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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의 백합화/ 아2:1-3/ 성결교회주일설교
가시밭의 백합화 아2:1-3 오늘 우리는 성결교회 창립92주년을 맞으며 다시한번 우리 교회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려고 합니다. 1. 한국성결교회는 민족자생교회입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의 감리교회는 미국의 남감리교회선교 사 아펜젤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성결교회는 한국인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두명의 한국청년 정빈, 김상준에 의해 시작됩니 다.한국인에 의해 시작된 교회, 한국인에 의해 말씀이 전파 된 교회, 한국인에 의해 성장한 자랑스러운 민족자생교회가 한국성결교회입니다. 2. 한국성결교회는 민족의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한 교회 입니다. 일본성결교회가 일본천황숭배를 반대합니다. 일본성결교단전체가 폐쇄되고 목회자들이 투옥되는 고난을 경험합니다. 한국성결교회가 일본천황숭배를 반대합니다. 한국성결교단전체가 폐쇄되고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투옥되고 순교당하는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우리 성결교회에게 3가지 유익을 주었습니다. (1) 고난은 오히려 한국성결교회를 성장시켰습니다. (2) 고난은 한국성결교회의 신앙을 성숙시켰습니다. (3) 고난은 한국성결교회를 진실한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3. 한국성 결교회는 민족의 역사를 책임지는 교회입니다. 한국교회는 언제나 한민족고난의 역사 속에 함께 숨쉬며 더불어 성장해 왔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국가적 시련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이 백성이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거짓없는 진실된 기도로 국난의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야 할 책임이 우리 성 결인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생활속에서 효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1. 맛있는 음식을 대접합니다. ’어머니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맛있게 잡수세요. 치아가 불편하시니 부드러운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많이 드시고 기운내셔서 기도많이 해주세요.’ 2. 한달에 한 번이상은 꼭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을 합니다. 그리고 용돈도 여유있게 드립니다. 용돈이 큰 효자노릇합니다. 3. 외출할때는 행선지를 알리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간단한 간식이라도 들고 옵니다. 4. 온가족이 함께 식사할때는 어머니의 고생하시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5. 어머니가 특벽히 보고싶어하는 친척들이 있으면, 연락해서 전화나 방문하도록 요청합니다. 6. 운동할수 있는 기회나 간단한 일거리를 드립니다. 마늘까기, 야채다듬기, 고추꼭지따기 등은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일합니다. 7.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악을 육성으로 녹음해서 함께 듣습니다. 시끄러운 유행가만 고집하지 말고 어머니시 대의 흘러간 옛가요를 연습해서 들려드립니다. 8. 간단한 의료기구나 운동기구를 구입해서 간호원 노릇합니다. 체온계, 혈압측정기, 수지침, 헬쓰기구 등을 구입해 드립니다. 9. 미용실을 함께 갑니다. 10. 여행을 시켜드립니다. 좋은 음식과 호텔을 선정해 드립니다. 11. 예쁜 유행옷을 사드립니다. 12. 생일을 잊지않고 정성스럽게 생일잔치를 해드립니다. 13. 철따라 보약을 해드립니다. 14. 매일 새벽마다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골3:20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레19:32 ’너는 센머리 앞에서 일어나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개인적 생활을 위한 권면/ 첫번째:성결한 생활을 할 것/ 벧전1:13-벧전2:10
개인적 생활을 위한 권면/ 첫번째:성결한 생활을 할 것 벧전1:13-벧전2:10 베드로는 문안 인사와 찬송의 이유를 설명한뒤 이제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재의 구원을 인해서 장래의 예언으로 인하여 찬송하라고 하였고 이제는 개인적 생활을 위한 권면을 하는데 1:13-2:10절 까지 입니다. 베드로는 세가지의 권면을 하고 있는데 A.성결한 생활을 힘쓸것 ( 1:13-21) B.형제 사랑을 힘쓸것 (1:22-25) C.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장할 것 (2:1-10) 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첫번째 성결한 생활을 힘쓸 것을 권면하는 것에 대해서 상고 해보겠습니다. 성도가 성도로서의 삶을 올바로 살것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성도의 고민이요 기도 제목인것 같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도가 되어 다른 사람의 신앙에 귀감이 되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1:13-21절까지 에서 다섯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상고해서 마음에 큰 도전이 되어서 성도 여러분의 삶에 큰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13절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될줄 믿습니다. 성도가 마음의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이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겸손히 절제도 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도 하나의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과 같습니다. 허리를 동이는 것은 나그네의 복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당시에도 이와 같은 모습을 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때도 역시 허리를 동이고 겸손의 모습,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은 세상적인 마음, 하나님이 원치 않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조이는 것이며 겸손하고 절제하는 모습이며,자신을 쾌락이나 방탕함에 내 놓지 않는 모습입니다. 바로 성도 여러분들께서 성도로서의 삶을 사실때 이와 같은 모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근신하는 것은 음주나 방탕등을 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남을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수근거리거나 죄를 지을 만한 것들을 자제하는 행동입니다. 근신하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때에 받을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사람입니다. 근신하여 경건한 삶을 산 성도가 하나님의 선물과 상급을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근신하는 성도는 바로 하나님의 선물,은혜를 소망합니다. 저는 특별히 저와 여러분께서 근신하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의 나타나실때에 큰 은혜를 받으시길 소원합니다. 둘째로,두려움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14절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 을 본 삼지 말고 (15절)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절)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성도는 모름지기 자기의 행실을 살피면서 거룩하게 살기 위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척도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수차에 걸쳐 교구를 하셨습니다. 레위기에 보면,(11:44,19:2.20:7,26,21:8)네 군데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사욕에 눈이 어두어 신앙을 팽개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덕적인 퇴폐를 따라가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자 처럼 거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바로 모든 행실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거룩한 행실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로 거룩한 삶을 계속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갖고 두려움으로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구별 지으시길 바랍니다. 거룩이란 말은 바로 구별한다. 갈라낸다는 것입니다. 더러움과 죄악으로 부터 구별지은 사람이 바로 성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마치 요셉처럼 “어찌 내가 하나님앞에 득죄하리요”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항상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째로,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한 성도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18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 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항상 의롭게 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름때나 먼지등은 빨래비누 등으로 씻깁니다. 한스푼이나 슈퍼타이 등으로 씻깁니다. 그러나 죄악은 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흠없고 점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만 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9에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예수님을 소개 했습니다. 계시록5:6절에 보면,일찍 죽임을 당하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보혈을 흘리신 것입니다. 구약엔 동물의 피로 사람이 죄를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죄를 지을때마다 동물의 피와 생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4:15절에 나온것처럼 죄없으신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창세전 부터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죽은자 가운데 살아나시고 영광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이 되셨습니다. 절망과 낙망이 와도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시며 나의 죄씻음을 위하여 바로 부활하신 분이시며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과 평안의 소망이시며 확증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안지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쁘신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그분께 고백하면 용서해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날마다 죄를 씻음 받으심으로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사시길을 바랍니다.
거룩한 성결의 영/ 롬1:1-8/ 성결교회주일설교/ 2010-05-30
거룩한 성결의 영 롬1:1-8 1. 복음이란? (1) 오늘 성결교회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우리 지구촌교회가 어떤 교단에 속한 교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은 많지 않을 줄 압니다. 요즘은 교단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교단이 먼저가 될 수 없기에 지나치게 교단을 강조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1년에 한 번쯤 성결교회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성결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결\'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은 매우 필요할 것 같습니다. (2)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물질이 없는 사람에게 기쁜 소식은 필요한 물질을 얻는 것입니다.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 기쁜 소식은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죠. 아이를 유괴 당한 어머니에게 기쁜 소식은 돈이 아닙니다. 아이가 살아있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일 것입이다. 마음이 허무하고 소망이 없는 이에게는 소망을 주는 소식만이 기쁜 소식입니다. 이 세상의 소식은 이런 여러가지 문제 중에서 하나 혹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은 될 수 있지만 모든 문제에 대한 기쁜 소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에 대한 기쁜 소식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을 이사야를 인용하여 누가가 증거합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 되셨고,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보게 되는 기쁜 소식이 되셨고, 묶인 자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이 되셨고, 눌린 자에게 힘이 되는 기쁜 소식이 되셨습니다(눅4:18-19). (3) 이런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4). 2천년 전 이 땅 어느 한 구석에 오셨던 그 분이 그리스도임을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의 의해서 고백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하고 고백하게 하신 성령을 왜 하필이면 다른 말도 많은데 \'성결의 영\'이라고 했을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성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중생 (1) 우리 기독교대한성결교회라는 교단은 4가지 복음의 핵심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입니다. 성결은 첫째로 중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중생이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2) \"저희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케 하고 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하라\"(대하29:5) 성결은 더러운 것을 씻는 것 아닙니까? 더러운 것은 무엇으로 씻습니까? 물로 씻죠? 물은 형체가 없습니다. 성령은 어떤 형체나 틀이 없는 자유의 영입니다. 얼음으로 얼굴을 씻을 수 있습니까? 얼음은 형체가 있는 고체지만 어느 정도 씻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형체가 있었어도 점점 형체가 없어지고 녹아 내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없고, 죄를 씻을 수도 없고, 자유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정적이고 틀에 매여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지구촌교회는 아무런 틀도 없어지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안수기도도 하지 않고 어떤 특별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데 불치병이 고쳐지고 정신병이 치유되지 않습니까? 어디 한두명입니까?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경쟁하고 소외시키고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어떤 틀에 맞추는 곳이라면 또 하나의 숨막히는 곳이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귀신은 굳어진 제도나 형체나 틀이 있는 \'물 없는 곳\'을 찾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얻지 못하고\"(마12: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구촌교회는 모두가 경쟁하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고 틀이 없는 어떻게 보면 무질서한 교회이기를 우리 모두 소망합니다. 다만 자기만 드러내려고 하는 사단의 세력만 숨막히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3) 하나님을 모르는 것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성결하지 않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 즉 하나님 이외에 다른 마음도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말라기 2:11에도 이방 신의 딸들과 결혼한 것을 가리켜 \'성결을 욕되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이외의 다른 생각, 다른 목적, 다른 가치관을 가진 것을 성경은 성결하지 못하다고, 더럽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3. 성결 (1) 두번째는 성결입니다. 성결은 웨슬레가 말한 성화와 같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충만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 모든 우상(물질, 권력, 명예 등)이 내 생각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정도로 하나님의 영에게 사로잡힌 바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실제로 믿어지지 않으니까 자꾸 물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라는 말은 \'10%는 빼놓고\'라는 뜻이 아닙니다. 힘을 완전히 빼야 물에 뜨지 않습니까? 마귀는 염려를 타고 역사합니다. 염려는 마귀가 숨어살 수 있는 움막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있는 무덤가를 헤매며 소리를 지르며 쇠사슬을 끊는 군대마귀 들린 사람 속에 들어있던 그 \'수천의 군대\'는 다름 아닌 수천 가지의 염려와 상처들이었고 그것이 치유됨으로 움막들이 없어져서 마귀가 떠났다고 나는 믿습니다. (3)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출애굽기 28:36에 보면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했습니다. 성결은 새겨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있어야 산다고 세뇌 당해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계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과 전혀 무관한 분이시라고 전제해 놓고 그런 지식을 배웠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지식을 씻어내는 방법은 그것과 반대되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임을 믿을 수 있도록 세뇌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뇌가 아니잖습니까? 오히려 세뇌된 것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반복해서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뇌하듯이 반복해서 들을 때 기적이 나타나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3:5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라고 했습니다. (4) 성결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약3:17) 항상 말씀 드리지만 사원의 눈과 사장의 눈은 다릅니다. 학생의 보는 눈과 교수의 보는 눈은 다릅니다. 신자가 보는 눈과 목사가 보는 눈은 다릅니다. 보는 자리와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혜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마5:8)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마귀가 그랬듯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것입니다(빌2:8). 4. 신유 (1) 세번째 성결한 삶은 신유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서로가 높아지려고 하는 경쟁사회, 사람을 따돌리는 소외가 있는 세상은 질병은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부터 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과 더불어 어울려 놀았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바로 치유 그 자체입니다. 주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 더러운 귀신을 먼저 나가게 하셨습니다. 관계를 깨고 경쟁으로 몰아넣는 귀신을 쫓아낼 때 질병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 이외의 섬기는 물신과 맘몬을 몰아내고 성결을 회복하는 것은 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주님은 병자를 보시고 죄 사함을 먼저 선언하셨습니다. 죄를 씻고 성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때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단절된 곳으로부터 질병과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의사들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요즘은 그분들이 먼저 인정합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마음의 병이고 영혼의 병이라는 사실입니다. 영혼의 병이란 무엇입니까? 죄와 죄책감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그 자체가 생명공동체요 생명을 살리고 개인적인 질병 뿐 아니라 사회적인 질병까지도 치유하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5. 재림 (1) 네번째 성결은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서 준비됩니다. 여호수아 7:13에 보면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성결은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성결케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만 바라보면 희망이라고는 어느 한 구석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소망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형태를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체험해 봤지 온전한 모습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믿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기꺼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동참하는 것입니다(5). (3) 우리는 너무나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 강조해왔습니다. 물론 죽어서 천국 가야 합니다만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힘있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간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그날까지, 땅 끝까지 세상을 치유하는 복음과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말씀을 가지고 전하는 사명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고 성결인이 아니겠습니까?
거룩한 성결의 영/ 롬1:1-8/ 지영태 목사/ 대초리교회/ 성결교회주일설교/ 2010-05-22
거룩한 성결의 영 롬1:1-8 1. 복음이란? (1) 오늘 성결교회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우리 교회가 어떤 교단에 속한 교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은 많지 않을 줄 압니다. 요즘은 교단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교단이 먼저가 될 수 없기에 지나치게 교단을 강조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1년에 한 번쯤 성결교회주일을 지키면서 우리 성결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결\'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은 매우 필요할 것 같습니다. (2)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물질이 없는 사람에게 기쁜 소식은 필요한 물질을 얻는 것입니다.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 기쁜 소식은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죠. 아이를 유괴 당한 어머니에게 기쁜 소식은 돈이 아닙니다. 아이가 살아있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일 것입이다. 마음이 허무하고 소망이 없는 이에게는 소망을 주는 소식만이 기쁜 소식입니다. 이 세상의 소식은 이런 여러가지 문제 중에서 하나 혹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은 될 수 있지만 모든 문제에 대한 기쁜 소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문제에 대한 기쁜 소식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을 이사야를 인용하여 누가가 증거합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 되셨고,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보게 되는 기쁜 소식이 되셨고, 묶인 자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이 되셨고, 눌린 자에게 힘이 되는 기쁜 소식이 되셨습니다(눅4:18-19). (3) 이런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4). 2천년 전 이 땅 어느 한 구석에 오셨던 그 분이 그리스도임을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의 의해서 고백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하고 고백하게 하신 성령을 왜 하필이면 다른 말도 많은데 \'성결의 영\'이라고 했을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성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중생 (1) 우리 기독교대한성결교회라는 교단은 4가지 복음의 핵심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입니다. 성결은 첫째로 중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중생이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2) \"저희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케 하고 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이하라\"(대하29:5) 성결은 더러운 것을 씻는 것 아닙니까? 더러운 것은 무엇으로 씻습니까? 물로 씻죠? 물은 형체가 없습니다. 성령은 어떤 형체나 틀이 없는 자유의 영입니다. 얼음으로 얼굴을 씻을 수 있습니까? 얼음은 형체가 있는 고체지만 어느 정도 씻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형체가 있었어도 점점 형체가 없어지고 녹아 내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없고, 죄를 씻을 수도 없고, 자유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정적이고 틀에 매여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무런 틀도 없어지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안수기도도 하지 않고 어떤 특별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데 불치병이 고쳐지고 정신병이 치유되지 않습니까? 어디 한두명입니까?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경쟁하고 소외시키고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어떤 틀에 맞추는 곳이라면 또 하나의 숨막히는 곳이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귀신은 굳어진 제도나 형체나 틀이 있는 \'물 없는 곳\'을 찾는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얻지 못하고\"(마12:4)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구촌교회는 모두가 경쟁하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고 틀이 없는 어떻게 보면 무질서한 교회이기를 우리 모두 소망합니다. 다만 자기만 드러내려고 하는 사단의 세력만 숨막히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3) 하나님을 모르는 것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성결하지 않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 즉 하나님 이외에 다른 마음도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말라기 2:11에도 이방 신의 딸들과 결혼한 것을 가리켜 \'성결을 욕되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이외의 다른 생각, 다른 목적, 다른 가치관을 가진 것을 성경은 성결하지 못하다고, 더럽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3. 성결 (1) 두번째는 성결입니다. 성결은 웨슬레가 말한 성화와 같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충만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 모든 우상(물질, 권력, 명예 등)이 내 생각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정도로 하나님의 영에게 사로잡힌 바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실제로 믿어지지 않으니까 자꾸 물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라는 말은 \'10%는 빼놓고\'라는 뜻이 아닙니다. 힘을 완전히 빼야 물에 뜨지 않습니까? 마귀는 염려를 타고 역사합니다. 염려는 마귀가 숨어살 수 있는 움막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있는 무덤가를 헤매며 소리를 지르며 쇠사슬을 끊는 군대마귀 들린 사람 속에 들어있던 그 \'수천의 군대\'는 다름 아닌 수천 가지의 염려와 상처들이었고 그것이 치유됨으로 움막들이 없어져서 마귀가 떠났다고 나는 믿습니다. (3)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출애굽기 28:36에 보면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했습니다. 성결은 새겨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있어야 산다고 세뇌 당해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은 계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과 전혀 무관한 분이시라고 전제해 놓고 그런 지식을 배웠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지식을 씻어내는 방법은 그것과 반대되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임을 믿을 수 있도록 세뇌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뇌가 아니잖습니까? 오히려 세뇌된 것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반복해서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뇌하듯이 반복해서 들을 때 기적이 나타나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3:5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라고 했습니다. (4) 성결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약3:17) 항상 말씀 드리지만 사원의 눈과 사장의 눈은 다릅니다. 학생의 보는 눈과 교수의 보는 눈은 다릅니다. 신자가 보는 눈과 목사가 보는 눈은 다릅니다. 보는 자리와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혜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마5:8)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마귀가 그랬듯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것입니다(빌2:8). 4. 신유 (1) 세번째 성결한 삶은 신유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서로가 높아지려고 하는 경쟁사회, 사람을 따돌리는 소외가 있는 세상은 질병은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부터 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과 더불어 어울려 놀았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바로 치유 그 자체입니다. 주님께서 병을 고치실 때 더러운 귀신을 먼저 나가게 하셨습니다. 관계를 깨고 경쟁으로 몰아넣는 귀신을 쫓아낼 때 질병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 이외의 섬기는 물신과 맘몬을 몰아내고 성결을 회복하는 것은 세상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주님은 병자를 보시고 죄 사함을 먼저 선언하셨습니다. 죄를 씻고 성결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될 때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단절된 곳으로부터 질병과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의사들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요즘은 그분들이 먼저 인정합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마음의 병이고 영혼의 병이라는 사실입니다. 영혼의 병이란 무엇입니까? 죄와 죄책감입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그 자체가 생명공동체요 생명을 살리고 개인적인 질병 뿐 아니라 사회적인 질병까지도 치유하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5. 재림 (1) 네번째 성결은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서 준비됩니다. 여호수아 7:13에 보면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성결은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성결케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만 바라보면 희망이라고는 어느 한 구석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소망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형태를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체험해 봤지 온전한 모습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믿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사실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기꺼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동참하는 것입니다(5). (3) 우리는 너무나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 강조해왔습니다. 물론 죽어서 천국 가야 합니다만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힘 있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간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그날까지, 땅 끝까지 세상을 치유하는 복음과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의 말씀을 가지고 전하는 사명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고 성결인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공동체의 성결을 지키라/ 고전5:6-13
교회 공동체의 성결을 지키라 고전5:6-13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6)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7)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8)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9)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10)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11)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12)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고전5:6-13) 교회의 잘못된 자랑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은 다이아몬드입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흔히 ”4 C”로써 평가됩니다. 첫째는 carat, 즉 크기입니다. 1캐럿은 0.2g입니다. 둘째는 clarity, 투명도입니다. 셋째는 color입니다. 황색, 갈색, 녹색, 청색, 적색, 흑색 등이 있는데 청색을 띤 백색을 가장 높은 품질로 평가합니다. 넷째는 cutting입니다. 이상적인 비례로 잘라졌는가를 평가합니다. 다이아몬드의 품질에 흠이 되는 것은 包有物, 내부의 균열, 연마시의 흠 등입니다. 포유물은 자연산인 경우 0.2%까지의 질소와, 20ppm까지의 알루미늄이 포함됩니다. 다이아몬드가 최고의 보석이 되는 이유는 稀貴性과 强度, 광채, 내구성 등입니다. 물리적인 성질을 보면 다이아몬드는 硬度 10으로 현존하는 광물 중에 가장 단단합니다. 安定性도 비활성기체 속에서는 1700℃까지 안정하고, 산화 조건 하에서는 1000℃가까이까지도 안정합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외형뿐만 아니라 그 내적인 특성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교회를 다이아몬드에 비유한다면 어떨까요? 같은 보석이라도 내용을 살펴보면 품질이 천차만별이듯이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다 같은 교회 같지만 공동체의 내용을 품질로 평가한다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평가 내용이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는 부지런함, 수고, 인내, 거짓 사도를 드러낸 장점이 있는 반면 처음 사랑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물질적으로 가난해진 교인들로써 칭찬을 받았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우상 도시에서 어느 정도 버티었지만 반도덕 주의자들인 니골라당을 용납한 것에 대해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있었으나 자칭 선지자인 이세벨을 용납하여 우상과 음란에 빠진 것을 책망 받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富饒하여 겉모양은 살아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은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교인은 적었지만 말씀을 철저히 지킴으로 신실한 생활을 함으로써 칭찬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적인 교회의 전형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신앙은 세속적이고 미지근하기만 한 것을 책망 받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의 교회들은 하나님께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아마 하나님의 평가는 안중에도 없을 겁니다. 만일 하나님의 평가를 조금이라도 존중한다면, 오늘날 교회들처럼 저 혼자 잘났다고 자랑하지는 않을 겁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자기 교회를 무척 자랑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가장 큰 도시에 세워진 가장 큰 교회입니다. 바울, 아볼로 같은 좋은 지도자가 거쳐간 교회입니다. 방언, 예언, 신유 등, 성령의 은사가 풍성한 교회입니다. 철학자의 나라인 그리스에 세워진 知的인 교회입니다. 이런 식의 평가는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얼마나 큰 교회인가? 얼마나 유명한 지도자가 있는가? 얼마나 성령의 은사가 많은가? 얼마나 고학력자들이 많이 모이는가? 그러나 과연 그런 것들이 자랑거리가 될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단언합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6절) 다 잘못된 자랑입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들을 외형과 상관 없이 미성숙된 교회로 평가하실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한 평가 기준을 순결과 진실에 두고 있습니다.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8절) 얼마나 공동체가 순수한가? 얼마나 공동체가 진실한가? 즉,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는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진실한가? 바울은 교회에서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전3:21)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9:23-24) 공동체의 순결 문제 오늘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순결, 즉 거룩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거룩하고 죄가 없어야 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특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개인의 순결을 말하기 전에 공동체의 거룩을 말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개인의 순결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순결 없이 개인의 순결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순결은 하나님 백성의 특성입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는 개인의 범죄를 특별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공동체를 몇 가지로 비유합니다. 건물에 비유합니다. 인체에 비유합니다. 가족에 비유합니다. 오늘 말씀은 반죽 덩어리에 비유합니다. 이러한 비유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체성과 연관성입니다. 교회는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은 혼자만의 삶을 누리는 독자적 존재가 아닙니다. 반드시 공동체 속에서 자기 역할을 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 속의 개인입니다. 건물은 기둥만으로, 혹은 지붕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모든 부품이 다 합쳐져야만 집이 됩니다. 인체도 마찬가집니다. 눈, 코, 귀, 입, 심장, 뼈, 손과 발, 다 중요하지만 홀로 존재하지는 못합니다. 다 합쳐져서 서로 협력할 때에만 생존이 가능합니다. 가족도 그렇습니다. 가족 중 어느 한 사람만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함께 행복하든지, 함께 불행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말씀에 비유된 반죽 덩어리도 그렇습니다. 반죽의 일부만 좋고 나머지는 나쁜 경우는 없습니다. 전체가 나쁘든지 좋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공동체의 특성은 무엇이든지 서로 共有한다는 점입니다. 좋은 것도 공유하고 나쁜 것도 공유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공동체에서 어느 한 사람이 악하다면 그것은 개인만의 죄가 아닙니다. 전체가 악한 것이 됩니다. 명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개인의 죄라 할지라도 공동체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누룩 없는 절기를 지키자고 합니다. 구약 절기를 지키자는 말이 아니라 신약적 의미의 무교절을 얘기한 것입니다. 구약의 무교절이 뭔가요? 무교절은 유월절부터 시작해서 7일간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유월절 절기의 기원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결정적 이유는 애굽에 내려진 長子 심판의 재앙입니다. 파라오의 왕실에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집에는 특별한 은혜가 내려졌습니다. 집집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심판을 시행하는 천사들이 피를 바른 집에는 심판을 내리지 않고 그냥 통과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하는 절기입니다. 즉, 유월절날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어린양 때문에 살아났듯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유월절에 이어지는 무교절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백성의 성결의 의무를 나타낸 것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애굽이나 가나안의 모든 죄악된 삶에서 떠나 완전히 성결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7일간 무교병(누룩 없는 떡)을 먹은 것은 모든 날 동안 거룩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것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자녀답게 평생토록 거룩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누룩 없는 떡을 먹자는 뜻입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누룩 자체가 식품 영양학적으로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룩이 지닌 상징성 때문입니다. 누룩은 죄와 닮은 특성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전염성이고, 둘째는 변질시키는 능력, 즉 파괴성입니다. 누룩을 반죽에 넣으면 삽시간에 퍼집니다. 그리고 반죽을 변질시킵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죄는 놀라운 전염성과 파괴성이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에 그 아들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숨었지만 가인은 뻔뻔하게 대들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당했지만 그 자손들은 바벨탑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항했습니다. 소돔성이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당할 때에 그 성안에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온전한 사람은 롯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그 땅에는 죄가 ”貫盈”(가득 차다)”했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전염성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해갑니다. 오늘날 죄는 어느 시대보다도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모든 매체들이 다 죄를 전파합니다. 신문, 잡지, 영화, 소설, 텔레비전, 드라마, 인터넷, 각종 광고들이 다 죄를 전파합니다. 이와 같은 타락에는 언제나 그럴싸한 명분이 있습니다. 經濟發展의 명분, 文化 暢達의 명분, 평등 사회의 명분 등등, 각종의 명분으로 죄가 조장됩니다. 경제 발전을 예로 들어 볼까요? 금년 4월 8일자 뉴스위크에 한국 관련 기사가 나왔습니다. 제목은 ”한국의 어두운 비밀”(Korea`s Dark Secret)입니다. 기분 나쁜 제목입니다. 기사 내용은 한국의 落胎 실상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 관리의 말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매년 150만 건 내지 200만 건의 낙태 시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미국과 비슷합니다. 미국의 가임 여성은 한국의 6배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낙태 비율은 미국의 6배인 셈입니다. 말로는 유교 국가인데 性文化는 미국보다 더 개판입니다. 1950년대까지 한국은 가장 보수적인 나라로 낙태율은 매우 낮았습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人口를 문제삼고 가족계획을 시작했습니다. 예비군 훈련 가면 단체로 꼬셔서 불임 수술을 시켰습니다. 인구 조절을 빌미로 여성들의 낙태가 공공연히 조장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형식적인 낙태관련법이 있기는 합니다. ”강간이나 기형아 출산 산모의 건강이 문제되는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한다는 법입니다. 그러면 이런 특별한 경우가 일년에 200만 건이나 됩니까? 매년 200만 명이나 되는 생명체를 母胎에서 虐殺하는 나라를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 같습니까? 경제 발전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문화 창달의 명분도 그렇습니다. 모든 문화 예술 활동에서 표현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으로 보장하라는 것이 현대 사회의 흐름입니다. 미신, 우상, 포르노, 폭력, 살인, 범죄, 모든 내용들이 상업주의 물결을 타고 범람하고 있습니다. 죄는 또한 놀라운 파괴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죄의 파괴력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전투에서 죽은 미군 병사는 몇 십 명도 안 됩니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 강도의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은 매년 2 만 명도 더 됩니다. 얼마 전에 ”막가파” 식의 범죄자들에게 다섯 명의 여성들이 살해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년 병원에서 살해되는 200만 명의 생명에 비하면 ”鳥足之血”입니다. 막가파는 살인자로 감옥에 갔지만 낙태자들은 아무 제재도 받지 않았습니다. 뱃속의 아이를 죽이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 범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멸망한 이유는 신앙적 背敎와 도덕적 타락입니다. 중세 교회가 몰락한 이유도 도덕적 타락 때문입니다. 범죄는 교회를 파괴시키고, 개인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특히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性犯罪가 그렇습니다. 노아 시대의 심판도 성범죄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도 성범죄가 주종입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이 몰락한 것도 성범죄 때문입니다. 죄는 개인과 공동체를 다 파괴합니다. 이제 다시 교회공동체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성도들이 죄를 방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인 동시에 교회 공동체의 책임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죄를 방어해줄 공동체가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세상 종말까지 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악해질수록 개인이 홀로 범죄적 환경에 맞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교회 공동체 속에 들어가서 죄를 방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공동체 자체가 죄에 오염된다면 큰일입니다. 아무도 개인을 지켜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순결을 생명처럼 방어해야 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거룩한 삶을 지켜가야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순결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범죄자를 추방하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교회 공동체가 죄에 감염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 가차 없이 죄를 추방해야 합니다. 죄는 개개인을 통해서 공동체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개인의 범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됩니다. 만일 누가 지속적인 범죄 행위를 일삼는다면 공동체는 그를 격리시켜야만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13절) 죄를 짓기만 하면 무조건 내어쫓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얘기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상 공동체로부터 聖別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세상 모든 단체들과는 전혀 다른 공동체입니다. 주인이 다르고, 구성원이 다릅니다. 공동체의 목표가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다릅니다. 비록 외형상 구성원들이 세상과 관련을 맺고 있기는 하나 영적으로는 완전히 세상에서 분리된 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4-18) 교회 공동체는 죄를 철저히 격리시켜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묵은 누룩은 반죽에서 떼어 내라고 했습니다. 묵은 누룩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죄악된 행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세요. 여섯 가지 특정 범죄가 나옵니다. 음란한 자, 탐욕스러운 자, 우상 숭배자, 후욕하는 자(욕설을 하는 자), 술취하는 자, 토색하는 자(노략질) 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범죄들은 세상에서 크게 여기는 죄가 아닙니다. 즉, 법적으로 다룰 범죄들이 아닙니다. 도덕이나 윤리적인 범죄들입니다. 누가 욕심이 많다고 처벌할 수 있습니까? ”김 아무개는 욕심이 많음으로 징역 10년에 처함!” ”박 아무개는 음란한 생각을 품었으므로 징역 5년에 처함!” ”이 아무개는 욕설을 해서 남을 모욕했으므로 벌금 3천 만 원에 처함!”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교회공동체는 세상법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법에 지배됩니다. 하나님은 세상 법과 상관없이 교회 공동체를 철저히 평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평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도덕적인 범죄자들과 사귀지도 말고 식사도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음식점에 가서 낯모르는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 식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생활을 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라는 말입니다. 범죄자와는 사귀지도 말아라! 왕따 시켜라! 그래야 공동체가 산다! 바로 그런 뜻입니다. 죄를 제거하는 것은 성도 개개인이 다 함께 져야될 책임입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 죄악이 침입한다면 단호하게 추방해야 됩니다. 철저히 잘라버리세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2-29) 거짓을 버려라! 진실을 말하라! 분내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고 제 손으로 노동을 하라!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하라! 먼저 내 자신부터, 모든 삶에서 죄악을 추방하십시오. 그것이 공동체를 위한 나의 책임입니다. 때때로 죄와의 싸움은 희생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손실을 입습니다. 지위를 잃기도 합니다. 명예가 손상되기도 합니다. 인간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죄와의 싸움은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를 살리고 내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 인체에 세균이 침입하면 백혈구가 나서서 싸웁니다. 백혈구는 세균을 완전히 감싸서 분해시켜버립니다. 그러는 동안 백혈구 자신도 생을 마감하는데 그것이 바로 상처에서 나오는 고름입니다. 백혈구의 전투로 우리 몸의 건강이 지켜집니다. 오늘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의 성결을 위해서 죄와 투쟁할 때에 교회 공동체의 건강이 지켜집니다. 거기에 따라서 내 자신과 가족의 영적 건강도 지켜집니다. 오늘날 세상은 급격히 타락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 한 복판에 교회가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서서 세상을 심판하고 거룩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럴 능력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불신 세상에 대한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 몫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거룩입니다. 앞으로 교회는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처럼 될 겁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別種의 집단으로 드문드문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혹독한 생존의 투쟁을 해야만 합니다. 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위해서 끝없는 투쟁을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 끝없는 투쟁을 해야만 합니다. 그 투쟁은 계급 투쟁이 아니라 죄와의 투쟁입니다. 우리는 나날의 삶이 잔치요 명절(feast, festival) 같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 생활이 잔치 같고, 가정 생활이 잔치 같기를 원합니다.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면 공동체 自淨의 책임을 감당하십시오. 죄의 누룩을 제거하세요. 먼저 내 자신의 죄를 제거하고, 그 다음에 교회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제거하도록 노력하세요. 그러면 매일매일 잔치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의 달, 두 번째 멧시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8절)
교회 공동체의 성결을 지키라/ 고전5:6-13/ 2002-08-06
교회 공동체의 성결을 지키라 고전5:6-13 교회의 잘못된 자랑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은 다이아몬드입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흔히 ”4 C”로써 평가됩니다. 첫째는 carat, 즉 크기입니다. 1캐럿은 0.2g입니다. 둘째는 clarity, 투명도입니다. 셋째는 color입니다. 황색, 갈색, 녹색, 청색, 적색, 흑색 등이 있는데 청색을 띤 백색을 가장 높은 품질로 평가합니다. 넷째는 cutting입니다. 이상적인 비례로 잘라졌는가를 평가합니다. 다이아몬드의 품질에 흠이 되는 것은 包有物, 내부의 균열, 연마시의 흠 등입니다. 포유물은 자연산인 경우 0.2%까지의 질소와, 20ppm까지의 알루미늄이 포함됩니다. 다이아몬드가 최고의 보석이 되는 이유는 稀貴性과 强度, 광채, 내구성 등입니다. 물리적인 성질을 보면 다이아몬드는 硬度 10으로 현존하는 광물 중에 가장 단단합니다. 安定性도 비활성기체 속에서는 1700℃까지 안정하고, 산화 조건 하에서는 1000℃가까이까지도 안정합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외형뿐만 아니라 그 내적인 특성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교회를 다이아몬드에 비유한다면 어떨까요? 같은 보석이라도 내용을 살펴보면 품질이 천차만별이듯이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다 같은 교회 같지만 공동체의 내용을 품질로 평가한다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평가 내용이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는 부지런함, 수고, 인내, 거짓 사도를 드러낸 장점이 있는 반면 처음 사랑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물질적으로 가난해진 교인들로써 칭찬을 받았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우상 도시에서 어느 정도 버티었지만 반도덕 주의자들인 니골라당을 용납한 것에 대해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있었으나 자칭 선지자인 이세벨을 용납하여 우상과 음란에 빠진 것을 책망 받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富饒하여 겉모양은 살아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완전히 죽은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교인은 적었지만 말씀을 철저히 지킴으로 신실한 생활을 함으로써 칭찬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적인 교회의 전형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신앙은 세속적이고 미지근하기만 한 것을 책망 받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의 교회들은 하나님께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아마 하나님의 평가는 안중에도 없을 겁니다. 만일 하나님의 평가를 조금이라도 존중한다면, 오늘날 교회들처럼 저 혼자 잘났다고 자랑하지는 않을 겁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자기 교회를 무척 자랑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가장 큰 도시에 세워진 가장 큰 교회입니다. 바울, 아볼로 같은 좋은 지도자가 거쳐간 교회입니다. 방언, 예언, 신유 등, 성령의 은사가 풍성한 교회입니다. 철학자의 나라인 그리스에 세워진 知的인 교회입니다. 이런 식의 평가는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얼마나 큰 교회인가? 얼마나 유명한 지도자가 있는가? 얼마나 성령의 은사가 많은가? 얼마나 고학력자들이 많이 모이는가? 그러나 과연 그런 것들이 자랑거리가 될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단언합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6절) 다 잘못된 자랑입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들을 외형과 상관 없이 미성숙된 교회로 평가하실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한 평가 기준을 순결과 진실에 두고 있습니다.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8절) 얼마나 공동체가 순수한가? 얼마나 공동체가 진실한가? 즉,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는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진실한가? 바울은 교회에서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전3:21)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9:23-24) 공동체의 순결 문제 오늘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순결, 즉 거룩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거룩하고 죄가 없어야 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특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개인의 순결을 말하기 전에 공동체의 거룩을 말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개인의 순결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순결 없이 개인의 순결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순결은 하나님 백성의 특성입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공동체는 개인의 범죄를 특별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공동체를 몇 가지로 비유합니다. 건물에 비유합니다. 인체에 비유합니다. 가족에 비유합니다. 오늘 말씀은 반죽 덩어리에 비유합니다. 이러한 비유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체성과 연관성입니다. 교회는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은 혼자만의 삶을 누리는 독자적 존재가 아닙니다. 반드시 공동체 속에서 자기 역할을 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 속의 개인입니다. 건물은 기둥만으로, 혹은 지붕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모든 부품이 다 합쳐져야만 집이 됩니다. 인체도 마찬가집니다. 눈, 코, 귀, 입, 심장, 뼈, 손과 발, 다 중요하지만 홀로 존재하지는 못합니다. 다 합쳐져서 서로 협력할 때에만 생존이 가능합니다. 가족도 그렇습니다. 가족 중 어느 한 사람만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함께 행복하든지, 함께 불행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말씀에 비유된 반죽 덩어리도 그렇습니다. 반죽의 일부만 좋고 나머지는 나쁜 경우는 없습니다. 전체가 나쁘든지 좋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공동체의 특성은 무엇이든지 서로 共有한다는 점입니다. 좋은 것도 공유하고 나쁜 것도 공유합니다. 선과 악에 대한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공동체에서 어느 한 사람이 악하다면 그것은 개인만의 죄가 아닙니다. 전체가 악한 것이 됩니다. 명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개인의 죄라 할지라도 공동체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누룩 없는 절기를 지키자고 합니다. 구약 절기를 지키자는 말이 아니라 신약적 의미의 무교절을 얘기한 것입니다. 구약의 무교절이 뭔가요? 무교절은 유월절부터 시작해서 7일간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유월절 절기의 기원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결정적 이유는 애굽에 내려진 長子 심판의 재앙입니다. 파라오의 왕실에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집에는 특별한 은혜가 내려졌습니다. 집집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심판을 시행하는 천사들이 피를 바른 집에는 심판을 내리지 않고 그냥 통과하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하는 절기입니다. 즉, 유월절날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바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이 어린양 때문에 살아났듯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유월절에 이어지는 무교절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백성의 성결의 의무를 나타낸 것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애굽이나 가나안의 모든 죄악된 삶에서 떠나 완전히 성결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7일간 무교병(누룩 없는 떡)을 먹은 것은 모든 날 동안 거룩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것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자녀답게 평생토록 거룩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누룩 없는 떡을 먹자는 뜻입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누룩 자체가 식품 영양학적으로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룩이 지닌 상징성 때문입니다. 누룩은 죄와 닮은 특성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전염성이고, 둘째는 변질시키는 능력, 즉 파괴성입니다. 누룩을 반죽에 넣으면 삽시간에 퍼집니다. 그리고 반죽을 변질시킵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죄는 놀라운 전염성과 파괴성이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에 그 아들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숨었지만 가인은 뻔뻔하게 대들었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당했지만 그 자손들은 바벨탑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항했습니다. 소돔성이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당할 때에 그 성안에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온전한 사람은 롯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그 땅에는 죄가 ”貫盈”(가득 차다)”했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전염성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해갑니다. 오늘날 죄는 어느 시대보다도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모든 매체들이 다 죄를 전파합니다. 신문, 잡지, 영화, 소설, 텔레비전, 드라마, 인터넷, 각종 광고들이 다 죄를 전파합니다. 이와 같은 타락에는 언제나 그럴싸한 명분이 있습니다. 經濟發展의 명분, 文化 暢達의 명분, 평등 사회의 명분 등등, 각종의 명분으로 죄가 조장됩니다. 경제 발전을 예로 들어 볼까요? 금년 4월 8일자 뉴스위크에 한국 관련 기사가 나왔습니다. 제목은 ”한국의 어두운 비밀”(Korea`s Dark Secret)입니다. 기분 나쁜 제목입니다. 기사 내용은 한국의 落胎 실상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한국 정부 관리의 말에 의하면 대한민국에서 매년 150만 건 내지 200만 건의 낙태 시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미국과 비슷합니다. 미국의 가임 여성은 한국의 6배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낙태 비율은 미국의 6배인 셈입니다. 말로는 유교 국가인데 性文化는 미국보다 더 개판입니다. 1950년대까지 한국은 가장 보수적인 나라로 낙태율은 매우 낮았습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人口를 문제삼고 가족계획을 시작했습니다. 예비군 훈련 가면 단체로 꼬셔서 불임 수술을 시켰습니다. 인구 조절을 빌미로 여성들의 낙태가 공공연히 조장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형식적인 낙태관련법이 있기는 합니다. ”강간이나 기형아 출산 산모의 건강이 문제되는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한다는 법입니다. 그러면 이런 특별한 경우가 일년에 200만 건이나 됩니까? 매년 200만 명이나 되는 생명체를 母胎에서 虐殺하는 나라를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 같습니까? 경제 발전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문화 창달의 명분도 그렇습니다. 모든 문화 예술 활동에서 표현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으로 보장하라는 것이 현대 사회의 흐름입니다. 미신, 우상, 포르노, 폭력, 살인, 범죄, 모든 내용들이 상업주의 물결을 타고 범람하고 있습니다. 죄는 또한 놀라운 파괴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죄의 파괴력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전투에서 죽은 미군 병사는 몇 십 명도 안 됩니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 강도의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은 매년 2 만 명도 더 됩니다. 얼마 전에 ”막가파” 식의 범죄자들에게 다섯 명의 여성들이 살해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년 병원에서 살해되는 200만 명의 생명에 비하면 ”鳥足之血”입니다. 막가파는 살인자로 감옥에 갔지만 낙태자들은 아무 제재도 받지 않았습니다. 뱃속의 아이를 죽이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 범죄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멸망한 이유는 신앙적 背敎와 도덕적 타락입니다. 중세 교회가 몰락한 이유도 도덕적 타락 때문입니다. 범죄는 교회를 파괴시키고, 개인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특히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性犯罪가 그렇습니다. 노아 시대의 심판도 성범죄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심판도 성범죄가 주종입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이 몰락한 것도 성범죄 때문입니다. 죄는 개인과 공동체를 다 파괴합니다. 이제 다시 교회공동체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성도들이 죄를 방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인 동시에 교회 공동체의 책임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죄를 방어해줄 공동체가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세상 종말까지 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악해질수록 개인이 홀로 범죄적 환경에 맞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교회 공동체 속에 들어가서 죄를 방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공동체 자체가 죄에 오염된다면 큰일입니다. 아무도 개인을 지켜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순결을 생명처럼 방어해야 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거룩한 삶을 지켜가야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순결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범죄자를 추방하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교회 공동체가 죄에 감염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 가차 없이 죄를 추방해야 합니다. 죄는 개개인을 통해서 공동체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개인의 범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됩니다. 만일 누가 지속적인 범죄 행위를 일삼는다면 공동체는 그를 격리시켜야만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13절) 죄를 짓기만 하면 무조건 내어쫓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얘기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세상 공동체로부터 聖別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입니다. 교회는 세상 모든 단체들과는 전혀 다른 공동체입니다. 주인이 다르고, 구성원이 다릅니다. 공동체의 목표가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다릅니다. 비록 외형상 구성원들이 세상과 관련을 맺고 있기는 하나 영적으로는 완전히 세상에서 분리된 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4-18) 교회 공동체는 죄를 철저히 격리시켜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묵은 누룩은 반죽에서 떼어 내라고 했습니다. 묵은 누룩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죄악된 행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세요. 여섯 가지 특정 범죄가 나옵니다. 음란한 자, 탐욕스러운 자, 우상 숭배자, 후욕하는 자(욕설을 하는 자), 술취하는 자, 토색하는 자(노략질) 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범죄들은 세상에서 크게 여기는 죄가 아닙니다. 즉, 법적으로 다룰 범죄들이 아닙니다. 도덕이나 윤리적인 범죄들입니다. 누가 욕심이 많다고 처벌할 수 있습니까? ”김 아무개는 욕심이 많음으로 징역 10년에 처함!” ”박 아무개는 음란한 생각을 품었으므로 징역 5년에 처함!” ”이 아무개는 욕설을 해서 남을 모욕했으므로 벌금 3천 만 원에 처함!”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교회공동체는 세상법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법에 지배됩니다. 하나님은 세상 법과 상관없이 교회 공동체를 철저히 평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평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도덕적인 범죄자들과 사귀지도 말고 식사도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음식점에 가서 낯모르는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 식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생활을 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교회 공동체에서 추방하라는 말입니다. 범죄자와는 사귀지도 말아라! 왕따 시켜라! 그래야 공동체가 산다! 바로 그런 뜻입니다. 죄를 제거하는 것은 성도 개개인이 다 함께 져야될 책임입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 죄악이 침입한다면 단호하게 추방해야 됩니다. 철저히 잘라버리세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2-29) 거짓을 버려라! 진실을 말하라! 분내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고 제 손으로 노동을 하라!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하라! 먼저 내 자신부터, 모든 삶에서 죄악을 추방하십시오. 그것이 공동체를 위한 나의 책임입니다. 때때로 죄와의 싸움은 희생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손실을 입습니다. 지위를 잃기도 합니다. 명예가 손상되기도 합니다. 인간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죄와의 싸움은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를 살리고 내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 인체에 세균이 침입하면 백혈구가 나서서 싸웁니다. 백혈구는 세균을 완전히 감싸서 분해시켜버립니다. 그러는 동안 백혈구 자신도 생을 마감하는데 그것이 바로 상처에서 나오는 고름입니다. 백혈구의 전투로 우리 몸의 건강이 지켜집니다. 오늘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의 성결을 위해서 죄와 투쟁할 때에 교회 공동체의 건강이 지켜집니다. 거기에 따라서 내 자신과 가족의 영적 건강도 지켜집니다. 오늘날 세상은 급격히 타락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 한 복판에 교회가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서서 세상을 심판하고 거룩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럴 능력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불신 세상에 대한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 몫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거룩입니다. 앞으로 교회는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처럼 될 겁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別種의 집단으로 드문드문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혹독한 생존의 투쟁을 해야만 합니다. 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위해서 끝없는 투쟁을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 끝없는 투쟁을 해야만 합니다. 그 투쟁은 계급 투쟁이 아니라 죄와의 투쟁입니다. 우리는 나날의 삶이 잔치요 명절(feast, festival) 같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 생활이 잔치 같고, 가정 생활이 잔치 같기를 원합니다.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면 공동체 自淨의 책임을 감당하십시오. 죄의 누룩을 제거하세요. 먼저 내 자신의 죄를 제거하고, 그 다음에 교회 공동체 내에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제거하도록 노력하세요. 그러면 매일매일 잔치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의 달, 두 번째 멧시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8절)
교회를 성결하게 하라/ 행5:1-11/ 2001-10-25
교회를 성결하게 하라 행5:1-11 1.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소설 ”춘향전”은 같은 제목, 같은 소재로 가장 많이 영화화된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 남원의 기생 성춘향이 광한루에 그네 타러 나갔다가 사또의 아들 이몽룡을 만나 인연을 맺고, 평생을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남모르는 사랑을 계속하던 중 사또가 서울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서로 헤어지게 된다. 춘향은 지조를 지키느라 다른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사또는 춘향에게 수청을 들도록 강요한다. 춘향은 죽기를 무릎 쓰고 신관 사또의 요구를 거절 하다가, 옥에 갇혀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때 암행어사가 되어 내려온 이몽룡이 춘향의 목숨을 구하고 함께 서울로 올라가 평생을 행복하게 산다. 2. 조선 후기 영조, 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개화기를 거처 현재에까지 전승되고 있는 이 춘향전은 기독교의 신앙적인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우리가 배워야할 중요한 삶의 교훈들이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은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을, 마치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세상의 유혹과 시련 앞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지키어 그 날에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날을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19;6-10)에 비유하기도 한다. 교회는 순결해야한다. 한 지아비를 섬기기 위하여 죽음을 무릎 쓰고 정조를 지킨 춘향처럼, 주님을 만날 때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한다. 사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순교자라고 했다. 교회는 이 순교자들의 신앙의 터 위에 세워졌다. 순교의 신앙으로 교회는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왔다. 에베소서5;26-27의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티나 주름이나,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교회를 자기 앞에 내 세우시려는 것이며, 교회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엡1;23) 우리 주님 예수님은 흠과 티가 없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또한 이 땅위에 당신의 흠 없는 몸 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친히 피 흘려 죄인들의 죄를 구속하시고 의롭다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십자가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는 깨끗해야한다. 의로워야 한다. 성도의 공동체는 거룩해야한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마22;1-14)를 통하여 주님을 맞이해야 할 신부인 교회는 깨끗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을 둘러보러 나오신 왕이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추방하도록 지시하셨다. ”임금이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갔다가, 거기에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는 것을 보고서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가?’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 때에 임금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두운 데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하였다.”(마22;11-13)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 날에 주님 앞에 나갈 때 우리가 반드시 입고 나가야할 그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회개한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땅의 어느 누구도 회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의로운 사람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의 거룩함을 위하여 날마다 교회와 성도들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4의 말씀이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고 성문으로 해서 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3. 오늘의 성경의 말씀은 지금껏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성장해 온 교회에 일어난 하나의 끔찍한 불상사의 기록이다. 교회 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비참하게 죽어 나가는 참사를 전해 주고 있다. 그것도 무슨 간음죄를 지어 교회 안에 큰 무리를 일어킨 것도 아니고,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더욱 아니며, 그렇다고 방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남에게 사기처서 등쳐먹은 것도 아니다., 교회 안에서 헌금 문제로 일어난 지극히 작은 내부적인 문제 때문에 하루에 부부가 죽어 나가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헌금을 전혀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잘해 보려고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바치기까지 한 충성스런 사람이었는데, 본래 약속한 헌금을 다 바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 안에서 이 참담한 일이 생긴 것이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일이 있은 후에 ”온 교회와 이 사건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행5;11) 사도들의 권위는 더욱 확고하여지고 교회는 박해 가운데서도 활발하게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갔다. 교회는 주께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서 불러내신 사람들의 모임이다. 성령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의 주체는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교회를 볼 때 모여 있는 사람들만 본다면 큰 착각이다. 이 땅에 처음 교회가 세워 졌을 때, 당시의 사람들과 권력자들은 교회를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 생각했다. 교회 속을 들여다보니, 하나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고작 어부 출신이었고, 세상에서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린도전서 1;26)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사실상 우습게 보았다. 사도들을 불러서 적당히 협박하고 위협해서 돌려보내면 별 볼일 없는 교회는 쉽게 해산할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큰 착각을 한 것이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만의 모임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성령님이 역사하고 계셨다. 교회는 그 사도들에 의하여 움직이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었다. 그래서 교회에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운 권세가 있었다. 교회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를 보는 사람들은 영의 눈으로만이 볼 수 있는 이것을 보아야한다. 교회를 가볍게 보면 안된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4. 오늘 사도행전 교회에서 일어난 이 끔찍한 사건은 교회를 우습게 안 한 어리석은 사람의 죄로 일어난 불상사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 이 두 사람은 처음교회 그 역사의 한 가운데서 기적처럼 성장하는 현장을 보았다. 박해 속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힘있게 뻗어 가는 교회의 모습을 신기하게 보아 온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제 재물을 조금도 제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없고, 자기 밭을 팔아 교회에 바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았고, 특별히 신실한 사람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서 아낌없이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바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도 밭을 팔아 바치기로 결심했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거룩한 스스로의 결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막상 밭을 팔아 현금을 손에 잡았을 때에 일어났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헌금 전혀 못 바치는 사람도 있는데, 이 많은 돈을 다 바칠 필요가 있나!” ”밭을 얼마 받고 팔았냐고 설마 물으려고, 적당히 떼고 바쳐도 누가 알랴!” ”우리도 살아야지. 앞으로 살아가려면 믿음만 가지고는 살 수 없지. 돈이 있어야 돼!” 하여튼 이 부부는 서로 의기가 투합이 되어 밭 판 값의 일부를 아주 잘 감추어 두고 남편 아나니아가 그 나머지 일부를 가지고 교회에 와서 베드로 사도 앞에 내 놓았다. 어쩌면 ”이렇게 많은 돈을 헌금하시느냐? 고맙다”는 치하의 말이라도 들을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베드로 사도의 청천 벽력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아나니아는 들으시오.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사탄에게 홀려서,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얼마를 몰래 떼어 놓았소? 그 땅 팔리기 전에도 그대의 것이 아니었소? 또 팔린 뒤에도 그대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이니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할 마음을 먹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행5;3-4)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세 시간쯤 지나서 이런 일을 전혀 모르고 있던 아내 삽비라가 교회로 들어왔다. 베드로 사도가 그에게 물었다. ”그대들이 판 땅값이 이것 뿐이오? 어디 말해 보시오”이 물음 앞에 그 여인은 ”예, 그것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베드로는 ”왜 그대들 내외는 서로 공모해서 주의 영을 시험하려고 하였소? 보시오, 그대의 남편을 묻은 사람들의 발이 막 문에 다다랐으니, 그들이 또 그대를 메고 나갈 것이오”그러자 그 여자가 베드로 앞에 쓰러져 숨졌다. 사람들은 그를 그 남편 곁에 장사 지냈다. 5. 도대체 이 사건은 오늘 교회에 무슨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일까? 헌금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렇게 큰 일 난다는 것을 깨우쳐서 헌금 많이 하도록 하려는 것인가? 교회는 돈을 긁어모아서 사도들을 호화호식 시켜주는 곳인가? 아니요? 천만에! 교회는 어느 누구를 위한 이권 공동체가 아니다. 교회는 어느 누구도 돈을 목적으로 모이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어떤 명분 아래서도 깨끗해야 한다. 교회는 재산을 증식 시켜서 거대한 이권 공동체를 형성시키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주식회사가 아니다. 교회의 헌금으로 증권 투자해서 헌금의 이자를 불려서 수익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다. 헌금은 은혜 받은 자들의 자발적인 감사의 표현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이다. 그것이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 헌금이고 감사의 예물이다. 사실은 십일조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다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이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십일조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드리고자 했던 것이고, 할 수만 있으면 밭이라도 팔아서 드리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처음 십일조헌금에 대해서 알았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얼마 되지 않는 용돈이 생기면 십의 일조가 아니라 십의 십조를 드렸다. 이것이 나의 십일조의 시작이었다. 소득의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 8월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첫 번째 받았던 누른 월급봉투,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리던 날 그 날의 사건은 나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신앙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한 때는 내가 헌금을 많이 드린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하나님 앞에 나의 의를 내세우는 것 같아서 이제는 특별한 헌금은 무명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이 나의 자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내 삶에 누리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드릴 수 있는 것 가운데서 나의 의라고 할만한 것이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다해도, 목숨까지라도 아까워해야 할 것은 없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단순히 헌금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6.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은 교회 공동체의 성결을 요청하는 말씀이다. 인류를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놀라운 기적 속에 확장되고 있는 이 때 교회 안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교회 안에 거짓이 교묘히 믿음과 헌신을 빙자해서 들어온 것이다. 이 사건은 앞으로 계속되어질 주님의 교회가 세상 속에 어떤 모양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가름하는 중요한 다림 줄이 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참으로 거룩하고 깨끗하게 설 것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술수와 거짓이 판치는 세속적인 집단으로 전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어떻게 보면 이 정도의 거짓말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 한 사건을 통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위하여 단호한 결말을 보여 주신 것이다. 거짓은 사탄의 속성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말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생각해 보라. 알곡과 함께 가라지가 자랄 수 있다고 하지만 사단의 역사가 현저한데 그것을 그대로 용납한다고 하면 장차 이 땅 위에 세워질 교회들이 성령의 역사와 사단의 역사가 혼돈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은 땅에 떨어지고 구원의 역사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심판하신 것이다. 주님의 교회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흡사한 사건이 구약성서에도 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광야 40년을 지난 후에 가나안을 정복하기 시작한 초기에 이루어진 아간의 사건이 그것이다. 여호수아 7장에 기록된 이 사건 역시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가 시작되는 시기에 일어났다.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발을 내어 디디면서 그들은 철옹성 여리고를 뜻밖의 방법으로 쉽게 정복했다. 하나님의 지시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승리의 환호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들은 그 다음의 자그마한 성 ”아이”를 공격했다. 큰 성을 정복한 후라 그 정도의 성쯤이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한 여호수아는 3천명을 파견했다가 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때 여호수아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대답은 아이성의 정복에 실패한 것은 군사가 적었다거나, 작전이 잘못되었다거나, 기도하지 않고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이기지 못하고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희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여호수아7;11-13) 가나안에서 시작되는 새 언약의 공동체 안에 아간이라는 한 사람의 범죄가 은밀히 행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여리고 성에서 탈취한 물건 가운데서 시날산(産)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숨긴 것이다. 이 범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셨다. 대적을 결코 당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는 이 새 역사 속에 거짓이 판치는 더러운 도둑 공동체를 만드시기를 원치 않으신 것이다. 그래서 제비 뽑아 유다 지파, 세라 족속, 삽디의 가족, 아간을 뽑아 아골 골짜기에 버려 돌로 쳐죽여 돌무더기를 만들었다. 가나안 땅의 정복은 그 후에 다시 계속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당신의 교회를 더럽히는 모든 죄악에 대적하신다. 심지어 주님은 성도들의 몸조차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임을 일깨우시면서,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다 (고린도전서3;16, 6;19-20)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양을 팔고,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는 사람들을 내어 좇으시면서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마가복음11;17)하시며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후에 일으키리라 하셨다. 성전이 성전 되는 것은 거룩함에 있다. 20세기 초에 유명한 신학자 Karl Barth는 하나님을 좁은 인간의 사고에 한정시키려고 했던 19세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자(Let God be God)”라고 오치면서 인본주의적인 신학에서 새로운 신 정통주의 신학을 선도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교회를 교회 되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라고 외쳐야할 것이다. 사무엘상2장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을 버리시고, 무명의 사람 어린 사무엘을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7.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은 처음 교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나, 이 사건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행5;5, 11) 여기서 온 교회가 갖게된 두려움은 교회의 머리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심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총 안에 살아간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하나님께 바른 제단을 쌓았던 사람 아벨은 자신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인정했다. 그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렸다. 히브리서11장 4, 6절의 말씀이 이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야곱은 형 에서가 받아야할 축복을 대신 받은 후에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다가 루스 광야에서 한 밤을 지낸다. 이튼날 새벽 그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제단을 쌓으면서 말한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배게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창세기28;16-19) 하나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신앙,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고,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신 능력 안에 살아가는 신앙! 이것이 바로 요셉의 신앙이었다. 8. 오, 살아 계신 주님, 교회를 거룩하게 하소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소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경건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의 능력 안에 살게 하소서. 아멘.
교회의 성결함을 위하여/ 마18:15-17
교회의 성결함을 위하여 마18:15-17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룩, 효소, 미생물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 조차 생각되지 않는, 아주 작은 것이 밀가루 덩어리를 변화시킵니다. 죄는 누룩과 같습니다. 자그마한 것이라도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과 담을 쌓아 은혜의 통로를 막고, 우리의 삶의 저주와 심판으로 이끌고, 우리의 삶을 악하게 만듭니다. 거룩한 주님의 교회이지만 죄의 누룩이 들어오게 되면 교회를 분열시키고, 교회를 변질시키고, 교회의 성결함을 파괴합니다.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집안의 모든 누룩을 제거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악하게 변질시키는 죄를 제거하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면 우리의 형제 가운데, 교우 가운데, 죄를 지으면, 잘못된 신앙, 믿음에 빠지게 되면 먼저 찾아가 권면하라고 하였습니다. 권면을 듣고 - 죄에서 떠나, 잘못된 신앙에서 돌아선다면 다시 교우로서 선한 교제를 나누지만 그러나 권면을 듣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면, 그릇된 신앙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라. 교제하지 말아라, 상종도 하지 말아라, 교회에 발을 들여 놓지 말게 하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의 성결함, 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하여 악한 누룩, 죄, 그릇된 신앙, 이단 사상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항상 2가지와 싸워 왔습니다. 첫째는 외부로부터의 도전으로 정치적 박해와 핍박입니다. 로마 시대에 기독교는 10번의 대대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공산정권은 기독교를 아편으로 정의하여 수많은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고,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많은 시대, 많은 나라에서 교회는 배척을 받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둘째로 내부로부터의 도전으로 복음이 변질되고, 신앙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갈 1:8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후 1세기,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 다른 복음이란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다른 복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같은 변질된 복음,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변질된 신앙, 그릇된 믿음, 악한 사상이 교회 안에 침투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싸워야 하지만 교회 안에 들어온 변질된 신앙, 다른 복음과도 싸워야 하였던 것입니다. 무엇이 복음입니까? 진짜 순복음이 무엇입니까? 한국의 순복음 교회에서 “영혼이 복을 받고, 사업이 번창하고, 육체가 건강한 3박자 구원”을 말하였는데 이것이 순복음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함을 받는다는 것”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삭제하면 다른 복음이요, 변질된 복음이요, 이단 사상입니다. 초대교회의 유대인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할례도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주장하였습니다. 헬라 사상에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주장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인데 “율법을 지켜야 한다.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인데, 율법을 지키는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기에, 십자가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기에 다른 복음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는 것인데 “박태선이 감람나무다. 문선명을 참아버지다. 정명석이가 구주이다.” 하며 기독교라고 하지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이단에 대하여 연구하게 되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이단이 있는가 하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 아크로 폴리스 광장에서 서서 헬라인들을 향하여 변론할 “내가 보니 당신들에게는 모든 일에 종교성이 많도다” 하고 말하였는데 우리 한국인에게는 종교성이 많습니다. 우리의 종교성으로 말미암아 세계 어는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교회의 부흥이 이룩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이단들이 크게 번성하고 있습니다. 이단이 한자로 다를이, 끝단자를 사용합니다. 말 그대로 끝이 다릅니다. 언뜻 보아서는 똑같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도 있고, 예수님도 있고, 성령님도 있습니다. 예배도 있고, 기도도 있고, 열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끝이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구원함을 받는 것인데, 여기에 조금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고, 성경의 내용을 다 믿지만 조금 더해서 믿거나 덜해서 믿고, 해석을 아주 조금 다르게 하고 그래서 언뜻 보아서, 보통의 교인들이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너무 많은 이단들이 큰 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목사이지만 커다란 이단을 제외하고는 이단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모릅니다. 모든 이단들을 다 조사하고, 연구하여, 어느 끝이 다른지 알아내야 하는데 - 저도 바쁘고 분주한 사람인데 언제 그 이단들을 다 쫓아다니며 조사 연구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에서, 우리 교단의 총회에서는 전문적으로 이단만 연구하는 기관을 두었습니다. 그 분들이 누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어느 교회가 다른 복음을 좇는 이단인지를 조사 연구하여 발표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 발표를 보고 어디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검색엔진 네이버에서 이단을 치면 “이단, 이단, 그놈의 이단 타령은 언제 끝나는가? 이단, 이단하는데, 한군 사람들 특히 일부 종파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하면 왜? 목에 핏대를 세우는가? 이단, 이단, 우리나라처럼 많이 쓰는 나라가 없는 듯 합니다. 자기와 관점이 다르면 다 이단입니까? 왜 한기총에서 이단을 판별합니까? 한기총이 하나님입니까?” 이런 글들이 뜨게 됩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에 함께 군인 교회를 섬긴 권사님이 한 분 계신데, 저도 제대를 하고, 그 분 신랑도 제대를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만나게 되었는데, 우리 교단에서 다른 복음을 믿는 이단이라고 분류한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권사님과 대화하는 중에 “한국 교회 목사님들은 이상해요, 할 일도 없나봐요, 왜 이단 타령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그 권사님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가장 바른 교회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쓸데 없는 논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다르면 다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편협한 사람들이라고 몰아세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다른 복음과 싸워왔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주님의 복음 -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는 이 복음의 내용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교회는 순수한 복음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 가야 합니다. 바리새인을 향하여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으로 사람들로 그릇된 길, 심판과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고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처럼 다른 복음은 자신도 파멸에 이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변질된 신앙, 잘못된 이단 교회는 자신도 생명을 잃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싸워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교회는 신앙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을 통하여 몇 주째 “천국, 하나님의 나라, 생명”에 대하여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하고 값진 것이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생명을 얻어야 하고, 구원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함을 말씀하시는데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여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여서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 낫다 - 결코 다른 사람을 생명에서 떠나게 하여서는 안된다고 엄히 경계하셨고 “손이 범죄하면 손을 짤라버라고, 불구의 몸으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경우에도 천국에는 꼭 들어가야 한다” 말씀하셨고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마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다시 찾은 목자처럼 하나님이 천국에서 잔치를 열고 기뻐하시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 믿고 구원 받게 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서는 구원 받은 내 자녀가, 내 나라 백성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목자로 말미암아,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변질된 교회로 말미암아 실족하면 결코 안되는 것이니 교회에 다른 복음, 변질된 신앙, 이단 사상이 결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 발람의 교훈을 따르고,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온 이세벨은 교인들을 가르치고,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경계하십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단의 무리가 교회에 들어왔고, 곧 그들은 몇 사람을 옥에 던져서 환난을 받게 할 것이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하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칭찬을 받습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책망 받아야 하지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였고, 자칭 사도라하는 변질된 신앙을 전하는 이들의 거짓을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악안 영, 사단의 역사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습니다. 구약 시대를 보십시오. 참 선지자인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 바알과 아세라 거짓 선지자들과 싸움을 하는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850명입니다. 왕을 비롯한 집권자들이 다 거짓 선지자를 따릅니다. 백성들은 중간에서 머뭇 머뭇 하는 것 같지만 심정적으로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데 엘리야 선지자 혼자서 제단을 쌓지 않았습니까? 엘리야 선지자 혼자 하나님 편에 서 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사단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습니다. 몹시 두려워하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 왕궁에는 나라의 녹을 먹는 많은 수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많은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성별된 성직자가 수없이 많지만 “내가 보낼 사람이 없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왕궁에는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괜찮습니다. 안전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고, 거룩한 성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입니다” 말하였습니다. 멸망한다고 홀로 외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보다, 안전하다고 외치는 다수의 선지자들의 말에 임금도 백성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홀로 외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가 쓴 글을 불에 태워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친대로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 유린되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 가짜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혼자 진짜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을 넘어뜨려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도, 초대교회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도 우리를 넘어뜨려, 실족케 하려는 악한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감사한 것은 구약시대와 같지 않게 가짜보다는 진짜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 잘못된 믿음, 이단 사상을 가진 목회자, 교회가 있지만, 참다운 주님의 교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으려는 것처럼, 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를 넘어뜨리고, 실족시켜서 자신들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번 주간 교회와 신앙이란 신문의 1면 기사입니다. 5천명이 출석하는 부산의 어느 교회 청년부에 3명의 새로운 청년들이 등록하였습니다. 평범한 청년들이었는데 2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이상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말씀을 안 가르치고 인간의 소리만 한다.” 등 교회에 대한 불만 불평들을 늘어 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몇 몇 청년들이 이들의 생각에 동조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잘 가르치는 곳이 있으니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하였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기 위하여 다녔습니다. 그러나 따라 나섰던 청년들은 그곳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 단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알고 보니 청년부 뿐 아니라 교회 부서 곳곳에 그들이 침투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요람을 통하여 교인들의 전화번호, 주소, 이메일 등을 알게 된 이단 단체는 무료로 성경공부를 가르친다는 홍보자료를 발송하였습니다. 우리도 잘 보십시오. 교회에 대하여 이런 저런 불평을 늘어 놓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히 들어온 이세벨이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14:14을 보면 “거짓 예언자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 마음의 생각대로 거짓되게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거짓 예언을 하겠습니까? 예레미야처럼 “멸망한다.” 예언하면 백성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핍박을 받지만 자신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과 관계 없이, 백성들이 듣기 좋은 거짓 예언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미선교회란 사이비 종교 단체는 1992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니 준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미혹된 어리석은 사람들은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쳤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교회도 재산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바치지 마세요, 교회도 필요 없습니다.” 하여야 할텐데 다 받았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허탄한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미혹된 어리석은 사람들은 거지가 되었고, 허탄한 거짓을 말한 가짜 목사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사이비 단체에서는 “대 환란이 시작될 것이니 비상 식량을 준비하여야 한다”며 비상식량 박스를 팔았는데, 이를 통해서 수십억원을 매상을 올렸다고 합니다. 썩어질 세상의 재물을 얻으려고 자기 생각대로 거짓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13장을 보면 솔로몬이 죽은 뒤에 여로보암이 다윗 왕조를 반역하여 10지파를 이끌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웁니다. 사마리아를 수도로 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에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다윗 왕조에 마음을 빼앗길까 염려하여 예루살렘 성전처럼 단과 벧엘에 전을 지어 백성들로 제사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흉내내어 제사장을 두었고, 제물을 드리는 제단과 분향단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대신해서는 금송아를 놓았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하면 다른 복음이요, 사이비요, 이단입니다. 여로보암 임금이 벧엘의 제단에서 분향을 할 때에 갑자기 하나님의 선지자 한 사람이 나타나서 외치는데 “제단아! 장차 이 제단 위에 저 거짓 제사장이 제물로 올려질 것이고, 뼈가 태워질 것이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또 외치기를 “지금은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리라” 하였는데, 단이 갈라져 재가 쏟아진 것입니다. 왕은 손을 펴서 그 선지자를 기리키며 “저 놈을 잡으라” 하고 외쳤는데 펴진 손이 오무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왕이 간청합니다. “저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 주십시오. 내 손을 다시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선지자가 기도하니 왕의 손이 전과 같이 되었습니다. 크게 두려워 한 왕은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나와 함께 궁에 들어갑시다. 융숭한 대접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신께 예물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길로 총총 사라졌습니다. 진짜 선지자입니다. 왕 앞에 나아가 당당히 외친다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걸고 외쳤습니다. 왕의 융숭한 대접을 거절하였습니다. 오늘날 재물에 눈이 어두워 다른 복음을 외치는 사람이 많은데 그는 재물의 유혹도 뿌리쳤습니다. 벧엘에 한 노 선지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용감한 선지자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노 선지자는 나귀를 타고 용감한 선지자가 간 길로 따라갔습니다. 나무 아래 쉬고 있는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당신은 참 훌륭한 선지자입니다. 내 집이 가까이 있으니 나와 함께 우리 집에 가서 음식을 먹고 쉬었다 가십시오”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입니다. 괜찮습니다. 함께 갑시다.” 용감한 선지자가 망설이자 다시 말하기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집에 데리고 가서 먹고 마시게 하라” 하고 속였습니다. 노선지자를 따라간 용감한 선지자는 노선지자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쉬고 돌아가다 사자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왕 앞에서도 용감했던 선지자, 재물의 유혹도 과감하게 물리친 선지자 그러나 “나도 선지자이니다. 나도 천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는 말에 쉽게 넘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계시를 받았는데, 내가 환상을 보았는데, 네가 천사의 음성을 들었는데 ---” 이런 말을 들으면 신앙에 있어서 진실했던 사람이, 시련 앞에서 담대했던 사람이, 지금까지 믿음의 길을 잘 걸어왔던 사람이 쉽게 넘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말 들어 보았습니까? “그 분은 참 신령해요. 그 분 참 기도 많이 한 분입니다. 그 분은 투시의 은사를 받아서 우리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본답니다. 그 분은 예언의 은사를 받은 분이라, 우리의 답답함을 시원케 해줍니다. 그 분은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응답이 빠릅니다.” 무엇인가 있는 줄 알고, 귀가 솔깃하여 듣고, 따라가고, 다른 복음에 미혹되고, 실족하여 넘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17년 동안 목회를 하였습니다. 40여년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엇인들 안 보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뭘 봤다는 사람치고 제대로 본 사람을 못 보았고 무엇을 들었다는 사람치고 제대로 들을 사람을 못 보았고 능력의 행한다는 사람치고 진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청년 때에는 부흥회도 많이 하였고, 기도원에도 많이 다녔습니다. 그 때에 많은 부흥사 목사님들이 특별히 다니엘서, 요한 계시록을 가지고 설교를 많이 하셨는데 “다니엘서 70이래라는 말이 있고, 계시록에 7년 대환란이라는 말이 있고, 그래서 이렇고 저렇고 하여 앞으로 곧 아마겟돈의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이고, 7년 대환란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 1980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1990년도에 지구의 종말이 오는데 --” 이런 설교를 가만 듣고 있으면 목사님이 보통 신통력이 있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천기를 알고 계신 것입니다. 어쩌면 성경을 그렇게 잘 쪼개시는지--- 저렇게 신령하신 목사님은 화장실도 안 가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다 허황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어느출판사에서 1976년에 출간한 “평신도를 위한 다니엘서 강해” 라는 책 126페이지 2째줄부터 “유럽의 10개국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통합되면 강력한 지도자가 나올 것이고 연방 대통령이 선출될 것인데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1980년을 통합의 목표로 삼고 있는데 장담하고 있습니다.” 223페이지 3째줄부터 “유럽의 통합 대통령이 나와서 이스라엘과 7년 계약을 맺는데 그 때부터 7년 환난이 시작됩니다. 7년 환난의 기간 중 3년 반 때에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고, 예수님이 강림하셔서 악한 자들을 멸하시는데 죽은 자가 3억은 될 것이고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지금 우리는 “익은 밥 먹고 무슨 선 소리를 하는가. 웬 봉창 뚤어지는 소리인가?” 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000이십니다. 1970, 80년 대에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부흥사들에 의하여 많이 들려졌습니다. 그 때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인들은 뭔가 있는 것 같고, 천기를 알고 있는 것 같고, 신령한 목사님이란 생각을 하야 우르르 몰려 갔던 것입니다. 왜 이단들이 생기는지 알겠습니까? 저같이 “예수, 십자가, 은혜, 복음, 섬김, 사랑, 충성” 이란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해서는 교인들이 결코 신령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마치 천기를 알고 있는 듯이, 남들이 안 하는 이야기, 교인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알기를 원하는 내용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담대하게 외치면 뭐가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는 줄 알고, 신령한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은 목사가 말하면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만 그런 목사님들이 한 마디 하면 신통해서, 혹은 무섭고 두려워서 절대 순종합니다.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처럼 허탄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직통 계시 받은 말씀인 것처럼 담대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고, 뭔가 있는 줄 아는 어리석은 교인들, 하나님의 사람을 거부하면 재앙을 만날까 하는 두려움 속에서 이단의 교세가 날로 커지고, 많은 진실된 성도를 미혹하여 넘어지게, 실족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목사로서 - 신령한 목사다 하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저도 목소리를 깔고 뭔가 있는 사람처럼 직통 계시를 받은 것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척, 안 보이는 것을 보이는 척, 미래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것입니다.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앞에서,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인 성도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염려하신 대로 나쁜 누룩인 다른 복음, 변질된 신앙, 이단 사상이 거짓 목자를 통하여, 넘어진 교인들을 통하여 우리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미혹당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은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신앙생화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 위에 서서 주님이 주신 복음을 간직한 교회를 다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진짜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시원치 않게 보였고, 거짓 선지자가 참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매 주일 “예수, 십자가, 사랑, 복음, 천국, 생명, 구원, 봉사, 충성, 헌신” 에 대하여 설교 하지만 이것이 진짜 목사의 진짜 설교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이 세우신 교회요, 바른 믿음의 터 위에 서 있는 교회요, 주님이 주신 복음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이 교회에 있는데 어디가서 기웃 거린단 말입니까? 이 교회에서, 바른 믿음을 가지시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셔서,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이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내려야 할 결론/ 단호한 성결의 삶/ 느13:1-
내려야 할 결론/ 단호한 성결의 삶 느13:1- Ⅰ. 들어가는 말 우리는 15회에 걸쳐서 느헤미야를 공부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살펴 온 것입 니다. 포로 2세대에 해당하는 느헤미야에게 들려 온 예루살렘의 소식과 그로 인해 방성대곡하며 기도했던 느헤미야,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아픈 가슴으로 40여일을 기도하다가 아닥사스다 왕의 앞을 통과하던 느헤미야의 사랑과 믿음, 성벽을 중건하기 위해서 너무나 지쳐 버린 백성들의 어깨에 힘을 북돋우기 위해 행했던 느헤미야의 연설과 {일어나 건축하자}는 백성들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히 들리는 듯합니다. 그리고 성벽 재건이 시작될 무렵 산발랏 일당들 의 집요한 반대와 내부에서부터 일어난 원망들을 얼마나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처리해 내는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 도력과 이제 완성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의 물결들. 우리는 그들의 부흥의 현장 속에서 얼마나 함께 기 뻐하였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서 결핍된 열정들과 말씀에 대한 사모함 들을 되찾아야 함을 역설하였습니까? 이제 우리는 느헤미야의 마지막장에 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결론을 끌어내야 합니다. 느헤미야 전 체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꼭 얻어야 할 한 가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미 살펴 온 것처럼 이들이 생활하던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상실의 의미를 가지는 이방인들과의 결 혼이 보편화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이들은 안식일과 십일조 율법을 지키는 일에 무능해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들 에게 말씀이 회복되고 수문앞에서의 부흥을 통하여서 자신들에게 가만히 들어온 것들을 절개해 나가기 시작했습니 다. 그리고 과감히 잘못된 부분들을 잘라 내었습니다. 그리고 다짐의 인(印)을 쳤습니다. 얼마나 뜨거운 시간들이었 는지..... 그 일이 있고나서 느헤미야는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유다 총독으로서의 재임 기간을 끝내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있던 12년의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 신이 얼마나 페르시아에 있었는지를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저희가 살피고 있는 13장은 페 르시아에 갔다가 다시 온 시점입니다. 그리고 이제 살펴볼 일련의 상황들은 단기간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학자 들에 따라 다르기는 합니다 마는 대략 7년에서 10년의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7-10년 동안 자리를 비운 사 이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떻게 변해 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를 관찰해야합니다. 이일은 우리에게 느헤미야에 대한 결론을 가지게 해 줄 것입니다. 아울러 느헤미야가 살았던 이스 라엘의 마지막 역사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별로 다르지 앟ㄴ음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Ⅱ. 본문 관찰 본문을 살피기 전에 11장과 12장을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11:1에서 12:26까지 지속되고 있는 명단은 예루살렘에 들 어와 살게 된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7:73절의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백 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이 다 그 본성에 거하였느니라\"에 이어지는 기사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7:4은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11:1-2절에 지도자들이 10명당 1명 꼴로 성에 들어와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12:26-43절까지는 7장 이후 중단되었던 성벽 중건 이후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성벽 낙헌식 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이 성전 봉헌은 성결과 감사의 찬송 그리고 큰제사였습니다. 그리고 10:28절 이하로 이어지는 12:44-13:3절은 당시 유대인들의 상황, 즉 이들이 얼마나 율법을 준행하려고 애썼으며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암몬 자손을 분리시키는 것은 신23:3-6절에 하나님께서 명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략 10년의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은 본문 6절에 \"그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않 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왕에게 다시 말미를 청하여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와 보니 상황이 이렇 더라는 식으로 본문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4-9절, 10-14절, 15-22절, 23-27절, 28-31절의 소단락으로 끊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10, 15, 23에 {내가 또 알아본즉}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10장의 인친 내용과 비교하여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것 입니다. 10장의 여섯가지 인친 내용과 13장의 지켜지지 않은 일 비교표 10장의 여섯 가지 내용 13장의 다시 일어난 문제 느헤미야의 대응 ⑴ 근신하여 율법을 지키겠다.(29절) 30-31절 - 내가 이와 같이 저희로 이방 사람과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함 ⑵ 잡혼을 하지 않겠다(30절) 1)4-7절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친인척 비리 2)28절 - 엘리아십의 손자가 산발랏의 사위가 됨 3)23-27-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아서 일어난 사건 - 아이들이 아스돗 방언은 절 반쯤하고 유다방언은 못하는 상황 -8-9절:도비야의 세간을 방밖으로 내어 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하고 하나님의 전 기명을 다시 들여놓음 -28:쫓아내어 떠나게 함 -25:저주하고 책망하고,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맹세시키고 훈계함 - 훈계함(26-27절) ⑶ 안식일을 지키겠다(31절) 15 :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 살렘에 들어와 파고 있음 16 :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자손에게 팔고 있음 -15:경계함 -17:유다 귀인들을 꾸짖음 -19절 :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까지는 열어 주지 않음, 아무짐도 들 어오지 못하게 함 ⑷ 성전세를 자발적으로 내겠다(32-33절) 10-14:레위 사람들에게 받을 것을 주지 않음으로 성전에서 직무를 행하는 사람들이 전리로 도망함. -11절:성전이 버린바 되었음을 꾸짖음 -12절:온 유다가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임 -13절:새로운 종교 지도자를 세움 ⑸그밖에 성전에 쓸 것들을 드리겠다(34-35절) ⑹처음 소산으로 십일조를 드리겠다.(36-39절) Ⅲ. 결론과 적용 우리는 이와 같은 관찰을 통해서 10년여의 기간에 그들이 맹세하고 인(印)을 친 내용들이 송두리째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좋은 실례(實例)입니다. 저 와 여러분은 이들보다도 훨씬 편리하고 유혹 많은 도시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유배에 있 을 때 그들에게는 얼마간의 자유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그들은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바벨론 문화요 언어였을 때 그들은 자발적으로 혼합의 길을 택했습니다. 현재 우리의 상황도 이 와 같은 유배 상태에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기독교적인 문화와 삶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 럽게 스스로 동화되어져 가는 것이 우리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뢰할 수밖에 없는 사람 인 것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연약한 질그릇인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무감각하거나 방만해진다면 여기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펴 온 바에 의하면 과격할 정도로 행동하고 있는 느헤미야의 모습 을 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 8절의 \"내가 심히 근심했다\", 14절의 \" 내 하나님이여...\", 22절의 \"나의 하나님이여...\", 29-31의 \"내 하나님이여...\"는 얼마나 느헤미야가 하나님앞에 몸 부림치면서 이 일들을 감행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해 줍니다. 느헤미야는 이 모든 일을 기도로 신중히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결코 성격이 못되었다거나 폭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정도의 단호함이 아니고는 이들의 삶 의 방향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유배되어 가는 유다 백성들에게 예언할 적에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 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 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렘 29:4-7). 마치 잘 섞여서 살라는 말씀처럼 보여지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세상과 단절되어서 살아서도 안되는 것이고 단절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그곳에서 번성하고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타협과 순응을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마지막 행동을 우리의 삶의 모토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이 도시 속에서 생존하기 위 해서는 과격한 단호함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적당히 지키다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자녀를 낳고 번성하되 그들과 섞여서는 안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적당히 넘어가서도 안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느헤미야의 결론을 {단호한 성결}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레11:45)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이 거룩함은 단호한 성결의 의 지가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이 도시 속에서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 속에서 집을 짓고 자녀를 낳고 열매를 먹어야 합니다. 쇠잔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까 지도 내어 주면서 번성하는 것은 참된 번성이 아닌 것입니다. 하여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단호하게 구분하 는 {단호한 성결}의 삶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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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성결의 축복/ 막7:1-23
내적 성결의 축복 막7:1-23 저는 매주 설교하기 전, 사무실에서 예배 준비를 할 때, 또는 심지어 강대상에 엎드려 예배를 위해 기도할 때, 제 안에 고통스런 질문이 하나 일어납니다. 거의 매주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질문입니다. ’나 같이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어떻게 성도들 앞에 설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그런 일종의 자기 성찰적인 질문입니다. 그런 질문이 일어나면 참 힘이 빠져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강대상에 설 확신이 생기지 않아요. 그럴 때 저는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보배로운 피, 주님이 골고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그 피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나는 부족하고 추합니다. 그러나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내가 의지합니다. 나를 정하게 하시옵소서. 그 피로 나를 씻어 주시옵소서. 그 피로 나를 깨끗하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주님의 그 보배로운 피가 저와 여러분을 깨끗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또한 말씀으로 깨끗함을 얻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느니라.” 주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깨끗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아요. 거울에 자기를 비추면서 흠과 티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거하지요. 마찬가지, 말씀의 거울에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더럽고 추한 모습들을 하나 씩 하나 씩 제거하는 겁니다. 오늘도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불신과 의심 두려움을 털어 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여러분 안에 있는 더러움과 추함이 깨끗함으로 바뀌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또한 자기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려고 고난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Be holy because I am holy.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당신과 같이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더럽고 추하다하여도 그 속에서 자기 백성만은 구별되고 깨끗하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님이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20세기 프랑스와 유럽의 영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마르트 로뱅(Marthe Robin)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여자로 인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여러 가지 새로운 신앙 운동들이 그녀에게서 영향을 받아 생겨났습니다. 마르트 로뱅은 1902년 프랑스의 샤토네프 드 갈로르라는 곳에서 태어납니다. 열 여섯 살 때 병에 걸리게 되는데 의사들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런 병이었습니다. 병은 갈수록 악화되어갑니다. 그런 중에서 마르트는 하나님이 자신을 색다른 삶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삶은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요. 23살에 마르트는 ’포기 각서’라는 것을 씁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즉 기억과 이성(理性)과 의지, 몸과 모든 감각, 지성과 모든 기능, 마음과 모든 감정을 사랑의 하나님께 바치는 그런 ’포기 각서’를 씁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해요. 저는 무조건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 오 내 영혼의 사랑이시여!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자 모든 것을 버립니다. (Raymond Peyret, Marthe Robin (New York: Albe House, 1983), p.39. 26살에 마르트는 두 다리가 완전히 마비되었고 곧 양팔도 마비됩니다. 그때부터 마르트는 먹지도 않고 마지시도 않고 자지도 않습니다. 도저히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이 시작되는 거예요. 1981년 79살로 죽을 때까지 51년 동안 그녀는 매주 성찬 때 받아먹는 한 조각 성찬 떡과 포도주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습니다. 완전한 ’금욕’ 그 자체였습니다. 2년쯤 지났을 때, 그러니까 그녀의 나이 28살이었던 1930년 9월에 예수님이 실제로 마르트에게 나타나 묻습니다. ”나처럼 되고 싶으냐?” 마르트는 ”네”라고 답합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마르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예수님의 상처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때부터 마르트는 매주 한 차례씩 예수님의 고난 속에 온전히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을 그녀도 똑같이 당하게 돼요.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고 머리에는 가시 자국이 생겨났습니다. 손과 발의 못자욱은 그녀를 더욱 조여왔고 옆구리의 창 자국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옵니다. 매주 금요일이면 이런 예수님의 죽음의 고난이 마르트를 거의 혼수 상태에 빠뜨리고 그러다 토요일이 되면 회복되어집니다. 그리고 주일이나 때로는 월요일까지 완전 탈진 상태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합니다. 해가 더해갈수록 고난의 깊이도 더욱 깊어갑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 받았지만 점차 마르트 자신이 고난받는 예수님이 되어져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르트는 자신을 여러번 방문했던 프랑스 철학자 장 기통(Jean Guiton)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환상 속에서, 예수께서 갈보리로 가시던 그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지금은 그보다 깊어졌다. 지금 나를 사로잡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 오직 그분이시다.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 . . 이런 일은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이 지탱해 주시지 않으면 금방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너무 아름답다. (Jean Guitton, Portrait de Marthe Robin(Paris: Grasset, 1985), p.199. 마르트가 살아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과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찾아왔습니다. 티없이 맑은 눈과 미소로 마르트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유머 감각도 풍부했다고 해요.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언제나 손님에게 모든 관심과 배려가 향해 있습니다. 상대가 말문을 열기도 전에 이미 문제를 알아차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구체적 지침을 분명히 일러 줄 때도 있었고, 계속 질문만 던질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방을 떠나면서 내면에 깊은 평안을 느꼈다고 합니다. 고난이 빚어내는 내적 청결, 깨끗함, 순수함, 거룩함 그 자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기의 사람을 거룩케 하십니다. 요셉의 고난을 보십시오. 형들에게 팔리워 노예와 죄수의 신분으로 오랜 동안 고초를 겪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길면 길수록 요셉의 내면은 더욱 깨끗하여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를 보게 됩니다. 고난은 축복입니다. 여러분, 고난은 축복이에요. 지금 고난 중에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의 내용과 정도, 또 이유를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고난은 축복의 두레박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우물에서 생명수를 길어 올리는 두레박, 고난이 바로 그 축복의 두레박입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의 고백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정금으로 만들어간다는 사실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렇게 깨끗함을 받은 자가 누리게 될 축복은 무엇인가.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또 고난을 통해 정화되고 순결해집니다. 깨끗해집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내적 성결의 축복인데, 우리의 내면이 깨끗해졌을 때, 우리의 보이지 않는 영적 삶이 정화되고 순결해졌을 때, 그때에 나타나는 축복이 무엇인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흔히 ’청결한 자들’ 또는 ’정결한 자들’ ’깨끗한 자들’로 번역되는 헬라어 원어는 ’hoi katharoi’입니다. 이 말은 ’katharotes’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katharotes’라는 말은 ’고요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청결한 자들’ ’깨끗한 자들’이란 말은 곧 ’흔들림 없는 고요한 상태의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에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란 마음에 출렁거림이나 요동함이 없는 고요하고 맑은 마음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요동하게 하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마음에 파도가 일게 하는 것, 그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의 파도예요. 육적이고 감각적인 욕심이 일어날 때 그것은 거센 파도와 같아서 한 가정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소유에 대한 끝없는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자식이나 어떤 외모를 통해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런 욕심, 이런 모든 욕심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고요함이 상실되어지는 겁니다. 요한복음 1: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하나님을 보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고요한 호수에 달빛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고요한 마음, 깨끗한 마음에 하나님의 모습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줄 믿습니다. ”마음을 곱게 먹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이런 대중가요 가사도 있지요. ’마음이 곱다’ ’마음이 예쁘다.’ 그 말은, 그 말의 숨겨진 의미는 세상 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마음이 고우면 아무리 미운 사람도 곱게 보입니다. 마음이 고우면 아무리 싫고 부정적인 것도 감사로 아멘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자기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내면이 얼마나 고요하고 청정하냐 거기에 모든 세상 만사가 달려 있다는 거예요. 원래부터 미운 사람도 없고 원래부터 좋은 사람도 없습니다. 타고나기를 실패하고 안 될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겁니다. 찬송가 495장, ’내 영혼이 은총 입어’의 3절은 이렇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늘 나라가 따로 없습니다. 주님 뵈올 수 있는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모든 죄가 사함 받은 곳, 보혈로, 말씀으로 고난의 삶을 통해 마음의 깨끗함을 이룬 곳,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둘째, 내적 성결을 통해 주어지는 두 번째 축복, 그것은 영원한 생명수입니다. 제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청년부 생활을 할 때, 그때 청년부는 매주 금요일날 모여서 청년부 예배를 드리고 잠깐 쉰 다음에 밤 11시부터 다시 모여서 철야 기도를 했습니다. 11시부터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 해뜰 때까지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배우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저는 청년때 그렇게 기도했던 것, 그것 가지고 목회하는 것 같아요. 큰 영적 자산이에요. 청년때 기도하는 것은 마치 은행에 저금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년 때 열심히 기도하는 것, 저금하는 거예요. 그 저금 찾아 쓰면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한번은 기도하다 환상을 보았습니다. 제 평생에 잊을 수 없는 환상이에요. 그때는 참 은혜를 많이 사모했습니다. 기도의 대부분이 ’성령 충만 주세요’ 그겁니다. ’성령 충만’ ’성령 충만’ 그것이 대부분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날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셨어요. ’네가 성령 충만 달라고 기도하는데, 이것이 지금 너의 상태다’ 하시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탁자 위에 한 유리 그릇이 놓여 있어요. 거기에 주전자 같은 것으로 물을 부으려고 하는데, 물을 부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 유리 그릇 안에 갖가지 오물 찌꺼기가 다 들어 있는 겁니다. 더러운 침 뱉어 놓은 것, 무언가 썩은 것, 담배 재 같은 것, 그릇은 또 닦지 않아서 때가 끼어있습니다. 제가 보아도 도저히 거기에 그 맑고 깨끗한 물을 따를 수가 없었어요. ’네 영적인 그릇이 이렇다’는 겁니다. 성령의 생수, 은혜의 생명수를 하나님이 부어주시려고 하는데 내 마음의 그릇, 영혼의 그릇이 깨끗지를 않습니다. 생수가 부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천지 만물도 다 주셨고요, 우리 생명도 주셨고요,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다 주셨습니다. 주기를 좋아하는 분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Whatever you ask, it will be listened to and acted upon.”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시는 분입니다. 하물며 성령 달라고, 은혜 달라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안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보니까 줄 수가 없어요. 그 성령의 생수가 주어졌다가는 오히려 더 더러운 물이 되고 저를 더 망칠 수 있습니다. 왜? 받을 그릇이 되어있지 않으니까? 청결하면 주십니다. 깨끗하면 부어주십니다. 은혜의 생수, 영원한 생명수, 성령의 생명수를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7:37-39절입니다. 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믿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말씀으로 깨끗함을 받은 자, 그런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줄 믿습니다. 성령이 한량없이 한량없이 부어질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 26장 다 같이 찾아보시겠습니다. 12절부터입니다.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17)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18)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얻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우물은 곧 부를 상징하는 겁니다. 1년 중 비가 오지 않는 기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가축을 먹이고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물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우물을 팔 때마다 물을 얻었고, 19절에 보면 아예 그 우물은 샘 근원이라고 했어요. 거부가 됩니다. 주변 호족들로부터 ”너는 여호와께 복 받은 자”라고 불려집니다. 여러분, 땅의 우물만 많아도 이렇게 잘되고 거부가 되는데, 하늘의 영원한 생명수, 성령의 생수가 부어지기만 하면 놀라운 영적 축복과 은혜가 넘쳐납니다. 누구든지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부어주세요. 누구나 사모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문제는 내 영혼의 그릇입니다. 내면의 상태입니다. 보혈과 말씀으로, 그리고 고난을 통해 우리 영혼의 그릇은 깨끗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껏 부어주십니다. 성령의 생수, 영원한 생명수, 축복과 은혜의 생수를 차고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이런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너희는 스스로를 성결하게 하라(최대 강병의 원리)/ 수3:1-6/ 이석권 목사/ 2001-09-08
너희는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최대 강병의 원리) 수3:1-6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 내일이면 주께서 너희 가운데 이적들을 행하시리라.”하더라. (5) 여호수아 3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인데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 성도들의 성령 세례의 모형이다. 홍해에서 물 세례를 통해서 중생의 경험을 하고, 이제 가나안 입국을 앞에 놓고 여리고 성의 승리는 내 육의 소욕을 요단강에서 완전히 장사 지내는 데 있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요단 물이 갈라지는 사건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심을 이로써 알라고 하셨다. 그리고 카나안 일곱 족속들을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이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카나안 칠족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옛 사람의 모형이다. 우리가 초기의 구원에 있어서 중생의 경험을 했다고 해서 우리 마음속에옛 사람의 원죄가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홍해 만을 건넌 제 1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멸망을 받았고, 제 2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요단 물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영적 이스라엘인 나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0장에서 이스라엘의 이 역사적 사건은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고전 10:11). 성결은 거룩이란 용어와 관련되어 있는데, 사람들의 경험에 따라 여러 가지 말로 표현되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충만’이라 하였고, 사도 요한은 ‘온전한 사랑’ 웨슬레 선생은 ‘기독인의 완전’이라 하였다. 그리고 우드는 성결에 대해서 말하기를 “죄로부터 구원과 하나님의 형상과 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도덕적 의미에 있어서 건강한 것, 온전한 것,또는 완전한 것, 보통 용법에 있어서는 순결과 경건과 같은 의미다”라고 하였다. 그밖에도 성령세례, 성화, 성령 충만, 혼의 안식 등으로 표현하였다. Ⅰ. 성결해야 할 이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 77 - 1.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하여 “내가 오늘부터 모든 이스라엘 목전에서 너를 크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모세와 함께하였던 것처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것을 알리라.(7절). 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법궤안에 세가지(십계명,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의 성 삼위 하나님의 속성은 모두 거룩인데, 이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과 동행하는 원리는 우리의 거룩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요, 죄인과는 같이 하실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제일 조건이 우리의 성결이다. 우리 성도의 생애에서 성결하게 사는 것이 행복보다 나은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성결케 됨은 거룩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본질적 변화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닮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결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2. 하나님의 기적을 힘입기 위하여 ‘너희는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 내일이면 주께서 너희 가운데 이적들을 행하시리라.’(5절) 평생에 처음 가는 위험한 길을 가장 안전하게 행하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힘 입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내일 이스라엘 가운데서 요단 물을 가르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하신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하시는 목적이 성결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의 사람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종국적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살전 5:23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오는 구원을 초기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카나안에 들어가는 구원을 종국적 구원이라 부르고 싶다. 초기 구원과 종국적 구원 사이는 엄청난 거리가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리고 초기 구원자가 다 종국적 구원을 완성한 것이 아니다. 여호수아와 칼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 78 - 그들은 홍해를 건너는 물 세례를 통하여 중생의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요단 물을 건너는 상령의 세례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실패케 하는 죄의 쓴 뿌리 때문에 모두 도중에서 구원이 실격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종국적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우리에게는 성결의 은혜가 절대 필요한 것이다. 믿음의 안식, 승리적 생활, 충만한 축복, 보다 높은 그리스도인의 생애 등의 같은 말은 모두 성도들의 성결 생활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 5:23) 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종국적 구원을 말씀합니다. Ⅱ.성결의 방법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거룩하게 됨이라.’(딤전 4:5). 1. 거듭(중생)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결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제 2차적인 분명한 역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두 번째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첫 번째 것을 경험해야 된다. 아직도 죄된 행동을 하는 사람 곧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는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 받기까지는 마음의 깨끗함과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이집트에서 나와서 아직 홍해도 건너지 못한 자가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 2차적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무엇 보다도 제 1차적인 중생의 경험이 먼저 필요합니다. 2.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 생명에 참예하고, 죄에서 용서를 받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세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의 결핍, 자기 중심, 타인에 대한 판단, 시험 앞에 무기력 등, 원치 아니하는 죄의 쓴 뿌리가 아직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중생한 생애의 확실한 하나의 특색은 이러한 내적 죄에서 벗어나서 의를 사모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 79 - 아직 중생의 경험이 없는 자는 이런 욕망이 없다. 퀘이커 신자인 스미스 여사는 이 은혜를 사모하여 말하기를 “나는 성결을 사모하기 시작하였다. 나는내가 아직도 서로 잡혀있는 죄의 뜻에 완전 일치되고, 그와 더불어 방해 받지 않는 교통을 갈급하게 소원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토레이 박사는 “이 은혜 없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다고 사람치고 이 축복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내가 성령으로 세례 받았음을 알게 되기까지는 나의 봉사하는 일에서 한걸음을 더 내어 디딜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3.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야 한다. 엘리야는 갈멜산 제단에 송아지를 잡고 제물의 각을 떠서 완전히 성별하여 바칠 때 불의 응답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결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성별시켜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나의 귀한 것을 희생하여야 한다. 나의 희생이 없이 이 귀한 은혜를 받을 수 없다. 4.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야곱의 벧엘의 사건은 중생의 경험이요, 브니엘의 사건은 성결의 경험이다. 벧엘에서 브니엘의 사건이 있기 까지는 20년이 걸렸다. 야곱이 벧엘에서 기도할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광경을 보기는 했지만 그때 성결의 체험을 한 것은 아니다. 성결의 체험은 브니엘에서, 밤을 새워가며 천사와 씨름하는 승리적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야곱은 벧엘에서 중생의 경험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옛 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있었다. 브니엘에서 기도할 때 환도뼈가 위골된 것은 옛 사람이 죽는 모형이다. 이때 야곱은 이스라엘의 새 이름을 받았으니, 성결 체험이 이루어 진 것이다. 내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기도하는 자는 반드시 이 은혜를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5. 믿고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 물에 들어 설 때, 강물이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믿음과 순종의 행위를 말해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결케 하시기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을 믿어야 한다. - 80 - 히 13:12=? ‘그런즉 예수께서도 자신의 피로써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의 죄의 옛 사람이 이미 죽은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하게 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에 들어설 때, 물이 그 위에 넘친 것은 그들이 이미 수중에 장사 지낸 모형이다. 그리고 요단 저편 새 땅에 상륙한 것은 예수님 부활의 새 생명에 참예하는 모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그들 앞서 진행하며 일어난 초자연적 사건인 것과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신 말씀 안에 우리의 성결이 다 이루어 놓은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감사생활은 곧 성령충만을 뜻한다. ‘술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들을 지어 말하고,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고, 항상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서로 복종하라.’아멘.
당신의 식생활은 성결 하십니까?/ 레11:
당신의 식생활은 성결 하십니까? 레11: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삽시다. 레위기의 주제는 성결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거룩하고 성결해야 합니다. 레위기 1-7장은 5대 제사, 8-9장은 제사장 위임식, 10장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11장은 성민의 식생활 문화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성민의 식생활 문화를 규정해 주신 계시의 목적이 무엇인가? 식생활 문화는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① 천지창조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세기 2:16)라고 하심은 식물만 허용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② 노아 홍수 이후 시대부터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의 손에 붙이었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세기 9:2-3)고 모든 생물을 식물로 허용하였습니다. ③ 모세 율법 시대에 와서는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레위기 11:46-47)고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였습니다. ④ 초대 교회 시대에는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사도행전 10:11-13)고 하심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식생활은 인간 삶의 기초입니다. 사람은 먹는 음식에 따라 입의 구조와 크기가 달라집니다. 입이 형성된 구조에 따라 자연히 발음과 억양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지역마다 기후와 토질이 달라 생산되는 특산물이 다르므로 먹는 식물에 따라 각기 다른 방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그 언어가 만든 문화와 생활양식이 다르므로 자연히 생각하는 의식구조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인생들에게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성결한 삶을 살게하신 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회개를 통해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족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3) 저가 초등 학교 시절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 때입니다. 대부분의 집에 농사용으로 소를 키웁니다. 그 당시에 소는 여름철에는 풀을 베어서 주고, 아침과 오후에는 풀을 먹이려 소을 몰고 산과 들판으로 나갑니다. 온 산과 들판에는 소들이 풀을 떧어 먹습니다. 그 때에 저의 집에서 소먹이는 일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두 가지 신령한 것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소들이 길을 가다가 간혹 미끄러운 곳을 통과할 때는 몸 자세를 낮추고는 앞발을 세워서 파지(把指)를 합니다. 그래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합니다. 다른 하나는 집으로 돌아와 외양간에 들어간 소는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먹은 풀을 다시 끄집어 올려서 되새김질을 합니다. 그러다가 간혹 비닐 봉지나 나뭇가지나 쇠붙이 같은 것이 있으면 하나씩 걸러 냅니다. 이것은 실로 인생에게 좋은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복잡한 산업 전선에 나가서 일할 때 한푼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다 집어삼킵니다. 그러다가 해가 져서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일을 마치고 자리에 누워서 하루 동안에 행한 일을 하나씩 끄집어 되새김질을 해 보면 도무지 먹어서는 안될 해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것을 전부 하나씩 걸러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육체가 건강해집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사는데 회개는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한복음 13:10)라고 했습니다. 둘째: 당신은 청결한 삶을 통해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물에 있는 모든 것 중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무릇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것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라\\\"(9-10)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의 일입니다. 저가 어릴 때에 6. 25를 지난 60년대 시절에 살아가기 참으로 어려운 시절입니다. 그 때에 쌀밥과 고기를 먹는 집이면 부잣집이었습니다. 쌀은 농사를 지어서 얻어야 하지만 고기는 주로 산에서 짐승이나 강에서 고기를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때 간혹 소를 들판에 쳐(방목) 놓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습니다. 그때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고기들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대부분 깨끗한 물에서 헤엄치며 삽니다. 그러나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매기나 꼼장어는 물밑 흙속에 있습니다. 그때 어떤 고기를 잡느냐에 따라서 그날 하루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물밑 흙이나 갯벌속에 있는 것을 잡는 날이면 온 몸에 뻘 투성이가 됩니다. 고기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의 주 기능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 기능도 있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할 것은 지느러미는 헤엄치는 역할을 하며, 비늘은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합니다. 지느러미를 가진 고기는 탁류와 함께 떠내려가지 않고 물살을 거슬러 청수를 향해 올라갑니다. 성도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얽매여 갯벌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가치관을 뚫고 탁류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님을 모신 삭개오는 더 이상 여리고 갯벌에서 낙을 누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누가복음 19:8)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누가복음 19:9)고 했습니다. 셋째: 당신은 온유한 삶을 통해서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13-19) 새중에서 이러한 것들을 금했습니다. 그 하나는 독수리와 같이 양육강식을 하는 육식하는 새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민이 사납고 흉폭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않았습니다. 다음은 까마귀 같이 본성이 부패하고 썩은 것을 좋아하는 새입니다. 성도는 썩고 부패된 것을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지 그것을 즐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는 올빼미와 같이 야행성 기질이 있는 새들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야행성이란 아름다운 창조 질서를 거스리는 삶을 두고 하는 말이지 오늘날 산업 사회에서 행하는 주야가 교차된 삶과는 다른 말입니다. 당신은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본래 그렇게 지으시고 가증하다고 하셨는가? 이 모든 자연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것이며 모든 자연은 성결한 백성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위탁받은 관리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으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 16:4)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산상수훈 중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6)고 했습니다. 여기서 공중에 나는 새는 약자를 해하지도 않고, 부정한 속된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창조 질서를 거스려 밤에 행치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나무에 앉아 있는 새가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이 잘 되어 생명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면서도 부지런히 나는 근면하고 성실한 새입니다. 넷째: 당신은 소망중에서 성결을 배워야 합니다. 읽을말씀☞ \\\"날개가 있고 발로 기어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20-21) 저가 어릴 때 많이 먹었던 곤충 중에 메뚜기가 있습니다. 가을 추수기가 되면 나락(벼)논에 메뚜기 떼들이 모여들니다. 그때 그것을 잡아서 뽁아 먹기도 하고 양계를 하시는 분들은 사료용으로도 씁니다. 곤충 중에서 금하신 것은 기어 다니는 것입니다. 본래적으로 기어다니는 곤충이 있으나 성민의 삶을 두고 말할 때 기어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창세기 3:1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배로 기어다니는 것을 가정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곤충들 가운데서는 네다리가 있어서 기어가다가도 뛰고 날개가 있어서 나는 것들을 먹게 했습니다. 성민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성도는 비록 땅에 살고 있지만 땅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땅에 붙어서 기어다니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땅에서 뛰는 다리를 주었습니다. 이 다리에는 복음의 신을 신고 뛰어야 하며, 날개에는 소망을 실고 하늘을 날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19-20)고 했습니다. 땅에 붙어서 기어 다니는 세속적인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항상 위를 소망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의 삶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계시를 깨닫을 수 있도록 인도하심은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환란의 터널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 세대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얼마나 우리의 심성이 메말라 가는지 모릅니다. 환경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지상 최고의 스승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명절 후에는 반드시 성결하게 하라!/ 욥1:1-5, 마26:1-5/ 신삼철 목사/ 2007-02-25 주일낮
명절 후에는 반드시 성결하게 하라! 욥1:1-5, 마26:1-5 시작하는 말 큰일을 치루고 나면 반드시 후유증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잔치가 끝나면 서운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명절을 지나고 나면 “명절 증후군”이 있다고 합니다. 그 증후군이 신체적인 것은 며칠 지나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며, 물질적인 것이라면 절약하면 곧 회복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조금은 오래 갈 수 있고 방치하면 우울증같은 병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적인 문제라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명절이 지난 후 기도가 하기 싫다든지, 교회가 오기 싫다든지, 은혜와 은사를 상실했다든지,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등 영적인 증후군이 나타난다면 그러한 문제를 그냥 방치하면 영육간의 불행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사탄을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 겉잡을 수 없는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욥은 슬하에 10자녀, 10남매를 두었습니다.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누이들도 함께 청하여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습니다. 아비 욥이 볼 때는 위태위태했습니다. 조마조마 하면서 가슴을 조였습니다. 생일파티 증후군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욥은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욥1:5)고 생각하여 자녀들을 각각 불러 성결케 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자녀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의 신앙생활이 항상 그러했습니다. 우리들도 욥처럼 명절이 지난 후에는 한번쯤은 자신의 행동을 짚어 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명절을 지나는 동안 흐트러진 인간관계, 쌓여진 스트레스, 마음으로 지은 죄를 풀고 해결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죄를 범한 것을 성결케 하여야 합니다. 전인적인 불신앙적인 행동을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대 명절은 “설과 추석”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명절은 애굽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 명절입니다. 우리의 국경일인 “8.15해방 기념일”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월절 명절에는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 남자들은 형편이 허락하는 한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에 세계에서 모인 유대인들이 아우성치며 지켜보는 가운데 헤롯의 정치적인 결단, 가야바의 종교적인 파문, 빌라도의 군사적인 선고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유월절 명절에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심으로 온 인류가 지옥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탄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명절에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명절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유다 ! 명절에는 대목을 보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상인들은 한 가지라도 더 팔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목이 터져라고 외쳐댑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지만, 어떤 이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사기치고, 도둑질 하고, 강도질하고, 폭리를 취해서라도 한 대목 보려고 하는 자들로 득실거립니다. 지금은 한 술 더 떠서 인터넷 사기꾼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성경에 소개된 명절 중에는 “유월절”이 가장 큰 명절입니다. 유월절 명절의 대목을 보기 위해서 성전 마당에서 비둘기파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양을 파는 자들이 떠들어 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대목장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대목을 보고나면 또 다음 명절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선택하셔서 부르신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써 3년 동안 따라 다녔지만 하나님의 성령님이 역사하실만한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인본주의 사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사탄이 충만했습니다. 세상적인 야망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써 지상에 메시아 제국을 건설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눈치 빠른 가룟유다는 자기의 목표가 빗나갔다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였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의 머리털로 발을 씻으니 향유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가룟유다는①300데나리온의 가치를 허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②가난한 자들을 핑계하여 도적질 하려고 했습니다. ③그는 도적이었습니다. 돈궤를 맡아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곤했습니다(요12:1-6).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듯이 평소에 주님의 돈궤에 손을 댔던 유다가 유월절 대목을 볼 작정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26:15)고 흥정을 시작했습니다. 가룟유다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은30을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명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유월절 명절을 잘 못 샜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하기 보다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명절에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 유월절 명절에 예수님이 이단으로 몰려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종교적인 재판을 받기 위해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에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가서 앉지 말아야 할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가 보아야 할 곳이었습니다. 가야바의 집은 가지 말아야 할 집이요, 앉지 말아야 할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주님이 계셨기에 반드시 가야할 곳이었고, 지켜보아야 할 자리였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만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였지만 하찮은 계집아이들에게 농락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하찮은 계집아이에게 ①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을 부인했습니다. ②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것을 잡아 뗐습니다. ③예수님의 당(공동체)이었음을 부인했습니다(마26:69-75). 당시의 분위기가 워낙 살벌하여 계집아이 하나가 그렇게 무섭고, 커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명절에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만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여 영적으로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명절에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말을 한다면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자들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을 자기도 모르게 부인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한번 부인하고 두 번 부인하며, 세 번 부인하게 되면 참말로 부인하여 명절에 신앙 다 팔아 먹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술도 한잔씩 마시게 되고, 도박도 하게 되며, 제사도 지내게 되고, 성묘하면서 묘앞에 절도 하게 됩니다. 근근득생으로 받은 은혜 기름 쏟듯이 다 쏟아 버리고 명절 끝에는 영적으로 진공상태가 되어 돌아옵니다. 명절에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괜히 만나서 시험 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명절에 심문당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3번 부인하고 나자마자 닭이 울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시선이 마주치자 주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눅22:62)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시선이 마주치자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여 자신을 성결케 했습니다. 베드로는 ①닭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②주님의 시선과 마주쳤습니다. ③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④우리도 명절에 주님을 부인했다면 뉘우치고 회개하여 자신을 성결케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명절에 멀리 도망간 제자들 ! 명절에 제자들은 고난당하시는 예수님과 되도록 반대로 멀리 도망갔습니다. 어떤 젊은 청년 제자는 벗은 몸으로 도망을 가기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도록 도망하여 숨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엠마오로 내려갔습니다. 제 몸 하나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흩어져서, 혹은 한곳에 모여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유월절에 히브리인들이 문을 닫고 심판의 천사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것과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했는지 모릅니다. 명절에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여자들 ! 역시 신앙은 여자들이 깊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갈보리 언덕에는 “갈릴리에서 좇아온 많은 여자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베데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습니다(마27:55-56). 명절에 세상 사람들이 다 이상한 방향으로 몰려 다녔다 할지라도 그렇지 않은 남은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거룩한 씨가 거룩한 그루터기입니다. 끝맺는 말 명절을 어떻게 보냈던지 답은 한 가지입니다.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같이 자신을 자포자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이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여 성결케하고, 다시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기어코 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명절을 보내리라”고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는 권면의 말씀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성결케 함으로 명절을 타고 들어 온 불화, 시험, 사탄, 악령, 미움, 허탈감을 몰아 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려야 합니다. 좋지 못한 생각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새출발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성결케 하여야 합니다.
성결 생활/ 잠11:16/ 결혼식설교
성결 생활 잠11:16 저는 박용익 목사님의 결혼 주례를 받았고, 제 아들 고신일 목사도 역시 박 목사님께 주례를 받았습니다. 후에 박 목사님에게 좋은 글귀 하나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첫째는 물질관계, 둘째는 이성교제, 셋째는 명예관계, 넷째는 감정처리였습니다. 저는 요즘 결혼하는 신혼부부에게 가장 소중한 교훈으로 이 말씀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물질관계와, 이성교제와, 명예관계와, 감정처리를 잘할 수 있는 인격만 가진다면 그는 어디를 가도 떳떳하게 살 수 있으며, 어디를 가도 성공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의 부부생활은 어떤 조건에서도 행복할 것입니다. 버어마의 아웅산 사건 때 희생된 분들은 우리나라에서 40년에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하는 엘리트들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머리와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로서 이들에게는 네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공부를 했든지 모두가 한국적 실력자들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대통령에게 신고하러 갈 때에 양복을 빌려 입은 이가 있고, 구두창을 두 번씩이나 갈아 신을 만큼 검소하게 산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신앙을 가진 분들로 거의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게 분주하면서도 모두가 가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어느 책에서 이 기사를 읽으면서 너무 좋은 일꾼들이 희생된 것을 몹시 아까워했습니다. 가정생활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어디를 가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결혼을 하면서 주례사를 받는 어여쁜 신혼부부는 무엇에 성공하기 전에 먼저 가정과 부부생활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이 가정생활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물질관계, 이성교제, 명 예관계, 감정처리를 잘 하면서 믿음으로, 사랑으로, 근면으로 사실 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이 부부에게 가득할 것입니다.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자/ 눅1:75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자 눅1:75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가정에 가브리엘을 보내셔서 요한의 탄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가랴는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세례 요한의 수태고지를 전달받고 그 사실을 믿지 못하였기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가 벙어리 되었던 것은 자신과 엘리사벳이 나이 많아 늙었으니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으로 그 징표를 보여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눅 1:20)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이 태어나자 곧 그 이름을 ’요한’이라 짓고 혀가 풀려 제일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구약의 예언은 찬미와 새 노래로 나타나는데 신약 예언의 시작인 이 찬가 또한 그렇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여. 주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시리로다.” 라고 합니다. 사가랴는 구속 역사를 언급하여 하나님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구속에 대한 예언과 약속과 표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구속은 그때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제공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세주를 보내심에 있어서 특히 이 민족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고 부릅니다. 사가랴는 이제 메시야께서 친히 이루실 구속 역사를 인하여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메시야의 구원으로 계속해서 섬김의 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말씀하시며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눅 1:75)고 합니다. 우리의 섬김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먼저 성결로 섬겨야 합니다. ’성결’(호시오테티)은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경건성과 관련하여 쓰이며 구원의 시대에 사는 신자들의 삶을 묘사합니다. 성결은 중생으로 얻어진 새로운 본성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태초에 그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 형상 내에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엡4:23)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4)고 합니다. ’거룩함’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속한 삶으로 악에 물들지 않는 성결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결로 섬기기 위해서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여기서 타락한 본성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본성도 인간의 신체와 같이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로 도우며 힘을 주고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본성은 옛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이 타락한 본성을 물러 받았습니다. 이 타락한 본성은 몸 안에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타락한 본성과 함께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타락한 본성은 옛 사람처럼 간교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모든 성도를 안에서 옛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쇠하고 시들어 없어져 갑니다. 또한 이 옛 사람은 썩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 있는 죄는 영혼의 기능을 침식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죄가 날마다 더욱 악화되어 결국은 파멸시킵니다. 또한 ”유혹의 욕심을 따라”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향한 성향과 욕망은 곧 유혹의 욕심입니다. 유혹의 욕심은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약속하나 인간을 더욱 불행 가운데로 인도하며 배신과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유혹의 욕심을 입으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추한 낡은 옷과 같으니 벗어 버려야만 합니다. 그 모든 욕망은 억제되고 극복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욕심은 ”구습” 즉 회개하지 않고 이방신을 섬겼던 상황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합니다. 타락한 습관을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습관을 따라 행해야만 합니다. 은혜로운 습관을 포용하고 지지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악행하기를 그친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는 ”날마다 더욱 더 새로워진 심령을 갖기에 합당한 수단들을 사용하라”는 말입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24절)고 합니다. 새 사람은 새로운 본성,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합니다. 새로운 본성은 새로운 생활 원리와 소생시키는 은혜에 의하여 활력화 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을 살게 하여 주며 기독교가 요구하는 거룩한 생활에 이르게 합니다. 이 새 사람은 그의 솜씨가 참으로 탁월하시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 또는 만들어졌습니다. 또 ”하나님을 따라”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고 그의 위대한 본과 원형을 따라감을 말합니다. 인간 영혼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을 타락한 인간의 비참함과 죄 됨을 나타내 줍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모습을 닮았다함은 새로운 피조물의 아름답고 거룩하고 복됨을 말합니다. 이 새 사람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거룩함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계명에 신실하게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삶 속에서 성결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어떤 곳에 아름다운 색유리로 창문을 만들고 그 위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Glory to God in the Highest) 이라고 새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아이들의 돌팔매로 유리 한 쪽이 깨지면서 영어 글자 ’e’가 떨어져나가 ”Glory to God in the High st.”(큰 길에서 하나님께 영광)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 거렸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딘지 납득이 가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어수선하고 욕설이 나며 심지어 불신과 불평이 넘치는 큰 거리와 골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분별력이 없이 세파 속에 뒤섞여서 아무런 구별이나 특징도 없이 휘몰리며 죄를 즐기는 ’속물의 생활’도 추하지만 거룩함과 경건을 잘못 이해하여 발에 흙 묻히기를 거절하고 스스로 정결하다고 자만하면서 어려운 삶의 현장에는 장님이 되는 ’수도원적인 신앙’도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남다른 특권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곧 남다른 책임이 주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곧 값없이 죄 용서받고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죽어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빚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롬1:14).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위해, 내 나라를 위해 눈물을 쏟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큰 거리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다운 신앙인도 찾고 계십니다.( 거리에서 영광을 -예화 뱅크)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 어느 지방을 여행할 때였습니다. 그와 동행하던 한 육군 대령이 주머니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더니 그에게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양하자 이번에는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담배도 피우질 못합니다.’라고 사양하더니만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9살이 되던 해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저를 부르시더니 일생 동안 술 담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굳은 약속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것입니다.’ 링컨이 울먹거리며 말을 끝맺자 대령은 ’참 훌륭하십니다. 나도 그런 서약을 지킬 수 있었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존경을 표했다고 합니다. 삶 속에서 성결로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다음 의로 섬겨야 합니다. ’의’(디카이오쉬네)는 옳음 정의의 뜻입니다. 70인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사 5:7)고 합니다. 랍비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가장 많은 공로가 쌓이게 되는 행위들 중 하나로서의 자선행위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를 지칭하는데 사용됩니다. 지혜자는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14:34)고 합니다. ’의’는 윤리적 측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 측면에 대한 포괄적인 ’올바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진정한 번영은 경제력, 군사력과 같은 외형적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 신앙에 따른 공의의 실현에 있습니다. 의로운 정치, 사람과 사람간의 공평무사한 평등, 경건한 신앙에 대한 공적인지지, 미덕의 전반적 실천과 공인, 유덕한 자의 보호와 보존, 타국인에게 대한 동정과 자선은 ”의로움”이라 불러집니다. 이러한 의로움은 권좌를 받들어 주고 국민의 마음을 고양시키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 적합한 국가를 만들어 주며, 그 하나님의 은총은 그들의 성민으로서 높은 민족이 되게 해 주십니다. 이사야선지는 “그 때에 공평이 광야에 거하며 의가 아름다운 밭에 있으리니 (사 32:16)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7)”고 합니다. 사역자들은 율법을 설명하고, 재판장들은 그 율법을 집행할 것이며, 이들은 모두 매우 현명하고 충성되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악한 자들은 선하게 되고 선한 자들은 더 선하게 됩니다. 모든 종류의 백성들, 즉 가난하고 천하며 무식하여 광야처럼 무시당하는 자들과, 부유하고 훌륭하고 유식하며 아름다운 밭처럼 존경받는 자들에게 다같이 사물에 대한 올바른 생각과 훌륭한 명령의 원칙과 선과 악, 죄와 의무에 대한 자각이 있게 됩니다. 또는 그 나라 모든 지역, 즉 평원과 울타리를 한 땅, 시골과 도시, 좀더 거친 지역과 보다 더 경작되고 개량된 지역, 어디서나 정의가 잘 집행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우리가 그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공평이나 법칙을 들여왔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그것에 의해 구원받아야 하는 의를 들여왔습니다. 내적인 평화가 의가 내재할 때 따라옵니다(16절). 의의 일이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자들은 이 복된 결과를 체험하게 됩니다. 의 그 자체가 평화이며, 그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 입니다. 마음의 거룩한 평정과 안심입니다. 그것으로써 그 영혼은 스스로를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이 즐거움을 방해할 권세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평화와 평안, 그리고 영원한 안전은 의의 길과 일(작용)에서 기대될 수 있으며 발견되게 마련이란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의의 역사(공효)는 평화입니다.”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 가운데서, 풍성한 참 기쁨 즉, 순종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현세적 보상을 맛보게 됩니다. 비록 의의 역사가 고생스럽고 값비싼 것일지라도, 또 우리로 멸시받게 할지라도, 그것은 평화입니다. 우리의 책임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해 주는 평화입니다. ”의의 결과는 평안과 안전입니다.” 우리 시대의 끝까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영원의 끝없는 세대까지도 그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희생과 제사의 율법적 예배가 아니라 성결과 의의 영적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록펠러는 장래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첫 번째 여인에게 버림받은 사나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세 가지 면에서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가난했던 자가 가장 부유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기적은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남에게 주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적은 장수입니다. 그는 98세까지 살았는데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고 깨끗하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록펠러가 이런 3가지 기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바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일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갔으며, 성경을 매일같이 읽었고,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 때에는 성경을 읽어 줄 사람을 채용해서 귀로 성경을 들으면서 말씀을 날마다 대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은 ’훌륭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늘 말했다고 합니다.(록펠러의 기적) 의로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그리고 두려움이 없이 섬겨야 합니다. 두려움이 없이(아포보스)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함께 놀라지 않는 다는 의미도 갖습니다. 두려움과 놀라움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원수들로 인한 두려움과 놀람이요 또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놀라움입니다. 섬기게 하리라(라트류에인)는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철저한 복종과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굴조차 들 수 없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철저히 낮아진 종이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인을 엄한 분으로 상상한 게으르고 비이성적인 종의 두려움같이 노예적 두려움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고통과 놀램이 있는 두려움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아가 율법적 정신의 두려움 즉 종의 영이 갖는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적 정신 곧 양자의 영이 갖는 담대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사랑의 두려움으로 하여야 합니다. 그 두려움은 공경하고 순종하는 두려움이어야 하며, 각성시키고 소생시키는 두려움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섬김에 있어서 모든 두려움과 놀람이 없이 섬기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은혜입니까? 모든 원수들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과 놀람을 없이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 된 종으로서의 두려움과 놀라움도 없게 하시고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고 경배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김으로 성결한 안전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해 받음을 두려워하는 일들로부터 평온한 사람들처럼 경건한 안보와 마음의 평정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프랭클 박사는 인생을 이런 예화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인간은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와 같이 일단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그 무대 위에 있게 된다. 이제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비춘다. 객석의 조명은 컴컴하다. 무대 위에 일단 올라서면 관중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한 개의 검은 구멍만 보일 뿐이다. 그곳에는 어떤 스피커 장치도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 구멍으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듣거나 그 구멍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구멍 안에 인간을 심판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 수 있다. 그 사실은 인간에게 위로가 되며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활력을 주고 동기를 부여해주고 인도자가 되어준다. 결국 그 사실은 무대 위에 있는 동안에 인간의 행동을 결정해 주게 된다. 이제 무대 위의 배우가 그 검은 구멍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기쁘게 해드릴 것을 결심하는 순간 그 배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극은 끝이 난다. 박수가 쏟아진다. 그리고 조명등에 불이 들어오고 마침내 청중들의 얼굴을 본다.” 그 무대 위의 배우는 우리이며 구멍 안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물론 우리는 그분을 뵐 수도, 음성을 들을 수도 없지만 우리의 연기를 말없이 평가하시는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제하게 되고, 근신하게 되고, 동기를 부여받고, 그리고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격려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는 실패를 열매 맺는 경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슈퍼바이블-무대 위의 연기자 인생)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되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며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모두가 됩시다.
성결교회/ 출25:21/ 성결교회주일설교/ 2002-07-22
성결교회 출25:21 출애굽기 25 :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오늘은 우리교단의 교회들 전체가 기념하는 ”성결교회주일”입니다. 성결교회는 외세의 침략 아래서 이 나라의 국운이 풍전등화와도 같던 1907년, 뜨거운 심령으로 복음증거 사업에 헌신했던 정빈과 김상준의 두 청년에 의하여 시작되어진 교회입니다. 시작 초기에는 ”동양선교회”라는 선교회의 재정적 지원과 지도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재정과 지도력에 의하여 교회가 발전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단의 국내외 교회들은 3천2백여 교회, 교인 수는 6십3만 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1. 성막의 구조 뜻깊은 오늘을 맞이하여, 과거 구약시대의 ”성막”, 그 안의 성물들 중에서 특별히 ”법궤”에 대해 살펴보며 그 의의를 살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셔서, 무사히 시내산 밑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법”인 ”율법”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대로 ”성막”을 제조하여 세웠습니다. ”성막”은 지극히 높고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한 건축물이었습니다. 그 건축물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여행하는 중이었으므로, 이동이 용이하도록 제작되어진 조립식 건축물이었습니다. 동쪽으로 나 있는 출입문을 들어서면 성막뜰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번제단”이 있었고, 그 번제단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들을 불살라 바쳤습니다. 조금 더 전진하면, ”물두멍”이 놓여져 있었고, 그것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더러워진 수족을 깨끗이 씻는 성물이었습니다. 그 앞에는 지붕을 덮은 건축물인 ”성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성소의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그 곳에는 내부를 환하게 비춰주는 ”금등대”와 하나님께 바치는 떡을 진열해 놓은 ”진설병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쪽으로 ”금향단”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분향하기 위한 성물이었습니다. 그 안쪽으로는 다시 휘장으로 구분되어진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다 같은 정사각형의 장소였습니다. 그 곳에는 단 하나의 성물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것이 ”법궤”입니다. 2. 법궤의 형태와 의미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 법궤를 제작하라는 계시의 말씀으로, 그 성물의 구조와 내용물을 알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의 재료는 ”조각목(애굽 아카시아)”이었습니다. 이 나무는 옹이가 많고 가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귀중한 목재로 여겨지지를 않았으나, 단단하고 내구력이 좋은 장점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천하게 취급되어졌던 나무가 성막의 성물을 만들기 위한 귀한 재료가 된 것입니다. 이 법궤의 크기는 가로의 길이가 1m 보다 조금 더 길고, 세로 약67cm, 높이 약67cm가 되는 직육면체의 아담한 상자였습니다. 그들은 그 상자의 안팎을 순금으로 쌌습니다. 그 위쪽 가장자리로는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 네 모서리 부분에는 금 고리 넷을 달았고 채를 그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사람들이 메어서 이동할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싼 것입니다. 그 채는 이동하지 않을 때에도 궤의 고리에 꿴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 법궤 안에는 ”증거판”을 넣어 두었고, 히브리서(9:4)의 말씀에 의하면, 그 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궤 위에는 역시 순금으로 뚜껑을 만들어 덮었는데 그것을 ”속죄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속죄소의 두 끝에는 금으로 만든 그룹 둘을 세웠는데, 그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고 그 얼굴들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였습니다. 법궤가 놓여져 있는 지성소에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그 때에도 그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야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속죄소 앞과 위에 뿌려 그 자신과 백성들의 죄가 가리워 지게 하였습니다. 이 법궤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그의 인격을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법궤를 나무로 만들어 그 안팎을 금으로 싼 것은 그리스도의 양면성을 알게 해 주는 사실로서, 그의 인성과 신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인간이 되심으로 미천한 우리와 고락을 같이 하셨지만, 한편 그는 하나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신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광야를 여행할 때에, 그곳에서는 양식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셨는데, 그것이 ”만나”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주위에 아침이 되자 이슬이 덮여있었고 그 이슬이 마르자 땅위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만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굽거나 삶아서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농사지어서 얻은 것이 아닌 하늘의 양식으로서, 그들이 광야를 여행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사십 년 동안 그들을 살려준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후손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만나 조금을 금항아리에 담아 보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만나는 믿는 자들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영적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 구약 시대에, 신비한 음식인 만나를 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수명이 다한 다음에는 죽어야 하였지만,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 가운데 참여한 사람들은 부활의 영광 가운데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궤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었습니다. 출애굽 하여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그들의 지도자로 세워주신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거역하며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휘관들에게 각각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12개의 지팡이를 가져왔는데, 그 중 하나가 대제사장 아론의 지팡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들을 모두 성막 안 법궤 앞에 두게 하셨습니다. 다음날, 성막 안으로 들어가 보니, 12개의 지팡이들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는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로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누구를 선택하셨는가? 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그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구약시대 인간 대제사장은 그 자신도 죄인 중 한사람으로서 불완전하며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신약시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의인으로서 우리의 죄를 속해 주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궤 속에는 두 돌판(율법판)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하여 시내산 밑에 도달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모세를 그에게로 올라오게 하셔서 그에게 율법을 계시하여 주신 후, 두 증거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산밑에 진치고 있던 백성은 산 위로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며 뛰놀고 있었습니다. 산밑으로 내려오다 그러한 광경을 본 모세는 대노하여 가지고 있던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책망하여 돌이키게 한 후, 하나님의 지시대로 돌판 둘을 다듬어 만들어 가지고 다시 산 위로 올라갔더니 하나님께서 처음 판에 쓰셨던 말씀을 다시 그 판들에 써주셨습니다. 그 판들을 법궤 안에 놓아 둔 것입니다. 깨어져 버린 첫 번째 돌판에서 알 수 있듯이, 타락한 인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한 채 계속적으로 그의 법을 범하는 죄인들에 불과합니다. 인생들 중에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나설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자기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자도 전혀 없습니다. 법궤 안에 넣어진 두 번째 돌판은 계속적으로 범죄 하는 죄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변하지 아니하는 ”언약(율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도덕과 법은 그들 대다수의 의견이나 상태에 의하여 그 기준이 수시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하나님의 언약(율법)은 이 세상의 상황이나 조건에 의하여 변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돌판이 지성소 안의 법궤 안에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기준이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보호되어짐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돌판은 이 죄악 세상에 오셨으나 범죄하지 아니하시고 율법의 완성이 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은 신약시대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서 완성되어진 것입니다. 그 궤 위에는 뚜껑(속죄소)를 만들어 덮었습니다. 정금으로 제작되어진 속죄소는 죄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냅니다. 그 속죄소의 양쪽 끝에는 정금으로 만든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개를 펼쳐 속죄소를 드리웠습니다. 그들은 속죄소에 나타나 죄인 된 백성과 만나시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호해 드리는 것을 상징해 주는 존재들입니다. 그 속죄소로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판을 예고해 주는 율법을 덮으시고, 속죄의 자비를 베풀어주심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의롭지 못한 인간들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가지고 와 속죄소 위에 뿌렸습니다. 그로서, 그들의 죄가 일시 가리워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제물로 바쳐 피를 뿌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영원히 가리워 지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참된 속죄소가 되는 분이십니다. 과거 구약시대, 성막에 거하시며 법궤로서 그 자신의 임재를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교회에 거하시며 진리와 성령으로 우리와 만나고 계십니다. 우리모두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하심에 감격할 것이며, 이 성결의 지성소로 불러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가운데,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드리는 그의 자녀들이 되도록 하십시다! 과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천한 죄인에 불과하였던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아 귀한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재료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살 수 없습니다! 나를 불러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결의 영/ 롬1:4/ 2003-02-20
성결의 영 롬1:4 아마도 최근 각종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실린 한 집회 광고를 한 두 번쯤은 보신 일이 있으실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의 집회광고 말입니다. 저하고 이름이 비슷하지만 전혀 무관한 사람입니다. 곳곳에 프랑카드를 걸고 홍보 요원의 전단지 살포는 기본이고, 주요 일간지에 커다란 하단광고에 심지어 TV의 30초 광고까지 엄청난 광고료를 들여가면서 집회광고를 했습니다. 바로 지난주 3월 19일에서 23일까지 무려 5일간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계속된 집회 광고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미혹되어 참석했었고, 또 많은 신자들은 도대체 무슨 집회 길래 저렇게 돈을 들여 홍보하고 야단인가 아마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는 세칭 구원파라고 알려진 이단의 한 분파이자, 본류인 권신찬의 기독교 복음침례회의 한 아류인 대한 예수교 침례회의 대표입니다. 그는 중3을 중퇴한 학력에 신학교도 다니지 않은 채 목사라고 행세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구원파의 대부격인 권신찬의 영향을 받아서 나름대로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면서 스스로 성경을 통달한 사람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성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기성교인들의 신앙적 허점을 파고들어 나름대로 그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그는 기존 신자들에게 다짜고짜 구원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하면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또 묻습니다. 기존 신자들 가운데 그럴 사람들이 별로 없겠지만 날짜까지 대면 지금 죄가 있느냐고 또 묻습니다... 이렇게 집요하게 죄 문제 구원문제를 파고들어 기성교회 교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그 믿음을 뒤흔들어서 미혹합니다. 이 구원파들의 결정적인 주장은 한 마디로 구원은 깨달음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담의 원죄로 인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보혈로 자신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받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가진 자들이 구원받은 것인데 이들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성 교회교인들이 죄사함을 위해 눈물로 통회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아직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합니다. 정말 우리가 한번 구원받고 나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한번 회개하고 나면 그 이후에 지은 죄까지도 미라 한꺼번에 용서받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의 결정적인 착각이자 실수는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실제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결의 필요성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죄와 관련해서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롬 3:26을 보면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 의를 힘입어서 의롭다 여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의로워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뿐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칭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과거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는 선언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분상의 의인이지 존재론적인 의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딤 1:15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위의 13절을 보면 자신이 훼방자요, 행악자였었다는 사실을 과거 시제로 고백하고 나서, 이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할 때는 현재 시제를 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하나님 보실 때 과거에도 큰 죄를 저질렀지만 현재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처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그 죄사함을 받기 위해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여전히 현재 짓고 있는 죄 때문에 고민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요 8장을 보면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주님은 이 여인의 죄를 다 사해주시고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은 용서받았지만 그래서 과거의 죄는 다 씻겨졌지만 현재와 미래에 또 다시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짓지 않으려고 힘써서 노력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장신대 오성춘 교수가 쓴 영성훈련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고 크게 공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과거에 범죄한 죄의 사실들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살아서 나를 죄악 가운데로 끌고 가려고 하는 죄의 세력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거룩한 장소를 찾아 거기에서 하나님의 경건을 이루고자 했으나 \\\'죄의 세력\\\'은 세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속에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거룩한 장소를 찾아가도 죄는 나를 넘어지게 하고 있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할 때 죄는 그곳에 나와 함께 있었고 하나님께 무릎 꿇고 경배하는 내 속에 아직도 살아 있었다. \\\"겸손하라\\\"고 입으로 외치는 내 속에 교만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외치는 내 속에 섬김을 받으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또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가르치는 나의 심령은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런 고민에 빠져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주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지었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 깊은 곳에 여전히 아담에게서 유전된 죄의 세력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우리 안에 원죄의 부패성은 아직도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자주는 못 갑니다만 가끔 부모님 산소에 가면 한 동안 본격적인 벌초는 아니더라도 봉분과 횃대 부분의 떼를 손질하게 됩니다. 잡초는 할 수 있으면 뿌리째 뽑아야 하는데 하도 그 뿌리가 깊어서 뿌리째 뽑다보면 봉분 자체가 손상을 입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겉에 잎사귀하고 줄기부분까지만 뜯어내곤 합니다. 그런데 다음 번에 다시 가보면 영락없이 더 크게 자라서 산소를 볼품없게 만들곤 합니다. 잡초는 뿌리째 뽑아내야 합니다. 잎이나 줄기만 뜯어내면 겉으로 볼 때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가 다시 줄기를 만들어내고 잎을 냅니다. 히 12:15를 보면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원래 쓴 뿌리가 우리의 심령 속에 박혀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여건과 상황을 만나면 줄기를 내고 잎사귀를 내서 무성해 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저지르는 구체적인 죄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줄기와 잎사귀를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 회개했다고 다시는 죄를 짓기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3월 1일 대도 조세형이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는 네 가지 혐의로 기소가 됐습니다. 주거 침입, 절도, 총포도검법 위한, 공무집행방해입니다. 그는 지난해 11월 24일 도쿄 시부야구 주택가에서 절도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자 출동한 일본 경찰관에게 흉기를 휘두르며 반항하다 오른쪽 턱과 팔에 전치 3개월의 총상을 입고 붙잡혔습니다. 장말 안타까운 것은 15년형을 받고 출소할 때 매스컴이 기독교 신앙으로 대도 조세형이 새사람이 됐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교회에 다니며 신앙간증을 했고, 앞으로 신학공부를 하여 주의 종이 되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에 간 것도 일본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부인을 만나서 결혼도 했고 수입도 만만치 않아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본에서 또다시 절도죄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부인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많은 사람들은 조세형이 참회하고 새롭게 결단했다고 정말 새사람이 된 줄 알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겉으로 드러난 죄의 잎사귀와 줄기는 잘라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독한 죄의 쓴 뿌리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보통의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강한 죄의 쓴 뿌리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쓴 뿌리가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겉에 나온 죄의 잎사귀나 줄기를 잘라내는 일도 해야 하지만 이 죄의 쓴 뿌리의 세력을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성결이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거룩하고 깨끗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성경의 원어는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카도쉬, 신약의 헬라어로는 하기오스라는 말입니다. 이 두 원어의 의미는 같은데 \\\'분리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 구별되었다, 하나님을 위해 분리해 놓다\\\'라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속하기 위해 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결이란 우리를 반 하나님적인 것들,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분리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적인 가치관, 세상적인 욕망, 세상 풍조들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결하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밝고 건조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곰팡이나 세균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번식도 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니까 성결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가 그 세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점점 그 힘도 약화시키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도 필요하지만 사실 성결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성결해지지 않으면 회개거리는 끝도 없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점차 성결해 지게 되면 회개거리는 점점 더 줄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결의 영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결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성결은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결은 전적으로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6:11을 보면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 안에서\\\'만 성결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결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성결의 영인 성령은 죄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킵니다. 갈 5:1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임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안에 육체적인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는데 가만 두면 거기에 끌려가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죄의 쓴 뿌리가 여러 가지 죄를 저지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지적으로 노력하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쳐도 그렇 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육체적인 욕망과 싸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 지을 생각을 없애주시고, 죄 지을 현장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지 못하도록 제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셨습니다만 언론계에서는 누구라면 다 아실만한 거물이시고 지금은 교회 장로님으로 수고하시는 분과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아내 덕에 교회는 그분 표현대로 개 끌려가듯이 끌려 다녔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는 정말 끊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답니다. 하나는 담배고 다른 하나는 도박이었답니다. 교회 갈 때도 깜빡 잊고 와이셔츠 윗 주머니에 담배 갑을 넣고 갔다가 부끄러움을 당한 일도 많을 정도로 골초였답니다. 그리고 도박 때문에 수 차례 아내로부터 이혼하겠다는 협박까지 받을 정도로 너무 심각했던 때가 있었답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끊어보려고 정말 안 해 본 것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번번히 실패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아내에게 개 끌려가듯이 끌려서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답니다. 계속 졸다가 마지막 날 밤 집회에서 함께 기도하는데 글쎄 마음이 뜨거워지더랍니다. 그랬더니 극성스러운 아내가 부흥 강사에게 자기를 데리고 가더니 안수기도를 받게 하더랍니다. 역시 안수기도를 받고 나니까 그 마음이 더 뜨거워지더랍니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담배를 피우려고 물었는데 갑자기 구역질이 나더랍니다. 담배 맛이 전과 같지 않고 너무 쓰더랍니다.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담배를 끊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던 도박을 하려고 포카 판에 앉았는데 그렇게 힘이 들더랍니다. 며칠 밤도 새우던 자기인데 두 세시간을 견디기가 힘이 들더랍니다. 그러면서 또한 자연스럽게 도박과도 거리를 두게 됐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를 성결하게 다듬어 가시는 성결의 영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우리를 막아주십니다. 죄의 쓴 뿌리가 세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없애 주십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육체의 욕망과 육체의 소욕이 들끓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 소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의지로는 이 욕망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성결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출 19: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의 몸을 성결케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출 29:32을 보면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거기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인을 새겨 넣어 제사장들의 관 전 면에 달라 명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결에는 헌신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결한 삶이란 곧 헌신하는 삶을 말합니다.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는 점점 힘을 잃게 되게, 점점 우리 안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죄의 쓴 뿌리는 모양만 남게 되고 어떤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 5:2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인 헌신의 삶을 살게 하시므로 우리 삶 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우리 심령을 사랑으로 채우십니다.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니다. 이 땅에 평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인내하게 하시고, 착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진실하게 하시고 온유하게 하시고 또한 절제하게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이렇게 살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이런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쓴 뿌리들은 그 힘을 잃게 됩니다. 모양은 있으나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결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성결을 이루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이 성결은 하루 아침에 은혜 받았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조금씩 평생토록 이루어 가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 힘으로는 이 성결을 결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만 성결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결이 무엇인가?/ 마5:1-8
성결이 무엇인가? 마5:1-8 1. 마음의 청결이다 (마 5:8). 가) 이성에 대한 마음이 청결해야 함 (마 5:28). 나) 물질에 대한 마음이 청결해야 함 (엡 5;5). 다) 시기.질투가 없는 마음이 되야 함( 창 4:5). 2. 참 사랑이 곧 성결이다 (마 5:46-48). 가) 원수라도 사랑하는 참 사랑 (마 5:44). 나) 편벽되지 않는 참 사랑 (마 5:45). 다) 거짓없는 참 사랑 (롬 12:9). 3. 빛의 생활이 곧 성결이다 (마 5:14). 가) 착한 행실이 곧 성결이다 (마 5:14). 나) 빛이 되시는 주님을 쫓는 사람을 어두운 데서 살지 않음 (요 8:12). 다) 빛의 믿고 실행함이다 (시 119:105). 결론 : 성결은 청결한 마음, 사랑, 빛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열매와 같으니 누구든지 성결의 은혜를 받고자하면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원수라도 사랑하고 광명한 생활을 계속하면 된다 (요일 1:9).
성결하게 삽시다/ 벧전1:13-19
성결하게 삽시다 벧전1:13-19 우리 교단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성결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중앙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적인 입장은 무엇입니까? 최초로 세워진 모교회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성결해야 합니다. 一.성결이 무엇입니까?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카토쉬,헬라어로는 하기오스, 영어로는 Holiness입니다. 성도라는 말도 원문으로는 카토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란 말은 복수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단수형으 로 부를때에는 Saint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특 별하게 잘 믿는 사람을 성자라고 호칭했습니다. 살아서는 부를 수가 없었고 죽은 다음에야 성자로 추존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베드로, 성 요한, 성 바 울, 성니콜라스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럼으로 성도는 성결해야 됩니다. 성 도여러분! 성결합시다,성자가 됩시다. 성도,성결,카토쉬,거룩하다. 깨끗하다. 흠이없다. 구별되었다. 독특하다, 신성하다,경건하다,봉헌되다는 다 같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성령을 충만히 받은 심령으로 사는 삶,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 그리스도 의 심정을 가지고 사는 삶을 성결한 삶이라고 합니다. 1. 깨끗한 삶을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 마태복음 5:3 에\"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 요\"라 했습니다. 심령은 헬라어로 퓨뉴마라고 하는데 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음이라는 말은 칼디아로서 사람의 생각과 뜻과 감정들의 좌소 곧 이지적 사고와 감정 적 사고와 의지적 사고를 합하여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 마음과 영을 합해 서 심령이라 부릅니다. 심령이 깨끗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7:9에 \"만물보 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 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 시나니\"라고 했습니다. (1)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면 구부러진 행위를 합니다. (2) 마음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게 됩니 다. (3) 마음이 음탕하면 음란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4) 마음에 미운 맘을 품으면 결국 살인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4:8에서도 \"죄인들아 손을 깨끗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2. 성결한 삶은 죄와 상관 없이 사는 생활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했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고, 흠없이 깨끗하게 ,거짓없이,진실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3:10에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 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라고 했습니다. 3. 성결한 삶은 세속과 구별되게 사는 생활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생활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1) 말이 달라야 합니다. 상스런 말이 아니고 누추한 말이 아 니고 포악한 말이 아니고 거짓된 말이 아니어야 합니다. (2) 행실이 달라야 합니다.민수기 6:18에 보면 나실인은 독주,포도주,포도즙,생포도,건포도,씨 나 껍질도 먹지 않고 구별되이 생활했습니다. 술, 담배,오입,도박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락도 건전치 못한 오락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복도 그렇습 니다. 유행이 있다고 해서 아무 유행이나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백년이 지 나도 성도는 성도입니다. (3) 이성교제도 깨끗해야 합니다. 청교도(Puritans),순결(Purity) 하게 살기 위해서 1602년 영국에서 일어났 습니다. 종교개혁을 형식,제도,신학적으로 철저히 하려는 개혁파인데 성공 회에서 박새를 심하게 했습니다. 자신들의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102명이 1620년에 메이클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1년이 지나자 절반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이 들은 미국에 뿌리 깊은 영향을 주었고 세계 개신교 성도에게 신앙의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1) 말씀중심으로 살았습니다 (2) 하나님의 제일주의(우선주의)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먼저 짓고, 그 다음에 학교를, 마지막으로 자기 들의 집을 지었습니다. (3) 엄격한 신앙생활( 주일성수,십일조,규칙,시간) 을 했습니다. (4) 협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5) 감사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성결교회가 한국교회의 청교도들이 됩시다. 성결이라는 말과 청교도 라는 말이 같은 뜻입니다. 4. 성결한 삶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과 오래참음,자비,양선,온유,절제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5.성결한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최고의 표준으로 살고저 노력하는 생활입 니다. 성결한 생활이란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항상 자기를 살펴 깨끗하게 하며 근신하고, 경성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하기 위하여 끊임 없이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도 \"저희를 위하여 나도 나를 거룩하게 하노니\"라고 요한복음17:19에 말씀하셨습니다.왜냐하면 성결은 하나님의 예 정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4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 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결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베드로전서 1:15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 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 지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했습니다. 二. 어떻게 성결할 수 있습니까? 1. 회개함으로 깨끗하여져야 합니다. 이사야 1:18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 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면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기억하시지 않는다고 했 습니다. 요한일서 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웨슬레는 \"성실한 생활은 한번도 죄를 짓지 않거나 실수하지 않는 생활이 아니라 날마다 회개 하는 생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려면 조심해야 하지만 돌아와서 자기를 반성해 보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믿음으로 깨끗하여 집니다. 베드로전서 1:18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피의 공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집니다.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 리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해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늘 기도를 힘 써야 합니다. 그래야 성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4.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 성결하여 집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나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하리라\"고 했습 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그 능력 가지고 자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정 력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수가 있습니다. 마귀를 이길 수가 있 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 금노릇, 빚노릇 하면서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세상에서 성도답게 살 수 있습 니다. 여러분 성령의 능력 받아서 성결한 삶을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성결의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충만한 결과를 성결한 삶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성결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중앙교회 성도입니다. 그런고로 명실 공히 성실하게 삽시다. (1) 곧 깨끗하게 삽시다. 참신하게 삽시다. (2) 죄와 상관없이 삽시다. (3) 세상과 구별되게 삽시다. 믿는 사람은 어딘가 달라져야 합니다. (4)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삽시다. (5)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표준으로 삽시다. 예수와 같이 삽시다.
성결하게 삽시다/ 벧전1:13-19/ 2004-02-21
성결하게 삽시다 벧전1:13-19 우리 교단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성결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중앙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적인 입장은 무엇입니까? 최초로 세워진 모교회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교회의 성도들은 성결해야 합니다. 一.성결이 무엇입니까?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카토쉬,헬라어로는 하기오스, 영어로는 Holiness입니다. 성도라는 말도 원문으로는 카토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란 말은 복수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단수형으 로 부를때에는 Saint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특 별하게 잘 믿는 사람을 성자라고 호칭했습니다. 살아서는 부를 수가 없었고 죽은 다음에야 성자로 추존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베드로, 성 요한, 성 바 울, 성니콜라스 등으로 불렀습니다. 그럼으로 성도는 성결해야 됩니다. 성 도여러분! 성결합시다,성자가 됩시다. 성도,성결,카토쉬,거룩하다. 깨끗하다. 흠이없다. 구별되었다. 독특하다, 신성하다,경건하다,봉헌되다는 다 같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성령을 충만히 받은 심령으로 사는 삶,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 그리스도 의 심정을 가지고 사는 삶을 성결한 삶이라고 합니다. 1. 깨끗한 삶을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 마태복음 5:3 에\"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 요\"라 했습니다. 심령은 헬라어로 퓨뉴마라고 하는데 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음이라는 말은 칼디아로서 사람의 생각과 뜻과 감정들의 좌소 곧 이지적 사고와 감정 적 사고와 의지적 사고를 합하여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 마음과 영을 합해 서 심령이라 부릅니다. 심령이 깨끗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7:9에 \"만물보 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 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 시나니\"라고 했습니다. (1)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면 구부러진 행위를 합니다. (2) 마음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게 됩니 다. (3) 마음이 음탕하면 음란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4) 마음에 미운 맘을 품으면 결국 살인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4:8에서도 \"죄인들아 손을 깨끗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2. 성결한 삶은 죄와 상관 없이 사는 생활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했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 하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고, 흠없이 깨끗하게 ,거짓없이,진실하게 사는 삶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3:10에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 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라고 했습니다. 3. 성결한 삶은 세속과 구별되게 사는 생활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생활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1) 말이 달라야 합니다. 상스런 말이 아니고 누추한 말이 아 니고 포악한 말이 아니고 거짓된 말이 아니어야 합니다. (2) 행실이 달라야 합니다.민수기 6:18에 보면 나실인은 독주,포도주,포도즙,생포도,건포도,씨 나 껍질도 먹지 않고 구별되이 생활했습니다. 술, 담배,오입,도박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락도 건전치 못한 오락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복도 그렇습 니다. 유행이 있다고 해서 아무 유행이나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백년이 지 나도 성도는 성도입니다. (3) 이성교제도 깨끗해야 합니다. 청교도(Puritans),순결(Purity) 하게 살기 위해서 1602년 영국에서 일어났 습니다. 종교개혁을 형식,제도,신학적으로 철저히 하려는 개혁파인데 성공 회에서 박새를 심하게 했습니다. 자신들의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102명이 1620년에 메이클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1년이 지나자 절반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이 들은 미국에 뿌리 깊은 영향을 주었고 세계 개신교 성도에게 신앙의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1) 말씀중심으로 살았습니다 (2) 하나님의 제일주의(우선주의)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먼저 짓고, 그 다음에 학교를, 마지막으로 자기 들의 집을 지었습니다. (3) 엄격한 신앙생활( 주일성수,십일조,규칙,시간) 을 했습니다. (4) 협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5) 감사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성결교회가 한국교회의 청교도들이 됩시다. 성결이라는 말과 청교도 라는 말이 같은 뜻입니다. 4. 성결한 삶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과 오래참음,자비,양선,온유,절제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5.성결한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최고의 표준으로 살고저 노력하는 생활입 니다. 성결한 생활이란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항상 자기를 살펴 깨끗하게 하며 근신하고, 경성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하기 위하여 끊임 없이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도 \"저희를 위하여 나도 나를 거룩하게 하노니\"라고 요한복음17:19에 말씀하셨습니다.왜냐하면 성결은 하나님의 예 정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4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 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결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베드로전서 1:15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 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 지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했습니다. 二. 어떻게 성결할 수 있습니까? 1. 회개함으로 깨끗하여져야 합니다. 이사야 1:18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 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면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기억하시지 않는다고 했 습니다. 요한일서 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웨슬레는 \"성실한 생활은 한번도 죄를 짓지 않거나 실수하지 않는 생활이 아니라 날마다 회개 하는 생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하고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려면 조심해야 하지만 돌아와서 자기를 반성해 보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믿음으로 깨끗하여 집니다. 베드로전서 1:18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피의 공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집니다. 디모데전서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 리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해서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늘 기도를 힘 써야 합니다. 그래야 성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4. 성령을 충만히 받음으로 성결하여 집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나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하리라\"고 했습 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그 능력 가지고 자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정 력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수가 있습니다. 마귀를 이길 수가 있 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소 금노릇, 빚노릇 하면서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세상에서 성도답게 살 수 있습 니다. 여러분 성령의 능력 받아서 성결한 삶을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성결의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충만한 결과를 성결한 삶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성결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중앙교회 성도입니다. 그런고로 명실 공히 성실하게 삽시다. (1) 곧 깨끗하게 삽시다. 참신하게 삽시다. (2) 죄와 상관없이 삽시다. (3) 세상과 구별되게 삽시다. 믿는 사람은 어딘가 달라져야 합니다. (4)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삽시다. (5)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표준으로 삽시다. 예수와 같이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