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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명은 그래서 용사였다/ 삿7:1-8/ 강문호 목사/ 2006-07-11
300명은 그래서 용사였다 삿7:1-8 강대국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몹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와서 가지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정성껏 양을 길러 양털을 만들어 놓으면 와서 가지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힘이 없어서 미디안 군대가 와서 달라고 하면 주어야 했습니다. 힘이 없으니 대항할 수도 없었습니다. 왕도 없던 시대입니다. 지도자도 없었던 시대입니다. 어느 누군가가 나타나서 나라를 살려야 할 때였습니다. 그 때 기드온이라는 농사꾼이 있었습니다. 미디안이 보는 데서 밀타작을 하면 또 와서 빼앗아 갈가 두려워서 포도주를 짜는 틀속에 들어가서 몰래 밀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 기드온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농사꾼에 지나지 않는 자기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큰 용사라고 하니까 너무도 놀라서 물었습니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삿 6;13-14)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 6;14) 기드온은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양털을 가지고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한번은 양털만 젖고 땅은 말라있는 증거이고 다음 날 다시 한번 보여주신 증거는 반대로 양털만 말라 있고 땅은 젖어 있는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하나님만 믿고 나가서 군사를 모집하려고 나팔을 불었습니다. 32,000명이 싸우러 나가 겠다고 모여 들었습니다. 32,000명이 모레산 밑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 그래서 기드온은 32,000명 앞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미디안과 전쟁을 하러 나가려고 한다. 적은 메뚜기같이 많고 낙타떼같이 수를 셀 수가 없다. 마지막 길인지도 모른다. 전쟁이 두려운 사람들은 돌아 가라.> 기드온이 소리지르자 22,000명이 두려움을 느끼고 떠났습니다. 10,000명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그리고 물 마시는 것을 보고 군사를 뽑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10,000명을 데리고 하롯샘으로 갔습니다. 길보아산에서 흐르는 샘물이 흐르는 냇가였습니다. 목이 마른 그들은 모두 엎드려서 물을 정신없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300명이 적을 살피면서 물을 손으로 떠마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300명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다 집으로 돌려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300명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을 치러 나갔습니다. 승리하였습니다. 이 본문을 놓고 기도하는 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원병이 선택병은 아니다.> <32,000 지원병중에 선택병은 300명이다.> <지원병은 많았다. 그러나 선택병은 적었다.> <지원하였다고 다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일하려고 나섰습니다.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려고 선택하는 사람은 100명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쓰셔야 쓰임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300명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 가요? 1. 희생. 위험한 일에 지원한 이들이었기에 용사입니다. 이는 자기 희생입니다. 미디안이 나라를 위협할 때 누구도 막을 엄두를 내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망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나서셨습니다. 농삿군을 선택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큰 용사여!> 그 때 기드온은 미약한 사람이라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큰 용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큰 일 할 사람들이라고 인정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그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따라 군사를 모집하려고 나팔을 불었습니다(삿 6;34) 그랬더니 32,000명이 지원하였습니다. 사실 32,000명은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날 군대를 모집하듯이 억지로 징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진하여 나온 사람들입니다. 애급에서 나올 때 군사수만 60만명이 넘게 나왔습니다. 지금은 가나안에서 정착하고 살고 있으니 100만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조금 후 다윗이 통일 왕국을 만들고 인구를 조사하니 150만명 가량을 되었던 것같습니다. 100만명 넘는 군사수 가운데 나라를 살려 보겠다고 지원한 이가 32,000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300명 용사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이들이었습니다. 좋은 일에는 빠지고 어려운 일에는 나서는 이들이 100여만명 중에 32,00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다 칭찬받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부르면서 <큰 용사>라고 부르셨습니다. 큰 용사를 따르는 이들은 용사였습니다. 깡패를 따르는 이들은 결국은 깡패입니다. 공산당을 따르는 이들은 결국은 공산당들입니다. 생명을 걸고 미디안과 싸우겠다고 지원한 이들은 용사들이었습니다. 영굴 빅토리아 여왕은 프러시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전한 군인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여야 했습니다. 모두 전쟁을 기피하였습니다. 그 때 빅토리아 여왕은 자기 아들을 앞장 세웠습니다. 모두 만류하였습니다. <앞으로 여왕님을 받들어야 하고 앞으로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할 사람이니 만일을 위하여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때 빅토리아 여왕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누구인들 자기 아들을 총알이 나라오는 전쟁터에 앞장 세우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나 내 아들부터 앞장 세워야지.> 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장렬하게 싸우겠다고 전쟁터에서 앞장 섰습니다. 이것이 영국을 감동시켰습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큰 용사 앞에 작은 용사입니다. 전쟁에 이겼습니다. 이것이 용사입니다. 마치 아브라함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하니까 이삭은 아버지에게 자기를 죽이라고 순종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둘 다 훌륭합니다. 이것이 용사입니다. 이 회창이 대통령 되는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두 아들을 군대에 내보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타격이었습니다. 지금 모두 이 명박을 다음 대통령 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지만 이 명박도 군대에 가지 않았고 두 아들도 군대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핵폭탄처럼 터질 것입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이는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100년전 일입니다. 1905년 월드시리즈 야구 경기에서 크리스티 매튜슨이라는 투수는 총 3 경기에 등판해서 3 경기 모두를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야구의 신동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불렀습니다. 남다른 뛰어난 야구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38살이었습니다. 그 때 1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1918년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군인 나이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야구라는 중요한 게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살리겠다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지원하였습니다. 안 가도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미국의 야구에서 그가 빠지면 안 되기에 미국 야구를 빛내 줄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독일군이 쏜 독가스에 중독되어 버렸습니다. 폐가 크게 손상되어 기침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상에서 고생을 하다가 45세에 죽었습니다. 야구의 천재가 아깝게 죽어습니다. 이것이 용사입니다. 자기 희생이 있는 것이 용사입니다. 일산 어느 교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를 짓자고 하니까 교회 앞마당에 콘테이너 두 대가 놓여지더라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두 가정이 집을 팔고 교회 마당에 컨테이너를 놓고 하나님이 다시 집을 주실 때까지 기도하면서 교회에서 살겠다고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 용사입니다. 2. 담대함 어떤 일에도 두려워 하지 않기에 용사입니다. 용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용사입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두려워하는 이는 결코 그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기드온은 32,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군대는 메뚜기같고 약대떼같고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삿 7;12) 그런데 하나님은 32,000명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미디안 군대는 135,000명입니다(삿 8;10). 그런데 32,000명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었습니다.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 그래서 기드온은 32,000명 앞에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제 미디안과 전쟁을 하러 나가려고 한다. 적은 메뚜기같이 많고 낙타떼같이 수를 셀 수가 없다. 마지막 길인지도 모른다. 전쟁이 두려운 사람들은 돌아 가라.> 기드온이 소리지르자 22,000명이 두려움을 느끼고 떠났습니다. 10,000명 남았습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을 두려워 하는 이가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10,000명 남은 사람들 중에 300명 용사가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 용사입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같이 지난 주간에는 <왕의 남자>를 보았습니다. 전에는 같이 <진주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일본 가미가제 특공대가 진주만을 습격하는 장면이 크라이막스입니다. 가미가제는 신풍(神風) 신의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1274년, 1281년 몽골 군함이 일본을 쳐들어 왔습니다. 그 때 이상한 바람이 불어서 몽골 군함을 전복시켜 버렸습니다. 그 후 가미가제가 일본을 지켜 주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2차 대전 말 일본은 가미가제 특공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전투기에 한 명만 탑니다. 폭격하는 곳까지 갈 휘발유만 넣습니다. 돌아 올 휘발유는 없습니다. 폭탄을 비행기에 장치합니다. 마지막 길입니다. 흰 천 위에는 마지막 술잔이 놓여집니다. 천황이 내려준 마지막 술잔입니다. 이 술잔을 마지막 마시고 <덴노 헤이가 반자이!> <천황 폐하 만세!>라고 소리를 지르고 비행기에 오릅니다. 그리고 적진에 떨여 죽습니다. 무서운 공격대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군대입니다. 왜 그럴가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두려운 자는 집으로 가라고 하니까 22,000명이 두려워서 갔습니다. 그러나 300명 용사들은 남았습니다. 두렵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출애급한 후에 제일 먼저 생긴 문제는 홍해였습니다.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 데 애급군사가 따라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서 떨었습니다. 심히 두려워 떨었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0-12) 이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두려워 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하였고 모세는 두려워말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 않는 이들을 용사로 사용하십니다. 문제가 생겨도 두려워 하지 말고 도전하여야 합니다. 도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 나게 됩니다. 이것이 용사입니다. 3. 집중 300명 이들은 사명만 바라 보기에 용사입니다. 32,000명중에 이제 10,000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도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데리고 나가지 말고 또 뽑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물 마시는 것을 보고 군사를 뽑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10,000명을 데리고 하롯샘으로 갔습니다. 길보아산에서 흐르는 샘물이 흐르는 냇가였습니다. 나는 하롯셈에 가서 발을 담그고 앉아 이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모습이 상상되었습니다. 목이 마른 그들은 모두 엎드려서 물을 정신없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300명이 적을 살피면서 물을 손으로 떠마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300명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다 집으로 돌려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용사입니까? 사명을 잊지 않는 사람이 용사입니다. 9700명은 물만 보았습니다. 당장 목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00명 용사는 물을 마시며 적을 보았습니다. 사명이 적을 물리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농사꾼 기드온이 전쟁을 하러 가자고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인 것입니다. 누가 나팔을 불던지 상관없습니다. 목적만 거룩하면 사명감을 느끼는 이들이었습니다. 32,000명이 같이 사명감을 가지고 나왔지만 두려워서 22,000명이 탈락하였습니다. 사명보다 육신을 생각하는 9,700명이 불합격되었습니다. 오직 300명 용사만 남았습니다. 늘 내가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잊지 않는 이들이 300명 용사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학생이 뉴욕 박물관 임시직 직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그는 매일 남보다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하여 마루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어느 날 박물관장이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박물과 마루를 닦는 것이 부끄럽지 않는가?>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 곳은 거냥 바닥이 아닙니다. 박물관 마루바닥입니다.> 청년은 성실성을 인정받아 정식직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알래스카를 다니면서 고래와 포유동물을 연구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고래학자 앤드류스 박사입니다.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잊지 않아야 용사입니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는 1835년 스코트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3살 되었을 때 미국으로 이민오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가난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네기는 피츠버그의 전신 전화국 배달소년으로 취직되었습니다. 그는 일을 철저히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카네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기 구역의 중요한 사람들의 집주소와 이름을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잘 알려진 사람의 주소가 잘못 적혀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어 생계를 보탰습니다. 어느 날 임금을 타려고 모두가 한 줄로 서있을 때였습니다. 카네기 차례인데 봉급을 나누어 주는 이는 카네기를 젖혀 놓는 것이었습니다. 옆으로 비켜 서 있던 카네기는 불안하였습니다. 무엇인가를 잘못 하여 해고시키는 줄 알았 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집의 생계가 걱정이었습니다. 드디어 임금을 다 나주어 준 매니저가 카네기를 불렀습니다. <카네기야! 너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배달원이다. 너는 다른 배달원보다 더 정확하고 더 많이 배달하여 주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배달원이다. 이제부터 너의 봉금을 매주 2달러 25센트씩 더 올려준다.> 후에 세계 최대의 부호가 된 카네기는 이 순간을 영영 잊을 수 없었습니다. 카네기는 얼마 나 기뻤던 지 그 날 밤 그 2불 25센트를 손에 쥐고 하루 밤을 잔 후에 식탁에서 부모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늘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잊지 않고 충성하는 이가 용사입니다. 해바라기는 늘 해만 바라봅니다. 레이다는 늘 이상한 비행기를 추적합니다. 미디안을 치려는 용사들은 늘 미디안만 바라 보았습니다. 사명만 바라보는 300명 그들은 용사였습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고 있습니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성당 출입을 막고 무려 4년 동안이나 성당에 틀어박혀 그림에만 매달렸습니다. 어느 날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 구석구석에 정성스레 그림을 그려가던 미켈란젤로에게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여보게, 그렇게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뭘 그렇게 정성을 들여 그림을 그리고 있나? 완벽하게 그려졌는지 누가 알기나 한단 말인가?> 미켈란젤로가 말했습니다. <내가 안다네> 그리고 집중적으로 일하였습니다. 유명한 그림이 되었습니다. 집중하는 이는 결과를 보게 됩니다. 오늘부터 사명만 바라 보십시오. 지금부터 할 일만 바라 보십시오. 이제부터 목적만 응시하십시오. 300명 용사처럼 물을 마시면서도 사명을 잊지 마십시오. 4. 전략 300명 용사들은 승리의 전략이 있기에 용사입니다. 300명 용사들은 기드온과 같이 메뚜기떼같이 많은 미디안을 300명으로 이길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승리 전략은 이것이었습니다.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었습니다. 100명씩 세 팀으로 나누었습니다. 각각 손에 나팔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빈 항아리를 들었습니다.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적들을 에워샀습니다. 그리고 깊은 밤 보초들이 교대할 시간에 나팔을 요란하게 불어 댔습니다. 성경은 <이경 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삿 7;19).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을 삼경으로 나누었습니다. 일경은 저녁부터 밤 10시까지, 이경은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삼경은 2시부터 새벽까지입니다. 2경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교대시간이니까 밤 10시경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항아리를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도록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횃불을 들었습니다. 미디안 군사들은 자다가 깨어 보니 천지가 개벽하는 것같았습니다. 엄청난 적들이 둘러싸고 있는 듯이 요란하였습니다. 이들은 잠도 깨지 못 한 채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드온 300명 용사들은 도망가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하나 하나 죽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완벽한 승리를 얻었습니다. 300 명 용사들은 세 가지 도구를 전략에 사용하였습니다. 항아리를 깨뜨렸습니다. 항아리는 성경에서 그릇을 의미합니다. 그릇이 깨져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깨짐속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깨져야 합니다. 횃불이 사용되었습니다. 빛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빛된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나팔이 사용되었습나다. 나팔은 성경에서 증거입니다. 우리가 증거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같이 하여 주십니다. 우리 오늘 하나님께 승리의 전략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렵니까? 오늘 축복의 전략을 달라고 매달리지 않으렵니까? 적은 수지만 큰 적을 물리칠 하나님이 주신 전략을 가지고 있으면 승리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한 분 한 분에게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큰 용사여!> 큰 용사들이여! 당신들의 이름은 용사입니다. 300명은 용사들이었습니다. 1. 희생 2. 담대함 3. 집중 4. 전략 강문호 목사(서울 갈보리교회)
主, 군대장관을 먼저 만나게 하소서/ 수5:10-15/ 2001-09-18
主, 군대장관을 먼저 만나게 하소서 수5:10-15 오늘은 세 째날로 또 축복 성회 마지막 시간으로서 「主, 군대장관을 먼저 만나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축원하는 마음으로 이 제목을 드렸습니다. 인터넷으로 설교를 공개하고 그 설교를 듣기 위해서 홈페이지 안으로 방문하는 방문객의 수를 보면 설교에 따라서 그 접속해 오는 분의 수가 크게 차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설교 제목이 축복이 들어갔으면 월등하게 많은 분들이 그 설교를 찾아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내용은 더 축복인데 그 제목이 좀 축복같지 않아 보이면 의외로 피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봉사한 봉사여도 주께는 아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는 그야말로 위로와 격려와 축복의 말씀이었는데 제목만 보니까 \'봉사해도 헛일이네\' 아마 그렇게 본 것 같아요. 그래 가지고서 그 설교에로 들어오는 손님이 아주 적어요. 그리고 축복 축복하는 데는 굉장히 많은 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많은 분들이 역시 위로와 축복 받기를 원하고 계시는구나 이런 평가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오시는 데이터를 보고서 짐작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들 좋아하는 축복 축복하는데 이 축복은 그저 아무나 받아서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아야 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다가 출애굽 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가나안 복지에로 가게 된 것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안 받았으면 괜찮았을 것을 그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 복받는 순간부터 그들은 오히려 당장 복을 누린 것이 아니라 고생길로 들어섰다 하는 그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은 받았는데 그 내용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 축복을 받았을 적에 아멘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걸어서 걸어서 내 앞으로 다가와 내 앞으로 펼쳐져 주느냐?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축복 받은 사람이 그 축복의 현장으로 가야만 되더라는 겁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위치하게 했던 그곳에 당당하게 자리잡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 축복의 현장으로 가서 축복을 누리려면 복 받은 사람이 거기로 가야되지 그 축복 속에 말하였던 가나안 땅이 내 앞으로 굴러오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축복의 현장인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까지 내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가야되는데 그 가는 길이 험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겁니다. 절로 절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저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고생길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복 아무나 받을 것 아니고 복을 주신다 해도 오늘 말씀을 들으시고 그래도 받겠다 하시는 분은 아멘으로 복을 받으시고, 그렇다면 난 포기하겠다 아마 이런 분들도 나올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홍해에서 역사하사 애굽과 이스라엘을 분리 시켜 주셨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아주 크게 역사 하셨습니다. 대단한 바다를 둘로 쪼개고 그 사이에로 이스라엘을 건너게 했습니다. 무슨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건너갑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간다는 목적지를 주었습니다. 그리로 향하여 건너갈 때에는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해 주었습니다. 애굽이 뒤쫓아오게 되니 하나님께서 다시 물을 합쳐서 애굽의 군사들을 다 수장시키고 이제 애굽과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주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서부터 하나님께서는 \"너희 알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그 복지를 향하여 갈지어다.\" 해서 지도자의 인도를 받아서 가게 되었는데 한 25일쯤 가게 되니까 점점 힘든 일이 많아졌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한 25일쯤 지났을 적에 어떤 불평을 하게 되었는고 하니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애굽 사람의 가마솥 곁에서 불 지펴드리고 그 사람들 종노릇 했으면 이 고생은 안 할 것을….\" 하면서 불평한 불평이 복 받은 현장으로 가다가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출애굽기 16장 1절-3절에 있는 말씀을 제가 읽어드린다면 \"애굽에서 나온 지 이십 오일이라 원망하여 가로되 애굽 땅에서 먹던 가마 곁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하면서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던 겁니다. 막상 축복의 말씀 속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그것이야 정말 좋았습니다. 그 복 받은 곳을 향하여 저희들이 가고 있는데 그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얼마간 가다보니 목마른데 물을 찾아서 샘을 발견했더니 그냥 물이 쓴 마라의 샘이었습니다. 그래서 쓴 물로 인하여 굉장히 속이 상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께서 먹을 만큼 양식을 갖고 가라 물도 준비해 가라 또 짐승들도 끌고 가라 금패물 은패물도 갖고 가서 훗날 너희가 쓰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양식을 갖고 나왔는데 사람이 가난하여 굶어 죽게 되면 금패물 은패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굶주리는 나라들 혹 외국에 나가게 되면 무슨 장식품이라든지 보석 같은 것 절대 사지 않는 답니다. 그저 빵만 사간다는 겁니다. 사람이 굶어죽게 되면요 다른 것 보이지 않습니다 양식입니다. 그런데 갖고 나온 양식도 한 25일쯤 지나게 되니까 바닥나버렸다 그겁니다. 거의 바닥이 날쯤에 그래도 우리가 계속해서 가야되겠는지 말아야 되겠는지 우리의 갈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얼마나 더 험한 길을 가야되겠는지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열 두 지파의 각 두령들을 내어 가지고서 정탐을 합니다. 건장한 사람들이 미리 가 가지고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과연 정탐을 했는데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흘러 넘쳤습니다. 갔다 와서 보고하는 사람들의 보고를 들어보니 모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과연 그 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우리가 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정말 복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 형편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복된 땅으로 출발하여 지금 25일쯤 가고 있는데 물 떨어져 양식 떨어져 그러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 그저 지나온 25일보다 가는 날이 더 쉬울 것인가 생각하여 정탐을 해 보았더니 못 산다면 차라리 낫겠는데 거기는 너무 너무 넘쳐서 풍성해서 재물이 넘쳐서 얼마든지 먹고 쓰고 남는데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좋은 땅이니 세상에서 가장 좋은 민족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장수가 그 땅을 미리 차지하여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런 정탐 소식을 백성들에게 전하여 주게 되니 정말 기가 막혔던 것이지요. 먹을 것도 떨어져, 물 마시는 것도 그냥 목마를 때 그때 그때 먹기도 힘들고, 이런 차에 정탐 소식을 들으니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터져 나온 얘기가 뭡니까? \"차라리 애굽의 종 되었던 때가 좋았다. 종 되었던 때에는 먹을 것 걱정한 적이 있느냐. 마실 것 걱정한 적이 있느냐. 입을 것 걱정한 게 있느냐. 뼈빠지게 일하면 그저 먹고 자는 것은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가지고서 이 모세와 여호수아 이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우리가 무작정 따라 나왔더니 복이 이건가.\" 하면서 그저 되돌아가겠다 이렇게 후회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복 아무나 받는 것 아닙니다. 복을 받고 복의 현장까지 가는데는 그저 복이 굴러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현장까지 가야되는데 그 현장은 한발자국도 가까이 와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기까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축복을 받고 나면 \"아멘 아멘\" 그 축복 속에 있는 내용의 가나안 땅이 우리에게로 바로 올 줄 압니다. 그런 직장이 바로 굴러올 줄 압니다. 그런 부요가 그대로 굴러올 줄로 압니다. 아닙니다. 거기로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증입니다. 아무나 이것을 받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후손들도 사지의 광야 사십년 생활을 마치고 감옥에서 출옥하는 심정으로 \"다시금 너희 조상에게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리라.\" 하시는 축복을 듣고 요단을 넘어서려고 이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 조상들에게 사십년전, 홍해를 갈라주심같이 요단의 물을 막아서서 태산같이 물이 쌓이게 하고 마른 땅으로 자기들이 건너들 오니 이것이야말로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이 강만 건너가면 내 앞에 바로 오지 않겠는가 하고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사십년전 저희들 조상 때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복지는 걸어서 자기들 앞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계속해서 가나안 복지에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저들 조상 때나 마찬가집니다. 뭐가 틀어막고 있습니까? 여리고가 틀어막고 있습니다. 여리고가 저들의 가는 길을 틀어막았습니다. 바로 엊그제 하나님께서 요단을 극적으로 건너게 해 주실 때 건넘과 동시에 지난 날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겠다 해서 그 수치의 짐을 벗어버리고 조상들의 죄명을 다 벗어버리고 자기들은 이제 죄인의 후손들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어 가지고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우리의 목표요 우리의 가는 땅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 하고서 이제는 가려고 하면서 이제 요단을 건너서 그곳에 진을 쳤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수치를 굴러가게 해 주시겠다 라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좋았던지 그곳 이름을 굴러갔다 저주가, 수치가 굴러갔다 하여 길갈이라 정하고 그 길갈촌에 일단 자리를 잡았습니다. 길갈촌에 들어오니 광야와는 달랐습니다. 저 광야에는 씨를 뿌려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뿌릴 수도 없었습니다 매일 옮겨다녀야 되니. 그러나 이제 이 길갈에 와서 진을 치고 씨를 뿌렸더니 싹이 납니다. 결실 합니다. 추수를 해 가지고서 이제는 길갈 에서 나온 곡식을 추수해 가지고서 볶아 먹습니다. 떡을 만들었습니다. 무교병을 만들었습니다.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 절기를 거기서 지켰습니다. 그렇게 지켰더니 그 동안 사십년 동안 한 끼도 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던 만나가 길갈촌에 와서 자기들이 농사한 것을 먹은 그 이튿날에 딱 끊어져 버린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들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끊어졌으니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 드릴 때까지는 요단을 넘어왔어도 만나는 따라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길갈 현장까지 따라왔다 그겁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우리가 이곳 곡식을 먹었는데 어제 저녁까지도 만나가 와서 만나도 좀 먹고 자기들이 만든 곡식으로서 음식을 좀 먹었는데, 이 길갈촌에 와서 곡식을 딱 먹고 나니까 그 다음 날에 만나가 뚝 끊어지는데 아무리 아침에 나가서 만나를 쓸어들이려고 해도 없습니다. 만나가 끊어지고 나니까 어떤 현상이 벌어졌는가? 양식이 모자란다 그겁니다. 길갈촌에서 난 것 하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 하고 두 개를 보태 가지고 자기들이 식생활 하기에 적당했는데 만나가 뚝 끊어지고 나니까 그만 양식이 모자라요. 길갈 이 좁은 땅에서 생산한 것 가지고는 우리 이스라엘이 다 살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어디서 양식을 구할까 구할까 하는데 양식이 저 외부로부터 옵니다. 그냥 옵니까? 돈 주고 사야지요. 외부로부터 왔는데 어디 생산품이냐? 가나안 열매다 이겁니다. 요즘에는 온 세상이 동일시장이 되어 가지고서 그저 외국 것을 우리가 쓰고 우리 것을 또 외국에 보내고 이렇게 자유시장경제 시대가 되었습니다마는, 이때 당시에는 자기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에서 농사해 가지고서 자기들 다 먹고 남아야 파는 것이지 자기들이 먹을 것이 부족한데 내어다 파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길갈에서 소득을 얻어 가지고서 음식을 해 먹는데 그것 가지고는 부족했어요. 하나님께서 보태주시는 만나를 더 얹으니까 겨우 겨우 식생활 할 수 있었는데 만나가 뚝 끊어지니까 그저 빨리 다른 데서 곡식을 얻지 아니하면 안 될 판입니다. 그런데 그 곡식의 포장지를 보니까 가나안 땅 생산품이다 그겁니다. 그러니 뭡니까? 역시 가나안 땅은 쓰고도 남는데 우리 길갈에는 이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살겠는가. 이 내용을 오늘 본문으로 조금 전에 읽었으니까 여러분께서 아시겠습니다마는 한 번 더 확인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그랬습니다. 자기들이 먹고 남는데 가나안 땅 열매를 갖고 올 리가 없습니다. 지금 이 길갈은 가나안이 아닙니다. 길갈을 통과해서 출발해서 길갈을 지나서 또 어디를 가야 됩니까?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넘어가서 한참 가야 됩니다. 아이성도 무너뜨리고 해야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길갈 즉, 죄인의 수치를 갖고 있던 이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듯이 요단을 넘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가 굳이 풀이해 본다면 죄악 사망의 자손으로 있다가 거듭난 생명, 물을 통과한 것이나 다름없겠습니다. 이렇게 거듭나서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백성 되어, 옛날 마귀의 자손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이제는 굉장한 신분의 변화를 입어서 높아져서 그 곳에 진을 쳤는데 바로 그렇게 되자마자 하늘 부요같은 부요가 왔느냐? 그렇지 않더라 그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될 때에는 굉장한 복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의 복이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전에 보다는 좀 나았지만 그저 열심히 직장에서 일하고 열심히 사업을 경영하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가족이 먹고 살기에도 부족했다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보태주듯이 하나님께서 그저 돕는 도움으로 누구를 통해서든지 도움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던 것이 길갈촌의 형편이었다 그겁니다. 그런데 그런 형편에서 이제 곡식을 수입을 해 놓고 보니까 가나안 땅의 열매가 들어왔다 그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길갈로는 안 돼. 이 길갈촌으로서는 안 돼. 우리는 가나안 땅으로 가야돼 가나안 땅으로 가야돼. 저 가나안 땅에는 곡식이 얼마나 넘쳤던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곡식을 판매를 하지 않느냐. 우리가 곡식을 지금 가나안 곡식을 얻게 되었으니 가나안 열매를 얻게 되었으니 거기는 얼마나 풍성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차라리 광야에로 돌아가면 좋았을 것을, 여리고가 틀어막고 있으니 어떻게 여리고를 무너뜨릴까? 여리고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다가 굶주린 우리 백성이 다 쓰러져 죽을 것이라. 차라리 요단을 건너오지 아니하고 오히려 저 광야 우리 죽어갔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 있던 그곳에 있었으면 적어도 먹는 것은 보장되지 않았느냐.\" 그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광야 사십년 동안은 적어도 먹을 것 걱정 없었습니다. 다만 저들이 죽기로 명령받고 그 사막밖으로 못나오게 되어 있었으니 사막에서 죽는 날까지를 기다리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으로 오지 못할 벌을 받았지만 적어도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몰살시키지 아니하시고 저들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광야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겠다 하였으니 그 광야야말로 감옥이지요. 넓은 감옥이지요. 그러나 그 감옥은 적어도 일식삼차는 보장되었다 그겁니다. 일식삼차가 뭔지 아십니까? 감옥에 가니까 대통령도 일식삼차 하루 세 끼다 그겁니다. 여러분, 감옥에 갔는데 밥값 내라는 감옥은 없습니다. 들어가 있으면 바깥에 나오지 못하고 벌 다 받을 때까지 못 나오는 것 말고는 적어도 하루 세 끼는 확실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옷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아파도 치료도 해 줍니다. 다만 그 기한이 찰 때까지 못 나오는 것 말고는 확실하게 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후손들의 조상들에게도 죽어 이 땅에 묻혀야지 살아나가지 못할지어다 명했기 때문에 그 바깥 지경 바깥으로는 나올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 수명이 다하는 죽는 날까지는 뭐가 보장되었습니까? 물이 수돗물 꼭대기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반석에서 물을 빼어주었어도 목말라 죽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서 매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 후손들이 요단을 건너왔지만 길갈에서 재정이 부족하고 또 가나안 땅이 좋은 줄은 알지만 거기로 가려니까 튼튼한 여리고 성벽이 자기들을 틀어막고 있으니 저들 조상처럼 입에 무슨 말이 나오고 싶었겠습니까? \"차라리 이럴 바에야 저 광야에로 다시 들어가서 매일 밥이 보장되어 있는 저리로 갔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겠습니까마는 실수는 두 번 안 한다 이것이 후손들의 결정적인 각오였던 것 같습니다. 저들 조상들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그저 그 약속을 어깨에다 메고 자기의 상식을, 어깨에 있던 것을 끄집어 내리고 그 어깨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메고 그대로 그 저항을 밟고 들어갔으면 벌써 사십년 전에 가나안 땅인데 그것 믿지 못해서, 그것 따르지 못해서 사십년 고생하면서 \"우리는 죽기 전에는 이 지경을 벗어나지 못해, 그러니 내 아이들아 너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절대로 우리처럼 하지 말라. 아무리 목이 마르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우리처럼 되돌아가겠다는 소리를 절대 되돌아가겠다는 소리는 절대 입밖에 내지 말라.\" 얼마나 그런 얘기를 많이 했겠습니까? 이 후손들은 자기 조상들이 결정적으로 실수했던 그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 하는 생각으로서 되돌아간다 소리하지 않고 참 어렵지만, 배가 고프지만 저 가나안 열매를 사 먹어가면서 그저 여리고가 앞에 있지만 그저 겁도 나지만 되돌아간다는 소리는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네 백성을 이끌고 이제는 저 자급자족뿐만 아니라 넘쳐서 다른 지역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저 가나안 복지에로 향하여 너희는 이제 출발할지어다.\"라고 해서 막 출발을하려고 하는데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첩첩태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현장에까지 가려니까 복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려고 하니까 그저 태산이 자꾸만 막는다 그겁니다. 여리고 성벽에 탁 틀어막습니다. 그 큰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이야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도무지 할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호수아가 안 갈 수도 없어서 \"예. 가겠나이다.\" 하고서 머리는 앞으로 나가는데 엉덩이는 자꾸 안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저 강 건너 도로 넘어가 가지고서 하루 세 끼 보장되어 있는 그 광야에로 갔으면 싶은 생각도 있고 너무 앞이 두렵고 겁이 나니까 \"길갈 했지만 내 모양이 이 모양인가? 길갈 땅에 씨를 뿌렸지만 이것의 소출은 겨우 이것뿐인가? 우리 가족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여행도 가지도 못하고 자식들 공부도 시키지 못하겠네. 병원에 가도 입원비도 없네.\" 이런 형편이 되었는데 \"아 저 동네 하나님이 주신 땅은 분명히 있기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꿈과 같구나. 여기에 있는 여리고를 무슨 재주로 무너뜨린단 말인가.\" 하고서 겁이 나고 두려운데 여호수아가 그 백성을 이끌고 \"가자.\"라고 하니까 백성들이 \"못갑니다.\" 소리는 입에 담지 못해. 또 옛날처럼 될까바. \"예.\" 하지만 걸음이 잘 나가지를 않아요. 그래 여호수아가 그저 겁이 나서 성을 한 번 더 쳐다보려고 고개를 치켜드는데 아이구머니나 건장한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 착 섰다 그겁니다. \"아이구머니나. 누구요?\" 얼마나 순간적으로 급했던지 \"넌 누구를 위하느냐? 우리를 위하여 왔느냐, 아니면 우리 대적을 위하여 왔느냐?\" 여호수아가 얼마나 그 순간에 겁이 났던지. 두려움이 가득 찼는데 군대장관이 칼을 뽑아들고 섰으니 보통 겁난 것이 아닙니다. \"누구요? 우리를 위하여 왔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여 왔느냐?\" 이 심각한 순간에 놀라 가지고서 이런 질문을 하는데 여호수아의 마음에는 여기에 지금 앞에 버티고 선 이 장관이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서 자기들을 도우러 온 장관인 것으로 더 생각했겠습니까, 아니면 잔뜩 이나 어려운 일이 계속되는데 이놈의 이 건장한 골리앗 같은 놈이 또 나타났으니 이것 우리 대적의 진중에서 왔구나 대적을 위하여 왔구나 이런 생각으로 그들에게 더 해를 줄 군대장관으로 여겼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한 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이 순간에, 이 놀라운 순간에 군대장관이 탁 버티고 서서 칼을 이렇게 뽑아들었는데 그때 여호수아와 그 백성의 생각에 자기편 되려고 하나님이 보낸 군대장관으로 여겼겠습니까? 그렇다고 생각되시면 아멘 합시다. 그러면 반대로 이 어려운 중에 더욱 어렵게 하려고 우리를 해롭게 하는 저 대적의 입장을 옹호해 주는, 대적을 위하여 우리를 쳐죽이려고 온 참으로 자기들에게 어려움을 주려고 온 군대장관인 줄로 알았을 것이다 라고 인정되시면 아멘 합시다. 대단하십니다. 정답이네요. 여러분은 저와 함께 아까 본문을 한 번 읽고 말았습니다마는 한 번 읽고서 그렇게 대답하시다니 참 존경스럽습니다. 역시 축복을 받아서 어려움을 이기고 현장까지 갈 수 있는 아주 대단한 성도들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위해서 많은 시간 기도하고 많은 시간 성경을 읽고서 우리 성도님들께서 아멘 하신 그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왜 이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보낸 자기들을 위한 군대장관이 아니라 반대측에서 온 자기들을 해하려고 한 군대장관으로 이 순간에 알았느냐 라는 것을 한 번 헤아릴 수 있는데 13절 볼까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아니라\' 다음에 얘기는 뭡니까?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심으로 왔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저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하면 될텐데 \'아니라\'는 말은 왜 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어떻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니라\'고 이 천사가 말했겠습니까? 여호수아의 생각은 뭡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보지 않고 사단의 군대장관으로 보고 있었다 그겁니다. 발발 떨면서 이제 죽었거니 하고 있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무서운 너희를 공격하려고 온 그런 자가 아니라. 나는 오히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라고 보내준 군대장관으로서 왔느니라.\"고 대답했으니 이 \'아니라\'를 보면 여호수아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당신 누구요? 우리를 위합니까, 아니면 우리의 대적을 위합니까?\" 할 때 실제로 여호수아 마음속에는, 그 백성의 마음속에는 더 누군줄 알았습니까? 대적을 위하는 군대장관인 줄 알았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사인, 하나님의 군대장관인 이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군대장관이 아니야. 이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주셨으므로 너희를 위하여 지금부터 출발하게 될 것이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아멘. 오늘 여러분 앞에 주의 종으로서 이제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서 여러분 앞에 다가서는 하나님의 천사가 여러분의 현장에 임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다행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졸병이 하나 왔으면, 하나 뿐입니다. 그렇지만 군대장관이 하나 왔다면 하나가 아니지요. 군대 장관에게는 소대장이면 소대원이 따르고 중대장이면 중대원이 따르고 대대장이면 대대장, 사단장이면 사단장, 적어도 군대장관이라고 하니까 대단한 수의 능력있는 천사들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지도하고 명령하는 군대장관이 왔으니 이것 졸병 하나 온 것하고 다릅니다. 군대장관 한 사람 섰지만 이 한 사람 힘이 아닙니다. 굉장한 힘으로써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적을 위한 군대장관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보낸 저와 여러분을 위한 군대장관으로 왔다 하셨다 그겁니다. 그러니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 이 군대장관과 함께면 이 능력들과 함께면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까지 보호받으면 가겠도다.\" 하면서 출발하여 가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여리고는 무너뜨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겁니다. 여리고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겁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벽에 돌멩이 하나라도 뽑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벽에 곡괭이 들고 가서 그 구멍 하나 내었습니까? 전혀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성벽이 그렇게 무너질 성벽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역사 했다고 믿으십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과 그의 소속한 하나님의 능력이 일일이 힘을 가해서 무너뜨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눈으로 안 보였을지라도 저들 앞에 나타났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그와 함께 한 모든 능력으로써 여리고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또 다음 상황을 보면 기억할 수 있는데, 이같이 축복 받은 백성이 나아가는 길 앞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막아서고 있는 여리고가 여러분 앞에 있다 할지라도 여리고를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보내신 군대장관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면 길갈촌에서 모자라는 양식 붙들고 외부에서 사다가 구걸해서 먹을 생각하지 마시고, 길갈에 진치고 영원히 살 생각하지 마시고, 길갈에 들렸으면 거기에서 지난 날의 수치를 굴러 보내버리고 자유 얻은 사람, 축복 받은 사람이 되어 여리고가 있지만, 아이성이 있지만 그것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의 군대장관 만났거든 그냥 출발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여러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천사가 역사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생활형편이 지금 길갈입니까? 여러분의 가진 능력으로서는 만족이 없으십니까? 빌려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오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일지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성령으로 주의 종에게 붙들리게 하시고 그리고 주의 종을 감동시켜서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 계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이천년을 맞아 들어온 우리들에게 지난 날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고 길갈촌에 당장 어려운 이 연초의 이 어려운 생활에 그냥 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넘쳐서 내가 쓰고도 남에게 줄 수 있는 현장으로 이끌려는 하나님의 뜻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군대장관을 우리에게 파송해 주시려고 이 말씀을 주셨으니, 오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의 부족한 길갈촌에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리고와 같은 큰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여러분은 두려워만 하고 있지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에게 파송되어 여러분의 길을 그들이 헤쳐가면서 인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더 나은 이천년을 위하여 목사 된 것을 그나마 모처럼 만에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주께서 당신의 종을 들어서 주가 말씀하시고, 당신의 종의 두 손을 들게 하사 하나님이 스스로 친히 팔 드심처럼 하여 그 우수와 좌수에 복이 흘러내리게 해서 부귀와 장수가 그 손아래에, 손이 미치는 그 방향의 거룩한 지경 안에 있는 자에게 복이 임하게 하시는 주께서, 오늘 주께서는 종의 입술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서 이제 너를 위하여 네 앞에 왔느니리라.\"는 말씀을 전하게 한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으로 듣게 한 줄을 믿습니다. 이 말씀과 함께 영적으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의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여리고 앞에서 동행을 시작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앞장을 서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종을 세운 것을 믿고 저는 성령으로 확신을 얻고 오늘 목사의 직위를 여러분을 위해서 사용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바로 여리고 앞에 여호수아의 현장이 오늘 이 현장이 된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종의 기도를 주께서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은 민수기 14장에 잘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 했을 때 \"전염병을 내려서 이 바란에서 모두 몰살하게 하겠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적에 하나님의 종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말씀드리기를 \"이 현장에서 몰살시키시면 하나님의 공의는 이루어집니다마는 사람들이 오해하여 하나님이 기운이 없어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을 다 죽였다고 하지 않겠나이까. 그러하오니 한꺼번에 몰살을 전염병으로 시키지 마옵시고 이들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광야에로 보내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커녕 이 광야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시옵고 스스로 죽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다 죽고 난 다음에 그 후손들이나 나오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너는 참음이 강하고 참으로 인내가 크도다. 내 마음에 합한 자로다. 내가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즉시 죽이지 아니하고 광야 사십년동안 돌게 할 때에 한끼도 주리지 않게 만나를 내리시고 하루도 목마르지 않게 반석에서라도 물을 뽑아서, 반석 반석하니까 물 나오는 반석이니까 오죽 좋았겠나 싶지만 아닙니다. 물이 오죽 없었으면 바위를 두들겨 가지고 물을 뽑았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모세의 기도를 따라 들어주셨으니 모세의 하나님께서 오늘날 저희의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그의 종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주의 종이 간절한 마음으로 종의 신분으로서 여러분의 담임 목사된 자격으로서, 참으로 여러분의 현재의 위치가 지난 날의 수치는 지나갔다손 치지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넘쳐서 먹고 쓰고 남아서 남의 동네까지 내어보내어야 될 그런 형편에 가지 못하고 길갈촌처럼 다른 데서 보탬을 받지 아니하면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직장과 사업과 건강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래서 복이 넘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하나님이 주셨기로 그리로 해서 가보려고 하니 여리고가 단단히 틀어막고 있어서 여러분의 사업이면 사업, 진학이면 진학, 진급이면 진급, 결혼이면 결혼, 빚진것이면 빚진 것,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니까 더욱 더 첩첩태산으로 막고 서 있다면 이런 형편에 있는 여러분에게 주의 종으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 여러분 결코 떠나온 곳, 저 사막으로 광야에로 들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애굽에로 되돌아가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복 주셨거든 그 말씀을 어깨에 올려놓으십시오. 그 축복의 현장이 아무리 멀고 앞에 가로막힌 것이 있더라도, 오늘 이 시간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구하여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여러분의 가는 길 막고 저항하는 모든 악한 조건들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파송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구합니다. 이 기도를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어떠한 군대 장관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셔야 되겠는가? 이제 구체적으로 축복을 하려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자녀들을 가능한 한 데리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오늘 많은 어린이들이 왔습니다. 대성전 안에 들릴 수가 없어서 지금 안디옥성전 에베소성전으로 쫓겨가서 지금 거기에 있는데 이 현장이나 그 현장이나 우리 한 예배의 지경이 된 줄로 믿습니다. 다 같이 거룩한 곳이 된 줄로 믿습니다. 어른은 또 어른이지만 특히 자녀들을 위하여 축복하고자 하는데, 마태복음18장 10절에 보면 \"어린 모든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어서 죽을 때까지 따라 다니는 죽은 이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그의 천사가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신데 \"너희가 어른이라고 하여 어린아이를 업신여기지 말라. 함부로 때리거나 함부로 말하지 말라. 아이 취급을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저의 천사가, 저희에게 딸려져 있고 딴 데가지 않고 아이만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천사가 매일 그 아이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피해와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의 사건을 하나님 앞에 매일 아뢰고 있으니 아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지 말라.\" 누구 때문에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겁니까? 저의 천사가 있다 그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고 저 안디옥성전과 에베소성전에 있는 우리 성도들의 자녀 되신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이천년을 맞아 이제 이후를 살아가는 동안에 어린이들로서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언제 무슨 사고를 당할지 언제 전쟁을 당할지 언제 어려움을 당할지 언제 나쁜 사람을 만나서 잘못된 곳에 빠지게 될지 알 수 없는 이 지경에서, 오늘 주의 종 목사로서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주신 자녀들은 우리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교회를 지켜야 될 큰 기둥들이 될 것이기에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어린이들을 위하여 선한 천사를 이 시간 파송하여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을 지켜주고 사고날 일을 면케해 주고 떨어지면 붙들어 주고 위기가 올 때에 누구를 시키시더라도 막아줄 수 있는 여호와의 거룩하고 순종하는 위하는 천사가, 성도님들의 자녀들의 현장과 그 가는 곳에 여러분의 자녀들의 천사로 파송되기를 또 파송해 주시기를 다시 한 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린 아이 때만 천사가 왔다가 그저 이십세가 되면 떠나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5절에 보면, 그 앞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는데 돌로 된 옥에 갇혔으니 튼튼한 옥에 갇혔으니 나는 빠져나가기 틀렸다 하고 베드로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저 방에서 두려워서 벌벌 떨고 우리도 잡혀가지 않나 하고 숨어 있는데 베드로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요. 자고 있을 때가 아니요. 일어나라. 일어나라.\" \"누구시오? 누구시오?\" 하는데 그냥 착고가 출출 풀립니다. 그냥 풀립니까? 다 풀었지요. 아주 천사 그때 온 천사는 수갑을 잘 푸는 열쇠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철문도 척 열리고 그냥 민다고 했으면 휘었겠지만 그냥 탁 열리니 열어줍니다. 여러분 그런 천사가 있음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와서 착 풀립니다. \"빨리 나가라. 빨리 나가라. 조금 더 있으면 안 돼. 이 간수가 있으면 못 나가. 빨리 나가라. 빨리 나가라.\" 해서 뛰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을 사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을 사람들 방으로 찾아가서 밤중에 아직 어두운데 문을 두드리니까 어른들은 겁이 나서 나오지 않고 로데라고 하는 계집아이가 나가서 \"누구십니까?\" \"나 베드로.\" \"어, 베드로님!\" 쳐다보니까 베드로가 서 계신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냥 반가우면 얼른 문을 열어드려야 될텐데, 천사가 옥문은 열어주었지만 이 집 대문은 로데가 열어주어야 될텐데 얼마나 너무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너무 흥분해 가지고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려고 그만 방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그겁니다. 그래 바깥에서 계속 두드리는데 방에 들어가서 이 아이가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 뭐냐 하면 \"여러분, 베드로 사도께서 오셨어요. 베드로 사도께서.\" \"무슨 소리? 지금 감옥에 있는데. 나와도 지금 재판을 받아야 나오고 내일 나오지 이 밤중에 어디로 온단 말인가?\" \"아닙니다. 내가 베드로의 음성을 들었어요. 베드로님을 내가 보았어요. 베드로 맞았습니다. 체구도 맞고 키도 그렇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 아이가 미쳤구나.\"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하고서 정말 진실이라고 하니까 그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아이의 적극적인 주장을 보고서 \"참말은 참말이구나. 거짓말은 아니구나. 야야 지금 나가봐. 없을 것이야.\" \"아니 온 게 사실입니다.\" \"그래 알았어. 왔지. 왔지만 베드로의 천사가 온 거야.\" 그랬습니다. \"그의 천사가 온 거야.\" 그랬어요. 그 당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를 돕는 천사가 파송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천사가 감옥에 있는 베드로를 대신해서 그 천사가 빠져 나와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 다른 사람들은 꿈인 줄 알고 만나는 때가 많습니다. 환상인줄 알고 만나는 때가 많습니다. 만날 때에 천사가 천사 모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음성으로 한다 그겁니다. 주인의 모습으로 온다 그겁니다. 그래서 그 방안에 있는 신앙하는 사람들은 그때 당시에 천사 역할을 알기 때문에 \"아이고 그러면 베드로가 온 게 아니라 로데야, 베드로의 천사가 왔어. 베드로의 목소리와 같더라고? 베드로의 키와 같더라고? 그러면 베드로 천사야.\" 그랬다 그겁니다. 아까 소개한 사도행전 12장 15절 그 앞뒤에 있는 얘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온 천사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우리가 기도할 때 바로 기도를 하늘에 올리고 우리가 어려울 때에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가 사고날 지경에 깨닫게 해 주고 뭔가 느낌이 오게 해 준다 그겁니다. 이런 역할을 한다 그겁니다. 그의 천사가. 이 천사는 베드로처럼, 물론 여기에 천사가 왔겠지 라고 했지만 실제 온 것은 천사가 온 것이 아니라 누가 왔습니까? 베드로가 직접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알고 있는 지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께서도 친히 하신 말씀, 어린 아이 적부터 그의 천사는 계속해서 그와 함께 있어서 그 길을 인도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혹 여러분께서 살아있는 가족이나 혹 죽어 세상을 떠난 분들의 모습을 하도 그 음성을 하고 꿈에라도 나타나면 어떤 사람은 꿈에 나타나면 그 뒷날 일이 잘 되는 주인공이 있고, 참 평소에는 좋았는데 저 사람만 꿈에 나타나고 나면 다음날 싸움질이 나고 다음날 사고가 나고 핸드백을 잊어버리고 하여간에 별로 좋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다 그겁니다. 그런 분들이 생각하기를 \"아이고 그 사람이 왔구나. 돌아다니다가 왔구나.\" 이렇게도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마는 그래 왔는지 저래 왔는지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의 천사가 그의 모습을 하고 오는 경우를 지금 말씀드린다 그겁니다. 그러면 그의 천사가 왔는데 그의 모습을 하고 왔는데 만나고 나니 잘 될 때가 있다 그겁니다. 절로 절로 좋은 사람 만나고 길을 갔는데 복된 길만 가게 되고 어떤 사람은 만나고 나니까 그냥 그 사람만 만나면 잘 안 된다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살아 생전에나 여러분이 이 사후에라도 여러분을 따르던 천사가 여러분들의 후손의 꿈에 나타나게 될 때에 도와주는 천사로서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된 길을 열어주는 여호와의 천사로서 여러분의 이웃과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천사를 여러분이 동역을 할지언정 마귀가 보낸 망하게 하는 천사, 아무리 살아생전에 좋아하고 아무리 좋아졌지만 그가 남기고 가는 천사를 악한 천사를 남기고 갔다면 그의 모습과 그의 음성을 하고 나타나는 그는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나는 이 군대장관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천년에 들어선 우리 교회, 우리 교회 앞에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복지의 현장이 있습니다. 큰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이같은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셨는데 이 현장을 가려고 하니 지금의 형편은 길갈입니다. 길갈에서 우리의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하여 쳐다보니 또 뭡니까? 여리고가 큰 벽으로 막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 교회 앞에 누가 나타나 주어야 되겠는가? 대적을 위하는 천사가 나타나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우리 교회 앞에 이 시간 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구합니다. 주여,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 앞에 서게 되면 우리 교회의 길은 여리고가 여리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손대지 않아도 무너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깨에 올리고 우리의 상식을 어깨로부터 끄집어 내린다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우리 어깨에 올려져 있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려고 보냄을 받은 군대장관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사업이 현재 길갈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 남의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 되지 않게 하시고 남의 위가 될지언정 아래 되지 않게 하시며 남에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게 되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이것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입니다. 온 가족이 먹고도 남아서 저 길갈에까지 팔 수 있는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업의 현장, 이런 자녀의 현장, 이런 여러분의 장래의 현장의 가는 길에 아직도 길갈촌의 부족이 있으십니까? 여리고같은 어려운 장벽이 다른 사업으로 하여 막고 있습니까? 법으로 하여 막고 있습니까? 여리고 성은 얼마나 튼튼했던지 법을 고치기가 쉬웠지 성을 무너뜨리기는 어려웠습니다마는, 법보다 더 강했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의 나아가는 길, 하나님께서 주신 그 넘치는 복된 현장,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모든 면에 그 복의 현장으로 가는 길에 여리고가 있다 하더라도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 앞에 이 시간 \"나는 너희를 위하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군대장관으로서 이제 왔느니라.\" 하는 이 말씀과 함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의 사업 앞에 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 앞에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결혼하고자 하는 문제 앞에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진학하고자 하는 일 앞에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진급하고자 하는 그 현장에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진급의 복을 받았습니까? 진학의 복을 받았습니까?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겠다는 복을 받았습니까? 사업의 성공을 받았습니까? 가정의 평안하게 될 복을 받았습니까? 넘치는 복을 남에게 꾸어주게 되는, 높아져서 명성이 높아지는 그런 복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복판쯤 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복판은 아직 안 이뤄있습니까? 물론 아닐 줄 믿습니다. 그곳을 향하여 가는 이천년 초에 우리는 모두 서 있습니다. 지금 형편은 길갈촌 같아서 부족합니다. 여리고가 우리를 틀어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대적을 위하는 군대장관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오늘 여러분 앞에 모든 현장 앞에 가는 길 앞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축원을 오늘 계속해서 드리는 주의 종 목사는 참으로 오늘 성도님들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받은바 큰 사랑을 위하여 오늘 좀 갚아드리는구나 위로를 받습니다. 주께서 역사 하실 줄을 믿습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 하와에게 대적을 위하는 뱀이 먼저 나타나지 아니하고 아담과 하와를 위하는 여호와께서 보낸 군대장관이 뱀보다 먼저만 나타났더라면, 그 뱀이 유혹할 때에도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옆에 있어서 \"아니야, 아니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야. 사단아 물러가라.\" 악한 영을 거룩한 힘이 있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와서 물리쳐만 주었다면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없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인간의, 인간 중에 대단한 인간 아담이라 할지라도 그들 가는 길에 누가 먼저 오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대적을 위하는 군대장관보다 먼저 온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에도 헤롯이 보낸 칼보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먼저 왔기 때문에 예수님도 안전하고 요셉 마리아도 저 애굽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 만약에 하나님의 보낸 천사보다도 헤롯의 칼꾼이 먼저 그들 앞에 섰더라면 당하지 않고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난 해까지 여러분이 대적을 위하는 악신의 인도를 받았다면, 악신의 유혹을 받는 일이 있었다면 지난 날의 수치를 이 해에 들어서면서 굴러가게 해 주신 하나님, 이제는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이 인쳐 주신 줄을 믿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을 향하여 목적하신 현장까지 이르게 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오늘 보내어 주셨으니, 저 안디옥성전과 에베소성전에 있는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저의 천사로서 하나님의 천사가 먼저 자리잡고 저들의 손을 먼저 잡아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의 사업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에 나아가는 일에도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먼저 오시고, 그 전에 우리를 괴롭혔던 악신의 사자가 있었다면 주 예수 이름으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자리를 바꾸어 우리를 위하는 군대장관이 우리의 팔목을 잡아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잡으신 그 팔목을 놓치지 마시고 약속의 현장까지 우리를 도착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당신의 군대장관을 백성 된 우리 앞에 보내어 험한 길을 군대장관과 그의 속한 능력의 천사들로 헤치게 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현장에까지 우리로 이르게 하려고 하신 오늘 이처럼 복을 내리신 아버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지금부터 영원토록 우리의 가는 길 하나님이 목적한 현장에까지 큰 능력으로 실족하지 않도록 하시며 시험들지 않도록 하시며 일으켜 인도하시는 그 역사 하심이, 이천년에 들어선 모든 성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따라 살기로 결심하고 살게된 것을 믿는 성도 모든 성도 성도의 머리 머리 위에와 그 가정에와 자녀들에게와 사업과 직장과 계획하는 모든 일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
主, 군대장관을 먼저 만나게 하소서/ 수5:10-15/ 2004-02-11
主, 군대장관을 먼저 만나게 하소서 수5:10-15 오늘은 세 째날로 또 축복 성회 마지막 시간으로서 「主, 군대장관을 먼저 만나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축원하는 마음으로 이 제목을 드렸습니다. 인터넷으로 설교를 공개하고 그 설교를 듣기 위해서 홈페이지 안으로 방문하는 방문객의 수를 보면 설교에 따라서 그 접속해 오는 분의 수가 크게 차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설교 제목이 축복이 들어갔으면 월등하게 많은 분들이 그 설교를 찾아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내용은 더 축복인데 그 제목이 좀 축복같지 않아 보이면 의외로 피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봉사한 봉사여도 주께는 아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는 그야말로 위로와 격려와 축복의 말씀이었는데 제목만 보니까 \'봉사해도 헛일이네\' 아마 그렇게 본 것 같아요. 그래 가지고서 그 설교에로 들어오는 손님이 아주 적어요. 그리고 축복 축복하는 데는 굉장히 많은 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많은 분들이 역시 위로와 축복 받기를 원하고 계시는구나 이런 평가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오시는 데이터를 보고서 짐작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들 좋아하는 축복 축복하는데 이 축복은 그저 아무나 받아서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아야 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다가 출애굽 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그 가나안 복지에로 가게 된 것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안 받았으면 괜찮았을 것을 그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 복받는 순간부터 그들은 오히려 당장 복을 누린 것이 아니라 고생길로 들어섰다 하는 그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은 받았는데 그 내용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 축복을 받았을 적에 아멘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걸어서 걸어서 내 앞으로 다가와 내 앞으로 펼쳐져 주느냐?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축복 받은 사람이 그 축복의 현장으로 가야만 되더라는 겁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위치하게 했던 그곳에 당당하게 자리잡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 축복의 현장으로 가서 축복을 누리려면 복 받은 사람이 거기로 가야되지 그 축복 속에 말하였던 가나안 땅이 내 앞으로 굴러오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축복의 현장인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까지 내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가야되는데 그 가는 길이 험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겁니다. 절로 절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저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고생길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복 아무나 받을 것 아니고 복을 주신다 해도 오늘 말씀을 들으시고 그래도 받겠다 하시는 분은 아멘으로 복을 받으시고, 그렇다면 난 포기하겠다 아마 이런 분들도 나올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홍해에서 역사하사 애굽과 이스라엘을 분리 시켜 주셨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아주 크게 역사 하셨습니다. 대단한 바다를 둘로 쪼개고 그 사이에로 이스라엘을 건너게 했습니다. 무슨 복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건너갑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간다는 목적지를 주었습니다. 그리로 향하여 건너갈 때에는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해 주었습니다. 애굽이 뒤쫓아오게 되니 하나님께서 다시 물을 합쳐서 애굽의 군사들을 다 수장시키고 이제 애굽과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주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서부터 하나님께서는 \"너희 알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그 복지를 향하여 갈지어다.\" 해서 지도자의 인도를 받아서 가게 되었는데 한 25일쯤 가게 되니까 점점 힘든 일이 많아졌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한 25일쯤 지났을 적에 어떤 불평을 하게 되었는고 하니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애굽 사람의 가마솥 곁에서 불 지펴드리고 그 사람들 종노릇 했으면 이 고생은 안 할 것을….\" 하면서 불평한 불평이 복 받은 현장으로 가다가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출애굽기 16장 1절-3절에 있는 말씀을 제가 읽어드린다면 \"애굽에서 나온 지 이십 오일이라 원망하여 가로되 애굽 땅에서 먹던 가마 곁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하면서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던 겁니다. 막상 축복의 말씀 속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그것이야 정말 좋았습니다. 그 복 받은 곳을 향하여 저희들이 가고 있는데 그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얼마간 가다보니 목마른데 물을 찾아서 샘을 발견했더니 그냥 물이 쓴 마라의 샘이었습니다. 그래서 쓴 물로 인하여 굉장히 속이 상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께서 먹을 만큼 양식을 갖고 가라 물도 준비해 가라 또 짐승들도 끌고 가라 금패물 은패물도 갖고 가서 훗날 너희가 쓰도록 하라 이렇게 해서 양식을 갖고 나왔는데 사람이 가난하여 굶어 죽게 되면 금패물 은패물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굶주리는 나라들 혹 외국에 나가게 되면 무슨 장식품이라든지 보석 같은 것 절대 사지 않는 답니다. 그저 빵만 사간다는 겁니다. 사람이 굶어죽게 되면요 다른 것 보이지 않습니다 양식입니다. 그런데 갖고 나온 양식도 한 25일쯤 지나게 되니까 바닥나버렸다 그겁니다. 거의 바닥이 날쯤에 그래도 우리가 계속해서 가야되겠는지 말아야 되겠는지 우리의 갈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얼마나 더 험한 길을 가야되겠는지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열 두 지파의 각 두령들을 내어 가지고서 정탐을 합니다. 건장한 사람들이 미리 가 가지고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과연 정탐을 했는데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흘러 넘쳤습니다. 갔다 와서 보고하는 사람들의 보고를 들어보니 모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과연 그 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우리가 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정말 복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 형편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복된 땅으로 출발하여 지금 25일쯤 가고 있는데 물 떨어져 양식 떨어져 그러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 그저 지나온 25일보다 가는 날이 더 쉬울 것인가 생각하여 정탐을 해 보았더니 못 산다면 차라리 낫겠는데 거기는 너무 너무 넘쳐서 풍성해서 재물이 넘쳐서 얼마든지 먹고 쓰고 남는데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좋은 땅이니 세상에서 가장 좋은 민족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장수가 그 땅을 미리 차지하여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런 정탐 소식을 백성들에게 전하여 주게 되니 정말 기가 막혔던 것이지요. 먹을 것도 떨어져, 물 마시는 것도 그냥 목마를 때 그때 그때 먹기도 힘들고, 이런 차에 정탐 소식을 들으니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터져 나온 얘기가 뭡니까? \"차라리 애굽의 종 되었던 때가 좋았다. 종 되었던 때에는 먹을 것 걱정한 적이 있느냐. 마실 것 걱정한 적이 있느냐. 입을 것 걱정한 게 있느냐. 뼈빠지게 일하면 그저 먹고 자는 것은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가지고서 이 모세와 여호수아 이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우리가 무작정 따라 나왔더니 복이 이건가.\" 하면서 그저 되돌아가겠다 이렇게 후회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복 아무나 받는 것 아닙니다. 복을 받고 복의 현장까지 가는데는 그저 복이 굴러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현장까지 가야되는데 그 현장은 한발자국도 가까이 와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기까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축복을 받고 나면 \"아멘 아멘\" 그 축복 속에 있는 내용의 가나안 땅이 우리에게로 바로 올 줄 압니다. 그런 직장이 바로 굴러올 줄 압니다. 그런 부요가 그대로 굴러올 줄로 압니다. 아닙니다. 거기로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증입니다. 아무나 이것을 받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후손들도 사지의 광야 사십년 생활을 마치고 감옥에서 출옥하는 심정으로 \"다시금 너희 조상에게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리라.\" 하시는 축복을 듣고 요단을 넘어서려고 이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 조상들에게 사십년전, 홍해를 갈라주심같이 요단의 물을 막아서서 태산같이 물이 쌓이게 하고 마른 땅으로 자기들이 건너들 오니 이것이야말로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이 강만 건너가면 내 앞에 바로 오지 않겠는가 하고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사십년전 저희들 조상 때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복지는 걸어서 자기들 앞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계속해서 가나안 복지에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저들 조상 때나 마찬가집니다. 뭐가 틀어막고 있습니까? 여리고가 틀어막고 있습니다. 여리고가 저들의 가는 길을 틀어막았습니다. 바로 엊그제 하나님께서 요단을 극적으로 건너게 해 주실 때 건넘과 동시에 지난 날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겠다 해서 그 수치의 짐을 벗어버리고 조상들의 죄명을 다 벗어버리고 자기들은 이제 죄인의 후손들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어 가지고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우리의 목표요 우리의 가는 땅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 하고서 이제는 가려고 하면서 이제 요단을 건너서 그곳에 진을 쳤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수치를 굴러가게 해 주시겠다 라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좋았던지 그곳 이름을 굴러갔다 저주가, 수치가 굴러갔다 하여 길갈이라 정하고 그 길갈촌에 일단 자리를 잡았습니다. 길갈촌에 들어오니 광야와는 달랐습니다. 저 광야에는 씨를 뿌려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뿌릴 수도 없었습니다 매일 옮겨다녀야 되니. 그러나 이제 이 길갈에 와서 진을 치고 씨를 뿌렸더니 싹이 납니다. 결실 합니다. 추수를 해 가지고서 이제는 길갈 에서 나온 곡식을 추수해 가지고서 볶아 먹습니다. 떡을 만들었습니다. 무교병을 만들었습니다.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 절기를 거기서 지켰습니다. 그렇게 지켰더니 그 동안 사십년 동안 한 끼도 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던 만나가 길갈촌에 와서 자기들이 농사한 것을 먹은 그 이튿날에 딱 끊어져 버린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들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끊어졌으니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 드릴 때까지는 요단을 넘어왔어도 만나는 따라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길갈 현장까지 따라왔다 그겁니다. 그래서 어제 저녁에 우리가 이곳 곡식을 먹었는데 어제 저녁까지도 만나가 와서 만나도 좀 먹고 자기들이 만든 곡식으로서 음식을 좀 먹었는데, 이 길갈촌에 와서 곡식을 딱 먹고 나니까 그 다음 날에 만나가 뚝 끊어지는데 아무리 아침에 나가서 만나를 쓸어들이려고 해도 없습니다. 만나가 끊어지고 나니까 어떤 현상이 벌어졌는가? 양식이 모자란다 그겁니다. 길갈촌에서 난 것 하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 하고 두 개를 보태 가지고 자기들이 식생활 하기에 적당했는데 만나가 뚝 끊어지고 나니까 그만 양식이 모자라요. 길갈 이 좁은 땅에서 생산한 것 가지고는 우리 이스라엘이 다 살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어디서 양식을 구할까 구할까 하는데 양식이 저 외부로부터 옵니다. 그냥 옵니까? 돈 주고 사야지요. 외부로부터 왔는데 어디 생산품이냐? 가나안 열매다 이겁니다. 요즘에는 온 세상이 동일시장이 되어 가지고서 그저 외국 것을 우리가 쓰고 우리 것을 또 외국에 보내고 이렇게 자유시장경제 시대가 되었습니다마는, 이때 당시에는 자기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에서 농사해 가지고서 자기들 다 먹고 남아야 파는 것이지 자기들이 먹을 것이 부족한데 내어다 파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길갈에서 소득을 얻어 가지고서 음식을 해 먹는데 그것 가지고는 부족했어요. 하나님께서 보태주시는 만나를 더 얹으니까 겨우 겨우 식생활 할 수 있었는데 만나가 뚝 끊어지니까 그저 빨리 다른 데서 곡식을 얻지 아니하면 안 될 판입니다. 그런데 그 곡식의 포장지를 보니까 가나안 땅 생산품이다 그겁니다. 그러니 뭡니까? 역시 가나안 땅은 쓰고도 남는데 우리 길갈에는 이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살겠는가. 이 내용을 오늘 본문으로 조금 전에 읽었으니까 여러분께서 아시겠습니다마는 한 번 더 확인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0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그랬습니다. 자기들이 먹고 남는데 가나안 땅 열매를 갖고 올 리가 없습니다. 지금 이 길갈은 가나안이 아닙니다. 길갈을 통과해서 출발해서 길갈을 지나서 또 어디를 가야 됩니까?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넘어가서 한참 가야 됩니다. 아이성도 무너뜨리고 해야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길갈 즉, 죄인의 수치를 갖고 있던 이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듯이 요단을 넘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우리가 굳이 풀이해 본다면 죄악 사망의 자손으로 있다가 거듭난 생명, 물을 통과한 것이나 다름없겠습니다. 이렇게 거듭나서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백성 되어, 옛날 마귀의 자손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이제는 굉장한 신분의 변화를 입어서 높아져서 그 곳에 진을 쳤는데 바로 그렇게 되자마자 하늘 부요같은 부요가 왔느냐? 그렇지 않더라 그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될 때에는 굉장한 복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의 복이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전에 보다는 좀 나았지만 그저 열심히 직장에서 일하고 열심히 사업을 경영하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가족이 먹고 살기에도 부족했다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보태주듯이 하나님께서 그저 돕는 도움으로 누구를 통해서든지 도움을 입지 아니하면 살아가기 힘들 정도가 되었던 것이 길갈촌의 형편이었다 그겁니다. 그런데 그런 형편에서 이제 곡식을 수입을 해 놓고 보니까 가나안 땅의 열매가 들어왔다 그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길갈로는 안 돼. 이 길갈촌으로서는 안 돼. 우리는 가나안 땅으로 가야돼 가나안 땅으로 가야돼. 저 가나안 땅에는 곡식이 얼마나 넘쳤던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곡식을 판매를 하지 않느냐. 우리가 곡식을 지금 가나안 곡식을 얻게 되었으니 가나안 열매를 얻게 되었으니 거기는 얼마나 풍성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차라리 광야에로 돌아가면 좋았을 것을, 여리고가 틀어막고 있으니 어떻게 여리고를 무너뜨릴까? 여리고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다가 굶주린 우리 백성이 다 쓰러져 죽을 것이라. 차라리 요단을 건너오지 아니하고 오히려 저 광야 우리 죽어갔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 있던 그곳에 있었으면 적어도 먹는 것은 보장되지 않았느냐.\" 그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광야 사십년 동안은 적어도 먹을 것 걱정 없었습니다. 다만 저들이 죽기로 명령받고 그 사막밖으로 못나오게 되어 있었으니 사막에서 죽는 날까지를 기다리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으로 오지 못할 벌을 받았지만 적어도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몰살시키지 아니하시고 저들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광야 안에서 빙글빙글 돌리겠다 하였으니 그 광야야말로 감옥이지요. 넓은 감옥이지요. 그러나 그 감옥은 적어도 일식삼차는 보장되었다 그겁니다. 일식삼차가 뭔지 아십니까? 감옥에 가니까 대통령도 일식삼차 하루 세 끼다 그겁니다. 여러분, 감옥에 갔는데 밥값 내라는 감옥은 없습니다. 들어가 있으면 바깥에 나오지 못하고 벌 다 받을 때까지 못 나오는 것 말고는 적어도 하루 세 끼는 확실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옷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아파도 치료도 해 줍니다. 다만 그 기한이 찰 때까지 못 나오는 것 말고는 확실하게 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후손들의 조상들에게도 죽어 이 땅에 묻혀야지 살아나가지 못할지어다 명했기 때문에 그 바깥 지경 바깥으로는 나올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 수명이 다하는 죽는 날까지는 뭐가 보장되었습니까? 물이 수돗물 꼭대기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반석에서 물을 빼어주었어도 목말라 죽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서 매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 후손들이 요단을 건너왔지만 길갈에서 재정이 부족하고 또 가나안 땅이 좋은 줄은 알지만 거기로 가려니까 튼튼한 여리고 성벽이 자기들을 틀어막고 있으니 저들 조상처럼 입에 무슨 말이 나오고 싶었겠습니까? \"차라리 이럴 바에야 저 광야에로 다시 들어가서 매일 밥이 보장되어 있는 저리로 갔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겠습니까마는 실수는 두 번 안 한다 이것이 후손들의 결정적인 각오였던 것 같습니다. 저들 조상들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면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그저 그 약속을 어깨에다 메고 자기의 상식을, 어깨에 있던 것을 끄집어 내리고 그 어깨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메고 그대로 그 저항을 밟고 들어갔으면 벌써 사십년 전에 가나안 땅인데 그것 믿지 못해서, 그것 따르지 못해서 사십년 고생하면서 \"우리는 죽기 전에는 이 지경을 벗어나지 못해, 그러니 내 아이들아 너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 절대로 우리처럼 하지 말라. 아무리 목이 마르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우리처럼 되돌아가겠다는 소리를 절대 되돌아가겠다는 소리는 절대 입밖에 내지 말라.\" 얼마나 그런 얘기를 많이 했겠습니까? 이 후손들은 자기 조상들이 결정적으로 실수했던 그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 하는 생각으로서 되돌아간다 소리하지 않고 참 어렵지만, 배가 고프지만 저 가나안 열매를 사 먹어가면서 그저 여리고가 앞에 있지만 그저 겁도 나지만 되돌아간다는 소리는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네 백성을 이끌고 이제는 저 자급자족뿐만 아니라 넘쳐서 다른 지역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저 가나안 복지에로 향하여 너희는 이제 출발할지어다.\"라고 해서 막 출발을하려고 하는데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첩첩태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현장에까지 가려니까 복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려고 하니까 그저 태산이 자꾸만 막는다 그겁니다. 여리고 성벽에 탁 틀어막습니다. 그 큰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이야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은 도무지 할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호수아가 안 갈 수도 없어서 \"예. 가겠나이다.\" 하고서 머리는 앞으로 나가는데 엉덩이는 자꾸 안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저 강 건너 도로 넘어가 가지고서 하루 세 끼 보장되어 있는 그 광야에로 갔으면 싶은 생각도 있고 너무 앞이 두렵고 겁이 나니까 \"길갈 했지만 내 모양이 이 모양인가? 길갈 땅에 씨를 뿌렸지만 이것의 소출은 겨우 이것뿐인가? 우리 가족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여행도 가지도 못하고 자식들 공부도 시키지 못하겠네. 병원에 가도 입원비도 없네.\" 이런 형편이 되었는데 \"아 저 동네 하나님이 주신 땅은 분명히 있기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꿈과 같구나. 여기에 있는 여리고를 무슨 재주로 무너뜨린단 말인가.\" 하고서 겁이 나고 두려운데 여호수아가 그 백성을 이끌고 \"가자.\"라고 하니까 백성들이 \"못갑니다.\" 소리는 입에 담지 못해. 또 옛날처럼 될까바. \"예.\" 하지만 걸음이 잘 나가지를 않아요. 그래 여호수아가 그저 겁이 나서 성을 한 번 더 쳐다보려고 고개를 치켜드는데 아이구머니나 건장한 사람이 칼을 뽑아들고 착 섰다 그겁니다. \"아이구머니나. 누구요?\" 얼마나 순간적으로 급했던지 \"넌 누구를 위하느냐? 우리를 위하여 왔느냐, 아니면 우리 대적을 위하여 왔느냐?\" 여호수아가 얼마나 그 순간에 겁이 났던지. 두려움이 가득 찼는데 군대장관이 칼을 뽑아들고 섰으니 보통 겁난 것이 아닙니다. \"누구요? 우리를 위하여 왔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여 왔느냐?\" 이 심각한 순간에 놀라 가지고서 이런 질문을 하는데 여호수아의 마음에는 여기에 지금 앞에 버티고 선 이 장관이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서 자기들을 도우러 온 장관인 것으로 더 생각했겠습니까, 아니면 잔뜩 이나 어려운 일이 계속되는데 이놈의 이 건장한 골리앗 같은 놈이 또 나타났으니 이것 우리 대적의 진중에서 왔구나 대적을 위하여 왔구나 이런 생각으로 그들에게 더 해를 줄 군대장관으로 여겼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한 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이 순간에, 이 놀라운 순간에 군대장관이 탁 버티고 서서 칼을 이렇게 뽑아들었는데 그때 여호수아와 그 백성의 생각에 자기편 되려고 하나님이 보낸 군대장관으로 여겼겠습니까? 그렇다고 생각되시면 아멘 합시다. 그러면 반대로 이 어려운 중에 더욱 어렵게 하려고 우리를 해롭게 하는 저 대적의 입장을 옹호해 주는, 대적을 위하여 우리를 쳐죽이려고 온 참으로 자기들에게 어려움을 주려고 온 군대장관인 줄로 알았을 것이다 라고 인정되시면 아멘 합시다. 대단하십니다. 정답이네요. 여러분은 저와 함께 아까 본문을 한 번 읽고 말았습니다마는 한 번 읽고서 그렇게 대답하시다니 참 존경스럽습니다. 역시 축복을 받아서 어려움을 이기고 현장까지 갈 수 있는 아주 대단한 성도들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위해서 많은 시간 기도하고 많은 시간 성경을 읽고서 우리 성도님들께서 아멘 하신 그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왜 이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보낸 자기들을 위한 군대장관이 아니라 반대측에서 온 자기들을 해하려고 한 군대장관으로 이 순간에 알았느냐 라는 것을 한 번 헤아릴 수 있는데 13절 볼까요.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아니라\' 다음에 얘기는 뭡니까?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심으로 왔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저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하면 될텐데 \'아니라\'는 말은 왜 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어떻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니라\'고 이 천사가 말했겠습니까? 여호수아의 생각은 뭡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보지 않고 사단의 군대장관으로 보고 있었다 그겁니다. 발발 떨면서 이제 죽었거니 하고 있으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무서운 너희를 공격하려고 온 그런 자가 아니라. 나는 오히려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라고 보내준 군대장관으로서 왔느니라.\"고 대답했으니 이 \'아니라\'를 보면 여호수아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당신 누구요? 우리를 위합니까, 아니면 우리의 대적을 위합니까?\" 할 때 실제로 여호수아 마음속에는, 그 백성의 마음속에는 더 누군줄 알았습니까? 대적을 위하는 군대장관인 줄 알았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사인, 하나님의 군대장관인 이 사람이 말하기를 \"아니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군대장관이 아니야. 이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주셨으므로 너희를 위하여 지금부터 출발하게 될 것이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아멘. 오늘 여러분 앞에 주의 종으로서 이제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서 여러분 앞에 다가서는 하나님의 천사가 여러분의 현장에 임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다행한 순간이었겠습니까. 졸병이 하나 왔으면, 하나 뿐입니다. 그렇지만 군대장관이 하나 왔다면 하나가 아니지요. 군대 장관에게는 소대장이면 소대원이 따르고 중대장이면 중대원이 따르고 대대장이면 대대장, 사단장이면 사단장, 적어도 군대장관이라고 하니까 대단한 수의 능력있는 천사들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지도하고 명령하는 군대장관이 왔으니 이것 졸병 하나 온 것하고 다릅니다. 군대장관 한 사람 섰지만 이 한 사람 힘이 아닙니다. 굉장한 힘으로써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적을 위한 군대장관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보낸 저와 여러분을 위한 군대장관으로 왔다 하셨다 그겁니다. 그러니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아 이 군대장관과 함께면 이 능력들과 함께면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까지 보호받으면 가겠도다.\" 하면서 출발하여 가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여리고는 무너뜨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겁니다. 여리고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겁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벽에 돌멩이 하나라도 뽑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벽에 곡괭이 들고 가서 그 구멍 하나 내었습니까? 전혀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성벽이 그렇게 무너질 성벽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역사 했다고 믿으십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과 그의 소속한 하나님의 능력이 일일이 힘을 가해서 무너뜨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눈으로 안 보였을지라도 저들 앞에 나타났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그와 함께 한 모든 능력으로써 여리고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또 다음 상황을 보면 기억할 수 있는데, 이같이 축복 받은 백성이 나아가는 길 앞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막아서고 있는 여리고가 여러분 앞에 있다 할지라도 여리고를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보내신 군대장관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면 길갈촌에서 모자라는 양식 붙들고 외부에서 사다가 구걸해서 먹을 생각하지 마시고, 길갈에 진치고 영원히 살 생각하지 마시고, 길갈에 들렸으면 거기에서 지난 날의 수치를 굴러 보내버리고 자유 얻은 사람, 축복 받은 사람이 되어 여리고가 있지만, 아이성이 있지만 그것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의 군대장관 만났거든 그냥 출발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여러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천사가 역사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생활형편이 지금 길갈입니까? 여러분의 가진 능력으로서는 만족이 없으십니까? 빌려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오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일지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성령으로 주의 종에게 붙들리게 하시고 그리고 주의 종을 감동시켜서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 계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이천년을 맞아 들어온 우리들에게 지난 날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고 길갈촌에 당장 어려운 이 연초의 이 어려운 생활에 그냥 있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넘쳐서 내가 쓰고도 남에게 줄 수 있는 현장으로 이끌려는 하나님의 뜻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군대장관을 우리에게 파송해 주시려고 이 말씀을 주셨으니, 오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의 부족한 길갈촌에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리고와 같은 큰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여러분은 두려워만 하고 있지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에게 파송되어 여러분의 길을 그들이 헤쳐가면서 인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더 나은 이천년을 위하여 목사 된 것을 그나마 모처럼 만에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주께서 당신의 종을 들어서 주가 말씀하시고, 당신의 종의 두 손을 들게 하사 하나님이 스스로 친히 팔 드심처럼 하여 그 우수와 좌수에 복이 흘러내리게 해서 부귀와 장수가 그 손아래에, 손이 미치는 그 방향의 거룩한 지경 안에 있는 자에게 복이 임하게 하시는 주께서, 오늘 주께서는 종의 입술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서 이제 너를 위하여 네 앞에 왔느니리라.\"는 말씀을 전하게 한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으로 듣게 한 줄을 믿습니다. 이 말씀과 함께 영적으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의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여리고 앞에서 동행을 시작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앞장을 서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종을 세운 것을 믿고 저는 성령으로 확신을 얻고 오늘 목사의 직위를 여러분을 위해서 사용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바로 여리고 앞에 여호수아의 현장이 오늘 이 현장이 된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종의 기도를 주께서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은 민수기 14장에 잘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 했을 때 \"전염병을 내려서 이 바란에서 모두 몰살하게 하겠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적에 하나님의 종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말씀드리기를 \"이 현장에서 몰살시키시면 하나님의 공의는 이루어집니다마는 사람들이 오해하여 하나님이 기운이 없어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을 다 죽였다고 하지 않겠나이까. 그러하오니 한꺼번에 몰살을 전염병으로 시키지 마옵시고 이들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광야에로 보내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커녕 이 광야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시옵고 스스로 죽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다 죽고 난 다음에 그 후손들이나 나오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너는 참음이 강하고 참으로 인내가 크도다. 내 마음에 합한 자로다. 내가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즉시 죽이지 아니하고 광야 사십년동안 돌게 할 때에 한끼도 주리지 않게 만나를 내리시고 하루도 목마르지 않게 반석에서라도 물을 뽑아서, 반석 반석하니까 물 나오는 반석이니까 오죽 좋았겠나 싶지만 아닙니다. 물이 오죽 없었으면 바위를 두들겨 가지고 물을 뽑았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모세의 기도를 따라 들어주셨으니 모세의 하나님께서 오늘날 저희의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그의 종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주의 종이 간절한 마음으로 종의 신분으로서 여러분의 담임 목사된 자격으로서, 참으로 여러분의 현재의 위치가 지난 날의 수치는 지나갔다손 치지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넘쳐서 먹고 쓰고 남아서 남의 동네까지 내어보내어야 될 그런 형편에 가지 못하고 길갈촌처럼 다른 데서 보탬을 받지 아니하면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직장과 사업과 건강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래서 복이 넘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하나님이 주셨기로 그리로 해서 가보려고 하니 여리고가 단단히 틀어막고 있어서 여러분의 사업이면 사업, 진학이면 진학, 진급이면 진급, 결혼이면 결혼, 빚진것이면 빚진 것,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니까 더욱 더 첩첩태산으로 막고 서 있다면 이런 형편에 있는 여러분에게 주의 종으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 여러분 결코 떠나온 곳, 저 사막으로 광야에로 들어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애굽에로 되돌아가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복 주셨거든 그 말씀을 어깨에 올려놓으십시오. 그 축복의 현장이 아무리 멀고 앞에 가로막힌 것이 있더라도, 오늘 이 시간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 앞에 구하여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여러분의 가는 길 막고 저항하는 모든 악한 조건들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파송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구합니다. 이 기도를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어떠한 군대 장관이 여러분 앞에 나타나셔야 되겠는가? 이제 구체적으로 축복을 하려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자녀들을 가능한 한 데리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오늘 많은 어린이들이 왔습니다. 대성전 안에 들릴 수가 없어서 지금 안디옥성전 에베소성전으로 쫓겨가서 지금 거기에 있는데 이 현장이나 그 현장이나 우리 한 예배의 지경이 된 줄로 믿습니다. 다 같이 거룩한 곳이 된 줄로 믿습니다. 어른은 또 어른이지만 특히 자녀들을 위하여 축복하고자 하는데, 마태복음18장 10절에 보면 \"어린 모든 자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어서 죽을 때까지 따라 다니는 죽은 이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그의 천사가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신데 \"너희가 어른이라고 하여 어린아이를 업신여기지 말라. 함부로 때리거나 함부로 말하지 말라. 아이 취급을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저의 천사가, 저희에게 딸려져 있고 딴 데가지 않고 아이만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천사가 매일 그 아이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피해와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의 사건을 하나님 앞에 매일 아뢰고 있으니 아이라고 해서 함부로 하지 말라.\" 누구 때문에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겁니까? 저의 천사가 있다 그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고 저 안디옥성전과 에베소성전에 있는 우리 성도들의 자녀 되신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이천년을 맞아 이제 이후를 살아가는 동안에 어린이들로서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언제 무슨 사고를 당할지 언제 전쟁을 당할지 언제 어려움을 당할지 언제 나쁜 사람을 만나서 잘못된 곳에 빠지게 될지 알 수 없는 이 지경에서, 오늘 주의 종 목사로서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주신 자녀들은 우리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교회를 지켜야 될 큰 기둥들이 될 것이기에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어린이들을 위하여 선한 천사를 이 시간 파송하여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는 길을 지켜주고 사고날 일을 면케해 주고 떨어지면 붙들어 주고 위기가 올 때에 누구를 시키시더라도 막아줄 수 있는 여호와의 거룩하고 순종하는 위하는 천사가, 성도님들의 자녀들의 현장과 그 가는 곳에 여러분의 자녀들의 천사로 파송되기를 또 파송해 주시기를 다시 한 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린 아이 때만 천사가 왔다가 그저 이십세가 되면 떠나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5절에 보면, 그 앞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 갇혀 있는데 돌로 된 옥에 갇혔으니 튼튼한 옥에 갇혔으니 나는 빠져나가기 틀렸다 하고 베드로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저 방에서 두려워서 벌벌 떨고 우리도 잡혀가지 않나 하고 숨어 있는데 베드로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요. 자고 있을 때가 아니요. 일어나라. 일어나라.\" \"누구시오? 누구시오?\" 하는데 그냥 착고가 출출 풀립니다. 그냥 풀립니까? 다 풀었지요. 아주 천사 그때 온 천사는 수갑을 잘 푸는 열쇠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철문도 척 열리고 그냥 민다고 했으면 휘었겠지만 그냥 탁 열리니 열어줍니다. 여러분 그런 천사가 있음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와서 착 풀립니다. \"빨리 나가라. 빨리 나가라. 조금 더 있으면 안 돼. 이 간수가 있으면 못 나가. 빨리 나가라. 빨리 나가라.\" 해서 뛰어나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을 사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을 사람들 방으로 찾아가서 밤중에 아직 어두운데 문을 두드리니까 어른들은 겁이 나서 나오지 않고 로데라고 하는 계집아이가 나가서 \"누구십니까?\" \"나 베드로.\" \"어, 베드로님!\" 쳐다보니까 베드로가 서 계신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냥 반가우면 얼른 문을 열어드려야 될텐데, 천사가 옥문은 열어주었지만 이 집 대문은 로데가 열어주어야 될텐데 얼마나 너무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너무 흥분해 가지고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려고 그만 방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그겁니다. 그래 바깥에서 계속 두드리는데 방에 들어가서 이 아이가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 뭐냐 하면 \"여러분, 베드로 사도께서 오셨어요. 베드로 사도께서.\" \"무슨 소리? 지금 감옥에 있는데. 나와도 지금 재판을 받아야 나오고 내일 나오지 이 밤중에 어디로 온단 말인가?\" \"아닙니다. 내가 베드로의 음성을 들었어요. 베드로님을 내가 보았어요. 베드로 맞았습니다. 체구도 맞고 키도 그렇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 아이가 미쳤구나.\"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하고서 정말 진실이라고 하니까 그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아이의 적극적인 주장을 보고서 \"참말은 참말이구나. 거짓말은 아니구나. 야야 지금 나가봐. 없을 것이야.\" \"아니 온 게 사실입니다.\" \"그래 알았어. 왔지. 왔지만 베드로의 천사가 온 거야.\" 그랬습니다. \"그의 천사가 온 거야.\" 그랬어요. 그 당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를 돕는 천사가 파송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천사가 감옥에 있는 베드로를 대신해서 그 천사가 빠져 나와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 다른 사람들은 꿈인 줄 알고 만나는 때가 많습니다. 환상인줄 알고 만나는 때가 많습니다. 만날 때에 천사가 천사 모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음성으로 한다 그겁니다. 주인의 모습으로 온다 그겁니다. 그래서 그 방안에 있는 신앙하는 사람들은 그때 당시에 천사 역할을 알기 때문에 \"아이고 그러면 베드로가 온 게 아니라 로데야, 베드로의 천사가 왔어. 베드로의 목소리와 같더라고? 베드로의 키와 같더라고? 그러면 베드로 천사야.\" 그랬다 그겁니다. 아까 소개한 사도행전 12장 15절 그 앞뒤에 있는 얘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온 천사는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우리가 기도할 때 바로 기도를 하늘에 올리고 우리가 어려울 때에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가 사고날 지경에 깨닫게 해 주고 뭔가 느낌이 오게 해 준다 그겁니다. 이런 역할을 한다 그겁니다. 그의 천사가. 이 천사는 베드로처럼, 물론 여기에 천사가 왔겠지 라고 했지만 실제 온 것은 천사가 온 것이 아니라 누가 왔습니까? 베드로가 직접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알고 있는 지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께서도 친히 하신 말씀, 어린 아이 적부터 그의 천사는 계속해서 그와 함께 있어서 그 길을 인도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혹 여러분께서 살아있는 가족이나 혹 죽어 세상을 떠난 분들의 모습을 하도 그 음성을 하고 꿈에라도 나타나면 어떤 사람은 꿈에 나타나면 그 뒷날 일이 잘 되는 주인공이 있고, 참 평소에는 좋았는데 저 사람만 꿈에 나타나고 나면 다음날 싸움질이 나고 다음날 사고가 나고 핸드백을 잊어버리고 하여간에 별로 좋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다 그겁니다. 그런 분들이 생각하기를 \"아이고 그 사람이 왔구나. 돌아다니다가 왔구나.\" 이렇게도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마는 그래 왔는지 저래 왔는지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의 천사가 그의 모습을 하고 오는 경우를 지금 말씀드린다 그겁니다. 그러면 그의 천사가 왔는데 그의 모습을 하고 왔는데 만나고 나니 잘 될 때가 있다 그겁니다. 절로 절로 좋은 사람 만나고 길을 갔는데 복된 길만 가게 되고 어떤 사람은 만나고 나니까 그냥 그 사람만 만나면 잘 안 된다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살아 생전에나 여러분이 이 사후에라도 여러분을 따르던 천사가 여러분들의 후손의 꿈에 나타나게 될 때에 도와주는 천사로서 나타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된 길을 열어주는 여호와의 천사로서 여러분의 이웃과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천사를 여러분이 동역을 할지언정 마귀가 보낸 망하게 하는 천사, 아무리 살아생전에 좋아하고 아무리 좋아졌지만 그가 남기고 가는 천사를 악한 천사를 남기고 갔다면 그의 모습과 그의 음성을 하고 나타나는 그는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나는 이 군대장관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천년에 들어선 우리 교회, 우리 교회 앞에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복지의 현장이 있습니다. 큰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이같은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셨는데 이 현장을 가려고 하니 지금의 형편은 길갈입니다. 길갈에서 우리의 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하여 쳐다보니 또 뭡니까? 여리고가 큰 벽으로 막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 교회 앞에 누가 나타나 주어야 되겠는가? 대적을 위하는 천사가 나타나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우리 교회 앞에 이 시간 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구합니다. 주여,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 앞에 서게 되면 우리 교회의 길은 여리고가 여리고가 아닙니다. 우리가 손대지 않아도 무너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깨에 올리고 우리의 상식을 어깨로부터 끄집어 내린다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우리 어깨에 올려져 있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려고 보냄을 받은 군대장관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사업이 현재 길갈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 남의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 되지 않게 하시고 남의 위가 될지언정 아래 되지 않게 하시며 남에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게 되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이것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입니다. 온 가족이 먹고도 남아서 저 길갈에까지 팔 수 있는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업의 현장, 이런 자녀의 현장, 이런 여러분의 장래의 현장의 가는 길에 아직도 길갈촌의 부족이 있으십니까? 여리고같은 어려운 장벽이 다른 사업으로 하여 막고 있습니까? 법으로 하여 막고 있습니까? 여리고 성은 얼마나 튼튼했던지 법을 고치기가 쉬웠지 성을 무너뜨리기는 어려웠습니다마는, 법보다 더 강했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의 나아가는 길, 하나님께서 주신 그 넘치는 복된 현장,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모든 면에 그 복의 현장으로 가는 길에 여리고가 있다 하더라도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 앞에 이 시간 \"나는 너희를 위하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군대장관으로서 이제 왔느니라.\" 하는 이 말씀과 함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러분의 사업 앞에 서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 앞에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결혼하고자 하는 문제 앞에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진학하고자 하는 일 앞에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진급하고자 하는 그 현장에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진급의 복을 받았습니까? 진학의 복을 받았습니까?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겠다는 복을 받았습니까? 사업의 성공을 받았습니까? 가정의 평안하게 될 복을 받았습니까? 넘치는 복을 남에게 꾸어주게 되는, 높아져서 명성이 높아지는 그런 복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복판쯤 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복판은 아직 안 이뤄있습니까? 물론 아닐 줄 믿습니다. 그곳을 향하여 가는 이천년 초에 우리는 모두 서 있습니다. 지금 형편은 길갈촌 같아서 부족합니다. 여리고가 우리를 틀어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대적을 위하는 군대장관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오늘 여러분 앞에 모든 현장 앞에 가는 길 앞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축원을 오늘 계속해서 드리는 주의 종 목사는 참으로 오늘 성도님들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받은바 큰 사랑을 위하여 오늘 좀 갚아드리는구나 위로를 받습니다. 주께서 역사 하실 줄을 믿습니다. 에덴 동산에 아담 하와에게 대적을 위하는 뱀이 먼저 나타나지 아니하고 아담과 하와를 위하는 여호와께서 보낸 군대장관이 뱀보다 먼저만 나타났더라면, 그 뱀이 유혹할 때에도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옆에 있어서 \"아니야, 아니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야. 사단아 물러가라.\" 악한 영을 거룩한 힘이 있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와서 물리쳐만 주었다면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없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인간의, 인간 중에 대단한 인간 아담이라 할지라도 그들 가는 길에 누가 먼저 오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대적을 위하는 군대장관보다 먼저 온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때에도 헤롯이 보낸 칼보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먼저 왔기 때문에 예수님도 안전하고 요셉 마리아도 저 애굽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 만약에 하나님의 보낸 천사보다도 헤롯의 칼꾼이 먼저 그들 앞에 섰더라면 당하지 않고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난 해까지 여러분이 대적을 위하는 악신의 인도를 받았다면, 악신의 유혹을 받는 일이 있었다면 지난 날의 수치를 이 해에 들어서면서 굴러가게 해 주신 하나님, 이제는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이 인쳐 주신 줄을 믿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을 향하여 목적하신 현장까지 이르게 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오늘 보내어 주셨으니, 저 안디옥성전과 에베소성전에 있는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저의 천사로서 하나님의 천사가 먼저 자리잡고 저들의 손을 먼저 잡아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의 사업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에 나아가는 일에도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먼저 오시고, 그 전에 우리를 괴롭혔던 악신의 사자가 있었다면 주 예수 이름으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자리를 바꾸어 우리를 위하는 군대장관이 우리의 팔목을 잡아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잡으신 그 팔목을 놓치지 마시고 약속의 현장까지 우리를 도착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강한 군사가 되라!/ 삿7:2-8/ 2008-01-13
강한 군사가 되라! 삿7:2-8 유난히 힘이 센 장사 개미가 있었습니다. 다른 개미들은 쌀 한 톨을 겨우 드는데 이 개미는 두 톨씩도 거뜬히 들었습니다. 많은 개미들이 이 힘 센 개미를 우러러보았습니다. 기고만장해진 개미는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힘 센 장사 개미는 사람들이 많은 시장으로 찾아가서 힘 자랑을 하였습니다. 쌀 두 톨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집어던지기도 하며 괴력을 발휘하였지만 어느 누구 하나 개미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철없는 어린아이의 발에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 지식의 힘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권세가 있는 사람은 그 권세의 힘을 과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진 힘이란 겨우 쌀 두 톨을 드는 힘밖에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개미처럼 무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어디 있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나가 보십시오. 하늘과 온 땅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곳에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영을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결코 나 자신의 이성과 판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온 마음을 열어서 임하시는 성령님을 환영하십시오. 한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강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기적을 이루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끝없이 한탄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놀라운 사실입니다. 세계 역사에서 인간 속에 가장 큰 가치를 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이분을 믿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승리하는 삶의 중요한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하는 삶의 경험들을 해 보십시오. 이 경험이 있는 사람은 평안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를 붙잡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오. 종교를 붙든 사람은 언제나 시대에 뒤져서 자신의 삶에 오히려 암흑을 드리우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붙든 사람은 시대 속에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권세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골 골짜기를 걸어갈지라도 기쁨과 감사와 찬송을 하면서 밝은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든 사람은 어디를 갖다놓아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삶의 자리를 아름답게 만들어갑니다. 자신이 선 그곳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한 발자취를 남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지배와 능력을 받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매력과 기쁨과 감격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흑암의 권세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의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영적 위기를 당하지 않도록 때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시간마다 때마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여러 땅들을 점령하면서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전심으로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2장 10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에 예기치 못한 아주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보십시오. 세대가 교체되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그러니까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세대에 일어난 문제는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앎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에 보면,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엘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를 몰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여호와를 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엘리 아들들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현대인들의 신앙 모습에서 이런 양태를 우리는 너무 쉽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색채가 과학으로 가려진 오늘날에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신앙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신이 없습니다. 복음의 재생산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은 선데이 크리스찬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끊임없이 불평과 불만을 쏟아냅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고, 인정이 많은 사람인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영적 상태가 위기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영적 위기에 빠져있다는 사실은 나 자신 만의 위기가 아니라 이것은 내 가정의 위기요, 내 교회와 이 사회의 위기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다에는 등대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 등대가 밤에 불을 밝히지 못한다면 등대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등대의 임무는 바다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아무리 커다란 유조선이라 하더라도 이 등대가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제아무리 높은 사람이 탔다고 하더라도 이 등대가 없이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등대는 매우 중요하며 꼭 필요한 것이기에 등대의 역할은 대단합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매 한가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된 우리가 빛의 삶을 살지 못하면 세상은 온통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질서 없이 죄악 가운데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인 우리들은 아무리 캄캄한 밤에서도 멀리까지 빛을 비출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 여정에서 풍랑을 만나 갈 길을 알지 못하고 어두운 밤길을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길라잡이가 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 가운데는 꼭 필요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꼭 없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모름지기 우리는 어느 때에나, 어느 장소에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그저 내가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우리교회 교인이었다는 그 사실에 만족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 사용되어져야만 합니다. 모세의 손에 들리워진 지팡이처럼 하나님의 손에 들리워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병든 곳에는 치유의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불의한 곳에는 정의의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 한 토막도 자를 수 없는 무딘 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날이 무디어서 이제는 쇳덩어리로만 쓰이는, 그래서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모든 것을 자르는 날카로운 칼날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무딘 연장이 아니라 칼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멸하는 갈멜산에서의 승리,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골리앗을 물리치는 다윗의 승리와 함께 가장 통쾌한 승리를 기록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를 통해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미디안 군대는 13만 명이었고, 기드온이 모은 이스라엘 병사들은 3만 2천 명이었습니다. 비율로 보면 5대1의 싸움입니다. 만약에 이 싸움에서 이기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이후를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3만2천 명 모두가 다 싸움에 나서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3절에 보면 먼저 두려워 떠는 자들을 돌려보냅니다. 그랬더니 3만2천 명 중에서 2만2천 명이 돌아가 버립니다. 이제 1만 명이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만 명도 많다고 하시면서 다시 시험하십니다. 물을 마시게 한 후에 고개를 숙여 입으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사람만으로 군대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결국 3백 명만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군사의 수를 줄이신 이유는 만약에 3만2천 명이 나가서 싸워 이기면 \"내가 목숨 걸고 용감히 싸워서 이겼다\"면서 교만해질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300명으로 13만 군사를 이기면 그것은 물으나마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긴 것입니다. 교만해지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무딘 연장이 아니라 칼날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그곳에 내가 있었다는 존재자로서가 아니라 그때 내가 그곳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는 사명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존재자로서가 아니라 사명자로서 역사 속에서 쓰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로부터 아름답게 쓰임 받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두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어느 책에 \'지난 20세기에서 가장 어이없는 사건들\'을 소개했습니다. 내용인 즉, 1993년 마이크 스튜어트라는 사람은 높이가 낮은 터널과 육교가 매우 위험하다는 홍보 영화를 촬영하던 중 자신이 탄 트럭이 낮은 육교 밑을 지나는 것을 모르고 계속 촬영을 하다가 육교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1977년 뉴욕에서 한 남자가 차에 치였으나 별 부상을 입지 않아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목격자가 다친 척하고 차 앞에 쓰러져 있다가 나중에 보험금을 타라고 귀뜀을 해 주었습니다. 그 말에 그는 차 앞에 다시 엎드렸는데 바로 그 순간 차가 다시 출발해서 즉사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 자신의 자기를 지키지 못하면 이런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에서도 하나님 자리에 나 자신을 두려고 하면 이런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보십시오. 기드온은 3만2천 명이나 되는 장정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모이자 기드온이 교만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마음 상태로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드온과 백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하나님 앞에서 오만해질 가능성을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전쟁에서 한 번 거둔 성리가 이스라엘을 영원히 망하게 하는 길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미리 보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3백 명은 너무 적은 인원입니다. 메뚜기 떼처럼 많은 미디안 군대와 싸워서 이길 승산이 없는 수입니다. 아무도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상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다른 해결책이 없었던 상황에 처했던 사람은 신앙의 성숙을 위한 귀중한 재산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다는 것의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단 300명의 병력으로 전쟁에 나갔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싸움을 앞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길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바로 이 겸손을 요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때때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한없이 연약한 인간의 능력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한계, 나의 한계를 체험하는 그 자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의 삶에 바울의 가시와도 같은 아픔을 주십니까? 사도 바울은 그 대답을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그 당시에 전세계를 뒤흔들던 사람으로 복음을 들고 다니며 로마 세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가시가 없었다면 스스로를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교만해질 위험성을 보셨습니다. 결국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그의 몸에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 고통 없이 편안한 삶 가운데서 교만하게 살다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은 그 편안함이 오히려 그의 영혼에 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아름답게 쓰임 받는 도구가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딘 쇳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3만2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당당한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3백명의 군대가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여 승리하는 것이 더욱 값진 의미를 갖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리에 나 자신을 두고 싶어하는 자아망상은 가장 위험천만한 유혹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때때로 우리가 교만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도록 연약한 부분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아름답게 쓰임 받는 도구가 되려면 의미 없는 다수보다 준비된 소수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에 대한 것인데 예수님은 소수를 사랑하셨습니다. 소수라는 것은 나무의 뿌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곧 중심이 무엇이며 본질이 무엇인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만약에 진정 비본질적인 수에만 매달렸다면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참으로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을 분명히 신뢰해야겠다는 그의 의지였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향한 신뢰가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뢰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기드온이 데리고 나갈 3백 명을 조심스럽게 선택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준비된 소수의 일꾼을 쓰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심스럽게 준비된 사람을 가려냈습니다.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얼마만큼 준비되어 있느냐의 시험이었습니다. 물론 물을 마시고 있던 백성들은 자신들이 시험받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물을 마시며 시험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정신차리고 물을 마셨겠습니까? 아직 전쟁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나태한 태도를 취한다면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합니다. 평범한 삶 가운데서도 늘 주님 앞에 준비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장차 주께서 큰 일을 맡기실 때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성실성을 가진 자를 택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칼날은 한 번 갈아 놓는다고 계속해서 날카로운 연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쓰고 난 후 다음을 위하여 언제나 날을 세워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딘 연장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비상사태를 위해 평범한 상황에서 준비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가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강한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강한 군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도 되어야 하지만 이 시대에는 군사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두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리고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준비된 강한 군사가 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의미 없는 다수보다 준비된 소수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변인이 되지 말고 중심인이 되십시오. 소극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사명을 붙들고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한 평생을 살면서 제일 위대한 발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안 일입니다. 우리가 한 평생을 살면서 제일 후회 없이 한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한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인생여정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그때 내 인간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장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려야 할 때는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상급의 면류관이 없을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위에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향하여 중단 없이 사명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준비 없이는 그분의 뜻을 이루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계약의 전승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 제일 큰 일은 사람을 찾는 일입니다. 집안의 상속자를 그 부모가 준비하고 키우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의 상속자를 언제나 준비하시고, 은밀하게 키우시고, 지명하여 세우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고 하는 꿈을 꾸어야 됩니다. 꿈을 꾸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상속자다!\" 그리고 그 사명을 향하여 걸어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성공한 사람들의 배후에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사명이 있는 것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고난을 통해 어떻게 다시 일어나 승리했는지 꼭 증거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붙들어서 능력 있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을 붙들고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기적은 오늘도 일어납니다. 바른 믿음을 갖기만 한다면 기적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준비된 삶을 살아가십시다. 강한 군사만이 전쟁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강한 군사만이 개선 장군이 되어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와의 강한 군사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크게 쓰실 것입니다.
강한 군사가 되라/ 딤후2:1-13/ 2001-04-10
강한 군사가 되라 딤후2:1-13 할렐루야!! 봄의 중심이 되는 4월을 맞이하였습니다. 햇살이 더욱 따스해졌습니다. 오늘 4월 첫 주이자 사순절 셋째 주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성도들의 가정에 4월 한달 은혜와 풍성하신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본문: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군사로 칭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그리스도의 좋은 제자라는 말을 즐겨 쓰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밖히신 이후 기독교인은 제자에서 점점 전투적으로 변화하면서 십자가의 군사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셨고 이 사명을 감당하려할 때 사탄이 강력하게 도전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온갖 궤계를 다 동원하고 나아가서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보면 (3)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적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 강하고 담대한 군사로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의 소망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군사에 대한 기록들 골로새교회의 두 번째 사역자였던 빌레몬의 아들 아킵보에게 빌레몬서 1장 2절에서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라고 말하고 있고 또 빌립보서 2장 25절을 보면 골로새교회의 초대 사역자였던 에바브로디도를 향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는 군사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마귀를 멸하는 군사가 되어야 할 것이고,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군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를 통해 주의 종의 지도와 당ㅇ회의 지도를 받아 강한 군사로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고후10:3-4에 보면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4)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음은 우리를 바짝 긴장시키는 경고의 말씀이입니다. 우리의 적은 영적존재이며 견고한 진을 갖춘 강력한 군대적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기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좋은 군사의 조건 군사 중에는 좋은 군사가 있고, 좋지 않은 군사가 있습니다. 좋은 군사는 잘 훈련된 군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7절에 보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예를 보면 다윗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은 물맷돌의 대가였습니다. 다윗은 양을 돌볼 때에도 물맷돌을 사용했습니다. 평소에도 사자나 곰과 같은 짐승과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훈련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훈련된 능력을 가지고 골리앗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있는 힘을 다해서 평소의 실력대로 눈을 부릅뜨고 골리앗의 이마를 정조준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물맷돌을 날렸습니다. 그래서 한 방에 골리앗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시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고도 축복받고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제 좋은 군사가 되는 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은 군사 강한 군사는 좋은 무기로 잘 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근년에는 각국에서 군사현대화를 서두르는데 군비현대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왠만한 무기는 컴퓨터화 된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작년 서해 앞 바다에서 북한 해군과 우리 해군 사이에 교전이 있었는데 우리 해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나고 적은 상당한 손실을 입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대한 원인 분석을 성도들도 잘 알고 계시듯이 그것은 우리나라 함정은 최첨단 씨스템을 갗추고 있기 때문이며 적은 아직도 무기작동을 수동으로 조작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군사인 그리스찬도 좋은 무기로 잘 무장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군사는 모름지기 강력한 믿음의 전신갑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어떤 대적 앞에서도 반석같은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한 십자가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지 못할 때에는 축복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보다 적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적을 두려워하는 군사는 결코 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육간에 풍성한 복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충만한 이스라엘은 넘치는 요단강을 건너 하늘을 찌를 듯한 여리고를 화살 한 개 쏘지 아니하고 무혈로 점령하였고 젖과 꿀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갈렙은 좋은 군사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강력한 믿음입니다. 어느 상황에서든지 어떤 대적이 앞을 가로막든지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가르고 애굽의 군사를 멸절시키며 이스라엘을 해방시켰습니다. 여호수아는 넘치는 요단강을 건너 강한 성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85세의 갈렙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 선봉에 서서 가나안 정복에 앞장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도 십자가의 좋은 군사입니다. 골리앗이라는 강력한 적 앞에서 온 군사가 벌벌 떨고 있을 때 그는 목숨을 걸고 그에게 나아가 기적적으로 승리를 만들어 내었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합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좋은 군사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라고 말하면서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죽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보다 더 강하고 담대한 군사가 어디 있습니까?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생명을 바쳐 순교하면서 복음을 아시아와 유럽과 그 중심지인 로마까지 븍음을 확산 시켰습니다. 할렐루야!! 잘 훈련된 군사는 생명을 걸고 명령에 순종하고 생명을 바쳐 사명을 완수합니다. 결코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않습니다. 무책임한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2). 말씀의 검을 가져야 합니다. (엡6: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가장 강력한 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교육되어져야 세상을 이기고 사탄의 도전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되지 않은 성도는 허수아비와 같은 죽은 성도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무기없이 적 앞에 나가는 군사는 죽음 외에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4장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집요한 공격을 말씀으로 철저하게 막아내시고 있습니다. 좋은 무기로 무장된 군사는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적을 대항하여 싸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말씀하시사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잘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는 일과 성경을 연구하는 일과 나아가서 주의 사자를 통해 설교 듣는 것을 귀하에 여겨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늘 말씀 안에 살면서 승리와 축복이 넘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믿는 지혜롭고 능력 있고 성도가 되어 승리와 축복된 삶을 쟁취할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을 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구원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고전12: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靈)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믿고 구원의 은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는 강한 군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은 연약한 영적 상태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이란 것은 주님과 교회를 위해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생명을 걸고 대적들과 싸울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지게 됩니다. 고전12:4-10절에는 성령충만한 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으로 지혜,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영분별력, 각종 방언 말함, 방언통역의 능력 등을 부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하면 사람이 강력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온갖 능력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본래 학문 없는 범인이었지만, 성령충만을 받고 난 뒤에는 사도행전 2장의 설교에서 보듯이. 얼마나 논리 정연하고 강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입니다. 얼마전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베드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충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능력 충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위해 첫째로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중에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가 성령충만 하지 못하게 하려고 기도하는 것을 훼방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간계를 타파하고 뜨거운 기도생활을 계속해야 됩니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성령충만을 우선 해야 합니다. 4) 성공적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고넬료의 가족이 예배를 드리면서 성령충만을 받습니다. 은혜스런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은혜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배시간 30분전에 나와 찬송과 기도로 준비하고 은혜를 주실 줄로 믿고 정성스러운 예물을 준비하고 설교 말씀에 사모하는 영을 부어주시라고 간구하고 이 시간 찬송과 기도와 모든 과정을 통해 은혜를 부어주시라고 기도하고 사모하는 빈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거기에 성령이 충만함이 임하십니다. 축복이 넘칩니다. 하렐루야!! 예배를 성공시키는 것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은혜와 축복의 충만함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우리는 십자가의 좋은 군사여야 합니다. 나약하거나 비굴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승리를 확신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통의 은혜/ 히12:5-11/ 구세군사관학교새벽경건회설교/ 2008-11-06
고통의 은혜 히12:5-11 서론) 주의 집중) 거의 20년 전에 이 사관학교의 한 아이가 사관학교 앞 도로에서 달리는 차에 치어 처참하게 몸이 부수어져 수 주일을 의식불명의 상태로 생사를 오고 갔습니다. 다행히 의식불명에서 깨어났지만 이 아이의 몸뿐만이 아니라 뇌까지 심하게 다쳐서 기억을 상실하게 되었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대학생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이하의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당한 분은 그 당시 교감님으로 계셨던 존경하는 안양영문의 김필수 사관님입니다. 부모의 입장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아들을 바라볼 때 순간순간 아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인데요 문제 제기) 이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다 하나님나라 갈 때까지 기쁘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참 좋겠는데 우리의 인생에서 행복만이 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이 고통이라는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이 고통은 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인데 이 고통이라는 것이 우리를 눈물 나게 하는 것입니까?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우리의 허물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라든지 아니면 아무 이유가 없어 보이는 고통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고통을 주시든지 아니면 어떤 부분에서 사단의 역사를 허락하시던지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습니다. 욥기서1: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즉 욥의 소유를 다 네 손에 붙이노라 또 2:6절에도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욥은 그 많던 재산을 잃게 되고 육체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2:7절에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처럼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고통이라든지 사탄의 역사에 의한 고통이라든지 그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론)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고 고통을 허락하시는 걸까요. 핵심주제) 그것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6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떨 때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통을 주시는 걸 까요.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고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귀중히 여기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자녀가 잘 되길 바랄 것이고 하나님 당신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동행하길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꾸 죄의 본성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 떨어져 있으려고 합니다. 저의 고향은 경북 영천 대창이라는 곳인데 시골입니다. 옛날에 포도 농사를 조금 경작해 보았는데 포도나무에 가지를 자를 때가 있습니다. 다자를고 다음날 가면 가지는 시들어 죽어 있습니다. 왜 입니까?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말라 죽어 버린것이죠 어린 아이가 부모님이 없이 세상가운데서 살면 살수 있습니니까?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영혼도 서서히 말라죽을 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고 말씀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고 예배의 삶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는 것이 축복임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모르고 하나님과 자꾸 멀어 지려 하기 때문에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 중에 바울과 그의 동역자이였던 데마라는 사람의 차이를 볼 수 있는데 같은 사역자이였지만 바울은 감옥이라는 고통 속에서 육신은 갇혀 이었지만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았지만 그러나 데마는 감옥이라는 고통이 없었고 육신은 자유로웠지만 세상이 좋아 세상으로 빠지게 됩니다. 차라리 바울과 함께 감옥에 투옥이 되었다면 감옥이라는 고통가운데 있었더라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을 까요? 간증) 저는 20대 중반까지 거울을 통해 제 얼굴을 보고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잘 생길 수가 있을까? 이렇게 미남이 있을까? 이렇게 잘 생긴 얼굴은 그냥 나두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봐야 된다는 생각으로 서울의 시내라는 시내는 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제 잘생긴 얼굴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때 거의 초신자 이였었는데 교회는 나가지 않고 세상 가운데 있었는데 그런데 저에게 고난이 오기 시작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가운데 머리가 확연하게 들어날 정도로 머리가 없어졌는데 참 절망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 고난 가운데 감사 할 것은 이제는 외모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하나님께 더 집중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에베소서 4: 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진리의 하나님이신 하나님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도록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고통의 징계를 주십니다. 여러분 지금 아무도 모르는 어떠한 고통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시고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임을 믿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 두 번째는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9절에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바로 이 복종을 겸손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겸손 바로 이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고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늘의 왕좌에서 내려 와서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그 존귀하신 분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이 겸손의 모습을 따르지 못하고 당파와 분쟁 시기 질투로 서로가 높아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겸손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12: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육체의 가시를 준 것이 자고하지 않게 즉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라는 고백을 합니다. 바울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위인들이 이 고통을 통해 겸손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 40년의 고통을 통해 겸손을 배웠고, 욥도 가족을 읽고 재산을 읽고 육신의 병마와 싸우면서 겸손을 배웠고 아브라함도 그 이방 땅에서 죽음의 공포 가운데 겸손을 배웠고 요셉도 웅덩이와 감옥의 고통 속에서 겸손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겸손케 하시는 것일까요? 잠언16:18절에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말씀합니다. 태초 아담이 넘어졌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교만 때문 이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사울 또한 높아 지려고한 교만 때문에 왕에서 내려오게 되고 비참함 최후를 맞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교만이요 그렇기에 고통을 통해서라도 그 사람을 겸손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모습입니까? 또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겸손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의 아름다운 모습인 줄 믿습니다. 고통이 있습니까? 고통을 통해 겸손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시는 자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11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의의 평강한 열매, 저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꿈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이룬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화)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바이올린은 저 3천미터 미국의 로키산맥 꼭대기에서 비바람과 추위와 눈비에 오랜 세월을 견딘 나무에서 탄생한다고 합니다. 예화) 작은 씨앗은 땅속의 답답함과 어두움과 태양의 뜨거움의 고통의 기간이 있어야만 큰 거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풍성한 열매도 맺고 많은 새들이 깃들어 쉴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자녀 또한 고통의 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십니다. 요셉은 형제들의 손에서 죽임을 당할 번하고 노예로 팔리우고 억울하게 어두운 감옥의 고통을 격고 나서야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셉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그의 형제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창세기 50:19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다시 말해 이 고통의 긴 시간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꿈과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의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총리가 될 수 없었고 이스라엘 민족의 씨가 되는 요셉의 많은 가족을 살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고통의 긴 시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꿈과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릴 위해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다면 인류 구원의 하나님의 위대한 꿈과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세월동안 선교사들의 고통의 피가 이 땅을 복음의 땅으로 만들었던 꿈과 목적이 있었듯이 전 세계의 선교사들의 고통의 피가 복음의 목적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꿈과 목적이 무엇이 있을까요? 혹시 그것을 잊고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고통의 시간 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그 하나님의 꿈 때문에 내가 희생해야 될 것이 너무 무거워 고통 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슬퍼하지 않길 바랍니다. 제 나이가 이제 37살인데 아직도 장가를 못 갔습니다. 29살 때부터 결혼을 위해 새벽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께 원망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만약에 제가 일찍 결혼을 했다면 하나님의 꿈을 위해 헌신하기가 힘들지 않았겠는가 생각합니다. 지금은 사역을 같이 할 좋은 여사관님을 만나게 해 주셔서 아름다운 사역을 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고통의 시간이 없었다면 만날 수 없었겠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7:3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세상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욕망과 쾌락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의 어떠한 고통이 있을 지라도 기뻐해야 될 줄 믿습니다.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너무 힘들 수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그 꿈을 위해 예수님의 복음의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참 기쁨을 누릴 줄 믿습니다. 결론) 지금 고통가운데 있는 분이 있으십니까? 한번 뒤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지 지금 고통가운데 있습니까? 한번 뒤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복종하고 겸손의 자세로 있는지 지금 고통가운데 있습니까? 한번 뒤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꿈을 혹시 잊 고 있지는 않은지 이 세상에는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을 단순한 괴로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겸손하게 바로 세우고 우리를 하나님의 꿈을 위한 일꾼으로 삼으심에 대한, 기쁨을 누리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골짜기에서 큰 군대가!/겔37:1-14
골짜기에서 큰 군대가!/겔37:1-14 2007-04-10 16:40:38 read : 125 지난주에 우리나라에 로봇가수가 탄생(?) 했습니다. 싸이버 가수는 있지만 로봇 가수는 처음입니다. 생김새는 .. 로봇같이(?) 생겼습니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데뷔는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로봇이 아무리 노래를 잘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계음’이란 것입니다. 기계음에는 ‘감정’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심금을 울리는 것은 정교한, 오차없는 그런 소리가 아닙니다. 훌륭한 가수는 음하나 틀리지 않고 부르는 그런 사람이아닙니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자신안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써 사람들을 울게 하기도 하며 또 웃게도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속에 담긴 ‘그 어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력입니다. 겉보기에 사람같다고 해서 그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젠가 파주에 갔었습니다. 그곳에 프로방스란 음식점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그 식당에서 경영하는, 조화를 모아놓은 가게가 있습니다. 얼마나 화려하고 예쁜지요! 그런데 그 꽃들은 다~ ‘죽은 꽃’입니다. 그 꽃은 시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꽃에는 꽃의 생명인 ‘향기’가 없습니다. 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꽃이 아닙니다. 문제는 ‘생명’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속에 존재하는 생명이 곧 그의 존재요, 또한 ‘존재케 하는 힘’입니다. 많은 이들이 살았으나 죽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어보입니다. 웃어야 할 때에 웃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한지요~) 얼굴은 늘상 무표정 입니다. 눈의 초점이 풀어졌습니다. 만사가 다 귀찮습니다. 역동성이 없습니다. 용기를 잃었습니다. 소망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살아있습니까?!’ 새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본문-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골짜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그 뼈의 수는 심히 많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셀 수 가 없을 만큼 많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죽임’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 뼈들은 이미 아주 깊이 메말라 있었습니다.(2) 죽은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물으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가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습니다. 그가 보기엔, 그 뼈들은 살아날 기미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 말의 뜻은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주님만이, 누구도 할 수 없는, 오직 전능자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만큼 거기엔 소생의 가능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속의 단어들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골짜기입니다. 골짜기는 봉우리가 아닙니다. 드러낼 수 없는 곳, 움푹 패인곳, 햇빛이 전해지지 않는 곳입니다. 어둠의 곳이요, 습한 곳이요, 침체의 곳입니다. 외면받는 곳입니다. 인생에도 봉우리가 있고 반대로 골짜기가 있습니다. 인생의 봉우리는 소위, 잘나갈 때를 가리킵니다. 신수가 훤하고 인정받고 성공의 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봉우리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러다가 반대로 골짜기를 만나면 낙심하고 슬퍼하며 숨어버립니다. 골짜기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 수북히 쌓인 마른뼈들이 있습니다. 죽은지가 이미 오래됨을 알려주는 것이 마른뼈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신이 땅에 뭍히고 세월이 지나면 남는 것이 바로 마른뼈입니다. ‘죽음이 오래된 그 상태’ 거기에서 어찌 생명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른뼈는 더 이상 생명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도 아닌, 절망 한참 뒤의 상태입니다. 또 그곳에는 소망도 없습니다. (11) ‘다 멸절된 상태’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는, 만족함이 아니라 절망의 끝지점입니다. 절망이 깊으면 소망을 가질 힘조차 없는것입니다. 바로 그 상태입니다. 또한, 무덤이라 했습니다. (12) 무덤은 죽음의 곳입니다. 무덤에 가보셨잖아요? 그곳엔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그저, 죽은자들을 덮은 흙더미만 있을 뿐입니다. 그곳에서는 누군가를 불러도 전혀! 대답이 없습니다. (만일, 대답이있다면?...)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는 이가 없는 것처럼’말입니다. 요동함도 없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일도 행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침묵만 흐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가신 곳은 깊고도 어두운 곳이요, 생명이 사라진지 오래된 곳이요, 아무 바랄 것이 없는 곳이요, 숨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답답함만이 존재하는 곳일 뿐입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말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들에게 외치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할 것이다”(5) “그리하면,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으로 덮여지며 (너희가) 살리라” (6) 선지자는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습니다. (7) 그러자, 뼈들이 들어맞고 또 서로 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뼈가 몇 개일까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뼈는 또 얼마나 될까요? ... 그러나 그 뼈들은 정확하게(!) 서로 임자를 찾아서 맞아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그 뼈에 이제는 힘줄이 생겨났습니다. 살리 덮어졌습니다. 형체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곧 생령이 된지라” 그렇습니다. 생기가 들어가야 비로소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외칩니다. “생기야, 이 사망을 당한자에게 불어서 살게하라”(9) 그러자, 그 형체를 갖춘 몸은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0) 그렇습니다. 이제 그 뼈는 더 이상 죽은 뼈가 아닙니다. 생명을 얻고 큰 군대를 이뤘습니다! 할렐루야! ‘큰 군대’라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전쟁용어’입니다. 골짜기를 벗어나서 봉우리로 치닫는(!) 존재입니다. 패배의 자리에서 일어나서 승리의 땅으로 오르는 존재입니다. 침체의 땅에서 솟아오르는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아무런 바램도 없었으나 이제는 승리에 대한 열마으 소망을 갖게되었습니다. 어두운 절망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임했습니다. 캄캄함이 걷혀지고 이제는 저 앞에, 저 위로 바라볼 곳이 생겼습니다.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덤같은 자였으나 이제는 침묵을 깨고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역동적인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할렐루야! 이 모든 변화는 바로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신은, 골짜기인생을 봉우리로 끌어올립니다. 마른뼈와 같은 건조한 삶에 생수를 부어 촉촉케 하십니다. 소망을 잃은 자들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무덤에서 건지십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건지신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건지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습니다.” (행1:8) 당신은 지금?... 인생의 골짜기에 있어서 자신을 더욱 숨기려 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가야할 곳, 저 봉우리를 잊고 있지는 않는지요? 한 번의 실패로 인하여 의기소침하여 포기하고 더 깊은 골짜기를 찾고 있지는 않는지요? 당신에게 성령의 임하심이 있기를! 마른뼈처럼 무미건조한, 메마른 신앙, 메마른 삶속에 빠져있지는 않는지요? 생기를 잃어버린채로 삐걱거리는 삶속에 있지는 않는지요. 당신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소망을 잃었습니까? 바랄 기운이 사라졌습니까?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다 사라졌습니까? 승리와 성공에 대한 꿈을 다 접었습니까? 체념과 절망의 마음이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당신에게 성령을 부으시기를 바라십니다. 무덤처럼, 불러도 대답을 잃었습니까? 하나님의 요구에도 그저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지않습니까? 주의 뜻에 움직여 본지가 언제인지요? 언제까지 죽은자처럼 아무일도 행치않는 당신은 아닙니까? 당신에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계셔서 무덤을 터뜨리고 생명에로 나오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골짜기에 하나님의 종, 말씀의 대언자를 두셨습니다. 그 대언자는 성령의 임재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엔 생명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큰 군대, 즉 봉우리와 생기와 소망과 생명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당신의 거할 곳은 골짜기가 아닙니다. 마른뼈 상태가 아닙니다.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이 아닙니다. 일어납시다. 성령의 임재를 구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앞에 순종합시다. 회복을 간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의 삶에 변화가 임할 것입니다. 아멘!
골짜기의 해골떼가 어떻게 산 군대를 이룰까?/ 겔37:1-10
골짜기의 해골떼가 어떻게 산 군대를 이룰까/겔37:1-10 2005-01-19 14:34:30 read : 214 해골떼가 산 군대를 이루는 환상을 보았습니까? 유다는 바벨론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불타고, 성벽은 훼파되었습니다. 나라를 이끌어 갈 만한 괜찮은 백성들은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의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골짜기의 해골떼와 같습니다. 철저한 파멸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생명의 기운도 찾을 수 없습니다. 큰 산불이 나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은 스스로 소생하는 능력으로 다시 생태계를 회복합니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수십 년이 지나면 작은 풀포기부터 시작해서 큰 나무로 다시 숲을 이룹니다. 해골떼는 어떻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해골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더 나빠집니다. 하나님이 선지자에 묻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뼈들이 다시 산다는 것은 유다 나라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의 진리로는 죽은 자가 다시 사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나라를 다시 세우고, 죽은 자가 다시 살 것을 네가 믿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선지자는 대답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골짜기의 해골떼가 산 군대를 이루는 환상을 보았습니까? 인생역전이라는 말도 기가 막힌 말입니다. 해골떼가 산 군대를 이룬다는 말은 더 기가 막힌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온 우주를 뒤흔드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있습니까? 골짜기의 해골떼와 같습니까? 현실의 심각함과 비참함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회복에 대한 믿음과 소망입니다. 해골떼 보다 무서운 것은 포기이고 절망입니다. 소망을 붙잡읍시다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사로의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기 원하면 돌을 치워야 합니다.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여덟번째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향해 소망의 문을 엽시다. 패배주의는 죽음입니다. 낙심과 절망은 죽음입니다. 소망이 큰 능력입니다. 믿음도 능력이고, 사랑도 능력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소망이 더욱 큰 능력입니다. 승리는 내일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 자의 것입니다. 성령이 들어가야 산 군대를 이룹니다. 마른 뼈들을 살리는데 두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뼈가 연결되고 힘줄과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입니다. 외적인 생명을 갖춥니다. 다음에 호흡과 생명이 들어가야 인격적인 생명이 됩니다. 생각도 하고 감정도 갖는 살아있는 인격체가 됩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인체의 신비”라는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인체를 특수 처리해서 전시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뼈와 힘줄과 가죽까지 다 드러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술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죽으면 시신을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다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립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푸주간의 고기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죽은 자와 산 자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호흡과 심장의 박동이 있으면 산 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 뼈가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덮입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또 내가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7-8절).” 말씀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은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뼈가 새로워지고, 힘줄이 새로워지고, 가죽까지 새롭게 됩니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특별히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왔다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시작과 끝입니다. 어두운데서 밝은 빛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됩니다. 평생을 살아도 내가 왜 사는지,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골짜기의 해골떼입니다. 복음 안에서 인생의 목적을 아는 산 군대가 됩시다.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거역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영벌의 상태인 지옥에 던져집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그치게 할 것입니까? 율법으로 안 됩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지만 율법은 그를 더욱 좌절하게 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지랴.” 선행으로 안 됩니다. 선행은 작은 등불은 되지만, 망망대해에서 안식의 항구까지 이끌지는 못합니다. 결국은 죽음입니다. 세상의 법이 얼마나 발달되었습니까? 인간의 죄를 말합니다. 죄짓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해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해골떼가 아닙니다. 산 군대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세상 끝 날까지 책임지신다고 합니다. 때로 징계는 받습니다. 사상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버리지는 않습니다. 강 가운데 지나든지 물 가운데 지나든지 불 가운데 지나든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짐은 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능히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복음이 있는 자는 해골떼가 아니라 산 군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관을 제공합니다. 성경은 가정의 기원과 원리를 말합니다. 성경은 국가의 기원과 목적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말합니다. 성경은 노동과 문화에 대해 말합니다. 국제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성경은 종말과 내세에 대해 말합니다. 복음을 받으면 뼈가 연합하고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새롭게 됩니다. 해골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산 군대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부족합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지만, 겉모양만이지 속에는 아직 생명이 없습니다. 마네킹과 사람은 다릅니다. 마네켕은 마네킹입니다. 모양만 사람이지 생명이 없습니다. 사람보다 더 잘 생긴 마네킹도 있지만 심장이 뛰지 않고 호흡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대언함으로 사람의 형상을 회복하였지만 아직 그 속에 생명은 없습니다.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어떻게 해야 산 군대가 됩니까? 생기가 들어가야 산 군대가 됩니다. 생기가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더라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9-10절).” 말씀으로는 부족합니다. 빛이 있으면 열기도 있어야 합니다. 외모를 갖추었으면 속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주의로 안 됩니다. 이성으로 안 됩니다. 경험주의로 안 됩니다.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해답은 생기입니다. 생기가 들어갈 때 비로소 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들 때 먼저 흙으로 육체를 만드셨습니다. 아직 산 사람이 아닙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을 때 비로소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생기입니다.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으로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 빛을 실제 있게한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말씀대로 창조하는 능력을 성령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할 때 온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부활케 하는 능력도 성령입니다. 죽은 지 삼일 되는 예수를 살린 것도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능력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아서 성령의 도구로 일했습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는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갖고 있을 때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맨손으로 사자의 입을 찢었습니다. 성문 문설주를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일 천명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서 나실인의 비밀을 토설하여 머리카락이 잘라진 후에는 아무 힘도 쓰지 못했습니다. 두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는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 성령의 능력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함께 한 영광과 성령이 떠난 비참함이 삼손의 인생의 빛과 그림자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 전까지 제자들은 문을 닿고 숨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잡혀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이 임해서 능력을 받은 다음에는 달라졌습니다. 담대히 나아가서 예수는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계집아이 앞에서도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가 유대인들 앞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3년 동안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으로 부족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을 받을 때 진정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는 것을 실천하고, 믿는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산 군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성령을 받습니까? 성령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믿습니다. 삼신은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독립된 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일신도 아닙니다. 단일신이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가면을 쓰고 때와 장소에 따라서 얼굴을 달리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분 하나님이지만, 능력과 영광과 영원하심이 같지만, 각 위는 인격적으로 고유하게 역사해서 창조와 구원을 이루십니다. 천지창조에도 성부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로 실행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역사도 삼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부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서 구원할 것을 계획하셨고, 성자는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셔서 구원의 근거를 마련했고, 성령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우리에게 십자가의 구원을 믿게 하십니다. 성령은 단독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주시는 성령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성령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속된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령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령이 아니고, 성자 예수님이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부를 알고 믿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자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성령을 받지만, 성령을 받은 자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성령을 소홀히 해서 안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습니까?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찬양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거룩한 모임에 성령이 임합니다. 술자리에는 술이 취하고, 잔치집에는 음식으로 취하지만, 성령을 구하는 성회에서는 성령이 충만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방문해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서도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에베소에서도 말씀을 전하고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성회에 임합니다. 성령받기를 사모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은 기도하여 구해야 충만히 받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영광의 보좌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임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고,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성령은 계속해서 임하십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더욱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구할 것은 성령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니라. 무엇을 구합니까? 가장 좋은 것,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 보다 귀한 축복입니다. 새벽기도회는 성령을 받는 시간입니다. 우리 영혼이 깨어나는 시간입니다. 독수리 같은 힘을 얻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금요일 심야기도회는 성령 대망의 시간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합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한 주간 살면서 마음에 눌리는 것도 많고, 가슴 아픈 일도 많고, 걱정도 많이 생기고, 어려운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침체되고, 사명을 잃습니다. 온갖 일들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납니다. 온갖 사단의 역사들의 영의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해골떼가 되었다 할지라도 기도의 제단에 엎드리면 산 군대가 되어서 일어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이제 그만 죽여주십시오” 하고 절망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일으키어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기도의 제단에 엎드려서 성령을 받읍시다. 산 군대가 되어 일어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개인과 가정은 성령 안에 새로운 삶을 체험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죄를 멀리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됩니다. 자아가 죽습니다. 새로운 자존감을 갖습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지혜를 받습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요셉같이 노예로 팔린 사람이 총리가 됩니다. 다니엘 같이 포로로 잡힌 사람이 총리가 됩니다.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직분 감당하고, 어느 곳에 가든지 다른 사람을 돕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됩니다. 산 군대가 됩니다. 날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워집니다. 저는 성령을 받고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교회는 79년 가을부터 나갔습니다. 이것도 귀한 은혜이다. 구원받았습니다. 병들어 학교를 쉬고 있었습니다. 파멸은 막았습니다. 그러나 뭔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부족했습니다. 성령을 받고 다 해결되었습니다. 80년 8월의 성령 체험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갈급함이 사라지고 일하고 싶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증거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살아납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교회가 있습니다. 육체로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인간의 줄만 붙잡습니다. 낡은 줄이 끊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형식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예배와 제도는 발달되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왜 이렇습니까?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든 처음에는 다 성령으로 시작했습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령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이 주인 노릇하고, 성령이 사라진 자리에 돈이 권력을 차지하고, 성령이 사라진 자리에 조직과 제도만 남는다면 안 됩니다. 성령은 교회를 살리는 영입니다. 은사를 나눠주시는 영입니다. 하늘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서 전도하고 선교하는 교회로 섬깁시다. 나라가 새로워집니다. 영국은 산업화의 심각한 부작용으로 사회 문제가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웨슬리를 비롯한 영적 부흥운동이 나라를 살렸습니다. 만약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지 모릅니다. 성령운동은 혁명 보다 좋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나 제도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나라의 진정한 변화가 올 수 없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죄를 이기는 나라가 됩니다. 청와대에서 국수를 먹었습니다. 부정부패를 청산하자고 얼마나 목소리 높였습니까? 자르기도 많이 잘랐고, 감옥에도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됩니다. 영적인 새 생명이 들어가야 합니다. 프로 야구선수와 연예인 병역 비리로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말이 안 됩니다. 무슨 운동선수가 병으로 인해 병역이 면제됩니까? 대중의 인기를 먹고 대중 속에서 살아야 하는 연예인이 부정하게 병역 면제를 받습니까? 성령이 아니면 돈과 인기와 명예 같은 우상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자꾸 문제가 됩니다. 좌파로 가서 성공한 나라가 없는데 좌파로 간다고 걱정입니다. 이념 보다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이념 때문에 6.25 전쟁도 하고, 지금까지 남북으로 갈라져 살았습니다. 아직도 모자랍니까? 날카로운 예리란 이념으로는 모든 사람의 삶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적만 만들 뿐입니다. 삶을 포용하는 것이 좋은 정치입니다. 그런 나라가 번영합니다. 이념과 사상을 넘고 다양한 사람의 삶을 포용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초대교회가 공산주의와 비슷한 삶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어려운 형제들을 위해서 집이나 재산을 팔아서 함께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누가, 무슨 힘으로 공동생활을 이끌었습니까? 법이나 이념으로 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골짜기의 해골떼의 비참함도 보고, 산 군대의 영광도 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성령을 받아서 산 군대를 이룹시다. 승천하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에 달려 있습니다. 오직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가난하고 못하는 제3세계의 선교지를 보면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의 불길이 활활 타오릅니다. 병든 자가 고침 받고, 가난한 자가 부유해집니다. 삶의 질이 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직 성령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 살게 되었다 해서 성령을 외면한다면 해골떼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인간이 교만하면 안 됩니다. 교만을 버리고 성령 앞에 복종합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새로운 삶이 임할 것입니다.
교회의 정예 군대/ 삿7:19-23
교회의 정예 군대 삿7:19-23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삿 7 : 22 상) 지난 6월에 우리는 전면전의 위기에 놓일 뻔했습니다. 북한의 소형 함정이 남방 한계선을 침범해 들어왔고 교전이 있었습니다. 아차하면 정말 전쟁이 일어날 순간이었습니다. 6.25를 경험했던 세대는 조마조마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입니다. 하기는 세계인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동해에서는 금강산 유람선이 오가고 있는데 서해에서는 총격전을 하고 있으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지요. 1950년 발발한 6. 25는 1127일간 계속되며 이 강산을 국제적인 화약시험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온 국민이 전쟁의 고통 가운데 빠졌으며 그 가운데서도 우리 교계의 피해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목회자가 남쪽에서 210명, 북쪽에서 310명 순교하였고 10만명이 넘는 성도가 북으로 납치되어 갔습니다. 남쪽의 705교회가 전파되고 267교회가 반파되었으며 북쪽에서는 1150교회가 전파되었습니다. 그 6. 25는 흘러간 악몽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언제 다시 피바다가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북쪽에는 아직도 동네마다 \\\\\\\'당이 명령하면 한다\\\\\\\' 라는 표어가 붙어 있고 주민 전체가 군인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시라도 전쟁에 임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남쪽에서는 햇빛정책 속에서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한국에 대하여 아직도 우려가 많습니다. 무분별한 사회학자가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있지만 위험천만한 생각입니다. 남북회담 때마다 북쪽에서 요구하는 것이 바로 미군철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저들은 지금 나라를 지탱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만든 것이라고는 군수물자 뿐입니다. 이래도저래도 죽을바에는 한판 붙어보자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울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십자가의 군병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만약 적화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먼저 그리고 제일 크게 피해볼 것은 교회입니다. 목사요 교회 직분자요 성도일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저들은 우리 남쪽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 선교사가 전해준 말이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도 기차로 3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의 건축을 맡고 있던 북한 출신 책임자가 이태희 목사 잘 계시냐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동기도원의 근황까지 묻는데 기가 질리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남쪽의 정, 교, 재계에 좀 이름이 있다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들이 세세하도록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떠한 상황 속에 있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땅에 미디안군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이 큰 위기에 놓여 있을 때 기드온이 단 300명의 용사로 대승을 거둔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자 그 비결이 무엇인가 깨닫고 우리도 이 민족적 위기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철저한 파수군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기드온과 함께하기로 한 군사는 3만 2천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먼저 두려워하는 자를 돌려 보냈습니다. 남은 자가 일만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도 많다 하셨습니다. 그들로 물가에 내려가 물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방을 둘러보며 물을 떠 마시는 자 300을 택하시고 나머지는 다 돌려 보냈습니다. 세상에 무릎을 꿇은 자는 필요없다 하신 것입니다. 전도를 해도 전교인이 하는 것보다 단 몇 명이 전도해 오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만 2천명보다 기드온과 300명이 더 귀했습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정예군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정신무장이 해이해지면 패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월남은 최신무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패망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 UN군이 전쟁물자를 주면 적군에게 팔아 먹었습니다. 그러니 세계가 다 들어붙어도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군의 부패, 사회의 부패는 나라 망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강원도 정도만한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도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습니다. 미국에는 이스라엘에서도 애굽에서도 유학생이 와 있습니다.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스라엘 유학생은 어느새 자기네 조국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러나 아랍권 유학생들은 차일피일 전쟁 피할 구실만 찾고 있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이미 승패는 결정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도 200, 300명이었을 때는 굉장히 뜨거웠습니다. 너도나도 나와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성도는 적어도 일할 사람은 많았습니다. 3만2천명의 오합지졸보다 정신무장이 제대로 되어 있는 300명의 정예군이 오히려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옛날에 아이들이 동네 패싸움을 할 때 한쪽에는 열다섯명이 있고 또 한쪽에는 겨우 두세명이 맞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이길까요 ? 많은 쪽은 \\\\\\\'내가 아니더라도\\\\\\\' 하는 생각으로 정신이 해이해져 있고 적은 쪽은 생명을 걸고 싸우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모두 정예군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 아니더라도 많으니까 하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정예군 사상이 가정을 든든히 세우고 나라를 지키며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정예군은 또한 군의 비밀을 지킬줄 알아야 합니다. 삼손은 대단한 이스라엘의 장사였습니다. 그러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 하나님의 주신 전신갑주를 스스로 벗어버렸습니다. 기생의 무릎에 누워 잠들었습니다. 파수군이 잠들면 나라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실인의 비밀을 토해 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져버린 것입니다. 그는 적군에게 붙잡혀 눈이 뽑히고 조롱 당하다 적들과 함께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 한 사람이 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적의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은 안해도 나는 한다 하는 정예군 사상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비록 적은 군사력이었지만 한밤에 적진을 둘러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소리치고 나팔을 불며 적군을 깨웠습니다. 놀란 적군이 서로를 치기 시작하여 스스로 진멸 당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와 민족의 안보와 장래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군도 신앙으로 정신무장을 해야 합니다. 군의 복음화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전에 프에불로 함장이 북에 끌려가기 전 병사들을 모아놓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 토마스 칼라일은 말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이 위대한 국가를 건설한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 127 : 1) 아멘.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할 때에 엘리사가 보고 소리쳤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왕하 2 : 12)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나라, 우리 교회를 지키는 병거와 마병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3만2천명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300명의 정예군을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밤중 하나님의 지시대로 나팔을 불었습니다. 우리도 어두운 세상을 향해 기도의 나팔, 복음의 나팔을 불기 바랍니다. 기도에 힘을 얻고 나가 싸우는 자는 반드시승리합니다. 할렐루야 !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였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을 뽑아 전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산에 올라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피곤해진 모세의 손이 내려왔습니다. 그 때 아론과 훌이 옆에 있다가 돌을 가져다 모세를 앉히고 양 옆에서 모세의 손을 받쳐 주었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의 대승리로 아말렉과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교회 뿐만 아니라 가정, 사업에도 배후에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붙잡아 주셔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길 때 우리 하나님 책임져 주십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처럼 정예군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사상을 가지고 우리 모두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군대 귀신을 내쫓자/ 막5:1-11
군대 귀신을 내쫓자 막5:1-11 오늘 본문은 무덤 속에서 사는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를 고백한다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늘 캄캄한 밤입니다.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는 나만의 무덤입니다. 제 아내도, 사랑하는 자녀도, 부모도, 친구도 그런 내 무덤에는 다가올 수가 없습니다. 죽어서야 가는 무덤에서 나는 비록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몸과 같 았습니다. 사람들 곁에서 살지 못하고 밝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내 무덤, 내 동굴로 자꾸 만 들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답답할 때만 잠시 무덤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점점 더 무덤에서 살 아가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수렁과 같습니다. 어느 날 눈떠보니 무덤 에 매이고 묶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저도 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염도 깍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고, 옷도 걸치지 않고, 괴상한 몸짓과 울부짖음으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때로는 그런 내가 싫어서 돌로 내 몸을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 증상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져 이제는 저를 쇠사슬과 고랑으로 맬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감히 이런 저를 제어할 힘이 없습니다. 참 한심한 노릇입니다. 저도 사람으로 태어나 정말 한번 멋지게 꿈을 이루며 살고 싶었습 니다. 그런데 되는 일이 하저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되는 것 같은데, 나만 자꾸 골짜기에 처박혀 들어갑니다. 이제 더 이상 이상도 없고 꿈도 없습니다. 아내와 날마다 불 화와 싸움의 연속입니다. 내 아내가 어떻게 이리도 내 맘을 몰라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꼭 내가 사는 것을 방해하려는 여자 같습니다. 자식도 머리가 굵어지니 말을 들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서나 혼자입니다. 직장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평생을 바쳐 해 온 일이 바닥을 보여가고 있습니다. 몸은 왜 이리 아픈지 늘 찌들어 있습니다. 어딘가 고장이 나 나사가 풀 려 있듯이 늘 피로와 답답함에 매여있습니다. 그 때 바다 건너편에서 배가 한 척 다가왔습니다. 저는 늘 바닷가 보이는 언덕에서 있었습 니다. 얼마나 설레고 흥분되었는지요? 내게 빛이 임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그분은 나를 바라보시더니 무덤에서 나오라고 손짓하셨습니다. 나는 너무나 기뻐 달려가 그 앞에 절하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데 하나님 앞 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아, 이런, 이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지금 내 심정을 토로하고 나를 이 무덤에서 꺼 내어서 다시 살게 해달라고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작 다른 말이었습 니다. 이미 나는 내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내 생각을, 내 말을, 내 행동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얼마나 무덤에서 나와 사람답게 살고 싶었는데 질문을 달랐습니다. 가만히 보니 내가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그 앞에서 자신 있게 내 이름 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름도 없었습니다. 아니, 이름이 있었는데, 이제 그 이 름도 잊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당황했습니다. 내 이름을 알리고 싶지만 내 이름이 없습 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군대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제 어느 내가 진짜 나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많은 것이 다 엉켜서 나를 괴롭히고 있습 니다. 그것이 뒤엉켜 군대처럼 나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그 군대가 나를 괴 롭힙니다. 인생이란 군대, 성공이란 군대, 명예와 관계란 군대가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를 보시고 다 아신다고 인자한 눈길을 보내주셨습니다. 군대는 이제 나가 야할 때임을 알았나 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데, 예수님이 들어와 군대 를 내 밖으로 몰아내고 계시네요. 이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습니다. 이제 살 것 같습니다. 이제 무언가가 보입니다. 삶이 보입니다. 사랑이 보입니다. 좀 못살아도, 인정을 덜 받아 도 사랑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는 내 몸에서 나와서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돼지 속으로라도 들어가야겠 다고 합니다. 내 대신에 돼지에게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그러자 돼지들이 바다에 뛰 어들었습니다. 잘 못하면 제가 그렇게 될 뻔했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다시 저런 군대가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고민을 했는데 이미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할렐루야! 나는 이제야 자유를 얻었습니다. 나는 군대 귀신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을 만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것은 거라사 지방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냥 그곳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현재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바로 귀신들린 사람이요. 그러므로 무덤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장소는 어디 입니까? 무덤사이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무덤에 있으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예수님도 만날 수 없습니다. 무덤에서 나올 때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무덤에서 나와야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 해 보겠습니다. 무덤에서 나오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무덤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1. 내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한 장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는데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무덤입니다. 무덤에 살던 그는 어떻게 됩니까? 4절- 5절을 보세요. 무덤에 있으면서 그는 더 악화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무도 제어할 수 없고, 소리를 지 르고 제 몸에 상처를 내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무덤 속에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생각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쇠사슬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걱정 한번 하면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덤에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 앞에 내려 놓으라고 해도 걱정 근심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누구도 나를 말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들이 어떻게 됩니까? 나를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닙니까? 걱정과 근심을 한다고 해결됩니까? 무덤 속에 있으면 안 보입니다. 저도 무덤 속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도 예외 없습니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무덤 속에 들어가면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안보이니까요. 목사가 되어서 저도 출세하고 싶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커다란 교회를 하는 것이 성공한 목회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제 앞에서 벌벌 떠는 것이 보기 좋았던 적도 있습니다. 더 많이 공부해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인들이 그 학위 때문에 저를 존경하는 것이 행복하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컨데 그것이 제가 무덤에 있었을 때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사실 저는 귀신을 본적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을 기도로 쫓아내려고 다닌 적도 있습 니다. 그런데 말씀을 대하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귀신들린 것이 정말 무엇일까? 물론 인격적인 귀신이 들어 가 있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렸다는 것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자기 기준을 가지고 우기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아닙니다. 내가 기준입니다. 무덤에 있으면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왕입니다. 전부입니다. 사람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분들이 계십니 다. 힘이 든다고 그곳에서 미친 듯이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상처 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자기 생각의 기준으로 말입니다. 말로는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자기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두렵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라는 소리를 하기도 두렵습니다. 또 그런 소리를 하는 분들도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도 자기 생각으로 제한하고 있 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서움은 저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토마스라고 하는 사람도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 신지 알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최후의 인간 지식이다\"라 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무덤 속에 있으면 안됩니다.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자폐아들도 자기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선 내가 무덤 속에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무덤 속에 나올 때 내가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을 내어쫓으면서 예수님은 그에 게 물어보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9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무엇을 물어보시는 것입니까? 본질입니다. 자기 자아입니다. 이름을 물어보는 것은 히브리 사고를 보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학생이라고요? 계속 학생이겠습니까? 제가 대답한다고 가정해보면 목사입니다. 아빠입니다. 남편이요.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대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겠느냐는 것입 니다. 한 번 따라 해보십시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만화 영화 \'라이온 킹\'을 보셨습니까? 라이온 킹은 매우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어린 사자 인 \'심바\'는 아버지 무파샤가 죽자 멀리 달아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자기가 누군이지 알고 라이언 킹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어린 라이온. 심바가 자기를 깨닫는 과정입니다. 도망간 어린 심바는 자기가 사자들의 제왕인지도 모르고 벌레나 먹고 멧돼지와 친구 삼아 살아가던 어느 날, 현자, 원숭이 라피키가 나타납니다. 현자 원숭이가 라이온에게 묻습니다. \"넌 누구냐?, Who are you?\" 라이온은 고개를 떨구며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현자 원숭이가 \"지금의 넌, 네가 아니다\" 하면서 어린 사자, 심바를 이끌어 물가로 갑니다. 심바는 물 속을 바라보자 자기 모습이 보입니다. 현자 원숭이가 다시 한번 자세히 보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자 이번에는 자기 모습 속에 죽었던 사자 들의 왕이었던 아버지 무파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 아버지의 음성이 들립니다. \"넌 내 아들이다. 너는 라이언 킹이다. 네가 누군지 분명히 알라!\" 심바는 자기가 라이언 킹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는 아무 것 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누구이고 자기가 그 아버지의 아들임을 알기 전까지 그는 단지 평범한 사자였고 의미 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안에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자 그는 위대한 라이언 킹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Who are you? 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시겠습 니까? 정답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습니까?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 이 거라사의 사람도 무어라고 대답을 합니까? \'군대\'라고 합니다. 9절을 읽어보세요.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군대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군대는 이름도 아닙니다. 성도 아닙니다. 분명히 자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군대는 \'레기온\' 이라고 하는 원어를 쓰는데 6,000명 정도로 구성된 로마군인을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군대는 죽음과 파괴와 약탈의 어두운 그림자였습니다. 울던 아이들도 로마 군대가 오면 울음을 그쳤다고 합니다. 이런 군대를 말합니다. 그는 자기 안에 이런 무서운 군대가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막고 있는 군대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교회에서 \'뷰티플 마인드\'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에서도 묻게되는 물음 이 있습니다. \" 내가 누구인가?\" \"세상의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라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자기를 괴롭히는 환상을 이겨 가는 천재 주인공의 내적인 투쟁이 아주 치열하 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고백은 이렇습니다. \"아직 나는 제정신이 아니다. 환상 을 살고 있다. 아니 평생 그렇게 살아갈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를 무시하고, \'나\'로 살려고 한다. 그것과 대결한다. 또렷이 직시한다. 지금까지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였지 만 이제 떠나겠다.\" 정말 처절한 주인공의 싸움은 자기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가족들과 친국의 격려와 지지가 감동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이름을 물어주고 계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네가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그 질문은 나를 만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물론 제 대답은 죄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목사가 아닙니다. 주님! 죄인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돌아가셨군요. 나를 알아야 예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알아야 군대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나를 알아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무덤에서 나와 자기를 알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재미있는 것은 귀신의 모습입니다. 쉽지 않은 귀신입니다. 이름도 군대지만 내보내기도 힘이 드는 귀신입니다. 10-11절을 보면 군대귀신은 사람의 몸에서 나와 돼지 속에라도 들어가려고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13절에 허락해주자 돼지 이천 마리가 바다에서 몰살합니다. 이것이 귀신의 모습입니다. 귀신은 어디엔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 체험을 해도 바뀌기 쉽지 않아요. 왜 그래요? 옛 생각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 습관이 안 바뀝니다. 옛 귀신은 우리를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꾸 우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이 곤고한 사람이라고. 자기 안에 또 다른 법이 거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도 변화되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다 보면서 너무나 와 닿는 것은 대부분 교인들이 옛 모습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안 돌아가게 하려고 애를 쓰고, 교인들은 돌아가려고 하는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느끼곤 합니다. 물론 가끔 저도 줄다리기에 동참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참으로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돈을 떼어먹었던 분들은 쉽게 하나님의 것을 떼어먹습니다. 교회 결석하던 분들 은 또 결석을 합니다. 봉사하지 않는 분들은 다시 봉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실제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항상 우리에게 있습니다. \"옛날이 좋았어, 가마솥에서 기름진 것을 먹을 때가 좋았어\"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옛날처럼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냥 변함없이 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군대 귀신 들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옛날 무덤을 그리워하는 모습입니다. 군대 귀신에 걸린 사람의 특징은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 마을 사람과 실제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다르게 나타납니 다. 귀신들린 사람은 온전해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7절을 보세요.\"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노라\" 반대가 된 것입니다. 도리어 이들이 군대 귀신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 다. 역설적이죠. 사람들이 도리어 귀신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요? 왜 예수님을 거부하게 되었을까요? 돼지가 빠진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본다는 것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군대귀신에게 붙어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시 이런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내가 변화될 때 너무나 손해 볼 것 같아서 군대 귀신을 데리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포기하지 않고는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골고다에서 자신을 포 기했을 때 하늘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여러분들에게 있는 군대 귀신을 빼내려고 합니다. 손해 볼 것 같죠? 그러나 온전해집니다. 제대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여러분에게 있는 군대귀신을 쫓아 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혹시 무덤에 갇혀서 살고 계십니까? 그러면 모든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귀신들린 것입니다. 나와야 합니다.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첫째 내가 무덤에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과 사고의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둘째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생각하십시오. 너는 누구냐? 셋째,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돼지 손해보십시오.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군대 귀신에게서 빼주기를 원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대장으로 모시고 영적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 립니다.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 행10:1-8/ 2011-02-09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 행10:1-8 복음의 황금어장이란 대명사는 여러가지 의미로 두고 쓰이는 낱말로서 특히 군대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여 큰 효과를 얻는다는 뜻을 지칭하는 말로 많이 사용해왔습니다.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부모를 떠나 외로운 병영생활을 하는 가운데 위험한 일이 있으며 또 단조롭게 반복되는 생활 공간속에서 새로운 변화된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상황 아래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해 낼 수 있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Mission school의 교목들도 역시 학교가 복음전파의 황금어장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감수성이 매우 민감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스폰지에 물을 뿌리는 것과 같이 복음을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 까닭에 중공에서는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법률로 규정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병원에서 목회하는 원목들도 그야말로 병원은 복음전파의 황금어장으로서의 산실이라고 합니다. 출세한 억만장자도, 지위가 높은 고관대작도 더 나아가서는 지위고하와 유무식을 막론하고 또한 빈부귀천을 따질 필요도 없 이 겸손해져버린 그들에게는 한가닥 희망을 붙잡으려는 본능들을 가지고 있기에 복음을 잘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움을 주어야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환언한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곳이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깊은 곳이라고 느껴지기만 하면 즉시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면 의사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개인의 기록들에 대해 상당부분을 서술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1>베드로에 대해서<2>스데반의 순교에 대하여 <3>백부장 고넬료에 대하여 <4>선교사역에 심혈을 기울였던 바울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남겼습니다. 물론 다른 이름도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중에서 고넬료의 기록은 이방인에 대한 기록으로 무려 10-11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속에는 에디오피아(구스인) 내시의 기록이 세례로 시작된다면 이탈리아의 군대장관 백부장 고넬료의 기록은 사도들의 획기적인 새로운 출발을 열어주는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내시는 길가에서 행해진 복음전파 사건이지만 고넬료는 그의 가족과 일가와 친구들을 구원시킨 획기적인 사건으로 가정복음화와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파의 장을 활짝 열어재킨 사도들의 대변화였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유대인들의 교회입구에 서 있어야 했고 성전안에서 이방인의 뜰을 넘지 못하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던 그들이 성전에 들어올 수 있는 대역사가 이루어졌고 이제부터는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 그리스도의 부활과 다시 오심이 전해질 수 있는 최초의 계기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가장 늦게된 성(城), 대해롯이 로마황제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세운 가이샤라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베드로는 가장 오래된 성(城), 아름답다 는 뜻을 지닌 그리고 단지파가 차지하고 있었던 성지안에 있는 욥바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명령권을 가진 장교로서 수고하는 고넬료 그가 제9시에 기도한 것을 보면(우리시간3시) 유대인의 기도관습을 쫓는 아직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상태의 신앙인이었던 같습니다.특히 이탈리아 군대는 32개 부대가 있었는데 그 부대는 로마의 주요한 지역 여러곳에 주둔했다고 합니다.이 군대들은 의용군으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로마에서 가장 애국하는 군대로 그리고 애국적 백성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군단의조직은 10개의 부대이며(6,000명) 각 부대는 6개의 100인대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을 때의 환상은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는 사건처럼 보였으며 천사가 나타나 바닷가에 있는 시몬을 청하라고 하였고 역시 거의 동시간대에 자기의 처소에서 베드로는 기도하다가 하늘이 열리며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보자기 안에는 각종 네발달린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으며 그것들을 잡아 먹으라는 명령이 하늘에서 들렸습니다.이 음성을 들은 베드로는 부정한 것을,속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결하게 했는데 어찌하여 속되다고 하느냐며 다시 명령하시므로 베드로는 순종할 뜻을 보였습니다. 1.이때에 초대교회는 심각한 고민 중에 빠지게 되었으며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더욱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기독교를 유대주의로써 유대안에만 머물게하는 회당 중심으로 끌고 나갈 것인가 또는 신앙과 세례에 의한 이방주의이면서 탈회당적 복음전파를 시도하여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켜 계속 진행해 나갈 것인가하는 심각한 고민과 번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이 문제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는 선민사상이라는 우월감을 포기해야 할 심각한 문제요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선교의 대과제였던 것입니다.이 때 하나님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 베드로에게 고넬료의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해답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즉 고넬료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 처지에 있었고 베드로는 복음을 전해야 할 입장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간구와 응답이라는 동일한 일치점을 서로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허락하셨습니다.그리하여 선민의 기독교는 유대안에 갇히지 않게 되었고 복음이 이방세계로 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뜻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고넬료 가족으로부터 시작한 구원은 일가를 초월하여 친구들에게까지 이루어지고 오순절의 성령역사가 재현이 되었던 것입니다. 2.여기에서 고넬료는 유대인 성도의 큰 자랑거리인 두 가지를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언제나 큰 자랑 거리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구제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드리는 기도였는데 이 두가지 기도와 구제는 유대인 신도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의 덕행에 해당하는 일이었습니다.이처럼 이방인인 고넬료가 구제하며 기도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그런데 베드로의 기도시간과 고넬료의 기도시간은 거의 같은 시간이었음을 짐작하게 해 주는데 고넬료는 제9시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응답받은 시간이 제9시로 환상을 보고 있었고 베드로는 제6시(정오)에 기도를 드리며 환상을 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때 기도하는 고넬료는 유대인의 형식적인 시간에 맞춘 기도이상의 기도를 드렸습니다.물론 유대인의 기도습관을 따르긴 하였지만 환상을 볼 정도의 간절한 기도를 하기에는 형식과 의식을 뛰어넘는 오랜 시간과 정열을 쏟는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교를 위하여 유대주의적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놀랍게 사용하시기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유대인은 자기동족이 아니면 모든 이방인을 짐승으로 취급하였고 그들과도 상종치 않는 구약시대의 율법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그들은 선민이란 우월감과 자기 만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그런까닭에 복음은 자기들만의 유일한 전유물과 같았고 이방인에게는 이 복음을 전해서는 안되는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고넬료를 예비하고 계셨으며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 선교를 위해 고넬료에게 복음전할 것을 명령하셨으며 이에 순종한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에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초대교회에 깨닫게 하셨고 선교의 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더 나아가서는 이방인들을 향한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그리고 이방인에게도 이방인의 뜰에 앉아서만 예배를 드리도록 하지않고 성전안에 들어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시므로 복음이 천하만민의 것임을 선포하신 것이며 이는 곧 이방인들을 향한 교회의 문을 여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기도의 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4.하나님께서 천사를 고넬료에게 기도의 응답으로 보내 주셨지만 복음은베드로를 통하여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민이 구원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지만 절대로 천사를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세운 인간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시고 생명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그러기에 선교는 가는 것이요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이와같은 견지에서 보면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에게 보내어진 선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맨 처음으로 복음을 듣게 된 행운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도 흠모할만한 귀한 직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허락받았다는 믿음의 긍지를 갖고 천사도 할 수 없는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그러기에 바울은 천사도 흠모할만한 직분을 우리가 받았으니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할 것이며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갈라디아교회에 담대하게 말하였던 것입니다.(갈1:8)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베드로처럼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며 베드로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5.구원을 받기 위해서나 구원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천사의 명령을 즉시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없으니 천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시키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할 수 있을지래도 구원의 복음을 외칠 수 없는 천사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는 즉시 달려가야 하며 가서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6.경건한 하인 둘과 경건한 종졸(부하) 한 사람씩을 택한 고넬료의 신앙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천사의 명령을 지킨 고넬료는 심부름시키기 위하여 주인의 의사를 분명하고 똑똑하게 전달할 용감한 종과 군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의중까지도 읽어 대변할 지혜롭고 영리한 자를 택한 것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정도의 하나님 경외심을 가진 하인과 부하를 선택해 심부름을 시켰다는 신앙자세와 그의 태도를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하인들은 유대인으로서 고넬료의 집에 하인(종이나 노예)으로 수고하고 있는 동안에 기도하고 구제하는 일들로 신앙습관이 길들여져 있는 그들에게 고넬료가 기도와 구제를 본받았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열왕기하 5:1-14을 참조해보면 이방인 나아만의 집에 끌려온 경건한 유대인인 계집종이 있었습니다.그런데 자기의 주인인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리자 그녀는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 가면 그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소개하여 문둥병을 고침받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까닭에 신앙은 위대하고 중요하며 구원은 놀라운 하나님의 최고로 값진 은혜이기에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베드로를 만나러 가는 하인을 돌보기 위하여 한사람의 무장한 부하를 대동하여 오는 길 가는 길을 지키게 했는지도 모릅니다.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리고 구원받기 위하여 보낸 세 사람의 강권함에 의하여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음식먹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유대교의 엄한 율법을 무시한 채 그리고 선민사상을 도외시한 채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고넬료가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기 위하여 하인들과 종들을 보낼 때에 당부하는 겸손함은 더욱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항입니다.그들을 보낼 때에 지배국의 군대장의 어떤 명령을 피지배국의 한 국민에게 전달하러 보낸 것이 아니라 환상 중에 있었던 사실을 그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서 베드로를 초청하러 보낸 것입니다. 즉 지배자로서 명령하듯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알리고 정중하게 모셔 오도록 보낸 것입니다.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전하기 위하여 욥바에 도착했을 때는 이틀 후였고 이때에 베드로는 기도하기 위하여 지붕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9) 다시 말하면 그는 고넬료의 기도 응답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를 환상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기도의 일로 인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렸으며 이방인에게도 오순절에 임한 성령이 임하게 되었습니다.분명 우리가 믿기는 성령이 임하면 반드시 권능을 받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역사가 뒤따랐는데 고넬료도 성령의 세례를 받고(44-48) 참된 복음의 증인이 된 줄로 믿습니다.더 놀라운 것은 두사람의 기도로 고넬료의 가족과 일가 그리도 친구들이 세례와 성령과 구원을 함께 받았다는 일인 것입니다.(10:44-48) 그러므로 우리는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요청만 있으면 갈까말까 번민할 필요가 없으며 주님의 명령만 따르면 가서 전하는 우리에게 주님이 직접 일하시며 역사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특별히 군대에는 상관의 종교에 따라 부하의 종교가 같을 수 있는 특수체질이 형성되어있다고 본다면 고넬료를 통하여 구원받은 백성은 성경에 기록한 인원보다 훨씬 많을 줄로 믿습니다.우리는 복음의 황금어장에서 기도하다가 응답받은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와 경건성의 아름다운 신앙정신과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인 베드로의 높은 선교정신을 되새기면서 하나님께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구원을 위하여 복음전파의 선봉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군인, 선수, 농부/ 딤후2:3-6/ 2002-10-06
군인, 선수, 농부 딤후2:3-6 우리는 지금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친구들은 가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진정한 삶일까요? 사도바울은 이 비밀에 대해 3가지로 밝혀주었습니다. 1. 군사(3,4) 군사는 어떤 전쟁에 있어서도 겁을 먹거나 도망가면 안됩니다. 도망가는 그 자체만으로도 승리를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싸움에서도 끈질기게 싸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친구들은 군사와 같이 모든 싸움에 있어서 겁을 먹거나 고난이 다가올 때 너무 쉽게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또 군인은 사소한일에 얽매여 있으면 안됩니다. 군인의 임무는 나라를 지키고 국민의 안전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런 임무를 버리고 밤낮으로 놀고 pc방 만화, tv에 빠져만 있다면 그는 군인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군대에서 명예롭지 못하게 빨리 내보냅니다. 마지막으로 군인은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자입니다. 군인은 상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군인정신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군사들이 복을 잘 전하는 것을 최고로 여깁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도록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초대합시다. 2. 운동선수(5) 바울은 당시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운동선수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을 보며 \'법대로 경기하는 것\' 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그 선수가 아무리 빨리 달리고 농구를 잘해도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박탈당합니다. 운동선수는 법대로 경기하는 것이 면류관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들에겐 운동선수처럼 법대로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기도 생활하는 것, 전도생활 하는 것, 등등입니다. 이런 법을 무시하고 아무리 착하게, 또는 남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고, 예쁘게 살았다해도 하나님의 법에 모자라면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법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규정하고있는지 정신을 차리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면류관을 받습니다. 3. 농부(6) 농부는 참으로 힘든 직업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 잠을 제대로 못 잔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농작물을 돌볼 때 비가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 비료를 제때주어야 하고, 농약도 시간을 잘 맞춰 주어야 하고 씨를 정확하게 뿌려야 하며 수확도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정말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직업이 농부입니다. 아무리 농기계가 발달해도 사람의 수고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말로만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처럼 우리가 복음을 심었으면 식물을 열매맺게 하기 위해 전심을 기울여 돌보는 것처럼 땀흘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수고를 하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령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총동원 전도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같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군사, 법대로 경기하는 운동선수, 한 사람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초등부가 됩시다. 그래서 하늘의 면류관을 받읍시다. 앞으로 친구들에게서 군인 같은 기백, 운동선수 같은, 멋진 플레이, 농부처럼 땀흘리는 모습들이 보여지고 한 사람을 살리는 기쁜 일들이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귀순 용사/ 대하30:1-9
귀순 용사 대하30:1-9 세상 살아가는데 있어서 싸워야 할 상대가 있고 항복하고 섬겨야 할 상대 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믿고 섬기고 순종하며 죄를 짓고 불 순종한 가운데 징계를 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는 귀순 용사처럼 항복하고 돌 아 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1.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1절)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내리는 무서운 형벌 곧 가장 사랑하는 장자는 다 죽음을 당하는 위기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이 임하지 않고 지나가므로 무서운 죽음을 면 케 하고 또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날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입니 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복을 받고 살면서 우상을 섬기고 타락하고 범죄함으로 강한 앗수루 군대가 침입하여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 히스기야 왕은 이런 재앙을 면하기 위하여서는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서운 죽음의 저주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어린양 예수 스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오래 동안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인 십자가에 피앞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면하고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전에 저주를 멈추게 할 주 님의 피아래로 오십시요. 어던 죄라도 다 용서받고 사함받을 수 있습니다. 2.성결한 제사장들의 모임(3절) \"이는 성결한 제사장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한 고로\" 소 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서지만 의인 열명이 없 어서 멸망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시대도 성결한 제사장이 부족하고 백성도 모이기를 싫어 하므로 국가에 고난이 왔습니다. 의인 몇사람이라도 모여서 기도하면 주님께서 그 나라와 그 교회와 가정은 버림받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의로운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모여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므로 이 민족이 고난 중에도 어려움을 면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일제시대도, 6.25 전쟁시에도, 제 2공화국의 혼 란기에도 유류파통과 여러번의 혁명 때에도 기도원에도 성전에도 모여서 기 도하는 의로운 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3.귀순 용사처럼 여호와께 돌아 오면 삽니다.(6-9)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 돌아 오라 그리하면 저가.... 돌아 오시리 라.\"(6) \"그런즉 너희 열조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귀순하여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8절) 1) 고난받는 자가 주께 돌아 오면 하나님도 그에게 돌아 오십니다. 이스라 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하나님도 그들을 떠나므로 불뱀이 그들을 물어서 죽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복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인도자요 보호자요 필요한 것을 공급 하시고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주 떠나가시며 내 생 명 헛되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 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돌아 오 셔서 복을 주시고 지키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2)\"너희 열조와 형제같이 하지 말라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한 고 로 여호와께서 멸망에 붙이신 것을 너희가 목도한 바니라\" 안 믿는 사람 믿 음이 없는 사람처럼 같이 따라가면 괴롭게 할 사람들이나 환경이 생기게 되 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3)\"너희 열조와 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귀순하여 4)영원히 거룩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을 섬겨 5)그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귀순 용사처럼 항복하고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을 섬기면 모든 재앙이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목적이 교만을 꺽고 항복하여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을 섬기게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4. 주님께 돌아 오는 자에게 주시는 복(8-9) 1)하나님의 진노가 떠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던 적군, 악한 자들, 질병 근심 걱정 물러 갑니다. 2)내가 돌아 오면 내게서 나갔던 형제나 자녀들이 내게로 돌아 옵니다. 또 한 멀리 달아 났던 물질과 건강과 기쁨이 돌아 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 아 왔을 때 천한 신분에서 아들의 존귀한 신분으로 바뀌었고, 냄새나는 옷 에서 아름다운 옷으로 배고픔에서 살진 송아지를 먹는 부유한 상태로 변했 으며 슬픔과 고독이 기쁨과 즐거움음의 교제가 있는 복된 환경으로 바뀌었 습니다. 3)주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이키지 아니하십니다. 계속 보시면서 공급과 인도 사랑 보호 기쁘고 즐겁게 하시고 새일을 이루십니다. 더 이상 괴롬당하지 마시고 어려운 질병이나 환경과 싸우지 마시고 귀순 용 사처럼 하나님께 돌아 오십시요 복의 근원되시는 우리의 도움과 위로와 소 망이 되신 능력의 하하님이 우리에게 돌아 오시고 진노와 저주는 물러 가고 형제와 자녀가 돌아 오고 떠났던 물질도 돌아 올 줄 믿습니다.
그들은 결코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삿7:1-8/ 2008-06-13
그들은 결코 용사가 아니었습니다 삿7:1-8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만, 기독교인들만 읽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추천도서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위인전기처럼 생각하고 읽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어떤 방식으로든 성경을 읽다가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결코 위인전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만 해도 대략 3천 여명의 사람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대략이라고 하는 이유는 한 사람이 다른 이름으로 여러 번 나오는 경우도 있어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위인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대단한 위인처럼 묘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드온과 함께 전쟁에 나갔던 삼백 명을 <기드온의 삼백 명 용사>라고 부르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용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삼백 명 용사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우리 입에 붙은 습관적 표현일 뿐입니다. 왜 그들이 용사가 아닌지를 생각해 봅시다. 우선 그들의 지도자인 기드온 자신이 용사가 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셨지만, 그것은 기드온을 큰 용사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일 뿐이지 실제로 그가 용사란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또 성경에는 삼 백 명이 용사란 표현 자체가 없습니다. 당시 기드온의 전쟁은 미디안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늘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곡식을 약탈하고 마치 식민지처럼 지배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감동시키셨고, 기드온을 따라 싸우러 온 사람이 삼만 이천 명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이 두려운 사람들은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가고 일만 명이 남았습니다. 남은 일만 명은 용감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삼백 명만 용사라고 하겠습니까? 나머지 구천 칠백 명도 돌아가지 않고 남았으니, 용사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삼백 명만 유독 용사라고 부릅니까? 어떤 분들은 삼백 명과 구천 칠백 명의 차이점을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나온 설명이 물 마시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물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마시라고 했을 때 삼백 명은 무릎을 꿇고 손으로 움켜서 마셨고, 구천 칠백 명은 엎드려 핥아 마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설명을 합니다. 손으로 움켜 마시는 사람은 주변을 경계할 수 있고, 즉시 적에게 대처할 수 있는 반면에, 핥아 마시는 사람은 적에게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삼백 명만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 삼백 명을 돋보이게 만들려는 의도가 담긴 무리한 설명입니다. 그들을 억지로 용사로 보이게 하려는 설명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훨씬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 삼백 명을 선택하셨는가? 훌륭해서인가? 지혜로워서인가? 용감해서인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구천 칠백 명과 삼백 명 중 어느 쪽이 적습니까? 세 살 짜리 아이도 아는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수가 적기 때문에 삼백 명을 선택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삼만 이천 명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돌려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너무 많은 군대로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한 것처럼 여길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숫자를 줄이려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관심은 능력있고 지혜롭고 용감한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라, 숫자가 적은 쪽을 택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두려워하는 사람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갔고, 다음에 물을 마시는 과정에서 삼백 명만 남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물을 움켜 마시는 사람만 택하겠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물을 마시게 한 후에 하나님께서 지정하시는 대로 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4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 때까지만 해도 어떤 사람이 남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물을 마시게 하고 보니, 움켜쥐고 마신 사람이 적었기에 그들을 남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는 물을 핥아먹은 사람들이 삼백 명이었다면, 그들은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삼백 명은 뛰어난 인재이기 때문에 선택된 게 아니라, 숫자가 적은 쪽이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삼백 명을 대단한 용사나 되는 것처럼 미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그들이 처음부터 용사였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한 것은 기껏해야 나팔을 불면서 항아리 안의 횃불을 적진에 던졌을 뿐입니다. 모든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돋보여야 하는 것은 그 삼백 명이 아니라, 그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삼백 명을 돋보이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용사>라고 부르기보다는 <연약한 보통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에 의해 쓰임 받은 사람>이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을 좀 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적 성경 읽기>입니다. 이 방법은 등장 인물의 훌륭한 점을 찾아내려는 방식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윗을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다윗을 선택하셨을까요? 이 질문을 받으면 떠오르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22절을 보면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다>는 게 무엇을 말합니까? 다윗의 어떤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다윗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느니, 찬양을 잘 한다느니, 하나님을 사랑하여 성전을 지으려 했다느니 하면서,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이 들었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그 설명 자체가 지나친 비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 다윗에게 차기 왕이 되도록 기름을 부으실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 때는 다윗이 찬양을 잘 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성전을 지으려 했는지, 아무런 말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나중에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왕이 된 후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있었던 일들을 끌어다가 억지로 설명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설명은 우리 모두를 좌절시킵니다. 다윗은 본래부터 뛰어난 인물이고, 훌륭한 인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라고 말한다면, 내세울 훌륭한 점이 없는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를 율법적 신앙으로 길들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면 ~~~~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적어도 10억 정도의 현찰을 낼 수 있어야 천국문이 열린다, 적어도 면죄부를 살 정도의 능력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뛰어난 인물도 못되고, 훌륭한 인물도 못되는 사람, 훌륭하기는커녕 오히려 죄인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건 분명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성경 읽기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적 성경 읽기>입니다. 이 방법은 등장 인물의 위대함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입니다. 다시 다윗의 이야기를 해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는가를 물을 때 여기서는 다윗의 훌륭한 점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차기 왕을 정하기 위해 왔을 때 다윗은 가족들 조차도 기대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 아버지 이새는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사무엘이 와서 아들들을 불러 모으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누구입니까? 수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도한 최고지도자입니다. 사무엘의 얼굴 한 번 보는 것이 평생의 영광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이 다른 사람을 시킨 것도 아니고 노구를 이끌고 손수 작은 마을 베들레헴까지, 이새의 집에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게다가 아들들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우리 같으면 외국에 있는 자녀도 부를 판인데, 이새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님이 우리 자녀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려는 가 보다. 그렇다면 우리 큰 아들 엘리압이 얼마나 훌륭한가. 엘리압 하나면 다른 녀석들을 볼 필요도 없어>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일곱 명의 자녀만 부르고, 양을 먹이러 들판에 있는 다윗은 처음부터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다윗이 받던 대접입니다. 그는 집안에서도 꼴찌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다윗, 난 너를 택했다. 난 네가 맘에 든다. 네가 약하기 때문에 더욱 내 맘에 든다. 너 자신도 ‘내가 무얼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맘에 든다. 만약 네가 큰 형 엘리압처럼 뛰어난 인물과 재능을 가지고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다면, 난 너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자신이 뛰어난 인재라고 여기기 때문에 나중에 모든 영광을 자신이 차지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압은 결코 내 은혜로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넌 다르다. 넌 너무 연약하다. 그러나 내가 너를 들어 쓰면 넌 위대하게 될 수 있다. 넌 그 모든 것이 내가 도운 결과인 줄 알고 나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난 약한 너, 꼴찌인 네가 맘에 든다>, 이게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 날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부터 다윗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도,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된 것도, 나중에 왕이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나중에 밧세바로 인해 죄를 지은 후에 회개할 때도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제발 왕의 자리만은 유지하게 해 주세요. 제발 재물만은 남겨 주세요> 이런 식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몸부림치며 눈물로 회개할 때 드린 기도는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만약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시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잘 알았습니다. 여러분,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을 선택하셨나요? 그가 워낙 뛰어난 인물이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이젠 우리 모두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정답은 다윗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적 성경 읽기>입니다. 성경을 복음적으로 읽으면 등장 인물의 훌륭한 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신 하나님의 사랑만 눈에 보입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습니다. <연약한 그를 택하여 위대하게 하신 하나님, 저도 약합니다. 저도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저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위대하게 될 줄 믿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이 약하고 보잘것없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길만 함께 하시면 아무리 연약한 사람도 위대하게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큰 꿈과 비전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 비전의 근거는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뛰어난 사람이므로 비전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만 도우시면 이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것, 하나님을 더 강력하게 의지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사람이란 칭찬보다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칭찬에 더 집착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교회에 대한 생각도 다릅니다. 여러분 요즘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본래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중에 제일은 소망이니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명박 당선인이 소망교회 장로요, 유력 인사들이 소망교회에 많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유명 인사가 많으니까 부흥할 것이라는 생각이 옳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훌륭하니까 부흥할 것이라든지, 시설이 좋으니까 잘 될 것이라든지, 유명 인사들이 많기 때문에 부흥할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만 도우시면 우리 교회는 부흥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여러분, 약하십니까? 작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삼백 명이 용사이기 때문에 선택하신 게 아닙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 자체도 그들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이유를 뭐라고 하셨습니까? 신명기 7장 6절 이하를 보세요.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뛰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꼴찌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안에서 죄인들이 변하여 어떻게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는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 안에서 절망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소망으로 승리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꼴찌들의 합창이 많이 나옵니다. 요셉도 열 두 형제 중 열 한 번째로, 심지어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가 되었으나, 하나님이 도우시니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린 여인이고, 전승에 의하면 몸을 팔던 여인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금번에 오셔서 간증한 박순애 전도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분이 대단한 가문에서, 대단한 공부를 하고, 대단히 출세한 사람이라면 감동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용사가 아닌 한 여인이 하나님의 손안에서 그 어떤 사람보다 강한 용사가 된 이야기이므로 우리가 감동과 소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가 되느냐,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하는 문제뿐입니다. 하나님은 <위인들만 남으라. 훌륭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건 율법적입니다. 죄도 없고, 온전한 사람만 남으라고 하면 우리는 다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오라>고 합니다. <죄인도 오라. 죄인은 내가 의롭게 해 주겠다, 약한 자도 오라. 약한 자는 내가 강하게 해 주겠다. 지친 자도 오라, 내가 새 힘을 주겠다. 삶의 의욕을 잃은 자도 오라. 내가 네 인생에 의미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리에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소망을 가지십시오. 용사가 아니기에 더욱 안심하십시오. 강하지 않기에 더욱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군대 /창32:1-2
그리스도의 군대 /창32:1-2 2008-01-20 16:59:05 read : 474 군대생활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정답은 “없다”입니다. 그런데 군대 생활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을까요? 군 생활에서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재미있고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군인으로 복무할 바에야 열심히 하면 재미있습니다. 피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하는 겁니다.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하든 때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간으로 만들면 재미있습니다. 저는 군 생활을 재미있게 했습니다. 암기도 열심히 하고, 재식훈련도 열심히 하고, 사격도 열심히 하고, 총검술도 열심히 하고, 유격훈련도 열심히 하고 그리고 제가 있던 부대의 특성상 도망병도 열심히 잡아 오고 폭동진압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생활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투철한 사명감이 있으면 재미있습니다. 여자들은 특정한 사람들만 군에 지원 입대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가 군대 이야기라고 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군대, 하늘 군대에는 여군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군대의 여군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하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군대 이야기는 여군들이 더 좋아합니다. 어느 군에서 제대한 복학생이 학교에 복학원서를 제출하려고 가서 복학원서를 창구에 내밀자 직원이 “군번 말고 학번 적으세요”라고 하였답니다. 막 제대한 학생이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면 “예, 병장 아무개”라고 한다잖아요. 그런데 얼마 쯤 지나면 금방 군대에서의 말씨나 습관을 다 벗어버리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군대는 그 습관이나 말씨가 돌아오지 않고 영원합니다. 성경의 군대 가운데 유명하고 강한 군대들이 많이 있습니다. 애굽 군대가 강한 군대였습니다. 특히 바로의 병거는 대단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도 강한 군대였습니다. 아브라함 군대는 집에서 훈련한 사병 318명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골리앗 군대도 강한 군대입니다. 앗수르와 수리아의 군대도 강한 군대입니다. 그 외에 엄청난 힘을 자랑했던 바벨론 군대와 메데바사의 군대 등이 강한 군대입니다. 세상 군대는 강해도 결국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늘군대는 영원히 승리하는 군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란 히브리어로 ‘마하네 엘로힘’입니다. ‘진을 치다’라는 뜻의 ‘하나’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마하네’의 70인역 헬라어는 ‘파레므볼레’입니다. 이 말은 성도들의 진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20:9에는 “그들이 지면에 널리 펴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사탄이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그들을 태울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늘 군대라고 합니다. 하늘의 군대는 성도들의 진인 교회입니다. 천사들과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군대입니다. 오늘의 신약 본문인 요한계시록 19:14에는 하늘에 있는 군대가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고 합니다. 군인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다고 합니다. 하늘 군대가 해군입니까? 군인은 주로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습니다. 하늘의 군대는 위장도 안합니까? 하늘의 군대는 깨끗한 옷이 무기입니다. 정결한 삶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그리스도의 군대가 어떤 군대인지 성경을 통하여 보시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군대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창세기 32:1-2에는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천사는 세 가지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투쟁의 천사가 있고, 도움의 천사가 있고, 치유의 천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문자 그대로 사자로서 전달자, 군대 그리고 찬송하는 자의 역할을 합니다. 저도 하늘나라에 갈 때는 찬양대로 역할을 바꿀까 싶습니다. 천당에 가면 목사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당에서는 설교할 일도, 성경 가르칠 일도, 기도할 일도, 심방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당에 가면 찬양을 끊임없이 해야 할 것입니다. 천사도 그렇습니다. 이미 구원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게 되면 사자나, 군대나, 전달자로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천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존재입니다. 천사는 인격을 가진 사자입니다. 영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성경은 천사에 대한 예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도 예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천사는 히브리어로 ‘말라크’입니다. ‘사자’(messenger)의 뜻입니다. 이 말의 헬라어는 ‘앙겔로스’(angelos)인데 이 말도 같은 뜻입니다. 천사는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자로 믿어집니다. 그 출현은 종종 하나님 자신의 임재와 구별이 어렵습니다. 천사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인간을 보호하고, 지도하고, 형벌을 주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가브리엘, 미가엘 등 천사장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천사장이 있습니다. 천사는 모두 남성으로 천사장은 힘센 장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천사는 예쁘고 순하게 묘사하고 성탄 카드에는 여성으로 그리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천사장의 이름도 있습니다. 첫째는 가브리엘인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입니다. 둘째는 미가엘인데 전쟁과 성도를 보호하는 천사입니다. 미가엘은 세상 군대의 싸움에도 관여하고 있으며 또한 마지막 때에 성도들을 보호하고 마귀를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 쫓는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다니엘 12:1에는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2:7에는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라고 합니다. ‘미가엘’은 말하자면 그리스도 군대의 총사령관입니다. 미가엘이 이끄는 그리스도의 군대의 전쟁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영토 확장을 위해서, 이념을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전쟁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천사의 영’이란 뜻입니다. 천사의 영이 군대입니다. 천사의 영은 싸우고, 보호하고, 지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군대이고, 천사의 영은 천사가 군대가 되게 하는 힘입니다. 요엘 2:25에는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과 황충과 팥중이”라고 합니다. 메뚜기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느치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황충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팥중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이런 곤충들이 아무 힘이 없는 작은 것들이지만 이것들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하나님은 곤충도 군대로 이용하십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용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쓰나미가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지난 번 태국의 쓰나미를 보세요. 하나님이 한꺼번에 쓸어버리면 이길 자가 없습니다. 허리케인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보세요. 거대한 도시 뉴 올리언즈가 폐허가 됩니다. 태풍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태풍 매미가 할퀸 자국이 얼마나 심했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군대를 이길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군대의 힘에 손 하나 쓰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합니다. 조롱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자를 조롱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분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절대로 조롱하지 마세요. 자연을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빙하가 녹는 것은 자연을 조롱한 결과입니다. 칠레에서는 호수 하나가 사라졌답니다. 이것도 자연을 조롱한 결과입니다. 자연이 하나님의 군대인 것을 절대로 잊지 마세요. 스펄젼은 “오 자비로우신 하나님, 교회에서는 성인(聖人)이요, 길에서는 천사요, 집에서는 악마인 아내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오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스펄젼의 아내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 천사는 영원한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입니다. 한번 헌병은 영원한 헌병입니다. 한번 그리스도의 군대는 영원한 군대입니다. 언제 제대합니까? 하늘나라에 가면 제대합니다. 그 때는 다시는 전쟁이 필요 없기에 군대가 필요 없습니다. 그 때가 우리가 제대할 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군대는 만국을 다스리는 군대입니다. 요한계시록 19:15에는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르시며”라고 합니다. 하늘의 군대는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이 무기입니다. 말씀이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칼로 만국을 치겠다고 합니다. 말씀으로 심판하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19절과 20절에는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와 말 탄자의 군대가 전쟁을 일으킵니다. 짐승이 잡히고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미혹하던 거짓 선지자가 함께 잡혀 산채로 유황불에 던져집니다. 사탄이 마지막 날에 여지없이 멸망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글씨입니다. 그리스도는 사탄과 세상 권세를 지배하실 왕이며 주님이십니다. 최후의 승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왕이나 권세나 사탄은 일시적으로 승리합니다. 잠시 동안은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종래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찬송합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대입니다. 최후의 승리자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능하지 못한 백성입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자기들이 한 것이 없습니다. 모세의 팔이 올라가면 이겼고, 팔이 내려오면 졌습니다.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쳐들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싸우신 싸움입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여리고를 함락할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간 횃불, 항아리, 나팔은 무기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여리고성을 돌 때에 그냥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 아이성에서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왜요? 대장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리품을 하나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쟁에서 자기들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무슨 전리품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승리하신 전쟁이기 때문에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을 훔쳤기 때문에 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회중 가운데서 20세 이상을 계수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회중이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의 장수 요압이 백성을 계수합니다. 이스라엘에 80만, 유다에 50만의 싸움에 나갈 수 있는 장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왜 진노하셨습니까? 다윗이 하나님보다 사람의 머리수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24:10에는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고 합니다. 미련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에게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수를 헤아리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의존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전에 골리앗을 이긴 경험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이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사사기 7장에는 기드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용사를 보시고 너무 많으니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군사는 많을수록 좋을텐데 하나님은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군사 22,000명이 돌아가고 1만 명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많다고 하시면서 군사들을 물가로 데려가 손으로 움켜대고 먹는 자 300명만 데리고 전쟁에 나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2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스스로 자랑할까봐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대인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이기는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싸움의 기술에 능하십니다. 우리의 싸움의 기술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반드시 짐승을 이깁니다. 세상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합니다. 사학법이 아직도 재개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있는 교회 앞에 가서 재개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시위하기로 했답니다. 우리 교회에도 왔습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것을 정확하게 듣지 않고 단지 사학비리만 가지고 계속 거부합니다. 교회에 대한 간접적인 박해입니다. 교회에 대한 모함도 많습니다.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말씀으로 반듯이 서 있을 때 승리합니다. 또 최근에는 교회의 탈세, 세습, 차별을 막는 종교법을 제정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가 탈세하는 것이 아니라 적법하게 면세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사회에 많이 환원합니까? 교회가 치부한다고 하지만 교회가 투기하고 치부하는 교회가 얼마나 됩니까? 대부분의 교회는 투기하거나 치부할 만한 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는 단체나 개인은 얼마나 사회에 기부하였습니까? 우리나라는 기부문화가 가장 열등한 나라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기부라고 할 수도 없는 액수의 기부를 합니다. 교회에 비할 때 기부는 초라할 것입니다. 빌 게이츠는 지난 13년 동안 세계 최고부자입니다. 재산이 54조 원가량 된답니다. 그 돈은 PC방에서 172억 5925시간 아르바이트 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우리나라 일 년 예산의 3분의 1이라고 합니다. 라면을 전 국민에게 일인당 52만개를 줄 수 있는 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1,000만 불을 유산으로 주고 나머지는 다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어느 단체가 그런 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개신교회와 관련된 사회복지법인이 전체의 85%입니다. 그런데 법으로 무엇을 정하겠다는 것입니까? 연동교회 담임목사의 자격을 법으로 정할 것입니까? 성직자들이 세금을 내면 근로자니까 노동조합을 만들라고 할 겁니다. 교회 사택과 재산에 대한 세금을 부과할 것입니다. 복지법인에도 개방형이사와 같은 공익 이사를 파송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교회는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패한 전쟁은 없습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하늘의 군대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권능을 목격하며 그 승리에 참여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늘 군대의 무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무기가 있다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칼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그리스도 군대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말씀대로만 사세요. 반드시 이깁니다. 말씀을 전하십시오. 반드시 승리케 하십니다. 결론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한국 교회는 칼 전쟁을 하였다고 합니다. ‘에큐메니칼’, ‘에반젤리칼’이 서로 싸웠답니다. 에큐메니칼은 연합운동을 주장하는 쪽입니다. 에반제리칼은 연합운동 보다 복음주의 운동을 주장하는 쪽입니다. 우리가 칼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칼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무기가 없는 군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무기가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이 무기입니다. 말씀이 무기입니다. 성령의 칼이 그리스도 군대의 무기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군대의 무기는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의의 호심경입니다.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신입니다. 믿음의 방패입니다. 구원의 투구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군대는 마귀와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군대입니다. 세상에서 반기독교와 대항하는 싸움입니다. 세상에서 사탄과의 끊임없는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군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딤후2:1/ 서도석 목사/ 2011-07-16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딤후2:1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군사 된 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표현은 우리 모두가 영적 전투 속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치열한 영적 전투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싸워야할 신앙생활의 3대 대적은 첫 번째 우리 자신입니다. 본성, 아직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의 두 번째 대적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성을 자극하고 세상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대적은 바로 하늘에 있는 악한 영, 사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입니다. 군인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절제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세상에서도 군인이 그러하듯이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됩니다. 군인은 명령에 절대복종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도 주님의 명령에 대해 절대복종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말씀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좋은 군사로서 갖춰야 될 군장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또한 마땅히 교육과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됩니다. 군인은 무장되어 있어야 되고 자기가 갖고 있는 무기를 다룰 수 있도록 잘 훈련되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다루는 법을 잘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잘 훈련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주목하라, 모방하라, 반복하라 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주목해야 됩니다. 그분이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사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모방하고 그리고 주님의 뒤를 가장 가까이 쫓아간 사도들을 모방하고 우리 앞에 있는 믿음의 선진들을 모방할 때 좋은 군사로 계속해서 훈련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죄성을 갖고 있고 아직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세 대적과의 전쟁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경건에 이르는 것과 지혜와 교훈을 를 완전히 내 것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딤후2:3-4/ 2011-07-16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딤후2:3-4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딤후2:3-4) 군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자기 생활을 반납하고 얽매이지 않는 충성스러움입니다. 일꾼의 삶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불러주신 삶이라고 바울은 비유로 설명하면서 이 역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이야기합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씀의 참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시간, 물질, 장래, 직업, 가정, 취미, 여가 등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집착하지 않고 항상 편손으로 있는 삶\'이라고 나름 정의를 내려 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것을 내 손에 쥐어 주실 때 자주 움켜쥘 때가 있습니다. 놓치지 않게 꽉 잡아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움켜쥔 손은 많은 갈등과 시련을 초래하는 것 같습니다. 움켜쥐는 순간 \'내 것\'이라는 착각속에 빠지게 되며,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오고,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좁은시야에 갇히게 되며, 욕심으로 발전하여 하나님보다 더 높은 비중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 같습니다. 편 손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손바닥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올려 놓으셔도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주시면 감사하고 거두어 가시면 또 다른 주님의 뜻에 대한 기대에 부풀게 됩니다. 최근에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다 내려놓고 편손으로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야겠습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신실하신 주님 앞에 좋은 군사로서 준비되어야겠습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당신의 좋은 군사로서 준비되기 원합니다. 하루에도 수십번 손을 움켜쥘 때가 있습니다. 두손을 활짝 펴고 주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가장 좋은 것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한 신입생형제와 중요한 만남이 있는데 일정이 겹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시간을 맞추어서 그 형제와 우선순위로 교제하고자 합니다. 상황과 시간을 주관하셔서 잘 만나 교제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주님의 군사된 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극히 큰 군대/ 겔37:1-10
극히 큰 군대 겔37:1-10 서언 에스겔서의 시작을 보면 B.C.593년경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기구한 운명을 노래하며 그발 강가에서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그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이상이 한 사람에게 임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에스겔은 나이 3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그 직무를 시작하게 되는 나이였습니다. 그는 제사장이 되어야 했으나, 아무런 제사의 직무를 할 수 없는 포로의 형편에 있음을 인하여 고통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그를 선지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강건케 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불손종하였던 이스라엘이 바 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하나님의 징계하심으로 정당한 것이며, 그러한 징계의 날이 다 지나면 하나님께 서 그들을 회복하게 하시고 다시 강건케 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가 전한 메시지의 중심이었습니다. 그가 보았던 많은 환상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한 많은 말씀들이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지 만, 본문에 등장하는 에스겔의 이상은 그 모든 회복의 메시지 중에 가장 중심적인 내용인지라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큰 군대를 이루는 놀라운 이상, 그것은 바벨론에서 해골처럼 변해버린 이스라엘이 다시금 하나님의 큰 군대로 변화받는 소망의 예언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함께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분문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시고\\\"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현실에 사로잡힌 사람은 내일의 희망을 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내일을 견주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놀라운 꿈의 사람이며 성공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년에 어디에서 부동산 붐이 일어날지를 안다면 부자가 못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10년 후에 어떤 직업이 가장 유망한지, 무슨 사업이 가장 유망한지 를 안다면 누구나 성공적인 생활을 계획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일을 예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미래학\\\'이라는 학문을 대학에 마련 하고 유능한 전문인을 양성하면서도 그러한 예상들은 빈번하게 빗나갈 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미리 아는 것은 어떠할까요? 이 시대를 경영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손은 역사를 움직이며, 우주의 흐름을 통치하십니다. 때 문에 그 분의 마음과 계획을 아는 것이 곧 역사를 아는 것이요, 미래를 아는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우리의 지혜로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만 알 수 있습니다. 권능의 하나님이 임하시고, 그 분의 신이 우리를 주장하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그 분의 뜻과 섭리를 깨닫게 되 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상중에 하나님의 이끌림으로 한 골짜기 중에 섰습니다. 그 골짜기는 사람의 뼈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뼈들은 누렇게 말라 있었으며 이미 죽은지 오래되어 생명의 자취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 그것은 당연히 부정의 대답이 나올 질문입니다.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버렸고, 흐트러져 어느 것이 누구의 뼈인지를 알 수 없는 뼈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결코 바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에스겔은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지혜로운 대답을 배워야만 합니다. \\\"안됩니다.\\\" \\\"못합니다.\\\" \\\"어렵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시면 하시려니와 주께서 뜻하 지 안으시면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 예화 > 한 신경과 전문의 박사님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과 식사를 하다가 말을 꺼냈습니다. \\\"목사님은 언어중추신경이 다른 모든 신경들을 총괄하여 통제하는 중심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최근에 발표된 학 설인데, 언어적으로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사람의 몸도 중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 다.\\\"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요. 성경의 야고보서에 보면 혀는 작은 지체지만 온 몸을 어거하는 능력이 있다고 나와 있답니다.\\\" 그러자, 박사님은 대단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감탄을 연발하는 것이었 습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마른뼈들이 없이도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물며 거기 누워있는 뼈들을 일 어나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는 우리들의 관점에서 힘들뿐이지 결코 하나님께는 어렵지도, 불가 능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혜로운 에스겔의 대답을 들으시고,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믿음위에 바랄 수 없는 것을 실행하는 믿음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노아가 맑은 하늘 아래에서 방주를 지음과 같이, 아브라함이 100세에 사라와 동침함과 같이 인간적인 눈으로 바 랄 수 없는 것을 바랄뿐 아니라 그 바람을 위하여 실천하는 행동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가정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도 도무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아서 실의에 빠 진 분이 계십니까? 혹시 꼭 주님을 믿도록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그 사람에게만은 하늘이 무너지면 무 너졌지 신앙으로 변화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절망감을 느끼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실망하지 마시고 대언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마른 뼈들을 향하여 살아나라고 외치는 외침이 사람들 앞에서는 무익하고 미련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 만,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로운 것이요, 용기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에스겔의 목소리가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리며 번져갔을 때에 그의 앞에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른 뼈들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이 뼈와 저 뼈가 서로 연락하여 제 모습을 찾아가는 놀라운 일이 보여졌던 것입니다. 온 골짜기를 가득히 채워서 도저히 서로의 뼈를 구분도 할 수 없었는데,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났더니 그 뼈들이 저절로 자기 자리를 찾아서 사람의 형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무지 어려운 일들이 종종 하나님의 방법으로는 너무너무 쉽게 풀려지곤 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길과 방법으로 우리의 지혜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다 만 입을 벌리고 찬미와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기적을 만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통 3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하곤 합니다. 첫째는 계시된 말씀으로 이는 성경의 말씀을 의미하며 이미 완성되어서 장차 천국에까지 변화됨이 없이 존속되는 말씀을 뜻합니다. 둘째는 선포된 말씀으로 설교와 같이 계시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선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 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 말씀을 사람들이 듣기에 편하고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화도 삽입하고, 간증도 하고 하는데 그 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중심적인 메시 지를 계시된 말씀인 성경의 바탕위에 두었을 때에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잘 들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면서 정작 설교의 중심적인 부분은 빼먹고 짜투 리만 들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셋째는 성령을 통하여 내게 적용된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을 묵상하거나, 설교를 들음으로 많은 말씀을 함께 나누지만, 그 모든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유효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으로 힘을 얻고, 어떤 사람은 저 말씀으로 힘을 얻습니다. 이렇게 각 사람마다 성령을 좇아 말씀이 해석되고 적용되어 유효하게 되었을 때에 그를 나만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고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설교는 주관적이며 해석된 하나 님의 말씀이고, 은혜를 받는 성도 개인에게는 적용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공통적인 색깔을 가지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비로소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데, 본문에서 보니 제자리를 찾는 기적이 먼 저 있었습니다. 자기의 인생의 자리를 알지 못하고, 제맘대로 살던 인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되면 가정과 직장과 사회는 물론 영적인 자기의 자리를 찾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자리는 어디입니까? 이불속입니까? 세상과 담합(談合)하는 술자리입니까? 불만과 시비의 자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배당의 이 자리가 여러분의 영적인 자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 분은 여기 있어야 마땅하며,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또 보니 이번에는 사람의 형상을 갖춘 뼈들에게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입혀졌습 니다. 비로소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도무지 안하무인이고, 사람구실을 하지 않던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고 그 안에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본성이 달라져서 새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곧 죽으려고 결심했던 사람이 삶의 목적과 소망을 발견하고, 미움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기쁨과 사랑을 되찾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 예화 > 뉴욕의 한 형사가 은행강도를 추적하다가 한 빈민가의 지하실에 숨어있는 그를 발견하고 덮쳐들었다. 지 하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서는 순간 형사와 강도는 서로를 향하여 총을 겨누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 고 있었을 때에, 형사는 지하실의 책상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게 되었다. 그가 성경을 읽고 있었다 는 의미였다. 형사는 조용히 다가가 그 성경을 보았다. 로마서의 말씀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는 말씀이 보였다. 그는 강도를 향하여 말했다. \\\"자네가 지금 총을 내리면 수갑을 차고 재판을 받아서 형을 살게 되겠지만, 그러나 그 후에 얻을 자유는 지금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을 것이네.\\\" 그 순간 강도의 손이 떨리더니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는 수갑을 받았고, 자유를 대신에 마음의 자유 를 이미 얻었던 것이다. < 예화 > 팬이라는 젊은 사업가가 있었는데, 젊은 기백과 능력으로 사업수완을 펼치다가 큰 좌절을 겪었다. 도저 히 일어설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 목숨을 끊기로 작정하고 어느 해변가 작은 모텔 에 들어갔다. 해가 질 저녁무렵 마지막 산책을 나왔을 때 해변 한 쪽에서 젊은이들이 무리지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이 보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복음성가였다. 그 순간, 그가 어렸을 때 고향에서 예배드리던 기억을 회상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하나 님을 떠난 생활을 하였는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자신의 능력만을 믿는 생활을 하였는가 도 알게 되었다. 모텔 방으로 돌아온 그는 진지한 마음으로 무릎을 굻고 기도를 드렸다. 그날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 다. 다음날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 후 팬은 미국인들에게 가장 좋은 양질의 물건을 어떻게 적절한 가격과 최대한의 친절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이 크 게 성공하여 미국 굴지의 제이씨팬 백화점이 되었다. 제이씨팬이라는 이름은 다른 뜻이 아니라, 바로 지 저스 크라이스트 팬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팬이라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뜻으로 이름 을 정한 것이다. < 예화 > 1924년 파리 올림픽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릭에게서 영국, 아니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육상 100M 금메 달을 기대하고 있던 영국인들의 가슴은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 일정표에 100M 경기가 주일 에 거행되는 것으로 발표되자 에릭은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출전포기를 알렸다.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에릭의 결정에 충격을 받은 영국인들은 그를 \\\'조국의 명예를 버린 자\\\'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이라고 신 랄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적어도 에릭에게는 그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주님의 날을 어겨가면서까지 메 달을 따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과의 타협이라고 여겨졌던 것이었다. 에릭은 파리 올림픽에서 자기의 주종목과는 전혀 거리가 먼 400M에 선수부상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출전하게 되었다. 경기 당일, 평소 에릭을 잘 알아왔고 특히 100M를 포기하는 결연함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한 육상팀 안마사는 \\\'나를 존중히 여긴는 자를 내가 존중하리라\\\'는 성경말씀을 적은 종이쪽지를 에릭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날, 에릭 리들은 놀랍게도 47.6초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따내었다. 이렇게 되자 에릭을 비 난하던 영국 신문들은 그를 가장 훌륭한 영국인이라고 극찬하며 추켜올렸다. 하지만 에릭은 올림픽 다음 해인 1925년, 모든 명예와 기회를 버려두고 조용히 중국 선교사로 영국을 떠났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에 보니 그렇게 형상은 갖추어졌으나, 아직 생기는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외형적 인 변화를 보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다인줄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생기가 있어야 비로소 생명인 것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생기, 곧 성령이 오셔야만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을 수 없는 존재로 타락되어졌다는 뜻입니 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참생명을 가진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너무나 중대한 것이라서 에스겔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야 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하라\\\' 하셨다.\\\" 그러자 생기가 곧 그들에게 들어가 살게 하였습니다. 생기가 사방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편재하시는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어디에나 우리와 함께 하 시는 하나님이시며 때문에 우리의 죄와 허물을 누구보다 잘 아셔서 중보하시고,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가장 깊이 이해하셔서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불어왔다는 것은 바람같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그 형상은 없으나 때로는 세미하게, 때로는 강력하게 그 능력을 행사하시고, 모든 오염을 깨끗이 날려 보내는 바람처럼 우리를 정결케 하시며, 심령의 불을 살아나게 하시고, 우리의 생명 의 근원과 근거가 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형상을 회복한 마른 뼈들을 일으켜 세워서는 끝내 극히 큰 군대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군대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소집된 집단을 뜻합니다.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전진하여 고지를 점령하고 승리하는 것이 군대의 목적입 니다. 그 중에 약탈을 일삼고, 처자식을 걱정하며, 스스로를 나약하고 게으르게 내버려 두는 것은 다 군 대에서 중벌을 받을 일입니다. 군대는 군대다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의 무장을 하고 적진으로 달려가서 상대방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악한 영들을 대적 하여 그들을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는 일에 거침이 없어야 합니다. 부끄러워서, 난 말발이 약해서, 얼굴이 챙피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를 꺼리는 자들은 하나님 의 군대하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른 뼈들과 같은 존재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성령이 그 안에 임하시면 이제는 하나님 의 군대가 되어 일어나야 합니다. 능히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책임있는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늘 똑같은 \\\"죄송합니다\\\"를 반복해야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자기 하나의 믿음조차 추스리지 못하여서 늘상 기죽고 주눅들어 살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의 군대가 되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 분의 뜻과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십시오. 가는 곳마다 악한 영들을 대적하여 평강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시게 하는 군병이 되십 시오. 맺음말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권능과 성령에 이끌려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이 변해버린 내 민족과 이웃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을 향하여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므로 변화되고,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큰 군대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은 명령하고 계십니다. 추수할 일군이 없는 이 때에 너희가 가서 일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 상 그 일에 힘쓰고 그리스도의 큰 군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지고 이 부름에 응답하여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장차 주실 영원 한 상급과 면류관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극히 큰 군대더라/ 겔37:10
극히 큰 군대더라 겔37:10 서 론: 에스겔이 본 환상 중에서 골짜기에 아주 말라빠진 해골이 심히 많았던 것이 나중에 큰 군대로 부활(復活)하는 놀라운 이적이 가 장 대표적일 것이다. 그 영적 교훈을 다시금 깨닫자. 1. 아주 말랐던 해골이다. 뼈들(體骨)이 아주 말랐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아주 절망적인 상태 이다. 해골이란, 죽은 사람의 시체(屍體)가 썩고 썩어 근육부분은 다 없어지고 기본 뼈대만 남은 실정이다. 그래서 아주 말랐다고 하였다. 일단 생명이 끊어진 시체이면 죽은 직후이나 오래 되었거나가 문제되 지 않을 것이나, 그래도 아주 말랐다는 표현은 일호의 소망도 없고, 부활 가능성을 도저히 상상도 못해 볼 정도인데도 결국 부활하여 큰 군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들이 어떤 부패한 상태에 빠지고 아 주 절망적인 극악무도한 죄인의 상태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교 훈해 준다. 2. 산산히 흩어져 있던 해골이다. 해골이라고 원형체(原形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산 산히 흩어져 있는 상태로서 머리뼈나 허리뼈나 발목뼈 등이 제각기 굴 러다녔다. 그런데 예언을 따라 먼저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 이 서로 연락하였고, 각기 제 위치에 원상복귀되었다. 발목 뼈가 머 리에 붙지도 않고 손가락 뼈가 발에 붙지도 않아 질서정연하게 각기 제 자리에 돌아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그 위에 가죽이 덮였다. 즉, 신경(神經)이 연결되고 근육(筋 肉)이 오르고 피부(皮膚)가 덮혀졌으니 의젓한 사람이 된 것이다. 생 기만 없을 뿐 심장이 움직여 호흡작동만 멈춰 있는 상태이다. 3. 생기(生氣)가 들어갔다. 여기 생기는 원어에 \'숨\'인데 창 2:7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도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고 하였떠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났다. 뼈들과 같은 기본적인 교리로만 성립된 교회는 해골교회다. 성령의 역사로 인한 신령한 생명운동이 교회에 절대 필요하다. 결 론: 해골 중에 아주 말랐던 것들이 큰 군대를 이루웠으니 이는 살리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요, 기적 중에 기적이다.
기다릴 줄 아는 용사/ 삼상26:1-12/ 2004-03-22
기다릴 줄 아는 용사 삼상26:1-12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남한에서만 부르지 않고 북한에서도 부릅니다. 그런데 원래 남한의 버젼과 북한의 버젼이 가사가 조금 달랐습니다. 그런데 남북교류를 하면서 아마도 가사를 통합한 것 같습니다. 남한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이렇게 불렀는데 북한에서는 ‘통일이여 오라’라고 하지 않고 ‘통일을 이루자’라고 불렀습니다. ‘통일이여 오라’와 ‘통일을 이루자’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버젼이 더 옳습니까? 우리는 통일이 오기를 기다려야 됩니까? 아니면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됩니까? 그것은 민감한 정치적인 사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는 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될지, 아니면 우리 손으로 직접 이루어야 될지 모를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혼을 놓고 생각을 해봅시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은 애가 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짝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너가 좀 짝을 찾아봐라’ 이렇게 아마 독촉을 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만은 막상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짝을 어디서 찾습니까? 무슨 세상 젊은이들처럼 나이트클럽에라도 가서 찾습니까? 그것처럼 막연한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우리는 젊은이들의 고충을 이해를 해주어야 됩니다. 저의 먼 친척 되시는 분이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나니까 마음이 허전하더라는 것입니다. 외롭더래요. 어느 날 저녁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나갔다가 어떤 여자 분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급진전을 해서 결혼에 골인하게 됐는데, 불행하게도 그 결혼이 오래 지속되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 양반이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 외롭다고 너무 서둘렀어’ 여러분 위급함만이 사람을 서두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로움도 우리를 서두르게 할 수 있고, 한가함도 우리를 서두르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한가한 것을 참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백수로 40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물론 장인의 양을 친다고는 하지만 그건 자기 소유의 양무리도 아니고 자신의 소명도 아닙니다. 할 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시간을 앞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40년이라는 시간을 다 채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났더니 길이 비로소 열리더라는 것입니다. 영어속담에 ‘Haste makes waste\'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두르면 망친다‘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일도 서두르다가는 망치기 쉽습니다. 신앙에도 이같은 갈등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뜻을 보여달라고 기도합니다만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 ‘W\'를 알아야 된다고 합니다. 첫 번째 ’W\'는 ‘Word\'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되고, 둘째는 ’Will\'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한가지 더 있습니다. ‘Way\'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을 알아야 됩니다. 예컨대 우리가 부산을 가겠다고 했을 때, 목적지는 정했습니다. 부산을 갑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탈수도 있고 차를 몰수도 있고, 오늘 갈 수도 있고 내일 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지를 정하는 것과 방법을 정하는 것이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목적지를 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통하여 이루실 것이냐, 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장차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리라’ 기름부음을 통해서 장차 임금이 될 것을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당시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임금이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심으로 이제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떤 방법으로 다윗이 임금이 될 것인지 그건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다윗이 스스로 발견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다윗의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을 보면은 이스라엘에는 지금 사울이라는 임금이 있습니다. 그는 좋은 임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버렸습니다. 이미 임금이 있는 상황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미워합니다. 자기의 사위인데도, 그를 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군대를 데리고 토끼 사냥하는 것처럼 다윗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를 찾으면 그를 처형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은 사울이 다윗을 쫓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십 광야라는 곳에서 사울도 잠이 들고, 군사도 잠이 들었습니다. 그 곳에 다윗이 매복해서 잠입했습니다. 절호의 찬스입니다. 만일 지금 다윗이 사울을 제거해버린다면 다윗은 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 것은 정당방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을 차기 임금으로 지명하신 것이 아닙니까? 사울을 제거해버리면 다윗은 아주 쉽게 임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다윗은 자기 스스로 제동을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비록 내가 임금이 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 방법으로 임금이 되지 않겠다. 아주 중요한 결단을 내립니다. 이 방법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보면은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한번 따라해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신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윗의 믿음과 인격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이 구절이 핵심구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면 우리의 인내와 희생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건 무의미한 종교행위에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에는 보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그걸 다윗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실 때 자꾸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에게 증거를 보여주시오’ 이런 기도하지 마세요. 그건 하나님이 들으시기 에는 불신으로 들립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리고 그 믿음에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결과가 나타날 때 그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그 믿음은 여러분의 믿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 후반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그랬어요. 하나님이 사울과 군사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죽여도 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잠들게 하셨으니까. 다윗이 죽여도 된다 그런 뜻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길에 가시다가 백 만원이 들어있는 봉투를 주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준 겁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게 유익이 되는 방법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건 그리스도인답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다윗과 비교를 해보면은 우리는 너무 적에게 관대할 줄을 몰라요. 너무 조급하고 잔인하고 인내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 줄을 모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관용을 베풀면 우리가 관용을 베푸는 그 공간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장차 다윗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 다윗이 자기 손으로 자기 스스로를 임금으로 세우면 임금이 되기는 하겠지만 거기에는 별로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은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게 하시면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고 다윗의 원수 마져도 다윗을 축복하게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주 중대한 차이점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은 25절 말씀을 보시면은 사울이 잠에서 깨어나서 다윗이 한 일을 깨닫고 말하기를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지금 이 말이 누가 하는 말입니까?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그 원수 마져도 축복합니다. 만일 오늘본문 말씀을 불신자가 읽는 다면은 다윗이 좀 답답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무기력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골리앗과 싸울 때 물 맷돌 던진 사람이 맞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은 골리앗에게 물 맷돌 던지는 것도 믿음이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참음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잡히셨을 때 사람들이 온갖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완전히 범죄자로 몰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안 하셨어요. 묵묵부답 하셨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 그건 예수님이 무력하시기 때문이 아니예요. 당신을 변론하는 일을 아버지에게 완전히 맡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희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을 변론하는 일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맡겼더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심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부활입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을 믿지만 믿음을 해석하는 신학에 따라서 믿음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교로 이어지는 알미니안 전통은 사람의 의지를 강조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사람의 의지와 선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개혁신학에서 시작해서 장로교로 대포 되는 칼빈 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합니다.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취향에 맞으십니까? 저는 원래는 전자 쪽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 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그런 식으로 믿었습니다. 그것도 옳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까, 예수를 믿다보니까 신앙이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첫째는, 살다보면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야곱이 결혼할 때 누구와 결혼하려고 했습니까? 라헬과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누구와 결혼을 했습니까? 레아와 결혼을 했어요. 그 장인이 그를 속인 것입니다. 전기 불이 없기 때문에 속았어요. 라헬을 사랑하고 라헬과 결혼하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레아와 결혼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레아의 혈통을 쫓아서 누가 태어났느냐 면은 유다라는 아들이 태어나고, 유다의 혈통을 쫓아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선택한 것이 아닌 삶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일 이루 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를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남편을 죽게 하지 않습니까? 다윗의 일생일대의 실수입니다. 그 결과로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만은 다윗과 밧세바를 통해서 누가 태어나느냐 면은 솔로몬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혈통을 쫓아서 예수님이 탄생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실수예요. 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세 번째는 때로는 우리가 바꾸고 싶지만 바꿀 수 없는 현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고난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병자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병을 벗어버리고 싶지만 벗어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몸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 장애를 벗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선택하지도 않았고 바꿀 수도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믿어도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바꿔주시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온전한 뜻을 이루신다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알 수만 있다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꿀 수 없었던 그의 현실이 바로 육체의 가시입니다. 그 가시가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추측을 하는 중에 저는 그 가시가 그의 수감 생활이 아니었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할일 많은 사도 바울, 복음도 전해야 되고 할 일이 많은데 감옥 속에 들어가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했을 겁니다. 나로 하여금 감옥에서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 속에 있으면서 할 수없이 글을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글이 무엇이 됐습니까? 바울 서신이 돼서 신약성경의 반 이상을 차지하게 됐어요. 그러니 바울의 관점에서는 이게 얼마나 희생이고 손해인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게 손해가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온전한 뜻을 이루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어떻게 사람이 자기의 머리로 이것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믿음을 통해서,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장은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돌아보면서 ‘내가 과거에 이 일이 참 고통스럽고 힘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았는데, 그 과정을 잘 인내하고 돌아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흔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거기에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함께 하셨다.’ 그렇게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모든 것’ 이라고 하지 말고 ‘모----든 것’ 거기에는 우리의 성공도 들어있고, 실패도 들어있고, 장점도 들어있고, 단점도 들어있고, 잘한 일도 들어있고, 못한 일도 들어있고, 자랑스러운 일, 부끄러운 일,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일, 숨기고 싶은 일, 기억하고 싶은 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거기에 다 포함돼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합력하는 것입니다. 마치 팬케이크를 만들 때 밀가루와 계란과 우유와 설탕과 버터 등을 다 합쳐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팬케이크를 먹을 때 계란을 먹는 게 아니 예요. 버터를 먹는 게 아니고 그 모든 것이 합해서 만든 팬케이크를 먹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행하시는 일은 그 속에는 우리의 아픔도 있고, 좋은 일도 있고, 장점, 단점이 다 들어갔는데, 하나님이 큰 일을 이루실 때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아 나의 아픔이 여기 있다’고 말하지 않고 ‘내 단점이 여기 있다 내 장점이 여기 있다’라고 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이 합쳐서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놀라운 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 보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삽니까?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때로는 내가 무엇을 바란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란다고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합하여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것을 보여주리라’ 할렐루야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것’ 왜 알지 못합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원수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알 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도 알 지 못해요.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방해하겠습니까?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게만 하면 승리 할 줄로 알았어요. 그러나 마귀가 알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을 죽게 하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마귀가 말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섭리가 이루어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스데반이 돌로 맞아 순교를 하니까 그걸 지켜보고 있던 사도 바울이라는 청년이 결국은 그 영향으로 예수를 믿게 되고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오히려 복음의 역사가 더 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비밀이라는 겁니다. 사람도 모르고 육신으로 알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나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느니라’ 계시, 기독교를 계시의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사람의 육신의 눈에는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자 그 이름으로 부름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베일에 덮여 있던 당신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미리 알았더라면 감사했을 텐데, 기뻐했을 텐데, 그걸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불평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손해를 본 것 같지만 그건 손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을 다윗이 믿음으로 연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