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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 2002-02-02 10:24:29 read : 7 이남섭 교수 (한일신대) 1. 문제제기와 연구 주제 1.1.1. 문제제기 - [경제기적] 뒤에 오는 [경제정의론]의 의미 [경제정의]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현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경제기적'도 이루었고, 올림픽도 치렀고, '중산층'도 많아졌고, GNP도 높아졌고, 자가용도 많아졌는데, '경제정의'를 내세운 한 시민운동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시민사회로부터 그렇게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소박한 의혹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기적'뒤에 몰려오는 이 황당한 '경제정의'의 요구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황당한 현상은 당연히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하나는 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경제기적'이 곧 경제정의는 아니라는 문제이다. 경제의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는 왜 우리사회가 정의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고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장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또 다른 문제는 왜 지금 '경제정의'가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그 실현 가능성은 사실상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불가사이한' 현실의 존재가 바로 오늘 우리가 '경제정의'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하는 출발점이 된다. 사실 교회는 지난 몇 년 사이에 경제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이것은 한국교회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교회의 공통된 관심사로 나타났으며, 자본주의 사회뿐만이 아니라 구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전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동구의 몰락]이후 자본주의가 인간의 발전과 경제정의 실현의 가장 효율적인 체제라면 이제 그것을 가만히 따르기만 하면 되는데 왜 [경제]가 심각한 주제가 되고 [경제정의]가 계속 요구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소위 변화된 오늘의 세계에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검토할 필요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1.1.2. 연구주제와 방법 그리고 한계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우리는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이 무엇인지를 논의 하는데 이 연구의 기본 목적이 있다. 우리의 연구과제는 어떤 새로운 신학적 경제정의론을 제시하는데 있지 않고 현 우리사회의 경제현실에서 지배적으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타당성을 거시 이론적 차원에서 검토하는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 우리사회의 지배적 경제질서를 [신 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규정하고 먼저 이 정책의 출현 배경과 특징을 정리 분석한 다음 이 정책이 표명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를 규명할 것이다. 그 다음 이 정책의 국내적 조명을 김영삼 민간 정부의 [신경제 5개년 계획]과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을 중심으로 전개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미시적 접근 방법보다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제정의론의 논의를 전체적 의미에서 평가하는 거시적방법을 취할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의 연구목표는 처방이 아니라 진단에 있다. 왜냐하면 골비쳐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대안의 모색은 올바른 진단 뒤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이데올로기성 규명에 분석의 초점을 둘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다분히 이론적 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점이 이 연구의 한계가 될 것이다. 이 연구는 토론을 위한 시론적 성격의 것으로 완결된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서 논의 되는 경제정의론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능하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성서적, 신학적 근거에서 볼때도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다. 나머지도 이에 대한 설명을 하나씩 하는것으로 2. 이론적 방법론적 전제들 : 왜 신학은 경제를 문제삼는가 신학이 경제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한 가지 비유를 들면서 이 문제를 접근하려고 한다. "경제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교회는 '앰뷸런스적'인 일을 많이 해왔다. 그러나 이 일은 언제나 필요하나 그것은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재해는 다루나 그것의 원인과 예방은 다루지 않는다. '앰뷰런스적'인 행동은 주로 아마츄어적인 이해에 의존한다. '앱뷸런스식'의 차원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이슈를 아주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전문가 없이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그러나 전문가가 다룰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주제에 포함된 이슈는 (경제문제) 전문가에게만 맡기기에는 사안이 너무나 중요하다." 이 비유는 오늘 신학이 경제문제를 다루어야 함을 상식적 차원에서 잘 설명해 준다. 이제 좀더 깊이 있는 이론적 근거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서적 근거와 신학적 근거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의의 개념정의, 여기서 우리는 제3세계,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적 입장을 참고할 것이다. 2.1.1. 성서적 근거들 경제 문제에 대하여 성서가 이야기하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모두 요약 할 수 없다.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의 책으로서 성서는 경제적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신뢰하고 자연을 보존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책임성을 다루는 창조주 하나님을 다룬다. 하나님의 중심 주제로서 정의에 대하여 논의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의를 빵과 기구들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보여준다. 성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개입주의자(intervencionista)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의지와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죄로 가득한 구조를 정당화 하지 않도록, 불평등을 허용하지 않도록, 그리고 노예를 증가하지 않도록, 타자의 희생 위에 부를 축적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기구를 창조하도록 요구한다. 예수 자신은 그의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구약에서의 해방의 예언자적 메시지를 가득 채웠다. 이것을 그는 나사렛의 선언에서, 가난한 자와의 연대 속에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성서적 전망이 우리가 경제적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는 것을 불가능 하게 한다. 그 자신의 고유한 법과 절대적 원칙을 선호하는 오늘의 세계경제는 우상숭배에 대한 성서적 비판을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과 맘몬사이의 선택이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 할 필요가 있다. 너는 하나님과 맘몬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눅 16:13). 우리는 정의롭고 존속될 수 있는 대안적 경제체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미 만들어진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새로운 꿈과 우리의 탐구를 위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행동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서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세계는 무에서 창조되었다. 여자는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준다. 5개의 빵조각으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이야기, 죽음에서 살아난 예수의 이야기, 이 모든 것은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그리스도는 새땅과 새하늘을 약속하시는 분( 계시록 21:5 )임을 가리킨다. 2.1.2. 신학적 근거들 어떤 사람들은 신학은 경제를 분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제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있으나 신학적 성찰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위대한 신학자들은(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경제와 정치는 결코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들 신학자들은 신앙과 사회, 정치적 실천을 연결 시켰으나 언제나 간접적으로 하였다. 예를 들면, 루터와 칼빈은 경제와 정치를 세상적 영역의 부분으로 고려하였지, 영적 영역의 부분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는 칼빈과 개혁교회의 전통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신앙 그 자체는 경제생활의 원칙이다. 정치와 경제 또한 "영적 영역"의 부문이다. 경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개혁교회의 기여가 본질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우리는 개혁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개혁교회의 신학적 유산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영역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요구하는 오늘 우리의 세계질서와는 대립된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교회의 세 가지 신학적 전제에 대한 빠른 이해를 요구받는다. - sola scriptura(오직 성서로)는 (우리는) 삶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오직 성서가 우리를 인도함을 가르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현재 세계 경제에서 우리는 율법, 예언자 그리고 복음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와는 독립되어 살도록 요구하는 사회와 직면하고 있다. 불의한 경제실천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착취당한 자의 편에 선 하나님의 개입은 분명하게 십계명과 예언자의 가르침, 그리고 그리스도의 관심에 표현되어 있다. Sola gratia (오직 은총으로)는 이해타산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한 선물로 선포된다. 그러나 근대세계 경제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을 노예화하도록 위협하는 파렴치한 힘과 직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구원과 삶은 신앙의 체험(sola fide)이라는 진리를 확고하게 고수하여야 한다. 그러나 근대세계경제에서 우리는 역사의 종말이 도래하였다는 주장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요구는 해방을 위한 가난한 자의 희망을 죽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세속화한다. 개혁교회의 신학에 따르면 인간구조의 영원성, 역사적 순간을 적대화하려는 욕망은 진정한 이단이며 신앙의 적이다. 이점을 16세기의 사회경제적 관계의 변화에 신학적으로 적용하였다는 점이 교회에 대한 칼빈의 최대의 선물이었다. 그는 다른 개혁자들이 하지 않은 방법으로 태어나고 있던 자본주의 질서와 쉽지 않은 평화를 이루었다. 여기서 이것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교리는 예정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론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에 칼빈은 봉건주의의 구질서를 방어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으며 또 그 질서가 지나가는 것을 슬퍼할 이유가 있음을 느끼지 않았다. 또 하나님이 모든 새질서에 대한 주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칼빈은 그 안에서 기독교의 소명을 발휘하는 정당한 가능성과 적극적 가치를 보았다. 이리하여 경제적 삶과 사상에 대한 칼빈신학의 최대의 기여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제체제는 하늘아래 없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2.1.3.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행동규범에 대하여 끊임없이 관심을 표명해 왔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회의 사회적 교리는 경제적 무질서를 문제삼았다. 가령 1891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Rerum Novarum (새로운 사태)", "개신교 종교 사회주의(쿠터, 라카츠, 바르트)", 불가코프(Bulgakov)와 베르자에프(Berdiaev)와 같은 러시아의 망명 신학자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책임사회 윤리", 1961년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Matar et Magistral", "Facem in Terris (땅의 평화 1963)", 1967년의 교황 파울로 6세의 회칙 "Populorum Progressio"등 이 모든 것은 경제적 현실의 문제에 대한 교회와 신학의 우려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경제활동에 대하여 영향을 주려는 교회와 신학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가르침이 사실상 경제학자, 경영자, 기업가, 다국적 기업에 의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교회와 신학이 현대 경제체제의 지배적 방향을 비판하고 [공공선]의 중요성과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부의 생산과 분배]를 호소하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만약 어떤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며 불의한 경제구조는 평상시처럼 계속된다.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주요한 위치에 있는 평신도 - 경제학자, 기업가, 경영가 -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전혀 반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정반대 되는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는 경제적 문제에 대하여 개입할 수 없으며, 교회는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제는 도덕 또는 윤리적 원칙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경제는 가치 중립적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경제적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효율성이며, 이것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내는 데 있다. 한마디로 교회와 이들 경제적 활동의 책임자들 사이의 대화는 "귀머거리 사이의 대화"의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와 경제계사이의 이러한 관계의 부재는 민중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경제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주지 못하며 이점이 오늘 신학과 경제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정립이 요구되는 배경이 된다.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이 신학을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학자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경제를 관리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공공선]에 대하여 말하는데)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은 이러한 신학적 주장들을 당위적인 것에 대한 것이지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지적해야 할 사실은 이들 경제계의 주체(은행가, 사업가, 상인)들의 입장에서 나타나는 허위의식이다. 이들은 경제적 삶과 윤리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윤리는 인간 삶이 보다 인간적이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윤리는 삶의 재생산을 위해 염려하는 데 이것은 경제적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이것은 윤리에게 있어서 중립적 지역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의 물질적 조건에서 출발하여, 경제가 삶의 재생산을 돕든지 또는 돕지 않든지를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며 가치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숨기려는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이 된다. 이와 반대로, 프리드만(M, Freedmann)과 시카고 학파의 입장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도덕 밖의 것으로 설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본성이 다루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신학이 경제학을 비판하게 되는 고유한 경제적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신학자들과 교회를 세계의 현실 밖으로 놓으려는 도덕주의적 관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를 세계의 현실 밖으로 격리하려는 대표적인 경제학이 바로 고전적 또는 신고전주의 경제이며, 맑스주의 경제학자들 가운데서는 스탈린의 경제적 저술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제를 과학이라고 규정하고 신학을 미신이라고 간주, 세계 밖으로 추방하려 하는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모두 분석할 수 없다. 단지 고전적 경제학자들에 제한하여, 그들의 비합리적 허위의식을 지적하려 한다. Julio de Santa Ana 가 정확하게 보았듯이 이들의 중요저작들에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경제적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대표적 표현이다. 그는 모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시장을 조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서 그는 시장은 동일한 사회적 힘이 만나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신적 개념을 마술적으로 (신학적으로) 도입하면서 모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현실을 숨기려 하였다. 이외에도 고전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종교적 언어의 예들은 많이 있다. "기적", "희생", "구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희생"의 개념은 종교적 실천에 그 기원이 있다. 오늘날 이 희생의 언어는 끊임없이 반복되나 "대중 계층의 희생"만을 가르치지 풍요 속에 사는 이들의 희생은 요구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시카고 학파와 밀턴 프리드만의 사상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즉 "높은 사회적 희생" 없이 경제 성장은 불가능하다. "구원"의 개념은 외채 - 제3세계의 외채 - 에 대해서 말할 때 많이 사용되는데, 여기서 외채는 민중의 희생으로 또는 외채의 "구제"로 해결된다. 외채의 "구제"와 같은 말들은 겨우 형이상학적인 것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은, 경제이론은 근본적 입장을 표현하기 위하여, 종교와 신학에 고유한 단어들을 사용하며, 이러한 상징의 사용도, 무의식적으로, 경제이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숨기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고전적 정치경제학을 가리켜 종교이론이라 규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모든 경제 이론은 하나의 함축적 신학을 포괄하고 있으며 정반대로 모든 신학적 성찰은 또한 그 속에 함축적 경제학을 지니고 있다"는 Julio Santa Ana의 진술은 정당하다고 본다. 이것은 또 우리의 경제정의에 대한 논의가 경제 현실과 유리된 도덕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현실 그 자체에서 출발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2.1.4.경제정의의 주요 원칙들 이제 우리가 이 연구에서 전제하는 '경제정의' 의 주요 원칙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개념 정의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성서적 ,신학적 논의를 그 주요내용으로 한다. 첫째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공동체- 경제정의는 생산과 분배가 중요하게 고려되나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이며, 노동자의 세계이며 인간 노동의 가치이다. 생산성과 성장은 신학적으로나 성서적으로 볼 때 사회경제적 질서를 위한 마지막 기준으로 받아들 일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정의로운 경제 체제로의 가능한 전환은 오직 [하나님의 왕국]의 담지자인 가난한 자들의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의 삶이 사회경제적 질서를 위한 최후의 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수의 논리 (la logia de las mayorias)가 기준이 되는 생산의 새로운 사회관계가 형성되는 사회를 전제한다. 경제 정의는 불의한 경제체제의 변혁을 위해 저항하고 실천하는 착취당하는 이들과의 연대를 요구한다. 3.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있어서 경제정의 "변화된 세계", "새로운 세계질서","경제 제일주의로의 세계질서의 재편"이 오늘의 세계를 묘사하는 대표적 용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표현-수식어-뒤에 놓여 있는 공통적인 현실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세계적 재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정의}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이러한 [세계질서]가 태동하게된 배경을 이해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며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동구권 이후]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라는 점을 분석할 것이다. 3.1.1. 현 국제 경제질서의 재편의 배경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국내 경제학자들은 최근의 세계 경제 질서의 위기와 재편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3자위원회의 전략(Comision Trilateral) 대한 평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세계자본주의 주도국의 자체 분석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1960년대 말에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적 위기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국제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프로젝트의 실현을 보장하는 새로운 전략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이 당시 논의된 기본적인 적은 이제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제 3세계와 제4세계의 빈곤이었다. 가난한 나라들은 갈수록 집요하게 [새로운 국제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부의 균등한 재분배, 원자재의 가격과 공산품 사이의 균등한 상호교환, 일련의 기술이전,유리한 환율등을 함축하였다. 부유한 북의 나라들에 대한 가난한 남의 나라들로 결집된 새로운 적의 도전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구조적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1973년에 록펠러, 키신저, 브렌진스키의 지도아래 3자 위원회(Comision Trilateral)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세나라, 미국,서유럽,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가,은행가,다국적 기업의 최고 경영인,정치가,학자 들로 구성되었다. 3자위원회의 이름은 바로 이 세나라가 연합 한데서 나왔다. 이 3자위원회에서 논의된 중요한 결론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전지구적이라면, 해결책 또한 전지구적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와 같은 다른 체제로의 전환 또는 남쪽의 가난한 나라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수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혁신이 아니라 갱신이다.(세계적 차원에서 직면하고 있는 체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조정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새로운 국제체제]의 출현이 아니라 [갱신된 국제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리하여 3자위원회는 자본주의 위기의 극복을 위한 기본적인 전략을 다음과 같이 작성하였다. 첫째, 경제적 차원에서 다국적 기업을 통하여 자본의 국제화를 강화하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소속된 모든 나라들의 체제의 지구적 해결에 가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족 경제의 자율성에 대한 희구와 독자정치의 수립은 이러한 협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방해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재정적 차원에서 기존하는 국제금융기구들(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등)의 기능을 다국적 은행을 통해 강화한다. 세째, 과학-기술적 차원에서,고전적이고 더러운(환경오염)산업기술을 남의 주변부 나라들로 이전하고 중심부 나라들엔 보다 역동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기술 산업의 주요 부분을 보존한다. 여기서 환경산업은 3자위원회를 위하여 아주 중요한 산업으로 고려된다. 네째, 정치적 차원에서,세계자본주의의 위기의 해결은 이 체제를 구성하는 모든 나라들에게 그 혜택이 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능한] 나라들과 [가능하지 않은]나라들 사이의 선택이 제기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능한 나라들은 브라질, 베네쥬엘라, 멕시코 등 소수의 중진국들이 3자위원회 나라들과 강력하게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나라들로 선택된 나라들은 3자위원회에서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가치들의 회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즉 "상대적 민주화" 또는 "보호된 민주화"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 말은 제3세계 정치가 또는 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3자위원회에 의해 만들어 졌다. (간혹 이 용어는 보다 사회적인 언어로 "기독교 민주당",또는 "사회 민주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 이들 나라에 있어서 임금의 상대적 회복을 장려하여 중간층의 구매력을 증가시키고 이를 통해 내수시장의 소비망을 확대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3자위원회의 외부시장(국제시장)에 활력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가 수출하기를 원함으로 인하여 3자위원회의 시장은 포화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이미지를 더럽힌 '국가안보국가'의 야만적 행위를 청소하기 위하여 인권의 옹호와 고무를 진작하는 정책을 취한다. 이상이 3자위원회가 오랜 시간의 협의와 연구끝에 수렴한 체제 위기의 장기적 극복 전략의 전체적 대안이었다. 따라서 이 기본 전략의 실제적 적용은 3자위원회와의 긴밀한 협력의 방식을 통하여(G7회담)실시되며 이 과정에서 개별 나라들의 특수한 결정은 전체적 전략을 준수한다는 조건아래에서 허용되어 졌다. 이 장기전략의 1단계는 카터의 인권정책으로 나타났고 2단계는 레이건 - 부쉬 - 대처 - 콜-나까소네 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과감한 실시로 나타났다. 지난 80년대 동안 실시된 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는 대부분 실패로 평가되고 있으나 예상하지 않았던 동구권의 붕괴로 인해 이 정책의 전환 내지 포기는 아직 미결정의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시장경제체제의 우수성을 선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남아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오늘 "변화된 세계" 또는 "새로운 국제질서"라는 요란한 소리로 떠들썩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태동하게 된 배경이다. 3.1.2.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특징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태동배경에서 지적하였듯이, 이 경제질서는 제3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정의로운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의 요구에 대항하기 위하여 구상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략적 경제 정책의 한 단계이다. 기본적으로 불의한 기존의 경제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갱신된"경제정책의 하나이다. 이제 갱신된 이 경제질서의 특징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질서가 제시하는 경제정의론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분석해 보자.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주요한 특징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시장경제의 세계화'(또는 지구화, 국제화)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의 사유화' 또는 '민영화'가 그것이다.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2.1.1.. 시장경제의 세계화 시장경제의 세계화는 이미 10년 전부터 추진되어 왔으나 이것이 국제적 여론의 파고를 타기 시작한 것은 "동구의 몰락" 이후이다. '동구의 붕괴'는 시장경제체제의 환상을 더욱 부풀렸다. 그러나 매스컴을 통한 국제화 논의는 국제화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심지어는 허황된 의식까지 유포하고 있음을 지적되어야 한다. 세계화는 두 가지 모순된 현상을 동반한다. 한편으로는 범지구화 현상이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배타적인 지역 경제블록화 현상이 오히려 강화된다. 이 상반되게 보이는 현상은 사실은 단일한 논리에서 기인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글로발리즘(Globalismo)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주도해 왔던 미국이 1950년대 중반 이후 경제적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의 수립으로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3자 위원회(Comision Trilateral)에 의해 재편되어 졌다. 글로벌리즘은 제한 없는 자유무역을 통하여 세계경제질서를 발전시키자는 강자의 논리이다. 그것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의 확장적, 공세적 이데올로기로서 불균등한 세계경제의 갈등구조를 극복 내지 해소하기 보다는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시장질서의 회복은 흔히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른바 왈라스-파레토(Walras-Pareto)의 일반균형론(teoriade equibrio)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에서 그러한 가정이 나온다. 더구나 국가 주도의 전형적인 발전모델로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장은 그 안에 인간이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제로이며 결코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물론 1930년대 이후의 국가개입(뉴딜 정책)이 스태그플레이션이 라는 새로운 형태의 모순을 낳은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전후에 복지국가가 이룬 모든 개혁적 성과를 부정하고 시장으로 돌아가자는 신자유주의의 시장경제만능론은 현실을 무시한 지나친 비약이다. 다른 한편 경제의 세계화는 시장의 '개방화'로 나타난다. '개방'을 하지 않으면 세계경제에서 낙후되는 것으로 평가된다.이 이론에서는 선진국의 보호주의 정책(슈퍼301조와 같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며 한국보다 500년이나 앞서서 세계경제에 개방한 라틴아메리카 경제의 낙후성에 대한 설명이 없다. 지난 500년 진행된 개방의 실패경험은 역사의 박물관속에 갇혀 버린다. 개방화 속에서도 선진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보호주의의 장벽에 대해서는 쌍무협정의 조항으로 슬그머니 처리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계화 또는 개방화의 선택적 적용이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3.1.2.1.2. 경제의 사유화(Privatization) 또는 민영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두번째 특징은 공기업의 사유화 또는 민영화이다. '국가개입의 최소화','작은 정부론','정부규제의 완화','민간의 활력','행정의 간소화'등 경제의 사유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용어들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국가의 경제개입을 견제 또는 국가기능의 역할(경제에 있어서)을 최소화하는데 있다.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n)은 케인즈의 개입주의 국가론이 자본주의의 모든 위기의 원인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이것은 경제의 사유화를 추진하는 기본이론이 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선진제국에서 보여지는 경제위기의 주된 원인은 복지국가체제의 실패에 있다. 케인즈 주의에 입각한 복지정책은 본질적으로 인플레와 노동의욕의 상실로 인한 경기침체로 말미암아 국가재정이 파탄에 직면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재정의 건전화를 기하기 위해서 공적부문-복지부문-의 지원을 줄이는 '작은 정부'를 지향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고용과 복지를 창출하는데 드는 불요불급한 지출을 줄이고 공익에 대한 기업의 부담을 덜어 줌으로써 경쟁력 강화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고용과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을 통한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관리 정책으로부터 유연생산적 공급 지향적 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개입국가적 조치와 함께 꾸준히 늘어난 국가 지출 및 공급지향경제를 지원키 위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막대한 투자는 국가채무규모의 엄청난 증대를 가져 왔으며 이러한 부담은 민영화와 탈규제조치에 의해서만 해결될 것으로 전제한다. 이리하여 이제껏 공익과 고용안정,사회복지의 상징이던 공기업이 어느새 낭비와 비효율의 상징으로 급변하면서 대대적인 민영화의 수난을 겪게 되는 것이다. 민영화 조치는 각종 규제완화,사회복지 삭감,긴축재정과 함께 국제화시대의 각국 정부들이 가장 애호하는 경쟁력 강화전략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할 사실은 경제의 민영화보다는 복지국가가 먼저 선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구의 이 복지국가는 동구의 사회주의 복지국가와의 경쟁 상태에서 형성,전개되었다는 점이며 결과는 체제자체의 위기를 불러온 엄청난 부담이었으며 결국 이 정책의 상호 포기로 귀결되었다.단지 차이는 사회주의적 국가개입을 채택하였던 자본주의 복지국가(케인즈식)정책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가지고 원래의 자본주의 노선으로 복귀하였다면 동구의 현 사회주의 국가들은 기존의 강력한 국가주도의 복지국가사회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적'시장경제정책'을 채택하였다는 데 있다. 이것 은 궤도,노선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체제의 붕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뉴딜정책을 시행하였을때 아무도 미국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라고 평가하지 않았듯 유신체제의 긴급조치 8.3을 시행하였을때 아무도 한국자본주의 체제의 ꝷ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3.1.2.1.3. 지배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형성배경에서 언급하였지만,'국제화'현상은 세계 각 지역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의 자유로운 발전의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지난 수십 년간 심화되어온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팽창,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 통신위성,정보의 전달 및 수송체계의 비상한 발달로 인하여 세계적 통상의 기회와 규모와 속도가 엄청나게 증가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고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국제화'는 현대사의 오랜 질곡인 제국주의적 지배와 종속관계가 더욱 악화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적으로 지금 자본과 기술과 상품의 자유로운 교류는 가능하지만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불가능하다는데 이미 드러나 있다. 무너진 동구의 장벽은 이제 제1세계와 제3세계사이의 국경선으로 옮겨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구체적 작업은 유럽에서의 이민법제정과 미국의 나프타 체결(NAFTA)의도에서 나타난다. 서구의 지역별 경제블록화 이면에는 제3세계 노동의 제1세계로의 이동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다국적 기업은 싸고 자원이용이 용이한 세계 어느 지역이건 옮겨 다닐 자유를 누리지만 세계의 기층민중에게는 자신의 일자리를 선택하여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사실상 제한되어 있다. 자유는 자본의 것이지 민중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라은 자만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학자 김종철이 "국제화 논의는 성장과 경제개발 및 자유무역의 논리를 전세계적으로 확대하려는 다국적 기업들과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에 직접 간접으로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라고 단언한 것은 타당성이 있다. 3.1.3.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과 경제정의론 지금까지 서구신학은 서구자본주의 자체를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본질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사회학자들이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을 기독교윤리와의 관계에서 해석해 보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교회 내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동일시한 신학은 없었다. 오히려 기독교와 자본주의 가치 사이의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신학적 진술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낙관적 신뢰는 "숨은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처음으로 서구신학은 자본주의를 두려움 없이 기독교의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체제로서 정당화하였으며 이것은 신보수주의 신학(Neoconservadurismo ; 이하 NC로 약칭) 또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오랫동안 적대 관계에 있었던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고전경제학이 도덕신학과의 결합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경제학이 신학임을 공식적으로 시인하는 행위이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재편은 단순히 새로운 경제정책의 부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보장하고 촉진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과정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수립자들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모순 - 윤리적 위기 - 을 단순히 정책의 변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에서 출현한 것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 또는 NC이다. 이 NC는 유럽에서 출현하였으나 북미에서 훨씬 대중적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미국의 유명대학의 사회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 등으로 구성되어 지며(Think Toank) 이것은 제도적으로 "종교와 민주주의를 위한 연구소(Institution on Religion and Democracy)"산하에 결집되어졌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로는 카톨릭사제출신의 미첼 노박(Michael Novak), 개신교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톤(Samuel Huntington), 루터교의 노이하우스(J. R. Neuhaus)와 글라사르(N.. Glasar) 그리고 크리스톨(I. Kristol)을 지적할 수 있다. 이기구의 최대의 과제의 하나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있으며 여기에서 경제학은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제 신자유주의 경제신학의 신학적 전제를 경제정의론에 제한하여 정리해 보려고 한다. 3.1.3.1.1.시장경제가 생산하는 상품으로서 경제정의 (개인연금시대 - 개인연금을 위한 경제정의) 신자유주의 경제신학의 근본적 목표는 "민주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이고 정당한 체계로 제시하는 데 있다. 이들 NC이론에 의하면,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민주적 자본주의"경제제도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경제체계"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정치경제제도보다 인간의 사회적 문제해결책으로서 더욱 능률적이며, 보다 현실적이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성과 자유를 확보하면서 인간 공동체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건인 재화의 생산분재(경제정의)문제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회경제체제보다 훨씬 합리적인 사회제도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역사의 내적 구조는 이것을 입증한다. 겨우 200년도 채 안되는 자본주의 지배동안에 부르주아는 그이전의 세대들이 이룬 것보다 훨씬 막강한 생산력을 창조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러한 생산기술의 끊임없는 혁명과 동시에 억압적 관계를 해소하는 사회적 관계의 다른 혁명"을 보았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신학(노박과 피터 버그)은 거의 배타적으로 자본주의의 장점만을 찬양하였다. NC의 경제신학에 따르면,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에 있는 덕목은 효율성과 성장 그리고 인간의 창조성과 기업정신이다. 창조적 환상없이 이윤도 효과적 성장도 없다. 창조적 상상력과 함께 기업의 팀웍이 있으며, 기업적 관리를 견디는 합리적, 인간적 조정이 있다. 시장경제의 이러한 덕목은 자유와 정의(경제)에 유리한 조건들을 창조하도록 이끈다. 이것은 사회적 다원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그와 함께 자유와 연대의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덕의 극치는 분배능력에서 나타난다. 시장경제도 다른 어떤 체제보다 나은 분배를 실현한다. 당연히 국가의 계획경제보다 나으며 심지어는 복지국가의 빈곤에 대항한 투쟁의 방법들보다 낫다. 이점을 버거는 입증할 수 있는 경험적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소위 쿤츠(Kunts)의 곡선에 의하면, "만약 경제성장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부와 이익의 불평등은 처음에는 심해지나 그후에는 빠른 시간안에 감소되며 그후에는 상대적으로 안정한 위치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쿤츠의 테제를 입증해 주는 구체적인 예로 아시아의 자본주의(NICS)경험을 제시한다. 요약하면, 자본주의는 모두의 운명을 개선한다. 부자와 가난한자 둘 다 동등하게 자본주의로 인해 더 많은 것을 확보한다.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혁명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그 어떤 체제보다 정치경제적 과정에서 보다 해방적이다. 빈곤과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보장하며 자유와 경제정의의 생산을 보장한다. 그리고 자유와 경제정의의 생산은 시장경제가 확대될수록 더욱 증가한다. 말하자면 시장경제가 생산하는 상품으로서 '경제정의' 인 셈이다. 2) 자본주의체제의 도덕적 위기 극복책으로서 경제신학 앞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객관적 분석보다도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훨씬 많이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이란 보다 폭넓은 프로그램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NC의 민주적 자본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전통의 재건을 위한 신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반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었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동맹을 맺게 된 위기의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 자본주의는 깊은 사회-문화적 위기 앞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이 진단은 정치적, 문화적 세계뿐만 아니라 종교적 세계에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근대성 자체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나타난다. 이들에 의하면 근대사회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 모순에 있다. 근대자유의 두 가지 역동성 사이의 충돌, 즉 경제적 역동성과 문화적 역동성이 충돌할 상황에 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근대 경제학은 갈수록 많이 생산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의무를 추진한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조건의 추구가 근대경제학의 주요관심사였다. 이를 위해 적합한 계획, 효과적 관리와 높은 이윤을 끈덕지게 추구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잘 훈련된 대담한 기업적 인간이 요구되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실현의 표현을 향한 근대적 근대성, 자신의 본래성의 실현을 추구하는 문화적 근대성이 있다. 이것은 개인의 주관성과 그 실현을 중심에 둔다 이 문화적 근대성의 극단은 나르시즘과 쾌락주의(hedonismo)의 탐구로 나타난다. 신보수주의 이론가들은 상반된 이 두개의 역동성이 현재 극적으로 충돌할 과정에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들이 이과정을 심각하게 느끼는 이유는 문화논리가 경제논리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를 움직이게 하는 가치들을 방해한다는 데에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자본주의를 위해 아주 위험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적 과학적 생산의 근본을 뿌리채 흔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난 200년 동안 자본주의체제를 뿌리내리게 해온 것에 대한 도덕적 가치와 태도들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NC가 염려하는 중심적 도덕은 청교도적 윤리이다. 근대성에 대한 NC진단의 핵심을 성격 지운다면, 그것은 청교도적인 도덕성의 상실, 가치의 상실에 있다. 보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자본주의 근대성의 하나의 영적 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 NC이론가들은 민주적 자본주의의 현실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자본주의 근대성의 허약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니엘 벨의 테제는 바로 이것을 포착하고 있다. 소비주의와 쾌락주의는 자본주의 근대성의 문화적 역동성의 표현이다. 여기서 지배적인 가치는 소유와 소비가 제공하는 기쁨이다. 이 기쁨을 통해 체제의 멤버들에게 (대중)체제를 정당화하여 체제는 이렇게 그들의 멤버를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근본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는 도덕적, 성스러운 것의 경험이 없다. 금지된 것과 허용된 것의 한계가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다. NC의 우려는 문화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모순을 해소해야 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것을 맛보려고 하는 소비주의와 쾌락주의의 희구는 단지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만을 위해 움직이는 윤리이다. 이 윤리는 질서로 훈련되고 질서를 사랑하는 노동자의 인격을 양성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개념, 완전히 쾌락주의적인 개인, 체제가 요구하는 특성을 지니지 못한 개인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쾌락주의적 병폐를 중단시켜야 하며 생산성의 윤리, 질서, 규율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NC의 사상가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능의 기본에는 아담 스미스가 아미 본 것처럼, 그것 없이는 체제가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일련의 가치체계가 있다. 그것은 체제의 규범을 존중하는 것, 협약의 준수정신이다. 또 중요한 다른 가치는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의 능력이다. 이 두 가치는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여기서 NC이론가들은 생산적이고 희생적 윤리의 나무는 종교적 기반이 없이는 고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NC의 진단에는 윤리를 회복하기 위한 종교의 필요성에 대해 일반화된 의견이 있다. (유대-기독교) 종교 없이는 노동, 포기, 질서등과 같은 정신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보증이 없다. 다시 말해, 체제의 봉사를 위한 종교적 부흥이 필요하게 된다. 체제의 도덕적 기능을 위한 봉사, 체제의 정신적 기능을 위한 봉사에 윤리와 종교가 요구되어 진다.여기서 체제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 도덕적 덕목에 대한 교리적 강화가 일어난다. 미첼 노박의 민주적 자본주의의 경제신학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미첼 노박의 경제신학은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성서)를 이용한다. 기독교는 민주적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받아들인다. 자본주의의 문화적 "영혼"으로서, 궁극적 인간화와 조화의 힘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이점이 또한 NC의 경제신학이 우리시대의 사회。 문화적 위험중의 하나가 되는 이유이며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근거이다. 4. 한국사회에 있어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와 경제정의 앞에서 우리는 우리시대 지배적인 경제체제인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발생배경, 특징 그리고 경제정의론의 한계를 분석하여 보았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한국사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고 이과정에서 제기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와 한계를 김영삼 민간정부의 경제5개년계획과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을 중심으로 논의해 보려한다. 여기서 우리의 논의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측면을 다루지 않고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들의 경제정의론의 정책논의의 전체적 의미를 평가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4.1.1. 「신경제5개년계획」의 성격과 경제정의관 김영삼 민간정부가 지난 1년간 추진해온 경제정책의 방향은 경제활성화, 경제개혁 그리고 국가경쟁력 강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여 왔다. 이러한 기본 경제정책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0년대부터 6공화국 말기인 1993년 2월까지 약 30년간 이어져온 경제정책의 기조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30년간의 경제정책이란 중앙 통제적(국가 계획적) 경제정책을 의미하며 중앙 통제적 경제정책은 i)중앙정부의 계획에 따라 세운 성장목표의 추구; ii)중앙정부의 금융, 세금감면 또는 보조금, 행정지원 등의 직。간접지원; iii)중앙정부의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의 직접적 통제, 규제를 특징으로 한다. 30년간 6차에 걸친 경제개발정책은 한마디로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그 형식상 크게 차이가 없는 계획경제였다. 김영삼 민간정부는 취임이후 1960년대 이후 30년간 6차에 걸쳐 추진해왔던 '경제개발계획(제7차경제사회개발1992-1996)을 포함하여'이란 이름을 폐기하고 '신경제5개년계획(92-97)'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입안하였다. '신경제 100일계획'이라는 단기 전략아래 시행해온 경기활성화의 추구와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 실시로 표현되는 개혁적 경제정책, 그리고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조인에 따른 국제화, 개방화의 추진과 국가경쟁력 강화로 요약된다. 그러나 김영삼정부가 지난 1년간 시행해온 경제정책의 방향은 지난 30년간 군사정부가 추진해온 성장지상주의 경제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임금인상의 억제를 노사합의의 형태로 강제하고, 금년을 노사분규가 없는 해로 만들겠다는 선언등은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를 직접 통제해온 과거 30년의 정책기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지난 1년간의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은 지난 30년간 군부통치 시대의 중앙 통제적 경제정책을 그대로 답습해 계승하고 유지하되, 낡은 중앙 통제적 정책에 새로운 이름만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신경제5개년계획'에 관련하여 계속된다. 정부는 '신경제5개년계획지침'에서, 민간의 창의를 최대한 발현시킬 수 있도록 과거의 정부주도적이고 개입 위주의 경제운용에서 벗어나 시장의 자원배분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는 민간주도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이 '지침'에 의하면, '신경제'의 기본이념도 정부의 지시와 통제 대신 국민의 참여와 창의가 발전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는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국제가 대폭 줄어들어 기업 활동이 자유로운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달 후 발표된 '신경제5개년계획'에 따르면, '신경제'란 "모든 국민이 함께 하는 경제"를 말하며, 여기서 말하는 모든 국민에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포함되었다. 즉 신경제란 "정부와 민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경제"를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신경제'는 민간주도경제운영과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요약하면, 김영삼 민간정부의 '신경제'는 산업독점자본의 이익을 관철하는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신경제'는 자본분파간의 관계를 합리화하여 산업자본을 강화하고, 생산자계층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강화하여 사적 독점자본의 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국제적인 자본경쟁에 대처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경제'는 '신자유주의'전략에 의한 슘페터적 근로국가로의 이행을 기본으로 하되 신국가주의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는 장상환의 평가는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상반된 평가에 직면하게 된다. 개혁지향적인 진보적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김영삼정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 전망한다. 이와 달리 [경실련]의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김영삼정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진보적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김영삼 민간정부의 '신경제'는 전혀 새로움이 없는 과거의 성장정책의 재판이다. 차이는 지난 80년대 한국경제의 여건변화를 감안하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 논리-시장경제논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비결은 재벌지배의 강화가 될 수 밖에 없다. 이 점을 신경제의 대외무역정책, 산업발전, 금융정책, 재정정책, 토지, 주택부문정책, 농업정책, 노동정책, 사회복지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이 분석에 의하면, 재정정책안을 제외하고, 신경제의 대부분의 정책이 철저하게 시장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현재의 경쟁력 강화대책은 재벌위주로 짜여져 있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민간정부의 '신경제'가 신자유주의의 시장논리를 철저하게 반영되지 않는 부문도 인정한다. 그것은 재정정책부문에서 발견되는데, 이상영은 정부가 내세운 '작은 정부'라는 것이 재정정책에서 전혀 0반영되지 않고 있음을 분석하면서 이것은 구호와 정책이 따로 놀고 있는 예라고 지적한다. 경제정의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노동 부문과 사회복지부문에 대한 [신경제]의 정책 방향은 부정적이다. 노동부문을 분석한 이병희는 신노동정책이 국가 경쟁력의 강화를 목표로 고통 분담과 의제적 합의만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별 자본의 노동 통제 강화를 뒷받침하는 정책이 감소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사회복지부문을 다룬 강혜구는 기초복지에 대한 정수 지출이 다른 중간 수준의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낮은 현실에서 (도표 참조) 신경제정책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신경제정책은 재정의 지원이 필요한 기초복지는 외면한 채 민간이 사회복지부문에 적극 개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 가령 실버타운 건설에 민간 자본의 주도를 장려 - 비판한다. 시장논리에 입각한 이러한 정책은 사회복지부문에서의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 전망하였다. 노동부문과 복지부문에 있어서 경실련의 경제학자들도 긍정적 결론을 얻지 못한다. 93년호에 7-8%의 경제성장률과 4-5%의 물가상승억제선을 제시한 김영삼정부의 경제학은 국민에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통분담 및 임금인상의 자제를 요구했으나, 결과는 저성장, 고물가상승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고통분담에 참여한 국민에게 더 큰 고통을 부담시겼다고 비판한다. 경실련의 대표적 경제학자인 이근식도 신경제의 경제개혁은 재벌 위주로 경제가 운용되었음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분배정의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경제개혁의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분배정의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불로소득의 배제를 강조한다. 요약하면 [신경제]는 재벌위주의 종전의 성장정책이 크게 변화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하여 부정적인 [경제적 민주화]의 전망을 제시한다. 심지어, 강철규는 '1백일 계획' 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발상자체가 시장경제질서로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그는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하는 개혁을 요구한다. 4.1.2.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의 성격 1989년 7월 시민운동의 활성화를 통해 한국 사회의 건전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취지 아래 창립된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제 거의 4년에 걸친 활동 끝에 명실공히 한국 사회의 중요한 시민운동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경실련의 시민운동으로서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긍정적인 평가가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무엇보다도 [경제정의]의 문제를 짧은 시간에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제기하였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동시에 [경실련]의 한계에 대한 논의도 당연히 경실련이 제기한 [경제정의]의 향방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실련]이 그동안 제시한 경제정의의 향방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실련]이 그동안 제시한 경제정의의 구체적인 정책 대안에 대한 미시적 분석보다 구체적인 정책대한에 내포된 전반적인 철학적 성격을 검토해보려 한다.0 필자가 보기에는,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의 철학적 기조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비록 민주복지국가형에 대한 기대에서 보여지는 모순적 이념형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토대로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추구하는 [경제정의론]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의 새로운 점은 한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노사간의 모순이라는 시각에서보다는 생산계층과 비생산계층의 모순이라는 각도에서 파악하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토지투기로 인한 엄청난 불로소득과 이로 인한 빈부의 격차 심화 현상은 노사간의 모순이라는 접근방식으로 풀리지 않는, 그러나 한국 사회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경제 문제라고 인식한다. 따라서 경실련은 한국 사회 '경제민주화'의 핵심을 불로소득의 척결에 두고 토지 세제의 개혁과 금융자율화, 그리고 임대주택을 비롯한 복지정책의 확대를 목표로 설정하였다. 당연히 국가 또는 정부의 역할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경실련]의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따르고 있음을 보나, 국가의 역할에 있어서는 약간의 수정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경제분야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사회복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우는 개발 독재 과정에서 세제와 금융 혜택을 통한 정부와 재벌의 유착이라는 정경유착 - 금권정치의 왜곡된 형태로 국가의 개입이 이루어져왔다고 진단한다. 이에 대해 경실련은 국가의 역할은 공공복지에 국한되어야 하며 그 이외의 것들은 시장의 자율적 기능에 맡겨야 한다고 처방한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역할을 넘어서는 경제분야의 정책은 반시장적, 중앙통제적이며 반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도모하는 것으로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정책들이라고 규정한다. [경실련] 경제학자들의 경제정의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장경제 질서에 기반을 둔 인본적 시장경제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민주적 자본주의론'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경실련] 경제정의론의 문제점을 지적해보도록 하자.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가정은 성장과 분배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자와 기업가의 관계는 결코 적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공존공생의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 계급의 일방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기업가 모두의 공동 이익 - 사회의 일반 이익이나 공공 선 - 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이 '공동 이익' 또는 '사회의 일반 이익'과 '공공 선'의 내용을 누가 정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경실련의 한국 중산계층의 초계급적 입장을 취한다는 평가는 지나치게 이상화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에서 문제되는 두번째 전제는 경제와 정치의 지나친 구분이다. 경실련은 경제의 정치화를 두려워한다. 시장경제의 자율성에 대한 신화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시장 기능을 민주적으로 통제해나가야 하는 데서 당연히 직면하는 정치적 역학 관계의 중요성이 무시된다. 이것은 시민단체, 노조, 소비자운동 등이 직접 시장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에 대한 정치적 인식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남미에서의 경험은 민주화와 시장경제 정책 자체가 자동적으로 경제적 정의를 약속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시장경제의 운용은 자율성보다는 전체적 계획(planification total)이라는 구도 하에서 조작,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견제는 시민사회가 감당해야 하며 이것은 단순히 미시적 문제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고찰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03-12-25 10:29:08 read : 19 이 덕 휴 목 차 제1장 들어가는 글/ 2 제1절 작품에 대하여/ 2 제2절 저자의 생애와 사상/ 4 제2장 기독교의 본질/ 7 제1절 서문/ 7 1. 제1판의 서문/ 7 2. 제2판의 서문/ 8 제2절 서론/ 10 1. 인간의 본질/ 10 2. 종교의 본질/ 12 (1) 제1부 종교의 진실한 본질/ 14 1) 본질론/ 14 2) 신 또는 종교의 비밀/ 17 3) 소결/ 22 (2) 제2부 종교의 허위의 본질/ 24 1) 종교의 본질적 입장/ 24 2) 신의 본질/ 26 3) 사변적 신학비판/ 29 4) 모순의 변증법/ 30 5) 결론/ 32 제3장 나가는 글/ 34 제1절 비판/ 34 제2절 평가/ 38 제3절 비판에 대한 반성/ 41 * 참고문헌/ 45 ** 필자와 이 논문에 대하여/ 46 제1장 들어가는 글 제1절 작품에 대하여 본서『기독교의 본질』은 포이에르바하(L.A. Feuerbach, 1804-1872)가 1841년에 출간한 책으로서, 서론(1-2장)과 본문, 즉 제1부(3-19장) 및 제2부(20-28장)로 구성되었다. 서론부 제1장에서는 "인간 일반의 본질"을 서술하고. 제2장은 "종교 일반의 본질"을 도출해 내고 있다. 여기서 그가 종교와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소위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를 시도하는 데, 그 결정적 테제는 다음과 같다. "종교는 무한성의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의 자기 의식, 다시 말해서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존재로서의 자기 의식이며 그것 이외의 어떤 것일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러한 인식론적 가치의 전도를 해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대상이 철저히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신학의 비밀이 인간학이고 신적 본질의 비밀이 인간적인 본질임을 증명했다." 여기서 포이에르바하가 '증명'이라고 한 것은 학문에 있어서 한 가지 주장을 각양각색의 문제에 대하여 일관되게 해석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적용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일관성 때문에 그의 저서가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계속되는 것이다. 서론부의 제1장과 제2장은 사실상 제1부와 제2부의 총론부 라고 할 수 있다. 제1부와 제2부의 관계는 저자 자신이 붙인 제2판의 서문에서 엿볼 수 있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나의 저서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단지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일 뿐, 종교의 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2부로 나누어진다. 그 중 제1부는 요점에 관해서는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2부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그러나 양 부분에서는 동일한 것이 증명되고 있으며 단지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즉 제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 즉 종교의 진리로 인도하며, 제2부는 논박이다. 따라서 제1부는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것의 직접의 증명이며 제2부는 간접의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제2부는 필연적으로 제1부로 환원된다. 제2부는 전혀 독립된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제2부는 단지 제1부에서 말하는 의미와 반대되는 의미의 종교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제1부에서 말하는 의미의 종교가 정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제1부에서는 주로 종교를 취급하고 제2부에서는 신학을 취급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이 책을 칸트(Immanuel Kant, 1729-1804)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구상했으며, 본서의 구성도 칸트의『순수이성비판』과 유사한 서문과 제1부, 제2부 등으로 집필하였다. 1841년 3월 30일 에어랑겐 대학의 사강사 포이에르바하가 바이에른 내무성으로부터 파직통고를 받았을 때, 그를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기독교의 본질』제1판이 인쇄되고 있었다.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제목은 발행인 비간트(Otto Wigant)가 붙인 것이며, 이는 종종 있는 일로서 상업성을 위하여 적당하고 인기 있는 제목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신의 책을 모든 것을 압도하는 칸트의 저작『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2)의 모델을 따르면서 그 대칭물이 되도록 구상했다. 이에 따라 그는 본서의 제목을『순수비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Unvernunft)이라 명명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책을 포이에르바하가 당초 제시했던 제목으로 불러도 좋다. 왜냐하면, 이념 정책적일 뿐만 아니라 순수이성비판과의 형식적 유사성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서론은 칸트의 서문처럼 본론을 두 개의 주요부분으로 구획짓고 있으며,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코페르니쿠스처럼 회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미학과 분석론(순수이성비판의 제1부문)은 본서의 제1부인 "종교의 진실한 본질, 즉 종교의 인간학적 본질"(인간의 본질과 모순되는 종교)에 대응한다. 여기서는 신적인 제 가치의 형성에 작용하는 한편, 인간지성의 유한한 능력도 동시에 서술하고 있다. 선험적 변증론과 방법론(순수이성비판의 제2부문)은 본서의 제2부인 "종교의 허위의 본질"(인간의 본질과 모순되는 종교)에 대응한다. 여기서 교리의 체계는 이미 발전시켰던 방법에 따라 파괴되고 종교적 투사(投射)가 갖는 병적인 지적 성격이 폭로된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종교현상은 그 자체가 비판의 목적은 아니었다. 종교란 단지 그가 새로운 학문을 정초 시키는데 사용되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였다. 제2절 저자의 생애와 사상 포이에르바하(Feuer: 불, Bach: 시냇물)라는 문자적 의미는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대립이다. 전통적으로 그의 가계는 알려진 바대로 유명한 신학자. 법률가. 예술사가. 수학자·화가 그리고 근대 형법학의 아버지이자 그의 부친 안젤름 포이에르바하(Paul Johan Anselm Ritter von Feuerbach, 1775-1833)를 배출한 '불의 강'의 집안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확신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자와 철학자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신들 사변적인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만일 당신들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다시 말하여 진리에 접근하려 한다면 종래의 사변철학과 철학과 편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당신들의 진리와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불의 강'을 통과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불의 강은 현대의 연옥(purgkatoium)이다. 철학자인 동시에 법률가인 아버지 안젤름 포이에르바하(Paul Johann Anselm Ritter von Feuerbach, 1775-1833)는 원래 타당한 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인간에 의해 입법되는 것이며, 법과 도덕은 분리되는 것이라는 소위 법률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재판관이란, 엄격한 결과를 자의나 주관적 가치의식으로 완화시키거나 변경시킬 수 없으며, 오직 법 아래에서만 존재한다는 법치주의자였다. 1808년 작위를 받은 안젤름 포이에르바하는 형법의 형벌기능에 대한 위하설(威 說)을 주장하여 이른바, 심리강제설에 의한 일반예방이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여 상대적 형벌이론을 주장하였으며, 오늘날 형법학의 최고의 이념인 "법률 없으면 형벌도 없다"(nulla poena sine lege)라는 명제 하에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수립하는데 공헌하였다. 당시까지의 형법학계는 소위 칸트와 헤겔(G.W.F. Hegel, 1770-1831)이 주장한 형법의 자기목적성에만 의지하는 절대적 형벌이론에 근거한 응보형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1798년에 트레스터(wi1helmine Tr ster)와 결혼하여 위로 세 아들을 낳고 이어서 1804년 7월 28일 란쯔후르트에서 네 번째로 태어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카톨릭 의식에 따라 바이에른의 시 교구에서 Jodocu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아버지 안젤름과 어머니 트레스터는, 비록 아버지가 정부와 지냈을지라도 다섯 아들을 낳은 후에도 딸 을 셋이나 더 두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스스로 쓴 익명의 사전에서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1804년 7월 28일생. 형제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저술가로서 가장 활동적임.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할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분야에서 즉 훈장도 작위도 얻을 수 없는 분야에서 활동함. 그는 먼저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에어랑겐에서 몇 년간 강의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학문 외에는 단지 경건한 양(羊)의 사육만이 번창하고 있는 대학'이 자신에게 적합한 곳이 아님을 깨닫고 '독자적이고 조용한 생활에서만 성숙될 수 있는 사상을 잉태하고 있음을 느끼고' 안스바하 부근의 시골로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저술활동을 1830년 아직 체계를 갖추지도 않았고 저자의 이름도 없는 저술인 -그러나 위대한 천재성과 풍부한 표현으로 가득찬-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고찰』(Gedanken ber Tod und unsterblichkeit, 1830)로 시작했다. 그는 용암의 흐름과 같은 이 저술에서 젊음의 불꽃을 태우고 자신의 후기의 철학적 발전을 선취하여 풍자시의 형태로 대담하게 표현하고는 이를 더욱 전진시켜 나가는 대신 자신의 주관성을 순수하게 객관적인 요소 안에서 극복하고 또 형성하기 위해 철학사로 후퇴한다. 이렇게 자신의 본질을 억제하고 포기했던 시절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편견이 생기게 되었다. 그 편견이란 그가 이미 타인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재생하고 발전시키는 사상가이기를 그치고 비판자의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헤겔 학파에 귀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의 시기는 『기독교의 본질』이후 종막을 내린다. 왜냐하면 이 저술에서 비판의 과제는 단순히 대상을 분석하여 모순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대상을 하나의 포괄적 원리로부터 발생적으로 산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출의 근거는 '자연이라는 근거 위에서의 인간'이다. 이시기를 우리는 이전의 역사적 시기나 비판적 시기와 구별하여 실증적 또는 생산적 시기라고 명명할 수 있는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의 세 번째 시기라고 한다. 포이에르바하의 의미 다시 말하여 그의 철학적 의미를 전개시킨다는 것은, 이는 이미 그가 애초부터 역사와 경험 일반을 그의 사상의 초석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제2장. 기독교의 본질 제1절 서문 1. 제1판의 서문 저자는 지금까지 여러 저작에서 종교와 기독교, 신학과 사변적인 종교철학에 관하여 자신의 사상을 잠언(箴言)이나 논쟁의 형식으로 다루었다. 이 책의 특징은 한정된 주제에 대한 원리를 포함한다. 그것은 적극종교(positiven Religion)의 철학 또는 계시의 철학을 위한 원리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신화학(神話學)이 가지는 유치할 만큼 공상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철학 또는 사변철학을 위한 원리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기독교 신화학은 이야기로서 전해지는 허황 된 이야기를 그럴싸한 사실로서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일찍이 스콜라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신앙개조(Articulus fidei)를 논리학적, 형이상학적 진리로서 논증한다.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철학을 위해 종교를 희생하며, 기독교적 신화학은 종교를 위해 철학을 희생한다.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종교를 제멋대로 사변적인 장난감으로 삼으며, 기독교적인 신화학은 이성을 공상적인 종교적 유물론의 장난감으로 삼는다. 확실히 철학과 종교가 일반적으로 양자의 種差를 제외하면 동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유하는 존재자와 신앙하는 존재자는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종교의 심상은 동시에 사상과 사실을 표현한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사이의 본질적 구별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책에서 종교의 형상은 사변적인 종교철학으로 고찰되지 않고 사실로서 고찰되지도 않으며 다만, 형상으로 고찰된다. 즉 신학은 기독교적 신화학에서 처럼 신비적 실용학으로서 취급되지 않고 사변적 종교철학에서처럼 본체론으로서 취급되지도 않으며 정신병리학으로으로 취급된다. 이 책의 목적은 정신적 수치료학(Pneumatishe Wasserheilkunde)을 촉진하고 자연적 이성이라는 冷水의 용법과 효용을 가르치며 고대 이오니아인의 단순한 수문학(hydrologie)을 사변적인 종교철학의 영역에서 부흥시키는 것이다. 탈레스(Thales, B.C. 640/24-546경)에 의하면, 물은 모든 사물 및 존재자의 근원이며 신들의 근원이기도 하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에 따르면. 만물이 탄생할 때에 특수한 존재자로서 물을 돕는 정신 또는 신은 명백히 훗날의 이교적인 유신론을 생각해낸 덤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의 놀라운 치유능력이 있는 것이다. 수문학에서의 물은 단지 물질적인 생식수단이었지만, 포이에르바하의 물은 정신적 치료학으로서의 물이라는 것이다. 2. 제2판의 서문 나는 정신적인 자연과학자일뿐이다. 자연과학자는 물질적 수단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정신적인 자연과학자로서 이 책을 썼다. 이 새로운 철학은 지금까지의 철학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원리로서 초인간적, 초자연적, 곧 반인간적, 반 자연적인 종교나 사변에 의해 부패하고 불구가 된 모든 인간에게 반항하는 철학이다. 단지 사유되었을 뿐인 추상적 존재자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자, 가장 실재적인 참된 실재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철학은 실재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철학은 사상을 그 반대물로부터, 곧 물질(Stoff)로부터, 실재(Wesen)로부터, 감각(Sinn)으로부터 산출하며, 자신의 대상을 사유에 의해 규정하기 전에 먼저 감각적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종교의 현존재를 폭로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설사 종교 또는 오히려 신학이 그것을 거부하려고 할지라도 인간을 숭배한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이다. 나만 "신이 인간이며 인간이 신이다"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종교 그 자체도 그렇게 외친다. 인간이 아니라 단지 합리적인 존재일 뿐인 그러한 신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우선 신을 인간으로 만들고 그리고 다음 지금 비로소 인간적으로 형성되고, 느끼고, 생각하는 신을 자신의 숭배와 존경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의 모순에 가득 찬 거짓덩어리와 속임수 덩어리를 제거했을 뿐이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일 뿐, 종교의 인간학적인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2부로 나누어진다. 그중 제1부는 요점에 관해서는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2부는 종교를 종교의 모순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양 부분에서 동일한 것이 증명되고 있으며 단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제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로 인도하고 제2부는 종교를 종교의 모순으로 인도한다. 제1부는 발전이고 제2부는 논박이다. 따라서 나는 제1부에서 신학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학이라는 것, 신학의 본질(신적 존재)의 술어와 인간의 본질(인간 존재)의 술어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것, 따라서 신적인 주어(주체) 또는 본질(존재자)과 인간적인 주어(주체) 또는 본질(존재자) 사이에도 아무 구별이 없이 양자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정신의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꿈속에서도 무 또는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현실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종교에 대해서 행하는 작업은 오직 종교에 눈을 뜨게 하는 것, 안쪽에 향하여 있는 종교의 눈을 바깥쪽으로 돌려주는 것, 바꿔 말하면 표상 또는 상상 속의 대상을 현실 속의 대상으로 전화시키는 것만이 내가 종교에 대해 행하는 작업의 전부이다. 제2절 서론 1. 인간의 본질 종교는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점에 기초한다.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구별짓는 것은 의식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은 자기의 유(Gattung), 자기의 본질성(wesenheit)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본질(존재자, 있는 것)에게 있을 뿐이다. 의식이 개체와 관계하며, 학문에서는 유와 관계한다. 그러한 오직 자신의 유, 자신의 본질성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본질만이 다른 사물 또는 다른 본질을 그들의 본질적인 본성에 따라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종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교한 무한자(Unendlich, infinite)의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 즉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는 본질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실제로 유한한 존재자는 무한한 존재자에 대해 극히 미미한 예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물론이다. 무한자에 관한 의식에서는 주체가 그 자신의 본질의 무한성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의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 의지, 그리고 심성이 그것이다. 완전한 인간에게는 사유하는 힘, 의지하는 힘, 심정의 힘이 필요하다. 사유의 힘은 인식의 빛이고 의지의 힘은 성격의 에너지이며 심정의 힘은 사랑이다. 이성과 사랑과 의지의 힘이란 완전성이고 최고의 힘이며 인간 그 자체의 절대적 본질이며 인간의 현존재의 목적이다. 인간은 인식하고 사랑하고 의욕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참된 존재자는 사유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는 존재자이다. 인간 안에 있고 개개의 인간 위에 있는 신적인 삼위일체란 이성과 사랑과 의지의 통일이다. 이성, 의지, 사랑 그리고 심정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며, 인간은 오직 그것들에 의해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인간에게 혼을 불어넣어 주고 인간을 규정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힘으로서, 그리고 신적이고 절대적인 힘이다. 인간은 그들 힘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인간은 대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대상에서 자기자신을 의식한다. 대상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우리는 대상에 의해서 인간을 의식한다. 대상에서 인간의 본질이 나타난다. 이것은 정신을 물론이고 감성에서도 나타난다. 대상은 인간의 노출된 본질이며 인간의 진실하고 객관적인 자아이다. 의식이란 자기 확증이며 자기긍정이며 자기사랑이며 자기자신의 완전성에 대한 기쁨이다. 의식은 어떤 완전한 존재자를 특색 짓는 표징이다. 의식은 어떤 만족하고 완전한 존재자 속에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한자를 사유한다면,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고 또 확증하는 것이다. 또한 무한자를 느낀다면,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고 또 확증하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이란 자기자신에게 대상적인 이성이며 감정의 대상이란 자기자신에게 대상적인 감정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초월적인 사변이나 종교의 견지에서는 단지 희생적인 것, 주관적인 것 또는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 본질, 대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 감정이 지각하는 신적 본질은 감정의 본질이 자기자신에게 황홀해지고 도취된 것, 즉 환희에 취해 자기 안에서 행복에 잠기는 감정이다. 이것은 감정이 무한자의 기관, 종교의 주관적 본질로 될 때에는 종교의 외적 표현들이 그 객관적인 가치를 잃는다는 것을 보아도 이미 명백해진다. 인간은 확실히 공상의 힘에 의해 자기보다 더 높은 다른 종류의 개인을 표상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자기의 유, 즉 자기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2. 종교의 본질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대상, 즉 감성적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의 관계에 관해 주장한 것은 특히 종교적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적용된다. 감성적 대상에 대한 의식은 자기의식과 구별된다. 그런데 종교적 대상의 경우에는 의식은 자기의식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종교적 대상은 인간 안에 있으며 그것 자체로서 내면적인 대상이다. 때문에 종교적 대상은 인간의 자기의식, 인간의 양심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끊을 라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해 취하는 태도, 또는 인간이 자기의 본질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다. 신적 본질이란 인간적인 본질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인간의 본질이 개개의 인간의 제한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화 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신적 본질이란 인간의 본질이 개인으로부터 구별되어 다른 독자적 본질로서 직관되고 숭배된 것이다. 그 때문에 신적 본질의 모든 규정은 인간 본질의 규정이다. 이것은 신의 술어, 즉 특성 또는 규정에 대한 관계에서는 실제로 주저 없이 인정되지만 주어, 즉 그들 술어의 기체(근본, 본질)에 대한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어를 부인하는 것은 무신앙, 무신론으로 간주되지만, 술어를 부인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신의 술어를 부인하는 방법도 있다. 사람들은 신적 본질의 술어가 유한한 인간적 규정임을 인정한다. 인간은 자기가 진실한 것으로서 표상하는 것을 곧바로 현실적인 것으로서 표상 한다. 인간에게는 현실적인 것만이 진실한 것이며 상상된 것과는 대립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개념, 즉 실존의 개념은 진리의 첫째가는 개념이며 근원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신이란 인간의 본질이 최고의 진리로서 직관된 것이다. 그러나 신 또는 종교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파악하여 최고의 본질로서 직관할 때의 규정성이 각양각색인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하다. 인간이 신을 사유할 때의 이러한 규정성은 인간에게는 진리성이며 동시에 최고의 실존 또는 실존자체이다. 따라서 신이 규정된 본질임과 같은 이유로 신은 실존하는 현실적 본질이다. 왜냐하면 신의 질 또는 규정성은 인간 자신의 본질적인 질 바로 그 자체이지만, 특정한 인간은 자기의 본성, 자기의 실존, 자기의 현실성을 오직 자기의 규정성 안에서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의 술어와 인간의 술어의 동일성을 망각하고 그와 함께 신적 존재자와 인간적 존재자의 동일함을 망각하기 위해 신은 무한한 존재자로서 무한히 풍부하고 다양한 술어들이라는 표상에 구원을 청한다. 그 술어들 가운데서 우리가 현세에서 인식하는 것은 약간 닮았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적인 존재자와 약간 다른 것은 그것 이외의 술어, 즉 피안에서의 일이다. 무한히 풍부한 신의 술어들의 비밀은 다양하고 무한하게 규정될 수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감성적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적인 존재자가 가지는 비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대상화하며 그런 다음에 다시 자기를 이와 같이 대상화되고 주체는 인격으로 전화된 본질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이 종교의 비밀이다. 여기서의 인간은 신의 대상이다. 따라서 믿음이 깊은 인간은 지가의 심성과 행위를 신의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을 신의 목적, 즉 정신에서 대상인 것은 행동에서는 목적이므로 신의 활동을 인간의 구원수단으로 삼은 것에 의해서 인간의 활동의 허무성을 다시 취소한다. 인간이 선해지고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따라서 인간은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을 통해서 오로지 자기자신을 목적으로 한다. 분명히 인간은 신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영원한 도덕적 구원 이외의 어떤 것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 안에서 인간은 단지 인간자신의 활동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나는 종교의 발전과정을 일반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므로 종교의 발전과정은 인간이 점점 신을 거부하고 자기자신을 승인하는 일이 많아지다는 것 속에서 성립한다. 애초에 인간은 만물을 구별 없이 자기 외부에 두었다. 이것은 계시신앙에 나타난다. 이스라엘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직 극히 자연적인 충동도 적극적인 신적 명령으로 생각하였다. 이 예로부터 인간은 자기를 거부하면 할수록 신은 그만큼 저급해지고 또 그만큼 더 보통의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인간의 충동이나 격정을 그것의 특성이나 내용에 따라 구별지었다. 기독교는 오직 선한 격정, 선한 기질, 선한 사상만을 신의 계시, 신의 작용, 즉 신의 심성, 신의 격정, 신의 사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 자신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내면적인 도덕적 깨끗함을 외면적인 육체적인 깨끗함과 구별하지만, 이스라엘의 종교는 양자를 동일시했다.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와는 반대로 비판과 자유의 종교이다. 이스라엘은 외면적인 것조차 자기의 의지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외면적인 것은 자율에 두었다. 즉 기독교는 이스라엘이 자기 외부에, 신 안에 두었던 것을 인간 안에 두었던 것이다. 이 적극주의의 가장 완결된 발로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인에게 기독교도는 교의를 믿지 않는 사람(Esprit fort, 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며 자유사상가이다. 사물은 이와 같이 변한다. 어제의 종교는 오늘은 이미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오늘 무신론으로 인정되는 것이 내일은 종교로 인정된다. (1) 제1부 종교의 진실한 본질, 즉 종교의 인간적인 본질 1) 본질론 종교는 인간이 자기자신과 분열한 것이다. 즉 인간은 종교에서 신을 자기와 대립한 존재자로서 설정한다. 신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인간의 본성은 신이 아니다. 신은 무한자이고 인간은 유한자이다. 신은 영원하고 인간은 일시적이다. 신은 완전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 신과 인간은 양극이다. 신은 단적으로 긍정적인 것이자 모든 실체성의 총체이며, 인간은 단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자 모든 허무성의 총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자신의 감추어진 본질을 대상화한다. 따라서 종교는 신과 인간의 대립·갈등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 갈등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본질과의 갈등이다. 만일 종교의 대상인 신적 본질(존재자)이 실제로 인간의 본질 이외의 본질이었다면 분열이라든가 같등은 일어날 수 없었다. 분열은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하나이어야 하고 또 하나일 수 있는 본질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이 본질은 지성과 이성 또는 오성(Verstant, understanding)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인간의 대극(對極)으로서의 신은 인간적인 본질, 즉 인격적으로 인간적인 본질이 아니라면 오성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이다. 신의 본질은 오성의 자기의식이며 오성이 자기자신의 완전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오성은 심장과는 달리 욕망이나 열정이나 욕구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결함이나 약점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순수한 오성인은 일면적이지만 특징적 규정성에서 오성의 본질을 상징화하고 인격화하는 인간이다. 이러한 순수한 오성인은 감정인이 갖는 고뇌나 열정이나 탐닉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오성은 본원적·원초적인 존재자이다. 오성은 만물을 제1원인인 신으로부터 끌어낸다, 오성은 오직 자기 안에서만 세계의 근거와 목적을 발견한다. 당신이 신 안에서 긍정하고 대상화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오성이다. 신이란 당신의 최고 개념인 오성이며 당신의 최고의 사유능력이다. 오성은 따라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 즉 옛날의 존재론적 신학(Ontotheologie)에서 말하는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인 존재자이다. 또한 오성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자이며 절대적 주체이다. 오성의 통일성은 신의 통일성이다. 그 자체 절대적 통일성으로서의 자기자신(오성자신)을 의식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오성은 무한한 존재자이다. 따라서 오성은 통일성과 조정되며 유한성은 다수성과 함께 조정된다. 마지막으로 오성 또는 이성은 필연적인 존재자이다. 그것은 오직 이성의 실존만이 이성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성도 어떤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무이며, 존재는 비존재와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으로서의 신, 즉 오성의 무한한 본질, 일반적인 본질, 의인화하지 않은 본질이 종교에 대해 가지는 의의는 특수과학의 출발점인 일반적인 근본명제가 특수과학에 대해 가지는 의의 이상의 것은 아니다. 종교의 대상적인 본질이 인간과 다른 본질이라는 것은 그 본질의 본질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를 만족시키기를 바란다. 종교는 인간의 최고의 선이다. 그러나 오성의 본질을 표현할 뿐인 신이 어떻게 종교를 만족시킬 것인가? 신은 종교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종교는 신이 아니다. 오성은 단지 인간에 관해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본질인 자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기독교도는 오직 자기만을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오성은 보편적이고 범신론적인 본질이며 우주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특히 기독교는 전적으로 인신론(anthropotheistisch)적인 본질, 즉 인간의 자기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관적으로 인간적인 존재자의 배타적인 자기긍정이라는 것이다. 오성은 전적으로 율법의 엄격함에 따라 판단한다. 심정은 자신에 순응하며 공평, 관대하며 동정심이 많고 인간적이다. 율법은 인간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며 사랑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사랑은 율법과 심정,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매개한다. 사랑은 신 그 자체이며 사랑 이외에는 어떤 신도 없다. 사랑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고 신은 인간을 만든다. 사랑은 신과 인간의 참된 통일이며 정신과 자연의 참된 통일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신의 눈 속에서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피만이 신을 자비롭게 만들고 신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즉 우리의 가 용서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추상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의 의식을 통해서 신 또는 자기와 화해한다. 신의 사랑의 의식, 즉 신을 그 자체 인간적인 본질로서 직관하는 것은 신의 성육신, 육화 또는 인간화의 비밀이다. 성육신이란, 신의 인간적인 성질이 감정적인 사실로서 드러나는 것이고, 인간화된 신이란 단지 신격화된 인간의 현상에 불과하다. 신이 인간에게로 내려온다는 것은 반드시 인간이 신에게로 올라간다는 것이 선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신성의 제1인격이 성육신 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제2인격이 성육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2인격은 종교의 진실하고 전체적인 제1인격이다. 성육신이 신비적이고 불가해하고 사변적으로 보이는 것은 성육신의 출발점인 이 매개개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학이 사변철학과 어떻게 다른가는 다음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즉 인간학은 신비적인 가상(假像)에 의해 속고있는 특수한 경탄할 만한 비밀로는 보지 않는 것이다. 인간학은 신의 인간화라는 교의들 사랑으로 환원한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더욱이 신은 자기 안에 아들을 가지고 있다. 신은 아버지이다. 인간성의 모든 관계는 신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은 신과 소원하지 않으며 미지의 것도 아니다. 성육신에서 종교는 자기자신에 대해 반성함에 있어서 신학으로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즉 신은 철두철미하게 인간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고백 할 뿐이다. 인간은 종교에서 자기를 신적인 활동의 대상이나 신적인 목적으로서 직관한다. 2) 신 또는 종교의 비밀 인간화된 신, 즉 그리스도의 본질규정의 하나는 열정(Passion, 그리스도의 수난)이다. 사랑은 수난을 통해서 확실해 진다. 그리스도에 관련된 모든 사상과 감정은 수난이라는 개념에 집중한다. 사랑은 수난을 통해서 확실해 진다. 우선 그리스도에 관련되는 모든 사상과 감정은 수난이라는 개념에 집중된다. 신으로서의 신은 인간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그리스도로서의 신은 모든 인간적인 비참함의 총체이다. 고뇌(수난)는 기독교의 최고의 명령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 자체가 수난사이다. 이교도에게는 감성적인 쾌락의 환상이 신들에 대한 예배 안에 혼합되어 있다면 기독교도 당연한 것이지만, 고대의 기독교도에게는 혼이나 심정의 눈물과 한숨이 신에 대한 봉사에 필요한 것이다. 신의 가장 내적인 혼, 즉 기독교에서는 신에 대한 내면적인 본질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예배에서 나타나는 신이 참된 신이지 궤변적인 신학의 신이 인간의 참된 신은 아니다.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이다. 우리가 오늘도 여전히 모든 교회 안에서 마주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초상은 우리에게 결코 구제자를 보여주지 않으며 단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수난자를 보여 줄 뿐이다. 신이 고뇌하는 것은 그러나 실은 신은 심정이다 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심정은 모든 고뇌의 원천이며 총체이다. 고뇌를 가지지 않은 존재자는 심정을 가지지 않은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수난의 신의 비밀은 감정의 비밀이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이 자기자신 안에 반성되고 반영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자신이 마음에 들고 자기자신에게 기쁨을 느끼며 자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은 인간의 거울이다. 인간에 대해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인간에 의해 완전한 것이나 우수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인간에게 신이다. 감정이나 고뇌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는 신은 느끼고 고뇌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에 만족을 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 오성과 의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자 또한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오직 전인을 자기 안에 포괄하는 존재자만이 전인을 만족시킬 수 있다. 인간이 자기의 전체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 삼위일체의 의식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오성의 일반적 본질, 즉 신으로서의 신을 하나의 특수한 본질, 하나의 특수한 본질, 하나의 특수한 능력으로 끌어내린다. 우리는 단지 신학에 의해 삼위일체의 복제, 형상, 비유로서 특색 지어지고 있는 것을 사물 그 자체, 본질, 원형, 원물로서 이해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수수께끼를 푼 셈이다.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구상화하여 알기 쉽게 하고자 사용한 공식적인 형상을 주로 정신(Geist, mens), 오성(Verstant, intellectus), 기억(Ged chtnis, memoria), 의지(Wille, voluntas), 사랑(Liebe, amor 또는 caritas)이었다. 신은 사유하고 사랑한다. 사유된 것, 인식된 것, 사랑 받는 것은 신 자신이다. 자기의식의 대상화는 우리가 삼위일체 안에서 마주치는 최초의 것이다. 신의 자기의식이란 절대적 본질성 또는 본질성으로서의 의식에 관한 의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신 그 자체, 단순한 존재자로서의 신은 단적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고독한 존재자, 즉 절대적 고독과 독립성이다. 사람은 혼자서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것은 오직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랑할 때, 우리는 타자에게 의존한다. 사랑이란 자기와는 다른 존재자를 욕구하기 때문이다. 신적 존재자의 고독 속에 인격성에서는 신과 구별되지만, 본질에서는 신과 일치하는 존재자가 조정(措定)됨으로써 충족된다. 다시 말하여 아버지 신과 구별되는 아들 신이 조정됨으로써 만족된다. 아버지인 신은 나이며, 아들 신은 너이다. 나는 오성이고 너는 사랑이다. 그런데 오성을 동반하는 사랑 및 사랑을 동반하는 오성이 비로소 정신, 즉 성령이며 전인이다. 삼위일체에서의 제3인격은 두 개의 신적 인격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 이상의 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다. 제3인격이란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이며 연대성이 전혀 불합리하게 조정된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분석의 특수한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다만 성령이란 주관적 측면으로 보아서 종교적 심성의 자기 표현, 종교적 감정의 표현, 종교적 영감의 표현이며 종교 안에서의 종교의 인격화, 대상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가족,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사랑의 유대를 보완하기 위해서 제3의 인격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여성적인 인격이 천국에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참으로 안성맞춤이다. 당초 마리아가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놓였던 것은 아버지가 마리아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뜻이 아니었다. 모성적인 원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리아는 오히려 삼위일체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범주에 적합하다. 아들, 즉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아들은 그 자체에서 아버지의 남성적인 본질과 어머니의 여성적인 본질사이에 있는 중간본질이다.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서 가지는 사랑은 남성적인 본질이 여성적인 본질에 대해서 가지는 최초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신의 아들을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과 결부되어 왔다. 신의 어머니에 대한 신앙이 쇠퇴하는 곳에서는 신의 아들과 아버지인 신에 대한 신앙 또한 쇠퇴한다. 아버지가 진리인 것은 오직 어머니가 진리일 때뿐이다. 사랑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여성적이다. 신의 사랑에 대한 신앙은 신적 존재자로서의 여성적 존재자에 대한 신앙이다. 프로테스탄트교는 신의 어머니를 한쪽으로 밀쳐버렸다. 그러나 냉대 받은 여성은 그 대신 프로테스탄트교에 가혹하게 보복했다. 프로테스탄트교가 신의 어머니를 향해 삼위일체 전체에 향해졌다. 일단 신의 어머니를 오성을 위해 제물로 바치는 사람은 어느새 다시 신의 아들의 신비를 의인적(인격적) 표현으로서의 제물로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적 존재자가 배제된다면 확실히 의인적 표현이 은폐된다. 삼위일체의 신은 카톨릭교의 신이다. 삼위일체의 신은 내용이 풍부한 신이다. 이 때문에 신은 실제생활의 내용이 사상(捨象)되는 곳에서 요구된다. 생활이 공허할수록 신은 그만큼 더 풍부해지고 더 구체적이 된다. 신은 결핍의 감정으로부터 발생한다. 인간이 상실한 것이야말로 신이다. 따라서 공허함이나 고독함과 같은 허전한 감정은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존재자의 사회나 교제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종교 속에서 차지하는 본질적인 의의는 항상 제2인격의 본질 안에 집중되어 있다.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 동질, 동일한 본질)와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 유질, 비슷한 본질)에 관한 격렬한 싸움은 비록 글자 한자의 차이에 불과 하였지만 공허한 싸움은 아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제2인격과 신의 동격성이었다. 교의학적 사변은 신의 형상인 신의 아들의 내적인 생성을 완전히 간과하면서 아들은 바로 신성의 형이상학적 관념으로부터 일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인격의 또 하나의 규정이며 형상의 본질과 관련된 것은 제2인격은 신의 말(Wort, Logos)이라는 규정이다. 말은 추상적인 형상, 상상 속의 사물이다. 또는 모든 사물이 항상 최후에는 사유력의 대상인 한, 말은 상상된 사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물의 말, 이름을 알면 사물 그 자체를 아는 것처럼 상상한다. 말은 구제하는 힘 행복하게 하는 힘, 해방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신의 말이란 종교의 내부에서 인간에게 대상이 되는 신성이며 말의 참된 본질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말의 참된 본질을 인간의 말과는 구별된 특수한 본질로서 표상 한다. 자기를 계시하고 발현하고 표현하는 신인 제2인격은 신 안에 있는 세계창조의 원리이다. 세계가 신은 아니다(기독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싹은 이미 도래하고 있었다). 세계는 신과는 별개의 것이며 신의 대립물이다. 이 표현은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은 아들을 확실히 아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세계는 적어도 신과 구별된다. 세계 창조의 과정은 심리학적(정신논리학적, psychologisch) 과정의 신비적인 표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의식과 자기의식의 통일화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신은 자기를 사유한다. 따라서 신은 자기를 사유함으로써 또한 자신과는 다른 것을 사유한다. 따라서 자기를 의식한다. 신이란 자기의식이 대상이나 본질(존재자)로서 조정(措定)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사유함으로써 또한 자신과는 다른 것을 사유한다. 나는 너의 의식의 매개에 의해 세계의 의식을 획득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인간의 신이다. 인간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연에 신세지고 있으며 타인이 없으면 물리적, 정신적인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추상적인 논리학적 범주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계창조의 원리는, 다른 것은 오직 차이성의 원리로부터 나올 수 있을 뿐이며 단순한 본질 자체로부터는 나올 수 없다. 기독교적 철학자나 신학자가 애써 무로부터의 창조를 변호하려 하지만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근본명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적인 오성을 모든 사물을 자체 안에 총괄하는 정신적 물질로서 현실적인 물질의 근거로 삼았다. 사물(Ding)은 존재(existiren)하기 전에도 존재(sein)하고 있었다. 그 사물은 감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세계는 오직 세계 그 자체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세계와 창조주로서의 신 사이의 구별은 단지 형식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본질적인 구별은 아니다. 따라서 신의 본질이란 세계의 본질이 추상화되고 분리되어 사유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신의 본질이란 세계의 본질이 현실화되고 구체화되고 감성적으로 직관된 것이다. 신 안에 있는 자연의 교리는 자연주의를 통해서 유신론, 특히 최고의 존재자를 인격적 존재자로서 고찰하는 유신론을 확립하고자 한다. 인격적 유신론은 신을 모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인적적 존재자로 생각한다. 신이란 신의 존재이다. 신이란 신 자신의 본질이다. 이 점에서 유신론은 종교의 본질과 일치한다. 인격성은 신의 추상적인 신이다. 그러나 신이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신의 개념 안에 들어 있다. 인간은 신의 인격성 안에서 자기자신의 인격성의 초자연성, 불사성, 독립성, 비제한성을 찬미한다. 인격신이 하나의 진리성, 유일한 진리성인 곳에서는 자연은 아무런 실재적인 의의를 가지지 않으며, 실재적인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본래의 무로부터의 창조가 단 하나의 설명 근거이다. 왜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자연은 무라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자연이 절대적 인격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의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오직 섭리나 기적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섭리는 인간에 관계한다. 섭리는 인간을 위해 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능한 법칙의 효력을 폐기한다. 자연의 섭리에 경탄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종교적 자연주의일지라도 자연주의에 속한다. 종교적 섭리는 오직 기적 안에서만 계시된다. 섭리는 인간의 특권이다. 섭리는 다른 자연적인 존재자나 사물과는 다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섭리는 인간을 세계의 연관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오직 특수한 섭리만이 종교적 의미에서의 섭리이다. 섭리에 대한 신앙은 자기자신의 가치에 대한 신앙이다. 섭리가 믿어지는 곳에서는 신에 대한 신앙은 섭리에 대한 신앙에 의존한다. 섭리가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신이 신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종교적 섭리에 대한 신앙은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신앙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자연과 구분한다. 자연과 인간의 구별이 인간의 신이다. 범신론과 인격신론의 구별은 다음의 질문으로 해소된다. 즉 인간의 본질은 세계의 밖에 있는 본질인가 아니면 세계의 안에 있는 본질인가, 초자연적인 본질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본질인가 하는 질문이다. 범신론은 인간을 자연과 동일시한다. 인격신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독립시키며, 인간을 부분에서 전체로 바꾸어 독립된 절대적 존재자로 만든다. 이것이 범신론과 인격신론의 구별이다. 따라서 세계의 창조자란 다음과 같은 인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세계는 창조된 것이며 의지의 산물, 다시 말하여 자기를 가지지 않는 실존, 위력이 없는 실존, 허무적인 실존이라는 증명 또는 의식에 의해서 자기자신의 중요성, 진리성, 무한성의 확실성을 자기에게 주는 인간이다. 따라서 세계는 무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무는 세계 자신의 무이다. 이상에서 말한 창조의 비밀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오직 다음의 것을 명심하라. 즉 창조에서는 결코 흙, 풀, 짐승, 물 -이것들에게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창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자나 영혼의 창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은 그 자체가 인격으로서의 인격성의 개념 또는 이념이며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 틀어박혀 있는 주관성이며 절대적 존재 및 본질로서 조정된 무욕구의 자기 충족태이며, 너를 가지지 않는 나이다. 3) 소결 그리스도는 주관성의 전능이며 자연의 온갖 속박과 법칙으로부터 구출된 심정이며 세계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기 혼자에만 집중된 심정이며, 심정의 모든 소망의 심정이며, 공상의 승천이며, 심정의 부활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구별이 필요하다. 인간은 기독교에서 자기를 오직 자기자신에게로 집중시켰고 자기를 세계 전체의 연관으로부터 떼어놓았으며 자기를 자기자신에게 만족하는 전체로 만들고 세계의 밖에 있고 또 세계를 초월하는 절대적 본질로 만들었다. 인간은 더 이상 자기를 세계에 속하는 존재자로 간주하지 않고 세계와의 연관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이교도는 단지 인간을 우주와 연관시켜 고찰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교도는 인간을 오직 타인과 연관시켜, 공동체와 결합해서 고찰했다. 이교도는 적어도 철학자로서는 개체(인간 또는 개인)를 유와 엄밀히 구별했고 부분으로서의 개체를 인류라는 전체와 구별했으며 그리고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켰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유를 방치하고 개체만을 안중에, 심중에 새겨두었다. 기독교는 이교에 대한 직접의 대립물이다. 기독교는 이교의 대립물로서 이해될 때에만 진실로 이해되고 독단적인 사변적 억지에 의해 불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의 대립물이 허위인 한, 기독교는 진실하지만 기독교의 대립물이 진실인 한 기독교가 허위이다. 기독교는 개체를 위해 유를 희생시켰다. 이교는 개체를 유라는 전체와 구별해서 오로지 부분으로서 이해했으며 그에 반해 기독교는 개체를 유와 직접적이고 무차별한 통일성 안에서 이해하였다. 기독교에서 개체는 직접적인 섭리의 대상이다. 즉 신적 존재자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다. 이교도는 개인의 섭리를 유, 법칙 그리고 세계질서를 매개로 해서 믿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별적 존재자를 일반적 존재자와 동일시했다. 신은 하나의 개체로서 유라는 개념이다. 신은 유라는 개념 또는 본질이다. 더구나 신으로서의 "유의 본질"은 유로서 일반적 본질로서, 모든 완전성의 총체로서, 실제의 제한이든 가공의 제한이든 개별적인 본질이다. "신의 본질과 실존은 동일하다"는 것은 신은 하나의 실존, 개별적 본질이며 동시에 유개념(Gattungsbegriff)또는 유의 본질(Gattungswesen)말고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의 유와 개체성의 이러한 직접적인 통일성을 명확하게 상징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실제의 신인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원상이며 인류의 실존하는 개념이며 신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순수한 천상의 인간, 유적 인간이며 시조 아담(Adam Kadmon)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서의 시조 아담은 하나의 인격으로서 직관된다. 그리스도, 즉 종교적인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간이 아니라 역사의 끝이다. 인간의 유로서의 개념 및 생활의 의미는 기독교가 지배함과 동시에 소멸해 버렸다. 거기서는 또한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며 신은 그 자체 이 목표가 달성된 것이며 인류의 이 최고 목적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신은 각 개인에게 따로따로 나타난다. 오직 신만이 기독교가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도는 반드시 타인이나 인류나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들의 자기 편집에 가까울 정도의 편협한 신앙적 배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즉 기독교도에게는 타인에 대한 내적 욕구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이것으로써 수행되었다. 우리는 신이 세계의 밖에 가지고 있는 자기의 본질, 신의 초자연적인 본질, 신의 초인간적인 본질을 인간적 본질의 성분으로 환원시켰다. 인간적 본질의 성분은 신의 본질의 근본성분이다. 우리는 결론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인간은 종교의 시작이자 중간이며 끝이다. (2) 제2부 종교의 허위의 본질, 즉 종교의 신학적 본질 1) 종교의 본질적 입장 종교의 본질적 입장은 실천적(praktisch)인 입장이다. 즉 여기서는 주관적인 입장이다. 종교의 목적은 인간의 복지, 구원, 행복이며,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인간의 관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신이란, 영원의 구원이 실현된 것 또는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실현하는 무제한적인 위력이다. 기독교만큼 강하게 인간의 구원을 강조한 종교도 없다. 기독교는 특히 이점에서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스스로를 신의 교리라고 부르지 않고 구원의 교리라고 부른다. 신은 본질적으로 종교의 대상이지 철학의 대상이 아니며, 심정의 대상이지 이성의 대상이 아니며 심정의 필요의 대상이지 정신의 자유의 대상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신은 이론적 입장의 본질이 아니라 실천척 입장의 본질을 표현하는 대상이며 존재자 이다. 신과 인간사이에 세계라는 표상, 즉 제2원인이라는 표상이 끼어 드는 곳에는 일반적으로 종교는 폐기된다. 종교는 신과 인간사이에 있는 사물의 현존재에 관한 예감을 단순히 감성적 자연적인 직관으로부터 받을 뿐이다. 그리고 종교는 일반적으로 혼자서는 제2원인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제2원인의 존재는 종교에서 보면 오히려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게2원인은 인간을 신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의 본질로서 특색 지은 것을, 종교 자신이 확증하는 종교의 본질적인 작용은 기도이다. 기도는 전능하다. 경건한 사람이 기도할 때 간절히 바라는 것을 신은 충족시켜준다. 그는 자연의 위력을 다름 아닌 기도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기도할 때 경건한 사람은 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의 초자연적인 수단을 택한다. 신은 그에게서 동떨어진 제1원인이 아니라 모든 자연적인 결과의 가장 가까운 동력인 이다. 기도의 직접 작용은 기적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본질적으로 종교의 사고방식 안에 포함되어 있다. 종교는 모든 것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종교의 본질과 무관하며 단지 경험적인 또는 감성적인 사고방식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그러나 종교가 시작되는 곳에서는 기적이 시작된다. 참된 기도는 하나 하나가 기적이며 기적을 일으키는 힘의 작용이다. 종교적인 기적은 자연적인 기적과 절대로 다르다. 다만 사람들은 이성을 귀머거리로 만들거나 자연과학이라는 가상아래 종교적인 기적을 합리성과 현실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기적과 자연적인 기적을 항상 혼동하는 것이다. 2) 신의 본질 종교란 인간이 자기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에 종교의 진실성과 도덕적 치유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자신의 본질로 관계하는 것 아니라 자기와는 대립된 다른 존재자로서의 자기의 본질에 대해서 관계한다. 여기에 종교의 비진실성, 종교의 한계, 이성이나 도덕과 종교의 모순이 있으며 또한 여기에 종교적 광신의 유해한 원천이 있으며 나아가 피비린내 나는 인간 희생의 최상의 형이상학적 원리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사라는 비극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잔학과 소름끼치는 장면의 시원적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하여 종교가 신학이 된다면, 인간과 신의 통일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종교의 근원에는 신과 인간사이의 질적인 구별 또는 본질적인 구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대 유대교에서 여호와는 실존 측면에서 보아 인간적인 개체와 구별된 본질에 불과했다. 그러나 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호와는 온전히 인간과 똑같았다. 후기 유대교에서 비로소 여호와는 인간으로부터 매우 날카롭게 분리되었으며 신인동감동정설(Anthropopathismus), 인간의 감정을 신에게 이입시키는 것에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비유 안으로 도피했다. 기독교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문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직 나중처럼 그렇게 결정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특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는 아직도 하늘과 땅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불명확한 존재였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천사 중에 첫 번째 천사였으며, 최초로 창조되기는 했지만 창조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은 천사나 인간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신과 동일시하고 그리스도를 신의 외아들로 만들고, 그리스도가 인간이나 천사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에게 피조물이 아닌 영원한 존재자라는 독점권을 주었던 것이다. 종교에 대한 반성, 즉 신학은 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과 다른 본질로 만들고 그것을 인간의 외부로 끌어낸다. 이러한 방식 중에서 개념상 최초의 것은 정식의 증명 대상이 되는 신의 실존이다. 신의 현존재에 관한 증명은 내적인 것을 이적인 것으로 전화시켜 인간에게서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신은 실존을 통해서 사물 그 자체가 된다. 내가 신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나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의 하나가 무신론이다. 신의 실존은 경험적인 또는 감성적인 실존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주지하듯이 칸트는 신의 현존재에 관한 증명을 비판하면서 신의 현존재는 이성으로부터 증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칸트는 헤겔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칸트는 적절하다. 즉 개념에서 실존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성은 자신의 객체를 자신의 감관의 대상으로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경험론과 유물론이 성행한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의 경험적 실존이라는 개념이 완전하게 발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의 실존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실존, 자연의 실존과 구별된 하나의 특수한 실존에 대한 신앙이다. 신의 실존에는 계시의 개념이 연관되어 있다. 신의 실존의 자기증명, 신이 실존한다는 것의 진실한 증언은 계시이다. 신의 현존재에 관한 단순히 주관적 증명은 이성의 증명이며, 신의 현존재에 관한 객관적인 증명은 신의 계시이다. 신은 인간에게 이야기한다. 계시는 신의 말이다. 계시에 대한 신앙은 종교적 심성이 신앙하는 것, 소망하는 것, 표상 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에 관해서 종교적 심성이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확실성이다. 또한 계시에 대한 신앙은 종교적 의식에 특징적인 환상을 가장 분명하게 폭로한다. 그런데 신은 초인간적 존재자이다. 신은 오직 신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 진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계시한 것 이외에는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이 계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신이 인간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오는 것은, 단지 신 안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계시와 이른바 인간적 이성 또는 인간성 사이에는 환상적인 구별 이외의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신의 계시의 내용 또한 인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확증된다. 기독교적인 궤변의 최상의 원리, 중심점은 신의 개념이다. 신은 인간적 본질(존재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인간적인 다른 본질의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격적, 개체적 본질이어야 한다. 또는 신은 인격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본질로서 신이어야 한다. 즉 신은 결코 인격적인 본질이어서는 안 된다. 신은 존재한다. 즉 신의 존재는 특수한 존재로서는 지각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정의의 한쪽 절반은 다른 한쪽 절반과 언제나 모순된다. 존재(Ist)에서 주장되는 것은 당위(Soll)에서 항상 거부된다.근본개념은 단지 궤변에 의해서 숨겨져 있을 뿐인 모순이다. 우리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2002-01-30 10:01:25 read : 16 -------------------------------------------------------------------------------- 가상 현실과 교회의 대응 Ⅰ. 들어가는 말 어떤 건장한 남자가 문앞에 서서 카드키( card key)를 가지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본 다음 책상 위에 놓인 헬멧과 특이하게 생긴 장갑을 낀다. 그리고 잠시후 그는 발차기를 비롯해 찌르기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는 마치 실제로 싸움을 하는 듯 하다. 미친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가상 현실 프로그램을 이용해 무술을 수련중 이었다. 이런 내용은 어느 영화에서 상영되었다. 요즈음 들어 부쩍 컴퓨터의 관심이 높아지고 생활이 고도의 정보를 통한 세계화 추세에 들다보니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은 '컴맹'으로 불리우며 무시 당하는 세태이다. 특히 컴퓨터의 발달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제 컴퓨터는 기계를 떠나 생활이 되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요즘들어 가장 관심을 끄는 컴퓨터 프로그램 가장 널리 쓰이는 게임등은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만도 대기업에서 조차 가상 현실 게임산업에 손을 댔다고 하니 가상 현실이 우리 생활에 얼마큼 영향을 주며 얼마나 널리 쓰이게 될지 환하게 알 일이다. 가상 현실이 각광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상 현실은 구성이 복잡한 만큼 광범위한 응용 분야를 창출할 수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커다란 변혁과 전환을 몰고 올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러분야의 관련 기술을 하나로 집약시키는 한편 그 결과를 실생활에 접목 시킬수 있다는 점이 단지 컴퓨터 기술의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나 큰 파급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Ⅱ가상현실과 미래 1.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란 무엇인가 요즘 신문에서 "가상 현실을 이용한 xx 개발"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상'과 '현실' 이라는 이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진 새로운 기술의 이름은 이미 그 실체 보다도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이미 실제로도 군사분야와 교육, 인텔리어, 분야에서는 초보적인 실용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다 수년 전 나온 '토탈리콜' 이나 '론머맨' 같은 미국의 공상 영화에[ 등장해 흥미를 끌었던 이 기술은 사람들에게 "머리로 떠올릴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실현이 가능한" 놀라운 기술로 이해되고 있다. 실제로 가상 현실이란 개념은 정의 자체부터 매우 모호하다. 단어 자체가 가상(Virtual)과 현실(Reality) 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하난로 묶었을 뿐 아니라 가상 현실을 구현하는 기술도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를 포함하는 컴퓨터 기술 뿐 아니라 심리학 생리학 인간공학등의 다양한 분야가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상 현실이란 "컴퓨터를 이용하여 가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그 환경내에서 3차원의 의사체험(擬似體驗)을 가능하게 하는 첨단 기술"로 정의될 수 있다. 즉 가상 현실은 실제 물체는 없지만 이를 시뮬레이션해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2. 가상 현실의 역사 가상현실이라는 말이 일반인에게 거부감없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이 용어가 정착되기 전에는 가상 환경(Virtual environment) 인공현실(Artficial reality) 인공 두되공간(Cyber space) 등으로 이름이 불리웠는데 이 같은 용어의 흔재는 그 개념을 확실히 설정하는데 적 잖은 장애 요소로 작용했다. 가상 현실에 대한 연구는 60년대 중반 CAD의 원조로 불리우는 MIT의 이반 서덜랜드 교수에 의해 시작 된다. 넓은 의미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인 CAD가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의 모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컴퓨터 그래픽은 대상물을 수치화시켜 실시간 내에 표현하고자 하는데 3차원의 실세계를 평면으로 표현하는 데는 어딘지 답답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상 현실은 3차원 공간을 표현하는데데이타를 컴퓨터에 기억시켜 그 가상공간에서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디스플레이에 기억시키고 표시하는 것이다. 이 때 가상 공간에 있는 인간의 위치는 마우스 등의 입력기에 의해 이동 시킬수 있고 그에 따라 보이는 장면의 변화를 계산해 낸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인공 지능이나 산업공학, 등의 연관 과학 학문이 어우러지면서 가상 현실(Virtual Reality)기술이 본격화 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였다. 특히 멀티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음성 인식과 화상처리 기술의 진보는 이를 통합한 기술의 하나로 가상현실의 출현을 예고 하고 있었다.85년 미항공 우주국(NASA)은 좁은 우주선의 복잡한 작업을 단순화 하기 위하여 3차원 데이터 공간을 비행하며 몇 개의 컴퓨터 조작 패널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며 우주선 외부에서도 우주복을 입은채 조작할 수 있는 VIEW(Vitual Intreface Environment Workstation)을 만들었다. 사진이 최초로 발명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고 텔베비젼이나 영화관이 등장한 것도 20세기 초에 불과하다. 이들 매체는 모두 사물을 2차원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발명 당시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2차원의 한계를 넘어서 3차원의 표현방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이들 발명품보다 앞서 일어났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동안 좀더 현실감 있는 입체 이미지에 접근하고자 수 많은 입체경에 발명되어 왔으며 그 맥은 오늘날 가상현실시스템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입체화 발견에 대한 연구는 1백 50년 전에 휘트스톤 이란 인물이 프리즘과 거울을 사용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최초의 입체경을 발명해 명성을 얻은바 있는 그는 사람의 양쪽 눈이 보는 이미지 차이가 입체적인 깊이를 지각 시킨다는 사실을 영국학술원에 보고했다. 그는 마주 향하는 이미지들을 반사시키기 위해 45°각도의 거울을 사용해 두 개의 사진이 보는 사람의 눈을 향해 반사되도록 측면에 배치했다. 이 거울 입체경은 비교적 간단한 장치로 눈에 하나씩 2개의 2차원 그림을 제공함으로써 기술적으로 망막의 불일치를 만들었다. 렌즈없이 보는 유일한 입체경인 이 발명품은 이 후 관찰자의 눈 사이 거리와 이미지의 크기를 조절하는 렌즈가 부착돼 정교함을 더했다. 한편 무작위 점 입체화(random - dot stereogram)라 불리우는 입체 기술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베라 유레즈라는 사람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얼마전 관심을 끌었던 '매직아이(magic eye)'라는 것은 바로 이 무작위 점 입체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난수표에서 힌트를 얻어 흑백의 점으로 그려낸 두장의 그림을 일정한 방법을 통해 보면 입체적인 도형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인간의 두눈이 양안 시각을 갖는 다는 것과 대상인식은 항상 입체시 (立體視)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레즈의 발견 이전까지 사람들은 한눈의 대상물 인식은 입체시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는 두눈의 영상은 두뇌의 중간 지점에서 합쳐지고 깊이가 인식되기 때문에 편시야 시각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시초로 그 후 입체 환경을 통해 보는 입체 영화와 3-D 영상기법이 발전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부르스터라는 인물은 양쪽 눈이 정확히 다른 그림을 보는데 도움이 되는 렌즈를 사용한 입체경을 발명했는데 오늘 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이 발명품은 두눈이 같은 광경을 보는 것을 막기위해 두 개의 렌즈 사이에 경계 분리기가 동시에 놓여 있다. 이것은 후에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뷰마스터(View Master) 라는 간단한 입체 그림을 보는 도구로 발전하게 된다. 3. 인간과 가상 현실 1)생활속에 파고드는 가상현실 우리 주변에도 가상 현실 기술을 응용한 예가 적지 않다. 가장 구체적으로 가까운 예가 가상 현실 게임관인 어뮤즈21관이다(이 곳은 HMD를 착용하고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채 게임하는 곳이다.) 가상 현실의 응용 분야는 비단 흥미 위주의 오락만은 아니다. 산업용으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한새퍼시스가 시도한 가상 부엌 시스템이 있다. 부엌용 가구를 일일이 설치하지 않아도 입체 영상을 통해 위치를 바꿀 수 있으며 냉장고나 싱크대 등을 가상 세계안에서 사용할 수 있다. 동아 건설도 가상 모델 하우스 계획을 발표해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모델 하우스를 찾아다닐 필요없이 아파트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원하는 스타일의 아파트를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이다, 특히 아파트 실내에 들어가 걸어다닌다거나 베란다에서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벽제나 바닥제의 촉감을 느낄수 있다. 2)컴퓨터 문화를 새롭게 정의 가상 현실이 컴퓨터 관련업계에 일으키는 파장은 단순히 활용 분야가 많다는 이유외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가상현실의 인터페이스이다. 실제로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장비를 사용해야 한다. 가상 현실을 대표하는 장비로 알려져 있는 HMD(Head Mounted Display)를 단순히 영상을 입체로 보여주는 장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HMD는 출력 장치로서 역할외에 사용자의 머리 움직임이나 이동을 컴퓨터 시스템에 전달하는 입력장치로서의 역할도 겸한다. 이런 면에서는 촉각 디스플레이 장치인 데이터 글러브(장갑형태)와 바디 슈트( 옷과 같은 형태)도 마찬가지 이다. 특수 장비를 통해 감지된 인간의 동적은 컴퓨터가 처리하고 결과는 디스 플레이 장치로 보내진다. 보내진 결과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다시 컴퓨터로 보내지는 일련의 과정이 계속 반복된다. HMD는 인간의 동작을 감지함은 물론 그 동작에 대한 처리 결과를 나타내 주기 때문에 입력장치와 출력 장치의 기능을 모두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과 컴퓨터 간 상호작용의 연결 고리인 셈이다. 이런 일련의 개발과정은 키보드로 시작해서 마우스로 이어져 온 컴퓨터와 인간간의 인터페이스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우선은 인간이 컴퓨터가 할 일을 하나 하나 지시해야 하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말이나 손짓 등 일상적인 행동만으로 원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게 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컴퓨터를 단순한 작업도구가 아닌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3)인간 연구가 기초 가상 현실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매우 광범위하다. 컴퓨터와 관련된 하드웨아 소프트웨어 외에도 인간의 감각 기관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심리학 생리학 인간공학 등의 바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역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 웨어이다. 3차원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시각 장치로는 HMD외에도 레이저 광선을 이용한 홀로그래피 등이 있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소프트 웨어는 일반 3차원 그래픽보다 빠른 속도로 랜더링해야 함은 물론 사용자의 시점(view point) 변화에 따라 물체의 모든 면을 연출해 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컴퓨터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자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면 가상 현실 시스템은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감각이 어디에서 어떻게 감지되어 대뇌에 전달되는 지 알아야 인간 감각 기관의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서 전달할 것인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여주는 주체인 가상 현실 시스템과 그것을 즐기는 인간을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또한 이에 걸맞게 진보된 것이어야 한다. 4) 가상 현실과 오감 가상 현실의 작용을 살펴보면 가상 현실을 이루는 요소들을 알 수 있다. 우선 가상 현실 시스템은 실체 세계에 있는 인간의 동작을 측정하고 입력할 수 있는 기기를 사용한다. 그 다음 입력받은 동작을 컴퓨터가 관장하는 가상 공간에 전달해 작용과 반응을 일으킨다. 이때 가상공간은 인간의 동작에 대응해 영상과 소리 체감등 다양한 감각 정보를 합성한 후 이를 특수한 하드웨어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한다. 이런 일련이 과정들을 통해서 사용자는 실제 세계에서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상 현실 시스템의 주요 임무는 인간의 오감을 통한 체험의 전달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정확한 감성공학을 필요로 한다. 가상 현실의 공학적인 명제는 다름아닌 경험의 전달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또한 가상 현실의 효과를 충분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감각 전달 방법의 개발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가상 현실은 기술적 차원의 진보뿐 아니라 인간적 요소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1) 시각 디스플레이 (Display)장치 인간이 감각을 받아들이는 상당 부분은 시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상 현실 시스템에서 각각 디스플레이 장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눈앞에 소형 컬러 액정 디스플레이를 고정시켜 3차원 영상을 보게 하는 HMD는 시각 디스플레이 장치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머리에 착용하는 헬멧 형식으로 머리의 움직임을 측정한는 센서를 함께 장착하고 있다. 또한 헬멧의 각도와 높이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시스템을 관리하며 약 135°의 넓은 시야에 걸친 화상을 비춰준다. HMD의 성능중 하나 중요한 것은 넓은 시야를 확보해 가상 세계에 몰입과 존재의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인데 실재로 인간은 수평으로 155°의 시야를 갖기 때문에 넓은 시야를 제공하는 HMD일수록 보다 사실감 있는 가상 활경을 즐기는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HMD에도 문제점이 있다. HMD는 형태나 외양 및 기능에 있어서 다양하지만 모두 불편하다는 공통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며 시야의 크기와 직결되는 액정의 크기, 해상도, 새로운 이미지를 그리기 위해 걸리는 시간(Frame refresh rate), 머리에 장착함으로 해서 야기되는 위생상의 문제, 중량, 누의 피로감, 화면과 동작의 불일치로 인한 감각 기관의 혼란등이다. 또한 많은 케이블로 인해 이동에 제한이 있다는 결점도 가상 현실 시스템의 사용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첫 번째 난제는 낮은 해상도롤 인해 눈의 피로와 현실감 감쇄의 원인이 된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직 그래픽 처리속도가 사람의 반응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아직 그래픽 처리속도가 사람의 반응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시점 이동에 대한 실시간 화상처리가 약간 높다. 센서에서의 시간 자체는 시스템과 그래픽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시간 지체와 함쳐져 시스템이 반응하기 ¼-⅓초 이전의 위치가 HMD에 의해 전달된다. 따라서 사용자가 고개를 돌릴 때 가상의 그래픽 세계가 시야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현저한 시간 지연이 생기게 된다. 이런 현상은 사용자에게 방향감각의 혼란을 야기하는 등 후유증을 남기기도한다. 세 번째 머리에 장착함으로써 야기되는 위생상은 문제, 중량, 피로감, 장시간 착용시의 멀미 증상 등이다. 현재 발표된 상업용 HMD의 경우 무게가 보통 2㎏인데 현실감을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무겁다. 그리고 HMD의 특성상 눈앞의 무게 비중이 커서 HMD가 앞으로 처지지 않게 손으로 잡고 머리를 회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초당 프레임수인데 TV정도의 화면에서는 매초 30프레임 이하면 보이는 것이 불안정해 눈이 피로해 진다. 현제의 가상 현실 기술은 10-20프레임 정도가 한계이다. 이 종도의 화상을 10분이상 계속 사용한다면 모니터를 10시간 사용한 것과 같다는 보고 결과도 있다. 다섯째로 HMD를 착용한고 있는 동안은 오직 한 장소로 활동이 제한도며 가상 세곙 이외의 환경에서 작업이 필요할 때마다 장치를 벗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HMD의 문제점은 현실재적응이라는 문제로 집중된다. 감각궤한의 지연 실세계의 경험과 가속 운동으로 인한 시각 및 전정기관 체성감각기관에서 대뇌로 전달되는 감각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뇌가 혼란을 일으키게 되고 어지럼증 피로감 구토 땀흘림 방향감각의 상실 복부팽만감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이를 전문 용어로 사이버 병(Cybersickness) 이라고 부르는 데 보통 가상현실을 체험한 후 장시간 쉬었다가 현실에 적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청각디스플레이 장치 가상 현실에 사용되는 음향은 HMD에 연결돼 시각과 동시에 작동한다. 현재 사용되는 이 분야의 기술수준은 스테레오로 입체음향을 재생하는 정도지만 홀로포닉스라는 신기술의 접목이 시도하고 있다. 홀로포닉스는 3차원 공간내에서 눈을 감고도 소리가 나는 곳을 감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임에 따라 그 감지도가 변화해 생생한 소리를 제공하는 음향기술이다. 귀는 눈과 마찬가지로 입체적인 음향을 들을 수 있는 데 사물의 위치와 얼마나 먼곳에 있는지를 뇌가 판단하도록 해준다. 중이(中耳)에는 서로 연결된 세 개의 뼈가 있어 소리 에너지를 고막으로부터 액체가 차 있는 내이 (內耳)로 보낸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이 뼈를 고정하는 근육이 음향반사작용을 일으켜 조여지고 이 때문에 내이에 도달하는 에너지의 양을 최고 100분의 1정도로 감소시켜 준다. 이 근육은 지속적인 큰소리에 대해 10분이상 버틸수 없다. 귀는 또 어떤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주파수를 여과함으로써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맹인이나 눈을 가린 어른이 반사되어 돌아오는 휘파람 소리로 최고 3미터 까지 떨어진 곳에 물체가 있는 지 없는 지를 알수 있다. 강한 오디오 이미지는 사물에 대한 공간적 정보를 제공하며 체험자에게 가려진 가상존재를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공간적 단서는 귀와 귀사이에 이르는 소리의 세기와 귀에 도달하는 소리의 시간 지연에 차이가 있다. 가상 현실 시스템에서 소리의 역할은 현장감을 증가시키는 데 있다. 일반 스테레오 사운드는 2개의 채널을 통해 소리가 머리 중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만든다. 입체 음향은 외이를 통해서 고막으로 전달되는 음향신호를 좌우로 따로따로 생성해 임의의 장소에서 음원이 재생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 가상현실 시스템에서 청각디스플레이 장치는HMD에 연결 돤 헤드폰이나 이어폰이 주로 이용된다. 3차원 공간에서 현실적인 소리의 구현은 다수의 스피커를 사람 주위에 배치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다. 3차원 음향을 출력하기 위해서는 3차원 사운드 프로세서와 소리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는 음원이 필요하다. 이 분야의 성과 중 하나가 NASA가 개발한 컨볼보트론(Convol- votron)이다. 컴볼보트론은 아주 강력한 오디오 전용 DSP로서 HRTF로 만들어진 아날로그형 소리를 통해 3차원 사운드 효과를 내는 데 HRTF라 불리우는 일련의 계산법을 이용해 음원이 마치 소리가 특정 위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만든다. 이 시스템은 방음 장치가 되어 있고 소리의 반사가 없는 방에 설치된 144개의 스피커에서 출력되는 다양한 소리의 주파수에 의해 귀에 충격이 가해질 때 음향의 변화를 그려낸다. 최근에는 인간의 청각 특성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어 음성 신호의 실시간 처리로 일반적인 헤드폰을 사용해 3D 공간 임의의 위치에 음원을 높은 정밀도로 정립시키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3) 촉각 디스플레이 장치 촉각과 포스 피드백은 가상현실의 완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이다. 실제에서 촉감으 통해 사물의 존재를 인지하듯 물리적 저항 감각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개발된 장치들은 피부에 맞닿는 표면의 질감과 작은 압력을 시뮬레이트하는 데 사용된다. 전기적 촉각 및 진동 촉각 장치들이 전류나 작은 진동으로 피부의 자극 수용체들을 자극함으로써 사용자의 손가락 끝에 표면적 착각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가상의 터치 동작은 특히 텔레로보틱스 분야나 수술 시물레에션과같은 고도의 정확성을 요하는 분야에서 매우 중요하다. 가상 촉감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것이 촉각과 포스 피드백 시스템이다. 실제생활에서 감촉이나 포스피드백에 의존하는 수많은 체험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촉각은 물리적 자극에 대한 수용기를 통해 일어난다. 반면 포스피드백은 손가락이나 손에 작용하는 실제적인 힘을 의미한다. 이 감각은 근육이나 관절에 적용된다. 생리학에서는 촉각과 압각의 분류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만약 모발에 가볍게 접촉을 하면 모근의 신경말단망에 의해 촉각이 발생하고 페치니소체를 가볍게 누르면 압각이 발생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촉각은 피부표면에서 느끼는 피부감각과 피부 밑의 근육에서 느끼는 시부감각을 통한다. 피부에는 압각, 온각, 냉각, 통각을 만드는 점들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피부 전체에 이들 감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감각적음 압점, 온점, 냉점, 통점으로 불리며 각각 그 종류가 다른 감각을 만들어 낸다, 심부 감각은 근육,관절기 등 수용기의 충격에 의해 발생하는 감각이며 물체를 움직일 때의 저항감과 중량감등 운동이나 위치에 대한 감각과 심부통각으로 나누어지며 피부감각과 심부감각을 합쳐서 체성 감각이라고 한다. 가상현실에서도 체성 감각에 대한 제시는 아직 모색 단계인데 몸 전체에 분포돼 있는 촉각을 공학적으로 모방해 실시간으로 재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실현의 범위를 손에 한정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촉각의 피드백은 피부에 가해지는 힘을 말하고 포스 피드백은 근육이나 관절에 가해지는 힘의 되먹임을 말한다. 어떤 물체를 형성하고 손가락 끝으로 뭔가를 조종하고나 특정 방향에서 물체를 잡기 위해서는 손가락과 손의 움직임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범용적인 피드백 장치들은 비용,효율, 유용성에 있어서 충분치 못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장치들은 더욱 가벼워지고 더욱 더 나은 성능을 갖게 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 장치는 센서와 액튜에이터(ACTUAYOR)가 집적된 얇고 유연성 있는 형태로 발전할 것이며 새롭게 개발된 기술이 효과적 경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적용될 것이다. 현재 연구되어지고 있는 포스 피드백 방식으로는 마스터암, 조이스틱. 조이스트링, 데이터 글러브의 네가지를 들수 있다. 이들 장치는 현재 가상 현실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4) 후각과 미각 디스플레이어 장치 현재 실현되고 있는 가상 현실은 시각과 청각 및 촉각이 중심이지만 사용 목적에 따라 언젠가는 미각과 후각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오감은 2000년 전 아리스토 텔레스가 처음 알아낸 것이지만 과학자 들이 인간 감각의 깊은 비밀을 풀어내고 그 케카니즘을 규명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이다. 가상현실에서 후각과 미각은 아직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우리가 맛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후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콧속에 들어 있는 후각세포로 4천가지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고 향수업계의 전문가는 약 1만가지의 향내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맛에 대한 감각의 대부분은 후각을 구성하고 있는 100만개의 세포에서 나온다. 후각은 뇌가 가장 원시적인 부분인 변연계와 연결되어 있는 데 이곳은 정서 식욕, 성욕을 관장하는 부분이다. 이 후각 세포들은 다양한 수용기를 갖고 있어서 특정한 화학물질만이 들어갈 수 있고 수용기는 화학 물질의 냄새가 들어오면 신경신호를 일으킨다. 가장 중요한 후각 신경 조직과 후각 세포는 코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이 3차 신경조직 세포는 각기 다른 신경을 통해 뇌로 신호를 보낸다. 이들 두감각은 물리 세계에서 화학적인 인터페이스를 갖는데 컴퓨터는 아직 적합한 인테페이스를 갖고 있지 못하다. 현재 나와 있는 가상 현실 시스템의 전조인 모턴 헤이리그(Morton Heilig)는 센서라마(sensorama)라는 시각 청각 진동외에 배기 가스 꽃의 향수 행수 등 냄새의 감각까지 제공하는 개인용 오락기구를 발명하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가상현실의 오감 제어에 관한 선구자적인 고안의 발상이었다. 센서라마 기구는 일종의 1인용 극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상요자가 의자에 앉아 오토바이를 타고 뉴육시내를 다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도록 영상과 음향은 물론 바람 냄새 진동까지 제공한다. 오토바이 시뮬레이터와 비슷한 체감을 갖도록 설계된 시스템이지만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에 진정한 가상현실 시스템은 아니었다. 결국 오늘날 진정한 가상현실시스템의 원형으로써 앞날을 예견하는 선구자적인 고안인 셈이었다. 또 다른 실례로써 미국 플로리다 주의 디즈니 랜드에 있는 미래도시는 선사시대의 광경, 습기를 느낄수 있는 모의 향기를 사용하고 있다. 현재 후각 입력 장치로서 개발된 방향 디스플레이가 있으나 아직까지는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후각 디스플레이는 냄새의 가각이 잔존하기 때문에 급작스런 환겨의 변화에 빠르게 적용하기 힘들다. 가상 현실속에서 사용자가 갑자기 다른 환경속으로 들어가거나 다른 행동을 취할 때 이에 따른 냄새의 변화를 빠를게 바꿀 수 없는점이 후각 디스플레이의 가장 큰 단점이다. 냄새와 맛의 감각은 실제적인 분자를 받아들이기 위한 수신기 역할을 하는 코와 입을 통해 특정 신호를 뇌에 보내게 된다. 따라서 후각과 미각 디스플에이의 개발은 매우 어렵지만 궁극에 가서는 뇌파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냄새나 맛을 강제로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5) 가상 현실의 응용 모니터와 같이 평면에 나타난 이미지를 입체영상으로 나타내려는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기술의 미숙으로 오늘날과 같이 폭넓게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근래들어 입체시를 지원하는 각종 장치나 소프트웨어의 성능이 대폭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광고나 예술, 분자구조 모델링, 사진측량법, 모의 비행 시뮬레이터, CAD나 CAM, 방사선 수술, 컴퓨터 단층촬영, 3차원 비디오 게임, 3D TV, 다차원 데이터이 시각화에서부터 가상 현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입체영상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술은 앞으로 군사과학 의학 산업 교육 오락등 실제적인 모든 분야에 확대될수 있다. 가상 현실이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이것이 기존의 기술을 능가하는 무엇이 바탕이 되서라기 보다는 그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다는 게 더 클 것이다. 가상 현실의 응용분야는 쉽게 설명해 가상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공간 내에 존재하면서 안가고도 체험하는 것인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저자를 가상현실의 연습(Virtual Reality walkthrough)이라 하고 후자를 원격존재(Tele-presence)라 부른다 원격존재는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자신의 분신인 로봇의행동을 손에 잡힐 듯이 알게 되고 필요한 경우 로봇을 자신의 수족처럼 조작해 마치 자신이 그 장소에 있는 듯한 감각을 가질수 있는 기술이다. 원격존재와 가상현실의 관계는 하나를 거꾸로 말하는 것과 같다. 가상현실은 자신의 주변에 현실과는 다른 자연스런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원격존재는 자신이 현재의 자리에 있으면서 별도의 환경으로 가는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원격 존재가 한쪽이 다른편을 조작한다는 것 외에는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로봇뿐만 아니라 원격으로 조작되는 기계 전체를 일컬어 털레오페레(Teleoperator)라 부르는데 이 부분의 본격적인 연구개발이 진전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원자력이 본격적으로 연구되면서부터 이다. 최초의 연구는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를 중심으로 개발된 '매직핸드'라는 이름의 마스터 슬레이브 매니플레이터(manipulator) 였다, 1960년대의 텔레오퍼레이션 연구는 엑조스켈톤형 인력증폭기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1950년대 후반에 행해진 GE(Generak Electric)사의 모셔박사의 연구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는 다시 미국 정부와 GE사의 공동프로젝트인 '하디만( Hardymann)'으로 진전했다. 이들 연구는 사람이 장치 속에 들어가 힘을 증대시켜 무거운 것을 드는 일 등에 쓰이도록 고안됐는 데 만일 장치에 고장이 생기면 인간의 생명도 위험해지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상영화의 '에어리언'을 본 사람이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이 '기계옷'을 입고 괴물과 싸우는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1)의학분야 3차원 입체영상이 적용돼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의학분야이다. 3차원의 비디오 영상은 의사로 하여금 수술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시행착오를 방지하게 하며 수술경로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외과 의사들의 사전수술 시뮬레이션 계획에 3D영상기술은 매우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실례로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임상협회는 외과의사들이 아주 미세한 범위의 뇌에서 위치를 지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 뇌수술을 위한 3D의 응용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기술은 동시에 뼈의 재봉합기술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전자적인 3차원 입체영상은 의사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덜어주게 되고 뼈가 어떻게 구성되고 재위치 되어야 하는지 에 대한 계획을 제대로 세울수 있게 한다. 현미경으로 봐야 움직임을 알 수 있는 미소대상의 수술을 마이크로수술(microsugery)라고 하는데 이 수술은 현재 미소한 혐관유합 신경이나 정관 난관의 재생수술 등 다방면에서 이용되고 있다. 마이크로 수술은 대단히 미묘한 손의 동작을 필요로 하기에 고도의 숙련을 요구한다. 여기에 원격존재 기술을 도입해 보통의 수술과 같은 감각으로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가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은 현재 급속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마이크로 머신 기술의 진보에 바탕한 것이다. 손의 동작을 미소한 매니플레이터에 전달하고 환부의 영상을 확대해 관찰하면서 원격조작으로 수술한다는 것이 골자 최근에는 마이크로머신을 캡슐의 형태로 체내에 넣고 체외에서 원격존재기술을 이용해 진단이나 수술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각되고 있다. 가상 현실이 의료계에 대비되면서 의술혁명의 서곡을 울렸다. 병든 부위를 절개하지 않고도 가상현실 장비를 이용하여 인체 내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보면서 수술을 할 수 있는데 정확성도 있고 수술의 성공률도 높다고 한다. 원격지에 있는 환자에게 이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시술할 수 있는 장이 열릴 경우 외국의 유명한 외과 의사를 찾아 비행기로 몇시간씩 나아가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음은 물론 의료 해택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지역의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해부 실습용 시신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실제로 시신을 해부하지 않고도 모의 해부 실습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오락 최근 우리 주변에 가상현실 기술을 응용한 예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가상 현실 게임관인 어뮤즈21에 가보면 HMD를 착용하고 일반 게임과 달리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된 채 게임에 몰입해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현재 가상 현실 기술이 가장 많이 응용되고 있는 분야이며 가상 현실 산업이 발전하는 초기에 각광받을 분야가 오락분야이다. 가정용 게임기 분야에서는 3D를 이용한 입체게임기가 일본 세가사에서 개발돼 특수 LCD 안경과 함께 판매되기도 했다. 이 안경은 LCD셔터 방식을 채용한 특수안경으로 사용자에게 실감있는 입체그래픽영상을 제공해 준다. 최근 이 회사는 가상현실기술을 응용한 3차원의 비디오 게임기와 입체안경보다 더 몰입감을 주는 영상을 제공하는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를 개발해 제품화시켰다. (3) 가상건물 세우고 이상을 점검 아마도 가상 현실의 응용 중 가상 현실 연습 분야는 건축가들에게 큰 경제적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미국 노스케롤라이나 대학에 설치된 가상건축의 내부를 살펴보면 건물 구조의 청사진을 CAD프로그램으로 그래 놓고 이를 컴퓨터 그래픽 워크스테이션으로 보내 이미지에 입체감을 입혀 2차원 데이터를 3차원 이미지로 만든다. 이 이미지는 엔지니어나 건축가가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쓰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학 연구진은 이와 함께 가상의 빌딩 공간을 자연스럽게 돌아다니기 위해 핸들이 달린 러닝머신 시스템을 개발했다. 가상 환경에서 앞으로 움직이고자 하면 사용자는 러닝머신에서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코너를 돌거나 방을 보고 싶으면 걸으면서 원하는 방향에 있는 핸들을 돌리기만 하면 된다. 빌딩 주변을 걸을 때 걸음속도를 조절해 움직임의 비율을 제어할 수 있다. 이것은 실세계와 매우 비슷하다. 걷고있는 동안 머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고 주위를 둘러본면 물체는 실세계에서와 같이 원근감을 갖고 보여진다. 이러한 시스템은 단순히 재미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건축설계에 있어서도 기존의 설계방식에 비해 실제적 장점을 지니고 있다. 기존이 설계방식으로는 3차원적인 공간감을 2차원적인 모니터에서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을 뿐 아니라 3차원 모델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지 않고는 디자인의 잘못된 점을 알 수가 없었다. 가상 현실 기술은 이러한 점들을 개선시켜 줄 것이다. 건축도면을 입력해 설계단계에서 컴퓨터 속에 미리 건축물을 만들어보고 그 안을 둘러본다면 도면상에 나타나지 않는 문제점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가상 박물관을 들수 있다.현재 박물관들은 유적물을 컴퓨터 그랙픽 작업을 통해 복원하고 있다. 시스템 공학 연구소에서는 미륵사지탑 복원을 계기로 문화재 연구소와 계속적으로 이 작업을 진행중인데 이는 원형고증 작업에 신속성고 정밀도를 향상시켜 문화재 보존 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입체영상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가상박물관이 만들어지면 멀리 떨어져 있는 유적지까지 가지 않고서도 인파에 방해받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마치 그곳에 들어가서 살펴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설계분야에서도 기계적 설계환경의 연구에 입체시각이 2배에서 4배까지 정확도를 증진시키며 설계오류와 변경을 덜 초래 한다는 것이 이미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CAD나 CAM등 모든 설계응용분야에서 적용될 수 있다. 입체 영상은 자동화된 도구생산을 위한 설계도를 만들며 CAD프로그램에 그대로 공급될 수 있다. 가상의 움직임으로 사용자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시험과 오류에 의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건축설계의 경우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3차원의 모델을 만들며 HMD를 이용하여 그 내부를 돌아다니며 관찰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하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건축물의 완공을 미리 시뮬레이션할 수 있어 정확한 내부설계까지도 상세하게 설계할 수 있다. 또한 3차원을 통한 분석은 동시에 건축기사들이 잠재적인 문제점을 예견하는 것을 돕는다. 건축가는 3차원 공간을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하여 탐험할 수 있으며 여러각도에서 건물을 바라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설계가 활용되는 모든 분야는 3D의적용이 매우 긴요하게 쓰일 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과 노력을 절감시켜 줄 수 있다. (4) 인테리어 응용분야 VR연습이 실제 생활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분야는 인테리어 응용이다. 그 한예로 작년 시스템 공학연구소가 연구한 부엌 인테리어의 세계를 보면 이 장치는 미국의 VPL사가 개발한 데이터 글러브와 디스플레이 기술을 이용한 시스템으로 이용한 시스템으로 컴퓨터로 부엌의 CAD모델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머리에 아이폰을 쓰고 가상 부엌을 돌아 다닐수 있다. 식탁의 의자도 옮겨보고 냉장고의 색을 바꾸어도 보고 전자레인지를 즉석에서 배치하는 등 사람이 원하는 것은 어느것이나 변경 추가할 수 있다. 이 기술의 핵심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것과 동일한 3차원 입체 영상을 제작하고 제작된 입체영상을 실제와 동일한 느낌을 갖도록 실제감을 표현하며 실제와 동일하게 재작된 물체를 3차원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동시킨다는 데 있다. 이 시스템은 주방가구를 대상으로 개발되었으니 실제로는 전시장에 전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제품에 응용이 간으하다. 특히 무게가 무겁고 부피가 커서 배치가 용이하지 않고 표준품의 종류와 숫자는 많지만 전시될 물품의 수가 제한되는 제품이라면 더욱 유리하다. 가상 현실을 이용한 CAD는 디자이너가 제품을 디자인 할 때부터 사용자를 함께 참여시켜 디자인 할 수 있다. 즉 디자인 상태의 물품을 가상의 세계에서 사용자에게 이용토록 함으로써 사용상에 문제점은 없는 지를 체크해 가면서 제품을 디자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제품개발에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디자인 경비를 절약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개인별로 차이가 있는 부품은 각자에 맞는 개별 디자인이 가능해 진다. 음향설계 분야에서 콘서트 홀이나 집을 디자인 할 때 건축가는 청각적인 문제에 시달려 왔다. 건축되기 전에 건축물의 청각을 결정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콘서트 홀에 청중이 가득찼을 때 음향의 반향 등 예견되는 많은 경우를 생각해서 건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상현실을 이용해 가상의 건축물에 가상의 청중을 앉도록 하고 연주되는 음향을 가상의 청중을 통해 느끼도록 하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5)비행 시뮬레이터를 이용한 교육 교육은 가상 현실연습이 적용될 수 있는 관심 분야의 하나이다. 현재 가장 높은 수준을 이루고 있는 응용분야로 꼽히는 비행기 조종사의 시뮬레이터는 바로 어떤 방식으로 VR이 교육에 접합되는 가를 잘 보여준다.신형기의 시범 비행은 위험이 따르는게 보통이다. 개발된 비행기가 안전한지의 여부는 그 비행기의 동적 요소를 조합해 제작된 플리이트 시뮬레이터로 모의 비행을 실시함으로써 미리 알아보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음주나 약물 복용후의 운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실제 운전자에게 술과 약을 먹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를 대신하는 장치가 바로 운전 시뮬레이터다. 또한 체험이나 오락용 시뮬레이터의 한 종류인 '스페이스 월드'는 체험형 레저시설이라 고도 불리우는데 이곳에서는 미리 프로그램된 과정을 시뮬레이터로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객의 의지에 따라 대상의 운동이나 상활이 변하도록 하는 피드백 장치가 시도되고 있다. 이는 마치 컴퓨터가 이해되는 데 컴퓨터 오락이 큰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VR이 보통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도 오락과 레제 분야에서는 VR을 구체화 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연구비가 투입되고 있는데 아직까지 VR오락이 흡인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는 그동안 등장했던 첨단의 오락기 들이나 레저용 디스플레이에 익숙해진 일반인들이 이제 막 초보적인 단계에 들어선 VR게임이 어설픈 화면에 쉽게 설득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6) 사실감을 추구 목표로 한 기술 별도의 장소에 있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는 것이 원격지 화상 회의의 큰 목표다. 종래 텔레비젼 회의 모습을 표시할 뿐 이고 배경이 달라 한자리에서 회의한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이 기술이 보편화 된다면 현재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재택 근무는 좀더 본격화될 수 있다. 우선 가상의 회의실을 만들어 실공간과 같은 조명조건을 주고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을 이용, 실제공간에 있는 책상이나 의자 등의 연속성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인물을 영사한다. 또 인물도 같은 조명조건 내에서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을 구사해 표시한다. 실제 공간에서의 인물은 입체적으로 존재하고 파악되지만 지금까지의 디스플레이는 이를 평면으로만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가상현실을 응용한 원격지 화상회의에서는 실제와 같은 입체감이 표현되도록 한다, 이것은 수신자측에 3차원 모델을 준비하고 상대의 얼굴 크기나 복장색 등을 합해 모델을 변형시킨 후 가상 회의실에 영사하도록 해 시각적 상호작용을 만든다. 예를 들어 A라는 인물이 B라는 인물을 볼 때 B는 상대방의 시선을 느끼고 A의 방향을 향하며 또 제3자 C도 이 시선의 오고 감을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가상 현실의 응용에 있어 사실감의 추구를 목표로 한 것이다. (7) 군사분야 군사분야에서는 입체영상 활용도가 눈여겨 볼만하다. 근래에는 항공 촬영된 3D입체 사진을 이용해 적 지역의 정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형의 구조물과 형태를 3차원 정보로 저장함으로써 지질 형태를 보다 더 생생한 이미지로 관찰할 수 있다. 최근 미국방성은 스테레오 그래픽스사의 크리스탈아이즈 가상 현실시스템으로 성공적인 군사작전과 모의 전쟁 실험을 시행했다. 이 모의 훈련은 항공모함이 작전을 위해 가고 있는 동안에도 항공모함안에서 원격으로 할 수 있다, 이 기술이 좀 더 본격화된다면 가상 환경에서 실시간에 필요한 모든 훈련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8) 로봇 원격 조정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리모콘 사용에 익숙하다. 텔레비젼이나 오디오 등과 같이 가까이 있고 정지한 상태의 제어는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먼 거리에 있는 움직이는 기계라면 사정이 다르다 이같은 기계를 조종하기위해서는 간단한지 않은 원격조작(teleperation) 기술이 필요하다. 인간이 직접 들어가거나 다룰수 없는 환경의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자로 내의 냉각로를 교환하거나 해양의 바닥에 파이프 라인을 세우는 작업 또는 극히 위험한 폭발성 물질을 다루는 작업에 사람이 직접 투입된다는 것은 위험 천만한 일이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가진 유연성과 판단력, 정밀함 등이 반드시 요구된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느 도저히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술이 가상현실의 한 분야로 연구되고 있다. 미래에는 모든일을 자동으로 처리해 주는 로봇이 등장하겠지만 현 상태에서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로봇을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대안으로 개발중이다. 이 시스템이 바로 로봇에게 지능을 부여해 인간과 비슷하게 움직일 수 있는 팔을 가진 원격로봇(Telerobot) 이다. 이러한 로봇을 먼 거리에서 조종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직접 작업을 하는 듯한 착각이나 자신이 그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것을 원견 임장, 혹은 원격 존재라고 부른다. (9) 우주항공 및 과학분야 우중항공 및 원격응용 등의 과학 분야에서도 입체 영상은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우주과학에서의 3D입체 사진은 행성의 탐사나 분화구의 관찰에 이용된다. 미국 항공우주국에서는 달탐험 임무수행시 달표면에 첫발을 내디디는 장면과 무중력 상태에서의 골프 스윙과 같은 입체사진을 촬영해 왔으며 최근에는 목성과 해왕성의 근접통과 때도 입체영상을 시도했다. 이러한 형태의 연구는 한 행성 내의 분화구와 다른 표면의 깊이를 측정하는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행성표면에 대한 입체사진 촬영법 기술은 보다 생생한 지도를 그릴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그곳을 직접 탐험하기 전까지 표면 상태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NASA의 제트 추진연구소에서는 마젤란이 지구로 보내오는 금성의 사진을 정확히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스테레오그래픽스사의 입체시각시스템을 사용한다. 이 응용에서 둥근 돔이나 단층처럼 점진적으로 변하는 형상의 지리학적 모양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한 추가 정보가 제공된다. 예를 들어 화산의 2차원 영상을 보는 과학자는 2차원 영상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동심원에서 색깔차이에 대한 이유를 해석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3차원에서 같은 영성을 보면 내부의 원이 원추형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화산 핵심 구조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미국 항공사인 록히드사는 우주 시스템부의 태양판넬에 대한 검사응용에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기술 응용전까지 검사자는 각 태양판넬의면에 있는 많은 수의 회로가 단절됐는지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미경을 통해 판넬의 앞뒤로 움직여야 했다. 이로 인해 검사자의 피곤과 잦은 오류가 발생했었으나 이제는 현미경 대신에 입체 비디오시스템을 대치시켜 작업자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앚아 편안히 검사할 수 있게 되었다. 6) 가상현실의 문제점 이러한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가상현실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되어진다. 특히 가상 현실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줄수도 있다. 며칠전 쯤 논문에 참고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볼려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채널69'라는 제목의 테잎을 빌려주었다. 내용은 뉴스에 식상해 있던 전직 PD가 조작된 뉴스에 대해 반감으로 9시 뉴스시간에 컴퓨터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이동 방송국을 만들고 해적전파를 띄워 성인용 프로그램을 보내어 이 사회를 비꼰다는 조금은 황당무개 하지만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바로 "나는 나의 동정을 사이버 섹스를 통해 샤론스톤에게 줄거야" 하는 대사이다. 그런데 현재 인터넷이라든가 아니면 가까이에 용산에 가더라도 CD-ROM을 통한 2차원적 음란물들이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아무런 제재 없이 10대들에게 파는 것 또한 목격하였다. 그렇다면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실용화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가상 현실은 의학분야라든지 학문 과학 분야에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이버 섹스라든지 폭력성이 다분히 있는 게임등을 통해 청소년들의 정서는 망가질 대로 망가질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에는 텔레비젼이나 비디오, 영화 잡지 게임등을 통해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는데 가상현실이 바로 이것을 더욱 부추길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상현실 게임이 폭력용 주제로 다루는 내용이 많아 이들의 범죄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학부에 있을 때 미션스쿨에서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보았는데 성적인 행위를 하고 싶을 때가 음란비디오를 보고 있을 때 라고 대답한 경우가 60%이상이 된다는 것이며 폭력에 대해서는 폭력용 게임을 하고있을 때 이와 같은 폭력을 하고 싶다는 아이들도 절반 정도는 되었고 심하면 자기와 그 주인공과 동일시되는 느낌까지도 받는다고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가상현실은 또한 중독성이 강해 중독될 경우 마치 마약처럼 인간의 정서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한다. 가상 현실이 사이버시크니스(가상질병, Cybersickness)를 유발시키고 있다. 가상 현실 시스템이 많이 보급되는 만큼 그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사이버 시크니스의 증세는 다양하다. 가벼운 현기증에서 두통 구토 시력장애 방향감각 상실 등이다. 특히 현실감각의 적응이 빨리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며 전문가들은 "가상현실 시스템을 사용한 뒤 현실세계에 적응 못해 몇시간 동안 정상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Ⅲ. 21C와 목회(멀티미디어 중심으로) 1). 21C의 목회 멀티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멀티미디어는 하나의 사회적 강요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삶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멀티미디어를 모르면 세계를 모르고 멀티미디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마치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처럼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정보와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상식에 뒤지는 사람이 되는것이며 삶의 다양한 기능에 있어서 후진성을 면할 수 없다는 위기감까지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신학적, 종교적, 처학적 상상력의 빈곤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자동화, 기계화된 정보사회에서는 그것을 다룰 수 있는 테크닉만 알면 모든 일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성찰 사색 명상의 중요성 신존재를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될 수 있다. 멀티미디어의 보편화는 인간을 도덕적 인격적으로 보다는 기계적 기능적으로 평가하는 풍조를 조성할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기계가 인간을 조작하는 비극이 초래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일상의 윤리와 도덕적 자질에 대한 가르침도 멀티미디어로부터 제공받게 된다. 과거의 종교적 견해를 대신하는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새로운 종교로 멀티미디어가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멀티미디어는 더 이상 인간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역할가지 대신하는 메신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는 오늘의 목회현장을 향한 하나의 문화적 도전이다, 이 도전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서 극복해 내려면 목회적 차원에서 현대문명에 대한 건전한 비판적 시각이 형성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 스스로의자기 갱신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목회는 멀티미디어를 바르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멀티미디어의 세계가 이루어나가는 기술의 자동적 증대성에 대한 비판 능력도 필요로 한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목회는 더욱 강한 인격성,공동체성, 진실성, 거룩의 체험, 등을 나누는 신앙 공동체 형성에 목회적 역량이 모아져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바르게 수행하기 하려면 오늘의 목회현장 속에서 문화 비판적인 통찰력이 운용됨은 물론 기존의 목회에 대한 냉철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멀티미디어 시대의 인간들도 여전히 인간이며 여전히 구원의 복음과 복음을 통한 해방적 사역을 필요로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우리는 과거에 체험하던 신앙세게보다 더욱 폭 넓은 의미에서 새로운 신앙세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더욱 강한 신앙적 체험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2) 가상 현실과 목회 (1)교회에서의 활용 가상 현실이 우리 생활속에 파고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의 되어진 과학 기술의 진보에 의하며 빠르면 5년안에 실생활속에 깊숙히 파묻힘 것이고 컴퓨터 역시 커다란 것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컴퓨터가 실용화 될것이고 음성을 인지하는 컴퓨터 시스템이 우리생활과 관련이 되며 우리는 컴퓨터와 대화하며 살아갈지 모른다. 개인화가 이루어지고 공동체 생활이 약해 지며 가족이라는 최소 사회집단의 개념까지도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인해 인간의 손과 발은 점점 퇴화될 수 있고 또 신을 생각하는 사고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컴퓨터 즉 멀티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속에서 가능한 일이며 특히 이 부분에 있어서 가상현실 즉 VR기술이 한몫을 하리라 생각이 된다. 우리는 다가오는 21세기 목회에 있어서 한발 앞서가야 한다. 즉 가상현실을 무조건 비판한다기 보다는 장단점을 골고루 알아내고 목회에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컴퓨터 특히 본인이 다루는 가상현실부분에 있어서 많은 프로그램들이 개발되어야말 할 것이다. 특히 지금의 신세대들을 위한 선교방향이라든지 아니면 시대에 뒤지지 않는 교회가 되기위해서는 교회에서 자체로 그것들은 준비해 나아가야 한다. 먼저 나는 교회에서 가상현실의 프로그램을 교회에서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애배당이나 교육관을 건축할 때, 혹은 교회의 조경사업, 기동원시설의 장단기 계획을 세울 때 가상현실은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즉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프로그램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가상현실을 실용화하고 전도의 도구로서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게임기의 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게임은 청소년들이 쉽게 친해지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시기에 중요한 청소년 선교의 한 도구가 되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성경의 내용을 게임화한다든지 (예를 들면 다윗과 골리앗 게임,노아의 방주등)해서 성서의 내용에 친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또한 가상 현실을 통한 예배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에 대한 찬반 양론이 펼쳐지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장애인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은 예배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서 이용될 수 있다. 즉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어떤 예배도 시행할 수 있고 또한 예배 참석자에게 여러 가지 선택의 폭을 주어 예배에 흥미를 준다는 점도 있다. 또한 개발되어야 할 프로그램이 있다면 바로 성경에 바탕을 가상현실의 프로그램화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 하기를 원하고 아픔을 같이 나누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상상해 보라. 만약 우리가 엑소도스를 경험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그 커다란 대열 가운데서 그들과 같이 길을 떠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는 데 내가 가서 옆에서 있다면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레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는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내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 개발되어야 할 것이 성지에 대한 가상현실 프로그램화이다. 실상 신학도로서 성지에 가보고 싶지만 시간도 없을뿐더러 경제적이 어려움에 봉착하는 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완성이 된다면 우리는 멀리까지 시간을 허비하며 다녀올 필요가 없다.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 성가대원이 찬양을 개별적으로 연습할 때도 유익할 것이다. 가상현실을 통하여 오케스트라를 연주해 볼 수도 있고 자신의 파트만을 연주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은 교회 교육에도 유익을 줄수 있다. 다윗과 골리앗이 나오는 성경을 말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가상 현실로 제공하면 실제로 옆에서 구경하는 듯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다윗이 되어 골리앗과 겨루어 본다면 그 느낌이 어떨까? 가상현실은 새신자 양육에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말로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에게 가상현실을 통하여 경험하게 함으로써 좀더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도록 이끌수 있다. (2)문제점 교회에서도 이처럼 많은 부분에서 많은 유익함을 주고 있으나 반면에 단점들도 내비친다. 먼저 가상현실을 통한 예배로 인해 코이노니아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즉 가상 현실을 에배로 제공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예배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앙의 개인화가 이루어 지고 이러한 개인화현상으로 교회 공동의 친교의 기능인 코이노니아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혼자서 가상현실을 통해 예배를 드리는 습관이 몸에 배면 오히려 사람과 만나서 교제하는 것이 번거롭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교회라는 개념이 사라질 것이고 목회자들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한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대면하는 기회가 적어져서 결속과 연대의식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됨으로 목회자 고유의 권한인 설교의 권한이 약화되고 치유목회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것이라는 우려도 된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히 목사님과 성도들 사이에 대면하는 기회가 적어져서 결속과 연대의식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이야기 한 부분과 겹쳐지겠지만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는 재택예배로 인한 에배당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들수 있다. 한 때 미국의 빌게이츠는 사람들이 TV나 비디오가 생기면 극장이 모두 없어질 것으로 전망하였으나 그것은 기우였으며 아직도 극장은 건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멀티미디어가 본격적으로 생활하되면 재택근무가 늘어나게 된다. 현재에도 몇몇의 기업에서 재택근무가 실시되고 있고 또한 학교에서 재택수업이 이루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히 직장일도 집에서 보는 데 왜 예배만 교회에 가서 드려야 하는냐 하는 반론이 거세어 질 것으로 보인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은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을 것이다. 교통도 복잡하고 주차장도 부족하니 재택예배를 드리자는 의식이 일반하될 우려가 있다. 또한 주5일 근무로 주말여행이 일반화 되면 여행지에서 일행과 함께 드리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가 등장하게 되고 그러면 교회는 실제로 텅텅비게 될 것이다. 실제 지금 실시되고 있는 케이블 TV를 통해 드려지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도 많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상 현실을 통해 프로그
가상현실 노출치료/ Weingardt(Ph.D.)/ 2002-08-06
가상현실 노출치료 By Weingardt(Ph.D.) 모의상황은 공포증을 다루는 혁신적인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당신은 비행기 객실의 주위를 돌아볼 때면, 당신의 불안은 증가 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심장은 더 빨리 고동치고 당신의 폐는 충 분한 공기를 빨아들이지 못한다. 수백명의 다른 사람들과 시간 당 500마일 이상으로 대기권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작은 금속 튜브에 감금된 채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창문 바깥을 보면 날개, 공항의 건물, 할주로, 그 위에 있는 나 무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엔진 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동하기 전 당신의 좌석에서 약한 진동을 느낄 것이 다. 당신은 머리 위의 칸막이를 보고 있는가? 그 안에 당신의 여 행용 가방을 넣어 두었는가? 잘 들어가 있는가?" 만일 당신이 비행기 타는 것을 두려워하는 2500만명의 성인들(인 구의 25퍼센트까지 대략10) 중의 한 명이라면, 이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보스톤 대학 에 불안 장애센터의 David Barlow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개발된 스크립트의 일부이다. 그들은 가상현실 노출(Virtual Reality Exposure: 이하 VRE라고 함)로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내담자에 게 이 글을 읽어준다. Emony의과대학교의 Barbra Rothbaum박사 는 8월에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심리학회에 VRE를 발표했다. VRE 치료는 Rothbaum이 조지아 공학연구소의 Larry Hodges박사 및 그의 동료들과 함께 처음으로 개발했던 간단한 공포증을 치료 하는 흥미로운 새로운 방법이다. 이것은 실시간 컴퓨터 그래픽, 신체감각 추적 디스플레이 그리고 다른 감각 입력장치를 사용하 여 내담자를 3차원 세계에서 나오는 컴퓨터 내에서 적극적인 참 여자로 만든다. 이러한 가상세계는 내담자들이 두려워하는 상황 들을 만들어 내고, 그들에게 치료자 사무실이란 안전한 공간에 서 이러한 상황과 만나도록 한다. 노출치료의 원리 체계적으로 내담자들이 두려하는 것에 노출시키는 것은 가장 오 래되고 효과적인 행동치료 기법 중 하나이다. 노출치료의 원리 는 명료하다. 공포는 거미, 개, 고소, 공개 스피치 또는 비행과 같은 구체적인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강한 불안반응이다. 자극 이 공포증 내담자들에게 불안을 경험하도록 하기 때문에 내담자 는 그것을 피하게 되고, 공포증을 계속적으로 갖게 된다. 모든 노출치료의 일반적인 요소는 내담자들에게 자신들의 공포상 황에 맞닥뜨림을 하도록 도와주고, 불안이 가라 앉을 때가지 그 것에 노출되도록 한다. 노출치료가 강조하는 것은 내담자들이 두 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했던 자극에 익숙해져서 그것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는 것을 학습한다(1). 전통적인 노출치료는 두 가지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즉 실제 상 황과 상상적 상황이다. 실제 장면에서의 노출이란 내담자들에게 실제 생활에서 두려워했던 대상이나 상황에 노출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행의 두려움에 대한 공포의 경우에 고객과 공항에 가서 점차로 빈 비행기에 올라서 자리에 앉아 비행기와 친숙하도 록 도와주고, 결국 택시를 타고 가서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도 와준다. 이 방법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비해 상상적 노출 상황은 내담자들이 본 논문에서 소개한 것과 유사한 지시문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실제 공포상 황에서 경험하는 소리, 광경, 냄새, 촉각 등을 가상 상황에서 만 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반응들이 점차적으로 가라앉을 때 까지 그러한 상황을 상상한다. 이 접근의 단점은 어떤 내담자들은 요청하는 장면을 상상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불안감소의 치료를 받기 전에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을 빨리 멈춘다는 것이다. 그래 서 더 나아지기는커녕 더 약화되기도 한다. 체계적 둔감화 실제적 및 상상적 노출은 체계적 둔감화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다. 이러한 과정에서 내담자들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다양한 장면 을 기술하고, 가장 적게 두려움을 느끼는 장면으로부터 점차 많 은 두려움을 느끼는 장면을 위계적으로 정리하도록 한다. 이 때 치료자는 내담자에게 불안을 경험하지 않고 가장 두려워하는 상 황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나씩 그 상황에 노출한다. VRE치료에서 체계적 둔감화는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에 점차적으 로 노출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예컨대, Rothbaum, Hodges 그리 고 Smith(1999)가 사용한 비행기 프로토콜의 가상 상황의 비행 기 시나리오 위계는 다음과 같다. 1. 비행기에 앉는 것(엔진을 끈 상태에서) 2. 비행기에 앉는 것(엔진을 켠 상태에서) 3. 활주로를 이동하는 것 4. 이륙하는 것 5. 서서히 비행하는 것 6. 착륙 7. 뇌우와 난류 비행 VRE기법 가상현실 노출치료에서 내담자는 두 눈에 각각 분리된 스크린과 해드트레킹 장치(head-tracking)를 머리에 부착한다. 컴퓨터는 사용자가 바라보는 방향과 일치된 시각적 상과 장면을 처리한다. 그 장면들이 컴퓨터 에니메이션으로 제시될 지라도 대 부분의 사용자들은 디스플레이를 쓰고 난 후 20초에서 30초 이내 에 가상환경에서 실제처럼 느끼게 된다. 머리에 부착된 화면에 제시되는 장면과 비슷하게 흔들리고 진동하는 "흔들거리는 자 리"는 가상 환경에 촉감의 차원을 더 느끼게 하는데 사용된다. 비행의 두려움에 대한 그들의 연구와 더불어 Rothbaum, Hodges 와 동료들은 고소공포, 대중연설 공포, 회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에 대한 노출치료를 제공하는 가상 실재 환경을 개발했다. 이 러한 새로운 치료 기법에 대한 예비적인 연구는 매우 고무적이 다. VRE에 관한 부가적인 정보와 더불어 우리의 사무실에서 이러 한 종류의 치료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장비나 소프트웨어를 주문 할 수 있는 정보는 www.virtuallybetter.com이란 그들의 웹사이 트에 잘 나타나 있다. 참고문헌 1. Rothbaum, B. O., Hodges, L., and Smith, S. (1999). "Virtual reality exposure therapy abbreviated treatment manual: Fear of flying appplication" Cognitive and Behavior practice, 6(3). 2. Rothbaum, B. O., Hodges, L. F., Kooper, R., Opdyke, P., Willford, J., and North, M.M.(1995). Effectiveness of computer-generated(virtual reality) graded exposure in the treatment of acrophobia.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152 (4), 626-628.
가정 폭력과 학대/ 2010-10-02
가정 폭력과 학대 교 수: 정동섭 교수님 과 목: 주제별 상담 목차 Ⅰ. 서론 Ⅱ. 폭력에 대한 정의와 일반적 이해 A. 폭력의 정의 B. 폭력에 대한 일반적 이해 Ⅲ. 배우자 폭력 A. 폭력의 단계 B. 구타하는 남성의 특성과 치료 C. 구타당하는 여성의 특성과 치료 Ⅳ. 아동 학대 A. 정의 B. 학대의 유형과 원인 C. 아동에 대한 성적인 학대 D. 희생자를 위한 치유 E. 폭력과 학대를 방지 Ⅴ. 노인 학대 A. 노인 학대의 발생 B. 학대의 원인 C. 예방 Ⅵ. 결론 Ⅰ. 서론 가정폭력이라 하면 가정 내에서 가족원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으로서 배우자 구타, 아동학대, 형제간 폭행, 나이가 많은 부모들은 성인이 된 자녀들이나 다른 돌보는 사람에게 학대를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이승렬, 1998. 2). 가정 폭력과 학대 현상은 과거에 없었던 현상이 새로 생긴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다만 사회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문제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내 또는 자녀 구타 등 가정 폭력현상은 가정 이외의 사회에서의 폭력현상과는 대조적으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이며 가정에서 하나의 도구나 방편으로 쓰여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가정폭력을 공개적으로 논의하여 치유방법을 찾기보다는 감추고 쉬쉬하는 것을 능사로 여겼고 가정의 프라이버시라는 이유로 제 삼자가 개입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김남식, 1998. 2). 그러다 보니 문제가 노출되었을 때에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가정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어떻게 돌보느냐라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는 1997. 11월 정기국회에서 “가정폭력 방지법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시행하여 폭력을 억제하고 있다(김남식, 1998. 2). 그러나 근본적 해결방법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정 내에서의 폭력을 법으로 억제하기보다는 상담학적 접근과 가정폭력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기독교 상담학적 접근을 시도함으로서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어 치유함으로 건강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가정폭력은 우리의 가정이 안고 있는 깊은 상처 가운데 하나이며 이것을 치료하여 “건강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정정숙, 1998. 2). 왜냐하면 가정은 양육과 정신건강의 원천이 되게 때문이다. 이제는 가족폭력은 개인적인 고통을 넘어서서 한 사회 전체의 존패의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Ⅱ. 폭력에 대한 일반적 이해 A. 폭력의 정의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힘을 사용하는 것, 즉 여러 가지 목적으로 신체적인 힘이 사용되는 것으로 “때리는 것 자체에 목적으로 둔 것으로써 남에게 고통과 상해를 주는 것”과 “남을 처벌하는 것으로써 고통과 상해와 신체적인 구속을 사용하는 것”으로 구분된다(Steinmetz and Straus, 1974). 폭력은 사람(또는 사물)에 신체적(또는 물질적)으로 위협하거나 손상을 일으키는 행동이다. 힘보다 폭력은 사회적으로 비규범적이다. 가령 어린이를 찰싹 때려 벌을 주는 것은 괜찮지만 타박상을 입을 정도로 심하게 때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이다. B. 폭력에 대한 일반적 이해 1. 남녀의 폭력 분포 및 종교 연세대 김재엽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정의 10쌍 가운데 3쌍 꼴로 부부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밝혀졌다. 남편이 아내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비율은 15.6%인 반면에 아내에 의한 남편 폭력은 3.5%로 5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쌍방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12.3% 였다(안호기, 1999. 5. 8). 한국 이웃 사랑회의 전국 16개 아동학대상담센터에 접수된 아동학대 건수를 연도별로 보면, 지난 96년 71건에서 97년 159건, 98년 367건으로 해마다 배 이상 급증하고 있다. 한국 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 박사팀이 지난해 실시한 `가정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가운데 2.6%가 아동학대나 가정 내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 박사는 󰡒이 비율을 우리나라 전체 가구 수에 대비하면 33만8000가구에서 아동 학대와 폭력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했다(윤영미, 1999. 4. 30). 쉼터 이용자 실태조사(부산 여성의 전화, 1994 1~4월: 120명 부산 여성의 쉼터 이용자 대상)에서 나타난 피해자의 종교 중 기독교가 43.35%로서 1순위였고 가해자의 종교는 무교가 48.3%, 불교가 24.2%, 기독교 14.2%로서 3순위였다(이승렬, 1998). 2. 폭력의 유형 가정폭력에는 일반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한림대 윤현숙 교수는 “때리기나 물건 던지기와 같은 물리적인 충격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언어적․성적․정서적 학대도 폭력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내를 때리는 남성들의 70%가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폭력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이 아무런 여과 없이 곧바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가공할 만한 “학습효과” 인 셈이다. 서울 여성의 전화가 올해 1․4분기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아내 구타는 “남편이 술 마셨을 때”가 42.2%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은 “남편의 기분에 따라”(31.1%), “아내가 말대꾸할 때”(13.3%) 등이었다(안호기, 1999. 5. 8). 3. 나이와 학력 경북지방경찰청에 따르면 검거한 가정폭력 사범 23명(5명 구속, 18명 입건) 가운데 30대가 12명을 차지했으며 20대 7명, 10대는 4명이었다. 학력은 고졸이 9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고교 중퇴 5명, 대학 중퇴 3명, 중졸 3명, 대졸 2명, 중학 중퇴 1명이었고 직업은 무직 15명, 회사원 6명, 농업 2명으로 나타났다(대구=연합, 1999. 5. 8). 4. 가정폭력이 일어나는 이유?(김남식, 1998. 2) 사회학자들이나 정신의학자 혹은 상담학자들의 여러 가지 형태로 구명하고 있지만 중요한 몇 가지가 있다. a. 사회 통념이 문제이다. 우리들의 가정의 폭력이 있다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여기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더 큰 문제이다. “어디까지나 가정 문제” 라고 보고 가정 문제는 가정에서 처리해야지 사회적으로 논의할 게 아니다라는 사고방식이다. 또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았겠지”라는 사고까지 가세하여 가정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경향마저 있다. b. 왜곡된 여성다움의 인식이다. “여성은 여성다와야 한다”는 오도된 신화로 인하여 여성다움이란 순종, 의존, 희생 등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c. 바른 인간 관계이다. 가정폭력은 단순히 가정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깊이 고려하여야 할 사회적 문제이다. 5. 르노어 워커(Lenore Walker)가 제시하는 가정 안에서 폭력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정정숙, 1998. 2) a. 어릴 때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학대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 b. 성장기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행하는 것을 보고자란 사람 c. 다른 사람들을 폭행한 적이 있었던 사람 d. 총 기류를 좋아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총 기류를 사용하는 사람 e. 자주 화내며 필요이상으로 쉽게 화내는 사람 f. 꼭 사람이 아니더라도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때려부수고 또한 동물에게 폭력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 g. 음주가 h. 아내가 그의 곁에 때 지나친 질투심을 보이며 혹은 아내의 생애 속에 나타났던 어떤 중요한 사람에 대해서 계속 질투하는 사람 i. 아내가 항상 그의 곁에 있기를 기대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자하는 사람 j. 아내가 자기의 충고를 듣지 않을 때 쉽게 격분하는 사람 k. 인격의 양면성을 가진 사람 l.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지나치게 잔인한 면이 있는 사람 m. 아내에게 화낼 때 아내가 무척 두려워하며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행동으로 결정해야 하는 사람 n. 암성과 여성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전통적인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 o. 아내가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 Ⅲ. 배우자 학대 배우자 폭력은 주기적 성질을 가지며, 구타를 하는 남편과 구타를 당하는 아내에게 문제가 있다. A. 폭력의 단계(Matin, 1996, pp. 48-51) 르노어 워커(Lenore Walker)는 폭력 순환을 3단계로 구분했다. 1. 첫째 단계 : 긴장의 고조 스트레스 자극과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로 돈, 자녀문제 같은 것에 대해서 지속적인 사건이 점차 증진된다. 이런 감정들은 안으로 축적이 되어 강도가 더 심해진다. 이때 아내는 남편을 달래려고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쓰지만 더 이상 남편의 분노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내는 더 이상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물러난다. 남편은 아내의 이러한 태도에 더욱 분노로 반응한다. 여기서 아무런 개입이 없을 때는 불가피하게 둘째 단계로 넘어간다. 2. 둘째 단계 : 폭발 또는 급격한 폭력적 에피소드 첫째 단계에서 축적되었던 긴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하는 것이다. 감정 폭발이 불가피하다는 느낌이 먼저 든 다음에 이 단계의 폭력적 에피소드가 일어난다. 사태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쌍이 다 느낀다. 바로 이때 남편은 아내에게 공격적 행동을 가하게 된다. 이 단계는 구타가 멈추면서 끝나게 된다. 이와 함께 긴장도 감소하게 된다. 긴장과 불안의 일시적인 감소는 강화 효과를 나타내다. 3. 셋째 단계 : 사랑을 주고받는 통회 또한 후회 격렬한 폭발 후에는 비교적 진정된 시기가 오고 적어도 폭력이 재발할 때까지는 긴장이 풀어진다. 학대자인 남편은 아내에게 수없이 사과를 하고, 아내를 도와주려고 애쓰며, 친절하고 자책을 느끼는 태도를 보이며, 선물보따리를 안겨 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아내가 자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안정을 얻고 또 다시 스트레스 자극이 축적되면 그는 힘의 상실을 불평하면서 악순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셋째 단계 초기에 경찰, 가족, 목회자 또는 정신건강 관련 전문가들이 개입하게 되면 그들은 저항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부부가 서로 친밀감을 나누고 보호의 감정을 느낄 때는 그들은 만사가 형통한 것같이 믿고 문제는 해결되었고 폭력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B. 구타하는 남성의 특성과 치료 폭력을 하는 남성들은 인종, 사회, 경제적 지위, 직업에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서 찾아 불 수 있다. 1. 특성(Matin, 1996, pp. 35-40) a. 분노 조절 능력 결핍 부모간의 학대 행위를 목격했거나 어려서 학대받은 사람들은 성인이 된 후에 자신도 모르게 부모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많은 연구에서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사실과 폭력의 빈도가 높을수록 그 희생자는 폭력적인 배우자나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b. 표현 능력 결핍 학대자인 남성들은 자기 감정을 인식하고 조절하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진정한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하며 솔직하게 드러내 놓는 것에 약하고 오히려 위협을 느낀다. 특히 학대자인 남성들은 좌절당할 때는 아내에게 일시적인 만족을 기대하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마음을 아내가 다 알아서 이해해 주기를 원한다. 만약 아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거부”에 대해 폭력으로 반응한다. c. 자존감 저하와 자기 주장 부족 학대하는 남성의들은 밖에서 자기 주장을 못하며 자존감이 낮고 우울하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남성들은 많은 경우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폭력을 하게 된다. 낮은 자존감이 상처와 공포의 체험들과 결합이 되면 즉시 본노로, 그 다음엔 공격으로 전환된다. d. 알콜과 약물의 의존 구타하는 남성의 약 67%가 알콜을 자주 남용한다는 사실과 여성에게 더 심각한 상해를 가한다. 2. 치료(Matin, 1996, pp. 111-141)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도 일차적으로 희생자다. 왜냐면 그들은 분노를 발산할 줄 모르고, 대화 능력이 부족하며, 친밀함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여자를 의존하면서도 학대를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a. 집단을 이용한 치료 이러한 형태의 치료에서 근본적인 목표는 폭력적인 분노 표현을 긍정적인 표현으로 대치하도록 하는 것이다. 분노 자체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폭력적인 표현이 제거되어야 한다. 폭력적인 행동과 그 행동을 일으키는 사고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집단 치료의 이점은 치료자보다도 집단 구성원간에 서로 직접적이며 효과적으로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집단 참가자들은 다른 남 성들도 자기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도움을 얻게 된다고 한다. 또한 집단 치료는 남성들이 다른 남성들로부터 정서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집단치료는 치료자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도록 하며 내담자들에게 비용의 부담을 덜어 준다. b. 분노의 조절 분노의 조절은 생각, 가치, 인식이 어떻게 분노를 야기시키는지를 교육함으로써 습득된다. 대부분의 구타자들은 두 가지 분노 표현을 자기도 있다. 하나는 억압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적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상담의 목표는 분노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그 분노를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치료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내담자들이 자기 감독이나 자기 각성 훈련을 시작한다. 특히 부부가 함께 상담에 참여하는 경우 분노를 처리하는 몇 가지 기본 원칙과 절차를 밝혀 두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분노 감정이 일어나기 전과 후 그리고 분노 중에 무엇을 생각했는지 깨닫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혼잣말과 그 해석은 생각을 분노로 다음엔 폭력으로 변화시키는 기제이다. 이 과정에서는 먼저 파괴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 형태를 구분하고 그 다음에 공격성을 증폭시키지 않는 방식을 알려 주는 것이다. c. 감정의 맥락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5가지 방법 이 방법은 사람에게 분명하고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또한 메시지를 주거나 받을 때 무슨 메시지인지 검토할 뿐 아니라 분명하고 철저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 1) 감각-보고, 듣고, 냄새 맡고,맛을 본다. 이것은 대부분의 메시지들의 시초이다. 2) 사고하는 것-이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의도가 무엇인가를 해석한다. 3) 느끼는 것-감정은 우리가 상황에 대해 사고한 결과 나온 산물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칭찬하고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기분 좋게 느낀다. 4) 원하는 것-누군가 칭찬할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 찬성과 인정을 원하기 때문이다. 5)반응하는 것-생각과 필요의 맥락에서 느낌에 따라 행동을 취한다. C. 구타당하는 여성의 특성과 치료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면서도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원인과 구타당하는 아내를 위한 치료 방법 1. 낮은 자존감의 특성과 치료 a. 특성 매를 맞는 아내들은 많은 부분 자존감이 낮다. 더 이상 좋은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포기해 버린다. 남편은 “당신은 내가 항상 지켜 주는 것만으로 도 감사해야! 나니까 당신하고 살지! 내가 아니면 아무도 당신하고 안 살 거야!” 라고 말한다. 아내 들은 대개 이 말을 믿으려고 한다(Matin, 1996, pp. 41-2). b. 치료 먼저 희생자는 불의를 인내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려왔다는 자기 인정을 해야한다. 그래야 진정한 성숙과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이해는 인간의 연약함과 부적합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과정은 적절한 자기 사랑의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실패나 외적인 상처가 자존감 향상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매맞는 아내가 완전한 자아상을 갖도록 돕는 다음 방법은 삶의 목적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자존감의 마지막 단계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Matin, 1996, pp. 85-9). 2. 비현실적 희망의 특성과 치료 a. 특성 학대받는 여성을 다시 악순환에 빠지게 하는 또 다른 면은 상처를 주고받는 유대관계의 과정에 서 볼 수 있다. 즉 남편들은 매번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약속을 한다. 아내들은 그 말을 사실로 믿 고 싶기 때문에 끝까지 그 희망에 매달린다. 또한 학대받지 않는 동안에는 서로의 관계를 즐기기도 한다(송길원, 1999, p. 355). b. 치료 구타 후 남편는 잘못을 고백하고 잠시나마 변화의 삶을 산다. 그래서 아내들은 다시 희망을 갖게 되고 그 희망은 강화된다. 그러나 그 신혼기는 잠시 동안이고 대부분의 폭력적인 관계에서는 다시 긴장이 쌓이고 또 다시 학대의 에피소드가 반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의 희생자는 유화 정책의 함정을 피하도록 격려와 지시가 필요하다(Matin, 1996, pp. 91-3). 3. 고립의 특성과 치료 a. 특성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회적으로 점차 고립되기 때문이다. 흔히 매맞는 아내가 도움을 요청하게 되기까지는 가족과 친구, 교회와 같은 사회적 대인관계로부터 단절된다. 그 들의 남편은 그들이 집에만 있기를 원하기 때문에 친척과 친구들과의 만남을 피한다. 때로는 자진 해서 고립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가족과 자신이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고립은 자기 주위의 자원을 무시하고 이를 영속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타 당하는 아내는 도움이나 보호를 받을 방도가 달리 없다고 믿기 때문에 학대적 관계에 더 묶이게 된 다(Matin, 1996, p. 45). b. 치료 상담자는 희생자가 가족과 또는 사회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또한 희생자는 자신과 비슷하게 상처를 체험한 여성들과 만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놀기도 하고 즐길 수 있도록 결려해야 한다. 활동적인 모임에 참여하도록 격려한다. 운동은 스트레스를 이기는데 좋으며 친구도 사귀고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Matin, 1996, pp. 93-5). 4. 정서적, 경제적 의존성 a. 특성 매를 맞는 아내는 남편에게 대단히 의존적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술도, 교육도, 경험도 없다. 경제적으로는 남편에게 의존하고, 또 다른 차선책들이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 구타당하는 아내는 직업이 있어도 돈에 관한 모든 것은 남편이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학대를 받는 여성의 대다수는 몇 년간 계속 학대를 당하다 보면 자신감이 없어진다. 이러한 의존성은 또한 여성으로서 개인적 감각의 한계를 점차 상실한다(Matin, 1996, pp. 45-6). b. 치료 여성들이 학대당하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렸다. 왜냐면 폭력과 학대로 무력감이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폭력으로부터 회피하려면 새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학습해야만 한다. 여성들은 우울해 하고 자기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분노를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고가 변화해야 한다(Matin, 1996, pp. 95-100).. Ⅳ. 아동 학대 A. 정의 아동의 행복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나 아 동의 건강과 행복이 해를 받고, 위협을 받는 환경 하에서, 18세 이하의 아동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당하며, 성적 학대 또는 착취, 소홀한 대우 또는 부적절한 대우를 받는 것을 말한다(Collins, 1988, P. 295). B. 학대의 유형과 원인 1. 유형 a. 신체적 학대 여기에는 칼이나 채찍 같은 것들을 이용하여 폭행하고, 화상을 입히고, 골절시키며, 아동이 상 해를 입도록 유도하는 행동 등이 포함된다. 순수한 훈육의 위로 “때리는 것”은 아동학대로 간주되 지 않는다. b. 거부 신체적 거부에는 유기, 질병에 걸린 아이를 치료해 주지 않고 거부하는 것, 신체 관리를 적절 히 해주지 않는 것, 가정 내에서 건강이 위험한 상태에서도 무관심한 것, 충분히 가능한 환경에서 도 영양과 의복과 위생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 등이다. c. 정서적 학대 여기에는 말로 혹은 감정적으로 폭행하는 것, 감금, 영양 공급을 안해서 성장 발육을 막는 것, 비행이나 심각한 알콜/약물 남용 같은 반사회적 행동을 고의적으로 묵인하는 것 등이다. d. 성적 학대 여기에는 성적 추행, 근친상간, 매춘이나 포르노 필름을 제작하기 위해 착취를 하는 것등이 포 함 된다. 2. 원인(Collins, 1988, P. 297) a. 환경적인 스트레스 b. 학습된 학대 c. 개인의 불안정감 d. TV를 통한 폭력물의 영향 C. 아동에 대한 성적인 학대 대략 25만 건의 성적 학대가 매년 새로 발생한다고 한다. 소년 소녀들이 열여덟살에 이를 때쯤되 면 세 명의 소녀 중 한명 그리고 여섯명의 소년 중 한명꼴로 이미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그 주제에 대해 일만 사람들이 그처럼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성적 학대는 우리 사회에서 계속 만연되고 있다. 그 희생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학대는 붕괴적이요 방향을 잃게 하는 파괴적 체험이다(Collins, 1997, p. 392). 1. 개념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아동에 대한 성적학대는 성적 접촉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저항할 줄도 모 르며, 범죄자에게 심리적, 사회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아동에게 가해지는 성적 착취이다. 여기에는 애 무나 노출증, 수음, 성기 삽입등이 포함된다. 2. 성적 학대의 결과 a. 정상적인 발달 과업을 성취하지 못하고 저지를 당하게 된다. b. 아동은 모순 때문에 갈등과 좌절을 겪게 된다. c.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갖게 된다. d. 그 사건과 결과에 대해서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 e. 가치가 절하되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대상으로 격하된다. f. 자신들의 정체감이 흔들리게 된다. g. 이 같은 딜레마는 죄의식, 수치심, 공포감, 불안감을 형성한다. h. 대개 자아상이 약하고, 사회적 능력이 저하되며, 타인에 대한 신뢰성이 결핍되어 있다. i. 어릴 때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성인들은 정서적 자기만족이나 성인으로서의 독립심을 성취 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j. 아동기에 성적 희생을 당하면 청소년이나 성인이 되었을 때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다. k. 아동기에 성적 학대를 받은 여성이 다시 자기를 학대하고 자녀를 성적으로 착취할 가능성 이 높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3. 여러분은 다음 사항을 살펴봄으로써 학대와 무시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a. 아이가 특별히 부모에 대해서, 지나치게 두려워한다. b. 아이가 옷차림이 지나치게 지저분하거나, 혹은 날씨에 부적합하게 옷을 입는다. c. 아이가 영양 부족이나, 부적절하게 음식을 먹는 것을 보인다. d. 아이의 상처나 아픔이 붕대나 약물치료에 의하여 부적절하게 취급을 받는다. e. 아이가 움츠리거나 침울해 하거나 지나친 행동을 하거나 공격적이다. f. 아이가 관심이 없거나 집중을 할 수 없고, 부모보다 다른 어른들에게 더 매달리거나, 혹은 다른 아이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 g. 부모들이 엄격하고,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다그치거나 가혹하게 처벌하는 경향이 있다. h. 부모들이 부부의 불화, 이혼, 빚, 잦은 이사, 실직, 혹은 다른 압력과 같은 다양한 스트레스 를 경험해 오고 있다. D. 가정폭력의 희생자를 위한 치유 1. 지지 확립 2 내적 안내자 신뢰 3. 학대 명명 4. 학대를 기억하는 것 5. 분노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정의에 대한 건강한 반응이다. 희생자들은 그들이 겪은 폭행에 대해서 정당 한 반응으로서 자신의 분노를 받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분노와 상대방의 분노를 더욱 받아들일수록 희생자의 치유에 더 많은 도움이 될 수가 있다. 그러나 화를 낼 때 자신이나 다 른 사람을 신체적으로 다치게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 분노를 표현할 때, 유용하고 건설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a. 베개 두드리기 b. 혼자 있는 곳에서 소리 지르기 c. 가해자에게 편지를 쓰기 (보내든 보내지 않든 간에) d. 역할극 - 가해자와 상상 속의 대화를 하는 것 e. 신체적인 운동 - 걷기, 뛰기, 뜨개질, 정원손질, 테니스 등의 운동 ※희생자, 가해자, 목격자는 분노 처리를 확실히 해야 한다. 6 슬퍼하는 것 슬퍼하는 것은 치유 과정의 일부로서 희생자는 잃어버린 것을 슬퍼한다. 슬퍼하는 것을 재빨리 해 결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 음악, 그림 등은 슬퍼하는 시기에 종종 가장 좋은 친구가 되기 도 한다. 손을 잡아 주거나 안아 줄 수 있는 친구 또는 조용히 함께 앉아 있어 주는 친구 또는 함께 울어주는 친구라면 그야말로 가장 소중한 치유책이다. 7. 대면 8. 처벌 9. 영적 대처 수단 10. 학대자와의 동거 E. 폭력과 학대 방지 수많은 전문적인 상담자들과 사회의 많은 단체들이 폭력과 학대를 방지하기 위해서 최근 몇 년동안에 매우 두드러지게 관심을 기울였다. 어떤 단체들은 학대의 희생자들을 돕기위하여 매일 24시간 긴급 직통 전화를 설치 오고 있다. 자조 (self-help)나 지지 그룹들의 발전은 또한 희생자들과 학대자들에게 모두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떤 관찰자는 교회가 학대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을 증가시키는 교육적 프로그램을 후원함으로써 참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저자가 제안했던 동료 지지 집단을 교회가 설치해야 한다. 교회는 매맞는 여자와 그들의 아이들을 위해 안전히 쉴곳을 설치하도록 도와야하고, 위기 상황에 있는 자들을 상담하는 긴급 전화에도 참여해야 하고, 학교나 경찰서, 그리고 다른 사회단체들이 교육적이고 예방적인 프로그램을 고려할 수 있도록 독려를 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학대를 중재하고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Collins, 1988, P. 309). 1. 교육 2. 개인과 가정의 안정을 자극 3. 인간 관계 기술을 가르치기 4. 사회적인 행동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Ⅴ. 노인 학대 노인 보호는 주로 집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중에는 전혀 문밖 출입이 없거나, 하나 이상의 만성 질환에 걸려서 신체적인 보호를 필요로 하는 노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학대자들은 대부분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다. 알콜 중독, 약물 중독, 부부간의 문제, 장기화된 경제적 곤란 등이 부모를 학대하도록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희생자 부모에게서 낳은 아들이 가장 학대자가 될 가능성이 크며 그들은 대개 신체적인 학대를 한다. 딸이 그 다음을 차지하며 심리적인 폭행이나 거부 행동을 나타낸다. 그밖에 배우자, 손녀, 형제 자매, 세입자, 집주인도 학대자가 될 수 있다. 학대자들의 대다수가 어렸을 때 부모에게 학대받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어떤 연구자들은 학대가 아동기 때 받은 학대에 대한 보복 행위라는 가설을 세웠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폭력적 행동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학습된 스트레스 반응이라고 제안하였다(Matin, 1995, p. 282). A. 노인 학대의 발생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학대의 범위와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신체적 학대 의도적으로 가하는 신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또는 타박상, 매자국, 접질림, 탈구, 찰과상 또는 열상 등의 상해, 규율상의 제재, 신체적 정신적 건강 유지에 필요한 도움의 박탈, 성적인 학대, 활동할 자유의 구속, 부당한 감금, 살인. 2. 심리적 학대 욕설, 위협, 모욕, 조롱, 공포유발, 신체적 또는 정서적 격리, 조소나 멸시, 적대적 표현. 3. 물질적 학대 금전적 이익이나 개인적 이익, 소득, 또는 수익을 위해서 노인의 재산을 이용하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행위, 노인들이 은퇴 후를 위해 모아둔 재산을 박탈하는 행위, 강요나 허위 진술을 통해 돈이나 재산을 훔치거나 오용하는 행위. 4. 의학적 학대 의학적인 치료나 틀니, 안경, 보청기 등 필요한 보조 처치의 중지. B. 학대의 원인 다른 유형의 가정 폭력과 마찬가지로 노인 학대에 대한 이유도 한마디로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느 한 요인이나 또는 여러 요인들을 종합해서 보면 이러한 형태의 폭력을 설명할 수 있다. 1. 학습된 폭력 첫 번째 요인은 폭력이 학습된다는 것이다. 아동은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으로 폭력이 인정되는 것을 가정에서 관찰과 참여를 통해 학습해 왔다. 아동은 텔레비전이나 사회적 장면을 통해서도 폭력적으로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을 봄으로써 더 강화되어 폭력적인 경향을 가지고 성장하게 된다. 2. 의존성 학대의 두 번째 원인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증가하는 의존성으로서 이것은 노인들을 학대받도록 만들어 간다. 많은 노인 희생자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양로원이나 다른 끔찍스러운 기관에 안 가기 위해서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학대를 받으면서도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 3. 자식으로서의 위기 또 하나의 가설로서 노인 학대는 성인 자녀가 자식으로서 당면한 위기 해결에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생각에 따르면 성인 자녀의 중요한 발달과업은 청소년기의 반항의 단계 이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될 때는 과거에 해결되지 못한 감정들과 억압되었던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폭력 사용의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4. 내적인 스트레스 성인 자녀들은 때때로 ‘샌드위치 세대’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노인 부모와 어린 자녀들의 중간에 끼여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매우 특이한 스트레스 자극을 받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젊음을 상실해 가고, 노화되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빈 둥지를 지키게 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의존적인 두 세대를 보호하는 책임 위에 더 가중된 것이다. 5. 외적인 스트레스 또 다른 설명은 외적으로 오는 스트레스이다. 노인 학대자들은 알콜이나 물질 남용의 문제가 있음과 동시에, 이들은 실직이나 장기적인 의학적 문제, 직장에서의 갈등,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 법적인 문제 등의 외적인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사건 중 어떤 문제가 의존적인 노부모 문제와 동시에 일어나면 좌절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가 어렵다. 6.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우리 사회는 젊음을 우상화하며 늙는 것과 거기 수반되는 의존성을 두려워한다. 이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는 우리 나라에서의 노인 학대의 발생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노인에 대한 왜곡된 지각은 학대를 조장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C. 예방 노인 학대를 예방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가족들이 부모를 보살필 경제적, 정서적 자원이 있는가를 결정하는 일을 돕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가족에게 늙어 가는 부모들을 위해서 조언을 해줄 입장에 놓일 수도 있다. 부모를 공경하면서 가족에게도 최대한 유익하도록 가정의 자원을 활용하고 가치 있는 보호의 방법을 모색하도록 돕는다. 교회에서는 각 가정에서 기독교 신앙과 갈등 해결 방법을 연결시키는 능력을 길러 주도록 가르쳐야만 한다. 교회는 가족들에게 노화 과정에 대해 교육함으로써 노인에 대한 고정 관념적인 태도를 버리도록 돕고, 각 가정에서 세대간에 함께 학습할 기회를 갖게 한다. 현재의 자기 직계 가족 외에 다른 노인들에게도 지지를 보내고 친목을 도모하도록 격려함으로써 조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 많은 가정이 “양조 부모”를 통해서 사회적, 교육적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각 교회 스탭들이나 성도들은 특히 노인의 건강의 문제가 있을 때는 심방을 통해서 도울 수 있고 교회는 또한 노인이 있는 가정을 위해 봉사를 주도할 수도 있다. 이들 가정에서는 노부모들로 인해 계속 뒷바라지해야 하는 짐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도록 일시적 간호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음식 배달, 가정 간호, 가정 치료, 가정 방문, 낮 보호자, 교통편의, 노인의 신체적, 정서적 욕구에 대한 상담등이 있을 수 있다. Ⅵ. 결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곳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꿈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폭력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사람들은 폭력의 공포에서 살아간다. 폭력은 개인 관계에서의 폭력만이 아니라 가정폭력, 학교폭력과 사회 각 영역의 폭력으로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가정의 경우만 해도 사랑으로 묶여진 관계가 폭력으로 얼룩지는 경우가 있다. 부부 사이 또는 부모와 자녀나, 형제 자매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우리들의 가정을 비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가정폭력이 어느 특수계층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여기에 대한 대처 방안 제시가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기독교 가정에도 너무나 깊숙히 폭력이 행해지고 있다. 이렇게 기독인의 가정에도 폭력이 심각한 문제이고 보면 교회도 이제 󰡒가정 폭력 방지법󰡓 실천에 관심을 기울여야 됨은 물론 가정문제 예방 및 갈등처리에 대한 사역에 목회비중을 더 많이 두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아울러 우리들의 가정이 하나님 중심의 가정이 되고 바른 가치체계를 가짐으로써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신앙으로 극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문제를 덮고 감추기 보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논의하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참고문헌 김광일. 「가정폭력-그 실상과 대책」. 서울 : 탐구당, 1988. 게리 콜린스. 「가정의 충격」.한보헌, 황희철 역.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97. 고든 맥도날드. 「가정폭력, 어떻게 할 것인가」. 채슬기 역. 서울 : 하늘사다리, 1997. Matin, Grant L. 󰡒가정 폭력과 학대.󰡓「기독교 상담 시리즈 12」. 김연 역. 서울 : 두란노출판사, 1996. Collins, Gary R. Christian Counseling. Dallas: Word, 1988. Steinmetz, S. K. and Straus M. A. Violence in the Family. New York : Harper Row, 1974. 송길원. “가정폭력, 이렇게 극복하십시오.” 「월간 목회」, 1991. 1, pp. 351-58. 이승렬. “교회와 가정폭력 방지.” 「가정과 상담 Info Book」, 1998. 2, p. 154. 김남식. 󰡒폭력이 없는 사회와 가정.󰡓「가정과 상담 Info Book」, 1998. 2, pp. 153-54. 김남식. 󰡒가정폭력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정과 상담 Info Book」, 1998. 2, P. 154. 정정숙. 󰡒가정 폭력 상담.󰡓「가정과 상담 Info Book」, 1998. 2, p. 154. 윤영미. 「한겨레신문」, 1999. 4. 30. 안호기. 「경향신문」, 1999. 5. 18. 대구=연합중. 「중앙일보」, 1999. 5. 8.
가족 상담에 대한 보고서/ 2010-10-02
가족 상담에 대한 보고서 김예음 Pastoral Family Counseling Dr . Yea Eum Kim Fuller Theological Seminary Korean Doctor of Ministry Jan. Ⅰ. 서론 1.연구의 의의와 목적 가족관계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창2:18) 결혼은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인간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요소이다. 또 가정의 정의는 인간이 임하는 최초의 환경이다. 이것은 혈연관계로 연합된 공동의 거주, 생식을 특성으로 하는 기초집단이다. 가정은 사회 속에서 상호작용과 집단의 인격적 단위이다. 이러한 단위의 가정생활에는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때로는 사랑과 증오가 부차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이 사회가 매우 급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가정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부간에 있어서도 역할의 분담에도 부분적으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하여 밖으로만 나가게 되었고, 아내는 살림살이만을 위해서 전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부간의 역할이 때로는 급속하게 변화가 나타나서 러셀은 자녀수의 감소, 여성 해방 운동의 확산, 후기 산업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성별 분업화에 따른 결과 등으로 부부간의 역할에 평등주의가 나타난다고 한다. 곧 이러한 가정의 변화와 부부간의 평등주의와 60년대의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가족관계에 여러 가지 위기가 생겨났다. 그것은 성의 해방, 여성 해방 남녀평등이라는 이론 속에서 한국의 가정은 가부장적인 특성을 잃어갔고 그로 인하여 많은 문제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일들이 왜 점점 늘어가는가? 그것은 목회자가 시간적 여유의 부족과 상담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상담을 기피하고 있다. 또한 부부사이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J. E. Adams는 부부간의 갈등이 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부부간의 의사소통이라고 말했다. 아담스는 건전한 부부관계는 참된 대화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대화가 없는 가정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아니라고 말했다. 진정한 부부의 하나됨은 만족한 의사소통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라인벨은 “훌륭한 결혼이란 거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서로간에 만족을 채워줌으로써,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의 가능성들을 성취시킬 수 있는 최대한의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즉 현대 부부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결혼 관습과 태도에 있어서 부부들이 원하고 요구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좀더 효과적인 방법과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이 필수불가결 해졌다. 본 보고서는 이와 같은 필요성을 느끼고 관동대학교에서 가족상담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에 앞서 실제 한 가족을 상담한 실제 사역을 기술해 보려고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Divine Institution)은 가정과 교회밖에는 없다. 부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부부 관의 모델을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 본 상담 보고서의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보고서의 연구 방법은 그간의 수업을 바탕으로 관계된 서적들을 기초로 하여 먼저 본 연구자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한다. 그리고 실제적인 상담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들을 보고하려고 한다. 그리고 본 보고서는 문헌으로는 하워드 크라인벨의 「현대목회상담」, 「부부성장과정」. 하워드 스톤의 「위기상담」, 게리 콜린스의 「효과적인 상담」등을 중심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II. 가정문제의 형태와 원인 이희승씨의 국어대사전에 보면 위기의 정의를 “위험한 순간, 위급한 시기” 라고 정의하고 있다. 오성춘은 위기를 어떤 외적 위험에 대한 개인의 내적 반응, 위험에 대한 대응 능력의 일시적 상실,즉 정서장애가 역전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은연 중의 확신의 상실을 포함 한다고 말하였다. 또 “어떤 외적 위험에 대한 개인의 내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위기라는 영어단어“crisis”는 헬라어“krisis”,또는 “krine in”에서 온 것인데, 본래 이 단어는 인간경험 가운데서 전환점(turning point)이나,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하는 “분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보이센은 하나의 위기란 위험스러운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정신적, 정서적 성숙의 기회도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위기에 대처하는 데에는 고조된 정서적, 지적 과정들이 연관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헤데만과 카플란은 위기를 질병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으로 보았다. 따라서 하워드. 스톤(Howard W.Stone)은 위기는 사람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그의 인격이 성숙해 지든지 아니면 비참하게 반응하여 심지어 입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캐프란은 위기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한다. 단계적 위기와 우발적 위기이다. 단계적 위기는 인간의 성장과정 속에서 연속적으로 위기를 맞는데,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있는 출생, 용변 연습, 취학 청년기, 직업선택, 객지에서의 생활, 졸업, 약혼, 결혼, 임신, 부모가 되는 일, 중년기의 위기, 부모 喪 , 갱년기, 은퇴, 배우자의 죽음, 친구들의 죽음,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죽음이다. 우발적 위기는 그 사람의 독특한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필수적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또는 뜻밖에 상실 당했을 때 생기게 된다. 실업, 지지자의 상실, 또는 지위의 상실, 감당 못할 사건의 발생, 질병 또는 수술, 자녀의 죽음, 부부간의 부정과 이혼, 정신질환이나 알콜중독, 신체의 결함, 혼외 임신, 안전한 곳으로부터의 이동, 천재지변이나 또는 전쟁, 불경기와 같은 사회의 참화 등이다. 이런 사건은 정서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조성하며 여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경우 그 결과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위기는 단순한 사태의 돌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기란 어떤 외적 위험에 대한 한 개인의 내적인 반응이며 위기를 촉발시키는 사건과는 다르다. 돌발 사태의 발생으로부터 위기상황에 이르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가 있다. 사태의 돌발 - 사태에 직면한 당사자의 사태에 대한 판단 - 사태에 대한 대비책과 대처방법의 강구 - 사태극복의 실패 - 위기발생 첫째 단계는 자극 또는 촉발 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죽음이나 실직 같은 외적인 상황을 말하며 전문이론가들은 이것을 정서적인 위험 사건이라고 말한다. 둘째 단계는 그 상황에 대한 개인의 독특한 평가이다. 이것은 촉발적 사건에 대한 생각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사건을 중대한 위협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사건에 대한 평가는 평가하는 개인의 인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중요하게 평가되었나에 따라 위기로 발전될지 여부가 상당한 정도로 결정된다. 세째 단계는 그 사건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하여 그 사람의 여러 가지 대응책들이 경주된다(예를 들면 대응책들에는 친구들, 친척들, 목사 그리고 의사와 같은 눈에 보이는 방책과 새로운 상황과 여러 가지 문제들과 감정에 직면하는 내면적인 방책이 있다. 이 대응책의 적절성에 따라 한 사건이 위기로 경험되는 정도가 달라진다. 대응책은 상황에 대한(주관적)평가와 함께 위기 발생 과정의 두 가지 가변 요소이다. 마지막 네째 단계에는 개인은 외적 위협에 내면적으로 대응하면서 위기자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위기발생에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이 평가과정(인식작용)에서 촉발적 사건을 심각한 위협으로 평가하는데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이 그 위협적인 상황을 쉽게 해결해 두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로 예리한 위기가 대부분의 이론가들과 일선 상담자들이 동의하고있는 것처럼,대개 4 - 6주 동안 계속된다. 어떤 위기의 후유증은, 특히 슬픔의 경우 수 년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힐트너(Seward Hiltner)는 “교역자의 관심에서 위기를 보면 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의 중대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구스타프슨은(James M.Gustafson)은 니버(H.Richard Niebuhr) 의 “ The Responsible Self” 의 서문을 쓰면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 임재하여 그의 신앙의 불을 일으키며 그의 삶을 새롭게 하며, 비극을 뛰어 넘어 새로운 존재로 살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개인이나 목회자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위기 가운데 임재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적인 지혜를 따라서 위기상황의 역동성을 옳게 이해 할 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은 곧 계시의 순간임을 믿는 신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으로 위기를 당한 사람을 인도해야 할 것이다. 위기에 처한 당사자와 그를 돕는 공동체가 어떠한 대처를 했는가에 따라 새로운 삶의 도약이 이루어 질 수도 있고 파괴적인 삶으로 빠질 수도 있는 결단의 시기요, 긴급을 요하는 시기요, 궁극적인 관심을 제기하는 시기가 곧 위기 상황인 것이다. 위기는 인간의 결단을 요구하는 데에 중요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목회자들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더 중요한 사실은 위기에 처할 때 당사자가 어떠한 영적인 차원을 갖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순간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개입으로 새로운 영적인 성장이 가능하게 되는 시기라고 하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 1:4절에 하나님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위로를 통하여 모든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은 단순히 인간의 결단을 요구하는 인간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보게 되는 계시의 순간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한 남자와 여자는 “인류의 생존 사 만큼이나 긴 수명을 가지고 우리의 생활의 기초로서 존속하여 원초적 제도(Primary Institution)” 즉,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 가정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물학적 단위이다.(biological unit) 가정은 보다 넓은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그 적응능력을 훈련시켜야 하는 사회화 단위( unit for sociologization)이며,또 때로는 사랑과 미움이 교차되고 상호 작용하는 집단 인격의 단위(unit of collective personality)를 이루고 있다. 가정의 의미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 궁극적으로 그들 사이의 사랑도 생산의 목적도 아니라, 가정을 통하여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시는 하나님의 창조안에 동참하는데서 그 의미를 찾는다. 부르너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가정의 존재 구조를 찾으며,그 존재구조를 신앙으로 인식하는 한, 가족인들은 그 속에서 맺어지는 신비적 연합의 의미와 경험을 가진다고 말했다. III. 가정문제 상담 원리 상담자와 내담자는 각자 나름대로의 상담에 대한 기대와 목표를 가지고 가족위기 상담에 임하여야 한다. 목표의 선정은 상담의 성공과 실패에 관련되어 지기 때문이다. 가족위기 상담에서의 목표는 종국적으로 성서적 가족관에 연결되는 목표이어야 한다. 위기 상담자인 스톤(Howard W.Stone)에 의하면 위기란 외부적인 위험성에 대한 한 개인의 내적 반응이므로 그 상담의 목표는 “개인으로 하여금 우발적인 위기에 잘 대처하도록 돕는 것이다” 라 하였다. 이 목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기는 위기를 당하는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둘째, 따라서 상담의 목표 및 과정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를 고려할 수 있다. 셋째, 상담자는 위기를 당하는 개인의 결정적인 순간을 알 수 없으므로 위기 상담 자는 예방 적인 상담이 효과적일 것이다. 넷째, 정서적인 능력과 적응 적인 행동은 개인 성장에서 보다 집단 상담에서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오성춘씨는 위기상담에서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대개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들을 표현하다. 만약 교역자가 그들을 도와서 그 지배적인 감정들을 확인해 주고 또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목회자가 위기를 겪고 있는 어떤 개인이나 가정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 개입할 때 두 가지 목표를 지니게 되는데, 첫째는 위기는 발달이 된 사건의 충격을 가하는 한 감소시키는 것이며, 둘째는 그 사건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그들 스스로 힘을 돋우게 하고, 미래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A. 결혼 위기 상담(하워드 크라인벨) 개인과 사회의 위기가 점점 더해 가는 오늘날 소용돌이치는 혼란의 위기 가운데서 사람들을 보살피고 상담하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기회를 목회자는 가지고 있다. 전승 적으로 내려온 목회자의 위치와 역활 덕택으로 이들은 자연스럽게 위기 상담자가 된 것이다. 글래써는 주장하기를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하는 것과 사랑 받는 것, 그리고 그가 자신과 타인에게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욕망인데 이러한 욕망이 좌절될 때 사람들은 위기와 상실 속에서 사람들은 자주 영적인 배고픔, 생의 공허감 그리고 자신의 가치와 인간관계의 빈곤에 직면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도와서 그들 스스로 관계 개선의 질을 높이도록 하는데 목회자들은 노력해야 한다. 또한 위기 상담에서 의미를 일깨워 주고 소망을 주는 역활을 하며, 그 중 중요한 기능은 영성적인 성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이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변치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거기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위로를 통하여 모든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고후1:4) 위기는 사람들을 삶의 공허감이나 관계의 빈약함에 직면시키고 대결시키는데 목사는 위기에 처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들과의 관계안에서 영위되는 생의 본질적인 의미로 재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정서의 파괴를 초래하고 미래의 실패와 인격적 질환을 증가시키는 위기에 대한 비 건설적인 반응은 1.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 2. 문제로 부터의 회피(예 : 알콜의 힘을 빌어서). 3. 도움을 구하거나 받는 것에 대한 거부. 4.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무능력. 5. 위기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대한 실패. 6. 다른 해결수단 모색에의 실패. 7. 위기의 원인이나 해결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 가시킴. 8. 친구 또는 가족과의 관계 두절. 상담자는 피 상담자가 이러한 좋지 못한 반응들을 나타내는가를 주의 깊게 관찰해서 그로 하여금 부정적 반응을 버리고 다음과 같은 건전한 대처수단을 강구하도록 돕는다. 1. 문제를 직시하게 한다. 2. 문제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3. 분노, 불안, 죄의식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통해서도 표현 하고, 일할 수 있게 한다. 4.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대처하도록 한다. 5. 여러 가지 해결 수단을 모색하도록 한다. 6. 그 상황에서 변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분리하게 할 수 있게 한다. 7. 변화 불가능한 것은 사실 그대로 용납하게 한다. 8. 자신의 이미지에 있어서 허세가 있고 부담스러운 면은 포 기하도록 한다. 9. 친척, 친구 또는 전문가와의 접촉을 통해 문을 열게한다. 10. 문제를 건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더디더라도 단계를 어 밟아야한다. 성장상담은 상담, 치료, 교육, 삶의 고양을 통해 성장을 촉진시키는 개방적이고 발전적인 접근 방법이다. 성장 중심적인 방향을 취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미래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클라인벨은 지구상의 여러 해방 운동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모든 인간이 그들의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영적 잠재력을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최선의 가능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얻고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요10:10) 그리스도교적 삶의 목적은 인간을 해방시켜 삶을 풍부하게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다. 상담의 일반적인 목표는 사람의 관계, 행위, 기능 등에 있어서 어떤 정도의 건설적 변화에 있다. 상담의 목표는 즉 보다 나은 상호간의 만족한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요10:10)하기 위한 것이라고 요한 복음에 가정 서정적인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영적인 성장은 우리가 영에 중심을 둔 생명력이라는 내적인 권위를 발견하고 개발 할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난다. 예수의 놀라운 생명력은 시간을 초월한다. 이것은 또 치유의 능력이 있는 성장촉진 에너지로 경험할 수 있다. 예수는 특별히 성장을 촉진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예수는 예민한 감각과 깊은 사랑으로 만났기 때문에 어떤 유형의 사람들 -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들, 창기들까지도 포함해서 - 과 맺은 관계도 그들과 그의 계속적인 성장을 촉진시키는 나와 너의 만남이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하고, 성장 지향적인 방식으로 응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다고 긍정해 주었기 때문에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가 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예수의 희망과 기대가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풍부한 잠재력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성장상담은 희망지향 적인 상담이다. 성장상담방법은 실제에 근거한 희망의 상황 속에서 그들의 고통을 다루도록 사람들을 돕는다. 성장결혼상담은 사람들의 문제와 갈등을 전적으로 극복하도록 돕는 방법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결혼부부상담의 방법을 많이 사용하지만 부부들의 지난날의 성공-그러나 억압되어 있는-들, 그들의 현존하는 힘, 그리고 자신들의 유산을 보다 많이 사용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희망적이고 생산적인 인식을 갖도록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성장상담은 상담, 치료, 교육 삶의 고양을 통해 성장을 촉진시키는 개방적이고 발전적인 접근방법이다. 성장중심 적인 방향을 취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미래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여야 한다. 우리가 개방적이고 자신을 열고 남을 돌보고 모험을 감행하고 성장하는 그 만큼 남의 성장도 촉진시킬 수 있다. 성경상에 나타나는 많은 사건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인간을 의지하면 넘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전제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은 인간을 신뢰하지 않으신다. 오직 진리의 사랑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와 같이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목회상담 자는 온전한 인간인 예수를 바라봄으로 생명을 풍성케 하는 상담을 할 수 있다. 성장상담의 실제적인 원리로는 인간의 잠재력 개발이 있는데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성장의 능력, 감추어진 성장의 근원을 찾아내어 동기유발을 시키는 것이다. 성장상담은 각 단계에서 발생하는 위기들을 성장의 기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즉, 성장상담은 뜻밖의 위기 - 즉 질병, 사별 그리고 이혼 - 당한 사람들과의 자연스런 접촉을 할 수 있는 상담자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고무해준다. a. 계획적인 결혼 생활 방법(International Marriage Method) 계획적인 결혼생활방법(International Marriage Method)을 줄여서 IMM이라 한다. 이것은 간단하며 부부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혼생활을 성장시킬 수 있는 4 단계 도구로 되어있다. 개인의 성장은 우리가 동일한 관계 속에서 두가지의 것 - 우리가 얻을 수 없는 확고한 사랑,그리고 정직한 개방성을 경험할 때 일어난다. 성장공식은 아래와 같다. ‘돌봄 + 대면 = 성장!’ 신약성서가 성장 공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안에서 진실을 말할 수”(엡 4:15) 있을 때 서로의 관계는 성장을 돕는다. 개개의 가족들은 만일 그들의 보다 더 넓은 인류 가족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풍요롭게 한다면 건강하고 창조적이며 풍성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IMM의 4 단계 1. 당신의 건강한 관계를 확인하고 굳건히 하기. 서로의 기본적인 욕구를 더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적극적인 장점을 찾아보는 것이다. 두명 중의 한명이 먼저 ‘나는 당신의 ... 을 좋아합니다.’ 라는 문장을 완성하는데 가능한 많이 합니다. 그리고 나면 다른 한명이 역시 ‘나는 당신의 ... 을 좋아합니다.’라는 문장을 완성합니다. 이제는 이와 같이 한 일에 대하여 서로가 어떻게 느꼈는지 토론을 합니다. 토론중에 파트너가 말한 당신의 좋은 점을 기억할 수 있는대로 많이 카드에 적는다. 이 단계는 결혼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점과 자산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 2. 성장범위를 통일 시키기 - 만나지 못한 욕구들,서로에게 원하는 것들 여기에서는 ‘나는 당신으로 부터 ... 을 필요로 합니다.’ 라는 문장을 완성하고,다른 이도 꼭같은 방법으로 완성한다. 이것은 자신의 욕구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토론을 합니다. 두 목록중에 상충되는 것은 C라고 적고, 서로의 욕구가 반대되지는 않으나 단순히 다른 것은 B라고 적습니다. 같은 것은 A입니다. 3. 변화를 위한 재 접촉 - 당신의 욕구를 더 많이 파악하기 위한 결정 이제는 부부가 목록에 적혀있는 것중 모두에게 중요하고 성취될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 이것을 발전 시킴으로써 성공을 경험하는 것은 중요하다. 결혼 생활의 성장을 위한 목표를 A욕구에서 선택한 다음, 이것을 이룰수 있도록 언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세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분명하고 변화 가능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간략하게 그 요구 사항들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함께 참여하여 적는다. 그리고 계획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 각자의 행동을 바꾸려고 했던 것들을 적어둡니다. 이렇게 하면 검토하고 행한 것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4. 행동하기 - 계획, 검토, 발전시키기, 그리고 진행과정을 추적하기 IMM의 마지막 단계는 계획을 발전시킴으로써 공동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서로를 격려해 주기도 하고, 계획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 분명히 해야할 필요가 있거나 강조할 것들을 말합니다. 결혼생활을 더욱 성숙하고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을 계속 기록해야 합니다. IMM을 성공적으로 이용한 후, 성숙한 욕구에 만족하였다면 다른 욕구들을 나누고 계획을 수립합니다. 적극적인 감정과 장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나는 당신의 ...을 좋아합니다.’라는 단계를 규칙적으로 되풀이 한다. IMM을 사용해 시작된 발전 단계는 ‘만일 당신이 나의 욕구들을 충적시켜주면 나도 당신의 욕구들을 채워줄 것이다.’라는 단순한 주고 받는식으로 멈추어서는 안된다. 사랑과 신뢰가 커짐에 따라 사람의 욕구 속에서 상대방의 욕구가 충족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증가한다. 이렇게 되면 자아실현과 결혼실현(풍요한 결혼 생활)사이에 있는 어떠한 갈등이라도 자아-타자 실현이 결국에는 진정한 자아실현이 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B. 의미 요법을 통한 상담 (Victor E. Frankl) 의미요법의 창시자인 Victor E. Frankl은 1905년 비엔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다. 성장하면서 신경학과 정신요법에 관심을 가지게된 프랭클은 20세 때에 프로이드와 교분을 갖게되었다. 2차 세계대전시 유태인이란 죄명으로 죽음의 수용소인 Auschwise와 Dachau등지에 수용되었고 수용소에서 그의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녀들은 학살되고 그 혼자 살아남았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자 프랭클은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통하여 얻은 체험을 근거로 하여 Logo Therapy(의미요법)이라른 학설을 창설하였다. 로고테라피의 초점은 셋이다. 그것은 인간실존의 세가지 근원 사실에 초점을 모으고 있는데 1.의미의 의지가 그 하나이며, 2.고통 중에서 의미가 그 하나이며, 3.의지의 자유이다. 여기서의 자유는 자기 자신의 세운 방식뿐 아니라 죽음의 양식까지도 결정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로고테라피는 1.의지의 자유 2.의미에의 자유 3.생명의 의미이다. 의지의 자유는 결정론 대 범 결정론의 문제를 포함한다. 권력에의 의지나 괘락에의 의지는 균형유지 성 원리라는 보다 넓은 개념이다. 이 로고테라피는 환자에게 절망을 승리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에, 낙관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에서 불가피한 고통과 같은 삶의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요소들까지도, 인간이 자기의 곤경을 받아들이는 태도여하에 따라 인간적인 업적으로 바꿔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인간에게 의미를 발견하는 능력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심리요법이 묘사하고 있는 인간상의 완성에 공헌하고자 한다. 즉, 인간을 전 차원에서 이해하고 인간을 순순한 인간적인 것, 즉 영적 차원을 포함한 것으로 이해하는데 공헌한다. 이것은 신경증이 있는 사람이 인생의 과업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데 그에게 이 과업을 의식하게 하고 그것을 충분히 의식하도록 깨우쳐주면 그의 신경증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며, 로고테라피는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느냐의 선택의 자유를 그에게 맡긴다. 로고테라피는 환자스스로가 수행하여야 한다고 그리고 환자로 하여금 발견하도록 도와주며 따라서 환자를 의미와 대결하게 하는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의미와 가치의 범위를 깨닫고 알수 있도록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대하는데 있으며,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환자의 삶의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치료자의 임무가 아니라 실존에의 주체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환자 자신의 일이요, 치료자는 다만 환자의 이러한 노력을 하는 것을 도와 줄 뿐이다. 환자가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함은 의미는 발견될 수 있을 뿐이지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다. 이것은 실존에의 의미추구, 즉 그 의미를 성취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가치의 가능성을 실현시켜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동기화 된다고 생각한다. 짧게 말해서 사람은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를 정의하면 첫째 충동적인 에너지의 역동체로 보아왔던 종래의 심층 심리학에서 인간을 하나의 메카니즘의 한 부분으로 격하시켰던 것을 인격적, 영적 존재로 다시 회고시켜 놓았다. 둘째, 인간이해와 인간의 경험을 통해 발견되는 의미에 대하여 인간은 정신 혹은 영적 존재이며, 자유와 책임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인간존재는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삶의 의미, 죽음의 의미, 사랑의 의미, 노동의 의미, 고통의 의미등 인간의 모든 면에 의미가 있으며, 의미는 가치를 통해 충족되었는데 그것은 창조시기, 경험가치, 태도가치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은 없다고 했다. 셋째, 치료기술에 있어서 영적 차원에 대한 호소를 하였다. C.교류분석을 통한 부부의사 소통.(Eric Berne) TA는 Transacational Analysis의 약자로서 에릭번(Eric Berne 1910 - 1970)에 의해 개발된 정신 분석학적 경험과 기술에서 착상하였으며 거기서 정신분석학의 여러 가지 요소와 개인 및 사회심리학, 학습이론 등의 개념을 첨가하여 발전시켰다. 또 접근은 치료과정의 목표와 방향을 뚜렷이 제기하는 내담자가 전개한 계약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각 사람들의 초기 결정에 초점을 두며 새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개인 능력을 강조한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TA는 인격의 구성요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TA요법의 철학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교류분석의 특징은 이론적인 평이성에 있다. 번은 모든 사람들이 정신병의사 또는 영혼의 치유자가 되기를 바랬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신의학의 언어가 비신화화 또는 평이 화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번의 교류분석은 오직 한가지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치료자가 알 고 있는 바를 그대로 환자가 알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한가지 언어는 간단하고 생생한 Stroke, Child, Adult, Parent, Game, Racket등의 일상용어로 표현된다. 둘째로, 교류분석의 철학은 인간의 긍정성을 적극적으로 확인하는 가치체계 위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기본입장을 나타내는 네 번째의 명제인 ‘나도 옳고, 너도 옳다.’(I\\\'m OK- you\\\'re OK)는 단순한 전이 적 감정이 아니라 인간 실존에 대한 실존적인 서술이다. 세 째로 교류분석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결단적 치료’(decisional therapy)라는 것이다. 곧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활, 감정, 행동 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또 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네 째로 교류분석의 철학은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세 차원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이다. 교류분석의 이 네 가지 기본철학은 사고와 감정과 행동의 세 차원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이다. Eric Berne은 이 접근법이 구조적이고, 의사교류 적인 분석과 관련된 성격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TA는 사람과 자아 신뢰를 배울 수 있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으며 자기 감정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TA의 기본 목표는 내담자의 현재행동과 그 생의 방향에 대한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은 자율성의 달성이며 자아 통제와, 자기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과,지신의 행동과 감정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과, 자신이 행동과 감정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과, 여기 - 지금 사는 데에 있어 관계없는 부적당한 패턴을 버리는 것등을 말한다. 즉, 사람들이 솔직하게, 건전하게, 친밀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그들과의 의사교류 성질을 이해하도록 도우는 것이다. Ⅳ. 상담의 실제적인 방법. 부부는 항상 서로에게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친밀해지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부부간에 서로 대화할 화제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부부관계의 조화와 연합된 일치감은 만족한 의사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클라인벨은 의사소통이란 우리 몸에 산소가 중요한 것만큼이나 관계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기능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는 상호관계 속에서 긍정적인 STROKE를 주고받으며,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줄 안다. 허나 역기능적 부부의사 소통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요인은 첫째 자아가 건강하지 못한 부부에게서 발견된다. 이것은 성인자아나, 부모자아가 어느 한쪽에 치우쳤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때에는 부부각자가 어떤 자아상태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자아로 의사소통을 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역기능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들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서로 다른 인생각본에 따른 삶을 살며, 그 각본으로 인해 결혼관계에서 친밀감을 방해받는다. 이러한 자들의 삶의 태도는 인생각본이 형성되는 시기에 부정적 STROKE로 인해 자기 수용과 타인 수용을 하지 못하는 비극적 각본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세 째 역기능적인 의사 소통을 하는 부부들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삶의 태도를 반복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 동기 유발이 이루어진 게임을 한다. 결혼관계에서 게임의 발생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신뢰와 애정이 뒷받침된 진실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부정적 STROKE를 교환할 때 발생된다. 네 째 역기능적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들은 대화의 유형에 있어서 충족교류에 발생되는 메너리즘에 빠진 의사 교류나 적의 적, 교차적 교류를 통하여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들을 들 수 있다. 역기능적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는 1.자아가 약하거나 오염, 배타적이고 2.부부의 삶의 각본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며 3.적의, 교차교류를 하며 4.결혼관계에서 파괴적인 게임을 하는 부부라 볼 수 있다. 이런 부부들에게 TA를 통해 부부의사 소통을 하면 첫째, 성인자아가 부모와 아동자의의 재형성을 통해 통합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다. 둘째, 각본분석에 있어서 자율적이고 친밀한 각본을 형성하고 있는 부부에게서 볼 수 있다. 부부는 모든 부분을 수용할 줄 알며, 적절히 부부간에 긍정적 STROKE를 주고받아 긍정적 감정을 유지한다. 셋째, 교차, 적의 적 교류가 아닌 충족교류를 통해 의사소통의 방법이 재정립된 경우 기능적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넷째, 게임을 의식적으로 탈피하고 그 대신 시간구성을 재미있고 친근한 놀이로 채우게 될 때 기능적 부부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 또한 부부간의 의사소통이 쉽고 자기 노출이 되며 서로의 욕구에 대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 더욱 행복하고 친밀한 부부관계가 가능해진다. 1. 가족상담의 사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다. 그분은 사단에게 찬탈 당한 하나님 나라와 그 모든 영광을 회복시키기 위해 성육신 하셨다. 사단이 꾸민 “악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정면 대치되며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본질에 있어 사탄의 나라와 정반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며, 영적이며, 현재적임과 동시에 미래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가지고, 그 나라의 삶을 사셨다. 우리는 악한 자 안에 처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엡2:1-3)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1:12). 거듭난 것이다(요3:5).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신앙적으로 미숙하다. 그리하여 사단의 유혹과 미혹에 잘 넘어간다. 혼란과 혼돈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성장만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인 것이다. 그리고 신앙이 점점 성숙되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하여 하나님의 사업에 동참하고 헌신하는 지도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나라와 제자훈련의 신학은 우리 관동대학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원칙과 방법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 원칙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그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것과, 이제 갓 거듭난 신자들을 최단시간내에 신앙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녀답게 만드는 사역이야말로 목회 돌봄의 예방 적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현현을 맛보고, 그 영광을 선포할 수 있는 지도자로 키우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며, 완성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러한 교육대상 중에 가족간의 문제가 있거나 위기가 있다면 이러한 정상적인 신앙 성장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고 본 연구자는 관동대학교회의 집사 한 가정을 대상으로 가족 상담을 통한 치유를 위해 실제 임상적인 접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2. P집사의 가족에 대한 가족상담 1)가족에 대한 이해 P집사는 관동대학교회 여 집사이다. 교회에 대단히 헌신적이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아직 교회에 나오지를 않고 있다. 흔한 말로 짝 믿음의 가정인 것이다. 이로 인한 위기와 갈등이 끝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가족이다. 사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진심으로 신자들 개개인의 가정 문제에 대하여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를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형화되어 가고, 맘모스 예배당과 거대한 구조로 성장해 가고 있는 듯 하지만 실상 그 안에서 소외된 교인들과 병든 가정의 초라한 모습은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복음 운동과 함께 가정회복을 위한 치유사역을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갈등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사례별로 분석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우선 P집사 가족이 갈등양상에 있었기 때문에 임상적인 접근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정신적 심한 갈등과 불신으로 별거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P 집사 부부의 가정은 날카로운 대립 상태에 있었다. 물론 관동대학교회 안에도 짝 믿음 가정들이 많이 있다. 이들 가정의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가족, 즉 아내들을 통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영성훈련을 시켜 소귀의 목적을 달성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연구과정 중 이러한 가정치유 목회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치료할 대상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기 위한 특별한 장치가 고안되지 않고서는 쉽게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도울 수 있는 잘 훈련된 가정치유 사역자가 있어야 한다. 이 때 유능한 가정 치유사역자의 조건은 상처가 있는 자라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짝 믿음 가정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자칫 하면 신앙적인 핍박으로 이어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먼저 믿는 아내들은 더욱 지혜롭게 이에 대처하여야 한다. 결혼 생활에서 부부간의 갈등은 남편과 아내가 각각 다른 의견, 가치관 철학, 방법론, 생활관습, 가정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있다. 이 갈등을 해결하는 성경 적 기술이 짝 믿음 가정의 아내들에게는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부부간의 갈등! 이것은 있을 수밖에 없는 요소이다. 그러나 갈등은 연합의 시작이다.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바로 그 장벽들이 결혼 생활을 결속시킬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1)면접을 위한 준비 관동대학교회의 P집사는 구역장의 요구로 그녀를 심방하면서 첫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녀로부터 간략하게 상황을 들은 후 기도를 해주고 주중에 목양실에서 다시 만나 상담을 하기로 하였다. 심방을 통해서는 더 깊은 상담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심방대원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개인적으로 심방을 하기가 곤란하였던 것은 목사가 혼자 개인적으로 여성도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건덕 상 옳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다시 만날 약속만을 하고 그 집을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P집사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해 나갔다. 먼저 그녀의 간단한 신상을 파악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구역장과 주위의 성도들에게 본인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자료들을 수집하여 나갔다. P집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 출석횟수가 줄고 있었으며 전보다 열심도 식었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가정문제 같다는 진단이 나온 것이다. 가정문제는 근본적인 이유는 믿지 않는 남편으로 인한 스트레스 였지만 그 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단서가 여러 군데서 나타나고 있었다. P집사는 남다르게 부지런하다. 그리고 대인 관계에서도 매우 깔끔하다는 평을 듣는 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녀는 모든 일을 완벽에 가깝게 처리하고자하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구역장은 말한다. 목회자가 처음 그녀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가정의 분위기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본 상담자는 P집사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듣고 그를 상담하기 위하여 기도하며 준비하였다. 그녀의 마음이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권면이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한 다음에 스스로 입을 열때까지 인내로 기다리기로 마음 먹었다. 2) 면접 목사 : 안녕하셨어요? P집사 : 예 목사님 바쁘신데 저에게 이렇게 시간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목사 : 별말씀을 요. 우선 좀 않으십시오. 몸도 아프시다고 하던데 괜챦습니까? P집사 : 예 목사님 기도 덕분에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목사 : 주로 어디가 그렇게 자주 아프십니까? P집사 : 별다르게 꼭 어서 아프다고 말하기는 그런데 요사이 와서 전체적으로 힘이 없고 매사에 짜증이 나요. 목사 : 그래요? 그렇다면 본인은 언제부터 이러한 증상이 나타났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P집사 :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목사 : 그래도 늘 마음에 고민이 되거나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되는 문제가 있을 것 같은데 혹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까? P집사 : 글쎄요? 혹 고민이 있다면 우리 남편이 교회에 나왔으면 좋겠는데 나오지 않는 것이 가장 스트레스를 주고요, 그 다음 아이들이 좀더 잘 커주었으면 하고 바래고 있습니다. 목사 : 왜 남편을 꼭 교회 나오게 하려고 하세요? P집사 : 목사님들이 남편을 구원 시켜야 된다고 하니까 당연히 그런가보다 하고 전도를 하려고 마음먹었지요! 그게 아마 제 작년 교회 부흥회 때 였을 것입니다. 그 때 부흥 강사 목사님이 남편을 꼭 전도할 사람 손들라고 해서 제가 손을 들었잖아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시키는 데로 삼 년이나 섬기고 온갖 아양을 떨었는데도 교회에 나오기는커녕 절 더욱 골탕먹이려고 작정한 사람 같아요. 목사 : 네 그랬었군요. 그런데 믿음이란 게 하나님이 주셔야지 집사님이 애쓰신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P집사 :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제가 성격상 한 번 마음먹으면 꼭 해내어야 만족하는 성겨이거든요. 그래서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요. 목사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지금 스트레스를 주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남편의 불신앙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군요. P집사 : 예 그럴지도 모르지요. 뭐든지 쉽게 쉽게 생각하면 될 터인데 매사에 깔끔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요 목사님. 이것도 병일까요? 목사 : 아니오. 병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집사님이 그러한 좋은 성격이라면 좋은 성격이라고 할 수 있고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그 성격은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세요. 혹시 가족 중에 영향을 주신 분은 없습니까? P집사 : 아마 저의 아버님이 주신 성격일 꺼 예요. 저의 아버지는 딸을 아주 엄격하게 키우셨 거든요. 남자들과 꼭 같이 엄격하고 그리고 규율 있게 가르치셨어요. 그러다 보니 여자이면서도 남자인 점이 많아요. 그런 면에서 제가 모든 면에 완벽을 추구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아요. 목사 :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지요. 제가 아는 한 형제님은 여자들만 일곱인 집에서 자랐데요. 그러다 보니 자신이 여성이라는 생각도 어릴 때는 가끔씩 해보았데요. P집사 : 그렇군요. 아무튼 저의 아버지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일일이 간섭하시며 저흳ㄹ을 가르치셨어요. 그러다 보니 남편도 아이도 그런 시각에서 보아지더라고요. 내가 배울 때는 안 그랬는데 생각하니까 저도 모르게 간섭하게 되고 그것이 제대로 안되면 혼자 열 받고. 그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목사 : 그랬군요. 이해가 갑니다. P집사 : 목사님 그러면 저는 치료받을 길이 없습니까? 목사 : 글쎄요 큰 병이 아닌데 무슨 치료가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집사님의 자녀들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에 하나로 우리 어머니는 너무 엄격하셨다는 것만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어른이 되어 아이를 키울 때에 똑 같이 어머니의 시각에서 가르치겠지요. 그러면서 엄청나게 열 받으며 살게 될 지 모릅니다. 집사님처럼 말입니다. P집사 : 목사님 말이 사실이에요. 지금도 그런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형들은 동생을 야단칠 때 보면 저를 곡 빼 닮았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지요. 목사 : 글쎄요. 하루아침에 당장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문제를 알고 있다면 해결은 절반쯤 된 것입니다. P집사 : 정말 그럴까요? 목사님. 목사 : 예 정말입니다. 이제 시간을 가지고 저와 상담하면서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하면서 고쳐보도록 해봅시다. P집사 : 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 : 그러면 또 언제 시간을 내실 수 있을 까요? P집사 : 목사님이 좋으신 시간을 정하시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목사 : 그러면 제가 상담 시간을 조정해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기도합시다. 목사는 기도 후 헤어졌고 그 후에도 서너 차례 더 만남을 가지면서 상담을 통하여 그녀에게 도움을 주었다. 면접에서 보듯이 대개의 경우 내담자는 이미 자신의 문제를 어렴풋이 나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상담은 그들을 기술적으로 도와 문제의 핵심에 바로 접근 하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2. 분석-지쳐버린 P집사 건강하고 균형 잡힌 인간관계를 위한 일방적 관계 치유서라는 부제가 붙은 알프레드 엘스의 “사랑에도 함정이 있다는 책에 보면 남편, 아내, 부모, 자녀, 친구, 이웃과의 관계에서 저자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에 겹도록 많이 베풀고 있다 -고 지적한다. 반면에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너무나 적은 것만을 받고 있다 -고 말한다. 자신은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참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를 나타내지 않으며 -자신은 누구에게서도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고 말하는네 P집사가 그러하다고 보여진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분노와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이것이 상담을 통하여 얻은 결론이다. 그는 많이 주고 적게 받는 일방적 관계(One-Way Relationships)의 덫에 빠져 있다. 일방적 관계의 근원은 편향적 의존성(Codependency)으로서, 그릇된 동기로 주고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주면 줄수록 더 많은 상처를 받게 된다. 이러한 일방적 관계와 편향적 의존성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와 진단 및 치유 방법들이 많지 않다. 본 연구자는 P집사를 통하여 지쳐있는 상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남편을 상담하여 본 결과도 같은 결론이었다. P집사의 일방적 헌신은 비단 남편에게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두 자녀들에 대한 애정에 있어서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헌신 적이 었다. 그러므로 P 집사가 지쳐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우츠 박사는 저명한 목회 상담가이다. 최근의 심리학적 연구를 통해 발견한 인격 장애들, 사람들로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마저 지극히 어렵게 만드는 인격상의 문제들을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묘사했다. 저자는 이러한 인격 장애를 부모, 교사, 고용주, 노동자, 사무원 목사, 성도 등 어떤 사람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짐이 무거워 지면서 P집사는 인격장애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오우츠 박사는 왜 이런 인격장애가 형성되는지 그 원인을 파헤치고, 이러한 인격 장애가 교회에서 어떻게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했다. 그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도 오우츠 박사가 묘사하는 이런 행동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절대-공격성 인물들”은 강인하고 힘이 있는 것에 가치를 둔다. 그들은 자신의 자화상을 힘이 넘치고 자신감이 있으며 고집불통인 자로 그린다. 특별히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일이 많다. “의존성 인물들”은 호감이 있게 우호적이며 친절하다…그들의 또 다른 뚜렷한 자신을 약하며 깨어지기 쉽고 비효과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내리는 판단에 확신이 없으므로 스스로의 능력과 취향을 무시한다. “자기애성 인물들”은 연약한 것이나 의존적인 삶을 경멸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자신이 일반 사람들보다 위에 있고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데서 삶의 만족과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수동-공격성 인물들”은 권위에 저항하면서도 거의 미신적으로 우연이나 운명을 믿는다…결혼 생활에서도 그들은 배우자에게 어떤 일을 하기로 약속을 한 후, 그것을 질질 끌며 지연시키다가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P집사는 딱 집어서 오우츠 박사가 지적한 유형중의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본 연구자가 판단하기에는 “수동-공격성 인물”유형에 가까운 것 같다. 이러한 인격 장애를 가진 자들은 마치 가면을 쓰고서 자신의 진짜 모습은 가면 뒤에 숨기고 사는 것과 같다. 오우츠 박사는 이들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고, 그 본연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런 인격 장애를 가진 자들을 돕고, 또 인격장애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교회는 전인적 사역을 담당해야 한다. 3. 상담과 치료의 과정 1) 구조적 치료 P집사는 신앙이 있다. 그러므로 무엇 보다 성경을 통하여 신앙적인 방법에서 접근해 가는 것이 치료에 있어 꼭 필요하다고 연구자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몇번의 만남을 통하여 본 연구자는 우선 그녀의 짐을 벗겨주고 또 영적인 힘을 주기 위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있는 현실을 인정하게 하고 가족으로서 그녀가 맡은 역할에 대한 하나님을 뜻을 이해시키도록 하는데에 있었다. (1)갈등해소의 원리-짝믿음 가정의 아내들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①대접 받기를 원하는 만큼 대접하라눅20:26-27) ②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막10:43) ③주님의 마음, 곧 낮아지심 마음을 품으라(빌2:6-8) (2)짝 믿음 가정의 아내들은 갈등해소를 위한 두 번째 원리는 겸손과 인내이다.(잠16:19, 히10:36) 짝 믿음 가정의 아내들이 궁극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짝 믿음 가정의 불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남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나 짝 믿음 가정의 아내들이 궁극적으로 불신 남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목표를 세울 때, 우리가 당하는 많은 손해와 핍박도 참을 수 있다. 그리하여 본 연구자는 먼저 믿게 된 P 집사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을 소개하고 참고 인내해야 할 이유를 가르쳤다. 이 방법은 지시적 상담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모든자에 대한 복음증거의 명령 ①주님은 땅끝까지 복음 전하라 하셨다(막16:16-18). ②땅끝이란 복음없는 모든 이의 심령이다(마28:19-20) ③그러므로 남편도 땅끝이요, 복음전도의 대상이다. ④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한다.(딤후4:2) (2)전도를 위한 믿는 아내의 준비 ①남편의 영혼을 살리기를 위해 하나님께 구하여야한다.(시2:8) ②선포해야 한다.(시96:3) ③구체적인 접근이 있어야 한다(마28:19) ④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농부의 심정으로 인내하여야 한다(막4:31-32) ⑤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엡3:6). (3)교회와 연합적인 사역 ①하나님의 교회는 불신 남편전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행11:1). ②교회는 불신 남편을 전도하기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같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칠 계획을 세워야 한다.(행28:28) ③교회는 별도의 불신 남편 전도팀을 운영한다. ④불신 남편들을 교회내의 친교모임에 자주 참여할 기회를 갖게 한다. 2)생태구조적 가족 치료 남녀는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하고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달리한다. 어떤 때엔 언어도 다르고 환경도 다른,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P집사의 가족 문제의 근원은 다름 아닌 신앙이 다른 불신 남편으로 인한 갈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인정 받기 위하여 과도하게 남편에게 헌신적으로 봉사 하였고, 또 교회 다니는 일 때문에 가정과 자녀들을 잘 돌보지 않는다는 말을 남편으로부터 듣지않기 위하여 역시 과도하게 자녀들을 향하여 관심을 쏟은 결과 P 집사가 지쳐 버린 것이다. 그녀가 지쳐 버리자 신앙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가정 생활 조차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이일로 인해 그녀는 상당 기간동안 목회자와 만날 수 없었고, 교회 출석 횟수도 점점 줄어 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볼 때, P 집사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 보다 먼저 P집사 자신이 변해야 한다. 신앙을 떠나서 보더라도 남녀에 차이에 대한 이해는 상대방과 부대끼는 과정에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격게되는 좌절감을 해소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러면 서로간의 오해는 곧 풀리고, 그릇된 기대 또한 쉽게 수정될 수 있다. 물론 애정 어린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는 때로 어려움이 따를지도 모른다. 문제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로의 문제점이 원망과 배척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관심과 사랑, 친밀감과 신뢰감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통찰은 모든 문제들을 일시에 제거하는 임시 변동의 ‘즉효약’이 아니라는데에 동감한다. 대신에 생활하면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관계속에서 성공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제시해 준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자기 몫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상대에게 그 몫의 사랑을 주는데 필요한 밑천이 될 것이다. 버지니아 사티어(Virsinia Satir)의 Peoplemaking은 1972년 그 첫판이 나온 이래 장기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미국에서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녀의 참신하도 인간적인 사상과 의사소통의 새로운 기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온 책이다. 사실 이 책처럼 광범위하게 쓰일만한 책도 그리 흔치 않을 것 같다. 애초 사티어 여사는 의사소통 이론을 바탕으로 한 가족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임상사회사업가이고 이 책도 가족치료 분야에서 하나의 학파로 인정받고 있는 있는 그녀의 대표적인 저술의 하나이므로 결혼(부부)관계, 부모-자녀 관계 등 가정과 부모 역할에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한번은 정득해 볼만한 책이다. 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가정을 꾸리고 보다 나은 인간관계와 의사소통 방식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있는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하여 참신한 원리와 효과있는 기술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누구보다도 현재 부모 역할을 하고 있는 성인들과 앞으로 부모노릇을 시작하게 될 예비 부모들에게 우리가 부모로서 혹은 가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잘못된 선입관과 위험속에 있으면서도 안이한 생각으로만 살아왔던가를 반성할 기회를 주는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자기 가치를 높이면서 배우자와 인격적인 의사소통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가족 의사소통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가족 의사소통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안내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좋은 부모가 되고자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실제로 그 방법을 알고 있고 정말로 그렇게 되도록 힘쓰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얼마나 소중하다고 진실로 느끼고 있는가? 또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감각이 무너졌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한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는 그것은 어떻게 표현하며 전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계속적으로 던지면서 회의를 통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도록 이책은 이끌어 주는 것 같다. 넘어졌다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 넘어졌으면서도 넘어진 줄 모르는 것이 더 불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넘어진 것을 알면 일어나야 하고 서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넘어지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줄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티어 여사에게 받는 교훈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을 만드는 공장인 가정에서 가정고학을 책임맡고 있는 부모들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들을 일깨워 주고 북돋아주는 이 책은 각 장에서마다 문제 투성이인 우리편에 같이 서서 우리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파헤치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티어 여사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녀의 과학자와 같은 예리한 통찰력과 예술가와 같은 심오한 기교는 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성숙의 표지로서의 사랑을 전제하고 사랑이야 말로 인간 성숙의 진정한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에의 성숙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 할 때에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상담은 이러한 기독교적 인간 이해를 꼭 전제로 하게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성경은 상담을 위한 인간이해에 대한 성경적 통찰을 보여준다. 창2:24절에 하나님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두사람이 함몸을 이루는 것이라 했다. 결혼이란 부부의 전인격을 다른 한 사람과 나누는 것이며 완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개념이 소유이다. 소유물에 대한 태오와 사용에 있어서도 부부는 일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짝믿음 가정의 경우 이
경건주의
경 건 주 의 2002-11-12 15:16:57 read : 12 Ⅰ. 서 론 A.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경건주의는 유대-기독교의 역사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갖지 못했던 운동 중의 하나였다. 미국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경건주의가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여 미국의 교회사료 편집에 가장 큰 공백을 남기고 있다. 1 0세기 신학 용어로서의 경건주의는 도덕주의, 율법주의, 분리주의, 개인주의 등 부정적 평가 일변도로 취급받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묘사들은 경건주의에 대한 초기 정통주의적 반대자들의 논쟁적 발언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 운동은 개신교 내에서 가장 역동적인 운동으로서 생활 방식, 성서적 주제, 초교파 운동, 선교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갱신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건주의 운동은 루터파 안에서 최초로 분명한 형태를 취하여 나타났다. 1546년 루터가 사망한 후 루터파 내에서는 많은 신학적 논쟁이 벌어졌다. 루터파들과 칼빈주의자들은 각기 자기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하여 정교한 신학적 방법론, 스콜라 주의, 혹은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odoxy)라고 알려진 학구적 신학의 특징을 묘사하는 어휘를 개발해 냈다. 경건주의는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이와같은 개신교 정통주의에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그 객관주의에 대한 종교적 주관성이 강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은 정통주의로 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나, 정통주의는 메마르고 논쟁적이며 편협하고 실질적인 경건 생활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개인적인 중생과 성화 및 종교 체험에 대한 강조로 교회에 갱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국 경건주의는 종교 개혁자들의 생동감과 개방성과는 거리가 먼 부패된 정통주의에 항거하여, 삶의 성화와 사회의 윤리적 실천을 도모하면서 교회에 갱신을 일으킨 것이다. 독일내의 경건주의자들의 개신운동은 교회안에 새롭게 퍼져나가 교회안에서 무기력한 신앙에 중생의 체험을 강조함으로 생동감을 주었고, 교회안의 작은 교회 (Ecclesiolue in Ecclesiu) 를 통해서 성경공부와 삶을 서로 나누면서 교회에 새롭게 갱신을 일으켰다. 따라서 본 논문은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경건 활동을 통해서 교회에 어떻게 갱신을 일으켰는지를 살펴보고, 경건주의자들의 갱신이 선교와 모라비안과 웨슬레와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 끼친 영향을 통해서 경건주의자들이 갱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겠다. B. 연구 방법 및 범위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에서 보다 화란에서 먼저 그 태동을 보이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경건주의 운동을 전반적으로 다루기에는 본 논문으로 너무 벅찬 작업이고 또 본 논문의 목적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독일내에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 세 사람 (Arndt, Spener, Franke) 이 신앙의 내적 체험을 강조하고 성경중심의 그룹모임을 통해서 교회내의 성도들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교회가 갱신된 형태를 살펴 보겠다. 사회운동의 시각에서 살펴봄을 지양하고 성도들의 신앙의 내적 갱신을 중심으로 연구해 보고자 한다. 독일경건주의에 관한 자료가 빈약함을 인지하면서 본연구는 Snyder 가 쓴 "Signs of the spirit" 와 Brown 이 쓴 "경건주의 이해" 및 Erb 이 쓴 "경건주의자들과 그 사상" 을 참고하여 문헌연구방법에 의한 이론적 접근방법을 시도하겠다. 저술 방법은 Ⅱ장에서 경건주의 이해를 얻기 위하여 경건의 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경건주의가 17,18C에 어떤 배경 속에서 일어났는지를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제Ⅲ장에서는 독일의 경건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인 Arndt, Spener, Franke의 생애와 경건 활동을 살펴보겠다. 특히 Arndt의 경건 활동 내용에서는 영적인 삶 안에서 새 삶을 향하기 위한 수단을 살펴보겠고, Spener에게서는 그의 저서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를 중심으로 그의 경건을 살펴보겠고, Franke에게서는 그가 가장 크게 활동하였던 Halle 대학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제Ⅳ장에서는 경건주의자의 경건 활동이 교회 갱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 보겠는데 갱신의 정의와 갱신의 본질과 갱신의 모델을 살펴보고, 독일 경건주의자들의 갱신이 근대에 있어 선교에, 모라비안 교도에게 요한 웨슬레에게 19C미국 대각성 운동에 미친 영향을 통해서 그 내부의 갱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경건주의의 이해 A. 경건주의의 정의 1. 경건주의의 유래 서기1670년 독일 개신교 안에서 형성된 경건주의 운동은 경건성과 교회의 철저한 갱신을 위한 하나의 운동이었다. 1690 - 1740년 사이 반백년 동안 절정에 이른 경건주의는 교회생활의 모든 분야, 예배의식에 대한 신학에서부터 각 개인의 경건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깊은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경건의 유래를 살펴보겠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말은 "유세베이아"(eusebeia)인데, 이것은 "공경"을 의미하며 때로는 "경건함"으로 번역된다. "유세베이아"(eusebeia)를 라틴어로 "피에타스"(Pietas)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애정을 가리킨다. 영어로는 "파이어티"(Piety)이며 "불쌍히 여김"(pity)과 "동정"(compassion)을 의미한다. 독일어로는 "프롬"(fromm)인데 "경건하고 독실한"이나 "온화하고 순진하고, 소박한"을 의미한다. 이런 호의적인 해석들 말고도 이 단어는 오랫동안 부정적인 의미를 지녀 왔다. 예를 들면, 디모데후서 3:5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경건한 사람은 예배와 행동에서의 독실함에 의하여 특징지워질 수 있으나, 경건이란 그 행동이 의식적인 덕행이나, 보이기 위한 종교 행위 또는 위선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사람에게 언급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경건주의는 경건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의해 후손에게 전해진 비난조의 별명이었다. 그 이름의 개념은, 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스페너의 간절한 소망들을 수록한 요한 아른트(Johann Arndt)의 "교회 예전"(Church Postil)에다 스페너가 쓴 서문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에서 유래된 것 같다. 1675년에 있었던 이 서문의 출판은 독일 경건주의의 탄생을 촉진시킨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의 개념은, 1669년에 스페너가 거짓된 의를 다룬 한 편의 설교를 한 데 이어 최초로 제안한 "경건 집회"라 불리는 집회들로부터 유래되었던 것 같다. 2. 경건주의의 기원 역사적 운동으로서의 경건주의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 50년 동안에 있었던 독일의 스페너와 프랑케를 중심으로 한 신앙운동이다. 경전주의의 기원은 신비주의(Mysticism)와 영국의 청교도주의(Puritanism)에서 찾는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교회가 본질을 잃고 영적각성을 소홀히 할 때에 기존 체제에 대한 개혁적 의지를 가지고 교회의 사명을 재확인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독일 경건주의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발생하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신비주의는 엑카르트(Meister Eckhart), 타울러(John Tauler), 수도(Henry Suso),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등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발전하였다. 이중 타울러는 루터와 종교개혁, 그리고 스페너의 경건주의가 발생하는데까지 영향을 끼쳤다. 타울러는 엑카르트의 제자이며 영력과 지력을 겸비한 설교가였는데, 그의 설교집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읽혀졌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는 성경, 어거스틴, 그레고리, 디오니시우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자유롭게 인용하였고, 내적 생명력을 강조하여 외적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비난하였을 뿐 아니라, 복음적 사상이 강했고, 실제적이며 은총과 회개를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신비주의와 관련된 두 개의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경건주의의 발생과 스페너의 이론적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비주의의 두 단체는 "하나님의 친구들"(the Friends of God)과 "공동생활 형제단"(the Brothers of the Common Life)이다. '하나님의 친구들'은 14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이 단체는 교회에서 영적 고갈을 느껴 모여든 평신도들로 구성되었는데, 성경연구와 경건생활, 그리고 성별생활을 강조하였다. 이 단체에서 나온"독일신학"(German Theology)이라는 책은 프랑크프르트의 어느 사제가 14세기 후반에 쓴 글로서 독일교회의 영적 부흥을 가져오게 하는 중요한 책이 되었다. 또한 "공동생활 형제단"은 14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운동인데, 이들은 공동의 규칙 아래서 수도원 생활을 강조하였다. 왜냐면 이들은 타락한 교회의 개혁은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 형제단은 학교를 세워 성직자와 사회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교육내용은 복음주의와 경건주의 사상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15세기 네덜란드와 독일의 경건생활과 종교개혁의 터전을 닦아 놓았다. 이 단체에 속해 있던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에서 소박하고 신비한 교회적 경전을 주장하여 스페너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들 형제단은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평신도의 목회참여를 강조하였다. 신비주의의 신비적 요소는 종교개혁에 까지 계속되어 그 신학적 사상은 정통 신학자들에 의해 흡수되었다. 17세기 경건주의가 형성되기 전 몇몇 신비주의자들 중 뵈메(Jakob Boehme)는 깊은 영적 체험과 계시를 추구하여 프랑케(August Franke), 진젠돌프(Nikolaus Zinzendorf)에게 영향을 끼쳤고, 아른트(John Arndt)는 카톨릭의 신비주의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여 그의 "진정한 기독교"(Von Wahren Christentum)라는 책은 루터교의 대표적 경건서적이 되었으며 스페너의 경건주의가 탄생하는데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모라비안 운동과 영국 웨슬레 부흥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한편 17세기 이전의 경건주의적 요소는 청교도 주의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륙적 경건주의와 같이 청교도주의도 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형식적 예배의식과 정치체제에 반대한 개신교 운동이었다. 청교도주의는 청교도운동의 지도자인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가 말한대로, 하나님께 의존하며 사는 성경적 생활이 기본이 되는 사상이다. 청교도의 종교적 배경은 유럽대륙의 프로테스탄티즘, 즉 루터와 칼빈의 신앙과 영국의 위클리프의 개척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청교도는 종교개혁자들이 해결치 못한 것을 개혁하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루터나 칼빈은 중세 로마 카톨릭을 개혁한다고 하였지만 중세적 교회 문명(Church Civillization)을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교도는 중세기 문화의 잔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청교도는 목사의 복장 문제로 개혁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왕의 권위보다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또 이들은 형식적 교육대신 내적인 영적 체험을 강조하였고 지식인이 사회적 정의를 등한시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가정의 경건생활 실천, 청소년의 철저한 종교교육, 자기훈련 그리고 명상을 강조하였다. 이들 청교도의 대표자들로는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 존 밀턴(John Milton), 존 번연(John Bunyon),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 존 오엔(John Owen)등이 있는데, 박스터, 베일리, 번연의 저서가 번역되면서 대륙에 청교도주의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책중에서 박스터의 "이교도의 부르심"(A Call to the Unconberted), 베일리의 "경건의 훈련"(The Practice of Piety),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과 에임즈의 "거룩한 신학에 관한 수필"(Medalla Sacrae Theologiae)등이 경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자들에게서도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 특히 스페너는 그의 스승인 요한 단하우에르(Johann Dannhauer)로 부터 성실성, 성경주의 및 보다 민주적인 정책 등에 대한 칼빈주의의 강조는 경건주의의 원리가 되었다. B. 경건주의 운동의 배경 1. 역사적 배경 경건주의는 개신교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산물이었다. 그 근원은 16세기 말로부터 17세기에 일어난 경건의 실천에 대한 루터파 및 금욕적인 칼빈주의자들의 관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운동들은 영국의 청교도 운동과 네덜란드 개혁주의 진영들 속에서 최초로 나타났고, 아른트(Arndt), 스페너(Spener), 프랑케(Francke), 벵겔(Bengel), 진제도르프(Zinzendorf)등의 많은 사람들로 말미암아 루터 교회에서도 나타났으며, 고트프리드 아놀드(Gottfried Arnold), 에른스트 호크만(Ernst Hochmann), 요한 디펠(Johann K. Dippel) 및 페터젠파(Petersens)등과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개혁되었고, 모라비안파(Moravians)와 형제 교회(Church of the Brethren), 스웨덴 선교단(Swedish Mission Friends), 웨슬레주의 운동(Wesleyan move- ment)및 복음주의적 부흥 운동들로 말미암아 채택되었으며, 많은 기관, 협회들과 교파들의 기본적인 종교적 기풍으로 계속되고 있는 개신교의 주요한 운동들이다. "독일 경건주의"(Der deutsche Pietismus)는 요한 아른트(Johann Arndt)로부터 시작된 경건 운동(Frommigkeitsbewegung)과 개혁 운동에 뿌리를 두며, 30년 전쟁(der Dreissigjahrige Krieg)후 다시금 힘차게 활기를 띠었던 신비주의적 영성주의에서 분파되고, 지하로 들어간 물결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동시에, 하나의 총체적 유럽 경건 운동에도 근거를 두는데, 17세기 앵글로 색슨의 "청교도 주의"(Puritanismus), 네덜란드의 "엄정주의"(Prazisismus), 프랑스의 "얀센주의"(Jansenismus) 그리고 "정적주의"(Quietismus), 마지막으로 동구의 유대인의 "차씨드주의"(Chassidismus)를 들 수 있다. 경건주의가 발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30년 전쟁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경건주의의 시작은 스페너의 저서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에서 찾는다. 스 너는 1674년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의 재판에 나오는 서문을 부탁받아 그 책에서 경건주의를 피력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피아 데시데리아]이다. 이 책은 아주 대담한 개혁의 내용이 담긴 작은 책으로서 교회와 사회에 대한 솔직한 비판과 아울러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개혁의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피아 데시데리아]는 3부로 편집되어 있는데, 제 1 부에서는 교회의 비참한 영적 빈곤과 통치자의 타락상, 성직자의 부패와 불신앙을 공격하였고, 제 2 부에서는 교회개혁의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제 3 부에서는 개혁을 이룩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 여섯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바로 이 [피아 데시데리아]가 독일 경건주의의 시작인 동시에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에 경종을 고하는 중요한 책이 되었다. 2. 사회적 배경 루터의 1517년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과 신교는 줄곧 크고 작은 종교전쟁을 치루었고 부분적으로 서로의 종교 자유를 허용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누군가 지뢰밭을 밟으면 터질듯이 불안한 휴전으로 전운이 감도는 시대상황이었다. 그렇다가 보헤미아 국왕이었던 카톨릭 신자인 페르디난드가 카톨릭 정책을 노골적으로 내세우자 프로테스탄트들은 왕의 고문 두 명을 창 밖으로 집어던졌다. 흔히 "프라하 폭동"이라 부르는 이 사건은 30년 전쟁의 도화선이었다. 이 30년 전쟁이 결국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발생케 한 원인이었다. 30 년 전쟁이 끝난 후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군주중심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음으로 교회법 제정과 성직자 임명의 절대적 권한을 군주가 행사하고 있었고, 독일 궁궐생활은 백성을 돌아보지 않고 프랑스의 화려한 생활에 못지 않을 정도로 생활하는 정치부재의 상태였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제력이 심히 악화되어 어떤 곳에서는 돈의 가치가 떨어져 경제가 물물교환으로 까지 감축되었고, 학교는 문을 닫았으며 교회는 불타 버리고, 음식창고는 바닥이 남으로 집없는 무리들은 이리저리 구걸하러 몰려 다니면서 남의 것을 강탈하고 닥치는대로 파괴하였다. 이 의 경제적 심각성을 Christian Geber는 "농민들이 동물처럼 살았다"고 표현했다. 이 같은 경제적 손실은 국민의 도덕적 가치관의 타락을 가져왔다. 교회적 측면에서도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고, 목회자들은 국가의 관리가 되어 국가에 종속된 채 교회는 정치의 노예화 되었다. 이러한 스콜라적 기독교는 고립된 엄격한 교리해석을 전제로 하여 누구나가 다 여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성례에 참석할 것을 요청하면서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생활 전부인 것처럼 교인들을 우민화시키고 있었다. 즉 '사멸된 정통'의 종교만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통주의에 반발하여 종교적 정열과 내면적 생활을 중시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건설해 나가야 한다는 운동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이다. 이와같은 경건주의 운동의 태동은 복잡한 정치, 종교적 전쟁이 빚어낸 경제적 불황으로 인한 사회와 도덕의 타락, 그리고 정치권력과 타협함으로써 오게된 교회의 세속주의화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지 못했던 성직자들의 타락과 무의미한 신학논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종교적 배경 정치 상황이 이처럼 무척 비참한 상태이지만 성직계급들도 완전히 타락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성직자들이 도처에서 추문에 연루되며, 또한 기독교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이 많음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그들의 생활은 세속적인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육체의 쾌락과 안목의 정욕과 교만한 행동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의 으뜸가는 실천 원리, 즉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승진, 한 교구에서 다른 교구로의 영전을 얼마나 간절히 추구하며, 온갖 종류의 권모술수에 몰두해 있는지 살펴보라!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이러한 목회자들의 생활과 그들 속에 신앙의 열매들이 없는 것은 바로 그들의 신앙이 결핍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목회자들이 이 정도니 그의 신도들이 무엇이 필요한 지를 어찌 인식할 수 있겠는가? 이 당시 17C의 상황은 종교개혁의 신학은 점차 지엽적인 신학 논쟁으로 경쇄되고 교회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신앙의 열정은 식어가고 있었다. 당시의 루터교회는 종교개혁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성경을 교리와 생활의 표준으로 삼기 보다는 신조와 독단적 교리에 집착한 나머지 영적인 감정과 고결한 실제 생활을 소홀히 하였다. 목회자들의 교육에 있어서는 상호고백적인 논증법이 주요 위치를 점유하였다. 대학의 신학 교육의 매체로는 여전히 라틴어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대의 논쟁에 근거하여 주석을 한 신학의 내용들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교회의 교훈의 계통적 서술이나 공적인 논쟁에서 학생들이 자신이 가르침을 받은 신학을 옹호하도록 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는 윤리학의 논법은 궤변적이었다. 성경의 내용들이 신조안에 적절히 표현되어 있다고 주장되던 시대에는 독자적인 성서 주석이 교육과정에 거의 포함되지 못했다. 과거, 심지어는 종교개혁 시대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신학적 진술들을 영원한 진리로 간주하고, 기독교 신앙과 지적 명제들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라틴어로 교육받은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배운 신학을 백성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옮기는데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설교 중에 외래어로 된 인용문을 삽입하는데 대한 당시의 불평들은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전반적으로 논쟁과 논쟁법만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교구민들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에 직면하였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당대의 비평가들이 이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또한 당시 뚜렷이 구분된 계급사회에서 목회자들은 많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군주나 귀족들 앞에서 너무나 비굴하게 아첨하였으며, 또한 평민들 위에 군림하였다는 당대의 불평들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당시 많은 목회자들이 마술을 믿고 있었고 폭음과 폭식 등 당시 백성들이 행했던 악덕에 굴복했음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시에서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주일 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예배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도와 찬양 도중에 잡담을 하거나 걸어다니지 못하도록 금지한 규정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설교자가 설교 도중에 잠을 자는 것은 청취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러한 일은 매우 빈번하였으므로 유명한 신학자 게르하르트(John Gerhard)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그가 교회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점을 찬양하였다. 백성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법에 의해 요구되었다는 데에도 있으며, 또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행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동적인 효과를 지니는 행위라고 간주되어 많은 사람들은 1년, 또는 계절마다, 때로는 1달마다 정규적으로 성찬에 참여했다. 교회가 이처럼 외적으로는 번영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진정한 기독교인의 생활의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이렇게 17C 정통주의는 생명을 잃고 말았다. 이들의 성경에 대한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기초로 해서 이룩되었다. 이들은 성경 맹신자라는 비난을 면키 위해서 그 당시의 성례전 신학에서 이미 전통적으로 받아들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의 구별을 성경에도 적용하였다. 이러한 구별은 성경에 대한 과도한 신비화를 막아준다고 확신했다. 이처럼 17C의 신학은 루터의 위대한 발견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고 중세 스콜라주의의 최악의 요소를 또 다시 만들어 냈다. 모든 것을 체계화하려는 이들의 태도는 루터 자신이 그렇게도 배격했던 율법주의에 또다시 접근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또 다시 이용하는 것도 - 그래서 '스콜라적'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이유이지만 - 루터가 아주 혐오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Martin Schmidt의 해석에 의하면 Pia Desideria에 대표적으로 나타난 스페너의 교회개혁을 위한 강령의 현저한 특징은 스콜라적 전통을 배격하고, 그 대신에 신비적인 영성훈련이라는 전통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는 것으로서, 이 영성운동의 근원은 중세 말기의 아른트, 타울러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통의 특색은 칭의(법률적인 개념)대신에 중생(생물학적인 개념)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결국 경건주의는 17C 정통주의가 가져온 여러 병패들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Ⅲ.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형성 A. 아른트(John Arndt) 독일 경건주의는 John Arndt에서 이미 발판을 굳쳐가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Arndt는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는 루터가 이해한 말씀의 교리를 윤리적 교리로 변형시킴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경험을 성화의 경험으로 변화 시켰다고 Friedman은 지적한다. 또한 Koepp도 이것을 주장한다. 알런데 Arndt가 일반적으로 성화의 경험으로 변화시켰다고 간주되고 있지 않은 것은 Ritschl이 경건주의를 정의 할 때 "경건주의는 비밀 집회가 동반해야 한다"고 한 언급속에서 볼 수 있듯이 Arndt는 비밀 집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Stoeffler는 분석한다. 이렇게 볼 때 Arndt는 비밀집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경건주의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Ritschl의 정의는 천박했다. 더 중요한 것은 Arndt와 스페너의 경건이 현저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에 주의 했어야 했다. Stoeffler에 의하면, 그들의 목표와 강조는 근본적으로 같았고 스페너가 영적 선조로 느꼈던 사람들과 거의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아 왔다고 한다. 1. Arndt의 생애 Arndt의 안할트(Anhalt)의 발렌슈타트(Ballenstadt) 근처에 있는 에데릿츠라는 시골에서 그곳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6년 그는 의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헬름슈타트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거기서 심한 병을 앓고 그는 의학에서 성경과 신학 연구에로 방향을 바꾸었다. 신의 연구에 보충을 하기 위해 그는 빗텐베르그(Wittenberg), 스트라스버그(Strassburg), 바젤(Basel)대학에서 청강하였다. 1583년에 그는 안할트(Anhalt)의 바데본(Badeborn)에서 목사가 되었다. 그해 그는 Anna Wagner와 결혼했는데 죽을때까지 38년 동안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Arndt는 그의 주요 목적이 머리를 채우는데 있기 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교화하고 확신케하는데 있었다. 설교자는 양떼를 먹이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영적 생활을 개발하는데 부지런해야하고 매일 기도하면서 하는 성경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교는 단순하고 정서적이었다. 꾸밈이나 가담이 없었다. 그의 설교는 듣기만 하는 사람을 만들기 보다 오히려 말씀을 행하게 하는 열심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Arndt는 한 사람의 진실되고 위대한 루터교회 목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증오하고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미지근한 사람들을 고무하고, 그들의 의심을 조심스럽게 일깨우고, 낙심한자들을 격려하고, 슬픈자들을 명랑하게 하고, 무식한자들을 교육하고, 사악한자들을 견책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는 1611년에 Celle시의 수석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621년 Arndt 자신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있었다. 그의 목사의 일은 논쟁으로 얼룩지었고 세례 전에 귀신 쫓는 의식을 버릴 것을 거부한 부분에 대한 칼빈주의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저술 활동은 그를 폭 넓은 태도를 가지게 했다. 그가 출판한 모든 것들은 영적과 실제 크리스챤 생활에 관계된 것이지만 신비적인 경향이 있다. 1597년 그는 루터가 출판했던 독일 신학의 신판을 편집하면서 긴 서론을 썼다. 그의 서론은 그 당시 많은 출판물의 논쟁이 되었던 것처럼 비판되었다. 독일 신학의 신판은 분명히 성공적이어서 1605, 1617, 1621년에 재 출판되었다. 이 일로 Arndt는 유명해지고 그의 "진정한 기독교"(True Christianity)는 매우 선풍적이었다. 이것은 1605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607년 개정판이 나왔다. Arndt는 추가로 그의 원래 원본에 세 권의 책들을 더하여 1610년 4권으로 된 [진정한 기독교]가 책으로 커다란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1621년 그가 죽기까지 약 20판이 재판되었고 18세기 말까지 125번 출판되었다. 그의 저서들은 중세에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신비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루터처럼 그는 독일 도미니카 신비주의자인 요한 타울러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독일 신학의 작가와 같이 생각되었다. Arndt는 [진정한 기독교]의 처음 세권의 책들에서는 타울러로부터 종종 인용하였다. 타울러의 영성은 실천적인 목사였고 이런 이유로 Arndt가 매우 밀접하게 따르게 되었다. 비록 Arndt가 신비적인 근거를 사용하였지만 그의 주제는 하나님의 신비적인 연합보다는 크리스챤의 새로운 생활이었다. 2. Arndt의 경건 Arndt는 항상 그 자신을 순수한 루터교회 교훈을 가르치는 자로 생각했다. 이 사실은 그가 쓴 모든 책에 나와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Augusburg Cenfession"과 "Formula of Concord"를 지지하는 루터교인이 되기를 원했다. 실제로 그가 그랬느냐는 보기에 따라 달려있으나 그의 강조는 역사적 루터주의와 모순되지 않는다. Arndt의 경건은 세가지 주제 즉 영적 쇄신과 새로운 삶을 함양하기 위한 수단들로 토론될 수 있다. a. 영적 쇄신 Arndt는 인간의 영적 쇄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어떤 루터교도 못지않게 깊이 확신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가 한번에 모든 이를 위한다는데 강조점을 두는 대신에 그것은 기본적인 것이지만, 그는 개인 안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강조했다. 경험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구원 체험을 강조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영을 통하여 개인 안에 참된 신앙을 움직인다고 Arndt는 믿었고 거기서 새사람이 나온다고 믿었다. 그는 이 새로워지는 과정을 비약하지 않는데 이 과정 속에 참된 회개가 있다고 한다. 이 회개에 대하여 그는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르셨다. 참되고 바르고 진심으로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전향하도록 불렀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회개 없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아무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도 영적 쇄신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요소이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절대 신뢰하고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서 Stoeffler가 밝히는 대로, 최선의 신앙이 역사적 행위를 신뢰하는 것이라는 그 당시인들과 많은 차이가 난다. 그의 신앙의 열정은 바로 이 실존적이고 주관적인데서 나오는 것이다. Arndt는 새로운 삶에 대하여 그 일반과정이 거듭남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영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에 의하여 급격한 이동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b. 새로운 삶 Arndt는 세례적인 거듭남으로 완전하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일반적인 루터교회의 개념에 대하여 반대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됨과 거룩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데에 강조를 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완전하다. 그런데 왜 거룩한 생활에 대해 염려하는가?"라고 어떤 유명한 설교자가 말하는데 대하여 Arndt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세례를 통해 완전하다. 그러 므로 하나님이 바라시는 데로 살아가자. Arndt에게 거듭남의 즉각적인 결과는 하나님과의 일치였다. 여기서도 그 당시 루터교회 경건주의자들과 차이가 난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는데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으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인격적인 수준에서 연합된다고 주장하면서 때때로 신비주의의 경향을 나타낸다. 연합 속에 그리스도인이 이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 인간성은 하나님의 조명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령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 하게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Arndt의 핵심 주제는 연합문제에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신비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는 "간구하옵나니 내가 새 삶을 위하여 세례를 받았음을 매일 기억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c. 새 삶을 함양하기 위한 수단 Arndt는 그리스도인이 신앙과 덕있는 생활 속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형상에 이르도록 성장해 간다고 주장하는 한편 덕있는 생활은 세상과 자신에 대해 죽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세상을 부인하기 보다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Arndt는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이세상 일과 분리하고 그의 영적인 안락을 가지고 해야할 일들을 숙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기도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연적인 삶이 정확하게 몸을 움직이듯이 그렇게 성령은 기도를 통해 영혼을 움직인다"고 그는 믿는다. Arndt의 저서들은 선풍적인 지지와 영향을 끼쳤으나 반면에 Lucas Osiander같은 사람들에 의해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Arndt가 이런 신학 논쟁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꿋꿋이 걸어 온 것은 그의 고난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모든 증거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증거들은 진리를 위해 고난 당하게 된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었다. B. 스페너(P.J. Spener) 1. 스페너의 생애 스페너는 1635년 1월 13일,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라폴트스타인의 알사티안(Alsatian)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라폴라스타인 공작의 청지기였으며, 후에는 시의회 의원이 되었다. 스페너는 일찌기 그의 어머니로부터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세례를 받을 때에 대모가 되었던 라폴트스타인가의 여인도 또한 그의 소년 시절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영향을 준 사람은 그가 전도사, 설교자, 그리고 상담역으로 활동하던 청년 시절에 그의 목사였던 요아힘 스톨(Joachim Stoll)이었다. 스페너는 청년 시절 어느 책이든지 닥치는대로 읽곤 하였으며, 그의 초기의 생애는 부친의 서재에서 읽은 책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성경 다음으로 아끼는 책은 요한 Arndt의 [진정한 기독교](True Christianty)라는 경건 서적이었다. Arndt는 기독교인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정통 교리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중세 후반에 있었던 신비주의를 모방하고 그것을 옹호하였다. Arndt는 독단적인 주지주의에 대항하여 엄격한 종교적,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였다. Spener는 무도회 등 다른 학생들이 즐겨하는 것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여성들의 모임에 참여하기를 꺼렸으며 친구들도 많지 않았다. 후일 그의 매부가 된 스톨의 충고에 따라 주일에는 세속적인 오락은 물론 신학 연구도 삼갔다. 1659년 여름 신학 연구 과정을 마친 후 그는 스위스의 바젤, 베른, 로잔, 제네바, 그리고 프랑스의 리용, 몽베리알, 독일의 튀빙겐과 프라이 부르그 등을 여행하였다. 그는 제네바에서 프랑스 개혁파의 교회생활과 그 조직에 대하여 잘 관찰하였다. 여행 후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20세의 여인과 결혼했으며, 프랑크푸르트의 암 마인 교회의 수석 성직자로 부임하였다. 그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사람으로서는 놀라운 정열로 일에 임했다. 그는 주일 오후에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여기서 그의 활동 중 보다 중요한 것은 평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장려한 것이다. 그는 교구민들의 요청으로 최초의 영성 개발을 위한 사적인 모임인 "경건회"(Collegia Pietatis)를 성립하였다. 그 모임은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에 스페너의 집에서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참석하였으며 각기 구별하여 앉았으며 발언권은 오직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모임은 기도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 주일의 설교에 대하여 토의하거나, 혹은 경건 서적을 읽었다. 후에는 성경을 읽고 그것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어 그는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를 지어 대답하고 완전한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는 하나의 강령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즉 신학 교육의 개혁, 스콜라 철학과 신학적 논증법에 대한 비평, 상호 신앙 고백적인 신앙의 자유에 대한 변호, 지성의 종교는 물론 심령의 종교에 대한 강조, 생활과 행위로 표현되는 신앙을 요구함, 완전론적인 경향을 지닌 것으로서 개인의 영성 배양, 평신도의 지위 향상, 경건 생활 함양을 위한 사적인 모임의 권장, 신자들의 영적 제사장직의 개발, 신비주의를 인정하는 것 등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20년간 사역을 한 후, 스페너는 삭소니에 있는 드레스 덴(Dresden)으로 임명되어갔다. 이는 여기서 A.H. Franke를 만났다. 이들 공동의 노력으로 모임은 점차 학구적인 연구에서 부터 내적 경건 생활의 배양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심한 반대자에 부딪혀 제대로 꿈을 달성하지 못하고, 1691년 베를린으로 가서 사망할 때 까지 14년 동안 지냈다. 그는 다정다감하고 민감하며 낙관적이었다. 그는 기독교 사상의 개혁가라기 보다는 기독교 생활의 개혁가였으며, 또한 기독교 교리사에서보다는 기독교 경건사에 합당한 인물로 평가되어진다. 그러나 비록 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이 실질적이었다고 해도 그가 신학적으로 무능하거나 발언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러한 면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며, 알지도 못하지만 기독교 사상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2. Spener의 경건 a. 성경 스페너에 있어서 갱신 사상은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의 그릇된 성서 이해를 지적하는데서 시작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기꺼이 이해한다. 그것은 믿는 모든 이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16).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듣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고 말씀이 믿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손이기 때문 에도 아니고 말씀 스스로 성령을 통해 그들을 깨우치기 때문이다. 성서 자체를 성령의 내주 속에서 사람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는 말씀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을 루터교 정통주의자들에게 알림으로써 Spener는 성서 자체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Spener는 모든 성도 스스로가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스로가 성경을 늘 읽어야 할 것이다. 특히 신약 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아니할 것이다. 가정의 모든 아버지들이 자신의 성경을 또는 최소한 신약을 손에 들고서 매일 약간씩 읽는다거나 또는 그가 글을 보지 못할 경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낭독하게 하면 될 것이다. 고 하면서 늘 성경과 같이 하고 성경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매일의 삶 속에서 나에게 새롭게 말씀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 공부를 위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한 바람직한 일은, 모든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성 경을 읽는 시간을 갖는 그것이다. 가능할 수만 있다 면, 모든 성도가 정한 시간에 공식적으로 교회에 모여 서, 설명없이 순서에 따라 성경을 소리를 높여 한 사람 씩 앞에 나와서 낭독하는 일이다. 물론, 이때에 중간 중간 짤막한 요지를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성경을 잘 보지 못한다거나, 전혀 읽을 수 없다 거나 또는 아직 성경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지 못한 성도들의 경건을 위해서 매우 유익할 것이다. 고 보면서 Spener는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을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나 대화 가운데서 서로 연구하는 그것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성경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 구하는 것이 무언가를 개혁해 보려고 할 때, 가장 최선 의 방책이라는 사실이다(설교를 청종하는 것 뿐만 아니 라, 읽고, 연구하고, 그에 대해서 대화하는 그러한 태 도를 여기에서 의미한다. - 시 1:2). 이러한 열심있는 성경연구는 앞서 말씀 드린 이런저런 성도의 모임을 통 해서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한 성도의 모임은, 그 모 임을 통하여 모든 선한 것들이 우리 가운데서 성장해야 만 좋은 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성도 들이 열심을 내어 그러한 성경모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생명의 책에서 그들이 기쁨을 발견할 수 있도록 협조 하며, 영적인 삶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충만해져 서, 그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경 공부 그룹을 통해서 Spener는 자기만의 독특한 생각을 여러사람들에게 나누기를 원하고 성경을 잘못 이해한 면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삼는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읽는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성경은 특정의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대상으로 하며, 특정의 개인이 아니라 만민을 대상으로 하는 책 이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가능한한 그 말씀을 독자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며, 또한 하나님께 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시거나, 또는 말씀을 직접 받 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야 한다. 고 하면서 Spener는 성경에 대한 관심과 성경의 중요성을 알림으로 갱신의 시발점을 삼았다. 2) 신생 신생(Wiedergeburt)의 주제는 스페너 교회학의 기초열쇠가 된다. 그의 교회학은 최근 몇년동안 점차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스페너가 분명히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정통 교리를 고수하는 반면 신생에 대한 어원적인 개념은 기독교 경험에 대한 그의 이해에 역동적인 요소였다. 스페너는 종종 신생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 그의 저작으로서 특별히 1696년 발간된 "신생에 대한 중대한 소고"(Hockwichtige Articul von der Wiedergeburt)는 신생이 스페너에게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Martin Schmidt에 따르면 Wiedergeburt가 스페너의 사상의 내면의 의미이고 경건주의 신학의 근원적인 주제이다. 스페너의 신생의 개념은 단순하게 그의 신학에 있어 한 기초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의 영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체 과정을 보게되는 중심 사상이 되었다. 그에게 있어 우선적으로 법적 용어나 은유보다는 유기적인 사용이 루터와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Thomas Kuhn의 의식 가운데서 전형적 변천(Paradigm Shift)인 이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이다. 스페너에 따르면 신생은 세개의 단계를 수반한다. 즉, 믿음의 시작, 칭의와 양자, 그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온전해짐 등이다. 혁신의 개념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즉 순간적이거나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단계와 분기점에 의해 표시되는 효과적인 과정에 있는 것이다. 스페너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그리고 갱신된 하나님의 백성의 신실함에 근거한 교회를 위한 더 좋은 때(besserer Zeiten)를 위한 희망을 끝까지 붙잡았다. 그는 교회 스스로 다시 태어나고 갱신되는 것을 보기를 고대했다. 그의 완전에 대한 강조는 단지 개인적인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관계적 완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영적 제사장직(The Spiritual Priesthood)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에서 스페너는 또다른 제안을 하는데 "영적 제사장직의 확립과 부지런한 실행"이다. 모든 영적인 기능들은 예외 없이 모두 공개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것들의 규칙적이며 공적인 실행이 이런 목적을 위해 임명된 목사들에게 맡겨졌다 할지라도, 그 기능은 비상시인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행되어야 한다. 특히 공적인 행위와 관계없는 일들은 집에서나 매일의 삶 속에서 모든 이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행해져야만 된다. 스페너는 다음과 같이 영적인 제사장직을 정의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과 그가 성령으로 모든 믿는자에게 기름붙기 위해 값을 지불하고 사신 권 리이며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 제물을 가져오고 가져와야 되는 것으로 인해서 그들 자신들과 다른 사람 들을 위해 기도하는 권리이며 각자가 자신들과 그들의 이웃을 교화하는 권리이다. 스페너는 영적 제사장직은 세례에 있어 신생과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그 개념은 고차원의 기독론이다. 즉, 만인 제사장설을 예수의 대제사장직으로 부터 연유된다. 스페너는 베드로전서 2:9에서 구분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갈라디아서 3:28에서 늙으나 젊으나, 남자나 여자나, 구속자나 자유자나 영적인 제사장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제사장의 이름은 모든 크리스챤들을 위한 보편적인 이름이다. 즉, 그들의 직무에 따른 적절하지 않은 제사장들인 목사들을 위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스페너는 영적 제사장들의 직무를 1)제사 2)기도 및 축도 3) 말씀 선포 등으로 세분하였다. 공적인 사역이 사역의 직무로 지정되어 있고 특별한 소명을 요구하는 반면, 모든 신자들은 이런 제사장적인 기능을 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들 사이에서 행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신자들은 자신들에게서나 그들 사이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된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설교자들의 가르침을 시험하게 될지도 모를 정도가 되어야만 한다. 영적 경건주의에 대한 스페너의 강조에 있어 하나의 흥미있고 교회학적으로 많은 면들이 그가 성찬식에 대해 만든 연결장치이다. 세례는 영적 경건주의에 들어가는 입구이다. 그리고 영성체, 그것은 사람의 축제이며 우리 모두 하나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우리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는데 참여한다. 제물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에 근거한, 영적 제사장은 성만찬적 친교이다. 영적 경건에 대한 이러한 강조에 있어 스페너는 개신교 교리에서 새로운 강조점을 둘 뿐만 아니라 사실상 제도적인 언어가 훨씬 덜하게 하여 더욱 생명력 있게 교회학을 개선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와 그의 신생에 대한 강조로 계속 주장되었다. 하나의 특유한 교회학이 스페너에게 교회의 갱신된 삶(실질적인 목회개선)을 위한 관심으로 출현한다. 신자들의 제사장적 교회는 그리고 그것이 성례전과 함께한 것으로 스페너의 교회학적인 사고 가운데 이 전형적 변형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개척되고 주어졌다. 4) 경건회(Collegia Pietatis) 스페너는 경건회를 교회구조에 대한 뚜렷한 강조점의 맥락 가운데에 두었다. 스페너에게 그런 경건회는 단순히 목회전략(비록 명백히 그것이 있었다 해도)만은 아니었다. 즉 그는 확고하게 그 개혁자들의 근본적인 교회학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스페너의 경건단체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의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결국 소그룹으로 활성화 되었다.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에서 스페너는 교회에 대한 호감을 두고 그처럼 가정에 모이는 것에 대한 그의 제안을 소개한다. 고대 로마시대에 사도적인 일종의 가정회합을 다시 소개하기 위한 제안이다. 고린도전서 14:16 - 20은 모델로서 보여주고 있다. 스페너의 견해에 있어 교회갱신의 가장 훌륭한 소망은 영적 제사장직에 대해 모아진 표현들의 맥락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다. 선포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토의하는 일(시편 1:2)은 어떤 일을 개혁하기 위해 중요한 방법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안에 좋은 모든 것으로 부터 씨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야만 한다. 비록 열심히 성실하게 함께 성서를 연구한다해도 신자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Stoeffler는 세포그룹을 비슷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경건회는 교회를 통해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 그 교회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을 반영하기 위하여 다시 가져와야만 되는 것이다.... (그들은)다른 이들로 부터 진실한 크리스챤들을 분리 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새로 운 개혁의 중요한 면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 다. 그들을 통하여 목사와 헌신된 집사들은 삶의 개혁 에 대한 교리의 개혁에 부언하기 위한 협의에 있어 작 업을 하기 위해 시도되어졌다.... 그 제도는 너무도 혹 독하게 스페너의 적들에 의해 이 개혁안의 함축성 때문 에 거부 되어졌다. 이상이 언급되었을 때 스페너는 그들의 훈련 사역에 있어 목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그리고 신자들의 제사직을 기능적인 실제로 돌리기 위한 교회 안에서의 지방 장로회의 형성을 옹호하였다. 스페너의 견해에 있어서 경건회는 그와같은 장로 의회의 직접적인 하나의 진전이 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국내적인 회중 교회조직이다. 본질에 있어 경건회 조직이 장로들의 의회에 의해 길러지고 통합되어졌다. 그런데 그 구조는 많은 새로운 기독교교회를 성장시키었고 과거 15년에 20년까지 북미에서 기획된 공동체를 성장시켰다. 결론적으로 스페너의 저작은 그가 신자들의 내면적인 영적 경험뿐 아니라 전체 교회의 갱신을 가지고 관심을 쏟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는 그와같은 일반적인 갱신을 성취하기 위하여 신학과 초보적인 전략을 개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적인 영적경험을 스페너의 제 1 차적인 관심의 촛점이었다. C. 프랑케 (A.H. Franke) 프랑케는 스페너와 마찬가지로 요한 Arndt의 경건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개신교회 내에서 경건주의의 결정적 관철을 이룬 사람이었다. 여기 이 경건주의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랑케의 생애와 할레 대학과 그의 경건 생활에 대해서 살펴보자. 1. 프랑케(Franke)의 생애 프랑케는(1663 - 1727)는 스페너보다 연하였다. 그는 스페너의 제자로서 1690년 이후에 경건주의의 유력한 인물 즉 그의 후계자로 간주 되었다. 그는 1663년 3월 22일 Hamburg에서 북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인구 35,000명의 매우 전통적인 자유주의 도시인 Lubeck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다소 안정된 생활을 하는 법률가였다. 그의 가정은 진보적인 정통 루터파의 하나였다. 그는 16살때 근처의 Erfurt대학에 진학하여 논리학과 순수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학기 후 그의 숙부가 그를 위해 장학금을 마련하였을 때에 그는 Kiel대학으로 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영향력 있는 역사 신학자이며 스페너의 친구이고 교회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신앙심이 깊은 K. Korthold의 집에 머물렀다. 프랑케는 Kiel에서 신학, 역사학, 철학, 물리학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3년동안 공부하였다. 그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영어를 공부하면서 몇달을 보냈다. 그는 총명한 학생이었으며 특히 언어학에 뛰어났다. 1684년 봄에 그는 정통 루터교의 중심부로 인정되던 이름난 대학인 Leipzig에 가서 J.B. Carpzov, J. Dornfeld, 그리고 다른 사람들 밑에서 1687년까지 공부하였다. 그는 1658년에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무급강사 - 공식적으로 대학에 등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학생수에 따라 보수를 받는 강사 - 로서 Leipzig에서 강의했다. 1691년 스페너의 소개로 새로이 설립된 Halle 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동양어 교수로 임명되어 36년 후 그가 죽기까지 그곳에서 있었다. Kiel과 Leipzig대학에 있는 동안 프랑케는 공부에 전념했으나 그의 신학적 흥미는 영적이기 보다는 학구적이었다. 나의 신학은 나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에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믿음이라기 보다는 죽은 과학이었다." Leipzig에서 강의하는 동안 1686년 7월 18일 Otto Mencken교수 집에서 처음으로 접한 "성경 연구 그룹"(a collegium philobiblicum)이라는 성경공부를 위한 소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8명의 젊은 학자들의 모임은 Carpzov교수의 시사아래 얼마간 모임을 시작하였으며 프랑케는 일찍 리더가 되었다. 학생들은 원어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프랑케가 그의 공부에 있어서 체계적인 신학보다는 오히려 주석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후 "성경연구그룹"(Collegium Philobiblicum)은 인기있게 되었다. 1687년 10월 프랑케는 Luneberg에 돌아가기 전 Hamburg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 기간동안 그는 스페너의 경건주의 [Speneriun Pietism]에 점점 감화되었다. 프랑케는 1689년 2월 Leipzig에 돌아와서 강의를 시작하였고, 그의 강의는 매우 인기있게 되었고 몇개의 "성경 연구 그룹" (Colleregium Philobiblicum)이 조직되었다. 곧 영적 자각이 학생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좋은 반응도 많았지만 배타성을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와 대학 동료인 Loscher교수는 "학생 모임이 교회의 예배 의식을 모독하였고 영적 자부심과 배타성을 조장하였고, 신학적 과학을 낮추었으며 주관적인 접근을 통해 영존을 낙담시켰다"고 호소하기 까지 하였다. 경건주의자 [anti-pietist]의 반대로 인해 1년 후 그의 교수직을 잃었다. 그는 그후 1692년 1월 Halle에서 교수와 목사로서 그의 착무를 시작하기 전에 Spener와 여러날을 보냈다. Halle에서 프랑케는 저급한 대학에서 처음으로 보수 없이 강의하면서 Halle의 작은 교회인 Clalucha에서의 목사직을 통해 생활하였다. 그는 그의 목사 생활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그의 영향력 아래서 다소 세속적인 Glancha의 마을 - "Halle의 저급한 나이트 클럽" - 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라우하에서 그는 청소년들의 바른 지도를 위해, 부족한 자본에도 불구하고, 1695년 빈민자 학교와 고아원을 세웠다. 할레의 그 고아원은 매우 보잘것 없는 시작이었지만, 몇년이 지나자 교육 기관, 경영 기관 그리고 기업체로 번성하게 되었다. 독일 땅에서 개신교의 거대한, 유일무이한 기관의 총체로서 성장하였다.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란케가 이 할레의 교육 도시에서 추구하였던 목적은 가장 먼저 '대학 강연'(Seminarium Universale)의 계획과 더불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세미나로부터 매년 수백명이 경건주의적으로 교육을 받는 능력있는 사람들로서, 독일의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신분의 사람들, 물론 유럽 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실질적 개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2. 할레(Halle) 대학 할레 대학은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경건주의 운동의 본산이었다. 할레 대학의 정책이 주로 스페너의 주장과 교육방침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었지만 실지로 행정적인 면에서 이를 실천한 사람은 프랑케였다. 그는 이 학교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에게 목사가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을 시키는 데 전념했다. 할레에서 그는, 새로운 교육 제도로 인해 유명해진 학교들을 세웠는데, 이 제도들은 경건주의에 젖은 분위기에서 실천됐다. 할레 대학에서 그의 업적은 선교 기관을 통한 가난과 부도덕의 생활에 빠져 있던 소외된 대중들에게 교육과 자선의 손길을 뻗친 것이었다. 고아원, 학교, 과부의 집, 여자방, 교사 양성학원, 화학 실험실, 약국, 책방, 인쇄소, 무료 숙박소, 빈민 수용소 등등의 기관들을 세워 내지 선교에 힘썼다. 이러한 기관들은 경건주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내지 선교 사업의 계획은 독일 교회에 새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고 또한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생명이 없는 하나의 전통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실제의 종교가 되게 하였다. 한편 내지 선교 뿐 아니라 할레 대학을 중심으로 외지 선교에도 힘써서 개신교 선교가 첫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일에 큰 공헌을 하였다. 같은 할레 대학의 교수들의 비난 속에서도 프랑케를 중심한 경건주의는 18C의 선교사업의 산실의 역할을 했다. 모이어(Moyer)는 '할레의 경건주의자들이 성공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이교도인 백성들을 위한 선교 사업을 시작한 일이다'고 말한다. 할레 대학은 18C 동안에 60명 이상의 선교사를 배출하였으며, 창설된 지 3,40년 만에 약 6,000명 이상의 경건주의 목사를 배출하여 독일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일꾼을 보냈다. 특히 모라미안 선교의 중심 인물인 진젠도르프도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고 세례를 받을 때, 스페너가 그의 대부가 되었으며 프랑케에 큰 영향을 받았다. 3. 프랑케(Franke)의 경건 독일 경건주의의 지도적 인물로서 스페너의 영적 아들이며 궁극적으로 그의 상속자인 프랑케는 본질에 있어 그의 지도자의 신학을 신봉하였다. 스페너처럼 루터-Arndt의 전통에서 자란 프랑케는 스페너적인 기질이 있는 경건주의 자였다. 프랑케의 경건주의는 세가지 강조점에 의해서 특별히 나타난다. 1) 회심의 경험에 특별히 강조점을 둔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 경험에 있어 심리학이라 불리는 것에 더욱 일반적인 강조점을 두었다. 2) 기독교 양육, 특히 제자라는 말에 있어서, 훈련과 생활을 위한 규칙을 강조하였다. 3)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선을 행하기 위한 의무 등이다. 이러한 강조점들은 일반적으로 경건주의에서 마땅히 발견되어져야 한다. 프랑케 신학의 중심 주제는 회심과 빈번하게 그것에 수반하는 특히 참회의 투쟁이었다고 종종 말해왔다. 이점에 있어 프랑케와 스페너 사이의 비교는 스페너의 Pia Desideria와 널리 유포되었던 Nicodemus(1701)로 비교될 수 있다. Pia Desideria처럼 Nncidenus는 종교적인 사역을 위해 의도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을 사용한다. 하지만 개혁을 제안하기 보다는 프랑케는 교회의 커다란 문제로서 인간의 두려움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두려움은 참기독교 신앙의 반대를 만들게 되었다고 Sdchmidt는 지적한다. 그리고 분열된 마음의 치료가 하나님의 깊은 경험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한다. 그 문제에대한 이 심리학적 공식화는 사상의 전체 방향을 결정한다. Manfred Kohl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스페너의 신생(Wiedergeburt)이 더욱 수동적인 의미의 말인 반면에 프랑케의 개념 현인 회심(Bekehrung)은 능동적인 언어이다. 계 해서 프랑케는 "참회"(Busskampf)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것은 영혼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구습의 사람과 싸우는 것이다. 즉, 그는 오직 아주 강한 출생의 고통만이 다시 말하면 Busskampf와 Rene(참회의 형태)가 새로운 사람을 그 낙원으로 가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몇몇의 작가들은 프랑케의 심리학적인 경향에 대해 주의력을 끌어 내렸다. 즉 그의 회심에 따르고 수반되는 과정과 내적 경험에 대한 촛점등에 대해서이다. 프랑케는 기독교에 있어 신생의 교리보다 더 중요한 교리는 없다
경건주의의 목회적인 적용(Pietism and Its Application in Minisrty)/ 목회 세미나/ 세미나 논문 자료/ 2013-05-27
경건주의의 목회적인 적용(Pietism and Its Application in Minisrty)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은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의 성서와 하나님의 은총 중심의 신앙 운동을 다시 일으킨 신앙부흥운동이었다. 경건주의자들은 참교리(die wahre Lehre) 보다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로서 해야할 신앙의 행위를 더 중요시 여겼으며 행위로 증빙되지 않는 신앙의 삶을 거짓 믿음으로 간주하였다. 이 운동의 발상지에 대하여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으나 운동으로서 정착을 하게 된 곳은 독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에서 경건주의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슈페너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철저히 교회의 갱신 그리고 루터교 내에서 성서중심적인 목회, 생활 속에서 경건의 실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속의 작은 교회\"운동, 주일성수, 교리문답교육, 선교와 사회봉사 사업이라는 새로운 목회상을 루터교회에 제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서적인 목회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봉사·교육·친교에 대한 구체적인 목회상의 실제적인 모습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목회의 틀을 통해 경건주의자들은 신앙의 열기가 식어있는 루터교 정통주의의 신학 아래 있는 루터교회에 영적인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 이 운동은 17세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유럽의 교회에 지속적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특히 19세기에 일어난 부흥운동은 이 운동의 지속적인 영향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경건주의의 정신과 운동을 계승할 필요가 있으며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역사적인 교훈을 발견하고 영적인 능력이 있는 교회로 발돋움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I. 서론: 경건주의의 개념과 특징 19세기 독일 루터교회에서 신루터주의(Neuluthertum)의 대표적인 신학자요 목회자인 뢰헤(Wilhelm Löhe, 1808-1872)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리에 있어서 종교개혁은 완성되었지만, 삶에 있어서 종교개혁은 미완성이라고 했다. 경건주의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승하면서 무엇보다도 기독자의 실천적인 삶을 중요시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주의는 정치사적으로 볼 때 30년 전쟁(1618-1648)을 종식한 1648년 베스트팔렌 종교평화협약으로부터 1806년 독일의 신성로마제국(das Heilige Römische Reich Deutscher Nation)의 몰락까지, 신학사적으로는 1675년에 출판된 슈페너의 \'경건한 소원들\'(Pia Desideria)을 기점으로하여 1799년에 발표된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의 \'종교에 관한 講話\'(Reden über die Religion)를 종점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분명 경건주의는 과거의 운동이며 사건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17·18세기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러한 과거의 운동을 그것도 우리 땅이 아닌 유럽에서 일어난 운동을 우리가 배우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이 운동이 오늘 우리의 목회 현장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으며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의 목회를 점검해보고 더 나은 미래의 목회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건주의에 대해 독일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①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 리츨 이전에도 경건주의에 관한 연구가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연구의 총체적인 결정판은 그의 \'경건주의의 역사\' (Geschichte des Pietismus, 1880-1886)에 나타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경건주의를 교회를 해체시키는 교회 밖의 작은 종교 집회(Konventikel)와 개인주의(Individualismus)의 정신으로 본다. 개인주의는 한편으로는 중세기의 신부(新婦) 신비주의의 종교적인 性愛로 나타났는데 특히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bhard von Clairvaux, 1091-1153)의 솔로몬의 아가서와 연관을 맺은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중세 수도원에서 세상에 속한 일을 초월한 금욕으로 승화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리츨은 경건주의를 루터의 종교개혁의 완성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완화된 재세례파이며 \"종교개혁의 좌파\"(linker Flügel der Reformation)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② 그륀베르크(Paul Grünberg): 傳記的이고 地域史적인 연구를 통하여 리츨의 연구에 대해 측면으로 공격을 하면서 3권으로 된 슈페너에 관한 전기와 슈페너의 업적을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Göttingen 1893-1906)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그륀베르크에 의하여 경건주의는 객관적인 구원의 선물에서 주관적인 구원의 확신으로 관심을 넓혔다. 그륀베르크에게 있어서 경건주의란 개인의 신앙의 삶과 윤리적인 검증을 위해 교리적인 이론이나 논쟁을 가치절하한 운동이었다. ③ 리츨과 그륀베르크 이후 경건주의에 대한 교회사적인 연구는 한편으로는 루터에게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성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았다. 루터에게 찾은 학자들: 칼 홀(Karl Holl, 1866-1926)과 그의 제자들인 히르쉬(Emanuel Hirsch)와 하인리히 보른캄(Heinrich Bornkam). 홀은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생활에 있어서 큰 전쟁들의 의미\'(Die Bedeutung der großen Kriege für das geistige und religiöse Leben des deutschen Protestantismus, 1915)에서 루터교 정통주의가 개혁에 대한 의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경건주의자 특히 슈페너와 프랑케는 루터에 접근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영성주의에서 찾은 학자들: 제베르크(Erich Seeberg, 1888-1944)와 그의 제자들인 벤츠(Ernst Benz, 1911 출생)와 슐라이프(Arnold Schleiff, 1907-1943). 제베르크는 경건주의자 가운데 신비적 영성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는 아르놀트(Gottfried Arnold, 1666-1714)에 관한 그의 저서인 \'고트프리트 아르놀트. 그의 시대의 학문과 신비주의\'(Meerane, 1923)에서 신비적 영성주의의 전례에 없는 위대한 의의와 원대한 힘에 대하여 확실하고 명백히 주장하고자 했다. 제베르크 자신의 위대한 발견은 경건주의의 선구자요 전승자로서 신비적인 영성주의(der mystische Spiritualismus)를 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硏究史에서 볼 때 우리는 경건주의가 두 개의 교회사적 사건에 기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경건주의는 16세기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중심으로 일어난 종교개혁 이후 또 다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이 교리면에서 완성을 보았다고 한다면, 경건주의는 삶에서 미완성의 종교개혁을 완성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경건주의자들은 루터의 로마서 서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그들이 진정 종교개혁자의 후예임을 천명하였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요 1장)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 기질, 감각, 그리고 모든 힘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들며, 성령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오! 믿음은 살아있고, 굳세고, 강력한 것이다. 믿음이 선한 일을 끊임없이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은 선한 행위들이 행해져야 될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고, 오히려 이미 선한 행위들을 했으며 언제나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경건주의자들은 살아있는 믿음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을 상기하고 다시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경건주의란 결국 종교개혁과 마찬가지로 초대 기독교적인 살아있는 기독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운동이다. 이들은 그 당시 舊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die altprotestantische Orthodoxie)와는 달리 \"교리\"보다는 \"실천\", \"직무\"보다는 \"성령\", \"외형\"보다는 \"능력\"(딤후 3:5)을 더 중요시 하였다. 둘째, 신비적인 영성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교인들의 영적 욕구에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진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루터교 내에서 성령에 관한 관심을 새롭게 일으킨 운동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교회사적 근원에서 우리는 경건주의 운동에 나타난 특징을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① 경건주의에서는 교회의 공예배 이외에 작은 동아리(?콜레기아 피에타티스, Collegia Pietatis?, 기도 시간, 교회 밖의 작은 기도 모임, 종교적인 사적인 모임)를 중심으로한 종교적인 모임이 생겨났다. 경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과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교회의 교리와 직무에 예속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경건에 속한 인식을 하고 엄격한 기독교인의 공동체에 속하는데 있었다. 구원과 은혜의 기관으로서 그리고 포괄적인 조직으로서 기성교회(Amtskirche)가 경건주의에서는 보완이 되면서 한편으로 또한 배제되었다. 이것은 성전 뜰만 밟는 대다수의 교인에 대해 자신들을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로서 여겼던 경건주의자들의 자율적이고 지역적인 결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트뢸취(Ernst Troeltsch, 1865-1923)가 말했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한 분파(sect)를 이루었던 경건주의자들의 교회 밖의 작은 종교집회(Konventikel)은 모든 신자를 포괄하였던 교회를 두 개의 그룹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신자들의 주관적인 결정을 교회의 근본 기초로 삼았다. 기도 시간은 경건주의적인 삶의 중심이되었다. ②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갱신과 내면화의 운동으로서 그리고 종교적인 개인주의로서 표현되어지는 경건주의에서 경건주의자라로 여김을 받고 싶어하였던 사람들이 인정해야 했던 확고한 정신적인 전통이 시작되었다. 1700년 이후 경건주의자는 교회사에 대한 경건주의적인 해석에 연관된 자 만이 될 수 있었다. 즉 슈페너를 종교개혁을 계속 수행하고 경건주의를 창시한 사람으로서 루터와 같은 위치에 두어야 했다. 뷰르템베르크에서는 특히 벵엘(J. A. Bengel, 1687-1752)을 슈페너의 참 유산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여겼다. 후에 경건주의자는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경건주의의 역사적인 \"아버지\"인 슈페너와 경건주의 운동의 또 다른 창시자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절대적인 권위를 요구했었던 각 지역과 지방의 지도자인 \"대부\"(Patriarche)의 종교적인 견해를 인정해야 했다. 경건주의에 있어서 다양한 경향들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감동 감화를 신뢰하는 개인들에 의하여 생성되었지만 후에는 각 그룹들 사이에 지도자들의 차이를 야기하게 되었다. 18세기에는 모든 종교적인 모임에서 성경 이외에 열심히 읽혀진 책들은 경건주의의 창시자들이 쓴 경건서적들 이었다. 성경은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조언자였다. 경건주의 혹은 경건주의적인 그룹들의 고유한 신학적인 경향은 경건 서적들에서 자리를 잡았다. ③ 경건한 자로서 종교적인 모임의 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종교적인 신념들과 정해진 생활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주관적인 요소가 아직도 역할을 하였다. 윤리적으로 살고 거듭난 사람으로 간주되어도 그는 아직 경건주의자가 아니었다. 교회에 예속되지 않은 기도 모임의 회원들 가운데에서 \"형제\"로서 불러지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져야 경건주의자였다. \"형제\"라는 호칭은 각성한 사람들의 영적인 공동체를 표시한 것이었으며, 슈바벤 지역의 농부들 뿐만 아니라 북부 독일의 귀족들도 포함되었다. 형제는 교회 밖의 기도 모임의 회원일 뿐만 아니라 다른 기도 모임의 회원이기도 했다. 종교적인 모임들은 시간과 지역을 초월하여 아주 널리 퍼졌으며, 이것들의 회원들은 서신과 방문들을 통하여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물과 같은 이들의 결사(結社)는 사회 구석구석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로써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형제들 사이의 깊은 신뢰 관계가 싹텄다. 이 관계가 대부분의 경건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들의 정치적인 활동에도 이용되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자녀들\" -여기에는 경건주의자들 외에 크리스챤도 포함되어 있음- 로부터 분리는 형제들의 소속감을 확고하게 하였다. 이들은 생활의 변화와 신앙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인식 아래서 살았으며 미지근한 기회주의적인 크리스챤, 교회 그리고 공적인 생활의 다른 모습들의 집단으로부터 미래에 구별되어져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경건주의의 반대자들이 위선과 교만으로서 낙인을 찍은 이 특수한 지위는 행동과 의복에서 나타났다. 비록 각 경건주의자들이 자주 그들의 중생에 대하여 의심을 하였지만 그들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확고히 신뢰하였고 후회와 회개를 통하여 죄를 극복하고 철저한 회심을 통하여 그리고 개인의 \"성결\"의 여러 단계를 넘어 영원한 구원에 이르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특징과 더불어 경건주의는 세 가지 점으로 요약될 수 있다: ① 경건주의는 여러 지역에서 교리의 증명을 실천적인 삶에서 요구하였던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앙이 참되려면 이미 이 세상에서 선행으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요청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지켜지지 않았다. 바로 뷰르템베르크에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정관파(靜觀派) 신비주의가 역사의 상당한 시대에 전체 경건주의 운동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② 경건주의 신학은 모든 경건주의적인 경향으로부터 모든 점에서 인정받을 만한 완결된 체계를 세우지 못했다. 경건주의 신학이 모든 시대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신학적인 가르침과 구별이 되지만 - 먼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그리고 계몽주의 마지막으로 자유주의 신학 - 경건주의 전통 안에서 각 경건주의의 대부들과 추종자들에 의해 다양한 신학적인 가르침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신학과 천년왕국설과 같은 중심 교리에 나타났다. 또한 경건주의자들의 종교적인 자기 이해도 다양하였다. 부분적으로 지방과 지역에 따른 경건주의의 대부들의 영향은 더 나아가 각 지역에서 여러 곳의 기도 모임과 공동체를 생기게 했고 이들의 회원들은 형제들로서 여겨졌지만 이들의 견해에서 볼 때 경건주의적인 신앙의 본질과는 구별이 된다. ③ 윤리적인 척도들과 경건주의자들의 생활의 변화는 각 세기마다 동일하지 않았다. 경건주의의 모든 경향에 있어서 외형을 강조하고 드물지 않게 엄격한 윤리에서 나타났던 \"세상 안에서의 금욕\"에 대한 이해가 상이하였다. 이 금욕은 각 시대의 상황과 윤리적인 척도가 생겨난 사회 계층의 생활 관습에 예속되었다. 경건주의의 모든 모임에서 사치와 방탕은 확실하게 거부를 받았다.   2. 경건주의의 발단과 발전 경건주의의 발단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논란은 계속되어 왔다. 경건주의를 유럽 전 지역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볼 때 경건주의의 발단을 지역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1. 영국 영국의 청교도 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는 경향이다. 영국은 대륙과는 달리 종교개혁이 신학적인 문제에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영국왕 헨리 8세(Henry VIII, 1509-1547)는 자신의 비합법적인 결혼 문제로 1534년 영국왕은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하여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정치적이고 법적인 혁명이지 종교개혁이 아니다. 메리(Mary Tudor) 여왕의 통치(1553-58)로 다시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시대에 개신교로 복귀하였다. 청교도 운동은 1559년에서 1567년 聖服論爭(vestiarian controversy) 기간 중에서 형성되어 진다. 영국 교회는 이미 스위스 제네바의 칼빈주의적 개혁정신과 재세례주의자들의 두 가지 경향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이 두 경향은 장로교와 회중교회를 탄생케했고 이들은 영국 국교회가 더 개혁되기를 원했다. 특히 개혁을 원했던 사람들은 성복논쟁을 통하여 성의와 예전에 잔존하고 있는 교황주의의 잔재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이 청교도들을 강력하게 억압하자 수 많은 사람들이 튜더왕조의 전제정치로부터의 도피처로 네덜란드를 택했다. 독일 헷센의 교회사가인 헤페(Heinrich Heppe, 1820-1879)는 \'경건주의 역사와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 있는 신비주의\'(Geschichte des Pietismus und der Mystik in der reformierten Kirche, namentlich der Niederlande, Leiden 1879)라는 저서에서 경건주의는 이미 16세기에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성행하고 있었던 퓨리타니즘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랑(August Lang)은 1941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청교도주의와 경건주의\'(Puritanismus und Pietismus)의 제3장에서 영국의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를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평가하였다. 퍼킨스는 경건주의적 청교도들의 초기 그룹의 핵심 인사로서 1557년 캠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자비생으로 입학하여 1584년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안수를 받은 후 성 안드레 교회에서 설교자로 일했다. 그는 경건하고 무흠한 생활을 했으며 그의 설교는 평이하지 않았지만 너무 학문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민들도 이해할 수 있는 경건한 설교였다. 슈퇴플러(F. Ernest Stoeffler, 1922 출생)는 영어로 경건주의에 관한 새로운 단행본(경건주의 초기 역사, The Rise of Evangelical Pietism, Leiden, Brill 1965; German Pietism during the Eighteenth Century, Leiden, Brill 1973)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퓨리타니즘부터 융-슈틸링(Johann Heinrich Jung-Stilling)까지 다루고 있다 2. 네덜란드 네덜란드에 그 기원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리츨은 그의 \'경건주의 역사\' 제1권에서 경건주의의 시작은 독일 보다는 네덜란드의 개혁교회가 더 빨랐다고 본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독일의 교회사가로는 호이시(Karl Heussi), 뢰베니치(Walter von Loewenich), 쿠어트 디트리히 슈미트(Kurt Dietrich Schmidt), 쿠룸비데(Hans-Walter Krumwiede) 등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개혁교회의 청교도적 교회 갱신 운동이 \"나더레 레포르마띠\"(nadere reformatie)라는 이름으로 푸치우스(Gisbert Voetius, 1589-1676)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나더레 레포르마띠란 17세기 초반부터 네덜란드에서 생활의 종교개혁을 통하여 교리의 종교개혁이 보완되는 종교적인 갱신 운동이다. 이 운동은 우트레히트 대학 교수인 로덴슈타인(Jodocus van Lodenstein)을 통해 \"제2의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했다. 로덴슈타인은 우트레흐트에서, 특히 해상권의 상승을 통한 홀란드의 경제부흥기 이후와 프랑스의 관습이 유입된 이후부터, 교회보다는 기독교적인 생활의 일반적인 타락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다. 로덴슈타인은 푸치우스와 독일 브레멘 출신인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 교수였던 코케우스(Johannes Coccejus, 1603-1669)의 영향을 받았다. 코케우스는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동맹으로서(기독교 강요 II, 9-11) 신약과 구약에 대해 이미 칼빈에 의해 발전되었던 교리를 하나의 완결된 \"동맹신학\"(Föderaltheologie, foedus=동맹)으로 완성하였다. 이 동맹신학에서는 世界史가 창조에서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까지 구속사(救贖史)로서 이해되고 있다. 은혜의 동맹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과 더불어 맺었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함으로 손상을 입힌 행위 혹은 자연동맹(창 1:26)에 뒤따르는 것으로 이미 \"원복음\"(Protevangelium, 창 3:15 기독론적인 주석)에 약속이 되어 있다. 구약 성경에 대한 진술이 유형적인 해석에 의해 그리스도에 연관을 맺게 되었다. 네덜란드 경건주의의 또 한 사람으로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가 있다. 라바디는 원래 프랑스 태생으로 예수회 회원이었다. 그는 어거스틴과 베르나르의 신비주의 그리고 파리에 있는 시토 수도원인 포르 로얄(Port Royal)의 얀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칼빈주의자들의 공동체 생활에 감명을 받고서 1650년 개혁교회로 개종하였다. 1659년 제네바의 개혁교회인 성 베드로 교회의 설교자로 일했다. 이 때에 제네바에 학문연구를 위해 머물고 있었던 젊은 슈페너(Ph. J. Spener)가 그의 설교를 들었던 것이다. 1666년 라바디는 네덜란드의 미델부르크 개혁교회로 부름을 받았다. 1668년 미델부르크에서 이탈하여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교회를 \"바벨론\"으로 간주하여 저주하고 교회 밖의 \"작은 교회\" (ecclesiola)를 세워 개혁교회에서 분리하여 나가자 추방을 당했다. 그는 암스텔담에서 각성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정교회를 세웠고 박해를 받고 있는 신비주의자들의 피난처인 헤어포트(Herford)에서 그의 추종자들의 공동체 생활의 광신적인 형태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추방을 당하자 독일 함부르크-알토나에 있는 메노니트파의 교회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경건주의적인 교회 밖의 종교 모임의 아버지의 하나로 여겨진다. 3. 독일 독일을 경건주의의 시발점으로 보는 견해이다. 리츨이 경건주의의 시작에 있어서 네덜란드가 독일보다 앞선 것에 대한 반박은 먼저 작세(Eugen Sachsse)의 \'경건주의의 근원과 본질\'(Ursprung und Wesen des Pietismus, 1884)에서 시작되었다. 작세에 뒤이어 로이베(Hans Leube, 1896-1947)는 \'정통주의 시대에 있어서 독일 루터 교회의 개혁 사상\'(Die Reformideen der deutschen lutherischen Kirche im Zeitalter der Orthodoxie, Leipzig 1924)이라는 자신의 교수 자격 취득 논문에서 이미 루터교 정통주의에서 개혁 사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독일의 경건주의의 시작을 프랑케가 라이프치히에서 일으켰던 경건 운동의 역사에서 찾고 있다. 독일의 경건주의의 시작에 관한 견해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아른트와 그의 \'참 기독교에 관한 4권의 책\'(Vier Bücher vom wahren Christentum, 1605-1610)을 경건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로는 슈페너, 슈퇴플러, 왜((Wilhelm Koepp), 샤텐만(Paul Schattenmann) 등이 있다. 둘째, 슈페너와 \"경건의 모임\"(Collegium Pietatis, 1670) 또는 그의 \'경건한 소원들\' (Pia Desideria, 1675)의 출판을 경건주의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이다. 마르틴 슈미트, ?만 등이 이 견해를 가지고 있다. 셋째,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의 라이프치히의 소요 즉 루터교의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와의 갈등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이다. 로이베가 이 견해를 가지고 있다. 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네덜란드 독일 -1879 헤페(Heinrich Heppe) 경건주의는 청교도주의에서 일 어난 운동 -1941 랑(August Lang) -1960 알란트(Kurt Aland) -1965 슈퇴플러(E. Stoeffler) -경건주의의 창시자: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 헤페, 랑, 슈퇴플 러 - 1880 리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사람 들: 호이시(Karl Heussi) 뢰베니치(W. v. Loewenich) 쿠어트 디트리히 슈미트 쿠름비데(H.W. Krumwiede) - 경건주의의 창시자: 로덴슈타인(Jodocus van Lodenstein, 1620-1677)-리츨 라바디(Jeande Labadie, 1610-1674) - 1884 작세(Eugen Sachsse) 리츨에 대해 비판: 로이베(H. Leube) RGG 제2판 마르틴 슈미트 RGG 제3판 - 경건주의의 창시자 아른트-슈페너 아른트-슈퇴플러 슈페너-리츨 이전 시대 슈페너-마르틴 슈미트 1675년 Pia Desideria 프랑케-로이베 프랑케-리츨   3. 경건주의의 목회적인 적용 1. 성서 중심의 목회 17세기에 루터교는 루터교 정통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표식(主標識)은 루터교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도입이다. 이것은 루터가 배격했던 것을 다시 끌어들인 것으로 혹자는 루터가 앞문으로 쫓아버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통주의 시대에 슬그머니 뒷문으로 다시 들어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경건주의는 다시 성경을 신학과 신앙적인 삶의 중심에 옮겨 놓았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의 목회 현실과 더불어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나라처럼 목회의 르네상스 시대가 있었을까 할 정도로 우리나라 교회는 목회에 관한 프로그램과 교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목회에 대한 방법이 너무 많다고 할 수있다. 목회에 대한 원전은 바로 성서이다. 여기에 길이 있고 방법이 있다. 그런데 오늘의 목회자들은 너무 많은 신학, 너무 많은 방법론에 얽매어 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성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리스도가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한 것처럼, 목회에 이 방법이 좋고 저 방법이 좋다고 귀를 솔깃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성서 이상 더 훌륭한 목회서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성서와 씨름하느냐이다. 남이 해본 것을 그대로 나의 목회에 적용하려는 것은 인스턴트 목회이다. 그러나 자신이 성서를 통하여 찾아내고 성서를 중심으로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일구어낸 목회는 인스턴트가 아닌 살아 있는 생목회(生牧會)이다. 그러므로 목회는 테크닉이 아닌 성서에서 모델을 찾아야 한다. 경건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의 사람이었다. 슈페너는 자신의 대표작인 \'경건의 소원들\'(Pia Desideria, 1675)에서 교회의 개혁을 위한 6가지 프로그램 가운데 맨처음에 성서를 열심히 읽을 것과 교회의 공예배 이외에 성서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드는 일(기도회 모임 제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 이외의 프로그램들: 신자들의 영적(만인) 제사장직의 실현, 기독교 신앙은 이론보다는 실천에 관한 것, 신학적인 논쟁은 필요한 경우로만 제한, 교회 개혁의 핵심으로서의 신학 교육의 개혁(체험있는 신앙은 배운 지식보다 중요), 설교는 신앙의 촉진과 열매를 위해 쓰여져야 하지, 설교자의 허영과 학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2.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 루터 이후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구원을 받는다는 명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해야 한다. 어떤 성도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사실 살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니 행동거지가 도저히 구원받을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이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믿고 행동은 세상사람들 보다 다를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목사님의 답변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이 문제는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끊임없이 질문되어지는 것 가운데 하나다. 이 문제에 대한 답으로 1520년 2월 루터는 종교 개혁적인 윤리에 관한 글인 \'선행에 관한 설교\'(Sermon von den guten Werken)에서 십계명에 의거하여 신앙선행에 관한 새로운 관련성을 제시한다: 최고의 선행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에서 성속(聖俗) 행위들 사이의 구별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경건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루터보다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슈페너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선행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거짓이요 믿음이라는 것은 선행에 의해 증명되어 진다는 것이다. 3. 교회 속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 슈페너의 공헌 중의 하나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프로그램인 \'기독교 구성원의 향상을 위해 독일의 기독귀족에게 고함\'(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에서 벧전 2:9을 근거로하여 주장한 만인 제사장직을 다시 주장한데 있다. 루터는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라고 했다. 슈페너는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직을 영적 제사장직으로 칭하고 이들이야말로 거듭난 사람들이며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목회자의 조력자들이지 목회자의 자리를 넘보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소그룹이 교회 안에서 활성화 될 때 교회가 산다. 이런 소그룹이 있어야 목회자가 미치지 못하는 구석구석에 손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성숙하고 부흥되며 개혁되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고 오락을 즐기고 볼링치러가는 소그룹이 아닌 모이면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경건 서적을 읽고 시험에 들거나 연약한 사람들이 있거든 권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모임들이 살아서 움직여야 한다. 또한 이들은 가정에서 가정의 성직자로서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이런 때에 참 교회가 이 땅에 더 많아지게 된다. 4. 주일성수 오늘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주일을 성수한다는 것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나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일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계명이다. 슈페너는 주일성수를 단지 주일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날은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므로 예배드리는 것은 물론이지만 노동과 상행위, 오락, 술마시는 일 등 육신과 세상을 위한 하는 일 모든 것을 금했다. 슈페너는 그 당시의 루터교회의 부패를 진단하면서 이 부패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신자가 주일 이외의 날을 거룩하게 보낼 수 없는 것이다. 주일을 구별없이 보내는 것은 바로 로마 카톨릭의 부정적인 잔재(ex opere operato: 성례전 특히 성찬식의 기계적인참여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가 루터교에 남아 있어서 예배만 참석하고 주일의 모든 의무를 이행했다고 여기고 주일을 아무렇게 보내는 당시의 신자들의 생활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이다. 슈페너는 이미 대학시절 부터 주일성수를 경건훈련의 기본으로 생각하고 이 날에는 세속적인 모든 일에서 떠나 -자신의 학업을 위해 공부하는 것 까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에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이 때에 실천했던 주일 성수로는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금욕적이고 경건한 서적들을 읽고 친구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명상시들을 지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였다. 5. 교리문답교육 루터와 그의 동료들이 작센지역의 교회와 학교를 탐방하면서 (1526-1530년) 얻은 중요한 결과는 주민들이 너무 무지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직자들 가운데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성직자들의 무지가 이러한데 일반 국민들의 무지는 아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탐방의 결실로 나온 작품이 바로 루터의 대·소교리문답(1529년)이다. 루터의 소교리문답이 어린이를 위해 씌여졌다면, 대교리문답은 바로 성인들, 특히 목사, 교사들을 위해 씌여진 것이다. 대·소교리문답은 종교서적일 뿐만 아니라 국민을 교육시키는 교과서의 역할도 한 것이다. 17세기에 슈페너는 다시 이 책의 중요성을 독일 국민에게 일깨워 준 사람이다. 그가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목사로서 일할 때 그는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과 어린이들에게 종교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직시하였다. 슈페너는 교리문답이 성인들에게는 설교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교리문답에 나오는 기본적인 교리를 모르면 설교에 나오는 교리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임을 주장하였다: \"마음의 밭은 가시가 자라고 무성하게 되기 전에 일찍 어렸을 때부터 갈고 씨를 뿌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어렸을 때 받을 수 있는 교리문답교육이었던 것이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궁정수석설교자로 있었을 때, 또한 베를린에서 교구 감독장으로 있었을 때 이 교리문답교육을 결코 그만둔 적이 없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리문답교육의 붐을 일으켰고 그의 이러한 교리문답교육의 열기는 전 독일로 확산이 되었다. 6. 선교사업 개인 심령의 영적부흥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의 교회와 국경을 넘어 사랑의 실천을 이제 국외로 까지 눈을 돌리게 되는데 이것은 해외선교에서의 눈부신 활약이다. 1) 할레(Halle)의 해외선교 프랑케가 할레에 세운 고아원과 프랑케의 영향력이 지대한 할레대학교는 기독교 선교지의 요람이었다. 할레에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되었다. 할레의 첫 해외선교는 1706년 남인도의 트란게바-트리키노폴리(Trangebar-Trichinopoli) 근처에서 시작되었다. 첫 선교사인 바르톨메우스 치겐발크(Bartholomäus Zigenbalg, 1682-1719)는 드레스덴에서 가까운 풀스니츠(Pulsnitz)출신으로 덴마크 식민 총독부의 심한 몰이해적인 반대를 극복하고 짧은 생애에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그는 교회와 학교를 세웠고 창세기부터 룻기까지 그리고 루터의 소요리문답을 타밀어로 번역하였다. 프랑케가 죽은 후에도 할레는 해외선교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오지에서 쫓겨났던 루터교 광부들은 프랑케가 죽은 지 7년이 된 1734년부터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인 조지아(Georgia)에 이주하였다. 할레는 이들에게 선교사를 맨 먼저 파송하였고 여기에서 선교사로 일했었던 대부분이 할레 출신이었다. 이민 온 광부들은 황무지와 더위 속에서도 부지런히 기독교 공동체를 일구었고, 이 공동체는 유럽 각지에서 온 인근 주민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초기에는 헤른후트형제교회와 깊은 연관을 맺은 영국 성공회에서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가 된 죤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이 공동체에 매력을 느꼈다. 할레의 선교활동에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유대인 선교이다. 유대인에 대한 선교는 이미 슈페너가 그의 대표작인 \'경건한 소원들\'에서 그의 종말론과 관련하여 언급을 한 바 있는데 할레의 경건주의에 와서 이 결실을 보게 된다. 물론 제2차대전 이후 독일에서 제3제국이 유대인에게 저지른 죄와 과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조명하면서 깊이 사죄하는 신학자들에게는 유대인에 대한 선교가 반유대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유대인 선교를 위한 젊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인내를 반유대적이라고 속단하기에는 무리라 생각된다. 할레에는 1728년 칼베르크(Johann Heinrich Callberg, 1694-1760)교수에 의해 유대연구소가 세워졌고 세계 시민으로서 유대인의 해방을 주도했었으며, 히브리어-독어책들을 찍는 독자적인 인쇄소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훈련원도 있었다. 여기에서 훈련받은 선교사들은 동부 독일과 중동부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파송되었다. 2) 친첸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선교활동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친첸도르프 백작(Nikolaus Ludwig Graf von Zinzendorf, 1700-1760)은 프랑케가 할레에 세운 학교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여기에서 \"이방인 선교\"에 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경건주의에서 독창적인 길을 개척하였다. 특히 그의 선교활동은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었다. 헤른후트 형제교회는 신앙상의 이유로 백작의 영지에 은신처를 쁹게된 수공업자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되었는데 이들은 해외선교에 헌신적이었다. 1732년 8월 21일 형제교회에서 제비 뽑힌 도버(Leonhard Dober)와 니취만(David Nitschmann)이 평신도 선교사로서 서인도로 가게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엔 다비트(Chrristian David)와 두 명의 형제가 그린란드로 파송되었다. 친첸도르프 자신도 1741-1743년 북아메리카에 머무는 동안 인디안 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1732년에서 1760년 사이에 226명의 헤른후트 형제교회 선교사들이 10개의 선교지에서 활동하였다. 헤른후트 형제들은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20년 동안 영국 성공회와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 이전에 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들이 놀라운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선교가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공동임무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1930년까지 헤른후트 형제교회(모라비아 교회)는 거의 3,0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교인수와 선교사의 비율은 12대 1이었다. 7. 사회봉사 사업 개인의 내면적인 신앙의 부흥은 인간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실천으로 나타난 것이 경건주의 운동의 한 특성인데 이것은 교회가 교회 안에 쌓은 담을 부수고 (이것을 필자는 \'교회의 교회주의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이라 표현하고 싶다) 그들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회에 실천하였다. 이 사랑의 실천이 경건주의자들에게는 살아있는 참믿음에 대한 증거이다. 1) 슈페너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사회사업 1669년 7월 슈페너는 설교에서 정부가 빈민구제의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빈민구제사업을 제안하였다. 또한 1674년의 설교에서는 거지에게 적선하는 것은 그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 없고 이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자리와 공동으로 거할 수 있는 집을 지어 줄 것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결실을 얻어 1679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 빈민, 고아 그리고 노동자를 위한 집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경건주의 운동이 사회에 보여준 관심과 경건의 실천으로 그 이후의 사회사업운동의 한 본보기가 되었다: 1693년부터 베를린에서 일어났던 빈민구제의 개혁에 대한 본보기, 1690년에 카셀에서 고아원이 설립됨, 1710년 슈트트가르트에서 고아원, 노동자의 집, 교화소가 설립되었다. 2) 프랑케의 고아원 설립과 빈민구제 슈페너가 경건주의의 이론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면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는 이것을 조직하고 실천하였다. 이러한 실천은 바로 그가 할레(Halle)에 세운 고아원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die Weltverwandlung durch Menschenverwandlung)라는 경건주의의 근본 목적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케가 세운 고아원에는 그가 세상을 뜬 해인 1727년에 2,234명의 어린이가 있었고 그 중에서 고아는 137명이 있었던 대규모의 고아원이었지만 그 시작은 아주 평범하게 시작이 되었다. 프랑케가 목회를 했던 할레의 관문에 위치한 글라우하(Glaucha)에서는 매주 목요일 마다 각집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이 적선을 받아갈 수 있었다. 프랑케는 매주 목요일 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목사관 문 앞에서 빵을 나누어 가지도록 배려를 했는데, 바로 그 때에 이런 만남을 영혼구원과 기독교 기본지식의 전달을 위해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 조그만 모임을 통하여 프랑케는 교리문답을 가르쳤고 기도로 마친 이후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프랑케는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이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음을 목격하고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회의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는 방문객이 잦은 목사관의 거실에 두개의 성구를 붙이고 그 밑에 상자를 두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일 3:1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는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 이 일은 1695년에 시작되었으며 1695년 부활절에 프랑케는 자신의 공부방 앞의 방에서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학교를 열었다. 이렇게 작게 시작한 학교는 확장되어 1695년 가을에는 네명의 고아들과 함께 고아원을 열게 되었다. 할레의 고아원은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간주되었고, 여기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선교사로서, 디아스포라(Diaspora) 목사로서, 외교관으로서 그들이 맡은 일을 통하여 경건주의의 정신을 독일 뿐 아니라 외국에까지 널리 펼쳤던 것이다. 4. 결론: 목회 현장에 대한 제안 한국의 개신교는 2,000여 년의 기독교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이제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역사가 짧은 교회이다.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올 때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19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은 간접적으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에 일어났다가 사라진 운동이 아니라 이처럼 그 유산을 남긴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경건주의는 기독교 진리의 실천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고 이 진리의 실천의 힘이 영적인 힘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간파한 것이다. 이 사상적인 영향은 부흥운동에서도 볼 수 있는데 특히 한국 개신교의 초기 선교활동은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 당시의 한국의 개신교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교회였다.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뿐만 아니라 사회개혁의 실천은 바로 교회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것은 야고보서 1장 27절의 내용을 실천하는 교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개신교도가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에서 인구비율로 볼 때 개신교가 가장 많은 한국의 실정은 어떠한가? 신자의 수적인 증가와 함께 범죄와 도덕적인 타락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한국교회의 영적인 능력의 상실과 신자들의 경건의 실천이 없기 때문이며 가장 큰 요인은 루터가 말한 것처럼 \"성직자들의 타락\"에 있다. 슈페너는 교회가 부패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성직자가 부패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부패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물질과의 결탁에서 왔음을 교회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때에 목회 현장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를 촉구하는 교회가 되고 회개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면벌부(indulgentia)에 대한 95개 논제를 내걸었을 때에 제1항은 바로 회개의 참의미에 대한 것이다. 회개는 감정적이거나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기독인의 전생애에 걸쳐서 해야할 일이다. 둘째, 소유에 대한 포기 내지는 철저한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1524년 루터는 \"상업행위와 이자놀이\"라는 글에서 초기 자본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이 비판의 신학적인 핵심은 모든 것을 자신만을 위해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심이었다. 우리는 소유에 대하여 수도사적인 청빈이 이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시대는 수도사적인 청빈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제어하지 않은 한 결국 멸망의 길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오늘의 기독교인에게 그러므로 요청되는 것은 기도할 때 마다 \"주시옵소서\" 라는 간청보다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라는 소원이 진정한 기도로 자리잡아야 할 때다. 내가 죽지 않고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도서목록 1. 원자료 Die 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BSELK), hg. im Gedenkjahr der Augsburgischen Konfession 1930, Göttingen: Vandenhoeck &Ruprecht, 198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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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외경 및 위경 연구/ 2013-02-17
구약 외경 및 위경 연구/ 박동현/ 장신대대학원 6.1. 구약 외경 및 위경에 관련된 일반 지식 6.1.1. 무에서 창조하심(creatio ex nihilo) 하나님이 온 누리를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것이 기독교 창조 교리의 중요한 내용에 속하는데, 그 근거로 보통은 라틴어 불가타 구약 외경 마카베오하 7장28절을 든다. 거기에 보면 주전 2세기 전반에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없애려고 무서운 박해를 하던 시리아의 임금 안티오쿠스 4세 앞에서 아들 일곱과 마찬가지로 순교하는 한 어머니가 순교 직전의 막내 아들에게 하는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얘야, 내 부탁을 들어 다오. 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 난 것도 마찬가지다(공동번역). 6.1.2. 이사야의 순교 이사야가 므낫세 임금 때 톱에 썰려 순교했다는 내용은 구약 위경 '이사야 순교기' 5장2절에 나온다. 이사야가 톱으로 썰리고 있는 동안에, 베히라가 거기 서서 그를 고발했고, 거짓 예언자들이 모두 거기 서서 이사야를 비웃고 기뻐했다. 6.1.3.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 마카베우스>(Judas Maccab!aeus) 헨델의 오라토리오 <유다 마카베오스>는 마카베오상하의 내용을 근거로 한다. 우리 찬송가 155장, '주님께 영광'이 그 가운데 한 곡이다. 6.2. 구약 외경과 위경이 구약 또는 신약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되는가? 구약과 신약에 직접 나오지는 않으나 신구약을 잘 이어주는 내용이 더러 들어 있어서 성경을 조금 더 넓은 틀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마카베오상하서 같은 경우는 이른바 신구약 중간 시대(아래 6.3.2 참고)의 유다 역사를 잘 알려 주는데, 특히 다니엘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또 유다서 9절에서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암시하는 '모세의 승천기' 같은 책들은 구약에서 자세히 말하지 않아서 궁금했던 바들을 다룬다(아래 6.5.2 참고). 문제는 외경이나 위경에 적힌 것을 사실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도 될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6.3. 외경 및 위경이란 무엇인가? 6.3.1. 외경과 위경이란 낱말의 뜻 (1) '외경(eaIe)'과 '위경(eEIe)'이란 한잣말은 각각 '성경 밖의 경전'과 '거짓 경전'을 가리키는가? 어떤 학자들은 이 둘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고 '가경(E£Ie)'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가짜 경전, 경전 비슷하지만 실제는 경전이 아닌 것'을 뜻하는가? 우리말 큰사전에서는 '외경'이 올림말로 나와 있지 않고, '외전'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시 '경외성서'를 보라고 한다. '경외성서'는 '전거를 믿을 수 없다 하여 성서에 수록되지 아니한 30여 편의 문헌. 구약외전과 신약외전으로 나뉜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위경'에 대해서는 다시 '경외성서'를 보라고 한다. (2) 이 두 낱말은 <아포크뤼파>(ajpovkrufa)와 <프슈데피그라파>(yeudepivgrafa)라는 헬라말에서 비롯된 서양말들의 번역인데, 이 두 헬라말의 뜻은 각각 '숨겨놓은 것[=책]들'과 '가짜 이름이 붙은 글들'이다. 앞 경우는 한편으로 일반인들은 잘 이해할 수 없이 신비하다는 좋은 뜻에서 '숨겨놓은 책들'이라 한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고 이교적이어서 '감추어놓은 것들'이라는 부정적인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뒷 경우는 책을 쓴 사람이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남의 이름, 특히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름난 사람들(아브라함, 모세, 에녹 등)을 자기가 쓴 책의 저자로 썼기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외경과 위경은 개신교의 정경에 들어오지 못한 책을 가리킨다. 천주교에서는 외경도 '제2경전'(Deuterocanonical)이라 하면서 정경에 넣는다. 6.3.2. 신구약 중간 시대 문헌과 어떻게 다른가? (1) 신구약 중간 시대라 할 때, 이를 더러는 개신교 성경 번역본의 전통을 따라 구약의 마지막 자리에 있는 말라기와 신약의 첫머리에 나오는 마태복음 사이의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여 주전 사오백년 간을 그 기간으로 잡기도 한다. 그렇지만, 구약 성경에 들어 있는 책의 배열 순서와 그 생성 연대의 순서는 다르고, 또 이즈음에는 보통 다니엘서가 주전 2세기 전반에, 구약 성경 가운데서는 맨 마지막으로 생겨났다고 보기 때문에, 실제로 신구약 중간 시대는 대강 주전 200년과 주후 100년 사이의 시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외경과 위경에 속한 책들이 대부분 이 기간에 생겨나기도 했지만, 그 뒤에 나온 것들도 있다(아래 6.5.4 참고). 또 이 300백년 동안에는 외경이나 위경에 속하지 않는 책들도 생겨났다. 이리하여 맥나마라 같은 학자는 이 기간에 나온 비정경 문헌을 통틀어 신구약 중간 시대 문헌이라 부르면서, 구체적으로는 묵시 문학, 유언 문학, 쿰란 공동체의 문헌, 기도문, 헬라 유대 문헌, 랍비 유대교 문헌의 여섯 가지로 크게 나누어 다룬다. (2) 문헌의 출처를 따져 말할 경우에는 이 기간의 문헌을 그냥 유대교 문헌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그럴 경우 이는 다시 크게 쿰란 문헌(쿰란 동굴 말고도 사해 근처 다른 유대 동굴에서도 사본들이 나왔으므로 더러는 사해 사본 문헌이라고 한다)과 랍비 문헌으로 둘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쿰란 문헌에는 외경 위경 사본 뿐만 아니라 쿰란 공동체 자체의 생활에 관한 책들과 구약의 여러 책에 대한 주석서들과 찬송시 기도문 예배문 같은 것들도 있다. 랍비 문헌은 주로 구약 해석서들이다. 6.3.3. 외경과 위경의 권위와 가치 외경과 위경을 정경에서 구별해낸 것은 종교 개혁자들이다. 마르틴 루터는 신앙에 표준적인 '성경과 같이 볼 수는 없지만 읽어서 쓸모 있고 좋은 책들'이 외경이라 했다. 위경은 외경보다도 가치가 더 떨어져 그저 참고해 볼 만한 글들이다. 6.4. 구약 외경 6.4.1. 구약 외경의 정의, 범위, 위치, 분량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지만 헬라어 칠십인경의 전통을 대체로 따른 라틴어 불가타에 들어 있는 문서들로서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이 본격적으로 정경에서 구별해 내어 외경이라는 이름 아래 따로 모아 둔 책으로(아래 8.4.2 참고), 공동 번역에서는 토비트, 유딧, 에스더 추가 부분,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추가 부분(세 아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뱀),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의 9권을 구약과 신약 사이에 따로 묶어 두었다. 일반적으로 현대 천주교 성경에서는 이 9권의 외경 가운데 독립적인 책인 7권은 각각의 문학적 성격이나 역사적인 관련성을 따라서, 토비트와 유딧은 느헤미야와 에스더 사이에, 마카베오상하는 에스더 다음에, 지혜서와 집회서는 아가서 다음에, 바룩은 예레미야 애가 다음에 둔다. 에스더와 다니엘에 덧붙는 부분은 그 문맥에 맞게 들어가 있다(아래 8.4.3.1 참고). 아무튼 이렇게 볼 경우 오늘 천주교의 구약 정경은 46권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더러는 바룩서를 다시 좁은 의미의 바룩서와 예레미야의 편지의 둘로 나누어 따로 나누고, 다니엘서 추가 부분도 셋으로 구별하여 각각 한 책으로 헤아릴 뿐만 아니라, 불가타의 에스드라스 삼서(=칠십인경의 에스드라스 상), 칠십인경에는 없지만 불가타에 들어 있는 에스드라스 사서와 므낫세의 기도까지 외경에 넣기도 한다. 이럴 경우 구약 외경은 모두 15권이 되는데, 그 분량은 모두 183장이어서 히브리어 구약 929장의 5분의 1 조금 덜 되고, 신약 260장의 3분의 2가 넘는다. 그렇지만, 최근 챨스워스 같은 학자가 주장하듯이 불가타에만 있는 두 권은 위경에 들어간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6.4.2. 구약 외경의 언어와 역사 (1) 헬라어로 쓴 지혜서와 마카베오하서를 빼고는 모두 셈말로 적혀져 있다. (2) 초기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이 책들을 권위 있고 영감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이즈음에 이르러 유대교에서는 외경을 정경으로 여기지 않는다. (3) 기독교 성경 번역 역사에서는 4세기 제롬이 구약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라틴어로 옮기면서 헬라어 정경에 덧붙어 있는 것들을 '외경'이라고 불렀고, 서방 교회는 나중에 이 불가타에 외경 부분을 다시 넣었다. 루터와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외경을 정경 가운데 넣지 않은 까닭은 외경의 어떤 부분이, 이를테면 마카베오하 12장43-45절이나 토비트 따위의 책이 각각 연옥설이나 공적설 같은 천주교 교리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천주교회는 1546년 트렌트 공의회에서 개신교에서 말하는 외경도 기독교 정경의 한 부분이라고 선언하였다. 6.4.3. 구약 외경 각 책의 내용과 연대 구약 외경은 책에 따라 역사, 묵시, 지혜, 교훈 등 여러 가지 문학적 성격을 띠는데, 그 내용과 생성 연대를 대강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6.4.3.1. 정경에 있는 책에 덧붙은 부분 (1) 에스더 추가 부분 헬라어 성경의 에스더에서는 다음 여러 가지 내용이 덧붙어 있다. 모르드개의 꿈(1장 앞에 18절),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라는 아하수에로의 칙령(3장13절과 14절 사이 7절),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전해 온 말(4장8절과 9절 사이 3절),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4장17절과 5장1절 사이 29절),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임금을 배알하게 됨(5장1절과 2절 사이 9절과 5장2절과 3절 사이 4절), 유대인의 복권에 관한 아하수에로의 칙령(8장12절과 13절 사이 24절), 9장19절과 20절 사이에 1절, 모르드개가 꾼 꿈의 해석(10장3절 뒤에 11절)이 그것이다. 이 추가 부분들은 주후 70년 이전에 생겨난 것이 분명하지만, 주전 167-114년 사이 서로 다른 때에나 또는 주전 1세기 어느 때에 덧붙었을 것이다. 이 추가 부분을 쓴 사람들은 유대교를 변호하고 에스더서에 빠진 - 가장 중요한 것은 - 하나님의 이름, 여러 가지 신학적인 낱말이나 개념을 보충했다. 이를테면 구원은 이제 에스더가 보인 용기의 산물이 아니라 에스더의 신앙 때문이라는 식이다. (2) 다니엘서 추가 부분 다니엘 3장23절과 24절 사이 68절에 걸쳐 길게, 불길 가운데서 다니엘의 친구 아사랴가 부르는 찬송('아사랴의 찬송')과 또 세 친구가 함께 부르는 찬송('세 젊은이의 찬송')이 나오고, 맨 뒤 12장 다음에 수산나에 대한 이야기(64절 분량) 및 벨과 뱀[또는 용]에 대한 이야기(42절 분량)이 들어 있다. 아사랴의 기도는 독자들의 관심을 악한 임금에게서부터 순교에 직면한 유대인들에게로 돌리게 하면서,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시고 이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점을 강조한다. 수산나 이야기는 덕망 높은 여인에 관한 것인데, 두 노인이 수산나에게 욕정을 품지만 수산나가 이를 거절하고, 이에 그들이 수산나를 고발하나 다니엘이 반대 심문에서 그들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내고 수산나를 건져낸다는 이야기이다. 벨과 뱀의 이야기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우상 벨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것은 우상이 아니라 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을 다니엘이 어떻게 증명하는지를 묘사한다. 다른 하나는 다니엘이 우상을 부순 죄로 사자굴 속에 들어가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예언자 하박국이 천사의 지시와 도움을 받아 다니엘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다니엘은 풀려난다는 이야기이다. 이 추가 부분들은 주전 165-100년에 생겨났을 것이다. 6.4.3.2. 별개의 책으로 된 외경 (1) 토비트(14장 분량) 주전 180년 경 저작되었을 이 책에는, 특히 하나님은 율법에 충실한 자들을 참으로 도우신다는 점을 가르치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등장 인물로는 니느웨에 사로잡혀 사는 의인 토비트, 그의 아내 안나, 그의 아들 토비아, 잇달아 남편 일곱을 잃은 신부 사라, 첫날밤에 사라의 신랑들을 죽이는 악한 귀신 아스모데오, 이를 물리치는 천사 라파엘이 나온다. (2) 유딧(16장 분량) 주전 150년 경 저작되었을 유딧서는 여걸 유딧이 앗수르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물리치고 그의 목을 자름으로써 자기 조국을 어떻게 구해내는지를 알려 주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특히 침략해 오는 적으로 드러나는 악을 거부하고 토라에 복종하도록 유대인들을 격려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9장에 나오는 유딧의 기도에 보면, 놀랍게도 말로 원수를 속이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3) 지혜서(19장 분량) '솔로몬의 지혜'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주전 1세기 경에 쓰인 듯한 이 책에는 헬라적이고 애굽적인 개념과 유대의 전통 지혜론이 뒤섞여 있다. 잠언에서 볼 수 있었듯이 이 책에서도 지혜가 의인화되어 있다. (4) 집회서(51장 분량) '(예수 벤) 시락(의 지헤)서'라고도 불리는 이 책을 '집회서'(Ecclesiasticus) 곧 '교회의 책'이라고 한 것은 기독교회의 전통을 따른 것인데, 이 책은 주전 180년 경 예루살렘의 보수적인 스승이 지은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유대교를 변호하고 헬라 문화를 비판한다. 성전과 율법을 공경하고, 의롭고 자비로우신 한 분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 그 중심 주제이다. 그 히브리어 사본들이 마사다에서 발견되었다. (5) 바룩서(6장 분량) 예레미야의 친구이자 비서이자 제자인 바룩의 이름이 붙어 있는 이 책은 주전 1,2세기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데, 마지막 6장은 '예레미야의 편지'로 따로 다루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말로 시작하여, 지혜를 찬양하는 시문을 거쳐, 예루살렘으로부터 어떤 탄식 소리가 들리는지를 묘사한다. 6장의 헬라어 단편 사본이 쿰란 제7동굴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주전 100년 경에 생긴 것으로 보이고, 그 원본은 아마 주전 300년경 어느 때에 저작되었을 것이다. 72절이나 되도록 길게 쓴 이 편지는 우상을 두려워하거나 숭배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내용과 형식의 글인데, 예레미야 10장1-16절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6) 마카베오상(16장 분량) 주전 2세기말에 저작되었을 이 책에서는 마카베오 집안이 군사적인 업적을 세워 요한 히르카누스의 통치에 이르게 된 것을 칭송한다. 저자는 하스몬 왕조와 친한 사람이지만, 순교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은 주전 2세기 팔레스티나 역사를 연구할 때 쓸 수 있는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7) 마카베오하(15장 분량) 마카베오상의 연속이 아니라 그 1-7장의 내용을 다른 식으로 자세히 다루는 마카베오하는 주전 2세기 말이나 1세기 초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2:19-23에 따르면, 이 책에서는 키레네 사람 야손이 쓴 다섯 귄짜리 역사의 개요를 간추려 다룬다. 그 실제 내용을 살펴 보면, 이 책은 마카베오상보다 훨씬 더 신학적인 성향을 띠면서 몸의 부활과 순교의 효력과 기적의 계시적인 차원을 강조하고, 하스몬 왕조에 대해서는 호의를 품고 있지 않다. 6.4.3.3. 칠십인경에 들어 있지만 위경의 범주에 넣을 책들 (1) 에스드라스 상(불가타의 에스드라스 3서, 9장 분량) 주전 150-100년에 생겨났을 이 책에서는 역대하 35장1절-36장23절과 에스라서와 느헤미야 7장38절-8장12절을 새롭게 쓰려고 시도한다. 곧 요시야 통치 중기로부터 에스라 개혁의 절정기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에스드라스 상 3장1절-5장6절은 구약과 상관 없다. 이 책은 에스라를 '대제사장'으로 높이고 성전을 찬양하며 스룹바벨에 집중하는 경향을 띤다. (2)(3) 마카베오 3서(7장 분량)와 4서(18장 분량)는 각각 주전 1세기와 주후 1세기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4) 솔로몬의 시편(18장 분량)은 주전 1세기의 여러 시를 모아둔 것으로 보인다. 랄프스가 엮은 칠십인경에 보면 또한 시편 다음에 '송시'라는 책 이름 아래 14개의 시문을 모아 두었는데, 그 내용은 신 구약 여러 곳에 들어 있는 기도문과 찬송시와 므낫세의 기도이다. 6.4.4. 구약 외경의 중요성 구약 외경에 속한 책들이 비록 그 질에 있어서 정경에 속한 책들보다 떨어진다 하더라도, 종교 개혁 이전까지는, 그러니까 기독교 초기 역사 1500년 동안이나 기독교 정경의 한 부분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책들을 소홀히 볼 수만은 없다. 6.5. 구약 위경 6.5.1. 구약 위경의 정의, 범위, 종류 (1) 초기 유대교(주전 250년-주후200년)와 초기 기독교 안에서 생겨나서 이 두 종교의 근원에 대한 이해에 본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들이지만 정경과 외경에 속하지 않는 책들을 가리켜 위경이라 한다. 이런 책들에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라 등 옛 인물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수가 많다. 위경에 속한 책들의 숫자는 확정되어 있지 않아, 최대로 잡으면 65권까지 헤아릴 수 있다. (2) 그 문학적인 성격을 따라 종류별로 나누어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ㄱ. 묵시 문학서: 에녹1,2,3,서, 바룩2,3서, 에스라4서, 아담 묵시록, 아브라함 묵시록, 엘리야 묵시록, 에스라 묵시록, 에스겔 묵시록, 스바냐 묵시록 등 ㄴ. 유언 문학서: 12족장 유언서, 아담 유언서, 삼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언서, 모세 유언서, 욥 유언서, 솔로몬 유언서 ㄷ. 구약 내용의 확대 또는 전설: 아담 하와 전기, 야곱의 사닥다리, 요셉의 역사, 바룩4서, 이사야 순교승천기, 희년서(Jubilees), 얀네와 얌브레, 예언자들의 생애,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등 ㄹ. 지혜나 철학 문헌: 마카베오3,4서, 아히카르 등 ㅁ. 기도, 시, 송시(Ode): 야곱의 기도, 요셉의 기도, 므낫세의 기도, 솔로몬의 시편, 솔로몬의 송시 등 ㅂ. 유대 헬레니즘의 저작 단편들: 비극작가 에스겔, 주석가 아리스테아스 등 6.5.2. 내용 위경에 속한 책들은 주로 구약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구약의 유명한 인물들이 받은 묵시라고 하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구약의 내용을 다시 고쳐 쓰거나 확장한 경우도 있고, 다윗의 시편을 본따 지은 시들도 있고, 어떤 책들은 유대 지혜 문헌 형식을 갖춘 작문이기도 하다. 구약에서 궁금한 내용들, 이를테면 낙원, 아담, 하와, 멜기세덱을 다루는 수가 많다. 초기 유대교의 민담이 지니고 있던 힘을 반영하는 수도 더러 있다. 6.5.3. 위경의 지은이들이나 엮은이들 이런 책들 가운데에는 유대인들이 지었거나 엮은 책들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 유대인들이 쓴 것을 나중에 기독교인들이 확장했거나 다시 쓴 책들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주후 70년 이전의 유대 문서나 구전에 의거하여 기독교인들이 쓰기도 했다. 이런 범주에 속하는 어떤 책이나 글이 본디 유대교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는지 확정하기가 때때로 쉽지 않다. 초기 기독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었고,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구약 및 그 관련 문서들을 풀이했다. 때때로 유대교 문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하려고 편집하기도 했다. 보통은 기독론적인 내용을 덧붙였다. 6.5.4. 연대 기독교에서 비롯된 위경 문서들은 대강 100-400년 경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위경 문서들은 주전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머지는 예루살렘이 파괴된 주후 70년부터 미쉬나의 편집이 마무리된 200년 경 사이에 생겨난 듯하다. 가장 나중에 생긴 것들은 4,5세기 것들이다. 희년서와 에녹1서와 12족장 유언서는 사해 사본에 들어 있어서 그 연대를 추정하게 해 준다. 희년서와 에녹1서는 주후 70년 이전에 생긴 것이 확실하다. 12족장 유언서의 헬라어와 아르메니아 교정본(recension)는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나 셈말로 된 그 초기 단편들은 적어도 이 문서가 부분적으로는 유대교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6.5.5. 권위와 가치 위경 가운데 숱한 책들을 초기 유대인들은 구약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겼다. 이는, 이런 책들에는 예언이 잔뜩 들어 있으므로, 아담,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에스라, 또 예언이 사라졌다고 생각된 시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쓴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팔레스티나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의 삶, 특히 주후 70년 예루살렘 파괴 이전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재건하는 데 주 자료가 된다. 신약에서 예수께서 쓰신 상징과 용어, 이를테면 '하나님의 나라', '인자', '생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귀신(demon)인가, 마귀(devil)인가?/ 2013-05-11
귀신(demon)인가, 마귀(devil)인가? 이준승 목사 I. 귀신(鬼神-demon) 신드롬 세계 도처에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귀신들은 대체로 어둠 속에 거하면서 무서운 존재이며, 때때로 사람에게 나타나기도 하고 위해(危害)를 가하기도 합니다. 이 영적 존재는 한국에서는 ‘귀신’, 중국에서는 ‘퀘이’, 일본에서는 ‘오니’라 불립니다. 동양의 제사 제도는 죽어 귀신이 된 조상들이 혼백을 기리고 숭배하는 정령숭배(精靈崇拜) 사상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더욱 이 귀신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가 전보다 더욱 활발히 전개되고 있고, 심지어는 귀신과 접촉해 보려고 시도하는 개인들이나 단체들이 더욱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매 여름만 되면 ‘납량(納凉) 특집’이니 해서 온통 귀신 이야기가 주요한 화제 거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귀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 귀신의 정체를 알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과 심령학자들과 종교가들이 이 존재의 정체에 대해 나름대로 규명해 보지만 명확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들과는 달리 그 귀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일관성을 갖고 명확하게 규명해 줍니다. 귀신의 기원과 정체를 명확히 알려면 우리는 반드시 성경(聖經)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이 논고에서는 지면상 성경의 ‘마귀론’(魔鬼論- Demonology) 전체를 다 다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귀신의 기원과 정체에 대해 성경을 통해 개략적으로 고찰해 볼 것입니다. 이 고찰에 앞서 먼저 우리는 귀신이란 용어의 정의와 유래, 그리고 그 용어의 비성경적 어원에 대한 고찰과 더불어 그 비성경적인 용어의 기독교내 유입으로 인한 폐해를 간략하게 검증해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II. 귀신(demon)이란 용어의 유래 귀신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의 무속적 민간 신앙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민간 신앙에서는 대체로 귀신을 ‘죽은 사람의 넋’ 또는 ‘원한에 사무쳐 이승을 헤매는 원귀(寃鬼)’라고 믿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믿고 있습니다. 국어 사전에서도 가장 첫 번째 항목으로서 귀신을 ‘사람이 죽은 뒤의 넋’(spirit of the dead)1)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1990년도 초반에 상영된 ‘Ghost’(사랑과 영혼)과 같은 많은 헐리우드(Hollywood) 영화들이나 우리나라에서 방영 또는 상영된 ‘M’이나 ‘여고괴담’ 등과 같은 드라마나 영화들은 세간(世間)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잘못된 귀신의 개념을 더욱 확실히 믿도록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귀신에 대한 이러한 무속 신앙적이고 잘못된 개념이 기독교계에서조차도 그대로 걸러지지 않은 채 받아들여져 중대한 성경 교리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러한 비성경적인 세간의 용어를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성경의 용어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어 많은 오해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특히 ‘귀신론’(鬼神論)으로 유명한 모 기독교 단체는 이 개역 성경에 잘못 사용된 ‘귀신’이라는 용어를 여가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귀신을 ‘제 명(命)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으로 정의한 후, 이러한 개념을 더욱 발전시키고 교리화(敎理化) 하여 가르침으로써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마음을 참으로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된 것입니다. III. 귀신의 정체 A. 귀신인가? 마귀인가? 개역성경에서 주로 ‘귀신’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δαιμονιον’(daimonion)이란 명사는 60여회, ‘δαιμον’(daimon)이란 명사는 5회, ‘δαινονιζομαι’(daimonizomai)이란 동사는 5회, ‘δαιμονιωδη V’(daimoniodes)라는 형용사는 야고보서 3:15에서 단 1회 사용되었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 Bible)을 제외한 다른 영어 성경들에서는 그리스어 성경에서 그대로 음역하여 ‘demo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경에서 이 용어가 사용된 이 용례를 보면 ‘죽은 사람의 넋’이 아니라 한결같이 ‘마귀’(魔鬼-devil) 또는 ‘악한 영’ 또는 ‘부정한 영’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귀신이라는 용어는 성경의 용어로 결코 적합하지 않습니다.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동양의 제사 제도는 조상들이 죽어 그 혼백이 귀신이 돌아오거나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정령숭배 사상에서 기인된 것이지 결코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죽은 조상들이나 돌아가신 부모들에 대한 꿈이나 계시나 환상은 모두 마귀들, 혹은 악한 영들의 속임수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신비적이고 불가사의한 현상들이 일어나면 귀신이 된 죽은 원혼들이 이런 일을 한다고 믿지만, 대부분은 마귀들이나 악한 영들의 간악한 간계나 속임수입니다. 성경은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누가복음 16:19~31에서 죽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실례 -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귀신론을 주장하는 단체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것은 비유가 결코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을 주님께서 영으로 보신 사건입니다 - 를 통해 죽은 사람은 귀신이 되어 구천(九天)을 떠돌아다닐 수 없고, 단지 죽는 즉시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낙원(구원받은 이들이 가는 곳)과 지옥(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가는 곳)으로 감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곳들은 결코 상호 왕래가 불가능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넋이 귀신이 되어 떠돈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B. 귀신의 정체: 마귀 또는 악한 영들 세간(世間)에서 믿고 있는 귀신은 썩은 것, 어둡고 탁한 것, 음습한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에게도 붙기도 하는데, 원기가 왕성하고 담대한 사람에게는 붙지 않고 허약하고 겁많은 사람들에게 붙는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양기(陽氣)를 싫어하고 음기(陰氣)를 좋아하여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잘 붙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원통하게 죽어 한을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넋인 원귀(寃鬼)는 한을 풀어주면 저승으로 가기도 하지만, 악질의 원귀는 회유책을 쓰거나 ‘신명’(神明)의 힘으로 내치거나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크리스천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수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위 ‘축사’(逐邪)2) 라는 것을 통해 무당이 악귀를 물리칠 때 하듯 귀신을 몰아낸다고 합니다. 그러한 발상은 민간 무속 신앙이 그 이름만 살짝 바꿔 기독교에 유입된 한 실례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귀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의 구절들을 조심스럽게 연구해 보면 귀신은 구천(九天)을 떠돌아다니는 ‘죽은 사람의 넋’이나 원통하게 죽은 자의 ‘원귀’가 아니라 사탄과 함께 타락한 천사들 혹은 사탄이 부리는 영인 악한 영들(spirits)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날이 저물매 사람들이 마귀(devils) 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님 께 오거늘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그 영들(spirits)을 내쫓으시고 병든 자를 다 고쳐 주시니”(마 8:16). 누가복음 10:17~20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칠십 명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마귀들(devils)도 우리에게 굴복하더이다, 하니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들(the spirits)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이 일로 기뻐하지 말고 …”(눅 10:17~18, 20상) 이 구절에서 주님께서 파송한 제자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마귀(devils)를 굴복시켰다고 기뻐하자 주님께서는 갑자기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영들이 굴복하는 이 일로 기뻐하지 말고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의 무리입니다. 에베소서 2:2과 6:12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선언해 주고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들 따라 걸으며 공중에 권세잡은 통치자(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the spirit)이라.”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곳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는 것이라.” 사탄이 자신의 목적들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잘 조직화된 천사들의 서열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압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6:12가 시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서 10:13~21을 통해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the prince of the kingdom of Persia)가 다니엘의 기도 응답을 위해 보냄을 받은 가브리엘 천사를 가로막아 우두머리 통치자들(the chief princes) 중 하나인 천사장 미가엘이 급파되어 그를 도와 다니엘에게 이르게 한 것을 압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그리스의 통치자를, 21절에서는 다니엘의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미카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각 왕국 혹은 나라를 다스리는 인간 권력자나 통치자 배후에는 이를 주관하고 조정하는 영적 존재들이 존재함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공중을 그들의 활동 무대로 삼고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는 영들이 분명 타락한 천사들임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구절 중 하나는 요한계시록 12장 9절입니다. “이에 그 큰 용이 내쫓기니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천하를 속이고 미혹하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은 후에 하늘에서 미가엘과 그가 이끄는 천사들과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내어쫓기게 될 것이며, 그들의 사악한 활동은 극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열왕기상 22:20~38을 보면 이스라엘 아합 왕을 설득하여 죽게 하려고 한 영이 주 하나님앞에 나아와 자신이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 왕의 모든 대언자(선지자)의 입에 머물러 아합 왕을 현혹하고 결국 죽게 만드는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을 미혹한 그 거짓말하는 영은 죽은 사람의 넋인 귀신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이거나 사악한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하고, 속이기도 하며, 때로는 위해(危害)를 가하는 존재들은 ‘죽은 사람의 넋’인 ‘귀신’이 아니라 대왕마귀인 사탄이 목적한 바를 일사불란하게 이루는 타락한 천사들의 무리 혹은 악한 영들의 무리인 ‘마귀들’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은 헬라어(그리스어)에서 음역된 ‘demon’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모두 ‘devil’이라고 사용하여 귀신이라는 오해의 소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확하게 그 사악한 영적 존재들의 실체를 규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왕마귀인 사탄과 그가 부리는 영들을 ‘the devil’과 ‘devils’ 또는 ‘a devil’이라고 명확히 구분하여 그 실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글 개역성경은 마귀(devil)나 영(spirit)을 모두 ‘귀신’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사탄이 부리는 영인 ‘마귀’가 ‘제 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은 불신자의 넋’인 것처럼 속이는 모 단체의 ‘귀신론’ 같은 잘못된 교리가 활개를 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IV. 사탄과 그의 천사들, 곧 마귀들의 운명 루시퍼인 사탄이 하나님께 반역하여 그의 탁월한 지위에서 내쫓겼을 때 그는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그를 따르는 일련의 무리의 천사들을 동반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2:24은 지금 사탄이라고 불리는 루시퍼가 ‘마귀들의 통치자’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7에서는 “용과 그의 천사들”이라고 언급하고 있고, 마태복음 25:41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마귀와 그의 천사 또는 영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는 ‘불못’(the lake of fire)입니다. 원래 불과 유황으로 타는 영원한 불못은 하나님께 반역하여 대적하는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영벌에 처하시려고 마련한 영원한 형벌 장소입니다(마 25:41). 그러나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아니한 이들도 자신들을 속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한 마귀의 길을 따른 대가로서 그 영존하는 형벌의 불길인 불못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마 25:41)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에는 그 짐승(적그리스도)과 거짓 대언자도 있어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계 20:10)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롬 3:23, 롬 6:23). 사망과 심판(지옥과 불못)이 그들에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누구든지 자신의 죄의 대가로 지불해야 할 그 영원한 형벌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서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너무나 고귀한 선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그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이준승/복된소망침례교회 목사, 바이블서원 대표, 美 Landmark Baptist College 신학석사, 목회학 박사)
그리스도교의 십계명(十誡命)(1)/ 2013-05-27
그리스도교의 십계명(十誡命) 천주교와 개신교의 십계명이 다르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뿌리가 같은 종교이고 또한 같은 신/구약성경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았다고 전해지는 석판 십계명(十誡命)은 하느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준 10개조의 계율. 2장의 석판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며, ‘모세의 십계’라고도 한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종교 윤리의 근본원리를 간결하게 나타낸 것으로, <구약성서>의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거의 같은 형태로 나와 있다. 사막에서 목축을 하며 살아가던 고대 유랑 유목민의 부족공동 생활규율의 성격이 강하다. 전문(前文)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느님 야훼로라”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계율이 하느님의 택함을 받고 이미 구원함을 얻은 공동체에 대한 지침이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고 하여 유일신(唯一神)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는 첫째 계명, 우상숭배를 금하는 둘째 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금하는 셋째 계명 등은 다신교적인 고대 여러 종교 가운데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어 안식일의 성수(聖守), 부모의 공경, 살인ㆍ간음ㆍ도적질ㆍ거짓증거(僞證)ㆍ탐욕 등의 금지가 단언적인 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율법의 핵심 - 고대 교부철학의 대성자(大成者)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과 반발 십계명(十誡命)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참고로 삼는 계명으로,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모세 율법의 중심은 출애굽기 20장 1절~23장 33절의 계약서나 신명기 1~29장의 신명기 법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핵심은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의 십계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잘 알게 되면, 모세 율법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서 구약성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십계명(十誡命)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아쉐레트 하드바리임(10마디 말씀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출애굽기 34장 28절, 신명기 4장 13절과 10장 4절에 나온다. 십계명(十誡命)을 소개하는 출애굽기 20장 1절에는 이 모든 말씀들로 나오고, 신명기 5장 5절에는 야훼의 말씀으로 나온다. 【로마 가톨릭(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로마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우상에 대한 계명(출애굽기 20장 4∼6절)을 다른 신을 금지하는 1계명(20장 3절) 속에 포함시킨다. 결국 20장 3∼6절이 제1계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17절을 전·후반부로 나누어 제9, 제10계명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롬바드에 의하여 채택된 이래로, 로마 가톨릭이 따르게 되었다. 이러한 분류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에 의하여 옹호된 것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상에 대한 계명은 제1계명의 다른 신들에 대한 계명을 좀더 충분히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출애굽기 20장 17절과 신명기 5장 21절에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너희는 탐내지 말라”란 구절이 두 번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두 계명으로 구분된다고 말했다. 그는 신명기 본문에 따라 남의 아내를 탐내는 것에 관한 계명을 대체로 제9계명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남의 소유를 탐내는 것에 관한 계명을 제10계명으로 삼았다. 가톨릭과 루터교의 십계명 1. 하나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3.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4. 부모에게 효도하라. 5. 사람을 죽이지 말라. 6. 간음하지 말라. 7. 도적질하지 말라. 8.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9.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10. 남의 (집)재물을 탐내지 말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 라. 3. 너는 너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내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지니라. 7. 간음하지 말지니라. 8.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 註) 하나님/하느님, 여호와/야훼의 혼선을 피하고자 공동번역성서의 표현인 하느님과 야훼를 사용함. 1. 유대인 학자들의 견해 유대인 학자 필로(Philo)와 요세퍼스(Josephus)를 중심한 유대인 학자들과 제4세까지의 교부들과 현재 동방 교회(?)의 견해이다. 그들은 십계명이 두 돌비에 각각 5개씩 구분되여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1) Table(첫째 비석) (1) 다른 신들 (other gods) (2) 다른 형상들(Images) (3) 하나님의 이름(The name of God) (4) 안식일(The Sabbath) (5) 부모(parents) 2) Tabl(둘째비석) (1) 살인(Murder) (2) 간음(Adultery) (3) 도적질(Steel) (4) 거짓증거 (5) 탐심(Covitiny) 그 근거는 출애굽기 32장 15절에 근거를 둔다.(두 돌판을 가지고 있는 모세) 그러나 이 성구에 명시되어 있는것 뿐이다. 또 19절에 보면 모세가 그것들을 던져 깨뜨린 것이다. 다음에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다시 전과 같이 두 돌비를 만들어 가지고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글을 써서 주신 것을 가지고 내려온 것이다.45) 2. 어거스틴 (Augustine)을 중심한 견해 첫째 돌비에는 3계명 즉 제1계명에서 제3계명까지가 기록이 되어 있었고, 둘째 돌비에서는 제4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가 기록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첫째 석판(돌비석)에서는 (1) 다른 신들 (2) 하나님의 이름 (3) 안식일 이상의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들의 의무에 관한 것들이다. (1) 부모 (2) 살인 (3) 간음 (4) 도적질 (5) 거짓 증거 (6) 이웃의 아내 탐함 (7) 이웃 집, 종들,가축과 소유를 탐함. 위의 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의무와 덕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하여 세워진 학설인데, 서방교회즉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에서 수락한다. 이 견해는 신명기 5장에 근거하여 세워진 학설이다. 3.기독교의 견해 이 학설은 이상의 두 학설과는 달리 두 돌비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으되, 첫째 돌비에는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 기록이 되어 있었고, 둘째 돌비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가 기록되어 있었다는 견해이다.(칼빈이외 유명학자들도) 이는 출애굽기 32장 15째에 근거를 두었다. 즉 히브리어 (와우)와 (싸메크),다시 말하면 세투마(Setuma)에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계명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중심하여 분류하여 보면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윤리이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죤 칼빈(John Calvin)도 이 견해를 따른다. 출처 :大死一番 絶後蘇生 원문보기 글쓴이 : Yootherece paul 가톨릭 교리(24) 십계명 (상) 십계명(十誡命,라틴어 Decalogus, 영어 Ten Commandments)의 의의(意義)와 구분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열 가지 계명을 말합니다. 이는 두 개의 돌 판에 새겨져(신명 4,1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승되었고 그들의 사회와 종교생활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십계명의 연원(淵源)은 탈출기 20장 1-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인데, 양자는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탈출기는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에 포함시키나, 신명기는 이를 구별하여 아내의 지위를 독립시키는 점, 둘째 안식일을 지키는 동기가 탈출기에는 하느님의 초월성이지만, 신명기에는 하느님의 구원행위가 핵심이 되는 점입니다. 십계명의 내용은 고대 근동에서 보편화되었던 관념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이와 같은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과 깊이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그 구성 시기가 후기 예언자들의 시대(6세기)가 아니라 모세 시대임을 입증하는 근거가 됩니다. 탈출기 20장 17절에서 아내를 재물 속에 포함시켜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고 하는 하나의 계명이 신명기 5장 21절에서 아내와 재물을 분리함으로써 두 계명으로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조문’(신명 4,13; 10,4)으로 표현한 이유는 ‘열’(10)이 전승적인 숫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신명기의 전승은 서방교부들을 통하여 라틴교회에 계승되었습니다. 그리스 교회와 루터교회를 제외한 개신교는 십계명의 탈출기 구분을 따르면서, 라틴교회의 제1계명을 하느님 흠숭과 우상숭배 금지의 둘로 나누어 숫자 10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그의 백성 간에 맺은 계약의 핵심이요 선물입니다. 십계명의 처음 세 계명은 하느님과 인간의 수직관계를 규율합니다. 이를 상삼계(上三誡)라고도 부릅니다. 나머지 일곱 계명은 계약의 백성 상호간의 수평관계를 규율하는 내용으로서 하칠계(下七誡)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사랑의 계명 아래 통합시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의 사랑으로 요약하였고, 산상설교(마태 5~7장)와 고별사(요한 14~17장)에 의하여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십계명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십계명을 포함하고 완성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십계명의 준수 의무가 면제되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천주교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과는 다르지요? 여기에는 몇가지 성서 해석과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십계명은 구약성서 출애굽기 20:1-17과 신명기 5:6-21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내용은 같습니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지요. 그리고 그 차이에 다라 천주교와 정교회, 루터교와 다른 개신교들이 조금씩 달리 보고 있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개신교식의 분류인 10번째 계명,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는 대목입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남의 아내”에 대한 언급 순서가 바뀌었지요. 출애굽기는 이른바 소유물에 “아내”(여성)을 포함시키고 있지만, 신명기는 독자적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소유물을 언급하지요. 이 점에서 학자들은 사회적인 정의를 강조하는 신명기 기자의 관심에 따른 배려라고 보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 부분에서 신명기적인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두번째, 제 1계명과 제 2계명의 연관 문제인데요. 천주교는 기본적으로 “하느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부속적인 설명이 “모습을 본떠 새긴 우상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이라고 봅니다. 유일신 사상을 그토록 강조했던 유대교의 한 면모를 보는 것이지요. 이른바 상이 없는 종교를 하느님의 절대성을 통해 확인한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하나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이것이 천주교가 채택하고 있는 십계명 분류법(?)입니다. 개신교 우선 루터교는 전통적으로 천주교와 같은 “십계명” 배열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회와 장로교(칼빈과 쯔빙글리)의 경우는 현재 개신교에서 통용되는 출애굽기에 좀더 근거를 둔 십계명 배열을 따르지요. 최근 성서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원래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습니다.(아래 것은 천주교 십계가 아님) 일.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 너는 나를 본따 새기거나 비슷한 것을 만들지 말라. 삼. 너는 너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심하라. 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육. 너는 살인하지 말라. 칠. 너는 간음하지 말라. 팔. 너는 도적질 하지 말라. 구. 너는 너의 이웃에게 거짓증언을 하지 말라. 십.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이런 연유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신자들은 굳이 천주교가 “우상” 내용을 빼서 자신들의 성상 제작을 합리화했으니 성서적이지 않고, 성서를 재멋대로 본다라고 다그치지는 말들을 합니다. 하지만 . 개신교에서도 역시 존경해 마지 않는 어거스틴도 사실은 현재 천주교 식의 배열을 따랐습니다. 출처: 가톨릭 굿뉴스홈페이지- 천주교묻고답하기- 게시물 23번 작성자: 오성훈님 가톨릭의 십계명은 다르다? 십계명의 분류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가톨릭 교회에서 우상숭배 를 자유로이 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십계명의 2계를 삭제하고 그 대신 아홉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당한 비난입니다. 다만 분류 형식이 다를 뿐이니까요. 성서 원문에 있는 십계명을 보면 거기에는 첫째 계명 둘째 계명 하는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성서의 장 절도 성서의 저자들이 그렇게 구분한 것이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편의상 그렇게 나누어 놓았을 뿐입니다. 이제 한번 성서대로 십계명을 적어 볼까요. 1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 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 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7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 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생업에도 종사 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 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 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12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 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하지 못한다. 14 간음하지 못한다. 15 도둑질하지 못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출애굽기 20장 2-17절) 가톨릭 교회에서도 전에는 개신교측의 분류대로 쓰기도 하였었는데, 이것은 유다인 필론이 분류한 것입니다. 그 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쓰고 있는대로 우상숭배 금지를 첫째 계명에 포함시키고, 남의 아내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따로 나누어 아홉째 계명과 열째 계명으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이 합리적인 분류라 판단되어 가톨릭에서는 오늘날까지 이것을 통용하고 있습니다. 분류 방법만 다를 뿐, 하느님의 계명은 여전히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이제 성 아우구스티노의 분류법이 왜 더욱 합리적인 것인지 살펴 볼까요? 우상 숭배 금지에 대한 별도의 항을 세울 필요가 없다. 1.하느님 공경과 우상 숭배는 워낙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적극적인 계명에는 우상숭배를 금한다는 소극적인 계 명이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적극적인 계명과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계명은 둘이 아니고 하나 인 것과 같은 관계입니다. 또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말 속에는 우상숭배를 금 한다는 말이 저절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므로, 이 둘을 하나로 보는 것이 합 리적입니다. 당시에는 우상숭배자가 많아서 큰 영향을 미칠 위험이 있었으므로 원문에 우상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특별히 실었을 뿐입니다. 만약 당시에 소나 말, 해나 달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원문에 반드시 소나 말, 해 나 달을 숭배하지 못한다는 말씀도 꽤 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각기 다른 계명으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2.이미 말한대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의 위험이 컸기 때문에 특별히 이를 경계하신 것이므로,오늘날도 우상숭배의 위험이 농후한 세상이라면 비 록 근본적으로는 같은 계명일지라도 두 계명으로 갈라놓음으로써 강조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 풍조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면 으레 우상숭배를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특별히 경계할 필요가 없게 된 이상, 우상 숭배를 금지 하는 계명을 따로 세울 필요도 없게 된 것입니다. 3.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계명을 따로 세울 이유를 구태여 찾는다면, 십계명 원문에서 우상에 대한 말씀이 특히 길었다는 것 하나 뿐일 것입니다. 성서의 정신보다 그 표면적 기술(記述) 형식에 더 치중한다면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조목은 십계명에 넣지 말아야 하고 (원문에는 하느님이라는 말만 있지,공경 하라는 말은 없으니까), 오직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계명만으로 첫째 계명을 구성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어떻게 합리적인 구분이라 할 수 있겠 습니까? 남의 아내와 재물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 1.신학적 법리학적 지식이 발달되지 못한 고대인들에세는, 남의 아내에 대한 탐욕과 남의 재물에 대한 탐욕과의 분별이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과 남의 재물을 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류가 구별되는 근본이유는 그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는 덕행과 의무가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게 됩니다. 남의 재물을 훔치는 도둑질(절도), 남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살인), 남의 정조를 유린하는 행위(강간) 등은 각기 다른 종류의 죄악 입니다. 마음으로만 범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공경과 우상숭배와 같이 배타적 관계의 죄악도 아니고 둘이 공존할 수도 있으면서 서로 다른 성질의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종류에 따라 각각 다른 계명을 설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오늘날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자가 극히 드뭅니다. 또 그 유혹의 힘도 극히 미약하여 거의 힘을 쓰지 못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욕심과 성욕은 언제 어디서든지 대단히 위 험한 것이고. 그 유혹의 힘도 가장 강하여, 인류사회에서 범죄를 일으키게 하는 원인의 대부분이 여기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에서도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는 행위에 관함 금지 계명을 세우는 동시에 남의 아내와 재물에 대한 탐욕에 대해서까지 특별히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의 힘이 가장 강한 성욕과 물욕에 대하여 각 각의 다른 금지 계명을 세우는 것이 신학상으로나 실천상으로 효과적인 조 치인 것입니다. 우상숭배금지조항을 따로 세우는 것보다 이 두 탐욕에 대한 금지 명령을 따 로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펴낸 ‘천주교 교리 문답‘ 제 1계의 해설에는 마귀와 사신(邪神)을 섬기거나 마술과 마법을 쓰거나 헛징험으로 길흉을 믿는 것 등 온갖 미신 행위 가 일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계명을 삭제했다는 등의 말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의 글은 제임스 C. 기본스 추기경의 불후의 名著 ‘The Faith of Our Fathers(교부들의 신앙)‘에서 일부 발췌한 것임을 말해둡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 출처: 가톨릭 굿뉴스홈페이지- 천주교묻고답하기 - 게시물 1833번 작성자: 조정제님 십계명의 분류 십계명의 분류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요약해 드립니다. 가톨릭교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가톨릭 교회에서 우상숭배를 자유로이 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십계명의 2계를 삭제하였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당한 말이며 이렇다고 가르치는 분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천주교회는 성경을 가감한 적이 전혀 없으며, 다만 모세가 받은 계명(소위 모세의 율법)의 10가지로의 분류 형식이, 유대교(유대교인이며 유대인인 필론)가 분류한 십계명 분류가 아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10가지로 분류한 모세의 율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원래 성서는 장,절이 없었습니다. 그냥 설명문처럼 성서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읽고 보는 성서는 <장, 절>로 구분이 되어 있는바 이는 1000년대에 프랑스교회의 성서학자이자 추기경이 이렇게 성서에서 <장>을 구분하였고, 16세기 이후 인쇄술의 발달에 의해서, 장으로 구분된 성서를 보다 일기 쉽게 인쇄 편집할 때 인쇄업자^^가 다시 <장>에서 <절>을 구분하여 놓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장, 절> 구분된 채 성서가 내려온 것입니다.^^ 출애굽기나 신명기 원문에 있는 모세 율법(십계명)을 보면 거기에는 계명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 율법의 계명수도 성서의 저자들(모세라던지^^)이 그렇게 구분한 것이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편의상 그렇게 나누어 놓았을 뿐입니다. 하여 사실 십계명은 열가지 계명으로 처음부터 되어진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서에는 십계명이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주로 모세의 율법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제 한번 성서대로 십계명을 적어 봅니다. (출애굽기 20장 2-17절) 1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7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 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12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하지 못한다. 14 간음하지 못한다. 15 도둑질하지 못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초기에는 오늘날 개신교측의 사용하는 십계명(모세의 율법)을 쓰기도 하였었는데, 이것은 언급한대로 유대인인 필론이 분류한 것이며, 아직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출현하기 이전입니다.^^ *필론의 분류는 아우구스티누스(=성 어거스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가톨릭은 필론의 분류대로 십계명으로 분류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종교게혁 이후에는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등의 개신교와 정교회가 유대인 필론이 모세 율법을 10가지 계명을 분류한 방법대로 십계명을 쓰고 있습니다. 그 후 성 아우구스티노(어거스틴)가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쓰고 있는대로 (필론은 2계명으로 분류하였지만,) 우상숭배금지에 대한 율법을 첫째 계명(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에 포함시키고, 후반부의 <남의 아내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따로 나누어 아홉째 계명과 열째 계명으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이 합리적인 분류라 판단되어 가톨릭에서는 오늘날까지 이것을 통용하고 있습니다. 분류 방법만 다를 뿐, 하느님의 계명은 여전히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 참고로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성화(그림) 성상(조각품) 등등을 시청각교재처럼 사용하고 있는 성공회(개신교)와 정교회들은 다른 개신교들과 같은 즉 필론이 분류한 <십계명> 양식을 사용하고 있답니다.^^ 이제 성 아우구스티노의 분류법이 왜 더욱 합리적인 것인지 살펴 봅니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십계명 분류법은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의 맏형격인 루터교가 함께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1. <우상 숭배 금지에 대한 별도의 항을 세울 필요가 없다.> 하느님 공경과 우상 숭배는 워낙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적극적인 계명에는 우상숭배를 금한다는 소극적인 계명이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적극적인 계명과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계명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과 같은 관계입니다. 또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말 속에는 우상숭배를 금한다는 말이 저절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므로, 이 둘을 하나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우상숭배를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의 조항을 따로 분리하여 세울 필요도 없게 된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계명을 따로 세울 이유를 구태여 찾는다면, 십계명 원문에서 우상에 대한 말씀이 특히 길었다는 것 하나 뿐일 것입니다. 성서의 정신보다 그 표면적 기술(記述) 형식에 더 치중한다면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조목은 십계명에 넣지 말아야 하고 (원문에는 하느님이라는 말만 있지, 공경하라는 말은 없으니까), 오직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계명만으로 첫째 계명을 구성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2. <남의 아내와 재물을 탐내지 말라> 신학적 법리학적 지식이 발달되지 못한 고대인들에세는, 남의 아내에 대한 탐욕과 남의 재물에 대한 탐욕과의 분별이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의 아내를 탐하는 것과 남의 재물을 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류가 구별되는 근본이유는 그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는 덕행과 의무가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게 됩니다. 남의 재물을 훔치는 도둑질(절도), 남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살인), 남의 정조를 유린하는 행위(강간) 등은 각기 다른 종류의 죄악입니다. 마음으로만 범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공경과 우상숭배와 같이 배타적 관계의 죄악도 아니고 둘이 공존할 수도 있으면서 서로 다른 성질의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종류에 따라 각각 다른 계명을 설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 분류법의 지론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에서도 간음하지 못한다. 도둑질하지 못한다는 행위에 관함 금지 계명을 세우는 동시에 남의 아내와 재물에 대한 탐욕에 대해서까지 특별히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의 힘이 가장 강한 성욕과 물욕에 대하여 각각의 다른 금지 계명을 세우는 것이 신학상으로나 실천상으로 효과적인 조치인 것입니다. 우상숭배 금지조항을 따로 세우는 것보다 이 두 탐욕에 대한 금지 명령을 따로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대교의 분류법을 버리고 새로운 분류법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이상의 글은 “개신교 형제를 위한 가톨릭 사이트“에서 인용하였으며 제가 약간의 주를 달아 혼합하였음을 밝힙니다.) 말이 나온 김에 구원(의화)론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의화)론은 거져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서 구원(의화)된다고 합니다. 의화란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신앙은 은총안에서 <자유로운 응답>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신앙에 대한 각 개개인의 응답은 거져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의 “온전한 결과“로서 “자신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의화)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온전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과 선행> 혹은 <선행>으로 의화(구원)된다고 주장한 “세미펠라지오=반펠라지오“ 이단이나 펠라지오 이단을 단죄하였습니다. 또한 가톨릭교회 역시 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한 교부들의 공의회인 카르타고 공의회나 오랑주 공의회를 통해서 이러한 이단들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단죄하였으며,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전승 즉, 성경과 사도신앙의 전승하에 창립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개신교들이 간혹,^^ 이러한 펠라지오 이단이나 세미(반)펠라지오 이단들의 이설을 가톨릭 교회가 가르친다고 주장하며 가톨릭을 왜곡하고 있음은 그냥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에 대한 오해의 근원은 가톨릭에서는 구원을 이야기 할때, 의화뿐만 아니라 의화된 그리스도인이 이승을 떠나 공심판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교적인 성덕을 줄기차게 강조함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즉 의화된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은총안에서 완덕을 향해 질주하지 않으면 심판시 처벌을 받을 수 있다(천상 상급 즉 지복직관에 들지 못할수 있다)고 합니다.그러므로 의화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은총안에서 신망애 삼덕을 덕을 꾸준히 쌓을 것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리는 사실 개신교들(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등등)에서도 당연히 있습니다만, 일부 개신교인들(주로 오순절 종파들)은 자신들의 교리조차 잘 모르는채 혹은 모르는척 하면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으며 그것은 바로 천당행>이라는 식으로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톨릭이나 개신교, 정교회등)의 기본 신앙의 체계 중 핵심(즉 구원론 은총론과 원죄론)는 완전히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가톨릭교회의 주교였으며, 교황님을 도와 영국, 아일랜드 등지로 선교를 하신 교부이십니다.) 개신교들 중에서 특별히 루터교와 장로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의 요약으로 돌아가서, 1.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인 루터교에서는, 성서에서 모세의 율법 전문의 가감없이, 모세의 율법을 10가지로 구분한 유대인 필론의 분류를 따르지 않고, 성 아우구수티누스의 10계명 분류법를 따르고 있으며, 2. 정교회와 기타 다른 개신교들은 모세의 율법 전문을 10가지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대교인인 필론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54]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은 다른가요 “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은 어떻게 다른가요.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께 직접 받은 열 가지 계명을 말합니다. 이 십계명은 유다교를 믿은 유다인들 뿐 아니라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등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구약성경 탈출기 20장 1-17절에 나와 있습니다. 신명기 5장 6-21절에도 있습니다만, 좀더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탈출기의 십계명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  현재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신명기 십계 5:6-21)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반면에 정교회나 성공회, 여타 대부분의 개신교 십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 십계 20:1-17)  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있게 하지 마라.  이.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마라.  삼. 야훼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마라.  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오. 부모를 공경하라.  육. 살인하지 마라.  칠. 간음하지 마라.  팔. 도적질하지 마라.  구.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십.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마라.    ◇십계명 비교  이 두 가지를 비교하면, 가톨릭의 제1계명이 개신교에서는 제1계명과 제2계명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반면에 가톨릭의 제9계명과 제10계명이 개신교에서는 제10계명으로 합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탈출기 20장을 읽어 보면, 현재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사용하는 것처럼 ‘일, 이, 삼…‘하는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번호를 매겨 분류하다 보니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차이가 나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과 루터교는 5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노가 분류한 방식을 따르고 있고, 정교회와 성공회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는 초세기 유다교 학자인 필론이 분류한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개신교계 일각에서는 가톨릭교회에서 성화(聖畵)나 성상(聖像)을 모시는 것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에서는 개신교의 제2계명을 일부러 빼고 제10계명을 9계명과 10계명으로 나누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성화나 성상을 모시는 것은 성화나 성상 자체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나 성상에 그려진 분을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제1계명에는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는 내용이 당연히 포함돼 있습니다.  따라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이 차이가 나는 것은 해당하는 성경 본문을 어느 계명에 포함시켰느냐에 따른 것이지 십계명 자체가 다르기 때문은 아닙니다. 결국 가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은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합니다.    ◇한 가지 더  십계명을 찬찬히 살펴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세 계명은 하느님 사랑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칠 계명은 사람 사랑 곧, 부모(가족)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골자는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39). 출처 :레지오단원들의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 ♥보니파시아 성서의 세계 : 십계명 십계명은 열 개의 말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또 가장 많은 사람의 삶과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계명이다. 이천수백 년 전부터 시작하여 앞으로도,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존속하는 한 십계명은 계속해서 그 중요성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십계명은 구약성서가 쓰인 히브리 말로는 그냥 ‘열 말씀’이라고 한다. 이것이 그리스 말을 거쳐 라틴 말에서는 ‘데칼로구스(decalogus)’로 옮겨지는데, 이 명칭이 서양에서는 기원후 2세기의 교부 이레네오 성인 때부터 십계명을 일컫는 데에 사용되기 시작한다(영어에서는 그리스 말과 라틴 말에서 내려오는 Decalogue나 ‘십계명’과 같은 뜻을 지닌 Ten Commandments를 사용한다.). 두 곳에 나오는 십계명 십계명은 성서의 두 군데에 약간 다른 모습으로 나온다. 곧 출애굽기 20,2-17과 신명기 5,6-21이다. 게다가 이 두 단락이나 그 앞뒤로 ‘이것이 십계명이다.’라는 설명이 붙어있지도 않다. 사실 ‘열 말씀’이라는 히브리 말 명칭은 이 두 단락과 직접 연관이 없는 탈출기 34,28; 신명기 4,13; 10,4에 나온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열 말씀’이 십계명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 두 단락 사이의 관계이다. 출애굽기 20,2-17과 신명기 5,6-21이 근본적으로는 같지만 세부 사항에서는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 안식일 준수 계명이 출애굽기(20,8)에는 ‘안식일을 기억하다’로 되어있는데, 신명기(5,12)에는 ‘안식일을 지키다’로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 두 군데에서 다 안식일을 준수해야 하는 사람과 짐승이 열거되는데, 신명기(5,14)에는 “너의 소와 나귀”가 더 들어있다. - 출애굽기(20,11)에서는 하느님의 창조와 휴식이, 신명기(5,15)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겪어야 했던 종살이가 안식일 준수의 근거로 제시된다. - 신명기(5,16)에는 부모 공경의 계명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하는 대로”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고, 계명 준수에 따른 약속에도 ‘잘되다’라는 말이 더 들어있다. - 출애굽기(20,16)에서는 “거짓 증언”이, 신명기(5,20)에서는 “허위 증언”이 금지된다. - 탐욕 금지 조항은 양쪽이 다 두 문장으로 되어있다(출애 20,17; 신명 5,21). 출애굽기에서는 두 문장에서 ‘탐내다’라는 한 동사가 쓰이는데, 신명기에서는 ‘탐내다’와 함께 ‘욕심 내다’가 쓰인다. 또 출애굽기에서는 탐내지 말아야 하는 첫 대상이 이웃의 집이고, 그 다음이 아내를 비롯한 이웃의 재산이다. 신명기에서는 첫 대상이 이웃의 아내이다. 집은 둘째 문장에서 다른 재산들과 함께 열거된다. 초대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한 칠십인역의 출애굽기 20,17에서는, ‘탐내다’ 한 동사를 쓰면서도 신명기처럼 이웃의 아내가 먼저 나온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십계명은 둘 다 지금은 없어진 ‘원본’에서 유래한다. “거짓 증언”의 금령 등에서 볼 수 있듯이(출애 20,16과 신명 5,20), 현재의 십계명에서는 출애굽기의 본문이 우선시된다. 그렇다고 신명기의 본문이 부차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첨가된 설명문이 신명기에 더 많이 나오지만, 오히려 출애굽기보다 더 오래된 십계명 본문이 거기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 개의 십계명 십계명은 출애굽기 20,2-17과 신명기 5,6-21에 나오지만 두 군데에 다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다. ‘열 말씀’이라는 히브리 말 명칭이 분명히 하듯 계명이 열 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나누어보면 열 개만이 아니라 열한 개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열두 개로 나누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성서 본문을 어떻게 열 개의 계명으로 구분해 내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계명들이 나온다. 머리말 나는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① 너에게는 나 외에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된다. ② 너는 어떠한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③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된다. ④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⑥ 살인해서는 안된다. ⑦ 간음해서는 안된다. ⑧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⑨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 ⑩ 이웃의 아내를 탐내서는 안된다. ⑪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된다. 기원전 2-1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어떤 파피루스에 십계명이 나오는데, 그 본문이 히브리 말 성서와도 그리스 말 성서와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구약성서 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십계명의 표준 본문이 없었음을 뜻한다. 성서의 저자들과 전승가들은 십계명을 통일시키지 않았다. 십계명의 본문들이 서로 다른 모습 그대로 경전으로 확정되어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십계명을 열 계명으로 나누는 데에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3세기의 오리게네스 때부터 일부에서 ①과 ②를 첫째 계명으로, 그리고 ⑩과 ⑪을 각각 아홉째와 열째 계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된다. 그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비롯한 많은 교부들이 이 의견에 동조하여, 마침내 서방의 라틴 교회, 그리고 나중에는 루터 교회에서도 이 분류법을 따른다. 유다교의 탈무드, 유명한 유다인 학자 필로, 또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라든가 예로니모 성인, 특히 아우구스티노 이전의 그리스 교부들은 대부분 ①과 ②를 첫째와 둘째 계명으로, 그리고 ⑩과 ⑪을 열째 계명으로 분류하였다. 이 분류 방식이 동방 교회와 칼뱅교(칼빈교)에서 채택된다. 다른 한편, 성서 시대 이후의 유다교에서는 우리가 위에서 ‘머리말’이라는 이름을 붙인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를 첫째 계명으로, ①과 ②를 둘째 계명으로, ⑩과 ⑪을 열째 계명으로 구분한다. 우리 나라 천주교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의 전통에 따라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본문을 간략한 형태로,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라는 계명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나라 전통에 맞는 용어를 써서 십계명을 정리한다. 우리 나라 개신교에서는 전반적으로 칼뱅교의 분류법을 따르는데, 각 계명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본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현재 대부분이 사용하는 「개역 한글판 성경전서」에 따라 예컨대 첫째 계명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셋째 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가 된다. 우리 나라 가톨릭 교회의 십계명과 개신교에서 더러 편의상 사용하는 축약형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가톨릭 교회 ①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②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③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④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⑤ 사람을 죽이지 마라 ⑥ 간음하지 마라 ⑦ 도둑질을 하지 마라 ⑧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⑨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⑩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개신교 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② 너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라 ③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④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⑤ 부모를 공경하라 ⑥ 살인하지 말라 ⑦ 간음하지 말라 ⑧ 도적질하지 말라 ⑨ 거짓 증언하지 말라 ⑩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가르침으로서의 십계명 성서의 십계명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말투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중요하지 않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 외에는, 신구약 전체에 걸쳐 십계명이 순서 그대로 되풀이되는 곳이 하나도 없다. 성서의 저자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바오로도 십계명을 자유로운 형태와 순서로 인용한다(레위 19,3-4.11-13; 예레 7,9; 호세 4,2; 시편 15,3-6; 24,4; 마태 19,18-19; 마르 10,19; 루가 18,20; 로마 13,9; 야고 2,11). 중요한 것은 십계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정신을 깨닫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어떤 법적인 규범이 아니다. 십계명은 “나는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어서 우리말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너는 … 해야 한다’나 ‘너는 … 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표현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어 자유를 주신 다음, 당신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침을 내려주신다. 당신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십계명은 이렇게 자유의 하느님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에게 내리시는 가르침이다. 인간은 해방의 하느님만을 섬기면서, 그분이 주신 자유를 이웃도 누리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웃과 평화를 이루며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십계명은 그러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는 십계명의 말마디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마태 5,21-26.27-30.33-37 참조). 십계명은 결국 사랑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는 계명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계명만이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의 가르침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둘이며 동시에 하나인 계명으로 총괄하신다(마태 22,34-40). <임승필 요셉 신부> http://kr.blog.yahoo.com/sjoacc@ymail.com/166 십계명(The Ten Commandments, Decalogue)의 분류 유대교나 카톨릭, 그리고 기독교 모두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으로 받아들인다. 토라(5경)에 613개의 계명이 나오지만,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이 십계명일 것이다. 그 내용 뿐만이 아니라 십계명의 순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카톨릭 교도, 그리고 기독교인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성경 퀴즈로 십계명을 순서대로 나열하라고 한다면, 대답은 제각각일 것이다. 계명의 내용 뿐만 아니라 순서도 다르게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 종교마다 십계명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선 카톨릭과 개신교의 십계명 분류법을 제시해 본다. 개신교의 십계명 1.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라. 5.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하지 말라. 9. 거짓 증언하지 말라. 10.탐내지 말라. 카톨릭의 십계명 1.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3. 안식일을 기억하라. 4. 부모를 공경하라. 5. 살인하지 말라. 6. 간음하지 말라. 7. 도적질하지 말라. 8. 거짓 증언하지 말라. 9.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10.이웃 아내를 탐내지 말라.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부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고, 두번째 부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다. 카톨릭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계명을 3가지로 규정하는 반면, 개신교에서는 4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카톨릭에서는 개신교에서 하나로 분류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둘로 세분하여 “이웃의 집“과 “이웃집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십계명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분류는 카톨릭이나 개신교와는 색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들의 분류법은 다음과 같다. 유대교의 분류 1.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 2.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적질하지 말라. 9. 이웃에게 해가되는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 10.탐내지 말라.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법에 대한 분류는 세 종교가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유대교나 기독교와는 달리 카톨릭에서는 둘로 세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사회법에 관한 한, 순서나 내용에 있어서 똑같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에 대한 계명이 3종교 모두 상당히 다르다. 세 종교의 공통되는 계명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계명이다. 여기에 개신교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추가하고 있으며, 유대교에서는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씀을 첨가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러면 성서에 나오는 십계명을 왜 이렇게 제각기 다르게 구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십계명은 성서에 분명하게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종교에 따라서 어떤 계명은 첨가하고 어떤 계명은 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른바 우리가 “십계명“(The Ten Commandments, Decalogue)이라고 하는 것은 출애굽기 20장에 처음 나오며, 신명기 5장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곳들을 보면, 찬송가의 속표지에 나오듯이 분명하게 “제 1은“ 무엇이고, “제 2는“ 무엇이며, “제 3은“ 무엇이다... 그런 식으로 나와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출애굽기 20:1-17이나 신명기 5:1-21에 나오는 계명은 분류하기에 따라서 10개도 되고, 11개도 되며, 12개도 될 수 있다. 위에서 비교한대로,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유대교와 카톨릭, 기독교의 십계명 분류법에 나온 계명들을 다 합치면 12개가 된다. 그러나 3 종교가 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10개의 계명을 주신 것이라고 믿고 계명들을 10개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출애굽기 34:28에서 10개의 “계명“이 주어졌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랍비였다. 그러나 그는 십계명 가운데서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는 계명만을 언급하였다(롬 13:9). 십계명에 대한 바울의 인용에서 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바울은 순서없이 그 계명들을 인용했다는 것이다. 부모 공경과 거짓 증언에 대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순서가 서로 바뀌었다. 물론 바울도 당시의 다른 사람들처럼 “십계명“(유대인들의 분류법에 따른 십계명)에 대해서 잘 알고 또한 암송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십계명을 순서대로 그리고 빠뜨리지 않고 인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용이나 순서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같다. 즉 그에게는 그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같다. http://cafe.daum.net/Kosin52 세 가지 분류법이 있습니다. 1. 필로 분류 기원전 1세기 필로라는 철학자가 분류. 흔히 아는 십계명. 정교회, 루터교를 제외한 개신교가 사용. 2. 유대인들의 분류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쓰던 분류 ① 나는 너희의 주 하느님이다. ② 다른 신과 우상을 섬기지 마라.. 이하 동일 3. 아우구스티누스 분류 아우구스티누스 교부가 분류한 것. 천주교와 루터교가 사용. 현실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십계명 1. 한 분이신 하느님만을 섬겨라. 2. 하느님 이름 함부로 부르지마라. 3. 주일을 지켜라. 4. 부모에게 효도하라. 5. 사람을 죽이지 마라. 6. 간음하지 마라. 7. 도둑질하지 마라. 8. 거짓 증언 하지 마라. 9. 남의 아내 탐내지 마라. 10. 남의 재물 탐내지 마라 필로 분류와 기본 정신은 같습니다. 단 없는 것이 있지요. 우상 숭배에 관한 것 일부 과격 개신교도들은 천주교가 우상 숭배를 하기 위해 뺐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을 아셔야 합니다. 필로 분류 시절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호화찬란한 신상들을 보며 마음을 빼았기기 쉬웠습니다.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필로는 우상 숭배 구절을 따로 분류했습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 교부 시절,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타신 숭배는 우상 숭배와 동일시 되었고, 타 종교 신자들에게 당한 박해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타락한 성문화는 기독교인들도 물들기 쉬워 이를 경계하고자 남의 아내 탐내지 말라라는 부분을 따로 독립시켜야 했습니다. 십계명(十誡命)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참고로 삼는 계명으로, 모세 율법의 핵심이다. 모세 율법의 중심은 출애굽기 20장 1절~23장 33절의 계약서나 신명기 1~29장의 신명기 법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핵심은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의 십계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잘 알게 되면, 모세 율법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서 구약성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십계명이란 말 [편집] 십계명이란 용어는 히브리어 아쉐레트 하드바리임(10마디 말씀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출애굽기 34장 28절, 신명기 4장 13절과 10장 4절에 나온다. 십계명을 소개하는 출애굽기 20장 1절에는 이 모든 말씀들로 나오고, 신명기 5장 5절에는 야훼의 말씀으로 나온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히브리 사본과 사마리아 오경, LXX, 탈굼, 벌게이트 등에 근거하여 이를 말씀들, 즉 복수로 수정할 것을 BHS 비형 각주는 제안하고 있다. 십계명은 LXX에서 모두 목적격으로 나타나는데, 출애굽기 34장 28절과 신명기 10장 4절은 투스 데카 로구스로, 신명기 4장 13절은 타데카 레마타로 번역되고 있다. 모두 10가지 말씀들로 번역이 된다. 이 계명들은 출애굽기 20장 3-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본문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지만, 그 순서와 일반적인 내용은 본질상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문 [편집]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십계명 다음은 가장 주된 텍스트인 출애굽기 20장 1-17절의 내용이다. 하지만 한글번역본마다 문장의 차이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개역한글판과 공동번역성서를 모두 인용한다. 유대교, 동방정교, 루터교를 제외한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편집]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삼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내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팔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구는, 네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편집] 로마 가톨릭은 우상에 대한 계명(출애굽기 20장 4-6절)을 다른 신을 금지하는 1계명(20장 3절) 속에 포함시킨다. 결국 20장 3-6절이 제1계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17절을 전·후반부로 나누어 제9, 제10계명으로 나누고 있다. 이러한 분류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옹호된 것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상에 대한 계명은 제1계명의 다른 신들에 대한 계명을 좀 더 충분히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출애굽기 20장 17절과 신명기 5장 21절에서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너희는 탐내지 말라”란 구절이 두 번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두 계명으로 구분된다고 말했다. 그는 신명기 본문에 따라 남의 아내를 탐내는 것에 관한 계명을 대체로 제9계명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남의 소유를 탐내는 것에 관한 계명을 제10계명으로 삼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1)/ 전북 익산 8개 교회 연합제직수련회/ 평신도 세미나/ 논문 자료/ 2013-01-18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1)/ 전북 익산 8개 교회 연합제직수련회/ 평신도 세미나/ 논문 자료 자료제공/ 배종부 목사 2013.1.18.금.전북 익산 8개 교회 연합제직수련회> 1강의 오전10:40-12:10-빌4:6-7절,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1 P 2강의 오후 1:30- 3:00-히13:7,17절, 목사님을 잘 섬기는 제직.......39 P *강의안 요약본...................................................68 P *설교에 원용하실 때 극단적인 예화들을 잘 가려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1.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 1.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이다 (6)아무 것도 염려(念慮)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祈禱)와 간구(懇求)로, 너희 구(求)할 것을 감사(感謝)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知覺)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平康)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생활은 신앙생활의 가장 기초이며, 뿌리이다. 기도생활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다. 깊은 기도생활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진전을 이룰 수 없다. 기도는 신앙인의 생명이요 호흡이다. 1>.하나님의 성령이 기도하게 하셔야, 비로소 기도할 수 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감화, 감동이 있어야 기도한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기도하는 은혜는 정말 귀하고 복된, 은혜 중의 은혜이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기도할 수 없다. 기도의 분위기, 교회의 기도 풍토는 교회의 모든 사역 중에 제일 중요하다. 권사님들의 제일 사명은 기도하는 일이다. 그 다음은 사랑의 덕을 세우는 일이다. 그 다음은 성도들을 돌아 보는 일이다. 기도 운동의 주도는 권사님들이 해야 한다. 매일 밤 권사님들이 팀을 짜서 저녁마다 기도하면, 저절로 교회에 기도의 불이 붙고, 교인들이 기도하게 되고, 교인들 전체가 기도하게 되면 교회는 신령하게 되며, 영력을 가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삶이 안락하고 편하면 절대 기도할 수 없다. 편한 사람 치고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죽음의 고난이 닥치고, 파산의 고통이 오고, 회복할 수 없는 질병에 묶이고,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고난이 오면 비로소 인간은 기도다운 기도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편안한 삶 속에서 기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반대로 욥처럼 그러한 극한 시험과 환란을 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릴 것 같은데, 오히려 하나 같이 믿음이 정금처럼 단련되어 나온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믿음을 잃고 낙심할 것 같은데, 아니다. 신학교 때 채플 시간에 남해의 한 낙도의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했다. 그런데 얼마나 설교가 구수하고 재미있는지 참으로 은혜가 넘쳤다. 그런데 그 분에게는 큰 시련이 있었다. 아들이 섬으로 이사 가서 3개월 만에 교회 앞에 파 놓은 웅덩이에 빠져 죽어 버렸다. 이후 사모가 석 달을 강대상 앞에 엎드려 밤낮으로 일어 나지도 않고 울면서 기도하더라 했다. 그 후에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는데, 섬 주민의 90%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서 3억짜리 배를 사서 운행하며 온 섬 주민들을 다 무료 운송해 주고, 성도들을 출석하게 하는 그러한 교회가 되었다. 목사님은 그 섬에서 교장보다 더 높은 유지로서의 대우를 받는단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에게 꼭 필요한 연단과 시험 만을 주시고, 기도하게 하신다. 그리고 기도한 만큼 그에 해당되는 은혜 만을 주신다. 세상에 우연한 일, 필요 없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우리 생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계획 하에 되어지는 일이다. 우리 인생의 길흉화복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은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하는 은혜가 충만 하시기를 축원한다. 2>.괴로울 때에 기도하라. 고난 중에 기도하라. 마음이 괴롭고, 고통이 있을 때 기도하라. 삶의 고난과 역경이 기도하게 한다. 오래 기도하라. (삼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삼상 1: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 하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1: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삼상 1:27) 이 아이(사무엘)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행 16:25) 밤중 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약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 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3>.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라. 기도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어 가는 것이다. 초보자의 기도가 점차 성숙자의 기도로 바뀌어 간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기도하셨다. (마 26:39) 조금 나아 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 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기도 응답의 확신으로 기도하라. 5대 확신의 기도를 하라. 구원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 승리의 확신, 사죄의 확신, 인도의 확신 요16:24절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5>.주의 종의 기도를 받으라. 선지자(목사)의 기도는 나를 살린다. 범죄한 주의 백성들을 위하여 주의 종이 중보기도 하면 그 죄가 사함 받는다. 제사장(목사)의 축복기도를 받으라. 주의 종에게 신유기도, 축복기도, 예언기도, 영분별의 기도, 문제 해결의 기도를 받으라.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주의 종은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쉬면 아니된다. 주의 종은 성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왕하 20: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왕하 20:5) 너는 돌아 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 가겠고,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 할지니라.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약 5: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왕하 6: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 6: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 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6>.주의 전에서 기도해야 한다. (마 21:13) (예수님이)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새벽기도회, 삼일기도회, 금요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하라. 7>.간구하라. 간절히 기도하라. 눈물로 기도하라. 기도는 이론이 아니다. 기도는 실습이다. 기도는 실제 해 보는 훈련이다. 엘리야는 3년 반 동안 닫혔던 하늘 문을 열고 비 오기를 기도했을 때, 얼굴을 무릎 사이에 집어 넣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려 6번을 하인에게 물으며 기도했다. “구름이 보이느냐?”,“구름이 보이느냐?”반복하여 묻기를 7번째에, 드디어 구름이 몰려 온다. 우리는 기도하다가 너무 낙심을 잘들 한다. 우리는 너무나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고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절) (시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시 6: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8>.가난할 때에 기도하라. (시 102:17)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 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막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옛날 제가 신학교에 들어 갔을 당시, 저는 무척이나 가난했다. 한번은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가려는데,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토큰 한 개와 1000 원짜리 한 장 뿐이었다. 아침을 굶고서, 교회에 갔다.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 속에 계속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지금 내 손에는 단 돈 1000원짜리 한 장 뿐인데, 이걸 헌금으로 바치면 점심도 굶어야 하고, 더욱 끔찍한 것은 부산 북쪽 끝에서 남쪽 끝 송도까지 70리 길을 걸어 가야 하는데... 헌금을 바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헌금 시간이 되어 주머니가 돌아 오는데 이거 아직 결정을 못해서 큰 일이 났다. 그 때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자책감이 일어 났다.“에이! 바보같으니라구! 하나님께 드려 버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 아냐?” 그래서 드렸다. 드리고 나니 이거 걱정이 더욱 커졌다. 이제는 후회해도 소용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당 문을 나서는데, 어깨 힘이 쫙 빠져 걸을 힘이 없었다. 낙심한 사람은 배도 더욱 고픈 법이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혼자 터덜 터덜 걸어 가는데, 아! 그런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어느 집사님이 제게 다가 오더니, 자기는 청년부 회장이라면서 식사하시고, 얘기하고 가시라는 것이었다. 가서 식사를 하고,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중에 내가 신학생인 것을 알고는 그 분이 부끄러운 듯이 봉투를 하나 주면서,“전도사님! 부끄럽지만 이거 가실 때 차비라도 하세요.”했다. 당시에 그 봉투 속에 30,000 원이 들어 있었다. 한 달 생활비가 되는 액수였다. 저는 당시에 전도사도 아니었다. 그 교회에 나간 지 겨우 2주일 되는 때였다. 하나님은 밥을 굶는 당신 아들의 형편을 보시고, 미리 믿음의 종을 통하여 이렇게 예비해 두셨던 것이다. 그 분이 지금도 부산 명륜제일교회를 섬기고 있는 장한식 장로님이시다. 나는 그 곳에서 2주일 후에 그 분의 소개로 아동부 교육전도사를 맡고, 아내를 얻어 결혼까지 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가? 9>.기도는 하나님만 주목함이다. 기도는 하나님 들으시라고 하는 것이다. 기도에 사람은 필요 없다. 우리가 교회에 왔을 때 일차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이고, 사실상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자칫 잘못하면 이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믿음을 추구하기 쉽다. 사람 의식하는 일, 직분 의식하는 일, 환경 의식하는 일 등에서 가식과 외식이 나온다.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 눈치 보며 살아라. 이것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날 때 가능한 일이다. 요셉을 보라. 창39:8-9절에,“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 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 하였어도 금한 것은 오직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아무도 보지 않고 혼자 있을 때에도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다. CORAMDEO(하나님 앞에서)의 정신이 충만했다.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이 훌륭한 자가 참 대장부이다. 10>.기도 중단은 가장 큰 죄악이다. 어느 교회에서 교인들이 계속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늘 계속하던 철야기도회를 없애 버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기도 하기를 싫어하는 모든 교인들이 다 찬성하는데, 그 중에 단 한 명의 성도가 그러면 안된다고 교회에 강력하게 건의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 주에 혼자서 철야기도를 했다. 주일 아침에 어떤 사람이 빈정거리며 물었다. “그래! 철야기도회에 사람들이 많이 나왔어요?” “네! 아주 많이 나왔어요. 저는 큰 힘을 받았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어제 당신 혼자 기도 했다는데...” “물론이지요. 그러나 저와 함께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도 기도하셨는걸요? 천군천사들도 함께 기도하구요. 그러면 충분하지 않아요?” 11>.중보기도(도고)는 능력 사역의 원천이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이 어느 날 한 사람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 “당신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 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교회 지하실에서 언제나 저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300 여 명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할 때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나를 위하여 기도와 간구로 능력을 입게 해 줍니다.” 유명한 영국 고아의 아버지라는 죠지 뮬러는 일생 동안 2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는 고아들과 함께 빈 접시를 놓고 기도하여, 응답 받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친한 3 친구를 위하여 기도했는데, 한 친구는 즉시, 한 친구는 3년 후, 한 친구는 죽을 때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는 뮬러의 장례식에 와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다. 뮬러는 자신의 눈으로 친구의 구원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뜻을 정하고 지속적으로 드려야 할 기도는 하나님의 시간 계획의 때가 되었을 때에 응답되는 것이다. 12>.기도는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해야 한다. 24절에,“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어느 외진 수도원에 새로운 수도원장이 부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수도원의 수사들은 영성이 형편 없는 사람들이었다. 일은 서로 하지 않으려 하고, 교만해서 남을 다스리기만 좋아했다. 하루는 남루한 낡은 수도복을 걸치고, 어떤 수도사가 수도원 문을 들어 섰다. 대뜸 이들은 어디 지나 가는 수도사가 방문한 줄 알고 잡아다가, 부엌에 보내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이러는 사이에 석 달의 세월이 흘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수도원장이 오지 않아서 문의를 했더니, 수도원장은 이미 3개월 전에 부임했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들은 그제서야 큰 일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수도원장에게 가서 백배사죄를 했다. 그 후에 수도원의 기강이 바로 잡히고, 모든 수사들이 겸손과 섬김을 실천했다는 훌륭한 예화가 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온전히 맡기고 사는 삶의 지혜를 보여야 한다. 13>.오직 믿음으로만 기도하라. 조용기 목사의 神癒(신유)에 관한 말이 참 의미심장 하다. “참 많이 낫기도 하고, 안 낫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낫는 것만 말할 뿐입니다. 낫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낫지 않고 치유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전쟁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첩경이 기도이다. 정말 한번 붙어 볼 만한 영적 전쟁이다. 14>.기도 응답의 행복을 맛 보라. 사람은 경험의 존재이다. 기도 속에 행복하라. 기도하다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즐거워 하라.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스스로 기쁨을 누리라. 지금은 처녀인 제 딸이 초등학교 1-2학년 때 한번은 공부를 검사하는데, 배를 잡고 웃을 일이 있었다.“병원이 없는 섬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병원처럼 꾸민 배를 무엇이라 합니까?” “해적선!” “태풍의 위험을 무릎 쓰고 병원선을 타고 와, 만규의 병을 고쳐준 의사 할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10자로 써 보세요.” “ 고마워서 미치겠습니다.” 자기 사랑하는 자녀가 하는 일은 이렇게 엉터리라도 기분 좋다. 사랑스럽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즐거워 할 수 밖에 없다.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좋을 수 밖에 없다. 주님 당신이 좋고, 주님의 일이 좋고, 주님 집이 좋고, 목사님이 좋고, 성도들이 좋고, 모든 것이 무조건 좋다. 어린아이처럼, 철 없고, 순수한,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신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니라.” 기도 속에서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자기를 완전히 맡기라. 15>.염려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6)아무 것도 염려(念慮)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祈禱)와 간구(懇求)로, 너희 구(求)할 것을 감사(感謝)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知覺)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平康)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1.“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신다. 성도는 염려, 근심, 걱정하지 않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성숙함이다. 어떻게 염려하지 않게 되는가?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때 염려하지 않게 된다. 2.“오직”-“유일한 방법”이란 뜻이다. 3.“모든 일에”- 인생의 모든 일을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 속에 들어 오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 4.“기도와 간구로”- 일반기도와 특별기도를 하라. 5.“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하기 위하여 눈을 감으면, 제일 먼저 감사가 나와야 한다. 형식적인 감사가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감사의 심정이 있어야 한다. 구하는 모든 기도 제목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6.“하나님께 아뢰라.”- 기도의 응답 여부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맡기라. 떠났다. 이미 활을 떠난 화살이다. 하나님께 건너 간 것이다. 기도했으면 이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내가 간구한 문제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이런 자세를 가지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평안이 차고 넘친다. 16>.기도는 인내의 전쟁이다. 조급함을 버리라. 큰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 똑 같이 큰 기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 기도의 지속적인 인내, 많은 양의 기도가 필요하다. 기장의 총회장을 역임한 구룡포 석병교회 이훈 목사는 양로원 하나를 두고,“10년 기도하리라. 안되면 평생 하다 가리라.”했다. 이 작고 끈질긴 욕심 없는 작은 헌신, 충성, 희생의 삶과 기도가 필요하다. 석병교회 당회는 별칭“똥 치는 당회”이다. 교회 변소 칸이 72개이다. 살전5:17절의“쉬지 말고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하신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의 축복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다.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쉬지 말고 일하라.”하신 구절은 없다. 주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지, 주님의 뜻은 아니다. 주님은 6일만 일하고 하루는 쉬라고 하셨다. 이런 멋있는 말이 있다.“우리가 일할 때 일하는 건 우리!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일하는 분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 Douglas Stimers는 이렇게 말했다.“당신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니 영혼을 잘 먹이셔야 합니다. 영혼이 배 고프다고 이 세상의 주전버리로 채우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채워야 합니다.” 요16:24절-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렘33:3절-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엡3:20절-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요15:7절-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 응답을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약4:3절-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시66:18절-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 하시리라. 17>.부부 사이가 행복해야 기도가 응답된다. 엘가나의 훌륭한 점은 연약한 아내 한나를 깊이 사랑한 것이다.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자는 온전한 여자 대우를 받지 못하던 시대에 그는 한나를 끔찍히 사랑하며, 아꼈다.“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참으로 아내를 사랑한 사람이다.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가장 못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토록 교회를 세울 수 없다. 남편과 아내, 신랑과 신부의 관계는 곧 예수님과 교회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부부관계가 가장 이상적일 때 신앙과 교회생활이 바로 이해가 된다. 18>.기도는 질이 아니라 양이다. 큰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하듯이, 큰 기도는 질이 아니라 양으로 하는 것이다. 주님 앞에 오래, 많이 앉아 있는 사람이 영적으로 가장 빨리 간다. 조용기 목사는 개척 초기에 하루에 5시간씩 기도했다. 평생을 3시간 이하로 기도가 내려 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하루에 3시간 이상은 기도한단다. 윤석전 목사는 하루 종일 기도한다. 어쨎든 간에 주님 앞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한다. 1.기도시간을 비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기도 장소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2.기도의 영, 간구의 영을 받아야 한다. 이는 오래 앉아 있어야 받는 것이다. 기도의 기름 부음은 다른 왕도가 없다. 네 마음이 있는 곳에는 네 보물도 있느니라. 성령님은 중심을 살피는 분이시다. 그 분께 집중해야 한다. 그 분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19>.하나님과의 깊은 영교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기도의 응답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은혜 받고, 성령 받은 이후 저는 10번 기도하면 9번은 응답 받는다. 그리고 방언 통역과 예언과 영 분별, 지식의 말씀의 은사로 응답 여부를 미리 안다. 우리 집사님 한 분은 제 음성만 들으면 아프던 몸이 나아 버린다. 끔찍한 두통이 목사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씻은 듯이 물러 가 버린단다. 깊은 기도는 신령한 체험을 하게 한다. 나는 기도 중에“지옥 입신”체험을 했었다. 응답을 확신하고, 기도하라.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응답을 믿고, 염려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빌4:6)아무 것도 염려(念慮)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祈禱)와 간구(懇求)로, 너희 구(求)할 것을 감사(感謝)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知覺)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平康)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20>.방언기도 하라. 방언은 능력 있는 기도의 출발점이다. 방언을 못하면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 다음에라야 묵상기도, 관상기도, 영교기도, 대화기도에 들어 간다. 묵상기도는 일체의 소리를 내지 아니하고, 깊은 묵상 속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묵상기도에는 생각의 집중이 정말 중요하다. 이 기도는 나 홀로 있을 때에 가장 적합하다. 혼자 산책을 하면서, 골방에서, 기타 개인적인 가정 기도시간에 가장 적합한 기도가 묵상기도이다. 교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묵상기도는 기도의 마지막 경지이며, 높은 경지의 기도이다. 묵상기도의 내용들은 메모로 남겨 두면, 최고의 깊은 영감이 우러 남으로, 영성훈련의 좋은 지침서가 된다. 통성기도는 마음의 생각을 입술을 통하여 소리로 드리는 기도이다. 통성기도는 잡념이 들지 않고 집중이 잘 되며, 시인하는 기도이므로, 응답에 가장 신속하다. 신앙이 깊지 않은 초신자 들은 이 기도를 통하여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신앙이 깊은 신자들도 통성기도에 익숙해져야 한다. 공동체의 예배에 가장 적합한 기도 방법이다. 금식기도는 우리의 인격이나 내면, 아름다운 생활을 훈련 시키거나, 크고 위급한 문제가 닥쳤을 때에, 또는 육신의 정욕을 억누르고 변화를 시도할 때에 가장 적합한 기도이다. 금식은 기도의 칼날을 예리하게 갈아 주며, 고도의 집중력을 제공한다. 금식기도는 기도의 꽃이다. 이것은 정말 특별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도의 능력이다. 그러나 일반사람들도 정말 이 기도를 수시로 해야 한다. 금식기도는 가장 강력한 기도이다. 능력과 은사와 축사 등에 그 영향력은 지대하다. 방언기도는 성령 충만을 받은 자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기도는 시공을 초월하여, 성령이 간구하게 하심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인간의 제약과 연약함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깊은 은혜에 들어 갈 수 있게 한다. 100% 응답 되는 기도의 최고봉이다. 나는 오랜 기간을 시련과 연단을 통해 이러한 기도의 순례를 거쳐, 기도의 용사가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관상기도를 배웠었다. 이는 말씀을 깊이 응시하고 묵상하면서 그 말씀 속으로 내가 직접 들어 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중요한 기도를 말씀하려 한다. 그것은 쉬지 않는 기도이다. 자기의 마음을 지켜 매일 매일 정해진 시간의 기도 분량을 지켜 나아 가는 쉬지 않는 기도의 영성 훈련이 정착되어야 한다. 쉬지 않는 기도를 하려면 일상기도가 습관화 되어야 한다. 새벽기도, 저녁기도이다. 구약의 제사 중에 매일 드리는 상번제가 있다. (민28:23)아침의 번제(燔祭) 곧 상번제(常燔祭) 외(外)에... 매일 매일 기도 무릎이 없으면 마음에 가시가 돋는다. 혈기, 미움, 분노, 시기, 질투, 다툼...... 말이 거칠어지고, 사람이 사나워진다. 기도 무릎이 없으면 기도가 낯설다. 입에 뻣뻣해진다. 이 모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을 통해 응답을 받으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목적을 말한다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들이기 위해, 죄사함의 확신을 위해, 영생의 믿음을 얻기 위해, 인생의 짐을 덜기 위해, 질병에서 고침을 받기 위해, 마귀를 대적하고 소탕하기 위해, 시험 당할 때에 이기기 위해, 축복의 문을 열기 위해, 은사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성령으로 오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 기도한다. (고전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21>.겸비와 회개의 기도를 올리라.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국가적으로 회개기도 해야 한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죄를 회개하고, 예배 드리고, 기도 드려야 하나님의 재앙이 그친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22>.금식하며, 기도하라. (눅 2:37) (안나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끊고, 자유를 주며, 죄악이 떨어져 나가게 하고, 내적 상처가 떨어져 나가게 하며, 성결하게 한다. 권능을 준다. 영권의 온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폭발한다. (사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禁食)은 흉악(凶惡)의 결박(結縛)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壓制) 당(當)하는 자(者)를 자유(自由)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제 기억에 너무나 선명한 금식기도의 은혜 체험 중에 몇 가지가 있다. 어느 31일 금식을 할 때에 기도제목이“한국교회를 위한 사명”이었습니다. 이름하여“한국교회를 위한 31일 작정 금식 금족기도”였습니다. 성전 강대상에서 자며, 31일 동안 3층에서 한 발자욱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은혜로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또 두 번째 41일 금식기도할 때, 12일 만에 시편84:5절의“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경험이었습니다. 주(主)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大路)가 있는 자(者)는 복(福)이 있나이다. 그 때 하나님이“16차선의 하늘고속도로”를 제게 뚫어 주셨습니다. 제가 기도하기만 하면 하늘나라에서 부두의 콘테이너를 실어 나르는 것 같이, 하늘 트럭이 즉시로 출발하도록 부릉 부릉 항상 시동을 걸고 있는 상태의 환상이었습니다. 신속하게 하늘의 화물을 나르기 위하여 1, 2차선도 아니고, 무려 16차선의 하늘고속도로가 뚫린 것입니다. 그 날 이후로 정말 제게는 핍절함이 없는 기적이 연속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2-3가지의 기적이 언제나 저를 따라 다녔습니다. 물질, 마음, 가정, 교회가 전혀 달라졌습니다. 또 언젠가의 금식기도는 제 교회에 놓여진“식빵의 환상”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제 교회의 의자들에 식빵들이 착착착 놓여지더니, 사람들이 착착착 들어 와서 빽빽이 앉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온 자리에 차고, 강대상, 복도, 1, 2, 3층, 나중에는 교회 앞 삼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교통이 온통 마비되어 버리는 환상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저는 그 꿈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기도의 확신 속에서 하나님이 제게 폭발적 부흥을 주실 그 날을 꿈꾸고, 또 꿈꿉니다. 조용기 목사가 불광동에서 천막교회를 개척할 때에 눈을 감으면 천만 사람이 운집한 것이 보이고, 눈을 뜨면 빈 공간의 가마니떼기만 보였다더니, 저도 이 환상을 본 이후에는 자나 깨나 그 속에 젖어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잊을 수 없는 눈물의 기도는 간암에 걸린 최향희를 위한 51일 금식기도입니다. 두 번의 41일 금식기도를 하고는 하도 무서워서, 마지막 3번째는“언제 이 무서운 금식기도를 하나?”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느닷없이 최향희를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위하여 하기 바랐던 3번째 금식기도는 엉뚱하게 남을 위하여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 41일을 작정하고 기도를 끝냈는데, 병원에 갔더니 아가씨의 간암은 더욱 커져 버렸습니다. 너무나 충격이 커서 금식을 풀지 못하고,“굶어 죽으리라”하고 계속 갔던 것이 그만 51일까지 간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최고 장기금식 기록은 태백기도원(소원의 항구) 원장의 53일 기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경남 양산 내원사의 어느 여승은 80일 이상을 했더군요. 제가 그 기도원장을 이기고 싶어 55일을 작정했는데, 하나님이 교만 그만 부리라고 하셔서 끝냈습니다. 기적은 그 후에 일어 났습니다.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던 아가씨가 5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 소명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눈물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3>.성령 받기를 기도하라. 성령으로 기도하라.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하라. 성령기도 하라. 방언기도, 은사기도, 이성을 넘어 가는 기도, 영 분별, 환상, 투시, 영안, 예언, 방언 통역,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기도이다. (행 8:15) 그들이 내려 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24>.가장 중요한 7대 기도제목: 1>.지켜 주옵소서. 2>.인도 하옵소서. 3>.가르쳐 주옵소서. 4>.도와 주옵소서. 5>.축복 하옵소서. 6>.함께 하옵소서. 7>.평강하게 하옵소서. 25>.기도의 자세 1.목표를 분명히, 2.말씀을 따라, 3.회개와 용서의 마음으로, 4.믿음으로, 5.성령의 도우심을 구함으로, 6.뜨거운 마음으로, 7.확신으로, 8.감사함으로, 9.구체적으로, 10.성령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수원 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님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은 절친한 사이이다. 교세는 3,000명 대 70만명이다. 김장환 목사님이“조목사! 내가 당신보다 못한 게 뭐야? 나는 영어도 당신 보다 잘 해! 내 마누라는 미국 사람이고, 나는 미국에서 자랐고, 공부도 내가 더 많이 했고...... 그런데 왜 목회는 당신이 더 잘 해?” 조목사님이 대답했다.“당신 기도는 얼마나 해?”“하루 대강 30분 하지!”“나는 3시간 해!”“뭐 그리 할 말이 많아!”“이 사람아! 할 말이 많고 적은 게, 바로 당신하고 나의 차이야!” 기도할 그 때의 내 기도 내용을 살펴 보라. 그것이 바로 나의 영성 수준이다. 우리는 모임에 힘써야 한다. 특별히 기도 모임이 힘써야 한다. 모이는 그 곳에 은혜가 있고, 열심히 모이는 그 곳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 난다. 모이기를 폐하는 것은 사탄의 가장 원하는 바이다. 어느 개척교회 목사가 교역자 모임에서 주관하는 태국 관광을 갔다. 한 코스에 갔더니 코끼리 조련사가 손에 금덩이를 하나 쥐고서, 누구든지 코끼리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에게 이 금덩이를 주겠다고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데, 이 개척교회 목사가 자기가 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는 코끼리 귀에 대고 뭐라고 한참을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만 코끼리가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조련사가 금덩이를 주면서 뭐라고 얘기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개척교회를 하면 고생한 얘기들을 몇 가지 해 주었더니 코끼리가 운 것이라고... 이번에는 조련사가 코끼리 앞 발을 들게 하면 금덩이를 하나 더 주겠다고 했다. 개척교회 목사는 그건 쉽다고 했다. 그는 코끼리에게 다가가 한 마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코끼리가 앞 발을 번쩍 들었다. 이번에는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야 간단하지요. 야! 코끼리야. 너도 개척교회 한번 해 볼래! 했더니 앞 발을 번쩍 들었다고...... 개척교회 목회가 얼마나 힘들며, 얼마나 교회를 세우는 것이 힘든가를 알게 해 주시는 말씀이다. 교회는 기도를 먹고 자란다. 성도는 범사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야 한다. 기도가 살아 있는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저력이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으로 끌어 오는 유일 무이한 방법이다. 26>.주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기도 응답) 하나님은 정말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합당하게 행하고, 의롭게 살고, 믿음이 좋기 때문에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영혼과 삶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기도를 들어 주신다. 그 응답이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지 가장 분명하고, 가장 적절하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심을 알아야 한다. 만일에 우리 욕심대로 기도가 다 응답되었다면, 마치 어린 아이에게 칼을 쥐어 주는 것처럼 우리는 벌써 다 망하고, 이미 죽고 말았을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절)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의 응답이 없고, 현실이 답답할 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며 부르 짖으며 기다리시기 바란다. 우리의 믿음의 흔들리지 아니한다면, 인내 후에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에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응답하실 것이다. 기도의 응답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내 시간 계획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따라, 현재 내게 좋은 것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사를 다 아시는 하나님의 합력 선의 역사를 따라 응답된다는 사실을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할 일은 오로지 간구할 바를 간절히 기도해 놓는 일이다. <1>.먼저, 신속하게 응답해 주시는 기도가 있다.(Yes의 기도) 당신이 급한 것은 소용이 없다. 온전한 말씀 순종과 성령의 사람이 됨으로, 하나님을 급하시게 하라. 온전한 말씀 순종의 사람, 성령의 사람 만이 하나님을 급하시게 만들 수 있다. 이 기도는 위급할 때, 들어 주시지 않으면 안될 때, 외면 하시면 당신의 아들 딸인 우리가 위험이나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이나 곤경에 빠지게 될 때, 기도 드리는 그 즉시 바로 응답하시는 경우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당신 자녀들을 즉시 즉시 기적적으로 도우시는지 아는가? 1>.새성교회를 개척하여 이사를 할 때, 상계동 이 곳에 와서 집을 구하게 되었다. 2>.이등병 때 100킬로미터 행군을 하게 되었다. 서울 원당에서 걷고 또 걸어, 27시간 만에 산정호수 밑에까지 왔다. 명성산 옆에 승진훈련장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하나님! 저는 이제 무릎이 망가지고, 배가 고파서 도저히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습니다. 제게 건빵 한 봉지만 주세요.” 기도가 끝난지 1분도 채 안되어서 60 트럭이 먼지를 휘날리며 제 앞을 휙 하니 지나 갔다. 선탑자는 우리 중대장이었다. 불과 10여 미터, 선두 맨 앞에 차가 서더니, 차례대로 건빵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3>.하나님은 1초란 시간의 차이로, 우리의 생명을 간발의 차이로 건지신다. 무궁교회에 부임하여 첫 주 심방을 할 때, 갓 면허증을 딴 나는 운전이 미숙하여 브레이크와 악세레다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때였다. 그런데 이런 나의 차 밑에 아이의 자전거가 들어 갔다. 브레이크를 잡고 급정거 한 후 권사님이 내려 가 보니, 아이의 머리가 앞 바퀴 바로 앞 30 Cm 거리 땅바닥에 닿아 있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30 Cm의 간격으로 한 어린 아이를 살리셨다. 나를 살리셨다. 그래서 그 교회 부임 첫 설교 제목이 <30 Cm의 간격>이었다. 4>.군에서 주일 저녁 8시에 예배를 드리는데, 소대 내에 장비 분실된 것이 많다고 해서 고참들이 직싸게 두들겨 맞았다. 그러니 중고참들이 또 전 소대원들을 일제히 검열하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저는 당시에 방독면을 분실한 상태였다. 방독면은 당시에 서울 남대문에나 와야 구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는 간을 졸이며, 맨 졸병이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 제 앞 줄의 일병 하나가 구급대 하나가 없다고 해서 야삽으로 맞는데, 때리는 놈이 얼마나 무지 막지한지 그만 쫙 뻗어 버렸다. 잘못 맞아서 엉덩이 뼈를 쳤는데, 3일 동안 발발 떨며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맞는 장면을 본 나는“오늘 나는 죽었구나.”생각했다. 때리는 놈이 바로 내 앞까지 왔다. 그런데 때리는 고참의 동기가 되는 사람이 갑자기 제 앞에 오더니“야! 배종부. 너는 주일인데, 왜 교회 안가? 빨리 가 임마!”했다. 나를 맞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배려해 준 것이었다. 위기를 벗어나 교회에 갔다. 그 시각이 정확하게 저녁 8:25분! <2>.뜻을 정하여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들어 주시는 것이 있다.(Wait의 기도)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서 즉시 즉시 다 들어 주시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기도는 한 두번, 하루 이틀 만에 들어 주시는 기도가 아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하루에 3번씩 동쪽 창을 열고 고국을 향하여 기도했다.“해방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 가게 해 주옵소서.”21일 만에 다니엘의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 이는 실로 70년 만에 이루어진 기도였다. 십자가를 지는 주님의 기도는 일평생 계속된 기도였고, 기도의 응답과 함께 주님은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뜻을 정하고 지속적으로 드려야 할 기도는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을 때에 응답되는 것이다. <3>.거부를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기도의 응답이 있다.(No의 기도) 이것이 가장 크신 기도 응답의 은혜이다. 깨달음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는가?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는 지연되면서 깨닫게 하신 이후에 응답하시는 기도의 경우가 있다. 이 깨닫게 하시는 기도는 우리의 죄악과 잘못된 삶을 청산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며, 겸손하게 하며, 회개하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알게 한다. 욥의 고난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주는가? 욥은 고난 중에서 계속 주님께 부르짖는다. “주님! 왜입니까? 저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고난을 당해야만 합니까?” 욥기 마지막에 가서야 주님은 응답하신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너를 더욱 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너를 단련 시켜 정금 같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이니라.” 고난 속에서 깨달은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절) 고난에는 하나님의 주옥 같은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순간에도 낙심치 말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위급할 때는 급하게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 뜻을 정하고 기도해야 한다. 일생이 걸린 문제는 뜻을 정하고 오랫 동안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야 한다. 앞 날을 두고, 우리 모두 차분히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우리 계획대로 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가야 한다. 덤벙 덤벙 할 일이 아니다.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삶의 역경과 고난이 파도칠 때 우리는 미련한 곰처럼 처신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다 듬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추구하는 자가 되라.“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6:9절)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을 넘치는 기도 응답과 주님 만남을 통해 살아 있는 믿음의 길에 정진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한다. 모래 위의 발자욱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네. 주님과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 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 위에 두 짝의 발자욱을 보았네. 한 짝은 내 것, 또 한 짝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욱이 멈춘 곳에서... 내 삶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 때 자주 내 삶의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욱만 보았네. 그 때는 내 인생이 가장 비참하고 슬픈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당신은 저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 때 거기에는 한 짝의 발자욱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지요?” 주님께서 대답하시었네. “나의 소중하고 귀한 자녀여!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결코 떠나지 않았단다. 네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발자욱 그것은 내 발자욱이니라. 그 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2.왜 성령신앙인가? 1.왜 성령신앙인가?, 행전2:1-4절 1>.영적 낙제 수준의 그리스도인 상태(영적 지수 10점 정도) 약 20% 의 교인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일 년에 교회를 두 달도 채 나오지 않는다. 목사는 이들을 이끄는데, 목회력의 30%를 거의 다 소진한다. 2>.평균적인 그리스도인 상태(영적 지수 30점 정도) 구원의 확신은 있으나, 빈 쭉정이 들이다. 일생에 몇 번 쯤은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어 보려 하나, 이내 포기하고 만다. 이런 성도의 수는 약 50%이다. 목사는 이들에게 목회력의 40% 정도를 소진한다. 3>.육신적인 그리스도인 상태(영적 지수 50점 정도) 이들은 외관상으로 전적인 헌신자 들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3년- 5년- 7년- 10년이 지나면, 주기적으로 탈진하기 시작한다. 승리감이 없다. 패배감이 든다. 영적으로 방황한다. 은혜를 찾아 헤맨다. 아무리 애써도 영혼의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다. 주님과 실제로 교제함이 없다. 끝없이 은혜를 찾아 방황한다. 뭔가가 더 있는데 찾지를 못한다. 심지어 교회를 옮기기도 한다. 그리고는 영적 방황이 다시 시작된다. 새로운 교회에서, 다시 출발하여, 더 열심을 내어 보지만 역시 결과는 같다. 그는 자아의 힘을 극한까지 다하여 스스로의 영성을 밀어 올린다. 그러나 역시 허무와 공허 뿐이다. 율법과 짐을 더욱 더 느낄 뿐이다. 마음 속에 진정한 행복, 기쁨, 평안, 삶의 만족감, 영적 충족감이 없다. 영적인 세계가 도무지 열리지 않는다. 왜 그런지 아는가?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신앙의 뿌리가 성령이 아닌, 육적인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는 이들을 위해 목회력의 약 20%를 소진한다. 이들은 교회 안의 최상층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30-35 % 정도의 신자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4>.신령한 그리스도인 상태(영적 지수 80점 이상) 이 그룹이 영적 성인으로 성숙하는 이상적인 모델이다. 그는 봉사, 충성보다, 자신의 영적 성장의 원리를 바로 붙든 사람이다.“무엇을 할 것인가?”보다,“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 들이다.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의 살아 있는 실제적인 교제가 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충만함, 기쁨, 평안,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음, 하늘에 대한 소망, 영적인 것에 대한 실제적 체험, 일상의 것들을 채우시는 하나님 경험, 기적의 경험, 성령의 역사와 은사의 일상적 체험... 등이 생생히 살아 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하나님께 훌륭하게 쓰임 받는다. 성령님은 언제나 그의 마음 속에서 동행하시며, 인도하신다. 그의 영혼을 늘 그것을 느끼고 누린다. 그의 가치관은 세상에서 떠나 언제나 하늘에 가 있으며, 그의 목표는 영적인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경이, 놀람, 능력, 기적, 권능, 은사...의 삶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신앙의 뿌리가 자아에 기초한 육에 있지 않고, 영에 기초한 성령께 닿아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 가려고 애쓰는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걸어 가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힘으로 밀어 올리는 율법적 신앙생활이 아닌, 성령 안에서 누리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범사에 그리스도의 삶과 동일시 되며, 성령의 사람이 된다. 그에게는 갑자기 풍성한 성령의 삶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자기 안의 그리스도가 살기 시작한다. 갈2:20절의 삶이 나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肉體)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爲)하여 자기(自己)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면, 마음 속의 넘치는 기쁨과 평안 때문에 때때로 황홀경 속에 들어 가기도 한다. 병 고침, 성령의 은사, 역사, 기름 부음, 능력 행함, 기적 들이 주변에서 수시로 일어 난다. 그러나 이런 사람 역시 항상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니다. 자아가 다시 살아나 영적으로 내리막 길을 걷기도 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성령님을 주목하고, 성령 충만함을 지키기 위하여 성령님께 복종하면 나날이 성령 충만한 삶이 진보한다. 그는 매일, 매 순간 성령님을 주목하여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몸임을 확인한다. 자기 부인이 계속된다. 그는 치열한 영적 전투를 경험하며, 나날이 거룩하게 변해져 간다. 그리고 승리를 향해 다가 간다. 매 순간 항상 그의 자아는 죽음에 넘겨져야만, 영적 전쟁은 승리로 끝난다. 이 때 성령 충만한 그의 영적 점수는 90점-95점 대로 상승한다. 거의 그리스도와 가까운 삶을 살게 된다. 그는 죄와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 마음 속에 죄악을 생각만 해도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성화란 이론이 아니다. 실제로 내 속에서 이루어지고, 삶으로 살아지는 역사이다. 이런 사람은 교인 비율상으로 5% 미만이다. 아니, 2-3% 정도 된다고 생각한다. 2.성령 세례(행전2:1-4절) (행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예수님의 경우 성령 세례는 어떻게 나타 나셨는가?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태어 나시고, 성령 세례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신 후에 사역을 시작하셨다. 온통 성령 자체이신 예수님에 임한 성령 역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신앙생활과 사역을 위해서는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성령 세례 이후에 놀라운 공생애를 비로소 시작하신 것이다. 성령 세례 이전의 30년은 그냥 한 인간으로 묻혀 있다. 2>.사도들의 경우 성령 세례는 어떻게 나타 났는가? 1>.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반을 살았다. 그러나 성령이 나타 나시지 않았다. 그들은 사역의 실패자 들이었다. 갈릴리신학대학을 나와도 안된다. 예수님께 직접 3년 반을 배워도 안된다. 성령 받기 전에는 사역하지 마! 개척 나가도 안돼! 실패야! 2>.그 다음, 부활하신 주님께 40일을 더 배웠다.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40일 간을 보충수업을 해도 안돼! 3>.그리고“몇 날”이 지났다. 행전11:15절, 고넬료의 가정에 임한 성령 세례 -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聖靈)이 저희에게 임(臨)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전2:38-41절, 초대 교회의 폭발 - (38)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悔改)하여 각각(各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洗禮)를 받고, 죄(罪)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聖靈)을 선물(膳物)로 받으리니, (39)이 약속(約束)은 너희와 너희 자녀(子女)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主)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者)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確證)하며 권(勸)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悖逆)한 세대(世代)에서 구원(救援)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洗禮)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弟子)의 수(數)가 삼천(三千)이나 더하더라. 오순절 성령 세례를 단회적 사건, 지나간 사건이라고 말하는 신학은 오류이다. 성령세례는 계속되는 사건이다. 이것이 성령의 나타남의 관건이다. 2004년 3월! 배종부 목사가 성령 세례 받은 그 날! 이렇게 울면서 기도 드렸다. “주님! 이제는 출발선에 서야 합니다. 더 이상 물러 설 수도 없고, 물러 설 형편도, 처지도 아닙니다. 저는 마지막 선까지 밀려 나간 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길도 없습니다. 여기서 죽기를 각오하고, 이제 밀고 나가야 합니다. 나의 탈진한 심정, 무너진 경제와 목회, 새로운 길을 찾음, 환경과 여건 등을 바라 봄은 이제 그만 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 보고, 성령의 권능으로 일어 서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 보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걸어 가게 하옵소서. 그 분을 너도 똑 같이 모셔라. 시대는 변했으나 그 분은 성경에 나타 나신 그대로이다. 모세도, 사도 베드로도, 사도 요한도, 사도 바울도 다 갔으나 이 시대에 빛을 밝히는 소명을 갖고, 내가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이 시대의 하나님의 대안이며, 희망이며, 소망이며, 능력이며, 성령의 대변자이다. 네게 성령 세례의 그 날이 있느냐? 2004년 3월 초의 어느 날! 이전부터 오랫 동안 뭔가 툭 하고 터지려는 느낌을 들더니, 나는 드디어 성령 충만함 속으로 들어 갔다. 나에게는 예전에 방언 받을 때 성령 세례가 왔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2004년 3월에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 속으로 동시에 들어 간 것이다. 성령 세례는 일순간에 받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지속적인 일정 기간을 두고 받는 사람도 있다. 구원, 중생과 성령 세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은사를 받았다고 성령 세례 받은 것이 아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 말고, 직접 경험했느냐가 중요하다. 너도 사도행전을 경험했느냐? 왜 너의 개인적인 성령 체험이 교회 부흥으로 이어지지 않느냐? 왜 네게는 성령님이 나타 나시지 않느냐? 성령 세례가 임하는 경우: 1>.말씀을 듣는 중에 - 고넬료 가정의 경우 2>.안수 받을 때 - 사마리아 교회와 에베소 교회의 경우 3>.기도할 때 -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양수리 기도원에서 000 목사의 설교 도중에 찬양을 하는데 찬양이 충만해지니, 귀신 들린 여자 둘이 나왔다. 내가 먼 거리에서 축사(逐邪)했더니, 극심하게 이상한 몸짓을 하다가, 강대상에 쓰러져 버렸다. 왜 성령신앙인가? (행1:4) 사도(使徒)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約束)하신 것을 기다리라. (5)요한은 물로 세례(洗禮)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聖靈)으로 세례(洗禮)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主)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自己)의 권한(權限)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8)오직 성령(聖靈)이 너희에게 임(臨)하시면 너희가 권능(權能)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 하시니라.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1.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와 사역 전체가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눅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 4: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 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2.성령으로 영계가 열리며, 귀신들이 나가기 때문이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3.위대한 주의 종들은 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 들이기 때문이다.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 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2)/ 전북 익산 8개 교회 연합제직수련회/ 평신도 세미나/ 논문 자료/ 2013-01-18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2)/ 전북 익산 8개 교회 연합제직수련회/ 평신도 세미나/ 논문 자료 엡4장:11-12절 19.복음 전하는 자(전도자)의 은사(gift of evangelism) 20.목사(하나님의 백성을 돌봄)의 은사(gift of Pastor) 21.독신,금욕의 은사(gift of celibacy)(고전7:7절) 22.청빈의 은사(자발적 빈곤)(gift of poverty)(고전13:3절) 23.순교의 은사(gift of martyrdom)(고전13:3절) 24.선교사의 은사(gift of missionary)(엡3:6-8절) 25.후한 대접의 은사(gift of hospitality)(벧전4:9절) 26.중보기도의 은사(gift of intercession) 27.구출(逐鬼축귀,逐邪축사)의 은사(gift of exorcism) 28.예배 인도의 은사 29.글 쓰는 은사 30.선교하는 은사 31.匠人의 은사 5>.方言(방언), 고린도전서14:1-40절 성령의 나타남의 출발점, 시작 (2)방언(方言)을 말하는 자(者)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者)가 없고, 그 영(靈)으로 비밀(秘密)을 말함이니라. (4)방언(方言)을 말하는 자(者)는 자기(自己)의 덕(德)을 세우고, 예언(豫言)하는 자(者)는 교회(敎會)의 덕(德)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方言) 말하기를 원(願)하나, 특별(特別)히 예언(豫言)하기를 원(願)하노라. 방언(方言)을 말하는 자(者)가 만일(萬一) 교회(敎會)의 덕(德)을 세우기 위(爲)하여 통역(通譯)하지 아니하면, 예언(豫言)하는 자(者)만 못하니라. (13)그러므로 방언(方言)을 말하는 자(者)는 통역(通譯)하기를 기도(祈禱)할지니, (14)내가 만일(萬一) 방언(方言)으로 기도(祈禱)하면 나의 영(靈)이 기도(祈禱)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靈)으로 기도(祈禱)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祈禱)하며, 내가 영(靈)으로 찬미(讚美)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讚美)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方言)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感謝)하노라. (19)그러나 교회(敎會)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爲)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一萬) 마디 방언(方言)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1)율법(律法)에 기록(記錄)된 바 주(主)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方言)하는 자(者)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百姓)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그러므로 방언(方言)은 믿는 자(者)들을 위(爲)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者)들을 위(爲)하는 표적(表蹟)이나, 예언(豫言)은 믿지 아니하는 자(者)들을 위(爲)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爲)함이니, (23)그러므로 온 교회(敎會)가 함께 모여 다 방언(方言)으로 말하면, 무식(無識)한 자(者)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者)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6)그런즉 형제(兄弟)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各各) 찬송(讚頌)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啓示)도 있으며, 방언(方言)도 있으며, 통역(通譯)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德)을 세우기 위(爲)하여 하라. (27)만일(萬一) 누가 방언(方言)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 세 사람이 차서(次序)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通譯)할 것이요, (28)만일(萬一) 통역(通譯)하는 자(者)가 없거든 교회(敎會)에서는 잠잠(潛潛)하고, 자기(自己)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39)그런즉 내 형제(兄弟)들아! 예언(豫言)하기를 사모(思慕)하며, 방언(方言) 말하기를 금(禁)하지 말라. (40)모든 것을 적당(適當)하게 하고, 질서(秩序)대로 하라. 6>.神癒(신유)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1>.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2>.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3>.고치시니,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나의 성령사역 소문도 멀리 멀리 퍼져가리라. 사람들과 병자들이 내게 다 오고, 고침을 받으리라.) (마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말씀이 항상 기본이고, 원칙이다. 축사도 병 고침도, 모든 은사 사역도...)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 귀한 말씀을 잊지 말라.)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육은 병을 치유하고, 장애를 고쳐야 한다. 혼은 상한 심령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심령으로 회심시켜 강건하게 해야 한다. 영은 오직 성령님께 복종하고, 동행하며, 성령충만하게 만들어 사역자로 키워야 한다. 이 3가지의 영역의 치유가 바로 신유의 복음의 목표이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노방전도, 여행전도를 게을리 하지 말라.) (마 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권능은 기도하는 자에게, 골방에 사는 자에게 예수님이, 성령님이 부어주신다. 골방의 은혜를 받으라.) (마 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모든 사역과 은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병자에게 치유, 목음 전도가 목적이다. 개인의 영광과 치부, 영화는 없다. 치유자나 사역자의 목표는 오직 하나 전도 뿐이다.) (마 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병은 다 낫는다는 믿음을 확실하게 가져야 한다. 어떤 병은 낫지 않으며, 어떤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엉터리이다. 낫지 않는 이유는 낫지 않을 만한 장애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 요인들이 어떤 때에는 우리 눈에 영원히 가려져 있을 수 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병인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넘쳐야 한다.) (막 1: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왜 데려 오는가? 귀신을 내쫓으려고, 병 고치려고, 말씀 들으려고...) (막 1: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귀신을 묶으라. 귀신은 자기가 위험한 자리에 오면 원래 발악하고, 소리지르고, 고함지르며 난폭하게 행동한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죄인들을 마다 하지 말라.) (막 5: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다.) (막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막 6: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나, 성령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성령의 불이 붙어야 한다. 성령 역사는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없다. (막 6: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성령으로 기름부으라.) (막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막 6: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성령의 권능은 전이된다.) (눅 4: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눅 4:40) 해 질 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아기에게 배가 아파 치유기도했다. 장을 따라 검은 기운이 빠져 나갔다. 울던 아기가 가만히 있다가 좀 누워 있더니, 이내 일어나 명랑하게 뛰어 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적적인가?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치유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눅 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말씀의 능력과 권세가 있어야 한다,) (눅 5: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성령충만으로 나오는 힘, 골방의 삶에서 나오는 힘, 늘 성령 동행의 삶에서 나오는 힘이 바로 성령의 권능이다.) (눅 6: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말씀이 먼저, 병 고침은 그 다음이다.) (눅 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살 자는 예수님을 만난다. 을지병원의 엘리베이터에서 발목이 아파 딛지 못하는 아줌마를 만나 치유해 주려 하니, 바쁘다며 그만 가 버렸다. 불쌍한 여자! 수술해야 한단다. 수술하면 낫나?) (눅 9: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예수님이 성령으로 축사, 치유, 능력을 부어주신다.) (눅 10: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병자들에게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라.) (행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초대교회의 성령역사는 그대로 재현되어야 한다.) (행 5: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행 5: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다 낫는다. 여기“다”가 중요하다. 낫지 않으면 이유가 있다. 그 원인을 제거하면 다 낫는다.) (고전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4>.능력이요 그 다음은 5>.병 고치는 은사와 6>.서로 돕는 것과 7>.다스리는 것과 8>.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딤전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능력자도 지병이 있을 수 있다. 의학적, 자연적 치료법을 무시하지 말라.)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약 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병 낫기를 서로 기도하며, 치유를 서로 서로 완성해 나가야 한다.) 2.목사님을 잘 섬기는 제직 1>.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목사님과 교회를 잘 섬김이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좋은 교회, 좋은 성도, 좋은 목사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힘을 합쳐 끊임없이 만들어 가야 한다. 좋은 성도는 좋은 목사가 만들고, 좋은 목사는 좋은 성도가 만든다. 좋은 교회란 좋은 성도와 좋은 목사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다. 세상을 떠나신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하던 말씀이 생각 난다. “온누리교회 교인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선하고 좋은 사람만 모인 것이 아니다. 다들 문제 있는 사람들이 오지만, 온누리교회에 동화되면 새사람이 된다.” 무엇이 그들을 새사람으로 만드는가? 사랑의 친교, 성령의 역사, 은혜로운 일들, 자발적인 헌신과 충성의 마음... 등이다. 과거 저는 섬기던 부산 00교회를 떠날 때에, 성도들 앞에 참담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좋은 목사가 되지 못하여 성도들에게 진정한 영적 유익도, 축복도 선사하지 못하고, 갈팡 질팡하는 목회 끝에 2년 만에 도중 하차하게 되었다. 담임목사로서는 너무 생명이 짧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적어도 담임목사는 5년 이상, 10년 이상은 목회를 해야 한다. 그러나 첫 목회 경험지에서 저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에는 마음이 편할 수 만은 없었다. 저도 상한 마음으로 떠났고, 성도들도 교회의 구조적인 불합리함 때문에 7번째 목사가 또 쫓겨 가는 것을 보면서, 역시 상한 마음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이 상처를 지우는 데는 적어도 몇 달 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의 그 아픔 들을 통하여 나에게 더욱 더 유익을 주시고, 더 넓은 목회의 세계를 아는 축복을 주셨다고 확신한다. 내가 떠난 이후에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가 임하여 목조 건물인 교회는 홀랑 불타 버리고, 목사를 상습적으로 쫓아 내던 000 장로 부부는 내가 떠난지 4개월 만에 아내 권사가 암으로, 6개월 만에 남편 000 장로가 무너지는 교회 담장에 깔려 죽고 말았다. 그 사건은 내게 충격이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당시 나는 훌륭한 목사가 아니었다. 문제 있는 목사였다. 나에게도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훈련의 과정으로 인도는 하셨지만, 징계하시지는 않으셨다. 어리고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나를 향한 주님의 손길은 징계의 채찍과 막대기가 아니라 사랑이요, 시련과 연단과 훈련의 과정이다. 2년 전, 제가 교통사고를 내서 어느 아줌마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 전에 나는 이미 주님의 심판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그 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다리 몽댕이를 분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부흥성회 인도 때문에 차마 너를 눕혀 놓을 수 없어서, 다른 죄 없는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 사건으로 나는 나의 죄를 확실히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과 예조를 느끼고 몸서리쳤고, 내가 살아 가는 것이 나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시는 은혜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좋은 성도란 어떤 성도일까? 성도라 하면 다 포함되는데 좋은 목사, 좋은 장로, 좋은 권사, 좋은 집사, 좋은 전도사, 좋은 일반 평신도... 목사 자신은 좋은 목사란 어떤 목사인지 스스로 잘 알지 못한다. 장로도 마찬가지, 권사도 마찬가지, 집사, 전도사도 마찬가지이다. 남이 잘 안다. 그런 점에서 좋은 성도 상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역시 목사라 할 수 있다. 저는 목사로서 한 평생을 살아 가기로 주님 앞에 서약하고 안수 받은 사람이다. 좋은 성도 상에 대하여 앞으로 저의 관점이 부분적으로는 변해 가겠지만, 근본 관점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목사 입장에서 제가 생각하는 좋은 성도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그것은“목사에게 잘 하는 성도”이다. “하나님께 잘 하는 성도!”이건 너무 추상적이다.“교회에 잘 하는 성도!”역시 범위가 너무 넓다. 여러분 가운데는 분명히 이견(異見)이 계신 분이 있을 것이다. 틀린 것은 아니다. “목사도 인간인데 그가 잘못할 때도 잘하란 말이냐?”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잘못하는 목사에게도 언제나 잘 하는 성도는 정말 좋은 성도이다. 나는 목회를 잘 못하는 목사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진실로 한 번도 없다. 그러나 나의 성도들은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 준다. 이런 좋은 성도를 만난 것은 진실로 나의 복이다. 어디 가서 이런 착하고 좋은 성도들을 만날까? 나는 아무리 좋은 교회 자리가 난다 할지라도 선뜻 부임해 갈 자신이 없다. 가면 대번에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큰 교회에 부임한다 하면 걱정부터 먼저 된다.“아이구! 저 사람 언제 또 쫓겨 날까?”하고... 중요한 사실은 목사 개개인의 됨됨이와 잘 잘못을 떠나서 항상 목사에게 잘하는 성도, 잘 하고자 하는 성도는 정말 좋은 성도이다. 부디 여러분! 이러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란다. “좋은 성도”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사에게 순종 잘 하고, 목사에게 충성 잘 하고, 목사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고, 목회에 활력과 용기와 보람과 성취감을 주는 성도이다. 그리고 말로 만이 아니라 실제로 목회를 도와 주는 사람이다. 만일에 성도 중에 자기의 삶과 일에 우선권을 두지 아니하고, 목사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목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반대로 나쁜 성도란 목사에게 불순종 하고, 목사의 목회 일에 반대하고, 목사의 마음에 스트레스를 주고, 목회에 낙심과 좌절과 실패와 절망감을 주는 성도이다. 목사들은 이런 성도를 가라지라 한다. 물론 목사가 가라지라 해서 다 가라지는 아니나, 그러나 제가 판단할 때 목사가 가라지라면 95% 이상이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2>.훌륭한 목사란 어떤 사람인가? 골1:24-29절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 났고,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1>.성도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는 자(24) <2>.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자(24) <3>.성도를 위한 자(25) <4>.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우는 자(28) <5>.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자(29) <6>.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자(29) 벧전5:1-4절 (1) 너희 중(中) 장로(長老)들에게 권(勸)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長老)된 자(者)요 그리스도의 고난(苦難)의 증인(證人)이요 나타날 영광(榮光)에 참예(參與)할 자(者)로라. (2)너희 중(中)에 있는 하나님의 양(羊) 무리를 치되 부득이(不得已)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自願)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爲)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맡기운 자(者)들에게 주장(主掌)하는 자세(仔細)를 하지 말고, 오직 양(羊) 무리의 본(本)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牧者長)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榮光)의 면류관(冕旒冠)을 얻으리라. <7>.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2절) <8>.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라.(2절) <9>.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3절) 이상의 말씀은 목사와 장로가 언제나 기억하고 지켜야 할 지도자의 덕목이다. 3>.주의 종을 받드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 목사를 사랑하라.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로 하여금 행복하게 목회하게 하라. [히 13:17-21절] (17)너희를 인도(引導)하는 자(者)들에게 순종(順從)하고, 복종(服從)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靈魂)을 위(爲)하여 경성(警醒)하기를 자기(自己)가 회계(會計)할 자(者)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有益)이 없느니라. (18)우리를 위(爲)하여 기도(祈禱)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善)하게 행(行)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善)한 양심(良心)이 있는 줄을 확신(確信)하노라. <1>.순종하고 복종하라.(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순종은 납득이 될 때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어긋날 때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복종은 납득이 가지 않을 때도 따르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복종이란 순종의 외형적인 자세이다. 틀려도 순종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틀린 일은 복종은 하되, 순종은 할 수 없는 것이다.“목사님! 겸손히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신앙 양심으로 이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이러한 태도가 복종하나, 순종할 수 없는 자의 아름다운 자세이다. <2>.나를 위한 목사의 기도를 축복 되게 하라.(17절) 축복이 진심으로 응답 되려면, 그에 합당한 믿음생활이 병행되어야 한다. 목사가 기도해 보면 진심으로 축복이 마음으로 우러 나는 성도가 있고, 입술로는 기도하나 마음은 없는 성도가 있다. 목사의 진심은“나도 모르겠다.”,“네가 그렇게 믿는데, 하나님이 축복하실 리가 없지!”라고 말한다. 심지어 목사의 마음에“너는 매 맞아야 한다.”,“너는 저주 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다. 목사 마음에 이 정도 되는 성도는 성도가 아니라, 진짜 가라지요, 마귀이다. 무서운 말씀이니, 가슴에 새기기 바란다. 저는 성령을 받고, 영분별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이 더욱 더 뚜렷하게 이 모든 사실을 다 보여 주신다. 하나님이, 주의 종이 진심으로 나를 축복할 수 있도록 예수 믿어야 한다. <3>.목사가 목회를 즐거움으로 하게 하라.(17절) 근심하며 목회하지 않게 하라.(17절) 자심감에 차서 목회하게 하라. 두려워 하지 말고 담대하게 용기백배, 의기양양하여 목회하게 하라. 격려하고 용기를 주라. 허물을 감싸 주고, 덮어 주라. 목사를 괴롭히는 성도는 자기가 대신 제거하라. 기도하라. 신뢰하라. 사랑하라. 인간적인 감정으로 잘 하지 말고, 신앙적 척도에 바로 서서 잘하라. <4>.목사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라.(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목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라. 어느 개척교회 목사가 교역자 모임에서 주관하는 태국 관광을 갔다. 한 코스에 갔더니 코끼리 조련사가 손에 금덩이를 하나 쥐고서,“누구든지 코끼리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에게 이 금덩이를 주겠다.”고 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데, 이 개척교회 목사가 자기가 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는 코끼리 귀에 대고 뭐라고 한참을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만 코끼리가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조련사가 금덩이를 주면서 뭐라고 얘기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개척교회를 하면서 고생한 얘기들을 몇 가지 해 주었더니 코끼리가 운 것이라고...” 이번에는 조련사가 코끼리 앞 발을 들게 하면 금덩이를 하나 더 주겠다고 했다. 개척교회 목사는 그건 쉽다고 했다. 그는 코끼리에게 다가 가 한 마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코끼리가 앞 발을 번쩍 들었다. 이번에는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더니,“그야 간단하지요. 야! 코끼리야. 너도 개척교회 한번 해 볼래!”했더니 앞 발을 번쩍 들었다고...... 개척교회 목회가 얼마나 힘들며, 얼마나 교회를 세우는 것이 힘든가를 알게 해 주시는 말씀이다. 이런 말이 있다. “아무리 작은 개척교회라도 주의 종이 있고, 한 명 이상의 성도가 있고, 배고픔이 있고, 눈물의 기도가 있다.”고... 목사와 교회는 기도를 먹고 자란다. 성도는 범사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야 한다. 기도가 살아 있는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저력이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으로 끌어 오는 유일 무이한 방법이다. 성도는 쉬지 않고 목사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는 잘 하지만, 사람인 목사에게는 보아 가면서 해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것이고,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음으로 그 분에게 잘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일인 교회 일과 하나님의 사람들, 즉 목사와 교우 들에게 잘 하는 일이 곧 하나님께 잘하는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잘 지키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신앙의 척도이다. 먼저, 목사의 말에 순종하라. 정말 마음이 내키지 않거든, 복종하라. 목사의 마음을 즐겁고 평안하게 하라. 그의 목회가 기쁘고 신나게 하라. 목사와 좋은 인간 관계를 맺으라. 목사가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 사람인지 아는가? 털끝 만큼도 그의 마음에 짐이 되는 사람이어서는 아니된다. 저는 목회란 것이 이렇게 힘들고 고달프고 어려운 길인 줄 알지 못했다. 아니, 목회의 길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도 없고, 걸어 갈 수도 없는 길이다. 나는 다시 산다면 목사의 길을 걷지 않는다. 나 같은 천박한 사람은 고상한 목사의 길을 결코 걸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처 입는 대로 믿음을 빼앗기고, 낙심하고, 마음이 강퍅해진다. 한 인간인 목사도 그렇게 된다. 성도들은 자기들의 강퍅하고 못된 버릇으로 목사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도, 목사가 목회 잘 하기를 바란다.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절대 축복이 가지 않는다. 목사든 성도든, 이럴 때는 기도하고 말씀으로 치료하여 회복해야 한다. 4>.목사님을 잘 섬기는 행복, 사무엘하6:1-14절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무엇일까? 목사는 성도를 어떻게 대해야 하며, 성도는 목사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알아야 하는 것일까? 성도에게 목사는 도대체 무엇인가?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이 세상의 최우선의 관계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목사와 성도의 관계 보다 더 이상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과 양의 관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목사와 성도는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이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가장 소중한 사이이며, 반드시 함께 해야 할 사이이며, 법궤인 목사는 성도의 가슴 속에 가장 소중히 모셔야 할 보물이다. 육적 혈연관계도는 부부 사이는 무촌, 부모 자식 사이는 1촌, 형제자매 사이는 2촌,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가 3촌이다. 영적 혈연관계도는 예수님과 성도 사이는 신랑 신부 사이, 부부 사이이다. 목사님과 성도 사이는 부모 자식 사이 1촌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이다. 성도 상호 간은 2촌이다. 불신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는 삼촌이다. 십계명은 천륜 4가지, 인륜 6가지인데, 그 중 첫째가 부모 공경이다. 영적으로 보면 영적 부모 같은 목사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성도는 목사님의 보호와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종인 목사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 성도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 불신자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각각 다르다. 하나님의 종의 잘 잘못은 하나님이 직접 처리하신다. 성도는 하나님의 종인 목사님의 지도와 감독 하에 있을 때 하나님이 지키신다. 불신자는 일반은총의 영역 안에서만 지키신다. <1>.하나님이 당신 이름을 두신 곳 족장 시대 - 제단에 두심 모세 시대 - 성막에 두심 솔로몬 시대 - 화려한 솔로몬 성전에 두심 포로기 이후 -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에 두심 예수님 당시 시대 - 예루살렘 성전에 두심 예수님 이후 신약 시대 - 심령 성전에 두심 광야와 같은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심령 성전을 잘 지어 가야 한다. 모세가 성막을 짓던 법처럼, 우리도 그렇게 우리 마음 속에 성전을 지어 가야 한다. 성막 안에는 각종 기구 들이 있었다. 그 기구 하나 하나는 다 깊은 영적 의미를 갖고 있다. 성막을 잘 알면, 하나님을 잘 배우게 된다. 예수님, 인간론, 교회론, 예배론, 청지기론, 우주론, 천국론까지 다 뚫린다. 13가지 주제를 다 알게 된다. 성막의 휘장은 뜰문 휘장, 성소 휘장, 지성소 휘장 등이 있다. 뜰문은 지나면 성소에 번제단, 물두멍, 떡상, 금등대, 분향단, 그리고 지성소 휘장 뒤에 법궤 순서로 성물이 있다. 성 소: 1>.번제단 - 죽음의 능력, 죽어 제물이 되어야 한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 2>.물두멍 - 회개의 능력, 회개로 신앙의 출발을 해야 한다. 3>.떡 상 - 말씀의 능력, 날마다 말씀을 먹어야 한다. 성령의 조명한 말씀을... 4>.금등대 - 성령의 조명,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5>.분향단 - 기도의 능력, 기도의 삶이 늘 함께 해야 한다. 지성소: 6>.법궤 - 임재의 능력, 하나님이 내게 임재해 계셔야 한다. 지성소는 지성소 휘장을 지나 가야 한다. 예수님이다. 그 속에 들어 가야 법궤를 만난다. 법궤 위의 속죄소 중앙 양 그룹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 하나님의 음성이 이 곳에서 들린다. 하나님은 법궤 위에서 말씀하신다. 법궤를 들고, 요단강을 건넜다. 법궤가 요단 강에 들어 서자 요단 강이 갈라졌다. 법궤를 앞세우고 여리고 성을 돌았다. 7일째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법궤를 앞세우고 가나안을 차례 차례 점령해 나갔다. 너의 심령 속에 법궤를 모셔 들여라. 네 속에 법궤를 모시고 나아 가면 요단 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삶이 형통해지고, 장사가 안되는 곳에 장사가 잘 되고, 갖가지 놀라운 기적들이 나타 난다. 법궤를 모시고, 법궤를 앞세우고 나아 가라. 특히 목사의 아내 사모가 그리해야 한다. 내 남편이라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신 마음으로 섬겨라.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성막이 우리 심령 속에 제대로 지어지면, 이를 교회론으로 풀어 보면 뜰, 성소, 지성소로 나뉘어지고, 인간론으로 풀어 보면 육, 혼, 영으로 나뉘어진다. <2>.“성도의 법궤는 목사이다.” 오늘날 우리 심령 성전의 법궤는 무엇일까? 지성소에는 가장 중요한 법궤가 있다. 법궤 속에는“만나 항아리”와“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다. 모세가 들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영도력, 지도력이다.“싹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권능이 그 지팡이에 함께 하여“살아 있다”는 말이다. “만나 항아리”는 하늘 양식이다. 말씀이다.“십계명”은 우리 일상생활의 기본 규범이 되는 말씀, 계명, 삶의 지침이다. 그러면 법궤는 무엇일까? 법궤는 하나님의 종 목사이다. 목사 속에 하나님의 생생한 살아 있는 지도력과 성령의 부어 주시는 말씀과 삶의 지침이 다 들어 있다. 법궤는 지성소 한 가운데 있다. 목사는 교회 한 가운데 있다. 법궤 위의 속죄소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목사가 강단 위,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우리의 심령 성전에 법궤를 늘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당신의 목사를 영적으로 늘 가슴에 품고,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받으며, 그의 꾸중과 훈계를 들으며 살아 가야, 당신의 영혼과 삶이 복을 받고, 형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영적 위계 질서는 영적 세계에서는 어김이 없는 철칙이다. 이 말은 목사를 잘 만나면 일생의 축복이요, 잘못 만나면 패가 망신하고, 저주를 받아 죽고 만다는 것이다. 방자한 자, 교만한 자, 정계 받을 자, 자기 자리를 쫓겨 날 자는 법궤를 잘못 만나 그 길을 걷는다. <3>.록펠러의 어머니의 10가지 유언 영국에서 어려서 고아였던 록펠러의 어머니의 10가지 유언은 의미 심장하다. 록펠러는 당대의 최고 부자였다. 이 유언은 미국 맨하탄의 록펠러 재단 빌딩 입구에 쓰여 있다. 그 어머니는 정말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여인이었다. 1.하나님을 너의 친 아버지로 섬겨라. 2.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오른쪽 주머니는 반드시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4.주일은 꼭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라. 5.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 자리에 앉으라. 6.하루에 성경을 한 장씩 읽으라. 7.하루를 기도하고, 시작하라. 8.잠자기 전에는 반드시 회개 기도를 하고 자라. 9.사람과 원수를 맺지 말라. 10.불쌍한 이웃을 힘이 닿는 대로 도우라. 이제 법궤인 목사를 대입하여 성경 본문을 주해해 보자. (삼하6:1-23)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정예병, 최고의 군대, 항상 최고로 법궤를 모셔야, 교회 내 최고의 사람들로 하여금 법궤인 목사를 수종 들고 호위하게 해야 한다.) 다시 모으고, (2) 일어 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 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속죄소에 하나님이 계심)이라. (3)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최고로, 존귀하게, 항상 새 것에 모셔야...)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4) 저희가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행하고,(법궤 앞에서 모셔라. 항상 남들보다 먼저 충성하라. 헌신하라. 뒤에서 보니까 법궤가 흔들리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목사의 허물이 보이는 것이다. 앞에 서면 목사의 허물과 단점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주악하더라. (6)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문제가 생김, 교회 안에 시험이 생기고, 풍랑이 일어남, 소들은 집사들, 일군 들이다. 제직들이 날뛰고, 그 결과 꼭 목사가 다친다. 벧세메스로 올라 가던 암소가 울며 가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던 그 자세를 늘 기억하라.)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당연한 일, 잘한 일, 자기 눈에 법궤가 위태로워 보여 안정시키려고, 보호하려고...)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하나님 눈에는 사람이 잘못함, 붙들면 안됨, 하나님의 법궤를 침범하거나 붙들면 안됨,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님의 장로 임직식-왜 장로가 됩니까? 목사님을 보좌하려고 합니다. 장로님이 돕지 않아도 나 스스로 목회 잘 하니, 장로 되거든 죽으시오.) 진노하사 저를 그 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법궤에 손을 대거나, 만지면 죽는다.)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 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법궤가 복으로 역사하는 경우) (12)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얼마나 복을 크게 받았으면, 소문이 왕의 귀에까지 들렸을까? 법궤를 잘 모셔, 온 천하에 복을 받은 소문이 넘치게 하라. 록펠러의 어머니의 유언을 기억하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법궤는 기쁨으로 매어야 한다. 목사와 교회가 짐이 되고, 부담스러워짐은 그 영혼과 신앙이 이미 병든 것이다. 목사와 성도의 사이는 항상 최고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한다. 기쁨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목사의 가슴에 못을 박지 말라.)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 갈 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성령의 감동으로 최선을 다하라. 사람 눈에 우스워 보여도 좋고, 미친 것처럼 보여도 좋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 목사도 그렇게 미쳐야 하고, 성도도 그렇게 미쳐서 목사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라.) <4>.목자와 양의 관계 성도와 목사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 가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성도와 목사와의 관계를“목자와 양의 관계”라 한다. 이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유추된 것이다. 예수님은 목자요, 우리는 양들이다. 목사는 예수님의 위임을 받은 작은 목자요, 성도는 그를 통하여 예수님의 지도를 받는 양들이다. 목사가 만일 진정한 목자라면, 예수님이 하신 목양 자세 그대로 목회해야 한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목사는 진정 두려움으로 목회하게 될 것이다. <5>.청지기 목사, 청지기 목회 나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를 청지기와 양으로 비유하고 싶다. 그것이 가장 적절하다. “대목자장 되시는 예수님 앞에 나는 작은 목자, 청지기입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오늘 새벽기도회에서 중요한 영감을 하나 확실하게 붙들었다. 청지기 목사, 청지기 목회론이다. 나는 영적 세계를 알고, 영적 전쟁에 돌입한 예수님의 최정예 부대의 최고 정병의 최고 사령관이다. 나는 이제 이후 더 이상 마귀의 세력에 밀리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영적 오기가 아니라, 내게는 그런 권능이 이미 왔다. 나는 성령의 모든 은사를 소유했고, 성령의 권능의 종이다. 나는 이제 이후, 더 이상 나에게 맡겨 주신 예수님의 양떼들을 절대 저 이리 떼들의 밥으로 그냥 두지 않는다. 다 구출해 내고, 살려 내고, 내가 지키는 영적 테두리 안으로 데리고 와서 축복 받게 하고, 새 삶을 살게 하리라. 나는 성도 들을 지키는 영적 파수군이다. 양떼를 가장한 마귀들도 있을 것이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분별이 될 것이다. 나의 성령님이 다 알게 해 주실 것이다. 그것은 내가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나는 무조건 청지기로서의 나의 사명을 다 감당한다. 양들을 미혹에서 건져 내어 살리는 것이 나의 목적이니, 성령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성도들을 건져낼 것이다. 살려 내야지! 양이란 어차피 철 없고, 분별 없고, 미혹 잘 당하고, 마귀가 노략하면 그냥 당하는 것이다. 약하니 성도의 잘못이 아니지! 지켜 내지 못한 청지기 목사의 잘못이지! 성도의 영혼과 가정, 가족을 돌보지 못한 죄를 회개했다. 성도가 미혹 당하는 징후가 나타났으나, 방치한 죄를 회개했다. 못된 교회에 나가는 것을 알고도 막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 다른 오염된 영적 물을 먹으니, 양이 병들 수 밖에... 나는 절대 내 성도의 영혼을 찾는데, 포기하지 않는다. 불독처럼 물고 놓지 않으리라. 나는 내게 맡겨 주신 주님의 양떼 들을 단 한 사람이라도 절대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영혼을 두고 사투한다. 요10:10절의 속이고, 빼앗고, 죽이고, 멸망 시키러 오는 저 악한 원수 마귀에게서 나의 성도들을 다 찾아 오고, 축복을 받게 하리라. 저들 모두를 안전한 주님의 품 속에 거하도록 인도하리라. <6>.목사가 성도를 지키는 5차 방어선 성도를 지키는 방어선을 철저히 고수해야 한다. 5차 방어선을 사수하라. 1차 방어선은 예배와 설교이다. 이 방어선이 뚫리게 해서는 아니된다. 여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예배와 설교를 위해 목사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내가 성령 목회로 전환한 후, 이전 목회의 첫 열매인 000 집사가 거꾸러졌다. 000 집사가 교회에 나오지를 못한다. 믿음에 문제가 있는 사람 들은 아예 다 나오지를 못한다. 마귀가 강력하게 붙들고, 교회에 못 가게 하는 것이다. 교회에 가면 성령의 나타 나심과 성령의 권능의 말씀으로 그 영혼 들이 살아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이후 영적 전쟁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 주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저 양떼들을 다 건져 내리라. 2차 방어선은 중보기도의 방어선이다. 이 방어선은 일차 방어선이 뚫린 자들을 위한 방어선이다. 제 2선에서 추락한 저들을 다 건져 내리라. 나는 단 한 영혼도 마귀의 손에 넘겨 주지 않는다. 사투하며, 저들의 영혼을 건져 내리라. 성도를 위하여 금식하며, 중보 기도하고, 그 영혼을 돌보리라. 3차 방어선은 전화, 심방, 편지, 강권 등의 돌봄의 방어선이다. 필사적으로 저들이 교회에 나올 때까지 저지한다. 저들이 멀리 이사를 하지 않는 한, 교회에 나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도록 만든다. 나는 성도를 돌보고, 지키기 위하여 이를 악문다. 4차 방어선은 경고의 방어선이다. 하나님이 너를 징계하신다고 경고한다. 반드시 저들이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라도 교회에 나오도록 만든다. 실제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고... 이제 이후, 내 손에 걸려 든 영혼은 단 한 영혼도 빠져 나갈 수 없다. 5차 방어선이 있다. 인내의 방어선이다. 기나 긴 지속적인 전투를 여기서 계속해야 한다. 여기서 목사의 임무를 끝내라. 어떤 배신자도, 원수도 저주하지 말라. 목사가 버리고 저주하면 그는 패가 망신하고 죽는다. 성도가 저주 받아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의 매가 임하기 전에 필사적으로 인내하며 저들을 지켜 내야 한다. 이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면 그는 저주를 받으니, 패가 망신하고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은가? <7>.교회 내의 법궤를 허무는 자들:부목사들, 여전도사들, 장로들, 권사들, 집사들, 사모... 1>.부목사들: 자기 담임목사를 판단하고, 불순종 하고, 그 위에 올라 타고, 자기가 더 지식이 있고, 똑똑한 척 교만하고, 교인들의 마음을 빼앗고, 뒤에서 목사를 험담, 비판한다. 배목사 역시 큰 교회 목사님들, 선배 목사님들, 자기 위에 있는 목사님 들을 절대 비판하서나 씹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2>.여전도사들:이들은 여성적으로, 여성 사역이나 가정 사역, 상담 사역, 기도 사역 등 전문 사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가 저들을 사용한다. 그런데, 교회 내에 여전도사들이 시험거리이다. 문제 중의 문제이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기도의 능력이 있고, 또 열심히 기도하고, 나름대로 영적 일가견이 자리 잡은 사람 들이다. 그래서 사역의 길에 나섰다. 그런데 대부분이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고, 인격 바탕이 갖추어지지 않고, 삶이 바닥을 헤맨 사람들이며, 이혼했거나 지식적으로 무식하다. 여기에다 나름대로 영적 편견이 오만으로 자리 잡고 굳어져 있다. 그들은 절대 자기들의 기도의 체험에서 온 경험을 보완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최고라고 말한다. 이들 눈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갓 부임한 영적으로 햇병아리 같은 목사는 도무지 눈에 차지가 않는다. 이 사람들이 소위 기도의 능력, 성령의 은사, 영권이란 것을 내세우며, 목사를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심방을 다니며, 교인들의 마음을 허문다. 목사를 헐뜯는다. 이 사람들이 목사를 헐뜯고, 짓씹는데 언제나 앞장 선다. 목사를 보좌하고 하나님의 일을 세워야 하는데 허물고 다닌다. 여자들 특유의 짓씹는 짓을 앞장 서서 한다. 그러나 이 나라에 여전도사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들 모두를 매도해서는 아니된다. 제대로 훈련 받고, 배운, 사역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나는 앞으로 그들을 쓸 것이지만, 이 점을 분명히 짚고, 알고, 가려서 쓸 것이다. 3>.장로들: 한국교회는 장로들이 문제이다. 큰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장로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타락한 종류들이다. 저들 때문에 주의 종들인 목사의 가슴이 피를 흘리며, 신음한다. 들려 오는 소식은 전부 장로들이 목사를 친 얘기들 뿐이다. 끊임없이 싸우고 갈라진다. 나도 과거에 그런 뼈 아픈 경험을 가진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철 없던 어린 시절, 못된 장로에게 쫓겨 났다. 한국교회 내에 장로 때문에 이를 갈고, 욕을 하고, 목회를 못하고, 지옥 가운데서 신음하는 목사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부디 장로들을 제대로 길러 내라. 이것이 목사의 책임이다. 장로들이 법궤인 목사를 흔들린다고 붙든다. 붙드는 정도가 아니라, 흔들어 버리고, 갈아 치워 버리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는다. 자기는 신앙 양심과 교회 정의를 위하여 잘 하는 짓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죽음으로 가는 웃사의 행동이다. 흔들리는 법궤를 붙드는 행위가 자기는 잘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의로운 영적 투사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아니다. 절대 붙들어서는 아니될 영역에 손을 댄 것이다. 4>.권사들: 권사들이 기도하고, 덕을 세우고, 성도의 본이 되어야 하는데, 한 마디로 문제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모든 말과 문제와 교회 내의 시비가 권사 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바로 된 사람이 권사가 되어야 한다. 권사들을 제대로 길러 내야 한다. 5>.집사들: 면목동의 000교회의 한 남집사는 교회가 힘들게 건축할 때, 전세금을 빼서 교회에 갖다 바쳤다. 축복의 출발을 성령으로 감동으로 얼마나 잘 했는가? 그러나, 그 다음에 마귀가 되어 버렸다. 회계집사가 되고, 신임을 얻고, 힘을 얻자 목사의 목회에 간섭을 하고, 목사가 잘 하느니 못하느니 자기가 상목사가 되어 좌지 우지하기 시작했다. 목사가 차츰 차츰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목사가 너무 괴로워 우리 000 집사에게,“저 집사님 때문에 너무 힘들다,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했단다. 그러던 중에 그 집 아이가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다. 그리고 본인은 집도 없이 가난 속에 허덕이다가, 떠돌이가 되어 버렸다. 예전에 그 아내가 우리 교회에도 한번인가 다녀 갔다. 왜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생기는가? 이유는 단 하나다. 법궤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당신이 손을 대서는 아니될 성역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이것 하나 만은 깊이 분별해야 한다. 법궤는 축복의 통로인 동시에, 저주의 통로이다. 하나님이 축복을 받을 사람은 법궤를 통해 축복하시고, 저주 받을 사람은 법궤를 통해 저주하신다. 그 방법은 법궤인 목사를 건드리게 하고, 다치게 하는 것이다. 본인은 그것이 저주로 가는 길인 줄 모른다. <8>.법궤인 목사는 축복의 통로인 동시에, 저주의 통로이다. 하나님이 법궤인 목사를 축복의 통로로 만들었으나, 그로 인하여 실족한 자들이 저주를 받는다. 저주 받기로 작정된 자는 목사에게 죄를 짓고, 관계를 파괴하여 저주를 자초한다. 목사와의 관계를 모르면 저주를 자초한다. 은혜 받고, 축복 받고, 형통하려고 교회에 나왔는데, 어찌된 셈인지 빼앗기고, 저주 받고, 망하고, 죽어 끝장을 본다. 이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인간적 감정이나 정, 사랑, 의리, 가족 유대, 친분은 목사와의 영적 관계에 치명적인 적이다. 이것이 영적 질서와 하나님의 성령의 교통을 가로 막는 최고 장애물 들이 된다. 축복의 도구인 목사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파괴되고, 뒤틀리면 먼저 나의 은혜가 고갈된다. 그리고 영이 시든다. 그리고 죽는다. 마침내 삶의 귀퉁이가 무너지지 시작한다. 그러다가 와르르 무너진다. 자기 자리를 지키라. 영적 경계선을 절대 넘지 말라. 목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목회를 말아 먹든, 씹어 먹든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교회를 팔아 먹든, 말든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너 아니어도 간섭하다가, 저주 받은 사람 많다. 주제 넘게 나서지 말라. 목사가 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목사가 엉터리일 수 있다. 그러나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목사가 목회를 유기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 조용히 떠나라. 네가 안 다치는 것이 중요하지! 일꾼인 잘못한 목사는 주인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 때에 당신이 그 막대기와 채찍이 되지 말라. 나는 지난 교회 초창기 4여 년 동안 목회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교회를 다 말아 먹은 사람이다. 사모나 거쳐 간 여전도사 들이나, 집사들이 여러 판단과 생각이 많았겠지만, 그들이 내 목회를 고친 것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하셨다. 나는 사람 때문에 고쳐진 게 아니라, 성령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쳐졌다. 괜히 마귀만 되지 말라. 법궤를 건드리면 마귀가 그 심령을 사로 잡아 버린다. 마귀가 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목사의 일은 두 분이 결정할 일이다. 미안하지만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사모는 그 일에 끼어 들 영적 자격이 아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9>.법궤는 하나님의 종 목사이다. 법궤가 흔들린다고, 붙들지 말라. 법궤의 위치가 불안하고, 문제가 있고, 죄가 있고, 성격에 문제가 있고, 네 판단에 내가 붙들어 주어야 목회를 잘 하고, 교회를 잘 세울 것 같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 교만이다. 죽을 짓이다. 네가 손을 대어서는 아니 될 법궤에 손을 대지 말라. 너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다. 이건 절대적인 영역의 한계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들 수 없고, 자식이 부모에게 대들 수 없듯이, 이 영적 관계는 나의 심령이 살고,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는 필수적인 일이다. 만일에 그리한다면 벌써 너는 교만에 사로 잡혀 저주를 자초하고, 패망으로,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 예수를 잘 믿었는데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한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 법궤를 잘 모셔야 한다. 내 중심에 모셔야 한다. 법궤를 소중히 해야 한다. 법궤는 내가 가르치고, 다스리고, 판단하고, 문제로 삼을 대상이 아니고, 무조건 잘 모셔야 할 가장 소중한 대상이다. 법궤인 주의 종을 그래서 잘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전부 나의 축복의 원천이 되고, 바탕이 된다. 너의 법궤를 찾으라. 성소는 나 자신이며, 지성소는 내 밖에 있다. 번제단, 물두멍, 떡상, 금등대, 분향단은 다 내 속에 있으되, 나의 법궤는 내 밖에 있는 것이다. 바로 내가 섬기는 나의 목사님이다. 여러분이여! 진정 내 영혼이 복을 받으려면, 나의 목사님이 있어야 한다. <10>.십일조의 의미 십일조는 교회에 바치는 것이 아니다. 주의 종에게 바치는 것이다. 구약을 보라.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한 양식이 십일조의 기원이다. 레위인들이 먹고 살도록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교회와 주의 종에게 말라기 3장의 십일조 축복과 저주를 명심하고, 예물을 드려라. 하나님께 바친다는 추상적인 얘기 하지 말라. 교회에 바친다고 뭉뚱거려 말하지 말라. 주의 종의 응식(應食)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교회 헌금은 목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집행할 성경적 권리가 있는 것이다. <11>.나의 법궤를 어떻게 찾을까? 1>.자기 목사를 찾으라. 교회생활, 설교, 목사의 삶을 보면서,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잘 들으라. 당신의 판단이 옳다는 객관적 근거가 있는가를 물으라. 감리교 군목 출신의 000 목사가 제대를 하고, 자기가 목회를 배울 목사님이 누군가 살피다가 금란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것을 보고, 김홍도 목사님을 찾아 와 말했다. “목사님! 저도 목사님께 목회를 제대로 배워 큰 목회를 할 것입니다. 허락해 주세요.” 김목사님이 그를 부목사로 받아 주었다. 그런데 3개월 째에 사표서를 제출했다. 김홍도 목사님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는 이유였다. 김홍도 목사님이“자네는 뭘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꾸중했다.“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는데 왜 교회가 이렇게 크냐?”했다. 그는 그 날부터 6개월 동안을 새벽 기도하며 하나님께 물었는데, 드디어 김홍도 목사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홍도 목사님은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하는 종이었다. 그는 7년을 김홍도 목사님에게서 목회를 배웠다. 지금 000 목사는 춘천에서 강원도의 제일 큰 교회를 건축하고 목회를 잘 하고 있다. 법궤인 목사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목사에게도 법궤인 자기 목사님이 있어야 한다. 그 속이 얼마나 깊은지 아는가? 그와 주님이 얼마나 가까운지 아는가? 당신 눈에 그것이 보이는가? 당신이 그것을 판단할 만한 영적 분별력이 있는가? 당신 꼴을 보라. 그런 분별력이 있어서 그렇게 형통한지, 대단한지, 남이 인정하는지... 자기 목사를 빨리 찾아야 한다. 그와 함께 살고, 죽으라. 2>.자기 목사를 최고의 지성으로 잘 섬겨라. 대접하라. 모든 좋은 것으로... 선물하라. “목사님! 시골 동서가 마늘을 보냈어요. 최고 좋은 것 가져 왔어요.” 후에 심방 가 보니, 부엌에 더 좋은 마늘이 있었다. “집사님! 이 마늘 우리 집에 갖다 준 것보다 더 좋은데..” 집사의 얼굴이 발개졌다. 집안 경조사에 항상 최고의 어른으로 모시라. 자동적으로 제일 먼저 생각이 나야 한다. 목사와 항상 함께 살라. 삶의 모든 일에 항상 목사님이 생각 나야 한다. 목사님은 우리 집에 살지 않지만, 우리 가족 중에 최고 가족이다. 최우선 대상으로 모여야 할 분이다. 000 목사님은 유언을“너의 목사님! 잘 섬겨라.”라고 말할 것이라 했다. 3>.자기 목사와 동역하라. 예배, 말씀, 기도, 범사에 동역하라. 예배 잘 참석하라.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은혜 가운데서 자라 가라. 10년이 가도 안 자라는 것은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꼴을 먹지 말라. 여기 저기 다니지 말라. 새벽기도를 다른 교회에 나가지 말라. 자기 교회로 오라. 영적 꼴을 한 가지로 먹어야 한다. 자기 교회, 자기 목사가 없는 사람은 잡식을 하다가, 탈이 난다. 양신이 든다. 양은 분별력 자체가 없다. 눈이 멀기 때문이다. 자기 목사가 힘을 다해 영적 설교를 하고, 영혼을 살려 놓으면, 새벽기도 나간 교회 목사가 다른 설교하여 그 영혼을 망쳐 놓는다. 영적으로 혼란이 오고, 나중에는 그만 양신이 역사한다. 미혹 당한다. 원로목사님 들이 하는 충고 3가지가 있단다. <1>.장로는 반드시 그 아내를 보고 세우라. 장로가 신앙이 없어도 함께 사는 여자가 바로 되었으면, 그 남자는 바로 선다. 그러나 여자가 시원찮으면 틀림없이 말썽을 부린단다. 목사와 대적한단다. <2>.우직하게 하나님을 섬겨라. 까불지 말고, 요란 떨지 말고, 잘난 척 하지 말고, 똑똑한 척 하지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오직 진실하고 꾸준하게, 표나지 않게 주님만 잘 섬겨라. 소처럼 우직하게... 낙타처럼 터벅 터벅... <3>.하나님이 채찍질 하고 때려, 교인이 벌을 받고 망하려면 예배에서 차츰 차츰, 한 발, 한 발 멀어져 간다. 처음에는 졸고, 다음에는 앞에서 뒤로, 뒤에서 기둥 뒤로, 그러다가 결석하고, 그리고 교회를 떠난다. 물론 핑계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예배에 실패하는 자가 되지 말라. 예배에 지각하지 말라. 기도에 동역하라. 목사가 기도하는 것을, 너도 기도하라. 다른 뜻 품지 말라. “목사님과 맞지 않다.” 여전도사가 말한다. 집사가 말한다. 사모가 말한다. 끼리 끼리 모여 앉아 헛소리 한다. 웃기는 소리... 너의 영적 수준이 목사와 같으냐? 너의 신앙의 길이 목사 보다 높으냐? 아니 목사와 대등하냐? 너의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냐? 얼마나 교만한가? 너의 세상 잣대로 재지 말라. 하나님이 세우시고, 제 자리에 두신 법궤를 네가 뭔데 판단하느냐? 목사의 견해 밑으로 들어 오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 잘 기억하라. 영맥으로 진단하면 교회에는 목사 한 사람의 영맥 외에는 없다. 하나님의 영적 견해가 목사를 통하여 흐른다. 잘난 부목사나 전도사나 사모나 장로, 권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맥이 결코 흐르지 않는다. 제가 이제 와서 깨닫는 것은 목사들이 성도의 수준을 너무 높이 본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성도들은 유치원 아이 들이야! 어렵게 가르치면 절대 못 알아 들어! 반복해서 초보적인 것들을 쉽게 쉽게 가르쳐야 해!” 목사 앞에, 교회 앞에, 신앙생활함에 잔꾀를 부리지 말라. 자기 똑똑한 체 하지 말라. 머리 굴리지 말라. 소처럼 뚜벅 뚜벅 걸으라. 낙타처럼 뚜벅 뚜벅 걸으라. 큰 교회 목사님들에게 목회를 배우면 한결같은 대답이,“우직하게 믿으라. 바보처럼 믿으라. 등신처럼 믿으라.”하신다. 잘 믿어 복을 받는 자가 최고지! 광야에서는 주님이 우리를 진짜 죽었나, 여전히 살아 있나 계속 시련과 연단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3)/ 전북 익산 8개 교회 연합제직수련회/ 평신도 세미나/ 논문 자료/ 2013-01-18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3)/ 전북 익산 8개 교회 연합제직수련회/ 평신도 세미나/ 논문 자료 (여인은 아들을 선물로 받고, 죽은 아들의 살림도 받았다.) (롬16:3-4)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 하느니라.” (000 목사의 0000교회 성도들은 70%가 목사님을 위하여 죽겠다고 하고, 전 재산을 다 내어 놓겠다고 공언한다.)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형 알렉산더와 함께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 루포이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요삼1:9-11)\"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디오드레베의 반열에 서지 말라.) <12>.목사님을 잘 섬기는 법; 1>.교회에서 으뜸 되려 하지 말고, 항상 목사님께 복종하라. 2>.범사에 목사님을 잘 대접하라. 3>.악한 말로 망령 되이 목사님을 폄론하지 말라. 4>.목사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시기하고, 소외시키려 들지 말라. 5>.야당성을 버리고, 악한 것을 일체 본받지 말라. 2013.1.18.금.전북 익산 8개 교회 연합제직수련회> 1강의 오전10:40-12:10-빌4:6-7절, 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 2강의 오후 1:30- 3:00-히13:7,17절, 목사님을 잘 섬기는 제직 1.기도와 성령으로 무장한 제직 1.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이다 기도생활은 신앙생활의 가장 기초이며, 뿌리이다. 기도생활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되지 않는다. 깊은 기도생활이 없으면 신앙생활은 진전을 이룰 수 없다. 기도는 신앙인의 생명이요 호흡이다. 1>.하나님의 성령이 기도하게 하셔야, 비로소 기도할 수 있다. 2>.괴로울 때에 기도하라. 고난 중에 기도하라. 3>.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라. 4>.기도 응답의 확신으로 기도하라. 5대 확신의 기도를 하라. 구원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 승리의 확신, 사죄의 확신, 인도의 확신 5>.주의 종의 기도를 받으라. 6>.주의 전에서 기도해야 한다. 7>.간구하라. 간절히 기도하라. 눈물로 기도하라. 8>.가난할 때에 기도하라. 9>.기도는 하나님만 주목함이다. 10>.기도 중단은 가장 큰 죄악이다. 11>.중보기도(도고)는 능력 사역의 원천이다. 12>.기도는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다. 13>.오직 믿음으로만 기도하라. 14>.기도 응답의 행복을 맛 보라. 사람은 경험의 존재이다. 기도 속에 행복하라. 기도하다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즐거워 하라.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스스로 기쁨을 누리라. 15>.염려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16>.기도는 인내의 전쟁이다. 조급함을 버리라. 큰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 똑 같이 큰 기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한다. 기도의 지속적인 인내, 많은 양의 기도가 필요하다. 17>.부부 사이가 행복해야 기도가 응답된다. 18>.기도는 질이 아니라 양이다. 주님 앞에 오래, 많이 앉아 있는 사람이 영적으로 가장 빨리 간다. 19>.하나님과의 깊은 영교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20>.방언기도 하라. 방언은 능력 있는 기도의 출발점이다. 방언을 못하면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그 다음에라야 묵상기도, 관상기도, 영교기도, 대화기도에 들어 간다. 21>.겸비와 회개의 기도를 올리라. 22>.금식하며, 기도하라.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끊고, 자유를 주며, 죄악이 떨어져 나가게 하고, 내적 상처가 떨어져 나가게 하며, 성결하게 한다. 권능을 준다. 영권의 온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폭발한다. (사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禁食)은 흉악(凶惡)의 결박(結縛)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壓制) 당(當)하는 자(者)를 자유(自由)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23>.성령 받기를 기도하라. 성령으로 기도하라.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하라. 성령기도 하라. 방언기도, 은사기도, 이성을 넘어 가는 기도, 영 분별, 환상, 투시, 영안, 예언, 방언 통역, 지혜와 지식의 말씀의 기도이다. 24>.가장 중요한 7대 기도제목: 1>.지켜 주옵소서. 2>.인도 하옵소서. 3>.가르쳐 주옵소서. 4>.도와 주옵소서. 5>.축복 하옵소서. 6>.함께 하옵소서. 7>.평강하게 하옵소서. 25>.기도의 자세 1.목표를 분명히, 2.말씀을 따라, 3.회개와 용서의 마음으로, 4.믿음으로, 5.성령의 도우심을 구함으로, 6.뜨거운 마음으로, 7.확신으로, 8.감사함으로, 9.구체적으로, 10.성령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26>.주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기도 응답) <1>.먼저, 신속하게 응답해 주시는 기도가 있다.(Yes의 기도) <2>.뜻을 정하여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들어 주시는 것이 있다.(Wait의 기도) <3>.거부를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기도의 응답이 있다.(No의 기도) 2.왜 성령신앙인가? 1.왜 성령신앙인가?, 행전2:1-4절 1>.영적 낙제 수준의 그리스도인 상태(영적 지수 10점 정도) 약 20% 의 교인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일 년에 교회를 두 달도 채 나오지 않는다. 목사는 이들을 이끄는데, 목회력의 30%를 거의 다 소진한다. 2>.평균적인 그리스도인 상태(영적 지수 30점 정도) 구원의 확신은 있으나, 빈 쭉정이 들이다. 일생에 몇 번 쯤은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어 보려 하나, 이내 포기하고 만다. 이런 성도의 수는 약 50%이다. 목사는 이들에게 목회력의 40% 정도를 소진한다. 3>.육신적인 그리스도인 상태(영적 지수 50점 정도) 이들은 외관상으로 전적인 헌신자 들이다. 이들은 신앙의 뿌리가 성령이 아닌, 육적인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는 이들을 위해 목회력의 약 20%를 소진한다. 이들은 교회 안의 최상층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30-35 % 정도의 신자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4>.신령한 그리스도인 상태(영적 지수 80점 이상) 이 그룹이 영적 성인으로 성숙하는 이상적인 모델이다. 그는 봉사, 충성보다, 자신의 영적 성장의 원리를 바로 붙든 사람이다.“무엇을 할 것인가?”보다,“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 들이다.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의 살아 있는 실제적인 교제가 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충만함, 기쁨, 평안,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음, 하늘에 대한 소망, 영적인 것에 대한 실제적 체험, 일상의 것들을 채우시는 하나님 경험, 기적의 경험, 성령의 역사와 은사의 일상적 체험... 등이 생생히 살아 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하나님께 훌륭하게 쓰임 받는다. 성령님은 언제나 그의 마음 속에서 동행하시며, 인도하신다. 그의 영혼을 늘 그것을 느끼고 누린다. 그의 가치관은 세상에서 떠나 언제나 하늘에 가 있으며, 그의 목표는 영적인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경이, 놀람, 능력, 기적, 권능, 은사...의 삶이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신앙의 뿌리가 자아에 기초한 육에 있지 않고, 영에 기초한 성령께 닿아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 가려고 애쓰는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걸어 가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힘으로 밀어 올리는 율법적 신앙생활이 아닌, 성령 안에서 누리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범사에 그리스도의 삶과 동일시 되며, 성령의 사람이 된다. 그에게는 갑자기 풍성한 성령의 삶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자기 안의 그리스도가 살기 시작한다. 갈2:20절의 삶이 나온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肉體)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爲)하여 자기(自己)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면, 마음 속의 넘치는 기쁨과 평안 때문에 때때로 황홀경 속에 들어 가기도 한다. 병 고침, 성령의 은사, 역사, 기름 부음, 능력 행함, 기적 들이 주변에서 수시로 일어 난다. 그러나 이런 사람 역시 항상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니다. 자아가 다시 살아나 영적으로 내리막 길을 걷기도 한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성령님을 주목하고, 성령 충만함을 지키기 위하여 성령님께 복종하면 나날이 성령 충만한 삶이 진보한다. 그는 매일, 매 순간 성령님을 주목하여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몸임을 확인한다. 자기 부인이 계속된다. 그는 치열한 영적 전투를 경험하며, 나날이 거룩하게 변해져 간다. 그리고 승리를 향해 다가 간다. 매 순간 항상 그의 자아는 죽음에 넘겨져야만, 영적 전쟁은 승리로 끝난다. 이 때 성령 충만한 그의 영적 점수는 90점-95점 대로 상승한다. 거의 그리스도와 가까운 삶을 살게 된다. 그는 죄와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 마음 속에 죄악을 생각만 해도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성화란 이론이 아니다. 실제로 내 속에서 이루어지고, 삶으로 살아지는 역사이다. 이런 사람은 교인 비율상으로 5% 미만이다. 아니, 2-3% 정도 된다고 생각한다. 2.성령 세례(행전2:1-4절) 1>.예수님의 경우 성령 세례는 어떻게 나타 나셨는가?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태어 나시고, 성령 세례 받으시고, 성령이 임하신 후에 사역을 시작하셨다. 온통 성령 자체이신 예수님에 임한 성령 역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신앙생활과 사역을 위해서는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성령 세례 이후에 놀라운 공생애를 비로소 시작하신 것이다. 성령 세례 이전의 30년은 그냥 한 인간으로 묻혀 있다. 2>.사도들의 경우 성령 세례는 어떻게 나타 났는가? 1>.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반을 살았다. 그러나 성령이 나타 나시지 않았다. 그들은 사역의 실패자 들이었다. 갈릴리신학대학을 나와도 안된다. 예수님께 직접 3년 반을 배워도 안된다. 2>.그 다음, 부활하신 주님께 40일을 더 배웠다.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40일 간을 보충수업을 해도 안돼! 3>.그리고“몇 날”이 지났다. 성령이 오셨다. 오순절 성령 세례를 단회적 사건, 지나 간 사건이라고 말하는 신학은 오류이다. 성령세례는 계속되는 사건이다. 이것이 성령의 나타남의 관건이다. 성령 세례가 임하는 경우: 1>.말씀을 듣는 중에 - 고넬료 가정의 경우 2>.안수 받을 때 - 사마리아 교회와 에베소 교회의 경우 3>.기도할 때 -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왜 성령신앙인가? 1.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와 사역 전체가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2.성령으로 영계가 열리며, 귀신들이 나가기 때문이다. 3.위대한 주의 종들은 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 들이기 때문이다. 4.성령으로가 아니면 믿음도,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5.우리의 신앙과 사역과 교회 섬김과 전도도 다 성령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아니고는, 성령을 훼방하고는 신앙생활도, 주의 일을 할 수 없으며, 성령으로 비로소 영적 사역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며, 알며, 가르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아니되기 때문이다. 6.성령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성령이 없는 자는 곧 진정한 신앙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7.성령으로 은사와 권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8.성령 충만해야 진정한 주님의 충성된 헌신적인 일군이 되기 때문이다. 9.인간의 계획과 경영은 모두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에, 오직 성령으로만 나아 가야 한다. 10.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지시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과 음성을 그대로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11.성령과 성령 신앙 만이 신앙의 핵심 중에 핵심이며, 실제적인 간증과 증거와 전도도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2.성령으로 구원과 영생, 은사와 권능, 모든 하늘의 것들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13.범사에 성령이 친히 도우시기 때문이다. 14.성령으로만 진정한 주의 일군이 되기 때문이다. 15.성령님 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 신령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16.우리가 성령의 것이며,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이다. 17.오직 성령으로 행하고, 육체로 행하면 아니되기 때문이다. 18.성령을 소멸하거나 모독하면 아니되기 때문이다. 3>.성령님의 역사와 은사 1>.성령님은 누구신가? 1.성령님은 인격이시다. 2.성령님은 영이시다. *영. 혼. 육의 사람: <1>.육으로 사는 사람 - 먹기, 잠자기, 성욕 채우기, 육신의 정욕 채우기... (요일2:16)이는 세상(世上)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肉身)의 정욕(情欲)과 안목(眼目)의 정욕(情欲)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世上)으로 좇아 온 것이라. <2>.혼으로 사는 사람 -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채우기, 정신적 유희 즐기기, 지식의 우상화, 세상의 사상과 이론, 철학의 노예... (골2: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擄掠)할까 주의(注意)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遺傳)과 세상(世上)의 초등학문(初等學問)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3>.영으로 사는 사람 - 신앙의 삶, 은혜의 삶, 성령의 사람... (갈6:8)자기(自己)의 육체(肉體)를 위(爲)하여 심는 자(者)는 육체(肉體)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聖靈)을 위(爲)하여 심는 자(者)는 성령(聖靈)으로부터 영생(永生)을 거두리라. 3.성령님은 보혜사(도와 주시는 분)이시다. 모든 영역에서 나를 도우신다. *성령의 삶의 3대 요체 - 성령 주목, 성령 동행, 성령 충만 1>.거듭나게 하심 - (요3:5)예수께서 대답(對答)하시되 진실(眞實)로 진실(眞實)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聖靈)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2>.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 - (롬8:13)너희가 육신(肉身)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靈)으로써 몸의 행실(行實)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靈)으로 인도(引導)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3>.영적 가족이 되게 하신다 - (롬12: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肢體)가 되었느니라. 4.성령님은 은사를 부어 주신다. 우리가 능력있는 영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예:기도-일반기도와 방언기도) 2>.성령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성령님의 3대 역사) 성령님은 3가지 방면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in, by, on) <1>.내 안에 계신 성령님: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절) 기타 갖가지 아름다운 인격적 열매:선행, 구제, 섬김, 궂은 일 감당함, 충성함, 성실함, 진실함, 양심적임...... 인격적인 열매가 바로 은사로 쓰인다. 섬김(사역)의 은사(gift of service) 권위(권면,믿음의 격려)의 은사(gift of exhortation) 구제(기부,관대한 행위,나눠줌)의 은사(gift of giving) 긍휼(동정,슬픈 자를 위로함,친절을 베풂)의 은사(gift of mercy) 지혜(권면,말,성령이 그 때 그 때 가장 필요한 지혜로 주시는)의 말씀의 은사(gift of wisdom) 서로 돕는 은사(gift of helping) 목사(하나님의 백성을 돌봄)의 은사(gift of Pastor) 청빈의 은사(자발적 빈곤)(gift of poverty)(고전13:3절) 후한 대접의 은사(gift of hospitality)(벧전4:9절) 중보기도의 은사(gift of intercession) <2>.내 곁에 계신 성령님: 대화, 교통, 인격적 교제, 인도하심, 동행하심, 가르치심, 생각나게 하심, 깨닫게 하심, 강권하심...... 내 곁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에서 성령님은 최고의 인격적 관계로 모셔야 할 내 생애 최고의 주인이시다. 1.늘 대화하라. 2.늘 배려해 드려라. 3.늘 사랑하라. 4.늘 마음으로 신경을 써 드려라. 5.배신 않고, 죄짓지 않고, 마귀에게 속하지 않아야 한다. 6.최선을 다하라. 7.늘 복종, 순종하라. 8.그 분의 자존심을 짓밟지 말라. 9.성령님께 다 맡기라. 10.그 분께 세세히 다 말씀드리라. 11.비전을 의논하라. 12.사람을 위해 그 분과 의논하라. 사랑하는 이, 아픔과 고통을 주는 이, 미움을 주는 이... 성령충만해지면 사람에 대한 미움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13.생각나는 대로 범사를 성령님과 함께 나누라. <3>.내 위에 계신 성령님: 사역과 직분 수행을 위한 재능과 능력과 열정과 은사 1.예수님을 믿고 고백함은 성령님의 역사이다.(고전12:3절)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2.은사의 근원은 성령님이시다.(4절) 3.직임 수행을 위하여 은사를 주신다.(5절) 4.은사로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함이다. 5.분쟁없이 지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돌아보게 하시려고 은사를 활용하게 하신다. 3>.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내 안에, 내 옆에, 내 위에 임하시는 성령의 3대 역사와 꾸준히 동행하라. 능력과 은사를 경험하라. 말씀(묵상과 설교)과 기도(통성,골방)와 찬양속에서... 4>.성령님은 어떤 은사를 주시는가? - 28가지 恩賜(은사)의 세계 롬12장 6-8절 1.예언(설교,영적으로 감동된 발언,말씀으로 분별하는 일,앞 날의 지침)의 은사(gift of prophecy) 2.섬김(사역)의 은사(gift of service) 3.가르침의 은사(gift of teaching) 4.권위(권면,믿음의 격려)의 은사(gift of exhortation) 5.구제(기부,관대한 행위,나눠줌)의 은사(gift of giving) 6.지도력(권위,다스림,행정)의 은사(gift of leadership) 7.긍휼(동정,슬픈 자를 위로함,친절을 베풂)의 은사(gift of mercy) 고전12장 8-10, 28절 [고전 12:4-12절] 恩賜(은사)의 세계 8.지혜(권면,말,성령이 그 때 그 때 가장 필요한 지혜로 주시는)의 말씀의 은사(gift of wisdom) 9.지식(공부,앎,영적 지식을 알고,전파하고,가르치는)의 말씀의 은사(gift of knowledge) 10.믿음(역사를 일으키는 권능)의 은사(gift of Faith) 11.병 고침(인간에게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의 은사(gift of healing) 12.이적(기적,능력 행함)의 은사(gift of miracle) 13.영 분별함(영적인 일들을 분별, 사람의 배후에 있는 영의 실체를 분간,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직시함)의 은사(gift of discerning spirits) 14.방언(방언은 어린 아기의 언어를 배움과 같다)의 은사(gift of tongues) 15.방언 통역(입술을 다스리는 자에게,은사의 최고봉 단계)의 은사(gift of interpretation) 16.사도적 은사(gift of apostle) 17.서로 돕는 은사(gift of helping) 18.다스림(행정,조직)의 은사(gift of administration) 엡4장:11-12절 19.복음 전하는 자(전도자)의 은사(gift of evangelism) 20.목사(하나님의 백성을 돌봄)의 은사(gift of Pastor) 21.독신,금욕의 은사(gift of celibacy)(고전7:7절) 22.청빈의 은사(자발적 빈곤)(gift of poverty)(고전13:3절) 23.순교의 은사(gift of martyrdom)(고전13:3절) 24.선교사의 은사(gift of missionary)(엡3:6-8절) 25.후한 대접의 은사(gift of hospitality)(벧전4:9절) 26.중보기도의 은사(gift of intercession) 27.구출(逐鬼축귀,逐邪축사)의 은사(gift of exorcism) 28.예배 인도의 은사 29.글 쓰는 은사 30.선교하는 은사 31.匠人의 은사 5>.方言(방언), 고린도전서14:1-40절 성령의 나타남의 출발점, 시작 6>.神癒(신유) 2.목사님을 잘 섬기는 제직 1>.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목사님과 교회를 잘 섬김이다. 2>.훌륭한 목사란 어떤 사람인가? 골1:24-29절, 벧전5:1-4절 <1>.성도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는 자(골1:24) <2>.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자(24) <3>.성도를 위한 자(25) <4>.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우는 자(28) <5>.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자(29) <6>.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자(29) <7>.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벧전5:2절) <8>.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라.(2절) <9>.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3절) 이상의 말씀은 목사와 장로가 언제나 기억하고 지켜야 할 지도자의 덕목이다. 3>.주의 종을 받드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 목사를 사랑하라.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로 하여금 행복하게 목회하게 하라. [히 13:17-21절] (17)너희를 인도(引導)하는 자(者)들에게 순종(順從)하고, 복종(服從)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靈魂)을 위(爲)하여 경성(警醒)하기를 자기(自己)가 회계(會計)할 자(者)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有益)이 없느니라. (18)우리를 위(爲)하여 기도(祈禱)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善)하게 행(行)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善)한 양심(良心)이 있는 줄을 확신(確信)하노라. <1>.순종하고 복종하라.(17절) <2>.나를 위한 목사의 기도를 축복 되게 하라.(17절) <3>.목사가 목회를 즐거움으로 하게 하라.(17절) <4>.목사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라.(18-19절) 4>.목사님을 잘 섬기는 행복. 사무엘하 6:1-14절 <1>.하나님이 당신 이름을 두신 곳 성 소: 1>.번제단 - 죽음의 능력, 죽어 제물이 되어야 한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 2>.물두멍 - 회개의 능력, 회개로 신앙의 출발을 해야 한다. 3>.떡 상 - 말씀의 능력, 날마다 말씀을 먹어야 한다. 성령의 조명한 말씀을... 4>.금등대 - 성령의 조명,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5>.분향단 - 기도의 능력, 기도의 삶이 늘 함께 해야 한다. 지성소: 6>.법궤 - 임재의 능력, 하나님이 내게 임재해 계셔야 한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2>.“성도의 법궤는 목사이다.” 오늘날 우리 심령 성전의 법궤는 무엇일까? 법궤는 하나님의 종 목사이다. 목사 속에 하나님의 생생한 살아 있는 지도력과 성령의 부어 주시는 말씀과 삶의 지침이 다 들어 있다. 법궤는 지성소 한 가운데 있다. 목사는 교회 한 가운데 있다. 법궤 위의 속죄소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목사가 강단 위,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우리의 심령 성전에 법궤를 늘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당신의 목사를 영적으로 늘 가슴에 품고, 그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받으며, 그의 꾸중과 훈계를 들으며 살아 가야, 당신의 영혼과 삶이 복을 받고, 형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3>.록펠러의 어머니의 10가지 유언 1.하나님을 너의 친 아버지로 섬겨라. 2.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오른쪽 주머니는 반드시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4.주일은 꼭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라. 5.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 자리에 앉으라. 6.하루에 성경을 한 장씩 읽으라. 7.하루를 기도하고, 시작하라. 8.잠자기 전에는 반드시 회개 기도를 하고 자라. 9.사람과 원수를 맺지 말라. 10.불쌍한 이웃을 힘이 닿는 대로 도우라. <4>.목자와 양의 관계 <5>.청지기 목사, 청지기 목회 <6>.목사의 성도를 지키는 5차 방어선 1차 방어선은 예배와 설교이다. 2차 방어선은 중보기도의 방어선이다. 3차 방어선은 전화, 심방, 편지, 강권 등의 돌봄의 방어선이다. 4차 방어선은 경고의 방어선이다. 5차 방어선이 있다. 인내의 방어선이다. <7>.교회 내의 법궤를 허무는 자들:사모, 부목사들, 여전도사들, 장로들, 권사들, 집사들...... <8>.법궤인 목사는 축복의 통로인 동시에, 저주의 통로이다. 법궤가 흔들린다고, 붙들지 말라. 법궤의 위치가 불안하고, 문제가 있고, 죄가 있고, 성격에 문제가 있고, 네 판단에 내가 붙들어 주어야 목회를 잘 하고, 교회를 잘 세울 것 같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 교만이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다. <9>.법궤는 하나님의 종 목사이다. 법궤를 잘 모셔야 한다. 내 중심에 모셔야 한다. 법궤를 소중히 해야 한다. 법궤는 내가 가르치고, 다스리고, 판단하고, 문제로 삼을 대상이 아니고, 무조건 잘 모셔야 할 가장 소중한 대상이다. 법궤인 주의 종을 그래서 잘 섬기고,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전부 나의 축복의 원천이 되고, 바탕이 된다. 너의 법궤를 찾으라. 성소는 나 자신이며, 지성소는 내 밖에 있다. 번제단, 물두멍, 떡상, 금등대, 분향단은 다 내 속에 있으되, 나의 법궤는 내 밖에 있는 것이다. 바로 내가 섬기는 나의 목사님이다. 진정 내 영혼이 복을 받으려면, 나의 목사님이 있어야 한다. <10>.십일조의 의미 십일조는 교회에 바치는 것이 아니다. 주의 종에게 바치는 것이다. 구약을 보라.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한 양식이 십일조의 기원이다. 레위인들이 먹고 살도록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교회와 주의 종에게 말라기 3장의 십일조 축복과 저주를 명심하고, 예물을 드려라. 십일조는 주의 종의 응식(應食)이다. <11>.나의 법궤를 어떻게 찾을까? 1>.자기 목사를 찾으라. 2>.자기 목사를 최고의 지성으로 잘 섬겨라. 대접하라. 모든 좋은 것으로... 선물하라. 집안 경조사에 항상 최고의 어른으로 모시라. 목사와 항상 함께 살라. 삶의 모든 일에 항상 목사님이 생각 나야 한다. 목사님은 우리 집에 살지 않지만, 우리 가족 중에 최고 가족이다. 3>.자기 목사와 동역하라. 예배, 말씀, 기도, 범사에 동역하라. 예배 잘 참석하라.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은혜 가운데서 자라 가라. 10년이 가도 안 자라는 것은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꼴을 먹지 말라. 여기 저기 다니지 말라. 새벽기도를 다른 교회에 나가지 말라. 자기 교회로 오라. 영적 꼴을 한 가지로 먹어야 한다. 자기 교회, 자기 목사가 없는 사람은 잡식을 하다가, 탈이 난다. 양신이 든다. 양은 분별력 자체가 없다. 눈이 멀기 때문이다. 자기 목사가 힘을 다해 영적 설교를 하고, 영혼을 살려 놓으면, 새벽기도 나간 교회 목사가 다른 설교하여 그 영혼을 망쳐 놓는다. 영적으로 혼란이 오고, 나중에는 그만 양신이 역사한다. 미혹 당한다. 원로목사님 들이 하는 충고 3가지가 있단다. <1>.장로는 반드시 그 아내를 보고 세우라. 장로가 신앙이 없어도 함께 사는 여자가 바로 되었으면, 그 남자는 바로 선다. 그러나 여자가 시원찮으면 틀림없이 말썽을 부린단다. 목사와 대적한단다. <2>.우직하게 하나님을 섬겨라. 까불지 말고, 요란 떨지 말고, 잘난 척 하지 말고, 똑똑한 척 하지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오직 진실하고 꾸준하게, 표나지 않게 주님만 잘 섬겨라. 소처럼 우직하게... 낙타처럼 터벅 터벅... <3>.하나님이 채찍질 하고 때려, 교인이 벌을 받고 망하려면 예배에서 차츰 차츰, 한 발, 한 발 멀어져 간다. 처음에는 졸고, 다음에는 앞에서 뒤로, 뒤에서 기둥 뒤로, 그러다가 결석하고, 그리고 교회를 떠난다. 물론 핑계는 다 이유가 있다. 예배에 실패하는 자가 되지 말라. 예배에 지각하지 말라. 기도에 동역하라. 목사가 기도하는 것을, 너도 기도하라. 다른 뜻 품지 말라. “목사님과 맞지 않다.” 여전도사가 말한다. 집사가 말한다. 사모가 말한다. 끼리 끼리 모여 앉아 헛소리 한다. 웃기는 소리... 교회에는 목사 한 사람의 영맥 외에는 없다. 하나님의 영적 견해가 목사를 통하여 흐른다. 잘난 부목사나 전도사나 사모나 장로, 권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맥이 결코 흐르지 않는다. 목사 앞에, 교회 앞에, 신앙생활함에 잔꾀를 부리지 말라. 자기 똑똑한 체 하지 말라. 머리 굴리지 말라. 소처럼 뚜벅 뚜벅 걸으라. 낙타처럼 뚜벅 뚜벅 걸으라. 큰 교회 목사님들에게 목회를 배우면 한결같은 대답이,“우직하게 믿으라. 바보처럼 믿으라. 등신처럼 믿으라.”하신다. 잘 믿어 복을 받는 자가 최고지! 교회에 나오면 처음부터 목사님 앞에,“제 목을 따 주세요.”목을 내 놓아야 한다. 자기가 죽어야 비로소 참다운 신앙생활이 시작된다. 번제단의 제물은 칼로 죽임을 당하고, 각이 뜨여지고, 더러운 것들은 다 갖다버리고, 번제로 온전히 불태워져, 재가 되어 사라져야 한다. 자기 견해가 다 부서져야 천국 간다. 교회는 천국 가는 훈련소이다. 내 견해를 버리고, 하나님의 견해에 맞추는 훈련하는 곳이 교회생활이다. 그러니 먼저 목사님의 견해에 맞추어야지! 하나님의 의지는 목사를 통하여 흐른다. 흐르지 않으면 그의 목회는 안된다. 설교도 못한다. 목회 자체가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 목사님과 함께 하는가, 하지 않는가?”성도가 영적으로 벌써 안다. 전 성도는 자기 교회 목사님의 영적 의지 밑으로 들어 가야 한다. 교회의 법궤는 주의 종 목사이다. 성도 안에 심령 성전이 제대로 지어져야 한다.“나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전 안의 가장 중요한 것이 법궤이다. 모든 문제와 축복과 저주는 다 내 속에 있다. 교회를 제단이라 한다. 사람이다. 건물이나 강대상이나 강단이 아니다. 교회의 법궤는 말씀을 나타 내는 목사님이다. 법궤는 말씀을 담고 있는 궤짝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으나, 그 속에는 만나 항아리와 십계명이라는 우리 신앙의 전부가 그 속에 들어 있다. 법궤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을 만난다. 그래서 목사를 잘 섬기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 구약의 법궤와 똑 같다. 장로들이 주로 법궤인 목사에게 손을 댄다. 자기들이 볼 때 목사가 목회하는 것이 미숙하고, 불안하고, 망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세상 경험으로 보면 목사는 철부지와 같다. 그래서 장로들이 나름대로의 판단과 정의감 때문에, 교회를 바로 세운답시고 목사에게 손을 대는 것이다. 요즈음은 아예 대놓고 자기들이 그릇 되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목사에게 공공연히 손을 대는 장로들이 한 둘이 아니다. 저주 받을 장로들이 한 둘이 아니다. 목사는 축복의 통로요, 동시에 저주의 통로이다. 목사를 잘 섬겨라. 예수 잘 믿는 길은 목사를 잘 섬기는 길이다. 법궤를 잘 섬기면, 복이 온다. 여러분의 심령 성전의 중심에 법궤가 있다. 바로 목사가 있다. 네가 섬기는 너의 목사님에게 일등으로 잘 하는 사람이 되라. 만 가지의 복이 거기서 온다. 당신의 목사와의 관계가 바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복을 받지 못한다. 당신 목사님을 법궤로 잘 모셔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당신 자신이 법궤가 되라.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역시 법궤이다. 자기 속에 심령 성전을 이루고, 법궤를 소유하라. 목사와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꺼림칙한 사람은 복을 받기 위하여, 목사와의 관계를 회복하라. <12>.목사님을 잘 섬기는 법; 1>.교회에서 으뜸 되려 하지 말고, 항상 목사님께 복종하라. 2>.범사에 목사님을 잘 대접하라. 3>.악한 말로 망령 되이 목사님을 폄론하지 말라. 4>.목사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시기하고, 소외시키려 들지 말라. 5>.야당성을 버리고, 악한 것을 일체 본받지 말라.
기독교적 시각에서 본 禪
기독교적 시각에서 본 禪 2002-11-12 15:06:53 read : 8 밮 표 일 : 1991. 11. 4 발 표 자 : M. Div 4차 900710 김 길 태 서 울 신 학 대 학 대 학 원 목 차 Ⅰ. 서 언 .................................................................. 1 Ⅱ. 禪에 대한 이해 .......................................................... 1 1. 禪의 어원 ............................................................. 1 2. 禪의 기원 ............................................................. 2 3. 선의 본질 ............................................................. 3 4. 묵조선과 간화선(默照禪, 看話禪) ....................................... 4 Ⅲ. 기독교적 시각에서 본 선과 존재론 ........................................ 6 1. 선인식의 한계 ......................................................... 6 2. 禪과 神論 ............................................................. 8 3. 禪과 인간존재 ......................................................... 9 Ⅳ. 결 언 ..................................................................10 * 참 고 문 헌 ...................................................... 11 Ⅰ. 서 언 禪은 행위요 생활이며 평소의 경험 그 자체이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상의 행동거지다. 이를 일러 [평상시의 마음가짐이 곧 도(平常心是道)]라 하고, 또는 [언제나 좋은 날(日日是好日)]이 라고도 한다. 우리 인간도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생활해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구나 다 현실에 직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는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는 법(法)을 담는 그릇이다. 도(道)로 나아가는 문이라고 혜원 스님이 말했듯이, 인간들에게 닥처오는 일상적 다반사가 그대로 지나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반드시 禪이 대두 된다는 것이다. 또한 禪은 도원선사(道元禪師)의 말대로 [물고기가 자유롭게 노는데 물고기와 닮고, 유유히 나는 새들에게서 새와 함께]하는데 있는 것인데 이를 사상적으로 말하려면 禪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지적으로 말하면 禪은 무지(無知)의 지(知)요, 무분별(無分別)의 분별이며, 行쪽으로 말하면 無行의 行이요, 無作의 作이다. 이런 각도에서 禪을 인식할 때 기독교와의 관계성을 무시할 수 없음으로 이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하여 본 서고에서는 II장에서 선에 대한 이해를 우선하고 III장에서는 기독교적 시각에서 본 선과 존재론을 생각해 봄으로 종교경험의 유사성을 밝혀 보고자 한다. 한편 종교적 다원주의 속에 살고있는 현대에, 혼합주의로 오해되지 않기를 우선 부탁을 하는 바이다. Ⅱ. 禪에 대한 이해 1. 禪의 어원 우리가 선에 대해 말할 때, 과연 선이란 무엇이며, 그 선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것을 알아야만 선을 행해 나가는 자들의 발걸음을 종잡을 수 있게 되고 또 그 걸음에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먼저 선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 보기 전에 일찍이 서산대사께서 하신 말씀을 말 머리에 두는 것이 선의 이해에 바른 걸음을 정하는 길인 것 같다. 서산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선의 핵심을 찌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선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의 드야나(dhyana), 필리어의 자나(jhana)에서 나온 것으로, 이의 완전한 음사는 선나(禪那)이다. 또한 이를 의역하면 정(定), 정려(靜廬), 사유수(思惟修)가 되며 음사와 의역을 합하여 禪定이라고도 한다. 사유수란 마음을 한곳에 모아 사유하는 수행을 뜻하며, 정이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완전히 몰입하여 생각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정신 작용을 일컫는 말이다. 정려 역시 고요하게 마음을 다스려 동요함이 없이 깊이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참선(參禪)이란 말은 선을 탐구한다. 즉 선을 행하여 진리를 깊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禪師에게 나아가 禪道를 닦는다는 두가지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2. 禪의 기원 선의 기원은 석가모니에게서 부터 비롯된다. 어느날 석가세존은 영산회(靈山會)에서 대중들에게 설법을 마친후 연꽃 한송이를 들어 보였다. 이러한 석가세존의 행동에 대중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때 마하가섭(摩河迦葉)만은 그 뜻을 깨닫고 혼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석가는 기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을 가졌다. 이는 형상없는 형상이요 미묘한 법문이어서 말이나 글에 의존하여 나타낼 수 없는 것이며, 경전을 떠나 따로 전할 수 밖에 없다. 이제 이 법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이것을 후세 사람들은 석가와 가섭이 말없는 가운데 서로의 마음을 전했다 하여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염화미소(焰華微笑)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와같이 선은 한송이의 연꽃과 한번의 미소와 더불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가섭은 선종의 초조가 되었으며, 그후 27대가 가섭의 맥을 이어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에 선이 전래된 것은 달마에 의해서이며, 이로서 달마는 중국 선종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뒤을 이어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중국의 선종이 꽃피게 되었다 한다. 중국의 선종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도의 선종과는 또 다른 중국 특유의 선불교를 탄생시켰다. 이 중국의 선종은 6조 혜능에 의하여 황금시대를 맞게 되었고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한국과 일본에 전래되었으며, 이윽고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3. 선의 본질 선사들은 흔히 선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의 네구절 게송(偈頌)으로 나타내고 있다. 교외벌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위의 게송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교외별전(敎外別傳) 법이나 도는 문자나 경전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들 언어나 문자는 단지 도를 전하는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언어나 문자를 통하지 않고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말이나 글로 나타내 보이는 교리 따위는 사실 깨달음의 진리자체, 곧 진면목(眞面目)의 그림자이거나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진리는 모양이나 언어를 초월한 곳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는 말 그대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가르침이나 논리, 주장등을 문자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진리의 실체를 놓치고 뜻하지 않게 공허한 이야기로 끝나기 쉬움을 경계한는 말이다. [석가는 成道한 수 입멸(入滅)할 때까지 일언 일자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불입문자의 근거가 되고 있는바 이 또한 선의 한 본질을 드러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바로 마음을 가리킨다]라는 뜻이다. 이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 밖에서 무엇을 구해서는 않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너의 마음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지도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선의 긍정적인 목적은 견성성불(見城成佛) 즉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마침내 부처가 되는데 있는 만큼, 거기까지 이르는데는 반드시 마음으로써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견성성불(見城成佛) 자기의 본성을 보는 것, 곧 참된 자기를 깨닫고 아는 것이 바로 성불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원래 사람은 각기 자기 안에 불성을 갖고 있는데, 이 불성이 미혹과 집착등으로 가려짐으로써 참된 자기를 잃어 버리게 되었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그러므로 성불이란 이러한 불성의 완전한 자기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법을 자기의 본성안에 있으며, 우리는 禪을 통해 이 자신의 본성을 봄으로써 곧 반법을 보게 되는 것이다. 모두 삼라만상은 성품의 향기이므로, 견성이야말로 진정한 성불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간략히 말한 네 구절의 게송은 선의 본질을 가장 핵심적으로 나타낸 말이라 하겠다. 4. 묵조선과 간화선(默照禪, 看話禪) 중국 선종에 두 가지 선의 큰 흐름이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물조선과 간화선이다. 1)묵조선(默照禪) 묵조선이란 말을 뜻대로 풀이해 보면 [침묵속에 고요히 비추어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가 6년동안 단좌(端坐)한 것이나, 달마가 9년 동안 면벽(面壁)한 것 등은 모두 침묵적조(沈默寂照)의 묵조선이다. 이처럼 묵조선은 고요히 앉아서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온갖 상대적인 생각들을 끊어버리고, 오직 고요하고 맑게 마음을 지어가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지켜보는 禪이다. 침묵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비추는 것은 마치 안으로 무르익어가는 과일에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내면 세계를 꿰뚫어보는 묵조선은 세세생생 동안 자신의 마음을 얽어매고 짓눌러온 백팔번뇌를 똑바고 직시하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인가? 살아오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좋고 나쁨을 구별해 왔다. 이 모든 가림이 사실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그히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들이며, 이러한 것들에 우리는 마음을 빼앗겨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 역시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고요히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것이야말로 묵조선의 본바탕인 것이다. 2) 간화선(看話禪) 간화선은 다른 이름으로 화두선(話頭禪)이라고 하며, 또 공안참구(公案參究)이라고 하며, 또 공안참구수행이라고도 한다. 간화선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화두를 간하는 선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두란 선종에서 공안이라고도 부르는데 선자가 선의 과제로 삼는 말이다. 원래 공안이란 말은 정부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국민이 준수해야 할 사안 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을 선가에서는 예로부터 조사(祖師)들이 강한 설(設)이나 언구(言句, 문답 등 불조와 인연된 종강(宗綱)을 수록하여 공안이라 하며, 선의 과제로 삼는 것이다. 화두는 그 본질이 불조의 깨달음 자체이므로, 수행자가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상의 과제라 하겠다. 이 과제를 뚫고나야 비로서 부처를 알고, 조사를 알고, 자신의 본서을 알고, 법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화두를 조사관(組師關)이라고도 한다. 이 화두를 타파했을 때, 즉 의심의 덩어리가 완전히 깨졌을 때 진리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일념으로 화두를 들게 될때 다음과 같은 관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첫째, 과거나 미래로 나갔던 마음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게 되고, 둘째, 꿈을 꾸고 있는듯한 망상에서 깨어나게 되며, 셋째, 도를 구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고 점점 강렬해져서, 넷째, 분별심이 사라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화두를 들때 자신의 전 존재를 화두에 맡기고, 모든 생각이나 분별을 끊고, 지식이나 논리로 헤아리려 하지 말며, 行, 走, 坐, 臥, 語, 默, 動, 靜의 어떤 상태에서나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도 오로지 화두 일념이어야 한다. 화두를 드는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화두가 바로 자신의 생명이며, 과거 현재 미래이며 우주 자체인 것이다. Ⅲ. 기독교적 시각에서 본 선과 존재론 1. 선인식의 한계 앞에서 언급했거니와 선이란 것은 온갖 체계적인 논리 전개를 거부한다. 어떤 이론이나 신학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선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선은 인생에 대한 해설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나 구원의 신학도 아니다. 다만 삶 자체의 직적적인 체험이다. 삶의 본질은 이성적인 논증을 초월하는 것이 사실이다. 선에 있어서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여기서 선인식의 한계점이 있다. 선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반 언어이며 선의 논리는 철학적인 논리를 철저하게 뒤엎은 것이다. 선사들의 공안에서도 이러한 예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한 스님이 조주선사(778-897)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佛性이 있읍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무(無)!" 여기서 '無'란 글자 그대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이 公案에서 사용될 때에는 이미 그 의미가 문제되지 않는다. 즉 단순히 '無'!'이다. 이 '無'에는 어떤 지적인 요소도 없다. 이유를 이유로 삼지 않고 사실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것이 禪이 추구하는 깨우침의 수단이다. 그래서 질문자는 단순히 이 '無'라는 소리(音) 자체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드디어는 그 소리와 완전하게 자신을 일치시키게 된다. 상대적으로 자아로 부터의 해방이요 二元的 思考로 부터의 탈출인 셈이다. 그래서 흔히 禪을 '自由自在'라고 한다. 禪에 있어서는 어떤 외적인 動力이나 動因이 철저하게 배척된다. 禪수행자는 佛을 만나면 죽이고, 組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서, 大自在를 얻는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禪은 自力만으로 끝나고 마는가. '깨우침으로 법을 삼으라'는 그 깨우침의 경험은 이 자력의 산물인가. 徐京保는, 見性의 경험은 점(漸)이 아니라 돈(頓)이며 자력이 다 궁해졌을 때 홀연히 나타나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즉 험준한 언덕에서 손을 놓아 떨어진 후에 다시 새로 소생하여 깨어나는 경험이다. 서경보는 그와같은 경험을 他力으로 본다고 했으나 일단 大悟를 覺한 자에게는 이미 自.他의 구별을 초월해 있으미 그것을 絶對自力이나 絶對他力으로 본들 어떠하겠느나는 이론을 편다. 이제껏 살펴본바, 禪의 특색은 일체의 前提性을 배격하는데 있다. 그 전제가 神이 되든 인간이 되든 그것을 굳이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意識의 無意識化' 또는 '心身脫落'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선에 대한 인식은 이성적 논증을 통한 접근방법으로는 제한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더우기 절대타자의 신적 권위로부터 비롯되는 계시신앙을 가지고서는 禪으로의 접근이 무척 어려워 보인다. 禪은 우선 健實한 자기신뢰를 바탕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禪은 무신론인가, 아니면 범신론인가. 2. 禪과 神論 선은 신을 어떤 의미로 받아 들이는가. 우선 분명한 것은 선에서느 신을 기독교와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절대타자인 신을 향해서 접근해 가는 방법을 마다한다. 또한 '나'와 대면해 있는 상대적인 위치로 신을 끌어내리려고 하지도 않는다. 선에 있어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만'이 비로서 자기를 실현하여 진아(眞我)에 도달할 수가 있다. 臨濟(?-867)는 일찌기 이렇게 선언한 바가 있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고 組師를 구하면 조사를 잃는다."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여타의 존재들을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은 무신론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山田靈林 같은 이는 대우주의 질서정연한 법리법칙을 예로 들면서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우주정신의 신비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와같은 인식은 선을 통하여 森羅萬象에 숨겨져 있는 신적 형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E.라쌀레도 그의 장기간에 걸친 禪수련을 통해서 말하기를,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자연 내지 우주의 일체체험이며, 선에서는 신에 관하여 결쿄 말하지 않으나 무신론자로 自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의 주장에 의한다면 禪불교에서는 신이나 선의 존재를 개념화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기독교적인 神信仰과 유사한 신적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선불교에서의 이러한 신적 깨달음이란, 자기안에 내재하고 있는 신성에의 자가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 자각은 우주에 萬在해 있는 靈妙不可思議한 佛性을 眞如實相으로 깨닫게 한다. H.오트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현재의 자기존재 이상의 존재'이며 본질적으로 신비에 의해서 둘려싸여 있는 존재이다." 그와 흡사하게도, 선불교에서의 신은 곧 만유에 내재해 있는 신성을 가리키며 그것은 우주정신이요, 본래의 '나(眞我)'요 나와 우주의 합일체요, 곧 부처의 母胎가 되는 것이다. 禪者들은 스스로 무신론자이거나 범신론자이기를 마다하지만 종교적 시각으로 볼 때에는 농후한 범신론적 경향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3. 禪과 인간존재 선은 '眞人'으로 나가는 명상의 길이다. 다시 말해서 선자는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라는 끊임없는 물음과 명상을 통해서 궁극에는 사람이 더이상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없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곧 차별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이 되는 것이다. 臨濟가 어느날 법회에서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하였다. "그대들의 생동하는 가슴에는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無位眞人이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대들의 머리를 드나들고 있으니, 이것을 알게될 때까지 잘 살피고 살펴야 하느니라." 그때 한 스님이 앞으로 나와서 묻는다. "무엇이 無位眞人입니까?" 그러자 임제는 法床에서 내려와 그 스님의 멱살을 움켜잡고 말했다. "말해라! 말해봐라!" 그 스님이 무슨 말을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임제는 잡았던 그를 밀쳐버리면서, "이 무슨 마른 똥막대기같은 무위진인인가!"하면서 방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임제는 무위진인을 몸안에 있는 부처로 본 것이었는데 임제로부터 무안을 당한 그 스님은 무위진인을 하나의 對象格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생명도, 가치도 없는 마른 똥막대기와 같은 상태로 하락시키고만 것이다. 임제는 인간의 자기신뢰를 내내 강조했던 사람이다. 만일 '眞我'와 '현실의 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그 간격을 좁힐 수 없다면 달세계를 여행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식이었다. 이리에.유끼오는 "모든 인간은 각자가 가진 진아의 淸淨함의 정도만큼 본래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함으로써 인간내부에 깃들어 있는 神性을 극구 찬양하였다. 가도와끼.가끼찌도 인간내부에 실존하는 신성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參禪을 통하여 '超個人的 個人'과 '신의 自己傳達사건'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T. 머튼도 역시 "깨달음이란 곧 부처의 마음을 갖는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것(고전2:16)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일치되는 것(고전6:17)에 비유할 수 있는 일" 임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므로 선에서의 인간은 신을 향해 열려있는 인간이요, 스스로의 깊은 내면의 통찰을 통해서 진리를 梧得할 수 있는 인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선에서는 결코 진리에 달하기 위해서 타자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미 그 자체속에 '참된 모습'의 모습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그가 眞人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본래의 모습을 자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명상, 그것이 곧 선속에 스며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소위 "우주론절 휴머니즘"에 입각한 인간관이랄까. 기독교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Ⅳ. 결 언 선은 원래 대승불교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그 사상의 연원이 인도에 있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즉 선은 대승경전을 소의(所依)로 하고 있다. 그러나 선은 선으로써 중국에서 별도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선]이란 글자는 범어(梵語)의 선나(禪那:Dhyana)에서 왔지만 오늘날의 선은 전혀 인도식의 선나는 아니다. 아니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선사상은 중국에서 그 행위적 방면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인도식의 선나는 일종의 관법으로, 마음을 응축시켜 적정을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중국에서는 그러한 이론보다도 생활 그 자체, 즉 우리를 평소의 행동, 바로 그 위에서 선을 활성화 시킨 것이다. 달마에서 혜능까지의 5,6대는 오로지 하나만을 고수하고 청정함을 살피며 마음을 보는것 따위가 설해졌고, 또 그를 실천 수행 하였다. 혜능에 이르러서야 선정과 지혜는 오로지 하나일 뿐임이 설해졌고, 견성(見性)의 경험이 중시되어 비로서 중국 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견성 경험을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신비론적 見神 경험이라든가 응집된 마음의 상태와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어쨌든 견성 경험을 知와 行이 하나로서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선은 자연히 動과 靜 양면을 갖추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 사상은 無知의 知요 無念의 念이며, 無心의 心이다. 無意識의 意識이요, 無分別의 分別이며, 상비의 상즉이다. 事事無碍며 萬法如如이다. 따라서 선사상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할 때 어떤 종교적 입장에서 종교경험적 유사성을 찾으려하나 실상은 전혀 다른 신론, 인간존재론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럴나 이 세계의 지경을 단언하여 무시해 버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로서 바른 신앙을 정립하되 넓은 아량으로, 선을 매체로 하여 기독교가 '몸(肉)의 대화'를 펴나가게 될때, 새로운 '대화의 신학'이 열리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런 연구에서 자칫 기독교의 생명력을 결여한 혼합주의에 이탈될 가능성을 묵과해서도 안될 것이다. 끝. 참 고 문 헌 1) 박 희준, [선의 이해를 위하여], 서울:대원정사, 1987. 2) Suzukk, D.T, [선의 진수], 동 봉 역, 서울:고려원, 1987. 3) 혜원스님, [선체론], 서울:도서출판가람기획, 1991. 4) 산전영임 외, [선과 그리스도교], 김용한 역, 서울:전망사, 1982. 5) Dune, C. [석가와 예수의 대화], 황필호 역, 서울:종로서적, 1980. 6) 김 명성, "간화선과 묵조선", [불교사상], 1985.5. 7) 문 상희, "기독교와 신비주의", [기독교사상], 1971.5. 8) 정 양산, "선이란 무엇입니까?", [불교사상], 1986.2. 9) 오 지수, "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침례신학대학원, 1989.
나는 요즘 교회를 옮기고 싶다(1)/ 김순희/ 2013-03-15
나는 요즘 교회를 옮기고 싶다(1)/ 김순희 <차 례> 책머리에 정말 새신자 입장에서 배려하십니까? 교회 안의 작은 교회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교회 학교가 변화될 때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진다 나의 신앙에 영향을 끼친 양육자 가장 훌륭한 양육자, 부모 평신도 지도자의 필요 충분 조건 성숙한 인도자가 되기까지 - 저자/ 김순희 연세대학교졸업. 방림 여자 중학교 교사 역인. 현재 광림 교회 권사. 남편 이보선 집사와의 사이에 지은과 지수 두 딸을 두었으며, 저서로는 전도용 책자 『천사도 흠모하겠네(두란노 출간)』가 있다. 책 머리에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성경 공부와 설교 말씀을 통해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변화되지 못하고 해주기만을 바라는 ‘공주병, 왕자병’의 영적 미숙아가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 때문에 새신자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납니다. 영적 미숙아는 세상 속에서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세상은 저들이 제대로 양육 받지 못한 영적 미숙아인지 성숙한 그리스도인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성도는 불신자들이 읽는 성서”라는 말처럼 세상은 주변에서 만나기 쉬운 평신도를 보고 교회를 판단하고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훌륭한 설교 말씀을 하시는 목사님, 성경 공부를 잘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이름하여 수평 이동 교인이 많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교회들은 실제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성장이 멈췄다는 통계는 웬일입니까? 주머닛돈이 쌈짓돈이라고,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기성 교인들이 또 새신자로 등록되어 결국 통계 수치만 올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도시 개발 때문이라는 핑계도 댈 수 있겠지만 이사 때만 되면 그것을 교회 옮기는 절호의 기회(?)로 삼는 교인도 있습니다. 교회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마치 신발 갈아 신 듯 교회를 옮겨 버립니다. 그러니 자연히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습니다. 덩달아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교인들도 생겨납니다. 많은 성도들이 전도만 잘하면 그만이지 하면서, 양육은 그저 목사님 혼자서 책임지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한 후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까지 끊임없는 관심과 기도로 이끌어 주며 사랑을 베푸는 ‘양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전도와 양육’ 이 두 단어는 서로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도 대상자의 90%는 한 번씩 교회에 가 봤다고 합니다. 그들은 과거에 교회에 다닐 때 신앙이 성장하지 못해서, 교인 사이에 시험이 들어서, 목회자 때문에, 부모님의 신앙은 돈독하시지만 가정 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해서 등등으로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교회를 떠난 이유들을 분석해 보았더니 목회자나 목회 방침 때문보다는 주위의 평신도나 평신도 지도자들 때문에 떠난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양육에 있어서 평신도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말해 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는 무리가 믿음이 연약한 교인을 교회 밖으로 내몰고서 또다시 전도하려고 애를 쓰는 어리석음이 알게 모르게 반복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것처럼, 첫 전도에서 믿음의 본을 보여 방황하는 교인을 만들지 않도록 양육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정말 새신자 입장에서 배려하십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를 찾은 새신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가족이나 이웃의 애걸(?)에 못 이겨 왔다, 억지로 왔다, 과거에 다녔던 교회의 향수에 젖어 얼떨결에 오게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왔다는 표현이 그들에게는 더 잘 어울린다. 한국 교회 전체 평균, 새신자 중에 정착하는 정식 등록 교인 수는 10% 정도라고 한다. 이 안타까운 통계를 빌리지 않더라고 새신자 정착에 어떤 걸림돌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거의 모든 교회가 교회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히 새신자에게는 온 정성을 쏟는다. 새신자 담당자들이 친절하게 주차를 해주고, 예배 시간에는 전교인의 따뜻한 환영과 목사님의 축복 기도, 선물 증정, 그리고 예배 후에는 교회 안내, 예배 안내, 선교회 소개, 새신자 교육에 이어 점심 식사까지 대접을 한다. 교역자가 즉시 심방을 가고, 속회(구역, 순)예배를 함께 드린다. 그렇듯 교회마다 나름대로의 방침을 세우고 노력을 들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성장률이 저조하다. 어떤 교인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문제가 있다’ ‘ 목회 방침이 문제다’ ’건축 헌금이나 십일조를 지나치게 강요한다‘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목회자에게 책임을 돌린다. 실제로 그런 이유 때문에 새신자가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새신자가 떠난 이유가 “나 때문에…”라고 말하는 교인은 거의 없다. 정말 교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큰맘 먹고 교회에 첫발을 내딛은 주일 아침, 그러나 아주 작은 문제 때문에 발길을 되돌리고 만다. 주차 문제로 다투는 교인(성도라 하기엔 미숙한). 남의 차에 박치기해 놓고서도 메모 한 장 없이 슬쩍 도망가는 사람, 예배 중에 의자 안쪽으로 좀 들어가 달라고 하면 ‘늦게 온 주제에…’라는 듯 인상 팍 쓰는 사람(결국 마지못해 엉거주춤 일어나 그 사람이 좁은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예배 끝날 때까지 옆사람과 소곤대는 사람, 껌 씹는 사람, 팔짱 낀 사람, 다리 꼬고 앉아서 앞좌석에 흙 묻혀 놓는 사람, 예배 잘 드려 놓고 식당 가서는 새치기하는 사람, 옆사람은 찬송가가 없어서 멀뚱하니 서 있는데 같이 보자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목청 터져라 찬송 부르는 사람, 상하좌우로 목운동하며 열심히 졸다가 가끔 깨서 “아멘”하는 사람, 말씀은 안 듣고 주보에 낙서만 하는 사람, 다른 책보고 있는 사람, 향수를 들이붓고 왔는지 두통까지 몰고 오는 사람(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는 교회에 향수를 너무 많이 뿌리고 오면 옆사람이 얼마나 고역인지 이 기회에 알리고 싶다). 유아실이 있는데 굳이 자녀를 예배실에 데리고 와서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 “화장실이 더럽다. 교회 내부가 깨끗하지 않다. 실내가 어둡다. 유아실이 지저분하다. 교회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을 괜히 혼낸다…” 하면서 불평하는 사람 등등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간단한 이유에서 시작하여 엄청난 이유들이 쏟아진다. 우리들 평신도의 부주의가 새신자가 교회에 들어선 첫날 발길을 돌리게도 만들고, 첫날 각인된 좋지 못한 첫인상이 그들로 하여금 몇 주일 씩 등록 결정을 미루게도 만든다. 절에 다니는 사람과 교회 다니는 사람이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세상 사람들은 “절에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라고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말이다. 은연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막연히 ‘이 교회 교인들은 좋을 것 같다’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온 분들에게 첫날부터 실망을 안겨 주어서야 되겠는가?’ 전도를 통해 처음 교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부터 양육은 시작된다. 어찌 보면 전도보다 더 힘든 것이 양육이다. 열 달의 임신 기간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출산 직후부터 맞닥뜨리게 되는 자녀 문제가 훨씬 더 신경 쓸 일이 많듯이. 잠시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한두 번 다니다 그만두는 사람, 잘 다니다가 중간에 엉뚱한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 그나마 자기 혼자 가면 좋겠건만 물귀신 마냥 단체로 사람들을 끌고 나가는 사람 등등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그들을 어찌 그냥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갓난아이를 돌보듯 정성을 다해 그들이 스스로 제 구실을 할 때까지 성심 성의껏 돌봐 주어야 한다. 그게 양육이다. 사실 한두 명 전도할 때는 양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몰랐다. 새로 지은 아파트 입주자들을 전도해서 새신자가 갑자기 늘어났을 때 나는 양육에 대한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인도 할 수 있는 직분자는 단 두 명이었는데 속회는 무려 여섯 속이었다. 인도자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다섯 속을 인도하게 되었다. 새신자는 인도자의 관심이 조금이라도 덜하다 싶으면 교회를 바꾸기도 하고, 아직 미성숙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속회에도 나오지 않았다. 섬기는 교회와 거리가 먼 지역일수록 양육 대책은 더더욱 중요하다. 이 현상은 양적으로 팽창하는 교회가 겪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전도로 인해 양적으로 급성장했을 때 노련하지(?) 못한 인도자에게는 새신자를 양육하는 것이 마치 난생 처음 갓난아기를 다루는 것처럼 힘들 수가 있다. 속회가 급성정할 때 인도자가 부족하여 궁여지책으로 새신자만 모아서 속을 만든 적이 있다. 놀랍게도 새신자끼리 모여 있는 속이 훨씬 믿음도 순수해서 빠르게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체험했다. 인도자가 새신자만 맡은 경우, 양육을 책임지게 된 사람의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속회 모임의 장소도 돌아가면서 모이는 것에 부담 느끼지 않도록 인도자 집에서만 모인다든가 중간중간 전화 심방, 가정 심방을 통해 새신자의 신앙 생활을 잘 보살펴야 된다. 새신자 속을 인도할 지도자는 속회 장소를 늘 제공할 수 있는 성도로서 베푸는 것과 봉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성경을 쉽게 가르칠 수 있는 양육자여야 한다. 새신자가 새신자 속회에서 6개월 정도 양육받은 후에 기존 속회에 섞이면 별무리 없이 잘 성장하는 것을 본다. 양육을 책임 맡은 평신도 지도자의 역할과 교회안의 가장 작은 단위인 속회의 바른 양육을 통해서, 새신자의 믿음이 교회 안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놀랍게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도자가 양육까지 책임을 진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전도 잘하는 사람 따로 있고 양육 잘하는 사람 따로 있다. 둘 다 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행히 현대 사회는 세분화되어 있다. 전도자와 새신자 속회 양육자를 이원화하여 전문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아마 더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신자 입장에서 배려하고 있는가?’이다. 예1> 예배 순서에 따라 새신자 환영을 위해 새신자를 그 자리에 일어서게 한다든지 목사님 앞으로 나오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어색하고 생소한 분위기와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이 쑥스러워서 앞으로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일어서지도 않으려는 사람이 꽤 많이 있다. 그러한 입장을 고려하여 새신자가 누구인지 미리미리 파악해서 예배 후 목사님과 따로 인사를 나누고 기도를 받게 하는 교회도 있다. 예2> 새신자 교육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왔기 때문에 새신자 교육으로 장시간 교회의 지체하기가 곤란한 사람도 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는 집 근처의 양육자가 일대일로 양육을 시키고 문서로 통신 교육을 받게 하는 것도 좋다. 성경, 찬송에 대해 전혀 모르고 주기도문, 사도신경이 무엇인지 모르는 새신자가 눈치껏 1시간 이상을 앉아 있어야 한다. 그들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여 적응할 때까지의 기간이 새신자에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전도하면서 새삼 느꼈다. 얼마 동안(2주에서 1개월 정도) 새신자를 위한 예배 장소를 따로 마련해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찬송은 부르기 쉬운 것으로 두 번 정도 반복해서 불러 익숙해지게 하고, 기도는 짧게, 말씀은 쉬운 내용으로, 그리고 시간은 40분 정도로 하여 예배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새신자 예배실에는 성경과 찬송을 비치해 두고 새신자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설문 형식의 답변서를 작성해서 나누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배 후 30분 정도 성경 신구약 찾는 법, 주기도문, 사도신경,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것, 기도하는 법(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으로 기도를 끝맺어야 하는지), 많이 쓰는 용어(아멘, 할렐루야 등)설명, 그 외에 구원에 대해, 예배, 헌금, 교회 생활 등 새신자 양육에 필요한 것을 교육한다면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새신자 예배, 교육의 총 시간을 대예배 시간과 맞추어서 예배 후 평신도와의 교제 시간을 배려하는 것도 좋겠다. 예3> 신앙이 다른 부모님 몰래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서 집으로 환영 카드나 환영 전화를 해서 곤란을 겪는다던가, 미리 약속도 하지 않고 불쑥 심방을 와서 시부모님과 맞닥뜨려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예4> 너무 무관심해도 곤란하지만 반대로 너무 자주 연락해서 피곤하게 만들어서도 안된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새신자에게 간단한 설문으로 본인의 의사를 묻는 것도 중요하다. (본인이 작성해도 되고 전도자가 작성해서 제출해도 된다.)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시대이다. 교회의 새신자반 운영을 오랜 신앙 경력의 직분자들이 계획하는 일이 많다. 그분들 대다수가 모태 신앙이나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신 분들이라서 ‘어른이 되어서 교회에 처음 찾아온 새신자의 입장’을 얼마나 이해하고 계획하시는지 퍽 궁금하다. 대부분의 교회엔 새신자 담당자가 있다. 환영, 안내 등의 외형적 담당도 중요하다. 그러나 새신자 상담실을 운영하여 새신자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해 주는 소책자나 신문(p. 23의 보기 참조)을 만들어 나누어준다든가, 수평 이동 신자가 교회를 옮기게 된 개인적인 사정을 듣고 정착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맞아 주는 실질적인 도움도 필요하다. 사도 바울도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말했다. 정말 새신자의 눈으로 보고 배려하십니까? 교회안의 작은 교회 우리는 귀중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전도한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 인도하여 교제를 나누며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훈련하고 교육하여서 주님의 참 제자가 되도록 한다. 그러한 애씀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사도행전 2:46-47의 초대 교회 성도처럼 살아야 한다. ‘믿는 이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회 예배를 드리고 선교회 모임을 가지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회 예배를 드리고 선교회 모임을 가지며 순수한 마음으로 애찬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미하며 사랑의 교제를 행했다. 그러한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을 보이는 삶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칭찬하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 주시는 가운데 교회도 부흥하게 되었다’는 간증이 있어야겠다. 새신자나 수평 이동 교인이 교회에 등록을 해도 속회와 같은 소그룹 모임에 잘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은 뒷문으로 나가 버리는 또 하나는 잃어버린 양이 된다. 출석 교회와 거리가 먼 교인일수록 속회 활성화가 교회 정착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사도행전 말씀대로, 소그룹을 통해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웃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을 보일 때 전도도 되고 속회도 성장하고 나아가 교회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속회는 교회 안에 기본이 되는 소그룹 모임으로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마다 지역, 연령, 직장 등 교인들의 형편에 따라 작게는 3-4명 많게는 7-8명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속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정에서 모여 찬양, 기도, 말씀, 헌금 순으로 예배를 드린 후 친교의 시간을 갖고 흩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다 보니 다른 약속이 있으면 빠지기도 하고 인원이 많으면 별일이 없는데도 기분에 따라서 나 하나쯤이야 하고 빼먹기도 한다. 꼭 가야 된다든가 손꼽아 기다려지는 것이 아닌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습관적으로 참석하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속회다. 속회는 말씀의 양식을 나누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와 기도 응답의 체험을 서로 나누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속회 예배 때 인도자가 지난주일 목사님 설교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여 상기시켜 주는 것도 좋다. 통계에 따르면, 설교 후 72시간 내에 95%를 잊어버린다고 하니 말이다. 1부 예배와 2부 친교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목적 있는 소중한 시간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친교 과잉증은 절대 금물이다. 속회에 잘 참석하는 교인은 신앙이 빨리 성장하여,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교회를 떠나가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뚜렷한 이유 없이 속회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신앙이 병들어 버리고 소속감의 결여로 교회를 떠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속회는 어린양이 머무는 새신자의 양 우리가 되어야 하고 인도자와 속장은 새신자를 돌보는 목동이 되어야 한다 새신자 양육을 위하여 첫째, 관심을 가져라. 연세가 드신 분들의 말씀이 퍽이나 재미있다. 자녀가 어릴 때는 거리에 나가 보면 어린아이만 눈에 띄고 초등 학교에 들어가면 초등 학생만 눈에 들어온단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중 고등 하교에 들어가면 청소년들만 보이고, 군에 입대하면 세상에 온통 군인들만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건 ‘관심’일 것이다. 교회로 인도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고무줄을 늘였다 하듯이 새신자들의 형편과 사정에 맞게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도와야 한다. 둘째, 기도하라. 인도자가 새신자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기도다. 기도를 통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양육에 성공하려면 기도가 최우선의 일이고, 최선의 방법이다. 새신자의 가족 구성원들 이름을 모두 적어 놓고, 그 가정의 기도 제목을 기록해 두고 매일 기도해야 한다. 셋째, 성서적으로 양육하라. 교육에는 교과서가 필요하다. 신앙 교육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이상의 교과서는 없다. 교과서를 읽어보지 않고 가르치는 교사는 없을 것이다. 인도자가 꾸준히 성경을 읽어 두어 문제가 생길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말씀으로 권면하고 말씀에서 얻은 지혜를 따라 행한다면 멋진 양육이 될 것이다. 넷째, 신앙 생활의 본을 보여라. 새신자는 속도원(구역 식구)의 신앙을 닮고 속도원은 인도자의 신앙을 닮게 되어 있다. 사람은 눈에 보는 것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게 된다. 본을 보이지 못하면 그 인도자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고 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옳고 바르게 사는 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평신도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참된 모습이다.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지금은 서비스 시대이고 소비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기업은 소비자로부터 외면 당할 수밖에 없다. 어느 기업이든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기업이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특히 문제점을 해결해 주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고객을 놓치면 영원히 놓치는 것이다. 교회가 기업과 같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건 파는 기업도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하고 투자하는데 하물며 귀중한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기업가의 노력에도 못 미쳐서야 되겠는가? 교회 안에는 다양한 달란트를 소유하고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많이 있다. 목회자와 합심하여 새신자가 마음 평하게 안정감을 갖고 교회 안에서 믿음의 자녀로 정착할 수 있도록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갖고 기존 교인의 문제점을 고쳐 나가야겠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면서 교회마다 매주일 새신자가 등록해도 도무지 교인이 늘어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난 전도 대상자의 90%는 한번 이상 교회에 가 보았거나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었다. 첫째, 교인들에게 실망해서. 둘째, 부모님은 신앙 생활에 열심이시나 가정 사역을 잘 감당하지 못해서. 셋째, 과거에 다녔던 교회 학교에서 신앙이 성장하지 못해서. 한국 교회는 아직도 “양 잃고 양 우리 안 고친다”로 버티고 있다. 늘어나는 숫자에만 관심을 감고 빠져나가는 숫자에는 무뎌져 버린 우리들. 교인들에게 실망한 이유 ▶신용이 없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다. 시간이나 약속한 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세상 법에 어긋난 일을 한다. (뇌물을 좋아한다. 비리를 저지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작게는 공동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자기 사업을 위해 교인들을 이용한다. (판촉 사원, 보험 사원 등으로 끌어들인다. 다단계판매에 교인을 이용한다.) ▶믿음과 행동이 다르다. (사랑해야 한다면서 부모 형제 흉을 보고 미워한다) ▶개인적인 비밀을 누설한다.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여러 사람에게 비밀을 말하고 다닌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비방한다. (타종교에 대해, 타교인들의 행동이 나 타교회에 대해) ▶목사님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다가 돌아서서 목사님을 비방하는 직분자 들이 있다. ▶목사님 눈 도장만 찍으려고 한다. (목사님께서 참석하시는 예배나 모임에는 꼬박꼬박 참여하여 순종하는 척하면서 성도들간의 예배나 모임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는 비협조적인 직분자들이 있다.) ▶인색하고 욕심이 많다.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 모른다. 무엇이든지 먼저 가지려고 한다. 절대로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 (초신자는 뒷전이고 직분을 세상 직위처럼 생각한다.) ▶직분자들이 기도 생활, 말씀 생활을 제대로 못하면서 말로만 양 떼를 지도하려고 한다. ▶직분자들이 한심한 행동을 한다. (점을 치러 다니거나 궁합을 본다. 속회 예배 후에 화투를 친다. 사생활이 문란하다.)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 (속회, 선교회 헌금을 목적과 다르게 사용한다. 선교를 목적으로 내세워 물건을 사도록 강요한다.) ▶기독교인이 직장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교사가 촌지를 요구해서 학부모를 괴롭힌다. 사장이 인색하며, 직장 상사가 까다롭게 하며, 동요가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다.) 부모의 이중적 신앙 태도 ▶집안의 경조사에 교회 일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아서 친척들의 원망을 듣는다. ▶헌금은 많이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 ▶새벽 예배, 철야 예배에 참석한 후 피곤하다며 늦게 까지 자고 집안일을 제대로 해놓지 않는다. ▶교회 일 때문에 식사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자녀들이 종종 빵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평소에는 기도나 성경을 읽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다가 어려움을 당할때만 기도한다.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 늘 불평 불만을 말한다. ▶자녀들과 한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행동은 없이 늘 말만 앞세운다. ▶주일 안 지키고 여행을 자주 간다. ▶고 3때나 시험 때는 교회에 안 가도 된다고 가르친다. ▶교회를 자주 옮긴다. ▶십일조 헌금이 들쭉날쭉하며, 설교 시간에 졸고 예배 시간에 지각하고 축도도 마치기 전에 교회 문을 나선다. 신앙의 성장이 없는 교회 학교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교회 안에서 이끌 때, 오른손으로는 잡아당기면서 왼손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밀어내고 있다.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분들의 신앙이 연약해질 때, 사탄은 그 틈을 노린다. 물론 원인 제공을 교회에서 할 때도 있다. ▶구원받은 지 얼마 안됐는데 직분을 너무 일찍 맡겨서 감당치 못하고 떠나는 경우. ▶처음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 여러 종류의 사역을 맡겨서 어느것 하나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낙심케 되는 경우.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교회에 10년 정도 다닌 사람들이 부딪히는 문제다.) ▶일꾼이 부족한 개척 교회 시절에는 열심히 헌신해서 교회 안에서 인정받았으나 교회가 부흥하고 일꾼이 많아진 요즘에는 교회 일이나 교인 사이에 자꾸 시험 드는 일이 생겨나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달라고 곧잘 기도한다. 그러면서도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이 나에게 닥치는 것을 싫어한다. 다행히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이다. 가정적인 시련을 겪는 것보다 교회 안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하고 인내하며 기도할 때 반드시 축복이 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나의 의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분함과 성냄과 불평이 마음속에 슬그머니 자리잡으려고 할 때 ‘주님은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생각해 본다. 분명히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에 대한 시험이거나 사탄의 유혹, 이 둘 중에 하나다. 기도하며 인내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 보따리를 싸가지고 다른 교회로 가면, 여전히 문제의 보따리는 그 교회에도 도사리고 있다. 설사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문제의 보따리가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는 두 개의 보따리를 싸 들고 다른 교회로 옮겨간다. 그러나 문제의 보따리는 점점 커지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결국 떠도는 교인이 되고 만다. 많은 교인들이 주일은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교인은 느지막이 교회에 가서 설교만 듣고 축도도 끝나기 전에 교회 문을 나선다. 주일 예배에서 설교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설교를 듣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다. 흔히 “예배 보러 간다”는 말을 한다. 연극을 관람하러 가는 것처럼 구경하러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찬양과 경배로 나타내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드리러 간다’고 표현해야 한다.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데 지각하고, 아무 옷이나 입고 가고, 팔짱을 끼거나 다리 꼬고 앉아서 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 아닌가! 이처럼 나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 내게 주신 지난 일주일의 삶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를 사랑하신 그 귀한 사랑을 고백하며, 아버지를 향한 찬양을 드리고, 아버지께 기도 드리고, 아버지를 위해 구별된 헌금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설교 말씀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떼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이 말씀이 우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한다”(살전 2:13)고 하셨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언젠가 전교인 수련회 때 강사로 초빙되어 오신 목사님의 간증이 생각난다. 미국에서 훌륭한 목회를 하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분이었다. 그 목사님이 안수를 받고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할 때, 목사님 설교가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젊은 교인들은 목사를 딴 분으로 바꾸자는 극약 처방을 내놓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 교인들은 다른 교회로 옮겨가기도 했다. 그러나 기도하시는 몇몇 분들이 모여 목사님 모르게 매일 목사님을 위해 철야 기도를 했다. 그 후 목사님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한 후 교인과 하나가 되어 기도했다. 그러자 점점 설교 말씀이 성령 충만하여져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게 되고 교회는 날로 부흥 성장하여 오늘날과 같이 훌륭한 한인 교회, 좋은 목회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툭 하면 목사님을 신발 갈아 신 듯 쉽게 바꾸는 교회가 있다. 또 교회가 무슨 무 잘리듯 반으로 갈라져 나가는 것도 본다. 이상하게도 그런 교회는 부흥이 안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 같다. 좋은 교회, 좋은 목회자는 좋은 교인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국사람은 모임을 유난히 좋아한다. 출신 학교에 따라, 고향에 따라, 성씨에 따라, 운동 또는 각종 취미에 따라서 갖가지 명칭을 붙여 모임도 많이 갖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 사람들만큼 안 뭉치는 나라도 없다고 한다. 마음에 안 들면 서로 싸우고 흉보고 갈라서서는 또다른 모임을 만들고…, 갈라짐으로써 파생되는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비단 이사가 잦은 도시에서만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고질적인 한국 병이다. 참을성이 없고, 잘 적응하지 못하고,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를 잘하고, 절대로 양보하지도 손해보지도 않겠다는 기질 때문이리라.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지 않고 믿음 가운데 성장하지 못하면 이것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기에 양육을 그만큼 강조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갈라져 나가는 데 앞장서고, 교회나 목사님을 대적하는 데 앞장서는 사람들은 평신도가 아니라 직분을 맡은 평신도 지도자들이다. 평신도 지도자에 대한 양육도 절실히 필요한 때다. 어떤 이들은 늘 불평 불만이 가득 차 있다. 지옥 가는 자격증(?)을 확실하게 따 둔 사람은, 불평 불만이 가득 차 외진 곳에 숨어 수근거리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이른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민족이 왜 사십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광야를 방황하며 지냈는가? 그들은 없으면 없다고 불평했고, 있으면 지겹고 싫증이 나서 불만을 토해 냈다. 끄떡하면 위대한 지도자 모세 앞에 우르르 몰려 나가 따져 묻곤 했다. 요즘 말로, 데모의 선구자들인 듯싶다. 그들은 그 불평 불만 때문에 뱀에 물려 죽기도 하고, 땅이 갈라져 산채로 생매장되는 등 수없이 떼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했다. 결국 끝까지 순종하고 긍정적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한 이십 세가 넘는 사람들은 아무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불평 불만이 그들의 삶을 파멸로 이끈 것이다. 그뿐인가. 이처럼 앞장서서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고 뒤에서는 불평 불만을 일삼아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이중 인격자들도 많다. 정 하기 싫으면 혼자 슬그머니 빠지면 될 일인데, 꼭 물귀신처럼 주위 사람들을 선동해서 문제를 확대시키곤 한다. 그것이 그들의 특징이다. 직분자들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해서 실족케 할 때도 있다. “작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는 말씀도 있지 않은가. 혹 교회를 위해 좋은 의견이 있다면 충분히 기도한 후에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겸손히 다른 사람 의견을 존중해 주고, 기도의 동역자가 되어 진행되는 일을 돕는 것이 성도로서 취할 가장 현명한 방법이란 생각을 해본다. 때로는 목사님, 전도사님의 평을 성도들 앞에서 나름대로 잘하는 유식한 평론가 직분 자들이 있다. 어쩌다 부모들이 자녀 앞에서 무심코 선생님 평을 할 때가 있다. 선생님이 썩 마음에 안 들어도 훌륭한 선생님 같다고 말한다면 자녀들은 신뢰감을 갖고 학교 생활을 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을 좋지 않은 분으로 말하면, 자녀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게 되고 점점 학교 생활에도 싫증을 내게 될 것이 뻔하다. 성경에도 지도자 모세에 대해 여선지자이며 누이인 미리암이 비방했을 때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들게 하신 일이 나온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권한은 오로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오래 전에 C 목사님의 도자기 속 외화 밀 반출 사건으로 온 기독교계가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그 소식을 뉴스에서 듣고 나도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 친정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네가 직접 보았느냐? 직접 보지도 않은 일을 함부로 말하는 것은 사탄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고, 주의 종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노여워하시는 일이다. 만일 목사님이 잘못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테니 다시는 그런 말을 옮기지 말거라. 그렇게 걱정이 되면 기도해라”고 엄명을 내리시는 것 아닌가. 그 일 이후로 목사님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듣고 입방아찧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혹 친구들이 자기 교회에서 목회자로 인한 문제로 의논해 올 땐 꼭 C 목사님의 사건을 말해 주곤 한다. (훗날 C 목사님의 사건은 모함이었음이 밝혀졌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교회 안에서 변화된 참 그리스도인이 있고, 변화되지 못한 교인도 교회에는 있다. 그렇다면 어느 교회나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문제는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이유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가지가지다. 작은 문제로 교회를 떠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고. 크나큰 상처를 안고 좌절감에 빠져서 떠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혹시 외롭다고 생각될 때나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는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는지?’ ‘사람을 만날 때 항상 불평을 늘어놓고 남의 허물을 늘어놓지는 않았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떠나고 싶어하는 교인에게는 절대로 사랑에서 우러나온 권면의 한계를 넘어서는 비난의 말을 한다거나 그런 뜻을 비춰서는 안된다. 다시는 안 만날 사람처럼 비난의 화살을 무차별로 쏘아 대서 더 큰 상처를 입혀서 떠나 보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너무 큰 상처를 입게 되면 다른 교회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는 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주의 일에 더 헌신하기 위한 순수한 뜻을 갖고 떠나는 교인도 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은 떠나는 교인을 위해, 사랑의 마음을 갖고 그가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축복의 기도를 해주어야 한다. 반대로 떠나가야 되는 교인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 해를 입히거나, 믿음이 연약한 교인을 실족케 해서는 안된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라. 혹시 내 신앙의 흔들림으로 목회자와 교회에 대해 불평만 한 것은 아니었는가? 교우간에 불화를 일으켜 놓고 떠나가는 것은 아닌가? 회개할 것은 없는가? 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더욱이 직분자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떠나가야 될 때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성급히 행동하지 말고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결코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어떠한 길이 옳은 결정인지 응답하신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아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6). 교회 학교가 변할 때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진다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이다. 소수 민족인 유대인이 차별 상황을 극복하고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 과학,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정통 유대인 학교는 매일 아침 1시간 동안 기도한 후 오전 내내 종교 교육만 시키고 정규 수업은 오후에 4시간밖에 안 하는데도 이처럼 많은 수재들이 배출된다. 가정에서 성경적 자녀 교육을 철저히 가르치지만 교육열에 있어서도 다른 나라와 구별된 교육 상황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정부 예산 중 가장 큰 국방비와 맞먹는 예산이 교육비라고 한다. 16세까지는 의무 교육이며 18세까지의 모든 교육은 무료다. 교육은 소모가 아니라 투자라는 철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강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교회도 교회 학교 교육이 투자라는 개념을 갖고 교육하는지 궁금하다. 대부분 열악한 환경인 교회 학교는 교회의 ‘장식품 꽃’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15세 이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사실을 볼 때 교회 학교는 실로 중요한 양육의 장임을 잊어선 안되겠다. 오늘날 우리 자녀를 유혹하고 있는 TV, 컴퓨터, 전자 오락 때문에 아이들은 교회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세상인데, 교회 학교에서는 겨우 가마를 타고 다니는 뒤떨어진 교육을 하고 있다. 교사가 부족하고 교회의 지원이 미미하고., 아이들로부터 관심을 잃어 가는 교회 학교가 장차 교회의 앞날을 어둡게 하리라는 것쯤은 삼척 동자도 다 알 것이다. 과거 영국과 미국은 선교 대국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어떠한가? 대부분 노인 성도들만이 교회를 지키고 있는 형편이다. 2세를 위한 양육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 그들 교회가 점점 황폐화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전도와 세계 선교를 위해 힘쓰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교회 학교 교육에 투자하지 않고 신경을 쓰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리도 영국이나 미국 교회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몇몇 교회들이 교회 학교가 거듭나기 위해서 발벗고 나섰고 실제로 교회 학교가 부흥하니 교회도 부흥하기 시작한다는 기쁜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 오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다 유대인은 대학을 갓 졸업한 처녀는 유치원 교사로 고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첫째, 아이들을 길러 본 부모님이 교사로서 가장 적합하다. 둘째 신앙이 돈독하고, 셋째 교육에 대한 경험이 있는 교사 출신이면 최상의 적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들은 어떤 사역보다 교회 학교 교사를 최우선으로 지원해야 한다.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을 받으신 분은 필수 과정으로 교회 학교 교사를 거치게 하는 교회도 있다. 이런 제도는 교회 학교 교육에 관심을 갖게 하고, 교회의 질적 성장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런 경우 자신에게 가르치는 은사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보조 교사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매년 교사가 바뀌는 것도 고려해 봐야 할 점이다. 교사가 바뀔 때마다 출석률이 떨어지기도 하고 교사의 책임감도 떨어지게 된다. 어떤 교회는 교사가 학생을 6년 동안 계속 책임지고 가르치기도 한다는데, 적어도 교사가 2년 정도 같은 학생들을 맡는다면 책임감도 생기고 학생들도 안정감을 갖게 될 것이다. 가능하면 영아 때부터 ‘신앙 생활 기록 카드’를 작성하여 매년 두 차례씩 개인 상담 시간을 갖고 구원의 확신을 점검하면서 청장년부 까지 양육을 이어 나간다면, 그 카드는 훌륭한 양육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한다 복음 중심으로 접촉점을 가질 수 있는 교회 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한다. 획일적인 교육이 아니라 어린이 개인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학생들은 음악, 미술, 체육, 글쓰기, 말하기 등 제각기 관심 분야가 다르다. 관심이 없는 분야는 정말 지루해 한다. 과거에는 교사의 설명과 주입식 교육으로 심심하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해도 할 수 없이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교육에도 개선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설교 말씀을 들은 후 각 분야에 따라 이 말씀이 적용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학생들을 원하는 반으로 나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찬양반으로 가서 믿음과 신앙인의 용기 있는 삶에 대한 찬양을 부른다. 미술 그리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만화나 그림으로 다윗과 골리앗을 표현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느낀 점을 글로 표현해 본다. 말하기를 좋아한다면 동화 구연을 시켜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설교 말씀을 통해서 각자 마음에 와 닿은 신앙을 나름대로 고백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한다. 설교 말씀은 전체적으로 듣고 학년별로 각 활동 분야를 나눈다. 이럴 경우 교사가 부족하게 되므로 저학년과 고학년(1-3학년, 4-6학년) 두 그룹으로 나눌 수도 있다. 이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달란트를 활용해야 하며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교회가 적극적으로 재정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볼 때 대형 교회들이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재정이 부족한 농어촌 교회 학교를 적극 돕는 일도 귀한 국내 선교 사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이 끝난 후에는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결단과 산앙인으로서의 정직한 생활 자세, 습관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참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한다. 1년 후에는 특별한 훈련과 연습 없이도 그 동안 닦아 온 실력을 각 분야별고 발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정과 연결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영아부는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교사의 숫자가 많아야 한다. 5세 미만의 양아부나 유아부는 어머니와 함께 어린이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영아부는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을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자녀와 함께 예배 드리기를 원하는 분들만 따로 모아 운영하면 좋다. 요즘 신세대 부모들은 자녀가 선택하는 교회를 다니는 경향이 많다. 자녀가 교회 학교를 싫어하면 금방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는 교회 학교가 성장하는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다. 말로는 교회 학교의 중요성을 외치면서 속으로는 어른들을 위한 대중 목회가 성공한 목회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하루 빨리 바뀌어야 한다. 청소년들의 건전한 활동 공간을 교회가 마련해 주어야 한다 청소년들은 갈 곳이 없다고 말한다. 기껏해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락실, 편의점, 만화방, 노래방 등에 가는 것이 전부다. 마땅히 할 것도 없고, 마음껏 뛰어 놀 공간도 없다. 그들 주변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 교회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에서 도서실이나 공부방, 야학을 운영하고 있다. 교회 마당이나 체육관에서 마음껏 운동할 수 있고, 함께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비디오를 상영한 후 토론하고, 드라마 예배, 찬양 예배, 영어 성경반 등을 통해 취미 생활과 신앙 생활을 병행해서 지도해 주기도 한다. 최근에 기독교 중 고등 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주일에 과외나 보충 수업을 하면 학습 능률이 올라가느냐는 질문에 72%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오히려 학생들은 “휴식을 통해 재충전할 수 있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정신적인 갈등과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불안한 미래를 주님께 맡겨 자신감을 갖고 학업에 정진할 수 있다”고 응답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시간은 양적 개념으로는 분명히 시간을 빼앗긴 것이지만 질적인 면에서 볼 때는 그렇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집중력과 지혜를 가지고 주어진 시간 동안 몇 배의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명문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대학도 청교도들이 자녀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성경 학교였다. 우리 나라에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중 고등 학교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 교육 목표에 맞게 말씀과 찬송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며. 3년 동안 성경 66권을 통독하는 미션 스쿨도 있다. 아침 일찍 학생 기도실에서 기도를 드리고 교실로 향하는 학생도 있다. 학생들의 신앙 수련회, 예배 시간, 경배와 찬양 시간에 함께 참여하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습 세례에 참여하도록 적극적인 신앙 양육을 한다. 교목실이 활발히 움직이는 학교는 신앙 상담, 인생 상담을 해주고 영어 성경 공부, 성가, 성경 공부 등의 그룹 활동을 이끌어 주며 거리 청소, 고아원․양로원 방문, 여름 농어촌 봉사 활동 등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지도한다. 그러나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많은 중 고등 학교의 학생들이 성경 시간이 딱딱하고 지루하며 주입식 교육이라고 불평한다. 제단 이사회나 교장 선생님, 교목님들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예배시간과 성경 시간으로 기독교 교육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변화가 필요하다. 바른 신앙 교육으로 알려진 다른 기독교 학교의 교육 방침도 도입해 보고, 기독교 영화를 보여 주거나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여 토론이 장을 마련해 보는 적극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신앙 교육에 있어서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개별 설문지를 통해 신앙 생활 상태를 점검하여 일대일 상담과 지속적인 신앙 지도를 해야 한다. 기독교 대학은 기독교 고등 학교에 비해 신앙 교육이 풀어져 있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예배와 기독교 개론 강의를 듣는 정도다.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대학 안에는 소위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이상한 종교 서클을 만들어서 장학금을 대 주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어가서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고 펄펄 뛰는 부모를 많이 보이 보아 왔다. 대학, 청년부가 활발히 움직여야 된다. 따라서 지역 교회는 주변 대학을 연결해서 적극적으로 학원 복음화에도 힘써야 한다. 청년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농어촌 봉사 활동, 도시 빈민 선교, 성경 공부, 찬양, 영성 개발 훈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된다. 기독교인의 자녀 25%는 어디에 있을까? 대학들이 몰려 있는 신촌(더구나 기독교 대학들이 많은 곳이다)을 변화시켜야 된다고 요즘 교회가 앞장섰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기독교 대학이 변화되어야 한다. 감사하게도 철저한 기독교 교육으로 사회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미래의 평신도 지도자를 배출하려는 목적으로 한동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모든 교수가 기독교인이고, 매일 아침 학생들이 한 시간씩의 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니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인가! 지속적인 교회 학교가 성장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성장하는 비전을 가져 본다. 교회 학교 교사 일은 보람되지만 힘들 때도 있다. 50년 가까이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가 있었다. 대통령이 그에게 체신 장관을 맡아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주일 성수와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보장해 주신다면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의 백화점 왕 ‘위너 메이커’ 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는 1달러 50센트짜리 성경을 월부로 사서 읽었다. 성경은 그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그는 평생을 교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봉사하며 복받는 삶을 살았다. 가장 훌륭한 양육자, 부모 얼굴은 모르지만 어떤 교인이 아들 문제로 상담을 하고 싶다고 전화를 걸어 왔다. 부부 모두 기독교 대학을 나왔으며 경제력도 있고 가정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는데 아들이 자꾸 딴 길로 빠진다고 했다. 고등 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썩 잘해서 늘 집안의 자랑 거리였으며, 소위 일류 대학이라고 하는 학교에 당당하게 합격한 수재 아들이 말이다. 그들 부부는 젊어서는 주말마다 여행 다니고 취미 생활을 하느라 교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전혀 다닐 맘을 먹지 못했단다. 교회 학교를 다니던 아들도 중학교 때부터는 일요일이면 과외를 시키느라 교회 가는 아이를 강제로 붙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지금 아들은 대학교 2학년인데, 선배들의 권유로 어떤 동아리에 들어가고부터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단다. 부모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던 아들이 어느 날 인가부터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안되겠다 싶어 전화를 걸었단다. 그토록 침이 마르게 자랑했던 효자가 하루아침에 불효자가 된 것이다. 일이 그 지경에 이르러서야 정신이 퍼뜩 나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단다. 몇 달밖에 안되었지만 용기를 내서 아들에게 교회에 나가자고 했더니, 아들이 “엄마는 옛날에 그렇게 다니고 싶어할 때는 못 다니게 하시더니 이제는 무슨 변덕이 나서 교회에 다니라는 거죠?”라며 대들었다는 것이다. 하소연을 들은 뒤에,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고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처럼 참고 기도해 보라고 권했다. 농사 중에 자식 농사가 제일 힘들다고 했던가. 나를 닮아 나온 자식인데 내 마음대로 되겠지 싶지만, 자녀 교육은 그게 아니다. 행동으로 몸소 본을 보여야만 한다.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세 살 버릇은 어떻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가?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이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우며 그대로 자라난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좋은 본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신앙 교육을 시킬 때, 그 밑에서 훌륭한 자녀가 길러지는 것이다. 학교, 사회, 교회, 나라 구석구석이 문제 아닌 곳이 없다. 일차적으로 가정이 문제가 없어야 된다. 물질로만 부모의 의무를 다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점점 사회적으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교회 아이들만 해도 그렇다. 자신의 신앙 생활에 부모의 모습이 도움이 된다는 아이들보다는 부모의 위선적인 모습 때문에 교회 가기를 거부하는 세대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걱정이다. 본이 되기는커녕 삐뚤어진 신앙관을 심어 주어서야 되겠는가? 교회를 자주 옮겨 다니는 부모 때문에 마음 터놓고 지낼 믿음의 친구도 사귀기 어려워지고, 자연히 교회에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없도록 만든다. 일주일 내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원으로, 과외 공부로 스트레스를 받고 심신이 지쳐 있는 우리 아이들. 그러나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주일날, 교회에 조금만 오래 있으면 성적에 큰 지장을 받고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 자연히 자녀들에게 불안한 감정을 심어 주게 된다. 나에게 집안 형편이 아주 어려운 친척이 있다. 형편은 어렵지만 누구보다도 신앙으론 부요한 집이다. 주일날은 교회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3 때도 주일이면 아친 일찍부터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고 저녁때까지 봉사를 했었다. 평소보다 훨씬 좋은 수능 성적을 얻어서 금년에 연세 대학교에 단과 대학 수석으로 장학생이 되었다. 고3 때는 교회를 안 가도 된다는 부모는 자녀가 어떤 결과를 얻게 될지 궁금하다. 요즘은 봉사도 점수에 들어간다니까 너나없이 봉사할 곳을 찾는단다. 자녀 대신 봉사하고 점수를 받아 가려는 기가 막힐 정도로 머리를 쓰는 한심한 부모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온갖 핑계를 대 가며 봉사하기를 거부하는 이런 얌체 부모 때문에 자녀는 공짜만 바라는 사람이 되기 쉽다. 반대로, 교회 일에는 발 벗고 나서면서 집안 친척들 경조사에는 교회 일을 핑계로 번번이 빠져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을 보고자란 자녀는 무슨 일이건 교회 핑계를 대는 사람이 된다.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거나 세끼 식사도 챙기지 못하면서 새벽 기도와 철야 예배에는 열심히 라면, 또 교회 일 때문에 피곤하다면서 늦게까지 잠자고 집안은 엉망이라면 그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교회 일이 바빠서 어린 자녀들끼리 하루 종일 집을 지키며, 주일날은 종종 빵이나 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한다면 자녀들 입장에서 볼 때 주일은 축복의 날이 아니라 서글픈 날이 되는 것이다. 주일날은 정성이 깃든 특별 음식을 준비해 보라. 믿음이 없는 자녀와 남편도 달라질 것이다. 주일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하루 종일 얼굴 마주 대할 사이도 없이 각자 바쁘게 지낸다면 진정한 안식으로써 주일을 잘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 중심으로 주일날 모든 교회 행사가 몰려 있는 것도 문제다. 될 수 있으면 주일에 활동 부서를 한 가지만 맡겨서 가족과도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겠다. 여성도들을 위해서 평일 낮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교회 행사나 교육이 이루어져야겠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여직분자나 가족이 믿지 않는 여성도를 위해 낮에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직장에 다니는 직분자들을 위해 저녁에 2부로 수요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다. 자녀들이 복 받는 삶과 거리가 멀어지도록 만들려면 십일조나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고 헌금은 많이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는다면, 부모의 인색함을 보며 자녀들은 실망하고 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색한 사람으로 자라기 쉽다. 예배 시간에 지각하고 축도도 마치기 전에 교회 문을 나서고 설교 시간에는 조는 일이 다반사인 부모를 보면서 도대체 부모님이 왜 교회를 다니시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하는 자녀도 있다. 예배가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계속 시계만 들여다보며 짜증을 부리는 부모에게서 자녀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평소 기도하는 모습이나 성경 읽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나 심각한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기도하는 것은 자녀에게 기복적인 신앙을 물려줄 수 있다. 지도하는 선생님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자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친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자녀들 앞에서 목회자에 대한 불평 불만과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목회자와 교회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자녀들과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말로만 사랑을 강조하는 부모는 사랑의 실천이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자녀가 이기적으로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공경하지 못하는 부모라면 자녀로부터 공경 받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른손으로 벌을 주었으며 왼손으로 껴안아 주라”는 유대인 속담이 있다. 그렇다. 벌과 사랑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결혼 전에는 장점만 보이는 안경을 쓰게 되고 결혼 후에는 단점만 보이는 안경을 쓰게 된다는 말이 있다. 신앙인의 가정은 장점만 보는 안경을 써야 한다.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부부가 서로 위로자와 격려자가 되어야 한다. 요즘은 ‘명퇴, 조퇴’로 인해 고개 숙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부부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감한다면 자녀도 그러한 부모님의 신앙을 통해 안정감 갖게 될 것이다. 양육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는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부모님께 받은 양육에 감사하며 자기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두 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돕고 사랑을 나누며, 하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살 때 부모는 자녀로부터 존경과 효도를 받게 된다. 신앙의 유산을 올바로 물려준다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복된 자녀가 될 것이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 아닌가! IQ(지능 지수)보다 EQ(감성 지수)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시대이다. IQ가 발달된 사람은 그 IQ를 자신의 영욕만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에 IQ 위주의 교육은 인간 관계를 그르칠 수 있다. 그러나 EQ가 발달된 사람은 사회에 유익을 주고 인간 관계를 좋게 만든다. 성경 말씀대로 양육하는 것이 곧 EQ를 높이는 지름길이다. 또 IQ는 유전적인 반면에 EQ는 80% 이상이 교육 등 후천적인 노력으로 좌우된다고 한다.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 이라는 말이 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열두 아들을 위해 축복 기도한 내용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번성하게 되었다. 기독교 가정의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축복권을 지닌 강한 위치에 있다.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며, 아버지가 신앙으로 집안을 인도해 나갈 때 사회도 올바로 유지된다.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거짓 없는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유대인은 어머니의 신앙 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이다. 수직 전도와 수평 전도가 있다. 자녀를 말씀으로 바르게 양육하는 것은 수직 전도이며 이웃 사랑은 수평 전도이다. 또한 이것은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때로는 자녀 때문에 감히 주님의 일을 못하겠다는 분도 많이 보아 왔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초등 학생이기 때문에, 고3이라서, 결혼 때문에, 손주를 봐 줘야 해서 등등 이유도 가지가지다. 문제가 해결되면 하겠다던 그들은 결국 자녀 문제 때문에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평신도 지도자의 필요 충분 조건 1 . 부르심에 순종하자 우리는 공주병, 왕자병이 유행인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교회 안에도 새해에 직분을 맡기려고 하면 갑자기 모세병이 유행한다. 바로 “못해요”병이다. 못한다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워 교역자의 혈압을 올려 드리는 기특한(?)분들도 많다. “나는 못해요(출애굽기에서 참 많이도 듣던 대목이다). 기도도 잘 못하고 성경 말씀도
나는 요즘 교회를 옮기고 싶다(2)/ 김순희/ 2013-03
자꾸 대화의 내용이 엉뚱한 길로 빠질 때에는 인도자는 선장처럼 적당한 기회에 대화의 진로를 바꾸는 데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도 튀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 힘들더라도 따로 그 사람과 대화의 시간을 가져서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실컷 하도록 해서 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고,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 주어야 한다. 한술 더 떠서, 꼭 부정적인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있다. 교회의 공식적인 행사를 광고하고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면, “그런데 꼭 참석해야 합니까? 먼저 다니던 교회에서는 그런 행사를 한적이 없었는데요” 라며 비협조적인 발언을 취미 삼아 한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협조는 안 해주더라도 가만있어 주기나 하면 좋으련만, 나는 이들을 암초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정적인 사람 때문에 서로 협력해야 하는 교회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꼬이는 것을 종종 보아 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 그런 상황이 닥치면 우선 인도자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사람의 이야기를 무조건 틀렸다고 반박하거나 더 이상 말을 못하도록 막아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어주어야 한다. 진정 그럴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기에 나름대로 주장하는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더구나 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들어주지 않으면 그들은 꼭 뒤에서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고칠 수 없는 나쁜 버릇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일단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주고 이해하고 난 뒤에는 인도자의 의견을 들려주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도록 하여 탁월한 선택을 하게끔 이끄는 지혜가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맞다, 틀리다’는 판단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흑백 논리로 맞서다 보면 서로 감정만 상하게 될 뿐이다. 더욱이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다. 사람들 앞에서 인도자가 “왜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하세요?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세요”라고 훈계조로 말해서 상처를 입힐 때가 많다. 의견을 다 듣고 난 뒤 “아, 그렇군요” 라든지 “그 의견도 듣고 보니 참 괜찮네요”라고 긍정적인 표현을 한 후 “그러나 교회에서는 …”하면서 차분히 그 취지와 목적 등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감정을 크게 상하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4. 구성원에 대해 순발력 있게 대처하라 속회의 구성원은 연령 차가 많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다. 속회 구성에 있어서 고부간, 시누이 올케 사이, 모녀지간은 따로 떨어지는 것이 좋다. 속도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절대 옮기는 일이 없어야겠다. 가정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어린 자녀를 둔 분들은 자녀의 연령이 비슷한 사람끼리 구성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아이들이 많을 경우에는 아이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장난감과 그림책, 과자 등을 준비하고, 돌아가면서 아이들을 돌봐 준다면 좋겠다. 자녀를 출산해서 3세 정도 될 때가 손도 많이 가고 키우기 가장 힘든 때다. 이때가 어머니들이 주일 성수하기 힘들고 신앙 생활하기 가장 어려운 시점이다. 움직일 수 있는 아이는 이때부터 잠시도 가만있지 못한다. 모든 표현이 앙앙 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끔 주위 사람들의 시선과 정신을 몽땅 빼앗을 때도 있다. 지혜롭고 순발력 있는 어머니는 자녀를 안고 잠시 자리를 비우지만 동작이 느린 어머니는 그러지도 못한다. 그러다가 결국 눈살찌푸리는 교인들 때문에 도중하차하고 만다. 눈총을 주는 분들은 자녀가 없는 분들인가? 한 번 생각 해 보라. 내 몸 하나 단장하고 나오기도 바쁜데 어린아이 준비시켜 등에 업고 기저귀, 우유 챙겨서 한 보따리 싸들고 나와 (게다가 아이가 둘이라면 더 정신이 없다) 예배에 참석하는 정성을 말이다. 얼마나 예쁜가! 우리 모두 사랑의 눈길을 보내 주자. 함께 버스를 탔을 때에는 인도자가 새 신자 옆에 앉는 것이 좋다. 안면 있는 성도들끼리 앉으면 초신자는 외톨이가 되어서 단체 행동에 거부감을 갖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량 봉사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새로 산 차가 더럽혀질까봐 남이 내 차를 타는 것이 싫다는 인도자고 있다. 주님이 과연 기뻐하실까? 그러면서도 차 안에는 십자가를 버젓이 걸어 놓고 다닌다. 헌신과 봉사와 사랑이 넘치는 인도자를 하나님도 사람도 좋아한다. 이처럼 함께 예배드리는 분들 중엔 인도자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나 신앙 연륜이 더 깊은 분들, 또 성격이 안 맞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명절이나 생신 등을 잘 기억했다가 찾아가는 방법도 효과적이다. 그런 분들을 맡고 있는 인도자에게서, 새해에 세배를 드리러 찾아 뵈었더니 가족들에게 자랑까지 하시면서 그렇게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만약 몸이 편찮으시다면 찾아가 뵙기에 더 좋은 기회다. 죽이라도 끓여 간다면 더없이 좋아하실 것이다. 특히 연장자나 연로하신 분들은 성경 공부를 갈 때나 교회 행사에 참여할 때 따로 만나서 모시고 가는 것도 인도자로서 꼭 기억해야 할 사향 중 하나다. 최대한의 관심과 겸손으로 늘 먼저 베푸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모두가 하나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5. 믿음을 굳게 하라 인도자는 말씀을 선포하는 영적 교제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의 사랑과 교제를 나누는 귀중한 중심 역할을 속회에서 담당해야 한다. 인도자가 속회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성령 충만하여 영육이 강건하고 열심을 겸비한 모범적이고 훌륭한 성품을 가진 지혜로운 인도자라면 더 바랄 게 없다. 물론 이론상으론 이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뜻을 표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지도자를 판단하고 따져 보는 일에는 모두 자신 있어하지만, 막상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 새신자들을 양육하게 된다면 어떤 자세와 방향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타성에 젖어 자신도 모르게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 들 때가 있다. 특히나 신앙 경력이 오래된 분들 가운데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나도 옛날에는 그런 봉사 다 해봤다.” “왕년에 성경 공부 그렇게 열심히 안 해본 사람 있다더냐?” 그들은 과거지사, 지난 세월에 대한 향수만을 먹으며 산다. ‘옛날병’ 에 중독된 이들이 참 많다. “옛날에는 재미있게 예배를 드렸고… 옛날에 그 권사님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옛날 그 속회는 참 좋았는데…,” 옛날병에 걸린 이들의 공통점은 현재의 모든 상황에 대해서는 불평 불만만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과거지사가 아니라 현재다. ‘왕년에’ ‘옛날에’를 부르짖는 사람은 ‘현재 나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다’라고 인정하는 것밖에 안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는 말씀처럼, 우린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신앙의 절개를 꺾어 버리면 안된다. 인도자의 믿음이 흔들리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평소에는 열심히 기도하다 급할 때는 점쟁이를 찾는 기가 막히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버스를 탔다. ‘ㅇㅇ보살, 당신의 운명을 점쳐 준다’는 내용의 광고가 붙어 있었다. 지하철 역 게시판에도 같은 내용의 다른 철학관 광고가 걸려 있었다. ‘ㅇㅇ운명 철학관’ ‘ㅇㅇ도사’라는 광고가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무속에 종사하는 사람이 무려 60만 명이라고 한다. 1년 전에 비해 무려 20%나 늘어난 숫자다. 백화점에서도 컴퓨터를 이용해서 점을 봐 주고, 새해 운세, 궁합 등을 봐 주는 대학생 아르바이트가 성업(?)이라고 한다. 소문난 점집은 문전 성시를 이루고 복채가 1억 원씩 하는데도 재벌 총수들은 아낌없이 돈을 뿌린다고 한다. 역학자들에게 국운과 국가 경영에 대해서 물어 보는 정치가들이 많다고 하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도 생겼다. 60만 명이라…, 한국 목회자 10만 명의 6배, 다방과 담배가게 보다 2배나 많은 숫자라고 한다. 최근에는 TV프로에까지 무속인들이 출연해서 책임 못질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고 있다. 성도는 선택받고, 구별된 백성임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벧전 4:3). 우리가 정리하고, 끊고, 결단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삶을 지체시키신다. 하나님은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미신 혹은 무속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매우 단호하다. “용납하지 말고(신 18:11) 믿니 말며(레 19:31) 배격하라”(출 22:18), 성경은 무속인의 종류를 거짓 선지자, 무당, 박수, 복술자, 신접자, 점성가, 초혼자, 술객 등 여덟 가지로 말하고 있다. 무속은 운명론을 말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무능하고 나태하게 만들며,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심어 준다. 불안을 안고 무속을 찾으면 일시적으로는 해결이 된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소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모르는 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에 알려 주지 않으시기도 한다. 가령 자신이ㅇㅇ년 ㅇ월에 죽을 것을 안다 치자, 미리 알면 삶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지만, 죽을 날짜 받아 두고 하루하루 지낸다는 것이 아마 더 죽을 맛일 게다.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이 되어도 늘 새 신자의 모습으로만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속회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과 속회를 새로 구성하면 절대로 속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있다. 흔히 말하는 동질성 응결 증상이다. 주님께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46)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이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같은 믿음의 형제 자매끼리 싫고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마땅히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해야 하리라. “저는 아무하고나 묶어 주셔도 시키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새로운 분들도 사귈 수 있으니 좋지요. 저는 아무애도 좋습니다”라는 분들처럼. 또 이런 분들도 있다. “교회가 너무 멀다. 버스를 몇 번씩이나 갈아타야 하니 불편하다. 왜 교회 버스가 우리 쪽에는 없느냐?” 하면서 무엇이든 가까우면 좋다는 편의주의자도 있다. 그러나 가깝다고 더 열심히 하고, 멀다고 적당히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리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서울대학교가 집에서 멀다고 안 다니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봐요”해서 모두 폭소를 터뜨린 적이 있었다. 그렇다. 거리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마음인 것이다. 교인 중에 전라도 광주에 전근 발령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내려가신 분이 계셨다. 트리니티 성경 공부가 늘 눈앞에 어른거리고 말씀 배우는 것이 너무 귀해, 그분은 매주 화요일마다 새벽같이 고속 버스를 타고 와서 성경 공부를 하고 내려갔다. 그런가 하면 미가엘 성가대운 중엔 주일 아침 6시에 시작하는 성가 연습 시간을 맞추려고 수원에서 새벽 네 시 반에 집을 나서는 분도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일곱 시간씩 걸어서 예배를 드리러 온다는 선교사의 눈물겨운 보고를 들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좋은 교회를 다닐 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드린다. 그들에게 거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교회가 너무 작아서, 반대로 교회가 너무 커서라는 말로 교회를 멀리하는 경우도 있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 나름대로 알차게,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풍성하게, 주님은 각 사람들에게 교회 안에서 감당할 것들을 맡기셨다. 우리는 그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서 감사함으로 깨달을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훈련시키시 고 연단 시키시는 것이다. 6. 하나님과 인간과의 물질 문제를 바로 하라 물질 문제로 말썽을 일으키는 속도원이 있을 수 있다. 생각건대 물질 문제는 영적 문제의 신호다. 급히 나오느라 지갑을 안 가지고 나와서, 혹은 가게에서 몇천 원 잠깐 빌리는 경우에도 꾼 돈은 즉시 갚아야 한다.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천 원쯤이야 하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게 아니다. 물질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받으시는 분이다. 나는 속도원들에게 헌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더라도 꾸어서는 드리지 말라고 이른다. 또 잔돈이 없으면 다음에 합쳐서 더 드리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하나님께 바친 헌금을 손을 대어 잔돈을 거스르는 몰지각한 일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광림 교회 김선도 목사님께서는 평소 헌금에 대한 말씀을 잘 안 하시지만, 십일조에 대한 설교는 연초에 꼭 한 번 하신다. 온전한 십일조는 첫째,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위해 드리는 것이다. 현대 선교의 3M은 사람 (Man), 돈(Money), 방법(method)이다. 그러니 십일조는 물질을 통해 간접적으로 선교에 동참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순종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셋째, 십일조를 드리면 온전한 축복을 이룰 수 있다. 성경에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 딱 한 군데 나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십일조인 것이다. 김선도 목사님은 성도의 의무인 온전한 생활을 강조하시면서 우리 교회에 하지 않고 딴 교회에 하더라도 꼭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미국의 부자 록펠러의 어머니는 이런 유언을 했다. “첫째, 십일조는 단 1센트(90원)라도 분명히 계산하여 하나님께 드려라. 둘째, 주일을 꼭 지키되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은혜를 받아라. 셋째,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라.” 그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신앙 생활을 성실히 했으며, 정확하게 십일조를 하나님의 전에 드렸고, 결국 세계적인 큰 부자가 되었다. 십일조만 계산하는 직원이 40명이나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해서 십일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축복하신다. 성경 속의 축복받은 사람들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 헌금의 열 가지 법칙을 적어 본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먼저 자기 자신을 드리고 헌금하라.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물질만 드리면 문제가 된다.) 둘째: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드리라. 셋째: 형편과 능력대로 드리라.(믿음이 연약할 때 마음만 가지고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헌금을 드려서 가정과 사업에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넷째: 약정 헌금을 할 때는 충분히 기도한 후에 헌금액을 정하라. (무모하게 약정 하고 감당치 못해서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 다섯째: 헌금할 형편이 안될 때 억지로 하지 말라. (헌금을 못하는 것 때문에 신앙이 후퇴해서는 안된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후8:12). 여섯째: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지 말라. (불신앙, 불안, 섭섭함, 분노 등이 생기면 헌금이 인색하게 된다.) 일곱째: 정직하게 드리라. 여덟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양로원, 고아원 등을 십일조 명목으로 돕는 것은 옳은 방법이니다.) 아홉째: 미리 준비하여 드리라.(먼저 하나님께 드릴 것을 떼어 놓고 생활비를 사용한다. 준비 없이 헌금시간에 당황하여 호주머니를 뒤적거린 다면 주님은 기뻐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열째: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을 바로 사용하라. “주머니가 회개해야 진짜 회개다”라는 말이 있다. 깍쟁이 아내 때문에 십일조를 바르게 못하는 남자 분들을 많이 보아왔다. 또 몰래 헌금을 했다거나, 평소 물질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인정받지 못하는 주부가 헌금을 해서 가정 불화를 일으키는 경우도 보았다. 물질 관리에 관한 한 가정에서나 주변에서 인정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 특히 가정에서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고 헌금 생활을 올바로 할 때, 그 자녀도 복받는 신앙인이 될 것이다. 전도한 새 신자 중에서 가장 빨리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시작한 김 집사가 생각난다. 6년 전에 전도했는데 여고 시절에 잠시 신앙 생활을 하다가 결혼해서 자녀를 둘이나 두었지만 신앙 생활을 못하고 있었다. 전도하고 나서 두 달쯤 되었을 때 그녀는 나의 십일조 간증을 듣고는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모든 일에 순종하며 말씀대로 믿고 실천하려고 했다. 당시 그녀의 기도 제목은 남편이 안정된 직장인 은행을 그만두고 교수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그 일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것도 아니고, 소위 일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안 배경이 든든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대로 된 줄로 믿고 순종하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기도했다. 6개월 뒤에 지방 대학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녀는 그 곳에 가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집사의 직분도 받았다. 남편이 5년 만인 금년 초에 서울에 있는 모교의 부교수로 임명받았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김 집사는 인간 문화재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뜻밖의 소식도 전해 왔다. 김 집사는 “내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다.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며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시작했더니 이렇게 큰 복을 주셨다”고 간증했다. 김 집사처럼 축복받는 생활을 직접 체험하고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것을 볼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교인들끼리 돈 관계를 갖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준다. 결국엔 돈 때문에 신뢰감도 잃고, 사랑도 잃고, 신앙 생활까지 저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빌려 달라고 할 때 차라리 돕는다 생각하고 저거 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그리스도인의 돈 관계는 그러해야 하리라. 교인끼리의 동업 문제도 그렇다. 내 생각 같아선 같은 교인끼리는 절대 동업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피를 나눈 친형제 사이도 갈라놓는 게 돈 아닌가! 항상 사람들 사이에 돈이 끼여들면, 서로 의심하게 되고 치사스러워지게 마련이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한 것처럼 손해를 마다하지 않는 너그러운 아량이 없다면 동업은 아예 생각지 말하고 권하고 싶다.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길 때 사탄은 그 기회를 악용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유혹하고,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비뚤어지게 만단다. 7. 허물없는 관계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 서로 믿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신경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사소한 이유로 불편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인도자는 늘 높임말을 사용해야 한다. 아무리 허물이 없는 사이라고 해도 속회 예배 때는 경어를 사용하여 예절 바른 태도를 갖춰야 한다. 이미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 가운데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처럼 처음에는 잘 자라다가 돌연 중간에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거나 열매 맺는 생활을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교회나 인도자들은 포기해서는 안된다.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겠지만 그들을 휘감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해 주고 잘 자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도와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르고 튼튼하게 자라 열매 맺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내가 인도자로서 내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신약 성경에 칭찬 받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나온다. 그들은 신실한 믿음의 부부로 하나님 앞에는 충성된 종들이요, 사도 바울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어 눟을 정도로 귀한 동역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부부였다. 그들은 바울을 극진히 대접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가르치기에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는 이방인의 모든 교회까지 이들 부부에 대해 감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평신도 지도자 부부가 많이 탄생한다면 교회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날로 더해 갈 것이다. 가깝기 때문에 더 예의를 지켜야 한다. 세상에서의 예의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예의를 지킬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칭찬 받는 성도의 삶이 된다. 8. 경조사에 솔선 수범하라 속도원이 기쁜 일을 맞게 되면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을 겪게 되면 함께 슬픔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위로하고 기도하는 사랑의 관계가 기독교인의 바른 관례다. 자주 겪게 되는 일 중 하나가 장례식과 결혼식이다. 예부터 인생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으려면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많이 참석해 보라는 말이 있다. 성경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전 7:2)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살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 돕는 것은 훗날 그 가족들이나 장례에 참예했던 분들에게 주님의 귀한 사랑을 나타내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대부분 장례식을 마치고 나면 유족들은 교회에 대한 강한 애착과 소속감을 가지게 되고, 기독교 공원 묘지나 교회 공원 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가정에서 드리는 추도 예배 준비는 먼저 고인의 사진, 고인이 쓰시던 성경, 찬송을 상위에 놓는다. 가족들이 그 앞에 둘러앉고 예배 인도는 교역자가 오시지 못할 경우, 가족 중 한 분이 한다. 기도나 성경 봉독은 가족 중에서 맡고, 순서지를 마련하여 참석한 분들에게 나누어 주면 좋다. 예배드린 후에는 고인에 대한 신앙 생활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덕담을 나누게 될 것이다. 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스라이드, 비디오 등을 보면서 고인의 믿음 생활을 회상하는 순서도 뜻깊다. 순서 후에 정성껏 차린 음식을 함께 나누며 화목한 시간을 갖도록 한다. 온 가족 모여 드리는 추도 예배는 첫째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받기로 다짐하는 결단의 시간이 되며, 둘째 믿지 않던 일가 친척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 계기가 되고, 셋째 가족의 결속력을 더욱 다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는 귀하고 유익한 시간이 된다. 9. 심방과 대심방 개인의 성격과 믿음의 분량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심방자가 먼저 그 가정의 문제를 꺼내면 안된다. “이 가정의 문제를 알고 왔다”고 얘기하는 것이 상대방의 입장을 더 힘들고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일로 인해 새신자가 ‘이 교회 교인들은 말이 많구나’ 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떠나가 버린 일도 있다. 또한 사정을 듣고 난 뒤에 심방자가 원인을 알아내고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된다. 욥에게 찾아간 세 친구들은 욥의 처지를 보고 “욥, 자네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어. 그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욥, 자네가 조상들의 전통을 저버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거야” “욥, 나는 자네가 왜 그런 고난 가운데 있는지 알고 있네. 자네가 신령치 못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다. 욥의 처지를 듣고 믿음으로 소망을 갖도록 격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욥위 마음을 더 상하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다 알지는 못한다. 욥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징계가 아닌 다른 이유로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사정을 듣고 난 뒤에 손을 꼭 잡아 주거나 등을 다독거리면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믿음을 갖고 있으니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심방자는 절대로 이야기를 함부로 다른 성도에게 옮기면 안된다. 함께 기도하기로 약속했으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해서도 안된다. 심령이 상한 형제 자매들을 사랑으로 심방하며, 기도하며,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와주는 것이 인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다. 일 년에 한 번,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드리는 대심방이 있다. 대부분 기도로 미리 준비를 하고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을 일 년 도안 우리 가정에 주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기대하며 대심방을 받게 된다. 어떤 분들은 남편도 잠깐 시간을 내어 부부가 함께 심방 예배를 드리는 가정도 있다. 아예 녹음기까지 준비해 놓고 일년 내내 주신 말씀을 되새기는 열성파 가정도 있다. 목사님이 심방오실 시간에 맞추어 방석을 꺼내 놓고, 말씀을 전하기 쉽게 조그마한 상도 준비해서 그 위에 가정의 기도 제목을 조목조목 적은 기도 카드를 올려 놓는다면 좋을 것이다. 심방 감사 헌금을 정성껏 준비하는 이들도 보았다. 나의 경우에는 심방 2주일 전에 교인들과 대심방 시간 약속을 미리 해두고 사흘 전에 재확인한다. 그리고 하루 전에 다시 한 번 최종 연락을 해서 시간을 확인하고, 점심 대접을 하는 가정 외에는 중복되지 않도록 과일도 한 가지씩 정한다. 요즈음 경제를 살리자고들 난리다. 좀더 알뜰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것은 크리스챤으로서 당연한 의무라 생각한다. 10. 전도의 생활화 전도에 성공하는 제일 좋은 방법, 최선의 방법은 기도다. 전도대상자에게 전화하거나 만나러 갈 때, 그 사람의 마음을 녹여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공하게 된다. 더구나 전도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이다. 전도 대상자는 믿고 싶어해도 사탄은 끊임없이 방해 공작을 편다. 전도 대상자와 그 가족들,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고 기도해야만 전도에 성공할 수 있다. 전도 대상자를 만나면 꼭 상대방의 장점을 찾아내서 칭찬해 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주변에는 컴퓨터나 꽃꽂이, 홈패션 등의 기술을 가르쳐 주며 전도하는 사람, 테니스, 축구, 농구 등을 함께하거나 장기나 바둑을 두면서 전도하는 분들이 많았다. 전도 대상자와 함께 게임이나 시합을 할 때에는 무조건 져 주어야 한다. 또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물건들을 활용하고 나누면서 전도하는 모습도 보았다.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말로만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는 나눔과 행함이 없는 전도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전도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내게 주신 시간(건강)의 달란트를 활용하여 전도 대상자가 외출할 때 어린 자녀를 돌봐 주기도 하고 그 집에 손님이 오시는 날이면 음식 준비나 설거지를 돕기도 했다. 노인들을 전도할 때는 하루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 드리며 전도했다. 물질의 달란트를 활용하여 약간의 비용을 들여서 밑반찬이나 음식을 만들어 세 번 정도 음식 교제를 하면서 전도하기도 했다. 이 방법은 여자 성도들이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성공적인 전도 방법이다. 또 설교 테이프나 상대방의 형편과 사정에 맞는 간증집, 좋은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 주거나 아이들 옷가지, 신발, 동화책, 참고서, 장난감 등을 나누어주면서 전도하기도 했다. 재능의 달란트를 활용하여 몸이 불편한 분들에게는 수지침, 체침 등을 놓아 드리면서 전도하고, 또 교사 경력을 살려 전도 대상자 자녀들의 공부를 돌봐 준 것도 좋은 전도의 기회가 되었다.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전도의 원칙을 가르치셨다. “뱀같이 지혜로우라.” 뱀은 귀가 없어서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온몸으로 진동을 감지해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전도할 때 처음 만난 상대방의 형편과 상황을 재빨리 감지해서 지혜롭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도 대상자를 처음 만났을 때는 우선 상대방의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하고, 가족의 이름을 외워서 기도해 주었다. 특히 자녀들에게 관심을 많이 가졌다. 또 전도 대상자의 필요를 민감하게 살펴 도움을 주곤 했다. 독감에 걸려 있다면 생강차를 끓여다 주거나 죽을 쑤어서 가져다주면서 전도했다. 전도하는 동안 내 신앙 생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는 생각에 기쁨과 평안이 넘쳐 났고, 전도 대상자의 문제가 기도로 응답되는 것을 보며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영적 체험과 신앙의 확증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전도 대상자에게 베푼 것 이상으로 나와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셨다. 나의 모난 성격이 변화되었고, 귀한 믿음의 동역자들을 많이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전도받은 사람이 열심을 내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자극과 도전을 받아 늘 깨어 있는 신앙을 유지하게 된 것은 전도를 통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크리스천의 성화 과정 중 마지막 단계의 시험이 바로 ‘전도’다. “겸손, 사랑, 헌신, 봉사, 감사, 용서, 순종, 기뻐하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본을 보이라, 중보 기도하라”고 명하신 주님은, 이 모든 것들을 전도하는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전도야말로 성도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축복의 관문’ 이며, 성숙한 성도라면 마땅히 전도의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전도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기 원하시는 분은 「천사도 흠모하겠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1. 베드로의 실패와 성공을 기억하라 전도만 해다 놓으면 뒷일을 목사님께서 책임지시겠지, 양 떼를 양육시키는 것은 교역자 몫이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 믿음의 형제 자매가 목회자를 도와서 성도가 양육해야 할 부분을 잘 감당할 때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될 줄 믿는다. 항상 사도행전 2:42 이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 본다. ▶ 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 일하라고 주신 직분을 잘 감당했는가? ▶ 나는 맡겨진 속도원들을 양육하고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말씀을 붙잡고 노력하며 기도에 힘썼는가? ▶ 나는 믿음의 자매들과 마음을 같이하며 성전에서 말씀을 듣고 교육받기 위해 모이기를 힘썼는가? ▶ 나는 사랑의 교제를 위해 기쁨으로 모이는 장소를 제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베풀었는가? ▶ 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신 말씀대로 속도원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여기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끝까지 관심을 갖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돌봐 왔는가? ▶ 나는 늘 하나님 우선 순위의 생활로 범사에 감사하며, 이로 인해 하나 님께는 영광이요 이웃에게는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하여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했는가? 그 어떤 질문에도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목회자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았는지, 성경에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전도도 해야 된다고 했으니까 마지못해 한 것은 아니었는지….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목적 의식도 없고 방향도 없이 되는 대로 하다가 교회 안에서, 목회자에게, 교인들에게 시험을 받고 나가 넘어져서 영영 일어서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나는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받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베드로의 실패를 눈여겨보며 베드로의 성공을 배워야 한다. 정말 훌륭한 인도자라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예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 그리곤 오직 순종함으로 성공한 베드로처럼 살아가야 한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골라 하고 내 생각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하라고 명령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결단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다 버리자,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살아갈 수 있다.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주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나이다. 그리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주님의 자녀가 되어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믿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네피림(Nephilim)에 대한 연구/ 창조과학자료/ 2013-01-14
네피림(Nephilim)에 대한 연구/ 창6:4을 중심으로 Ⅰ. 서론 성경에는 난해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구절들의 해석도 학자마다 다소간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 하나가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이다. 어떤 학자들은 네피림의 어원을 \'나팔\'로 추정하여 그들을 하늘로 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 혹은 그 후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거나 심지어 괴물이나 신동(神童)으로 간주하는 학자들(Tuch, Knobel)도 있다. 또 어떤 이들(Luther, Calvin, Keil, Murphy)은 네피림을 \'타락한 자들\'로 규정, 이들을 \'압제자\', \'난폭군\', \'훼방자\' 등으로 보고 있으며, 네피림의 어원을 \'팔라\'와 연결시켜 보통 사람들과 \'구별\'된 \'훌륭한 사람들\'로 보는 학자도 있다. 네피림의 기원에 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진다. ⑴ 타락한 천사들 ⑵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들 ⑶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한 거인족. ⑴항의 경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네피림의 어원을 \'나팔\'로 추정하여 그들을 \'하늘로 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 혹은 그 후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다. ⑵항은 창세기 6장 2절을 \'천사들\'과 \'인간 여자들\'의 결혼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나 네피림을 \'타락한 자들\'로 규정, 이들을 \'압제자\', \'난폭군\', \'훼방자\' 등으로 보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네피림의 기원이 달라진다. 네피림의 기원을 ⑶항으로 보는 학자들은 창세기 6장 4절의 \'당시에\'(in those days)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인다. 즉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할 때, 이미 \'땅\'에 \'있었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거인들\'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는 사실이다. 거인은 거대한 신장을 가진 한 존재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인들이 먼 옛날부터 땅 위에 살았었다고 믿고 있다. 이 거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이들의 기원을 창세기 6장 1-4절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거인들의 조상을 \'네피림\'으로 본다. Ⅱ. 네피림의 어원에 대한 연구 \'네피림\'은 성경에 두 번(창 6:4 ; 민 13:33) 기록되어 있는 낱말로 그 어원은 분명치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네피림이라는 낱말이 \'나팔\'의 칼(kal)형에서 파생된 복수 명사형으로 본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Hoffman, Delitzsch)은 이러한 원어의 뜻에서 유추 해석하여 네피림을 \'하늘로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 혹은 그 후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괴물\'이나 \'신동\'으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다(Tuch, Knobel).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네피림을 \'타락한 자들\'로 규정, 이들을 \'압제자\', \'난폭군\', \'훼방자\' 등으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하여 네피림의 어원을 \'팔라\'와 연결시키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하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이러한 원어의 뜻에서 유추 해석하여 네피림을 보통 사람들과 \'구별\'된 \'훌륭한 사람들\'로 본다. Ⅲ. 네피림의 기원에 대한 연구 네피림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것은 네피림의 기원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네피림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견해로 나누어 진다: ⑴ 타락한 천사들 ⑵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들 ⑶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한 거인족. 가. 타락한 천사들 네피림을 \'타락한 천사들\'로 보는 학자들은 네피림이란 낱말이 \'떨어지다\'(fall)라는 의미의 \'나팔\'에서 파생된 단어이기 때문에 네피림의 뜻은 \'떨어진 존재들\'(fallen ones)이 되며, 결국 네피림은 \'떨어진 자들\'로서 땅의 존재가 아닌 \'천상적 존재\' 즉 \'하늘에서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 혹은 그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거로 네피림을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나팔\'이란 단어는 \'떨어지다\'(fall)라는 뜻 외에도 \'부패하다\' 즉 \'타락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네피림의 어원을 \'나팔\'로 보고 그 의미를 \'떨어지다\'(fall)로 해석할 경우 네피림은 단어의 의미상 \'떨어진 존재들\'(fallen ones), 즉 \'떨어진 자들\'로서 땅의 존재가 아닌 \'천상적 존재들\'로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나팔\'의 의미를 \'타락하다\'로 볼 경우 네피림은 영적 혹은 윤리적으로 \'타락한 존재들\'로서 \'천상적 존재들\'이 아닌 \'땅의 존재들\'일 수도 있다. 또한 네피림의 어원을 \'나팔\'로 보고 그 의미를 \'떨어지다\'(fall)로 해석한다고 할찌라도 그것이 반드시 \"하늘로 부터 떨어진\"의 의미로만 볼 수는 없으며, 또한 타락한 천사들이 천상에서 떨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다 -\'땅\'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한 족속을 이루어 살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네피림의 어원을 \'나팔\'이 아닌 \'팔라와 연결시킬 경우 네피림은 보통 사람들과 \'구별\'된 \'훌륭한 사람들\'로서 역시 \'천상적 존재들\'이 아닌 \'땅의 존재들\'이 된다. 나.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들 앨더스(G. Ch. Aalders)는 \"(창세기)1, 2절을 천사들이 여인들과 동거하였음을 나타내는 구절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이 거인들이 천사들과 여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손이라고 간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네피림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으로 보는 학자들은 창 6장 2절을 \'천사들\'과 \'인간 여자들\'의 결혼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창세기 6장 2절을 \'천사들\'과 \'인간 여자들\'의 결혼으로 해석하지 않는 학자들도 네피림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으로 보기도 한다.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다. 1. 하나님의 아들들 a. 천사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이라는 해석은 가장 오래된 견해로 가장 초기의 유대인의 해석(에녹1 6:2 ; 요벨 5:1), 70인역(LXX), 필로(Philo), 요세푸스(Josephus) 그리고 사해 두루마리(the Dead Sea Scrolls) 등에서 취하고 있는 견해이며, 저스틴(Justin), 이레니우스(Irenaeus),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터툴리안(Tertullian), 오리겐(Origen) 등의 초기 그리스도인 작가들 역시 이 노선을 취한다. 이 견해를 수용하는 현대 학자들은 세 가지 주된 이유들을 제시한다. ⑴ 구약성경(시 29:1 ; 욥 1:6 ; 2:1 ; 38:7)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상의 신과 같은 피조물로 간주된다. ⑵ 창세기 6장 1-4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여러가지 해석들은 창세기 6장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의 아들들\'이 \'다른 사람들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문구는 적어도 그와 같은 생각이 애매한 표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그)사람\'(히, (ha)adam)2)이 모든 인류로 간주되는 6장 1절에 의해 더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2절의 \"사람의 딸들\"은 당연히 인류의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보통 계층의 사람들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⑶ 우가릿 문헌(Ugaritic literature)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만신전(pantheon)의 일원들로 간주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창세기에서도 유사한 의미로 그 문구가 사용되어졌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한다. 위에서 제시한 이유들 중 ⑶은 이교도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수용할 수 없으나 나머지 이유들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b. 셋 계통의 경건한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Seth) 계통의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근거로 성경 용례상 경건한 성도들을 가리켜 역시 \'하나님의 아들\'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신 32:5 ; 시 73:15 ; 호 1:10)과 셋의 후손들에 의해서 비로소 여호와께 대한 경배가 행해졌다는 점(4:26), 그리고 무엇보다 신학적 의미와 구속사적 맥락상 잘 부합된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 계통의 경건한 사람들\'로 보아야만 족보와 홍수사건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사람들은 아내를 취할 때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 충동에 따라 결정했다. 즉 종교적인 배경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안일한 삶에 타락이 몰려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따라 반응하셨다는 것이다. 한편,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이라는 견해를 반박한다. ⑴ 범법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았던 것이다. 만일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엄중하게 심판하셨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3절에서는 인간 세계에 대한 심판만을 예고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⑵ 만일 천사설이 옳다면, 죄악사는 인류 타락사가 아니고 천사 타락사로 돌변되는 셈이니 자연스럽지 않다. ⑶ 천사는 본래 죽지 않음으로 생식하지 않는 존재이다(마 22:30). ⑷ \"아내를 삼는지라\"(히, nashym lakah)라는 구절은 구약에서 결혼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용어로서, 간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천사들에 대해서는 사용될 수 없다. 만약 천사들이 이 일을 했다면 이는 결혼이 아니라 간음일 수밖에 없었다.3)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볼 수 없다는 논거에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된다. ⑴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 계통의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근거로 언급한 성경 본문들은 창세기 6장 2, 4절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문자적으로 같지 않다. 창세기 6장 2, 4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베네 엘로힘\'4) 이다. 그러나 신명기 32장 5절은 \'바나이우\', 시편 73편 15절은 \'도르 바네크\', 호세아 1장 10절은 \'베네 엘 카이\'이다. \'베네 엘로힘\'은 단순한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다. 다시 말해서, 천사들을 가리켜 \'베네 엘로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⑵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았기 때문에 죄를 범했다고 한다면 \'사람의 딸들\' 역시 죄를 범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를 삼았다\"라는 것은 구약시대에 일반적으로 결혼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6:25 ; 민 12:1). 결혼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합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결혼에 동조한 \'사람의 딸들\' 역시 범법자이다. 뿐만 아니라 죄를 범한 천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큰 심판의 날까지 유보되었을 뿐이다(마 25:41 ; 고전 6:3). 또한 성경에서 죄를 범한 천사들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경우가 베드로후서 2:4과 유다서 1:6에 언급되어 있다. 이 책(베드로후서, 유다서)의 저자들이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힌 천사들\'에 관한 내용을 어디서 인용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위경(Pseudepigrapha)인 \'에녹서\'(Enoch)에서 인용했다고 본다. 에녹서에는 타락한 천사들의 타락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상세하고도 장황하게 보도된다.5) 그러나 베드로나 유다가 \'실례\'(illustration)로서 그것을 사용했다고 해도 그것이 역사적 사실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러한 내용이 위경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비역사적인 것으로 단정해 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베드로나 유다가 이 위경의 내용을 인용한 것은 이 위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던 독자들이 자신의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사도 요한은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그들이 이해하기 용이하게 헬라 사상 가운데 있었던 \'말씀\'(헬, logo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요 1:1, 4), 바울은 아덴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을 변증하기 위해 이교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4행시 크레티카(Cretica)와 아라투스(Aratus)의 시 \'패노메나\'(Phaenomena)를 인용하였으며(행 17:28), 디모데후서 3장 8절에서는 외경(Apocrypha)과 위경에 자주 나타나는 일화를 사용하였다. 이 천사들의 죄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유 6)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벧후 2:4)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다. 그런데 타락한 천사들이 모두 갇힌 바 된것은 아니다. 타락한 천사들 가운데 자유로운 악한 천사들은 \'사단\'(Satan)을 중심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그러면 타락한 천사들 가운데 어떤 천사들 만이 \'흑암\'에 갇히게 되었는가? 바클레이(W. Barclay)에 의하면 천사들의 타락에는 \'두 가지 계열의 전승\'이 있다. 첫째는 \'오만함\'에 기인한 타락이고 둘째는 \'욕망\'에서 유래한 타락이다. 전자는 루시퍼(Lucifer)와 그 추종자들에게 관한 것(사 14:12 ; 눅 10:18)이고, 후자는 육체를 가진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자기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에 관한 것이다(창 6:1-4). 그런데, \'오만함\'으로 타락한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은 \'지옥\'에 갇히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활동하고 있다(마 4:1-11 ; 눅 10:18-19 ; 요 13:2, 27 ; 벧전 5:8 ; 계 12장 ; 13:1-4 ; 20:1-3, 7-10). 그렇다면 \'지옥\'에 갇힌 천사는 바로 교만의 죄가 아닌 욕망의 죄- 본성을 거스린 죄 -로 타락한 천사들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의 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구절(6절)이 에녹서에서 인용한 것이라면, \'욕망의 죄\'란 \'천사들이 땅에 내려와 여인들과 성관계를 맺은 것\'이다.6) 유다서 7절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유다서 7절은 창세기 19장(1-29)에 기록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의 멸망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 7) 위의 구절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이 형벌을 받은 것은 \'간음\'과 \'다른 색을 따라 가는\' 죄악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죄악은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행하여진 것이다. 여기서 \'저희\'(헬, toutois)란 남성 3인칭 복수 대명사로서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렌스키(R. C. H. Lenski)는 \'저희\'와 관련된 것은 \'천사\'(5절)가 아니라 \'믿지 아니한 이스라엘 사람들\'(6절)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의 주장은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가 수식하는 것이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가 아니라 \'불의 영원한 형벌을 받음으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 곧 \'천사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망한 것과 같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저희\'는 \'믿지 아니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천사들\'에게도 관련된다. 왜냐하면, 천사들도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히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가 수식하는 것은 \'불의 영원한 형벌을 받음으로\'가 아니라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5절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망한 것은 \'믿지 아니하는\' 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이 지은 죄 곧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저희\'는 5절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아니라 6절의 \'천사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박윤선은 \"\'다른 색\'이란 말은 \'다른 육체\'(헬, sarkos heteras)란 뜻이니, 천사들은 \'육체\'가 아니므로 \'다른 색\'이란 말을 그들과 대조시킨 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사들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결혼도 하지 않고 신체도 가지지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몸을 취하거나 육체로 나타났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들이 소돔을 방문했을 때, 그 도시의 사람들은 동성애에 심취한 나머지 천사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상관\'(히, yada)하려고 하였다(창 19:5). 그러므로 박윤선의 논거에는 무리가 따른다. 물론 \'다른 육체\'를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들\'로 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7절의 \"다른 색을 따라간다\"는 표현은 소돔에 온 \'천사들\'을 그 도시의 사람들이 \'상관\'하려고 했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소돔이 멸망한 이유는 이와 같은 행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하기로 이미 작정하셨다(창 18:20-21).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행위를 저지른 것은 소돔 백성들 뿐이다(창 19:4-5). 그런데 유다는 7절에서 소돔 뿐만 아니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다른 색을 따라간다\"는 표현은 로마서 1장 2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성관계\'(동성애)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유다는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천사들\'과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이 같은 종류의 범죄-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의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른 육체와 성관계를 맺기를 원한 것과 천사들이 땅에 내려와 여인들과 성관계를 맺은 것-를 통하여 멸망당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후서 2:4과 유다서 1:6의 \'흑암에 갇힌 천사들\'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나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딸들\'과 성관계를 맺은 천사들일 것이다. 이 천사들을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볼 경우 즉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유다서 6절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로 볼 경우 일시적으로나마 그들은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히는\' 심판을 이미 받은 것이다. ⑶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본다고 해서 죄악사가 인류 타락사가 아닌 천사 타락사로 돌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기 전에 이미 타락했다(창 3:6 ; 창 4:8 ; 23 등). 이 사건은 인류 타락사가 천사 타락사로의 변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증가와 다양성7)을 보여 주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 된다. 즉 홍수 심판의 원인은 \'하나님의 아들들\' 곧 천사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죄악\"(창 6:5) 때문이었다. ⑷ 생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식 능력 즉 성적 능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천사들은 일상적으로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육체적인 형상을 입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돔을 찾았던 두 천사는 인간의 육체를 가졌으며, 이에 소돔 백성들이 그들과 상관[sexual intercourse]하기 위해 롯의 집으로 몰려들었다(창 19:1-5).8) 히브리 전통에 의하면 천사들은 \'상위의 천사들\'(higher angels)과 \'하위의 천사들\'(lower angels)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상위의 천사들은 생식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필리핀의 한 소녀는 천사에 의해 성희롱을 당했으며, 중국에서는 귀신들에 의한 성적 희롱이 아주 흔한 일이라고 한다. ⑸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 계통의 경건한 자들로 보는 견해의 가장 큰 결점은 사람의 딸들을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들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견해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1절의 \'사람\'을 일반인이 아닌 가인의 자손들로 본다. 이 경우 2절의 \'사람의 딸들\'은 가인 계통의 여인들이 된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본래 일반명사인 \'사람\', 바꾸어 말하면 \'인류\'에 대해 어울리지 않는 의미를 부과시키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일반인[인류]이 아닌 특별한 계통의 사람들로 보는 경우는 이 부분- 만약 이 귀절의 \'사람\'이 가인 계통의 자손을 의미한다면 -을 제외하고는 없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도 문제점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다(6:3). 앞의 견해를 따른다면 여기서 \'사람들\'은 일반인이 아닌 특별한 계층의 자손 즉 불경건한 가인 계통의 자손들이 된다. 왜냐하면 1, 2절의 \'사람\'을 일반인이 아닌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로 보았기 때문이다.9) 그러므로 결국 심판을 받는 것은 인류가 아닌 불경건한 자들 곧 가인 계통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불경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기술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노아와 그의 식구를 제외한 전 인류에게 미쳤다고 보고한다(6:7).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이 아닌 전 인류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경우, \'사람의 딸들\'은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태어난 딸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평범한 인간의 딸들이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들의 구별은 성경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본 단락의 \'사람의 딸들\'처럼 평범한 의미를 함축하는 단어를 가지고 그와 같이 의미화된 어구로 표현되는 식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한편, 모리스는 \"단순히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결혼했기 때문에 온 세상이 완전히 타락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한다. c. 만신전의 일원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만신전의 일원들\'(gods within the pantheon)이라는 견해는 이교도 신화(pagan mythology)가 그 이야기의 배후에 숨겨져 있다라는 생각에서 수립되었는데 이러한 표현은 라스샤므라 사본과 아르슬란 타쉬에서 발견된 B.C. 8세기 경의 것으로 보이는 가나안의 주술문에 바로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어 있다. 이교도들의 신화에서는 신들과 이 세상의 여자들 사이의 성교(intercourse)와 같은 이야기들이 흔히 있다. 실제로 우가릿(Ugaritic)에서는 \'신(들)의 아들들\'이 만신전(pantheon)의 구성원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우가릿의 새벽의 전설(Ugaritic legend of the Dawn)에서는 만신전의 최고 신인 \'엘\'(El)이 두 명의 여자들을 유혹한다. 신과 인간 여자들과의 이러한 결합으로 비너스(Venus)에 해당하는 여신들이 된 듯한 \'새벽\'(Dawn)과 \'황혼\'(Dusk)이 탄생한다. 길가메쉬의 영웅(The heroic figure of Gilgamesh) 또한 그와 같은 결합에 의한 자손이라고 보고 있다. 이와같이 이교도들에게 있어서 신들은 신과 인간 사이의 결합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초인간적인 개인이나 거인은 이교도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종류의 희한한 기원에서 유래한 고대 사람들을 시사한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들\'이 \'만신전의 일원들\'(gods within the pantheon)이라는 견해는 거인들과 유명한 사람들이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이교도적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d. 군주들 혹은 왕족 \"하나님의 아들들\"이 \'군주들\'이라는 해석은 A.D. 2세기 중엽에 유대인의 해석을 통하여 소개되어진 것으로 통치자들이나 재판관들이 때때로 \'신들\'로 언급되어진 사실에 근거한다(출 2:6 ; 22:8 ; 삼상 2:25 ; 시 82:1). 이 견해는 천사들이 성교를 탐닉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입장의 학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나 비록 통치자가 흔히 \'신\'으로 지칭되기는 하였지만, 그 자녀가 \'신의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된 적이 없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반론이 제기된다. 또한 설령 \'하나님의 아들\'이 군주를 뜻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큰 난제가 하나 등장한다. 즉 군주의 자녀와 평민의 자녀가 결혼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정도의 엄청난 죄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e. 가인의 후손들 에스린저(L. Eslinger)은 가인(Cain)의 후손인 라멕(Lamech)이 일부다처주의자라는 4장 19-24절과 5장의 셋의 후손들이 아들들과 딸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은 가인의 후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셋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브(Eve)의 원죄(창 3:6)10)를 반복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악한 계통 즉 가인의 후손과 관련되어지는 것이 틀림없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에스린저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지지받을 수 없다. ⑴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은 \'천사들\'(시 27:1 ; 욥 1:6 ; 2:1 ; 38:7) 또는 \'성도들\'(신 32:5 ; 시 73:15 ; 호 1:10)에 한해서만 사용되었을 뿐 가인의 후손과 같이 불경건한 자와 관련되어 사용된 적이 없다. ⑵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브의 원죄를 반복했기 때문에 그들을 사악한 계통의 사람들과 관련시키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에스린저의 주장대로 한다면 다윗(David) 역시 이브의 원죄를 반복했기 때문에(삼하 11:2-4)11) 사악한 계통의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의 택한 자로(삼상 16:12 ; 시 89:19-20) 경건한 계통인 셋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다(눅 3:31-38). f. \'천사\'와 \'군주\'가 결합된 인물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와 군주의 결합\'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Ross, Clines)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소를 떠난 타락한 천사들이 군주들과 용사들 및 강한 사람들 안에 거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다니엘 10장 13절, 20절 그리고 에스겔 28장 11-19절을 든다. 단 10:13, 20에서는 미가엘이 강력한 영들, 즉 땅의 왕들과 왕국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군장들\'과 더불어 싸웠으며, 겔 28:11-19에서는 두로 왕이 예언자의 마음에 사탄, 즉 기름부음받은 그룹으로 연상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들\'로 보고, \'타락한 천사들\'이 하늘나라 군대와 싸울 싸움에 대비하여 군대를 증원하기 원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식의 힘을 활용하고, 그것을 그들의 목적에 맞도록 부패시키기로 결심하였는데 이러한 전략은 신약 당시에 흔했던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것[귀신들림, demon possession]과 비슷한 기술의 수단에 의하여 실천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귀신에게 몸이 사로잡힌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보이게 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여자들을 아내로 취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생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의 직접적인 성교가 있을 수가 없다고 본다면 신약 당시에 흔했던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것과 비슷한 기술의 수단에 의하여 인간(군주들)의 몸에 들어간 \'천사들\'이 \'인간들\'(사람의 딸들)과 성교- 결국은 육체를 가진 \'사람들\'의 성교이지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사람의 딸들 \'사람의 딸들\'을 누구로 보느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를 가리키냐 것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 계통의 경건한 후손들\'로 볼 경우 \'사람의 딸들\'은 \'가인 계통의 불경한 후손들\'이 되며,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이나 \'천사와 군주가 결합된 인물\'로 볼 경우 \'사람의 딸들\'은 말 그대로 \'인간의 딸들\'이 된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들\'을 군주들 혹은 왕족으로 볼 경우 \'사람의 딸들\'은 \'평민의 자녀\'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을 무엇으로 보느냐는 아쉽게도 \'네피림\'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합으로 인해 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땅에 \'있었던\' 존재들이다(창 6:4).12) 다.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한 거인족 \'네피림\'은 단지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한 거인족일 뿐이다. \'당시에\'(in those days)라는 말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즉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할 때, 이미 \'땅\'에 \'있었던\' 존재들이다. 그런데, 네피림이 신체적으로 장대한 \'거인들\'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 13:21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모세의 명을 받아 사십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와서 보고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었다(민 13:32). 물론 그들의 보고처럼 그 땅에 거하는 모든 백성이 다 신장이 장대한 자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 3:11에 언급된 바산 왕 \"옥\"(Og)과 삼상 17:4에 언급된 가드 사람 \"골리앗\"(Goliath) 그리고 삼하 21:16 이하에 언급된 \"이스비브놉\" (Ishbi-Benob, 16절), \"삽\"(Saph, 18절)13),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Lahmi, 19절) 등과 같이 그들 가운데는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정탐꾼들은 아낙 자손14)을 가리켜 네피림의 후손이라고 일컬었는데(민 13:33), 이는 필시 아낙 자손의 장대함이 네피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이는 정탐꾼들이 네피림을 거대한 신장을 가진 존재 즉 \'거인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네피림의 신체적 장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70인역(LXX), 벌겟역(Vulgate), 흠정역(A.V.) 등에서는 네피림을 \'거인들\'(헬, gigantes)로 번역하였다. 한편, \'당시에\'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했을 당시 즉 홍수 이전의 시대를 말한다.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할 \'당시에\' 이미 \'땅\'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의 저자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배경 즉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에 대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네피림의 존재를 언급한 것은 네피림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과 어떠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된다. 네피림과 이들과의 관련성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⑴ 신체적 유사성 : 4절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은 \"깁보림\"이였다. \'깁보림\'은 주로 \'거인\', \'용사\', \'장수\' 등의 의미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베스터만은 \'네피림\'과 \'깁보림\' 둘 다 거인의 기원을 다루는 것으로 취급하였으며 틴들 주석 또한 둘 다 거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70인역(LXX)도 \"깁보림\"을 \'거인들\'(헬, gigantes)로 번역하고 있다. ⑵ 행위 또는 성격의 유사성 : 본 논문 \"Ⅱ. 네피림의 어원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학자들이 네피림을 \'타락한 자들\'로 규정, 이들을 \'압제자\', \'난폭군\', \'훼방자\' 등으로 보고있다.\"고 언급했다. \'깁보림\' 역시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힘세고 강한 영웅이었거나 압제자였을 것이다. ⑶ 적대성 : \'깁보림\'이 \'용사\'요 \'유명한 사람\'으로 불리워진 것은 \'네피림\'을 대항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네피림\'과 \'깁보림\'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Ⅳ. 결론 네피림의 어원을 \'나팔\'로 보는데는 학자들 간에 거의 이견이 없다. 다만 \'나팔\'의 의미를 놓고 다소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나팔\'의 의미가 다양하기 때문이다.15) 그렇기 때문에 \'나팔\'을 \"떨어지다\"(fall)의 의미로 보고 이러한 원어의 뜻에서 유추 해석하여 네피림을 \'하늘로 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네피림을 \'타락한 자들\'로 규정하고 이들을 \'압제자\', \'난폭군\', \'훼방자\' 등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팔\'을 \'떨어지다\'(fall)로 해석한다고 할찌라도 그것이 반드시 \'하늘로 부터 떨어진\'의 의미로만 볼 수는 없으며, 또한 타락한 천사들이 천상에서 떨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다- \'땅\'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한 족속을 이루어 살았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네피림\'의 기원에 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진다 : ⑴ 타락한 천사들 ⑵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들 ⑶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한 거인족. 이 가운데 ⑴항의 경우는 앞에서- 네피림의 어원 -언급한 바와 같이 그 가능성이 희박하며, ⑵항의 경우 역시 그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창 6:4의 문맥상 \'네피림\'이 \'태어난\' 존재들이 아닌 \'있었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⑶항의 경우가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네피림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단지, 이 연구를 통하여 밝힐 수 있는 것은 네피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틴을 정복할 때 듣고 보았던 아낙 자손들의 조상으로서(민 13:33)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한 거인족이라는 사실 뿐이다. 그러나, 네피림이 신체적으로 장대한 \"거인들\"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스라엘의 회의적인 정탐꾼들이 거인들의 존재에 대하여 말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정복을 시도해 보지 못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다(민 13:28, 33). 특히 정탐꾼들은 아낙 자손을 가리켜 네피림의 후손이라고 일컬었는데(민 13:33), 이는 필시 아낙 자손의 장대함이 네피림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이는 정탐꾼들이 네피림을 거대한 신장을 가진 존재 즉 \"거인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 1) Gleason L. Archer,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pp. 79-80와「성서대강해 :창세기(上)」영암저서 편찬위원회 편 (안양: 성결교신학대학교 출판부, 193), p. 117를 보라. 2) 웹(Web) 상에서의 원어[히브리어, 헬라어] 표기가 불가능해 英音으로 표기함. 히브리어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읽음. 3)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모리스(Henry M. Morris)는 \"아내를 삼는지라\"(taking a wife)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결혼을 뜻하는 표현이 아님을 지적한다. Henry M. Morris, The Genesis Record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1), p. 167. 4) 이 용어는 구약 전체를 통틀어 5회(창 6:2, 4 ; 욥 1:6 ; 2:1 ; 38:7) 등장한다. 5) Enoch 6:-10:15.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6) Enoch 6:1-2.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7) 베스터만(C. Westermann)은 이 사건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 4장 2절에서 16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가인의 범죄, 그리고 11장 1절부터 9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바벨에서의 반역 사건들과 함께 죄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한계에 대하여 3장과 4장은 개인적인 반역과 타락을, 6장은 성적 관계를 통하여, 11장은 기술 문명을 통한 반역과 타락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Claus Westermann, Genesis 1-11, trans. John J. Scullion (Minneapolis: Augusburg Publishing House), pp. 366-367. 8) 비록 천사들이 사람의 육신을 쓰고 나타났기는 했지만 이들이 사람과 성적으로 관계할 수는 없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 이유는 천사들이 소돔인들과 상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소돔인들의 음란을 징벌하고 죄악을 심판했다.\"는 것이다. 원용국,「창세기 주석」(서울: 도서출판 세신문화, 1990), p. 149. 9) 여기서 1, 2절의 \'사람들\'에게는 \'불경한 자들의 딸들\'이라는 의미를 부과하고 3절의 \'사람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에게는 \'일반인\'[인류]이라는 식으로 동일한 단어를 상이하게 해석한다면 일관성 없는 해석이 된다. 전계상, \"창세기 6장 1-4절의 주석적 연구\" (신학학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1992), p. 30. 10) 에스린저는 이브의 원죄를 \"... saw ... good ... took ...\"으로 본다. Goddon J. Wenham, Word Biblical Commentary : Genesis 1-15 (Waco: Word Inc., 1987), p. 140. 11) 창 3:6과 삼하 11:2, 4을 영역본으로 비교해 보라. 12)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후손은 \"깁보림\"으로 이들은 \'있었던\' 존재들이 아니라 \'태어난\' 존재들이다. 13) 대상 20:4에는 \'십배\'(Sippai)로 소개되어 있다. 14) 여기서 아낙 자손은 \"대장부들\"로 묘사되어 있는데, \'대장부\'라는 말은 히브리 원문에 \'네피림\'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네피림 후손\'과 \'아낙 자손\'은 동격이 된다. 한편, 이집트의 주문(呪文) 문서(Egyptian Execration Tests)는 약 2,000년 전 팔레스틴에 한 아낙 족속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Mercer Dictionary of the Bible, s. v. \"Giant.\" 15) \'나팔\'이란 동사는 구약성경에서 365회 나타나며, 매우 풍부한 여러가지 의미들을 함축한다.「성서원어대전 : 구약편」이병철 편 (서울: 브니엘 출판사, 1987), \"(히, naphal)\" 항목. 참고문헌 성경 및 경전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King James Version. Korean Revised Hangeul Version.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주석 및 단행본 Archer, Gleason L.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rties.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Brueggemann, Walter.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 Genesis.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Cassuto, U.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Translated by Israel Abrahams. Jerusalem: The Magnes Press, 1978. Davidson, R. The Cambridge Bible Commentary : Genesis 1-1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Morris, Henry M. The Genesis Record.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1. Ross, Allen P. Creation and Blessing.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8. Tuck, Robert. 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 Ⅰ.Ⅱ Peter, Ⅰ. Ⅱ.Ⅲ John, Jude, Rev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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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유대교/ 유대학핸드북(1)/ 2013-01-23
랍비유대교/ 유대학핸드북(1) 유대학핸드북 제3장 목록 3.1. 왜 랍비유대교인가? 3.2. 유대교의 간략한 역사 3.2.1. 고대이스라엘 종교와 초기유대교 3.2.2. 마카비 이후부터 성전 멸망까지 3.2.3. 중세 카라이트와 동유럽 하시딤 3.3. 랍비 유대교 계파 특징 3.3.1. 정통파 3.3.2. 개혁파 3.3.3. 보수파 3.3.4. 재건파 3.3.5. 힐로니, 하레디, 다띠, 마소르티 3.4. 랍비 유대교의 13가지 신앙원리 3.5. 랍비유대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본질 3.6. 사람의 본성 3.6.1. 하나님의 형상 3.6.2. 두 본성 3.7. 마쉬아흐-메시야 3.7.1. 랍비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 3.7.2. 메시야 3.7.3. 언제 메시야가 오시는가? 3.7.4. 메시야는 무엇을 하시는가? 3.7.5. 올람 하 바 - 메시야의 시대 3.7.6. 예수님에 대하여 3.8. 카발라와 유대신비주의 3.8.1. 유대교에 있는 신비주의 3.8.2. 카발라: 잘 못 이해된 교리 3.8.3. 하나의 \'소프\'와 열의 \'세피로트\' 3.9. 회당과 랍비 3.9.1. 회당(시나고그), 슐, 템플 3.9.2. 회당의 기능 3.9.3. 조직 3.9.4. 회당 안의 예전 도구들 3.9.5. 비 유대인의 회당 방문 3.9.6. 템플 3.9.7. 유대 지도자들 3.10. 중요한 랍비들 3.11. 랍비유대교의 경전 3.11.1. 토라 두루마리 3.11.2. 쿠마쉬 3.11.3. 탈무드 3.11.4. 다른 저술들 3.12. 할라카 3.12.1. 할라카가 무엇인가? 3.12.2. 할라카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3.12.3. 유대교의 613개 율법들 3.12.4. 게제이라: 율법의 울타리 3.12.5. 타카나 - 랍비들이 세운 법 3.12.6. 민하그 3.13. 랍비 유대교 예전 3.13.1. 토라 읽기 3.13.2. 파르쉬요트 3.13.3. 특별 파르쉬요트 3.13.4. 기도문(쉬모네에스레이) 3.13.5. 예배의 순서들 3.13.6. 변형들 3.13.7. 시두르 3.13.8. 말해야 할 것과 행동해야 할 것 3.13.9. 기도의 다른 응답들 유대학핸드북 전체목록으로 가기 -------------------------------------------------------------------------------- 3.1. 왜 랍비 유대교인가?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나 장로교 목사가 된 필자는 오늘날 유대교를 그저 ‘유대교’라 부르고 싶지 않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나왔다. 고대 유대교도들 가운데 얼마가 새로운 믿음을 받아 들였고 이 믿음이 여러 경로를 거쳐 기독교로 발전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유대교는 기독교의 모태가 된 유대교와 같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의 유대교는 서구(西歐) 사회에서 그곳의 종교였던 기독교와 애증(愛憎)의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왔다. 아마도 ‘증’ 쪽의 감정이 더 많이 작용을 했음인지 오늘날의 유대교에서는 반(反) 기독교적 사상이 많이 목격되고 있다. 이런 반기독교적 사상은 고대 유대교에서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오늘날의 유대교를 구태여 랍비 유대교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랍비 유대교는 기독교가 구약성경(舊約聖經)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타나크’라고 한다. ‘토라 느비임 베 케투빔’의 머리 글자를 딴 조어(造語)인데 우리 말로 직역하자면 ‘율법과 선자자들과 문학서들’로 된다. 랍비 유대교가 또한 매우 중요시하는 탈무드는 사실상 타나크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미쉬나’에 주석을 붙인 것이다. 이 탈무드의 집대성 시기는 신약성경의 집대성 시기와 비슷하다. 탈무드와 신약성경은 유대교가 랍비 유대교와 기독교로 나뉘어 진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 둘에는 서로 엇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기도 하고 적대적인 내용이 들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는 상호보완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내용도 들어 있다. 탈무드에 실려 있는 반기독교적인 내용을 뒤집어 읽으면 신약 성경이 미처 말하고 있지 못한 부분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탈무드는 신약 성경과 서기 6세기 까지의 기독교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편저자의 견해다. 문제는 아무도 그 가치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랍비 유대교는 타나크를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 받아 들이고 있지만 그 해석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 예수님의 지적대로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많은 율법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랍비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한 후 유대인의 종교 세계에서 독무대를 차지한 바리새파 사람들의 유대교라고 할 수 있다. 랍비 유대교 이외도 다른 유대교 종파들이 많이 존재 하고 있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를 제외하면 다른 유대교 종파의 인구의 수는 극히 미미하다. 참고로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을 우리는 ‘메시아닉 쥬 (Messianic Jew)’라고 하는데 이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의 소수 종파일 따름이다. 랍비 유대교는 오늘날 유대교의 주류(主流)로 우리의 탐구 대상이 된다. 하지만 주류라 해도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편저자에게 그것이 유대교는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유대교를 그저 랍비 유대교라 이름하는 것을 독자들은 십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랍비 유대교임에도 그저 유대교라고 표현한 것은 랍비 유대교 만의 것이 아니거나 혹은 편의로 명칭한 것이므로 혜안을 바랄 뿐이다. 제3장 목록으로 돌아가기 3.2. 유대교의 간략한 역사 3.2.1. 고대 이스라엘 종교와 초기 유대교 타나크, 즉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인들, 즉 아브라함, 모세, 다윗같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 속에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고대 이스라엘 종교는 주전 931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이스라엘을 이루는 열 두 지파들 가운데 열 지파는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북왕국 즉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었고, 나머지 두 지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왕국 즉 유다 왕국을 이루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 앗시리아에 멸망하면서 그 백성들 대부분이 뿔뿔이 흩어 졌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때 잃어 버린 열 지파(the Lost Ten Tribes)를 애석해 하며 그리워 한다.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누구와 혼혈을 이루었는지 하나님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아마도 고대 이스라엘 종교를 곳곳에 심었을 것이다. 이슬람교 사상에 고대 이스라엘 종교 사상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중국 철학에도 그 비슷한 것이 들어 있지 않은가 호기심이 생길 때가 있다. 팔레스틴 지역의 나블루스에는 이른바 사마리아인들이 지금도 무리 지어 살면서 북이스라엘의 종교 전통을 이어 가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나름의 토라 즉 사마리아 오경을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도 한다. 한편, 남왕국 유다의 백성들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독특한 계시 종교를 이루었다. 이 종교를 초기 유대교(Early Judaism)라고 부른다. 이 초기 유대교에서 구약 성경의 첫 다섯 책들인 모세 오경이 집대성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3.2.2. 마카비 이후부터 성전 멸망까지 초기 유대교는 셀뤼키드 헬라인들과 25년 동안 전쟁을 하면서 하누카의 기원(주전 164년)을 이룬 마카비 무리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마카비 전사(戰士)들은 ‘하시딤’이라고 자칭하는 경건한 무리들이었는데 나름의 신앙 수칙과 삶의 방법들을 고수했다. 하시딤은 메시야 신앙에 충만해 있었고 경전에 따라 무력도 불사하는 무리들이었다. 이 하시딤은 오늘날 이스라엘의 신비적 종교인들인 하시딤과는 관계가 없다. 하시딤은 후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가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에게 저항했던 열심당,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 나사렛파(노쯔림), 신비적인 치유파 등이 나타 나서 하시딤과는 별도의 유대교 계파를 이루었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사제 집단이었으며 귀족들이었다.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개인적인 삶은 매우 정치적이었고 헬라 귀족을 동경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글로 기록된 토라’만 인정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토라를 엄격하게 실천했다. 성전과 그곳에서의 희생 제사가 사두개인들의 종교적인 삶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이들은 소멸할 수 밖에 없었다. 바리새파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글로 기록된 토라’ 뿐만 아니라 ‘말로 된 토라’도 주셨다고 주장했다. 말로 된 토라를 두번째 경전이라는 의미에서 ‘미+쉬나’라고 한다. 이들은 두 토라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충분히 훈련 받은 랍비들만 그것을 해석할 수 있고 그에 따른 행동지침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후 70년 로마 군인들이 성전을 파괴하여 유대인의 운명이 풍전등화 처럼 위급하게 되었을 때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유대인들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은 율법 학교(예시바)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는 것 뿐이라고 믿었다. 오늘날의 랍비 유대교는 이 예시바를 통해서 이루어 진 것이다. 에세네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종말을 고대하며 수행하는 신비적인 집단이었다. 초기 기독교는 에세네파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파의 거주지는 고립된 곳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군은 이들을 쉽게 찾아 내서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쿰란 지역이 주전 30년 경에 지진으로 초토화 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쿰란은 당연히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초토화 된 것이다. 쿰란에서 발굴된 고문서들은 주전 150년부터 주후 5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에 따르면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에세네파였거나 적어도 관련을 맺었을 것이다. 열심당은 종교 집단이 아니라 정치적 무력 집단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유대 광야 남쪽에 있는 맛사다에서 전멸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랐던 유대인들을 나사렛파라고 한다. 나사렛파는 핍박을 피해 동부 유럽으로 갔고 그곳을 거쳐 미대륙에 까지 갔다. 이들이 바로 ‘메시아닉 쥬’라고 일컬어 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유대교 종파들 가운데서 지금까지 살아 남은 자들이 ‘랍비 유대교’를 이룬 바리새파와 메시아닉 쥬를 이룬 ‘나사렛파’라고 할 수 있다. 나사렛파는 헬라인들에게 복음 선교의 주도권을 내어 준 이후 지금까지 저들 나름의 길을 걸어 왔다. 메시아닉 쥬를 기독교인들이 전도를 해서 만든 유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이것은 상당한 무지에 속한다. 3.2.3. 중세 카라이트와 동유럽의 하시딤 주후 9세기에 미쉬나의 존재를 강력하게 부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카라이트’라고 한다. 카라아트는 ‘성경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들은 미쉬나와 그 주석인 탈무드를 무시한다. 그러므로 탈무드를 중시하는 랍비 유대교와는 구별 된다. 카라이트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 한다. 이들은 미쉬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감이 서린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랍비들의 해석을 무시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탈무드는 오로지 현자들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책’이다. 카라이트는 안식일에 불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지낸다는 습관으로 유명하다. 1700년대에 동유럽에서 랍비 유대교의 한 분파가 일어났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들은 ‘하시딤’으로 알려져 있다. 마카비 시대의 하시딤과는 관련이 없다. 동유럽의 하시딤은 매우 급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미트나그딤(반대자들)이 많고 그들의 도전을 수시로 받고 있다. 하시딤과 미트나그딤의 주장은 오늘날 유대교 안에서 자유주의적이며 근대적인 유대교를 빚어냈다. 정통파와 자유파도 하시딤의 가르침을 존중한다. 제3장 목록으로 돌아가기 3.3. 랍비 유대교의 계파와 특징 랍비 유대교를 그 성향에 따라 정통파와 보수파와 개혁파로 구분한다. 정통파와 일부 보수파는 전통주의자들로 불리운다. 개혁파와 재건파와 일부 보수파를 자유주의자들 혹은 근대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현재 이스라엘 공화국에서는 정통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신정국가를 꿈꾸며 세속 정치에도 깊이 관여한다. 3.3.1. 정통파 정통파는 많은 그룹들로 형성되어 있다. 근대 정통파는 유대인의 율법인 할라카를 근대 사회에 적용 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정통파 유대인들을 ‘하시딤’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주거 지역이나 복장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해서 독특하게 한다. 이 때문에 하시딤을 울트라 오도독스 즉 초정통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시딤이나 근대주의자들이 아닌 정통파를 예시바 정통파라고 부른다. 정통파는 미쉬나도 ‘글로 된 토라’ 즉 모세 5경 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613개 율법도 토라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며 이 율법은 오로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3.2. 개혁파 이들은 모세오경 즉 토라도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토라에 대한 현대 자유주의적 신학 비평을 받아 들인다. 그리하여 토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편집되었으며 시대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문화적인 윤리에 관심을 갖는다. 3.3.3. 보수파 정통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생겨 났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할라카를 받아들이지만 율법은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 어떤 율법은 채택되고 다른 것은 채택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 성향이 중도적이지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정통파를 따른다. 3.3.4. 재건파 신학적으로는 보수파의 후예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랍비 유대교의 주장을 훌쩍 뛰어 넘는다. 이들은 유대교를 ‘진화하는 종교적 문명’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역사 안에서 행동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부인한다. 그래서 개혁파의 좌파라고 혹독하게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할라카를 지킬 필요가 있으면 지키고 지키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건파는 의외로 많은 랍비들을 배출했고 특별히 미국에 있는 유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3.3.5. 힐로니, 하레디, 다띠, 마소르티 전 세계의 유대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자신들을 ‘힐로니’라고 부른다. ‘세속인’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들도 안식일이나 명절에 촛불을 켜놓고 제한적인 종교 행위를 하고 코셔를 먹는다. 하레디(초정통주의자) 또는 다띠(정통주의자)라고 불리워 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