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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궤는 이방에 공개되지 않았다/ 삼상6:19-21, 출25:18-19/ 2003-11-20
그 궤는 이방에 공개되지 않았다 삼상6:19-21, 출25:18-19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와 함께 싸우던 중에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되어지자 실로 성전에 모시고 있던 여호와의 궤를 자기들의 불리한 이 전쟁의 현장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이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게 된 이스라엘 군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블레셋 군대에게 이 법궤가 붙들려 가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해서 당시에 성전을 지키고 있던 엘리가 의자에 앉았다가 충격을 받아서 떨어져서 죽게되고 또 그의 두 아들 역시도 그 전쟁 중에 다 죽었습니다. 이처럼 한 소식을 듣게된 엘리 집안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직 해산일이 좀 남은 것 같은데, 충격에 의해서 산고를 겪었는데 너무나 엄청난 산고여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면서 그가 하는 말이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라고 소리치면서 자기 몸에서 태어나는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리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부터 떠났다 라는 뜻으로 그 아이를 죽어가면서 이름하여 이가봇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말처럼 생각처럼 이스라엘에서 이가봇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영광과 그 능력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아니하셨다 그런 말씀입니다. 과연 이 궤와 거기 계신 하나님은 대단하셨습니다. 전쟁의 현장에서 붙들린바 된듯 블레셋의 복판 신당 다곤에게로 끌려가다시피 옮겨져 가시기는 했습니다마는 그 첫날 궤에 계신 여호와께서는 다곤 옆에 한동안 가만히 계셨으나 밤 사이에 이 조그마한 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블르셋 사람들이 가장 신앙하고 그 신의 시키는대로 한다 라고 하는 그 신당에 있던 그 다곤 신을 엎어뜨렸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다곤 신 옆에 있던 소위 여호와의 궤라는 이것이 어떻게 되었을까 한번 확인도 해볼 겸 블레셋 방백들이 신당으로 나왔더니 그 거대한 신 다곤이 그냥 엎어져 있었습니다. \"이것 어찜인고? 이를 리가 없는데, 지진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누가 흔든다고 이것을 쓰러뜨릴 수도 없는데?\"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 그 신상을 세움과 같이 역사해서 다시 일으켜 세워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또 다시 그 신당으로 가 보았더니 어제보다 더 철저하게 엎어졌습니다. 다시 일으키려고 걱정하면서 일으켜보았더니 머리는 머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다 부셔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소문이 들려오는데, 블레셋 온 마을마다 독종이 일어나서 아주 독한 부스럼이 일어나서 모든 사람들이 긁으며 피와 고름을 흘리고 있다 라는 소식을 이 블레셋 방백들이 접하게 됨으로써 매우 당황한 나머지 \"아무래도 우리에게 붙들려온 이 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하는 이 궤가 무엇인가 역할을 하고 있지 않느냐?\" 이런 의논을 한 끝에 \"이 궤가 우리 지경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이 나라가 존재하기 힘들 것이며, 이 나라 백성이 다 죽게될 것이 아니가? 그러므로 이 궤를 다시 보내자. 우리가 이 궤에 손상을 가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해서 연구한 끝에 \"그러나 과연 이 궤가 어찌 보면 궤짝일 뿐인데, 이 속에 과연 하나님이 어찌 계시며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이처럼 큰 우리의 신상을 완전하게 망가뜨렸단 말인가?\" 여러 의견이 분분한 나머지 \"과연 그러면 이 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전쟁에 나오면 전쟁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는 하나님이 계셨는지 우리가 잘 알지 못하겠으니 그러나 이 궤에 대해서 더 이상의 손상을 가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 합시다.\" 해 가지고서 젖먹이는 송아지가 있는 암소를 끌어다가 억지로 그 송아지를 떼이우고 젖먹일 때쯤 되었는데, 송아지가 엄마 소에게 달라붙으며 울부짖게 되고 엄마 소는 젖이 불어서 이 송아지에게 젖 먹일 마음이 생길 때쯤 해서 여호와의 궤를 그 소 등에 싣고서 벧세메스라는 동네로 이스라엘이 있는 그 지경 중간쯤에 있는 동네로 일단 블레셋 지경에서 떠나가도록 해 보았습니다. 그저 보낼 수가 없어서 금부치 등을 같이 실어보냈는데, 거기에는 금쥐도 있고 또한 금으로 그 독종을 만들어서 \"이같은 피해를 우리가 보았다.\"라고 하면서 이제 실려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만히 저 지경 너머에서 블레셋인들이 하는 일과 소가 새끼를 두고도 젖이 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끼에게로 가지 아니하고 줄곧 자기들 곳을 향하여 오고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도다. 저 소 등에 무엇이 탔단 말인가?\" 가까이 가까이 와보니 하나님의 궤가 그 소 등을 타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 소가 되돌아가야 할텐데 곧 바로 자기들의 지경까지 이 궤를 싣고 오는 것을 보아서 \"대단한 궤로다. 이 궤는 참으로 신기하도다. 혹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던 바로 여호와가 계심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서 아주 신기해 했습니다. 이 궤가 자기들의 지경에 도착하자마자 궤를 내려 가지고서 궤 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는가 해서 들여다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궤를 본 사람이 많습니다마는 옆에서 보았거나 멀리서 보았거나, 그렇게 본 경우는 괜찮았습니다마는 블레셋 군인들이 그 궤를 그냥 탈취해 가지고 들고가도 괜찮았습니다마는 이 벧세메스 사람들이 내려와서 내부를 살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오늘 19절에 말씀한 대로 괄호 속에 오만이나 넣고 칠십인이 그 궤를 본 고로 다 죽임을 당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아라비아 수 2번에 난하 주를 보면 어떤 사본에 오만이란 숫자가 없다 라고 해서 아마 괄호를 만들어둔 것 보니까 모르긴 몰라도 오만 칠십 인까지는 안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처 밀밭에서 농사짓던 사람들인데, 얼마나 넓어서 오만 칠십인이나 붙었겠나 싶어서 볼때 안 칠십 명쯤 일하던 농부들이 와 가지고서 경험이 없어서 본 것 같습니다. 문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보아서도 괜찮고 들었어도 괜찮은데, 그렇다고 해서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히 버림받은 벧세메스 사람들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궤를 봄으로써 하나님이 다 치셨으니 그 사람들이 궤를 본 그 내용이 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니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랬습니다. \"들여다 본고로\" 우러러 본 것도 아니고 그냥 궤를 옮긴 것도 아니고, 궤를 열고 궤 내부를 감찰했다 그겁니다. \"들여다 본고로\" 그랬어요. 단순히 여호와의 궤를 보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모조리 다 죽임을 당했던 것이 아닙니다. \"들여다 본고로\" 이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조리 죽이신 것이 혹 알려진 것처럼 저들이 들여다 보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그렇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궤 속에는 전시간에 말씀드린 돌판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벧세메스 사람들이 보았던 그 세 가지 물품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 물품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출애굽기 16장 32절에 보면 그 궤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지 않음을 밝혀주고 있으니 제가 읽어드려 봅니다. \"만나를 궤속에 넣어 간수하라. 내가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너희 후손에게 보이기 위함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궤를 만드실 적에 출애굽기 16장 32절에 이르시기를 \"그 속에 만나의 항아리를 넣어라. 그것을 넣어 두어야 될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너희를 광야에서 먹인 그 만나에 대해서 너희 후손들이 그것을 보아야 될 것이니라. 내가 너희를 광야에서 먹인 그 만나를 너희 후손들이 여기 와서 보지 아니하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는 다시는 만나를 보지 못할 것이니 너희 후손들로 보기 위하여 이 만나를 궤 속에 넣어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궤를 만들라 하시고 그 궤 속에 세 가지 물품을 넣으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아무나 들여다보면 이 물품들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서 인생이 보면 죽는 것이니라\" 이런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 그 후손들로 하여금 그 궤 속을 들여다보도록 하기 위해서 그 궤를 열 때마다 그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큰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이 궤를 만들었고, 그 속에 만나와 돌판과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를 넣었던 것으로 우리가 살펴볼 때에 하나님께서 이 벧세메스 사람들의 궤를 들여다본고로, 본 사람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날에 다 죽였던 이 사실을 놓고서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그 궤 속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 영광이 나타나서 저절로 영광에 의하여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들여다 본고로\"였습니다. 궤 속을 들여다보고 그 궤 속을 관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을 다 하나님께서 동네에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서 다 죽였느냐? 아마 하나님께서 그 들여다본 사람들 그 내부를 관찰했던 사람들을 그날 그렇게 죽이지 아니하셨더라면 많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블레셋이 발발 떠는 여호와의 궤, 다곤 신을 손대지 않았는데도 깡그리 부셔버린 그 궤 속의 하나님, 이 하나님이 그 궤 속에 어떤 모습으로 계셨을까?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그 엄하신 모습으로 계시지 않겠는가?\" 해 가지고서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들어있는 것은 오래된 만나 항아리요 그리고 사람이 쪼아만든 돌판이요 그리고 이제 말라비틀어진 한때 싹은 났었지만 지금 말라비틀어진 그런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으니 충격을 안 받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 남았더라면 동네방네 나가 가지고서 \"그 궤 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아느냐? 돌판이 들었더라. 모세가 만든 돌판 말일세. 광야에서 저들 조상들이 죽고 살아 나오지 못하던 그때에 먹었던 오직 단순한 한가지 음식, 그 음식을 상징하는 만나 항아리가 들었더라. 그리고 지팡이는 무엇이더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자리에 올라가서 백성이 앉으려고 다단과 고라와 온이 하다가 땅이 입을 벌려서 죽임을 받았던 그 바로 그 후에 하나님께서 너희 열두 지파의 족장들의 막대기를 가져오라 지팡이를 가져오라 자 어느 지팡이에 내가 함께 하는가를 확인하라 해서 오직 아론의 지팡이만 싹이 나게 하셨던 그 지팡이가 아니더냐? 그 엄청난 궤인 줄 알고 들여다보았더니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앞에 대하여 죄만 가득 들어있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허물만 그 안에 가득 들어있었느니라.\" 이렇게 이제 온 동네에 온 이방들에게 소문이 날 형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 궤 속에는 일면 하나님의 사랑도 그 세 가지 물품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 궤 속에 들어있는 물품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마는 또 다른 한 면은 무엇입니까? 숨길 수 없는 또 한가지의 면을 우리가 그 물품을 보면서 발견할 수밖에 없으니 이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이요 그래서 다시 만든 돌판이며, 하나님이 인도하여 애굽으로부터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먹을 것이 떨어지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돌질을 하고 그리고 애굽으로 되돌아가겠다 라고 하다가 그 원망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 원망하는 자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으되 그 만나와 메추라기는 먹는 사람들이 정력도 떨어지고 한가지만 사십년 동안 먹으려하니 기가 막히도다 하면서 가족끼리 나와서 울부짖었던 그런 만나와 항아리, 또한 방금 전에 말씀드린 그 지팡이,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지팡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역사를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 당신이 하는 것은 분수에 지나도다. 당신이 우리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다같이 거룩한데 하필 당신만 그 높은 단에 올라가서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느뇨 하다가 입을 벌여서 그 주모자들이 죽게되고 그 따르는 백성들이 크게 피해를 보았던 지팡이, 우리는 보았도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 세 가지 물품은 하나님의 영광도 품고 있지만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수치가 그 세 가지 물품에 다 담겨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느 한가지도 믿음을 가지고 충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헌신해서 받았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배역하다가 나타났던 물품들이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수치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만을 그 궤에 담으시려고 했다면 홍해를 가를 때에 그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의 홍해 바닷물을 걷어다가 조금 한병 담아다가 두었으면 더 좋지 않았겠습니까. 또 반석에서 물을 내어 가지고서 그 광야 가운데서 저들 온 백성을 먹이게 했던 그 깨어진 반석의 돌 조각을 차라리 그 속에 담아 두었다면 하나님 영광만 나타내겠지만 그 속에 들어가 있던 것은 \"너희 후손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라. 너희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기서 죽을지라. 그러나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될 너희 후손들은 너희같이 되지 않기를 바라서 이것들을 넣어라.\" 해서 넣으셨으니 하나님께서 비중을 두신 것은 그 궤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의 허물을 담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허물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계셨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궤로 블레셋 나라 복판에 있는 신당, 그 안에 장엄하게 세워져 있는 다곤을 만났을 적에 다음날 아침이면 분명히 이 방백들이 와서 자기들의 신 앞에서 여호와의 궤의 뚜껑을 열고 그 내부를 들여다 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 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거대한 다곤 신을 쓰러뜨렸고 다음 날에는 다시 목도 잘려지고 팔도 잘려지고 다리도 잘려지도록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독종이 일어나도록 온 몸을 부스럼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이런 역사를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합니다. 그 뚜껑을 열어볼 용기를 아무도 갖지 못합니다. 가만히 그날 계셨더라면 다곤 신 옆에 그냥 계셨다면 그 다음날에는 분명히 이 법궤가 뚜껑이 열려질 것이고 뚜껑이 열려지면 그 속에 있는 세가지 물품을 저들이 보게 될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기는커녕 이스라엘의 수치를 온 세상에 드러낼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궤 열려지기 전에 다곤을 부서뜨리고 그 일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그 궤 속에 감추어진 채로 하나님께서 그 위 속죄 속에서 덮으시고 벧세메스로 이동해 오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이동해 오신 것이 아니라 그 궤 속에 들어있는 이스라엘의 허물도 같이 이동을 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벧세메스에 왔는데, 벧세메스에서 또 한 사건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어디 보자. 궤 속에 뭐가 들었느냐? 궤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 하면서 와서 모두 다 뚜껑을 열고 달려들어서 들여다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하 이 궤가 공개되었구나. 이 궤속에 들어있는 것을 이들이 보았구나.\" 해서 진정 오만 칠십인인지 혹 칠십인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들여다본 사람을 다 그날에 죽이셨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쳐 보지 못했던 다른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사람들이 모조리 다 죽은 것을 보고 달려온 사람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오늘 사무엘상 6장 20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다 겁을 내어서 접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접근시키지 아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영광을 안 보이려고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속에 자기 백성의 허물이 들어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의 죄의 흔적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 허물과 죄를 이방 사람에게 보여버리면 아사셀이나 마찬가지인 다곤 신 앞에 죄와 허물을 내어놓으면 아사셀격인 다곤은 \"그 죄와 허물은 내 것이요. 그에게 사망을 주리이다.\" 하고 큰소리치고 붙잡아 버릴텐데, 하나님께서는 다곤 신 앞에서도 궤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 궤를 들여다본 고로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궤를 보지 못하고 뒤에 달려온 사람들이 한 얘기가 무엇입니까?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 궤 속에는 엄청난 하나님이 계신 줄 알았다 그겁니다. 그 궤 속에는 하나님이 굉장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어서 아무도 접근 못할 그런 궤인줄 알도록만 만들었을 뿐이지, 그 궤를 들여다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 죽이신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하시고서 하나님께서 그 궤를 다시 이끌고 그 사건 이후에 아비나답의 집으로, 아비나답의 집에서 또한 오벧에돔의 집으로 그리고 훗날에 다윗 왕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이스라엘의 곧 이스라엘의 고향 예루살렘까지 다윗궁으로 당당하게 이동을 해 오셨으니, 어찌 보면 하나님의 이동이지만 하나님의 이동하시는 그 궤 속에 허물 많은 이스라엘도 블레셋 사람에게 다 망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살아서 승리로 되돌아왔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 자리에 앉으신 부모님들께서도 자기 사랑하는 친자식의 허물이 있다면 바깥에 소문내는 사람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간혹 부모님 중에서 자기 자식의 허물을 사방에 선전하는 분을 보고서 \'이분이 과연 그 사람의 부모인가? 그리고 부모 될 자격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기본적으로 부모는 자식의 허물을 덮어버립니다. 바깥에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 말씀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역시 53장 6절에는 \"그가 이방 권세 앞에서 곤욕을 당하며 그가 괴로울 때에도 우리들의 허물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아니하셨도다. 그에게 죄가 없으며 그에게 허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신 모든 어려움을 당하며 이방 사람들에게 끌려가며, 이방의 집권자 앞에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털 깎는 자에게 붙잡힌 양처럼 털 깎이면서도 곤욕을 당하면서도 그는 입을 열지 아니했도다.\"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끌려와야 했습니까? 다곤 신 앞에까지 와야 했습니까? 빌라도 앞에까지 와야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 집권자들 앞에서 자기가 짊어진 그 죄를 자기 탓으로 자기가 죽을 것으로 결심하시고 자기 백성들의 허물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 속에 들어있던 이스라엘의 허물들 곧 돌판이며 만나 항아리며 아론의 지팡이, 이것들이 다곤 앞에서 뚜껑 열려져서 공개가 되거나 벧세메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순식간에 안을 들여다 보고 말았는데, 그 사람들을 그냥 살려두었거나 하였으면 죄 많은 이스라엘은 또한 그와 같은 우리는 과연 어찌되었겠나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개되는 것은 그나마 우리가 좀 부끄러움을 당할 뿐이지 괜찮지 싶지만, 아주 심각한 부분은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궤를 보기에 하나의 박스인 것처럼 봅니다. 그래서 법궤하면 하나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여러분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허물이 들어있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들어있는 증거궤이요, 증거궤가 무엇을 증거하는 겁니까? 이스라엘의 죄와 그를 용서한 하나님을 증거하는 궤입니다. 그 하나가 증거궤이요 \"그 위에 하나님께서 속죄소를 덧붙여서 붙여서 만들라. 그 속죄소 위에 그룹이 이 두 궤를 하나처럼 얽어매게 만들고 그리고서 내가 거기서 함께 있으리라.\" 하였었는데, 만약 이 하나처럼 여겨지는 법궤가 다곤 신 앞에 가 가지고서 \"안되겠구나. 이 세상의 마신 아사셀격인 이 다곤 앞에 왔으니 이제 내 밑에 깔려있는 이 죄는 내어주어야 되겠구나. 저 아사셀 격인 다곤은 죄를 먹고사는 이방 신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궤 속에 있는 죄를 분리시켜서 내어보내고….\" 다시 말씀드려서 \"아래편에 있는 증거궤는 여기에 때어놓고 피와 생명이 있는 속죄소만 그 그룹과 함께 나는 이동해 가리라.\" 하고서 하나님께서 그 다곤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가 들어있는 증거궤를 분리시켜 버리셨다면 다곤 앞에 떨어진 우리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은 우리의 형편은 어찌되었겠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벧세메스 사람들이 어차피 내부까지 들여다보았으니 속죄소 위에는 별로 볼 것이 없습니다. 피 뿌리는 판이고 그 네 끝에 뿔이 있고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양쪽에 그룹으로 잡아맨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내부를 들여다 보았다면 이스라엘이 죄와 허물을 다 보았으니 \"하나님이 어찌 죄 많은 저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신단말이뇨? 죄와 동거할 수 없는 참 신이신 줄 알았더니 이스라엘의 허물과 함께 있도다.\" 하면서 이스라엘의 그 수치를 소문내게 될 것이니 그만 쯤 되었으면 하나님께서 \"아니야, 저것이 붙어 왔었구나.\" 하면서 그냥 분리시켜버리시면 하나님은 그 위의 궤로써 이동해오시고 그 허물과 죄의 궤는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그냥 남겨져버렸다면 수치 가진 이스라엘은 어찌 되었을 것이며, 그 이스라엘과 같은 우리는 어찌되었겠느냐 그것입니다. 그 궤가 하나님에 의해서 공개되지 아니한 것이 얼마나 다행한지, 그 궤가 하나는 거룩한 속죄소 위에 하나님이요 그 밑에는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이 들어있는 그런 증거궤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 순간에 두부를 자르듯이 탁, 무우를 자르듯이 탁 잘라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처음부터 한 개가 아니고 두 개인데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주신 하나님, 그리고 속을 들여다본 자들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하나님, 누구를 위함이었는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그 속에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도 있지만 회개와 용서의 속죄소가 있어서, 그 궤 속에는 전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알곡과 가라지가 각각 따로이되 그 뿌리는 섞여있어서 그 가라지를 하나님께서 분리시켜버리셨다면, 그 가라지를 저들로 하여금 보게 만들어버렸다면 얼마나 새로 얻은 회개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은바 이스라엘 민족의 새 생명과 그 용서받은 은혜를 얼마나 욕보일까하여 차라리 궤를 덮어버렸고 보려고 하는 사람 보려고 하는 다곤 신을 미리 깨뜨려버렸고, 블레셋에 들어가서 한동안 거하시면서 아무도 그 궤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시다가 마음놓고 나오셨더니 벧세메스 사람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안을 들여다보아 버리니까 안되겠구나 해서 다 죽여서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하지 않습니까. 말을 못하게 만들어 버린 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오늘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매우 매우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허물을 본 자의 입을 막아버린 것도 감사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형편에 허물 가진 우리의 궤를 분리시키지 아니하시고 붙었던 채로 그대로 탈출하셔서 이스라엘의 현장에까지 귀환하셨으니, 이스라엘만 돌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아오심이요 하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자기 나라로 귀환하여 성공적으로 돌아왔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다곤 앞에 갔었어도 이것을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그리고 벧세메스에 오면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또한 오벧에돔 집에 갈 무렵에 또 다곤의 타작마당에서 이 궤가 수레에 실려가다가 넘어지려고 하니까 웃사가 가서 그것을 붙들었는데 어찌되어서 이 궤가 두 개로 나누어져서 나뒹굴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로 붙은 채로 운명을 같이 할 수 있었던가? 바로 그것을 오늘 2001년을 맞는 정말 이 새천년 부활절을 맞으면서 그 비밀을, 그렇게 분리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과 허물 많은 우리가 같이 동행하여 다곤 앞에도 같이 갔지만 예루살렘 성까지 다시 들어올 수 있던 그 이유가 어디 있었는지 오늘 인용구로 소개해드린 출애굽기를 찾아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5장을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제 25장 18절부터 그 궤가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되었는지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제 25장 18절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자, 하나님께서 증거궤를 만드시고 그 증거궤 속에 이스라엘의 이 세 가지 물품을 넣으라고 하신 후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허물과는 동거하실 수가 없으시니 이제는 그 위에 속죄소를 만들지만 그 속죄소와 증거궤가 다시는 분리되지 아니하도록 이 끝과 저 끝에 두 그룹을 쳐서 만들라 그랬습니다. 이 그룹은 하늘에 있는 피조물로서 사자로서 우리는 더러 독수리로도 표현하고 매로도 표현하고 아주 강한 발톱으로써 날면서 붙들어주는 그런 장석이라고 이제 보겠습니다. 이 장석을 만들되 금으로 만들어서 녹슬지도 아니하고 변치도 아니하고 이 두 궤를 그냥 올려놓을 것이 아니라 이 두 그룹으로 매 발톱 같은 발톱으로 땅땅 쳐서 둘이 하나가 되게 만들어버리는데, 어떻게 만드느냐? 분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덩이로 연하게 하라 그랬습니다. 만들 때에는 둘이지만 하나는 증거궤요 하나를 속죄소이지만 그러나 둘을 양쪽에서 그룹으로써 쳐서 연하여서 한 덩어리가 되게 해 버려라 그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만드셨으니 이 철저한 장석으로, 하늘의 천사와 같이 여겨지는 하늘의 나는 큰 피조물로 여겨지는 이 그룹의 장석 발톱으로 꽝꽝 쳐 틀어박았으니 아무도 이 둘을 분리시킬 수가 없도록 만들었다 그겁니다. 이렇게 되기를 바라면 누가 바래야 되겠습니까? 죄 많은 우리가 오히려 그렇게 바라야 되겠지만 우리가 무슨 염치가 있어서 그리 되도록 두 그룹으로 붙들어서 하나 되게 해 달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저것들은 내가 놓아버리면 저것은 아사셀에게로 가야 되고 다곤에게로 가야되고 블레셋의 종이 되고 말테니 사망으로 떨어지고 말테니 저들의 모습을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할지라. 속죄소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역사할터이니 둘이 하나가 되도록 쳐서 그룹으로 만들어 버리라. 그리고 그 장석은 염분이나 바람이나 세월이 흘러서 녹슬게 하지 말고 금으로 쳐서 만들어라.\" 해서 그렇게 둘이 합하여 연하여 하나가 되도록 연하여 한 덩이가 되도록, 즉 속죄소와 증거궤가 연하여서 한 덩어리가 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곤 앞에 가서도 혹 하나님께서 저들을 떨쳐버리시고 싶어도 떨쳐버릴 수 없도록 한번 사랑하고 싶을 때에 사랑해버렸던 것입니다. 한번 약속하고 싶을 때에 약속해버렸으니 이 약속을 가리켜 혹 언약궤라고도 말한다 그것입니다. \"나는 거기에 너희와 항상 있을 것이니 다곤 앞에 가더라도 있을 것이요,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너희가 소문이 날 지경이 된다하더라도 나는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이 궤에서 항상 너희와 함께 있어서 나는 이제 떠날래야 떠날 수 없으니 너희는 내 사람이 되었도다. 너희에게 죄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염려 말라. 너희와 나는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로 만들어버렸도다.\" 오죽 철저히 두 개임에도 불구하고 한 개로 만들어버렸으면 오늘날 \'법궤, 법궤\' 하는 사람들이 이 궤 두쪽인 것은 자세히 보지 아니하면 모를 정도로 그저 \'하나님의 궤, 하나님의 궤\' 하는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저 자신을 포함해서 여러분이 귀하게 여겨지시는 것은 여러분에게 수치스러운 허물과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 되게 하시되, 하나 되기를 바랄 사람은 우리인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가 이렇게 하나가 되어버리면 내 속에 죄와 허물이 있다하더라도 \"나는 너희에게 죄와 허물이 있다하여 버릴 수가 없이 영원히 하나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이 이처럼 하여 두 그룹으로 쳐서 하나되게 만들어 주셨으니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과 우리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살아계신한 우리는 다곤 앞에 가서도 우리의 허물이 이방에게 드러나지 않도록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제는 알았으니 그 다음에는 우리가 그 속에 들어있지만 우리인줄 모르고 \"이 위대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어찌 우리가 나아가리요?\" 할 만큼 우리가 모여 있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현장에는 마귀의 역사가 마귀의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덮여질 줄로 믿습니다. 가려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이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소 위에서 다 사하시듯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다시 사신 주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셨으니 우리가 이제 쓰러질 수가 없습니다. 다곤처럼 목은 목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팔은 팔대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한 몸 되게 하셨으니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죄와 허물이 많았으되 하나님께서 그 궤를 연하여 하나되게 만들어주신 연고로 좋은 곳에 가도 떨어질 수 없고 험한 곳에 가도 떨어질 수 없어, 실로로부터 떠나갔으나 실패하고 진 것 같았으나, 비느하스의 아내 말처럼 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궤를 붙잡고 계신 한은 이스라엘과 떠날 수 없어서 블레셋의 다곤 신을 무너뜨리고 성공적으로 예루살렘 궁 가나안이라 일컬어지는 천국에까지 입성하셨으니 천국에 입성할 때 하나님만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입성하셨으니 여러분이 이 세상 사는 동안에도 벧세메스 사람들이 소문낼까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하나가 된 것을 누가 끊을 수 있으리이까. 그리고 천국에 이를 때까지 법궤가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윗궁에까지 들어왔던 것처럼 천국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하나된 채로 이끌고 나간 것이니 구약의 법궤를 통하여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법궤가 우리의 법궤요, 그 법궤 속에 하나님 계셨으면 오늘날 우리 몸 속에 하나님 계시고 또한 그 법궤 속에 하나님 계셔서 역사하셨으면 이 교회 속에 머리로서 역사하실 것이니 다곤 앞에 서더라도 다곤을 보지 마시고 우리 위에 계신 우리와 하나로 연하여져버린 한덩이 된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실패는 없습니다.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2001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교회들의 머리가 되셔서 오늘 우리를 천국까지 이끌어 가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사신 거룩하신 주여, 주께서 증거궤 속에 이스라엘의 허물을 상징물로 들여놓으시고 이스라엘 후손들로는 그 궤를 들여다보고 하나님께서 자기 선조들에게 무엇을 하였는지를 그리고 앞으로 어떤 죄를 범치 말아야 되겠는지를 알도록 하라 하신 그 궤 속에 물품인데, 다곤 앞에서는 절대 공개하지 아니하고, 차라리 공개를 당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다가오는 줄로 알고 다곤을 미리 깨뜨려버리셨던 하나님, 또 순식간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보고 그 내부를 이방에 소문낼 것 같으니 그들의 입을 막아 들여다 본 사람을 모두 죽이신 하나님, 그리까지 하시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하나되시고 그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인도하여 들이셨는데, 주여 이러하셨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저희가 깨닫나이다. 우리 몸 안에 드신 영이 성령이신 줄 깨닫습니다.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어 도무지 다곤처럼 몸통과 머리가 분리될 수 없는 정말로 하나로 엮어져버린 그런 두 그룹으로 쳐서 만들어 금 빗장으로 장석으로 우리를 하나되게 만들어버린 이런 관계 속에 우리와 우리 주님인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궤 속에 이 궤 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저들이 도끼를 갖고와서 궤를 깨거나 열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역사하시니 이스라엘의 바로 희망이었고 승리할 수가 있었나이다. 주여, 우리의 주되신 주여, 무덤 속에 들어갔으나 마치 다곤에게 붙들려가듯 블레셋에게 붙잡혀가고 다곤 신 앞에 가서 곤욕을 치르셨으나 그 속에서 죽지 아니하고 다시 살아서 역사하심으로 끝내 이스라엘을 지켜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나타나셔서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와 주님이 영원히 하나 되기를 원하나 우리의 마음대로만은 안될 것인데, 주께서 그렇게 하나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분리시켜주지 말아주시옵소서. 우리의 허물을 이방에 열지 마시옵시고 차라리 하나님만 보시고 우리의 회개만 받아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나그네 예수님/암8:4-10
나그네 예수님/암8:4-10 2002-04-05 17:44:26 read : 56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동서를 갈라놓았던 냉전체제가 붕괴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 중의 하나가 노동인구의 대이동현상입니다.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구라파 등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이 제삼세계에 투자를 함에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본을 따라서 이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현재 세계 도처에는 이주 노동자들의 수가 수 천만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아시아에만도 3000만 명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자기 나라 안에는 일자리도 변변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일을 하더라도 받는 임금이 너무나 적어서 외지로 돈을 벌려고 나가는 노동 인구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제는 21세기에 더욱 부각될 세계적인 문제이고, 교회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삼세계에는 실업자들이 차고 넘칩니다. 전 세계의 노동 인구 중 약 30%가 실업자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력이 필요한 나라가 있는 것을 알면 국경을 넘어 일을 찾아 이동합니다. 실업자가 이토록 많이 생기는 배경에는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까닭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케인즈 경제학에서는 자본과 노동이 함께 갔는데 신자유주의 경제학에서는 노동이 설자리를 잃었습니다. 그 결과로 이 세계에는 지금 실업자들이 다량으로 생산되고 있고 자기네 국경을 넘어서 일을 찾는 이주 노동자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실업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한국으로 오는 사람들도 많은 이유는 한국이 경제대국 10 몇 위 권에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까운 중국인 노동자가 그 수에 있어서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중국의 노동인구 약 8억 중에서 실업자가 약 1억명이라니,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으로 몰려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조선동포(조선족)들이 많이 오고 있습니다. 같은 핏줄에 언어도 통하니 돈을 벌기 위하여 우리나라로 건너오는 것입니다. 10여년 전부터 시작된 이주노동자들의 유입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고 있습니다. 구제금융 때(IMF) 외국인 근로자들의 수가 한 때 떨어지더니 그 이후 다시 증가하여 지난 7월 현재로 314,086명(국감자료)이 되었습니다. 이들 중 70%(220,162) 가 불법 체류 자들인데 이들은 처음에 산업연수생으로 오긴 했으나 봉급이 너무 적어서 돈을 더 벌기 위하여 처음 초청 받은 산업 장에서 도망하여 다른 업체에 정식 근로자로 취업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1년 내지 2년을 벌어야 겨우 입국수속에 들어간 본전 정도를 모을 수 있다고 합니다. 국감자료에 의하면 송출기관에 평균 3147 달라(한화로 약 400만원)를 내고서야 이곳에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7월에 있었던 조선족들의 집회에서 증언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보통 1000만원이 들었고 1800만원을 들여서 온 근로자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달에 30, 40만원 받은 산업연수생으로서는 빚을 갚을 수 없기에 도망을 나와 다른 산업체로 가서 100만원 정도를 받아야 1, 2년 안에 겨우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국가별로 보면 중국(조선족 포함), 필리핀, 베트남, 미얀마,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네팔, 이란, 태국, 우즈베크스탄, 카자흐스탄, 몽고 등 14개국에서 왔고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근로자들이 원치 않는 이른바 3D(dirty, dangerous, difficult) 업종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고충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몇 가지만 추려 보면 첫째로 임금문제입니다. 산업연수생으로 들어 온 이주노동자들은 처음부터 우리나라 노동자들과 차별적 대우를 받습니다. 정규적인 계약으로 일하는 외국인근로자들도 내국인의 임금의 80%정도이고 거기에 추가되는 상여금이나 퇴직금 등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돈을 벌려고 왔지만 일한 만큼의 월급을 못 받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노동시간을 살펴보면 평균 노동시간을 훨씬 상회하여 주 65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도 상당하다고 합니다. 하루 8시간 이상의 노동은 몸과 마음의 무리를 가져오게 되어서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병들어 죽거나 불구자가 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의 문제는 임금체불입니다. 열심히 일을 했으면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바로 바로 지불 받아야 하는데 임금을 몇 달씩 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습니다. 한때는 체불임금을 받지 못한 채 우리 나라를 떠나고 싶어도 손에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서 못 떠나는 이주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네 번째의 문제는 산재와 의료보험에 관한 것입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산업재해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데 작년도에는 1197건이고 금년 들어 6월까지 660명이 산재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70%가 넘는 이른바 불법취업 이주노동자들은 몸이 다치거나 아파도 의료나 산재의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보고가 되면 강제출국을 당할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리고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도움을 받는 길도 막혀 있는 상태입니다. 가정도 없는 이들은 돌 볼 사람들이 가까이 없기에 사전에 건강진단을 받아 볼 처지도 못됩니다. 고용주들은 그들의 건강에 거의 무관심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소모품처럼 건강할 때 쓰다가 병이 나면 버리는 악덕 기업인들도 있습니다. 노동조건이 열악한 상태에서 오랜 동안 일하다 보면 건강한 사람들도 병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실로 이들의 건강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다섯 번째로 한국인과 결혼하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고 있는데 자녀의 호적 문제, 교육 문제 등등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로 이주노동자들은 출입국에 관련하여 큰 애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이 그들의 여권을 업주들에게 압류 당하거나 혹은 출입국 관리소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이긴 하지만 여행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사례들입니다. 이런 것을 브로커들이 악용하여 외국인들의 적은 수입에서 얼마를 갈취해 가는 사례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문화적인 차이에서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식생활의 문제, 종교나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문제, 주거상의 문제, 언어의 문제, 여가생활의 문제 등등 너무나 답답하고 외로운 삶을 저들은 살고 있습니다. 가정도 없이 오락이나 휴식도 즐기지 못하면서 일 벌레로 살아가는 저들에게 우리 성도들이 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현재 한국의 여러 종교와 자선 기관들이 이주노동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 총회와 여러 지 교회들과 노동상담소에서 상담이나 쉼터를 장만하여 저들을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총회가 직영하는 \"평화의 집\"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협동목사님이신 김 목사님이 소장으로 봉사하고 계십니다. 현재 약 30여명의 외국인들이 거기서 기거하고 있습니다. 이 쉼터는 일거리가 없거나 잘 때나 밥을 먹을 곳이 없는, 오갈 데 없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시설입니다. 4년 전에 4500만원을 들여서 평화의 집, 외국인근로자쉼터를 장만했는데 전세가 계속 올라가서 현재 7000만원의 건물을 얻어서 운영하고 있는데 다음 달에는 전세금을 2000만 더 올려 줘야 하기에 지금 모금 중에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여러분들이 매월 한번씩 드리는 사랑의 헌금 중에서 50만원을 보태기로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가 총회외국인근로자선교회 회장직을 창립 때부터 계속 맡고 있는 데다가 협동목사님도 소장이시니 아니 도울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새문안교회는 베트남에서 온 근로자들을 돌보고 있고 구로동에 세워진 조선족 교회는 조선족 약 4000명이 등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수십 곳에서 쉼터나 인권상담소를 개설하고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서울과 지방의 여러 교회들이 총회외국인근로자선교회에 정기적으로 헌금을 보냅니다. 이들 나그네들은 존엄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토록 귀중한 생명을 우리 정부나 기업주들이 귀하게 여기고 저들의 고충과 아픔을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며 우리교회가 앞장서서 저들을 도와야 합니다. 저들의 육신의 삶을 도와주면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분들도 있습니다. 지난봄에는 평화의 집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주 노동자들의 수가 계속 증가하여 약 100만 명까지 증가 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자기 발로 이 땅에 찾아 온 저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킬 아주 중요한 기회를 우리는 얻고 있습니다. 많은 선교자금을 동원하여 해외에 선교사를 보내는 그 비용보다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보다 효과적인 전도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우리 한국의 교회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땅에 와 있는 불쌍한 나그네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돌봐 준다면 저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아주 적은 비용으로 많은 선교적인 효과를 반드시 이룩할 것입니다. 지난 7월에 있었던 조선족 교회와 조선동포들을 위하여 총회외국인근로자 선교회가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그들의 소원을 함께 외쳐주고 정부에 대해서도 저들을 돕도록 호소함으로서 저들의 마음이 교회로 많이 기울어졌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자기들의 편에 서 준다는 것을 저들이 알았을 때 저들의 마음은 기독교에 대하여 열리게 되고, 때가 오면 성령의 역사로 저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교회는 외국인 나그네 전도의 아주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좋은 기회를 100% 이용하여서 많은 생명들을 도와서 저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서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표준새번역)\"빈궁한 사람들을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사람을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기껏 한다는 말이 \'초하루 축제가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 수 있을까?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낼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 찌꺼기 밀까지도 팔아먹자 하는 구나.\' \" 이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보복의 말씀이 그 이후에 이어집니다. \"그들이 한 일 그 어느 것도 잊지 않겠다. 그들이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 어찌 땅이 지진을 일으키지 않겠으며 어찌 땅위에 사는 자들이 모두 통곡을 하지 않겠느냐? . . . 그 날에는 내가 대낮에 해가 지게하고 한낮에 땅을 캄캄하게 하겠다. 내가 너희의 모든 절기를 통곡으로 바꾸어 놓고 너희의 모든 노래를 만가로 바꾸어 놓겠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옷을 입히고 머리를 모두 밀어서 대머리가 되게 하겠다.\" 이번 뉴욕과 워싱턴의 참사를 보면서 테러자들의 무도함과 잔인함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으나 다른 한편 미국이 소련연방의 붕괴 이후 너무 오만하였기에 겸손하게 행동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피의 보복보다는 참회하면서 외유내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00억불을 전쟁을 위하여 쓰지 말고 지구촌의 평화를 위하여 쓰면 미국은 승리합니다. 모두가 그 앞에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주신 말씀과 같이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 님 대접하듯이 대했다면 세상은 평화롭게 됩니다. 오늘날의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잘못한 죄로 그들의 나라에 갔다가 보복 테러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보복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돌봐야 합니다. 작은 자에 대한 봉사가 곧 예수님께 행한 것입니다. 외국에서 와서 가장 좋지 못한 환경에서 제일 어려운 일들을 하는 근로자들을 도우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 됩니다. 감히 이런 등식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나그네=예수>. 나그네가 예수님입니다. 이런 심정을 가지고 나그네들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미국에서 거의 10년 이상 나그네의 삶을 살아 보았지만 나그네들은 서럽습니다. 외롭습니다. 백인들에게나 흑인들에게 왕따도 당해보았고 그리고 그런 아픔을 당하는 동족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1992년도에는 반대로 나성에서의 흑인들의 폭동을 당하면서 한인들은 많이 반성했었습니다. 금년에 처음 실시하는 외국인근로자 주일에 성도들의 나그네들에 대한 관심을 부탁합니다
너를 이방인에게 보내리라/행22:2-21
너를 이방인에게 보내리라/행22:2-21 2001-09-19 20:57:35 read : 89 바울은 많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린치를 당해서 거의 죽을 뻔하게 됩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바울을 향하여 율법을 무시하고 성전을 모독하고 하나님 백성, 선민 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무시한다고 해서 절대로 살려둘 수 없다고 결심을 하고 그를 해치려고 합니다. 로마 군대가 출동해서 바울이 죽지 않도록 군중들로부터 그를 구원해 내게 됩니다. 그들이 바울을 미워하는 가장 큰 근본적 원인은 복음에 대한 적대감 때문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인 동시에 또한 죄인 된 인간의 자랑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기 의(意), 상대적인 우월감, 이것을 복음은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 거부감이 있었고 이것을 가장 예리하게 생각하는 동족 유대인 바울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로마인들은 로마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요사태입니다. 시끄러워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제 군인들이 출동해서 바울을 체포했고 이제 이 소요사태의 원인인 바울을 취조하기 위하여 병영 내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안토니아 성체라고 하는 그 계단 가장 높은 곳까지 언덕길을 올라갑니다. 언덕 위의 높이 세워진 병영인데, 거기 맨 높은 계단으로 올라가면 밑으로 쭉 끝이 보이고, 거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와-하고 있다고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계단으로 올라가서 취조실로 가면 이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이 군대 지휘관인 천부장에게 부탁합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유대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십시오. 유창한 헬라 말로 로마 천부장에게 부착하자 천부장이 정치범이 아닌가 확인을 하고 말할 기회를 허락합니다. 이제 바울이 성난 군중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말을 하려고 그렇게 나서게 되는 겁니다. 왜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 끌려가기 직전에 마지막 설교를 하려고 하는가? 그렇게 묻는다면 바울의 마음이 지금 너무도 답답한 것이죠. 유대인들의 많은 생각들은 자기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는 절대로 성전을 모독한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을 무시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율법을 필요 없다고 한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오해하고 있으니, 어쩌면 내가 이것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지막 오해를 풀도록 설득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중에 다만 몇 사람이라도 예수께 돌아올 수 있다면 이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그러한 마음을 가졌을 것으로 봅니다. 또 하나는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분들은, 아마도 바울이 이 순간에 스데반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한 분들이 많습니다. 바울 자기가 스데반이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의 모습이 자기에게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스데반 죽음 후에 바울이 계속 고민했고, 그리고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 신앙의 뿌리가 바로 스데반의 설교가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제 이 군중 앞에서 앞으로도 이럴지 모르는데 마지막으로 스데반처럼 마지막 설교를 천사의 얼굴로 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추측들을 합니다. 만약에 다는 아니더라도 이중에 다만 몇 사람이라도 내가 스데반 말을 듣고 감격한 것처럼 마지막 나의 진정한 간증을 듣고 돌이키는 자가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해서 그는 마지막 자기 힘을 모아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마음으로 말씀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첫 결론의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2절인데요. 1절 보시면,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부형이란 말은 유대인이 유대인을 향한 말입니다. 다정하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말로 바울은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 설교의 내용이 자기의 일생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자가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종이 된 그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기 진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소위 휴먼 스토리입니다. 자기의 지나온 삶을 진솔하게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자기고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그가 고백하는 자기 과거의 내용. 우리가 다 아는 바지만 한번 쭉 살펴보겠습니다. 주제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같이 이스라엘을 모독하거나 율법을 버렸거나 매국노가 아닙니다. 이것을 먼저 증명하고자 합니다. 3절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나는 유대인입니다. 태어나기를 유대인의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빌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서 혈통이 유대인이요. 10살이 넘으면서 예루살렘에 유학을 와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한 율법교육을 받았습니다. 가말이엘이 누군지 여러분도 아십니다. 나는 피도 유대인이고 교육 즉 나의 사고의 기초가 바로 유대인이다. 나의 성장도 유대인 바리새인 출신입니다. 나는 유대적이 아닐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자기 배경을 설명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나의 입장은 어떠하냐? 설명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나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시지만 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얼마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4절에 설명합니다.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사랑하기를 여러분만큼 했고 여러분 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데 제일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 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내가 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주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메섹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밝은 빛이 내게 비쳐오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6절입니다.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불빛이 비치면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것도 바로 오정쯤 해서 그런 얘깁니다. 오정쯤이라고 하는 말은 계시론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오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정신이 가장 말똥말똥 할 때거든요. 헛깨비 보지 않을 시간이 바로 오정입니다. 열 두시 정각 누가 햇갈리겠는가 그런 얘깁니다. 제가 신학생 때 말입니다. 가을 사경회를 하는데 가을사경회가 꼭 있습니다. 9월초 2학기 개강을 하게 되면 신학교에서는 전학생이 전부다 산에 가서 부흥회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수업하기 전에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여서 사경회를 하는데 사경회 다 끝나고 밤중 11시쯤 되었는데 기도하는 친구들끼리 두 세 팀으로 나뉘어 산에 올라갔는데 한 무리가 오늘밤에 나는 주님을 꼭 만나야 된다고 하면서 무덤 옆에서 기도를 하겠다고 하여 우리는 올라왔는데 갑자기 웃옷을 벗더라구요. 왜냐하면 기도하는 친구들이 옷을 벗고 해야 졸리지 않고 부르짖어 땀 흘려 기도해야 된다고 하면서 웃옷을 벗었답니다. 우리는 그냥 올라왔는데, 조금 있으니까 \"주여! 주여!\" 하고 외치는 소리가 나는데, \"주여 주여\" 소리가 잘 들으면 \"주여! 주여!\" 이고 잘못 들으면 \"죽여 죽여\" 처럼 들리고 나 잡어 먹어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기도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기도하러 올라가지 않은 친구들이 잠을 자려고 하니 하도 시끄러워서 몇 사람이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죽여 살려 하니까, 무슨 일인가 하여 후레쉬를 들고 올라왔습니다. 소리 나는 곳까지 와서 후레쉬를 비춰보니까 우리 학생들이라. 그래서 그냥 다시 내려가는데 갑자기 생각하니 이상하단 말입니다. 왜 웃옷을 벗고 저렇게 안 하던 짖을 하나? 도대체 누군가? 싶어 궁금하여 다시 가서 얼굴을 비춰보고 김 아무개 아무 개 이하 여러 명 이단 말이죠. 누구누구인지 확인하고 왔는데, 각자가 다 기도하고 내려 왔는데, 그 다음날입니다. 웃옷을 벗고 무덤에서 기도하던 친구가 하나님 응답 받았다고 하니까, 모두들 호기심을 갖고 모여서 듣는데, 그 친구 말이 내가 어제 밤에 줄을 각오로 기도를 하는데 주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한 밤중이 되었을까? 나를 주께서 부르셨음을 확인시켜 주옵소서 하는데, 갑자기 환한 불빛이 자기를 향하여 멈춰서서 비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비취신 주님께서 가까이 와서 자기를 바라보았다는 겁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사라져서,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났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또 안 믿어져서, 주여! 나에게 다시 한번만 더 나타내 주시옵소서! 했더니 비취신 주님께서 조금 있으니까 다시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를 쏘아 보듯이 가만히 지켜보았다는 겁니다. 정말 눈을 떠서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고 간증을 하는데 모르는 친구들은 아, 그러느냐고 했더라는 겁니다. 그 전날 밤에 후레쉬 들고 왔던 친구가 거기 있었어요. 그래서 그 얘기를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눈물겨운 얘기지요. 오정쯤이란 말은 무슨 소리냐 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시간 절대로 헷갈릴 수 없는 시간에 하나님을 만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빛을 보려고 기대 했던 것도 아니고 또한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밝은 대낮에 전혀 기대하지 않고 예측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 졌는데 밝은 낮인데도 더 밝은 빛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옆에 있는 사람도 보았어요. 중요한 것은 증겁니다. 그 빛을 본 결과 어떻게 됐는고 하니 눈이 멀어버립니다. 이건 확실한 증거. 이렇게 증거를 들이대는 겁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렸는데 그 내용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소리를 듣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고 당돌하게 물었을 때, 불빛만 보고 주여 감사합니다. 이게 아니였습니다. 불빛을 보고 음성을 듣고 그리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말할 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분명하게 명백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펄펄 뛰었는데, 주께서는 네가 나를 핍박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바울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래서 그가 앞이 캄캄하여 하는 말이 10절 입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갔더니만 아나니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나니아가 누군가 하면 12절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여러분도 아시는 바 율법적으로 경건하고 의롭다고 소문난 아나니아를 아시지 않습니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사울아! 하나님이 너를 부르셨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불렀는가에 대하여 14절입니다.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바울을 부르신 3가지 과정 혹은 목적을 설명하시는데요, 자기 뜻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자기 뜻을 알게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뜻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깊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기 백성들에게 꼭 전해 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뜻입니다. 구원의 오묘한 비밀입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 을 받는 것입니다. (이 신 칭 의) 라고 하는 것. (이 신 )믿음으로써 (칭 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교리. 이것이 하나님이 알게 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견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그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인간 중에 가장 정학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신 칭의 의 교리가 구약에도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희미했고 바울처럼 명료하게 깨달은 자는 없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자기 뜻을 알려면 먼저는 유대교 율법에 정통해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깨달은 그 깊은 진리를 그 시대의 학문과 철학을 통하여 변증할 수 있는 체계화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볼 때에 이것을 체계화시키면서 율법은 행하므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보여지지만 율법을 넘어서 율법 속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원리가 그곳에 녹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제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창세기 15장 6절에서 이 근거를 찾아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을 믿은 것을 의고 여겼다. 여러분 제사 자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드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양 죽이는 것이 뭐가 어찌 내 죄를 사할 수 있는가? 사 할 수 있을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제도를 주셨고 양에게 내 죄를 전가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용서하겠다고 하는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을 믿고 그 믿음의 결과로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속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매 교리가 들어 있는 겁니다. 이것을 바울이 깨달아 안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절대로 인간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중에 비밀이었다. 이것을 바울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저 의인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죄인 중의 죄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달려 죽는 형틀입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이 볼 때에는 제일 흉악한 죄인 이 누구냐 하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 의인을 가장 큰 죄인으로 십자가에 매단 그 사건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죄인이 사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의인이 의로운 가운데서 죄인 되는 것 이것을 철학적으로 만유균형의 원리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겠습니까? 반대사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의인이 죄인 된 사건이 있기 때문에. 저 의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위해서 죽음을, 다시 말하면 죄인으로 죽는 그 사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그 입에서 나온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 신 칭 의) 의 비밀을 알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속죄 제사성을 깨닫고 그리고 이제 그 음성을 듣고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 복음의 진수에 대하여 귀로 듣고 있습니다. 이 진리가 깨달아지기까지 수 천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역사와 전통이 지나갔고 깨달은 자와 들은 자를 통해서 기록되고 그리고 그 말씀을 연구한자에 의하여 아주 쉽고 평이하게 설명되고 선포되는 복음의 진수를 우리가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굉장한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 앞에서 이 보고 듣고 깨달은 것을 전하는 증인이 되라고 그는 사명을 받게 되고 그래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7절입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어디로 돌아왔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 왔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성전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명을 받들어 성전에 와서 나는 기도했습니다. 기도 중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니 너는 성전을 떠나서 이방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충실한 유대인이며, 여러분의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 시며 나는 성전을 사랑하였고 더구나 배교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았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함께 믿는 여러분이 믿고 내가 믿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하여 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을 하고 있을 때 유대인이 \"저 놈 잡아 죽여라\" 했단 말입니다. 22절 얘기가, 왜? 저놈 잡아 죽이라고 하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이방인에게 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그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들로 말하자면 어떤 의미가 되는고 하니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다는 뜻이 됩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와야 하는 죄인이고 그것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주셨다면 우리 유대인의 특권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것이요, 이것은 유대인의 자존심에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했다고 한단 말입니다. 자기들이 죽인 예수를 의인으로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들은 심각한 갈등을 하게 됩니다. 둘 중에 하나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믿고 주장하는 내용을 따르든지 아니면 반대 입장에 서지 않으면 그들은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뉘우치고 싶지 않은 그들은 바울을 죽이라 그렇게 외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의 설교가 끝나지 못한 가운데서 이 일은 그렇게 소란스럽게 끝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맺고 싶었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대개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겠습니까? 그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하여 세계만방에 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죄인은 구원받습니다. 여러분과 나도 똑같았습니다만 예수를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를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나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율법의 완성인 복음을 함께 믿읍시다. 우리 함께 예수 믿읍시다. 그런 얘깁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이러한 결론을 알고서 중간에 끊어 버리고자 그들이 죽이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바울이 왜 자기의 체험을 이렇게 말했는가? 간증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상대에게는 강한 호소력을 갖습니다. 그 이상의 진실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후의 순간에는 자기 고백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진실한 고백을 하게 되고요. 중요한 것은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옳은 것 같아서 이 복음으로 들어 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강권적이 역사 때문에 내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 고백 속에 들어있는 바울의 전제가 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른 신앙에 대한 개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전 인생과 인격과 사고의 유일한 권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 내 의지와는 달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내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뜻과 상관없이 따라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그는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의 신앙을 조명하자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최고의 권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있어서의 최고의 권위는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욕심, 자기의 이익, 자기 평판, 이것이 그들의 가장 근본적이고 그리고 최후의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던졌고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지 않고 자기 욕심에 지기들을 맡기게 됩니다. 자기의 자랑을 근거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들의 틀 속에 가두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의 영혼을 위하여 세상 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자기 욕심에 붙들려서 하나님이 우리들만 사랑한다고 강조하고 이방인에게 이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차람하다고 죽이려고 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위치에 다다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 속에서 참으로 어려운 문제는 무엇이냐 면 내 행위의 최고 기준은 누군가? 여러분 우리 행동의 최고 기준은 무엇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냐? 내 욕심이냐? 내 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위치는 절대적이냐 아니면 상대적이냐? 내가 손해보고 내가 싫어도 혹은 죽음이 앞에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네, 하고 따라 가는 것이냐? 아니면 내 멋대로 내 마음대로 해놓고 하나님은 나를 따라 다니면서 O.K.나 하고 복이나 주는 그러한 하나님을 나의 추종자로 만드느냐? 그것이 신앙의 많은 사람들이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능력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그 큰 그 능력으로 나에게 복을 좀 주옵소서 하나님의 지혜는 필요하지 않고 내 뜻과 지혜가 앞서므로 하나님의 지혜는 필요 없고 능력만 주옵소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태인이 바울을 거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입학할 때 여러 번 질문을 받은 내용이 왜 신학교에 왔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대답이 다 다르겠습니다. 살다 보니 인생이 무상해서요 여기 진리가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이 대학 저 대학 다 떨어지니까 점수가 안돼서 집에서 신학교나 가라 해서 온 사람도 있고, 누가 기도해보니까 너는 신학교나 가야 할 팔자라더라 그래서 온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들은 신학을 깊이 연구해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대답이 다 다양하겠지요? 제가 두어 번 질문을 당하고 나서 나중에 물어보았어요. 신학교 교수님에게 어떤 대답이 정답입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날 보내서 왔습니다 랍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던지 간에 발뺌하는 나를 꽉 붙들어서 가라! 그래서 왔습니다. 이 말을 기대한답니다. 이 확실한 소명의식을 기대한답니다. 가장 위험한 신앙은 무엇이냐? 아예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 욕심 속에 하나님을 가두는 사람 그리고 이것을 합리와 하는 사람, 하나님을 수단화하는 사람 이것이 신앙의 최고의 적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유대인의 모습 속에서 명백하게 바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을 통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과연 부러져야 하는 것이냐? 자기 욕심이 하나님 위에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 이름을 불러도 하나님의 적대자로 밖에는 설 수가 없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따르고 그리고 따르면서 더욱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믿고 가는 것입니다. 알게 되면 감사하고 기뻐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냐? 우리의 욕심이냐? 이것이 우리가 선택해 야할 최후의 길인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오늘 바울의 변증을 통하여 여러 가지를 상고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렇게도 공격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기준 되지 못하고 자기들의 욕심이 최후의 판단 기준이 되었음을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명백히 분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이 입술로의 고백이 문제가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이 나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시는 것이냐? 아니면 나 자신의 목적이 앞서고 하나님은 나의 종처럼 나를 위하여 일해주는 존재로 전락시키느냐? 이 문제가 우리에게 최후의 문제로 남는 줄 아옵니다. 원하오니 우리에게 바른 신앙을 주시기를 원하오며 유대인같이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잘 안다고 말하고 그리고 오래 믿었으나 자신을 하나님께 꺾기지 못함으로 인하여 결국은 믿음의 길에서 실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비참한 사람되지 않도록 은혜 내려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나님! 교회 나와서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구원받는 백성들 되기를 원합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만 되고 말지 않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원하옵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하나님 앞에 굴복할 수 있도록 부러질 수 있고, 깨끗이 포기 할 수 있고,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너희는 이방 사람처럼 하지 마라/ 호9:1-4
너희는 이방 사람처럼 하지 마라 호9:1-4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과 세상에 속해 있는 자들과 구별된 생활을 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며 구원자를 알고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냈습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택하신 자녀들이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8:14 절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은 자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들을 선택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분을 잊어버리고 그 목적도 잊어 버렸습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버리고 자기 멋대로 다른 자식들을 불러들어서 그들의 잘못된 것을 본받아 살 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사람한테 가서 내 아버지라 하면서 그 앞에서 기뻐하 고 뛰며 놀고 제물을 바치고 죄를 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보고 어떻게 말합니까 ? 제 아비도 모르는 자식, 불효 자식이라 하지 않습니까 ? 이스라엘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을 본 호세아선지자는 9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호9:1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 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아 ./ 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자식을 바라보면서 부르는 부모의 음성이요,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왜 이스라엘아 ./ 라고 부르셨는가 ?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당시 이방인들은 언제 기뻐 뛰며 놀았느냐하면 추수할 때입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면서 그들은 즐거웠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축제를 지냅니다. 이 모든 풍성한 열매는 바 알이 준 것이다. 자 ./ 먹고 마시자. 술과 음식을 먹고 춤을 추며 기뻐 놀다가 음행이 이루어 집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방인 처럼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달라야하는데 하나님 을 잊어버린 그들은 우상 앞에서 이방인들과 똑같이 행음을 하였습니다. \"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이런 것을 본 호세아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 물질의 풍성함이 다가 아니다. 호9:2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며 ... 물질의 풍성함을 인하여 우상 앞에서 기뻐하지만 그 물질이 너희를 기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너희를 보호하지 못한다. 물질이 너희에게 참된 기쁨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너희를 잘되게 성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물질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그 물질은 너희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물질이 너희를 실망하게 할 것이요, 속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 너희들이 해야할 일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 니다.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 이스라엘아 ./ 너희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고, 풍성한 열매를 주시는 그분 앞에서 뛰어 놀아라 는 말씀입니다. 누가 씨를 뿌릴 땅을 주었느냐 ?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분이 누구인가 ? 바알인냐 하나님이냐 ? 하나님께 감사의 열매를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나한 이웃을 위하여 나누어주며 기뻐하고 즐거워 는 것이 너희의 할 일이 아니냐 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하지 않는 한 물질이 너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 이고 기쁨이 너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이방 사람처럼 행하는 한 하나님의 축복은 너희들에게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2. 이방 사람처럼 행하면 약 속의 땅에서 쫓겨난다. 호9:3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 을 먹을 것이니라 너희들이 이방 사람처럼 계속 그러고 있는 한 여호와의 땅에서는 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에서는 구별된 자들만이 거하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땅이란 약 속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 속의 땅으로 구별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은 그들의 후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신30: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신30: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 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30: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 를 섬기면 신30: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 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들이 이방 사람처럼 행하였기에 너희는 약 속의 땅에서 거하지 못하고 쫓겨나서 이방 나라에서 더러운 것을 먹게 될것이다는 것입니다. 애굽이나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종이 되면 깨끗한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게 되고 부정한 음식을 먹게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될 것을 말씀합니다. 아버지를 따난 아들처럼 돼지의 밥도 얻어먹을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을 말씀합니다. 3. 이방 사람처럼 행하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된다 호9:4 저희가 여호와께 전제를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저희의 제물은 거상 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 무릇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저희의 식물은 자기 먹 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이방인의 포로가 되고 속국이 되면 하나님에게 제사도 드릴 수가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애굽의 사백년 동안, 바벨론의 칠십년동안 그들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일제시대와 같이 또 지금 북한과 같이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 드린다하여도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제사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포로요, 장소도 이방인 땅이요, 제물도 부정하기에 하나님의 집에 드릴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 이방 사람처럼 세상의 것으로, 죄악으로 기뻐 뛰놀지 말아라 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별되게 살아라 는 것입니다. 구별되게 살면 하나님이 우리들을 알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물질이 실망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 속의 땅, 하나님의 기업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예배하며 살게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나그네였으니... / 레19:33-34/ 외국인공동체헌신예배설교/ 2012-11-11
너희도 나그네였으니... 레19:33-34 1. YIC 그 생소한 이름 제가 염산교회에 처음 왔을 때, YIC YIC 그러길래 저게 뭐지? 궁금했었습니다. 생소한 이름 YIC, 여러분의 표정도 보아하니 듣도 보도 못했다는 표정이군요^^ Yumsan International Church 의 약자라고 하네요. 염산 국제교회가 YIC더군요. 염산국제교회라는 이름으로 중국, 필리핀, 베트남, 네팔 등의 외국인들이 공동체를 이뤄 주일 11시 30분에 어르신 나눔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모여서 예배하는지는 좀있다 영상을 통해 나누도록 하구요. 오늘 말씀은 이 YIC라는 정체불명의 단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숙제를 던져주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한국에는 텃세라는 말이 있습니다. 텃세란 말은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특권의식, 또는 뒷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말합니다. 한국은 예부터 단일민족 국가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좋게 작용하면 좋지만 다른 민족들 입장에서는 되게 배타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지기 쉬웠습니다. 텃세가 심한 민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제 3세계 사람들의 한국에서의 차별과 그들에 대한 처우개선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제가 10년 전에 시골에서 서울 구경하러 올라와서 명동성당을 보고 싶어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명동성당 앞에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의 차별과 폭력을 금해달라는 시위현장이었습니다. 실제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천막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운동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권적인 행위의 근절에 대한 문제는 사회적인 이슈가 됐었고, 많은 공감대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코미디 프로에서도 폭력적인 한국 사장님들을 비꼬기 위한 캐릭터들도 등장했었죠.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기억 나십니까? 여러분들이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제가 재연을 해 드려 보겠습니다. 하루는 사장님 갑자기 막 때렸어요 왜 때리냐고 했더니 생일방이라며 계속 막 때렸어요 전 너무 아파서 그만하라고 했더니 사장님 작은 마음의 표시니 거절하지 말라며 계속 막 생일방을 줬어요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월급 올려달라 하면 생일방 줍니다 몸 아파서 일 못하겠다 하면 생일방 줍니다 저 1년에 생일 한번 있어요 왜 자꾸 사장님 매일 생일빵 줍니까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그 당시의 우리 사회를 비꼬는 풍자 코미디극 이였죠. 10 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외국인 그것도 제 3세계 외국엔들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변했을까요? 크게 변한 거 같지 않습니다. 지난 달에도 우리 YIC 형제 한 명이 저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사장님이 자신이 1년 가까이 일한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불법 채류자이기 때문에 신고를 못한다는 것을 알고 그런 거랍니다.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저랑 신대원을 같이 다니던 윙풍남이라는 베트남에서 유학온 전도사가 한 명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기숙사 저의 옆 방에서 살았는데 정말 시끄러웠어요. 전화통을 계속 붙들고 통화하는 소리 때문이었죠. 맨날 전화로 베트남 말로 상담전화를 받는데, 한국 사장님들이 일 시켜 놓고 돈을 안주는 베트남 동료들의 전화라는 거였습니다. 그 친구도 늘 “사장님 나빠요”를 입에 달고 살았죠. 한국 남편에게 국제 결혼 온 여자분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남편과 시댁의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는 여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어느 샌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염리동도 도심 속의 다문화 동네로 변모해 가고 있습니다. 제 3세계 외국인들이 염리동으로 모여 들고 있는 것이죠. 이 외국인들이 아파트촌으로 가겠습니까?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나마 시내 중심에 염리동 같은 동네가 있어서 이분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거죠. 어느 새 우리 가운데로 가까이 오게 된 이방인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으며 어떤 자세로 그들을 대하고 있나요?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2. 압제하지 말고 사랑하라. 여러분 텃세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회 가운데서도 이러한 외국인에 대한 텃세가 문제였나 봅니다. 오늘 본문 33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억압하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만 탈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 12장 38절에는 잡족과 동물들도 그들과 함께 탈출했다고 말합니다. 잡족이란 섞여있는 군중이란 뜻인데요 한 마디로 다른 민족 사람들, 즉 외국인들도 그들 사이에 섞여서 이집트를 탈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외국인을 상당히 억압했었나 봅니다. 적어도 그들을 무시하고 억압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 안에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다른 외국인들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할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대한 처우를 아예 율법 조항으로 못박아 놓은 것이지요. 우리 개역 성경에는 거류민이라고 나와 있는 데요,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란 뜻이죠. 이 거류민이라는 히브리 단어가 “게르’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꼭 알아 두어야 할 단어 중 하나입니다. 게르는 히브리어로 나그네, 거류민, 이방인이란 뜻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게르였다라고 합니다. 나그네였다는 것이죠. 33절과 34절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외국인들에 대해 3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첫째 외국인들을 억압하지 말아라~ 노동착취를 하지 말고, 과도한 의무를 부여하여 그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둘째 자국민처럼여겨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라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대하라는 겁니다. 조금 파격적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조금 파격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외국인들, 특별히 신앙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 그들을 외국인들로 여기지 말고 자국민, 원주민들로 여기고 대하라는 명령을 하시고 계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셋째 명령은요 한 술 더 뜨십니다. 그 외국인들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을 합니다. 저는 이 사랑하라는 히브리 동사 아하브 동사가 쓰여진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하브라는 동사는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성지 답사 갔다 오신 분들이 사해의 진흙으로 만든 아하바라는 비누를 사가지고 오셨던데 아하바라는 뜻이 바로 사랑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사용됐던 단어가 바로 아하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쓰인 사랑하다라는 뜻의 아하브가 지금 나그네 게르들을 대상으로 쓰인겁니다. 게르를 사랑해라.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그릇의 크기에 저는 탄복합니다. 게르를 압제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들을 너희 국민으로 받아들여~ 아니 거기서 그치지 말고 그들을 사랑해 주어라~ 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윷놀이 할 때 윷을 담아 던지는 작은 종지 그릇만한 스케일인데 하나님은 아예 큰 저장 탱크와도 같습니다. 나그네를 압제하지말 뿐만 아니라 사랑하라는 겁니다. 저만 충격을 받은 것 같군요. 여러분들은 여기 참석하신 YIC 의 형제 자매님들이 외국인들로 보이십니까? 우리 나라사람으로 여겨지십니까? 솔직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이들을 외국인으로 보았지 우리 나라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게르들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를 보십시오. 이집트 땅에 있을 때 너희도 게르였기 때문이다. 너희도 나그네였기 때문이야. 너희가 나그네로서 당한 그 설움을 알잖아~ 이 사람들이 당할 아픔을 역지사지로 생각해봐~ 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게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도 게르였다. 옆에 사람에게 고백해 주세요. 당신도 게르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나는 염리동 토박이다. 적어도 우리 조상때부터 100년 이상 염리동에서 살았다. 라는 분 손들어 보십시오. 여러분도 모두 여기에 굴러온 돌들이 아니십니까? 나그네의 설움을 아시는 분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염리동에서 나그네의 설움을 당하고 있는 우리 외국인 형제 자매들의 사정을 우리가 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페러다임을 바꿉시다. 이분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우리 조국의 국민이며, 우리 형제요 자매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염산국제교회 YIC는 우리 염산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게르인 우리 외국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손짓이며 몸부림인 것이지요. 그래서 YIC는 이제 그냥 주일에 저 구석에서 따로 모이는 외국인 모임 수준이 아니라 우리 아들 딸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 공동체, 게르 공동체인 YIC는 정말 염산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며 프라이드입니다. 게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귀한 도구가 바로 YIC입니다. 단순한 영어 이니셜인 YIC라는 이름 대신 나그네 예배, 나그네 커뮤니티, 게르 커뮤니티, 이런 의미 있는 말로 이 모임의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요? YIC에 오시는 70%의 사람들이 불신자들입니다. 예수님 믿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은 다들 대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들 중에 YIC 예배 오기 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중국 한족들은 전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한족 3명 조선족 교포 1명이 세례까지 받았잖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늘에서는 지금 잔치가 벌어진 것이지요. 이 분들이 주일 한 번 YIC를 통해 신앙이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막노동을 통해 돈 벌러 온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한국인 남편 만나서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여기에 온 이유는 다양하지만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여러분 이 나그네 공동체 YIC는 정말 귀한 모임입니다. 오늘만 하더라도 한 번도 예수님을 믿어 보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못한 네 명의 초신자들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분들이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분명히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여러분 YIC에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어 주십시오. 우리는 봄 가을에 힐링캠프라는 이름으로 수련회를 갖습니다. 재정과 기도로 후원해 주시면 저희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예배 후의 한글교실, 한 달에 한 번 음식을 해서 나누는 친교모임도 있고 함께 큐티를 하는 큐티 모임등 다양한 소그룹 활동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YIC는 더 이상 염산에서 이방인이 아닙니다. 우리도 나그네였으니….나그네된 우리의 외국인 형제 자매들을 더욱 사랑합시다. 이것이 염산교회를 향한 YIC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복음을 듣는 이방인/행10:34-43
복음을 듣는 이방인/행10:34-43 2007-04-24 09:38:17 read : 136 경건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기도 중에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도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하늘로부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온갖 짐승과 새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베드로에게 그것을 다 먹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복음이 열려 있다는 의미의 계시였습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고넬료의 집안 식구들과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가 전한 이방인들에게 전한 설교의 내용이 무엇인가 알아봅시다.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행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말과 자신이 본 환상을 서로 연관지으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편협된 의식에 얽매어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당신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두 받으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스스로의 판단을 따라서 그것을 진리와 비진리로 규정하는 오류를 자주 범합니다. 그래서 특히 믿음생활 가운데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엡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닫고 외친 이 한 마디의 고백은 여러 세기에 걸쳐 유대인들이 가졌던 민족적 편견을 일소해 버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부하며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믿고 행하는 일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며 흔들릴 수 없는 원리이고 초자연적인 특색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데, 한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세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해 주셨습니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사무엘상 16장에서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의 집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왕을 택하게 되는데, 이새 아들들을 그 앞에 데려 오게 하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이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제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과 경건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 그리고 편견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 (행 10:36,37)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본문에서 베드로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사용하던 칭호를 예수에게 사용하면서 구원의 유일한 길인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유의 주’로서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십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가 평화의 복음을 핵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화평’은 히브리어로 샬롬이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로 쓰는데,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중보자로서 그 직위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성사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과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심판하는 자와 죄인의 관계였으므로 화해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동안 그 둘을 가로 막았던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민족적 편견과 편애가 없어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화평의 도구의 역할을 합니다. 본문 37절에서 이 화평의 복음은 요한의 세례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예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마 3:1,2)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하나님께 나아 올 때에 하나님과 참 화평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넬료 일가와 친구들이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진지한 태도는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 안에서 참 평강을 경험한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의 핵심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그 가속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전한 말씀의 핵심적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실로 강한 권능을 가지시고 놀라운 능력으로 선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이 권능을 사용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병든 사람, 배고픈 사람, 세상에서 소외 된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가 새 삶을 찾아 주셨습니다. 오늘 모든 병자들을 고치시는 주님의 능력이 이 시간에 임하길 바랍니다. 셋째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다시 사셨습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십니다. 죄 사함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기초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얻는 일에 대하여 강한 체험이 없다면 영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행 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복음 전도자들은 죄사함에 대하여 강하게 증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요, 구원에 이르는 초보단계이며, 모든 은혜를 얻는 첫 단계가 됩니다. 이상에서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복음의 진수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간략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말씀을 전할 때 자신이 갖고 있는 세상적인 지식을 가미하려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오히려 복음의 참뜻을 흐리게 합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전도자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다가 오류를 범하기보다 말씀을 그대로 전함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태도가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에는 초기 사도 시대에 있었던 계시적 체험을 친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이방 세계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고넬료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쿠리너 “다른 빛은 촉광을 점차적으로 잃지만 복음은 그 강도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부활의 증인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들은 예수의 증인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믿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위치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타나내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속합니다. (행 10:39,40)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는 자신이 목격자이며 증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사흘만에 그를 살리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부활의 주님은 사도들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사도의 자격 중에서 한 요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친히 직접 목격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행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던 자들은 이 일에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자들은 육체의 부활과 함께 영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만약 복음 증거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부활 사상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올바른 신앙으로 성장해 나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 된다. 또 이것은 성도가 어떤 역경도 이기고 나가며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행 10: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베드로는 고넬료 일가와 함께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증거 내용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의롭다 해 주시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부활의 증인으로 예수님을 전했고,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도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많은 일 중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분이 나의 삶과 생활에서 어떻게 구원해 주시고, 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주님의 능력을 소개하고 그 이름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고백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도들은 이 일을 위하여 생과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며 새 생명의 길로 나가게 하는 선한 일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니엘 웹스터 “그리스도의 복음만큼 탁월하고 신성한 실체는 없다.” 파스칼 “나에게 복음이란 결코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무디 선생이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던 한 사람에게 전도를 했다. 무디는 하루종일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버스를 기다리던 그 사람에게도 “예수 믿으시오”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건 안 믿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하고 서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퉁명스럽게 무디는 “당신이 나에게 화내는 것은 좋지만 예수는 믿어야 합니다.”하고 자꾸 강조했습니다. “당신,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요”하고 그가 묻자. 무디는 “그것이 내 직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에 사람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이 사람은 무식하니 그만두고 저 사람은 유식해서 곤란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전도할 상대가 없습니다. 반대하는 자나 무식한 자나 지식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가릴 것이 없습니다. 결 론 베드로 설교는 고넬료의 일가에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 설교의 내용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고백의 기초가 됩니다. 성경은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마28:18-20; 막16:15).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우리를 위하여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듣는 이방인/행10:34-43
복음을 듣는 이방인/행10:34-43 2007-03-06 16:49:52 read : 90 경건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기도 중에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도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하늘로부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온갖 짐승과 새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베드로에게 그것을 다 먹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복음이 열려 있다는 의미의 계시였습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고넬료의 집안 식구들과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베드로가 전한 이방인들에게 전한 설교의 내용이 무엇인가 알아봅시다.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행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말과 자신이 본 환상을 서로 연관지으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편협된 의식에 얽매어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당신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두 받으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스스로의 판단을 따라서 그것을 진리와 비진리로 규정하는 오류를 자주 범합니다. 그래서 특히 믿음생활 가운데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엡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닫고 외친 이 한 마디의 고백은 여러 세기에 걸쳐 유대인들이 가졌던 민족적 편견을 일소해 버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부하며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믿고 행하는 일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며 흔들릴 수 없는 원리이고 초자연적인 특색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데, 한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세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해 주셨습니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사무엘상 16장에서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의 집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왕을 택하게 되는데, 이새 아들들을 그 앞에 데려 오게 하였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이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제지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과 경건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 그리고 편견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할 것입니다. 화평의 복음 (행 10:36,37)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본문에서 베드로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사용하던 칭호를 예수에게 사용하면서 구원의 유일한 길인 예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유의 주’로서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십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가 평화의 복음을 핵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화평’은 히브리어로 샬롬이며,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로 쓰는데,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중보자로서 그 직위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성사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과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심판하는 자와 죄인의 관계였으므로 화해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의 관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동안 그 둘을 가로 막았던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민족적 편견과 편애가 없어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화평의 도구의 역할을 합니다. 본문 37절에서 이 화평의 복음은 요한의 세례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예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마 3:1,2)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하나님께 나아 올 때에 하나님과 참 화평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넬료 일가와 친구들이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진지한 태도는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 안에서 참 평강을 경험한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의 핵심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그 가속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전한 말씀의 핵심적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과 능력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실로 강한 권능을 가지시고 놀라운 능력으로 선한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이 권능을 사용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병든 사람, 배고픈 사람, 세상에서 소외 된 사람,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가 새 삶을 찾아 주셨습니다. 오늘 모든 병자들을 고치시는 주님의 능력이 이 시간에 임하길 바랍니다. 셋째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다시 사셨습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십니다. 죄 사함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기초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얻는 일에 대하여 강한 체험이 없다면 영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행 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복음 전도자들은 죄사함에 대하여 강하게 증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요, 구원에 이르는 초보단계이며, 모든 은혜를 얻는 첫 단계가 됩니다. 이상에서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복음의 진수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간략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말씀을 전할 때 자신이 갖고 있는 세상적인 지식을 가미하려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오히려 복음의 참뜻을 흐리게 합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전도자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복음을 전하다가 오류를 범하기보다 말씀을 그대로 전함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태도가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에는 초기 사도 시대에 있었던 계시적 체험을 친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이방 세계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고넬료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쿠리너 “다른 빛은 촉광을 점차적으로 잃지만 복음은 그 강도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부활의 증인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들은 예수의 증인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믿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위치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타나내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에 속합니다. (행 10:39,40)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실에 대하여 베드로는 자신이 목격자이며 증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었으나 하나님께서 사흘만에 그를 살리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부활의 주님은 사도들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습니다. 사도의 자격 중에서 한 요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친히 직접 목격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행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던 자들은 이 일에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자들은 육체의 부활과 함께 영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만약 복음 증거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부활 사상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올바른 신앙으로 성장해 나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 된다. 또 이것은 성도가 어떤 역경도 이기고 나가며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소망을 가져다줍니다. (행 10: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베드로는 고넬료 일가와 함께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증거 내용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의롭다 해 주시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해 주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부활의 증인으로 예수님을 전했고,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도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많은 일 중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분이 나의 삶과 생활에서 어떻게 구원해 주시고, 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주님의 능력을 소개하고 그 이름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고백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실상은 영적으로 죽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사도들은 이 일을 위하여 생과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며 새 생명의 길로 나가게 하는 선한 일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니엘 웹스터 “그리스도의 복음만큼 탁월하고 신성한 실체는 없다.” 파스칼 “나에게 복음이란 결코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 무디 선생이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던 한 사람에게 전도를 했다. 무디는 하루종일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버스를 기다리던 그 사람에게도 “예수 믿으시오”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건 안 믿건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하고 서 있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퉁명스럽게 무디는 “당신이 나에게 화내는 것은 좋지만 예수는 믿어야 합니다.”하고 자꾸 강조했습니다. “당신,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거요”하고 그가 묻자. 무디는 “그것이 내 직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에 사람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이 사람은 무식하니 그만두고 저 사람은 유식해서 곤란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전도할 상대가 없습니다. 반대하는 자나 무식한 자나 지식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가릴 것이 없습니다. 결 론 베드로 설교는 고넬료의 일가에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 설교의 내용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고백의 기초가 됩니다. 성경은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마28:18-20; 막16:15).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우리를 위하여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외국인 새 색시/ 룻2:2-3/ 2003-10-09
외국인 새 색시 룻2:2-3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그녀를 환영했습니다. 10년이나 지나서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그동안에 일어난 변화를 보면 놀랍기도 했겠지요. 동네의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베들레헴 타임즈가 있었다면 그날 1면 톱기사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나오미의 뒤에 따라온 룻이라는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의 한 마을에 파란눈 며느리가 들어온 것처럼 신기한 구경거리는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외국 여자, 즉 이방인 여자라는 것, 젊어서 과부가 되었는데도 시어머니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는 것 등등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이야기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의 소문은 금방 퍼졌고, 온 동네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룻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한편 룻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고향 모압에 있을 때부터 남편이나 시어머니로부터 베들레헴 이야기를 종종 들었었겠지요. 전에는 유다니 베들레헴이니 하는 곳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이제 남편의 고향이니까 궁금하게 생각되기도 하고, 가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또 시어머니 나오미는 종종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곳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게 되면서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시어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낯선 나라에 오게 되었습니다. 전에 모압에서는 나오미가 이민자였는데, 이제 룻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오게 된 것입니다. 룻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 늘 사모하던 시어머니의 고향,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마침내 발을 딛게 되었을 때 룻의 감회가 어땠을까요?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의 자서전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아프리카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정말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저도 처음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의 그 흥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뉴질랜드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의 감격을 기억하십니까? 지상 최후의 낙원,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자연, 그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땅, 한국에서 우리가 꿈꾸던 뉴질랜드의 모습은 이처럼 이상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환상이 깨진 때는 언제였습니까? 우선 당장 먹고 살 일이 캄캄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가 아니던가요? 룻이 보았던 베들레헴은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풍요롭고 여유로운 땅이었습니다. 모두들 나와서 모압에서 돌아온 자기들을 환영해 주는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의 땅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의 땅이었습니다. 여기서 산다면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연환경이 좋고 아름다운 땅이라 해도 먹고 살 일이 캄캄하다면 그 아름다움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땅이라 할지라도 굶어죽을 상황이라면 그 거룩한 땅에 대한 애정이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말하는데, 맨처음 단계를 관광객 단계라고 합니다. 아무리 거칠고 힘든 곳이라 할지라도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그런대로 즐겁게 지낼 수 있습니다. 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관광객이 이것저것 호기심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즐기는 것과 같은 상태라 해서 관광객 단계라고 합니다. 이 관광객 단계가 끝나면 고통이 피부에 느껴지고 불편함에 대한 불평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룻은 이 새로운 땅에서 관광객 단계를 거칠 여유도 없이 당장 생존의 문제와 싸워야 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르지요. 하나님을 믿겠다고, 그의 백성이 되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그 하나님의 땅에서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인도해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서 룻의 믿음이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룻은 하나님 백성이 되기로 한 것을 후회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모압으로 돌아가고 말겠지요. 며칠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들어가 살 집을 마련하고 살림살이도 급한 것부터 모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룻은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겠지요. 자기 집에서 쓸만한 노동력은 자신뿐입니다. 자기가 자신과 시어머니의 생계를 완전히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이 있어야 생산활동이 가능하지요. 농경사회에서 자본은 토지인데, 모압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토지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생각처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얻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닙니다. 당시 사회에서 모든 자본을 소비해버린 사람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노동력을 파는 일인데, 오늘 우리 사회에서의 개념처럼 고용되어 직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팔아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이처럼 남의 종이 되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모압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 겨우 종이 되기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마침내 룻이 입을 열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무슨 말이었을까요? \'어머니, 여기서 도저히 살 수가 없네요. 다시 모압으로 돌아갑시다.\' 그 말이 아니었습니다.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나가서 이삭이라도 주워오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룻의 인격과 인간성을 다시 한번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 앉아 있지만 말고 이삭이라도 주으러 나갑시다. 그래야 끼니라도 때울 것 아닙니까? 내가 길을 압니까?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 창피해서 어떻게 혼자 나갑니까? 어머니가 좀 같이 가 주셔야죠.\'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쉬고 계십시오. 제가 나가서 이삭을 주워오겠습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봉양해야겠다는 룻의 마음이 이 한마디에 그대로 묻어 나오고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특히 오늘은 우리가 어버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낳고 길러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오미가 룻을 낳았습니까, 길렀습니까? 남편이나 살아 있어야 어머니가 될 터인데, 시집오자마자 남편이 죽었단 말이죠. 자식이라도 하나 낳았다면 내 아이의 할머니가 되겠지만, 그것도 없는 상황에서 룻이 나오미를 어머니로 모시고 효도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충심으로 공경하고 봉양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를 너무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베들레헴 동네 입구에 커다란 열녀문을 세우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룻은 온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금방 눈에 띌 것입니다. 그리고 남의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사실 구걸행위나 같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룻은 지금 시어머니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이처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가장 낮아지는 일을 자처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 창피하다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고집을 부리다가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지요. 겸손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미덕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현실적으로 겸손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낮은 곳에 처하게 하셨을 때입니다. 그 섭리가 우리를 낮추셨음에도 불구하고 낮아지기를 거부할 때 무슨 소리를 듣게 됩니까? \'쥐뿔도 없는 것이 분수를 모른다\'는 말이겠지요. 제가 뉴질랜드에 와서 참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많은 교민들이 그처럼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오클랜드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한국에서 법대를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하는 일은 수퍼마켓에서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법대 나온 사람이 수퍼마켓 청소를 하면 안된다는 법은 없지요. 그러나 우리의 상식으로 볼 때 어울리는 일은 아닙니다. 룻이 모압에 있었더라면 남의 밭에 이삭을 주우러 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청년도 한국에 있었더라면 취직을 못해서 백수 생활은 했을망정 수퍼마켓 청소는 하지 않았겠지요. 내가 그래도 법대를 나왔는데 고시공부는 못할망정 청소부 노릇을 어떻게 하나? 하는 식으로 자존심을 꺽지 않았다면 이 사회에서 생존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낮아져야 할 때 낮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명한 일이고 칭찬을 받을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낮아진 룻을 부끄러워합니까? 아니지요. 룻이 나오미에게 하는 말을 다시 한번 보세요.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어려움을 자주 당하고 피해를 많이 겪은 사람은 피해의식이 강해서 공격적이 되기 쉽습니다. \'내가 아무 밭에나 가서 이삭을 줍는다고 누가 시비를 걸지는 않겠지요? 추수하다가 이삭 떨어진 것은 어차피 버리는 것인데 못줍게 하겠어요? 나도 자존심이 있지, 이삭 줍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 해가면서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구요. 까짓 것 못줍게 하면 말지요. 밭이 한두 군데인가요? 우리가 당장 이렇게 어려워서 이삭을 주워 먹고 산다고 누가 업신여기거나 놀리기만 해 봐라. 가만 두지 않을테니까.\' 그러나 룻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으면... 어느 밭주인이 나에게 이삭을 주워가라고 허락을 해 주시면... 내가 그를 따라가서 이삭을 줍겠습니다.\' 누가 은혜를 베풀지 모르지요. 룻이 아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마음이 넓은 사람인지, 누가 구두쇠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 보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모습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옛날에는 백수라는 말이 건달이라는 말과 같이 쓰여서 아주 듣기 나쁜 말이었는데,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하지 못하고 얼마간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니 백수라는 말이 부끄럽거나 모욕적인 말이 아니라 평범한 호칭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여자들은 백수라고 하지 않고 백조라고 합니다. \'백수와 백조\' 이런 책도 있더군요. 어쨌든 룻은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고고하게 보이는 백조가 되는 것보다 나가서 허리를 굽히고 이삭 줍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백수와 백조들이 일하기 싫어서 노는 것은 아니지만,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너는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을 것이다\'라고 하셨거든요. 바울 사도도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잠언에 보면 현숙한 여인의 모습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규모있게 열심히 일하는 여인입니다. 이것을 보고 남자들이 여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서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미화시켰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말장난이나 하고 쉬운 것도 어렵게 만드는 소위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소립니다. 전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는 쓸데없는 소리지요. 이처럼 룻은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만한 성품과 인격을 갖춘 사람을 어디서 쉽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룻의 이야기가 효성이 지극했던 한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여인에게 임한 크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룻의 성품과 인격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성품이 온유하고 성실한 사람과 고집불통에 안하무인격의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두 사람이 같이 예수를 믿었다면 어떤 사람이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 물론 둘 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차이가 없겠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좋지 않은 성품이 다 없어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지만 사람의 성품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룻과 같은 훌륭한 인격의 신앙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믿음과 아름다운 인격을 본받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도 있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감화하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셔야 하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도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성품과 인격을 만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자기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존경받고 신망있는 인격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외국인 체류자들을 사랑하십시오/ 레19:33-34/ 2012-11-09
외국인 체류자들을 사랑하십시오 레19:33-34 <레위기 19장 33-34절 히브리어 성경 직역> 33절 나그네(외국인-ger)가 너희들의 땅에서 너와 함께 체류할 때, 그들을 억압하지(oppress) 말아라 34절 너희와 함께 체류하는 나그네(ger)를 너희들 가운데서 자국민(원주민)처럼 여기고, 그를 너처럼(yourself) 사랑하라(love) 왜냐면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ger)들 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야웨이다. וְכִי-יָגוּר אִתְּךָ גֵּר, בְּאַרְצְכֶם--לֹא תוֹנוּ, אֹתוֹ כְּאֶזְרָח מִכֶּם יִהְיֶה לָכֶם הַגֵּר הַגָּר אִתְּכֶם, וְאָהַבְתָּ לוֹ כָּמוֹךָ--כִּי-גֵרִים הֱיִיתֶם, בְּאֶרֶץ מִצְרָיִם: אֲנִי, יְהוָה אֱלֹהֵיכֶם. 1. 이번 주일 오후예배 설교 본문이다. 주일 오후 예배는 지금 섬기고 있는 제 3세계 외국인 헌신(드림)예배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직역하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2. 일단 33절을 말씀하신 근거는 외국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사이에서 상당한 억압과 차별을 받았던 상황을 전제했다는 것 아닐까? 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는 것이다. 명령을 요약하자면 세 가지다. 첫째, 억압하지 말아라 둘째, 자국민처럼 여기고 셋째,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3. 하나님의 높은 차원의 기준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억압하거나 압제하는데서 그치지 말고 자국민 처럼, 원주민처럼 여기라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나가신다.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여기서 아하브(ahb)라는 동사가 등장한다. 말그대로 사랑하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하라브라는 동사를 보며 나는 한 대 꽝 맞는 느낌이다. 4. 하나님께서 외국인과 나그네들에 대해 이렇게까지 높은 차원의 도덕적인 기준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런 요구를 하시는 근거는 너무도 단순하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잖느냐? 그 설움을 당해 봐서 알잖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여 하나님은 나그네를 보호하고 사랑할 것을 명령하신다. 5.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구나. 아~ 정말 나는 하나님의 그릇의 크기를 보며 탄복한다. 제 3세계 필리핀, 네팔, 베트남, 중국인들 그들을 외국인 취급하지 말라신다. 너의 형제며 이웃이니 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신다. 6. 지금도 이 땅에서 압제당하며 온갖 차별과 무시를 견뎌가며 버티고 있는 제 3세계 형제 자매님들~!! 사랑합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형제요 우리 조국의 한 구성원입니다. 부디 이 땅에서 평안히 잘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외국인과 나그네 인생/ 히11:13-16/ 2005-01-24
외국인과 나그네 인생 히11:13-16 어떤 공원에 한 나그네가 벤치에 앉아서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습니다. 공원 청소부는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자 서둘러 청소를 하는 중 벤치에 앉은 나그네를 보고“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나그네가 대답하길 “글쎄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생각하는 중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그것도 잘 몰라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 것입니까? ”글쎄요 그것을 알았으면 벌써 여기를 떠나지 않았겠습니까? “ 공원 청소부의 질문에 도리어 이 나그네는 반문을 하듯 했습니다. 공원 청소부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한 이 나그네는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방향이 다르기는 했지만 공원 청소부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이 질문내용은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대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은 성경에서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73:20절에서는 인생은 꿈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시편90:5절에서는 잠깐 자는 잠으로 표현했고. 욥기7:6절에서는 베틀에 북보다 더 빠른 인생이라고 표현했고. 이보다 더 많이 나와 있는 표현은 그림자와 같은 인생(대상29:15, 전6:1·2) 꽃과 같은 인생(욥14:2, 시103:15, 사40:6). 풀과 같은 인생(시37:2, 사40:6-8, 약1:10, 11). 손바닥만한 인생(시39:5) 지렁이 같은 인생(사41:14) 안개와 같은 인생(약4:14)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에는 인생을 나그네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기 말고도 여러 곳에서 인생을 나그네의 길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창47:9, 대상29:15, 벧전2:11). 그렇다면 왜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나그네는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지나갈 뿐입니다. 나그네의 특징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해서 옮겨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처럼 날마다 날마다 옮겨가는 인생입니다. 오늘의 얼굴이 어제의 얼굴이 아니며. 오늘의 몸이 어제의 몸이 아닙니다. 사진 속에 내 얼굴은 10년이 가고 100년이 가도 변함이 없지만 사진 밖에 실물인 내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사진 속에 들어있는 내 얼굴이 아무리 곱다고 하더라도 지금에 나는 다시금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오늘 이 순간에도 한번 지나고 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늙은 나이며.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늙은 나일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이처럼 출생에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단1초도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 나가는 나그네 길인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나그네인생들이 정착할 장소가 아니라 잠시 들러 가는 장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자기 소유의 땅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100년 이상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소유의 땅에 자기 힘으로 호화스러운 집을 마련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집에서 한껏 오래 살아봤자 100년 미만입니다. 지난 10월에 우리 교회 성도들이 저와 함께 성지를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 가는 곳마다 좋은 호텔에서 묵었었습니다. 경치 좋기로 유명한 갈리리 호숫가에서 묵었던 일은 지금도 머리에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룻밤 자고는 쫓겨났습니다. 지금은 이름모를 또 다른 나그네가 그 호텔에서 지내겠지요? 사실 이 세상 모든 집들이 다 이와 같습니다. 얼마 전에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가 묵었던 제주의 어느 호텔은 하룻밤 방세가 280만원이라고 합니다. 놀랄만한 일이지요? 그러나 타이거 우즈도 그 호텔방에서 며칠을 묵고는 떠났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잠시 거쳐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권세를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은 결국 오래가지 못합니다. 대통령 자리가 좋다고 해서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지 않으려고 갖가지 추악한 방법을 다 동원했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씨도 결국 그 자리에서 오래 앉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권세를 자기 손안에 언제까지나 잡아두려는 욕심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끈으로 잡아매어 두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람은 오늘도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되어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나그네는 한 곳에 정착하는 사람이 아니고 계속에서 진행해 나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그네 인생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땅 사놓고 집사놓고 권세 얻어서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나그네 인생은 언제나 앞으로 다가올 새 세계에 대한 기대와 소망 속에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행진해 나갑니다. 둘째, 나그네가 가는 길은 험난하고 고독합니다. 야곱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바로 왕이 묻기를 “네 연세가 얼마뇨? ”하고 물었었습니다. 이때 야곱이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 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나그네 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길이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임하셨던 길이었음에도 (창28:13-15, 321:10)불구하고 역시 그도 인간인지라 이 땅위에서 생활은 고난의 생애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 나그네 길은 누구에게나 고달프고 외로운 것입니다.(전1:12-13)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 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이 말씀에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인생 나그네 길이 괴로움과 수고뿐인 것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전2:22-2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정말 그렇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일평생 동안 근심과 수고 속에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죄악을 범한 인간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이재성씨라는 분이 “샌프란시스코의 메아리”라는 제목의 책을 내 놓았습니다. 이 책은 그가 이민 가서 생활하는 동안 벌어졌던 갖가지 슬픈 얘기, 웃기는 얘기들을 수기형태로 기록한 작품이었습니다. 그 책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편은 저녁 일찍 출근하여 밤새 세 곳으로 다니며 청소를 하고 새벽에서야 집으로 퇴근을 하고, 아내는 새벽에 나가서 어느 한국교포가 운영하는 봉재공장에서 일하고. 저녁 늦게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부부라고는 하지만 얼굴구경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어쩌다가 남편이 새벽에 조금 일찍 들어오면 일하러 집을 막나가는 부인의 손목을 한번 꼭 잡아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어느 날 부인이 일을 하러 나가면서 미안했는지 편지한 장을 써서 침대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여보, 밥하고 찌게는 준비되어 있어요. 그리고 봉급 받은 것은 침대 및 창에 넣어놓았어요. 여보, 우리도 남들처럼 살아볼 날이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참고 고생하기로 해요......” 나그네 길은 어차피 고독합니다. 한번 집을 떠나 나그네 길에 들어 서 보십시오. 나그네는 어디를 가나 어떤 대접을 받더라도 외롭고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으로 최고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나폴레옹이 센트헤레나 섬에서 운명하기 직전 마지막 남긴 말 중에서 “육대주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천만인의 한숨이요. 오대양에 넘실거리는 바닷물은 백만 인의 눈물”이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어쩌면 나폴레옹의 이 고백처럼 그의 일생은 한숨과 눈물의 연속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인생들의 가는 길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들은 나그네 길과 같이 험난하고 고독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다만 우리가 스치고 지나갈 거친 광야요. 험악한 골짜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영원히 안주할 곳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그네의 가는 길은 먼 거리가 아닙니다. 나그네 길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곧 목적지를 향하여 떠나가는 길입니다. 인생은 짧고 빠릅니다. 오래 살아야 100년 미만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건강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참으로 냉혹하고도 분명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내 인생은 아침 안개와 같이 잠깐 보이다가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인생이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일생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그림 동화 중에“숲 속에 작은 아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두 남녀 아이가 술래잡기를 하다가 여자아이가 그만 잘못하여 요정들이 살고 있는 숲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자아이는 이 숲 속의 요정나라에서 잠깐 동안 춤추며 놀다가 그 숲을 나오게 되었는데 그동안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던 것입니다. 숲 속에서 나온 여자아이는 그곳을 떠났다가 돌아온 시간이 불과 몇 시간이 안 지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세상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 여자아이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몰라볼 만큼 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웬 젊은이가 있기에 “저이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젊은이가 바로 자기와 함께 술래잡기하던 7년 전의 남자친구라는 것입니다. 이 여자아이는 순식간에 7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었던 것이고 그 사이에 세상은 놀랄 만큼 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금방 늙습니다. 그리고 금방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나그네의 가는 길은 결코 먼 거리가 아닙니다. 짧은 거리입니다. 쉬 끝나는 길입니다. 우리 교단의 유명한 원로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자리에서 존함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난 이제부터 원로목사 모임에 안가기로 했네, 하시기에 왜 그러시냐고 물었습니다. 원로목사님들과 만나서 과거사도 나누며 시간 보내면 좋을 것 같은데 그 목사님의 말씀이 원로목사 모임에 가니까 언제 어느 목사님이 돌아가셨고. 몇 월 며 칠 날은 어느 목사 사모가 돌아가셨고 등등 돌아가신 분들 소개하는 시간이 적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나그네 길은 이처럼 금방입니다. 우리가 늙는 것과 죽는 것도 금방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구역예배 강사 하는 것, 주일마다 식당에서 밥 짓는 것, 등등을 가지고 투덜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명감당하는 일도 금방 지나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길이 힘듭니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 힘듭니까? 불평하지 말고 충성하십시오. 세월은 금방 지나갑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세월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맡겨졌을 때 열심을 다하여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나그네는 본향을 향하여 가는 이들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위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살면서 영원한 본향을 언제나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의 본향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지나가는 갈대아 우르였지만, 그들이 그리워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보다 나은 본향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은 이처럼 땅에 있는 본향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나은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것이니 우리가 나그네 길을 다 마치고 돌아갈 본향도 바로 그곳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렇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우리가 거처할 집을 마련하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요14:2-3). 어느 욕쟁이 할머니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아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어느덧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좋은 며느리가 정신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할머니 머리맡에 앉아서 쉴 사이 없이 기도하고 찬송하며 시어머니를 권고했습니다. “어머니, 예수님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꼭 부여잡으세요” 할머니는 희미한 목소리로 “알았어, 알았어”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인 며느리가 다시 할머니에게 “어머니 이 세상 떠나면 어디 가신다고 했죠?” 하고 귀찮을 정도로 다그쳐 물으니까 할머니가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는 큰 소리로 하시는 말씀이 “지랄하고 있네! 아, 내가 예수님 덕분에 천국 가는 것을 잃어버렸을 줄 알아?” 하시고는 고요히 숨을 거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세의 소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신 측의 원로이신 임종만 목사님이 쓰신 책을 보면 그가 전도사시절에 합동장례식을 했던 경험을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임전도사님이 시무하던 칠원 교회에 70이 넘은 두 내외가 교회에 열심히 출석했습니다. 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대장간을 하는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이면 언제나 흰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나란히 교회에 나와 앞자리에 앉곤 했습니다. 이 두 부부는 어느 해 할아버지가 먼저 앓아눕더니 그를 간호하던 할머니도 같이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이 심방을 가서 할아버지 방에 가서 기도하면 “전도사님 저는 괜찮습니다. 할마이 방에 가서 기도해 주이소”하고, 할머니 방에 가서 기도하면 “전도사님 저는 괜찮습니다. 영감님 방에 가서 기도해 주이소”하면서 서로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두 분이 불과 여섯 시간을 간격을 두고 같은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한 날 한 무덤에 시신을 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복된 죽음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이와 같은 복된 죽음을 맞이하실 수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해도 조용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나그네 길은 종착역이 보다 더 가까이 왔다고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본향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뵈올 때 “잘했다”칭찬을 받을 수 있을만한 나그네 길이 되도록 하루하루를 거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외국인과 나그네/ 히11:13-16/ 2001-09-19
외국인과 나그네 히11:13-16 저는 지난 한 주간 외국인 생활을 하고 왔는데 외국인은 입국할 때부터 구별이 됩니다. 제가 도착한 그 공항은 외국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공항이었으므로 입국수속을 받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자들은 쉽게 입국수속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외국은 낯선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도 조심스럽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은 미래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 세상을 살면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는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성을 잘 나타낸 문학적 표현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것은 이 땅위에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돌아갈 본향이 있으므로 당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올 곳이 없는 외국인은 매우 불행한 사람입니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은 돌아갈 고향이 없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외국인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가 떠나온 고향을 돌아가지 않아도 \'본향을 사모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다,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것은 외국인과 나그네 된 자들에게는 최대의 소망입니다. 여기보다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것, 더 나은 본향이 있다는 것-이것이 외국인과 나그네의 최대의 희망입니다. 외국인의 삶의 현장을 보면 조국에 사는 것 보다 모든 것이 불리합니다. 그러나 돌아갈 본향이 있으므로 당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외국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의 본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소망 가운데 영원히 하늘나라의 소망을 누리고 사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고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게 매우 의미깊은 삶의 가치인 것입니다. 여기보다 더 좋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좋다는 것은 우리에게 복입니다. 여기보다 더 좋은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본향을 바라보는 믿음, 그 본향을 기다리는 소망, 이것이 나그네와 외국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역할 그리고 외국인과 나그네는 머물러 서있는 그 자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나라에 와있는 외국인들도 역할이 있습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와서 수고하는 외국인들은 1년만 고생하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땅에 와있는 외국인들도 꿈이 있고 역할이 있습니다. 내가 외국에 산다는 그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내가 머문 그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사는가 하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이번에 멕시코 국경지대를 한번 가보았는데 미국과 멕시코의 환경적 차이는 비교가 안되었습니다. 우리나라 50년대 이후 판자촌에서 살던 그 비참한 삶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는 난민들을 봤습니다. 사막과 같은 그 산에 판자촌을 짓고 사는데 모두 놀고먹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비참한 삶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그네로 살든 외국인으로 살든 내가 지금 머물러 있는 이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멕시칸들이 미국에서 하루벌어 3개월 또는 1년을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총을 겨누고 있는 국경지대를 죽을 각오를 하고 밤에 넘어옵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그들의 삶이 처절하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목숨을 걸고 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외국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그 역할이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7번정도 집회 인도차 외국에 갔다 왔던 것 같습니다. 금번에도 외국에서 6번의 설교를 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6번 말씀을 외치고 왔던 저의 역할에 저는 만족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외국 땅에 살면서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의 역할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정당하십니까? \'나는 외국인으로 당당하다. 본향에 돌아가도 부끄럽지 않다\'는 당당함이 있습니까? 외국인은 외국에 가서 무엇을 하느냐는 목적이 뚜렷해야 하고 하늘의 백성으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선 그곳은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 곳을 거룩한 자리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머무는 가정, 직장, 교회를 거룩한 장소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머무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두 가지가 따라 다닙니다. 하나는 \'목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천교회\'가 따라옵니다. 이 두개가 나를 간섭하는 시어머니 노릇을 합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경거망동할 수 없고 영천교회 담임이기 때문에 허튼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종합해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거듭나게 했고 나를 사역자로 불러 세웠고 나를 영천교회 담임으로 불러세운 줄을 믿습니다. 그분 때문에 내가 함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분 때문에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외국이라고 면책이 오는 것이 아니라 외국이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영천교회 덕망 때문에 함부로 살 수 없는 하늘나라의 백성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영적 관계성을 중요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집에 진공 청소기가 있는데 용량이 크기 때문에 굉장히 셉니다. 그런데 청소를 하는 중에 갑자가 작동을 멈추는 겁니다. 그래서 \'어디가 고장났나?\'하면서 살펴보아도 고장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기코드가 약간 빠져 있었습니다. 전기코드에 연결이 안되면 아무리 그 기계가 좋아도 고물밖에 안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아무리 구색을 잘 갖추어도 코드가 하늘나라와 연결이 안되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삶이, 말이, 전도함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나그네로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의 나그네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코드가 빠진 청소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돌아갈 준비 그리고 외국인, 나그네는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며 그 촛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합니다. 천사를 좋게 하려고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촛점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서 달란트 계산을 해야 합니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LA에는 실패한 외국인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정착을 못하고 역할을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는 실패한 외국인은 비참합니다. 문학에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도 실패자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왔는데 모진 추위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습니다.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가 생각하다가 \'아 그렇다. 감옥이야말로 겨울의 별장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감옥을 가기 위해 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금은방을 부수고 경찰을 기다렸지만 경찰은 범인이 도망가지 않고 현장에 있을 수 없다고 그를 범인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일부러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런데 식당 종업원이 힘이 얼마나 센지 그를 들어 쓰레기통에 집어 던져 버려 행패도 실패했습니다. 공중전화에 어떤 여성이 전화를 거는데 꽃뱀을 건드렸습니다. 딱 달라붙더니 안 떨어지는 겁니다. 뜻대로 되지는 못하고 자기가 더 봉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신사가 우산을 놓고 공중전화를 하고 있을 때 우산을 훔쳤더니 아 그게 당신의 것이요? 그럼 가지세요 하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실패한 인생을 살면 안됩니다. 그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외국인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당당히 돌아갈 수 있는 외국인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 본향에 계신 주인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외국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맺는 말 이제 우리는 정말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어려워도 그 본향을 바라보고 소망을 갖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좋더라도 여기에 머물지 말고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준비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 백성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간 교회에 가보니 연만하신 어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강렬했습니다. 미국이 노인복지가 잘 되어 있지만 여기보다 더 나은 하늘나라의 본향을 기다리는 믿음을 가진 노인들의 모습을 볼 때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새롭게 된다는 것, 신선감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것들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저 본향의 것을 사모하고 본향의 것이 우리에게 와야 우리가 신선해지지 세상의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가 신선해 지기를 원한다면 하늘나라의 것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을 가진다고 우리가 세련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가슴 속에 내가 돌아갈 본향을 사모하고 그 주인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만 하늘나라 백성다운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축복을 우리 모두가 누리기를 바랍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히11:13-16/ 2001-09-19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히11:13-16 성도 여러분! 전국의 모든 도로에는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객들의 차량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체험하는 모습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말한대로 나그네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고통이나 미련도 없이 제 고장을 떠나가는 나그네와도 같으니, 그들은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망명가는 사람처럼 슬픈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 가는 것이 아니라, 고국으로 돌아온 망명객이나 자기가 태어난 나라로 돌아오는 갈곳없던 사람들이 아니라 커다란 기쁨을 안고 이세상을 떠나간다. 인생이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이 한결같이 슬프게 느껴지느니, 그 기쁨 그 즐거움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의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이 지상의 즐거움을 누릴수 있으니, 그들은 그 즐거움 속에서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앞날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나그네길이 곧 끝날 것을 기뻐하는 나그네들인 까닭입니다. 곧 닥쳐올 앞날에 대한 기대 가운데 영원한 본향을 위하여 준비된 인생은 마음이 즐겁기 마련입니다. 성도 여러분! 히 11장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바로 세우기에 가장 좋은 본보기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정의를 히11:1-2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곧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나그네길을 어떤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는지 잘 보여 주십니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며 그예물이 그의 죽음(순교)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그네 인생으로서의 에녹에게 어떤 믿음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로서 하나님이 그를 옮기신 것입니다. 노아의 믿음은 보지 못한 일에 경고하심을 받고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슨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 가르쳐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실때에 순종하여 나갔으며, 사라는 잉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죽은 자와 방불한 자가 하늘의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습니다. Ⅰ 오늘의 본문은 외국인과 나그네인 우리네 인생은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셨습니다. 인생은 초행길의 행인이기 때문에 인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까지 살아온 인생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왔습니까? 그는 양의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양의 생명을 사랑합니다. 보호하십니다.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인,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즐기던 모든 것들을 버리기 까지 예수를 따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를 버렸습니다. 그물동 함께 버렸습니다. 바울은 학벌도, 가문도 버렸습니다. 주님을 다르며 복음을 증거하기위해서는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아니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세상 권세도 버렸습니다. 고향을 버렸습니다. 죤 스토트는 영국 여왕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는 대관식이 행해지기 바로 직전, 즉 여왕의 머리에 왕관이 쓰워지기 바로 직전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캔터베리는 대주교는 성당 안에서 동서남북 각방향의 청중들을 향하여 네 번의 소리를 지릅니다. \'귀빈 여러분! 저는 이분이 틀림없는 영국 여왕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대주죠가 물을 때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안에 모인 청중들이 큰소리로 승인의 대답을 네 번 해야만 비로소 왕관이 여왕의 머리에 씨워집니다.\" 스토트씨는 말을 계속 잇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도 오늘 여러분들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틀림없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심을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께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이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모든 사람이 필히 대답해야 할 질문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중인의 외침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2) 믿음을 지키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받고 주의 말씀으로 은혜 받고 믿음으로 사는 백성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기뻐하십니다. 가. 생명의 주 인류의 창조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속죄함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그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 는 것입니다. 다. 서령의 내주를 통해서 영생의 열매를 맺는 축복을 인하여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Ⅱ. 오늘의 본문은 우리 인생은 손님과 나그네의 행인인 것을 주지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대한 자기 인식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잠시 잠깐이라는 인식입니다. 허무하게 마치지 않도록 값지게 살아야 합니다. 의무와 책임에 대한 인식입니다. 완수해야 합니다. 준히하여 예수앞에 나아갈 인식입니다. (벧전2:11)의 말씀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하시며 나그네길을 정욕의 종으로 살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1)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자는 것입니다.(아벨신앙처럼) 2) 은혜의 주님과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에녹신앙처럼) 3)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여 구원과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노아 신앙처럼) Ⅲ. 오늘의 본문은 인생의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가르쳐 주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1) 인생은 현주소는 제2고향입니다. 2) 하늘에 있는 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3) 성도들을 위해서 준비된 나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향에 가기를 갈망합니다. 고향을 잃어버린 자야말로 정말로 불행합니다. 시편 기자는 \"참새도 제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나도 거할 곳을 주소서\" 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참새와 제비가 보금자리를 얻은 곳은 하나님의 제단 가까이에서 였습니다. 그곳은 죄를 용서해주고 화해가 일어나는 곳이며, 사람편에서는 그곳은 복종과 전적인 의지를 상징합니다. 그곳이 바로 영혼의 고향이며, 그곳에서 진실한 안식과 평화를 얻을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라는 큰도시에 \"십자로\"라고 알려진 주요 도로 교차점이 있습니다. 하루는 키 큰 순경이 그의 순찰구역에서 꼬마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아저씨, 집을 잃어버렸어요. 집으로 가는 길을 알 수가없어요\" 꼬마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 순경은 내가 정거장까지 데려다 주지.\" 라로 말하며 꼬마의 손을 잡고 십자로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한참동안 주위를 살펴보더니 그 꼬마는 그만 \"아, 아저씨! 여비부턴 길을 알아요! 라고 소리치며 순경의 손을 벗어나 깡충깡충 뛰며 집을 향해 뛰어나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이르렀을 때 인간도 그 어린 아이와 마찬가집니다. 비로소 본향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영생의 길이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그누구도 하나님앞에 나갈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패배의 길이 아니라 영원한 승리의 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롬11:11-27
유대인과 이방인 롬11:11-27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는 서로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고, 낮과 밤이 있으며, 전기에는 +, -가 있고 자석에도 N극과 S 이 있으며, 육지 가 있으면 바다가 있고,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울음이 있으면 웃음이 있고,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는 법입니다. 사회 경제에서도 호경기가 있으면 불경기의 때가 있는 법 입니다. 이러한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적당하게 잘 조화가 되어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는 바울이 썼습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서로 다른 인종으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스데반의 박해로 인하여 서 흩어진 유대인들이 로마까지 와서 처음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도 점점 복음을 듣고 교회로 들어와서 이제 교회 구성원이 유대인 반 로마 이방인 반정도 가 되었습니다. 서로 대비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서로 교회 내에서 충돌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서로가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기에 정 반대의 이질성이 교회 내 에서 같이 조화를 이루는 문제가 아주 심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만 칭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방인만을 편들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서로 다 른 이 두 집단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해야 가장 적당한 말이 되겠습니까? 로마서라는 바울의 편 지를 보면서 우리는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오묘한 말씀의 지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주시는 것도 아니요,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이 버리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믿으면 누구든지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이 더 예수를 잘 믿을 것 같은데 거꾸로 됐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상하게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 들이 그 당시에 더욱더 복음을 잘 받아들여서 구름 떼와 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러한 묘한 현상이 벌어지자 정말 로마 교회는 심각한 갈등을 내부적으로 겪지 않을 수가 없 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예수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흉을 보 고 괄시를 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자기 동족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에서 소외감과 낙심과 절망을 하면서 나름대로 괴로워하면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구약 율법에 명시된 할례 같은 것도 지켜야 참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억지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주 시원하게 두 집단에 대하여 말 씀을 합니다. 구원은 반드시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할례와 같은 행위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 혼자 힘만으로는 건너 편 언덕에 절대로 오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사닥다리,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강한 일침을 놓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 복음을 잘 받아들 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약적 전통이 오히려 걸림돌이 많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 연히 이런 걸림돌이 전혀 없는 이방인들에게 더욱더 전도가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방 인들의 숫자가 교회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방인들은 점점 교회 안에서 의기양양하게 되었습니다.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커져 갔습니다. 그런 반면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낙심되고, 자기 동족이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심히 고민하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예견 한 바울이 이제 로마서 10:11절에서 놀라운 지혜로운 말씀으로 두 집단에 대해서 경고를 합니다. 첫째로, 이방인들에게 너무 자긍하지 말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유대인들에게는 너무 낙심해서는 안되며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다 고 말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특히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사도로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갈라디아 서 2장 8절에 보면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고자 함 이라\\\"하면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을 증거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에 대한 전도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복음을 특히 이방인에게 전도하게 하십니까? 유대인인 바울 자신을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 히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십니까? 아니, 자기 동족들도 안 믿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벌리셨습 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오히려 믿지 않고 핍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흩어져서 이제 이 방인에게로 넘어갔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바울은 그렇게 가고 싶었던 로마에 도착 했습니다. 도착한 후 그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 백성들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다. 그런즉 하나님이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로 알라 저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구원의 문을 이방인에게로 돌려서 이방인 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집중하게 되었고 지금은 이방인이 본격적으로 구원을 받는 전도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 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으나 오기를 싫어하거늘\\\" 첫 번째 유대인들을 구원의 자리에 초청했으나 유대인들이 싫어했습니다. \\\"그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이제 저 사거리 길가로 가서 아무나 구원의 잔치에 만나는 대로 초청해 오라\\\" 이렇게 해서 유대 인들이 거부하자 이방의 전체 민족에게 복음의 문이 열어 지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어쩌면 어부지리를 얻고 있는 셈입니다. 국회 위원 당선자가 있는데 그가 무슨 사정으로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차점자가 다시 당선이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바로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방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대로 자긍하지 말고 이것이 자기 공로인줄로 생각하고 으시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순전히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지 무슨 행동이 유대인들보 다 나아서 구원받는 것이 절대로 아니요 지금은 유대인들이 마음 문을 닫고 있어서 오히려 이방 인들에게 전도의 초점이 맞춰진 상태라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전도가 잘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자기의 공로인줄 생각하지 말고 자긍하지 말라고 바울은 이 사실을 본문 에서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참 감람나무가 있는데 그 가지가 고약해서 몇 가지를 꺾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있는 돌 감람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대신 이 꺾여진 참 감람나무 그 꺾이운 자리에 접붙였습니다. 그러므 로 접붙임 받은 이 가지는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제 가지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 이 아니요, 뿌리가 가지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8절에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 라 …\\\" 또 20절에 \\\"…높은 마음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18절에 \\\"…네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존하는 것이라.\\\" 21절에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절에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결국 찍히 움을 받으리라\\\"고 엄청난 경고를 주면서 겸비할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 내에서 의기양양해 있는 이방인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입니까? 그럼 한편 유대인들에게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위축되어 있는 유대인들에게 11:1에 보 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 니라…\\\" 이방인들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좋은 감람나무의 것으로 접붙임을 얻었으므 로 원가지인 유대인들은 더더욱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바울은 자기가 이 비밀을 25절에서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 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 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어떤 일정한 구원받은 숫자가 들어오면 그 때에는 이방인의 대한 전도의 문이 닫혀 버리고 유대인에게 전도하는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유대인들은 자기 민 족의 대다수가 지금 예수를 부인하고 전도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에는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비밀이 있음을 깨닫고서 이것을 알고 힘을 내라고 유대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 복잡한 것 같습니다만 자세히 요약하면 이방인들에게는 자긍하지 말고 낮추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요, 유대인들에게는 위축되지 말고, 나중 에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깨닫고, 유대인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 오히려 이 방인들에게 전도의 문이 열린 이 사실, 이 비밀을 깨닫고, 마음으로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 로마서 11장의 요지입니다. 사실, 1996년 현재까지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구약 전통 유대교만을 고집 하는 그들은 아직도 메시야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합니다. 예수를 안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습니다. 우리 나라도 보십시오. 100년 기독교 역사상 벌써 1/4이 예수를 믿 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1/100도 안됩니다. 그것이 참 이상합 니다만 그러나 성경대로 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의 문을 안 열어 주셨습니다. 처음에 열었으나 구원의 문 을 이방인에게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방인의 수가 들어오고 있는 때입니다. 이방인 들에게 전도가 잘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지상 말세가 되면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제 이방인들의 전도의 문도 닫히고 마지막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이 성경이 보여 주는 세상 말세의 모습. 성경대로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유대인들이 복음을 잘 받아 들였더라면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의 문이 안 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런데 처음에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스데반을 죽이고 핍박을 하자 그 사람들이 예루살 렘을 떠나가서 다 이방 세계로 가 버렸습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참 이방인들에게 은 혜를 주시는 때인만큼 이방인들은 자긍하지 말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감사 하고 스스로 높이지 말고, 겸손하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곰곰히 생각하면 시원하고도 적절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교 회도 상반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현재 모든 것이 잘 되고 형통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고, 현재 가정의 어려움, 사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런 가정도 동시에 같이 있습니다. 로마 교회와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부유층과 물질적으로 어려움 당하는 자들이 같이 있는 곳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공부 많이 해서 지식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그리고 공부할 기회가 적어서 많이 배 우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보통 세상의 다른 공동체는 주로 같은 성질의 사람들이 어떤 이익을 위하여서 같이 집단을 이 루고 있지만 교회는 특이하게도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와 같이 정 방대의 다양 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우리는 때로 로마 교회와 같이 똑같은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현재 잘 되 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된다고 절대로 이방인들처럼 자긍하지 말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고 자긍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긍이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자기 공로인양 으시대고 뽐내는 것을 말합니다. 뿌리가 가지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 라. 항상 더욱 조심하며 겸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뿌리에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실 내가 잘되고 있는 중이라면, 내 사업이 잘 된다면 다른 경쟁자의 사업이 안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유대인에게 허용될 것이 이방인들에게 와서 지금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저쪽으로 갈 것이 지금 내게로 와서 잘 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사실을 깨닫고 자긍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내게 주셨음을 알고서 더욱 겸손하고 두려워하고 겸비해야 합니다. 한편 지금 현재 잘 안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힘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잘될 때는 내 공로인양 우쭐대면서 살아갑니다. 또 안될 때는 짜증 부 리며 괴로워하며 내 식구들까지 괴롭히고 남까지 괴롭힙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모습 입니까? 얼마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살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내 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의 일체의 비결을 알았노라.\\\" 어떤 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은 알지만, 궁핍이 오면 도무지 못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도 잘되고 모든 일이 잘되고 가정도 잘되고 물질이 넉넉해지면 우리 남편 최고라고 하면서 날마다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명랑해지고 교회도 잘 나옵니다. 그런데, 사업이 기우뚱하고 가정의 어려운 때가 오면 매일 남편에게 바가지 긁으면서 도무지 못살겠다고 합니다. 난리를 피웁니다. 교회도 안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풍부에 처할 줄은 아나 비천에 처할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디 생 에 낮만 있습니까? 밤도 있는 법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 때는 잘 견디어 냅니다. 밤이 오면 잘 견디어 냅니다. 가난할 때는 가정을 잘 돌보고, 아내 사랑할 줄 알고 열심히 노력할 줄 아는 편입니다. 그러나 풍 부해지고 부유해지자 가정을 돌보지 않습니다. 조강지처를 버립니다. 돈 쓰는 재미에 교회도 오지 못하고, 예배에도 오지 못하고, 교만해지고, 거드름 피우고, 어려울 땐 기도 생활 하다가 잘되면 기도 안합니다. 이런 사람은 비천에 처할 줄은 알지만, 풍부에 처할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바울이 말한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인생의 낮이 와도 잘 대처 하고 밤이 와도 잘 대처하는 사람, 모든 일이 잘 되고 풍부하면 더욱 겸손해지며 이럴 때일수록 두려워하는 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잘될 때 기고 만장하는 것을 누가 못합니까? 안될 때 다 죽어 가는 것 누가 못합니까? 요즘은 안되니까 자살들을 합니다. 가정을 포기하고 인생을 끝장냅니다. 그것 을 누가 못합니까?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잘될 때에는 오히려 겸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자중하면서 더욱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이 진찌짜 사는 것입니다. 또한 잘 안될 때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뭔가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견디어 내는 것. 이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될 때에는 한정 없이 저쪽으로 가고 못 될 때에는 한정 없이 이쪽으로 가지 만 그리스도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살아 있다고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는 낮과 밤이 교차됩니다. 저 하늘나라 가면 밤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있고, 즐거울 때가 있으며, 어두울 때가 있고 밝을 때가 있으 며,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잘 될 때는 오히려 겸비하며 은혜를 깨닫고 안 될 때에는 낙심하지 말고 잘 견디어 내는 사람, 이런 사람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승리하는 삶이요, 가장 소망스러운 인생입니다. 여러분 짧은 인생 이렇게 살아 야 되지 않습니까? 그냥 되는 대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큰 깨우침이 되어 우리 인생이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방 나그네를 돌보라/ 출22:20-26/ 외국인근로자선교주일설교
이방 나그네를 돌보라 출22:20-26 현재 우리나라에는 십이삼만명의 외국인노동자가 있다고알려져 있 다. 관광비자로 들어와 돈을 벌기 위해 불법체류하고 있는 이들은 필 리핀 ,파키스탄 등 대부분 동남아 후진국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 들에 대한 통계조차도 확실하게 없는 상황이다. 이런 외국인노동자들 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은 다양하다.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 에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 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다. 또 이들은 힘든 허드렛일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것 같 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이들로 인해 생길지도 모르는 혼혈아문제 등 도덕과 윤 리의 파괴에 대해 염려하기도 한다. 싼 임금으로 일하는 이들로 인해 기업주들로부터 이전과는 다른 대접을 감수해야 하는, 또 이같은 결과 로 전체 노동운동이 약화되기도 하는 실정 속에 우리 노동자들에게도 외국인노동자들은 사실 별로 달갑지 않은 존재이다. 외국인 노동자 당사자들의 형편은 어떤가, 불법체류의 신분이기에 억 한 일을 호소할 수도 없으며, 언어 소통도 안되는 약점 속에서 일부 악덕기업주들에 의해 인권을 유린당하며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은 한국노동자들의 1/5-1/6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그나마 제 때, 제대로 받지도 못한다고 한다. 일하다 다치거나 병들어도 산업재 해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해 적은 임금으로는 치료도 할 수 없는 실정 이다. 이간적인 외로움과 고독, 출산, 주택의 문제 등 알려지기 시작하면 기가 막힌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닌 것이다 뭉제는 우리 교회가 이들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성경의 대답은 간 단하다. 이방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잘 돌보라\'는 곳이 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잠시 왔다 떠나가는 나그네이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께속한 것인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외국인이겠는가?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요, 온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어느곳 에서나 누구나 자유롭게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어야 하는 것 이 성서적 원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똑같은 형제로 돌보아야만 한다. 성서는 또 \'너희들이 종노릇 한 적이 있으니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라고 가르친다. 사실 노동운동, 농민운동,인권운동,민주화운동 및 해방후의 병원, 학교시설 등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외국의 지원과 도움을 받 았는가. 이 빚을 잊어서는 안된다. 며칠전 필리핀교회협의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한국에 있는 불법체 류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 한국교회가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었다. 권익보호,교육, 교회시설개방,단결할 수있는 조직건설지원, 실 태조사및 전담기구 설립 등 참으로 어려운 문제, 벅찬 과제들을 요청 한 편지였다. 걱정과 갑자기 성경말씀이 생각났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이다. \"....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 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 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 가 모른체 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힝제 : 이방 나그네를 돌보라 목성경본: 출 22:20-26 문검 색 : 이방인, 나그네 어선 집 : 現代說敎選集 II ** 文興一 牧師 編 ** ---------------------------------------------------------------------- 이방 나그네를 돌보라 ------------------------ 성경 본문: 출 22:20-26 현재 우리나라에는 십이삼만명의 외국인노동자가 있다고알려져 있 다. 관광비자로 들어와 돈을 벌기 위해 불법체류하고 있는 이들은 필 리핀 ,파키스탄 등 대부분 동남아 후진국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 들에 대한 통계조차도 확실하게 없는 상황이다. 이런 외국인노동자들 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은 다양하다.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 에 많은 사람들이 당혹해 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다. 또 이들은 힘든 허드렛일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것 같 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이들로 인해 생길지도 모르는 혼혈아문제 등 도덕과 윤 리의 파괴에 대해 염려하기도 한다. 싼 임금으로 일하는 이들로 인해 기업주들로부터 이전과는 다른 대접을 감수해야 하는, 또 이같은 결과 로 전체 노동운동이 약화되기도 하는 실정 속에 우리 노동자들에게도 외국인노동자들은 사실 별로 달갑지 않은 존재이다. 외국인 노동자 당사자들의 형편은 어떤가, 불법체류의 신분이기에 억 한 일을 호소할 수도 없으며, 언어 소통도 안되는 약점 속에서 일부 악덕기업주들에 의해 인권을 유린당하며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은 한국노동자들의 1/5-1/6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그나마 제 때, 제대로 받지도 못한다고 한다. 일하다 다치거나 병들어도 산업재 해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해 적은 임금으로는 치료도 할 수 없는 실정 이다. 이간적인 외로움과 고독, 출산, 주택의 문제 등 알려지기 시작하면 기가 막힌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닌 것이다 뭉제는 우리 교회가 이들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성경의 대답은 간 단하다. 이방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잘 돌보라\'는 곳이 다. 사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잠시 왔다 떠나가는 나그네이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께속한 것인데 누가 주인이고 누가 외국인이겠는가?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요, 온 인류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어느곳 에서나 누구나 자유롭게 똑같은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어야 하는 것 이 성서적 원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똑같은 형제로 돌보아야만 한다. 성서는 또 \'너희들이 종노릇 한 적이 있으니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라고 가르친다. 사실 노동운동, 농민운동,인권운동,민주화운동 및 해방후의 병원, 학교시설 등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외국의 지원과 도움을 받 았는가. 이 빚을 잊어서는 안된다. 며칠전 필리핀교회협의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한국에 있는 불법체 류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 한국교회가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었다. 권익보호,교육, 교회시설개방,단결할 수있는 조직건설지원, 실 태조사및 전담기구 설립 등 참으로 어려운 문제, 벅찬 과제들을 요청 한 편지였다. 걱정과 갑자기 성경말씀이 생각났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이다. \"....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 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 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 가 모른체 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말할 것이다.\"
이방 땅에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교회/ 행11:19-30/ 나종수 목사/ 2012-12-12
이방 땅에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교회 행11:19-30 19절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예루살렘 스데반 사건이 흩어지는 계기가 되어 이방 땅의 안디옥 교회까지 복음이 퍼짐 복음이라는 것은 순탄한 환경이나 고난이 없는 가운데 성장하거나 전파되는 것이 아님 고난이 없으면, 환경이 순탄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은데 오히려 나태하고 게으르고 교만해 지기가 쉽다. 고통과 역경 속에서 복음이 확산됨 안디옥교회 : 이방 땅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 “그리스도인”이라 칭함 복음의 역사: 하나님의 강제적 섭리와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짐 영국->미국->한국 우리나라가 해외선교의 주도권을 쥐게 됨 인구수도 적고, 경제력도 부족, 어떻게 기적 같은 일들을 이루어 내는가? ① 무계획성 ② 무모성 영국, 미국 책상 앞에서 계획하다 날 샌다. 한국은 가슴에 불이 떨어지면 무조건 간다.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 선민사상이 깨어지지 않음 20절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그 중에 몇 사람이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 믿을까? 21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하나님이 구원 못 시킬 사람은 없다. 단지 도구로 쓰임 받는다. 22절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 파송한 이유? ① 검증을 위해(감독) ● 독립교회 위험한 소지가 있다. 탈선 할 때 방지 할 수 없다. 신학적으로 잘못 되었을 때 제어가 안 된다. 거짓말 10번 하면 진실이 된다.(히틀러) ② 양육하기 위해 23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 교회에 첫 번째 있어야 할 것 ①은혜 ②주와 함께 함 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하나님이 교회를 키우지만 누구를 통해서 키우시는 가? 사람을 통해 교회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리더십 ① 영적인 리더십: 신앙적인 리더십 (성령과 믿음이 충만) ② 인격적인 리더십: 성품(착한 사람) ③ 기능적 리더십 : 함께 일하기를 좋아하는 리더십 25절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바나바는 다소로 사울을 찾아 감. 자기와 같이 일하자고 권면. 기독교인의 참된 인격은 함께 일하는 것.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면서 일하는 것. 자기를 낮추면서 일하는 것. 섬기면서 일하는 것이 기독교의 지도력 26절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와 사울은 일 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안디옥 성도들을 양육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중심으로 일 년 동안 열심히 모여 떡을 떼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교제하는 그 모습을 보고,“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하면서 별명을 하나 붙여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 우리 모두 그런 별명이 붙어야 한다. ‘저 사람은 예수 믿는대, 예수쟁이래’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분간이 안 가는 사림이 있다. 회사 안에서도 예수 믿는 티를 전혀 내지 않고, 29절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맨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구제 안디옥 교회가 맨 먼저 한 일도 구제 그러면 그들이 헌금 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각각 그 힘대로 ’ 각각했다.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성령 받은 자의 특징은? ① 전도 ② 구제 ② 선교 결론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주와 함께 했다. 우리 교회도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방 법정에 소송하는 문제/ 고전6:1-11/ 2002-02-25
이방 법정에 소송하는 문제 고전6:1-11 고린도전서 6장은 두 가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11절까지는 이방법정에 소송하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2-20절까지는 음행의 일을 피하여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거룩하게 지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전반부 이방법정에 소송하는 문제에 대해서 강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그리스도안에 한 형제된 지체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분쟁의 이유와 내용이 무엇인지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교회 지체안에 분쟁의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 사이에 분쟁의 일이 아마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분쟁의 일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회안의 분쟁의 일이 발생했을 때 교회 안에서 사랑의 원리를 따라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이방법정의 재판관들에게 분쟁의 문제를 소송한데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교회내의 분쟁의 문제를 이방법정의 재판관에게 호소하여 해결받고자 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이 지금 이처럼 이방법정에 소송하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지금 이방법정에 소송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교회의 지체간에 발생한 문제를 가지고 이방법정에 소송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처럼 이방법정에 형제간의 일을 가지고 소송한 것이 잘못된 일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특히 두 가지 원리를 따라서 이방법정에 소송하는 일이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새 시대를 사는 하나님나라의 성도가 존귀한 자라는 원리에 부당함을 지적합니다. 또 하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 성도간에 연합하는 원리에도 부당함을 지적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도의 존귀함에 합당하지 않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교회 안의 일을 가지고 이방법정에 소송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1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의한 자들\'이라는 말은 불의한 재판관 다시 말해서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고 불공정하게 한다는 의미로 불의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의한 자는 교회 밖의 이방재판관이라는 의미로 불의한 자입니다. 뒤의 성도 앞에서 한다는 말과 대조되는 의미로 불의한 자입니다. 여기 \'불의한 자들\'은 4절의 \'경히 여김을 받은 자\'와 같은 말입니다. 또 6절의 \'믿지 아니하는 자\'와 같은 말입니다. 지금 바울의 논지는 교회 안의 일을 가지고 교회 밖의 이방재판관에게 소송하는 일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가 교회안의 형제사이의 분쟁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방법정에 소송하는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시대의 교회의 존귀함과 탁월함에 대조하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2-3절을 보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성도로 부름받은 백성의 특권이며 존귀함입니다. 세상을 판단할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천사들까지도 판단하는 권세를 교회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교회의 위치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창조 시에 사람을 만물의 마지막에 지으시고 만물의 으뜸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머리로 아담을 삼으셨습니다. 아담을 대리통치자로 삼았습니다. 아담을 통해서 모든 피조물로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누리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담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위에 가지고 있는 권세입니다. 이 아담의 직무와 권세를 하나님은 구약교회가 계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나라의 머리로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로 하나님을 대리하는 제사장 나라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을 이방에 반사하는 지혜의 민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의 표상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반사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로 구약시대의 경륜에서 구약백성이 가장 지혜로운 백성입니다. 구약의 경륜에서도 교회 안의 일을 이방나라의 재판관에게 가지고 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심히도 어리석은 일이며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서 세상과 이방나라를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약이스라엘의 나라도 완전한 지혜를 따라서 세상을 판단하는 나라는 아닙니다. 그림자적이며 많은 한계와 어두움이 있는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진행상에 있는 지혜요 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세상에 하나님의 온전한 판단의 기관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새시대의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지혜가 가장 찬란하게 나타난 기관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지혜가 세상에 나타났는데, 교회가 바로 그 하나님의 지혜를 기업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서 새시대의 특권과 존귀함을 누리고 있는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 새 백성으로 부름받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교회는 이런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새시대로 부름받은 신약의 교회만이 이런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새 백성의 교회, 신약의 교회만이 하나님의 지혜가 가장 잘 나타난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구약시대의 유대인의 재판관이 가지는 지혜와 능력도 가지지 않는 이방의 재판관에게 고린도 교회가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의 행위는 구약의 유대인의 행위보다도 못한 일입니다. \'불의한 자\', \'경히 여김을 받는 자\', \'믿지 않는 세상재판관\'에게 거꾸로 판단을 받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이런 세상의 재판관들은 일반은총의 원리를 따라서 일반적인 의와 불의를 구별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새 질서를 누리고 있는 교회안의 삶의 의미를 알 수도 없고 바르게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세상법정의 재판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시대의 교회안의 삶의 질서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재판관들은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교회의 삶의 질서를 알지 못합니다. 단지 이방인적인 지혜를 가지고 일반원리를 따라서 의와 불의를 구분할 뿐입니다. 이처럼 새시대의 교회의 존귀함에 비추어보았을 때 어리석은 이방법정에 소송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입니다. 4-6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어리석음 행위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의 이방법정에 소송하는 행위는 교회의 존귀함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심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둘째 성도의 사랑의 사귐의 연합에 합당하지 않다 뿐만아니라 이런 고린도 교회가 이방법정에 형제간의 분쟁의 일을 소송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요 공동체로 부름받은 교회의 원리를 생각할 때도 옳지 않는 일입니다. 바울이 두 번째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6-8절입니다.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형제간에 송사하는 일 자체가 이미 완전한 허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방법정에 소송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형제에게 손해를 보고 속고 불의를 당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며 나은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삶의 원리가 바로 새시대의 교회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서 구약시대와 대비하시면서 새 시대를 사는 신약교회의 삶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4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시대입니다. 이웃은 사랑하지만 원수는 미워하는 시대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손해를 준 만큼 그 사람에게 갚는 삶의 질서입니다. 율법을 맡은 직무자들에게 소송을 걸어서 손해를 입은 만큼 그에게 갚는 시대입니다. 뿐만아니라 개인이 죄를 개인적으로 용서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누가 누구에게 범죄했으면 개인이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습니다. 율법을 맡은 재판관을 통해서 판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삶의 원리가 구약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는 전혀 다른 삶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라고 하십니다. 심지어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웃만 사랑하고 형제만 사랑하면 이런 것은 세리도 하는 것이고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이런 이방인의 삶의 질서, 또 구약의 삶의 질서를 따라 사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안에서 새 시대를 사는 삶의 질서가 요구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죄인들과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새시대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새시대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를 위해 몸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형제의 손이 되고 형제를 섬기며 사랑의 봉사를 해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하는 행위가 허물이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손해를 보고 불의를 당하고 속은 것이 나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한 형제된 원리입니다. 교회안에 분쟁의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혹시 분쟁의 일이 발생했다 할지라도 형제를 위해 사랑의 짊을 지는 원리를 따라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반은총의 원리를 따라서 볼 때도 부부간의 문제는 부부당사자들이 사랑의 원리를 따라서 해결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간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문제가 커집니다. 일반가정에서의 가정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관계보다도 더 신령하고 탁월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신령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교회는 피를 나눈 혈연의 관계보다도 더욱 신령한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온 지체가 연합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안의 문제는 반드시 교회안의 사랑의 원리를 따라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회가 이런 일을 망각하고 세상의 이방법정에 교회안의 문제를 소송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잘못된 일임을 바울은 교회밖에 있는 불의한 일들과 대비하면서 설명합니다. 9절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을 상기시키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가 형제간의 분쟁의 문제를 사랑의 원리를 따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이방법정에 소송하는 것은 불의한 자의 행위와 똑같다는 말입니다. 이런 행위를 하고 어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교회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과의 절교/ 느9:/ 2010-11-02
이방 사람들과의 절교 느9: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성전을 건축하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수축하고 지도자를 세우고 말씀을 들을 때에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낮 4분의 1 즉 3시간은 말씀을 듣고, 4분의 1 3시간은 회개하며 자복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도 건축하고 성벽도 온전하게 수축하고 지도자도 세웠지만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려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복하며 회개하는데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앞으로 전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겉으로 다 갖추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해결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과 동시에 아니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2절에 보니까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했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세속적인 나의 삶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그리고 금식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언제든지 돌아갈 세상적인 내 자리가 있는 사람은 진실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울며 회개하는 것 같지만 그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순간 세상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갈 사람, 그 사람의 회개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한 때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날마다 밤마다 띵까띵까 술집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어머니의 간곡한 권면에 정신을 차렸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잠시 졸았답니다. 그러던 중 가던 말이 멈추기에 깨어보았더니 아니, 늘 밤마다 찾아가던 그 술집이더랍니다. 그래서 김유신 장군은 알아서 자기의 주인을 술집으로 인도한 자기가 사랑하던 그 말을 그 자리에서 죽였답니다. 그 말이 잘못한 것이 없지만 그만큼 자기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사랑하던 말을 죽였다는 겁니다.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나의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지한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결단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에 그들은 또한 그냥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감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안타까워하며 금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달은 자들이 먹고 마시고 잔치를 벌이겠습니까? 죄를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뭔가 먹고 마시는 것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배고플 때는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하지만 어떻습니까? 배부르면? 다 귀찮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을 때 먹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송구스럽고 죄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을 언제 합니까? 병원에서 어떤 검사를 할 때 밥을 굶습니다. 수술을 할 때 금식을 합니다. 뱃속에 음식물이 있으면 검사도 수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새로워지고 변화받기 위해서라도 금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 쓰며 회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옷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 전통으로 볼 때 상복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상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복을 입고 울며 기도한다? 이것은 바로 자기들이 깨달은 죄를 가장 큰 슬픔으로 여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심각하게 여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제 성전을 다 건축하고 내일이면 봉헌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내적으로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의 역사 없이 부흥은 없습니다.
이방 풍속을 쫓지 말라/ 레18:1-30
이방 풍속을 쫓지 말라 레18:1-30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철저히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임을 알고 계시며 그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심연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지를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인간 타락성이 보여주는 가장 깊은 욕망이 무엇임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욕망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적 욕망입니다. 이 욕망은 인간 모든 욕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다른 모든 욕망들도 이것을 생각하듯이 주의하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대표되는 성적인 문제를 가지고 말씀하신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요한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총 집합해서 오늘 본문에서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짐승을 잡아먹고 놀아도 예수의 피를 기억하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즉 구속을 받았다면 구속받은 자의 삶을 살기에 힘쓰라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자리에까지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조심하고 주의하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애굽땅의 풍속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땅의 풍속을 쫓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를 행하지 말고\"라고 한 것을 보아 애굽땅의 풍속이 앞으로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의 풍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풍속은 애굽이나 가나안이나 꼭 같다는 말입니다. 이 풍속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애굽의 풍속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애굽의 풍속이 어떠합니까? 골육지친을 가까이 하여 범죄하는 풍습입니다.(6) 그 실상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어미를 범합니다.(7) 친어머니가 아닌 계모를 범합니다.(8) 이복 자매를 범합니다.(9) 손녀나 외손녀를 범합니다.(10) 이복 여형제(11), 고모(12), 이모(13), 숙모(14)를 범합니다. 시아비가 자부를(15), 형수나 제수를 범합니다.(16) 근친 관계 속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욕을 따라 범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인간이 얼마나 욕망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남자가 한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을 아울러 범하며 여인과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함께 취하기도 합니다.(17) 인간이 얼마나 탐욕적인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내가 살아 있는데 또 처제를 취하여 분란을 일으킵니다.(18) 인간의 정욕은 여인의 고통도 고려할 줄 모릅니다.(19) 나아가서는 남의 아내까지 범합니다. 이것을 통간 또는 간통이라고 부릅니다. 즉 결혼하여 각기 남편과 아내가 있는 사람이 남의 남자와 여자를 좋아하여 범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둘이 서로 눈이 맞아 범하는 죄이기 때문에 둘다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20)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했다고 했는데(21) 자녀를 불살랐다고 하기도 하고(렘 7:31) 불로 통과케 했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이런 행위를 하면서 그 드리는 부모들이 남녀 창기들과 음란히 관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볼 때 미신적인 정욕에 빠진 인간들이 정욕을 채우면서 갖은 거짓말에 홀려 자녀까지도 죽는데 내어 주고는 자기는 정욕을 추구하는 짐승보다 더 못한 짓거리들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 없는 짐승보다 훨씬 더 악해집니다. 그러니 요즈음도 남자든지 여자든지 바람이 나면 아이들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내몰라라하고 버리고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모 행위들과 수간이 옛날부터 성행했습니다.(22-23) 지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던 죄악입니다. 영어로 남색 즉 남자 호모 섹스를 소도미라고 하는데 바로 소돔의 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죄로 치달아 가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고 끝이 없습니다. 죽어야 끝이 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씨를 말려서라도 가나안 땅에서 멸절시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애굽이나 가나안 풍속을 쫓지 말고 나의 법도를 쫓으며 나의 규례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인간의 정욕이 무서운 것인가를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할 수 있고 욕망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더러워지면 땅도 더러워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애굽이 이것 때문에 망했습니다.(27) 가나안도 이 때문에 심판을 받았습니다.(24-25) 이스라엘도 이렇게 되면 망하게 됩니다.(28)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쫓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30) 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인간이 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을 부부간의 연합의 표현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주실 때는 서로서로 사랑하고 돕는 배필로서 짝을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자기를 위해 있는 자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있는 자들입니다. 상대방 속에 자기가 있지 자기 속에 자기가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둘은 연합할 수 있고 서로 깊이 헌신할 수 있으며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연합이란 배필간의 연합을 즉 마음과 몸이 한데 뭉쳐지고 인격이 둘이면서도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연합을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은 이러한 인격적인 연합과 헌신이 전제되지 않는 자기 만족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성을 이와 같이 자기 만족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타락한 결과이며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에서 여자의 방종을 막기 위해 남편을 사모하며 남편의 다스림을 여자가 받도록(창 3:16) 하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굽과 가나안은 성을 자기 만족의 도구로 생각하며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헌신하고 배필에게 연합해야 할 인간이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 배필을 떠나서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변해 버렸을 때 마침내 그 욕망이 인간 전체를 잡아 먹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욕망의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소돔도 애굽도 가나안도 그리고 지금의 이 세상도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소돔이 심판을 받았고 애굽이 심판을 받았고 가나안이 심판을 받았고 마침내는 온 세상의 심판이 임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이 이러한 것이 죄악이요 멸망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죄악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멸망의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더구나 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모든 문제가 이러한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발산시키는 것이 인간이 살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정신병 의사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기독교인들이 정신병이 많은 이유는 죄를 가르치므로 욕망을 지나치게 억제하다가 보니 정신병이 생기니 신앙에 너무 심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된 것은 물론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철학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이들은 인간을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불신 심리학자는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해 아버지를 질투하는 욕망의 덩어리로 인간을 보기까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어야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길을 모색합니다. 이러한 이론을 따라서 유흥업소가 번창하고 술집과 사창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번창합니다. 낯뜨거운 영화들과 비디오들이 이러한 구실 하에 필요성을 인정받아 번성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이나 지도층들이나 국민들이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하는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말로 필요악이지만 없다면 이 세상이 더 엉망이 될 것이므로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는 욕망 하는 인간 자체가 죄악의 덩어리며 따라서 그것을 부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밖에 있습니다. 자기의 정당한 문제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환경과 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고 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정당한데 주위 환경이 나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탓하고 남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현세계가 생각하고 있는 인간 철학입니다. 여러분은 얼마 전에 여의도 광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차를 몰고 돌진한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는 심리는 이 사회 전체에 대한 원망의 표현입니다. 자기는 문제가 없고 사회가 자기를 못살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릇된 인간관이 보여주는 열매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다른 방향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성폭력 현상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고 더구나 점잖은 사람들이 가까이 아는 사람들 그 중에는 김보현양 사건과 같은 의붓아버지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 외에도 근친 성폭력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이러한 것들에 대한 원인을 인간 자기 속의 죄성에서 찾지 아니하고 복잡한 사회 생활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 같은 데서 찾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기 모순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인간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 자신 속에 있으며 따라서 그 모든 책임도 자기에게 있음을 가르칩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자신의 욕망을 자기가 죽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더구나 그렇습니다. 배우자와의 인격의 연합과 헌신의 정신에 입각하지 않는 욕망은 말할 것도 없이 방종이요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단호히 죄라고 해야 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시초부터 끊어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애굽땅의 풍속을 쫓지 말며\"(3)라는 말씀은 오늘도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한 욕망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발산\"의 대상이 아닙니다. 통제와 절제의 대상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깨닫고 따르는 자가 성도입니다. 이것이 죄인 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것을 좋아 할 수 없습니다. 그 밑에는 마귀의 마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이런 것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련을 두고 있고 사랑하고 있고 마음으로 원하고 있으며 그러한 욕망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끊어 버리지 못합니다. 여전히 연연해 하다가 다시 빠져들어 갑니다. 마약 환자가 황홀경에 대한 매력을 버리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 가듯이 서서히 죄악 속을 빠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도라고 하면 타락한 욕망이 죄악인줄 알고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미워하고 싫어하십시오. 이런 것들은 아무리 내버려도 손해 볼 것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할 것은 이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주님의 법도를 쫓으며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고 한 것과 같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 계명을 마음에 두고 이 계명의 인도를 따라 가십시오. 율법에서 자유했다고 해서 율법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 채워서 즐거움으로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 거룩이 유지가 되고 육신의 욕망이 달아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성경보고 찬송하고 소위 은혜의 방편이라는 수단들을 잘 이용하십시오 성령님은 이런 것들을 이용하셔서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 따르겠다는 여러분의 믿는 마음이 곧 성령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하늘 나라를 다시금 소망하십시오. 이것이 희미해지면 세상에 빠지게 되지만 이것이 분명해 지면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은혜의 방편이자 우리에게도 은혜의 방편이지만 율법의 완성인 부활의 예수님보다 더 큰 은혜의 방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를 생각하고 세상을 이기십시오. 예수님은 지금도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방 풍습/ 레18:24-28/ 2003-10-01
이방 풍습 레18:24-28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애굽에서 탈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는 그 여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즉, 광야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는 그 가나안 땅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아주 비옥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땅은 \"토하는 땅\" 이라는 것입니다. 멀미를 해서 음식을 올리듯이 그렇게 토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소위 \"오바히트\" 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땅이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아니라 땅이 그렇게 하니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토해 버리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들어 갔다가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도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땅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천국도 토해내는 그러한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처럼 말입니다. 몸이 토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에 맞지 않으면 토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몸이 견뎌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여러분들은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저도 그런 목사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다고 마음을 놓으라는 것도 큰 문제인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니 너무 그렇게 개의치 말라는 것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 괜찮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과거에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300년 이전에 교회가 제일 많은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인데, 그때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이기에 개신교가 따로 없고 다 로마 카톨릭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던 시기입니다. 천주교 말입니다. 그때 교회에 무엇이 있었는고 하니까, \"면죄부\" 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지은 만큼 돈을 교회에 바치면 그 죄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구약의 \"속죄의 제사\"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러나 이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피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건을 훔쳤을 때는 얼마, 사기를 쳤을 때로 얼마, 거짓말을 했을 때는 얼마, 이렇게 금액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 많은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하면서도, 주일날 교회에 와서 헌금만 많이 하면 그 순간 모든 죄가 깡그리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것이 그리 나쁜 의도로 만들어진 제도는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회개를 하되, 말로만 그렇게 하지를 말고, 정말로 통회하는 심정으로 자기의 귀한 물질들을 회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자체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습관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습관이 된다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인데, 그 애통해하는 심정은 사라져 버리고 돈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떻게 변질이 되는고 하니, 무슨 안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먼저 교회에다 돈을 내어놓고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마음 푹 놓고 떳떳하게 말입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헌금을 가지고 장난을 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목사님, 설마 어떻게 그런 일이!\" 라고 하시겠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지금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소위 그런 카톨릭에서 개혁했다고 하는 한국의 개혁교회, 개신교에서도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카톨릭 교회가 웃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그러한 것이 잘못인 줄 뻔히 알면서도, 돈이 되니까 눈을 감고 만 것입니다. 항상 돈이 교회든지 어디든 가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은 자기 부모도 자식이 대신해서 돈을 바치면 그 부모의 죄도 사라져서 지옥에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그런 사기를 교회가 앞장서서 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돈으로 지금 그렇게 웅장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유럽의 천주교의 교회 건물들이 들어선 것입니다. 아무리 멋있고 아름다워도 그것이 교회입니까? 그러한 더러운 돈으로 지어진 화려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아무리 예배를 드린들, 하나님께서 대꾸나 하시겠습니까? 이것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교회에 무엇을 바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온 몸에 피를 다 흘리고서 죽어야만 했는지를 똑똑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피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앞으로 그런 죄를 더 이상 짓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회개하고 애통해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만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비판하면서도 어떻게 됩니까? 면죄부가 그렇게 변질된 것처럼, \"예수님, 제가 십자가의 피를 믿을 테니까, 제가 나쁜 일을 조금 해도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쪽으로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나쁘다고 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인간이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마져도 이렇게 이용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을 하겠습니까? 항상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28절을 보겠습니다. (레 18: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자, 지금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이스라엘 편입니까? 땅 편입니까? 땅 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 오면 땅이 더럽혀지고 토해내어야 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끗이 하셔서 데리고 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심이 아니고, 자기가 그들에게 약속한 땅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 밖에 모르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약속에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옷을 깨끗이 세탁해서 입는데, 왜 옷을 깨끗이 합니까? 옷 때문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옷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옷을 입는 사람을 위해서 옷이 세탁기에 들어가서 뒤틀려야 하고, 사람 손에 비벼져서 깨끗하게 되어서 자기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옷을 입는 사람을 보기 좋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입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광야라고 하는 커다란 세탁기 속에 들어가서 40년 동안을 마구 세탁을 당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영광만을 고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섭섭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자기 영광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만 말입니다. 도저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이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다만, 저는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십니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구원시켜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것이 무작정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착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내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해도, 내 가족, 내 교회, 내 나라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그런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편이니까 말입니다. 다시 한번 더 묻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편도 되고 하나님 편도 되는 것이 아니고, 내편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은 하나님 자기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마저 거부한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흐를 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해야 할 줄 압니다. 기회가 항상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이 토해내는 성질이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토해냄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희생의 대가를 늘 생각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희생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천국에서 토해냄을 당하지 않고 영원히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또 그 십자가 희생의 피를 믿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분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약속대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 자신의 영광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무슨 뜻인 줄 아실 줄 압니다. 목사의 임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을 잘 도닥거려서, 마음을 맞추고 화목하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것이 목사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여러분, 목사는 여러분의 입장을 옹호해 주고, 비위를 맞추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바램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러한 마음이 정말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오히려, 평소에 사람들이 자기 밖에 모르고, 하나님께서 선택 하셨다고 해도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했다고 생각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자기가 구원받는데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며, 인간의 욕심인가 하는 것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여러분들이 싫어해도 말입니다. 여러부느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은,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말고 자기 이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토해내어 버리는 곳, 그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예수님만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갈 것 아닙니까? 자기 이야기를 하면, 또 서로 자기자랑 하다가 열 받고 싸움 밖에 더 하겠습니까? 천국에 들어 갈자는, 요한 계시록에 보면 세마포 흰옷을 입는데, 무엇을 의미합니까?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러한 죄가 말끔히 다 씻겨지고, 오직 예수님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만이 들어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토하는 땅에 가서라도 토해냄을 당하지 안고 영원히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너무나 확실합니다. 자, 이제 좀 고민되는 시간이 왔습니다. 설교시간에 과연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가 할 정도로 민망한 이야기가 이 레위기 18장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6절부터 23절까지 계속 기록되어 있는데, 자세한 것은 집에 가셔서 한번 읽어보시고, 그 내용인 즉, 근친상간(近親相姦)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형제들과 친척들과 성 관계를 하는 그런 추악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가 남자끼리, 여자가 여자끼리 관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짐승이라면 몰라도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인간의 죄가 이만큼 더럽고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고 하면서, 같은 남자들끼리 결혼을 해서 엄연히 부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기 멋대로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주간지나 스포츠 신문이 아니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부끄러운 것을 읽으라고 하십니까? 아마 이 성경구절들을 오늘 처음 보시는 분도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왜 이러한 부끄러운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근친상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고, 이미 이방나라인 애굽에 있을 때에 보고 배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3절, 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 18:3)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레 18:4)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애굽에 있었던 이방 풍속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말고도 여러 가지 풍속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이방 풍속을 언급하시면서, 바로 가장 대표적으로 근친상간을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 풍습의 대표적인 모습인 이러한 근친상간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바로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모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다른 것들도 물론 다 죄가 되고 말입니다. 조금 어렵습니다만, 이 죄(罪)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권력이고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만한 힘을 가졌기에 마구 자기의 힘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이런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이렇게 근친상간이라는 성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애굽의 모습이고, 오늘날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동방예의지국\" 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 지금 우리나라가 이런 인간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병들어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인간들은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이웃의 입장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다 멀쩡한 것 같지만 모조리 부수어지고 박살이 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 심판을 보여주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방 나라는 죄로 똘똘 뭉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본 받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의 풍속도 본 받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역시 이방 풍속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지금 현재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방 족속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을 확실하고 철저하게 쫓아내어야만 제대로 된 약속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이방풍속은 도무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있으면, 추악하고 더러운 이방 풍속이 남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토해낼 수밖에 없으니, 모두 다 없애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보고 배웠던 이방 풍속도 버려야 하고, 같은 차원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자기잡고 있는 이방 나라들도 다 박살을 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인정사정을 봐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쓸어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이 땅은 어떠한 곳입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까? 그 어떤 짓을 해도,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지어도 전혀 토해낼 생각은 하지 않고서, 그냥 꾸물 꾸물거리며 모든 것을 다 삼켜 버리는 무서운 곳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죄악 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여기저기 군데군데 있는 것이 아니고, 아예 죄로 물들어버린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사망 권세가 이 세상을 덮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과 같이 손잡고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죄라는 죄는 다 모아놓은 이곳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지 않습니까? 요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좀 배운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선한 문화를 만들자\" 라고 하는데, 아니 도대체 이 세상에 선한 구석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디 선한 곳이 있어야, 선한 문화를 만들든지, 못 만들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만들어보았자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제 아무리 예수라는 이름을 갖다 부쳐도,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기에, 모두 다 악한 문화밖에는, 우리가 버려야 하는 쓰레기들 밖에 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제법 괜찮고, 아직 쓸만한 구석이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금 창조하십니까? 있는 것 고쳐서 쓰면 되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짐을 싸들고 떠날 준비를 다 한 나그네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그네는 지금 자기가 있는 곳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아무리 튼튼한 집을 짓더라도 천막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천막으로 말입니다. 제 아무리 형제가 많아도, 부모와 처자식이 있어도, 집이 스무 채가 있어도, 그러한 이 세상의 것에는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그분만으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 밖에는 모르고, 알아도 자기 가족, 식구 밖에는 모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 줄을 알고 나 자신까지도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 참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왜 성도입니까? 어떻게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거룩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 말입니다. 하늘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 토해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로 토해냄을 당하지 않고, 영원히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방 풍습/ 레18:24-28/ 2003-10-01
이방 풍습 레18:24-28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애굽에서 탈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가고 있는 그 여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즉, 광야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는 그 가나안 땅이 우리는 일반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아주 비옥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땅은 \"토하는 땅\" 이라는 것입니다. 멀미를 해서 음식을 올리듯이 그렇게 토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소위 \"오바히트\" 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땅이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아니라 땅이 그렇게 하니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토해 버리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들어 갔다가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도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땅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천국도 토해내는 그러한 특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처럼 말입니다. 몸이 토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에 맞지 않으면 토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몸이 견뎌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여러분들은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저도 그런 목사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다고 마음을 놓으라는 것도 큰 문제인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니 너무 그렇게 개의치 말라는 것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 괜찮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과거에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300년 이전에 교회가 제일 많은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인데, 그때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이기에 개신교가 따로 없고 다 로마 카톨릭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던 시기입니다. 천주교 말입니다. 그때 교회에 무엇이 있었는고 하니까, \"면죄부\" 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지은 만큼 돈을 교회에 바치면 그 죄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으면 구약의 \"속죄의 제사\"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러나 이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피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건을 훔쳤을 때는 얼마, 사기를 쳤을 때로 얼마, 거짓말을 했을 때는 얼마, 이렇게 금액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 많은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하면서도, 주일날 교회에 와서 헌금만 많이 하면 그 순간 모든 죄가 깡그리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것이 그리 나쁜 의도로 만들어진 제도는 아니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회개를 하되, 말로만 그렇게 하지를 말고, 정말로 통회하는 심정으로 자기의 귀한 물질들을 회개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자체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습관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습관이 된다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인데, 그 애통해하는 심정은 사라져 버리고 돈만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떻게 변질이 되는고 하니, 무슨 안 좋은 일을 하려고 하면 먼저 교회에다 돈을 내어놓고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마음 푹 놓고 떳떳하게 말입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헌금을 가지고 장난을 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목사님, 설마 어떻게 그런 일이!\" 라고 하시겠지만, 그러나 분명하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지금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입니다. 소위 그런 카톨릭에서 개혁했다고 하는 한국의 개혁교회, 개신교에서도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카톨릭 교회가 웃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그러한 것이 잘못인 줄 뻔히 알면서도, 돈이 되니까 눈을 감고 만 것입니다. 항상 돈이 교회든지 어디든 가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은 자기 부모도 자식이 대신해서 돈을 바치면 그 부모의 죄도 사라져서 지옥에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그런 사기를 교회가 앞장서서 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돈으로 지금 그렇게 웅장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유럽의 천주교의 교회 건물들이 들어선 것입니다. 아무리 멋있고 아름다워도 그것이 교회입니까? 그러한 더러운 돈으로 지어진 화려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아무리 예배를 드린들, 하나님께서 대꾸나 하시겠습니까? 이것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은 교회에 무엇을 바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온 몸에 피를 다 흘리고서 죽어야만 했는지를 똑똑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피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앞으로 그런 죄를 더 이상 짓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회개하고 애통해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만 이러한 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비판하면서도 어떻게 됩니까? 면죄부가 그렇게 변질된 것처럼, \"예수님, 제가 십자가의 피를 믿을 테니까, 제가 나쁜 일을 조금 해도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쪽으로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나쁘다고 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인간이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마져도 이렇게 이용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을 하겠습니까? 항상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28절을 보겠습니다. (레 18: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자, 지금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이스라엘 편입니까? 땅 편입니까? 땅 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 오면 땅이 더럽혀지고 토해내어야 하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끗이 하셔서 데리고 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심이 아니고, 자기가 그들에게 약속한 땅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 밖에 모르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약속에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옷을 깨끗이 세탁해서 입는데, 왜 옷을 깨끗이 합니까? 옷 때문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옷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옷을 입는 사람을 위해서 옷이 세탁기에 들어가서 뒤틀려야 하고, 사람 손에 비벼져서 깨끗하게 되어서 자기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옷을 입는 사람을 보기 좋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입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광야라고 하는 커다란 세탁기 속에 들어가서 40년 동안을 마구 세탁을 당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영광만을 고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섭섭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자기 영광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만 말입니다. 도저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이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다만, 저는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십니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구원시켜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그것이 무작정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의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착각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내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해도, 내 가족, 내 교회, 내 나라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그런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편이니까 말입니다. 다시 한번 더 묻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편도 되고 하나님 편도 되는 것이 아니고, 내편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은 하나님 자기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마저 거부한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흐를 때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해야 할 줄 압니다. 기회가 항상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가나안 땅이 토해내는 성질이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토해냄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희생의 대가를 늘 생각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희생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천국에서 토해냄을 당하지 않고 영원히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또 그 십자가 희생의 피를 믿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분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약속대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 자신의 영광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무슨 뜻인 줄 아실 줄 압니다. 목사의 임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을 잘 도닥거려서, 마음을 맞추고 화목하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것이 목사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여러분, 목사는 여러분의 입장을 옹호해 주고, 비위를 맞추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바램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러한 마음이 정말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오히려, 평소에 사람들이 자기 밖에 모르고, 하나님께서 선택 하셨다고 해도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했다고 생각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자기가 구원받는데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며, 인간의 욕심인가 하는 것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여러분들이 싫어해도 말입니다. 여러부느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은,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말고 자기 이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토해내어 버리는 곳, 그 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예수님만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갈 것 아닙니까? 자기 이야기를 하면, 또 서로 자기자랑 하다가 열 받고 싸움 밖에 더 하겠습니까? 천국에 들어 갈자는, 요한 계시록에 보면 세마포 흰옷을 입는데, 무엇을 의미합니까?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러한 죄가 말끔히 다 씻겨지고, 오직 예수님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만이 들어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토하는 땅에 가서라도 토해냄을 당하지 안고 영원히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너무나 확실합니다. 자, 이제 좀 고민되는 시간이 왔습니다. 설교시간에 과연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가 할 정도로 민망한 이야기가 이 레위기 18장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6절부터 23절까지 계속 기록되어 있는데, 자세한 것은 집에 가셔서 한번 읽어보시고, 그 내용인 즉, 근친상간(近親相姦)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형제들과 친척들과 성 관계를 하는 그런 추악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가 남자끼리, 여자가 여자끼리 관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짐승이라면 몰라도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인간의 죄가 이만큼 더럽고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고 하면서, 같은 남자들끼리 결혼을 해서 엄연히 부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기 멋대로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주간지나 스포츠 신문이 아니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부끄러운 것을 읽으라고 하십니까? 아마 이 성경구절들을 오늘 처음 보시는 분도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왜 이러한 부끄러운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근친상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니고, 이미 이방나라인 애굽에 있을 때에 보고 배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3절, 4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 18:3)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레 18:4)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애굽에 있었던 이방 풍속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말고도 여러 가지 풍속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이방 풍속을 언급하시면서, 바로 가장 대표적으로 근친상간을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 풍습의 대표적인 모습인 이러한 근친상간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바로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모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하는 다른 것들도 물론 다 죄가 되고 말입니다. 조금 어렵습니다만, 이 죄(罪)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권력이고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만한 힘을 가졌기에 마구 자기의 힘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이런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이렇게 근친상간이라는 성폭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애굽의 모습이고, 오늘날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동방예의지국\" 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 지금 우리나라가 이런 인간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병들어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인간들은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이웃의 입장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파괴되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다 멀쩡한 것 같지만 모조리 부수어지고 박살이 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 심판을 보여주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방 나라는 죄로 똘똘 뭉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본 받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의 풍속도 본 받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역시 이방 풍속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지금 현재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방 족속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을 확실하고 철저하게 쫓아내어야만 제대로 된 약속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이방풍속은 도무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있으면, 추악하고 더러운 이방 풍속이 남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토해낼 수밖에 없으니, 모두 다 없애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보고 배웠던 이방 풍속도 버려야 하고, 같은 차원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자기잡고 있는 이방 나라들도 다 박살을 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인정사정을 봐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쓸어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이 땅은 어떠한 곳입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입니까? 그 어떤 짓을 해도,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지어도 전혀 토해낼 생각은 하지 않고서, 그냥 꾸물 꾸물거리며 모든 것을 다 삼켜 버리는 무서운 곳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죄악 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여기저기 군데군데 있는 것이 아니고, 아예 죄로 물들어버린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사망 권세가 이 세상을 덮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과 같이 손잡고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죄라는 죄는 다 모아놓은 이곳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없지 않습니까? 요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좀 배운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선한 문화를 만들자\" 라고 하는데, 아니 도대체 이 세상에 선한 구석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디 선한 곳이 있어야, 선한 문화를 만들든지, 못 만들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만들어보았자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제 아무리 예수라는 이름을 갖다 부쳐도,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기에, 모두 다 악한 문화밖에는, 우리가 버려야 하는 쓰레기들 밖에 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제법 괜찮고, 아직 쓸만한 구석이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금 창조하십니까? 있는 것 고쳐서 쓰면 되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짐을 싸들고 떠날 준비를 다 한 나그네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그네는 지금 자기가 있는 곳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아무리 튼튼한 집을 짓더라도 천막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천막으로 말입니다. 제 아무리 형제가 많아도, 부모와 처자식이 있어도, 집이 스무 채가 있어도, 그러한 이 세상의 것에는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그분만으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 밖에는 모르고, 알아도 자기 가족, 식구 밖에는 모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 줄을 알고 나 자신까지도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 참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왜 성도입니까? 어떻게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거룩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 말입니다. 하늘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 토해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로 토해냄을 당하지 않고, 영원히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