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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강해(2)/ 교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해야 한다/ 고전1:10-17/ 2004-04-25
교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해야 한다 고전1:10-17 Ⅰ.내용 분해와 조직 1.머리말 - 고린도교회는, 교회가 감당해야 할 복음전도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서로 분열되어 다투고 있었다. 2.본론 ①교회의 분열과 다툼 ㄱ.제발 싸우지 마라. a.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호소한다. 교회 안에 분열이 없도록 참마음으로 하나가 되라(10) b.부디 서로 갈라지지 말고 의견을 모아서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연합하라(10) ㄴ.파당을 만들지 마라. a.나는 글로에의 집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너희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11) b.너희는 저마다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다라고 말한다(12) c.그리스도가 그렇게 나누어졌는가?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아니면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13) ②바울의 본분과 사명 ㄱ.몇몇 사람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 a.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14) b.너희는 아무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다(15) c.스데바나의 가족에게도 세례를 주긴 했지만, 그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준 기억이 없다(16) ㄴ.나의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a.예수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고 나를 보내셨다(17) b.인간의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17) 3.맺는말 ①교회 안에서는 파당을 지어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 ②교회와 성도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그 본분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Ⅱ.내용 연구와 삶의 적용 1.바울의 호소 ①마음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ㄱ.교회 안에서 분열이 없어야 한다(10) ㄴ.서로 의견을 모아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연합해야 한다(10) ②분열과 다툼이 없어야 한다. ㄱ.교회 안에서 바울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 다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12) ㄴ.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받을 뿐이다(13) ③우리의 임무는 복음전파다. ㄱ.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다(17) ㄴ.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말재주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한다(17) 2..삶의 적용 ①인간의 문제(결과) ㄱ.서로 갈라져서 다투는 일이 많다. ㄴ.성도와 교회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일에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고 있다. ②하나님의 치료(섭리) ㄱ.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 ㄴ.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받게 하셨다. ③인간의 응답(실천) ㄱ.주님의 뜻 안에서 서로 의견을 모아 참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ㄴ.오직 한 분 예수를 중심으로 굳게 연합해야 한다. ㄷ.성도와 교회의 본분이 복음 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와 일치 / 사43:16-18, 히13:8
과거와 미래의 차이와 일치 / 사43:16-18, 히13:8 2007-12-21 16:29:51 read : 74 1985년에 개봉된 ‘백투더퓨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미국에 있을 때 본 기억이 납니다. 30년 전으로 돌아간 마티는 옛날에 살고 있는 브라운 박사를 현재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영화입니다. 30년 전에서 현재를 보면 미래입니다. 그러나 30년 후에서 현재를 보면 과거입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면서 현재의 기억 속에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기대 속에서 미래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의 사전적 의미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 미래로 움직이는 비공간적인 연속체라고 합니다. 시간 속에서 늘 살면서 시간이 무엇인가를 알지만 시간의 의미가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를 가장 알뜰하고 멋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를 사흘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벌써 한 해가 다 가고 이제 3 주간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새해라던 해가 벌써 헌 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금년의 몇 날을 알뜰하게 잘 살아서 마지막을 잘 장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서 1:9-10에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다시 있습니다.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새 것이란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과거는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가질 권리가 없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현재만이 내 것입니다. 가질 권리가 있고 사용할 권리가 있는 것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사용 정지된 부도수표, 써먹을 생각 말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미래는 지불 날짜가 되지 않은 어음, 써먹을 생각 말 것”이라는 말도 됩니다. 과거는 괴로운 것보다 좋은 것만 말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미래는 성공과 행복만 약속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현재만이 진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순간에 불과합니다. 현재는 순간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 가능한 시간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5:16에는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지혜의 마음을 가져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더 지혜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과거를 보고 미래를 판단할 줄 아는 자입니다. 현재를 보고 미래의 비전을 가지는 자가 가장 지혜 있는 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아십니까? 과거와 미래의 일치점을 아십니까?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가장 지혜 있는 자입니다. 전도서 1:4에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땅도 영원히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입니다. 자고 나면 바뀌고 섬이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지고 세계 지도가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 한 평생에 살 안 끼는 팔자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평생 화가 없이, 태평한 날만 보내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평생 살 안 끼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언제나 현재로 사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그리스도 더불어 시간을 초월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귀한 비결을 배워,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올해를 “벌써 다 지났구나”하는 절망이나,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살자”하는 포기가 아니라 알뜰하게 현재를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과거와 미래는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 43:18에는 “너희는 이 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전 일을 이미 지나갔습니다. 기억하거나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는 시간적으로 다시 오지 않습니다. 단지 기억 속에 현재로 살아있는 것이 과거입니다. 과거와 미래와 시간적 차이는 항상 클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갑니다.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내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새 것은 낡은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과거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리적 시간으로는 과거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시간적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시간적 교회가 아니라 정신적 교회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시간으로 과거로 돌아가서 초대교회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시절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몰라야 합니다.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우리가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된 다음에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 회상적으로 사는 것은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과거는 절대로 집착할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과거가 아름다워도,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과거는 지나간 시간입니다. 과거의 행적이 미래의 수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과거 때문에 보장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시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전혀 다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현재의 것을 즐길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13에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달려가는 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뒤를 보는 자는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앞으로 가는 자는 뒤를 보지 않습니다. 달리기를 하다 2등을 제쳤습니다. 그럼 몇 등일까요? 이등을 제치면 이등입니다. 어떤 분은 일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등이 아니지요. 제 아내가 옛날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에 달리기를 하면 옆에 있는 나무가 쌩쌩 지나간대요.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머리카락이 날린대요. 그런데 골인 지점에 들어가 보면 항상 꼴찌래요. 우리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빠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돌아보아야 할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한 관광객이 택시를 타고 워싱턴 DC 국립문서보관소 건물을 지나면서 건물에 새겨진 글을 보았습니다. “과거는 서막에 불과하다.” 관광객이 운전자에게 “저것이 무슨 뜻인가요?”하고 물었습니다. 택시 운전자는 “제 생각엔 ‘당신이 지금까지 본 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기대되는 미래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교적 책을 많이 읽으려고 애쓰고 있고, 책을 많이 저술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물어봅니다. “책을 쓰고 몇 번이나 보십니까?” 미안하지만 저는 제가 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책을 읽을 시간에 또 다른 책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책도 다시 읽어본 책이 성경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바라보고 계획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홈런왕이었던 행크 아론은 절대로 공을 친 다음 담장 너머로 가는 공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루를 향해 열심히 달리기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친 공이 홈런이 되는지 구경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 만해도 바쁩니다.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해도 분주한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것이 사탄이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에 과거만 고집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다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과거 때문에 현재나 미래를 망치지 마십시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과거를 거울삼고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 얼룩진 과거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아닙니다. 루터가 말했습니다. “과거 없는 성자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둘째, 과거와 미래는 삶의 틀이 일치합니다. 히브리서 13:8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동일하실 수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미래나 예수님께는 동일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왜 일치합니까? 그리스도는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은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입니다. 우리의 현재는 순간이지만 그리스도의 현재는 영원입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무한하고 장구합니다. 그분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동일합니다. 우리말에 ‘팔자’란 말이 있습니다. ‘팔자’는 한국에서는 좋은 운명을 실어주는 숫자이며 행운의 숫자입니다. 팔자가 오랜 기독교의 전승에는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세례반을 8각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8자를 옆으로 눕혀 놓은 글자(∞)의 의미를 아시지요? 무한대입니다. 끝이 없는 수입니다.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인 팔자가 누워 있으면 무한대가 되는 것입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죄목으로 사자굴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사자굴에서 목숨을 건진 다니엘을 발견한 다리오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떨며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다니엘서 6:26에는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다리오왕이 직접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현재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무한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과거가 있어서 늙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미래가 있어 젊은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치 않으실 분이십니다. 성경이 이를 증명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시간적 차이는 약 2,000년입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보면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모든 구약의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입니다. 환생이라고 하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과거와 미래의 일치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백투더퓨처’가 아닙니다. 미래학자들은 말하기를 미래 현상은 이미 현재 속에 있다고 합니다. 미래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재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내세는 가장 많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이런 식의 사람의 미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 시간에 사시는 분이십니다. 칼뱅은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언제나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하나이며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와 미래는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래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대부분 유태인들입니다. 허만 칸, 다니엘 벨,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시간을 아는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를 압니다. 마샬 맥루한이란 학자는 ‘지구촌’이란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미래의 미래는 다시 현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은 돌아갑니다. 물리적 시간은 선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나 시간의 질은 반복됩니다. 인류역사의 흐름은 과거를 회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돌아가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메타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어디로 돌아갑니까? 교회의 본질적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또 최근에는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새로 생겨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현대 문화를 수용하지만 내면으로는 진실성과 보수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입니다. 현대 음악도 사용하고 현대 개념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적 내용인 영성과 신비와 복음을 회복하려고 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고대미래 교회’를 말합니다. 미래는 고대와 패러다임이 절묘하게 일치하며 그 패러다임의 핵심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고대가 가지고 있던 신비로운 교회로 돌아갑니다. 고대가 가지고 있던 엄숙하고 예전적인 교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런 교회의 변화와 더불어 ‘오순절 주의’가 다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는 1960년대에 ‘세속도시’라는 책을 썼습니다. 콕스는 지성주의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하고, 탈종교화가 두드러지게 되고 교회가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근 ‘하늘에서 내려온 불’(Fire from Heaven)이라는 책을 통하여 자신이 쓴 세속도시에 대한 반성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쇠퇴하고 탈종교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미래는 더 이상 세속주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주의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5억 이상의 사람들이 열정, 은사, 신비를 회복하는 오순절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오순절주의 교회를 통하여 세계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현재 세계 교회의 성장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오순절주의 교회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한 결 같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성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고대교회를 보면 미래교회를 압니다. 교회의 가장 원형적인 교회는 광야교회입니다. 제가 쓴 ‘세상을 바꾸는 미래교회’라는 책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교회는 다시 고대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미래 교회에 적합한 교회입니다. 결론 최근에 나온 얘기 가운데 세 가지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둘째는 앙드레김 검은 옷 입히기입니다. 셋째는 노무현대통령 입 다물게 하기입니다. 앙드레김이 문상 갈 때 흰 옷을 입을까, 검은 옷을 입을까 하는 것도 젊은이들의 퀴즈에 나옵니다. 그런데 더 불가능한 것이 실제로 있습니다. 시간을 물리적으로 되돌리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현재를 잘 살면 미래는 아름다워지고 시간의 질은 절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우리의 남은 날의 첫째 날입니다. 우리의 매일은 날마다 새로운 날입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날입니다. 미래가 실현된 날입니다. “독수리는 까마귀에게 배우기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배울 가치가 없는 일을 위하여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온고이지신’하는 지혜를 배우고 미래를 여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미래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방법은 과거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잃지 않고 회복하여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와 일치 / 사43:16-18, 히13:8
과거와 미래의 차이와 일치 / 사43:16-18, 히13:8 2007-12-21 16:29:51 read : 78 1985년에 개봉된 ‘백투더퓨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미국에 있을 때 본 기억이 납니다. 30년 전으로 돌아간 마티는 옛날에 살고 있는 브라운 박사를 현재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영화입니다. 30년 전에서 현재를 보면 미래입니다. 그러나 30년 후에서 현재를 보면 과거입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면서 현재의 기억 속에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기대 속에서 미래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의 사전적 의미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 미래로 움직이는 비공간적인 연속체라고 합니다. 시간 속에서 늘 살면서 시간이 무엇인가를 알지만 시간의 의미가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를 가장 알뜰하고 멋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를 사흘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벌써 한 해가 다 가고 이제 3 주간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새해라던 해가 벌써 헌 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금년의 몇 날을 알뜰하게 잘 살아서 마지막을 잘 장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서 1:9-10에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다시 있습니다.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새 것이란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과거는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가질 권리가 없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현재만이 내 것입니다. 가질 권리가 있고 사용할 권리가 있는 것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사용 정지된 부도수표, 써먹을 생각 말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미래는 지불 날짜가 되지 않은 어음, 써먹을 생각 말 것”이라는 말도 됩니다. 과거는 괴로운 것보다 좋은 것만 말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미래는 성공과 행복만 약속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현재만이 진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순간에 불과합니다. 현재는 순간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 가능한 시간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5:16에는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지혜의 마음을 가져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더 지혜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과거를 보고 미래를 판단할 줄 아는 자입니다. 현재를 보고 미래의 비전을 가지는 자가 가장 지혜 있는 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아십니까? 과거와 미래의 일치점을 아십니까?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가장 지혜 있는 자입니다. 전도서 1:4에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땅도 영원히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입니다. 자고 나면 바뀌고 섬이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지고 세계 지도가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 한 평생에 살 안 끼는 팔자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평생 화가 없이, 태평한 날만 보내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평생 살 안 끼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언제나 현재로 사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그리스도 더불어 시간을 초월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귀한 비결을 배워,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올해를 “벌써 다 지났구나”하는 절망이나,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살자”하는 포기가 아니라 알뜰하게 현재를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과거와 미래는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 43:18에는 “너희는 이 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전 일을 이미 지나갔습니다. 기억하거나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는 시간적으로 다시 오지 않습니다. 단지 기억 속에 현재로 살아있는 것이 과거입니다. 과거와 미래와 시간적 차이는 항상 클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갑니다.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내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새 것은 낡은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과거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리적 시간으로는 과거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시간적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시간적 교회가 아니라 정신적 교회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시간으로 과거로 돌아가서 초대교회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시절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몰라야 합니다.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우리가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된 다음에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 회상적으로 사는 것은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과거는 절대로 집착할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과거가 아름다워도,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과거는 지나간 시간입니다. 과거의 행적이 미래의 수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과거 때문에 보장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시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전혀 다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현재의 것을 즐길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13에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달려가는 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뒤를 보는 자는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앞으로 가는 자는 뒤를 보지 않습니다. 달리기를 하다 2등을 제쳤습니다. 그럼 몇 등일까요? 이등을 제치면 이등입니다. 어떤 분은 일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등이 아니지요. 제 아내가 옛날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에 달리기를 하면 옆에 있는 나무가 쌩쌩 지나간대요.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머리카락이 날린대요. 그런데 골인 지점에 들어가 보면 항상 꼴찌래요. 우리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빠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돌아보아야 할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한 관광객이 택시를 타고 워싱턴 DC 국립문서보관소 건물을 지나면서 건물에 새겨진 글을 보았습니다. “과거는 서막에 불과하다.” 관광객이 운전자에게 “저것이 무슨 뜻인가요?”하고 물었습니다. 택시 운전자는 “제 생각엔 ‘당신이 지금까지 본 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기대되는 미래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교적 책을 많이 읽으려고 애쓰고 있고, 책을 많이 저술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물어봅니다. “책을 쓰고 몇 번이나 보십니까?” 미안하지만 저는 제가 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책을 읽을 시간에 또 다른 책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책도 다시 읽어본 책이 성경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바라보고 계획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홈런왕이었던 행크 아론은 절대로 공을 친 다음 담장 너머로 가는 공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루를 향해 열심히 달리기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친 공이 홈런이 되는지 구경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 만해도 바쁩니다.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해도 분주한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것이 사탄이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에 과거만 고집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다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과거 때문에 현재나 미래를 망치지 마십시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과거를 거울삼고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 얼룩진 과거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아닙니다. 루터가 말했습니다. “과거 없는 성자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둘째, 과거와 미래는 삶의 틀이 일치합니다. 히브리서 13:8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동일하실 수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미래나 예수님께는 동일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왜 일치합니까? 그리스도는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은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입니다. 우리의 현재는 순간이지만 그리스도의 현재는 영원입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무한하고 장구합니다. 그분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동일합니다. 우리말에 ‘팔자’란 말이 있습니다. ‘팔자’는 한국에서는 좋은 운명을 실어주는 숫자이며 행운의 숫자입니다. 팔자가 오랜 기독교의 전승에는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세례반을 8각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8자를 옆으로 눕혀 놓은 글자(∞)의 의미를 아시지요? 무한대입니다. 끝이 없는 수입니다.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인 팔자가 누워 있으면 무한대가 되는 것입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죄목으로 사자굴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사자굴에서 목숨을 건진 다니엘을 발견한 다리오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떨며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다니엘서 6:26에는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다리오왕이 직접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현재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무한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과거가 있어서 늙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미래가 있어 젊은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치 않으실 분이십니다. 성경이 이를 증명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시간적 차이는 약 2,000년입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보면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모든 구약의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입니다. 환생이라고 하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과거와 미래의 일치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백투더퓨처’가 아닙니다. 미래학자들은 말하기를 미래 현상은 이미 현재 속에 있다고 합니다. 미래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재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내세는 가장 많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이런 식의 사람의 미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 시간에 사시는 분이십니다. 칼뱅은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언제나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하나이며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와 미래는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래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대부분 유태인들입니다. 허만 칸, 다니엘 벨,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시간을 아는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를 압니다. 마샬 맥루한이란 학자는 ‘지구촌’이란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미래의 미래는 다시 현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은 돌아갑니다. 물리적 시간은 선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나 시간의 질은 반복됩니다. 인류역사의 흐름은 과거를 회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돌아가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메타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어디로 돌아갑니까? 교회의 본질적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또 최근에는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새로 생겨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현대 문화를 수용하지만 내면으로는 진실성과 보수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입니다. 현대 음악도 사용하고 현대 개념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적 내용인 영성과 신비와 복음을 회복하려고 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고대미래 교회’를 말합니다. 미래는 고대와 패러다임이 절묘하게 일치하며 그 패러다임의 핵심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고대가 가지고 있던 신비로운 교회로 돌아갑니다. 고대가 가지고 있던 엄숙하고 예전적인 교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런 교회의 변화와 더불어 ‘오순절 주의’가 다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는 1960년대에 ‘세속도시’라는 책을 썼습니다. 콕스는 지성주의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하고, 탈종교화가 두드러지게 되고 교회가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근 ‘하늘에서 내려온 불’(Fire from Heaven)이라는 책을 통하여 자신이 쓴 세속도시에 대한 반성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쇠퇴하고 탈종교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미래는 더 이상 세속주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주의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5억 이상의 사람들이 열정, 은사, 신비를 회복하는 오순절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오순절주의 교회를 통하여 세계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현재 세계 교회의 성장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오순절주의 교회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한 결 같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성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고대교회를 보면 미래교회를 압니다. 교회의 가장 원형적인 교회는 광야교회입니다. 제가 쓴 ‘세상을 바꾸는 미래교회’라는 책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교회는 다시 고대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미래 교회에 적합한 교회입니다. 결론 최근에 나온 얘기 가운데 세 가지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둘째는 앙드레김 검은 옷 입히기입니다. 셋째는 노무현대통령 입 다물게 하기입니다. 앙드레김이 문상 갈 때 흰 옷을 입을까, 검은 옷을 입을까 하는 것도 젊은이들의 퀴즈에 나옵니다. 그런데 더 불가능한 것이 실제로 있습니다. 시간을 물리적으로 되돌리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현재를 잘 살면 미래는 아름다워지고 시간의 질은 절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우리의 남은 날의 첫째 날입니다. 우리의 매일은 날마다 새로운 날입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날입니다. 미래가 실현된 날입니다. “독수리는 까마귀에게 배우기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배울 가치가 없는 일을 위하여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온고이지신’하는 지혜를 배우고 미래를 여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미래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방법은 과거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잃지 않고 회복하여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와 일치/ 사43:16-18, 히13:8
과거와 미래의 차이와 일치 / 사43:16-18, 히13:8 2007-12-21 16:29:51 read : 73 1985년에 개봉된 ‘백투더퓨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미국에 있을 때 본 기억이 납니다. 30년 전으로 돌아간 마티는 옛날에 살고 있는 브라운 박사를 현재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영화입니다. 30년 전에서 현재를 보면 미래입니다. 그러나 30년 후에서 현재를 보면 과거입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면서 현재의 기억 속에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기대 속에서 미래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의 사전적 의미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 미래로 움직이는 비공간적인 연속체라고 합니다. 시간 속에서 늘 살면서 시간이 무엇인가를 알지만 시간의 의미가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를 가장 알뜰하고 멋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를 사흘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벌써 한 해가 다 가고 이제 3 주간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새해라던 해가 벌써 헌 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금년의 몇 날을 알뜰하게 잘 살아서 마지막을 잘 장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서 1:9-10에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다시 있습니다.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새 것이란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과거는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가질 권리가 없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현재만이 내 것입니다. 가질 권리가 있고 사용할 권리가 있는 것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사용 정지된 부도수표, 써먹을 생각 말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미래는 지불 날짜가 되지 않은 어음, 써먹을 생각 말 것”이라는 말도 됩니다. 과거는 괴로운 것보다 좋은 것만 말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미래는 성공과 행복만 약속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현재만이 진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순간에 불과합니다. 현재는 순간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 가능한 시간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5:16에는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지혜의 마음을 가져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더 지혜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과거를 보고 미래를 판단할 줄 아는 자입니다. 현재를 보고 미래의 비전을 가지는 자가 가장 지혜 있는 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아십니까? 과거와 미래의 일치점을 아십니까?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가장 지혜 있는 자입니다. 전도서 1:4에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땅도 영원히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입니다. 자고 나면 바뀌고 섬이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지고 세계 지도가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 한 평생에 살 안 끼는 팔자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평생 화가 없이, 태평한 날만 보내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평생 살 안 끼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언제나 현재로 사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그리스도 더불어 시간을 초월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귀한 비결을 배워,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올해를 “벌써 다 지났구나”하는 절망이나,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살자”하는 포기가 아니라 알뜰하게 현재를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과거와 미래는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 43:18에는 “너희는 이 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전 일을 이미 지나갔습니다. 기억하거나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는 시간적으로 다시 오지 않습니다. 단지 기억 속에 현재로 살아있는 것이 과거입니다. 과거와 미래와 시간적 차이는 항상 클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갑니다.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내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새 것은 낡은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과거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리적 시간으로는 과거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시간적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시간적 교회가 아니라 정신적 교회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시간으로 과거로 돌아가서 초대교회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시절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몰라야 합니다.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우리가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된 다음에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 회상적으로 사는 것은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과거는 절대로 집착할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과거가 아름다워도,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과거는 지나간 시간입니다. 과거의 행적이 미래의 수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과거 때문에 보장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시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전혀 다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현재의 것을 즐길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13에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달려가는 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뒤를 보는 자는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앞으로 가는 자는 뒤를 보지 않습니다. 달리기를 하다 2등을 제쳤습니다. 그럼 몇 등일까요? 이등을 제치면 이등입니다. 어떤 분은 일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등이 아니지요. 제 아내가 옛날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에 달리기를 하면 옆에 있는 나무가 쌩쌩 지나간대요.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머리카락이 날린대요. 그런데 골인 지점에 들어가 보면 항상 꼴찌래요. 우리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빠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돌아보아야 할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한 관광객이 택시를 타고 워싱턴 DC 국립문서보관소 건물을 지나면서 건물에 새겨진 글을 보았습니다. “과거는 서막에 불과하다.” 관광객이 운전자에게 “저것이 무슨 뜻인가요?”하고 물었습니다. 택시 운전자는 “제 생각엔 ‘당신이 지금까지 본 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기대되는 미래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교적 책을 많이 읽으려고 애쓰고 있고, 책을 많이 저술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물어봅니다. “책을 쓰고 몇 번이나 보십니까?” 미안하지만 저는 제가 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책을 읽을 시간에 또 다른 책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책도 다시 읽어본 책이 성경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바라보고 계획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홈런왕이었던 행크 아론은 절대로 공을 친 다음 담장 너머로 가는 공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루를 향해 열심히 달리기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친 공이 홈런이 되는지 구경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 만해도 바쁩니다.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해도 분주한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것이 사탄이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에 과거만 고집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다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과거 때문에 현재나 미래를 망치지 마십시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과거를 거울삼고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 얼룩진 과거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아닙니다. 루터가 말했습니다. “과거 없는 성자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둘째, 과거와 미래는 삶의 틀이 일치합니다. 히브리서 13:8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동일하실 수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미래나 예수님께는 동일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왜 일치합니까? 그리스도는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은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입니다. 우리의 현재는 순간이지만 그리스도의 현재는 영원입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무한하고 장구합니다. 그분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동일합니다. 우리말에 ‘팔자’란 말이 있습니다. ‘팔자’는 한국에서는 좋은 운명을 실어주는 숫자이며 행운의 숫자입니다. 팔자가 오랜 기독교의 전승에는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세례반을 8각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8자를 옆으로 눕혀 놓은 글자(∞)의 의미를 아시지요? 무한대입니다. 끝이 없는 수입니다.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인 팔자가 누워 있으면 무한대가 되는 것입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죄목으로 사자굴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사자굴에서 목숨을 건진 다니엘을 발견한 다리오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떨며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다니엘서 6:26에는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다리오왕이 직접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현재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무한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과거가 있어서 늙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미래가 있어 젊은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치 않으실 분이십니다. 성경이 이를 증명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시간적 차이는 약 2,000년입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보면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모든 구약의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입니다. 환생이라고 하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과거와 미래의 일치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백투더퓨처’가 아닙니다. 미래학자들은 말하기를 미래 현상은 이미 현재 속에 있다고 합니다. 미래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재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내세는 가장 많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이런 식의 사람의 미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 시간에 사시는 분이십니다. 칼뱅은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언제나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하나이며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와 미래는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래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대부분 유태인들입니다. 허만 칸, 다니엘 벨,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시간을 아는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를 압니다. 마샬 맥루한이란 학자는 ‘지구촌’이란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미래의 미래는 다시 현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은 돌아갑니다. 물리적 시간은 선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나 시간의 질은 반복됩니다. 인류역사의 흐름은 과거를 회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돌아가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메타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어디로 돌아갑니까? 교회의 본질적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또 최근에는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새로 생겨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현대 문화를 수용하지만 내면으로는 진실성과 보수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입니다. 현대 음악도 사용하고 현대 개념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적 내용인 영성과 신비와 복음을 회복하려고 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고대미래 교회’를 말합니다. 미래는 고대와 패러다임이 절묘하게 일치하며 그 패러다임의 핵심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고대가 가지고 있던 신비로운 교회로 돌아갑니다. 고대가 가지고 있던 엄숙하고 예전적인 교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런 교회의 변화와 더불어 ‘오순절 주의’가 다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는 1960년대에 ‘세속도시’라는 책을 썼습니다. 콕스는 지성주의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하고, 탈종교화가 두드러지게 되고 교회가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근 ‘하늘에서 내려온 불’(Fire from Heaven)이라는 책을 통하여 자신이 쓴 세속도시에 대한 반성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쇠퇴하고 탈종교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미래는 더 이상 세속주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주의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5억 이상의 사람들이 열정, 은사, 신비를 회복하는 오순절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오순절주의 교회를 통하여 세계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현재 세계 교회의 성장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오순절주의 교회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한 결 같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성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고대교회를 보면 미래교회를 압니다. 교회의 가장 원형적인 교회는 광야교회입니다. 제가 쓴 ‘세상을 바꾸는 미래교회’라는 책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교회는 다시 고대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미래 교회에 적합한 교회입니다. 결론 최근에 나온 얘기 가운데 세 가지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둘째는 앙드레김 검은 옷 입히기입니다. 셋째는 노무현대통령 입 다물게 하기입니다. 앙드레김이 문상 갈 때 흰 옷을 입을까, 검은 옷을 입을까 하는 것도 젊은이들의 퀴즈에 나옵니다. 그런데 더 불가능한 것이 실제로 있습니다. 시간을 물리적으로 되돌리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현재를 잘 살면 미래는 아름다워지고 시간의 질은 절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우리의 남은 날의 첫째 날입니다. 우리의 매일은 날마다 새로운 날입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날입니다. 미래가 실현된 날입니다. “독수리는 까마귀에게 배우기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배울 가치가 없는 일을 위하여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온고이지신’하는 지혜를 배우고 미래를 여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미래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방법은 과거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잃지 않고 회복하여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일치의 근거와 목적/ 요17:11~21/ 한국교회연합주일 공동설교문/ 2004-10-19
교회 일치의 근거와 목적 요17:11~21 1. 교회의 일치를 지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배후에는 교회 분열의 역사와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분열은 스캔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그 자체가 분열의 역사였습니다. 교리논쟁(성서 기록의 권위문제 등), 신앙고백의 구속력 문제(16, 17세기의 유럽 교회의 신앙고백이 어느 정도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성령운동과 경건파에 의한 부흥운동의 도전,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처방법에 따른 이견(국가와 교회의 관계문제, 노예제도를 둘러싼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 인종분리정책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회의 분열, 반공주의 등), 사회문화적 원인(이민, 지역주의, 언어적 갈등 등) 등에서 우리는 분열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열이 있기에 우리는 온전한 일치를 추구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은총을 입어 하나님과 일치되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일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대가는 어떠한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교파교회 선교에서 시작되어 처음부터 교파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훌륭한 일치의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신사참배문제, 신학적인 문제, 세계교회협의회 회원권 문제, 반공주의, 독재정권과의 관계 문제 등을 두고 크게 양분되었고, 지역주의와 교권에 대한 다양한 이해관계로 인해 또 다시 많은 수의 교단들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교회를 분열시킨 외적인 요인들이 많이 해소되고 민주화도 성취된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일치에 대한 여망이 다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일치주간을 맞아 성서가 의미하는 교회의 일치가 무엇인지, 그 근거는 무엇이며 목적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2.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고, 또 스스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 직전에 하신 것이라는 점에서 그 절실성이 더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무엇을 위한 기도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근거는 무엇이며, 그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께서 기도하신 일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조직체들의 일치 근거와는 다릅니다. 권력집단은 그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 경제 집단은 그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가족은 그 혈연관계에 의해 혹은 지연, 학연 등 인간적 동기에 의해 일치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교회가 뿌리 내리고 있는 일치는 다릅니다. 교회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는 교인들의 계급, 남녀노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사회적 신분과 자연적 조건이 문제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형제 자매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인간적인 이유로 인한 분쟁과 분열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혹은 교파 신학적 입장의 차이, 인간적 연민과 동정 등도 궁극적인 교회의 일치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의 교회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세상은 교회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세상은 이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요 17:14). 교회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 처음부터 우리는 세상의 미움에서 비롯된 교회의 고난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왜 교회를 미워할까요?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요 17:14).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 속에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사람을 소유에 의해 판단한다면, 교회는 존재의 가능성에서 판단합니다. 세상이 자아실현, 자기성취를 통해 삶의 가치를 확인한다면, 교회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확인합니다. 세상의 미움은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입니다. 어느 교회가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까? 세상의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정의를 사랑하는 교회는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입과 눈과 귀가 되는 교회는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3. 그런데 세상의 미움을 받는 교회를 위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주시는 것입니다’(요 17:15). 세상의 미움, 박해와 시련이 닥쳐오면 교회는 자칫 현실을 도피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교회가 악의 세력을 회피하거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과의 적극적인 대결과 그에 필요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능력을 요청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진리로 거룩해져야 합니다.’(요 17:17). 교회의 성화는 교회 자체의 속성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교회를 성화시킵니다. 교회의 성화는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실천적 행동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공동번역은 이 말씀을 ‘이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번역합니다.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거짓과 폭력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그 진리를 확신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칠 때 그 진실성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진리는 힘을 얻어 불의와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곧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진리를 증언하는 길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은 진리를 삶으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교회를,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4. 교회는 왜 하나가 되어야 할까요?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그럴까요? 다양한 교파분열 때문에 받는 세상의 비방을 벗어나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조직적인 세력을 과시하고, 사회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일까요? 성서가 증거 하는 교회의 일치는 실용적 목적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의 말씀에 의하면 ‘세상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 것처럼 교회도 사랑했다는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데(요 17:23) 그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는 그 자체 안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을 교회에게도 주십니다(요 17:22). 그 영광은 십자가 사건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됩니다. 일치에서 중요한 것은 획일화가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조직의 통합이나, 신학의 통일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치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참여하는데서 성취됩니다. 즉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교회는 영광을 받으며, 복종과 겸손을 통하여 그 영광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일치의 궁극적 목적을 분명히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일치는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과 분열되어 있는 세상을 하나님과 일치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땅 위의 교회가 연합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일치를 예시할 것입니다. 5. 그리스도교 일치는 교회와 교회,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일치의 영역은 우주적 일치를 의미합니다. 아파하는 세상,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 안에서 인간도 아파하고, 심지어 교회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다만 교회는 그 아픔 속에서도 궁극적 희망을 안고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함으로 아픔과 죽음에 매몰되지 않을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 하나님과 세계, 온 우주적 일치를 위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이러한 우주적 일치를 꿈꾸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치의 신비/ 고전12:12-27/ 정용섭 목사/ 대구샘터교회/ 주현절설교/ 2010-01-24
교회 일치의 신비 고전12:12-27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즉 구원자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구원은 절대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오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교회 역사를 배우며 거기에 동참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거룩한 사건에 함께 연루되어 갑니다. 교회 분쟁 이렇듯 거룩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교인들 사이에 왜 분쟁이 있을까요? 크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분쟁이 있고, 작게는 개신교 안에서 교파에 따라 분쟁이 일어납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싸우고 갈라지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심지어는 같은 지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분쟁이 일어납니다. 실제로는 멀리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분쟁보다는 같은 개신교 안에서의 분쟁이, 그리고 지교회 안에서의 분쟁이 더 심각합니다. 큰 싸움까지는 안 간다고 하더라도 서로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 경우는 많습니다. 박 집사는 성격이 왜 저래, 저 사람을 보면 불편해, 김 집사는 왜 저렇게 잘난 척 하는 거야, 등등, 거룩한 공동체에서 있지 말아야 할 싸움들은,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갈등들은 많습니다. 이런 분쟁은 초기 기독교에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사도들이나 사도 급에 해당되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대기독교와 헬라기독교와의 분리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가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 교회와의 신앙적인 갈등으로 결국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도 분파가 생겼습니다.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었습니다.(고전 1:12)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파가 나뉜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분파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이런 분파적 현상은 단순히 세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하는 차원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훨씬 다양한 문제들이 고린도교회를 분파적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습니다. 우상 앞에 놓았던 음식을 먹는 자유가 있는 사람과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서로 비난했습니다.(8장) 때로는 성만찬에서도 이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고전 11:18) 당시에는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애찬식도 성찬식에 포함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 후에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기서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가져온 것을 자기들끼리만 나눠먹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신유, 방언, 예언, 축귀 등을 가리키는 열광적 은사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은사가 더 우월하다고 보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교회의 일치를 파괴하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이렇게 갈가리 찢어진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평화를 거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그런 분파와 분쟁과 파당을 고린도교회에서 목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몸 바울은 교회 일치가 교회의 정체성이며, 본질이라는 사실을 본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몸으로 비유합니다. 1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그림을 그리듯이 교회를 설명합니다. 교회의 구조와 기능은 몸의 원리와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1) 몸은 여러 지체로 구분됩니다. 손, 발, 눈, 가슴, 그리고 몸 안에 심장, 신장, 위, 큰창자, 작은창자 등, 여러 장기가 있습니다. 모든 지체는 한 몸을 이룹니다. 발이 자기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몸에 붙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귀가 눈이 아니라고 해서 몸에 붙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서로 다르지만 모두 몸에 붙어 있습니다. 그런 지체들이 합해서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지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각각의 지체가 나뉘지 않고 모두 하나의 지체라고 한다면 그건 몸이 아닙니다. 모두 손이거나 모두 발이거나 하면 제대로 된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교회에 적용합니다. 교회 신자들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달라야만 합니다. 각각 할 일도 다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배우는 사람도 있고, 청소하는 사람도 있고, 남을 돌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배척할 수 없습니다. 2) 약한 지체가 더 소중합니다. 22-24절이 이를 설명합니다. 팔과 다리는 강하고 눈은 약합니다. 그러나 눈이 더 중요합니다. 팔이 하나 없는 게 눈이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보이는 지체보다는 보이지 않는 지체가 더 중요합니다. 심장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몸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약한 지체, 아름답지 못한 지체를 귀하게 보호해야만 몸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약한 신자들을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교회를 섬기는 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원리를 정리하면 몸의 지체 사이에 분쟁이 없고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25절) 이런 원리에 따라서 교회 구성원들이 관계를 맺는다면 근본적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겠지요. 거꾸로 교회가 분열하고 신자들의 마음이 찢긴다면 교회의 근본 원리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겠지요. 이것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돌려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원리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어 있지 않다는 식으로 서로 분리하려고만 하거나, 약한 지체를 서로 돌보고 싶다기보다는 그들 앞에서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요?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말썽을 피우는 사람과도 무조건 화합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파렴치한 일을 행한 사람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적절하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그런 일들은 필요합니다. 더구나 신앙적인 진리를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치열하게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진리 투쟁에서는 바울도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그런 진리의 차원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소모적인 경쟁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욕망으로 인한 분쟁을 말합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신유,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등의 은사를 놓고 무엇이 더 큰지 싸웠습니다. 불필요한 경쟁이고 분쟁이었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싸웁니다. 좋은 일을 앞에 놓고도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바울은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여러 지체가 서로 돌봐야 하듯이 교회에 속한 이들도 그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면 실제로 교회가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일치를 이룬 적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도 분열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파 사이에도 그렇고, 신자 개인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신자들의 수준이 낮거나 인격이 불량하거나 신앙이 부족한 탓일까요? 아닙니다. 꽤 괜찮은 사람들이 모여도 분쟁은 없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 분열의 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 걸쳐 있다는 사실이 그 이유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지금 우리가 공동체로 모이는 이 현실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의 토대가 되는 영적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 이미 승리한 교회, 그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치 삼위가 일체를 이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아직 투쟁 중에서 있는 교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의 그런 상처는 종말이 되어야 완전히 치료될 것입니다. 종말에는 보이는 교회가 아예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분열의 상처를 안고 있는 교회를 지고 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승리의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보이는 교회의 상처를 치료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마치 우리 몸의 백혈구와 같습니다. 몸에 균이 아무리 많아도 백혈구가 충분하면 몸의 건강을 완전히 잃지 않습니다. 백혈구가 암세포도 방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면역력이 왕성하게 작동하는지 아닌지 달려 있습니다. 면역력을 높이는 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한, 이미 영광에 들어간, 종말에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낼 보이지 않는 교회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광의 교회를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여러 지체로 된 하나의 몸이 교회라는 말을 하면서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했습니다. 27절에서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갖고 살았는데, 그의 몸이 어떻게 지금 교회가 된다는 말인가요? 우선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물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 예수님은 부활 이전과 이후로 구분됩니다. 부활 이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방식의 몸으로 살았지만, 부활 이후에는 전혀 다른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부활의 몸은 궁극적인 생명의 몸입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근원입니다. 골로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골로새서는 여기서 우주론적 그리스도론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주를 몸으로 하는 머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주론적 생명의 근거라는 것이 신약성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런 신약성서의 설명이 너무 막막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부활의 주님을 믿고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으면 충분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신앙은 중요합니다. 각자가 부활의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 부활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생명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그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주의 근본이 되셨습니다. 우주는 그의 몸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우주 전체를 생각해보십시오. 태양과 별과 달도 모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물, 공기, 흙, 산, 강, 꽃, 산양, 고래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아침 안개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세계와 자연이 그리스도 자체라는 말이 아닙니다.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이집트의 신앙을 흉내 내자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몸’이 그 대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엡 4:15) 또한 그리스도는 세상의 머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차원에서 교회와 세상은 똑같습니다. 세상은 확대된 교회이고, 교회는 축소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는 양쪽 모두의 몸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각각의 지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듯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세상에 각각의 지체로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이 계신가요? 우리가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 경쟁, 욕망으로만 삶을 확인하는 세상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시각으로 세상과 교회를 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입니다. 그게 보이는 사람이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일락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사람이 있고, 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몸’이라는 사실은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와 존재 신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비를 아는 사람들은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교회 일치의 원리를 몸으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서로 분쟁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돌보는 삶이 그것입니다. 이런 능력이 우리 교회에서 넘쳐나 세상으로 밀려들기를 바랍니다.
교회, 그 하나됨을 위해/ 요17:9-11,21, 엡4:1-13
교회, 그 하나됨을 위해/요17:9-11,21.엡4:1-13 2003-03-21 18:20:46 read : 146 > 여름을 보내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7월말에서 8월초가 가장 더울 때인데, .... 오늘이 8월 첫 주입니다. 이 더위에 휴가를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겠고, 휴가중이신 분들도 계시겠고, 못 가신 분들도 계시겠고..... 모두모두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오늘의 설교 본문 중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 중의 일부이에요. 예수님이 이제 제자들과 작별 할 때가 가까워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저들을 위함이니이다. .....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다 하나가 되어.... 믿게 하옵소서!\" 여러분도 다 하나가 되어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실 때도 하나가 안 되었는데, 어떻게 안 계신 이후에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까? 오늘은 예수님도 기도해주셨던 것처럼, \"교회 - 그 하나됨을 위해!\"라는 주제를 성서본문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 마크 트웨인이란 사람이 크리스챤 작가로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기독교인의 아픈 데를 날카롭게 꼬집지요. 하나되지 못하는 교회를 풍자하고 있어요. .....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자기가 개와 고양이를 갖다가 한우리에 넣어 봤다는 거예요. 그런데 개와 고양이는 어때요? 서로 상극이잖아요. 그런데도 그것들은 곧 친해져서 잘 지내더라는 거였어요. 그 다음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에다가 한번 넣어 보았다는 거예요.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 ... 그런데 처음에는 당황한 눈치였는데, 조금 지나니까 그것들도 역시 잘 지내더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 천주교인을 섞어서 한 우리에다가 한번 집어넣어 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곧바로 싸우기 시작하더라는 거였어요. 좀 지나면 괜찮겠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더 격렬해지더라는 거였어요.... 물론 풍자입니다만, 그마만큼 교인들은 하나되기가 어렵더라는 얘기이겠지요. > 교파와 교파뿐만이 아니라 교회내에서도 우리는 하나됨을 포기할 수 없어요. 교회는 하나되어야 합니다. 왜? 교회는 이미 하나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 근거가, 하나됨의 근거가 여기 에베소서 본문에 나와요..... 수요일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아시지요? 에베소서는 책 전체가 하나의 교회론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우리가 3장까지 공부했는데, 이 1장부터 3장까진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교리적으로 다루고 있었어요. > 요약해보면, 1장에선 교회가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공동체였다고 가르쳐주고 있었어요. 예정하고 택해주시고, 구원해 주셔서 모인 공동체라고 했어요. 그 다음 2장에선 화해공동체, 평화공동체라고 하고 있었어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에베소서 2:114)....\" 벽이 무너지고, 담이 무너지는,.... 그 당시 가장 높은 담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었지요. 그런데 이 높은 담이 무너지고 있어요. .... 이렇듯 담이 무너지면서 \"함께 지어져\"가는 것이 교회이고 \"성전\"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성전이라고 했어요. 달리 성전이 아니었어요!! 그 다음, 3장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는 곳(에베소서 3:10)이라고 했어요.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야해요. ..... 혼자 도닦아 깨달아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을 깨달아 간다고 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3:6에 나오는데,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었어요. 이것을 다시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그것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 같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이 보화를 발견하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이 보화를 샀어요. 그리고 여기에 그의 생명을 걸었어요. 인생을 걸었어요. ..... 벽을 쌓는데 생명을 건 것이 아니라, 벽을 허무는데 인생을 걸었어요..... > 이처럼 1-3장까진 교회가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어요. 이어서 오늘 4장 1절 이하를 보고 있는데, 4-6장까진 교회 내에서의 성도의 생활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어요. .... 우리가 교회를 공동체라고 하지요. 건물이 교회가 아니에요. 모인 사람들이 교회이에요. ..... 그러면 모였다고 다 교회입니까? 아니에요. 이번 월드컵에 응원인파가 몇 백만 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그들이 공동체입니까? 아니에요. 모여서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끝나면 모래알같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교회는 한 식구, 한 권속, 한 형제자매..... 공동체예요. 그러므로 먼저 본문에선 성도들의 구체적인 생활지침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어요. > 교회의 하나됨의 근거가 오늘의 본문 4-6절에 나오는데, 먼저 4절을 보세요!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이니, 너희가.....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소망도 하나!!..... 여기서 몸은 교회이지요? 우리는 모두 교회의 지체이에요. 성령이 우리를 이 한 몸의 지체가 되게 해 주셨어요. 그래서 교회의 지체가 된 이래 한 소망을 갖게 되었어요. > 그 다음 5절을 보세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요.\" 우리가 다 주님을 믿어요. 예수가 주님이시고, 그리스도라고 똑같이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그분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는 분이에요. 그 하나님을 예수님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도 아버지라고 부르고 ... 그래서 동일한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어요. 그리고 여기계신 우리 모두도 다 아버지가 같아요. 그러니 우리는 한 형제자매입니다. 한번 옆 사람을 째려보세요!.... 진짜 째려보는 사람이 있어요..... 형제 자매이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힘을 푸시고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말씀해 보세요! .... >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이에요. 물론 여기서 하나됨은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이에요.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에요.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소망도 하나인 것은 맞아요.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도 맞아요. 하나님도 하나이에요. 이런 면에서 통일과 일치를 이룰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다양한 문화와 전통, 제도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더욱 더 다양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돼요. 이런 가운데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 벽을 넘고, 담을 넘어서 ... 남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수용해야 돼요. > 어떤 사람이 천사에게 물었어요. \"천국에는 어느 교파교인이 가장 많이 들어왔습니까? 장로교인입니까?\" - \"아니다. 장로교인은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한 명도 없대요!! \"그러면 감리교인 입니까?\" - \"감리교인도 아직까지 한 명도 없다.\" - \"그럼 도대체 어느 교파입니까? 천주교입니까?\" - \"아니다. 여기에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만 있다.\" 이렇게 말하더라는 거예요. > 교회는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의 교회교회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되어 살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① 1절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이지요. 교회는 선교공동체이에요. 그러므로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할 때, 그래서 그 본연의 사명에 충실할 때, 교회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② 그 다음 2절에서 서로 용납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에큐메니칼 정신이지요. 교회일치의 정신이에요. 온유와 겸손으로, 오래 참음과 사랑을 가지고 서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아직 많이 부족하지요? 우리는 앞으로 함께 살아나가는 법, 더불어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요. ③ 그 다음 3절에서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우리들을 묶어 하나되게 해 주셨는데, 그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④ 그 다음 7절 이하에서 받은 바 은사대로 다양한 직분을 주셨어요. 그 은사와 직분은 사람마다 다양하지요. 그래서 더 더욱 소중합니다. 이런 각기 다른 은사와 직분은 좋은 일에 하나되는데 쓰여져야 합니다 > 한 과수원에 사과를 자꾸 도둑맞아서 주인이 지키는 사람을 여러 명 두었어요. 그런데 그 지키는 사람들이 따먹기도 하고 내다 팔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은 이것을 어떻게 하나 생각하다가 장님과 앉은뱅이를 두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장님은 볼 수 없으니 사과를 못 볼 것이고, 앉은뱅이는 높이 올라 갈 수 없으니 사과를 못 따리라 .... 그러나 며칠 후에 다시 와 보니 여전히 사과가 줄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웬일인고 하고 몰래 지켜보았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장님이 자기 어깨 위에다가 앉은뱅이를 태워 가지고는 사과를 열심히 따 내리더라는 거예요..... > 우리는 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앞에 설때, 부족하고 허물많은 사람들이에요. 장님이고, 앉은뱅이이고..... 이 부족한 사람들이 교회를 세워나가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나쁜 일에 한 몸을 이루면 어떻게 돼요? 말이 안돼요. 정말 좋은 일에 한 몸을 이루어야 주님 보시기에 정말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다양성 속에서의 아름다운 일치는 좋은 일에 모두 하나가 되는 형태로라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12절 말씀처럼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저마다 찾아서 열심히 할 때,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교회가 든든히 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러한 아름다운 일치를 위해 힘을 모아가는 수석교회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은사와 직분들을 좋은 일에 써서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어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길/고전1:10-17
교회가 하나 되는 길/고전1:10-17 2007-04-05 13:11:45 read : 261 금년부터는 절기나 중요한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매주 고린도서를 중심으로 강해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고린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이 충만했으며, 은사가 충만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으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언급한 후 곧 바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을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제일 먼저 언급한 문제는 교회의 분쟁이었습니다. 11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글로에란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석가들에 의하면 고린도에 거주하는 부유한 여성 실업가로, 별 설명이 없는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 잘 알려진 여신도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바울의 선교를 열심히 돕는 유력자로 종들을 통해 선교비나 필요한 물품을 보내는 자였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 여인이 보낸 분들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형편을 들어보니 교회 내에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분쟁이 생겼습니까? 12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 즉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서 서로 다툰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분쟁’이란 말은 헬라어로 ‘에릭스’인데 이는 10절에 말하는 ‘분쟁’의 헬라어 ‘스키스마’와 다른 단어입니다. 10절에서 말하는 분쟁이라는 말은 완전히 분열된 상태이고 12절에 말하는 분쟁이라는 말은 서로 울근불근 다투는 상태이기는 하나 완전히 갈라진 상태는 아닌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파벌 간의 다툼으로 인해서 갈라지기 직전의 위기를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작년 한 해 동안 영락교회의 분쟁을 수습하노라고 갖은 고생을 다 해보았습니다. 한참 분쟁이 심할 때에는 앞장 선 분들의 눈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당회실에 와서 마구 고함을 지르기 일 수고, 제가 조금만 누구 편에 서는 느낌을 들면 저한테 달려들어 싸우자고 할 것 같은 태세입니다. 조금만 삐긋했다가는 광성교회 같은 큰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도 보여서 얼마나 마음으로 조바심을 쳤는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런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글로에가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종을 보내서 이 사실을 전갈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 실상과 바울이 권면하는 교회가 하나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고린도 교회의 분쟁 실상과 원인은 무엇입니까? 좀 전에 언급한 대로 고린도 교회는 네 파벌로 나누었는데 분석해 보면 철저히 인간적인 생각들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네 파벌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1)바울파는 이방인들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바울은 한번도 이들에게 자기편이 되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음에도 이방인들이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끼리끼리 뭉쳐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소위 구원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도 폐하고 할례도 받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2)아볼로파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유대인이었는데, 그는 상당히 지식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 곳은 지적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는 학자들이 많았는데 아볼로도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를 좋아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볼로파는 기독교를 철학적인 종교로 믿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3)게바파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게바란 유대인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하고 부르지 않고 구지 게바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게바파, 즉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존중히 하는 자들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이나 할례를 지키지 않아도 되고 다만 믿음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울을 싫어했습니다. (4)그리스도파는 은혜 체험자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자기들만이 참다운 기독교인들이요, 참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체험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는 파였습니다. 그들은 기도도 많이 하고 전도와 봉사도 많이 하는 자들로 교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영적 교만과 독선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나 교회 지도부가 자기들을 등한히 하는 느낌이 들면 자기들끼리 가정집회나 기도원 같은 곳으로 몰려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이단같은 잘못된 곳으로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파벌이 생긴 원인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시험이 들어서 그렇게 되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적 생각들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분쟁이 있는 교회들을 찾아가 이 파나 저 파를 만나보면 열심히 성경이나 법을 갖고 말하지만, 대부분 인간들의 생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교회는 지연 중심으로 이북파, 영남파, 호남파로 나누기도 하고, 어느 교회는 학연 중심, 혹은 혈연중심으로 파벌이 조성되기도 합니다. 경북 어느 큰 교회는 목회자가 자주 바뀝니다. 장로님들의 3분지 1이 강씨인데 당회를 하기 전에 먼저 문중회의를 하고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담임목사가 자기들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 목회를 방해함으로 아무리 능력 있는 목회자가 부임해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너무나 한심한 교회입니다. 또 목회자가 자주 바꾸는 교회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사실, 처음 교회 나와서 은혜 받는데 도움을 준 목회자, 담당 교구 목회자로서 특별히 돌봄을 받았을 때, 혹은 성경공부 반에서 구원의 체험을 받았을 때, 그 분을 일생 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좋아했던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어떤 그룹이 형성되기도 하고 은혜를 받았던 어느 기도원이나 어느 부흥 강사 목사님을 중심해서 어떤 아류가 형성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가 홍익교회에서 30년 목회하는 동안 70%이상의 성도들이 저를 통해서 세례를 받고 제직이 되거나 중직이 되었고 집사람을 통해서 병 고침 받은 분들이 상당수 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후임자가 부임한 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우리의 이름과 받은 은혜를 들먹거리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분들은 후임 목회자에게 미운 톨이 박힙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 것은 세례를 주었거나 주례나 장례식을 집례했거나, 제직이나 중직이 된 것, 혹은 병 고침을 받은 것도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전부 하나님이 하신 일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만 기억하고 인간은 잊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면 우리도 인간인지라 섭섭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덕이 됩니다. 여하튼 어떤 이유든 간에 교회 안에 분파가 있고 분쟁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 받을 일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이단 문제를 제외하고는 어치든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온전히 합하는 것입니다.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온전히 합해야 할 이유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한 몸이 된 이상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히 합하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절에는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 가정이나 교회나 어떤 기관이든 말 때문에 시험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데 부인은 저렇게 말합니다. 남편은 이렇게 하자는데 부인은 저렇게 하자고 합니다. 의견이 달라도 둘이 잘 타협해서 하나의 말, 하나의 길로 가야 하는데 끝까지 고집하거나 둘이 결정하고서도 계속 불만을 말하면 결국 둘은 깨지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고 장로님들은 다른 말을 합니다. 결국 교인들은 갈라지고 시험이 들거나 깨지고 맙니다. 물론, 인간이 모인 곳이라 의견이 다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서로 의논하여 결정한 다음에는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면 됩니다.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까 다른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마음이 하나가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신 분열증에 걸리고 미친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까?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됩니다. 빌2:2-5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을 가질 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게 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다툼이 생기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은 증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나 당회원이나 제직, 기관의 임원들은 교회의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제일 조심할 것은 말입니다. 어느 분은 교회에 와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입으로만 충성합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말로 온갖 잔소리하고 앞장 서 일하는 사람을 마구 비판함으로 심한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험담은 물론이고 이간질하는 사람입니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로 나라도 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구려 보장 왕 25년 당대 영웅인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남생은 이 귀한 벼슬을 얻어 정사를 맡은 다음 여러 성을 순찰하면서 국민의 여론을 듣기 위하여 정사를 자기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어느 날 남건과 남산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당신의 형 남생이가 당신들을 미워하여 장차 없애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 그의 대책을 모색하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혹시나 하고 의심이 되며 염려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남생이 민가를 순방하고 있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의 동생 남건과 남산이 당신의 자리를 탐하고 있으니 그 대책을 세우라고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남생도 믿지 않았으나, 혹시나 해서 동생들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비밀사절을 보냈습니다. 동생들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그 사절을 잡아들이고 형을 왕의 이름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남생은 자기가 보낸 신하는 오지 않고 자기를 불러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들이 음모를 꾸미는구나 생각하고, 동생들도 형님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낯선 사람의 말을 믿고, 군대를 동원하여 남생을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생은 당나라로 피신하였습니다.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남생에게 현도군공에 봉하고 장군을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습니다. 전쟁 2년 만에 신라까지 합병하여 평양성을 에워싸니 한 달 만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 28대 705년간 천년 시작이 하루아침에 끝마치고 말았습니다. 나라도 말에 의해 무너진다면 작은 교회 정도는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말을 옮기는 사람들, 특별히 그 말에다가 나쁜 의도를 보태서 옮기는 사람을 교회는 제일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므로 같은 마음과 같은 말, 같은 뜻을 나타내십시오. 그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교회가 되게 하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어떻게 하나가 되었습니까?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십자가 안에서 나란 존재가 목 박혀 죽고 부활 안에서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다 다르지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세례를 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으로 변화 받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다른 사람이지만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으므로 한 몸이 되었고 예수님의 피로 영적으로 교통하게 된 것입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뉨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나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렇게 사도가 되었고 세례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교회 분쟁의 도구로 이용하는가 라고 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다른 이의 허물과 죄를 용납하고 대신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교회는 십자가 사랑으로 용납함이 없이는 무너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자신이 허물과 죄가 많다고 느끼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칭 의인은 교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서로 율법의 눈으로 판단하기만 한다면 모두가 정죄 받을 사람들뿐이므로 한 사람도 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 서서 설교하는 저도 여러분들이 율법의 눈으로 본다면 몇 개월도 못 되어 온갖 허물과 잘못 때문에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가정을 좋아합니까? 가정은 어린 자녀들이 허물 많고 실수 많을지라도 부모님이 사랑으로 덮어주고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실수했을 때 부모님들이 가서 대신 용서를 빌고 대신 그 값을 치러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정인 교회는, 법정처럼 너나없이 서로의 잘못을 따지고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아무도 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참석하고 싶은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가 교회에 온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의 부족이나 허물을 용납하고 덮어주는 교회, 때로 교회의 큰 어려움이 있을 때라도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교회 지도자들이 부모처럼 큰 가슴을 가지고 “이 모든 풍랑은 나의 연고입니다.”라는 고백할 수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제가 영락교회의 문제를 수습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서로의 잘못을 들추기는 잘하지, 누구 하나 교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나의 연고로 이런 풍랑을 만났습니다.”라고 하는 분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과거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님 같은 위대한 목회자도 계셨지만, 최창근 장로님 같은 큰 그릇의 동역자가 있었기에 은혜가 넘쳤던 것입니다. 최창근 장로님은 신의주에서 월남하신 후, 1948년 12월, 주문진어업조합 이사로 있던 친구의 도움으로 수산업을 시작 했습니다.한 번은 동태를 잔뜩 실은 17t 자리 배에 선원 5명과 함께 승선해 부산을 향했는데, 기상변화로 거대한 폭풍을 만나 죽음의 위기를 만났습니다.그 때 최 장로님은 동해에 빠져 인생을 마감할 생각을 하니 너무나 가슴이 터질 듯싶어 불타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태어나 그렇게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는 처음일 정도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먼저, 지금까지 물질욕에만 매여 살던 죄를 회개하면서 “살려만 주시면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비바람과 싸우면서 3시간 만에 통통배가 새벽 6시경에 기적적으로 울진항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특별히 지난 50여 년간 한 목사님를 그림자처럼 보필하며 가장 큰 물질 후원자 역할을 했습니다.기드온협회, 군선교연합회, 세진회, 기독공보 사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76년 영락고등학교 건축을 위해 4억원의 토지를 매각해 기증, 보성여고 강당건축을 위해 2억원의 토지를 매각해 헌납,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 8만평의 현 부지를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최선을 다해 사업을 하고 그 수익을 하나님 사업에 쓰는 것이 사명이라고 여기며 살아오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써도 써도 계속 채워지는 샘물’과 같이 물질을 채워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번에 영락교회 문제 수습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90세가 넘은 최창근 장로님은 문제를 일으킨 장로님들을 만난 후에도 야단을 치기보다는 손을 붙들고 우시면서 “다 선배들이 부족한 탓이다.”고 하심으로 너무나 부끄러웠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바로 교회는 이런 큰 가슴의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남의 잘못이나 부족은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십자가 사랑으로 이루어진 교회이기에 허물과 죄를 덮어주고 대신 그 짐을 질 때에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어치든지 우리 교회는 45년 동안 화목 가운데 하나가 되어 온 것처럼 앞으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분쟁이나 분규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시는 홍익교회의 중직들과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그리스도 마음을 품으am로 같은 말, 같은 마음과 뜻을 나타내며,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며 대신 짐을 짐으로, 어떠한 문제 앞에서라도 하나된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의 일치(1)/ 엡4:1-6
교회의 일치(1)/엡4:1-6 2007-04-05 12:48:03 read : 266 에베소서는 1장부터 3장까지는 교리 부분을 기록했고 4장부터 6장까지는 기독교의 실천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장부터 시작되는 실천론에서 바울이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은 교회의 일치였습니다. 그만큼 교회의 일치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서울노회에서 어쩌다 보니까, 분쟁이 심한 네 교회 수습전권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때 절실히 느낀 것은 교회는 어치든지 하나가 되는 것을 제일 우선으로 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시험에 드니까, 어제까지 그렇게 ‘형님, 아우’하면서 친하던 사이가 인사도 안 합니다. 나중에는 서로 삿대질 하면서 욕을 합니다. 더 나가서는 거룩한 예배 시간에 강대상에서 서로 멱살을 잡고 때리고 싸웁니다. 아마 다 나름대로 교회를 바르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고 변명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으로 철저히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을 면치 못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연약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라, 서로 부족한 것투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이 지구상에는 없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나 건물로, 그리고 하나님의 가정으로 표현했습니다. 몸이나 건물은 지체간이나 자재 간에 일치되지 않으면 병이 들거나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호화주택에 산다 할지라도 식구끼리 일치하지 못하고 밤낮 다툰다면 그 곳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판자 집에 산다고 할지라도 식구끼리 서로 아끼며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면 그곳이 천국에 가까운 곳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화려하게 교회당을 건축했을지라도 밤낮 분쟁이 심한 교회는 지옥의 악취가 나지만, 비록 천막교회당일지라도 교인끼리 형제자매처럼 사랑한다면 거기에서 천국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화한 가정에서 문제아가 생기는 것처럼, 불화한 교회에서 가라지가 양산되기가 쉽니다. 그러나 화목한 가정에서 어린 아이들이 실수와 허물을 벗고 점점 어른이 되는 것처럼, 일치와 화목된 교회에서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들이 점점 예수님의 제자들로 변하여 감으로 알곡 신자들이 많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교회가 일치됩니까?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로 배울 수 있습니다. 1. 교회의 일치를 위해 성도들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들 각자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1-2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특혜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대개 사람은 그 신분에 합당하게 행하게 됩니다. 옛날 양반들은 가장 귀중하게 여긴 것은 체면이요, 체통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얼굴을 깎이는 것을 제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한국 사람이 많이 쓰는 말은 ‘얼굴이 안 선다.’ ‘볼 낯이 없다.’ ‘얼굴에 먹칠한다.’입니다. 양반 체면 때문에 아무리 비가 쏟아져서 옷이 흠뻑 젖어도 뛰지 않고 점잖게 걸었습니다. 집에서도 언제나 의관을 정제하고 앉을 때도 단정하게 앉아야 하며 식사할 때도 소리 내지 않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그 신분에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성도들이 가져야 할 네 가지 덕목이 나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했습니다. (1)첫 번째 덕목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마음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과거 율법 안에 있을 때는 너무나 자랑할 것이 많은 교만한 사람이었으나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에 의해 깨어진 후에는 과거 자랑하던 모든 학벌과 가문, 바리새인이라는 신분과 로마 시민권 등등을 모두 배설물처럼 버렸고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여길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 교회가 시험에 듭니까? ‘내가 당회장인데 나를 무시할 수 있는가?’ ‘내가 부장인데 내 허락도 없이 할 수 있는가?’라면서 서로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자기를 과시하고 높은 대접만 받으려는 자들이 지도자로 활동한다면 교회 일치에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반대로 지도자들이 자기는 한 없이 낮추고 주님만 높인다면 그런 교회는 하나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2)두 번째 덕목은 온유입니다. 온유란 모가 나지 않은 둥글한 성격, 부드러운 솜 같은 성격을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같습니다. 입니다. 예수님은 마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온유한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을 때에 그 교회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기운으로 가득찰 것이 분명합니다. (3)세 번째 덕목은 오래 참음입니다. 많은 교회가 시험 드는 것은 서로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연륜이 깊어가면서 배운 것은 오래 참을 때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점입니다. 30대 나이 때 한번은 무슨 회의를 하다 말고 대단히 감정이 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하든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많은 시간 기도하면서 만든 안을 어떻게 단 한번 기도해 보지도 않고 반대한다 말인가?’라는 생각에 혈기를 참지 못하고 아주 강한 말로 할 말을 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시험이 오래 가는지, 더 나가서는 갈수록 더 큰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오래 참는 훈련을 합니다. 아무리 주일날 문제가 생겨도 꿀꺽 참고 일주일동안 기도하면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번번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혈기를 참지 못하고 형제와 다투고 싸우므로 피차 상처를 받을 때, 교회 평화는 깨지므로 너도 나도 은혜와 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4)네 번째 덕목은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한다는 말은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춰 바꾸려는 의도가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상대방의 허물과 부족을 덮어주고 감싸 줄 뿐 아니라 십자가로 대신 지는 자세를 말합니다. 많은 부부들이 자꾸 문제가 생기는 것은 상대방을 자꾸만 자기에게 맞춰 변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금실이 좋게 사는 부부들은 서로에게 맞추어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부부들은 처음 결혼해서 서로 생활습관이나 성격을 고치려고 하다가 다툼이 많이 일어나고 결국 성격이 안 맞는다고 깨어지는 부부도 있습니다. 사람은 한번 길들인 생활습관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의 부부는 결혼한 지 36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잘못된 생활습관이나 성격을 고치려고 많이 다투기도 했으나 좀체 안 됩니다. 어느 날부터 아예 타협하기를 ‘가정안에서의 생활방법은 아내에 맞추기로 한다. 그러나 가정 밖의 일은 남편이 주관한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서로 맞추어 살면서 서로의 부족한 것을 도아 주며 사니까 평안하게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 허물과 부족을 들추어내어 비판하고 고치려고 하다 보면 생기는 것은 다툼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허물이나 부족이 있기 때문에 그런 법정 같은 교회는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이 왔다가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 간에 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허물과 부족할 때는 덮어주고 감싸줄 뿐 아니라 대신 짐을 저주는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깃들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겸손과 온유함,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하는 이 네 가지 덕목을 갖추는 것이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성도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네 가지 덕목은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겸손한 과정을 겪은 자가 온유해집니다. 겸손과 온유가 오래 참게 되고 마침내 남의 허물과 부족도 감싸주고 덮어주는 용납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온유한 사람의 대표로 모세를 뽑습니다. 그러나 사실, 모세도 젊어서는 얼마나 혈기가 강한지, 자기 동포를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처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 40년 동안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살면서 깨어질 대로 깨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저에게 사명을 주셨지만 ‘못 한다.’고 할 정도로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겪은 후에 오래 참는 자, 모든 자들의 허물과 부족을 용납하는 자가 됨으로 나중에는 200만의 오합지졸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복지까지 인도하는 큰 그릇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형남 장로님은 과거 기독공보 이사장, 숭실대학교 학장 등을 역임한 분인데 처음에는 기독교 실업인으로서 일신방직을 경영하면서 공장 안에 서림교회를 세워 전 종업원에게 전도하였을 뿐 아니라 목회자에 대한 예의가 지극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백리언 목사님이 서림교회에 시무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런데 김형남 장로님은 사업상 술 담배를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미 장로 장립 시에 금연하기로 약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백 목사님은 크게 실망하여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보통 편협한 장로 같으면 자존심이 너무 상하여 그런 식으로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는 그 목회자를 단번에 그만두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형남 장로님은 그 길로 목사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체면에 아랑곳없이 백 목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다시 약속하겠습니다. 제발 교회를 떠나가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결국 백 목사님은 고집을 풀고 김형남 장로님의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백 목사님은 그 후로 더욱더 김형남 장로님을 깍듯이 대했다고 합니다. 과연, 김형남 장로님은 겸손과 온유의 큰 그릇이었습니다. 그 그릇 안에서 많은 목회자와 많은 인재가 발아(發芽)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를 택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신 그 은혜 갚기 위해 더욱 더 겸손하고 온유하며 서로 오래 참고 용납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교회가 일치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3절에 나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는 개인의 마음의 평안이 아니고 형제 관계의 평화, 또는 화평을 말합니다. 위의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함은 하나님을 향한 합당한 삶, 합당한 열매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빛나는 보석알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제 그 보석 알들을 평안의 매는 줄로 엮어야 합니다.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매야 보화가 됩니다. 모든 성도들을 평안의 매는 줄, 화평의 줄로 단단히 엮을 때에 교회는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각자 하나님 앞에 빛나는 삶으로 만족하고 하나로 묶지 않으면 교회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로 묶습니까? 성령을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의 직업과 일가친척도 버렸고, 고향도 등진 채, 오직 예수님에게서 3년간 갖은 기적은 보고 말씀을 배우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을 팔아먹는 자가 생겼고, 겟세마네에서는 다 도망치고 예수님 홀로 체포당하셨습니다.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부활 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다락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너무나 무기력한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생기가 그들에게 임하시니 그제야 일어섰습니다. 다락방에 뛰쳐나와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왜 많은 신자들이 세례와 직분도 받았지만 제 구실을 못하고 매일 똑 같은 실수와 범죄와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기도 자리와 충성 자리가 먼지만 쌓여 있습니까? 왜 전도의 결실이 없습니까? 한 마디로 생기가 없는 탓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심령은 죽은 심령과 다를 바 없다. 이목구비가 다 있어도, 사지백체가 멀쩡해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생기가 들어가자 살아있는 군대가 되어진 것처럼, 성령은 무기력한 신자들을 교회 안에서 능력 있는 지체로서 제 구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40일 기도회 남은 기간 동안 우리 각자 성령의 능력을 달라고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에 너도 변하고 나도 변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질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 목사님에게는 속을 많이 썩이던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견디다 못해서 그 분을 위해서 30일 기도를 작정했습니다. “하나님, 그 집사님의 마음을 좀 바꾸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과연 저 집사님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 지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일마다 눈여겨보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그 분의 얼굴은 험상궂은 얼굴 그대로입니다. 그 목사님을 향한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바라볼 때마다 여전히 가슴이 떨립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한 3주간쯤 지나서 갑자기 자기의 기도의 내용이 변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그 목사님은 울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그 집사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후 주일에 그 분을 보니 그렇게 달라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 내가 변하니 상대방도 변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심령은 지금 어떠한 상태입니까?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지만, 뼈만 앙상히 남은 채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됩니다. 말씀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함으로 교회 안에서 제 구실을 다하는 능력 있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모든 교회들이 일치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는 너무나 자기 교회를 내세웁니다. 자기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교인들도 마구 뺏어옵니다. 어느 대형교회는 버스를 개척교회 앞에 세워두고 솔솔 빼갑니다. 개척교회에서는 한 교인을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 수년 동안 갖은 수고를 다했는데 어느 날 버스로 실어 가버리고 맙니다. 그 교인이 대형교회 갔더니 얼마나 좋습니까? 개척교회는 상가 이층에 40평정도 교회당 하나이므로 교회학교, 찬양대 등 너무나 복작거립니다. 한 사람이 교사하랴, 찬양대 하랴, 구역장 하랴 완전히 녹초가 됩니다. 항상 재정에 시달리므로 언제 자기 교회당이나 교육관을 가질지 막막합니다. 그런데 큰 교회 가보니 본당은 물론이고 모든 부속시설이 너무나 화려합니다. 예배 때도 보면 관현악단과 함께 찬양대가 너무나 감동적으로 찬양합니다. 또한 그 교회의 목사님의 설교가 그렇게 은혜로울 수 없습니다. 왜 진작 이런 좋은 교회를 모르고 지냈는지 후회가 됩니다. 개척교회 때는 교회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은 교회 다니는 것이 너무나 평안하고 즐겁습니다. 그러므로 개척교회 목회자가 아무리 와서 사정해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예 어느 날은 이사 가고 맙니다. 과연, 이렇게 다른 교인들을 뺏어 가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더 나가서는 상당히 많은 대형교회들은 사방 각지에 지성전(支聖殿)을 만들어 놓고 위성방송을 통해서 본 교회 설교를 영상으로 듣게 만듭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장로교니, 감리교니, 성결교니 교파를 너무 따집니다. 장로교 안에서도 통합 측이니, 합동 측이니, 개혁 측이니 하면서 지나치게 경쟁함으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게 합니다. 아닙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모든 지교회 뿐 아니라, 각 교단들, 더 나가서는 세계 모든 나라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4-6절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모든 교회들이 일치되는 이유를 일곱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입니다. (2)성령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역사하시는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3)소망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지향해 나갈 목표도 하나입니다. (4)주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 뿐이십니다. (5)믿음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믿음도 하나입니다. (6)세례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는 길은 신앙고백으로 받는 세례 한 길 뿐입니다. (7)하나님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만 섬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교단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교단이나 교파를 초월해서 연합하여 일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내년은 1907년 평양에서 성령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로 우리 교단은 물론이고 많은 교단들이 대대적으로 성령운동을 벌이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1907년 성령대부흥운동은 처음에 교파를 초월한 선교사들이 모여서 시작한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 선교사들은 매일 정오에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한 형제가 아무 일도 안 생기므로 기도회를 중지하자고 제의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들은 매일 더 많은 기도를 하여야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4개월 동안 매일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예배 도중에 우는 것과 죄를 회개하는 사람이 있었고 드디어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주일날 밤 예배 시 어떤 곳에서는 죄의 각성이 회중을 휩쓸었고 예배는 월요일인 2시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서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이처럼 많은 교회에서 이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선교사 중 한 사람은 고백하기를 “기도로 몇 달을 보낸 것이 결과가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사 모든 선교사들이 합하여 반년에 행한 것을 하나님은 반나절에 성취하셨습니다. 두 달 동안 2천명 이상의 불신자가 회개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 재산을 교회 짓기 위하여 바쳤고 더 바치지 못하여 울었습니다. 한 교회에서는 매일 기도회가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하기로 했는데 첫 날 그 시간이 되기도 전에 400명이 도착했습니다. 목적은 기도하기 위해입니다. 그 수는 날이 갈수록 늘었고 서울서는 매주의 기도회에 평균 출석이 11,000명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교파를 초월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전력할 때 이런 놀라운 역사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교회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가 되고 일치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고 먼저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하며, 더 나가서는 모든 성도들 간에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될 뿐 아니라 모든 교회, 모든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하기에 힘쓰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의 일치(2)/ 엡4:7-16
교회의 일치(2)/엡4:7-16 2007-04-05 12:47:19 read : 151 지난주에 말씀 드리기를, 교회는 어치든지 하나가 되어야지, 불화하거나 분쟁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요즈음 교회가 성장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교회가 무너지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중곡동 어느 교회는 우리 교회보다 더 많이 모이던 교회였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교회가 시험이 들므로 다투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제 나이 또래의 담임목사님을 사임시키고 40대 젊은 목사님을 모셔왔습니다. 그러나 3년 정도 되지 않아, 편이 갈라져 싸우더니 결국 젊은 목사님을 따라 교인들이 나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850명 이상 모이던 교회가 600여명 모이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갈라져 나간 교인들이 결국 그 목사님이 싫다고 내보냈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교회는 하나로 일치 됩니까? 지난주에는 세 가지로 (1)주님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 되기 위해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하는 삶을 사는 것이요, (2)성령의 능력으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서로 화합하는 것이요, (3)언제나 일치되어야 할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도 교회의 일치의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받은 은사, 받은 직책을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7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 했습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성도마다 분량대로 재능과 능력의 은혜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꼭 같이 동일하게 선물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각각 다양하게 주셨습니다. 8-10절에 보면,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8절의 말씀은 시68:18을 인용한 것으로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게 하심이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본뜻은 다윗이 법궤를 모시고 적군을 많이 포로로 잡아 가지고 시온산 위에 세운 예루살렘 성으로 개선할 때 획득한 많은 전리품을 수고한 장병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며 노래한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노래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라고 조금 변경시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즉, ‘위로 올라가실 때에’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속죄 구령 사업을 완수하고 승천하실 때를 의미하고, ‘사로잡힌 자들’이란 말은 예수님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 사로잡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마귀와 죄악과 사망의 권세를 다 정복함으로 그 동안 사단에게 사로잡혔던 자들을 빼앗아 성도로 만든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구원의 선물을 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각양 은사의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봉사하는 각양 직책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직책도 선물입니다. 9-10절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메시야 사명을 성취하시고 부활 승천하셨는데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은 하늘과 땅에 충만한 존재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육신만 입고 계셨으면 육신의 제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으십니다. 이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성령을 통해서 온 만물 안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회복시키며 완성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일에 우리가 동역자로 동참하니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이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로써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분량대로 직책을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데 11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 했습니다. 사도는 초대 교회에 있어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성직으로, 당시 교회에 최고의 권위를 가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다스리며 인도했던 것입니다. 선지자의 위치는 구약에서는 종교 생활의 주도적 지위에 있었으나 신약에서는 사도 다음 가는 직위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물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미래사를 예언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앞장서서 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 곳 교회에 정착해 있지 않고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부흥 강사 같은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메세지는 자기 생각이나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 선지자의 직위는 약 2세기까지 계속되다가 그쳐지고 말았습니다. 박해 시대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가 발전함에 따라 교회에 상주하는 목회자들이 생김으로 선지자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란 사도의 지도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을 순회하며 전달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때 당시 전도인 또는 오늘의 선교사와 같은 직책입니다. 초대 교회 일곱 집사 중 빌립 집사는 전도자라 불리웠습니다. 디모데에게도 전도자의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또 어느 분에게는 목사의 직책을 주심으로 양떼들을 감독하고 교회를 통솔하고 지도하는 목양의 역할을 맡기십니다. 이에 비해 교사는 복음 진리를 일일이 가르쳐서 깨우쳐 주고 양육하는 책임까지 다 해야 했습니다. 여기 직분들은 교회 안에 중추적 지도자의 직분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물의 분량대로 교회 안에 귀한 직분을 세운 목적이 무엇입니까? 12절에 나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 이라”고 했습니다. (1)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직책을 주셨습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카타르티스몬’이란 말인데 이 말의 근본 뜻은, 외과 의사들이 수족의 골절을 다시 맞추고 어긋난 관절을 다시 제자리 에 맞추는 경우에 말합니다. 즉, 성도들이 탈선될 때 바로 잡고, 신앙과 인격을 말씀에 합당하게 잘 키워 성장시킴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2)봉사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 직책을 주셨습니다. 봉사는 ‘디아코니아’, 실제적 봉사를 의미합니다. 몸으로 봉사하는 일, 성도들을 온전케 함과 아울러 저들로 하여금 실질적으로 교회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내고 자기 몸을 헌신하여 각각 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는 일을 잘하게 하라는 목적으로 직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직책을 받고 아무 봉사를 하지 않는 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봉사한다는 것은 꼭 교회 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묵묵히 마을길을 청소하고 불우한 이웃노인들이나 고학생을 돌보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슨 직책을 받으셨으며, 지금 무슨 봉사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 제직들은 무엇인가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봉사하심으로 영적 실업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3)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직책을 주셨습니다. 직책을 주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세우려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 지도자들 또는 교회에 각각 선물의 분량대로 봉사 맡은 분들이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힘쓴다면 참 교회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안 됩니다. 번번이 넘어집니다. 왜 그런 현상이 생깁니까? 인간의 힘, 인간의 노력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렇게 허물과 죄가 많은 자를 십자가 은혜로 구원해 주신 것도 너무나 감사한데 귀한 직책까지 허락해 주시오니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무능하여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직책을 감당할 만한 분량의 은사를 허락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하십시오. 특별히 이번 부흥사경회의 주제가 “성령이여 임하소서”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도회 시간마다 참석하셔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받은바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를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 때 예수님이 눅11:13에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약속하신대로 성령의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맡은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합니다. 그러면 놀랍지요, 열심히 직책을 감당하면 할수록 점점 더 능력이 강해지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이 임하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올해의 인물’ 로 선정된 도로시 딕스 여사는 초등학교 교사직에 있다가 몸이 너무 쇠약하여 35세에 사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신학교에 다니는 조카가 “주말마다 교도소에 가서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죄수들의 상담을 해왔는데 일을 계속할 수 없어 후임자를 찾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딕스 여사는 그런 정도라면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하여 자원하였습니다. 그 후 40년간, 즉 75세까지 그녀는 죄수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교직을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약한 몸이 강해지고 이전에 없던 기쁨이 늘 솟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예수님의 빛을 받으면 나도 빛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큰 빛이 되시는 예수님의 역할, 즉 치료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새사람을 만드시던 그 일을 작은 빛인 우리들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간증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이 지금 받은 직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줄 아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심으로 여러분을 통해서 교회가 더욱더 하나가 되는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교회가 계속 성장해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성장하지 않으면 병이 생기는 것처럼 교회가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여기저기 병이 들면서 시험이 오고 내분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성장하다 보면 연약했던 부분들도 점점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인 숫자나 헌금액이 점점 많아가는 것을 말합니까? 물론, 그러한 외적 성장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믿는 것과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성장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믿음과 이성입니다. 너무 믿음만 있어도 안 되고 너무 이성만 내세워도 안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기적들,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재림을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랍지요. 어느 날부터 성경의 모든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열심히 성경의 사실을 이성으로 알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공부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남녀가 직장에서 만났다고 합시다. 둘 사이에 점점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서로의 성격이나 가정, 과거나 희망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먼저 서로가 모든 것을 믿고 그 다음 이성으로 서로를 알려고 힘쓸 때에 점점 사랑이 깊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을 알도록 힘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날로 성장하는 성도가 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성장하려면 온갖 시련과 유혹을 이기어야 합니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어른은 온갖 시련과 유혹이 온다 할지라도 이길 수가 있는 자이지만, 아이들은 시련과 유혹이 오면 넘어지기 쉬운 자입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대학시험, 취직시험, 군대, 결혼, 아이 낳는 일, 등등, 어렸을 때는 모르던 많은 아픔들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많은 시련과 유혹이 다가올 때마다 이길 때 어른으로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장성한 믿음을 가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시련과 유혹이 따르게 됩니다. 어느 신자는 처음 교회에 나와서 얼마나 믿음이 잘 자라는지요.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까지 나오고 열심히 충성 봉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목회자들은 그 시련을 이기라고 열심히 응원하지만, 그만 너무 아쉽게도 실패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원망합니다. “이처럼 열심히 충성함에도 축복은커녕 왜 이런 어려운 시련을 줍니까?”라면서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그 신자가 그 시련을 이기었다면 믿음의 뿌리가 더 깊어졌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한번 앓고 날 때마다 점점 약아지는 것입니다. 시련과 유혹을 이길 때마다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궤술’이란 말이 나옵니다. 바른 말이 아니면서 바른 말처럼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때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비방과 거짓말로 우리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말씀의 좁은 길을 따라 나가면서 이기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신자들은 남의 말에 너무나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결국 남의 장단에 너무 쉽게 넘어지고 맙니다. 곧잘 충성하다가 누가 조금만 비판하면 ‘하니, 안 하니, 사표 내니’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문제가 많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해 자주 흔들리는 일군들도 문제입니다. 아니 됩니다. 우리는 순례자의 길을 걸으면서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시련과 유혹의 고개를 한 번씩 넘을 때마다 점점 믿음이 강해지고 마침내 장성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3)성장하려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행위를 나타내야 합니다.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어른이 되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랑이 있다는 점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이해심이 부족합니다. 사랑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어느 때는 모자란 사람, 장애자들을 놀리고 때립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사랑도 깊어갑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자가 됩니다. (4)성장하려면 모든 성도와 연합하여 충성하여야 합니다.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 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입니다. 몸에는 많은 기관들이 있습니다. 눈과 입, 손과 발, 뼈와 마디, 심장과 오장육부 등 엄청난 기관이 있습니다. 이런 많은 기관들이 서로 연합하고 협력할 때 그 몸은 강건하게 자라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눈을 눈대로,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병신이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너는 너, 나는 나, 네 은사는 네 은사, 내 직책은 내 직책이라고 하면 서로 전혀 협조하지 않으면 결국 너도 병들고 나도 병들면서 결국 교회라는 몸도 깨어지고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산 속에 혼자 가서 아무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해 보십시오. 혼자서는 장성한 자가 못되는 것은 지체 간에 서로 섬김을 통해서만 성장하도록 하나님이 법칙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원하는 일군은 자기 혼자 능력 있다고 독불장군 식으로 행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지체와 지체끼리, 은사자와 은사자끼리, 강한 자와 약한 자끼리 오직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서로 섬기고 협력하여야 합니다. 그 때 너도 살고 나도 살고 교회라는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도소국제연맹 총무로 있는 론 닉켈은 50개국의 교도소를 시찰한 바 있는데, 그 중 최고로 열악한 교도소는 잠비아의 한 교도소였다고 합니다. 너무 좁아 누울 자리가 없어 교대로 자야하고 화장실 시설도 없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옥과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론 닉켈은 그런 견딜 수 없는 참혹한 곳에 수감된 죄수들은 악만 남아서 날마다 싸우고 죽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곳에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 죄수들은 노래를 들려주겠다면서 80명의 죄수가 4부 합창으로 찬송가를 여러 곡을 불렀습니다. 닉켈 씨는 ‘이런 환경 속에서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하나 되게 하는 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 때 죄수들은 닉켈 씨를 한 감방으로 인도했습니다. 그 감방 벽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인처럼 검은 예수님이었는데 얼굴과 손이 모진 노동에 시달린 험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 상을 그린 죄수는 종신형을 받고 그 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얼마 전 병들어 죽었다고 합니다. 죄수 한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는 죄를 지었으니 고생을 해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찬양한 합창단 80명은 모두 교도소 목사님 덕분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처럼 강하게 뭉쳐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시험에 들고 내분이 일어날 때 가 보면 ‘무엇 때문이다.’ 혹은 ‘누구 때문이다.’라고 서로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된 교회는 판자교회든지, 박해를 받는 위치에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꼭 필요로 하는 일군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들추어내고 비판하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감싸주고 덮어주며, 더 나가서는 대신 십자가로 지는 성도입니다.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리는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가지가지의 사람들, 가지가지 직책들, 가지가지 은사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려고 열심히 섬기는 피스 메이커가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성장하고 있습니까? 멈추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기 위해서는 (1)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힘쓰십시오. (2)온갖 시련과 유혹을 이기십시오. (3)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행위를 나타내십시오. (4)모든 성도와 연합하여 충성하십시오. 그 때에 홍익교회는 그러한 성도님들을 통해서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의 일치/ 행15:1-35/ 2010-06-04
교회의 일치 행15:1-35 사도행전의 주제는 1:8절에 있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특히 한국 교회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권능’이라는 말에만 주목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권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권능은 항상 어떤 신비적인 은사의 나타남을 목표로 했던 것입니다 . 방언과 예언, 병고침 등이 성령의 역사라고 인식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이적과 표적과 기사가 가득한 책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이나, 사도행전의 교회를 본받자는 표어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기본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 이 구절에서 ‘성령의 권능’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전도에만 집중해 왔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반드시 그 최고의 목표가 전도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오직 전도와 부흥에만 매달려 왔습니다. 물론 이러한 전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을 오직 전도에만 한정시켜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권능은 교회의 일치에 그 목표가 있다고 봅니다. 모든 표적과 기사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주님께서 복음의 사역자들을 도우시고, 이방 땅으로 복음전도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핍박에도 불구하고 확장되었습니다. 이 일의 결과물이 바로 오늘 본문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하나됨, 즉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주로 교회의 일치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도행전의 복음전파를 지리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유대 땅과 이방 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대 땅에 대한 복음전초기지로써 예루살렘 교회가 그 역할을 다하고, 이방 땅에 대한, 그 중에서도 아시아와 로마의 동반구는 안디옥 교회가 복음의 전초기지로써 그 역할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두 사도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러한 전도사역을 최종 결론짓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 자신들이 이방인에게 전하였던 일을 다 보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5:12절입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이렇게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된 발단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15:1-2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안디옥교회에 일어난 일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자들이 안디옥교회에 와서 가르쳤는데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다툼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 다툼과 변론에 대하여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하자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안디옥 교회의 몇 사람을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의 사도회의가 처음 열리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전송을 받고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은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면서 그들이 전하였던 복음전파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니까 형제들이 다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바나바와 바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행한 일들을 다 고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첫 사도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예루살렘 교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일어나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15:5절입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주장이 엇갈린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엇갈린 주장에 대하여 사도회의는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였고 많은 변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토론을 많이 했었다는 겁니다. 그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7-11절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시니라.” 이러한 베드로의 의견은 다분히 고넬료를 두고 한 말입니다. 베드로도 사실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교제하는 것이 위법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에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0:28-29절입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베드로에게 보이신 환상을 통해 고넬료의 가정에서 보낸 심부름 꾼들의 초청을 받아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오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도중에 성령이 내려와 고넬료의 집에 모인 자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할례자들이 그를 향하여 비난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11:3절입니다.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습니다. 11:15-17절입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성령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이방인 사람들을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데 어찌 베드로 자신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니 이 말을 듣고 할례자들이 잠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말하기를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했습니다. 이런 결론을 내렸어도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는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것은 인정하였지만 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내려가서 자기들 주장과 생각대로 교회 사랆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베드로 사도께서는 이러한 일을 예로 들며 자기를 사도로 택하신 목적이 바로 이방인들로 복음을 믿게 하시려고 불렀으며, 성령을 주시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셨으니 누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의 주장의 핵심은 바로 9절과 11절에 있습니다. 저희 이방인들이나 우리 유대인들을 분간치 않으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나 저희가 다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서로 차이가 없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보고가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 표적과 기사들을 다 사도들과 장로들 앞에서 고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말을 마치자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인 야고보 사도가 일어나 발언을 했습니다. 그 발언은 사도 베드로의 증언이 선지자들이 증거한 말씀과 합하다고 한 것입니다. 교회의 대표인 베드로의 의견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선지자들의 말이 서로 일치한다고 하였습니다. 15:14-15절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그럼 선지자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16-18절입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이 말씀은 아모스 9:11-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윗의 집이 무너졌었는데 그 집을 다시 짓는다는 것인데 그 집을 다시 일으키는 일에 남은 자들과 이방인들이 참여하여 함께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였고 다시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남은 자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참여하여 주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 사도의 주장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옴이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야고보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성경말씀으로 그 정당성을 말했습니다. 그 후에 자기 의견을 결론으로 제시합니다. 19-2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야고보 사도는 할례를 받는 것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는 일은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면 일방적으로 바나바와 바울의 편만 옳다고 한 것인가? 아닙니다. 이방인이라도 멀리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을 멀리 하라, 음행을 멀리 하라, 목메어 죽인 것을 멀리 하라, 피를 멀리 하라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왜 이것들을 제안했는가? 21절에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의 글을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읽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던 곳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로 흩어졌던 곳들입니다. 그 곳에 회당을 만들어 안식일마다 모여 모세의 글을 읽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유대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도록 다만 몇 가지만은 하지 말라고 권한 것입니다. 절대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명령이나 헌법 조항이 아니라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4가지를 제정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그 의견이 좋다고 가결하였습니다. 22절입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교회에서 파송한 사람들을 함께 안디옥 교회로 보냈습니다. 편지를 써서 보내었는데 예루살렘 교회가 모여 결의한 내용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23-2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의 결정을 보냈는데 안디옥 교회를 가리켜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전에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파송한 것처럼 공식적으로 파송하지 않은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에 내려가 시키지 않은 말로 교회를 가르쳐 미혹하게 했다고 지적하며 이제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공식적인 사람을 파송하기를 가결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가결은 만장일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으로 인정한 사람은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편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마치 특사를 보낸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일치가결한 것을 성령이 결정한 것과 같은 권위로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28절에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말로 같은 위치에 두고 말씀합니다. 교회의 결정이 곧 성령의 결정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의견을 낸 4 가지 외에는 아무 짐도 교회에 지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이 4가지가 요긴한 것입니다. 왜 요긴한 것인가? 절대적 계명이기 때문에 요긴한 것인가? 그러한 관점이 아니라 교회가 평안함을 이루기 위해 요긴한 것입니다. 즉 교회의 일치를 위한 요긴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가결사항을 갖고 사람들을 보내어 안디옥 교회에 전하니 교회가 기뻐했습니다. 다툼과 변론 때문에 힘들어 했었는데 이제 이런 결정을 듣고 또 위로의 말을 듣고 기뻐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유다와 실라도 안디옥 교회에 얼마 동안 머물며 여러 말로 형제들을 권면하여 굳게 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다시 안디옥 교회의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문제가 끝이 난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남아 여전히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본문을 보면 교회 안에 어떤 분쟁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났을 때, 교회가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하고 처리하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어떻게 한 몸을 이루는가, 더 확대하면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가 어떻게 하나인가를 말해줍니다. 민수기 32장에도 이런 일들이 나타났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고, 이미 점령한 요단 동편의 땅이 그들이 보기에 가축을 위하여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족장들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가 가축을 먹이기에 좋은 땅이니 자기들은 요단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한 싸움에 참여할 필요가 없이 머물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모세는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고 하며, 그렇게 되면 다른 지파의 형제들이 낙심하여 요단 건너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가려는 것을 막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예전에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이스라엘 자손이 거절함으로 광야 40년 동안에 다 죽고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 남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모세는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하나님과 약속한 가나안 땅을 얻기를 거절하면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이제 다 멸망하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마음을 돌이켜 가나안 땅을 다 얻기까지 요단 동편 땅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싸움의 선봉에 서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민수기 32장도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로 한 언약을 시내산에서 맺었는데 그 언약을 지키어 함께 하는 싸움에 모든 지파가 하나가 되어 요단을 건너 가나안 정복에 나서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그 모태가 유월절에 있습니다. 유월절에 그 나라가 출생했다고 봅니다. 그럼 유월절에 그 나라의 모습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린 양의 고기를 먹음에 그 공동체의 성격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어린 양이 있으면 그 양을 먹을 가족이 세 사람만 있는데 그 고기의 양은 10인분 정도가 된다고 하면 다른 가족의 식구들을 데려다가 그 어린 양의 고기에 맞게 먹음으로 새로운 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가 나타났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공동체를 나타내는 표지는 바로 어린 양의 한 마리에 맞게 식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출애굽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로운 한 가족을 형성하였습니다. 가족이라 함은 한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는 공동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표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유월절 전날 밤에 최후의 만찬에 그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떡과 잔을 주시면서 그의 살과 피를 주심이 곧 교회의 표지입니다. 교회의 출생은 새 유월절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었지만,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하여 새 언약 공동체요, 새 생명의 공동체임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럼 이 상에 둘러앉아 함께 먹은 제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어린 양이신 주님의 몸에 참여하여 한 몸을 이룬 새로운 공동체를 나타낸 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거기에는 예수를 팔 자도 있었고, 예수를 세 번 부인할 수석 사도 베드로가 있었고, 예수님이 잡히시면 모두 도망갈 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의 공동체의 하나됨과 신약의 공동체의 하나됨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 최후만찬에서 잘 드러나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살과 피를 이 제자들을 위하여 주셨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그 하나됨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자기 몸에 연합시키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린 짐승인 양 한 마리에 함께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주님의 몸에 연합한 공동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죄의 용서가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배반하고 도망갈 자들을 위하여 ‘이것은 내 살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언약의 피’라고 하시면서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몸을 나타내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주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5장을 보십시다. 1-8절입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린도교회 안에 음행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계모를 취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음행한 당사자도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고, 그 교회 공동체도 이 일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에 대하여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라고 하며 책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하나님 보다 더 괜찮은 마음을 갖고 있는 자들이 고린도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이 음행을 그냥 넘어가시지 않는데 교회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음행을 한 당사자와 자기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는 죄를 지었을지라고 나만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 음행한 일에 대하여 사도는 교회 공동체 전체를 향하여 꾸짖고 있습니다. 교회는 새 유월절 덩어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희생이 되신 공동체입니다. 어린 양이 희생이 된 이스라엘 유월절 양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 떡 덩어리 안에 악독한 누룩이 생겨나면 온 덩어리에 퍼져 다 먹지 못하는 상한 떡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악한 누룩을 제거하지 않으면 주님이 희생이 되신 새 유월절 떡덩어리가 다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떡 덩어리를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이런 음행에 대하여 수수방관하거나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교회를 해치는 일이 됩니다. 교회는 용납되어야 할 일과 용납되지 아니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일치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한국의 기독교는 금주를 아주 거룩한 표지로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절대적인 교회의 계명은 아닙니다. 즉 술 먹으면 그리스도인 아님이라는 등식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한국 교회의 금주에 대한 엄격함은 선교상황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선교사들이 들어가면 무엇을 금지할까요? 아편입니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보니 술을 먹는 사회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조그만 위스키 잔에나 조금씩 따라 홀짝 홀짝 마시는데 한국 사람들은 어디에 따라서 마십니까? 그렇지요, 막걸리를 사발에다 부어 마십니다. 그러니 그들 눈으로 보면 한국 사회는 술에 미친 것으로 비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오늘 사도행전에서 말하듯이 예루살렘 교회가 가결한 내용은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이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전부터, 바벨론 포로 이후로부터 이방 땅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각 처에 회당을 세웠고 거기서 안식일마다 모세의 글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성경에 문안하면서 입맞추라고 하니까 우리 나라 신자들도 서로 입을 맞춘다고 하면 아마 큰 일이 벌어질 겁니다. 예수믿는 자들은 아주 문란한 자들이라고 단박에 안 믿는 사람들이 공격할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성경에 입맞추라고 명령문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게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반드시 지켜야 될 것, 그렇지 않아도 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물러서지 않으며 지켜야 할 것과 선교적인 상황과 같이 어떤 부수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율법주의에 젖어 있어요. 항상 우리의 신앙생활 기준은 해야 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양분하면서 삽니다. 먹어야 될 것,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딱 구분하는 것이 아주 옳은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찬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저희 교회가 성찬이 예배의 핵심이다라고 가르치니까 단박에 성찬 안하면 교회가 아니다 라는 것에 빠집니다. 마치 사도신경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합니다. 물론 교회에 예배가 가장 중요하고 성찬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성찬하지 않으면 교회 아님으로까지 달려가는 것은 지나치지 않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십일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입장에서 보면 십일조 헌금 항목이 없으면 진짜 교회, 십일조 헌금 항목이 있으면 가짜 교회 이렇게 나누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우리가 죄의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죄인의 본성이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자기에게 무슨 특별한 장난감이 생겨났거나, 다른 친구가 가지지 아니한 좋은 물건이 있으면 제일 먼저 하고픈 일이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 자랑을 통해서 어린 아이가 나타내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는 가지지 못했는데 나는 갖고 있다.’라는 것 아닙니까! 그리해서 자기 친구와 자신이 다름을 증명하고자 하고 자기가 친구보다 우월함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전반적인 사고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다르다는 것 아닙니까? 구속사 복음도 우리가 들으면서 뭐를 가장 드러내고 싶어 하냐면 ‘너희가 듣는 것은 가짜고 나는 진짜다.’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새로 알게 되는 일이나 물건이 전부 다른 사람과 분리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래도 자기가 가진 것으로 자랑하니 조금 낫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상대를 낮추고 비하하여 자기를 높이려는 쪽으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항상 상대방의 허물만 보이고 비판거리만 찾게 됩니다. 그런 말을 올리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 말을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새 유월절 떡 덩어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최후만찬의 식사 자리에 둘러앉은 제자들이 주님을 팔 자요, 부인할 자요, 배신할 자들인데 그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주심으로 용서의 공동체로 교회가 출생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처럼 ‘하라! 하지 말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로 주어졌습니다. 즉 계명 조차도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계명입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함에서 우리의 모든 삶의 윤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함께 하는 성령의 권능은 어떤 성령의 은사가 신비롭게 나타났는가에 그 목표가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의 권능은 복음전도가 얼마나 다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최종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선교목표도 실상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복음에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는데 유대인과 헬라인이 차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권능은 교회가 한 진리 안에서 어떻게 유월절 떡 한 덩어리를 이루는가가 그 목표요 나타남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의 형제들의 잘못을 함부로 이야기하거나 심지어 남의 잘못을 일일이 수집하러 다니기까지 한다면 이는 정말 교회도 주님도 모르는 자의 소치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이 교회를 분란에 빠지게 하고 무너지게 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을 때 어찌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그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권능으로 그냥 묵살하고 무시해도 좋을 뻔 하였을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나타났던 놀라운 이적과 표적과 기사들은 그 경험과 체험으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얼마나 큰 확신을 주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바울과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를 보자는 말입니다. 그냥 자기 생각이 맞고 자기 경험한 것이 분명하니까 더 이상 논의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결정을 내리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많습니까! 설령 자기가 본 것이 아무리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어도 교회의 결정을 따라 움직이려 한 점을 보시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이 문제를 내어놓고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추구하는 이런 모습을 교회가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안디옥 교회에 내려온 ‘어떤 사람들’을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바나바는 안디옥교회가 생겨났을 때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공식으로 파송된 자입니다. 또한 여기 예루살렘 사도회의 결정을 편지로 갖고 안디옥교회로 파송을 받은 유다와 실라도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인 권위를 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목사는 공동의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서명을 받아 청빙을 받은 자입니다. 어떻게요? 말씀을 통해 가르치고 진리로 다스리도록 청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 집사님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갑니까? 그 집사의 판단을 믿고 그것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건 아주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의 대표인 장로님을 모셨으면 그에게 이런 저런 일을 알려야 하고 당연히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기를 위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습니다. 내 마음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쁘면 모든 것이 좋지 않게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일에 매우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자기를 위한 결정을 하지 말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결정이 나와야 합니다. 그게 새 백성으로 사는 길입니다.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안디옥교회의 행보를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절대적으로 거부해야 할 할례와 율법의 가르침, 그리고 교회가 선교적인 덕을 위하여 지켜야 할 것을 결정하되 이 교회의 결정이 곧 성령의 행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권능은 그 최종 목표가 교회의 일치에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목표는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새 유월절 떡 덩어리를 만드는데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을 주셔서 여러 지체가 다르고 여러 은사가 달라도 사랑으로 서로 연합하는 복된 교회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여러분의 삶이 이처럼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주님 안에 일치됨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일을 실천하는 복된 것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교회의 일치와 평화/ 빌2:1-4/ 교회연합주일설교/ 2001-09-09
교회의 일치와 평화 빌2:1-4 오늘은 교회연합주일입니다. 해마다 9월 둘째 주일은 모든 교회들이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함께 기도드리며 예배드리는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항상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하면서 날마다 참다운 교회,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회복해 나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하나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고, 사회 모든 분야가 분열되어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기에다 교회마저도 너무 많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남북통일을 말하고, 이 사회의 화합과 평화를 외쳐본들 누가 우리들의 이러한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19세기를 선교의 세기라면, 20세기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기였습니다. 19세기에는 세계 곳곳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고 많은 민족들이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우리나라도 19세기 말에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20세기는 교회가 하나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로 1,000여년 동안 갈라져 있던 로마 카톨릭교회와 정교회가 서로 화해하였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루터교회와 카톨릭교회가 한 자리에 모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협력과 화해의 노력을 통해 새로 맞이하게 된 21세기는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세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1. 하나가 되라 사도 바울은 빌리보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가 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제2차 세계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이방여인 루디아의 집에서 유럽최초의 교회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교회에 대해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인들도 바울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그의 선교사업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생명이 어떻게 될까하는 것과 이 일로 인하여 복음의 문이 닫히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감옥에 갇힌 사건을 통해서 오히려 더 많은 열매가 맺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2장의 말씀은 교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본문 말씀은 교회나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여러 가지 훌륭한 점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4장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여인은 빌립보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서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 어떤 인간관계의 위기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빌립보교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교회들마다 한 하나님, 한 교회를 섬기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밖에 있는 저 많은 교회들은 주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도 주안에서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 하나되는 네 가지 원리 1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가 되기 위한 네 가지 원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권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훈하고 경고할 뿐만 아니라, 위로하고 격려하여, 믿음이 연약하거나 시험에 든 성도들을 굳게 서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권면은 성도들이 하나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둘째로, 위로입니다. \"사랑의 무슨 위로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하여 항상 베푸시는 사랑의 격려에 힘입어 영육간의 고난과 좌절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고통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 이러한 위로는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사단의 세력을 이기게 하는 요소입니다. 셋째로, 교제입니다. \"성령의 무슨 교제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인 성도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유익하게 하는 상호의존적인 삶, 곧 성령의 인도에 순종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는 공동체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제를 위해서는 성령과의 깊은 교제를 가져야 하며 그 가운데서 맺는 성령의 열매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로, 긍휼과 자비입니다.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성도들 사이에 가져야 할 인격적 자세로서 주님을 위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긍휼은 전 인격을 동반한 사랑의 관심과 도움을 말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연민을 가지고 연약한 자에 대해서 베푸는 은혜로운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랑에 넘치는 긍휼과 자비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되는 네 가지 원리를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것은 모두 이웃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권면이나 위로나 교제 그리고 긍휼과 자비 등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되는 원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3. 구체적으로 실천 할 일 1절에서 하나되는 4가지 원리를 가르친 다음에 2-4절에서는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할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다. 2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반복적 권면을 해 주고 있는데 이 말씀은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마음을 합하라는 것입니다. 목표가 하나이면 마음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목표가 하나인데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생각과 목표를 가지고 마음이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보다 이웃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부정적인 선언이 나오는데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다툼이나 허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투는 일을 잘하고,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의 명예를 목표로 하는 허세나 야망을 가질 때 무서운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심에서 나오는 이러한 다툼이나 허영 대신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치와 소중함을 깨닫게 되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살게 됩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이웃들의 일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출발입니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갈 때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어 느낄 수 있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크고 높은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훼퍼는 예수님을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처럼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돌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교회가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가 되기 위해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일들은 모두가 이웃과 관계된 것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며 섬길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으로 받는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생활이 깨끗하고 덕스러워서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천사들까지도 감동하였습니다. 한 천사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자 찾아갔습니다. 듣던대로 훌륭했습니다. 그 천사는 성자에게 무엇인가 선물하고자 제안했습니다. \"당신이 기도하면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해 주겠다\"고 하자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므로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기도하면 죄인이 회개하는 은혜를 주겠다\"고 하자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역시 거절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은혜를 구하는가\"하고 묻자 \"세상에 사는 동안 죄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섬기며 살아갈 때 교회가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연합주일을 맞이하여 \"하나가 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겸허한 심정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요소는 권면과 위로와 교제와 긍휼과 자비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세 가지를 다시 한번 마음에 다짐하십시다. 우리들이 마음을 같이 해야 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야 할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지 못하고 분열을 계속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빌2:5) 교회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직장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나라가 하나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되는 일에 힘씁시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는 바울의 말씀대로 하나되는 일을 위해 노력합시다.
교회의 협력과 연합/요17:20-26
교회의 협력과 연합/요17:20-26 2004-02-03 21:34:12 read : 234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야 하며, 그래서 세상을 복음화 할 수 있다. 우리 영락교회는 4대 신앙지도 원 칙이 있습니다. 제가 이 4대 신앙원 칙을 하나하나 설교를 하고 있습니 다. 그 첫번째는 복음주의 신앙입니 다. 복음주의 신앙이라는 것은 성경 중심의 신앙, 또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입니다. 두번째는 청교도적인 생활입니다. 성서적 생활윤리의 훈 련,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청 교도적인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거 듭난 자의 삶, 그래서 성결하고 진 실하고 근면하고 절제하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오늘은 그 세번째로 에큐 메니칼 정신입니다. 교회연합 정신 의 구현, 이렇게 또 표현할 수가 있 습니다. 첫번째가 신앙이고 두번째 가 생활이라면 세번째 이 에큐메니 칼 정신은 성도와 성도간의 관계, 교회와 교회간의 관계, 그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 연합 정신, 에큐메니칼 정신에 관해 서 성경말씀은 그 연합의 기초를 우 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가. 연합의 기초 (21a, 22, 2 3)1. 연합의 기초와 모범 삼위 일체 1)본문 21절 말씀은, 아버지 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 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 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이시니라 그 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조금 전에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우 리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만 그 사 도신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 세분이 한 분 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부 와 성자, 성령 세분은 각각 다 독자 적인 인격을 가진 분이시고 각각 독 특한 역할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런 데 각각 독립적인 세분이 서로 원숙 한 사랑으로 깊이 교제함으로써 성 숙한 관계를 형성해서 하나가 되었 다는 말씀이지요. 그게 삼위일체입 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 시는데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면 구원하시겠다고 믿고 그 아들을 전 폭적으로 신뢰해서 우리 사람들 가 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이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구원을 하신 것이지요 성자 예수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셨습니 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입 고 이 땅에 오시기까지 순종하시구 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했습니 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 신 것이지요. 성자 예수그리스도는 또 제자들과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들과 모든 사역을 다 성령 하나님께 맡기셨습 니다. 이렇게 세분은 사랑으로 교제하고 성숙한 관계를 이루면서 하나가 되 어서 완벽하게 사역을 감당하십니 다. 세분 사이에는 무슨 이기적인 사랑이라든지 교만이라든지 그런 것 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세분 사이에는 사랑, 존중, 겸손 이 모든 것들을 통한 교제를 통해서 완벽하 게 하나가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서 그렇게 완전하게 하나가 되셨는 데, 그렇게 모범을 보이셨는데, 그 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대로 우 리 성도님들도 그렇게 하나가 되어 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2) 여러분 우리는 예수그리스 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 으신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 시는지 그런 것들을 보았습니다. 경 험을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운데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삶을 살도록 하심을 통해서, 그 세분이 우리 속에 어떻 게 역사하시고, 어떻게 우리가운데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지를 우리가 보고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들 이 하나가 된 것을 보고 모범과 기 초로 삼아서 이제는 우리가 사랑으 로 실천하고 성숙한 관계를 이루어 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삼위께서 하나가 된 것 같이 우리 성도들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 니다. 2. 연합의 실제 1)먼저 우리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관계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다양한 분들이 많 이 모여 있습니다.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다양 한 재능과 생각들을 가진 분들이 모 여있습니다. 다양하지만 그 다양한 사람들이 다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화평한 교회 를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우리 영 락교회가 55주년입니다만 55년동안 우리 교회가 지내면서 화평하게 지 내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얼 마나 많은 자기 주장과 자기 견해와 자기 일하는 방법을 가지고 신앙생 활을 해 왔을까요? 그런 다양한 분 들이 다 각각 자기 생각, 자기주장, 자기 견해, 자기 일하는 방법들이 다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하 나로 모아져서 화평한 교회로 죽 오 늘날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목사님께서 교회를 이끌어가 고 교회신앙을 지도하는 원칙을 화 평으로 삼았습니다. 화목한 교회. 한 목사님을 화해의 목회자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조화, 조화를 이루는 화해의 목회자. 한목사님께서는 포 용과 관용과 인내로써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영락이라는 한 그릇 속에 모아서 화평하게 하나로 만들어 이 끌어가신 것이지요. 여러가지 많은 문제들이 있을 때에 인내하면서 또 포용하면서 하나로 만들어 나갈 때 에, 어떤 때는 답답해 보이기도 합 니다. 좀 추진력있게 확 나가지 못 하고 천천히 인내하면서 하나로 만 들어 나가려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어 요? 갑갑해보이고, 일이 제대로 안 되는 것처럼 보이고 그랬을겁니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 가장 최고의 덕은 화평입니다. 여러가지 많은 일 들을 우리 교회에서 해야 하지만 그 많은 일들을 하다가 화평을 놓치면 안하니만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견해가 있습니까? 어 떤 생각이 있습니까? 어떤 주장이 있습니까? 어떤 일을 해야 되겠습니 까? 그 모든 생각과 견해와 일을 해 나가고 말을 하고 일을 추진해 나갈 때 이것이 교회의 덕이 되는구나, 이것을 통해서 교회에 화평이 되는 구나, 늘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속한 기관, 단체, 모든 곳에서, 구석구석에서 주의 일 을 감당해나가고 여러분이 가진 견 해를 피력해 나가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 영락교회가 화목하고 화평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또 교회와 교회와의 관계 에 있어서 연합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큐메니칼 정신이라고 이야 기하지요. 우리 한 목사님은 (올바 른 신앙노선, p.41 9)에큐메니칼 정 신을 협동정신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온 우주만물이 다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 그 다양한 것들이 다 모여서 조 화를 이루고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얼마나 다양 한지요.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각각 다 다른 그런 표현 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파가 다양하 고, 신조가 다양하고 교회 정치와 예배의식들이 다 다양합니다. 여러 분 이렇게 다 다양하지만,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 는 기본신앙은 다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기본신앙만 같 으면, 그 다음에 뭐 정치체제가 조 금 다르다든지, 예배의식이 조금 다 르다든지, 이런 것들은 지엽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 를 믿는 기본신앙 안에서 그 지엽적 인 모든 것들, 다른 것들을 다 멀리 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협 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우리 한목사님께서 에큐메니칼 신앙 으로 협력을 내세울 때에 그 말씀은 무슨 뜻인고 하면, 복음주의 신앙, 여러분 우리 교회 신앙지도원칙 첫 번째가 복음주의 신앙 아닙니까? 그 복음주의 신앙을 중심으로 해서 그 것을 주체적으로 잘 붙들고 있으면 서, 그러나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 하고도 복음을 전파하는 주의 일을 위해서는 같이 협력한다는 뜻입니 다. 때로는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분들, 때로는 우리와 정치체제가 다 른 분들, 그런분들과 같이 협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 들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 진 복음주의 신앙은 버리고 다른 것 을 내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닙 니다. 내 복음주의 신앙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나 다른 신학 과 다른 정치체제와 다른 예배의식 을 가진 분들과 주의 일을 위해서 협력한다는 말씀이지요. 한 목사님이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 업할 때에, 그만 신학교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장로교회, 미국장로교 회도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주 의 신앙을 가진 분들이 그만 학교에 서 나가서 다른 신학교를 세웠습니 다. 한목사님께서 그 분열의 현장을 보면서 분명히 결심을 했다고 그럽 니다. 복음주의 신학을 가지면서도 그러나 분열은 하지 말아야되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가졌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복음주의 신앙을 분명히 가 지면서도, 다른 여러 사람들과 같이 열린 자세로 만나, 함께 협력하여 주의 일을 해나가는 것, 이것이 바 로 에큐메니칼 정신입니다. 나. 연합의 목적 (21c, 23c) 1. 믿음 위하여 이렇게 연합을 하는데, 그러면 연합 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연합을 해서 어떤 목적을 이룰까요? 21절 제일 끝의 말씀을 보면 세상으로 아 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하 옵소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가 되고 교회들 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왜 하나 가 되어야 하면,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 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세상 은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그래서 갈 라지고 깨어진 관계 때문에 너무나 심한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갈라지고 깨어진 사람들 앞 에서 교회가 하나된 모습을 보인다 는 얘기지요. 사랑으로 하나된 모습 을 보이게 되면 그분들이 우리 성도 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예 수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고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도와 교회들이 깨 어지고 분열하게 되면 전도의 문을 막는 겁니다. 제가 농촌마을에 잠깐 살았는데, 자그마한 마을에 교회가 두개에요. 하나였는데 그만 갈라졌 습니다. 다 합쳐도 미자립교회인데, 다 갈라져서 미자립교회가 둘이 생 긴거예요. 그 동네에서 는 예수 믿 으라고 전도를 못합니다. 예수 믿으 라고 이야기하면 아니 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싸워서 갈라졌 는데 무슨 예수냐? 나더러 어느쪽 편에 서라는 것이냐?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못해요. 교회가 분열되면 전 도의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갈라지면서 어떻게 한국사회의 분 열, 우리 사회의 지역감정에 의한 분열, 이런 것들을 그러지 말라고 권면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 상 처를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하나가 되야, 그래야 복음전도할 자 격도 생기는 것이고 이 사회를 치유 할 능력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복음전도를 위한 연합 1)우리 한목사님은 교파를 초월하여 협력하고 연합해야 할 이 유를 두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올바 른 신앙노선 p.420) 하나는 민족전 체나 국가를 위한 봉사를 위해서이 고 두번째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협 력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협력하고 연합하면 무슨 정치적인 욕심, 교권 그런 것 때문에 하나가 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 니다. 우리 한목사님은 얼마나 직함 이 많으셨는지요, 무슨무슨 이사장, 무슨무슨 회장, 무슨무슨 총재, 감투 욕심이 많으셔서 그렇게 많이 가지 셨던 것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한 목사님을 모시고 연합사업을 많이 하시던 분들, 그 어른들 말씀을 들 어보면 한 목사님을 중심으로 세워 놓아야 그래야 많은 교회들이 모인 다는 것이지요. 다른 분을 세워 놓 으면 잘 안모인다고 그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한목사님을 그 자리에 세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목사 님을 회장으로 세우려고 하면 얼마 나 사양을 많이 하는지, 강권해서 겨우 회장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모입니까, 회장 하려고 모이는 것이 아니거든요. 회장하려 고 연합기관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 다. 오늘 우리 한목사님은 그 연합 하는 이유를 나라와 민족에 봉사하 기 위해서, 복음전파하기 위해서라 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2)이 나라와 이 민족이 어려 움에 처했을 때, 교회가 연합하여 협력하는 일들에 한목사님이 힘썼습 니다. 6.25사변 전서부터 6.25사변이 일어나가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이 굉 장히 큰 곤경에 처했을 때에 한목사 님은 교회를 전부 연합하고 조직해 서 신앙집회라든지 계몽강연이라든 지, 구호사업 이런 모든 것들을 전 개를 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움을 겪 을 때에 얼마나 많이 헌신했는지 모 릅니다. 말년에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이라는 연합기관을 만들어서 굶 주린 사람들 돕는 일들을 하셨지요. 여러분 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늘 염 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나 라 이 민족이 어려움을 겪을 때 앞 장 서서, 같이 힘을 합쳐서 봉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3)연합하는 두번째 이유는 복음전파를 위해서입니다. 우리 한 목사님이 일생동안 가장 심혈을 기 울이고 가장 애를 많이 쓰고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 교회를 같이 연합시 켜서 복음전파해서 민족복음화를 이 루는 그 일이었습니다. 일제시대를 거쳐오면서, 또 6.25사변 을 거치면서 우리 이 민족정신이 그 만 황폐화되어버리고 공백기에 접어 들고 말았습니다. 우리 민족정신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사상이나 정신이 그만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에 한목사님은 선구자였습니 다. 이 황폐된 민족정신을 기독교정 신으로 채우고 기독교정신으로 변화 시켜야되겠다, 그런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복음전파, 민족복음화를 위 해서 무진 애를 썼습니다. 영락교회만 가지고 일하기가 다 감 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 을 모아서 연합으로 전도집회를 열 었습니다. 한목사님 자신이 강사가 되기도 했고, 밥 피얼스 목사님이나 빌리그래함 목사님이나 이런 분들을 강사로 초청해서 전도집회를 하기도 하고, 남산에서, 한강 모래백사장에 서, 여의도 광장에서 여러가지 모양 으로 오랜 세월동안 전도집회를 했 습니다. 고기가 많이 모이는 곳에 그물을 쳐 야 한다고, 군복음화 하는 일들도 하시고, 학원선교 하는 일들도 하시 고, 이 모든 것들이 민족복음화를 위해서 그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1984년에는 한국기독교100주년대회 를 모든 교단과 기독교 기관들을 다 모아서 대규모집회로 진행을 했는 데, 한목사님이 일생동안 교회를 모 아가지고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파해 서 민족복음화를 이루는 일에 혼신 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전도집회를 열심히 해서 우 리 영락교회가 큰 교회가 되었는데, 우리 영락교회만 큰 교회가 된 것이 아니구요, 한목사님께서 활동하고 애를 쓰신 그 기간동안에 교회가, 한국교회가 급성장해서 많은 큰 교 회들이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예 수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영 락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에 있 는 많은 교회들이 다 한목사님께 신 세를 진 것이 많이 있다, 우리 한국 민족이 기독교정신으로 그만큼 서게 된 것은 한목사님 노력덕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합해서 복음 전파하고 교회를 하나고 모아서 민 족복음화를 이루는 일을 그렇게 열 심히 하셨습니다. 지난 연말에 한목사님이 굉장히 위 독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중환 자실에 입원을 하셨는데, 병원에서 는 가망이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물 론 그 전에 갑자기 일을 당하면 준 비해서 장례를 치룬다는 것이 너무 나 어렵기 때문에, 그래 제가 당회 를 중심으로 해서 조심스럽게 조용 히 장례를 준비하도록 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위독하고 편찮 다는 그런 통고를 받았을 때에, 이 렇게 천천히 있어서는 안되겠다, 제 마음 가운데 바쁜 생각이 들고 빨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당회원들, 은퇴원 로 장로님들, 또 총회 임원들 단계 를 거쳐서 한국교회 각 원로들을 다 모시고 의논들을 했습니다. 그 의논 을 할 때에 제 마음 가운데에는 한 목사님 장례는 그저 우리 영락교회 장례로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다 연합하는 장례로 치뤄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같이 의논을 해 나가는 가운데, 큰 원칙 두가지 원칙을 가졌습니다. 하 나는 한목사님께서 일생동안 청빈하 게 검소하게 삶을 사신 분인데, 그 분 장례를 무슨 세상 고관대작들같 이 화려하게 요란하게 해서는 안되 겠다, 검소하면서도 정중하게 장례 를 지내야되겠다는 원칙을 정했구 요, 두번째는 한국교회 전체가 다 교파와 각 기관을 망라해서 연합으 로 모여야되겠다는 것으로 원칙을 정했습니다. 한목사님께서 활동하지 못하시게 되 면서부터 한국교회 전체를 모으는 지도자가 없어서 연합사업이 굉장히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한목사님 장 례를 치루면서 많은 한국교회 기관 들이 거기에 참여를 했고, 장례예배 때 한국교회 모든 교파의, 각교단의 어른들이 다 참석해서 오래간만에 연합이 이루어지는 기회가 되었습니 다. 여러분 우리교회는 한목사님 지도를 따라서 한국 교회를 연합시키고, 한 국교회가 같이 협력하는 일에 앞장 서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해 나가야 할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입 니다. 다. 결 교회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교제와 관계를 기 초로 하고 모범으로 삼아서 우리 성 도들과 우리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이 하나가 되어서 화평해야 합니다. 각 교회들이 모여서 연합하고 협력 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가 될 때에, 복 음전도가 가능하게 되고 이 민족을 복음화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지도를 따라서 우 리 교회가 그렇게 화평한 교회가 되 었습니다. 우리교회가 한국교회의 연합과 협력을 앞장서서 이끌어 가 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이 신앙지도원 칙, 에큐메니칼 신앙이라는 신앙지 도원칙, 사랑으로 화평하고 하나가 되는 이 신앙지도원칙을 따라서 우 리 영락교회가 늘 화평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영락 교회가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연합하 고 협력하는 일들을 잘 이루어가고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롬6:3-4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롬6:3-4 2004-03-16 14:48:56 read : 144 \'자리의 철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앉을 자리가 있고 설 자리가 있습니다. 가야 할 자리가 있고 가서는 안 될 자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리를 어떻게 차지하느냐, 어디의 자리에 서느냐 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게는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 죄 가운데 살겠느냐 아니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거하리요\' 죄에 대하여 우리는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는 살 수가 없다. 바로 이것이 1절과 2절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는 말에 우리의 눈을 돌려야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하여는 더 이상 응수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죽었는데 날마다 죽노라”. 죄가 날보고 뭐라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는 반응할 수가 없다. 왜? 나는 죄에 대하여는 죽었기 때문에. 죄 가운데 나는 더 이상 거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이런 사실을 바울은 확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이미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실 때에,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 주실 때에 우리는 옛 사람에 대하여는 완전히 죽은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옛 사람에 대하여 죽은 우리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 변화된 사람이에요. 책을 집필하는 사람이 1권 그리고 2권을 따로 쓰듯이 아주 새로운 것이 출발되는, 그래서 연결이 없는, 완전히 그것과도 다른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변화된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 3절을 읽다가 보면 \'안다\'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경험이나 감정 차원이 아니라 지식 차원으로 우리가 이 진리를 알아야 된다. 바울은 여기에서 알 것을 알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너희가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을 알아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실을 확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게 되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으니 성화된 삶을 살아라. 바로 이런 말인데, 성화되려면 네가 변해야 된다. 그래서 세례의 의미를 여기에서 설명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말할 때 예배의식 중의 하나요, 교회의 의식의 하나로다가 세례를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세례교인입니다” 하나의 의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례전은 필연적인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예전에 참여를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가 하는 그런 질문에 응답을 하려고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례전에 참여함으로 인해서 공적인 고백을 하게 되지요. \"당신은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보시겠습니까?\", \"아멘!\" 하고 많은 성도들 앞에서 공적인 고백, 그것이 세례를 받는 일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례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밥토\', \'밥토\'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잠긴다, 물 속에 담근다, 적신다\' 그래서 침례교인들은 세례를 받으려면 물 속에 푹 들어갔다 와야 된다고 그렇게 설명을 해요. 우리 장로교회에서는 스프린클(sprinkle)입니다. 물을 뿌리는 거예요. 물을 뿌리는 것으로 세례를 주는데, 세례의 본 의미는 잠근다, 그런 말이에요. 담긴다, 물 속에 빠지는 것, 적시는 것. \'밥티조\'라는 말은 \'물에 잠기다, 물에 씻기운다\'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은, \'밥티조\'라는 이 말은 성경에 나와 있지마는, B.C. 400년부터 A.D.200년 사이에 한 600년 동안 이 \'밥티조\'라는 말은 \'자리를 바꾸는 것\'으로 사용한 단어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조세푸스라고 하는 유대인 역사가가 쓴 글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과 파괴된 도성으로 밀물듯이 군중들이 몰려온다, 그 \'밀물듯이 몰려온다\'는 이 단어를 \'밥티조\'라는 단어로 썼어요. 잘 들어보세요. \'밀물듯이 몰려온다\' 그것이 \'밥티조\'그것이 세례라는 단어로 그렇게 쓴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세례라는 단어를 \'옷에 물감을 들인다\', 흰 천에다가 빨간 물감을 들여서 빨간 천으로 옷을 해 입었다 그 말이에요. 푸른 천으로 옷을 지어 입는 거예요. 물감을 들이는 것. 또 다른 의미로는 \'술을 마시는 것\'. 술 마시는 것을 \'밥티조\'라 그랬다 말이에요. 그것을 세례라고 그랬어요. 여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물밀듯이 밀려온다, 물입니다. 옷감에 물을 들인다, 액체예요. 술을 마신다, 역시 액체입니다. 여기 공통점은 액체입니다. 여기서 이 말은 액체가 공통점이나, 여기 핵심은 무엇인고 하니 \'변한다\' 그 말이에요. 변화시키는 것, 상황을 변화시키고, 색깔을 변화시키고, 술 취한 사람은 사람이 변하는 거예요. 이 변하는 것이 여기에 공통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은 파괴되었고, 물감의 옷은 색이 변했고, 술을 마신 자는 그 행동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밥티조\'라는 이 세례를 베푼다, 세례를 준다, 세례를 받는다는 이 말은 변한다는 말이에요. 물 속에 잠겼느냐, 스프린클 해서 뿌렸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변했느냐, 세례 받고 내가 변했느냐, 이 변한 것이 중요하다 그 말이에요. 김치를 담글 때에 배추를 소금에 잠그지요. 담그는 거예요. 잠가 두면은 더 이상 배추의 맛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맛으로 변질이 되지요. 변하는 겁니다. 일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 맛은 전혀 다른 것으로 영구히 변합니다. 세례의 의미는 잠근다는 뜻으로만 이해하지를 말고 변했느냐, 변한 것이 그것이 세례다. 나는 세례를 받았다 하는 말은 무엇이 변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느냐 세상에 속했느냐. 그러니까 세례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거예요.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1절로 2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인을 시켜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것은 물 속에 빠진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애굽 군인들은 물에 빠졌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은 발도 젖지 않은 채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이들이 지금 달라진 것은 애굽 바로에게 속했던 이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세에게 속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바로에게 속했던 이들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음으로 인하여 모세에게 속하는 사람으로 변질이 되었다. 변화를 받은 것을 여기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세례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 모세에게 속한 사람은 다시 바로에게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출애굽을 한 다음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바뀌는 거예요. 변하는 겁니다.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의 목표가 달라지고 모든 삶의 방법이 달라지는 거예요. 우리는 남들이 슬퍼할 때 기뻐합니다. 남들이 기뻐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전혀 가치관이 다른 삶을 사는 거예요. 왜요? 세례를 받고 변했거든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으로 변한 겁니다. 갈라디아 3장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딸아이가 엄마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엄마 행세를 해요. 젊은 청년이 군대에 들어가서 군복을 입으면 군인으로서 엄마 앞에 와서도 \"충성!\" 하고 절을 한단 말이에요. 인사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옷을 입었느냐? 그리스도 예수로 옷을 입었다.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로 옷을 입은 사람이에요.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왜? 세례 받았기 때문에 구원이 아니라 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렇게 보니까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그러면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 했으니, 세례를 안 받으면 구원이 없는가?\' 그래서 병상세례를 요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임종도유례를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성례전에서 빼버렸어요.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세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사실은 세례는 공적인 고백이에요. 많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내 생명의 구주로 모십니다”라고 대답을 해야지,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혼자 목사 앞에서 그래 가지고 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습니다마는 그러나 죽음 전에 그에게 믿음의 확신을 넣어주기 위한 방법으로 가끔 임종식에 우리가 가서 세례를 베풀기는 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안 받았다고 해서 믿음을 가진 이가 지옥에 가느냐,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 말이에요.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세례를 받기 때문에 구원이 오는 것은 아니다. 물세례가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한편 간도는 낙원에 이를 수가 없었어야 할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례 받을 시간이 없었어요. 세례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이 세례는, 그리스도와 자신을 동일시 할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사람, 그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이 말씀이 로마서 오늘 본문 6장 3절로 4절에서 가르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과거의 삶에 대하여는 완전히 죽어야 된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는 말은 죽음을 말합니다. 옛 사람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옛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는 한 그는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4절에서 \'이미 나는 죽었고 장사되었다\' 그랬어요. 이미 죽은 자예요. 그리고 장사된 자입니다. 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지마는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옛 사람은 죽은 거예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존재라 그 말이에요. 그리고 새롭게 장사되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죄 안에 거할 수 있겠느냐\' 죄 안에 살 수가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야 될 우리가 아닌가, 여기 죽으심과 장사지냄과 부활과 합하여 우리도 그러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말은 그건 좀 힘든 표현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같이‘ 4절 말씀입니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니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절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 이다. 여기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자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그와 함께 장례식을 했다 그 말이에요. 여러분, 죽은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날 수도 있지요, 깨어날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장례식 하기 전까지. 장례식을 한 다음에 무덤에 묻힌 다음에는 무덤 열고 나온 사람은 없어요. 흙으로 다 덮어놓았는데 그 다음에는 아마 목숨이 어느 정도 있다 하더라도 죽고 말 거예요. 그러니까 장례지냈다 그 말은 죽은 자의 매장을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례를 매장, 장례지냈다 그 말입니다. 완전히 매장을 시킨 거예요. 옛 사람은 세례를 통하여 완전히 매장을 시켰어요. 다시 살아날 수 없도록 해 버린 거예요. 죄에 대하여는 완전히 죽은 것을 말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과 승천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매장당하는 일까지도 함께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다.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자는 그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된 자이다. 죽기 위해서 장사지내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장사하는 것이지요. 죽었기 때문에 땅에 묻는 것입니다. 장사 지내는 것은 죽은 자를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떼어놓는 것입니다. 땅에다가 묻어 버린다 그 말이에요. 죽은 자의 시체가 매장되기까지 아직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살아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땅 속에 시체가 매장되어 흙이 덮였을 때에는 이 세상의 영역에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지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죄와 죽음의 다스림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통치에로 옮겨지는 마지막 단계로 장사되어 진 바 되었다고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반복하여 강조한 바울은, 죽었을 뿐만 아니라 매장되었다, 장사지낸 바 되었다. 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죄로 다시 돌아가기란 묻힌 시체를 다시 파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 받은 사람, 다시는 죄의 물을 먹지 않고, 죄에 감염되지도 않고, 죄에 끌려가지도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복을 누리시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 멘
그리스도와 연합/롬6:1-11
그리스도와 연합/롬6:1-11 2001-11-28 18:40:44 read : 59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본질과 그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끈질기게 말해왔습니다. \" 구원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차라리 예수를 안 믿었으면, 내가 그렇게 죄인이라고 하는 것조차 잘 모를텐데, 말씀을 알고 나니 어쩌면 그렇게 큰 죄인인지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냥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겠는가 ? 그래서 바울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을 줄 알면서 이런 말까지 합니다. 5장 20절에 \" . .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율법이 너희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지 ?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인줄 알겠지 ? 하지만 걱정하지마. 진정으로 깨닫는 다면, 오히려 큰 죄를 깨달음이 더욱 은혜를 감격하게 하는 법이니까 ? 바울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6장으로부터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축복과 생명에 대해서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특권과 직결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연합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이 연합되었으면, 그리스도가 무너지기 전에는 무너질 수 없고, 그리스도가 이르는 영광에 우리도 반드시 이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이요 특권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연합이 단지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이라는 양극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단지 죽음에만 연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활에만 연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와 영광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멸류관도 없다. 우리가 십자가에 동참함으로 영광에도 이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한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산에 들어갔다가 산불을 만났습니다. 멀리서부터 자신을 포위하고 타들어 오는 산불에 그는 꼼짝없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궁리를 하다가 주머니에 성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가 있는 자리에다 불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불이 탄 자리에 들어 선 것입니다. 그 불이 점점 퍼져나가다가 포위에서 오던 불과 만나게 되니까 더 이상 산불이 타들어 오지 못한 것입니다. 왜 ? 이미 탈것이 다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 가운데서 죽음을 이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했을 때, 그것이 단회적인 사건, 즉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때, 모든 인생이 거기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또한 사람의 아담, 즉 두 번째 아담이 십자가에 달릴 때, 모든 사람이 또한 함께 달린 것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첫 번째 범죄의 순간에는 그야말로 인생 모두, 아무도 예외일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린 구속은 그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 국한 되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암송하고 있는 요 5 : 24절의 말씀 \"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릴 때 우리도 달린 것입니다. 그분은 비록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의 죄를 안고 저주 받은 자가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 2 : 20절 말씀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말씀이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육체의 죽음이상으로 잘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고 고백하면서 살아있는 것 때문이요, 그 죽음의 의미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인데,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죽었다는 것인가 ? 하는 생각을 갖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 당장 죽지 않고,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죽는다고 해서, 안죽는 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살이의 죽음을 놓고 그가 수명만큼 살다가 자연사를 했든지, 아니면, 달리는 자동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로 죽었든지 그 죽음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 어차피 하루를 보내기 전에 모두 죽는데 말입니다. 아담의 죄가 그 피에 흐르는 자는 모두 죽습니다. 잠깐의 시차가 있겠지만, 죽습니다. 그 시차라고 하는 것은 마치 장소가 다른 것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든지, 미국에서 죽든지 무슨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와 여기는 시차가 있습니다. 우리가 좀 더 넓은 땅에 살아서 시차가 한 백년쯤 차이나는 곳에서 살면, 그냥 다른 장소에서 죽는다는 정도의 의미가 오늘 우리가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 그래서 그 죽음에 연합한다는 것, 우리의 영원한 사망이 거기에 달린다는 것이요, 그 원인이 되는 죄가 그곳에서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의심합니다. 정말 그곳에서 우리의 죄와 사망이 해결되었는가 ? 그러나 여러분 그 증거를 내 안에 찾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죄에 대해서 죽으셨습니까 ? 그렇다면 나의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죄를 짓는데 어떻게 죽었다고 할 수 있느냐 ?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민봉기 형제가 요리 잘하는 장어, 장어 대가리 잘라 놓으면 몸통이 꿈틀거립니까 ? 안 꿈틀거립니까 ? 사람들은 어 ! 이게 머리를 잘랐는데도 살았네 ! 라고 하지만, 살았습니까 ? 글쎄 그것을 살았다고 표현하든지 죽었다고 표현하든지,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 사람이 사고로 인해서 다리나 팔을 절단했을 때, 그 없어진 부분에 통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발을 잘랐는데, 발가락이 가렵다거나 아프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의 죄를 지고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죄와 사망이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지으면서 살아온 죄 값을 지불하셨다면, 우리가 앞으로 지을 죄까지 이미 선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죽음에 연합한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법괘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에 발을 들여놓을 때, 물이 갈라졌고, 그 물 가운데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습니다. 그리고 제자장들이 강에서 나오자 그물이 다시 합쳐져서 아무도 건널 수 없었습니다. 요단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죽음에 발을 들여놓을 때,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요단 즉 죽음의 가운데 버티고 있을 때,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요단 가운데, 예수께서 계실 때,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사망 가운데 버티고 있을 때, 우리가 사망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자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 말씀을 우리가 잘 암송하고 있습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도다 \" 아무리 멋지게 죽었어도, 아무리 장렬하게 전사했어도, 부활이 없으면 얼마나 허망한 일이겠습니까 ?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까 ? 그렇다면 반드시 그분과 함께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이나 후이나 여전히 같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러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 5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저는 본받는 다는 말을 의미 있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이 단지, 내가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어떤 한 사람을 부활하게 한 게 아닙니다. 그 한 분으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이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 12장 24절의 말씀과 같이 \"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하셨는데,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를 본받는 다고 하는 것은 단지 나 하나의 부활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짐으로 수많은 부활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죽지 못해서 부활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남이 욕하는 것에 대해서 죽을 수 있으면,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고, 책망에 대해서 죽을 수 있으면 바른 길에서 떠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칭찬에 대해서 죽을 수 있으면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비방에 대해서 죽을 수 있으면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부활하는 것이요.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는 길입니다. 고린도 후서 4장 10 -12 절 말씀, \"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 우리가 많이 죽을수록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부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우리는 사망의 그늘을 벗어난 생명을 삶을 열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산 새 생명들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가면 그것을 선언합니다.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으리요 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끊으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축복에서 끊으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확신에서 끊으리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 어떤 세력도 이것만큼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려서도 안되고 굶겨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와 떨어질래 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와 연합한자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음에 연합하고, 그와 더불어 부활에 연합한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 죄는 이미 머리가 잘렸습니다. 그 몸짓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십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되십시다. 내가 죽어 예수의 영광이 나타나는 일이면 그 일을 행합시다. 내가 죽어서 생명의 많은 열매들이 맺게 된다면 우리 그렇게 사십시다. 이런 인생들에게 어떤 축복과 특권이 주어졌는지 우리 계속해서 로마서를 통해서 은혜를 누립시다. 오늘은 우리 예수와 함께 죽음에 연합된 자요, 예수와 함께 부활에 연합된 자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증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롬6:1-14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롬6:1-14 2008-06-09 16:53:01 read : 114 어제 전철을 타고 한일병원에 심방을 가는 중에 어떤 분이 종이 한 장씩 나눠 주는 것을 받았습니다. 전철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받더라고요. 거부감없이 받아서 어떤 사람들은 읽어 보기도 했습니다. 저도 뭔가 하고 봤더니 ‘기’에 대한 광고더라고요. “기란 생명입니다.” “기는 사람의 생명을 탄생케 하고 유지하게 하는 거대한 우주의 생명력이며 근본적인 에너지입니다.” “사람이 있기에 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기가 있기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생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병은 기가 막히고, 기가 부족해서, 기가 오염되어 생깁니다. 따라서 막힌 기공을 풀어주고 부족한 기를 보충해 주고 오염된 기를 제거해 주면 모든 병은 사라지고 기쁜한 몸, 상쾌한 기분, 아름답고 젊어집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기는 만물을 만드는 근원, 즉 모든 만물들은 기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는 모든 생명의 근원, 기는 만물의 근원이고 우주 운행질서의 원리, 기는 사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거나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하는 기에 대한 근본은 뉴에이지 사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범신론 사상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평범성을 벗어나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사상들은 창세기3장 4-5절에 있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단의 유혹에서 온 것입니다. 이 달콤한 사단의 거짓말이 뉴에이지 운동의 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즘은 이런 사상들이 일상생활속 깊이 가면을 쓰고 비밀스럽게 들어 와있습니다. 스트레스 감소한다는 ‘기 치료’, ‘마인드콘트롤’, ‘요가’ 및 ‘각종 명상들’ . . 이런 것들의 깊은 곳에 들어가면 뉴에이지의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상상력을 사용하여 마음속에 무엇을 그려봄으로써 자신의 삶을 바꾸거나 몸안의 병을 고치고 정신적 치료를 하며 부와 성공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마인드콘트롤’이라는 기법을 통해서 명상을 하게 합니다. 그 훈련과정에서 마귀가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기 위한 명상을 하게 한다고 합니다. 요가는 ‘함께 묶는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요가의 실제적인 목적은 마음을 비우고서, 신체의 모든 움직임을 중지하고 이 세상의 모든 감정들을 끊어버린 뒤 힌두교의 브라만 곧 신과의 연합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요가를 수행함으로써 마음이 비워지고 ‘프라나’라고 하는 몸안에 흘러야만 하는 중요한 에너지의 흐름이 용이하게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사실 영을 의미하며 엄밀히 말하면 마귀의 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가 들어와 공중투시 같은 영계에서의 여러가지 경험들을 선물로 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혼과 영을 ‘함께 묶는’고리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왜 사람들이 전도지는 안받을려고 하는데 이런 ‘기’에 대한 광고는 받아서 읽을려고 할까요?그 이유는 한 마디로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부담스럽게 생각합니까?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을 싫어하고 전도지를 받기를 싫어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설교도 싫어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합니다. 반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죄인”이라 부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죄의 종이 되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모두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싶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누가 죄를 짓고 싶어서 짓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본래 본성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노예가 되어서 죄가 이끄는 대로 힘없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죄의 바이러스에 걸린 것입니다. 죄는 감기와 비슷합니다. 감기를 우습게 보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감기는 모든 질병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죄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단 사람 속에 들어가 죄에 전염되면 영적 system이 완전히 떨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싫어지고, 예배드리기 싫어지고, 말씀읽기 싫어지고, 사람 만나기도 귀찮고, 만사에 신경질이 나고, 의욕이 떨어집니다. 사탄의 마술에 한 번 걸려들면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마약에 빠진 사람처럼 . . . 성경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자유, 의와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과 의욕을 뺏아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2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찬송202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놀라운 능력이로다. . . .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이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라면 오늘 말씀에서 그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1. 은혜를 남용하지 말라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은헤의 종교입니다.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하나님의 은혜는 넘쳐 흐릅니다. 그렇다고 그 은혜를 오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6장은 전체적으로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도는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은 롬5:20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에 대한 잘못된 남용, 오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죄를 많이 지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다라고 할 때 그렇다면 우리가 더 죄를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나님의 은혜를 오용하려는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 여기 줄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줄은 하나님 손에 붙들려 있는 우리를 가리킵니다. 이 줄은 때로 우리의 죄로 인해 끊어져 버립니다. 정욕적인 생각과 행위로 하나님에게서 끊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 묶어주십니다. 관계가 회복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죄를 짓습니다.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지나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줄이 끊어져 버렸어요.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어 다시 묶어 주십니다. . . . 또 . . 또 끊어집니다. 끊어질 때마다 하나님이 불쌍히 보셔서 또 묶어주시고 또 묶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묶어 주실 때마다 끈은 더 짧아질 것이고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맹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죄를 더 지어야되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의 범죄를 합리화시키고 미화시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은혜의 남용입니다. 용서의 오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여러분 잘 들어 보십시오. 호주의 한 섬 감옥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한 죄수가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동료 죄수를 때려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 죄수는 시드니 본토로 보내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 죄수는 아주 솔직하고 냉담하게 진술을 했습니다. 후회의 빛도 없습니다. 피살자에 대한 원한도 없었습니다. 판사가 당황해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왜 죽인 거요? 동기가 뭐요?” 이 죄수는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자입니다. 그 섬의 감옥 생활에 이골이 나서 계속 살아 있을 이유를 전혀 못 느꼈다고 답했습니다. 판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건 다 좋소. 그러면 당신 혼자 바다에 빠져 죽든지 하지 왜 사람을 죽인거요? 왜 하필 살인을 했소?” 죄수가 답했습니다. 일말의 후회나 죄의식이 전혀 없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자살하면 바로 지옥행입니다. 하지만 살인하면 다시 시드니로 보내질 것이고, 처형 전에 신부한테 고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겁니다.” 여러분 참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남용하고 있는 전형적인 실례입니다. 혹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신다고 하시니까 이것을 이렇게 이용해 먹는다면 . . .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2. 그리스도와 연합하라.(3)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반복되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합하여’(2절에 2번) (4절에 1번) ‘함께’(4절, 6절에 한번씩, 8절에2번), ‘연합한자’(5절에 2번)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연결되어진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합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스’인데 ‘속으로, 안으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연합’이라는 말은 ‘쉼피토이’인데‘ 접붙인다 접합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주님과 함께 연합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된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가 붙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찬양나팔2집 97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손잡아 주리라 - 내가너를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여호와라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거하면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비행기? 자동차? 또는 버스?? 보디가드?? 여기 명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사실 먼 거리를 가거나 낯선 길을 갈 때에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젊고 여린 아주머니들도 장거리를 갈 때에 어린 아들이라도 함께 가면 든든하대요. 인생길은 모두 처음 가는 길입니다. 다시는 돌아설 수 없는 외길(One Way)입니다. 혼자 가기는 너무 고달프고 힘듭니다. 그러나 동행자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낯선 거리나 어려운 환경도 잘 이기며 행복하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참으로 험하고 힘들지만 가장 사랑하는 분이 동행해 주시면 행복하게 갈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아내, 남편, 친구, 돈??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해야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도, 말도, 행동도. . . 그리소도와 연합한다는 말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사는 법은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바울은 그의 고백대로 날마다 죄와 싸웠고 날마다 죽었습니다. 은혜받고 구원받은 새사람의 특징은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이제 죄에 더 이상 머물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6절). 옛사람이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종이요 그래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버렸습니다. 죄를 짓는 옛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죽을 때 날마다 산다는 것을 기억하고 날마다 죽으십시오. 3.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됩니다.(1-2, 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기왕에 세탁기에 넣을 옷이니 더러운 흙을 더 묻히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잘못 하다가는 옷을 다 버립니다. 더 큰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더 심각한 죄를 범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인격에 심각한 상처들을 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형을 마치고 감옥에서 출옥한 사람은 이제부터 죄와 상관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죄를 향해서 죽은 자라고 인정하고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우리는 용서받고도 교회안에서 미움이 그대로 남아 있고 갈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까? 자아가 아직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옛 사람의 모습이 철저하게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떤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다과를 준비해 주시기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기도 후에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을 때도 사람들의 얼굴이 뭐 씹은 느낍입니다. 나중에 담임 목사님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기도할 때 그 사람들을 치켜세워 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거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 . 자존심이 그대로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만약 결혼 첫날 밤 신부에게 이렇게 이야기 할 신랑이 있겠습니까? “당신을 정말 사랑하오. 평생 당신과 함께 살고 싶소. 하지만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소. 결혼 후 나는 다른 여자들과 사귀어도 괜찮죠? 키스 정도는 괜찮겠죠? 가끔씩 바람을 피워도 괜찮겠죠? 당신은 원래 용서가 많고 은혜로운 사람이니까. . . ” 이런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여러분에게 지금 주님이 말씀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정당화 합리화 시키지 마십시오. 정말 은혜받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4. 죄 싸워 이기십시오.(6) 죄는 겉으로는 황홀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허망합니다. 그 결국은 파괴요, 멸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시골에 가면 풀어 놀고 개를 먹입니다. 어떤 개는 낯선 사람이 지나가면 으르렁거리며 달려와 물려고 합니다. 그때 무서워서 달아나면 안됩니다. 달아나면 개는 더욱 신이 나서 좇아옵니다. 그 개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선 달려오는 개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가 멈추어 섭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개의 눈동자만을 째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개가 스르르 눈을 피합니다. 그리고는 꼬리를 내리고 뒤로 물러섭니다. 죄와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대면하십시오. 죄의 순간의 쾌감을 보지 마시고, 순간의 황홀함을 보지 마시고 . . . 죄의 결과를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죄의 결과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죄는 우리를 파괴합니다. 죽입니다. 멸망시킵니다. 죄를 지을 때의 쾌감만 생각하지 마시고 죄 때문에 올 결과들을 생각하면서 정면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대로 물러서지 않을 때는 가만히 개처럼 엎드리면 됩니다. 낮은 포복 자세로 허점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공격의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즘되면 아무리 사나운 개라도 싸우기를 포기하고 물러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과 죄의 공격에 허점을 보이지 않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엎드려 기도할 때 사탄과 죄는 달아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엎드려서 개를 응시하고 있는 데도 개가 꿈쩍도 하지 않을 때 남은 한 단계가 있습니다. 가만히 손을 뻗어서 옆에 있는 돌이나 나무 막대기를 손에 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개를 향하여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는 부리나케 달아나고 맙니다. 죄와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격용 무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격용 무기는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와 죄를 대적하면 마귀와 죄는 달아납니다. 죄와의 싸움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손이 죄를 범하면 그 손을 잘라버리라고 . . . 눈이 죄를 범하면 눈을 빼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죄와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4.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헌신하며 삽니다. (12-14)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 중의 하나는 여러분의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를 이루는 병기로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주께서 값을 치루고 사신 몸입니다. 이제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13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우리의 몸을 거룩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라고 합니다. 우리 옛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불의의 병기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 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탄을 즐겁게 해주며 살았으나 예수를 구주로 섬기면서는 이젠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살아가는 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의의 병기로 드려지지 않으면 죄의 병기로 드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불의의 병기로 쓰임받는 것은 가만히만 있어도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바빠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우리를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고 맙니다. 영적 세계에서는 중간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목숨걸고 싸우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며 나가는 사람은 눈으로 보기에는 실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마귀와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됩니다. 코피가 납니다. 그러나 진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언제나 바빠야 합니다. 주의 일 때문에 바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한가할 대 마귀는 우리를 불의 의 도구로 삼아 버립니다. 본래 할일 없는 사람들이 잘 아픕니다. 그리고 정신병도 잘 걸립니다. 바쁜 사람은 아플 새도 없고 정신병 걸릴 틈도 없습니다. 최근 즐어와서 우울증 환자가 많이 생깁니다. 과거에 밥먹고 살기 힘들 때는 우울증환자 없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말만 많이 하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종의 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질병입니다. 사단의 병에 걸린 사람들 . . 본래 충성된 사람은 말이 없거든요. 묵묵히 일합니다. 우리의 몸의 지체를 마귀가 쓰는 도구로 바치지 말고 하나님이 쓰시는 병기로 멋지게 쓰여지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예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리라는 각오를 오늘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필립 브룩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안락한 삶을 구하지 말고 강한 자가 되기를 기도하라.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 George Whitefild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는 닳아 없어지고 싶다.”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 롬6:1-11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 롬6:1-11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비행기, 자동차, 또는 버스가 좋다고 말씀할 수가 있습니다. 명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사실 먼 거리를 가거나 낯선 길을 갈 때에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인생 길은 모두 처음 가는 길이며 다시는 돌아설 수 없는 외길(One Way)입니다. 혼자 가기는 너무 고달프고 힘듭니다. 그러나 동행자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낯선 거리나 어려운 환경도 잘 이기며 행복하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도 종종 험하고 거칠 때가 있지만, 가장 사랑하는 분이 동행해 주시면 행복하게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나와 동행해주시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 동행은 부부가 같이 가는 것 보다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도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만 사랑하는 주님은 전혀 시공간이 제약을 받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깊은 연합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어떤 중심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까? 합하여 라는 말이 나옵니다. (2절2번) (4절 1번) 함께 라는 말이 나옵니다. (4절) (6절) (8절2번) 연합한자 라는 말이 나옵니다. (5절2번) 이 말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연결되어진 삶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연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건이 나의 죽음의 사건이고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이 나의 부활의 사건이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합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스라는 말인데 속으로 안으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연합이라는 말은 쉼피토이 라는 말인 되 접붙인다 접합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된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요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이루어 진 것을 말합니다. 물고기가 물과 연합되어진 것보다 더 깊은 연합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는 것처럼 우리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수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 것을 불과 쇠 덩이를 말합니다. 쇠가 불에 들어가면 불과 쇠 덩이가 연합되어 벌겋게 한 몸이 되어지는 것처럼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과 소금을 비유로 합니다. 소금은 예수님이고 맹물은 우리들입니다. 맹물 에 소금이 들어오면 짠물이 되는 것처럼 맹물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짠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와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과 연합하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죄를 이기고 올바르게 살아갈 있을 것인가를 오늘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죄 가운데 살수 없습니다 0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0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면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5장 20절에서 소중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은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대단히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씀을 편중된 시각으로 보면 \'이제부터 죄짓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했잖아.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 죄짓는 거라면 나쁜 것이 아니야.\' 이렇게 오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러시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로마노프 가의 라스푸틴 종교보좌관은 왕가의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보통 죄인이 되면 하나님께 보통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큰 죄인이 되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속 반복하여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제정 러시아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막기 위해 6장을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1절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죄에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 또는 죄를 끊지 못한다, 혹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은혜를 더 받기 위해 계속 죄를 지어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2절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것은 무섭게 칼로 자르듯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배구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토스해서 떨어지는 공을 스파이크 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니까, 그러면 은혜를 넘치게 하기 위해 죄에 거하겠느냐고 토스를 합니다. 바울 사도가 토스된 공을 스파이크 하면서 \"그럴 수 없느니라\"할 때 이것을 받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헬라어 표현에서 이것(메 게노이토)은 가장 강력한 부정을 말하고 있습니다.(3:4,6,31; 6:15; 7:7,13; 9:14; 11:1,11) \"우리가 죄에 거하겠느뇨?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것이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대단히 강한 어투입니다. 일종의 막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둬!\' 라는 식의 말입니다. 진리를 오해하고 악용하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렇게 강경하게 단호하나 어조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우리 또한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때문에 죽으시기까지 했는데 죄에 거할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너 역시 그때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힘이 무력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리자 우리는 죄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죄의 힘이 통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자유 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런 내가 또다시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 죄를 짓는 다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왕에 세탁기에 넣을 옷이니 더러운 흙을 더 묻히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잘못 하다가는 옷을 다 버립니다. 더 큰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더 심각한 죄를 범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인격에 심각한 상처들을 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형을 마치고 감옥에서 출옥한 사람은 그 교도소에 미련을 둘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죄용서 받은 사람은 이제부터 죄와 상관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죄를 향해서 죽은 자라고 인정하고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왜 믿는 교인들 가운데 갈등이 있고, 싸움이 있고, 잡음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모두 자기들이 너무 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옛 사람의 모습이 철저하게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지 않은 사람일수록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잘합니다.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열심히 출석하고 봉사도 할 테니 제발 내 육신만은 죽이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가끔은 자존심도 세워 주면서 설교해 주세요.\" 목사님 한 분이 어떤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다과를 준비해 주시기에 대표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기도 후에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을 때도 말을 건네 오는 성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돌아올 때 그 교회 담임 목사님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대답인즉, 기도할 때 그들을 치켜세워 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거랍니다. 어떤 집에 심방을 갔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죄에 대하여 설교를 하는데 안주인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더니 \"목사님, 저도 다 압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교회를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난 구석이 한군데도 없다고 고백할 때 비로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틀려도 나만큼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한 것을 믿는 사람은 결코 자아가 튀어 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깊이 깨닫고 경험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곽선희목사님이 신학대학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제자들과 악수를 하며 졸업을 축하하는데, 한 졸업생이 유난히 많이 울고 있었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 왜 우는지 물었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오늘이 나의 청춘 매장식입니다.\"하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런 자세로 살기만 한다면 그는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2. 새 생명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0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0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우리 죽은 몸도 다시 살아나서 새 생명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을 알고 세례를 받는 자는 새 생명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어느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일흔 살쯤 되어 보이는 노인으로서 온화하고 덕이 있어 보였습니다. \"노인 어른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물었습니다. \"나는 올해 세 살이오\" \"아니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 호적상의 나이는 일흔입니다만 그 동안 헛되게 살았소. 예수 믿고 참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3년 전에 세례를 받았소.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나이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고 있으니 양해하여 주시오\" 이 나그네는 노인의 대답을 통해서 세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면 새 생명을 얻게 되었는데 우리의 삶에 전혀 새로운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라고 칭합니다.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창설되었습니다. 날이 새면 교회간에, 교파간에 티격태격했는데, 그런 교회들이 좌우간 일단 한데 모여서 하나가 되자,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한데 모이게 되었습니다. WCC대회를 열 때에 개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이어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이 장례식은 아주 드라마틱한 행사였습니다. 장례식을 할 때 서양 사람들은 위오윙이라고 해서 관을 열어놓고 한 사람 한 사람 차례차례 지나가면서 그 관을 한 번씩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고 \'그 동안 내게 베푸신 사랑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 동안 사랑 많이 받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하고 한마디씩 인사말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 날도 이제 대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위오윙을 하게 되었습니다. 관속에 시체는 없습니다. 다만 관 바닥에 거울을 깔아놓았어요. 그러니 관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갔던 것입니다. 죽어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다 관에 들어갈 자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랄프 윈터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참 기발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세례\'에 관해서도 그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세례를 줄 때에 물로 할 것이 아니라, 사람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관을 갖다놓고 그 관속에다 사람을 한 번씩 집어넣어야 될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관속에다 사람을 집어넣고 꽝하고 닫은 다음에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일어나라\"하면 벌떡 일어나고...... \'옛사람은 관속에 죽었다\'하는 뜻으로 말입니다. 나의 과거는 죽었고 내가 이제 새 생명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한때 북한에서는 남한에 간첩을 많이 남파시켰습니다. 그들이 북한의 간첩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남한에 적이며,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자라도 경찰서 앞을 편한 마음으로 지날 수가 없었고, 자유의 나라에 살면서도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체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일부는 한국에 자수하여 새 삶을 찾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단 자수해서 용서를 받았으면 이제 위험이 있기는 해도, 자유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전히 북한과 은밀하게 교신하며 간첩처럼 산다면 그는 자수한 자가 아니라 이중간첩입니다. 옛날에 이 수근씨가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옛 사람은 십자가에 완전히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이제는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며 그 새 신분으로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죄 된 삶을 끊고 술과 담배 등을 끊고 성경을 손에 들고 예배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3.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아야 합니다. 0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0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0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보면 죄에서 죽었지만 실제적인 삶을 보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로이드 존즈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 개의 밭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단이 주장하는 밭이고, 하나는 하나님이 주장하는 밭입니다. 그 두 밭 사이는 길 하나의 차이입니다. 옛날에는 사단의 밭에서 쟁기로 밭을 갈기도 하고 김을 매기도 하고 씨를 뿌리기도 하고, 추수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다른 쪽 밭에서 죽었기에, 하나님의 밭으로 왔습니다. 그 사이가 길 하나 차이이기에, 저쪽 밭에 있는 주인이 가끔 이쪽으로 소리를 질러댑니다. \"여기 봐라!\"하고 부르면서 화려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쪽 밭에서 일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저쪽으로 바라보면 너무나 화려하여 거기로 주의가 가서, 정신도 따라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앗차! 저 주인은 내 옛 주인이지. 현재 주인은 아니야!\'하고 정신차려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가 넘어갈 뿐, 내가 사단의 밭으로 넘어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에 그대로 있으며, 다만 순간순간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때에 넘어가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옛날 통치를 받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리고 그 통치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했는데, 거기서 해방된 사람이 다시 그리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죄에게 종노릇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죄에서 벗어나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의 분명한 정체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새끼 호랑이가 엄마와 풀밭에서 재롱을 떨며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끼 호랑이가 그 어미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나 호랑이 맞아? 달리기도 못하고 토끼 한 마리도 못 잡고 사냥도 못하는 내가 호랑이 맞아?\" 어미는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낳은 새끼니까 너는 틀림없는 호랑이다\" 또 물어 봅니다. \"강아지만도 못한데 나 호랑이 맞아? 난 아무 것도 못하는데 내가 호랑이 맞아?\" 자꾸 물어보니까 화가 난 어미 호랑이가 \"야 이 개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졸지에 개새끼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못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입니다. 오늘은 보잘것없는 강아지만도 못한 거지만 이게 이제 며칠 안 돼서 산림의 왕이요, 전 짐승을 호령하는 호랑이가 될 겁니다. 지금 내가 뭔가 부족하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해서 자기 정체의식을 잊어버려 서는 안 됩니다. 나는 죄씨 집에 살다가 이제 의씨 집으로 이사온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게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4. 사망이 주장하지 못합니다. 0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0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기에 더 이상 사망이 주장하지 못합니다. 이제 나는 영원한 사망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일본의 자살 특공대인 가미가제 대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천황을 위해서 미국 군함을 향해 전투기를 몰고 충돌하여 군함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무모하게 보이는 그들의 맹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애국하는 방법은 되었어도 아까운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죽어도 값진 죽음을 선택합니다. 네팔의 어느 목사는 불교의 나라로 알았던 한국에서 기독교가 성장하면서 길에서 전도해도 말리지 않고,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모이는 대중 집회가 많다는 말을 듣고는 부러워하면서, 자기도 고국에서 맘껏 찬송을 부르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고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도 네팔에서는 전도하다 붙잡히면 투옥되고, 세례 주다 발각되면 수 년 동안 감옥에서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릎 쓰고 전도하는 사역 자들이 있는 까닭은 혹 고난이 와서 목숨을 잃어도 사망이 그를 주장할 수 없다는 부활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사망이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5.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여길지어다\"(recognize)라는 말은 여기서 \"여긴다\"는 말은 \"계산하다, 생각하다, 마음에 그리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명령형입니다. 이것은 믿으라는 말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나 체험과 상관없이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그려 넣고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값을 지불하시고 계산을 끝내셨습니다. \"여긴다\"는 말을 운동권에서 쓰는 단어 중에 \"의식화\"라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을 향한 밝은 자화상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내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의식화를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되 이 말은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을 의식화 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죄 지을 일이 생길 때, 막 성질이 나려고 할 때, \"나는 죽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의식화해야 합니다. 빅터 세리브리아코프라는 사람은 열 다섯 살 때 선생님으로부터 그가 학교를 다 마치기란 불가능한 일이므로 오히려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를 배우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후 17년 동안 빅터는 별의별 직업을 전전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서른 두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우연한 기회에 주어진 평가를 통해서 자신이 I.Q 161의 천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능아로 살아온 그에게 이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빅터는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고 천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책을 쓰고 많은 특허를 냈으며 성공적인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I.Q 132이하는 회원이 될 수 없는 국제 멘사협회의 의장이 되었습니다. 빅터를 갑자기 이와 같이 훌륭한 인물로 변화시킨 힘은 무엇인가? 빅터를 변화시킨 것은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갖게 된 막대한 자신감이었습니다. 자신은 더 이상 저능아가 아니라 천재라는 변화된 자화상이 그를 학식과 명성을 갖춘 뛰어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과거와는 다르게 바라보았을 때 그의 행동도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여기다\'라는 말씀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한 예를 들어 여러분 중에 어떤 부자 친척이 죽을 때 다른 친척이 없어서 먼 친척 뻘 되는 여러분 이름으로 800억을 예치해 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통보 받고 나서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은 그 구좌에서 한 푼도 꺼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글쎄, 한번 시험을 해 볼 수 있겠지요\"라고 한다면 은행에 가서 확인해 볼 것이고, 정말 당신 이름으로 거금이 예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신분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것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여길지어다\'라고 결론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지\' 않으면 그것이 실제로 여러분의 삶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존재이지만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늘 확인하여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매장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단번에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순종하기만 하면 새 생명 안에서 넘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인도에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마을에서 어느 종족이 싸움이 붙었는데, 그 쪽에 이상한 전투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가도 곧 다시 붙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몸이 떨어져 나가도 \"난 안 죽었다\"고 소리만 치게 되면 금방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싸움터에 나서기만 하면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의 한 아이가 그 전투사를 죽이는 비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그 괴물이 스스로 죽었다는 것을 알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전쟁터에 또 그 괴물 같은 전투사가 나타났는데 어느 군인의 칼에 목이 잘렸습니다. 그 순간 아이는 큰 소리로 \"넌 죽었다! 넌 죽었단 말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그 괴물은 \"내가 죽었다고? 그렇구나, 난 죽었구나!\"라고 하더니 죽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은 것을 인정하자 마자 정말 죽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이미 죽었다는 것을 믿고 인정할 때에 참으로 옛 사람이 죽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산 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자신이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옛 사람에 대한 사망 신고서를 내고, 새 사람에 대한 출생 신고서를 내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고 마칩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암행 순시차 나가셨다가 다리 밑에서 거지 소년을 보았는데 어쩐지 마음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거지 소년을 데리고 궁궐에 들어오셔서 만조백관 앞에 서서 \"오늘부터 이 소년을 내 아들로 삼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이제 분명한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거지는 죽었고 왕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저녁에 잘 시간이 되었는데 왕자다 막 대궐 바깥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어디 가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본래 거지라서 다리 밑에서 자야 편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신하들이 \"아닙니다. 왕자님, 왕자님이 주무실 곳이 대궐 안에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이 왕자가 다시 대궐 밖으로 달려나갑니다. 시녀들이 좇아가면서 \"왕자님 어디 가십니까?\" 라고 묻자 \"본래 거지라서 내가 세수하는 곳은 다리 밑에 있다\"고 하자 시녀들이 \"아니예요. 왕자님, 세수하실 곳이 대궐 안에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이 왕자가 왕자다운 행동이 나타나려면 거지 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아니면 왕자 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나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라 거지는 죽었고 새롭게 왕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당분간은 거지같은 행동이 계속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워낙 오랫동안 거지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음에도 죄인 같은 삶은 계속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계속 확인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하셨다면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면서 죄와 싸워서 승리하고 행복한 생애를 살아 갈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롬6:1-11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롬6:1-11 2001-10-27 05:41:18 read : 384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비행기, 자동차, 또는 버스가 좋다고 말씀할 수가 있습니다. 명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사실 먼 거리를 가거나 낯선 길을 갈 때에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인생 길은 모두 처음 가는 길이며 다시는 돌아설 수 없는 외길(One Way)입니다. 혼자 가기는 너무 고달프고 힘듭니다. 그러나 동행자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낯선 거리나 어려운 환경도 잘 이기며 행복하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길도 종종 험하고 거칠 때가 있지만, 가장 사랑하는 분이 동행해 주시면 행복하게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나와 동행해주시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이 동행은 부부가 같이 가는 것 보다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도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만 사랑하는 주님은 전혀 시공간이 제약을 받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깊은 연합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어떤 중심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까? 합하여 라는 말이 나옵니다. (2절2번) (4절 1번) 함께 라는 말이 나옵니다. (4절) (6절) (8절2번) 연합한자 라는 말이 나옵니다. (5절2번) 이 말은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연결되어진 삶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연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건이 나의 죽음의 사건이고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이 나의 부활의 사건이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합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스라는 말인데 속으로 안으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연합이라는 말은 쉼피토이 라는 말인 되 접붙인다 접합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된 관계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요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이루어 진 것을 말합니다. 물고기가 물과 연합되어진 것보다 더 깊은 연합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는 것처럼 우리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수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 것을 불과 쇠 덩이를 말합니다. 쇠가 불에 들어가면 불과 쇠 덩이가 연합되어 벌겋게 한 몸이 되어지는 것처럼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과 소금을 비유로 합니다. 소금은 예수님이고 맹물은 우리들입니다. 맹물 에 소금이 들어오면 짠물이 되는 것처럼 맹물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짠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와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과 연합하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죄를 이기고 올바르게 살아갈 있을 것인가를 오늘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죄 가운데 살수 없습니다 0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0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면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5장 20절에서 소중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은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대단히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씀을 편중된 시각으로 보면 \'이제부터 죄짓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했잖아.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 죄짓는 거라면 나쁜 것이 아니야.\' 이렇게 오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러시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로마노프 가의 라스푸틴 종교보좌관은 왕가의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보통 죄인이 되면 하나님께 보통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큰 죄인이 되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속 반복하여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제정 러시아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자칫하면 빠질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막기 위해 6장을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1절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죄에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 또는 죄를 끊지 못한다, 혹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은혜를 더 받기 위해 계속 죄를 지어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2절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이것은 무섭게 칼로 자르듯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배구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토스해서 떨어지는 공을 스파이크 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니까, 그러면 은혜를 넘치게 하기 위해 죄에 거하겠느냐고 토스를 합니다. 바울 사도가 토스된 공을 스파이크 하면서 \"그럴 수 없느니라\"할 때 이것을 받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헬라어 표현에서 이것(메 게노이토)은 가장 강력한 부정을 말하고 있습니다.(3:4,6,31; 6:15; 7:7,13; 9:14; 11:1,11) \"우리가 죄에 거하겠느뇨?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것이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대단히 강한 어투입니다. 일종의 막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둬!\' 라는 식의 말입니다. 진리를 오해하고 악용하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렇게 강경하게 단호하나 어조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우리 또한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때문에 죽으시기까지 했는데 죄에 거할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너 역시 그때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힘이 무력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리자 우리는 죄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죄의 힘이 통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자유 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런 내가 또다시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 죄를 짓는 다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왕에 세탁기에 넣을 옷이니 더러운 흙을 더 묻히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잘못 하다가는 옷을 다 버립니다. 더 큰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더 심각한 죄를 범하려고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인격에 심각한 상처들을 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형을 마치고 감옥에서 출옥한 사람은 그 교도소에 미련을 둘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죄용서 받은 사람은 이제부터 죄와 상관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죄를 향해서 죽은 자라고 인정하고 미련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왜 믿는 교인들 가운데 갈등이 있고, 싸움이 있고, 잡음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모두 자기들이 너무 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옛 사람의 모습이 철저하게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지 않은 사람일수록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잘합니다.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열심히 출석하고 봉사도 할 테니 제발 내 육신만은 죽이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가끔은 자존심도 세워 주면서 설교해 주세요.\" 목사님 한 분이 어떤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다과를 준비해 주시기에 대표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기도 후에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을 때도 말을 건네 오는 성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돌아올 때 그 교회 담임 목사님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대답인즉, 기도할 때 그들을 치켜세워 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거랍니다. 어떤 집에 심방을 갔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죄에 대하여 설교를 하는데 안주인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더니 \"목사님, 저도 다 압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교회를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잘난 구석이 한군데도 없다고 고백할 때 비로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틀려도 나만큼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한 것을 믿는 사람은 결코 자아가 튀어 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깊이 깨닫고 경험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곽선희목사님이 신학대학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제자들과 악수를 하며 졸업을 축하하는데, 한 졸업생이 유난히 많이 울고 있었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 왜 우는지 물었습니다. \"이제 나는 죽었습니다. 오늘이 나의 청춘 매장식입니다.\"하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런 자세로 살기만 한다면 그는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2. 새 생명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0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0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우리 죽은 몸도 다시 살아나서 새 생명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을 알고 세례를 받는 자는 새 생명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어느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일흔 살쯤 되어 보이는 노인으로서 온화하고 덕이 있어 보였습니다. \"노인 어른 춘추가 어떻게 되십니까?\" 물었습니다. \"나는 올해 세 살이오\" \"아니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 호적상의 나이는 일흔입니다만 그 동안 헛되게 살았소. 예수 믿고 참되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3년 전에 세례를 받았소.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나이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고 있으니 양해하여 주시오\" 이 나그네는 노인의 대답을 통해서 세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면 새 생명을 얻게 되었는데 우리의 삶에 전혀 새로운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라고 칭합니다.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창설되었습니다. 날이 새면 교회간에, 교파간에 티격태격했는데, 그런 교회들이 좌우간 일단 한데 모여서 하나가 되자,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한데 모이게 되었습니다. WCC대회를 열 때에 개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바로 이어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이 장례식은 아주 드라마틱한 행사였습니다. 장례식을 할 때 서양 사람들은 위오윙이라고 해서 관을 열어놓고 한 사람 한 사람 차례차례 지나가면서 그 관을 한 번씩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고 \'그 동안 내게 베푸신 사랑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 동안 사랑 많이 받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하고 한마디씩 인사말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그 날도 이제 대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위오윙을 하게 되었습니다. 관속에 시체는 없습니다. 다만 관 바닥에 거울을 깔아놓았어요. 그러니 관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얼굴이 보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갔던 것입니다. 죽어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다 관에 들어갈 자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랄프 윈터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는 참 기발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세례\'에 관해서도 그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세례를 줄 때에 물로 할 것이 아니라, 사람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관을 갖다놓고 그 관속에다 사람을 한 번씩 집어넣어야 될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관속에다 사람을 집어넣고 꽝하고 닫은 다음에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일어나라\"하면 벌떡 일어나고...... \'옛사람은 관속에 죽었다\'하는 뜻으로 말입니다. 나의 과거는 죽었고 내가 이제 새 생명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한때 북한에서는 남한에 간첩을 많이 남파시켰습니다. 그들이 북한의 간첩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남한에 적이며, 자유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자라도 경찰서 앞을 편한 마음으로 지날 수가 없었고, 자유의 나라에 살면서도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체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일부는 한국에 자수하여 새 삶을 찾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단 자수해서 용서를 받았으면 이제 위험이 있기는 해도, 자유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전히 북한과 은밀하게 교신하며 간첩처럼 산다면 그는 자수한 자가 아니라 이중간첩입니다. 옛날에 이 수근씨가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옛 사람은 십자가에 완전히 죽은 것으로 인정하고, 이제는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며 그 새 신분으로 살아야 합니다. 과거의 죄 된 삶을 끊고 술과 담배 등을 끊고 성경을 손에 들고 예배하는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3.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아야 합니다. 0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0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0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보면 죄에서 죽었지만 실제적인 삶을 보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로이드 존즈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 개의 밭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단이 주장하는 밭이고, 하나는 하나님이 주장하는 밭입니다. 그 두 밭 사이는 길 하나의 차이입니다. 옛날에는 사단의 밭에서 쟁기로 밭을 갈기도 하고 김을 매기도 하고 씨를 뿌리기도 하고, 추수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다른 쪽 밭에서 죽었기에, 하나님의 밭으로 왔습니다. 그 사이가 길 하나 차이이기에, 저쪽 밭에 있는 주인이 가끔 이쪽으로 소리를 질러댑니다. \"여기 봐라!\"하고 부르면서 화려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쪽 밭에서 일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저쪽으로 바라보면 너무나 화려하여 거기로 주의가 가서, 정신도 따라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앗차! 저 주인은 내 옛 주인이지. 현재 주인은 아니야!\'하고 정신차려 다시 이쪽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가 넘어갈 뿐, 내가 사단의 밭으로 넘어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에 그대로 있으며, 다만 순간순간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때에 넘어가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옛날 통치를 받을 때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리고 그 통치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했는데, 거기서 해방된 사람이 다시 그리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죄에게 종노릇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죄에서 벗어나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의 분명한 정체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새끼 호랑이가 엄마와 풀밭에서 재롱을 떨며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끼 호랑이가 그 어미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나 호랑이 맞아? 달리기도 못하고 토끼 한 마리도 못 잡고 사냥도 못하는 내가 호랑이 맞아?\" 어미는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낳은 새끼니까 너는 틀림없는 호랑이다\" 또 물어 봅니다. \"강아지만도 못한데 나 호랑이 맞아? 난 아무 것도 못하는데 내가 호랑이 맞아?\" 자꾸 물어보니까 화가 난 어미 호랑이가 \"야 이 개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졸지에 개새끼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못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입니다. 오늘은 보잘것없는 강아지만도 못한 거지만 이게 이제 며칠 안 돼서 산림의 왕이요, 전 짐승을 호령하는 호랑이가 될 겁니다. 지금 내가 뭔가 부족하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해서 자기 정체의식을 잊어버려 서는 안 됩니다. 나는 죄씨 집에 살다가 이제 의씨 집으로 이사온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게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4. 사망이 주장하지 못합니다. 0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0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기에 더 이상 사망이 주장하지 못합니다. 이제 나는 영원한 사망에서 해방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일본의 자살 특공대인 가미가제 대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천황을 위해서 미국 군함을 향해 전투기를 몰고 충돌하여 군함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무모하게 보이는 그들의 맹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애국하는 방법은 되었어도 아까운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죽어도 값진 죽음을 선택합니다. 네팔의 어느 목사는 불교의 나라로 알았던 한국에서 기독교가 성장하면서 길에서 전도해도 말리지 않고,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모이는 대중 집회가 많다는 말을 듣고는 부러워하면서, 자기도 고국에서 맘껏 찬송을 부르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고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도 네팔에서는 전도하다 붙잡히면 투옥되고, 세례 주다 발각되면 수 년 동안 감옥에서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릎 쓰고 전도하는 사역 자들이 있는 까닭은 혹 고난이 와서 목숨을 잃어도 사망이 그를 주장할 수 없다는 부활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에 사망이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5.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여길지어다\"(recognize)라는 말은 여기서 \"여긴다\"는 말은 \"계산하다, 생각하다, 마음에 그리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명령형입니다. 이것은 믿으라는 말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깨달음이나 체험과 상관없이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그려 넣고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값을 지불하시고 계산을 끝내셨습니다. \"여긴다\"는 말을 운동권에서 쓰는 단어 중에 \"의식화\"라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을 향한 밝은 자화상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내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의식화를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되 이 말은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을 의식화 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죄 지을 일이 생길 때, 막 성질이 나려고 할 때, \"나는 죽었는데...\"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의식화해야 합니다. 빅터 세리브리아코프라는 사람은 열 다섯 살 때 선생님으로부터 그가 학교를 다 마치기란 불가능한 일이므로 오히려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를 배우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후 17년 동안 빅터는 별의별 직업을 전전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서른 두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우연한 기회에 주어진 평가를 통해서 자신이 I.Q 161의 천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능아로 살아온 그에게 이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빅터는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고 천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책을 쓰고 많은 특허를 냈으며 성공적인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I.Q 132이하는 회원이 될 수 없는 국제 멘사협회의 의장이 되었습니다. 빅터를 갑자기 이와 같이 훌륭한 인물로 변화시킨 힘은 무엇인가? 빅터를 변화시킨 것은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갖게 된 막대한 자신감이었습니다. 자신은 더 이상 저능아가 아니라 천재라는 변화된 자화상이 그를 학식과 명성을 갖춘 뛰어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과거와는 다르게 바라보았을 때 그의 행동도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여기다\'라는 말씀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한 예를 들어 여러분 중에 어떤 부자 친척이 죽을 때 다른 친척이 없어서 먼 친척 뻘 되는 여러분 이름으로 800억을 예치해 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통보 받고 나서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그것은 제 것이 아닙니다.\" 이럴 경우 여러분은 그 구좌에서 한 푼도 꺼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글쎄, 한번 시험을 해 볼 수 있겠지요\"라고 한다면 은행에 가서 확인해 볼 것이고, 정말 당신 이름으로 거금이 예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신분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동하는 것이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여길지어다\'라고 결론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지\' 않으면 그것이 실제로 여러분의 삶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존재이지만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늘 확인하여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매장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단번에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순종하기만 하면 새 생명 안에서 넘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인도에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마을에서 어느 종족이 싸움이 붙었는데, 그 쪽에 이상한 전투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가도 곧 다시 붙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몸이 떨어져 나가도 \"난 안 죽었다\"고 소리만 치게 되면 금방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싸움터에 나서기만 하면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의 한 아이가 그 전투사를 죽이는 비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그 괴물이 스스로 죽었다는 것을 알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전쟁터에 또 그 괴물 같은 전투사가 나타났는데 어느 군인의 칼에 목이 잘렸습니다. 그 순간 아이는 큰 소리로 \"넌 죽었다! 넌 죽었단 말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그 괴물은 \"내가 죽었다고? 그렇구나, 난 죽었구나!\"라고 하더니 죽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기가 죽은 것을 인정하자 마자 정말 죽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이미 죽었다는 것을 믿고 인정할 때에 참으로 옛 사람이 죽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산 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 자신이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옛 사람에 대한 사망 신고서를 내고, 새 사람에 대한 출생 신고서를 내어야 합니다 이야기를 하나 하고 마칩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암행 순시차 나가셨다가 다리 밑에서 거지 소년을 보았는데 어쩐지 마음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거지 소년을 데리고 궁궐에 들어오셔서 만조백관 앞에 서서 \"오늘부터 이 소년을 내 아들로 삼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이제 분명한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거지는 죽었고 왕자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저녁에 잘 시간이 되었는데 왕자다 막 대궐 바깥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어디 가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본래 거지라서 다리 밑에서 자야 편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신하들이 \"아닙니다. 왕자님, 왕자님이 주무실 곳이 대궐 안에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이 왕자가 다시 대궐 밖으로 달려나갑니다. 시녀들이 좇아가면서 \"왕자님 어디 가십니까?\" 라고 묻자 \"본래 거지라서 내가 세수하는 곳은 다리 밑에 있다\"고 하자 시녀들이 \"아니예요. 왕자님, 세수하실 곳이 대궐 안에 준비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이 왕자가 왕자다운 행동이 나타나려면 거지 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아니면 왕자 의식을 가져야 할까요? 나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라 거지는 죽었고 새롭게 왕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당분간은 거지같은 행동이 계속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워낙 오랫동안 거지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음에도 죄인 같은 삶은 계속될지 모릅니다. 그래도 계속 확인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하셨다면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면서 죄와 싸워서 승리하고 행복한 생애를 살아 갈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롬7:1-6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롬7:1-6 2004-04-24 10:56:44 read : 207 구원을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죄와 율법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믿은 좋은 성도라도 무력감과 믿음 생활의 한계를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늘 추구해야할 이상입니다. 로마서는 죄와 율법 사이에서 갈등하는 성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스스로 죄인으로 깨닫게 하고 그 속에 묶어 놓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죄를 이기고 윱법으로부터 해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 율법 아래서의 삶 때로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삶이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반율법주의자’(Antinomianist)적 극단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렇다고 우리가 율법을 지키므로 결코 의로워지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더욱 실감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법을 알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아서 큰소리를 치고 살았지만 계명을 알고 보니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주의자’란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의 각 조항들을 다 지켜 행함으로 거룩해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율법의 일부 중에서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들의 목록에 의하여 신앙을 측정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외부로 드러난 죄에 대하여는 민감하지만 내면에 숨어 있는 죄의 근원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참된 근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온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랑의 정신을 망각한 율법의 준행은 다만 외식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살뿐입니다. (롬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본문에서는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에 대하여 부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결혼한 남편이 죽어도 그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예속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파키스탄과 인도 일부에서는 결혼해서 남편이 일찍 죽으면, 신부를 기절시켜서 같이 화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혼인법에 의하면 남편은 살아 있는 동안만 그의 아내를 구속할 수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는 자유롭게 되므로 다른 남편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과의 결혼에서는 자유케 되고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혼인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합니다.” 이는 사망은 모든 계약을 말소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의무나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율법에 매여서 살게되는 동안에는 율법을 지키려 해도 그것을 이룰 수 도 없습니다. 우리가 내 힘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가 율법아래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더욱 죄인임을 알게되고 결국낭패를 보게 됩니다. 육의 사람으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아내가 남편 아래에 예속되어 있다가 남편이 죽게 되면 자유하는 것처럼,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율법의 지배를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靈)에 의하여 새 삶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서 선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한 것은 우리가 법 없는 생활을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성도가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원동력은 율법으로 비롯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자는 율법의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내 육적 의지와 행하는 종교적 의무로만 살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이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성도답게 살아가는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율법의 의를 붙잡고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려는 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 자는 그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성령의 지시하심과 인도를 받게 됩니다. 결국 그 속에는 옛 남편과 같은 자아(自我)와 육의 생각이 죽고 새 남편 같은 예수 그리스도에 예속되어 그 안에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속하지 않고 육신에 있을 때에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고,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라는 말은 우리가 죄로 물든 본성 그대로의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에 물든 본성대로 사는 삶은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사는 생활이며 그 결말은 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불신자들의 운명입니다. (요 15:4,5)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하여 미국이 승리를 하면 본토에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백성들도 승리자가 됩니다. 이같이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함께 승리지가 됩니다. 3. 새 생활의 시작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생활을 하지 못할 때에는 육의 소욕과 율법의 지배아래서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령을 근심시키며, 불신자와 같은 도덕적 삶을 살게 됩니다. 한편 성도의 마음 속에는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결하고 있습니다(갈 5:17). (롬 7:20,21)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불신자들에게도 마음에 선을 추구하는 종교성이 있어서 그 양심이 죄에 대하여 때로는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의 종교성을 무시하고 억제하고 계속 죄를 범하게 되면 결국 죄의 포로가 되고 죄의 노예가 됩니다. 이처럼 성도들도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의 법을 지키려는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육의 소욕대로 살게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육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갈5:19-24). 한편 인간이 외적으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으며 신앙생활의 성공을 결코 보장할 수도 없고, 이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도 줄 수 없습니다.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 육신은 우리를 ‘얽매어 놓은 것’이었는데,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율법과 정욕 사이에서 특별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갈 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는 영으로 시작을 했다가 이후에는 성경의 지식과 판단이 서게 되면서부터 다시 육적으로 회귀하는 경우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갈 3:1, 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는 우리가 율법에 대한 복종과는 달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지시하심을 받아 살기를 작정한다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삶은 하나님의 성령에 인도되는 삶이요, 영적인 삶이요, 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삶을 사모하였습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Create in me a clean heart, O God; and renew a right spirit within me. “새롭게 하소서” 이것은 우리의 소망이며 희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한 마음’(a clean heart), ‘정직한 영’(a right spirit)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와 연합한 자, 성령으로 인도된 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 한 유태 청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신의 섭리를 그린 할리우드의 최대의 서사시인 <벤허>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 영화의 원작자는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터키 대사를 지낸 바 있는 루 월레스(Lew Wallace)입니다. 그는 유명한 장군이면서 동시에 문학의 천재로서 그의 친구인 무신론자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과 기독교의 신화를 영원히 없애 버릴 책을 쓰기로 했습니다. 월레스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한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깊이 연구하여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허위라는 것을 주장하는 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책의 제1장을 마치고 제2장의 첫 페이지를 쓰다가 그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예수를 고백하면서 새 인생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그 사건이 있은 지 2주 후에 그는 소설 <벤허>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부제는 ‘그리스도의 이야기(A tale of the Christ)\'였습니다. 이 소설은 1880년 출판과 동시에 200만 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차례 연극, 영화화되어 인기를 끌었다. 또 월레스의 글은 지금까지 쓰인 예수의 생애를 다룬 저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소설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월레스가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진실한 자세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우리는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당신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이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줄 것이며, 놀라운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낼 것입니다. 결 론 우리의 영적인 삶은 마치 악한 남편 밑에서 있는 아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악한 남편이 있는 동안에는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율법 아래 있으면 결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면, 이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서는 죽고 새 삶의 시작이 진행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삶이요,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게 됩니다. 우리도 새 삶을 위하여 새 영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을 위하여 다윗처럼 새 영을 달라고 기도 합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롬6:1-23
그리스도와의 연합 롬6:1-23 로마서 6장에 접어들어서는 바울의 본격적인 복음의 진수가 나타나 있습니다.오늘의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합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연합이라는 말은 함께하다,하나가 되다 라는 의미인데 연합의 개념은 ,특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은 이성적으로 알수 있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체험적으로 알수 있는 개념입니다.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느끼는 개념이며 그냥 그렇게 아는 개념입니다.우리가 결혼을 하면 한몸이 되었다,연합되었다고 표현합니다.두 남녀가 하나가 된것을 여러분은 어덯게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남녀가 사랑으로 연합한 것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면 굉장히 복잡해 지고 또 무미건조해질 것입니다.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가 하나되었다는 것을 그냥아는 것입니다.마주보고만 있어도 눈빛만으로도 알아지는 것입니다.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우리가 어덯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바울은 그 깨달음을 가지고 답답하게 신앙생활하는 로마교인들을 향하여 그리고 지금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은 먼저 앞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많다는 말을 받고 있습니다.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으니 은혜를 많이 받기 위해서는 죄를 더 많이 짓자라는 논리를 펼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또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그리고 지금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신앙은 사변의 대상이 아닙니다.이상한 논리를 전개하여서 그럴듯한,그러나 결국에는 황당무계하고 복음의 정신에서는 완전히 빗나간 생각과 말을 우리가 할수가 있습니다.신앙을 이성으로 접근하려할 때,사변적으로 접근할 때,신앙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을 때 얼마든지 일어날수 있는 현상들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조심하여야 합니다.말씀앞에 겸손하여야 합니다.그럴수 없느니라라는 본문의 표현은 아주 강한 부정의 표현입니다.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그렇습니다.그런일이 우리안에는 결코 일어 나서는 안됩니다.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은혜받고 축복받으러 나왔지 이상한 궤변을 가지고 자기도 망치고 상대방도 미혹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진리를 현혹케하는 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가르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여기에서 죄는 구체적으로 죄와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죽은 이라는 말은 부정 과거형으로 이미 결정적으로 죽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죽음이라는 말에는 완전히 떨어져 나가다 단절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즉 이 말씀을 풀어서 써 보면 <죄와의 관계에서 이미 완전히 단절되고 떨어져 나간 우리>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제가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여러분은 죄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단절되고 떨어져 나가셨습니까? 글쎄요 아직 아녜요,아니면 잘 모르겠는데요 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3절의 말씀을 보십시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그는 이미 죄를 모든 죄의 형벌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10절에는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한사람 아담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세상에 들어온 이 원죄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이미 해방시키신 것입니다.4절에서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또한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세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지금의 세례는 약식으로 베풀지만 그 세례의 의미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침례의 예식이 베풀어진 것 같습니다.세례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에 잠기게 하였다가 다시 일으키는 의식입니다.세례는 이처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다가 그리고 다시 살았습니다.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공유하였다는 말과도 같습니다.즉 내가 그리스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내안에 있는 상태입니다.그리스가 죽었을 때 나도 죽었으며 그리스도가 사셨을 때 나도 살았습니다.이것은 신비스러운 일입니다.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 하기 어렵습니다.그러나 사실입니다.우리 모두는 영으로 영적인 눈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느낄수 있으며 그렇게 고백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입니다.내가 그리스도안에 그리스도가 내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죽은 것은 무엇이고 살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6절의.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죽은 것은 우리의 옛사람이었습니다.우리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에 그리 스도와 함께 산것은 새생명,거듭난 생명,새로운 나,구원받은 생명인 것입니다.여기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믿음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로마서 11장에서는 <접붙임>이라는 단어로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돌감람나무인 네가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은 자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모두 죄라고 하는 원죄의 나무에서 살던 가지드이었습니다.죄라는 큰 나무에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갖가지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습니다.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내 맘대로 고집하며 내 멋대로 살아왔었습니다.그래서 우리 모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그런데 보십시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입니다.그것은 바로 이 원죄의 나무에서 우리가 완전히 단절되어서 바울은 11장에서 찍힘을 받았다라고 표현 하고 있습니다.완전히 단절되고 찍어서 잘라내어서 -이것이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생명나무에 우리를 접붙였다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8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것을 반드시 믿어야합니다.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복음의 모든 것입니다.여기에서 우리의 모든 신앙과 고백이 비로서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10절이하를 보십시요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찌어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나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다 라고 여기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사탄은 자꾸 우리에게 의혹의 영을 불어 넣습니다.자꾸 사변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몰고 갑니다.형식적으로 몰고가고 복음의 진리에 접근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하고 있습니다.사탄은 우리가 아직도 죄인임을 자꾸 이용하고 있습니다.사실 그렇습니다.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아직도 우리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이 있습니다.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안에 악한 생각이 남아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이미 본질적으로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하나님의 자녀,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만하면,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의 은총을 받기만하면 우리는 이미 본질적으로 신분이 바뀐다는 사실입니다.17절에는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그렇습니다.우리는 전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본래는 죄의 종이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왜냐하면 그 종이 죽었다는 말입니다.종은 죽기전에는 주인으로부터 자유할수 없습니다.그러나 종이 죽으면 그때는 완전한 자유입니다.그것이 18절의 말씀입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바울은 지금 설명하거나 설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얼마나 우렁찬 선포입니까? 천년만년 내려온 우리의 꽉 맺힌 답답함을 한순간에 풀어주는 폭포수와도 같은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에게서 해방된 것입니다.이제는 의의 종입니다.더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우리가 죄에게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요한사도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바울은 로마서 8장 서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얼마나 우렁찬 선포입니까? 이제 우리는 죄에게서는 죽었고,그리스도가 죽었을 때,그리고 그의 부활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접붙임을 당한 하나님의 종,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과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이것이 분명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부럽지 않습니다.그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날마다의 삶이 감사와 감격의 삶이며 날마다의 예배가 기쁨이며 축제인 것입니다.그러므로 13절 하반절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는 모두 의의 병기입니다.이미 의의 병기가 된자들입니다.우리의 신분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을 우리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 선하게 씌임받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로마서는 총 16장까지 있는데 이제 6장을 강해하였습니다.로마서에는 복음의 진수가,복음의 핵심이 담겨져 있습니다.교회사적으로도 시대가 어렵다던가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 또는 새롭게 도약할 때 교회는 항상 로마서를 가르쳤습니다.종교개혁시대에도 그랬고 19세기 말에도 그러했습니다.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다시 로마서를 공부할 때입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우리 교회가 할일이 참으로 많습니다.장막도 넓혀야 하고 기도원도 세워야 합니다.어찌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우리 모두 말씀으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하고 지금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말씀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2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연합된 영생의 축복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