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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마25:14-30/ 구세군사관학교새벽경건회설교/ 2009-12-05
게으름 마25:14-30 찬송가: 372 -여러분 힘드신데 재미있는 이야기 해드리죠- 예화) 어느 부잣집의 황소 한 마리와 노새 한 마리가 먹는 것도 같이 먹고 쉬는 것도 같이 쉬며 늘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황소는 꾀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주인이 노새보다 나에게 더 힘든 일과 더 많은 일을 시키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황소는 앞으로 일을 안 하겠다고 결심하며 주인이 일을 하라고 끌어내도 외양간에서 꼼짝도 안하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황소는 슬슬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고 돌아온 노새에게 물었습니다.. “노새야 내가 일하지 않고 놀고 있는 것에 대해 주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냐?” 라고 물어 보니까? 노새가 말합니다. “아니, 별말 없던데” 그런데 황소야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인이 소를 잡는 백정하고 오랫동안 얘기하더라” 오늘 본문은 여러분 모두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게으른 자와 충성된 자를 말씀하시며 어떤 자가 충성된 자이며 어떤 자가 게으른 자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다른 나라로 볼일을 보러 갈 때 세 명의 종들에게 각각의 달란트를 맞기고 같습니다.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마지막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맞기고 갔는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의 배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종도 장사를 해서 두 달란트를 남겼고. 그래서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죠.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주인에게 책망과 저주를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본문에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웁니까? 정답: 게으르지 말자, 게으르지 말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이 한 달란트를 땅속에 묻을 수밖에 없는 이 게으른 자로 만들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 달란트를 땅속에 묻을 수밖에 없는 이 종의 게으름은 자신의 작은 달란트만을 보았기 때문 이였습니다. 한 종은 다섯, 한 종은 두 달란트를 받았는데 자신은 한 달란트를 받았기에 자신의 이 작은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작은 한 달란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성실하게 충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의식과도 같습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작다고 생각할 때 무기력에 빠지게 되고 나중에는 게으름과 절망이 오는 것이죠. 오늘 이 종도 주인님 왜 나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시나요.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의 달란트가 너무 작다는 생각으로 그냥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은 것입니다. 자포자기와 절망이 게으름이 된 것이죠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가 많던지 적든지 간에 주인이신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면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죠.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십시요. 여기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벌었던 사람도 두 달란트를 벌었던 사람도 똑같이 잘 했다고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데 왜 입니까? 주인은 남긴 것의 많고 적음으로 칭찬한 것이 아니라 맡긴 것에 대한 충성된 것으로 그 종들을 칭찬한 것입니다. 간증) 결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충성하는 과정을 사랑하십니다. 열심히 충성하는 과정이 있다면 좋은 결과도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큰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작은 것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받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크든지 작던지, 하나님은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기신 그것으로 바로 그것으로 우리의 충성의 과정을 보십니다. 하나님께 달란트를 많이 받았다고 충성합니까?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의 큰 것을 받았으나 충성하지 못하면 게으른 자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의 작은 것을 하나님께 받았지만 충성된 자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너무 작으면 힘이 없습니다. 너무 작으면 그냥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 그냥 묻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에게 작은 것을 주었다 그러나 충성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우리가 되기 바랍니다. 또한 왜 게으른 자입니까? 또 하나의 게으른 이유는 주인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은 그냥 땅에 묻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무엇이 였죠. 바로 주인에게 충성을 하는 것 이였습니다. 이것이 주인의 뜻 이였습니다. 여기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주인의 뜻을 알았기에 열심히 장사를 했습니다. 또 두 달란트 받은 종도 주인의 뜻을 알았기에 충성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뜻을 몰랐기에 그냥 땅에 묻는 게으름뱅이가 된 것입니다. 24절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즉 주인은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려 하며 타작도 하지 않고 알곡을 거두려는 자라고 주인을 파렴치한 인물로 매도합니다. 이것이 주인의 뜻을 아는 종의 태도입니까? 게으른 종은 주인의 뜻을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주인의 뜻인 충성을 하지 못한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습니다. 작은 것 하찮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는 충성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선냄비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자선 냄비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 충성하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자선 냄비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충성합니다.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초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는 단 몇 푼을 모으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종으로써, 거리의 예배자로 당당하게 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선포하며 충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작든지 크든지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것이 너무 작다고 말하고 남들과 비교의식을 하고 절망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재능을 땅속에 묻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게으름뱅이가 되어서는 안되며 나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종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그 뜻 그 사명을 깨닫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구세군이 있고 이곳을 통해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은 더 큰일을 여러분을 통해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자에게는 훗날 주님과 함께 천국의 더 큰 즐거움에 참여 할 줄 믿습니다.
광야 학교/신8:1-20/2003-02-17
광야 학교 신8:1-20 독수리를 새들의 왕자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독수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강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독수리는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절벽에다가 새집을 짓고 어느 정도 새끼가 자라면 새 집을 어미 독수리가 흔들어 부순다고 합니다. 그러면 독수리 새끼가 절벽 밑으로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는 절벽 밑으로 내려가서 잡아서 다시 올려놓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도 이런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무도 세파에 시달리며 자란 나무는 깊은 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광야의 훈련도 중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실패의 인생도 살아보아야 합니다. 매일 일등만 하는 사람은 3등 4등으로 떨어지면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F학점을 맞아보기도 해야 인생에 있어서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학생들을 보면 공부를 못해서 자살하는 학생을 못 보았습니다. 이런 학생들은 사회에 나가서 남보다 뒤지면 견디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자기 자녀들에게 때로는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40년 간 광야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편안하게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보다는 40년 간 광야를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을 부으시고 오랜 세월동안 사울을 피해 광야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때로는 역경과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역경과 시련을 통해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모세5경의 중요한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세 오경은 우리의 영적 인생을 잘 묘사하고 있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말해준다. 창조의 시작, 죄의 시작, 죄로 인한 고통 속에서의 부르짖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출애굽은 고통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 다음에 민수기가 나오는데 민수기는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지만 광야의 삶을 만나게 되는데 이 광야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 나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모세 오경을 우리의 신앙에 비추어본다면 죄로 인하여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며,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지만 광야의 삶에 때로는 물을 없어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고, 때로는 원망스러운 상황을 경험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 자녀다워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다워질 때 가나안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의 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다워지는 훈련의 장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워지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훈련이 필요하며 연단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워지기 전에는 왕자로서 누려할 삶이 보류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다워지는 훈련의 기간이 바로 광야의 생활이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광야학교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0:13절말씀을 보면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약속의 땅은 7-9절까지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초생달 지역으로 풍요로운 지역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인도한 곳은 사막지역인 팔레스타인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을 하나님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을까요? 어떠한 환경이던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그 환경을 하나님이 젓과 꿀이 흐르는 환경으로 바꾸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야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 하는 나라가 잘 살게 되어 있다. 즉 어떤 신앙을 갖느냐에 의해 그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어느 나라든지 종교에 기초해서 세워지지 않은 나라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 나라는 종교에 의해 그 정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요 이 정신이 바로 그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은 바로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며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그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고 하였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네 모든 물산에 복을 받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고, 네 대적이 너를 치려 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훈련시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먹을 짐승과 못 먹을 짐승을 구별하여 놓으셨습니다. 물고기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시켜 놓으셨습니다. 모든 것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시켜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매 순간 하나 하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사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통해 하루에 한 오멜씩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다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욕심이 발하여 더 많이 거두려 하였고, 집에다 쌓아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볼 때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쌓아둔 만나는 벌레가 생기고 썩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밖에 나가보니까 여전히 만나는 내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변함이 없는 신실함을 훈련시키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뭔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찾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며 주님이 주신 말씀을 자꾸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을 앞에 두고 2세들이 가나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별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의 내용은 과거에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지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똑같은 말씀을 언제나 암송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림절이 되면 에스더를 읽으며 하만으로부터 구원하시던 날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무조건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오는 것입니다. 뱀의 꼬리를 잡으라 하면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팡이가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물에 그물을 던지라 하면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배에 가득 채울 물고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 하라 하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을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체놀이 하지 말아라 하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체놀이 해서 잘되는 집안 못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 교회에 있으면 교회도 다 파괴시킵니다. 따지지 마시고 순종하십시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광야학교에서 \"겸손\"의 훈련을 시키셨다. 16절 말씀을 보면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겸손입니다. 물질을 얻어 형통할 때도 하나님이 물질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것이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모든 영광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렌 동산에서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서 유혹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17절에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구약의 벨사살이라는 바벨론 왕은 자기가 천하에 왕 인양하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성전기명들을 놓고 주연을 베풀고 \"내가 신이지 신이 어디 있느냐 하며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기명을 가지고 술잔으로 씀, 그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너는 저울에 달아보니 모자란다. 너는 한도에 찼다. 그러므로 너의 나라를 메대와 바사에게 나눠주겠다. 그 날 밤에 하나님의 채찍이 임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몰아 닥쳐서 대 바벨론 제국은 하루아침에 망하고 그는 전쟁에서 불에 타서 전사를 하고 말았다. 광야에서 어떻게 겸손의 훈련을 시키고 계십니까? 광야에 들어가 보니까 내가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수고한다고 해서 물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늘만 처다 보고 살아야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IMF가 오기 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며 살았습니까. 그런데 IMF가 터지고 나니까 사람들이 자기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로 몰려들고 기도원으로 몰려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어느 나라는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3년 간 비가 오지 않으니까 사람이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나무 뿌리 캐러 다니는 것입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세 번째로 광야학교에서 \"신앙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훈련\"을 시키셨다. 2절 말씀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네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으신 것입니다. 광야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 불순물을 빼버리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정금 같은 신앙으로 아름답게, 온전하게 세워지는 장소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교회 안에서는 다 신앙이 좋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큰 소리를 많이 칩니다. 내가 신앙이 좋다고 자랑을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서는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신 세계에서 신앙의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벼랑끝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단이 하나님께 욥의 신앙에 대해서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게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그러나 욥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한 상화에서도 주님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학교에서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으로 변했으며, 애굽에서 가지고 있었던 우상을 하나하나 버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용하실 때 믿음의 테스트를 해 보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믿음을 사울을 피하여 사는 삶에서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요셉을 노예로서, 감옥에 죄수로서 악한 환경속에서 그의 믿음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요, 조건적 신앙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광야학교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신8:1-10/2001-09-17
광야학교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신8:1-10 1절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여기서 중요한 신명기서의 주제인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축복은 거저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순종할 때, 순종의 대가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축복해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시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십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그리하면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가지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너희가 살게 될 것이다.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는 번성하고, 이거는 창세기1:26 ,28장을 그대로 다시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 세 번째로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땅이 없이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희들의 땅을 밟게 한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것을 너희가 얻으리라 그랬습니다. 취하게 될 것이다.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이 축복을 주시는데 거저 주시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길로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40년 동안입니다. 이름하기를 훈련하기 위해서 데리고 갔기 때문에 광야학교입니다. 그 학교를 마스터하려면 40년의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한가지 훈련을 하는데 40년 동안입니다. 그러면 그 광야학교를 개설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학교를 세우신 취지가 무엇입니까? 2절에 \"너희를 낮추시고\" 왜냐하면 참으로 높이기 위해서, 존귀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서, 이거는 겸손 훈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훈련에 통과할 학교가 있습니다. 1학년 겸손훈련입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에게 한 달에 1억씩 돈을 벌어서 갖다 준다해도 겸손한 마음으로 가족을 섬기지 아니하고 내가 이만큼 너희에게 벌어서 갖다 준다고 왕처럼 군림하고, 폭군처럼 행세하면 존경도 사랑도 못 받습니다. 차라리 100만원씩 갖다주는 사랑하고 겸손히 섬기는 가장이 되기를 원하시겠지요. 우리가 수 백 개의 교회를 지어서 개척한다고 할지라도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 교회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겸손한 자를 붙들어 쓰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겸손훈련 낮아짐의 훈련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시면 제일 어려운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낮아지는 연습이 어렵습니다. 왜 적응이 잘 안되십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 어려우니까 적응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간단해요. 모든 것을 다 비우게 하고 밑바닥으로 낮아지겠다고 생각하면 문제될게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광야학교를 세우셨습니다. 이거는 예수님께서 그대로 적용을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 : 6-9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예수님도 땅바닥까지 무덤까지 내려갔어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세상에 뛰어난 군왕들까지도 주님 앞에 무릎을 끓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고 경배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존귀한 이름 낮아지심으로, 낮추심으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광야학교를 통해서 겸손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이거는 마음 훈련입니다. 2학년 코스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마음을 바르게 갖는 훈련입니다.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우리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합니다. 만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없다.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주님의 이름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른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이 없으면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모른다하리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바로 데리고 가지를 않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이 데리고 훈련을 시키면서 너무너무 힘들었던 것은 그들의 의식과 마음을 바꾸어놓기 위해서 광야학교를 개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했던 사람들은 애굽에서 가졌던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았어요. 그래서 싸우다가 그들은 40년 광야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중퇴하고 탈락해서 다 죽었어요. 애굽의 의식을 버리지 못한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이 그들은 새 사람 새 마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21세기를 살면서 19세기 20세기 고정관념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신앙생활을 그래도 잘한다고 착각한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왜 고달프세요? 고달픈 광야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싶으면 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까? 아직도 내 마음에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마음까지 깨뜨리시기 위해서 지금도 광야학교를 나에게 허락하고 계시지 않나 생각하면 거의 맞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명령을 지켜 행하는지 아니 행하는지\" 보신다는 겁니다. 이거는 순종의 훈련입니다. 믿음의 빛은 순종할 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굶기는 훈련, 주리게 하시며, 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을 굶기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광야로 보내서 굶는 훈련을 시키셔요. 굶게 한 다음에 참된 양식이 무엇인지 하늘을 통해서 만나를 먹여주셨어요, 만나가 무엇입니까? 대관절 보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했던 것을 먹어보면서 이것을 무엇인가? 그들을 굶게 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참된 양식을 주신 겁니다. 이번 전도여행이 먹을 것을 가지고 가지 말자. 주면은 얻어먹자. 거지 전도여행이라 그랬습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철저히 굶으면서 전도해보자.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굶고 왔습니까? 기가 막힌 간증들을 하는데 내내 하는 이야기가 먹는 이야기만 해요. 목마를 때 수박이 먹고 싶었는데 수박이 나타나고, 한 아이는 피자, 한 아이는 계란을 먹고 싶다고 그랬는데 계란으로 피자를 만들어서 주시고, 너무 더워서 아이스크림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누군가가 주는데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충격을 받겠습니까? 말도 안 듣고 뻔질거리던 아이들이 그 순간에 무릎을 끓고 회개하더라는 겁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정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굶어보셔야 돼요. 그래야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먹이시고 체험해보자는 겁니다. 오늘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인 것을 믿습니다. 지난번에 한 선교사님이 오셨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십 몇 년 동안 헌신하다가 오신 분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선교후원 교회를 끊고 1년만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어떻게 만나를 먹이시는지를 체험하고 싶으면 선교 후원교회를 끊어보라는 것입니다. 이분은 선교를 파송해서 갔는데 한 교회가 1년을 보조해주고 끊어 버리더라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순간순간 기도할 때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채우시는 하나님을 십 년 넘도록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굶기신 것은 먼저 잘 먹이기 위해서 굶기는 훈련부터 시키시는 겁니다. 그게 광야학교입니다. 몸이 아프셔서 먹지를 잘 못하십니까? 먹으려고 애쓰지를 마십시오. 우리 사람들은 아프면 억지로 먹으려고 애를 쓰는데 금식하면서 책을 보니까 단식요법, 모든 짐승은 몸이 병이 나면 먹는 것을 다 끊는다는 겁니다. 궁둥이를 흙에 대고 태양을 향해서 가만히 앉아있다는 겁니다. 자연치료요법인 단식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만 많이 먹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다이어트도 하고 좀 많이 굶어보았으면 좋겠어요. 금식기도도 좀 해보고요. 네 번째, 훈련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 말씀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바라보게 하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이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40년 동안 시킨 겁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약점은 세상의 정보에 대해서는 너무너무 민감해요. 바삭하게 끼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하고 몰라요. 영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미를 너무 몰라요. 기가 닮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문제는 씨알도 중요하지만 밭도 중요해요. 아무리 복음의 씨를 뿌리지만 길바닥처럼 닳아진 마음 밭에는 씨가 뿌리를 낼 수 없고 새들이 그 씨를 먹어버린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월광이 2천2백을 이루고 전도사역을 감당하려고 그러면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매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오늘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겸허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일에 훈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거는 저부터입니다. 지도자는 말씀에 사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우리 크리스천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 그래야 시험도 물리치고 유혹도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4절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철저히 책임져주십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그것이 가죽옷, 신이 가죽 쇠인데 40년 동안 발이 부릍지 아니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신발이 좋았다. 옷이 좋았다는 겁니다. 거지같이 하나님이 입히지를 않았습니다. 아주 가죽 밍크 오버로 양털로 잘 입혔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해석을 하는데 한 벌을 입고 출애굽을 했는데 40년 동안 그 가죽옷이 밤사이에 다시 새 옷으로 되더라는 겁니다. 사람이 키가 크면 가죽옷도 크더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영적으로 해석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철저히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보호하셨다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5절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그 학교는 무슨 학교입니까? 이론적으로 가리키는 책상에서 공부한 게 아니고 \'징계\'라는 말은 훈련한다, 바르게 잡는다, 교육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월광에 필요한 것은 가만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기도훈련, 찬송훈련, 봉사훈련, 섬김훈련, 전도훈련, 선교훈련입니다. 우리는 머리만 발달된 사람이 아니라 가슴이 넓어지고 무릎을 끓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훈련은 잔인하기 때문에 성경에 번역하기를 징계라고 그랬습니다. 훈련은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정신과 행동을 바르게 가르친 것을 훈련이라고 합니다. 말을 안 들으면 매도 때리고 말을 안 들으면 벌도 주는 겁니다. 이게 징계이고 강한 용어입니다. 그래야 훈련을 받습니다. 누가 훈련을 받기를 좋아하겠어요. 저도 싫어요. 참 고달파요. 그러나 해야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잉태되는 건 한 순간에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기까지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10개월이 필요하고 태어나서도 수 십 년간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 겨우 사람구실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거듭났다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바로 되느냐? 절대로 그것은 아닙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불러서 구원시킨 다음에 제자가 되라고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제자\'라는 말은 훈련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될 것입니다. 6절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하지니라\" 결국 이 훈련학교의 궁극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기 위해서입니다. 명문학교에서도 졸업하면 졸업장도 있고 학위증도 있고 취직이 보장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도 이 광야학교를 졸업하면 이렇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7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광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아름다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높은 산이든 계곡이든 시내가 흐르고 땅에서 물이 펑펑 솟아오르고 샘이 조용히 오르고 시내를 이루고 광야에 40년 동안 사는 이런 땅은 환상적입니다. 8절\"밀과 보리와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무엇을 주십니까? 식생활의 기본인 밀과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류, 모든 것을 달콤하게 먹으라고 꿀까지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9절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생활도구를 만드는데 철기문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10절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누구를 찬송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우리 월광의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 광야학교는 누구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광야학교를 세우셨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의무적으로 이 광야학교를 통과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광야학교를 거치지 않고 애굽 땅으로 바로 간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어요. 제 생각 같아서 모세는 광야학교를 40년 동안 마스터하고 부름을 받았어요. 그런 모세도 다시 광야학교를 보내서 똑같이 40년 동안 훈련을 받게 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은 좀 바로 보내는 안되겠습니까? 품에 안긴 어린아이까지 전체가 다 광야학교를 가게 하십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반드시 광야학교를 통과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믿습니다. 피할 길이 없이 다 가야돼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부를 때 본토 친척 다 내려놓고 떠났습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까지 그는 수 십 년의 광야학교를 거쳐갔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산악지대 광야를 걸어서 가나안 땅까지 갔습니다. 그는 마지막 코스가 뭔고 하니 모리아산에 100세에 낳은 이삭을 바치는 것이 마지막 시험이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그대로 드렸어요. 통과했어요.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축복하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야곱이는 에서와 함께 쌍태였는데 성경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이미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으로 이미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이 그냥 오지를 않았습니다. 처가살이를 20년을 했어요. 광야생활의 슬프고 고독하고 무시당하고 멸시를 당하는 하나님이 시키니 했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사위노릇을 한 게 아니라 머슴살이를 했어요. 열심히 해놓으면 약속을 바꾸어버리고 열심히 해놓으면 약속을 바꾸어버리고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견디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야곱은 다 견디고 참으면서 훈련을 받습니다. 마지막 훈련은 얍복 강변이었습니다. 영적전쟁입니다. 자기를 깨뜨리는 기도훈련을 합니다. 이 훈련을 통과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이스라엘이라 했습니다. 이게 성경의 원리인 것입니다. 요셉은 태어나면서 불과 5세 미만 때 어머니를 잃습니다. 요셉의 사는 집에는 아버지의 부인들이 적어도 네 사람이나 되었어요. 네 사람 중에 자기 어머니가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있고 없고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런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요셉이가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동생 베냐민을 낳고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요셉이를 사랑하고 보호하지만 아버지 눈만 안 보이면 형제들이 요셉을 구박을 했습니다. 때리고 미워하고 보복하고 아버지가 사랑하면 할수록 요셉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상처를 입고 요셉은 어린 시절을 자랐습니다. 그는 구덩이에 들어간 훈련을 하고 노예훈련 종살이도 했어요. 마지막에 감옥훈련까지 다 겪었어요. 그 훈련을 졸업하는 날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어떻게 쓰셨습니까? 애굽의 총리로 높이셨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은 감옥을 통과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옥사장이 되었어요. 같은 죄수이면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즐겁게 옥살이를 하는지 모든 총 관리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감옥이고, 직장이 감옥이고, 자식이 감옥입니다. 나를 얽어매고 구속하잖아요. 남편이 감옥입니다. 연애할 때는 좋을지라도 저녁에 조금만 아내가 어디에 갔다가 와도 따지고 돈만 모르게 써도 어디에 썼느냐고 감옥 중에 감옥입니다. 그런데 그 감옥훈련을 잘 통과한 사람이 가정에 승리합니다. 직장에 승리하고 교회생활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감옥입니다. 인간은 적당히 구속될 때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어요. 마스터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훈련들을 통과하면 되는 겁니다. 교회는 엄청나게 여러분을 구속하는 곳입니다. 교회에 와서 자유함을 얻으리라. 영적으로 자유함을 얻지만 인간적으로 엄청나게 구속합니다. 주일을 지키시오, 기도하시오, 성경 보시오, 전도하시오, 헌신하시오, 오라, 가라, 이 구속을 마스터하지 못하면 교회 생활을 적응하지 못합니다. 교회 생활을 적응하지 못하면 축복 받기 어렵습니다. 구속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훈련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나에게 하나님이 더 크게 쓰시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예수님도 광야학교를 통과하셨습니다. 가난훈련, 고독훈련, 사람들이 자기를 대적하고 미워하는 훈련을 다 받으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억울하지만 생각해보면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만큼은 억울하지를 않은 것 같아요.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훈련을 다 통과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홀로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이 있어도 다 졸고 있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까지도 외면하셨어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버지까지 나를 버리시면 어찌합니까? 내가 이 고통을 당할 때 아버지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이까? 여러분, 그러시죠 몸이 아파 병상에 누워있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면 어디 계시나이까? 내가 왜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써야 합니까? 울부짖지요. 주님께서도 우리보다 더하는 고통의 훈련학교를 다 통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은 것 때문에 평소보다 7배나 더하는 풀무불 속에 들어갔어요. 사람들이 밖에서 보고 놀랐습니다. 분명히 세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네 사람이 있었어요. 성경은 말합니다. 인자 같으신 분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인자 같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불 속에 들어가서도 함께 하고 물 가운데로 지나갈 때도 내가 거기 함께 하리라 약속하심을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면 혼자 두지를 않는다는 것을 아세요. 거기 그 자리에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광야학교를 통하여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울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시는, 훈련하시는 학교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산다면 말씀훈련을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나 그 말씀에 순종하고 나아갈 수 있는 순종의 훈련을 저희들이 마스터해야 합니다. 힘드시죠? 그러나 통과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놀라운 사건들 기대함이 있습니다. 우리 월광 안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금년 여름같이 더운 날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가 살아있고 평소보다 더 기도가 뜨거워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 훈련을 통해서 역사 하심을 믿습니다. 한 성도님은 직장에서 강제 퇴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퇴직 당한 것 때문에 주님을 만났어요.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을 쓰고 새벽마다 와서 기도하고 양육을 받고 간증을 하셨는데 얼마나 신앙생활을 재미있게 하시는지 만일에 그분이 퇴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주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인생의 실패는 신앙의 하나님의 축복의 장소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광야는 육신 적으로는 고달프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장소인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낮추고 주리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 주시려고, 하나님을 믿으십시다.
광야훈련학교/ 신8:1-10/ 2011-08-03
광야훈련학교 신8:1-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후 가나안을 목표로 삼고 행진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도 큰 기쁨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쁨과 감격은 잠시였고 고된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음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해낸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에 있을 때를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사십년 동안 광야의 길을 거쳐야 했고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광야에서 죽었고 그들의 자녀들만이 사십년을 지난 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을 목표로 출애굽의 큰 기적의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이 광야에서 구원하신 그들을 그처럼 고생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광야의 사십년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전에 광야의 길을 거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광야를 거치도록 한 데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의도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목적은 그들을 그 고난을 통하여 시험하여 하나님이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인지 아닌지를 알려 하기 위함이고 또 그들이 이제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그 말씀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광야를 통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어떠했습니까? 광야의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굳은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떡을 의지하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점차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훈련학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치르도록 한 시험은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시험에 불합격했고, 또한 메마른 광야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훈련과 배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지 못함으로 이 훈련의 과정에 대해서 계속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들이 광야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거기에 동의하고 따랐다면 광야의 삶이 얼마나 달랐을까요? 동일한 여건이라 해도 그 가운데서 감사와 평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먼저 광야를 거쳐야 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천국생활을 맛보기 위해서 먼저 광야와 같은 훈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축복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어떤 삶으로 먼저 인도하시는지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처럼 분명히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광야훈련학교를 거쳐 합격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려면 먼저 광야훈련학교에 입학해야 하고 거기서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실력이 없음을 깨닫고 그분의 훈련과정에 동의하고 잘 따라야 합니다. 광야훈련학교가 힘든 훈련과정이라고 거기에 들어가려 하지 않거나 또 들어가서도 힘들다고 성실하게 훈련을 받지 않으면 결국 졸업하고 축복의 단계로 들어갈 때가 될 때 자격미달이 드러나게 됩니다. 광야훈련학교를 통과하지 않고 누릴 가나안 땅은 없습니다. 고난과 낮추어짐과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은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세상에서도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성공을 누릴 수 없고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한 축복과 은혜는 광야의 과정을 잘 통과한 사람에게만 유효합니다. 겸손의 훈련, 순종의 훈련, 신뢰의 훈련, 인내의 훈련, 감사의 훈련, 기다림의 훈련, 소망의 훈련 이 모든 것이 광야훈련학교의 과목들입니다. 영어, 수학, 과학, 사회 같은 과목보다 훨씬 어렵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런 인격적이고 영적인 성품의 변화들은 광야의 고난과 낮아짐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고난과 낮아짐을 통해서 이런 변화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진정한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훈련 받지 않고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 복을 누리려 합니다. 세상에서는 혹시 가능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나라는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복도 누리지 못합니다. 현재의 삶에서 평안하고 잘 먹고 잘 입고 많은 것을 소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이 훈련과정에서 주님의 가르침과 훈련을 잘 받아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비전과 세상 사람들의 비전은 다릅니다. 우리의 비전은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천국의 복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전은 가능한 한이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추구할 것은 세상에서 고난이 없고 평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겪으면서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뜻하신바 신뢰와 순종과 거룩한 성품을 이루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건강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바로 고난을 축복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인정하는가 아닌가에서 나타납니다. 고난 가운데서 불평하고 염려하고 있다면 아직 광야의 과정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고난을 두려워하고 계속 피하려 하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천국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주님을 더욱 알고 주님께 더욱 순종하게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은 고난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광야훈련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통과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 과정에 더욱 기꺼이 자신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히려 훈련을 가능한 한 피하려 하기보다 훈련을 통해 주어질 축복을 소망하며 스스로 훈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광야가 왜 필요합니까? 훈련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받는 것을 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아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축복의 길인데 우리 안에는 여전히 세상을 의지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려 하는 아주 강한 고집과 완고함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신앙과 불순종과 온전하지 못한 인격들 안에는 주님의 축복이 담길 수 없습니다. 광야에 필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축복을 막는 장애물들을 다루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하고 깨져야 하고 잃어버려야 합니다. 낮아져야 높아질 수 있고 깨져야 온전하게 세워집니다. 이것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받아야 할 훈련입니다. 훈련을 감사하십시오. 적극적으로 훈련에 참여하십시오. 이것을 피하려는 육체의 욕심을 제어하십시오. 그리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으십시오.
기도학교(6)/ 시143:1-8
기도학교 VI/시143:1-8 2003-01-14 18:04:13 read : 130 오늘 성경은 다윗의 시 그가 하나님 앞에 아주 어려운 영적 상태, 심령의 고통과 피곤함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의 피곤함과 참담함과 심령의 상함과 아주 고달픈 영적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피곤하고 참담하고 곤고하고 메마른 심령이 되어있지 않은가고 한번 자기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기도학교를 꽤 여러 주간 계속해 왔습니다. 이제쯤은 나는 기도가 쉬운가? 어려운가? 기도를 하는가? 안 하는가? 둘 중에 하나가 결정이 되었습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인가? 나는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인가? 기도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인가? 기도하는 것이 쉬운 사람인가? 를 완전히 알 수 있도록 말씀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동기가 무엇인가? 기도의 방법이 무엇인가? 기도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여러시간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교제다. 사귐이다. 섬김이다. 기도는 나의 필요한 것을 달라는 요청과 청구가 아니고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랑의 교제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교제를 위한 기도이어야 한다. 기도를 많이 한 것에 대한 대가로 응답을 받는다든지, 기도했기 때문에 무엇을 주신다는 거래적, 상업적, 투자와 return이라는 이런 개념을 우리가 버리고 사랑에는 거래가 없고, 사랑에는 계산이 없듯이 그냥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기도의 동기와 목적이 되어야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을 음미하며 주님을 교제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목말라 하고, 주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고 주님의 임재를 그리워 하는 마음의 느낌을 느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루종일 바쁘게 다니다가도 시간시간마다 주님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지는 사랑의 사귐이 사모하고 목말라서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와야 된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은 결코 영적으로 피곤함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올바로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힘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새 힘을 얻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힘이 없어졌거나 우리 마음의 심령이 갈하거나 내 영혼이 목말라 피곤하게 되었다면 사모함과, 목마름과 피곤함은 다른 것입니다. 피곤함은 죽은 상태와 같습니다. 본문말씀에 \"나로 죽은지 오랜 자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기도의 올바른 자세나 하나님 앞에 올바른 우리의 신앙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피곤해지고, 곤고하고, 영혼이 메말라진다는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이렇게 되느냐 하는 것을 기도와 연관해서 세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잘못된 desire, 둘째는 잘못된 source, 셋째는 잘못된 연결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바른 desire가 있어야 되고, 기도 할 때는 바른 source를 찾아야 되고, 바른 연결을 가져야 기도를 통해서 힘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이 나지 않습니다. 교회생활 하는데 신이 나지 않습니다. 또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생활에 기쁨이 없어지고, 날마다 에너지가 빠지고, 기운이 빠지고, 풍선이 바람 빠지는 것같이 푹 가라앉아서 아주 피곤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고쳐야 됩니다. 그만큼 기도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기도학교를 공부하는데도 기도를 시작도 하지 못했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하나하나 점검해야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나라를 방문한 어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사람, 감옥에 갇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불만이나 괴로움이 없이 오히려 그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교인이 나오는 교회를 방문한 선교사는 담임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교인들이 이렇게 어려운 환경속에서 열심히 기쁘게 생활할 수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의 말씀을 믿고 항상 기도하는 일에 힘씁니다. \"저부터 하루에 4시간 이상 기도하고, 우리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1시간 이상이나 찬 마루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자유세계에서는 교회들이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선교사님은 부끄러웠습니다. \"우리의 중요한 과제는 기도회에 신자들을 참석시키는데 힘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기도하도록 의욕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 힘든 일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둘은 대단히 차이가 있습니다. 기도회에 나와라, 기도하라는 것에 열심이지 기도하는 것에 열심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목사도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어야 되고, 성도들도 열정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특히 목회자에게는 불타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은 성 크리소스톰이 자기 교구 내의 동떨어진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워낙 외진 곳인데다가 오랫동안 사제가 없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살고 있는 한 농부를 최선을 다해 교육시킨 다음 사제로 세우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뒤로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자격도 없는 자를 내가 잘못 사제 자리에 앉힌게 아닐까?\" 그래서 그는 다시 그곳에 가서 몰래 예배 시간에 참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기둥 뒤에 숨어 이 농부 사제가 어떻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는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제를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습니다. 짧은 설교를 하는 동안 그의 얼굴은 열광적으로 빛났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성 크리소스톰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농부 사제에게 축복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농부사제는 무릎꿇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주교인 것을 알자 깜짝 놀랐습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할텐데 어찌 저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십니까\" 주교가 대답했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오. 나는 당신처럼 그렇게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배드리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농부사제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주교님,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단 말씀인가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나 예배하는 것에 정말 뜨거운 사랑과 중심을 바쳐서 주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의 필요성을 말해 줍니다. 성경은 네 집을 바쳐라, 네 돈을 바쳐라, 네 땅을 바쳐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고 우리 자신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힘이 없으며, 왜 피곤하며, 왜 참담하며, 왜 목마른 땅같이 혹은 죽은 시체와 같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desire입니다. 우리의 소원이나 간구가 주님 자신이어야지 다른 것을 구하면 대부분 우리 자신의 이기심에 묶일 수 있습니다. 나무를 잘 가꾸지 않고 열매만 딴다든지, 화초는 잘 가꾸지 않고 꽃만 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열매도 시원치 않고, 꽃도 시들게 되는 것처럼 사랑을 쏟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감나무를 심었다고 합시다. 비료를 주고, 나무를 사랑해서 잘 가꾸어주고, 사랑해주고, 전지를 해주고, 벌레를 방지해 주고, 기다려 주면 좋은 열매를 많이많이 주는 것입니다. 만약 가꾸지도 않고, 거름도 주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고 감만 딸려고 열매만 기다린다면 시원치 않은 감 몇 개만 열리게 되고 떫은 땡감이나 먹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정성을 바치고 그분과 교제를 갖고, 그 분을 높이고 찬양하고 교제하지 않고, 무엇을 달라고만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무엇을 심어놓고 정성을 쏟고 그래야 열매가 열리는 것처럼, 무엇을 달라고만 하고 나무를 흔들어 대니까 되지도 않은 시간에 달라고 하니까 떫은 감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sour하고 괴롭고 아픔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기다리고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안에서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면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실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 이하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했습니다. 정말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가지 못했다면 그것을 깨닫고,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만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하면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면 주님은 우리 사랑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기 전에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교회생활 할 때에도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기려면 내가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문제가 없고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을 위해서도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시겠습니까 생각하면 복잡해 집니다. 아무리 해 주어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자식들에게도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고마운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요청만 하지 말고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날 영수는 엄마에게 \"엄마 말씀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우등생이 된 것 2천원, 집에서 심부름 한 것 천원, 엄마가 음악공부 하라고 하여 피아노 공부한 것 5백원, 집에서 청소한 것 천원, 기타 동생을 돌본 것 천원, 계 5천5백원\"이라고 쓰여진 한 장의 청구서를 제시했습니다. 엄마는 빙그레 웃으며 저녁식탁 위에 5천 5백원과 함께 한 장의 편지를 놓았습니다. \"엄마가 매일 밥지어 준 것 3천원, 매일 세탁해 준 것 3천원, 잠재워 준 것 4천원, 기타 바느질 해주고 돌봐준 것 3천원 계 1만3천원 그러나 엄마는 영수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 무료. 안 받기로 했음.\" 이것을 받아든 영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때껏 어머니의 크신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따뜻한 엄마 품에 안겼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얼마나 많은데 조그마한 것을 해드렸다고 그것에 대해서 배상이나 보상이나 반드시 대가를 받아야 된다는 이런 생각이 있다면 아직도 우리는 영수 정도 밖에는 안 된다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주일날 안수 집사 한 분이 예배당에 나오질 않았습니다. 다른 집사님으로부터 집사님이 낚시를 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화가난 표정으로 \"다리나 똑 부러져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금방 후회했습니다. 옆에 있던 집사님은 안수집사의 친구였고 안수집사의 성격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저녁 낚시를 갔던 집사님이 사택으로 찾아오겠다는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잔뜩 긴장을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집사님의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고, 손에는 과일이 한아름 들려져 있었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어제 제가 교회를 나오지 않았는데도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옷이나 두툼하게 입고 갔느냐고 걱정해 주셨다면서요. 다음부터는 꼭 주일을 지키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일을 지킬때에 주님을 사랑해서 주의 전에 나오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와야지 억지로 나와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헬라의 도시 국가에 아주 부강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처첩들이 많았습니다. 그 처첩들이 모두 왕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날 사랑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너희가 원하는 것을 선물로 주겠다. 나라의 주권만 빼놓고 무엇이든지 다 줄테니 적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덕이 있는 부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아무것도 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왕은 그 부인에게 \"당신은 왜 원하는 것이 없느냐? 욕심도 없느냐?\"고 묻자 그 부인은 \"아니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왕 당신을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자신을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나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습 그대로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가장 현명한 기도는 주님 자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도 충분한데 욕심만 부려서 되겠습니까? 하루는 하나님께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사탄이 묻기를 \"당신은 빛을 만드시고 빛을 보니 좋으니라\" 하시고 땅과 하늘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하셨는데 어찌하여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사람을 보니 좋으니라\"고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빛과 하늘, 땅을 만들때는 완성품으로 만들었고 인간은 미완성품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만들어 가느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 우리가 지금 공사중에 있기 때문에 부족한가 봅니다. 그리고 지금 미완성이기 때문에 완성을 위해서 가는데 중요한 것은 부족하지만 사랑하는 것,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랑해야 되고, 연약하기 때문에 더 사랑해야 되고, 쓰러지고 죄가 있기 때문에 더 사랑해야 되고, 주님을 더욱 사모하고 사랑해야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잘못된 소스 때문에 우리가 피곤해 집니다. 인간의 지혜, 인간의 능력, 인간의 생명은 한계가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소스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가지고 쓰려고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의 source이십니다. source란 자원입니다. 원천입니다. 그래서 source가 주님께 있으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source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과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source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기도의 모든 지혜의 source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의 원천이 바로 있어야 거기서부터 올바른 자원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힘의 근원이 되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한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이 아마 세상 재미에 취해서 기도를 오래 쉬었나 봅니다. 그랬길래 \"심판하지 마옵소서\" 하고 아우성 치면서 내 영혼이 목마르고 내가 피곤하고 내가 참담하고 내가 죽은지 오래된 시체같이 되었나이다. 기도를 쉬고, 하나님이 주신 source를 찾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준 권세나 부귀나 영화나 세상의 쾌락에 source를 두었기 때문에 그는 \"exhaust\" 아주 피곤해지고 곤고해지지 않았나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섬기라. 그 분만 source로 삼아라.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때 heart를 표시합니다. 심장을 표시할 때는 heart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장은 2개입니다. 폐도 2개입니다. 간도 peace가 두 개입니다. 하나가 고장이 나서 잘라내도 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위도 고장이 나서 조금 잘라내고도 그냥 살아갑니다. 그러나 심장을 잘라내고 산다는 분은 한번도 못보았습니다.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두 개가 있다가 하나를 떼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원하십니다. 스페인에서 마음을 무엇이라고 말하냐고 했더니 \"꼬라손\"이라고 합니다. \"코라손은 heart\"입니다. 우리말로 일편단심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영어로 번역하기가 좀 힘들 것입니다. 일편=one piece, 단심=single mind, 한 조각의, 한 piece 하나밖에 없는 것 그것을 주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의 사랑을 주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들 나았다고 좋아하고, 그 자식 잘 키워서 훌륭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장가 보내놓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 봅니다. 왜 장가가면 그만입니다. 장가가면 저희 자식 먹여 살리느라고 정신 없습니다. 거기에 기대와 소망과 모든 사랑을 다 쏟은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쁨의 source 되시고, 지혜의 원천이 되시고, 우리의 삶의 생명의 능력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분과 기도를 하면 그 source가 늘 흘러오기 때문에 우리가 힘을 얻고 용기를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잘못된 곳에 기대와 소망을 가진 것은 source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source가 잘못되면 곤하고 피곤해져서 결국 잘못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주님께 가까이 그분만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connection입니다. connection은 연결입니다. 마치 고압선이 있을 때 거기서 전기를 따가지고 올때에 녹이난 낡은 선을 써서 그곳의 연결이 잘 붙지 않았다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집안에 들어온 전기가 있어도 연결이 안되면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 처럼 하나님의 능력의 소스이시고 모든 것의 전부이시지만 우리가 그분에게 기도를 통해서 그분과 든든하게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의 기쁨과 능력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의 말씀드린 마지막 단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나니\" 그렇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connection이라는 것이 연결되어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절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열매는 절로 열리는 것이지 억지로 딴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거룩한 능력을 연결시키려고 하고, 마귀는 이것을 끊임없이 끊으려고 합니다. 이 connection이 끊어지면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연결이 끊어지고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이 커도 우리에게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려면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가져야 될 것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한 기자가 그의 상대성 이론을 한두마디로 설명해 보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상대성 이론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당신이 1분동안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불운을 겪는다면 그것은 1시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1시간 동안 매우 사랑하는이와 시간을 갖는다면 그것은 1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말을 통해 배운 교훈은 우리들이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그때 누리는 즐거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루하면 1분도 1시간처럼 느끼고, 좋으면 1시간도 1분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정말 뜨거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기도한다면 우리가 주님 앞 에 드리는 시간이 1시간도 1분처럼 지나가고 그와 진정한 깊은 교제를 가지면 주님의 위대한 삶의 축복과 능력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계절이 오려면/ 행28:1-10/ 김준곤 목사/ 한국대학생선교회(CCC:씨씨씨) 출신 나사렛형제들
복음의 계절이 오려면 행28:1-10 이 시간 “복음의 계절이 오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의 CCC 대학생들이 일어나 ‘사천만을 그리스도에게’,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도했던 엑스플로 74 그 때가 눈에 선합니다. 그 때 저는 영광스럽게도 사랑방 성서학교 중순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그 때 한국교회는 많이 기도했고 그 때를 분기점으로 한국에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300만에 불과했던 성도수가 천만을 넘었고 인구비율로 보면 세계제일의 선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창8:22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계절은 아무도 막지 못할 하나님이 내신 법칙입니다. 세상의 냉방기가 다 동원되어도 여름을 막을 길 없고 세상의 난방기가 다 동원되어도 겨울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나 복음전도에도 더 풍성한 계절이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 일행이 멜리데에서 한 겨울을 보낼 때 있었던 놀라운 복음의 결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멜리데라고 하면 오늘의 이탈리아의 말타(Malta)라는 섬입니다. 바울이 한 계절 멜리데에 있는 동안 멜리데의 가장 높은 사람을 위시하여 많은 섬사람들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멜리데의 복음의 계절이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의 계절이 오려면? 1. 기도해야 합니다. 1절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이 섬에 당도하기까지 파도와 싸우는 엄청난 싸움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든 싸움이었으면 며칠 후에야 그곳이 멜리데인줄 알았겠습니까? 이처럼 복음의 계절은 그냥은 오지 않습니다.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을 점거하고 있는 악한 영과 싸워야 합니다. 사단이 자기가 점거한 자리를 쉽게 내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평안해진 것 같아요. 복음의 초창기에 얼마나 사단의 시험이 많았습니까? 전도하면 동네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교회를 반대합니다. 새신자가 생겨도 갑자기 그 가정에 시험들이 발생합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시험들입니다. 그 고비를 이겨야 합니다. 성령을 사모함에도 얼마나 악령들이 역사하는지 그런 운동은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정당한 일이어도 충분한 기도의 배경이 없으면 사단의 방해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그러므로 먼저 엎드려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돌아볼 때 우리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 호감을 주어야 합니다. 2절 함께 읽겠습니다.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난파당해 사람들이 헤엄쳐 왔고 2주간이나 풍랑에 시달렸으므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멜리데 사람들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특별한 동정이라 한 것을 보면 얼마나 잘 대해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멜리데가 B.C.218년 이후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의 로마의 행정관은 양심과 도의는 물론 난파된 로마호송선에 탄 사람들을 구조하고 도울 의무와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토인들은 특별한 동정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호의는 복음 전도의 중요한 토양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좋은 평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은 활짝 열리고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안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에 대한 평판을 나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삼대종교를 비교해 보면 세상적으로도 우리 기독교처럼 아름다운 종교가 없습니다. 거의 모든 좋은 면에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수재의연금 1위, 사회복지시설과 비용 1위, 교도소 교화율 1위, 금주 금연 1위, 군신자율 1위, 민주열사와 민주제도 1위, 건전한 성의식 1위, 연예계 1위, 스포츠계 1위, 여야 정치인 1위, 국내외 입양활동 1위, 학교와 병원 1위, 개혁단체 1위, 투명한 재정관리 1위, 구제와 사회봉사 1위, 국위선양 1위, 대북동포돕기 1위, 미흡하나 조선족돕기 1위,,, 다 이루셀 수 없습니다. 불교는 범죄율 1위 사회복지 3위 최대종교라면서 꼴찌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언론과 포털사이트는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널려져 있는 숱한 미덕은 다 감추고 온갖 우스꽝스러운 사건이나 기사만을 골라 올리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니 이런 것이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도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피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교회를 향한 사탄의 세력을 주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더욱 선행하고 입을 봉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사기꾼이나 자기밖에 모르는 깍쟁이라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악평과 맞서 싸우는 강력한 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신앙에 대한 호감이 절대 필요합니다. 3. 이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3-6절을 보면 놀라운 이적이 일어납니다. 함께 읽어 보시죠.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 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불을 피울 때 장작에서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의 상함도 피해도 없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의 영광은 크게 나타나고 비로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이적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살아계심을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곳에는 반드시 이적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만 아니라 기독교 교회사에 언제나 부흥의 현장에 이적이 있었습니다. 병든 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눈먼 자가 보고 귀머거리가 듣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4. 요새를 정복해야 합니다. 7-8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멜리데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최고 행정관 보블리오의 집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의 열병과 이질을 안수로 고쳐 낫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 일로 보블리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나중에 멜리데의 감독이 될 만큼 하나님의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이 땅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군사 문화 법률 언론 복지 등 각계각층에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들이 장악하여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사이버선교사도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더 이상 안에서 분쟁하며 힘을 다른 곳에 소비하지 말고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해야 합니다. 5. 널리 전도해야 합니다. 9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복음의 소식이 온 섬에 퍼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찾아와 병 고침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전도입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가족과 이웃 민족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가까운데서 먼데까지 혹은 먼데서부터 가까운데까지 널리 전해야 합니다. 내 가족이 불신자가 있는데 내가 누구를 전도하느냐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더 연단하시고 겸손케 하시며 기도케 하셔서 먼저 성장시키려는 것이지 전도 못할 사유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이 땅의 복음화입니다. 주님은 복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겨울이라는 한 계절에 멜리데에 복음의 기적이 나타났듯 겨울보다 더 냉혹해지고 있는 우리 이 땅에 복음의 계절이 오도록 간절히 갈망하며 기도하고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불안과 불확실성의 안개 속을 헤쳐가는 크리스천의 자세/ 마24:, 막13: 눅21:/ 김성민 목사/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 2003-04-05
불안과 불확실성의 안개 속을 헤쳐가는 크리스천의 자세/ 전쟁과 괴질과 북핵의 정세 속에 종말의식 가지고 살아야 마24:, 막13: 눅21: 미군의 바그다드 진입으로 대이라크 전쟁이라는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하나 온전한 평화를 이루는 순간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하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또한 종전 후에도 이라크를 지지한 시리아 같은 나라의 정권 교체가 제의되고 있으며, 사담 후세인의 축출로 인해 야기될 가능성이 있는 아랍권의 권력 재편이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가에 불안과 불확실성을 지니고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 더해 SARS(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라 명명된 호흡기성 괴질이 급속한 속도로 번지면서 전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괴질이 전염될까봐 두려워 마스크를 쓰고 주식 거래를 하고 있는 어느 홍콩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들이 마음속에 교차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라크 다음의 징계 대상이 북한과 파키스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파키스탄은 인도와 경계를 두고 있는 ’카시미르’지역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군사적인 대치를 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지역 중 하나다. 특별히 점점 강경파 무슬림들이 실권을 잡아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일들이라 또 다른 비극적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또한, 우리와 마주보고 있는 북한과 연관된 문제는 어떤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외국 언론들은 우리 언론보다 이 문제의 위급성과 심각성을 크게 다루고 있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블래어(Blair) 영국 총리가 이라크를 논하며 다음은 북한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미국의 패권주의(Pax Americana) 하에 길들일(?) 다음 목표로 북한이 최우선 순위임을 알 수 있는 적지 않은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가중되는 외부 압력에 대해 ‘북한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예측되고 있다. 그 중에는 전쟁이라는 선택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채 거론되고 있다. 한마디로 불안한 상황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다. 이러한 분위기의 세상을 보며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과 연결을 시키는 것은 성경을 읽는 크리스천들로서는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다.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종말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마 24장; 막 13장; 눅 21장)은 오늘날의 모습을 같은 맥락 속에 조명해 보기에 충분하다. 그렇다. 종말의 순간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종말이 가까운가는 우리가 던질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 하셨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오히려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러한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이다. 성경 속에서 종말을 논하며 예외 없이 우리가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논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말이다. 첫째, 크리스천 개개인 모두는 이런 모든 상황이 결코 예상외의 모습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그 분의 섭리와 주관하심 하에 일어나고 있다.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 되심을 말하고 있다. 창조를 통해 이 세상을 시작하게 하신 그 분이 종말을 향해 섭리와 주권 속에서 이彭?가심을 기억하며, 그분을 향한 신뢰를 더욱 다져야 한다. 그러기에 두려움과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 파묻혀 있는 비크리스천과 달라야 하며, 오히려 그 분께로의 소망을 확인해야 한다. 혹시 영적으로 자고 있었다면 이제 일어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크리스천 서로를 향한 사랑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종말을 바라보며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권하고 있다. 더 나아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때 ’안타깝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혼란 속에 이념 및 정책으로 갈라져 서로를 비방하는 모습이 교회 속에 만연해 있다. 단순히 정권이 바뀌면서 생기는 과도기적인 현상이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서로를 향한 봉사를 통해 시너지(synergy)를 창출하기 보다는 이기적인 모습이며, 서로를 세워주는 분위기 보다는 오히려 헐뜯고 중상하고 모함하며 쓰러뜨리는 분위기가 자리 잡아 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상처가 있는 곳을 싸매주고 위로하기 보다는 그 곳에 소금을 뿌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조그마한 상처를 잡아채 더욱 더 깊은 상처를 만들고 깊은 흉터를 남기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아무리 위대하게 보이는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이 절실하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치부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기 보다는 사랑으로 감싸며 기도로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크리스천의 모습이 퍼져가기를 기도해 본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있을지라도 성프란체스의 ’평화의 기도’를 조용히 묵상해 보며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을 다짐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셋째, 믿지 않는 이들을 향한 선교와 전도의 마음을 그 어느 ㎈릿?다져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종말을 논한 후 디모데를 향하여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명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종말을 논하시며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셨다. 특별히 이 말씀은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을 향한 명령일 뿐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도 및 선교의 종말과의 관계성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분은 이러한 계획을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을 사용하실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것을 다른 백성에게 돌리셨듯이 말이다(마 21:43). -박성민 박사는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금속공학박사, 미국 트리니신학대학원 신약학박사, 저서:[리더십제대로오르기] 등 다수, 한국CCC 대표
에덴학교의 시험/ 창3: / 2010-12-03
에덴학교의 시험 창3: 1. 말하는 뱀선생님을 조심합시다. 한 때 우리나라에 “꽃뱀”을 조심하라고 남자들에게 언론을 통해서 경고를 하기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꽃뱀이 누굽니까? 네, 돈 있는 남자나 능력있는 남자를 유혹해서 그 돈을 가로채고 패가망신하게 하는 여자를 의미했습니다. 시험을 칠 때 학생들에게 시험이 가장 어려울 때는 언제인가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공부를 하지 않고 농땡이를 쳤을 때입니다. 저는 늦게 대학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싫은지를 잘 아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저도 시험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좀 우직한데가 있어서 한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시작하면 화장실을 가는 것 빼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누운채로 책을 보면서 2-3일을 안 잔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 마음도 편하고 시험을 치면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만일 에덴동산에 아담대신에 살았더라면 하나님이 내신 시험을 상당히 잘 쳤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어떠했습니까? 먼저 아담 학생과 하와 학생에게 첫 시험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뱀 선생님이 출석을 불렀습니다. 아담! 네!, 하와, 네! 두 사람 다 출석점수는 만점입니다. 에덴학교에 두 사람 다 시험을 치루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이제 종이 치고 시험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두 사람이 다니는 학교에 시험을 내는 선생님이 좀 이상합니다. 이상한 동물입니다. 어떤 동물입니까? 네 뱀입니다. 그런데 이 뱀이 이상합니다. 뱀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뱀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장 1절 상반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간교하더라’의 뜻은 나쁜 뜻이 아닙니다. 1) 김서택, 「창세기 강해설교1, 하나님의 형상, 사람의 모습」, (서울; 홍성사, 2005), p, 286. 이 말은 아주 지혜롭고 슬기로우며 남의 마음을 아주 잘 알아준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이 에덴동산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아무리 타락하기 전이라도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들 중에는 느리기도 한 동물도 있고, 말 안듣는 동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쏙 드는 들짐승이 있었는데 그 짐승이 바로 뱀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의 본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이 뱀이 상당히 하와에게 인정을 받은 동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처음에는 뱀이 배로 기어다니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3:14절에 보면 뱀이 죄를 짓고 난 후에 배로 기어다니도록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뱀은 지금처럼 징그럽고 기분 나쁜 모습은 아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하와는 도망을 쳤을 것입니다 . 그런데 이 아름다운 뱀에게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능력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그 자랑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뱀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도 부흥을 주옵소서/눅24:13-35, 행2:37-42/ 이상규 교수/ 고신대학교/ 2008-06-21
우리에게도 부흥을 주옵소서 눅24:13-35, 행2:37-42 시작하면서 1907년에 있었던 대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교회에는 부흥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여러 곳에서 ‘부흥’에 대한 학술모임이 전개되었고, 1907년의 대부흥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습니다. 백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사건을 한국교회가 이처럼 중시하고 이때를 기념하려고 할까요? 오늘은 이 점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듣고 계신 줄 압니다만 백 년 전인 1907년에는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집단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커다란 부흥을 체험한 해입니다. 이때의 일은 한국교회의 ‘재생’(rebirth)이라고 불릴 만큼 엄청난 영적 각성을 가져왔고, 그 결과로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을 경험했고 교회와 사회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부흥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면서 이때의 일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부흥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부흥’이라고 말할 때 부흥을 단순히 수적인 성장이나 외적인 발전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부흥은 단순히 수적 성장이나 발전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와 각성입니다. 한국교회가 경험했던 부흥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흥’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근본적으로 부흥은 생명(life)과 각성(awakening)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흥을 흔히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간섭”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아더 윌리스(Aurthur Willis)라는 분은 부흥을 “하나님께서 장엄하신 능력으로 자신을 죄인들에게 계시하시는 일”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부흥운동사를 연구해온 에드윈 오르(Edwin Orr)는 보다 선명하게 부흥이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또 그와 관련된 신앙공동체에서 신약 기독교에서 보는 성령의 역사”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흥은 단순히 수적인 성장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영적 각성고가 변화들을 의미합니다. ‘교회부흥운동’이란 말이나 ‘신앙부흥운동’이란 말은 여자적으로 성경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교회사에서 경험한 부흥의 역사를 종합해 볼 때 부흥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부흥, 혹은 신앙부흥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과 관계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영적 부흥은 불신자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영적 부흥은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와 그 공동체에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부흥은 내적 각성과 변화로 인한 새로운 활력이자 영적 각성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부흥은 일차적으로 한 개인의 내적 변화에서 시작되어 밖으로 나타난 현상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내적 변화 없이는 외적 부흥은 불가능 하다는 사실입니다. 부흥의 시대적 배경 교회 부흥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나 기독교회는 그 시대의 상황과 무관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과 그 시대적 사람들의 삶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난 경우를 조사해 보면, 영적 퇴보가 있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심각하게 위협 받고 있을 때, 혹은 국가적인 위기나 어려움이 있을 때 부흥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부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힘이자 활력이었고 새롭게 소생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역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부적인 요인이 부흥을 가져온 주도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비록 교회가 처한 정치·사회적 환경이 교회와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외적인 요인이 부흥을 가져오는 주된 동기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도들의 말씀에의 사모함과 간절한 기도, 그리고 진실한 회개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경우 1903년에서 1907년에 이르는 한국의 사회의 정치적 환경, 암물한 조국의 현실이 하나님을 앙망하게 하는 일에는 영향을 주었지만 그것 때문에 부흥이 임했다고 말하는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1900년대 점증하는 일본의 세력을 보면서, 그리고 청일전쟁(1984-5)과 을미사변(1895), 그리고 노일전쟁(1904-5), 을사늑약(1905)을 보면서 우리가 절망감에 빠지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주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갔을 것입니다.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는 말이었다고 말하면서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의 아픔을 보면서 이 때야 말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신자의 책임의식이 고조되었고,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와 함께 암울한 현실로부터 탈출 욕구가 심화된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한국교회는 새로운 부흥을 갈망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에게 영적 부흥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부흥의 역사적 전개 1907년 대 부흥은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 연원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元山)에서는 선교사들의 집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집회는 중국에서 사역하던 중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휴양 차 원산에 오게 된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Miss Mary Cutler White)와 캐나다장로교 파송으로 역시 중국에서 일하던 중 원산으로 오게 된 매컬리(Louise H. McCully)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 두 선교사들은 한국인 가운데 부흥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 왔는데, 집회에서 말씀을 강론하던 하디(Dr R. A. Hardie) 선교사의 회개는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였고, 한국교회 부흥을 가져오는 시작이 됩니다. 하디의 회개는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주어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마다 청중들은 감동을 받았고 회중가운데서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디의 죄의 고백은 한국인들의 회개운동으로 이어져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디의 회개는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회개운동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디는 이때로부터 사경회의 강사가 되어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회개와 영적 각성, 그리고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설교하였습니다. 부흥의 역사는 1903년 8월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온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소속 프란스목사(Rev F. Franson)가 1903년 10월 원산을 방문하고 그가 인도한 장감침(長監浸) 연합사경회 기간에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무디의 영향을 받고 중국내지선교회(CIM)의 허드슨 테일러, 기독교연합선교회의 심슨(Simpson) 등과 교분을 나누었던 프란손은 일주일간 원산에 머물면서 사경회를 인도했을 때 다시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04년 봄에도 원산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초교파적인 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장로교 선교사 롭(Alexander F. Robb), 전계은(全啓恩)목사,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목사도 성령을 충만히 받고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한국인과 선교사들은 이 땅에도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원산에 이어 개성 송도도 회개를 동반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선교사의 보고서가 남아 있다. 죄에 대한 참회가 너무 분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했으며 훔친 물건들을 배상하였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처음으로 죄가 무엇이며,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 집회는 성령이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여 진정한 죄의 자각과 구원의 확신을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은 머리로는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마음은 성령의 정결케 하는 능력을 알지 못한 채 그냥 옛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부흥의 역사와 함께 1904년 6월에 와서 처음으로 부흥회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에도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났습니다만 특히 1906년에는 또 한 차례의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1906년 개성의 송도(松都)에서는 큰 부흥을 경험했는데, 이때에도 회개와 죄의 고백이 일어났다고 기록했습니다. 돈을 훔친 자는 돌려주고 형제를 미워한 자는 용서를 빌었고, 다른 이유로 예수를 믿었던 이들은 참으로 주님을 섬기겠노라고 고백하였고, 양반이라고 하여 천민을 멸시하던 사람이 이재부터는 그 사람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요, 형제로 대하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 해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하디를 초청하여 ‘평양선교사 사경회’를 개최되었습니다. 이 집회에서 하디선교사는 요한 1서를 본문으로 설교하였고, 은혜를 받기 전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였으며, 서구인으로서 우월의식을 가지고 한국인을 폄하하였던 죄를 회개했을 때 성령께서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진솔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이런 부흥의 역사가 서울과 평양, 목포등지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평양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영적 뜨거움이 없음을 보고 새벽마다 기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것이 새벽기도의 시작이었고, 1907년의 대 부흥은 이런 과정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1907년 대부흥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평양을 중심한 서울 등 이북지역과 목포 등 전라도 지역, 그리고 전국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907년 1월에는 평양에서 대 부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이때의 집회에는 약 1500여명이 회집한 가운데 낮에는 주로 성경을 공부하고 저녁에는 대중 집회형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집회는 계속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분위기는 냉담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든 중 1월 14일에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기대하는 정오기도회가 열렸고, 그날 저녁에는 오늘 우리가 대 부흥이라고 말하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날의 대 부흥은 길선주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을 아간과 같은 자라고 말하고,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기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하도록 부탁을 받았으나 그 일부를 자신이 사취했던 죄를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회개했습니다. 이 길선주의 회개는 1907년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던 위대한 부흥의 시작이었습니다. 죄의 회개를 외쳤던 길선주의 설교는 세례요한의 선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집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고, 이날의 회개운동은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길선주의 회개에 이어 청일전쟁 당시 자기 아이를 죽었던 한 여인이 살인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 죄의 고백은 엄청난 충격을 불러 일으켰고 이때부터 수많은 이들은 자신의 가슴을 열어 제치고 은폐된 비밀의 창고 속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소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 같았고, 그 회개가 이 강산을 부흥의 불결로 파도치게 하는 동력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회개에 대해 김양선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모든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 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하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다. 국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든가 또 바로 죽임을 당한다 하드라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심지어 어떤 여신도는 청일전쟁 때에 어린 애기를 업고 도망하다가 무거워서 빨리 갈 수 없어 아기를 나무에 부딪쳐 죽게 하고 혼자서 달아났던 참혹한 일을 자백했다. 죄의 자복은 계속되었고 죄의식에 고민하면서 땅을 쳤습니다. 회중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이 기도회는 새벽 두시까지 자백과 눈물로 계속되었습니다.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이날 저녁 말씀을 전한 길선주의 얼굴은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고, 그날의 설교는 우뢰와 같은 선포였습니다. 교인들은 밤 세워 눈물로 기도했고 온갖 죄악들이 숨김없이 고백되었습니다. 겨울의 세찬 바람도 아랑곳없이 기도의 물결은 계속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나타난 부흥의 역사는 순식간에 평양 전역으로 알려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에로 확산되었습니다. 또 평양시내의 미션스쿨에로 번져갔습니다. 평양신학교 개학 사경회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부흥의 불길에는 교파의 벽이 없었습니다. 감리교학교에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의 불길은 곧 타 지방으로 번져갔습니다. 이러 부흥은 1907년 4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08년에는 만주와 중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07년 부흥의 역사적 의의 1907년 전후의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의의를 지닙니다. 첫째,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내적인 신앙의 성숙을 가져왔습니다. 1907년 부흥으로 장로교회에서만 이 해에 16,000명의 새 신자를 얻었고, 감리교에서는 10,000명의 새 신자를 얻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이 부흥운동의 결과로 평양을 중심으로 약 3만 명의 개종자가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통계의 의하면 1907년에는 학습, 세례교인이 9만 명이었으나, 1908년에는 이 부흥운동의 결과로 15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둘째, 선교사들과 한국인 간의 상호 이해와 공동체적 일체감 형성에 기여하였습니다.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때는 선교사들이 입국한지 20년이 지난 때였으나 한국인과 선교사들 간에는 상호 불이해와 장벽이 없지 않았습니다. 민족성의 차이, 습관과 풍습, 사고방식이나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도 없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의 우월의식 또한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흥을 통해 상호 몰이해를 회개하였고, 서로를 진정한 형제애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셋째, 1907년 부흥은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전도운동의 대표적인 경우가 1909년에 시작된 백만인 구령운동이었습니다. 1907년 대부흥이 그해 6월까지 절정에 달했으나 곧 그 열기가 식어지고 1908년에는 영적 각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자 1909년에는 이전의 부흥의 열정을 전도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 백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주의 연함 공의회는 100만인 구령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09년 외국에서 온 부흥사들은 전국 주요도시에서 전도 집회를 개초치하며 전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기독교 문서를 보급하며,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등 전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07년 부흥은 선교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1907년 장로교회는 전도국을 설치했고, 노회의 조직과 함께 이기풍목사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1908년에는 평양여전도회가 이선광(李善光)을 제주도에 파송했습니다. 1909년에는 한석진목사를 동경에, 최관흘목사를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에 파송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선교활동은 부흥운동의 결실이었습니다. 네째, 1907년 부흥은 단순한 영적인 각성운동이거나 교회의 성장만이 아니라 사회변혁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변화된 새로운 관계는 수평적인 질서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권(女權)에의 인식을 통해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고 신분타파, 의식개혁, 구습(舊習)의 개혁,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 와 사회개혁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런 점들은 18,9세기 영국이나 미국에서의 부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결실들이었습니다. 기생의 도시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부흥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부흥은 어떻게 오는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1백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부흥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한국교회와 서양교회의 부흥역사를 살펴볼 때다음의 몇 가지는 부흥을 가능케 했던 준비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입니다. 부흥과 사경회(査經會)는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교회에서나 한국교회 부흥에서 현저한 특징이었습니다. 말씀이 읽혀지고 가르쳐지고 해석될 때에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고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부흥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말씀의 신실한 전파 없이는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24:13-32의 경우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뜨겁게 하고 부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두 제자는 서로 말하면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반문했습니다. 18세기 이래 도처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하게 전파될 때 나타났던 현상이었습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평양에서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직 후 한국을 방문했던 요나단 고포드는 평양에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지속적인 기도와 기도의 영이 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기도는 성령의 역사를 불러오는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로 간구해야겠습니다. 셋째는 죄의 고백입니다. 부흥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던 또 한 가지 중요한 역사는 죄의 고백이었습니다(행2:37-42). 통회와 자복은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통로였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이 경우가 사도행전 2장 37절 이하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반응이 37절인데,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주체할 수 없는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고 겸비하는 마음으로 섰을 때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맺는 말 1900년대에는 교회의 수적 성장만이 아니라 신앙운동과 영적 부흥에도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특히 1900년 초에는 일정기간 동안 회집하여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査經會)가 도처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런 사경회가 말씀을 사모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관심입니다. 말씀 없는 부흥은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오늘 다시 부흥을 주시도록 간구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 가장 결여된 것은 진정한 회개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이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야겠습니다. 회개 없이는 부흥이 없습니다.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의 진솔한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한국교회를 쇄신하고 정화하고 영광스런 교회를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주일학교 교육/신6:6-9/2001-09-17
주일학교 교육 신6:6-9 이렇게 교육위원회가 헌신을 다짐하는 하는 이 시간에 우리는 주일학교교육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주일학교교육이란 무엇입니까? 교육(敎育)이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을 훌륭한(참된)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고 길러주는(이끌어주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교육이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을 훌륭한(참된) 신자가 되도록 가르치고 길러주는(이끌어주는) 행위입니다. 주일학교교육이란 그러한 기독교교육을 하기 위하여 주일에 교육하는 교회학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주일학교교육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엡 4:11-12.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참 신자, 참 일꾼으로 길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3. 주일학교 교육은 왜 중요합니까? 1) 교육이 없이는 참된 신자가 되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무식이 용감\"이란 말이 있습니다. 모르면 할 수 없더라고요. 그러니 교육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불효도 몰라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2) 주일학교 교육은 교회성장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린이 주일학교는 교회의 황금 밭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교회에서는 주일학교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여 유감스럽게도 주일학교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주일하교는 교회성장의 터전이 되는가를 살펴봅시다. ① 교인들은 대개 주일학교를 거친 이들입니다. 서울을 비롯한 중요 도시의 교회 교인 3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주일학교를 거친 사람이 87%이었답니다. 벤슨박사가 말한 바에 의하면 미국교회 85%의 교인이 주일학교를 다닌 이들이며, 선교사나 교역자들은 95%가 역시 주일학교를 안온 이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도 교회를 조사하여 본 결과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는 제직들이나 주교교사 및 찬양대원 등의 89%, 그리고 교역자가 된 이들의 92%가 주일학교를 통과한 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미국 감리교 감독을 지낸 한 분이 말하기를 \"만일 주교사업을 교회에서 없애버린다면 감리교 교회는 15년 내에 교인 수가 반이 줄어들고 말 것이다. 그리고 30년 내에 감리교회는 실제적으로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아이오아주의 전지사였던 혼 나단 켄드(Hon Nathan Kend)씨가 말하기를 \"만일 주일학교 사업을 돌연히 없애거나 종국적으로 없앤다면 교회자체가 1세기 동안이라도 계속될는지가 의심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유명한 변호사가 지적하기를 \"주일학교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단 하나의 기구로 인정된다. 만일 주일학교에서 자라나는 소년 소녀들을 잘 지도하여 교육시키지 못한다면 앞으로 얼마 안 가서 교회가 약화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존재까지도 없어지게 되고 말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② 큰 주일학교는 큰 교회를 만듭니다. 큰 주일학교를 가진 작은 교회는 점점 부흥되어 가거나 혹은 크게 부흥되고 말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작은 교회였지만 주일학교를 활발히 발전시킴으로서 큰 교회를 이룩하게 됩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 베다니 장로교회와 뉴욕 성바울교회, 성죠지교회, 포트 워어쓰 제일침례교회, 시카고 무디 기념교회 등이 주일학교를 통하여 성장한 교회라고 합니다. ③ 미래의 교회는 오늘의 주일학교에 달려있습니다. 주일학교는 미래 교회의 규모와 모습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는 자주 결석을 하거나 다니다가 도중에 타락하는 책임성 없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주일학교를 다녀보지 못했거나 또는 다녀도 훈련을 잘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습관이 굳어지기 전인 어린 시절에 주일학교에서 온전한 교육을 받은 교인이라고 한다면 예배시간도 규칙적으로 지킬 것이며 교회봉사도 잘 하고 경건한 신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잘 교육을 받은 사람이 또한 성경을 사랑하고 연구하며 성경말씀에 잘 순종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래의 교회도 역시 오늘의 주일학교교육 여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④ 선교지역 교회나 개척교회도 주일학교를 통하여 세워집니다. 대부분이 처음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할 때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전도하고 교육함으로서 일하게 됩니다. 어떤 이방종교를 믿는 여인이 선교사에게 \"나는 내 조상들과 죽고 말 것이니 제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당신의 종교를 믿게 하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힌두교인 한 사람이 말하기를 \"장년들을 전도하는 것은 나무 가지를 꺾어 가는 것 같아서 아무 두려움은 없었지만 어린이들에게 전도를 시작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나무 뿌리에 도끼를 놓는 것과 같이 매우 두렵다.\"고 하였답니다. 과연 선교사들이나 개척교회 설립자들은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먼저 전도하고 교육함으로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3) 주일학교교육은 국가와 사회의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와 국가를 잘 유지하여 나아가기 위해 아주 기본이 되는 요소는 바로 기독교 신앙정신입니다. 청교도들의 정신으로 세워진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로서 놀랄만하게 발전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교육과 신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참된 신앙으로 교육시켜 나아가는 주일학교 사업이 국가에 얼마나 큰 소망을 주는가를 살펴봅시다. ① 정치가들의 말 미국 지도자가 된 훌륭한 사람 100명에게 \"주일학교의 가치성\"을 문의한 윌리엄 이 애트킨슨(William E. Atkinson)의 글에 보면, \"많은 정치가들이 \'주일학교는 미국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기관의 하나이다\'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② 법관들의 말 뉴욕주 대법원 법관을 지낸 엘 화우셑이란 분이 12년간 법관생활을 해온 중에 4,000면이 넘는 소년 소녀 범죄자를 취급하였는데 그 중에서 주일학교에 다닌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③ 청소년들의 범죄와 그 방비와 선도의 길 나날이 늘어가는 청소년들의 범죄를 어떻게 방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은 주일학교교육만이 청소년 범죄율을 감소시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덴버시의 필립 비 길리안이란 재판관은 말하기를, \"소년 재판소에 참으로 두통거리가 되어 있는 소년 소녀들의 범죄자 중에서 주일학교에 잘 다니는 이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샌프라시스코 경찰서장이었던 던칸 마태손도 그가 경험한 중에서 \"많은 소년 범죄자 중에서 주일학교를 다닌 이는 한사람뿐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미국 소년 소녀 범죄자의 90%는 주일학교에 다니지 아니한 16-24살난 청소년들이라고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만일 우리들의 청소년들을 주일학교에 잘 나오게 한다면 모든 교회는 차고 넘치겠으나 우리 형무소 감방은 빌 것이다.\"고 말하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주일학교 사업을 철저히만 한다면 무서운 범죄를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범죄자를 잘 선도하게 될 수도 있고 또한 감소시킬 수 있게도 될 것입니다. 4. 그런데 현재 한국교회 주일학교교육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금 한국교회는 주일학교가 아주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500-1000여명이 모였던 큰 교회의 주일학교도 아동의 수가 100명 이하나 십 수명뿐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교인 수가 감소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주일학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간다면 한국교회도 서구의 교회처럼 노인들만 남거나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I.M.F 보다도 더 심각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왜 이런 위기가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에 닥쳐왔을까요? ⊙ 한국교회 교회교육위기의 원인 1) 인식의 부족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쁘게 뛰어가는 어린이들, 학원 가방을 메고 이곳 저곳을 순회하는 아이들, 이것이 요즈음의 우리 주변의 풍속도입니다. \'교육 제일 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태 속에서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조차도 이에 질세라 갖가지 교육을 위탁 기관을 빌어 자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치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한 결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자녀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로 자라나는 것을 돕는 것에는 주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유 초등부나 중 고등부에 나오는 것이 입시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여 자녀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방해하는 일도 있습니다. 아침에 모세 오경을 읽게 하고 기도시간과 말씀 읽기 시간을 오전 수업으로 보내는 유태인의 교육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자녀 교육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를 뿐 아니라 자녀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에 기인합니다. 또한 세상 잘못된 사상들을 무조건 받아들임으로서 자녀를 사단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어린 영혼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습관적으로 어린이들을 대하고 지식 전달에만 머무르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귀한 하나님 말씀을 어린이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자매들이나 해야 한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의식을 갖고 있으며 나그네처럼 잠시 들렸다 가는 기관으로 여기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2) 투자의 부족 교회 재정 규모에 비해 교육 기관에 투자되는 비율은 상당히 빈약합니다. 그것도 대부분 성경 학교나 수련회 등 단회적인 행사에 일년 예산중의 대부분이 쓰여집니다. 그리고 몇 번 시상과, 생일 파티, 달란트 시장을 하면 일년 예산은 다 쓰여지게 됩니다. 물질이 많이 투자되어야 교육이 제대로 이뤄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영혼이 곧 \'선교지(宣敎地)\'라는 생각을 한다면 어린 영혼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 영혼을 얻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다른 것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도구가 효과적으로 쓰여지려면 합당한 물품이 필요할 것이고 그에 상응하는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헌신의 부족 토요일 저녁과 주일 아침이면 바쁘게 움직이는 교사, 뭐가 그리 급한지 아침에 뛰어가는 교사, 이런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일주일 동안 바쁘게 살다 보니 미처 주일학교 준비를 못한지라 토요일 늦게까지 준비하다 그만 늦잠을 자서 지각을 했던 경험을 적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맡은 반 어린이를 위해 기도를 얼마나 했나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전화도 일년에 한두 번 하나? 그리고 어린이에게 전도지는 몇 번을 전해 주었는지 생각해 보면 기억이 없습니다. 4) 훈련의 부족 예수님은 제자들을 3년간이나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비로소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맡기신 지상 명령인 전도와 선교, 그리고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그는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사들을 어떻게 훈련시키고 있는 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무작정 인원 나누기 식으로 각 기관에 배치하여 일부터 맡기지는 않았는가! 주님이 각각 사람을 훈련시키시기 때문에 교회가 그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인위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하실 때 말씀하신 대위 명령인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읽어본다면 우리가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일에 얼마나 소홀히 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주일학교교육 현실은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떨고 있던 이스라엘 군대와 같습니다. 또한 미디안의 착취를 피하여 포도원 틀에서 타작하던 기드온 모양입니다. 새롭게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의 \"누가 갈꼬?\"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주일학교교육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핑계하지 맙시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또 핑계하는 여러분이라도 해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다윗처럼 물 맷돌이라도 들고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일학교교육에 대한 역할분담을 잘 해야 하겠습니다. 잠 14:4.을 보면, 잠 14:4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주일학교교육이란 힘들고 귀찮은 일이겠지요?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첫째는 본인이 교육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교사가 되라는 것입니다. 안되겠으면 보조교사라도 해야 합니다. 둘째는 교육에 애쓰는 교사들을 좀 알아주고 위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존경하고 자녀들로 하여금 학교의 선생님들보다 교회의 선생님을 더 존경하도록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기도로 지원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물질로 돕고 지원해야 하겠습니다. 뜻을 모읍시다. 관심을 가집시다. 우리 교회가 주일학교 부흥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광야학교/삼상21:1-15/2002-08-07
하나님의 광야학교 삼상21:1-15 독일 베를린의 막스플랑크 교육연구소는 15년 동안 1천명을 대상으로 나이와 지혜의 연관성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랜 연구를 통해 지혜로운 사람들이 갖는 몇 가지 공통점을 밝혀냈는데 [첫째, 역경을 극복했거나 고난을 체험한 경험이 있다. 둘째,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이 있다. 셋째, 일찍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체험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결론으로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혜를 얻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려운 일을 만나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평안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순탄한 인생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축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린 나이에 성공을 맛보았습니다. 그가 골리앗을 물리치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자 다윗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기쁨도 잠시, 하나님은 그를 모진 고난의 현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포기하고 싶을 만큼 강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다윗은 이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을 위대하게 만든 광야학교는 어떤 곳입니까? 1. 하나님의 광야학교는 인간의 의지를 깨뜨리시는 곳입니다. 광야학교는 빨리 성공하는 기술이나 방법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깨뜨리는 곳입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골리앗을 물리칠 때의 용기와 당당함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 때의 그 용맹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지금 다윗의 모습에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비굴함만 남아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비굴하게 행동하는지 보십시오. 다윗은 요나단과 헤어진 후에 놉에 갔습니다. 놉은 실로의 성소가 파괴된 이후에 성소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었던 곳입니다. 그가 성소를 찾은 것은 위기의 때에 하나님을 찾으려는 믿음의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가 제사장인 아히멜렉과 나눈 이야기는 전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떡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의 손길을 피해 떠도는 다윗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이 있었다면 배고픔을 면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을 달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비굴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떡을 구하면서 아히멜렉에게 한 말이 문제입니다. 2절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갑작스럽게 혼자의 몸으로 나타난 다윗을 영접하면서 제사장은 왜 갑자기 혼자서 이렇게 나타났는가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왕의 비밀스러운 명령을 받아서 자신의 부하들은 다른 곳에 두고 혼자 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 여러분, 지금 다윗이 하는 말이 참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다윗은 제사장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8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은 혼자의 몸인데다가 무장도 해제된 채 도망치는 신세가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가 무기가 없는 것이 왕의 명령이 너무나 비밀스럽고 급한 일이라서 무기를 챙길 시간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기가 있으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도 참입니까? 거짓입니까?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황이 너무 다급하니까? 급한 마음에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구요. 아니면 사울의 목자장 에돔사람 도엑이 그곳에 있는 것을 알고 제사장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22장에 보면 다윗의 거짓말 때문에 제사장만 85명이나 죽임을 당하고 그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까지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죽음의 위기를 넘기려고 하는 다윗의 모습은 연약한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도 연약한 한 작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2절과 13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다윗이 놉을 떠나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인 가드로 갑니다. 당시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가장 치열한 전쟁을 치를 때였습니다. 더군다나 가드는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곳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살아남기 위해 원수의 나라인 가드의 왕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윗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본 아기스의 부하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직감한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대문짝에 몸을 비비면서 미친체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기스는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고 하면서 다윗을 쫓아냅니다. 얼마나 비굴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인간 다윗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다윗의 영웅적인 모습만 보아왔습니다. 영광스러운 신앙의 모습만 보았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과 지혜로운 모습만 보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칭찬하는 소리에 파묻혀 있던 다윗의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다윗도 자신에 대한 잘못된 신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다윗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외로운 광야에서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윗은 철저하게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간들이 다윗을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인간의 의지를 꺾으시기 위해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생각하는 대로 할 수 있고, 의지대로 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이 지나쳐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꺾으십니다. 우리의 것을 겸손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바라보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고난의 채찍을 드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철저하게 낮아져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광야학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광야학교에 입학한 다윗은 자신의 모든 의지가 꺾이는 아픔과 함께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철저하게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자신을 비롯해서 의지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의지하던 것들을 제거하시고 혼자 남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입학한 광야학교는 외로운 곳이었습니다. 군대장관이라는 영예스러운 지위도, 아내 미갈과의 달콤한 사랑도, 그의 친구 요나단의 우정도, 그를 키워주고 믿어주던 사무엘 선지자도, 그리고 그가 쌓아왔던 자신감도 다 상실한 채 홀로서야 했습니다. 기댈 곳도 의지할 것도 없는 그곳에서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은 그의 곁에 함께 서 있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가 이제껏 의지하고 기대던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견고한 기둥을 의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편 34장과 56장에 보면 그때의 심정이 어땠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34장을 보겠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체하고 쫓겨난 후에 얼마나 비참한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왔을 법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마음에는 감사와 찬양이 흘러 넘쳤습니다(시34:1-3). 이 사건은 그가 하나님께 피한 것이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된 은혜의 체험이었던 것입니다(시34:8). 또한 그는 이 사건을 통하여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34:19)”라고 하는 평생의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56장을 보십시다. 3절에 보면 다윗은 그 모든 두려움에서 주를 의지하는 법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0절과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렇습니다. 다윗은 광야학교에서 그가 의지하고 믿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 빈손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열린 손으로]라는 책에서 정신병원에 수용된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할머니는 정신병원내에서도 모든 사람들을 질겁하게 만드는 문제의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작은 동전하나를 손에 쥐고 끝내 내놓으려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동전을 쥐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펴는데 두 사람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할머니는 마치 그 동전이 자신의 존재 자체인 것처럼 여기고 그것을 빼앗기면 더 이상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찮은 동전 하나를 붙잡고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움켜쥐고 집착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 꼭 쥔 주먹 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수 없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동전이라고 할지라도 무엇이든지 가득 찬 손에는 하나님이 축복을 부어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손에 있는 것들을 비울 때, 그 빈손 위에 하나님의 축복은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혹시 고난의 광야학교에 계신 분 있습니까? 아무것도 의지할 것을 찾지 못하고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지금, 여러분이 들고 있는 그 빈손으로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찬송가 188장 3절)] 그렇습니다. 의롭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잘 하는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빈손이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와주심만을 바라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그곳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광야학교에서 빈 손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광야학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만드는 곳입니다. 사무엘서를 공부하면서 갖게되는 한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불순종으로 일관하는 사울을 폐위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이새의 아들 다윗을 사울의 뒤를 이을 왕으로 정하시고 기름까지 부으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났습니다. 대신에 다윗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곧바로 다윗의 시대가 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울의 상태만 더 나빠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왕의 자리로 올려주지 않고 계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울 왕을 통해 다윗을 죽음의 위기로 고난의 현장으로 몰고 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우리가 공부하려는 내용입니다. 사울이 처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출중한 용모와 겸손한 인격을 소유했었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의 다듬어지지 않은 인격은 지도력의 한계로 나타나 국가적인 위기에서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뜻을 제일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고서는 그 어떤 사람도 그 나라의 지도자로서 쓰임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사울은 준비되지 못한 지도자였습니다. 사울의 실패는 신실하지 못한 신앙, 다듬어지지 않은 인격, 검증되지 못한 지도력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과는 다르게 다루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 왕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내버려두시고 다윗을 훈련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고의 긴 세월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때를 기다리는 시간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위대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랫동안 준비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모세는 80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린 후에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자로 우뚝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40년간 바로의 왕궁에서 애굽의 학문과 언어와 지리를 배우게 하시고, 곧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신 것이 아니라, 다시 40년간 미디안이라고 하는 광야학교로 보내셔서 인고의 세월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극에 달해 있는데도 하나님은 급하게 서둘지를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합당한 사람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동안 모세는 엄청나게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40년 동안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평과 원망을 다 받아주면서 말씀으로 이끌 수 있는 온유함을 하나님의 광야학교에서 배운 것입니다. 요셉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꿈에 강렬하게 붙잡힌 그가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기고만장하여 부모도 형제도 무시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야생마와 같지 않습니까? 그러한 요셉을 하나님은 광야학교에 입학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남들이 겪지 않는 많은 시련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미움을 받고 누명을 썼으며, 종이 되고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광야에서 보낸 13년간의 시간은 한 나라를 다스릴만한 지혜와 인격과 믿음을 배우는 시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결코 교만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광야학교에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광야학교는 하나님의 때에 맞게 쓰임을 받기 위한 기다림의 기간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2-4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데어도로 에프’라는 목사님이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나를 삼킨 이 물고기가 얼마나 위대한가? 이 물고기의 뱃속은 요나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신학대학이었다.” 맞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고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었으며 변화되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기도를 배웠고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했으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했습니다. 고통은 어둡고 힘든 것이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자에게 그 날들은 결코 어두운 그늘로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위대한 사람들은 결코 평탄하기만 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했고 때로는 혹독한 시련의 광야 길을 걸어가야 했지만 그런 경험들은 그들에게 어두움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간들을 통해 깊어지고 강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우리로 깊이 생각하게 하며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고난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분이 있다면 깊이 생각하는 광야의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철저하게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과 동시에 그 고난의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세워져서 우리의 앞날들이 더욱 빛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학원 복음화/ 잠1:7/ 2003-05-23
학원 복음화 잠1:7 1. ‘학원 복음화’ 왜 시급한가? 이번 5월달은 ‘세계복음화의 현장’들을 살펴 보고 있다. 복음이 우선적으로 전해 져야 할 곳들이 많이 있다. 우리들이 받은 복음은 축복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이다. 이 복음이 들어가서 변화를 일으킬 것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우리의 삶, 인격, 인간관계, 사상과 가치관을 변화시켜야 한다. 지난 주일에는 우선적으로 가정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또 다른 현장, 학교를 살펴보겠다. ‘학원 복음화’가 왜 시급한가? 우리들은 많은 시간과 돈을 써서 학교에 투자를 하고 있다. 모든 가정이 학교와 관계되어져 있다. 시간적으로 보면, 약 12년간 학교와 관련되어져 있다. 더 많은 학업을 하게 되면 20년 가까이 하게 된다. 인생의 1/5, 많으면 1/3을 학교,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금전적인 면을 보면, 많은 돈이 교육에 들어간다. 교육비가 가계비용에 많은 부담을 준다 . 하버드대학의 경우, 학부를 졸업하는 데에 평균 10만 여불 의 빚을 진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데에 1억원 이상의 빚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입시전쟁, 입시지옥이라는 표현까지 나오는 것처럼 많은 애를 쓰고 있다. 명문학교에 보내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다. 교육에 대한 굉장한 신경을 쓰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시간과 돈을 많이 쓰지만 현실적으로 그 결과는 좋지 않다. 교육내용, 교육환경 등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교육환경이 점점 더 타락의 쪽으로 가고 있다. 정책 입안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지만, 사실 ‘학원 복음화’ 이외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본다 . 학원 복음화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어린 학생들이 세상의 악한 것들이 들어 가기 전에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심어지면 세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학교 선생이나 당국자들이 복음에 눈이 뜨고 준비하면 학원의 많은 문제 해결이 되어질 것이다. 대학과 그 이상의 분야에서 공부를 하는 자들은 장차 미래의 지도자들이 될 것이다. 이들이 복음으로 인생의 답이 난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학원 복음화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조금 앞을 내다 보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부분에 많은 투자를 한다. 특히 교회가 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투자를 한다면 매우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 교회는 대부분의 교우들이 학교와 관련되어 있어, 학원 복음화에 비젼과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금년 말씀 방향인 ‘세계복음화’의 학원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삶을 드리워진다면 아름다운 삶이 되어질 것이다. 2. 학교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 창조주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는 왜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학교는 지식을 교육하는 곳이다. 어릴 때부터 세상지식을 넣어 주어 개발시키며, 사회에 유용한 인물을 만드는 것이 학교의 목표이다. 세상을 살면서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 학교의 목표이다. 만일 학교가 없다면, 누가 이것을 가르칠 것인가? 세상을 살아 가는데 많은 것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수리 계산부터 시작하여 많은 물질의 원리와 법칙을 알아야 한다. 기술, 문리, 과학을 알아야 한다. 사회를 알아야 한다. 인간관계와 법칙, 역사를 배워야 한다 . 인간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언어를, 문학을, 문화를 배워야 한다. 만약 학교가 없다면 부모가 이 모든 것을 책임지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부모가 할 수도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학교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학교의 목표요, 세워진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이 우연히 생겨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생겨진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을 배워야 한다. 성경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초등 학문’ 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는 표현을 썼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할 때 인간의 지식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없는 지식은 불안정한 지식이요, 유익하지만 우리에게 악한 지식이 될 수도 있다. 선악과처럼 선도 될 수도 있고 악도 될 수 있다. 자기에게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3. 오늘 날 학교교육에서 하나님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는 학교가 점점 황폐해져 가고 있다. 많은 나쁜 풍조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 가고 있다. 학교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것을 염려하여 자녀들을 위하여 홈 스쿨을 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가정 학교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더 이상 학교를 믿지 못하는 결과, 특히 믿는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 학교가 하나님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많이 번지고 있다. 학교가 단지 지식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배우는 지식이 오히려 위험한 지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 하버드대학이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에 세워졌을 때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세워졌다. 지식을 가르치고 교회에 유용한 일꾼을 배출하기 위해서 세워졌지만, 지금은 가장 하나님을 반대하는 학교가 되어 버리고 있다. 점점 학교의 교육에서 하나님이 제외되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악착같이 하나님을 제외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나쁘게 만드는 것처럼 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 이전까지는 미국 학교가 학업을 시작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고 학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 이 기도문을 보면 “All mighty God! We acknowledge that we should rely on you for our living.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살아 가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We pray that you bless ourselves, our parents, our teachers, and our country. Amen.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들과 우리 부모님들과, 우리 선생님들과 우리 나라에 축복해 주세요.” 그러나 무신론자들이 소송을 하여 케네디대통령에 의해 이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시행되었다.이 기도를 금지한 그때부터 미국은 급 속도로 타락해졌다. 또한, 1973년도에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두 가지 법안이 통과된 것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모든 교육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낙태법을 통해서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을 통해서 미국에 온갖 죄악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4. 하나님 없는 교육의 결과가 어떠한가? 우리는 교육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평화로운 곳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 향락주의, 이기주의, 세상주의로 변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세상중심의 교육을 받으며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지으셨다. 우주를 운행하시면서 물질의 법칙과 원리대로 이 세상을 운행하고 계신다. 1차 원리는 물질의 법칙과 원리다. 그러나 모든 물질과 모든 사물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식 속에서, 삶 속에서 자꾸 거절한다. 인간의 과학과 지식은 합리성, 논리성, 과학성을 따진다 . 하나님은 반 논리적이 아니시며, 논리를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반 과학적이 아니시고, 과학을 초월하신다. 과학의 원리로, 물질의 원리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하나님을 밀어낸다. 그래서 무신론이 생기고 물질중심의 사고방식이 생긴다. 학문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학문과 지식은 논리와 과학적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밀어내게 된다. 필연적이다. 우리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배와 하나님의 영향을 받기를 거절한다 . 내가 하나님이며 내 중심으로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려고 한다. 그것이 자기의 권리요, 자기의 자의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다. 가장 물질과 문명이 발달한 미국사회에 인간이 전부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자꾸 나아간다. 우리가 하나님 없는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과 관계없는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꾸 자기 중심적으로 갈수 밖에 없다. 또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을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을 죽이려고 하는 배후의 세력이 있다 . 사단이 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 세상의 신, 세상만이 전부인줄을 착각하게 만든다. 물질과 만져질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살아가게 하고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행복한가? 지식을 습득하면 할수록 공허감이 온다. 삶의 의미를 잃어간다. 목적을 상실한다. 지식을 아무리 추구해도 인생에 답은 없다. 박사를 하여도 인간의 심령은 한없이 어두워져 간다. 이런 속에서 인간은 답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이고, 방황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학교교육으로는 더 이상 답이 없다. 5. 학원 복음화를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만들어야 한다. 더 과학을 발전시키고 세상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우리 인생의 답은 아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학교문화를 보자. 하나님을 좇아내는 대신에 사단이 온 학교문화를 장악하고 있다. 많은 어려운 일들이,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 사단이 수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마약을 의존하며 살도록 하며 타락의 길로 몰고 가고 있다 . 이것을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보아야 하며, 학원 복음화를 열심히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방황에서 건져내야 한다. 특히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가장 행복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물질을 주어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주의 교회를 위해서 아낌없이 그들의 삶을 드리어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6. 학원 복음화를 위해서 몇 가지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1) 첫째, 우리 자신이, 그리고 부모나 학교 학생이 복음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복음이외에는 답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인생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결론 내려야 한다. 복음의 의미를 알고 복음의 축복을 누려야 한다. 복음에 결론을 내리고 복음때문에 살고 복음때문에 죽어야 한다.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우리 이웃이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많음을 알아야 한다. 학교와 관련된 모든 자들이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한다. 오늘 학교는 삶의 답에 혼돈을 하고 있으며 착각을 하고 있다. 학문이면, 박사를 하면 인생이 모두 되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착각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공부가 필요하고 학위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답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답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요 복음이다. 또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신자들이 있지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과 비젼과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 복음을 남과 나누려고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자기가 복음에 굳게 서서 특별히 학원 복음화의 비젼과 관심과 열심을 가지고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먼저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2) 복음전파의 비젼을 가지고 나가면서 각자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거기에서 성공하여야 한다. 교수는 교수로서 자기 학문의 세계에서 제일이 되어야 한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할 수 있다. 내가 정말로 복음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이 증거를 주시기 위해서 하실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공부에 중압감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본다. 이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믿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가 나의 학문의 세계에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혼돈하고 중압감을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모든 우리 삶의 영역 속에서 함께 하신다. 복음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역사하신다.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 조용하게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매력있는 크리스챤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크리스챤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복음증거의 길은 열리게 되어 있다. 나에게 답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물어올 것이다. 간단하게 답을 주면 된다. 이것이 우리가 할 복음 전파의 길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3) 나 혼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하면 같은 신앙을 가지고 같은 비젼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능력이 나타난다. 또 함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학원 문화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술 마시지 않고도 마약을 하지 않고도 멋있고 신나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여야 한다. 기독교인이 학교 안에서 그러한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여야 한다. 사도바울이 골로세서 4장2절이하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열어주도록 기도하라. 우리가 마땅히 할 말로서 그리스도를 말하여야 한다. 학원 복음화의 비젼을 가지고 나간다면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실 것이다.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 제자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성경을 잘 몰라도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제자를 삼도록 말씀 운동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를 위해 힘쓴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축복 하실 것이다. 내가 이 복음을 잘 모른다고 주저하고 발을 뺀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실 은혜와 축복을 내가 놓치게 된다. 그래서 내가 부족하지만 이것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나에게 말씀을 주실 것이고 깨닫게 하실 것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말하게 하실 것이며 이러한 가운데서 내가 믿음이 자라고 비젼이 더 열리게 되는 것이다. 7. 학원 복음화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가정 복음화 다음에 중요한 것이 학원 복음화이다. 우리 교회가 이 일에 힘쓰고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고 이 일에 소원을 가진다면 학원 복음화의 열매가 열릴 것이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어떤 현장으로 가더라도 이 복음의 비밀을 말한다면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세계 복음화에 소원, 비젼을 가지고 하나님께 복음을 전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 하시기를 바란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디에 있던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완전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기를 바란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학원 복음화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학교, 그곳에 복음 전하기를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지 않게 하시고, 복음 가운데 굳게 서서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기를 기도드립니다.
학원 복음화/ 잠1:7/ 2003-05-23
학원 복음화 잠1:7 1. ‘학원 복음화’ 왜 시급한가? 이번 5월달은 ‘세계복음화의 현장’들을 살펴 보고 있다. 복음이 우선적으로 전해 져야 할 곳들이 많이 있다. 우리들이 받은 복음은 축복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이다. 이 복음이 들어가서 변화를 일으킬 것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우리의 삶, 인격, 인간관계, 사상과 가치관을 변화시켜야 한다. 지난 주일에는 우선적으로 가정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또 다른 현장, 학교를 살펴보겠다. ‘학원 복음화’가 왜 시급한가? 우리들은 많은 시간과 돈을 써서 학교에 투자를 하고 있다. 모든 가정이 학교와 관계되어져 있다. 시간적으로 보면, 약 12년간 학교와 관련되어져 있다. 더 많은 학업을 하게 되면 20년 가까이 하게 된다. 인생의 1/5, 많으면 1/3을 학교,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금전적인 면을 보면, 많은 돈이 교육에 들어간다. 교육비가 가계비용에 많은 부담을 준다 . 하버드대학의 경우, 학부를 졸업하는 데에 평균 10만 여불 의 빚을 진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데에 1억원 이상의 빚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입시전쟁, 입시지옥이라는 표현까지 나오는 것처럼 많은 애를 쓰고 있다. 명문학교에 보내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다. 교육에 대한 굉장한 신경을 쓰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시간과 돈을 많이 쓰지만 현실적으로 그 결과는 좋지 않다. 교육내용, 교육환경 등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교육환경이 점점 더 타락의 쪽으로 가고 있다. 정책 입안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지만, 사실 ‘학원 복음화’ 이외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본다 . 학원 복음화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어린 학생들이 세상의 악한 것들이 들어 가기 전에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심어지면 세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학교 선생이나 당국자들이 복음에 눈이 뜨고 준비하면 학원의 많은 문제 해결이 되어질 것이다. 대학과 그 이상의 분야에서 공부를 하는 자들은 장차 미래의 지도자들이 될 것이다. 이들이 복음으로 인생의 답이 난다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학원 복음화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조금 앞을 내다 보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부분에 많은 투자를 한다. 특히 교회가 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투자를 한다면 매우 좋은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 교회는 대부분의 교우들이 학교와 관련되어 있어, 학원 복음화에 비젼과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금년 말씀 방향인 ‘세계복음화’의 학원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삶을 드리워진다면 아름다운 삶이 되어질 것이다. 2. 학교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 창조주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는 왜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학교는 지식을 교육하는 곳이다. 어릴 때부터 세상지식을 넣어 주어 개발시키며, 사회에 유용한 인물을 만드는 것이 학교의 목표이다. 세상을 살면서 행복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 학교의 목표이다. 만일 학교가 없다면, 누가 이것을 가르칠 것인가? 세상을 살아 가는데 많은 것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수리 계산부터 시작하여 많은 물질의 원리와 법칙을 알아야 한다. 기술, 문리, 과학을 알아야 한다. 사회를 알아야 한다. 인간관계와 법칙, 역사를 배워야 한다 . 인간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언어를, 문학을, 문화를 배워야 한다. 만약 학교가 없다면 부모가 이 모든 것을 책임지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부모가 할 수도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학교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학교의 목표요, 세워진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이 우연히 생겨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생겨진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을 배워야 한다. 성경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초등 학문’ 이라고 하였다. 본문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는 표현을 썼다. 하나님을 알고 경외할 때 인간의 지식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없는 지식은 불안정한 지식이요, 유익하지만 우리에게 악한 지식이 될 수도 있다. 선악과처럼 선도 될 수도 있고 악도 될 수 있다. 자기에게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3. 오늘 날 학교교육에서 하나님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는 학교가 점점 황폐해져 가고 있다. 많은 나쁜 풍조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 가고 있다. 학교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것을 염려하여 자녀들을 위하여 홈 스쿨을 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가정 학교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더 이상 학교를 믿지 못하는 결과, 특히 믿는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 학교가 하나님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많이 번지고 있다. 학교가 단지 지식만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배우는 지식이 오히려 위험한 지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 하버드대학이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에 세워졌을 때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세워졌다. 지식을 가르치고 교회에 유용한 일꾼을 배출하기 위해서 세워졌지만, 지금은 가장 하나님을 반대하는 학교가 되어 버리고 있다. 점점 학교의 교육에서 하나님이 제외되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악착같이 하나님을 제외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나쁘게 만드는 것처럼 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 이전까지는 미국 학교가 학업을 시작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고 학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 이 기도문을 보면 “All mighty God! We acknowledge that we should rely on you for our living.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살아 가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We pray that you bless ourselves, our parents, our teachers, and our country. Amen.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들과 우리 부모님들과, 우리 선생님들과 우리 나라에 축복해 주세요.” 그러나 무신론자들이 소송을 하여 케네디대통령에 의해 이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시행되었다.이 기도를 금지한 그때부터 미국은 급 속도로 타락해졌다. 또한, 1973년도에 낙태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두 가지 법안이 통과된 것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모든 교육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낙태법을 통해서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을 통해서 미국에 온갖 죄악이 득실거리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4. 하나님 없는 교육의 결과가 어떠한가? 우리는 교육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평화로운 곳으로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 향락주의, 이기주의, 세상주의로 변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세상중심의 교육을 받으며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지으셨다. 우주를 운행하시면서 물질의 법칙과 원리대로 이 세상을 운행하고 계신다. 1차 원리는 물질의 법칙과 원리다. 그러나 모든 물질과 모든 사물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식 속에서, 삶 속에서 자꾸 거절한다. 인간의 과학과 지식은 합리성, 논리성, 과학성을 따진다 . 하나님은 반 논리적이 아니시며, 논리를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반 과학적이 아니시고, 과학을 초월하신다. 과학의 원리로, 물질의 원리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하나님을 밀어낸다. 그래서 무신론이 생기고 물질중심의 사고방식이 생긴다. 학문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학문과 지식은 논리와 과학적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밀어내게 된다. 필연적이다. 우리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배와 하나님의 영향을 받기를 거절한다 . 내가 하나님이며 내 중심으로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려고 한다. 그것이 자기의 권리요, 자기의 자의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는다. 가장 물질과 문명이 발달한 미국사회에 인간이 전부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자꾸 나아간다. 우리가 하나님 없는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과 관계없는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꾸 자기 중심적으로 갈수 밖에 없다. 또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간을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을 죽이려고 하는 배후의 세력이 있다 . 사단이 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 세상의 신, 세상만이 전부인줄을 착각하게 만든다. 물질과 만져질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살아가게 하고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행복한가? 지식을 습득하면 할수록 공허감이 온다. 삶의 의미를 잃어간다. 목적을 상실한다. 지식을 아무리 추구해도 인생에 답은 없다. 박사를 하여도 인간의 심령은 한없이 어두워져 간다. 이런 속에서 인간은 답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이고, 방황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학교교육으로는 더 이상 답이 없다. 5. 학원 복음화를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만들어야 한다. 더 과학을 발전시키고 세상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우리 인생의 답은 아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학교문화를 보자. 하나님을 좇아내는 대신에 사단이 온 학교문화를 장악하고 있다. 많은 어려운 일들이,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 사단이 수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마약을 의존하며 살도록 하며 타락의 길로 몰고 가고 있다 . 이것을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보아야 하며, 학원 복음화를 열심히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방황에서 건져내야 한다. 특히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가장 행복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물질을 주어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주의 교회를 위해서 아낌없이 그들의 삶을 드리어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6. 학원 복음화를 위해서 몇 가지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 1) 첫째, 우리 자신이, 그리고 부모나 학교 학생이 복음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복음이외에는 답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인생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결론 내려야 한다. 복음의 의미를 알고 복음의 축복을 누려야 한다. 복음에 결론을 내리고 복음때문에 살고 복음때문에 죽어야 한다.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우리 이웃이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많음을 알아야 한다. 학교와 관련된 모든 자들이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한다. 오늘 학교는 삶의 답에 혼돈을 하고 있으며 착각을 하고 있다. 학문이면, 박사를 하면 인생이 모두 되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착각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헛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공부가 필요하고 학위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답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답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요 복음이다. 또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신자들이 있지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과 비젼과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 복음을 남과 나누려고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자기가 복음에 굳게 서서 특별히 학원 복음화의 비젼과 관심과 열심을 가지고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먼저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2) 복음전파의 비젼을 가지고 나가면서 각자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거기에서 성공하여야 한다. 교수는 교수로서 자기 학문의 세계에서 제일이 되어야 한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면 할 수 있다. 내가 정말로 복음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이 증거를 주시기 위해서 하실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공부에 중압감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본다. 이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믿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가 나의 학문의 세계에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혼돈하고 중압감을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모든 우리 삶의 영역 속에서 함께 하신다. 복음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역사하신다.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 조용하게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매력있는 크리스챤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크리스챤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복음증거의 길은 열리게 되어 있다. 나에게 답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물어올 것이다. 간단하게 답을 주면 된다. 이것이 우리가 할 복음 전파의 길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승리하여야 한다. 3) 나 혼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하면 같은 신앙을 가지고 같은 비젼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능력이 나타난다. 또 함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학원 문화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술 마시지 않고도 마약을 하지 않고도 멋있고 신나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여야 한다. 기독교인이 학교 안에서 그러한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여야 한다. 사도바울이 골로세서 4장2절이하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열어주도록 기도하라. 우리가 마땅히 할 말로서 그리스도를 말하여야 한다. 학원 복음화의 비젼을 가지고 나간다면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실 것이다.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 제자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다. 내가 성경을 잘 몰라도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제자를 삼도록 말씀 운동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를 위해 힘쓴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축복 하실 것이다. 내가 이 복음을 잘 모른다고 주저하고 발을 뺀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실 은혜와 축복을 내가 놓치게 된다. 그래서 내가 부족하지만 이것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나에게 말씀을 주실 것이고 깨닫게 하실 것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말하게 하실 것이며 이러한 가운데서 내가 믿음이 자라고 비젼이 더 열리게 되는 것이다. 7. 학원 복음화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가정 복음화 다음에 중요한 것이 학원 복음화이다. 우리 교회가 이 일에 힘쓰고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고 이 일에 소원을 가진다면 학원 복음화의 열매가 열릴 것이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어떤 현장으로 가더라도 이 복음의 비밀을 말한다면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 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세계 복음화에 소원, 비젼을 가지고 하나님께 복음을 전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 하시기를 바란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디에 있던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완전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기를 바란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학원 복음화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우리와 관계하고 있는 학교, 그곳에 복음 전하기를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지 않게 하시고, 복음 가운데 굳게 서서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