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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을 한결같이(2)/ 멋쟁이 갈렙/ 수14:6-15/ 2001-09-19
45년을 한결같이(2)/ 멋쟁이 갈렙 수14:6-15 가나안 정복 길에 들어선 이스라엘 자손은 그 총본부를 길갈이라는 땅에 설치하였습니다 그곳에 여호수아가 거주하면서 전체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갈렙이 찾아옵니다. 갈렙도 그 땅을 차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대화 속에서 갈렙의 인물 됨됨이와 신앙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갈렙은 이제 그의 나이 85세의 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투와 인생에 대한 진지한 자세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I. 갈렙은 45년을 한결같이 그 마음에 성실한 대로 살아왔습니다. 45년 전 40세의 청춘 갈렙은 긍정적인 사람이었고, 진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현대 용어로 고친다면 갈렙은 그야말로 \\\"신지식인\\\"이었습니다. 남들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였습니다. 45년 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악평하며, 불평하며, 원망하며 \\\'못한다, 할 수 없다, 해도 안 된다\\\'라고 하였을 때, 갈렙은 당당하게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이는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45년이 지난 시점에서 갈렙은 그 시절을 추억하며 본문에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7절). 45년 전 갈렙은 분노한 백성들 앞에서 \\\"마음에 성실한 대로 보고하였었다\\\"고 말합니다. 마음에 성실한 대로란 \\\"마음에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담겨있었지만, 갈렙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그 마음에 좋은 뜻을 품었다가도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면 스스로 삭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믿음의 생각을 갈렙은 주저 없이 고백하였습니다. 마음에 악한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말로 선하고 옳은 믿음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갈렙 같은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갈렙과 같은 믿음의 언어를 가진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축복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제 생활 속에서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믿음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믿음의 생각과 언어를 통하여 화려하게 부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 교회에서 회의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평상시에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는 의견이 절대로 교회에서 존중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럭비공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 말씀에 열의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풍성한 물이 있는 우물이라도 물을 퍼내지 않으면 마르는 것처럼 아무리 훌륭한 인물에, 좋은 학벌에, 넘치는 재치와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일 매일 기도의 샘에서 은혜의 생수를 퍼 올리지 않으면 메마른 심령이 되고 맙니다. 매일 매일 말씀의 동산에서 신령한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굶주린 백성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믿음의 언어는 나올 수 없습니다. 믿음의 언어는 역사를 이루지만, 인간의 툭툭 던지는 부정적인 말 한마디는 이스라엘 전체를 죽이는 독과 같습니다. 저는 특별히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사랑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존중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은 기도에 목말라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입에서 믿음의 언어가 선포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램도 그 주인이 엔터 키를 누르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도 여러분이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 머물러있거나 시들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여러분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그 향방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리어카 점포를 냈습니다. 마음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부끄럽다. 남들은 다 잘 나가는데 난 이게 뭔가? 얘들 보기도 부끄럽구나.\\\' 이런 사람은 보나마나 잘 안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비록 리어카 장사지만 난 어엿한 사장님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나를 복 주셔서 크게 하실 것이다.\\\'라는 사람은 잘됩니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흘러내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평범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왜 물이 꼭 높은데서 낮은 데로만 흘러야하는가? 낮은데서 높은 데로 흐르게 하면 안 되는가?하고 생각하면 비범한 생각입니다. 이런 비범한 생각의 범주에 믿음의 생각이 포함됩니다. 어차피 우리가 거부해도 시간을 흐릅니다. 나의 인생은 진행됩니다. 유수처럼 흘러가는 세월 속에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좀 별난 구석이 있어야 합니다. 남들하는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해야된다고 생각하니까 불행해집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하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남이 기도하니까 나도 하고, 남이 기도하지 않으니까 안 하는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내가 반드시 해야만 될 일이니까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로 충분히 검토해보고, 확신이 서면 그것을 감행하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기도 없이 살지 마십시오. 말씀을 외면한 채 살지 마십시오. 이것을 꼭 돈버는 일에만 적용시키지 마십시오. 평신도로서 하루에 7시간이상 새벽 기도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박종훈이라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금융계에서 일찍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고통 당하던 중 주님을 뜨겁게 체험하고 새벽기도를 시작하여 하루에 꼬박꼬박 7시간씩 기도하는 특이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직장에서 진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진급하면 기도시간이 그만큼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항상 믿음의 생각을 품고,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믿음이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45년이 지난 뒤에도 갈렙의 그와 같은 믿음의 언어는 변동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갈렙이 말합니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분들의 언어 생활을 보면 끔찍합니다. 하나님이 그 삶 속에 역사 하실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죽겠다.\\\"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죽겠다고 말하면 정말 죽을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 의도적으로라도 죽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안 된다.\\\" 안 된다고 말하면 정말 될 일도 안 됩니다. \\\"못살겠다.\\\" 못 살겠다고 말하면 정말 못 살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꾸 이유를 따지며 살면 인생이 피곤해 집니다. \\\"다 그런 것이다.\\\" \\\"이런 일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의 생활 태도입니다. 도리어 입을 열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믿습니다.\\\"라고 연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 하여 주십니다. II. 갈렙은 45년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한 채 살아왔습니다. 갈렙의 일생 가운데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부분은 그가 45년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본문에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 약속을 받은 뒤, 갈렙은 그의 모든 인생의 여정을 이 약속에 비추어 해석하였습니다. 85세면 고령의 나이입니다. 그런 그가 아직도 그 기력이 강건하고 그 힘이 젊은 시절과 일반이었습니다. 그가 특별한 보식을 잘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특별한 운동을 지속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갈렙의 고백입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갈렙은 85세임에도 불구하고 그 강령함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45년 전에 자기에게 주셨던 약속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시기를 네 발로 밟는 땅을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갈렙이 그 땅을 발로 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러면 갈렙은 가나안 땅을 발로 밟기까지 생존해 있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땅을 기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갈렙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갈렙과 그 자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려면 실질적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 전쟁을 위해서 강인한 체력은 기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갈렙에게 두 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약속을 믿는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의 보장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두 가지 종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개인에게 개별적인 약속을 별도로 주시기도 하십니다. 약속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약속을 간직하고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자주 변하는 약속은 약속이 아닙니다. 진정한 약속은 이루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공개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성령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III. 45년 한결같은 신앙으로 살아온 갈렙은 약속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약속에 기반을 두었던 갈렙은 담대하게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그냥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의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무턱대고 열심히 일만하면 뭔가 되겠지하는 막연한 태도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마음에 주어지는 소망을 존중하십시오. 그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내십시오. 그리고 그 허락을 주장하며 하나님께 간청하십시오. 그런 다음 행동하십시오. 이것이 순서입니다. 행동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현실을 분명히 간파했습니다. 갈렙의 현실은 그곳에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평범한 체구의 사람이 아낙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게다가 갈렙은 평지에서 싸워야 하고, 그들은 크고 견고한 성읍을 요새로 삼아서 싸우기 때문에 갈렙은 그들에 비해서 훨씬 불리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성읍의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습니다. 기럇 아르바란 아르바의 성이란 뜻으로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서 가장 용맹스러운 영웅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똑바로 직시한 갈렙의 행동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갈렙은 \\\"하나님 제일 주의자\\\"였습니다. \\\"상황이 그러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본문에서 \\\"혹시\\\"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원어 성경을 통해 보니 \\\'혹시\\\'라는 단어는 \\\'정녕\\\'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갈렙은 \\\"여호와께서 정녕 나와함께 하신다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난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일단 갈렙처럼 하나님 제일주의로 \\\'난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신앙을 가지게 된다면 신앙 생활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왜 성도가 기도하지 않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일주의자는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기적이 나타납니다. 또한 갈렙은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갈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에 되어 그 약속을 현실로 만들려는 용감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 한가지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가 빌어주는 축복\\\'이었습니다. \\\'축복\\\'이란 \\\'높은 분에게 복을 달라고 빌어주는 행위\\\'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높이 세우셨습니다. 40년 전 여호수아와 갈렙은 같은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에 의하여 전 민족의 지도자로 선출된 자였습니다. 갈렙은 그러한 동년배의 여호수아이지만 그가 주의 종임을 알고 그를 통하여 축복을 기꺼이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란 헬라어로 번역하면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는 축복\\\"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성경은 이러한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말씀합니다. 결론 45년을 한결같은 신앙으로 일관했던 갈렙은 우리 모두의 신앙적 귀감입니다. 45년 한결같은 신앙으로 일관하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5년을 한결같이(2)/ 멋쟁이 갈렙/ 수14:6-15/ 2003-06-18
45년을 한결같이(2)/ 멋쟁이 갈렙 수14:6-15 가나안 정복 길에 들어선 이스라엘 자손은 그 총본부를 길갈이라는 땅에 설치하였습니다 그곳에 여호수아가 거주하면서 전체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갈렙이 찾아옵니다. 갈렙도 그 땅을 차지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대화 속에서 갈렙의 인물 됨됨이와 신앙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갈렙은 이제 그의 나이 85세의 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투와 인생에 대한 진지한 자세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I. 갈렙은 45년을 한결같이 그 마음에 성실한 대로 살아왔습니다. 45년 전 40세의 청춘 갈렙은 긍정적인 사람이었고, 진취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현대 용어로 고친다면 갈렙은 그야말로 \"신지식인\"이었습니다. 남들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였습니다. 45년 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악평하며, 불평하며, 원망하며 \'못한다, 할 수 없다, 해도 안 된다\'라고 하였을 때, 갈렙은 당당하게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이는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45년이 지난 시점에서 갈렙은 그 시절을 추억하며 본문에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7절). 45년 전 갈렙은 분노한 백성들 앞에서 \"마음에 성실한 대로 보고하였었다\"고 말합니다. 마음에 성실한 대로란 \"마음에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담겨있었지만, 갈렙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그 마음에 좋은 뜻을 품었다가도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면 스스로 삭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믿음의 생각을 갈렙은 주저 없이 고백하였습니다. 마음에 악한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말로 선하고 옳은 믿음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갈렙 같은 사람이 귀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갈렙과 같은 믿음의 언어를 가진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축복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제 생활 속에서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믿음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믿음의 생각과 언어를 통하여 화려하게 부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 교회에서 회의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평상시에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는 의견이 절대로 교회에서 존중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럭비공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 말씀에 열의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풍성한 물이 있는 우물이라도 물을 퍼내지 않으면 마르는 것처럼 아무리 훌륭한 인물에, 좋은 학벌에, 넘치는 재치와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일 매일 기도의 샘에서 은혜의 생수를 퍼 올리지 않으면 메마른 심령이 되고 맙니다. 매일 매일 말씀의 동산에서 신령한 양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굶주린 백성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믿음의 언어는 나올 수 없습니다. 믿음의 언어는 역사를 이루지만, 인간의 툭툭 던지는 부정적인 말 한마디는 이스라엘 전체를 죽이는 독과 같습니다. 저는 특별히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사랑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존중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말씀에 굶주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은 기도에 목말라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입에서 믿음의 언어가 선포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램도 그 주인이 엔터 키를 누르지 않으면 실행되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도 여러분이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 자리에 머물러있거나 시들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여러분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그 향방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리어카 점포를 냈습니다. 마음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부끄럽다. 남들은 다 잘 나가는데 난 이게 뭔가? 얘들 보기도 부끄럽구나.\' 이런 사람은 보나마나 잘 안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비록 리어카 장사지만 난 어엿한 사장님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나를 복 주셔서 크게 하실 것이다.\'라는 사람은 잘됩니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흘러내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평범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왜 물이 꼭 높은데서 낮은 데로만 흘러야하는가? 낮은데서 높은 데로 흐르게 하면 안 되는가?하고 생각하면 비범한 생각입니다. 이런 비범한 생각의 범주에 믿음의 생각이 포함됩니다. 어차피 우리가 거부해도 시간을 흐릅니다. 나의 인생은 진행됩니다. 유수처럼 흘러가는 세월 속에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지 마십시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좀 별난 구석이 있어야 합니다. 남들하는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해야된다고 생각하니까 불행해집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하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남이 기도하니까 나도 하고, 남이 기도하지 않으니까 안 하는 그런 자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내가 반드시 해야만 될 일이니까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로 충분히 검토해보고, 확신이 서면 그것을 감행하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기도 없이 살지 마십시오. 말씀을 외면한 채 살지 마십시오. 이것을 꼭 돈버는 일에만 적용시키지 마십시오. 평신도로서 하루에 7시간이상 새벽 기도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박종훈이라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금융계에서 일찍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고통 당하던 중 주님을 뜨겁게 체험하고 새벽기도를 시작하여 하루에 꼬박꼬박 7시간씩 기도하는 특이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직장에서 진급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진급하면 기도시간이 그만큼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항상 믿음의 생각을 품고,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믿음이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45년이 지난 뒤에도 갈렙의 그와 같은 믿음의 언어는 변동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갈렙이 말합니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분들의 언어 생활을 보면 끔찍합니다. 하나님이 그 삶 속에 역사 하실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죽겠다.\" 죽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죽겠다고 말하면 정말 죽을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 의도적으로라도 죽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안 된다.\" 안 된다고 말하면 정말 될 일도 안 됩니다. \"못살겠다.\" 못 살겠다고 말하면 정말 못 살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꾸 이유를 따지며 살면 인생이 피곤해 집니다. \"다 그런 것이다.\" \"이런 일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의 생활 태도입니다. 도리어 입을 열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믿습니다.\"라고 연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 하여 주십니다. II. 갈렙은 45년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한 채 살아왔습니다. 갈렙의 일생 가운데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부분은 그가 45년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본문에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 약속을 받은 뒤, 갈렙은 그의 모든 인생의 여정을 이 약속에 비추어 해석하였습니다. 85세면 고령의 나이입니다. 그런 그가 아직도 그 기력이 강건하고 그 힘이 젊은 시절과 일반이었습니다. 그가 특별한 보식을 잘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특별한 운동을 지속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갈렙의 고백입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갈렙은 85세임에도 불구하고 그 강령함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45년 전에 자기에게 주셨던 약속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시기를 네 발로 밟는 땅을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갈렙이 그 땅을 발로 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러면 갈렙은 가나안 땅을 발로 밟기까지 생존해 있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땅을 기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기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갈렙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갈렙과 그 자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려면 실질적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 전쟁을 위해서 강인한 체력은 기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갈렙에게 두 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약속을 믿는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의 보장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두 가지 종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개인에게 개별적인 약속을 별도로 주시기도 하십니다. 약속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약속을 간직하고 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자주 변하는 약속은 약속이 아닙니다. 진정한 약속은 이루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공개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성령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III. 45년 한결같은 신앙으로 살아온 갈렙은 약속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약속에 기반을 두었던 갈렙은 담대하게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그냥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의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무턱대고 열심히 일만하면 뭔가 되겠지하는 막연한 태도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마음에 주어지는 소망을 존중하십시오. 그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내십시오. 그리고 그 허락을 주장하며 하나님께 간청하십시오. 그런 다음 행동하십시오. 이것이 순서입니다. 행동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현실을 분명히 간파했습니다. 갈렙의 현실은 그곳에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평범한 체구의 사람이 아낙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게다가 갈렙은 평지에서 싸워야 하고, 그들은 크고 견고한 성읍을 요새로 삼아서 싸우기 때문에 갈렙은 그들에 비해서 훨씬 불리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성읍의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습니다. 기럇 아르바란 아르바의 성이란 뜻으로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서 가장 용맹스러운 영웅이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똑바로 직시한 갈렙의 행동은 아주 중요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갈렙은 \"하나님 제일 주의자\"였습니다. \"상황이 그러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본문에서 \"혹시\"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원어 성경을 통해 보니 \'혹시\'라는 단어는 \'정녕\'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갈렙은 \"여호와께서 정녕 나와함께 하신다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난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일단 갈렙처럼 하나님 제일주의로 \'난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하신다\'는 신앙을 가지게 된다면 신앙 생활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왜 성도가 기도하지 않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일주의자는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려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해 보십시오. 기적이 나타납니다. 또한 갈렙은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갈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에 되어 그 약속을 현실로 만들려는 용감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 한가지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가 빌어주는 축복\'이었습니다. \'축복\'이란 \'높은 분에게 복을 달라고 빌어주는 행위\'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높이 세우셨습니다. 40년 전 여호수아와 갈렙은 같은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에 의하여 전 민족의 지도자로 선출된 자였습니다. 갈렙은 그러한 동년배의 여호수아이지만 그가 주의 종임을 알고 그를 통하여 축복을 기꺼이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란 헬라어로 번역하면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는 축복\"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성경은 이러한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말씀합니다. 결론 45년을 한결같은 신앙으로 일관했던 갈렙은 우리 모두의 신앙적 귀감입니다. 45년 한결같은 신앙으로 일관하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나안 ― 저주받은 후손 2002-02-01 08:47:07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의 인물연구 1. 인적 사항 1. 노아의 막내아들인 함의 넷째 아들, 즉 노아의 손자. 2. 구스와 미스라임, 붓과 함께 홍수 후 제 3세대를 이룸. 3. '가나안'은 '자주 빛'이란 뜻. 그 후손들의 직업은 무역이었는데 자주빛 염료가 주요상품임. 4. 가나안인과 베니게인의 선조. 2. 생애 주요 사건 1
가나안 ― 저주받은 후손 2002-02-01 08:47:07 read : 3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의 인물연구 1. 인적 사항 1. 노아의 막내아들인 함의 넷째 아들, 즉 노아의 손자. 2. 구스와 미스라임, 붓과 함께 홍수 후 제 3세대를 이룸. 3. '가나안'은 '자주 빛'이란 뜻. 그 후손들의 직업은 무역이었는데 자주빛 염료가 주요상품임. 4. 가나안인과 베니게인의 선조. 2. 생애 주요 사건 1. 노아의 저주 ⑴ 저주의 내용 : ① 노아가 홍수 이후 농경의 산물인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자 함이 형제들에게 알리며 조롱함(창 9:20-23). ② 함이 아비를 모독한 징계로서, 그 아들 가나안이 노아의 저주를 받아 셈과 야벳의 종이 되리라고 예언됨(창 9:25-27). ⑵ 저주의 의미 : ① 아비의 잘못을 자손에게 저주가 내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음(출20:5). ② 그러나 후손이 받는 징벌의 직접적인 원인이 그 아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 레위기 18장 등을 참조할 때, 가나안 후손들이 받은 징벌의 직접적 원인은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이러한 저주 예언이 징벌에 선행된 것은 보편적으로 이미 타락한 인류 중 일부집단에 대한, 특별은총이 유보 내지는 범죄에 대한용서 가능성의 배제로 보아야 함. ⑶ 저주의 실현 : ① 세계사의 초기에는 함의 자손 니므룻과 미스라임이 바벨론과 애굽을 세우고 막아한 군력을 확립하여 노아의 저주가 무효한 것처럼 보였음. ② 그러나 바벨론 포수 후 1세기도 안 되어 셈의 후손인 페르시아와 야벳의 후손인 헬라, 로마에 정복됨. 그 후 계속해서 사라센과 터키의 지배를 받음. ③ 함의 후손이 살고 있는 아프리카의 원주민은 유럽인의 노예로 매매됨. 현대에도 아프리카 문명은 여전히 후진 상태를 답보하고 있음. 3. 성격과 업적 가나안 개인 자체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없음. 그러나 그는 홍수 후 초기 시대의 한 인물로서 그에 얽힌 성경 기사가 후대에 실현됨으로써, 성경의 역사성 내지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심을 간접적으로 증거 하는 구체적인 실례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음. 4. 교훈 1. 500여 년 간 하나님을 섬겨온 노아도 술취함으로 자녀들에게 수치를 받는 것에서, 술취함은 방탕한 것이며 만악의 근본임을 알 수 있다(엡 5:18;사 28:7). 2. 타인의 죄를 폭로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살피고 사랑으로 용서하며 감싸야 한다. 왜냐하면 범죄의 가능성이 모든 이에게 있기 때문이다. 3. 가나안에 대한 자주가 아프리카 문명의 후진성으로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것에서,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2003-06-10 00:44:03 read : 37 주의 종 모세가 죽은 뒤에, 주께서, 모세를 보좌하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스라엘 자손 곧 모든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 강을 건너서,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대로, 너희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 큰 강인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헷 사람의 땅을 지나 서쪽의 지중해까지, 모두 너희의 영토가 될 것이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서신서의 말씀: 야고보서 4:13 ~ 15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4:22 ~ 30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대고 말하려고 한다. 너희가 나더러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하시오\' 하고 말하는 줄 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받았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잔뜩 화가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냈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에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 여러분께서는 오늘 봉독한 여호수아서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큰 흐름을 들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얘기는 모세의 얘기와 중첩됩니다. 모세 얘기가 끝나면서 여호수아 얘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이야기를 그려봅시다.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모세가 출애굽한 해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원전 1250년, 우리 역사에 뭐가 있나 찾아보았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세워진 때는 기원전 57년 정도밖에 안 되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18년일 뿐입니다. 하여튼 기원전 천년 대는 아주 오래 전의 시대입니다. 기원전 1250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거닐다가 이제 40년이 지난 약 121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서 40년 동안 돌아온 여정은 이스라엘 지도를 놓고 보면 이렇습니다. 가나안 지도를 눈앞에 놓으면, 위쪽 그러니까 북쪽에 큰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이 호수가 갈릴리 호수입니다. 또 하나 남쪽에 보면 물이 흘러들되 빠져나가지 않아서 죽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를 사해라고 하는데,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 몸이 둥둥 뜹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와 남쪽 사해를 연결하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바로 요단강입니다. 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입니다. 요단강 서편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지금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와 있는가 하면,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남쪽 접경지역의 동쪽에 있습니다. 여기에 서서 보면, 서쪽에 있는 도시는 여리고입니다. 서쪽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새로 등장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서 지금 나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기원전 1200년경, 요단강 건너편 동쪽의 일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 있는 한 산에서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산은 느보라 이름하는 산입니다. 느보 산. 그 산의 제일 큰 봉우리가 비스가입니다.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 이 봉우리에 모세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봉우리에 앉은 모세에게 요단 강 너머 서쪽에 있는 땅을 보여줍니다. 이름하여 가나안 땅, 내용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이 땅을 모세에게 보여주면서 이제 40년 동안 걸어온 길의 목표인 저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에게는 \"모세야, 너는 이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40년 간 고생했는데, 눈앞에 있는 땅에 못 들어간다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성서에는 모세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야웨 하나님의 말씀에 승복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기 보좌관이었던 여호수아를 택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 인간적으로 솔직히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나이 80에 출애굽해서 이제 120이 되었는데, 목표를 눈앞에 두고 강제 퇴역입니다. 강제로 은퇴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 요즘말로 말하면 공동의회를 열고서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신명기 32장에 있는 이 유언의 내용을 모세의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야웨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속에서 여러분을 이끌었으나, 나는 이제 여기서 끝납니다. 내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마지막으로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비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합니다만, 그 땅은 사실 신천지는 아닙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흉년이 들어 양식이 없어서 이집트로 가서 민족도, 자존심도, 역사도 다 팔고서 먹을 것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몽땅 이집트로 간 것이 4백 년 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형제들이 미워하여 이집트 상인에게 판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온 집안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 이사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타향살이를 자처했고 그것은 식민 생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집트 종살이 생활은 하나님이 시킨 것도 아니고, 이집트가 전쟁을 벌여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기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먹고살 물품을 얻고 자유를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것이 4백 년! 그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두고 온 산하, 우리의 고향, 흉년은 지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복된 땅, 그 땅으로 돌아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비전, 이것이 4백 년 동안 이스라엘을 정신적으로 지켜주었습니다. 그 비전을 모아서 모세가 출애굽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요단강 건너편에 놓고 동쪽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오늘로 끝납니다. 그리고 가나안 입성의 역사가 막 시작됩니다. 출애굽할 때의 역사는 모세와 함께 과거로 흘러가고, 가나안 입성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여호수아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록 같이 일한 사람이었으나 여호수아가 모세가 아닌 바에는 지도자는 달라진 것입니다. 단절입니다. 모세는 모세,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단절의 연속입니다. 역사를 단절의 연속으로 보는 눈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자신의 모습, 임마누엘의 모습을 새로 선정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도 그대로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과 사람의 모습은 단절이지만, 사람이 바뀌고 지도자가 바뀌지만,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도도한 물결, 역사의 혼,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된 흐름입니다.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그분은 모세를 통해서만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같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끄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역사는 단절 속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바뀌고 단절되지만,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이 없습니다. 모세가 받은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역사 속의 한 토막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개인의 역사, 가정의 역사, 사회의 역사, 민족과 세계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거나 역사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절만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은 있습니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역사 속에 도도하게 흐릅니다. 단절 속에 끊임없이 연속되는 새로운 역사!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떠났던 백성이 4백 년의 이집트 생활을 거쳐서 40년 광야 길을 지나서 오늘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떠나온 고향에 다시 들어갑니다. 야웨 하나님은 4백 년 이집트 종살이 때에도,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도, 그리고 가나안,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도 계속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역사의 주인, 그 주인이 3천 2백 년 이후에 살아가는 오늘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너희들은 바뀌어도 이념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고 나라 이름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모두가 바뀌어도,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창조와 완성 사이에서 나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 역사의 토막토막 속에 너희는 열과 성의를 가지고 동참하라.\" 여호수아가 어떻게 가나안에 입성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인도하리라는 약속을 사람을 바뀌더라도 지키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서양 역사를 보면, 영국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단이 종교문제로 박해받다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서 소위 우리가 지금 말하는 신대륙, 미국 대륙을 향해서 떠납니다. 아마 그때 그 사람들 마음속에 그리던 신대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땅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꿈을 안고 고향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으로 향합니다. 오늘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은 대서양을 건너가던 청교도들처럼,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가려고 합니다. 젖이 흐른다는 말은 양과 염소가 푸른 풀을 부족함 없이 뜯고 젖을 충분히 제공하는 최고의 초지를 가리킵니다. 꿀이 흐른다는 것은 양봉사업이 잘 되는 땅, 비옥한 땅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 아니라 목축과 농사와 양봉이 잘 되어서 복이 넘치는 땅, 가나안으로 가자! 우리가 오늘날 건너야 할 요단강, 대서양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지만, 서양 사람들은 대서양을 건넜지만, 혹시 우리는 3·8선이라 이름하는 육지 속의 대양을 건너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과 북이 서로 건넘으로써 삼천리 금수강산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이 될 수 있는 날, 그게 언제입니까? 그 미래를 품고 오늘 평화를 향해 나가보십시다. 사람은 변합니다. 역사는 변합니다. 체제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을 주신 이 하나님이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이 길을 가자.\" 이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작지만 알찬 경동이라 이름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는 역사의 단절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의 연속성을 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단절 속에서도 연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한테 주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읽은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명을 누가 보장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기간을 누가 약속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약속 못 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살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살아있는 만큼 일하고, 그래서 역사는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를 거쳐서 예언자들에게로 이어져 온 단절된 역사를 결정적으로 이으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준 약속의 담지자,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향 땅에서는 천대받는다\"고 예수님도 불평하셨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버린 마지막 선지자, 인간이 버린 유대의 마지막 지도자였습니다. 그 사람을 유대 역사가 인간의 존재나 체제가 완전히 버렸습니다. 버린 구체적인 증거가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완전히 죽였지만, 그걸로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시 이어집니다. 부활이 뭡니까? 인간이 끊어놓은 역사를 하나님은 다시 묶으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시는 표입니다. 인간이 칼로 싹둑 잘라버린 역사를 하나님은 보혈의 피로 다시 엮어 연속시켜놓습니다. 그렇지 않고 경동교회가 어떻게 생깁니까?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말았다면, 뭐 때문에 교회가 생깁니까? 신앙은 어디서 생깁니까? 인간이 끊어놓습니다. 그리고 다 죽이기도 합니다. 폭격도 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은 끊어진 채, 상처받은 채, 죽임 당한 채 같이 와서, 다시 당신의 복의 역사를 연결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너희는 내가 준 역사의 한 토막을 성실히 살면서 나의 역사를 증거하라고 보낸 사람들이다.\" 끊어진 역사를 이어주는 십자가의 보혈, 그 보혈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부활이라 이름하는 생명의 신천지가 열립니다. 우리 앞을 막아선 요단강을 건너면, 새로운 신천지가 나타납니다. 요단강은 어디에든지 있습니다. 우리 가슴에도 있고, 우리 사회에도 있습니다. 건너십시오. 가면 새로운 땅이 열립니다. 미지의 땅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2013-06-17 22:27:14 read : 5 여러분께서는 오늘 봉독한 여호수아서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큰 흐름을 들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얘기는 모세의 얘기와 중첩됩니다. 모세 얘기가 끝나면서 여호수아 얘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이야기를 그려봅시다.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모세가 출애굽한 해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원전 1250년, 우리 역사에 뭐가 있나 찾아보았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세워진 때는 기원전 57년 정도밖에 안 되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18년일 뿐입니다. 하여튼 기원전 천년 대는 아주 오래 전의 시대입니다. 기원전 1250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거닐다가 이제 40년이 지난 약 121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서 40년 동안 돌아온 여정은 이스라엘 지도를 놓고 보면 이렇습니다. 가나안 지도를 눈앞에 놓으면, 위쪽 그러니까 북쪽에 큰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이 호수가 갈릴리 호수입니다. 또 하나 남쪽에 보면 물이 흘러들되 빠져나가지 않아서 죽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를 사해라고 하는데,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 몸이 둥둥 뜹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와 남쪽 사해를 연결하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바로 요단강입니다. 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입니다. 요단강 서편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지금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와 있는가 하면,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남쪽 접경지역의 동쪽에 있습니다. 여기에 서서 보면, 서쪽에 있는 도시는 여리고입니다. 서쪽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새로 등장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서 지금 나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기원전 1200년경, 요단강 건너편 동쪽의 일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 있는 한 산에서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산은 느보라 이름하는 산입니다. 느보 산. 그 산의 제일 큰 봉우리가 비스가입니다.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 이 봉우리에 모세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봉우리에 앉은 모세에게 요단 강 너머 서쪽에 있는 땅을 보여줍니다. 이름하여 가나안 땅, 내용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이 땅을 모세에게 보여주면서 이제 40년 동안 걸어온 길의 목표인 저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에게는 \"모세야, 너는 이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40년 간 고생했는데, 눈앞에 있는 땅에 못 들어간다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성서에는 모세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야웨 하나님의 말씀에 승복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기 보좌관이었던 여호수아를 택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 인간적으로 솔직히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나이 80에 출애굽해서 이제 120이 되었는데, 목표를 눈앞에 두고 강제 퇴역입니다. 강제로 은퇴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 요즘말로 말하면 공동의회를 열고서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신명기 32장에 있는 이 유언의 내용을 모세의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야웨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속에서 여러분을 이끌었으나, 나는 이제 여기서 끝납니다. 내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마지막으로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비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합니다만, 그 땅은 사실 신천지는 아닙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흉년이 들어 양식이 없어서 이집트로 가서 민족도, 자존심도, 역사도 다 팔고서 먹을 것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몽땅 이집트로 간 것이 4백 년 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형제들이 미워하여 이집트 상인에게 판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온 집안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 이사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타향살이를 자처했고 그것은 식민 생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집트 종살이 생활은 하나님이 시킨 것도 아니고, 이집트가 전쟁을 벌여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기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먹고살 물품을 얻고 자유를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것이 4백 년! 그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두고 온 산하, 우리의 고향, 흉년은 지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복된 땅, 그 땅으로 돌아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비전, 이것이 4백 년 동안 이스라엘을 정신적으로 지켜주었습니다. 그 비전을 모아서 모세가 출애굽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요단강 건너편에 놓고 동쪽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오늘로 끝납니다. 그리고 가나안 입성의 역사가 막 시작됩니다. 출애굽할 때의 역사는 모세와 함께 과거로 흘러가고, 가나안 입성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여호수아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록 같이 일한 사람이었으나 여호수아가 모세가 아닌 바에는 지도자는 달라진 것입니다. 단절입니다. 모세는 모세,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단절의 연속입니다. 역사를 단절의 연속으로 보는 눈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자신의 모습, 임마누엘의 모습을 새로 선정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도 그대로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과 사람의 모습은 단절이지만, 사람이 바뀌고 지도자가 바뀌지만,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도도한 물결, 역사의 혼,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된 흐름입니다.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그분은 모세를 통해서만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같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끄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역사는 단절 속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바뀌고 단절되지만,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이 없습니다. 모세가 받은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역사 속의 한 토막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개인의 역사, 가정의 역사, 사회의 역사, 민족과 세계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거나 역사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절만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은 있습니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역사 속에 도도하게 흐릅니다. 단절 속에 끊임없이 연속되는 새로운 역사!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떠났던 백성이 4백 년의 이집트 생활을 거쳐서 40년 광야 길을 지나서 오늘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떠나온 고향에 다시 들어갑니다. 야웨 하나님은 4백 년 이집트 종살이 때에도,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도, 그리고 가나안,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도 계속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역사의 주인, 그 주인이 3천 2백 년 이후에 살아가는 오늘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너희들은 바뀌어도 이념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고 나라 이름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모두가 바뀌어도,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창조와 완성 사이에서 나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 역사의 토막토막 속에 너희는 열과 성의를 가지고 동참하라.\" 여호수아가 어떻게 가나안에 입성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인도하리라는 약속을 사람을 바뀌더라도 지키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서양 역사를 보면, 영국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단이 종교문제로 박해받다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서 소위 우리가 지금 말하는 신대륙, 미국 대륙을 향해서 떠납니다. 아마 그때 그 사람들 마음속에 그리던 신대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땅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꿈을 안고 고향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으로 향합니다. 오늘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은 대서양을 건너가던 청교도들처럼,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가려고 합니다. 젖이 흐른다는 말은 양과 염소가 푸른 풀을 부족함 없이 뜯고 젖을 충분히 제공하는 최고의 초지를 가리킵니다. 꿀이 흐른다는 것은 양봉사업이 잘 되는 땅, 비옥한 땅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 아니라 목축과 농사와 양봉이 잘 되어서 복이 넘치는 땅, 가나안으로 가자! 우리가 오늘날 건너야 할 요단강, 대서양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지만, 서양 사람들은 대서양을 건넜지만, 혹시 우리는 3·8선이라 이름하는 육지 속의 대양을 건너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과 북이 서로 건넘으로써 삼천리 금수강산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이 될 수 있는 날, 그게 언제입니까? 그 미래를 품고 오늘 평화를 향해 나가보십시다. 사람은 변합니다. 역사는 변합니다. 체제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을 주신 이 하나님이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이 길을 가자.\" 이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작지만 알찬 경동이라 이름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는 역사의 단절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의 연속성을 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단절 속에서도 연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한테 주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읽은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명을 누가 보장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기간을 누가 약속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약속 못 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살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살아있는 만큼 일하고, 그래서 역사는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를 거쳐서 예언자들에게로 이어져 온 단절된 역사를 결정적으로 이으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준 약속의 담지자,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향 땅에서는 천대받는다\"고 예수님도 불평하셨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버린 마지막 선지자, 인간이 버린 유대의 마지막 지도자였습니다. 그 사람을 유대 역사가 인간의 존재나 체제가 완전히 버렸습니다. 버린 구체적인 증거가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완전히 죽였지만, 그걸로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시 이어집니다. 부활이 뭡니까? 인간이 끊어놓은 역사를 하나님은 다시 묶으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시는 표입니다. 인간이 칼로 싹둑 잘라버린 역사를 하나님은 보혈의 피로 다시 엮어 연속시켜놓습니다. 그렇지 않고 경동교회가 어떻게 생깁니까?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말았다면, 뭐 때문에 교회가 생깁니까? 신앙은 어디서 생깁니까? 인간이 끊어놓습니다. 그리고 다 죽이기도 합니다. 폭격도 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은 끊어진 채, 상처받은 채, 죽임 당한 채 같이 와서, 다시 당신의 복의 역사를 연결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너희는 내가 준 역사의 한 토막을 성실히 살면서 나의 역사를 증거하라고 보낸 사람들이다.\" 끊어진 역사를 이어주는 십자가의 보혈, 그 보혈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부활이라 이름하는 생명의 신천지가 열립니다. 우리 앞을 막아선 요단강을 건너면, 새로운 신천지가 나타납니다. 요단강은 어디에든지 있습니다. 우리 가슴에도 있고, 우리 사회에도 있습니다. 건너십시오. 가면 새로운 땅이 열립니다. 미지의 땅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2003-06-10 00:44:03 read : 38 주의 종 모세가 죽은 뒤에, 주께서, 모세를 보좌하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스라엘 자손 곧 모든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 강을 건너서,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대로, 너희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 큰 강인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헷 사람의 땅을 지나 서쪽의 지중해까지, 모두 너희의 영토가 될 것이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서신서의 말씀: 야고보서 4:13 ~ 15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4:22 ~ 30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내게다 대고 말하려고 한다. 너희가 나더러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하시오' 하고 말하는 줄 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받았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잔뜩 화가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 일어나서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냈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에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 여러분께서는 오늘 봉독한 여호수아서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큰 흐름을 들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얘기는 모세의 얘기와 중첩됩니다. 모세 얘기가 끝나면서 여호수아 얘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이야기를 그려봅시다.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모세가 출애굽한 해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원전 1250년, 우리 역사에 뭐가 있나 찾아보았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세워진 때는 기원전 57년 정도밖에 안 되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18년일 뿐입니다. 하여튼 기원전 천년 대는 아주 오래 전의 시대입니다. 기원전 1250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거닐다가 이제 40년이 지난 약 121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서 40년 동안 돌아온 여정은 이스라엘 지도를 놓고 보면 이렇습니다. 가나안 지도를 눈앞에 놓으면, 위쪽 그러니까 북쪽에 큰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이 호수가 갈릴리 호수입니다. 또 하나 남쪽에 보면 물이 흘러들되 빠져나가지 않아서 죽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를 사해라고 하는데,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 몸이 둥둥 뜹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와 남쪽 사해를 연결하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바로 요단강입니다. 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입니다. 요단강 서편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지금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와 있는가 하면,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남쪽 접경지역의 동쪽에 있습니다. 여기에 서서 보면, 서쪽에 있는 도시는 여리고입니다. 서쪽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새로 등장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서 지금 나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기원전 1200년경, 요단강 건너편 동쪽의 일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 있는 한 산에서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산은 느보라 이름하는 산입니다. 느보 산. 그 산의 제일 큰 봉우리가 비스가입니다.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 이 봉우리에 모세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봉우리에 앉은 모세에게 요단 강 너머 서쪽에 있는 땅을 보여줍니다. 이름하여 가나안 땅, 내용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이 땅을 모세에게 보여주면서 이제 40년 동안 걸어온 길의 목표인 저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에게는 "모세야, 너는 이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40년 간 고생했는데, 눈앞에 있는 땅에 못 들어간다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성서에는 모세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야웨 하나님의 말씀에 승복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기 보좌관이었던 여호수아를 택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 인간적으로 솔직히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나이 80에 출애굽해서 이제 120이 되었는데, 목표를 눈앞에 두고 강제 퇴역입니다. 강제로 은퇴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 요즘말로 말하면 공동의회를 열고서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신명기 32장에 있는 이 유언의 내용을 모세의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야웨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속에서 여러분을 이끌었으나, 나는 이제 여기서 끝납니다. 내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마지막으로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비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합니다만, 그 땅은 사실 신천지는 아닙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흉년이 들어 양식이 없어서 이집트로 가서 민족도, 자존심도, 역사도 다 팔고서 먹을 것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몽땅 이집트로 간 것이 4백 년 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형제들이 미워하여 이집트 상인에게 판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온 집안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 이사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타향살이를 자처했고 그것은 식민 생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집트 종살이 생활은 하나님이 시킨 것도 아니고, 이집트가 전쟁을 벌여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기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먹고살 물품을 얻고 자유를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것이 4백 년! 그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두고 온 산하, 우리의 고향, 흉년은 지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복된 땅, 그 땅으로 돌아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비전, 이것이 4백 년 동안 이스라엘을 정신적으로 지켜주었습니다. 그 비전을 모아서 모세가 출애굽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요단강 건너편에 놓고 동쪽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오늘로 끝납니다. 그리고 가나안 입성의 역사가 막 시작됩니다. 출애굽할 때의 역사는 모세와 함께 과거로 흘러가고, 가나안 입성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여호수아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록 같이 일한 사람이었으나 여호수아가 모세가 아닌 바에는 지도자는 달라진 것입니다. 단절입니다. 모세는 모세,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단절의 연속입니다. 역사를 단절의 연속으로 보는 눈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자신의 모습, 임마누엘의 모습을 새로 선정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도 그대로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과 사람의 모습은 단절이지만, 사람이 바뀌고 지도자가 바뀌지만,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도도한 물결, 역사의 혼,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된 흐름입니다.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그분은 모세를 통해서만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같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끄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역사는 단절 속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바뀌고 단절되지만,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이 없습니다. 모세가 받은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역사 속의 한 토막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개인의 역사, 가정의 역사, 사회의 역사, 민족과 세계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거나 역사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절만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은 있습니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역사 속에 도도하게 흐릅니다. 단절 속에 끊임없이 연속되는 새로운 역사!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떠났던 백성이 4백 년의 이집트 생활을 거쳐서 40년 광야 길을 지나서 오늘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떠나온 고향에 다시 들어갑니다. 야웨 하나님은 4백 년 이집트 종살이 때에도,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도, 그리고 가나안,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도 계속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역사의 주인, 그 주인이 3천 2백 년 이후에 살아가는 오늘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너희들은 바뀌어도 이념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고 나라 이름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모두가 바뀌어도,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창조와 완성 사이에서 나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 역사의 토막토막 속에 너희는 열과 성의를 가지고 동참하라." 여호수아가 어떻게 가나안에 입성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인도하리라는 약속을 사람을 바뀌더라도 지키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서양 역사를 보면, 영국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단이 종교문제로 박해받다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서 소위 우리가 지금 말하는 신대륙, 미국 대륙을 향해서 떠납니다. 아마 그때 그 사람들 마음속에 그리던 신대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땅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꿈을 안고 고향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으로 향합니다. 오늘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은 대서양을 건너가던 청교도들처럼,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가려고 합니다. 젖이 흐른다는 말은 양과 염소가 푸른 풀을 부족함 없이 뜯고 젖을 충분히 제공하는 최고의 초지를 가리킵니다. 꿀이 흐른다는 것은 양봉사업이 잘 되는 땅, 비옥한 땅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 아니라 목축과 농사와 양봉이 잘 되어서 복이 넘치는 땅, 가나안으로 가자! 우리가 오늘날 건너야 할 요단강, 대서양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지만, 서양 사람들은 대서양을 건넜지만, 혹시 우리는 3·8선이라 이름하는 육지 속의 대양을 건너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과 북이 서로 건넘으로써 삼천리 금수강산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이 될 수 있는 날, 그게 언제입니까? 그 미래를 품고 오늘 평화를 향해 나가보십시다. 사람은 변합니다. 역사는 변합니다. 체제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을 주신 이 하나님이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이 길을 가자." 이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작지만 알찬 경동이라 이름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는 역사의 단절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의 연속성을 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단절 속에서도 연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한테 주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읽은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명을 누가 보장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기간을 누가 약속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약속 못 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살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살아있는 만큼 일하고, 그래서 역사는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를 거쳐서 예언자들에게로 이어져 온 단절된 역사를 결정적으로 이으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준 약속의 담지자,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향 땅에서는 천대받는다"고 예수님도 불평하셨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버린 마지막 선지자, 인간이 버린 유대의 마지막 지도자였습니다. 그 사람을 유대 역사가 인간의 존재나 체제가 완전히 버렸습니다. 버린 구체적인 증거가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완전히 죽였지만, 그걸로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시 이어집니다. 부활이 뭡니까? 인간이 끊어놓은 역사를 하나님은 다시 묶으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시는 표입니다. 인간이 칼로 싹둑 잘라버린 역사를 하나님은 보혈의 피로 다시 엮어 연속시켜놓습니다. 그렇지 않고 경동교회가 어떻게 생깁니까?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말았다면, 뭐 때문에 교회가 생깁니까? 신앙은 어디서 생깁니까? 인간이 끊어놓습니다. 그리고 다 죽이기도 합니다. 폭격도 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은 끊어진 채, 상처받은 채, 죽임 당한 채 같이 와서, 다시 당신의 복의 역사를 연결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너희는 내가 준 역사의 한 토막을 성실히 살면서 나의 역사를 증거하라고 보낸 사람들이다." 끊어진 역사를 이어주는 십자가의 보혈, 그 보혈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부활이라 이름하는 생명의 신천지가 열립니다. 우리 앞을 막아선 요단강을 건너면, 새로운 신천지가 나타납니다. 요단강은 어디에든지 있습니다. 우리 가슴에도 있고, 우리 사회에도 있습니다. 건너십시오. 가면 새로운 땅이 열립니다. 미지의 땅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2013-06-17 22:27:14 read : 7 여러분께서는 오늘 봉독한 여호수아서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큰 흐름을 들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얘기는 모세의 얘기와 중첩됩니다. 모세 얘기가 끝나면서 여호수아 얘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이야기를 그려봅시다.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모세가 출애굽한 해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원전 1250년, 우리 역사에 뭐가 있나 찾아보았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세워진 때는 기원전 57년 정도밖에 안 되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18년일 뿐입니다. 하여튼 기원전 천년 대는 아주 오래 전의 시대입니다. 기원전 1250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거닐다가 이제 40년이 지난 약 121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서 40년 동안 돌아온 여정은 이스라엘 지도를 놓고 보면 이렇습니다. 가나안 지도를 눈앞에 놓으면, 위쪽 그러니까 북쪽에 큰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이 호수가 갈릴리 호수입니다. 또 하나 남쪽에 보면 물이 흘러들되 빠져나가지 않아서 죽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를 사해라고 하는데,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 몸이 둥둥 뜹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와 남쪽 사해를 연결하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바로 요단강입니다. 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입니다. 요단강 서편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지금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와 있는가 하면,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남쪽 접경지역의 동쪽에 있습니다. 여기에 서서 보면, 서쪽에 있는 도시는 여리고입니다. 서쪽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새로 등장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서 지금 나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기원전 1200년경, 요단강 건너편 동쪽의 일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 있는 한 산에서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산은 느보라 이름하는 산입니다. 느보 산. 그 산의 제일 큰 봉우리가 비스가입니다.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 이 봉우리에 모세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봉우리에 앉은 모세에게 요단 강 너머 서쪽에 있는 땅을 보여줍니다. 이름하여 가나안 땅, 내용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이 땅을 모세에게 보여주면서 이제 40년 동안 걸어온 길의 목표인 저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에게는 "모세야, 너는 이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40년 간 고생했는데, 눈앞에 있는 땅에 못 들어간다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성서에는 모세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야웨 하나님의 말씀에 승복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기 보좌관이었던 여호수아를 택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 인간적으로 솔직히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나이 80에 출애굽해서 이제 120이 되었는데, 목표를 눈앞에 두고 강제 퇴역입니다. 강제로 은퇴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 요즘말로 말하면 공동의회를 열고서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신명기 32장에 있는 이 유언의 내용을 모세의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야웨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속에서 여러분을 이끌었으나, 나는 이제 여기서 끝납니다. 내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마지막으로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비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합니다만, 그 땅은 사실 신천지는 아닙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흉년이 들어 양식이 없어서 이집트로 가서 민족도, 자존심도, 역사도 다 팔고서 먹을 것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몽땅 이집트로 간 것이 4백 년 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형제들이 미워하여 이집트 상인에게 판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온 집안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 이사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타향살이를 자처했고 그것은 식민 생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집트 종살이 생활은 하나님이 시킨 것도 아니고, 이집트가 전쟁을 벌여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기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먹고살 물품을 얻고 자유를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것이 4백 년! 그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두고 온 산하, 우리의 고향, 흉년은 지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복된 땅, 그 땅으로 돌아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비전, 이것이 4백 년 동안 이스라엘을 정신적으로 지켜주었습니다. 그 비전을 모아서 모세가 출애굽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요단강 건너편에 놓고 동쪽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오늘로 끝납니다. 그리고 가나안 입성의 역사가 막 시작됩니다. 출애굽할 때의 역사는 모세와 함께 과거로 흘러가고, 가나안 입성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여호수아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록 같이 일한 사람이었으나 여호수아가 모세가 아닌 바에는 지도자는 달라진 것입니다. 단절입니다. 모세는 모세,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단절의 연속입니다. 역사를 단절의 연속으로 보는 눈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자신의 모습, 임마누엘의 모습을 새로 선정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도 그대로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과 사람의 모습은 단절이지만, 사람이 바뀌고 지도자가 바뀌지만,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도도한 물결, 역사의 혼,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된 흐름입니다.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그분은 모세를 통해서만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같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끄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역사는 단절 속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바뀌고 단절되지만,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이 없습니다. 모세가 받은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역사 속의 한 토막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개인의 역사, 가정의 역사, 사회의 역사, 민족과 세계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거나 역사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절만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은 있습니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역사 속에 도도하게 흐릅니다. 단절 속에 끊임없이 연속되는 새로운 역사!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떠났던 백성이 4백 년의 이집트 생활을 거쳐서 40년 광야 길을 지나서 오늘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떠나온 고향에 다시 들어갑니다. 야웨 하나님은 4백 년 이집트 종살이 때에도,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도, 그리고 가나안,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도 계속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역사의 주인, 그 주인이 3천 2백 년 이후에 살아가는 오늘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너희들은 바뀌어도 이념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고 나라 이름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모두가 바뀌어도,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창조와 완성 사이에서 나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 역사의 토막토막 속에 너희는 열과 성의를 가지고 동참하라." 여호수아가 어떻게 가나안에 입성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인도하리라는 약속을 사람을 바뀌더라도 지키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서양 역사를 보면, 영국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단이 종교문제로 박해받다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서 소위 우리가 지금 말하는 신대륙, 미국 대륙을 향해서 떠납니다. 아마 그때 그 사람들 마음속에 그리던 신대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땅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꿈을 안고 고향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으로 향합니다. 오늘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은 대서양을 건너가던 청교도들처럼,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가려고 합니다. 젖이 흐른다는 말은 양과 염소가 푸른 풀을 부족함 없이 뜯고 젖을 충분히 제공하는 최고의 초지를 가리킵니다. 꿀이 흐른다는 것은 양봉사업이 잘 되는 땅, 비옥한 땅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 아니라 목축과 농사와 양봉이 잘 되어서 복이 넘치는 땅, 가나안으로 가자! 우리가 오늘날 건너야 할 요단강, 대서양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지만, 서양 사람들은 대서양을 건넜지만, 혹시 우리는 3·8선이라 이름하는 육지 속의 대양을 건너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과 북이 서로 건넘으로써 삼천리 금수강산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이 될 수 있는 날, 그게 언제입니까? 그 미래를 품고 오늘 평화를 향해 나가보십시다. 사람은 변합니다. 역사는 변합니다. 체제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을 주신 이 하나님이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이 길을 가자." 이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작지만 알찬 경동이라 이름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는 역사의 단절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의 연속성을 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단절 속에서도 연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한테 주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읽은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명을 누가 보장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기간을 누가 약속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약속 못 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살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살아있는 만큼 일하고, 그래서 역사는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를 거쳐서 예언자들에게로 이어져 온 단절된 역사를 결정적으로 이으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준 약속의 담지자,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향 땅에서는 천대받는다"고 예수님도 불평하셨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버린 마지막 선지자, 인간이 버린 유대의 마지막 지도자였습니다. 그 사람을 유대 역사가 인간의 존재나 체제가 완전히 버렸습니다. 버린 구체적인 증거가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완전히 죽였지만, 그걸로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시 이어집니다. 부활이 뭡니까? 인간이 끊어놓은 역사를 하나님은 다시 묶으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시는 표입니다. 인간이 칼로 싹둑 잘라버린 역사를 하나님은 보혈의 피로 다시 엮어 연속시켜놓습니다. 그렇지 않고 경동교회가 어떻게 생깁니까?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말았다면, 뭐 때문에 교회가 생깁니까? 신앙은 어디서 생깁니까? 인간이 끊어놓습니다. 그리고 다 죽이기도 합니다. 폭격도 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은 끊어진 채, 상처받은 채, 죽임 당한 채 같이 와서, 다시 당신의 복의 역사를 연결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너희는 내가 준 역사의 한 토막을 성실히 살면서 나의 역사를 증거하라고 보낸 사람들이다." 끊어진 역사를 이어주는 십자가의 보혈, 그 보혈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부활이라 이름하는 생명의 신천지가 열립니다. 우리 앞을 막아선 요단강을 건너면, 새로운 신천지가 나타납니다. 요단강은 어디에든지 있습니다. 우리 가슴에도 있고, 우리 사회에도 있습니다. 건너십시오. 가면 새로운 땅이 열립니다. 미지의 땅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수1:1-9 2013-06-17 22:27:14 read : 6 여러분께서는 오늘 봉독한 여호수아서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큰 흐름을 들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얘기는 모세의 얘기와 중첩됩니다. 모세 얘기가 끝나면서 여호수아 얘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이야기를 그려봅시다. 고고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모세가 출애굽한 해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원전 1250년, 우리 역사에 뭐가 있나 찾아보았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가 세워진 때는 기원전 57년 정도밖에 안 되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18년일 뿐입니다. 하여튼 기원전 천년 대는 아주 오래 전의 시대입니다. 기원전 1250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여, 40년 동안 광야를 거닐다가 이제 40년이 지난 약 121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서 40년 동안 돌아온 여정은 이스라엘 지도를 놓고 보면 이렇습니다. 가나안 지도를 눈앞에 놓으면, 위쪽 그러니까 북쪽에 큰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이 호수가 갈릴리 호수입니다. 또 하나 남쪽에 보면 물이 흘러들되 빠져나가지 않아서 죽은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를 사해라고 하는데,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 몸이 둥둥 뜹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와 남쪽 사해를 연결하는 강이 있습니다. 이 강이 바로 요단강입니다. 이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입니다. 요단강 서편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지금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와 있는가 하면,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드는 남쪽 접경지역의 동쪽에 있습니다. 여기에 서서 보면, 서쪽에 있는 도시는 여리고입니다. 서쪽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새로 등장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서 지금 나아가려고 합니다. 바로 기원전 1200년경, 요단강 건너편 동쪽의 일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 있는 한 산에서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산은 느보라 이름하는 산입니다. 느보 산. 그 산의 제일 큰 봉우리가 비스가입니다. 느보 산의 비스가 봉우리, 이 봉우리에 모세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봉우리에 앉은 모세에게 요단 강 너머 서쪽에 있는 땅을 보여줍니다. 이름하여 가나안 땅, 내용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 이 땅을 모세에게 보여주면서 이제 40년 동안 걸어온 길의 목표인 저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에게는 \"모세야, 너는 이 땅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40년 간 고생했는데, 눈앞에 있는 땅에 못 들어간다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성서에는 모세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야웨 하나님의 말씀에 승복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기 보좌관이었던 여호수아를 택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합니다. 인간적으로 솔직히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나이 80에 출애굽해서 이제 120이 되었는데, 목표를 눈앞에 두고 강제 퇴역입니다. 강제로 은퇴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 요즘말로 말하면 공동의회를 열고서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신명기 32장에 있는 이 유언의 내용을 모세의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야웨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속에서 여러분을 이끌었으나, 나는 이제 여기서 끝납니다. 내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땅,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마지막으로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비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합니다만, 그 땅은 사실 신천지는 아닙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흉년이 들어 양식이 없어서 이집트로 가서 민족도, 자존심도, 역사도 다 팔고서 먹을 것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몽땅 이집트로 간 것이 4백 년 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형제들이 미워하여 이집트 상인에게 판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온 집안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 이사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타향살이를 자처했고 그것은 식민 생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집트 종살이 생활은 하나님이 시킨 것도 아니고, 이집트가 전쟁을 벌여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기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먹고살 물품을 얻고 자유를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것이 4백 년! 그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두고 온 산하, 우리의 고향, 흉년은 지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복된 땅, 그 땅으로 돌아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비전, 이것이 4백 년 동안 이스라엘을 정신적으로 지켜주었습니다. 그 비전을 모아서 모세가 출애굽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요단강 건너편에 놓고 동쪽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오늘로 끝납니다. 그리고 가나안 입성의 역사가 막 시작됩니다. 출애굽할 때의 역사는 모세와 함께 과거로 흘러가고, 가나안 입성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여호수아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록 같이 일한 사람이었으나 여호수아가 모세가 아닌 바에는 지도자는 달라진 것입니다. 단절입니다. 모세는 모세, 여호수아는 여호수아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단절의 연속입니다. 역사를 단절의 연속으로 보는 눈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셨던 자신의 모습, 임마누엘의 모습을 새로 선정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도 그대로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과 사람의 모습은 단절이지만, 사람이 바뀌고 지도자가 바뀌지만,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도도한 물결, 역사의 혼, 역사를 움직이는 힘, 그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된 흐름입니다.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그분은 모세를 통해서만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같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끄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역사는 단절 속의 연속입니다. 사람은 바뀌고 단절되지만,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이 없습니다. 모세가 받은 것은 무한한 하나님의 역사 속의 한 토막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 다음에 이어지는 토막은 또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개인의 역사, 가정의 역사, 사회의 역사, 민족과 세계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거나 역사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절만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은 있습니다. 이 흐름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역사 속에 도도하게 흐릅니다. 단절 속에 끊임없이 연속되는 새로운 역사!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떠났던 백성이 4백 년의 이집트 생활을 거쳐서 40년 광야 길을 지나서 오늘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떠나온 고향에 다시 들어갑니다. 야웨 하나님은 4백 년 이집트 종살이 때에도,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도, 그리고 가나안,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도 계속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역사의 주인, 그 주인이 3천 2백 년 이후에 살아가는 오늘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너희들은 바뀌어도 이념이 바뀌고 체제가 바뀌고 나라 이름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모두가 바뀌어도,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창조와 완성 사이에서 나의 역사는 계속된다. 이 역사의 토막토막 속에 너희는 열과 성의를 가지고 동참하라.\" 여호수아가 어떻게 가나안에 입성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인도하리라는 약속을 사람을 바뀌더라도 지키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서양 역사를 보면, 영국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단이 종교문제로 박해받다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서 소위 우리가 지금 말하는 신대륙, 미국 대륙을 향해서 떠납니다. 아마 그때 그 사람들 마음속에 그리던 신대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땅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래의 꿈을 안고 고향을 등지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으로 향합니다. 오늘 여호수아 휘하의 이스라엘 백성은 대서양을 건너가던 청교도들처럼,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가려고 합니다. 젖이 흐른다는 말은 양과 염소가 푸른 풀을 부족함 없이 뜯고 젖을 충분히 제공하는 최고의 초지를 가리킵니다. 꿀이 흐른다는 것은 양봉사업이 잘 되는 땅, 비옥한 땅을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 아니라 목축과 농사와 양봉이 잘 되어서 복이 넘치는 땅, 가나안으로 가자! 우리가 오늘날 건너야 할 요단강, 대서양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지만, 서양 사람들은 대서양을 건넜지만, 혹시 우리는 3·8선이라 이름하는 육지 속의 대양을 건너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과 북이 서로 건넘으로써 삼천리 금수강산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땅이 될 수 있는 날, 그게 언제입니까? 그 미래를 품고 오늘 평화를 향해 나가보십시다. 사람은 변합니다. 역사는 변합니다. 체제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을 주신 이 하나님이 오늘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이 길을 가자.\" 이 길을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작지만 알찬 경동이라 이름하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서는 역사의 단절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의 연속성을 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단절 속에서도 연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한테 주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읽은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우리의 생명을 누가 보장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기간을 누가 약속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약속 못 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살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살아있는 만큼 일하고, 그래서 역사는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를 거쳐서 예언자들에게로 이어져 온 단절된 역사를 결정적으로 이으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준 약속의 담지자,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고향 땅에서는 천대받는다\"고 예수님도 불평하셨습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버린 마지막 선지자, 인간이 버린 유대의 마지막 지도자였습니다. 그 사람을 유대 역사가 인간의 존재나 체제가 완전히 버렸습니다. 버린 구체적인 증거가 골고다의 십자가입니다. 완전히 죽였지만, 그걸로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 아니라, 다시 이어집니다. 부활이 뭡니까? 인간이 끊어놓은 역사를 하나님은 다시 묶으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시는 표입니다. 인간이 칼로 싹둑 잘라버린 역사를 하나님은 보혈의 피로 다시 엮어 연속시켜놓습니다. 그렇지 않고 경동교회가 어떻게 생깁니까? 십자가에 죽어버리고 말았다면, 뭐 때문에 교회가 생깁니까? 신앙은 어디서 생깁니까? 인간이 끊어놓습니다. 그리고 다 죽이기도 합니다. 폭격도 합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은 끊어진 채, 상처받은 채, 죽임 당한 채 같이 와서, 다시 당신의 복의 역사를 연결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너희는 내가 준 역사의 한 토막을 성실히 살면서 나의 역사를 증거하라고 보낸 사람들이다.\" 끊어진 역사를 이어주는 십자가의 보혈, 그 보혈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부활이라 이름하는 생명의 신천지가 열립니다. 우리 앞을 막아선 요단강을 건너면, 새로운 신천지가 나타납니다. 요단강은 어디에든지 있습니다. 우리 가슴에도 있고, 우리 사회에도 있습니다. 건너십시오. 가면 새로운 땅이 열립니다. 미지의 땅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오늘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민14:1-30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민14:1-30 2003-07-02 20:55:33 read : 24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풍요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신령한 가나안 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의 과정은 천국을 향해 순례의 행진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중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가고 나머지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민14:30).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지 그 비결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지 :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8-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당신을 위해 충성했다 할지라도 원망하는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을 업신여긴 한 번의 실수로 왕위를 빼앗겼고, 모세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도하는 일에 충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원망하고 입방아 찧음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신1:1-3).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영접하지도 않았고, 깨닫지 못한 결과 불신과 원망의 입방아를 찧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소돔 고모라 성을 나올 때 결코 뒤돌아보지 말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뒤돌아 봄으로써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와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말씀대로 믿고 순종할 뿐 아니라 입술로 죄를 짓지 않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신령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대지 :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일에 결코 태만히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렘48:10)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뜻을 받드는 자의 자세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말씀도 제대로 받지 않고,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선과 차선을 가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하고,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행했던 것입니다. \'태만\'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고 버릇과 예의가 없이 제 마음대로 함부로 날뛰고 말을 지어내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하면 저주를 받고, 방자히 행하는 자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신18:2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과 귀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아시기 때문에 들으신대로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선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2-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태만히, 방자히 행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고 순종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대지 : 여호수아와 갈렙은 굳건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믿고 그 믿음대로 끝까지 행했던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첫째 기도의 사람입니다. 이는 마치 히스기야 왕과 같이 자기의 생명이 다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듣자마자 울며 기도할 때 그 생명을 15년이나 연장받은 것처럼 기도의 능력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히스기야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신앙인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써 \'생명과 장수(長壽)\'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신30:19-20). 두 번째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변화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믿고, 나아가서 주님 재림할 때까지 죽지않고 살아서 영광 가운데 영육의 변화를 믿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게 되면 사망마저도 집어 삼키는 위대한 신앙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고전15:54-5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를 믿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40년간 믿음을 지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생활 중에 의복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는 축복을 체험했습니다(신8:4, 29:5, 느9: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원망함으로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면 우리는 날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견고하게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자들이 되어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신령한 가나안 땅에 다 들어가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고전15:57-58).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민14:1-30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민14:1-30 2003-07-02 20:55:33 read : 26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풍요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신령한 가나안 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의 과정은 천국을 향해 순례의 행진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중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가고 나머지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민14:30).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지 그 비결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지 :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8-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당신을 위해 충성했다 할지라도 원망하는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을 업신여긴 한 번의 실수로 왕위를 빼앗겼고, 모세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도하는 일에 충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원망하고 입방아 찧음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신1:1-3).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영접하지도 않았고, 깨닫지 못한 결과 불신과 원망의 입방아를 찧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소돔 고모라 성을 나올 때 결코 뒤돌아보지 말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뒤돌아 봄으로써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와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말씀대로 믿고 순종할 뿐 아니라 입술로 죄를 짓지 않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신령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대지 :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일에 결코 태만히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렘48:10)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뜻을 받드는 자의 자세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말씀도 제대로 받지 않고,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선과 차선을 가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하고,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행했던 것입니다. '태만'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고 버릇과 예의가 없이 제 마음대로 함부로 날뛰고 말을 지어내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하면 저주를 받고, 방자히 행하는 자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신18:2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과 귀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아시기 때문에 들으신대로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선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2-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태만히, 방자히 행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고 순종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대지 : 여호수아와 갈렙은 굳건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믿고 그 믿음대로 끝까지 행했던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첫째 기도의 사람입니다. 이는 마치 히스기야 왕과 같이 자기의 생명이 다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듣자마자 울며 기도할 때 그 생명을 15년이나 연장받은 것처럼 기도의 능력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히스기야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신앙인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써 '생명과 장수(長壽)'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신30:19-20). 두 번째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변화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믿고, 나아가서 주님 재림할 때까지 죽지않고 살아서 영광 가운데 영육의 변화를 믿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게 되면 사망마저도 집어 삼키는 위대한 신앙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고전15:54-5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를 믿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40년간 믿음을 지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생활 중에 의복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는 축복을 체험했습니다(신8:4, 29:5, 느9: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원망함으로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면 우리는 날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견고하게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자들이 되어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신령한 가나안 땅에 다 들어가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고전15:57-58).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민14:1-30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민14:1-30 2003-07-02 20:55:33 read : 25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풍요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신령한 가나안 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의 과정은 천국을 향해 순례의 행진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중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가고 나머지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민14:30).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지 그 비결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지 :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8-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당신을 위해 충성했다 할지라도 원망하는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을 업신여긴 한 번의 실수로 왕위를 빼앗겼고, 모세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도하는 일에 충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원망하고 입방아 찧음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신1:1-3).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영접하지도 않았고, 깨닫지 못한 결과 불신과 원망의 입방아를 찧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소돔 고모라 성을 나올 때 결코 뒤돌아보지 말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뒤돌아 봄으로써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와 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말씀대로 믿고 순종할 뿐 아니라 입술로 죄를 짓지 않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신령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대지 :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일에 결코 태만히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렘48:10)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뜻을 받드는 자의 자세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말씀도 제대로 받지 않고,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선과 차선을 가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하고,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행했던 것입니다. \'태만\'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고 버릇과 예의가 없이 제 마음대로 함부로 날뛰고 말을 지어내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하면 저주를 받고, 방자히 행하는 자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신18:2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과 귀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아시기 때문에 들으신대로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선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2-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태만히, 방자히 행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고 순종했던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대지 : 여호수아와 갈렙은 굳건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믿고 그 믿음대로 끝까지 행했던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은 첫째 기도의 사람입니다. 이는 마치 히스기야 왕과 같이 자기의 생명이 다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듣자마자 울며 기도할 때 그 생명을 15년이나 연장받은 것처럼 기도의 능력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히스기야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신앙인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써 \'생명과 장수(長壽)\'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신30:19-20). 두 번째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변화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믿고, 나아가서 주님 재림할 때까지 죽지않고 살아서 영광 가운데 영육의 변화를 믿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게 되면 사망마저도 집어 삼키는 위대한 신앙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고전15:54-5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를 믿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40년간 믿음을 지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생활 중에 의복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는 축복을 체험했습니다(신8:4, 29:5, 느9: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원망함으로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면 우리는 날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견고하게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자들이 되어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신령한 가나안 땅에 다 들어가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고전15:57-58).
가나안 땅에 찾아온 평화/ 수11:16-23
가나안 땅에 찾아온 평화/수11:16-23 2013-07-22 20:41:28 read : 7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라고 하는 사람이 늘 즐겨 쓰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948년에 그리스의 내전이 있을 때 한 마을에 청년이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민을 떠날 때 모든 마을 주민들이 부두 가에서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가 전쟁에 나가고 떠나가서 미안한 맘으로 주민들에게 미국에 가면 무엇을 보내 줄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음식, 의복, 의약품 어느 것을 보내드릴 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무리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겐 선물은 필요 없고 평화를 가득 선물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인류는 평화를 간절히 애원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중요하지만 평화가 없는 이런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평화로운 때보다 전쟁과 복력에 휩싸인 때가 더 많습니다. 1968년에 윌(Will)이라는 박사와 듀란트(Ariel Durant)라는 박사가 공동으로 세계의 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세계사중 전쟁이 없었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3421년 동안 세계가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지낸 기간이 불과 286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촌 역사의 91.6%는 나날이 전쟁으로 점철되어있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백년 한 세기만 하더라도 전쟁과 혁명으로 죽은 사람이 9억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구의 한 편 이라크 땅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과 보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고 있는 여호수아서에서도 가나안 땅도 그랬습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갈렙의 이야기를 추정해 볼 때 약 7년간의 전쟁이 계속 되고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이 많이 죽었습니다. 요즘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려놓고 1년도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지쳐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 전쟁 때문에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7년간의 전쟁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맨 마지막에 즐거운 소식이 들리는데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듣기를 원했던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마침내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저 이라크의 전쟁도 그치고 이라크 땅에도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전 세계의 평화의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 사이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계속되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면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보다는 우리 심령에 영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여호수아서는 그 당시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평화가 가능한가, 오랜 전쟁을 끝마치고 평화를 찾게 된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가? 그런데 그 대답은 아이러니컬하게 전쟁을 통해서였습니다. 2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우리는 일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마지막 절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말씀만 가지고 좋아합니다. 평화가 오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 앞 절에 이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 온 땅을 취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통해서 그 온 땅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라야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쳐서 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 땅에 가고, 왜 그들을 멸하라고 하시는지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의 죄악을 밀어내고 근절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전쟁을 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 죄악을 통회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킬 것을 명령 하고 있습니다 . 19절 20절 말씀에도 기브온은 그들과 이스라엘과 화친하려고 나왔고, 그 밖의 다른 가나안 족속들은 이 이스라엘을 대항하고 대적하고 절대로 그들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가나안 모든 족속이 진멸 당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져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모든 질서가 바로 잡히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남북전쟁도 미국 역사의 뿌리 깊이 박혀있는 노예 제도에 대한 죄악을 뿌리 뽑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역사가들은 다른 목적들이 있었다고 지적하지만 특별히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사람은 그 노예제도를 위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때의 전쟁이 없었더라면 아직까지도 미국사회에 노예제도와 불평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모든 전쟁에 이러한 논리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벌려놓은 이라크 전쟁도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운 싸움도 바로 그런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모든 왕들을 죽이고 백성을 진멸시키면서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을 했습니다. 그 모든 임무를 완성하고 난 뒤에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영적 교훈들을 얻습니다. 첫째 우리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누구입니까? 먼저 우리는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죄는 언제는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습니다. 죄를 지으면 화평이 깨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히브리서 12: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다”고 했는데 우리가 죄와 싸울 때 이런 태도로 싸워야 합니다. 요즘 성도들이 죄에 대해서 무서워하지 않고 죄를 달콤하게 생각하고 죄를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아무리 나를 즐겁게 해주고 유익하게 한다 하더라고 이것이 죄라면 우리는 과감히 죄와 싸우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둘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과 풍속과도 싸워야 합니다. 로마서12장2절 말씀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합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많이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는 문화나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가치관과 풍속은 결국 우리를 패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풍속들 중에 하나님을 떠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따돌림과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고 우리는 세상을 대항해서 싸워야 진정한 영적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싸워야 할 대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불복종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취하기 전에 먼저 싸워야 할 것이 있는데 ,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떻게 하면 바른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제 목회 선배 몇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 중에 한분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한국에서 목회하는 것 중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흥미 있는 답변을 한 가지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든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형교회를 목회 하다보면 뭐라고 하는 자도 없고, 모든 게 다 잘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데, 그 상황에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이 대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바깥뿐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 가나안전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전쟁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땅의 아낙 자손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오기 전 45년 전에 그땅에 정탐하러 왔다가 아낙 자손들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끄고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작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때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45년 후에 이제야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승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얻었고 아낙 자손들을 몰아내는데 본문말씀 21절과 22절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고 합니다. 이전에는 아낙 자손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이 아낙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거인족속들이 가나안땅에 한 사람도 없도록 멸망시키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약간만 남아있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 경내에 그들이 얼굴을 내 밀수 없도록 격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끝까지 싸워야할 우리의 적수가 있는데, 그가 바로 마귀 사탄입니다. 마귀 사탄은 참 교활합니다. 자기를 드러 내지 않고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에게 달라 붙는지요. 여러분 이번 CBS에서 주최한 뮤지컬 The Promise를 보셨습니까? 그곳에 가 보셨던 분들은 참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 이 뮤지컬 가운데 여러분은 누구를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사역과 감동적인 장면들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감격적인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 외에도 사도 베드로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극중에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 하는데, 베드로전서 5장8절의 말씀처럼 사탄 마귀가 여기도 저기도 늘 나타나는데 마귀가 안 나타나는 곳이 없었습니다. 호시탐탐 나타나서 역사했던 실체가 마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가 여기 다시 모였을 때 나타나고 우리의 모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그의 권세는 세상의 권세와 영들까지도 모두 동원해서 공격해오는 것이 마치 가나안전쟁의 아낙 자손과 같이 힘세고 무서운 존재가 마귀 사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 사탄과의 전투를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싸움을 싸우고 난 뒤에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마귀 사탄과의 싸움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귀와 싸울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시로 기도하면서 악한 영들을 대항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힘입고 특별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힘입고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실 때에 물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마귀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 얻은 평화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얻기 위해 죄와 세상과 나와 마귀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연합 되어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가나안 땅에 찾아온 평화/수11:16-23
가나안 땅에 찾아온 평화/수11:16-23 2013-07-22 20:41:28 read : 6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라고 하는 사람이 늘 즐겨 쓰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948년에 그리스의 내전이 있을 때 한 마을에 청년이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민을 떠날 때 모든 마을 주민들이 부두 가에서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가 전쟁에 나가고 떠나가서 미안한 맘으로 주민들에게 미국에 가면 무엇을 보내 줄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음식, 의복, 의약품 어느 것을 보내드릴 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무리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겐 선물은 필요 없고 평화를 가득 선물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인류는 평화를 간절히 애원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중요하지만 평화가 없는 이런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평화로운 때보다 전쟁과 복력에 휩싸인 때가 더 많습니다. 1968년에 윌(Will)이라는 박사와 듀란트(Ariel Durant)라는 박사가 공동으로 세계의 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세계사중 전쟁이 없었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3421년 동안 세계가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지낸 기간이 불과 286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촌 역사의 91.6%는 나날이 전쟁으로 점철되어있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백년 한 세기만 하더라도 전쟁과 혁명으로 죽은 사람이 9억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구의 한 편 이라크 땅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과 보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고 있는 여호수아서에서도 가나안 땅도 그랬습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갈렙의 이야기를 추정해 볼 때 약 7년간의 전쟁이 계속 되고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이 많이 죽었습니다. 요즘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려놓고 1년도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지쳐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 전쟁 때문에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7년간의 전쟁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맨 마지막에 즐거운 소식이 들리는데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듣기를 원했던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마침내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저 이라크의 전쟁도 그치고 이라크 땅에도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전 세계의 평화의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 사이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계속되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면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보다는 우리 심령에 영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여호수아서는 그 당시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평화가 가능한가, 오랜 전쟁을 끝마치고 평화를 찾게 된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가? 그런데 그 대답은 아이러니컬하게 전쟁을 통해서였습니다. 2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우리는 일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마지막 절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말씀만 가지고 좋아합니다. 평화가 오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 앞 절에 이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 온 땅을 취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통해서 그 온 땅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라야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쳐서 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 땅에 가고, 왜 그들을 멸하라고 하시는지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의 죄악을 밀어내고 근절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전쟁을 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 죄악을 통회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킬 것을 명령 하고 있습니다 . 19절 20절 말씀에도 기브온은 그들과 이스라엘과 화친하려고 나왔고, 그 밖의 다른 가나안 족속들은 이 이스라엘을 대항하고 대적하고 절대로 그들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가나안 모든 족속이 진멸 당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져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모든 질서가 바로 잡히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남북전쟁도 미국 역사의 뿌리 깊이 박혀있는 노예 제도에 대한 죄악을 뿌리 뽑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역사가들은 다른 목적들이 있었다고 지적하지만 특별히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사람은 그 노예제도를 위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때의 전쟁이 없었더라면 아직까지도 미국사회에 노예제도와 불평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모든 전쟁에 이러한 논리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벌려놓은 이라크 전쟁도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운 싸움도 바로 그런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모든 왕들을 죽이고 백성을 진멸시키면서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을 했습니다. 그 모든 임무를 완성하고 난 뒤에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영적 교훈들을 얻습니다. 첫째 우리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누구입니까? 먼저 우리는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죄는 언제는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습니다. 죄를 지으면 화평이 깨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히브리서 12: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다”고 했는데 우리가 죄와 싸울 때 이런 태도로 싸워야 합니다. 요즘 성도들이 죄에 대해서 무서워하지 않고 죄를 달콤하게 생각하고 죄를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아무리 나를 즐겁게 해주고 유익하게 한다 하더라고 이것이 죄라면 우리는 과감히 죄와 싸우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둘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과 풍속과도 싸워야 합니다. 로마서12장2절 말씀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합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많이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는 문화나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가치관과 풍속은 결국 우리를 패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풍속들 중에 하나님을 떠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따돌림과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고 우리는 세상을 대항해서 싸워야 진정한 영적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싸워야 할 대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불복종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취하기 전에 먼저 싸워야 할 것이 있는데 ,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떻게 하면 바른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제 목회 선배 몇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 중에 한분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한국에서 목회하는 것 중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흥미 있는 답변을 한 가지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든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형교회를 목회 하다보면 뭐라고 하는 자도 없고, 모든 게 다 잘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데, 그 상황에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이 대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바깥뿐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 가나안전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전쟁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땅의 아낙 자손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오기 전 45년 전에 그땅에 정탐하러 왔다가 아낙 자손들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끄고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작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때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45년 후에 이제야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승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얻었고 아낙 자손들을 몰아내는데 본문말씀 21절과 22절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고 합니다. 이전에는 아낙 자손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이 아낙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거인족속들이 가나안땅에 한 사람도 없도록 멸망시키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약간만 남아있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 경내에 그들이 얼굴을 내 밀수 없도록 격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끝까지 싸워야할 우리의 적수가 있는데, 그가 바로 마귀 사탄입니다. 마귀 사탄은 참 교활합니다. 자기를 드러 내지 않고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에게 달라 붙는지요. 여러분 이번 CBS에서 주최한 뮤지컬 The Promise를 보셨습니까? 그곳에 가 보셨던 분들은 참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 이 뮤지컬 가운데 여러분은 누구를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사역과 감동적인 장면들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감격적인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 외에도 사도 베드로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극중에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 하는데, 베드로전서 5장8절의 말씀처럼 사탄 마귀가 여기도 저기도 늘 나타나는데 마귀가 안 나타나는 곳이 없었습니다. 호시탐탐 나타나서 역사했던 실체가 마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가 여기 다시 모였을 때 나타나고 우리의 모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그의 권세는 세상의 권세와 영들까지도 모두 동원해서 공격해오는 것이 마치 가나안전쟁의 아낙 자손과 같이 힘세고 무서운 존재가 마귀 사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 사탄과의 전투를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싸움을 싸우고 난 뒤에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마귀 사탄과의 싸움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귀와 싸울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시로 기도하면서 악한 영들을 대항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힘입고 특별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힘입고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실 때에 물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마귀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 얻은 평화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얻기 위해 죄와 세상과 나와 마귀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연합 되어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가나안 땅에 찾아온 평화/수11:16-23
가나안 땅에 찾아온 평화/수11:16-23 2013-07-22 20:41:28 read : 8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라고 하는 사람이 늘 즐겨 쓰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948년에 그리스의 내전이 있을 때 한 마을에 청년이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민을 떠날 때 모든 마을 주민들이 부두 가에서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가 전쟁에 나가고 떠나가서 미안한 맘으로 주민들에게 미국에 가면 무엇을 보내 줄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음식, 의복, 의약품 어느 것을 보내드릴 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무리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겐 선물은 필요 없고 평화를 가득 선물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인류는 평화를 간절히 애원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중요하지만 평화가 없는 이런 것들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평화로운 때보다 전쟁과 복력에 휩싸인 때가 더 많습니다. 1968년에 윌(Will)이라는 박사와 듀란트(Ariel Durant)라는 박사가 공동으로 세계의 역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세계사중 전쟁이 없었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지난 3421년 동안 세계가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지낸 기간이 불과 286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구촌 역사의 91.6%는 나날이 전쟁으로 점철되어있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백년 한 세기만 하더라도 전쟁과 혁명으로 죽은 사람이 9억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구의 한 편 이라크 땅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과 보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고 있는 여호수아서에서도 가나안 땅도 그랬습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전쟁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갈렙의 이야기를 추정해 볼 때 약 7년간의 전쟁이 계속 되고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이 많이 죽었습니다. 요즘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려놓고 1년도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지쳐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 전쟁 때문에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7년간의 전쟁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맨 마지막에 즐거운 소식이 들리는데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듣기를 원했던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마침내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저 이라크의 전쟁도 그치고 이라크 땅에도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전 세계의 평화의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 사이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계속되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면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보다는 우리 심령에 영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여호수아서는 그 당시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평화가 가능한가, 오랜 전쟁을 끝마치고 평화를 찾게 된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가? 그런데 그 대답은 아이러니컬하게 전쟁을 통해서였습니다. 23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우리는 일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마지막 절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말씀만 가지고 좋아합니다. 평화가 오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 앞 절에 이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 온 땅을 취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통해서 그 온 땅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라야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쳐서 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명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왜 가나안 땅에 가고, 왜 그들을 멸하라고 하시는지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의 죄악을 밀어내고 근절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전쟁을 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 죄악을 통회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절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킬 것을 명령 하고 있습니다 . 19절 20절 말씀에도 기브온은 그들과 이스라엘과 화친하려고 나왔고, 그 밖의 다른 가나안 족속들은 이 이스라엘을 대항하고 대적하고 절대로 그들이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가나안 모든 족속이 진멸 당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져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모든 질서가 바로 잡히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남북전쟁도 미국 역사의 뿌리 깊이 박혀있는 노예 제도에 대한 죄악을 뿌리 뽑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물론 역사가들은 다른 목적들이 있었다고 지적하지만 특별히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사람은 그 노예제도를 위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때의 전쟁이 없었더라면 아직까지도 미국사회에 노예제도와 불평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모든 전쟁에 이러한 논리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벌려놓은 이라크 전쟁도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운 싸움도 바로 그런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모든 왕들을 죽이고 백성을 진멸시키면서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을 했습니다. 그 모든 임무를 완성하고 난 뒤에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영적 교훈들을 얻습니다. 첫째 우리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은 누구입니까? 먼저 우리는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죄는 언제는 우리와 하나님을 갈라놓습니다. 죄를 지으면 화평이 깨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히브리서 12: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였다”고 했는데 우리가 죄와 싸울 때 이런 태도로 싸워야 합니다. 요즘 성도들이 죄에 대해서 무서워하지 않고 죄를 달콤하게 생각하고 죄를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아무리 나를 즐겁게 해주고 유익하게 한다 하더라고 이것이 죄라면 우리는 과감히 죄와 싸우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둘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과 풍속과도 싸워야 합니다. 로마서12장2절 말씀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합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많이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반역하는 문화나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가치관과 풍속은 결국 우리를 패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풍속들 중에 하나님을 떠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따돌림과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고 우리는 세상을 대항해서 싸워야 진정한 영적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싸워야 할 대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습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불복종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취하기 전에 먼저 싸워야 할 것이 있는데 ,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떻게 하면 바른 목회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제 목회 선배 몇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그 중에 한분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한국에서 목회하는 것 중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흥미 있는 답변을 한 가지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든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형교회를 목회 하다보면 뭐라고 하는 자도 없고, 모든 게 다 잘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데, 그 상황에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이 대답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바깥뿐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 가나안전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전쟁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 땅의 아낙 자손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오기 전 45년 전에 그땅에 정탐하러 왔다가 아낙 자손들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그 사람들이 얼마나 끄고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작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때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45년 후에 이제야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고 승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얻었고 아낙 자손들을 몰아내는데 본문말씀 21절과 22절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 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고 합니다. 이전에는 아낙 자손을 두려워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이 아낙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거인족속들이 가나안땅에 한 사람도 없도록 멸망시키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약간만 남아있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 경내에 그들이 얼굴을 내 밀수 없도록 격퇴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끝까지 싸워야할 우리의 적수가 있는데, 그가 바로 마귀 사탄입니다. 마귀 사탄은 참 교활합니다. 자기를 드러 내지 않고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에게 달라 붙는지요. 여러분 이번 CBS에서 주최한 뮤지컬 The Promise를 보셨습니까? 그곳에 가 보셨던 분들은 참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 이 뮤지컬 가운데 여러분은 누구를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사역과 감동적인 장면들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의 감격적인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 외에도 사도 베드로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극중에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 하는데, 베드로전서 5장8절의 말씀처럼 사탄 마귀가 여기도 저기도 늘 나타나는데 마귀가 안 나타나는 곳이 없었습니다. 호시탐탐 나타나서 역사했던 실체가 마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가 여기 다시 모였을 때 나타나고 우리의 모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그의 권세는 세상의 권세와 영들까지도 모두 동원해서 공격해오는 것이 마치 가나안전쟁의 아낙 자손과 같이 힘세고 무서운 존재가 마귀 사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귀 사탄과의 전투를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싸움을 싸우고 난 뒤에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마귀 사탄과의 싸움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귀와 싸울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시로 기도하면서 악한 영들을 대항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힘입고 특별히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힘입고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실 때에 물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마귀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 얻은 평화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얻기 위해 죄와 세상과 나와 마귀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승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연합 되어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2003-06-18 01:11:00 read : 14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전적 하나님에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죄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믿고 영원토록 우리에게 기름진 영의 땅으로 우리는 인도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발을 놓은 직후에 하나님께서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명령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이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이 하나님이 임재 하셨던 그 곳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시켜 주신 그곳에서 돌 열 두 개를 취해서 다듬지 않고, 지파의 이름을 새기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이 하셨음을 알리기 위하여 그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복받게 하기 위해서 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들으면 서 우리 교회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을 뒤돌아 볼 때 우리는 너무 우리의 이름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기념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기념적인 어떤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 우 리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면 그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명예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명예를 쫒는 사람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거짓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명예는 그것을 포기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새로운 길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제 하나님이 두 번째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구 약의 모든 이야기들은 장차 이루어질 아름다운 사건의 그림자들입니다. 구약에 있었던 이야기가 그때 끝나 버리고 신약에 와서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약의 여러 가지 일들은 신약에 와서 아름다운 일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명령은 무엇인가? \'할례의식을 행하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할례란 단어가 10번이 나옵니다. 할례의 의미는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의 사전에 보면, 창세기 17장에 할례란 말이 처음 나옵니다.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약간 끊어내는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는 이 유가 무엇인가? 의학적 해석과는 달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다시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를 부르셔서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 할례 의식을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라고 나옵니다.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되었다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할례의식을 통하여 너와 나 사이에 가려진 것들이 없어지고 정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할례에 대 한 의미를 알면서 할례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 주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육적으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육체적으로 할례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할례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과 연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다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낳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자녀를 낳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통해서 우리의 목 적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 리를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어질 때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통해서 성취되어질 때 우리는 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욕심에 빠집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우리는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들을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표현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내 개인의 어떤 것이 드러나지 않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내 속에 역사하고 나를 통해서 그 하나님이 표현되어 진다면 이 세 상은 사랑으로 충만하여 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상은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표현이 아니고 우리의 타락한 자아를 다스리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시기가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미움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 나라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런 하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날 때만이 가능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이 내게서부터 나오는 것을 가지고 나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일들, 애굽이라는 자체가 하나님을 부 인하는 나라입니다. 왕이 신입니다. 왕은 스스로 신 인줄 알고 영원히 살 줄 압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 생각을 했습니다. 미이라, 피라미드가 그래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인류를 불러서 구원시켜 주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 들을 애굽에서 건져냅니다. 건져내시면서 당장 앞에 건너갈 수 없는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만나로 먹여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 샘물로 그들을 먹여 주시면서 훈련을 시킵니다. 진정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며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 다. 40년 동안 하나님이 훈련을 시켜도 아무도 그것을 못 깨달습니다. 그래서 광야 에서 다 죽고 맙니다. 오늘 말씀에도 너희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멸망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어집니다. 그 사실을 깨 달은 자가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와서 하나님에 의해서 살다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 가서도 하나님이 당장,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 의해서 살고 너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너희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 의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나오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주장과 우리의 뜻에 의해서 살고 내 어떤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할례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고 이제는 나의 나됨은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왔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매일 먹고 사는 양식도 하나님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나는 살고 먹던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다면 할례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합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빌립보서 3장 3절에 적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곧 육신을 벗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서 참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위해서 할례 의식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골로세서 2장 11절 말씀에 \'할례는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육체의 표피를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이 것을 끝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할례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진정 내가 중심이 아닌 예수님이 내 구주로 바뀌어 질 때 우리는 이제는 나에 의해서 나온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는 예수 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합니다. 십일조를 왜 드립니까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십 일조를 드리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탐하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의 고백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어질 것입니다. 물질보다 더 큰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내게 주어졌고 이 세상의 물질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물 질을 다스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이 내게 주어짐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부르지만 진정 할례의 체험이 없는 신앙의 생활을 많이 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 속에는 영적 진보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한 예를 들자면 베드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 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선택하고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해서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필요로 하고 쓰시는 사람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불려져도 우리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질 수 없습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면서 드려지는 것만이 하나님을 위 해서 쓰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에 의해 부름받았습니다. 3년동안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주님의 수제자로 쓰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주님이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닙니다. 나는 절대 당신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고 대답합니다. 그 상태는 할례의 체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나는 열심을 내지만 자신 이 중심입니다. 혈기를 내고 분노를 내지만 할례받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새 벽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 부인했습니다. 부인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정말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과정이 곧 할례의 과정인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 그것이 할례의 과정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졌습니다. 교만하고 자신을 신뢰하고 자 신 만만했던 베드로는 할례의 순간을 통해 자신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영 주님을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주님을 쫒아 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후 그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신약의 말씀을 가지고 할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7절을 통해서 할례라는 것은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 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래서 나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앞에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은즉 이제는 내 안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골로세서 2장 12절을 통해서 보면 할례의 의미는 부활함이라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할례도 이렇게 말씀을 맞추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태어난지 8일 째 되는 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는 오늘날 우리가 받는 세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중심인 세례는 세례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양심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세례의식입니다. 내 중심의 삶이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 세례의 의식입니다.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 의해서 살고 나를 위해서 살던 삶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한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하 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할례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녀인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이든지 우리로부터 나오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 의해서 뭔가 되어지기를 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곳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은 우 리를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옴을 깨닫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한 생명의 복 가운데로 인도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할례를 행한 장소는 \'길갈\'입니다. 그 의미는 애굽의 더러운 것이 다 떠나갔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묻어온 모든 것 들이 다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계속 나아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 의식을 한 이후에 유월절 의식을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 약속이 이루어 집니 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가면 그 소산을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이 유월절 이후에 가나안에서 나온 소산물들을 수확해서 양식으로 먹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 이스라엘 백성들,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되어졌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고 하늘의 생수를 마시면서 매일 영적 배부름을 체험하고 날마다 생수의 물을 마 시는 삶은 십자가 앞에 나를 포기한 순간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서 내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내어놓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 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늘의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이 유는 그것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새로운 계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새싹이 돋는 3월입니다. 이 순간 예수가 나의 주님임을 고백하시고 길갈의 체험을 하시면서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것을 가지고 하늘을 이 땅에 심 어가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2003-09-30 23:49:23 read : 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전적 하나님에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죄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믿고 영원토록 우리에게 기름진 영의 땅으로 우리는 인도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발을 놓은 직후에 하나님께서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명령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이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이 하나님이 임재 하셨던 그 곳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시켜 주신 그곳에서 돌 열 두 개를 취해서 다듬지 않고, 지파의 이름을 새기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이 하셨음을 알리기 위하여 그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복받게 하기 위해서 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들으면 서 우리 교회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을 뒤돌아 볼 때 우리는 너무 우리의 이름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기념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기념적인 어떤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 우 리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면 그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명예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명예를 쫒는 사람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거짓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명예는 그것을 포기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새로운 길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제 하나님이 두 번째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구 약의 모든 이야기들은 장차 이루어질 아름다운 사건의 그림자들입니다. 구약에 있었던 이야기가 그때 끝나 버리고 신약에 와서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약의 여러 가지 일들은 신약에 와서 아름다운 일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명령은 무엇인가? \'할례의식을 행하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할례란 단어가 10번이 나옵니다. 할례의 의미는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의 사전에 보면, 창세기 17장에 할례란 말이 처음 나옵니다.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약간 끊어내는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는 이 유가 무엇인가? 의학적 해석과는 달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다시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를 부르셔서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 할례 의식을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라고 나옵니다.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되었다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할례의식을 통하여 너와 나 사이에 가려진 것들이 없어지고 정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할례에 대 한 의미를 알면서 할례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 주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육적으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육체적으로 할례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할례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과 연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다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낳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자녀를 낳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통해서 우리의 목 적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 리를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어질 때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통해서 성취되어질 때 우리는 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욕심에 빠집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우리는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들을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표현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내 개인의 어떤 것이 드러나지 않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내 속에 역사하고 나를 통해서 그 하나님이 표현되어 진다면 이 세 상은 사랑으로 충만하여 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상은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표현이 아니고 우리의 타락한 자아를 다스리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시기가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미움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 나라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런 하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날 때만이 가능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이 내게서부터 나오는 것을 가지고 나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일들, 애굽이라는 자체가 하나님을 부 인하는 나라입니다. 왕이 신입니다. 왕은 스스로 신 인줄 알고 영원히 살 줄 압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 생각을 했습니다. 미이라, 피라미드가 그래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인류를 불러서 구원시켜 주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 들을 애굽에서 건져냅니다. 건져내시면서 당장 앞에 건너갈 수 없는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만나로 먹여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 샘물로 그들을 먹여 주시면서 훈련을 시킵니다. 진정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며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 다. 40년 동안 하나님이 훈련을 시켜도 아무도 그것을 못 깨달습니다. 그래서 광야 에서 다 죽고 맙니다. 오늘 말씀에도 너희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멸망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어집니다. 그 사실을 깨 달은 자가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와서 하나님에 의해서 살다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 가서도 하나님이 당장,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 의해서 살고 너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너희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 의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나오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주장과 우리의 뜻에 의해서 살고 내 어떤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할례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고 이제는 나의 나됨은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왔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매일 먹고 사는 양식도 하나님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나는 살고 먹던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다면 할례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합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빌립보서 3장 3절에 적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곧 육신을 벗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서 참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위해서 할례 의식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골로세서 2장 11절 말씀에 \'할례는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육체의 표피를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이 것을 끝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할례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진정 내가 중심이 아닌 예수님이 내 구주로 바뀌어 질 때 우리는 이제는 나에 의해서 나온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는 예수 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합니다. 십일조를 왜 드립니까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십 일조를 드리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탐하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의 고백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어질 것입니다. 물질보다 더 큰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내게 주어졌고 이 세상의 물질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물 질을 다스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이 내게 주어짐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부르지만 진정 할례의 체험이 없는 신앙의 생활을 많이 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 속에는 영적 진보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한 예를 들자면 베드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 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선택하고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해서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필요로 하고 쓰시는 사람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불려져도 우리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질 수 없습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면서 드려지는 것만이 하나님을 위 해서 쓰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에 의해 부름받았습니다. 3년동안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주님의 수제자로 쓰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주님이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닙니다. 나는 절대 당신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고 대답합니다. 그 상태는 할례의 체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나는 열심을 내지만 자신 이 중심입니다. 혈기를 내고 분노를 내지만 할례받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새 벽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 부인했습니다. 부인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정말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과정이 곧 할례의 과정인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 그것이 할례의 과정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졌습니다. 교만하고 자신을 신뢰하고 자 신 만만했던 베드로는 할례의 순간을 통해 자신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영 주님을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주님을 쫒아 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후 그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신약의 말씀을 가지고 할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7절을 통해서 할례라는 것은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 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래서 나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앞에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은즉 이제는 내 안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골로세서 2장 12절을 통해서 보면 할례의 의미는 부활함이라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할례도 이렇게 말씀을 맞추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태어난지 8일 째 되는 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는 오늘날 우리가 받는 세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중심인 세례는 세례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양심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세례의식입니다. 내 중심의 삶이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 세례의 의식입니다.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 의해서 살고 나를 위해서 살던 삶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한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하 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할례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녀인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이든지 우리로부터 나오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 의해서 뭔가 되어지기를 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곳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은 우 리를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옴을 깨닫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한 생명의 복 가운데로 인도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할례를 행한 장소는 \'길갈\'입니다. 그 의미는 애굽의 더러운 것이 다 떠나갔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묻어온 모든 것 들이 다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계속 나아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 의식을 한 이후에 유월절 의식을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 약속이 이루어 집니 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가면 그 소산을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이 유월절 이후에 가나안에서 나온 소산물들을 수확해서 양식으로 먹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 이스라엘 백성들,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되어졌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고 하늘의 생수를 마시면서 매일 영적 배부름을 체험하고 날마다 생수의 물을 마 시는 삶은 십자가 앞에 나를 포기한 순간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서 내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내어놓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 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늘의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이 유는 그것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새로운 계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새싹이 돋는 3월입니다. 이 순간 예수가 나의 주님임을 고백하시고 길갈의 체험을 하시면서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것을 가지고 하늘을 이 땅에 심 어가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2003-06-18 01:11:00 read : 15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전적 하나님에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죄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믿고 영원토록 우리에게 기름진 영의 땅으로 우리는 인도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발을 놓은 직후에 하나님께서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명령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이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이 하나님이 임재 하셨던 그 곳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시켜 주신 그곳에서 돌 열 두 개를 취해서 다듬지 않고, 지파의 이름을 새기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이 하셨음을 알리기 위하여 그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복받게 하기 위해서 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들으면 서 우리 교회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을 뒤돌아 볼 때 우리는 너무 우리의 이름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기념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기념적인 어떤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 우 리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면 그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명예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명예를 쫒는 사람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거짓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명예는 그것을 포기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새로운 길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제 하나님이 두 번째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구 약의 모든 이야기들은 장차 이루어질 아름다운 사건의 그림자들입니다. 구약에 있었던 이야기가 그때 끝나 버리고 신약에 와서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약의 여러 가지 일들은 신약에 와서 아름다운 일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명령은 무엇인가? '할례의식을 행하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할례란 단어가 10번이 나옵니다. 할례의 의미는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의 사전에 보면, 창세기 17장에 할례란 말이 처음 나옵니다.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약간 끊어내는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는 이 유가 무엇인가? 의학적 해석과는 달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다시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를 부르셔서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 할례 의식을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라고 나옵니다.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되었다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할례의식을 통하여 너와 나 사이에 가려진 것들이 없어지고 정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할례에 대 한 의미를 알면서 할례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 주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육적으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육체적으로 할례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할례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과 연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다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낳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자녀를 낳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통해서 우리의 목 적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 리를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어질 때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통해서 성취되어질 때 우리는 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욕심에 빠집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우리는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들을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표현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내 개인의 어떤 것이 드러나지 않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내 속에 역사하고 나를 통해서 그 하나님이 표현되어 진다면 이 세 상은 사랑으로 충만하여 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상은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표현이 아니고 우리의 타락한 자아를 다스리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시기가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미움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 나라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런 하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날 때만이 가능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이 내게서부터 나오는 것을 가지고 나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일들, 애굽이라는 자체가 하나님을 부 인하는 나라입니다. 왕이 신입니다. 왕은 스스로 신 인줄 알고 영원히 살 줄 압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 생각을 했습니다. 미이라, 피라미드가 그래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인류를 불러서 구원시켜 주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 들을 애굽에서 건져냅니다. 건져내시면서 당장 앞에 건너갈 수 없는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만나로 먹여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 샘물로 그들을 먹여 주시면서 훈련을 시킵니다. 진정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며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 다. 40년 동안 하나님이 훈련을 시켜도 아무도 그것을 못 깨달습니다. 그래서 광야 에서 다 죽고 맙니다. 오늘 말씀에도 너희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멸망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어집니다. 그 사실을 깨 달은 자가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와서 하나님에 의해서 살다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 가서도 하나님이 당장,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 의해서 살고 너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너희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 의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나오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주장과 우리의 뜻에 의해서 살고 내 어떤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할례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고 이제는 나의 나됨은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왔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매일 먹고 사는 양식도 하나님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나는 살고 먹던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다면 할례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합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빌립보서 3장 3절에 적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곧 육신을 벗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서 참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위해서 할례 의식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골로세서 2장 11절 말씀에 '할례는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육체의 표피를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이 것을 끝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할례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진정 내가 중심이 아닌 예수님이 내 구주로 바뀌어 질 때 우리는 이제는 나에 의해서 나온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는 예수 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합니다. 십일조를 왜 드립니까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십 일조를 드리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탐하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의 고백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어질 것입니다. 물질보다 더 큰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내게 주어졌고 이 세상의 물질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물 질을 다스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이 내게 주어짐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부르지만 진정 할례의 체험이 없는 신앙의 생활을 많이 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 속에는 영적 진보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한 예를 들자면 베드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 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선택하고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해서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필요로 하고 쓰시는 사람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불려져도 우리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질 수 없습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면서 드려지는 것만이 하나님을 위 해서 쓰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에 의해 부름받았습니다. 3년동안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주님의 수제자로 쓰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주님이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닙니다. 나는 절대 당신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고 대답합니다. 그 상태는 할례의 체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나는 열심을 내지만 자신 이 중심입니다. 혈기를 내고 분노를 내지만 할례받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새 벽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 부인했습니다. 부인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정말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과정이 곧 할례의 과정인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 그것이 할례의 과정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졌습니다. 교만하고 자신을 신뢰하고 자 신 만만했던 베드로는 할례의 순간을 통해 자신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영 주님을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주님을 쫒아 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후 그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신약의 말씀을 가지고 할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7절을 통해서 할례라는 것은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 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래서 나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앞에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은즉 이제는 내 안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골로세서 2장 12절을 통해서 보면 할례의 의미는 부활함이라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할례도 이렇게 말씀을 맞추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태어난지 8일 째 되는 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는 오늘날 우리가 받는 세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중심인 세례는 세례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양심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세례의식입니다. 내 중심의 삶이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 세례의 의식입니다.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 의해서 살고 나를 위해서 살던 삶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한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하 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할례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녀인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이든지 우리로부터 나오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 의해서 뭔가 되어지기를 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곳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은 우 리를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옴을 깨닫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한 생명의 복 가운데로 인도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할례를 행한 장소는 '길갈'입니다. 그 의미는 애굽의 더러운 것이 다 떠나갔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묻어온 모든 것 들이 다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계속 나아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 의식을 한 이후에 유월절 의식을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 약속이 이루어 집니 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가면 그 소산을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이 유월절 이후에 가나안에서 나온 소산물들을 수확해서 양식으로 먹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 이스라엘 백성들,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되어졌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고 하늘의 생수를 마시면서 매일 영적 배부름을 체험하고 날마다 생수의 물을 마 시는 삶은 십자가 앞에 나를 포기한 순간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서 내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내어놓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 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늘의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이 유는 그것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새로운 계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새싹이 돋는 3월입니다. 이 순간 예수가 나의 주님임을 고백하시고 길갈의 체험을 하시면서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것을 가지고 하늘을 이 땅에 심 어가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2003-09-30 23:49:23 read : 4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전적 하나님에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죄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믿고 영원토록 우리에게 기름진 영의 땅으로 우리는 인도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발을 놓은 직후에 하나님께서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명령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이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이 하나님이 임재 하셨던 그 곳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시켜 주신 그곳에서 돌 열 두 개를 취해서 다듬지 않고, 지파의 이름을 새기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이 하셨음을 알리기 위하여 그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복받게 하기 위해서 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들으면 서 우리 교회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을 뒤돌아 볼 때 우리는 너무 우리의 이름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기념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기념적인 어떤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 우 리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면 그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명예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명예를 쫒는 사람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거짓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명예는 그것을 포기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새로운 길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제 하나님이 두 번째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구 약의 모든 이야기들은 장차 이루어질 아름다운 사건의 그림자들입니다. 구약에 있었던 이야기가 그때 끝나 버리고 신약에 와서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약의 여러 가지 일들은 신약에 와서 아름다운 일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명령은 무엇인가? '할례의식을 행하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할례란 단어가 10번이 나옵니다. 할례의 의미는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의 사전에 보면, 창세기 17장에 할례란 말이 처음 나옵니다.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약간 끊어내는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는 이 유가 무엇인가? 의학적 해석과는 달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다시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를 부르셔서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 할례 의식을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라고 나옵니다.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되었다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할례의식을 통하여 너와 나 사이에 가려진 것들이 없어지고 정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할례에 대 한 의미를 알면서 할례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 주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육적으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육체적으로 할례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할례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과 연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다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낳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자녀를 낳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통해서 우리의 목 적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 리를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어질 때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통해서 성취되어질 때 우리는 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욕심에 빠집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우리는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들을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표현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내 개인의 어떤 것이 드러나지 않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내 속에 역사하고 나를 통해서 그 하나님이 표현되어 진다면 이 세 상은 사랑으로 충만하여 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상은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표현이 아니고 우리의 타락한 자아를 다스리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시기가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미움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 나라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런 하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날 때만이 가능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이 내게서부터 나오는 것을 가지고 나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일들, 애굽이라는 자체가 하나님을 부 인하는 나라입니다. 왕이 신입니다. 왕은 스스로 신 인줄 알고 영원히 살 줄 압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 생각을 했습니다. 미이라, 피라미드가 그래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인류를 불러서 구원시켜 주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 들을 애굽에서 건져냅니다. 건져내시면서 당장 앞에 건너갈 수 없는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만나로 먹여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 샘물로 그들을 먹여 주시면서 훈련을 시킵니다. 진정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며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 다. 40년 동안 하나님이 훈련을 시켜도 아무도 그것을 못 깨달습니다. 그래서 광야 에서 다 죽고 맙니다. 오늘 말씀에도 너희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멸망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어집니다. 그 사실을 깨 달은 자가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와서 하나님에 의해서 살다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 가서도 하나님이 당장,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 의해서 살고 너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너희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 의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나오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주장과 우리의 뜻에 의해서 살고 내 어떤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할례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고 이제는 나의 나됨은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왔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매일 먹고 사는 양식도 하나님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나는 살고 먹던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다면 할례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합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빌립보서 3장 3절에 적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곧 육신을 벗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서 참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위해서 할례 의식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골로세서 2장 11절 말씀에 '할례는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육체의 표피를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이 것을 끝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할례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진정 내가 중심이 아닌 예수님이 내 구주로 바뀌어 질 때 우리는 이제는 나에 의해서 나온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는 예수 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합니다. 십일조를 왜 드립니까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십 일조를 드리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탐하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의 고백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어질 것입니다. 물질보다 더 큰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내게 주어졌고 이 세상의 물질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물 질을 다스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이 내게 주어짐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부르지만 진정 할례의 체험이 없는 신앙의 생활을 많이 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 속에는 영적 진보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한 예를 들자면 베드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 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선택하고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해서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필요로 하고 쓰시는 사람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불려져도 우리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질 수 없습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면서 드려지는 것만이 하나님을 위 해서 쓰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에 의해 부름받았습니다. 3년동안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주님의 수제자로 쓰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주님이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닙니다. 나는 절대 당신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고 대답합니다. 그 상태는 할례의 체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나는 열심을 내지만 자신 이 중심입니다. 혈기를 내고 분노를 내지만 할례받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새 벽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 부인했습니다. 부인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정말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과정이 곧 할례의 과정인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 그것이 할례의 과정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졌습니다. 교만하고 자신을 신뢰하고 자 신 만만했던 베드로는 할례의 순간을 통해 자신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영 주님을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주님을 쫒아 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후 그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신약의 말씀을 가지고 할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7절을 통해서 할례라는 것은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 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래서 나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앞에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은즉 이제는 내 안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골로세서 2장 12절을 통해서 보면 할례의 의미는 부활함이라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할례도 이렇게 말씀을 맞추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태어난지 8일 째 되는 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는 오늘날 우리가 받는 세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중심인 세례는 세례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양심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세례의식입니다. 내 중심의 삶이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 세례의 의식입니다.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 의해서 살고 나를 위해서 살던 삶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한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하 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할례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녀인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이든지 우리로부터 나오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 의해서 뭔가 되어지기를 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곳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은 우 리를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옴을 깨닫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한 생명의 복 가운데로 인도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할례를 행한 장소는 '길갈'입니다. 그 의미는 애굽의 더러운 것이 다 떠나갔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묻어온 모든 것 들이 다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계속 나아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 의식을 한 이후에 유월절 의식을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 약속이 이루어 집니 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가면 그 소산을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이 유월절 이후에 가나안에서 나온 소산물들을 수확해서 양식으로 먹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 이스라엘 백성들,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되어졌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고 하늘의 생수를 마시면서 매일 영적 배부름을 체험하고 날마다 생수의 물을 마 시는 삶은 십자가 앞에 나를 포기한 순간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서 내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내어놓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 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늘의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이 유는 그것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새로운 계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새싹이 돋는 3월입니다. 이 순간 예수가 나의 주님임을 고백하시고 길갈의 체험을 하시면서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것을 가지고 하늘을 이 땅에 심 어가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가나안 땅에서의 두 번째 명령/수5:1-9 2003-09-30 23:49:23 read : 3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전적 하나님에 은혜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죄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믿고 영원토록 우리에게 기름진 영의 땅으로 우리는 인도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발을 놓은 직후에 하나님께서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명령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명령이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이 하나님이 임재 하셨던 그 곳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시켜 주신 그곳에서 돌 열 두 개를 취해서 다듬지 않고, 지파의 이름을 새기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이 하셨음을 알리기 위하여 그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복받게 하기 위해서 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들으면 서 우리 교회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을 뒤돌아 볼 때 우리는 너무 우리의 이름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기념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기념적인 어떤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 우 리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면 그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명예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명예를 쫒는 사람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거짓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명예는 그것을 포기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새로운 길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제 하나님이 두 번째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구 약의 모든 이야기들은 장차 이루어질 아름다운 사건의 그림자들입니다. 구약에 있었던 이야기가 그때 끝나 버리고 신약에 와서 새롭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구약의 여러 가지 일들은 신약에 와서 아름다운 일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명령은 무엇인가? \'할례의식을 행하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할례란 단어가 10번이 나옵니다. 할례의 의미는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의 사전에 보면, 창세기 17장에 할례란 말이 처음 나옵니다. \'남성 생식기의 표피를 약간 끊어내는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는 이 유가 무엇인가? 의학적 해석과는 달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다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다시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를 부르셔서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 할례 의식을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라고 나옵니다.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되었다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할례의식을 통하여 너와 나 사이에 가려진 것들이 없어지고 정말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할례에 대 한 의미를 알면서 할례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 주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육적으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육체적으로 할례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할례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과 연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다 창조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낳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자녀를 낳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통해서 우리의 목 적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 리를 위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어질 때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를 통해서 성취되어질 때 우리는 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욕심에 빠집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면 우리는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우리들을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표현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내 개인의 어떤 것이 드러나지 않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내 속에 역사하고 나를 통해서 그 하나님이 표현되어 진다면 이 세 상은 사랑으로 충만하여 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상은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표현이 아니고 우리의 타락한 자아를 다스리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시기가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미움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 나라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런 하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기를 하나님이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날 때만이 가능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것이 내게서부터 나오는 것을 가지고 나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일들, 애굽이라는 자체가 하나님을 부 인하는 나라입니다. 왕이 신입니다. 왕은 스스로 신 인줄 알고 영원히 살 줄 압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 생각을 했습니다. 미이라, 피라미드가 그래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시 인류를 불러서 구원시켜 주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그 들을 애굽에서 건져냅니다. 건져내시면서 당장 앞에 건너갈 수 없는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광야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만나로 먹여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 샘물로 그들을 먹여 주시면서 훈련을 시킵니다. 진정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며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 다. 40년 동안 하나님이 훈련을 시켜도 아무도 그것을 못 깨달습니다. 그래서 광야 에서 다 죽고 맙니다. 오늘 말씀에도 너희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아서 멸망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어집니다. 그 사실을 깨 달은 자가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와서 하나님에 의해서 살다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 가서도 하나님이 당장,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 의해서 살고 너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삶이 너희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 의식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나오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주장과 우리의 뜻에 의해서 살고 내 어떤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할례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고 이제는 나의 나됨은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왔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매일 먹고 사는 양식도 하나님에 의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나는 살고 먹던지, 마시던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다면 할례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합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빌립보서 3장 3절에 적혀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곧 육신을 벗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서 참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위해서 할례 의식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골로세서 2장 11절 말씀에 \'할례는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육체의 표피를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아가는 모든 삶,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이 것을 끝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할례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진정 내가 중심이 아닌 예수님이 내 구주로 바뀌어 질 때 우리는 이제는 나에 의해서 나온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는 예수 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합니다. 십일조를 왜 드립니까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십 일조를 드리는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탐하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의 고백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의 고백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어질 것입니다. 물질보다 더 큰 하나님의 생명이 내게 주어졌고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내게 주어졌고 이 세상의 물질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물 질을 다스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이 내게 주어짐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부르지만 진정 할례의 체험이 없는 신앙의 생활을 많이 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 속에는 영적 진보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한 예를 들자면 베드로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필요로 하 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선택하고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필요해서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필요로 하고 쓰시는 사람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만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불려져도 우리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질 수 없습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면서 드려지는 것만이 하나님을 위 해서 쓰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에 의해 부름받았습니다. 3년동안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주님의 수제자로 쓰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떠합니까? 주님이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아닙니다. 나는 절대 당신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고 대답합니다. 그 상태는 할례의 체험이 없는 상태입니다. 나는 열심을 내지만 자신 이 중심입니다. 혈기를 내고 분노를 내지만 할례받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새 벽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 부인했습니다. 부인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는 정말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과정이 곧 할례의 과정인 것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 그것이 할례의 과정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졌습니다. 교만하고 자신을 신뢰하고 자 신 만만했던 베드로는 할례의 순간을 통해 자신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영 주님을 떠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주님을 쫒아 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후 그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신약의 말씀을 가지고 할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 7절을 통해서 할례라는 것은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 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래서 나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앞에 내가 날마다 죽노라. 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은즉 이제는 내 안에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골로세서 2장 12절을 통해서 보면 할례의 의미는 부활함이라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제 8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할례도 이렇게 말씀을 맞추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태어난지 8일 째 되는 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는 오늘날 우리가 받는 세례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중심인 세례는 세례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양심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세례의식입니다. 내 중심의 삶이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 세례의 의식입니다.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 의해서 살고 나를 위해서 살던 삶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한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하 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할례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녀인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이든지 우리로부터 나오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 의해서 뭔가 되어지기를 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는 곳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은 우 리를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나옴을 깨닫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한 생명의 복 가운데로 인도 되어질 수 있습니다. 할례를 행한 장소는 \'길갈\'입니다. 그 의미는 애굽의 더러운 것이 다 떠나갔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묻어온 모든 것 들이 다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계속 나아가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 의식을 한 이후에 유월절 의식을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 약속이 이루어 집니 다.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가면 그 소산을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이 유월절 이후에 가나안에서 나온 소산물들을 수확해서 양식으로 먹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 이스라엘 백성들,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되어졌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늘의 양식을 먹고 하늘의 생수를 마시면서 매일 영적 배부름을 체험하고 날마다 생수의 물을 마 시는 삶은 십자가 앞에 나를 포기한 순간부터 가능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서 내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내어놓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 리가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늘의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이 유는 그것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새로운 계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새싹이 돋는 3월입니다. 이 순간 예수가 나의 주님임을 고백하시고 길갈의 체험을 하시면서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것을 가지고 하늘을 이 땅에 심 어가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가나안 땅에서의 세 번째 명령-여리고 정복/ 수6:1-7, 히11:29-31/ 사순절설교/ 2003-03-10
가나안 땅에서의 세 번째 명령-여리고 정복 수6:1-7, 히11:29-31 여호수아서는 우리의 신앙 생활의 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잘 공부하고 이해하며 우리 신앙 생활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어떻게 신앙생활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 하는 비결도 이 성경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과정을 보면 입성의 과정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입성의 과정, 그것이 1장에서 5장까지입니다. 광야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약속의 땅 구원의 자리에 이르는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첫 번째 명령하신 내용이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악이 만연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결정하셨고, 물로 온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다시는 내가 너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언약의 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심의 모든 것을 청산하고 우리를 구원시키고 새로운 땅에 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라는 이것이 할례의식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의식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하면서도 항상 그 의미를 가집니다. 내가 십자가 앞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절기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내 자신을 죽이고 포기하지 않으면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은 해도 주님과 깊은 교통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나를 십자가 앞에 내려 놓는 순간에 주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가나안 땅에서 첫 열매를 먹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약속대로 그들에게 첫 소산을 주셨습니다. 열매의 의미는 굉장한데 있습니다. 거기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열매는 갈증을 해소시켜 줍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포도열매를 우리가 생각할 때 포도에는 생명의 씨앗이 있고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는 배불리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의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주시고 항상 우리에게 배부름과 만족함을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명가운데 살고 생명을 나눌 수 있습니다. 입성의 단계에는 1번째 단계 요단을 건너라. 요단을 건너서 2번째 단계는 정복의 단계입니다. 여리고 성을 정복하라.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데는 항상 이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는 입성의 단계, 그리고 정복의 단계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입성하시면 왕으로 오셔서 예루살렘을 통치하시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님이 넘어뜨려야 하는 수많은 여리고 성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십자가가 바로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십자가가 바로 주님께서는 큰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방법으로 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순종의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사람들은 다 패배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승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세 번째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바를 지켜가는 과정을 보면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승리의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 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본문 6장을 보면 1~7절까지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8~19절까지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적혀 있습니다. 20~21절까지에는 그 결과가 곧 승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먼저 명령,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와 똑같습니다. 일찍 일어나라. 그리고 언약궤를 앞세우고 아무 말 없이 따라가라. 여기 여리고 성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12절에 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 15절에도 \\\'제 칠일 새벽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앞세웁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와 거리를 두고 사람들이 따라갑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도 항상 하나님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매일 당하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려면 내 앞에서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보면 성 주위를 매일 한바퀴씩 한번씩 돌아라. 엿새동안 그리하라. 제사장 7명이 양 뿔로 만든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 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제사장들이 앞서가고 언약궤가 그 중간에 있고 백성들이 따라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바라보고 따라가라. 제 7일에는 일곱바퀴를 돌되, 양각 나팔을 불고 그 소리가 들리면 소리를 질러라. 7 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성경에 7이란 숫자는 대단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보통 하늘의 숫자를 3이라고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4를 땅의 숫자라 말합니다. 동 서 남 북. 그리고 3과 4를 더해서 완전숫자인 7이 됩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7이란 숫자를 씁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모든 주권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여기 내용 전체로 보면 항상 중심이 하나님이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하나님께서 앞서가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전의 중심이 정말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우리가 하는 모든 초점이 정말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지 우리에게 맞추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리고 성은 굉장한 성 같아도 지금 시대와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성 둘레가 0.6Km입니다. 그러나 이 성이 그 당시에 가나안 땅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8000년부터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중간 규모의 도시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600m의 성은 20여분이면 다 돌 수가 있습니다. 이 성을 하나님께서 돌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앞서가셨고 말씀하신 바를 듣고 믿고 순종함으로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승리의 역할을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리고 성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만사형통인줄 알았습니다. 땅은 좋았습니다. 첫 소산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사실 거기 이미 여러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처형한 왕만 해도 31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만사형통의 복을 주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곳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사형통이 방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악한 영들이 우리로 하여금 만사 형통의 삶을 계속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막는 것 자체가 여리고 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무너뜨리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교회 안에서도 부딪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주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다 누린 것입니다.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고 평안하지 못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악한 영들에 의해서 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장 큰 여리고 성은 우리의 자아입니다. 삐뚤어진 자아입니다. 자신에게 쌓여진 여리고 성이 무너지면 하나님과 교통이 되어집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스스로 십자가 앞에 자기를 죽이지 못하고 살아서 역사하려고 하는 사람이나 제도에 의해서 우리는 교회 생활을 즐겁게 하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것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늘 들어야 합니다. 내 자아와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수 많은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패배하고 맙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찾아가보면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6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었다.\\\'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을 쌓았습니다. 성문이 굳게 닫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지만 문을 굳게 닫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들고 나가보면 사람들이 문을 굳게 닫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을 쌓는 일입니다. 성이 그들의 보호요, 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물질로 성을 쌓습니다. 혹은 자녀나, 지식이나, 직업이 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을 어떻게 정복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 방법을 그대로 배워서 사용하면 헤매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해 나가는 길입니다. 무너뜨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무기나 장비를 준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이 아닌 영적인 싸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악한 영과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심한 하나님의 지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시에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 성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인내하며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일어나서 20분 동안 성을 돌고 와서 진에 머물러 앉아 있습니다. 엿새동안입니다. 마지막 칠일째도 일곱바퀴째 돕니다. 일찍 일어나라 하니 일어나고, 성을 돌라고 하니 돌았습니다. 나팔을 불어라 하니 불었고, 소리가 들릴 때 소리를 지르라고 할 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성이 무너졌습니다. 기적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큰 축복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면 다 순종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을 보면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니 물을 채웁니다. 떠다 주라고 하니 떠다 줍니다. 의심하면서 맛을 본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거기서 여호수아가 이런 지시를 합니다. \\\'입에 아무 말도 내지 말라.\\\' 10절 말씀에 보면 \\\'여호수아에 백성에게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여호수아는 경험이 있습니다. 1차 정탐 때 열두명이 정탐을 합니다. 그러나 10명의 부정적인 사람에 의해서 전체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심지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까지도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는대로 듣는대로 판단해서 말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여호수아가 알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쁜 소식은 사람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만든다.\\\' 부정적인 말은 전염성이 강해서 금방 전체의 분위기를 침울하게 합니다. 반면 좋은 소식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 줍니다. 부정과 긍정은 곧 패배와 승리의 시작이다. 불행과 행복도 부정과 긍정에서 기인되어 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좋은 소식을 전해주러 오신 좋은 소식 자체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만 듣고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먼저 소리를 지르라고 하지 않고 나팔소리가 들리면 듣고 소리를 지르라고 합니다. 나아만 장군의 순종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그들은 부질없는 행동을 보고 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리고성도 튼튼하고 그들은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7일동안 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지만 매년 그 방법입니다. 성찬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어떠한 방법도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이 있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같은 행위를 반복해도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가는 하나님을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생명을 주고 갈증을 해소해 주시고 풍족함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절기입니다. 저는 사순절 때마다 세상의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나를 괴롭히고 방해하는 여러 가지 일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마치 여리고 성을 도는 것처럼 하나님을 앞세우고 사순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광야에서 건지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죄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영원한 은혜의 자리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나안 땅에도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이 있는 것 처럼 오늘날 많은 여리고 성들이 세상에도 있고 우리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내 속 깊숙이 있습니다. 우리가 혈과 육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결단해도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기도만이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앞세워서 하나님이 하시게 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내가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이 무엇인지 알고 주님이 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할 때 주님이 내게 오셔서 나의 주님으로 역사하실 때 변화될 수 있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있는 수많은 여리고 성이 무너뜨려 지시고 사순절 이후에는 정말 부활의 승리를 안겨다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