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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환경을 변화시킨다/ 행16:24-34
감사는 환경을 변화시킨다/ 행16:24-34 2008-05-16 14:17:49 read : 100 저는 1963년 봄에 시골의 전깃불도 없는 교회에서 4년 목회를 하고 시골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보고 감리교의 거성이신 조신을 목사님께서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저를 부목사로 불러들여서 4년간을 목회했는데 목사님이 은퇴하시면서 저도 함께 떠나라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투표를 하거나 제직회를 해서 후임자를 결정하면 후임자가 될 것 같은데 떠나야 한다고 해서 떠나는데 몹시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별시간에 특송을 하라고 해서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 찬송을 불렀더니 온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섭섭해 했고 이사 올 때는 얼마나 많은 분들이 따라왔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또 그 교회 턱 밑에다 개척교회를 시작했다면 몇 십 명이라도 모였겠지만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이나 온다는 망우리의 하꼬방 같은 교회에 부임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더니 세계 최대 감리교회가 되지 않았습니까? 작년에는 WMC 역사상 처음으로 Conference Center가 아닌 교회에서 훌륭하게 치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금란교회에 대한 계획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실망도 하고 섭섭한 마음도 들었으나 하나님이 이런 큰 계획과 축복을 예비하신 것을 몰랐던 것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감사만 하면 환경이 변하여 좋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 1.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라 “웃을 일이 있어야 웃는 것이 아니라 웃다 보면 웃는 환경으로 변한다”라는 말대로 감사한 일이 꼭 있어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생활을 하면 감사한 환경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데이빗 스코퍼 박사(Dr. David Scoper)는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과의 차이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는 깨어 있는 순간을 고민하며 지나고 자기를 가두어버린(self-imprisoned) 성도는 감사함으로 지낸다. 성도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느냐 불평하는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라고 했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사는 사람은 감옥에 안 가도 감옥생활을 하는 것이고 늘 감사하는 사람은 감옥에서도 천국생활, 평안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가집니다. ① 하나님은 좋으신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며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자식들을 좀 엄하게 키운 편이어서 거짓말하거나 속이거나 잘못하면 엄하게 꾸짖고 때리기도 하니까 아들 목사는 아버지를 싫어하는 편이고 나아가서 아버지는 자기를 미워하는 줄만 알았다가 어려운 해병대를 갔다 온 다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30년이 걸렸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 악한 인간도 자식을 사랑할 줄 알거든 하물며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죽으시게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또 하나님을 정말 여러분의 아버지라고 믿는다면, 어떤 고난과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무조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내 인간의 욕심과 고집대로 살기 때문에 벽에 부딪혀 머리가 깨지기도 하고 넘어져 무릎이 깨져 피가 나기도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독생자까지 우리 위해 내어주신 좋으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고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달콤한 일이 생기지 않아도 좋으신 하나님, 그 한 분 때문에 늘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는 3장 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했고, 19절에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환경이 좋건 나쁘건 간에, 농사가 잘 되었건 안 되었건 간에, 여호와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깊은 신앙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② 하나님은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실패와 고통과 슬픔, 그 어떤 것이라도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고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어렵고 앞이 안 보이고 캄캄해 보여도 지나고 보면 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인 소경 목사, 안요한 목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37년 동안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비방하며 살다가 어느 날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헤매다가 어느 날 자살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뚜렷한 음성이 들려오기를 “요한아, 요한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하는 음성을 듣는 순간 회개의 눈물이 쏟아지면서 뒤집어졌습니다. 그리고 영의 눈이 밝아짐을 느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말하기를 “저는 장님이 되고 수지맞았지요. 눈으로 보는 37년보다 앞 못 보는 7년이 오히려 행복하고 보람이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밝은 눈을 가지고 살다가 영원히 캄캄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낫겠습니까? 잠깐 동안 고생스러워도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영의 눈이 열려서 믿음으로 살다가 천국 가는 것이 낫겠습니까? 그것뿐이 아니라 우리 좋으신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으나 형들의 시기로 종으로 팔려가 외국에서 종살이를 했고 정직하게 가정 일을 잘 했으나 억울하게 감옥에 가서 몇 년이나 고생을 했지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형들이 찾아왔을 때 복수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0장 20~21절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억세게 재수 없는 사람, 저주 받은 사람으로 보였으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틀림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결코 이 말씀을 의심해선 안 됩니다. 2. 감사와 찬송은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환경을 극적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① 닫혔던 문이 열리고 얽어맨 사슬이 풀립니다 본문에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은 점하는 귀신에 붙잡혀 고생하는 한 여종을 보고, 주인은 알아맞히어 돈을 벌기 때문에 좋아했지만 바울은 영안으로 볼 때 마귀에게 사로잡혀 고생하는 비참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 결과 그 여종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그 주인은 이익의 소망이 끊어졌으므로 온갖 거짓말을 다 해서 관가에 고발을 해 옷을 벗기고 멍이 들고 피가 나도록 때렸습니다. 그리고 손에 수갑을 채우고 발에는 차꼬를 채워서 맘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면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하게 버려둘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등등 불평할 수가 있었겠으나 바울과 실라는 그 캄캄한 감옥 속에서 기쁜 마음으로 힘껏 찬미하고 감사했습니다. 감사한 마음 없이 찬송이 입에서 나옵니까? 깊은 밤중에 갑자기 옥터가 흔들리고 닫혔던 철문이 열리고 수갑이 풀려 떨어지고 발에 채웠던 차꼬가 풀렸습니다. 결국 자기를 때리던 간수들이 찾아와 무릎 꿇고 빌며 “선생님들,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할 때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라고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감사와 찬송의 힘이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닫혔던 철문이 활짝 열리고 우리를 얽어맨 마귀의 쇠사슬과 차꼬에 얽매였던 몸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감사와 찬송은 우리를 가두었던 마귀를 물리치고 닫혔던 축복의 문이 열리고 우리를 얽어매었던 것들이 풀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십니다. 미 공군 군목이었던 캐로덜스(Merline R. Carothers) 목사님은 “감사와 찬송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모든 시험을 기쁨과 축복으로 바꾼다”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론이라는 병사의 아내가 “만일 남편이 월남에 가면 나는 자살하고 말겠다”라고 하면서 군목님을 찾아와 상담을 청했습니다. 그 부부에게 무릎 꿇으라고 하고는 감사기도를 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반항을 했지만 결국 기도를 따라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월남에 가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억지로라도 감사를 했는데 자기는 어려서 양녀로 갔다가 버림을 당했는데 자기 친정 오빠를 찾게 되었고 그 오빠의 친구가 법무관이었는데 그가 도와서 월남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감사와 찬송이 이렇게 환경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느 가정에 한 소녀가 있었는데 가끔 발작을 일으켜 부모한테 행패를 부리고 가구를 부수곤 했습니다. 캐로덜스 목사님은 그래도 감사 찬송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더 발작하면서 화분까지 방바닥에 집어던져서 화분이 깨지고 흙으로 온통 바닥이 지저분해졌습니다. 그래도 계속 찬송하고 감사했더니 그 마귀가 쫓겨나고 그 딸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사와 찬송은 마귀도 무서워 떱니다. ② 마귀를 이깁니다 사실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쇠고랑 차고 감옥에 갇힌 것은 점하는 귀신이 여종에게서 나와 전도를 못하게 방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망,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고 찬송했더니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고 쇠고랑이 풀어져 내려서 결국 간수와 그 가족들을 전도해서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③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유다의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과 암몬과 마온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서 온 유다에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하기를, 역대하 20장 12절에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15절에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시고, 17절에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하시면서,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21절) 하신 말씀대로 찬송하고 감사하며 나아갔더니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었다가 그 삼 개국 연합군을 쳐 그들을 패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굳게 믿고 찬송하며 감사했더니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도 승리하는 비결은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실패에서 승리로 바뀌게 합니다. ④ 불화가 화로 바뀝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감사하는 말을 자꾸 해보십시오. 다툼과 분쟁이 사라지고 화목과 평안이 옵니다. 부부간에도 작은 것이라도 서로 칭찬하고 감사해보십시오. 싸움이 일어나겠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작은 것이라도 칭찬하며 감사할 때에 그 가정은 평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큰일에만 감사하지 말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교통사고나 암병에 걸렸다 나아야 감사하지 말고 작은 일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사고와 재난을 당하여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야 감사하면 항상 죽을 뻔한 일만 일어나야 감사할 것 아닙니까? 큰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지 말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죽을 뻔하다가 살아날 때에만 감사하지 말고 평상시에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⑤ 감사하면 감사한 일이 더 생깁니다 하나님도 감사하는 성도에게 더 큰 복을 주시며 기뻐하시지 사람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주고 싶고 더 돕고 싶은 법입니다. 감사하고 찬송할 때에 감옥이 천국 생활로 바뀌는 것입니다. 감사는 이렇게 환경을 바꿉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마6:25-34/ 김기석 목사/ 환경주일설교/ 2015-06-14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마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 죽음의 그림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불길한 검은 구름이 우리 머리 위를 뒤덮고 있는 것 같은 나날입니다. 메르스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웬만하면 대중이 모인 곳에 가려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아파도 차마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는 게 오늘의 실정입니다. 외국인들도 방문을 꺼립니다. 초기에 확산을 막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런 걸 두고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소비 심리 위축을 염려하여 한국은행은 기준 금리를 인하했다고 합니다. 책임 있는 주체들은 어찌하든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는 1940년대의 가상 도시인 오랑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의사인 베르나르 리유는 어느 날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에서 죽은 쥐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기분이 좀 나쁘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며칠 후 도시 전체에서 죽은 쥐가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그는 시청 공무원에게 전화를 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공무원은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야 뭐든 할 수 있다면서 책임을 방기합니다. 전형적인 관료주의입니다. 베르나르는 오랑시 의사협회장인 리샤르에게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당장 페스트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고 있는 데도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관료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의사협회장의 모습을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속상합니다. 그런 가운데 낙동강이 죽음의 강이 되었다는 보도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녹조가 순식간에 번졌습니다. 보를 만들어 물을 흐르지 못하게 만드니 물이 병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는 식수원으로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고 위험이 많은 고리 원전의 작동 중단을 권고하는 안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에너지 기본계획을 통해 핵발전소 2기를 더 짓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핵발전소를 줄여가는 추세에 역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햇빛과 바람을 통해 청정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언제 파국으로 몰아넣을지 모르는 핵에너지에 집착하는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국제사회와 약속했던 온실가스배출 감축안도 산업에 부담을 준다는 핑계로 후퇴시키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낙인이 깊게 찍혀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 곤고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본래 조화롭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 몫의 삶을 한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스런 삶의 방식으로 인해 그러한 조화는 무너졌고, 피조 세계는 지금 신음하고 있습니다. 메르스라는 질병도 개발을 명분으로 동식물들의 서식지를 파괴한 결과 가운데 하나라고 하더군요. 서식지를 빼앗긴 박쥐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곳에 내려와 낙타를 감염시켰고, 낙타는 또 사람에게 질병을 전달했다는 것이지요. 질병이 점차 세계화되는 추세입니다. 매해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문명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탐욕입니다. 지금의 문명은 욕망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함으로 유지됩니다.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의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게 문제입니다. 지구 생태계는 더 이상 인간의 탐욕스러운 삶의 방식을 버텨낼 힘이 없습니다. 이럴 때면 삶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번영의 신학’을 통해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사람들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게 날로 매진한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입니다. 숨 가쁘게 달려보지만 행복은 늘 신기루처럼 저만치 멀어지고 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삶을 장악하고 있고, 함께 살라 하신 이웃들은 잠재적 경쟁자 혹은 적처럼 보입니다. 환대보다는 적대감이 넘칩니다. 옳고 그름을 정밀하게 판단하기보다는 진영 논리에 따라 네 편 내 편을 가르며 싸웁니다.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분노 조절 장애를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이렇게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산상수훈의 한 단락입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삶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루하루 끼니를 잇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고, 가까운 시일 안에 그런 상황이 개선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구차한 인생들, 땅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리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삶의 곤경을 해결해 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다 해서 마음까지 빈곤해져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온통 땅의 현실에 사로잡혀 살다보면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원망의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은 곧바로 타자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적대감은 자기 속에 있는 행복의 가능성조차 제거합니다. 주님은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너무 한가롭고 낭만적인 교훈 같습니다. 찜질방에서도 자지 못하고 PC방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도 많은 현실입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은 소중합니다. 삶이 곤고할수록 가끔 시선을 더 큰 세계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치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이들은 희망의 불모지인 그곳에서 비인간이 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극한의 상황이었기에 살아남기 위해 먹을 것 때문에 다투고, 사소한 편익을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자기를 지켜준 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 비인간화시키려는 이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용소와 같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육인 동시에 영이기 때문입니다. 육의 굶주림도 문제이지만 영의 굶주림은 더 큰 문제입니다. • 아름다움에 눈 뜨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차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고 입히시지 않더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단락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고 맡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도 보고 싶습니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향유하는 능력이 회복될 때 우리는 과도한 욕망의 지배에서, 소비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작고 사소한 것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빈곤하지 않습니다. 전남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에 사는 유동종(84) 할아버지와 강연순(83) 할머니 집에 귀한 손님이 들었습니다. 두 분만 사는 단출한 살림이 늘 쓸쓸하지만 두 분은 지금 외롭지 않습니다. 우편함 속에 기쁜 소식이 깃들었기 때문입니다. 새가 그 안에 둥지를 틀고 작고 연약하고 이쁘고 위태롭고 애틋한 알 여섯 개를 낳아 놓았습니다. 노부부는 그 새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다 해놓았습니다. 우편 배달원에게 우편물을 다른 곳에 놓아달라는 메시지도 적어 놓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주의하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미 새가 아주 대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새가 여간 영리해. 대문간에 내가 의자 놔뚜고 앙겄으문 절대 일로 안 옵디다. 두 마리가 저기서 찌웃짜웃 하고 있제. 그라문 내가 인자 들오니라 하고 비껴주고 그라제. 새가 어디 멀리 안 가. 알 지킬라고 가찬 디서 항시 망 보고 있제. 긍께 내가 여그 앙겄다가도 알 품으라고 얼릉 비껴주고 그래.”(<전라도닷컴>, 2015년 6월 158호, p.34) 글쓴이는 굳이 ‘갑을’을 따지자면 우편함에 세든 새 부부가 ‘을’이고 집주인이 ‘값’인 셈이지만 집주인이 더 눈치를 보고 사는 셈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산골에 깃들어 사는 시인 박남준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부나 권력을 가진 그 누구도 아닌, 딱새 청딱따구리 버들치 귀뚜라미 잠자리 등등의 눈치를 보며 사는 삶의 아름다움이여.”(p.35)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앞의 이야기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고 여린 생명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비에 사로잡힌 시편 시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시24:1) 진실한 믿음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임을 겸허히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함부로 대하거나 훼손할 수 있겠습니까?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을 규정하는 단어로 저는 ‘아낌’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아끼다’라는 타동사는 ‘내어 놓거나 버리기를 아깝게 여기다’, ‘소중히 여겨서 함부로 쓰지 아니하다’라는 뜻과 더불어 ‘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애쓰다’라는 뜻으로 활용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아낄 뿐만 아니라, 대하는 모든 사람을 배려하는 삶이야말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삶입니다. • 삶의 우선순위 우리 삶이 이렇게 무겁고 또 뒤죽박죽이 된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과 나중에 구해도 되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과 말이 뒤바뀌고, 선과 후가 착종되면서 삶이 고단해졌습니다. 시인 김사인은 “얼빠진 집구석에서 태어나/허벅지 살만 불리다가 속절없이 저무는구나./내 새끼들도 십중팔구/행랑채나 지키다가 장작이나 패주다가 풍악이나 잡아주다가 행하 몇 푼에 해해거리다 취생몽사하리라./괴로워 때로 주리가 틀리겠지만/길은 없으리라.” 하고 노래합니다. 시 제목이 <한국사>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흘러가버리는 인생이 씁쓸합니다. 시인은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만들어내는 역사의 풍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길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33) 주어진 일상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모셔 들이십시오. 학교나 집에서 공부하고, 일터에서 일하고, 벗들과 어울려 놀고, 가족들과 지내는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삶이 가지런해지고 따뜻해질 것입니다. 작고 여리고 어여쁜 생명들의 아름다움에 눈 뜨고, 그것을 세심하게 돌보려 할 때 우리 삶의 비애는 줄어듭니다. 이런 돌봄에는 지금 비참하고 곤고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돌보는 마음은 우리 내면의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명약입니다. 우리 마음이 건강해지면 우리가 잠시 세 들어 살고 있는 자연 세계도 평안해질 것입니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세계 인구가 10억 명에 달한 때가 1810년이라 합니다. 그런데 불과 200년 사이에 인구는 그 일곱 배인 70억 명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으로부터 야기된 새로운 멸종이 멀지 않았다는 경고음이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려야 합니다. 생명 중심적 사고로의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공의 사다리 맨 밑단에 있는 이들조차 각자에게 주어진 생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살도록 세심하게 보살펴야 합니다. 배우지 못했어도, 물려받은 것이 없어도, 병약하게 태어났어도, 실패를 거듭해도 우리를 부둥켜안아주는 공동체가 살아 있는 한 절망이란 없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일을 하라고 부름 받은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어 하십니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그것을 아끼고 돌보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면이 풍요로운 이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법입니다. 이 아름다운 초대에 삶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깨끗한 환경/ 창1:24-31/ 이성희 목사/ 2015-02-12
깨끗한 환경 창1:24-31 발자국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발 사이즈나 발의 건강 척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지배하는 공간의 지수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인들은 침대를 사용합니다. 침대는 자고나도 공간을 점유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부자리는 아침에 개면 공간을 원점으로 환원합니다. 의자는 앉고 일어나도 공간을 점유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석은 앉았다가 치우면 공간을 절약합니다. 가방은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아도 공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 보자기는 물건을 쌌다가 풀어놓으면 공간을 돌려줍니다. 서양의 양복은 입체수납하기 때문에 공간을 유지합니다. 우리네 한복은 접어서 장롱에 평면수납하기 때문에 공간을 절약합니다. 병풍이나 부채도 사용한 다음에는 다시 접어놓으면 공간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색종이 공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주로 오려 붙이기를 하지만 우리는 접어서 치마저고리를 만들고 배를 만듭니다. 우리나라는 공간경제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작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환경 파괴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자국 지수가 낮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라고 하는 OECD 가입국 가운데 하위 다섯 번째라고 합니다. 브라질은 아시는 대로 국토가 굉장히 넓은 나라입니다. 발자국지수가 상당히 높은 나라입니다. 특히 아마존 유역에는 얼마나 많은 열대림이 있는지 ‘세계의 허파’라고 일컬어집니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외채가 많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에 브라질에 갔을 때에 들은 얘기입니다. 브라질이 미국에 약 200억 달러의 외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브라질이 미국에게 부채를 갚지 못하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모라토리엄을 선포한 것이지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부채를 당장 상환하라고 하였답니다. 그랬더니 브라질은 돈이 없으니 아마존의 나무 200억 달러 치를 베어가라고 하였답니다. 아마존의 나무가 사라지면 미국은 당장 심각한 기상의 변화가 온다고 합니다. 가장 큰 피해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200억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브라질에 가서 안내원들과 교민들에게 여러 번 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볼 때 이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이건 폭력배가 하는 억지지 이게 무슨 정당하고 신의 있는 국가 간의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들은 자랑스럽게 이 이야기를 합디다. 지구의 환경을 담보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지구적 폭력이며 인류에 대한 또 다른 신종 테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간지수를 낮추어야 합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을 최대화해야 합니다. 이런 관심은 생태적 관심에서 성경적 신적 명령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환경보존은 하나님이 주신 신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게레트 하딘이란 분이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 책을 썼습니다. 공유지의 자유사용권을 신봉하는 사회에서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끝내 모두 파멸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환경이란 인류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연은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올해 지구 표면의 온도는 1961년부터 1990년까지의 평균 온도보다 0.45도가 높아졌습니다. 얼마 안 높아진 것 같지만 이 온도는 대단한 환경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지구상에 폭설이 내리고,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불고, 한발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비옥한 땅들이 급속하게 사막화가 진행됩니다. 지난 주간의 신문에는 알프스에도 황사가 와서 눈이 누렇게 변했습니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 먼지가 그곳까지 간 것입니다. 지구의 온난화의 직접적 피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는 인구가 15,000명밖에 되지 않는 9개의 산호섬으로 된 나라입니다. 산호섬의 높이가 해발 4.5미터 이하입니다. 바로 이 작은 섬나라가 지구 온난화의 첫 희생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투발루 기상청은 지난 2월 19일 오후 조수가 평균 해수면보다 3.07미터 높아지고 20일 오후에는 3.1미터에 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섬 대부분 지역이 1시간 정도 바닷물에 침수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였습니다. 나우루, 키리바시, 사모아, 투발루는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나라들인데 이 나라의 교회들이 ‘세계선교협의회’(CWM)의 회원 교회들로서 저도 그 곳의 교회 지도자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들이 물에 잠겨 어떻게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그 곳의 교회들이 다 바닷물에 잠겼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동식물은 50년 내 30%가 멸종한다고 합니다. 어떤 영국의 과학자는 2100년에는 지구의 온도가 5.8도 상승한다고 합니다. 그 분은 별 걱정 다 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5.8도 상승해서는 지구가 견디지 못하고 그 때까지 지구가 생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환경보전론자들은 지구상에 서식하는 동식물이 약 1400만 종이고 약 1만2000종이 멸종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수천 종은 이미 멸종에 다가가고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다른 나라가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의 환경지속지수는 전 세계 142개 국가 중 136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환경에 대하여는 우리나라가 꼴찌나 다름없습니다. 수출입 물량이 세계 12위인 나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환경문제는 이제 어떤 나라의 지엽적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적 과제이며 온 인류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입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할 얘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문제입니다. 요즘의 환경용어로 말하면, 에덴은 완벽한 생태계였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고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깨끗한 환경은 깨끗한 양심, 올곧은 인간성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한 환경이란 어떤 상태입니까? 첫째, 창조의 원리를 보존하는 상태입니다. 창세기 1:1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일이었고, 이 세상의 시작이었습니다. 히브리서 3:4에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 신앙 고백의 주체입니다. 지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한 번도 인간이 주인이 된 적이 없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는 “종류대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생물을 종류대로, 육축을 종류대로, 기는 것을 종류대로,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모두를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을 종류대로 만드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채소와 나무를 사람의 식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 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질서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질서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질서 있게 세계를 운행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그 질서를 하나님은 한 번도 파괴하신 적이 없습니다. 욥기 38:25에는 말합니다.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비도 우뢰도 번개도 다 길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의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의 모든 성장과 번식과 이동이 길이 있습니다. 작은 기러기도 그 나는 길이 있어 자기 길로 날아갑니다. 아무렇게나 자라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길이 있고 성장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이고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원리와 길을 잘 보전해야 깨끗한 환경이 됩니다. 길을 파괴하면 진흙탕이 되고 무질서가 됩니다. 환경파괴는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니라 제 손가락으로 제 눈 찌르기입니다. 모든 피해가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부메랑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진리입니다. 파괴된 창조질서는 완벽하게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환경의 파괴는 파괴자 스스로에게 그 대가가 돌아옵니다. 최근 서울대학교의 황우석 교수가 사람의 체세포와 난자만으로 인간 배아(胚芽)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세계 최초라고 하여 세계 유명대학교에서 그를 모셔가려고 하고 있지만 그는 한국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에는 그가 “당분간 인간 난자를 가지고 복제 연구하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신이 시킨다고 하더라도 인간복제 실험은 거부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그 분은 지식과 더불어 지혜가 있는 분 같아 보입니다. 이사야 55:8에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고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가늠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인간적으로 조작하면 낭패를 당합니다. 곧 파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판단해야 합니다. 가장 깨끗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의 손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도 하나님의 생각과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되어야 가장 깨끗한 환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란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땅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깨끗한 환경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깨끗한 나라가 되어야 이 기도는 이루어집니다. 둘째, 피조물을 바르게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신적 명령이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인간에게는 황송한 하나님의 명령입니까?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유용하게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그릇된 사고는 지배하고, 파괴하고, 오용하고, 마구 사용하였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할 것 없이 바르게 다스려야 합니다.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동물이 인간에 대하여 공격적이 됩니다. 식물도 점점 못 먹게 됩니다. 땅을 얼마나 더럽혔는지 땅이 곡식을 내지 못합니다. 북한에도 그렇습니다. 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지런히 일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너무 그 동안 서로 경쟁하느라 화학 비료를 많이 줘서 이제는 땅이 생산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땅이 지치고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동물의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병들이 동물만의 병이 아니라 인간의 병입니다. 이 병이 동물의 잘못으로 생긴 병이 아니라 인간이 잘못하여 생긴 병입니다. 광우병, 돼지콜레라, 조류독감, 장출혈성급성감염증(O-157),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이 잘못 다스린 결과입니다. 다스린다는 말을 영어로 ‘govern’이라고 하지요. 이 말의 뜻을 가진 헬라어는 ‘쿠페르네시스’(kupernesis)란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지도자가 별과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땅도, 동식물도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지 지배할 대상이 아닙니다. “다스리다”의 히브리어는 통치권 행사를 의미하는 어근을 가졌습니다. 통치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통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8에는 다스리는 은사를 이렇게 말합니다.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8의 말씀을 보면 “다스리는 것”은 분명히 은사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로 활용해야 합니다. 은사가 되어야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조물이고 다른 모든 것도 우리와 같은 피조물인 것을 알 때에 깨끗한 환경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자가 아니라는 겸허한 자세가 환경을 깨끗하게 보존하게 합니다. “인간은 환경의 정복자가 아니고 환경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자의식이 있을 때에 환경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본래의 모습을 보전해 나가며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 환경의 변화가 갈수록 큽니다. 홍수, 한발, 기근, 따뜻한 겨울, 추운 여름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잘못 다스리니까 발생하는 것입니다. 러더 위트락이 쓴 ‘영적 성숙’이란 책에는 “부럽게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락의 결과로 그들은 세상과 자신에 대해서도 그릇된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에 대한 지식을 상실하게 하였습니다. 상실할 뿐만 아니라 그릇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릇된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파괴하는 지식입니다. 지배하는 지식입니다. 훼손하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군림하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아니라 원래의 지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래의 환경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 31절에는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합니다. “좋았더라.”는 말은 “토브”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좋고 아름다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창조의 완벽성,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것은 모든 창조를 다 끝내셨고 인류를 창조하셨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인간을 만드셨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원리대로 다스렸다면 가장 좋은 상태일 텐데 그렇지 못하니 좋지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파괴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깨끗한 환경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우리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C. S. 루이스는 “창조주께서는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즐길 수 있는 아름다움을 만드셨다.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반응한다.”고 하였습니다. 루이스는 이것을 ‘일상적인 반응’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말한 일상적 반응입니다. 그런데 더러워진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보고 반응하지 못합니다. 더러운 것을 보아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2:18에는 “좋지 못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하나님이 2장에는 좋지 못한 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불만족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관계적 본성에 확실한 강조를 하십니다. 창세기 6:6에는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상서 15:11에는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좋아하셨던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후회하십니다. 피조물의 타락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루소는 말했습니다. “창조자의 손을 떠날 때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인간 손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나빠졌다.” 사람의 손은 만지면 만질수록 점점 더 나빠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손이 타락한 손이기에 그렇습니다. 결론 어떤 분이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가 좋아하는 일을 주시지 않으시려면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게 만들어주겠습니까?” 우리의 절실한 관심과 요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무얼 좋아하실까? 이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상태가 나쁜 상태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좋은 자녀는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보통 자녀는 자기의 좋은 것을 합니다. 보통 이하의 자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나쁜 자녀는 부모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골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녀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해 드리는 자녀가 됩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본래 상태를 깨끗하게 유지하고 보전하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이 되게 합시다. 이 일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며 만드신 모든 환경을 깨끗하게 잘 보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당신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창1:28, 롬1:20/ 환경주일설교/ 2013-06-05
당신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창1:28, 롬1:20 일본 대지진과 해일,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이웃 나라인 한국과 세계 모든 나라에 경각심을 주었습니다. 나아가 원전에 대한 획기적인 정책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세계 곳곳의 기상 이변은 지구 재앙이 이미 시작됐음을 암시합니다. 게다가 생물 종의 대멸종, 식량의 급격한 감소는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 또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위기입니다. 결국 인류는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은 예수입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과 죽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것이 예수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이 제 숨을 평화로이 쉬며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걸작입니다(창 1장). 하나님은 만물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신 26:15).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온 생명이 살게끔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사는 모든 생명은 존엄하며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창조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육화되는 사건입니다. 어미가 자식을 낳듯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피조물은 서로 형제자매인 셈입니다. 가톨릭 수녀였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은 “하나님은 자연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매일 매순간 자연으로 찾아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환경을 보전하고 돌보는 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신 최초의 사명입니다. 자연은 진리를 가르치는 친구입니다. 중세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자연은 성서 이전의 성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생태신학자 도드는 “예수께서 자연계의 비유를 많이 말씀하신 것은 자연계의 질서와 영적인 질서 사이엔 내적인 친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자연의 과정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두 가지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하나는 좁은 길입니다. 협착하고 위험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하지만 그 길의 종착역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른 한 길은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도 많고 편리한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은 멸망입니다. 풍요와 편리를 따라 살아온 인류는 지금 지구 재앙이란 거대한 벽에 부딪혀 있습니다. 이를 넘어 설 수 있는 길은 역시 자연에 있습니다. 절제의 삶, 좁은 길은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있습니다. 그 삶이 지구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계시라면 예수 사건은 특별한 계시 사건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담고 있는 자연 계시입니다. 에크하르트는 “만물이 제 모습에서 하나님을 나타내 보일 때 하나님은 비로소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계시 사건입니다.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 보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얻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 사건임을 잊지 마시고 그 길을 걸어가십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고, 모든 만물을 대함에 있어 하나님 대하듯 하고, 착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우리의 예배입니다. 자, 이 거룩한 행보를 시작하십시다.
당신이 처한 환경 속의 진리/ 막4:35-41
당신이 처한 환경 속의 진리 막4:35-41 말씀을 시작하기전 세가지의 비유를 들을것입니다. 한번 공통점을 맞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이 비유 에 들어 있는 사람은 아닌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첫 번째, 어느 목사님의 간증에서 들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목사님이 심방을 하실때 대부분 권사님, 전도사님과 함 께 심방을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권사님과 함께 중환병을 가지고 있는 교회성도를 심방하러 가셨습니다. 병원 중 환자실에 있는 그 환자와 가족을 놓고 함께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이 분을 살려주시옵소서\\\" \\\"주여! 주 님이라면 능히 하겠나이다. 믿습니다\\\"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병원을 나오자 마자 권사님이 목 사님께 말합니다. \\\"목사님, 그분 병이 심각하네요, 얼마 못살게죠?\\\"라고 묻더랍니다. \\\"얼마까지 살려주시옵소서, 주님이라면 능히 하겠나이다 믿습니다\\\"라고 소리치며 말했던 것이 몇분도 안되어 \\\"얼마 못살겠죠\\\"라고 말한것입니 다. 두 번째, 미시시피에서 교회와 술집과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재판은 이렇습니다. 교회 앞에 큰 술집이 있어서 교 회가 은혜스럽지 못했는가 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는 말씀도 있는데 이 교회는 부흥이 안되는 이유를 술집 때문에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과 재직들이 모여서 술집이 안되어서 망하든지, 불이 나서 망하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 앞에 술집이 없어지길 기도하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작정기도를 하고 열심히 그 앞에 술집을 없애달라고 목사님과 성도들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대로 그 술집이 불이 난 것입니다. 문제 는 여기서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 불난 술집주인이 고소를 한 것입니다. 이유는 자기 술집 앞에 있는 저 교회가 자기 술집 망하게 기도해서 자신의 술집이 불났다고 고소한것입니다. 재판장이 교회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당신 은 정말로 술집이 불이 나도록 기도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답변이 가관입니다. 목사님이 말하길 \\\" 재판장님, 기도한다고 불납니까?\\\" 그래서 재판장이 이런 판결을 내렸습니다. \\\"기도한다고 불나냐고 말하는 목사보 다 기도해서 불났다고 하는 술집주인이 더 믿음이 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역사가 H. G 웰즈가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 주교가 기도시간이 되어서 성전에 들어가 기도를 했습니다. \\\"오 전능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 기도를 시작했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오냐 네가 무엇을 고하려 하느냐.\\\" 하니까 깜짝 놀란 대주교 는 \\\"하나님! 정말 제 기도를 듣고 계셨군요.\\\"하면서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방금 말했던 대주교, 그리고 술집주인과 재판정에 섰던 목사, 병원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나와서 오래 못살을것이라 고 말했던 권사님 이들에게는 공통적인 것이 있지요. 무엇입니까? 모두가 형식적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순간 순간 지금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신이 없이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예배 보기 위해 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한시간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문목사 한테 보이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자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리임을 명심하십시오. 주님이 지금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형식적으로 하지 마십 시오. 우리가 찬양할 때 형식적으로 하지 마십시오. 교회 나올 때도 형식적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외식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는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탕자 같은 제가 왔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살다가, 그 저 믿음도 없이 방황하다가, 그저 내 몸 하나 추스르기 위해서 세상에서 살다가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 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주님 앞에 아뢰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6) 주님이 말씀합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신학하는 분들이 대부분 고민하고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것이 무엇인가 또는 영성이란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공통적으로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 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우리의 생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살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분, 바로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질 않지만 누구나(Everybody),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 목사나 여러분이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심 판을 받게 된다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난주에 말씀했습니다. God is watching you. 이 세상과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보고 계시고 우리의 삶의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했던 대주 교, 목사, 권사는 교회 따로 세상 따로입니다. 아니 교회 안에서도 기도 따로입니다. 따로국밥이 따로 없지요. 우리가 안경을 쓰고 다닙니다. 시력이 나쁘기 때문에 안경을 쓰지요. 눈이 있다고 모두가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맹인중에도 눈은 있어도 보지 보하는 사람이 있지요. 눈은 있어도 안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시력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도 똑 같습니다. 교회는 다녀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씨퍼렇게 눈을 뜨고 계시는 것을 못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시력이 없는것입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신앙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담대하다고 하지요. 그리고 실제로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교회와 세상에서 두려울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살아계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돕고 인도하시 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주님의 자녀임을 알고 있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은 간땡이 가 부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무서울것이 없습니다. 순교도 합니다. 목숨을 주님을 위해서 내 놓습니다. 그렇 다고 우리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면 안됩니다. \\\'주여 간땡이가 붙게 하여 주옵소소\\\' 간땡이가 부었다고 예수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주여 내 마음을 열어 주를 보게 하옵소서. 믿음의 눈을 주 시옵소서, 믿음의 시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마가복음 4장 35-41절의 말씀을 과거에 제가 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틀란타에서 공부하고 있 었을 때 그곳에서 3시간정도 떨어진 사우스 캘롤라이나에 있는 클램손 대학에 위치한 사랑의 교회에서 제가 오늘 Text를 가지고 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교수와 청년들이 말씀이 듣고 싶어 그래도 그곳에서 제일 가까 운 아틀란타에 계시는 목사님들에게 말씀을 증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곳에 가려고 하지를 않았습니 다. 아틀란타에 200명, 300명의 목사님들이 있는데 아무도 그곳에 가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이유가 많겠지요. 모 두가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영적인 면에서 탈진된 상태였습니다. 영적인 삶을 위해 몸부림 치던 때였 습니다. 공부하는 저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기도한 것이 있었습니다. 함부로 영 혼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는것도 너무나 큰 잘못이기에 참으로 신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 나님, 나도 목사인데 내가 거기에 가면 안되나요. 하나님 나를 쓰시면 안되나요.\\\' 정말로 이사야에 있는 6장 8절 이 저에게 그대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주님이 보내주셔서 제가 가게 되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차에 태우고 그리고 신실이를 데리고 매일 왕복 6시간을 운행하면서 열심히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거기에 계신 분들과 늦게까지 교제하며 돌아왔습니다. 아침 8시에 출발 해서 새벽 1시 2시에도 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당시 주님이 제 마음을 열어 주셔서 저는 이곳 내쉬빌로 오기까지 한번도 말씀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도 말씀을 전하는 것을 빠지지 아 니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교수와 청년들을 놓고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매주 매주 교회가 울음바 다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사가 울고 두 번째는 아내가 울고 세 번째는 교수가 울고 네 번째는 청년들이 울고. 제가 그곳에서 깨달은 사실은 주님이 간땡이를 붇게 하지 않으시고 먼저 목사의 눈을 씻어 주셨습니다. 공부한다고 하면서 메말렀던 나의 영혼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여하는 자들의 눈을 또한 씻어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연합교회도 눈이 씻겨 지는 역사가 먼저 일어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오는 모든 자들의 눈이 씻겨져 하나 님을 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씨퍼렇게 살아계시는 것을 체험하길 바랍니다. 여러분, 눈이 있으면 무엇합니까? 시력이 있어야지요. 귀만 있으면 무엇합니가? 들어야지요. 주님이 말씀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시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귀가 있기를 바랍니다. 연합교회에 나오는 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또한 그 임재를 바 로 우리 자신의 현장에 가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우리 가정의 현장이, 우리 학업의 현장이, 사업 의 현장이, 전도의 현장이 축복 받을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과 대화함(Engage the Word) 한번 전한 말씀도 또 읽어보면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것을 체험합니다. 하루 하루가 다른 것처럼 과거에 는 보지 못했던 말씀이 새롭게 보이길 시작합니다. 과거 사우스 캘롤라이나 클렘손 대학에서 전한 말씀은 교회 인 터넷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저는 과거에 전했던 말씀과는 달리 오늘의 말씀을 새롭게 조명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 늘 말씀 제목을 \\\'당신이 처한 환경속의 진리\\\'라고 정했습니다. 잘 아시는 말씀이기에 거두절미하고 말씀을 직접 우 리의 환경속으로, 우리의 현장으로 가지고 가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이 말하잖아요.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배뒤에서 잠들어 계셨습니다. 만일 우리중 한 사람이 과거 2000년 전 풍랑이 일어난 곳을 갈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어서 바로 풍랑의 현장으로 갔 다고 합시다. 풍랑이 일고 있는 그 현장,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이 지금 처한 환경속에서 진리가 무엇입니까?\\\" \\\"당신이 처한 환경속에서 참된 이치는 무엇입니까,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그들의 머리로는, 진리로는, 참으로 알고 있는 이치는 \\\"이제 풍랑으로 우리 다 죽었다\\\"라 고 했을것입니다. 파도에 다 잠겨서 죽을것이 그들의 진리였습니다. 그것이 진리일까요? 아닙니다. 진리는 배 뒤에서 잠이 들어 계셨습니다. 진리는 한 인격체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길이고 생명이십니다. 바로 이 진리되신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말하시면 안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 주 잔잔하여지더라[39]\\\" 잘들으십시오. 우리는 진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분 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습니다. 그분을 구주로 고백한 모든 자들의 삶에 들어와 먹고 마시고 동거하십 니다.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임재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약품중에 회사마다 앞을 다투어 만드는 것이 타이레놀 종류의 진통제입니다. 약국에 가 보십시오. 즐비하게 놓여 져 있는 것이 이런 약들입니다. 광고를 보십시오. 선전하는 것 대부분이 자기들이 만든 진통제 약들이 2배 3배 다 른 회사것보다 잘 듣는다고 선전합니다. 왜 이런 진통제를 많이 광고합니까? 왜 이런 진통제를 만들어 내는 회사 가 많이 있습니까? 이유는 사람들이 많이 찾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 서 머리 아픈 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진통제를 먹습니다. 학생은 학생대로 진통제를 먹습니다. 주부들, 회사원, 직 장인들 아니 사장부터 모두가 다 진통제를 다 먹습니다. 저와 여러분만 진통제 먹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들 이 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 아픈 일들이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아프죠. 이런 한탄이 나 옵니다. \\\"아 죽겠다, 못살겠다, 힘들다\\\" 그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진리는 돈 좀있었으면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빨리 공부를 마치고 학위를 받았으면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장사 잘되었으면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결혼 잘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높은 고위직에 올라가는 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예수안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진리되신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우리의 환경을 꾸짖으시면 잠잠해 집 니다. 우리의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고 막막함이 있지만 진리되신 예수님이 한번 일어 나셔서 말씀만 하시면 잠 잠해 진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왜 진통제만 먹습니까? 왜 진통제는 의지하면서 왜 진리되신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습합니까? 왜 진통제는 사러 약국에는 가지만 진리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번주 아내와 100일 기도회에서 한 찬송가곡을 부르면서 느낀것인데 부르면 부를수록 은혜로운 찬양임을 알게 됩니 다. 가사를 만든 사람이 무명인데 제가 만들어 준 찬양 테입에도 나오는 곡입니다. 성경 시편 46편 말씀을 가지고 만든 찬양인데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피난처있으니 1절.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절.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우리안에 고민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땅들이 변하고 물결 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떠들어 댑니다. 환경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누구나 환경은 다르지만 진리는 오직 하나임을 아십시오. 돈이 진리가 아닙니다. 물질이 진리가 아닙니다. 장가 잘가고 시집 잘가는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공부잘해서 학위따는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명예얻는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에서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명심하십시오. 그분이 한번 목소리 발하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중에 빌립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빌립제자를 시험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오병이어의 사건 에 나옵니다. 5000명의 배고픈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먹이길 원하셨습니다. 실제 남자만 셈을 해서 5000명이지 여자들, 아이들은 이곳에 들어가지 않은것입니다. 만명, 아니 만 오천명이 되었을까 요? 빌립에게 시험하여 예수님이 묻습니다. \\\'빌립아,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빌립이 셈을 하는데 200데나리온으로도 안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요 6:7). 이 말은 도저 히 우리 예산 가지고는 못 먹입니다. 안됩니다라는 것입니다. 안된다는 것이 빌립의 진리였습니다. 왜 안됩니까? 예수님이 하겠다는데요! 예수님이 먹이겠다는데 안될것이 무엇입니까? 충분히 먹이시고 12광주리가 남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 바로 진리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시험하신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주님이 시험하고 있을수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에서 주님이 시험 하고 있을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 있는 우리의 이민현장에서 주님이 시험하시고 계실수 있습니다. \\\"주 님, 말되는 소리를 하세요. 이 상황에서 그게 말이나 됩니까?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 \\\"주님 돈도 많이 들고 누가 저 많은 음식을 운반합니까? 아니 운반은 둘째치고 음식점이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까? 우리의 이민현장에서 안된다고 외치는데 그것이 진리입니까? 그것은 진리 가 아닙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지요. 진리되신 예수님이 친히 5000명 과 그들의 가족들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셨습니다. 이민의 현장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말씀하시고 시험하시고 도우시려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의지해야 합니 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옆에서 말씀하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나를 의지하라. 나는 너희에게 내 능력으로 이루 어지지 못할 명령은 하지 않는다. 나를 의지하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이루어지리라.\\\" 우리 옆사람과 함께 이런 이 야기를 나눕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믿음으로 삽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믿음으로 삽시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믿음으로 삽시다.\\\" 말씀으로 생활함(Response the Word) 에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간땡이가 부어서 담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담대한 이유는 믿음으로 살기에 담대 한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4장에 있을 내용이 아니라 꼭 5장으로 넘어가야 할 내용같습니다. 그런데 4장에 있는 이 유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4장에 기록한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피곤하시면 풍랑이 일어도 주무시고 계실까요? 과연 무엇을 하셨기에 그날 그 렇게 피곤하셨습니까? 4장 앞을 보세요. 주님이 전한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사람 마음밭이 여러 종류가 있는데 길가와 같은 마음이 있다. 돌짝같은 마음도 있다. 가 시밭과 같은 마음도 있다. 옥토밭과 같은 마음도 있다. 믿음으로 옥토밭을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그 렇게 전한 말씀인데도 제자들은 풍랑이 왔다고 벌벌떱니다. 아침에, 오후에 내내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은 온데간데 없고 풍랑만 보입니다. 무서워 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고 있지요! \\\"어찌하여 이렇 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내가 오늘 하루종일 너희에게 말씀하고 주님과 동행하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제자들에게 사라지고 오직 풍랑만이 보 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말씀하시죠.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풍랑만 바라 보면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제자들의 잘못은 믿음의 말씀은 들었는데 말씀들을데 따로, 그리고 현장에서 따로, 아주 따로 국밥입니다. 실제로 말씀과 함께, 주님과 함게 동행하지 못한 사실입니다. 바다의 풍랑만이 그들의 눈에 비쳐진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주님은 꾸짖고 게십니다. 우리 삶에 주님이 꾸짖고 있을수 있습 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저와 여러분이 환경만 보고 나가면 될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혹시 오늘 나오신 분 중에 자신의 어려운 환경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기도하십시오. 신앙인들의 모순 중에 하나 중에 고민은 하지만 기 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삶 가운데 고민은 하면서도 실제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매 달리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모순 중에 모순입니다. 그리고 기도한 것을 믿지도 않습니다. Ironical 한것입니다. 제가 100일 제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의 아내에게도 참 감사한 일은 주일날 저와 아내만 나와서 예배드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돌아가면서 차에서 저와 아내가 일치하는 말을 했습니다. 100명을 영혼을 놓고 기도를 하지만 차고 넘치게 부어주시는 주님이 100명을 훨씬 더 보내주실 것 같다는 것입니다. 더욱 기도로 준비하고 그 영혼들은 어떻게 양육시킬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입니다. 저희 가족이 낙심했다고요! 천만 의 말씀입니다. 목사가 무식하고 어리석고 광신이여서 100명을 놓고 기도합니까? 내가 못 배워서 만나는 사람마다 100명의 영혼중에 한사람이 되라고 합니까? 내가 주변에 있는 목사님들에게 말합니다. 10명 20명 30명 개척멤버 따져가며 안 할것이라고! 그저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안에서 할것이라고. 사람이 없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저 와 여러분에게 주님이 허락하시고 주님이 평안을 주시는데 어찌 은혜가 아닙니까?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돈 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아내와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100명 이상 많이 나오면 성경공부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되 기에 성경공부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또한 주일학교, 청소년, 청년 예배등을 신설하고 교사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 다. 또한 차가 없는 성도들과 운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교회 차량인 벤이 필요해서 벤을 달라고 기도도 합 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어봅시다. 제가 바보여서 이런 기도를 드립니까? 왜 이민교회가 100명의 영혼을 위해서 5년, 10년, 아니 20년간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이 보내주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차량밴도 사는 것입니 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계획보다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 담대한 믿음으로 나가지 않습니까? 믿음 으로 해야지요. 저와 여러분에게 귀한 믿음이 있길 원합니다. 말씀으로 나감(Go with the Word) 지금은 작고하신 새문안 교회 김동익목사님의 책 중에 \\\"인간의 위기와 하나님의 기회\\\"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군 대에 있을 때 그 교회 수요예배를 꼭 참석해서 김목사님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이곳 내쉬빌에서 가장 큰 한인 교회중에 하나인 감리교회가 바로 70년대에 김동익목사님에 기도로 인해서 세워졌습니다. 내쉬빌 감리교회에 70면 대부터 다니던 분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강해다운 강해설교를 접했던 목사님이 바로 김동익목사 님이셨습니다. 제가 그분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구요. 사모를 이야기하면 아시더군요. 황산성변호사 라구... 정말로 유명해야 할분은 실제로 목사님이셨습니다. 너무나도 은혜로운 강해를 해 주셨습니다. 제가 그 강해를 듣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고 또한 그분의 모는 책을 다 사서 읽었습니다. 책속에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인간이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바로 그때 주님은 기회를 주신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소중했습니다. 그리고 맞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환경 속에 풍랑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무 엇인가를 말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십시오. 밤새 고기잡이 명수인 베드로가 고기 한 마리도 못잡고 있을 때 주님이 오셨지요. 그래서 주님이 저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해서 고기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혔지요. 기 적입니까? 아닙니다. 기적은 고기가 많이 잡힌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주님앞에 나와 자신을 고백하는 베드로가 기적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마음이 기적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눅 5:8). 고기많이 잡으면 되는줄 알았는데 많이 잡혔는데도 기쁘지가 않습니다. 왜요? 중요한 사실을 발 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저 깊은곳 물속도 주님은 다 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된 마 음도 다 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기잡이 어부가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시도했는데 어떻게 한 마리도 못잡을 수가 있습니까? 이 것도 기적 아닙니까? 어떻게 고기잡이 명수가 고기 한 마리도 못잡나요? 어떤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든것입니다. 한 마리도 못잡는 환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서, 그의 현장에서 주님이 말씀하길 원하셨습니다. 왜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요. 그 고백을 나오게 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하나님이 고기를 못잡게 하셨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는 그 밤에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말씀에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은 아마도 열심 히 고기를 못 잡도록 했을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쪽으로 그물을 던지면 고기 몽땅 저쪽으로 가라고 말했을것입니다. 피라미 새끼까지도. 한마리도 못잡게 하기 위해서요. 저쪽에 던지면 이쪽으로 옮기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드 로보다 더 열심히 고기를 요리 조리 피하게 하셨을것입니다. 하나님이 고기를 못잡게 환경을 만드시면 아무리 아무 리 해도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속에서 주님을 고기를 못잡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그리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고백하십시오. 당 신이 처한 환경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십시요. 어느 생물학 교수님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비루스 발톱에 때만도 못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 감사 합니다\\\" 비루스가 발톱이 있습니까? 현미경으로 보일까 말까한 비루스인데 발톱이 있다고요, 아니 발톱에 때가 있 다고요? 그만큼 부족한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에 감사한 기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제발 눈만 갖지 말고 시력을 가지십시오. 귀만 갖지 말고 주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켜 주십니 다. 주님이 일어나셔서 바다를 명하여 꾸짖어 주십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했던 성부 성자 성령님이 우리의 환경을 꾸짖어 주십니다. 한주간 나의 환경속에 거하시는 진리되신 주님을 경험하십시오. Expericing God,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 그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매일 주님과 상의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 의 환경을 보지말고 주님바라 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열어 주의 일을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환 경속에서 은혜주실줄 믿습니다. 일어나셔서 찬송가 79장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하자 이리오라\\\" 우리 찬양 드리겠습니다.
더 나쁜 환경을 만나면/ 출5:22-출6:9/ 2002-08-10
더 나쁜 환경을 만나면 출5:22-출6:9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고, 믿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만사형통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믿음의 삶을 살아갈 동안 우리는 여전히 삶의 고통과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는 것 같고, 예수 믿지 않았을 때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도 삶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째서 세월이 갈수록 아픈 일에 더 생깁니까? 어찌해서 내 삶은 이렇게 첩첩 산중입니까?”라고 심각한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 보십시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도록 계획을 세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을 위해 모세를 부른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바로 앞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 달라’고 했을 때 바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학대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왕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보다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순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로는 화를 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혹독한 다루게 됩니다. 출5:6을 보면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지푸라기도 주지 않고 벽돌 굽는 일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노동조건이 더 혹독해진 것이지요. 7절을 보면 “또 그들의 전에 만든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고 말한 바로의 반응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모세가 직면한 어려움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에게 전하고 바로가 더 혹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바로 왕을 찾아가서 호소합니다. 그러나 바로왕은 듣지 않았지요. 이스라엘의 패장들은 자기들에게 화가 미친 줄 그 때 알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왕 앞에서 나올 때 모세와 아론을 길에서 만나게 되자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모세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가 괜히 나서서 가만히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괴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패장들이 모세에게 따지고 대들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기가막힐 일이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암초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모세는 “어찌하여”라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어찌하여”에 “더”를 붙여서 “어찌하여, 더 학대를 당하게...”라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에 와 닿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 이런 상황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는데... 그래도 잘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런데 왜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더 나빠지고 있습니까? 모세는 “어찌하여”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였는데 어찌하여 더 상황이 빠집니까?”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작은 누님은 지금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자형과 곧 주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작은 누님은 원래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한 사람입니다. 자형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결혼하고 난 다음 어려운 중에서도 믿음은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조카 민욱이가 8세가 되었을 때 병원에서 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이 아이를 고치기 위해 좋다는 약을 다 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민욱이가 백혈병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작은 누님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만 교회를 떠나 버렸습니다. 물론 시골교회이기 때문에 양육이니 믿음의 훈련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부목사 생활을 하는 저로서는 전화로 믿음을 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왜 작은 누님을 교회를 떠났는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안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럴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지금도 작은 누님은 자기는 하나님에게 상처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처럼 말한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노력했는데 하나님은 “어찌하여...?” “어찌하여 더” 어려운 상황을 주셨느냐는 것이지요.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 “어찌하여...?”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모세에게 대답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메시지를 주시기 원하십니까? 고통과 어려움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움은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고통은 인간에겐 실존적인 것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다.’ 라고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어두움은 다 사라지고 오직 밝은 빛만 비칠 것이다. 어려움이나 고통은 한순간에 다 없어질 것이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순간 순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질병을 치료하시고 고통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곳은 여전히 문제투성이의 세상 한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대로 활동하고 있고, 죄가 그대로 있는 세상에서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납니다. 겨우 돈을 좀 벌었다 싶은데 그만 병마가 찾아옵니다. 남편문제로 씨름하다가 겨우 가정이 행복한가 싶었는데 이번엔 자녀들이 속 썩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우환과 질고를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에 가는 순간까지 이 땅에서의 삶은 고난과 어려움 투성입니다. 예수 믿어도 병들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삶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사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구원받았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분의 변화입니다. 이 말은 삶의 문제가 사라지고 갑자기 부자가 되고 병도 없고 고통도 사라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헛된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떤 문제가 와도 그 문제를 극복하며 기쁨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구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가 와도 끄덕 없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는 헛된 논쟁입니다. 삶에 문제는 늘 있어왔습니다. 문제없는 인생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문제가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삶의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고 응답받고, 더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 가는 것이요, 문제가 없으면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문제를 쳐다보게 하는 것은 악한 사단의 의도입니다. 믿음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요셉을 아시지요. 그는 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그는 형통한 사람, 존재자체가 바로 그런 형통한 사람입니다. 하는 일이 형통하다는 것과 형통한 사람이다 는 것은 다릅니다. 요셉은 아예 형통한 사람입니다. 어떤 문제도 그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닥쳐와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생활도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감옥생활도 그를 실망시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형통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그에겐 문제나 고통이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핍박과 고통을 당하면서 감옥에 갇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삶의 문제라고 고민하며 원망하며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그에겐 그런 핍박이나 삶의 고통들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그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지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이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와도 상관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믿은 자가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상관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더 나쁜 상황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삶에 더해지는 고통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쳐오면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비로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출6:1의 말씀을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가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이스라엘이 더 큰 고통을 당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바로왕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줄 기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왕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야... 이제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먼저 “이제” 라는 단어를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이 단어는 아주 극적인 표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어찌하여 더 어려워졌습니까?” 라고 절망 한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역사의 반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 능력의 손을 펴실 시간이 된 것입니다. 모세가 두 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여기에 보면 “강한 손을 더하므로”라는 말이 두 번씩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두 번씩이나 반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로에게 어떻게 하실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지금 강한 손을 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숨통을 조이고 다급하게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과 다름없이 벽돌을 구워야 하는데 이제는 짚까지 주어야 합니다. 이 절대적인 명령을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바로 왕 보다 더 큰 손을 펴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리 누르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누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더 이상 바로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출애굽기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바로왕의 거역할 때마다 재앙이 애굽 땅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 쟁앙이 임하고 이 재앙, 파리재앙... 나중에는 온 애굽 땅에 죽음의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전 애굽 땅에 나타났습니다. 계속해서 출6:6-8에 보면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I will...”이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일곱 가지 선언입니다. 첫 번째가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입니다. 두 번째는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세 번째는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네 번째는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다섯 번째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지라” 여섯 번째는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리고 일곱 번째는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곱 가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약속이고 주권적인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실 일을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이지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라고 했을 때 바로가 선뜻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주었다면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는 ‘참 바로왕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 라고 하면서 바로 왕을 칭찬했겠지요.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모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한번 가서 책상을 치면서 말하니까 바로 왕이 겁먹고 우리를 보내잖아! 역시 모세야’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무슨 일을 만나면 모세부터 찾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신격과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우상화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드디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은 ‘어찌하여 더 이스라엘이 학대를 당하게 하십니까?’ 라고 묻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모세야 네가 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할 것이다 너는 두려워하지 마, 내가 이제부터 애굽 땅에 능력을 보일 때니까 바로에게 어떻게 하는지 잘 보아라” 더 나쁜 상황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더 나쁜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병들었다가 치유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치유의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고 기도했더니 응답받았습니까? 그 때 우리는 응답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의 체험이 있는 자가 비로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1장에 보면 마리아 자매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두 자매는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주님 내 오라버니가 병들었습니다. 와서 고쳐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고는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그만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마르다 마리아 자매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나사로는 죽었고 모든 장례절차를 끝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있는 것에 왔더니 나사로가 죽은지 벌써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가까이 오게 되자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와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원망하며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이제야 오십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왜 주님이 이제야 오셨습니까? 왜 주님이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요청에 침묵하셨고,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까? 여기엔 주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더 놀라운 계획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깊이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자훈련 사역자반에서 이 말씀을 나누면서 얼마나 은혜를 체험했는지 모릅니다. 자 보십시오 마르다 자매의 요청처럼 예수님이 금방 오셨다면 나사로는 안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치료해주셨겠지요. 그러나 그랬다면 마르다 자매는 예수님을 그저 병을 치료하는 분 정도, 치료의 능력을 가지신 분정도로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가 죽고 난 다음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은 마르다 자매에게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시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병만 고치는 분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 사건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마르다 자매의 요청,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상황이 더 나빠진 것처럼 보인 이유입니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모세가 ‘어찌하여 더 어려워졌습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응답은 한 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나는 여호와라”라는 말씀만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모세는 너무 답답해서 “어찌하여...”라고 질문을 했는데 하나님은 다섯 번이나 ‘나는 여호와라’ 라고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답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왜 ‘나는 여호와라’라는 말씀만 반복하셨을까요?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지를 듣고 싶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고난 중을 당할 때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강함은 하나님 바라보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힘은 바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대답을 주지 않고 “내가 너희의 여호와라”는 말씀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해방시키는 이 극적인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원합니다. 더 어려운 상황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찾아와 바로의 절대적인 권력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이 심판하시고 여호와라는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조상들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잘 몰랐습니다. 이 이름이 얼마나 위대하며 능력있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만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면서 하나님의 여호와 되심을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여호와되심, 완전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사실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실 삶의 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에 관심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시간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라고 고백은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삶의 풍성한 근원이 되시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필요는 그리스도로부터 채워집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를 바랍니다. 보십시오 교회가 세상의 세력 앞에 무력해져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말씀을 보내어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하십니다. 교회가 영적인 힘을 잃어갈 때 하나님은 주의 종을 보내어 교회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야 합니까? ‘삶이 왜 이렇게 힘드냐? 교회가 왜 부흥하지 않는가? 왜 이렇게 애를 쓰는 데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는가?’라는 환경을 보지 말고 그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얼만 크신 분이냐 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그 어떤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힘들수록 하나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로 보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 더운 여름날 덥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더 열심히 말씀과 기도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십시오. 더 어려운 환경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창1:26-31/ 환경주일설교/ 2012-06-07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창1:26-31 쓰레기 산이 하늘공원이 되다 지금 전 세계 60억 인구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지구촌의 가장 큰 축제는 21세기 첫 월드컵 개최,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지구촌의 최대 스포츠 축제인 2002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입니다. 그런데 개막식과 개막 전 첫 경기가 펼쳐진 곳은 다름 아닌 상암 월드컵 경기장입니다. ‘하늘공원’으로 변한 난지도 쓰레기 산을 오르던 소설가 정연희 씨(66)의 첫마디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눈앞의 상황에 감탄을 넘어 망연하기까지 한 표정입니다. 예전엔 쓰레기 산이었으나 지금은 ‘하늘공원’이 된 산을 중간쯤 올랐을 때 서울월드컵경기장이 한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한 달여 간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평화적 전쟁의 스펙터클’이 펼쳐지는데 ‘난지도’의 작가 정연희 씨는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는데, 여기서 세계인의 축제가 열릴 줄은…”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소설 ‘난지도’를 통해 물질문명의 풍요가 가져오는 정신적 황폐함을 바로 이 공간을 통해 고발문학 형태로 풀어냈던 그녀로선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서울시민이 하루 3000 트럭분의 쓰레기를 내지르던 곳이 60억 지구촌 사람들의 눈과 귀를 모으게 하는 현장이 된 것입니다. 그 드라마의 첫 장면이 바로 그녀의 작품 무대입니다. 소설 ‘난지도’는 발표 직후 ‘대도시의 재앙을 폭로한 손꼽히는 고발문학’으로 평가받으며 문단과 지식인, 종교인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환경문제를 다룬 대표적 환경소설이자 도시 빈민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참여소설이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파리 떼와 악취 속에서 빠져 절규하면서 소설을 통해 재앙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난지도 쓰레기 산 위로 쏟아져 내리는 불볕은 저주였다. 그것은 앙심이었다. 쓰레기더미는 죽음의 산이다. 인간의 삶에서 부스러기 되어 나온 주검들의 산이다. 그 산에는 살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맹렬하게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썩어 가는 일과 썩어 가는 냄새뿐이다. 그것만이 죽음도 정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죽음이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구더기가 끓고 파리가 들끓는다…’ “월드컵이 ‘총구 속에 핀 꽃’과 같은 모습으로 계속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그러한 상징성을 지니기에 충분하지요. 썩은 물과 토양 위에 저렇게 경기장과 공원 등이 들어서 축제와 휴식의 공간이 되었으니 생명과 부활이 아니겠어요?”라고 작가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복음전도자이면서 기독교 사회학자인 토니 컴폴로 박사는 새 천년의 그리스도인의 상을 말하면서 “새 천년의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린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Green Christian’ ‘녹색 그리스도인’, 환경을 아낄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왜 환경보호, 자연보호 운동이 필요한가요? 환경보호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첫 번째 명령하신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 같지만, 사실 “자연을 보호하라”, “에덴동산을 잘 지키라” “기쁨의 동산을 잘 지키라.” 는 말씀이 첫 번째 말씀입니다. 창세기 2장 15-16절에 보면, 17절까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보호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기 전에 에덴동산을 지키라고 하나님은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아담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지금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톰 싸인은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환경오염문제 즉 생태계의 파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최근 세계 각 곳에서 일어나는 지진, 홍수, 태풍 등 재난을 바라보면서 21세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명의 하나가 환경보호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환경파괴로 인한 각종 질병 및 기후 변화가 예상을 초월하는 결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땅은 계속해서 황폐해져가고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땅을 지키고 가꿀 의무가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와 아름다움 안에서 우리가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을 보호하고 아끼는 마음, 삶 속의 작은 실천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 신앙생활의 한 모습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 동안 개인의 영혼구원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강조해 왔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환경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심지어는 우리의 환경을 파괴하는 과오를 범해 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환경보호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자연은 그대로 어떻게 된 것이나 그냥 있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자연은 진화의 산물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오묘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이 자연이 자연의 진화로 된 것이 전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작품을 통해서 주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잘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꽃 하나라도 솔로몬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꽃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꽃이 왜 지어졌는가 하면, 하나님이 꽃을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려고, 꽃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나님이 꽃을 직접 지으셨습니다. 또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창조물인 것입니다. 시편 19편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어떤 사람은 신격화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숭배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정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것을 착취하거나 파괴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 결과 각종 미신과 자연숭배, 정령숭배, 토템이즘, 점성술, 이런 것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퍼져 있습니다. 또 심각한 환경 파괴로 인한 인류 종말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 이것도 큰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환경 파괴적으로도 잘못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이 두려워하거나 마음대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만물의 영장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연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그래서 사람이 자연을 마음대로 파괴해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창조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조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므로 자연 만물은 모두가 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어 놓으신 그 창조물을 보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파괴한다면, 하나님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쁨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은 살 수가 없고 자연이 보호되면, 인간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없이 인간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 삶의 터전인 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왜 지으셨습니까? 아담을 사랑하시고 하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자연을 지으셨습니까?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연을 지으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시집가게 하고, 장가들게 하면, 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신혼 자녀가 살 수 있는 아파트 한 채라도 사줄 것입니다. 거기에 가재도구를 다 사서 넣어 줍니다. 그래서 아들, 딸들, 이제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가 신혼여행 끝나고 집에 오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가 힘이 없으면 못해요. 그러나 힘만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흉이 아닌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시고, 능력이 한이 없으시고, 못할 것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사람의 터전을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연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과 자연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아담에게 ‘에덴동산’은 그 이름처럼 부족할 것이 없는 ‘큰 기쁨의 동산’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행복하게 살고, 기쁘게 살게 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을 지어서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죄짓고 타락했을지라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은혜의 시대로 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심판의 날이 오는 그 날까지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의인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 이니라.” 하나님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햇빛을 비춰주시고, 비를 내려주셔서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장차 이 사랑을 받아야 할 후손들에게 범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파괴하면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요, 자연을 파괴하면 우리의 후손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지어주신 자연 속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말 복되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의 삶의 터전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5장에서 땅의 안식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레위기 25장 21절입니다. “내가 명하여 제 육 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 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과 희년의 법칙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기심에 가득 찬 인간은 자연을 내 것인 양 마음대로 사용했고 마음대로 훼손시켰습니다. 그 결과 먹고 마심에 부족함이 없던 땅이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고, 보기에 심히 좋았던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인간도, 땅도 하나님 앞에서 안식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쉬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땅도, 자연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연을 보호해야 할 청지기 자연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니까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땅,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잘 지켜야 할 청지기의 사명이 성도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보호는 구호나 운동이나, 과학의 발전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이 예수 믿고, 타락한 인간이 예수 보혈의 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성령을 받아서, 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청지기의 신분을 회복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니까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우리의 영이 살 때, 우리가 신앙으로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땅이 다시 기름진 땅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하나님과 인간 관계, 인간과 인간 관계, 또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화해시키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되는 길, 인간과 인간이 화해되는 길, 인간과 자연이 화해되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또 인간과 인간이 화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화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연보호의 첫 걸음은 구원받은 성도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어서 주님이 오시면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것입니다. 또 주님의 청지기는 하나님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 것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요, 자연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청지기는 하나님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가, 진실로 우리가 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이고, 주님의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물질만능과 소비향락에 젖은 현대인은 무조건 새 것만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낭비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 가지고 남자만 오천 명, 부녀자까지 합치면 수만 명을 먹였습니다. 아주 원대로 배불리 먹었고 만족하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신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6장 12절입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말씀했습니다. “남을 것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배부른 사람들에게, 행복한 사람들에게, 건강한 사람들에게, 넉넉한 사람들에게, 부요한 사람들에게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교육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절약 정신입니다. “절약하라.” “먹고 난 후에 절대로 낭비하지 말아라.” “많이 벌었다고, 돈 많다고, 건강이 있다고, 아름답다고, 명예가 있다고, 권세가 있다고, 낭비하지 말아라.” “시간도 낭비하지 말아라. 절약하라.” 절약 정신입니다. 두 번째 교육 목적은 “자연을 보호하라.” 열 두 광주리의 떡이 들판에 그냥 버려졌다면, 자연이 썩고 냄새가 나고 훼손됩니다. 그러니까 “먹고 남은 것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그것은 무엇입니까? 절약 정신을 가르쳐 주신 것이고 자연보호 정신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 부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절제의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것을 버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넉넉하다고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자연을 썩게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연은 보호한 만큼 혜택을 준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는 것처럼, 자연을 보호하면 보호한 만큼 사람들에게 혜택을 줍니다. 덴마크가 전쟁으로 패했을 때, 패망한 덴마크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 당시에 그룬트비 목사가 외쳤습니다. 삼애(三愛) 운동.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자연 사랑, 삼애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자연을 사랑하자.” 결국은 덴마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고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 성장이, 세계 어느 나라 국민 실질 소득으로 볼 때는 제일 많은 나라가 되었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고, 부강한 나라, 힘이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자연보호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파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근육질의 남자라도, 아무리 예뻐도 산소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인체의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잘났더라도, 학벌이 좋고, 건강하고, 아름답고, 명예·권세 다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땅에서 나는 식량을 먹지 않으면, 영양을 공급받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산소를 마셔야 되고, 사람은 물을 마셔야 되고, 또 땅에서 나는 것으로 영양을 공급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이 없이 사람은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엔 자연이 없이는 못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사랑하신다고 하더라도 그냥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연을 주셨고,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을 벌겠다는 욕심에 산림을 훼손합니다. 강과 바다에 오염물질을 몰래 버립니다. 농약과 각종 폐기물로 땅을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자연과의 평화 없이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떤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연을 죽이면 인간의 평화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환경파괴에 따른 식량부족과 쓰레기 및 핵폐기물 처리는 국제적, 또 지역적, 개인적 분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을 파괴한 대가인 것입니다. 자연을 보호하면 젖과 꿀을 얻을 수 있지만, 자연을 개발의 명목으로 파괴하면 가시와 엉겅퀴밖에 거둘 게 없습니다. 자연을 보호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젖을 주고, 꿀을 주고, 깨끗한 물을 주고, 또 깨끗한 공기를 줍니다. 또 정말 인체에 좋은 햇빛을 줍니다. 그러나 환경을 파괴하면, 아무리 개발 명목으로 환경을 파괴했다 하더라도 가시와 엉겅퀴를 냅니다. 음식물 쓰레기 배출, 교회도 예외 아니다 지구 온난화, 대기·수질·토양 등의 각종 오염, 무분별한 개발 등 20세기 후반부터 환경과 관련한 문제가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는 가운데 2002년 환경주일을 맞아 환경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자는 운동이 총회적 차원에서 실시될 전망입니다. 환경부 통계(2001. 1)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는 연간 4백83만 2천 톤으로 식품공급량의 18.7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비용으로 환산하면 14조7천4백76억 원으로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출액과 맞먹는 수준이고, 농축수산물 수입액의 1.5배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더구나 음식물 쓰레기의 발생은 64퍼센트가 가정에서, 36퍼센트가 음식점 같은 집단급식소에서 발생된다는 것이 밝혀져 가정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심각한 상황임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총회 환경보전위원회는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의 발생을 줄이는 것이 환경을 지키기 위해 전국 교회와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우선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환경보전위원회는 총회 사회부를 통해 전국교회에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포스터를 보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한편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가정과 교회, 식당에서 실천할 수 있는 실천지침을 함께 보내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에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실천지침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가정에서 지켜주실 일 ▲교회에서 지켜주실 일 ▲음식점을 이용할 때 지켜주실 일 ▲음식점을 경영할 때 지켜주실 일 등 네 분야로 나뉘어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 지침은 계획성 있는 식품 구입과 순서에 맞는 사용으로 음식물 낭비를 최대한 줄이는 것과 함께 음식물을 낭비하지 않는 절제와 균형을 갖출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실천수칙 총회 환경보전위원회가 2002년 환경주일을 맞아 역점을 두고 펼치는 활동은 ‘음식물쓰레기 줄이기 운동’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각자의 가정이나 음식점 등에서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현장으로만 간주해 온 교회 내에서도 실천해야 할 지침들을 명시해 입체적인 캠페인 전개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데 각 부문별 실천지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 가정에서 1. 식단 계획을 세워 필요한 식품만 구입 2. 냉장고 상시 점검, 음식물 보관 시 날짜순서대로 보관하고 속이 보이는 그릇을 사용 3. 생식품은 바로 손질해 조리하고 보관 4. 가족의 건강과 식사량에 맞춰 조리 5. 먹을 만큼 덜어서 남기지 않고 먹기 6. 지나치게 짜거나 맵지 않게 먹기 7. 음식물쓰레기는 따로 버리기 나. 교회에서 1. 식사 인원, 재고 물량, 보관능력에 맞춰 계획성 있게 식품 구입 2. 적정 온도 및 습도를 유지, 구입 날짜 순서대로 보관하고 사용 3. 조리 시의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 4. 이용자가 자율적으로 덜어 먹도록 준비 5. 음식쓰레기 배출량을 조사해 다음 식단에 참고 6. 음식물쓰레기는 물기와 이물질을 없애 위생적으로 관리 7. 남은 음식은 이웃과 나누기 다. 음식점 이용 시 1. 주문하기 전에 메뉴판 살피기 2. 자신의 식사량을 미리 말하기 3. 먹지 않을 음식은 미리 반납하기 4. 함께 먹는 요리는 개인 접시를 사용하기 5. 음식이 담긴 그릇에 이물질을 버리지 않기 6. 음식이 남지 않을 만큼만 더 주문하고, 먹지 않을 후식은 사양하기 7. 남은 음식은 포장해서 가져가기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실천은 큰 기쁨을 가져옵니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작은 실천을 할 때, 우리에게 당장 기쁨이 옵니다. 하천 오염과 공기 오염의 주원인은 생활하수와 자동차 배기가스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할 수만 있다면, 생활 폐기물을 줄여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세제 덜 써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도 많이 만들었다가 남겨서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남겨 버리면 그 자체가 환경오염인 것입니다. 음식점에 가서도 많이 시켜서 남기지 말고, 먹을 만큼만 시켜서 깨끗하게 먹고, 혹시 남았다면, 꼭 싸달라고 그래서 집에까지 가지고 올 필요가 있습니다. 식당에서 일 년 동안 버리는 식량비용이 북한 동포를 일 년 동안 먹이고 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물질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오염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니까, 이것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북한이 가난으로 육체가 죽어간다면, 우리는 배금주의에 젖어서 낭비와 사치 그리고 과소비로 육체와 영혼이 병들어 가는 것 아닙니까? 아주 작은 실천, 곧 가정과 공공장소의 전기 한 등 끄는 것, 수돗물 한 방울 아끼는 것, 쓰레기 분리수거 하는 것, 재활용을 생활화하는 것, 음식물 쓰레기 줄이는 것, 이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나라가 사는 길이면서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연을 살리는 길이요, 자연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연, 성도가 자연을 지켜야 할 청지기 사명을 감당해야 할 자연, 자연은 보호한 만큼 혜택을 주는 자연. 우리는 더 많이 보호하고, 더 많이 아끼고, 더 많이 사랑해서 정말로 많은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통해서 혜택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결론입니다. 우주와 만물의 모든 것은 “주를 위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연을 잘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미래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물려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저 자연을 훼손하면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서 자손에게 준다 하더라도 자연이 훼손되었을 때, 그 자손은 그것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나의 집의 잔디가 아무리 잘 정돈되었다 하더라도, 나의 집 우물이 아무리 깨끗한 우물이라 하더라도, 나의 집이 아무리 문화 시설이 잘된 고급주택이라 하더라도, 산사태가 나면, 홍수가 나면, 마당에 잔디도, 우물물도, 집도 다 무너져버리고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 줄 것이 무엇이냐, 정말로 아름다운 자연,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 깨끗한 태양 빛을 우리가 남겨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도 환경오염으로 말미암아, 오존층 파괴로 말미암아 자연이, 사람들이 너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자연을,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연을 우리가 보호하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고, 우리의 삶도 윤택하게 살고, 우리의 후손도 행복하게, 평안하게,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는 땅을 물려주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냐고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야, 구원받은 성도가 성령을 받아야, 성령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자연보호와 자연 사랑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분명히 나도 살고, 가정도 살고, 나라도 살고, 사회도 살고, 자연도 살고, 하나님도 기뻐하시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 사회에 보여 줘야 합니다. <무지개>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별거 아닙니다. 물방울들이 모인 곳에 태양광선이 지나가면서 분석을 해 주니까 일곱 색깔의 아름다운 무지개가 됩니다. 우리도 보통 다 물방울처럼 별거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주님의 햇빛이 우리 영혼을 통과하게 되면 우리가 비록 부족하나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눈을 열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거기서 비취는 아름다운 햇빛이 우리의 심령에 비취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이 아름다워지고 이 추한 세상에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 거룩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연환경을 아름답고 푸르게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명령이요 뜻입니다. 인간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환경보호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세상을 회복해 가는 축복과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강해(25)/ 환경 보호에 힘써야 합니다/ 막9:14-24/ 이동원 목사/ 2002-03-21
마가복음강해(25)/ 환경 보호에 힘써야 합니다 막9:14-24 먼저 창세기 1장 28절 말씀 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 창세기 1장28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1장28절 다같이 시작!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장에서 한 절 더 읽겠습니다. 창세기2장 15절 말씀입니다. 2장 15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네 저는 이 밝아온 새로운 천년에 우리 새 시대를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에 대한 아주 중요한 topic 들을 가지고 이 새 초에 좀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환경보호에 대해서 좀 같이 성경공부를 해 보려고 합니다. ‘환경보호’ 그런 제목으로 성경공부를 해 보신 일이 있는 사람 한 번 손을 들어보세요 ‘환경보호’ 에 놀라운 사실입니다. 한 사람도 없네 하 하 하 흠 그 뒤에 있어요? 어 미래학자인 탐 싸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은 21세기에 그리고 새로운 천년에 크리스챤들이 직면해야 할 최대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환경문제가 될 것이다. 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전 세계 흩어진 침례교들의 연합 기관인 침례교 세계연맹이라는 기관 이 있습니다. ‘BWA’ 라고 그러는데요 Baptist world An Alliance라고 그러는데 이 기구의 사무총장으로 계시는 덴튼 로츠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도 저하고 아주 친한 그런 분 이신데 그분의 쓰신 글에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어요 ‘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함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함께 자연을 구원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들의 새로운 시대의 소명 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 받은 영혼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마 영혼구원에 대한 우리가 메시지는 많이 들었지만 뭐 자연구원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그런 topic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댄튼 로츠 박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진정한 복음전도자는 진정한 생태회복 운동가 이어야 만 한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태계’ 혹은 ‘생태학’ 이라는 단어를 요즈음 우리가 뉴스 미디아 아 매스 미디아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그 단어를 우리가 접근하게 됩니다. 생태학 ecology 라고 부르는데 여기선 생물과 살아 있는 생물과 환경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을 가리켜서 우리가 ‘생태학’이다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최근의 복음주의적 선교 학자들은 복음전도의 명령과 함께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명령은 전도 명령이죠 우리가 지상 명령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족속들 가운데 증거하여 예수를 모르고 믿지 않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는 일,이 전도 명령 이것은 크리스챤들의 물론 양보 될 수 없는 변할 수 없는 첫 번 째 사명 가장 중요한 사명 소위 priority 우선 순위적 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전도 명령과 함께 우리는 새롭게 문화명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문화명령’ 이 전도의 명령과 함께 우리에게는 문화적 명령이 주어져 있다 이게 오늘 생각 하려고 하는 제목과 관련이 있는데 이 문화 명령 가운데서도 새 천년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바로 환경보호 혹은 자연보호의 과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계 일각에서 특별히 어 복음전도자 이면서 기독교 사회학자인 토니 컴폴로 라는 분이 있는데 이 토니 컴폴로 박사는 새 천년의 그리스도인의 상을 말하면서 새 천년의 그리스도인 들은 마땅히 그린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 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Green Christian’ 그런 소리 들어 보셨어요? ‘Green Christian’ ‘녹색 그리스도인’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그린 크리스챤 이 환경을 아낄 줄 아는 그리스도인 들이 되어야 한다 는 얘기죠 그럼 오늘 우리는 왜 우리가 환경보호가 필요하냐? 또 자연보호 운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또 어떻게 우리는 환경보호를 할 수가 있는가? 우리가 이러한 질문으로 오늘 성경의 말씀을 한껏 접근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왜? 이 환경보호의 혹은 자연보호에 힘써야 할까요? 왜? 그 대답은 첫째로 이 환경보호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창세기 1장 28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처음사람 아담에게 복을 주시며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이 말씀을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이 말씀을 인간에게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중심으로 사람 마음대로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그런 명령으로 이 말씀을 받아드릴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 말씀은 문맥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창세기 1장28절의 말씀을 제대로 균형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장 전체의 그 맥락 속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어야 하고 또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1장 11절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어요 창세기 1장11절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1장11절 말씀 다같이 시작!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매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더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창조하시며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명령가운데 하나가 “ 땅이여 땅은 풀과 씨를 맺는 채소를 내라!” 이게 하나님 명령이에요 땅을 향해서 명령하신 것이에요 땅은 씨를 맺는 채소를 내라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뜻인데 땅이 채소를 잘 못 내면 어떻게 되요? 땅이 채소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또 산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 되겠죠. 또 20절 말씀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20절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1장20절 시작!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의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아라” 하나님이 물들은 물 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물 속에는, 물 속에는 생물들이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입니까? 뜻이에요, 아니에요? 그거 대답하기 어려워요? 그냥 예 하기만 하면 그것이 정답이에요 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물 하천가운데 에 시내 가운데 강 들 가운데 생물이 번성케 하라 근데 강 속에서 시내 속에서 생물들이 번성하지 못하고 고기들이 죽어간다면 그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니죠 자 여기 또 보면 같은 20절 말씀에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공간 이 space 이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나님은 이 새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싶어하신 것이죠 그래서 이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이 궁창가운데 아름다운 새 들이 각종 각양의 다양한 새 들이 날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보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대 새 들이 날아갈 수 없는 하늘 새들이 자꾸만 이 대기오염 때문에 한국의 하늘에서 쫓겨가고 자꾸 만 어디론가 가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뜻 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자 이런 맥락 속에서 28절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어요 28절에 이제 도달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은 인간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을 만드시고 사람을 축복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근데 이게 사람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란 말이에요 생육하고 번성 하라가 이미 보는 것 처럼 어디에도 적용 됐어요? 자연들에게도 자연들에게 22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물고기 새 짐승에게도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의 물에 충만하라 새 들도 땅에 번성하라 생육하고 번성 하라가 인간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게 그러니까 그것만 딱 띄어 놓고 보면 사람에게만 주신 말씀같애요 그러니까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 아무때나 어디에서나 모든 것을 다 잡아 먹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뜻 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에요 생물도 번성해야 되요 생물이 번성해야 요 하늘에는 새가 나르고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고기 떼들이 헤엄을 치는 세계를 하나님은 창조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에요 creation mandate 하나님의창조 명령이에요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하면 이러한 모든 자연이 사람과 더불어 이런 모든 자연들이 혹은 사람이 모든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이런 자연과 더불어 이 우주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다 믿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하니님의 뜻이에요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홍수사건 때도 보면 노아의 홍수 심판 때 자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기 없었어요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있고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면서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방주를 만드셨을 때에 방주 속에 사람 만 들어가게 하셨습니까? 아니죠 네 방주 속에 뭘 들어 가게 하셨습니까? 혈육 있는 모든 생물 그 생명 있는 생물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암 수를 함께 방주 안에 보존케 하신 것 여기 하나님의 어떤 기대가 있었겠어요 하나님이 자연을 보호하기를 원 하신 다는 것이죠 인간과 더불어 인간과 더불어 사람과 더불어서 이런 아름다운 생물들이 생명 있는 자연 들이 만물 들이 함께 보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 들이 지금까지 자연운동에 상당히 무관심 해 왔습니다. 오히려 과거에 역사적 기독교는 환경파괴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그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소위 서구 문명의 발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이 상당히 컸는데 저는 이 그러한 과정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매우 오해한 말씀 중의 하나가 단어 하나 때문에 그래요 오늘 이 1장 28절에 보시면 여기 땅에 충만 하라 그 다음에 땅을 뭐라고 했어요? ‘정복하라’ 이 정복하라 는 단어를 잘 못 이해해서 그래요 그래서 마구잡이로 땅을 개간하고 정복하면 된다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인간 중심으로 사람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서는 어떤 것 이라도 희생 될 수 있다. 짐승도 자연도 마음대로 희생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정복주의에 이걸 ‘정복 주의’ 라고 말합니다. 이 정복주의 적 윤리를 가지고 계속 세계와 만물을 착취 하는 일에 기독교인 들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편승했던 책임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복하라는 뜻이 뭐냐 땅을 정복하라는 의미가 뭐냐 땅을 마음대로 파 헤쳐도 좋다는 의미 일까? 그게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정복이라는 단어에서 부터 영어의 culture 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문화, 문화 이 잘 개발 한다는 뜻이에요 가꾸고 돌 본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이것을 창세기2장에 보면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죠? 자 아까 우리가 읽었던 창세기 2장 15절 을 다시 보시면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처음사람 아담을 이끌어서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다음에 그것을 에덴 동산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스리며 여기도 다스리다 라는 말이 나와요 그 다음에 첨부 된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다스리며? 그 다음에 뭐에요?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처음 사람 아담으로 하여금 잘 다스려 지키게 하시고’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정복하라는 말이 뭐 파괴 해도 좋다는 그런 의미에 말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잘 다스릴 청지기적 책임을 강조한 단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 단어를 잘 못 이해 했던 것 입니다. 그러므로 자연보호 환경보호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인 것 입니다. 자 하나님이 이런 자연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창조 하셨을 때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사역은 완성 됩니다. 그런데 그 사역의 한 단계 단계마다, 한 단계 단계마다 하루 이틀이 지날 때 마다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 보시면 어떤 하나님의 소감이 붙어 있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참 좋다! 좋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러분 얼마나 좋아요? 뜨는 해 새 천 년의 밝아 오는 태양 우리는 비록 체육관 안에서 의의 태양 되신 주님을 바라 보았지만 동해안 간 사람들도 별 수 없이 못 봤잖아요 내가 예언한 그대로 네 그러나 사실 떠 오르는 태양 을 바라보는 감격 지는 해 석양을 바라보는 감격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좋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자연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자연을 자연 되게 하는 것 이 그리스도인 들의 책임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왜 우리는 크리스챤 들의 환경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뭡니까?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왜 그리스도인들이 환경 보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자, 창세기 1장28절 말씀, 우리가 읽었던 말씀 다시 돌아가 보시면 이 말씀이 어떤 말로 시작이 됩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처음 창조하셨던 아담과 하와에게 뭐를 주시며 그랬어요? 복을 주시면서. 축복을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땅을 잘 다스려라 땅을 잘 관리하라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 보호, 자연 관리는 우리의 축복을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축복을 위한 것이다. 자, 그러니까 땅과 자연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죠. 사람이 언제 지음을 받았습니까? 대답이 어렵습니까? 엿새 동안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몇 째날 지으셨습니까? 그 대답이 어려워요. 엿새 날 네, 마지막 날. 사람이 한 셋 째날 넷 째날 지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생존 그 자체가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지요. 다른 것을 다 지어 놓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셨어요. 인간이 지어졌을 때 보니까 모든 것을 이미 완벽하게 다 이루어져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연은, 만물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선물로 다 주신 거예요. 그러나 내가 받은 선물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까? 이 선물 관리가 중요하죠. 여러분 아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아주 소중한 선물을 받으셨다면 그 선물을 어떻게 할까요? 소중하게 관리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이북을 방문했을 때 나는 가고 싶다고도 그러지 않았는데 묘향산을 가자고 끌고 가더라구요. 그래서 묘향산을 가 보았어요. 왜 끌고 갔나 금강산은 못 보지만 묘향산이라도 보게 되어서 다행이다 가자 그래서 갔어요. 산을 보러 가는 줄 알고 갔더니 산을 보여주려고 끌고 간 게 아니라 묘향산에 김일성이 세계 각국에서 받은 모든 선물을 전시해 놓은 김일성 위대하신 아바이 수령님의 선물 전시관이 있어요. 그거 보여 주려고 그 곳까지 끌고 간 거예요. 이만큼 좋은 선물을 많이 받았다. 그걸 자랑하고 싶어서 거기까지 끌고 갔더라구요. 우리가 소중한 선물을 받으면 소중하게 관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이 자연이, 만물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이라면 지금 인류는 소중하게 이 선물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인들은 어떨까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자연을 소중하게 잘 관리하고 있습니까? 날로 심각해 가는 대기 오염 현상, 스모그 현상, 강물 오염, 또 흙 속에 침투되고 있는 케미칼한 여러 화학적인 요소들로 말미암아서 더 이상 생물을 배태할 수 없는 우리의 흙의 오염들. 그리고 강물 산천마다 넘쳐 흐르고 있는 오염된 쓰레기들, 하늘에서는 산성의 비가 내리고 오존층은 파괴되고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날로 촉진되고 누구의 책임입니까? 누구의 책임입니까? 대답하세요. 나의 책임입니다. 나도 책임 있어요. 인류의 책임이고 우리들의 책임이고 그리고 그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 산비탈에 뛰어 놀다 보면 바위옷 이라고 하나 나무 둥지 같은 데 파란 이끼가 낀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었어요. 그렇죠? 요즈음 없더라구요. 바위가 파란 이끼로 뒤덮혀 있는 모습. 딱딱한 모습들. 그것이 대기가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신선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요즈음 볼 수가 없어요. 다 파괴가 된 것입니다. 나쁜 물, 나쁜 공기, 나쁜 음식 모든 것이 다 파괴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요즈음 와서 호흡기 질환이 급속도로 증가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합니다. 호흡기 질환이 왜 생겨요? 나쁜 물하고 공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쁜 음식을 먹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사, 감기 결코 대기 오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일 년 중에 사람이 제일 많이 돌아가시는 달이 어떤 달인지 아세요? 통계적으로 12월과 1월 이랍니다. 왜 그럴까요? 한 해를 보내면서 한 해와 더불어 인생을 마감하기 위해서 12월에 돌아가실까요? 왜 1월에 돌아가실까요? 새로운 해를 맞이해서 새 해와 함께 출발하기 위해서 1월에 돌아가실까요? 그렇지 않아요. 12월과 1월이 공기가 제일 나쁘답니다. 일 년 중에 제일 공기가 나쁜 달이 12월과 1월이예요. 그래서 많이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지진과 기근 현상, 또 홍수와 가뭄의 현상들, 자연 파괴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의 재앙이 아니예요. 사람이 만들어 낸 인재예요. 사람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결과예요. 그리고 하늘을 원망하죠. 나무를 다 베어놓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다 파괴해 놓고 홍수난다고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니예요. 하나님 책임 아니예요. 우리 책임이예요. 인적 재앙이예요. 우리가 하나님 주신 축복을 다 거절하고 다 파괴해 놓고 우리는 하늘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지 못할 때 자연은 우리를 더 이상 보호할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자연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자연 보호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왜 그리스도인들이 자연 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 세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목적은 아닐지 몰라요. 그러나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 가운데 포함되어 있어요. 자, 여러분 자연 파괴의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합니까?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집 더 많이 짓기 위해서, 아파트 지어서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지금도 막 파괴하고 있잖아요. 사람의 욕심이예요. 욕심의 배후에는 뭐가 있어요? 죄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이 자연이 저주를 받기 시작한 원인도 인간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의 죄가 아니라면 자연은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었어요. 창세기 3장을 찾아 보세요. 창세기 3장이 무슨 장입니까? 창세기 3장을 무슨 장이라고 부릅니까? 타락장. 창세기 3장 첫 부분에서 우리는 처음 사람의 범죄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17절, 창세기 3장17절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여기 땅이 저주를 받는 다는 말이 처음 나와요. 땅의 저주는 무엇 다음에 온 결과입니까? 사람의 죄 다음에 온 결과입니다. 인간의 범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게 된 것이라 말이죠. 사람의 범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어요. 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자연과 만물이, 땅이 저주를 받았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으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면 어떤 결과가 또 와야 될까요? 사람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를 받았다면 사람들이 구원받고 죄짓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죄를 덜 짓는 세상이 온다면 자연도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회복이 되어야지요. 자연은 자기 책임이 아닌 사람 때문에 괜히 피를 본 것입니다. 자연은 사람 때문에. 혹시 이런 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있는지 몰라요. 잘 들어 보면 자연이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자연이 통곡하고 있는 소리가, 자연이 신음하고 있는 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막 지나가다가 막 산을 헐고 있는데 가보면 아파 아파 나는 너무 너무 아프다 울고 있는 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감동이 안 되시는지 무감각해져 가지고. 죄에 익숙해지면 사람이 무감각해집니다. 자,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의 구속이 완성이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 구원의 완성의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 재림의 때입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면 사람들의 구원이 완성이 되고 또 이 땅에서 죄가 완전히 심판되고 쫓겨나고 추방되면 마지막 결과를 보여줄 때 로마서 8장20절 한 번 보세요. 로마서 8장20절. 찾아 보세요. 로마서 8장20절입니다. 오늘 이것은 아주 특별 성경공부예요. 나도 사실은 처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20절. 새 천년에 어떤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까 생각하다가 이런 크리스찬들의 윤리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수요일날 오시는 분들은 이런 특별한 것을 공부했다고 절대로 주일날만 나오는 사람들에게 얘기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20절부터 보시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 자연이 허무한데 굴복한다. 자연도 썩고 병들고 그러죠. 자연 자체의 뜻이 아니다.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절 다같이 읽습니다. 21절 시작.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도달할 때,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이 완성될 때, 우리의 몸까지 썩지 않을 부활의 몸을 입고 완성될 때 피조물도 그때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자연도 완전히 자연으로서 회복되고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22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인간이 탄식하고 고통할 때 누구도 고통한다고요? 자연도 고통하면 탄식한다. 자연이 탄식한다는 말이 성경적입니까 아닙니까? 성경적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물어보는 것입니다. 자연이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자연이 울고 있는 소리, 자연이 탄식하는 소리. 우리는 자연의 통곡 소리, 자연의 탄식 소리를 좀 들어야 돼요.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어야 돼요. 좀 진지하게. 우리가 성경을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이런 문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자 이렇게 완성이 돼요. 저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예수님은 이러한 자연을 아파하시면서 이런 자연을 돌보려는 의지를 가지셨다고 생각해요.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산상수훈에 보시면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하늘의 새를 보라. 좀 봐요. 그냥 지나가지 말고 오늘 날씨 좋다 안 좋다 그러지 말고 새를 좀 봐요. 들의 백합화를 보라. 길쌈도 안 하고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지만 잘 자라고 있지 않느냐. 누가 돌보신다고 했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돌보신다. 그러면 자연은 누가 돌보고 있다는 얘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자연을 돌보고 있다는 얘기예요. 하나님은 자연에 관심이 계십니까 없습니까? 당신이 만드신 작품인 자연에 왜 관심이 없겠습니까? 사람들이 자연을 너무 파괴하면 야 너희들 안 되겠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은 자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 우리가 만약 정말 그리스도적 삶을 추구하고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이 자연 친화적 삶을 사셨다면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돼요. 자연을 감사하고 자연을 보호할 줄 알고 이런 삶을 살아야죠. 저는 이런 면에 있어서 대표적인 크리스찬, 역사 속에 살았던 그리스도인 중에 대표적인, 자연 친화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면 아씨시의 성자인 프란치스코 라는 사람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들어요. 캐톨릭이었지만. 굉장히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일생에 보면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 그가 살고 있던 동네에 가축들이, 양들이 자꾸 죽어 없어져요. 목축지대고 농부들이 많았는데 가축들이 자꾸 죽어 없어지는 것이예요. 알고 보니 늑대가 산에서 내려와서 계속 잡아 먹어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안 되겠다 늑대를 죽이자 늑대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산에 있는 늑대들을 완전히 없애자 계획을 세우는데 아씨시의 성자였던 프란치스코가 그것을 반대합니다. 죽이기 전에 나에게 기회를 달라. 나한테 맡겨달라고. 내가 한 번 해볼테니까 안 되면 그때 여러분이 죽이라. 그리고 그가 기도하고나서 산으로 올라갔어요.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며칠 후에 프란치스코가 산에서 내려오는데 보니까 늑대를 데리고 내려와요. 그런데 늑대가 아주 양같이 순해졌어요. 그래서 그때 이래로 늑대를 마치 자기 애완용 동물처럼 프란치스코가 데리고 살았다는, 그리고 늑대를 향해서 내 친구여 내 형제여 부르면서 살았다는 거예요.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는 없지만 또 여러분이 이것을 시험해보려고 나도 한 번 그렇게 해보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책임질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은 들어요. 우리가 거의 성화가 완성에 가까우면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궁극적인 천국의 광경을 묘사할 때 성경에 보면 이런 묘사가 나오잖아요. 이사야 11장에 보시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천년왕국에 대한 묘사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궁극적인 천국의 묘사라고 말하지만 뭐 어쨌든 상관없어요. 이것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사야 11장6절부터 보시면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괜찮은 나라, 믿습니까 여러분? 그것이 천국인 것을 믿습니까? 그 천국에 갈 것이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기대가 되세요. 진짜 마지막 천국의 모습을 보세요. 계시록 21장을 한 번 찾아 보세요.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을 한 번 찾아 보세요. 22장 제일 마지막절 1절부터 보시면 새 하늘 새 땅,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면서 요한계시록의 기자인 사도 요한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1절 이하에 또 저가 수정같은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은 어떤 나라예요? 오염이 없는 나라, 완벽한 자연이 회복된 나라 그 푸른 강, 그 푸른 나무, 푸른 숲 다시 저주와 병이 없는 그 세계, 그 세계에서 살게 될 희망을 갖습니까? 그러면 그 천국이 이 땅에 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우리들이라면 이 땅에 살 동안 완벽하다고 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면 우리에게 환경 보호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마지막으로 어떻게 환경 보호에 우리가 참여할 수가 있는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극단적 환경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극단적 환경론자들이 있어요. 크리스찬들이 환경 운동을 기피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세계에서 환경 운동을 제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뉴 에이지 운동가들이예요. 뉴 에이지 운동은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금세기 최고의 이단 운동입니다. 그들이 환경 운동을 열심히 합니다. 그들은 환경이나 자연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연을 신으로 봅니다. 자연 그 자체가 신이라 말입니다.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연을 신으로 봅니다. 자연 앞에 기도하고 자연을 숭배하는 거예요. 그리고 땅을 향해서 오 나의 어머니 대지시여 그러면서 기도하고 그럽니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이. 그러나 우리는 자연은 신이 아니예요. 자연은 신의 피조물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자연을 관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자연과 하나 됨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우리는 잘 돌보고 또 자연을 엔조이할 그런 특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결정적으로 뉴 에이지 운동가들과 크리스찬 환경 운동가가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등급적 가치를 믿습니다. 피조물의 등급적 가치, 이것이 뭐냐 하면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자연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최고의 가치는 자연이 아니예요. 최고의 가치는 여전히 인간이예요.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가장 소중해요. 인간보다 조금 못한 것이 동물이예요. 동물보다 조금 못한 것이 식물이예요.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에 등급적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참새 얘기를 하면서 너희가 참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가 참새보다 귀해요 안 귀해요? 귀해요. 우리가 먹고 살 것이 없으면 참새를 잡아먹을 수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괜찮아요. 먹고 살 것이 없으면. 그러나 심심풀이로 재미로 참새를 잡는 것, 그것은 죄라고 생각해요. 저는 기독교인들이 사냥을 즐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배고픈 사람들이 참새를 잡아 먹는 것은 괜찮아요. 죽느냐 사느냐 위기에 있는 사람들이 개를 잡아 먹는 것은 괜찮아요. 그러나 취미로 잡아 먹는 것, 저는 안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크리스찬들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크리스찬들이 보신탕을 즐길 수가 있느냐?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한 번 기도해 보고 하나님의 대답을 구해 보세요. 하나님이 괜찮다 실컷 돌아다니면서 잡아 먹어라 그러실까요 안 그러실까요? 요전에도 보니까 어떤 목사가 밀렵을 하다가 붙들렸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돈을 위해서 재미를 위해서 그러면 안 돼요. 저는 등급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은 아예 채식주의자가 많아요.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합니다. 분명히 등급적 가치가 있어요. 그러나 되도록 0悶О?만물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예요. 크리스찬들의 자연에 대한 책임은 한 마디로 말하면 청지기적 책임이예요. 우리는 청지기다. 자연이 주인이 아니예요. 우리는 자연에 대한 청지기예요. 주인은 하나님이세요. 우리는 자연을 맡아서 관리할 청지기에 불과한 것이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탈란트의 비유를 자연에도 적용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먼 나라로 가면서 주인이 달란트를 맡겼어요. 맡긴 것 가운데 자연도 있어요. 주님이 다시 오셨을 때 무얼 기대할까? 주님 우리가 맡겨주신 자연을 다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이것도 책임을 져야 해요. 주님이 원하시는 건 뭐예요? 주님이 주신 자연을 더 풍성하게 가꾸어서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더욱 풍성한 자연을 가꾸고 우리의 후손에게 다음 세대에게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물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찬의 책임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 가지 제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첫 째로 우리는 환경친화적 과학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극단적 환경론자 가운데는 과학 자체를 배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과학은 굉장히 중립적 가치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잘못된 과학은, 기술은 자연을 파괴합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과학자가 필요합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기술을 발달시키는 과학자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환경 친화적 환경 보호 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합니다. 저는 장차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런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자연 보호 목장을 좀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교회 small group가운데 자연 보호 목장. 그래서 자연 보호에 대해서 연구하고 자연 보호에 대해서 캠페인을 벌이고 또 이런 것 도와 달라고 그러면 저희 교회 재정의 일정한 부분들을 이런 운동에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그 일도 해야 되기 때문에. 그 운동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운동을 한다는데 대해서는 이런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 앞으로 5월달이면 선거할텐데 저 사람 보니까 인상이 나쁘다 그래서 찍고 이런 유치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나하고 고향이 같으니까 찍어주자 언제까지 이런 유치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까? 우리가 선거가 가까와서 투표를 할 때도 정책을 보아야 됩니다. 그 사람의 정책이 환경 친화적 정책을 갖고 있는가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에 앞장서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뽑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개인의 삶 속에서 환경적 친화적 삶을 우리 개개인이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살 수가 있습니까? 쓰레기를 덜 방출하고 음식 조금 덜 먹고. 식당에 가서 음식 타 올 때도 먹지 않으면서 괜히 왕창 타 갖고 왕창 남겨서 쓰레기를 발생하는 것, 하나님 기뻐하실까요 안 기뻐하실까요? 매우 안 좋아하실 것입니다. 아주 안 좋아하세요. 하나님이. 인상을 쓰시면서 여러분이 밥을 탈 뚫어지게 나를 꿰뚫어 지켜보고 계시는 불꽃같은 안목을 지니신 하나님. 밥 조금만 가져 와요. 먹을 수 있을 만큼 조금만 가져와요. 깨끗이 없애요. 쓰레기를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느끼는 것인데 되도록이면 자동차도 작은 것을 타고 걸어올 수 있는 거리는 걸어 다니고 교회 버스 타고 올 수 있으면 자기 차 가져오지 말고 여럿이서 같이 카풀해서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3월달이 되면 요 앞으로 이사오려고 합니다. 걸어다니려고 합니다. 가장 작은 일에서 부터 우리가 환경을 보호하고 아끼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목적이 그 어느 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회복의 영광 속에서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는 그 날을 위하여. 우리가 마지막 한 구절 보겠습니다. 시편148편 한 번 다 찾아 보세요. 시편 148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이런 환경 보호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들에 가서 억제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한 운동도 하는 사람들, 크리스찬의 삶이예요. 우리가 전도하는 것만 크리스찬의 삶이 아니예요. 이것도 매우 중요한 크리스찬들의 소명 가운데 하나란 말이죠. 시편 148편은 아름다운 시편입니다. 우리가 교독을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데서 찬양할찌어다 그의 모든 사자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찌어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찌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찌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라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과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며 청년 남자와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찌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심이로다 저가 그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저는 모든 성도 곧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거리로다 할렐루야 하늘과 별과 나무와 땅들과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그날을 위해서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와 아름다움 안에서 주님을 지금 이 순간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가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을 보호하고 쓰레기를 줍고 산에서 나무를 꺾지 않고 꽃을 아끼는 마음,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 신앙 생활의 한 모습이고 새로운 천년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한다.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첫 번째 스페셜 윤리 시리즈 스타디의 첫 번째로 환경 보호를 할 줄 아는 크리스찬이 되자. 결론은 Green Christian 이 되자.기도하겠습니다. 이동원 목사(용인 지구촌교회)
믿는 자의 환경/ 막5:35-43
믿는 자의 환경 막5:35-43 인간은 자기가 태어나서 성장한 환경의 산물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고향, 먹고 마신 음식, 그곳의 생활과 문화 등이 우리들의 사고와 인격을 형성하는 보금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장성한 후에도 인간은 자기 삶의 주변 환경에 끊임없는 영향을 받으며 생활 형태가 형성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 환경의 좋고, 나쁨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어떤 환경 속에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마귀는 영적인 환경의 오염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지으시고 먹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은 아름다운 실과 나무를 많이 나게 하시고 상함도 해함도 없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낙원에 아담과 하와를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되 그곳의 하나님 주권만은 절대로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에덴의 그 많은 처소를 다 제쳐두고 선악과 나무 밑으로 아담과 하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다음 \'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이 시기 질투해서 먹지 못하게 한다\'고 미혹했습니다. 아마도 매일 아담과 하와를 그 나무 밑으로 데리고 가서 쳐다보게 하며 유혹하였을 것입니다. 마귀는 선악과의 영향력이 미치는 환경에 아담과 하와를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 그 어느 곳에라도 가 있을 수 있으련만 마귀의 꾐에 빠져 늘 선악과 밑에서 그 열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바라봄의 법칙에 의해 그들은 선악과에 잡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악과에 잡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는 그들 눈에 너무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음직 하게 좋아 보였습니다. 그 위에 마귀가 자꾸만 그럴듯한 해석을 갖다 붙입니다. 이렇듯 오염된 환경 속에서 아담과 하와는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비참한 인생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환경\' 이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인간을 포로로 잡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엄하게 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그곳 7족을 멸하라\' 그 이유는 가나안 땅 백성들은 우상숭배가 심하고 음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들어가 살면 별 도리 없는 그 환경에 물들어 하나님을 저버리고 타락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막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환경을 먼저 정하게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7족을 완전히 멸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멸하고서는 타협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경고 그대로 그들은 가나안의 분위기와 환경에 물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고 음란과 방탕의 생활로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잔학한 바벨론과 앗수르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처참한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나는 어떤 환경에든지배반 받지 않는다\'고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 인물 중에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현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입니다. 그는 잠언의 거의 대부분과 전도서, 아가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토록 현명하고 축복 받은 그가 말년에 많은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데려왔습니다. 그 중에는 애굽 왕의 딸과 두로와 시돈 왕의 딸도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자기들의 잡신과 우상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지혜롭고 현명하기로 유명한 솔로몬은 그 아내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그만 유혹을 받아 그들의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절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같이 지혜로운 사람도 환경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나쁜 환경에 들어가서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가를 잘 깨달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만드신 믿음의 환경입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택한 제자들은 모두가 그 땅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나 세리 등으로 배움도 없고 사회적인 배경도 없는 평범 이하의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는 3년 반 동안 함께 잡수시고 주무시고 생활하시면서 친히 가르치시고 함께 전도 하셨습니다. 별로 보잘것없는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의 분위기 속에서 위대한 인물들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변화되고 말이, 생애가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수님께 함께 한 후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행동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며,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나타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모두 감탄했습니다. \'저들은 어부가 아니냐! 세리들이 아니냐!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하느냐!\' 사람들은 저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변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분위기,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환경이 평범한 사람들을 이렇게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환경이 변화될 때가 왔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원수들에게 잡혀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때 이후의 제자들의 생활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환경을 떠나 그들 홀로 그리스도 없는 삶이 되자 그들은 너무나 무력하고 형편없는 옛날 그대로의 사람으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는 조그만 계집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도 겁이나 \'저주하고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저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담대하고 신앙도 투철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 환경을 벗어나자 말자 이렇듯 나약하고 비열한 존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승천 50일 이후, 오순절 날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 거하셔서 성령의 분위기 속에 들어가자 말자, 성령의 환경에 잡히자 말자 그들은 능력 있는 기도자,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한번 외치면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이튿날에는 5천명을 회개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이 그들을 줄줄이 따랐고 그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저들의 세대 이후의 전 유럽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분위기 속에 들어오자 말자 전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위기에 따라 큰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나약하고 미지근한 신자일지라도 능력 있고 권세 있고 뜨거운 교회에 나가면 그대로 권능 있고 열렬한 성도들로 변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며, 매일 성령 충만한 가운데 있으면 우리들은 완전히 변화된 사람으로 되고 마는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게 되자 예수님께 뛰어와 \'내 딸에게 손을 얹어 살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간구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를 듣고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다가 혈루병 앓는 여인을 만나 고쳐주시느라고 시간이 좀 지체되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가까이 이르자 그 집 종이 뛰어나와 야이로에게 \'이제 선생을 더 괴롭히지 마소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하고 고했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통곡을 많이 해야 큰 초상이 되어서 전문적으로 울어주는 울음꾼들을 사용했습니다. 이 울움꾼들이 이미 회당장 집에 와서 진을 치고 천지가 떠나가도록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위로하신 후 집에 들어가 울음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들은 입을 삐죽거리며 비웃었습니다. \'죽은 아이가 잔다니…\' 그때 예수님은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그 아이에게로 가시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무리들을 모두 내어 쫓으셨습니다. 불신앙의 분위기를 일신시키신 것입니다. 분위기는 중요합니다. 불신앙의 분위기 속에서는 하늘나라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자란 곳 나사렛에 가니 모두 배척하여 불신앙의 그곳에서는 큰 일을 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도 믿음이 강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어린 아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방은 이제 믿음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땅의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 딸아 일어나라\'하시니 즉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불신앙의 분위기를 추방, 신앙의 분위기를 조성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의심과 냉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회개하며 생활의 정리정돈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시기를 바라면 교회의 분위기를 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청산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신앙으로 굳건히 서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분위기를 바꿔야 됩니다. 불안과 초조, 절망과 의심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나와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우는 자들을 쫓아낸 것처럼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마음속의 불신앙적인 것을 쫓아내고 온전한 신앙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며 주님께서 와서 일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믿음의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분위기와 환경 속에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너희가 모이기를 힘써 모여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모이는 것\'은 놀라운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에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고 하셨는데 이 얼마나 놀라운 분위기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예수님도 그 가운데 와 계시기 때문에 믿음의 분위기 속에, 믿음의 환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천을 쫓고 두 사람은 만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혼자의 믿음이 천의 원수를 쫓으면 두 사람의 믿음이 합치면 만의 원수를 쫓는 위대한 분위기와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주일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를 보십시오. 한번 예배에 수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찬송 부른다는 것은 굉장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 보다 두 사람이, 두 사람보다 열 사람이 낫고 열 사람 보다 천 사람, 천 사람 보다 만 사람.. 수가 많을 수록 그 신앙은 서로 상승작용을 해서 불신앙을 쫓아내고 마귀를 쫓아내고 신앙의 뜨거운 열기를 가져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신앙이 약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는 분위기속에 들어가면 그 분위기가 나를 변화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모이기를 폐하면 안됩니다. 꼭 주일성수하고 수요 성경공부 같은 모임 등에 최대로 참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늘 이런 분위기를 만들면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나 사업장에서도 불신앙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신우회를 조직하고 함께 모여 찬송하며 말씀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분위기가 조성되면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데 분위기를 떠나 버리면 우리의 신앙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의인 롯이 가족과 함께 그 성에 들어가서 사는 동안 그들은 그 성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완전히 소돔 고모라를 사랑해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롯의 딸들은 그곳의 음란, 방탕한 습관에 젖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 성을 멸할 때에 롯의 아내는 이곳을 너무 사랑해서 떠날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그 딸들은 아버지와 함께 도망해 나왔으나 산 중에 숨어있을 때,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잠자리를 같이하여 두 딸이 모두 아버지로서 모압과 암몬이라는 자식을 낳아 이스라엘을 끝가지 괴롭히는 족속을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의인 롯과 그 가족이 소돔과 고모라의 분위기 속에 살다가 완전히 패가망신하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의인이라도 나쁜 환경에 들어가니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에 처하게 되어도 그곳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는 분위기인 기도 모임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참석,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영의 생활을 보존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 한 주일 동안 세상에서 있으면서도 신앙의 불을 끄지 않게 하기 위해 교회에서는 속(屬)모임을 조직해 함께 모여 말씀공부하며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계속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속회에 가입하셔서 적극적으로 속 모임에 참석하십시오. 롯의 가족들 같이 되지 않기 위해 성령의 불을 지피는 모임에 꼭 참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봉사하는 기회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주일날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봉사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위해서 관심을 집중하고 애쓰는 동안에 그 분위기 속에서 신앙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불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불신앙과 세속적인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친구들과 모임은 술, 담배, 도박, 세상 잡담 등 거칠게 몰아치는 세속적인 분위기로 꽉 들어차는 것입니다. 그 곳에 들어가 함께 희희낙락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우리의 심령에 꽉 차고 마는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세속적인 친구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세상에서의 친구는 다 떨어져버리고 믿는 친구들과 교제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위기 때문에 도저히 합쳐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과 기름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은 떠나가고 믿는 이들은 서로 합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의 향락을 도모하는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육체를 이용해 유혹하는 처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들어가면 육신의 정욕에 취해 영적인 세계로 나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환경을 적극 피야 합니다. 저속한 것은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원수 마귀는 분위기 만들기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사단의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그 속에 몰아놓으려고 하고 성령은 성령의 분위기를 만들어 그 속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찌 하든지 주님 편에 서서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십자가 중심에 서고 지속적인 말씀공부와 기도, 찬양을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찾아가며 젖어 살 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 하나님께 칭찬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믿음/ 순종/ 신앙생활과 환경/ 막5:35-43/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1993-07-11
믿음/ 순종/ 신앙생활과 환경 막5:35-43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과 환경”이란 제목으 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태어나서 성장한 환경의 산물입니다. 자기 가 태어난 고장, 먹고 마시는 음식, 그곳의 생활 습관과 언 어, 문화 등이 우리의 사고와 인격을 형성하는 보금자리가 된 것입니다. 장성한 다음에도 인간은 자기 삶의 주변 환경 에 끊임없는 영향을 받으면서 생활이 형성되어 가고 있습 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자 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 렇다면 우리 환경의 좋고 나쁨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 력이 형언할 수 없이 강합니다. 더구나 우리 크리스찬들은 자기가 어떤 환경 속에 지금 살고 있는가를 깊이 염두해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부인 해도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환경에 물이 들고 맙니 다. 어떤 환경에 사느냐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을 점령해 버 리고 맙니다. 오늘 이 시간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과 환경 은 어마어마한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말씀 을 통해서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첫째로, 마귀는 영적 환경을 오염시키는 원인자인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낙원을 지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 었습니다. 거기는 낙원이었습니다. 먹기에도 아름답고 맛있 고 보기에도 좋은 나무가 많이 나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시 고 그곳에는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어 문자 그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산의 실과는 다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 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에덴에 아름다운 동산을 다 사람에게 주셔도 사람이 하나 님의 권세는 반드시 인정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존경하면서 살아야 에덴과 세계 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 귀가 와서 아담과 하와를 다른 나무 아닌 바로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나무 밑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말하기를 너희가 이 선악과의 나무를 먹어도 죽지 않 을 것이다.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너희도 하 나님처럼 될까 싶어서 하나님이 질투하고 시기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다른데 가지 못하도록 하고 선악과나무 밑에 와서 그를 바라보게 만들고 그 영향력을 받게 만든 것입니다. 갈 곳도 많은데 그들은 마귀에 꿰임에 빠져서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선악과 나무 밑에 와서 매일매일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무의 열매의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 다.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그 열매를 늘 바라보자 말자 그 열매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기 까지 했습니다. 결국에는 그 나무 밑에 늘 와서 보고 그 나 무 밑에서 마귀의 말을 듣고 그리고 난 다음 그 열매에 대 한 탐심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종국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손을 내밀어 그 열매를 따먹고 타락하 고 버림을 받고 처참한 죄인의 인생 길을 살게 된 것입니 다. 이것을 볼 때 사람은 환경을 피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 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의 나무 밑에 서서 밤낮 선악과를 바라보고 있는 이상 그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가 없고 선악과의 포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이스라엘 백성 들에게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 나안의 친족을 다 멸하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멸하고 쫓아 내라고 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의 백성들은 극 도로 우상숭배가 심하고 생활이 음란하고 세속적이었습니 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 라엘이 들어가면 별도리 없이 그 환경의 지배를 받아서 이 스라엘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게 되고 음란하고 방탕하고 하나님을 저버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준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모든 가나안의 친족들을 다 쫓아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 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일부분만 쫓아내고 그 다음에 는 그들과 섞여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로 가나안 족속의 영 향력을 받아서 그 환경에 물들고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 신 을 섬기게 되고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에 떨어졌다가 나중 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버림받아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 로로 잡혀가게 되고 처참하게 심판을 받게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혜롭고 현명하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에 갔다 놓 아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나는 환경을 이길 수 있 다.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 보면 인류역사상 가장 지혜롭던 사람이 있습니다. 솔 로몬입니다. 그는 전무후무하게 그만치 지혜로운 사람이 전 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 다. 그는 솔로몬 잠언서의 대다수를 다 기록했으며 그는 전 도서와 아가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 만년에 아주 원숙한 인격자가 되어야할 이때 많은 이방 여자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애굽의 여자들이라든지 이런 이 방 여자들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았을 때 그들이 예루살렘 으로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예루 살렘 왕궁 속에 우상의 제단들을 가득 쌓았습니다. 솔로몬 이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인데도 그 아내들의 영향을 받아 서 그 원숙한 나이에 그만 타락해서 우상에게 절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세우게 되고 그는 우상의 노 예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혜롭던 사람도 자기의 환경의 영향력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은 솔로몬이 우상숭배자가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은 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롭다 하더 라도 그 환경을 이겨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러므로 자기가 어떠한 환경 속에 들 어와서 사는가를 깊이 마음속에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 다. 롯을 보십시오. 롯은 의인이었습니다. 성경도 롯을 의인 이라고 말했습니다. 의인인 롯이 그 아내와 딸들을 데리고 소돔 고모라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돔 고모라 성의 음란 하고 방탕한 환경 속에 매일매일 노출되어 살다가 이것이 그들의 생활습관을 점령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 돔 고모라 성을 멸할 때 아브라함의 기도를 듣고 롯과 그 의 가족을 이끌어 내려고 할 때 롯의 아내는 얼마나 소돔 과 고모라 성에 젖어 들어갔던지 그 곳에 물이 들어서 소 돔과 고모라 성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천사가 강제로 끌 어냈는데도 불구하고 머뭇거리다가 심판을 받아서 소금기 둥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롯의 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소돔 고모라 성은 음란하 고 방탕해서 부모와 같이 살고 형제와 같이 살고 방탕했습 니다. 그 습관에 얼마나 젖었던지 그들이 떠나오고 난 다음 에도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서 그 딸들이 차례로 아버지와 동침하여 나온 자식이 모압과 암몬 자식인 것입니다. 그들 은 대대로 이스라엘에 대적해서 싸우는 블레셋 사람들 중 에 일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환 경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의인 롯이 소돔 고모라 성에 들 어갔다가 완전히 패가 망신을 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환경은 우리들에게 와서 우리들을 그 환경에 물들게 하 고 그 환경이 우리들을 점령해서 우리를 환경의 포로로 삼 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 떠한 환경을 선택해서 사는가 이것은 우리 생활에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둘째로,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만드신 믿음의 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한 열두 제자 는 지극히 평범하고 오히려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들 아니면 세리들이고 그 당시 사회 에서는 교육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지 못하 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 도자가 될 수도 없고 선생도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부들과 세리들을 예수 님이 데리시고 3년 반 동안 함께 주무시고 여행하시고 잡 수시고 그리고 생활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 께 사는 그 분위기에 들어가자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어 부들에게 거대한 변화가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말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 게 되고 사람들이 볼 때 그들은 장엄한 인격자가 되었습니 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 둘씩 둘씩 내보내니까 그들은 나가 서 그리스도처럼 증거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말씀을 전파하니 사람들이 몰려와서 다 주의 이름을 불렀 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분위기 속에 있을 때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세리들이 위대한 스승이요 인물 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잡혀서 끌려가고 그들이 버림을 당하자 예수님 을 떠난 그들은 너무나 비참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분위기를 떠나자 말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다 연약하고 허약하고 보잘 것 없 는 인물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가 장 지도자인 베드로 같은 사람도 어린 소녀 앞에서 예수님 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중에는 저주하고 맹세 까지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처참하고 허약한 존재로 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분위기 속에 있을 때는 제자들은 위대한 인물들이었으나 그리스도를 떠나고 난 다 음에는 그들의 허약함은 이루 말로다 할 수 없고 옛날의 어부나 옛날의 세리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 가 50일 이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 는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그들 속에 거하고 그들 주위에 임하시고 성령의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자 말자 순식간에 그들은 또다시 위대한 용사들로 변화되고 만 것입니다. 성 령의 분위기 속으로 들어가자 성령은 그리스도 영이요, 하 나님의 영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분위기 속으 로 들어가자 약한 자들이 강하게 되고 무식한 자들이 유식 하게 되고 무능한 자들이 유능하게 되어서 능력과 권능 있 는 제자들이 되어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매 하루에 삼천명, 그 다음에 오천명씩 회개하고 예루살렘을 복음으로 가득 채우고 종국적으로는 그 당시 온 세계를 뒤엎어서 복음화 하고 이것을 위해서 그들은 하나 같이 다 목숨을 바쳐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성령의 분위기 속으로 들어오자 말자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버리고 만 것입 니다. 오늘날도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허약하고 연약하더라도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고 우리가 성령 안으로 들어가서 성령의 분 위기 속으로 들어가면 연약하고 허약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능력과 권세있는 사람으로 변 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분위기 이것은 우리의 운명을 변화 시키고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크나큰 변화를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역사 하실 때 유대인의 회당장 야이로가 딸 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와서 많이 간구하니 예수님께서 고 쳐주려고 회당장과 같이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혈루병 여 인을 고친다고 시간을 많이 소모했습니다. 바로 회당장 야 이로의 집에 가기 전에 딸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종이 와서 하는 말이 선생을 더 괴롭힐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집안에는 통곡하는 소리가 천지 를 진동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죽으면 울음꾼들을 청해다가 울게 했습니다. 많은 울음꾼들이 많이 와서 울어 주면 좋은 초상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많은 울음꾼들 이 와서 회당장 집에 와서 호곡하고 울고 난리였습니다. 예 수님께 회당장 야이로와 그 집에 들어가서 이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비웃고 입을 삐죽거리고 부정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딸이 죽은 자리에 가서 고치기 전에 먼저 분위기를 일신했습니다.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쫓아냈습니다. 안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다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호곡하는 사람, 비웃는 사람, 입을 삐죽거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못하도록 다 쫓아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분위기를 일신한 다음에 그 가운데도 믿음이 연약한 제자들을 데리 고 가지 아니하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을 데리 고 들어가서 죽은 딸에게로 가서 달리다움 일어나라 하니 죽은 딸이 일어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 하시기 이전에 먼저 분위기부터 바꾸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서 나사렛에 갔을 때 고향 땅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주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비웃고 예수님을 의심하니까 그 자리에 서 예수님이 큰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분위기가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참으로 나와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으려면 우 리 마음속에 분위기를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 에 부정적이고 퇴폐적이고 세속적이고 의심이 꽉 들어찬 마음과 이런 것을 모두다 회개해서 쫓아내야 하는 것입니 다. 야이로의 집에 호곡하는 사람을 쫓아내듯이 미움도 쫓 아내고 의심도 쫓아내고 불안도 쫓아내고 공포도 쫓아내고 불신앙도 회개로 쫓아내고 분위기를 완전히 변화시켜서 예 수님을 모셔 놓고 그 다음 기도해야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 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먼저 회개로 분위기가 바꿔지고 난 다음에 천국의 역사가 일어나지 회 개와 분위기가 안 바꿔지는데 주님이 그대로 와서 역사하 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 전에 먼저 마당에 있는 사람부터 쫓아내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 기적을 행하 기 전에 우리의 마음의 마당에 있는 모든 불신앙의 분위기 를 일소하고 난 다음에야 예수님이 오셔서 역사하는 것입 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교회 가운데 불신앙의 역사를 다 내어쫓아야 합니다. 교회의 분쟁을 모 두 다 내어 쫓고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되게 한 다음에 그때 기도해야 주님께서 능력과 권세로 역사해 주시는 것 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가 어떤 분위기 속에 있 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분위기가 잘못되면 신앙도 잘못 됩니다. 잘못된 환경 속에 있으면 그 사람도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원수 마귀는 어찌 하든지 예수 믿는 한사람 한사람이나 혹은 집단적으로 잘못된 분위기를 만들어서 세 속에 물들게 하려고 죽을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원수 마귀의 오염된 사상에 물들어서 신앙이 쓰러 져 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오염되게 한 원수 마귀는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와서 우리에게 오염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분위기 속에 우리를 몰아 넣어 가지고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서지 아니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 살도록 그렇게 분위기를 조성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중심으로 서고 예수님을 경배하 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성령께서 는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예수님과 성 령이 합쳐서 원수 마귀를 대적하여 오늘날 천국의 분위기 를 만들려고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과 원 수마귀의 싸움터가 이 세상인 것입니다. 마귀는 세속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고 성령은 천국의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셋째로,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서 삶을 살아야겠습 니까? 믿음의 분위기 및 환경 속에 살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는 모 이기를 폐하는 어떠한 자 같이 되지 말고 주님이 오실 날 이 가까워질수록 힘써 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성령은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일 때는 나 도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세 사람이 모이면 예수님이 함께 계셔서 천 국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여서 설교 듣고 찬송하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같이 계셔서 천국 분위기가 되고 그 분위기 속으로 들어오면 그 분위기가 우 리 속으로 물들어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 속으로 침투 해 와서 우리의 마음속에 세속이 물러나고 천국이 뚜렷해 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천을 좇고 두 사람은 만을 좇는 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이면 모일수록 분위기가 상승작 용해서 천국의 역사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낫고 두 사람보다 열 사람이 낫고 열 사람보다 천 이 낫고 천 사람보다 만이 낫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 도 이름으로 모이면 상승작용을 해서 그 분위기 속에 천국 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세 속에 물든 사람을 가져다 놓아도 그 분위기 속에서 세속이 떠나가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천국의 영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속에 물 들지 아니하고 천국이 항상 우리 속에 보존되게 하기 위해 서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반드시 교회에 와서 하늘나 라 분위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 하고 함께 찬미하면서 하늘나라의 분위기를 마셔들여야 합 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가슴속에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 래서 우리가 또 다시 세상에 나아가 일할지라도 세속이 아 무리 다가와도 주님을 예배드릴 때 얻은 그 하늘나라의 분 위기가 우리를 점령하므로 세속이 우리를 점령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주일날 하루에 예배보는 것은 일주일밖에 효력이 없습니다. 다음 주일날 반드시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 교회에 나와서 예 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분위기가 우리 속에 가득 히 숨쉬고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수요 성경공부나 구역예배 모임이나 기도회 등을 최대한으로 참석해야 됩니다. 교회만 여러분 천국의 분위기를 만들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동네에 가서도 그 세 속 가운데 하늘나라 분위기를 가지고 오기 위해서 구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이 있습니다. 구역장 중심으로 지역 장 중심으로 모이게 해야 합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 도하고 찬미하므로 천국의 분위기가 우리 몸 속에 가득 채 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장소에서 일할지라도 공 장에서나 직장에서나 직장 신우회를 조직하고 공장 신우회 를 조직하고 점심시간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구 절 몇 구절 읽는 것이 별로 영향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분 위기를 통해서 내가 세속적인 공장이나 직장에서 일할지라 도 하늘나라가 내 속에 머물러 있게 하고 내가 하늘나라 속에 살게 하는 위대한 힘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 니다. 이러므로 믿음에 도움이 되는 모임에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입해 일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실업인 연합회가 있는데 여기 각 부서에 가입해서 여러분께서 그 분위기를 조성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모이고 함께 하나 님 사업을 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절 대적인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주를 위해서 봉사하면 힘들지만 주님을 위해서 시간 드리고 몸 드리고 물질 드리는 것은 주의 나라 분위기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위 기는 나를 지켜줍니다. 나를 자라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불신앙 및 세속적인 환 경은 피해야 합니다. 불신앙과 세속적인 환경을 여러분이 따라서 가면 그 속에서 마귀의 오염의 빠져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세상적인 친구들의 모임은 될 수 있으면 피하 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적인 친구들이 모이면 술 먹고 담배 피고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 속으 로 들어가면 별 도리 없이 그 분위기가 우리의 신앙을 깨 어 흔들어 놓고 맙니다. 여러분도 경험을 했듯이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점점 세상적인 친구가 멀어지고 세상적인 친 구는 떠나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믿는 새로운 친구들 이 나타난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별 도리 없습니 다. 이것은 분위기의 문제 때문인 것입니다. 세속적인 분위 기에 들어가 있으면 그 분위기에 어울려서 세속적인 사람 이 될 수밖엔 없습니다. 그것이 안 되자면 자연적으로 우리 는 어느 직장이나 어느 환경이나 믿는 사람이 함께 모이게 되고 함께 기도하게 되고 믿음의 분위기로써 자기를 보호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향락을 도모하는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술집에 간다든지 그리고 세속적인 춤을 추고 노는 놀이 집 에 간다든지 방탕한 곳에 간다든지 이러한 분위기는 우리 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마귀는 그 육체적인 분위기를 통 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들고 영적인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고 영적인 소원을 없애 버리고 육신 의 정욕과 쾌락의 도구로 삼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요사이 소위 신문에 난 오렌지족이라는 젊은 청년 남녀 들 그들은 무리를 지어 모여서 밤낮인지 모르고 술과 퇴폐 로써 향락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 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영적으로 깨우치지 못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떨어지면 그것은 완전히 도적질하고 죽임을 당하고 파탄을 당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쇄신, 이것은 우리 에게 절대로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모아놓고 찬송 을 부르고 가정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자녀들이 싫어하고 그것을 저항한다고 하더라도 그 분위기는 그들의 마음을 잡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위기 문제인 것입니 다. 부모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그 분위기는 자녀 들을 사로잡고 그 자녀들이 아무리 세상에 나아가서 세속 과 합쳐지려고 해도 이 가정에서 예배보는 분위기가 그들 의 목덜미를 잡고 당기기 때문에 세속으로 떨어지지 못합 니다. 이러므로 가정예배는 그 가정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 게 지켜주는 크나큰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국민 일보에서 가정예배란을 끊임없이 만든 것은 가정예배를 통해서 가정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분 위기를 가정 가정마다 가져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 니다. 여러분 저속한 텔레비젼이나 음악을 듣거나 잡지를 보는 것은 우리에게 크게 분위기 훼손이 됩니다. 오늘날도 텔레 비젼에 저속한 프로그램이 많이 나와서 안 믿는 사람들까 지도 텔리비젼 보지 않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저속한 텔레비젼을 입을 딱 벌리고 보고 있으면 입속으 로 마귀가 싹싹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저속한 것을 볼 필 요가 없어요. 내가 보아야 할 교양적인 프로그램만 보고 나 면 그 다음 텔레비젼을 꺼버려야 해요. 더 이상 보지 말아 야 해요. 저속한 그러한 것이 우리의 분위기 속에 세속을 가져다 밀어 넣는 것입니다. 음악도 오늘날 사탄의 음악이 있습니다. 젊은 아이들이 하는 록음악이나 째즈 음악 중에서 완전히 육체를 흥분시 키는 사탄음악이 있습니다. 사탄은 그런 음악을 통해서 분 위기를 조성해서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떨 어져 나가고 거룩한 삶에서 떨어져 나가고 방탕의 노예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물 러 나와야 합니다. 수요일 날 우리 교회에서 청년들이 가진 이 음악회, 밤새 도록 하나님의 거룩한 음악으로써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 사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 분위기 속에 들어와서 찬송을 부 르는 젊은이들은 신앙이 충만해지고 하늘나라가 넘쳐납니 다. 이번에 이 청년들이 저와 함께 소련에 가서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에서 가는 곳마다 전도하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 고 찬송을 부르고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가는 곳마다 천 국이 역사하는 분위기로 가득 채워 놓은 것입니다. 이 얼마 나 감사할 일입니까. 또한 저속한 잡지 같은 것 보지 마십시오. 더러운 잡지를 보고 마음속에 악한 원수 마귀가 오염된 분위기로 가득히 채워서 신앙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 택권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텔레비젼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잡지를 보거나 이러한 세속적인 분위기를 내어쫓아 야 합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사탄이 우리 속에 부패한 분 위기를 만들어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스스로가 올바른 분위기를 만들고 올바른 분위기를 찾아갈 운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 다. 왜냐하면 새가 보금자리를 지어서 둥지를 터서 그 속에 사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분위기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서 올바른 분 위기를 만들면 그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날로 자랍니다. 그 러나 이 분위기를 저버리고 세속적인 분위기에 들어가면 사탄의 오염된 분위기로 말미암아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은 강한 것 같아 도 도도히 흐르는 환경과 분위기의 강물에 결국은 떠내려 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한 신앙과 은혜에 넘치는 삶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서고 성령에 충 만하며 말씀과 같이 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되고 그런 분위기 속에 살아야 하 고 그런 분위기를 찾아야 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분위기에 있는가가 여러분의 내일 의 신앙을 결정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는 곳마 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되는 것 입니다. 될 수 있으면 그 곳에 참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과 같이 하지 말고 주의 날이 가까이 올수록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의 모임에 항상 같이 하여 성령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자 라게 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아 버지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주의 강림하심이 점점 다가오고 우리가 주 앞에 모일 날이 가까 워졌는데 하나님 아버지 원수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 의 분위기를 오염시켜서 세속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세상 풍속을 좇아 흘러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마귀의 흉악 한 계획에서 벗어나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예수 그리스 도를 섬기는 분위기에서 살게 도와 주시옵소서. 힘써 그 분 위기를 만들게 도와 주시옵소서. 힘써 그 환경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입다/ 삿11:1-11/ 2002-09-25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입다 삿11:1-11 (서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전혀 예기치 못한 위기나 좌절에 이를때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좌절하지 않는다.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본처에게서 낳은 아들들이 그를 홀대했다. 본문을 보면 형제들이 \\\"입다를 내어 쫓았다\\\"고 했다. 온갖 멸시와 구박 속에서 자라난 입다는 결국 자기 고향 땅에서 살지 못하고 돕땅에 가서 살았다. 돕땅은 가나안땅이 아니다. 길르앗 북쪽변방에 있는 수리아의 땅이다. 그는 조국과 민족, 형제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입다는 좌절과 실의에 빠지거나 타락하지 아니했다. 그는 당당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사사가 될 재목이 된 것이다. 그는 드디어 자기가 안고 있었던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했다. 그래서 오늘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입다\\\'에 대해서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한다. (一) 입다는 불우한 환경에서 실력을 닦았다. 6절에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고 했다. 돕땅에 거한 입다는 나름대로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보아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사회적으로 지탄과 멸시의 대상인 기생이었고, 아버지는 자기를 낳기만 하고 전혀 책임을 지지않는 무책임한 자였다. 형제들은 그를 미워하고 멸시했다. 급기야는 쫓겨나 불량배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러한 환경에 휩쓸리지 아니했다. 그는 길리앗의 장관이 될 수 있을만큼 큰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그렇게 불우한 환경속에서 자라났지만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준비하고 실력을 쌓았다. 어떤 식물학자는 \\\"새순이 싹을 틔워 올라오는데에는 무려 3만여개의 상처를 입으면서 꽃도 피우고 훌륭한 열매를 맺는다\\\"고 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환경이 나쁘다고 원망하지 맙시다. 가정이 어렵다고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좋지않은 환경을 주신 것은 바로 지금 미래를 준비하라고 주신 것이다. 다윗은 그의 8형제 중에서 운이 좋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것이 아니다. 시 78:70-72에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오셨다는 연락을 받고 형들은 가서 사무엘 선지자와 함께 식사자리에 참석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자리에 있지 아니했다. 왜 그랬습니까? 다윗은 어디에서 무슨일을 했습니까? 그는 양의 우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맡겨준 양들을 열심히 돌보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은 동기가 된 것이다. 성도 여러분! 절망과 좌절이 여러분을 끊임없이 찾아와 괴롭히고 있습니까? 낙심 하지 말고 지금 미래를 준비하십시오. 지금 내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머지않은 장래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쓰실 것이다. (二) 입다는 큰 마음을 가졌다. 그는 형들의 요청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고 (7절) 말했다. 그러나 그는 길리앗 형제들의 요청을 거부하지 아니했다. 그는 생명을 걸고 싸움을 하기 위해 갔다. 성도 여러분! 입다가 자기를 이용하려는 형제들의 꾀임에 빠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입다는 마음이 큰 사람이다. 그는 원수라도 용서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같은 넓은 아량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신앙은 좋은데 마음이 넓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남이 자기에게 조금만 섭섭하게 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도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상당한 방어심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일종의 강박증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제 2차 대전 후에 네덜란드 교인들은 한동안 주기도문을 외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독일 나치의 학정과 만행의 직접 피해자였던 그들은 독일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얼마후에 독일 교회 대표자들이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지난 과오에 대하여 사죄했다. 그때 네덜란드 대표가 답사 대신 \\\"주기도문을 외웁시다\\\"라고 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주님 가르친 기도를 암송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2) 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모든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넓고 큰 마음을 가집시다. 남을 용서하는 사람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실의와 절망속에서 분노의 노예가 되지않고 입다와 같이 오히려 형제들을 용서하고 형제를 구원하러 가는 것이다. (三) 입다는 승리가 하나님께 있다고 확신했다. 9절에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고 말했다. 입다는 큰 용사였다. 큰 용사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전쟁의 명수\\\"라는 뜻이다. 입다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쟁의 명수였다. 특별히 누구의 도움 없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당대의 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나에게 붙이시면\\\"이라고 말했습니까? 이것은 전쟁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전쟁의 승패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시어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불우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생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아무리 약한자라도 강한자를 부끄 럽게 할 수 있다. 학벌없는 자라도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다. 입다같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화려하게 자기 고향으로 금이환향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수단이 좋았기 때문인가? 그가 성공지향적으로 살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가 한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는 단지 하나님께 모든 인생의 승리의 비결이 있음을 알고 어떠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유다왕 여호사밧왕 때의 일이다. 모압자손과 암몬자손이 연합하여 침공해 왔다. 거기에 더하여 마온 사람들과 아람사람 들까지 협공해 왔다. 이때에 여호사밧왕은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고 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응답했다. (대하 20:15) 입다 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악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아니하고 참아낼 수 있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확신 하시고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다른 사람에 대하여 관대하고 인생의 성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 하십시오. 그러면 어떠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성공할 줄 믿는다.
사울의 변명/ 삼상15:17-35/ 이영란 목사/ 2012-06-14
사울의 변명 삼상15:17-35 <본문> 사무엘상 15장 17-35절 /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는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왕이 되고 난 이후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 족속과의 싸움에서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전리품을 탈취하기에만 급급하였다고 증거합니다(19절). 탈취하기에만 급했다는 말은 ‘탈취물에게로 날아갔다’는 뜻입니다. 즉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보고 탐심이 생긴 나머지 그것을 간절하고도 열정적으로 원했다는 의미입니다. 사울을 향해 악을 행했다고 지적하는 사무엘을 향해 사울은 끊임없이 자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심지어는 사울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은 백성이 두려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합니다(24절). 사울의 이 변명은 어느 정도 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 사울의 왕권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사울 왕권의 한계였습니다. 자신을 지적하는 사무엘에게 사울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제사드리기를 원했습니다(25절). 그러나 경배할 것을 허락해 달라는 사울의 요구는 사울이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갖고자 하는 의도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울은 사무엘이 집전하는 제사의 현장에 사무엘과 함께 있음으로 자신이 왕으로서 건재함을 만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심중을 간파한 사무엘은 사울의 폐위된 왕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단호히 선포합니다(26절). 사울은 정치적 목적에 필요한 것이기에, 또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죄의 고백을 하고는 있으나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사울은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사람’일뿐이었습니다(딤전6:5절). 사무엘과 사울이 각기 집으로 돌아간 이후 사무엘이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않았다는 말은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 선지자로서의 권고를 더 이상 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사울에게 필요했던 것은 번듯한 제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예배의 형식보다 예배자의 마음이 더 중요했습니다. 수양의 피나 기름보다 사울의 전인격적 마음이 더 중요했습니다. 제사는 그림자일 뿐이요, 순종이 실체여야 함을 사울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제사에 집중한 나머지 순종이 무시될 수 없음을 오늘날의 예배자들인 우리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란한 예배의 행위에 순종의 자세가 가려져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우리 각자가 살아갈 삶의 자리에서 순종의 예배가 드려지는 복된 날 되길 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고 말씀하신 주님, 오늘 우리에게 맡겨주신 삶의 예배가 순종의 예배의 자리가 되도록 우리의 심령을 열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9:14-17/ 환경주일설교/ 2007-06-0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9:14-17 해 아래 새 것이 없지만(전1: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새 것이 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명 운동은 사망에 처한 자들을 새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바리새인과 같은 옛 것의 교훈이 아니라 새 교훈으로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고 새 것을 따랐습니다. 새 것의 등장으로 옛 것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옛 것은 분개하여 새 것에게 도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오늘 본문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의 규례를 따르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낡은 부대, 낡은 옷들이 새 포도주의 발효력을 감당치 못해 이처럼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저버리고 신앙의 형식만 갖추고 위선과 오만으로만 가득찬 저들을 향해 주님은 무엇이 신앙생활이고, 무엇이 신앙의 본질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오해 본문 14절에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현장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바리새인들처럼 금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기만 탐하고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례 요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온 선구자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고, 약대 털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야생의 꿀)을 먹으면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헤롯왕의 죄를 책망할 정도로 정의감에 불탔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 결국 헤롯에 의해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요1:6)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소리침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도록 권유하였습니다(요1:37).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은 한 집단을 이루어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니 신앙생활이 형편없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라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은 당시 전통적인 유대 종교의식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유대 종교에 있어서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은 절대적인 행사요, 저들의 종교 생활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잘못된 형식은 전통을 만들고, 결국 그 전통이 사람을 종교적 노예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저들이 가진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신앙은 자기들처럼 믿어야 하고, 자기들처럼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진정한 믿음의 본질은 외면한 체 형식만 강조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기와 같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처럼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틀렸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처럼 기도하지 않고, 금식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신앙적 전통이나 형식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그 마음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지를 살피신다는 사실입니다. 참 생명이신 예수님은 거부한 체 자기들의 전통적인 금식이나, 기도, 구제로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답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그릇된 신앙적 편견을 교정하기 위해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혼인집의 비유 본문 15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주님은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무턱대고 아무 때나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금식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신을 신랑으로,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로 비유하였습니다. 당시 결혼식의 축제는 일주일간 열렸습니다. 이 잔치 기간에는 금식의 날이 와도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대적 규례를 통해 예수님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곧 영적인 신랑인데 나와 함께 이 축제에 참여한 제자들이 금식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 때는 금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환난의 때, 슬픔의 때, 고난과 역경이 다가올 때는 금식해야 하지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는 생명 운동의 잔치에 왜 금식하느냐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의 내용은 참으로 신랑을 맞은 생명의 잔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중풍 병에 든 백부장의 하인과 침상 채 메고 온 중풍병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각색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해 주셨습니다. 죄인 취급을 하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러한 생명의 잔치가 계속되고 있는데 금식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랑이 있을 때는 먹고, 마시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고 금식하므로 경건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은총, 매일의 삶속에서 구원하시는 은혜, 나를 신령한 것으로 채우시는 축복을 생각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겼을 때는 금식해야 합니다. 세상일에 치우쳐 주님의 일을 빼앗겨 영적인 기쁨과 힘을 잃었을 때는 금식 기도로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끊지 못하고 있는 죄의 습관 때문에 초라한 자신을 발견할 때 금식 기도로 승리해야 합니다. 세상적 쾌락으로 삼손처럼 힘을 잃었을 때 금식함으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도는 이 두 가지의 일을 조화 있게 유지해야 합니다. 생베 조각의 비유 본문 16절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평범한 진리를 이용해 깊고도 심오한 영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낡은 옷에 구멍이 났을 때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기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베 조각이 물에 젖으면서 수축해지면 오히려 옷을 더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낡은 옷\'은 구약의 율법을 오해하여 타락한 당시의 유대주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생베 조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금식의 문제보다 이제 더 깊은 신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꿰매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신앙은 타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혼합주의, 혼합종교를 경계해야 합니다. 유교에다 기독교의 옷을 입히려 하지 마십시오. 불교에다 기독교의 옷을 적당히 입혀 둔갑시키지 마십시오.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에다가 기독교의 옷을 입혀 토착화 신앙을 만들지 마십시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행4:12). 우리는 옛 형식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기워 입지 말고 과감히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도는 형식만 변해서는 안됩니다. 겉모습만 경건의 모양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성품이 변해야 합니다. 본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새 포도주의 비유 본문 17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발효 작용이 아직 되지 않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될 때 낡은 부대는 터져 둘 다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새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 포도주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된 음료인 예수를 가리킵니다(고전11:25,행2:13). 또한 여기 \'새 부대\'는 거듭난 성도를 의미합니다. 종교적 아집과 교만으로 형식에 매여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저들에게는 그리스도 때문에 낡은 부대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임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수용할 부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변화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옛 것인 중풍병자에게 영육의 고침으로 사용된 새 포도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갈증을 만난 옛 것인 세리와 죄인들에게 사죄의 은총으로 가슴을 시원케 하는 새 포도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옛 것인 종교적 형식주의인 금식의 굴레에서 사람들을 혼인집으로 인도하는 새 기쁨의 포도주입니다. 우리는 새 포도주의 은혜를 받으려면 옛 사람의 행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우리에게는 기도 생활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점점 자신의 부대가 낡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앞에 복종시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복종시켜야 우리의 부대는 날마다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일에 게을리 하는 동안 우리의 부대는 낡아져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낡은 부대가 되어,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부담이 되고, 힘이 들고, 교회 생활에 기쁨을 잃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바리새인과 같이 종교적 형식과 종교적 오만에 가득찬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보았습니다. 저들은 옛 것만 고집하고 새 것을 배척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고, 낡은 옷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성도는 결코 외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근본이 변해야 합니다. 낡은 부대는 버리고 새 부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참으로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은 사람들은 삶이 달랐습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은 스데반은 낡은 옷, 낡은 가죽 부대의 돌에 맞아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새 포도주로 충만한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장렬한 순교를 하였습니다. 새 포도주로 가득 채워진 새 부대인 베드로, 바울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은 낡은 가죽 부대의 무수한 공격을 받았지만 변함없이 주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55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구는 낡았습니다. 여기 저기 구멍이 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안보의 구멍이 나 버렸습니다. 이라크는 전쟁 위기의 구멍이 났습니다. 곳곳에 기근의 구멍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오존층의 구멍, 환경 파괴의 구멍으로 온통 지구는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 낡은 것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낡은 것이 새 것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망의 진노의 옛 것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옮기워진 성도는 이제는 예전의 낡은 전통과 습관에서 벗어나 새 시대에 걸맞는 삶의 양식을 좇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음성입니다. - 아멘 -
신앙 생활과 환경/ 막5:35-43
신앙 생활과 환경 막5:35-43 인간은 자기가 태어나서 성장한 환경의 산물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고장, 먹고 마신 음식, 그곳의 생활과 문화등이 우리들의 사고와 인격을 형성하는 보금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장성한 후에도 인간은 자기 삶의 주변 환경에 끊임없는 영향을 받으며 생활 형태가 형성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 환경의 좋고, 나쁨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어떤 환경 속에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 마귀는 영적 환경의 오염을 가져옴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지으시고 먹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좋은 아름다운 실과나무를 많이 나게 하시고 상함도 해함도 없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사상도 할 수 없는 그 낙원에 아담과 하와를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되 그곳의 하나님 주권만은 절대로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에덴의 그 많은 처소를 다 제쳐두고 선악과 나무 밑으로 아담과 하와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다음 \'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이 시기 질투해서 먹지 못하게 한다\'고 미혹했습니다. 아마도 매일 아담과 하와를 그 나무 밑으로 데리고 가서 쳐다보게 하며 유혹하였을 것입니다. 마귀는 선악과의 영향력이 미치는 환경에 아담과 하와를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 그 어느 곳에라도 가 있을 수 있으련만 마귀의 꾐에 빠져 늘 선악과 밑에서 그 열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선악과에 잡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는 그들 눈에 너무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음직하게 좋아 보였습니다. 그 위에 마귀가 자꾸만 그럴듯한 해석을 갖다 붙입니다. 이렇듯 오염된 환경 속에서 아담과 하와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비참한 인생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환경\' 이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인간을 포로로 잡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 엄하게 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아가거든 그곳 7족을 멸하라\' 그 이유는 가나안 땅 백성들은 우상숭배가 심하고 음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들어가 살면 별 도리 없는 그 환경에 물들어 하나님을 저버리고 타락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일 하나님께서는 막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환경을 먼저 정하게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7족을 완전히 멸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멸하고서는 타협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경고 그대로 그들은 가나안의 분위기와 환경에 물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고 음란과 방탕의 생활로 떨어졌습니다. \'나는 어떤 환경에든 지배받지 않는다\'고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 인물 중에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현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입니다. 그는 잠언의 거의 대부분과 전도서, 아가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토록 현명하고 축복 받은 그가 말년에 많은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데려왔습니다. 그 중에는 애굽 왕의 딸과 두로와 시돈 왕의 딸도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자기들의 잡신과 우상을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지혜롭고 현명하기로 유명한 솔로몬은 그 아내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그만 유혹을 받아 그들의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절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같이 지혜로운 사람도 환경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가를 잘 깨달아 알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이 만드신 믿음의 환경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택한 제자들은 모두가 그 땅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나 세리 등으로 배움도 없고 사회적인 배경도 없는 평범 이하의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는 3년 반 동안 함께 잡수시고 주무시고 생활하시면서 친히 가르치시고 함께 전도하셨습니다. 별로 보잘것없는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의 분위기 속에서 위대한 인물들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변화되고 말이, 생애가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수님께 함께 한 후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행동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자를 고치며,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나타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모두 감탄했습니다. \'저들은 어부가 아니냐! 세리들이 아니냐!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하느냐!\' 사람들은 저들이 예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변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분위기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환경이 평범한 사람들을 이렇게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위기에 따라 큰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나약하고 미지근한 신자일지라도 능력 있고 권세 있고 뜨거운 교회에 나가면 그대로 권능 있고 열렬한 성도들로 변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며, 매일 성령충만한 가운데 있으면 우리들은 완전히 변화된 사람으로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않고 나의 신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게 되자 예수님께 뛰어와 \'내 딸에게 손을 얹어 살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를 듣고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다가 혈루병 앓는 여인을 만나 고쳐주시느라고 시간이 좀 지체되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가까이 이르자 그 집 종이 뛰어나와 야이로에게 \'이제 선생을 더 괴롭히지 마소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하고 고했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죽으면 통곡을 많이 해야 큰 초상이 되어서 전문적으로 울어주는 울음꾼들을 사용했습니다. 이 울움꾼들이 이미 회당장 집에 와서 진을 치고 천지가 떠나가도록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위로하신 후 집에 들어가 울음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그들은 입을 삐죽거리며 비웃었습니다. \'죽은 아이가 잔다니...\' 그때 예수님은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그 아이에게로 가시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무리들을 모두 내어 쫓으셨습니다. 불신앙의 분위기를 일신시키신 것입니다. 분위기는 중요합니다. 불신앙의 분위기 속에서는 하늘나라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자란 곳 나사렛에 가니 모두 배척하여 불신앙의 그곳에서는 큰 일을 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도 믿음이 강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어린 아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방은 이제 믿음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땅의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 딸아 일어나라\'하시니 즉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불신앙의 분위기를 추방, 신앙의 분위기를 조성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의심과 냉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회개하며 생활의 정리정돈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시기를 바라면 교회의 분위기를 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청산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신앙으로 굳건히 서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분위기를 바꿔야 됩니다. 불안과 초조, 절망과 의심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나와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우는 자들을 쫓아낸 것처럼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마음속의 불신앙적인 것을 쫓아내고 온전한 신앙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주님께서 와서 일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3. 믿음의 분위기 및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한다. 믿음의 분위기 및 환경 속에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성경은 \'너희가 모이기를 힘써 모여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모이는 것\'은 놀라운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천을 쫓고 두 사람은 만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혼자의 믿음이 천의 원수를 쫓으면 두 사람의 믿음이 합치면 만의 원수를 쫓는 위대한 분위기와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주일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합니다. 한 사람 보다 두 사람이, 두 사람보다 열 사람이 낫고 열 사람 보다 천 사람, 천 사람 보다 만 사람.. 수가 많을 수록 그 신앙은 서로 상승작용을 해서 불신앙을 쫓아내고 마귀를 쫓아내고 신앙의 뜨거운 열기를 가져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신앙이 약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는 분위기 속에 들어가면 그 분위기가 나를 변화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모이기를 폐하면 안됩니다. 꼭 성수주일하고 수요 성경공부나 구역예배 모임 등에 최대로 참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늘 이런 분위기를 만들면 참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의인 롯이 가족과 함께 그 성에 들어가 사는 동안 그들은 그 성의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완전히 소돔 고모라를 사랑해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롯의 딸들은 그곳의 음란, 방탕한 습관에 젖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 성을 멸할 때에 롯의 아내는 이곳을 너무 사랑해서 떠날 수가 없어 머뭇거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십시오. 의인 롯과 그 가족이 소돔과 고모라의 분위기 속에 살다가 완전히 패가망신하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의인이라도 나쁜 환경에 들어가니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떠나 한 주일 동안 세상에서 있으면서도 신앙의 불을 끄지 않게 하기 위해 교회에서는 구역모임을 조직해 함께 모여 말씀공부하며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구역에 가입하셔서 적극적으로 구역예배에 참석하십시오. 롯의 가족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성령의 불을 지피는 모임에 꼭 참석해야하는 것입니다. ◉ 뿐만 아니라, 봉사하는 기회를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주일날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봉사하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관심을 집중하고 애쓰는 동안에 그 분위기 속에서 신앙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불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 그뿐 아니라 불신앙 및 세속적인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친구들과 모임은 술, 담배, 도박, 세상 잡담 등 거칠게 몰아치는 세속적인 분위기로 꽉 들어차는 것입니다. 그 곳에 들어가 함께 희희낙락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우리의 심령에 꽉 차고 마는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세속적인 친구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세상에서의 친구는 다 떨어져 버리고 믿는 친구들과 교제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위기 때문에 도저히 합쳐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과 기름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은 떠나가고 믿는이들이 서로 합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원수 마귀는 분위기 만들기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사단의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그 속에 몰아놓으려고 하고 성령은 성령의 분위기를 만들어 그 속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찌 하든지 주님편에 서서 마귀를 쫓아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십자가 중심에 서고 지속적인 말씀공부와 기도, 찬미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찾아가며 젖어 살때 너도 살고 나도 살고 하늘나라가 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과 환경/ 왕상11:1-11/ 2001-10-25
신앙과 환경 왕상11:1-11 맹모 삼천지교(三遷之敎)라는 고사 성어가 있다. 맹자가 어렸을 때 그의 집이 묘지 근처에 있었는데 맹자가 매일 상여 메고 장사 지내는 놀이만 하고 놀고 있으니 이사를 갔다. 시장근처로 갔더니 매일 물건 팔고 사는 놀이만 하니 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맹자는 매일 서당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공부하는 놀이를 하면서 자랐다는 것이다. 맹자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세 번 거처를 옮겼다는 이 고사성어는 교육에 있어 환경이 큰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 어떤 학자들은 맹자 어머니가 일부러 교육을 위해 묘지 근처로 이사를 가서 먼저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고 또 시장근처로 이사를 가서 삶을 가르치고 그 다음에야 서당 근처로 이사해서 지식을 배우도록 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환경이 중요한 것이다. 미국 코넬 대학의 실험실에서 \'개구리 적응실험\'을 했다.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집어넣었더니 순간적으로 뛰어 나왔다.그러나 처음에는 미지근한 물에 넣어두고 오랜 시간을 두고 아주 천천히 조금씩 조금씩 온도를 높여갔더니 개구리는 온도가 높아지는 것을 모르고 나중엔 끓는 물 속에서 편안하게 익으면서 죽어 갔다. 사람들도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영적인 것도 그렇다. 지금 내가 나쁜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분위기가 좋은 것이 아니다. 무감각해 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씩 영혼이 죽어 가는 것에는 둔감하다. 독약도 한 병을 누가 먹이려고 한다면 큰 범죄가 되고 문제가 되겠지만 아주 소량을 조금씩 먹이는 것은 신경 쓰려 하지 않는다. 여러분의 영적 환경은 어떤가? 영적인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영적 분위기가 중요하다. 예수님도 다른 곳에서는 많은 능력을 행하셨으나 자기 고장에서는 능력을 행치 않으셨다. 믿지 않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가정의 분위기도 중요하고 학교나 사회 분위기도 중요한 것이다. 교회 분위기도 중요한 것이다. 오늘 신앙과 환경에 대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솔로몬의 신앙과 환경 솔로몬 왕은 유대나라의 역대 임금중 지혜가 뛰어나고 가장 많은 부귀와 영광을 누렸던 왕이다. 그는 젊어서는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로 일천 번제를 드렸고 성전을 7년 동안 짓고 여호와의 궤를 옮길 때 셀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제물을 드렸다. 낙성식을 행할 때는 화목제를 드렸는데 이 제사는 의무적인 제사가 아니다. 자원해서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다. 제물로 바친 소가 이만 이천 마리요 양이 12만 마리였다. 예배드리기를 기뻐하며 하나님께 대해서는 계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왕상 8장에 성전을 낙성하고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보면 훌륭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솔로몬은 혼자만 신앙이 좋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가 다스리는 백성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가르치고 이끌어 주었던 왕이었다. 그런 솔로몬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높아지고 부유해지자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왕이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때 그만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 사치와 허영을 좇아 살게되고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이기 시작했고 궁전에서 이방 신들을 섬기도록 했다. 나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 우상들을 세웠다. 그러자 조공을 바치던 나라들이 대적하고 신하들이 배반하기 시작한다. 죽은 후 나라가 찢어져 버렸다. 오래 전에 연세가 많으신 한 여자 권사님이 제게 질문을 하기를 \"솔로몬이 천국에 갔을까요?\" \"아무래도 못 갔겠지요?\" 하나님 만이 아신다. 그 권사님이 하늘나라에 가신지 벌써 오래 되셨는데 그 궁금증은 풀어졌을 것이다. 직접 확인하셨을 테니까...... 신앙은 발전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시간이 흐를수록 나빠지는 사람도 있다. 좋은 신앙도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솔로몬도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서서히 타락해 간 것이다. 성경에는 그 이유가 분명히 나와 있다. 이방여인들 때문이었다. 애굽 바로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더니 모압 족속 암몬 족속 에돔 시돈 헷 족속등의 여자들을 취하여 무려 일천명의 여자를 거느리게 된다. 백제 의자왕 만은 못하지만 이름도 다 기억하기 어렵다. 성경에 \'이방여인과 결혼하지 말라.\'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라\' 하시는 것은 그런 환경이 조성되면 서서히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도 그와 같은 것이다. 솔로몬의 믿음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청년시절이 아니었다. 결혼을 잘못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강대국인 애굽의 바로의 공주와 결혼하니 세상적으로 보면 복받은 결혼 같은데 망해 가는 끄나풀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있게 이방 우상을 무시하고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물들어 간 것이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하는데 반복적으로 유혹하니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물들어간 것이다. 믿음이 좋았었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 아니고 지혜가 있다고 괜찮은 것이 아니다. 넘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분명히 있었다. 2. 믿음의 환경을 만드시는 예수님 예수님도 불신앙적이고 회의적인 분위기에 젖어있는 고향에서는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찾아와 고쳐 달라고 간구하였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를 듣고 고쳐주기 위해 그와 함께 어린 딸이 있는 그의 집으로 가다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만나 고쳐주시느라고 시간이 좀 지체되었다. 회당장의 집에 가까이 가니 그 집 종이 뛰어나와 야이로에게 \'이제 선생을 더 괴롭히지 마소서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라고 했다. 이미 죽었으니 예수님이 가신들 살릴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신 후 그 집에 들어가 울음꾼들에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니 그들은 비웃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직업적인 울음꾼들도 있어서 초상집에 가서 울어주곤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행하시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당장의 어린 딸을 살리시는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울 믿지 않는 사람들을 먼저 내 쫓으셨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가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 즉시 살아 일어났다. 분위기는 중요하다. 불신앙의 분위기 속에서는 하늘나라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불신앙적 분위기를 추방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귀는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고 그렇게 분위기를 조성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분위기에 약하다. 그래서 하와가 먼저 넘어간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불신앙과 부정적인 마음 냉소적인 마음이 가득차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속에 불신앙적인 분위기를 모두 몰아내시기 바란다. 교회도 부정적이고 화합하지 못하고 냉소적인 냉랭한 분위기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모든 불신앙적 분위기가 있다면 예수님 이름으로 몰아내시기 바란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 마음에 예수님 모시고 모든 불신앙적 것들을 몰아내시고 교회 모임에도 가정에도 예수님 모시고 모든 불신앙적 요소들을 몰아내시기 바란다. 자리잡을 기회를 주면 안 된다.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성령충만하면 다른 것이 들어 올 수 없다. 컵에 물을 부으면 공기는 자연히 다 빠져 나가는 것과 같다. 3. 불신앙적 환경을 영적 분위기로 바꾸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신다. 우상 숭배의 도시! 죄악이 관영한 그 환경을 떠나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우상숭배하는 애굽에서 떠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좋지 못한 환경은 떠나야 한다. 피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환경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 적극 막아야 한다. 요즈음 청소년들이 이런 유해 환경속에 내 팽개쳐져 있다. 신앙적 분위기가 어두운 분위기를 몰아내야 하는데 오히려 불신앙적인 분위기가 영적 분위기를 몰아내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본다. 인터넷 채팅이 인기를 끈다고 하는데 화상채팅을 하고 번개팅을 하고 원조 교제라는 것을 하고 어떤 학생을 게임에 빠져서 동생을 게임의 주인공 처럼 도끼로 살인까지 했다. 무서운 세상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사방에 얼마든지 이런 환경이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보고 듣는 것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보는 것 듣는 것 조심해야 한다. 그런 분위기를 바꾸어버리려고 하지 않고 주여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기도만 한다고 될까?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매일 유혹하니 함께 있기를 피했다. 나중에 둘이 있을 때 옷을 잡고 유혹하니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쳐 나왔다. 만일 그 자리에 그냥 있으면서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했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불신앙적이고 세속적인 환경을 피해야 한다. 자꾸 술먹고 죄짓는 세속적인 자리에 참여하면 점점 젖어 간다. 물들어 간다. 분위기를 바꾸어 버리는 자가 되기 바란다. 가정도 성경 읽기 운동에 참여하시는 분은 집안 분위기가 틈나면 성경 읽는 분위기로 바뀌는 것이다. 다른 TV나 다른 잡지 읽을 여가가 없다. 집안 그림도 성구나 성화를 붙여야지 이상한 그림들이나 연예인 그림 같은 것 붙이는 것은 좋은 신앙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믿는 가정에 성구나 성화는 하나도 없고 다른 장식만 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다. 음악도 사단의 음악이 있다. 이상한 팝송 자꾸 들으면 영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어떤 집은 수집 취미라고 양주 장식하는 가정도 있다. 그것을 보고 자녀들이 무엇을 느끼라는 것인가? 가정의 분위기를 신앙적 분위기로 바꾸기 바란다. 직장에서 신우회 모임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직장 분위기를 예수님 분위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도 자기 영역을 넓히기 위해 애를 쓴다. 광고도 그래서 하는 것이다. 마귀는 공중 권세를 잡고 자기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우리는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교회도 은혜스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회의를 해도 분위기 깨는 발언은 하지 말라. 말한 마디 잘못하면 찬물 끼얹은 것처럼 되어 버린다. 냉냉해 지는 것이다. 사기 저하시키는 발언은 하지 말라.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집사님 권사님들이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분위기를 만들자. 교회는 기도하는 분위기 만들어야 한다. 새벽기도나 수요일 금요일 기도시간에 참석하는 숫자가 적을 때는 힘을 얻어야 하는데 힘이 빠진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이 몇 명인데.... 또 집사님들이 몇 명인데..... 기도하는 분위기 만들자. 성경 공부하는 분위기 만들어야 한다. 전도하는 분위기 만들어야 한다. 사랑하고 양보하는 분위기 서로 위해주는 분위기 서로 봉사하는 분위기 서로 존경하는 분위기 마음의 환경도 가정의 환경도 교회 모임도 직장 분위기도 좋은 분위기로 바꾸고 또한 적극적으로 영적 분위기에 참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15/ 환경주일설교/ 2007-06-10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15 성경에 보면 태초에 우리의 조상이었던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는 그의 아내인 이브와 함께 동산나무 숲에 숨었다고 하였다(창3:8).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9)고 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소재를 물으신 것은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찾으셨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범죄한 아담부부가 차마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어서 나무숲에 숨어 있지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하나님은 저들의 소재뿐만 아니라 저들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헤아리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여호와의 눈은 어디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15:30)하였고, 욥기의 기자는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하는 자는 숨을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34:21-22)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 인간의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살피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의 말처럼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범죄한 아담을 살피실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나와 계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만 살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우리 하나님은 내가 모래에서 그 형체가 이룩되기 전에 이미 주의 눈이 나를 감찰하셨나이다.”(139:15)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범죄한 아담만을 살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남이 알게 모르게 행한 선행도 살피시고 악행도 살피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숨겨진 동기까지도 손바닥 드려다 보시듯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가 주의 낮을 피하여 어디로 가리까.”(139:7)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고로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후 무화과나무 숲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신 것은 저들의 소재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물으신 것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놈이 죄인입니다. 생각이 짧아서 그만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나이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회개가 아담의 입으로부터 나오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물은 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본문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불러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란 히브리어는 영어에서 ‘man’이란 단어와 동일한 뜻을 가졌으며, 본 아담이란 단어 앞에 정관사 곧 영어의 ‘The’가 붙어 있으니까 이 말은 어떤 개인의 고유명사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신 질문은 곧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와 같은 내용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 3장의 본문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들과의 관계성을 발견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외면할 때 우리의 하나님은 ‘이 아무개야! 네가 어디 있느냐?’ ‘박 아무개야! 네가 어디 있느냐?’ ‘김 아무개야!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지금 인간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느냐? 너는 지금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걷고 있느냐? 너는 지금 크리스천으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고 있느냐? 저는 지금 모든 인간관계를 원만히 형성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나는 바른 인생의 가치관 위에 서 있다고 보는가? 지금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지금 나는 나의 본분을 잘 수행하며 사는가? 지금 나는 이웃과의 관계가 정상적이고 원만한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회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새로운 다짐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은 모두가 선하고 아름다웠고, 또한 조화롭게 운행되는 세계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조화의 세계가 부조화의 세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교회의 성가대는 짧은 역사에 규모다 작은 성가대이지만 대단히 성가를 잘 부르는 편입니다. Chorus의 생명은 음의 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그리고 베이스들이 한데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룰 때 그 성가는 힘이 있고 장성하여 듣는 이가 감동 감화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성가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러나 성가대원들의 음성이 맞지 않는다든지 전체적으로 음이 부조화를 이룰 때 그 성가는 소음이 될 수도 있고, 귀를 거슬리게 하는 음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태초에 한님이 창조한 세계는 모든 것이 조화 속에 운행되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원만했고, 부부사이가 원만하였고, 형제간에 우애로웠습니다. 인간과 피조물의 관계도 조화로워서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고 하였다(시8:9).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이란 범죄는 이 조화로운 세계를 부조화의 세계로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은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20세기가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 P. 틸리히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인간과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은 3차원의 관계를 단절시켜 부조화의 세계를 건설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3차원의 부조화로부터의 관계의 회복을 촉구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은 1. 첫째, 일그러진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인간성 회복과 개발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에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그만 제가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창3:5)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통회자복 했더라면 용서를 받았으련만 아담은 회개는커녕 오히려 ‘네 어찌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단 말이냐?’란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라고 변명했습니까? 12절을 보면 아담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제게 주신 저 여편네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도 타락한 것도 그리고 내 신세 망치게 된 이유도 그 1차적인 책임은 아내 때문이요, 2차적인 책임은 당신이 저런 요망한 여자를 제게 주셨기 때문이 아니냐고 변명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내가 타락한 이유도 불순종한 이유도 내 탓이 아니라 아내와 당신 탓이 아닌가하고 반문하고 있지 않은가! 이 때 하나님은 이브에게 ‘그러면 너는 왜 따먹지 말라고 한 그 선악과를 따먹었단 말이냐?’고 물으시니 이브 역시 내 탓이 아니라 뱀의 간계 때문이었다고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 않습니까?(창3:13)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지은 허물과 죄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또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고 내 탓으로 돌리고 솔직히 뉘우치고 회개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도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주일 아침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지었으며 원하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였나이다.”고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 후 목사는 “그리스도의 명하심에 따라 여러분의 죄가 사하여졌음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지 않는가! 2. 둘째, 이웃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그 말씀 속에는 ‘너와 제일 가까운 아내와의 관계가 원만하냐? 너와 네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하냐? 너와 네 이웃과의 관계가 원만하냐? 너와 네 형제자매와의 관계가 원만하냐?’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먼저 나와 내 아내와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창 2:23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이브를 창조하시어 아담에게 데리고 가서 아내로 주겠다고 하실 때 아담은 이브를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했던지 거의 입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아담과 이브사이의 부부금실은 가히 천하일품이었다고 할 수 있고 마냥 행복한 나날을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행복하기만 했던 부부의 관계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타락한 다음 어찌 되었습니까? 약 3:11절에서 한 입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온다고 한 말과 같이 아담의 입에서 한 때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산중의 살이라”할 정도로 사랑을 고백했던 남편의 입에서 ‘내 신세를 이 모양 이 꼴이 되게 한 것은 당신이 내게 준 저 여자 때문입니다. 저 여자 때문에 내 신세를 망쳤나이다.’라는 저주와 폭언인 쓴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부부사이엔 애정이 변하여 증오가 되고 단물이 변하여 쓴물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남편은 자기가 출세를 못하고 사업이 부진한 모든 원인을 아내에게서 찾으려 듭니다. 그래서 허구한 날 아내를 저주하고 아내를 개 패듯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내 중에는 자기 불행의 원일을 출가를 잘못하고 남편을 잘못 만난 데서 찾으려 드는 아내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허구한 날 바가지나 박박 긁는 아내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어느 교수의 연구발표에 의하면 남편만 아내를 구타하는 것아 아니라 아내에게서 매를 맞으며 살다 못해 이혼을 제기하는 남편들도 자그마치 22%나 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웃 중에서도 이웃이요, 무촌관계라 할 부부사이의 관계는 어떠해야할까요?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경우를 그려봅시다. 세상에는 나 보다 잘 난 남편감도 많은데 내 아내는 나처럼 무능한 남자도 남편이라고 시집와서 남처럼 돈도 못 써보고 모양도 못 내보고 그저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아내를 생각하면 그저 고맙기만 하고 그 아내를 위해서라면 내가 뼈가 휘도록 일한 들 무엇이 아까울까 하고 생각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 남편이야 말로 일등남편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경우를 그려봅시다. ‘세상에는 나 보다 더 예쁘고 잘난 여자들도 많은데 나처럼 못난 여자를 아내로 맞아 그래도 굶주리지 않고 헐벗게 하지 않게 하려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그저 남편이 세상의 제일이지’하며 사는 부부상.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부상이 아닐까요? 이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의도했던 부부상이 아닐까요? 따라서 성경에서 ‘아담에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는 그 질문은 너의 부부관의 현재의 관계는 과연 원만한 관계에 있느냐? 아니면 아담의 부부처럼 자신의 처량해진 신세의 원인을, 불행의 원인을 상대방인 배우자에게 찾고 있는지는 않은지를 물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J.G.밀러는 “바보는 항상 남의 탓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나의 불행의 원인을, 우리 가정의 불행의 원인을, 아니 이 나라의 불행의 원인을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하는 사고의 전환이 있는 곳에서 깨어진 모든 관계는 새롭게 회복됨을 기억합시다. 3. 셋째,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의 회복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 역사학자인 토인비 박사가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면 아들은 전화요금을 누가 내는지부터 묻는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요금을 부담해야 한다고 하면 용건만 빨리 말하고 끊으라고 재촉을 하고 아버지가 요금을 낸다고 하면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하며 오래 통화를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토인비 박사가 1970년대 초에 한국에 들렸다가 떠나면서 인터뷰를 하는데 “한국의 가족제도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극찬한 기사였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 보아도 한국처럼 부모님을 공경하고 노인을 깍듯이 모시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한국은 가히 노인들의 천국이라고 극찬한 일이 있습니다. 실로 한때 우리나라는 경로효친에 있어서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까지 부르지 않았던가! 과거의 우리의 조상님들을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도 모세가 전해 준 십계명의 제4계명인 ‘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을 잘 지킨 민족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이미 사도바울의 가르침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엡6:1)라는 도리를 잘 지켜온 민족이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제일 되는 계명. 그것은 다름 아닌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시고, 오늘이 있기까지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거두어주신 분은 다름 아닌 부모님이십니다. 하다못해 동물들의 사회에서도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돌보는 것이 새끼 된 도리라면 하물며 사람의 탈을 쓰고 태어난 인간이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나 몰라라 한다든지 불효한다면 그것이 과연 인간의 도리일까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가 급속적인 산업사회로 변모되면서 핵가족 사회로 가족이 직장 따라 흩어지게 되면서 경로효친사상이 퇴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과거의 한국의 가족제도를 부러워한 것은 한 집안에서 여러 세대가 모여 살고 거기에 어른이 있고 효도가 있고, 사랑이 있는 유대와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산업화되고 핵가족화 되면서 집안의 어른들이 설 자리와 권위가 사라지고 아이들이 보다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아버지가 아들집에 다니러 갔었습니다. 며칠 동안 이 집안의 상황을 살펴보니 그 집에서 제일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람은 손자이고, 두 번째는 며느리이고, 세 번째가 가장인 아들, 네 번째는 애완용 개였고, 다섯 번째는 가정부이고 자신은 마지막 여섯 번째인 것을 느꼈습니다. 며칠 후 아버지가 아들집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3등 아비야! 잘 있거라. 6등 애비는 간다.” 이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아들집을 떠났다고 합니다. 작년에 아시아에 살고 있는 청소년 일만 여 명에게 노후의 부모님을 공경하겠나 안 하겠나를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유감스럽게도 중국이나 태국 등은 ‘부모의 노후에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겠다.’가 70% 이상인데 반해, 동방예의지국임을 자랑하던 한국의 청소년들은 아시아에서 제일 하위인 30여%에 머물고 있음이 신문에 발표된 일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통계인가습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기성세대인 우리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부모 된 우리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허리가 휠 정도로 학원엘 보내고 예능 교육, 실기교육에 돈을 쏟아 붇는데 는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경로 효친을 가르치고 생활로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보면 앞부분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도리를 말하고 뒤 부분은 인간이 이웃에 대한 도리를 말하는 데 이웃 중에서도 제일 되는 계명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도 제대로 공경 못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너는 지금 네 부모와의 관계가 원만하냐? 네 부모를 잘 섬기고 있느냐?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네 부모를 노엽게 해드리지 말고 잘 공경해 드려라. 불편했던 관계를 회복시키라고 촉구하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4. 넷째, 자연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부조화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마저 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은 자연계마저 저주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3:17절에서 하나님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듯이 타락한 인간이 가는 곳은 그 어느 곳이든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자연계가 무분별하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8:22절에서 타락한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저주받은 자연계마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서 하루 빨리 파괴된 자연계를 회복시켜달라고 탄식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우리는 산에 가든지, 들에 가든지, 바다에 가든지 파괴되고 훼손된 자연계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가 열려야 합니다. 지난 6월5일은 ‘세계 환경의 날’ 이었습니다. 본래 부요하고 아름다웠던 자연계가 무분별한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모조리 파괴되고, 찌들고, 폐허화되어서 계절에 따라 꽃피고 열매 맺던 각종 기화요초와 산천초목이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신음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서 각종 공해와 오염으로부터 자연계를 회복시켜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생태계의 원형 그대로를 회복시켜 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는 가정에서부터 쓰레기 줄이기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 야외에서도, 내 주변의 쓰레기는 내 스스로가 책임지고 수거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에겐 어려서부터 쓰레기나 껌, 그리고 오물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생활습관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보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도록 해서 삼천리금수강산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건강하고 부요하게 관리하고 보존해서 자손만대에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지금 너는 내가 창조한 자연계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있느냐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문명은 죽음의 문명이었고, 소비의 문명이었고, 그리고 파괴의 문명이었으나 지금부터의 인류의 운명은 하나님이 태초에 의도하셨던 인간과 하나님과의 조화, 인간과 인간과의 조화,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회복하여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고 인간과 자연계가 한데 어우러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기도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욘2:1-9/ 서영오 목사/ 2002-02-28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기도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욘2:1-9 어느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물든 황혼 역으로 기억됩니다. 아버님께서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시기에 끝까지 다가갔습니다. 겨우 발을 붙이고 떨면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만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고난과 절망 속에서 좌절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천길 같은 물 길속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만 같고 세상 모든 불행들이 나에게로만 향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절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쿵하고 내 몸이 떨어졌는데 깨어나서 보니까 폭신한 은혜와 자비의 손길에 부딪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받아주시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과 삶은 산산조각이 나고 파멸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보내셔서 요나를 바다 속으로 떨어뜨리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다면 요나는 끝장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가 아니고, 추락하는 인생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고 있는 다시스의 뱃속에서는 하나님을 잘 만나지 못합니다. 별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에 열심을 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저 심연의 깊은 물고기 뱃속 같은 환경, 그런 고난 속에서는 하나님을 많이 만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태권도 8단의 무술 인으로 사우디 황실 경호원들을 지도하는 교관으로 79년 해외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범을 보이다 발목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교관직을 사임하고 멕시코로 옮겨 도장을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발목 부상 때문에 도장도 시원치 않아 85년 다시 LA로 이사해서 봉제공장을 시작했습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회사는 처음에는 잘됐습니다. 걷치는 것이 없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당신은 부인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무슨 소리냐. 내가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며 화내기가 일수였습니다. 10여년이 지나면서 1997년 초 회사는 일거에 부도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업이 파산지경에 처하자 그때서야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기도원에 들어가 눈물로 부르짖는 가운데 신명기 8장 17∼18절을 통해서 완전히 자아가 깨어지는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 교만했던 자신을 회개하고 물질에 눈이 어두웠던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 비운 곳에 기도와 말씀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채용했습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고 기도로 회사를 운영하며 최선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시고 나이키로부터 의류 납품 권을 받는 100배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E & J 텍스타일 그룹(Textile Group) 회장 김용규 장로입니다. 김장로는 현재 직원 1000여명을 두고 있으며 세계적인 스포츠용품사인 나이키에 매달 100만장의 티셔츠를 납품하는 중형 의류회사 회장이 되었습니다. LA 한인 상공인연합회는 지난 3월 8일 김용규 장로님께 ‘2000년 최고 경영자 상’을 수여했다. 그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믿음을 붙들고 신앙으로 위기를 성공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불의 아니게 재난을 당하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하나님이 정말 소중한 줄 깨닫고 믿음으로 기도로 그 순간을 딛고 일어서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깜깜한 어두움이 지나면 새벽이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인생 길에서도 역경이 지나면 순경이 오게 마련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거칠고 어려운 시간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물고기 뱃속! 어두움이 진한 곳입니다.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어있는 곳입니다. 끈적거립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숨쉬기조차 답답한 곳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세상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철저한 고독과 철저한 절망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러한 환경과 여건에서 하나님을 기억해 내고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기도하기 시작한 이유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2절입니다. “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 내가 받은 고난을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도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기도를 배울 수 없는 현대판 '요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물고기의 입을 열게 하여 요나를 받으신 것은 요나의 입을 열게 하시기 위한 뜻이 담겨있었던 것입니다. 자녀가 입도 있고, 말도 할 수 있는데 벙어리 행세를 한다면 그 부모는 얼마나 않탑갑겠습니까?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배웠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보입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풀리고 해결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 하나님,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겠습니다. 가정이 어렵고, 경제가 어려워서 감당하기 힘들어도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 하반 절을 다시 보십시오. “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중요한 것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기도를 들은 것이 아닙니다. 성자의 기도를 들은 것이 아닙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등졌던 요나의 기도를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간구에 응답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2. 요나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예배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4절)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이 말은 모든 것 다 포기하고 빨리 성전으로 돌아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성전에서 예배를 통해서 새 힘을 얻었습니다.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가 부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제 부름 받았습니까? 절망 중에 성전을 찾았을 때 부름 받았습니다. 인생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를 사모하는 마음, 예배에 성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실패는 교회를 떠나고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실패에서 비롯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다 실패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다 실패했어도 예배에 성공하면 회복되어 질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이 만나는 화해의 장소, 회복의 장소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모든 삶이 회복되어 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에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요나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기도를 배웠습니다(9절) “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 감사입니다. 승리를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승리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감사함으로 승리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마다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정말 어려움 당하지 않고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음성을 주십니다. 그것은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라!”는 음성입니다. 시편 22편에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이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하면 하나님이 그 찬송 중에 거하시고 역사 하십니다. 찬송하면 신비한 하나님의 은총이 어디선가 슬그머니 나타나 우리의 필요를 정말로 신기하게 채워줍니다. 특히 어려운 중에 나오는 감사찬송은 정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의 기도와 찬송은 감옥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자 굴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나사로의 무덤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1994년 미스 아메리카에 당선된 화이트 스톤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청각장애인, 귀머거리입니다. 그녀는 발레를 전공했습니다. 못 들어도 눈치와 감정으로 춤을 춥니다. 한번은 발레 공연이 끝났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청각 장애 때문에 발레를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발랄하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최대의 장애자가 아니겠어요?” 역사 이래로 부정적인 삶을 산 사람의 동상이 세워진 적이 없다고 합니다. 혹시 세워졌다고 해도 얼마 못 가서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으면 모든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면 그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스티븐 코비의 간증입니다. 뉴욕에서 그가 지하철에 탔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한 중년 남자가 여러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철을 탑니다. 아이들이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굽니다. 갑자기 지하철이 시장바닥이 되었습니다. 스티븐 코비가 중년 남자를 보니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해서 스티븐 코비가 중년 남자를 흔들어 깨워서 따집니다. “여보! 아이들이 지금 너무 떠드는데 미안하지도 않소.” 중년 남자가 힘없이 눈을 뜨고 그 상황을 비로소 인식을 했습니다. “미안하오. 한 시간 전에 병원에서 저 애들의 엄마가 죽었소. 지금 그 상황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앞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잠시 정신이 없었던 것 같소.” 그 순간 스티븐 코비는 너무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의 짜증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이 남자의 고통으로 마음이 채워졌습니다. 환경은 이전과 다름없는 짜증나는 환경이었지만 사람을 향해 마음 문을 열었을 때 그 환경이 엄청나게 다르게 부각되었습니다. 환경이 인생의 행복을 결정하지 않고 시각과 태도가 행복을 결정합니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때문에만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노래 부르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여건과 상황 속에서도 기도를 잊지 마십시오. 예배에 성공자가 되십시오.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감사함으로 노래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에 즐겁고 행복한 노래가 끊이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욘2:1-10/ 김광일 목사/ 충주남부교회/ 2002-02-10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욘2:1-10 태권도 8단의 무술인으로 사우디 황실 경호원들을 지도하는 교관으로 79년 해외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범을 보이다 발목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교관직을 사임하고 멕시코로 옮겨 도장을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발목 부상 때문에 도장도 시원치 않아 85년 다시 LA로 이사해서 봉제공장을 시작했습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한 회사는 처음에는 잘됐습니다. 거치는 것이 없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당신은 부인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무슨 소리냐. 내가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며 화내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나면서 1997년 초 회사는 일거에 부도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업이 파산지경에 처하자 그때서야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기도원에 들어가 눈물로 부르짖는 가운데 완전히 자아가 깨어지는 체험을 하고 그동안 교만했던 자신을 회개하고 물질에 눈이 어두웠던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회사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채용했습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고 기도로 회사를 운영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시고 나이키에 의류를 납품하는 백배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E&J 텍스타일 그룹 회장 김용규 장로입니다. 그는 현재 직원 1000여명을 두고 있으며 세계적인 스포츠용품사인 나이키에 매달 100만장의 티셔츠를 납품하는 중형 의류회사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믿음을 붙들고 위기를 성공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불의 아니게 재난을 당하고 실패하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하나님이 정말 소중한 줄 깨닫고 믿음으로 기도로 딛고 일어서는 일입니다. 날이 덥습니다. 의욕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필리핀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하는데 더우니까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날씨가 더운 것 만큼이나 인생이 힘들 때가 많습니다.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이런 찬양을 부를 때마다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우리들의 실상을 표현해주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처지도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의 환경은 물고기 뱃속입니다. 물고기 뱃속! 어두움이 진한 곳입니다.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어있는 곳입니다. 끈적거립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숨쉬기조차 답답한 곳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세상의 방법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철저한 고독과 철저한 절망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선지자 요나는 이와 같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첫째로 요나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받은 고난을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도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기도를 하지않는 현대판 \\\\\\\'요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물고기의 입을 열게 하여 요나를 받으신 것은 요나의 입을 열게 하시기 위한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녀가 입도 있고, 말도 할 수 있는데 벙어리 행세를 한다면 그 부모는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배웠습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보입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풀리고 해결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겠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감당하기 힘들어도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겠습니다.\\\\\\\" 어떤 섬에 전신시설이 처음 가설되었습니다. 전선이 높은 전주에 올려지는 것을 보고 있는 노인에게 동네의 한 실업가가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신기한 발명품입니까? 이것이 완성되면 한 시간 안에 320Km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곳에 전문을 보내고, 그 회답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하고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노인은 관심 없다는 듯이, 그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오??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그 실업가는 ??그래요? 그럼 이 전신보다 더 빠르거나 더 뛰어난 것이 있다는 겁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노인은 사65:24를 읽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전문을 보내기도 전에 회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소???라고 되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고, 간구를 항상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요청하고 있는 기도응답이 우리에게 실현되도록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어떤 현대식 통신시설보다 더 빠르며, 인공위성보다도 더 확실하게 전달됩니다. 하나님은 범죄하고 하나님을 등졌던 요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어떠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요나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요나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구원의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나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영혼이 피곤할 때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풍랑에 시달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잠도 잘 수 없었고 피곤한 환경에서 영혼도 탈진한 상태에서 아무 것도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건속에서 요나는 외쳤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보통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실패를 거듭하고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은 도무지 앞길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 속을 채웁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의 순간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생각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특권입니다. 진화론 창시자 찰스 다윈은 말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살아온 날들에 대한 깊은 회한으로 우울하게 보냈습니다. 다윈이 운명하기 몇 달 전에 호프 부인이 병실에 누워 있는 다윈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다윈은 성경을 펼쳐들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호프 부인은 다소 의아해서 \\\\\\\"지금 무엇을 읽고 계신가요?\\\\\\\"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다윈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바이블입니다. 성경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주 고귀한 생명의 책이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호프부인은 구약성경 창세기를 펼쳐 보이면서 \\\\\\\"다윈 당신이 일평생 주장해 온 진화론은 허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당신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했고 후프부인의 이 말에 다윈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아주 놀라운 간증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참 미숙한 젊은이였습니다. 모든 사물과 현상에 대해 의심을 품고 접근했습니다. 진화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진화론은 의심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진화론을 학문이 아니라 창조론을 대적하는 종교처럼 믿게 된 것입니다. 제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증거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위기가 그를 참 신앙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다윈은 진화론을 접고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고백하며 증거 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말년에 하나님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바꾸어 주십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을 품고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째로 요나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9절)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 감사입니다. 승리를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승리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감사함으로 승리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마다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정말 어려움 당하지 않고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음성을 주십니다. 그것은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라!\\\\\\\"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과 여건속에서 찬송하면 하나님이 그 찬송 중에 거하시고 역사 하십니다. 찬송하면 신비한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 우리의 필요를 정말로 신기하게 채워줍니다. 특히 어려운 중에 나오는 감사찬송은 정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의 기도와 찬송은 감옥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자 굴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나사로의 무덤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1994년 미스 아메리카에 당선된 화이트 스톤은 청각장애인, 귀머거리입니다. 그녀는 발레를 전공했습니다. 못 들어도 눈치와 감정으로 춤을 춥니다. 한번은 발레 공연이 끝났을 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청각 장애 때문에 발레를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그러자 그녀가 발랄하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최대의 장애자가 아니겠어요?\\\\\\\" 스티븐 코비여사가 뉴욕에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한 중년 남자가 여러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철을 탑니다. 아이들이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굽니다. 갑자기 지하철이 시장바닥이 되었습니다. 스티븐 코비가 중년 남자를 보니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해서 스티븐 코비가 중년 남자를 흔들어 깨워서 따집니다. \\\\\\\"여보세요! 아이들이 지금 너무 떠드는데 미안하지도 않소.\\\\\\\" 중년 남자가 힘없이 눈을 뜨고 그 상황을 비로소 인식을 했습니다. \\\\\\\"미안하오. 한 시간 전에 병원에서 저 애들의 엄마가 죽었소. 지금 그 상황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살아야 할지 몰라서 그저 앞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잠시 정신이 없었던 것 같소.\\\\\\\" 그 순간 스티븐 코비는 너무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의 짜증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이 남자의 고통으로 마음이 채워졌습니다. 환경은 이전과 다름없는 짜증나는 환경이었지만 사람을 향해 마음 문을 열었을 때 그 환경이 엄청나게 다르게 부각되었습니다. 환경이 인생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과 태도가 행복을 결정합니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때문에만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노래 부르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환경과 여건속에서도 기도를 잊지 마십시오. 어떠한 환경과 여건속에서도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감사함으로 노래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들의 삶에 즐겁고 행복한 승리의 역사가 언제나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승리한 사람/ 단6:1-4/ 2004-02-21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승리한 사람 단6:1-4 1791년 11월 4일 워싱턴이 이끄는 군대가 세인트클레어에서 참패를 당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워싱턴 장군의 얼굴에는 전혀 불안한 기색이 없이 아주 평온해 보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참모가 찾아와 워싱턴 장군에게 이런말을 합니다. \\\"우리는 결정적인 참패로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그때 워싱턴 장군은 몹시도 불안해 하는 참모에게 이런말을 했습니다. \\\"뭐가 걱정인가 이겨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고 져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단 한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믿음안에 사는 것일세\\\"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많은 환경의 변화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변화하는 환경이 우리에게 기쁨을 줄때도 있고, 아픔과 괴로움을 줄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하는 환경이 우리의 신앙까지도 흔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편안할때는 신앙생활을 잘 할수 있어도 어려운 환경을 만났을 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할때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지만, 어려운 여건에 부딪치면 실망하고 좌절해 버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우리의 신앙을 피해도 안되고 포기해도 안됩니다. 우리의 어려움이 하나님 의 어려움은 아니며 우리의 절망이 하나님의 절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만난 다니엘이 그 어려운 여건과 환경속에서도 성공적이며 승리한 삶을 살았음을 보게 됩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환경이 절망적인 환경으로 바뀌어 졌어도 그 절망적인 환경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 성공과 승리의 인생을 살게됩니다. 오늘 우리도 다니엘과 같이 우리 믿음이 환경에 좌우되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그 환경을 지배하시고 변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힘입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다니엘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한 당시 포로로 붙잡혀간 귀족 청년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의 아름다음은 그가 포로로 끌려가기 전이나 포로로 끌려간 이후나 시종일관변함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다니엘이 그 어려운 여건과 환경속에서도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며, 우리도 우리의 삶의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승리하는 삶의 비결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다니엘은 삶의 지혜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위에 뛰어남으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한지라\\\"했습니다. 다리오왕은 자신의 나라를 120개주로 나누어 주마다 한사람씩 방백을 임명하고 그 주를 다스리게 하고 그 위에 세명의 총리를 세워 120개주를 총괄하도록했는데 세명의 총리가운데 다니엘이 수석총리로 세워지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출신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는 포로로 붙들려간 종의 신분입니다. 정치 세계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시기하고 모함하는 세계입니다.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세요. 꼴불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다니엘이 왕의 사랑을 받아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사람보다 판단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에 지혜가 있어서 분별력과 판단력이 빨랐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어려운 환경과 여건속에서 누가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 마음에 지혜가 있어 분별력과 판단력이 빠른 사람이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마음의 민첩함은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그 삶의 지혜는 어디서 얻어지는 것입니까? 지식은 배우고 공부하여 습득과정을 통하여 얻지만 지혜 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야고보서 1:5을 보면 \\\"너희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회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어려움을 만날 때 제일 먼저 드리는 기도가 \\\"주님! 이 시련을, 이 어려움을 물리쳐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럴 때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현대의 고민은 지식인은 많지만 지혜있는 사람이 모자라는 일입니다. 지혜란 지식을 활용하는 것으로 삶 전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부딪치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며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인가? 어려운 환경과 여건속에서 어떻게 승리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위해 중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 지혜를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을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었던 민첩한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그 민첩한 마음과 지혜로운 판단력이 있었기 때문에 왕의 신임을 받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일수록 그 마음이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떠날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어려운 환경을 이기며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 다니엘은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4절을 보면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은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인기와 명성이 높아지자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고소할 틈을 노렸습니다. 권력의 주위에는 어디에나 파워 게임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니엘도 예 외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다른 총리들과 120명의 방백들에게는 다니엘이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다니엘은 포로이며 이방인입니다. 자기네들과는 정치노선이 같질 않습니다. 거기다가 타협이나 흥정도 없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뽑아낸 형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니엘에게서 틈이나 허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틈. 아무허물도 찾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다니엘의 삶이 얼마나 구별된 삶이며 성결한 삶이었던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순결한 삶이요 정직하고 진실한 삶입니다. 다니엘이 처음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왔을 때 왕은 유다청년 몇사람을 뽑아 엘리트 훈련을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하고 채소만 고집했습니다. 당황한 것은 왕의 신하였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채소만 먹겠다고 고집하다가 얼굴이 상하고 체중에 변동이 생기면 왕의 문책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먹은 소년들과 채식을 하는 우리의 얼굴을 비교해 보아서 보이는 대로 처분하라고 하고 10일을 시험해 보게 합니다. 그리고 10일후에 모였더니 왕의 진미를 먹은 소년들보다 다니엘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윤택해 진 것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은 아무리 조건이 좋고 기회가 좋아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거절하는 용기도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구별되게 산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아무 틈. 아무 허물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 때문에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흠없는 사람으로 허물이 없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찾으시며 그들을 통하여 역사를 새롭게 하시며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앞에 구별된 사람으로, 성결한 사람으로, 아무 틈. 아무 허물도 없는 사람으로 세워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다니엘은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10절을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집에 돌아가서는 그방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을 모함하려고 왕에게 어느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왕의 허락을 받아냅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전에 행하던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총리가 된 후에도 기도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왜 다니엘이 그처럼 기도에 힘썼습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포로로 붙들려 와서도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총리가 된 후에도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도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기도 생활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다니엘과 같이 어려운 자리에 처해도 다니엘과 같이 축복의 자리에 이르러도 기도하는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다니엘과 같이 우리 믿음이 변하지 않기 위하여 늘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는, 우리의 신앙을 미혹하는 세상의 풍조와 현실과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이기려고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빌바를 알지 못해도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다니엘은 국무총리의 자리보다 하나님을 더 생각했고, 바벨론왕보다 하나님을 더 높이고 경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왕 이외에 다른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집어 넣는다는 법을 공포케 했지만 그런 것을 개의치 않고 언제나 하던대로 기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일로 결국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지만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봉하시고 다니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기도로 이겼습니다 어떤 어려움이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믿음이어야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삶의 환경이 어려워졌다고 하나님을 멀리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과 여건 가운데서도 그것을 신앙으로 이겨내는 사람이 믿음의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삶이 어려워졌다고 가던길을 중단하면 안됩니다. 하던일을 중단하면 안됩니다. 사명을 놓아버리면 안됩니다. 신앙을 포기하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명을 놓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놓는 것과 같습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당대에 복을 받지 못한다면 자녀들대에 복을 받습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했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아무 틈. 아무 허물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기도는 승리의 열쇠입니다. 우리도 다니엘과 같은 믿음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막13:1-10/ 환경주일설교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막13:1-10 앞으로 지구의 수명은 몇 년 남았을까요? 일반적으로 천문학자들은 지금으로부터 46 억년전 태양이 폭발을 일으키자 태양계가 생겨났다고 주장하며 나이는 약 46억살이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50 억년 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나이를 먹음으로 오는 종말은 그렇지 몰라도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지구의 종말은 결단코 그렇게 길지 않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만약 지구의 천연자원이 현재 속도로 사용될 경우 인류는 50년 이내에 2개의 행성을 개척해서 이주해야 한다고 영국 주간 옵서버가 몇 년 전에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세계야생동물기금(WWF)연구보고서를 인용 인류가 지구의 생명유지 능력을 초과하는 속도로 지구를 수탈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서방사회의 높은 소비수준을 비난하면서 기존의 자원이 고갈돼 가고 있기 때문에 2050년까지는 지구와 같은 크기의 또 다른 행성들이 필요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수집된 과학적 자료에 근거한 이 보고서는 지구 자연의 3분의1 이상이 지난 3년 간 인간에 의해 파괴됐다고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자원 사용의 속도가 극적으로 신속하게 낮아지지 않으면 지구는 늘어나는 인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보고서는 또 인류가 낭비적인 생활방식을 절제하든지 아니면 과학자들이 인간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또 다른 행성을 찾는데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이나 또 다른 행성의 개척은 실현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유일한 대안은 \\\'지금 소비를 줄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세계야생동물기금 보고서는 미국이 환경에 가장 큰 압박을 가하고 있다며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영국 시민들의 거의 2배 일부 아프리카인의 24배에 달하는 자원을 소모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가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만 그 중의 한 가지는 환경오염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비행기 안에서도 그렇고 현지 식당에서도 그렇고 이들은 대부분 일회용 사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릇을 제대로 씻을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1회 사용한 후에 큰 비닐 봉지에 그대로 다 담아서 처리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이상한 기후가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서부지역에 5월의 온도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그렇게 더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7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있을 때 중국 지진 뉴스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지진과 함께 그보다 며칠 먼저 발생했던 미얀마 쓰나미로 인한 피해를 보면 아연실색할 정도입니다. 인명피해만 사망자가 7만 8천 명에 이르고 이와는 별개로 5만 6천 명이 실종된 상태로 보고가 되고 있습니다. 한편 중국 쓰완성 지진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그렇게도 엄청난 지진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재난이 어제 오늘의 일만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은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온의 변화, 환경의 변화를 통해 지구 심층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할 조짐을 계속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 12장 2절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금 세계 도처에 일어나는 재난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성도입니다. 보다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언한 주님의 재림의 징조가 확연히 다가오고 있음을 말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종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종말이 찾아올 때 나타날 징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일부의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간추려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문을 나설 때, 한 제자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대화를 하면서 예수님은 감람산에 올라왔습니다. 이때 조용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의 이 질문에 대답한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루살렘이 망할 때 어떤 징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분명하게 징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징조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지금은 때가 악한 때입니다. 사람도 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이단을 조심하십시오. 5-6절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이단에 빠진다는 것은 역시 사람의 미혹을 받아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4장24절에서 보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미혹하는 사단은 큰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능력이 나타나기를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적을 구합니다. 마가복음13장33절 말씀에도 보면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여러분,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가 분명하다면 다른 것이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약육강식의 동물 사회에서 누가 잡혀 먹히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연약한 토끼라도 함께 있으면 쉽게 잡아먹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자 외로 떨어져나가면 반드시 그것은 자기보다는 힘센 동물에게 먹이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이름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6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자기가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1서2:18절 말씀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적그리스도, 이단과 사이비들이 많이 일어나면 날수록 주님의 재림하심이 가까이 다가옴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를 분명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난리의 소문을 조심하십시오. 난리가 나고 소문이 무성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7절 말씀,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고 하면서 이 소문이 어떤 소문인가 하면 8절의 내용을 받습니다. 원문에서 번역을 하면 ‘왜냐하면’이라는 것이 우리 성경에는 빠져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난리의 소문은 어떤 소문인가? 나라와 나라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의 소문을 말합니다. 결국 인간들이 전쟁을 통해서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간의 분쟁이라는 것은 불보듯 뻔합니다. 여러분, 지금 수많은 전쟁을 예고 하고 있습니다. 우선 무역전쟁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무역전쟁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오로지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지금 강대국들은 힘없는 나라들을 대상으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고, 힘없는 작은 나라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국민이 손해보지 않도록, 그리고 강대국의 힘에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항하기 위하여 유럽 연합, 즉 EU를 결성하고 있습니다. 남미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환태평양시대에 아시아도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광우병 문제로 인한 쇠고기 수입문제와 FTA문제가 크게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무역전쟁은 자원전쟁입니다. 자원전쟁은 심각할 것입니다. 지금 석유자원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지금 보세요. 중국이 개발되고 인도가 꿈틀거리니까 모든 자원부족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철의 가격이 심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식량자원의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곡물류 값이 오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옥수수 값이 오르니 사료 값이 오릅니다. 밀가루 값이 오르니 밀가루를 원료로 하는 모든 것, 즉 국수, 빵, 과자류 값이 오릅니다. 앞으로 쇠고기 더 무서운 것이 쌀입니다. 우리가 정신 차려야 합니다. 쌀은 절대로 수입쌀 먹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값이 싸더라도 수입쌀을 먹다보면 자국의 쌀생산이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쌀을 가진 국가들이 쌀수출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쌀값은 부르는 것이 금이되고 맙니다. 쌀마저 내어놓으면 이 나라는 그대로 망하고 맙니다. 쇠고기는 안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쌀은 안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또 다른 전쟁이 있습니다. 물전쟁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물부족현상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중동지역에서도 물을 싸먹고 물이 풍부한 금수강산이라고 일컫던 우리나라도 물을 싸먹고 있습니다. 유네스코(UNESCO) 등 유엔 기구들이 주도한 세계 물 포럼에서 발표한 각국의 물 빈곤지수(WPI, World Poverty Index)에 따르면, 한국의 물 사정은 비교적 양호한 편입니다. 2006년도 기준으로 147개국 중 43위로 나타났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전 세계가 야심찬 환경정책을 당장 실행하지 않는다면 2020년 이후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맞게 되고 기상이변과 물부족, 대기오염 등으로 인류가 고통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OECD는 2030년 환경전망보고서 (OECD Environmental Outlook to 2030)에서 각국의 실증자료를 바탕으로 과학적인 시뮬레이션 기법을 통해 이같이 새로운 정책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전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이 2030년에는 37%, 2050년에는 52%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2050년 지구 평균온도는 산업화 이전보다 1.7∼2.4도 상승해 폭염, 가뭄, 폭풍, 홍수의 증가로 농작물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 세계적으로 10%의 경작지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함께 상당수 동식물종이 멸종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인간 복지를 가능케 하는 지구의 생태서비스 능력이 제한될 것으로 내다봤다. 물부족이 극심한 지역에 사는 인구는 현재 10억명에서 39억명으로 늘어나고 도시의 오존오염, 미세먼지에 따른 조기 사망자수는 각 현재의 4배,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과 함께 또 다른 소문이 들려온다고 했습니다. 셋째, 천재 지변이 많이 발생합니다. 8절 하반절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여러분, 난리의 소문은 전쟁의 소문이었지만 재난의 소문은 우리 모루를 불안케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 어느 때, 우리나라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지진의 경우에 우리나라가 확률적으로는 낮지만 언제 중국과 일본과 같은 일을 겪게 될지 모릅니다. 미국 서부지역에도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을 낮게 건축하고 이웃집과 집사이를 총총 이어서 건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벽돌이나 시멘트로 하지 않고 대부분 목조건물로 건축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근도 심각하게 될 것입니다. 기근은 이미 성경속에서 많이 나타났고 앞으로도 기근이 심각하게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인류가 멸망당하는데 사용되는 여러 가지 재난이 있지만 기근이 가장 무섭습니다. 예레미야14:12절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앞으로 우리가 식량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사실 누가복음 21장에서는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다고 하면서 온역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한 질병, 전염병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종말을 예언하는 내용의 말씀 가운데 6장12절에 보면 여섯째 인을 뗄 때에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해가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민수기14장12절 말씀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지금 인간은 광우병 소문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습니까? 앞으로 이런 소문들이 끝없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특히 전염병은 인간들의 죄 때문에 내려지는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성적문란은 에이즈라는 전염병이 발생한 것입니다. 광우병은 사실 식물성을 먹고 자라야 할 소가 동물사료를 먹을 때 발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조류독감을 보세요. 엄청난 영향력을 줍니다. 날아다니는 새 중에서 독감에 걸린 새의 배설물를 통해서 전염된다고 하는 조류독감, 그 전염성이 얼마나 강한지 주위에 있는 건강한 것도 다 도살해야 하는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주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인해 음식점들이 치명타를 당합니다. 소문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을지 모릅니다. 끝으로 예수 믿는 성도들이 배척을 당합니다. 9절 말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그래서 5절에 보면 ‘사람의 미혹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재난들은 천재지변들입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나 핍박은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성도들이 핍박을 받을 때 종교적 핍박이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인들끼리의 핍박을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바리새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렸듯이 말입니다. 정치적 핍박이 있습니다. 세상 임금들 앞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을 지키기 위한 핍박은 당연하고 수모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앞의 재난의 소식이 전해지고 직접 재난을 겪을 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인가? 당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결국 그들에게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 곧 예수를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핍박받을 일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일어난다고 종말이 바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시작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종말이 오는가? 주님은 언제 재림하시는가? 10절에 보면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이런 종말을 믿으면서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 처처에 발생할 때 종말을 믿는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런 일을 보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선교해야 합니다. 만국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12장 56절 말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징조를 알면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징조를 보면서, 징후를 보고 기상을 알아맞히기도 하면서 주님의 재림이 임박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대를 잘 분별하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가장 우선적으로 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복음증거 하는 일임을 기억하시고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환경보호도 해야 하지만 결국은 주님이 오시는 길로 갑니다. 그렇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말씀에 사명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