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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을 맺는 남선교회/ 눅8:4-8/ 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결실을 맺는 남선교회 눅8:4-8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에서 이 \\\'씨\\\'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또 \\\'밭\\\'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심령을 말합니다.그래 서 \\\'씨를 밭에 뿌린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심령의 밭에 뿌린다 고 그렇게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씨앗이 결실치 못한 이유는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서 새가 줏어 먹었 고,또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또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 기운을 막았기 때문이다 고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세 종류는 그래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단 한 종류만,바로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6절에 \\\"더러는 바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라고 했습니다. 외부적인 환란때문에 멸망당했다고 이야기하지 않 습니다. 뜨거운 태양때문에 그 나무가 죽었다고 하지않고 \\\'습기가 없으므 로\\\'라고 말합니다. 내부적인 문제입니다. 그 토양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위 에 있는 핍박이 문제가 아니었고, 위에 있는 환란이나 여러가지 질고가 문 제가 아니고 이 토양 자체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입니다. 왜 바위에 떨어진 씨가 결실치 못하고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 까? 먼저 씨가 나빴어도 아닙니다.흙이 없었서도 아닙니다.온도가 없어서 도 아닙니다.바로 습기가 없어서 결실치 못했습니다.습기가 없으면 모든 흙 이 아무리 좋아도,씨가 아무리 좋아도,그리고 온도가 아무리 적당하게 오랬 동안 보온이 되어도 그 씨앗은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 활에 있어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이 습기가 있어야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습기에 관해서 함께 생각해 봄으로써 은혜를 나눌려 고 합니다. 먼저, 이 습기는 눈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는 데는 눈물의 습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눈물없는 심령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들여도,수긍해도, 심령이 뜨거워 져도 그만 말라 비 틀어지고 맙니다.눈물은 이렇게 모든 것을 결실을 맺도록 만듭니다.눈물이 없으면 아무리 그 말씀이 좋고 기쁨으로 받아 들였어도 마지막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이 있는 사람하고 없는 사람하고는 이 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눈물 흘리는 심령에게 하나님은 계속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능력 도 주시고, 또 하나님의 귀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는 겁니다. 이런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새로워지고,하나님의 능력이 임 하게 되고,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언제나 체험되는 그런 사랑받는 자가 되 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 앞에서는 약하십니다.눈물 속에 많은 응답을 주시기도 합니다.눈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장래도 인도하여 주십니다. 열왕기하 20장 1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그만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심히 통곡하며 눈물로써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열왕기하 20장 5절 말씀에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3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15년을 더할 것이며\\\"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그렇다 고 해서 아무렇게나 찔끔찔끔 우는 그런 눈물은 필요하지않습니다. 하나님 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눈물은 먼저,통회의 눈물입니다.회개의 눈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기 잘못을 깨닫는 회개의 눈물이 없이는 자기 신 앙이 죽습니다. 신앙은 회개의 눈물이 끝날 때 죽기 시작합니다.다 소멸합 니다. 그러나 회개가 있는 한 죄는 우리에게서 승리하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 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요한일서 1장 9절에 약속하셨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 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잠언 28장 13절에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여러분에게 하루,하루를 살면서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잘못했다고 하는 뜨거운 눈물의 회개가 있습니까? 회개의 눈물이 없이 후회만 했던 가룟 유다는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는 닭이 울때 목을 놓아 하나님 앞에서 통곡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큰 기둥으로 새롭게 쓰임받게 되어졌습니다. 그후에 베드로는 일평생 새벽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일어나서 눈물 로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죄는 죄가 죄인줄을 모르는 죄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한 모든 죄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하면서 자기 잘못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 는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다윗은 자기 죄 때문에 침상을 적시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 눈물로 기도하는 이 회개의 눈물,통회의 눈물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그렇게 눈물흘린 자에게 결실을 맺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 다음에 또 주님이 기뻐하시는 눈물은 감사의 눈물입니다. 감격의 눈물 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보니까 너무,너무 고맙습니다.보혜사 성령을 내게 보내 주시사 예수를 믿게 만드시고,온 우주보다 더 귀한 영광으로 나에게 역사하 여 주시고,하늘의 시민권을 나에게 주셔서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시민으 로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며 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바로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은총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눈물흘리며 감사,감격하는 모습 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지금도 함께 하시고,영원까지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축복으로 다 인도하십니다. 그리고,우리 죄를 다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해 주셨고,하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사 지금 이시 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고, 내 속에 있는 성령과 여러분 속에 있는 성령은 지금도 기뻐하면서 우리에게 은혜위에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세상 축복은 하나의 덤에 불과합니다.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실제 적인 축복은 지금 우리가 이미 다 받았습니다.영원전부터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의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요, 가장 영광의 사람이요,가장 축복의 사람입니다.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런 긍 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의 축복도 우리하고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예수 믿는 믿음하고는 절대로 바꿔서는 안됩니다. 이 예수 믿는 믿음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에 이 세상의 어떤 부귀 영화로 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이 믿음 속에 내세의 영원한 것, 영원한 축복, 영원 한 영광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다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이 영적인 감사가 하늘의 보좌 앞에까지 끊임없이 올라가야 됩니다. 이 영적인 감사에 대해서 우리는 눈물로써 끊임없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죽을 뻔하다가 살면은 감사하는데 죽을 뻔한 사건까지도 없 게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 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인도하십니다.지금도 매 순간,매 시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이 순간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고 이 자리에 나올 수도 없습니다. 하루 하루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한 시간도 살 수가 없고, 1분 1초도 살 수가 없습니다.왜 어려운 환난 가운데서 건져주면 감사 하고 그 어려움까지도 없이 안전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시면 왜 감사가 없습 니까? 왜 깨닫지를 못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영육간에 놀랍도록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놀랍도록 우 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이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날마다 감격을 느끼며 감 사하는 이 감사의 눈물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이 감사의 눈물을 늘 흘리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 습니다.성령 충만을 더 많이 받습니다.이 감사의 눈물이 많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에 보다 많이 동참하게 만듭니다.하나님은 이 감사를 통하여 많은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한데, 내가 구원받은 것이 너 무 감사한데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들이 어쩌다가 저렇게 예수 안 믿고 지옥에 떨어질까! 불못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할텐데 \\\",하면서 예수 믿지 않은 그들을 바라볼 때 나 도 모르게 가슴이 아픕니다.마음이 답답합니다.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 믿자고 전도합니다.교회 나가자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살 아 계신다고얘기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함께 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 믿기만 하면 영원히 구원받는 것을 때를 얻든지 못얻 든지 항상 전합니다. 여러분! 내 일가 친척이나 친구가 지금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아무런 눈물이 없다면 아직도 우리는 은혜 충만치 못한 사람입니 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많은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 다. 이 사랑의 눈물,동정의 눈물,연민의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 나와야 합니 다.그래서 이 사랑이 많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습니다. 이 눈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이 눈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습니 다. 다음으로, 이 습기는 땀을 의미합니다. 땀은 노력을 상징합니다.열심을 의미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나서 결실을 얻기까지 땀흘려 노력하는 것처럼 하나 님의 말씀을 받는 심령도 노력하는 땀이 없이는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잘 자라지 못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땀흘리는 노력없이는 신앙도 성장하지 못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반드시 땀을 흘려야 결실을 맺는다면 하나님의 것, 영적인 것은 더우기 땀을 많이 흘려야 됩니다.땀을 흘리는 열심이 있어야 됩니다.육신이 살기 위해서도 그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데 영적인 생활을 위 해서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영이 자라지 못합니다.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영적인 일에 땀 흘리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영적인 일을 위해서 우리가 땀을 흘려 나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 지 모릅니다.우리 가 예수 믿는 것도 열심이 있어야 됩니다.그래야 우리 믿음도 자라고, 그렇 게 열심이 있어야 하늘 나라에서도 많은 상급을 우리가 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위하여 흘린 이 땀은 반드시 하늘 나라에 보화입니다. 내 땀이 한 방울 흘릴 때 그 땀 한 방울은 금 한 돈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다 이어몬드 하나보다 더 귀합니다. 우리가 세상 보화는 보화인 줄 알면서 예 수님 위해서 흘린 이 땀은 보화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영적인 세계를 깊이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예수님 위해서 흘리는 이 땀은 천국의 보화 가 되고, 나의 이 땅의 보화보다 훨씬 귀중한 영광의 보화가 되어 집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열심히 땀을 흘려야 됩니다. 열심이 있어야 됩니다.전도 하느라고, 봉사 하느라고,집사 하기 위해서, 교사 하기 위해서 땀 흘리면서 열심을 내야 됩니다. 그러면 믿음이 쭉,쭉,쭉 자랍니다. 내게 믿음이 있어야 열심도 내지만 또한,열심을 내야 믿음이 자랍니다. 열심을 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열심을 내야 결실을 맺도록 하나님이 인도 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 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예수님도 땀 방울이 피방울처럼 뚝, 뚝,뚝 떨어지는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땀을 흘리고,전도할 때 땀을 흘리고,봉사하면서 땀을 흘리는 것은 하늘 나라의 보화가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습기란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피흘려 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피흘 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피로 값주고 산 우리들에게도 바로 하늘 나라의 영 광을 다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피흘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았습니다.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로,공짜 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받는 모든 상은 예수 믿은 다음에 이 믿음을 얼마나 활용하고,믿음대로 얼마나 살고,하나님의 말씀대로 얼마 나 순종했느냐에 따라서 그 모든 상급은 달라집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그 큰 영광을 함 께 누리기를 원합니다.하늘 나라의 모든 보좌에 함께 앉기를 원하십니다.영 광의 자리,거기서 세세토록 왕노릇 하기를 원하십니다.면류관 주기를 원하 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면류관을 줄 수가 없습니다.그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는 비결은 바로 나도 예수님을 위해서 피흘릴 각오로 피흘림의 증거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피흘리는 각오를 가지고 순교정 신으로 산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하여 영광의 주인공이 되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 말씀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 항치 아니하고\\\"라고 하면서 우리가 피흘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 계시록 2장 10절 말씀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 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피흘리기까지 죽도록 충성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피흘리기까지! 그래야 영광의 귀한 사람이 됩니다. 피흘리는 사람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렸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모든 것을 전부 다 주십니다.피흘리는 사람이 가장 큰 성공자 입니다. 순교한 사 람, 순교할 각오로 사는 사람,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습니다.이보다 더 영광의 사람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 피흘릴 각오로 살아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피흘릴 각오로 영광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피흘렸었는데 나도 예수님을 위해서 피흘려야 하지 않겠습니 까? 여기 만 볼트의 전류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백 볼트 전구를 연결하면 그 백 볼트는 그만 터지고 맙니다.이 만 볼트의 전류가 흘러가면 받아 들이는 것도 만 볼트로 받아야 이것이 연결됩니다.마찬가지로 에수님 은 사랑은 엄청난데 그 사랑을 받아 같은 보좌에 앉는 영광의 사람은 나도 피흘릴 각오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 다.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성공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영원한 영광의 사람은 아닙니다. 부끄러운 구원 을 받는 자에 불과합니다.그러나 정말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아는 사람은, 정말로 축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할 기회를 주시 옵소서. 하나님이여,나로 피흘릴 각오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게 하여 주 시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가장 영광의 사람입니다.가장 성공적인 신앙인입니다. 영원히,영 원히 천사도 흠모하는 가장 귀한 사람입니다.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부러워 하고 천사도 부러워 하는 사람입니다.그런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 남선교회 회원들과 관문교회 교우들은 부끄러운 구원받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이렇게 면류관의 주인공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내 생명을 걸고 순교정신으로 예수를 믿어야 됩 니다.순교정 신으로 교회 출석도 해 봅시다.순교정신으로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와서 기도해 봅시다.순교정신으로 전도도 하고,봉사도 해 봅시다.순교정신으로 원수도 사랑해 봅시다. 여러분, 이 자리에 습기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장성하지 못하신 분이 있습니까? 습기가 없어서 심령에 기쁨과 평강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 습기가 있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눈물이 없고,땀흘림이 없고, 피흘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그래서 신앙에 확신도 없고 내세의 상급도 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바위 위에 습기가 없게 됩니까? 이는 바위가 깨어지지 아 니하니까 습기가 없습니다.바위가 깨어져서 가루가 되면 옥토가 됩니다. 그러면 바위는 어떻게 깨야 됩니까? 부숴 뜨려야 됩니다.때려 부숴 뜨려 가루를 만들어야 됩니다. 바위 같은 내 심령에 습기가 있기 위해서는 내 심 령을 깨뜨려야 됩니다.내가 눈물을 흘리고,땀을 흘리며,피를 흘릴 때 바위 같이 단단한 내 심령은 성령께서 깨뜨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 습기가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옥토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심 령에 습기가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이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내 심령도 옥토가 되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 을 맺게 됩니다. 여러분, 성령이 임하셔서 역사하도록 우리는 눈물을 주님 앞에 바칩시다. 땀을 주님 앞에 드립시다.피를 흘릴 각오로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이런 자 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6절에 \\\"더러는 바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바로 이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라고 했는데 우리 심령이 마르고,열매가 마르고,상급이 말 라진 자가 되지 아니하고 우리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열매가 충만하며, 하늘의 보화가 충만한 남선교회회원들과 관문교회 교우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리더십/요13:12-15/ 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06-11-18
교회를 세우는 리더십 요13:12-15 오늘 남녀 선교회 임원 헌신예배를 당하여 작년에 온누리교회에서 리더십의 권위자인 죤 맥스웰 목사님이 오셔서 강의한 “교회를 세우는 리더십”을 내용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여러분에게 교회를 떠나 직장과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도 참 유익하고 소중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쉬운 질문 인 것 같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짧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첫째날에 개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에게 누가 지나가든지 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20년의 수명을 주겠다. 개가 20년이 깁니다. 10년만 주십시오! 하나님이 10년에 동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둘째날에 원숭이를 만드셨습니다.하나님이 원숭이에게 장난을 하여 사람들을 웃기게 하라. 20년을 주겠다. 원숭이가 하나님에게 20년 지루합니다! 싫습니다! 10년을 돌려드립니다. 라고 하자 하나님이 동의 하셨습니다. 셋째날 하나님이 소를 창조하셨습니다. 농부와 함께 노동을 하여 새끼 송아지를 키우라.60년 기간을 주겠다. 소가 하나님 힘들것입니다. 20년만 주세요. 40년 돌려드리겠습니다.하나님이 동의하셨습니다. 넷째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먹고 즐기고 결혼하고 자녀 낳고 사는데 20년을 주겠다. 하나님! 20년 밖에 안 주세요. 소가 돌려 드린 40년과 원숭이가 돌려드린 10년과 개가 돌려드린 10년을 제게 주세요. 하나님이 동의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수명이 80년이 되었답니다. 인간은 처음 20년 동안 먹고 자고 놉니다. 40년 동안 땡빛 밑에서 노가다 하면서 가족을 위해 일합니다 .10년은 원숭이 처럼 장난하여 손녀 손자를 기쁘게 해 줍니다. 10년은 대문 앞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짖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를 듯 합니까? 이 세상에서 살았던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주어진 시간과 상황 속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지도자이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데 자기를 따르는 자가 없다면 그는 단지 짖고 있습니다.많은 지도자는 다만 산책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 텔레스가 가르친 기간은 130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작사 작곡을 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 바하 와 같은 작곡가가 영감을 얻어 메시야 찬양합니다. 시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예수님은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책이 예수님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수천년 동안 가장 영향력을 많이 미쳐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장 위대한 리더입니다. 사람들이 죤 맥스웰 목사님에게 리더십에 대한 자료를 어디서 얻었는가? 묻는다고 합니다. 맥스웰 목사님의 대답은 성경에서 얻었다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그 대답을 듣고 놀란다고 합니다. 정말이냐고 ! 정말이라고! 가장 위대한 리더이신 예수님에게서 리더십의 원리를 배웠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네 가지 리더쉽의 원리를 나눌려고 합니다. 1.리더십은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이 만일 이 자리에 계신다면 생각하고 “ 예수님이 리더쉽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리더쉽은 섬김이다. 이것을 가르칠 때 수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먼저 되고자 하면 나중이 되라\".\" 높은 사람보고 작은 사람이 되라\" \"소유하기를 원하면 베풀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말씀하셨다. 여러분 왜 리더십을 가지고 싶습니까? 권력과 지위를 얻고 싶기 때문입니까? 내가 리더가 되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겨야 합니다. 리더들 가운데 “꼭대기에 있는 것은 참 외로운 것이다.”라고 말하는 리더가 있습니다. 이것은 리더십의 참된 표현이 아니다. “마치 리더는 산꼭대기에 있고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아 ! 꼭대기에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참된 리더가 아닙니다. 리더가 꼭대기에 혼자 있으면 아무도 여러분을 따르지 않는다. 리더는 사람들이 있는 데로 내려와 사람들을 데리고 꼭대기에 함께 올라갑니다. 리더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리더는 섬김의 마음(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더가 측근에 있는 사람을 누르면 누를 수록 함께 떨어지고 측근을 일으켜 세워주면 상대방도 올리고 나도 올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리더십은 섬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때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사용하셨습니다.그러나 빌라도는 예수 죽이는 죄가 자기와 아무 상관없다는 의미로 물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의 물 사용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세워주기 위해서 였다. 빌라도의 물 사용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였다. 여러분의 리더쉽으로 자신을 섬길 것입니까? 다른 사람을 섬길 것입니까? 안정된 리더는 뻗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내려 앉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습니다.안정된 리더만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며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불안정한 리더는 “타이틀”에 관심을 가지고 지위와 위치에 매여 있습니다.그리고 불안정한 리더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리더십은 섬기는 것입니다. 2.우선 순위의 문제 예수님은 자신이 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당신이 리더가 되기를 원하다면 우선순위를 정하고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훌륭한 지도자는 활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 바울은 나는 이 한 가지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훌륭한 지도자는 우선순위를 잘 정한다. 많은 크리스쳔이 “ 목적지” “미래” 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람들은 내가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면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목적지에 매여 삽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가르침를 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예수님 언제 다시 옵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알바 아니다. 너희가 신경 쓸 것은 기도하고 성령을 받아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일을 신경 쓰지 말고 오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 오늘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제를 과장합니다. 어제는 실제보다 낫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어제를 “그 좋았던 날”들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과거를 과장합니다. 어제는 어제밤으로 끝났습니다. 과거는 잊어버리십시요. 사람들은 지난일 어제를 확대 해석할 뿐 아니라 내일을 확대해석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살 수 있는 일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룹니다. 미루는 습관이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없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과소평가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날 그 사람이 어떻게 보내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지도자로 성공할지 알 수 있습니다. 하루 동안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보면 여러분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 내가 지도자로 성공할 수 있습니까? 85% 정확성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공의 비결은 여러분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는 성공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성공을 이벤트(event)로 생각합니다. “성공은 매일 매일 이루는 것입니다” 졸업장을 손에 쥐는 순간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공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을 혼동하는데 졸업할 수 있다고 인정받는 것이 졸업장을 손에 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성공했습니다. 수업에 열심히 한 것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졸업장을 받는 것은 이미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 21가지 리더십 불변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다 과정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매일 개발 되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중요한 결정을 일찍 내립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인생 초기에 성공할 목표를 세워 평생에 걸쳐 그 일을 합니다. 평생에 걸쳐 일찍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 결정을 내리는데 신중합니다. 그런데 의사결정을 실행하는 것을 과소평가합니다. 훌륭한 결정을 내리지만 결정을 실행하는데 실패합니다. 1월 첫째주 한 결심의 70%가 2주안에 잊어버립니다. 죤 맥스웰 목사는 현재가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원칙”이라는 책에서 \"오늘을 사는 원칙\" 12가지를 소개합니다. 오늘을 위하여 - 12가지 아침마다 확인한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 나는 올바른 태도를 선택하고 몸으로 보여줄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좋은 가치를 포용하고 실천할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가족과 대화하고 그들을 돌볼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건강한 지침을 배우고 따를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중요한 우선 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 할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책임을 받아들이고 보여 줄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적절한 의무를 완수하고 책임을 다할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돈독한 인간관계를 쌓기 위해 애쓸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돈을 벌고 그것을 제대로 관리할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매일 믿음의 깊이를 더하고 그 믿음을 유지할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오늘 하루를 위하여... 나는 남에게 베푸는 것을 통해 타인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한 달 동안 한 원칙만 합니다. 한 원칙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1973년에 시작 40년 동안 하였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살은 하루 하루의 삶에 달려 습니다. 그렇다면 성공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성공은 내 삶의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자기가 왜 이 땅에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때 인생을 살아가는데 힘과 안정성이 있습니다. 2. 성공은 내가 가진 최대한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언제나 자라가고 있고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3. 성공은 계속 씨를 뿌리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 뿌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뛰어 넘어 사는 삶입니다. 죤 맥스웰 목사님은 40권의 책 집필하였다 그 책 가운데 “생각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어떻게 사고하고 생각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품는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있는 자리는 우리의 생각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오늘 생각하는 것이 내가 있을 곳을 결정합니다. 3.관계성입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공유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황금률은 “우리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대로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관계가 모든 리더십의 초석이 됩니다. 사람을 효과적으로 리더하기 위해 그들과 효과적으로 지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관계를 맺지 않고 싶은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 사마리아 여인, 병든 사람. 관계가 전통보다 중요합니다 〈사람을 이기는 방법 25가지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람법칙 * 망치의 법칙(해머): 상대방의 이마에 있는 파리를 죽이기 위해 망치를 사용하지 마라 - 과대반응의 법칙 :어떻게 반응하는냐에 따라 상황이 더 악화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부부 싸움에서 이기고 싶습니까? 지고 싶습니까? “싸움에서 이겼어도 사랑이 잃어간다”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 환경을 관계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 * 예수님은 단 한번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관계가 중요한 것을 아셨다 그것은 좋은 태도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4. 예수님은 팀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성공하기 위해 팀을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서를 연구하면 성공적인 팀을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멘토했는지 예수님은 팀을 만들기 위해 4가지를 했습니다 1) 일상적인 삶과 연관된 삶의 현장에서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가르쳤습니다. 일상적인 삶과 사람들을 통해서. 2) 지식 전달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3) 삶의 현장에서 노출하게 했다. 경험하게 했다 - 직접 사람들을 리더하게 했습니다 4)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책임지게 했다 - 그들이 자기들이 어떻게 했는지 스스로 평가하게 했다(보고하게 했다) 우리는 모두를 훈련시킬려고 한다. 헌신된 사람에게 집중해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모든 사람과 똑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예수님은 군중보다 제자들과 더 많은 시간을 가졌다.예수님은 제자가운데 세 명의 제자가 측근이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예수님이 늘 세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어디로 사라졌을때 9명의 제자가 무슨 대화를 하였을까요? ‘왜 예수님은 세놈들만 데리고 가는가?’ 저 모양 눈에 거슬린다‘ ‘왜 똑같은 사람인가?’ ‘정말 짜증난다’라고 말하는 제자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제자들은 ‘나는 신경 안 써 그들이 돌아올때까지’라고 말하는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내려와서 주둥이를 가만히 두지 않아 거기서 세 개의 장막을 짓는다고 했는데 거기서 짓고 거지 있지 왜 내려왔어“ 하고 말하는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제자가 도마에게 “도마야 ! 예수님이 너한테는 다른데 가자고 말 안했니?” “아니 한번도 없고 앞으로 말씀하시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어떤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소수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사람들과 시작해야 합니다.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측근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리더십의 네 가지 모습은 리더십은 섬기는 것이다. 우선순위의 문제. 관계성의 문제, 어떻게 팀을 이루셨는지 보여주셨다. 여러분의 부서에서 이 네가지 원리를 적용하여 보시고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인생에서도 이 원리를 적용하여 본다면 여러분의 인생이 놀랍도록 변화될 것이며 여러분이 바로 리더로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 살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궁신지화(窮神知化)/ 출3:14, 요17:3/ 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06-11-12
궁신지화(窮神知化) 출3:14, 요17:3 이찬교 1. 영생이란 공동번역 히브리서 6장 1절에 “우리는 초보적 교리를 넘어 서서 성숙한 신앙의 경지로 나아갑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은 초보적 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성숙한 경지에 이른 신앙인이라고 믿고 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3절을,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요한 웨슬레는 요한1서 4장 18절을, 유영모 선생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3절을 좋아하셨답니다. 요한은 17장 3절에서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문인데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라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이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하튼, 여러분은 영생을 오래 사는 ‘장생’이라고 혹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시나요? 다음 이야기를 통하여 영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당나라 때 공부를 많이 한 덕산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만 하고 있는 스님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을 하는 스님들이 있는 절로 떠났습니다. 절 앞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점심때였습니다. 그는 길가의 떡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점심 좀 주세요.” “어서 오시오, 어서 짐을 내려놓구려.” 떡을 파는 할머니는 친절하게 말하며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짐은 참 무거웠습니다. 피땀 흘려 연구한 책을 가져온 것입니다. 떡 파는 할머니는 깜짝 놀라 이 무거운 것이 다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자기의 연구논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굉장한 학자이구려.” 그 말에 스님은 만족한 얼굴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 물을 것이 있소. 내가 지금까지 깨치지 못한 말이「금강경」속에 있는데 그것은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란 말이요. 당신이 지금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도대체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는 것이요?” 과거심은 지나갔으니 찍을 수 없고 미래심은 오지 않았으니 찍을 수 없고 찍을 수 있다면 현재심 뿐인데 현재심도 찍으려는 순간 사라지고 마니 현재심이라고 찍어질 것 같지가 않다. 스님은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섰습니다. 노파는 떡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산골 노파의 질문하나 대답할 수 없는 스님은 슬펐습니다. 자기의 입장이 어딘가 잘못된 것임을 느꼈습니다. 생각해 보면 자기의 입장이 뚜렷하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석가의 말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외우고 그것을 해석해 보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자기의 시간관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관이었습니다. 마음에 점을 찍었다는 말은 입장을 가졌다는 말일 것입니다. 이 점심이야기를 통하여 영생은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을 초월한 즉 4차원을 넘어선 것이지요.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말은 시간을 초월한 즉 생사를 초월한 깨달음이 영생이라는 것이죠. 어떤 깨달음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죠, 그런데 이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알 것 같으면서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스님은 자기가 가져온『금강경』주석을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이 잘린 사람처럼-사실 노파의 보이지 않는 칼에 목이 잘리기도 했지만은- 노파 앞에 무릎을 꿇으며 천 번 배례하고 불씨를 부탁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 줄 스승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노파는 여기서 십리를 더 가면 용담원에 용담 스님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천재일우에 만난 이 스승에게 그는 마음의 문을 열고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스님은 밤도 늦었으니 물러가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서야 덕산은 자기로 돌아와 스님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은 칠흑 같은 암흑이었습니다. 덕산은 첫 길이라 동서를 분간할 수 가 없었습니다. 덕산은 스님을 향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용담은 초에 불을 붙여 덕산에게 주었습니다. 덕산이 토방으로 내려서자 용담 스님은 촛불을 탁 불어 꺼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 덕산은 굉장히 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덕산이 가만히 서 있으니까 차차 훤해지기 시작했으며 차츰 별이 나타나고, 먼 산이 보이기 시작하여 대문이 나타나고, 어느 정도 훤해진 속에서 덕산은 자기발로 걸어서 대문을 나서 자기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금년 여름 어느 날 밤 저는 친구와 함께 당진의 대호방조제에 밤낚시를 하러 갔었습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더군요. 왜 그 별들이 낮에는 보이지 않았을까요? 태양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요. 클 태 거짓 양 즉 큰 거짓인 태양에 가려서 저 광활한 우주가 보이지 않은 것이죠. 태양을 꺼야 비로소 우주가 보이는 것이죠. 그래서 하이데거를 전공한 외국어대 이 기상 교수는 태양을 끄라고 얘기합니다. 촛불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알고 있는 지식, 즉 이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 한계를 넘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나아가야 깨달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을 넘어서 있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은 우상일 뿐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병아리가 되듯이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이 자기중심적 사고의 틀을 깨고 보다 넓고 다른 높은 차원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님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2. 하나님 체험 (1)모세의 하나님 체험 그러면 이런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체험한 분이 누가 있을까요? 모세와 예수님이 떠오르네요. 먼저 모세의 경우를 보지요.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엘(로힘)(2,500회)이라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고, 이집트는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지요. 엘은 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태양신은 힘이 있는 보이는 신이었지요. 모세는 ‘보이지 않지만 계시는 분’인 ‘여호와’(6,700회)을 체험하지요. ‘여호와’는 ‘ehyeh’라고 발음되는 히브리어인데, 모세가 하나님을 체험한 출애굽기 3장 14절 “ehyeh aser ehyeh”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 어근 ‘hyh’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닌 ‘미완료형 동사형’의 이름이랍니다. ‘hyh’의 동사는 1인칭 단순 현재시재, 미래시재, 사역동사로 쓰일 수 있는데, 위 구절은 각각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희와 함께 하리라\\\', ‘존재자를 있게 한 존재\\\'의 뜻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존재 중심으로 보면 스스로 있는 자요. 존재자 중심으로 보면 존재자를 있게 한 존재지요. 그러니 첫째, 셋째가 하나요. 또한 시간을 초월하면 셋이 하나이지요. 모세는 이런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죠. 기독교는 계시종교인데 무슨 체험이냐고요? 계시와 체험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보면 계시요, 사람중심으로 보면 체험이지요. 별이 보인다는 것은 별이 보여주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이죠. 모세가 깨닫고 체험한 것은 생명이 있게 한 분, 즉, 생명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만물의 어버이)이라는 거죠. 그리고 이 근본체험을 하고 이스라엘백성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킵니다. (2) 예수님의 하나님 체험 다음 두 성경구절을 통하여 예수님의 하나님체험에 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 나오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요한복음 10장 38절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내재)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초재)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자비라는 히브리어 원어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어머니의 품속 글자의 복수형이라죠. 그렇다면 이 두 구절을 동양적 언어로 가장 잘 이해한 말이『주역』「계사전하」5장에 나오는 窮神知化가 아닐까 합니다. 窮자는 굴속에 몸이 들어 있는 또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의 품속에 우리 몸이 들어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글자이니까요. 그리고 요한복음 10장 38절 말씀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비유는 “태양을 머금고 있는 이슬의 모습” 또는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는데 알 속에서 병아리가 생겨 그 껍질을 깨고 나오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3.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이슬 속에 있는 태양, 알 속의 병아리인 예수님을 여러분은 어떤 분이라 생각하세요. 마태복음은 유태사람을 위해서, 마가복음은 로마사람을 위해서, 누가복음은 희랍사람을 위해서, 요한복음은 동양 사람을 위해서 씌어졌다고 합니다. 어느 문화권이냐에 따라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죠. 그것은 그 문화권의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하기 쉽도록 썼다는 것이겠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 중 “데오스 엔 호 로고스”를 한국 사람이 가장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번역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俱胝和尙 凡宥所問 胝竪一指 구지화상 범유소문 지수일지 구지화상은 누가 와서 어떤 질문을 하여도 손가락 하나를 내 세웠습니다. 구지 밑에는 심부름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자기가 스님의 뜻을 아는 것처럼 손님이 와서 ‘스님 계신가?’ 하고 물으면 으레 손가락을 내세웠습니다. 이 손가락에 깊은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 사람들은 이 어린애에게 질려서 스님을 만나 보지도 못하고 가버리곤 했습니다. 물론 스님을 만나도 손가락을 내세우는 것 이외에 아무 대답도 없을 것이 너무도 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선 어린애한테 우롱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구지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당장 어린애를 불러 사람들이 나의 행방을 물었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구지 앞에서도 손가락을 내세웠습니다. 그때 구지는 가혹하게도 어린애의 손가락을 잘라버렸습니다. 어린애는 피가 나는 손을 움켜잡고 치료하려고 뛰어갔습니다. 그 때 스님이 뒤에서 불렀습니다. 어린애는 스님의 부름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때 스님이 허공을 향하여 손가락을 높이 세웠습니다. 어린애도 따라서 손가락을 높이 세우려고 하였으나 자기의 손가락은 이미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자기의 가슴이 메어 터지게 떠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구지는 왜 손가락을 쳐들었는가 하면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손가락을 쳐든 것입니다. 물론 손가락 하나를 위로 올렸다는 말은 올라가란 말도 되고, 참을 찾으라는 말도 되고, 억만 가지로 해석해도 맞아 들어갈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를 배운다고 또는 성경을 본다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자기의 생각을 성경의 특정구절로 합리화해서 교리를 만들어 절대화하는 일이 있다면 차라리 덕산이 불경을 불사르거나 구지가 손가락을 자른 것처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고린도후서 3장 6절에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동전이 딸랑 떨어지는 순간 구원받는다.’와 같은 교회지도자들의 교리가 절대화되었을 때 루터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은 옳지만 지금은 교리나 성경이 우상이 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리나 성경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니지 않나요? 교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지 교리나 성경을 문자대로 받아 들여 하나님을 가리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각 하에서 예수님에서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글 개역판은 요한복음 1장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성경 United Bible Societies의 Today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에는 “Before the world was created, the Word already existed; he was with God. and he was the same as Go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곧” 과 “the same as”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곧’이라는 한자말은 ‘즉’이지요. 이 ‘즉’의 의미는 다음 말에서 쉽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사즉생과 사同생” 두 말은 다른 말이지요. 예수 즉 여호와지만 예수 동 여호와와는 다른 것이지요. 그리고 로고스는 ‘말씀’보다는 ‘도’로 번역하는 것이 한국 사람에게 더 와 닿지 않을까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도통한 도인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태초부터 계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당나라 때 구마라습의 제자 승조가 30세에 박해를 받아 죽음을 당하기 직전 지은시가 있습니다. 四大元無主 五蘊本是空 以首臨白刃 猶如斬春風 4대원무주 오온본시공 이수임백인 유여참춘풍 지수화풍의 4대원이 주인이 없는 것이며, 색수상행식(의식되는 상대, 느끼는 감정, 생각하는 사상, 인격적인 행동, 주체의식)의 마음도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이제 내 목이 흰 칼날 밑에 놓여 있다. 봄바람을 자르는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마음은 하나님에 속한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말도 내 말이 아니고 한국말이고, 모든 사상은 세계의 사상이지 내 사상이 아닙니다. 사상의 맨 끝으로 올라가면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맨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죠. 예수님의 가르침도 맨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죠. 요한복음 1장 11절 “그가 자기 땅 에 오셨다”, 14절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셨다”, 18절 “그 분이 하나님을 알려 주셨다”와 14장 9절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은 불교에서 석가를 화신으로 보는 것처럼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불교에서는 우주 전체가 부처라 할 때의 부처는 法身이라 하고, 또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 세상에 와서 남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化身이라 합니다. 예수는 화신이지요. 현존재지요. 예수는 여호수아의 준 말인데, 이 말의 의미는 신명기31장 8절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복을 빌어 줄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대 앞에서 가시며 그대와 함께 계시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야훼라는 말이 존재라면 예수라는 말은 요새말로 “현존재”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와 14장 24절 “이 말은, 내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廻光返照’라 할 수 있죠. 빛을 돌려서 비춰주는 것인데, 말하자면 햇빛을 달이 받아서 그 달이 다시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주는 것과 같죠. 요한복음 10:33~38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냐고 놓고 유대사람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오는 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신가의 논쟁은 여기서 끝난 것이지요. 아까 해 드린 이야기의 주인공 구두스님에 대하여 설두라는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對揚深愛老俱胝 宇宙空來更宥誰 僧向滄溟下浮木 夜濤相共椄盲龜 대양심애노구지 우주공래갱유수 승향창명하부목 야도상공접맹구 중생을 사랑하는 늙은 구지스님, 천지가 생긴 이래 이렇게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중생을 위해 뗏목을 띄워 주었으니 거친 파도에 눈먼 거북들이 뗏목에 달라붙어 살게 되었구나. 같은 이야기가 종밀이『원각경』을 끝내고 난 후에 자기의 견해를 피력한『원각경소』의 내용 중에 부목맹구난치우(浮木盲龜難値遇)이란 말이 나옵니다. 바다 속에서 오래 산 거북이 너무 오랫동안 깊은 바다 속에 빛을 못 봐서 퇴화하여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이 거북이 나중에 조물주에게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결과 조물주께서 거북의 배꼽에 눈을 하나 허락하였습니다. 이 배꼽 눈으로 무엇을 보고자 자꾸자꾸 밝은 데로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거북이 바다 위로 떠서 오래 떠돌아다니다가 떠다니던 부목을 만났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떠돌다가 만났는가 하면 千載一遇다, 천년을 걸려서 한 번 만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 거북이 부목을 붙잡고 몇 해를 돌아다니다가 부목에 생겨난 어떤 구멍, 말하자면 관솔 같은 구멍하고 배꼽 눈이 일치했습니다. 진리의 태양을 본 것이죠. 바로 예수님 같은 분을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것이지요. 예수님은 수천 년의 역사에 한 번 나온 큰 스승이시지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모세와 예수님의 하나님체험과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제 저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들을 생각해 보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밥을 먹고 그 밥의 에너지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 밥은 水昇火降의 생명현상에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물은 보통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불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데, 식물에서는 이와 반대로 물이 올라가고 빛이 내려와서 광합성작용을 하여 우리가 먹는 음식과 산소가 생기지요. 지구는 태양과 세 점을 이은 면적이 일정하게 유지하며 돕니다. 인공위성도 무중력 공간으로 가는데 조금 느리면 떨어지고, 조그만 빨라도 타 버리는데 지구가 이렇게 태양을 도는 것은 신비자체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물에 만약 장력이 없다면 우리는 태양빛에 다 타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유지되니까 광합성작용이 일어나고 지구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주가 하나님의 품속이지요. 이러한 생명현상은 리사이클링을 통하여 지속됩니다. 몇 년 전에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전’을 본적이 있습니다. 창조의 신인 ‘브라만’과 파괴의 신인 ‘시바’가 있더군요. 쌀이 만들어지는 것은 브라만이 하고 소화는 시바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화는 사실은 부패의 과정이잖아요. 이런 파괴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는 거잖아요. 죽음도 사실 이런 것이죠. 어느 스님이 잘 먹고 잘 싸야 건강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과정이 잘되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이죠. 사실 몸은 자연, ‘4대원 무주’이지요. 내 몸이지만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숨을 쉴 수도 있고 안 쉴 수도 있는 것이 아니죠. 몸은 자연이니까 자연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건강은 몸 자신을 자연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종족보전에 인센티브를 주셨습니다. 식물에게는 꽃의 아름다움을 주셨고, 사람에게도 아기를 갖고 키우는 데도 기쁨을 주시지요. 이러한 모든 것이 있게 한 분을 저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 예수님 말씀 중에서 기억에 절로 떠오른 것이 있습니까? 저는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원숭이를 화를 올린 후 원숭이의 위에 내시경을 들이대면 위가 빨갛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면 미워하는 자신이 상하고 마음에 증오심을 품으면 마귀가 되어 무역센터빌딩을 폭파하고, 그 결과는 부시의 증오를 가져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죄 없는 민간인을 살해하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숨 쉴 때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 예수님이 우리 속에 부활하신 것 아닐까요? 경제학에서는 천연자원(토지), 물적자본, 인적자본을 생산의 3요소라 합니다.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천연자원에 사람이 일을 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것만큼은 남에게 주어도 손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었으니까요.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 이것을 실천한 사례 몇 가지를 들어 신학자나 목사가 아닌 우리 평신도가 깨달음을 얻고 이것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될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친하게 지낸 목사님께서 여주에 있는 장애인이 있는 곳을 방문하면서 저에게 기독교인이 이자를 받는 것이 맞는지 연구 좀 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올해 노벨평화상과 서울평화상을 동시에 수상한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은행가인,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66) 그라민은행 총재는 지난 30여 년 동안 600만 명의 가난한 사람, 특히 여성들에게 신용대출을 해 그 중 58%를 가난에서 구제했습니다. 최근에 신문에 기사가 나왔으니 긴 설명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난지도에서 야학을 할 때 남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다는 것이죠. 희망의 단어가 없었죠, 빈곤 문화죠.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까? ‘이들을 아프리카에 옮겨 농장을 가꾸게 해야지’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잊어 먹고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는 사례를 최근『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읽었습니다. 첫 번째는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의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사례입니다.(629쪽) 에이브러햄 조지는 인도에서 태어나 인도군에 복무하다 퇴역 후 미 우주항공국에 근무하던 어머니를 따라가 뉴욕대학에서 공부하고, 국제금융 분야 소프트 전문회사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 회사를 매각하고는 인도로 돌아가서, 미국에서 번 돈을 이용해 인도를 밑에서부터 변화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그가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책임 있는 신문과 언론인 없이는 인도의 통치 수준이 개선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언론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또한 불가촉천민이 사는 방갈로르 외각에 그는 산티브하반 초등학교를 세웠고 이를 더 자랑스러워합니다. 입학생의 자격은 불가촉천민입니다.『세계는 평평하다』의 저자 토머스 L. 프리드먼이 방문해서 이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컴퓨터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 저자가 8살짜리 소녀와 컴퓨터 타이핑 시합을 했는데 그 소녀가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세계 어디서든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영어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불가능했던 지난 여러 세기 동안 불가능하기만 했던 경력과 직업을 그 들도 가질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근처에서 살면 언제나 불가촉천민이지만 그들이 다른 곳에 가면, 그리고 적절히 교육을 받고 사회화 교육을 밟는다면 그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죠. 산티브하반 학생들에게 프리드먼이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했을 때 그들은 우주비행사, 의사, 소아과의사, 시인, 물리학자나 화학자, 과학자, 외과의사, 탐정, 작가 … 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캄보디아에서 일과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례입니다. 제레미 호켄스타인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뒤 매킨지 컨설팅에 일하다가 같이 일하는 동료와 함께 인생항로를 바꿉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데이터 입력회사인 ‘디지털 디바이드 데이터’를 캄보디아의 프놈펜에 설립했습니다. 젊은이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05년에는 창업한지 4년 만에 3개 사무실에 170명의 직원을 두고 있습니다.(491~492쪽) 셋째는 문명의 혜택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빌 게이츠 재단의 체계적인 지원에 대한 것입니다. 270억 달러의 자금으로 설립된 빌과 멜린다 게이츠 제단은 질병에 시달리고 기회를 박탈당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원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말라리아로 해마다 100만 명이 죽고 이 중 약 70만 명이 어린이이고, 대부분은 아프리카에 삽니다. 2003년 빌 게이츠 재단은, ‘지구 보전을 위한 대도전’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과학자들로부터 8,000페이지에 이르는 아이디어를 받아 2003년 가을에 14개 도전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출생 직후에 단 한 번의 접종으로 효과가 있는 백신개발, 만성전염병을 치유할 면역법 개발 등이 있습니다. 일 년 내에 75개국 과학자들로부터 이들 문제를 해결할 제안을 받았고, 가장 적합한 제안에 2억 5천 달러의 현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과학적 상상력에 도덕적 호소를 하고 과학계가 실제로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재단의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성취하려고 합니다. 지난 20년간의 과학기술이 이룩한 놀라운 발전을 볼 때 과제의 일부를 해결할 수단을 가지고 있고, 단지 부족한 것은 자금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아프리카나 인도의 농촌 지역은 보건체계가 망가져 있어 빌게이츠 재단은 무너진 보건체제를 대체할 배달 시스템과 의약품 개발에도 열심입니다.(509~512쪽) 이상의 사례를 통해서 볼 때 비판을 통한 긍정을 거쳐 어려운 자를 위한 실질적인 대안의 모색과 실천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38절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 지라도 그 일을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교우 여러분! 궁신지화 덕지성야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남선교회의 역할/ 출17:8-16/ 2001-04-23
남선교회의 역할 출17:8-16 할렐루야!!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찬양예배에 참석하신 사랑하는 성도들 위에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가 갑절이나 넘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히 오늘은 남선교회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의 남선교회의 비중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만큼 책임도 크다는 말입니다. 1.본문: 오늘 이 시간에는 주시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음으로 우리 남선교회가 교회에서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아말렉의 침공을 받아 심히 불리한 전투를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기적적으로 승리를 일궈낸 유명한 전투입니다. 2.이스라엘 공동체: 여기 광야를 행군하는 이스라엘공동체는 교회로 상징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스라엘 교회가 외부의 도전을 받아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3.전투에 나서는 여호수아와 전사들: 적이 침공하자 모세는 여호수아를 불러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울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20세 이상된 성인 남자들은 무기를 들고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일사분란하게 나아갑니다. 여기에서 우리 남선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를 위해 생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과 칼이 번뜩이고 화살이 비오듯하는 전쟁터에 생명을 걸고 나서는 것처럼 남선교회 회원은 교회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정신으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아멜렉은 무엇입니까? 죄악이 바로 대적 아멜렉입니다. 죄악이 와서 우리 진을 흐트러 놓고 우리를 붙잡아서 죄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또 미움이 아멜렉입니다. 미움이 우리 가슴속에 파고 들어 부부간에 서로 상처를 입히고, 불화하게 하고 부모 자식 간에 원수가 되고, 이웃과 대적하고, 나라와 나라가 갈라지고, 민족이 갈라지며 이 세상에 수많은 살상과 죽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병의 아멜렉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질병들로 사람들의 마음과 몸과 생활이 병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질병의 아멜렉은 우리에게 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주와 가난의 아멜렉이 있습니다. 저주는 소리없이 다가와서 인간의 모든 하는 일에 가시와 엉겅퀴를 뿌려 놓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면 물이 끊기고 양식이 끊깁니다. 저주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오늘 날 인류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의 아멜렉도 있습니다. 죽음은 가장 절망적인 것이고 가장 무서운 공포입니다. 죽음의 아멜렉이 우리 사람들을 붙잡고서 우리가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인류는 이 아멜렉의 공격에 거꾸러지고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처참한 슬픔과 불안을 안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인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이 아멜렉을 맞아서 갈보리십자가에서 싸우게 했습니다. 여호수아가르비딤에서 아멜렉과 대항해서 싸운 것처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이아멜렉과 대적하여 싸웠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예수님이 형벌받은 처소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담, 하와 이후로 인류를 잡고 있은 이 아멜렉과 싸우는 처절한 전쟁터였습니다.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시고 예수님은 물과 피와 온 몸의 땀을 다 흘리시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아멜렉에서 해방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 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고 의를 갖다주는 위대한 역사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아멜렉을 무장 해제 시켜 버린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속죄제물, 속건제물, 번제물이되어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죄악의 아멜렉이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힘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을 보고도 방관하거나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것은 남선교회 회원됨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조직적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서로 서로 협력하되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며 전쟁에 임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세운 각 기관의 회장과 임원들의 명령을 좇아 협력하고 복종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강한 교회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전쟁은 나 혼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우리는 여러 다른 기관과 더불어 상호 협력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셋째는 서로의 책임을 다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수아대로 병사들은 병사대로 아론과 훌은 그 나름대로 맡은 사명을 감당할 때 전쟁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맡은 사명을 최선을 다해 바로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대호 기관에서의 나의 위치대로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3. 주의 종과 일치: 아무래도 교회의 중직들은 거의 남선교회 회원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만큼 교회의 정치나 행정이나 교회의 재정운영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선교회 회원들은 교회의 성장 발전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영적 육적 정신적이 지도자인 목회자와 밀접하고 긴밀한 협력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사분란하게 주의 종 모세와 일치를 이룸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특히 남선교회 회원들은 주님이 세우신 주의 종과 잘 조화하고 협력하여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는 전위대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4.기도하는 남선교회; 빌립보서 4: 4- 8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문제가 생겼는데 아무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졌음을 뜻하는 것니다. 하나님과 평소에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입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아니라 평소에도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임을 뜻합니다. 평소에 그 신앙기초를 든든히 다져 놓은 사람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도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만이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따라 산에 오른 아론과 훌은 함께 생명을 걸고 기도하였습니다. 주의 종이 간절히 기도할 때 저들도 함께 기도하며 충성하였습니다. 교회를위해 주의 종을 위해 싸움전선에 나가있는 전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남선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전도회/ 빌2:19-24/ 남전도회헌신예배설교/ 2010-11-13
남전도회 빌2:19-24 찬송:372장. 우리는 목사나 장로로 부름받기 전에 남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여자는 갈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여자를 갈대라고 하면 남자는 지푸라기라고 한답니다. 여자보다 더 상처를 잘 받으며 잘 토라지고 토라지면 오래 가서 여자보다 더 속이 좁은 남성이 많아졌다는 의미에서 나온 신생어입니다. 한 마디로 진정한 남성다움이 실종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남자의 진정한 모습은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대지이며, 모두를 담을 수 있는 바다이며, 무엇이든 기댈 수 있는 거산입니다. 티모디 드와이트의 시입니다.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주님의 눈동자처럼 소중하고 주님의 손바닥에 새겨놓은 교회, 그 교회를 위해 저희 눈에 눈물이 흐르며 저희 입에선 교회를 위한 기도가 흘러넘쳐나고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 저희 근심과 고생은 세상에서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남성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다시 일어나라/ 요20:24-31/ 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04-06-18
다시 일어나라 요20:24-31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16장) 부 자 : 구하노니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내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 :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부 자 :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예수의 부활은 제자들도 믿기 어려웠다. 누가복음 24장 11절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마태복음 28장 17절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마가복음 16장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부활한 예수는 11제자와 500여 성도에게만 나타났다. 기왕이면 빌라도에게,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산헤드린 공회 앞에 턱 나타났으면 어땠을까? 왜? 왜? 왜? 요한복음 20장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Ⅰ】부활의 증거 = 상흔(Stigma) 1. 예수는 무엇 때문에 십자가형의 상처를 부활한 몸에 지니고 있었던 걸까? 왜일까? 없애실 수 있었을 텐데! 2. 의심 많은 도마 예수 부활의 증거를 고난의 흔적에서 찾았다. 3.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에서 참 신앙의 증거로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웅장한 건물? 수많은 교인 숫자? 세상보다 앞서가는 Multi-Media 개발? 1993년 4월 비기독교인 이어령 교수 강연 <교회 밖에서 본 교회> 中 에서 \\\"도마가 예수 부활의 증거로 요구한 것이 바로 고난의 흔적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의 증거로 도마에게 보여 주셨던 것 또한 고난과 아픔의 상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 때문에 고난 당한 흔적,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 상처 자국, 세상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당한 희생의 흔적,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러한 흔적과 자국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보여 주는 것이라고는 집단화된 이기심, 거대한 야망, 그리고 세속화된 성공주의와 출세주의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던 증거가 결단코 아닙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당하셨던 고난의 상처와 아픔의 흔적을 보여 줄 교회를 소개해 주십시오. 나는 그 교회 교인되기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Ⅱ】이제 너는 예수 그리스도로 살라.(믿는 자가 되라!) 1. 성만찬의 秘密 누가복음 22장 19절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성찬을 받을 때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일(영혼 구원의 전도사역)이 다시 아들을 통해 성도에게 위임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2. 예수는 언제나 지극히 작은 자들과 성도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다. 마태복음 25장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사도행전 9장 5절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3. 어거스틴의 고백 \\\"주님은 우리의 눈에서 벗어나 승천하셨고 우리는 슬퍼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 당신을 우리 가슴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4. 율법 아래서는 羊이 목자를 위해 희생되었지만, 복음 아래서는 목자가 羊을 위해 희생되었다.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Ⅲ】세계의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1. 예수는 세계의 구원을 위한 역할을 다 하신 후 부활 승천하셨 다. 그리고는 교회에게 세계의 구원을 위임하셨다. 누가복음 22장 29절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마가복음 16장 15절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2. 교회가 이 지상에서 하는 일이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 (나비효과) 누가복음 10장 16절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 다. 땅에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천사들이 기뻐한다. 3. 우리 어깨 위에 세계의 구원이 달려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라! 울산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성도들이여! 다시 일어나라! 남선교회여!
바울의 세계 선교에 대한 열정/ 행19:8-21/ 강영래 목사/ 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14-04-06
바울의 세계 선교에 대한 열정 행19:8-21 오늘 강은교회 남선교회 헌신예배에 부족한 종을 초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강은교회 남선교회 여러분들이 주님께 더욱 헌신된 모습이 되어서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아시아를 복음화 시키는 내용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 사도 바울은 우상의 도시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뜨거운 비전을 가졌습니다. 바울의 비전은 기독교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당시에 항구 도시 에베소는 로마령 소아시아의 수도로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는 다산의 신 아데미 여신의 거대한 사원과 “아데미” 신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습니다. 온 성은 아데미 숭배와 마술, 점 등 토속 미신들이 성행하였습니다. 에베소는 한 마디로 미신으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A.D. 53년 경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8절을 봅시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바울은 에베소 시내와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할 때 “거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시오.”라며 공개적으로 비방하며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바울 사도는 에베소 전도에 실패했습니다. 대 사도 바울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도 전도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전도의 열매가 없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초기 사역에 실패한 바울 사도는 다시 도전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역을 주셨습니다. 1. 두란도 서원 사역(1-20) 하나님은 바울에게 새로운 사역으로 한 장소에서 가르치고 훈련하는 사역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두란노서원에서 현지인들 중에서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초기 사역에 실패한 바울 사도에게 새로운 길을 주셨던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의영광교회는 1997년 3월 7일 날 개척해서 17년이 지났지만, 아직 큰 교회로 성장하지 못하고 아직도 개척교회 수준입니다. 그러나 2011년부터 저에게 새로운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전국에서 하나님이 바울 사도와 같이 세계 선교의 열정을 품은 선교사 지망생들을 모아서 사이버로 집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해서 그들을 선교사 또는 목사 훈련을 시켜서 목사로 안수해서 전국으로 전 세계로 파송하는 일입니다. 2011년에 세계선교신학대학을 세워서 10만 명의 선교사를 전 세계로 파송하여 세계를 복음화 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4월 19일이 목사 안수일인데 지금까지 1명을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하고, 3명을 목사 안수하고, 3명을 강도사 인허 하고 전도사도 몇 명 됩니다. 제가 세계선교신학대학의 학장이고 우리 황화진 목사님이 구약신학을 맡아서 강의하는 교수님이십니다. 황 목사님이 도와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황 목사님은 중국 선교를 매년 다녀오시고 중국 선교와 세계 선교에 큰 뜻을 품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황 목사님을 많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세계 선교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시는 황 목사님과 강은교회와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은 반드시 크게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9절을 봅시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바울은 두란노서원에서 현지 지도자를 양육하고 훈련하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제자훈련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세워 날마다 말씀을 강론했습니다(9). 여기서 “강론”이란, 말씀을 묻고 답하며 깊이 있게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2년간 사역하고, 그 제자들을 아시아 전역에 파송하여 전도하게 함으로써 아시아에는 복음이 널리 퍼져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말씀을 듣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10). 두란노서원에서 훈련 받은 이름 없는 제자들이 아시아에 교회를 많이 세웠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교회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입니다. 실제로 당시 바울 사도의 제자들이 아시아에 세운 교회는 20교회가 넘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아시아에서는 사도 바울이 사용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가는 치유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11,12). 오늘도 선교 현장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에게서도 이러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들이 이웃에 전도하며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치유의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사도 바울을 흉내 내어 예수의 이름으로 악귀를 쫓아내려고 하다가 악귀 들린 자에게 도리어 매를 맞고 옷을 빼앗겨 벌거벗은 몸으로 피를 흘리며 도망쳤습니다(13-16). 이 일로 인해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이름을 더욱 높이게 되었고(17), 믿는 자들이 급속도로 많아져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18). 성도님들이 전도하고 선교할 때에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의 이름이 높이며 주님께 돌아오는 자가 많아져서 큰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마술(sorcery)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사용하던 책을 모아 불사르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책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 책값은 은 5만 드라크마(약 5억원)이나 되었습니다(19). 에베소에서 대대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미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미신 행위에 관한 책들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오늘날 미신 행위에 관한 책들은 우리나라에도 많습니다. 토정비결, 점, 운명철학, 관상, 수상, 족상 등입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미신 행위에 관한 책들이 사라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이런 책들을 불 질렀다는 것은 저들이 더 이상 미신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 일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여파로 에베소에서 우상숭배의 세력이 크게 꺾였습니다. 우상의 도시 에베소에서 복음이 힘 있게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20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한 마디로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은 결과 우상이 물러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전에는 아데미 여신과 우상들이 에베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에베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결과, 에베소에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전도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 로마에 대한 뜨거운 선교 비전 21절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바울은 이제까지 개척한 아시아와 유럽의 선교지들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다음에는 로마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는 두 가지 이유는, 첫째로,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 교회가 모금한 복지 헌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로마 선교를 위해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 지원을 받고자 함이었습니다(롬15:25-26). 21절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 말씀은 그 동안 아시아에서 전도하느라고 너무 수고를 했으니 이제는 로마에 가서 요양하고 쉬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파해서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겠다는 엄청난 비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을 복음으로 정복하여 세계 선교를 이루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지도] 사도 바울에게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사도 바울의 불타는 선교 열정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선교의 큰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는 지난 10여년 동안 소아시아와 유럽 전역을 다니며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선교하면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매도 많이 맞았고, 돌에 맞아 까무러쳤었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굶기도 했고, 강물에 빠져 죽을 뻔도 했었습니다. 그는 지금 5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늙은 나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 거대한 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공을 들여서 세운 선교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미련 없이 맡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역장님들 중에는 새 동네에서 구역을 새로 시작하여 몇 년간 수고하여 구역을 크게 부흥시키고 권찰, 집사, 구역장을 세워 구역을 셋, 넷으로 나누어 여러 사람에게 맡긴 후, 또 새 동네로 가서 구역을 개척한 구역장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분입니다. 그곳에 가서도 권찰을 세우고 집사를 세우고 구역장을 세워 일을 맡기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육 간에 큰 복을 이미 주셨지만, 앞으로 더 크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의 모든 선교지를 뒤로 한 채 로마에 가서 로마를 복음화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 가는 로마 사람들에 대한 빚진 자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요(롬1:14), 둘째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완성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세계복음화의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당시 세계 최대의 나라요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심장부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과 같이 로마는 사통팔달의 도시였고, 헬라어는 만국 통용어였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힘이 있었고, 로마의 부와 학문은 세계 복음화를 이룰 수 있는 저력이 있는 선교 전략적 도시였습니다. 로마 선교는 곧 세계 선교라는 것을 사도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선교 비전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미국과 유럽과 북한과 중국과 동남아시아와 인도와 중동을 아프리카를 복음화하려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배울 점은 (2) 둘째로, 바울의 큰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겠다는 것은, 그의 큰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세계복음화는 너무 커서 이룰 수 없는 허황된 꿈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에베소에서 역사하신 것처럼 로마에서도 역사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결국 로마로 압송되어 로마의 가이사(케사르) 네로 황제에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네로 황제의 측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제국은 복음을 거부하고 황제를 숭배하게 하고 전도자들을 처형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결국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계속해서 10명의 황제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수많은 성도들을 화형 시키고 사자 밥을 만들며 기독교로 진멸하려고 핍박했지만,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한지 약 250년 후인 A.D. 313년에 결국 로마는 기독교를 승인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 전도와 세계 복음화의 비전이 성취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큰 믿음과 세계 복음화의 큰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북한이 복음화 되고 중국이 복음화 되고 동남아시아, 이란 이라크 이집트 같은 중동, 인도가, 이스라엘이 마침내 반드시 복음화 될 줄 믿습니다. 저는 CCC(한국대학생선교회) 출신으로 CCC에서 믿음을 키웠습니다. 이것은 CCC와 우리 교회와 우리 세계선교신학대학의 표어입니다만, 우리나라 전국의 교회의 표어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같이 한 번 말해 봅시다. “오늘의 민족 복음화, 내일의 세계 복음화” 오늘 우리 민족을 복음화 시키고, 내일 전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저와 황 목사님과 강은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우리는 예수님에게 전 세계를 다니며 전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모든 민족으로 예수님의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주님의 진실한 제자가 되어야 허겠습니다. 두란노서원에서 바울에게 예수님을 배운 사람들이 아시아 전 지역을 복음화 시켰듯이 여러분들도 교회에서 우리 세계선교신학대학에서 또 다른 곳에서 말씀으로 예수님을 배워서 예수님의 진실한 제자가 되어서 전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의 전 세계를 복음화 시키겠다는 불타는 선교 비전과 열정을 가집시다. 평생 중에 1년만이라도 선교사로 헌신해서 우리 주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바울의 세계 선교의 열정을 본받는 저와 황 목사님과 강은교회의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강영래 목사(인천 주님의영광교회)
사명 따라 일하자/ 고전12:25-27/ 조한우 목사/ 가현교회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02-02-24
사명 따라 일하자 고전12:25-27 여러분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르죠? 교회에만 나오면 졸려서 꾸뻑 꾸뻑 조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그건 예수 믿는 재미를 몰라서 그런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이 굉장히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몰라서 그런 겁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보아도 은혜가 됩니다.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가리켜서 복의 근원이라고 하잖아요?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복의 근원이 되십시다. 안 보면 보고싶고, 얼굴만 보아도 은혜가 되고, 만나면 좋은 친구∼∼ 가현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옆에 계신 성도님들과 인사를 나누어 봅시다. ”잘 오셨습니다.” ”금년 한해도 건강하세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아직 전도사님이셨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신혼 살림을 차리고 얼마나 재미있게 생활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루는 이 목사님이 방 청소를 하시다가 사모님께서 쓰시는 장롱 속에서 아주 이상하게 생긴 통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궁금하신 목사님이 사모님에게 ”여보, 이게 뭐요?” 하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사모님이 펄쩍 뛰시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절대로 열어보면 안 된다고 아주 신신당부를 하더래요. 목사님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고서 내버려두었습니다. ’뭐, 여자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데...’ 그렇잖아요? 목회에 너무나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어느새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전도사님은 벌써 목사님이 되었고요. 20여년간 목회하면서 어느 날 이사를 하게 되어서 목사님께서 짐을 정리하시다가 20여년 전의 그 통을 우연하게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그동안은 잊고 살아서 몰랐는데 그걸 또 보고 나니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더랍니다. 목사님이 속으로 생각하시기를 이제는 20년이나 지났는데 설마 괜찮겠지...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서는 통을 살짝 열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글쎄 현금 200만원하고 계란이 3개가 들어 있더랍니다. 잠자코나 계셨으면 좋았을 걸... 더욱 궁금해진 목사님께서 사모님께 물어보셨대요. ”여보, 이게 도대체 뭐요?” 그랬더니 사모님은 얼굴이 시뻘게지시면서 절대로 열어보지 말랬는데 왜 열어봤냐고 원망을 하면서 마지못해 이야기를 하시더랍니다. 그 사모님의 말씀인 즉슨,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졸음이 오면 그때마다 계란을 하나씩 모았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매우 기분이 좋아지셨어요. ”오! 그래요?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비밀로 간직하고 있었소? 그래 20년 동안 내가 3번 밖에는 졸음이 오는 설교를 하지 않았구려?^^ 그런데.. 이 돈 200만원은 또 뭐요?” 그러자 사모님이 머뭇거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동안 계란 모은 거 판 돈이예요.” 하시더랍니다. 가현교회 사모님은 계란 몇 판이나 모았는지 몰라? 우리 조은교회는 이번에 계란 팔아 모은 돈으로 사택 사서 나가잖아요. 5월 첫 주에 이사갑니다. 목사님의 설교... 이거 정말 어렵습니다. 아예 설교는 들어보기도 전에 첨부터 작정을 하고서 자는 사람들도 있으니,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눈을 떠봐요, 살짝.” 예배드리는 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자세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나와 있느냐? 어떠한 마음 자세로 앉아 있느냐하는 것이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를 좌우하게 됩니다. 어느 집사님이 밤새도록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다음날 주일이 되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마침 예배 전에 이 집사님이 찬송을 인도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지난 밤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일단은 예배 시간인데... ’세상 것은 잊어버리자.’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헛기침을 하고는 찬송을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골교회라 반주자도 없구요, 오로지 찬양을 인도하는 이 집사님의 곡조에 따라서 불러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찬송가 313장 부르시겠습니다. 갈길을 밝히 보이시니” 그리고 드디어 선창을 합니다. ”♪갈 끼이이를 따단-단♬”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어요, 그래? ”갈 끼이이를”까지만 했어도 어떻게 고쳐서 불러보겠는데, 따단-단까지 해 놓았으니 이걸 어떻게 고쳐서 부를 수도 없고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그 날 예배가 엉망이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와서 아직까지도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있다면 마치 그 말씀은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정신들 바짝 차리시고 오늘 말씀을 듣는데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자, 한번 다같이 크게 따라 합시다. ”사명 따라 일하자”(×2) 우리는 사명이란 말과 소명이란 말을 잘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개념은 좀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소명을 영어로는 ”Calling”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다같이 소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똑 같은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자 이제 무슨 말인지 헷갈리기 시작하죠? 잘 들으세요. 우리 모두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각자 다 다른 사명을 주셨다는 겁니다.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명을 깨닫고, 각자 자기의 사명을 따라 일하시는 우리 가현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교회 생활이 즐겁고, 보람되고 또 믿음도 쑥쑥 성장하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은사장’입니다. 교회 내에 있는 다양한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자, 한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 이렇게 모두 아홉 가지의 은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교회에는 이렇게 다양한 은사가 있지만 그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각자가 맡은 직임(직책)은 서로 다르지만, 그 직임을 맡겨주신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모든 것를 모든 사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할렐루야!)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입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도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래 요 옆 동네 하성 토박이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고려 말부터 하성면 원산리, 원퉁이라고 하는 동네에 와서 살기 시작했으니까 한 6∼ 700년은 하성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나 봅니다. 우리 외가도 여기서 가깝습니다. 오리미(오니산리) 한씨네가 외가 동네이거든요. 제가 모태신앙으로 외할아버지의 신앙을 이어 받아서 어머니로 저까지 그리고 이제는 우리 아이들까지 4대째 장로교 집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하성에 있는 삼보교회 출신이거든요. 우리 가현교회와 같은 예장 통합측 서울서남 노회 북부시찰이 아닙니까? 저는 거기서 주일학교로부터 학생, 청년시절을 거쳐서 전도사로, 그리고 거기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 목사로 계속해서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작년 7월에 김포시 북변동 산호 아파트 뒤에 먹자 골목에서 조그만 지하실에 교회를 개척하고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솔직히 요즘에 와서는 각 교회가 개별화되어지고, 그래서 서로 교류하지 않으려고 하고요, 은근히 협력도 기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홍 성욱 목사님께서는 마음이 열려 있어서 조그마한 개척교회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저를 불러서 이렇게 세워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를 나눕시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할렐루야!) 주 안에서 하나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흔하게 쓰는 말 중에 그 뜻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소명”과 ”사명”이란 단어도 그렇고요, ”은혜”와 ”은사”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이 두 단어는 언뜻 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 뜻이 전혀 다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은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공평하고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믿으십니까?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사라고 하는 것은 은혜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몇몇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사를 못 받았다고 해서 너무 크게 실망할 것도 없고요,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방언 못한다고 주눅들지 마세요. 병 고치는 은사가 없다고 해서 기죽을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를 따라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나도 남들처럼 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하겠다고 하는 거룩한 욕심이 있다면 성령의 은사를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면 주십니다.(할렐루야!) 그런데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다 똑같이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에게 주시는 은사가 다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을 가지고 누가 더 잘났느냐? ’누가 더 위냐’를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각자의 은사를 통해서 교회에 충성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은사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은사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서로 물고 뜯고 싸우고, 서로 편을 갈라서 파당을 짓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교회를 찢어놓는 일까지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났느냐? 은혜 없이 은사만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가현 교회는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아멘!) 은사는 없어도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은사는 은혜 안에서 절제되어지고 협력하게 되고, 또 보완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교회의 혼란을 가져오게 되자 사도 바울 선생이 은사에 대해서, 사명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몸은 하나인데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붙어있지 않습니까? 오장육보, 사지 백체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지체들이 이렇게 복잡하게 붙어있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님에게 붙어있는 우리 들도 결국은 교회라고 하는 한 몸을 이루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몸에 붙어있는 각 지체들이 서로 연합하지 않고 싸우고 다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발이 손에게 말을 합니다. ”야, 임마! 누군 답답한 신발 속에 갇혀서 평생을 무좀과 싸우며 사는데, 누구는 길죽 질죽, 요즘 유행하는 말로 쭉쭉 빵빵, 잘 생겼다고 좋은 대접 받으면서 여기 저기 행세란 행세는 다하고 다니느냐? 나도 너처럼 반가운 사람 만나면 얼굴 내밀고 아는 척 좀 해야 되겠다.” 그러면서 첨 만나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그 꼬랑내 나는 발을 내밀면서 악수 하자고 대든다면 이거 되겠습니까? 자 그리고 또 보세요. 눈은 항상 눈물로 맑게 씻어서 늘 청결을 유지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일분에도 수 십번 씩 껌뻑 거려서 눈동자를 보호해 주잖아요. 게다가 근무처도 아주 좋은 곳에 있어서, 밝은 세상에 나와서 그것도 전망이 아주 좋은,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귀란 놈은 보세요. 이게 귀가 아닙니다. 이건 귀때기(?)지. ㅋㅋㅋ 목사님이 귀때기라고 하면 안 되는데....^^ 깔대기처럼 생겼으니까 귀때기라고 부르는 것도 틀린 건 아닌 거 같은데? 좌우간 이건 귀가 아니라 진짜 귀는 이 속에 들어있거든요. 그러니까 귀란 놈은 노상 껌껌한 동굴 속에 처박혀서 왼 종일 답답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 속에 먼지는 왜 그렇게 많이 들어오는지... 며칠만 지나면 누런 귀지가 하나 가득 찹니다. 그래서 참다 못한 귀가 투덜거리며 눈에게 말을 합니다. ”얌마, 나도 너처럼 물 청소 좀 받아야 되겠다.” 그러면서 그 동굴 속에다가 물을 하나 가득 받아 놨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날 일입니다. 각자가 하는 일이 다 다른 겁니다. 그러나 그 일들은 모두 이 ’한 몸’을 유익하게 하기 위한 거란 말입니다. 제가 주걱턱에다가 이렇게 못 생겼어도요, 제 몸에 붙어있는 각 지체들이 저를 위해서 얼마나 충성을 다 하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금식 끝난 지 며칠이 안 되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지만 말이죠. 지난 겨울에 제가 모처럼 만에 고기 뷔페에 가질 않았겠습니까? 한 사람에 7,000원씩 받는데,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제가 좀 많이 먹거든요. 소고기 불고기를 가져다가 숯불에 잘 달궈진 불판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구수한 냄새가 나면서 지글 지글.....(음~ 바로 이맛이야!!) 다들 식사하고 오셨죠? 저는 지금 침이 꼴깍 넘어갑니다. 이 맛있게 익은 고기를 누가 봤느냐? 안 권사가 제일 먼저 봤습니다. 사실은 안 권사보다도 더 먼저 발견한 사람이 있죠. 그게 누군지 아세요? 코주부 성도.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초신자 코주부 성도가 코를 벌름거리면서 고기 냄새를 제일 먼저 맡았다 이겁니다. 아, 그러면 초신자나 먹게 그냥 내버려두지. 아, 그걸 눈치 빠른 안 권사가 잽싸게 알고 쫓아 온겁니다. 눈치 하면 또 안 권사 아닙니까? 초신자인 코주부 성도가 맡아놓은 것을 글쎄 안 권사가 어느 틈에 알고 쫓아 온 거예요. 심방 다니면서 그런 거만 보고 다니나봐.. 그런데 그것을 안권사가 가져 가느냐? 누가 가져가요? 손집사. 손집사가 잽싸게 집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코주부 성도하고 안 권사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만 거죠. 손 집사가 원래 수완이 좋잖아요. 손 집사가 어디서 가져 왔는지 젓가락을 가져다가 이리 저리 뒤집으면서 고기를 잘 구워서는 상추에 불고기를 얹어놓고 쌈장을 듬뿍 찍어서 먹음직한 쌈을 만듭니다. 아, 그런데 보세요. 바로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으하하하’나타나는 구장로. 구 장로님이 나타나시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손 집사가 구 장로님한테 아부를 합니다. 손 집사가 얼마나 아부를 잘 하는지 그저 높은 사람 앞에만 가면 싹싹 빌기를 잘 하거든요. 아부하면 또 손 집사 아닙니까? 그 먹음직한 고기 쌈을 구 장로님께 딱 갖다가 바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흐뭇해진 구 장로가 으하하하 입을 벌려서 손 집사의 상납을 받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머지 않아서 우리의 손 집사, 금방 안수집사가 될 거예요. 아뿔싸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구 장로께서 드시는 줄 알았더니 그 속에 누가 숨어 있었느냐? 이 집사. 이 집사 이 양반이 그 튼튼한 이빨로 질겅 질겅 씹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빨 좋은 거 오복의 하나라고 하잖아요. 씹는 거 하면 이 집사가 최곱니다. 여기도 이 집사 있어요? 근데요, 씹어도 잘 씹어야 돼. 이것 저것 다 씹어도 목사님은 씹으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아, 그럼 목사님 씹으면 되나? 자, 보세요. 교회에 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초신자 코주부 성도가 처음에 발견한 그 맛있는 고기 덩어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씹는 건 이 집사란 말이죠. 코주부 성도도, 안 권사도 그리고 구 장로까지. 모두가 다 이 집사의 농간에 놀아난 겁니다. 그러나 그게 이 집사를 위한 겁니까? 누구를 위한 거예요? 맞습니다. ’나’라고 하는 이 몸뚱이 전체를 위한 겁니다. 코주부 성도가 냄새를 맡았던 것을 안 권사가 찜을 해 두었어도요 손 집사가 냉큼 집어다가 구 장로님 입에 넣어주는 것 봐요. 그럼 그걸 구 장로님이 드시느냐? 이 집사가 질겅질겅 씹잖아요? 그런데 결국 먹는 것은 목사님이란 말입니다.(할렐루야!) 왜? 싫어요? 목사님이 잘 잡수셔야 교회가 건강한 거예요. 이런 설교 들으면 꼭 시험드는 성도들이 생기던데, 가현 교회는 시시한 교회가 아니니까 제가 맘 푹 놓고 말씀을 전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22) 교회의 직임은 달라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남선교회 헌신예배라죠? 남 선교회든 여전도회든 학생회든 주일학교이든 모든 각 기관들이 가현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글쎄 어느 교회에 가 보면요,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극성맞은 여 집사님들이 교회 문 밖에서 대판 싸우는 교회도 있더래요, 글쎄... 여기 말고 저기, 어디.. 나 그런 거 보면 아주 속 상해서 죽겠어요. 여전도회에서 김을 떼어다가 파는데 판매한 개수하고 수금한 돈하고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누가 돈을 냈네, 안 냈네.. 한 바탕 난리를 치룹니다. 애매하게 의심을 받는 사람은 그게 억울해서 상처를 받고요, 책임을 지고 수금을 해야 하는 여전도 회장은 손해날까봐 안달 밖달하고... 세상에..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냐 말예요. 여전도회에서 계란을 팔던지 휴지를 팔던지, 또는 남선교회에서 돼지를 잡아서 몇근씩 나누던지 윷놀이를 해서 자금을 마련하던지간에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의 목적을 두고 행하는 일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평안하게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것. 그것 이상 아무 것도 없습니다. 특히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은 이들은 모든 행실에 있어서 삼가 조심을 해야 합니다. 자기 신앙에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 놓고 회개하고서 자기의 죄를 해결 받은 후에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각자 각자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찬양의 재능이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피아노를 잘 치는 달란트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다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 달란트를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홍 목사님께서는 남들에게는 없는 아주 섬세하고 친절한 겸손의 달란트를 가지고 계십니다. 컴퓨터도 잘 하시고요. 얼마나 매력이 있으신지 모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나 몰라요? 홍 목사님의 육체미... 어휴, 부러워^^ 전 별로 잘 하는 게 없어서 고민이었습니다. 목소리는 쇳 소리가 나서 막걸리에 물 탄 거 마냥으로 컬컬하죠. 주걱턱에 덧니까지 나서 볼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뭔지 아세요? 귀신 쫓아내는 거하고, 죽은 사람 염하는 거. ㅎㅎㅎ 달란트 치고는 좀 으시시하죠? 그러나 무슨 달란트를 지녔건 간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자기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가현 교회를 아름답게 이루시게 하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쓰임을 받을 것인가? 그 사명을 깨닫고 사명 따라 열심히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다같이 따라합시다. ”사명 따라 일하자”(×2) 계시록 2장 10절 말씀에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기도하시겠습니다.
새 길과 나/ 창1:1/ 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07-09-16
새 길과 나 창1:1 이헌영 저는 여성 옷을 만들어서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패션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에는 디자이너가 7명 있는데 이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최고의 히트작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애써서 만든 옷이 열 벌도 못 팔고 재고로 쌓이는가 하면 어떤 옷은 몇 번씩 추가 작업을 해서 몇 천 벌을 파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히트작품을 만들기 위해 늘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동아제약의 박카스나 오리온제과의 초코파이 같은 히트 상품은 그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작품입니다. 물에 뜨는 아이보리비누는 100년이 넘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아직도 많이 팔리는 대히트작품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보다 더 크고 오래된 히트작품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헌금제도입니다. 시인 유치환 님은 「깃발」이라는 시에서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닮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단 줄을 안 그는.” 하고 노래했습니다. “아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맨 처음 헌금제도를 생각해 냈을까?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기꺼이 재물을 바치게 하는 그 헌금제도를 누가 맨 처음 생각해냈을까?” 제가 처음 교회를 다닐 무렵은 어렸기 때문에 헌금함 같은 곳에 헌금을 내면 하나님이 몰래 오셔서 가지고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조금 세월이 흐른 후에 실상을 알았을 때 속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말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도 속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헌금의 종류를 많이 만들어내고 헌금을 걷을 때는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앞세워 하나님이 헌금을 받는 형식을 취합니다. 한 발 더 나가서 헌금을 드리는 성도들은 간구하듯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하늘 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 그리고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앞세워 걷고 주 뜻대로 써달라고 간구의 노래를 부르고 아멘이라고 맹세까지 했으면 그러게 쓰여져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의 조직을 보면 크게 남선교부, 여선교부로 나누고 연령별로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 장년부, 노년부로 나누고 하는 일에 따라서 예배부, 선교부, 교육부, 봉사부, 친교부, 재정부, 관리부, 총무부, 그 외에도 건축추진위원회, 장학위원회, 경조위원회, 인터넷위원회 등으로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서 지역별로 또 나누어 1구역, 2구역, 3구역으로 그래서 누구든지 4~5개의 조직원이 되게 마련이며 결국은 전 교인들을 간부로 만듭니다. 최하가 집사입니다. 틈을 안 주기 위해서 행사를 끊임없이 만듭니다. 주일날 아침예배, 저녁예배, 수요저녁예배, 금요철야기도회, 매일 새벽기도, 그것도 모자라서 부흥회, 100일 작정기도회, 수련회, 바자회, 운동회, 야유회 등으로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웬 훈련과 교육은 그렇게 많은지 무슨무슨 제자훈련, 전도폭발훈련, 횃불, 무슨 훈련 등 그리고 전도교육, 선교교육 등등…. 이렇게 교인들을 꼼짝없이 조직과 시간으로 묶어놨는데 교인이 이사를 가면 이번엔 버스를 이용해서 모셔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그 사람을 꼭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일까요? 부활을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사업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아니라고 해도 헌금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만득이도 영구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은 모두 교회의 것이 되어서 자기들 마음대로 쓸 수가 있으니까요. 지난 8월 21일 한겨레신문 사설입니다. 가톨릭 서울대교구가 2006년 재무제표를 외부 회계법인에 맡겨서 감사한 결과를 공개한 일을 다루면서 「투명한 교회를 위한 결단」이라는 제목으로 쓴 사설의 일부입니다. “백 번 양보하더라도 종교단체가 이렇게 세제상의 혜택을 받으려면 헌금이나 기부금 혹은 수익금이 본래의 목적에 맞게 쓰여야 한다.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하고는 사회에 이바지하는데 쓰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 겨우 헌금이나 기부금의 3% 정도만 그렇게 쓰인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의 위기라고 합니다. 실제로 불교나 가톨릭은 신도 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개신교는 점점 줄고 있다는 소식을 여러분도 들었을 줄 믿습니다. 인터넷으로 탈레반 납치 사건 뉴스를 보다가 그 뉴스의 댓글을 보면서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순식간에 올라오는 수백수천 건의 댓글 중 ‘기독교’라는 없었습니다. ‘개독교’라고 지칭하며 그들이 거기서 죽기를 바라는 글투성이였습니다. “거기서 죽으면 순교 아니냐? 그러니 나라 곤란하게 하지 말고 그냥 거기서 죽어라. 살고 싶으면 너희 하나님한테 살려달라고 해라.” 정말 그 정도일 줄은 솔직히 몰랐습니다. 오죽하면 청와대에서 비방하는 댓글을 자제해달라고 했겠습니까? 저는 이 모든 일들이 헌금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제가 오강남 교수님의 [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읽고 이 새길교회에 온 지가 약 5~6년 된 것 같은데 새길교회는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처음 새길교회를 창립하실 때 많은 고뇌와 지혜 그리고 용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합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마음 붙이고 믿음을 이어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그리고 10년 후, 창립 30주년 때를 짐작해 봅니다. 그때의 새길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모르긴 하지만 제가 처음 온 5~6년 전과 지금의 모습을 보고 또 10년 후를 떠올려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즉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우리끼리 조용히 이 믿음 지켜가면서 지금같이 우리끼리 서로 문안 여쭈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기존 교회를 뛰쳐나와서 만든 이 교회, 평신도들의 교회 새길교회가 그 이름에 걸맞게 새 길을 열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어떤 사명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 뜻에 좀 더 가까이 가는 쪽으로 변혁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새길교회에 변혁할 것을 제안합니다. 교회란 예배드리는 곳, 기도드리는 곳,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써야 합니다. 지난해 이곳에서 설교하셨던 유니온신학대학 총장님께서 4복음서에서만 예수님이 40번이나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하셨다고 하셨는데 일일이 확인은 못했지만 아주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은 성경을 읽어보신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하니님은 그 헌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새길교회의 모든 헌금은 하나님께 바쳐진 후 48시간 안에 100% 모두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줍시다. 그리고 교회의 조직을 극도로 줄여서 지출이라고는 집세와 2, 3명의 인건비 그리고 비품구입비 정도로 한정하고 그 운영비는 지금의 점심식사를 유료로 하든가 별도의 회비를 걷든가 해서 충당합시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오랫동안 무심히 여기저기 쓰다 보니 이제는 관행이 되었는데 잘못된 이 관행을 이제는 끊을 때가 된 것입니다. 헌금 100%를 온전히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줌으로 사회에는 신선한 충격의 파문이 일게 하고 많은 교회의 양심에 경종을 울리며 도전이 되게 해 봅시다. 숲속에 난 두 갈래 길 중 어느 길로 갈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망설임 없이 새로운 길을 선택해 봅시다.
선교사로 일하는 사람들/ 골1:25-29/ 남선교회연합헌신예배/ 2008-06-20
선교사로 일하는 사람들 골1:25-29 (골1:25)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 이니라 (골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 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 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1:29) 이를 위하여 나 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본문이 말씀하는 주제들: 사도 바울 만이 아니라 우리는 교회의 일꾼이다. 일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뤄야 한다. 만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오늘날 성도들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비밀을 이방인 가운데 풍성하도록 해야 하 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이 비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시다. 교회는 그(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쳐서 각 사람을 그 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야 한다. 교회는 바울처럼 이 일을 위하여 능력 주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한다. ◈나는 이번 태국 라용교회에 가서 온 교인들이 모두 선교사처럼 일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위해 선교사로 일하는 일꾼들이 될까? 1.예수님처럼 회개라고 천국을 맞으라고 전파해야---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 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2.천국복음과 함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치유목회자로 전도해야---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 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믿고 나음을 입은 사람들이 나가서 예수를 전하게 해야--- (마9:31)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 에 전파하니라 4.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일해야.--- (마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5.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우리의 이름도 따라가도록 일해야---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6.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음은 바로 전도를 위함이라고 믿고 살아야--- (막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 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7.곳곳마다 전도하여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한 귀신들을 내어쫓아야--- (막1: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8.주님 시대처럼 상황이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전도해야--- (막7: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 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9.만국에 복음을 전파해야--- (막13: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0.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IMF 한파 때문에 이 일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11.세상 일에 매어 하나님 나라 전파하는 일을 유보하지 말고 전도해야--- (눅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 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12.초대교회처럼 그리스도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 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13.전파하는 자가 없이 복음은 전파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전도해야--- (롬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 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4.우리 모두는 나는 보내심을 받은 영광스런 선교사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도해야--- (롬10:15) 보내심을 받 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5.내 말로가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도해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하여 16.남에게 전파하고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되지 않도록 살며 전도해야---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 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17.전도를 받는 자는 전도하는 자의 신앙을 그대로 닮는다는 것을 두렵게 알고 전도해야--- (고전15:11) 그러 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8.전도자는 자기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전파해야--- (고후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 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19.전도를 받은 자들이 복음의 소망 안에서 흔들리지 않게 전해야--- (골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 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20.전도를 받는 이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움 받도록 전도해야--- (골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전도는 전도자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전도를 받는 이를 위하여 전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 야 한다. 21.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 앞에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골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 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22.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해야---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23.우리도 바울처럼 전도를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명령이라 믿고 전도해야--- (딛1: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 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24.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식구를 보존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도에 힘쓸 때 나와 내 가족을 보존하신다는 것을 믿고 전도해야--- 아멘.
선교의 비전/ 행16:6-10/ 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08-06-20
선교의 비전 행16:6-10 미얀마에서 선교사로 눈부신 활약을 한 저드슨은 신학교를 졸업할 당시 어느 큰 교회의 부목사로 초빙되었 습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은 부러움과 기대에 찬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해외 선교에 비전이 있었던 그는 그 초빙을 거절하고, 불교의 나라인 미얀마에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그의 결정을 만류하고 걱정스런 조언을 했지만, 저드슨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목숨을 바칠 각오로 선교사업에 뛰어들었습 니다. 그곳에서 한 명의 세례 교인을 얻는데 걸린 시간은 6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헌신은 식을 줄 몰랐습 니다. 그 결과 불교의 나라 버마에는 6만 명의 기독교인이 생겨났으며, 전세계 선교사의 마음속에 비전과 용 기를 심어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교는 비전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선교회 헌신예배를 맞이하여 ”드로아의 환상 을 봅시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일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자기를 파송한 안디옥교회로 돌아가서 선교보고를 하였습니 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예루살렘 총회에서 해결한 후에 바나바와 함께 다시 1 차 전도여행지를 돌아보며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려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마가 요한의 문제로 서로 갈라 서게 되었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육로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를 굳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수리아-길리기아-더베-루스드라(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사역지) 바울은 거기에서 새로운 동역자인 제자 디모데를 데리고 여러 성읍을 통과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 다. 그 결과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해 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아 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그때 당시 로마의 한 속주로서 에베소가 그 수 도였습니다. 소아시아 서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 일 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게 되었습니다.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다른 핍박자가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주도권을 가지시고 복음 전파를 가장 기뻐하시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고 권고하시는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에 그 목 적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그 목적이 선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이가 아니 라 바로 하나님에 의해 문이 닫쳐지고 그 길이 막히고 일이 지연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목적은 선하지만 그 방법과 과정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아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내 가 생각하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하고자 하시는 섭리 때문입니다.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인간의 의도와 하나님의 생각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울이 생각할 때 아시아는 중요한 선교 전략지였습니다. 그래서 후일에 바울은 그곳에서 거의 3년간이나 시간을 할애하면서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던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중요한 선교 전략지였으나 바울사도 일행이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할 곳은 따 로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모로 갈지라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일을 몰아붙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불필요 한 시간과 물질을 허비할 때가 많이 있는데 지혜의 성령님은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몰아붙이는 식이 아니 라 전략적인 방법으로 그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바울 사도 일행이 무시아를 지나 어디에 도착하였습니까? 그곳이 바로 드로아입니다. 제가 지난번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갔을 때 파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 밤 12시쯤 도착하여 리무진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지 나 도착한 곳이 바로 드로아 건너편 항구였습니다. 거기에서 버스와 함께 배를 타고 새벽에 드로아 항구에 도 착하였습니다. 저와 같이 간 일행은 배를 타고 드로아에 항구에 입항하면서 ”주여 바울이 밤에 환상을 보았던 그 선교의 비전을 나도 갖게 하옵소서!”하고 같이 기도 드렸습니다. 저희가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는 동이 터 오는 새벽이었습니다. 드로아 항구에 발을 내딛는 순간 마음속에 감격이 몰려왔습니다. ”아 이곳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배이신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 사람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떠난 곳이구나!” 드로아는 조그마한 항구 도시로 깨끗하고 아담하였습니다. 이곳은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곳입니다. 지금 도 구 드로아에 가면 트로이의 목마가 있고 구 드로아의 시가지가 발굴되고 있습니다. 1.바울이 밤에 본 환상 이 환상을 보여 주신 분은 성령님이었습니다. 이미 성령님께서는 바울 사도 일행을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 지 못하게 막으셨고, 비두니아로 가려고 애쓸 때 역시 허락지 않고 이곳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언제 환상을 보았습니까? 바울이 드로아에 도착하여 밤이 되었는데 그 밤에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드로아 건너편이 마게도냐 땅 바로 유럽의 관문입니다. 바울의 비전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려고 하는 비전 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게도냐 땅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바 울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바울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유럽 전도의 꿈이었습니다. 1)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스데반 순교와 박해를 계기로 안디옥으로 전해진 것이 선교의 제1 전환기라면, 2)안디옥 교회가 성령의 지시에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초대 선교사로 파송하여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 역에 복음을 전파하게 한 것은 선교의 제2 전환기라고 할 것이며, 3)이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와 더불어 성령의 환상을 통해서 아시아를 포기하고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유럽 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은 선교의 제3 전환기라고 할만큼 괄목할 만한 사건입니다. 공통점은 이 모든 일들이 인위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배후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라는 점과 이 같은 성령의 뜻에 믿음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순종한 결과입니다. 물론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으니 (고후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 하신 말씀과 같 이 험난한 길이었지만 그 길이 성령이 원하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묵묵히 순종하는 중에 복음은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선교는 성령님을 통해서 비전을 가진 자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비전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비전 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바울이 가졌던 드로아의 환상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건너와 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손짓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저에게도 그런 비전을 주셨는데 중국 선 교에 대한 비전입니다. 중국의 13억의 많은 영혼들의 부르짖음을 생각할 때 가슴이 더욱 뜨거워집니다. 제가 1 차 단기 선교를 갔을 때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선교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니 얼마나 감격하였는지 모릅 니다. 과연 하나님은 꿈꾸는 자에게 그것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2.환상을 본 바울의 결정 1)바울은 환상을 본 후에 그의 일행과 함께 자신의 환상을 나누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라는 말씀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비전이 있다할지라도 그 엄청난 일들을 혼자 감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비전일 수록 다른 사람과 함 께 나누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앞으로 선교사를 파송 하려는 엄청난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사 하나의 힘으 로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 성도 하나 하나가 그런 열정과 같은 비전이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한 일이 되는 것입 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교의 환상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의 비전은 더욱 놀라운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2)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망설이지도 않았습니다. 마게도냐로 떠나기로 힘썼습니다. 선교는 거저 되지 않습니다. 꿈꾸는 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더욱이 힘쓰는 자에게서 성취됩니 다. 지금 우리 나라 한국교회는 약 5000명이 넘는 선교사를 세계 각국에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합동 교단이 교회로서는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교는 입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힘쓰고 애쓸 때 가능합 니다. 선교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물질로 돕고 또 선교지로 나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 일행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놀라운 복음 전파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고린도 교회 등등 곳곳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유럽 전도의 문이 활 짝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앞에는 새 천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새 천년을 맞이한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환상을 주셨습 니까? 그것은 새 천년에는 우리도 선교사를 파송 하는 대열에 서라는 비전을 주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 전체가 한 달에 만원씩만 선교 헌금에 동 참한다면 선교사 한 사람은 파송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까? 어렵다면 어렵겠지요. 그러나 결코 어려운 명제는 아닙니다. 믿음만 있다면 그것은 오늘이라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어디 에 있습니까? 선교의 환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드로아의 환상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선교는 꿈꾸는 자 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제 당당하게 선교의 대열에 합 류하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는 믿음/ 겔44:23-26, 행10:11-16/ 이성희 목사/ 남선교회주일설교/ 2014-02-12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는 믿음 겔44:23-26, 행10:11-16 오늘은 총회가 정한 남선교회 주일입니다. 점점 남성들의 설 자리가 작아지고 여성들의 세상이 되는 요즘에 굳건한 가정의 제사장 되시고 남자답게 굳센 믿음을 가진 남선교회 회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남선교회들이 많은 회원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이웃을 섬기는 남선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쯧쯧쯧, 아담아, 푹 자거라. 아마 오늘이 네가 푹 잘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남성들은 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일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세상을 접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만드는 일의 몫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들이란 하나님의 도성과 사람의 도성, 두 개의 시민권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페리그리니’(perigrini) 즉 지상에 거주하는 이방인이고 두 세계에 대한 충성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지 주의 깊게 따져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는 것은 저 나라를 위하여 이 나라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두 세계가 끄는 힘을 동시에 느낍니다. 인간은 그 두 가지의 기묘한 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운데 끼여 있습니다. 진창에서 뒹구는 천사요, 날기를 시도하는 포유동물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이러한 특성을 반대쪽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두 마리 말로 묘사했습니다. 성경에는 미묘하고 통합적인 실재를 성과 속, 자연과 초자연으로 구분하지 않고 한가지로 제시합니다. 속된 것과 거룩한 것, 자연과 초자연은 구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투스는 영적인 활동과 세속적인 활동 간의 인위적 담을 허물기 위하여 베네딕투스 수도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은 기도이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잘 분별하고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적 지혜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첫째,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에스겔 44:23에는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근본 생각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잘라서 떼어놓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베어내다’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표준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구별되는 것이며, 탁월하고 비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왕따를 당합니다. 세상들이 가는 길과는 반대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다”고 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가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천사들이 나타났고 천사들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찬양합니다. 6:3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이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4:8에는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어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십니다. 예수님이 거룩하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한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시기에 마태복음 7:6에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15에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런 말씀이 레위기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거룩한 곳에서 거룩한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학개 2:12에는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다 거룩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에게는 ‘코셔’(Kosher)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별하여 만든 것들을 말합니다. 채소나 과일 그리고 모든 제품에 코셔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처음 재배할 때부터 특별하게 성별하여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제품들입니다. 이런 마음의 준비와 자세가 모든 성도들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참된 거룩의 뿌리는 규범이나 원칙이나 기준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참되고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열정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목사가 다른 교회를 찾아가다가 찾지 못하여 길을 물어보려고 복덕방에 들어갔습니다. 복덕방 주인은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얼마나 친절하게 또박또박 잘 가르쳐주는지 목사는 나오다가 다시 들어가서 그 주인을 교회만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전도하였습니다. “당신은 친절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 꼭 예수만 믿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전도를 다 하고 목사가 복덕방을 나오자 다시 따라 나와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복덕방 주인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더랍니다. “교회 가는 길도 모르면서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준다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천국에 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거룩이 성장하면서 유혹은 점점 줄어듭니다. 그 누구도 유혹받지 않을 만큼 성숙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유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하고 거룩하게 사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거룩성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거룩한 생각, 거룩한 묵상, 거룩한 생활을 지향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경건한 거룩은 관계의 거룩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게 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죄는 달콤하지만 뱃속에 들어가서는 쓴 것으로 변합니다. 반면에 거룩은 처음에는 쓰지만 나중에는 단 것으로 변합니다. 출애굽기 20:11에는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날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저의 모친의 엄격한 신앙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은 생활의 철칙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일은 거룩한 날이니 절대로 공부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부를 조금 오랫동안 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15년을 더 공부했으니 제법 했지요. 그러나 단 하루도 주일에 공부한 적 없습니다. 주일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나님 보다 어머니 얼굴이 아른 거려 못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시험치고 논문 쓸 때는 정말 바빴지만 그래도 주일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토요일에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12시가 넘으면 그냥 책을 덮어놓고 잤습니다. 주일 밤에 공부할 일이 있으면 12시까지는 성경을 보다가 12시가 되면 책을 펴고 공부했습니다. 문자적인 성수주일을 하느라고 고생했고 주일에 공부를 안 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공부할 시간도 적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공부 못하지 않고 박사학위 공부할 때도 12명 중에 두 번째로 일찍 학위를 받았습니다. 거룩의 연습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거룩의 연습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에 축복이 됩니다. 둘째, 속된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0:15에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속된 짐승을 잡아먹으라고 하셨을 때에 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속되다고 한 것은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먹지 말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셨습니다. 속된 것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레위기 10:10에는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라고 하십니다. 선민으로 거룩한 것만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복음으로 옮겼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은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7:18에는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속된 것을 거룩하게 만들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먹었나, 무엇을 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한 목적이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한 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선입니다.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닙니다. 거룩함은 오직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일하면 거룩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초’에는 “마음을 쉬고 보면 새들이 날아간 자국까지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보면 맑고 거룩한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면 사람이 속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룩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디모데전서 4:4-5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선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거룩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경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면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거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천사들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타락하여 속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원래 사람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하고 범죄 하여 속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음식이 거룩한 것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복이 거룩한 것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잠이 거룩한 잠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이 거룩한 일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의 목적이 하나님이 되므로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업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거룩한 무리,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순간이 거룩한 순간이며 우리의 삶 자체가 은혜입니다. 묵상주의자들 간혹 성과 속의 이분법에 빠지는 우를 범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거룩하고 저것은 속되다고 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속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스리랑카 어느 마을의 선교사에게 주민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에게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놀라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라고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하지 못한 삶이 결국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의 거룩은 우리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는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간디는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적 삶을 충만하게 산다면 인도에는 힌두교도는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그래서 중요한 말씀입니다. 존 웨슬리는 “사회의 거룩함 외에 거룩함이란 없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개인의 종교로 만드는 것은 곧 기독교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현세에 가장 많은 일을 한 그리스도인들은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입니다. 비행기를 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불신자가 비아냥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책에 적힌 얘기를 다 믿수?” “예, 믿지요.” “고래 뱃속에 들어간 사람 이야기도 아슈?” “알지요. 요나이지요.” “사람이 고기 뱃속에서 살 수 있다고 보시오?” “천당에 가서 물어보면 알겠지요.” “그 사람이 천당에 없다면 어떡할 거요?” “그럼 아저씨가 물어보면 되겠네요.”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거룩하지 못한 생각만 합니다. 하나님 없이 보는 성경이 거룩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는 일이 거룩할 리가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삶입니다. “I am a gentleman”을 한국말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요즘 아이들은 ‘신사임당’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신사가 무엇입니까? 신사는 양복이나 구두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사는 마음의 포용력입니다.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아멘’하는 마음이 신사입니다. 신사는 모든 속된 것을 거룩하게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 속의 거룩함으로 거룩하게 변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신사이고, 참 신사의 자세입니다. 결론 영화 ‘불의 전차’의 실제 주인공인 에릭 리들은 1912년 올림픽의 영국대표 단거리 선수였습니다. 그는 100미터 예선 경기가 있는 날이 주일이므로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영국민의 엄청난 비난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100미터를 포기하고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닌 200미터에서 우승하였습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의 여류 국수 타이틀 보유자인 조혜연양은 세계 여자 바둑 최강전이 주일에 열릴 예정이었으므로 출전 포기를 선언하였습니다. 그 때에도 많은 비난도 있었지만 조혜연양은 아직도 최강의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잘 되게 하십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세요. 속된 것을 물리치는 용기를 가지세요. 속된 것을 거룩하게 하는 믿음을 가지세요.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속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성도, 거룩한 무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서울 연동교회)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 창12:1-9/ 남전도회헌신예배설교/ 2008-06-20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 창12:1-9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 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 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 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창 12: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 였더라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창 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 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 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1.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 1)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역사를 바꾼다(1, 4).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 라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2)자신의 창대 함을 \'복의 근원\'으로 바꾸는 사람이 역사를 바꾼다(2).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가정과 가족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역사를 바꾼다(4, 5). (창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 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 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4)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는 사람이 역사를 바꾼다(7, 8). 처음에는 방랑자처럼, 또는 잠시 들려 가는 나그네처럼 찾아들었던 그 땅을 아브람은 후에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기업의 땅으로 삼는 개척자가 된 것이다. 참으로 역사를 바꾼 것이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 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창 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5)끝까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자리를 지키는 자가 역사를 바꾼다(9). 하나님이 지시해주신 기업의 땅은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서는 안 된다. (창 12: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아브람이 점점 옮겨간 \'남방\'은 어디인가? 거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 없는 \'애굽\'이었다.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신앙이다. 거기에는 불행과 불미스런 일이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끝까지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을 떠나지 말자. 2. 남선교회원만이 할 수 있는 역사(役事)가 무엇일까? 1)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는 일이다. 이는 가정적 책임이다. 성경에는 \'돕는 배필\'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아담에 대한 하와의 역할에 해당되는 말이다.→창 2:18 여호 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아담은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하와를 보호하고 부양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를 위해 서 남자답고, 주인답게,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일해야 하고,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신약에서는 2)불한당만난 자를 구하는 일이다. 이는 사회적 책임이다. 과거에는 우리 사회에는 혼자 배불리려는 도둑이 많았는데, 오늘날은 이상하게 갑자기 불한당을 만나는 사람 이 많아지는 것 같다. 부디, 바로 믿는 남선교회 회원들이 사업상으로도 크게 성공하고,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불한당 만난 이 사회 를 구원하는 일을 감당케 되기를 바란다. #세금을 작게 내는 상품 개발하여 선전 *여러 회원들은 세금을 많이 내고도 잘 살 수 있는 복을 받기를 축원한다. #한 때 정동제일교회 김종건 장로는 일식업계에선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분으로써 존경받았다. 3)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밝히는 일이다. 이는 복음적 사명이다. (삿 7: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 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나팔을 불며\',는 복음을 외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횃불\',을 복음, 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빛된 삶으로 해석하면, \'항아리\',는 자기 육체로 해석할 수 있다. *여인이 옥합을 깨듯이 남선교회원은 \'자기 육체\'를 깨는 희생을 치러서, 여인이 집안에 등불을 밝히듯 남자 는 세상에 복음의 횃불을 밝혀야 한다. 남자들이 여인들보다 앞서 세상에 복음의 횃불을 밝혀야 할 까닭은 단 지, 여인인 안사람과 달리 남자는 바깥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3. 교회가 남선교회원에게 기대하는 사역(使役)은 어떤 것들일까? 1)가정을 잘 다스리는 일이다. ①이것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되는 일이다. ②이것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니다. 숨은 기도와 눈물로 되는 일이다. 가장은 가정을 위해 책임을 지고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자이다. 기도 없이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 되기 때문이다. ③이것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니다. 많은 희생과 사랑으로 되는 일이다. 2)자신의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는 일이다. 고집스런 신앙과 어리석게 보이는 기도로 이를 성취하라! 그리고 자신의 사업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되게 하라. 또한 자신의 사업이 남과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일이 되게 하라. 성공자는 자기의 열매를 쌓는 자가 아니라 필요한 자에게 나누는 자이다. 3)교회의 일이라면 언제나 최우선하는 것이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교회의 일에 initiative를 두는 이는 자기 일에도 충실함을 흔히 볼 수 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람을 귀히 여길 줄 모르게 된다. 사람을 귀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역사를 바꾸는 좋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4. 하나님은 진정으로 헌신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에게 은총을 주신다. 우리는 이 시간 \'과연 나는 지금 진정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는가?\'를 우리 스스로 자문자답해 볼 필요가 있다. 헌신이란 자기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것이거나, 남의 눈치 때문에 하는 것이거나, 어떤 이익 때문에 하는 것 이 아니다. 헌신은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결단이며 삶이다. 헌신이란 바울의 말대로 자기가 선택한 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그 안에서 자기를 발 견하는 것이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 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 려 함이니...\' 하나님은 진정으로 헌신하는 자를 찾으신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주의 일을 하는 영광을 얻 게 하시며, 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것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가능한 것이며(빌 4:13), \'나를 능하게\' 하시고,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 심이니 회원들에게 교회가 바라는 것은, 1)가정을 잘 다스리는 일이다. 2)자신의 사업을 일으켜 성공하는 일이다. 3)교회의 일이라면 언제나 최우선하는 것이다. 누가 역사를 바꾸는 사람인가? 1)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역사를 바꾼다(1, 4). 2)자신의 창대함을 \'복의 근원\'으로 바꾸는 사람이 역사를 바꾼다(2). 3)가정과 가족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역사를 바꾼다(4, 5). 4)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는 사람이 역사를 바꾼다(7, 8). 5)끝까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자리를 지키는 자가 역사를 바꾼다(9). 회원 모두가 아브람이 누리던 복을 받아, 이 세대에 공헌하는 이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 빌3:12-14/ 남선교회헌신예배설교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 빌3:12-14 이창엽 해피 프린스라는 제목의 동화를 기억하십니까? 유럽의 어느 도시 공원에, 온몸에 금박을 입히고 두 눈과 칼자루에는 보석이 박힌 왕자의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해피 프린스, 행복한 왕자였고, 모든 시민들은 이 왕자의 동상을 사랑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어느 날,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가던 제비 한 마리가 지친 날개를 쉬기 위해 행복한 왕자의 발치에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행복한 왕자는 제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내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빼서 아픈 어린 아들을 돌보지 못해 고통받는 저 어머니에게 가져다 주지 않겠니? 내 심장이 비록 납으로 되어있지만 너무나 슬프다.” 제비는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다음날 왕자는 추위와 허기에 지친 한 청년에게 사파이어로 된 자신의 눈을 하나 빼서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제비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왕자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행복한 왕자의 눈 하나를 빼내어 그 청년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행복한 왕자는 다시 제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도시 저 편에 성냥팔이 소녀에게 남은 눈 하나를 빼어서 가져다 주지 않겠니?” “하지만 왕자님, 그럼 왕자님은 세상을 볼 수가 없잖아요?” 제비는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지만, 이번에도 행복한 왕자의 간절한 소망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날이 점점 차가워지고 겨울이 깊어져 제비는 따뜻한 이집트로 날아가야 했지만, 눈이 없는 행복한 왕자 곁에 머물러 그의 눈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비는 도시의 가난하고 굶주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왕자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행복한 왕자는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금박을 벗겨내어 거리의 아이들에게 가져다 줄 것을 다시 부탁했습니다. 이제 행복한 왕자는 보석도 없고, 눈도 보이지 않고, 찬란했던 금박도 없어져 아주 볼품없는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도시의 사람들은, 형편없이 망가진 행복한 왕자의 동상을 치워버릴 궁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비는 행복한 왕자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어, 남쪽으로 떠나지 못했습니다. “왕자님, 이별의 시간이 되었네요. 마지막으로 왕자님의 손에 키스하게 허락해 주세요.” “그래, 어서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거라.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니, 내 입술에 키스해다오.” “아니요, 저는 이집트가 아니라, 죽음의 나라로 갑니다.” 제비는 왕자의 입술에 키스하고는 발치에 떨어졌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뜨거워져오는 눈시울을 느끼고 감정을 추스르려 애를 썼지요. 그런데 제비가 죽고 나자, 갑자기 쩍-하는 큰 소리가 울려나왔습니다. 행복한 왕자의 가슴속에 있던 납으로 된 심장이 둘로 갈라진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에서 저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끼면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때의 제 상태를 설명할 어떤 단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 감정의 격렬함이 오르가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 순간은 몹시 슬프기도 했고, 제가 저 자신을 잊고 오직 행복한 왕자와 제비에게만 몰두해서 아주 순수해졌으며 평온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에는 행복한 왕자와 제비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분들의 가슴도 이렇게 절절했을까요? 저는 모릅니다. 아직 제게는 예수의 부활이 힘든 숙제와 같습니다. 신앙하고 싶지만, 어떻게 믿어야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추구합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무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바야흐로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다 혹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든 말든, 굳이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든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있는 사람이요,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다.” 제 생각에는 행복한 왕자도, 제비도 영생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행복한 왕자를 연극으로 한다면, 여러분은 어느 역할을 맡고 싶습니까? 행복한 왕자, 제비, 가난한 사람들, 그 도시의 시민들, 아니면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 중 어느 역할이 마음에 드십니까?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또한 미래에는 어떤 역할을 하고 싶습니까?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우리가 지금 하고있는 역할과, 지금과는 다른 역할에 대한 간절한 소망, 어쩌면 그것이 신앙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와 아내는, 지난 6월부터 새길교회로 신앙의 터를 옮겼습니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궁금하게 여기는 저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아 줄 분들이 많은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예수 믿으미'가 아니라 '예수 따르미'를 추구하는 분들이시기 때문일까요? 지금까지 새길을 가꾸어 온 여러분들이 가진 풍부한 영성을 저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의 손에 꼭 잡힌 예수 따르미의 모습이기를/ 빌3:12-14/ 남선교회 헌신예배/ 2003-10-19
예수의 손에 꼭 잡힌 예수 따르미의 모습이기를 빌3:12-14 윤여성 간증이라는 것을 하려고 하니 약간은 떨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제게 다가오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원래 유교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도 밤 12시가 가까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도령복을 입고 한 달에 2~3 번씩 제사를 지냈습니다.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인간은 양심 껏 살면 되는 것이지 특별히 종교가 뭐 필요하냐고 하셨고, 저의 집안 가훈은 ? 역지사지, 즉 남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자? 라는 인간적인 삶에서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 4학년 때 아버님과 할아버님이 한 해에 돌아가시는 경험을 하면서 인간의 삶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저에게 찾아온 기회는 집사람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군대에도 아직 안 간 대학원생이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장인어른이 내건 조건은 한가지였습니다. 세례 받고 목사님이 주례하는 결혼식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생활을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사랑한답시고 결혼하겠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지요. 그나마 양쪽 집안에서 둘 다 막내였기에 결혼하게 되었고 세례도 초스피드로 받게 되었는데, 그것도 부활절 낮 예배 시간을 놓쳐서 저녁예배에 특별 단독세례를 받고 겨우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교회는 다녔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냥 다녔지요. 수년 후 어느 날 제가 말씀에 흥미와 의문을 갖기 시작했을 때, 토요일 저녁에 집사람과 열띤 토론을 하고 다음날 교회에 가면 주일 설교제목으로 그 주제가 설명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몇 달을 계속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교육방법이셨지요. 그렇지만 그 때까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면서 진정한 고민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이 점점 저를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방황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보여주셔서 믿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이것이 간절한 소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다가오기 시작하셨습니다. 저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 중 하나가 술, 담배를 끊게 된 것입니다. 저는 원래 다른 것은 몰라도 술은 끝장을 내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술 끊은 지 10년이 되어가지만, 지금도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면 술 끊은 저를 보고 위로한답시고 “그래 넌 평생 먹을 술을 이미 다 먹었잖아.“ 라고 이야기합니다. 엄청 많이 먹었던 모양입니다. 담배도 비슷한 시기에 끊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성가대를 하고 있었는데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토요일 저녁에 안 피우기, 토요일 하루 종일 안 피우기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끊어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제 의지로는 안 되었습니다. 포기상태가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호주머니에 담배를 1주일쯤 가지고 다니면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술, 담배 끊는 놈하고는 상종을 말라“고 하지요. 독종 중에 독종이라고. 실제로 저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루에 거의 2갑 가까이 피우던 사람이 안 피우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을 때, 저는 속으로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웃기지요. 제가 끊었습니까? 전 끊지 못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제 의지와는 무관한, 의지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스스로 술, 담배를 통제할 수 있는 자였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셨겠지만, 저는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은 더 잘 아시기에 그렇게 하셨겠지요. 하나님을 알고 난 다음, 이렇게 무능한 자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평탄한 삶보다는 계속 갈등구조 속으로 저를 몰고 가셨습니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제가 변화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올 1월에 이 곳 새길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첫 설교가 한완상 형제님의 “예수따르미의 바람직한 삶“ 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자, 뒤에 것을 버리고 계속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저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새길교회로 오게 하시어 또 다른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하나님이 계속 변화시키실 제 자신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예수의 손에 꼭 잡힌 예수 따르미의 모습이기를 소망합니다.
지극히 높은 이름/ 빌2:5-11/ 남전도회헌신예배/ 2002-03-24
지극히 높은 이름 빌2:5-11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겁요즈음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분별이 안된다라고----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신자가 별반 없더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는 항간에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롯 유다가 그런 사람이요 5병 2어의 기적의 떡을 먹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런 사람이었으며 10명의 문둥이 가운데 9명의 문둥이가 그런 사람이 였습니다. 주님은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을 제자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곳은 중동 지역을 총괄하는 로마 군대의 본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이 위풍 당당하게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그들이 부럽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보십니다. 겁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겂 베드로는 이 말에 선득 대답합니다. 겁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겂 주님은 그를 칭찬하시기를 겁대답을 잘 했다마는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겂하십니다. 이 대화가 있고 나서 즉시 주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3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를 못하고 무조건 겁주여 그리 마옵소서겂라고 만류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보고 겁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겂라고 심하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그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말한 고백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시키시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꼭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존재, 주님의 되심, 알고 있는 예수, 고백하는 예수님이 반드시 같은 예수님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어디까지나 변함이 없이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눈을 형형 색색이어서 파란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파랗게 보이고 빨간 마음을 가진 사람 눈에는 빨갛게 보여서 주님의 존재와 주님을 아는 인식에 큰 차이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스컴의 보도를 그대로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떤 때 신문에서는 것이것은 그것이라고 한다겄라고 보도가 되었는데 그 말을 한 당사자는 것그것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말한 것을 신문이 오보한 것이다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것이 진실한 것인지를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도 그런 식으로 잘못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에는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과 그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은 과히 신적이지만 그의 만류는 순전히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에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병든 사람은 의사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로, 억눌린 사람들은 혁명가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의 사람으로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피부 색깔도 자기들의 피부 색깔과 같이 봅니다. 예수님은 원래 피부가 우리와 같은 황색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백인으로, 흑인들은 예수님을 아에 흑인으로, 우리 나라 김기욱 화백은 예수님을 큰 갓을 쓴 양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편견, 사람들의 편견, 신학자들의 편견으로 예수님의 원래 모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엄마가 자식을 키웠습니다. 15살이 되는 생일에 그 엄마는 방성 대곡을 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 엄마의 대답은 비참 그것이었습니다. 겁나는 우리 아이를 15년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알다시피 이 아이는 백치요 저능아입니다. 15년을 키웠는데 지금도 나를 자기 엄마 인줄 모르고 엄마라고 부를 줄을 모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겂 15년을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볼 줄을 모릅니다. 3, 4년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을 줄 모릅니다. 외정 치하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분이 평생에 예수님을 우리 나라를 해방시켜 주실 분으로 믿다가 죽을 때에서야 겁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분겂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유관순 누나 정도로 생각을 하다가 죽을 때에야 겨우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원한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원수 갚아 주는 싸움 잘하시는 중국 배우 것이 소령겄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당신을 늘 겁인자가---- 인자가겂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라든지, 선생이라든지, 랍비라고 부르면서도 한 번도 겁인자겂라고 부르지를 않습니다. 여기 인자라는 말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니엘서에서는 심판자라는 말로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자라고 불러도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닌데 인자라고 예수님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 스데반이 이 말을 합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겁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도다겂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는 거의 100세가 되도록 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순교를 하고 난 한참 후에 요한복음을 씁니다. 그는 요 1:14에 겁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겂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신앙의 고백은 참으로 예수님을 바로 보고 말씀하신 고백입니다. 겁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겂라는 신앙 고백이 뼈 속에서, 그 인격에서, 그 살 속에서, 그 영혼에서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과 가르침과 사랑과 헌신과 믿음의 증거들과 세월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는 바울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의 것기독론겄이라고도 합니다. 즉 바울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모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알아야 참 모습의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겁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겂[빌 2:9-1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신 이름, 모든 피조물로 그 앞에 무릅을 끓게 하시는 이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주라 시인해야 하는 그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잘 났다고 자기 이름을 들어내는 사람, 예수님 앞에 무릅을 끓지 아니하는 교만한 사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사람이 되셨으되 종으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 본체라는 말과 형체라는 말은 모두 것모르테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본체가 따로 있고 예수님은 형체로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고 형체십니다. 정리를 하자면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을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본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예수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한 신부가 신랑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그 선물이 남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은혜는 은혜일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아시는 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셔도 없으신 것처럼, 의인이시면 서도 죄인인 것처럼, 하나님이 신데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이야기에 거지가 된 왕자는 거지 모양을 해 가지고서도 왕 노릇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는 거지의 생활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죄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면서도 죄인이 되려 하신 것이 아니고, 죄인처럼 죄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기꺼이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해도 왕 노릇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것호산나 호산나겄 하고 찬송을 해도 어린 나귀를 타시고 길을 가십니다. 것호산나겄라는 말은 겁왕을 찬양하세겂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님을 부르던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에 모두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입으로 겁왕겂이라 부른 것이지 마음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입에 있고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있고 우리들의 영혼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들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을 할 때 주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 가르침을 받아 온전케 될 수 있고,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지나가신 분이 아니라 역사 속에 현실로 살아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믿고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할 때 그곳에 기적이 나타나고 이적이 나타납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허상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신기루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6.25 때 전장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죽어 가는 미군들은 대게 것신선한 우유 한컵겄을 달라 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인들은 죽어 가면서 것어머니겄를 부르고 죽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우유를 먹고 자라서 그렇고 우리 아이들은 어머니의 젓을 먹고 자라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부를 이름이 누구의 이름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스데반을 보십시오. 겁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겂 이렇게 외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까지 함께 사시고 그 영혼을 받아 주시고 때가 되면 우리 몸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부를 마지막 이름은 예수님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겁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겂 이 이름을 높이고, 이 이름을 의지하고, 그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의 생활을 합시다.
지극히 높은 이름/ 빌2:5-11/ 남전도회헌신예배설교
지극히 높은 이름 빌2:5-11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즈음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해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지 분별이 안된다”라고----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신자가 별반 없더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는 항간에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일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가롯 유다가 그런 사람이요 5병 2어의 기적의 떡을 먹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런 사람이었으며 10명의 문둥이 가운데 9명의 문둥이가 그런 사람이 였습니다. 주님은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을 제자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곳은 중동 지역을 총괄하는 로마 군대의 본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로마 군인들이 위풍 당당하게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그들이 부럽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보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는 이 말에 선득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은 그를 칭찬하시기를 “대답을 잘 했다마는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니라”하십니다. 이 대화가 있고 나서 즉시 주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3일만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를 못하고 무조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만류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보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심하게 책망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그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말한 고백일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시키시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꼭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존재, 주님의 되심, 알고 있는 예수, 고백하는 예수님이 반드시 같은 예수님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어디까지나 변함이 없이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눈을 형형 색색이어서 파란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파랗게 보이고 빨간 마음을 가진 사람 눈에는 빨갛게 보여서 주님의 존재와 주님을 아는 인식에 큰 차이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문에서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스컴의 보도를 그대로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떤 때 신문에서는 ‘이것은 그것이라고 한다’라고 보도가 되었는데 그 말을 한 당사자는 ‘그것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말한 것을 신문이 오보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것이 진실한 것인지를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도 그런 식으로 잘못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에는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과 그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은 과히 신적이지만 그의 만류는 순전히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마음에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병든 사람은 의사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로, 억눌린 사람들은 혁명가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의 사람으로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피부 색깔도 자기들의 피부 색깔과 같이 봅니다. 예수님은 원래 피부가 우리와 같은 황색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백인으로, 흑인들은 예수님을 아에 흑인으로, 우리 나라 김기욱 화백은 예수님을 큰 갓을 쓴 양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편견, 사람들의 편견, 신학자들의 편견으로 예수님의 원래 모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엄마가 자식을 키웠습니다. 15살이 되는 생일에 그 엄마는 방성 대곡을 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 엄마의 대답은 비참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를 15년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알다시피 이 아이는 백치요 저능아입니다. 15년을 키웠는데 지금도 나를 자기 엄마 인줄 모르고 엄마라고 부를 줄을 모릅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15년을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볼 줄을 모릅니다. 3, 4년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을 줄 모릅니다. 외정 치하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분이 평생에 예수님을 우리 나라를 해방시켜 주실 분으로 믿다가 죽을 때에서야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유관순 누나 정도로 생각을 하다가 죽을 때에야 겨우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원한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원수 갚아 주는 싸움 잘하시는 중국 배우 ‘이 소령’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당신을 늘 “인자가---- 인자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라든지, 선생이라든지, 랍비라고 부르면서도 한 번도 “인자”라고 부르지를 않습니다. 여기 인자라는 말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다니엘서에서는 심판자라는 말로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자라고 불러도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닌데 인자라고 예수님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 스데반이 이 말을 합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도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는 거의 100세가 되도록 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순교를 하고 난 한참 후에 요한복음을 씁니다. 그는 요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신앙의 고백은 참으로 예수님을 바로 보고 말씀하신 고백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신앙 고백이 뼈 속에서, 그 인격에서, 그 살 속에서, 그 영혼에서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난과 가르침과 사랑과 헌신과 믿음의 증거들과 세월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는 바울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의 ‘기독론’이라고도 합니다. 즉 바울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모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알아야 참 모습의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 나신 이름, 모든 피조물로 그 앞에 무릅을 끓게 하시는 이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주라 시인해야 하는 그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잘 났다고 자기 이름을 들어내는 사람, 예수님 앞에 무릅을 끓지 아니하는 교만한 사람,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사람이 되셨으되 종으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기 본체라는 말과 형체라는 말은 모두 ‘모르테’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본체가 따로 있고 예수님은 형체로 계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고 형체십니다. 정리를 하자면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을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본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예수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한 신부가 신랑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그 선물이 남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은혜는 은혜일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아시는 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셔도 없으신 것처럼, 의인이시면 서도 죄인인 것처럼, 하나님이 신데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도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왕자와 거지라는 이야기에 거지가 된 왕자는 거지 모양을 해 가지고서도 왕 노릇을 하려 합니다. 그래서는 거지의 생활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죄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면서도 죄인이 되려 하신 것이 아니고, 죄인처럼 죄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기꺼이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해도 왕 노릇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하고 찬송을 해도 어린 나귀를 타시고 길을 가십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왕을 찬양하세”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수님을 부르던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에 모두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입으로 “왕”이라 부른 것이지 마음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은 입에 있고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있고 우리들의 영혼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들의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을 할 때 주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 가르침을 받아 온전케 될 수 있고,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지나가신 분이 아니라 역사 속에 현실로 살아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믿고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할 때 그곳에 기적이 나타나고 이적이 나타납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허상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신기루를 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6.25 때 전장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죽어 가는 미군들은 대게 ‘신선한 우유 한컵’을 달라 하고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인들은 죽어 가면서 ‘어머니’를 부르고 죽었습니다. 미국 아이들은 우유를 먹고 자라서 그렇고 우리 아이들은 어머니의 젓을 먹고 자라서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부를 이름이 누구의 이름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스데반을 보십시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렇게 외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까지 함께 사시고 그 영혼을 받아 주시고 때가 되면 우리 몸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부를 마지막 이름은 예수님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 이름을 높이고, 이 이름을 의지하고, 그 능력에 의지하여 승리의 생활을 합시다.
피 흘린 십자가 피 묻은 신앙/ 히9:1/ 남전도회헌신예배
피 흘린 십자가 피 묻은 신앙 히9:1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헌신의 참된 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의미가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살아야 하는 진실된 의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1. 죄인은 헌신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죄를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이고 기독교는 피로 세워진 종교입니다. 레 17:11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해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즉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니 피를 뿌려서 죄를 속하라는 말씀입니다. 히 9:22에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피 밖에 죄를 씻을 방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의 과실은 다 먹어도 좋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매우 쉬운 것 같지만 호기심 많은 인간에게는 지키기 힘든 언약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 과실을 먹고 죄를 지어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에게 바쳐진 사람들이 되지 못하고 죽음에 얽매인 사람들이 되었고 그들의 이런 잘못이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전가되어 우리들도 죽음에 매여 살게 되고 말았습니다. 롬 6:23에는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망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를 말하고, 생명에서 끊어진 것을 말하고, 사망의 권세 아래 살게 된 것을 말하고, 사단의 종노릇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죽음이고, 죄고, 어두움이고, 사망입니다. 인간 불행의 총화는 사망이요 죽음입니다. 죽음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요, 둘째는 육체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 사망이요, 셋째는 제 2의 죽음, 큰 죽음인데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서 소망이 없이 절망적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영 육의 분리는 사실 영원한 죽음의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일종의 죽음의 가사 상태입니다. 일시적인 죽음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영원한 죽음은 무감각, 무경험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 영원한 소외, 영원한 어두움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받을 죽음이 사단의 간계로 미화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가짜를 잘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가짜 예수님을 만들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그의 피로서만 해결될 수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서 적그리스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은 붉은 혁명의 깃발을 앞세워 공산주의를 만들어 내고, 1960년대는 Student Power라는 신좌익 운동을 만들어 일본, 미국, 아프리카, 남미 그리고 우리 나라 학생들까지 피를 흘리지 않고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하여 무서운 피의 제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피흘림은 속죄의 피흘림이 아니라 새로운 체제를 위한 피흘림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문화 혁명이 일어나 “피를 흘리자, 피를 흘리자”라고 피의 숙청을 부르짖었습니다. 이미 망해 버린 구 소련의 국기에는 피 빛 바탕에 별 5개가 있는데 세계5 대륙을 피로 적화해야 한다는 사단의 계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이교도들의 종교도 대게 피의 종교들입니다. 그들은 피로 죄를 씻는다고 하고, 자기들의 신에게 피를 바친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피를 흉내낸 사단의 장난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흉내내서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의 의미를 흐리게 하고 마치 그들이 말하는 피가 그리스도의 피와 같은 것으로 착각을 하게 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생명의 피요 축복의 피입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하나님이 옷을 입혀 주셨는데 그것은 한 마리의 짐승을 잡아 피를 흘러 만들어 주신 것이요,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침으로 피 흘리는 제사를 드렸고,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해 피를 흘려 우리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 죄인의 생명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죄인의 구원은 깨끗하게 사는 도덕적 결의로나, 신화, 소설, 문학에서 나 온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말씀이 255번이나 나오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인이 구원을 얻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피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만찬식 때 포도주를 가지시고 “이것은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2,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피입니다. 헌신에는 속량의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값을 주고 산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당신의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돈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노동의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강압적으로, 말로 우리를 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사상이 아닙니다. 피를 흘려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의 심장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흐릅니다. 그들의 영혼 속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살아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의 참된 헌신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희생하므로 써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혹은 수고로운 짐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량이 없는 헌신은 공염불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이렇듯 고귀한 생명의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우리들도 우리들의 생명을 바쳐 주님 위해 살아야 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속량하는 수고로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도덕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의로워집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며, 성실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이 말씀입니다. 영원한 삶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의인을 요구합니다. 교회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기관이지만 그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죄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적 의인이란 죄없는 완전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어 덧입음을 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덧입은 사람은 그 생각과 말과 행동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가져야 하며 그리스도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총으로 인해 의인이 되었으니 의인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재직이 되고 중책을 맡았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방법과 수단을 그대로 동원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피가 같다는 말입니다. 요세는 어떤 일 때문에 친자 확인이라는 것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자 확인은 4-5가지의 조건이 정확히 맞아야 친자 증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친자 확인은 피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가지라도 맞지 않으면 친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확실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들의 생명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인의 흉내를 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천사의 모양을 흉내낼 수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흉내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아 있습니다. 5. 예수님의 피는 약속의 수단입니다. 우리가 도장을 찍을 때 붉은 인주를 쓰는 것은 피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과 인격을 걸고 이렇게 약속을 합니다”라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5,000이상의 약속을 피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사용된 붉은 인주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6. 예수님의 피는 능력입니다. 사상, 도덕, 교육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피가 그의 피입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하고, 영원히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죄인을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들을 지옥에서 완전히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신장 이식 수술을 하는데 필연적인 두 가지 요소가 맞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장을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이식을 받은 사람이 거부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이 우리의 것이 되려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가 계시고 그 생명을 받는 우리가 그 생명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고 믿음으로, 전적인 의탁과 순종으로“당신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요, 당신의 생명은 나의 생명입니다.”라고 믿어야 합니다. 진센돌프는 모리비안 교파의 지도자입니다. 모리비안 사람들은 감리교의 웨슬레에게 은혜를 준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진센돌프가 박물관에 있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 그림에는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살길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었느냐”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그 그림과 그 글을 보고 있다가 그 자리에 무릎을 끓고 “주여, 나의 모든 생명을 다 드립니다.”라고 헌신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것은 참으로 배은망덕합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또 다른 아픔, 또 다른 고독과, 슬픔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기에 달려 돌아가실 때 “테델레스타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세금은 다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우리의 생각에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 하고, 우리가 세상을 살 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이 온통 그리스도의 삶이 되어야 하고 우리들의 이상과 꿈이 모두 그리스도의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내 생명보다 더 귀하시고, 내 자식보다, 내 명예보다, 내 세상보다 더 귀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없는 세상을 올바른 세상이 아니며, 그리스도 없는 나는 참된 구원을 얻은 내가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는 저주받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피의 언약입니다. 지울 수도 없고 지워지지도 않는 생명의 언약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우리 무덤 앞에는 십자가가 세워 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묘비에는 세상의 공적이 아니라 단 한마디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주님의 나라에 간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헌신 예배에 헌금했다고 헌신된 것이 아니며, 예배당 청소를 했다고 헌신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우리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잘 알고 주님의 마음과 진심으로 교회를 섬겨야 헌신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 행11:19-26/ 김찬종 목사/ 과천교회/ 남선교회헌신예배/ 2002-08-05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 행11:19-26 안디옥 교회의 창립은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큰 환난이 일어나자 그 흩어진 사람들이 주 예수를 증거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환난으로 인하여 흩어졌지만 불붙은 그들의 뜨거운 가슴은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에게까지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안디옥 교회의 창립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슬기롭게 잘 이기면 더 큰 축복을 예비하셨다가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 자신들도 어떤 의미로는 흩어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나 사회로 돌아가면 흩어진 교회로서의 몫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지방에도 복음이 증거되었다는 말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주요 요점이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흥의 방법은 그 시대가 필요한 일꾼을 통해서 부흥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당한 시대에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민족의 조상,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여 세워서 웅장한 역사를 성취하셨습니다. 모세의 시대가 끝나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워서 가나안 복지로 그 민족을 이끌어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해주셨던 것입니다. 다윗을 세워 이스라엘 나라를 굳건한 나라가 되도록 하였으며, 솔로몬을 세워 새 성전을 짓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12제자를 세워서 하늘나라의 사업을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알맞은 일꾼을 통하여 역사하셨습니다. 18세기 영국 사회가 극도로 퇴폐해지고 말씀이 살아 있지 않는 교회가 될 때에 존 웨슬리를 세워 복음운동을 일으키며 성결 운동을 일으켜서 영국 사회를 구원하셨습니다. 19세기 말에는 암흑과 같은 한국 땅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보내시사 이 민족에게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가 요청하는 일꾼은 자격과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울 때는 재덕이 겸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진실무망한 사람, 불의의 이를 탐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재주만 있고 덕을 세우지 못한 사람은 안됩니다. 재주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지혜나 죄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덕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따라서 재덕이 겸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거망동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즉 믿음이 있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진실 무망하다고 하는 것은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는 사람, 깨끗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를 통하여 이 축복을 허락해 주신 것이며, 지도자를 세우는 근거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내려와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교회가 크게 부흥될 때에 일곱 집사를 세운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의 자격도 출애굽기 18장의 천부장을 세울 때의 자격과 비슷합니다. 첫째로 성령 충만한 사람, 둘째, 지혜 충만한 사람, 셋째, 칭찬 듣는 사람, 한 가지 더 포함시키면 믿음 충만한 사람을 세웠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지혜 충만할 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사회에서 칭찬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충만해야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와 같이 좋은 일꾼들을 세웠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행 6; 7)라고 했습니다. 즉 부흥의 축복이 주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라건대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셔서 중한 직분을 피택받는 여러분들, 여러분이 피택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왕성해야 합니다. 말씀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말씀따라 기도하고, 말씀따라 생활하고, 말씀따라 봉사하는 열심히 왕성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열심히 상고해야 됩니다. 말씀 공부하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24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말씀합니다. 1. 그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이중인격자가 아니라 상냥하다는 말입니다. 의지와 태도가 친절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남을 걱정해 주고 남의 이익을 위해서는 희생 봉사한다는 사람이라고 해석해도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일하는 곳 어디에 가서도 신임을 받은 사람, 그런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정 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에 대한 기사가 사도행전 4장과 9장 두 곳에 나옵니다. 먼저 4 : 37에는 초대교회가 필요하여 그의 밭을 팔아서 교회에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물질을 바르게 바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의 신앙생활을 흉내내다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기록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9장에 보면 신약의 역사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되는 훌륭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핍박자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꾸러지고 나서 3일 금식 후에는 거듭나서 바울이 되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던 사람이 4, 5일 후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사울이 다메섹에 가서 전도하니 아무도 믿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패였던 자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메섹에서 도망쳐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를 위시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나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믿어 주지를 않습니다. 그때 바울이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바나바가 나서서 중재한 것입니다. 사울 보고 믿은 것이 아니고 바나바의 신실함을 보고 믿어 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2. 그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타고난 성실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복음의 진리에 강하게 붙잡힌 사람입니다. 허약하고 절망적인 의심에 시달리지 않았습니다. 본문 23절에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아 안디옥에 간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교회가 창립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구원 받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나바는 이 같은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오셨고 부활 승천하신 것을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라야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지도하는 그의 지도 방침이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3. 그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은 입으로만의 충만이 아니라 그 분의 삶으로 충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 : 22에 성령의 열매는 9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바나바는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온유하고 겸손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협력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본문 25절에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1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혼자서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큰 일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좋은 협력자가 있을 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좋은 협력을 해서 일을 해나갈 때 서로 양보하는 마음, 인내하는 마음, 절제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이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성령 충만으로 1년 동안 사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쳤지만 조금도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 충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일을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말썽이 일어납니다.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착한사람이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24절 하반절에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큰 무리는 적어도 500명, 천 명, 수천 명을 말할 것입니다. 착한 사람, 믿음이 충만한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 하나를 통하여 큰 무리가 주님께로 돌아오리라. 뿐만 아니라 26절 하반절에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의 정식 명칭을 인정받은 것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착한 사람이 됩시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됩시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남선교회/ 빌3:12-14/ 2003-10-19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남선교회 빌3:12-14 조봉기 오늘날 사는 것이 암흑 같고 답답합니다. 잠만 자도 몇 억 씩 불어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있는 가 하면 한편에서는 가난과 고통으로 하루에도 수십 명이 자살하고, 돈 때문에 죽고 죽이고, 가정과 사회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장애인과 불우한 계층을 위하여 근검절약하며 평생 모은 재산 수백 억을 사회와 학교에 환원한 아름다운 일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교회 건축 헌금으로 엄청난 금액이 쓰이고 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교회 건축 헌금이 8억 5천이 아니고 85억도 아닌 850억 이랍니다. 인천에 있는 모 교회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성전 예산은 바벨탑보다 많을 것입니다. 바벨탑 설립 예산은 모르긴 해도 이것보다는 적었을 것입니다. 회사 부도로 길거리의 노숙자는 넘치고 명퇴로 수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넘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서울역, 을지로, 대학로의 지하도에 가보세요. 가득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또 놀라지 마세요. 유명한 김 모 목사님 퇴직금이 8억이 아니라 80억 이랍니다. 우리 새길교회 헌금 50년 치 입니다. 누구 말대로 막가자는 거지요. 이 시대를 구할 철학도, 종교도, 사상도 없습니다. 더 이야기 하면 놀라서 기절할까봐 골치 아픈 세상 이야기는 여기서 접고 우리 새길 공동체의 남선교회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합니다. 첫째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모여야 일이 되지요. 우리 교회 특성상 개성이 강하고 신앙관들이 뚜렷하여 개개인들은 훌륭하십니다. 이러다 보니 개개인 모두 사회 활동과 봉사 활동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혼자 할 일이 있고 함께 할 일이 있습니다. 특히 먼저 나오신 형제분들이 새로 나오신 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NGO, 봉사활동에 대한 성격과 참여방법을 알려서 동참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새로 오신 형제들도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좀 더 새길 공동체 활동을 조직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새길 공동체에 온 소감을 묻길래, “아직 공동체 밖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더니 나보다 더 오랜 형제도 같은 심정이다 하셨습니다. 오히려 새로 오신 형제들이 인터넷 대화, 구역활동, 등나무 까페 등으로 대화의 공간을 만들며 우리들과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일 하루라도 사회적 지위, 명예, 욕망, 학벌 등 무거운 인생의 짐을 벗어 놓고 자연인으로 돌아와 새길 공동체의 식구가 되어 대화와 활동에 참여합시다. 이것이 첫번째 부탁입니다. 둘째는 신앙운동입니다. NGO 활동이나 사회봉사는 새길 공동체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일이 있습니다. 종교적 다원성 속의 대화, 교회의 평신도 중심성, 신학의 대중화, 새로운 신앙운동입니다. 이는 우리 공동체가 해야 할 시대적 선교 사명입니다. 진리는 특수층의 특허품이나 돈 받고 파는 상품이 아닙니다. 종교 자체도 목적은 아닙니다. 종교는 하나님 나라를 찾고 만드는 방법이고 과정입니다. 우주선이 우주에 진입하면 자기를 실어온 로켓을 버리듯이 종교도 언제가 버려야 할 로켓입니다. 우리는 많은 신앙적 갈등과 방황 끝에 새길 공동체에 신앙의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여기는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으며 우리가 해야할 선교 사명이 있습니다. 천국은 빼앗는 자의 것이라 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하여 일하고 노력하는 자가 주인입니다. 남선교회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인 참여와 새길 공동체 선교사역에 우리 함께 일합시다. 생각과 방법은 달라도 진리를 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