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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억 기부한 억척 할머니
50억 기부한 억척 할머니 2002-11-29 13:53:19 read : 3383 욕쟁이 할머니, 곰탕집 할머니, 삯바느질 할머니, 젓갈 할머니…. 1977년 충북대에 전 재산을 기부하고 고인이 된 김영례 할머니를 시작으로 최근 가톨릭대에 15억 원을 기부한 김경임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기부 행사에 할머니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억척 할머니’라 불리는 이들은 콩나물 장사, 이불 행상, 잡일 등 가리지 않고 평생 번 돈을 각종 단체나 학교에 적게는 1,000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 억 원에 이르는 재산을 기부했다. 지난 1997년 IMF 한파로 건국 이래 최대 경제 위기라던 그 해에 유독 할머니들의 기부가 많아 세밑에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윤혜성(70세) 권사가 그 해 말에 ‘억척 할머니’ 대열의 주인공이다. 1997년 12월 8일 윤 권사는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평택대학에 토지 1만 1,000평을 기부했다. 시가 50억 원에 상당하는 규모였다. 윤 권사의 모교인 피어슨기념성경학원이 평택대학의 전신이다. “피어슨 선교사의 정신이 흐려지지 않도록 써 주십시오”라는 것이 기부한 동기이다. 평양이 고향인 윤 권사가 단신 월남해 모은 돈으로 산 귀한 재산이다. 장갑 장사에서 미군 빨래까지 “얘기할 것도 없어. 전재산을 내놓은 것도 아닌데….” 억척 할머니들 어느 누구도 ‘나 이만큼 냈어요’하고 얼굴 내보이는 경우가 없듯, 윤 권사도 무엇 드러낼 게 없다며 얼굴을 붉힌다. 젊은 시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터인지라 거동은 좀 불편하지만, 얼굴은 흑백 증명 사진 속의 그때처럼 여전히 곱다. 촬영을 위해 외투를 가지러 들어가는 윤 권사를 따라 안방 옷장 구경에 동행했다. 한눈에 들어온 몇 벌 되지 않는 옷가지들만 봐도 지나온 세월을 짐작하고 남는다. 동시에 윤 권사를 자세히 살펴보니 장신구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는다. 윤 권사는 어려서부터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다.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은 것이 본마음”이라는 그는 의사가 되어 선교 사역에 나서는 게 꿈이었다. 가족들을 떠나 홀홀 단신 남쪽으로 내려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때 손에 쥔 것이라곤 금 두 냥이 전부였다. 열일곱 나이에 집안의 권유로 결혼한 상태였다. 경찰 관계 일을 하던 남편은 먼저 내려와 있었고 나중에 윤 권사가 내려와 함께 살았다. 1949년 윤 권사는 의학 공부가 여의치 않아 월남과 동시에 피어슨기념성경학원에 입학했다. 그것도 잠시, 6·25 발발과 함께 윤 권사의 또 다른 인생 여정이 시작되었다. “전쟁 터졌을 때 가진 거라곤 뜨개실 두 뭉치였어요. 그걸로 시작했지요.” 윤 권사는 갓난 아들을 데리고 혼자 전쟁을 감당해야 했다. 경찰이었던 탓에 남편의 어깨는 윤 권사의 몫이 아니었다. 손에는 실뭉치 둘, 등에는 갓난아기를 덧대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1951년의 일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장갑을 떠서 내다 팔았는데, 겨울철이라 사람들이 너나없이 찾았다. 그 돈으로 다시 실을 사서 장갑 장사에 나섰다. 두 식구의 생계 수단이었다. 좀더 안정적인 일을 찾던 그는 근처 미군 부대에서 할 일을 발견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빨래였다. 추운 겨울 찬물에 언 손을 비비며 산더미 같은 빨래를 해내느라 온몸이 동상에 걸렸다. 손발은 물론이고 코, 어깨 등 성한 데 없이 몸을 부려가며 번 돈이 쌀 다섯 가마였다. 그것이 본격적인 장사 밑천이 되었다. 이번에는 부산이다. 중고 재봉틀을 구입해 구제품으로 아동복을 만들었다. 처음 해본 일에도 꽤 근사하게 만들어졌다. 장갑을 팔 때처럼 반응이 좋아 웬만큼 돈이 모였다. “그 돈으로 금을 샀어요. 안 먹고 안 입고 안 자고 일만 했어요. 한 돈씩 모은 게 열 냥이 되었어요.” 선교와 장학 사업에 관심 많아 거실 한 켠에 가득 쌓인 성경들처럼 힘든 시간들을 혼자 이겨내는 동안 얼마나 하나님께 부르짖었을까. 그러면서도 한 번도 잊지 않는 한 가지는 선교 사역에 대한 꿈이었다. 금 열 냥으로 헌 집을 사서 수리해 팔기 시작해 큰 돈을 모았다. 당시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이 이런 그를 보고 좋은 일에 투자할 것을 제안하였고, 그게 윤 권사가 장학 사업을 생각하게 된 배경이다. 1980년 ‘윤혜성 장학회’를 설립하고 1년에 두 차례씩 학생 10명에게 각기 30만원씩 보조했다. 기독 대학과 신학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어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직접 선별해 후원하였다. 1997년까지 계속된 장학 사역은 현재 형태를 달리해 ‘헤브론 수양관’이라는 실물로 남아 있다. 장학금만 지급하다 보니 안타까운 일이 너무 많아 같은 공간에 살면서 돕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 청소년들의 신앙 훈련을 위한 센터를 건립했다. 하지만 수양관은 현재 그린벨트에 묶여 활용하지도 못하고 몇 년째 윤 권사의 속을 끓이고 있다. "그린벨트가 뭔지도 몰랐어요. 4년 동안 부지를 구입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간신히 결정한 곳인데, 그 땅이 그린벨트라 하더라고. 정부 인가를 받지 못해 건물 다 지어놓고 텅 비어 있어요." 윤 권사가 자신의 토지를 기부한 것이 평택대가 처음은 아니다. 몇몇 교회에도 토지를 기부한 적이 있다. 서울 방초교회도 윤 권사가 기부한 200평 대지 위에 건물을 세울 수 있었다. 1981년 5월의 일이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따라 처음 구입한 땅을 하나님께 드렸다. 처음 드린 그 땅이 방초교회 부지이다. 현재 출석하고 있는 퇴계원 동부교회도 윤 권사가 기부한 땅 위에 건물을 올렸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들의 이해가 크게 작용했다. 지금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 중인데, 첫아들을 병으로 잃고 서른 일곱에 얻은 유일한 피붙이다. “어머니가 고생해서 번 돈이니 어머니 생각대로 하세요”라고 말했다는 아들 내외의 사진이 거실에서 윤 권사를 보고 웃고 있다. 하나님께 돌려드린 것일 뿐 윤 권사의 ‘나눔’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실상은 믿음의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힘겨운 인생을 눈물과 원망이 아닌 열매 주심을 감사해 고백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쓸 부지와 교회 세울 땅 그리고 장학금 조금”이라는 그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린 것뿐이라고 단언한다. 앳된 열일곱에서 이제 일흔이 된 윤혜성 권사. 점심 때가 되었으니 식사하고 가라며 한사코 붙잡아 식탁에 앉힌다. “대접할 게 이것밖에 없어요. 미안해요.” 자장면 그릇을 마주하고 앉아 문득 할머니가 된 윤혜성 권사의 젊은 날을 가늠해 본다. 아들과 함께 먹었을 끼니들, 욕심내지 않고 하나님께 돌렸을 그인지라 자장면 한 그릇에도 고맙기만 하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나눔을 자랑하지 않는다. 일흔의 노 권사가 평생을 통해 배운 천국의 진리를 기자는 ‘거저’ 배운다. 나눔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닌 나눔 자체만으로 있을 뿐이라는 어느 목사님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빛과 소금 글 / 송민희 기자 사진 / 정화영 기자
MK신화 일꾼 유태식 부회장
MK신화 일군 유태식 부회장 2002-03-14 22:00:32 read : 867 돈보다 중요한 것 바로 ‘생명’이다 이영희 기자 ◀유태식 부회장에게 오는 강연요청은 수도없이 많다. 모두들 MK의 기적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진은 두산연수원 강연회에서 일본 교토의 한 거리. 택시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다. 마침 자신이 타려던 MK택시가 다가오기에 손을 흔들었건만 그 택시는 이 사람을 지나쳐 50미터쯤 앞에 있던 목발을 짚고 있던 사람앞에 차를 세우고 그의 목발을 챙기고 부축해서 택시에 태웠다. 이 모습을 보고 먼저 택시를 잡았던 그 사람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윽고 택시기사는 꾸벅 인사하며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다음 택시를 이용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바로 택시를 먼저 잡았던 사람은 이 택시회사의 유태식 부회장이었다. MK는 택시업계 최초로 ‘지체부자유자 우선’승차제도를 실시하였고, 장애자 할인요금까지 시행했다.MK택시에는 ‘장애자 우선’스티커가 차문에 붙어 있다. 일본 최고의 기업 MK 일본의 MK는 세계의 MK이다. 우리의 경주나 부여 같은 일본의 고도 교토에서 열 대의 택시로 1960년에 출범한 작은 택시 회사가 현재는 1천여대의 택시를 비롯 MK석유, MK산업, 시티신용조합 등의 금융회사를 포함한 열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MK그룹으로 성장했다. 이런 외적인 성장뿐 아니라 일본 대학생 취업선호도 1위의 기업으로 조사되어 대학을 졸업한 학사 출신들이 MK에 들어오려고 시험을 치른다. “MK는 택시회사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대학생들이 몰려듭니다. 한 번은 40명을 뽑는데 8천명이 지원을 했습니다. 200대 1의 경쟁을 뚫고 MK의 택시운전기사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로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의 MK가 있기까지 그 중심에서 아이디어 뱅크와 씽크뱅크 역할을 유태식 부회장의 말이다. 일본 내에서도 최고의 기업이라는 평가를 듣는 MK는 바로 한국인이 세운 기업이다. MK는 유봉식 회장과 유태식 부회장의 불굴의 추진력과 그누구도 생각지 못한 독특한 아이디어로 이제는 일본내에서 최고의 기업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일본과 한국, 그리고 세계에서 앞다투어 MK의 경영전략과 마인드를 배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한다. 그때마다 유태식 부회장은 수많은 강연을 하고 특히 한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기업과 단체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한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기업뿐 아니라 수많은 교회들을 다니며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는 “나의 전 생애는 MK의 일원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MK를 빼버리면 내 삶은 허물어지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MK와 함께 살아왔습니다. 내가 MK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자신이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감격으로 고백하는 것은 단지 MK의 일원으로만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의 전 생애는 어린시절 영접한 하나님과 함께한 삶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을 늘 자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빼버리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고백한다. MK가 철저한 고객서비스 정신을 적용하고 택시운전기사들을 끊임없이 교육하고 그들의 지위를 스스로 높여주고 사원들의 집을 지어주고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디자이너 하나에 모리 씨가 디자인한 제복을 입혔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었다. 그리고 장애우를 최우선으로 태우고 그들에게 요금할인혜택을 베풀었을 때도 온갖 비방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일본의 시민들은 MK를 인정하며 밀어주었고 결국 비웃던 사람들도 어느덧 MK의 경영마인드를 앞다투어 배우려고 줄을 서게 됐다. MK의 이러한 이면에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삶속에 그대로 실천하려는 유태식 부회장의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이 있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스무 살에 현해탄 바다에 빠져 죽음직전까지 갔었고 몇 년 전엔 심장병으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번 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나는 여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여분의 수명을 제게 주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바르게 사는 삶의 자세를 전하라고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유태식 부회장의 말이다. ▲유 부회장이 섬기고 있는 경도교회 추수감사절예배 때 찬양드리는 유태식 장로(앞줄 우측 두번째). 그의 사업과 신앙얘기는 책으로 출판되었다(‘돈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쿰란출판사). 두 번의 죽을 고비 함께 하신 하나님 한 번은 그의 형님인 유봉식 회장이 한 임원회에서 “내가 유태식에게 회사를 완전히 맡기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가 회사보다 교회를 앞세우기 때문이다. 유태식은 MK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하라고 하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선택할 놈이다”라고 까지 말할 정도로 그의 신앙은 남다르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어린시절 그는 온갖 핍박속에서도 혼자서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어릴 때 교회에서 야외예배를 가면 가족들끼리 앉아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고 한없이 부러워했던 그는 울면서 “우리 가족도 예수믿는 가정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 그 기도의 응답인지 이제는 대부분의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제가 계속 기도해오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MK회장인 우리 형님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형님은 추진력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일을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은 전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번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슬렁슬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형님같은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면 신앙생활도 확실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MK경영철학 속에 기독교 정신은 더욱 깊숙히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지독히도 가난해 수업료를 내지 못해 교실에서 내쫓기기 일쑤였고 대학에 합격하고도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을 때도 그가 소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 때문이었다. 신앙양심을 지키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가려다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도 다른 밀항자들은 경찰이 자리를 비운사이 모두 도망갔는데 자신을 붙잡았던 경찰관이 곤란을 당할까봐 다시 되돌아왔던 그였다.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은 바로 신앙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가 일본행을 결심한 것은 일본에 가서 돈을 번 사람들이 그가 살던 남해 쪽에 꽤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형이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일본땅을 밟았던 그는 도착하자마자 수용소에서 4개월을 보내야 했고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가는 배에서 뛰어내려 하마터면 현해탄에서 스무살의 창창한 나이에 생을 마감할 뻔도 했다. 그의 입술에선 생명을 건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왔고 결국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그는 “내가 세계의 중심이다라고 외치는 젊은이들의 당당한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 나는 자기 일에 자신만만하고 의욕이 넘치는 젊은이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그런 자신감, 그런 당당함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과 당당함이 공익과 공동선에 기초하지 않을 때 그것은 오만이 됩니다. 이기주의, 개인주의는 기업의 이윤을 내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자기만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 이타적 정신이 필요합니다. 같이 더불어 잘살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 또 나와 상대방이 함께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 그 기업과 개인은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강조한다. MK택시는 일본 사람들이 서로 타려고 하는 택시가 되었다. MK의 친절서비스, MK사원들을 위한 주택보급, MK가 지체부자유자를 우선으로 태우고 요금을 할인했을 때 일본의 시민들은 이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MK가 자기들만 잘 살겠다고 작정했다면 이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MK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저희 어머니의 말없는 교훈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남에게 좋은 것을 주어야 나에게 좋은 것이 돌아온다는 평범한 그러나 매우 소중한 진리를 우리가 어릴 때 밥상에서부터 가르쳐 주셨습니다”라고 유 부회장은 회고한다. 일년이면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는 그는 “내 건강의 비결은 운동이나 보약이 아니라 강연이고 간증입니다. 이런 체질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여분의 생명으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사양하지 않고 내가 받은 은혜를 간증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명이지만 또한 나의 기쁨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한다. 신앙계
MK유봉식 회장의 기독교적 경영론
MK유봉식 회장의 기독교적 경영론 2002-04-23 22:05:16 read : 966 일본 MK주식회사는 1960년대 초 교토(京都)에서 택시회사로 출발하였다. MK택시를 처음 이용하는 승객은 깔끔한 제복에 모자를 쓴 운전기사가 “고맙습니다, MK의 OO입니다”하며 공손히 절하는 광경에 놀란다. 승차 후 “어디까지 가십니까? OO까지 가시는군요”라고 목적지를 복창하는 친절한 기사의 태도에 곧 안도감과 신뢰감을 갖게 된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기사는 운전석에서 내려 손수 차문을 열어 주며 “고맙습니다. 잊으신 건 없으십니까?”하고 정중히 작별 인사를 한다. 이때 비라도 내리면 우산을 바쳐 주며 배웅한다. 이것이 1976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인사하지 않으면 요금을 받지 않는’ MK 운동이다. 한마디로 MK는 택시 그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이다. 오늘날 1,300여 대의 차량과 3,000여 명의 종업원 그리고 7개 계열사를 거느린 MK주식회사를 창업하고 일본 굴지의 회사로 성장시킨 경영자는 재일동포 유봉식 회장이다. 근무 태만 사원 가정 방문 유 회장은 1928년 6월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43년 15세 때 당시 일본에 있는 형만 믿고 무작정 교토로 건너왔다. 그는 밥벌이를 위해 물장수 숙부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린 나이에 고된 노동을 마다 않고 숱한 고생을 하면서 교토의 리츠메이칸(立命館)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리츠메이칸대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30대 초반에는 작은 석유회사를 25개 주유소를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시킨 경험도 갖고 있다. 유봉식 회장이 택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0년 택시 10대로 회사를 운영하면서부터이다. 엄선한 24명의 운전기사들을 고용하였지만 결근·지각·조퇴가 다반사여서 택시가 100% 가동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기사들에게 목이 아프도록 당부하고 교육을 실시하였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유 회장은 기사들의 근무 태만 원인을 밝히기 위해 일일이 사원들의 가정을 방문하였다. 그 결과 대다수 기사들의 소득과 주거 환경이 최악의 상태인 것을 알게 되었다. 단칸방에서 부부와 아이들 심지어 부모를 모시는 처절한 광경도 목격했다. 택시기사는 근무가 없는 날에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지만, 동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인근 공장의 소음 등으로 도저히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사들이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다시 운전대를 잡다 보니 불친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 회장은 파격적으로 사원을 위한 주택 건설을 결심하고 그동안 저축해 두었던 자금을 투자하였다. 그 결과로 기사들의 결근·지각·조퇴가 현저히 감소하였으며 대 고객 서비스는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사원주택 건설 사업은 ‘1사원 1주택 갖기 운동’으로 정착하였다. 유봉식 회장의 획기적 경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근로자들에게 이익 배당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노사 각 5명씩으로 구성된 경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익의 30%만 회사가 갖고 나머지 70%를 근로자들에게 배분키로 하였다. 이 모임을 통해 회사 경리 장부를 공개하게 되었고 노사 화합의 한마당으로 삼았다. 이러한 관리 사원 제도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 1969년 ‘MK시스템’으로 당시 7만 엔 수준이던 택시기사의 임금을 12만 엔으로 끌어올린 획기적인 제도였다. 경쟁사들은 MK가 고임금 지급으로 6개월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교토는 물론 오사카 등 원근 각지 운전기사들이 MK에 입사하려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등 인기가 치솟았고 승객들의 만족도는 현저히 증가하였다. 유 회장의 독특한 경영으로 MK택시는 차량 보유 대수에서 20년 동안 100배 가까이 증가하는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고객 지상주의 경영 유봉식 회장은 ‘현장에 파고드는 경영’으로도 유명하다. 추운 겨울날 맞교대 시간에 직원 휴게실에서 기사들에게 손수 커피 물을 따라주기도 한다. 교토의 겨울 날씨는 매섭다. 택시기사가 경영자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유 회장은 택시를 시민에게 환원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먼저 도시 교통에서 그 존재가 무시되고 있는 신체 장애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MK 모든 사원들에게 휠체어 취급법을 교육시키고 차체에 ‘신체 장애인 우선’이라는 커다란 스티커를 붙였다. 그리고 장애인들에게 우선 승차권을 배부하였다. MK택시가 첫 시도한 이 운동은 일본 전국으로 확산되어 시 직영 버스, 사설 철도, 국철에도 장애인 우선 좌석이 따로 마련되었고 각 지방의 택시들도 장애인 우선 태워 주기를 실시하였다. 이 운동은 신체 장애인에게 요금의 10%를 할인해 주는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72년 유 회장은 ‘택시를 시민에게 환원하는 운동’ 일환으로 심야에 응급환자와 산모를 위한 긴급 차량을 배차하였다. MK는 긴급 수송에 대비해 시내 심야 승차장을 마련하고 타 회사 택시가 운행하지 않는 새벽 2시부터 6시까지 대기하여 요청 시 지체 없이 달려가도록 하였다. 모든 직원이 적십자사에서 실시하는 강습을 받고 구급 요원 자격증을 획득하도록 유도하였다. 1978년부터 차내에 구급 약품을 비치하고 응급 처치하는 구급 택시를 발족시켜 시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유 회장의 고객 지상주의 경영은 일본 운수성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1983년 운수성이 택시 요금 인상을 통보하자, 이에 불복하여 요금 인하 신청서를 냈다. 유 회장의 주장은 경영 개선 노력으로 요금을 인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요금 인하 신청은 운수성에 의해 기각되었다. MK택시는 2년 동안 법정 투쟁을 벌인 끝에 1985년 오사카 지방재판소로부터 전면 승소 판결을 받아내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일본 소비자 운동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 판결로 인정받는 MK택시의 승소는 25년 동안 유 회장과 MK가 축적한 고객 만족 경영의 결실이었다. 인간 평등의 경영 철학 MK그룹 유봉식 회장의 경영 철학은 사훈에 그대로 녹아 있다. ‘운전기사란 소모품에 불과하다. 걸레처럼 쓰다가 버리고 또 새 것으로 바꾸면 된다. 운전기사는 얼마든지 있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하던 시절에 유 회장은 ‘운전기사는 사원이기에 앞서 한 인간이며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대학 법학부 재학시절 스에카와 교수에게 배운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며 무산자의 노동이야말로 새로운 가치를 낳는 원천’이라는 사상은 유 회장의 평생 가치관이었고 경영자가 되어 이를 확고히 다졌다. 유봉식 회장의 경영 철학은 이러한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신 말씀처럼 MK의 경영철학과 실천에는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의 사원 그리고 고객에게 최선을 다해 고객을 돕는 인간 사랑과 존중의 정신이 배어 있다. 성경적인 가르침에 부합하는 경영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MK그룹은 보여 주고 있다. 테마 정보 MK 사훈 ‘우리들의 신념’ • 우리는 노동이 가장 신성함을 믿는다. • 우리는 회사와 더불어 있음을 믿는다. • 우리의 책무는 승객을 위하는 일임을 믿는다. • 우리는 사회에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우리는 건전하게 이익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 우리는 학습에 전념하여 인격 완성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빛과소금/ 김성국 / 이화여대
'꿈의 축제' 같은 비전을 ...
'꿈의 축제' 같은 비전을 ... 2002-12-04 01:27:04 read : 4613 ▲꿈의 축제 교회 담임 이윤호 목사@이윤호 목사 제공 20여년간의 외국 생활 후 최근 한국에 영구 귀국하여 서울 송파동에 '꿈의 축제 교회'를 개척한 이윤호 목사(51)와 이메일을 통한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서강대 네비게이토 출신의 이 목사는 미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하면서, 치유와 영적전쟁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와 챨스 크래프트 박사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미 WTF(World Task Force) 선교회를 창립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근 수년간 국내외적으로 영적 치유, 회복,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강조하는 치유 세미나를 진행하며 활발한 치유 사역 활동을 전개해왔다. 현재 기독교치유상담원 국제 대표.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먼저 해외에서 그동안 귀한 사역을 담당해오시다 최근 한국에 영구 귀국하신 목사님과 인터뷰를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귀한 인터뷰 기회를 마련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랫동안의 해외 사역 후 최근 한국에 영구 귀국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사역 현장을 한국으로 전환하신 이유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제가 약 20년간의 미국 유학 및 인도네시아 선교사역을 포함한 해외사역 후 국내사역으로 사역지를 전환하게 된 데는 크게 2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1) 많은 외국사람들이 '코리언 드림'을 찾아 한국에 옵니다. 이는 한국사람들을 포함한 세계 수많은 나라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사회에 대한 꿈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국민 10명중 4명이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민을 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사는 사람들과 대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이 두 종류라고 합니다. 2) 개인적 이유인데, 제가 20년 전 한국을 떠날 당시, 인도네시아 선교사 생활을 포함한 해외사역을 최소한 10년 한 후에 다시 고국에 돌아서 목회를 하며 고국에 무언가를 기여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최근 개척하신 '꿈의 축제 교회'는 교회명이 주는 신선하고 활달한 느낌 만큼이나 신선한 목사님의 교회 비전을 담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꿈의 축제 교회'의 사역 방향 및 비전에 대해서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꿈의 축제' 교회라는 이름은 사실상 좀 특이하고 신선한 이름입니다. 제 은사이신 미국 풀러신학교의 와그너박사가 제시하신 '신사도적 교회(New Apostolic Church)'에 걸맞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교회의 영어 이름은 "Dream Celebration"인데 한국교회로선 최초의 이름이며, 웹싸이트를 들어가 보아도 아직까지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이름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저희 교회는 비전과 사명지향적 새로운 패러다임 교회입니다. 21세기는 선교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존 교회의 목회철학 및 방법의 대변신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저희 교회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성경이 가는 대로,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신세대를 전도하고 훈련하는 미래지향적 교회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이름도 신세대가 좋아하는 이름으로 지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또한 말씀사역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노선에서 성령을 환영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하는 3중적 전인사역을 강조하는 균형적 교회가 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한국을 변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가치관으로 형성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꿈을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앞으로 20년내에 저희의 목회철학에 동조하는 천개 이상의 교회를 한국에서 개척하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긍극적으로는 저희 교회 사역이 한국 국민들이 한국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하는 살맛 나는 한국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고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 근무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위한 축복 통로로 사용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신약의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치유사건이 42회나 나타나 있을 정도로 치유 사역은 사복음서 전체의 1/5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치유 사역이 성경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치유 사역에 대한 반감 내지는 의심의 눈초리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교치유상담원 원장으로 활동해오셨으며, 세계 각국에서 치유 및 영적전쟁사역을 전문적으로 감당해오신 경험을 살려 치유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 및 신앙적인 효용성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어떤 분이 "현재 교회에서 하는 사역 중에는 성경에 없는 것도 많고, 또한 성경에 확실히 언급된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교회에서 하지 않는 사역도 많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치유사역이야말로 후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치유사역에 대한 성서적 기초는 확고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치유자로 소개하지 않았습니까?(출 15:26). 예수님 역시 자신의 공생애 사역을 '치유하고 자유케하는 사역'이라고 확신하셨고(눅 4:16-18), 기자님께서 언급하신대로 실제로 치유사역은 사복음서의 1/5을 차지할 정도로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마 4:23, 8:16,17; 9: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역은 교회 사역 및 신자들의 사역 중 가장 소홀히 취급받고있는 사역이며, 심지어 부정적인 반응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에 대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1) 치유사역의 신학 정립; 2) 치유사역의 올바른 실천; 3) 전인적인 치유사역의 필요성, 즉, 몸, 혼, 영의 종합적인 치유가 그것입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병과 의학의 한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한 치유사역은 시대적 요청입니다. 또한, 저희 교회는 치유사역의 현장이 치유은사가 있는 소수의 치유 사역자들이나 기도원이 아닌 지역교회가 되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이는, 지역 교회안에 있는 치유사역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사랑과 돌봄과 능력이 있는 균형 잡힌 사역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유 및 영적 전쟁 사역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게 된 개인적인 동기가 궁금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나누어주시겠습니까? -제가 선교사 후보생으로써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하면서(1986-1996), 특히 치유와 영적전쟁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피터 와그너박사와 챨스 크래프트 박사의 영향을 통해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저는 풀러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전까지는 치유 및 영적전쟁에 정말 무지했고, 심지어 이에 대해 부정적 편견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교사로인도네시아에서 사역하면서 효과적 복음전파 및 사회개혁을 위해서는 세 가지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3중 복음은, '듣는 복음'과 더불어 능력 과시를 통한 '보는 복음', 그리고 이웃 및 사회에 대한 봉사를 통한 '느끼는 복음'을 뜻합니다. ▶21일부터 24일까지 꿈의 축제 교회에서 '능력과 말씀의 삶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이번 세미나를 간략히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11월 21일부터 24일의 '제 26차 성령, 치유, 영성 세미나'는 지난 8년 동안(1995-2002) 저희 세미나를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무료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전술한 바와 같이 해외에서 약 20년간 사역하다가 사역지를 한국으로 전환하면서, 다양한 사역을 감당할 모판이 될 "꿈의 축제'교회 탄생을 감사하며 축복하는 마음으로 이번 세미나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승리하라"로서 신자들이 꼭 승리해야 할 1) 물질(돈); 2) 성; 3) 파워(영적권세, 권력 및 직위)의 세 가지 영적 전쟁의 주요 영역을 다루게 됩니다. 또한 이번 세미나에서는 다른 기존의 영성집회와 달리, 강사를 포함한 전문 사역자들이 상담, 치유기도, 방언통언, 예언사역등 차별화된 개인사역을 할 예정입니다. 김영빈 기자 ybkim@chtoday.co.kr
‘베데스다예수마을’ 송명섭, 이뵈뵈목사 부부
‘베데스다예수마을’ 송명섭, 이뵈뵈목사 부부 2002-07-04 11:10:28 read : 1064 장애인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예수의 사랑의 삶을 새롭게 깨우쳐 병든 영혼이 치료되고 정신장애인들이 사회로 복귀하는 역사 나타나 지체장애인과 치매노인 그리고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다정한 벗이 되고자 충남 연산면에 사회복지법인‘베데스다예수마을’를 설립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전하고 있는 목회자 부부가 있어 화제다. 특히 이들 부부, 원목 송명섭목사와 이뵈뵈원장은 공부를 해야하는 학생들에게는 학교를 보내줄 뿐만 아니라 예수마을에서 치유받아 새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목회에 소명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학 졸업후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있어 각박한 현실 속에서 생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예수마을 출신중에서 두 부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가 4명이나 된다. 예수마을 산하에는 기도원을 비롯 어린이 집, 의원, 사랑의 집, 소망의 집 등이 있으며 최근 새 성전을 마련하고 오는 7월 8일 새 성전 입당예배를 드리는 한편 순차적으로 새 성전마련 기념 축복성회를 개최한다. 매월 마지막주 김봉일목사가 이끄는 계시록성회를 비롯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김순보목사를 포함해 조황호목사, 진순천목사, 임성주목사, 조예환목사, 최승일목사, 박재열목사, 최겸손목사, 강정환목사, 송태권목사, 권우준목사 등이 강사로 나서 동 성회를 인도한다. 새 성전 입당과 관련해 송명섭목사는 “예수의 사랑 위에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동 마을을 세운지가 벌써 7년이 되었다”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3년전부터 기도로 준비하였던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 입당예배에 초대한다”고 말했다. 멀리 논산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동 마을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스러운 시골의 풍경을 갖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예수의 사랑이 없이는 한 걸음도 걸어 갈 수 없는 삶의 현장임을 알게 된다. 기도로 병든 이들이 치료되는 역사가 나타나고, 이름뿐인 교인이 변화되어 사명자로 변하고 정신장애인들이 사회로 복귀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그야말로 치유와 새로운 삶의 희열로 가득찬 곳이다. 이뵈뵈목사는 신유의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치유사역을 감당해 오고 있다. 육체적인 나약함과 경제적인 극심한 고통을 안고 방황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와 회복을 체험하고 난 뒤, ‘나 같은 사람 만나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나 같은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 터 위에 1995년부터 사랑과 기도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이뵈뵈목사. 예수님을 만난지 6개월만에 은사체험을 하고 1년 만에 중환자들을 섬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으로 함께해 주셨다고 고백하는 이목사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빈손으로 이곳에 와서 하나님께 참으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감사하는 마음으로 썩어지는 밀알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두 부부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고 사실 그렇게 살아왔다. 이들 부부의 사랑의 돌봄이 널리 소문이 나 있기 때문이다. 희생을 기뻐하고 나눠주기를 즐겨하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예수마을을 섬기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사랑의 동산을 일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두 부부의 앞으로의 비전은 우선 자라나는 2세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바르게 양육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첩경이라는 사명감으로 영유아 보육시설에서부터 대안학교까지 계획하고 있으며 하나하나 가시적인 열매가 나타나고 있다. 이미 김제에 대안학교를 위한 부지 3천 5백평을 확보해 놓은 상태다. 앞으로 은퇴목사들을 위한 안식처도 준비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한 송명섭목사는 “일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한 목회자들이 말년에 매우 어렵게 사는 경우를 보아왔다”며 “이들이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서 사역자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확장되어지고 있는 곳, 예수마을의 이름다운 사역이 있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고 또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명자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희생적인 사랑에 다시 눈뜨게 됐다는 이들 부부의 고백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병득부장 (1658호 2002. 6. 30)
“나는 고물이라오” 은진교회 고물목사 전용열
“나는 고물이라오” 은진교회 고물목사 전용열 2003-03-14 02:06:12 read : 6881 "고물(故物) : 1. 고물(古物) 2. ‘오래된 물건이나 사람’을 홀하게 이르는 말.” 본인을 기꺼이 ‘고물’이라 칭하는 이 있으니 그가 바로 전용열(43) 목사다. 스스로를 홀하게 이르는 닉네임에 무언가 심오한 뜻풀이를 기대할 만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고물장수가 아르바이트라서”였다. 요즘 그는 낮 동안 안산 어디께 예배당 공사 현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느라, 기자는 늦은 저녁 무렵에야 그를 독대할 수 있었다. “정리를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엉망이네요.” 두 명이 앉으면 꽉 차는 그의 ‘서재’는, 미안한 말이지만 정말 정돈이 덜 돼 보였다. 아, 그 전에, 그의 집을 들어설 때 문 곁의 요강이며 올망졸망 세 아이, 남루한 살림살이를 곁눈질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순간 마음을 붙들어 맸음을 고백한다. 기자가 혹 식사를 걸렀을까 기다리다 혼자 요기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파조의 이야기를 잠시 떠올리다 걷었음도 함께. 사이버 전사 전용열 목사의 글은 ‘호전적’이다. 까페(http://cafe.daum.net/nagne) 운영자인 그는 설교문이나 칼럼 등을 통해 세상과 기존교회와 대담히 맞장뜨는 사람이다. 정제되고 박학하고 세련된 언어로 말하지는 않지만, 통렬하게 비틀고 꼬집고 일침을 가한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어라, 한국교회의 환부를 나름의 배짱과 시각으로 지지고 있는 중이다. 글을 통해 먼저 만난 그의 첫인상이다. 좀 과한 게 아닌가, 용감하긴 한데 독불장군이겠군 싶었다. 뭐, 직접 만나 느낀 바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에게는 분명 당당히 유아독존하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함부로 정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형제’라는 의식이 있다면 마냥 좋은 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칭찬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원하는 걸 알죠. 그래도 기존 기독교와 목사님들에 대해 공박하는 것 때문에 친구가 없이 외롭더라도 나는 내 길을 갈 겁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게 좋아서 하나님도 나를 인정할 거라 착각하는 건 아니냐, 잘 되길 바라며 ‘나’를 중심한 복 구하기가 진정 ‘믿음’이냐, 덩치 커지고 번창하는 교회가 성공의 본보기냐…. 한국교회를 대표해 꼼짝없이 앉아서 걸쭉한 훈계 한 마당을 다 들었다. 새삼 그런 얘기를 왜 하냐 싶지만, 살펴보면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어느 새 우리가 말하기 잊어버린, 포기해버린 내용들이다. 먹물 근성과 매너리즘으로 기름기 가득한 머리 속에서 이미 옛이야기처럼 슬그머니 놓아버린 것들. 그런 우리에게 그는 쓴소리 외치는 악역(?)을 자처하고 있다. 달콤한 독소가 아닌, 투박하고 쓰지만 생명이 있는 생수로 세상의 나그네(nagne:까페 이름)들을 쉬었다 가게 한다. ◇은진교회의 모토. 그가 식사하는 사이 파파라치처럼 몰래 방안을 찍을까도 했지만, 이 액자 글귀에 카메라가 머물렀다. 은진교회 이야기 “은진교회는 예배당이 없습니다. … 허리 아픈 마나님은 (제가 만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힘이 들면 드러눕구요, 큰딸 슬기는 예배하는 동안 두 동생 관리하구요, 저는 의자에 앉아서 주보 순서대로 예배를 인도합니다. … 일주일에 예배 한 번 하는데도 온 식구들이 긴장을 하고, 눈치를 보고, 앉았다 누웠다 하는 처와, 주인이 불교 신자라 너무 크게 하지 말라는 부탁으로 조용조용히 찬송을 부르며 예배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 빼고는 어떤 예배당에서 하는 예배나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 주님만 주인인 교회로, 모이고 흩어지고 자랑하는 주님의 교회를 사모합시다.” 그의 까페에 있는 ‘은진교회 예배 엿보기’라는 글 중 한 부분이다. 600명 정도의 까페 회원에 비한다면 다섯 식구가 집에서 드리는 예배는 언뜻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95년에 개척을 시작했지만 IMF즈음 98년에 예배당을 닫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은진교회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그다. 그리고 다른 방식의 목회를 이어간다.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가정을 지키되 목사로서의 직분도 충실히 완수하기 위해 남다른 땀을 흘리며 산다. 비관적으로 몰고갈 수도 있을 상황을 매번 뛰어넘으며 ‘노동’의 신성함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매일 밤마다 너댓 시간 고물을 주운 후, 까페에 글을 올리는 일이 중요 일과. 현실적으로 번듯한 예배당을 유지할 상황도 아니고 사람들과 금새 친해지는 성격도 아니라 고민하던 중, 상대 체면을 차리지 않으며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게 ‘인터넷’이었다. “믿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가 만났고, 만나가는 하나님을 알리는 일에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양보가 없는 하나님’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내 쪽에서 마음대로 해석할 수 없죠. 사람들은 싫어하겠지만 인간의 ‘죄성(罪性)’을 계속 일깨우는 게 제 할 일입니다.” ◇관악산 등반 까페의 운영자이기도 한 전 목사. 산을 통해 자연의 기운을 마시는 건 그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우금녀 사모와 함께 관악산에 올라. 고물더미 위에 피는 십자가 따로 시간 내 기도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가 굳이 ‘전도’라 말하지 않고 그냥 자기 기반에서 ‘살아가라’고 말하듯, 시간과 장소를 가려 무릎꿇지 않는다. 사실 그럴 여유가 없기도 하다. 리어카 끌고 밤새 걸어다니는 거리가 바로 그의 기도처다. 시간도 밤이라 별별 상황과 만난다. 도둑 취급당하고 시비도 생기는 가운데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은혜를 베푸신단다. 산을 좋아해 홀로 산을 오르며 기도하는 시간 또한 귀중하다. 과거에 안 해본 일이 없단다. 고구마 장사, 양복점, 개 사육, 목수, 땅꾼…. 돈 버는 재주가 없다는 그는 수많은 직업을 거쳐 고물장수에 이르면서 굳은살을 키워왔다. 예전엔 돈을 벌기 위해, 신학생일 때는 학비를 마련하려고, 개척하고는 예배당 유지비로. 자신이 일하지 않을 때는 아내가 고생해야 했고 그 때문에 지금은 허리를 못 쓰는 아내에게 미안해 한다. 목사라고 믿음으로 앉아만 있을 수 없다며 팔 걷어 부치고 현장에 나선 건 그의 적극적 선택이었다. 나름의 목회를 이어가며 동시에 가정을 놓치지 않는 길. ◇계속 리어카를 끌고 다니다 최근에 구입한 트럭. 은진교회를 지탱하는 중요 역할을 담당한다. 고물을 줍는 건 쓰레기 더미에서 더 사용할 만한 물건을 찾는 일이란다. 고물로 생계유지하는 이들의 힘든 형편을 헤아리는 것도 그의 몫이다. 어렵게 사는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장차 안정되게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고 안착할 주거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다. 또한 제소자들이 출소해서 정착하지 못할 때 스스로 살 힘을 얻어 독립할 수 있는 공간이기 위함이다. 그가 운영하는 또 다른 까페 ‘사랑나누기’를 통해 모아지는 회비는 그 첫걸음이 된다. 우선 소년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을 위한 도움을 지속하는데, 일회적으로 그치면 안 된다 한다. 십자가 내건 예배당은 없지만 인터넷을 매개로 사람들과 만나면서 계속 꿈을 ‘도모’하는 중이다. 없는 이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삶의 현장에서 도울 지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이.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 ‘십자가’, ‘복음’을 외치는 미련퉁이 그를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개척교회 목사’ 그 특별하고 고된 족속. 더구나 전 목사 계통의 고집 있는 부류들. 결기 있게 세상과 맞부딪치는 본인의 수고뿐만 아니라, 그 아내와 아이들과 평균 이하의 생활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목사 자신의 고초와 사모의 눈물, 곧 사춘기를 맞을 아이들. 그네들에게 감상적으로 마음을 한껏 건네고 슬퍼할까도 했지만, 그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마음을 여미며 짐짓 씩씩함을 표했다. 굳은살과 근육과 탄 얼굴로 나서는 세상에 그의 길이 있다. “주어진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을 알기 소원”하는 그에게 열리는 하늘이 있다. 멍투성이 몸과 마음이 마침내 위로받고 보듬어질 하늘의 품이 있기에, 현재의 자기 몸놀림에 확신을 갖고 박차를 가한다. 고물을 줍고 글을 쓰는 목사. 인생은 어차피 고물 아니냐 한다. 늙어가는 과정이라고, 오래될수록 좋은 게 아니냐고. 정미현 기자 papaya@cnews.or.kr
개혁을 위한 작은 싸움
개혁을 위한 작은 싸움 2002-06-01 21:22:46 read : 1167 감리교 개혁을 위한 작은 싸움 난정교회 이필완 목사 김홍도 목사로 인해 다시 한 번 감리교단이 시끄러워질 것 같다. 교회헌금의 유용, 교회세습 문제, 이단신학자 축출 등으로 유명세를 치른 김홍도 목사. 최근 간통에 따른 위증죄 등으로 700만 원의 실형을 선고받았던 그를 감리교단법에 의거, 징계하자는 내용의 고소장이 작성된 것이다. 감리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을 중심으로 132명(1차고소인 및 이필완 목사 포함)이 고소건에 실명으로 동의하였고, 현재 서울연회에 접수한 상태다. 5월 8일 ‘급보! 김홍도 목사 고소건으로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시작으로 인터넷을 통한 실명 동의를 받기 시작했고, 13일까지 총 128명이 동의함으로 마무리됐다. 처음에 전 금란교회 장로였던 곽노흥 씨를 비롯한 두 사람이 청원하였던 이 고소건은 “고소인이 너무 적어 처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서울연회 감독으로부터 2차례나 반송을 당했고, 이에 많은 목회자들로부터 동의를 얻어 재고소를 추진하게 됐다. 인터넷 고소를 주도한 이필완(48·난정교회) 목사는 “전체 감리교 목회자에 비한다면 적은 숫자일지 모르지만, 130여 명이라는 많은 목회자들이 실명으로 고소에 동참해 준 것은 생각 이상으로 큰 파장이었다. 그 만큼 김 목사로 인해 상처받았던 목회자가 많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감리교단에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로서 실명으로 이번 고소건을 주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한 계기는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김홍도 목사의 문제를 지켜보면서 많은 상처를 받았고, 큰 문제라고는 생각했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보이지 않게 묵묵히 하나님을 섬기는 많은 목회자들이 가슴 아팠을 것이고 분노했을 거다. 교회 세습, 간통, 이단 시비 등 끊임없이 교단 내에 문제를 일으켜왔고 열심히 목회하고 신학하는 사람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변선환, 홍정수 교수를 종교재판으로 교단에서 쫓아냈고 최근 박익수, 김득중 교수도 이단으로 몰고 있다. 김 목사는 교단 내의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 또 간통 문제로 700만 원의 벌금형까지 받은 김 목사는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의심받을 만하다. 따라서 교단법으로 징계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던 중 몇몇의 장로, 목사가 낸 고소장이 ‘고소인이 적다는 이유’로 반려되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러면 많은 목회자들이 함께 하면 될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감리교법에 따르면 목사가 위증죄 등으로 일반법정에서 벌금형이 확정되면 목사면직 사유에 해당한다. 따라서 위증과 업무상 배임 등으로 7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은 사실은 김 목사를 징계할 사유가 충분하다. 그래서 감리교의 한 목회자로서 함께하자는 의견을 올린 것이 생각 외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다. 5천여 감리교 목회자에 비한다면 적은 숫자지만, 6일 만에 130여 명에게 실명 동의를 얻어낸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어떤 정치적 세력이나 지역, 인맥과 관계없이 목회자 개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이 이번 고소건의 큰 의미일 것 같다. 그렇다. 나 역시 섬에서 목회하는 가난한 목회자다. 인터넷으로 동의한 목회자들을 살펴보니 감리교 개혁을 원하는 젊은 목회자들도 있지만 의외로 중견 목회자들도 있었다. 어떤 중심 세력이 있어서 이루어진 고소가 아니라는 거다. 감리교에 대해 염려하는 목회자들의 순수한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게 이번 일을 통해 발견한 희망이자, 의미다. 하지만 김 목사를 고소하자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시각도 만만찮다. ‘김홍도 목사를 고소할 만큼 자신은 깨끗하냐’, ‘목사가 사람 죽이자는 논리로 맞서서야 되겠느냐’, ‘소영웅주의’가 아니냐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아직까지 그런 비난이 크게 일지는 않았지만 만약 이 고소의 움직임이 계속된다면 그런 비난의 여론이 생길 수 있다고 예상한다. 나 역시 이번 고소를 주도하게 되면서 정말 마음 아파하고 있다. 어찌 마음이 안 아플 수 있겠는가. 같은 감리교회 목회자로서 다른 목회자를 말 그대로 ‘고소’하는 건데…. 하지만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김 목사의 잘못과 문제에 대해 아무도 일언반구 못하는 이런 분위기로 감리교 개혁이란 꿈도 꿀 수 없다. 이번 고소를 통해 나 역시도 목회에 많은 무리가 있다. 피고소인으로부터 직접 명예훼손의 맞고소를 당할 수도 있고 시골 목회 정서상 교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것도 같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려는 이유는 ‘언제든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목사가 우려하고 있는 바는 이 움직임의 순수성이 혼탁해지는 것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이 일에 대해 배후에 무슨 조직이 있는 게 아니냐, 이 일을 통해 뭔가 꾸려보려 하는 거냐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이 목사는 염려스럽다고 했다. 이번 일을 통해 어떤 조직을 꾸리거나 개혁을 위한 모임같은 것을 만들 생각은 전혀 없다. 한때 감리교 개혁을 위해 이리저리 열심히 뛰고 운동했었고, 조직을 통한 싸움이 어떤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조직을 통한 싸움에는 한계가 있다. 이번 일은 순수하게 고소인을 모집한 데 의의가 있으며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염려스럽다. 어떤 정치적 세력이나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 말이다. 또 감리교 목회자로서 한 일이 일파만파로 커지는 느낌이 들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계속할 것이다. 이 목사가 이번 고소에서 지향하고 있는 것은 ‘김홍도 목사 퇴진’이다. 하지만 여러 차례 고소장 접수가 반려됐던 과거를 되짚어볼 때, 130여 명의 서명으로도 기소되지 않을 수도 있다. 김홍도 목사가 퇴진할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무슨 모임을 꾸리거나 체계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일을 확대시키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꾸준하게 목회자로서 움직일 거다. 만약 130명으로 부족하다면 더 많은 목회자들에게 동의를 얻어 전국 감리교 목회자들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싶다. 오늘 아침 전국 감리교 목회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해서 발송했다.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아 미처 이 문제를 공유하지 못한 목회자들을 위한 것이다. 5천여 되는 편지를 몇몇의 이웃 목회자들, 가족들과 함께 밤을 세워 발송했다. 이 편지가 부디 부질없는 편지가 되지 않길, 더 많은 목회자들이 함께 참여해서 감리교 개혁, 나아가서는 교회 개혁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이 목사는 “한국 교회는 이미 자정 능력을 잃었다. 똥물도 물 속에 섞여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 정화가 되는데, 한국 교회는 스스로 정화는커녕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판국이 되고 만 것이다”라고 탄식했다. 또 이번 고소를 통해 김 목사가 물러난다 하더라도 끝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번 일이 무리없이 잘 진행된다면 “한국 교회 개혁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진아 기자 nebo@cnews.or.kr 주간기독교
고흥반도 예내교회 박병도전도사
고흥반도 예내교회 박병도전도사 2002-03-26 04:11:29 read : 1159 여섯 시간을 줄곧 내달아 도달한 남도 끝자락 고흥반도. 그럼에도 예내교회가 있는 외나로도까지는 어림잡아 한 시간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직접 찾아가겠다는 필자를 박병도(40세) 전도사는 한사코 만류했다. 찾을 수 없으니 면사무소가 있는 축정까지만 오란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내리라는 지명을 지도에서 확인했고 한갓진 시골에서 교회 찾기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가 옳았다. 예내교회에 도착했을 때 동구 밖 혹은 언덕 위의 하얀 예배당이리라는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졌다. 예배 처소라고 부르기에도 송구스러울 정도로 예내교회는 일견 볼품없는 교회다. 황무한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 산비탈 이편저편에 자리한 스물세 가구 중 가장 초라한 촌집에 십자가를 세웠다. 한 귀퉁이를 태풍으로 쓰러진 느티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예전에 당제를 지냈다는 나무가 이젠 교회 울타리가 되어 있는 셈이다. 느티나무 건너 동쪽으로 다도해의 그윽한 바다가 보이는 게 그나마 안심이다. 하지만 이방인의 관심일 뿐, 바다를 지척에 놓고 사는 이들에게 어디 눈에 새겨둘 만한 광경이겠는가. 촌집 안방을 이리 한 뼘 저리 한 뼘씩 넓혀 예배당을 꾸몄단다. 낮은 천장과 한지를 입힌 격자 창문, 노오란 때깔의 비닐 장판…. 촌로들이 모여 한담이나 나눌 사랑방으로 쓰임직하다. 휘장은 물론 그 흔한 장의자 하나 없다. 자그마한 강대상이 덩그마니 놓인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예배를 드린다. 화려하고 장엄한 의식에 익숙한 눈에는 지나치게 옹색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곳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듯하다. 겉모습이 아닌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잠시 접어두고라도 말이다. “고흥에 있는 제법 큰 교회에서 사역할 때입니다. 이곳에 교회는 있는데 예배가 드려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마음 걸림은 하나님께서 쓰시려는 계획이었을까. 일단 살펴보기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길을 나선 그였다. 지붕에선 비가 줄줄 새고 처마는 주저앉고, 예배가 드려져야 할 곳에는 고추가 가득 널려 있었단다. “황무하게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던 옛 선지자들의 참담한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고흥으로 돌아와 안타까움으로 몇 날 며칠 잠을 이루기 힘겨웠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굳이 예내교회를 저에게 보이신 뜻을 새겨보았습니다. 그리고 대형교회든 예내교회든 당신께서 세우셨다는 그 자체로 이미 깊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지요.” 고난이 결국 유익이라 해도 고난을 자초할 자가 어디 있으랴. 그러나 그는 사모와 어린 두 아이를 이끌고 예내로 들어왔다. 2000년 8월이었다. 등 떠미는 이는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 하길 원하셨고, 무너진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를 인도한 바였다. 산비탈의 나무들이, 들판의 돌들이 지붕을 수리하고 처마를 세우고 예배당을 정리했다. 헛간을 손봐 사택으로 삼았다. 그 홀로였다. 마을의 불신자들은 그를 배척했으며, 산 너머 10여 리 떨어진 교회에 출석하던 몇 안 되는 신자들은 냉담했다.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첫 주일예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 외에 아무도 없는 쓸쓸한 예배였죠. 외면하던 이들의 비아냥거림이 귓전에 쟁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모든 문을 열어제친 채 마을을 굽어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외치지 않는다면 산비탈의 저 나무들이, 들판의 저 돌들이 일어나 외칠 것이다. 내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도 그 감격이, 지치고 힘겨울 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흘렀다. 현재 장년 17명에 주일학교 4명. 스물세가구가 전부인 마을 규모와 대부분이 독거 노인인 점을 주목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결을 물었다. 그는 한동안 웃기만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 선물에 이편의 공로가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우문현답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필자는 아둔한 물음에 계속 매달렸다. “교회가 무너진 것을 안타깝게 여긴,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여삐 여기신 듯합니다. 그리고 교회 성장이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 움직이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또 원론적인 이야기다. 손에 쥐어줘야 알아차리는 필자의 어리석음이 다시 발동하자, 곁에 있던 조순애(72세) 집사가 거들었다. “그간 무진 애를 쓰셨지요. 처음에는 문전 박대도 수없이 당했지만 이젠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전도사님을 찾아요. 훌쩍 왔다가 어느 날 훌쩍 가버릴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갈 양반이라는 걸 안 게죠. 그래서 교회에 일이 있으면 마을 전체가 발벗고 나서요.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모두 다요.” 나이 일흔에도 청년처럼 그 신뢰가 교회에 대한 벽을 허문 계기였다. 복음의 씨가 된 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먼저 발상을 전환하기로 했단다. 강단에서 내려와 그들과 함께 어울려야 한다고, 그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전기 배선 기술자로 나섰다. 보일러 배관공을, 마을의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김지민(36세) 사모는 독거 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쌀이 떨어져 수제비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행한 까마귀의 역사처럼 지금껏 지내왔다. 그러면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복음은 그의 진심을 따라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가슴을 적셨다. “우리 교회의 일꾼들이십니다”라고 그는 곁의 두 할머니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김방심(77세) 집사와 조순애 집사. 일흔이 훌쩍 넘은 할머니에게 일꾼이라니…. “저희 교회에서 제일 젊으신 분이 예순일곱, 최고령이 아흔이십니다. 칠, 팔십의 노인들이지만 저는 언제 어디서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내교회야말로 청년 혈기로 깨어 있는 교회라고요.” 그리 믿고 싶은 게 아니냐는 반문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열한 시 주일예배에 아홉 시부터 찬송을 하며 준비하십니다. 열 시만 넘으면 빨리 하자고 성화십니다. 또 예배가 끝나면 조금 더 하자고 그러십니다.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열심입니다. 예내리 좌측은 예당이고, 우측은 우주기지가 들어설 하반입니다. 저희 성도님들은 올해의 전도지를 예당과 하반까지 확장해 놓고 있어요. 청년의 혈기보다 더 기운차지 않습니까.” 새벽기도든 주일예배든 예외 없이 전원 출석이란다. 교회 공사를 할라치면 꼬부랑 할머니까지 벽돌 한 장, 모래 한 줌씩 들고 비탈길을 오르내린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 은혜가 넘쳐서 그런다니 만류할 수도 없을 지경이란다. 오래오래, 평생이 될지라도 “저희는 주보가 없습니다. 열일곱 분 중 두 분만이 글을 아시기 때문에 찬송가 몇 장이라고 해도 그 페이지를 찾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찬송가를 펴놓고 찬양을 하고 싶어하시죠. 고심 끝에 궁리해 낸 게 파란색과 빨간색 책갈피입니다. 예배 전에 찬송가에 꽂아놓습니다. 그리고 첫 찬양 때는, 자 파란색입니다….” 불현듯 가슴이 저려왔다. 그가 감당해야 할 사역 현실의 어려움을 실감한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필자를 오지 선교 현장으로 보내 글을 쓰게 하신 까닭을 새삼 떠올린 탓이었다. 필자와 이 글을 읽은 독자 모두를 겨냥하신 그분의 뜻이 있지 않을까. 오지 선교 현장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시려는 그 이상의 것. 우리가 혹은 잊었거나, 혹은 뒷전으로 밀어두었거나, 또 혹은 낯설어진 그분과의 첫사랑에 대한 회복 말이다. 문맹의 노인이 볼 수도 없는 찬송가지만 굳이 펴놓고 그분을 찬송하려는 그 간절함을, 우리는 간직하고 있는가. 교회 내에 잠자리가 없어 조순애 집사를 따라 나섰다. 밤길을 짚어가다 슬그머니 그에 대해 물었다. “고맙고도 죄송하죠. 사례비라고 이십만 원 드려요. 그걸로는 양식도 안될 테니, 염치없는 노릇이죠. 성도들이 늘고 있지만 힘없는 노인네들뿐이라서…. 에고, 딴말은 안 할랍니다. 조금 더 일찍 오시지. 늦게 온 벌로, 우리 모두 죽어 예 묻어놓고 떠나랑께.” 말해놓고 조 집사가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김지민 사모의 말이 떠올랐다. “환경으로 따지면 힘들지 않을 수 없지요. 친구도 없이 외톨박이로 자라야 하는 아들들의 교육 문제가 특히 그렇지요. 하지만 이곳이기에 맛볼 수 있는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일흔 넘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할머니들입니다. 예배드릴 때 발갛게 상기된 그분들의 얼굴을 보면 열아홉 살 처녀처럼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그 모습이 감사이며 기쁨이고 또한 이런저런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이튿날 아침, 예내교회를 떠나며 그에게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언제까지 이곳을 지킬 것인가. 오지 선교의 어려움을 익히 보아온지라 은근히 조바심이 난 까닭이었다. “하나님의 계획을 사람이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기도합니다. 오래오래 그것이 평생이 될지라도 이곳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와 마지막 악수를 나눴다. 소망을 아는 자만이 인내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의 인내는 소망 안에서 열아홉 살 처녀처럼, 그분 보시기에 언제든 아름답기를 기원했다. 누군가 외지고 고단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목격하는 것은 눈물날 정도로 감격스럽다. 필자는 멀어지는 예내교회와 박 전도사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산모퉁이를 돌아 텅 빈 바다만 남았을 때 훗날 취재가 아닌 가벼운 차림으로 이곳을 되찾고 싶어졌다. 번다한 세상살이가 오늘의 감격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손쉽게 망각하게 만드는지 익히 알고 있으므로…. 조창인/ 밀리언셀러 「가시고기」,「등대지기」 작가
구도자 예배’ 창시 하이벨스 목사·러브리스 목사 특강
구도자 예배’ 창시 하이벨스 목사·러브리스 목사 특강 2009-11-13 09:18:40 read : 4709 ''리더십''(두란노),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IVP) 등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구도자 예배''로 한국에 잘 알려진 빌 하이벨스 목사가 허심탄회하게 목회원칙을 풀어냈다. 12일 국민일보 빌딩에서 개최된 글로벌 리더십 서밋에서 하이벨스 목사는 팀 티칭의 대가답게 미국 올랜도 디스커버리교회 데이비드 러브리스 목사와 함께 리더십과 교육, 소통 등의 주요 원리를 전했다. 키워드에 맞게 강의 내용을 소개한다. ◇팀티칭=담임목사가 단독으로 설교하는 것보다 두세 명의 부목사와 함께 팀 티칭을 하는 게 좋다. 부교역자를 세우면 담임목사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담임목사의 설교가 꼭 필요한 시기가 있다. 하지만 십계명 설교를 할 때 10번의 시리즈 속에 부교역자가 두세 가지 정도는 담당할 수 있다. 목회의 목적은 유명 목회자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데 있다. 팀 티칭을 통해 성도들은 담임목사뿐만 아니라 부교역자들의 다양한 메시지에 은혜를 받게 된다. ◇세분화=성도는 크게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사람과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사람,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사람으로 따지면 아기와 어린이, 청소년, 장년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세 번째에서 네 번째다. 과거 우리 교회 성도 26%가 여기에 해당됐는데 신앙성장에 어려움을 겪고 교회를 떠날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들을 참여시키고 전략회의를 가졌다. 이후 각자의 신앙단계와 은사에 맞게 양육과 도전을 하며 사역을 맡기게 됐다. 1년에 한 번씩 성도들을 대상으로 신앙단계를 조사한다. 교회는 네 번째 단계의 사람이 많을수록 영향력이 커진다. ▲ 참석자들은 빌 하이벨스 목사에게 교회 사역 관련 많은 질문을 던졌다. ©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박정현 ◇소통=교회의 비전은 어찌 보면 ''소통''이라 할 수 있다. 성도와 소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대일 상담이다. 그 다음은 테이블에서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 그 다음은 수십 명이 함께하는 모임이다. 마지막은 전 성도가 모인 예배의 자리다. 우리는 비전을 전달하기 위해 담임목사가 직접 비디오 촬영을 하고 인터넷에 올린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이용해 교회소식과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성도들과 채팅을 하기도 하고 주일 예배 땐 휴대전화를 통해 설문조사를 하기도 한다. 일례로 예배 중 ''당신은 일주일에 성경을 얼마나 자주 보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성도들이 휴대전화로 답을 보내고 15초 만에 통계가 영상으로 뜬다. 예수님이 지금 계셨다면 소통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교육=한국 못지않게 미국도 교육문제가 크다. 하나님의 교육 계획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다. 자녀들은 교회보다 부모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게 돼 있다. 따라서 교육 문제를 단순히 교회에 떠맡겨선 안 된다. 교육에서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교회는 가정을 돕는 곳이 돼야 한다. 돈, 성적, 직업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가정이 될 수 있도록 부모들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야 한다. 젊은 세대에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선 연령에 맞게 리더를 세우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교회=내가 처음 한국을 찾은 것은 1978년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설교는 당시 20대의 나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강력한 비전과 도전을 줬다. 나는 한국교회에 빚진 자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를 돕고 격려할 수 있다는 게 나에겐 큰 기쁨이다. 안타깝게도 일부 미국교회 목회자들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너무 자만하고 있다고 농담한다. 가장 성공적인 목회는 얼마나 겸손하게 섬기느냐에 있다. 한편 이번 행사를 주최한 크리스채너티투데이는 16∼17일 서울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와 23∼24일 부산 중앙교회(최현범 목사)에서도 세미나를 진행한다(willowcreek.co.kr·02-581-3488, 051-624-4554). --------------------------------------------- "리더십 위기 때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윌로우크릭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 '리더십 개더링' 강연 “리더십의 위기를 맞았을 때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리더의 가장 쉬운 선택은 그만두는 것이다.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많았지만 그런 시간이 더 나은 지도자가 될 수 있게 했다. 중요한 것은 실수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구도자예배로 부흥을 거듭해 온 미국의 대표적 교회 중 하나인 윌로우크릭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는 12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크리스채너티투데이(발행인 오정현 목사) 주최로 열린 ‘리더십 게더링’에서 한국 교계 목회자 120여 명의 만나 도전한 말이다. ▲ 빌 하이벨스 목사(우)가 강의를 인도하고 있다. ©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박정현 빌 하이벨스 목사는 연단에 올라 3시간 동안 참석한 목회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답하며 허심탄회하게 생각을 공유하고 사역과 고민을 나눴다. 디스커버리교회 데이비드 러브리스 목사가 함께 강단에서 호흡을 맞췄다. 빌 목사는 모든 질문에 앞서 성도를 네 부류로 나눴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이제 막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 ‘신앙이 성장하는 사람’, ‘그리스도 중심의 성숙한 사람’ 네 단계로 성장한다는 전제를 세우고 설명해 나갔다. 그는 윌로우크릭교회의 설교 방향에 대해 “네 단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는 예배를 준비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면서 “모든 세대가 참여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드는 것을 권면한다.”고 말했다. 반면 빌 목사는 요즘 관심이 늘고 있는 이머징 교회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20대만을 위한 사역을 해서 성장한 적도 있지만 그 세대가 후에는 20대 예배에는 관심을 잃었었다. 이머징 교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모든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지금은 관심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또 빌 목사는 34년간 사역에 대한 평가를 위한 조사 과정을 설명하며 성과와 받았던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교회의 장점을 알고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사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 그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조사 내용에 따라 성장 단계와 성숙한 단계의 성도를 위한 사역이 부족했다는 결과를 보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면서 매년 이 같은 평가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미국 성도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단계와 성장하는 단계가 사이가 가장 많다. 내게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될 때 전도와 기도, 헌금을 한다. 그러나 교회의 영웅은 말하지 않아도 일하는 성숙한 단계의 사람이다. 교회가 이런 사람이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평가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면서 “우리가 바랐던 것은 교회가 정직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서 불필요하게 비판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는다.”고 일부 작가들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보이기도 했다. 재미있었던 답변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변화를 도전해야 하는지 질문에 자신이 봐도 괜찮은 설교에 변화가 없었고 강단에서 내려오고 싶을 정도로 엉망인 설교에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처럼 하나님께서 성장의 순간에 역사한다는 의미였다. 한 목회자는 사역자를 채용하고 떠나보내는 데 대한 지혜를 구하기도 했다. 질문에 데이비드 러브리스 목사는 “사역자를 고용할 때 그 사역에 필요한 부분을 먼저 보고 결정한다.”고 답했고 빌 하이벨스 목사는 “가급적 교회 안에서 세우면서 일년에 두 번씩 전문위원이 정기적으로 면담과 태도에 관심을 두고 평가한다. 좋지 않은 결과에는 교회를 떠나보내는 어려운 대화를 한다.”고 말했다. 평신도 리더십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빌 목사는 목회자의 태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목회자는 평신도가 사역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 지도자나 목회자가 영광을 즐기며 자신을 돕는 자로 생각하지 않고, 최고경영자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또 빌 목사는 리더십 위기에 대한 대처에 “포기하는 것은 타협이기 때문에 절대 안 된다. 리더의 대표적 실수 백개가 있다는 90개는 내가 경험했을 것이다.”면서 중요한 것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긍정적인 마음이다.”고 말했다. 이에 데이비드 목사가 “나는 아마 백개 중 99개 실수를 했을 것이다.”고 말해 좌중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인격적인 교회가 비인격적인 프로그램으로만 사역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창의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5년 전 우리는 기획된 예배를 드려 많은 사람이 왔지만 이제는 이벤트를 보려고 교회를 찾지 않는다.”면서 “모두가 겪는 어려움이지만 상황 속에서 우리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덧붙이면서 빌 목사는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는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다.”면서 “한국 교회의 목회자나 미국 대형교회 목회자 중에 자만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어느나라에서든 허용될 수 없다. 가장 성공적인 목회는 얼마나 겸손하게 섬기는 데 있다.”며 꼬집기도 했다. 전체 진행을 마치며 빌 하이벨스 목사는 한국 교회에 대해 빚진 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1978년 한국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한국 교회를 본 것이 제게 새로운 비전과 도전을 주어 20대 청년이 큰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한국 교회를 돕고 격려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큰 기쁨이다.”며 인사했다. ---------------------------------------- 빌하이벨스 '리더스 게더링' 강연 전문 빌 하이벨스 목사와 데이비드 러브리스 목사...질의 응답 전문 12일 여의도 CCMM 빌딩 12층 우봉홀에서 열린 크리스채너티투데이(발행인 오정현 목사) 주최로 열린 ‘리더십 게더링’의 하이벨스 목사와 데이비드 러브리스 목사 강연과 참석자들의 질의에 대한 응답 전문을 게재한다. Q. 윌로우크릭교회는 담임목사와 부목사들이 전도설교, 강해설교 등으로 나눠서 설교하고 있다. 자칫 부교역자에게 인기가 쏠릴 수 있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는가? 설교 사역의 균형이 아름답게 정착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빌 하이벨스 : 질의응답을 갖기 전에 교회의 성도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막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 ‘신앙이 성장하고 있는 사람’, ‘그리스도 중심의 성숙한 사람’로 구분지어 보겠다. 우리는 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는 예배를 준비한다. 미국 대부분의 교회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설교를 하고, 어떤 교회는 초신자만을 위한 설교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에 해당하는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팀 티칭을 위해서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나도 실수가 많았다. 때로는 목회자가 너무 많아서 성도들에게 혼란을 주기도 했다. 내 생각에는 한 명 또는 두세 명이 팀티칭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부교역자 때문에 담임목회자의 영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담임목회자가 정기적으로 필요한 내용으로 설교할 경우 큰 무리가 없다. 때로는 교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순간에는 절대적으로 담임목회자의 말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담임목회자의 생각을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교역자가 설교를 할 때마다 비디오로 설교를 보고 느낀 점을 적어서 준다. 더 발전을 위한 조언이다. 내가 설교를 할 때도 부교역자에게 설교에 대한 평가를 요청한다. 솔직한 평가를 받고 싶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러브리스 : 담임목사인 나 자신을 유명인사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여 드리려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팀티칭을 한다. 같은 목회자라 할지라도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때론 교인들이 나보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다양한 사역자들로 인해 성도들은 훨씬 성장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Q. 요즘 젊은이들은 이머징(emerging) 교회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윌로우크릭교회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익숙한 젊은이들을 위한 전략이 있는가? 한국의 전통적 스타일의 교회가 많은데 조언을 한다면? 빌 하이벨스: 이머징 교회와 관련한 대화는 분란이 많다. 이머징 교회에 대해 책을 쓰는 저자들도 정의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에 맞게 대화하고 사역의 흐름을 맞추고 있다. 의도적으로 모든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복음을 찾는 이에게는 이머징 교회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한 때 20대만을 겨냥해 사역을 하고 천 오백 명까지 성장한 적도 있다. 그 20대 청년들이 결혼을 해 자녀를 낳고 30대가 되면서 20대 예배에는 관심을 잃었다. 대부분이 큰 교회에서 예배를 같이 드리게 돼 있다. 지금은 이머징 교회에 대한 대화와 관심보다는 모든 세대에 복음을 전하는 데 지금은 관심을 두고 있다. 데이비드 러브리스 : 윌로우크릭교회처럼 디스커버리교회도 모두가 참여하는 사역이다. 하지만 교회에의 한 캠퍼스는 젊은이들만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 세대만을 위한 교회로 분립할지도 모르겠다. 모 교회가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20대 사역만을 통해 필요를 채워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나이가 많아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교회 사역을 위한 전략모임에서 담당자를 통해 다양하게 반영하고자 한다. 내게 결혼한 세 아들이 있다. 한 아들은 이머징 교회에 관심이 많은 반면 20대 두 아들은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서 비춰보면서 우리는 선택이 아닌 두 가지 경우를 다 제공하고 있다. 빌 하이벨스: 미국 교회 내에서는 이머징 교회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논의가 얼마나 효율적일지 모르겠다. 작가들은 이머징 교회에 대해 쓰고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런 책과 토론으로 변화가 일어나는지 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권면하는 것은 모든 세대가 참여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의 내면의 목소리도 귀 기울여야 한다. Q. 책 <팔로우 미>에 관해 미국에서 많은 토론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 논의로 인해 배웠던 것은 무엇인가? 무엇에 포커스를 두었던 것인가? 빌 하이벨스 : 배경을 간략히 설명하겠다. 윌로우크릭교회는 30여년 역사를 가진 사역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고민을 했다. 예를 들어 잘 나가는 차가 있는데, 정비소에서 가서 더 잘 나갈 수 있도록 부품을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자문하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의 장점을 알고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조사하고 데이터를 발표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장점은 많이 알고 있어서 신경 쓰지 않았고 부족한 부분에 관심을 두기로 했다. 또 부족한 부분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비슷한 고민을 하는 교회에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독교 작가 중에 우리 교회 사역의 약점에 대해서 평가 이상의 집착을 보이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우리가 바랐던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정직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윌로우크릭은 회개하라>는 책을 쓴 작가와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 책이 교회에 긍정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작가는 더 많은 독자가 읽게 하기 위한 제목이었다며 사과했다. 에베소서에는 화목한 관계를 위해 애쓰라는 말씀이 있다. 교회 안에서 불필요하게 다른 목회자를 비판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배운 것도 많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성공적으로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제 막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을 위한 사역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성장하는 사람과 성숙한 사람을 위한 사역이었다. 설문지에 26%의 성도가 더 성장할 수 있는데 교회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오랜 전략회의와 기도를 통해 이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줄 것을 논의했고 그 사람들을 회의에 참여시켰다. 결과적으로 2년 뒤에 많이 떨어져나갔다. 지금은 교회가 그런 분들을 위해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아기 때문에 그 부류들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앞으로는 1년에 한 번씩 같은 평가를 할 생각이다. 담임목회자로서 예수님 안에서 성도들이 잘 성장하는지 너무 궁금하다. 여러분의 목회 과정에서도 이런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용기있게 변화를 이끌어가길 바란다. 데이비드 러브리스 : 윌로우크릭교회 했던 조사 과정을 우리교회도 했다. 빌이 말한 평가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원래 우리 현장에는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우리 안에서 인정하고 변화를 이끌어갈 필요가 있다. 전체 그림을 보고 그들의 신앙 단계가 어느 곳에 든지 조사 과정을 거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신앙의 각 부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영적인 아기’, ‘어린 아이’, ‘청소년’, ‘성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이를 키울 때도 각 아이에게 다른 교육을 해야할 때가 있듯이 목회를 할 때도 똑같은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도움을 줄 수 있쩝熾?대한 접근을 하면서 특히 성장과 성숙 단계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헌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빌 하이벨스: 개인적으로 큰 도움이 된 깨달음이 있었다. 여러분은 신앙의 네 단계 중 어느 단계에서 어느 단계로 올라서기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한 조사에 의하면 가장 힘든 단계는 성장하는 단계에서 온전한 헌신을 위한 단계로 올라서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미국의 경우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단계와 성장하기를 원하는 단계 사이에 있다. 이분들은 내게 유익하고 기쁨이 될 때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전도, 기도, 헌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교회 안의 영웅들은 마지막 성숙한 단계의 사람들이다. 많은 시간을 교회 안에서 헌신하기 때문이다. 전도와 봉사, 헌금을 교회가 말하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 영웅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변화하려는 이들이 헌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교회가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네 영역의 비율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부분을 정확히 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데이비드 러브리스 : 세 번째 단계의 사람은 예수님이 내 삶의 일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 재정과 일터, 예수님의 관계가 각각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다른 부분보다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성공한 것이고 예수님도 기뻐할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예수님 중심의 사람은 그 분이 내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윌로우크릭교회와 디스커버리교회는 사람들이 마지막 단계로 헌신하게 하려는 것이다. Q.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전통적 소통 구조에서 온라인 소통 구조로 많은 변화가 있다. 한국 교회가 일반 성도들과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조언해 달라. 빌 하이벨스 : 교회 안에서 생각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담임목회자와 일대일로 나눌 때이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그런 시간을 가지고 성도와 소그룹리더들을 만나 비전을 나누려고 한다. 두 번째로는 소그룹, 그 다음으로 중그룹, 마지막으로 전 성도가 모이는 자리에서 소통하려고 한다. 이외에도 문서나 인터넷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우리 교회 인터넷 사역자는 일대일로 나누는 모습을 촬영해 인터넷에 정기적으로 올려 효율적인 전달을 하고 있다. 데이비드 러브리스 : 우리도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을 활용하고 있다. 매일 트위터로 교회 소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일을 나누면서 성도들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우리 교회에는 온라인 캠퍼스가 있다. 얼마전 상해에 방문했을 때 우리 교회 예배 실황을 볼 수 있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그룹과 사역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교회에서 예배 중에 핸드폰을 키도록 해서 실험한 방법이 있습니다. 설교 중에 성경을 얼마만큼 읽는지 핸드폰으로 질문지에 답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5초 안에 성도들의 답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믿지 않는다’에 답한 12% 성도분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시대에 사신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Q. 한국에서는 교회 중요 정책을 결정할 때 당회에서 결정을 하고 성도들에게 알리고 있다. 윌로우크릭교회에서는 교인들의 생각이 교회의 중요한 결정에 반영되는 방법이 있는가? 빌 하이벨스 : 윌로우크릭교회 웹사이트에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많은 질문이 올라오고 있고 모두 읽어보고 있다.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변하는 과정이 매우 유익하다. 하지만 그분들의 필요에만 리더십이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Q. 도전을 했지만 성도들의 삶이 바뀌지 않는 모습은 고민이다.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변화를 도전해야 하는가? 빌 하이벨스: 30년 이상 사역을 하면서, 믿거나 말거나 몇 번은 괜찮은 설교를 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설교도 모든 성도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나도 모른다. 반면에 형편없는 설교를 할 때가 있다. 설교 중에 강단에서 내려오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런 설교를 듣고 구체적으로 성도가 변화되는 순간이 있다. 매일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하며 안타까움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 위안을 얻고 있다. 말씀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잘 자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좋은 땅에 심겨 30배, 100배 성장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장하는 순간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Q. 리더십은 미래에 대한 예측 기능이 있다고 볼 때, 리더로서 어떤 노력을 하고, 그 예측을 교회에 반영하기 위한 시스템이 있는지? 빌 하이벨스 : 리더는 항상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사회가 어떤 흐름을 가지고 움직이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구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내가 교회에 반영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설교를 준비한다. 1월부터 12월까지를 연간 계획을 세우면서 어떻게 하면 그 계획을 예배에 담아낼까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먼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Q. 동역하는 사역자를 어떻게 구하고 지혜롭게 떠나보내야 하는지 궁금하다. 데이비드 러브리스 : 우리는 리더십 계단이라는 과정이 있다. 사다리를 가지고 사역자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각 단계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사역자를 고용할 때는 그 사역에 필요한 것을 본다. 사역을 이끄는 자가 가질 은사가 무엇인지, 일 중심과 관계 중심에서 어느 것이 필요한 사역인지 등을 보고 결정한다. 빌 하이벨스 : 가급적이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예를 들면 자원봉사를 오랫동안 한 검증된 사람, 스탭으로 들어온 사람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사역자들은 일 년에 두 번씩 조사전문 직원으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평가받는다. 솔직한 면담 시간을 갖고, 일 외에 태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일 그 과정 속에서 좋지 않는 결과를 나올 때 교회를 떠나보내는 어려운 대화를 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고용할 때가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평가과정은 아주 중요하고 전략적이어야 한다. 그 사역자의 발전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아내들이 늘 평가하고 있다.(웃음) Q. 한국 교회의 문제점 중에 하나는 학생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점이다. 근원적인 문제는 가정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부모에게 있다면 목회 과정에서 그런 부모의 모습을 도와주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 좋은 질문이다. 우리 교회도 이 부분을 많이 고민해 왔다. 하나님께서 계획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계획 하나는 부모가 자식을 양육할 책임이 있고 그 책임대로 한다면 문제가 없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가 관심을 가지고 이 부분에 관심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다른 계획은 부모가 자식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교회에 도움을 요청할 때 교회가 청소년 그룹을 통해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부모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교회는 부모를 가르쳐야 한다. 모든 교회가 다음 세대를 놓치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솔직하게 문제를 접근해 본다면, 근본적으로는 교회가 아닌 부모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부모에게 지속적인 도전을 던지고 있다. Q. 무늬만 평신도 사역이지 뒤에는 목사님이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평신도 리더십을 세워가야 하는지 궁금하다. 빌 하이벨스 : 목회자는 평신도가 사역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 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자가 사역 현장에서 일하도록 돕는 것이다. 교회에 우리를 부르신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팀워크가 필요하다. 성도는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교회는 도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 많은 목회자들은 에베소서 4장 말씀을 설교하지 않는다. 지도자나 목회자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을 코치나 돕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내가 최고경영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이 사역할 수 있도록 돕고 지원해야 한다. 데이비드 러브리스 : 내가 존재하는 것은 평신도 사역자들을 돕기 위한 이유다. 평신도들이 교회가 교회 밖에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모일 때 밖에 있는 교회를 자기고 안으로 들어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한다. 우리 모두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가 살아 움직여야 한다. 또 교회가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교회는 일 년에 한번씩 모든 교인이 일어나서 삶의 현장에서 자신들이 사역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교인들이 교회에서 할 수 있는 부분을 알게 되고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감사하게 된다. 빌 하이벨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평신도가 있다. 예를 들어 이사진, 장로회, 교사 등의 자원봉사자들이 되겠다. 그 다음으로 소그룹리더와 같이 중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평신도가 있겠다. 그 외에 일상적인 자원봉사자로서의 평신도가 있다. 목회자는 성도가 가장 높은 단계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일상적인 일만 하게 한다면 낭비가 될 수 있다. 반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높은 단계의 일을 감당할 수 없기도 합니다. 나는 평신도가 감당할 만한 무게를 보고 있다. Q. 리더십만큼 팔로워십의 개발도 아주 중요한데 팔로워십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는가? 데이비드 러브리스 : 믿음의 여정 속에서 항상 누군가는 내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은 내 뒤에 있다. 그래서 도전하는 것은 리더를 따르는 것이 의미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 나를 돕고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반면 내가 도와야 하는 사람이 있다. 중요한 질문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고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의 삶 속에 이런 질문에 답이 필요하다. 내가 담임목사로 있지만 내가 따르는 멘토와 같은 분이 있다. 그런가하면 나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교와 삶 속에서 전하고 있다. Q.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적인 리더십이라는 것이 있는가. 목회를 하면서 리더십의 위기를 맞았을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빌 : 우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포기하는 것은 타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안 된다. 리더로 가장 쉬운 선택은 그만 두는 것이다. 나도 그런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성도들 앞에서 사과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고, 새로운 사역을 도전했는데 실패한 적도 있었고, 훌륭한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몇 개월만에 실망한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도 포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목사님이 어려움을 겪을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당신보다 더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고 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더 나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좌절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이 더 나은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 더 나은 미래를 줄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의 초점을 두어야 한다. 지도자가 하는 대표적 실수 백개가 있다면, 90%는 내가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 나를 여러분의 교회에 청빙할 수 있겠는가. 긍정적이어야 한다. 앞으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그 실수들이 남아있다면 문제다. 나머지 10%에 대해서도 모두가 함께 해결해 간다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실수를 하더라도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지도자의 내적 성품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러브리스 : 나는 아마 그 백개 중 99가지 실수를 했을 것이다. 모든 지도자는 실패에 대한 번민을 경험할 것이다. 윌로우크릭교회와 같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 성공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부분에 충실하면 된다. 하나님은 왜 너를 만든 이유대로 살지 않았는지 질문하지 큰 교회로 만들지 않은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 속에서, 성공적인 목회자로서 모델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일에 얼마나 성실했는가, 은사를 동원했는가, 은사를 최대한 활용했는가, 우리 삶을 통해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가, 예수님의 성품이 나타나고 있는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변화가 점차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예수님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뻐했다. 모세와 아브라함 같은 리더를 따르는 것에 기뻐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사역을 통해 만들어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유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Q. 인격적인 복음이 비인격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요즘 인격적인 교회가 비인격적인 프로그램으로만 사역하지는 않는가? 빌 하이벨스: 이 부분에 대해 거의 모든 교회가 고민하고 있다. 정답은 모두가 소그룹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문제다. 예배를 볼 때 사람들이 하나의 이벤트라고 느끼는지, 사람들이 참여하는 예배가 되는지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 방법들에 대해 모색하고 있지만 이제 시작 단계다. 미국의 교통체증, 텔레비전 등을 통해서 볼 때 모든 것이 비인격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격적인 것을 기대하고 교회에 올 때가 있다. 15년 전 우리는 예배 무대에서 기획된 예배를 드렸고 많은 사람들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제 이벤트를 보려고 교회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비인격적이고 이용당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창의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의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몇 개월 전에 성도들이 앉아있는 자리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처음으로 설교를 해봤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전보다 더 집중력하고 있다고 느꼈다. 예배 후에는 한 시간 이상 동안 교인들은 개인적인 면담이나 기도를 받을 수 있다. 담임목사는 슈퍼스타가 아니라 기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지만 상황 속에서 우리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는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다. 한국 목회자들은 자만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미국의 대형교회 목회자들도 똑같은 실수를 한다. 하지만 어느나라에서든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성공적인 목회는 얼마나 겸손하게 섬기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규모와 상관없이 자만, 영웅화하는 일에서 벗어나 섬기는 위치에서 살아가야겠다. 물론 다른 사람 목회자를 컨트롤할 수 없지만 나 스스로를 그렇게 할 수 있다. 나만 관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괜찮을 것이다. Q. 교회는 지역과 목회자가 다른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정보화사회가 되면서 교회가 비슷해지는 경향이 있다. 지역에 맞는 목회가 필요하다고 볼 때, 윌로우크릭교회는 시카고 지역을 위해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빌 하이벨스: 아주 작은 영향을 미치는 정도이다. 2만 5천명 교인이 큰 도시 시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비전을 가진 교회가 힘을 모은다면 도시를 움직일 수 있다. 내가 시카고 시내를 돌아다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모른다. 교회와 하나님께도 무관심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노력할 것이다. 내 기본적인 철학은 한 번에 한 사람, 한 마을씩 다가가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이 우리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당신 교회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해 주었다. 어떤 때는 그런 엉뚱하고 이상적인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가 있는 그 지역만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교회의 자녀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도록 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큰일을 맡겨줄 것이다. 이 시간을 마치며 한 말씀 하겠다. 처음 1978년 한국에 왔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 설교를 들었다. 30년 전에 본 것은 제게 새로운 비전과 도전을 주었다. 그 경험이 작은 믿음을 주었는데, 당시 20대 청년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받은 빚진 자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돕고 격려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큰 기쁨이다. 글로벌 리더스 서밋이 곧 열리는데 많은 나라에서 이를 통해 사역이 일어나는 것을 봤다. 여러분의 교회가 적극적으로 차여해 주기를 바란다. 많은 세션 중에 본인에게 영향을 주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리더에게 사역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할 것이다. ---------------------------------- 빌 하이벨스 목사가 제시하는 성장의 ‘절대 원리’ [리뷰] 빌 하이벨스 목사의 액시엄(AXIOM) 오랜만에 산에 올랐습니다. 아침 시간, 집 앞에 있는 맹산(분당구 야탑동)에 올라갔는데 안개가 많이 낀 날이어서 더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산 입구에는 ‘반딧불이 자연학교’(연못, 물레방아, 오두막 등이 있습니다)가 있습니다. 분당의 환경단체에서 자연을 지키고 다양한 자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인데, 이곳에 있는 벤치에서 묵상하는 것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자연을 보존하고 지키겠다고 만든 공간인데, 올라올 때마다 변한 것이 보이네!’ 흔히 자연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틀린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흐름을 억지로 바꿈으로 인해 많은 자연 재해를 당해도, 인간은 ‘개발’이라는 논리로 어리석은 행동을 계속합니다. 그래서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절대 원리’가 절실해지는 때입니다. 그런 묵상을 하다가 이 책의 제목을 보니 더 느껴지는 것이 많네요. “액시엄(AXIOM)”,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절대 원리’나 ‘불변의 이치’라는 뜻입니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35년 동안 사역(그 중 30년 이상은 윌로우크릭에서 목회함)하며 발견한 변화와 성장의 “절대 원리”를 76개로 정리한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액시엄(AXIOM) 도서 상세정보 빌 하이벨스의 액시엄 정가 : 12000원 판매가 : 10800원 출판사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저자 : 빌 하이벨스 발행일 : 20081020 페이지수 : 376 목사님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브라질을 방문해서 일정을 치르다가 4시간이 남아서 『콜린 파월의 행동하는 리더십』이라는 책을 폈는데 참 흥미로웠습니다. 단락들이 길게 질질 끌며 이어지는 게 아니라, 파월이 군인으로 활동하던 시절과 나중에 미 합참의장으로 있던 시절에 깨달은 현명한 교훈 스물네 가지를 단순명료하게 제시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열 단어 미만의 문장으로 제시된 각 원리에는 열정과 에너지가 스며 있었습니다. 확신에 찬 그 글들을 읽으며 목사님은 훌륭한 리더는 사람을 잘 이끌기도 하지만, 정확하고 기억하기 쉬운 표현으로 잘 전달할 줄도 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본인이 믿어온 액시엄을 76개로 정리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님은 비전과 전략(제 1부), 팀워크와 의사소통(제 2부), 활동과 평가(제 3부), 리더의 성품과 자질(제 4부)이라는 4개의 큰 단락으로 나누었지만, 하나하나의 액시엄을 언급한 후, 비슷한 내용의 어록으로 연결해 주는 ‘관련 장’을 마지막 부분에 소개합니다. 하나만 예를 든다면 ‘액시엄 02’는 ‘부탁할 때는 크게 하라’인데, ‘액시엄 03’인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 인식하라’를 읽어도 되지만, 02 마지막에 언급되는 LINKS에서는 08장(10점짜리를 영입하라), 22장(상대방이 거절하리라고 지레짐작하지 말라), 64장(안주하고자 하는 두려움과 싸우라)에 대한 정보를 줍니다. 유사한 액시엄의 내용을 연결해서 읽어도 된다는 친절한 설명이지요. 단문(短文)으로 되어있는 소제목들이 모두 멋지지만, 그 중 몇 개의 액시엄만 소개하겠습니다. AXIOM 03(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 인식하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리더의 핵심 의무는 그 조직이 겪고 있는 시기를 제대로 알고, 정확히 규정하고, 더 나아가서 그 시기가 의미하는 바를 구성원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다섯 가지의 시기를 말합니다. 1) 성장기(만사가 장밋빛. 출석률이 치솟고, 프로그램마다 사람이 넘쳐나고, 미래가 창창한 때이다.) 2) 다지는 시기(다지는 시기의 목표는 성장기 시절에 들어온 사람들을 흡수하고 지원하는 일이다.) 3) 전환기(사역진에서 여러 명이 한꺼번에 그만둠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시기로, 모든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약간 불균형감과 불확실함을 느끼게 된다.) 4) 침체기(대부분의 리더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기로, 만사가 유난히 침울하고 진부하고 꽉 막힌 느낌이다.) 5) 개혁기(리더가 교회 사역 전반을 면밀히 조사하고 필요한 조치, 즉 정비를 할지 정밀 검사를 할지 아니면 종료시킬지를 강구하고 밝혀야 할 때다.) 그러면서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조직 내의 구성원들은 리더가 말해 주지 않으면 그들이 어느 시기를 겪고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는다.”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리더가 된 후에도 느슨하게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참 중요한 리더의 사명임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AXIOM 21(구성원을 고르는 조건, 3C를 숙지하라)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드림팀을 짜는데 거의 30년이 걸렸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말하는 드림팀이란 자신과 함께 장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쁘게 사역할 사람들로 구성된 팀을 의미합니다. 그 기간 동안 목사님은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을 3C로 정리했는데, 성품(Character), 역량(Competence), 인화(Chemistry)가 그것입니다. 짧은 인터뷰 시간 동안 ‘성품’을 파악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반드시 점검하고, 그 후에 일할 수 있는 능력, ‘역량’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때는 맡기려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정하고, 그 역할에 요구되는 자격 요건만을 파악했습니다. 만능 멀티플레이어(1종 보통면허 소지, 찬양 인도 가능, 컴퓨터 능숙, 영어 소통 우대…)를 요구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을 생각해볼 때 참 바람직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설교자,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님(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에서 수 년 동안 설교 전담 목사로 사역하다가, 현재는 캘리포니아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음)도 그런 방법으로 모셔왔다고 하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입을 결정하기 전에 ‘인화’를 점검한다고 합니다. 앞의 두 가지 능력이 탁월하다고 할지라도 인화력이 없으면 시너지가 발휘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겠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회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공동체가 동일하게 점검해야 할 조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AXIOM 36(“나를 납득시켜 주세요”를 활용하라)에서 밝히는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리더가 범하기 쉬운 잘못 중에 하나는 아랫사람이 잘못했을 때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내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쓰는 방법이 하나 있다. “나를 납득시켜 주세요.”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쓰는 이유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기도 전에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나도 모르게 흑백 논리로 말하는 우를 범치 않기 위해서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사건들의 75% 정도를 이 방식으로 푼다고 합니다. 이러한 리더십이 있기에 많은 뛰어난 참모들이 생기는 것이겠죠? 하나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AXIOM 56(영혼을 버리면서까지 무작정 달리지 말라)에서 목사님이 반성하는 내용입니다. “사역의 어느 시점에서 나는 해를 거듭할수록 빨라지는 내 ‘속도계’에는 만족했지만, 내 ‘영혼계’가 그 속도를 전혀 따라잡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속도가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속도에 굶주린 리더들은 대부분 리더 역할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는 자원이 고갈되고 만다. 그래서 어느 속도쯤 되면 영혼이 그냥 주저앉아 버린다. … 당신도 영혼계가 흔들리고 있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속도를 늦춰야 할 때인지 모른다. 영성을 회복해야 할 시점이라면 업무와 일정을 조절하고 영적 훈련도 재조정하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 정말 리더와 목사들이 꼭 명심해야 할 액시엄이라 생각됩니다.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76가지의 액시엄에 대한 느낌을 모두 다를 것입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으니까요. 직접 읽어보세요. 그리고 과연 내가 적용할 수 있는 액시엄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세요. 책을 통한 간접 체험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독서하기 좋은 가을, 이 책을 통해 내 액시엄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빌 하이벨스의 액시엄(Axiom)’을 참고서로 삼고, 진짜 액시엄인 ‘성경’(The Bible)을 교과서로 삼아 꾸준히 묵상하며 ‘절대 원리’를 얻고 싶은 이 훈 목사.
긍휼의 삶 목사 조지오글
긍휼의 삶 목사 조지오글 2002-11-21 23:05:55 read : 2851 지난 74년 타의에 의해서 우리 곁을 떠났던 조지 오글(오명걸)목사가 한국인권협회가 선정한 제5회 인권상을 수상하기 위해서 다시 한국을 찾았다. 6~70년대 한국산업선교의 산증인이기도 한 그의 근황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그가 한국을 방문하여 인권상을 수상하고 난 다음 감리회 본부를 찾았다. 오글목사를 본사에서 만나 지난 74년 추방을 당한 이후 미국에서의 생활과 근황에 대해서 들어 보았다. 이 자리에는 평생을 반려해온 도로시 오글 사모도 함께 동행했다. “긍휼은 고된 작업이다. 긍휼은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긍휼은 가난한자들의 상처를 보살펴주고 그들의 삶을 돌보아 주는 것이다. 긍휼은 약한자를 옹호하고 그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자들을 강력하게 고발하는 것이다. 긍휼은 압제받는 자들이 정의를 위해 투쟁할 때 거기에 합류하는 것이다. 긍휼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들을 귀가 있고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긍휼은 우리의 친구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내려 놓는 것이다.”<헨리 나우웬의 긍휼 중에서> (복음주의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헨은 하버드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다가 말년에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정신지체장애인들을 섬기다 지난 96년 64세의 일기로 돌아갔다.) ● 조지 오글과 오명걸 오명걸목사, 칠순을 훌쩍 넘긴 노(老)목사는 한국사람이 아니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서른살의 나이로 한국선교사로 왔다. 막 전쟁을 끝낸 한국은 지금의 아프카니스탄처럼 미래가 보이지 않는 그런 땅이었을 것이다. 그때 한국으로 온 그는 대전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대전 인근 신탄진교회에는 손명걸전도사가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 손명걸전도사와 한방에서 생활하면서 조지 오글이라는 이름대신 오명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3년동안 대전과 공주에서 중고등학생들의 영어교사로 3년을 지내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두 번째 한국을 찾은 것은 1960년이었다. 다시 한국을 찾기까지, 그는 57년 미국으로 돌아가 그 길로 시카고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회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시카고목회그룹은 10명의 전문가들이 주택, 건강, 정치, 경제, 신앙 등 다양한 부문에서 힘을 모아 함께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일을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목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고, 그 운동은 가톨릭 사제들에게서 영향를 받았다. 독일 나치스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세운 강제노동집단에는 가톨릭신부가 여러명 있었다. 신부들은 이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함께 노동하며 고통을 나누고 치유했다. “이들은 나치의 눈을 피해 몰래 들어갔기 때문에 때론 이로 인해 사형을 당한 신부도 수십명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그들의 그 정신과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고 한국에 돌아 왔습니다. 저는 교회가 잘 사는 사람을 그 중심에 두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거리를 없애기 위해 산업선교 실무자들이 직접 공장에 들어가 그들의 마음, 소명, 사회에 대한 생각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런 신학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60년 한국에 다시 돌아온 그는 김종필감독에게 산업선교에 대한 자신의 뜻을 설명하였다. 그의 생각과 뜻을 읽은 김종필감독은 61년 그를 인천으로 파송한다. 여기서 그는 조화순목사를 만났고, 또 조승혁목사와 함께 일했다. 그 이후 74년 12월 14일 한국에서 추방을 당하기까지 그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오명걸목사로 살았다. 한국교회의 산업선교회는 오명걸목사가 효시이다. ●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 올해 다시 한국을 찾은 오명걸목사는 새끼 손가락에는 금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가 한국에서 추방을 당할 때 인혁당 관련자들의 부인들이 그에게 끼워준 반지이다. 추방을 당하던 날 혹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반지를 팔아서 도움이 되라고 건너준 반지였다. 그리고 그 부인들은 조지 오글 목사의 부인 도로시 오글 “우리 남편들이 살아 나올 때까지 계속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무작정 추방을 당하면서 혹시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려움을 위해서 끼워준 반지였다. 그 반지를 낀 채 공안원들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면서 그는 울부짖었다. “하나님! 저 감옥속에 들어가 있는 저 사람들의 죄없음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하나님 저 사람들을 살려 주십시오. 저 사람들이 살아서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은 끝내 살아 나오지 못했다. 오글목사는 이제 그 반지를 죽을 때가지 새끼손가락에서 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74년 추방된 이후 근 30년동안 새끼손가락에서 그 반지를 빼지 못한 것은 국가공권력에 의해 죽지 말아야할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에 항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가슴의 억장이 무너지는 한을 품게 만든 그 권력에 대항하여 그 가슴에 분노와 한을 삭이고 있을 그 가족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는 반지를 뺄수가 없다. “그 가족들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리라.” “평생을 두고 기도하기를 멈추는 죄를 짓지 않게 하옵소서!” 반지를 끼고 있는 동안 그의 이 약속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그의 새끼손가락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 오명걸목사의 반지는 생떼같이 남편과 아버지를 먼저 보내야 했던 그 가족들을 위한 중보기도이다. ● 인혁당재건위 사건과의 만남 1974년 10월 여자들과 아이들이 울면서 오명걸목사를 찾아왔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끌려간 사람들의 부인 8명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명걸목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울면서 도와 달라고 했다. 남편들을 군사법정이 아닌 일반법정에라도 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은 그는 기도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오명걸목사가 용기를 내어 KNCC 목요기도회에서 이 부인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오명걸목사는 목요 기도회에서 부인들의 말을 들어본 결과 그 부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자신의 판단도 함께 붙여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서 오명걸목사는 중앙정보부의 고문조작설을 제기했다. 그때문에 남산(중앙정보부 대공분실)으로 끌려가야했다. 그 남산에서 17시간이나 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조사관들로 부터 오명걸목사에게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들은 공산당이고 공산당을 돕는 너도 공산당이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퍽 다행스럽게도 미국인 선교사의 신분은 중앙정보부 조차도 그를 가혹하게 다루지 못하는 장치가 되었다. 오명걸 목사는 그 이후에도 인혁당재건위사건이 국가의 정보기관과 공안권력에 의해서 고문조작되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억울한 죽음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다녔다. 그리고 군사재판이 아닌 민간재판에서 처음부터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함을 증언하고 다녔다. 그 결과 그는 두 번 더 남산에서 조사를 받았고 결국은 1974년 12월 14일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가 추방당하던 날 경찰차 4대는 인천 그의 집을 에워쌌고 그의 부인 도로시 오글은 네 아이들과 집안에 구금되어 나올수가 없었다. 오명걸목사가 추방을 당한 이후 도로시 오글을 찾아 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전국에서 찾아온 많은 이들이 도로시를 위로하며 오명걸목사의 용기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당시 도로시는 그들 가족이 한국사람들로부터 너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남편을 쫓아낸 권력이 있는 반면에 그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지는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권력의 편이 아닌 오명걸목사의 편에 서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남편이 추방당하고 2개월 후 그의 부인(도로시 오글)과 아이들이 일본으로가서 그를 만나 함께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오명걸목사는 다시 미국인 목사 조지 오글로 돌아갔다. 조지 오글목사, 불의한 권력에 의해 이 땅을 쫓겨났던 그는 추방당한 지 28년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권력이 바뀌고 난 다음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관광차 한국을 다녀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에서 불러서 그가 왔다. 인권상 수상자로 한국은 다시 그를 불렀던 것이다. ● 에필로그 조지 오글목사를 보면서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영성신학자인 헨리 나우휀의 말을 생각한다. 이 복음주의 영성신학자에 시각에 의한다면 조지 오글목사야 말로 긍휼의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타임즈/남재영 부장 veritas@gamly.com
김세윤박사,문자신앙을 타파하라!
김세윤박사,문자신앙을 타파하라! 2002-07-05 13:27:41 read : 1228 김세윤 박사 인터뷰 ▲복음의 정신과 영을 본받아야 행복해 집니다. 김세윤 박사 다음은 7월 2일 김세윤 박사와의 단독 인터뷰 내용이다. ▲'형법적 의'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바울 신학과 '관계적 의'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바울 신학을 통합(integration)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아직 정리되지 않아 구체적인 통합방법을 말할 단계가 아니다. ▲독자들이 많이 궁금해 할 것 같은데 그에 대해 약간이라도 언급해 주신다면. -(현재 바울 신학 연구가들 사이에서) 제일 중요한 이슈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울 신학을 '바울의 소명 사상'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단 '형법적 의'의 차원에서 선언된 칭의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렇게 놀라운 선언을 받아서 은혜의 세계에 진입을 했으면 그속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속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의인의 상태에 머무름으로 관계적 의를 실현하게 된다. (아무 공로 없이 우리를 불러주시고 법정적으로 우리의 의를 선언하셔서 다시금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관계적 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에 따라 행할 때만이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고 그것이 곧 '관계적 의'의 열매가 된다. 즉, 의인됨의 열매는 성령에 따라 행할 때에만 맺어지는 것이다. 칭의와 윤리의 딜레마를 이러한 관점에서 해결하기 위해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한국에 있을 때 여러가지 사정으로 중단하게 되었다. 미국에 가서도 여러가지 잡일이 생겨 논문작성을 미뤄왔다. ▲샌더스가 바울의 칭의론을 축소 해석한 것이 칭의론의 과도한 해석으로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에 오히려 순기능적인 효과를 야기할 수도 있지 않은가. -크리스천의 도덕적, 윤리적 문제는 샌더스 식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고 관계론적인 측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샌더스의 신학은 축소주의이며 개혁신학의 전통을 뒤집어 엎으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신앙을 천박하게 만들고 구원의 은혜성을 약화시킨다. ▲"문자에 집착하면 정신과 영이 죽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 더 효과적으로 접근하고 그것을 더 온전히 전하기 위해 문자를 거스르기도 했다. 그 결과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선포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하셨지만 바울은 헬라에서 자비량으로 전도하면서 무료로 복음을 나누어 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이 지혜를 전해준다고 하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돈을 받고 철학을 가르쳐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는 달리 값없이 복음을 전함으로 바울은 스토아 철학과 복음이 다르다는 인식을 헬라인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킨 것이다. 이렇듯 바울은 복음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문자를 어기기도 했다. 우리도 문자를 고집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가 방해를 받게 된다. 한국 교회에 그러한 현상이 많다. 문자에 잡착하다가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문자적인 신앙을 타파하고 그리스도의 정신과 영성을 온전히 본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복음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또한 성경해석에 대한 올바른 훈련이 있어야 한다. 크리스천투데이 김봉규 기자 bkkim@chtoday.co.kr
김승규 변호사…검사때 기독교 교도소에 매료 설립추진
김승규 변호사…검사때 기독교 교도소에 매료 설립추진 2003-08-19 23:16:45 read : 6312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사랑이 넘치는 기독인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로서,교회 ‘장로’로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법무법인 로고스 공동대표 김승규(59·분당 할렐루야교회 장로) 변호사의 인생 포부다. 김 변호사는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사법시험 12회로 법조계에 입문,서울지검 남부지청장 법무부차관 부산고검장 등 법무부와 검찰 요직을 두루 거친 후 지난 3월 퇴임했다.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인 그는 항상 감사하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선후배 검사들의 신망이 두텁다. 1999년초 대전 법조비리 사건 때 대검 감찰부장으로 선후배 검사들을 조사하는 ‘악역’을 맡기도 했다. 서울지검 형사부장 시절 주먹구구식으로 관리되던 벌금 징수 업무를 전산화했고 2000년 인사때 검찰 간부 인사에서 유력한 서울지검장 후보로 거론됐으나 건강문제를 인사권자에게 미리 알리고 보직을 사양해 화제가 됐다. 김 변호사는 지난해 대검차장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의 2남 홍업씨를 구속 기소했다. 지난 3월 검찰 개혁 인사를 앞두고 후배들을 위해 사표를 제출한 그는 최근 검찰 개혁과 파격 인사가 현안으로 떠오른 탓인지 아쉬움을 갖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는 철저한 크리스천이다. 한국기독교 교도소 이사,사단법인 기독교 세진회 이사,한국 홀리클럽(Holy Club)연합회 이사,애드보켓코리아 감사 등 기독교와 관련된 많은 직함을 갖고 있다. 특히 그는 서울 고검 부장검사 시절 기독교 민영교도소 설립에 매료돼 열과 성을 다했다. 수많은 선후배 검사들과 피의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왔다. 그가 기독교 민영교도소 설립에 관심을 쏟는 것은 기독교 사랑에 기초한 교도소 운영은 좋은 인간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새 정부의 ‘서열 파괴’ 인사에 따라 사시 12∼15회 출신 중 첫 용퇴한 검찰간부다. 변호사로 새 출발한 그는 후배 검사들에게 “피의자들이 깨끗이 승복할 수 있도록 진술 사항을 깊이 새기고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며 인격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진심어린 충고도 잊지 않는다. 모태 신앙인 그는 매주일 설레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간다. ‘당회원’으로,‘장로’로 봉사하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중 3때인가 몸이 아파 한해 휴학을 하고 교회 부흥회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목사님으로부터 구원의 설명을 듣고 ‘아,내가 이미 구원받았구나!’하는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흐르더군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된 첫날이지요.” 이후 그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어 거듭남을 확인했고 공직생활하는 동안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에 불탔다. “법률가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법의 정신을 잘 이해하듯,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정리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요즘 한가지 특별기도 제목을 정했다. 개인 전도의 차원을 뛰어넘어 도시와 지역을 복음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시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성시화 운동의 하나로 추진하는 것이 기독교 민영교도소다. 부인 김미자(55) 권사와의 사이에 3남을 둔 김 변호사는 “기독교 민영교도소가 설립되면 대한민국 복음화의 획기적 전기가 마련되고 재범률도 낮아지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가 특별히 하나님께 받은 소명은 범죄로 물들어 가고 있는 이 땅을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로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꿈꾸는 청년에겐 희망이 있다
꿈꾸는 청년에겐 희망이 있다 2002-03-11 23:06:46 read : 6086 연기자의 수명은 배역을 얼마만큼 제대로 소화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누군가가 배역을 맡는다는 것은 실제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맡는 역할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명배우란 설령 너무나 동떨어지고 감당키 어려운 역할이 주어진다고 해도 이를 잘 소화할 수 있는 연기자를 말한다. “연기자가 대통령이라는 배역을 맡았을 때 비록 그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대통령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에 맞게 연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배우인 것입니다. 분에 넘치는 배역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훌륭히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비결, 그것은 결코 내가 잘나고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배역을 맡기신 하나님의 힘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촌 오지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게 굳이 맡겨진 배역을 따진다면 누가보더라도 비천하고 하잘 것 없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엑스트라가 아닌 주연을 맡은 떳떳한 명배우로 류태영 박사는 우리 앞에 서 있다. 류박사에게는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들의 초청이 이어지고 있다. 1997년 중국방문시 환영하는 소학교 어린이들 미군부대에서 구두닦이 할때 1967년 결혼식 덴마크 외무성 초청으로 유학을 떠나는 날. 어머니, 아내와 갓난 딸 소미 그리고 조카딸이 함께했다 인생의 설계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가난의 굴레, 그러나 신앙으로 생애를 살며 기도로 자녀들을 가르치신 어머니가 있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받은 은혜체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풍우가 몰아쳐도 그를 교회로 이끌었던 이유였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교회에서 기도드리는 것이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야 말로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소중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푸라기보다도 못한 것들을 들어 귀하게 쓰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어떤 역경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지혜였다. “움막같은 집에서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기거하던 좁은 단칸방. 모두가 잠든 후에 비로소 방 한구석에 앉은뱅이 책상을 놓고 공부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졸다가 관솔불에 앞 머리털이 산불처럼 타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동네 어귀에 있는 변전소에 찾아가 밤새도록 켜져 있는 전기불 밑에서 밤새워 공부하다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신문배달원, 아이스케이크 행상, 빨랫비누 장사를 하며 열여덟이란 나이가 되서야 겨우 중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커다란 백지장을 펼쳐 놓고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1주일을 고심한 끝에 인생의 설계도가 완성 되었습니다. 백지장을 펼쳐놓고 줄을 그어 가야할 고속도로를 그린 것입니다. 시간의 고속도로에는 대학입학, 결혼, 직업 등을 기재해 놓았습니다. 막막한 당시 형편에서 어느 하나도 보장되는 일이 없었지만 미래를 채워나갔습니다. 믿음이 있고 노력하면 안되는 일이 어디있겠는가 되새기며 작성한대로 실천하기를 맘먹었습니다.” 실천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일 반성하고 새다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용기가 솟구쳤다. 헐벗음과 굶주림이라는 밑바닥 인생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맡기실 배역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덴마크 현지 신문에 실렸던 류박사 기사 임금님 귀하 서울에 올라와 미군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유학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후 대학생활에서도 유학이라는 말한마디가 언제고 어디에서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매일 기도를 했다. 그리고 믿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반드시 응답을 주시리라 믿었다. 그렇게 새벽기도 하기를 13년. 마침내 응답이 주어졌다. 우리나라 농촌에 대한 논문을 쓰라는 응답.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농촌을 잘살게 하겠노라 다짐했던 부분이고 그 꿈을 따라 지금까지 줄곧 한길만을 달려올 수 있었다. 덴마크의 국민운동에 관한 책을 대한 후 그는 불모의 땅을 비옥한 땅으로 일궈낸 덴마크를 직접 몸으로 느끼기를 소원했다. 갑자기 편지 한통을 썼다. 우리 농촌을 잘살게 하고 싶다고 그러니 나를 초청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디 누구에게 보내야 하는지 몰랐어요. 백과사전을 펼쳐 현재 프레드릭9세가 국왕으로 재임하고 있다고 적혀 있더군요. 바로 수취인에 ‘프레드릭9세 임금님 귀하’라고 써 넣었지요.” 그후 2주일 쯤 지나 편지가 날라왔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당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기로 했다는 것. 국왕의 초청으로 덴마크의 선진 농업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계기는 이처럼 동화같이 이루어졌다. 덴마크 유학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으로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하고 벤구리온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기도의 응답이었다. 결국 인생의 설계도에 따라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다. 이스라엘 라빈 전 총리와 함께 해산의 기쁨 건국대학교 설립자 유석창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류태영 박사는 농촌학습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강의와 농촌방문을 통해 실질적인 개발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후 류 박사는 청와대 농촌발전 담당관실의 실무책임자로서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저는 가난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많은 경험들을 토대로 한국 농촌의 유토피아를 꿈꿔온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와 농촌전문가로 조국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지금도 큰 감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여건을 가진 중국 등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가들에서 류 박사의 명성은 익히 알려져 있어 강연과 초청이 쇄도하고 있다. 자국에서 가장 큰 문제인 농촌 개발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프로젝트를 일깨워 줄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중국정부 관계자들 앞에서 행했던 강연 한 대목.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의식입니다. 어떻게 구두닦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길바닥에서 자도 항상 제 마음은 미래의 꿈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에 서있는 자체가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나에게 이런 혁명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고초와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와 인내를 주시고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류 박사는 증거한다. 태어난 가정환경이나 사회정서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의 흐름과 같은 숙명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류 박사는 올해 일생을 몸담았던 교단을 떠나게 된다. 최근 류 박사는 또다시 도화지를 꺼냈다. 새로운 인생의 설계도를 그리기 위해서다. “제 스스로 미래의 꿈을 잉태하자고 외칩니다. 아기를 임신한 어머니는 반드시 아기를 낳습니다. 미래에 대한 크고 작은 꿈들을 잉태한 사람에게는 일정한 기한이 지나면 반드시 그 꿈을 해산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꿈꾸기 원하는 청년 류태영의 말이다. 신앙계
내과의사 박관 목사
내과의사 박관 목사 2002-04-03 13:15:03 read : 1187 “자,오늘 암송할 성경 구절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말씀입니다. 다섯 번만 외웁시다. 너희의 혼과 영과 몸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15평 크기의 작은 예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20여 명의 성도들이 박관(48세)원장을 따라 입안에서 성경 구절을 주절거린다. 암송이 반복될수록 성경 속의 글자들이 튀어나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두세 번 암송을 하자, 목소리는 점차 커지고 무게가 실린다. 박 원장은 둘러앉은 성도들을 살펴보며 암송 상태 확인에 들어간다. “저기, 김 집사님부터 외워 보실까요?” 여느 교회의 수요예배와 별반 다름없는 이곳은 서울시 중곡동 독일내과의원으로 박 원장의 병원이자 교회이다. 침례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박 원장은 전인치유교회의 담임 목사이기도 하다. 환자들을 마주하면 전형적인 의사이지만, 강단에선 마치 부흥사처럼 예배를 인도한다.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이 암송한 성경 구절을 되뇌는 성도들에게 박 원장은 “성경 암송은 은혜가 됩니다. 말씀을 암송하면 성령의 능력이 임하실 것이에요”라고 권면한다. 암송한 성경 말씀은 평소 박 원장이 강조하는 구절이다. 육체의 질병만 치료하는 의사는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며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치유돼야 함을 강조한다. 보도 블록을 보고 울었던 남자 예수님의 총체적인 치유 사역을 그대로 좇고자 하는 박 원장은 지난 1992년 지금의 자리에 병원을 개업했다. 병원 이름이 말해 주듯 독일 본대학에서 간의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쥔 채 호의호식하며 ‘행복한 날들’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학 중에 만난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감격한 이후 편하게 살 수가 없었다. 3대째 내려오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는 슈바이처 박사의 꿈을 안고 유학을 떠났지만 언어와 문화 차이에서 오는 충격으로 ‘시민성 질환’을 얻었다. 가톨릭 신앙으로 극복해 보려고 발버둥쳤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위궤양과 불면증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간호사가 건네준 로마서 강해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읽고 그의 삶은 일대 전환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로마서 말씀에서 깨어진다고 했던가! 8장 1~2절 말씀 앞에서 그는 모든 고민과 방황에 마침표를 찍었다. 진정 삶에서 자유를 누리며 넘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 한동안은 강의를 듣다가도 ‘열십자 형상’에 십자가를 생각하며 울기도 하고, 길을 가다 보도 블럭의 십자가 모양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렸던 은혜의 시간들을 보냈다. 동시에 그가 앓고 있던 병도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나았다. 육체와 영혼의 치유 병행해야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박 원장은 더 이상 의사가 누릴 수 있는 명예를 추구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결단은 치료 방법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의학적 진단과 동시에 내면의 상처와 갈등을 다루지 않으면 육체의 질병은 완치할 수 없게 됩니다. 내과 질환의 80% 이상이 인간 내면의 문제에서 출발한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 몸과 마음을 하나로 인식하고 종합적으로 치유해야 합니다.” 영혼과 육체의 병행 치료를 추구하는 그에게 현대 의학은 마치 맹장염 환자에게 진통제를 주는 것과 같다. “진통제는 잠시 통증을 완화시키지만 맹장은 터져 버려요. 영적 치유가 병행되지 않으면 육체의 질병은 만성질환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독일내과의원에 하루 내원 환자 수는 100여 명 수준이다. 소화기관 계통과 간장병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박 원장은 이들을 맞아 의학적 진단을 우선한다. 그리고 상담 과정에서 가정 환경, 종교적 상태, 고민 등으로 문진하고 문제 해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한다. 위로하고 같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효과적인 영혼과 육체의 동시 치유 사역이다. 몇 년 전 70세가 넘은 깡마른 할머니 한 분이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진찰 결과, 위암 3기임을 확진했다. 고령이고 너무 쇠약해 수술이나 항암제 치료를 시술할 수 없었다. 의학적 처방에 한계를 느끼고 고통을 덜어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 중에 박 원장은 마음에 부담을 느꼈다. 그 할머니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예수를 소개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할머니는 곧바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 그 후 일상적인 진료를 했는데 할머니의 마음에 평화가 오면서 병세가 호전되고 얼굴에 볼살이 붙기 시작했다. 한달 후 내시경 검사 결과 암세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저는 병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어요. 주님을 영접하고 마음에 기쁨이 찾아드니 면역 세포들이 증가하여 암세포를 죽인 겁니다.” 지난해 박 원장은 교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예수를 영접한 환자들을 교회로 보내야 하는데 그러면 지속적으로 만나 상담하고 양육할 기회가 마련되지 않는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 ‘육체의 고통을 치료하고 영혼의 고통도 치료하는 진정한 의사가 되라’는 영감을 주셔서 교회를 설립했다. “진료할 때는 늘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러나 교회를 설립하고 나서 편하게 환자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성도들도 자유롭게 상담과 기도를 부탁해 와 교회 설립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목회는 치료와 돌봄을 포함한다 박 원장은 자신을 의사라고 부르는 것보다 목사라는 직함이 더 영광스럽단다. “의사는 열심히 공부하면 될 수 있지만, 목사는 공부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소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목사 안에 의사와 교사가 포함된다고 봐요. 목회 영역에 치료 사역, 가르치는 사역, 돌봄의 사역이 있어요. 결국 목회자로서 모든 일을 감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박관 원장은 지금 자신의 사역을 구체화하기 위해 경기도 포천에 ‘전인치유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모든 크리스천 의사들이 목자의 마음으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기를 당부한다. 수요예배 인도를 마치고 땀에 흠뻑 젖은 채 강단을 내려오는 그는 쉰 목소리로 성도들에게 인사한다. “건강만큼은 잘 관리하셔야 합니다.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거든요.” 빛과 소금/ 신상목 기자
뉴질랜드 바이블 칼리지 총장 브라이언 해써웨이/ 2002-05-14
뉴질랜드 바이블 칼리지 총장 브라이언 해써웨이 브라이언 해써웨이(Brian Hathaway) 뉴질랜드 오클랜드대를 졸업하고 중등사범대학과 초등사범대학 등에서 과학을 가르쳤다. 사범대학의 과학과장을 사임한 후, 오클랜드 서부의 테어태투바이블채플(Te Atatu Bible Chapel)에서 풀타임 사역자로 섬겼다. 뉴질랜드는 물론 해외 여러 나라의 교회나 컨퍼런스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주로 사회의 리더십 그룹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그들을 교육하며 격려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99년 5월부터 뉴질랜드바이블칼리지(Bible College of Newzealand)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신앙과 일터를 어떻게 하나로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올해 바이블칼리지 내에 현대기독교연구학교(School of Contemporary Christian Studies)를 설립했다. 가족으로는 아내 노엘린과 네 명의 자녀가 있다. 현재 뉴질랜드의 기독교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뉴질랜드는 국교가 기독교라 국민들이 다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도 있죠. 그러나 주일에 교회에 가고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10%가 채 되지 않습니다. 물론 문화는 크리스천 문화예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문화일 뿐 삶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회나 목사들이 오직 교회 내 문제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뉴질랜드의 많은 크리스천들은 신앙을 일상 생활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어요. 개중에는 교회 출석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이를 지루하게 생각한 나머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떠난 크리스천들 중 다수는 정착지를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어요. 왜 교회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신학교들이 학생들에게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학교가 단지 목사만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학교에서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으니까 교회도 마찬가지가 된 것이죠. 또 다른 원인은 목사들이 너무 바쁘다 보니까 교회에서 목회하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의 영적인 문제나 프로그램들에 대한 고민에만 빠져 있어요. 그들은 주일만 중요한 것처럼 강조하고 평일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평신도들은 \'사회에서 어떻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만, 교회에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인데요.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교회를 돕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얘기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업가들은 무조건 돈을 더 많이 벌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묻게 됩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빛과 소금은 무엇인가?\' 사업가들은 이 사회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죠. 그들은 자신들이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마음은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까요. 이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내가 왜 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사회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회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교회에서의 삶과 일터에서의 삶이 분리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교회에서 적용되었던 영적인 삶의 원칙을 직장과 사업처 속으로까지 끌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몇몇 기독 직장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들은 교회가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으로 되어 직장인 개개인들을 이끌어 주지 못하니까 직장인들 스스로 모여서 그 문제를 풀어 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고민들과 상황은 한국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회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이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뭐라고 말씀하실까\'를 자문해 보는 것입니다. 둘째,\'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질문하십시오. 이런 사회, 이런 직장,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사업가라면 자기의 사업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말입니다. 변호사라면 변호사로서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찾아나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하나님 앞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실 겁니다. 빛과 소금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실 거예요.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본이 되는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를 변화시켜라 그것은 곧 평신도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목사나 선교사만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그분은 우리의 삶이 어떠했나에 대해 물으실 겁니다. 때문에 목사나 모든 크리스천들이 동일한 사명감을 갖고 선교의 책임을 져야 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청지기로서의 능력과 힘을 주셨습니다. 직장인이나 사업가나 전문 직업인이나 주어진 여건 속에서 어떻게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지 그분께 여쭤 봐야 한다는 면에서 누구나 다 동일한 입장에 있어요.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런 사고를 갖고 있지 않으면 항상 영적인 일과 세상적인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어려움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것만 중요하고 세상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옳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사회를 변화시켜야만 합니다. 교회 또한 동일한 생각을 갖고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훈련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에요. 교회가 그러한 일을 감당하려면 교회와 크리스천 개개인이 협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문제에 대해 파악한 후,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비전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놓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줘야 하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직장인들로 하여금 삶 속에서 갖고 있는 문제를 털어 놓고 나누면서 그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상의해야죠. 일하기 위해 창조된 우리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일터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면, 일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까? 그동안 저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첫 번째 이유는 예배이고 두 번째 이유는 교제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에 관한 언급이 창세기의 첫 세 장에는 나오지 않아요. 성경의 시작 부분인 이 곳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어떤 단서도찾아보기 힘들고, 또 교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말할 만한 장면(하나님이 저녁 무렵에 오셔서 동산을 거니신 것)이 잠깐 나옵니다. 물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보면 예배와 교제가 똑같이 중요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죠.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일\'에 대해서는 다섯 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발견이었어요. 이 부분을 가만 보면 하나님도 일을 하시고 또 그것을 매우 즐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Work), 지키게 하시고\"(창 2:15). 저는 \'일하는 것\'이 인간을 창조한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오늘날 우리 일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가능성을 여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컴퓨터, 자동차, 텔레비전, 비행기 등을 창조해 내는 가능성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교실에서 학생들의 가능성이 발휘되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또 의사는 인간 몸의 가능성이 발휘되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며, 공부하는 학생도 그들에게 주어진 그 가능성이 발휘되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주신 가능성이 발휘되도록 그 자녀를 양육하는데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기술자도 하나님의 창조의 가능성이 열리도록 그분과 함께 일하고, 목사도 성도들의 가능성이 발휘되도록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할수록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고 사람들은 일에 지칩니다. 오늘날 자신의 일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 아닌가요? 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을 싫어하고 그것을 지겨운 것으로 여깁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실입니다. 창세기 첫 부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죄의 결과가 하나님의 창조 속으로 들어와 일이 종종\'고통스러운 노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지구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일의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커다란 기계의 부품이 되어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은 보수를 위해 강압적인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일해야 하고, 마지막 한푼까지도 쥐어 짜내려는 주인 밑에서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아니에요. 사탄은 일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왜곡시켰습니다. 하루하루가 반복되면서 일은 그의 영광으로부터 무너져 버렸어요. 이사야 65장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가며 영원히 함께 일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하게 계획하였던 혁신적이고 만족스런 경험의 창조가 될 것입니다. 뉴질랜드바이블칼리지 복음주의적이며 국제적인 학교 1922년 설립된 이래 수많은 기독교 사역자들을 배출한 이 학교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초교파 신학대학이자 사역 훈련 센터다. 캠퍼스는 오클랜드 헨더슨 지역에 있으며, 통신강좌를 통해 크라이스트처치, 더니든, 헉베이 등 뉴질랜드 전지역에서 2,5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현재 뉴질랜드 정부와 호주신학교연합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성경자격증 과정(1년), 신학학사 과정(3년), 석사 과정(2년) 등과 단계별 영어 연수 프로그램이 개설되어 있다. 이 학교의 특징은 복음주의적, 초교파적, 다문화적, 국제적이라는 것. 지난 80년 동안 배출된 수천 명의 졸업생들은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신앙과 일터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현대기독교연구학교(School of Contemporary Christian Studies)를 설립했다. * 홈페이지 www.bcnz.ac.nz * 전화 0064-9-836-7800
대담] 성공적 후임 목회 중인 이영훈 - 고명진 목사
대담] 성공적 후임 목회 중인 이영훈 - 고명진 목사 2009-04-10 11:35:04 read : 6093 ▲이날 대담은 본지 이병왕 편집국장의 사회로 진행됐다.©신현석 명예기자 “조용기ㆍ김장환 목사님의 사랑, 우리에겐 큰 힘” 최근 미국의 한 유명 한인교회가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갈등으로 미국 법정에 서는 일이 발생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렇듯 ‘성공적인 후임 목회’는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본지는 한국교회에 성공적 후임 목회에 대한 롤 모델을 제시하고자 현재 훌륭하게 후임 목회 중인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와 수원중앙침례교회 고명진 목사를 초청, 7일 오후 1시 FGTV 스튜디오를 빌려 특집 대담을 진행했다. 1시간여 진행된 대담의 사회는 이병왕 편집국장이 맡았다. 이영훈 목사와 고명진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와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 원로목사의 후임자로, 교계 뿐 아니라 사회적인 관심 가운데 담임목사직을 이어받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회자의 후임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 영광임에는 틀림없지만, 각각 성공적으로 사역하던 목회지를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두 목회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위에 원로목사님들의 지지와 격려 속에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을 밝혔다. 두 목회자는 후임자 선정 과정에서부터 전임 목회지와의 이별, 담임목사 취임 이후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역까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후임목회지에서 사역하게 될 목회자들을 향한 진심어린 조언을 통해 선교 2세기에 접어드는 한국교회가 평화롭게 선배들의 사역을 계승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두 분 목사님은 ‘조용기ㆍ김장환, 김장환ㆍ조용기’라는 한국교회의 거목이신 두 분 목사님의 리더십을 이어받으셨습니다. 처음 그 두 분의 후임으로 청빙을 받으셨을 때 부담스러우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고명진 목사님께서는 후임 청빙을 받고 몇 차례 고사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사 하신 이유도 이런 부담감 때문이셨습니까. - 고명진 목사 (이하 '고'): 저는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부목사로 11년, 오산침례교회에서 14년에 목회했습니다. 김장환 목사님이 후임결정 2년 전 말씀해 주셨는데, 선뜻 결정이 어려웠습니다. 원로목사님께 말씀을 듣고 기도하겠다고 답했는데 수원중앙침례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후로도 원로목사님이 ‘나는 기도가 끝났는데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오셨고, 결국 2년 반 만에 부족하지만 결정을 하게 됐습니다. 이영훈 목사님께서는 먼저 3인의 후보자로 선정 되신 후에, 투표에 의해 후임자로 확정이 되셨는데 3인의 후보로 올랐을 때의 심정을 포함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영훈 목사 (이하 '이'): 저는 미국에서 LA한인교회를 섬기면서 교회 여러 문제를 정리하고, 교회 성도들이 한마음되서 교회를 부흥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청빙투표가 있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7명 중에서 3명이 선정됐고, 그 중 한사람을 결정하게 됐는데,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투표가 끝난 후 조용기 목사님이 직접 전화하셔서 ‘표를 많이 받았으니 준비하고 들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전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고, 워낙 큰 자리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자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얼떨떨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모든걸 다 주님께 맡기고 오게 됐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너무 크시고 하신일이 많기 때문에 목사님 하신 일을 심부름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심부름꾼의 사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웃음) 어쨌든 그렇게 부담스러운 자리들을 맡으셨습니다. 사실 전임 교회에 계속 머물러 계셨으면 ‘안정적인 목회’를 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 그렇게 힘든 길을 선택하시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신현석 명예기자 - 이 : 저는 조용기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너무 많습니다.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지금까지 주님을 섬겨왔습니다. 1964년 10살 때 순복음교회로 와서, 성령체험을 하고 교회학교부터 시작해 대학부까지 거쳤습니다. 여의도교회에서 학생회장으로, 또 교회학교 교사로 여러 곳에서 봉사를 하면서 결국 신학교가서 주의 종이 되면서 어떡하면 조용기 목사님의 사역이 더 크게 더 귀한 사역이 뿌리를 내리고 많은 분들에게 전해져야 되겠는가 하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국제신학연구원에 왔을 때는 신학연구를 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담임목사) 직분을 맡게 되니까 그 일이 굉장히 크고 어디에 손댈지 모르게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풀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고 : 저 역시 김장환 목사님께 은혜를 많이 입은 목사입니다. 오산침례교회에 부임해 14년 있었습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부름받고 나서도 오산침례교회가 잘 성장하는 교회였기 때문에 참 결정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저와 제 아내, 가족, 친구들과 기도하면서 이 문제는 한 교회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지도력에 관한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교회가 커서 옮기고 탁월한 목사님의 후임이 되는 개인적인 영광 때문에 옮긴다기 보다는 정말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저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일이 있다면 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무언가 지도력 이양의 본을 삼을 만한 좋은 일을 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해 달라고 간구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후임 목회의 경우, 대개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의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 때 담임 목회자를 떠나보내는 교회 성도님들의 마음에는 섭섭함이랄까, 심한 경우 배신감까지 든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고명진 목사님은 오산침례교회에서, 이영훈 목사님은 LA순복음교회에서 담임 목회를 하시던 중 청빙을 받으셨는데, 그 교회 성도님들의 반응은 어떠셨는지요. 그리고 배신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성도님들이 가졌을 섭섭함은 어떻게 ‘케어’하셨는지요. - 이 : 성도님들이 처음에는 굉장히 놀라기도 하고 섭섭해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곧 담임목사가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담임목사로 가는 것에 대해 자부심 가지고 축하해주시고 많은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성도님들과 정이 많이 들었는데 떠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성도님들이 기꺼이 사역 잘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저보다 더 훌륭하고 좋은 후임 목사님을 세워서 절대로 교회가 요동함이나 어려운일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후임선정에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여러 목사님을 모시고 준비하는 가운데 교회에 가장 적합한 좋은 목사님 모셨습니다. 제가 떠난 후 교회가 안정되고 부흥하는 모습에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떠날 때 좋은 후임 목사님을 좋은 분을 정해두면 그런 섭섭함이 다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 고: 저도 거의 동일한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와 함께 사역하던 고 목사가 세계적인 김장환 목사 후임자로 가고 또 전에 있던 교회니까 어떤 분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셨던 분도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 말씀대로 후임자가 좋은 분이 결정되고 그분이 오셔서 사역을 잘 하십니다. 저는 지금도 오산침례교회 후임목회자와 강단을 교류하면서 좋은 관계로 지냅니다. 후임 목회지로 옮겨 오신 후, 전임 목회자의 명성이나 사회적 인지도 때문에 사역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 목회하면서 애로사항은 없으셨는지요. - 고 :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다. 영적인 부담감이야 왜 없겠습니까. 김장환 목사님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하시고 전 세계적으로 다 아는 리더십이기 때문에 영적 부담감은 굉장히 컸습니다. 늘 어떻게 해결할까 주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한 좋은 대답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김장환 목사님께서 한 번도 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핀잔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늘 어디에 가시든지 “고 목사 잘한다”, “우리 목사 잘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어떻게 맘에 들겠습니까. 목사님은 50년 넘게 하셨고, 저는 목회연륜도 짧은데. 그런데도 가시는 데마다 칭찬해주시니까 오히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과 다짐을 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지금까지 할 수 있었고, 원로목사님도 계속 지지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 이 : 말씀을 듣고 보니 훌륭한 원로목사님 덕분에 후임목사들이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저를 절대적으로 사랑해 주시고 후원해주시고 많은 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아 주셨습니다. 늘 제가 부족한 점이 많아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가장 큰 부담이 설교입니다. 50년을 한결같이 원로 목사님이 설교를 전하시고 모든 성도님들이 그 말씀을 듣고 변화되고 치유받고 믿음이 자랐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선다는 것이 부담입니다. 설 때마다 부담이 됩니다. 저는 설교를 늘 모니터 합니다. 지켜보면서 부족한 것이 많은데 하나님 은혜로 매주 지난다고 생각합니다. 조목사님이 저한테는 영적 아버지 같은 분인데, 저를 잘 돌봐 주시고 성도님들도 조목사님 덕분에 저를 잘 봐 주셔서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것 같습니다. - 고 : 한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김장환 목사님께서 두 아드님이 다 목사인데도, 저를 후임자로 결정해 주셨습니다. 저는 입양한 큰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부목사 11년 하는 동안에는 칭찬받아본 적 거의없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되고 나서는 늘 저에게 ‘쉬면서 해라, 운동하라’고 늘 격려해주십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대담 중인 고명진 목사와 이영훈 목사(우)©신현석 명예기자 두 분 목사님께서 후임 목회자로서 부임 초기에 가장 주력한 부분은 무엇이었습니까. - 고 :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 탁월한 리더십 하에 그동안 목양의 꼴을 먹었던 우리 성도들, 특별히 김장환 목사님께 누를 끼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역을 할까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저희 전 세대들은 탁월한 리더십과 순종하는 성도들로 인해 성장한 모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지 못한 저로서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에 기대하시는 부분이 무엇인가를 새로운 영적 비전으로 세우고 마음을 모으고 기도했습니다. 부임 이후 새벽기도를 시작했는데 많은 분들이 기도해줬습니다. ‘본이 되는 교회가 돼야 한다’, ‘후임목사가 잘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마음이 전 성도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이 : 저는 처음 순복음교회에 와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4대째 기독교집안에서 자랐지만 그런 성령의 역사는 알지도 듣지도 못했는데, 순복음교회에서 체험하고 나니 하나님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순복음교회는 하룻밤 자고 깨면 부흥될 정도로 큰 부흥이 있었는데, 제가 2천명 됐을때 출석해 70만 역사가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담임목사로 왔을 때는 순복음교회의 처음 영성을 재현해야겠다는 다짐이 있었습니다. 50년의 시간이 흐르다보니 나이가 들고, 천국가신 분들도 많아서 그때 그 열성적인 성령의 은혜 역사를 많이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첫사랑을 회복하는데 주력을 하고 그 일을 위해 특별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이 참여해주셔서 서대문시절, 여의도 초기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 기뻤습니다. 늘 처음에 부흥하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분 목사님은 전임 목회자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측근으로서, 언론이나 일반 성도들에게 잘 공개되지 않은 그 분들의 모습을 알고 계실 텐데 한 가지씩만 소개 좀 해주시죠. - 이 : 사실 한국에서는 조용기 목사님께서 너무나 크시고, 하신일이 많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지금도 매일 뵈도 늘 어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해외에서 목사님과 식사할 기회가 많을 때 보면 목사님은 항상 소박하고 순수하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할 때 조용기 목사님은 영적인 권위가 있고 카리스마가 있어서 가까이 가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데 슬픈 영화를 보면 잘 우실 정도로 정도 많고 제자들을 많이 아껴 주십니다. 아프리카 같은 해외선교지 나가면 옷을 한 벌만 남기고 다 선교사님들한테 주고 오십니다. 또 선교사 사모님 살짝 불러서 손에 선교비를 쥐어주시기도 하십니다. 저도 유학생활을 할 때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선교지에 있는 제자들이 그런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또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 앞에서 어린애같이 단순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일보, 엘림복지타운, 사랑과행복나눔, 평양심장병원 같은 큰 일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으면 하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 고 : 큰 목사님들은 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김장환 목사님도 굉장히 단순하십니다. 하나님 명령이면 다른 것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하십니다. 너무 말씀드릴게 많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목사님은 배려가 많으십니다. 해외에 가서 같이 방을 쓸 때 새벽에 먼저 일어나셔서 옆 사람이 깰까봐 화장실에서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 찾는 일에 직접 나서는 분이십니다. 전직 대통령이 어려울 때 찾아가신 일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텐데, 권력이 있을 때는 찾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 백담사, 병원, 감옥 수없이 많이 찾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정이 많으시고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두 분은 전임 목회자의 훌륭한 목회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짐도 동시에 지고 있으십니다. 이 짐은 곧 두 분 목사님의 목회철학을 어떻게 접목시켜야 하는 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 목사님이 구상하고 계시는 목회 계획 및 비전을 들었으면 합니다. 고명진 목사님께서는 ‘과연, 그 교회’라고 하는 슬로건을 내 거셨는데,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과연 그 교회’는 어떤 교회며, 그 교회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목회를 하실 계획이신지요. ▲수원중앙침례교회 고명진 목사©신현석 명예기자 - 고 : 수원중앙침례교회보다는 김장환 목사님이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장환 목사님 시무교회로 우리 교회가 많이 알려졌는데, 과연 그 교회인가. ‘과연 그 교회가 되자’는 마음으로 정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 보시기에도 ‘과연 수원중앙침례교회’, ‘과연 그 목사’ ‘과연 그 성도’, ‘과연 그 일’이 되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교회 네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지역사회의 자랑, 한국교회의 긍지, 민족의 소망, 세계의 등불 되는 과연 그 교회’ 입니다. 이것을 조금 줄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사람을 존귀하게, 과연 그 교회’로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영훈 목사님께서는 최근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사회구원을 힘쓰는 교회’를 말씀하신 것으로 아는데, 이를 포함해서 말씀 해 주십시오. - 이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50년 역사가운데 조용기 목사님을 정점으로 78만의 세계최대의 역사를 이뤘고, 한국 사회와 세계 교회 속에 새로운 이정표를 이루기 위해 19개 지교회 독립을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19개 지교회와 본교회가 상호협력하게 됩니다. 또 새로 출범한 사랑과행복나눔 재단을 통해서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초대교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받은 근본적인 이유가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궁핍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가 물량교회로 나간다는 비판이 많은데, 오히려 큰교회가 섬기는 교회가 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해 나아가는 교회가 될 때 이 사회에서 교회를 칭찬하게 되고 한국교회가 한국의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섬기는 교회, 소외된 계층에게 나아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두 분이 생각하시는 ‘본인 목회의 강점’은 무엇입니까. - 이 : 순복음교회하면 성령운동이지 않습니까. 성령운동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성령의 능력, 은사, 그런 부분을 많이 얘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1977년 예수원에서 3주간 지내면서 ‘성령충만이 예수님 닮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순복음의 성령운동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예수님 닮는 모습으로 사회 속에 나타날 때 세상의 아픈 모습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부터 작은 예수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작은예수되기 운동을 펼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예수가 되려고 힘쓴다면 교회분쟁, 교단분쟁이 사라질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교회가 돼서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에 대해 교회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소박한 바람은 작은예수되기 운동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 고 : 특별한 장점이나 강점이 없는 게 제 특징입니다. 그래도 한 가지 있다면 하나님 뜻이라고 확신하면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잘 모르면 누구에게든 물어봅니다. 원로목사님께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여쭤보고, 물어본 것에 대해서는 제 생각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합니다. 두 분 목사님께서 서로의 목회에 대해서, 평가라기보다는 ‘참 저런 점은 잘 한다’, ‘저런 모습은 좀 배워야 겠다’고 느끼시는 점이 있으실 텐데 말씀 좀 해주시죠. - 고 : 뵌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영훈 목사님을 뵈면 진짜 예수님 대하는 것 같습니다. 소박하고 굉장히 소탈하십니다. 이 목사님의 제안으로 40-50대 차세대 젊은 목사님들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이 건강함을 유지하는 것도 이영훈 목사님의 권위적이지 않은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당회장인데도 얼마나 섬기는 마음으로 대하시는지, 정말 예수님 닮은 그 모습을 보여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모든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되십니다. - 이 : 과찬이십니다. 고명진 목사님 뵈면 어디에도 모나지 않은 부드러운 성품이 있습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를 부흥시키는데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사용하신 것 같습니다. 또 폭넓은 대인관계도 큰 장점입니다. 정계, 재계, 교계 어디라도 그 인맥이 다 있습니다. 모든 분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목회사역도 잘 하십니다. 지난번에 보니 교회 어르신들 모시고 성지순례까지 다녀오시는 모습을 봤는데, 부지런하고 섬기는 모습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후임 목회를 하시게 되는 분들에게 조언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 이 : 저희 어머님이 목사님 따님이셨습니다. 늘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마다 주말마다 전화하셔서 “목회는 하나님의 일이야. 늘 겸손하고 기도 많이 해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늘 그 말씀을 마음에 되새깁니다. 사실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엎드려 기도하지 않으면 이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누구든지 간에 목회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엎드려 기도하고 내가 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순복음교회 오늘이 있기 까지 성도님들의 기도해 주셨습니다. 목사님이 성도를 사랑하고 성도가 기도하는 것 중요합니다. 저는 성도들을 만나면 조용기 목사님을 위해 기도 많이 해주시고 제 기도를 조금 나눠달라고 부탁드립니다. 목사와 성도들과의 사랑과 기도, 존경의 관계가 유지된다면 하나님께서 부흥시켜 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 고 : 저도 부모님과 원로목사님으로부터 늘 새겨듣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늘 겸손하라 하나님 앞에 너를 낮추면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말씀입니다. 후임 목회를 하신다면 이런 마음이 중요합니다. 명백히 하나님 뜻에 위배되지 않으면 선임목회자가 하는 일을 계승 발전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급히 서둘지 말고 혹시 마음에 안 들더라도 기다리면 하나님이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꼭 하실 일이면 모든 여건과 분위기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끝으로 지금은 고난주간이고 오는 부활주일에는 한국교회가 하나가 돼 부활절연합예배를 드리는데, 한국교회의 일치를 위해 각 교단과 교파에 바라는 바가 있으면 한 말씀씩 부탁드립니다. 이 :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 <더 내려놓음>을 읽고 굉장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제일 쉬운 것이지만 제일 힘든 것입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이 마음의 결심만 하고 내려놓으면 되는데 알지만 내려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주님 앞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내가’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일치의 어려움이 있고 교파 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훈련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훈련입니다. 목사와 성도, 교회와 교회,교파와 교파간의 관계가 사랑으로 하나돼 한국교회 일치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고 : 그 부분에 대해 감히 뭐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이 목사님 말씀대로 내 아집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낮아져서, 남이 나를 높여 줄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 인요한(John Alderman Linton)/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2010-12-08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 연사 : 인요한(John Alderman Linton)│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주최 : 朴正熙대통령기념사업회 제가 키가 좀 큽니다. 키 큰 사람이 속이 없다고 하는데 한국 속담 틀린 것을 아직 발견 못했습니다.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어르신들 모시고 강의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벌벌 떨립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우리를 잘살게 만든 기반을 닦아주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또 ‘잘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강의 시작하기 전에, 여기 저희 집안을 잘 알고, 저를 도와주신 분을 소개합니다. 삼대가 선교를 했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우리 조상들은 한국을 많이 도왔지만 저는 거꾸로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저에게 도움을 주신 분이 여기 앉아계십니다. 유준 박사님이십니다. 가족사 그리고 한국과의 인연 제가 공부도 잘 못한 사람인데 의과대학에 추천을 해주셔서 제가 연세대학교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더욱 더 친밀감이 가고 그렇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 집안에 대해서 배경설명을 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은 남부입니다. 남북전쟁이 미국에 일어나면서 리 장군(Robert E. Lee`1807~1870)이 백악관에 불려갔어요. 링컨이 리 장군에게 북쪽 군인 총사령관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리 장군이 큰 고심을 했어요. ‘버지니아가 고향인데 버지니아가 어디로 붙을지 모르겠다, 연합에 나갈지 남을지.’ 그래서 대통령께 “제가 제 고향하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5일 만에 버지니아가 남부로 붙기로 결의하자 남부로 말을 타고 들어가, 북부 총사령관 오퍼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남부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이게 역사의 비극이면서도 남북전쟁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요. 사실 링컨도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미국이 강해진 것은 리 장군 때문이에요. 왜냐?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전쟁에서 질 때는 깨끗이 지자! 게릴라전하지 말고 북부가 이겼으니 전쟁을 그만하자.’ 멋있게 남쪽을 다 설득을 해서 조용하게 전쟁을 끝내도록 한 분이 리 장군입니다. 미국이 그때 잃은 병력이 65만 명입니다. 합병증 환자까지 합하면 한 100만 명을 잃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미시시피를 재건하면서 전쟁 끝나고 첫 예산 중 5분의 1이 의족이었습니다. 주 예산의 5분의 1, 그만큼 피해가 컸는데 거기에서 미국이 미국식을 알았어요. 우리가 엄청난 전쟁을 치르면서 거의 65만 명 이상이 죽었는데 여태까지 치른 전쟁사망자를 다 합쳐도 그때 사망자 숫자가 안 됩니다. 그렇게 남북전쟁 때 미국사람이 많이 죽게 되었지요. 어쨌든 그 역사가 끝나고 한국하고 인연을 갖습니다. 시작의 단추는 사실 조금 잘못 끼웠어요. 솔직한 역사적인 얘기를 하자면…. 무슨 얘기냐면 일본하고 을사조약을 해가지고 미국이 스페니쉬와 전쟁(Spanish-American War)으로 필리핀을 갖게 되고 한국을 일본에 맡기는 을사조약이 있었지요. 어쨌든 조금 아름답지 않게 출발을 했는데 미국과 한국의 두 국가가 그렇게 출발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알렌과 언더우드는 북 장로교 출신으로서 한국 땅에 오셔서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을 세웠고, 저희 조상은 1895년에 유진 벨(Eugen Bell)이라는 분이 한국에 도착해서 2년간 언어를 배우고 1897년에 북장로교인들이(전쟁으로 남장로교는 남쪽, 북장로교는 북쪽으로 나누어진 겁니다. 미국 이야기입니다.) “이제 남쪽에 가서 선교를 열심히 해라.”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라도가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동학후세들도 있고 그 골치 아픈 동학사건이 일어난 곳에 가서 선교를 잘해 봐라.” 그래서 저희 진외조부님께서(할머니의 아버지가 됩니다.) 1897년에 나주에 내려가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사실 나주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당시 향교가 강해서…. 처음 목포에 가셔서 학교를 두 개 세웠어요. ‘영흥’하고 ‘정명’을 세우고 그 다음 1900년도 초에 광주에 올라와서 ‘숭일’과 ‘수피아’ 학교를 세우고 저희 집안의 마지막 큰 업적은 저희 할아버지가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대전서부터 전라도 지역선교를 맡게 되고 저희 할머니가 1899년 목포 태생입니다. 아버지가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고 저는 1959년, 태어날 때 예수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전주가 고향은 아니고 순천에 계시던 어머님이 병원에 와서 잠깐 신세만 지고 54년도에 순천에 파송 받았던 우리 부모님하고 같이 저는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전남 순천에서의 어린 시절과 박대통령 그런데 여러분, 지난 50년 동안의 변화로 온 인류가 변했는데, 한국의 변화는 세계변화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한국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많이 변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기 나오면서 정확하게 옛날 기억을 더듬어봤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60년대 초에 어떻게 살았는가 한국에서…. 그걸 여러분들하고 오늘 좀 나누고 좋은 점, 아쉬운 점, 특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느꼈던 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얼마나 가난했냐면 저희 집 주변이 다 초가집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선교부(우리집은 기와집이었지만) 그 주변집들은 다 초가집인데 점심 때 가서 그 마루에(전라도는 좀 따뜻하니까 양지 바른쪽으로 마루가 다 있습니다.) 앉아서 김치하고 고구마를 먹었어요. 근데 제가 철이 없어서 김치하고 고구마가 맛있어서 먹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밥을 못 한 거예요. 점심끼니를 김치하고 고구마만 먹는데 좀 재미도 있었어요. 항상 마루 밑에 강아지가 있고, 고구마껍질을 던지면 제 기억에 강아지가 뛰어 나와서 껍질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받아먹었어요. 근데 아주 너무 너무 형편없었어요. 제가 말 구루마 타고 다닌 것이 기억나요. 말 구루마로 모래, 자갈 같은 건축자재를 옮겼죠. 달구지도 타고 밭농사, 논농사 다 소가 했고 그래서 지금 오는 외국인한테 그 어린 시절을 설명하려면 앞이 콱 막히고 나중에 무슨 얘기를 하냐면 “민속촌에 가시면 그런 거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볼 수 없습니다.”합니다. 그리고 또 저 개인적으로, 우리 아버지가 62년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만 불을 받았습니다. 우리 집안 전 재산이 만 불이었습니다. 그때 한국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늘 뭐라고 말씀들을 하셨는가 하니 한 2년 동안 혼란을 겪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킬 때 “그건 나쁜 혁명이 아니다. 사람들이 안도감을 느낀다. 아이고! 다행이다. 이제 법과 질서를 누군가 잡았기 때문에 이제 됐다.” 그래서 저희 마을뿐만 아니라 저희 아버지가 가진 돈, 그 당시에 만 불을 증권 쪽에 아주 전문가한테 그 돈을 맡겨서…. 결론적으로만 말씀드리면 우리 가족 6명 아이들이(우리 어머님은 12명을 목표로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6명밖에 못 낳았습니다.) 다 교육을 받았고, 저희 아버님이 84년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에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그 돈(약 2억이 남았어요.)을 찾아가지고 미국에 집을 지어가지고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그 결론부터 말씀드리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과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 때문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제일 감사하고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 대한민국을 잘살게 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철이 들고 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전라도에서 그 당시에는 김대중 선생을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빛이 많이 가려졌지만 이제 제가 철이 들어서 그리고 이북을 왕래하면서 그런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북전문가로서 노 전 대통령 독대, “우리가 잘해주어도 북은 변하지 않아…” 여러분 제 사상도 상당히 보수로 많이 변했습니다. 좀 난센스 같지만 최근에 노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제가 노대통령 취임 5일 만에 이북전문가로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이제는 좀 얘기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제가 확인시켜드리는 일입니다. 노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 밤을 새웠어요. ‘무슨 말을 해야 이북에 대해서 이해를 하실까?’ 엄청 고민을 하고 갔습니다. 아침시간에 들어가서 만났는데 제 시간이 돌아와서 제가 뭐라고 말을 했느냐면 ‘긴 얘기를 해 봐야 들을 것 같지 않고 너무 많은 사람들과 만나니까 굉장히 짧게 이야기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노대통령께 말씀드렸습니다. 집에 지체장애아를 키우는 분들께 제가 굉장히 조심스러운데…. “이북의 상황은 집안에 정신박약아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북한사람들이 정신박약아라는 것은 아니고…. 북한사람들에게 제재를 가하자니 가족이고, 때리자니 가족이고, 놔두자니 집안을 엎어버립니다. 상황이 골치 아픕니다. 그러니까 정책을 펴실 때는 5년 정책을 펴시지 말고 10년, 20년 갈 수 있는 아주 단단한 정책을 펴셔야 합니다. 가슴이 뜨거운 정책을 펴시면 안 됩니다. 냉정한 이성으로 정책을 펴십시오.” 이렇게 제가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제 얘기를 딱 10분 듣고 질문을 하나 하는 거예요. “우리가 잘하면 그이들도 우리에게 잘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잘하면 핵도 포기하고···” 그래서 “그때 53년도에 미군이 38선에서 그만둔 것은, 미국 사람들이 카우보이 정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만두게 된 까닭은 러시아가 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하고 핵전쟁이 붙을까봐…. 중공군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밀고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거기서 주춤한 것은 미국 사람들이 러시아의 핵 앞에서 약간 주춤했습니다. 이북사람들이 그것을 다 봤는데 핵을 포기해요? 그 사람들 핵 포기 안 합니다. 절대로 포기 안 합니다. 숨어서 몰래라도 핵을 만듭니다.”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전라도에서 보냈는데 전라도 촌놈이 거기서 조금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아마 여러분들은 실수라고 생각 안 하실 겁니다. “대통령님! 그게 문제가 아니고 핵은 만들 겁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우리 남쪽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이들한테 잘해 주면 그이들도 우리한테 잘할 거라는 그런 오해, 그런 잘못된 생각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분 얼굴이 벌겋게 변하고 누구를 부르더니 담배를 갖다달라고 하더라고요. ‘스트레스를 저 때문에 굉장히 많이 받아서 저렇구나’, 그날 저는 혹시 한국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하고 굉장히 고민을 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미국의 “Kitchen Stove”와 한국의 온돌문화는 가치관의 기본 <박정희 대통령, 프로레슬러 장영철 선수 접견(1964. 2. 25)> 여러분 루즈벨트 대통령이 공황이 일어나고 나서 미국사람들을 다시 일으켰던 것은 무슨 사상이었느냐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이다? 결국은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새마을 사업을 일으키면서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 여러 가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도 있지만 그 생각과 그 사상이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조금 걱정되는 부분을 오늘 몇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은 70년 전에, 저희 아버지가 공황 때 살았는데요,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을 지켜준 것은 가족의 힘이었습니다. 가족이 국력이었습니다. 어디서 미국사람들이 그런 훈련을 받고 미국이 튼튼해졌냐 하면요. 미국의 “Kitchen Stove”였습니다. 서부시대에는 돈이 많지 않았어요. 미국 방들의 온도는 대략 5도밖에 되지 않았어요. 모두 밤에 잠자려고 하면 두꺼운 이불…. 지금 냉장고 온도가 5도입니다. 따뜻한 방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부엌난로에서 무슨 교육을 배웠느냐면, 노인들이 가르쳤어요. 숙제도 부엌난로 앞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시고 엄마 아버지도 계시고 그래서 미국의 힘은요 “Kitchen Stove!? 부엌난로 앞에서 미국사람들이 강해진 거예요. 그게 가족의 힘입니다. 가치관입니다. 제가 좀 주제 넘는 얘기지만요. 유준 박사님 사랑받고 좋은 학교 나와서 또 제일 젊은 부서장으로 왔습니다. 제가 지금 19년째입니다.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로 30대에 왔습니다. 지금 나이가 만 50입니다. 일하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경험들을 할 수 있었느냐 하면요. 정말 이런 기회가 저한테 주어졌는데 클린턴도 제가 만났어요. 부시하고도 대화 나눴어요. 또 카터하고는 아산에 내려가서 없는 사람들 ‘사랑의 집짓기운동’하면서 일주일 동안 같이 지냈어요. 노대통령도 만났고, 전에 김대중 대통령도 여러 차례 만났고, 이명박 대통령도 만나고 제가 자랑하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요. 제가 교육받은 사람으로 저를 만들어 준 그곳을 여러분들한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곳이 어디였느냐면 전라남도 순천의 안방 아랫목 교육이었습니다. 학교교육의 얘기가 아닙니다. 겨울 추울 때 나무로 혹은 낙엽으로 군불 떼고 들어앉아서 교육 받았던 것…. 그러면 어른들이 우리한테 얘기해 줘요. ‘여수·순천 사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6.25는 어땠다. 과거에 호랑이가 있었다. 언제 심고 언제 걷고….’ 이런 걸 다 우리한테 가르쳐 줬어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런 건 돼, 인간의 됨됨이는 이렇게 하면 돼. 이거는 안 돼’ 이걸 가르쳐줬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런데 미국의 가정은 벌써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도 그대로 따라 해요. 결혼한 사람의 50%가 헤어져요. 못 참아서 무너지는 이유가 잘살기 때문에 그래요. 중앙난방 때문에 그래요. 이제 노인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인간교육을 받을 장소가 없어요. 그래서 무서운 말로 ‘방콕’이라고 하죠. ‘방에 들어가서 콕 박힌다.’ 다 아이들이 인터넷 앞에 가고 텔레비전 앞에 가고 정말 무섭습니다. 온돌방 문화가 저한테 아주 정말 튼튼한 교육장소가 됐고, 나중에 유준 박사님 같은 분이 저를 도와주셔서 저는 특혜를 받고 입학을 하고, 또 공부를 마치고 미국 가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들어와서 당당하게 누구든지 만날 수 있는 것은 그 소중한, 어렸을 때 그 교육입니다. 박정희, 근로자, 어머니… 남한을 일으킨 3대 힘 우리 자신들을 좀 비춰봅시다. 제가 북한얘기를 좀 섞어가면서 할 거예요. 왜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느냐면 북한이 워낙 못 살고 워낙 어렵기 때문에…. 38선으로 나눠진 남쪽은 세계에서 10대 경제 안에 들어가고 북쪽은 어떻게 된 걸까? 개성에서 평양으로 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차가 아주 굉장히 시끄러웠어요. 막 ‘부앙’ 떨리고 그러는데 안내원이 “남조선이 우리보다 좀 앞선 것을 얘기해보라우!” 그러더라고요 이북말로…. 그래서 ‘이거 또 무슨 정보원 아닌가, 보위원 아닌가?’ 하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제 저도 전라도 깡패기질이 있습니다. 우리 고향이 순천극장파도 있고, 시민극장파도 있고 복잡해요. 파도 많아요. 그래서 이 친구보고 “정말 얘기해 보라우?” 그러니까 이 친구가 “얘기해보라우!”, ‘좋다. 무엇이든 물어봐라, 다 이야기해주마.’ 이런 심정을 가지고 이 사람한테 40분을 강의를 했어요. “첫째, 우리가 잘사는 까닭은 박정희 때문이다. 박정희 다음은 당신 정주영 알지 않느냐? 정주영만 있는 게 아니었고 거기 이병철도 있었다. 박태준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박정희로부터 특명을 받고 특혜를 받고 엄청난 공장들을 세우고 국가를 발전시켰다. 우리 어렸을 때는 나는 전라도에서 컸기 때문에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너무 너무 너무 잘 몰랐다. 박정희가 위대한 사람이었다. 중국이 오늘날 잘살게 된 !! 孤 우리보다 박정희를 공부했기 때문에 저렇게 잘산다. 중국도, 싱가포르 이광요도 박정희사상을 배운 사람들이다. 박정희는 위대한 사람이다. 뭐 인권문제 가지고 따지는 사람이 있는데 기본 생계가 보장되어야 인권도 논할 수 있는 거다. 남조선에서 보릿고개를 없애 준 사람, 그게 박정희다.” “두 번째, 잘살게 된 까닭은 남쪽에 있는 근로자들 때문이다. 구로공단에서 16시간씩 일했다. 자본주의(이 사람은 공산주의자예요. 공산주의자한테 설명하려면 기본부터 얘기해야 돼요.)에서 잘 살려면 돈을 모아야 된다. 돈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돈을 모으기 위해서 16시간씩 공장을 돌리고 심지어 남조선 여자들이 머리카락까지 팔았다.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다.” 맨 마지막에 “세 번째, 남조선이 잘사는 이유는 한국의 여성들 때문이다. 근면·절약정신. 당신 한국여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아냐?” 그건 공감하더라고요. “북쪽여자들도 대단합니다.” 그래서 “그 여자들이 근면·절약 정신교육. 이런 걸 우선시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제가 “그것이 한강의 기적이다. 박정희와 재벌 총수들, 근로자들의 헌신적인 힘! 희생! 세 번째 여자들! 우리 어머님들 때문에 잘산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이 양반이 뭐 좀 시큰둥해요. “줄 잘 섰디뭐?”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거 무슨 얘기요?” 난 못 알아들었어요. “남조선 아이들은 미국 뒤에 줄섰고, 우리는 소비에트 러시아 뒤에 줄 서가지고 이렇게 돼버렸다.” 중국 얘기는 하지도 안합디다. 그래서 내가 그 자보고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필리핀은 미국 뒤에 백 년 전에 줄을 섰는데 왜 이렇게 못살죠?” 박수 안 칩니까?(웃음) 한국인들 이제는 타협을 배워야 할 때 여러분. 박정희 대통령이, 또 한국 민족의 우수성이 없었다면 기적을 못 이뤄냈을 겁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아부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말합니다. 미국에 이민가면 한국 사람들이 1년이면 80% 이상이 새 차를 사요. 5년이면 80% 이상이 새 집을 마련해요. 미국 사람들은 30년이 돼도 그걸 못해요. 대단한 일입니다. 그게 어떻게 된고 하니, 제가 무슨 마음으로 미국을 갔냐면 제가 굉장히 가난했어요. 84년도에 우리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제가 의과대학 2학년 때예요. 가족회의를 했는데 “더 이상 아무리 어려워도 엄마가 가진 것을 더 쓰면 안 되겠다. 다 스스로 해결해라. 이제 끝이다.” 그래서 뉴욕을 들어갔는데 뉴욕이 얼마나 어려웠느냐면 할렘에 가서 살았습니다. 밤으로 창밖에서 총격전이 일어나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또 뭐를 깨달았느냐면 법과 질서가 얼마나 중요하냐? 엄청 중요한 겁니다.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언제 내 와이프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아이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그런 환경 속에서 한인교회를 나갔는데 한인 전라도 아주머니한테 방법을 들었어요. 영어로 융자라는 것이 “mortgage”죠. 발음하기 힘든 단어예요. ‘r’ 때문에. 우리는 ‘R’하고 ‘L’하고 ‘ㄹ’하나로 합쳐서 발음하잖아요. 좀 힘들죠.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나한테 뭐라고 하냐면 “집사는 거 일도 아니여~! 그거 돈 좀(전라도 말로) 모타 갖고 그냥 은행에 가서 모가지 대면 돼! 모가지!” 그런데 지금까지 들어본 얘기 중에 가장 진리예요. “mortgage” 모기지를 이 할머니가 “모가지”로 알아들었는데 은행이 내 목을 잡고 있으니까 모가지라는 건 확실해요. 하여튼 미국에 이민 간 할머니조차도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유태민족은 그렇게 못해요. 불가능해요. 제가 이제 조금 조심스럽게 여러분들한테 좀 몇 가지 비판을 하려고 해요. 좋은 얘기 많이 했죠? 나쁜 얘기 좀 해도 되겠죠? 외국인들이 제 사무실에 진료 받으러 오면 “Korean들이 danger(위험)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전불감증, 그것은 다 나쁜 것이 아니다.” 고속성장할 때 자본주의에서 가장 돈을 빨리 벌고 일어서는 방법은 어음을 여기서 끌어서 저기 막고 오늘만 어떻게 넘기면 내일은 돈 버는 거거든요. 웃으면서 제가 “그건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은 유전인자에 안전이라는 것은 빠져버리고 없어져버렸다.” 좀 성급하죠? 그 다음에 국회니 어디 회의를 해 보면 영어로 “compromise” 타협을 잘 못해요. 참 너무 너무 가슴 아픈 때가 많아요. 미국이 생길 때 한 쪽에서는 주당대표 찍자고 하지요. 한 쪽에서는 인구비례로 대표를 세우자! 싸우다 싸우다 상원하고 하원이 생겼어요. 상원에서는 주대표제, 하원에서는 인구대표제 이것이 어떤 대표적인 미국의 타협국회문화입니다. 타협을 배워야 돼요. 지금 한국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모든 사람들이 소모를 하고 있어요. 성숙하면 타협을 해야 돼요. 타협하는 것이 서로 이기는 것이지 서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니에요.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돼요.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없는 점 아쉬워 그리고 잘난 사람을 끌어내리는 데 또 소질이 있어요. 링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보다 백 배 더 독재했습니다. 신문사 300개 문 닫았어요. 주의회를 재판도 안하고 연금을 시켰어요. 대법원장 불러 가지고 “당신 까불면 감옥에 넣어버리겠다!” 남북이 나눠지고 전쟁이 날 것 같으니까 링컨조차도 그런 극단의 처방을 냈어요.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기념관이 없어요. 이거 바뀌어야 됩니다. 미국사람들은 링컨이 잘못한 부분은 땅속에 묻어버렸어요. 나타나지도 않아요. 방문해 보셨죠? 워싱턴 링컨기념관에 가보면 링컨이 예수님 다음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되어 있어요. 아쉽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누가 업적을 냈을 때, 이순신장군 어떻게 했어요? 서울에 돌아와 보니까 왕이 감옥에 넣어 버렸어요. 금속활자가 서양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을 앞섰어요. 200년을 앞섰는데 백과사전에 보니까 흐지부지 돼버렸어요. 발견은 200년 먼저 했는데 아마도 금속활자를 못 만든 사람들이 금속활자 만든 사람을 암매장시키지 않았을까, 그렇죠? 사촌이 땅을 사면 유태인들은 잔치를 벌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세력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에 배 아프기는커녕 잔치를 벌여야 될 일이에요. 남 잘 된 것을 축복해 주고 축하해 주고 그런 문화로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최근에 제가 와서 느낀 것은…. 김대통령 시절에 그 분이 저한테 물었어요. 문화개방을 하려고 하는데 “성문화가 들어오지 않겠느냐? 서양의 헐리웃이 우리를 점령하지 않느냐?”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냐면 “걱정을 하지 마세요. 한국문화 튼튼합니다. 절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지난 봄 터키의 한 가게에서 콜라를 사려고 하는데 아줌마가 계산하러 나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왜 이렇게 안 나오는가 했더니 대한민국 사극을 옹기종기 앉아서 보고 있더라고요. 터키말로 어쩌고저쩌고 해서 보니까 우리 사극이에요. 이란에서도 한국 사극이 최고 인기라고 합니다. 그것이 한류문화입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걱정하는 것은 개방에 있어서 이제는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그런 시대는 지났고 무한경쟁시대에 걱정할 것 없는데 약간의 “신대원군 끼”가 있어요. 저도 세브란스에서 훈련을 받고 그렇게 공부 잘 못하고 해서 꼴등하다시피 했는데 미국에 가서 세브란스에서 교육받은 것 가지고 나가니까 제가 중간이 아니라 우수한 쪽에 들어갔어요. 그게 세브란스 교육이에요. 나가서 힘을 겨뤄보니까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좀 교만하게 들려서…. 박정희 어른이 기초를 닦은 대한민국의 희망 희망을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 항상 대한민국의 희망을 얘기하면 이상하게 박정희 어른으로 또 돌아와요. 왜냐하면 기반입니다. 기초입니다. 그것을 일찍 깔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희망은 조선사업입니다. LNG선을 영하70도, 그 액체 LNG를 보관할 수 있는 조선소 기술이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최고입니다. 1위예요. 특허가 있어서 흉내도 못 내요. 극비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포항제철에서 박태준의 후배들이 지금 철을 만들어내는데 전세계적으로 거치는 코크스(Cokes)라는 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철을 만듭니다. 아무리 철 값이 떨어져도 생산능력이 있고 수익이 남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IT산업. 전 세계에서 고속인터넷이 제일 완벽하게 깔린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게 제 마지막 비판이자 칭찬입니다. 과소평가입니다. 왜 이렇게 우리자신을 과소평가하는지, 과소평가할 것도 있지만 자랑할 것도 많습니다. 삼성전자가 지난 5년 동안에 소니(Sony)를 앞섰는데 최대 10년을 앞섰답니다. 가면 갈수록 격차가 마라톤처럼 소니는 출발점에 가있고 삼성은 지금 마라톤의 끝을 뛰고 있습니다. 엄청 앞섰습니다. 삼성, 대단한 기업입니다. 누가 만들었죠? 기아자동차가 미국의 최악 불황일 때 최악의 지난 1년 동안 미국자동차 시장점유율을 6% 올렸습니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제 연금을 미국 쪽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제도가 있는데 금융위기에 미국이 거덜 난 것 같아서 한참 심사숙고하다가 우리 아버지하고 똑같은 결정을 내려서 ‘연금을 여기서 받고 여기서 죽어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북한의 실상 얘기가 너무 길어지면 재미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여러분한테 이북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선택을 잘못해 가지고 이북이 어떻게 저렇게 망가졌는지…. 이북이 저렇게 살 필요가 없어요. 전쟁 전에는 평양이 서울보다 더 잘 살았다고 그래요. 전기도 남아돌아가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는지…. 재미난 것은 인권을 노리면서 김일성이 이렇게 나왔어요. “머슴과 지주를 없애겠다.” 이게 좀 조심스러운 말이고 내가 총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열린사회예요. 할 말은 하고 죽어야 되겠어요. 그 사회는 머슴과 지주가 당원하고 인민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97%가 소위 인민입니다. 그런데 인민은 농노입니다. 그저 협동농장에서 죽어라 일해가지고 그렇게 못 살아요. 3%가 소위 그 사람들이 없애겠다는 지주 쪽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지주는 머슴한테 선을 더 베풀었어요. 먹여 살렸잖아요 최소한. 그런데 먹여 살리지도 못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북 비판할 때 그거 꼭 나눠서 욕하세요. 97%는 죄가 없어요. 제가 15년 동안 스물 몇 번을 다니면서 정말 답이 안 나오고 그 부패한 관료들하고 일을 하면서 아주 질려 버렸어요. 정말 희망이 없어요. 그러나 ‘다 굶어죽어도 싸다’, 이건 심한 말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봉건시대로 간 겁니다. 300년 뒷걸음 해버렸고 하루가 갈수록, 하루가 가면 우리는 일주일 앞서고 북한은 일주일 뒤처집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통일이 아쉬운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산가족! 지금 나이들이 많아요. 이산가족들이 그 유일한 인맥이에요. 통일이 빨리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맥 때문이지 이산가족만 없었으면 그렇게 급하지도 않습니다. 이산가족을 볼 때 꼭 죄를 지은 것 같아서 통일이 빨리 돼야 되겠다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집사람이 중국으로 엘리트 북한의사들을 데리고 나와서 교육을 시켰어요. 평양에 있는…. 최고 3일 정도 교육받다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임플란트 교정치과에서 제일 첨단을 가르치는데 한 3일 지나니까 “이런 것 가르치지 마세요. 우리는 마취할 시약도 없는데 이런 것 배워 봐야 머리만 아픕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28개의 뇌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깜짝 놀랐답니다. 도장을 28군데를 받았대요. 무슨 뇌물이 필요하냐? 그 뇌물이 뭔지 몰라도 돈이 많이 들 것 같고 당황하지 않아요? 여러분 한번 맞춰 보세요. 뭘 요구했을 것 같아요? 돈? 선물? 유에스비(USB:컴퓨터 이동식 저장장치)입니다. “컴퓨터에 꽂는 장치 용량 제일 많은 것에 남조선 사극을 좀 담아 달라. 최대한 가능하다면 지난 것까지도 담아 달라. 최신 것.”, “이거 가지고 가다가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총살 아니냐?” 그랬더니 “아~ 일 없습니다. 이거 가지고 가서 지우고 들어가서 파일을 복구시키면 돼요.” 들어가서 지우고 조작하면 어떻게 또 나온대요. 그!! 니까 세관 통과할 때 누가 보면 없는 걸로 되어 있고…. 그래가지고 거기에 있는 고관들한테 최고 인기선물입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 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2003년도 쯤 되는데…. 무쏘는 사고 1년 반 만에 폐차를 시켰어요. 견디지를 못했어요. 갤로퍼 수명이 3년이에요. 그런데 어디를 갔느냐면 원산, 함흥, 김책, 청진, 단천, 함경남도의 가장 북부에 가면 단천이 있습니다. 단천휴게소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는데 그 다음 날 새벽에 청진까지 한번 가보자 했더니 열 몇 시간이 걸린대요. 아마 한국 같으면 고속도로로 한 두 시간 걸릴 거예요. 그래서 단천에서 김책까지 가는데 혼이 났습니다. 비포장도로 마천령 고개를 넘고…. 함경남도와 북도 사이에 일제시대 때 길이 그대로예요. 변한 것 하나도 없어요. 그래가지고 들어가는데 이북호텔은 평양을 떠나면 정말 지내기가 힘듭니다. 최고급 호텔, ‘청진 관광 려관’에 도착을 했어요. 도착을 해가지고 우리 형님은 가서 항상 말하는 게 있어요. “우리는 남의 돈을 모금해 가지고 오니까 제일 싼 방 주세요.” 그러면 그 쪽 얘기는 항상 똑같아요. “3등실 돈 가지고 일등실에서 주무세요.” 호텔 선임이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위대한 장군님이 주무셨던 방에 가서 우리 단장은 자라.” 그래서 제가 호기심에 갔더니 몇 월 며칠 위대한 장군님이 거기서 주무셨답니다. 다음 제가 뭐가 급했냐면요. 여러분한테 이 얘기를 해야 제 머리로만 대화가 가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도 대화가 갈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제가 가서 뭘 했느냐면 목욕을 하고 싶어요. 비포장도로로만 열 몇 시간을 달렸으니 머리에다가 흙을 한 삽 올려놓은 것 같아요. 그래서 프런트에 가서 뭐를 제일 고민했는지 아세요? 평양 밖의 좀 후진 호텔은 이틀 걸러 한 번밖에 더운물을 안 쏴줘요. 십 분씩 이틀에 한 번밖에 안 쏴줘요. 더운물을 ‘쏴준다’고 그래요. ‘혹시 이 호텔이 격일이 아닌가?’ 하고 고민을 한 거예요. 오늘 안 쏴주는 날일까 봐. 그래서 프런트에 가서 “나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더운물…” 더운물 말 딱 나오니까 “우리 십 분씩 쏴주겠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아주 작은 것도 고마워요. 그래서 호텔방에 올라와서 7시 5분 전부터 옷 다 벗고 목욕탕 앞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세 가지 장비가 필요해요. 바케쓰가 하나 있어야 돼요. 그걸 목욕탕 속에 잘 빠트려야 돼요. 사회주의 국가는요, 목욕통 청소를 안 해요. 밑에 진흙이 좀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찬물을 받아놓고, 그거는 화장실용 물이거든요. 그걸 슬그머니 !! 幌려 놓고 그 다음 미리 빠트려놨어요. 그 다음에 세숫대야 하나 놓고 바가지 갖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영락없이 딱 정각이 되면 물이 나와요. ‘퀄퀄퀄퀄’하고 물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걸 또 빨리 받아내야 합니다. 왜? 녹물이에요. 관이 오래됐거든요. 그 다음에 더운물 갖고 목욕을 시작했는데 여러분은 거짓말 같으실 텐데요. 거짓말 아닙니다. 갑자기 세상이 새까만 거예요. 정전이 된 겁니다. 온 호텔방을 기어 다니며 배낭 속에 플래시를 찾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거 찾는데 한 3분 걸렸어요. 여러 번 찾았어요. 찾아가지고 왔는데 처음에 3분 보냈죠, 찾는데 3분 보냈죠, 그래서 한 3분밖에 안 남았어요. 딱 목욕탕 앞에 갔는데 ‘전두환 아버지 감사합니다.’ 왜 갑자기 전두환 얘기가 나오느냐면 제가 광주항쟁에서 통역한 사람이에요. 하루 통역한 게 화근이 되어 가지고 아주 나쁜 사람으로 되어 있었어요 5공화국 때. 그래서 제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제가 불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병영훈련을 자원해서 갔어요. 학생 병영훈련을 가서 열심히 9박 10일 동안 산을 뛰어 다니고 총도 쏘고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그 병영훈련에서 뭘 배웠는고 하니 ‘3분 목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3분 목욕’에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해봤고 그래서 ‘전두환 아버지 감사합니다’ ‘3분 목욕’을 가르쳐줬으니까. 그래서 거기서 3분 목욕을 하고 걸어 나오는데 ‘청진 시민 여러분 저는 3분 목욕을 해냈습니다.’ 걸음이 팔자걸음이에요. 소중한 이 국가를 잘 지켜야 여러분 제가 이 얘기하러 온 거 아니에요. 3주 후에 연희동에 공중목욕탕이 있어요. 3천 5백 원에서 4천 원으로 올랐다가 다시 4천 5백 원. 지금 다시 4천 원으로 내렸습니다. 거기 들어갔는데 아주 불이 훤하더라고요. 갑자기 청진 생각이 나는 거예요. 찬물도 퀄퀄 나오고 더운물도 퀄퀄 나오고…. 제가 벽을 보고 혼자서 울기 시작했어요. 너무 너무 고마워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요. 마음껏 목욕하는 거 한 번도 고맙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냥 눈물이 나는 거예요. 혹시 노인들이 볼까봐 얼굴에다가 샤워를 끼얹고 그랬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때도 안 울었어요. 놀래가지고…. 근데 거기서 펑펑 우는데 ‘아! 이것이,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거구나’ 제가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소중한 메시지는 박정희 대통령이 깔아놓은 바탕에 대단한 국가를 세우고, 우리가 가진 것이 엄청 많아요. 우리 다 재벌 같이 삽니다. 여러분들이 손자손녀, 여러분 자녀한테 다 얘기해야 됩니다. 여행갈 수 있는 것, 자기차 운전하고 할 수 있는 것, 친구 만날 수 있는 것, 가서 통닭하고 생맥주 마실 수 있다는 것, 따뜻한 방에서 자는 것, 여름에는 다 에어컨 켜고 지내는 것, 여러분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이 국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얻은 것이 많은데 우리가 잘 지켜나가야 됩니다. 연사약력 1959년 12월 8일 생 국적 미국 1980∼1982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의예과 수료 1987.2.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2000.8.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 2003.8.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1987∼1988 미국 뉴욕주 Flushing Hospital 소아과 수련의 과정 수련 1988∼1991 미국 뉴욕주 Catholic Medical Center of Brooklyn Queens 가정의학과 수련의 과정 이수 1991∼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부교수 1991∼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소 소장 1992∼현재 재단법인 순천기독결핵재활원 이사 1996∼현재 대전 국제학교 이사 1997∼현재 대한항공의료자문위원 2005∼현재 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 대외협력이사 2007∼현재 국가청렴위원회 위원 2007∼현재 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2007∼현재 국가이미지개발위원회 위원 수상 1996.3.2. 내무부장관 공로상 1998.4.7.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장 2002.12.24. 대통령 표창장 2005.10. 국민훈장 목련장 자격 면허 1987.2. 대한민국 의사 면허 - 1987년 1988.7 미국 뉴욕주 의사면허 - 1989년 저서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 (2006, 생각의 나무)
대형 교회가 한국 교회에 진 빚을 갚을 차례다
대형 교회가 한국 교회에 진 빚을 갚을 차례다 2002-06-01 20:56:30 read : 1213 김병선 목사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강원대 경영학과, 총신대 신대원, 동서선교연구개발원, 영국 웨일즈복음주의신학대를 수료했다. 한국 IVF 간사를 역임하고, 인도네시아 주재 선교사로 14년 간 사역했다. 1998년 5월부터 서울 내수동교회 담임목회자로 사역하면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총무로 일하고 있다. 교인들에게 떠남을 강조한다는데, 분명한 목회관이 있을 것 같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 전파를 통해 새신자를 맞아(evangelism), 양육하여 예수의 제자로 삼고(discipleship), 필요한 곳에 보내 섬기게 하는 일꾼을 나눠주는 공동체(mission)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내어 섬기는 것을 강조했다. 새신자를 맞는 것과 제자 삼는 것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 목회 차원에서 둘 다 그 중요성은 동일하다. 떠나기 위해 먼저 예수의 제자, 즉 체계적인 양육과 함께 가는 곳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 수평 이동은 심각한 수준이다. 원인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통계에 따르면, 7명 중 1명이 1년 내에 교회를 옮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6명 중 1명은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신앙 생활을 한다. 잦은 주거 이동을 배제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현대인들은 지쳐 있다. 교회에서만큼은 편히 쉬고 싶어한다. 정체성을 숨기고 부담 없이 신앙 생활하며, 봉사에 대한 어떤 강요도 받고 싶지 않은 게 현실이다. 바람직한 이유라면 좀더 좋은 예배 환경과 양육 체계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적이다. 주님 나라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겠다는 마음이 없다. 십자가를 지는 결단이 부족한 것이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다. 또 젊은 그룹은 철새와 같다. 어른들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약해 교제권이 형성되면 잘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높기 때문에 더 새로운 것,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쉽게 이동한다. 내수동교회도 수평 이동에 자유롭지 않다고 보는데. 한국 교회의 정체 및 마이너스 성장은 결국 전도를 통한 교인보다 다른 교회, 다시 말해 작은 교회에서 온 교인이 많다는 것을 말해 준다. 내수동교회도 수평 이동에 자유롭지 않은데, 특히 청년 대학부가 그렇다. 서울로 진학을 하거나 직장 때문에 옮기는 이들은 어쩔 수 없지만, 문제는 서울 시내에서도 상당수가 청년 대학부로 옮겨온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필요한 곳에 보내어 섬기게 하는 일꾼을 나눠주는 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양육해 달라고 무언의 부탁을 한 작은 교회들에게 일꾼을 나눠줄 책임이 있다. 샛강이 살아야 큰 강이 산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 적용되는 진리다. 보낸다는 개념은 성도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어떤 목회자가 보내고 싶겠는가. 나 역시 잘 양육된 신실한 사람 하나가 절실한 목회자다. 그래도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강조한다. 한국 교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게 안타깝다. 우리 교회만 하나님 나라가 아니지 않은가? 한 교회의 부흥이 하나님 나라의 부흥은 아니다. 주위의 교회에 피해를 주면서 자기 교회를 성장시키려 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온 몸이 골고루 발달해야 건강한 것처럼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도들이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고 있다. 작은 교회도 문제는 있다. 여러 가지 일에 분주하다 보면 목회자와 성도들은 영적 고갈을 경험한다. 이런 곳에 큰 교회들이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개념으로 인력과 재정을 지원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동역이 되겠는가. 이제 대형 교회가 정책적으로 개척 교회와 미자립 교회에 인력과 재정을 후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가? 성도들 중에는 개척 교회에 대해 부담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한두 명이 움직이는 것보다 거룩한 부담을 가진 사람들로 팀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팀으로 일하면 훨씬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인력뿐 아니라 재정도 지원해야 한다. 교회를 완벽하게 갖춘 후 도우려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도 도울 수 없다. 목회자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ht)는 물론 성도들에게 공감대가 필요한 대목이다. 보내기 전에 충분한 양육이 없다면 역효과가 나타나지 않는가? 교회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고 사용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목회자는 강단에서 끊임없이 이 일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주님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행 1:8)고 말씀하셨다. 또 “모든 족속이 복음을 들어야 끝 날이 온다”(마 24:14)고 말씀하셨다. 대상을 우리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공교회, 세계 교회로 넓히는 게 중요하다. 결국 선교적 사명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누구를 보내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약한 지역 교회를 돌보도록 했다(행13:1∼3). 지금으로 말하면 담임목사와 부목사쯤 될 것이다. 안디옥교회는 가장 중요한 인물을 보냈다. 개척 교회는 일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디옥교회가 무너졌는가. 오히려 최초로 이방 선교를 시작한 교회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이젠 대형 교회가 한국 교회에 진 빚을 갚을 차례다. 사역을 위해 떠났다가 돌아올 수도 있다. 일로 인한 탈진이 그 원인이다. 잠시 돌아와 안식을 얻고 재충전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전도와 양육 체계가 명확해야 한다.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전도와 함께 양육은 시작되고 양육은 다시 전도로 이어진다. 승부는 양육에 있는데, 일상에 사용할 것을 배우고 익혀 현장으로 나가는 것이다. 주님은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가르치셨다. 흔히 가르치는 것을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키게 하는 것이다. 제자 양육의 진정한 목표는 겸손한 일꾼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제자 양육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일터로 나갔느냐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교회와 성도가 양육 받는 기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또한 선교 중심의 메시지 선포를 통해 인력과 재정을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모으는 것’에 관심이 있다. 성경은 ‘가라, 나눠줘라, 봉사하라’고 가르친다. 떠남은 결국 교회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모습인가? 교회관을 목양 개념에서 그리스도의 몸 개념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몸의 각 지체는 제 역할이 있다. 크리스천은 일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이 생겨야 하는데 한국 교회는 이러한 의식이 약하다. 일꾼 개념 자체가 없으니 일터가 있을 리 없다. 작은 교회, 우리를 필요로 하는 교회로 가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신 은사를 활용하는 것으로 그 은사를 100% 사용할 수 있는 일터도 분명히 있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대형 교회가 정책적으로 나눠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나름대로 성장했다면 정책적으로 일꾼을 나누는 일에 힘써야 한다. 강단을 통해 그리고 정책적으로 충분히 배려한다면 언젠가 결실을 맺을 것이다. 사관학교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각 군에 필요한 인력을 보내는 것이다. 교회도 사관학교처럼 일꾼을 보내는 일에 힘써야 한다. 빛과 소금 장동석기자 bogus@tyrannus.co.kr
목사 안수 받은 김성혜 총장 /
목사 안수 받은 김성혜 총장 /2003-06-27 09:31:53 read : 9127 1958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교인 5명이 천막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개척자인 조용기 목사의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와 성령을 강조하는 목회철학으로 이제는 등록 교인만 70만명을 헤아리는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다. 순복음교회를 통해 배출된 제자 목사들이 전국 각지에서 개척한 교회와 기도처는 300여개, 교인은 130여만명에 이른다. 조 목사의 부인인 김성혜(金聖惠·61) 한세대 총장은 어머니 최자실 목사(1989년 작고)와 함께 오늘의 순복음교회를 일군 ‘1등 창업공신’이다. 언론과 거의 인터뷰를 하지 않는 그를 27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11층 그레이스홀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가 조 목사를 만난 건 중학교 3학년 때. 조 목사와 순복음 신학교 4기 동기였던 어머니를 통해서였다. “당시 조 목사가 학생회장, 어머니가 전도부장이었죠. 둘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같이 북치고 노래 부르며 거리전도를 하면서 친해졌대요. 어머니는 조 목사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걸 보고 ‘저렇게 똑똑한 청년이 있다니’하고 감탄하셨다고 해요. 그때 이미 사위를 삼아야겠다고 점찍었다고 합니다. 조 목사가 제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면서 저와도 친해졌죠.” 신학교를 졸업한 조 목사와 최 목사는 김 총장이 고1 때 불광동에서 천막교회를 개척했다. 신도들은 대부분 입에 풀칠하기 바쁜 피란민이어서 헌금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때 교회 재정은 조 목사가 선교회 통역과 번역으로 벌어오는 2만7000원과 서울예고를 다니던 김 총장이 피아노 레슨으로 벌어오는 2만원가량이 전부였다. 말하자면 김 총장이 소녀가장처럼 교회 수입의 절반을 책임진 것이다. “당시 조 목사님이 폐결핵을 앓고 난 뒤였는데 교인 20∼30명 앞에서 엄청나게 큰소리로 설교를 했어요. 건강이 염려돼서 ‘교인도 얼마 없는데 작은 목소리로 설교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아냐, 난 여기에 2000명의 신자가 있다는 기분으로 설교한다’고 대답했어요. 그때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던 거죠.” 그는 이화여대 피아노학과를 졸업하고 1주일 만에 조 목사와 결혼했다. 그러나 연애나 신혼생활은 거의 없었다. 그저 교회에서 얼굴 보는 게 전부였다. 조 목사는 지방 전도회를 갈 때 서울역에 기차 출발 시간보다 2시간 먼저 가 있거나 심방 가는 집을 약속시간 1시간 전에 찾아가 신자들을 난처하게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성격이 급했다고 한다. 반면 그만큼 모든 일에 부지런하고 치밀하게 준비하는 성격이었다. 조 목사가 집을 비우는 일이 많다보니 이사 자녀교육 등 집안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돌이켜보면 자녀 교육을 조금 잘 못한 게 아닌가 싶어요. 모든 걸 목사님 위주로 하다보니까 제가 아이들에게 ‘조용히 해라’ ‘아버지를 피곤하게 하지 마라’며 아이들과 아버지를 차단시킨 적이 많았죠. 그래서 부자간에 살갑게 지낼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아들 셋 중에 목사가 1명도 안나온 것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지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는 주부나 목사의 사모로만 그치지 않았다. 이화여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81년부터 호서대 교수, 예술대학장, 사회교육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강남대 신학과, 연세대 교육대학원(영어교육전공), 베데스다 신학대학원 등도 졸업했다.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큰아들 조희준씨에 대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활달하게 얘기하던 그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문제만 아니면 우리 가정이 뭐 부러울 게 있겠습니까. 그 문제만 아니면 한없이 교만한 가정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가 있으니까 우리 식구가 하나님을 부르짖고 납작 엎드려 기도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도 젊을 땐 마약을 하는 등 나쁜 길에 빠졌지만 마흔살이 돼서 회개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제 아들도 회개하고 투철한 신앙인으로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세대 학생들에게 총장이 아니라 목사로서 말씀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 가장 큰 동기였다. “음악도 좋고 장학사업도 좋지만 아무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더욱 보람있는 일이죠.” 그가 목사 안수를 받자 주변에선 2년 앞으로 다가온 조 목사의 은퇴와 후계구도를 연관지어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건 하나님만이 아시죠. 2년 후면 제가 한국 나이로 64세가 되는데 너무 나이가 많지 않나요. 저는 한세대에서 할 일이 많아요. ‘3년 공부, 1년 실습’이라는 ‘3+1제’도 완전히 정착시켜야 하고…. 또 조 목사님이 은퇴한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일에서 손을 떼지는 않을 겁니다. 개척목사가 한꺼번에 손을 떼면 교회 내에 소용돌이가 일어요. 1500여명이나 되는 장로님들을 모시기도 쉽지 않잖아요.” 그는 ‘주위 여건이 어쩔 수없이 돌아가면 몰라도’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조 목사의 뒤를 이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기독교계의 거목이 된 요즘의 조 목사를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은 어떨까. “젊었을 땐 조 목사님이 ‘이게 뭐야’하고 소리를 지르면 겁이 덜컥 났는데 이젠 하나도 겁이 안나요. 남편 말대로 ‘맞먹는’ 수준이 된 거죠. 한편으론 많이 자상해졌어요. 외국에 나가도 꼬박꼬박 전화해주고 결혼 40주년엔 ‘지난 세월 잘 참아줘서 고맙다’며 편지도 보내와서 제가 잘 보관하고 있어요.”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출처;동아일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림 받으며 살아온 삶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림 받으며 살아온 삶 2002-11-21 22:17:48 read : 2668 (휴먼 스토리 - 김진호 신임 감독회장) 盡人事待天命…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요8:50) ● 프롤로그 감독선거가 있기 하루 전이다. 총회 취재를 나온 교계 언론사 기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감독회장선거에서 누가 감독회장에 선출될 것인가 하는 것을 화제로 애기꽃을 피웠다. 그 자리에서, 그래도 감리교회통이라 자부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김진호목사가 감독회장에 당선될 거라고 생각하는 기자는 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김진호목사가 감독과 감독회장에 당선되었다. 최근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재수는 필수고 삼수는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 흐름이다. 그런데 출마하자마자 단번에 감독회장까지 된 경우는 선례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근래 들어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라할 수 있다. 어쨌든 기자들의 눈으로도 그의 당선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아니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기자들의 그런 시각을 일거에 접어버리고는 당당하게 감독회장이 되었다. 이것은 김진호감독회장에게는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크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내공이 강한 사람이다. 이러한 내공이 그가 살아온 날을 더듬어 보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소년 김진호 그는 경기도 수원출생이다. 그 시절은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였다. 대부분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겨야했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날은 일년 중에도 손으로 꼽히는 그런 때였다. 그의 나이 11살 때, 1949년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5남매 그리고 뼛속을 파고드는 가난을 유산으로 남겨둔 채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누나가 있었지만 11세 김진호는 장남으로서 어머니를 도와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누나와 남동생 그리고 두 여동생등 오남매가 친척집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12살 때 6.25가 발생해 그는 화성군 비봉면 양노리로 피난을 갔다. 그곳에서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조피득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어느 정도 교회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으나 더 큰 이유는 교회에서 먹을 것을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가난에 허기지던 시절 교회에서 나눠주는 선물과 먹을 것들은 그의 발을 교회에 붙들어 매기에 충분했다. 사실 교회에 발걸음을 들일 때는 신앙외적인 이유가 더 컸다. 그러나 교회 주일학교 교사들을 통해서 그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 주일학교 교사였던 최기훈장로(성동지방)의 사랑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가난 때문에 지치고 허기지던 시절, 교회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진심으로 그를 환영하고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나이로 보면 이 나이는 이때 쉽게 자존감을 다치게 될 수 있는 그런때였다. 더구나 어려운 가정환경은 자존심 강한 그를 쉽게 좌절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학교를 통해서 높은 자존감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의 사랑과 칭찬 그리고 배려깊은 보살핌은 가난의 비린내를 쉽게 털어낼 수 없었던 그의 어린시절에도 그가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자랄 수 있게 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사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신앙을 이어 받은 것은 아니었다. 따져보면 그의 가문에서는 그가 신앙의 개척자였다. 그가 신앙생활을 하고부터 전 가족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뿔뿔이 흩어져서 살았던 가족들도 그가 목사가 된 이후에야 함께 모여 살 수 있었다. 말하자면 자수성가형 신앙인이라할 수 있다. 고등학교때 가족들과 헤어져 보냈으며 고학으로 고등학교 다녀 외로웠던 시절 교회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중고등시절에 기독학생운동과 학생부흥회를 통해 신앙이 성장했다. 숭실대에서 있던 학생 부흥회는 잊을 수 없다. 외롭고 가난한 시절에 아버님 같은 이병설담임목사님의 보살핌과 지도로 당시 방황하지 않고 목회자가 되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 배움의 길 그가 살아온 날을 회상해보면 그는 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림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빈 몸으로 그는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가 삼일학교를 다니고 또 신학을 다 마치기까지 그를 돕는 손길이 없었다면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 나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수원 삼일학교에 진학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혼자서 생활고를 해결했다. 당시 삼일학교의 특별한 배려로 매점경영을 맡게돼 그것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 당시 그는 신앙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2때였다. 토요일에 수원시 주최 전국웅변대회에 수원시 대표로 참가를 준비했는데 대회 날짜가 갑자기 주일로 옮겨졌다. 주일 성수를 위해서 대회를 포기했다. 미션스쿨인 삼일학교의 교장은 ‘김군이 잘한 일’이라고 격려했고, 그 일로 인해 주일에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결의되었다. 그는 “당시 차주은 교장선생님은 나를 어여삐 여겨 내가 신학교 등록시 첫 번째 등록금을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지금은 그 일이 신앙간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굉장히 어려운 일을 결정했는데 어떤 열정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고등학교 웅변을 잘해 수원지역 대표로 꼽히기도 했는데 그때 자질은 이후 목사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특별히 그가 감사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청소년기에 선생님들의 신뢰와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삼일학교에서 특별한 배려로 구내매점을 운영하게 된 것도 다 그의 신앙과 재능을 아낀 선생님들의 사랑과 배려 덕분이었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우스게 소리로 말한다. “당시 학용품과 빵을 팔아 학업을 했기 때문에 내게는 남다른 경영마인드가 그때 생기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농담이지만 그 이면에는 눈물과 아픔을 삼키며 성실하게 노력해온 그의 삶의 흔적을 읽을 수가 있다. 이렇게 삼일학교를 마치고 1960년도에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을 했으나 그는 수원에서 통학을 해야만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은 이유는 학비 충당을 위해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야 했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다니던 중 1년8개월의 군대 생활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복학하여 65년도에 졸업 했다. ● 목회자 김진호 목회는 신학교 4학년때 화성군 반월면에서 실습목회를 시작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당시 감독파송 제도에 따라 파송받은 교회인 동탄면 동탄교회에서 첫 번째 목회를 시작했다. 동탄교회는 당시 교세가 40명이었으나 그가 목회하는 동안 1백명으로 부흥했다. 첫 목회지였던 만큼 열심과 성심을 다한 것이 교회를 부흥되게 한 요인이었다. 그는 34살의 나이에 마산중앙교회 부담임을 맡은후 바로 담임을 맡게 되는데, 71년도에 마산중앙교회는 5백명 모이는 교회로 당시 삼남연회에서는 가장 큰 교회였다. 그 나이에 큰 교회에 부임해 간 것은 교계 핫 뉴스였다. 그가 마산중앙교회로 부임하게 된 내막은 상당히 회화적인데가 있다. 마산이 처가집이어서 다니러 내려는데, 마침 담임목사가 병중에 있었어 주일설교를 대신했다. 그것이 인연이 돼 담임을 맡게 되었다. 그가 마신중앙교회로 부임하게 되면서 그는 불필요하게 많은 시샘을 받았다. 그러나 그 특유의 뚝심과 성실성 그리고 겸손으로 등을 돌린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그에게 돌리게 만든다. 마산중앙교회 목회 7년, 그는 큰 경험을 했다. 지금도 그 시절이 가장 인상 깊다. 그는 지금도 농담처럼 말한다. “그 교회에서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고. 마산중앙교회를 1천명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시키고 정릉교회로 옮겼다. 정릉교회는 당시 어려움이 있는 교회였다. 그가 부임하여 7-8년간 목회하는동안 2백명 교인을 1천명교회로 부흥시켰다. 마산중앙교회 7년, 정릉교회에서 7년. 당시 목회 철학이 ‘젊어서는 7-8년 목회하고 또 다른 사역지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월곡교회로 옮긴다. 한 지방에 있는 정릉교회 보다 교세가 작은 월곡교회 교인들의 부탁으로 큰 결심을 갖고 교회를 옮겼다. 당시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은 나의 목회철학에 따라 결심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회생해보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 길이 바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선택했다.” 그것은 그에게서 ‘목회의 출애굽’이었다. 월곡 8년, 도봉 12년 이젠 도봉교회에서 그의 목회적 삶에 마침표를 찍을 생각이다. ● 에필로그 되돌아보면 가는 교회마다 순탄하게 목회를 한 셈이다. 큰 교회를 두고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작은교회를 기꺼이 선택해서 간 그의 그 도전이 오늘 그를 만들어 온 초석이었다고 보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김진호 목사, 이제 그는 감리교회의 최고의 수장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의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그의 생의 태도이다. 그런 그를 보면서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있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는 이가 계시니라(요8:50)” 그가 감독회장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선언한 말은 ‘감독회장을 명예로 알기보다는 감리교회의 부흥을 먼저 생각하겠다’는 말이었다. 그의 이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이 아니라면 감리교회는 그의 재임기간 동안 행복한 출항을 하게 될 것이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온 날들은 그의 오늘을 있게한 뿌리였다. 그는 눈물과 고통 그리고 좌절을 통해서 어떤 점에서는 온몸으로 인생을 터득했다. 인생에는 아픔을 경험한 자만이 아는 아픔의 빛깔이 있다. 서민적이고 진솔하고 친화력이 있다는 평가 역시 그의 그런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들이 내게 인간미가 있다, 친근감을 가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그런 내 인생의, 내가 살아온 삶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감독회장 김진호 목사, 기자가 본 가장 큰 그의 장점이라면 결코 재주가 덕을 앞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목사 김진호의 영성은 바로 그런 영성이다. 남재영 부장 veritas@gam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