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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강해(2)/ 사도의 권리/ 고전9:1-14/ 2002-08-13
고린도전서강해(2)/ 사도의 권리 고전9:1-14 지난 주에 우리는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바울이 우상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하 는 결단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죄이기 때 문에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약한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고 했습니 다. 결국 신앙이란 어떤 법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그 법을 초월하는 것도 아닙 니다. 신앙은 형제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유란 자기의 편리함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원리입니다. 자 유는 더 높은 가치를 위해 포기하고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의 내용은 고전 9장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9장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의 권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권리가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8장부터 11장1까지 계속해서 형제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사례들을 들 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한 예의 연결선상에 있습니다. 1)’나는 자유자요 사도다’ 먼저 바울은 먼저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직에 대해 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직을 의심하는 무리가 발생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이유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교회안의 파당 때문 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고질적인 아픔이었습니 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처음부분 1장에서부터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 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1:11-12) 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교회안의 믿는 자들의 파당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을 따르는 자들의 반대편에 섰던 자들은 ’알고 봤더니 바울이 가짜 사도래! 예수님도 직접 보지도 못한 사람은 사도인 척 하고 있네 어쩐지 조금 모자라는 데가 있지?’그러니 바울의 반대편에 서있던 사람들은 바 울이 행하는 모든 일을 가지고 걸고 넘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 을 위해서 결단한 일들 조차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구설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자기 가 사도라는 사실을 애써 증명하려고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사도 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사도의 위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 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남이 자기를 의심하든 말든 충분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굳이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사도직이 의심을 받을 때 복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먼저 믿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 도들을 위해서 입니다. 분열되어 있는 고린도 교회의 화해를 가져오기 위함입 니다. 교회의 분열과 파당은 교인들의 신앙을 저하시키는 외적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했을 때 생겨 나는 결과 들을 종종 경험하고 보게 됩니다. 그런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 그는 사도라는 사실을 우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함입니 다. 교회가 분열되어 있고 싸우고 있다면 누가 그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 겠습니까? 교회의 교인이 바로서야 복음을 전하는데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사도의 직분이 아니면 복음을 전하지 못했겠습니까? 고린도전서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썼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도가 교회 밖에서 가정에서 믿지 않는 남편에게, 혹은 아내에게나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만날 때 무엇이라 말해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교회 를 와 보겠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매일 싸움만 해’ ’우리 교회 목사님은 이렇고 저렇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교회 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요? 과연 이렇게 했을 때에 복음을 전하는데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자랑해야 한다. 좋은 점을 자랑해야만 합니다. 부족한 면을 감싸주고 좋 은 점을 드러내 놓으며 자랑해야 합니다. 칭찬해야 합니다. 사실 ’자기가 사도라는 사실과 나도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고, 결혼할 수도 있고,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을 수도 있다’이런 말을 바울로서는 할 필요가 없 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로서의 권위가 부인되면 복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기가 사도임을 증명해야 하는 바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 까?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도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일했는가하 는 것을 자랑하면서 그 자랑을 무익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고후 12:1). 아무 유익도 없는 자랑을 할 수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2)사도의 권리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 모든 말을 쉽게 금방 이해하였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린도 교회도 그들 나름대로의 지식과 습관과 전통 속에 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바울의 편지 하나로 쉽게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조금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간섭하시면 금방 깨닫게 되겠 지만 대부분은 자기의 지식과 고집을 기준으로 해서 바울의 말을 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는 말 을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얼마든지 우상 제물도 먹고 마실 수 있는 지식도 있고 권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먹지 않는 것은 약한 형제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며 자기가 아니라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에서 자신이 포기한 사도로서의 권리의 내용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 입니다. 4절의 ”먹고 마실 권리”는 말씀은 대접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5절의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는 결혼과 아내까지라도 부양 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6절의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는 전도자의 일은 복음 전하는 일이기에 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부양 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러한 것을 뒷바침해 줄 예로서 포도원 농부와 목자의 비유 그리고 구약적인 율법의 근거 와 과 신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눅10:7)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사도로서 교회 에 생계비를 요구할 권리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바울이 이 권리를 쓰지 않고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12절에 보면 ”다른 이들도 너 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 이로다”고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권리도 포기하는 것, 이것이 바울의 신앙의 원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이 중심이었습니다. 형제의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 신의 권리도 포기하고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오직 복음만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라는 한 인간을 알고 따르기를 원한 것이 아 니라 오직 복음을 알고 주님만 따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직 서로서로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권리을 포기하는 일에 힘쓰며 사시기 바랍니다. 3) 전문인 선교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이 사도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비량 선교를 한 것이 오늘날 의 새로운 선교 모델로 제시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선교사의 신분 을 가지고는 세계의 많은 지역들로 들어갈 수 없게 됨에 따라 이제는 선교 단 체나 교회가 전문인 사역자들을 파송하기 시작해 선교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 게 되었습니다. 전문인 사역자들 내지는 평신도 선교사라는 과연 왜 필요한 것일까요? 첫째는 목사나 교회 사역자의 신분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세상의 3/4이 나 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업을 가진 평신도의 신분으로는 폐쇄된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사회의 모든 구조 속으로 침투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선교사역을 뒷받침할 재정문제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선교사들 에게 계속적으로 후원금을 보내야했다. IMF가 터지고 환율이 오르면서 그에 대한 부담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직업선교 전략을 이용하면 교회에 비용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몇 배의 선교 능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셋째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세계는 새로운 선교전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탈식민주의, 민족주의, 도시화, 세속화, 산업화, 교육열 등이 직업선교사가 전문 선교사보다 이점을 가질 수 있는 요인들입니다. 특히 전문 지식인 계층에게 접 근하는 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말씀을 끝맺으려 합니다. 목양교회는 우리 스스로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 만하여 서로가 감싸주는 따뜻한 분위기, 형제와 자매를 위해서 자신의 권리마 저도 아낌없이 포기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1:11-17/ 2001-11-15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1:11-17 하나님께서는 고대 시대에 그의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그의 백성 유다 민족에게 엄한 질책과 경고를 했습니다.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사 1: 15-17) 이것은 지금부터 약 2,700 여년 전에 당시 유다의 반인권적인 권력을 향한 하나님의 질책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 우리 민족같이 남. 북으로 분단되어 북에는 이스라엘 왕국, 남에는 유다 왕국으로 분립되어 서로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남. 북 왕국들이 모두 그러했지만, 남쪽 유다 왕국도 그 당시 전성기를 맞아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 정의는 땅에 떨어졌고 빈부의 차이가 극심하여 당시 많은 백성들은 배고픔과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정권과 그들과 한편이 된 지배 계층이 가련했던 유다 민중을 억압하고 그들의 고혈을 짜서 그들을 신음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못된 권력자들에게 분노하시고 그들의 죄악을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내 앞에서 악한 행실,” ”주홍같이, 또는 다홍같이 붉은 죄”를 행했다는 매우 심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엄히 질책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표현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실제로 사람을 잡아 죽여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행위를 가리켜서 한 말씀입니까?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라는 말씀을 미루어 볼 때 포악하고 억압적이며 반인권적인 정권이 악랄한 억압과 착취를 일삼아 과부와 고아들을 양산해 내고 그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부정하고 짓밟던 악한 행위를 보시고 질책하신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책망은 실로 놀라운 내용이었습니다: ”무엇 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사 1: 11-15) 이 말씀은 결코 예사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제사는 단순히 관례나 전통에 따라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시행하는 것이고 또 실상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입니다. 또 구원받은 우리 인간은 마땅히 창조하시고 해방해 주신 하나님께 제사지내고 예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제사나 예배를 거둬 치우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피투성이 된 손을 가진 자들은 아무리 하나님께 화려한 제사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웅장한 성전을 짓고 하나님도 감동시킬 만한 음악과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하나님의 질책이고 경고입니다. 피투성이 된 손을 하고 있는 자들이란 어떤 자들입니까? 실제로 사람의 피를 흘리도록 판결한 빌라도의 손만이 아닙니다. 노동자를 부당하게 착취하고 해고시킨 손은 피투성이로 뒤범벅 된 손입니다. 또 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 씌워 용공, 좌경, 빨갱이 등으로 몰아 구속하도록 내어 주고, 또 소위 구사대나 조직 폭력배들을 고용하여 노동자들에게 몽둥이질을 하게 하는 자들, 도시 빈민, 노점상, 화훼 마을 사람들 등을 몽둥이로 쫓아내는 폭력적인 경찰관과 구청 직원들, 전태일 같이 노동자를 분신, 자살케 하는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자들, 전 삼성 시계 노동자인 김용희 씨가 30일에 가까운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데 그런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자들, 지금도 민중 대회 후 평화로운 시위를 하고 학교로 돌아가고 있던 학생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둘러 학생과 경찰관을 부상당하게 하여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게 하는 자들, 등등이 모두 피투성이가 된 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피투성이 된 손을 가진 자들이 화려한 의식으로 요란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만 호통을 치신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이들이 하나님의 성전의 뜰을 밟는 것까지 호통을 치셨습니다. 아예 하나님의 성전 뜰을 밟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노하셔서 이렇게 제사와 예배를 거둬 치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것은 결국 제사와 예배 행위 자체를 반대하신 것이 아니라 피묻은 손으로 그러한 제사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반대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사나 예배 행위 이전에 먼저 사회 정의를 세우고 민중의 인권과 생존권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 국민의 정부라는 정권 하에 있습니다만, 그 전에 지난 30년 이상 계속된 군사 독재 정권 하에서 살았습니다. 그 때 우리 한국교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극히 일부의 그리스도인들이 군사독재정권과 싸웠습니다만,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복음화를 열심히 했습니다. 복음화니 영성이란 것은 기껏해야 군사 독재의 피해자들을교회로 인도하여 그들을 잘 돌보아 준 행위였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악독했던 군사 독재자들과 싸우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영성을 내세우고 복음화만 열심히 추진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현실은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그렇게 성장한 사회에서 고급 옷 로비 사건은 무엇입니까? 더구나 이 고급옷로비 사건의 주인공들은 모두 교회의 권사들이 아닙니까? 공무원 가운데도 기독교인이 그리 많건만 왜 공무원 사회는 부정 부패로 찌들었고 그렇게 뿌리 깊어 근절될 수 없단 말입니까? 왜 기독교인 대통령, 기독교인 국회의원, 정치인이 그렇게 많고 국회에서 조찬 기도회가 그렇게 자주 있는데 왜 정치는 반기독교적이고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당하고 있습니까? 기독교인 사장들이 그렇게 많은 데 왜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대량 해고가 있으며 폭력을 휘두르는 구사대나 조직 폭력배가 날뛰고 있는 것입니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가 군사 독재들에게 강도 맞은 피해자들을 교회로 데리고 가서 싸매어 주고 돌보아 주었다면 그것은 그들을 더 못된 강도로 교육하여 이 사회에 다시 내보내어 더 악독한 강도 짓을 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문 기술 경찰관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조폐공사 노조의 파업 유도 사건과 고급 옷 로비 사건을 철저히 조사, 처벌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탐욕으로 가득찬 한국의 몰인정한 기업가들과 이를 묵인하고 오히려 이들을 편들고 있는 우리 정부 당국이 외국인 노동자를 학대하는 야만적인 짓을 규탄하고 있습니다.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을 문제삼고 불평등한 미군주둔군 협정을 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전력과 한국 가스회사를 민영화하고 이를 해외 매각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금 이 땅의 민중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장하라는 것이고 이것을 위한 범국민 운동이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왜 관심 해야 합니까? 이것은 모두 힘없고 가난한 민중들을 돌보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강도를 만나는 불행한 일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 후에 여의도 국회 앞에 가서 천하에 악법인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서 특별 기도회를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도 우리 향린교회가 악법인 국가보안법에 의해 고난 당하고 있는 이 땅의 민중들과 분단되어 고난 당하고 있는 이 민족을 위한 선교적인 투쟁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난 금요일(12월 10일)은 국제연합이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한지 제5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오늘 주일은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의 인권 상황을 돌아보기 위한 주일인 인권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인권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표적으로 한가지만 말한다면 그것은 국가보안법이란 반민주, 반민족, 반인권 악법이 엄존하고 있고 이 악법에 의한 피해자들이 이 땅에 많이 존재하고 있고 지금 이 추운 겨울에도여전히 감옥에서 징역을 살고 있고 혹은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200여명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최근 세계 각국의 인권침해 순위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우리 나라는 46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지금 우리가 국가보안법의 철폐니 개정이니 하고 떠들고 있는 이 사실 자체가 우리 민족의 수치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 아시다 시피 우리가 회원국으로 있는 그 유엔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권고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철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우방 나라들이나 국제사면위원회 같은 국제 인권 단체들이 국가보안법이란 악법을 폐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으나 이 정권은 남. 북 분단을 이유로 아직 그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하도 그것을 민족 분단에다 핑계를 대니까 이제는 ’설령 한국이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란 악법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지경입니다. 이 나라의 지성을 대표하는 민주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을 중심으로 이 땅의 교수들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했습니다. 이 나라의 법과 민주를 염려하는 민주변호사협의회 소속 변호사들을 중심하여 이 사회의 변호사들이 국가보안법은 악법이라고 규정하고 그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이 나라의 농민, 빈민, 여성, 등은 물론 노동계, 보건의료계, 등 할 것 없이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이 거의 모두 망라하여 국가보안법이란 악법을 철폐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나라의 도덕과 양심을 대변하는 종교계에서도, 불교, 원불교, 카톨릭교회, 개신교, 등 이 땅의 모든 종교들이 들고일어나서 한 목소리로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였습니다. 특히 종교계의 투쟁은 실로 가열찹니다. 카톨릭의 사제들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며 22일간을 삭발, 단식투쟁을 했고 또 며칠 전에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이 악법의 철폐를 요구하며 미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의 목사들도 목회자 정의평화위원회 소속 목사들이 중심이 되어 목회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성명서를 한겨레 신문에 실었습니다. 우리 교단에 속한 목사님입니다만, 전주 고백교회의 담임목사인 한상렬 목사가 53일간을 단식했습니다. 지금 전북에서는 모든 성당과 모든 교회들이 우리 교회처럼 국가보안법 철폐를 요구하는 휘장을 성당과 교회 건물 앞에 쳐 놓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썩은 정치권에서는 권력의 빵 조각을 가지고 서로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추한 정쟁만을 계속하고 있고 이 정권은 공동으로 집권하고 있는 자민련이란 정당 내의 보수-우익 세력을 핑계하면서 이 천하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철폐는커녕 개정하는 일 조차도 미적거리고 핑계를 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끄저께 영자 신문을 보니까 국회에서 집권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 두 당의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박태준 자민련의 총잰가 하는 이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려는 국민회의의 움직임에 대하여 이는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우리는 국가보안법 개정에 찬성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태준 총재는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는 매우 섬세한 문제로 신중하게 다뤄야 하고 적어도 명년 4월 총선까지는 손대면 안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박태준 총재는 최근에 기독교인이 된 이래로 신앙이 매우 돈독한 분이라고 미국에서 그를 세례주었던 제 후배 목사가 제게 자랑삼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에게 이사야서와 예언서, 그리고 예수님의 교훈을 다시 잘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에짚트 제국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려 하늘을 우러러보고 울부짖던 민중의 신음 섞인 호소를 들으시고 바로의 권력을 내리 치시고 심판하여 민중들을 해방해 내시고 자주하는 새 민족을 내신 출애굽의 하나님, 고아와 과부의 울부짖는 호소를 들으시고 불의한 권력을 심판하여 망하게 하신 하나님, 로마제국과 헤롯 정권의 학정 아래에서 강도 만나 죽어 가고 있던 민족에게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사야서에 있는 대로 그따위 화려한 제사나 예배를 당장 거둬 치워라 하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피묻은 손을 가진 자들이 제사를 드리러 하나님에게 나아 온다는 것, 그렇게 하고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 정의를 유린하고 민중의 인권과 생존권을 박탈한 자들이 아무리 화려한 예배를 드려도 아무런 소용도 없다, 오히려 그런 짓들을 거둬 치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억압받고 학대받는 민중을 해방하여 참다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민중의 해방자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신 그 분, 인간의 목숨이 온 천하보다 더 귀중하다(마태 16: 26)고 하시는 분, 그 분이 오늘의 한국 기독교와 교회를 본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종교나 교회란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종교나 교회를 위해 있지 않다’고 선언하시지 않겠습니까? 또 그는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워’ 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설교 후의 응답송으로 부를 찬송가인 ”뜻 없이 무릎 꿇는...”(515장)이란 찬송가는 죤 헤이(J. Hay)가 지은 것입니다. 그 2절에 보면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이 있고 눈물과 아픔이 있는 한, 거기 예수님이 오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고난을 함께 지실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한 사람이라도 고난당하는 영혼이 있는 한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고 계시고 그런 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평안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과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까지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이 대림절에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유는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성탄절 이야기 때문이라기 보다도 구체적으로 이 땅에 인권이 유린되고 정의가 부재하여 아픔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 땅의 민중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교, 복음화를 곧잘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선교나 복음화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 성령의 친교 등을 잘 말하면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많이들 모인 교회는 무엇인가 은혜가 충만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를 할 때 어떻게 기독교를 이해하고 전하는 가 하는 것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협박성의 외침은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강도 만난 피해자들을 돌보고 더 나아가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강도들을 이 사회에서 추방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곧 인권 선교이고 인권 선교를 하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부를 향해서 요구합니다.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악법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반인권법인 국가보안법을 당장 폐지하시오. 그리고 이 법에 의해 감옥에 가 있거나 재판을 받고 있는 200 여명의 양심수들, 또 구속 수배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 성탄절에 모두 석방, 사면, 복권하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권리 포기/ 갈2:20/ 2008-02-16
권리 포기 갈2:20 미국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채플린을 할 때에 저를 일깨운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환자를 만나서 상담하고 마칠 때가 되면 채플린 몇 명이 모여 하루의 일을 서로 보고하고 평가합니다. 저 차례가 되어서 오늘 환자를 만나서 상담했던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그때 슈퍼바이저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수많은 대답 중에 왜 너는 그런 말을 했는가? 수많은 질문 중에 너는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가?’ 를 묻습니다. 이 질문은 내가 아무런 의식 없이 무심코 생각하고 대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세상에 많은 질문 중에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세상에 수많은 대답 중에 그런 대답을 하는지 나에게 그 생각과 말의 뿌리가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어떤 문제 앞에 각 각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말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게 하는 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하는 다양한 생각과 말의 뿌리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의 욕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포장하고 객관적인 이유를 이야기하며 정당하게 말하는 것 같아도 그 배경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 자시의 가치관등이 그 말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너무 좋고 감격해서 예수님께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말했던 것은 바로 그 속에 정말 평안과 복된 곳에 머물고 싶은 자기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둘째, 정확한 말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땅에 12정탐꾼들을 보내어서 돌아와서 보고 할 때에 10명의 정탐꾼들은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지만 그곳에 거하는 사람들을 보니 대단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과 우리를 비교해보니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옳은 판단입니다. 이러한 것은 주로 율법이나 도덕, 윤리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말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그렇게 인정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말에는 항상 자기나 혹은 객관적인 판단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인간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예레미야 등입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그냥 사람들이 말하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대답을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믿음의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때에 이 대답은 너에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에게로 나온 것이다 즉 믿음에서 나온 것 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듣기를 원하시고 보기를 원하시는 말과 생각이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의 말과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서 주님은 믿음의 말과 생각이 표현되고 나타나기를 원하시고 이 믿음대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과 생각은 아무에게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말과 생각을 하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 사람에게서 들어볼 수 있습니다.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말과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자아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자아관이란 내가 나에 대해서 갖고 있는 마음의 상, 이미지를 말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자아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세계에 대한 개념과 태도를 형성해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자아관이란 바로 이렇게 형성된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느냐는 내가 어떤 경험을 하여왔느냐에 많이 좌우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자아관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서 자기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내가 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없어 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아관의 공통적인 것은 내가 모든 일의 주인이라는 자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평가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거절하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권리포기란 내가 나의 주인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산에서 만났을 때 처음으로 하신말씀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3:5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신을 벗으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룻기 4:7-8에 보면 신을 벗는다는 것은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룻을 아내로 맞이하려는 보아스가 나오미의 가정에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할 때, 그 사람이 신발을 벗습니다. 그 의미가 바로 나의 소유와 권한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너가 네 인생의 주인 되어서 무엇이든지 결정하고 선택 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기위해서 보내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모세는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을 바라보며 거절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나는 내가 생각해도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출 3:13에 내가 이스라엘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셋째, 나는 해 봐야 안 될 것이 뻔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출애굽기 4:1에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넷째, 나는 부족해야 라고 변명합니다. 출4:10에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자니이다. 다섯째, 하나님 나 말고 다른 사람 찾아보시지요. 출4:13에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는 자기가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사람을 죽였고 그런 자기를 죽이기 위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리더십, 무술, 언어 등 지도자로서 갖추기에 필요한 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히브리백성을 위해서 나서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애굽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권력과 힘과 지혜를 가지고 나아갔어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조롱하며 멸시하므로 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세가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고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그 자아상을 바꾸시기 위해서 또박또박 모세의 변명에 대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화를 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인생의 주인 되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거절하는 네 자아상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결국 모세는 항복합니다. 자기가 판단하는 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결정을 맡기는 복종을 선택합니다. 근본적인 자아관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행세하여서 내가 나를 평가해서, 내 뜻대로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도록 권고하십니다. 이것을 포기할 때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 확신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릭워렌 목사님은 자기가 자기주인이 되어서 살아갈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두려움, 좌절, 피곤함, 그리고 실패로 결론지어진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바울이 이루었던 믿음의 역사는 바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며 내 인생을 주관하심을 믿는 그 자아관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생각과 언어를 말하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중단하고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할 때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둘째, 권리포기란 무엇을 말합니까? 세계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세계관이란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즉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이며 삶에 대한 시각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한 곳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여리고성을 앞두고 있을 때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 이 두 군데입니다. 여호수아 5:15절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세상의 세계관은 어떠합니까? 돈이 얼만큼 있는가? 권력이 얼마나 있는가? 성공이 얼마나 사모할 일인가! 등을 생각합니다. 크고 많고 높은 것이 사람들에게 존중과 추구의 대상이 됩니다.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 소아과 연구원들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이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했습니다. 30년 전에는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순서가 동물 어두운 방에 있는 것, 높은 곳, 낯선 사람, 시끄러운 소리 순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부모의 이혼, 핵전쟁, 암에 걸리는 것, 환경오염, 아동폭행 등의 순서였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10년 전에 서울시내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어보았더니 여러 대답 중 에 가장 많은 대답을 한 것이 유명하게 살고 싶다, 부자로 살고 싶다, 편하게 살고 싶다 입니다. 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런 세상입니다. 즉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배 받는 것 보다는 지배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접하는 것보다는 대접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에게 제일 먼저 걱정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땅의 입구에 있는 여리고 성입니다. 그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하기위해서는 성이 튼튼해야 합니다. 요새처럼 그 위용이 대단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크고 장대한 이 성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너의 눈앞에 보이는 여리고성이 크고 장대하며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그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무리 크고 놀랍다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고, 주께서 밟는 땅마다 주신다고 약속하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그 다음날부터 한 것이 무엇입니까? 침묵하며 이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돕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돕니다. 그리고 나팔을 불고 백성은 소리를 치게 합니다. 이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계관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노예로서 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창과 칼의 힘이 얼마나 큰지 잘 압니다. 인간의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줄도 압니다. 인간이 이루어놓은 일을 무너뜨리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 앞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성을 돌기만 합니까? 바로 인간의 힘과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곳이라는 믿음의 세계관이 그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자기들이 메뚜기와 같다고 외치며 우리는 저렇게 좋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낙심하고 절망하면서 울었던 이스라엘백성이 아닙니까? 담대하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말씀을 믿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곳이며 믿음으로 나갈 때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관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부갑상선 기능 항진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 이란 긴 이름의 희귀병에 걸린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칼슘이 몸안에서 과다 생성되어 축적됨으로 온 몸이 석회처럼 굳어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여덟 살에 다리를 절기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자리에 누워 굳어가는 육신과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에게는 모든 세상이 절망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원망의 덩어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을 거부하며 누운 채로 영어와 한문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그러기를 30개월 한 권의 책이 나옵니다. 바로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라는 책입니다. 주인공인 박진식씨는 SBS 휴먼드라마에도 소개되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신앙인이 아니였지만 극한 고통가운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되었고, 바랄 수없는 것들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박진식씨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비전과 감사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세상을 바라본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는 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하여 절망하신분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읽고 부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꿈꿀 수 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참담한 현실에 처해 있을지라도 살아있는 한 꿈을 버리진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마침내 맞이한 내 안의 신앙이라는 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아픔으로 깨달은 건 감사였다. 밥을 삼키기 힘겨워졌을 때 단지 음식물을 삼킬 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숨쉬기가 힘겨워졌을 때 단지 고른 숨을 쉴 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중장애인이 되었을 때 단지 한 손가락, 한 손이라도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온 몸이 중증의 돌인간이 되었을 때 단지 머리와 몸통만 정상이어도 감사하다는 걸 뼈에 새겼다. 하나 덧붙이자면 평형기관 마져 손상되었을 때 나는 어느 생명체에게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절절히 깨달았다. 끝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여러분 이 세상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유전무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상의 벽은 너무나 높고 험합니다. 특히 장애인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세계관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자기 속에 들어올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희망과 비전 그리고 감사로 자기의 삶을 믿음으로 정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나아가서 광야라 할지라도, 비록 여리고성처럼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믿음의 걸음으로, 말씀의 순종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권리포기는 바로 이 세계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셋째, 권리포기는 무엇을 의미 합니까? 가치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가치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이 나에게 더 소중하고 중요한가를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사막에 가서 금덩어리 하고 물 한 컵 중 선택하라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할까요. 물론 금덩어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구출 받을 만한 기약도 없는 사막에서 물을 먹지 못해 생명에 지장을 주는 상태에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까요? 물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입니다. 자신에게 더 필요하고 유용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즉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당시에 그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얻으려고 목숨을 겁니다. 일평생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이었습니다. 그리스문명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로마는 학문의 세계를 얼마나 존중했는지 모릅니다. 그에게는 가말리엘문하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의 세상 속에서 그는 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돈이 중요했습니다. 바울의 집은 물질적으로 풍부해서 돈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샀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아무리 사정하고 인간관계로 고개를 숙여도 안 되는 곳에서 돈으로는 얘기가 통한다는 뜻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무서운 거예요. 돈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나서 그가 구체적인 결단 중에 ‘내가 내 인생을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생각했던 이 모든 것을 내가 배설물처럼 여겼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내가 신앙 안에서 분명하게 내 가치관을 바로 세워 선택을 해 나갈 때 나에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며칠 전에 유명잡지편집을 담당하는 이사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말이 광고주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고주를 부를 때에 광고는 빼고 주님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얻기 위해서, 유지하기위해서, 더 풍성하게 하기위해서 인간은 모든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려놓을 때 그리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게 될 때에 모세와 같은 결단이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11:24-26까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의 가치관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먼저 거절할 것을 거절합니다. 자기에게 오는 모든 명예를 거절합니다. 선택할 것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합니다. 바라볼 것을 바라봅니다. 즉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세가 거절한 것은 이 땅에서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모세가 선택한 것은 이 땅에서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허상과 같은 것입니다. 가치관이 바뀔 때 생각이 바뀝니다. 말이 바뀝니다. 믿음의 언어와 믿음의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전에는 돈이면 무엇이든지,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면 무엇이든지 자기마음대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말하였지만 이제는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바로 믿음의 생각을 품습니다. 믿음의 말이 그 입술에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중심이였음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바르고 올바른 말을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넘어서서 내가 정말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가치관을 가지고, 믿음의 언어를 표현하고, 믿음의 행위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땅에 썩어질 것을 위해서 선택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나라의 백성다운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본의 파동학자인 에모도 마사로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라는 책에서 물도 사랑에 반응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물을 향해 심한 모욕의 말을 하면 물의 결정체가 흉하게 깨어져 그 모양이 형편없이 변합니다. 그 물에 악마라는 글씨를 써서 붙이면 결정체 가운데가 보기 흉한 구멍이 뚫립니다. 그런데 물을 보고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라고 말하면 물의 결정체는 아름다운 육각형을 띠게 됩니다. 더 나아가 ‘너를 사랑해’라고 말을 하면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로 물의 분자가 변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실험해서 사진으로 다 찍어놓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이 70%의 수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믿음의 언어, 믿음의 생각,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증거하고 사람들 앞에 축복할 때 바로 그 언어와 생각의 힘이 사람 속에 모든 물을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결정체로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이런 표현하게 되면 우리 몸에 물이 육각형을 이루면서 건강한 몸을 이룬 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시며 내 삶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언어와 생각을 품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하나님만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믿음의 말이 아니겠어요.“너 지금 그 성적가지고 뭐 하겠다고 얘기하니? 안 될 거야!”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 듣고 싶은 사람 없습니다.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를 향한 계획이 있어. 너는 지금까지 해온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일이 더 중요한 일이야, 너의 삶은 의미가 있어, 가치가 있는 거야, 낙심할게 아니야 다시 일어서, 하나님이 너의 인생을 붙들고 있어!” 그런 믿음의 말을 여러분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듣기 원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내 삶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 소망의 말씀 듣기를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속에 사모하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내 몸을 내 육신과 내 영을 험담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비평하고 비판하는 그곳에 노출시키지 마세요. 내 몸의 70%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 영혼이 병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모두 믿음의 말을 듣기 원합니다. 낙심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신다고 그리고 하나님이 너를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고 하나님이 가장듣기를 원하는 말이면서 오늘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말 그것이 믿음의 언어가 아닐까요? 믿음의 언어가 없으면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여러분 입술 속에 어떤 언어가 나오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마음이 품어지기를 원합니까? 믿음의 언어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구체적으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되는 것 내려놓으십시오. 이 세상의 가치관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십시오. 그때에 여러분의 입술 속에, 여러분의 삶속에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믿음의 역사, 정복의 역사, 신앙의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 역사는 민족을 바꾸고 열방을 바꾸는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 일에 쓰임 받는 사랑하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축원합니다.
권리냐, 의무냐?/ 창2:18-25/ 길자연 목사/ 2009-09-02
권리냐, 의무냐? 창2:18-25 우선순위가 내 인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이루려는 것들을 위해 희생하고 도전하는 삶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보다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쟌 스네이비스라는 사람은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능력과 장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에 오판하여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은 삶의 기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가정생활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가정은 일보다,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며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기본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초가 부실하면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홀랜드는 ’사람이 가정에 가까이 있을 때에 행복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가정을 벗어나 밖에 있을 때는 행복에서 멀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정 밖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가정을 귀찮게 생각하고 가정의 사슬을 끊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행복의 원리는 가정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있는 사람은 다 있는 사람이고, 가정이 없는 사람은 다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은 행복의 오아시스입니다. 행복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복의 기초를 만드시고 그 운영의 책임을 우리 인간들에게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은 힘을 기울여 노력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주변에서 행복을 위한 노력없이 행복을 소모적으로 망가뜨리며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흔히 신앙생활을 열중하는 사람들 중에는 현실생활보다 천국을 사모하며 내세 중심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국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현실 생활이 천국만큼 중요한 이유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상생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파송받은 선교사들입니다. 천국의 백성들로서 이 세상에 파송받은 행복의 전달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가정의 행복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남자를 남자답게 만들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남녀가 공존하는 가정입니다. 행복한 가정에 사는 사람들은 어딘가 다릅니다. 이와 달리 불행한 가정의 사람들은 비참한 사고와 서슴치 않는 것을 종종 목격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건강해야 합니다.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가정의 주인이 누구신가를 한번쯤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가정에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인가, 누구를 중심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의 주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닙니다. 가정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행복이 되시고 중심이 되십니까? 하나님은 가정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아담을 보실 때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아시고 아담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라는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오늘 본문 2장 18절에서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남자 혼자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남자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부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마음 속, 몸 속에 들어있는 성적인 본능, 먹고자 하는 본능, 명예를 추구하는 본능, 이 모든 본능들은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인간의 본능을 인간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행복과 삶을 위해서 심어주신 것을 축복으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캐론 잉그버그라는 여자 박사가 <탱고는 두 사람이 추는 것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두 사람의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며 가정 역시 너와 나 우리 두 사람의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듯 우리 인간의 서로가 필요로 하는 인간의 내면의 감정, 생리적 현상, 마음의 상태, 인간의 모든 욕구가 가정 안에서 표출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언제나 가정 안에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정 안에 들어와야 하고 가정에 충실해야 하고 가정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기 위해서 가정을 뛰쳐나갑니까?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로 행복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가정의 중심에 두고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행복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을 통한 가정의 행복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생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생활을 잘하면 믿음을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의 행복을 보장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믿음생활이 행복의 동력이 되는 것일까요? 믿음은 신뢰성을 주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신뢰가 있습니다. 믿음은 가족을 결속하는 힘이 있습니다. 서로간에 성격적 차이와 생각의 차이를 초월해서 식구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믿음 안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5절 말씀에서처럼 믿음생활을 잘하면 하나님과도 하나가 되지만 아내와 남편이 하나가 됩니다.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으면 두 사람은 결속되고 갈등이 해결되고 행복이 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정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께 나와서 ”나사렛 예수여 내 딸이 병이들었습니다. 고쳐 주십시오”라고 하자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딸이 귀신에서 나음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토록 복잡하던 가정문제가 믿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있으면 모든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삭을 보시고 한나를 보십시오. 농경시대에 자식이 농사짓는 힘의 원천인데 그런 농경사회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20년 만에 응답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복의 전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잘 믿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를 인정하는 행복 이렇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믿음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 부수적으로 행복을 위하여 해야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서로의 동질성과 이질성과 그리고 대등성을 알아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 할 정도로 여자를 열등하다고 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자와 남자는 성별적인 차이가 있고, 기능적인 차이가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동질적인 존재라고 봅니다. 이것을 알아야 서로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의 도구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은 자기에게 이끌려 오는 하와에게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했습니다. 최상의 칭찬의 표현입니다. 칭찬은 행복을 배가시키는 도구가 됩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고 했습니다. 가족 식구는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4장 1절에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라고 했습니다. ’동침’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안다’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살과 살이 하나가 되는 동침의 사건을 통하여 서로를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연합하여 서로 알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것은 가족들 서로 간에 위선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 안에 위선이 그대로 있으면 가정은 불행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여러분, 행복하십시오. 행복은 가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정적인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길자연 목사(서울 왕성교회)
권리를 사양함/ 고전9:1-18/ 2003-03-07
권리를 사양함 고전9:1-18 9장은 8장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8장에서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를 논한 바 있습니다. 우상이나 그 제물이 다 아무 것도 아니로되, 때로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해서 먹는 것을 절제하라고 했습니다. 9장은 거기서 나아가 바울이 사도로서 가진 자유와 권리, 그 권리를 양보할 때의 유익을 논하고 있습니다. 사도로서 바울의 권리 먼저 바울은 자신이 가진 두 가지 권리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자유인의 권리이고, 둘째는 사도로서의 권리입니다. 첫째로, 자유인으로서의 권리입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1절) 바울의 자유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자유는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자유입니다. 로마제국은 노예로 유지되는 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노예요, 전쟁에서 농사, 교육, 가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노예가 동원되었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노예가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하물며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면 어디서나 신분이 보장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 시민권을 얻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연금했던 로마의 천부장은 많은 돈을 들여서 시민권을 얻었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출생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행22:28) 부모가 시민권자였다면 아마 상류층에 속했을 것이고 재산도 많았을 겁니다. 로마 제국 안에서 상류층에 재산 많고 집안 좋으면 더 없는 자유를 누렸을 것입니다. 두 번째 자유는 천국 시민권자로서의 영적인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바울은 항상 십자가를 의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처럼 할례나 의전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느꼈습니다. 어떤 범죄의 탐욕이나, 율법의 정죄나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도 자유로웠습니다. 자기 힘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바울은 영적으로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상, 어떤 철학, 어떤 인간적 교훈에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인간적 욕망이나, 어떤 귀신, 우상, 혹은 어떤 미신에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마음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바울은 사망에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이 세상에서 바울이 매인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요, 천국의 법칙인 하나님 말씀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유로운 천국 시민임을 누구에게나 자랑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둘째로, 말씀드릴 권리는 사도로서의 권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 데 비교적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사도직을 비방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음에 대하여(고후1:23), 착취자라는 악평(고후7:2), 말이 졸하다든지(고후10:10), 많은 헌금을 거둔다든지(고후8:20), 큰 사도들만 못하다든지(고후11:5), 이런 저런 흠을 잡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변론을 합니다.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3절) 사도적 권리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사도란 어떤 직책인지부터 정확히 알아야겠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사도직은 주님의 일을 하는 모든 직분자들에게 해당됩니다. 나아가서 모든 성도들도 일정한 분량의 사도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의 사도직은 열두 사도와 바울에게만 적용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도직은 좁은 의미에서의 사도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사도직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목격자여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직접 임명한 자여야 합니다. 셋째로, 초대 교회의 설립자들입니다. 넷째로,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신약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입니다. 다섯째로, 사도적 증표로써의 기적, 즉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내어쫓거나 죽은 자를 살려내어 획기적인 복음 전파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오늘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두 가지 권리를 얘기합니다. 첫째는 결혼할 권리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5절) 바울은 독신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독신 생활의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직자도 결혼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란 바로 바울 이외의 모든 사도들을 말합니다. \"주의 형제들\"이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예수님의 아우들을 말합니다. \"게바\"는 베드로 사도를 말합니다. 바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도들, 예수님의 아우들과, 수제자 베드로까지 다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 사도는 결혼 생활을 했습니다.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닌다\"는 말은 같은 교인인 아내를 동반한다는 뜻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베드로 사도는 전도 활동을 하면서 계속 아내를 동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로마 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파들이 성직자의 결혼을 정당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속한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독신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많은 유혹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부부는 천국 일의 협력자입니다. 둘째는 생활비 보장에 대한 권리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4,6절) 일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생활비 조달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교회로부터 생활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바울은 아주 상세하게 변명을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향한 비난 가운데 물질과 관련된 부분이 꽤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이 생활비를 제공받을 수 있는 다섯 가지 정당성을 제시합니다. 첫째, 세상적 원리에서 본 생활비 보장의 정당성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를 세 가지 대상과 비교합니다. 첫째는 군대이고, 둘째는 농장이고, 셋째는 목장입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7절)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입니다. 군인으로 징집된 사람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습니다. 징집된 이상 국가가 그 생활을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모집된 천국의 군인으로서 자신이 받는 보수의 정당성을 변호합니다. 포도원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종종 천국을 포도원에 비유합니다. 교회는 천국의 농장입니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거기서 나는 열매를 먹을 권리가 있습니다. 양떼를 기르는 목축업자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양을 기르는 목장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라면 양떼에게서 나는 젖을 먹는 것은 당연합니다. 둘째, 구약 율법에서 본 정당성입니다.(신25:4)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8-10절) 팔레스틴에서 곡식을 타작할 때 소가 밟아 떨도록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소의 입에 망을 씌우는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소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식을 코 앞에 두고 먹지 못하니 고문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은 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도록 하신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값진 것을 전달해 준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11절)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 노임을 받습니다. 그 노임은 일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큰 일을 하면 큰 대가를 받고, 적은 일을 하면 적은 대가를 받습니다. 의사가 좋은 보수를 받는 것은 생명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법관이 비싼 대가를 받는 것은 사회 정의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영생을 전해주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사람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목회자의 일은 어떻습니까? 일의 성격으로 본다면 최고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적인 일을 한 대가로, 육신적인 생활비를 받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는 말씀입니다. 넷째, 바울의 후임자들이 받는 대접과의 비교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12절) 바울의 후임 목회자들은 매우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입니다. 우상의 도시에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로 살도록 훈련한 신앙의 아버지입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1-2) 그렇다면 다른 사도들이 받는 정도의 대접을 받는 것은 정당합니다. 다섯째, 주님의 명령입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3-14절)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10:9-10) 바울의 권리를 요약한다면 첫째는 자유의 권리입니다. 로마 시민으로서의 시민적 자유와 천국 시민으로서의 영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사도로서의 권리입니다. 사도는 결혼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도는 생활비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사도의 권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별로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특권이라기보다는 성도로서, 혹은 사도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입니다. 권리를 스스로 제한함 그러면 바울이 이렇게 자유와 권리를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유를 마음껏 누리겠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사도로서의 권리를 되찾고, 그 권리를 마음껏 행사하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반대의 뜻입니다. 자신의 자유와 특권을 다 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오늘 말씀의 초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유인으로서의 특권을 다 쓰지 않았습니다. 음식의 자유가 있었지만 다른 신자들을 위해서 때로는 우상의 음식을 제한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가 있었지만 때로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주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사도로서의 특권을 다 쓰지 않았습니다. 결혼할 권리가 있었지만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생활비를 지급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생활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천막 깁는 일을 하면서 자급 전도를 했습니다.(행18:3)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것이 바울의 자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자랑합니까? 없는 특권이라도 만들어서, 남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을 자랑합니다. 관공서에 가면 항상 특권층이 있습니다. 줄서서 기다리는 곳에 항상 줄서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새치기 문화입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세상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왜 굳이 유명인사가 되려고 합니까? 특권층 노릇 좀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특권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특권층을 비난하면서도 서로가 특권층이 되려고 애씁니다. 요즘 나오는 무슨 상품명들을 보세요. \"로얄, KING, PRINCE, PRINCESS, NOBLES, GOLD, PLATINUM, DYNASTY...\", \"단 몇 %만의 특별한 사람들을 위하여!\" 별 시건방진 놈들 같으니라구! 시시한 물건 하나 팔아먹으면서 무슨 로얄이고 킹입니까? 장사꾼들은 어떻게 하든지 소비자에게 특권층 노릇 좀 하라고 자극합니다. 그만큼 우리 마음 깊숙이 특권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뭔가 특권을 누리지 못하면 엄청나게 손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상 특권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우리는 천국 시민권자들입니다. 최상의 신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십니다. 최상의 부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천국 직분을 가진 자들입니다. 최상의 직분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세상적 권리를 다 쓰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두 가지 큰 축복을 받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상을 받습니다. 교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교회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는 생각입니다. 교회 일을 해서 상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일은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구역장, 성가대원, 각종 도우미....이런 일을 할 때에 우리는 상급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16-17절) 전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것 자체로써 상급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로서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전도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도라고 한 것은 불신자 전도를 비롯해서 목회적 설교 전반을 얘기 한 것입니다. 목회자가 목회자 노릇 한 것이 무슨 상급의 대상이 되는가?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사람이 밥 먹은 값으로 상을 받는다든지, 매일 세수하고 양치질 한 값으로 상을 받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상을 받을 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가진 특권을 다 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18절) 명심하십시오! 성도로서 교회일 하는 것 가지고 상 받으려 하지 마세요. 정말 상 받고 싶으시면 내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남을 위해 양보하세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상 받는 비결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상 받는 사람들과 벌받는 사람들이 똑 같이 자신이 한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습니다. 상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상 받을 일을 한 것을 모르고 있고, 벌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벌받을 일 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 이들은 다 같이 주님의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교회 일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상 받을 일인 줄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상은 전혀 엉뚱한 일로 말미암아 주어졌습니다. 교회 일이 아니라 일상의 일입니다. 주린 사람을 먹이고, 갇힌 사람 찾아보고, 목마른 사람 마시우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병든 사람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이 일들의 공통점이 뭡니까? 내가 하고싶은 일을 참고 양보했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남을 위하려면 내 하고싶은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양보하고, 돈을 양보하고, 자존심도 양보하고, 직책도 양보하고, 모든 특권을 양보해야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인들 가운데는(우리 교회에는 한 사람도 없지만) 예배와 기도에는 강한데 권리 양도에는 국물도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뭔가 잘하는 것 같은데 일상 생활에서는 인색하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많아요. 예배만 폼나게 드린다고 하나님께 상을 받지는 못합니다. 정말 하나님께 상을 받고 싶다면 오늘 내 권리를 다 쓰지 말고 적당히 양보하세요. 상을 기대하지 않아도 상을 주실 겁니다. 둘째로, 복음의 장애물이 없어집니다. 즉, 사람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12) 영혼을 얻습니다. 사람을 얻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에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줬습니다. 그 바람에 그 여자의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점쟁이 수입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붙잡아 관원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관원들은 고발자의 얘기만 듣고 바울 일행을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를 재판 없이 때리거나 가두는 것은 황제에게 벌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밤중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는 이적이 일어나고, 간수장과 그 가족이 회개하고 바울에게 전도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날이 밝아 상전들이 놓아주라 해서 풀려날 때에 비로소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리고 사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상관들이 와서 정중히 사과한 것은 물론입니다. 만일 바울이 미리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혔다면 매도 맞지 않았을 것이고 감옥에 갇히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편했을지 모르지만 간수와 그 가족을 구원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것 때문에 사람을 얻은 것입니다. 세상 살면서 가장 큰 축복은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형제, 좋은 친구, 좋은 교인, 좋은 상관, 좋은 부하...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세상에서 얻은 가장 큰 복이 바로 좋은 사람들과 만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좋은 친구, 좋은 교회, 좋은 교인, 좋은 이웃을 만났습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큰 축복은 좋은 교인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특히 장로교 목회자로서 큰 축복은 좋은 장로님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복을 가리켜 人福이라고 합니다. 제가 볼 때에 인복은 요행으로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누구에게든지 내 권리를 다 주장하지 않을 때 좋은 사람들이 곁에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내 할 말 내 주장 다 하면서 전도해 보세요. 누가 귀를 기울일까? 저는 지금도 집사람과 가끔 그런 문제로 논쟁을 합니다. 내가 아는 것, 혹은 내 의견을 꼭 표현해야만 하는가? 내 뜻을 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어떤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까? 자기 PR시대니까 표현해야만 하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잘난 척 해 봐야 별 소득이 없습니다. 적어도 인간 관계에서는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씁니다. 때로는 남을 무시하고 밟으면서 자기 뜻을 관철시킵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익을 보는 줄 알아요. 큰 착각입니다. 내 주장만 내세운 결과가 뭡니까? 잘못하면 바가지나 쓸 뿐입니다. 차라리 다른 사람 의견대로 따라 보십시오. 잘 되면 감사한 일이고, 잘못되면 용서할 특권을 가지게 되지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손해보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는 YES보다는 NO를 강조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무슨 업적을 쌓는 일보다는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될 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는 될 수 있는 한 NO보다는 YES를 많이 합니다. 성인으로서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한 것을 존중한다는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거꾸로 살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개판으로 무질서하게 살아도 내버려 둡니다. 그러다가 다 큰 자식들은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될 게 뭡니까? 어른들끼리 모여서 무슨 회의만 했다하면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남의 의견을 경청할 줄을 몰라요. 정말 바보같은 사람들입니다. 내 권리를 양보함으로써 더 큰 유익을 얻는 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특권을 양보하시고 마굿간에 나셨습니다.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사시고, 무소유자로 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까지 양보하셨습니다. 그래서 얻은 소득이 뭡니까? 모든 인류의 생명을 건지셨습니다.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 자녀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권리를 양보하지 않고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마찬가집니다. 오늘 여당과 야당이 밤낮 싸우는 것이 뭡니까? 양보하지 않고 얻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남북관계에서 안 되는 것이 뭡니까? 밤낮 퍼준다고 야단만 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퍼 주기는 얼마나 퍼 줬습니까? 양보는 가진 자가 하는 겁니다. 없으면 양보하려고 해도 할 것이 없습니다. 가진 자가 양보하는 것은 오히려 일종의 채권입니다. 국가 관계도 그렇습니다. 외교 관계나 무역 분쟁도 그래요. 일방적으로 이익만 보겠다고 하는 것, 사주지는 않고 팔아먹기만 하겠다고 하는 것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더 얘기할 것이 없습니다.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라 설명은 길게 했지만 결론은 간단합니다. 내 자유, 내 권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권리를 양보하세요. 그냥 되는대로 양보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결심이 필요할까요? 바울은 양보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15절) 죽음을 각오하고 양보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자에게 두 가지 커다란 유익이 생깁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상을 받습니다. 둘째로, 사람을 얻습니다. 영혼을 구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많은 혜택을 줍니다.
기업 무를 권리를 얻은 보아스/ 룻4:7-8/ 2003-10-09
기업 무를 권리를 얻은 보아스 룻4:7-8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 오늘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 말씀을 잠시 읽고 묵상하는 중에 번개, 천둥이 얼마나 치는지 우리집 막내 아이가 다른 방에서 자다가 일어나 무섭다고 제 방으로 왔습니다. 큰 녀석 둘은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데 막내는 아직 어리고 제일 민감한 모양이에요. 무섭다고 왔습니다. ”뭐가 무서워서 그러니?”라고 물었더니, ”아빠는안 무서우세요?”라고 되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뭐가 무섭냐?”고 했더니 아빠를 아주 존경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라구요. 그런 가운데 천둥번개가 얼마나 치는지 불이 다 나갔습니다. 부랴부랴 촛불을 켜서 성경을 보는데 하나를 켜서는 불을 밝힌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3개, 4개의 촛불을 켜고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평소에 전기불이 환할 때는 전기불이 고마운 줄 몰랐는데 전기불이 나가고 나니까 그 귀중함을 이렇게 깨닫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않습니까? 언제나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잊지 말고 늘 생각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잊지 말고 늘 기억하시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에게는 두 사람의 친족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보아스고, 또 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무개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무개는 자기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책임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권리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그 권리를 보아스에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법적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절차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룻기의 기자는 보아스와 아무개라는 친족 사이에 진행되는 대화를 잠시 중단하고 법적 절차를 위해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례적으로 행하던 풍습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풍습은 일을 확정할 때 신을 벗어서 주는 풍습입니다. 그 관례를 설명해주고 8절에서는 의식을 실제로 행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7,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옛적”이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룻기의 배경이 된 시대는 룻기 1장에서 보았듯이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룻기가 실제로 기록된 시대는 사사 시대가 아닙니다. 4: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적어도 보아스와 다윗 사이에 지금 몇 세대가 지났습니까? 보아스 다음에 오벳, 오벳 다음에 이새, 이새 다음에 다윗입니다. 3 세대가 흘렀습니다. 또 룻기에 이미 다윗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이 없어서 혼란했던 사사 시대가 아니라 왕이 등장한 이후입니다. 룻기가 기록되었을 때는 왕이 다스리던 왕정 시대입니다. 왕정 시대가 되면서 관습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왕정 시대에는 법적인 문서가 잘 발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도 등기 이전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다 문서로 합니다. 다윗 시대에는 문서가 잘 발달되어 있었지만 사사 시대에는 문서가 아직 발달되어 있지 않았던 때입니다. ”옛적”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를 말합니다. 그 다음에 지역은 ”이스라엘 중에”라 했습니다. 지역마다 관습이 다 다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나서 이를 쑤실 때 어떻게 합니까?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과 식사를 해보니까 그런 것이 없습니다. 가리고 하지 않습니다. 다 보이면서 이를 쑤십니다. 잘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것을 예의라고 합니다. 대신에 그 사람들은 음식을 쩝쩝거리면서 먹거나 입에 음식을 잔뜩 집어넣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인간 이하로 취급을 합니다. 교양이 없는 사람, 상대 못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입에 음식을 넣은 채 말을 잘 합니다. 나라마다 관습이 달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방귀 끼는 것을 참 조심스러워 합니다. 방귀 끼는 것이 굉장한 실례가 됩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음식을 먹고 트림하는 것을 아주 실례로 여깁니다. 아주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가면 유대인도 살지만 아랍 계통의 사람들도 살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나면 꺼억하면서 트림을 아주 잘 합니다. 제가 하도 이상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트림하는 것은 에티켓에 어긋나는데 그렇게 하느냐?” 그랬더니 아랍 사람이 자기네는 트림하는 것이 건강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건강하니까 트림을 하는 것이랍니다.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나면 안 나오는 트림을 억지로 한다고 합니다. 관습이 다 틀려서 그런 것입니다. 법적인 효력을 가져야 할 일들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이 법적 효력을 가질 필요가 있는 일들입니다. ”무르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책임입니다. 친족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또 ”교환하는 일”은 상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고 팔고 할 때는 주로 무엇을 사고 팔고 하겠습니까? 토지입니다. 또 소나 양같은 가축도 있고, 오늘 본문을 보면 무엇이 해당되겠습니까? 룻과 같은 여자도 해당됩니다. 옛적 이스라엘 중에 땅이든지 가축이든지 여자든지 간에 모든 것을 총망라해서, 다시 말해서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하든지, 상거래를 하든지 간에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무슨 일을 했다고 했습니까?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자기 신을 벗어 주는 것이 어떤 일을 처리하고 확정하기 위해서 하는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면 신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신 1:36, ”오직 여분네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신 11:24,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수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수 14:9,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이 말씀들을 보면 신은 소유와 관련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으로, 발로 밟는다는 것은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을 준다는 것은 소유를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신을 신었으면 벗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신을 벗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출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무슨 뜻입니까? 네가 서 있는 곳은 속된 네 소유의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땅, 하나님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 것은 상대방의 소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을 확정하기 위해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라고 했는데 누가 신을 벗어서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 본문에서는 아무개라는 친족이 신을 벗어서 보아스에게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권리를 보아스에게 양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 구절은 다시 한번 그 의식의 중요성, 엄숙성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을 확증하는 이스라엘의 전례입니다. 그렇게 해야 법적인 효력이 나는 것입니다.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한 친족 아무개와 보아스 사이에 일을 확정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관습을 실제로 행합니다. 4:8,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자기의 신발을 벗는지라.” 신을 벗어서 보아스에게 주었습니다. 룻 4:4,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대 내가 무르리라.” 처음에는 무르겠다고 한 가장 가까운 친족이 무르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가까운 친족과 보아스 외에는 더 이상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친족이 없다고 했는데 한 친족이 포기했으므로 오직 보아스만이 기업 무를 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만이 천국의 기업을 물러주십니다. 오직 한 분 외에는 우리를 구속해 주실 분이 없습니다. 누구입니까? 행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우리를 구원해주실 수 있습니다. 신을 벗어주는 관례까지 다 마침으로써 드디어 그동안 우리가 보아스와 룻을 위해 기도했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어떠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보아스와 룻을 위해서 기도했던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응답되었던 것처럼 이 아침에 여러분의 모든 기도의 제목들이 다 남김없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는 친족/ 룻4:5-6/ 2003-10-09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는 친족 룻4:5-6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나오미의 친족으로 성경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무개는 자기에게 이득이 될 것을 생각하고 나오미의 땅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내용이 법률적인 효력을 얻기 위해서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4: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그러니까 증인들 앞에서 ”이제 내가 삽니다”라고 선언을 해야 합니다. 법정이라든지 국회를 보면 땅땅하고 의사봉을 때립니다. 의사봉으로 때려야만 효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 법률적인 효력이 발생하려면 ”내가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다 증인입니다”하고 선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선포를 하기 바로 직전에 보아스는 급하게 말합니다. 기업 무를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책임도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4:5,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당신에게는 살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엘리멜렉의 기업을 계속해서 이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듣게 되었을 때 아무개라고 하는 친족은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돈을 주고 땅을 사면 나오미와 룻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을 계속 부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룻에게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자기가 돈을 주고 산 땅이지만 그 땅이 결국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룻에게서 나온 아이에게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엘리멜렉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룻에게서 아이가 많이 나오게 되면 자기의 아이들이 받게 될 기업의 분배가 더 적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후손들과 다투게 될 일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할 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기업 무르는 자는 적어도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가장 가까운 친족이어야 하고, 둘째는, 잃어버린 기업을 되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족은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자기에게 돌아오게 될 손해에 대한 생각이 앞서 기업 무를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4:6,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결국 첫번째 기업 무를 친족인 아무개는 포기를 합니다. 나는 권리도 책임도 다 포기하겠으니 나의 무를 권리를 당신이 취하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서 책임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살기 좋고 화평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책임은 생각하지도 않고 늘 권리만 주장하기 때문에 살벌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은 미합중국입니다.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나라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 가운데 특별히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두 민족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미국의 상권을 전부 장악했습니다. 부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만 쓰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돈을 모두 본국으로 보냅니다. 이스라엘이 중동에 무슨 돈으로 자기 나라를 건설하겠습니까? 미국에 있는 이민자들이 자기가 번 돈을 절대로 자기가 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도로를 건설하고 항만도 짓고 건물도 짓고 키부츠라고 하는 집단 농장도 세우는데 무슨 돈으로 하느냐 하면 미국에 있는 이민자들이 보내온 돈으로 합니다. 그래서 본국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 있는 유대인들을 굉장히 존경합니다. 또 특별한 민족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입니다. 일본은 땅이 얼마나 좁습니까? 거기다가 인구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의 시책은 될 수 있으면 외국에 나가서 살라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면 낯설고 물설고 언어와 관습이 다른 곳에서 고생을 하게 되니까 정부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을 다 지원해줍니다. 정착금을 대줍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일본 사람들은 자기가 일본 사람이라는 긍지가 대단히 강합니다. 자부심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정부가 지원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는 식입니다. 나가서 살든지 죽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초기에 미국 이민을 가서 얼마나 고생들을 많이 했습니까? 다행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부지런하니까 악착같이 일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번 돈을 우리 나라에 보내겠습니까? 아닙니다. 자기들이 고생할 때 우리 나라에서 도와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처음에 미국에 이민갈 때 자기들이 살던 집을 팔아도 그 돈을 다 가지고 나갈 수 없도록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재산도 마음대로 못 가지고 나갔습니다. 마음속에 조국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개인이든지, 가정이든지, 교회든지, 국가든지 간에 항상 권리에 앞서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 존재가 되어야 복받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가 친족으로서 불쌍한 나오미의 가정을 도와줄 수 있을까?”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친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무개라고 하는 친족은 권리만 생각했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은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자기는 권리도 책임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아무개라고 하는 친족을 아주 못된 사람으로 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합니다. 6절을 보면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해여 무르지 못하노니.” 무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안 한다는 것과 못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안 하는 것은 할 능력이 있는데도 할 의사가 없는 것이고, 못하는 것은 원하지만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당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친족 아무개는 물론 마음속에 책임감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무조건 그 사람의 약함을 탓하기에 앞서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번에도 생각을 했습니다만 오르바는 나오미의 말에 순종을 해서 어머니의 말대로 모압 지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르바를 나쁘다고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오르바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아무개라고 하는 친족도 할 능력만 있으면 했을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의 약함을 감싸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대머리였던 사람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 엘리사가 대머리였습니다. 왕하 2: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놀리니까 곰이 나와서 아이들을 다 물어죽였습니다. 그런 대머리를 볼 때도 놀리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사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께 얼마나 기도를 했으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로 ”엘리사야, 괜찮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셨겠습니까? 그러니까 머리가 빠질 수밖에 없지요. 또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이 자꾸 외출합니다. 탓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주님 앞에 눈물을 흘렸으면 ”괜찮다 내 아들아”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랑의 손길로 자꾸 쓰다듬어주셨겠습니까? 우리가 대머리를 볼 때도,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는 사람을 볼 때도 외모를 흉보지 말고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 들어주시고 복을 주시는 겁니다. 보아스처럼 내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서 책임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서 다른 사람의 약함을 탓하고 놀리지 말고 언제나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주고 감싸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한 부르짖음도/출22:21-24, 마5:17-20/ 인권주일설교/ 2009-12-05
마지막 한 부르짖음도 출22:21-24, 마5:17-20 오늘은 인권주일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기리는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두신 모든 인간은 똑 같은 권리가 있고, 함께 존경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인권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개인 또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리고 행사하는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라고 합니다. 이 권리를 누리고 빼앗기지 말고 빼앗지 말기를 바랍니다. 인권문제는 18세기에 시민계급이 봉건세력인 귀족을 견제하여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인권의 전형적인 사건은 1789년의 프랑스혁명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 목표를 천명하였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탄생되게 되었습니다. 시민혁명 사상은 근세 자연법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인권의 대표적 내용은 자유권, 참정권, 평등권, 인간으로서의 존엄권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기본 권리를 의미합니다. 왜 인간의 기본 권리마저 유린하고 삽니까?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학대합니다. 이런 인간의 욕심은 인간 사회를 동물적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동물 세계의 생태를 보세요. 흔히 말하는 “약육강식”, “생존경쟁”,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강한 자가 잡아먹고, 약한 자는 잡아먹힙니다. 서로가 생존하려고 피를 튀기며 싸웁니다. 아침이 되면 어떤 동물은 잡아먹으려고 뛰고, 어떤 동물은 안 잡아먹히려고 뛰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는 정글처럼 징그러운 삶을 삽니다. 이것이 정글법칙입니다. 인간의 기본 권리는 이미 죄로 점철되었고, 악으로 오염되었고,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권이란 인문주의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경계선을 넘어선 상황입니다. 인권이란 성경에 비추어볼 때, 성경대로 살 때 이해할 수 있고 인권을 지키고 실천이 가능합니다. 성경에는 인권의 기본구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7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합니다. 창세기 5:1-2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남녀가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예시합니다. 남녀가 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남자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남자에게만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사람에게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이나 옛 생활들이 너무 여과되지 않고 인터넷에 마구 유포됩니다. 심지어는 영상물이 돌아 인권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흥미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고 초상권을 침범하는 사례가 심각한 수준에 까지 와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인간의 기본 권리조차도 누리지 못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나 다름없이 장애인이 언제나 불이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남성에 비하여 항상 상대적인 성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로부터 억울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약자가 인간의 기본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권입니다. 인권주일에 다시 한번 말씀을 통하여 인권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8:2에는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면 교만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악랄한 재판장은 돈을 탐하고 약자를 무시하였습니다. 돈을 받고 재판을 부당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인권의 적입니다. 공공의 적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 왔을 때 혼자서 백성들의 재판을 맡아서 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백성들의 재판을 담당해야 하는 모세로서는 탈진상태가 되었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청을 받아들여 모세는 중간 지도자를 세웁니다. 그 때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자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출 18:21)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진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불의한 이익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사람도 두려워하게 되고 존경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윌리엄 워드는 “나는 아첨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비판하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 무시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나 격려해주는 사람은 절대 잊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2:21에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1987년 이래로 꾸준히 늘어서 30만 명을 넘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3D 업종이라고 하는 온갖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필요로 해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경제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그들의 인권은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여권을 압류 당한 사례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임금과 퇴직금의 체불과 삭감이 예사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일하지만 잔업수당, 야간수당, 휴일수당 등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온 ‘새터민’들도 인권유린 당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새터민의 돈을 떼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 와서 경제 개념이 없을 때에 접근하여 돈을 떼먹는답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우리와 함께 살 자격이 없습니다. 화성에나 가서 혼자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경기도 화성이 아니고 저기 태양계의 화성 말입니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현수막을 많이 보셨지요? 외국인 신부도 지난 15년간 50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지난해 농어촌 결혼 3건 중 1건이 국제결혼입니다. 2005년 한 해 동안 국제결혼은 전체의 13.6%이었습니다. 올해 3월 현재로 이들 가정에서 태어난 혼혈인은 초등학생은 6,310명, 중학생은 847명, 고등학생은 249명입니다. 국제결혼은 계속 증가하여 2012년에는 혼혈 학생이 16만5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단일 민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다민족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혼혈아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선교사님은 필리핀에서 선교하시다가 한국에 오시면서 필리핀 아이를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서울에서 사는데 학교에 다닐 수가 없어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어른들이 만나면 “야, 너 어디 사람이냐?”, “야, 너 아버지 한국 사람이야?” 등 아이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요. 아이가 집에 와서 그러더랍니다. “엄마, 나 한국사람 맞지?”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필리핀에 돌아갔습니다. 출애굽기 22:22에 보세요. “너는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아와 과부”는 구약 시대에 가장 약자였습니다. 그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가만히 살게 둬도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외된 사람들을 압제하고 빼앗고 억울하게 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권사님은 남편이 사업을 잘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그 동안 형제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외상값도 안주더랍니다. 그래서 수억 원의 손해를 보고 지금은 기도하면서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약하고 서러운 사람들을 얕보고, 사기치고, 눈앞에서 빼앗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출애굽기 22:23에 무어라고 하십니까?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게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면 하나님이 그들 대신 손 봐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자 편의 하나님이십니다. 왜 약자편인지 아세요? 강자는 가만히 둬도 혼자서도 잘해요. 그러나 약자는 보호해줘야 생존합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싸우면 어머니는 동생 편을 듭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형은 내버려둬도 안 얻어맞지만 동생은 내버려두면 얻어맞아요. 형은 항상 엄마는 동생편이라고 불평이 심해요.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들고, 주신 인간의 기본 권리를 찾게 해 주시려고 하나님은 약한 고아와 과부의 편을 드십니다. 야고보서 1:27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하니 하는 그 것이니라”고 합니다. 참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경건은 생동적인 것이고, 인권적인 것이고, 복지적인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장 큰 고통은 외로운 것이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오, 옆에 아무도 없는 소외감이 아닐는지요”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런 것입니다. 한 때는 ‘한강 투신’이 마치 유행인양 번졌습니다. 강에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은 사회에 대한 항변입니다. 생활고로, 취업난으로, 성적 하락으로 한강에 뛰어듭니다. 사회가 급속도로 산업화, 현대화되면서 사회계층 간, 세대 간의 사회 통합이 해체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자살이 크게 늘어난 것입니다. 작년에 인권위원회에서 “양심적 병역기피”를 인정하였습니다. 참으로 애매하고 우스운 결정이라고 봅니다. 그 때 어느 전방 병사가 그랬답니다. “그럼 우리는 양심불량이냐?” 어느 한 부류의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다른 부류의 인권을 해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인권이 아닙니다. 노동조합의 시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조합은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시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시위하기 때문에 도로를 점거하여 많은 시민들의 아까운 시간을 빼앗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시위할 권리가 있다면 시민들은 도로를 달릴 권리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시위문화가 향상되어 발전적이고 성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유엔에서의 북한 인권결의안에 우리나라는 올해 찬성하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계속 기권하였습니다. 모든 민족의 인권이 유지되고 보존될 수 있도록 세계가 협력하고 모든 인류의 인권이 보존되어야 합니다. 인권은 공평하신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인권을 잘 보존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억울한 자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5에는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고 합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비로소 제 정신이 든 겁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한이 맺히게 하고 억울하게 하는 것은 재판관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중국과 일본은 한(恨)은 없고 원(怨)만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도 있고 원도 있습니다. 그래서 원한(怨恨)이라고 합니다. 한이란 권력에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하층계급이 가지는 것입니다. 지배층이나 부유층은 한은 없고 원만 있습니다. 한은 우리나라만 가진 문화적 증후군입니다. “욕구나 의지의 좌절과 그에 따르는 삶의 파국, 또는 삶 그 자체의 파국 등과 그에 처하는 편집적이고 강박적인 마음의 자세와 상처가 의식, 무의식적으로 얽힌 복합체”라고 합니다. 우선 한의 정의가 복잡하잖아요? 이거 이해하려다가 또 한 맺히겠습니다. 한국인의 한이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심리입니다. 그래서 세계 심리학회에서는 아무리 한국인의 한을 표현할 수 있는 영어 단어를 찾아도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새로 만든 것이 ‘Han’입니다. 화병(火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슴앓이란 우리에게만 있는 병입니다. 문자 그대로 불이 나는 병입니다. 마음에 불이 나니 어떻게 끄겠습니까? 이런 우리 민족의 문화적 질병은 유일하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병입니다. 우리의 전통 속담이나, 설화나, 민요나, 판소리를 보세요. 마음 깊이 맺힌 한 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여한(女恨)이란 말이 있습니다. 속담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 영화를 보면 주로 한 맺힌 여인이 한을 풀고 나면 귀신이 사라지고 영화도 끝납니다. 여성의 인권이 유린당한 결과입니다. 가난도 한이 되었습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피죽도 쑤어 줄 것 없고, 새앙쥐 볼가심할 것 없다’. 그 외에도 흥부전, 장화홍련전, 홍길동 등을 보세요. 전부 한 맺힌 이야기들입니다. 남도 지방의 민요에도 보면 시집살이의 고달픔과 시누이에 대한 증오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잠아 잠아 오지 마라, 시어머니 눈에 난다, 시어머니 눈에 나면, 임의 눈에 절로 난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논에 가면 갈이 원수, 밭에 가면 바래기 원수, 집에 가면 시누 원수, 세 원수를 잡아다가, 참 실로 목을 매어, 범든 골에 옇고지나”. 참 슬프지요? 이런 민요가 있다는 자체가 민족의 한이요 설움입니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한 마디로 ‘해한(解恨)문화’라고 합니다. 민요나 속담이나 탈춤이나 판소리 등을 보면 문화를 통하여 한을 푸는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풀어야 할 한이 많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말다툼도 하지 않습니다. 싸우지도 않습니다. 소란을 피우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원한을 쌓고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지으셨습니다. 누구도 소외되고, 차별되고, 무시되고, 한을 품고 살고, 인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2004년 12월 1일에 인디언의 보스턴 출입금지 법률을 폐기하였습니다. 이미 사문화된 규정을 정식으로 폐기한 것입니다. 실로 329년만의 일입니다. 1675년에 보스턴 시장이 인디언의 수감 법에 서명하였습니다. 1675년 매사추세츠 인디언 부족인 왐파노아그 족과 인근 플리마우스시의 백인 정착민 사이에 전쟁이 절정이었습니다. 이 때 시장은 인디언이 시내에 나타나 시민을 괴롭히는 것을 방지하는 법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폐기하므로 법적으로 인디언이 보스턴 시내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기회가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 짐 크로우 법이라는 흑백 분리정책의 인종분리정책 법이 있어서 인권이 무시되고 인종이 차별을 받았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무저항으로 흑인의 인간권리를 주장하였고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일입니다. 아침 기도회 시간에 기도 제목을 서로 나누는데 어떤 미국인 학생이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기도 시간이니까 가만있다가 공부 시간에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네 미국인들이 어떻게 인종분리정책을 위해 기도합니까? 미국은 2차 대전 때 일본인들을 모조리 수용소에 감금했습니다. 지금도 말이 좋아 ‘인디언 보호구역’이지 인디언을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자격이 없고 이 기도를 드리려면 우리 한국 사람이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 가운데 한번도 외국을 침범한 적도 없고, 지배한 적도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미국인 학생들이 놀라서 묻습디다. “정말 한번도 침범한 적이 없나?” 저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한번도 침범한 적이 없는 게 아니라 침범할 힘도 없고 못했지요. 그러나 이런 우리의 약함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은 44세 때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72세에 석방되었습니다. 케이프타운 로번섬에 있는 감옥이었습니다. 그의 인권 운동에 의하여 남아프리카는 350년에 걸친 인종차별 제도를 철폐하였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넬슨 만델라는 “어떻게 억압한 사람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원한을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일스 플레처는 말합니다. “길 잃은 자에게 그 분은 길입니다. 헐벗은 자에게 옷이며, 굶주린 자에게 음식입니다. 묶인 자에게 자유이며, 약한 자에게 강함입니다. 죽은 자에게 삶이고 병든 자에게 강건이며, 눈먼 자에게 광명이고 가난한 자에게 부요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한을 풀어주는 분입니다. 군중의 심리란 때로는 자기 이익과 관계 될 때에 강자 편입니다. 군중의 심리란 자기 이익과 관계가 없을 때 약자 편입니다. 이것이 군중의 무지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은 자의 편이시고, 약한 자의 편이십니다. 결론 제가 형님처럼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얼마 전 사모님이 간 이식 수술을 받고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나오시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말 저는 가까이 지내던 분이 세상을 떠나서 얼마나 서운한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목사님만 봐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 목사님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제도 만났었는데 얘기만 해도 그렇게 우셔요. 지금도 옷장을 열 수가 없답니다. 사진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답니다. 평소에도 그렇게 애처가이셨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정말 너무 슬퍼하십니다. 일전에도 화장실에 들어가서 혼자서 통곡하며 우셨답니다. 요즘에는 부인이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고 하는데, 운다는 것이 잘못 웃어서 촛불이 꺼진다는데, 그렇게 슬퍼하며 우시는 모습을 보니 한층 존경이 갔습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가서 평안을 누리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정이 어디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한 생명에 대하여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게 사랑일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이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한 생명, 한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아끼십니다. 소중히 여기십니다. 한 인간의 인격과 인간 그 자체를 하나님은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한 인간의 권리가 박탈되고 훼손되면 하나님도 진노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28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합니다. 인권의 최고의 결정적 증언입니다. 모두의 인권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사람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의 권리/ 고전9:1-14/ 2003-10-27
사도의 권리 고전9:1-14 지난 주에 우리는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바울이 우상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하 는 결단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죄이기 때 문에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약한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고 했습니 다. 결국 신앙이란 어떤 법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그 법을 초월하는 것도 아닙 니다. 신앙은 형제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유란 자기의 편리함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원리입니다. 자 유는 더 높은 가치를 위해 포기하고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의 내용은 고전 9장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9장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의 권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권리가 있음에도 그 권리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8장부터 11장1까지 계속해서 형제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사례들을 들 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한 예의 연결선상에 있습니다. 1)\'나는 자유자요 사도다\' 먼저 바울은 먼저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직에 대해 서 말하는 것은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직을 의심하는 무리가 발생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이유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교회안의 파당 때문 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고질적인 아픔이었습니 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처음부분 1장에서부터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 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1:11-12) 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교회안의 믿는 자들의 파당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을 따르는 자들의 반대편에 섰던 자들은 \'알고 봤더니 바울이 가짜 사도래! 예수님도 직접 보지도 못한 사람은 사도인 척 하고 있네 어쩐지 조금 모자라는 데가 있지?\'그러니 바울의 반대편에 서있던 사람들은 바 울이 행하는 모든 일을 가지고 걸고 넘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 을 위해서 결단한 일들 조차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구설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바울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자기 가 사도라는 사실을 애써 증명하려고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사도 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사도의 위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 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남이 자기를 의심하든 말든 충분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굳이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사도직이 의심을 받을 때 복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먼저 믿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 도들을 위해서 입니다. 분열되어 있는 고린도 교회의 화해를 가져오기 위함입 니다. 교회의 분열과 파당은 교인들의 신앙을 저하시키는 외적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했을 때 생겨 나는 결과 들을 종종 경험하고 보게 됩니다. 그런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 그는 사도라는 사실을 우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함입니 다. 교회가 분열되어 있고 싸우고 있다면 누가 그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 겠습니까? 교회의 교인이 바로서야 복음을 전하는데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사도의 직분이 아니면 복음을 전하지 못했겠습니까? 고린도전서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믿고 있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썼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도가 교회 밖에서 가정에서 믿지 않는 남편에게, 혹은 아내에게나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만날 때 무엇이라 말해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교회 를 와 보겠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매일 싸움만 해\' \'우리 교회 목사님은 이렇고 저렇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은 교회 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요? 과연 이렇게 했을 때에 복음을 전하는데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자랑해야 한다. 좋은 점을 자랑해야만 합니다. 부족한 면을 감싸주고 좋 은 점을 드러내 놓으며 자랑해야 합니다. 칭찬해야 합니다. 사실 \'자기가 사도라는 사실과 나도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고, 결혼할 수도 있고,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을 수도 있다\'이런 말을 바울로서는 할 필요가 없 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로서의 권위가 부인되면 복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기가 사도임을 증명해야 하는 바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 까?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도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일했는가하 는 것을 자랑하면서 그 자랑을 무익한 자랑이라고 말합니다(고후 12:1). 아무 유익도 없는 자랑을 할 수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2)사도의 권리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 모든 말을 쉽게 금방 이해하였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린도 교회도 그들 나름대로의 지식과 습관과 전통 속에 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바울의 편지 하나로 쉽게 해결되리라는 생각은 조금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간섭하시면 금방 깨닫게 되겠 지만 대부분은 자기의 지식과 고집을 기준으로 해서 바울의 말을 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는 말 을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얼마든지 우상 제물도 먹고 마실 수 있는 지식도 있고 권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먹지 않는 것은 약한 형제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며 자기가 아니라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의 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에서 자신이 포기한 사도로서의 권리의 내용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 입니다. 4절의 \"먹고 마실 권리\"는 말씀은 대접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5절의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는 결혼과 아내까지라도 부양 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6절의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는 전도자의 일은 복음 전하는 일이기에 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부양 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이러한 것을 뒷바침해 줄 예로서 포도원 농부와 목자의 비유 그리고 구약적인 율법의 근거 와 과 신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눅10:7)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사도로서 교회 에 생계비를 요구할 권리도 있다고 합니다. 다만 바울이 이 권리를 쓰지 않고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12절에 보면 \"다른 이들도 너 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 이로다\"고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권리도 포기하는 것, 이것이 바울의 신앙의 원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이 중심이었습니다. 형제의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 신의 권리도 포기하고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오직 복음만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라는 한 인간을 알고 따르기를 원한 것이 아 니라 오직 복음을 알고 주님만 따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직 서로서로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권리을 포기하는 일에 힘쓰며 사시기 바랍니다. 3) 전문인 선교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이 사도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비량 선교를 한 것이 오늘날 의 새로운 선교 모델로 제시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선교사의 신분 을 가지고는 세계의 많은 지역들로 들어갈 수 없게 됨에 따라 이제는 선교 단 체나 교회가 전문인 사역자들을 파송하기 시작해 선교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 게 되었습니다. 전문인 사역자들 내지는 평신도 선교사라는 과연 왜 필요한 것일까요? 첫째는 목사나 교회 사역자의 신분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세상의 3/4이 나 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업을 가진 평신도의 신분으로는 폐쇄된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사회의 모든 구조 속으로 침투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선교사역을 뒷받침할 재정문제 때문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선교사들 에게 계속적으로 후원금을 보내야했다. IMF가 터지고 환율이 오르면서 그에 대한 부담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직업선교 전략을 이용하면 교회에 비용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몇 배의 선교 능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셋째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세계는 새로운 선교전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탈식민주의, 민족주의, 도시화, 세속화, 산업화, 교육열 등이 직업선교사가 전문 선교사보다 이점을 가질 수 있는 요인들입니다. 특히 전문 지식인 계층에게 접 근하는 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말씀을 끝맺으려 합니다. 목양교회는 우리 스스로 교회의 분위기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 만하여 서로가 감싸주는 따뜻한 분위기, 형제와 자매를 위해서 자신의 권리마 저도 아낌없이 포기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권리/ 롬14:1-12/ 2003-10-25
사랑의 권리 롬14:1-12 지나온 한국 교회사를 돌이켜 보면 분열의 역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과거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하여 분열이 반복되고 있지요. 비단 교회사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 전체가 분열의 역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역사가 분열의 역사이기도 하였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이 이렇듯 서로 헐뜯고 싸우며 분열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 인간 존재라는 것에 물론 저 자신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들을 보면 역시 마찬가지로 여기저기서 분열의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 교회, 빌립보 교회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골로새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서도 약간의 분열의 낌새를 느낄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어떠했을까요? 로마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두 부류가 교회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부류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바울은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 보낸 긴 편지의 마지막에 바로 그 문제에 대한 은혜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14장, 15장 입니다. 그리고 16장에서 인사말을 하고 로마서가 끝나게 되지요. 우리의 로마서 강해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자, 그 무렵 교회에 들어와 있던 성도들의 배경을 우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시에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모이는 교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서로 그 동안의 문화 전통이 너무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한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충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신명교회에 일본인들이 여럿 정식 교인으로 출석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난번의 다데야마 목사님이나 오오야마 목사님 같은 분들은 워낙 사람들이 착해서, 그리고 한시적으로 우리 교회를 배우겠다고 다녔기에 아무 문제가 없이 그냥 지나칠 수가 있었지만, 교인이 된 일본인들 중에 성질이 고약한 사람들이 없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 민족의식이 강한 교인들이 \'왜놈의 자식들, 예수 믿어도 어쩔 수가 없어\'라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상대방에서도 마찬가지 이겠고요. 조화가 쉽지 않은 민족적, 문화적 요소들이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다 씻겨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하게 지키면서 성장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엄한 율법주의를 고수하던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로마 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가려먹는 습관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을 어려서부터 가려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종교적 관습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죄다. 경건하게 살려면 채식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들은 고기를 먹는 신자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를 받아도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습관은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나 봅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본 환상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네발 짐승, 곤충, 날짐승 등을 보자기에 담아 베드로 앞에 내려놓고, 그것들을 잡아먹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보니까 먹어도 되는 것도 있었지만, 손을 댈 수 없는 부정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행10:14) 하고 거절하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행10:15) 라는 음성이 다시 들린 겁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음식을 놓고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고 따지는 옛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겁니다. 이와 같이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도 율법에 매여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음식을 가려먹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5절의 \"어떤 이는 이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라는 구절은, 원래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는데 주일이 일요일로 바뀌면서 나타나는 혼란을 반영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은 그들과 완전히 반대가 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유인이다. 음식을 먹느냐 안 먹느냐를 가지고 구속당할 이유가 없다. 안식일은 유대인 당신들이나 지켜라\" 그러다 보니 자연히 유대인 신자들과 반목하는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을 멸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줄 알았더니 율법에 매여 사는구만.\" 반대로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 \"저것들 저래도 경건생활 한다고?\" 서로가 헐뜯는 겁니다. 우리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술,담배 문제가 대표적 경우입니다. 소위 진보적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보수적 교인들이 술,담배 문제를 가지고 따지면 \"성경적 근거도 없는 걸 갖고 따지고 그래. 그러면서 실생활에 있어서는 이기적인 예수쟁이들\"이라고 핀잔을 주고, 보수적 교회 교인들은 \"술,담배를 해. 상종 못할 마귀 새끼들 같은니라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둘을 놓고 \'믿음이 연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자유함을 얻지 못하니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안에서 날이니 음식이니 하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함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즐기는 자들은 분명히 \'믿음이 강한 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를 칭찬하고, 믿음이 약한 자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이 관심을 가진 것은 믿음이 강하냐, 약하냐의 것이 아니라 서로 반목하는 현상이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앞으로 믿음이 성장하면 되는 것이고, 믿음이 강한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되는 문제이지, 현재의 믿음의 강약 자체는 전혀 문제삼을 거리가 못된다고 본 것이겠지요. 문제를 삼은 것은 믿음의 차이가 근거가 되어 서로 업신 여기고 비판하는 현상이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문제는 그 사람의 주인이 상관할 문제라는 겁니다. 그 사람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왜 남의 종을, 곧 하나님의 종을 비판하냐는 겁니다.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서 있는 건데 왜 시비를 거냐는 겁니다. 출애급 당시에 모세가 이방 여자를 소실로 취했습니다.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의 누나 미리암이 하나님의 종으로써 합당치 못하다고 모세를 비판합니다.(민12:1) 이때 하나님께서 어느 쪽을 벌하셨습니까? 놀라웁게도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모세의 일은 당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인데 왜 네가 나서서 모세를 비방하냐는 겁니다. 물론 모세의 그런 행동이 옳은 것이 아님은 하나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러나 그 문제의 처리는 하나님의 소관 사항이지 미리암이 나서서 비판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죽하면 그런 끔찍스러운 벌까지 내리십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이웃들로부터 빚을 졌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곧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올바른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란 의무만이 아니라 동시에 권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지님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고 자녀로 삼으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특권은 남을 업신여기는 권리가 아니라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권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무슨 권리냐고, 권리란 말 그대로 어떤 이익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가치를 의미하는데,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고 주는 것이라고 할 때, 사랑은 남에게 이익을 안겨 주는 행위이지 결코 이익을 받는 행위는 아니지 않느냐고, 따라서 사랑의 의무란 말은 맞지만 사랑의 권리란 말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문제 제기를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다. 지난 시간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싯구절의 의미를 생각하며 그 말이 맞는 말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신비한 현상이어서, 분명히 뭔가를 주었는데 돌아서고 보면 전에 없던 어떤 것이 내게 생겨난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곧 사랑을 줌으로 말미암아 행복이라고 하는 인간 최대의 이익을 예기치 않게 받게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권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권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남을 업신 여길 권리를 주신 적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을 업신여기고 남을 비판하니, 그것은 권리의 남용이요 권리의 오용인지라 미리암에게 벌을 내리신 겁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는 다른 사건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습니다. 출애급한 백성들이 가데스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마실 물이 나오지 않은 겁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비방한 겁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 반역자들아!\"라고 백성들을 몰아 부치며 화를 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행동을 보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못하는 벌을 내리시고 맙니다. 하나님께 끊임없이 불신을 나타내 보이는 백성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인데, 모세가 나섰다가 벌을 받게된 겁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기도하고 있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하고 돌아와 보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이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였습니다. 그들에게 기도할 것을 권면하시고 또 기도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셨지만,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라고 하시며 그들의 상태를 이해해 주신 겁니다. 그러기를 세번을 반복했는데 여전히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남은 시간을 자고 쉬어라. 그 정도면 넉넉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약한 믿음의 제자들에 대해 참으로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대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자신들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시는 예수님께 대해 미안하고 쑥스러우면서도 얼마나 고마움을 느꼈겠습니까? 백성들에게 \'이 반역자들아\'라고 소리치며 화를 내는 모세의 모습과, 똑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제자들에게 이해와 인자함으로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목회자인 제가 부족한 교인들의 모습을 대했을 때, 모세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예수님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반성하고 무척이나 노력을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믿음의 분량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나온지 얼마 안되어 믿음이 약한 교인들이 주일을 빼먹는다거나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지 못할 때, 믿음이 강한 교인들은 그들을 업신 여기거나 비판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과 같이 안타까운 마음은 가질 지언정, 그들을 이해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열심으로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하다고 하여 한없이 나쁜 길로 빠져 들고, 또한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여 늘 올바른 생활만 하게 되지는 않는 법이니까, 그들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 때도 우리는 언제나 팔장끼고 수수방관해야 하는 겁니까? 잘못된 길을 가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모두 하나님 소관이니까, 난 못본척하고 내 길만 제대로 가면 되는 겁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 가리키는 내용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사탄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을 때라거나,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걸맞지 않은 잘못된 행동을 할 때는 지적해 주고 때로는 꾸짖어 주기도 하여야지요.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을 하기도 하셨고, 한번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며 야단을 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잘못을 지적하는 것의 차원이 아니라 3절에 나오는 대로 업신여기는 차원을 가리키고 있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동시에 자신은 잘낫다고 내세우는 것을 포함하지요.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이해해 주는 것과, 그의 도를 넘어서는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 주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서로 가치관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의 가치관과 믿음이 약한 사람의 가치관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에 서로 자신의 가치관 위에서 상대방을 비판하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상대방을 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설령 흠이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이해해 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흠이 본질적인 문제가 될 때는 지적해 주고 때로는 꾸짖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적하고 꾸짖을 때도 항상 그가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이해심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결코 업신여기는 마음이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의 사랑입니다. 그가 내게 필요가 없으면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랑입니다. 그에 대한 필요가 먼저이고 사랑이 나중인 겁니다. 다른 하나는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의 사랑입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는 내게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부부사이에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상대방이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혹은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는 구별될 필요가 있습니다. 참 사랑은 후자의 사랑이고, 그리스도인의 사랑 역시 후자의 사랑입니다.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 설령 흠이 있다 하더라도 그를 업신 여기거나 비판할 여지가 없습니다. (고전13장)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견딘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그의 흠조차도 다 이해해 줍니다. 그런 사랑으로 그가 혹 도를 넘어서는 나쁜 행실에 빠질 때는, 혹 사탄의 유혹에 빠져있을 때는 그를 꾸짖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랑으로 베드로에게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혹은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혼을 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그런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도 예수님의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은총의 특권인 것입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탄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괴롭힐 권리가 없습니다/ 시146:3/ 윌커슨(데이빗 윌커슨: David Wilkerson) 목사/ 2009-05-21
사탄은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괴롭힐 권리가 없습니다. 시146:3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엄청난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초조해하고 근심하며 믿음에서 “요동하는”자들은 사탄의 덫으로부터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답은 간단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의 손가락 끝에 이 인생의 위기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소중한 약속들이 있는데 계속해서 우리는 혼란과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신을 미워하십니다. 거의 대부분 그것이 그분의 손을 묶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스러운 공급을 누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우선적으로 “주님, 나의 불신을 처리해주십시오. 어린아이처럼 당신을 신뢰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이곳 뉴욕 시에서 주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문제 꺼리들로 인해 압도당할 지경입니다. 수백만 인구가 과밀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폭력과 마약, 살인, 공기로 전염되는 신종 결핵, 에이즈 전염병으로 걷잡을 수 없습니다. 거리에 사는 병든 자들과 이러한 질병을 가진 홈리스들을 매일 섬기는 우리의 사역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이 섬기는 일에 그들을 강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수천 명의 삶을 감동시키며 번성하는 교회를 브로드웨이에 세우는데 우리가 통로가 되도록 허락하여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뉴욕 시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셨을 일을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즉 가난한 자, 굶주린 자, 노숙자, 중독자, 죄인들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자들을 섬기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간적인 자로 재어볼 때 소망이 없다고 한 때 여겨지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으므로 우리는 즐거워합니다. 거리로 부터 이미 작은 무리가 구원을 받았고 매일 구출되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의 모든 파괴력을 능가하는 그분의 권능을 증명해 보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시련가운데, 당신을 위해서도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아멘!
살아 있는 자들의 권리와 책임/ 전도서전9:4/ 2010-04-04
살아 있는 자들의 권리와 책임 전9:4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전 9:4) 솔로몬 왕은 아무리 용맹한 사자라도, 죽으면 그만이요, 천하고 용맹스럽지 못한 개라도 살아 있음이 낫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절망이요 끝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음은 생명이 있다는 것이요, 희망과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에서 삶의 고귀성과 살아 있음의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심장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심장경색증 때문에 가슴을 가르고 다리에서 동맥 30㎝를 잘라 심장의 낡은 혈관을 대체하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난 그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 시간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를 개척해 온갖 고난과 고초를 겪으며 살아온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그때마다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새삼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러면서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시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절망이요, 끝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음은 생명이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떠올랐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냥 그것으로 끝났으면, 인류는 절망과 고통의 종말 속으로 영원히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인류에게 구원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전 기도했습니다. “주님 살려만 주신다면 내 피 한 방울이 남도록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붓글씨 성경을 쓰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생명을 연장받은 저는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붓글씨 성경을 두 번째 쓰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붓글씨 성경은 10년 동안 작업해 1992년 출간됐으니 20년 만에 하나님께서 다시 붓글씨 성경을 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살아 있는 민중이었지, 죽은 사람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가 아니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의식과 영혼이 살아 있고,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택함받은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벧전 2:9). 시편 89편 48절에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까?”라고 했습니다. 죽음과 음부의 권세에서 건져 줄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이 있는 날까지 힘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불가사의를 봅니다. 그들은 나라 없이 2000년을 유랑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유랑을 끝내고 나라를 세웠으며,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영을 받았고, 거듭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방인들의 뜻을 좇아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그쳐야 합니다. 그것은 과거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산자들입니다. 거룩한 영으로 살아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태현 목사(의정부 창일교회)
상대의 권리를 인정하라/ 출23:4-5/ 2002-09-19
상대의 권리를 인정하라 출23:4-5 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미국의 대 재난에 대하여 미국 CNN의 앵커가 목사, 랍비, 신부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신이 이러한 일을 허락하였는가?”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있었지만 그렇게 시원한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그 비극에 대한 리처드 허먼 오하이오 주립대 교수의 답변이 더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는 ‘테러리스트들이 왜 그리 많은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에서 미국이 이스라엘만을 지원한다는 사실 2. 미국이 부패한 정부를 지원하고 있다는 점, 3. 청년층의 실업이 매우 높아 탈출구가 없으며 성공할 수 있는 미래가 없다는 점, 4. 국민들이 가난하며 의식이 깨어 있지 못해 단순한 구호에 따르게 된다는 점을 주요 이유로 들었다. 성공할 수 있는 미래가 없다는 것, 국민의 의식이 깨어 있지 못하다는 점은 테러의 직접적인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에게도 당위성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사실이던 아니던 그들이 그들의 주권을 침해 당했다고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형제의 나라로 여기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에서 싸움이 공정하지 못하도록 한쪽 편만 일방적으로 돕고 있으며, 자신들의 부패한 정치가들을 외부로부터 지원하여 미국의 이익만을 대변케 한다는 믿음은 그들로 테러의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 테러의 동기는 그들이 느끼는 불공정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신이 왜 이것을 허락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할 수 있다.섣불리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고 현실 정치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대 참사가 ‘신이 허락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권리를 범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일 수 있음에 동의하게 된다 성경은 ‘상대의 권리’를 범하지 않기 위해 주의할 것을 명한다. 그러한 행위는 개인적 차원이나 국가적 차원에서 반드시 재난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1: ‘거짓 보고(증언)를 하지 말며’, ‘증언을 위해 악한 사람과 함께 손을 들지 말 것’을 명하는 이유는 그 근거 없는 증언이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고 잘못된 일로 고소 당하게 함으로 ‘상대의 권리’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2: 또한 ‘대중(다수)을 따르지 말며, 동시에 가난하거나 약한 사람에게 편애를 보여서도 안되는 이유 역시 그것이 상대의 정당한 권리를 손상 시키기 때문이다 4,5: 또한 성경은 우리의 행위가 개인적인 반감, 적의, 증오에 의해서조차 상대방의 권리가 제한되어서는 안 될 것을 명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상대방의 권리’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권리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이렇게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너의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 잃은 것을 보면,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그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 ‘원수의 가축이 길을 잃은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가는 것’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악일 수 없으며 상대의 권리를 해치는 것일 수 없어 보인다. 인간 법정은 그의 원수의 길 잃은 동물을 돌려 주는 일에 실패한 사람을 고소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신다(마 5:43-48, 롬 12:19-21). ‘잃어 버린 것을 되돌려 받는 것’조차 성경은 상대의 ‘권리’라 정의한다. 그러므로 심지어 나의 원수 된 자의 손해에 대하여 무정한 것조차 ‘그 잃은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하는 그 사람의 권리’를 해치는 것이라 성경은 정의한다. 이렇게 우리는 내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조차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요청받는다. 5절 역시 내가 미워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동일한 태도를 취할 것이 명해진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길에서 아무런 도움이 없이 엎드려져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을 그에게만 남겨 두는 것으로부터 삼가라. 너는 반드시 그와 함께 그것을 면하게 해 주어야 한다.’ 원수의 어려움 때문에 마음에 문제시 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같은 무정과 냉소를 포기하라 하신다. ‘그가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기 보다, 그를 도와 그 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라’는 것이다. 신 22:4에서도 ‘너 자신을 삼가지 말라’고 명하신다. ‘도울 수 있음에도 돕지 않는 것, 그것도 상대의 권리를 해치는 것’이라 성경이 정의하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정의하듯이 테러는 분명 악(evil)이다. 그러나 그 악이 가능케 되었던 이유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만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정작 싸워야 할 대상은 테러가 아닌 모슬렘들이 느끼는 불공정(Unjustice)이다 그들 모슬렘들이 이 불공정의 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진정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행복이란 전쟁과 같은 한쪽의 승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미의회는 400억 달러를 지출하기로 의회에서 결정하였다. 만일 그 돈을 아프카니스탄이나 파키스탄과 같은 나라에 원조할 것을 결의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미국은 효과적으로 자국민의 안녕을 위해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둘 다가 이기는 win win 정책이 되어질 것이다. 떠난 사람들은 400억불 들여서 돌려 받을 수 없다. 전쟁은 그들의 보복 심리를 채워 줄 수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 직면한 테러의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님을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쟁은 그럴싸 하지만 이번 테러와 아무 관계도 없는 이들의 무고한 생명을 또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누군가에 대한 피해 의식 가운데 살아간다. 그리고 그 피해 의식으로 인한 분노를 안고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그 사람만 처치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거짓 확신에 살아간다. 모슬렘 사람들도 이 같은 거짓 확신에 사로 잡혀 있기에 이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따스하고 친절하다가도 그 원수만 만나면 싸늘해 진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제거되기를 원한다. ‘나의 권리가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개인적 차원에서의 테러는 늘 우리의 일상 가운데 있다. 사람들은 수 많은 테러를 행하고 테러를 당한다. 말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서로에게 치명타를 입히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 테러로부터의 자유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할 때 가능한 것임을 가르친다. 성경은 미국민들이 재난을 당해서 보여준 하나됨, 비행기 속에서 격투를 벌였던 그 용기, 구하기 위하여 올라가 함께 희생 당했던 소방관들의 헌신, 돕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들인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 피를 모으기 위해 모였던 이들, 자신의 재물을 쾌척했던 이름 없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감동어린 용기와 기백이 위기의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다른 민족을 위한 것일 수 있기를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이 또 오늘 우리의 태도가 되기를 명한다. 그것이 가능할 때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두려움과 재난이라는 악이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유할 권리를 구하라/ 창32:22-32/ 2008-05-22
소유할 권리를 구하라 창32:22-32 오늘 본문은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도록 홀로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깊은 밤 자신의 모든 소유물도, 가족들도 다 강 저편에 건네 보내고, 야곱 홀로 하나님께 축복을 달라고 천사와 씨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구하는 “축복”은 무얼 의미할까요? 야곱은 이미 거부가 되었고, 자손도 열 둘이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는 “축복”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소유할 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거부이고, 자손도 풍성했지만, 그러나 그 소유물도 가족의 생명도 다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을 건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그의 손에서 이미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강 건너 편에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 에서의 수중에 있는 것이었으며, 그는 이제 마지막 남은 자신의 생명도 담보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천사와 씨름합니다. 깊은 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땀을 흘리며 자신의 어두운 운명과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은, 축복의 사람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야곱은 매우 특이한 축복의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축복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솔로몬과 같은 인물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꼭 같은 축복의 주인공이면서도 이런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소유한 경로가 다릅니다. 야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먼저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인물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약속의 자손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시고 그의 집에 영영한 하나님의 축복을 허락하셨고, 그 축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솔로몬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런 인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복을 소유하지 못한 채 태어나서 축복을 소유한 인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소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그의 강한 열망과 집착은 마침내 그를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축복의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러한 야곱의 신앙을 배워가길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목숨 걸고 축복을 구한 야곱의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과 삶의 운명을 개척하는 적극적 태도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태도가 있었기에 야곱은 성경에서 그 어떤 인물보다도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름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이며, 오늘날에도 그의 후손들은 그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오늘날 야곱의 이름으로 실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이렇게 운명의 변화를 겪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으며, 그는 누구보다도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 축복을 소유하기까지 야곱의 인생은 세 단계로 나눠집니다. 1. 첫 번째는, 복 없는 자로 태어난 시기입니다.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그러한 축복의 반열에 들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생적인 기득권에서 제외된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몸이 약해 사회생활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형은 건장한 체격의 타고난 사냥꾼이었고 쾌활한 성격까지 가졌지만, 야곱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야곱이 이러한 태생적인 모든 약점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만 소유한다면 자신의 이런 운명도 바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2. 두 번째는, 복을 차지한 시기입니다. 비록 야곱은 복을 타고 나지는 못했지만, 장자의 축복을 받는데는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샀고, 그리고 아버지 이삭에게서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창 27:37).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야곱이 이 복을 받기는 받았으되, 그것을 소유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복을 가지고도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삼촌 라반에게 한 그의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창 30:30)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그는 분명 놀라운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있는 곳에 복이 머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복을 온전히 소유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복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는, 복을 누리는 시기입니다. 복을 차지하기는 했으나, 복을 누리지는 못하던 야곱이 마침내 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소유하기 위해 날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했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복에 대한 집착은 야곱을 축복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야곱은 “복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과 나도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권리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소유할 권리를 구하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모든 복을 상속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누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유할 권리를 받은 자만이 가능합니다. * 그러면 어떤 복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해야 할까요? 1.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하십시오. 예수가 나의 구세주라는 것이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구속의 사건이 내 것으로 믿어지고, 내 것으로 경험되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영적인 믿음을 소유한 자는 많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믿는 부모로부터 습관적으로 믿음을 상속받습니다. 어떤 이는 입으로는 믿음을 고백을 했는데, 영적인 경험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말씀의 지식은 있는데 말씀의 능력은 알지 못합니다. 지식적 믿음은 있는데 영적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야곱과 같이 목숨을 걸고 얻기까지 계속 매달리십시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2. 성령의 능력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보혜사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능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며, 세상과 싸워 이길 능력을 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낫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며, 가난한 자에게 부요와 축복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소유할 권리를 구하십시오. (롬 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3. 물질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하십시오. (전 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 6:2)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잠 5:10) 『두렵건대 타인이 네 재물로 충족하게 되며 네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게 될까 하노라』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옛말에도 작은 부자는 세상이 내고,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부유하기를 원하십니까? 물질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4. 건강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하십시오. (욥 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우리 코에 호흡을 주시고, 우리 몸에 강건함을 주시고,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보호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좋은 음식과 운동과 훌륭한 의사가 반드시 당신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에 건강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소유할 권리를 구하십시오. (단 1:13-15)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5. 헌신과 드림과 나눔의 능력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하십시오. (대상 29:9)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하니라』 (신 28:47-48) 『[47]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부유하다고 해서 다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이 있다고 건강이 있다고, 재능이 있다고 다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풍족하다고 해서 다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전부를 드리고도 기쁘고, 나누고도 더 나누지 못해 미안하고, 헌신하고도 더 헌신하지 못해 안타까운 것은 나누고 드릴 능력을 소유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나눌수록 부유해지고, 드릴수록 축복받으며, 헌신할수록 더 크게 쓰임받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드리고 나누고 헌신할 능력은 인간의 본성에는 없습니다. 위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008년에는 우리 성도들이 이 능력을 받아 더 많이 드리고 나누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행복을 소유할 권리를 달라고 하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표정입니다. 환란이 와도, 시련이 와도,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떠나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도 불행한 사람은 행복을 소유할 권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물질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만들어져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소유할 권리를 구하십시오. (시 40:16)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결 론> 축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좋은 것들, 지식이나 지혜나 물질이나 좋은 직장이나 모든 것이 영원히 내게 축복이 될지 아니면, 곧 잃어버릴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소유할 권리를 받아야 합니다. 누릴 권세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과 같이 소유할 권리를 구하십시오.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미 약속된 축복, 그리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축복들을 영원히 우리의 것으로 누리고 만족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달라고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육 간의 모든 축복을 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롬14:1
우리에게는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롬14:1 \'사랑과 미움\'이라는 말의 그 느낌과 의미를 한 마디로 어떻게 풀이 할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대답 또한 다 양할 것입니다. 유행가나 복음성가에도 사랑과 미움을 노래한 것이 엄청 나게 많습니다. TV드라마도 과반수 이상이 사랑과 미움을 주제로 하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많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사랑과 미움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 습니다. 그랬더니, \"사랑이란 언제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며, 그 반대 가 미움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랑은 오래도록 기 억하고 있어야 할 일이고, 미움은 하루빨리 잊어버려야 할 일\'이라고 생 각합니다. 지난 시간에, \'불행의 원인이 욕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욕심에서 파생된 것 중에는 \'미움\'이 있습니다. 미움이 그 마음속에 가득할 경우,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 다. 물론, 그 마음속에 사랑이 많을 때에는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요. 그런고로, 사랑의 마음은 오래 간직하도록 해야 하고, 미운 마음은 빨 리 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 려, 그 반대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래도록 기억하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일은 쉽게 잊고, 하루속히 잊어버려야 할 일은 잘 지우지 못하고 있 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움은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잘 해결되지 않습니 다. 잊으려고 하면 더욱 생각나는 것이 미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잊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9월 10일자 신문을 보니, 김영삼 전대통령과 이회창 총재에관 한 박스 기사가 나란히 실려있었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원망하 는 말들을 모아놓은 기사였습니다. 두 분 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입 니다. 그리고, 두 분은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함께 일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분이 앙숙이 되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사를 대하는 제 마음은 아주 착잡했습니다. 그런 잡스런 기사를 실어놓고 있는 신문도 못마땅했거니와, 그와 같은 기사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두 분의 태도가 적잖이 실망스러웠습니다. 한 분은 대통령을 지낸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인데, 어찌 그 마음들 이 그토록 좁아터질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 는 두 분인데도 서로 미워하며 다투는 것을 보면, 미운 감정은 누구에게 나 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미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미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 의 잘못을 잘 깨닫지 못하고 상대방의 허물만 보기 때문입니다. 혹 자신 의 잘못을 안다 할지라도,자기 잘못은 별스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의 잘못은 아주 크게 부풀려서 평가하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습니 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에게는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 는 권리가 없다(롬14:10)』고 말했습니다. 특히,『믿음 약한 사람이 잘못 을 범했을 때, 크게 나무라지 말고 따듯하게 대해야 한다(롬14:1)』고 했 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형제의 잘못이나 허물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1.정죄하기를 밥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다툼으로써, 자신은 물론이요 남들이 볼 때에도 창피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누 구나 빠짐없이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 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일을 보고(報告)하게 된다고, 바울은 로마서 14 장 1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부분 남의 문제를 가지고 비판하거나 흉을 보고 있습니다. 물론, 형제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애정을 가지고 거론하는 것 이라면, 그리 탓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애정 없이 비난 을 위한 비판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를 모르는 이가 그런 다면 몰라도, 어떻게 \'용서와 사랑\'을 기본적인 신앙 덕목으로 삼고 살아 야 할 기독교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일까요? ①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고 있기 때 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를 지을 때마다, 예언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름아닌 출애굽 사건입니다. 오랫동안 애 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구출하 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특히, 홍해바다 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바닷물을 갈라서 이 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하신 다음, 다시 물이 합쳐지게 하 심으로써 뒤쫓아오는 애굽 사람들을 모두 수장(水葬)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애굽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놀라운 은혜를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김으로써 주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건은 그야말 로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평생 죄의 종살이를 하다가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주의 피로 구원하여 영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셨 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불쌍하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사망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데, 주께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는 속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그의 피로 우리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구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갚아나가야 합니다. 어 떻게 말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할 때에, 그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②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데 아주 인색하기 그지없습 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용 서는 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신하가 왕에게 1억 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신하는 빚 갚을 능력이 없어서, 왕은 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그런데, 그 신하는 백만 원밖에 빚지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신하는 그 사람에게 \'당장 돈을 내놓아라\'고 다그쳤다. 빚진 사람은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그 신하는 들은 체 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그 신하를 불러들여서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기고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주었더니, 너는 그 몇 푼 안 되는 것 때문에 사람을 옥에 가둔단 말이야!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게 아니냐?\"하고 야단쳤다. 왕은 탕감해주었던 돈을 다시 갚도록 하고, 그 신하를 감옥에 가두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신하는 우리 자신을 말 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갚아도 도저히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하나님 께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무조건 용서함으로써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서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일 은 아주 쉽게 해도, 이웃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은 무척 오랫동안 자기 자신과 씨름을 해도 성사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려야 할 것입니 다. 그리고, 만약 끝까지 용서하지 못할 경우에는, ③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가 무효화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 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산 결과를 보고해야 합니다. 물론, 잘 한 것도 보고해야 하겠지만, 잘못한 것도 낱낱이 보고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동 안 자신이 지은 죄도 다 탕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갈 때까지 형제에 대한 미운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갈 경우, 우리의 구원은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서로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마 18:35)』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단 형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앞서 말씀드린 주님의 예화를 통해서 깨달았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미움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 다.미움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그 마음에 기쁨과 평화 가 임하게 됩니다. 물론, 내가 먼저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을 수 있는 사 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가 꼭 내 마음에 들어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허물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우 리가 하나님 마음에 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①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훌륭하고 잘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거나 사랑할 때에는 무슨 조건이나 이유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달이 태양 빛을 받아 되쏘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서,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눠주게 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다른 형제 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권리가 없다(롬14:10)』는 사실입니다.심판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만일 우리가 형제를 비난하 거나 정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월권행위가 되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형제를 심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직접 자신 이 죄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 다. 우리에게는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있으되 심판할 권한은 없다는 것 을 알고, 우리는 그 권한을 거꾸로 행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 니다. ②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롬14:8)』이라고 하 면서, 우리가 무엇을 먹거나 행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먹든지, 또는 무슨 일을 행하든지, 내 기준을 가지고 심판하면 안 됩니다. 그리 고, 그것이 신앙과 관련이 된 것이라면, 더더욱 우리에게는 정죄할 권리 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주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날이 이르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어야 합니 다. 그래서, 그가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줘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다른 형제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은혜는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형제를 비난 하고 심판하면서 정죄할 경우에는, 그 용서의 은총은 무효가 된다는 것 을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헛되지 않도록, 서로 용 서하고 사랑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우리에게는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출14:1-12,/ 2001-11-15
우리에게는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출14:1-12, \'사랑과 미움\'이라는 말의 그 느낌과 의미를 한 마디로 어떻게 풀이 할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대답 또한 다 양할 것입니다. 유행가나 복음성가에도 사랑과 미움을 노래한 것이 엄청 나게 많습니다. TV드라마도 과반수 이상이 사랑과 미움을 주제로 하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많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사랑과 미움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 습니다. 그랬더니, \"사랑이란 언제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며, 그 반대 가 미움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랑은 오래도록 기 억하고 있어야 할 일이고, 미움은 하루빨리 잊어버려야 할 일\'이라고 생 각합니다. 지난 시간에, \'불행의 원인이 욕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욕심에서 파생된 것 중에는 \'미움\'이 있습니다. 미움이 그 마음속에 가득할 경우,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 다. 물론, 그 마음속에 사랑이 많을 때에는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요. 그런고로, 사랑의 마음은 오래 간직하도록 해야 하고, 미운 마음은 빨 리 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 려, 그 반대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래도록 기억하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할 일은 쉽게 잊고, 하루속히 잊어버려야 할 일은 잘 지우지 못하고 있 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움은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잘 해결되지 않습니 다. 잊으려고 하면 더욱 생각나는 것이 미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잊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9월 10일자 신문을 보니, 김영삼 전대통령과 이회창 총재에 관 한 박스 기사가 나란히 실려있었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원망하 는 말들을 모아놓은 기사였습니다. 두 분 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입 니다. 그리고, 두 분은 대통령과 국무총리로 함께 일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분이 앙숙이 되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사를 대하는 제 마음은 아주 착잡했습니다. 그런 잡스런 기사를 실어놓고 있는 신문도 못마땅했거니와, 그와 같은 기사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두 분의 태도가 적잖이 실망스러웠습니다. 한 분은 대통령을 지낸 분이고, 다른 한 분은 장차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인데, 어찌 그 마음들 이 그토록 좁아터질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 는 두 분인데도 서로 미워하며 다투는 것을 보면, 미운 감정은 누구에게 나 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 미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미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 의 잘못을 잘 깨닫지 못하고 상대방의 허물만 보기 때문입니다. 혹 자신 의 잘못을 안다 할지라도, 자기 잘못은 별스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의 잘못은 아주 크게 부풀려서 평가하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습니 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에게는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 는 권리가 없다(롬14:10)』고 말했습니다. 특히,『믿음 약한 사람이 잘못 을 범했을 때, 크게 나무라지 말고 따듯하게 대해야 한다(롬14:1)』고 했 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형제의 잘못이나 허물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1.정죄하기를 밥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다툼으로써, 자신은 물론이요 남들이 볼 때에도 창피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누 구나 빠짐없이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 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일을 보고(報告)하게 된다고, 바울은 로마서 14 장 1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부분 남의 문제를 가지고 비판하거나 흉을 보고 있습니다. 물론, 형제의 앞날이 걱정되어서 애정을 가지고 거론하는 것 이라면, 그리 탓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대개는 애정 없이 비난 을 위한 비판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를 모르는 이가 그런 다면 몰라도, 어떻게 \'용서와 사랑\'을 기본적인 신앙 덕목으로 삼고 살아 야 할 기독교인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일까요? ①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고 있기 때 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를 지을 때마다, 예언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름아닌 출애굽 사건입니다. 오랫동안 애 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구출하 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특히, 홍해바다 사건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바닷물을 갈라서 이 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건널 수 있게 하신 다음, 다시 물이 합쳐지게 하 심으로써 뒤쫓아오는 애굽 사람들을 모두 수장(水葬)하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애굽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 놀라운 은혜를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김으로써 주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건은 그야말 로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평생 죄의 종살이를 하다가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주의 피로 구원하여 영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하셨 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불쌍하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사망의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데, 주께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는 속죄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그의 피로 우리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구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갚아나가야 합니다. 어 떻게 말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할 때에, 그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②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데 아주 인색하기 그지없습 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용 서는 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신하가 왕에게 1억 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신하는 빚 갚을 능력이 없어서, 왕은 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그런데, 그 신하는 백만 원밖에 빚지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신하는 그 사람에게 \'당장 돈을 내놓아라\'고 다그쳤다. 빚진 사람은 조금만 더 참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그 신하는 들은 체 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왕은 그 신하를 불러들여서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기고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주었더니, 너는 그 몇 푼 안 되는 것 때문에 사람을 옥에 가둔단 말이야!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게 아니냐?\"하고 야단쳤다. 왕은 탕감해주었던 돈을 다시 갚도록 하고, 그 신하를 감옥에 가두었다.〉 여기서, 왕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신하는 우리 자신을 말 합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갚아도 도저히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하나님 께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무조건 용서함으로써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서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남을 비판하는 일 은 아주 쉽게 해도, 이웃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은 무척 오랫동안 자기 자신과 씨름을 해도 성사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려야 할 것입니 다. 그리고, 만약 끝까지 용서하지 못할 경우에는, ③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가 무효화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 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산 결과를 보고해야 합니다. 물론, 잘 한 것도 보고해야 하겠지만, 잘못한 것도 낱낱이 보고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동 안 자신이 지은 죄도 다 탕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갈 때까지 형제에 대한 미운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갈 경우, 우리의 구원은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서로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마 18:35)』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단 형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앞서 말씀드린 주님의 예화를 통해서 깨달았으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미움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 다. 미움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해야, 그 마음에 기쁨과 평화 가 임하게 됩니다. 물론, 내가 먼저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을 수 있는 사 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가 꼭 내 마음에 들어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허물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우 리가 하나님 마음에 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①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훌륭하고 잘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거나 사랑할 때에는 무슨 조건이나 이유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달이 태양 빛을 받아 되쏘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어서,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눠주게 되 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다른 형제 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권리가 없다(롬14:10)』는 사실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만일 우리가 형제를 비난하 거나 정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월권행위가 되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형제를 심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직접 자신 이 죄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 다. 우리에게는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있으되 심판할 권한은 없다는 것 을 알고, 우리는 그 권한을 거꾸로 행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 니다. ②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롬14:8)』이라고 하 면서, 우리가 무엇을 먹거나 행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먹든지, 또는 무슨 일을 행하든지, 내 기준을 가지고 심판하면 안 됩니다. 그리 고, 그것이 신앙과 관련이 된 것이라면, 더더욱 우리에게는 정죄할 권리 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주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날이 이르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어야 합니 다. 그래서, 그가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줘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다른 형제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은혜는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형제를 비난 하고 심판하면서 정죄할 경우에는, 그 용서의 은총은 무효가 된다는 것 을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헛되지 않도록, 서로 용 서하고 사랑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우리에겐 형제를 업신여길 권리가 없다/ 출14:1-12/ 2009-09-10
우리에겐 형제를 업신여길 권리가 없다 출14:1-12 옛날 우리나라에 어질고 착한 어떤 임금이 한 분 있었습니 다. 이 임금은 재산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자비심도 많아서, 어 려움을 당하는 신하나 백성들이 있을 때에는 서슴지 않고 도와 주는 아주 좋은 임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심히 어 렵게 지낸다는 소식이 있으면, 임금님은 반드시 그를 불러서 그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고 적절하게 도와주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금님이 어떤 신하 하나가 적잖이 많은 빚을 지 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신하는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따진다면 1조 8천억 원이 훨씬 넘는 아주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신 하가 그렇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그 신하로서는 평생 갚아도 도무지 다 갚을 수 없는 어마 어마한 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마음씨 좋은 그 임금님은 그 불쌍한 신 하의 돈을 다 갚아주기로 했습니다. 임금님이 갖고 있던 재산 중에서 거의 다 전부를 정리하다시피 해서 그 신하의 빚을 다 갚아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신하는 임금님께 죽도록 충성 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하가 어디를 가던 중에 그 밑에서 일하는 관리 하나를 만났습니다. 마침 그 관리는 그 신하에게 3백만 원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신하는 그 관리를 만나자마자 ‘빚을 언제쯤 갚을 거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조금만 여유를 주시면 다 갚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신 하는 “그럴 수 없네. 당장 갚아야 하네!”하고 다그쳤습니다. 그 관리는 빌고 또 빌었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면 반드시 꼭 갚겠노라고 하면서 사정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나,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하 면서 그 관리를 감옥에다가 집어넣었습니다. 이 소식이 임금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임금님 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정말 그를 불쌍히 여겨서 엄청나게 많은 그의 빚을 다 갚아주었건만, 그래 3백만 원을 갚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 부하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말이 냐?”고 하면서 임금님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은 그 신하를 불러서 “내가 너의 빚을 다 갚아 주었으니,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꾸짖고는 그 신하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도록 하게 하라’고 형리에게 지시했습니다. 지금까지 들려드린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하신 말씀을 조금 윤색해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제자 베드로가 “다른 사람의 죄를 몇 번 정도나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하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 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들려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 서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어서 죄의 용서함을 받게 된 우리는 하나 님께 엄청난 빚을 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 없이 그 모든 빚을 다 탕감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 는 서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살되, 아무 조건 없이 무제 한적으로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웃과 아주 사소한 문제로 서 로 다투거나 갈등을 빚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생각과 좀 다르다고 해서,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해 서,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서 불평했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아주 다정하고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이라 해도, 오늘 무슨 문제가 있어서 다투게 되면, 생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아주 냉랭해지고 마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인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싸울 일도 아니건만, 우리는 몇 푼어치도 안 되는 알량한 자존심 때 문에, 그토록 서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탕감 받은 자의 비유’에서, 그 신하는 임금님께로부터 엄청 나게 많은 빚을 다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부하가 그 60만분의 1도 안 되는 빚을 갚지 않는다고 해서 그 부하 관리에게 ‘당장 내 돈 내놔라’고 큰소리치면서, 끝내는 그 부하를 감옥에다가 집어넣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요? 자신의 허물과 부족은 깨닫지 못한 채 남의 허물은 에누리 없이 따지 고 비난하는 버릇이, 어떤 사람은 아주 심하게 나타나는 경우 도 있거니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금씩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혹 어떤 사람 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속이 좁고 이해심이 없다.’고 말 하기도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형제의 잘못을 아무 조건 없이 무제한적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왜 냐하면, 우리가 원래 하나님께 엄청나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 으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빚을 다 탕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 그 결과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자비하신 하나님께 서 우리의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웃 형제의 잘못을 굳이 따지려고 든다면, 하 나님께서도 우리의 죄와 잘못을 따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 니다.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우 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그 죄 를 다 들춰내어 비난할 경우, 이미 용서받은 우리의 모든 죄가 다 무효화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우 리 형제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그 형제와 화목하게 지 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그 지은 죄 값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 지옥 가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 리 형제의 죄와 잘못을 쉽게 용서하고 화해해야만 하는 것입니 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차라리 안 보고 사는 게 낫 지, 어떻게 미워 죽겠는 사람을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정말 삶 은 호박에 바늘도 안 들어갈 소리이지, 보기도 싫은 사람과 어 떻게 화해하고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까지도 용서할 수 있을 때, 우리 죄를 다 용서하시 고 하늘의 풍성한 복을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죽기보다 싫은 용서를 할 수 있겠습 니까? 1.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 니다. 현재 서울시장으로 있는 이명박 씨는 소망교회 장로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40대에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건 설사장이 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수도 서울의 시장으로서, 최근 청계천을 완전히 복원함으로써 적잖 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성공 담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인생 5계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의 첫째가 ‘적(敵)과도 동침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직후, 선거 때 자기편에 섰던 서울시청 관계자로부터 봉투 하나를 전달받았습니다. ‘살생부’였습니다. 선거 때에 그와 반대편에 섰던 서울시 고위 공무원들, 그리고 청계천 개발 불 가론을 전파했던 반대파들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시(市)를 장악할 수 없다’는 보고서 였지만, 이 시장은 이 보고서를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고 태워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살생부를 보면 결국 선입견이 생길 수밖 에 없는 것이고, 그 결과 그런 사람들과는 함께 일을 할 수 없 을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장은 지금도 말하기를 ‘그 때 살생부에 들어있었던 사 람들이 더욱 성심껏 일했기 때문에, 오늘날 청계천 복원사업과 버스체제 개편이 가능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적(敵)과의 동침’, 이미 말씀드렸듯이, 참 어렵고 힘든 일입 니다. 그러나 성공만 한다면, 적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느라 애쓰 고 수고한 것, 그것보다 몇 갑절 이상의 유익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가 있어서 참으로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일 때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보다 더 세밀하고 더 멀리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의 눈을 생각해야 합 니다. 별로 밝지도 못한 우리 눈에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인다 면, 하나님의 밝으신 눈에는 우리의 허물이 얼마나 더 크고 더 많이 잘 보일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형제의 죄나 허물을 가지고 따질 엄두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겉에 나타난 것만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의 속 중심까지도 보실 수 있다고 하셨으니, 우리에게 진정으 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무슨 염치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가지고 비난하거나 따질 수 있겠습니까? 바울선생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 다(롬14:4)’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에게 는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길 권리가 없다(롬14:10)’고 했습 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누구나 빠짐없이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다 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슨 잘 못을 하느냐에 관심 두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얼마나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지 늘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음식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잘 먹는 사람은 가려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또한 가려먹는 사람은 아무 거나 다 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고 했습니 다. ‘어떤 음식이든지, 그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먹는다 면 전혀 나쁠 것이 없다(롬14:6)’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우 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2.서로 상대방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겨울바람이 봄바람더러 춥다고 말한다.’는 말이 있고, 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도 있습니 다. 그리고 ‘그슬린 돼지가 달아맨 돼지 타령한다.’는 말도 있습 니다. 이 모든 속담이 결국은 자기 결점이나 허물을 깨닫지 못 하고 다른 사람의 문제점을 들춰내어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 을 가리켜서 하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허물을 발견하게 될 때마다, 내가 지은 죄 가 그 사람보다 더 크고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 니다. 내가 원래 기본적으로 행하는 모든 잘못도 물론 죄가 되 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허물을 비난하거나 트집을 잡게 되 면, 내가 이미 지은 죄보다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우리가 그 누 군가를 심판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한과 영역을 침범하 는 것이 되어 아주 큰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뒤를 추격하다가 그만 홍해바다에 다 수장되고 마는 사건이 출애굽기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 당시의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뒤를 추격하 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그처럼 비참하게 몰사 당하는 일은 발 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되면, 비난받는 사람보 다 비난하는 우리 자신이 더 큰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다른 사람의 죄를 추격하면서 따지다 보면, 추격하는 그 사람 자신이 더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타인의 허물을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선생은 말하기를 ‘믿음이 약한 자가 무슨 잘못을 했더라도 나무라지 말고 따뜻이 맞이해야 한 다(롬14:1)’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기도할 지언정, 그 믿음이 자라기도 전에 인정 없이 짓밟는 일이 없도 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긍휼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연약 해서 넘어진 사람을 흉보거나 비난하지 말고, 그를 일으켜 세 워주는 자비심을 발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것처럼, 허물 많은 우리 이웃을 크게 꾸짖거나 나무랄 것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사 랑을 가지고 그들을 잘 돌봐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주 들어서 알고 있는 예화를 하나 들려드릴까 합니 다. 인도의 성자 썬다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심한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날, 썬다싱은 네팔지방의 어느 산길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동행인이 있어서, 그 두 사 람은 얼어 죽을 것처럼 혹독한 추위 속에서 눈발을 헤치며 바 삐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얼마쯤 갔을까, 인적도 없고 민가도 없는 산속에 이르렀을 때, 눈 위에 쓰러져 죽어가는 노인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 니다. 썬다싱은 동행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이 사람을 같이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고 가면 곧 얼어 죽을 것이오.” 그러나 그 동행자는 “미쳤소! 우리도 죽을지 살지 모르는 어려운 판국 에 한가하게 누구를 도와준단 말이오?”하면서 화를 내더니, 그 는 그냥 먼저 가버렸습니다. 망설이고 있던 썬다싱은 쓰러진 노인을 일으켜 등에 업고 있 는 힘을 다하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눈보라는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이젠 정말 자기 한 몸도 움직이기가 힘들어졌습 니다. 그러나 그는 무겁고 괴로운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그 사 람을 업은 채 험한 산길을 계속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걷다보 니, 그의 온몸에서는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등에 업 힌 노인의 얼었던 몸이 썬다싱의 더운 체온 덕분에 점점 녹아 서 그 노인은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마을 가까이 왔을 때, 그들은 길가에 쓰러져 얼어 죽은 시체 하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시체는, 혼자서만 살겠다고 먼저 가버렸던 바로 그 여행자였던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서 가버린 그 사람 은 도중에서 그만 얼어 죽었고,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죽어 가는 사람을 등에 업고 갔던 썬다싱은 두 사람의 체온 덕분에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상대방의 허물을 비난하면서 다투게 되면 함께 망하고, 서로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부드러운 말씨로 잘 이끌 어줄 경우에는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이 부족하여 자주 넘어지는 사람이 보이면, 그를 붙잡아 일으 켜주어야 합니다. 아예 주저앉아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업고서라도 함께 가도록 해야 합니 다. 그럴 때에,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서로가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따뜻한 말로 용 기를 북돋아줌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인권선언 과정/ 창2:1-9/ 2002-04-06
인권선언 과정 창2:1~9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의 과정을 마치고 이레째 되는 날은 쉬셨다\"는 말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선언이요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말이 무슨 뜻과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 속에서 되어진 말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역사적 상황은 바벨론 포로기이다. 기원전 587년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후 그 땅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바벨론 도시외곽 지역에서 포로민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았다. 정복자들에게 끌려가서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들의 삶의 모습은 그 당시 그들이 지었던 시편 42편이나 137편에 잘 나타나 있다. 정복자들의 조롱과 멸시와 채찍 아래서 힘든 강제 노역을 당하면서 가난에 쪼들리고, 비인간적인 처우를 참아야 했던 포로민 공동체를 통해 이 본문은 전해졌다. 모든 땅과 재산과 인명까지도 모두 바벨론 사람들의 소유였던 상황 하에서 포로들이 외치는 내용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에게 잘 관리하도록 골고루 나누어주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한쪽은 왕과 신하들 정복자들인데 비해 또 한쪽은 피정복자들이며 노예로 끌려와 강제노동을 당하는 그 억눌린 민중들이 소리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너희와 우리는 차이가 없다. 모두가 하나님처럼 살 권리가 있는 평등한 자들이다.\" 또한 죽을 때까지 일해봐야 우리에게 돌아올 몫도 없이 쉬지도 못한 채 끌려나가 일해야 하는 자들의 항변이었다. \"하나님도 엿새동안 일하시고 제7일엔 쉬셨다. 그러니 우리도 쉬어야 한다.\"라고 부르짖고 나섰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정말 좋았더라. 그런데 지금 우리의 이 꼴이 무엇이냐? 정말 비참하구나,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란 사실도 잊고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고 있지도 못하고 하루도 편안히 쉬는 날이 없이 짐승처럼 살고 있는 이 모양이라니!\" 이런 노예들의 항변과 탄식, 부르짖음이 인권선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포로민 공동체의 인권선언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팔레스틴으로 귀환(기원전 538년)했던 가난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그 위력을 발휘했다. 구약성서 기자는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는 정경을 만들기 위해 모세 오경을 편집하면서 이 포로민 공동체의 인권선언을 그들 민족의 영원한 인권선언으로 받아들이면서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첫 창조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음은 성서의 첫 자리를 인권선언으로 편집한 것에 예의 주시해야 한다. 예수가 공생애에 들어서면서 했던 첫 선언도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들을 해방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고, 산상설교에서도 그 핵심은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미움받고 배척 당하고 욕먹고 누명 쓴 자들에게 축복을 선언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도 \'주린 자, 목마른 자, 망명자, 헐벗은 자, 수감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인권선언이다. 이처럼 예수의 관심의 대상, 위로와 구원의 대상은 한결같이 소외 자들, 즉 그 당시 사회 속에서 이른 바 죄인들이었다. 이들은 복음서에 의하면 인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계층이었다. 예를 들면 가난하여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이들, 창녀, 전과자들, 세리 등이 이에 속했고, 나환자, 정신병자 등도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하여 죄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계층에 접근하여 교류를 가짐으로써 유대인들로부터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을 받았지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인권선언 하신다. 세계 제1차, 제2차 대전을 경험한 사람들은 강대국에 의한 전쟁과 공포, 인권유린 등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1948년 UN을 통하여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하여 인간의 권리 찾기 운동을 전개해 왔다. 세계인권선언에 의해 제시된 권리의 목록은 각국의 헌법과 법률체계에서 전통적으로 중요시된 참정권과 시민권을 집대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속에는 법 앞에서의 평등, 임의적 체포로부터의 보호,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일사부재리의 원칙, 재산권, 사상의 자유, 의견 및 표현의 자유, 평화적 집회 및 단결의 자유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선언문은 이러한 시민권과 참정권의 목록에 \'노동의 권리\'와 \'직업선택의 자유\', \'동일한 일을 한 것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 등과 같은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를 추가하였다. 금년은 세계인권선언 52돌이 되는 해이다. 유엔과 세계인권단체들은 21세기의 인권 개념과 인권보호 방안을 모색하며 인권신장의 의지를 새롭게 다지고 있다. 그동안 인권 후진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온 우리나라도 국제기준에 맞는 인권법을 제정해야 한다. 인권선언과 이에 따른 고통에 찬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는 지난 동안에 갖가지 인권유린으로 얼룩져 왔다. 전쟁, 고문, 불법 체포, 투옥, 인종차별, 기아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당했다. 그 예로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아프리카 르완다의 대학살, 보스니아의 인종청소 등을 들 수 있다. 지난해에도 117개 나라에서 고문이 자행되고, 55개국에서는 약식 처형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권유린이 지금도 널리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도 과거 군사 독재 시절, 용공음해와 고문조작, 의문사 등 숱한 인권유린의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그런 일들이 진상조사 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 등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현재와 미래의 인권피해 구제나 인권침해의 방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인권법이나 인권과 관련된 법안이 아직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인권문제는 일부 특정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인류를 위한 것으로서 인간다운 삶과 사회를 향한 근본 출발점임을 상기하고 싶다.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과 창조행위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유로움을 인간에게 불어넣어 주셨다. 동물과 사물들이 지닐 수 없는 자유선택권을 주셨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또한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음을 증명하는 말이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들의 짐승이나 공중의 새나 나무나 강처럼 똑같은 피조물이다. 그러나 이 피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인간은 현실을 주체적으로 구성해 나가는 창조적 피조물이라는 데 긍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예수의 삶에서 그 현실을 알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인간의 온전함을 부당하게 깨뜨리는 모든 악마의 세력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그 인간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였고 비뚤어진 인간을 바로잡는 선교활동을 하였다. 절름발이, 문둥이, 귀머거리, 소경, 벙어리, 가난한 자, 빼앗긴 자,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들의 인권을 위해 힘쓰셨다. 그는 구원자로, 해방자로 그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악마와 마귀의 쇠사슬을 끊어 버린 자율적 존재의 긍정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삶 속에서 자유인으로서, 자율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 동안 우리나라 안에 인간을 타율적 객체나 조종될 대상으로 보는 사회구조와 정치, 경제, 사회 이념 및 체제가 인간을 근본적으로 깔보고 미워하는 태도를 취하며 인간을 편리한 도구로 악용하여 왔다. 이제는 그 전철을 다시 밟아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 자율적인 주인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부족하여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으므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성령을 통해 도와주신다. 타율적 인간이 되도록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에 올바른 자유인이 되도록 성령을 통해 일하신다. 성령은 인간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 나그네가 아닌 주인으로, 대상보다는 본체로 비극적인 인간의 성격을 바로 놓으신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생명은 존엄하다, 그러므로 인간을 \'하나님의 모상\'이라고도 한다(창세기 1:26~28, 야고보 3:9). 인간은 육체와 감정을 조화시킬 수 있는 감각적이며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영혼은 영혼을 지향하는 생명력과 정신활동의 주체이다. 인간의 영혼은 단순히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존엄성을 구현하고 생존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존의 자유는 천부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로도 침해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큰 죄이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하여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다. 생명과 육신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파괴하고 버릴 수 있는 물건과는 취급될 수 없는 존엄한 것이다. 인간은 모두다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누구나 생존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땅 위에 어느 누구도,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인간이 살아야 할 의무와 생존의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예수가 선교 생활로 나서면서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서 선포한 선언을 보면 그것은 암울한 사회에 대한 선언이다. 예수는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다.\"라고 했고,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려 하심\"이라고 했으며, \"눈먼 자들을 보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눌린 자를 놓아주려 왔다\"고 했다. 역사 안에서 예수의 몸된 교회가 이러한 예수의 선언과 이 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몸으로 증거하려면 오늘의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1948년 12월 10일, 제3차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의 날을 선포한 이후 금년으로 52돌을 맞는 이 때, 그 동안 인권 후진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온 우리나라도 이제 국제기준에 맞는 인권법을 제정할 때가 왔고, 인권위원회의 위상과 권한의 문제를 논의하여 결정할 때임을 주지하고 싶다. 인권선언과 이에 따른 고통에 찬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는 지난 52년 동안 갖가지 인권 유린(전쟁, 고문, 불법체포, 투옥, 인종차별, 여성차별, 기아 등)으로 얼룩져 왔다. 우리나라도 과거 독재시절 용공음해와 고문조작, 의문사 등 숱한 인권유린의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다. 문제는 아직도 그런 일들이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현재와 미래의 인권 피해 구제나 인권침해의 방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을 감안해서 인권법이나 인권과 관련된 법안이 만들어져야 한다. 인권을 억압해온 각종 악법과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 세계인권선언 52돌을 맞아 한국 교회는 영혼구원에만 힘쓸 뿐 아니라 구조악으로 얼룩진 인간구출을 위해 기도하고, 인간다운 삶과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를 향한 근본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기독교의 선교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인권선언과 신약에서의 예수의 공생애의 첫 인권 선언, 그리고 제3차 유엔총회에서의 세계 인권 선언은 한 맥락에서 지금 우리의 시대를 향한 중요한 메세지이기 때문이다.
인권회복을 위한 우주적 전쟁/ 광야에서 싸우심/ 눅4:1-4
인권회복을 위한 우주적 전쟁/ 광야에서 싸우심 눅4:1-4 주 예수님은 그 영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려고 광야로 나 가셨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가는 길에 있었 던 빈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광야는 하나님 나라를 얻 기 위한 시련과 역경과 투쟁의 곳이다. 먹을 것과마실것이 없고 춥 고 더운 곳이며 대적이 길을 막는 것이다. 이곳은 인간의 생존을 위 협하는 장소이다. 의식주의 문제는 생존을 위협하고 대적들은 명예를 위협했으며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상황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게 했던 곳이다. 사탄은 이 모든 악조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사십년동 한 광야에 묶어 두었었다. 주님은 광야로 나가서 사십일을 금식하며 사탄과 싸우신 것이다.이싸움은 세상을 빠져나온 하나님의 백성이 하 나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있는 싸움이며 사탄을 수단과 방법을 댜해 서 하나님나라를 막는 싸움이다.애굽으로 예표된 세상은 사탄의 왕국 이며 가나안으로 예표된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그 사이 에 있는 광야는 전쟁터다. 뒤에는 홍해가 있고 앞에는 요단강이 있 다. 세상과 하나님나라는 두 강으로 인하여 완전히 갈라져있다. 광야 에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의 시험뿐이다. 오직 전쟁만 있는 곳 이다.뒤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전쟁을 피할 길이 없다. 뒤로 돌아가고자 하면 홍해에 빠져 죽을 것이며 앞으로 가고자 햐면 요단강에서 죽을 것이다. 광야를 극복한 사람만 강을 건널 수 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 이끌려 광 야로 나갔고 주 예수님은 그 영에 이끌려 광야로 나갔다. 이스라엘은 살기 위해서 나갔고 주 예수님은 시험을 받기위해 나갔다. 이스라엘 은 사십년동안 유혹을 받고 방황했으며 주예수님은 사십일 동안 금식 하고 주리신 후에 시험을 받으셨다.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는 광야가 있고 세상과 하나님나라사이에는 사탄의 시험과 전쟁이 있으며 아담 과 그리스도사이에는 십자가가 있다. 주에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은 받 으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가나안과 하나님나라와 그 리스도는 모두 우리주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물려지는 유업이다. 사 탄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끼어들었다. 광야는 가나안과 애굽사이에 끼어 있다. 사탄이 없었다면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였을 것이며 광야 가 없었다면 가나안과 애굽은 하나였을 것이다. 사이에 끼어든 자를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둘이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던 세계를 회복해야 하고 하나님과 사람 이 동산에서 걸었으나 두렵지 않았던 세계를 회복해야한다. 이 일이 하나님의일이며 사람의 일이다. 이 일의 맨 앞에 서신이가 우리 주 님이시다. 우리의 주되신 예수는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 는 하나님을 대신하며 온인류를 대신하여 끼어든 자를 물리치고 동산 을 회복하시려고 광야에서 사탄과 대면하게 괴었다. 주예수님은 하나 님의 대리자이시며 사람의 대표자이시다. 그는 육체를 가지신 하나님 이며 그 영을 가지신 사람이시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므로 사탄을 심판하지 못했으며 사람은 그 영 이 없으므로 사탄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육체 안에있 고 그 영에 이끌려사탄과 싸우려고 광야로 나갔다. 사탄은 하나님이 육체가 없음을 인하여 거역했으며 사람에게 그 영이 없음을 인하여 우롱했다. 그러므로 사탄을 이길 자는 육체안에 그 영을 가진 그 사 람이다. 그 영은 십자가 안에서 만유를 거친 인격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만유 위에 뛰어나시다. 천사는 피조물일지라도 하나님과 방불 한 영이었기 때문에 거역할 수 있었지만 육체가 없었기때문에 만유 를 포함한 그 영이 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거역할 수는 있었지 만 만유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사탄을 이길 자는 오직 만유를 거치신 그리스도뿐이다. 우리주 예수님은 사탄을 이길 완전한 자격을 가지신 분으로 광야에 나갔다. 이제 우주적 문제 는 그리스도가 사탄을 이기고 그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끼어든 자를 가나안과 애굽 사이에 끼어 있는 광야에서 싸워 이기는 일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광야문제이고 광야의 모든 문제는 사탄의 시험이다.인생문제속에는 광야가 깔려 있고 광야속에 는 사탄의 시험이 숨어있다. 그러므로 인생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곧바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자기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왜 하 나님을 원망하고 그를 대항하겠느가! 광야에는 사탄의 시험이 있는 곳이다. 사탄은 여기서 사람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은 여기서 사람을 만유위에 뛰어나게 하려고하신다. 주 예수님은 광 야로 나갔다. 우리도 주를 따라 광야로 가자. 거기서 우리 주님의 승 리를 보고 그를 따르자. 아멘.
작은 자의 하나님/ 마25:1-46/ 인권주일설교
작은 자의 하나님 마25:1-46 이번주는 세계교회가 인권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인권주 간 행사와 인권주일을 강조하며, 지켜야 하는 자체가 인권선교의 절실 성이 오늘도 우리의 삶 현장 곳곳에 있다는 것을 반증함이겠습니다. 해 아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평등한 천부적 인간 존엄 의 권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오늘의 현실은 인간을 파괴하고 그 존엄한 권리가 무시하며 짓밟는 행위가 세계처처에 산재 해 있습니다. 지난 30여년간 군사문화가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규정하며 오도 된 가치관으로 우리의 삶을 황폐케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큰 것\"으로 상징된 그 무엇을 추구하는 일에 정신을 다 빼앗겼습니다. 큰 나라, 많은 땅, 큰 집, 좋은 차, 좋은 직장, 권력, 인류대학, 박사, 재능,미인...\" 이 \"큰 것\"을 성위한 성공자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고 그래서 이를 위해서는 인격,도덕,양심도 묻어두는 \"힘의 논리\"로 인하 여 사회 병리현상이 깊어 세상살이의 피고함이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 다. 이러한 어두웠던 세상에서 그때 이러한 세속주의에 영합하여 교회 조차 \'큰 것\"을 분별없이 추구해온 지난날의 모습이었음을 자성해 봅 니다. 대군중집회에 흥분하고, 큰 교회, 천문학적 헌금의 자랑.. 희사 사장처럼 고급승용차 굴리는 큰 교회 목사는 유능해 보여 머리 숙이고 이름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농어산촌, 도시 작은 교회 목사들을 무시 한 교회 부익부 빈익빈현상,참으로 부패하고 부도덕한 세상을 심판할 만한 도덕적 권위가 교회에 있었는지 묻게 했었습니다. 이 현상이 오 늘인들 없겠습니까? 이런 사회와 교회 현실을 직시할때 예수님의 \"최 후심판\"의 비유는 오늘에 주는 교훈이 의미심장합니다. 인생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앞에 영생과 영벌로서 자신의 삶이 정산되 는 때가 있을텐데 본문의 최후 심판의 기준은 무슨 대단히 어렵고 까 다로운 기준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옥에 갇힌 이들을 돌아보아 주고 있는가 하는 지극히 평범한 기준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극히 언제라도 큰 부담없이 행할 수 있는 바로 그 작은 관심과 손길을 주고 주지 아니한 그것이 천국, 지옥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그를 지의신 자를 멸하시는 것 (잠언 14:30)\"이라 했고 약한 이, 미련한 이,작은 이를 들어 강한자, 지혜있다 하는 자, 큰 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고후 1:27-29)하는 역설의 논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와 작은 이를 향한 하나님의 편애속에 인류의 보편적 사랑 을 구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정식\"은 성경에 일관된 가르침입니 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속에 지니고 있으면 그 래서 그 말씀에 진실한 응답의 삶을 살려 한다면, 영안이 밝히 열려 우리의 주변을 바르게 볼 수 있으니, 위로해 주어야 할 \"슬픔\"이,치유 해 주어야 할 \"아픔\"이,나누어 주어야 할 \"빈 손\"들이 해방시켜 주어 야할 \"놀림과 묶임\"들이, 열어 주어야 할 맹목적 가치에 \"눈먼 이들\", 채워주어야 할 \"궁핍과 소외\"된 곳이 너무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 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가 섬겨야 할 작은 자는 누구입니까? 제 3세계,제4세계(원주민)고난의 역사현장이요, 세계곳곳 억압적 구 조속에 자유의 삶을 절규하는 현장이요, 가난과 질병과 전쟁의 고통이 있는 현장이요,종교,인종,민족 분쟁으로 고통당하는 현장입니다.UR파 고, 농산물 수입개방으로 인한 절대절명의 위기속, 생존의 벼랑끝에 선 이땅의 농민들, 도시빈민, 영세상인, 막장의 광부, 열악한 노동현 장 인권사각지애에 신음하는 현장 주한미군들의 범죄 현장에서 고통당 하는 여인들, 정신대 할머니, 사회로부터 방치된 채 고통당하는 어린 이들, 시국 관련 청년학생들의 부당 징집으로 고통당하는 현장 민가협 양심수 가족, 구시대 냉전논리의 희생자들, 성폭력 희생자들, 6만여명 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통, 4백만 장애인, 아직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1천5백여 교육개혁의 주체인 해직교사 들, 1천만 이산가족, 북한 동포들, 한이 많은 서남부 백성, 제도교회 의 성차별 현장...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못한 인생들.. 수없이 많은 현장의 아픔들을 눈밝히 열려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높여 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권리를 신 장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고 그의 권리를 짓밟는 사람들을 언제나 패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예수의 마 음, 그분의 비우심과 낮아지심(빌립보 2:5-11)의 그 생명과 능력을 힘 입고, 해방과 자유의 충만한 영성(눅 4:18)을 바탕으로 성령께서 하라 하시는 명령을 우리가 이행해 갈때 가능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민주화,개혁,인권을 신장시켜 가는 일이 후퇴하 지 않도록 감시자가 되고,실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세 계의 해방과 권리 신장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과 피조물들의 생명까지 도 존중히 여기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