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 예화
  • 자료
  • 성경
기도와 순교/ 행12:1-10
기도와 순교/행12:1-10 2003-10-23 20:20:12 read : 160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하는 일이 땅위에 그대로 떨어지게 되어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눈에 보이는 세상일은 원인이 하늘에 있어서 세상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설립되고 확산되고 주님의 소식이 널리 전달되는 것은 인간적인 자기의 바램이나 사람들이 하기를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령을 보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런점을 사도행전에서 여러가지고 이야기 하는 이유가 어떤 경우에도 교회가 낙심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낙심을 하고 힘이 빠져있고 사명을 못한다는 것은 환경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겨주었는데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과 처지가 있기 때문에 일을 못한다는 핑게를 하나님께 하기 쉽습니다만 그것은 그 교회가 마치 세상의 사업을 하는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설립하는 것도 주님이요 이끌어가는 것도 주님이십니다. 교회를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것도 주님이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어떻게 하면은 잘 유지될 수 있느냐 보다도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을 교회가 어디서부터 나왔느냐, 교회가 누구의 간섭을 받고있느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만약 교회의 설립자 되시는 주님의 생각과 교회에 대해서 다른 마음을 먹고 있는 우리의 생각과 다를때는 언제든지 교회의 구원을 철수하고 맙니다. 구원없는 교회, 희망없는 교회, 영생이 없는 교회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항상 두개의 계통이 나란히 나가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뜻,그리고 그것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뜻이 나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교회만 관심을 쏟는다면 그야말로 주님은 보이지 않게 되고 반면에 주님만 생각하게 되면 주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하시느냐에 대해서 우리가 오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2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12장 1절에 보면 헤롯왕이 상당히 교회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이런 감정은 생기는 것은 그가 마음먹은대로 지시한대로 방침대로 교회가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세력이 왕의 손에 있는데 교회가 거침돌이 되고 방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독재자는 자기가 지배하고 있는 모든 세력이 마음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왕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백성들을 섬기는 왕이 진정한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지도자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 뜻에 따라오도록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인간세상입니다. 헤롯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교회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헤롯이 예수님의 제자중 야고보와 베드로를 죽이기로 한것은 그당시 헤롯이 다스리는 나라에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호응이 없으면 나라가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교회를 하나의 제물로 삼기를 생각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교회를 파괴하기로 마음을 먹고 두사람을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죽었고 베드로는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얘기를 그냥 성경에서만 대할 때는 건성으로 넘어가기 쉽지만 이런 일이 만약 우리 교회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마음의 동요나 갈등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장로님께서 말씀대로 사시고 빈틈이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누구든지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분이 파출소에 잡혀서 돌아가시게 되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하나님은 뭘하고 계시냐고 대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믿고 잘섬기는 분을 오래오래 살게 하셔 가지고 많은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겠느냐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지상에서 일어난 일만 가지고 교회란 무엇이냐를 규명할 경우에는 이러한 오해가 발생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성경을 빼놓고 교회의 경험이라든지 목회생활의 경험을 내세워서 그중에서 신기한 것만 골라서 이것이 진리라고 내새울 경우에 그것은 대부분 성경과 충돌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때문에 있습니까? 교회의 인간적인 생각을 방지하도록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라고 하는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하늘의 뜻은 인간들의 지상의 뜻과 일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의 의무요 성경의 사명입니다. 성경을 보지않는 순간 다른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목사가 목회를 해도 다른길로 가기 쉬운 것입니다. 어쨋든 장로님이 잡혔을 경우 파출소 소장에게 가서 뇌물주고 아부를 하면서 장로님을 빼내는 일을 첫번째 계획으로 세울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일을 시켰을 것이고 이런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심한 갈등을 줄 수 있습니다. 이세상에서 하나님이 높으냐 아니면 세상 사람이 더 높으냐는 갈등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답을 압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하나님이 더 높다고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이 더 무섭고 권력이 세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네가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 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 하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답을 내리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답을 내려도 말로는 정답이지만 마음속까지는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최고라고 해놓고 그 뒤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절망과 낙심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절망과 허탈감이 오는 것은 환경탓이 아니고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는 것을 염두해 두고 그때마다 성경을 보면서 믿음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 당시의 사도행전 12장에 나오는 교회는 그당시로 봐서 매우 어려운 때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과연 살아계시는가에 대해서 신앙의 밑둥치까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잡혀서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살았습니다. 이 본문을 두고 다음과 같이 해석은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사람은 기적적으로 살리신다는 미신 같은 해석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세 친구 같은 경우 느브갓네살 왕이 세 친구를 불 속에 넣었는데 살았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사자입을 봉해서 살았고, 에녹이 죽지 않고 엘리야도 올라간 여러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야고보와 베드로는 하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살리신 것이 아니라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베드로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죽일 때 기적적으로 살려냈으면 하는 것이 성경을 덮어버리고 인간의 경험으로 목회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을 왜 죽게하시느냐고 말입니다. 죽일려면 둘다 죽게 하시든지, 살리려면 둘다 살리시든지 하나는 죽이시고 하나는 살리시고 이게 무슨 혼란입니까?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상당히 궁금할 갑니다. 그러나 궁금하다는 자체가 땅의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끄집어 내려는 마음가짐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회가 중요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그들의 어떻게 봉사할 것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들은 소모품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이 죽는 것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죽이십니다. 사도바울이 얘기하기를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고 뜻이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내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항상 주님께서는 그들을 이용해서 한 알의 밀알로 잡아서 교회 잘되고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동원시키기 위해서 죽고 살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요지도 베드로를 어떻게 살리느냐, 우리가 어떤 사람이 있을 때 살리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된다는 방법론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무엇인가,누가 다스리시는가 하는 점이 베드로의 구출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설교의 핵심과 요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특별히 알아야 될 것은 6-7절에 보면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애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여기보면 베드로가 기도한다든지 몸부림쳤다든지 하나님께 항거했다든지 그런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누워서 잤습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간에 주님께 헌신된 사람이기 때문에 편히 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안식과 평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깨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깨웠습니다. 베드로가 구출될 때까지 스스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구출된 것은 인간들의 행위와 노력이 없었습니다. 교회가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나서 이자리에 나온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야고보와 베드로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것입니다. 그다음에 사도행전에서는 교회가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살아서 기도하는 무리에 나갔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두손을 들고 애원한 것입니다. 기도했더니 베드로가 구출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왔을 때에 놀랐습니다. 기도하면서 그들은 베드로가 살아올 줄 몰랐습니다. 다만 그들이 믿은 것은 베드로가 살아올 줄 믿은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인도하고 베드로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형태가 기도입니다. 베드로를 일방적으로 깨워서 데리고 나온 천사의 행동처럼 교회가 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기도입니다. 교회의 운영은 주님의 손길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교회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일을 꾸려 나갈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궁핍을 느껴야 되는데 그 궁핍을 세상적인 수완으로 보충하려 들기 때문에 자연 기도가 멀어집니다.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착하고 거짓말 안하고 십계명 지킨다고 자동적으로 예수님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뻐시게 못한다 성경에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 무슨 신자입니까.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면 그냥 교인에 불과하지요. 하나님을 기뻐시게도 못하는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척 받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것처럼 행동을 옮겨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표시를 내야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살린겁니다. 교회는 인재가 많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재한 하나님이 언제든지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재력가나 재주꾼을 의지하도록 유도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쪽으로 광고해서도 안됩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필요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회가 무슨 교회입니까? 기도하지 않는 교회의 위험성이 여기 있습니다. 숫자 불어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이비한 교회입니다. 주님이 살아 역사 한다는 증거를 엉뚱한 데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삶의 증거이지 숫자 늘어나는 것이 증거가 못됩니다. 3000명, 5000명 늘어났던 초대 교회들,그러나 하나님은 그 교인들을 흩고 말았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해야할 사명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교회는 주님께 복종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기도로서 의지하는 교회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불러 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사도행전 12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30에 보면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교회라는 단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산됐느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 자체가 의미있는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될 때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갈수록 무능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기도함으로 모든 것은 주님께 반납하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서 주께서 저희들을 종으로 삼아서 교회가 주님의 것이고 그를 통해서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교회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순교적 기도/ 단6:1-28
다니엘의 순교적 기도 단6:1-28 (단6:1) 다리오가 자기의 심원대로 방백 일백 이십 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단6:2) 또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이라 이는 방백들로 총리에게 자기의 직무를 보고하게하여 왕에게 손해가 없게 하려함이었더라 (단6:3)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단6:4)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단6:5)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 (단6:6)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단6: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단6:8) 그런즉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단6:9)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6:11)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단6:12) 이에 그들이 나아가서 왕의 금령에 대하여 왕께 아뢰되 왕이여 왕이 이미 금령에 어인을 찍어서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적실하니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대로 된 것이니라 (단6:13) 그들이 왕 앞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그 다니엘이 왕과 왕의 어인이 찍힌 금령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 (단6:14)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인하여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 내려고 힘을 다하여 해가 질 때까지 이르매 (단6:15)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씀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의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변개하지 못할 것이니이다 (단6:16)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단6:17)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아구를 막으매 왕이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 처치한 것을 변개함이 없게 하려 함이었더라 (단6:18) 왕이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맞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기악을 그치고 침수를 폐하니라 (단6:19)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단6:20)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단6:21)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단6: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단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단6:24)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단6:25) 이에 다리오 왕이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려 가로되 원컨대 많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단6: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 이시오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단6: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단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다니엘은 무엇보다도 도적적으로 깨끗한 인물임을 알수 있습니다. 요셉과 쌍벽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도 국무총리 시절에도 변하지 않는 인격과 삶이었습니다. 그의 고결한 성품과 매력적인 인격은 모든 성도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고 어린 아니들에게까지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니엘을 누구보다 단호하고 결단력있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일도 죽을 각오로 하면 안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한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의 입을 봉하고, 원수들의 올무를 끊어 버렸습니다. 1. 시종일관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원수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왕 앞에 가서 애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함정이 빠진 줄을 알면서도 태연히 집으로 돌아 왔습 니다. 대항책을 강구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혼자 탄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죽을 받아 들이려고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평생했는 데도 고난은 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기도했습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너의 항상 섬기는 하나님 \\\'이라는 말을 왕이 두번이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왕 앞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왕과 모든 바벨론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는 기회였습니다. 2. 그의 기도는 규칙적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규칙적이었습니다. 하루에 세번씩 기도했습니다. 원수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잡아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사실을 알고도 그 기도의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있는 믿음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규칙적을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 너무 깊이 물들고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습관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위한 것이고, 세상에서 얻은 것들입니다. 이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의 생활화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니엘이 그 어려운 시험을 이길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훈련된 기도와 신앙의 습관이 중요한 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다니엘은 믿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방에는 예루살렘으로 향한 열린 창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6절에 보면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실 자임을 믿어야 할지니라(11:6)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향한 믿음의 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허공을 울리고 마는 공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응답 받는 기도를 드렸고,역사하는 기도를 드렸고,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창을 열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한번 자신이 믿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닫혀진 창들을 활짝 여시기를 바랍니다.
두 종류의 순교자/ 행12:1-5/ 이규왕 목사
두 종류의 순교자/행12:1-5 2006-12-26 11:17:49 read : 166 (행 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행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 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행 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지난 연초에 보훈처의 기관장 되시는 분과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보훈처의 상황과 국가 유공자의 자손들에게 국가가 어떤 혜택을 베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청취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이 만큼 잘 살기까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수많은 애국자들의 피 흘림과 죽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라와 민족을 팔아 자기 몫을 챙기던 친일파나 공산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오늘 날에는 친일파 노릇을 한 사람들의 후손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부모나 선조들이 한 친일 행위 때문에 그 후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 운동을 하다가 순국을 한 애국자들의 후손은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연금의 혜택을 받고 자녀들은 장학혜택을 받아 누리는 모습을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다가 피 흘려 죽은 순국선열들은 당시에 누구보다 많은 수모나 역경을 겪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제일 늦게 출발한 기독교가 온갖 사단의 훼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세계적인 종교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또한 순교자들의 피와 헌신자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이 그러하다면 하나님을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바친 헌신자들과 또한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은 어떤 복을 받을 까요? 1. 순교를 당한 야고보 사도 창세 이래로 사단 마귀의 권세는 항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훼방해 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실체를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사단도 영이기 때문에 그 실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욥 2: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만일 사람의 눈에 보여 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실체와 존재를 부인한다면,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범위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나 지난날의 역사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내가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몽땅 다 부인하는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단을 눈으로 볼 수 없어도 사단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을 죄짓도록, 우상을 섬기도록, 병들어 고통을 당하도록 만들고, 결국 죽음 너머 지옥으로 끌고 가는 배후 세력이 바로 사단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사단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지상에 최초로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부터 오늘의 교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훼방하고 괴롭혀왔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사단을 가리켜 공중 권세와 정사를 잡은 세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 사단의 권세가 얼마나 강력한지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필요하다면 사람, 돈, 권력, 국가 등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다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존재임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 12: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행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여기서 \'그 때에\' 라는 말은 하나님의 손이 예루살렘 교회와 함께 하심으로 수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교회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복음이 점차 확산되어 사마리아를 거쳐서 안디옥에까지 확산되어 땅 끝까지 복음화 되는 일이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사단 마귀가 그것을 보고 좋아하거나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을 통해 기독교를 핍박하게 하였고 그 때문에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하고 기독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으나 오히려 기독교는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다급해진 사단 마귀는 아주 강력한 무기를 동원하였는데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의 왕 헤롯을 동원하여 교회를 박해한 일입니다. 성경에서는 애굽 왕은 바로, 로마 황제는 가이사, 유대 왕은 헤롯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여기서 헤롯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의 손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은 그의 할아버지 못지않게 더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 몇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 본보기로 사도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세례 요한처럼 참수를 하였습니다. 간교한 헤롯왕이 기습적으로 취한 행동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였고 아무런 저항이나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성경은 이례적으로 야고보 사도의 순교를 아무런 설명을 가하지 않고 단 한마디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성경 한 장 전체에게 상세하게 기록한 순교 장면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흔히 오해하기 쉬운 것처럼 차별이 아니라 스데반 집사의 죽음은 합법을 가장한 법 절차를 밟는 동안 스데반 집사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복음을 증거 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아무런 법 절차를 밟지 않고 기습적으로 감행한 일이기 때문에 묵묵히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야고보 사도를 죽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다음 목표인 베드로 사도를 죽여 예루살렘 교회에 큰 타격을 입히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행 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행 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간교한 헤롯왕은 그의 정치적 발판인 유대인들이 야고보 사도의 죽음을 너무나 기뻐하는 것을 보고 힘을 얻어 베드로 사도를 죽이는 일은 예수님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 무교절에 이벤트처럼 공개적으로 하려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야고보 사도의 순교 기사와 달리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 차별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말미암아 평신도들이 뿔뿔이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가 야고보 사도에 이어 베드로 사도마저 잃게 된다면 마치 폭격 맞은 교회가 연이어 지진을 만나는 것과 같은 큰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위기에 직면한 예루살렘 교회는 죽음을 앞둔 베드로 사도를 위해 무슨 대책을 세웠습니까? 그 답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단순하고 분명한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여기서 간절히 라는 말과 빌더라는 말은 한두 번 모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함께 모여서 그가 풀려날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 미완료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대책이라고 할 수 없는 너무나 무기력한 방법인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2. 풀려난 베드로 사도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믿고 좋은 일만 항상 있다면 구태여 전도하지 않아도 불신자들이 스스로 자기 발로 교회를 찾아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다니면서 구태여 고난을 자초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지 않고 교회를 다니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으면 만사형통하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예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최대 재벌들의 가정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사회의 지탄을 받고 해외로 도피를 하고 뉴스 초점이 되고 자살을 하고 중병에 걸리고 감옥을 드나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원치 않는 고난과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신자와 교회가 불신자나 세상 단체보다 더 가혹하게 당할 수도 있음을 예루살렘 교회가 야고보 사도를 잃은 것처럼 일방적으로 당할 수도 있음을 본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을 믿다가 야고보 사도처럼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처럼 억울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결코 개죽음이나 헛수고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고 천국의 소망을 갖도록 하심을 오늘 성경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해마다 수능고사 당일이면 학부모들이 교회에 모여 자녀들이 시험 보는 시간 시간마다 실수하지 않고 잘 치룰 수 있기를 시험이 다 끝나는 시간까지 기도하는 것처럼 감옥에 갇힌 베드로가 무사히 풀려나도록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인간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베드로가 수감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헤롯왕은 군인을 동원하여 겹겹이 둘러쌓았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으로 베드로가 풀려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행 12:6)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애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이미 야고보 사도가 힘없이 순교를 당할 정도로 헤롯 정권이 강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같으면 낙심이 되어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할 수 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감옥에 갇혀 내일이면 원수들 앞에 합법을 가장한 재판을 받으며 온갖 모욕을 다 당하고 예수님처럼 매를 맞고 야고보 사도처럼 참수를 당할 위기에 놓인 베드로는 감옥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행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아주 깊이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과연 옆구리를 쳐서 깰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은 베드로의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러한 상황에서 베드로처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그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릴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히려 감옥 밖에 있는 예루살렘 교우들은 잠을 자지 않고 마가 요한의 집에 함께 모여 깨어서 졸린 눈을 비비며 밤을 지새우며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의 기도가 이미 베드로를 죽이기로 결심한 헤롯의 마음을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보다 하나님이 더 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밤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 주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께서 것처럼 그야 말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1) 베드로가 수감되어 있는 감옥으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2) 날이 밝으면 죽을 것도 잊고 태평하게 깊은 잠을 자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발로 차서 깨웠습니다. 3) 두 손에 쇠사슬을 벗기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고 따라나서게 하였습니다. 4) 지나갈 때마다 감옥 문들이 자동문처럼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5) 마침내 감옥을 나와 길거리로 나왔을 때 천사는 간곳이 없이 사라졌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 자신도 사실처럼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환상을 보는 듯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행 12: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이 때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주님의 몸된 교회에 고난이나 위기를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1) 교회의 단결을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위기를 만나게 되면 흩어지는 집단이 아니라 뭉치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고난 중에 있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 고난 중에 교회와 성도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3) 하나님은 성경책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심으로 하나님은 여전히 현존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단순한 일과성 역사가 아니라 오늘도 중단되지 않고 있는 사단의 기독교 탄압에 대해 그의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 보호하심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3.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 하루 밤만 지나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 사도가 만인들 앞에서 예수님처럼 처형이 될 위기의 순간을 기적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단이 헤롯왕을 사주하여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둘 때는 마치 사단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보다 더 위대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구나 베드로 사도를 쇠사슬로 묶어 감옥에 가두고 군인 두 사람 틈에 재우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무장한 간수들이 옥문을 겹겹이 지켰는데 아무리 베드로가 믿음이 좋고 교회가 철야기도를 한다고 거기서 빠져 나올 길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단이 막을 수 없고 헤롯이 죽일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깊으신 뜻 가운데서 인간이 아무리 원할지라도 당신이 작정하신 시간표에 따라 때가 되면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미련하고 조급한 인간의 생각으로는 때로 하나님이 밀리시는 것처럼 보이고 침묵하고 일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렘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눅 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베드로가 그와 같이 기적적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베드로의 믿음이 크기 때문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합심하여 철야 기도하였기 때문이라고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노라면 베드로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도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 베드로 사도의 불신 야고보 사도의 죽음을 보고서도 베드로는 옥중에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다는 말이 성경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해야 할 시간에 오히려 천사가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야만 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질 정도로 태평한 사람이었습니다. (행 12: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그 같은 모습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한 밤중에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의 태도가 믿음의 결과인지 자포자기 때문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과정은 마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 나올 때처럼 매우 피동적인 자세로 천사가 깨우고 옷을 챙기고 앞장을 서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나하나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답답함은 그것으로 끝이지 않습니다. 감옥을 빠져 거리로 나아왔을 때 비로소 베드로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그것이 믿어지지 않아 환상인 줄 알았다고 하는 것은 베드로가 그와 같은 기적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행 12: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행 12: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2) 예루살렘 성도들의 불신 베드로의 기적이 베드로의 믿음의 결과가 아닐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기도의 결과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와서 자기 살길을 찾아 도망치지 않고 평소에 예루살렘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단골 장소인 마가 요한의 다락방을 찾아갔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의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로데라는 소녀는 그 주인공이 베드로라는 사실을 믿고 기뻐하며 달려가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을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행 12: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아멘! 할렐루야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물리치시겠는가? 지체하시겠는가? 즉각 응답해 주셨구나! 소리치며 기뻐하며 춤을 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아닙니다. 밤새 베드로의 출옥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이면서 막상 로데가 베드로가 왔다는 말을 전했을 때 그들은 모두 황당하다는 듯이 믿지 않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행 12: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여기서 미쳤다는 말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으로 헛소리를 한다는 뜻입니다. 로데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힘써 말하였지만 그들은 한 술 더 떠서 그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를 지키는 수호천사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계속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을 때 문을 열고 베드로를 본 사람들이 기뻐한 것이 아니라 깜짝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행 12: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여기서 놀란다는 말(엑시스테미)은 제 정신을 잃는다는 말로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밤을 지새우며 베드로의 출옥을 위해 기도하는 예루살렘 성도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들이 밤을 지새우며 열심히 한 기도는 믿음의 기도였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베드로를 출옥시키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의 기도대로 베드로를 출옥시키신 것은 그들의 기도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힘인 것입니다. 3) 헤롯왕의 죽음 사람이 죽는 이유는 자연사 사고사 징계사가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죽인 헤롯왕이 일시적으로 강자처럼 보였고 베드로마저 죽임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폐쇄되고 기독교는 박살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를 죽이려고 했던 막강한 권세를 가진 헤롯왕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헤롯왕이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오만방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자 하나님은 더 이상 참지 않으시고 베드로에게 보냈던 주의 사자를 헤롯왕에게 보내어 치게 하시니 그렇게 서슬이 시퍼렇던 헤롯이 잔칫상에서 아이고 배야 하며 쓰러진 후에 충이 먹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행 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이는 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왕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서 참으로 누가 위대한 왕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와 그의 백성된 그리스도인을 못살게 구는 사람의 마지막이 어떠한가를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헤롯에 대한 징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죽은 후에 지옥에 던져져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 더욱 비참한 일입니다. 사단이 그렇게 말아 먹으려고 하고 유대인들과 헤롯왕이 그렇게 없애버리려고 했던 예루살렘 교회와 기독교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행 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여기서 ‘흥왕하다’는 말은 계속해서 자라고 커지고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 있는 말로 헤롯의 비참한 최후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4) 베드로의 산 순교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생각으로는 야고보 사도만 억울한 순교를 하고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정반대입니다. 야고보의 순교는 결코 패배나 슬픈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최고의 영광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로서 최초로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위기를 피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나 그가 로마에서 마지막 순교를 당할 때까지 매일 매일의 삶은 핍박을 받고 죽을 고비를 견뎌야 하는 끝없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확산되는 일에 죽도록 충성을 한 증인의 삶을 살다가 마지막 로마에서 야고보보다 더 비참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믿음의 사람에게 순교는 단지 시간의 차이 일뿐입니다. 베드로도 야고보 못지않게 매일 매일 죽음 못지않은 고난을 더 많이 겪었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가 간 길이 바로 주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에 주님과 더불어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단번에 순교를 당하여 하늘나라로 갔다면, 베드로는 매일 매일 순교의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하늘나라로 가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과 더불어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는 가장 큰 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육신을 입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부귀권세와 장수도 복이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한 순간의 죽음으로 모두 다 끝나버리는 한시적인 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왜 야고보 사도는 순교를 당하도록 버려두시고, 베드로 사도는 기적적으로 구출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고보는 죽은 순교자요 베드로는 산 순교자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살아있는 동안 베드로처럼 산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렇다면 산 순교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처럼 복음을 위해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주님이 내게 허락하신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고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만을 누리다가 죽는다면 하늘나라에 가서 무슨 상급이 있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비록 야고보 사도처럼 단번에 순교할 수 없을지라도 베드로처럼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수고롭지만 손해 같지만 시간과 물질과 노력과 마음을 쏟는 일입니다. 평소 예수님 때문에 수고하고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순교의 죽음을 당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축복인 것입니다.
모리아산 제단의 제물/ 창22:1-12/ 순교자기념주일설교/ 2008-06-28
모리아산 제단의 제물 창22:1-12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모든 죄인된 인간의 죄속제물로 오셨다고 일컫습니다. 왜 제물인가? 로마서 3:25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서 주신 말씀 요한1서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물은 전적으로 자기 희생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를 위해서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일종의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제물로 생명을 내어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순교자들은 누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았는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지만 그를 통하여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다면 바로 그 구원받을 사람을 위해서 순교한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들도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세워진 교회들이요, 교회의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대구칠곡교회도 누군가의 순교의 신앙, 순교자적 믿음의 헌신이 필요하며 그런 헌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믿음 이야기입니다.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믿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성경은 21장과 22장 사이에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번제용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으로 오를 만큼 충분히 성장한 때를 말합니다. 연대기에 보면 이삭이 BC 1,892년에 태어났고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칠 때는 BC 1,872년경입니다. 결국 21장과 22장 사이에는 20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삭이 이제 20세 청년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지금 120살이 되었습니다. 20년 동안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습니까? 브엘세바에 우물을 파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 그 외에 20년 동안 아브라함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일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라는 히브리어가 ‘야훼로힘(והאלהים)’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 하나님”이십니까? 2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을 말하기에 정관사(ה)가 있습니다. 변함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시험을 생각해야 합니다. 시험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단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일종의 유혹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temptation입니다. 유혹인 시험은 우리 안에 있는 정욕에서 오는 것이고, 마귀가 사용하는 것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험은 하나님에 의한 시험으로 성도의 신앙을 증험해 보는 test입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논리적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논리적으로 의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믿음의 시험은 범죄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확증케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유혹과 시험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를 부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직역을 하면 ‘그리하여 그가 아브라함을 불렀다’입니다. 여기서 ‘부르다’는 히브리어는 ‘아마르(אםר)’입니다. 이것은 ‘대화하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명령이 아니라 대화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친밀한 대화입니다.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험이 올 때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120세 되는 고령입니다. 자식을 의지하고 자식에게 집착하는 시기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아들을 택할 것인가? 계속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그야 말로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순종할 것인가? 순종하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꺼이 순종할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모리아 산 제단에 서 있는 아브라함을 바라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키에르케그오르는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으로써 ‘참된 기독교인은 신 앞에 나서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그의 유명한 “Enten - Eller”이것이냐 저것이야? 이라는 철학서적을 내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갈등에 서 있습니다. 아들 이삭이냐, 아니면 말씀에 대한 순종이야? 그런데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짝이 일어났다”고 성경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밤잠을 설치하면서 심한 갈등을 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것이 아니라 저것을 택했습니다. 순종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 우리가 순종의 사람이 됩니다. 절대 믿음은 먼저 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여기서 “독자 이삭을 데리고”고를 직역하면 “독자 이삭을 너 자신이 데리고”입니다. 번제로 들리라고 하는 제물이 소나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강조한 것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함부로 드릴 수 있는 제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강조합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라면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혼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힘겨운 영적싸움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 사라에게도 사환에게도 일체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고독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외롭게 기도해야 하고 때로는 혼자 울어야 하고 혼자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신앙은 고독한 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고독한 길입니다. 혼자 가야하고, 혼자 결정해야 하고, 혼자 고민해야 하고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순간순간 결단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조언을 받고 카운실을 받는다 할지라도 최종 결단은 본인이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모리아를 모리야로 발음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선별해주다”로 해석됩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높은 땅”이라고 했고, 불가타역은 “비전의 땅”으로 해석 했습니다. 불가타역에서 ‘모리아산’을 ‘비전의 땅’으로 번역한 것은 영적해석입니다. 비젼이 무엇입니까?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을 바라보면서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여 그곳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모리아산은 브엘세바에서 약 75km입니다. 걸어서20시간 정도입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난해한 구절이지만 충분히 해석 되어지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와 “내가 아이와 함께”는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으로 교차대구법입니다. 교차대구법은 수사법으로써 서로 다른 행동을 하나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제물을 바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온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올바른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의논해서도 안되고 그들이 가까이 있어도 안됩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다 제거하거나 자신이 순종함을 시행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환경이나 사람은 누구든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데 방해꾼 때문에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결단하는데 믿음없는 자식이 관여하고, 아내가 결단하는데 남편이 방해하고, 남편이 결단하여 추진하고자 하는데 아내가 ‘결단코 안된다’고 버티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 두고 오직 이삭만 데리고 먼제단에 필요한 재료를 갖고 갔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은 여기서 “내 아들”이라 하지 않고 “아이”라고 했습니다. 왜 “아이”라고 했을까요? 아브라함이 초연해지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삭은 자기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저것이다’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5절에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린다고 말하지 않고 경배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는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알 수 있다면 아브라함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당황하여 무엇이라고 말했다 해도 그의 믿음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는 믿음뿐입니다. “돌아오리라”는 히브리어는 “그리고 우리가 돌아오리라”입니다. 일인칭 복수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입니까? 이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쳐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어거스틴은 “100세에 낳은 자식이라면 그 자식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6-9절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대화입니다. 지금 20세의 청년이 된 이삭이 늙은 아비 아브라함을 한마디 불평도 없이 대화를 했습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이삭이 번제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명문화하기 전에 이미 번제가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신앙교육을 시켰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잘 지켜야 그 자녀들이 부모를 신뢰하게 됩니다. 이삭이 아비 아브라함의 신앙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6-8절에서 이삭과 아브라함의 대화는 이삭의 꾸밈없는 호기심과 아브라함의 억누를 수 없는 애정이 조화를 이룹니다. 아브라함이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같이 갔습니다. 이때 아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부자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긴 침묵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비 아브라함의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통해 자기 자신이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간의 신뢰감이 눈에 보입니다. 9절에 “단을 쌓고”라고 했습니다. “단”이 히브리어나 영어에서는 정관사(the ה)가 붙어서 ‘the alter’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제단을 말합니다. 참된 에배는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지는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버릴 줄 알았고 모리아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알았습니다. 지정된 제단에서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버릴 것을 버릴 줄 알면 순종의 성도가 됩니다. 버릴 것을 버릴 줄 모르면 순종의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9절에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라고 했습니다. 번제물을 드릴려면 희생제물을 결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했습니까? 120세가 되는 노인이 20살 되는 원기 왕성한 이삭을 결박했다는 것은 아들 이삭의 동의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흠 없이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0절에 보면 “잡으려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완전한 단념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전혀 마음에 동요되거나 부자지간의 감정을 가지고 그 자식을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거나 아픔이 되거나 슬픔이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기도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기도보다 더 성숙된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철회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상 15: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의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이 우리에게는 일어날 수 없을까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시대 시대 마다, 복음이 전해지는 나라마다 이런 믿음의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순교자가 탄생했습니다. 여러분, 순교가 무엇입니까? 복음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죽는데 내어놓은 삶을 말합니다. 순교는 순종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이 없이는 순교를 할 수 없습니다. 로마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면서 순교당했습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이요 동역자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 씨가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을 믿고, 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고자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순교의 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것은 자신이 순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순교의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식이 아프기만 해도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 제단에 제물로 드리기 위해 결박을 하고 장작더미위에 올려놓고 칼로 그를 내리치려고 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우리들 같으면 ‘하나님, 제가 대신 드리겠습니다’라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 아마 떼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고 이른 아침에 곧 바로 출발을 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순종의 삶이요, 믿음입니다. 사실 오늘은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순교자의 본을 받아 순교자적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타협하는 신앙이 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이 될지도 모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첫 50은 본문이고 나머지 인생은 그 주석이다”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여러분, 본문이 잘되어야 주석이 잘됩니다. 아브라함은 120세까지 본문이 잘되었기에 157세까지 하나님이 주석을 쓰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 본문을 잘 쓰십시오. 그러면 나머지 여러분의 인생의 주석을 하나님이 쓰실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함께 돌아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수풀속에 숫 양을 한 마리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이삭대신 말입니다. 그래서 생긴 단어가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예비해 주십니다.
모리아산 제단의 제물/ 창22:1-12/ 순교자기념주일설교/ 2008-10-01
모리아산 제단의 제물 창22:1-12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모든 죄인된 인간의 죄속제물로 오셨다고 일컫습니다. 왜 제물인가? 로마서 3:25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서 주신 말씀 요한1서2:2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물은 전적으로 자기 희생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를 위해서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일종의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제물로 생명을 내어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순교자들은 누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았는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지만 그를 통하여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다면 바로 그 구원받을 사람을 위해서 순교한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들도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서 세워진 교회들이요, 교회의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대구칠곡교회도 누군가의 순교의 신앙, 순교자적 믿음의 헌신이 필요하며 그런 헌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믿음 이야기입니다.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믿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성경은 21장과 22장 사이에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번제용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으로 오를 만큼 충분히 성장한 때를 말합니다. 연대기에 보면 이삭이 BC 1,892년에 태어났고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칠 때는 BC 1,872년경입니다. 결국 21장과 22장 사이에는 20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삭이 이제 20세 청년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지금 120살이 되었습니다. 20년 동안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습니까? 브엘세바에 우물을 파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 그 외에 20년 동안 아브라함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일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라는 히브리어가 ‘야훼로힘(והאלהים)’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 하나님”이십니까? 2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을 말하기에 정관사(ה)가 있습니다. 변함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시험을 생각해야 합니다. 시험은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단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일종의 유혹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temptation입니다. 유혹인 시험은 우리 안에 있는 정욕에서 오는 것이고, 마귀가 사용하는 것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험은 하나님에 의한 시험으로 성도의 신앙을 증험해 보는 test입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논리적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논리적으로 의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믿음의 시험은 범죄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확증케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유혹과 시험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를 부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직역을 하면 ‘그리하여 그가 아브라함을 불렀다’입니다. 여기서 ‘부르다’는 히브리어는 ‘아마르(אםר)’입니다. 이것은 ‘대화하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명령이 아니라 대화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친밀한 대화입니다.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험이 올 때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해야 합니다.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120세 되는 고령입니다. 자식을 의지하고 자식에게 집착하는 시기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아들을 택할 것인가? 계속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그야 말로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순종할 것인가? 순종하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왔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꺼이 순종할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모리아 산 제단에 서 있는 아브라함을 바라보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키에르케그오르는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으로써 ‘참된 기독교인은 신 앞에 나서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그의 유명한 “Enten - Eller”이것이냐 저것이야? 이라는 철학서적을 내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갈등에 서 있습니다. 아들 이삭이냐, 아니면 말씀에 대한 순종이야? 그런데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짝이 일어났다”고 성경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밤잠을 설치하면서 심한 갈등을 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것이 아니라 저것을 택했습니다. 순종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 우리가 순종의 사람이 됩니다. 절대 믿음은 먼저 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여기서 “독자 이삭을 데리고”고를 직역하면 “독자 이삭을 너 자신이 데리고”입니다. 번제로 들리라고 하는 제물이 소나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강조한 것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함부로 드릴 수 있는 제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강조합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라면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혼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힘겨운 영적싸움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 사라에게도 사환에게도 일체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고독한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외롭게 기도해야 하고 때로는 혼자 울어야 하고 혼자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신앙은 고독한 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고독한 길입니다. 혼자 가야하고, 혼자 결정해야 하고, 혼자 고민해야 하고 ,혼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순간순간 결단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조언을 받고 카운실을 받는다 할지라도 최종 결단은 본인이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모리아를 모리야로 발음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선별해주다”로 해석됩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높은 땅”이라고 했고, 불가타역은 “비전의 땅”으로 해석 했습니다. 불가타역에서 ‘모리아산’을 ‘비전의 땅’으로 번역한 것은 영적해석입니다. 비젼이 무엇입니까?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을 바라보면서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여 그곳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모리아산은 브엘세바에서 약 75km입니다. 걸어서20시간 정도입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난해한 구절이지만 충분히 해석 되어지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와 “내가 아이와 함께”는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으로 교차대구법입니다. 교차대구법은 수사법으로써 서로 다른 행동을 하나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한 제물을 바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온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올바른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의논해서도 안되고 그들이 가까이 있어도 안됩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다 제거하거나 자신이 순종함을 시행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환경이나 사람은 누구든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데 방해꾼 때문에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결단하는데 믿음없는 자식이 관여하고, 아내가 결단하는데 남편이 방해하고, 남편이 결단하여 추진하고자 하는데 아내가 ‘결단코 안된다’고 버티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 두고 오직 이삭만 데리고 먼제단에 필요한 재료를 갖고 갔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은 여기서 “내 아들”이라 하지 않고 “아이”라고 했습니다. 왜 “아이”라고 했을까요? 아브라함이 초연해지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삭은 자기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저것이다’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5절에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린다고 말하지 않고 경배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는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알 수 있다면 아브라함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당황하여 무엇이라고 말했다 해도 그의 믿음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는 믿음뿐입니다. “돌아오리라”는 히브리어는 “그리고 우리가 돌아오리라”입니다. 일인칭 복수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입니까? 이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쳐도 하나님이 다시 살려 주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어거스틴은 “100세에 낳은 자식이라면 그 자식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6-9절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대화입니다. 지금 20세의 청년이 된 이삭이 늙은 아비 아브라함을 한마디 불평도 없이 대화를 했습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이삭이 번제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명문화하기 전에 이미 번제가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신앙교육을 시켰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잘 지켜야 그 자녀들이 부모를 신뢰하게 됩니다. 이삭이 아비 아브라함의 신앙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6-8절에서 이삭과 아브라함의 대화는 이삭의 꾸밈없는 호기심과 아브라함의 억누를 수 없는 애정이 조화를 이룹니다. 아브라함이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같이 갔습니다. 이때 아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부자간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긴 침묵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비 아브라함의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통해 자기 자신이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부자간의 신뢰감이 눈에 보입니다. 9절에 “단을 쌓고”라고 했습니다. “단”이 히브리어나 영어에서는 정관사(the ה)가 붙어서 ‘the alter’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제단을 말합니다. 참된 에배는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지는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버릴 줄 알았고 모리아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알았습니다. 지정된 제단에서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버릴 것을 버릴 줄 알면 순종의 성도가 됩니다. 버릴 것을 버릴 줄 모르면 순종의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9절에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라고 했습니다. 번제물을 드릴려면 희생제물을 결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했습니까? 120세가 되는 노인이 20살 되는 원기 왕성한 이삭을 결박했다는 것은 아들 이삭의 동의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흠 없이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0절에 보면 “잡으려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완전한 단념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전혀 마음에 동요되거나 부자지간의 감정을 가지고 그 자식을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거나 아픔이 되거나 슬픔이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기도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기도보다 더 성숙된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철회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상 15: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의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이 우리에게는 일어날 수 없을까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시대 시대 마다, 복음이 전해지는 나라마다 이런 믿음의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순교자가 탄생했습니다. 여러분, 순교가 무엇입니까? 복음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죽는데 내어놓은 삶을 말합니다. 순교는 순종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이 없이는 순교를 할 수 없습니다. 로마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면서 순교당했습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이요 동역자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 씨가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을 믿고, 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고자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순교의 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고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것은 자신이 순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순교의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식이 아프기만 해도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 제단에 제물로 드리기 위해 결박을 하고 장작더미위에 올려놓고 칼로 그를 내리치려고 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우리들 같으면 ‘하나님, 제가 대신 드리겠습니다’라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하도록 하기 위해 아마 떼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고 이른 아침에 곧 바로 출발을 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순종의 삶이요, 믿음입니다. 사실 오늘은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순교자의 본을 받아 순교자적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타협하는 신앙이 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이 될지도 모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첫 50은 본문이고 나머지 인생은 그 주석이다”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여러분, 본문이 잘되어야 주석이 잘됩니다. 아브라함은 120세까지 본문이 잘되었기에 157세까지 하나님이 주석을 쓰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 본문을 잘 쓰십시오. 그러면 나머지 여러분의 인생의 주석을 하나님이 쓰실 것입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함께 돌아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수풀속에 숫 양을 한 마리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이삭대신 말입니다. 그래서 생긴 단어가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예비해 주십니다.
빛 가운데 행하라/ 요일1:1-10/ 순교자기념주일/ 2011-06-26
빛 가운데 행하라 요일1:1-10 찬송가 383장(새찬송가 336잘 – 환난과 핍박 중에도) 철원 장흥감리교회 마당 한쪽에는 서기훈 목사(1883~1951)의 순교 기념비가 서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한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死(사)於(어)當(당)死(사)非(비)當(당)死(사) 生(생)而(이)求(구)生(생)不(불)是(시)生(생)’ 풀이하면 ‘죽을 때를 당해서 죽는 것은 참 죽음이 아니요, 살면서 살기를 구하는 것은 참 삶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철원은 해방 직후 38선 이북에 속하였고, 6·25 전쟁 기간 동안 수십 차례국군과 공산군 사이에 뺏고 뺏기는 격전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서 목사님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을 권유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살 만큼 살았는데 얼마를 더 살겠다고 피난을 가느냐? 그리고 여기 남은 교인들은 누가 돌보겠느냐?” 며 마지막까지 교회를 지키다가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서 목사님이 남기신 이 짧은 한시는 가볍게, 쉽게 믿음의 길을 걸으려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요한1서의 저자는 외부적으로는 기독교의 박해가 심하고 내적으로는 이단 사상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5) 고 외칩니다. 이어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6, 새번역) 이라고 강조합니다. 본문 속의 진리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어둠의 세력에 항거하는 것입니다.(요일 2:15~17) 그로 인해 세상의 미움을 받아 가시밭길을 걸어가거나 끝내 죽음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민족의 수난과 함께 한 감리교회는 일제의 침략과 수탈, 해방 이후 이념을 갈등이 빚은 동족상잔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배교하거나 타협하면 살 수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기꺼이 죽음을 택했습니다. 오늘은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순교자기념주일’을 지키면서 믿음의 선배들의 강고(굳세고 튼튼하다)한 종교적 신념, 숭고한 희생을 되새겨봅니다. 우리에게 감리교회의 자랑스러운 신앙 유산을 잘 기념하고 계승 발전시켜 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음에 감격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순교자의 영성으로 거듭나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도의 순교와 교회의 기도 /행12:1-5
사도의 순교와 교회의 기도 /행12:1-5 2008-01-18 18:34:37 read : 110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했으며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합니다. “손을 들어”라고 했는데 “포악한 손을 들어”라고 하는 것이 원문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헤롯왕은 정확히 말하자면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가 왜 그리스도인들을 해하려 했는지 본문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헤롯이 예루살렘 교회를 포악하게 내려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와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헤롯 아그립바는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대 헤롯의 손자입니다. 아그립바가 네 살 때이던 주전 7년 그의 아버지 아리스도불로는 그의 할아버지 대 헤롯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그가 왕권을 찬탈하려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였습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 처형당하자 아그립바는 어린 나이에 로마로 보내졌고 거기서 로마의 최고위 황족의 자녀들과 함께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 중 둘만 예로 든다면 가이오와 글라우디오입니다. 이 둘은 나중에 차례차례 로마의 황제들이 된 자들입니다. 이때 아그립바가 그들과 맺은 교제관계가 훗날 그로 하여금 그의 할아버지 대 헤롯처럼 유대 왕국을 다스리게 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주후 37년에 로마 황제 칼리굴라가 된 가이오는 아그립바에게 왕의 칭호를 주고 전에 아그립바의 삼촌 빌립이 다스리던 영토인 요단 동편과 갈릴리 북쪽의 열 도시 즉 데가볼리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칼리굴라는 또 39년에는 아그립바의 또 다른 삼촌인 헤롯 안디바를 유배 보내고는 그가 다스리던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아그립바에게 줌으로써 그의 영토를 확장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41년에 칼리굴라가 죽고 로마의 새 황제가 된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에게 35년간 로마총독의 통치 하에 있던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할아버지 대 헤롯 때의 영토와 맞먹는 영토에서 모든 유대인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그립바는 자신의 신변에 대해 안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칼리굴라 황제와의 교분 덕택이었는데 로마인들이 칼리굴라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그립바는 언제까지나 로마의 호의를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그립바는 그의 영토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유대인 신하들로부터의 충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그립바는 유대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특히 영향력이 강한 바리새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시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헤롯이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 몇 사람을 잡아 죽이려 했고 첫 번째로 사도 야고보를 죽인 것도 그런 시도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이 전하는 바대로 유대인들은 야고보의 죽음을 기뻐했으며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본 아그립바는 또 베드로도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했습니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게 했다는 것은 감방 안에서 두 병사가 베드로의 양옆에서 쇠사슬로 베드로의 양손을 각각 자기들의 손에 같이 묶고 감방 문밖에는 두 병사가 지키는데 이렇게 네 명씩 한 조로 편성된 감시조가 여섯 시간씩 4교대로 지켰다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 바로 뒤에 오는 6절에서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라고 한 것은 바로 그 감시방법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최고로 엄중한 밀착감시였습니다. 아마도 아그립바는 베드로가 전에도 옥에 갇힌 적이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옥문을 열고 나온 사실(행5:18-19)을 알고 있었기에 또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이런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베드로를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한 것 같이 베드로를 유대인들 앞에 끌어내다 공개재판을 하고 처형하려 했음을 의미합니다. 열두 사도들 중에서도 지도자이며 대변인인 베드로를 유대인들 손에 내주고 처형함으로써 계속해서 그들의 환심과 지지를 유지하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무슨 비행을 저질렀습니까? 아무런 비행도 잘못도 없습니다. 무슨 소요를 일으킨 일도 없었습니다. 사도들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라곤 많은 이적기사뿐이었습니다(행2:43, 5:12). 눈속임으로 백성을 현혹시키는 마술을 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잡아 일으켜 걷고 뛰게 해주었습니다(행3:1-10). 그래서 사람들은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환자들에게 덮이기를 바랄 정도였습니다(행5:15). 또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혀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행5:16). 예루살렘 교회는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있었습니다(행2:47, 5:13). 그런데 어려움에 처하고 고통 받는 민간에게 치유와 선행을 힘쓰던 예루살렘 교회가 세속 권력자와 유대교 고위지도층의 정치적 이해타산과 야합의 결과로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칼로 살해를 당하고 베드로도 붙잡혀 엄중한 감시 아래 임박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순절 성령강림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예루살렘 교회가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야고보는 희생을 당하고 말았지만 아직 옥에 갇힌 채 살아있는 사도 베드로는 무사히 풀려날 수 있기를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본문 5절). 그 기도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 죽이려고 하던 날 전날 밤에 베드로는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고 있었고 파수꾼들은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행12:6). 그런데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베드로의 손에서 쇠사슬을 벗겨주고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우며 일어나게 했습니다(행12:7). 그 천사는 베드로로 하여금 띠를 띠고 신을 신고 겉옷을 입게 하고는 따라오라 했습니다(행12:8). 베드로는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 줄로 여기며 천사를 따라갔습니다(행12:9). 여러 겹으로 파수꾼들이 있었지만 천사가 베드로를 데리고 지나갈 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고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자 문이 저절로 열렸으며 시내로 나와 거리 하나를 지나자 천사는 떠나고 베드로는 동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행12:10). 그리고 헤롯에 의한 야고보의 순교를 알리며 시작된 사도행전 12장은 그 끝부분에서 바로 그 헤롯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비교적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옛날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처했던 위기상황과 비슷한 한 가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반정부 무장세력인 탈레반이 한국교회의 자원봉사단원들을 납치하고 열하루 째 억류하고 있으며 지난 수요일 저녁에는 그 “포악한 손을 들어” 인솔자였던 배형규 목사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억류하고 있는 22명의 생명을 위협하며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 나라의 민간에 너무나 선하고 필요한 봉사의 활동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한 일은 전쟁으로 팔다리를 잃은 어린아이들에게 의수와 의족을 달아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의사와 간호사입니다. 그들의 의술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비참한 처지에서 절망에 빠져있던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위험한 지역인지 모르고 간 것이 아닙니다. 위험하다고 해서 아무도 안 간다면 그 불쌍한 아이들은 어찌 되겠느냐며 애끓는 마음으로 나선 것입니다. 그들을 인솔했다가 무참히 살해당한 배형규 목사는 정말로 보기 드문 귀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가르친 수천 명의 학생들 가운데 가장 신뢰하고 아끼며 크게 기대를 걸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확고한 신앙과 반듯하고 깊이 있는 신학적 사고와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과 청년들을 위한 열정과 헌신으로 다져진 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4년 내내 전액장학생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장신대에서는 제가 졸업논문을 지도했기에 잘 알지만 신학공부 또한 잘 할 뿐 아니라 바르게 한 목사입니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봉사단원들을 이끌고 간 것은 결코 영웅심에서가 아닙니다. 평소에 대단히 신중하고 청년들에 대해 세심한 염려를 기울이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20여년 오로지 청년들을 위한 사역에 전념해왔습니다. 그는 어렵고 힘들어 보통 남들이 가려하지 않는 곳들을 찾아다니던 그의 소명감 때문에 이번에도 아프가니스탄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돌아오면 또 아프리카 우간다로 봉사활동을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은 희귀성 폐질환을 앓아 몇 년 전 1년간의 요양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도 식을 줄 모르는 그의 봉사의 사명감이 그를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그가 순교의 피를 흘려야 할 곳인 줄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감히 배형규 목사를 순교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렇게 귀한 인물을 그 젊은 나이에 그 험한 곳에서 참혹하게 죽게 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사람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이제 그곳 아프가니스탄에도 복음의 계절이 오기 위해서 순교의 피가 흘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배형규 목사를 택하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가장 강퍅한 무장세력 탈레반이 있는 아프가니스탄이기에 가장 정결하고 흠없는 희생의 제물이 필요했고 그래서 온유겸손하고 깨끗한 배형규 목사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골라 쓰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배형규 목사의 순교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아니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어딘가에서 반드시 배형규 목사가 흘린 순교의 피가 복음의 씨가 되어 아름답게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자원봉사자들이 보다 신중하게 움직이지 못한 면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함부로 비난하고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부으며 납치범들을 자극해서 그들의 생명을 구해내려는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온갖 언행을 서슴치 않는 무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악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국교회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를 잃고 베드로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가 한 일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최우선으로는 아직 억류 중에 있는 나머지 스물두 명의 젊은이들이 더 이상 한 사람도 상함이 없이 최대한 빨리 풀려나 돌아오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을 붙들고 있는 탈레반 병사들의 감시가 철통같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기적같이 베드로를 풀려나게 하셨듯이 그들을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 극심한 불안상태 속에서도 또렷한 의식과 끝까지 버티려는 의지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희생이 된 배형규 목사의 온 가족에게 그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고통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믿음과 소망과 위로와 용기를 하나님께서 충만히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가족들뿐 아니라 그를 아끼고 사랑하던 모든 이들이 그의 몫까지 더 잘 감당하려는 다짐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23명의 봉사의 손길과 그들이 흘린 땀방울들과 배형규 목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이 그 끝없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평화롭게 살 수 있으며 오랜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빨리 치유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기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야고보 이전의 예루살렘 교회의 첫 순교자 스데반이 순교할 때 어떤 기도를 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스데반은 사람들이 돌로 자기를 치기 시작하자 무릎을 꿇고 크게 외치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는 눈을 감았습니다(행7:59-60). 또 예수님 자신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스데반의 기도가 또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한 우리의 자원봉사자들을 납치하고 살해하여 피랍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우리 온 국민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주고 있는 자들이지만 그들을 미워하지 맙시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기도합시다. 그들이 포악한 손을 들어 얼마나 고귀한 사람을 죽였는지를 깨닫고 뉘우치며 참회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그들과 그 나라 백성이 복음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기도합시다. 아프가니스탄이 평화롭고 백성이 행복하게 사는 나라 되도록 기도합시다. 전쟁의 참화를 당하고 고통 속에 사는 모든 이들이 위로 받고 치유 받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래서 그 땅을 뒤덮고 있는 증오가 걷히고 사랑이 피어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것이 23명의 자원봉사단원들이 원했고 기도하며 실천하던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 전체가 그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한 하나님의 종의 순교가 교회 전체의 기도로 이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역사하시리라 믿습니다. 큰 슬픔을 당한 한국교회와 온 그리스도인들 위에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산 순교자/ 행1:6-11
산 순교자 행1:6-11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지어낸 픽션이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 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그때 천국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천사들 중 하나가 질문을 드렸습니다. \"예수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세상 사람들에게 다 알려 주고 오셨습니까?\" \"아니,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람 소수만 알고 있네.\" \"그러면 헛 수고하신 것 아닙니까?\" \"아냐, 내 제자들에게 맡기고 왔는걸.\" \"아니 예수님, 그 사람들은 형편없는 자들 아닙니까? 실패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나는 다른 계획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네.\" 여러분, 그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증거합니다. 천사의 우려처럼 제자들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통해 십자가 복음은 전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복음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교회는 왕성하게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사실 예수님 승천 당시 남아 있던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부족하다 못해 천한 사람들인데 ...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은 생선 비린내가 풍기고 불학무식한 갈릴리 어부들이었고, 마태는 매국노로 낙인 찍힌 세리였고, ... 대충 이런 인물들인데 이들이 도대체 무슨 재간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그 정확한 이유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이적을 목격했고,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물론 이런 것도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불충분했습니다. 요21:1 이하 보면, 부활을 목격한 후에도 그들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갈릴리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던 것입니다. 또 본문 6절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언제 이스라엘이 회복되느냐? 즉 정치적인 회복, 로마에서 독립해서 왕국를 건설하느냐? 이겁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격입니다. 3절 보면 주님이 부활해서 40일간 뭘 하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설명했는데 ... 이래서 주님이 승천 이전에 누누히 강조한 게 있습니다. 뭐죠? 4절~5절. 성령 강림을 기다리라!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신 후에야 비로소 변화된 것입니다. 모든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능력있는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변화된 모습이 2장 이후에 나타납니다. 본문 보니까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님은 그들의 변화될 미래를 예상하면서 8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상에서 마지막 남기신 유언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최상 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마28:18~20과 더불어 흔히 지상 명령(Great Commission)이라 부릅니다. 다같이 암송합시다! 바로 이 말씀을 붙들고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 \'98/05/31 주일낮예배(성령강림절) 2 이 세계 각처의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했고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110여년전 땅끝과 같았던 이 땅에 사는 우리까지 ...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단 그 당시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를 인생의 목적이요, 삶의 스타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고 승천하실 때 당시 제자들은 아직 어리둥절해서 예수님이 아득히 사라져 가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흰옷 입은 천사둘이 말합니다. 11절. 하늘만 쳐다 보지 말고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그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백성이 됩니다. 당장이라도 천국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분명히 천국이 이 세상보다 좋을진대 왜 주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 두십니까? 우리는 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 남아 있어야 됩니까? 바로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단순하게 헹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더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 이야깁니다. 이것을 꼭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야 정말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먹고 마시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면 무슨 의미있는 인생이 되겠습니까? 풀과 같이 시들고 사라지는 인생일 뿐입니다. 벧전1:24~25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 요일2:15~17 \" ...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영원히 후회없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행1:8 말씀을 꼭 붙드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장차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우리가 자랑할 게 무엇입니까? 오직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함께 살펴봅니다. [1] 예수님의 증인 성경에 나오는 \'증인\'이란 말은 본래 법률 용어입니다. \'듣고 본 내용을 증거, 보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이 배경이 된 로마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고 증거한다는 것은 곧 목숨을 바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증인이란 단어는 성경 원어 헬라어로 \'말튀스\'인데, 여기서 순교자라는 영어 단어(martyr)가 생겼습니다. 즉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요,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사실을 전파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진리이기에 ... 우리 자신에게 중요하고,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고, ... 이런 삶을 위해 초대 교회 당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에, 증거에 목숨을 \'98/05/31 주일낮예배(성령강림절) 3 바쳐 죽음으로써 순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예> 12제자(가룟 유다 대신 들어간 맛디아 포함) - 사도 요한 제외하고 모두 순 교. 한국에 찾아왔던 선교사들 - 토마스 선교사 등 ... 절두산 ... 기독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통해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계 도처에 이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슬렘권, 공산권, ... 1년에 15만 정도의 순교자가 나온다고 합니다. 엄청나죠? 그런데 우리는 평화의 시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처럼 순교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순교가 무섭게 느껴져서 그렇지 어차피 한번 죽는 법인데 감당할 수만 있다면 가장 영광스런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도 다른 방식의 순교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산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단번에 바쳤습니다. 즉 죽음으로써 \'짧고 단회적인 순교\'를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나 대신 그런 각오와 결단, 즉 순교자 정신을 가지고 일생을 산다면 그 역시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셈이 됩니다. 말하자면 \'길고 지속적인 순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이 순교를 했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순교를 하는 것입니다. 롬12:1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대상을 통해 주신 것일 뿐 같은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증인의 사람을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의 순교도 상황이 되면 가능합니다. 오늘의 삶 속에서 예수 증인이 되지 못하면 위험한 상황에서 순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 공산당이 밀고 내려오면 ...목사, 장로, 성도부터 잡아갑니다. 그때 나는 과연? 그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다만 주어진 인생의 여건 속에서 예수 증인의 삶을 살아 가기를 바랍니다. [2] 구체적인 산 순교자의 삶 ① 구체적인 방법 * 직접적인 증거 - 입술의 증거, 기타 여러 가지 통신 수단을 통해서(편지, 문서, 방송, 인터넷 등 각종 통신을 통해서 ...), 직접 선교사로 나가는 등 ... * 간접적인 증거 - 전도, 선교 지원을 통해, 인격과 삶의 본을 보임으로써 마5:13~16 소금과 빛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것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98/05/31 주일낮예배(성령강림절) 4 사랑은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 손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우리 나라처럼 이미 복음이 상당히 많이 증거된 곳일수록 아주 절실합니다. 우리의 믿는 것과 말하는 것, 살고 있는 것이 차이가 날 때 세상 사람들은 귀를 막고 등을 돌립니다. 결국 진리가 거부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세상이 우리의 말을 안 듣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정죄할 권리도 없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비난할 게 아닙니다. 세상은 늘 그런 겁니다. 다만 우리가 빛나지 못하는 우리가 문제일 뿐입니다. ② 어디서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 가까운데서(예루살렘) - 가족, 가까운 이웃, 동족, ... * 먼데서(땅끝까지) - 예루살렘 다하고 다음에 유대, ... 이런 식이 아닙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외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만일 차근 차근 다 하고 다음 지역으로 간다면 아직도 우리에게 복음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 이 시대는 세계화 시대(Globalization)입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 부를 정도입니다. 이것은 일견 무역이나 산업을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마치 로마 시대에 잘 발달된 군용 도로망이 복음을 위해 쓰였듯이 ... ③ 언제 - 주님 오시는 날까지(세상 끝날까지-우주적 종말), 나를 부르시는 그날까지(개인적 종말) [3]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 되리라 8절을 다시 보면, \"성령이 임하시면 ... 증인이 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증인의 삶, 순교자적인 삶은 사람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 사람들이 보기에 매력적인 것도 못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권능이 임합니다. 헬라어로 \'뒤나미스\'인데, 이 단어에서 다이너마이트, 다이내믹 등의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떤 능력이 나타나는가? ① 믿어집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천국이, 영생 부활이 믿어집니다. ② 담대해집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영생과 부활, 천국이 있으니까 ... ③ 예수님을 나타내게 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으로부터 오시는 영으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룰 수밖에 없는 것이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요15:26, 16:14)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자동으로 예수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절!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을 환영합시다! 그리고 예수 증인의 삶을 살아갑시다! 산 순교자가 됩시다! 이러 인생은 기쁩니다. 순교하면서도 기뻐할 정도로 큰 기쁨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영광스런 삶입니다. 부디 이런 산 순교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례요한의 순교/ 마14:1-12
세례 요한의 순교 마14:1-12 영화제에서 남자나 여자 연기상 발표를 보게 되면 그들이 어느 역을 맡았느냐로 연기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맡은 역에서 얼마나 그 배역에서 합당한 연기를 잘 수행했느냐 하는것으로 상을 받는것을 볼수있습니다. 이는 연기상을 받은 연기자가 반드시 그 영화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배역을 맡아서도 아니요, 반드시 그 영화에서 돈이 가장 많은 배역을 맡아서도 아니요, 반드시 그 영화에서 명예가 가장 높은 배역을 맡아서도 아닙니다. 때로는 왕자와 같은 부귀영화에 아름다운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는 만인이 부러워하는 배역을 맡아 실감있는 연기를 잘 함으로서 상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시한부 인생이나 빈민이나 고아같은 배역을 훌륭히 연기함으로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연기상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의 일생도 이와같다고 생각됩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무리하고 하나님앞에 우리 모두가 설때에 과연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우리모두가 부러워하는 영광의 멸류관을 주시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달란트 비유와 열 무나 비유를 통해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재능을 주시어 사람마다 각각 받은 각자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를 맡기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드렸는가 하는 것이 달란트 비유라면, 열 무나의 비유는 누구나 이 땅에서 사는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할 의무와 이를 태만히 하는자가 받아야 할 징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재능을 최대한 활용치 못한자가 받는 책망이라면 열 무나의 비유는 내가 능히 할수있는 하나님의 뜻에 태만히 한자가 받는 책망인 것입니다. 결국 결론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이 땅에서 받는 배역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몫이 됩니다. 우리의 평가는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이땅에서의 삶의 배역을 얼마나 충실히, 성실히, 책임있게 수행하였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1절 ”그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렇게 세례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세례요한에 관한 기사로는 마태복음 3장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등장하여 예수님께 세례를 주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임하는 것을 직접 보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1장에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묻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하시는 예수님의 요한에 대한 임물평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세례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계속됩니다. 이와같이 세례요한에 관한 기사들이 그의 출생과 초기사역이 3장에 잠간 나오다가 옥에 같인 기사가 11장에 나오고 이제 그의 마지막이 헤롯왕을 윤리적으로 비판함으로 인해 비참하게 죽는 죽음의 기사가 14장 본문에 나옵으로서 세례요한에 대한 기사가 분산되어 이야기 흐름상의 이해에 일목요연한 집중력을 흐리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모든 기사나 기록이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어저 있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 소문이 드디어 헤롯 안디바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헤롯이 예수 소문을 듣고 2절에 ”이는 세례요한이라 저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 권능이 그속에서 운행하는 도다” 하며 놀랍니다. 예수 소문을 들었다함은 그의 ”명성” 즉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적의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요, 예수의 명성을 듣자 곧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은 헤롯이 세례요한에 품었던 그의 근심을 솔직히 표현하는 말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세례요한의 죽음의 기사를 볼때에 세례요한은 그 명성에 비해 너무도 허무하게 죽지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직접 관련된 3사람을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헤롯의 처 ”헤로디아”입니다. 대 헤롯의 손녀요, 아그립바 1세의 누이로서 살로메의 어미가 됩니다. 처음에는 그의 시동생 빌립에게 출가하였다가 그를 버리고 시숙 헤롯 안디바의 처가된 사악한 여자요, 결국 세레요한의 책망을 듣고 노하여 딸 살로메를 이용하여 간교하게 세례요한의 목을 베게한 악한 여자입니다. 악이 더 큰 악을 낳게하는 전형적인 실례요 악을 행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딸까지 악으로 끌어들이는데 주저치 않고 더 더욱 큰 악을 저지른 여자입니다. 한가지 악을 숨기고 감추기 위해 사람들은 그보다 큰 악을 저지르며 이와같은 악순환은 결국 멸망의 자리로 사람을 몰고가는 것입니다. 둘째 ”살로메” 라는 소녀입니다. 악한 어미의 사주로 16,7세의 어린 나이에 선정적인 춤을 추며 아무리 어미의 사주를 받았기로 사람의 목을 달라는 양심에 화인맞은 악의 전형적인 자태를 보게됩니다. 악에 악을 뿌려 더 큰 악이 나오는 사탄의 역사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분봉왕 헤롯”입니다. ”헤롯”이란 애급의 ”바로”와 같이 하나의 왕조칭호입니다. 본래 팔레스틴 지역은 한사람의 왕인 이두매 출실 헤롯대왕에 의해 통치되다가 그가 죽자 3지역으로 분활되어 3아들에게 활당되었는데 사마리아와 유대지역은 아켈라오(BC4-AD6)가 갈릴리 동부 지역은은 빌립(BC4-AD33) 이 갈릴리와 베뢰아지역은 안디바(BC4_AD39) 가 다스렸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헤롯은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리던 안디바를 칭하며 그는 그의 행적을 통해 세례요한에 대해 살로메의 요청으로 요한을 죽이는것에 대해서 두가지 면에서 근심 하였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요한이 거룩한 사람인 것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요(막6:20) 다른 하나는 요한이 백성들에게 선지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음에 그를 죽임으로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일잔치에 술에 취해 딸 살로메에게 한 바보같은 맹세를 통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를 죽이는 우를 범하게된 불상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처럼 이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것이라는 탄식을 듣게 된 이름입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권력이나 힘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실때에 교만과 허욕으로 나타납니다. 재물이나 학식이나 높은 지위나 그 모든 것이 그위에 하나님이 없다면 이 모든 축복들이 몽땅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을 멸망시키는 저주의 곳으로 인도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 이적의 소문을 들은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이 자신에 의해 이미 처형된 세례요한의 환생으로 생각해 심히 두려워 했음을 볼때에 예수님의 왕적권능은 이미 널리 증거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수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비아 반열 제사장 사가랴가 그 아비요, 아론의 자손 엘리자벳을 어미로 하는 최고의 가문이요, 최고 엘리뜨 가문에서 탄생하게 됩니다. 그의 탄생 기록 역시 대단합니다. 아비 사가랴는 자식없으나 흠없는 삶을 살다가 제사장 전례를 쫏아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주의 사자를 만나 수태고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를 믿지 않다가 벙어리가 되어 성소에서 나오는 사가랴로 온 백성은 사가랴가 성소에서 이상을 본줄 알게 됩니다. 더욱 세례요한은 어미 배속에서 조차 마리아게 임신한 예수를 만나매 알아보고 복중에서 기뻐 뛰놀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미 엘리자벳이 해산하자 그 이름을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나 그 모친은 요한이라 할것이라고 하자 친족중에 요한이라는 이름이 없다하여 부친 사가랴에 물은즉 서판을 달라하고 이름을 천사가 가르쳐준대로 요한이라 적으니 곧 그의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됩니다. 이에 인근 근처에 사는 모든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말이 온 유대에 퍼지매 듣는 사람마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고 하니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라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탄생기사이며, 얼마나 놀라운 세례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기적이십니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기사와 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쓰실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각본도 주시고, 무대도 만들어 주시고, 배역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일막에만 나올는지, 사막오장에 다 나올런지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궁정대궐에서 귀한 왕자마마로 산해진미를 먹던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던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 아닌 하나님의 몫이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광야의 외치는 자로 등장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게케 하기위해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것이라” 장차 이 아이가 어이될꼬 하던 세례요한입니다.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를 외치매 구름같은 사람들이 나와 죄를 고백하니, 회개의 세례를 주던 세례요한입니다. 당신이 메시야가 아닙니까? 추앙받던 세례요한입니다. 이와같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것이라 소개합니다. 얼마나 멋진 소개이며 얼마나 대단한 소개입니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님에게는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 오시나이까? 사양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할때에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이 보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였노라 선포합니다. 더욱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담대히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세례요한을 평가하셨습니까? 첫째 ”내가 내 사자를 네앞에 보내노라 하신 것이 이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메시야에 앞서 엘리야가 오리라 하신 구약의 성취를 설명하셨습니다. 둘째 ”여자가 낳은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라” 더 이상의 칭찬이 어디있겠습니까? 셋째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그 사람이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위대성은 무엇입니까?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의 말씀입니다! 흥하여야 하고 쇠하여야 할 것을 아는 선지자 세례요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평가처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요! 여자가 난자중 가장 큰자요! 쇠하는 길이 어떤것인가를 알고 순교한 위대한 사역자입니다! 어떤 분들은 세례요한의 헤롯왕과 헤로디아의 불륜을 책망하고 옥에 같인 것을 기독교인의 사회정치에 참여하는 민중신학의 근거로 삼으나 예수님은 이일로 헤롯을 책망치 않으셨으며 더 이상 그런일에 언급을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이는 오직 세례요한이 쇠하여야 하는 순교의 하나의 방법으로 택한것 뿐인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사역 시작은 세례요한이 옥에 같쳤다는 소문을 들은 후이며 마지막 그에대한 평가는 그가 죽은 후입니다. 그리고 12절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마지막 요한의 제자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장면이며 이후로 요한의 제자들은 다시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 세례요한의 쇠함이 철저히 이루어 졌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옥에서 예수님의 하신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묻는 기사를 보고 세례요한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을믿고 증거했으나 나중에는 자신이 옥에 같이자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의심했다고 오해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나중 의심했으니 세례요한은 구원받지 못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 스스로가 세례요한을 마지막 구약의 선지자라 소개했으며 어떻게 여자가 난자중 세례요한보다 큰자가 일어남이 없다고 했겠습니까? 의심했다면 어떻게 의심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철저하게 쇠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의 목을 소반에 담아, 모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낼수가 있겠습니까? 광야에서 세례를 줄때에 세례요한에게는 수도 없이 많은 제자들과 세례요한을 따르는 수많은 구원을 갈망하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제자들과 군중들을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보내야 하는 책임이 있었으며 이 책임은 세례요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수시로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스스로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합니다. 옥에 같힌 자신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제자들을 예수께 보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예수께 물어보게 합니다.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이까?” 하나님 아들 예수께 묻고 또 묻게 하십니다. ******* 이 세례요한의 절규를 이해할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제 쇠하여야 할 일이란 순교하는 길뿐인 것을 세례요한은 압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헤롯이 그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일에 대해 그 일이 옳지않다고 많은 군중앞에서 외치매 바로 결박당하여 옥에 가두어 지고 목이 베어저 소반에 담아집니다. 철저하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이땅에 온 세례요한은 철저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임무를 완수하고 쇠하여야 하는 자신의 마지막 순교까지 철저하게 이루고 간 선지자입니다. 서현장로교회 성도여러분! 저나 여러분은 어떤 임무와 책임을 가지고 이땅을 살고있습니까? 바나바와 같이 섬기는 임무를 맡으셨습니까? 브리스가와 아굴라같이 동역의 임무를 맡았습니까? 디모데나 디도같은 사역의 임무를 맡았습니까? 아니면 가이오같이 재물로 온 교회와 교우들을 섬기는 일을 맡았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인 바울의 서신을 로마로 가저간 뵈뵈나 자주장사로 많은 재물을 벌어 하나님을 공경한 루디아같은 여자들의 충성됨을 거울삼아 우리는 기도하며 우리의 맡겨진 배역에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배역과 배경과 무대는 하나님이 주신다 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내 환경과 처지와 현실속에서 하나님이 내게주신 임무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기만 하면 됩니다.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지, 두 달란트를 주셨는지 그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다섯 달란트를 남겼는지, 두 달란트를 남겼는지는 오직 내 몫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일에 우리 모두 전심을 다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우리 모두 힘을 내고, 정성을 다하고, 열심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하기싫은 것들.... 양보하고, 용서하고, 참고 견디며, 사랑하며, 섬기는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배역이요, 우리가 전심을 다해 해야할 일이요 순교 하기까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일인것입니다. 쇠하여야 할줄 아는 세례요한의 철저한 순종을 거울삼아 우리 모두 맡은 우리배역에 열심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여 이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다가 하나님나라에서 영광의 멸류관을 받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신앙/ 히11:35-40/ 순교자기념주일설교/ 2008-06-28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신앙 히11:35-40 히브리서11장을 믿음장이라 일컫습니다. 믿음의 인물들이 17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라 일컬음을 받기까지 어떤 자세로 살았는가? 이들에게 가장 확고한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믿음을 무엇으로 확증할 수 있습니까? 핍박과 시련입니다. 진리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억압은 핍박이라고 하지만 신앙과 상관없이 찾아오는 시련들이 있습니다. 이런 시련도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들기고 하고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시련과 핍박을 받으면 믿음을 송두리째 내어 던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님이 아무런 능력을 행사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릴 때 조롱받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사가 대머리라고 아이들로부터 조롱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성도를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함부로 하지 못할 경우는 언떤 경우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참된 가치를 발견한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즉 부활의 소망을 가졌는데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자기가 믿고 있는 진리의 소망이 확고할 때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죽는데 내어준다는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35절에 보면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신앙을 가진 여자들의 경우 어떤 성도가 있었는가 하면, 죽어도 부활한다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을 받아도 구차하게 변명해서 그 고통을 벗어버리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리를 부인하거나 거부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에 고통이 따르고 지금 죽음의 위협에 처했더라도 부활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중에 인내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약이 오릅니다. 항복해야 할 사람이 ‘날 죽여달라’고 버티고 그 어떤 고난도 받고 견디어 낼 때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36-37절 말씀을 보면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로 전전긍긍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이 어려운 고통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큰 고난과 핍박을 당해도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핍박받은 사람들은 오히려 더 힘을 얻어 자신 있게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오늘 38절에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런 순교자들의 믿음으로 오늘의 교회가 계속 확산되고 있습니다. 최초로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형성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전하거나 믿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전혀 두려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계속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7장에 보면 스데반집사가 설교한 후에 결국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그것도 사울이란 유대교 신봉 청년으로부터 그렇게 당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8장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4-5절말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구호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이면 기도하여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흩어지면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유명한 교부인 폴리캅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아주 늙은 나이에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경기장에는 수많은 로마인들이 처형당하는 폴리캅을 위해 운집해 있었습니다. 사형 집행인은 폴리캅을 화형시키려고 큰 나무더미를 쌓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화형 집행을 위해 로마 군인들이 폴리캅의 온몸을 줄로 묶으려 할때 폴리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견딜 수 있으니 묶지 마시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폴리캅의 손만 묶어서 그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폴리캅의 주위에 원형의 막이 생겨나서 불이 그의 몸을 태우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놀란 로마 군인들은 그를 칼로 찔렀습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와 그의 주변에서 타오르는 불을 모두 꺼버렸습니다. 이때 폴리캅의 장엄한 순교를 목격한 많은 로마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폴리캅 같은 순교자를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할 신앙은 곧 순교자적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순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견지해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친구를 만났는데 전에 교회에 다니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장남으로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교회를 나가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너무 쉽게 무너진 모습입니다. 제사지내기 위해 거룩한 부활의 신앙을 포기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가졌던 믿음이란 도대체 어떤 믿음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궁금했습니다. 우리 대구칠곡교회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무섭게 여기십니까? 우리가 어차피 한 번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면 멋있게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멋있게 죽는 방법은 예수를 믿고, 예수위해 일하다가 예수님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순교의 죽음이 가장 멋진 죽음이 아닐까요? 한 인생이 자기 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일이라면 그 일을 하다가 죽을 때 아름다운 죽음이라 일컫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엄청난 고통당하다가 결국 죽음의 길로 갔다면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순교는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 가장 고귀한 말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누구나 순교를 말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 칭호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예수믿고 죽는 순교자가 제일 큰 축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순교는 믿는 자에게 있어서 개인의 축복 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큰 축복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 많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죽음으로서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죽음의 공포는 복음 전파의 불꽃을 줄어들게 하는데 한명의 순교자가 나오면 10명 100명의 믿음의 형제들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복음을 확산시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핍박받던 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져서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그중의 대표적인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여러분 안디옥교회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지 아시지요. 최초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들의 선교로 말미암아 1-2세기 교회가 왕성하게 성장하고 부흥했습니다. 사실 교회부흥의 지름길은 순교자의 피가 흘러내릴 때입니다. 안강에 가면 안강에서 기계면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 육통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그 마을에 육통교회가 있습니다. 육통교회에서 순교한 심능양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의 손녀 딸 중 심정희 권사님이 계시는데 지금은 은퇴했습니다만 서울 동신교회 강동수 목사님의 사모님입니다. 이 사모님이 증언한 할아버지 심능양 장로님의 순교이야기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1896년7월16일에 육통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심능양 장로님의 형제는 4형제인데 숙부 되는 심석규씨가 당시 손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맹의화 선교사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 여러분,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분이 이땅에 아들을 보내어 구원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질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심능양 장로님의 숙부가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죽은자로 살린다고 하는데 예수만 믿으면 석녀가 애를 낳을 수도 있습니까?” 그 말에 좌중엔 웃음이 터졌지만, 맹의와 선교사님은 진지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이지요. 옛날에 아브라함은 애기를 낳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100세가 되어서 낳았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믿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옥동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심능양 장로님의 숙부는 그때부터 교회에 출석했고 힘있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심능양 장로님의 나이는 11살 정도 되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숙부댁으로 입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양육 받던 중 1906년에 육통교회가 세워졌고 그때에 어린 양자로 온 심능양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결혼도 하고 자녀를 5남매를 낳는 등 신앙생활도 함께 열심히 하였고 나라가 어려울 때는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1933년 안강교회 장로님으로 장립을 받았고, 육통교회를 위하여 섬기시다가 1949년5월에 소천했습니다. 사실 심능양 장로님이 살아계실 때 일제시대에 교회가 출입하지 못하도록 못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에 해방되었습니다. 그때 심능양장로님은 못박힌 교회의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 강대상 앞에 엎드려서 소리 높여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 주여! 주는 끝내 당신의 집을 당신의 사람들에게 돌려주셨습니다. 이제는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심장로님은 믿음도 좋았지만 그 지방 유지로서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때 안강읍 국민회의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맏아들 심의도 장로는 안강읍에서 대동청년단 단장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심의도가 권사님의 아버님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장로님은 본의 아니게 정치를 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오직 전도에만 열심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 된지 3년이 되던 1948년5월에 안강에는 좌익세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우익청년들과 충돌이 잦았습니다. 심장로님의 가문은 좌익세력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많은 사람들이 좌익세력들에게 죽음을 당했는데 심장로님은 1949년5월26일에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그 날이 수요일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수요예배를 인도하며 비장한 어조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때 인용한 말씀 중에 사도행전20장24절 말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을 향하여 비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생명을 전도보다 귀하게 여기지 맙시다. 마귀들이 배도를 요구하며 생명까지 요구할 땐 기꺼이 내줍시다. 그리고 주님의 나라에 승리의 나팔을 불며 들어갑시다” 그러면서 그날 밤 장로님은 폐회찬송으로 현재 543장을 불렀습니다. “저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 내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 내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서 게하소서 /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쳐옵니다” 수요저녁예배를 다 마치고 성도들이 귀가했을 때, 공산 프락치들은 심장로님 댁으로 들이닥쳐 심장로님을 끌고 나와 교회로 갔습니다. 교인 명부를 탈취하려고 교인들의 활동상황을 캐물었지만 아무것도 캐낼 것이 없자 그들은 심장로님을 교회 밖으로 끌고 나가다가 교회 현관 앞에서 칼과 죽창으로 심장로님의 옆구리와 등을 사정없이 찔렀습니다. 장로님은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프락치들도 이미 떠나고 없었습니다. 요한복음12장24-25절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 육통교회는 아직도 건재하고 있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기독교는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멀리 넓게 번져나갑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순교가 있을 때 교회는 더욱 왕성하게 번져나갔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순교자가 발생할 때 교회는 가장 힘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교인들의 삶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믿는 진리를 위해 생명을 걸때,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는 신앙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복음이 왕성하며 교회가 선교에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은 피의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피의 복음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순교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제 국민일보에 보면 아펜셀러 기념교회가 세워졌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아펜셀러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함께 자신은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서 활동하였습니다. 1902년 6월11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 회의에 참석키 위해 아펜셀러가 승선했던 배가 군산 앞바다 어청도 부근에서 사고로 침몰했습니다. 승객23명과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상존자인 미국인 탄광 기술자 보울비는 “아펜셀러는 물에 잠기면서도 한국인 비서와 목표가 고향인 여학생을 구조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바다는 100년이 넘도록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교한지 105년째 되는 해인 금년 군산시 내초도에 내초도 온누리교회가 인근25개 교회와 연합해 한국의 첫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셀러순교기념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1일 내일 입당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순교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에 터키에서 들려온 순교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터키선교를 위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번역하여 출판 보급하던 독일인 선교사 틸만과 현지 그리스도인 두 형제는 지난 4월18일 오후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5명의 무장 괴한들은 기독교와 선교사들이 국가를 분열시키고 이슬람교도들을 개종시킨다는 이유로 이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틸만 선교사의 아내 수잔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전했습니다. “저들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한 것이 무엇인지 진실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평범한 삶을 살려고 이 나라에 왔습니다. 커키인들이 독일에 와서 회교인으로서 하는 것처럼 우리도 터키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살기 원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말라트야에 묻혀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족은 여기서 살고 있고, 아이들은 여기서 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보내기를 원치 않습니다....우리는 때때로 남편의 무덤에 다녀오곤 할 것입니다. 어린 딸들은 꽃을 놓아두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보기를 원할 것입니다” 또한 터키의 첫 순교자가 된 네자티와 우르는 7년 전과 2년 전에 각각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핍박과 회유를 통해 개종의 요청을 받고 있던 네자티는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그의 신앙을 드러내었습니다. 따라서 터어키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성장하고 부흥할 것입니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엄청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돌로 사람을 쳐죽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점점 왕성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도의 국민들은 예수를 믿고 싶어하다가고 핍박이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거기에도 순교자의 피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세상이 감당못할 신앙은 죽음을 각오한 신앙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이 순교를 하게 만듭니다. 순교할 때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가? 하지만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역경이 있었습니까? 36-38절 말씀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우리에게 이런 역경은 아닐지라도 우리 앞에 나타나는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 날은 문화적으로 어렵습니다. 어떤 생명에 위협을 느끼기 보다는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거나 믿음을 흐트려놓은 문화란 이름아래 우리의 신앙을 무너지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당신은 죽을 각오를 하면서 신앙을 지키고 있습니까? 호레이스 만은 “순교자로 죽는 것보다 순교자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제적으로 순교는 순간적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신앙으로 사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한 번 두 번이 아닌 지속적으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회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의롭게 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 때문에 당하는 환란이나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으며, 성경은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5-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순교자 기념주일입니다. 단순히 순교자를 기억할 것이 아니라 순교적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오히려 더 많은 순교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절대적인 복음을 상대화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만연하는 현실에서, 주5일제 근무에 따른 주일성수 문제 등에서 우리의 순교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확고한 부활신앙을 함양해서 ‘세상이 두려워하는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
순교 신앙/ 계14:13
순교 신앙 계14:13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는 1993년도부터 6월 둘째주일을 ’순교자기념주일’로 지정하여 지켜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 그 배후에는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뿌려져 거름 역할을 했음을 기억하고 그 위대한 순교신앙을 기념하고 발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은 세계기독교가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기적적인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유례없는 부흥과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 부흥과 발전에는 순교자의, 피가 흘러 넘쳤기 때문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순교의 피는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의 씨앗이 되어주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순교신앙과 순교영성의 터 위에 세워지고 부흥발전해 온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순교신앙, 순교영성이란 말들이 어색하고 낮설게 느껴지는 시대 가운데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덧 평안과 편리와 안락과 온갖 복지와 혜택으로 가득한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작은 불편이나 불이익도 참을 수가 없는 정신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의 위기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한국기독교를 기독교라고 하지 않고 ’개독교’라고 폄하하는 사람들까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터넷 포탈싸이트의 검색어 중에 이 용어가 검색금지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막는다고 막아지는게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버린 것이 이런 위기의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빠지고, 주님의 마음이 빠지고 아무리 성장이 되면 무엇 합니까? 그것은 결국 위기를 자초할 뿐인 것입니다. 덩치가 커질수록 더 위험한 것입니다. 덩치가 커질수록 근본으로 돌아가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순교신앙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다시 힘차게 외쳐져야 합니다. 다른 복음이 더 이상 주류복음으로 교회 안에서 활개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정조를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100년전 이 민족의 극한 고난의 순간에 임했던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순교 신앙만이 바알과 아세라의 혼합인 기복 신앙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순교신앙만이 세상 정치와 물질과 짝한 오늘의 한국교회의 병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개교회주의와 이기주의 신앙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고칠 수 있습니다. 순교자 손양원목사님께서는 복음 때문에 감방에서 끌려가서 감방속에서 복음 전한다는 이유로 독방에 갖혀서 그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빈 방을 홀로 지켜 고적을 느끼나 성삼위 함께 하니 내 식구가 되었구나 괴로움 중에 내 주를 체험하리라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매개가 되었으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된 까닭이로다. 죄악으로 얼룩진 육체의 껍질을 벗어야 하겠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연단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두번 돌아오지 못한 세상의 고난의 맛을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부귀영화 뒤끝은 다시 섭섭하나 고난의 뒤는 위로와 기쁨의 다음 차례가 되는 법입니다. 하물며 주 안에서 고난은 진리가 아니리요!”라고 썼습니다. 이런 순교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순교자’라는 말은 ’증인’(martus)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순교자’란 의미는 법정 증인석에 앉아서 어떤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이란 뜻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순교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역사적 예수의 사실에 대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순교자가 죽음으로써 증거하고자 한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소문이나 확신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교리도 의식도 전통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조금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증거한 것은 역사적 예수, 실재하신 예수를 증언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고백은 개인의 내적 신념에 그치지만 기독교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눅24:48)란 말의 ’증인’이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선교 행위를 뜻합니다. 순교자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 것에 대한 ”기록”(눅24:46-47)과 신앙의 참됨을 증거하기 위해 수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순교자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롬5:3; 8:17).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이는 몸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의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체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교신앙인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도록 하는 일에 순교신앙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가 병들면 자녀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죽은 순교자’와 ’살아있는 순교자’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습니다. 박해에 항거하다가 죽은 사람과 수난을 당하고 죽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습니다. 생명을 잃은 자와 생명을 잃지 않은 자를 동등하게 대합니다. ’순교’는 죽음을 절대조건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목숨을 잃어야 증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자답게 항거하면서 신앙을 지킨 사람도 ’순교자’로 간주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5에서 12장 1절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째로, 오늘날 순교신앙은 어떤 형태로 표현, 실천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안에서는 우상숭배를 강요는 권력도, 십자가의 도리나 신조를 수호하기 위한 순교를 요구하는 물리적인 세력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신실성을 유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어쩌면 더 강하고 무서운 우상숭배가 강요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악한 마귀사단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믿는 자의 신앙을 무너지게 하려고 힘쓰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상과 우상숭배의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우상숭배란 한 분 하나님을 거슬려 또 다른 예배의 대상을 모시고 그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우리 마음에 우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자신을 경배하는 일이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경배를 우리 스스로에게 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자랑은 우상이다”라고 말한바가 있습니다. 자기자랑, 학벌자랑, 영력자랑, 지식자랑, 돈자랑, 자식자랑은 현대판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의 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강력합니다. 로마제국이나 일제의 강압 보다 더 무서운 우상들이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상들은 사회나 역사에서 가면을 쓰거나 변장하고서 아주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자’라면 순교신앙으로 투쟁해야 할 원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갖가지 우상의 베일을 벗기고 그것을 대항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초대교회의 순교자들과 일제말기의 순교자들과 다름없이 이 같은 우상들에 항거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교신앙의 포현입니다. 오늘의 순교자 개념은 능동적입니다. 수동적인 개념에서 능동적인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고전적인 순교자는 수동적 저항의 특징을 지닌 반면에 현대 개념의 순교자는 능동적 참여의 특징을 지닙니다. 이전에 순교자는 누가 죽여주어서 순교자가 된 것이며, 누가 고난을 던져주어서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누가 죽여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가 날마다 사는 것이 순교신앙입니다.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후4:11)하셨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벼루 열 개가 구멍이 뚫어지고 붓 천 자루가 몽당 붓이 되도록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경전을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했기에 추사의 글과 그림이 귀한 것이 된 것입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1년에 두 번 약 100일 동안 ’동굴 속에서 홀로 치열하게 수도’하는 동안거, 하안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절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으로 완화되기는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 수행을 하는데,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수련해 가는 과정이 옆에서 보는 이를 숙연케 합니다. 어찌 기독교 신앙을 이런 것과 견줄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들이 얻는 것의 가치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저들보다 더 주님을 위하여 용맹정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순교 신앙을 갖자/ 계14:13/ 2008-12-10
순교 신앙을 갖자 계14:13 주후 32년 경 겨울에 로마 황제는 군인들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은 이교 신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칙령에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그 직분을 잃을 뿐 아니라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300년 동안 무적의 사단이었던 12사단의 대장은 자기들의 부하를 불러모아 놓고 그 칙령을 읽어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2사단 군사들이여, 여러분은 여러 전투에서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황제의 법에 순종함으로써 제국의 가이사에게 충성을 다 하는데 앞장섭시다. 내일은 우리 사단이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얼마 뒤 두 명의 군인이 장군을 찾아 와 12사단에는 40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그들은 이교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장군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시오, 만약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무기를 압수 당하고 그 직책에서 쫓아 낼 것이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리 알고 깊이 생각하고 좋은 쪽을 선택하라고 하시오,” 그 날 밤 진영에서 4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시편을 읽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제사 참여를 거부하자 처형하라는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팔과 목이 묶인 채 제사를 거부한 사람들은 얼어붙은 호수 근처로 끌려갔습니다. 해가 지자 그들은 벌거벗긴 채 호수 한가운데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이 세운 큰 전과(戰果)를 참작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호수 옆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고 제사를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을 위해 따뜻한 목욕탕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이들이 호수 가운데로 끌려가자 차가운 바람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불었습니다, 목욕탕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호숫가에서 장작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 보초병은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 가자 찬송 소리가 약해졌습니다. 그 때 보초병은 그리스도인들의 중얼거리는 기도 소리와 함께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 그런데 조금 후에 그 천사의 찬송 소리가 바뀌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39명, 순교자 39명, 그리고 39개의 면류관이로다 ” 그때 그 보초병은 따뜻한 목욕탕으로 걸어오는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즉시 그 보초병은 무기를 놓은 채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내 옷을 입으시오. 내가 당신을 대신하겠소!” 그리고는 그 보초병은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로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뛰어가면서 그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다음날 아침 장군은 죄수들을 끌어내라고 명하였습니다. 얼어죽은 시체들이 호수 한가운데 쌓여 있었고 그 가운데는 보초병의 시체도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안 것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주님의 품에 안긴 것이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거나 순교를 당한다고 해서 복음까지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은 오히려 마음이 더 뜨거워지고, 복음의 귀중함을 더 깊이 깨달아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은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권능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나에게 가장 크게 예금하는 것이고 천국에 상을 쌓는 일이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영혼을 천당으로 옮기기 때문에 이웃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길이 전도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어서 복음을 전파할 때도 인간이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생명을 거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7장까지 예루살렘 복음 전파가, 8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 복음전파, 13장부터는 사마리아로 복음이 퍼져나갑니다. 그런데 그 전환기가 되는 시기마다 순교자의 피가 있었습니다. 7장에 스데반 집사, 12장에 야고보 사도가 순교합니다. 주의 사도가 순교할 때 그도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지만 이 땅에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불꽃이 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생명을 걸고 열심히 나아갈 때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겸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었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능력을 가지고 생명을 걸고 피흘릴 때까지 나가서 복음 전파에 앞장서야 합니다. 거룩한 순교자의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1. 나에게 총을 겨눌지라도 1999년 4월20일 콜로라도 덴버의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이런 광기 어린 학살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군데에 모아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 가운데서도 확실한 신앙의 결단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캐시 버낼입니다. 그는 죽음의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리고 너희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 이 말을 들은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곁으로 가라” 하며 총을 쏘았고, 결국 캐시 버낼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미국의 십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캐시 버낼의 순교 앞에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한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얼마 후,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캐시 버낼과 같은 담대한 증인으로 서야 되겠다는 신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미국 전역의 각 학교에서는 ‘우리도 캐시 버낼의 길을 따르자’라는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고, 캐시 버낼의 순교적 결단을 기념하는 국기 게양대 앞 기도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4,25) 2. 불꽃도 나를 사르지 못하리라 16세기 초, 영국인들은 중세 카톨릭의 지배 아래 일종의 영적 노예 상태로 허덕였습니다. 그러다가 라틴어 성경이 영어로 처음 번역되면서 영적 부흥은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 중에 토마스 빌네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제들이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들이 새로 번역된 신약 성경을 그에게 소개해 준 다음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바울보다 더 큰 죄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빌네이는 지칠 줄 모르고 신약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한 지배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기존 교회를 격노시키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빌네이는 교회를 거스른 이단자라는 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화형대를 향해 걸어가는 그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그는 죽음을 맞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불꽃이 나를 삼킬 때 나는 그 열기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몸은 불에 타 없어지겠지만, 그 고통 뒤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이 따를 것입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 후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빌네이는 서서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많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3. 주님을 파는 아버지는 원치 않습니다 후르레스끄라는 성도는 죽도록 매를 맞고 붉게 달아오른 쇠갈고리와 칼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간수들은 굶은 쥐들을 감방에 들여놓아, 그는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눈을 잠시 붙이려고 하면 쥐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에 쥐들을 쫓아야만 했습니다. 간수들은 그를 2주 동안 밤낮으로 세워놓고 동역하는 성도들을 배반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14 살난 아들을 데려다 그의 앞에서 사정없이 채찍질했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아, 나는 이들에게 말해야 되겠다. 나는 더 이상 차마 볼 수가 없구나.” 그러자 그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주님을 파는 아버지를 원치 않습니다. 끝까지 견디십시오. 만약 이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예수님과 조국을 위하여 죽을 것입니다.” 악에 찬 간수들은 소년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였습니다. 감방벽은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소년은 주님을 찬양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4. 스데반의 순교를 본 받아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4∼60) ”유토피아(Utopia)”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교수형을 당할 때의 일입니다. 사형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스데반이 죽을 때에도 사도 바울은 이를 합당히 여기고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도 스데반은 끝까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용서를 구했다. 마침내 그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고 그도 순교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 같은 순교자끼리 친구가 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을 믿는다. 오늘 내가 당신들의 손에 죽지만 언젠가 당신들도 회개하여 주님 앞에서 친구로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을 믿고 기도한다.”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중국 청나라 말기에‘장센’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꾼에다가 호색한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중년이 되자 시력이 점점 나빠지더니 거의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간 장센은 극적으로 시력의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을 들은 장센은 이제 자신도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며 세례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J. 웹스터 선교사는 “돌아가서 이웃들에게 당신이 변화되었다고 말하시오. 얼마 후 우리가 방문할 그때까지 당신이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기꺼이 세례를 주겠소”라고 말했습니다. 다섯 달 후, 그 마을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수백 명의 새로운 신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장센은 욕을 먹고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의화단원들이 약 50명의 성도들을 붙잡아 처형하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들을 죽여 봐야 소용없어요. 장센이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자꾸 생겨나니까요.” 의화단원들은 장센을 데려오면 50명을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장센은 자신을 위해 대신 죽으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진 출두했습니다. 지방 관원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장센은 자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한다고 대답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영혼의 눈으로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보며 결국 장센은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마23: 34, 35, 마24:9, 히11:32-37) ”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눅21:17) 6. 폴리갑의 순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훌륭한 순교자입니다. ”무신론자를 죽여라, 폴리갑을 잡아라(당시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자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폭동을 진압한 시장은 폴리갑을 구출하기 위하여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86년간 나는 그리스도를 섬겼으나 한번도 그리스도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어찌 나를 구원한 그리스도를 욕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화형을 서고 받게 되었습니다. 폴리갑은 화형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꺼지는 불로 나를 태워 죽이려고 하지만 영원히 까지지 않는 지옥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 부족한 종을 순교자의 반열에 넣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나를 받아 주소서, 이 어려운 잔을 능히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당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순교자란 이처럼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화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 거짓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7. 순교자의 교훈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치고 좋은 관리직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굳게 사양하고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왜 그처럼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의화단 사건이 있었을 때에 중국의 내륙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우상을 섬기는 큰 신당이 있었는데 하루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신당으로 왔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에게 우상에게 절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위협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우상 앞을 지나가며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끌려온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절을 하기는커녕 고개도 숙이지 않고 우상 앞을 걸어 지나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군인 앞에서 목이 땅에 떨어져 구르며 순교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 절만 한 번 하면 사는데,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나는 어렸지만 그 사건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눅9:24) 7. 먼저 내가 죽어야(목사가 먼저 죽어야) 초대 교회사에 빈민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경건한 식스투스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교회의 수석 집사인 라우렌티우스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면서 말합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데려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식스투스 감독이 대답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 며칠 후, 로마 시장은 라우렌티우스에게 교회의 전 재산을 국가에 상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정리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일을 며칠 미루고는 교회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의존하여 살고 있는 수천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다 모집하였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에 올라오면서 보물을 요구하자 그는 예배당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백 명의 소경, 벙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들이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을 가리키며“교회의 보물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식스투스의 위대한 신앙을 본받은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로마 황제 앞에서 숯불로 달구어지는 수난 끝에 순교의 제물로 죽어갔습니다. “순교의 목자가 있는 곳에 순교의 양이 있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죽이는 목사가 있는 곳에 날마다 자기를 쳐서 죽이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먼저 죽지 않고는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수 없고,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죽지 않고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순교는 고귀한 죽음입니다. 순교자에 대한 성경의 보증과 약속 또한 아름답습니다. 이 순교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신앙은 생명을 거는 신앙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면 가장 큰상을 받습니다. 가장 성공한 자입니다. 가장 위대한 자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전도하다가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창피를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내가 주일날 교회에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것은 취직된 것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순교만 축복이 아니라 예수를 믿다가 당하는 모든 고난 환난 손해도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다가 도둑 당하고 교통사고 당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예수 믿다가 당하는 모든 시련과 고난도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잘된 것도 축복이지만 예수 믿고 어려움 당하고 예수 믿다가 순교하는 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 영광,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신앙, 이런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복음의 역사와 하나님의 큰 축복이 풍성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 오늘날에도 순교하지 않은 살아있는 순교자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순교신앙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 기도: 내 의의 하나님, 예수 믿고 축복 받는 것만 기뻐하지 말고 예수 믿고 환난 당하고 시련 당하며 순교하는 것이 더 큰 축복인 것을 알게 하여 주소서 순교자의 피를 기뻐 받으시고 그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응답해 주소서. 순교자의 후손된 저희도 그들의 신앙과 헌신을 본받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살아도 영광이고, 죽을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며 사는지 보여 줄 수 있도록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교 신앙을 갖자/ 계14:13/ 2008-12-10
순교신앙을 갖자 계14:13 주후 32년 경 겨울에 로마 황제는 군인들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은 이교 신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칙령에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그 직분을 잃을 뿐 아니라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300년 동안 무적의 사단이었던 12사단의 대장은 자기들의 부하를 불러모아 놓고 그 칙령을 읽어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2사단 군사들이여, 여러분은 여러 전투에서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황제의 법에 순종함으로써 제국의 가이사에게 충성을 다 하는데 앞장섭시다. 내일은 우리 사단이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얼마 뒤 두 명의 군인이 장군을 찾아 와 12사단에는 40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그들은 이교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장군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시오, 만약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무기를 압수 당하고 그 직책에서 쫓아 낼 것이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리 알고 깊이 생각하고 좋은 쪽을 선택하라고 하시오,\" 그 날 밤 진영에서 4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시편을 읽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제사 참여를 거부하자 처형하라는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팔과 목이 묶인 채 제사를 거부한 사람들은 얼어붙은 호수 근처로 끌려갔습니다. 해가 지자 그들은 벌거벗긴 채 호수 한가운데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이 세운 큰 전과(戰果)를 참작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호수 옆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고 제사를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을 위해 따뜻한 목욕탕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이들이 호수 가운데로 끌려가자 차가운 바람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불었습니다, 목욕탕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호숫가에서 장작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 보초병은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 가자 찬송 소리가 약해졌습니다. 그 때 보초병은 그리스도인들의 중얼거리는 기도 소리와 함께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 그런데 조금 후에 그 천사의 찬송 소리가 바뀌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39명, 순교자 39명, 그리고 39개의 면류관이로다 \" 그때 그 보초병은 따뜻한 목욕탕으로 걸어오는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즉시 그 보초병은 무기를 놓은 채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내 옷을 입으시오. 내가 당신을 대신하겠소!\" 그리고는 그 보초병은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로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뛰어가면서 그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다음날 아침 장군은 죄수들을 끌어내라고 명하였습니다. 얼어죽은 시체들이 호수 한가운데 쌓여 있었고 그 가운데는 보초병의 시체도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안 것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주님의 품에 안긴 것이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거나 순교를 당한다고 해서 복음까지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은 오히려 마음이 더 뜨거워지고, 복음의 귀중함을 더 깊이 깨달아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은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권능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나에게 가장 크게 예금하는 것이고 천국에 상을 쌓는 일이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영혼을 천당으로 옮기기 때문에 이웃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길이 전도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어서 복음을 전파할 때도 인간이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생명을 거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7장까지 예루살렘 복음 전파가, 8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 복음전파, 13장부터는 사마리아로 복음이 퍼져나갑니다. 그런데 그 전환기가 되는 시기마다 순교자의 피가 있었습니다. 7장에 스데반 집사, 12장에 야고보 사도가 순교합니다. 주의 사도가 순교할 때 그도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지만 이 땅에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불꽃이 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생명을 걸고 열심히 나아갈 때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겸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었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능력을 가지고 생명을 걸고 피흘릴 때까지 나가서 복음 전파에 앞장서야 합니다. 거룩한 순교자의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1. 나에게 총을 겨눌지라도 1999년 4월20일 콜로라도 덴버의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이런 광기 어린 학살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군데에 모아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 가운데서도 확실한 신앙의 결단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캐시 버낼입니다. 그는 죽음의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리고 너희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 이 말을 들은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곁으로 가라” 하며 총을 쏘았고, 결국 캐시 버낼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미국의 십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캐시 버낼의 순교 앞에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한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얼마 후,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캐시 버낼과 같은 담대한 증인으로 서야 되겠다는 신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미국 전역의 각 학교에서는 ‘우리도 캐시 버낼의 길을 따르자’라는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고, 캐시 버낼의 순교적 결단을 기념하는 국기 게양대 앞 기도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4,25) 2. 불꽃도 나를 사르지 못하리라 16세기 초, 영국인들은 중세 카톨릭의 지배 아래 일종의 영적 노예 상태로 허덕였습니다. 그러다가 라틴어 성경이 영어로 처음 번역되면서 영적 부흥은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 중에 토마스 빌네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제들이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들이 새로 번역된 신약 성경을 그에게 소개해 준 다음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바울보다 더 큰 죄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빌네이는 지칠 줄 모르고 신약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한 지배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기존 교회를 격노시키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빌네이는 교회를 거스른 이단자라는 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화형대를 향해 걸어가는 그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그는 죽음을 맞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불꽃이 나를 삼킬 때 나는 그 열기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몸은 불에 타 없어지겠지만, 그 고통 뒤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이 따를 것입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 후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빌네이는 서서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많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3. 주님을 파는 아버지는 원치 않습니다 후르레스끄라는 성도는 죽도록 매를 맞고 붉게 달아오른 쇠갈고리와 칼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간수들은 굶은 쥐들을 감방에 들여놓아, 그는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눈을 잠시 붙이려고 하면 쥐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에 쥐들을 쫓아야만 했습니다. 간수들은 그를 2주 동안 밤낮으로 세워놓고 동역하는 성도들을 배반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14 살난 아들을 데려다 그의 앞에서 사정없이 채찍질했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아, 나는 이들에게 말해야 되겠다. 나는 더 이상 차마 볼 수가 없구나.\" 그러자 그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주님을 파는 아버지를 원치 않습니다. 끝까지 견디십시오. 만약 이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예수님과 조국을 위하여 죽을 것입니다.\" 악에 찬 간수들은 소년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였습니다. 감방벽은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소년은 주님을 찬양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4. 스데반의 순교를 본 받아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4∼60) \"유토피아(Utopia)\"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교수형을 당할 때의 일입니다. 사형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스데반이 죽을 때에도 사도 바울은 이를 합당히 여기고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도 스데반은 끝까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용서를 구했다. 마침내 그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고 그도 순교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 같은 순교자끼리 친구가 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을 믿는다. 오늘 내가 당신들의 손에 죽지만 언젠가 당신들도 회개하여 주님 앞에서 친구로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을 믿고 기도한다.\"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중국 청나라 말기에‘장센’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꾼에다가 호색한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중년이 되자 시력이 점점 나빠지더니 거의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간 장센은 극적으로 시력의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을 들은 장센은 이제 자신도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며 세례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J. 웹스터 선교사는 “돌아가서 이웃들에게 당신이 변화되었다고 말하시오. 얼마 후 우리가 방문할 그때까지 당신이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기꺼이 세례를 주겠소”라고 말했습니다. 다섯 달 후, 그 마을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수백 명의 새로운 신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장센은 욕을 먹고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의화단원들이 약 50명의 성도들을 붙잡아 처형하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들을 죽여 봐야 소용없어요. 장센이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자꾸 생겨나니까요.” 의화단원들은 장센을 데려오면 50명을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장센은 자신을 위해 대신 죽으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진 출두했습니다. 지방 관원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장센은 자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한다고 대답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영혼의 눈으로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보며 결국 장센은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마23: 34, 35, 마24:9, 히11:32-37) \"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눅21:17) 6. 폴리갑의 순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훌륭한 순교자입니다. \"무신론자를 죽여라, 폴리갑을 잡아라(당시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자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폭동을 진압한 시장은 폴리갑을 구출하기 위하여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86년간 나는 그리스도를 섬겼으나 한번도 그리스도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어찌 나를 구원한 그리스도를 욕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화형을 서고 받게 되었습니다. 폴리갑은 화형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꺼지는 불로 나를 태워 죽이려고 하지만 영원히 까지지 않는 지옥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 부족한 종을 순교자의 반열에 넣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나를 받아 주소서, 이 어려운 잔을 능히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당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순교자란 이처럼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화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 거짓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7. 순교자의 교훈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치고 좋은 관리직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굳게 사양하고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왜 그처럼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의화단 사건이 있었을 때에 중국의 내륙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우상을 섬기는 큰 신당이 있었는데 하루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신당으로 왔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에게 우상에게 절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위협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우상 앞을 지나가며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끌려온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절을 하기는커녕 고개도 숙이지 않고 우상 앞을 걸어 지나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군인 앞에서 목이 땅에 떨어져 구르며 순교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 절만 한 번 하면 사는데,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나는 어렸지만 그 사건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눅9:24) 7. 먼저 내가 죽어야(목사가 먼저 죽어야) 초대 교회사에 빈민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경건한 식스투스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교회의 수석 집사인 라우렌티우스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면서 말합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데려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식스투스 감독이 대답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 며칠 후, 로마 시장은 라우렌티우스에게 교회의 전 재산을 국가에 상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정리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일을 며칠 미루고는 교회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의존하여 살고 있는 수천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다 모집하였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에 올라오면서 보물을 요구하자 그는 예배당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백 명의 소경, 벙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들이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을 가리키며“교회의 보물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식스투스의 위대한 신앙을 본받은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로마 황제 앞에서 숯불로 달구어지는 수난 끝에 순교의 제물로 죽어갔습니다. “순교의 목자가 있는 곳에 순교의 양이 있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죽이는 목사가 있는 곳에 날마다 자기를 쳐서 죽이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먼저 죽지 않고는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수 없고,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죽지 않고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순교는 고귀한 죽음입니다. 순교자에 대한 성경의 보증과 약속 또한 아름답습니다. 이 순교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신앙은 생명을 거는 신앙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면 가장 큰상을 받습니다. 가장 성공한 자입니다. 가장 위대한 자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전도하다가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창피를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내가 주일날 교회에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것은 취직된 것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순교만 축복이 아니라 예수를 믿다가 당하는 모든 고난 환난 손해도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다가 도둑 당하고 교통사고 당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예수 믿다가 당하는 모든 시련과 고난도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잘된 것도 축복이지만 예수 믿고 어려움 당하고 예수 믿다가 순교하는 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 영광,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신앙, 이런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복음의 역사와 하나님의 큰 축복이 풍성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 오늘날에도 순교하지 않은 살아있는 순교자가 많이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순교신앙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 기도: 내 의의 하나님, 예수 믿고 축복 받는 것만 기뻐하지 말고 예수 믿고 환난 당하고 시련 당하며 순교하는 것이 더 큰 축복인 것을 알게 하여 주소서 순교자의 피를 기뻐 받으시고 그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응답해 주소서. 순교자의 후손된 저희도 그들의 신앙과 헌신을 본받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살아도 영광이고, 죽을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며 사는지 보여 줄 수 있도록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교/ 롬14:8/ 2010-06-21
순교 롬14:8 혹시 \"백색순교\"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순교라고 하면 흔히 신앙을 지키고자 피 흘려 목숨을 바치는\'적색 순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박해시절의 순교자들처럼 피 흘리는 순교를 강요당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그렇다고 순교가 필요없는 시대가 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언제나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 놓고 목숨까지 바칠 자세로 일상에서 순교자적 결단을 내리며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대적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신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안락을 추구하고 편함을 추구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교적 결단과 순교적 자세가 아니면 안됩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서서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과학만능주의와 쾌락주의는 우리들에게 순교적인 신앙생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백색순교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고 증거 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훌륭한 순교자의 후손답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나를 끊어버리고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 때, 이런 작은 순교를 실천할 때, 그 삶이 바로 증거의 삶이며 순교의 삶일 것입니다. 이것을 백색순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친히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백색순교신앙이 자신의 사명을 위해,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드리게 한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 느닷없이 뜬금없이 순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색순교자가 곧 적색순교, 피흘리는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드에게 전투적인 용어라기보다는 기독교인이 사는 문화이며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바울이나, 스데반같이 손양원목사님이나 주기철목사님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순교의 제물이 되지않더라도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순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오늘은 교회력으로 순교자기념주일이며 또한 우리교회로서는 제자대학 3기생들이 졸업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런 날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 가지 시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하여가입니다. 하여가는 (태조 : 이방원)이가 정몽주를 변심시키기 위해서 읖조린 시조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두번째는 단심가입니다. 단심가는 (정몽주)가 태조 이방원에게 자신의 충의를 밝히는 시조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그는 이 시조로로 답하고 난 뒤에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 복음적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학이 있다면 단 하나의 신학 곧 순교신학이어야 하며, 신앙이 있다면 단 하나의 신앙 곧 순교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치고 좋은 관리직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굳게 사양하고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왜 그처럼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의화단 사건이 있었을 때에 중국의 내륙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우상을 섬기는 큰 신당이 있었는데 하루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신당으로 왔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에게 우상에게 절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위협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우상 앞을 지나가며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끌려온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절을 하기는커녕 고개도 숙이지 않고 우상 앞을 걸어 지나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군인 앞에서 목이 땅에 떨어져 구르며 순교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절만 한 번 하면 사는데,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나는 어렸지만 그 사건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조금만 잔꾀를 부리면 많은 이득을 보고 출세도 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색순교입니다. 작은 죄만 허용해도 즐거울 수 있는데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죄는 누구나 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가슴아파하고 회개하고 그런 작은 죄조차도 허용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것이 바로 백색순교입니다. 편할 수도 있는데 결코 편한 길로 가지 않고 정해진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색순교입니다. 조금만 우회해도 편하고 넓은 길, 넓은 문으로 가면 편하겠지만 한사코 좁은길로 좁은 문으로 가는 것이 백색순교입니다. 오늘 순교자기념주일에 맞추어서 3기 세계비전제자대학 졸업식을 하게 된 것도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3인의 법칙\"이란게 있습니다. 혼자 일때는 아무런 힘도 없지만 셋이 됐을때 힘을 발희 하는 놀라운 법칙을 3인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길거리에서 혼자 손가락질을 하고 있으면 별로 신경 쓰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보이더라도 별 미친놈 다 보겠네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2사람이 같이 하고 3사람이 같이 하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됩니다. 목회자 혼자, 혹은 교인 한 두 사람이 하는 것보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열매로 훈련된 사람들이 함께 하면 교회와 세상을 바꿀수 있을 것을 확신하면서 제자대학에 임하고 있습니다. 오늘 졸업한 졸업생들이 목회자와 함께 한 방향을 주시한다면 다른 시선들도 따라 가게 될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하면 못 할 것이 없다/ 마9:37-38
순교를 각오하면 못 할 것이 없다 마9:37-38 주일 저녁 MBC TV에서 방여하는 시사매거진 2580이라고 하는 시사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방송이 자랑하는 여성기자, 이진숙 기자가 이라크에 들어가서, 현재 점령군인 미군과 치열한 게릴라 전을 치르고 있는 무자헤린과 인터뷰 하는 장면이 방송 되었습니다. 무자헤린이란 성스러운 회교전사라는 뜻으로서 성전(거룩한 전쟁)에 뛰어든 이슬람 전사를 가리킵니다. 지금 이라크에서는 과거 후세인 정권의 추종자들이 미국과의 전쟁을 \'성전(지하드)\'라고 선언하고 자기들의 목숨을 내어놓는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방송이 큰 화제 거리가 된 것은 무자헤린이 \'한국군도 이라크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 미군과 똑같이 간주 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을 죽일 것이다\' 라고 한 인터뷰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말과 눈빛에서 \'진심으로\' 거룩한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하는(죽고 싶어 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길을 가다 죽을 수도 있고, 병들어 죽을 수도 있는 일인데, 나는 우리 종교와 국가를 위해 기꺼이 죽기를 원한다. 그것은 \'순교\'이기 때문에 나와 내 가족에게 큰 영광이 될 것이다.\" 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저 이슬람교도들의 무모한 자폭테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과연 자기가 스스로 원하여서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아주 무서운 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 생명을 내놓았다고 한다면, 거기서 이미 승패는 갈라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도 \'순교\' \'순교\' 말하지만 정말 우리 시대에 기꺼이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진심으로 죽기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목숨 내놓는 순교가 아니더라도 \'영혼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고, 사랑하고, 시간과 물질과 내 모든 것을 내어놓는 섬김(순교적 정신으로 하는)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생명도 구원도 없는 이슬람을 추종하는 자들도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죽기를 각오하는데 아니 실제로 죽음으로 자기들의 신념을 보여주는데..\' 부활과 생명의 구원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죽음으로는 커녕 시간, 물질, 섬김에 내 것을 내놓는 일에 조차 얼마나 인색하고 확신이 없는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아주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 인간의 목숨이지만 자기 신념에 가득한 무지헤린들에게는 인간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혼을 살리는 일, 영원히 축복받는 길에서 있으면서도, 그 믿음이 확고하다고 하면서도 왜 \'복음 전하는 일\'에 \'나\'를 내어놓질 못하고 사는 것이겠습니까? 마리아가 \'나드\'라고 하는 향유를 옥합 째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이때 이 모습을 본 가룟 유다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책망하시고, 자기 전 재산을 드리는 마리아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결과를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결국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고, 그가 그렇게 좋아하던 그 돈을 제대로 다 써보지도 못한 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마리아처럼 시간과 물질과 삶을 전부 드릴 줄 아는 사람의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복음을 널리 전파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도 자기종교를 지키기 위하여 무모하게 죽어가면서 \'이건 순교다\'하고 있는데, 영생부활을 확신한다는 우리가 희생과 헌신이 없어서야 말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의 희생이 있는 곳에 복음전도의 열매가 있다\' 사르밧 과부의 얘기를 잘 아실 줄 믿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먹으려고 준비한 마지막 양식마저 주의 종 엘리야에게 바쳤습니다. 자기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을 비판한 가룟 유다처럼 사르밧 과부의 헌신을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드리는 희생적 헌신 위에 하나님은 밀가루와 기름이 다하지 아니하는 복을 내리셨습니다. 오병이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순교적으로 자신을 내어놓는 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다음 주일은 2003년도 태신자 총동원 주일 입니다. 지난 10개월간 새 생명을 인태한 산모의 심정으로 우리가 태신자를 품고 기도해 왔습니다. 주일학교를 포함해서 우리의 작정된 태신자의 숫자가 997명입니다. 물질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요 생명보다 귀한 것이 \'한 영혼\'이라면, 우리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이끄는 이 일에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야 할 줄 믿습니다. 경제난국과 전쟁과 기근과 가정 붕괴, 도덕붕괴, 생명경시풍조의 이 문제 많은 사회를 향하여 우리 크리스챤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을 변화 시킬 능력은 복음이외에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자포자기하고 자살하는 세상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부르짖는 절규를 들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사망의 늪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안보입니까. 제발 우리에게도 복음을 들려 주세요\" 여러분, 우리가 쉽게 하나님 아버지 뜻대로 살기만을 원한다고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길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으셔야합니다\" 하고 한마디 하는 일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복음 위하여 \'순교\'의 길을 간 믿음의 선조들도 있는데 우리가 무얼 부끄러워하고 무얼 주저 하겠습니까? 전도가 안 되는 것은 곧 \'나 자신이 아직 복음에서 생명을 다 바칠 만한 값어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 낸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고 은사(말주변)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크리스챤들의 역사 속에 순교자들의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저들은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여서, 세상 모든 일을 뒤로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생소망과 부활확신이 가득했기에, 지금 복음 전하다가 죽는 죽음을 영광스런 죽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자기 한 목숨 복음을 위하여 내어 놓기를 진심으로 원하였습니다. 믿음은 저들이나 우리나 다 같은 믿음인데, 누군 생명을 내걸고 복음 전하고, 우린 무엇 때문에 \'혼자 믿기\'에도 바쁜 것일까요? 거기엔 큰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순교자인 복음 전도자들은 \'성령 충만하였기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기에 자기 백성이 아버지 뜻대로 살다가 천국에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승천하시기 직전 주신 마지막 말씀이 \'돈 많이 벌어 와라, 학식을 높이 쌓고 와라, 높은 자리에 올라 세상을 호령해라\' 하질 않으시고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이 말씀을 부여잡고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시는 목적은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 되게 하시는 일\' 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능력을 받아 증인되게도 하시고, 듣는 이들의 심령을 녹여서 복음을 받아들이게도 하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이제 오늘 우리 온 수성가족들이 성령의 능력을 입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능력 입으면 우리도 이 시대의 순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전하기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던 이들이 이제 복음 전하는 일을 기쁨으로 알고 앞장서게 됩니다. 시간이 없다던 이들이 기꺼이 시간을 냅니다. 성령 충만하면 \' 난 태신자 감이 내 주변에 없다\'던 이들이 영안이 열려서 자기 생활 주변에서 무수한 전도 대상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태신자 운동 이전에 성령에 먼저 사로잡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그동안 안 들렸던 (아니 외면하고 살아왔던) 영혼의 절규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믿는 그 하나님 나에게도 전해 주시오\' \'당신이 다니는 수성교회 나도 좀 가보고 싶소\' 전도자는 특별한 은사 받은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이 \'영혼의 절규\'에 민감한 사람들이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일이 바빠서 전도를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 충만하면 영혼의 절규가 들려오게 됩니다. 이때는 \'안타까움이 생기는 법입니다\' \"내가 전도를 하여야겠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 마음만은 간절한데 마음껏 전도 할 수 없다\" 이때는 전도하는 이들을 기도로 물질로 도우면 됩니다. 협동작전을 펴면 됩니다. 전도하는 이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들이 \'기도\'하는 분들입니다. 나에게 시간 없고, 은사 없다 하면 \"기도를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교회 태신자가 997명입니다. 저는 이번에 태신자 작정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의 태신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부디 저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녹여 주시옵소서. 부디 저들이 다음 주일 11월 2일 예배에 시간을 내게 하시고 갑작스런 일로 예배 약속을 번복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작정된 우리 교회 태신자들이 모두다 주님의 전에 나아와 큰 은혜 받고 새 삶을 살게 하옵소서.\'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가 모여서 전도 열매를 딸 수 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9장 37절 38절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여기 \'보내어 주소서하라\'는 말씀은 곧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전도해야 할 사람을 보내 주소서 하는 말씀도 되고, 저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하여 낼 전도자들을 우리 교회에 많이 보내주소서 하는 말씀도 됩니다. 저는 이번에 러시아 사할린 땅에 가서 우리 선교사님에게 많은 은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러시아 땅에는 쭉쭉 뻗어 올라간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일부러 심은 것이 아니고 그 하얀 나무줄기가 가득한 이 자작나무 숲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헌데 그곳에서 사역하는 우리 선교사가 그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꿋꿋하게 서 있는 \'자작나무 한그루 같다\' 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너무 몸이 아프고, 외로울 때 나 아프다고 어딘가 전화 한통을 하여야 할 것 같은데, 이 황량한 땅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독신 선교사는 전화 걸 곳이 없었다고 하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아 저 선교사라면 이 목사의 심정을 알아주겠구나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단이 되고 훈련된 선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이랬습니다.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언니나 형제, 부모에게 말해봐야 마음만 더 아프실 것이고.. 해서 저는 정말 \"기도\"로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하소연 하고 울부짖고 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가 있는 이곳에 수성교회 식구들이 와서 봐야한다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현실적 어려움이 많았지만 \"기도 하는 건 제 마음이니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기어이 이렇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 간증을 들으며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오랫동안 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일이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 마음이시지만,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 하는 건 또한 제 마음입니다. 아무도 제가 기도하는 건 막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꼭 전도해야 할 영혼이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이제 성령 충만한 가운데 오늘부터라도 \'기도\'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내가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해주십시오. \'고맙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부담스러우니 날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별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 그런 사람을 만나거든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당신이 교회에 오고 안 오고는 당신 마음대로 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건 내 마음 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섭다는 사실을 아시길 바랍니다. 제가 지난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위하여 방문한 교회에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었습니다. \"기도를 클릭하면 하늘 문이 열립니다.\" 저는 한국 교회 부흥의 비결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와 밤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가 분명히 있었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사람 붙들고 \"예수 믿으라\" 말할 용기가 없거든, 전도자들을 위하여 기도의 자리에라도 엎드려 있으십시오. 전도지 들고 대문 두드릴 용기가 없거든 그렇게 해내는 전도자들을 위하여 기도의 자리에 엎드려 있으십시오. 아말렉은 전쟁에 능한 민족이었습니다. 창과 칼과 병거가 갖추어 있고 군대의 규모도 대단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가진 무기도 전쟁에 대한 대비책도 전혀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이 전쟁의 배경은 생각해 보면 누가 보더라도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질 수밖에 없는 전쟁 이었습니다. 헌데 모세가 두 손 높이 들어 기도 할 때, 전쟁터에서는 승리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기도 손이 내려 올 때 전쟁에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승패가 기도로 갈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전도 운동을 하려고만 하면 어김없이 사단의 방해 공작이 있음을 느낍니다. 분명, 영혼을 주께로 이끄는 이 일은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일인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여기시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의기소침 하거나 남의 일보듯 무관심 하거나 행사 자체의 효과와 경제성을 운운하는 가룟 유다의 마음은 분명 사단의 공작입니다. 백 만원, 천 만원이 들더라도 생명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이끄는 이 일은 반드시 교회가 해내야만 할 일인 줄 믿습니다. 자기들의 신념을 위해 죽기를 원한다는 이슬람 무자헤린의 눈빛이 기억납니다. 아니 이단에 빠져서도 집집마다 문 두드리며 온갖 멸시와 조롱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뭐가 부족하고, 저들만 못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하신 예수님!! 오직 진리는 하나요, 생명의 길도 하나뿐이라면, 유일한 생명의 길을 아는 우리가 침묵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구원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백성들입니다. 성령 충만하고, 기도하며 나를 내어놓고 담대하게 이웃에게 다가섭시다. 끝까지 포기하지 맙시다!
순교신앙/ 계14:13/ 2008-10-31
순교 신앙 계14:13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는 1993년도부터 6월 둘째주일을 \'순교자기념주일\'로 지정하여 지켜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 그 배후에는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뿌려져 거름 역할을 했음을 기억하고 그 위대한 순교신앙을 기념하고 발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은 세계기독교가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기적적인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유례없는 부흥과 발전을 가져왔지만 그 부흥과 발전에는 순교자의, 피가 흘러 넘쳤기 때문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의 신학자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이 그렇습니다. 순교의 피는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의 씨앗이 되어주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순교신앙과 순교영성의 터 위에 세워지고 부흥발전해 온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순교신앙, 순교영성이란 말들이 어색하고 낮설게 느껴지는 시대 가운데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덧 평안과 편리와 안락과 온갖 복지와 혜택으로 가득한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작은 불편이나 불이익도 참을 수가 없는 정신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의 위기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한국기독교를 기독교라고 하지 않고 \'개독교\'라고 폄하하는 사람들까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터넷 포탈싸이트의 검색어 중에 이 용어가 검색금지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막는다고 막아지는게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버린 것이 이런 위기의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빠지고, 주님의 마음이 빠지고 아무리 성장이 되면 무엇 합니까? 그것은 결국 위기를 자초할 뿐인 것입니다. 덩치가 커질수록 더 위험한 것입니다. 덩치가 커질수록 근본으로 돌아가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순교신앙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다시 힘차게 외쳐져야 합니다. 다른 복음이 더 이상 주류복음으로 교회 안에서 활개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정조를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100년전 이 민족의 극한 고난의 순간에 임했던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순교 신앙만이 바알과 아세라의 혼합인 기복 신앙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순교신앙만이 세상 정치와 물질과 짝한 오늘의 한국교회의 병리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개교회주의와 이기주의 신앙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고칠 수 있습니다. 순교자 손양원목사님께서는 복음 때문에 감방에서 끌려가서 감방속에서 복음 전한다는 이유로 독방에 갖혀서 그 아내에게 쓴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빈 방을 홀로 지켜 고적을 느끼나 성삼위 함께 하니 내 식구가 되었구나 괴로움 중에 내 주를 체험하리라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매개가 되었으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된 까닭이로다. 죄악으로 얼룩진 육체의 껍질을 벗어야 하겠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연단을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두번 돌아오지 못한 세상의 고난의 맛을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부귀영화 뒤끝은 다시 섭섭하나 고난의 뒤는 위로와 기쁨의 다음 차례가 되는 법입니다. 하물며 주 안에서 고난은 진리가 아니리요!\"라고 썼습니다. 이런 순교신앙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순교자\'라는 말은 \'증인\'(martus)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순교자\'란 의미는 법정 증인석에 앉아서 어떤 사실을 증언하는 \'증인\'이란 뜻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순교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역사적 예수의 사실에 대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순교자가 죽음으로써 증거하고자 한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소문이나 확신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교리도 의식도 전통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조금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증거한 것은 역사적 예수, 실재하신 예수를 증언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고백은 개인의 내적 신념에 그치지만 기독교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눅24:48)란 말의 \'증인\'이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선교 행위를 뜻합니다. 순교자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 것에 대한 \"기록\"(눅24:46-47)과 신앙의 참됨을 증거하기 위해 수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순교자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롬5:3; 8:17).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이는 몸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의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체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교신앙인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도록 하는 일에 순교신앙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가 병들면 자녀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죽은 순교자\'와 \'살아있는 순교자\'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습니다. 박해에 항거하다가 죽은 사람과 수난을 당하고 죽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습니다. 생명을 잃은 자와 생명을 잃지 않은 자를 동등하게 대합니다. \'순교\'는 죽음을 절대조건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목숨을 잃어야 증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자답게 항거하면서 신앙을 지킨 사람도 \'순교자\'로 간주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5에서 12장 1절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째로, 오늘날 순교신앙은 어떤 형태로 표현, 실천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안에서는 우상숭배를 강요는 권력도, 십자가의 도리나 신조를 수호하기 위한 순교를 요구하는 물리적인 세력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신실성을 유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어쩌면 더 강하고 무서운 우상숭배가 강요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악한 마귀사단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믿는 자의 신앙을 무너지게 하려고 힘쓰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상과 우상숭배의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우상숭배란 한 분 하나님을 거슬려 또 다른 예배의 대상을 모시고 그를 섬기는 행위입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우리 마음에 우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자신을 경배하는 일이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경배를 우리 스스로에게 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자랑은 우상이다\"라고 말한바가 있습니다. 자기자랑, 학벌자랑, 영력자랑, 지식자랑, 돈자랑, 자식자랑은 현대판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의 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강력합니다. 로마제국이나 일제의 강압 보다 더 무서운 우상들이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상들은 사회나 역사에서 가면을 쓰거나 변장하고서 아주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깨어있는 자\'라면 순교신앙으로 투쟁해야 할 원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갖가지 우상의 베일을 벗기고 그것을 대항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초대교회의 순교자들과 일제말기의 순교자들과 다름없이 이 같은 우상들에 항거할 것입니다. 그것이 순교신앙의 포현입니다. 오늘의 순교자 개념은 능동적입니다. 수동적인 개념에서 능동적인 개념으로 바뀌었습니다. 고전적인 순교자는 수동적 저항의 특징을 지닌 반면에 현대 개념의 순교자는 능동적 참여의 특징을 지닙니다. 이전에 순교자는 누가 죽여주어서 순교자가 된 것이며, 누가 고난을 던져주어서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누가 죽여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가 날마다 사는 것이 순교신앙입니다.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후4:11)하셨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벼루 열 개가 구멍이 뚫어지고 붓 천 자루가 몽당 붓이 되도록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경전을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했기에 추사의 글과 그림이 귀한 것이 된 것입니다. 불교의 스님들은 1년에 두 번 약 100일 동안 \'동굴 속에서 홀로 치열하게 수도\'하는 동안거, 하안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절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으로 완화되기는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 수행을 하는데,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수련해 가는 과정이 옆에서 보는 이를 숙연케 합니다. 어찌 기독교 신앙을 이런 것과 견줄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들이 얻는 것의 가치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저들보다 더 주님을 위하여 용맹정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순교신앙을 갖자/행1:6-11
순교신앙을 갖자/행1:6-11 2008-12-01 10:30:36 read : 105 주후 32년 경 겨울에 로마 황제는 군인들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은 이교 신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칙령에는 제사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그 직분을 잃을 뿐 아니라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300년 동안 무적의 사단이었던 12사단의 대장은 자기들의 부하를 불러모아 놓고 그 칙령을 읽어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2사단 군사들이여, 여러분은 여러 전투에서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황제의 법에 순종함으로써 제국의 가이사에게 충성을 다 하는데 앞장섭시다. 내일은 우리 사단이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얼마 뒤 두 명의 군인이 장군을 찾아 와 12사단에는 40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그들은 이교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장군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시오, 만약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무기를 압수 당하고 그 직책에서 쫓아 낼 것이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리 알고 깊이 생각하고 좋은 쪽을 선택하라고 하시오,\" 그 날 밤 진영에서 4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시편을 읽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제사 참여를 거부하자 처형하라는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팔과 목이 묶인 채 제사를 거부한 사람들은 얼어붙은 호수 근처로 끌려갔습니다. 해가 지자 그들은 벌거벗긴 채 호수 한가운데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이 세운 큰 전과(戰果)를 참작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호수 옆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고 제사를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을 위해 따뜻한 목욕탕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이들이 호수 가운데로 끌려가자 차가운 바람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불었습니다, 목욕탕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호숫가에서 장작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 보초병은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 가자 찬송 소리가 약해졌습니다. 그 때 보초병은 그리스도인들의 중얼거리는 기도 소리와 함께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 그런데 조금 후에 그 천사의 찬송 소리가 바뀌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39명, 순교자 39명, 그리고 39개의 면류관이로다 \" 그때 그 보초병은 따뜻한 목욕탕으로 걸어오는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즉시 그 보초병은 무기를 놓은 채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내 옷을 입으시오. 내가 당신을 대신하겠소!\" 그리고는 그 보초병은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로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를 향해 뛰어갔습니다. 뛰어가면서 그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다음날 아침 장군은 죄수들을 끌어내라고 명하였습니다. 얼어죽은 시체들이 호수 한가운데 쌓여 있었고 그 가운데는 보초병의 시체도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안 것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주님의 품에 안긴 것이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2)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핍박을 받거나 순교를 당한다고 해서 복음까지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은 오히려 마음이 더 뜨거워지고, 복음의 귀중함을 더 깊이 깨달아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은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권능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나에게 가장 크게 예금하는 것이고 천국에 상을 쌓는 일이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영혼을 천당으로 옮기기 때문에 이웃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길이 전도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어서 복음을 전파할 때도 인간이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생명을 거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7장까지 예루살렘 복음 전파가, 8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 복음전파, 13장부터는 사마리아로 복음이 퍼져나갑니다. 그런데 그 전환기가 되는 시기마다 순교자의 피가 있었습니다. 7장에 스데반 집사, 12장에 야고보 사도가 순교합니다. 주의 사도가 순교할 때 그도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지만 이 땅에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불꽃이 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생명을 걸고 열심히 나아갈 때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겸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었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능력을 가지고 생명을 걸고 피흘릴 때까지 나가서 복음 전파에 앞장서야 합니다. 거룩한 순교자의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1. 나에게 총을 겨눌지라도 1999년 4월20일 콜로라도 덴버의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이런 광기 어린 학살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군데에 모아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 가운데서도 확실한 신앙의 결단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캐시 버낼입니다. 그는 죽음의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리고 너희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 이 말을 들은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곁으로 가라” 하며 총을 쏘았고, 결국 캐시 버낼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가? 미국의 십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캐시 버낼의 순교 앞에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한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얼마 후,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캐시 버낼과 같은 담대한 증인으로 서야 되겠다는 신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미국 전역의 각 학교에서는 ‘우리도 캐시 버낼의 길을 따르자’라는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고, 캐시 버낼의 순교적 결단을 기념하는 국기 게양대 앞 기도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4,25) 2. 불꽃도 나를 사르지 못하리라 16세기 초, 영국인들은 중세 카톨릭의 지배 아래 일종의 영적 노예 상태로 허덕였습니다. 그러다가 라틴어 성경이 영어로 처음 번역되면서 영적 부흥은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영국 종교개혁의 선구자 중에 토마스 빌네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제들이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들이 새로 번역된 신약 성경을 그에게 소개해 준 다음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바울보다 더 큰 죄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빌네이는 지칠 줄 모르고 신약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한 지배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기존 교회를 격노시키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빌네이는 교회를 거스른 이단자라는 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화형대를 향해 걸어가는 그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그는 죽음을 맞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불꽃이 나를 삼킬 때 나는 그 열기를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몸은 불에 타 없어지겠지만, 그 고통 뒤에는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이 따를 것입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 후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빌네이는 서서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많은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3. 주님을 파는 아버지는 원치 않습니다 후르레스끄라는 성도는 죽도록 매를 맞고 붉게 달아오른 쇠갈고리와 칼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간수들은 굶은 쥐들을 감방에 들여놓아, 그는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눈을 잠시 붙이려고 하면 쥐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에 쥐들을 쫓아야만 했습니다. 간수들은 그를 2주 동안 밤낮으로 세워놓고 동역하는 성도들을 배반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14 살난 아들을 데려다 그의 앞에서 사정없이 채찍질했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아, 나는 이들에게 말해야 되겠다. 나는 더 이상 차마 볼 수가 없구나.\" 그러자 그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주님을 파는 아버지를 원치 않습니다. 끝까지 견디십시오. 만약 이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예수님과 조국을 위하여 죽을 것입니다.\" 악에 찬 간수들은 소년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였습니다. 감방벽은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소년은 주님을 찬양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4. 스데반의 순교를 본 받아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4∼60) \"유토피아(Utopia)\"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교수형을 당할 때의 일입니다. 사형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스데반이 죽을 때에도 사도 바울은 이를 합당히 여기고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도 스데반은 끝까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용서를 구했다. 마침내 그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고 그도 순교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 같은 순교자끼리 친구가 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을 믿는다. 오늘 내가 당신들의 손에 죽지만 언젠가 당신들도 회개하여 주님 앞에서 친구로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을 믿고 기도한다.\"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중국 청나라 말기에‘장센’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름꾼에다가 호색한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중년이 되자 시력이 점점 나빠지더니 거의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간 장센은 극적으로 시력의 일부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을 들은 장센은 이제 자신도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며 세례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J. 웹스터 선교사는 “돌아가서 이웃들에게 당신이 변화되었다고 말하시오. 얼마 후 우리가 방문할 그때까지 당신이 주님을 따르고 있다면 기꺼이 세례를 주겠소”라고 말했습니다. 다섯 달 후, 그 마을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수백 명의 새로운 신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장센은 욕을 먹고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의화단원들이 약 50명의 성도들을 붙잡아 처형하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들을 죽여 봐야 소용없어요. 장센이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인은 자꾸 생겨나니까요.” 의화단원들은 장센을 데려오면 50명을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장센은 자신을 위해 대신 죽으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진 출두했습니다. 지방 관원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장센은 자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한다고 대답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영혼의 눈으로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보며 결국 장센은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마23: 34, 35, 마24:9, 히11:32-37) \"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눅21:17) 6. 폴리갑의 순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훌륭한 순교자입니다. \"무신론자를 죽여라, 폴리갑을 잡아라(당시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자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폭동을 진압한 시장은 폴리갑을 구출하기 위하여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86년간 나는 그리스도를 섬겼으나 한번도 그리스도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어찌 나를 구원한 그리스도를 욕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화형을 서고 받게 되었습니다. 폴리갑은 화형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꺼지는 불로 나를 태워 죽이려고 하지만 영원히 까지지 않는 지옥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그리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 부족한 종을 순교자의 반열에 넣어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나를 받아 주소서, 이 어려운 잔을 능히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당신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순교자란 이처럼 한 마디의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라는 한 마디만 하면 화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 거짓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7. 순교자의 교훈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치고 좋은 관리직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굳게 사양하고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왜 그처럼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의화단 사건이 있었을 때에 중국의 내륙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우상을 섬기는 큰 신당이 있었는데 하루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신당으로 왔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에게 우상에게 절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위협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우상 앞을 지나가며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끌려온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절을 하기는커녕 고개도 숙이지 않고 우상 앞을 걸어 지나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군인 앞에서 목이 땅에 떨어져 구르며 순교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절만 한 번 하면 사는데,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나는 어렸지만 그 사건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 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눅9:24) 7. 먼저 내가 죽어야(목사가 먼저 죽어야) 초대 교회사에 빈민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경건한 식스투스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교회의 수석 집사인 라우렌티우스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면서 말합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데려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식스투스 감독이 대답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 며칠 후, 로마 시장은 라우렌티우스에게 교회의 전 재산을 국가에 상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재산을 정리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일을 며칠 미루고는 교회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의존하여 살고 있는 수천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다 모집하였습니다 . 드디어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에 올라오면서 보물을 요구하자 그는 예배당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수백 명의 소경, 벙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들이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그 무리들을 가리키며“교회의 보물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식스투스의 위대한 신앙을 본받은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로마 황제 앞에서 숯불로 달구어지는 수난 끝에 순교의 제물로 죽어갔습니다. “순교의 목자가 있는 곳에 순교의 양이 있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죽이는 목사가 있는 곳에 날마다 자기를 쳐서 죽이는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먼저 죽지 않고는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수 없고,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죽지 않고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순교는 고귀한 죽음입니다. 순교자에 대한 성경의 보증과 약속 또한 아름답습니다. “저는 순교를 소망합니다.” “예, 순교는 아름답지요. 저 역시 그 은혜를 사모합니다.” 이런 두 성직자에게 한 성도가 근심스럽게 말합니다. “제게는 그런 신앙도 용기도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고 박해자의 총구가 저들을 겨누게 되었습니다. 한 성직자의 각오는 어느새 무너져 버렸습니다. 또 다른 성직자는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장담과 설교를 들어온 성도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배에 힘을 주며 뇌까립니다. “제가 지금 순교를 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받아주소서.” 그런데 형장을 채우는 다른 기도소리가 있었습니다. “주님, 제가 이런 자리에 있다니요. 주님의 보혈이 이 몸에 흐릅니다. 이 영혼을 받으소서.” 바로 그 성도였습니다. 이 순교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신앙은 생명을 거는 신앙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면 가장 큰상을 받습니다. 가장 성공한 자입니다. 가장 위대한 자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전도하다가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창피를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내가 주일날 교회에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서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것은 취직된 것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순교만 축복이 아니라 예수를 믿다가 당하는 모든 고난 환난 손해도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다가 도둑 당하고 교통사고 당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예수 믿다가 당하는 모든 시련과 고난도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잘된 것도 축복이지만 예수 믿고 어려움 당하고 예수 믿다가 순교하는 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 영광,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신앙, 이런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복음의 역사와 하나님의 큰 축복이 풍성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 순교신앙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 기도: 내 의의 하나님, 예수 믿고 축복 받는 것만 기뻐하지 말고 예수 믿고 환난 당하고 시련 당하며 순교하는 것이 더 큰 축복인 것을 알게 하여 주소서 순교자의 피를 기뻐 받으시고 그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응답해 주소서. 순교자의 후손된 저희도 그들의 신앙과 헌신을 본받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살아도 영광이고, 죽을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며 사는지 보여 줄 수 있도록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교와 고난(Martyrdom and sufferings)/행12:1-5
순교와 고난(Martyrdom and sufferings) 행12:1-5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실제적인 핍박이 헤롯왕에 의하여 실행되게 되어서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가 죽게 되고, 베드로도 잡혀가서 옥에 갇히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헤롯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은 단지 유대교에 깊이 빠져서 기독교도들을 멸시하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뿐이었다. 즉 자신의 통치적인 편의를 위해서 무죄하고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일에 서슴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아 그 몸에 벌레가 생겨 그 벌레에 먹혀 죽는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는 모두 네 명의 헤롯왕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대헤롯으로서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자이고(B. C 37~A. D 4, 마2:16-18). 둘째는 헤롯 아켈라오 인데 그는 대헤롯의 4째 아내인 사마리아 여인의 소생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곧 폐위되어 정배 당한자이다(A. D 4~6, 마2:22). 세 번째는 헤롯 안타파스 인데 그는 갈릴리와 뵈뢰아의 분봉왕으로, 아켈라오의 동복동생으로 제수이며 질녀가 되는 헤로디아를 빼앗고, 세례요한을 목 베어 죽인 자이다(B. C 4~A. D 34, 마14:1-12). 네 번째는 헤롯 아그립바 1세로 대헤롯의 손자이며 헤로디아의 동복 오라비였다. 이가 바로 본문에 등장한 헤롯 왕으로 기독교인과 교회를 핍박하다가 그 몸에 벌레가 먹어 죽은 자이다. 1. 야고보의 순교를 배웁시다. 1) 야고보는 헤롯의 박해를 받았다. 헤롯은 사단의 사용되는 악의 도구로 사용 되고 있었다. 1절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라고 하였다. 사탄은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게 한다. 헤롯은 이 사탄의 사용물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도 세상의 권력이나 물권이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사탄은 권력의 위력과 그 활용성을 잘 알기 때문에 이처럼 권력을 동원하여 기독교인을 잔해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권력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탄이 권력이나 금력을 동원해 기독교도들을 잔해하면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 발전과 선교발전의 기회를 삼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 박해의 고난을 통해 성도 개인에게는 확고한 신앙을 뿌리 내리게 하시며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믿을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신다. 3절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를 잡으려 할새”라고 했다. 헤롯이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이자 유대교의 유대인들은 매우 기뻐했다. 왜냐면 그들이 하고자 했던 일을 헤롯왕이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롯은 베드로마저 죽이고져 옥에 가두고 말았다. 헤롯왕은 순조로운 통치를 위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져 했으나 우리는 그의 무지함을 발견한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칭찬 받지만 이미 하나님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총명이 어둡고 지혜가 막힌 무지한 자들은 항상 자기의 꾀에 자기가 속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세상에 악한 자도 조심해야 하지만 이처럼 무지한 사람들을 더욱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2) 야고보는 누구입니까? o. 순교자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인 사도요한의 형제이다. o. 그러므로 “주의 형제 야고보”(갈1:19)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10:3)와 구별해야 하는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작은 야고보”라 하고, 여기 순교한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큰 야고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다. o. 특별히 큰 야고보는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형제 요한과 더불어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성격이 급했다(눅9:54). o. 막10:35-44에 나타난 것을 보면 요한, 야고보 이 두 형제는 명예욕이 강하여 주님의 좌우편에 앉고 싶어 했으며,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막10:39)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이 말씀 속에는 이미 그의 순교가 암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본문의 야고보는 큰 야고보로 헤롯의 칼에 의하여 12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다. 스데반집사의 순교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는 비교도 안 되리만큼 야고보의 순교에 대한 기록은 너무 짧은 한 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짧은 기록에서도 초대교회 사도들과 집사들과 성도들은 한결 같이 신앙을 제일로 여겼으며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에 충만하여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바로 마10:28 대로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라고 구성지게 이 찬송을 부를 수는 있으나 실제로 그런 믿음을 실천하고 살아가는지요? 세상에 난발되는 부도 수표처럼 우리의 신앙도 “부도 신앙”이 되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계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사대 교인들을 향해 지적하셨듯이 우리를 책망하시지 않고 칭찬 하시도록 행함과 진실함으로 신앙생활하며 서로 섬기며 격려하고 주를 증거 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 태동부터 주님의 죽음을 통해 세워졌으며 그가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초대교회 시초에 집사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 후 야고보 사도를 비롯해서 Paul, 베드로 등의 순교로 인해 열매를 맺게 되었으며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름 없는 성도들의 수많은 순교의 피로써 기독교는 맥을 이어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주님은 야고보 사도와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여기에 비겁자, 배신자, 배도자가 되지 않고 예하며 따르는 자 되시기 바라며 그러려면 지금의 삶이 성령의 감동마다 예라고 하면서 실천적인 삶이 따라야 된다. 성도에게 있어서 순교는 축복에 해당 한다. 성도의 살 곳은 이 땅이 아니요 저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우리의 본향이요, 고향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적 죽음은 본향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요, 큰 상급과 면류관을 받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은 “나는 하늘나라의 향수병에 걸려 있다”고 했다. 성도의 신앙적 삶이란 야고보를 본 받는 순교를 각오한 생활이어야 한다. 2. 베드로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3-4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고 했다. 우리는 베드로의 생애를 십자가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십자가 현장, 그리고 그 이후로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십자가 이전에의 베드로는 고난의 의미를 몰랐다. 십자가 이전의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받아야할 참된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요6장에서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이적 기사를 읽을 수 있다. 그때에 많은 무리가 왕으로 삼으려 하니까 주님이 피신해서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다. 이튿날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떡과 음료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참된 고난의 의미를 알려 주셨다. 그 말을 듣고 모든 무리들은 주를 위한 고난이 두렵고 싫어서 다 흩어져 버리고 제자들까지도 머뭇거리고 있을 때 “너희도 가려느냐?” 하는 예수님의 침통한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는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로 믿고 알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직스럽고 훌륭한 신앙고백이었다. 그밖에도 베드로는 언제나 맨 먼저 나서서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수차 다짐까지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를 위한 고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럴듯한 감정과 고백은 있었지만 그것이 곧 피와 생명까지 희생하는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했다. 여러분! 진부한 질문 같으나 고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꼭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십자가지지 않고도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영생을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마귀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사이에 무서운 전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전에 알지 못했던 특별한 고난이 찾아오게 된다. 이 고난은 전에 느꼈던 세속에서 받는 그 고난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 없이 예수님을 믿으려 하거나 십자가 없이 구원 받으려 하는 것은 마치 등산하지 않고 산에 오르려 하거나, 십자가 없이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으려 하거나 배를 타지 않고 망망대해를 건너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특별한 의미의 고난을 분명히 깨닫고 주님과 함께 이 고난의 능선을 넘어 겟세마네 동산까지 올라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베드로는 십자가 현장에서 고난을 회피했다. 십자가 사건 이전의 베드로가 고난에 대해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했다면 십자가 현장에서 고난을 감당해야할 시점에서는 너무도 비겁하고 나약하기만 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가 너무도 쉽게 포기하고 배신하였으며 심지어 주님에 대해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고 고난의 자리를 피하여 갔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의 길 앞에서 소리 없이 주저앉고만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후에 크게 회개하고 자신이 쓴 서신들에 보면 그 기록의 내용의 절반 이상이 고난에 대한 권면과 경고로 되어 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했고 벧전3:14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말며 소동치 말라”고 했으며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가르친다. 왜 베드로가 이와 같이 고난에 대해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베드로가 쓰라린 자신의 부끄러운 실패의 역사를 통해 고난의 참된 의미와 고난을 이긴 자의 축복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다가 실패의 쓴잔을 마셔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혹 신앙의 실패이든, 인간관계나 사업상의 것이든 그 실패의 장에서 피하거나 자꾸 도망가려하지 마시고 겸손히 주님의 손을 잡으시고 주님과 함께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성공과 승리의 자리로 가게 되었다. 3) 십자가 사건 이후의 베드로는 기꺼이 고난을 감내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도 베드로는 극심한 박해를 받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승을 배신하고 구원자 주님을 부인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옛 어부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베드로가 이제는 당당하게 고난의 무대 위로 나서고 있다. 이미 헤롯왕은 칼을 들어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죽였고, 베드로도 무교절이 지나면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형 받을 당사자인 베드로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저는 신대원 3학년 시절에 서울 서대문 형무소 사형 집행장에 견학 간적이 있다. 그때 형집행시에 입회했던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형수들은 이미 반은 죽은 상태에서 끌려나와 최종 심문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다. 아니 내일 아침이면 죽어야 하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신뢰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런 상황에서 평안한 단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삶도 죽음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런즉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당신의 이름에 찬송을 드립니다”하는 실천적 신앙고백을 가지고 자신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겨 버렸기에 그는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했을 만큼 깊은 단잠에 빠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o. 왜 우리는 삶이 풍요롭지 못하고 각박해지고 마음속에 참된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사라져 갑니까? o. 왜 밤잠을 자지 못하고 초조와 불안 가운데 몸부림치며 초췌해집니까? 그 이유는 내 모든 것을 베드로처럼 주님께 다 맡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인생의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염려를 주님 앞에 맡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 훗날 베드로는 벧전5:7에 고백하기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다. 무슨 뜻입니까? “나의 경제적인 어려움도, 자식들에 관한 염려도, 내 삶의 절박한 문제도, 내 사업상의 염려, 내 진로의 염려도 다 주께 맡겨버리라”는 뜻이다. 내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 버리면 즉시 그 모든 문제를 주님이 다 받아 맡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시고 다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해결 받는 경험을 쌓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들은 어려울수록 기도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고 물어 보실 때 선뜻 대답하고 나서면서 주님과 함께 골고다 길을 걸어간 후에 영광의 새아침을 맞이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교와 순국/ 레3:1-5/ 2002-09-20
순교와 순국 레3:1-5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 첫째 주일임과 동시에 기미독립운동 82돌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뜻 있는 두 기념일에 깊이 연관된 문제는 희생이요 죽음입니다.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과 나라를 위해 죽은 선열들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인간들의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고 겉으로 드러난 사건, 즉 죽음만에 초점을 맞춰서 오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할 필요를 느낍니다. 두 사건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한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과 같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12:23절) 이 진리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통하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희생하고 죽는 삶입니다. 매우 역설적입니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무수한 생명들이 죽은 결과입니다. 우리의 밥상에 놓여진 채소와 생선과 육류들을 보면서 나의 한 목숨 부지를 위해서 주변의 많은 동식물들이 죽는다고 생각 아니 하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기 위하여 많은 동물과 식물이 죽습니다. 그것들을 먹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구약의 본문에서도 소의 피를 흘려서 사람의 죄를 사하고 생명을 살리는 제사를 보여줍니다. 희랍의 신화를 보면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신들이 자주 나옵니다. 이들 선신들은 인간을 위하여 죽어주는 신들입니다.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 올페우스같은 신은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가볍게 해주려고 스스로 고난을 자취한 신들입니다. 사람의 고난과 죽음을 대신해 준 신들입니다. 이들 선한 신들은 질투하는 사악한 신들이 자신들에게 덮어씌우는 누명과 형벌을 달게 받아가면서 잘 참아내면서 그들이 봉사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고통을 분담했습니다. 이들 신들은 고통만이 아니고 죽음까지 마다 않고 받았습니다. 인간들을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면서 죽은 신들이었습니다. 희랍의 세계 외에도 그 세계의 삶을 꽃피우기 위하여 죽는 신이 있었습니다. <미노쓰>세계를 위해서는 자그레우스가, <수메리아>세계를 위해서는 타무즈가, <하이타이>세계를 위해서는 아티스가, <스칸디나비아>세계를 위해서는 발더가, <시리아>세계를 위해서는 아도니스가 수난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이들 신들의 덕택으로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인간의 문명, 즉 삶이 꽃을 피워갔습니다. 인간의 세계를 위하여 수난 당하고 죽는 신의 최초의 신은 식물의 영인 \"에니아우텐 다이몬\"입니다. 봄에 출생하여 가을에 죽는 식물의 신입니다. 이 자연신의 덕택으로 인간들이 삶을 유지합니다. 만약 이 자연의 신이 사람들을 위하여 죽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습니다. 우리나라의 신화를 자세히 읽어보아도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참고 견딘 곰의 희생으로 한족의 나라가 건국됩니다. 쑥과 마늘 그리고 어두움! 이 고난을 뚫고 나가는 인내의 시험을 통하여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화된 국모 때문에 한반도에 새로운 나라가 탄생된 것입니다. 호랑이처럼 타인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죽이는 방식이 아니고 반대로 고통을 내면에서 인내하고 극복하는 곰의 희생의 방식으로 이 나라가 탄생되었습니다. 쓰고 맵고 어두움의 이중 삼중의 고난을 견디는 자만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쑥과 마늘을 먹는 역겨움을 이기고 햇빛을 못 보는 어두움을 힘들게 참아내는 아픔을 통하여 이 나라의 어머니는 탄생되었습니다. 그런 희생적인 어머니들 덕택으로 이 민족이 위기에서 구하여지고 나라의 생존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100일후 그 어둡고 침침한 죽음의 동굴을 헤치고 뛰어 나올 때는 그는 이미 곰이 아니고 아름다운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인간으로 변화된 곰의 눈에 비친 것은 아침의 밝은 햇살이었습니다.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맵고 쓴 것을 먹으면서 인내하던 곰은 어두움의 동굴에서 헤어 나와 처음으로 대하는 밝은 아침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능녀 즉 곰의 여인은 아사달 즉 아침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이름하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어머니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 나라는 세워졌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여러 나라의 신화 속에 포장되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출현했던 수난 당하는 참 신의 모습은 과연 누구일가요? 그 신의 수난이 아니면 인간도 역사도 세계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신은 지상의 역사 위에서 수십 수백 개의 가면을 쓰고 등장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은 유대 땅 갈보리 언덕 십자가위에서 그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겪은 고통과 죽음은 가장 참혹한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이 원형의 죽음이 역사 전체를 통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나타나서 이 역사를 계속 생존시키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82년전 기미독립운동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희생과 죽음은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필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33인중의 한 분인 이갑성 선생,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분의 회고담을 읽어보면 일경에 잡혀 죽을 각오를 하고 독립운동에 임했다고 합니다. 1918년 12월 하순부터 독립운동에 앞장 설 사람들을 찾는데 어려웠던 이유는 생명을 내걸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약 70여명의 학생 청년 그리고 지도적인 인사들이 모였는데 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분으로서 일본법을 잘 알고 있었던 함태영 씨가 \"만약 이 운동을 하다가 잡히면 사형\"이라는 말을 하면서 준비를 시켰다고 합니다. 만약 70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서명하면 몽땅 죽게되니, 3 그룹으로 갈라서 장기전을 펼쳐야 한다고 설득하여 1차에 33명이 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33인이 서명하고 싸우다가 죽고, 그 다음에 2차로 서명한 자들이 싸우다가 죽고, 그 다음에 3차로 서명한 자들이 싸우다가 죽어서 독립할 때까지 효과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자고 결의를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25명이 먼저 죽기로 각오하고 서명을 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이 나도 먼저 죽을 각오가 되었으니 이름을 넣어달라고 하여 26명, 27명, 30명, 33명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갑성 선생은 처음 25명 명단에서 빠졌답니다. 그는 젊은 나이였기에 젊은이들에게 연락하고 외국과의 연락 등의 일을 위하여 제3차 명단에 들게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일차명단에 들여보내 달라고, 먼저 죽겠다고 고집하여 33인 가운데 이름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70여명의 동지들이 똑같이 죽음을 각오한 분들이었습니다. 일차 33명만 독립선언서에 서명해서 이름이 났지만 70명이 죽기를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 중에는 20세 미만의 소녀들의 죽음을 각오한 운동 모습들을 이갑성 선생이 알려줍니다. 수십 리 수백 리를 걸어가서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만세운동의 날자와 시간을 연락하는 일들을 이들이 했습니다. 정말 목숨을 건 스파이의 사명을 이들이 했습니다. 이런 희생적인 소녀들의 구체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기미독립운동이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관순열사도 그때 나이 겨우 18세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뜻을 깨달았던 기독인들이었습니다. 목숨을 내건 독립운동을 위해 세워진 독립협회에도 기독교 인사들이 참여했습니다. 서재필 등의 최고 지도부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고 중간 지도층의 젊은이들이었던 이상재, 남궁억, 신흥우, 주시경 등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평양의 독립협회지부에는 안창호씨와 초대 7인 목사의 한 분인 한석진 씨 등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짐했습니다. 고종이 양위하게 되자 대한문 앞에서 자결하여 전국적인 항일운동에 불을 붙인 홍태순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상동감리교회 전덕기 목사님 같은 분은 을사오적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교회 안에서 구체화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젊은 기독인들에 의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원흉에 대한 암살 시도가 빈번했었습니다. 일본을 위해 주구 노릇을 하던 스티븐슨에 대한 장인환 의사의 거사, 안중근 의사와 뜻을 같이하여 행동에 나섰던 우연준, 이토 히로부미를 처치하려다가 기회를 얻지 못해 자결한 정재홍, 이완용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재명 등이 모두 한말의 민족주의자인 기독교인들로서 자신들의 목숨을 내건 사람들이었습니다.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목숨을 건 일들이었습니다. 1918년 여름 에 교회 전도사였던 여운형을 중심으로 장덕수 선우혁 등이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단체의 대표 겸 총무인 여운형이 국내에 들어와서 이승훈씨와 이상재씨를 만나서 의논하고 중국으로 가서는 마침 중국을 방문한 미국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을 찾아가서 파리평화회의 한국대표파견 협조를 요청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해주도록 부탁하는 이 모든 과정에는 위험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계속 국내와 일본을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종용하고 운동자금을 모금하여 김규식씨를 평화회의에 파견하는 일 등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의 총알을 늘 각오했던 것입니다. 1919년 1월 상해에서 선우혁이 와서 양전백 목사, 이승훈 장로, 길선주 목사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면서 늘 위험에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일경의 총알을 제일 먼저 맞게되는 구체적인 만세시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평양의 교인들이 시위를 먼저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인원 동원은 평양 시내의 기독교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했습니다. 이런 준비가 한창이던 2월 중순경 서울에서는 이승훈 장로와 함태영 장로(그 후에 목사가 되었고 우리 수송교회 초대 목회자의 한 분으로 일하셨다.) 이갑성 장로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추진되었고 박용희 목사(박한호 장로 선친)님도 경기도 일원에서 뛰었습니다. 우리 수송교회는 민족독립운동과 자주운동, 나아가서 민족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선배들을 많이 모신 교회입니다. 3년 간의 옥고를 치룬 함태영 목사님을 비롯하여 초대목사 전필순 목사님이 교인들 연락책임을 맡았었고 33인 석방운동을 벌이다가 잡혀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최석주 목사님 역시 1943년 사상이 불순하다고 하여 일경에게 잡혀서 90일간 옥고를 치렀는데 그가 바로 해방직후 수송교회 첫 당회장이 되신 분입니다. 교역자들만이 아니고 평신도들도 민족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신 것을 우리교회 60년사는 알려줍니다. 예컨대 정성채 장로님은 소년단을 창설하여 민족의 독립과 해방 및 계몽에 이바지했습니다. 적극신앙단이란 이름도 교회사에 나옵니다. 그리고 6. 25.때 10여명의 성도들이 납북되거나 살해당했습니다. 100여명 안팎의 적은 수의 교인들의 거의 10%가 희생된 셈입니다. 이제 그 후손들이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이 교회에 등록한 성도들은 선배들의 삶을 본받아서 희생적인 삶을 사셔야 합니다. 불의를 몰아내는 운동, 남북의 화해운동 등등 생명을 건 운동입니다. 안일한 삶, 편안한 삶의 연장만에 관심하고 건강에만 관심 하는 쪼다, 쫄자들이 되지 말고 선배들처럼 희생적인 삶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십시다. 무슨 일이나 희생 없이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남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말고 내가 먼저 희생하면 역사는 이뤄집니다. 가정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자세를 오늘의 독립기념주일에, 이번 사순절에 다시 한번 가다듬는 계기가 됬으면 합니다.
순교와 순국/ 레3:1-5/ 2002-09-20
순교와 순국 레3:1-5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 첫째 주일임과 동시에 기미독립운동 82돌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뜻 있는 두 기념일에 깊이 연관된 문제는 희생이요 죽음입니다.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과 나라를 위해 죽은 선열들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과 인간들의 죽음을 동일선상에 놓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고 겉으로 드러난 사건, 즉 죽음만에 초점을 맞춰서 오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할 필요를 느낍니다. 두 사건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한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과 같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12:23절) 이 진리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통하고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희생하고 죽는 삶입니다. 매우 역설적입니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무수한 생명들이 죽은 결과입니다. 우리의 밥상에 놓여진 채소와 생선과 육류들을 보면서 나의 한 목숨 부지를 위해서 주변의 많은 동식물들이 죽는다고 생각 아니 하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기 위하여 많은 동물과 식물이 죽습니다. 그것들을 먹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구약의 본문에서도 소의 피를 흘려서 사람의 죄를 사하고 생명을 살리는 제사를 보여줍니다. 희랍의 신화를 보면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신들이 자주 나옵니다. 이들 선신들은 인간을 위하여 죽어주는 신들입니다. 헤라클레스, 아스클레피오스, 올페우스같은 신은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가볍게 해주려고 스스로 고난을 자취한 신들입니다. 사람의 고난과 죽음을 대신해 준 신들입니다. 이들 선한 신들은 질투하는 사악한 신들이 자신들에게 덮어씌우는 누명과 형벌을 달게 받아가면서 잘 참아내면서 그들이 봉사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고통을 분담했습니다. 이들 신들은 고통만이 아니고 죽음까지 마다 않고 받았습니다. 인간들을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면서 죽은 신들이었습니다. 희랍의 세계 외에도 그 세계의 삶을 꽃피우기 위하여 죽는 신이 있었습니다. <미노쓰>세계를 위해서는 자그레우스가, <수메리아>세계를 위해서는 타무즈가, <하이타이>세계를 위해서는 아티스가, <스칸디나비아>세계를 위해서는 발더가, <시리아>세계를 위해서는 아도니스가 수난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이들 신들의 덕택으로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인간의 문명, 즉 삶이 꽃을 피워갔습니다. 인간의 세계를 위하여 수난 당하고 죽는 신의 최초의 신은 식물의 영인 \"에니아우텐 다이몬\"입니다. 봄에 출생하여 가을에 죽는 식물의 신입니다. 이 자연신의 덕택으로 인간들이 삶을 유지합니다. 만약 이 자연의 신이 사람들을 위하여 죽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습니다. 우리나라의 신화를 자세히 읽어보아도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참고 견딘 곰의 희생으로 한족의 나라가 건국됩니다. 쑥과 마늘 그리고 어두움! 이 고난을 뚫고 나가는 인내의 시험을 통하여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화된 국모 때문에 한반도에 새로운 나라가 탄생된 것입니다. 호랑이처럼 타인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죽이는 방식이 아니고 반대로 고통을 내면에서 인내하고 극복하는 곰의 희생의 방식으로 이 나라가 탄생되었습니다. 쓰고 맵고 어두움의 이중 삼중의 고난을 견디는 자만이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 쑥과 마늘을 먹는 역겨움을 이기고 햇빛을 못 보는 어두움을 힘들게 참아내는 아픔을 통하여 이 나라의 어머니는 탄생되었습니다. 그런 희생적인 어머니들 덕택으로 이 민족이 위기에서 구하여지고 나라의 생존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100일후 그 어둡고 침침한 죽음의 동굴을 헤치고 뛰어 나올 때는 그는 이미 곰이 아니고 아름다운 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인간으로 변화된 곰의 눈에 비친 것은 아침의 밝은 햇살이었습니다.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맵고 쓴 것을 먹으면서 인내하던 곰은 어두움의 동굴에서 헤어 나와 처음으로 대하는 밝은 아침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능녀 즉 곰의 여인은 아사달 즉 아침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이름하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어머니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 나라는 세워졌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여러 나라의 신화 속에 포장되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출현했던 수난 당하는 참 신의 모습은 과연 누구일가요? 그 신의 수난이 아니면 인간도 역사도 세계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신은 지상의 역사 위에서 수십 수백 개의 가면을 쓰고 등장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은 유대 땅 갈보리 언덕 십자가위에서 그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겪은 고통과 죽음은 가장 참혹한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이 원형의 죽음이 역사 전체를 통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나타나서 이 역사를 계속 생존시키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82년전 기미독립운동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의 희생과 죽음은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필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33인중의 한 분인 이갑성 선생,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분의 회고담을 읽어보면 일경에 잡혀 죽을 각오를 하고 독립운동에 임했다고 합니다. 1918년 12월 하순부터 독립운동에 앞장 설 사람들을 찾는데 어려웠던 이유는 생명을 내걸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약 70여명의 학생 청년 그리고 지도적인 인사들이 모였는데 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분으로서 일본법을 잘 알고 있었던 함태영 씨가 \"만약 이 운동을 하다가 잡히면 사형\"이라는 말을 하면서 준비를 시켰다고 합니다. 만약 70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서명하면 몽땅 죽게되니, 3 그룹으로 갈라서 장기전을 펼쳐야 한다고 설득하여 1차에 33명이 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33인이 서명하고 싸우다가 죽고, 그 다음에 2차로 서명한 자들이 싸우다가 죽고, 그 다음에 3차로 서명한 자들이 싸우다가 죽어서 독립할 때까지 효과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자고 결의를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25명이 먼저 죽기로 각오하고 서명을 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이 나도 먼저 죽을 각오가 되었으니 이름을 넣어달라고 하여 26명, 27명, 30명, 33명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갑성 선생은 처음 25명 명단에서 빠졌답니다. 그는 젊은 나이였기에 젊은이들에게 연락하고 외국과의 연락 등의 일을 위하여 제3차 명단에 들게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일차명단에 들여보내 달라고, 먼저 죽겠다고 고집하여 33인 가운데 이름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70여명의 동지들이 똑같이 죽음을 각오한 분들이었습니다. 일차 33명만 독립선언서에 서명해서 이름이 났지만 70명이 죽기를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 그 중에는 20세 미만의 소녀들의 죽음을 각오한 운동 모습들을 이갑성 선생이 알려줍니다. 수십 리 수백 리를 걸어가서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만세운동의 날자와 시간을 연락하는 일들을 이들이 했습니다. 정말 목숨을 건 스파이의 사명을 이들이 했습니다. 이런 희생적인 소녀들의 구체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기미독립운동이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관순열사도 그때 나이 겨우 18세였습니다 . 죽음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뜻을 깨달았던 기독인들이었습니다. 목숨을 내건 독립운동을 위해 세워진 독립협회에도 기독교 인사들이 참여했습니다. 서재필 등의 최고 지도부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고 중간 지도층의 젊은이들이었던 이상재, 남궁억, 신흥우, 주시경 등이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평양의 독립협회지부에는 안창호씨와 초대 7인 목사의 한 분인 한석진 씨 등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짐했습니다. 고종이 양위하게 되자 대한문 앞에서 자결하여 전국적인 항일운동에 불을 붙인 홍태순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상동감리교회 전덕기 목사님 같은 분은 을사오적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교회 안에서 구체화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젊은 기독인들에 의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원흉에 대한 암살 시도가 빈번했었습니다. 일본을 위해 주구 노릇을 하던 스티븐슨에 대한 장인환 의사의 거사, 안중근 의사와 뜻을 같이하여 행동에 나섰던 우연준, 이토 히로부미를 처치하려다가 기회를 얻지 못해 자결한 정재홍, 이완용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재명 등이 모두 한말의 민족주의자인 기독교인들로서 자신들의 목숨을 내건 사람들이었습니다.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목숨을 건 일들이었습니다. 1918년 여름 에 교회 전도사였던 여운형을 중심으로 장덕수 선우혁 등이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단체의 대표 겸 총무인 여운형이 국내에 들어와서 이승훈씨와 이상재씨를 만나서 의논하고 중국으로 가서는 마침 중국을 방문한 미국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을 찾아가서 파리평화회의 한국대표파견 협조를 요청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해주도록 부탁하는 이 모든 과정에는 위험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계속 국내와 일본을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종용하고 운동자금을 모금하여 김규식씨를 평화회의에 파견하는 일 등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경찰의 총알을 늘 각오했던 것입니다. 1919년 1월 상해에서 선우혁이 와서 양전백 목사, 이승훈 장로, 길선주 목사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면서 늘 위험에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일경의 총알을 제일 먼저 맞게되는 구체적인 만세시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평양의 교인들이 시위를 먼저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인원 동원은 평양 시내의 기독교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했습니다. 이런 준비가 한창이던 2월 중순경 서울에서는 이승훈 장로와 함태영 장로(그 후에 목사가 되었고 우리 수송교회 초대 목회자의 한 분으로 일하셨다.) 이갑성 장로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추진되었고 박용희 목사(박한호 장로 선친)님도 경기도 일원에서 뛰었습니다. 우리 수송교회는 민족독립운동과 자주운동, 나아가서 민족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선배들을 많이 모신 교회입니다. 3년 간의 옥고를 치룬 함태영 목사님을 비롯하여 초대목사 전필순 목사님이 교인들 연락책임을 맡았었고 33인 석방운동을 벌이다가 잡혀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최석주 목사님 역시 1943년 사상이 불순하다고 하여 일경에게 잡혀서 90일간 옥고를 치렀는데 그가 바로 해방직후 수송교회 첫 당회장이 되신 분입니다. 교역자들만이 아니고 평신도들도 민족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신 것을 우리교회 60년사는 알려줍니다. 예컨대 정성채 장로님은 소년단을 창설하여 민족의 독립과 해방 및 계몽에 이바지했습니다. 적극신앙단이란 이름도 교회사에 나옵니다. 그리고 6. 25.때 10여명의 성도들이 납북되거나 살해당했습니다. 100여명 안팎의 적은 수의 교인들의 거의 10%가 희생된 셈입니다. 이제 그 후손들이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합니다. 이 교회에 등록한 성도들은 선배들의 삶을 본받아서 희생적인 삶을 사셔야 합니다. 불의를 몰아내는 운동, 남북의 화해운동 등등 생명을 건 운동입니다. 안일한 삶, 편안한 삶의 연장만에 관심하고 건강에만 관심 하는 쪼다, 쫄자들이 되지 말고 선배들처럼 희생적인 삶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십시다. 무슨 일이나 희생 없이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남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말고 내가 먼저 희생하면 역사는 이뤄집니다. 가정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자세를 오늘의 독립기념주일에, 이번 사순절에 다시 한번 가다듬는 계기가 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