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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다윗/ 삼상17:41-49/ 2005-01-26
21세기 다윗 삼상17:41-49 오늘 본문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건입니다. 블레셋나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스라엘 서해안 지역에 살고있는 강력한 민족입니다. 블레셋은 지금의 팔레스타인입니다.(지중해 동쪽 해안의 이스라엘·요르단·이집트로 둘러싸인 지역. 지중해 연안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으로 되어 있다. 면적은 요르단강 서안 5800㎢, 가자 365㎢. 인구는 331만 1000(2001). 수도 예리코.) 지금까지도 그 민족은 이스라엘과 공존하면서 다투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역사가들은 우리 민족이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930여번 이상의 크고 작은 외침을 받았다고들 합니다. 말이 930번이지 엄청난 숫자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잡아도 대략 4,5년에 한 번 꼴로 외국의 침략이 있었고 이 땅에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처럼 많은 외침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우리 민족의 저력은 대단합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나라의 힘이 약했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우리 못지않게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입니다. 이 블레셋이라고 하는 민족은 아주 문화가 발달한 민족이고 군사력으로도 대단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졌습니다. 엘리 제사장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자녀들을 잃었고 사울왕도 아들들과 함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삼손도 블레셋에 가서 두 눈이 뽑히고 연자멧돌을 돌리다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수백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이 블레셋입니다. 본문을 보니까 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이 소고라는 곳에 나와서 진을 치고 큰 소리로 욕을하고 하나님을 모욕합니다. 삼상17: 9-10절 “그가 능히 싸워 나를 죽이며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온 이스라엘 군대가 그와 싸우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6규빗 하고 한 뼘, 약 3m에 가까운 거인입니다. 북한 농구의 간판스타 이명훈(28)이 키 2백35 cm에 몸무게 1백28kg . . 제자리에 선 채 덩크슛이 가능하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큰지 이해가 되십니까? 갑옷의 무게가 5000세겔, 57kg정도 . . .창날만 해도 철이 600세겔입니다. 어른의 몸무게 만큼 됩니다. 블레셋은 당시 철무기를 사용했습니다. 그 시대 신라는 토기를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목민 생활을 오래 해 왔기 때문에 그런 문화는 아예 없었습니다. 이렇게 문화가 발달한 블레셋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당해내겟습니까? 골리앗앞에 사울과 백성들은 고양이앞에 생쥐처럼 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지금 골리앗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대적 골리앗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직장과 생업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신앙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지만 우리 앞에 닥친 문제가 너무나 크고 높고 심각한데 비해서 상대적으로 우리 자신은 작고 부족하고 연약하여 고민하고 방황하고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골리앗, 우리가 보기에는 다윗이 전혀 상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길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순종과 말씀의 훈련을 철저히 받아야 합니다. 날마다 적극적으로 철저한 순종의 훈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만난 것이 인생의 성공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큰 축복의 길을 걷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닭과 독수리는 폭풍을 만났을 때 취하는 행동이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폭풍이 닥쳤을 때 닭은 날개를 접고 꼼짝 않고서 주저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이와 반대로 날개를 펴고 폭풍을 헤치면서 안전한 곳으로 피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환난을 만났을 때 겁에 질려 꼼짝못하는 닭과 같은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날개를 펴고 바람을 헤치며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는 독수리와 같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특별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에 의하면 그의 삶에는 신비스러운 기적의 역사가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삶도 우리들의 삶처럼 고난이 많았습니다. 죄악에 빠져 후회하며 산 사람입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고통스러워하며 인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위기의 순간을 영광스러운 역사로 바꾸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축복을 받을 수 가 있었을까요? 첫째, 다윗은 안에 있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것을 더 중요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서 보이는 것들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21세기입니다. 20세기에는 보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20세기에는 강한 것, 일류학교, 좋은 대학, 학력을 중시 했습니다. 경험, 전통 등이 중요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때입니다. 실력이 더 중요한 때입니다. 학력보다 아이디어가 더 중요합니다. 정보가 더 중요합니다. 경험보다 용기가 더 중요합니다. 다윗 자신은 사자와 곰 같은 강한 적과 싸워 본 경험이 있는 훈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 때문에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밖으로 나타난 실력 보다는 안에 감추인 영성이 더 중요합니다. 다윗은 밖으로 볼 때는 내 놓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든든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다윗의 말\\\' 중에서 그에게는 “사시는 하나님”(26절)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왜 두려워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다윗 자신을 도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순한 백성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라고 표현합니다.(26절)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의 연합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것은 곧 하나님을 모욕한 것으로 보았기에 이 전쟁은 하나님이 보호 해 주실, 하나님이 싸워 주실 전쟁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 하나님이 살아 역사함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이 믿음은 어제의 지켜주심이 오늘의 믿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체험신앙인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적으로 안다할지라도 체험이 없으면 믿음은 확실해 지지않습니다. 신앙은 경험적입니다. 다윗이 이처럼 고백을 하였다는 것은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고, 그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함께 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지금 함께 하신 하나님은 미래에도 함께 하십니다. 사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의 삶 전체를 주관하십니다. 공간을 초월하여, 시간을 초월하여 . . .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37절) 가지고 살아간다면 골리앗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사자와 곰을 이기게 하셔서 양을 구해주신 그 하나님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도 반드시 이기게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군인도 아닙니다. 그는 아직 나이도 어리고 미처 군대에 징집도 되지 못한 어린 아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않았습니다.‘나는 아직 어리니까’용기를 가지고 도전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합리화 하기를 잘 합니다. 스스로 합리화 하지 마십시오. 도전하십시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한다면 거기에는 별다른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실패의 위험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일을 이루실 일에 믿음의 도전을 하십시오.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거기에는 실패의 위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다윗은 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45절에 “너는 . . .나는 . . .”이런 문구들을 찾아봅니다. 분명한 자기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당당했습니다. 삼상17:26,36 “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 . .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 할례없는 블레셋 사람”, . . .그는 너무도 겁이 없었습니다. 어린 것이 나서지말라는 형들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왕인 사울에게마저 “그를인하여 낙담하지말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 . .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히 이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가 마귀의 사람인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것이 되었는가?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교회에는 있지만 구원과 상관 없는 사람인가? 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여호와의 대행자로 살았습니다. 다윗이 정체성이 분명하게 된 것은 그가 사무엘로 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부터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16:13)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 할 때 정체성이 분명해 지고 강해집니다. 위대한 성경의 인물들은 예외엾이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릴 때 그렇게 힘이 있던 사람이 마른 막대기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을 볼수 잇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을 때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자 그는 악신으로 충만해서 미치광이가 되고 맙니다. 삼상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손이 하나님의 영에게 감동을 받았을때 얼마나 힘이 강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리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비참하게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 새로운 힘이 생겨서 우상의 신전의 두기둥을 잡고 밀어서 원수들을 갚았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안에 있을때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겉으로 나타난 것은 검을 가졌다든가 투구를 썼다든가 가슴에 방패를 붙였다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는 한 소년 일 뿐입니다. 양을 치는 어린 소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그를 충만케했습니다. 그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지혜를 얻게 하고 힘과 용기를 가지고 승리할수 있게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길수 있는 비결은 성령충만의 길받게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네 증인이 되리라\\\" 세째. 다윗의 무기는 믿음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기가 좋아야 합니다. 골리앗은 갑옷과 투구와 칼, 창, 방패 등으로 완전무장을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까요? 다윗이 사용한 무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고작 물매와 돌맹이 다섯 개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지금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올림픽에서도 중요한 것은 자신감입니다. 우리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믿음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사람이 꾸지람을 들으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힘을 잃게 됩니다. 다윗은 “들에 있는 양은 누구에게 맡기고 전쟁을 구경하러 왔느냐?”는 큰 형 엘리압의 꾸중을 들었습니다(28절), 또 “너는 소년이고, 골리앗은 어렸을 적부터 용사이어서 너와는 상대가 안 된다”라는 사울 임금의 부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33절) 그리고 골리앗의 우렁친 말을 들었습니다. 삼상17:8-9 “그가 서서 이스라엘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의 장대한 외모와 전신갑주로 완전 무장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의 창과 칼을 보지 않았습니다. 사울 임금의 부정적인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므로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믿음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사용하던 물매와 돌을 준비했습니다. 다윗이 무기가 좋아서 승리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무기를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와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갔기 때문에 돌 한 개만 있어도 골리앗을 넘어뜨리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골리앗을 볼 때 “너무 크다. 나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다.” 라고 생각했지만 다윗은 “골리앗은 엄청나게 크다. 그러므로 나는 물맷돌로 충분히 맞출 수 있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의 눈은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합니다. 다윗은 긍정적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일이 어려울 때 문제를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사람들처럼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눈, 믿음의 눈, 기독교세계관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비결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체험을 많이 가진자가 힘이 있는 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우리의 무기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골리앗을 쓰러뜨리고도 다윗의 호주머니에는 사용하지 않고 남은 4개의 공기돌(조약돌)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습니다. 앞으로 골리앗 같은 적이 얼마든지 나타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기로 삼는 자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겨우 겨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지 마시고 다윗처럼 넘치는 능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무(三無)의 사람 다니엘/ 단6:10-18
3무(三無)의 사람 다니엘 단6:10-18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대로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를 가리켜서 삼다삼무(三多三無) 의 섬이라고 합니다. 바람 돌 여자, 이 세가지가 많다고 해서 삼다도라고 하며 또 세가지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거지 도적 대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三多의 사람이 되는 동시에 오늘 말씀 드리는 다니엘처럼 三無 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니 엘을 살펴보면, 다니엘은 삼다삼무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1) 은총을 많은 받은 사람. (2) 지혜가 특출하고 많은 사람 (3) 더망이 높은 사람, 이 렇게 삼다의 사람이었고, (1) 무흠의 사람 (2) 무퇴의 사람 (3) 무적의 사람으로서 삼무의 사람이 었습니다. 삼무의 사람 다니엘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상고해 봅시다. = 사생활조차도 흠없어 = 다니엘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바벧론 나라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끌려온 포로민 중에 한사람입 니다. 망국민족의 한을 가슴에 품고 수치스러운 포로민의 생활중에도 다니엘은 결코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도아니하고 그렇다고 굴욕적인 저자세로 아부하지도 아니하고 성실하게자기 발전을 하여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역량이 인정을 받아 메데 다리오왕 하에는 1백20명 방백을 통솔하는 세사람의 충리중에 한사람이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정적들이 적 지않게 많이 있었던 같습니다. 그리하여 정적들은 다니엘에게 조그마한 흠점이라도 발견되기만 하면그를 왕에게 고소하려고 눈 에 쌍심지를 켜고 흠집을 찾으려고 혈안이되어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 틈, 아무 허물, 아무 근심, 아무 그릇함도 없는 무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그를 높이기 위한 거짓되고 과장된 선전이 아니라 그의 정적들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고백이었으니만큼 조금도 허위나 과장된 말이 아닌 것입니다. 다니엘서 6:4에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 도 없음이었더라] 이란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다니엘이야말로털어도 먼지 하나 나지않는 완전무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완전 무흠한 사람이기에 포로 민의 낮은 신분으로서 당당하게총리적에 오를 수가 있었고 그 직무를 흠없이 충성되게 감당할 수가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항상 세상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주목의 대상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들이란 그들에게서 말과 행동에 흠잡힐 것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만 일 그렇지 않으면저들은 집중적인 비난과 공격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것이 없고 교회의 신성을 보호할 길도 없을 뿐더러 애매하게 하나님의 영광마저 가리우게 될 것입니다. = 불의와 타협않는 대쪽 = 용진무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의를 위하여 용감히 나가고 어떤 위협에도 뒤로 물러설줄 모르 는 사람을 가리켜 용진무퇴하는 사람이라고합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는 나가는 앞길에 태산 이 앞을 가로말고강물이 앞길을 가로막고 친구가 극구 만류하고 대적이 위협하고 죽음이 공포가 있다 할지라도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할 뿐, 뒤로 물러설줄모르는 사람을 가리켜서 무퇴의 사람 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이와같이 무퇴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을 모함하려는 정적들이 그의 흠을 발견하지 못하자 이제는 죄를 지어내서 앞으로 30일동안 왕 이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나 기도하면 사 자굴에 던져 넣는 왕의 법령을 발표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을 이러한 법령이자신을 처치 하기 위한 정적들의 간악한 술책인 것을 잘 알면서도 차라리 왕에게 반역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 께 반역자가 되지 않는 것이 더올바른 도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음밀한 기도가 아니라 정적 들이보라는 뜻으로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그대로 하루 세번씩 무릎 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이것은 결사적인 신앙을 통한 무퇴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그가 양보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순순히 기쁘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하겠 지만 양보해서는 안될 일에 대하여는 목에칼이 들어온다 해도 한걸음도 물러 서서는 안되는 것 입니다. 참그리스도인이라면 최후까지 고수해야 할 것은 신앙과 계명과 진리와 정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을 양보하는 것은 세속에 대한 항복이요 계명을 양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요, 진리를 포기하는 것은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요, 정의를 포기하는 것은 불의와 동조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 그리스도인들은 비굴한 영광보다는 영광스러운 고난을 택할 것이요 배신자가 되기보다는 순교자가 되는 편을 택하여왔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루 세번씩 기도 드린다는 것은 신앙과 계명에 속한 일이요, 예루살렘을 위해 비는 것은 진리와 정의에 속한 일로서 결코 타협하거나 중단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퇴 의 사람 다니엘은자기 혼자서라도 기도하는 일을 계속했으며 이 일을 권력이 굴하고 그일을 하는 데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하더라도 양보하거나 중지하거나결코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들은 너무양보하기를 잘하며 쉽게 물러서기를 잘하는 과오가 있습니다. 곤고할때도 그러한 것처럼 형통한 후에도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하며 병들었을때도 그러한 것처럼 건강한 후에도 계속 기도히야 하며 다수일때 그러한 것처럼 홀로일 때도 정의를 고수하며 물러서 지 말아야 참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장망성을 떠나 천성으로 올라가는 생활입니다. 제자리걸음이나 작전상 후퇴라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전진 또 전진이 있을뿐입니다. 우리 나가는 앞길에 광야가 가로 막아도, 홍 해가 앞을 막아도, 애굽의 병정이 뒤쫓아와도, 아말렉이 우리를 공격해도 우리 성도들은 용진무 퇴의 삶으로써 천성까지 들어가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믿음으로 하나님 편에 = 다니엘에게는 그를 해하려는 원수들 정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차례차례로 항복 하거나 자연도태되어 버려서 결과적으로 다 니엘은 무적의 사람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이 무적의 사람이 된데에는 다음 두가지 비결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로, 인자무적의 비결입니다. 잠16:7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 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 사람이 하는 일에 워낙 선하고 의 롭고 어질고 착하면 그를 오해하고 미워하는 원수라도 친구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강자무적의 비결입니다. 철저하게 강한 사람에게는 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대적했다가는 자멸할 것을 잘 알기때문입니다. 우리 연약한 인간이 철저하게 강하게 되 는 유일한 비결은하나님께서 내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18:6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내게 어찌하리요]라고 하셨 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1) 성부의 말씀 충만 (눅1:37). (2) 성자의 보혈 충만(빌4:13). (3)성령의 새생명 충만 (슥4:6) 한 신앙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막9:23). 요일5:4에 [세상을 이 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니라],히11:6에[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으로 하나님편이 되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사자굴에 들어가서도 오히 려 사자들의 보호를 받고 모함하는 원수들이사자굴 속에 들어가 사자밥이 되고 말았으니, 히11:38 에 [이런 사람은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고 하신 말씀대로 다니엘은 그 누구라도 당할수 없는 최 강자였습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우리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저들을 적으로 만들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으로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며 목마른자에게는 마실 물을 주며 헐벗은 자에게는 입을 것을 입히고 나를 미워하고 해 하려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가 있다면 그들도 내 친구로만 들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원수를 위해 복을 비는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끝까지 적대시하려는 미련한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멸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원수를 사랑 하기는 고사하고동지를 적으로 만들고 형제들끼리도 미워하고 교우끼리도 원수가 되게하는 사람 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마땅히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종말론적인 최악의 시대에 있어서 특히 우리 민족적인 위기에처한 상황속에 살아가는 우 리 신자들은 다니엘에게서 배워야 하고 모범을 삼아야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3무의 사람입니다. (1) 무흠한 사람, (2) 무퇴의 사람 (3) 무적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삼무의 사람이 된 것은 물론 다니엘이 훌륭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다니엘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생활,주님 제일주의,신앙만능주의로 철저하게 믿고 철저하게 사랑하고 철저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영위함으 로 만군의 여호와가 다니엘의 편이 되게 한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내편이 되시게 하기 위하여 삼무의 사람이다되시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의 역사 은혜의 역사 축복의 역사가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70이레의 비밀/ 단9:24-27/ 2015-08-01
70이레의 비밀 단9:24-27 오늘 말씀 드리는 70이레의 비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모든 종말론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면 종말에 대한 여러 주장에 대하여 흔들리지도 않고, 혼동되지도 않으며,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 하면 늘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혹자는 말하기를 [이 말씀은 종말론의 뼈대]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의 시간을 70이레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에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모든 일들은 유대인의 회복 뿐 아니라 인류의 구원까지도 다 이루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간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내린 때\"부터 시작됩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단 9:24-25). 우리는 이미 지나온 말씀들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내린 때\"에 대하여는 충분히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즉 이 역사적인 대 사건은 B. C. 539년 1월 29일에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중동의 패권을 잡은 메대와 파사의 왕 고레스가 내린 명령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파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파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파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스 1:1-3). 일어날 사건들 70이레 동안에 일어날 기본적인 사건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영적인 문제로 인류 구원의 사건이고, 둘째는 유대민족이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과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사건이고, 셋째는 인류의 종말입니다. 첫째, 속죄 사역에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24절을 조심 있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인류의 구원과 관계된 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허물이 마치며, 두 번째는 죄가 끝나며, 세 번째는 죄악이 영속되며, 네 번째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다섯 번째로 이상과 예언이 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역은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지극히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그리스도가 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둘째, 유대민족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단 9:25). 이 말씀에는 세 가지 사건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루살렘의 중건으로써 일곱이레 동안에 진행되는 사건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가 오시는 사건으로써 육십이 이레가 지난 후의 일입니다. 세 번째는 예루살렘은 곤란한 중에 중건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그리고 성전을 중건한 후 예루살렘 성을 중건합니다. 그러나 이 공사는 경제적인 여건이나, 인원동원 등의 문제뿐 아니라 이웃 민족의 방해 공작 때문에 아주 어렵게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주변 국가의 위협을 받고 한쪽 손에는 공사에 필요한 쟁기를, 또 한쪽 손에는 이방 민족의 침략을 저지할 무기를 들고 공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이 때의 형편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 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느 4:17-18). 과연 바벨론에서 시작되는 세계의 역사와 유대인의 회복, 그리고 예루살렘의 중건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하나님의 작정과 예언하신 대로 정확하게 엮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큰 교훈을 얻게 됩니다. 역사 진행이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대로 움직이는 것은 앞으로 다가오는 인류의 종말도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우리 장로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오직 경외와 아멘과 할렐루야가 있을 뿐입니다.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의 끝 셋째,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는 언제 끝이 나며 또 끝이 나는 시점에는 어떤 사건이 발생합니까? 첫 번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단 9:26).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진다\"는 말의 원어의 본 뜻은 \"자연히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작용을 통하여 없어지는 것\"을 가르칩니다. 과연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연사를 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운명하시게 됩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합니다. 한 왕의 백성은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과 그가 이끄는 로마의 정예 부대를 지칭하는 것인데 그는 A. D. 70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무참히 살육을 합니다. 초대 기독교 사가인 요세브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때 약 110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살해되고, 9만7천명이 노예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은 재건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고, 맛사다에서 끝까지 항전을 하던 유대의 민족주의자들은 전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본문 말씀대로 \"홍수에 엄몰된 것처럼\"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리우리라\"(마24:2)고 하심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역사의 증언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가면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 이상과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작정하신 70이레 중 69이레는 흘러갔습니다. 남은 한 이레 이제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인류 역사의 시간은 한 이레가 남은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한 이레이기 때문에 이 한 이레의 의미는 더욱 심각하고 신중합니다. 이 한 이레의 문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해석도 간단하지 아니합니다. 종말론에는 크게 두 가지 큰 흐름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흐름은 한 이레를 보는 시각에도 두 가지 의견을 제시합니다. 두 가지 흐름의 첫째는 역사론적인 입장이고 둘째는 미래적인 입장인 세대주의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역사론적 입장입니다. 이들은 한 이레를 70이레의 계속적인 흐름으로 생각합니다. 그랬을 때 생기는 의문점은 70이레가 시작되어 69이레가 지나는 시간보다 남은 한 이레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 이들의 고민으로 남습니다. 즉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내린 때가 B. C. 586년이고 예루살렘이 멸망한 해는 A. D. 70년이니 불과 600여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부터 지금까지는 190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니 도식상으로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두 번째, 미래적인 학자들의 입장이 생깁니다. 이들은 이 한 이레를 인류 역사의 흐름에서 뚝 떼어내 별개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이 한 이레는 인류의 종말에 있을 한 이레이고 69이레 끝과 한 이레의 시작 사이에는 굉장히 긴 시간의 공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의 공백기가 지금까지 1900여년이나 흘렀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공백에 대하여 언급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괄호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괄호시대에는 하나님이 유대인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상대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말씀드리기 전에 우선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서 정답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7). 두 가지 견해 앞서 말씀드린 종말론의 두 가지 입장은 \"그\" 라고 하는 부분을 해석하는 견해에서 서로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즉 세대주의는 그를 적그리스도로 생각하고, 역사론적인 입장은 \"그\"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세대주의의 입장 세대주의의 입장에서는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들은 문장의 흐름으로 보아 \"그\"라는 대명사는 앞서 있은 [한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는 자연히 로마가 될 터인데 로마는 망하여 지상에 없으니 이들은 말하기를 인류 종말에 로마 제국은 재생되어 적그리스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과 언약을 맺는데 그것은 유대인과의 언약이고 이레의 절반까지 즉 전3년 반까지는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를 드리게 하나 후3년 반에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하고 전권을 휘둘러 신자를 핍박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역사론적인 입장 첫째로 역사론적인 입장에서는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이레의 기간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해석은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 이레의 기간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신 데, 하나님이 작정하신 역사의 시간을 확인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가능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활동은 할 수 있어도 기간을 굳게 정할 권세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즉 한 이레가 시작되어 전3년 반이 시작되면 예수님은 제사와 예물을 폐지하십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예루살렘에서 소나 양이나 염소로 제사 드리는 것은 무의미해졌습니다. 히브리서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8-9). 칼뱅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날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구약의 의식을 폐지한다는 것 뿐 아니라 하늘이 열려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초청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제물이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미운 물건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에도 성전에서 소와 양으로 드리는 제사가 바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2)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마 24:15)이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로마 군인들의 침략으로 해석을 합니다. 3) 저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우상입니다. 그런데 그 미운 물건이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 자리에 세워졌고 그것은 수천 년 동안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끄덕하지 않고 서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 성전 자리,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려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던 그 자리에 이슬람교의 성전이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진노란 단어의 뜻은 완필(完畢) 곧 변동할 수 없이 완전히 끝이 났다는 뜻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합니다. 지금이 하나님의 진노가 예루살렘에 쏟아지는 시절입니다.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고 하였는데, 지금 중동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을 정탐한 후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라고 보고하였지만 지금의 팔레스타인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고장이 아닙니다. 전쟁과 황폐함이 있을 뿐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한 이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주님의 재림과 인류의 종말이 가까웠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정확하게 응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꼭 신앙생활을 정확하게 잘하여야 합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경제활동이나 사회생활보다도 더 정확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종말은 두 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행연습도 없고 또 다시 주어지는 기회도 없습니다. 한 번 실수하면 영원한 실수가 되고 마는 것이 종말에 대한 실수입니다. 그러니 꼭 신앙생활을 잘 하여 주님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대인 목사
7년 대환난의 비밀/ 단11:1-13/ 2015-08-01
7년 대환난의 비밀 계11:1-13 여러분 중에는 지금까지 종말론에 대하여 들어보신 경험이 있고 또 나름대로 종말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을 줄 생각합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듣고 있던 종말론과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잘 비교하면서 정확한 종말론을 정립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70이레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중에서 세대주의란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 세대주의 사상은 우리 한국 교회에도 뿌리를 깊이 내린 종말론입니다. 이 종말론은 보수적인 것도, 정통적인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개념을 정리해 드리기 위하여 세대주의 종말론의 개요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세대주의의 종말론 하나님은 인류의 시간을 70이레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나면서 예루살렘은 중건되었고, 예수님의 초림과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전개됩니다. 그러는 중에 역사의 시간은 한 이레가 남게 되는데,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이 한 이레를 69이레의 계속으로 보지 않고 역사의 흐름에서 뚝 떼내어 인류의 종말의 한 기간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 한 이레를 날수로 환산하면 7일이 되고, 하루를 일 년으로 계산하면 7년이 되는 데, 이 7년이 최후에 있을 7년 대환난의 기간이라고 세대주의 학자들은 말합니다. 한 이레가 시작되는 때, 즉 7년 대환난이 시작되는 때, 예수님은 공중에 재림하시고 성도들은 휴거 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맞으며, 공중에서 7년 간 혼인잔치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들림을 받지 못한 불신자와 유대인과 믿음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지상에 남아서 대환난을 겪게 되는데, 이때 세상은 적그리스도가 장악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7년 대환난은 전3년 반과 후3년 반으로 나뉘는데, 전3년 반에는 적그리스도가 유대인과 결탁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고 제사도 드리게 하나 후3년 반에는 이것을 금지하면서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7년의 기간이 차면 그 때 주님은 이 지상에 내려오시어 천년왕국을 세우고 믿는 성도는 왕과 같은 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휴거론과 맞물린 세대주의 세대주의는 서기 2000년도를 매우 예민하게 관찰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기간이 6일 간이고 7일째는 안식하신 것처럼, 인류 역사는 6천년 동안, 인류 구원의 섭리가 진행이 되나 6000년이 차면 인류의 종말이 오면서 천년왕국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학자 Lightfoot는 성경의 모든 년대를 계산하였는데, 그의 계산대로는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는 B. C. 4004년이 됩니다. 이 이론을 따르면 서기 2000년은 6000년에 해당하는 해입니다. 그래서 서기 2천 년에 천년왕국이 세워지는데, 인류의 종말과 재림은 그 전 해인 1999년에 된다는 것입니다. 1999년은 불란서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1999의 해 7월에 하늘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예언과도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니 1999년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해이고, 그래서 이 해에서 7년을 뺀 1992년부터 7년 대환난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1992년에는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것이고, 이 해에 맞추어서 유럽은 E. U로 통합되어 통합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이 사람이 부활한 로마 제국 즉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때가 되기 전에 준비를 하였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휴거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상이 세대주의 종말론과 1992년의 휴거론이 맞물린 사건이었고, 이것으로 인한 피해를 한국 교회가 입은 것입니다. 역사론적인 입장 이제 정통적인 종말론, 즉 역사론적인 종말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그간 다른 종말관을 가지고 계셨던지, 세대주의적 종말관을 가졌으면 깨끗이 지우고 수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역사론적 입장은 한 이레를 역사의 시간에서 절대로 떼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므로 69이레가 지났는데 이것에 이어서 한 이레는 계속된다고 합니다.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2). 거룩한 성이 42개월 간 유린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42개월은 3년 반입니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이방인에 의하여 유린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이슬람 성전이 세워져 있고, 성전 뜰 한 모퉁이에는 저들의 회당이 세워져 하루 세 번씩 메카를 향한 이슬람교도들의 예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하여 유린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눅21:24). 이방의 때는 42주 즉 3년 반입니다. 그러면 아직 42주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역사론의 입장에서는 성도들이 전 3년 반에 휴거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지상에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계 11:3). 여기 나오는 두 증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1) 이 두 증인은 누구입니까? 2) 1260일은 얼마나 되는 시간입니까? 3)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두 증인은 1) 이 땅에서 주를 모시고 서 있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자들입니다. 2) 이들은 큰 권세를 받고 사역하는 사람들입니다. 3) 이들의 활동시간은 1260일 즉 3년 반입니다(계 11:4-6과 슥 4:13-14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3년 반 동안 하나님의 복음을 열심히 전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활동시간인 3년 반이라는 것은 전 3년 반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이 전 3년 반이라는 사실은 잠시 후에 밝혀질 것입니다. 이 복음 증거자들은 세대주의자들의 말대로 전 3년 반이 시작되면 공중으로 휴거되어 예수님과 함께 한가롭게 혼인잔치를 하면서 지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 땅에 머물면서 열심히 땀흘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7년 대환난이 시작되면 믿는 성도들이 휴거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힘있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 3년 반은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후 3년 반이 되면 전도자들은 핍박을 받습니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계 11:7). 무저갱에서 나오는 이상한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두 선지자가 환난을 당하여 죽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복음 전도자들이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곳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의 복음과 그의 신실한 종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전 3년 반이든 후 3년 반이든 성도들이 휴거되어 하늘 중턱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 그대로 머물면서 적그리스도에게 고난을 당합니다. 그 기간이 후 3년 반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3일 반 동안 즉 3년 반 동안 복음이 수난일 당하게 됩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계 11:9). 이제 말씀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70이레 중의 한 이레는 역사에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이레의 전반인 전 3년 반에는 하나님의 복음이 능력 있게 전파됩니다. 이 때는 복음과 함께 기적도 일어납니다. 큰 역사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후 3년 반으로 접어들면서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의하여 복음은 수난을 당합니다. 이것이 역사론적인 입장에서 보는 종말론입니다. 믿으십시오 대환난을 말하면서 전쟁도 말하고 지진도 말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환난은 인간의 육신적인 고통보다는 복음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큰 환난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의 영혼을 죽이고, 살리는 문제요, 영생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후 3년 반이 끝나는 시점 후 3년 반이 끝나는 시점은 언제입니까?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계 11:11). 선지자가 다시 머리를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7년 대환난이 끝나는 시점입니다. 이 때가 되면 생기가 하늘로부터 임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합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 있던 복음 전도자들이 힘을 얻고 성도들이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들게 됩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눅 21:28). 이 때 비로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옵니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2). 재림의 나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입니다. 이 때 성도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이것이 휴거입니다. 믿습니까? 전·후 3년 반의 길이 복음이 전파되는 전 3년 반은 1260일로 기록하고, 복음이 수난을 당하는 후3년 반은 3일 반으로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1260일을 1260년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A. D. 1260년에 재림하신다고 하여 온 세상이 법석을 떨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 3년 반의 길이와 후 3년 반의 길이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말씀할 뿐 아니라 전 3년 반의 길이는 후 3년 반의 길이보다 엄청나게 길고, 후 3년 반은 전 3년 반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나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한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24:22).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최대한으로 후 3년 반의 환난 즉 복음의 수난 시대를 단축하십니다. 그래서 전 3년 반의 길이는 최대한으로 길어지고 후 3년 반의 길이는 최대한으로 짧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요 축복입니다. 믿습니까? 맺는 말 우리는 지금 복음이 자유롭게 전파되는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인하여 복음이 수난을 당하고 성도가 핍박을 당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성도의 수난을 분명히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지금 즉 복음이 자유롭게 전파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 나 자신이 복음으로 무장하고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주변에 있는 택한 백성들을 하루 속히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날에 누락자가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는 것입니다. 깨어 기다린다는 것은 염세주의나 기회주의자가 되어 산으로, 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언제 주님이 오실지라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정통주의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활, 일상생활에서는 영원히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처럼 오늘 씨를 뿌리고, 과수나무를 심고, 사업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지금 당장 주님이 오실 것처럼 생각하고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0-41).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밭에서,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적으로는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준비되어 주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대인 목사
가드로 간 다윗/ 삼상27:1-7
가드로 간 다윗 삼상27:1-7 Ⅰ. 다윗이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이 약해졌기 때문이다(1절). 다윗은 자기의 현재의 상태에 대해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이렇게 그 말씀을 읽을 수도 있는데),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 라고 하였다. 다윗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사울의 끝 없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백성들의 배반과 십 사람들의 고발 등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또 자기와 함께 있는 군사들의 수가 상당히 적은데도 한동안 군사의 숫자를 새로 보충할 길이 없고 발붙일 만한 땅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침울한 심정으로 이런 어두운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그는 왕이 되리라고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던가? 그것은 그가 왕국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을 계시하여 주지 않았던가? 그가 비록 사울의 약속은 믿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믿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특별히 돌봐 주신 경험들을 통해서도 그는 능히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를 지금껏 구해 주신 분이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불신이란 선인에게도 쉽사리 붙어다니는 죄이다. 그런 때 사람들은 \\\"겉으로는 싸우고 속으로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여호와여 우리의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Ⅱ. 다윗은 이렇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사울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자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결정하였고, 에봇이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보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오랫동안 시련을 당하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약해지고 인내하기가 어려워진다. 1. 사울은 다윗을 궁지에 몰아 넣다보니 자기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왕국에 대해 대적이 되었다. 사울은 다윗과 같이 훌륭한 장군과 그가 지휘하던 부대를 파면함으로 대적의 편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힘을 약화시켰다. 2. 이런 길을 택하는 것이 다윗 자신에게도 충신한 것은 못되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기치를 유다 땅에\\\" 세우라고 하셨다(22:5). 하나님은 거기서 놀라운 방법으로 그를 지켜 주셨고, 나라를 위해서도 좋은 일을 하도록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다. 그런데 그는 왜 자기 자리를 떠날 생각을 했을까? 그가 이스라엘의 지경을 벗어나고도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최근에도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미친 척하고 간신히 피해 나올 수 있었는데, 어떻게 그들 사이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고 기대하였을까? 다윗은 앞으로 그가 왕이 되면 전쟁도 불사해야 할 그런 사람들의 말을 지금은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다윗은 그로 하여금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분부하는 그의 대적들을 좋게 하여 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다시 이것을 가지고 그를 비난할 것이며, 다윗은 그 비난에 대하여 대답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은 또 이로써 그의 친구의 손들을 약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할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주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Ⅲ. 다윗은 가드에서 친절한 영접을 받았다. 아기스는 그처럼 용감한 사람을 접대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관용심에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하기 위한 정책적인 면에서 다윗을 환영하였다. 아기스는 다윗을 환영함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자기에게로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울을 믿지 못한 다윗이 아기스는 믿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아기스는 다윗에게 그를 보호하여 주겠다는 단단한 약속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가 만일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블레셋 사람의 말을 더 믿는 것과 그리고 의인이 이스라엘 땅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한다고 하여서 가드의 성읍에 피난지를 구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1. 다윗은 그의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2절). 그것은 다윗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또 그들도 다윗과 함께 있는 것이 안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다윗은 그를 위해 일을 해 주기를 바라는 아기스에게 자기의 입장을 보다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2. 다윗은 \\\"그의 아내들과 가족 식구\\\" 를 모두 데리고 갔으며, \\\"그의 사람들\\\" 역시 가족들을 거느리고 갔다(2,3절). 한 가정의 가장들로서 그들에게 속한모든 식구들을 데리고 가서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로 하여금 \\\"친히 아는 사람들처럼 지내게 하는 것\\\" 은 매우 잘한 일이다. Ⅳ. 사울은 더 이상 다윗을 쫓지 않기로 하였다(4절).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그가 최근에 회개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자기의 손에 닿는 곳에 있었다면, 또 다시 그에게 일격을 가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는 감히 다윗이 있는 곳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를 더 이상 쫓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죄를 떠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죄가 그들을 떠난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기회가 있었으면, 죄를 범했을 것이다. 사울은 비록 자기 손으로 그의 피를 흘리게 하지는 못했지마는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18:25), 조만간에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의해 죽게 되리라\\\" 고 기대하였기 때문에 그가 블레셋 땅으로 사라진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그를 이상 더 쫓지 않았다. 그리고 사울은 비록 자기 손으로 다윗을 죽이는 기쁨은 가지지 못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죽여만 준다면,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로써 만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Ⅴ. 다윗은 가드를 떠나 시글락으로 옮겨 갔다. 1. 다윗은 매우 신중하고도 정중하게 자기가 옮겨지기를 요청하였다(5절). (1) 그것은 매우 신중한 행동이었다. 다윗은 사울의 궁중에서 시기를 받았던 것과 같이 아기스의 궁중에서 역시 그 이상으로 시기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기스의 궁중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시골에 묻혀 살기를 원했다. 거기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피해서 자기 혼자의 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가 다스리는 고을에서 그는 자신의 신앙 생활에 힘쓸 수 있으며 또 자기의 사람들도 신앙에 충실하게 할 수 있으며, 가드에서와 같이 자기의 의로운 영으로 하여금 블레셋 사람들의 우상 때문에 괴로와하지 않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글락으로 가기를 원했다. (2) 다윗은 매우 정중한 방법으로 아기스에게 요청하였다. 그는 결코 자기가 가고 싶은 지명을 사전에 지적해서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좋을 대로 지방에 있는 성읍 중의 하나로 가게 해 달라고만 하였다(빌어 먹는 자가 골라 먹을 수는 없다). 그는 다만 그 이유로써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당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과 함께 왕도에 거하리이까?\\\" 든든히 서려고 하는자들은 높은 데 서지 말아야 하며, 겸손한 사람은 왕도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2. 아기스는 다윗의 요청을 매우 관대하고 친절하게 들어 주었다(6,7절).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다.\\\" (1) 이로써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의 기업을 되찾았다. 왜냐하면 시글락은 유다 지파의 기업에 속한 땅이었으며(수 15:31), 나중에 다른 성읍들과 함께 시므온 지파에게 속하게 된(수 18:5)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워서 그 땅을 점령해서 그 땅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아마 그들은 불법으로 이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각이 있고 명예를 아는 아기스는 이번 기회에 그 잘못을 보상하였을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롭게 판단하신다.\\\" (2) 다윗은 이로써 가드로부터 멀리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땅과 접경을 이르는 편리한 곳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거기서 다윗은 자기 나라 사람들과 계속 연락을 취할 수 있었으며, 점차 다가오는 혁명시에 그들이 그에게로 집결하는 장소로 삼을 수 있었다. 다윗은 사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가 그의 군사의 수를 늘렸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30:10 에 의하면 그때까지 그의 군사의 수는 여전히 6백명이었다). 그런데 사울이 죽자마자, 그의 친구들은 시글락으로 모여 들었다. 아니, 사울 때문에 다윗은 숨어 살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뜻을 부여주기 위해 다윗에게로 찾아갔던 것으로 보인다(대상 12:1-22). 이로써 다윗은 더 큰 이득을 보았다. 그 날 이후로 시글락은 내내 이스라엘 왕에게 속하게 되었다(6절). 겸손함과 정중함과 그리고 물러가기를 원하는 것 때문에 잃어 버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헛된 명예를 피할 때 참다운 성공이 따른다. 다윗은 시글락에 몇 날, 즉 \\\"4개월\\\" 을 머물러 있었다(7절). 그 기한에 대해서는 단지 4개월이라고도 읽을 수 있다. 또 70인역에 의하면 \\\"몇 개월\\\" 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여간 다윗은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한동안 그 곳에서 기다린 것은 틀림없다. \\\"믿는 자는 결코 서둘지 않기 때문이다.\\\"
간음보다 더 큰 다윗의 교사죄/삼하11:14-15, 27
간음보다 더 큰 다윗의 교사죄/삼하11:14-15, 27 2003-07-16 01:27:20 read : 10 오늘 본문은 단순히 다윗이 좀 실수를 하였다라고 얼버무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디 숨을 곳이 없을 정도로 다윗의 죄악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다윗은 이러한 죄를 한번 정도는 거저 용서받을만큼 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의 인생에 있어 하나님 앞에 보인 절대적인 신뢰는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뻬 놓아도 될만큼 밧세바 사건이외에서 완전하였던 다윗에게 있어서 이 수치스러운 사건을 2장이나 걸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까지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윗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음을 말하는 휴머니즘적, 인간적 동질감을 언급하기 위해서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 밝히고 있습니까? “다윗이 행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 “(27) 다윗이 무엇을 행한 것이 악한 것이었습니까? 첫째, “자기 양이 많이 있는 부자와 같았으면서도,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작은 암양 새끼 하나 뿐인 가난한 자의 양을 잡아 자기에게 온 손님을 대접한 것과 같은 일을 행한 것이었습니다(12:4)” 밧세바는 우리아에게 있어 그의 기쁨을 두었던 한 마리 뿐인 양과 같았던 아내였습니다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었다(12:3)” 다윗은 자신의 아리따운 여인에 대한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아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욕심을 품습니다 그는 그 유혹에 저항하지 않는다/자리를 피해야 하는데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약 1:15)” 말씀 그대로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행복할만큼 하나님이 능히 기쁨을 누리시도록 모든 여건을 주셨지만, 감각적 욕망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간음을 금하셨고, 그것을 악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사건에게 묻고 계시는 것을 가만히 살펴 보면 간음죄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 뿐인 아내로 즐거워 하였던 우리아를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악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당시의 왕에게 있어 이것은 결코 악한 일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랑의 이유였습니다 가득 채워진 여자의 방은 왕들의 영광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하의 하나뿐인 아내를 탐할만큼 다윗이 악하였다고 밝히십니다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해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다 만일 그것이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이처럼 하나님은 항거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사람들을 멸시하는 태도를 결코 용납치 아니하십니다 자신이 행동하는 것에 의해 그 연약한 이들과 그들의 가정이 어떠한 결과를 미치게 될까를 고려하지 않는 사람, 강자의 입장에 서서, 약자를 짓밟는 사람을 하나님은 악인이라 부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9-10) 직장의 직위를 이용하여 후배 직원을 희롱하는 것(술 따르게 하는 것), 하나님이 결코 용서치 아니하시는 문화입니다 비니지니스에 있어서, 자신이 독식하고 있음에도, 만족치 않고 벼 이삭을 주워서 먹고 살 듯이 하고 있는 사람의 것까지 취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악인이라 부르십니다. 나의 자비만을 기대하는 사람의 말없는 기대를 고려치 않고 외면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악인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의인은 누구입니까? ‘그 벗에게 행악치 아니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서원한 바는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시 15:4) 성도는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한번 내린 의로운 결정들을 변치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붙들만한 진실을 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멸시했던 죄악의 두 번째는 그가 은밀히 행하고자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밧세바 사건의 본질은 다윗이 우연히 죄를 범했다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다윗이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 감추려 의도적인 악을 교묘히 행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의 기만은 대단하였습니다 밧세바가 잉태한 것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 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 전쟁터에 있는 요압과 군사의 안부를 묻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그를 그의 아내가 있는 집으로 보냅니다 11절에서 우리아는 ‘언약궤와 유다와 이스라엘이 일시적인 막사에 있는 데 어찌 내가 집으로가서 먹고 마시며 아내와 자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성전을 치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다윗 자신이 7:2에서 나단에게 행했던 고백과 일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동일한 고백을 행했던 믿음 안에서의 동료인 우리아를 죽임에 있어 그는 결코 머뭇거리지 않는 잔인함을 보입니다 우리아의 죽음을 듣고서도 그는 결코 괴로와 하지 않습니다 ‘칼은 이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라고 말할 뿐입니다 밧세바를 괴롭게 하였으며 우리아를 죽음에 이끌었으며, 우리아를 죽이라는 명령으로 군대장관 요압의 마음에 심한 갈등을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자신의 악에 대하여 전혀 뉘우침을 지니지 못한 채 (12:1-6), 곡하는 기간(7일)이 끝나자 이내 밧세바를 데려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를 경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칼이 너의 집으로부터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네가 나를 멸시했기 때문이다” “진실로 너는 그것을 비밀히 행했으나 나는 모든 이스라엘 앞에 그것을 드러낼 것이라” 나단이 죄악을 지적할 때까지 그 분명한 죄악에 대하여 다윗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사실 얼마나 긴장을 가져다 주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도 돌이키지 않으려는 의도성이 우리에게 남아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히 아름다워 보이더라”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감각적 기쁨에 굴복하였던 다윗의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은 결코 자비로우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가벼이 여기시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다윗이라 할지라도… 그토록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운 것이기에,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담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진노를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다윗의 삶은 그 이전의 삶에 비해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울로부터의 핍박은 다윗에게 외적인 고통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는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 이후의 다윗의 고통은 내적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칼이 다윗가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그를 연단시키시고,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분명히 하사 그로 다시 범죄치 않게 하셨습니다. 감각적 기쁨에 굴복하는 것, 두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연약한 이들의 귀히 여기는 것들을 빼앗는 죄악됨은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혹 우리에게 시간과 재물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하실 때에, 더욱 일깨어 있는 것(be alert), 정말 소중한 일입니다
강성해지는 다윗/ 삼하5:1-10
강성해지는 다윗 삼하5:1-10 삼하 1-5 장은 다윗이 어떻게 왕좌에 오르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1. 사울의 죽음을 슬퍼함 (1장) 사울은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패전하였다. 활 쏘는 자에게서 중상을 입고 병기 든 자에게 칼을 빼어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두려워 하였고 결국 사울은 자기 칼에 엎드려 죽었다. 이것을 본 신하와 함께 사울의 세 아들들도 함께 죽었다. 불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머리를 베어 자기 진영으로 돌아 갔다. 자기를 좇아다니며 죽이려 한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은 그리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우리를 괴롭히던 원수가 죽었을 때 감정이 어떠한가 ? 만일 그것을 기뻐한다면 당신은 소심한 사람이다. 다윗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사울은 왜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던가 ? 1) 인내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순종 그리고 실없는 변명 때문이다. 2) 한가지 죄에 사로 잡히면 점점 더 나쁜 죄에 사로 잡힌다. 3) 하나님과 바른관계에 있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동행하지 못한다. 4) 핑게들은 고백을 대신하지 못한다. 5)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6) 이 세상에 순종을 대신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한 아말렉 사람이 전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사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갑옷을 가져 왔노라고 고백하였다. 만일 사울이 삼상 15장에서 아말렉 사람을 모두 죽였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매우 슬퍼 하였다. 삼하 1:17 이하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한 노래이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것이 다윗이 애도한 노래의 주제였다. 사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높이 선 자였으나 지금은 비참하게 된 자이다. 2. 다윗은 사울의 가족과 대적하여 싸운다. (2-4장) 다윗은 유다의 한 성으로 올라 갈 것인지를 여호와께 물었다. 어디로 갈 것인지도 구체적으로 물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헤브론에 올라 가라고 명하셨다. 유다사람들은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왕을 삼았다는 말이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후 우리는 여기에서 정치적인 음모를 보게 된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헤브론에 올라가기는 하였으나 그의 길은 피흘림의 길이었다. - 아사헬의 죽음 요압,아비새,아사헬은 모두 다윗의 이복누이 스루야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다윗의 조카이면서 다윗의 군대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행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사촌이면서 사울의 집에 대한 관심을 가진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은 다윗이 홀로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 갈등과 슬픔이다.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이는 것으로 다윗과 사울 양가의 오랜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 아브넬의 죽음 아브넬은 사울의 집에서 점점 그 권세를 더하여 갔다. (삼상 3:6) 그동안 다윗은 많은 아내를 두어 신명기 17:15-17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반하였다. 그것은 육욕의 과욕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말년은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암논은 그의 이복 누이 다말을 강간하였고 (13 장)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여 왕권을 빼앗으려 하였고(13-18장) 아도니야는 솔로몬에게서 왕좌를 빼앗으려 하였다.(왕하 1: 5- ) 사울의 조카 아브넬도 사울의 첩을 취함으로 이스보셋의 노여움을 샀다. 이 일로 아브넬은 다윗에게 화해를 요청하였으나 스루야의 아들들이 음모를 꾸며 그를 죽였다.(26-30 절) 요압은 아브넬을 죽이고 압살롬도 죽였다. 그러나 그는 솔로몬에 의하여 죽게 되었다. (왕상 2:5-6, 28-34) * 다윗은 여기에서 아브넬에 대하여도 애도한 사실을 보여준다.(3:31- ) - 이스보셋의 죽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4:1) 이스보세의 군장 두 사람 바아나와 레갑이 어느 햇빛 좋은 날 밀을 가지러 온체하고 들어가 침실에 누워 자는 이스보셋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는 이스보셋의 목을 가지고 다윗에게 와서 고하였으나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은 다윗은 그의 아들의 죽음 역시 기뻐하지 아니하고 두 장군의 목을 쳐 죽였다. 다윗의 등극은 이렇게 피의 연속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보좌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렸는데 .... 대상 22:8 에서 하나님은 피로 물든 다윗의 경력을 기뻐아니하시고 그가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3. 다윗의 등극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반을 다스렸다. 이제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을 다스리게 된다. 그동안 다윗은 모두 세번의 기름 부음을 받게 된다. 처음은 베들레헴 그의 집에서 사물엘 선지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 두번재는 헤브론에서 그의 유대인 추종자들에게서 받았으며 세번째는 수도 예루살렘에서 기름 부음을 받게 된다. 시편 18 편은 다윗이 모든 원수를 물리친 이후 그에게 평화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이다. 우리가 괴로움 속에 있을 때에 이 노래는 더욱 큰 기쁨을 주는 노래이다. 이미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던 여부스 사람들은 오만하여 감히 다윗이 이 성을 정복하는 다윗을 무시하였다. 소경과 절둑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조롱하였다. 다윗은 수로를 통하여 비밀리에 여부스를 침공한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 삼하 5:10 -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에 자신의 성을 건설하자마자 불렛이 공격하였다. 사단은 언제나 승리 후에 누리는 기쁨 속에 숨어서 들어 온다. 다윗은 또다시 여호와께 물었다. 다윗은 바알블라심에서 불레셋을 치고 승리하였으며 (5:20) 두번째 공격은 \\\'뽕나무 수풀 맞은 편에서 \\\'걸음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는 분부를 따라 불레셋을 공격하였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방법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도우시는 것을 보자.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다윗이었으나 그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다윗은 잊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언제나 그 분의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보호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도 우리를 신뢰하신다.
강성해지는 다윗/ 삼하5:10-25
강성해지는 다윗 삼하5:10-25 다윗은 왕으로 즉위한 후부터 점점 강성하여 30세에 왕이 되어 40년간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사람이 처음은 “(욥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말씀대로 처음보다 가면 갈수록 점점 강하여지면 이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강해져야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의 더 좋아지고 이달 보다 내달이 더 좋아지며 금년보다는 내년이 더 좋아져야 합니다. 즉 진보적인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는 덕이 되며 자신과 후손에게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다윗은 어떻게 점점 더 강성하여졌는가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본문 “(삼하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때 형통할 수 있지 그렇지 못할 때는 형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셉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때에 형통하였습이다. “(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39: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창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때에 형통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왕이 되었고 왕이 된 후에 점점 강성하여 진 것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자체가 복입니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진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본문 “(삼하5:19)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강성하여지는 비결은 오직 기도 뿐입니다. “(막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매개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기도한 사람치고 잘못된 일은 없으니까요. 다윗은 누구보다도 기도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점점 강성하게 하였습니다. 기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낳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늘 문을 닫고 여는 기적을 보여주었으며, 히스기야의 기도는 자신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켰고, 앗수로 군사 18만 5천을 하룻 밤 사이에 시체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나의 눈물의 기도는 아들을 낳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기도하고 잘못된 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진 비결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하는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다윗과 같이 기도 많이하여 점점 더 강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순종하였습니다. 본문 “ (삼하5:25)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 하였습니다. 순종은 복받는 비결이며 형통해지는 수단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점점 강성하여진 것도 다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삼상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그렇습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순종하여 많은 고기를 잡았고 사르밧 과부도 순종하여 복을 받았으며 나아만 장군도 순종하여 문등병을 고쳤습니다. 그 외에도 순종하고 복 받은 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순종은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우리들도 속는 셈치고 무조건 순종하여 점점 더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결론 다윗이 하루 아침에 왕이 되고 그리고 점점 강성해진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셨고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였으며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경건한 젊은 목회자 디모데/ 행16:1-2/ 2008-12-11
경건한 젊은 목회자 디모데 행16:1-2 오늘은 바울의 믿음의 아들인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디모데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 또는 \\\"하나님을 공경함\\\"이라는 의미입니다. 디모데의 모친은 유니게이며 외조모는 로이스요, 부친은 헬라인으로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경건한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났습니다.(행16:1-2) 경건하고 전통 있는 신앙적 가정에서 성장하여 신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고, 인정이 많은 성품으로 고향 루스드라에서 좋은 평판을 들었으며, 바울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딤전5:23, 딤후1:4) 바울이 계속해서 격려편지를 보낸 점으로 보아 성격이 내성적이고 병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에게서 할례를 받고 그의 영적 아들이요 동역자가 되어(행16:12),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였고, 고린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고후1:19) 후에 바울에 의해 데살로니가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 파송되었었고,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자(감독직분)로 봉사하였습니다.(딤전1:3) 그리고 한때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후에도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때(A.D.91-96년)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내성적 성격과 육체적 허약에도 불구하고 디모데는 주님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으로 바울과 함께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순교하기까지 신앙적 절개를 지킨 경건하고 모범적 신앙의 인물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신앙의 젖을 먹고 자란 복음의 아들인 디모데에 대하여 좀 더 정리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복된 신앙의 상속자 디모데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 땅 루스드라 출신이었지만 참으로 값진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 태어났습니다. 유대인 모친인 유니게와 외조모인 로이스에게서‘여호와 신앙’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어릴 적부터 신앙 교육을 가정에서 받고 자랐습니다. 그 결과 디모데는 경건한 신앙인으로 성장했고 인근 지역인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일대에서 모든 교회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후일에 사도 바울도 디모데를 향해 “그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했습니다(딤후1:5). 이렇게 디모데는 교회의 일꾼이 무척 귀했던 초대 교회에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 일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2. 디모데의 책임 어떤 교회에서 학생회 여름 수련회를 바닷가로 갔다가 한 학생이 심장마비로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학생의 아버지가 달려왔습니다. 그때 교회 담임 목사님이 울부짖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사실 그 목사님에게 실제적인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잘못은 없지만 지도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영혼을 가르치는 교사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교사의 잘못으로 어린 영혼이 실족케 되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책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맡겨 준 자에게는 많은 책임을 물으시고, 적게 맡겨 준 자에게는 적은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는 어린 영혼들을 진리와 소망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실족케 하여 그 영혼을 멍들게 하고 죽게 만드는 교사인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모습입니까? 디모데에게 주어진 책임은 막중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따로 세워져서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4:14) 그는 교회를 유지시켜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디모데 전서 6:20) 3. 경건한 젊은 목회자 디모데전서 4:8에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 돈독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올바른 자세와 행동\\\" 그것을 경건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 그래서 영어에 경건을 \\\"godly\\\"라고 한 것은 바른 표현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면서 생각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는 것이 경건한 생활이라고 봅니다. 참다운 크리스챤이라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늘 깨닫고 캄캄한 밤에 혼자 있어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먼 외국 땅에 가 있다고 할지라도 경건한 생활을 해야 올바른 신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나 교회에 와서는 신자인 것 같은데 누가 보지 않을 땐 거짓말과 위선으로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엄연히 보고 계신데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계신 줄 알고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안보인다고 없는 줄알거나 하나님이 못보시는 줄 아셨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신자가 되지 못합니다. 공기도 우리 눈에 안보입니다. 라디오 전파도 눈에 안보입니다. 사람의 정신도 영혼도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만 엄연히 존재합니다. 하나님도 온 우주에 충만히 계시고 지금 이 시간도 성경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눈으로 안 보인다고 안계신 줄 알고 못 보시는 줄 알면 그는 큰 과오를 범하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것을 망원경으로 봐야 하고 세균은 현미경으로 봐야 합니다. 냄새는 코로 맡아야지 귀로 맡을 수가 없습니다. 색깔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 코로는 알 수 없습니다. 맛을 입으로 알아야지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고 영혼의 눈,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와 사도 바울의 만남은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루스드라를 방문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언제나 신실한 동역자가 필요했던 바울에게 준비된 복음 사역자 디모데는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향한 복음 전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헬라인 부친을 둔 디모데에게 유대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시킨 후 그를 믿음의 아들이자 복음의 동역자로 삼아 함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젊지만 누구보다 경건했고 신앙의 뿌리가 깊은 디모데를 전적으로 신임하여 곳곳의 교회에 그를 파송했습니다. 디모데는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의 뜻에 순종하여 바울에 의해 파송된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고린도 교회에서,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주님의 교회를 보살폈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경건함과 깊은 말씀의 가르침으로 교회들을 튼튼히 세워 초대 교회 목회의 선구자적 역할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4. 신앙의 승리자 디모데는 본래 몸이 약하여 이런저런 병치레를 자주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비롯한 모든 동역자의 걱정과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열정은 가슴속에 뜨겁게 불타올랐고 신앙은 태산처럼 강건했습니다. 그리하여 약한 몸이었지만 디모데는 바울을 따라 힘든 전도 여행을 언제나 같이 다녔고 바울과 더불어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바울의 뒤를 따라 십자가 복음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뿌리 내렸던 디모데의 깊은 신앙은 병약한 육체를 뛰어넘어 드넓은 복음의 세계를 마음껏 활보했습니다. 바울을 도와 흔들리는 교회를 찾아가 강하게 붙들어 주었고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바울의 권고대로 디모데는 죽는 날까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힘껏 싸워 최후의 신앙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의 아비인 바울과 함께 의의 면류관을 차지했습니다(딤후 4:7∼8). 찬송가 402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1. 행군나팔 소리로 주의 호령 났으니 십자가의 군기를 높이 들고 나가세 2. 악한 마귀 권세를 모두 깨쳐 버리고 승리하신 주님과 승전가를 부르세 3. 달려갈길 다가고 싸움 모두 마친 후 주와 함께 기쁨을 용사들아 누리세 [후렴]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받아 쓰리라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면류관 받으리 저 요단강 건너 우리 싸움 마치는 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5. 사도 바울과의 관계 소아시아의 루가오니오 사람 디모데는 모친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가 다 경건한 신자로 디모데를 어릴 때부터 성경으로 잘 가르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모범 청년이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6:1, 디모데후서 1:5, 3:15). 주후 48년에 바울이 루스드라에 처음 갔을 때에 믿고, 주후 51년 두 번째 전도시에 전도하기로 결심하고 할례를 행합니다(사도행전 16:1-3). 장로들의 안수식으로 목사직을 받았습니다(디모데전서 4:14). 바울과 함께 소아시아, 헬라, 마게도냐, 로마 등지에 순회 전도하니 바울이 그를 가리켜 나와 함께 수고하는 자라 하였고(로마서 16:21) 내 귀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 4:17). 또 믿음의 참 아들(디모데전서 1:2), 사랑하는 아들(디모데후서 1:2)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 바울과 함께 로마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으며(히브리서 13:23)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에서 사역하였습니다(디모데전서 1:3). 디모데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실로 좋은 동역자였으며 위로자였습니다. 바울이 전도자로서의 디모데를 얼마나 신임하고 있었는지는 빌립보서 2:19 이하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6. 옥중 서신 로마의 옥중에서 노(老) 사도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많은 권고와 부탁을 하였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은 솔로몬 왕이 잠언을 통해 자신의 자식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과 격언을 남겨서 후대의 유산으로 삼은 것과 흡사한 것입니다. 바울 서신 중에 흔히 목회서신이라고 알려진 세 서신이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입니다. 당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직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모데(고전4:17)에게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딤전3:15)고 이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물론 이 디모데서는 개인서신이지만 그 속에는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할 것을 말씀해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 디모데서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목회의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로 1장에서 보여주는 대로 거짓 교훈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다른 교훈\\\"(1:3)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1:4)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늘날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이 아닌 것을 전파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란 이름 밑에 자신의 체험이나 신학을 주입하는 것이 문제이며 성경을 바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목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의 행정을 말씀의 원칙에서 떠나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3장에서 바울은 장로와 집사를 바로 선택에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할 것을 권면합니다. 3장1-11절에 나오는 장로와 집사의 자격에 관한 기준은 오늘날도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해서, 혹은 목사와 개인적으로 가깝다고 해서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일꾼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경건의 연습을 강조하면서(4:8), 정욕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2절에는 제자훈련의 방법과 비결이 나오고 15절에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목회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목회자는 먼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고, 끝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귀히 쓰이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 비결은 21절에 나옵니다. 즉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4장6-8절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20:23-24) 유명한 바울의 목회철학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바울의 유언이며 목회자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해 줍니다. 7. 인정받은 디모데 디모데는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학식이 많다거나 돈이 있다든가 직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의 욕구를 위해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선전하며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옳다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도자 바울은 사람이 인정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증언했습니다.(고후10:18) 그러면 디모데는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 되었습니까? 1) 내심이 충실한 사람 디모데는 내심이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혼혈아로 그 당시 사회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금보다 귀한 믿음이 충실한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양육으로 거짓이 없는 믿음이 충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은사를 받고 교회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재직(집사, 권사)들은 부서 속에서 일해야 할 존재이기에 겉보다 안이 충실해야 합니다 2) 자신 있게 일할 수 있는 사람 디모데는 자신 있게 일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의지가 너무 약해서 무슨 일에나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반면에 거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의지가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 않고, 지나치게 자신을 가지고 우쭐대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자신 있게 일할 수 있는 것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권력은 천년 만년 가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치 않고 자기를 믿고 의지하는 자를 지켜 주십니다. 권력을 믿고 히브리 민족을 학대하던 애굽 왕 바로는 홍해에 수장되었지만 손에 지팡이 하나만을 든 모세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서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 우리의 심금을 울릴 수 있으며, 어떤 생활이 우리에게 감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돈을 의지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말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권세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믿고 일하는 사람의 생활이 사람들에게 감화를 줄 수 있습니다. 3)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 디모데는 앞날에 희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미래에 대한 꿈이 충분히 없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도는 일에 대한 꿈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되고도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그것은 치명적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디모데는 내심에 믿음이 충실하고 권능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장래에 대한 꿈이 많은 사람입니다. 높은 이상과 위대한 진리에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처럼 보람된 일은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고 격려했습니다. 디모데는 선한 싸움을 위해 부름 받은 자입니다. 나는 어떤 목적을 위해 사는 자인가를 반성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실한 충성은 오늘날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지금까지도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디모데의 충성된 신앙을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디모데를 통해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1. 디모데의 경건한 신앙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거짓이 없는 철저한 신앙교육에서 비롯된 것으로(딤후1:5) 신앙교육 부재의 오늘날 기독교인 가정에 훌륭한 귀감이 됩니다. 2. 디모데가 자신의 내성적 성격과 병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복음사역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과 동역자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 그리고 기도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인간의 연약함을 들어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과 복음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기도하고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동역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3. 로마의 옥중에서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많은 권고와 부탁을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학식이 많거나, 돈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하나님께 인정받은 충실한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영적 아들이요, 동역자요, 제자로 삼아 복음사역에 이바지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제자로 삼은 것처럼 우리도 제자 삼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상 최후의 명령을 따라 우리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주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이 있습니다.(마28:19-20) (바울이 디모데를 영적인 아들로 여기고 사랑하였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 전파의 사업은 사랑으로 후세대를 양성할 때만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다운 목회자 양성의 의미는 크다 하겠습니다.) 4. 디모데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장래에 대한 꿈과 소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고 격려했습니다. 디모데는 선한 싸움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어떤 꿈과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이 시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성도가 됩시다. 5. 디모데는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감독직분으로 사역하였습니다. 우리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마24:45) 6. 우리 자신이 보기에 우리가 무지하고 무능하여 주의 일을 하는 데 부족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주께서 쓰시고자 하시면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고전1:27) 그러나 바울이 디모데에게 훈계했던 것처럼 연소함이 우리 행실의 방패가 되지 못하며 또한 무지가 범죄의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연륜에 맞는 믿음을 가지고 말과 행실에 조심해야 합니다.(엡5:15) 7. 모든 아이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도 디모데처럼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고달프고 쓸쓸해도 항상 기뻐하게 하시고 쉬지 말고 기도하게 하시며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디모데의 믿음과 행실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언제나 겸비한 자세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골리앗 앞에 선 다윗/ 삼상17:41-49/ 2003-04-19
골리앗 앞에 선 다윗 삼상17:41-49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지금도 전쟁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 다. 탱크로 중무장한 이스라엘과 돌팔매를 던지든지 아니면 소총을 들고 그 이 스라엘과 싸우는 팔레스틴 사람들의 모습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서시대의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됩니다. 이스라엘은 약자입니다. 불레셋 은 강대국입니다. 사울왕이 이끄는 이스라엘군대와 불레셋 군대가 골짜기 하나 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 다. 불레셋에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있는데 이스라엘 안에는 골리앗과 대항하고 싸 울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 골리앗의 모습을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불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 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 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 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니라\\\"(삼상17:4-7) 이렇게 장대한 거인 골리앗이 중무장을 하고 나서는데 이스라엘 쪽에서는 누구 도 대항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다윗이 등장하는데 다윗은 아직 장수도 더구나 군인도 아닙니 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는데 위로 세 아들이 지금 불레셋과 싸우는 이스라엘 군대의 군인입니다. 다윗이 여덟 아들 중 막내이니 까 아직 군대에 가지 않은 아들이 넷이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다윗 은 아직 전쟁터에 심부름조차 할 수 없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이새는 전쟁에 나가있는 세 아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서 다윗에게 들려 보냅니다. 이 다윗이 골리앗과 대항해서 싸우게 된 것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골리앗은 갑옷으로 중무장한 거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의 갑옷조차 크고 부담스러워서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골리앗의 무기와는 달 리 다윗은 목자의 지팡이와 물매가 전부입니다. 러나 다윗은 골리앗과 대항한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물매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어 쓰러트리고 나서 골리 앗의 칼을 빼서 머리를 베어들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옵니다. 기적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다윗은 골리앗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삼상17:26절을 보면 다윗은 골리앗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할례 없는 불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서 종으로 삼으려는 골리앗과 불레셋의 정체를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세상에서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세상에 굴복하여 죄의 종으로 사 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남보다 얼마 나 앞서 가느냐 하는 서열의 다툼이기가 쉽습니다. 얼마나 더 소유하느냐 하 는 문제에 더 예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의 자세를 배운다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길로 가지 못하 도록 방해하는 세력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을 버리 도록 강요하는 세상의 유혹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권리 와 의무를 빼앗으려는 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골리앗의 힘과 자신의 힘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는 무기가 다른 것 때문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굴복시켜 서 종을 삼으려고 하는 골리앗의 의도를 분명히 보고 그것 때문에 골리앗과 맞 서 싸우려고 합니다. 리는 이러한 다윗을 보면서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어 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 신앙을 방해하는 것, 믿음을 깨치려는 세력 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윗과 이스라엘 앞에서는 골리앗이 그 분명한 정체와 의도를 드러냅니다. 너희와 싸워 이겨서 종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야 하는 골리 앗은 그 정체와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재 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그 백성들에게 복으로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재물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 느니라\\\"(마6:24) 만약에 누가복음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온통 관심이 세상의 재물에 만 있다고 한다면 그때 재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 하게 하고 자신의 종으로 삼으려는 골리앗이 됩니다. 리앗은 때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유혹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선으 로 가장하여 우리의 판단들 흐리게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이용 해서 넘어뜨리려고도 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우리 앞에 서 있는 골리앗의 정체 를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 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우리 앞에 있는 골리앗 의 정체를 분명히 보라고 하는 경계의 말씀입니다. 째, 다윗은 하나님 편에 서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을 가지고 나오지만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나간다. (45절) 이것이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의 무기입니다. 골리앗보다 더 커지려고 하지 않 습니다. 더 강한 무기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골리앗을 제압할 만한 힘을 구하 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싸웁니다.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골리앗 앞에서 숨어 있는 사울 이나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입니 다. 다윗이 골리앗보다 신장이 훨씬 작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기가 없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울이 빌려주는 갑옷은 오히 려 벗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나가서 골리앗과 맞 서서 싸울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 그것은 다윗이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의 지혜 때문에 이긴 것도 아닙니다. 다윗을 능가하고 뿐만 아니라 골리앗 을 능가하는 하나님 때문에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애굽으로 보내실 때 모세는 자기가 약한 것을 걱 정했습니다. 힘이 없는 것,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 자기를 지지해 주는 사람 이 없는 것 때문에 주저했습니다. 자신에 비해서 애굽과 바로는 너무 강해 보 였습니다. 더구나 40년 동안 그 궁중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령하시지만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보낸다. 내가 너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여 내게 하겠다.\\\"라 고 말씀하십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다니는 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야학에서 가 르치는 명문대 대학생이 이 처녀를 사랑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상 황이 이 처녀에게 불리했고 시댁의 반대도 심했지만 결혼을 했습니다. 시댁에 는 없는 것이지만 이 가난한 새댁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었 습니다. 아마 그러한 상황에서 처음에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시집살 이에는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권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 라 시댁의 식구들을 전부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 한 형제들이 있었지만 집안에서 추도예배를 드릴 때면 이 권사가 예배를 인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그런 조건으로 시집을 갔을 때 신앙을 포기하고 불신 앙에 굴복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의 지하고 신앙을 지키면서 오히려 불신앙의 식구들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지혜도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 떤 힘도 하나님의 능력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의 권 세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 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0고 격려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윗도 아니고 모세도 아닙니다. 골리앗도 아니고 애굽의 바로처럼 강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의 하나님이 또한 우리의 하나님 되십니다.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또한 세상에 보내시고 지켜주십니 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불의의 세력이나 유혹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청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른들에 비해서 청 년들은 더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유혹과 유 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 록 배려하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세상은 움직여 갑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닙니다. 청년이라는 것 때문에 더 많은 유혹과 어려움에 부딪힐 수 있습 니다. 그러나 다윗 골리앗과 싸운 때는 나이가 어린 청년의 때였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하여 경험이 많은 군인들이 골리앗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 을 때 다윗이 그들 앞에서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신앙인의 무기는 경험이 아닙 니다. 세상의 지혜도 아닙니다. 재력이나 권력도 아닙니다. 칼과 단창으로 나 오는 세상에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들 의지하고 나가는 믿음이 신앙인 의 무기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이 신앙의 무기를 다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굴복시키려는 세상의 골리앗과 싸워서 승리하기를 바랍 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승리가 또한 우리들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굴복시키려는 어떤 세력이라도 넘어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 는 믿음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끝까지 지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삼상17:41-49
골리앗 앞에 선 다윗/삼상17:41-49 2003-07-08 14:01:50 read : 9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지금도 전쟁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 다. 탱크로 중무장한 이스라엘과 돌팔매를 던지든지 아니면 소총을 들고 그 이 스라엘과 싸우는 팔레스틴 사람들의 모습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서시대의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됩니다. 이스라엘은 약자입니다. 불레셋 은 강대국입니다. 사울왕이 이끄는 이스라엘군대와 불레셋 군대가 골짜기 하나 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 다. 불레셋에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있는데 이스라엘 안에는 골리앗과 대항하고 싸 울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 골리앗의 모습을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불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 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 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그 다리에는 놋경갑 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니라"(삼상17:4-7) 이렇게 장대한 거인 골리앗이 중무장을 하고 나서는데 이스라엘 쪽에서는 누구 도 대항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다윗이 등장하는데 다윗은 아직 장수도 더구나 군인도 아닙니 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는데 위로 세 아들이 지금 불레셋과 싸우는 이스라엘 군대의 군인입니다. 다윗이 여덟 아들 중 막내이니 까 아직 군대에 가지 않은 아들이 넷이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다윗 은 아직 전쟁터에 심부름조차 할 수 없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이새는 전쟁에 나가있는 세 아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서 다윗에게 들려 보냅니다. 이 다윗이 골리앗과 대항해서 싸우게 된 것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골리앗은 갑옷으로 중무장한 거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의 갑옷조차 크고 부담스러워서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골리앗의 무기와는 달 리 다윗은 목자의 지팡이와 물매가 전부입니다. 러나 다윗은 골리앗과 대항한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물매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어 쓰러트리고 나서 골리 앗의 칼을 빼서 머리를 베어들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옵니다. 기적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다윗은 골리앗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삼상17:26절을 보면 다윗은 골리앗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할례 없는 불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서 종으로 삼으려는 골리앗과 불레셋의 정체를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세상에서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세상에 굴복하여 죄의 종으로 사 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남보다 얼마 나 앞서 가느냐 하는 서열의 다툼이기가 쉽습니다. 얼마나 더 소유하느냐 하 는 문제에 더 예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의 자세를 배운다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길로 가지 못하 도록 방해하는 세력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을 버리 도록 강요하는 세상의 유혹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권리 와 의무를 빼앗으려는 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 골리앗의 힘과 자신의 힘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는 무기가 다른 것 때문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굴복시켜 서 종을 삼으려고 하는 골리앗의 의도를 분명히 보고 그것 때문에 골리앗과 맞 서 싸우려고 합니다. 리는 이러한 다윗을 보면서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어 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 신앙을 방해하는 것, 믿음을 깨치려는 세력 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윗과 이스라엘 앞에서는 골리앗이 그 분명한 정체와 의도를 드러냅니다. 너희와 싸워 이겨서 종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싸워야 하는 골리 앗은 그 정체와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재 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그 백성들에게 복으로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재물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 느니라"(마6:24) 만약에 누가복음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온통 관심이 세상의 재물에 만 있다고 한다면 그때 재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 하게 하고 자신의 종으로 삼으려는 골리앗이 됩니다. 리앗은 때로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유혹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선으 로 가장하여 우리의 판단들 흐리게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이용 해서 넘어뜨리려고도 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우리 앞에 서 있는 골리앗의 정체 를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 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우리 앞에 있는 골리앗 의 정체를 분명히 보라고 하는 경계의 말씀입니다. 째, 다윗은 하나님 편에 서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을 가지고 나오지만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나간다. (45절) 이것이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의 무기입니다. 골리앗보다 더 커지려고 하지 않 습니다. 더 강한 무기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골리앗을 제압할 만한 힘을 구하 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싸웁니다.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골리앗 앞에서 숨어 있는 사울 이나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입니 다. 다윗이 골리앗보다 신장이 훨씬 작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기가 없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울이 빌려주는 갑옷은 오히 려 벗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나가서 골리앗과 맞 서서 싸울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을 때 그것은 다윗이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의 지혜 때문에 이긴 것도 아닙니다. 다윗을 능가하고 뿐만 아니라 골리앗 을 능가하는 하나님 때문에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애굽으로 보내실 때 모세는 자기가 약한 것을 걱 정했습니다. 힘이 없는 것,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 자기를 지지해 주는 사람 이 없는 것 때문에 주저했습니다. 자신에 비해서 애굽과 바로는 너무 강해 보 였습니다. 더구나 40년 동안 그 궁중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 잘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령하시지만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보낸다. 내가 너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여 내게 하겠다."라 고 말씀하십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다니는 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야학에서 가 르치는 명문대 대학생이 이 처녀를 사랑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상 황이 이 처녀에게 불리했고 시댁의 반대도 심했지만 결혼을 했습니다. 시댁에 는 없는 것이지만 이 가난한 새댁이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었 습니다. 아마 그러한 상황에서 처음에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시집살 이에는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권사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 라 시댁의 식구들을 전부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 한 형제들이 있었지만 집안에서 추도예배를 드릴 때면 이 권사가 예배를 인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그런 조건으로 시집을 갔을 때 신앙을 포기하고 불신 앙에 굴복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의 지하고 신앙을 지키면서 오히려 불신앙의 식구들을 하나님 앞에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지혜도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 떤 힘도 하나님의 능력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의 권 세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 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0고 격려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윗도 아니고 모세도 아닙니다. 골리앗도 아니고 애굽의 바로처럼 강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의 하나님이 또한 우리의 하나님 되십니다.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또한 세상에 보내시고 지켜주십니 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불의의 세력이나 유혹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청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른들에 비해서 청 년들은 더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유혹과 유 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 록 배려하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세상은 움직여 갑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닙니다. 청년이라는 것 때문에 더 많은 유혹과 어려움에 부딪힐 수 있습 니다. 그러나 다윗 골리앗과 싸운 때는 나이가 어린 청년의 때였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하여 경험이 많은 군인들이 골리앗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 을 때 다윗이 그들 앞에서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신앙인의 무기는 경험이 아닙 니다. 세상의 지혜도 아닙니다. 재력이나 권력도 아닙니다. 칼과 단창으로 나 오는 세상에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들 의지하고 나가는 믿음이 신앙인 의 무기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이 신앙의 무기를 다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굴복시키려는 세상의 골리앗과 싸워서 승리하기를 바랍 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승리가 또한 우리들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굴복시키려는 어떤 세력이라도 넘어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 는 믿음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끝까지 지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골리앗에게 도전한 다윗/ 삼상17:1-40
골리앗에게 도전한 다윗 삼상17:1-40 1.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가 서로 어떻게 진을 쳤습니까(1-3)? 블레셋 진에서 누가 선봉장으로 나왔습니까(4)? 그의 무장된 거대한 모습을 말해 보시오(5-7). (삼상17:1)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치매 (삼상17:2)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였으니 (삼상17:3)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삼상17:4)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삼상17:5)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삼상17:6)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삼상17:7)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2.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어떻게 모독했습니까(8-10,16)? 골리앗 앞에서의 사울과 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11)? (삼상17:8)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삼상17:9)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삼상17: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삼상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3. 형들이 전쟁에 나갔을 때 다윗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12-15)? 또 무슨 일로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까(17-22)? (삼상17: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삼상17:13)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제 삼은 삼마며 (삼상17:14) 다윗은 말째라 장성한 삼인은 사울을 좇았고 (삼상17: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비의 양을 칠때에 (삼상17:16) 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삼상17:17)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삼상17:18) 이 치스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삼상17:19)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 중이더라 (삼상17:20)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의 명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싸우려고 고함하며 (삼상17:21) 이스라엘과 블레섹 사람이 항오를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하였더라 (삼상17:22) 다윗이 그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4. 다윗은 골리앗과 백성들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23b-25)? 골리앗에 대한 그의 분노를 말해 보시오. 그는 골리앗과 이스라엘 군대를 각각 어떻게 생각했습니까(26)? 장형 엘리압은 왜 다윗에게 노를 발했습니까(27-30)? (삼상17: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항오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삼상17:24)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삼상17:25)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삼상17: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삼상17:27) 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가로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여차여차히 하시리라 하니라 (삼상17: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삼상17:29) 다윗이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삼상17:30)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5. 다윗은 사울을 어떻게 위로했습니까(31,32)? 다윗은 목자로서 어느정도 용감했습니까(33-35)? 이를 통해 다윗이 가진 바 확신이 무엇입니까? (삼상17:31) 혹이 다윗의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삼상17:32)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삼상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삼상17: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삼상17: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삼상17: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삼상17: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6. 다윗은 왜 군복을 입지 않았습니까(38,39)? 대신 무엇을 들고 나갔습니까(40)? (삼상17: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삼상17: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삼상17: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7. 이상에서 골리앗에게 도전한 다윗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있는 골리앗이 무엇입니까? Ⅲ. 골리앗을 때려 눕힌 다윗(17:41-58) 1. 골리앗은 다윗을 왜 업신여겼습니까? 그리고 무슨 말로 저주하였습니까(41-44)? (삼상17:41)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삼상17: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삼상17: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삼상17: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2. 다윗과 골리앗은 각각 무엇을 의지하여 나갔습니까?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3. 다윗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46,47)? 다윗이 골리앗에게 도전한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오. (삼상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삼상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4. 골리앗은 왜 땅에 엎드러졌습니까(48,49)? 이런 다윗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았습니까? (삼상17: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삼상17: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삼상17: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삼상17: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 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삼상17:52)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지르며 블레셋 사람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의 상한 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삼상17:53)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을 노략하였고 (삼상17:54)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삼상17:55)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감을 사울이 보고 군장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아브넬이 가로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삼상17:56) 왕이 가로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삼상17:57)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의 앞으로 인도하니 (삼상17: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5.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까?
골리앗을 때려 눕힌 다윗/ 삼상17:45
골리앗을 때려 눕힌 다윗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17:45) Ⅰ.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사무엘(16:1-23) 1.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어떤 점을 책망하셨으며, 누구에게 보내셨습니까(1) (삼상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2. 사무엘이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따르는 위험이 무엇입니까(2a)? 그러나 하나님꼐서 어떤 방향을 주셨습니까(2b,3)? 사무엘은 어떻게 순종했습니까(4,5)? (삼상16:2)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삼상16: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삼상16: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삼상16:5)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3.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7)?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꾼을 택하시는 기준이 어떠한가 생각해 보시오. (삼상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4. 사무엘은 어떻게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까(8-13)?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12,18)? (삼상16: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삼상16: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삼상16:10)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삼상16: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삼상16:12)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5.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울의 고통은 어떠합니까(14-23)? (삼상16: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상16:15)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삼상16:16)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삼상16:17)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삼상16:18) 소년 중 한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삼상16:19) 사울이 이에 사자를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삼상16:20) 이새가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 아들 다윗의 손으로 사울에게 보내니 (삼상16:21)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 (삼상16:22)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청컨대 다윗으로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삼상16:23)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비밀/ 삼상17: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비밀 삼상17: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 시대에 블레셋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습니다. 사울의 군대가 나가 대결한 지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중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심히 도전함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전쟁에 나간 아들들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집에 남아 있던 다윗에게 ‘가서 형들을 위문하고 음식을 전하고 오라’며 전쟁터로 내보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도착했을 때 골리앗이 나와서 한참 시위하며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협박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마음에 치솟는 분을 참을 수 없어 사울 왕 앞에서 자원하여 이스라엘의 대표로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골리앗과 대결하여 물맷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넘어뜨리고 칼로 그 목을 베는 대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의 군인 중 허다한 역전의 용사들도 다 겁에 질려 못했던 일을 초립동 다윗이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거인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거인을 물리치고 승리하기 위하여 다윗이 이긴 비결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1. 가슴속에 꿈을 품고 살았다 다윗은 항상 그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시고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취해 사는 것에 비해 자신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달려들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꿈을 품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들을 쳐죽였습니다. 조그만 소년이 사자나 곰을 대항하여 어떻게 이길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마음속에 꿈이 컸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그가 하나님 안에 있는 꿈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자나 곰을 대항하여 나갈 때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나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는 나아가서 사자를 치고 곰을 치고 양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만났을 때 그를 사자나 곰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골리앗을 쳐서 죽이고 이스라엘에 대 승리를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속에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꿈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꿈을 항상 생각하고 항상 묵상하고 그 꿈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나간 다윗에게 사자와 곰도 골리앗도 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와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받고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속에 꿈을 품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꿈꾸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 없지만 꿈을 가지고 마음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마음속에 꿈을 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칭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는 꿈을 품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 모든 슬픔, 모든 연약과 질병을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기쁨을 얻고, 마음속에 소망을 얻으며, 치료받고 건강하게 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을 품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병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마음속에 꿈을 받아 들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병을 이기고 건강하게 되었다’는 모습을 꿈꾸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품고 현실에 대결하면 언제나 이깁니다. 꿈은 현실보다 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경제적인 고통이 있고 가난이 있고 슬픔이 있을지라도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청산하시고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는 예수님의 꿈을 마음속에 품어야 합니다. 꿈은 십자가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꿈은 십자가에서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매일 마음속에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나의 모습을 꿈꾸고, 그 꿈을 마음속에 품고 현실의 가난과 슬픔과 저주와 불안을 대결해 나가면 꿈을 품은 자가 언제나 이깁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꿈을 품고 현실을 대하면 꿈이 현실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죽음에 처했을지라도 이길 수 있음을 꿈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생을 얻은 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이 오더라도 우리는 영생을 얻고 천국이 우리 것이라는 꿈을 품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장 55절)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은 사망을 능히 극복하고 마음속에 천국과 영광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것은 비록 교육도 많지 않고 시골에서 양떼나 치는 조그만 소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꿈을 마음속에 품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꿈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꿈속에 있었으므로 사자를 보아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곰을 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역전의 용사들이 다 겁을 먹고 도망을 치는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히 서 있습니다. 그는 꿈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갈보리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오중 복음과 삼중축복의 꿈을 품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현실의 어떤 어려움도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던 모든 진리와 지식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선하신 목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쁜 하나님이 아니라 좋은 하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푸른 초장에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시며 생명을 끊임없이 소생시켜 주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는 참으로 좋은 목자라는 것을 그는 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달릴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다가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뚜렷했습니다. 그리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셔서 성령충만함으로 높이시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인지 나쁜 하나님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의심을 가지고 있고 환난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렸나보다’라며 원망하고 탄식하고 불평하고, 원수가 오면 겁이 나서 도망치고 ‘정말 천국이 있을까?’라고 의심하면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요동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고 의롭게 하시고 우리와 화목케 하시고 성령과 사랑을 부어 주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시고 우리 병을 제하시고 마귀를 멸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저주와 가난을 물리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며 지옥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대속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 2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종국적인 뜻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아는 사람만이 어떠한 일에도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 없이 희미하게 행동하고 오른편도 왼편도 아니고 중도도 아닌 방황하는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결코 성공 할 수가 없습니다. 3. 믿음의 사람이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환경이나 감각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을 믿고 귀로 듣는 것을 믿고 손으로 만지는 환경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좋아지면 ‘할렐루야’를 외치며 좋아하지만 환경이 어려워지면 좌절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령한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나 감각적으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환경의 협박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신앙 고백을 하면서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아갈 때 골리앗은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습니다. 그는 키가 엄청나게 큰 장신이었습니다. 골리앗은 산이 쩡쩡 울리는 큰 소리로 다윗을 향해서 저주의 말을 했습니다. 골리앗은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사무엘상 17장 43~44절)며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얼마나 간담이 서늘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환경이나 골리앗 같은 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고백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이 입술의 고백으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을 믿으면 원수 앞에서 강하고 담대한 신앙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강하고 담대한 신앙 고백을 했고 이 신앙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신앙을 부정합니다. ‘나는 못해요, 나는 안 되요, 할 수 없어요, 망했어요, 능력이 없어요, 나는 패해요’라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신앙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원수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함께 합작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더 힘을 얻습니다. 원수는 자기 말에 동의해 주면 더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다가 입술로 잘못되고 부정적인 고백을 하여 원수에게 짓밟히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믿었으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강하고 담대하게 그 믿음을 고백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 속에 고백하는 신앙, 이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사람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려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입술의 말에 신앙적인 고백이 나오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입술의 말에 부정적인 고백이 나오면 신앙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5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식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밤에 데리고 가서 하늘의 별들을 헤아리게 하여 꿈을 갖게 하고 네 자식이 저와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할 때 그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는 강하고 담대하게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85세에 하나님께서 꿈을 보여 주었지만 100살이 될 때까지 그는 아직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술로 고백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즉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 ‘사래’도 ‘사라’ 즉 여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85세부터 시작해서 장장 15년간 계속해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다’, ‘내 아내는 여주인이다’라는 끊임없이 신앙 고백을 통해 100세가 되었을 때 아들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다윗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4.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담력이 없으면 소년이 사자나 곰을 대항하여 싸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담력이 있기 때문에 용감해져서 사자나 곰을 향해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담력이 없이는 블레셋의 거인을 향하여 물맷돌만 가지고서 대적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떨려서 어떻게 나갑니까? 그러나 다윗은 스스로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어서 강하고 담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백성들이 강하고 담대함을 잃어버리고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물러갈 때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 들어가서 점령하자’라며 강하고 담대한 말을 했을 때 가나안 입성이라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담대한 신앙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나머지 백성들은 ‘우리들은 메뚜기와 같다.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다. 우리들은 죽고, 우리 처자가 다 잡힐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며 움추러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로 회진시켜 다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여호수아를 보고서 어떻게 격려했습니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확실한 꿈을 주신 후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거듭거듭 강조했습니다. 여호수아 1장 5~7절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여호수아 1장 9절에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도 주시고 약속도 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1장에는 무려 3번이나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마음을 강하게 먹고 지극히 담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꿈이 있고,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어도 담대히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파도치는 밤바다에서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 올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 위에 다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주시거든 내게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굉장히 담대한 사람입니다. 주께서 ‘오라’고 말씀하시자 칠흑같이 어둡고 거센 파도가 치는 밤바다 위를 베드로는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수제자가 되었습니까? 다른 제자들보다 지식이 많고 학문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담대했습니다.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모험심이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을 취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전의 용사들이 다 들어와서 벌벌 떨 때 소년 다윗이 강하고 담대하게 투구도 쓰지 아니하고 갑옷도 입지 아니하고 목자의 옷 그대로 입고 물맷돌 하나를 들고 나갔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얼마나 담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연히 골리앗과 싸워서 요행히 이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의 군인들과 다른 점이 바로 꿈이 있고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고 담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의 삶에 많은 고난의 골리앗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때 다윗과 같은 자세와 인품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 나와서 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항상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꿈을 가슴에 품고 현실에 부딪히면 이깁니다. 꿈이 없이 현실에 부딪히면 박살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 이것을 분명히 아는 지식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주신 하나님인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만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밀고 나가면 하나님이 같이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가정적인 생활의 골리앗이 우리 발 앞에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모실 그릇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그릇이 준비되면 오늘날도 하나님은 그 놀라운 능력을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내실 것입니다. - 기도 -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도 없이 희미한 생활을 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이제는 꿈을 품은 사람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분명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게 하시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비밀/ 삼상17:45-49/ 2003-12-04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비밀 삼상17:45-49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 시대에 블레셋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습니다. 사울의 군대가 나가 대결한 지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중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심히 도전함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전쟁에 나간 아들들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집에 남아 있던 다윗에게 ꡐ가서 형들을 위문하고 음식을 전하고 오라ꡑ며 전쟁터로 내보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도착했을 때 골리앗이 나와서 한참 시위하며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협박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마음에 치솟는 분을 참을 수 없어 사울 왕 앞에서 자원하여 이스라엘의 대표로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골리앗과 대결하여 물맷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넘어뜨리고 칼로 그 목을 베는 대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의 군인 중 허다한 역전의 용사들도 다 겁에 질려 못했던 일을 초립동 다윗이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거인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거인을 물리치고 승리하기 위하여 다윗이 이긴 비결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1. 가슴속에 꿈을 품고 살았다 다윗은 항상 그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시고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취해 사는 것에 비해 자신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달려들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꿈을 품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들을 쳐죽였습니다. 조그만 소년이 사자나 곰을 대항하여 어떻게 이길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마음속에 꿈이 컸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그가 하나님 안에 있는 꿈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자나 곰을 대항하여 나갈 때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나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는 나아가서 사자를 치고 곰을 치고 양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만났을 때 그를 사자나 곰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골리앗을 쳐서 죽이고 이스라엘에 대 승리를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속에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꿈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꿈을 항상 생각하고 항상 묵상하고 그 꿈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나간 다윗에게 사자와 곰도 골리앗도 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와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받고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속에 꿈을 품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꿈꾸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 없지만 꿈을 가지고 마음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마음속에 꿈을 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칭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는 꿈을 품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 모든 슬픔, 모든 연약과 질병을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기쁨을 얻고, 마음속에 소망을 얻으며, 치료받고 건강하게 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을 품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병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마음속에 꿈을 받아 들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ꡐ예수님께서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병을 이기고 건강하게 되었다ꡑ는 모습을 꿈꾸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품고 현실에 대결하면 언제나 이깁니다. 꿈은 현실보다 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경제적인 고통이 있고 가난이 있고 슬픔이 있을지라도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청산하시고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는 예수님의 꿈을 마음속에 품어야 합니다. 꿈은 십자가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꿈은 십자가에서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매일 마음속에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나의 모습을 꿈꾸고, 그 꿈을 마음속에 품고 현실의 가난과 슬픔과 저주와 불안을 대결해 나가면 꿈을 품은 자가 언제나 이깁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꿈을 품고 현실을 대하면 꿈이 현실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죽음에 처했을지라도 이길 수 있음을 꿈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생을 얻은 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이 오더라도 우리는 영생을 얻고 천국이 우리 것이라는 꿈을 품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ꡒ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ꡓ(고린도전서 15장 55절)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은 사망을 능히 극복하고 마음속에 천국과 영광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것은 비록 교육도 많지 않고 시골에서 양떼나 치는 조그만 소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꿈을 마음속에 품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꿈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꿈속에 있었으므로 사자를 보아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곰을 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역전의 용사들이 다 겁을 먹고 도망을 치는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히 서 있습니다. 그는 꿈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갈보리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꿈을 품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현실의 어떤 어려움도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던 모든 진리와 지식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선하신 목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쁜 하나님이 아니라 좋은 하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푸른 초장에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시며 생명을 끊임없이 소생시켜 주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는 참으로 좋은 목자라는 것을 그는 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달릴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다가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뚜렷했습니다. 그리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셔서 성령충만함으로 높이시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인지 나쁜 하나님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의심을 가지고 있고 환난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ꡐ하나님이 나를 버렸나보다ꡑ라며 원망하고 탄식하고 불평하고, 원수가 오면 겁이 나서 도망치고 ꡐ정말 천국이 있을까?ꡑ라고 의심하면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요동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고 의롭게 하시고 우리와 화목케 하시고 성령과 사랑을 부어 주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시고 우리 병을 제하시고 마귀를 멸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저주와 가난을 물리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며 지옥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대속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ꡒ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ꡓ(요한삼서 1장 2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종국적인 뜻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아는 사람만이 어떠한 일에도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 없이 희미하게 행동하고 오른편도 왼편도 아니고 중도도 아닌 방황하는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결코 성공 할 수가 없습니다. 3. 믿음의 사람이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환경이나 감각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을 믿고 귀로 듣는 것을 믿고 손으로 만지는 환경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좋아지면 ꡐ할렐루야ꡑ를 외치며 좋아하지만 환경이 어려워지면 좌절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령한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나 감각적으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환경의 협박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신앙 고백을 하면서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아갈 때 골리앗은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습니다. 그는 키가 엄청나게 큰 장신이었습니다. 골리앗은 산이 쩡쩡 울리는 큰 소리로 다윗을 향해서 저주의 말을 했습니다. 골리앗은 ꡒ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ꡓ(사무엘상 17장 43~44절)며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얼마나 간담이 서늘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환경이나 골리앗 같은 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에 ꡒ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ꡓ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고백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이 입술의 고백으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을 믿으면 원수 앞에서 강하고 담대한 신앙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강하고 담대한 신앙 고백을 했고 이 신앙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신앙을 부정합니다. ꡐ나는 못해요, 나는 안 되요, 할 수 없어요, 망했어요, 능력이 없어요, 나는 패해요ꡑ라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신앙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원수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함께 합작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더 힘을 얻습니다. 원수는 자기 말에 동의해 주면 더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다가 입술로 잘못되고 부정적인 고백을 하여 원수에게 짓밟히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믿었으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강하고 담대하게 그 믿음을 고백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 속에 고백하는 신앙, 이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사람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려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입술의 말에 신앙적인 고백이 나오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입술의 말에 부정적인 고백이 나오면 신앙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5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식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밤에 데리고 가서 하늘의 별들을 헤아리게 하여 꿈을 갖게 하고 네 자식이 저와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할 때 그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는 강하고 담대하게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85세에 하나님께서 꿈을 보여 주었지만 100살이 될 때까지 그는 아직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술로 고백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이름을 ꡐ아브람ꡑ에서 ꡐ아브라함ꡑ 즉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 ꡐ사래ꡑ도 ꡐ사라ꡑ 즉 여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85세부터 시작해서 장장 15년간 계속해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ꡐ나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다ꡑ, ꡐ내 아내는 여주인이다ꡑ라는 끊임없이 신앙 고백을 통해 100세가 되었을 때 아들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다윗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4.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담력이 없으면 소년이 사자나 곰을 대항하여 싸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담력이 있기 때문에 용감해져서 사자나 곰을 향해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담력이 없이는 블레셋의 거인을 향하여 물맷돌만 가지고서 대적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떨려서 어떻게 나갑니까? 그러나 다윗은 스스로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어서 강하고 담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백성들이 강하고 담대함을 잃어버리고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물러갈 때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ꡐ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 들어가서 점령하자ꡑ라며 강하고 담대한 말을 했을 때 가나안 입성이라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담대한 신앙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나머지 백성들은 ꡐ우리들은 메뚜기와 같다.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다. 우리들은 죽고, 우리 처자가 다 잡힐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ꡑ라며 움추러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로 회진시켜 다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여호수아를 보고서 어떻게 격려했습니까? ꡐ강하고 담대하라ꡑ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확실한 꿈을 주신 후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거듭거듭 강조했습니다. 여호수아 1장 5~7절에 ꡒ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ꡓ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여호수아 1장 9절에 ꡒ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ꡓ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도 주시고 약속도 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1장에는 무려 3번이나 여호수아에게 ꡐ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마음을 강하게 먹고 지극히 담대하라ꡑ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꿈이 있고,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어도 담대히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파도치는 밤바다에서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 올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 위에 다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ꡐ주시거든 내게로 오라 하소서ꡑ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굉장히 담대한 사람입니다. 주께서 ꡐ오라ꡑ고 말씀하시자 칠흑같이 어둡고 거센 파도가 치는 밤바다 위를 베드로는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수제자가 되었습니까? 다른 제자들보다 지식이 많고 학문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담대했습니다.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모험심이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을 취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전의 용사들이 다 들어와서 벌벌 떨 때 소년 다윗이 강하고 담대하게 투구도 쓰지 아니하고 갑옷도 입지 아니하고 목자의 옷 그대로 입고 물맷돌 하나를 들고 나갔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얼마나 담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연히 골리앗과 싸워서 요행히 이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의 군인들과 다른 점이 바로 꿈이 있고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고 담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의 삶에 많은 고난의 골리앗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때 다윗과 같은 자세와 인품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 나와서 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항상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꿈을 가슴에 품고 현실에 부딪히면 이깁니다. 꿈이 없이 현실에 부딪히면 박살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 이것을 분명히 아는 지식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주신 하나님인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만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밀고 나가면 하나님이 같이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가정적인 생활의 골리앗이 우리 발 앞에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모실 그릇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그릇이 준비되면 오늘날도 하나님은 그 놀라운 능력을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내실 것입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비밀/삼상17:45-49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비밀/삼상17:45-49 2003-11-11 13:19:51 read : 3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 시대에 블레셋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습니다. 사울의 군대가 나가 대결한 지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중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심히 도전함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전쟁에 나간 아들들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집에 남아 있던 다윗에게 ‘가서 형들을 위문하고 음식을 전하고 오라’며 전쟁터로 내보냈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도착했을 때 골리앗이 나와서 한참 시위하며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협박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마음에 치솟는 분을 참을 수 없어 사울 왕 앞에서 자원하여 이스라엘의 대표로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리고 골리앗과 대결하여 물맷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넘어뜨리고 칼로 그 목을 베는 대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의 군인 중 허다한 역전의 용사들도 다 겁에 질려 못했던 일을 초립동 다윗이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거인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거인을 물리치고 승리하기 위하여 다윗이 이긴 비결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1. 가슴속에 꿈을 품고 살았다 다윗은 항상 그 마음속에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시고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취해 사는 것에 비해 자신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달려들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꿈을 품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들을 쳐죽였습니다. 조그만 소년이 사자나 곰을 대항하여 어떻게 이길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마음속에 꿈이 컸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그가 하나님 안에 있는 꿈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자나 곰을 대항하여 나갈 때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나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는 나아가서 사자를 치고 곰을 치고 양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만났을 때 그를 사자나 곰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골리앗을 쳐서 죽이고 이스라엘에 대 승리를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마음속에 꿈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꿈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꿈을 항상 생각하고 항상 묵상하고 그 꿈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나간 다윗에게 사자와 곰도 골리앗도 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와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받고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속에 꿈을 품고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꿈꾸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 없지만 꿈을 가지고 마음속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마음속에 꿈을 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칭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다는 꿈을 품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 모든 슬픔, 모든 연약과 질병을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기쁨을 얻고, 마음속에 소망을 얻으며, 치료받고 건강하게 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을 품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병들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마음속에 꿈을 받아 들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병을 이기고 건강하게 되었다’는 모습을 꿈꾸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품고 현실에 대결하면 언제나 이깁니다. 꿈은 현실보다 강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경제적인 고통이 있고 가난이 있고 슬픔이 있을지라도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청산하시고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는 예수님의 꿈을 마음속에 품어야 합니다. 꿈은 십자가에서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꿈은 십자가에서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매일 마음속에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나의 모습을 꿈꾸고, 그 꿈을 마음속에 품고 현실의 가난과 슬픔과 저주와 불안을 대결해 나가면 꿈을 품은 자가 언제나 이깁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꿈을 품고 현실을 대하면 꿈이 현실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죽음에 처했을지라도 이길 수 있음을 꿈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이요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생을 얻은 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이 오더라도 우리는 영생을 얻고 천국이 우리 것이라는 꿈을 품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장 55절)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들은 사망을 능히 극복하고 마음속에 천국과 영광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다윗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것은 비록 교육도 많지 않고 시골에서 양떼나 치는 조그만 소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꿈을 마음속에 품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꿈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꿈속에 있었으므로 사자를 보아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곰을 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역전의 용사들이 다 겁을 먹고 도망을 치는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히 서 있습니다. 그는 꿈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갈보리 십자가 밑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꿈을 품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현실의 어떤 어려움도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던 모든 진리와 지식을 그려 놓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선하신 목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쁜 하나님이 아니라 좋은 하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푸른 초장에 인도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시며 생명을 끊임없이 소생시켜 주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는 참으로 좋은 목자라는 것을 그는 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달릴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다가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뚜렷했습니다. 그리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셔서 성령충만함으로 높이시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항상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인지 나쁜 하나님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의심을 가지고 있고 환난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렸나보다’라며 원망하고 탄식하고 불평하고, 원수가 오면 겁이 나서 도망치고 ‘정말 천국이 있을까?’라고 의심하면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요동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고 의롭게 하시고 우리와 화목케 하시고 성령과 사랑을 부어 주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시고 우리 병을 제하시고 마귀를 멸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저주와 가난을 물리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며 지옥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대속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 2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종국적인 뜻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히 아는 사람만이 어떠한 일에도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 없이 희미하게 행동하고 오른편도 왼편도 아니고 중도도 아닌 방황하는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결코 성공 할 수가 없습니다. 3. 믿음의 사람이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환경이나 감각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을 믿고 귀로 듣는 것을 믿고 손으로 만지는 환경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좋아지면 ‘할렐루야’를 외치며 좋아하지만 환경이 어려워지면 좌절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령한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나 감각적으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환경의 협박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신앙 고백을 하면서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아갈 때 골리앗은 서늘하고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습니다. 그는 키가 엄청나게 큰 장신이었습니다. 골리앗은 산이 쩡쩡 울리는 큰 소리로 다윗을 향해서 저주의 말을 했습니다. 골리앗은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사무엘상 17장 43~44절)며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얼마나 간담이 서늘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환경이나 골리앗 같은 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바로 고백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이 입술의 고백으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을 믿으면 원수 앞에서 강하고 담대한 신앙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강하고 담대한 신앙 고백을 했고 이 신앙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신앙을 부정합니다. ‘나는 못해요, 나는 안 되요, 할 수 없어요, 망했어요, 능력이 없어요, 나는 패해요’라는 이와 같은 부정적인 신앙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원수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함께 합작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더 힘을 얻습니다. 원수는 자기 말에 동의해 주면 더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다가 입술로 잘못되고 부정적인 고백을 하여 원수에게 짓밟히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믿었으면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강하고 담대하게 그 믿음을 고백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 속에 고백하는 신앙, 이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사람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려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입술의 말에 신앙적인 고백이 나오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입술의 말에 부정적인 고백이 나오면 신앙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5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식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밤에 데리고 가서 하늘의 별들을 헤아리게 하여 꿈을 갖게 하고 네 자식이 저와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할 때 그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는 강하고 담대하게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85세에 하나님께서 꿈을 보여 주었지만 100살이 될 때까지 그는 아직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술로 고백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즉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 ‘사래’도 ‘사라’ 즉 여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85세부터 시작해서 장장 15년간 계속해서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다’, ‘내 아내는 여주인이다’라는 끊임없이 신앙 고백을 통해 100세가 되었을 때 아들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다윗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4.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다 담력이 없으면 소년이 사자나 곰을 대항하여 싸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담력이 있기 때문에 용감해져서 사자나 곰을 향해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담력이 없이는 블레셋의 거인을 향하여 물맷돌만 가지고서 대적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떨려서 어떻게 나갑니까? 그러나 다윗은 스스로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어서 강하고 담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백성들이 강하고 담대함을 잃어버리고 환경을 바라보고 두려워하고 물러갈 때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 들어가서 점령하자’라며 강하고 담대한 말을 했을 때 가나안 입성이라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담대한 신앙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나머지 백성들은 ‘우리들은 메뚜기와 같다.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다. 우리들은 죽고, 우리 처자가 다 잡힐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며 움추러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로 회진시켜 다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여호수아를 보고서 어떻게 격려했습니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확실한 꿈을 주신 후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거듭거듭 강조했습니다. 여호수아 1장 5~7절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여호수아 1장 9절에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도 주시고 약속도 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1장에는 무려 3번이나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마음을 강하게 먹고 지극히 담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꿈이 있고,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어도 담대히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파도치는 밤바다에서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 올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 위에 다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주시거든 내게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굉장히 담대한 사람입니다. 주께서 ‘오라’고 말씀하시자 칠흑같이 어둡고 거센 파도가 치는 밤바다 위를 베드로는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수제자가 되었습니까? 다른 제자들보다 지식이 많고 학문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담대했습니다.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모험심이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담대한 사람을 취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전의 용사들이 다 들어와서 벌벌 떨 때 소년 다윗이 강하고 담대하게 투구도 쓰지 아니하고 갑옷도 입지 아니하고 목자의 옷 그대로 입고 물맷돌 하나를 들고 나갔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얼마나 담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연히 골리앗과 싸워서 요행히 이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의 군인들과 다른 점이 바로 꿈이 있고 지식이 있고 믿음이 있고 담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의 삶에 많은 고난의 골리앗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때 다윗과 같은 자세와 인품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 나와서 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항상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꿈을 가슴에 품고 현실에 부딪히면 이깁니다. 꿈이 없이 현실에 부딪히면 박살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 이것을 분명히 아는 지식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주신 하나님인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만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강하고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밀고 나가면 하나님이 같이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가정적인 생활의 골리앗이 우리 발 앞에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모실 그릇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그릇이 준비되면 오늘날도 하나님은 그 놀라운 능력을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내실 것입니다. - 기도 -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도 없이 희미한 생활을 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하나님 이제는 꿈을 품은 사람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분명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게 하시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골리앗을 이긴 다윗처럼!/ 삼상17:32-36/ 2001-10-23
골리앗을 이긴 다윗처럼! 삼상17:32-36 1.최근 \\\"한국기독교시국대책협의회\\\"에서는 작금의 국가 상황이 총체적 위기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교계가 국민화합 운동을 전개, 난국을 극복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협의회는 성명에서, \\\"정치지도자와 기업인 노동자 농민 공무원 의사 약사 등 모든 이해집단과 국민이 조금씩 양보하고 인내하며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면서 \\\"전국민이 화합해서 희망찬 사회를 건설해 나가자\\\"고 촉구했다. 우리는 그 동안 오랜 시간 짜증스럽도록 지루하게 끌어온 의약분업에 따른 국민적 불편을 감수해야만했는데 최근에는 농민들의 부채탕감을 요구하는 시위하며, 기업의 구조조정에 따른 감원조치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의 저항과 파업시위, 이 엄청난 당면 가제를 풀어야할 국회는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며 맴돌고 있는 동안 경제는 계속되는 악화로 제2의 IMF에 대한 불안이 팽배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사람들은 \\\"총체적 난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당면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 선 다윗 같은 형편임을 절감한다.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2.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은 성경66권 가운데 가장 신나는 동화 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이스라엘 첫 왕 사울이 다스리던 때이므로 지금부터 약 3천년 전의 사건이다. 사건은 블레셋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이루어진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후 가나안의 행로에서부터 적대관계에 있었는데 오늘도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원수의 관계이다. 엘라 골짜기에서 벌어진 두 민족간의 전투는 이미 그 전세가 블레셋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블레셋의 대 장군 골리앗이 블레셋의 진두에 나서서 호령하는 가운데 이미 이스라엘은 그 장수를 대적하여 싸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체 있었다. 이 때 다윗은 아직 소년의 시절이었는데 아버지 이세의 심부름으로 이 엘라 골짜기에 이스라엘 군으로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 세 형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볶은 곡식 한 에바와 떡 열 덩이와 치즈 열덩이를 가지고 가서 천부장에게 주고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도록 명령을 받고 온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도착한 때 엘라 골짜기의 이스라엘군은 완전히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골리앗의 위협적이고 모욕적인 호통 앞에 모든 이스라엘 군대는 심히 두려워하여 싸워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목격한 소년 다윗이 말한다.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이 당돌한 다윗의 말이 사울 왕에게 보고되어 다윗이 왕 앞에 서게 되었다. 이 때 다윗이 왕 앞에서 한 말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의 내용이다. 싸움의 승패는 싸워봐야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싸우기 전에 이미 승패는 판가름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겨놓고 싸운다\\\"는 말이 일리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싸우기 전에 기가 꺾이면 이길 수가 없다. 복싱 선수들이 링에서 시합에 들어가기 전에 선수가 맞서게 되면 서로 눈싸움이 먼저 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시선을 제압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하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다윗이 사울을 이기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함께 찾아 보면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오늘의 모든 상황을 이겨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3. 32절의 말씀을 보자.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이 말씀 속에서 다윗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라. \\\"그 사람을 인하여 낙담하지 말 것이라\\\" 블레셋의 골리앗을 보고 그의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심히 두려워하며 낙담하고 있는 사울 왕과 이스라엘의 모습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말이다. 지금 무엇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인가? 왜 낙담하고 있는 것인가? 그를 맞서 싸워보지도 않고 지금 전의를 상실한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완전히 압도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는 골리앗의 외모 때문에 압도되고 만 것이다. \\\"그 신장은 여섯규빗 한 뼘이요,(45*6=270+20=290cm)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썻고, 머리에는 어린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11.424g*5000=57.12kg)이요, 그 다리에는 놋 경갑을 첫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11.424g*600=6.854kg)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삼상17;4-7) 둘째는 그의 말에 압도된 것이다.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삼상17;8-10) 이 두 가지는 우리를 낙담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를 압도할만한 상황이 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하는 현실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 앞에서 다윗은 말한다. \\\"그를 인하여 낙담하지 말 것이라\\\" 이 말은 현실을 극복해야하는 우리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충고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상황 판단에서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하는 최초의 자세가 상대를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고 자신을 지나치게 작게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실상은 이것은 자신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 그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미리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자신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자세이다. 모세와 함께 가데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그가 써 보낸 13권의 신약성서의 편지글을 보면 맨 첫 부분에는 어김없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고전1;1, 갈1;1) 바울은 자신의 뿌리가 오직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실을 지극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이유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천명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어디에다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윗은 이런 면에서 확신에 차 있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과거의 승리는 지나간 한 사건으로 한 경험으로 흘러 보내지 아니하고 오늘의 발판을 삼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모신 강영우 박사님의 저서를 읽어보면 그 책마다에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어려웠던 삶의 경험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항상 \\\"내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시각장애인으로서 박사가 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단한 확신의 출발점이다. 그 많은 역경을 이기고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것이 힘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신앙고백에 있다. 강박사님의 가장 최근의 저서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내 삶을 언제나 힘있게 세워 줄 수 있는 삶의 불멸의 경험을 말하며 그 경험으로부터 새 출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5. 37절의 말씀을 보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에게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고 골리앗에게 나가며 한 말을 들어보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처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45-47) 다윗의 삶의 담대함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 전에 내게 승리를 주신 그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 이제도 승리 하게 하실 것이다. 이 전에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았듯이 나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자와 곰을 물리친 것처럼, 이제도 골리앗을 물리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시대는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철학에 의하여 살아가므로 삶에 유익이 된다면,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탄의 음모와 계략이 우리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이며 목사인 쿠르트 E. 코흐가 \\\"악마의 알파벳\\\"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우리말로는 \\\"악마를 찾아내는 46 가지 방법\\\"으로 번역된 이 책에서 그는 오늘 우리를 접근하는 악마의 여러 가지 방법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밝히고 있다. 현혹되지 말아야할 영적인 현상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있다. 이를테면, 부적 및 호신패, 점성학, 카드점, 기독교 정신요법, 투시능력, 암시 최면, 최면술, 이단, 손금보기, 정신분석, 텔레파시, 요가 등과 같은 것들이다. 정신을 집중시키고 건강에 도움을 주고 불운에서 벗어나 좋은 일이 있게 한다는 이름으로 사탄은 우리들에게 접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승리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바른 영적인 승리가 목적이다. 이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승리해야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신앙적인 방법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여러 가지 힘겨운 삶의 정황을 경험하고 있다. 당신은 쉽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낙담하지 않는가? 불평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원망하지 않는가? 혹시 잘못된 방법, 즉 불신앙적인 방법으로라도 잘되는 길이 있다면 좇아가려고 하지 않는가? 골리앗처럼 우리 앞에 우뚝 선 수많은 문제들을 다윗처럼 이겨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골리앗이 왔다. 다윗은 어디에?/ 딤후2:15, 행13:21-22, 눅16:9/ 하용조 목사/ 온누리교회/ 2003-04-01
골리앗이 왔다. 다윗은 어디에? 딤후2:15, 행13:21-22, 눅16:9 저는 온누리교회에서 6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후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러분을 바라보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슬렘 땅에 남아 있는 사랑하는 하나님 백성들을 대신해 여러분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알제리에 있는 크리스천 형제들, 방글라데시와 인도네시아에 있는 형제들, 여러분이 선교사를 보낸 터키 형제들을 대신해서 문안을 드립니다.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고난받는 모슬렘 지역 백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최근에 ‘세례를 주었다’는 이유로 순교한 이란계 목사님 일곱 분이 계십니다. 미망인이 돼 홀로 남아있는 사모님들이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안타깝게도 회교권 국가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회교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종족입니다. 다메섹 지역 교회와 바그다드에 있는 형제들을 대신해서는 드릴 인사가 없습니다. 브루나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팔레스타인계 아랍인들을 대신해서도 여러분께 드릴 문안 인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계 선교를 위해 애쓰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앞에는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이번에 ‘선교한국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선교를 하려는 청년·대학생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과 비전을 나누며 ‘하나님 왕국’을 회복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는 ‘두 가지 사건’을 강조했습니다. ● ‘하나님 일꾼’으로 헌신하는 사건 첫번째 사건은 디모데후서 2장 15절에 있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며 세계선교에 도전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대부분 크리스천들은 코 앞에 닥친 문제,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마음을 쏟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성도를 향한 더 큰 계획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어린 제자 디모데에게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은 투옥돼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번 옥에 갇혔습니다. 이제는 풀려나지 못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교수형을 당할 거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감옥에 매여 있는 바울에게 근심이 생겼습니다.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한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본향에 가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죽은 후 구속역사를 이어 복음을 증거할 디모데와 같은 젊은이들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힘써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삶의 마지막 점을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그 날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그날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저는 예수님에게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는데 네 불신앙 때문에 못 하였구나”라는 말씀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는 약하고 어려움 당하고 힘들어하는 죄인들을 사용하신다’는 말로 학생들을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에 예수님을 보는 그날에 집중하라.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드리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면할 때 주님은 모든 수고를 기억하시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회한의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쁘다는 이유로 영원을 위한 삶에 투자하지 못한 후회의 눈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힘든 약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가 살던 당시 헬라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종교를 믿을 수 있어?”라며 비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 하나님 위해 탁월한 기준 세운 다윗 우리가 어떻게 ‘인정된 일군’으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13장 21~22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실패했고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성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평가한 ‘사울’이라는 사람을 주셨습니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언어 구사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그는 우등생이었습니다. 정말 타고난 지도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울은 정말 위대한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어떤 일들을 시키실 때마다 사울은 “하나님! 제게 더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하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에게 맞춰서 해석했습니다. 22절에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사람을 더는 사용할 수가 없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울 위에 다윗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13장 36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2절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 그 사람은 내 모든 뜻을 이루는 사람이다”라고 밝힙니다. 여러분 생애를 통해 하나님 뜻을 이룰 수 있습니까? 죄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목사님들은 여러분이 다윗처럼 범죄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간음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살인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나쁜 아버지가 아닐 겁니다. 다윗은 범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정결케 할 수 있는 지를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나 되는 거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이 참 신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저주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병사들이 화가 나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까? 아닙니다. 작은 소년 다윗이 골리앗의 말을 들었습니다. “바알이 참 신이고 하나님은 참 신이 아니야”라는 말에 참을 수가 없어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간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 많은 상금을 지급했습니다. 둘째로 골리앗을 쓰러뜨리면 왕의 사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동기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다윗의 참된 동기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미스터 골리앗! 내가 너를 쓰러뜨릴 거야. 이것을 통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알게 될거야. 온 세상이 이 땅 위에 하나님 외에 참 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라며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소년 다윗은 당시 모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 모슬렘 깨울 ‘다윗’을 찾습니다 저는 ‘선교한국대회’동안 학생들에게 “골리앗이 지금 다시 돌아왔는데, 이 세력을 쓰러뜨릴 다윗은 어디 있는가?”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회교권에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예수님이 참 신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고 세뇌를 받습니다. 아주 사악한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아주 나쁜 크리스천들이 신약성경까지도 바꾸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쓰레기 같은 책으로 생각합니다. 모슬렘은 ‘모하메드’를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실들을 접하면 여러분 마음이 어려워지지 않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저는 40년 동안 모슬렘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장기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입니다. 제가 어떤 기도회에 참석한 후 하나님이 주신 일입니다. 저는 ‘예쁜 자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잘못된 동기를 품고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모임에는 자매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슬렘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형제들만 모인 기도모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임에서 ‘조지 보어’라는 스무 살 청년이 제게 “당신은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할꺼야?”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남은 나라가 어디인지를 물었습니다. “리비아, 리비아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저는 리비아가 어떤 나라인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철야기도에서 제 눈을 여시고 저의 꿈이 얼마나 작은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저 같은 사람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천 명의 장기 사역자들이 모슬렘 국가에서 사역하도록 돕는 도구로 저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실은 모슬렘 지역에서 선교하는 대부분이 서양선교사들입니다. 문제는 대부분 모슬렘 국가들이 서양 사람들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그다드에 미국 선교사를 보낼 수 있을까요? 레이건 대통령이 카다피 대통령 관저에 폭탄을 터뜨린 후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최근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나라에서는 모든 서양선교사들이 철수했습니다. 오직 네 가정의 선교사들이 지금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그들은 바로 한국 선교사들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한국 선교사들은 서양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란과 같은 나라도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 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입니까? 하늘 아래 구원받을 도리가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은 과장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선교프로그램을 지원합니다.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잘하였도다”라는 말을 듣기 원하십니까? ● 천국 사건 우리 생애에 일어나야 하는 두 번째 흥분되는 일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예수님은 “너희를 영원의 처소로 인도할 수 있는 친구를 사귀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좌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을 때 거기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각 나라와 족속과 민족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 보좌 앞으로 나올 것을 말합니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어떤 성도가 다가와서 여러분을 뜨겁게 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눈을 들어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 영혼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저희 나라에 선교사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 선교사가 삼촌에게 얘기하고 삼촌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예수님 보좌 앞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영원히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인생의 한 부분을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장 15절은 말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빌립보서는 선교사들을 도운 교회에 보내는 감사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나의 고난에 동참하는 빌립보교회에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교제(참예)라는 말은 ‘모든 일을 함께 진행하는 가까운 관계’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교사를 파송하셨습니다. 저는 한 성도님께 선교사들이 어디서 사역하고 있는지를 여쭈었습니다. 그분은 “전 세계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장로님께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가 어디서 사역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아프리카에서는 어느 지역에서 어떤 종족을 위해 사역하고 있는지도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파송한 선교사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사역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한 가정이 선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선교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릴 수 있습니다. 기도제목도 나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17절에서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이 주실 영원한 상급을 얘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면류관을 원합니까? 무게가 15kg 정도인 금면류관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한 가지는 그 면류관이 바로 ‘영혼들’이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받을 면류관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면류관은 여러분을 영원의 처소로 인도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프린터로 출력한 어떤 용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용지를 들고 서 있을 겁니다. 제가 들고 있는 용지에는 저를 교회로 인도한 자매님 이름이 적혀 있을 겁니다. 저를 철야기도에 인도했던 형제님 이름도 적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힘껏 도왔던 OM국제 총재 ‘조지 보어’목사님 이름도 기록 돼 있을 것입니다. 아마 중국사람과 일본 사람과 터키 사람들이 들고 있는 용지에 여러분 이름이 적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아프가니스탄과 아랍, 걸프에 있는 나라들에 영적 부흥이 필요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말레이시아에도 말레이종족을 위한 가정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브루나이에도 크리스천 두 명이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소말리아에는 5~6명의 크리스천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슬렘 땅의 영적 부흥을 위해 누군가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중국인 5%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저는 회교도 5%가 주님 앞에 돌아와 경배할 것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 일을 위해 여러분에게 뭔가를 보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대한 다윗/ 삼상25:32-35,39-42/ 김흥규 목사/ 2008-09-02
관대한 다윗 삼상25:32-35,39-42 <분별력 있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미덕들> 기러기는 수십 마리,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날아가도 맨 앞에 있는 기러기를 따라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맨 앞에 있는 리더가 방향을 잘못 잡을 때 전부 다 잘못 된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새들 중에서도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물며 한 국가의 영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지도자를 뽑으면 나라 전체가 융성해질 수 있고 나쁜 지도자를 선택하면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중동 지역으로 나가는 대사가 어떤 대통령에게 부임 인사를 했답니다. ”각하, 제가 부임하는 곳은 그늘도 40도나 된답니다.” ”그래, 그럼 그늘 같은 곳엔 안 들어가면 될 것 아니야.” 유머가 뛰어난 대통령이라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 없이 사는 무능한 대통령이라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분별력 있는 삶’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윗과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분별력은 누구에게나 다 필요한 미덕입니다. 가정 생활이나 학교 생활, 직장 생활, 교회 생활 등등 모든 분야에 필요한 덕성이지요. 하물며 한 국가의 영도자에게 분별력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즘 독도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가 심상치 않습니다. 독도 탐사를 하겠다는 일본측과 허락할 수 없다는 우리측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습니다. 양측 다 국익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인데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이 난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를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분별력은 크게 두 가지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로, 정확한 상황판단이 중요합니다. 현실감각이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비가일에게 돋보인 것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발은 무모한 감정과 욕심에만 사로잡혀 있을 뿐 뭐가 뭔지 상황판단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있어서도 정확한 현실 인식 능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개의 경우 인의 장막에 가려서 국민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민주화 시대가 되어서 많이 나아졌지만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는 대통령이 몇 사람의 실세들에게 둘러 싸여서 왜곡된 정보에 의해 좌우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이른바 ’민정시찰’이라는 것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자주 나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옛날에 왕과 우의정이 세상물정을 알아보려고 평민행세를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두 사람은 주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의정이 주막 기둥에 적혀 있는 글씨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 외쳤습니다. ”주상 전하, 우리의 신분이 탄로 났습니다!” 여러분, 그 기둥에 무슨 글씨가 적혀있었는지 아십니까? ”손님은 왕이다.” (좀 썰렁한 유머입니까?) 일국의 지도자가 보통 사람들과 격의 없이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 정확한 현실 판단을 위해서 참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철저한 가부장제도와 서열중심의 문화, 계급의식으로 가득찬 군사정권의 영향으로 일방적인 리더십만 행사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정치나 사회도 많이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민의(民意)를 존중하는 점점 열린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 둘째로, 지도자가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던지는 말 한 마디, 선택과 결단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것을 미리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그 때 그 때마 시원시원하게 단안을 내리기는 잘 내리는데 그것이 나중에 큰 문제를 몰고 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비전이 모자라기 때문이지요. 비전이란 이와 같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볼 줄 아는 안목인데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이루기를 원하는 이상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비전은 리더 한 사람의 것만 되어서는 안되고 ’shared vision,’ 즉 ’공유된 비전’이 되어야만 합니다. 리더는 자기가 꿈꾸는 비전이 공동체 전체의 발전과 유익에 긴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에게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전달해서 다함께 추구해나가는 비전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일국의 대통령도 온 국민이 공감하는 위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다윗을 주인공으로 해서 삼상 25장 말씀을 읽다보니 자연 리더십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실, 다윗은 분별력이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분별력의 두 가지 요소, 즉 정확한 상황판단 능력과 미래에 대한 비전도 두루 갖춘 지도자였습니다. 먹거리가 떨어져 한 때 도움을 주었던 나발에게 양털 깎는 잔칫날 양식을 요청했습니다. 나발은 당연히 다윗을 도와주어야 마땅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나발이란 이름 그대로 미련하고 욕심 사나웠기 때문이지요. 10명의 부하들로부터 나발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폄하하는 등 인격적인 모욕을 주었다는 말을 듣고서 다윗은 즉시 군사 400명을 완전 무장시켜 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다윗은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했습니다. 부하들 앞에서 자신의 명예가 짓밟혔다는 사실 하나에만 앙심을 품고서 오직 복수에만 눈이 멀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고, 선을 악으로 갚는 나발 일가를 용서할 수 없다는 복수심 하나에만 사로잡혀 나발 집안으로 쳐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런 때에 하나님은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준비시켜주셨습니다. 냉철한 이성은 사라지고 흥분과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던 다윗에게 아비가일은 이글거리며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꺼준 소낙비와 같았습니다. 침착하고 조리 있게 말해서 다윗을 무모한 감정이 지배하는 세계로부터 냉엄한 현실 세계로 되돌아오게 했던 것이지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동행하셨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주실 터인데 왜 스스로 원수 갚으시려고 합니까?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세요! 스스로 원수 갚으려고 해서 마음도 상하고 죄 없는 사람들의 피도 흘리게 해서 안 됩니다!” ”지금 제가 정성을 다해 준비해 온 예물을 받으시고 응어리진 마음도 푸시고 부하들 양식도 나누어주세요. 어리석은 나발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죄 없는 다른 사람들까지 죽여봤자 덕될게 무엇입니까?” 이 말을 듣고 다윗은 정신이 번쩍 들어 냉철한 현실의 세계로 되돌아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 여인이 이렇게 남편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사과도 하고 있지, 또 현재 내가 가장 필요로 한 양식도 선물로 가져왔지, 내가 무죄한 사람들 죽여서 그들의 양식을 빼앗는 것보다 이 선물을 받고 화해하는 편이 백 번 더 낫지. 옳은 말이야!” 이렇게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서는 상황판단을 바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모한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냉철한 이성으로 하나 둘 정확하게 셈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이제 다윗은 이와 같이 상황판단도 바로 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도 미리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비가일이 말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성군이 되실 터인데 지금 공연히 무고한 사람들 죽여서 나중에 후회하시거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다윗은 이 말을 듣고서는 망치로 한 대 맞은 듯이 화들짝 정신이 들었습니다. 군왕의 제일가는 사명이 백성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고 재산을 보호하는 일인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서 재산을 빼앗는 일은 결코 군왕이 할 도리가 아닙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들어보니 다윗은 자기가 현재 분풀이에만 눈이 멀어 이런 일을 했다가는 장차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도 큰 부담거리가 될 것이라는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차분히 현재로 되돌아왔고 미래에 일어날 불상사도 미연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큰 德의 사람 다윗이 보인 세 가지 관대함> 여러분, 이와 같이 다윗은 분별력의 두 가지 요소인 ’정확한 상황판단 능력’과 ’미래에 대한 탁월한 비전과 안목’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다윗은 이 두 가지에다가 ’관대한 마음’까지 품었습니다. 사실, 훌륭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 중에 하나는 관대한 마음, 즉 ’덕’입니다. 아비가일이 아무리 지혜롭고 재치 있는 조언을 했다고 할지라도 듣는 사람이 너그러운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다윗이 관대한 마음이 없었다면 아비가일의 말을 듣는 일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로지 복수하는 일에만 사로잡혀서 부녀자 따위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군사 400명을 이끌고 나발 집안의 남자들은 모조리 씨를 말리겠다고 돌격해 들어가면서도 아비가일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 흥분된 상태에서도 덕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아비가일이 워낙 겸손하게 정성을 다해 극진한 예를 갖추어 다윗을 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윗 특유의 관대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다윗의 관대함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아비가일을 다윗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32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아비가일을 다윗에게 보내주셨기에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그릇이 큰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나발 집안의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겠다고 출동했을 때 아비가일을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슬기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아비가일 같은 사람들을 많이많이 허락해주세요.” 하고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② 다윗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자기 손으로 직접 원수 갚지 않도록 지켜준 아비가일에게 감사합니다. 33절 말씀을 보세요. 다윗은 오늘 자기가 사람을 죽이거나 자기 손으로 직접 원수 갚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해준 사람이 아비가일이라면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군왕이 되어서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게 될 실수를 미연에 방지해 자기를 지켜준 사람이 바로 아비가일이라는 것이지요. 슬기로운 권면으로 자기를 건져준 사람이 아비가일이라면서 하나님의 축복까지 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얼마나 겸손하고 덕이 있는 큰그릇의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자기의 인격을 크게 훼손했고 자기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한 원수의 아내일지라도 그 말이 이치에 맞고 옳은 말일 때에는 감정을 풀고 기꺼이 들으려는 마음, 이 얼마나 아름답고 넓은 마음입니까? 원수의 아내라면 대개 도매금으로 넘겨 똑같이 취급해버리는 것이 상례인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원수의 아내라고 할지라도 사리에 맞고 정당한 말일 때에는 기꺼이 듣고 따르려는 겸손하고 열려진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이와 같이 넓은 마음, 열려진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만 무조건 옳다.”는 생각은 참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 내 생각이 현명치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진실하고 충성된 말일 때에는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우리 사회는 훨씬 더 밝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③ 아비가일이 준비해 온 예물을 받고서는 부탁을 다 들어줄 것을 약속합니다. 35절 말씀을 보세요. 다윗이 아비가일이 준비해 온 예물을 받아들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윗이 아비가일과 화해하겠다는 분명한 의지의 표시입니다. 비록 그 남편인 나발은 어리석고 고집 세고 욕심 사납지만 그 부인은 다르다는 사실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비가일의 소청을 다 들어주고 나발 집안의 식구들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다윗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약속을 했습니다. 아비가일이 워낙 슬기가 넘쳐 구구절절이 다 옳은 말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윗이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맞장구를 칠 줄 아는 대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고장난명(孤掌難鳴)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 손으로는 박수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과연 그랬습니다. 아비가일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아비가일을 알아줬던 다윗은 더 큰 인물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그 날 자기 집안에 불어닥칠 대살육을 막은 여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다윗이 이스라엘의 군왕이 되어서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는 치명적인 오점도 막아냈습니다. 그야말로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서 무혈혁명을 만들어낸 여걸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와 같이 나발 집안에도 좋고 다윗 왕가에도 좋은 무혈혁명이 한 사람 아비가일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관대한 사람, 덕장 중에 덕장, 큰 도량의 사람 다윗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여러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입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승진한 것을 아내에게 자랑합니다. ”여보, 나 오늘 부로 과장 됐어.” ”아니, 여보, 그게 무슨 자랑이에요? 옆집 순이 아빠는 작년에 과장 됐는데. 그리고 그게 어디 당신 혼자 힘으로 된 줄 아세요? 여자는 뭐 집에서 놀고 먹는지 아세요?” 이런 말을 들을 때 남편은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확실히 아비가일같이 지혜롭고 현숙하게 말하는 아내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어떤 말을 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받아넘기는 남편이 될 필요도 있습니다. 여러분, 덕불고(德不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평소에 덕을 잘 쌓아놓으면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해도 외롭지 않게 될 것입니다. 군대에서도 하는 말이 있지요. ”용장(勇將)보다는 지장(智將)이 낫고 지장보다는 덕장(德將)이 낫다.” 용맹무쌍한 장수보다는 지략이 뛰어난 장수가 한 단계 위이고, 가장 좋은 장수는 덕이 있는 장수라는 말이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덕이 있는 지도자 밑에는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모여듭니다. 다윗은 덕장이었기 때문에 겨우 600명의 용사들로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삼고초려의 정신으로> 여러분은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고사성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이 뛰어난 지략을 가진 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서는 제갈량이 사는 초가집에 세 차례나 찾아가서 부탁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지요. 군주가 신하의 집에, 그것도 허름하기 짝이 없는 초가집에 세 번씩이나 찾아가서 몸을 낮추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제갈량, 즉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두 번까지는 몸을 숨기고 만나주지 않았는데 세 번째에는 마침내 유비의 큰 덕과 겸손에 감동해 유비의 군사 고문이 되었습니다. 제갈량을 얻은 유비는 저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曹操)의 백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갈공명의 뛰어난 지략과 경륜도 높이 사지만 자신의 신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 차례씩이나 몸을 낮춘 유비의 큰 덕을 더 칭찬합니다. 아비가일도 분명히 대단한 여성이었지만 이 아비가일을 알아준 다윗은 더 큰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이 큰 덕의 사람이었기에 아비가일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본문 39-42절 말씀을 보면 남편인 나발이 죽자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여덟 왕비 중에 두 번째 부인이 되었던 것이지요. 장차 천하를 다스리게 될 다윗으로서는 아비가일의 지혜와 기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비가일 역시 자기를 알아주었던 다윗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 바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 41절 후반부의 말씀을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이 몸은 기꺼이 그분의 종이 되어, 그를 섬기는 종들의 발을 씻겠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답고 겸손한 말입니까? 이제 왕비가 된다고 해서 우쭐한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겸손해져서 다윗의 종이 될 뿐 아니라 다윗을 섬기는 종들의 발까지 씻어주겠다는 것이지요! 왕비가 된다는 사실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죽을 목숨을 구해준 다윗의 은혜에 감읍(感泣)해서 일생 종의 마음으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분별력 있는 모습입니까? 다윗이 이런 사람을 아내로 맞아들여 얼마나 더 훌륭한 군왕이 될는지는 불을 보듯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제 「분별력 있는 삶」이란 연속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 모두 아비가일처럼 지혜롭고 다윗처럼 관대해서 다 분별력 있는 인생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인천 내리감리교회)
그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삼상13:13-15/ 2004-03-11
그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삼상13:13-15 성시 낭독을 한 사도행전 13장 21절 22절 내용이 오늘 말씀드리려는 내용을 가장 잘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청하기를 우리도 이웃나라처럼 왕을 세워 주십시오. 보통 요청하는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요청을 들으시고 왕으로 세워 주셨는데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을 세웠다 는 거예요. 처음에는 사울이 겸손하고 또 하나님이 왕으로 세워 줄 만큼 사람이 괜찮았는데 일단 왕이 되고 나니까 사람이 변질되었습니다. 뭔가 되고 나니까 사람이 변질된다는 것 이것이 참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면 왕이 안 된 것만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가 되고 나더 니 교만해 지고 변질이 되는 경우도 있고요, 또 어떤 사람은 장로가 되더니 집사일 때 와는 딴판으로 변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로가 된 것이 오히려 화근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 역시 변질이 되어 왕 된 것이 결국 화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꼴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겠다 하여 폐해버리시고 자기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베들레헴 이새라고 하는 사람 집에서 막내아들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났더니 어떻게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네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너만이 내 뜻을 다 이루어 줄 수 있겠다. 하시어 왕의 자리로 올려 세워 주셨습니다. 문제는 왕의 자리를 탐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드시면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는 얘기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그 마음에 합한 사람을 상고해 보겠습니다.다윗은 어떻 게 그 마음에 합했을까? 첫째로는 본분을 다하는 사람 이었기 때문입니다.(삼상 16 : 11~ 12) 쉽게 말씀드리면 처녀와 총각이 결혼을 했습니다. 총각이 결혼하다 보니까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리고 왔으니 남편이 된게 아닙니까? 그럼 그 여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 다. 그러니까 결혼 안했으면 주어지지 아니할 본분이 결혼을 했기 까닭에 주어진 본분 즉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결혼해 놓고도 남자가 아내에 대해서 책임을 안 지고 자기 책임을 망각했다?고 하면 그 사람 어디다 쓸껍니까?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기뻐 하실리도 없고 마 음에 들어 하실리도 없는 겁니다. 또 내가 남의 집 며느리가 되었고 총각에게 시집을 가서 아내가 되었으면 아내이기에 해야 되는 본분이 있지 않아요? 그 본분을 망각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거나 마음에 들어하실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 본분에 충실하게 즉 그 본분을 다 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하신다 그런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데마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 사도의 전도를 받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전도 할 때 전도를 받았는지 혹은 서아시아의 어디를 다니러 왔다가 전도를 받았는지 모 르지만 하여간 바울 사도의 전도를 받고 아! 내가 이제껏 잘못 살았구나! 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훈련을 열심히 받았습니다. 이제는 일할만한 일꾼이 되었다 싶으니까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을 하고 선교 동역자가 된겁 니다. 흔히 쓰는 말로 선교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느정도로 바울과 함께 열심히 일했는가? 하면 감옥에 함께 갇힐 정도였습니다. 성경에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옥중 서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옥에서 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감옥에서 썼느냐 하면 로마옥에서 2년동안 갇혀있는 동안에 옥중서신을 쓴 겁니다. 그런데 빌레몬서와 골로새서에 보게 되면 그 데마가 바울과 함께 문안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결론부터 얘기하면 바울이 로마옥중에 갇혔을 때 데마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까지 즉 그 옥중에까지 따라 와 수종을 들고 같이 복음 사역을 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귀한 일꾼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선교사라고 하는 직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디모데 후서 4장 10절에 보면 \\\"디모데야!\\\" \\\"왜 그러십니까\\\" \\\"데마라고 하는 사람 알지?\\\" \\\"아 그분 그 렇게 열심히 돕고 계시지 않습니까?\\\" \\\" 말 말어, 그가 나를 버렸어. 그것뿐인줄 아느냐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데살로니가, 제 고향 살기 좋다는 곳으로 가버렸어. 네가 빨리 와서 이 자리를 채워 줘야겠다.\\\"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는걸 보면 데마는 좋은 자리를 얻고도 즉 그런 좋은 직분을 가지고도 그 본분을 망각해 버리고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 사람이 얻을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할 일이 어딨나요? 그렇게 된 이유가 있죠. 선교사로서 다가오는 고난을 감당키 어렵고 바울 사도를 끝까지 따라다 녀봐야 얻을게 하나도 없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 사람은 궁극적 목표를 하늘 나라로 정하고 천국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믿고 따르고 봉사한게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면 계산을 잘 못한거죠? 결국 제 본분을 저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좀 예수믿기 힘들고 직분감당하기 어렵다고 해서 직분을 버리지 마십시오. 고난을 못 이기고 또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으나 안 믿고 봉사한다고 해도 더 얻을 것이 없다하며 본분을 망각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 이유가 하 나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안 드는데, 그 사람에게 줄게 뭐가 있습니까?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세상의 것 주시면 좋고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주어진 본분에 충실해서 하나님께 마음에 드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무엘상 16장 11절 12절 봅니다.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 하겠노라 이 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이 말씀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 드리면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더 이상 봐 줄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폐하기로 작정하신 다음에 사무엘을 시켜서 베 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거기가면 어떻게 됩니까?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가 보아라. 예! 그리고 이새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아들들을 다 불러 놓고 그들 중에서 왕을 예선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들 중에서 왕을 당장 세우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왕을 예선을 하겠 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새가 얼마나 좋겠어요? 맏 아들부터 불렀습니다. 얼마나 늠늠하게 생겼는지. 정말 허대가 너무 좋은지라 왕이 될만하겠다. 그래서 기름을 부으려고 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하시며 너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만 나는 절대로 외모로 보지 않는다고 하셨 습니다. 둘째가 지나가도 아니고 셋째가 지나가도 아니었습니다. 전부 아들이 여덟인데 7명까지 지나갔는데도 전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럴 때에 사무엘이 이새라고 하는 아버지에게 묻기를 더 이상 아들이 없느냐? 하나 있긴 있습니다. 그럼 어디있다 말이요? 들에서 양 몇 마리 지 금 치고 있는데 그 아들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빨리 가 불러오라고하여 그 때 비로서 사람을 보내 부랴부랴 불러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다윗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겠습니까? 그래서 시편에 그가 뭐라 그랬습니까?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 셨다. 그러지 않아요? 아버지는 자기를 축에도 안 끼워 줬다니까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바로 이 사람이다. 기름 부어라. 기름을 부어 왕으로 예선했다. 이야기가 본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에 들었느냐? 네가 내 뜻을 이루어야 하겠다. 해서 왕의 자리에 앉혀놓고 온갖것 다 주었다 하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러면 다윗이 그 마음에 맞았다는 그것이 뭐냐?는 말입니다. 다른 형님들은 빈둥빈둥 놀고먹습니다. 다윗의 집은 식구가 10식구입니다. 아들만 8형제와 부모가 있으니까 10명이예요. 그런데 양은 몇 마리 밖에 안 됩니다. 아니 그렇게 형 님들이 함께 양을 칠 그렇게 많은 숫자가 아니라면 다른 집에 가서 품팔이라도 해야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매일 놀고 먹는 거예요. 그러나 막내 아들 다윗은 양을 치며 열심히 그 직분을 잘 감당하더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네가 양을 치라. 네가 잘 돌보아라 했더니, 그 목동의 자리에 서 자기의 본분을 충실히 감당하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놀고먹는 사람 중에서 하나도 기뻐하거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습니다. 놀고먹고 빈둥거리는 사람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리지만 자기 맡은 자리에서 본분 다하는 다윗을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하시고 기뻐하시고 올려주시고 세워주시고 온갖 좋은 것을 다 주셨습니다. 돈푼이나 있다고 귀한 직분 귀한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본분을 망각할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나중에 자기를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와 옛날의 열심을 찾고 온갖 충성을 다하고 본분을 다한다면 문제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분을 망각할 때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줄 것이 없습니다. 자기의 본분에 최선을 다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다윗에게 내 마음에 들었으니 네가 내 뜻을 이루어야 되겠다 하시어 왕의 자리에 세웠다는 것 아닙니까? 본분을 다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세움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주를 사랑하는 사람이였기 때문입니다.(시 18 : 1) 베드로는 평생에 세 마디를 주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첫째는 그가 예수를 처음 만났던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한 마리 못 잡았다가 예수님 하라는데로 하니까 고기를 감당 못 할정도로 잡지 않아요? 그 때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하는 말이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 : 8)\\\"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 고백 에서 예수와 인연이 맺어집니다. 나는 죄 없다. 죄인아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상관이 없어집니다. 그 다음에 제자를 삼고 얼마를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치고 난 다음에 세상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하지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 니이다(마 16 : 16)\\\" 신앙을 딱 부러지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거기서 그는 이미 구원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부활한 다음에 베드로는 역시 갈릴리 바닷가에 어부 자리로 돌아가지 않아요? 기어이 예수님이 거기까지 찾아가셨습니다.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 니다. \\\"베드로야!\\\" \\\"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 틀림 없느냐?\\\"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비록 육신이 약하고 믿음이 약해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를 했을망정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요 21 : 15 ~ 17)\\\" 얼마나 주님이 그 고백 을 듣고 기뻐하셨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내 양을 먹이라.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때 내 양을 먹이라 그러셨어요. 사명을 부여 해 준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에 그만큼 기뻐하셨다는겁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주님이 베드로를 더 사랑하지, 베드로가 예수님을 더 사랑합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랑하셨다면 그걸 선행적 사랑, 즉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를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한 그 사랑은 응답적 사랑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니까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즉,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다음에 우리들에게 응답을 해 주는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하십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까? 시편 18편 1절 찾으세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한 번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싸울려고 할 때 블레셋의 골리앗 대장이 외칩니다. 누구든지 1대 1로 싸움을 끝내자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싸울 필요가 있느냐, 한 사람만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때 누가 나갔어요? 골리앗 대장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는지! 다윗이 그 때 자기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에 나간 형님들을 만나러 갔다가 보니까 그 꼴을 보게되었습니다. 다윗이 그 때 뭐라고 그럽니까? \\\"왕이여\\\" \\\"왜?\\\" \\\"내가 저놈과 나가 싸우겠습니다.\\\" \\\"야! 네가 저 놈하고 어떻게 싸우냐?\\\" \\\"아니, 우리 하나님을 저렇게 모욕하고 저주하는 놈을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합니까? 내가 나가겠습니다.\\\" 물 맷돌 가지고 달려 나갔다는거 아니예요?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렇게 했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런데 왜 못나갑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 나님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저 놈을 가만 둘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는 차원이 조금 다릅니다. 저 남자가 내 아버지가 틀림없다고 의심 없이 믿습니다. 의심 안하지 않아요? 아버지 의심해 봤어요? 의심 없잖아요. 아버지 인줄은 믿는데 그 아버지를 진 짜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었다면 그렇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모욕하는 골리앗 대장을 왜 그냥 두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불같이 달려나갔습니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해요!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보다 열배나 더 사랑하시지만 즉 우리는 십분의 일 백분의 일을 사랑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하십니다. 세 번째로 열심이 불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시 69 : 9). 요한복음 2장 17에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성경말씀에 그런 말씀이 있더니 예수님이 바로 열심이로구나. 예수님이 그렇게 열심이 있었 다는거예요. 열심이 나를 삼켜버릴 정도로 열심이 불같이 뜨거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청소하는데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러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다고 한 그 열심이 삼킨 바 된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시편 69편 9절에 보면 다윗의 열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편 69편은 다윗이 쓴 것입니다.여기서 다윗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고\\\"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열심있는 분이였다면 다윗이 예수님과 견줄정도로 다윗이 열심을 예로 들어 예수님의 열심을 해석할 정도로 그렇게 열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열심이 있는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했다면 다윗의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여러분들 열심있는 사람들을 세워주시고 열심 있는 사람에게 좋은 자리 주시고 열심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 을 베풀어주시는 줄로 믿으시고 열심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