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しん(信)じる心を受け継がせよ(믿는 마음을 이어가게 하라)/ 申命記6:4-15(신6:4-15)/ 大嶋博道牧師(오오시마 히로미찌 목사)/ 日本フリーメソジスト神戸ひよどり台教会(일본자유감리교회 코오베 히요도리다이교회)/ 総員礼ৢ
信じる心を受け継がせよ(믿는 마음을 이어가게 하라) 申命記6:4-15(신6:4-15) 序論: 信仰継承を考える時に、我が子や次の世代に信仰を受け継がせるためにどうすればいいだろうか。これは、私たちの課題とも言えるだろう。「信仰継承」とは何だろうか。それは、イエス・キリストと出会い、救われたこと、神の恵みの中で喜びと感謝の生活をしていることを伝えることである。信仰継承とは、「クリスチャンになれ」と、勧めることではない。神の豊かな恵みに与る方法を教えることである。 信仰の継承の難しさは聖書人物の失敗例をみればよく分かる。 ○信仰の父と呼ばれるアブラハムとサラは、神の約束を待てずに、ハガルとの間にイシュマエルをもうける。その結果、イシュマエルとイサクは争い、ハガルとサラも争った。 ○イサクの双子の子らも争った。イサクは長男を愛し、妻リベカは弟の方を溺愛したからである。 ○サムエル記にあるように、優れた祭司であるエリの2人の子、ホフニとピネハスは、神殿で育ちながらも、神に対し罪を犯し続けた。2人は戦死し、ピネハスの妻は子にイカボド(栄光は失われた)と名付けた。エリは子の死を聞いて、席から落ちて死んだ。 ○サムエルの子らもまた、罪を犯し続けた。ダビデの子らも、後継者争いで親子、兄弟の対立がしばしばあった。信仰の継承からほど遠い歩みであった。 このように、偉大な人物の家庭でも、信仰継承ができなかったことを聖書は記している。それほどに信仰継承は難しいことである。が、だからと言って無視できない、大きな課題である。 本論:  ではどうすれば言いだろうか。結論は、聖霊の業を信じ、神の時を信じて、熱心に祈り続けることである。祈りなしにして、また、聖霊の働きなしにして救いはありえない。 具体的な方法を述べてみたい。  1.日々の目に見える働きを通して―申命記6:4は、律法の全てである。何よりも第一に神を愛せよという。69節にあるように、①心に留める②繰り返し教える③語り聞かせる④しるしとして身につけ、戸口や柱や門に書き記す。 2.信仰を宿らせる―若き伝道者テモテは母エウニケから、さらに祖母ロイスから信仰を受け継いだ。彼らに神の言葉が宿ったのである。信仰の継承に大切なのは、自分が信じている紙の言葉を子どもや孫に「宿らせる」ことである。 3.祈り続ける―信仰が次世代の子供や孫に継承するために、忍耐強く祈り続けることである。アウグスチヌスの母モニカは我が子のために涙の祈りを祈り続けた。 *牧会をしている私の父は、自らの信仰継承をこう語った。 1.背中で示した―自らの生き様による信仰継承 2.情熱―何としてもこの子を救ってほしいと熱心に祈った。これはクリスチャンの使命である。 まとめ: 創世記22:8、「二人は一緒に歩いて行った」6節にも同じ記述がある。大変な試練の中であっても、忍耐強く、希望を持って、共に歩み続けること。そうすれば神は神ご自身の「聖なる時」に必ず答えてくださる。忍耐して、希望をもって信仰継承のために励みたいものである。神は必ず、働いて下さるから。
どこまでか(어디까지인가?)/ 申命記34:1-8(신34:1-8)/ 大嶋博道牧師(오오시마 히로미찌 목사)/ 日本フリーメソジスト神戸ひよどり台教会(일본자유감리교회 코오베 히요도리다이교회)/ 総員礼拝・聖餐式(총동원예배,성찬식)
どこまでか(어디까지인가?) 申命記34:1-8(신34:1-8) 序論:  今日はみ言葉を通して、この世でのあなたの使命は「どこまでか」と言う事について学びます。先ず、モーセの生涯は3つの時期に区分されます。 ①「エジプトの王宮で過ごした40年」 ②「ミデアンの荒れ野で羊飼いとして過ごした40年」 ③そして「出エジプトから荒れ野の40年」に分ける事が出来ます。  この120年のモーセの生涯は神の不思議な、素晴らしいみ手に動かされた生涯でした。  ところで、モーセは神の約束の地に入る事は許されませんでした。目の前に約束の地を見ながらそこに入る事は出来ませんでした。(イスラエルの民で戸籍に登録された 20歳以上の者は、ヨシュアとカレブを除いてだれ一人約束の地に入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のです。ー民数記14:29~30参照)それは何故なのでしょうか。 その理由は次の2つがあります。 ①モーセは神が聖なるお方である事を示さなかった事がその第1の理由です。出エジプト17章では神が命じられた通り「岩を打った」が民数記20章では「岩に向かって、水を出せと命じなさい」と神が言われていたのにモーセは感情的になって「岩を2度打って」水を出した。則ち神様の命に従わなかったのです。 ②申命記34章10~12節に神がモーセを選び出された理由が書かれているがその事がモーセがエジプトの地に入れなかった第2の理由です。則ち、11節に「…あらゆるしるしと奇跡を行わせるためであり」12節には「…あらゆる力ある業とあらゆる大いなる恐るべき出来事を示すため」とあるように「モーセの使命はここまでだったのです」(使命の限界)しるしとしての奇跡を行い、あらゆる力ある神の業を示す事がモーセに与えられた使命だったのです。 モーセはネボ山のピスガの頂きで最期を迎えましたが、死ぬまで目はかすまず、気力は萎えてなかったのです。 本論: この事から次の3つの事を学びます。 ①神は私たちの人生の主権を持っておられる方である事 (詩31:15/1テモテ6:15~16) ②私たちは全力を注いで与えられた使命に生きる存在である事(ロマ12:11~12) ③神は最善(成功と繁栄)をなしてくださる方である事 (ロマ8:28)  まとめ:  私たちの人生の「使命」はどこまでなのでしょうか?ずっと継続したくても、手放さないといけないときが来ます。途中で投げ出したくても継続しないといけない時もあります。 私たちの「時」は神のみ手にあるのです。神の主権に委ねて、今日に全力を傾けて生きるだけで良いのです。神様は私たちの生涯を最善にしてくださいます。
まった(全)き愛に満たされて(완전한 사랑으로 가득하여)/ 1ヨハネ4:7-21(요일4:7-21)/ 大嶋博道牧師(오오시마 히로미찌 목사)/ 日本フリーメソジスト神戸ひよどり台教会(일본자유감리회 코오베 히요도리다이교회)/ 総員礼拝
全き愛に満たされて(완전한 사랑으로 가득하여) 1ヨハネ4:7-21(요일4:7-21) はじめに:  今年はプロテスタント日本宣教開始150周年を迎える。このような節目の時に、私たちの日本フリーメソジスト教団は「全き愛から更なる宣教へ」という教団標語を掲げた。この「全き愛」は、私たちの信仰生活の中で生涯追い続けるべき課題であり、また、キリスト者が信仰生活の中で目指すべき、そして到達すべき「恵みの高嶺」なのである。この「全き愛」は、家庭、生活、社会、国の形成の土台であり、また、宣教の原動力である。  「全き愛」とは、ジョン・ウェスレーが自らの生涯の中でしばしば強調した「キリスト者の完全」の実質(本質)である。このキリスト者の完全を、ウェスレーは「メソジスト教徒と呼ばれている人々に、神が託された偉大な宝(寄託物)と述べている。  「全き愛」とは、元来、Ⅰヨハネ4:15−17に記されていて、神と人との関係における完全、すなわち、完全な交わりを意味している。「全き愛」は、「動機の純粋さ」を意味する言葉として用いられ、神に向かって生きるキリスト者の一心さを表す。  スエーデンの神学者リンドシュトレームによれば、「全き愛」は ①意向の純粋-神に向けられたひたむきなまなざし  ②キリストへの模倣-キリストが生きたように生きる  ③神と我々の隣人への愛、全き、脇目もふらない愛(全存在をかけた愛)の3つに分けられる。  「全き愛」は聖書ではⅠヨハネ4:18に見られる。(本日のテキスト)また、「全き愛」は、ヨハネ13:1以降、イエスが十字架を目前にして弟子たちを「……この上なく愛し抜かれた(極みまで愛された)」という主イエスの姿に見られる。 この弟子たちは、裏切るもの、そして、逮捕の時、イエスを置いて逃げる者であった。イエスはそれを知りながらも、弟子たちを愛された。極みまでの愛は、そのあとに記されている「洗足」に具体的に見ることができる。この「洗足」こそ、キリスト者の愛の完全、「全き愛」の姿なのである。「全き愛」とは、このように、仕える愛、徹底的にへりくだった愛なのである。    では、今なぜ「全き愛」なのか。それは、「全き愛」だけが、人を動かすことができ、人を変えることができるから。そして、この「全き愛」こそが福音宣教の原動力だからである。 この「全き愛」に満たされるためには、 ①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贖いの御業に立ち返る  ②罪が赦され、神の子とされたことを確認する  ③日々、私たちを新しく造りかえてくださる聖霊を祈り求める ④礼拝を重んじ、日々のディボーションを通して「祈りと聖書の御言葉への傾聴」の時をもつ。(ウエスレーは「一書の人」と言われている。)  私たち一人一人が「全き愛に満たされる」こと、これが宣教の原動力となり、家族や近隣との平和、日本や世界の平和を生み出す原動力となるのである。「全き愛」に満たされて、一途に宣教の業に励みたいものである。
ロトも共に行った(롯도 같이 갔다)/ 創世記12:1-5(창12:1-5)/ 大嶋博道牧師(오오시마 히로미찌 목사)/ 日本フリーメソジスト神戸ひよどり台教会(일본자유감리회 코오베 히요도리다이교회)/ 総員礼拝(총동원예배)/ 2009-08-02
ロトも共に行った(롯도 같이 갔다) 創世記12:1-5(창12:1-5) 序 論:  ご存じのように、創世記12章からイスラエルの族長、信仰の父アブラハム物語が始まります。聖書を順序よく読んでいきますと、アブラハムと共に「ロト」という名前がしばしば出てきます。ロトはアブラハムの父であるテラの孫に当たります。 最初にロトの名前が登場するのは、創世記11:27です。 11:31でテラは息子アブラハムとその妻サラ、自分の孫であるロトを連れて、カルデアのウルからカナン地方に向かって旅をし、ハランという所で留まることになります。  創世記12章で、神様はアブラハムに現れ、父と共に留まっていたハランから神様が示す約束の地に出て行くことを命じます。 ここで、私には一つの疑問が浮かんできます。アブラハムはなぜ、甥のロトを連れて行ったのか。聖書にはその理由は記されていません。読者である、私たちが答えを見出さないといけないわけです。 実は、このことは、私たちがこの世を生きる上で、極めて大切な課題です。実は、アブラハムにとって甥のロトは大変な「お荷物」だったと思われます。「お荷物」というのは、 重荷に感じられるもの。負担となるものを意味します。 アブラハムにとってロトは邪魔な存在、負担になる存在。別な言い方をすれば、役に立たず、迷惑な存在でありましょう。   しかし、アブラハムはこのようなロトを徹底的に愛し、支え、家族の一員として守り抜きます。 ①ソドムから連れ去られたロトの救出(14:13~16) ②ソドム滅亡の際の執り成し(18:16~33)。  これは私の推測ですが、アブラハムがこれほどまでにロトにこだわったのには、一つは、父親のテラが孫であるロトを伴って旅に出たという事実があろうと思われます。 もう一つは、極めてこれは宗教的ですが、アブラハムは、「神の祝福がロトを伴うことによって実現する」ことを確信していたから。 逆に言えば、ロトを見捨て、ロトを排除することによっては「神の祝福」は絶対に実現しないということをアブラハムは固く信じていたからでありましょう。 本 論:  ここには、私たちの信仰生活にとって、非常に大切な真理が隠されています。 それは、私たちの信仰生活における祝福の旅路には、ロトが必要であること。ロトがいなければ神の豊かな祝福は実現しないのです。  私たちの信仰生活には、自分の都合の良いものだけを伴う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 いつも喜び、いつも幸せ、いつも楽、いつも思い通りっていうわけにはいかない。  信仰生活には、呻く(うめ)ような涙の祈りがあり、忍耐強く待ち望むような出来事があり、犠牲を伴う痛みもあります。時には失うことだってあります。 信仰生活において「ロト」は常に伴います。しかし、それが、信仰生活を豊かに導いてくれるのです。信仰生活に充実を与え、大きな祝福をもたらしてくれるのです。   今朝のメッセージをまとめますと、 (1)神の祝福の約束を徹底的に信じて、従って歩むこと (2)その際、アブラハムが荷物になるような甥のロトを伴ったように、私たちも、日々の歩みの中で、「ロトなる存在」を愛し、受け入れ、支え、祝福への旅路に共なるよ うに配慮すること。言い換えれば、神の祝福は「ロトと共なる歩み」の中に実現することを確信すること。 まとめ: あなたにとって「ロト」とは、あなたの夫でしょうか?妻でしょうか?あるいは子どもでしょうか?あるいは、あなた自身でしょうか?それともあなたを苦しめる何者かでしょうか? 「アブラハムは主の言葉に従って旅立った。ロトも共に行った」
감사의 능력/ 골3:15-17/ 추수감사주일설교/ 총동원주일설교/ 2006-11-19
감사의 능력 골3:15-17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인 동시에 총동원주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몇 십 년 전에 비하면 주택이나 교통편이나 가구, 가전제품 등, 너무나 편리하여서 얼마나 살기가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불평불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과거에는 없던 병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1세기에 인류를 괴롭히는 10대 질병 중 하나로 우울증을 지적했으며, 2020년에는 우울증이 심장병 다음으로 세계 2위의 질병이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한국도 성인 6명 중의 하나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고, 전 국민의 8%인 약 320만 명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당뇨병, 심장병, 암, 심지어 골다공증과 같은 기존질환에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불리어 지고 있습니다. 감기에 걸리면 멀쩡하던 사람도 심한 고통에 시달립니다. 마찬가지로 우울증의 증상은 우울한 기분, 흥미와 즐거움 상실, 기운이 없으며 매우 피곤하고 활동 감소성의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울증을 방치할 경우 생활에 흥미를 잃어, 자기 활동을 못하고, 심한 경우에는 자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우울증이 생긴 원인이 여러 가지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생활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울증의 치료방법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의사들은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항상 긍정적인 생각, 밝은 생각을 갖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감사해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1. 그러면 감사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라는 말씀은 성경에 수도 없이 나옵니다. 시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큰 고난, 큰 역경 중에도 하나님의 명령은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범사에’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성공의 날이나 실패의 날이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다 포함된 말입니다. (2)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은 자기에게 영광과 감사, 찬양을 돌릴 때 참으로 기뻐하시면서 그 밝은 마음에 거하시기를 즐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어둔 마음에는 어둠의 권세자인 사탄의 역사가 깃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불평의 가라지를 우리 마음에 심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삶을 파괴하는 것도 마귀의 이러한 술책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마귀가 “정말로 동산의 실과를 다 먹지 못하게 하더냐?”라고 유혹했을 때 하와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아니 된다. 하나님이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먹는 날에는 죽을까 하노라고 하셨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마귀는 “아니라,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 눈이 밝아져서 너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과일을 못 먹게 하는 것이다.”라면서 하나님에 대한 불만의 씨를 심어주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심어진 그 불평의 씨가 점점 자라 마침내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 마귀에게 예속되는 불행의 날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사회를 파괴시키는 것은 작은 불평의 씨앗으로 시작됩니다. 큰 문제나 큰 어려운 때는 가정이나 교회는 똘똘 뭉쳐서 해결하려고 힘씁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불평의 잡초는 그냥 방치합니다. 그 결과, 점점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교인간의 갈등이 커지면서 마침내 마귀가 본격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나 자녀, 남편이나 아내에 대해서나 교회 안에서 교인 간에 불평이나 원망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할 때 초장부터 담대히 물리쳐 버리십시오. 우리 생활의 포도원을 큰 여우가 찾아들어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여우가 와서 포도나무 뿌리를 갉아먹음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작은 여우가 바로 불평과 원망인 것입니다. (3)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 역대하 20장에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사밧 왕 때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십만 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 밖 150리 부근에 주둔했습니다. 이 때 온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정도로 당황했고, 이스라엘은 멸망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여호사밧은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군사작전을 열지 않고, 신하들과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기에는 성도들이 할 우선 적인 것은 기도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해서 말씀하기를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니 내가 너희를 위해 싸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 군대 앞에 성가대를 세우고 전진하면서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는 내용의 찬송을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보십시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고 그 역경과 죽음의 검은 폭풍 앞에서 오직 감사와 찬송을 시작하자마자 적군들 사이에 자중지란이 일어나면서 서로 칼과 창으로 찌르고 물고 찢음으로 스스로 자멸(自滅)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 군대는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오직 감사 찬송만으로 큰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미국에는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 공황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때에 미네소타 주 주지사 필스버리는 모든 주민에게 1877년 4월 27일을 ‘감사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은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 기도는 하늘을 덮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습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경 중에 감사할 때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기뻐하셔서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골목길에서 놀다가 친구가 던진 돌에 눈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는 현장에 달려가 소년을 안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두 눈은 실명되었으며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부모님은 몹시 낙심했습니다. 그때 소년은 또렷한 목소리로 “엄마 아빠, 눈은 잃었으나 머리는 남아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역경 가운데서도 감사를 나타낸 소년을 하나님은 일생 인도하셔서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시각장애자로서 영국의 경제학자요, 케임브리지대 교수, 국무위원이었던 헨리 포세트입니다. 또한 영국에 매우 가난한 한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가난해서 만삭의 몸이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일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그녀는 차가운 방에서 어렵게 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역경 중에도 감사하는 믿음을 보인 그 어머니를 보시고 그 아이를 일생 인도하셔서 큰 인물로 만드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만유인력의 법칙’과 ‘천체망원경’을 만든 아이작 뉴턴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여,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밝은 날이나 캄캄한 날이나, 성공하는 때나 실패할 때나, 모든 것이 축복으로 가득 차 보이는 때나 아닌 때나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십시오. 그 때 하나님은 그 귀한 믿음의 그릇 위에 큰 역사로 채워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자 그러면 어떻게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까? 세 가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본문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바다와 같습니다. 끝없는 감정의 파도가 물결치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우리의 마음이 호수처럼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공연히 우울하고 너무나 낙심하여 삶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어느 때는 누가 너무나 증오스럽고 혹은 분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감정이 터질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그 감정을 주체치 못하여 범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기 마음이 감사하는 밝은 감정으로 가득 차도록 지키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하는 마음이 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의 마음이 되니까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하므로, 결국 사탄의 어둠이 그 마음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 마음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맑아지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 크랜취 감독의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덩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추어도 하나님의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생이란 왜 이리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게딱지같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은혜를 받으면서도 감사하는 자는 실로 얼마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만큼 불평 원망은 쉽고 감사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느냐, 욕심의 마음, 사탄의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 감사냐, 불만이냐로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다른 가정의 아내나 남편에 비해 자기 아내나 남편이 너무나 부족한 것 투성이어서 불만을 느끼는 분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전부 욕심에서 생기는 불만인 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 100점짜리 아내나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면이 뛰어나면 저런 면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불만을 품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마지못해 사는 그런 부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느 분이 부부들의 일생을 재미나게 표현했습니다. 20대에는 부부가 끌어안고 자고, 30대에는 마주 보고 자고, 40대에는 천정을 보고 자고, 50대에는 등을 돌리고 자고, 60대에는 각방에서 자고, 70대에는 어디서 자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간에 불만이 싸이다 보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아닙니다. 100점짜리 아내나 남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아내나 남편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감사할 것이 많은지요. 아내를 보면서 ‘나 같은 것에 시집을 와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연노하신 부모님을 위해 효도하고 자녀를 귀하게 키워준 것 너무나 감사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2)입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16절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찬양하고”라 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는 바이지만, 우리의 마음은 배로 말하면 기관실과 같고 우리의 입은 배의 운전대와 같습니다. 우리의 입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배가 우로 가기도 하고 좌로 가기도 합니다. 마음이 먼저냐, 입이 먼저냐를 묻는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습니다. 마음에 불만이 가득 차면 자연히 입으로 불평이 나오게 되고 마음이 감사가 가득 차면 입으로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입이 불평하면 이상하지요, 마음도 불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입이 자꾸 불평하고 원망하면 우리의 삶은 그러한 어두운 방향을 향해 나가고 입이 자꾸 감사하면 우리의 삶의 배는 감사의 바다를 향해 나갑니다. 입의 말은 이만큼 우리 삶에 대단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잠6:2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누에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고치라는 집을 짓습니다. 우리가 불평의 말을 계속하면 그 불평의 실이 결국 불평의 집을 만들어 나를 갇히게 합니다. 반대로 늘 감사의 말을 하면 감사의 집을 지어서 나로 그 밝은 집에서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할 수밖에 없는 역경 가운데서도 억지로라도 감사의 말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의 환경을 허락하시어 그 집에서 살게 하실 것입니다. 감사의 능력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좋은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범사에 입을 열어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우리의 몸과 물질로 감사해야 합니다.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감사하고 입으로 감사할 뿐 아니라 더 나가서 행함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감사할 때 먼저 마음으로 진정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은 없는데 입으로만 감사하는 것은 입 발린 소리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마음으로나 입으로만 감사하고 감사의 행함이 없으면 성숙한 감사가 못됩니다. 만약 우리가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어머니, 아버지 지금까지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입으로만 감사할 뿐, 효도하는 태도도 없고 아무 선물도 없다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것입니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제사를 지내려면 자기 몸으로 절하여야 하고 또한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몸으로 감사하는 것을 헌신이라고 하고 이 물질로 감사하는 것을 헌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헌신할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힘껏 해야 하고 헌금할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힘껏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힘껏 은혜와 축복을 주시지만, 우리가 헌신과 헌금할 때 인색하게 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실 때에 인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고 계셨다가 우리가 심는 대로 반드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게 하시고 많이 심는 많이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감사할 조건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도 한번 말씀 드린 예화입니다. 어느 감리교회의 목사님 사모님이 병원에서 위암 판정을 받고 입을 굳게 다물고 미음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한창 나이에 이 지경이 된 것은 개척 교회 시절의 극심했던 고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당시 감리교 신학대학의 윤성범 학장님을 만났습니다. 학장님이 “목사님, 얼굴이 어둡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자기의 형편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학장님이 제안하기를 “노트를 한 권 사다가 아내에게 주세요. 그 노트에 감사할 일만 생각나는 대로 적으라고 해보세요.”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즉시 노트와 볼펜을 사들고 아내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이 마당에 무슨 감사할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라면서 냉담의 반응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모님은 마음을 고쳐먹고 한두 줄씩이나마 감사할 일을 써 내려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작은 일부터 적어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너무나 감사할 일이 많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계속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점점 통증은 사라지고, 다리에는 웬일인지 힘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암세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능력은 이처럼 놀랍습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이제부터는 우리의 마음과 입, 행함에서 불평과 원망이 나타나지 않고 우리는 생 다하는 날까지 더욱더 감사와 찬양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와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길이니, 마음과 입과 행함으로 힘껏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그네 인생/ 벧전1:24-25/ 총동원초청주일설교/ 2007-04-05
나그네 인생 벧전1:24-25 오늘은 우리 교회 초청 받아 나오신 분들과 교회 나오신지 얼마 안 되는 분들을 위해서 설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기를 “인생은 무엇입니까?”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인생은 나그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과거 많이 불렀던 유행가 중의 하나가 최희준 씨가 부른 ‘하숙생’입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라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인생은 나그네라고 표현한 곳이 많습니다. 야곱도 바로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대상 29:15에서 다윗도 인생을 나그네라고 했고, 시39:12에는 인생을 객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손님이라는 것입니다. 히11:9에도 인생을 나그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왜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했습니까? (1)인생은 잠깐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동안 살다가 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생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약4:4 인생을 안개라고 했습니다. 안개는 햇빛이 비치면 금세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시102:3에서는 인생을 연기라고 했습니다. 연기는 불을 피우면 나지만 불이 꺼지면 역시 곧 사라지고 맙니다. 욥7:7에서는 인생을 호흡이라고 했습니다. 콧김이라고 말한 곳도 있습니다. 인간은 3분만 숨을 쉬지 못하면 죽습니다. 시78:39에서는 인생을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적으로 바람은 따뜻한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움직입니다. 바람은 잠깐을 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벧전1:24에서는 인생을 풀이라고 했습니다. 풀은 봄에 났다가 차가운 바람이 불면 죽고 맙니다. 짧은 생명력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잠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에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풀끝의 이슬 같다는 말입니다. 흘러가는 세월은 길고 한가한데 사람의 생명은 풀에 놓인 이슬처럼 잠깐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어여쁜 얼굴이 내일이면 주름살로 가득한 얼굴로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아직 건강하고, 젊으니까, 아직도 내게는 생명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건강도, 젊음도 순식간에 지나가고 마는 날이 온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2)나그네란 이유는 죽을 때 모든 것을 두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눅12:19에서 보면 부자가 풍년에 큰 소출을 얻고 혼자 신나서 독백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강물이 흘러 한없이 흘러도 바다는 넘치는 법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탐욕도 한이 없습니다. 30평에 살면 50평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100평, 200평집에 살아도 인간의 탐욕의 구멍을 메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욕심을 따라 끝없이 움켜쥡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더 나가서는 악착같이 모은 엄청난 돈이 자기 영혼을 죽이는 독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분이 재미난 말을 했습니다. “돈이란 돌아야지 생명력이 있어서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지만, 돈을 쌓아두기만 하면 결국 자기를 돌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923년 시카고의 에지워터 버치 호텔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여기 참석한 사람들은 9명의 재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25년 후에 결과는 비참하게 마쳤습니다. ① 강철계 - 슈와브는 파산하고 죽었고, ② 비료계 - 인슐은 부정 축재로 파산되었습니다. ③ 가스계 - 홉스는 정신병 환자가 되었고, ④ 소맥계 - 고튼은 파산하여 출국하였습니다. ⑤ 증권계 - 휘트니는 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⑥ 정치계 - 휠은 허무한 생애를 비관하였습니다. ⑦ 은행계 - 프레저는 자살했고, ⑧ 금융계 - 리비모어도 자살했으며, ⑨ 대 기업가 - 크루기는 자살했습니다. 돈이나 명예를 위해 살던 사람의 말로는 세상에서도 비참하게 마칩니다. 어느 부자가 땅이 얼마나 많은지 만석지기였습니다. 그 면에서는 그 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산삼을 수없이 달여 먹었어도 죽는 날이 왔습니다. 부자가 죽는 순간에 자녀들에게 토지 문서를 모두 가져오라고 한 후 그 문서들을 하나씩 보더니 마침내 가슴에 끌어안고 눈물을 쭉 흘리더니 숨을 거두더라는 것입니다. 인생이 너무나 허무한 것은 우리가 죽을 때는 금가락지 하나도 못 가지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나그네라는 이유는 반드시 그 여행을 마치는 때도 오기 때문입니다. 꽃이 피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이 태어나는 날이 있으면 반드시 죽는 날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 히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어느 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하숙생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숙생은 항상 그 집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어느 날인가 떠나야 합니다. 그 날이 바로 죽는 날입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인생이 끝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은 죽은 후에 육신은 썩어 없어지지만 그 영혼만은 영원히 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죽은 후에는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영혼들은 천국에 가서 영원한 복을 상급으로 받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던 영혼들은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한 벌을 받는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이여, 그리고 교회는 나오시지만,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여, 이 세상에서 허무한 나그네 인생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들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을 믿으심으로 영원한 천국의 복을 상급으로 받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나그네 인생이 아니라 순례자 인생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나그네 인생과 순례자 인생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나그네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순례자 인생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그네는 오늘은 이 곳에서 유숙하다가 내일이면 또 다른 곳에 유숙합니다. 목적지가 없이 떠다닙니다. 그러나 순례자들은 멀리 성지(聖地)를 향해 떠났다가 때가 되면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습니다. 순례자 인생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로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임을 분명히 알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었을 때 ‘사망(死亡)했다.’고 표현합니다. 죽어서 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죽으면 ‘돌아갔다.’ 혹은 ‘소천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순례자는 어디서 왔는지, 죽어서 어디로 가는 지 분명히 아는 인생입니다. 또한 나그네는 이 세상에서 목적 없이 살지만, 순례자는 자기가 온 목적을 압니다. 멀리 성지 순례를 간 분들을 보면 열심히 목적대로 순례하다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두고 돌아옵니다. 나그네는 이 세상에서 욕심만 부리면서 살다가지만, 순례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 사명을 다하다가 갑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지라도 그 돈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맡기시는 줄 알고, 자기가 쓸 만큼 쓰고 나머지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삽니다. 부자라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있고 아닌 자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청지기 정신으로 선한 일을 위해서 쓰는 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된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같은 부자라도 자기 욕심만 위해 움켜쥐는 자는 결국 자신도 망치고 자식들도 망치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나그네 인생을 사십니까? 순례자 인생을 사십니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욕심을 부리며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불행한 인생이 되지 마시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 사명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 돌아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순례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자, 그러면 순례자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십시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은행통장이나 계약서를 상당히 중시여깁니다. 우리가 은행에 1억을 예금하고 나서 그 증거를 무엇으로 믿고 있습니다. 통장입니다. 통장에 찍힌 숫자만 믿고 1억을 예금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느 3억 짜리 아파트를 산후에 돈을 지불하고 무엇을 받습니까? 계약서나 등기문서를 받고 내 아파트인 줄 믿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분이 은행에 1억을 예금하고 돌아와서 ‘은행이 나를 속인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한다면 남들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웃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행통장이나 계약서, 혹은 등기문서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계약서가 무엇인 줄 압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을 구약, 신약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는 인생은 풀의 꽃처럼 허무한 날이 오지만 25절에 보면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면서 영원토록 변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변합니다. 심지어 토지문서나 계약서도 나라가 바뀌면 쓸모없는 날이 올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계약서인 성경 말씀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경 말씀에 보면 우리에게 놀라운 약속이 나옵니다. 그래서 복된 소식,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슨 계약을 하십니까? (1)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믿으면 무슨 죄든지 용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해도 막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그 사실을 믿는 자에게는 무슨 죄든지 용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경 요1서1: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계약하셨습니다. (2)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인 줄 믿는 자는 영이 살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 그 때부터 인간들의 영혼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되시는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이제 저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마다 영혼이 살게 하시겠다고 계약하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3)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지옥 대신 천국으로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멸망의 심판을 면해 주시고 천국 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지옥 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 천국의 길을 값없이 주신다고 하시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 계약 조건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만 따르면 이런 구원의 은혜, 천국의 은혜를 주시고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까지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특별 보호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 청지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순례자 인생을 살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 변화의 종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으로 인해서 나그네 인생에서 순례자 인생으로 바뀌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강하게 나타냈던 한 사람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황해도 안악군에 김익두라는 망나니가 살았습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16세 되었을 때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올라갔으나 보기 좋게 낙방하였습니다. 17세가 되면서 장사를 시작하였으나 그것도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때부터 술을 많이 마시고 놀음을 좋아 하는 생활로 타락하게 되였습니다. 나중에는 악명 높은 불량자가 되어서 안악군 일대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정도이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센지 누구나 그에게 대항하는 자는 모조리 때려 눞힐 정도가 되었으므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시장에 가는 도중에 서낭당 앞을 지나게 되면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안악 시장에서 그가 술을 외상으로 마시고 냉면을 외상으로 먹고 갚지 않는 것은 예사였으며 그렇다고 해서 잘못 건들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한마디도 그에게는 독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여선교사가 그에게 전도지를 주며 예수 믿기를 권고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전도지를 받아 쥐자 코를 풀고 그 종이를 돌려주며 그 선교사를 희롱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선교사가 “청년, 그렇게 하면 코카 썩지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큰 두려움과 감동을 주면서 교회 나오고 싶은 마음 생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안련 선교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몰래 참석하면서 마음에 크게 찔림을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번 결심하니까 대단합니다. 그는 세례를 받을 때까지 그는 l0개월 동안을 말이나 행동, 술담배를 삼가 조심하였고 한결같이 기도하면서 성경을 1백독 할 정도로 생활을 경건히 하였습니다. 하루는 술친구가 찾아와서 술을 마시자고 유혹하자, 그는 “지금 약을 먹는 중이어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무슨 약을 먹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지금 신약과 구약을 먹고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가 세례를 받은 후에는 얼마나 변했는지, 한번은 냉면집에서 일하는 아이가 보기도 싫고 밉기도 하여 뜨물 찌꺼기를 그가 지나가는 옆에 확 뿌렸습니다. 주인은 그 광경을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가지 고 그 애를 몹시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주인은 말하기를 “오늘은 그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냥 지나간 모양이나 다음 장날에는 우리 집은 망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다음 장날이 되어 김익두가 그집 앞을 또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예수 믿으시오.”라고 전도하면서 “나는 옛날의 김익두가 아니고 새 김익두 올시다. 당신에게 지은 외상값은 후에 다 갚아 드리겠오.”라고 함으로 불안해 하던 주인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김익두가 나중에 유명한 부흥사가 되어 수많은 병자를 고치는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요, 변화의 종교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욕심을 따라 사는 나그네 인생을 살다가 지옥에 가는 자들이 되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으심으로 순례자 인생을 사십시오. 그러므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큰 은혜와 복을 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시126:5-6/ 총동원전도주일설교/ 2010-01-21
눈물로 씨를 뿌리면 시126:5-6 오늘은 총동원 전도주일 28일전 주일입니다. 이제 앞으로 총동원 전도주일이 딱 한 달 남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태신자를 정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 이름을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예배에 들어오실 때 여러분들께 분홍색 또는 초록색 전도대상자 카드를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 전도대상자를 작정 하셨을 줄 압니다. 오늘 영상 하나를 보시고 전도 대상자 이름을 적어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계획을 하더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먹고 그것을 하나님께 표현하면 하나님은 그 걸음을 인도하시지만, 마음을 먹지 않고 아무런 결심이나 다짐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아무런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화이브 생명운동을 우리가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섯 사람,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다섯 번 찾아가자 사실 다섯 명 전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 분이 한 명씩,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자.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 만약에 한 분을 정하고 그분을 위해서 하루에 다섯 번을 기도하고 11월 8일 까지 다섯 번 방문 한다고 한다면, 또 그분의 이름을 가슴에 담고 하나님께서 내놓고 기도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11월 8일에 그분을 이 자리에 오게 하시고 그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 하지만 한국의 가을은 참 아름답습니다. 요즘 들녘을 보면 너무너무 풍성한 것을 보면서 이 가을이 가져다주는 추수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가을에 추수의 기쁨을 진정으로 맛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씨앗을 뿌린 농부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농부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추수를 원하고 좋은 열매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농부가 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가 씨앗을 뿌릴 곳에 가서 밭들 다 갈아엎고 흙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런 후에 씨앗을 뿌립니다. 보통 가을에 농사지으시는 분들이 특별히 벼농사를 짓는 분들은 벼를 다 수확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갈아엎습니다. 그러면 땅 속에 있던 해충들이 바깥으로 나오고 겨울 내 다 얼어 죽고 그래서 봄에는 그것을 부드럽게 만든 다음에 모를 심습니다. 어떤 분들은 겨울에 또는 이른 봄에 하기도 합니다. 배추나 무를 심으신 분들도 다 거두고 난 다음에 갈아엎거나 아니면 내년 봄에 다시 갈아엎어서 부드럽게 합니다. 딱딱한 곳에 씨앗을 아무리 뿌려 봤자 뿌리를 내려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흙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저께 이상만 목사님을 모시고 관계 중심 전도라는 귀한 세미나를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관계 중심 전도는 우리가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과 부드럽게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말을 잘하고 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돈이 많고 전도를 잘 한다 할지라도 내가 전도하려는 분과 좋은 관계가 맺혀져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 분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이크를 들고 전철이나 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 보다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좋은 분들께 찾아가 전도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통계도 그렇게 세계 통계도 그렇지만 대중 집회를 통해서 교회 나오는 사람의 숫자는 5%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하철이나 역 광장에서 많은 곳에서 복음을 듣고 내가 예수 믿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70% 이상이 친구의 권유로 아는 분의 권유로 또는 친지의 권유로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가장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것은 관계를 맺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흙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과 똑같습니다.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 놓으면 씨앗을 심으면 99%가 납니다. 평상시에 주변에 있는 분들과 관계를 맺어 마음 밭을 부드럽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복음을 제시하거나 교회를 소개하면 그 분들은 거의가 다 주님의 전으로 오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추수를 한 다음에는 씨앗을 심기 전에 밭을 부드럽게 해야 하듯이 여러분이 전도를 하기 원한다면 누군가와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 중심 전도의 가장 중요한 전제였습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려면 첫 번째, 관계를 잘 맺어 마음 밭을 부드럽게 한 사람에게 복음의 씨앗을 들고 가야한다는 것 지난 주일에는 제가 거기까지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이제 인격적인 관계가 잘 형성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씨앗을 들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좋은 씨앗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밭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 씨앗을 주머니에 아니면 봉투에 그냥 담아놓고 있으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눈물을 흘리면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 다시 말해서 기쁨으로 단을, 곡식을 거두는 자는 누구냐 하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여러분과 제가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가서 남들에게 복음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마28:17-19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너희는 가라.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먼저 예수를 만나게 하시고 생명의 씨앗을 주셨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생명의 씨앗이 있는데 우리는 이제 관계를 잘 맺어 마음 밭을 부드럽게 한 사람에게 복음의 씨앗을 들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평안을 준다. 그런데 이 평안은 세상이 너희들에게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세사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세상에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우리를 세상에 보낸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씨앗을 들고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여러분과 제가 이제 복음의 씨앗을 들고 세상으로 가야합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를 얻기 위해서 추수하는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가야할 사람은 다름 사람이 아니고 여러분과 저 입니다.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을 잘 못하고 사람들만 만나면 얼굴이 빨개지고 논리적이지 못하고 훈련을 잘 받지 못해 제가 전도를 잘 못합니다. 전도는 전도 훈련을 받고 목사님이나 권사님이나 장로님들이나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이 전도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탁월한 목사가 있고 헌신적인 장로님들이 계시고 또 훈련 많이 받은 교인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의 씨앗을 전달하는 유일한 사람일까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기 전 장군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2차 대전 때 어느날 부하 장군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장군 하나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장군님 이번에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탁월한 우리 지휘관들의 전략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일반 사병들을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아이젠하워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말은 틀린 것일세. 물론 지휘관의 탁월한 지휘 능력도 중요하지만 전쟁은 자네와 내가 일선에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쟁은 맨 앞에 총을 들고 나가 싸우는 한 명 한 명의 병사가 중요하네. 그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전진했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한 거야." 한 분 한 분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랑하는 교우들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의 전선에 나아가 여러분이 생명의 씨앗을 부드럽게 만든 세상의 밭에 여러분들이 심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요?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세상으로 가야한다면 세상은 어디를 의미할까요? 농부를 씨앗을 갖고 집안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방안에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들고 나가는 곳은 들이나 밭이나 산입니다. 바람 불고 춥고 뙤약볕이 나고 고난이 있고 맹수가 올 수 있는 위험한 곳입니다. 방안은 편안하고 안전하고 좋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생명의 씨앗을 갔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방안이 아닙니다. 교회 안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제가 가야할 곳은 바깥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우리보고 교회 안에 들어와 은혜 받고 축복 받고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보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초막을 짓고 그 변화산에서 머물기를 원했던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은 가자, 내려가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세상으로 내려와 내려오시자마자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싶었던 곳은 변화산이 아니고 세상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세상입니다. 아파하고 고통당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신음하는 이 세상, 여러분의 삶의 주변 아닙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리러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도날드 반하우수(Donald Barnhaus)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펜실베니아에서 목회를 하시는 데 유명한 설교가 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에게 예수를 안 믿는 그리고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을 비판하는 무신론자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 분이 암에 걸려 거의 죽음에 이를 때 잘 아는 친구 의사인 장로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 의사 장로님이 도날드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친구가 죽어가고 있으니 병문안 가서 기도 한번 해 주면 어떠냐? 평상시에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을 비판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한 이 사람,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환자가 누워서 바라봅니다. 이 목사님이 들어가자마자 침대 머리맡에 의자를 갖다 놓고 팔짱을 끼고 환자를 쳐다봅니다. 30분 이상 계속해서 쳐다보기만 하니까 이 환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자네 왜 나를 쳐다보기만 하는가? 내게 할 말이 있지? 한 번 말을 해봐. 자네 여기 왜 왔나? " 그러자 반하우수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온 이유는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핍박하고 무시하는 불신자가 죽을 때 지옥에 어떻게 가나 해서 그 모습을 보려고 왔네." 이 말을 듣고 이 환자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30분 쯤 지나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목사님의 말을 듣고 이 사람이 30분 동안 마음에 번민이 있었지요? 그 친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몇 십년동안 기다렸던 이 목사님의 말 한마디에 불신자가 지옥에 가는 자가 어떻게 죽어가는 가를 보려고 왔다는 이 말에 성령님이 감동감화 시켜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이 지나가 목사님의 손을 잡고 여보게 미안하네.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겠나? 거기서 반하수 목사님이 그 분의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할 때 그 분이 회개하며 죽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요? 주님이 없다고 부정하고 하나님 욕하고 예수님을 욕하는 많은 사람들, 직장을 잃고 육신의 질병 때문에 부부간에 문제 때문에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우리 주위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무나도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우리가 찾아가야 할 곳입니다. 그분들이 있는 곳이 들이고 그분들이 있는 곳이 산이고 그분들이 있는 곳이 밭입니다. 평상시에 우리가 그 분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번에 그 분들을 찾아갈 때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께로 돌아올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그분들에게 찾아갈 때 울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는, 울며 씨앗을 뿌리러 나가는 자는, 이 두 구절에 두 번 반복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는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전도는 울면서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씨앗을 뿌리러 나가는 자는 울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운다는 말은 머리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전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주위에 매일 강도짓하고 사기치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생각을 해 보세요. 머리로 생각하기에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사람이 아니야, 감옥에 가야할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는 것은 말도 안 돼, 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 깨달아야 해.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머리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머리로 사람을 대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게 되어있습니다. 판단하게 되어있습니다.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유대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율법학자들이 돌을 들어 내 치려고 할 때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율법으로 판단하는 자 머리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는 율법주의자가 되어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뛰어넘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앞섰습니다. 가슴으로 사람을 대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린다는 말은 가슴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남들의 허물과 죄를 보면 너무 안타깝고 그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갈 것이 너무 안타깝고, 예수 몰라 방황하고 주님을 몰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고통당하고 괴로워 할 것이 내 것으로 알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전도하고 싶으면 머리로 판단했던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그 영혼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주님은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시게 만들고 그 눈물을 주님이 받으시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수고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무 힘들게 일하면 눈물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셨지요. 사람은 힘들 때 눈물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전도하게 되면, 그를 찾아가 발로, 가슴으로, 손을 내밀고 수고하게 되어있습니다. 수고할 때 눈물을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세 번째 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고난과 희생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고난당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고 누군가를 전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설교를 해도 가슴에 와 닿지 않고 감동 받지 않고, 전도해야 하는 구나 머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절대 전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희생을 해야지. 내가 시간을 내고 재물을 내고 눈물을 흘리며 땀을 내려는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은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생각이 아니라 전도는 행동인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수고가 구체적으로 있지 아니하면 열매는 절대 거둘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화이브 생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무릎으로 기도하고 발로 찾아가고 손으로 선물을 사다주고 가슴으로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어주고 입술로 자랑하며 전하는 이런 수고와 희생과 헌신과 눈물이 있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흘린 눈물을 받으시고 분명히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울지 않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지 우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구세군을 창시한 윌리암 부스라는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문제는 울지 않는 사람이다. 우는 사람은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지만 울지 않는 사람은 늘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웁니다. 자기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가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은 울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죽어져 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울며 그를 전도하려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걸머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예수님을 보고 우는 여인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여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주님은 내 주위에 주님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울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보고 우리와 우리 자녀를 위해 울라. 주님은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울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은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모두다 주님이 가슴에 담습니다. 여러분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의 양만큼 주님은 여러분이 정한 그분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정하고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을 반드시 얻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고 돌아오리라고 되어있습니다. 두 번이나 똑같이 기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눈물과 기쁨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눈물과 기쁨은 서로 상반 된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는 자는 언젠가 기쁨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아기를 낳는 여자들을 보세요. 얼마나 고통을 느낍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눈물을 흘리며 거의 생명을 잃을 것처럼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서 해산하는 분만실에 가 보면 여자분들 다시는 아기를 낳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당하다가도 아기를 낳고 아기를 바라보는 순간 몇 시간 전에 아팠던 고통과 눈물은 온데간데없고 새 생명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까? 기쁨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맛을 모릅니다. 여러분과 제가 누군가를 전도해서 그가 교회 나와 변화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생활 잘 하는 기쁨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전도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해산의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기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제가 눈물 흘려가며 희생하며 전도한 것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55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간 말이 헛되이 빈 말이 되어 돌아오지 않습니다. 눈물 흘려가며 땀 흘려가며 희생하며 수고의 땀방울을 흘려가며 복음을 증언하게 되면 그것이 헛되이 빈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으로 채워주십니다. 마지막,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두고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곡식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열매 아닙니까? 우리가 전도하게 되면 수고의 땀을 흘리며 눈물을 흘리게 되면 반드시 11월 8일 이 자리에 죽어져가는 영혼들이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하게 되면 결실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분들이 와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분들이 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런 영적인 축복이 첫 번째 곡식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곡식은 그분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풍성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솔직히 나 예수 믿고 저주 받았어요. 나 예수 믿고 이혼 했고 망했고 나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다 잘못됐다. 나 예수 믿고 번민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게 되면 누군가에게 복음을 증언하게 되면 그 생명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더 풍성해질 줄로 믿습니다. 11월 8일, 28일 남았습니다. 이제 광고시간에 여러분이 정한 태신자를 적어내는 시간이 있습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상급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확장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생명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일이 저와 여러분, 우리 때문에 이루어지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서 소리 높여 말하라/ 행2:14-36/ 총동원전도주일설교/ 2009-11-19
서서 소리 높여 말하라 행2:14-36 우리 교회가 정한 2009년도 총동원 전도주일을 앞둔 50일 선포주일입니다. 예년에도 우리교회가 가을이면 총동원 전도주일을 했습니다. 이웃초청 예수큰잔치라는 이름을 붙여서 우리 주위에 주님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초청을 해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올해는 예년과 좀 달리 50일 전에 이렇게 선포식을 하고 오늘부터 11월 8일 당일까지 여러분이 기도를 하면서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예수 큰 잔치를 가지려고 합니다. 예년과 이번 총동원 전도주일의 차이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차이점은 예년에는 여러 사람을 데려오자고 했는데 이번에는 한 사람, 많으면 두 사람만 가슴에 품으시면 됩니다. 우리 교회 출석 교인이 1,500명가량 되고, 재적 교인이 5,6백명이 넘는다고 치면 그러면 약 2,000명가량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한 사람씩만 가슴에 품으면 됩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전도는 우리가 모르는 집에 가서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요즘의 전도는 주로 친구를 통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 가족을 통해 전도를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평상시에 잘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그의 권고에 의해 그의 삶의 변화를 보고 마음이 감동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한국 전도협회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 나오는 초신자 열 명 가운데 친구의 전도나 직장 동료의 전도로 교회 나오는 사람이 10명 가운데 7명이고 부모의 권유로 교회 나오는 사람이 1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도지를 받고 아니면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사람에게 감동을 받고 교회 나오는 사람은 10명중 한 명도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즘의 전도는 관계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전도하고 싶으면 그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고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면 여러분이 하는 말을 그분들이 받아들이게 되고 이해하고 좋게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라는 것은 한 두 달 만에 되는 것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복음을 증언하려고 하기 전에 그 사람을 여러분의 집에 초대할 수 있습니다 . 식사를 같이 하고 또는 그 집에 대소사가 있을 때 도와주기도 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여행을 같이 간다거나 영화를 같이 본다거나 음식을 같이 먹는다거나 자녀의 문제로 대화를 나눈다거나 해서 이렇게 평상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여러분이 그 분들에게 복음을 증언하고 교회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분들의 마음의 반은 이미 열려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평상시에 여러분이 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여러분들은 그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평상시에 좋은 관계를 맺지 않았다고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예를 들어서 이웃에 사는데 서로 얼굴 붉힐 일이 많고 싸우고 이래저래 소문을 들어서 여러분이 그 분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그 분들에게 복음을 문을 전한다고 해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말을 잘해서 교회가 갖고 있는 프로그램이 너무너무 좋으니까 그 분들이 그것 보고 감동 받아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삶의 변화를 보고 우리가 그 분들과의 맺은 관계를 보고 그 분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교회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 그래서 이번 전도의 특징은 아무나 많이 데려오는 것이 아니고요, 더군다나 남의 교회 잘 다니는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고 전혀 교회 나오지 않던 사람, 예전에 믿다가 낙심한 사람, 현재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 중에서 여러분들이 평상시에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 한사람만 데려오자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화이브 생명운동을 우리가 전개를 합니다. 여러분의 주보 첫 장을 넘겨보시겠습니다. 보시면 총동원 전도주일의 개요가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이번 총동원전도주일은 11월8일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11월 8일 이전에 50일 선포주일입니다. 선포주일을 하는 이유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누구를 전도할 것인가를 마음에 정하고 그분들을 위하여 여러분이 더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을 오늘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11월 8일에 총동원 전도주일을 하고요, 그 다음 주일 11월 15일은 11월 8일 오신 분들을 환영하는 주일을 갖고 11월 14일 토요일에는 그분들을 초청하는 만찬을 갖고 그분들을 위한 알파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번에 목표는 2000명입니다. 2000명 목표는 태신자 목표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숫자를 2000명으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나오는 교인들이 태신자를 한 명씩만 가슴에 품고 그리고 당일 11월 8일에 인도하는 숫자를 500명으로 잡았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품는다고 해서 다 오시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최소한 500명으로 잡고 그 다음에 이 500명을 놓고 우리가 기도하다가 500명이 오고 난 다음 주일 15일에 환영주일에 이 분들이 정식으로 등록을 해서 정식 교인이 되는 숫자를 150명으로 잡았습니다 . 얼핏 보기에는 너무 적은 수치를 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총동원전도주일을 해온 교회들의 경험을 보면 이 숫자가 가장 합리적인 숫자입니다. 150명이 한꺼번에 등록을 해서 다니게 된다면 우리교회 교인이 10%가 느는 것입니다. 한 번 행사로 교인 10%가 느는 것은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50일 동안 우리가 화이브 생명운동이라는 것을 합니다. 여기에 보면 세 분의 연예인들이 오시는 데 그 연예인 밑에 보면 2009년도 총동원전도주일을 위한 화이브 생명운동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운동을 50일 동안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무릎으로 기도하는 전도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이 정한 태신자, 전도 대상자를 가슴에 품은 태신자를 위해 매일매일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을 잘 한다고 그 분을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움직이려면 성령을 움직이려면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무기는 무릎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발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섯 번을 찾아가자는 것입니다. 다섯 번을 찾아가는데 오늘부터 시작해서 11월 8일 그분을 초청할 때까지 집을, 직장을 다섯 번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찾아가서 그분들을 교회에 초청하고 그 분들의 집에 찾아가 심방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손으로 하는 전도입니다. 그분들을 찾아가는 데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준비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간단한 전도용 선물을 판매할 것입니다. 시중에서 5,000원 10,000원 하는 것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사실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에게 무료로 드릴 수도 있지만 무료로 드리지 않고 여러분이 마음에 품고 전도하는 그 사람에게 여러분이 정성을 담아 전도용 물품을 구입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돈으로 구입을 해서 그것을 가지고 그 집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선물도 주고 때로는 초대해서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전도지도주고 이렇게 해서 선물과 식사대접과 전도지를 주고 해서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손으로 섬기는 전도입니다. 네 번째는 마음으로 이어주는 전도입니다. 이것은 그분들의 삶의 문제를 놓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것입니다. 자녀문제 때문에 고통당하면 함께 고통을 당해주고 그리고 기도를 해주고 좋은 안이 있으면 제안을 해 줘서 그 분들의 심정을 여러분의 심정으로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해 주는 마음으로 이어주는 전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입술로 전하는 전도입니다. 우리 교회를 자랑해 주시고 담임목사를 자랑하고 우리교회 장로님들을 자랑하고 교역자를 자랑하고 우리교회 프로그램을 자랑하고 교회의 아름다운 과정들을 자랑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교회 자랑, 담임목사 자랑, 장로님 자랑 교회 프로그램 자랑, 여러분의 입술로 우리 교회를 자랑할 수 있지요. 이 다섯 가지, 무릎 발 손 마음 입술을 가리켜 화이브 생명운동이라고 합니다. 50일 동안 여러분들이 이 다섯 가지를 동원을 해서 여러분이 정한 한 사람의 전도 대상자를 놓고 여러분이 이 다섯 가지를 다 하게 되면 확실하게 그분들이 총동원 전도주일에 오실 줄로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세 분의 연예인을 초청을 했습니다. 11월 8일 총동원 전도주일 당일 오후예배에 김세환 집사님이 예전에 가수였는데 이 분이 오셔서 찬양도 하시고 간증도 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 주일 환영주일 3부예배때에는 배영만이라는 게그맨이 전도사님이 되셨는데 간증을 하시게 됩니다. 그날 오후예배에는 텔런트 문회원 장로님이 오셔서 혼자 모노드라마를 하시게 됩니다. 많은 돈을 들여 연예인들을 초청했습니다. 이런 것들도 여러분이 전도하실 분에게 소식을 알리셔서 우리 교회에서 이런 귀한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참여하자고 알리시면 됩니다. 오시는 분에게는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주보에 보면 선물 초대권이 있습니다. 정말로 전도하시고 싶은 분에게 이것을 나눠드리면 되는데 나눠드릴 때는 그 뒷면에 전도하시고 싶은 분의 간단한 정보를 쓰고 여러분의 것도 써서 그 분에게 주시면 되는데 그 분은 그것을 받고 11월 8일 총동원 전도주일에 오시면 교회에서 준비한 좋은 선물을 드리게 됩니다. 만약에 11월 8일에 무슨 일 때문에 못 오실 것을 생각해 그 전에 오시게 되면 우리가 선물을 드리는데요, 가능하면 11월 8일에 오실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말씀을 전해주시면 됩니다. 예년에 했던 전도방법과는 달리 이번에는 관계전도를 하신다고 생각을 하시고 남의 교회 다니는 사람 절대 전도하지 마시고 현재 교회 안다니시는 불신자, 주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여러분들이 인도하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분들이 꼭 이번에 주님의 전으로 돌아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마인드를 갖고 여러분들이 오늘 주신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사도가 성령 받고 난 다음에 처음으로 일어나서 여러 사람에게 전도를 합니다. 설교를 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성령 받기 이전에는 설교를 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전도를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 받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일어나서 전도를 하고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오늘은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 다음에 첫 번째 오순절 설교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내용 가운데 몇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절) 우리는 이 본문에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라는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혼자 일어나서 설교하고 혼자 전도했다는 말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보면 열 한 사도가 함께 손을 잡고 함께 일어서서 전도하고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12명의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일어나서 전도하고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간 혹 가다 전도하러 나가자고 하면 교우들 가운데, 목사님 저는 말을 잘 못해요. 사람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혀가 얼어서 말을 잘 못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전도는 말을 잘하고 교회 오래 나오신 분들이 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전도는 말 잘하고 성경공부 많이 하고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만 전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다 함께 일어나서 전도를 했다는 구절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전도는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은 몇몇 종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전도가 은사인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무디 목사님이나 빌리그레함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전도자 이셨습니다. 이 분들은 늘 대중들을 향해서 전도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몇 몇 사람은 대중을 상대로 해서 복음을 증언하는 전도의 은사를 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의 숫자는 너무너무 미미합니다. 만약에 빌리그레함 목사님을 통해서만 전도가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전도 받아 교회 나온 사람은 너무너무 미미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몇 몇 사람에게는 대중 집회를 통해서 전도대회를 통해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전도는 근본적으로 어떤 특별한 몇 몇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모두가 다 전도자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 두 명의 제자가운데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말을 잘 못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 모두가 다 일어나 전도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은사라고 이야기 하고 내게는 그런 은사가 없기 때문에 나는 말을 잘 못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한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연세가 65세가 넘으셨는데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말을 잘 조리 있게 못합니다. 한글은 완전히 띠어서 잘 읽지만 그렇게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이야기 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오래 다녀서 성경공부도 많이 했지만 말을 조리 있게 못합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전도를 아주 잘하십니다. 이 집사님은 무엇으로 전도할까요? 전도대상자를 정해놓고 그 분을 찾아가지 전에 한 달 이상을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말을 잘 못하는데요, 논리적으로 말을 잘 못하는데 젊고 많이 배운 사람에게 찾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제가 이야기 못하지만 제가 전도하는 그 순간에 성령님이 그 자리에 계시면 내 말을 통해 나의 논리적인 말을 통해 그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그 분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사 그가 내가 전하는 말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 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분은 늘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전도하러 가기 전에 사람을 정해놓고 한 달 동안 그 분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찾아가는데요, 전에 같으면 사람 앞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얼굴이 빨개지는데, 기도를 하고 가면 왠지 담대함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첫 번째는 지혜를 주십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될 것인가를 주시고, 두 번째는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십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가시고 마음에 평안함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집사님은 하나님께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듣는 사람이 아 65세 넘은 할머니가 참 말도 잘하신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한다는 것이 아니고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듣습니다. 두 번째, 이 집사님은 돌아와 그 영혼 속에 떨어진 씨앗이 이제 자라게 해 달라고 눈물로 또다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집사님은 자기가 한 번 전도해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영혼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전도는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배우고 훈련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영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가게 되면 전도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열 한 명의 제자가 베드로와 함께 일어서서 같이 전도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말 잘 못하고 부족하고 배운 것 없는 나도 우리는 충분히 전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전도는 의무일까요? 책임일까요? 아니면 선택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가리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은혜 받으면 되는 것이지 내가 예수 잘 믿어 천국 가면 되는 것이지 왜 나 때문에 또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어야 되느냐! 정말로 전도가 책임이고 의무이냐고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선택하신 이유는 첫 번째는 우리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만, 두 번째 이유는 여러분과 제가 예수 안 믿었을 때에 죄 지었던 것처럼 예수 안 믿고 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나 때문에 돌아올 수 있게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자 축복이자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이고 동시에 예수 믿고 축복 받게 된 것은 바로 책임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동시에 우리가 구원 받은 자로서 누군가에게 복음을 증언해 또 다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책임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열 한 제자는 일어서서 복음을 증언합니다. 오늘 두 번째 보면, 다른 열 한 제자와 함께 일어나서 소리를 질러 전도했다고 했습니다. (14절 상) 소리를 높였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 번째,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 때도 확신이 있으면 큰 소리로 이야기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없으면 작은 말로 이야기 하게 되겠지요? 사도 바울을 위시하여 초대교회에 복음을 증언했던 위대한 전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급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급한 어떤 위기 상황을 보면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지요? 베드로와 다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성령 받고 난 다음에는 어디에서든지 복음을 증언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 간다는 사실을 증언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리를 지른다는 말은 모든 사람 중에 아무도 소리를 못 들어 주님께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급박한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소리를 내어 복음을 증언했다는 것은 이 베드로와 열 한 사도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본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확신을 갖고 있나요? 우리는 얼마나 급박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강하게 능력 있게 복음을 증언합니까? 죽어져 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방황하고 술 먹고 세상에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하고 감옥에 몇 차례 들락거리고 그대로 살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는데요, 만약에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가 정말로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안 가겠습니까? 그 사람이 안 믿겠다고 하더라도 그냥 물러설까요? 정말로 여러분과 제가 믿고 있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죽어져 가는 사람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강제로라도 그를 주님께 데려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너무 다급했습니다. 확신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열 한 명의 사람들이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며 각자 많은 군중들 앞에서 복음을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이 바로 이렇게 급박하게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 상황이 아닙니까?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더럽고 추한 일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쾌락에 빠져 사는 세상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잡다한 신들이 있는 이 세상에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까? 그들이 그대로 가다가는 주님을 몰라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 지옥에 들어갈 것을 뻔히 알고 있다면 어찌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믿음을 가만히 갖고만 있을 수 있을까요?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을 들고 가야합니다.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 교우들을 사랑하셔서 이번에 총동원전도주일을 통해 일어나서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언하라고 이 총동원 전도주일을 우리들에게 주셨다고 믿습니다. 열 두 명의 사도가 일어나 복음을 증언했던 것처럼 여러분과 제가 일어나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가 우리의 죄악의 용서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노라고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우리가 나가서 증언해야 할 때가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총동원 전도주일은 여러분과 제가 축복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 때문에 누군가가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서 그의 영혼이 구원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증언 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상급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전도를 통해서 여러분과 저의 영혼이 바뀌고 우리 교회가 바뀌고 우리 때문에 15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그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위대한 영혼의 잔치가 벌어질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수가 마을에 내린 총동원령!/ 요4:27-42/ 총동원전도주일설교/ 신삼철 목사/ 2007-06-17 (주일낮)
수가 마을에 내린 총동원령! 요4:27-42 시작하는 말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가시던 중 사마리아를 지나가시게 되셨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의 이름은 그 수도인 사마리아에서 왔고, 이곳은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건설하여(왕상16:24), 힐카누스(Hyrcanus)가 멸망시킨 것을 헤롯왕이 재건하여 “세바스테(Sebaste)라 칭하였습니다. 유대의 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예루살렘 성전 순례자들이 이곳을 통과하였다고 했습니다. 괴벽한 유대인들은 일부러 요단강 건너편 베뢰아 지방을 우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 우물 곁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6시쯤 되었더라”(요4:5-6)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수가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수가”는 ❶구약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욕을 본 세겜(창33:19,34 행7:16)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Godet, Meyer, Zahn). 이곳의 현재의 이름은 나블루스(Nablus)입니다. ❷어떤 이들은 세겜 동남 2마일에 있는 현재의 Askar이라는 동네로 봅니다. 수가라는 이름은 “술 취한 성, 누운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 취한 성, 쓰러진 성”이라는 뜻은 수가 마을의 상태를 잘 나타내 주는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마을은 옛날 우리나라의 옛날 “역말”에 주막이 많았던 겉같이 나그네가 쉬어 가는 “여인숙, 주막”같은 것이 많았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이 마을 동구 밖에는 공동 우물이었던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다. 이 우물에 대해서는 별다른 참고 재료가 될 만한 기록이 없습니다. 지금도 이 우물이 보존되어 “나블루스”에서 약1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 1697년의 조사에서는 깊이가 32m, 물깊이가 5m이었으나, 1841년의 조사에서는 깊이가 23m로 줄었고, 지금도 맑은 물이 솟고 있으며, 그 우물위에 “그릭정교의 교회당”이 서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제6시 정도 되었습니다. 요한은 시간을 로마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오후6시이니 해질녘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여행을 하시는 주님에게는 피곤도 하시고, 목도 마른 시간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선재설”은 교리적이며, 신학적인 면에서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어디든지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수가의 여인이 물 길러 가기 전에 벌써 주님은 우물곁에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2.그리스도를 만난 여인! 오늘 본문에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 이러라”(요4:7-8)고 설명합니다. 오후 6시경에 여자가 동네 밖으로 물 길러 나간 것은 그렇게 부유하거나, 높은 신분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가난하고 천한 신분임을 말해줍니다. 당시 높은 지위의 부인들은 물을 길러라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의 천한 여인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서로 만났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들어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총동원령! 1). 물을 좀 달라 ! 우리 주님은 “물을 좀 달라”는 지극히 평범한 말로 그 여인을 접근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지옥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물 한 모금”을 부탁했을 때에 거절당했지요. 사하라 사막이나, 중동의 사막에서 물 한 모금은 바로 생명과 직결될 수도 있습니다.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수가 여인은 너무 황공하여 거절 아닌 거절을 했습니다. 그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4:9)라고 반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을 일종의 혼혈족으로 보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은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할 때 똑똑하고 쓸만한 자들을 끌고 가고 그 자리에 아랍인들을 이주시켰습니다. 헬라 제국에 멸망당했을 때 헬라인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자연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족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순수 히브리 혈통을 가진 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을 개와 같이 취급했습니다. 2).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우리 주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4:15)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야곱의 우물물”을 달라고 하신 주님께 도리어 “영생수”를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4:16)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혼자 마셔도 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생수는 절대 혼자 마셔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내도 데려오고, 남편도 데려오고, 자식도 데려오고, 부모도 모셔오고, 친척이나 친족도 모셔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 오라 !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3)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그러한 예배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자들이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아내일수도 있습니다. 부모일수도 있습니다. 자식일수도 있습니다.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자들이 우리 집에, 우리 이웃에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같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세상의 윤리 도덕의 옷을 입고 말입니다. 4). 내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 여자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4:25)라고 말 할 때에 우리 주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4:26)고 말씀하셨습니다. 끝맺는 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라고 말하며 온 동네를 돌아 다녔습니다. 총동원령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동네에서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4:39)는 말씀대로 전도가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마을로 청하여 이틀을 그 마을에서 유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4:42)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가성의 총동원령은 크게 성공했습니다. 수가 동네는 완전히 복음화 되었습니다.
영적 고지를 점령하자!/ 고후10:4-5/ 총동원 전도주일설교/ 2009-07-08
영적 고지를 점령하자! 고후10:4-5 우리교회는 11월 15일을 총동원 전도주일로 지킵니다. 이번 총동원전도주일의 이름은 ‘해피데이’입니다 김목사님이 만든 해피데이 전도시스템을 도입해서 교회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해피데이 전도시스템은 지난 주일부터 적용을 시작했습니다. 진행 순서에 따라서 지난 주일에는 전도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영적고지’에 관한 설교를 하겠습니다. 전쟁을 할 때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지를 점령하게 되면 평지를 점령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는 고지 탈환을 위하여 온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6.25 전쟁 끝부분에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가 유명합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9일간 중국 인민지원군 44,056명과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 예하의 병력 2만 명이 치룬 유명한 전투입니다. 12번의 공방전 끝에 중국군은 1만여 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국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심한 포격으로 고지의 모습이 백마(白馬)같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백마고지를 놓고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백마고지를 빼앗으면 철원평야 일대를 갖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로 군사지정학상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백마고지를 빼앗기면 백마고지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백마고지보다 더 중요한 다른 많은 것들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백마고지 전투에 패하고 울었다는 것 아닙니까! 신앙생활에도 영적인 고지가 있습니다. 그 고지를 빼앗기면 많은 것들을 잃게 됩니다. 그 고지를 지키게 되면 많은 것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자들이 지켜야 할 영적 고지 중에 핵심은 생각의 고지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단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진이 나옵니다. 우리는 영적인 무기를 가지고 그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영적 고지로서 생각이 중요한 이유는 생각이 기도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 앞에 상달된다고 고백했고(시 19:1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을 지키려면 생각을 지키십시오. 내가 건강하게 살 것인가 병약하게 살 것인가를 생각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의사인 맥스웰 박사가 30년간 환자들을 연구한 결과 “결국은 그 환자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건강도 되고 인격도 되고 그 삶도 된다.”라는 발표를 했습니다. 잠 18:14에 보면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잠 23:7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밝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인생이 밝고, 건강이 밝고, 삶이 밝은 것입니다. 어두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 삶이 어둡고, 건강도 어둡고, 인격도 어둡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감사를 잘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사랑을 받습니다. 반대로 늘 불평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평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불평을 잘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감사를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감사거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불평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불평거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감사를 잘하려면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생각을 잘못하면 불평하게 됩니다.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깊은 우물에 큰 두레박 두 개가 도르래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한 두레박이 물을 담으러 내려가면 다른 두레박은 물을 가득 담아 올라와서는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하고 빈 두레박이 되어 물을 담으러 내려가면 다른 두레박이 물을 가득 담아 올라왔습니다. 하루는 한 두레박이 옆 두레박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정말 짜증나.” “왜 그래?” “올라올 때는 항상 물을 가득 채워 오는데 금방 다 쏟아버려야 하니 정말 짜증나고 속상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언제나 텅 빈 채로 내려가지만 물을 가득 담아서 올라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한 우물에 있는 똑같은 두레박이지만 생각을 잘하면 감사하게 되고 생각을 잘못하면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하는 이유는 생각이 운명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품을 낳고, 성품은 운명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주는 의미와 같이 사람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 자신의 장래와 운명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생각의 영적고지를 지키지 못해서 망한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유다’입니다. 요 13:2에 보면 마귀가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마귀가 준 생각을 물리쳐야 하는데 그것을 받아드렸습니다. 마귀는 가룟유다의 생각에 견고한 진, 영적 고지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지를 발판으로 삼아 가룟유다 속에 사단이 들어갔습니다. 결국 가룟유다는 주님을 팔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자살을 선택했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사단이 생각의 고지 속에 만들어놓은 견고한 진 몇 가지를 살펴보고 사단의 견고한 진을 하나님의 견고한 진으로 바꾸도록 사단의 견고한 진에 대체해야 할 하나님의 견고한 진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사단의 견고한 진을 허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견고한 진을 구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나는 하찮은 사람이다”에서 “나는 존귀한 사람이다”로 바꾸라. 어느 연구단체에서 서울시내 중학교 학생 2,000명을 상대로 의식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때 제시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당신은 지금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였습니다. 그런데 조사대상 학생 명 중 긍정적인 답변을 한 학생은 불과 27%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0명 중 27명의 학생만이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73명의 학생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거나 자신을 그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73%의 학생들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낮은 자존감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씨멘즈(D. A. Seamands)박사는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에서 낮은 자존감이 우리에게 미치는 네 가지 영향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그 결과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못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꿈을 파괴시킵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꿈도 버립니다. 도전하지 않기 때문에 꿈이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대인관계를 해칩니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으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듭니다. 넷째로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됩니다.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일을 주저하게 합니다. 낮은 자존감의 사람은 다양한 이유를 대면서 하나님의 일을 회피합니다. 영적인 자존심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낮은 자존감의 원인 중 대표적인 것 첫째는 중요한 타인들의 영향입니다. 둘째는 사회적인 가치관입니다. 세 번째는 완전주의적 신앙입니다. 완전주의는 부모의 끊임없는 요구로 해서 소아기에 주로 형성됩니다. 완전주의적 신앙은 율법주의적인 목회자의 영향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완벽한 신앙을 계속해서 요구하는데 성도들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율법주의적인 신앙 때문에 생깁니다. 관계 중심보다 행위 중심이 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완전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직도 충분치 않아’라는 의식에 지배를 받습니다. 열심히 일해 놓고도 ‘아직 충분하지 않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도 목회에 성공하고 사회생활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열매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완전주의 신앙을 갖게 되면 절망감과 죄책감을 갖게 만들고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게끔 합니다. 우리의 자존감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내가 비록 말씀대로 잘 살지는 못해도, 남에게 내세울 것이 없어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사람의 판단, 자신의 시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런운 존재라고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존귀합니다. 왕의 아들은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왕자인 것이지, 능력이 많거나, 인물이 좋아서 왕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왕자임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가진 다른 조건이 아니라 왕의 아들이라는 조건이 그를 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귀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이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 값 주고 살만큼 존귀한 존재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어줄 만큼 존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소 한 마리를 위하여 죽어줄 수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소 100마리를 위해서도 죽어줄 수 없습니다. 소가 100만 마리가 되어도, 아니 100억 마리가 되어도 소를 대신해서 죽어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는 죽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소 100억 마리보다 나의 한 명의 자녀가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실 만큼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집이라고 같은 집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거하는 청와대와 똥개가 사는 개집이 같을 수 없듯이 악령이 집을 삼고 사는 사람들과 성령이 집을 삼고 사는 사람들이 같은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니 존귀한 존재입니다. “나는 하찮은 사람이다”라는 사단의 견고한 진을 헐어버립시다. 그리고 “나는 존귀한 사람이다:라는 하나님의 견고한 진을 세웁시다. 영적고지를 점령합시다. 2. “나의 미래는 어둡다”에서 “나의 미래는 지금보다 100배 이상 좋아질 것이다.”로 바꾸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렵게 살아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대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어둡다”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지금보다 100배 이상 좋아질 것이다”라고 믿는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막 10:30에 보면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현세에는 백배를 내세에는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100배를 약속하셨다면 우리는 백배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이 100배나 좋아질 것을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어두운 미래를 바라본다면 불신앙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졸지에 잘되게 하시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점점 잘되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악인을 멸하시는 것도 졸지에 망하게도 하시지만 많은 경우 점점 약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희한하게 사울과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갔고 다윗은 점점 강성해 갔습니다(삼하 3:1) 아마 어떤 사람은 자기의 형편은 어렵고, 자기의 능력은 미력하기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을 것입니다. 요즘 어떤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그건! 니 생각이고”입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히 망한 상태에서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었던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후에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한나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8) 여기서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신다는 말은 완전히 망한 상태에서도 높이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죽었는줄 알고 사람들이 그를 거름더미에 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가 높아진다는 것은 완전 불가능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시 113편을 보면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떼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지극히 낮은 자들을 높여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 113:7,8에 보면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화여대 총장이었던 김활란 박사는 첩의 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너무 가난한 집의 딸이라 어느 부자의 첩으로 들어가서 그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망하여 길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가난한데다 첩의 딸이니 그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시대에는 서자에 대한 학대가 굉장했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을 믿으며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마침내 그에게 유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이화여대 총장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낮의 태양은 너무나 찬란하여 우리의 눈으로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출하는 태양은 비록 눈부시기는 해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처음에는 돋는 햇살 같습니다. 일출하는 태양과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인의 빛은 점점 밝아져서 한낮의 광명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면 나의미래는 밝습니다. “나의 미래는 어둡다”는 사탄이 속임수를 차버리십시오. “나의 미래는 지금 보다 100 이상 좋아질 것이다”라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견고한 진을 세우십시오.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영적 고지를 점령한 것입니다. 3. “나는 할 수 없다”에서 “나는 주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로 바꾸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중 추위에 시달리는 알래스카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팔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일 년 내내 뜨거운 태양 볕이 내려 쬐는 사막국가에 눈을 치우는 제설차를 팔 수 있겠습니까? 아멘!입니까? 노멘입니까? 그런데 무엇이든지 꽁꽁 얼어버리는 알라스카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음식을 얼지 않도록 보관하는 선반으로 팔고, 한평생 눈을 보지 못하는 사막의 나라에 모래 폭풍으로 고속도로를 덮는 모래를 쓸어버리는 차로 제설차를 수입하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면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도전했고 결국 이룩한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꿈을 꾸었고 그 꿈들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문제는 크고 그 문제를 풀어야 할 나는 너무나 작아 보이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점점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함을 넘어서, 두들겨 봤음에도 불구하고 도전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내가 겁쟁이인 채로 살아간다면 나는 아마도 큰일은 못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만 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제 안에 믿음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믿음 안에서 제 능력을 넘어선 일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분명히 저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말씀에 순종해서 도전해 보니 주 안에서 성취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저는 주 안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막 9:23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 길슨(M. Gilson)은 \"슬픈 인간의 불행은 습관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실험에서 얻는 결과입니다. 구멍 두 개에 두 눈을 대고 상자 속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상자 속에는 두 장의 그림이 나란히 있는데 오른쪽 눈으로는 오른쪽 그림을, 왼쪽 눈으로는 왼쪽 그림을 보게 하였습니다. 한 그림은 슬픈 얼굴이고, 또 하나의 그림은 기쁜 얼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슬픈 얼굴의 그림만 보더라는 것입니다. 길슨 박사는 이것을 \"인식의 차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는 태도가 어느 쪽 그림이 눈에 들어오는지를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슬픈 얼굴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기쁜 낯의 얼굴의 그림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즉 세상을 보는 습관이 행복에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사단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진을 깨고 믿음의 견고한 진을 만드십시오. 그래서 영적고지를 점령하기를 바! 랍니다. 4. “나는 전도할 수 없다”에서 “나는 전도할 수 있다”로 바꾸라. 전도에 실패한 우리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믿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전도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경험이 성공한 경험보다 많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나는 전도 할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사단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진입니다. 이 영적고지를 점령해야 전도가 될 것입니다. 전도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사 52:7에 보면 전도자의 발은 산을 넘는 발이라고 말합니다. 산을 넘는 일은 일반인들에게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에 태국선교 가서 산지족 마을을 갔는데 산을 오르면서 여러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 중에는 교회 뒷산처럼 가벼운 산도 있지만 남한산성 꼭대기처럼 만만하지 않는 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처럼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산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최고 높은 산은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산도 도전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점령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8000m급 산이 15개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엄홍길씨는 8000미터 이상급 산 15개를 다 정복한 사람입니다. 산이 높아도 도전하는 사람은 정복하듯이 아무리 전도하기 힘든 사람도 도전하면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의 산의 정복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성령님을 의지하고 계속해서 도전하면 언젠가는 정복하게 되어있습니다. 사 49:11에서 하나님은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라고 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산을 길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슥 4:6,7에 보면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산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앞에서는 평지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가 어렵고,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것 같아도 우리는 올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 40:9에서는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전도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고 명령합니다. 높은 산에 도전하는 것처럼 전도는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 40:9에 보면 전도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라”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합시다. 그러면 산을 정복하듯이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산이 평지가 되듯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 40:3,4에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전도하라 그리하면)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도전합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너무 망설이며 쭈뼛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교회의 사명인 전도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담대하게 순종합시다. 이미 운전면허를 딴 사람은 실제로 차를 몰아봐야 합니다. 운전법 책만 복습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그 사람은 운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미 전도 면허증이 주어졌습니다. 나가서 전합시다. 전도 대상자를 정해놓고 기도하십시오. 해피데이 기간 동안 지시대로만 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가 떨어지면 폭발하여 바위를 부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어도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롬 1:16에서 말씀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전도가 안 될 것 같아도 하면 됩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라서 견디지 못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큰 종이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모든 동민들의 이름을 다 적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금년에는 우리 모두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책임지고 전도합시다.\" 장로님들로부터 모든 교인들이 한 사람 이상 전도하기로 하고, 교인들이 모든 동민을 다 맡았는데,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호랑이로 소문난 윤 노인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무섭던지, 그분을 전도하겠다는 교인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상수라는 초등학생이 \"제가 윤 노인을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상수가 윤 노인을 책임지겠다고 하니,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네가 윤 노인을 전도하겠다고?\" \"예.\" 다음 날부터 상수는 학교 가기 전에 윤 노인의 집에 가서 외쳤습니다.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 \"뭐? 야소 믿으라고? 이놈의 자식이!\" 할아버지가 잡으러 오면 도망을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아이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상수는 무사히 학교로 도망을 갔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에 또 윤 노인의 집에 가서 대문을 열고 소리쳤습니다.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 \"이놈의 자식이!\" 다음 날 아침에 또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하면 할아버지가 따라오고, 또 학교로 도망을 가고, 또 오후에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라고 했습니다. 며칠째 계속 그러니 할아버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놈이 나를 놀린다.\'고 생각한 할아버지가 하루는 상수가 올 시간에 대문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상수가 대문을 열고 \"할배요, 예수….\"하는 순간에 그 무서운 윤 노인이 상수를 붙잡아 가지고 어른을 놀린다며 얼마나 사정없이 때렸는지 상수가 절뚝거리며 막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상수가 또 와서 소리쳤습니다.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 할아버지는 나가서 또 때리려 하다가 \'아니, 예수가 뭐기에 저 아이가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를 믿으라 하나? 예수가 뭐기에 그렇게 혼나 놓고도 또 오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자기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복음의 능력! 으로 전도대상자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11월 15일 해피데이가 기대됩니다. 세 사람을 작정합시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여 영적인 작업을 하고 선물을 들고 만나서 섬기고 영향을 주어서 데리고 옵시다. 영적고지를 점령합시다. 생각을 바꿉시다. 하나님을 믿고 자신감을 가집시다. 따라해 봅시다. “나는 존귀한 사람이다”, “나의 미래는 지금보다 100배 이상 좋아질 것이다.”, “나는 주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전도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 마11:28-30/ 신삼철 목사/ 천호교회/ 총동원전도주일설교/ 2005-07-03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 마11:28-30 시작하는 말 어떤 큰 부잣집에 생일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옷차림이 허름한 선비가 그 집에 들어가려 하자 문지기가 가로막았습니다. 선비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으나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선비는 돌아가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왔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들여보냈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음식을 먹고 있는데 선비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옷에다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옆 사람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선비는 대답했습니다. “이 집은 사람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옷을 초대했으니 옷도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소?”라고 대꾸했다고 합니다.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가려서 초청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나 초청을 하셨습니다. 잔칫집 비유를 보면은 그 지방의 유지 급이 되는 자들이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제히 사양을 했습니다. 주인이 이르기를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마22:9-10)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은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14:21)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내노라고 하는 자들은 물론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을 초청하셔서 은총과 축복을 주시기 위하심이셨습니다. 1.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오늘도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길을 가고 있습니다. 힘겨운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보천리길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외롭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네팔의 셰르파들은 몸집이 작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20, 30㎏의 여행 가방을 대여섯 개씩 짊어지고 히말라야를 오릅니다. 8000m 고도에 하늘의 성처럼 떠 있는 안나푸르나를 트레킹 할 때 셰르파들은 보이지 않고, 첩첩이 짐을 쌓아올린 큰 광주리가 혼자 저절로 움직이는 것같이 보인다고 합니다. 셰르파들이 거대한 짐을 옮기는 비법은 한가지라고 합니다. 자신의 속도대로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그들은 묵묵히 고된 노역을 하는 착한 소처럼 느릿느릿 걷습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라는 말은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말입니다. 인생은 오늘도 무거운 짐을 지고 우보천리길을 힘겹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현지인들이 한국인임을 알아차리면 “빨리 빨리”를 연발합니다. 적은 돈 내고 많은 것을 보려고 하니까 빨리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속사정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은 말임에는 분명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무거운 짐에서 빼어내 주시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사람의 무거운 짐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 인줄 너희가 알지라”(출 6:6-7)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지고 갈 짐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정에도 많습니다. 부모가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형제가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도 짐이 많습니다. 상급자가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급자가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동료가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구석구석에도 짐이 많습니다. 이웃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이든, 가난한 자이든, 병든 자이든, 누구든지 초청해 주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든, 가난한 자이든, 병든 자이든, 누구든지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에게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신분 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아무런 제재나 제한이 없는 초청으로 오늘도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로 나가는 자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죄를 범한 인생은 죄의 와중에서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계속 죄를 범함으로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참조, 롬 6:23). 이러한 인생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법으로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적인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와 그 형벌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아울러 영원한 안식을 약속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값없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고귀한 것이라 도저히 값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써만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그를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즉시 그의 평강과 위로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2.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 최장수 부부로 기록된 영국인 “퍼시 애로스미스(105)와 플로렌스(100)” 부부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였던 플로렌스는 1925년 6월1일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다섯 살 연상의 청년을 신랑으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8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이 이 부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해로할 수 있었습니까?” 남편의 대답은 “항상 아내에게 ‘여보, 사랑해요’라고 말했지요.” 아내의 대답. “전 남편에게 늘 ‘여보, 미안해요’라고 말했지요.” 이 부부는 평생 서로를 배려했습니다. 그리고 화를 품은 채 잠자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전날 아무리 다퉜더라도 아침이면 사랑으로 용서하고 새로운 날을 맞았습니다. 이 부부가 삶을 통해 실천한 성경말씀은 에베소서 4장 26∼27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멍에를 같이 메고 인생길을 걸어왔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사랑의 멍에입니다.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자기가 지신 멍에를 지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어떤 멍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여 기쁘게 짊어지신 멍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내 멍에는 쉽고”를 “내 멍에는 편하고”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내 멍에는 너희에게 알맞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중동에서 소가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것을 보면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고 합니다. 어미 소에게 멍에를 메우고 어린 소의 목덜미를 멍에 속에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어미 소가 열심히 멍에를 끌고 가면은 어린 소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 소는 쉽게 멍에를 메고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면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게 됩니다. 주님이 멍에를 대신 메어 주시기 때문에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메고 그와 함께 동행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회심 이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친 것도 그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명에를 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메는 멍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메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20). 신앙 생활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지만 예수님과 함께라면 오히려 훨씬 더 쉽습니다. 그리고 가볍습니다. 할 만합니다. 재미납니다. 즐겁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은혜가 됩니다. 열매가 맺어집니다. 3.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악마에게서 배울 것이 없습니다. 악마들이 모두 모여 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 결과 악마들은 인간을 붕괴시키는 특수무기를 만들기로 합의했습니다. 드디어 연구진은 3개의 특수 도끼를 완성했습니다. 우두머리는 도끼를 들어 보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세 도끼 중 하나만 사용해도 대부분의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다. 세 도끼를 모두 사용하면 넘어지지 않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면서 악마들은 낄낄거렸습니다. 그들이 만든 첫 번째 무기는 붉은 도끼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슴속에 움트는 믿음을 찍어내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파란 도끼였습니다. 이것은 마음속 희망을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까만 도끼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는 사랑의 줄기를 베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믿음 희망 사랑”을 잃으면 곧바로 절망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배우면 그의 인격과 성품,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까지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배운 바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배움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미국의 대부호 코넬리우스 밴더빌트(Vanderbilt)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신앙이며 존재 이유였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흑인 하녀가 그를 위해 찬송가를 불러주었습니다. 그 곡은 찬송가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밴더빌트는 조용히 찬송가 가사를 음미했습니다. 찬송가에는 예수의 속성이 아주 쉽게 표현돼 있었습니다. ‘우는 자의 위로, 없는 자의 풍성, 천한 자의 높음, 잡힌 자의 놓임, 죽을 자의 생명, 추 한 자의 정함, 죽은 자의 부활….’ 그때 밴더빌트의 입술이 조금씩 떨려왔습니다. 그리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과 지식, 명예를 포기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겸손한 약자가 됩니다. 그리고 쥐고 있던 것을 모두 놓는 순간 인생의 새로운 빛을 찾습니다. 신앙은 사망을 삼킵니다. 신앙은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참조, 마 28:19, 20). 끝맺는 말 사람들마다 “일생에 거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일에, 또 어떤 사람은 악한 일에 일생을 걸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1866년 영국의 한 대학에서 아프리카 탐험과 선교에 대해서 증언해 참석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가운데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하는 등 아프리카 탐험에 크게 기여했던 그는 이날 “가장 힘들었을 때 어떻게 했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언어가 안 통하는 사람들, 저를 불신하는 사람들, 심지어 적대적인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괴로웠을 때,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주님의 말씀에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 영원한 진리에 일생을 걸었습니다. 지금 저는 이 말씀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스스로 “삶의 방향은 바른 것인가?, 삶의 푯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지 말고 위를 향한 믿음 위에 서서 문제를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방향감각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의 위로가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넘치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를 믿으라!/ 행16:31/ 김용철 목사/ 총동원전도주일설교/ 2009-09-14
예수를 믿으라! 행16:31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김 용철 목사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올해로 저희 교회가 설립 된지 44주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여러분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여러모로 바쁘신대도 이렇게 많이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뵙게 되었으니 앞으로 저희 교회를 많이 사랑해주시고, 어디를 가시던지 저희 전주그리스도의 교회를 좋~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세상을 오래 살지는 않았습니다만 지금까지 55년을 살아오면서 가만히 보니까 이 세상에는 기쁜 일도 많지만 그러나 슬픈 일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뉴스를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지난 10월 3일 오후에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참으로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상주시민 운동장에 인기가수 현철씨며, 설운도씨, 태진아씨 등 유명한 가수들이 온다고 하니까 그 가수들을 보려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 왔던지, 그때 넘어져서 밟혀서 깔려 죽은 사람이 11명이고, 부상당한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밟혀서 11명이나 죽었다는 소식은 정말 슬프고 가슴 아픈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지난주 월요일인 10월 8일에도 슬픈 소식이 있었습니다. 파키스탄에 있는 캬슈미르라는 곳에서 딱 5초 동안 강진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지역 대부분의 건물들이 다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람이 3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합니다. 5초도 안 되는 순식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니 정말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어디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은 참으로 슬픈 소식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죽을 사람을 살렸다고 하는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쁘고 감동이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일본 열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까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일이 일본의 한 지하철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년전인 2001년1월26일 오후에 일본의 한 지하철역에서 사카모토 세이코(37)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서 그만 철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술에 완전히 취해서 일어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차가 막 역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은 사람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철도 건너편에서 한 청년이 쓰러져 있는 사카모토씨를 향해 철로로 뛰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사카모토씨를 붙잡고 일으켜서 끌어내려고 하는 순간 전차가 달려 들어와서 그 두 사람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술 취한 사람도 죽고, 그를 구하려고 했던 그 청년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일본인을 살리려고 철로로 뛰어든 청년은 일본인이 아니라, 바로 고려대학교 무역학과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 간 한국인 청년 이수현군이었습니다. 한 청년이 사람을 살리려고 달려오는 기차를 향하여 뛰어 들었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참으로 감동적인 소식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감동적인 소식은 언론을 통하여 순식간에 온 일본 열도에 퍼졌습니다. 그러자 일본 사람들은 이 의로운 한국 청년의 소식에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이수현군의 추모하는 홈페이지에는 일본에서만 1억2천 만개의 추모 글이 올라왔고, 한국에서도 4천 만개의 추모 글이 올라왔습니다. 아마 한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서 1억6천만개의 추모 글이 올라온 것은 세계적으로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사람을 살리려다가 죽은 이수현군의 소식은 정말 정말 큰 감동을 주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이수현군의 소식보다 더 감동적이고, 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바로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었던 본문 말씀입니다. 한번 다 같이 따라서 해 봅시다. (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시면 천국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 안 믿으면? 천국 못 간다”는 말입니다. 천국 못가면 어디를 갈까요? 지옥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을 간다”고 했으니 이 소식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요3:16절“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이 소식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것 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간다는 이 소식보다 기쁜 소식이 있다면 말해 보십시오. 저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저도 이 설교말씀을 준비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55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과연 나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이 있었는가?”를 자세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기쁜 소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기쁜 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년전인 1994년 7월8일 날 오후쯤에 우리교회 성도님 한 분이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김일성이가 죽었데요. 텔레비전 틀어보세요. 지금 텔레비전에 나와요”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는 그 소식이 왜 그렇게 기쁘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뭐요? 김일성이가 죽어요?”하면서 좋아서 텔레비전을 틀어 보았더니 정말 김일성이가 죽었다는 방송을 계속 내 보내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이가 들으면 화나겠지만 그때는 정말 김일성이가 죽었다는 소식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또 하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제가 남원군 덕과면 신양리에 있는 신양그리스도의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였으니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입니다. 지금 제가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했지만 그러나 저는 조금 구별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딸을 낳았으니 이제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1년11월2일 날이었습니다. 그 날 해가 지고 어둑어둑 해졌을 때 집사람이 배가 조금씩 아프다고 해서 택시를 불러타고 즉시 남원에 있는 부인의원이라고 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가서 방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서 진통이 온다고 해서 간호사한테 즉시 가서 집사람이 진통이 왔다고 말을 했더니 간호사가 와서 집사람을 출산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의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2-30분이나 지났을까? 했는데 간호사가 금방 싱글벙글하면서 저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아들입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듣고 기뻤을까요? 안 기뻤을까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들을 낳았다고 하니 정말 기뻤습니다. 딸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 때 집 사람이 또 딸을 낳았더라면 제가 상당히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딸을 둘이나 셋이나 넷을 낳고 아들 낳으신 분들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 제가 그 때 얼마나 기뻤던지 집사람이 아들 낳아서 방으로 돌아 왔을 때 당장 고깃집을 찾아 가서 쇠고기를 샀는데 몇 근 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2만원어치나 샀습니다. 아마 다섯 근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때 제가 시골교회에서 받은 사례비가 7만원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2만원어치나 쇠고기를 샀으니 보통 많이 산 것이 아닙니다. 그 때는 시골에서 목회를 했었기 때문에 쇠고기를 먹고 살 형편이 못되어서 저는 그 때 까지 제 손으로 쇠고기를 사서 먹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꼭 쇠고기까지 사서 먹어야 할 필요성도 없었습니다. 쇠고기는 부자들이나, 높은 사람들이나 사먹은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손으로 쇠고기를 얼마어치? 2만원! 그렇게 많이 사오자 집사람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그 때 왜 그렇게 쇠고기를 많이 사왔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 말 속에는 자기가 아들을 낳았다는 자랑스러운 생각이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왜 제가 쇠고기를 그렇게 많이 샀을까요? 아들 났기 때문입니다. 그 때 집 사람이 아들 안 낳았으면 제가 쇠고기를 샀을까요? 안 샀을까요? 그래도 샀을 것입니다. 두 근 정도 샀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이 소식은 김일성이가 죽었다는 소식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이 소식은 제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소식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기쁜 소식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 소식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을 간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당신이 어떻게 알아? 당신이 천국 갔다와 봤어?”라고 따져 물으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 소식을 듣고 믿어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심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하고, 논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연구해보니 예수님을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세상의 것들은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비행기가 어떻게 해서 하늘을 날라 가는지를 잘 모릅니다. 왜 핸드폰에서 소리가 나는지도 잘 모릅니다. 저는 집을 어떻게 짖는 지도 모르고,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어떻게 고칠 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그런 것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저는 1973년도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32년 동안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만 배우고 공부하고 연구했으며 가르쳐 왔습니다. 여러분! 30년 이상 한가지 만 배우고 연구했다면 그것 한 가지는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옷만 30년 동안 연구하면서 만들었다면 그 사람의 옷 실력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차 고치는 것만 30년 동안 계속했다면 그 사람의 차 고치는 실력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32년 동안 예수님을 배우고 연구했기 때문에 제가 예수님에 대해서 말 한 것은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연구해 보니 과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온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죄 용서함 받고 천국 가게 된다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을 가게 됩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영화 한 장면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영화는 산악구조대원이 동료를 구하려고 하는 장면입니다. 약 4분 정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영화보기---- 4분---- 여러분은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시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이 사람들은 미국의 록키 산에서 등산하다가 조난당한 자들을 구원하는 구조대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여자 대원이 밧줄을 타고 계곡을 건너 가다가 그만 몸을 밧줄에 매다는 고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것을 본 남자 대원이 그 여자를 구하려고 즉시 밧줄을 타고 다가가서 그 여자의 손을 꽉 붙잡고 살리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도 이 남자의 손을 잡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여인은 깊은 계곡 아래로 떨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손을 잡았지만 살지 못했습니다. 죽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아가시면서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이 나와 내 가정을 구원하는 것으로 알고 돈을 붙잡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강도 짖도 하고, 심지어는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돈은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절대로 여러분을 천국가게 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명예나 권세가 나를 구원해 줄줄 알고 명예나 권세를 붙들고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명예 권세가 좋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명예나 권세가 절대로 여러분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시고, 천국가게 해 주실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해 내 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천하 인간에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천지에 어떤 인간도 우리를 구원시킬 수가 없습니다. 공자님이 위대한 선생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공자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서 천국 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우리 인류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제가 또 영화 한 장면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 영화는 “곰”이라는 영화인데 어미 곰이 새끼 곰을 죽음 가운데서 구해주고, 사랑하는 장면입니다. 한 5분 정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영화- 베어 -- 5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영화를 보시면서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이 영화를 보여 드린 것은 어미 곰이 그 새끼 곰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만 어미 곰이 애기 곰을 핧아 주면서 사랑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눈물을 안 흘린 적이 없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이렇게 좋으신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저는 이 기쁜 소식 한 가지를 여러분에게 전해 드리기 위해서 오늘 이렇게 여러분을 모시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이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었다면 제가 그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을 것입니다. 제가 30년 넘게 찾아보고 연구해 보아도 이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이 어떤 것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오늘 이 시간 간절히 빌고 바라옵는 것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다 예수님을 믿으셔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이 다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미 곰이 새끼 곰을 보호하고 사랑하듯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여러분의 손자 손녀에 이르기까지 다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고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여러분을 다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나?/ 롬3:22-25/ 김홍도 목사/ 2005-10-16
왜 예수를 믿어야 하나? 롬3:22-25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중에 왜 바쁜 사람을 끌고 와서 예수님 믿게 하려고 하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거나 혹 귀찮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1. 사람은 “영생하는 존재”이므로 사람은 한 100년 살다가 죽으면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죽은 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에 William Jeunings Bryan이란 사람이 수십 년 전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했다가 3,000년 된 미라를 보게 되었는데 그 미라 속을 들여다보니까 곡식 단지가 있고 그 속에 3,000년 된 완두콩이 있었습니다. 만져보니까 쪼글쪼글하니 말라비틀어졌고 돌덩어리처럼 굳었습니다. 도무지 생명이 있어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굳어빠진 완두콩을 한 움큼 쥐어다 주머니에 넣고 가서 혹시 살아날까 하고 땅에 심었더니 한 달이 지나서 싹이 나고 잎이 나더니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후부터 Bryan 씨는 말하기를 “자 보시오. 일년생 식물도 3,000년 지난 뒤에도 땅에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 열매를 맺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100년 미만 살다 가 육신의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후에 부활이 있고 영원한 천국이 있고 영원한 지옥이 있는 법입니다. 모든 생물을 3차원으로 분류해본다면 첫째, 식물은 살긴 살았으나 몸만 있고 생각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오직 몸(body)만 있습니다. 둘째, 모든 식물 즉 개, 돼지, 원숭이는 몸만 있을 뿐 아니라 혼 즉 정신(mind)이 있습니다. 동물은 생각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개는 교통신호도 볼 줄 알고 어떤 짐승은 숫자도 계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셋째로 사람은 몸과 혼이 있을 뿐 아니라 영(Spirit)이 있습니다. 영이 있다는 것은 사람은 영생하는 존재(eternal being)임을 의미합니다. 쉽게 설명한다면 계란은 껍질과 흰자위와 노른자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듯이 사람은 몸과 혼과 영, 세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그 코에 생기 즉 영을 불어넣었습니다. 원숭이는 사람과 비슷해도 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숭이는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이지 부활이나 내세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고 기도도 못합니다. 그런데 엉터리같이 찰스 다윈이나 그의 추종자들은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엉터리 거짓말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으로 진화되는 과정에 있거나 사람이 되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본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 10월 14일(2005년) 국민일보에 난 기사를 보니까 영국의 Charles Dawson이란 사람이 1912년에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 형태를 발견했다고 했는데, 이것을 Piltdown 동네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Piltdown man이라고 이름을붙였고, 발견자의 이름까지 붙여서 Anthropus Dawson이라고 하고,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라고 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사기극이었습니다. 턱뼈, 이빨뼈를 적당히 갖다 맞춘 거짓말, 사기극이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병아리와 오리새끼를 갓 부화시켜서 호숫가에 갖다놓으면 병아리는 물을 봐도 아무 관심이 없는데 오리새끼는 물을 보자마자 헤엄을 치며 놉니다. 수영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오리는 수영하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물을 보자마자 헤엄치는데 병아리는 그 본능이 없기 때문에 물에 관심이 없고 헤엄도 못 칩니다. 사람에게는 이성의 본능이 있기 때문에 “어쩐지 나는 좋아”, “I love you” 하면서 결혼을 합니다. 이성의 본능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을 마시고 싶은 것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전도서 3장 11절에 “하나님이…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한 말씀대로 영생의 본능이 있는 것은 영생할 수 있고 내세의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두 세계가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고 영원히 고통 받는 불못, 지옥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어야만 죄 사함 받고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강권해서 여러분을 오시게 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살기도 바쁜데 죽은 다음의 일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며칠 동안 해외여행 가는 일도 몇 달 혹은 1년 전부터 준비를 하는데 영원한 내세를 준비 안 해서야 되겠습니까? 2. 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느냐 하면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은 꼬집어도 모르고 송곳으로 찔러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한 말씀대로 인간은 누구나 다 자범죄와 원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한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속”이란 말은 “값 주고 샀다”는 뜻입니다. 한 흑인 노예가 돈에 팔려 가족들과 헤어져 쇠사슬에 묶여 팔려가며 몹시 울며 슬퍼하는 데 한 부자가 그 광경을 보고 많은 돈을 지불하고 나서 자유의 증서를 만들어주면서 가족들과 함께 살라고 보내주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주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피를 다 쏟으시사 온 인류의 죄의 값을 치러주시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이 되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이제는 어떤 죄인도 예수님만 믿으면 그 즉시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습니다. “왜 피를 흘려 죽으셨는가” 하면,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 죄를 씻을 수가 있고, 예수님만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야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 착한 일 많이 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아무 종교나 믿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계란은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습니다. 무정란은 아무리 오래 품어도 병아리가 안 됩니다. 유정란은 그 속에 생명의 씨가 있기 때문에 병아리가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해야만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3. 예수 믿는 나라가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계를 다니며 여행을 해보시면 알 수 있듯이 교회가 많이 세워진 나라가 문명하고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돌을 깎아 제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놓고 복을 달라고 하는 나라나 테러를 감행해서 비행기를 폭파하고 자살폭탄을 터뜨려 수 백 명, 수 천 명을 서슴없이 죽이는 그런 종교를 믿는 나라가 복을 받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봅니까? 또 소가 하나님이라고 엎드려 절하는 것이 올바른 종교라고 보십니까? 참 하나님, 참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집을 설계하고 건축한 사람이 있는 것같이 해와 달과 수 억만 개의 별들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그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라는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을 대조해 보십시오. 미국과 소련을 대조해 보십시오. 예수님 잘 믿는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4. 죽음과 심판을 대비하기 위하여 여러분, 우리는 늙지 않을 것 같고 죽음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우리는 조만간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더디다면 다 죽어야 합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농부들이 농사를 지어서 가을이 되면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고 알곡은 창고에, 쭉정이는 불태우는 때가 있는 것 같이 죽음 후에 부활이 있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과 영원한 고통의 장소,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죽음 앞에는 학식도, 권력도, 많은 재물도 소용없습니다. 이 죽음을 미리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참 지혜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대통령도, 장군들도, 죄인들을 심문하고 정죄하던 검사 판사들도, 다 하나님의 크고 흰 보좌 앞에 서서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15절에 보면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도 늦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라도 고집부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죄가 많든 적든 다 평생 지은 죄를 드러내놓고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강도질만 하던 흉악한 죄인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며 예수님께 구원해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안 된다고 하시지 않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63빌딩에 가면 황금빛 나는 엘리베이터에 돈 한 푼 안 내고 올라타기만 하면 20층이든, 30층이든, 50층이든, 버튼만 누르면 실어다주듯이 예수님만 믿고 영접하면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 천국이요, 거절하고 안 믿으면 심판과 지옥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믿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이 시간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눈 감고 머리 숙이고 진실된 마음으로 다음 기도를 따라하십시오. 영원한 운명이 바뀌어집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왔사오니 받아주시고 구원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김홍도 목사(서울 금란교회)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기독교 신앙 ABC/ 행3:1-10/ 이무웅 목사/ 우이제일교회/ 2009-03-08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기독교 신앙 ABC 행3:1-10 요즘 학교마다 새학기를 맞이해서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학생들 교육을 철저히 시킴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 처음배우는 기초가 중요합니다. 운동을 할 때도 기본자세가 중요합니다. 특히 집을 지을 때에도 처음 기초공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그 건물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기초가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3주 동안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수십년 동안 신앙생활을 잘해왔고 교회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분들도 잘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며 내 신앙이 바른 기초 위에 서있는가를 확인 하실수있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앞으로 3주간에 걸쳐서 세 가지 질문을 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왜 하필이면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둘째, 왜 하고 많은 종교기관들 가운데 꼭 교회에 다녀야 할까요? 셋째,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할까요? 여러분은 앞으로 저와 함께 이와 같이 본질적인 질문들을 놓고 3주간동안 함께 씨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먼저 왜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과 수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왜 하필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마음속으로 한번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나의 자발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기독교 신자가 된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나고 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예수 믿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예수 잘 믿는 친구 따라 한두번 나오다 보니까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막연한 외로움과 쓸쓸함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다가 예수를 믿은 분들도 있습니다. 아마 사람마다 예수를 믿은 동기와 사연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를 믿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은 것은 참 잘한 일이며 최고의 결단임이 분명한데 도대체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우리는 그 가장 좋은 대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를 가진 사람과 예수를 못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은 예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를 못 가진 사람이 예수를 가진 사람을 만나함께 예수를 믿고 예수를 소유한 이야기 입니다. 먼저 예수를 가진 베드로와 요한의 행동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은 제 구시, 우리 시간으로 오후 세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살았던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아침 9시, 낯12시 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예수를 가진 사람은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규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지혜와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알지못하는 앉은뱅이도 매일 성전에는 올라가나 올라가는 목적이 달랐고 그에게는 기도하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이두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다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앉은 뱅이였습니다. 본문 2절을 보니까 “나면서 앉은뱅이 된자를 사람들이 메고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여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자는 아직 예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못 걷습니다. 40년동안 앉은뱅이 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간신히 살수있으니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걷고 움직이는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 문 앞에 올 때에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사람들이 그를 떠메고 왔습니다. 생계가 어려워 구걸을 해야만 간신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걸을수 없는 것도 서러운데 구걸을 해야만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바로 그 날도 이앉은뱅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기위해 성전문 곁에 나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남자는 예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형편을 예수 없는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보고 영적인 해석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육적인 해석이 아니라 영적인 해석입니다.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상징적인 해석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불행합니다. 나면서부터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떳떳하게 일하지 못하고 구걸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의 불행은 다름 아닌 의존성에 있는 것입니다. 의존성에 있다는 말은 스스로 독립할 수 없고 자유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어야 하는데 갈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먹고살아야 하는데 구걸을 해야 합니다. 철저히 얶메이고 의존해 있습니다. 예수가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인가에 의존합니다.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돈에 의지하고 권력에 의지하고 약물에 의지하고 술과 담배에 께임에 의지합니다. 여기에 의지해서 행복을 찾지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자유함이 없기 때문에 행복과 평안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힘센 사슬에 묶여 있어서 자유와 평안이 없습니다! 며칠전 의정부 가능동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34살먹은 간호조무사 이모라는 어머니가 11살먹은 아들과 9살먹은 딸을 목졸라 죽였습니다. 저녁때 TV를 보고있는 남매에게 엄마가 감기 예방주사를 놓아주겠다고 수면 유도제 앰풀주사를 놓아 잠들게한후 끈으로 목을졸라 자기가 낳은 자녀를 둘씩이나 자기손으로 죽인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요즘 강호순재판이 시작되었는데 가정과 자식이있는 몸인데 몇 달동안 여기 저기서 여자들을 유인하여 7명식이나 성폭행을 하고 엑쿠스에 여자들을 끌고다니며 갖은짖을 다하다가 완전 범죄를 위하여 살해하고 보험을 타기위하여 4번째 아내와 장모까지 불에 태워 죽이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강호순을 겉으로는보면 얼마나 그럴듯하게 잘생겼습니까? 그러나 그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같은 사람이였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는 제정신이 아니고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고있습니다.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 마약에 중독된 사람, 오락과 도박과 포르노에 중독된 사람,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자유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거기에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폭력도 날로 심해집니다. 자살율도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계층 간의 갈등과 반목도 커지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도 양극화 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유능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다고 해결할수가 있겠습니까? 더욱더 가혹한 형법을 만든다고 근절될 수 있겠습니까? 더 많은 경찰력을 확보한다고 이런 문제가 사라질수 있겠습니까? 더 많은 돈을 쏟아 붓는다고 사회가 달라질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영적인 문제이고 죄의 문제들입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일으키는 영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에(엡 2: 2), 반드시 그 영적인 문제들부터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에 나면서부터 못 걷는 앉은뱅이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오늘 하루도 먹고살려고 구걸을 하기 위하여 성전 문 곁에 앉아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그 문의 이름이 미문(美門)입니다. ‘아름다운 문’입니다. 성전 문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데 그 옆에 너무도 불행한 사람이 날마다 앉아 있습니다. 이 보다 더 오늘의 교회와 예수 없는 이들의 형편을 적나라하게 대조해주는 그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도 아름답기 짝이 없는 교회 건물 주변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구하는 예수 없는 이들이 즐비하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3절에 보니까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합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생계를 위해서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아직 예수 없이 사는 이 앉은뱅이를 향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4-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여기서 중요한 말이 ‘주목했다’는 말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무심히 쳐다봤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목하여 보았다는 말은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가르치는 말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지하도나 길가에서 구걸하는 분들이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스쳐지나갑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예수 없는 앉은뱅이의 영혼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구걸하는 소리를 듣되 건성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힘들게 살고있는 예수가 없는 그의 영혼을 주목해서 본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을 많이 가져도 예수가 없는 불쌍한 빈곤한 영혼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기와 명예를 가지고 화려하게 살아도 외양과는 달리 그 내면은 형편없이 빈곤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수 없는 모든 이들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여기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참으로 필요한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인간에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보라!”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듣고 앉은뱅이는 무엇인가를 얻을까 해서 빤히 올려보았습니다. 은이나 금을 구한 것입니다. 당장 하루하루 살아야 하기에 앉은뱅이는 은과 금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이 때 베드로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은과 금보다 훨씬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남자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은과 금만 얻는 것으로 그쳤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냥 하루 먹고 하루 사는 양식의 문제만 해결될 뿐 그의 영혼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 이튿날 또 다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미문 곁으로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을 것입니다. 매일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삶을 버릴 수가 없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불행한 삶을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과 금으로는 그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혹시 은과 금으로 몇 주일, 몇 달 동안 미문 곁에 나오지 않고 잠깐 편안히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돈 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은과 금으로는 앉은뱅이를 진실로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유케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은과 금이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과 금은 우리로 하여금 조금 더 편하게 살수는 있습니다. 편리는 주지만 평안은 주지 못합니다. 부함은 주지만 행복은 주지 못합니다. 은과 금이 앉은뱅이를 잠시 동안 부자가 되게 만들고 편하게 할 수는 있어도 기뻐 뛰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은과 금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은과 금으로 천국을 갈수 없습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자유함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을 갈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가진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없습니다. 부자가 아닙니다. 명예와 권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돈이나 권력으로 비교도 할 수 없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이 없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있기에 행복했습니다. 은과 금은 잠시 동안 앉은뱅이를 편하게 만들 수 있지만 또 다시 그는 비참한 자리에 빠지게됩니다. 은과 금으로 자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걷고 기뻐 뛰며 찬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지 은과 금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 없는 사람을 사랑의 손길로 예수의 이름으로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얻게 되었고 8절 말씀을 보니까 그가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갑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그가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걸을 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 다시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설 수 있고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찾아올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구걸하기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할 성전입니다! 만일 그가 은과 금을 얻었더라면 성전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구걸의 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얻은 뒤 성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성전은 비로소 그에게 세워진 본래의 목적을 찾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이제 그가 찾는 성전 미문은 이름 그대로 진짜 아름다운 문이 되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그의 육신과 영혼을 다 고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인치유의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육신과 영혼을 다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시 핵심으로 돌아가서 왜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은과 금으로 얻을수 없는 것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은과 금이 아닙니다. 세상에 길잃고 헤매는 영혼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일까요? 은과 금이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오늘 인류가 당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며 결정적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공허한 마음이 채워집니다. 우리 영혼의 어두운 부분이 밝아집니다. 소망이 없던 인생이 희망이 생겨집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고후 5: 17). 세상 사람들은 은과 금을 보화로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과 금을 얻기 위하여 동분서주하게 뛰어 다닙니다. 아침일찍 일어나 밤이 늦도록 은과 금을 붙들기 위하여 갖은 노력과 수고를 합니다. 물론 사람이 이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은과 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은과 금이 사람을 살리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은과 금속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이제일교회 성도여러분! 왜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집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안에 예수를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은과 금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이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은과 금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천국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은과 금으로는 천국을 살 수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는 살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은과 금을 앉은뱅이에게 주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은과 금보다 훨씬 더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얻었을 때 그의 인생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걸을수 있었습니다.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일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구걸하러 찾아왔던 성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기 위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남을 의지하며 어둡게 살았던 불행의 그림자를 청산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우이제일교회 성도여러분!,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은과 금이 가져다 줄 수 없는, 훨씬 더 귀한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늘의 보화요 인간의 모든 행복이 담겨진 하나님의 신령한 비밀 창고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고 내안에 소유하셔서 하늘에 기업을 내것으로 삼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인생을 행복하게 사시는 우이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요3:16/ 총력전도주일설교/ 2003-05-01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요3:16 지금 우리 교회는 5월 26일 주일을 총력전도 주일로 정해두고 구역 팀 전도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팀전도, 구역전도를 더 뜨겁게 강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오늘부터 가장 기쁘고 좋은 일이라 주제로 5월 26일 주일까지 5번에 걸쳐서 연속 시리즈 설교를 할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다음 주일은 두 번째로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세 번째 주일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네 번째는 믿는자의 책임에 대해서 마지막 5울 26일 주일에는 하나님의 사랑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우리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이라면 약간의 어려움이 있어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예수를 꼭 믿어야 할 필요성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이미 믿는 우리 자신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논제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하셨습니다. 왜 예수를 꼭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 좋은 겁니까?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분명하게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대답입니다. 멸망치 않고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멸망치 않고 했으니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당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어찌하여 우리 인생들이 무엇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까? 일곱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동시에 이렇게 멸망당하는 일곱가지 이유는, 또한 그 멸망당하는 일곱가지 이유가 동시에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멸망당하는 이유는 왜 인생들이 비참하고 불행해지는가? 첫 번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예외없이 이 세상에 나면서부터 지은죄들이 있습니다. 요즈음 대통령 세 아들이 삼홍이다 흑살이다 조롱을 당하면서 부모를 욕되게 하고 나라를 요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죄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별의별 방법을 동원합니다. 또 어떤이는 해외로 도주합니다. 그런다고 죄가 감춰지거나 없어지는 겁니까? 아닙니다. 내가 지은 죄는 그림자처럼 끝까지 어디든지 나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는대로 거두는 법칙대로 반드시 죄값을 받게 됩니다. 저주와 불행과 죄책이 따릅니다. 또 이세상에서는 어찌어찌 죄를 감추고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죄를 반드시 백일하에 드러내놓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12절에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었으니 죄도 같이 묻어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죽은자들까지 다 일으켜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그 죄를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요사이 최아무개라는 사람이 자기가 만난 사람하고 대화한 사실을 비밀히 다 녹음을 해뒀다, 그래서 그 녹취록이 있니 없니, 또 그 녹취록 몇 개를 압수했다, 또 분석중이다 이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녹취록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는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내가 세상에 와서 평생 지은 온갖 죄가 다 녹취가 되어있고 거기까지는 촬영까지 되어있는데 다 공개가 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로 너 이런죄가 있지? 그러니까 심판받는다하면 그걸로 끝나겠지만, 그런다고 인정되고 끝나겠지만 모든 사람앞에, 내가 아는 사람, 내가 평생 살았던 가족들, 친구들 앞에 내 모든 죄가 공개되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런 죄 때문에 이세상에서도 불행과 멸망을 당하고 죽어서도 죽으면 내 죄를 무덤으로 가지고 가서 묻어버리는게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심판을 받고 지옥의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멸망당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들립니까? 내 마음 때문에 우리는 비참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이 어떠해서요? 내 마음이 어떤단 말입니까? 학자들 중에는 사람의 마음이 선하냐 악하냐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그런 학자들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극히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말씀합니다. 간단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죄를 지었냐, 안지었냐? 이게 대답이에요. 모두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가되었든지 다 죄를 지었습니다. 환경이 나빠서요? 교육을 못받아섭니까? 아닙니다. 환경이 좋은 사람들 보세요. 죄 많이 지어요. 대통령 아들이 무슨 환경이 나쁩니까?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더 교묘하게 죄가 아닌 것처럼 더 위장하면서 더 큰 죄를 짓습니다. 왜 그러나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문제에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 19절에 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뭐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귀를 기울여보세요. 도대체 마음에서 뭐가 나오겠어요? 말씀하시기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부패하고 오염된 마음을 원죄라고 하고 육신이라고 합니다. 이와같이 우리 마음 자체가 본 바탕이, 이 근본됨이 부패되고 오염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 인간의 노력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곧 죄를 나는 안 지었어 하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에도 우리는 죄를 지었고 또 오늘도, 내일도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불행해지고 비참해지고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입니다. 왜 우리는 불행할까요. 왜 우리에게 비참함이 있을까요? 우리 인생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 가운데는 남보다 강한자가 있습니다. 남달리 유능한 자들이 있어서 성공했다 자부하고 또 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 중에서 일국의 정상에 올랐으면, 대통령까지 되었으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유능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대통형 된자들이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합니까? 왜 청와대에 앉아있는 저분이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까? 대통령 된 사람도 약하기 때문에요, 한계가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 인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내 속에 든 내 자신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게 인생이에요. 그러니 저양반 속이 오죽하겠습니까? 힘쓰고 애쓰고 참고 울어도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너나없이 실패를 하고 좌절을 당하고 깨진 그릇들이요,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 인생들이 멸망을 당하는 이유가 예기치 못한 낭패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기치 못한, 생각도 못했던 이런 일들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잘해볼려고 노력을 해도 예기하지 못한 어려운 일들이 닥쳐옵니다. 불가항력적인 일들이 와요, 우리가 지난날 IMF라고 하는 국가적인 폭풍앞에서 얼마나 우리 동포들의 수많은 가정이,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습니까. 이것은 예기치 못한 재난입니다. 아직도 그 쓰라린 후유증이 남아있습니다. 누구든지 순탄하게 살고싶고 평탄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싶으신 것입니다. Sweet Home을 이루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높고 거친 바다에 떠있는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습니다. 갖가지 고통스러운 일들이 불어닥칩니다. 질병으로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자의 슬픔이 옵니다. 장애물이 생깁니다. 유혹이 들어옵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중에 고통을 당합니다. 사고가 당합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을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깨지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갈라지기도 합니다. 사업이 실패를 하고, 신체적으로 장애를 당하고,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아서 장애자가 됩니다. 진로가 막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없이 원망합니다. 분노합니다. 낙심합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은 자포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어버리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들의 현실입니다. 다섯 번째로 우리를 멸망당하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불안. 뭐 유식한 말이 생각나는데 케에르케고르는 두려움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말밖에 몰라요.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 우리 가정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의 사업은, 이렇게 벌여놨는데 어찌될까? 내 직장은 어찌될까? 너무 불안합니다. 우리는 좋은 꿈을 또 높고 아름다운 비젼을 품으라 합니다. 또 그래야 하지요. 반드시 행복하게 살리라. 나도 한번 잘 살아보리라. 꿈을 가져봅니다. 그런데 왜 한쪽에는 자신이 없는 겁니까? 안될것만 같고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 가슴 한구석에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 공포,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저의 가슴에도 있어요. 히브리 2장 15절에 죽기를 무서워 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라고 했습니다. 다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는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다하는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 이 생명 자체가, 우리 영이 말이죠. 하나님을 떠난 후로부터는 무서워하는거에요. 욥이 이렇게 장탄식을 합니다. 욥기 3장 25절에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왔구나하고 탄식을 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그냥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하는 것이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서운 하는 것, 불안해 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이것을 장난스럽게 두려움의 징크스라고 합니다. 한번 실패하면 또 실패할 것 같은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여섯 번째로 멸망의 이유는 죽음입니다. 죽음. 사람은 너나없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한 미래 사건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들에게는 너무도 큰 슬픔입니다. 종말이에요. 모든 것이 스톱. 멈추는 순간입니다. 숨도 멈추고. 무엇보다도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가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더 절망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은요, 다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없다는 말입니다. 죽음이 오면. 죽기 전에야 또다시 사랑할 수 있기도 하지만 죽음 앞에는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입니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이 무서운 절망. 죽음이 너와 나를 영원히 갈라놓는구나. 참으로 죽음은 슬픔이요. 절망입니다. 그래서 죽음 자체는 우리에게 멸망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우리 인생들이 아름답게 살아야 되고, 행복하게 살아야 될 우리 인생들이 왜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해지는고. 왜 우리들은 이렇게 울어야 하는가? 마지막 가장 큰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마귀와 귀신들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그럴지 모릅니다. 마귀가 어디 있고, 귀신이 어디있어? 아, 여러분 도둑놈이 나 도둑질하러 가요하고 옵디까? 사기꾼이 나 사기꾼이요하고 푯말들고 옵디까? 나쁜 것은, 어두움은 다 자기를 감추는 것입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자기를 감춥니다. 우리 없어. 그러고 들어옵니다. 왜 세상이 지능은 발달하고, 지식은 높아지고 문명은 최첨단을 달리다고 하는 세상이 갈수록 흉폭해지고, 더러워지고, 요란해지는 것입니까? 왜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짐승화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 배후에 마귀와 귀신들이 역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데 이 도적이 왜 내게 오는고 하니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다는 것입니다. 내게 말입니다. 내 가정에. 그래서 마태복음 12장 43절에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 귀신들이 돌아다니는데 빈집에 들어간답니다. 귀신의 눈으로 볼 때 빈집이 있어요. 하나님이 없는 집. 어느 집에 귀신 하나가 들어갔는데 좀 공간이 넓어, 집이 좀 큰집인가보죠. 그러니까 이놈의 귀신이 나가서 저처럼 떠돌아 다니는 귀신 일곱을 데려와서, 여덟이 들어갔으니, 이 사람이 이 집이 어떻게 되었겠느냐? 더욱 심하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그런 이상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막 거칠어 질때가 있습니다. 또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아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려고 할때가 있어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때가 있어요. 어찌하여 우리 가정이 어수선한겁니까? 왜 사랑하는 가족끼리 대화가 꽉 막힌 것입니까? 그 배후에는 귀신들이 우리를 괴롭힐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와같은 우리 인생들을 참으로 소중한 인생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될 우리 인생들을 멸망하게 하는 일곱가지 이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실제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입니다. 내 가정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멸망, 우리를 멸망시키는 이 일곱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 앞에 정직해야 됩니다. 나는 그런 것 몰라! 그렇게 사세요. 그렇게 사시라고요. 그러나 불행해지고 비참해지는 것은 어찌할렵니까? 이제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내 가정을 행복하게 지켜야 할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일곱가지의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예수님을 전심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길밖에 없습니다.
왜 총동원 예배를 드리는가?/ 요4:27-36/ 총동원전도주일설교
왜 총동원 예배를 드리는가?/요4:27-36 2003-06-06 21:04:24 read : 170 72세 된 케이 오바라 라는 할머니에게는 30년간을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지내고 있는 딸이 있다. 16살 때 당뇨 합병증으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이후 30년을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딸의 병상을 지켜왔다. 매일 이유식에다 달걀, 과즙, 우유를 섞어 소화가 쉬운 유동식을 만들어 튜브를 통해 대여섯 번씩 나눠 먹이고, 등창이 생기지 않도록 마른 자리를 깔아주고, 두세 시간씩 피를 뽑아 혈당량을 맞추고 인슐린 주사를 놓아주었다. 잠자는 시간은 많아야 하루 두 시간 정도였다. 그러기를 무려 30년을 살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칭찬하면 그녀는 늘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딸이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엄마, 나 혼자 두지 마세요\' 라고 했을 때, 나는 \'그래, 내가 늘 네 곁에 있으마\' 라고 약속했죠\" 어머니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일은 어머니가 딸의 곁에 있는 것이고/ 딸이 어머니 곁에 있는 것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른다 할지라도 어머니가 딸의 곁에 있고 또 딸이 어머니 곁에 있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일이었던 것이다. 설령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다른 집 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의 아이라 할지라도 그가 살아 있고 나와 함께 있으며 즐거이 뛰어 놀고 있다면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은 바로 \'생명\'이다. 살아 있다는 것, 즐거워한다는 것, 노래한다는 것, 사랑을 나눈다는 것, 행복을 느낀다는 것. 이것이 생명의 가치요 보람이요 축복이다. 주님은 이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셨다. 천하의 으뜸으로 여기셨다. 우주의 존귀로 여기셨다. 인간에 대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함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죄로 말미암아 귀한 생명을 잃고 있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즐거워하고 노래하며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찬양할 이유가 있고 감사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날 사랑하셔서 \'우주의 존귀\'로 부르셨으며 또한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는 사실이다. 옛날 유대 랍비들은 \'왜 하나님은 맨처음 한꺼번에 많은 인간을 만드시지 않고 오직 한 인간으로 인류를 시작하셨을까\'라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찾아낸 답은 이렇다. \"모든 인류는 오직 한 조상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느 인간이 어느 인간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똑같이 고귀한 존재요 존중받아야 할 존재요 가치 있는 존재이다. 남녀노소, 지위고하, 인종과 국경, 빈부와 이념 어떤 차별도 없이 똑같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왜? 모든 인간은 똑같은 조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한 사람이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저도 함께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똑같은 조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서로 기쁨도 함께 하고 즐거움도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행복은 나 혼자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인류의 행복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인종과 국경, 종교를 넘어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이 되어야 하고 나의 평화가 너의 평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와 인류는 하나다. 왜? 똑같은 조상을 갖고 있기 때문! 그러므로 내가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그것은 전 인류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반면, 내가 한 인간을 구하는 것은 그것은 전 인류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결국 전 인류를 죽이고 살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우리는 작금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장 파괴적인 행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가? 참으로 참담한 일이다. 범인이 누구고, 배후가 누구며, 어떤 이유에서 저질렀으며, 무슨 목적으로 했으냐, 하는 것은 둘째다. 이 지구촌에 무서운 심판을 초래하는 한 가지 죄악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생명\'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조상으로 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또 바꿀 수도 없는 그토록 귀하고 소중한 생명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고 파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이 싹을 내고, 성장하고, 꽃이 피고, 사랑과 평화의 열매, 기쁨과 행복의 열매를 거두는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자들이 이루는 나라이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나라이고, 바라보는 나라이고, 사모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만이 이룰 수 없는 나라이다. 아니, 우리만으로 채워질 수 없는 나라이다. 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또 다른 사람들의 생명 또한 예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나의 생명이 귀하듯 저들의 생명 또한 귀하기 때문이다. 내가 천국의 소망을 누리듯 저들도 똑같이 그 소망을 누려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많이 채워진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 많이 비어 있다. 빈자리가 너무 많이 있다. 채워져야 할 귀한 생명들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채워져야 할 귀한 생명들이 채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출근길 버스나 전철은 사람들로 빈틈없이 차고 넘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 많이 비어 있다. 여기에 우리가 총동원 전도주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다. 주님은 우리가 총 동원 전도주일을 지키기 원하시는 것이다. 왜? 채워져야 할 귀한 생명들이 아직도 많이 있기 때문! 1.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만나야 한다. 본문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하나님을 소개할 수 있다. 여자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를 소개했던 것이다. 전도는 주님에 대해 알고 보고 들은 것을 남에게 말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주님을 만난 사람은 생생하게 남에게 말할 수 있다. 옛날에 만난 얘기를 오늘 해서는 재미가 없다. 오늘 내가 주님과 만나야 한다. 전도자의 삶의 기본은 매일 매일 주님과 만나는 것이다. 아침 기도로 만나고, 매일 QT로 만나고, 성경 읽기로 만나고, 믿음으로 사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만나야 한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을 주님을 만나보고 사는 삶으로 키워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히 주님을 남에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삶 속에서 흘러나야 하는 것이다. 요 1:41절.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안드레는 어제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다음날 안드레는 무엇을 했는가? 형제 시몬에게 주님을 전했다는 것이다. 진실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 주님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막 5:19절.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주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았다. 그때 그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이었는가? 집으로 돌아가 친속들에게 주님을 전하는 것이었다.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만난 사람은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본 사람은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들은 사람은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 이발사는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인 것을 알고, 그것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궁리 끝에 어느 비오는 날, 대나무 밑에 가서 혼자 소리쳤다는 것이다. \'임금님이 귀는 당나귀 귀!\' 사도 바울의 심정이 바로 이런 심정이다. 그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가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그는 주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하고 변화된 삶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려던 것은 \'그가 보고 들은 것\'(행22:15) 이라는 것이다. 오늘 내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오늘 내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한다. 오늘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의 생애를 통해서 단 한 사람에게라도 주님을 전해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자문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참으로 내가 주님을 만났는가?\' 만났다면 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내가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2. 형제 자매와 만나야 한다. 마 9: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았더니..\" 행 17:17절.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예수님은 사람을 만났다. 세리를 만났고 죄인들을 만났고 병자들을 만났고 귀신들린 자를 만났고 부자와 관원을 만났다. 신분적으로 낮은 사람들을 만났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났고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사람들을 만났다. 만나야 사건이 생긴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모든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만나야 그들을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천국의 길로 초대할 수 있다. 바울도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 나갔다. 때로는 회당으로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저자 거리로 나가기도 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회당으로 나갔을 뿐만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도 그는 저자 거리로 나갔다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 다짐을 하고, 기도를 하고, 또 홍보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도 대상자와 만나는 것이다. 만나서 얘기를 하고 소개를 하고 초청을 하고 주님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는 아는 형제 자매를 만나야 한다. 친구, 친척, 동료, 이웃 등 내가 아는 형제 자매가 있다. 먼저 그들을 만나야 한다. 둘째는 교회 나오다가 안 나오시는 분을 만나야 한다. 특별한 사정과 형편 때문에 지금은 안나오시는 분들이 있다. 1년이 넘게 안나오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더 오래 동안 안나오시는 분들도 있다. 그들을 만나야 한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던 분들이다. 우리와 성도의 교제를 나누던 분들이다. 더불어 교회를 섬기던 자들이다. 나오다가 안나오는데는 나름의 사정과 형편이 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신령한 집을 짓는 소중한 재료들이다. 벧전 2:5절 말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고 했다. 우리만이 신령한 집을 짓는 산 돌이 아니라 그들도 똑같은 산 돌이라는 것. 저와 여러분의 돌에다가 그들의 돌이 함께 쌓여져야 하고 올려져야 한다는 것. 그들의 돌이 우리의 돌과 함께 쌓여지지 않고 올려지지 않고 있다면, 그들의 돌이 있던 곳에는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리가 비어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이 집에서 주님의 신령한 은혜와 영적 부요함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나름의 이유로 인해서 우리로부터 떨어져 혼자 밖에 나가 있는 돌을 찾아야 한다. 그리도 그 돌이 다시금 우리와 함께 쌓여지고 올려지도록 해야 한다. 이 집은 우리만의 집이 아니다. 우리만이 기뻐하고 복을 누리는 집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복을 누려야 할 집이기 때문이다. 주위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구멍이 없는가? 비어 있는 자리가 없는가? 그 자리에 있던 소중한 주인공들을 찾아야 한다. 구멍을 메워야 한다. 자리를 채워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총동원 전도주일을 지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형제 자매들을 찾아 채워야 할 자리를 채움으로써 주님의 신령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교회를 쌓아 올리시기를 바란다! 셋째는 예수님을 모르는 형제 자매, 믿지 않는 형제 자매를 만나야 한다. 30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믿지 않는 형제 자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삶이 변한 것처럼, 믿지 않던 형제 자매가 예수님을 만나 축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어느 분이 택시를 탔다. 10분쯤 갔을까 \'아저씨, 성함이 구제회씨세요?\' \'아주 귀한 성함이시군요. 구제회, 안 잊어버리겠네요\' 괜찮으시다면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드려도 될까요? 제 친구가 전도사로 있는데 그 친구 이름은 \'지도자예요\' \'그런데 혹시 교회는 나가십니까?\' \'아니요\' \'아, 네 그러시군요\' 1-2분쯤 지났을까 \'아저씨, 아까 교회 나가신다고 하셨나요?\' \'아니요\' \'아, 네 나가시면 좋겠네요\' 그 분은 또 다른 얘기를 계속했고,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참, 그런데 교회는 언제쯤 나가실건가요?\' 중요한 것은 관심이다. 영혼에 대한 관심, 천하보다도 더 귀한 한 영혼에 대한 관심, 그가 명예를 가졌는지, 권세를 가졌는지에 대한 관심보다 그가 영혼의 문제를 해결했는지,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기쁨과 감격을 소유했는지에 대한 관심이다. 관심 있다면 할 수 있다. 만날 수 있다. 전할 수 있다! ## 2001년 10월 7일은 상동교회 총동원 전도주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총동원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귀한 생명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고귀한 생명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라이기에 우리만이 이룩할 수 없는 곳이다. 채워져야 할 생명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주님은 이 귀한 생명들을 금번 기회를 통하여 총동원하기를 원하신다. 아는 형제 자매들을 총동원하십시오. 교회 나오다가 안나오시는 분들을 총동원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지 않는 형제 자매를 총동원하십시오.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요3:16/ 2001-09-11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요3:16 인류가 이 지구상에 삶을 시작한 이래 인간들이 노력하는 삶의 방향은 살기좋은 사회, 질병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으로서 그 최종 목표를 복지사회 건설에 두고 노력하여 왔다고 생각합니다. 1차 산업인 농업, 임업, 수산업이라든지 2차 산업인 공업 3차 산업인 서비스 산업이 지향하는 바는 다 살기좋은 사회, 복지사회 건설에 있습니다. 더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발달하기 시작한 첨단 과학이나 이로 인하여 가속화된 멀티 미디어 세계 구현은 멀지 않아 복지사회 속에 가져다 줄 쾌적한 주거환경으로 예상되어 인류의 미래는 점점 유토피아적 세계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손을 대지 않고 말만 하여도 움직이는 로봇 말만 하여도 통화 가능한 전화기 손발로 조작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움직이는 자동차 등... 정말 현대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인류를 편안하게 그리고 편리한 삶으로 인도하여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점점 좋아져만 가는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여 볼 때 이러한 오늘의 현상이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른지는 몰라도 속으로 볼 때는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다. 이 그렇지 않다는 말은 과학과 문명의 발전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자유로와졌고 편리하여 진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에게 그것들이 참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가에 대하여서는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처럼 그동안 쌓아올린 인간의 놀라운 지식의 축적을 가지고 계속해서 인간의 유토피아적 세계 구현만을 위하여 연구하고 실현시켜 나아간다면 더욱 살기좋은 세상이 오게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하여 최고의 문명시설을 가지고 살고 최고의 복지혜택을 누리며 살게되는 그날이 오게된다고 할지라도 이 인간세계에는 정말 행복한 사회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고 오히려 계속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되어짐에 따라 이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문제이길래 그렇게 노력하여 이룩하게될 최고의 과학문명과 최고의 복지사회 속에서도 인간의 행복한 삶의 구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탐욕, 교만, 시기, 질투, 미움, 비방, 살인, 간음 등 부패되고 거짓된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한마디로 '죄'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 죄의 문제 즉 욕심과 교만과 질투와 미움 등 끊임없이 인간 내면세계에서 솟아나는 이러한 것들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외부를 과학으로, 복지로, 의학으로, 경제로 단장한다 할지라도 참다운 삶, 참다운 행복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중심 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참다운 행복이 조금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죄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을 먼저 분명하게 정의하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죄라고 정의합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하기를 남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죄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죄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탐욕, 교만, 시기, 질투, 비방, 살인, 간음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다 죄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면 그것들은 다 죄라고 말하기 보다 죄의 결과라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죄란 무엇입니까? 죄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 한 재미있고도 중요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태양계에서 지구와 가장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화성에 지구에서 발사한 한 우주선이 1997년 7월 4일 도착하였습니다. 화성에는 과연 생명체가 있을까 하는 주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궁금했으므로 이 화성탐사 우주선에는 많은 사람이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 항공우주국인 NASA에서는 이 우주선을 위하여 10여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안전착륙을 위하여 에어백을 사용하였고 지상에서 가상실험까지 완벽하게 마친 후에 1996년 12월 4일 우주선은 발사되었습니다. 이 우주선은 만 7개월 동안 우주를 항해하면서 화성을 향해 달렸는데 7개월 동안 얼마나 빨리 달렸는가하면 대기권을 벗어난 지점에서 부터는 시속 2만 5천 킬로미터로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시속 2만 5천 킬로미터에 대하여 감을 잘 잡지못하므로 비유를 들어볼 것 같으면 서울에서 영국 런던까지 보잉 747 비행기로 약 12시간 걸리는데 이 거리를 1시간도 채 안되는 시간에 도착하게되는 속도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지구의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이므로 시속 2만 5천 킬로미터로 달린다면 지구 둘레를 완전히 한바퀴 도는데 두시간도 안걸리는 속도라는 것으로서 이러한 속도로 만 7개월간을 달려서 예정된 시각, 예상한 장소에 정확히 도착하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은 인류과학의 대단한 발전의 결과였습니다. 이렇게하여 화성에 도착한 우주선의 이름은 패스 화인더(PATH FINDER)였으며 특히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소형 로버(Rober) 소저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형 로버(Rober) 소저너의 임무는 7일 동안 화성의 토양과 암석의 성분을 분석하고 그 데이터를 지구로 전송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저너가 어느날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여러분도 이 뉴스를 당시에 들으신 분도 계실줄 압니다만 그래서 지상 관제탑에서는 당황하고 속이 타게 되었습니다. 당시 소저너 속에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주 컴퓨터가 고장이 나더라도 보조 컴퓨터가 몇대 더 있어서 자동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도 점검하고 스스로 고칠 수도 있는 최고의 컴퓨터 시스템을 갖추었지만 그러나 그래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상 관제탑에서는 모두들 긴장하고 있었으며 모두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무리 애를써도 누구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은 점점 흘러만 가고 소저너는 고쳐지지 않다가 마침내 그 소저너를 고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소저너을 설계하고 만든 팀에서 처음부터 점검하여 다시 작동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로버(Rober) 소저너 이야기는 실제로 역사상에 있었던 실화이면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점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처음에는 멋있게 설계되었고 쓸모있게 만들어졌는데 이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고장났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다른 여타동물과 차원을 달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물로 주신 선악과,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이후 계속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인간 스스로 인생의 길을 걸으려고 애쓰면서 고장난 부분을 고치려고 아무리 애써도 인간들은 고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로버(Rober) 소저너처럼 자체를 진단하는 기능이 있기에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여지가 인간에게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치명상을 입었기 때문에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든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인간은 로봇하고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장류니 사고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도 나왔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다 알 것 같지만...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인간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주장과 학설이 있습니다마는 다 학설들일 뿐이며 '인간은 이것이다 이러한 존재다'라고 하면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단언한 사람은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단호하게 '인간은 이것이다, 이러한 존재다' 라고 말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우주를 만들었고 내가 인간도 만들었으며 비록 죄를 지어 타락하기는 하였어도 그래도 인간을 사랑하며 타락한 인간들일찌라도 그들에게 소망을 갖고 있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흙으로 만든 존재이며 너희 코에 나의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된 존재다. 뿐만 아니라 너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되 우리 인간의 머리털의 갯수도 다 셀 수 있을만큼 인간을 잘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학자가 겁나는 인간의 머리털까지도 셀 수 있을 만큼 인간을 정확히 잘 안다겁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은.... 사실 내가 나를 정확히 모르는 존재이며 너도 나를 정확히 모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결혼하여 오래살면 상대방에 대하여 다 파악하게 되고, 다 알 것 같지만 70, 80, 90까지 사신 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고 기르기에 부모는 자식을 다 알 것 같지만 부모도 자식에 대하여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어느 과학자도 자기의 이론이 절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며 어떠한 학문의 세계 제일의 권위를 가진 교수라고 할지라도 그의 지식이 절대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인간을 정확히 모르는 것입니까?..... 왜 인간은 인간의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설계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요 인간이 인간을 만들지 않아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정말 큰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 배울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나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한다면 더더욱 큰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고장나면 물어볼 데도 없고 고칠데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은 고장나면 서비스 센터로 가면되고 설계한 사람에게로 가면 고칠 수 있는 것 처럼 사람이 고장나면 교회로 와야하고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인간의 설계의도를 잘 파악하게 되고..... 고장나도 빨리 고치게 될 수 있게 되며..... 그리하여 결과론적으로 인간의 삶이 복되고 가치있고 유용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인생을 가치있고 유용하게 살려면 하나님을 안믿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 오늘의 주제를 좀 더 깊이 심화하기 위하여 좀 색다른 측면에서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역사 이래 인간은 건강과 장수, 그리고 영생을 추구하여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고기를 먹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채식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보약을 찾으면서 장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리고 유전학적 생물학적 의학적 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노쇠현상을 해결하여 유한한 인간이 죽지않고 무한히 살게되는 즉 영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스콤을 통하여 여러번 들었던 복제양 돌리를 생산하였던 스코틀란드 에딘버러 근처의 로슬린 연구소는 많은 연구소 중에 대표적인 세계적인 연구소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장수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에는 잘먹는 일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일 외에도.... 스스로 노력하여 이루기 위한 몸부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깅, 등산, 테니스, 수영, 골프 등 각종 운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러한 일들 자체에 대하여 이시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러한 운동들에 대하여 부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 필요한 운동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적당히 운동을 해야하고 또 적당한 운동을 통해서 성령의 전인 육체의 건강을 증진 시켜야만 하고 또 의학이나 생물학 유전학을 통하여 병의 원인을 발견하고 치료하고 예방하는 일도 꼭 해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일들을 시도하는 근본 자세와 목적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연구와 노력들을 통하여 종국적으로 인간은 과연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그렇게 하여 인류가 영생한들, 그 영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이 주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앙적인 입장에서 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볼 때 인간의 죄와 악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인간의 영생은... 인류에게 사실상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욕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인된 인간들에게 영생이 주어지게 되면 문제는 더 복잡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하여 인생의 삶이 더욱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한국 영화계를 주름 잡았던 고은아 씨의 이야기입니다마는 그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 그렇게 열심히 살아 트로피도 많이 받고 그 트로피를 자기 집에 잘 진열하고 살면서 시간만 나면 트로피를 닦으면서 내심 흐뭇해하곤 하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트로피들을 닦다가 그는 그 쇠로 만든 트로피를 받기 위하여 그동안 그토록 애써온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니 너무나 허망하고 처량하고.. 또한 지금 그 쇠로 만든 트로피를 닦으면서 흐뭇해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불쌍하게 느껴지면서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성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는 스토리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죄와 욕심 가운데서 태어나 삶의 허무와 무의미성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거기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의 핵심이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깊이 음미해 보면 그 속에 죄와 욕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제시되어 있고 삶의 허무와 무의미성에서 헤어나와 참되고 가치있게 사는 길과 영원히 사는 길이 제시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평강교회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서 그저 좋은 사람으로만 살려고만 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종교를 믿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들도 다 좋은 말씀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대로 잘 실천하여 살기만 하면 얼마든지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주 만물과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그분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때로 살아가면서 육체에 문제가 생기고 인생의 길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 마다 인간을 설계하고 인간을 만드신 그분을 찾아 그분을 통하여 원천적으로 해결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그리고 도저히 없어지지 않는 인간의 죄와 욕심과 허무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만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 시103:8-19/ 2001-08-25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시103:8-19 서론: 꽃 같은 인생 봄 만 되면 진해의 벚꽃을 보려고 관광객들이 많이 모여든다고 합니다. 저는 진해가 어디 붙었는지도 아직 가보지 않아 모릅니다. 진해 벚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릴 뿐입니다. 서울의 여의도 윤중로 벚꽂이 좋다고 합니다. 금년에도 아름답게 꽃이 피어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예] 그런데 지난 4월 어느 날 집사람이 여의도 벚꽂이 좋다는데 좀 보러가자고 졸라서 오래간만에 집 식구에게 인심쓰는 체 월요일 날 \'그럽시다. 우리 여의도 벚꽃 한번 보러갑시다\' 하고 나섰습니다. 좋아라고 순환도로로 해서 신나게 여의도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앗 불 싸, 이게 웬 일입니까? 여의도에 도착해서 보니 그 좋다는 벚꽂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차를 좀 몰고 더 깊이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래도 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벌써 벚꽃이 다 져 쏟아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집사람에게 말도 못하고 속으로 \'목사가 무슨 벚꽂을 보겠나\' 하고 여의도를 쓸쓸히 빠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많은 봄을 서울에서 살았건만 그 좋다는 여의도 벚꽃- 아니 다른 곳의 벚꽃도 한번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참 집 식구에게 미안했습니다. 어디 새 천년에 인심 좀 쓰고 내신 성적 좀 올려 볼 까 했지만 역시 허사였습니다. 벚꽃은 금년에도 우리를 기다려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화려한 벚꽃이- 열흘정도 지나니 다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도 꽃과 같다고 하나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5] 그것은 바람이 불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6]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생은 그날이 들의 풀과 같고, 그 영화가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영화를 누리고 사는가 싶으나 돌풍이 불고 우박이 떨어지면 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 박태준 총리의 갑작스런 퇴진 (5월19일) 포철회장, ㅇㅇ당 대표, 국무총리의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자기 재산을 남의 이름을 빌려 등기하고 그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아 부도덕한 자로 드러나 더 이상 국정을 수행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여론에 떠밀려 전 세계에는 국가의 위상과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고, 백성들에게는 실망을 안겨 주었고, 자신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총리직을 내놓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생은 유한한 존재, 덧없는 존재라는 것을 또 일깨워 주었습니다. 인생의 영화는 꽃과 같다는 것을 다시 알려주었습니다. 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결국 자기를 멸망시키는 천적이라는 또 일깨워 주었습니다. [시 90:10-11] 모세는 말하기를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건강관리를 잘 한 사람은 70, 80세를 살지만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한 것과 슬픈 일 당한 것 밖에 없고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화살이 날아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한된 삶을 삽니다. 나이를 자기 맘대로 늘 일수 없습니다. 벚꽃이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제 맘대로 날 수를 늘이지 못하고 땅바닥에 다 쏟아져 밟히고 마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제한된 삶을 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본론1: 좋으신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모릅니다. 자식이 낙방하고 실패해도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시 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하나님은 그 자녀가 실패하여 낙심할 때 도와주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1. 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 자녀가 하나님은 병들었을 때에 고쳐주십니다. 어떻게요? 그 자녀의 체질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시 103: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몸의 구조뿐만 아니라 체질까지 잘 아십니다. 그래서 병든 자녀를 고쳐주십니다.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시는 능한 손으로 고쳐주십니다.(히4:12) [시 103:3]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영혼의 병을 고쳐주시고, 그 다음 육신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영육을 건강하게 해 주십니다. 2. 왜 그렇습니까? [시 103:8]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믿는 자가 병들었을 때에 고쳐주십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중에 병든 이가 있다면 치료의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간증} 작년에 박영환 장로님 간증을 들었습니다. 폐암이라는 선고를 받았으나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깨끗이 치료를 받아 교회봉사를 잘하고 계십니다. 본론2: 은혜로우신 하나님(3-5) 1.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3)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 백성이 연약하여 죄 짖고 뉘우치고 슬퍼하며 회개 할 때 용서해 주십니다. [시 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사람은 죄 가운데 나서 죄 가운데 살다 죄 값으로 죽습니다. (시51:5) 죄의 삯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살고자 하는 자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 죄가 진홍 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게 해 주십니다.(사1:18) [예] 죄를 지은 사람은 지난날에 죄 지은 내용이 호적에 기록됩니다. 그래서 전과자가 됩니다. 지난 4.13 총선 때에 검찰에서 국회의원 후보들의 전과기록을 발표했었습니다. 그래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었 습니다. 그래서 낙선한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죄를 집고 넘어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면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죄를 다시 기억지 않으십니다. (히8:12) 어떻게 회개하느냐구요? 간단합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라고 하면 됩니다. 이 자리에 죄 짖고 근심하는 성도가 혹시 있으면 회개하여 깨끗이 용서 받으시기 바랍니다. 2.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4) [시 103:4] \"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하나님은 그 자녀를 파멸, 멸망, 죽음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죄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자녀로 삼아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더 늦기 전에 믿으십시오. 그래서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3. 만족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5] 하나님은 그 자녀가 구할 때 좋은 것을 주시되 만족한 것과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주십니다. [시 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 하나님은 믿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온 성도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바랍니다. 4. 새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5)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5) 하나님을 믿는 자의 생명은 하나님께 속해있음으로 추하게 시들고 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십니다. 건강을 주시되 높은 창공을 자유롭고 여유 있고 힘차게 날으는 독수리와 같이 새롭게 해 주십니다. 독수리도 험악한 세상을 살다보면 그렇게 강한 깃털이 빠지고 부러집니다. 그러나 둥지에 앉아서 깃털이 다시나기를 기다리면 하나님이 깃털을 새로 나게 해 주십니다. 그러면 독수리는 다시 힘차게 하늘을 날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과 만족한 은혜를 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주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독수리와 같이 새롭게 되는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 사람은 유한한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세상지식과 육안으로 파악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습득되는 지식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 지식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지식은 하나님과 그 말씀에 의해 배우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영존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되고, 불변하신 하나님을 알게되고, 영생 복락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은 꼭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래서 영생복락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결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17,18) 하나님을 믿고 언약을 지키고 법을 기억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개인과 자손에게 복을 주십니다. 자신도 잘 될 뿐만 아니라 자손 만대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됩니다. 이 복은 세상 것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고 영원한 복입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통치하시고 믿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어서 자신과 자손 만대에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
주 예수를 믿으라(1)/ 행16:25-34/ 변한규 목사/ 총동원전도주일설교
주 예수를 믿으라(1) 행16:25-34 5월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전도의 달입니다. 말을 바꿔 말하자면 5월은 전도의 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 예수를 믿으라” 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이 있고 교주도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공자를 믿으라 고 외치기도 하고 또한 석가모니도 믿으라고 말하기도 하며, 마호멧트를 믿으라고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박태선을 믿으라 하기도하고 문선명을 믿으라며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성경을 빌어 ”주 예수를 믿으라고” 간곡히 외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것일까요? 첫째, 예수는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을 전하다가 빌립보 옥에 갇히게 되는데 본문 25절을 보게 되면 ”밤중쯤 되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즉 그 밤이 바울에게 고통의 밤이 되었고, 괴로움과 역경의 시험의 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고독의 밤이 있고, 역경의 밤이 있으며, 질병의 밤, 실패의 밤, 재난의 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격언 중에 ”깊은 밤은 좋은 생각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으며 ”깊은 밤에 대부분의 인생들은 시인이 되어간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파스칼은 병상에서 프란시스는 죽음의 위기에서 밀턴은 소경이 된 후에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된 후에 모두 세상의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본문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최악의 장소를 최선의 장소로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두 사람이 합심하여 감옥을 성전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은 기도하고 찬송하는 하나님의 집이며, 기도하고 찬송하는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요 성전이 됩니다. 주경 신학자 뱅겔이 ”진실된 성도 가령 남편과 아내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이면 교회가 형성된다”고 하였듯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미하더니 성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옥중이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죄수들이 듣게 되었고 마침내 이적이 일어났으며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간수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실의와 낙담 가운데 있는 옥중 인생들에게 그들은 선교사가 되어 그 옥중을 선교지로 만들었습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간수가 ”등불을 다오!”라고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깜깜 하고 볼 수가 없는 밤중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영적 교훈을 찾아보자면, 세상은 밤중 같은 곳, 즉 도덕이 빛을 잃고, 정치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학원의 가로등에 불이 꺼져가고 있었고, 예술의 광장에 불이 희미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더니 깜깜한 밤과 같은 옥중을 대낮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떠한 빛이기에 어두움이 물러가게 하며 대낮이 되게 할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8: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 빛은 바로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한 곳은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면은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고 흑암이 태양처럼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옥중의 빛도 되시지만 가정의 빛도 되십니다. 죄악세상 인생에게 속죄의 빛이 되어 주시고 죽음의 인생에게 생명의 빛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셔서 천지가 밝아지게 하셨는데, 이러한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신 것을 실물교수 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시고 계실 때에 소경거지 바디매오가 꿇어앉아 있다가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불쌍한 소경은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구원을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머무르시사 저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바디매오는 소경임에도 불구하고 겉옷을 던지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십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물으시고 계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사랑하는 성도여! 밤중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여야 할 것인가요? 바디메오는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밤중 같은 세상에 참으로 적절한 요구를 하였던 것입니다. 소경의 간절한 욕구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아니고 바로 보기를 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선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눈 이 소경과 같이 밝아지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음이 밝아져야 하며 우리의 생활이 밝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불투명해서는 안됩니다. 주님 앞에서 오픈 되어져 있는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며 성도들의 가정이 되길 바랍니다.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을까요? 둘째, 예수는 이적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 ”홀현히 큰 지진이 나서…”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홀현히’라는 말은 갑자기, 느닷없이, 생각밖에 등 여러 가지의 뜻을 가집니다. 생각해 보면 이적은 갑자기 일어나며 축복도 갑자기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는 기도하고 찬송하며 설교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질병이 물러나는 이적 또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 있습니다. 빌립보 옥중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모두 다 쇠고랑에서 벗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적을 행한 이는 누구일까요? 이 이적의 장본인은 바울도 실라도 아니며 바울과 실라가 기도 할 때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에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소경아 눈을 떠라!” 말씀하셔서 소경을 보게 하신 예수님은 ”쇠고랑아 벗어져라” 말씀하셔서 많은 죄수들의 쇠고랑을 벗어지게 하신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이 모든 것들을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이 시간 예배하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홀연히 이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그러한 복입니다. 그 주님은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적을 만나기를 염원하신다면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해야 하며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적을 기다리는 것만큼 성도는 성도의 본분을 최선을 다하여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장 11절에 ”예수께서 이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여기에서 처음 표적이란 가나 혼인잔치에서 행하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행하신 이적을 말하는 것인데 이 이적에서 기억할 것이 있다면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한 항아리도 아닌 여섯 항아리나 되는 곳에 물을 아구까지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행히도 곁에 우물이 있었서 하인들은 여섯 개나 되는 항아리에 맹물로는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하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혼인잔치는 낭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내 기도의 항아리가 비어있지는 않는가? 내 찬송의 항아리가 비어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1년을 두고 한번쯤 내 헌금의 항아리를 들여다 볼 수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생일감사 헌금의 항아리엔 바닥나지는 않았는가? 십일조헌금의 항아리가 구멍 뚫리지는 않았는가? 건축헌금의 항아리가 마르지는 않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오게 됩니다. 그 밤이 오기 전에 힘써서 일하십시다. 일하지도 아니하면서 이적을 기다리는 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건강할 때 열심히 봉사해야 하며 내가 가진 재물이 날아가기 전에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나의 삶 가운데 이적을 행하실 것이며,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듯이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죄인 괴수가 변하여 성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앞에 나의 모든 것, 나의 염려까지도 맡겨야 하며 두려워도 말고 겁을 내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적을 행하시는 우리 주님 앞에 헌신 다짐하며 찬양하는 우리가 되십시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님 찬양합시다~♬ 왜 예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일까요? 셋째, 예수는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서 구원이란 헬라어로 소테리아라고 하는데 여기엔 다양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우선 육체의 질병으로부터의 고침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9장 21절에 간질병에 걸린 아들이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는데 이것은 구원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 8장 36절에 거라사 지방에 귀신 들린 사람이 고침을 받는 구원, 누가복음 5장 34절에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고침을 받는 구원입니다. 또한 위험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마태복음 8장 25절에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위험을 만났을 때에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태복음 24장 30절에 보면 베드로가 물에 빠져 들어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하며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또한 구원은 패역한 세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데 사도행전 2장 40절에 보면 ”너희가 이 패역한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패역한 세대란 하나님을 향한 반항과 불순종으로 어그러진 영적 정신적 사상적 질병을 뜻하며 또한 무실론, 유물론, 불가지론, 자연신론, 범신론, 진화론, 우상숭배, 배금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 현실주의 등 온갖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대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해방 받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무엇입니까? 죄로부터의 사죄를 의미하는데...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말하는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또 구원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며 영원한 건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얻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는 부활의 세계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사실이 구원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망의 세상에서 영생 있는 천국을 향하여 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을까요? 우리 함께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 세상에 임하셨도다” 요한복음 3장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래서 기독교란 ”주 예수를 믿으라!”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누구에게 전해야 할 것인가요? 물론 옥에 수감된 죄수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하며 죄수를 지키는 간수에게도 예수님을 전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이며 인생의 구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에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녀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먼저 말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말만은 기피해서는 안될 것이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하여 꿈속에서라도 주 예수를 전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미래에 주인이며 꿈나무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살아야 미래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바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어린이들, 즉 내 자녀들 내 청소년들입니다. 그들이 만일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된다면 모두 모두가 잃어버린 자들일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잃어버린 자요, 예수 믿지 아니하고 있다면 어머니가 잃어버린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려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오셨는데 누가복음 15장의 내용이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처럼 찾아 오셨습니다.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을 때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골짜기를 헤매면서 진땀을 흘리면서 찾더니 잃은 양을 어깨에 매고 기쁨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주님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전도하고 있는지요? 5월 한달이 내 믿음생활에 있어서 부끄럽지 아니하는 한 달이 되도록 하고 있는지요? 또한 주님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처럼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에서는 교회를 상징하는데 지금 우리 교회가 5월을 전도의 달로 지키면서 오늘은 어린이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한 장년부를 중심으로 해서 전도 집회와 간증집회를 하고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하며 찬송하면서 심야 기도와 철야기도를 하면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동참하고 계신지요? 우리 주님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곁을 멀리 떠나 탕자가 되었는데 그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돌아와! 돌아와!” 하며 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다리는 종교이며 참 구원을 주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길이 열리고 기쁨이 생기며 변화를 받고, 탕자 여인이 현모양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가정이 복을 받고 예수 믿는 나라가 부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양하겠네 저 죄인 어서 주께 와 죄 사하심을 받아라~♬
주 예수를 믿으라(2)/ 행16:25-34/ 변한규 목사/ 총동원전도주일설교
주 예수를 믿으라(2) 행16:25-34 오늘은 온 교회들이 지키는 어버이 주일입니다. 전도자 바울은 우리 모두에게 오월 한 달 동안 우리 어버이들에게 외칠 메시지의 주제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는 주제입니다. 바울이 왜 ’주 예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라’라고 했을까 요? ’주 예수를 연구하라, 주 예수를 묵상하라’ 할 수도 있는데 ’주 예수를 믿으라’하고 믿음을 강조했을까요? 이 시간 믿음문제를 묵상하면서 은혜를 사모하려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여기 의인도 믿음으로 말 미암아 된 의인인데 믿음은 무엇입니까? 물론 공자를 믿는 것도 석가모니를 믿는 것도 믿 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여기 믿음의 정관사가 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이란 뜻입니다. 그 믿음이 어떠한 믿음일까요? 죄인들을 구원하시 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믿 는 ’그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예수님 을 ”믿음의 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 라”(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찬양과 기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밝힌 대로 믿음의 대 상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두 가지입니다. ’살아계신 것과 상주시는 자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고 하는 믿음이요, 그 하나님은 우리의 노고를 묵과해 버리지 아니하시고 기억하신 바 되었다가 상주시는 분이 심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열 번 물을 수 있습니다. 믿음과 관계 있는 것 세 가지를 생각하면서 믿음의 소중함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 지식과 믿음. 본문 30절에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간수가 옥중에서 절규하 는 말입니다. 여기 ”어떻게 하여야”라는 말은 구원을 얻는 비법이 무엇이냐는 뜻입니다. 믿 음은 황금보다도 소중하고 영예나 권세보다도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거듭났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믿음으 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출처가 중요합니다. 사람에게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 터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장 8절)고 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진 ’믿음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념이라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신념을 성도들 중 에는 믿음으로 혼동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요, 신념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콜럼부스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신념가지고 대 서양을 건넜는지요? 믿음을 가지고 대서양을 건넜는지요? 신념가지고 건넌 것입니다. 스 페인을 떠나기 전날 해변에서 많은 뗏목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그 어디엔가 육지가 있는가보다. 그러니까 뗏목이 바다로 떠내려오는 것이 아니냐?’ 육지 는 또 다른 곳에도 있다고 믿는 신념이 있어서 먼 항해를 할 수 있었고 마침내 콜럼부스는 그 신념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어도 신념이 있을 수 가 있고 그 신념으로도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일에 대 하여는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신념의 어떤 총화가 아니고 신념의 어떤 정화된 고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신념은 신념인데 믿음은 하나님께로 부터요, 신념은 사람으로부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알고서 믿게 됩니까? 믿고서 알게 됩니까?’ 이것이 지식과 믿음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의 영역의 세 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는 물적 세계요, 또 하나는 영적 세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정복하라”고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정복할 수 있습니까? 물적 세계는 지식으로, 더러는 과학으로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는 믿음으로만 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방법과 신앙적 방법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말 하면서 때때로 세상 방법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인텔리적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에 부 작용이 나옵니다. 과학적 방법은 ’지식에서 지식으로’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 아무 리 고도화될지라도 믿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지식에서 지식으로만 가면은 지식의 축적은 될 수가 있지만 그것이 종합해서 믿음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지식에서 지식으로 가다 가 믿음이 된다고 하면은 많은 과학자 많은 철학자는 자동으로 신앙인이 될 것이 아닙니까? 대학생은 고등학생보다 더 많이 압니다. 고등학생들에 비하여 대학생들은 거의 신앙인이 되 기 일쑤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17절을 잘 살펴보면 ”믿음으로 믿음 으로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지식에서 믿음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믿음에’라고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지식이 먼저가 아니고 믿음이 먼저인 지라 바울이 말 할 때에 ”주 예수를 믿으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알고서 믿어지 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만 알게됩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영접해야 될 분이 지 연구해서 만나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알게되면 그것이 믿음으로 전진하게 됩니 다. 믿음으로 알게되면 알게되는 지식이 믿음으로 가게 합니다. 이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철학자 안셈(anselm)이 말했습니다. ’나는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는 다. 믿음이 없이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상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종종 지식을 말하고 있는데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고 체험 적인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라고 했는 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라고 했습니다. 이 아는 것으로도 영생 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아는 것은 체험적 지식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고 내가 아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헌신하고 싶어하는 신앙적 체험에 의해 서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는 것은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하더니 아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요한이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아는 지식이 어디서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데서 부터입 니다.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할진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예수 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 한마 디 말씀을 하시고 나사로를 살게 하셨다.’는 사실들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더 알기를 원할진대 예수님을 사랑하는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수님 더 알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영적 체 험이 많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 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이적과 믿음. 본문 26절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 이 다 벗어진지라” 기독교는 여기 이적 위에 서 있는 종교입니다. 우리들도 이적을 믿습니 다. 그런데 합리주의,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이적을 부인하는 사상이 교회 안에 아장아장 걸 어오기까지 했습니다. 눈안이라는 사람은 ’이적은 신화의 다른 표현이다’라는 말로 이적을 부인했습니다. 자유신학자 니버는 말하기를 ’이적은 현대의 이미 받아 들일 수 없는 사실이 다’고 했습니다. 철학자 흄은 ’이적은 자연법칙이 맞지 아니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적으로 꽉 차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 기까지 이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점에서 성경 자체가 이 적이라는 말입니다. 시계는 시계공이 만듭니다. 그리고 태엽만 감아주면 잘 갑니다. 비유컨 대 자연법칙이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통해서 역사를 통치합니다. 그러나 필 요하실 경우에는 그 자연법칙 속에 초자연법칙으로 개입하실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적 입니다. 더러는 ’이적은 자연법칙을 파괴하는 것인지라 우리는 믿을 수가 없다’라고 할 때 가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하면 어떤 물체든지 밑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물체 를 내가 꽉 잡으면 안 떨어집니다. 이것이 어찌 자연법칙의 파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연법칙보다 더 강한 힘이 개입한 것입니다. 이적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이적이 나타났습니까? 중요한 것 셋이 있습니다. 거짓종교와 참종교를 분별할 필요가 있을 때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기 7장 9절 이하에 보면 모세가 바로왕 앞에 갔습니 다. 하나님께서 모세더러 지팡이를 던져 이적을 행하라 하시고 이적을 시켜 지팡이를 던졌 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가 많은 술사들을 동원해서 대항하라고 했습니다. 많 은 무리 앞에 지팡이를 던지자 그 많은 뱀들이 꿈틀꿈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 뱀이 그 술사들의 지팡이 뱀들을 모조리 잡아 먹어버림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라는 것을 입증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에 이적을 행하십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보 면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 종교와 대결할 때, 어떤 종교가 참이냐를 판가름 할 필요가 있을 때, 이적을 행하셨는데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불을 쏟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이럴 경우에는 이적을 행하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 는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를 만났을 때에 그들을 돕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여기신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역사 하셨습니다. 가령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데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이제 바로 군대들이 몰려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 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홍해를 향하여 ”지팡이를 내밀라!”하셨습니 다. 그래서 홍해가 육지처럼 갈라지게 한 이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성 도들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는 이적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리고성 을 무너뜨려야만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일 곱 번 돌라”는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일곱 번 도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적을 보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돕 고 계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증거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이적을 행하 셨습니다. 본문에서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쇠고랑이 싹 벗 어졌습니다. 누가 행한 이적입니까? 우리 주님이 행하신 이적입니다. 왜 행하셨을까요? 한 영혼, 간수장을 구원할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시 기 위해 구원의 서론으로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의 아들이시다’는 실물교수를 하신 것이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이 메 시야 되심을 증거 하실 필요가 있을 때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적이 드뭅니 다. 이미 이적이 성경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이 갈라지는 이적을 보려고 하면 출 애굽기를 읽으면 됩니다. 구태여 이적을 행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 적을 믿습니까? 성경의 이적을 믿지 못한 사람을 어찌 참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 까?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적을 생각할 때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십시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느니라.’ 그러니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적은 마치 자연과 흡사합니다. 이적이 아닙니 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신 것뿐입니다. 이것이 이적입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편에서 생각하면 불가능합니다.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죽었는데 살아나다니... 그러나 하나 님 편에서 생각하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므로 그 생명을 취하시고 놓으실 수 있습니다. 개미 한 마리는 자동차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사는 자동차를 움직 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개미인생과 같습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히 하 실 수 있습니다. 기사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이 믿음 생활하는데 결단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적을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구원과 믿음. 본문 31절에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누가 주 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행 4:12)”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십니까? 신사숙녀 부를 것 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여기 구원이 어떠한 구원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는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궁극적 구원입니다. 궁극적 구원은 조직신학에서 ’견인’이 라고 말합니다. 견인이라는 말은 한자로 ’견고하게 붙잡아 오래 참음으로 마침내 구원을 얻 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에서 떨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열매 를 맺는다는 내용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견고하게 붙잡고 인내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참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참으사 나의 구원을 마침내는 성취시키신다는 내용입니 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일시적인 타락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완전히 타락하여 지 옥으로 가는 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전도하다가 보면 ’전에 나도 예수 믿었어요.’하는 사람 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 믿었다는 뜻이 아니고 ’교회 나갔었다.’라는 뜻으로 보 아야 합니다. 교회 나간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교회 나오 는 것으로 마감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겉모양은 신자지만 속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성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스펄젼이 말하기를 ’중생한 사람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과도 같다’ 그가 탄 배에도 물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침몰 당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것이 바로 궁극적 구원입니다. 성도는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험한 산길을 가는 것이 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얘야 내 손을 든든히 붙잡느라 그렇지 않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은 것 인가요? 아닙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떨어진다고 말했지만 결코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어린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 다. 이것이 견인이요, 궁극적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 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고 했습니다. 여기 비는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문제는 비를 받는 식물입니다. 식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채소, 또 하나는 가시엉겅퀴입니다. 비가 내리는데 채소는 좋은 열매는 맺습니다. 그런데 비가 내려도 가시엉겅퀴는 아무런 효용이 없습니다. 교회는 두 종 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채소성도가 있고 가시엉겅퀴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쭉정이고 또 하나는 알곡, 하나는 염소이고 또 하나는 양입니다. 그런데 물어야 합니다. 양이 변하여 염 소가 됩니까? 채소가 변하여 가시엉겅퀴가 되던가요? 알곡이 변하여 쭉정이가 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궁극적 구원에 관한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홍 수심판이 지났을 때에 노아가 방주에서 두 짐승을 날렸습니다. 하나는 까마귀, 또 하나는 비둘기인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썩은 송장 뜯어먹느라고 돌아오지 아니한 것입 니다. 그런데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비둘기의 속성이 말해줍니다.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썩은 송장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 중에는 까마귀성도가 있고 비둘기 성도 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활용해야 합니다. 반드시 믿음으로 해야될 것들이 교회에 몇 가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 엇이든 믿고 기도한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고 했습니다. 정말 응답 받고자 하면 믿음 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적을 만나고 하늘이 열리고 질병에서 놓임 받고 불가능한 철문 들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자 우리마음 합하여♬ 늘 찬송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 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하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 하라(벧전4:10)”고 했습니다. 박수 받기 위한 봉사이면 안됩니다. 하늘상급을 잃습니다. 봉 사는 이름 없이 빛 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신지라 우리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십니다. 주일새벽마다 교사들을 위해 식사 준비하는 마르다 봉사단들이 봉사 할 때에 모든 것 줄여가면서 좋은 것 잘 저축했다가 지난 토요일날 여기 아름다운 두 거울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다 놓은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치부책엔 바로 이러한 봉사를 기록한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전도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창 세기 3장 6절에 보면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게 말하길 ”은과 금은 내게 없 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했더 니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전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고 싶습니까? 바울과 실라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전도의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았습니다. 밤중에 전도했습니다. 전도의 장소의 제한 받지 않고 옥중에서 전도했습니다. 전도의 메시지는 이미 주어졌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 라!”입니다. 이 복음을 누구에게 전할까요? 오늘 어버이 주일에 온 가정들이 우리 부모님 께 전해야 합니다. 여기 간수는 한 가정의 아버지요 남편일 것입니다. 온 집이 믿었다고 했 으니 사랑하는 아내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믿고 아내가 믿어야 합니다. 아내가 믿고 남편이 믿어야 합니다. 부모가 믿어야 자녀가 믿습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 다. 가족 복음화를 이루는 가정들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등뒤에서 나 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 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