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미(美)를 가진 자가 부(富)도 갖는다/ 매력 자본/ 2013-02-14
미(美)를 가진 자가 부(富)도 갖는다/ 매력 자본 비만인 사람들의 연봉, 평균의 86%에 불과 취업·승진에도 영향 미쳐 사교술·유머도 매력에 포함 이사벨과 파멜라는 두 살 터울의 자매다. 둘은 대학에서 각자의 길을 갈 때까지 비슷한 환경에서 생활했다. 둘은 공학과 자연과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 둘의 삶은 판이하다. 이사벨은 자기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돈을 잘 벌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닌다. 남자친구도 끊이지 않는다. 파멜라는 직장을 계속 옮겨 다녔고, 주로 전문직의 보조 역할이나 단기 프로젝트에서 일했다. 영국의 사회학자 캐서린 하킴(런던 정책연구센터 연구위원)은 이를 ‘매력자본’의 차이로 설명한다. 둘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지적 능력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이사벨은 영리해서 빨리 공부를 마쳤으나 파멜라는 여러 해가 걸려서야 학위를 땄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금발 곱슬머리에 백옥 같은 살결과 푸른 눈을 가진 이사벨은 어릴 때부터 예뻤다. 성격도 활달했고, 외모를 가꾸는 데 공을 들였다. 이에 비해 파멜라는 진한 밤색 직모에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파멜라는 덩치가 크고 평범했으며 때로는 뚱뚱하게 보였다. 성격도 소심했다. 이사벨은 뛰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발랄한 성격과 외모, 사교 스타일을 형성한 반면 파멜라는 일찌감치 그런 노력을 포기해 직업적·사회적인 성취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킴은 분석한다. 그가 말하는 ‘매력자본’은 아름다운 용모와 성적 매력, 자기표현 기술과 사회적 기술 등을 합친 개념으로 하킴이 2010년 옥스퍼드대 저널 ‘유럽사회연구’에 발표했던 논문의 제목이다. 하킴은 이 논문을 바탕으로 출간한 책 《매력자본》에서 매력자본을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에 이어 제4의 개인자산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에는 외모, 건강하고 섹시한 몸, 능수능란한 사교술과 유머, 패션 스타일, 이성을 다루는 테크닉 등 사람을 매력적인 존재로 만드는 모든 자원이 포함된다. 하킴은 “매력자본은 회의실에서 침실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모든 부문에서 지능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매력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친구 연인 동료 고객 의뢰인 추종자 유권자 지지자 후원자로 만들고, 사생활은 물론 정치 스포츠 예술 비즈니스에서도 더 성공을 거둔다는 것. 매력도 자본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먼저 상상할 수 있는 건 아름답고 섹시한 배우와 모델, 가수 등이 등장하는 연예산업이다. 기본적으로는 섹스산업도 매력자본에 기초한다. 하지만 매력자본의 유용성은 이런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매력자본은 직장생활도 좌우한다.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평균적인 사람들이 100만원을 벌 때 비만한 사람은 86만원을 번다. 또 북미에서는 매력적인 남성이 14~28%를 더 벌고 매력적인 여성은 12~20%를 더 번다. 영국과 미국에서 이뤄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매력적인 사람들의 소득이 15%가량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킴은 설명한다. 1991년 영국에서 실시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매력적인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에 비해 소득이 20% 많았고 여성은 13% 많았다. 키가 클수록 남성은 23%, 여성은 26% 소득이 높았다. 소득뿐만 아니다. 매력자본은 취업과 승진에도 영향을 미친다. 매력적인 사람들의 취직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10% 정도 높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만난 지 60초 만에 상대방의 인상을 평가한다. 매력자본의 일종인 옷이나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자기표현 방식 등이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책의 서문 격인 ‘매력자본이 왜 중요한가’에 소개된 애나의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애나는 보수가 두둑한 금융업체에서 일하다 실직했다. 다이어트와 꾸준한 운동으로 체중을 줄인 그는 10년은 젊어보였다. 젊고 생기 있어 보이도록 헤어스타일도 짧게 바꿔 면접을 봤더니 3개월 뒤 컨설턴트 업종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잡았다. 연봉은 50%나 올랐다. 관리자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됐다. 응답자의 43%가 옷차림 때문에 직원을 승진에서 제외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20%는 그 이유 때문에 직원을 해고하기까지 했다. 타고난 외모가 볼품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희망적인 것은 매력자본에는 키나 피부색처럼 고정된 특징뿐만 아니라 활력, 사교술, 유머, 예의범절, 춤 실력, 자기표현 기술처럼 배우고 키울 수 있는 능력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참고: 캐서린 하킴/ "매력자본"/ 이현주 옮김/ 민음사/ 432쪽 서화동 기자
행복한 아침/ ‘생명의 원천’ 물/ 이철/ 연세의료원장/ 2010-08-31
행복한 아침/ ‘생명의 원천’ 물 [2010.08.31 17:48] 우리 몸을 말할 때 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체중의 3분의 2가 물이기 때문이다. 태아인 경우 몸무게의 90%가 물이다. 물은 모든 생물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성장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농사에 필요한 물을 잘 관리하여야 훌륭한 임금, 즉 성군이란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더 멀리 구약시대에 우물을 파서 물을 발견하는 것은 노래를 부르며 축하할 매우 기쁜 일이었다(창 26:32).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는 파지도 않고 우물을 얻게 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축복이었다(신 6:11). 물이 귀한 지역에서는 우물은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창 26:19∼21). 요즘에도 우리나라 봉사자들이 아프리카에서 우물을 파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성인의 경우 하루에 소변으로 1.5ℓ, 땀으로 1ℓ 정도의 수분을 배출하고 있기에 계속 수분 보충이 요구된다. 하루 음식물로 섭취되는 수분 양이 약 0.5ℓ이니 나머지인 2ℓ 정도를 물로 마셔야 한다. 2ℓ는 물 컵으로 따지면 8컵에 해당한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마시면 심장과 소화기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조금씩 자주 천천히 마시는 것이 좋다. 이처럼 물은 우리 몸의 중요 구성 성분으로, 물이 너무 부족하거나 너무 많아도 사망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는 곡식 농사에도 비가 없으면 가뭄이요 많으면 홍수가 일어나 농사를 망치게 된다. 흉년이 들면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다. 이처럼 물은 우리의 생사와 직결돼 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물’을 만드시며 인간에게 이를 마시게 하셨다. 잠언 25장 21절의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는 단순한 구절이지만 인체와 물의 관계를 무엇보다 잘 알려준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각종 인공음료가 넘치고, 물보다 이런 음료들을 즐겨 마신다. 물론 이런 음료에도 물이 들어 있으나 인공감미료나 설탕, 나트륨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바르게 물을 마시는 법이 성경에 쓰여 있다. 물은 우리의 생명수이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필요한 생명수를 마시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라고 하였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생명수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신앙인의 평생 과제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다. 위의 말씀에서 권한대로 물을 마실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의 의미를 되새기며 진정한 물로 인한 영육(靈肉) 간 건강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행복한 아침/ 3분/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7-28
행복한 아침/ 3분 세상에서 가장 못난 변명이 있다.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둘러대는 변명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고 못난 변명이다. 시간은 우리 삶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이며 인간이 가장 원하고 있는 삶의 길이이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시간을 방목하고 있는 자들의 변명이다. 시간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이 쓴 시에 ‘3분간’이란 시가 있다.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중략)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도장을 찍고/ 악수를 청하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지”(최정례의 ‘3분간’ 중에서)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3분간에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다.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고, 아기도 낳고 전쟁도 일으키고, 죽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하며,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도 하며 3분간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한하며 3분간에도 인간은 사건, 현상의 지독한 프로세스를 가질 수 있다. 하루는 24시간 1440분이다. 3분씩 나눈다면 3분간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하루에 480번씩 해낼 수 있다. 정말 ‘시간이 없어서’ 어떤 일을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시간이라는 막연한 존재가 자신의 분신임을 부인하고 있다. 급박하게 다가오는 불행과 걱정 근심들은 사실 오래 전부터 우리가 이끌고 온 잘못된 시간들의 부유물인 것을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시간은 아무런 징후가 없다. 사용하는 자에게 전권을 준다. 또 어느 시인이 쓴 시의 구절에는 이런 질문과 대답이 있다.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시인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해 가고 있다’고 답하고 있다. 소멸을 향해 가면 자기 자신의 소멸로, 죽음만 생각하고 시간을 보낸다면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시간은 자신과 분리된 개념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자가 있다. 그는 분명 신에게로 가까이 가고 있을 것이다. TV와 스마트폰에 온통 시간을 빼앗기는 젊은이들의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알코올과 마약과 쾌락에 시간을 빼앗기는 자들의 시간은 자신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시간의 근저를 따진다면 분명 시간은 구속적이긴 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가고 있는 가장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재료가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자신의 시간을 찾아서 이 뜨거운 여름 단 3분간 시간을 내서…. 시간을 찾아 나서면 어떨까?
행복한 아침/ 가정교육/ 이원영/ 중앙대 유아교육과 명예교수/ 2010-08-12
행복한 아침/ 가정교육 잠언 10장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1∼2절)는 솔로몬의 가르침이 있다. 이 말씀을 “지혜로운 청년은 나라의 기쁨이나 판단력이 없고 책임감이 없는 청년은 미래 조국의 근심이다”라고 바꾸어보자. 지금 잘못 길러진 아이들은 장래 가족의 불행, 타락한 사회, 부실한 나라의 원인이 됨을 알 수 있다. 요즘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우리나라의 가정교육이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중·고교에서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난다고 한다. 학생들이 친구들의 학용품이나 돈을 훔치는 일은 다반사이고 교사의 물건에 손을 대는 어린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한 초등학교 6학년 반에서는 교사가 교무실에 잠깐 다녀온 직후 핸드백이 없어졌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없어 단념하고 있는데 그 반 남자아이의 어머니가 “아니 선생님 가방이 왜 우리 아이 가방에 들어있어요? 간수 좀 잘하세요”라며 전화를 걸어왔단다. 2학년생을 둔 어머니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 “아니 방학숙제를 그렇게 어렵게 내면 어떻게 해요. 아동발달에 적합한 교육도 모르는 이 교사에게 우리 아이를 맡길 수 없어요. 담임을 바꿔주세요”라고 하였단다. 사회 전체에 퍼진 ‘네 탓’ 신드롬이 여기도 나타나는 것이다. 학부모, 교사, 이웃집 어른, 사회가 모두 협력해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도 모자랄 판에 아이들에게 학과 공부만 가르치고 도덕성, 인성, 사회적 책임감, 판단력, 배려 등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엄마 아빠는 직장일로 바빠 밤늦게 귀가하면서 인성교육과 도덕교육은 선생님 몫으로 미루고, 교사는 교권이 약해져 아이들에게 훈육과 관련해서 한마디 말도 못할 지경으로 위축되었으며, 옆집 어른들은 다른 집 아이에게 관심이 없어졌다. 정부도 기업도 경제에는 관심이 있지만 미래의 국민을 바르게 기르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목에 건 채 게임기에 빠져 있고 학원을 전전하며 혼자서 자라고 있다. 가정교육을 회복해야만 한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를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아이들에게 돌려주어 가정교육을 하게 하자. 그런 의미에서 한 준정부기관이 매주 수요일을 가정의 날로 정하고 전 직원이 5시30분 이후에는 반드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과로로 병에 걸리는 직원들이 많아지자 노동조합이 요구하여 시작됐다는데 직원들, 특히 아빠들의 말에 의하면 가족관계가 회복됐다고 한다. 자녀들의 고민도 들어줄 수 있고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으며 자녀의 인성교육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모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 자녀들은 건전한 시민으로 자란다. 가정교육이 인성 및 도덕 교육의 근본이며 이 교육은 아이가 출생한 그 순간부터 부모인 내가 해야만 효과가 있고 어릴수록 그 효과가 크다.
행복한 아침/ 개방/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8-04
행복한 아침/ 개방 모든 길은 문을 열어 놓았을 때 통할 수 있다. 문이 닫히면 편리하게 닦아놓은 길도 다닐 수 없는 길이 되고 만다. 문을 연다는 것, 마음을 연다는 것, 가슴이 열려 있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로마가 열악한 환경, 조건, 상황 속에서도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개방성에 있었다. 지적 수용은 그리스인에게서, 국민의 체력 강화는 겔트족과 게르만족에게서, 기술에 있어서는 에트루리아인에게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카르타고인에게서 국익에 필요한 것들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로마인의 뛰어난 점은 바로 주변 민족들을 향해서 열려 있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나 50년대 이후 분단국가의 의사 불통으로 인해 한반도의 발전 속도는 50년 이상 늦춰졌다고 한다. 각 세대는 자기 세대만의 고유한 사유형식을 갖는다. 그러나 세대와 세대는 늘 의사소통적 통일을 염원해야 한다. 오랫동안 이 땅의 문화를 지배해온 것은 유교정신이었다. 유교의 정신은 여전히 다른 가치체계를 용납하지 않는 배타적 독단적 사유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많은 부분에서 허례와 허식의 문화, 단절의 문화를 가져왔다. 가끔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관계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더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지가 않다. 용감한 자는 비판의 문도 활짝 열어놓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비판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비판의 문을 개방하면 따가운 비판을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개선과 변화를 얻을 수 있다. 김영현 소설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 해방, 자기 구원의 문을 열었다. 예전에 나는 어떤 정신과 의사로부터(그는 내 친구의 담당 의사였다) “말해 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충고가 사실이라면 나는 적어도 이 불쾌한 느낌, 혼자 어두운 방에 누워 있으면 영락없이 찾아드는 이 막연한 어둠의 기억으로부터 조금은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을 닫아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절박할수록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천들은 절대적 출구가 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이것은 소통의 완성일 수 있다.
행복한 아침/ 검과 칼/ 김성일 장로/ 작가/ 2010-07-12
행복한 아침/ 검과 칼 뉴욕에 있는 유엔 본부의 뜰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증한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긴 칼의 끝을 땅에 대고 눌러서 활처럼 휘게 해 놓은 작품이 있다. 구 소련에서 기증하여 더 인상적인 이 조각상의 기단에는 이사야서 말씀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사 2:4) 지금은 대포를 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시대지만 칼의 이미지는 여전히 전쟁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칼의 유래를 잘 몰라서 어휘의 선택에 자주 혼동이 있는데, 이 날카로운 도구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히브리어로 헤렙, 즉 양면에 날이 있는 검(劍)이며 본래 제사장들이 소나 양을 잡아 뼈와 살과 기름을 분리할 때 쓰던 것이다. 또 하나는 히브리어로 마아켈렛 즉 날이 한쪽에만 있는 칼(刀)인데 주방에서 요리할 재료를 썰거나 다질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언제부터 무기로 사용되었던 것일까?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창 4:23) 제사장들의 검은 권력을 놓고 다툴 때 무기가 되었고 주방에서 쓰던 칼은 형제 또는 이웃 간의 감정싸움이나 복수를 할 때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모두 단검, 단도처럼 짧은 형태였으나 집단적인 싸움 즉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면서 그 길이가 더 길어진 것이다. 주도권 장악을 위한 전쟁이 많았던 중동이나 유럽에서는 검을 많이 썼고 복수의 개념이 앞섰던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주로 칼을 사용했다. 우리 민족의 조상들이 제사용으로 사용하던 비파형 동검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중국에서도 천단에 제사를 드리던 고대에는 검을 많이 사용했다. 대륙에서는 혼란한 시기에 비적들이 횡행하면서 환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삼국통일 이후로 원한과 분노가 늘어났는지 검이 칼로 바뀌었다. 우리가 본국검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일본 검도에서 사용하는 것도 실은 모두가 칼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예수께서 주겠다던 이 검은 전쟁의 검이 아니라 말씀의 검이었다. 헬라어로 마카이라, 즉 양면에 날선 검으로 수술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그러므로 우리가 심판의 날에 대비하려면 전쟁의 검을 제사의 검으로 되돌려 혼과 영과 몸의 모든 마디를 찌르고 쪼개어 거룩한 제물로 거듭나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복수를 위해 품어왔던 칼도 다시 주방으로 되돌려 우리의 이웃과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정성이 깃든 음식으로 대접하는 도구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 12:20)
행복한 아침/ 고통/ 김성일 작가/ 2010-07-19
행복한 아침/ 고통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로 사람에게 내려진 첫 번째 조치는 임신의 아픔이었다.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 3:16) 전후의 상황으로 보아 이는 금단의 열매를 먼저 따서 먹은 여자에게 내린 형벌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람이 징계를 당하는 모든 장면 속에는 하나님 자신도 함께 겪는 아픔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탄식하며 새 시대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아픔이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그래서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실 때에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남겨 다음 시대를 이어가게 하셨다. 그러나 노아의 자손들 역시 반역의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 사람이 더 이상 자멸의 길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온 지면에 흩으셨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문화를 만들어가며 하나님에 관한 기억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택하여 광야로 끌어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려 했으나 그들이 거부하여 그분을 아프게 했다.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민 14:31∼32) 그러나 그 다음 세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삿 2:10) 이렇게 성경의 역사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과 다시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는 그분의 아픔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아픔을 감내하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9)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보낸 독생자가 세상에 와서 새로운 시대를 선언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마 9:17) 그가 감당했던 잉태의 고통을 다시 성령이 이어받는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그토록 깊은 실망과 혹독한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시는데 사람은 미리 겁을 먹고 그 고통을 피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으나 사람은 그분의 영을 피해 불임의 길을 간다. 성령의 권고를 따라 부지런히 새 것을 잉태하지 않으면 낡은 가죽 부대는 곧 터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행복한 아침/ 관심/ 용혜원 시인/ 유머자신감 연구원 원장/ 2010-08-15
행복한 아침/ 관심 외로운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파트에 갇혀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사람들은 어울려 살아야 행복하다. 저 들판의 나무 한 그루가 아무리 멋있어도 그 한 그루의 나무를 아무도 숲이라 하지 않는다. 외로움을 느낀다면 서로 관심을 가져 주어야 한다. 삶이란 울고 쥐고 발버둥치며 태어난다. 혼자 울고 태어나 몇 번 웃다가 남아있는 사람들을 울게 만들고 떠난다. 결국 떠나는 인생살이 관심도 주고받지 못하면 얼마나 쓸쓸한 삶인가. 알프레드 아들러는 관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인간은 고난 속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에게도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의 모든 실패는 그러한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자기주장만 펼치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관심이 아니다. 고집불통이고 편견과 아집으로 고통스러운 결과만 낳는다. 어떤 남자가 사업에 실패해서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지냈다. 어느 날 혼자라는 생각이 심장 끝까지 밀려와 자살을 결심하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파트를 들어오던 아내가 남편을 보았다. 그렇게 쌀쌀하게 대하던 아내가 그날까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보! 나예요. 사랑해요!” 남자는 아내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갑자기 살고픈 욕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남자는 그대로 뛰어가서 아내를 꼭 안고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때로는 눈빛 하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가 사람을 살리고 죽게 만든다. 관심이란 상대방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생각해 주는 것이다. 간섭은 내 마음으로 상대방을 생각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섭은 내 마음 속에 상대방을 가두는 것이다. 사람들은 관심을 원하지 간섭을 원하지 않는다. 어느 사이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핏대를 올리고 주먹을 쥐고 고함을 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상대방과 대화도 하지 않고 무조건적이다. 우리는 로렌스 굴드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남이 당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고 싶거든 당신 자신이 귀와 눈을 닫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표시하라. 이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리 재간이 있고 능력이 있더라도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불가능하다.” 관심이라는 시를 써 보았다. 제목 ‘관심’. “늘 지켜보며,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네가 울면 같이 울고, 네가 웃으면 같이 웃고 싶었다. 깊게 보는 눈으로, 넓게 보는 눈으로, 널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모든 것을 잃더라도, 다 해주고 싶었다.”
행복한 아침/ 관심/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7-14
행복한 아침/ 관심 최문자 시인 ‘우리 사랑할까요’ 참 좋은 인사법이 있다. 안부를 묻는 인사로 아프리카에서는 “당신이 보여요”라고 아침인사를 한다고 한다. 사랑하면 보인다. 몽골의 허허벌판 풀밭에서 양 치는 목동의 눈은 수㎞ 밖 산 밑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의 마릿수까지 정확히 알아맞힌다고 한다. 시력이 뛰어나기보다는 양떼에 대한 관심과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같은 시력을 가지고 같은 지점에 서 있어도 보이는 것이 다른 것은 그동안 사랑해왔던 시간의 길이와 더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우리는 늘 보고 싶은 것, 눈에 확 뜨이는 것, 보기에 좋은 것, 필요한 것만 보려고 한다. 잘 보이지 않는 것, 차마 볼 수 없는 것, 보고 싶지 않은 것, 보면 해가 될 것 같은 것에 대해서는 최대한 피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거리를 걸을 때 우리를 스쳐간, 우리가 본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관심 없이 보면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대상이 없어도 눈만 감으면 보이는 사람이 있다. 보려는 마음이 가슴에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시인들은 보는 법이 남다르다. 남이 보지 않는 것,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집착한다. 시 한 구절을 예로 들어보자. “모래 속으로 천천히 감겨들어간 손을 보면/부드러움이 얼마나 공포일 수 있는지…(중략)/모래는 순장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김경주 ‘모래의 순장’ 일부) 누구나 볼 수 있는 모래지만 시인은 모래를 그냥 모래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모래를 무덤으로, 모래를 공포의 대상으로, 더 나가서 순장의 형태로까지 본다. 이는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통찰력 때문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창조물에 대하여 갖는 깊은 관심과 사랑에 대하여 간과할 수 없다. 예수의 옷자락 작은 부분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 같은 여인을 사랑했으므로 예수는 보지 않고도 여인의 고통이 충분히 보였고 이미 보고 있었다. 어느 날 지하철 입구에서 좌판을 벌이고 야채와 콩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에게 콩나물 1000원어치를 사면서 자꾸 덤을 더 달라고 하더니 콩나물을 한 움큼 집어가는 어느 아주머니를 목격한 적이 있다. 손에 성경책은 들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 할머니의 고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모든 대상을 바라보기만 해도 고통과 상처와 눈물이 한꺼번에 클로즈업 되면서 잘 보여야 할 것이 아닐까? 나 자신부터 부끄러워지던 그날이었다. 아침에 만나면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보다 “당신이 보여요”라고 첫 인사를 한다면 약간 어색하지만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이 아침, 하루 종일 흐뭇하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프리카식이지만 참 좋은 인사법이다.
행복한 아침/ 그리스도의 예표/ 김성일 장로 작가/ 2010-08-30
행복한 아침/ 그리스도의 예표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이미 많은 징조와 예표로 그 일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그런 예표적인 사건과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5) 그래서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그 생애의 일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모형으로 살았다. 하늘의 본을 따라 성막을 지은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 가사의 성문짝을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을 오른 삼손,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인 엘리사 등 많은 모형 가운데 특히 이삭은 가장 뚜렷한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창 22: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였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독자였다. 예수는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고, 이삭은 자신을 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125세쯤이었으리라는 학자들의 추정을 따르면 이삭의 나이는 25세였다. 즉 자신을 결박하려는 아버지를 뿌리칠 수 있는 나이였으나 그는 아버지의 결단에 순종했다. 원주민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우물을 파서 아비멜렉을 승복시킨 것도 그리스도의 예표적 모습이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창 26:28) 이삭을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크리스천은 이삭의 신부인 리브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물동이의 물을 아브라함의 종에게 주어 물을 마시게 했을 뿐 아니라, 그의 낙타 10마리에게도 물을 길어 마시게 했다. 낙타 10마리가 마시는 데 필요한 물은 1000ℓ, 즉 5드럼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브두엘이 청혼을 받아들여 혼사를 결정한 후에 딸을 며칠 더 머물다 가게 하려고 딸에게 당장 가려는지 여부를 묻자 그녀는 대답했다. “가겠나이다”(창 24:58)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떠나 주인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신랑 될 이삭이 브엘라해로이를 떠나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삭은 리브가를 그의 장막에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다. 신랑 되실 예수께서 구원받은 자들을 마중하여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인다는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예표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행복한 아침/ 깨끗한 손/ 이철/ 세브란스병원장/ 2010-07-06
행복한 아침/ 깨끗한 손 지난해 우리나라에선 이변이 있었다. 매년 사회적 문제까지 일으켰던 아폴로 눈병 환자가 줄어 안과 병원이 한산했으며, 젊은이들에게 심각한 질환인 A형 간염도 3분의 1이나 줄었다. 뿐만 아니라 연중행사로 일어나던 대형 식중독 사고도 보도된 적이 없다. 이와 같이 전염병이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은 신종 인플루엔자로 우리나라에 손 씻기 열풍이 불었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이 신종 플루 유행 당시 필자를 ‘손 씻기 전도사’로 소개했고, 이로 인해 최근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의료진의 손 씻기가 일상화되고 있다. 필자가 25년 전 미국 브라운대학 연수 시절, 병원 감염 강의 때 있었던 일이다. 미국 교수가 모자, 마스크, 발싸개, 수술복까지 입은 채 중무장을 하고 강의실에 등장했다. 그 다음에는 걸쳤던 것들을 하나하나 벗어던지고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신생아실을 출입할 때 이렇게 많은 것을 입었지만, 지금은 이 손 하나만 잘 닦으면 병원 감염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병원 감염 예방에서 ‘손 씻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렇게 각인시켜주었다. 미국 연수 후 필자는 손 씻기 전도사가 됐다. 세브란스 새 병원을 지을 당시에도 모든 병실마다 세면기를 설치해 손을 쉽게 씻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세브란스병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하이파이브(High-Five)’라는 대대적인 손 씻기 운동을 시작했고 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신종 플루 덕분에 병원 내 손 씻기가 쉽게 습관화되었다. 사실 기본일수록 사람들에게 그 중요성을 인식시켜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기본이 중요하지만 기본을 하찮은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감염 관리에 우수 병원이 되었고 국제환자안전지침에 가장 중요한 병원 감염 관리에 만전을 기하면서 JCI(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 재인증도 획득했다. JCI 회장 일행은 신종 플루 유행 시 우리나라를 방문해 버스마다 붙어 있는 손 씻기 포스터를 보고 우리나라를 극찬하기도 했다. 씻기 행위는 성경에선 정결을 의미한다. 레위기 8장 6절에 보면 레위인들에게 여호와를 섬기는 자격을 위한 준비 행위로 물로 씻는 정결 절차가 진행된다. 요한복음 13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행위로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다. 의료인의 손 씻기는 정결과 환자 섬김의 본이 된다고 생각한다. 손 씻기를 통해 정결해진 의사와 간호사의 손은 환자를 감염으로부터 보호받게 하는 가장 훌륭한 섬김이 되기 때문이다. 올 들어 손 씻기가 다시 주춤하고 있는 듯하다. 손 씻기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싱가포르의 국립병원 외벽에는 30m 초대형 포스터가 있다. ‘Clean Hands Save Lives’(깨끗한 손이 생명을 살린다). 그렇다. 손 씻기는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확실한 방법이다. 이 철 세브란스병원장 ●약력=연세대 의대 교수(소아과학), 대한신생아학회 회장, 의료산업경쟁력포럼 공동대표 역임, 현 세브란스병원장
행복한 아침/ 나눔의 건강학/ 이철/ 연세의료원장/ 2010-08-24
행복한 아침/ 나눔의 건강학 최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중 하나인 뉴스위크지는 우리나라를 세계 ‘베스트 국가’ 순위에서 15위로 보고했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서는 일본에 이어 2위다. 희망적이며 긍정적인 사항은 평가 항목 중에서 교육과 경제적 경쟁력 부문이 각각 세계 2위와 3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로 살아가던 1950년대의 우리나라 1인당 GDP는 100달러에도 못 미쳤다. 북한이나 필리핀보다 못 사는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세계은행이 발표한 2009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1만7175달러라고 하니 실로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한강의 경제 기적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부분이 있다. 뉴스위크의 평가에서 교육, 경제성장력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삶의 질 부문은 29위, 평균기대수명 등을 감안한 건강 부문은 23위 등으로 많이 뒤처져 있다. 또한 다른 나라를 돕는 원조 비율은 국민총소득의 0.0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인 0.3%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성과지향주의로 달려온 우리 사회는 나눔보다는 소유, 사람보다는 물질을 우선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요로움을 간구하는 대신 내가 투쟁해 얻으려는 탐욕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열왕기하 5장 20∼27절에서 엘리사의 종인 게하시가 어리석은 물질적 탐욕으로 인해 풍요로운 미래를 잃어버리고 문둥병까지 걸린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 몸의 건강에서도 이런 진리는 그대로 반영된다. 오늘날 비만,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간장병 등 우리를 괴롭히는 많은 질병들이 현대인의 지나친 탐욕과 방탕함, 술 취함,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풍요는 곳간을 채우고 개인의 배를 부르게 하는 풍요가 아니다. 하나님의 풍요는 40년간 황량한 광야에서 300만 이스라엘 민족을 양육하셨던 것이다. 항상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이웃과 나누면서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순종의 풍요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고 결코 그분의 공급하심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즉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의 무리를 충분히 먹이신 것과 같이 우리 인간의 방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들을 언제나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부터라도 우리네 넘치는 식탁의 음식을 줄이고, TV를 보며 소파에서 낭비하는 시간을 가난하고 배고픈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봉사하도록 해보자. 그러면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우리 가정에 건강과 평화가 넘치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진정한 하나님의 풍요가 깃들 것이다.
행복한 아침/ 놀이/ 이원영/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 명예교수/ 2010-07-22
행복한 아침/ 놀이 아기 때부터 요즘 ‘영어유치원’이라고 잘못 알려진 영어학원 유치부에 다니던 아이가 만 4세에 유치원으로 왔다. 그 엄마가 어떤 소신으로 결정한 것인지 부정적 증상을 고치려고 온 것인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아이는 잘 적응했다. 아이는 유치원에 온 후로 책은 전혀 손에 들지 않고 열심히 놀기만 했다. 쌓기 놀이 영역에서 나무토막을 쌓아 여러 가지 구조물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역할 놀이 영역에서 헌 넥타이를 목에 걸고 아버지처럼 놀아보기도 했다. 특히 좋아하는 것은 유치원 마당 이곳저곳의 놀이기구를 타며 노는 것이었다. 맘껏 놀면서도 내심 걱정스러웠는지 아이는 “엄마가요, 유치원은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한대요”라고 시무룩하게 말하곤 했다. 엄마가 다시 학원으로 보낼까봐 은근히 걱정도 했다. 유치원에서 아이가 즐겁게 노는 자체가 바로 공부라는 생각을 아이나 엄마는 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 날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이 아이는 마당에 세워 둔 통나무 하나를 넘어뜨렸다. 통나무 밑에 있던 애벌레,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낀 아이는 마당에 있는 통나무를 모두 뒤집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원장님은 아이 옆에 앉아 “와. 지렁이가 있네. 애벌레도 있고. 너 정말 굉장한 공부를 하고 있구나” 했다. 아이는 “이게 공부라고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장님은 “그럼, 이게 바로 살아 있는 공부지” 하며 “그런데 이 애벌레는 어떤 종류인지 알아?” 했다. 아이가 모르겠다고 하자 다시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물었다. 아이는 “책을 봐요” 했다. 그리고 유치원에 있는 곤충 서적이나 과학 백과사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들은 아이가 통나무를 뒤집는 모습부터 이 활동에 대한 아이의 흥미가 만족될 때까지 모습을 모두 사진으로 찍었고, 책의 내용을 읽어 주었으며, 유아가 관찰한 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도록 종이와 그림도구를 줬다. 인터넷을 찾아 자신이 더 알고 싶은 내용을 검색하게도 하였다. 아이의 호기심이 어느 정도 만족되었을 때 선생님들은 그 과정의 사진과 그림들을 전시했다. 이 유아의 호기심과 탐구 과정은 다른 유아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이 유치원에서는 통나무 밑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유아들이 늘었다고 한다. 40분 단위로 시간표를 정해 놓고 교과 내용을 습득하게 하는 것만이 공부는 아니다. 놀이는 유아기의 공부 방식이다. 1840년 유치원(어린이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든 독일의 프뢰벨은 “놀이는 유아기에 나타나는 가장 최고의 모습이다. 놀이를 통해 유아는 전인으로 발달할 뿐 아니라 가장 예민한 마음 속 깊은 곳의 성향을 그대로 나타낸다”고 했다. 유아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신성(神性)이 놀이 중에 피어나기 때문이다.
행복한 아침/ 디지털 시대의 삶/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9-01
행복한 아침/ 디지털 시대의 삶 4세대를 위한 스마트폰이 곧 출시된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출시되는 스마트폰은 크기가 지금 휴대전화보다 훨씬 크지만 매우 가볍고 용량의 확대는 물론, 기능의 다양성이 기존 것에 비해 실로 놀랄 만하다는 것이다. 기능 소개 기사를 읽으면서 놀랍고 신기하기보다는 어쩐지 씁쓸하고 개운치 않았다. 처음 휴대전화가 출시되었을 때는 정말 필요하고 유익한 기기가 되겠다는 생각만으로 반갑고 신기했었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부터 나의 정신세계는 점차 메말라가고, 사유가 삭제되며, 삶의 여유가 좁아지는 듯했다. 요즘 언론환경이 변하고 있다. 휴대전화(인터넷 포함)를 통해 여러 신문을 찾아가며 그 가운데 자기가 읽고 싶은 기사만 집중 선정해서 읽어버린다는 것이다. 신문의 심장부위라고 볼 수 있는 사설, 논설, 시론 따위는 관심 밖의 내용이 되고 말았다. 2박3일 여행하는 일이 있었는데,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간 적이 있었다. 여행 가면서부터 첫날은 안정감이 없었다. 모든 정보가 다 그 속에 있었고, 여행 중에도 연락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조금씩 불안했었다. 그런데 수목 사이를 오래 걷는 동안 그 불안은 점차 사라졌다. 그 이튿날부터 귀가할 때까지는 정말 편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전화불통인 여행이 이렇게 명쾌할 줄은 몰랐다. 가끔 휴대전화를 꺼서 집에 놓아두고 기도원으로 간다. 휴대전화를 가져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기도가 너무 잘 된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기계에 노예가 되어 시달려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휴대전화가 인터넷 기능까지 하므로 휴대전화 하나로 만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휴대전화 하나로 무엇이고 다 해결하고 있다. 연락은 물론, 구매, 계약, 기계시동, 사기, 모함, 모략, 치료, 처방, 사랑, 이별, 심지어 상담이나 예배까지도 다 휴대전화 하나로 할 수 있다. 정말 번잡스럽고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휴대전화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꼭 있다고 본다. 서로 마주보고 표정을 읽어 내거나 배려하는 일, 고통을 같이 나누는 일, 사랑스런 교감을 나누는 일, 이런 중요한 사실들을 교환하는 일들을 어떻게 휴대전화가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연인이 헤어질 때 흘리는 눈물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면 정말 그 눈물의 참 의미가 전달될까? 얼마나 생애에서 기억되며 남을 것인가? 얼마 전 ‘현대문학’에 ‘잠적’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나는 맨 처음 순한 흙으로 된 자였네/ 그런데 정말 내가 끝까지 흙이었는가? …중략… 나는 내가 켤 수 있는 모든 전원을 다 끄고 충전 배터리를 빼버린 후/ 오늘, 나는 없겠네.” 흙으로 된 자가 끝까지 흙이 되지 못하고 이질적인 것에 길들여지는 것을 참지 못해 잠적해버리는 한 시인의 연민이 될 것이다. 가끔 휴대전화 없이 지내보라. 삭제되었던 사유와 담론이 회복되며 깊고 좋은 생각에 푹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진짜 충전이 아닐까?
행복한 아침/ 떡잎/ 이원영/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 명예교수/ 2010-07-08
행복한 아침/ 떡잎 유럽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으로 기독교도였던 보헤미아의 모라비아인들은 고향에서 쫓겨나 유럽 여러 나라로 흩어져 학대와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당시 기독교도는 보헤미아 인구의 90%에 해당할 정도로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가톨릭 정권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박해를 받았고 헐벗고 굶주렸다. 종교 지도자였던 코메니우스(1592∼1670)는 자기 민족이 신앙심을 지키고, 나라를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권력도 없고 돈도 없었던 코메니우스와 그의 신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곧 그들은 교육이 유일한 대안임을 깨달았다. 코메니우스는 청년들을 교육해 보았는데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청년들의 신앙심을 유지시키는 것도 어렵고 애국심을 갖게 하기도 힘들었다. 고심 끝에 코메니우스는 어머니들을 교육하여 갓 태어난 아기부터 올바른 방향으로 양육하도록 해 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만 6세 이전에 어머니들로부터 신앙을 배운 유아들은 청년이 되어서도 그 믿음을 굳건하게 지켰고 지식을 습득하여 유능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어머니들을 위한 교육서로 ‘유아학교’(무릎학교라고도 번역함)를 썼고 어머니들이 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다 자란 나무의 보기 싫은 가지들은 어린 묘목일 때부터 잘못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람 또한 처음 형성된 육체와 정신의 조합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면서 어머니들이 ‘유아학교’의 가르침대로 유아들을 성심껏 가르칠 것을 부탁하였다. 믿음을 간직하면서 자란 이 모라비아인들은 세계 전역으로 퍼졌지만 대대로 신앙을 지키고 있다가 훗날 자신들의 교회를 곳곳에 세웠다. 칼럼을 시작하며 모라비아인들에 대해 장황히 쓴 것은 가정이건 나라건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 유아들이 올바른 신앙심을 갖고, 도덕적인 행동을 하며,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우며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서다. 현재 우리나라 청년들은 신앙심을 이야기하거나 도덕적 행동을 말하면 구태의연한 노인 세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앙심과 건전한 도덕이 빠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무엇일까? 허무감, 우울증, 자살 충동, 물질만능주의는 아닐까? 코메니우스는 유아학교에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경건함, 도덕심, 지식의 순서여야 한다고 했다. 이 순서를 바꾸어 지식을 먼저 가르치면 그 아이는 분명 버릇없고, 배려심 없으며, 머리를 써서 나쁜 일을 하는 어른으로 자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모든 기독교 가정에서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건전한 가정이 건전한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원영 약력=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유아교육학 석사, 이화여대 유아교육학 박사, 중앙대 유아교육과 교수(1975∼2008.6), 현 환태평양유아교육연구학회(PECERA) 회장
행복한 아침/ 말과 행동/ 이원영/ 중앙대학교 유아교육과/ 2010-08-05
행복한 아침/ 말과 행동 20개월 된 외손녀 정인이의 말이 아주 급속도로 늘고 있다. 주변 어른들은 모두 이 아이가 35개월 된 오빠 정연이보다 말을 빨리 배운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 오빠가 선생님이다. 정인이는 오빠한테 맞거나 밀려 넘어지면서도 계속 오빠 주위를 맴돌면서 말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 들리는 말을 실제로 사용해 보려고 정인이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반대로 하기 시작한 오빠가 “안 먹을 거야” “내거 아니야” 하는 것을 들은 후에는 밥 먹을 시간이 될 때마다 “안 먹어” 하며 도리질을 하곤 한다. 아이 엄마는 “엄마, 이 애는 이상해. 안 먹는다면서 다 먹어” 했다. 그렇다. 정인이는 새로 들은 말을 실험해 보기 위해 ‘안’ ‘아니야’를 여기저기 붙여보면서 실험하고 있는 것이지 그 말과 연결된 행동의 의미까지 연결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배운 말과 연결되는 행동의 의미까지 파악하려면 수십 번의 실험과 시행착오가 있어야 하고 이런 상황을 유심히 관찰한 후 친절하게 도와주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어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내가 정인이를 안고 물 마시는 것을 도와줄 때였다. 나는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물높이가 아이의 입과 수평이 되도록 붙잡아주고 있었는데 정인이는 내 손을 계속 아래로 밀며 “빼, 빼” 하였다. “정인아. 뭐를 뺄까?” 해도 아이는 계속 힘을 힘껏 주어 내 손을 아래로 밀며 “이거 빼” 했다. 순간적으로 난 판단을 해야 했다. 계속 컵을 잡고 있으면서 옷을 적시지 않게 할지, 정인이 혼자 물을 마시며 옷을 적시게 할지를 말이다. 난 후자를 택했다. 아주 좋은 교육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정인아. 할머니 손뗀다. 네가 컵을 꼭 잡아” 하며 아이의 두 손이 컵을 잘 감싸 잡도록 도와주며 손을 뗐다. 물론 정인이는 컵을 위로 쳐들어 옷을 다 적셨다. 하지만 “빼”라는 말 대신 “손을 뗀다”는 말을 행동과 연결해 배울 기회를 가진 것이다. 하루 종일 아이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모든 어른이 아이가 새로 배우는 말을 도와주기보다는 그 아이가 쏟은 물, 그 물로 적셔진 옷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법석을 떨곤 한다는 것이었다. “아유 쏟아졌잖아. 누가 너보고 컵으로 물마시라고 했어?” “빨리 와 옷 갈아입자” 등의 말은 하지만 그 아이가 왜 컵을 자기 힘으로 움직이려 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이는 아이를 불완전한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태에서 지으신 존재로서,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고, 양육에 따라 신성이 피어날 존재로 본다면 어른들의 대응은 달라질 것이다. 아이에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그 아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동기를 파악해서 알맞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야 말의 의미까지 파악하며 배울 수 있다. 조기교육이 중요하다고 해서 어린 시기부터 학습지를 시키고 어른이 하는 말을 따라하게 하며 주입식으로 시키는 것은 공부도 아니다. 도리어 학습을 두려워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행복한 아침/ 무지개/ 최문자 시인/ 협성대학교 총장/ 2010-07-21
행복한 아침/ 무지개 무지개는 약속과 열정과 비전의 상징이다. 유년시절 소나기 온 뒤 이 산에 뿌리박고 저 산을 향해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뜬 것을 보고 수많은 상상력 속에 빠졌었다. 나뿐 아니라 동네 아이들도 ‘무지개 떴다’라고 외치며 무지개를 보러 마당에 나와 서성거리거나 산을 향해 달려가던 것을 기억한다. 무지개가 뜨는 것이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영향이나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지개의 출현은 상큼하고 가슴 후련하며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이 들고 나서 가끔 무지개에 대하여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유년시절과 같은 막연한 흥분 상태로서가 아니라 무지개를 이루고 있는 컬러의 아름다운 공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일곱 가지 색깔을 가졌음에도 어느 색깔 하나 자기의 힘을 과시하거나 영역을 넓히려 하거나 다른 색깔을 제압하려고 하지 않는다. 무지개는 자기 외의 다른 색깔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자기 색깔을 눈부시게 빛내면서 같이 아름답게 둥근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하나가 되자’라고 구호처럼 외칠 때가 많다. 나는 그때마다 내 마음속에선 다른 생각을 한다. 이 세상 어느 사물도 사건도 현실도 상태도 모습이나 속성에 있어서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꽃과 돌이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나무나 사람이 하나가 되어 나무가 사람이 되든지 사람이 나무가 되는 일은 창조의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무섭고 흉측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일에 대한 의견을 모을 때마다 ‘하나가 되자’라고 마치 윽박지르듯 몰아붙인다. 정말 절대적인 한 모습으로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일까? 모습과 생각은 다르지만 훌륭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공존하며 목표를 위해서 가장 훌륭한 무지개를 떠올리려 애쓰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총장으로 대학의 일을 집무할 때 안건을 진행하는 회의는 적지 않다. 그때마다 생각이 다르고 목적이 다르고 욕구가 다르지만 모두 자기 모습대로 자기 생각대로 회의가 진행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총장은 어느 한 색깔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모두 생각과 주장은 다르지만 자연의 조화로움 같은 거대한 대학 발전의 목표를 위해서는 그 모습 그대로 공존하면서 둥근 무지개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라고 생각해 왔다. 색깔마다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잠재력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카리스마라는 리더십이라는 미명 아래 많은 리더들은 다양성을 하나로 통일하여 한 가지 색깔의 무지개를 떠올리고 싶어한다. 쉽고 속도감 있는 결과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컬러가 삭제된다. 글로벌 시대, 다양한 욕구가 존중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 상상력이 이 시대의 중심을 가고 있다. 그 수많은 상상력을 하나로 묶을 필요가 정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창조주가 그걸 기뻐하고 계실까? 무지개의 파괴가 진정 변화일까? 가끔 깊은 생각에 빠진다.
행복한 아침/ 부부/ 용혜원 시인/ 유머자신감연구원 원장/ 2010-07-04
행복한 아침/ 부부 부부의 삶은 행복해야 한다. 신혼 시절부터 황혼이 물들어갈 때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이란 처음부터 풍덩 빠져버리는 건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줄은 몰랐다!” 부부 사랑도 마찬가지다. 행복하게 살다보면 얼굴도 닮아가고 생각도 닮아가고 서로의 사랑에 물들어가게 된다. 이 지상에서 내가 사랑할 사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집에 살아 신발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게 행복하다. 내 곁에 있어주고, 기다려주고,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나누며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은 동행하는 기쁨을 준다. 짐 콜린스가 이렇게 말했다. “성공이란 나이가 들수록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점점 더 나를 좋아하는 것이다.” 아무리 출세를 하고 돈이 많고 대단한 인물일지라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살다보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고 좋을 때도 많지만, 힘들고 벅차고 어려울 때도 많다. 그러므로 부부가 가장 힘들 때 하면 좋은 말이 있다. “여보! 나 있잖아!” 아주 짧은 표현이지만 정감이 있고 신뢰를 주는 말이다. 영국 속담에 “성공할 사람은 먼저 아내에게 묻는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부부가 서로 신뢰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 중의 축복이다. 무더운 여름날 강의를 하고 오면 아내가 “여보! 덥지요? 잠깐만 기다려요! 열무국수 해드릴 게요!” 하며 큰 양푼에 열무국수를 해줘 시원하게 먹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된 기분이다. 먹고 나서 시원한 냉커피까지 타주면 ‘아내와 결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 사이도 아주 작은 일들 속에 행복을 느낀다. 서로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배려해주면 싫어할 사람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정을 듬뿍 주며 살아야 행복하다. 부부 생활은 산맥과 같다. 높은 곳도 있고 낮은 곳도 있다. 실패할 때도 있고 성공할 때도 있다. 결혼 생활의 행복은 어느 순간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익어가는 과일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마음이 바짝 마르게 살지 말고 마음에 살이 통통 쪄서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북미 인디언 가족의 전통적인 인사말이 있다. “당신이 있어서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편에게, 가족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해주면 참 좋은 말이다. “당신이 있어서 고맙습니다.”
행복한 아침/ 사랑과 자유/ 호6:6/ 김성일 작가 / 2010-08-09
행복한 아침/ 사랑과 자유 호6:6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하셨을까?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고 그를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우주와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수상한 일들이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까다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환상과 기쁨이 있는가 하면 눈물과 한숨도 있고, 터질 듯 벅차오르다가 처절하게 무너지기도 하고, 화사하게 피어나는가 하면 아파서 몸부림을 치기도 한다. 사랑은 논리적으로 따질 수도 없고, 수학으로 계산되지도 않고, 지식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10) 그런데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그 사랑을 시작하신 것이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사 5:1) 사랑하는 이의 창가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듯 사람이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사랑에 빠진 하나님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랑은 일방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듯 그도 나를 선택해 주어야 한다. 사랑은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프러포즈를 받은 자가 자유로운 입장에서 상대방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 곧 자유의지를 주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 그것이 하나님의 프러포즈였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고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곧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자신의 판단대로 살겠다는 쪽을 선택했다. 내 말을 받아들여 나와 함께 살자는 하나님의 구애는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모처럼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과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비극으로 막을 열었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미 1:8)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호소하고 계신다. 나의 이 간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알아달라고 애원하신다. 구약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이 그렇게 울며불며 사람을 쫓아다니시는 슬픔의 역사이고 아픔의 역사였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행복한 아침/ 사색의 즐거움/ 용혜원 시인/ 유머자신감연구원 원장/ 2010-08-22
행복한 아침/ 사색의 즐거움 현대인에게는 사색하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색하는 시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허둥지둥 살다 보면 후회막급한 일들이 생긴다. 사색은 마음의 창고에 생각의 씨앗을 담아 놓는다. 사색하는 사간이 줄어들고 없어지면 성격이 급해지고 거칠어지고 실수가 많아진다. 자기중심적으로 되어 불평과 불만이 늘어난다. 사색이란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관조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평온하도록 고요함을 즐기는 것이다. 혼자일 때 진정한 사색을 할 수 있다. 홀로 사색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꽉 닫힌 마음의 뚜껑을 열고 들어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긍정정인 생각을 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웃음꽃이 피어나고 눈이 맑아지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 사색하며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하면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 사색에만 몰두하면 좋은 것이 아니다. 지나친 사색은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나약하게 만든다. 사색과 행동이 동반되어야 좋은 삶의 결과를 나타낸다. 소로는 사색에 대하여 말했다. “사색함으로써 우리는 본심을 잊는 일 없이 열중할 수 있다. 의지의 의식적인 노력으로써 우리는 행위와 그 결과에서 초연히 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만사에 선이든 악이든 격류처럼 우리 옆을 지나간다. 우리는 자연 속에 완전히 휩쓸려 있지는 않는다. 나는 물결에 흘러가는 나무토막일 수도 있고, 또는 공중에서 그 나무토막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사색하는 시간만큼은 주위가 산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색을 통하여 꿈을 만들고 행복을 추구하고 사랑에 빠져들어야 한다. 사색을 하면 생각이 행동으로 나갈 길을 잘 열어준다. 생각이 없으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색할 시간도 없이 바쁘고 힘들게 일을 하다 보면 생각지 않은 곳에서 일이 터진다. 그때는 후회할 시간도 없다. 사색할 시간을 가지면 우리의 삶에는 생기가 돈다. 시간이 있을 때 공원이나 한적한 길을 산책하며 사색을 즐기면 삶이 행복해진다. 어느 날 산책을 한 마음이 남아 있어 시 한편을 쓰게 되었다. “삶을 명랑하고, 즐겁게 살고 싶다면, 산책을 즐겨라. 삶의 순간순간마다, 지칠 줄 모르고 일어나는 질투심과, 반목과 시기와 변명에 시달리는 마음과, 뜨거운 유혹의 불길을 식혀야 한다. 삶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지나친 욕망을 벗어버리고,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삶이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아무런 소망도 없이 번잡한 일에 파묻혀 살던 것들, 잠시 놓아두고 마음 편히 걸어라. 삶이 평안하기를 원한다면 무거운 엉덩이를 번쩍 들고 일어나 산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