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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2015-07-13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Question 이제 얼마가 지나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크리스마스는 즉, 성탄절을 기념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탄생이겠죠?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12월 25일이 정말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이 태어나신 때는 언제이며....왜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정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nswer 1. (마 2:1)을 보면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탄생하신 때는 헤롯 왕이 죽기 얼마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셉푸스는 헤롯 왕이 주전 4년 3월 말, 또는 4월 초 월식 직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학자들은 주님께서 탄생하신 때를 주전 5년 말이나 주전 4년 초로 보고 있습니다. 카톨릭이나 개신교는 12월 25일을 예수 탄신일(성탄절)로 지키고, 동방 정교에서는 1월 6일을, 그리고 아르메니아 교회는 1월 19일을 성탄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예수께서 탄생하신 때는 주전 5년 말에서 주전 4년 초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2. 성탄절을 지금과 같이 지키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1) 첫번째 견해 : 로마 축제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됨. "크리스마스"의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12월 25일 설은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지 날"을 채택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입니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지절(12월 24일-다음 해 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당시에 밤이 길어지던 날이 끝이 나고 낮이 다시 길어지고 태양이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를 축제일로 기념했습니다. 이런 동지 풍습은 각국마다 있는데, 우리나라도 역시 12월 22일, 즉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는 등의 풍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교회는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가 된 후에 이러한 태양신의 축제일을 성탄일로 지키기로 결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방신의 축제일인 동지를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키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현재에 가장 유력한 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가 "크리스마스"를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로마"교회에서 "크리스마스"를 지키기 시작한 년대는 335년이라고도 하고, 혹은 354년이라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후에 이러한 "성탄절" 예식은 동방 교회로 퍼져나갔고, "콘스탄티노플"(379년), "카파도기아"(382년)등에서도 지키기 시작되었습니다. 2) 두 번째 견해: 신현절이 교황에 의해 신현절과 성탄절로 구분되어 지켜짐. 고대 교회에서는 2세기에 1월 6일을 "에피파니", 즉 주님이 나타나신 절기라 하여 "신현절"로 지켰습니다. 고대 교회는 이 날을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과,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겸하여 성탄절로 지켰습니다. 1월 6일은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념하고, 세례받으실 때에 아버지와 성령이 나타나신 일을 기념하며, 또 주님께서 가나에서 처음 행하신 이적을 기념 하여 325년에는 전 교회 대부분이 성탄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353~354년 경에 교황 리베리어스가 1월 6일을 신현절, 또는 세례절로 정하고, 반면에 12월 25일은 성탄절로 구분하여 예수 탄생일로 공식 발표하면서 로마에서 이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러한 예식에 동교회에도 동조했습니다. 3) 세번째 견해: 또 다른 학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에서는 원래부터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켰고, 동교회에서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켰는데, 후대에 와서 동-서교회가 모두 같은 날로 지키게 되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한편 현재 개신교와 천주교에서는 12월 25일을, 희랍정교에서는 1월 6일을 알메니아 교회에서는 1월 19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위의 세 가지 견해 중에서 현재 가장 유력한 견해로 지지받고 있는 것은 첫 번째 견해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도 참고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Iconoclastic(성상폐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가르쳐 주세요!/ 2015-07-13
Iconoclastic(성상폐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가르쳐 주세요! iconoclastic(성상(화상) 폐지론)의 의미에 대해서 이 말은 중세 때의 8-9세기에 있었던 \"화상 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때에 일부는 \"화상\"(아이콘; 조각, 그림 등 예술품) 사용을 지지했으며, 다른 쪽은 \"화상\"의 사용을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카톨릭이 예수 상이나 성모 마리아 상 등을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화상의 사용을 반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화상의 사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글자로 쓰여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듯이, 그림이나 동상 등의 예술품도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화상사용을 반대하는 사람(iconoclastic)은 이런 그림이나 동상(아이콘)이 우상 숭배를 조장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8-9세기에는 교회 내에 매우 큰 갈등과 분쟁을 일으켰던 문제였습니다.
Q.T는 왜 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하는 지 가르쳐 주세요!/ 2015-07-13
Q.T는 왜 해야 하고, 또 어떻게 하는 지 가르쳐 주세요! Q. 큐티는 왜 하며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 감사합니다. A. * 다음 웹페이지에 접속하시면 큐티에 관한 자세한 지침을 온라인 강의로 들을 수 있습니다. * 온누리 큐티 강좌 (http://onnuritv.com/web2/seminar/2001qt_theme/theme_0616.htm )
같은 누룩이 어디에서는 복음으로 어디에서는 죄로 상징되는 이유는?/ 2015-07-13
같은 누룩이 어디에서는 복음으로 어디에서는 죄로 상징되는 이유는? Q. 마 13;33에서의 누룩은 누룩의 확산력을 긍정적인 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마16;6-12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한 말씀에서 누룩의 부정적인 면을 나타낸 것 같습니다. 막 8;15, 출 12;15, 레 2;11 에서도 누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마13;33에서만 긍정적으로 사용되어 진 것 같아요. 왜 그런지 알려주세요. A. 1. 주님은 말씀을 하실 때에 여러가지 이미지(상징)들을 사용해서 보다 쉽게 진리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신 이미지 중에 한 가지는 "누룩"입니다. 누룩은 해로운 박테리아의 배양에 의해 감염된 것입니다. "누룩"은 밀가루 에 들어가면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적은 양으로도 많은 반죽을 발효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전하실 때에 이러한 누룩의 특성을 두 가지 의미에서 언급하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누룩의 의미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누룩의 발효 능력을 "복음의 침투력과 영향력"의 상징으로 비유하셨습니다(예-"천국은 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과 같으니..."). 주님은 복음이 마치 누룩처럼 밀가루를 신속하게 발효시키는 것처럼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주님은 누룩의 의미를 부정적인 의미에서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밀가루를 변하게 만드는 누룩의 특성을 사회를 오염시키는 "죄와 부패"의 상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종종 누룩을 사람과 사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악한 영향력의 상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헤롯과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누룩은 헤롯과 바리새인들의 정직하지 못한 기만적인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2. 이와 같이 주님은 한 가지 이미지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한 가지 이미지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불"이란 이미지는 긍정적으로 "성령"의 상징으로도 사용되고(사도행전), 또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혀"(야고보서)의 상징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서를 보면 "여인"이란 이미지도 긍정적으로는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는 "지혜 부인"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고, 부정적으로는 사람을 죄로 이끄는 "음녀"의 싱장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같은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응답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경우/ 2015-07-13
같은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응답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경우 Question 안녕하십니까, 수고가 많습니다. 본인은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으로...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로 몇가지 의문점이 들어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제가 다니는 곳은 미국 엘에이의 개척교회로써 신도가 몇되지 않습니다. 가족으로 해서 약 10가족 정도였는데, 이상한 일로 교회가 분열되어 가고 있어 과연 어떻게 이 사태를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교회 초창기 신도였던 제임스 가족과 조셉가족은 이 교회 이전부터 서로 가깝게 교류하는 사이였으며, 조셉가족과의 친분으로 저희 가족과 테리가족, 그리고 크리스가족등이 합류햐여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전부터 제임스 가족은 개척교회에서의 신앙생활에 회의를 조금씩 가져오던중 (그들의 말에 의하면), 몇가지 목사님과의 마찰에서 목사님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고 결국 교회를 떠나겠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 조셉가족과 테리가족및 크리스가족 그리고 저희가족은 제임스가족과의 대화를 해보았으나, 그들은 확고한 결단을 내린 듯 합니다. 특히 제임스 부부는 두분 모두 여러가지 방향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셨다고 하며 (교회를 떠나라는...) 강건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느날 조셉가족 부인되시는 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데, 제임스가족은 교회를 떠나지 않아야 된다는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두가지 상반된 말씀을 내리실 수가 있을까요? 두 사람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둘 중 한사람은 자신의 뜻을 여러가지 상황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임스가족이 내세우는 목사님과 교회에 대한 흠(?)중 한 가지가, 지금 현재의 교회로 이사오기 이전에 있었던 장소가 그때 당시 계약 만료가 되지 않았는데도 계약을 깨고 나온 것이 나쁘다고 합니다. 물론 잘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때 당시 교회의 재정적 상태가 2개월 이상 임대료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고, 결국 강제축출 당하기 직전에 계약파기하고 나온 것인데, 제임스가족이 말하는 바대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교회/목사\'라고 비난되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참, 제임스가족에게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느냐, 목소리로 들었느냐, 눈앞에 나타나셨느냐 하고 물었더니 마지못해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글을 읽어도, 성경책으로 펴도 그런 식의 말씀만 나오고, 한동안 왕래 없던 집사님/목사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중에도 그런 말이 있으며, 여타 등등 주변 여러가지 상황이 자신들이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이런 식으로 나타납니까? 자신들이 믿고 싶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신들의 의가 아닌지 싶습니다만.. 우문이었을지 모르나 신앙의 초보자로써 심각한 의문사항이 아닐수 없습니다. 명쾌한 답변을 기대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Answer. 1. 우리는 개척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도 있고, 또 좀 더 큰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를 선택해서 봉사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각자가 자신이 받은 은사와 부르심을 따라서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어느 교회를 섬기든지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봉사를 해야 그것이 자신에게도 유익할 수 있고, 또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나 목사님에 대해서 불평을 하거나 원망을 하면서 억지로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의 봉사는 하나님께 열납되기도 힘들고, 또 본인에게나 다른 성도들에게도 별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2. 개척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숙한 인격이 필요합니다. 개척 교회에서의 봉사는 환경이나 재정적으로 여러 가지 많은 짐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조그만 일을 해도 당장에 각 가정에 부담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섬기는 은사를 주신 분들은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감사함과 기쁨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개척 교회에서의 봉사가 교회와 본인에게 모두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개척 교회를 다니다가 중간에 개척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목사님과의 관계에 깊은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그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이 부담스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일단 마음을 낮추어 겸손한 자세를 갖고, 그 교회에서 봉사할 힘을 회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그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고려해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4. 하나님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하는 봉사는 하나님께 드려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오히려 교회에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충분히 기도하고 나서, 자신이 정말로 존경할 수 있는 목사님이 계신 교회로 옮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만일 교회를 옮겨서 감사함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다면 원망하면서 교회에 남아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억지 봉사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와 기쁨속에서 행복하게 신앙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와 기쁨과 평화의 나라이지, 강요나 억지와 싸움하는 독재국가가 아닙니다. 5. 그러므로 본인이 교회에서 목사님과 갈등을 일으키고, 기도하는 중에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면, 축복하는 마음으로 보내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한 성도님이 그가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지시를 들었다고 하면, 한 번 더 정말로 교회를 떠나야 하는지 깊이 기도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해보아도 교회를 떠나야 감사함으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면, 그 교회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떠날 수 있습니다. 6. 이때에 중요한 것은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찾아와서 \"너 그때에 왜 그 교회를 떠났느냐?\"고 물으실 때에 \"나는 이러이러해서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라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신앙 양심에 비추어서 주님 앞에서 결정한 일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각 사람들은 개척교회에 남아 있어도 주님을 섬길 수 있고, 그 교회를 떠나도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고, 또 주님을 위해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나 사나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날 때에도 주님을 위해 떠나야 하고, 교회에 남아 있어도 주님을 위해 남아 있어야 합니다. 7. 어떤 문제를 놓고 서로의 견해가 다를 때에는, 각자가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서 스스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서 진실되게 결정한 일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연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이해해줄 수 없기 때문에,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연약한 사람에게 맞추어 용납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숙한 사람이 연약한 사람의 짐을 담당해 줄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견해가 맞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짐을 져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진지하게 기도해보고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하는 사람이 잇으면, 축복하는 마음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남는 사람들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더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것이 옳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교회를 떠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교회에 남아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결론>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경우 해결법\" 1. 각 사람이 자기 신앙 양심에 비추어 주님 앞에서 내린 결정을 존중해 줄 것 2. 각 사람은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주님 앞에서 심판받을 것을 기억할 것 3. 각 사람은 어떤 다른 결정을 내리더라도 주님을 위해 결정해야 함. 4. 보다 강한 사람이 연약한 사람을 위해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연약한 사람의 입장에 맞추어 줄 것 답변 감사합니다. 구절구절 옳으신 말씀이구요, 저도 개인적으로 (신앙적으론 아직 깊이가 엷으므로) 말씀 하나하나 수긍이가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중입니다. 하지만 제 질문의 핵심을 짚어서 답변을 해주시진 않은 듯 하군요. 모범정답성 말씀만 있는 듯 하고, 가려운 제 부분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제 질문은, (1) 하나님의 말씀을 신도 개개인이 받을 수 있는가? (2)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받는가? (앞에서 열거한 두 가족은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얘기를 자주 함) (3) 같은 사항에 대하여 전여 반대되는 메세지가 각 이해 상충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 (4) 혹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하고자 하는 행위를 강조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5) 교회/목사가 인간적인 (그러나 법적 구속력있는) 약정을 피치못할/불가피한 상황에 의하여 파기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인가? 첫번 글에서 저희 교회의 상황을 말씀 드린 것은 위의 질문만 드렸을 때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시리라 싶어서 입니다. 위의 질문은 앞으로 제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궁금하고 꼬 잣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이지 싶어서 이렇게 다시한번 글을 올립니다. 명쾌한 해답을 기대하면서 이만 접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운영자님과 이 사이트에 있기를 기원하면서.. Answer. 1. 하나님의 말씀을 신도 개개인이 받을 수 있으며,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받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일은 \"예언의 은사\"에 속합니다. 때로는 \"방언\"과 \"방언의 통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신약 성경 중에서 고린도전서(12-14장)에 집중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초대 교회 당시에는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교회에 전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에는 이러한 초자역적인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여 불신자들을 믿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신약 성경이 기록된 후에는 예언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선교지나 최선선에서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는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개척 교회의 경우에 교회를 세우고, 불신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때로 이러한 은사가 주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성령께서 임의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은사를 받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아래 주소를 클릭해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http://biblenara.org/q&a/Q392.htm). 2. 같은 일에 대해 반대되는 메세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될 수 있는가? 혹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하고자 하는 행위를 강조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신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은사를 주실 경우에 그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하십니다. 방언의 은사를 주실 경우에는 그것을 통역하는 은사를 함께 주시고, 예언의 은사를 주실 경우에도 그것이 사실인지 아니지 분별할 수 있는 은사를 가진 은사를 주십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로 인해 큰 혼란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공적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것도 2-3인 이상이 함께 통역을 해서 그 통역이 사실이라는 것이 확인할 수 있을 경우에만 허락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이 있는 경우에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어서 그 말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악령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같은 일을 놓고 다른 해석이 주어지는 경우에는 어느 것이 진실 인지 분별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을 클릭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영 분별의 은사에 대해서 (http://biblenara.org/q&a/Q149.htm) * 성령/악령의 음성 구별하기 (http://biblenara.org/q&a/Q29.htm) 3. 같은 일을 놓고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 경우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여 선지자 한 사람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큰 박해를 받게 된다고 예언을 하고, 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고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여선지자의 예언대로 그 곳에서 유대인들로 인해 체포되어, 감옥에서 오랫 동안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과연 여선지자가 한 말이 맞을까요? 아니면 사도 바울의 행동이 맞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두 사람이 모두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선지자가 바울의 고난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후에 그 모든 예언이 사실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고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라기보다는 지도자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충정이었을 것입니다. 성도로서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큰 위험에 처할 것을 알면서, 그 곳으로 가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여 선지자의 권고는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사랑의 권고였습니다. 바울 역시 선지자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환난을 겪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는 결국 감옥에 갇혔다가 죄인의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이라면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도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같은 일을 놓고도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어느 한 사람이 맞고 다른 한 사람이 틀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성령에 의해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라면 두 사람이 모두 다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라면 성령께서 각 사람을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세월이 지나면 결국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3. 교회(목사)가 인간적인 (그러나 법적 구속력 있는) 약정을 피치 못할(불가피한) 상황에 의해서 파기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인가? 가능하면 성직자로서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목회자들이 무리하게 건물을 빌려서 교회를 세웠다가 임대료를 지불하지 못해서 부득이하게 나가야 되는 경우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목회자는 신뢰도에 있어서 타격을 입고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 성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피치 못할 일로 인해 계약을 파기하게 되는 일이 생긴 경우에 너무 그 일에 매달려서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이 생기면 성도들은 비난이나 원망하는 일에 에너지를 사용하기 보다는, 더욱 더 하나가 되어서 더 많이 기도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제가 볼 때에는 교회를 떠나려는 분의 경우 계약을 파기한 일보다는, 목회자에 대한 신롸와 사랑이 식어진 점이 더 큰 문제로 보여집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에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사라지면, 교회를 떠나야 할 이유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신뢰 관계가 사라지면 모든 일들이 은헤가 되지 않고, 또 떠나야 할 일들만 보이기 마련입니다. 제가 앞의 글에서 사랑에 대해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개척 교회 멤버들이 교회가 성장하면서 목회자들과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떠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 실제로 그 사람이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이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개척에 은사가 있어서 개척 당시에는 그의 역할이 크지만, 어느 정도 교회가 안정이 되면, 또 다른 개척지로 옮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적당한 때가 되어 교회를 떠나는 일은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심으로 교회를 떠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겸손함과 인내로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교회를 떠나는 경우에 는 그가 교회를 떠난 후에 많은 고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첫 번째 교회에서 받을 연단을 옮긴 교회에서도 다시 한번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연단을 통과하면 또 다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한 번 실수한 경우에,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다시 불러서 귀한 그릇으로 사용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굳이 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는 경우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분을 축복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에 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결국 남게 될 것이고,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고 용납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두고 그 분에게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개신교 안에 있는 여러 종파에 대해서 쉽게 설명해 주세요!/ 2015-07-13
개신교 안에 있는 여러 종파에 대해서 쉽게 설명해 주세요! Question 장로교.감리교.성결교,침례교.하나님의 성회 등과 같은 개신교 종파들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를 가슴에 두고 진리를 찾으니 기쁨이 넘칩니다.^^ 수고 하시고 답변 기다립니다. Answer 1. 개신교의 각 교파는 기독교 역사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약점들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장로교는 카톨릭의 부패와 비성경적인 제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일어난 종교개혁자들과 깊은 관계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이 성경에 없는 제도를 만들어 내게 되자 오직 성경만을 좆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카톨릭이 지나치게 사제 중심으로 운영되자 평신도의 참여를 강조했으며, 카톨릭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선행을 강조하게 되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2. 장로교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태어났으며, 이러한 교리를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장로교는 카톨릭과 달리 평신도 중에서 비례 대표를 선출해서 목회자와 함께 교회 운영에 참여시켰습니다. 이러한 평신도 대표들을 장로라고 불렀기 때문에 장로교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장로교는 특히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믿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3. 그러나 장로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반면에 인간의 책임을 소홀하고, 교리를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가 경직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감리교는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주권보다 인간의 믿음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함으로 구원을 얻으며, 택한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리교는 활발한 전도 운동과 사회 사업으로 침체된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4. 침례교는 좀더 자유롭고 독립적입니다. 침례교는 특별한 신조가 없이 각자 양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장로교나 감리교가 총회나 연회, 또는 노회의 감독을 받는 반면, 침례교는 개 교회가 독립적으로 운영합니다. 침례교는 감리교와 정반대로 모든 교인들이 직접 교회 운영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제도로 운영됩니다. 장로교가 대의 민주제라면, 감리교는 중앙집권제, 그리고 침례교는 직접 민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침례교의 특징은 침례에 대한 교리에 있습니다. 침례교에서는 물을 머리에 뿌리는 약식 세례를 거부하고 온 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를 주장하며, 믿음이 없는 어린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유아세례)을 반대합니다. 5. 성결교는 원래 동양에 있는 나라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생겨난 단체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파들과 특별히 다른 특징은 없습니다. 한 가지 있다면 구원을 받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성결한 삶(성화)을 강조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성회 역시 다른 교단과 교리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 나라의 순복음교회와 같이 성령 운동을 강조하는 점입니다. 그들은 구원 받을 때에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고, 성령에 의해 나타나는 신유나 기적들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성령 운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회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각 교단은 교리에 있어서 다른 교단의 약점을 보완하고 있거나, 아니면 강조하는 점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으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6. 더 자세한 자료는 아래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개신교의 각 종파에 대해서 (http://biblenara.org/q&a/gyopa.htm)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마이너스 상태인데 꼭 십일조를 내야합니까?/ 2015-07-13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마이너스 상태인데 꼭 십일조를 내야합니까? Q1. 현재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급여가 작아서 현재 생활을 해도 계속 마이너스가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통장에는 \"-\"이지만 십일조는 계속 드려야 된다는 생각에 그래도 급여를 받는 그대로 드리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풍족히 드리고 싶은 마음은 많지만 생활비가 계속 마이너스가 되어 적금을 깨서 메꾸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파산이 될 지도 모른다는 심적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좋은 답변을 부탁합니다. 십일조를 드려야 하지만 본인의 재산이 마이너스가 되면서 정확한 십일조를 드리는 일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형편에 따라서(예를들어 이십일조) 헌금을 드리면 안되는 지 알려주십시오! 참고로 저희 교회는 십일조 금액이 적혀 있어서 교회에 낸 헌금이 금방 알려집니다. 그래서 더 고민입니다. 바쁜시간 죄송합니다. 몸은 건강하신지요. 목사님 답변에 순종하겠습니다. A1. 요즈음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서 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 생각에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 기도하면서 지출하지 않아도 될 부분을 정하고 가능한 지출을 줄여본다. 요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지출을 줄여가고 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만큼 필요없는 소비를 줄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필요없는 소비를 하면서 재정이 모자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정상적으로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해서 기도한다. 소비를 최대한 줄였는 데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정상적인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만큼을 항상 채워주십니다. 물론 특별한 이유로 인해서 잠시 어려움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실족할만큼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적금을 깼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그 돈이 떨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우리에게 주시며, 또한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어 우리로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저는 님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한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님을 경제적으로 파산을 당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경제의 은사를 받은 분에게 조언을 구하고 기도를 부탁한다. 성도들 중에는 경제의 부분에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주시기 위해서 물질적인 면으로 여러 가지 연단과 시험을 거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물질에 대한 여러 가지 체험을 가지고 있고,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특별한 길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이러한 분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중보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4. 십일조를 할 때에 결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님의 경우와 같이 교회에서 십일조 액수를 공개하는 경우에는(참으로 아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헌금을 할 유혹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더 많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경제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혼자만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글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의 질문에 대해 답변한 경우인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빛을 진 상태에서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http://biblenara.org/q&a/Q57.htm) Q2. 요즘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은행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서 쓰고 있어요. 월급은 그 통장으로 들어가면서 마이너스를 메꾸고 있죠. 그런데 통장관리가 어려워지면서 계속 많은 마이너스로 유지가 되면서 이번에 들어온 월급으로 정산을 해도 마이너스 몇십만원이 되는군요. 그런데 여기서 십일조를 내면 마이너스 백만원이 넘어요. 저는 결국 소득은 있지만 쓰지 못하는 소득이 되는 입장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십일조를 내야하나요? 십일조를 내면 계속해서 마이너스를 정리하지 못하고 누적된 마이너스가 저를 힘들게 할텐데요. 이런 경우에도 내야 하는지요. 성경에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가 그걸 잠시 빌어쓰는것이어서 소득중 그 일부를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만 저처럼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 사람도 십일조를 내야 하는 것인지요. 힘들어서 그러니 답을 좀 주세요. 잠시 십일조를 유예할 수도 있는 것인지요. 아니면 십일조를 안내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요. 인터넷 어디선가 보았는데 십일조를 강권하면서 내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하던데요. 천주교도 그렇게 심하게 권하지도 않구요. 알기쉽게 설명 좀 부탁드릴께요. A2. 전에 비슷한 상황을 당한 분이 십일조에 대해서 질문을 해서 답변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아래 페이지 주소를 복사해서 인터넷으로 접속해 보시면 참고할 만한 글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슷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혼자만 당하는 어려움이 아니니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계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누구인가?/ 2015-07-13
계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누구인가? Question 요한 계시록 11장에서 두증인을 교회로 보고, 교회가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자, 사단이 교회를 음란(소돔)과 핍박(애굽)으로 죽여서 불신자들의 조롱 꺼리가 되게한다는 해석이 있는데, 맞는 해석인지요? Answer * 아래에 두 증인이 나타나고 있는 (계 11:3-14)의 내용에 대한 해설을 소개하겠습니다. 글이 좀 길지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자세히 설명을 했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읽지 마시고, 시간이 나실 때에 천천히 읽어보시면 질문하신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두 증인에 대해서(계 11:3-14) 1. 두 증인(11:3-6)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 옷을 입고 일 천 이 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히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11:3-6) 주님께서는 자신을 증거 하는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굵은 베 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할 것입니다. 이들이 굵은 베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회개의 메시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굵은 베 옷은 회개하는 자들이 입는 옷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복음을 증거 할 때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라"고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1,260일은 무엇을 말합니까? 세대주의자들은 이 기간이 말세에 있을 3년 반 동안의 환난 기간을 말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3년 반이란 말을 들으면 수리아의 왕 안티오투스에게 박해를 받은 기간을 떠올렸습니다. 왜냐하면 안티오쿠스 4세가 3년 반 동안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성전의 제사를 금지시켰으며,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박해를 당하는 치욕의 기간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들이 36년이란 숫자를 말할 때에 일제 36년의 치욕을 기억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복음주의 학자들은 이 기간을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1,260일, 42달, 3년 반, 그리고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기간은 계시록에서 4번 나타나는 데, 계시록에서 이 기간은 첫째로 (11:3) 을 보면 "교회가 복음을 증거 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둘째로 (12:6)과 (12:14)에서는 교회가 사단의 박해를 피하여 광야에서 양육을 받는 기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13:5)에서는 교회의 박해 기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기간은 한 편으로는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기간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사단이 교회를 박해하는 기간이기도 하며, 또 한 편으로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성령의 보호 아래 양육을 받는 기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두 증인은 누구입니까? 어떤 학자들은 이 두 증인이 엘리야와 모세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는 이적이 엘리야와 모세가 한 것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성경에서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나타날 말세의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예언하는 1,260일을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로 보기 때문에, 이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나긴 기간 동안에 단 두 명의 증인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증인이 말세에 복음을 증거 하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신 자신의 종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이 두 증인을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하였는데, 계시록에서 촛대는 복음의 빛을 비추는 교회를 상징하며, 감람나무는 성령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빛의 사명, 즉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교회에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환상을 스가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슥 4:2-). 스가랴는 일곱 등불이 있는 순금으로 된 등대(금 촛대)를 보았고, 그 곁에 선 두 감람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등대에서 기름이 흘러나와 감람나무에 기름을 공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스가랴가 이 두 감람나무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그들은 두 명의 기름발리운 자를 나타내는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 모셔 선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볼 때 이 두 감람나무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성전 건축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고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성령의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합니까? 성경에서는 한 명의 증언은 효력을 갖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증으로 형제들을 해칠 것을 막기 위해서 두 세 증인의 증언이 있어야만 그 증언을 받아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도 복음을 증거할 때에 두 명의 증인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훈련을 하실 때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명이란 증인의 수를 말합니다. 이것은 말세에 교회가 담당해야 할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 다음 구절에서 두 증인들이 하는 일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적은 모세가 애굽에서 행한 것과 같은 이적입니다. 그들은 또한 하늘을 닫아 예언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행한 이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서 교회가 세상의 박해와 거짓 종교의 미혹이 있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처럼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할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바로와 같은 사단이 세운 정치 세력들의 박해를 이겨낼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같이 거짓 종교의 위협을 이겨낼 것입니다. 이 두 증인이 정치 지도자와(총독 스룹바벨), 종교적인 지도자(대제사장 여호수아)로 된 것은, 사단의 공격이 종교적인 세력(거짓 선지자: 새끼 양)과 정치적인 세력(짐승)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에 우리는 이 두 증인이 말세에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교회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세워주시는 지도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두 증인은 궁극적으로 사단의 종교적, 정치적인 세력에 맞서서 싸우며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을 맞은 모든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 두 증인의 죽음(11:7-10)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물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 성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고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7-10) 두 증인들이 42달 동안의 예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짐승이 올라올 것입니다. 그리고 두 증인들은 그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큰길에 있게 될 것입니다. 3일 반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이 교회를 박해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 박해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3년 반 동안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3일 동안 묻혀 무덤에 묻혀 있었습니다. 주님의 시체가 묻힌 곳은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어기고 온갖 죄를 자행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성을 행해 심판 때에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 성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를 못 박아 죽인 도시였으며, 메시야를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박해한 도시였습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3일 반 동안 죽임을 당하신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될 것입니다. 교회는 정해진 기간 동안에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극한 공격을 받고 잠시 패배한 것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요한 당시에도 마치 로마와 유대인들이 승리하고 교회가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니체의 시대에도 "신이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증인이 묻힌 성이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소돔은 부패와 타락의 도시이며, 애굽은 택한 백성을 박해하던 도시입니다. 그리고 이 두 도시는 모두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성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박해하고, 온갖 죄를 지으며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될 곳, 즉 사단이 활동하는 세상 영역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교회들은 주님께서 복음을 증거 했으나, 세상 사람들에 의해 배척을 받고 사단의 공격으로 죽임을 당했던 것과 비슷한 고난을 받게될 것입니다. 말세로 갈수록 더욱 더 세상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심한 박해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세상에서 겪는 고난은 근본적으로 주님께서 당하셨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을 조롱하고 기뻐했던 것처럼, 교회가 이러한 고난을 받을 때에도 조롱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두 증인의 부활(11-14)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 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 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둘째 화는 지나갔으니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11-14) 그러나 교회는 사단의 공격을 이기고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우편으로 올라가신 것과 같습니다. 두 증인이 죽은 지 3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서 두 증인은 자기 발로 일어설 것입니다. 교회는 극한 환난 속에서 잠시 세상의 공격으로 인해 무너진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회를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두 증인이 죽은 것을 기뻐하던 사람들은 그때에 두려워할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한 원수들은 결국 자신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며, 교회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증인들은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고 그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잠시 동안의 박해를 이기고 승리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잠시 악의 세력에 의해 무너진 것같이 보이지만 결국 의가 승리한 것을 선포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러한 일을 증명해 줍니다. 우리는 그 동안의 역사를 통하여 세상 권세 자들이 교회를 박해할 때마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아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련 후에는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요한은 두 증인이 승천할 때에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지진이 일어나서, 그 성의 1/10이 무너지고 7,000명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지진이 나며 바위가 터지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결국 살아 계시며, 교회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어려울 때에 그것을 보고 기뻐하던 사람들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으시고, 진노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며, 교회를 대적하던 세력들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은 이러한 광경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계19장에 나오는 백마 탄 사람은 누구인가요?/ 2015-07-13
계19장에 나오는 백마 탄 사람은 누구인가요? Question (계 19:11)에서 나오는 "백마"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요? 제가 아는 분이 이 백마의 뜻을 알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어보면 그 백마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던데....혹시 나쁜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해서 마음을 조리고 있더군요! 그래서 질문을 드립니다. 가르쳐 주세요! Answer 본문에 나오는 백마는 주님께서 대적과 싸워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개선장군"이 되셨음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시에 개선장군들은 백마를 타고 모든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성대한 개선 행렬을 했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있는 (계 19:11-16)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의 승리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계19: 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여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1-16)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계 4:1)에서 "하늘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계 11:19)과 (15:5)에서 하나님은 요한에게 "하늘의 성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요한에게 "하늘 자체"를 열어보여 주셨습니다(계 19:11). 요한은 하늘에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그들과 싸우는 메시야와 그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그러면 (계 19:11-16)에서 요한이 본 주님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1. 승리자 첫째로 요한이 본 주님은 승리자였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원수와 싸워 승리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에서 승리자는 항상 백마를 타고 입성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단과 그를 추종하는 모든 세력들과 싸워서 그들을 정복하고 승리하셨습니다. 2. 왕 둘째로 요한이 본 주님은 왕이신 주님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을 쓰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의 머리에 쓴 일곱 면류관과 짐승이 그 머리에 쓴 열 면류관과는 다른 왕권을 나타냅니다. 용과 짐승은 무력과 거짓으로 찬탈한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의로 얻은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쓰신 많은 면류관은 주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충성(신실)과 진실하신 분 세째로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충성스럽고 진실하신 분이었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이름을 "충성"과 "진실"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충신"이라는 이름은 "충성되고 신실하여 믿을만한 분"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충성되시고 신실하신 우리 주님께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또한 "진실'이란 이름은 인격이 진실하고 진리 자체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진실하시며 모든 진리의 근본이 되시는 주님께 적합한 이름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충성되시고 신실하셔서 믿으실만하신 분이며, 진실하시고 진리 자체가 되시는 분입니다. 4. 공의의 하나님 넷째로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공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11절을 보면 주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셨다고 하는 기록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단과 같이 거짓말로 싸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단과 악의 세력들과 싸울 때에 공의로 싸우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의를 행하셨으며,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만국을 심판하실 때에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5. 전지하신 하나님 다섯 째로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전지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오한은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만물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전지 하신 능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6. 정복자 여섯 째로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정복자였습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피 뿌린 옷은 주님께서 적과 싸우실 때에 자신이 인류를 위해 흘린 구속의 피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만일 피 뿌린 옷을 이렇게 해석하면 이 구절은 주님께서 자신이 흘린구속의 피로 사단을 공격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피 뿌린 옷은 주님께서 대적들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승리하셨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피는 대적을 칼로 치는 치열한 전투 중에 당연히 옷에 묻게 마련입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들은 적과 싸워 피가 묻은 옷을 입고 개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왕이 매우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광의 표시였습니다. 7. 기묘자 일곱 째로 요한이 본 주님의 모습은 "기묘자"였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 이름을 쓴 것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은 주님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피조물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주님의 이름이 "기묘자"라 불리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께서는 놀라우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주님에 대하여 알려고 해도 주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기묘하신 분"이시며, 피조물들이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8. 하나님의 말씀 마지막으로 요한이 본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미리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싸우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주님께서 사단과 싸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시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모든말씀을 성취하셨고, 또 말씀으로 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계1장에 나오는 많은 물소리는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세요!/ 2015-07-13
계1장에 나오는 "많은 물소리"는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세요! Q. 안녕 하십니까? 요한 계시록을 읽던 중에 1장에서 많은 물소리란 말이 나왔는데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이렇게 올립니다.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1. 요한 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귀양을 갔다가 성령의 계시를 받고 쓴 계시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로마 황제의 박해로 인해 크게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는 자신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유일한 통치자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주"(Lord)라고 부르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Lord)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이로 인해 크게 박해를 받게 되었고, 당시에 홀로 남아 있던 유일한 사도인 요한도 밧모섬에 귀양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이 계속되면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주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지 갈등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부활하여 하늘과 땅을 다스리고 계시는 진정한 "주님"(Lord)의 모습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계시록 1장에 나타난 주님의 신적인 모습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당시의 성도들에게 엄청난 확신과 용기, 그리고 위로를 주는 계시였습니다. 계 1장에 계시된 주님의 모습은 로마 황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능하고 거룩하신, 그리고 신적인 능력과 위엄을 가지신 우주의 통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바라볼 때에 로마 황제의 박해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 발에 끌리는 옷-제사장이나 왕의 옷-제사장이며 왕이신 주님의 영광 * 가슴에 금 띠-왕 중의 왕이신 주님의 영광 * 흰 머리 털-지혜, 순수, 완전을 상징 * 불꽃같은 눈-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심판하시는 눈 *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은 발-힘과 안전감, 그리고 대적을 짓밟는 힘 *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권세, 위엄 있는 하나님의 음성(나이아가라 폭포가 떨어지는 듯한 거대하고 위엄 있는 음성) * 오른 손에 7별을 잡음-사자들을 붙들고 교회를 다스리고 돌보심 *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입-말씀으로 만국을 심판하심. * 해가 힘있게 비취는 듯한 얼굴-진리의 빛과 신적인 영광 3. 바로 이러한 주님은 7촛대, 즉 교회 사이에 계셨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통치자이신 주님께서 교회를 다스리며, 붙들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주님의 손에 잡은 7별은 교회를 위해 파송한 일곱 사자들(천사, 또는 지도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파송한 사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고, 돌보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당시 박해 받던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4.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볼 때에 세상의 왕, 즉 로마 황제를 압도하는 우주의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어 교회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을 통해 이러한 주님의 계시를 받은 성도들은 로마 황제의 위협 앞에 굴복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로 정절있게 주님을 섬기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당시 교회에는 이단을 받아들인 교회, 세속화된 교회,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위에 나타난 주님이 모습은 이러한 교회들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하고, 또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20장에 나오는 천년왕국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2015-07-13
계20장에 나오는 천년왕국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Question. 같은 종파이지만.. 재림 시에 주님께서 오실 때에 대해서 각각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즉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어느 것이 맞다고 보아야 하나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nswer. * 천년왕국 문제는 수많은 성경 학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토론을 해온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복음적이라고 하는 학자들조차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견해를 모두 설명하려면 책을 한 권은 써야 할만큼 그 내용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천년왕국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견해만을 요약하고, 이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성경 본문: 사단의 결박과 천년 왕국(20:1-6)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 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 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1-6) 요한은 한 천사가 하늘로부터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요한이 보는 가운데 한 용을 사로 잡고 그 용을 쇠사슬로 결박한 후에 무저갱에 던지고 잠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그 무저갱 위에 인봉을 하고 그 용이 1,000년 동안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감금시켰습니다. 요한은 1000년 지난 후에 그 용이 잠깐 동안 놓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그 후에 보좌들과 그 보좌 위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보좌 위에 앉은 사람들이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요한은 신실한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1000년 동안 왕노릇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1000년이 지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이 때에 살아난 것을 첫째 부활이라고 불렀습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고, 짐승의 표를 이마와 손에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제외되었으며,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 1000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은 이 본문을 놓고 씨름해 왔습니다. (계 20:1-6)에는 "천년"이란 말이 4번(1,2,4,7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유명한 "천년왕국"이란 말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천년 왕국"의 의미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견해차이는 다음과 같은 문제로 인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2. 천년왕국의 시기 문제 첫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천년 왕국의 시기"에 대한 문제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천년왕국"이 예수님의 재림 전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앞으로 점점 더 발전될 것이며, 그 후에 "천년 왕국"이 이루어지고,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천년 왕국이 지난 후에 주님의 재림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것을 1)"후천년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천년왕국 후 재림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1-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서구에서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발달한 과학과 문화를 보고 이 땅에 천년왕국과 같은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계 1-2차 대전을 통해서 인간의 죄성을 목격한 후에, 사람들은 이러한 생각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주님께서 먼저 재림하시고, 그 후에 "천년왕국"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천년왕국 전에 주님의 재림이 있다고 해서 학자들은 이 견해를 2)"전천년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천년왕국 전 재림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천년설은 다시 두 가지("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나뉘어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3. 1000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둘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1000년이란 기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에 대한 문제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1000년을 문자 그대로 1000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후천년설"이나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1000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1000년을 문자가 아닌 상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Ladd는 계시록에 언급된 1000년이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때 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천년 왕국은 역사의 마지막에 1000년 동안 있는 기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계시록에 언급된 천년왕국은 주님의 초림부터 재림때 까이의 모든 기간이 라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1000년 동안의 특별한 기간을 부정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견해를 가리켜서 3)"무천년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무천년설"이 천년왕국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주님의 초림부터 재림때 까지의 전 기간을 "천년왕국" 으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4. 천년왕국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견해들 그러면 이제부터 최근에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천년왕국"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좀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 최근에 아주 유행하는 견해 중의 하나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입니다. 이 이름은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몇 가지 시대(세대)로 구분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마지막 때에 7년 대환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7년 대환난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것이며, 그때에 성도들이 공중으로 휴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휴거된 성도들은 7년 대환난 기간 동안에 공중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가, 7년 대환난이 끝나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성도들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왕노릇을 하는 천년왕국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도들이 땅위에 내려와서 천년 동안 왕노릇을 하는 시대는 이스라엘 중심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때에 이스라엘이 세계 최대강국이 되고, 예루살렘이 세계의 수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때가 되면 모슬렘에 속해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찾고, 그 성전에서 다시 제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의 보좌를 계승한 메시아께서 유대인 중심의 천년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를 구약의 예언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다윗왕조의 회복을 예고하는 예언과, 미래에 회복될 성전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는 에스겔서에서 찾고 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러한 예언들이 모두 문자 대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장차 대환난 후에 다윗왕조와, 성전이 회복되고, 그 성전에서 다시 짐승의 제사가 드려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동물 제사가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모형이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짐승제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에는 1년에 한 번씩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더 이상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셨고, 그 곳에서 우리를 위한 제사장 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땅에 성전이 회복되고, 그 곳에서 다시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는 세대주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세대주의적 천천년설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복음을 다시 율법의 시대로 돌아가게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2) 역사적 전 천년설 그 다음 현대 기독교인에게 익숙해 있는 견해는 "역사적 전천년설"입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은 (계 20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마지막 때에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실제로 사단이 결박 당하고 1000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지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현재는 사단이 완전히 결박된 것이 아니라,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 후에 사단이 완전히 결박되어 1000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질 것이며, 그 때에 실제로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때에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일어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1000년 동안 왕노릇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천년이 지난 후에 다시 살아나서 마지막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에서 제외되고, 1000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계 20장)의 내용이 주님의 재림 후에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견해는 "역사적 전천년주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첫째로 (계 20장)은 주님께서 사단을 결박하는 것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 17-19장)에서 이미 짐승과 거짓선지자, 그리고 그를 따르는 모든자들이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미 모든 심판이 끝났기 때문에, 사단이 미혹할 열방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다시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려고 사단을 결박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둘째로 성경에는 천년왕국이 역사적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언급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은 오직 (계 20장)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일어날 중요한 사건에 대해서는 항상 여러 번 반복해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여러 번 반복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들어갈 것과, 그 후에 다시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또한 그 후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된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에 대해서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면 실제로 재림 후에 1000년 동안 계속될 특별한 왕국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을 매우 어색해 보입니다. 1-2년도 아니고 1000년이나 계속될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다른 선지자나 사도들도 이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일에 대해서 다른 모든 성경이 침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천년왕국을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에 주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주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니엘이나 이사야, 그리고 요한과 같은 성인들도 주님 앞에 서게 되면 그 영광에 압도되어 죽은 사람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천년왕국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면 순교자들 뿐 아니라, 믿지않는 열국백성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한 사람들이 천년 동안이나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다는 점은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주님과 함께 1000년을 지낸 후에도 여전히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점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1000년이나 통치하시는 주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을 믿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3) 무 천년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무 천년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천년을 상징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계 20장)에 언급된 1000년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때 까지의 전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단이 결박 당한 사건을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과 약간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마 12:28)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무 천년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미 사단이 결박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이미 사단이 결박되었으며, 귀신이 쫓겨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해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사단의 결박이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초림부터 재림때까지의 전 기간이 바로 사단을 결박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천년왕국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견해를 받아들일 때에도 역시 문제점은 있습니다. 첫째로 이 견해는 사단의 결박에 대한 해석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계 20장)을 보면 사단은 쇠사슬에 매여 무저갱에 던져졌고, 그 입구를 잠그고 인봉까지 쳤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완전히 갇힌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재를 보면 사단이 완전히 갇혀 있기 보다는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계 12-13장)에 언급된 것처럼 용은 여인이 낳은 아이인 그리스도를 삼키려고 했으며, 그 공격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여인으로 상징된 교회를 박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단의 사주를 받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 역시 현재에도 계속해서 활동하면서 교회와 세상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견해는 죽은자들의 부활에 대한 해석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들은 순교한 자들이 다시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하는 것을, "죽은 영혼들이 하늘에 올라가서 지금 주님과 함께 통치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순교자들이 육체적으로는 죽임을 당했지만, 그 영혼은 지금도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 20장)에 언급된 "첫째 부활"을 "죽은 성도들의 영적인 부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본문을 인위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5. 어느 것이 맞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떤 견해를 따라야 합니까? 전천년설입니까? 후천년설입니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입니까? 역사적 전천년설입니까? 아니면 무천년설입니까?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세대주의적 전 천년설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짐승 제사가 다시 드려진다는 주장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가 완성되었다는 히브리서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속죄의 제사가, 또 다시 짐승의 피를 통해서 드려져야 한다는 모순을 안게 됩니다. 이러한 주장은 복음을 율법으로 되돌리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은 나름대로 수용할 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천년설의 주장은 (계 20장)의 본문을 자연스럽게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천년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지금도 (계 20장)의 사건들이 주님의 재림 후에 실제로 일어날 것으로 믿고, 그 날을 사모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천년설 역시 장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미 사단을 결박하셨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살아서 주님과 함께 통치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천년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가올 미래보다는 현실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점을 강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6. 다양한 견해가 나오는 이유들 그러면 왜 이렇게 똑같은 본문을 놓고 다양한 견해들이 나올 수 있습니까? 저는 이러한 다양한 견해가 나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성경이 이에 대한 자료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년왕국의 시기나, 그 기간에 대해서 어느 한쪽의 주장을 확정할만큼 충분히 계시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천년왕국의 시기나 기간에 대한 문제가 구원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재림의 시기와 때에 대해서 우리에게 정확히 계시해주지 않은 것과 비슷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말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잘못하면 본문이 말하려는 요점을 놓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문에서 말하려는 것은 천년왕국의 시기나 기간이 아닙니다.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국 사단이 결박될 것이며, 그 때에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년왕국의 시기나 기간에 대해서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단의 결박이 있을 것이며,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것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둘째는 각자가 자신이 생활해 온 입장에서 본문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회자나 신학자에게 의해 강한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일단 한 견해에 익숙해지면 다른 사람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목회자나 신학자의 견해는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극한 박해나 고난 속에서 자란 성도들은 전천년설에 익숙해 있습니다. 악이 득세하는 현실을 보면서 현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이 세상을 통치하는 천년왕국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성도들은 "전천년설" 입장에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한국성도들은 일제 치하와 민족동란을 거치면서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이 기독교인을 결박하고 고문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현재를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이 통치하는 천년왕국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 장차 주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할 미래의 "천년왕국"을 고대하며 자라왔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교회 서옫들은 역사적 전천년설이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문화와 사상이 발달한 나라에서 자라난 성도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이러한 나라에서 자라난 성도들은 후천년설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끝없이 발전해 가는 과학이나 교육을 보면서 이 땅에도 얼마든지 천년왕국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역사가 점점 발전해 가다가 이 세상에 천년왕국과 같은 유토피아를 이루고, 그 후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보다 인간의 일반 은총에 의한 유토피아 건설이 관심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크게 강조하는 사회 속에서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기독교 국가에서는 무천년설에 익숙해지기 쉽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문화가 이루어진 세상을 보면서, 지금 사단이 결박되고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통치하는 천년왕국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러한 견해가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되어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유럽이나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신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를 한국 교회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고난이 많은 나라에서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그리고 인본주의 문화가 꽃피는 곳에서는 후천년설이, 그리고 기독교문화가 발달한 세계에서 무천년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7. 결론: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다양한 견해의 차이가 본문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해석할 때에 견해 차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본질적인 것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견해를 따라 해석하든지 강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공통적인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우리들에게 강조해주는 이야기의 공통적인 초점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본문은 우리들에게 사단이 굉장한 세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 당시에 로마 황제의 위력은 대단해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 로마 황제 앞에 박해를 받는 성도들은 바람 앞에 낙엽과 같은 아무 힘없는 존재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세상에서 짐승이나 새끼양같은 정치세력과 거짓선지자가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에게 용과 짐승과 새끼양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잠시 세력을 얻었을 뿐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악한 세력들은 천사에 의해 영원히 결박되고 멸망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천년왕국의 기간이나 시기 문제를 놓고 토론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로마 황제가 스스로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칼을 휘두르던 때에 살던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본문은 당시에 대단해 보이는 황제와 거짓종교 주동자들이 멸망하고 교회가 승리할 것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세상권력과 거짓종교들이 아무리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영적 싸움을 할 힘을 얻어야 합니다. 둘째로 본문은 주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사람들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로마의 박해 앞에서 순교의 위협을 당하고 있던 성도들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본문은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과 거짓 종교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성도들에게 큰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정치세력과 거짓종교의 위협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쓰여졌습다. 본문은 순교의 위협을 받던 성도들에게 큰 위로를 주고, 정치세력과 거짓종교의 위협 앞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굶주림과 가난속에 살아야 했던 성도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가지고 천년왕국의 기간이나 시기 문제로 시간을 보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본문이 성도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의 배후에 사단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다. 우리는 본무을 통해서 세상의 정치 세력과 거짓 종교가 대단해 보여도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가 되면 그들이 심판을 받고 멸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주님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순교자들과, 끝까지 충성한 성도들이 얻을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인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현재 받는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얻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22:18-19에서 예언을 제하고 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요?/ 2015-07-13
계22:18-19에서 예언을 제하고 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요? Question. 연일 수고하여 주심을 먼저 감사드립니다. 이 곳을 통하여 666에 대한 자료를 얻어 666에 대하여 논의 하다가 곁길로 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순수힌 해석이 아닌 현대에서의 적용 등을 물으며 시비를 걸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연결되어질까 염려되어 도움을 청합니다. 제가 올린 글은 아래 와 같습니다. * 666에 대하여 "666은 '상징수'로 보아야하고 결코 666의 문자적 표나 마크로 보면 안된다. 666의 해석을 강조하지 말고 666의 상징자인 짐승, 거짓선지자를 이길 수 있는 신앙을 강조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은 어떤 제도의 변화, 정치의 변화 체제의 변화속에서라도 다니엘처럼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신앙의 훈련 과 연단에 관심을 둘뿐이며 미래의 변화에 대해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선한 목자 여호와가 우리를 책임져 주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 화일 참조(첨부 화일 : 천정웅 교수께서 현대종교에 기고했던 글) 아울러, 성경에서 해석되지 아니하는 것들을 억지로 인간의 생각으로 해석하려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은혜로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글을 올렸으며, 이에 대하여 'ㅇㅇㅇ'이라는 분이 육백육십육은 님이 인용한 다음구절과 같이 (단 12: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계 13:18)"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 악인은 깨닫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만 깨닫는 다고 했는데, 님은 스스로 악인임을 인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른사람들도 본인같이 악인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인가요? 계시록도 다니엘도 마지막 때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데 말씀그대로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라고 하고 또 "지혜가 여기 있다"고 하고 있는데 깨달을 필요가 없다? 상징수라하면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 뜻을 얘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경 안에서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론을 제시 하였습니다. 답변으로 "제가 첨부한 글에 보면 여러학자들의 많은 의견이 실려 있습니다. 이 견해들도 모두 다 성경적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첨부된 글중 `18) 상징으로 보는 이론'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오랜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연구한 결과에도 온전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미약한 저희들이 결론까지 맺으려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성경으로 풀리지 아니하는 것을 억지로 풀려 하는 것은 바로 이단,사단의 시작이 아닐까요?" 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ㅇㅇㅇ'은 출애굽기의 유월절에 대한 기록과 계시록에 관련된 성구에 대하여 현대에서의 적용 등을 물으며 시비를 걸고 있는 것으로 느껴져 상당히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지 않을 계획이나 아래 질문에 대하여는 답변 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어 답변코자 하나 답변이 조심스러워 글을 올리니 어떻게 답변하여야 할지 알려주시기 원합니다. "계22:18- 19 의 '더하면', '제하면',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이런 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계속 응대를 하여야 하나요? 아니면, 응대치 말아야 하나요? 저는 성경내용을 유추하기 보다 은혜로, 영적으로 깨닫기를 원하는데 제 생각이 잘못된 걸까요? 감사합니다. Answer. 1. 가장 논란이 심한 부분을 언급해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학자들의 견해가 이렇게 많았다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이 수많은 견해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666의 정체는 사단의 입장에서 가장 노출되기를 꺼려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최대한 혼란을 느끼도록 방해할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666의 의미에 대해서는 천정웅 목사님의 글 중에서 "상징으로 보는 견해"에 충분히 소개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666의 의미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2. 일단 왜 요한계시록에 여러 가지 상징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에 속하는 책입니다. 이러한 책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극도의 위기에 놓였을 때에 승리의 소망을 주기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이러한 책은 교회가 이방인의 통치 아래 놓였을 때에 주어졌습니다. 구약의 다니엘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속국으로 있을 때에 회복의 소망과 비젼을 주기 위해서 쓰여졌고, 요한계시록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속국으로 있으며 박해를 받을 때에 승리의 소망을 주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묵시록들 안에는 주로 "적국의 멸망과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책에는 당연히 적국과 그 통치자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책은 당시에는 매우 불순한 불온문서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서들은 적국의 지도자들이 잘 알 수 없는 모호한 상징들을 통해서 의미를 전달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러한 책에 나오는 상징들은 당시의 성도들은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묵시록의 상징들은 적들에게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성도들에게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박해가 심해지게 되면서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셨는데, 그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 13:10-17)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666이라는 숫자도 당시의 성도들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666이라는 숫자는 성도들에게는 열려진 상징이었지만, 적들에게는 닫혀진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뜻을 깨닫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666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666이 로마 황제에게 큰 박해를 받고 있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1차적으로 로마 황제에 의해 박해를 받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승리의 소망을 주기 위해 주신 계시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보면 666은 하나님 대신 황제 숭배를 요구하던 로마 황제나, 그들을 지지하며 세상을 유혹하던 거짓 종교들과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그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던 사단의 세력들을 전체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777은 진정한 세상의 주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결국 666의 세력이 잠시 교회를 박해하고 번성하고 있지만, 결국 777의 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패배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1차적으로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면서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그러나 666은 초대 교회 당시의 교회에만 적용되는 책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모든 세대에 사단의 조종을 받는 세력에 의해서 박해를 받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도 공산권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이나, 기타 다른 일로 박해를 받는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은 훌륭한 승리의 소망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천정웅 목사님이 제시한 666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는 666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5.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는 문제에 대해서(계 22:18-19)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마무리하면서 그 책에 기록한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에 대해서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본서에 기록된 예언이 상상이나 창작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해 주신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고는 이 책에 대한 말씀에 대한 "신적인 권위"와 영감을 확증하는 도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신 4:2)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해 자 전해 주신 계시의 권위를 확증하는 진술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이 책은 당시의 각교회에서 예배 시에 사회자에 의해 읽혀졌고, 그 자리에 참석한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이 계시 외에 다른 것을 첨가하는 일에 대해서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록된'이라는 말(게그람메나스)은 완료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미 완전히 기록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본서의 예언이 완전해서 더 이상 가감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말씀에 다른 것을 '더하는 자들'은 이 책에 기록된 신적인 저주(교회의 반대자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저주)가 '더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본서의 완전한 예언을 변절시키기 위해 인간의 생각을 추가하는 그 어떠한 시도도 허용할 수 없다는 엄중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또한 요한은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추가하는 일 뿐 아니라, 그 계시를 삭제하는 일에 대해서도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완전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제하는 자'들은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하는 축복에서 '제외될 것" 이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축복에게 제외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경고는 요한이 받은 그리스도의 계시가 얼마나 정확하며 또 귀중한 것인지를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두 없어지지 않고 성취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영감된 신적인 계시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6장에 나오는 백마 탄 기사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2015-07-13
계6장에 나오는 백마 탄 기사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Q. 샬롬! 계시록을 공부하다 보니 많은 혼동이 있습니다. 6장에서 예수님이 인떼실 때 백마 탄 자가 나오는데 누구입니까? A. 1. (계 6:1-2)에 나오는 흰 말을 탄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레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1-2) 요한은 어린양께서 첫째 인을 떼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어린 양이 첫 번째 인을 떼실 때에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첫 번째 말을 탄 기수에게 천둥 같은 소리로 "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흰 말이 등장했습니다. 요한이 볼 때에 그 흰 말을 탄 사람은 활을 가졌는데,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계속해서 이기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환상을 (슥 1:8-17, 6:1-8)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는 환상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색깔(홍색, 자색, 백색, 흑색, 어룽진 색)의 말을 탄 기수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스가랴가 본 환상에서는 말들의 색깔이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감시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말들의 색깔이 특별한 의미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말들 중에서 첫 번째 말인 흰색 말은 전쟁과 정복을, 홍색은 피를, 흑색은 경제난을, 그리고 창백한 색은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 말은 주님께서 종말에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신 사건들(적 그리스도, 전쟁, 기근, 지진, 재난, 복음 전파....)과도 일치합니다(마 24:6절 이하, 막 13:7절 이하, 눅 21:9절 이하). 그러면 요한이 첫 번째 인을 뗄 때에 나타난 흰 말을 탄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사람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 견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흰 말을 탄 사람은 그리스도이다. 어떤 학자들은 활을 가지고 흰 말을 타신 분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흰 말을 탄 사람이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 온 세상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2) 흰 말을 탄 사람은 적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흰 말을 탄 기수는 적 그리스도를 상장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흰 말 탄 자의 모습이 (계 19:11)에 나오는 "백마를 탄 그리스도"의 모습과 비교해볼 때에 너무나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계 19장)에 나오는 "심판자 그리스도"는 "많은 면류관"을 쓰셨고, 그 입에서는 "날카로운 검"이 나오는 전형적인 심판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 6:1-2)에 나오는 백마를 탄 사람은 빈 활을 들고 있으며,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계속해서 이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 6장)에 나오는 4가지 말이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을 심판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판의 장면을 묘사하는부분에서 갑자기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어색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문에 나오는 흰 말 탄 기수는 "군사력으로 땅을 정복하려는 군국주의자들"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군국주의자들이 흰 말을 탄 것은 정복자들이 항상 "의와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가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종말에 관한 주님의 교훈"을 생각해 보면 말세에 일어날 현상 중에 "군국주의자들의 정복 활동"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쓰기 얼마 전에도 로마의 디도 장군은 자기의 정치, 종교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을 칼로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후세인과 같은 독재자들도 이러한 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역사는 계속해서 반족될 것입니다. 3) 만일 (계 6장)에 나타난 말들이 말세에 나타날 일들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흰 말을 탄 사람은 적그리스도의 활동을 상징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세에 있는 징조를 말씀하실 때에 "적그리스도의 출현, 전쟁, 기근, 재난 등"의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계 6:1-2)에 나오는 백말 탄 기수는 그리스도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항상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만일 흰 말을 탄 사람을 그리스도로 보는 견해도 일리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세에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흰 말을 탄 기수가 적그리스도라는 견해가 문맥상으로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분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2. 더 이상의 자료를 원하시면 아래의 웹 페이지에 접속해서 올려진 글을 참고해 보시기 바립니다. * 계 6장의 네 말을 탄 기수의 의미(http://biblenara.org/q&a/Q105.htm)
계6장에 나오는 인맞은 144,000명은 누구인가요?/ 2015-07-13
계6장에 나오는 인맞은 144,000명은 누구인가요? Q. 계시록 6장을 읽어보면 인을 맞은 144,000명이 나옵니다. 어떤 분은 이 사람들이 환란 때에 다시 복음을 전할 실제적인 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휴거는 이 사람들과 첫째 부활할 순교자들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인지요? 말도 안되는 소리 인지요? A. * 계시록에 나타난 144,000명은 누구인가? 1. 성도들을 인치기까지 대재난이 중지됨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은 여섯 째 인의 재앙 후에 네 천사가 땅 모퉁이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땅의 사방에 서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재난의 바람을 막고 있었습니다. 네 바람은 파괴를 수행하는 바람입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단 7:2)에서 "하늘의 네 바람이 지중해로 불더니, 네 마리의 크고 무서운 짐승들이 파괴의 사명을 띠고 지중해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늘의 네 바람이 지중해로 불어온 후에 지중해에서 일어날 네 독재국가들이 등장한 것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본 네 짐승은 바다 곧 지중해에서 올라왔으며, 이는 지중해에서 탄생할 네 독재국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네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천사들이 전 세계에 미칠 파괴를 수행할 천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온 천하를 파괴할 일을 수행할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볼 때에 그 천사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그 재난의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요한은 또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가 돋는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에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이 천사가 해 돋는 곳, 즉 동쪽에서 올라온 것은 그 천사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동쪽은 종종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성전의 동쪽 문을 통해 나가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겔 43:3). 그리고 구약 시대에 동쪽 문은 왕과 하나님만이 통행할 수 있는 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2. 인을 치는 이유-환난에서 보호하려고 그 천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제 막 영을 받고 올라왔습니다. 그 천사의 의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도장)을 치는 것입니다. 인(도장)은 "소유와 보호"를 의미합니다. 로마 시대에 노예들의 몸에는 주인의 화인(불도장)을 찍어서 그 소유를 확인했습니다. 주인의 화인(불도장)을 맞은 노예는 그 주인의 소유가 되었으며, 다른 사람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같은 노예라고 해도 누구의 소유인가에 따라 노예들의 신분도 결정되었습니다. 신분이 높은 귀족이나, 특히 왕에게 소속된 노예들은 큰 권세를 행사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천사가 하나님의 인(도장)을 이마에 표시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읽다가 보면 사단의 인을 맞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사단의 백성으로 확증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인"을 맞은 하나니므이 백성들과 사단의 인을 사단의 백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에스겔을 읽어보면 이와 비슷한 장면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겔 9장)에서 먹통을 찬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들이 하는 일은 예루살렘 성을 다니면서 그 성의 죄를 위해 애통하는 사람들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표시는 앞으로 내려질 대재난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표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때에 먹으로 미리 표시한 사람들은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요한이 본 천사가 이마에 인을 치는 목적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있을 대재앙에서 자기 백성을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천사들을 미리 보내서 그들의 이마에 인을 치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의 인을 맞은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엡 1:13). 3. 인 맞은 144,000명은 누구인가?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144,000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12,000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12,000이요, 갓 지파 중에 12.000이요, 아셀 지파 중에 12,000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12,000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12,000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12,000이요, 레위 지파 중에 12,000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12,000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12,000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12,000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12,000이라"(4-8) 요한은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가 144,000명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인맞은 144,000명은 누구일까요?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세대주의자들의 견해-이스라엘 12지파 세대주의자들은 인 맞은 144,000인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계 3장)에서 지상의 교회 시대가 끝나고 (계 4장)부터는 지상의 교회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때에 지상에는 불신자들과 유대인들만 남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때에 교회는 휴거하여 환난을 피하지만 지사에 남은 불신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난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재난을 통해서 사방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일부가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인을 맞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인밪은 144,000명이 바로 이러한 유대인들이라고 말합니다. 2) 순교한 성도들이라는 견해 또 어떤 사람들은 이 144,000명은 그리스도를 위해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가 순교한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영광의 인을 맞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보통 신자들이 아니라 순교한 특별한 성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144,000을 묘사하는 요한 계시록의 내용을 보면 그들이 보통 성도들이 아니라, 특별히 그리스도께 충성하다가 죽은 순교자들이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3)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견해 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이 144,00명이 신구약의 모든 신실한 성도들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 맞은 144,000인이 이스라엘 12 지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첫째로 본문에 나오는 지파들의 언급은 구약에서 열거되는 지파의 순서와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의 때에는 이스라엘이 디도 장군에 의해 멸망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세계로 흩어져 있어서 구약의 12지파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12지파의 순서를 보면 유다 지파가 맨 앞에 나와있고, 장자인 르우벤은 그 뒤에 나옵니다. 유다 지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셨기 때문에 이러한 순서는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단 지파의 자리에 므낫세가 들어가고, 에브라임이 빠지고 그 대신 요셉이 들어갔으며, 요셉은 맨 뒤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단 지파가 생략된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단 지파가 빠진 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와 연관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주신 남쪽 땅을 정복하지 못하고 북쪽의 라이스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 정착한 후에 그 곳에 우상을 세웠습니다(삿 18:30). 그리고 여로보암 때에 이곳에 금송아지를 세우면서 이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고 말았습니다(왕상 12:29). 2 세기경에 살았던 이레니우스는 단 지파가 생략된 것은 그 지파에서 적 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라는 전승 때문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창 49:17, 렘 8:16). 또 단 지파 자리에 므낫세 지파가 들어간 것은 므낫세 지파가 단 자파가 버리고 간 지역을 정복해서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요셉은 장자가 아니었지만 애굽에서 이스라엘 가족을 구원한 일로 인해 장자에게 돌아가는 두 분깃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장자인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을 범했기 때문에 야곱의 저주를 받아 장자의 분깃을 빼앗겼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육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 지파는 유대인이지만 자기 기업을 버리고 우상 숭배를 한 후에 그 명단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 1장)의 메시야 족보를 보면 하나님을 믿었던 이방 여인들-기생 라합이나 룻-은 그 명단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롬 2:28-29)에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며,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고,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갈 6:16). 이러한 점에서 144,000명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제한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계 14장)을 보면 시온 산에 선 144,000인이 또 다시 나옵니다. 성경은 그들은 주님께서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맥을 볼 때에 시온 산에 선 144,000 명을 "구약의 이스라엘 12 지파"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계 14장에 나오는 144,000명은 유대인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는 헌신된 성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144,000이라는 숫자를 유대인이라고 제한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144,000명을 문자적으로 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144는 이스라엘 12 지파의 수인 12와 신약의 12사도를 곱해서 나온 숫자이며, 1,000은 완전수로서 이를 곱한 144,000은 "신구약의 모든 신실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볼 때에 이 견해가 다른 견해보다 더 타당해 보입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습입니다(롬 4:11, 8장, 엡 1:13이하). 바울은 (롬 8장)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들"은 "어떤 피조물도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명은 이스라엘의 12 지파라기 보다는, 구약의 12 지파와, 신약의 12 사도를 기초로 하는 신구약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됩니다(약 1:1, 갈 6:16, 요 6:27, 고후 1:22, 엡 1:13 참조). 물론 이러한 성도들은 여러 가지 박해나 환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 때에 성도들은 로마 황제의 박해로 인해 크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들은 그 모든 박해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정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성령의 인을 맞으 신실한 성도들은 평안할 때에나 어려움이 찾아 올 때에나 항상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라갑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의 악과 싸우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이며 하늘 나라의 상속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영광뿐 아니라 환난에도 기쁘게 참여합니다. 우리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이 무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계6장의 흰말, 붉은말, 검은말, 청황색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15-07-13
계6장의 흰말, 붉은말, 검은말, 청황색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 6장에 나오는 흰말, 붉은말, 검은말, 청황색 말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궁금합니다.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계 6장의 흰말, 붉은말, 검은말, 청황색 말은 무엇인가? 요한 계시록 제 6장에 나타나는 네 가지 인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국가(초대교회 당시의 로마)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이 말들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모든 국가와, 특히 말세에 나타날 재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흰색은 전쟁과 정복을, 홍색은 피를, 흑색은 경제난을, 그리고 창백한 색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박해하는 로마 황제와 그 백성들, 그리고 각 세대에서 교회를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을 전쟁과 살륙과 기근과 역병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고해 주신 종말에 대한 징조와도 일치합니다(마 24:6절 이하, 막 13:7절 이하, 눅 21:9절 이하). 주님은 이 곳에서 말세에 기근과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습니다. 1) 흰색 말-적 그리스도의 정복 적그리스도는 정치적인 세력이나 종교적인 세력을 업고 세상을 정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혼란과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말 탄 기수가 상징하는 재앙입니다. 2) 홍색 말-전쟁 우리는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얼마나 전쟁의 살상 무기가 발달되어 왔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살상 무기를 통한 피의 살륙은 두 번째 말 탄 기수가 상징하는 재앙입니다. 3) 흑색 말-기근 말세로 갈수록 지구촌은 점점 더 기아에 시달리는 현상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 주민들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유한 자들이 부를 독점하고 다른 편에서는 굶주리고 헐벗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말 탄 기수가 상징하는 재앙입니다. 4) 창백한 말-죽음 이 세상은 갈수록 점점 더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요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살상무기의 개발이나, 자연 재해나, 사나운 짐승의 위협이나, 여러 가지 질병이나, 여러 가지 죽음의 요인들이 계속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말 탄 기수가 상징하는 재앙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들을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재앙들은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징계를 내려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제한된 형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앙들은 성도들에게는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뜨게 하며,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을 더욱 더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666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2015-07-13
계시록에 나오는 666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Question 안녕하세요? 샬롬~부산일보2월4일자 신문에 흥미있는 기사가 있어서 올립니다. '컴퓨터칩'에 대한 기사인데요. 요한계시록13장17~18,14장9절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한데요, 그의견들중 하나가 '바코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기사와 어떤연관성 있는 신학적해석이 있을수 있는지요? 궁금합니다. Answer * 아래의 글은 총신대 실천신학 교수로 계시던 천정웅 교수께서 현대종교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천교수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 분이 쓴 글은 "666에 관한 종래의 의견들을 잘 종합해서 정리하고, 또 나름대로의 자기 견해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계시록 13장 16∼18)." 1. "666"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 1) 로마로 생각하는 이론 로마는 헬라어로 "라테이노스"( )인데 이 수치의 합산이 666이다. - (람다)=30 - (알파)=1 - (타우)=300 - (엡실론)=5 - (이오타)=10 - (뉘)=50 - (오미크론) - (시그마)=200 30+1+300+5+10+50+70+200=666( 나원준, "휴거와 666의 정체", 월간현대종교 탁명환 편, 국종출판사, 1991, p 27. ) 이 된다. 666과 616중 666이 요한이 본래 사용한 숫자이며 이 수가 가리키는 이름은 라테이노스이며 따라서 로마 황 제와 로마제국 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기독교 대백과 사전", 기독교문사, 91(7판), p 772. ) 이 견해는 당시 기독교 핍박의 최대 세력인 로마제국이 바로 짐승의 수라고 본다(Irenaeus).( "크로스", 시내출판사, P 1003. ) 6의수는 요한 당시로서 로마이다. 666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로마에 굴복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 6의 숫자를 나열한 것은 6의 인물의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세 인물을 말한다. 용과 짐승과 새끼양이다. 이들 세 인물을 인정하는 자들은 살아 남을 수 있으나 그 밖의 사람들은 환난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환난은 12장에 의하면 하늘에 속한 자들이 된다. 그리고 11장에 의하면 두 선지자의 교회에 속한 자들이 되고 13장에서는 성도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다니엘서 11장에 의하면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에 해당한다. 이들 외에는 모두가 그들에게 굴복하기 때문이다.( 최정현, "성경의 대예언", 도서출판 한글, 1992, p 214. ) 2) 로마의 반대 이론 666은 로마를 가리키는 "라테이노스"( )란 헬라어의 숫자란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아무 곳에서도 로마를 "라틴"이라고 부른 곳이 없는 것은 이 견해의 크나큰 약점이다.( 박수암, "신약주석 요한계시록",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 183. ) 3) 네로로 생각하는 이론 "네로 황제"를 히브리어로 표기하면 '네론 카사르'( )이다. 이 것을 당시 유행하던 게마트리아 해석법(히브리어의 문자를 알파벳의 수치로 환산하는 유대 랍비들의 해석법)을 따라 풀이하면( 여기에 들어갈 문자는 히브리어로 표기하지 못했음) = 50 , = 200 , = 6 , = 50 , = 100 , = 60, = 200 이 되는데 이 수치를 종합하면 666이 된다. 이 견해는 로마 황제 네로(Nero, 54-68년)에 의한 기독교인 대 핍박 의 잔혼이 남아있던 그 시대적 상황이 참작되어 널리 신봉되었다.( "크로스", 시내출판사, p 1003. ) 수세기에 걸친 그와 같은 시도 가운데 선택된 인물 중 가장 그럴듯 한 인물은 네로일 것이다.( "성서 대백과" 정인찬 편, 기독지혜사, 1985, p 394. )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국가)에 의한 기독교 대박해라는 당시대의 역사적 배경에서 666의 기본 의미를 추출해 낸 다음, 그것을 장차 도래할 종말의 세속적이고 사단적인 인물(적 그리스도 혹은 그의 세력)에 결부시킨 듯하다.( 요일 2장, 핵심연구 [적 그리스도에 대하여], "크로스", 시내출판사, p 1004, 재인용 )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문자들은 각각 숫자상의 가치를 대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666은 로마 황제 네로를 가리킨 것이다. 이 666은 어느 시대를 통해서든 지 흐르고 있는 것이다.( 강봉국, "성서 주해", 성서교재 간행사, 1976, p 373. ) 4) 네로를 상징적으로 보는 이론 바클레이 같은 주석가는 이 수가 네로를 뜻한다는데 의심을 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이 적 그리스도를 네로의 형태로써 악의 화신이 되어 이 땅에 되돌아 오는 자로 내다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과거의 네로라고 할 수 없으며 네로 적인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입니다.( 이용호, "주님은 다시 오신다", 한국문서선교회, 1991, p 174. ) 5) 네로의 반대 이론 현대 학자들이 보는 일반적 견해는 '네로-시이저'(Nero-Caesar)이다. (만 약 라틴어 철자와 같이 만들기 위해 마지막 R자를 생략한다면 다른 수인 616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히브리어로 음역된 라틴 어 이름을 헬라어로 바꾸어야 하며 철자도 좀 달리 써야 한다. (모음 y가 qysr에서 빠져야 함). 이러한 방법이 상당히 타당성을 가진 것 처럼 보이지 만 왜 히브리어 이름을 헬라어로 변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네로를 위대하게 생각했던 그 당시에는 이 방법은 결코 적용할 수 없었다(네로 황제가 소생하는 신화는 학자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 고안해 낸 것임).( "틴텔주석", p 1983. ) 어찌 하여 헬라말로 본서를 기록하던 저자가 하필 여기 와서만 새삼스럽 게 히브리어 표기를 심중에 두었을까 하는 문제와 고대의 어느 주경가도 이 를 네로의 이름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원한 해답이 못된다.( 박수암, "신약주석 요한계시록",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 183. ) "네로 가이사"를 히브리말로 계산하면 666이 된다고 하여 이 수는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네로 가이사를 신약의 헬라어로 계산하면 1005가 되며 사도 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헬라어로 썼고 히브리말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순한, "요한계시록강해",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5, p 283. ) 네로 황제 등에 숫자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해석해보려는 시도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계시록은 상징의 책이지 수수께끼의 책이 아니 다.( C.F. Wishart, op. cit., p 25. 핸드릭스, 아카페출판사, p 184(주) ) 네로를 적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비유들 하기도 하나 이는 심히 빗나간 해 석(주장)들 입니다. 왜냐하니 네로 황제는 제1세기에 살다가 죽은 자이지만 나타날 적 그리스도는 장차 마지막 때에 출현할 자이기에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송기호, "대환란(제4권) 666의 비밀", 정오출판사, 1991, p 322. ) 6) 교황으로 보는 이론 로마교황 모자에 라틴어로 "하나님 아들의 대리자"라 했으며 교황의 공식 칭호 Vicarius Filii Dei를 666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해석한다.( 이광복, "성경종말론", 목양성경연구원, 1991, P 174. ) V I C A A R I U S . F I L I I D E I 5 1 100 1 5 1 50 1 1 500 1 교황은 이미 카톨릭 신에게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 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평화의 왕", "평화의 사도", "세계의 빛나는 별"이라는 칭호를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 그는 세계 평화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회복된 교황권의 모습이 얼마나 크고 강하여지고 있는가를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앞으로 소수의 충성된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다 교황을 추앙하고 경배할 때가 올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목하에서 "교회 일치 운동"(the Ecumenical Movements)과 초교파적 "은사 쇄신 운동"(the Charismatic Renewal Movement)으로 부지런히 그 성 취를 보고 있는 것이다.( 유석근, "666 적그리스도", (주)임마누엘, 1992, p 123. ) 라틴 십자가(The Latin Cross)는 전 카톨릭 조직에 찍힌다. 그것은 미사 때 사용되며, 교회 기도문에 군데군데 신비한 신호로 삽입되고, 사제의 가 운, 교회의 성구와 건물에 장식된다. 로마 교회는 그의 모든 추종자들에게 태어나서 죽기까지 라틴 십자가를 표해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교황권 이 가지고 있는 구별되는 표(Mark)로서, 짐승의 표 곧 666표이다.( 유석근, 전게서, p 147. ) 루터, 위클리프, 허스, 칼빈 그리고 그외의 모든 종교 개혁자들은 한결같 이 다니엘 7장의 '작은 뿔'과 계시록 13장의 '짐승', 17장의 '음녀',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불법의 사람'이 온갖 비성경적 교리들로 배도를 주도해 온 교황권(papacy)이라고 지적하였다. 칼빈은(John Calvin)은 그의<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밝혔다. "다니엘과 바울은 적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을 것이라고 예언하 였 다. 서방 교회에 있어서 이 저주받은 가증한 왕국의 머리를 우리는 교황 이라고 단정한다"( Calvin, Institutes, Vol. 2, p 314-315. (유석근, "666 적그리스도", (주)임마누엘, 1992, p 141.)재 인용. ) 적그리스도는 미래에만 잠깐 나타나거나 과거에만 잠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도요한때 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인물이 나타날 것인데 현재로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분명히 666적그리스도인 것이 다. 왜냐하면 그의 명칭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이름의 숫자가 666이기 때문인 것이다. 라틴어가 666이며 그 이름의 숫자를 받은 로마 교황이 라틴 어로 666이 되어 적그리스도의 이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의 총통이 나타난다 해도 같은 666이 될 것이며 유럽공동체 공식언어를 라틴어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에서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교황이 바로 예수님 을 모방했기에 사탄의 직통화신이 될 것이며 우리가 살피고 있는 666의 숫 자를 가진 적그리스도이며 현재 교황이든 장래 교황이든 666이란 사실을 깨 닫고 깨어 있기 바란다.( 서달석, "바이블 뉴스합본 V", 생명의 서신, 1992, p 14. ) 666 적그리스도였고 현재도 적그리스도인 로마 카톨릭( 서달석, "바이블 뉴스합본 X", 생명의 서신, 1992, p 28. ) 이다. 7) 교황으로 보는 반대 이론 로마교황이나 검은 교황이나 모두 적 그리스도일 수 없습니다. 적 그리스 도는 로마 제국에서 나오는 것이지 로마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적그리스도)의 번호는 "사람의 번호"이며 그 번호는 666입니다. 적 그리스도는 이 사람의 번호를 간단히 자기 것으로 전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교황이 사용하고 있는 삼중관에 대하여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 왕 관에는 어떠한 글자나 숫자가 나타나 있지 아니합니다. 한 때, 왕관에는 "하나님 아들의 대리자"라는 뜻의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탁월한 인물의 이름에 로마 숫자를 합하여 표시하는 방법은 신뢰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나폴레옹이 적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이 채택되었습니다. 뭇솔리니도 역시 이렇게 그 의 타이틀을 사용함으로써 적그리스도로 증명되었습니다. 다름 많은 이름들이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발생할 것입니다. 기껏 교황은 지상에 거하고 있 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대환난기가 계속되는 동안 로 마교회의지도자는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거짓 선지자이겠습니다.( 윌리암 베이르네스, "재림에 대한 의문과 해답", 보이스사, 1985, p 81-82. ) 로마 교황께서 머리에 쓴 관에 새겨진 글자의 수이니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대행(대신)해서 나타날 것이란 주장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주로 미주지역과 한국등지에서만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솔직히 로마 교황이 적그리스도라 한다면 왜 적그리스도가 수 천년간 계속되어 나타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영어권적 666수와 라틴어권적 666수와 그리고 기타 서구 방언적 666수는 반드시 수정과 보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동양 종교임에도 왜 서양화하거나 되어져서 계속 굴러가고 있는지 식상할 지경입니다.( 송기호, "대환란(제4권) 666의 비밀", 정오출판사, 1991, p 328. ) 8) 테이탄 테이탄은 헬라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신(神)을 가리키는데, 그 헬라어 문자를 수치화하면, 300+5+10+300+1+50으로서 종합하면 666이다. 그런데 이 테이탄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대체 적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로마 장군 디도(Titus)나 혹은 사도 요한 때의 로마 황제를 네로에 이어 2차 대박해를 주도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년) 등으로 추측한다.( "크로스", 시내출판사, p 1003. ) 9) 테이탄의 반대 이론 테이탄은 헬라 신화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거대한 신이었으며, 저자는 도미시안을 테이탄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왜 하필 여 기서 갑자기 헬라 신화를 연상했겠느냐는 문제가 있다.( 박수암, "신약주석 요한계시록",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 183. ) 10) 솔로몬의 호화스럽고 사치스런 죄를 가리킴 헹스텐베르크는 666의 문제에 대해 에스라 2:13에 그 자손들의 수가 666 으로 기록되어 있는 아도나김에게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고 있다. 하 지만 666이라는 숫자는 열왕기상 10:14에서 솔로몬이 한 해에 거두어 들였던 금 달란트의 수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지혜자의 표징으로 간주되었던 솔로몬은 호화롭고도 사치스러운 생활로 인하여 결국 말년에 우상을 섬기는 사악한 죄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 666이라는 수는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경계하라고 가르쳐 주시던 세속적인 탐욕을 가리키는 것은 아 닌가? 17절에서 이 세상의 재물을 추구하는 자들이 짐승을 섬기는 자들로 서술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제안을 타당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W.T. 린).( "베이커 주석", 기독교문사, 1988, p 561. ) 11) 솔로몬 반대이론 과거 이스라엘의 임금인 솔로몬 때에 세입금의 중수가 666 금 달란트였는데(열왕기상 10:14) 솔로몬 왕은 이 엄청난 금 666 달란트를 소유케 됨으로 서 타락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 666수는 어딘지 모르게 유물주의가 적그 리스도의 상징적인 기초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고 지적들을 하나 이 또한 의미하는 바는 있으나 상호 완전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송기호, "대환란(제4권) 666의 비밀", 정오출판사, 1991, p 322. ) 12) 요한복음 6:66 나는 이에 대하여 기도하는 중 요한복음 6:66을 보라는 음성을 듣고 빨리 펴 보았다. 그 구절은 "이러므로 제자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이 육백 육십 육은 예수의 참 제자 외에는 다 예수를 떠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 수인 것을 깨닫고 이 뜻을 알게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 육백 육십 육을 요 6:66이라고 믿고 그리스도를 떠난 자들은 다 적그리스도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종우, "요한계시록해석", 도서출판국제, 1984, p 279. ) 13) 개신교가 666이다. / 안식교의 이론 안식일 교회에서는 계시록에 나오는 표 중 하나는 짐승의 표요. 하나는 하나님의 표인데 안식일은 하나님의 표요, 일요일은 짐승의 표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을 받으려면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고 합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자들을 짐승의 표 받는 것으로 인정하는 이유는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교황이 안식일을 주일로 변경했기 때문이며 그가 또한 앞으로도 강제 일요일 휴업령을 내려 성도들을 죽이게 될 것이라고 생 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떤 희생을 각오 해서라도 교황이 내리는 일요일 휴업령을 지키지 말고 짐승의 표도 받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교황 은 앞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며 그에게 불순종하는 자는 다 죽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666을 이긴사람들", 소문출판사, 1991, p 86. ) 안식교의 성서 학자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썻다. "우리들은 지금 모든 영혼들을 위한 큰 싸움의 최고 절정에 도달하고 있다. 지금 세상은 두 패로 갈라져 서로 대진하고 있다. 수백만명이 속고 있다. 죽음의 위협과 보이콧(boycott)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 안식일을 지 키게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이 저들은 거짓 안식일을 지키므로 짐승에게 충 성을 다하고 있다.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안식일이지 결코 하나님 의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데 목숨을 바치 고저 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안식일을 지키도록 법이 제정될 날이 올 것이 다. 그 날이 가까왔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 안식교도들은 요한게시록 7장과 14장에 나오는 144,000명은 안식일을 지 킨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저들은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기 때문에 "살아계 신 하나님의 인"을 맞게 된다고 주장한다. 매매하기 위하여 토요일을 안식 일로 지키지 않고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면 짐승의 표를 받게 된다고 주장 한다.( J.N. 고트너, 이희숙역,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1970, p 212-213. ) 14) 마틴루터가 666이다. / 로마교회 이론 로마 교회는 개혁자 마틴 루터(Luther)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666이 산출 된다면서, 마틴 루터를 적 그리스도로 지목하여 했고 현재도 그렇게 단정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적 그리스도는 다니엘이 예언한 '작은 뿔'의 여덟 가지 특성들이 다 발견되어야 하 는데, 루터에게는 그와 같은 특징들이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이름의 수치가 666이 산출된다고 해서 누구든지 적그리스도로 간주될 수는 없는 것이다.( 유석근, "666 적그리스도", (주)임마누엘, 1992, p 139. ) 15) 개인을 지칭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 숫자는 어떤 특별한 인물이나 국가를 국가를 나타내지 않는다. 666은 단순히 본문에 나타난 짐승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숫자를 연구할 때 그것이 역사장의 특정 인물이나 국가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된 해석을 8:1,2에 대한 그 들의 해석에서 살펴볼 수 있다. 두 구절은 독립된 사건을 나타내는 구절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건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8:1,2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어린양이 일 곱째 인을 뗄 때 하늘이 반시간 동안 고요하였다. 그후 나는 일곱 나팔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일곱 천사를 보았 다." 그들은 계속하여 일곱 나팔이 울리는 것은 일곱번째인이 떼어지는 사 건 바로 뒤에 따라온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는 일곱 나팔이 일곱번째 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하늘이 반 시간 동안 잠잠할 때, 어떻게 일곱 천사가 서로 모여서 나팔을 받았느냐 하는 등등의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나 만 약 그들이 요한이 본 환상의 내용과 형식을 좀 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8:1,2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 구절은 첫번 째부터 여섯번째 인이 열리고 난 후부터 일곱째 인이 열리기 전까지의 반시간 동안 요한이 이제껏 보고들은 것을 묵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은 요한의 서신이 아시아에 있는 교회의 회중에게 전달되어 그들이 그것을 읽은 때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났을 것이다. 즉 그들이 일곱째 인을 떼 때 발생하는 사건을 읽기 전에는 다음의 일어날 사건에 대한 흥분과 긴 장에 휩싸여서 얼마 동안의 적막이 흘렀을 것이다. 즉 그들은 1절과 2절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공백이 있음을 깨닫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몇몇 고지식한 학자들은 이 공백 기관을 배제하고 1절과 2절을 연속적인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본문 18절을 해석해 보기로 하자. 먼저 우 리는 666 이라는 것이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RV)라는 구절을 심사 숙고해 보자. 바울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유추를 사용하여 어떤 영적 진리 를 암시하고자 할 때 이와 같은 구절을 여러번 사용하였다(롬3:5619, 고전9:815:32,갈3:15). 사도요한도 영적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때 (time)와 '숫자'(number)를 사용하고 있다. 한가지 예로서 3년 반은 전역사를 통해 존속하는 교회시대 를 상징하고 있다. 이 기간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시느니라"(마24:36). 또한 주님께서는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 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행1:7)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연대의 실제 계수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지 사람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록은 독자들에게 그 긴 기간을 나타내주는 3년 반 (42개월 = 1260일) 숫자를 제시해 주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3년 반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에까지 존재하는 교회의 시대를 말한다. 따라 서 이 숫자는 어떤 신비적인 상징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의 이성으로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기간인 3년 반과 일치하기 때 문이다. 또한 만일 이 숫자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기간(그의 세례 받으심 과 승천까지) 인 3년이 지난 후에 일어난 어떤 것들을 가리킨다면, 3년 반 이라는 기간은 오순절에 일어난 교회의 성령 세례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를 만나기 위해 들리움을 받을 때까지 기간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예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계수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 백성의 실제 숫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이다. 성경은 오직 "주님만이 자기 백 성들을 아신다"(딤후2:19) 고 했으며, 또한 요한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 도의 많은 군중이었다(7:9). 그러나 계시록을 읽는 독자들의 편리를 도모하 기 위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144,000명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준 것이다. 세번째 실례는 21:17에 나오는데, 하늘 성곽의 벽이 144규빗으로 나와 있 다(이는 아마 높이가 아니고 두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수치는 상징적인 것이지 실제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수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에서 인간이 사용하는 수치로써 하늘의 성곽을 표현한 것은 우리들로 하여 금 하늘의 성곽을 상상할 수 있게끔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짐승과 숫자를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왜곡되게 해 석함은 어리석은 일이다. 계시록에서 교회는 여러가지 다른 형상(24장로들, 여인, 증인들)이나 또는 숫자(144,000)에 의해 상징되어져 있다. 마찬가지 로 교회가 존속하는 기간도 어떤 형상(여인이 용으로 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 증인들이 예언을 선포하는 것,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짓밟는 것)이나 숫자 (3년 반)에 의해 상징되어져 있다. 한편 거짓 종교는 땅에서부터 올라온 짐승과 666 이라는 숫자에 의해 상 징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666은 네로황제나 칼리굴라 또는 제국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짐승과 거짓 종교를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핵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고지 식한 학자는 18절을 한번 힐끗 곁눈질하고는 하나의 독립된 절로 취급하여 해석한다. 그는 18절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이것이 지혜를 요구한다. 총 명이 있는 자는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 수는 인간을 가리키는 숫자이며 666을 말한다." 그는 18절 전체를 하나의 수수께끼로 보고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출 발점이 바로 666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666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666은 네로황제나 또는 다 른 황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666의 의미를 알아내 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단지 '666을 세어보라'고 말했을 뿐이다.( 마이클 윌콕, 이종일역, "역사의 저편 새 하늘과 새 땅", 기독지혜사, 1988, p 167-168. ) 16) 반기독교 독재주의자로 보는 이론 저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짐승의 수이면서 사람의 수라고 했기 때문에 짐 승은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반항하는 반기독교자이기 때문에 반기 독교 독재주의자는 모두 666에 해당하는 적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봅니다. 네로, 레닌, 스탈린, 히틀러, 김일성, 반기독교 독재주의자는 사단의 충 복입니다. 17) 사이비 단체로 보는 이론 외모가 양과 같다고 했으니, 곧 기독교의 형태를 가지고 활동한다는 것이 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의 말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짐 승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는 기독교의 단체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W.C.C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선명, 박태선처럼 기독교의 이름을 가지면서도 기독교가 아닌 단체들이 여기에 속 한다는 점이다. 18) 상징으로 보는 이론 본구절에서 요한의 질문은 '사람의 수니'라는 부분까지이고, 나머지 부분 은 그것에 대한 해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본 구절에서 666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거짓 종교이다. 이 제 우리는 이 구절을 요한 당시의 독자들이 읽었던 것처럼 해석해 보기로 하자. 지혜있는 그는 그 짐승의 수 곧 '사람의 수'를 세어보라. 그런데 그 숫자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와 전 역사를 통해 존재하는 교 회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666이라는 숫자는 완전수 777에 가깝기는 하지 만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지 않는가? 만약 참되고 완전한 것을 상징하는 숫자가 7이라면 거짓 종교는 6이라는 숫자로 표현될 수 있지 않는 가? 따라서 우리는 666을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즉 이 숫자는 신 약시대 때 온 세상을 대적하는 모든 거짓 종교 즉 적 그리스도의 권세를 상 징한다. 그런데 이 짐승의 수는 단순한 6도 66도 아닌 완전히 채워진 666이 니, 이 는 완전수인 7에서 1일 모자란 불완전한 수 6을 3개 포개 높은 것으 로 인간의 불완전성과 완전에 대한 마귀적인 모방, 현혹성, 환난, 저주 등 을 의미한다. 결국 666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상징하는 777에 반대되는 숫자 이다. 따라서 이 숫자는 하나님의 의에 미달하고 당신의 주권에 도전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뜻하고 있다.( 마이클 윌콕, 이종일역, "역사의 저편 새 하늘과 새 땅", 기독지혜사, 1988, p 167-168. ) 수를 센다는 것은 본질을 안다는 뜻이고, 다음에 나오는 "육백 육십 육" 도 질(質)을 표현한 수이다. 그 "수", 곧 "질"이란 것은 말씀의 여러 진리 가 저들에게서 거짓화 되었다는 표현이다. "짐승의 수"란 말씀의 확증, 곧 그 교리와 신앙을 확증하는 특질을 뜻하고, "666"이란 원칙적으로는 선한 속한 척하는 거짓된 교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666"의 뜻이 이같이 표현되 는 것은, 여섯은 셋의 곱수인데, 셋의 충만이나 전부를 표현하므로 진리를 전제로하는 수요, 선과 진리의 결혼을 표현하는 수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여섯은 말씀에 속한 여러 진리를 표현하나, 여기서는 거짓화된 그 교리들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또 "666"은 여섯의 세 겹인데, 세겹은 완결을 뜻하므 로, 그들에게 함께 한 선을 가장한 모든 교리가 온전히 파괴된 것이란 표현 이다.( 임종은, "열어 놓은 계시록", 도서출판 소망사, 1989, p 215. ) 그 수가 사람의 수라고 하며 따라서 사람이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뜻으 로 말하였는데 요한계시록은 언제나 문자적인 뜻이 아니라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손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불완전수 6의 삼중 적 표현으로 666이 나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이순한, "요한계시록강해",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5, p 283. ) 오늘 우리의 견해로는 그것을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것이 계시록의 문서 적인 성격을 볼 때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상징으로 볼 때 불완 전 숫자 6(7에서 하나 모자라는 수)이 세 개 모인 것으로서, 마귀의 수, 불 완전의 수, 인본주의 수인 것이다. 777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수라면 666은 마귀의 삼위일체 수이다. 마귀는 언제나 모자라고 실패하는 것이다. "실패 에 실패에 실패"를 나타낸다(Hendsiksen) 그것은 불완전의 삼위일체다(T. Torrance).( 박수암, "신약주석 요한계시록",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 184. ) 13:18의 말씀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666의 의미는 6이란 완전 숫자인 7에서 하나가 부족한 숫자이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레 중 엿새를 일해야 했 으며 노예도 다만 6년을 일했고 밭도 6년을 사용한 뒤에는 7년째는 쉬도록 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짐승의 숫자가 6을 세 개 나란히 배열한 수자 란 점이다. 이것은 인본 주의의 극단을 말하며 마귀의 삼위일체 수이기도 하다.( 신성종, "요한계시록강해", 정음출판사, 1983, p 99. ) 우리는 이 예언을 신약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의, 구조나 또는 요한계시 록의 나머지(예를 들면, 종말까지 인내하라는 가르침) 부분에서 따로 떼어 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한다면 복음에 무엇을 덧붙이 는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로만"이라는 원리들을 이 시대의 마지막 날에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원리라고 간주하여 내팽개쳤 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들의 편협한 예언 해석에 근거 하여 어떤 행위를 그 원리들에 추가해야 한다고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3장과 14장을 제대로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영원히 구원받은 자들을 인친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반면에 짐승의 표는 불경건과 불신에 대 한 특징으로 보는 것이다.( 그레엄 골즈워디, 김영철역, "복음과 요한계시록", 한국성서유니온, 1991, p. 195-196. ) 이 숫자를 단순한 상징으로 보는것도 가능하다. '예수'를 헬라어로 쓴 이 예수스란 단어의 숫자 가치를 합산해 보면 888이 된다. 모든 수가 완전 수 인 7을 넣고 있다. 그러나 666은 그 반대로 모든수가 7에 미달되고 있다. 즉 이 수는 어떤 개인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의에 부족한 사람들을 가 리키는 것 같다. 본문의 숫자가 특정한 한 개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가 리킨다고 생각하면 이 해석은 더욱 합리성을 띄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요 한은 우리에게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항상 악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범사마다 짐승의 표가 붙어있다. 즉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문화는 불가향력적으로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다.( 틴텔주석, 1983. ) 666이라는 수를,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힘이 악한 영에 의하여 인도될 때 행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나타내 주는 상징적인 수로, 그리고 짐승의 힘이 가장 지고한 발전단계에 도달하고 인간의 모든 문명과 예술과 노래와 과학 과 이성이 하나로 연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허무맹 랑한 것으로 간주하게 하고 미래의 삶에 대한 소망을 현세의 행복을 손상시 키는 것으로 간주하게 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수로 해석하고자 한 다. 그때 세속적인 힘의 영향력은 절정에 이를 것이며, 오직 참된 지혜자만 이 신앙의 세계와 무신앙의 세계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인식하게 될 것이 다.( 베이커 주석, 기독교문사, 1988, p 560. ) 본문이 왜 하필 666을 말했는가? 그것은 우상이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함이다. 만약 하나님의 숫자라면 7이다. 그리고 7이 세 번이면 완전한 하나님이다. 6은 7에 못미치는 숫자로서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이적 을 행하고 신(神)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까지는 못미친다는 것이 다. 그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의도를 망각하고 666 숫자 그 자체가 마치 신비적인 숫자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바른 성경해석 에 근거하지 못한 불건전한 종말론이다.( 한정건,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p 185. ) 우리가 이제 계13장을 통해서 얻어야 할 중요한 것은 짐승과 우상을 섬겨 그 표를 받느냐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의 표를 받느냐 또는 짐승의 표를 받 고 멸망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표를 받아 영생을 얻는냐 하는 두가지의 일 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표를 받을 수 없듯이 짐승을 섬기지 않으면 짐승의 표를 받을 수 없다. 짐승을 섬기지 않 고 표만 받는 것은 짐승의 표가 아니다. 짐승의 표란 반드시 짐승과 우상을 섬기고 받는 것이다.( 김수영, "666을 이긴 사람들", 소문출판사, 1991, p 81. ) 666은 '상징수'로 보아야하고 결코 666의 문자적 표나 마크로 보면 안된 다. 666의 해석을 강조하지 말고 666의 상징자인 짐승, 거짓선지자를 이길 수 있는 신앙을 강조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은 어떤 제도의 변화, 정치의 변화 체제의 변화속에서라도 다니엘처럼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신앙의 훈련 과 연단에 관심을 둘뿐이며 미래의 변화에 대해 관심이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선한 목자 여호와가 우리를 책임져 주기 때문이다. - 천정웅, "휴거와 666의 정체", 월간 현대종교 편집부, 1991, p 47. -
계시록에 나오는 두 번째 사망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2015-07-13
계시록에 나오는 두 번째 사망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Question 안녕하세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두번째 사망이라는 말이 몇군데 나오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명에는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Answer. 1. 성경에서 사용되는 사망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영적 죽음-하나님과 단절되어 생명과 축복에서 단절되어 있는 상태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엡 2:1-3,5)에서 죄와 허물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즉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사단의 지배를 받으며 정욕을 좆아 사는 상태를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육신의 죽음-육체와 영혼이 분리됨 이것은 흔히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육신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가리켜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첫째 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눅 16:22). 영혼이 육신을 떠나간 후에 그들을 최후 심판의 날때까지 낙원(신자)이나 음부(불신자)에 가게 됩니다. 이 곳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우리의 영혼들이 거주하는 중간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눅 16:19-31). 3) 영원한 사망-둘째 사망 이 영혼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이 심판에서 제외됩니다(계 20:15).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행위록에 기록된 대로 공정하게 심판을 받고 그 죄에 따라 영원한 심판의 장소로 가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일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둘째 사망은 영원히 정죄를 받고 하나님과 분리되는 최종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계 20:6,11-15). Question 2. 둘째 사망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알겠습니다. 또 궁금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심판에서 제외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낙원에 있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지 않고, 음부에 있는 사람들만 심판을 받는 것인가요? 아니면 낙원에 있어도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인가요? 다시 말해서,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만 낙원에 가는 것인지, 아니면 생전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한 사람들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없는 사람들) 까지도 가는 것입니까? 제 생각에, 자신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했지만,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다시 한번 답변 부탁드립니다. Answer2 1. 생명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은 사람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고 고백했다면 누구든지 생명록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증을 해주시기 때문에 세상에서도 자신이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말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사실은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일이 "마음과 행동 모두를 통해 나타나는 진실한 고백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2015-07-13
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 글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이 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6번(문서 열기)을 클릭하면 문서를 읽거나 다운 받을 수 있습니다. 1. 요한 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 2. 요한 계시록의 4가지 해석 방법 1) 과거주의적 해석 방법 2) 현재주의적 해석 방법 3) 미래주의적 해석 방법 4) 영적 해석 방법 5) 종합적 해석 방법 3. 묵시문학과 요한 계시록 4. 요한 계시록의 저자 문제 1. 요한 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 요한 계시록은 요한 당시에 소아시아에 퍼져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회람 서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1세기를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레니우스는 계시록이 81-96년에 있었던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 쓰여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도미티안은 "황제숭배"를 이슈로 제기한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가장 먼저 박해한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로마 시의 화재범으로 몰아 사나운 짐승과 불에 태우고, 참수형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네로 뒤에도 몇 몇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박해는 로마에 인접한 지역에서만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은 로마 공화정 말기와 로마 제국의 초기에 "로마의 정신"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가 세계에 평화와 정의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하고 이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로마의 정신"은 점차적으로 "황제의 인격"을 숭배하는 곳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유프라테스, 그리고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서 "가이사 숭배 사상" 즉 "황제숭배 사상"을 이용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민족의 종교를 없애버리고 황제숭배를 절대신앙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단지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를 중심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당국은 1년에 한 번씩만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다!" 라고 말만 하면 다른 종교를 갖는 것을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제국에 속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황제 숭배 예식을 실시한 후에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황제라 해도 인간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그때부터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게 되었으며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조직적인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주라 부르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순교자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로마 당국의 질풍과 같은 대 박해를 견디기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교회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한 마음으로 주님께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세속화와 사치와 타락에 빠져서 영적인 힘을 완전히 상실한 무능력한 교회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한쪽으로는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세상과 거짓 종교와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점차적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고 영적, 윤리적으로 타락해갔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던 1세기의 아시아 교회들에게 요한을 통해서 이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모습을 통해서 세상의 박해가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박해 앞에서 방황하는 교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황제로 인해 당황하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배후에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모습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싸움이 영적인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결국 최후에 사단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도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을 향해서 세상이나 거짓 교훈에 타협하지 말고 계속해서 정결한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첫 사랑을 상실하고, 윤리적 영적으로 부패해 가던 당시의 교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였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이러한 부패 요소들과 싸워 이길 것을 권면하셨던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 그러면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동안 요한 계시록을 해석해 온 방법을 나누어보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과거주의 학파의 해석(The prete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첫 번째 방법은 요한 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요한이 살던 1세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과거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이 이미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다 성취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 계시의 말씀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말한 천사의 말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들은 이 예언들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기 때문에 요한이 살던 1세기에 모두 다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1세기 당시의 교회와 로마 당국과의 싸움에서 궁극적으로 교회가 승리할 것을 (상징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과거주의적 해석 방법은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에 매우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미 과거에 다 성취된 것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내용을 1세기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하면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이란 말을 요한 당시로 국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히"라는 말은 "반드시"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 16:20, 눅 18:7-8 참조). 그러므로 이 말은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과거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요긴한 말씀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현재주의(역사주의) 학파의 해석(The historic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두 번째 방법은 계시록에 나오는 예언을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재림할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사건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방법을 '현재주의' 또는 '역사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을 모두 다 현재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연결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종종 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역사 사건에 뜯어 맞추는 실수를 범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현재 역사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을 로마를 멸망시킨 야만족이나 모슬렘의 침입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들은 천사가 요한에게 준 작은 책을 루터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세력을 로마 카톨릭으로 보고, 짐승의 멸망을 로마 카톨릭의 멸망으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큰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억지로 현실에 적용시키다가 실수하게 되는 단점도 있습니다. 3) 미래주의 학파의 해석(The futur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세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역사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람들이 계시록의 내용을 먼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를 '미래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초대교회-주님의 재림 때까지 있을 모든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4장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역사의 마지막 때(주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7년 대 환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라면 이 책은 요한 당시에 박해를 받던 성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도 주님께서 당시 교회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을 요한을 통해서 편지로 써주셨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당장 로마의 칼날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중동전쟁의 위협이나 E. C. 공동체의 출현 같은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다소 무리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상징주의 학파(영적 해석 학파)의 해석(The allegoricalist' view)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번째 방법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영적(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은 어느 시대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원리를 상징을 통해서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견해를 "영적인 해석"(또는 "상징주의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에서 선(교회)과 악(사단)의 전쟁 속에서 선(교회)이 승리하는 보편적인 신앙의 원리들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원리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단점은 사람들이 성경을 지나치게 자기 주관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5) 그러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종합적 해석)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가지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러한 네 가지 해석 방법은 모두 다 그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방법들은 단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요한계시록을 해석해야 합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방법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단점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종합형" 또는 네 가지 방법의 "절충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 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다음의 사항들에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가 요한 당시의 1세기의 교회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그 내용이 요한이 살던 1세기의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 지를 충분히 고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는 그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과거주의자들의 견해를 참고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메시지들이 1차적으로 1세기 교회를 위해 쓴 것이지만, 동시에 이 메시지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도 적용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1세기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해석할 때에 전시대를 걸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 그리고 복음과 거짓 종교사이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영적, 또는 상징주의의 견해도 참조하여 해석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한 가지 예언이 두 개 이상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이러한 예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그 당시에 이사야의 아내가 낳은 아들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예언은 처녀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사야의 아들은 모형이었고, 마리아가 낳은 예수 그리스도는 원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묘사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도 시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건을 한 사건 안에서 동시에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원근 통시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로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도 묵시적인 예언서이기 때문에 이러한 "원근 통시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짐승이 나타나는데, 이 짐승은 당시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의 황제, 또는 로마제국에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마지막에 나타날 최후의 적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가지 예언이 두 가지 이상의 사건으로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1세기의 사건인 동시에 현재와 미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역시 현재주의나 미래주의의 견해도 참고하게 될 것입니다. 3. 묵시문학과 요한 계시록 1)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의 유사점 우리가 계시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 구약 중간기에 유행했던 묵시사상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계시록이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고 또 내용상으로도 그들과 흡사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Revelation), 또는 '묵시'(Apocalypse)라는 말은 '감취었던 것이 드러난 것'(unveiling)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연극을 시작할 때에 막이 올려지면 그 뒤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묵시'란 말은 주전 2세기와 주 후 1세기 사이에 씌여진 유대 종교 서적들에 붙여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책들을 '묵시문서' 또는 단순히 '묵시'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묵시문학 속에는 강력한 이방민족들 사이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이 느껴야 했던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소수 민족아 당해야만 하는 핍박과 착취에 대한 내용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억압받는 민족의 원한을 갚고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에 대한 희망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권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재에는 악이 득세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개선될 것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항상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천재지변을 통해 역사에 개입하시고 악을 제거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결말은 항상 궁극적으로 선이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됩니다. 이러한 묵시 문학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의 통치를 받을 때마다 항상 주어졌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묵시문학을 통해서 계속되는 이방 세력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러한 묵시 문헌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자신의 백성이나 교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일시적으로 성도들과 교회가 악한 세력들에 의해 고난을 받으나, 결국에는 메시야를 통해 악한 세력들을 심판 받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마침내 악이 멸망하고 평화가 깃드는 영원한 세계가 임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의 특징은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전해주실 계시를 매우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전달해 주셨습니다. 계시록에는 행동과 직접적인 말씀과, 극적인 용어로 표현된 것과,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과 형상들을 통하여 전달된 계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그림이나 드라마, 그리고 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러한 그림이나 드라마, 또는 영상을 통한 상징들은 저자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록에서 바로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해 주신 것도 이러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시록의 언어는 현대인들에게 더 익숙한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형상과 상징들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계시록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들을 짐승이나 뿔 등과 같은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짐승들은 그 당시 통치자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이 이러한 상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의 통치자들의 멸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당시 교회의 독자들은 계시록에서 사용된 어휘나 상징에 익숙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시록에 나타난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와 멀리 떨어져서 태어난 우리들은 이 책에 사용된 상징이나 어휘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시록을 이해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의 차이점 그러나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주로 저자들의 이름을 숨기고 과거의 유명한 사람들(에녹이나 에스라와 같은)이 이름을 빌려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사도 요한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사변적인데 관심이 있으며, 세상의 종말의 때와 징조와 최후의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호기심을 채우기보다는, 당시의 대 박해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은 종말의 시기에 관해서는 단순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22:20). 또한 요한계시록은 다른 묵시문헌들과는 달리 사변적인 일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거나 듣고, 이 예언에 응답하여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윤리적인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묵시문헌의 요소를 배려하면서도 묵시문헌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4. 저자 문제 그러면 요한 계시록을 쓴 저자는 누구일까요? 여러분은 "그거야 당연히 사도 요한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대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요한 계시록은 너무나 많은 히브리적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문법에 있어서도 요한 복음이나 요한 서신과 그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2) 사도 요한이 아닌 다른 요한이 본서를 썼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3) 나이가 80이 된 사도 요한이 이러한 계시를 받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서를 누가 기록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시록의 저자를 요한으로 간주한 이상,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없는 한 이 견해를 따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저자는 (계 1:1)에서 자신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소개했습니다(1:1,4).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며(1:1),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22:19). 그는 당시 성도들의 환난에 함께 참여한 자였으며(1:9),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유배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를 받고 이 편지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1:9). 또한 그는 당시에 서 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해서도 익숙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도시들은 요한이 유배당했던 섬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도시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 책의 저자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12사도 중 하나였던 사도 요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 외에도 요한 복음과 세 편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고전5:5에서 범죄한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의 뜻은?/ 2015-07-13
고전5:5에서 범죄한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의 뜻은? Question 고전 5장에 보면 근친상간의 죄에대해 1절부터 4절까지 언급한 뒤에...5절에서 "이런 자를 사단에게 주어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음욕의 죄를 지은 자는 육신을 고통받게 하고, 회개하면 그 영혼은 구원을 받는 다는 뜻인가요? 답변 바랍니다. Answer 1.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근친상간을 한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전 5:1)을 보면 그 사람은 "아비의 아내", 즉 부친의 첩(또는 계모)를 취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계모(또는 첩)과 동거했든지, 아니면 계속적인 성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모든 교회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공공연한 일이었습니다. 2.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고린도 교회는 이 사람을 치리하는 일에 매우 속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도덕한 죄를 방치하는 경우에는 교회가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간음한 자를 방치하면 교회의 거룩성에 해를 입고, 또 이를 본 다른 성도들도 담대함을 얻어서 음란한 일을 행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나서, 고린도 교회 지도자들에게 회개치 않고 계속 음행을 하고 있는 성도를 치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여기에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은 "교회의 최종적인 치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 구절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 18:17-18)에서 주님은 죄를 범한 성도를 치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범죄한 성도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1)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권면해보고 이를 듣지 않으면, 2) 2-3 사람과 함께 다시 가서 권면하고, 이 권면도 듣지 않으면, 3) 그 사실을 교회에 알려서 교회의 이름으로 권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교회의 이름으로(공개적으로) 하는 권면도 듣지 않으면 그를 치리하여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은 교회 밖으로 추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범죄한 성도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치리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고전 5:1-)에 나오는 사람도 여러 번의 권고를 듣고도 회개치 않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를 치리하는 일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고린도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를 권면하고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추방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5. 그러나 이러한 치리 역시 그를 버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치리의 목적은 결국 그가 큰 고통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치리는 범죄자 당사자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서 "육체를 멸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치리를 당한 사람과 그 가족은 교회에서 매장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한 고통은 그를 회개하게 만들고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치리는 심판인 동시에, 사랑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좋은 아버지는 아들이 계속해서 못된 짓을 할 때에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처음에 아버지는 좋은 말로 아들을 권면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들이 죄를 범하면 매를 들 것입니다. 그리고도 죄를 끊지 못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집에서 내쫓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고통을 주어서 못된 습관을 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 역시 자기 힘으로 죄의 습관을 끊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혹한 치리를 통해서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7.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 교회의 한 장로가 출퇴근 하면서 전철에서 만난 젊은 여인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깊이 사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주 전철에서 만났기 때문에 가깝게 지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남이 잦아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의 교제가 길어지면서 차츰 그 사실이 교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그에게 몇 번 회개하고 잘못된 관계를 정리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 여인을 만났습니다. 마침내 그 교회에서는 그로부터 장로직을 박탈했습니다. 그 장로님은 이를 통해서 큰 상처를 받고 많이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장로님은 그 과정 속에서 잘못된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에 그는 작은 개척 교회로 가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전보다 더 많이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이 일로 인해서 더 성숙해졌고 연약한 사람을 감싸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8. 이와 같이 회개를 권고해도 끝까지 그 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극단적인 치리가 약이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치리를 통해서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하고, 죄로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며, 죄를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러한 치리를 통해서 반드시 주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죄를 범할 때에, 앗수르나 바벨론에게 그들을 넘겨주어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줄 몰랐던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땅에서 포로로 지내면서 결국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공관복음(마,막,눅)과 요한복음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2015-07-13
공관복음(마,막,눅)과 요한복음은 어떤 관계가 있나요? Question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성경에 현대인의 성경을 만드실 생각은 없으신지? Answer 1.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서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주소를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http://biblenara.org/gospel/gospel6-2.htm). 2. 현대인의 성경은 사랑의 교회 홈페이지에서 이미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곳(http://www.sarang.org/)에 접속하신 후에, 우측에 있는 "e-bible"(디지털성경)이라고 쓰여진 배너를 클릭하시면 쉬운 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