실패한다. 언약이 아니면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② 어느 정도로 실패했느냐? - 살인할 정도로 실패했다. 그 정도로 설쳤다. 즉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설치면 설칠수록 실패가 온다. 그러므로 언약 놓친 자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면 안된다. 이러면 결정적인 때에 사단인도 받는 것이다. 모세를 보라! 언약 잘모르니까, 살인했지 않는가? 과연 살인이 주님의 뜻인가? 언약잡고 주의 일을 해야 하는데, 다른 것 잡고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다. ③ 광야에서 40년 도망생활을 한다 - 실패의 인생을 산다. 모세가 비로소 80세가 되고난 뒤에, 즉 언약 발견하고 난 이후에 왜? 자기가 왕궁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생활한 이]유를 깨닫게 된다. 4)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의 기간 400년을 지낸 이유? ① 언약을 몰랐기 때문이다. - 피흘림의 언약, 복음 ② 이 언약을 말할 사명자가 나타나지 않아서이다 ③ 하나님의 때가 아직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원자로 세움을 받은 모세/출4:1-31
구원자로 세움을 받은 모세/출4:1-31 2011-08-22 22:19:13 read : 2 출애굽기 4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있겠습니다. 1절로 17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나눌 수 있겠고 18절 이하의 내용을 한 단락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1절 로 17절의 내용은 앞서 3장의 내용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모세를 소 명하시고 자신의 뜻을 알리시며 그를 그 백성의 구원자로 세우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 서 앞의 내용과 관련지어서 본문을 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이하의 내용은 모 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아론과 함께 자신을 증거하는 내 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 증거를 듣고 또 보고 믿으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올렸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17절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의 사양의 내용이 나오고 있습 니다. 그리고 각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앞 서 하나님께서는 타는 불꽃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내셨고 모세를 불러 자신의 뜻을 말씀하 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뜻과 그 뜻을 모세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제가 누구인데 바로에 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습니까?"하고 자신을 택하심이 당치 않다 는 첫 번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굳은 약속으로 모세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두 번째 질문을 하므로 그 반응을 보였는데, "백성들이 보내신 이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그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구원하 실 것입니까? 애굽을 심판함으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모든 보 화를 자기 백성에게 안기심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소명 하시고 그에게 자신의 구원의 뜻을 말씀하시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셨을 뿐 아니라 그 구원 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모세의 세 번째 반응이 4장 1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1"--------" 한 마디로 백성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증거를 대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하 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증거를 주셔야 백성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입 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의 불신앙, 하나님이 가라하시면 가는 것이지 무슨 말이 이렇게 많고 게다가 증거까지 요구하는가'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단순하게 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증거와 완성된 믿음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 문에 쉽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이 온 시대, 이미 드러난 증거를 따라 기 록된 말씀이 주는 부요함 가운데 하나님을 믿기에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이미 성 령께서 우리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주시는 은혜의 시대를 살기에 얼른 그런 생각이 들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 때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드러난 증거를 주어야 믿는 것이지, 이미 그 모든 증거 가운데 성장한 우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모세 와 및 구약의 증거를 요구한 이들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들에게 맞는 믿음의 요구가 있는 것이고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나무라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 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갖는 모든 의의 표준과 기준으로 모든 시대를 평가하고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 때는 아이에게 맞는 부모의 요구가 있는 것입니다. 무 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믿음이 온 시대를 사는 자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요구해서는 안되겠지요? '하나님 저는 도무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저에게도 증거를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수많은 증거들을 교회 가운데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확실한 증거를 주시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증거를 주시는데 무엇입니까? 첫 째 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증거이고 두 번째는 손에 문둥병이 들고 낫는 증거이고 세 번 째는 나일강의 물을 땅에 부었을 때 그 물이 피로 변하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증거 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고 그를 보내셨다고 하는 표징으로서 증거들입니다. 표적으로서 증거들인 것이지요. 모세의 권위를 증거하는 권세의 표적들인 것 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러한 표적들을 보이면 백성들이 모세를 믿게 될 것입니다. 과연 하 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으며 그를 보내셨음을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애 굽왕 바로는 보고도 믿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이 모든 표적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표적이요,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그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 표적을 통해 과연 모세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구 원자라는 사실이 증거 될 것입니다. 곧 이 표적은 그 직무를 증거해 주는 직무의 증거들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표적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실 은혜의 일들을 증거하는 증거들이 될 것입니다. 장차 이루실 언약의 확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위해 구원자를 세우시고 표적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구원자를 세우셨고 그를 통하여 수많은 표적과 증거를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입었 습니다.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 된 자가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표적으로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표적의 성취로 친히 죽음을 이기고 일어 나셔서 하늘에 앉는 영원한 왕이 되시므로 자신을 증거하여 주셨습니다. 이 부활의 표적은 모든 표적을 완성하는 표적이어서 이보다 더 확실한 표적은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므로 원 수를 심판한 이 마지막 표적은 이제 천하만민이 믿어야 하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은 동시에 그에 속한 모든 백성에게 장차 이루실 은혜와 생명의 표적이어서 우리의 구원의 의미 자체를 담는 표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표적을 보이신 적이 없고 나타내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풍성 한 표적으로 은혜를 베푸신 적이 없습니다. 이로서 주님께서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셨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의 보내신 구원자임을 증 거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를 하나님의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로 믿는 사람은 하나 님의 구원에 참여할 것이고 이 표적을 보고도 그를 하나님의 보내신 이로 믿지 않고 거절 하는 자는 하늘로부터 좇아 나는 진노의 심판 가운데 들 것입니다. 바로 이 부활의 표적이 이제 우리가 증거해야 하는 확실한 표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 우리를 구원하신 이 하늘의 표적을 증거하고 선포할 때, 세상의 택하신 주의 백성들 은 이 믿음에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자 이제 10절에 모세의 네 번째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가 말하였습니다. 10"---------"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자신 이 말에 능하지 못하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이런 내가 어떻게 백성들을 설득할 것이며 바로 앞에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과거 백성에게 배척받았던 쓰라린 경 험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그 뼈아픈 경험 속에 가졌던 모든 자신감을 잃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1"-----" 무슨 말입니 까? 입을 지은 내가 말을 주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세상을 지은 내가 함께 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입을 만든 내가 함께 하고 할 말을 가르칠 것이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드러난 주님의 뜻에 대하여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으며 순종하기를 주저할 때가 간혹 있습니다. 때로는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이러한 어리석은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사실입 니다. 우리가 주의 뜻에 대해 변명하며 순종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신감 없음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실패에 대한 불안이나 과거의 한 두 번의 실패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세처럼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 춤거리게 되고 갖가지 변명을 늘어놓게 되며 회피할 명분을 찾거나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 해 골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시대를 사는 우리의 태도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혹 모세 는 그랬다할지라도 우리는 모세와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가지 못하고 저래서 가지 못하겠습니다.' '이래서 순종하지 못하고 저래서 순종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 세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주님의 부활의 본 자의 태도는 분명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세를 본받는 것이 마치 경건의 길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 다. 모세처럼 몇 차례의 거절과 반항을 거쳐서 순종을 해야 진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의 예이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이런 분들은 '나는 이렇게 이렇 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해 다녔지만 결국은 두 손들고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이 대단한 간 증거리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다니는 경우가 혹 있습니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를 은혜의 강조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주저함이나 반항 없이 주 를 순종한 것이 더 놀라운 것입니다. 부르심을 따라 즉각적인 순종을 이루며 사는 것이 더 큰 기적이며 교회 가운데 진정 간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주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제 모세와 같은 태도가 아니라 "주여 저를 어디로 보내시겠나이까? 저를 누구에게 보내시겠나이까? 주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운 없이 나아가겠습니다."라는 태도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시대를 봉사하는 우리의 마땅한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13"--------"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저는 도 저히 안되겠습니다"하는 것이 모세의 태도입니다. 그는 끝까지 인간적인 생각에 매여 하나 님의 부르심을 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단호히 명령하셨습니다. 14-17"---------"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을 말씀하셨고 결 국 모세는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서 모세는 마지못해 하나님을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무려 다섯 번이나 주저하고 변명하고 망설인 끝에 하나님께서 노를 발 하실 때에야 비로소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주저하거나 망설인 모습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계산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래서 안되겠는데요, 저래서 안되겠는데요" 변명한 적이 있었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죽으심을 앞 두고 "할만하시어든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간구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저함이 나 망설임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어 말 씀하시기를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십자가의 가혹한 죽음일지 라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죽기까지도 기꺼이 순종하셨고 죽음으로서 순종을 이루어 내셨 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순종의 본,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주님처럼 온전한 순종의 길을 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여 부족하 지만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소서" "힘들고 외로운 길이 충분히 예상되지만 주님의 뜻이라면 그 길을 가겠나이다"이렇게 순종으로 행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순종하는 백성으로 우리를 만드시고자 주님께서는 죽음의 순종의 길을 가신 것이고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갖 자기 합리화와 변명의 태도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순종하기도 전 에 예상되는 어려움부터 계산하고 주저하거나 회피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자기 비 하 가운데 갇혀 있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주의 뜻이면 하겠나이다" 또는 "주의 뜻이면 하지 않겠나이다"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온전한 순종을 이루는 의의 백성들로서 이 땅을 사실 수 있기 바랍 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눅16:19-31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눅16:19-31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본문 누가복음 16장 1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은 우리들 모두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게 인생을 살았던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지 나사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큰 부자, 인생을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이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는데 그 집 대문에서 밥을 얻어먹는 거지에게는 버젓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무명인사였고 거지는 유명인사였습니다. 무언가 시사하는 대목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여간 이들이 늙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어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죽자마자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쉽게 말하면 천국에 간 겁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불이 펄펄 끓는 음부에 내려가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옥에 간 것이지요. 이 부자가 지옥에서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자기 집 대문에서 구걸을 하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져 있습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지금 당신 품에 안겨져 있는 저 나사로라는 사람은 사실 옛날 우리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거지입니다. 그런데 저 거지에게 좀 시켜서, 나사로에게 좀 시켜서 내가 너무 이 뜨거운 불에서 견딜 수가 없으니 물 한방울만 손 끝에 찍어서 내 혀에 좀 대주십시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을 합니다. \\\"안 되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아브라함이 딱 잘라서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거지 나사로가 세상에 있을 때 이 부자에게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까?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손가락에 물 한방울 찍어서 혀끝을 적셔 달라고 하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사실 나사로의 체면을 봐서라도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이거 너무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한 이 부자는 이번에는 또 다른 부탁을 아브라함에게 합니다. \\\"좋습니다. 내가 너무 뜨거워서 물 방울 혀끝에 적혀 달라는데 그것이 안 된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만두고 내가 한가지 청을 더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형제 다섯이 있습니다. 이 형제 다섯이 틀림없이 죽어서 나처럼 지옥에 와서 고생을 하게 될 텐데 제발 저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서 나처럼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좀 말 좀 보내주십시오. 제발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절한 소원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 부자의 청을 또 보기좋게 거절합니다. 그거 쓸데 없는 일이다. 안해도 되는 일이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청을 거절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의문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후에 자기처럼 지옥에 와서 말할 수 없는 고생할 것이 뻔한 자기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이 부자가 지금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생각하는 이 부자의 마음이 여러분, 갸륵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의 입장을 생각해서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바르게 살아서 지옥에 안가는 것이 좋은 일인데 뭐 조금만 수고를 하면 여러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일인데 왜 아브라함은 굳이 그 길을 마다하는 것일까? 그리고 뭐 무슨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는 이 부자의 청도 사실 생각해보면 꽤 합리적인 제한입니다. 이 부자가 지금 내가 좀 가서 형제들에게 말을 하고 올 테니 나를 좀 살려달라 그런 부탁도 아닙니다. 자기가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사로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슨 오랫동안 다녀오게 해달라 그것도 아닙니다. 넉넉잡아 며칠이면 되는 일입니다. 나사로를 며칠 더 세상에 나가서 살게 하고 그랬다가 다시 천국에 데려오면 됩니다. 뭐 아브라함에게 그런 정도 손해 날일이 없습니다. 며칠동안 나사로를 살렸다가 다시 천국에 데려오는 일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 면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모두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좋은(good) 아이디어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부자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부자의 간절한 청을 거절한 것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까 됐다. 나사로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런 말입니다. 29절 말씀에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찌어다. 이런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유를 들어서 한마디로 부자의 간청을 거절하게 됩니다. 제가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그 뜨거운 펄펄 끓는 불에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가? 저에게 이 말씀을 해주시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실감나게 그 부자가 고통스러워하는가 하는 것을 들려주어서 지금까지 제가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훤하게 지금 머릿속에 있습니다. 펄펄 끓는 지옥의 유황불. 부자가 거기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물 한방울만 혀끝에 찍어다 달라고 말을 했을까? 이 나도 지옥에 가면 안 될 텐데, 지옥에 가면 저런 유황불에 고생을 한다는데......집에 와서 저희 증조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머니, 정말 지옥이 있는 거야?\\\" \\\"있다마다.\\\" \\\"유황불이 펄펄 끓는 그런 곳이 지옥인가?\\\" 할머니가 저에게 당부하셨습니다. \\\" 야, 지옥이라는 곳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어려운 곳이란다. 그러니까 너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수 잘 믿어라.\\\"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 후로 저는 지금까지 때때로 이 지옥의 유황불을 생각하면서 예수를 잘 믿으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주일도 잘 지켜보려고 합니다. 목사가 주일을 잘 지킨다고 하니까 이상하지만 주일도 잘 지켜보려고 합니다. 헌금 생활도 정성껏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때때로 저에게 금전적인 손해가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돈을 언제 어떻게 떼어먹어서 이렇게 어려운가? 한참 생각해보면 영락없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냈어야 될 것, 내가 떼먹을 것을 계산해서 가져가신다 하는 것을 저는 평생을 통해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쳐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유황불에서 그렇게 펄펄 끓는 유황불에서 고생하던 부자 생각이 나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합니다. 아마 이 버릇이 지금 제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선교를 해야 된다는 이런 목회 철학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신학을 학문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제 신앙은 아직도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과 아브라함 품에 안겨져 있는 나사로-이때의 이 유치한 신앙이 지금 저의 신앙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부터 시작을 해서, 다시 말하면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부터 시작을 해서 제 머리 속에 끓임 없이 지워지지 않은 의문의 하나는 이 부자의 청을 두 번씩이나 거절한 아브라함이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니냐,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부자의 말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입니까?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된다. 여러분, 모세라는 사람은 지금 그때에 있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또 그 당시에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은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천국은 이런 곳이요, 지옥은 이런 곳이라고 생생하게 증언을 한다고 하면 사실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부자의 헛된 간청을 거절합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만사에는 다 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 그 형제들을 생각하는 당신의 그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내가 왜 이런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을 까하는 후회스러운 마음, 다 그것은 이해하겠는데 때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때가 지났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왜 진작 돌이키지 못했는가, 왜 진작 형제들의 영혼을 생각하지 못했는가? 이제는 때가 늦었다. 때는 지났고 문은 닫혔으니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나사로라는 사람을 보내달라. 나사로는 지금 여기 있어야 될 때지 세상에 나가야 될 때가 아니다. 나사로가 세상에 나갈 때가 아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일입니다만은 여러분, 이 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때를 놓쳐서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는 일이 우리의 생활 속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비근한 예로 공부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특히 우리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여기 있는데 \\\"아휴, 이럴 줄 알았으면 1학년 때, 2학년 때 공부 잘할걸, 중학교 때 공부 잘 할걸.\\\" 여러분들, 벌써 때를 놓쳐서 후회하지요? 건강의 때를 잃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건강을 조심했어야 되는데......젊음의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나이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일할 때 일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하고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때를 놓쳐서......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으니 때가 있는 법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때라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를 놓쳐서 평생을 후회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부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봉사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금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돈이 있나요, 항상 헌금할만한 돈이 우리에게 있나요?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습니다. 헌금도 때를 놓치면 못합니다. 기도할 때가 있고 기도를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기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아무 때나 엎드려서 기도하면 되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기도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소용없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너무 늦은 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기도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때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때를 놓쳐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미 문은 닫혔습니다. 부자의 청을 거절한 이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이 말하는 처지는 딱하고 당신의 심경은 이해하겠으나 아무리 사정을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 이미 늦었다. 나사로가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가 없다. 그런 때가 아니다. 여러분, 때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들 스스로를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혹시 때를 놓치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여러분들의 일상의 삶에서 젊었을 때, 건강했을 때, 여러분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때를 놓치는 일은 없습니까? 혹은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에서 때를 놓치는 때는 없습니까? 기도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봉사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열심히 일을 해야 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헌금해야 될 때를 놓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들 스스로의 신앙을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문이 닫힌 후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고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고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청을 왜 거절했을까? 오늘 본문에 보면 결정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31절 말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하더라도 듣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의 형제들이 뭐 몰라서 그렇게 사냐 그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당신의 형제들이 지금 잘 알고 있고 또 지금 선지자들이 늘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느냐? 정말로 당신의 형제들이 뭐가 뭔지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나사로라도 다시 보내야 되겠지,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서 보내야 되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모세의 율법이, 선지자들의 지금 이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그러니 나사로가 가서 해야 될 일이 없다. 나사로가 가봐야 할 일이 없다. 나사로가 가야 할 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지금 선지자들이 듣기 싫을 만큼 말하고 있다. 나사로까지 살아날 필요가 없다. 며칠 전에 우리 교회 집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목사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새롭게 신축을 하고 이사를 왔는데 이 성경공부를 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밑도 끝도 없이......그래서 제가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성경공부 더 하려고 하지 말고 아는 거나 좀 실습하세요. 아는 만큼만 좀 살아보세요.\\\" 아는 것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공부는 또 무슨 공부? 아, 이 집사님이 아주 목사를 잡으려고 마음을 먹었구만......사실은 제가 핀잔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 집사님이 옛날에 성경공부 나와라 나와라 할 때 한번도 안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요일날 성경공부하고 있거든요. 오래전부터......체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그런데 이 집사님은 한번도 안 나오시거든요. 지금 하고 있는 성경공부도 안나오는데 새로 시작하는 성경공부에 나오겠어요? 그리고 여러분, 성경공부를 왜 합니까? 성경공부는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살아보려는데 성경공부의 목적이 있습니다. 삶과 연결이 안된 성경지식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들 옆에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마침 오늘이 우리가 12월 둘째 주를 성서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언제든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왜 다시 살아나야 되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살아날 것입니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나사로가 살아나서......선지자들의 짐이 있습니다. 새벽마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마다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은 우리 기독교 인터넷 방송에 지금 4100편의 설교가 담겨져 있습니다. 언제든지 여러분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4100편의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위성방송에 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왜 죽었던 나사로가 할 일 없이 다시 살아나야 되겠습니까? 아무 필요 없습니다. 그가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가 다 압니다. 나사로가 안 와도 됩니다. 그 사람이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가 다 압니다. 여러분, 그리고 사실 그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있는 모세는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선지자들은 박집사, 김집사, 이집사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선지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지난날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지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셨지요? 우리다 경험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때때로 거역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하고 잘난척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채찍으로 들으셔서 치지 않았습니까? 내가 다 경험했습니다. 내가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이 모든 신앙의 경험이 모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어떻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일러주는 모세입니다. 이처럼 내 삶 속에서 살아 계셔서 역사 하셨던 신앙의 경험,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깨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권고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때로는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삶을 되돌아 생각하며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겪었던 인생의 체험, 신앙의 체험-이것이 우리의 모세요, 선지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주위에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증언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다 이 세상에 끝이 있고 하나님 앞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안 와도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우리에게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오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듣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건강을 잃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간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며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되며 제한된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그들을 통해서 이미 듣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인생에 실패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인생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병든 이들,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 축복 받은 사람들, 행복과 감사에 넘쳐 사는 사람들, 근심과 걱정 속에 사는 사람들, 우리 교회의 김집사님, 이집사님, 박집사님, 최집사님-이 사람들이 이 믿음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 그리고 생생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어떻게 섭리하시는가, 우리들이 사는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구태여 죽은 나사로에게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 옆에 있는 믿음의 증인들을 통해서 우리는 수많은 살아 있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선지자들, 믿음에 증인들이 구름처럼 둘러싸여서......히브리서 12장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의 축복을 통해서,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그들의 아픔을 통해서, 그들의 걱정과 그들의 안타까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을 오늘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자의 그 간절한 청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지 않느냐? 그들의 말을 들어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이유가 없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가가 있으니......오늘 이 아침 우리를 향하여 권면 하시는 성령의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눅16:19-31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눅16:19-31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본문 누가복음16장 1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은 우리들 모두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게 인생을 살았던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지 나사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큰 부자, 인생을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이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는데 그 집 대문에서 밥을 얻어먹는 거지에게는 버 젓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무명인사였고 거지는 유명인사였습니다. 무언가 시 사하는 대목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여간 이들이 늙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어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죽자마자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 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쉽게 말하면 천국에 간 겁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불이 펄펄 끓는 음부에 내려가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옥에 간 것이지요. 이 부자가 지옥에서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멀 리 바라보니 자기 집 대문에서 구걸을 하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져 있습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 청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지금 당신 품에 안겨져 있는 저 나사로라는 사람은 사실 옛날 우리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거지입니다. 그런데 저 거지에게 좀 시켜서, 나사로에게 좀 시켜서 내가 너무 이 뜨거운 불에서 견딜 수가 없으니 물 한방울만 손 끝에 찍어서 내 혀에 좀 대주십시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아브라함 이 대답을 합니다. \\\"안 되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아브라함이 딱 잘라서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거지 나 사로가 세상에 있을 때 이 부자에게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까?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손가락에 물 한방울 찍어서 혀 끝을 적셔 달라고 하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사실 나사로의 체면을 봐서라도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이거 너무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한 이 부자는 이번에는 또 다른 부탁을 아브라함에게 합니다. \\\"좋습니다. 내가 너무 뜨거워서 물 방울 혀끝에 적혀 달라는데 그것이 안 된다. 좋습 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만두고 내가 한가지 청을 더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형제 다 섯이 있습니다. 이 형제 다섯이 틀림없이 죽어서 나처럼 지옥에 와서 고생을 하게 될 텐데 제발 저 나사로를 그들에 게 보내서 나처럼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좀 말 좀 보내주십시오. 제발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 함에게 간절한 소원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 부자의 청을 또 보기좋게 거절합니 다. 그거 쓸데 없는 일이다. 안해도 되는 일이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청을 거절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의문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후에 자기처럼 지옥에 와서 말할 수 없는 고생할 것 이 뻔한 자기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이 부자가 지금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생각하는 이 부자의 마음이 여러분, 갸륵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의 입장을 생각해서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바르게 살아 서 지옥에 안가는 것이 좋은 일인데 뭐 조금만 수고를 하면 여러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일인데 왜 아브라함은 굳 이 그 길을 마다하는 것일까? 그리고 뭐 무슨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는 이 부자의 청도 사실 생각해보 면 꽤 합리적인 제한입니다. 이 부자가 지금 내가 좀 가서 형제들에게 말을 하고 올 테니 나를 좀 살려달라 그런 부 탁도 아닙니다. 자기가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사로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슨 오랫동안 다녀오게 해달 라 그것도 아닙니다. 넉넉잡아 며칠이면 되는 일입니다. 나사로를 며칠 더 세상에 나가서 살게 하고 그랬다가 다시 천국에 데려오면 됩니다. 뭐 아브라함에게 그런 정도 손해 날일이 없습니다. 며칠동안 나사로를 살렸다가 다시 천국 에 데려오는 일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 면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모두 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좋은(good) 아이디어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부자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부자의 간절한 청을 거절한 것이겠습니까? 오 늘 성경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까 됐다. 나사로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 런 말입니다. 29절 말씀에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찌어다. 이런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유를 들어서 한마디로 부자의 간청을 거절하게 됩니다. 제가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그 뜨거 운 펄펄 끓는 불에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가? 저에게 이 말씀을 해주시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실감나게 그 부자가 고통스러워하는가 하는 것을 들려주어서 지금까지 제가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훤하게 지 금 머릿속에 있습니다. 펄펄 끓는 지옥의 유황불. 부자가 거기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물 한방울만 혀끝에 찍어다 달라고 말을 했을까? 이 나도 지옥에 가면 안 될 텐데, 지옥에 가면 저런 유 황불에 고생을 한다는데......집에 와서 저희 증조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머니, 정말 지옥이 있는 거 야?\\\" \\\"있다마다.\\\" \\\"유황불이 펄펄 끓는 그런 곳이 지옥인가?\\\" 할머니가 저에게 당부하셨습니다. \\\" 야, 지옥이라는 곳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어려운 곳이란다. 그러니까 너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수 잘 믿어라.\\\" 저희 증 조할머니께서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 후로 저는 지금까지 때때로 이 지옥의 유황불을 생각하면서 예수를 잘 믿으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주일도 잘 지켜보려고 합니다. 목사가 주일을 잘 지킨다고 하니까 이상하지만 주일도 잘 지켜보려고 합니다. 헌금 생활도 정성 껏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때때로 저에게 금전적인 손해가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돈을 언제 어떻게 떼어먹어서 이렇게 어려운가? 한참 생각해보면 영락없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냈어 야 될 것, 내가 떼먹을 것을 계산해서 가져가신다 하는 것을 저는 평생을 통해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 다도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쳐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유황불에서 그렇게 펄펄 끓는 유황불에서 고생하던 부자 생각이 나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합니 다. 아마 이 버릇이 지금 제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선교를 해야 된다는 이런 목회 철학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 다. 제가 오랫동안 신학을 학문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제 신앙은 아직도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과 아브라함 품에 안겨져 있는 나사로-이때의 이 유치한 신앙이 지금 저의 신앙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부터 시작을 해서, 다시 말하면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부터 시작을 해서 제 머리 속에 끓임 없이 지워지지 않은 의문의 하나는 이 부자의 청을 두 번씩이나 거절한 아브라함이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니냐,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부자의 말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입니까?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된다. 여러분, 모세라는 사람은 지금 그때에 있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또 그 당시에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은 그러나 죽었던 사람 이 살아나서 천국은 이런 곳이요, 지옥은 이런 곳이라고 생생하게 증언을 한다고 하면 사실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부자의 헛된 간청을 거절합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깊 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만사에는 다 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 그 형제들을 생 각하는 당신의 그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내가 왜 이런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을 까하는 후회스러운 마음, 다 그것은 이해하겠는데 때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때가 지났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왜 진작 돌이키지 못했는 가, 왜 진작 형제들의 영혼을 생각하지 못했는가? 이제는 때가 늦었다. 때는 지났고 문은 닫혔으니 이제는 다시 돌 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나사로라는 사람을 보내달라. 나사로는 지금 여기 있어야 될 때지 세상에 나가야 될 때가 아니다. 나사로가 세상에 나갈 때가 아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일입니다만은 여러분, 이 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때를 놓쳐서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는 일이 우리의 생활 속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비근한 예로 공부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특히 우리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여기 있는데 \\\"아휴, 이럴 줄 알았으면 1학년 때, 2학년 때 공부 잘할걸, 중학교 때 공부 잘 할걸.\\\" 여러분들, 벌써 때를 놓쳐서 후회하지요? 건강의 때를 잃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건강을 조심했어야 되는데......젊음의 때를 놓치고 후회하 는 나이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일할 때 일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하고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 이 있습니까? 때를 놓쳐서......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 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으니 때가 있는 법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 고 울 때가 있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때라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를 놓쳐서 평생을 후회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부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봉사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금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돈이 있나요, 항상 헌금할만한 돈이 우리에게 있나요?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습니다. 헌금도 때를 놓치면 못합니다. 기도할 때가 있고 기도를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기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아무 때나 엎드려서 기도하면 되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기도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소용없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너무 늦은 때가 있습 니다. 아무 때나 기도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때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때를 놓쳐 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미 문은 닫혔습니다. 부자의 청을 거절한 이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이 말하는 처지는 딱하고 당신의 심경은 이해하겠으나 아무리 사정을 해 도 이미 때가 늦었다. 이미 늦었다. 나사로가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가 없다. 그런 때가 아니다. 여러분, 때라는 것 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들 스스로를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혹시 때를 놓치고 있는 일은 없습 니까? 여러분들의 일상의 삶에서 젊었을 때, 건강했을 때, 여러분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때를 놓치는 일은 없습니까? 혹은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에서 때를 놓치는 때는 없습니까? 기도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봉사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열심히 일을 해야 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헌금해야 될 때를 놓치는 것이 아닙 니까? 여러분들 스스로의 신앙을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문이 닫 힌 후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고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고 기도 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청을 왜 거절했을까? 오늘 본문에 보면 결정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31절 말씀, \\\'모세와 선지자 들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하더라도 듣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의 형제들이 뭐 몰라 서 그렇게 사냐 그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당신의 형제들이 지금 잘 알고 있고 또 지금 선지자들이 늘 목이 터져 라 외치지 않느냐? 정말로 당신의 형제들이 뭐가 뭔지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면 누구라도 하나 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나사로라도 다시 보내야 되겠지,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서 보내야 되겠 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모세의 율법이, 선지자들의 지금 이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그러니 나사로가 가서 해야 될 일이 없다. 나사로가 가봐야 할 일이 없다. 나사로가 가야 할 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지금 선지자 들이 듣기 싫을 만큼 말하고 있다. 나사로까지 살아날 필요가 없다. 며칠 전에 우리 교회 집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목사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새롭게 신축을 하고 이사를 왔는데 이 성경공부를 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밑도 끝도 없이......그래서 제가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 사님, 성경공부 더 하려고 하지 말고 아는 거나 좀 실습하세요. 아는 만큼만 좀 살아보세요.\\\" 아는 것도 제대로 실 천하지 않으면서 공부는 또 무슨 공부? 아, 이 집사님이 아주 목사를 잡으려고 마음을 먹었구만......사실은 제가 핀잔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 집사님이 옛날에 성경공부 나와라 나와라 할 때 한번도 안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 요일날 성경공부하고 있거든요. 오래전부터......체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을. 그런데 이 집사님은 한번도 안 나오시거든요. 지금 하고 있는 성경공부도 안나오는데 새로 시작하는 성경공부에 나오겠어요? 그리고 여러분, 성경공부를 왜 합니까? 성경공부는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살아보려는데 성경공부의 목적이 있습니다. 삶과 연결이 안된 성경지식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하 나님의 말씀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들 옆에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마침 오늘이 우리가 12월 둘째 주를 성서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 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언제든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왜 다시 살아나야 되겠 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살아날 것입니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나사로가 살아나서......선지자들의 짐이 있습 니다. 새벽마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마다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 인터넷 방송 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은 우리 기독교 인터넷 방송에 지금 4100편의 설교가 담겨져 있습니다. 언제든지 여러분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4100편의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위성방송에 쉬지 않고 하 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왜 죽었던 나사로가 할 일 없이 다시 살아나야 되겠습니까? 아무 필요 없습니다. 그가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가 다 압니다. 나사로가 안 와도 됩니다. 그 사람이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가 다 압니다. 여러분, 그리고 사실 그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있는 모세는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선지자들은 박집사, 김집사, 이집사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선지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지난날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 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지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셨지요? 우리다 경험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때때로 거역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하고 잘난척하고 하나님의 곁 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채찍으로 들으셔서 치지 않았습니까? 내가 다 경험했습니다. 내가 살아왔던 지 난날들의 이 모든 신앙의 경험이 모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어떻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우 리에게 일러주는 모세입니다. 이처럼 내 삶 속에서 살아 계셔서 역사 하셨던 신앙의 경험,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많 은 깨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권고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 리는때로는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삶을 되돌아 생각하며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겪었던 인생의 체험, 신앙의 체험-이것이 우리의 모세요, 선지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수많은 믿음의 증인 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주위에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증언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다 이 세상에 끝이 있고 하나님 앞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상을 떠나는 이 들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안 와도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우리에게도 죽음이 있다 는 것을 오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듣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건강을 잃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간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며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되며 제한된 우리의 시간 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그들을 통해서 이미 듣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인생에 실 패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인생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병든 이들,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 축복 받은 사람 들, 행복과 감사에 넘쳐 사는 사람들, 근심과 걱정 속에 사는 사람들, 우리 교회의 김집사님, 이집사님, 박집사님, 최 집사님-이 사람들이 이 믿음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 그리고 생생한 음성을 듣 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어떻게 섭리하시는가, 우리들이 사는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구태여 죽은 나사로에게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 옆에 있 는 믿음의 증인들을 통해서 우리는 수많은 살아 있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 은 선지자들, 믿음에 증인들이 구름처럼 둘러싸여서......히브리서 12장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의 축복을 통해서,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그들의 아픔을 통해서, 그들의 걱정과 그들의 안타까움을 통해서 우리 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을 오늘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죽은 나사 로가 다시 살아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자의 그 간절한 청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너희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지 않느냐? 그들의 말을 들어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이유가 없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가가 있으니......오늘 이 아침 우리를 향하여 권면 하시는 성령의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눅16:19-31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눅16:19-31 2003-06-22 14:58:03 read : 2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본문 누가복음16장 1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은 우리들 모두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게 인생을 살았던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지 나사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큰 부자, 인생을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이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는데 그 집 대문에서 밥을 얻어먹는 거지에게는 버젓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무명인사였고 거지는 유명인사였습니다. 무언가 시사하는 대목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여간 이들이 늙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어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죽자마자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쉽게 말하면 천국에 간 겁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불이 펄펄 끓는 음부에 내려가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옥에 간 것이지요. 이 부자가 지옥에서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자기 집 대문에서 구걸을 하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져 있습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지금 당신 품에 안겨져 있는 저 나사로라는 사람은 사실 옛날 우리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거지입니다. 그런데 저 거지에게 좀 시켜서, 나사로에게 좀 시켜서 내가 너무 이 뜨거운 불에서 견딜 수가 없으니 물 한방울만 손 끝에 찍어서 내 혀에 좀 대주십시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을 합니다. "안 되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아브라함이 딱 잘라서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거지 나사로가 세상에 있을 때 이 부자에게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까?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손가락에 물 한방울 찍어서 혀끝을 적셔 달라고 하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사실 나사로의 체면을 봐서라도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이거 너무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한 이 부자는 이번에는 또 다른 부탁을 아브라함에게 합니다. "좋습니다. 내가 너무 뜨거워서 물 방울 혀끝에 적혀 달라는데 그것이 안 된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만두고 내가 한가지 청을 더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형제 다섯이 있습니다. 이 형제 다섯이 틀림없이 죽어서 나처럼 지옥에 와서 고생을 하게 될 텐데 제발 저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서 나처럼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좀 말 좀 보내주십시오. 제발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절한 소원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 부자의 청을 또 보기좋게 거절합니다. 그거 쓸데 없는 일이다. 안해도 되는 일이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청을 거절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의문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후에 자기처럼 지옥에 와서 말할 수 없는 고생할 것이 뻔한 자기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이 부자가 지금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생각하는 이 부자의 마음이 여러분, 갸륵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의 입장을 생각해서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바르게 살아서 지옥에 안가는 것이 좋은 일인데 뭐 조금만 수고를 하면 여러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일인데 왜 아브라함은 굳이 그 길을 마다하는 것일까? 그리고 뭐 무슨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는 이 부자의 청도 사실 생각해보면 꽤 합리적인 제한입니다. 이 부자가 지금 내가 좀 가서 형제들에게 말을 하고 올 테니 나를 좀 살려달라 그런 부탁도 아닙니다. 자기가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사로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슨 오랫동안 다녀오게 해달라 그것도 아닙니다. 넉넉잡아 며칠이면 되는 일입니다. 나사로를 며칠 더 세상에 나가서 살게 하고 그랬다가 다시 천국에 데려오면 됩니다. 뭐 아브라함에게 그런 정도 손해 날일이 없습니다. 며칠동안 나사로를 살렸다가 다시 천국에 데려오는 일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 면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모두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좋은(good) 아이디어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부자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부자의 간절한 청을 거절한 것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까 됐다. 나사로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런 말입니다. 29절 말씀에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찌어다. 이런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유를 들어서 한마디로 부자의 간청을 거절하게 됩니다. 제가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그 뜨거운 펄펄 끓는 불에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가? 저에게 이 말씀을 해주시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실감나게 그 부자가 고통스러워하는가 하는 것을 들려주어서 지금까지 제가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훤하게 지금 머릿속에 있습니다. 펄펄 끓는 지옥의 유황불. 부자가 거기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물 한방울만 혀끝에 찍어다 달라고 말을 했을까? 이 나도 지옥에 가면 안 될 텐데, 지옥에 가면 저런 유황불에 고생을 한다는데......집에 와서 저희 증조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머니, 정말 지옥이 있는 거야?" "있다마다." "유황불이 펄펄 끓는 그런 곳이 지옥인가?" 할머니가 저에게 당부하셨습니다. " 야, 지옥이라는 곳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어려운 곳이란다. 그러니까 너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수 잘 믿어라."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 후로 저는 지금까지 때때로 이 지옥의 유황불을 생각하면서 예수를 잘 믿으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주일도 잘 지켜보려고 합니다. 목사가 주일을 잘 지킨다고 하니까 이상하지만 주일도 잘 지켜보려고 합니다. 헌금 생활도 정성껏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때때로 저에게 금전적인 손해가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돈을 언제 어떻게 떼어먹어서 이렇게 어려운가? 한참 생각해보면 영락없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냈어야 될 것, 내가 떼먹을 것을 계산해서 가져가신다 하는 것을 저는 평생을 통해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쳐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유황불에서 그렇게 펄펄 끓는 유황불에서 고생하던 부자 생각이 나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합니다. 아마 이 버릇이 지금 제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선교를 해야 된다는 이런 목회 철학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신학을 학문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제 신앙은 아직도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과 아브라함 품에 안겨져 있는 나사로-이때의 이 유치한 신앙이 지금 저의 신앙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부터 시작을 해서, 다시 말하면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부터 시작을 해서 제 머리 속에 끓임 없이 지워지지 않은 의문의 하나는 이 부자의 청을 두 번씩이나 거절한 아브라함이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니냐,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부자의 말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입니까?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된다. 여러분, 모세라는 사람은 지금 그때에 있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또 그 당시에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은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천국은 이런 곳이요, 지옥은 이런 곳이라고 생생하게 증언을 한다고 하면 사실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부자의 헛된 간청을 거절합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만사에는 다 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 그 형제들을 생각하는 당신의 그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내가 왜 이런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을 까하는 후회스러운 마음, 다 그것은 이해하겠는데 때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때가 지났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왜 진작 돌이키지 못했는가, 왜 진작 형제들의 영혼을 생각하지 못했는가? 이제는 때가 늦었다. 때는 지났고 문은 닫혔으니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나사로라는 사람을 보내달라. 나사로는 지금 여기 있어야 될 때지 세상에 나가야 될 때가 아니다. 나사로가 세상에 나갈 때가 아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일입니다만은 여러분, 이 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때를 놓쳐서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는 일이 우리의 생활 속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비근한 예로 공부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특히 우리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여기 있는데 "아휴, 이럴 줄 알았으면 1학년 때, 2학년 때 공부 잘할걸, 중학교 때 공부 잘 할걸." 여러분들, 벌써 때를 놓쳐서 후회하지요? 건강의 때를 잃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건강을 조심했어야 되는데......젊음의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나이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일할 때 일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하고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때를 놓쳐서......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으니 때가 있는 법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때라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를 놓쳐서 평생을 후회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부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봉사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금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돈이 있나요, 항상 헌금할만한 돈이 우리에게 있나요?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습니다. 헌금도 때를 놓치면 못합니다. 기도할 때가 있고 기도를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기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아무 때나 엎드려서 기도하면 되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기도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소용없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너무 늦은 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기도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때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때를 놓쳐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미 문은 닫혔습니다. 부자의 청을 거절한 이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이 말하는 처지는 딱하고 당신의 심경은 이해하겠으나 아무리 사정을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 이미 늦었다. 나사로가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가 없다. 그런 때가 아니다. 여러분, 때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들 스스로를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혹시 때를 놓치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여러분들의 일상의 삶에서 젊었을 때, 건강했을 때, 여러분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때를 놓치는 일은 없습니까? 혹은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에서 때를 놓치는 때는 없습니까? 기도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봉사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열심히 일을 해야 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헌금해야 될 때를 놓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들 스스로의 신앙을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문이 닫힌 후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고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고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청을 왜 거절했을까? 오늘 본문에 보면 결정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31절 말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하더라도 듣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의 형제들이 뭐 몰라서 그렇게 사냐 그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당신의 형제들이 지금 잘 알고 있고 또 지금 선지자들이 늘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느냐? 정말로 당신의 형제들이 뭐가 뭔지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나사로라도 다시 보내야 되겠지,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서 보내야 되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모세의 율법이, 선지자들의 지금 이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그러니 나사로가 가서 해야 될 일이 없다. 나사로가 가봐야 할 일이 없다. 나사로가 가야 할 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지금 선지자들이 듣기 싫을 만큼 말하고 있다. 나사로까지 살아날 필요가 없다. 며칠 전에 우리 교회 집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목사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새롭게 신축을 하고 이사를 왔는데 이 성경공부를 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밑도 끝도 없이......그래서 제가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성경공부 더 하려고 하지 말고 아는 거나 좀 실습하세요. 아는 만큼만 좀 살아보세요." 아는 것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공부는 또 무슨 공부? 아, 이 집사님이 아주 목사를 잡으려고 마음을 먹었구만......사실은 제가 핀잔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 집사님이 옛날에 성경공부 나와라 나와라 할 때 한번도 안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요일날 성경공부하고 있거든요. 오래전부터......체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그런데 이 집사님은 한번도 안 나오시거든요. 지금 하고 있는 성경공부도 안나오는데 새로 시작하는 성경공부에 나오겠어요? 그리고 여러분, 성경공부를 왜 합니까? 성경공부는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살아보려는데 성경공부의 목적이 있습니다. 삶과 연결이 안된 성경지식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들 옆에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마침 오늘이 우리가 12월 둘째 주를 성서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언제든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왜 다시 살아나야 되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살아날 것입니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나사로가 살아나서......선지자들의 짐이 있습니다. 새벽마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마다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은 우리 기독교 인터넷 방송에 지금 4100편의 설교가 담겨져 있습니다. 언제든지 여러분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4100편의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위성방송에 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왜 죽었던 나사로가 할 일 없이 다시 살아나야 되겠습니까? 아무 필요 없습니다. 그가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가 다 압니다. 나사로가 안 와도 됩니다. 그 사람이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가 다 압니다. 여러분, 그리고 사실 그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있는 모세는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선지자들은 박집사, 김집사, 이집사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선지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지난날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지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셨지요? 우리다 경험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때때로 거역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하고 잘난척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채찍으로 들으셔서 치지 않았습니까? 내가 다 경험했습니다. 내가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이 모든 신앙의 경험이 모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어떻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일러주는 모세입니다. 이처럼 내 삶 속에서 살아 계셔서 역사 하셨던 신앙의 경험,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깨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권고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때로는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삶을 되돌아 생각하며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겪었던 인생의 체험, 신앙의 체험-이것이 우리의 모세요, 선지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주위에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증언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다 이 세상에 끝이 있고 하나님 앞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안 와도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우리에게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오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듣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건강을 잃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간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며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되며 제한된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그들을 통해서 이미 듣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인생에 실패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인생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병든 이들,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 축복 받은 사람들, 행복과 감사에 넘쳐 사는 사람들, 근심과 걱정 속에 사는 사람들, 우리 교회의 김집사님, 이집사님, 박집사님, 최집사님-이 사람들이 이 믿음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 그리고 생생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어떻게 섭리하시는가, 우리들이 사는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구태여 죽은 나사로에게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 옆에 있는 믿음의 증인들을 통해서 우리는 수많은 살아 있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선지자들, 믿음에 증인들이 구름처럼 둘러싸여서......히브리서 12장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의 축복을 통해서,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그들의 아픔을 통해서, 그들의 걱정과 그들의 안타까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을 오늘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자의 그 간절한 청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지 않느냐? 그들의 말을 들어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이유가 없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가가 있으니......오늘 이 아침 우리를 향하여 권면 하시는 성령의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눅16:19-31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눅16:19-31 2003-07-22 21:09:07 read : 166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본문 누가복음16장 19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은 우리들 모두가 다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게 인생을 살았던 부자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지 나사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큰 부자, 인생을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이 부자에게는 이름이 없는데 그 집 대문에서 밥을 얻어먹는 거지에게는 버젓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부자는 무명인사였고 거지는 유명인사였습니다. 무언가 시사하는 대목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하여간 이들이 늙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어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죽자마자 천사들에게 받들려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쉽게 말하면 천국에 간 겁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서 불이 펄펄 끓는 음부에 내려가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옥에 간 것이지요. 이 부자가 지옥에서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멀리 바라보니 자기 집 대문에서 구걸을 하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져 있습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지금 당신 품에 안겨져 있는 저 나사로라는 사람은 사실 옛날 우리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거지입니다. 그런데 저 거지에게 좀 시켜서, 나사로에게 좀 시켜서 내가 너무 이 뜨거운 불에서 견딜 수가 없으니 물 한방울만 손 끝에 찍어서 내 혀에 좀 대주십시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을 합니다. "안 되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아브라함이 딱 잘라서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이러나 저러나 거지 나사로가 세상에 있을 때 이 부자에게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까?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손가락에 물 한방울 찍어서 혀끝을 적셔 달라고 하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사실 나사로의 체면을 봐서라도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이거 너무 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한 이 부자는 이번에는 또 다른 부탁을 아브라함에게 합니다. "좋습니다. 내가 너무 뜨거워서 물 방울 혀끝에 적혀 달라는데 그것이 안 된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만두고 내가 한가지 청을 더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형제 다섯이 있습니다. 이 형제 다섯이 틀림없이 죽어서 나처럼 지옥에 와서 고생을 하게 될 텐데 제발 저 나사로를 그들에게 보내서 나처럼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좀 말 좀 보내주십시오. 제발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절한 소원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 부자의 청을 또 보기좋게 거절합니다. 그거 쓸데 없는 일이다. 안해도 되는 일이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청을 거절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의문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후에 자기처럼 지옥에 와서 말할 수 없는 고생할 것이 뻔한 자기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이 부자가 지금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생각하는 이 부자의 마음이 여러분, 갸륵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브라함의 입장을 생각해서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바르게 살아서 지옥에 안가는 것이 좋은 일인데 뭐 조금만 수고를 하면 여러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일인데 왜 아브라함은 굳이 그 길을 마다하는 것일까? 그리고 뭐 무슨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는 이 부자의 청도 사실 생각해보면 꽤 합리적인 제한입니다. 이 부자가 지금 내가 좀 가서 형제들에게 말을 하고 올 테니 나를 좀 살려달라 그런 부탁도 아닙니다. 자기가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사로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슨 오랫동안 다녀오게 해달라 그것도 아닙니다. 넉넉잡아 며칠이면 되는 일입니다. 나사로를 며칠 더 세상에 나가서 살게 하고 그랬다가 다시 천국에 데려오면 됩니다. 뭐 아브라함에게 그런 정도 손해 날일이 없습니다. 며칠동안 나사로를 살렸다가 다시 천국에 데려오는 일인데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 면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모두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좋은(good) 아이디어입니다.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부자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부자의 간절한 청을 거절한 것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까 됐다. 나사로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런 말입니다. 29절 말씀에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찌어다. 이런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유를 들어서 한마디로 부자의 간청을 거절하게 됩니다. 제가 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닐 때입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그 뜨거운 펄펄 끓는 불에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가? 저에게 이 말씀을 해주시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실감나게 그 부자가 고통스러워하는가 하는 것을 들려주어서 지금까지 제가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훤하게 지금 머릿속에 있습니다. 펄펄 끓는 지옥의 유황불. 부자가 거기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물 한방울만 혀끝에 찍어다 달라고 말을 했을까? 이 나도 지옥에 가면 안 될 텐데, 지옥에 가면 저런 유황불에 고생을 한다는데......집에 와서 저희 증조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머니, 정말 지옥이 있는 거야?" "있다마다." "유황불이 펄펄 끓는 그런 곳이 지옥인가?" 할머니가 저에게 당부하셨습니다. " 야, 지옥이라는 곳은 그렇게 고통스럽고 어려운 곳이란다. 그러니까 너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수 잘 믿어라." 저희 증조할머니께서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 후로 저는 지금까지 때때로 이 지옥의 유황불을 생각하면서 예수를 잘 믿으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주일도 잘 지켜보려고 합니다. 목사가 주일을 잘 지킨다고 하니까 이상하지만 주일도 잘 지켜보려고 합니다. 헌금 생활도 정성껏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때때로 저에게 금전적인 손해가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돈을 언제 어떻게 떼어먹어서 이렇게 어려운가? 한참 생각해보면 영락없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냈어야 될 것, 내가 떼먹을 것을 계산해서 가져가신다 하는 것을 저는 평생을 통해서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쳐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유황불에서 그렇게 펄펄 끓는 유황불에서 고생하던 부자 생각이 나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합니다. 아마 이 버릇이 지금 제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선교를 해야 된다는 이런 목회 철학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신학을 학문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제 신앙은 아직도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과 아브라함 품에 안겨져 있는 나사로-이때의 이 유치한 신앙이 지금 저의 신앙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부터 시작을 해서, 다시 말하면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부터 시작을 해서 제 머리 속에 끓임 없이 지워지지 않은 의문의 하나는 이 부자의 청을 두 번씩이나 거절한 아브라함이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니냐,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부자의 말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입니까?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된다. 여러분, 모세라는 사람은 지금 그때에 있었던 사람도 아닙니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모세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또 그 당시에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은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천국은 이런 곳이요, 지옥은 이런 곳이라고 생생하게 증언을 한다고 하면 사실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부자의 헛된 간청을 거절합니다. 무슨 이유입니까?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만사에는 다 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 그 형제들을 생각하는 당신의 그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내가 왜 이런 죽음을 준비하지 않았을 까하는 후회스러운 마음, 다 그것은 이해하겠는데 때가 지났다는 것입니다. 때가 지났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왜 진작 돌이키지 못했는가, 왜 진작 형제들의 영혼을 생각하지 못했는가? 이제는 때가 늦었다. 때는 지났고 문은 닫혔으니 이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나사로라는 사람을 보내달라. 나사로는 지금 여기 있어야 될 때지 세상에 나가야 될 때가 아니다. 나사로가 세상에 나갈 때가 아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일입니다만은 여러분, 이 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때를 놓쳐서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는 일이 우리의 생활 속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비근한 예로 공부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특히 우리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여기 있는데 "아휴, 이럴 줄 알았으면 1학년 때, 2학년 때 공부 잘할걸, 중학교 때 공부 잘 할걸." 여러분들, 벌써 때를 놓쳐서 후회하지요? 건강의 때를 잃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건강을 조심했어야 되는데......젊음의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나이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일할 때 일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하고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때를 놓쳐서......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으니 때가 있는 법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때라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를 놓쳐서 평생을 후회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부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봉사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금할 때를 놓쳐서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돈이 있나요, 항상 헌금할만한 돈이 우리에게 있나요?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습니다. 헌금도 때를 놓치면 못합니다. 기도할 때가 있고 기도를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기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아무 때나 엎드려서 기도하면 되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기도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소용없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너무 늦은 때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기도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때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때를 놓쳐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때는 지나갔습니다. 이미 문은 닫혔습니다. 부자의 청을 거절한 이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신이 말하는 처지는 딱하고 당신의 심경은 이해하겠으나 아무리 사정을 해도 이미 때가 늦었다. 이미 늦었다. 나사로가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가 없다. 그런 때가 아니다. 여러분, 때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들 스스로를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혹시 때를 놓치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여러분들의 일상의 삶에서 젊었을 때, 건강했을 때, 여러분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때를 놓치는 일은 없습니까? 혹은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에서 때를 놓치는 때는 없습니까? 기도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봉사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열심히 일을 해야 될 때를 놓치는 것은 아닙니까, 헌금해야 될 때를 놓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들 스스로의 신앙을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문이 닫힌 후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고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고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도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의 청을 왜 거절했을까? 오늘 본문에 보면 결정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31절 말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하더라도 듣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의 형제들이 뭐 몰라서 그렇게 사냐 그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당신의 형제들이 지금 잘 알고 있고 또 지금 선지자들이 늘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느냐? 정말로 당신의 형제들이 뭐가 뭔지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나사로라도 다시 보내야 되겠지,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서 보내야 되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모세의 율법이, 선지자들의 지금 이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그러니 나사로가 가서 해야 될 일이 없다. 나사로가 가봐야 할 일이 없다. 나사로가 가야 할 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지금 선지자들이 듣기 싫을 만큼 말하고 있다. 나사로까지 살아날 필요가 없다. 며칠 전에 우리 교회 집사님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목사님 우리 교회가 이렇게 새롭게 신축을 하고 이사를 왔는데 이 성경공부를 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밑도 끝도 없이......그래서 제가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성경공부 더 하려고 하지 말고 아는 거나 좀 실습하세요. 아는 만큼만 좀 살아보세요." 아는 것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공부는 또 무슨 공부? 아, 이 집사님이 아주 목사를 잡으려고 마음을 먹었구만......사실은 제가 핀잔을 했습니다. 사실은 이 집사님이 옛날에 성경공부 나와라 나와라 할 때 한번도 안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요일날 성경공부하고 있거든요. 오래전부터......체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그런데 이 집사님은 한번도 안 나오시거든요. 지금 하고 있는 성경공부도 안나오는데 새로 시작하는 성경공부에 나오겠어요? 그리고 여러분, 성경공부를 왜 합니까? 성경공부는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살아보려는데 성경공부의 목적이 있습니다. 삶과 연결이 안된 성경지식이라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지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들 옆에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마침 오늘이 우리가 12월 둘째 주를 성서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언제든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왜 다시 살아나야 되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살아날 것입니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나사로가 살아나서......선지자들의 짐이 있습니다. 새벽마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마다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은 우리 기독교 인터넷 방송에 지금 4100편의 설교가 담겨져 있습니다. 언제든지 여러분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으로 들어가서 4100편의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위성방송에 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왜 죽었던 나사로가 할 일 없이 다시 살아나야 되겠습니까? 아무 필요 없습니다. 그가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아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가 다 압니다. 나사로가 안 와도 됩니다. 그 사람이 얘기하지 않아도 우리가 다 압니다. 여러분, 그리고 사실 그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있는 모세는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선지자들은 박집사, 김집사, 이집사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선지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지난날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것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지요, 말할 수 없는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셨지요? 우리다 경험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때때로 거역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교만하고 잘난척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채찍으로 들으셔서 치지 않았습니까? 내가 다 경험했습니다. 내가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이 모든 신앙의 경험이 모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어떻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우리에게 일러주는 모세입니다. 이처럼 내 삶 속에서 살아 계셔서 역사 하셨던 신앙의 경험,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깨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권고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때로는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삶을 되돌아 생각하며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겪었던 인생의 체험, 신앙의 체험-이것이 우리의 모세요, 선지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주위에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증언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다 이 세상에 끝이 있고 하나님 앞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안 와도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우리에게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오늘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듣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 건강을 잃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간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며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되며 제한된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그들을 통해서 이미 듣고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인생에 실패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인생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병든 이들,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 축복 받은 사람들, 행복과 감사에 넘쳐 사는 사람들, 근심과 걱정 속에 사는 사람들, 우리 교회의 김집사님, 이집사님, 박집사님, 최집사님-이 사람들이 이 믿음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 그리고 생생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어떻게 섭리하시는가, 우리들이 사는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 구태여 죽은 나사로에게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 옆에 있는 믿음의 증인들을 통해서 우리는 수많은 살아 있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선지자들, 믿음에 증인들이 구름처럼 둘러싸여서......히브리서 12장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의 축복을 통해서,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그들의 아픔을 통해서, 그들의 걱정과 그들의 안타까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을 오늘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자의 그 간절한 청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지 않느냐? 그들의 말을 들어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이유가 없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가가 있으니......오늘 이 아침 우리를 향하여 권면 하시는 성령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