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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안식/ 출31:21-17/ 2003-01-13
노동과 안식 출31:21-17 한 사업가가 어떤 신학교 교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때로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여 전임 사역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요? 언뜻 들으면 참 신앙이 좋은 사람의 고백 같지만 사실은 이 말에는 잘못된 직업관이 담겨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람의 생각에는 전임 사역자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또는 진정으로 섬길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아니 이것이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생각이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 줄 아는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가? ’우리의 직장이 곧 하나님이 주신 사역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한 번 따라 하자. ’나의 일터가 하나님이 주신 사역장이다. 바로 그 일터에서 하나님의 충성스런 일꾼으로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전담사역자(Fulltime Worker)로 일하는 것이 되고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에서 교역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선교사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Fulltime service)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길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신다. 예를 들어 정치인으로서 섬겨도 하나님 중심의 정치를 하고 나라와 백성을 하나님 뜻대로 잘 섬길 때 그것이 곧 풀타임 사역이 되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학생들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들로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일을 하나님이 맡겨 준 최상의 특권과 사명으로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가르칠 때 그것이 곧 풀타임 사역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노동이 괴롭든 즐겁든 우리 인생은 일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인생과 노동은 뗄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노동은 하나의 형벌이 되고 저주가 되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를 모든 죄와 악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노동마저도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승화시키시고 새롭게 그 의미를 속량해 주셨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의 하나이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의 노동이 보다 창조적인 일이 되고 보다 기쁘고 복된 일이 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엿새 동안 일하시고 제7일에는 안식하셨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최초의 선물이 무엇인지 아는가? ’안식’이었다. 하나님은 6일 동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는 안식하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한과 책임을 맡겨 주셨다.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을 베풀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허락해 주셨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무엇보다도 쉼이 필요한 존재이다. 인간은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별히 현대인은 심신이 지치고 피곤해 있다. 육체가 피곤에 지쳐있고 신경도 날카로워져 있다. 신경이 과민하여져서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하려고 한다. 너무 날카로워져 함께 살고 함께 일하기가 어려워졌고 일을 바로 잘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휴식이 참으로 필요하다. 여러분! 아무리 피곤하고 지칠 때도 푹 잠을 자거나 쉬고 나면 새 힘을 얻게 되지 않는가? 일만하고 전혀 쉼이 없다면 우리는 곧 지쳐 쓰러지게 되고 미치게 될 것이다. 쉼은 시간낭비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계속 신선한 마음과 건강을 가지고 우리의 삶과 일을 잘 해 가도록 도와주는 행복의 비결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허락해 주시면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단순히 주일에 일을 하지 말고 쉬라든가 물건을 사고 팔지 말라든가 세상 쾌락에 탐익하지 말라든가 하는 그런 뜻만이 아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 속에는 그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첫째로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고안하신 창조의 원리와 질서를 따라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것을 거슬려 살면 삶의 질서가 파괴되고 불행해진다. 자동차나 기계를 사면 그것을 어떻게 작동(Operate)할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Manual Book이 있다. 그 책에 기록된 원리를 따라 사용해야 고장이 안 생기고 제 기능을 잘 발휘하며 작동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처음 만드실 때 고안한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그 가장 중요한 원리의 하나가 안식일을 제정해 주신 것이다. 둘째로 안식일은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큰 의미를 갖는 날이다. 엿새 동안 열심히 땀을 흘려 노동한 사람이 이 날을 더 거룩하게 지킬 수 있고 이 날에 참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교훈했다. 우리는 자기가 맡은 일을 즐기고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심히 일해야 한다. ’배달해 준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해 주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일하는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산다. 셋째는 안식은 천국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우리가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예표를 말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천국의 예표요 상징이다. ’이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셨다. 거룩(Holy)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 가야 한다. 오늘 본문 13절에도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했다.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는 비결의 하나가 안식일 즉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했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과 교제해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비결은 이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데 있다.
노동과 재물/ 전도서전5:10-20/ 2003-08-25
노동과 재물 전5:10-20 성경에는 돈이라는 주제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 그 자체가 가치가 크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물질에 미혹을 받고 이 물욕으로 인하여 범죄하게 되고 불행한 결과를 맺기 때문에 이 물질에 대한 언급이 많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람들에게 ’재물’을 ’주인’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할 만큼 사람들이 돈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빌립보서 말씀에서 살펴본대로 사도바울은 유물주의자들은 그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야고보도 (약1:14-17)에 잘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이렇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물질이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물질로 만족하려고 욕심을 내고 죄를 범하지만, 결코 돈이 사람에게 참된 만족을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이 이런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귀의 미혹에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필요한 것들, 참으로 복되고 좋은 은혜와 온전한 선물은 다 위로부터 하나님께로서 내려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취해 본 전도자가 그의 삶을 통해서 경험한 것 뿐 아니라, 여러 인생들의 삶을 두고 평가해 볼 때에 나타나는 모순되고 허무한 삶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좀 배워 보려고 인터넷을 교육하는 곳에 한 달을 시간을 내서 가 보았습니다. 혼자서 책을 보고 따라서 해도 되기는 하겠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들며, 또 시행착오들이 있겠습니까? 전화비도 무척 나올 것입니다. 하루 종일 걸려야할 해결될 것을 그곳에서 물으면 선생님이 말 한 마디 해 주면 해결이 됩니다. 혼자서 독학을 해도 공부할 수 있는데도 왜 선생님이 필요합니까? 다시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자입니까? 자기의 짧은 지식이나 경험대로, 자기 고집대로 인생을 걸어가지 않고, 그래도 자기보다 앞선 분들의 경험을 귀담아 들어서 망할 길은 아예 가지 않고, 복되고 형통한 길을 알아서 그 길로 걸어가면 그 사람이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 땅위에서 참 가치 있는 삶을 살게되는 지혜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전도자 솔로몬이 말씀한 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감동하셔서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살아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서 이 말씀이 하라는대로 순종하고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자가 복됩니다. 전도자는 경제활동 그 자체가 악이 되는 것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물질만을 추구하여 사는 삶,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며, 얼마나 자신의 삶에 해를 끼치며, 근심과 걱정거리가 되는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5:10-20에서 돈에 대하여 일곱가지를 교훈합니다. 10절: 돈은 참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11절: 돈은 욕심을 일으킵니다. 12절: 돈은 많을수록 더 쓸 곳이 많아집니다. 13절: 돈을 지키는 일은 헛되고 수고로운 일입니다. 14-16절: 돈은 영원히 소유되지 않습니다. 17절: 돈은 걱정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18절: 돈의 축복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먼저 (전5:10)입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는 물질주의의 허무함을 말합니다. 인생들이 돈 있으면 모든 것들이 다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코 돈으로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 (전5:8)대로 부정과 악행을 다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은 실은 (전5:9)에서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말씀 같이 뭇 사람을 위해서 이 물질이 주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물질은 내게 맡겨 주신 것이지 내게 있다고 내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뭇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모으기 위해서 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부정과 학대가 이 땅에 자행되는지 모릅니다.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전5:11)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도 많아집니다. 재물이 많아져도 그 재물을 뜯어 먹는 사람들의 수가 함께 많아지기 때문에 그 소유주는 얻으려고 수고를 했지만, 결국은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허상입니다. 허영만 있습니다. 셋째로, (전5: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은 허무할 뿐 아니라 물질추구의 부작용을 말씀합니다. 노동자는 그가 얻은 것이 적든지 많든지 잠을 달게잡니다. 그러나 그 소유주는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그 얻은 물질의 보관할 것 때문에 근심하므로 자지 못합니다. 사원들은 적게 벌어도 집에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많이 수입하는 사장들은 밤낮 걱정이 그를 근심되게 합니다. 쌓은 것을 도적 맞지는 않을까, 부도날까, 망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무엇이 행복이라고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 재물을 쌓을 곳이 없어서 고민했습니다. 그런 행복한 고민이라도 해 보면 하는 분들 있습니까? 차라리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아는 자족한 마음이 부자입니다. 넷째로, (전5: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제물을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서부교회 앞에 지금으로 치면 어떤 수 백억 갑부가 살았는데 그는 아주 인색한 사람입니다. 친척에게 돈 3000만원 빌려준 것을 떼이고 고민 고민하다가 그만 홧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이 재믈을 모으느라 믿음 저버리고 또 이 재물을 쓰느라고 정신없고, 이 재물을 지키느라고 자기에게 해되도록 까지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다 유물주의입니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다섯째로, (전5:14)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것도 없느니라 (전5:15)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전5: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돈은 결코 영원한 것이 못됩니다. 재물을 쌓다가 이제 자녀에게 주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계획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죽음이 올 때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두가지 사실을 깨달아야합니다. 머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이 있어도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이러니 세상에서 수고한 것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여섯째로, (전5: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재물에 대한 집착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즐거움 조차도 가지지 못하고 온통 번뇌와 병과 분노가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시는 분, 경험하신 분들은 아직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서 옳다고 인정되시면 아멘으로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병은 육신적인 병 뿐 아니라 정신적인 병, 영적인 병 까지 다 말씀합니다. 얼마나 돈 때문에 분노하여 싸우는 일은 많으며 근심걱정은 좀 많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다 헛되고 무익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는 삶이 있습니다. 바로 해 위에서의 삶입니다. (전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전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5:20)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한 시간, 한 현실, 그 현실 안에서 만나지는 사람들, 얻어지는 부와 재산과 지식들은 다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씀합니다. 재물을 추구하는 삶은 허무하며 그 얻은 재물은 길지 않으며, 그 재물은 근심과 질병을 일으키고 다툼을 일으켜서 인생을 오히려 불행케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고하는 노동을 주시고 경제를 주시는 것은 우리들에게 선물인 것을 말씀했습니다. 물질을 목적으로 삼는 자가 아니라 수단으로 삼아서 선용할 줄 아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버릴 수 없는 귀한 선물입니다. (전2:26)에서도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했습니다. (전5: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 땅에서 하나님주신 것으로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으로 낙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일하는 즐거움을 아십니까? 진정 노동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노동 그 자체가 고통이나 저주가 되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직업에 무슨 귀천이 있습니까? 하나님게서 주신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전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람들에게 재물과 부요를 주시는 분도, 누리게 하시는 분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깨달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전5:20)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저는 인생의 어떤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지 않습니다.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지도 않고, 좋은 현실을 만드려고 애를 쓰지도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기뻐하시는 것으로 날마다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도 다 맡기고 가기 때문에 염려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주셨음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노동과 재물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으시렵니까, 아니면 저주스럽고 근심된 것으로 만들어서 일평생을 불행한 가운데 사시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노동 그것이 복됩니다. 주신 재물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자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참으로 복됩니다.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쓸 것을 풍성히 채워주시므로 그 마음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노동과 휴식/ 출20:8-11
노동과 휴식 출20:8-11 금년 지방회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연세가 70이 넘어 장로님 한분이 은퇴를 하심으로 찬하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맡으신 목사님이 “장로님 오래 사실려고는 하지 마십시오. 노인에게 오래 살라고 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욕입니다” 했더니 일순간 장로님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 “모세만큼만 사십시오”했더니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아무리 나이많은 노인도 더 오래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장수를 복이라고 말합니다. 장수는 분명 복입니다. 그러나 장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건강입니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하게 사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건강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지만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건강합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건강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신앙생활, 오래 한것만 자랑하지 마시고 건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몸이나 신앙이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영양부족과 영양과다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먹는 것은 적고 일하는 것은 많았습니다. 그들은 늘 영양실조에 시달렸습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서 건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정반대입니다. 잘먹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몸이 비대해지고 온갖 질병이 찾아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먹지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여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혜만 잔뜩 받아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 비만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이 원리는 각 방면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영양과 공급과 지출을 이룰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누구보다도 사람을 위하여 걱정하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사람이 그 욕망의 절제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욕망의 절제를 포기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즉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하는 치명적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비만과 동맥경화와 심장질환에 걸리게 되고 술을 즐기는데 절제하지 못하면 폐와 간과 골수에 손상을 입게 됩니다. 성욕을 절제합지 못하면 결국 퇴폐의 골짜기에 떨어지제 되어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심각한 문제들로부터 사람을 조금이라도 보호할 수 있을까 고심하시던 하나님은 결국 몇가지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곧 여자에게는 잉태하는 고통과 해산의 수고를 주신 것입니다. 남자에게는 종신토록 수고하여 얼굴에 땀이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신 일입니다. 즉 여자에게는 한달에 한번씩 경도의 기간과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필요한 시간을 부과함으로써 끝없는 욕망의 분출을 견제하셨고, 남자는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게 하심으로 콜레스테롤의 축적을 최대한 방지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그 정욕을 억제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 때문에 그 징계로써 사람에게 닥쳐올 신속한 종말로부터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건져 내시려는 하나님의 비상조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에게는 기회만 있으면 일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이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걷는 사람은 서고 싶어하고, 서있는 사람은 자꾸만 앉으려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은 또 눕고 싶어합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누우면 그는 죽음에 그는 죽음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은 아이 낳기를 싫어합니다. 아이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남자가 일하기 싫아하고 여자가 아이낳기를 싫어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향해 가는 지름길입니다. 역사상 모든 나라의 멸망들은 한결같이 일하지 않으려는 남자들과 아이 낳기를 싫어하는 여자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여자들이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함으로 매년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말세를 향하여 가는 징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로부터 오랫 전쟁과 가난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려 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존적에너지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모멸과 치욕 속에서 살 수 없다는 자각이 우리의 생존의지를 불타게 했고 우리는 참으로 지독하게 일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수십 달러 밖에 안되던 1인당 GNP가 6000달러를 넘어섰고 무역거래액이 세계 10위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은 1천 4백만의 대도시가 되었고 160개국이 참가하는 올림픽도 훌륭하게 치뤄냈습니다. 온세계사람들이 한국을 부러워하게 되었고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식량원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불러지면서 모세의 경고가 적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이나 고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진입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모세는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 8:12-14)” 모세의 걱정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큰 나라를 건설하고 그 소유가 풍부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의 신전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방의 여인들과 음행에 빠지고 우상숭배에 끼어들더니 마침내 멸망의 길을 걷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비해 놀랄만큼의 생활의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를 쌓았든 더 큰 목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당신도 지금 이와 같은 죽음의 대열에 빠져들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와 같은 영적비만에 걸려있지 않습니까? 2.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과거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열악한 조건 속에서 생계비도 안되는 저임금을 받으며 선진국들과의 경쟁을 위해 노동자들은 쉼없이 일했습니다. 땀흘려 지은 양식을 말도 안되는 가격에 공급하여 농민들은 그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역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사용자들이 뼈빠지게 일시키고 돈 안줄려고 했다면, 요즘은 일안하고 돈받겠다는 식이 되었습니다. 옛날 로마가 가장 강대했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사람들의 공휴일은 76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새황제가 즉위하면서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휴일을 늘려주면서 로마가 멸망하게 되었을 때 쯤에는 공휴일이 175일이나 되었습니다. 우리의 휴일은 법정일수가 96일입니다. 여기에다 노조와의 단체협약에서 덧붙여준 휴일과 휴가, 연월차, 각종 노조행사에 필요한 휴일, 그리고 예비군 교육까지 합하면 147일입니다. 거기에다 일부에서는 토요일 휴무를 검토 중인데 토요일 휴무를 0.5일로 계산하여 26일을 보태면 결국 173일이 됩니다. 물론 재충전을 위해 휴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하루를 쉬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의 멸망은 일주일에서 이틀을 쉬는데서 왔습니다. 서구 교회의 쇠퇴와 타락은 주 오일 근무에서 왔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오일을 근무하고 하루는 야외에 나고 놀고 주일만 교회에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틀을 쉬면 그나마 나오던 주일도 못지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연휴가 되면 놀러갈 계획부터 세우지 않습니까?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9-10)” 엿새는 세상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엿새동안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일곱째날 안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놀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전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들마저 놀러다니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제 일하는 모범을 보이는 일에 교회가 앞장설 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게도 하지말라(살후 3:10)”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걱정을 그대로 나타낸 말이었습니다. 일하지 않고 땀을 흘리지 않으려면 차라리 먹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천국에 도착하려면 성도들은 땀을 흘리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일하지 않아서 비만증에 걸린 성도들은 천국에 이르기도 전에 헐떡거리며 쓰러져 버릴 게 틀림이 없습니다. 3.주 안에서 휴일을 보냅시다. 위에서 예시한 부분들이 일하지 않고 먹고 즐기는 일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제는 정반대로 일에만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 일간지 신문의 해외토픽란에 어느 폴란드인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등기소의 직원인 한 사람은 27년 동안 하루도 쉬지않고 일만해 왔습니다. 그사람은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에 미쳐서 쉬는 것을 아예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하도 딱하게 보이니까 상부에서 강제로 일주일간 휴가를 주어 일을 떠나도록 했는데 그는 오히려 일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낙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두 사람이 열심히 도끼로 나무를 찍어 내고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한시간 일하고 잠시 쉬고 또 일하고 또 쉬곤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사함은 쉼없이 일을 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각자가 찍어낸 나무를 보니 오히려 쉬엄쉬엄 일한 사람의 것이 더 많았습니다. 어이가 없어 그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자ㄴ네는 어떻게 이렇게 많은 나무를 찍어낼 수 있었는가?” “나는 쉴 때마다 내 도끼날을 갈았다네.” 그렇습니다. 휴식도 사실은 일입니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재충전인 것입니다. 성도의 휴일은 일주일간 살아갈 수 있는 내 영적 삶을 위한 재충전인 것입니다. 이 충전이 없으면 무력합니다. 주일날 차량운행을 하면 다른날보다는 훨씬 수월합니다. 주일이 휴일이라서 차가 운행하지 않는 차량이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주된 이유는 야외로 빠져나간 차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도심은 한가하고 야외로 빠져나가는 도로는 차들들로 인하여 아예 주차장이 되어 버립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갑니다. 나의 모든 날들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갑시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여 주님 앞에 충성된 모습으로 섭시다. 열심히 벌어서 옳바르게 지출합시다. 주님 앞에 신령과 진정의 참된 예배를 드립시다. 주님이 주신 말씀들로 영적 삶을 재충전하고 그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갑시다. 늘 이기며 살아갑시다.
노동과 휴식/ 출20:8-11
노동과 휴식 출20:8-11 금년 지방회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연세가 70이 넘어 장로님 한분이 은퇴를 하심으로 찬하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맡으신 목사님이 \\\"장로님 오래 사실려고는 하지 마십시오. 노인에게 오래 살라고 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욕입 니다\\\" 했더니 일순간 장로님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 \\\"모 세만큼만 사십시오\\\"했더니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아무리 나이많은 노인도 더 오 래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장수를 복이라고 말합니다. 장수는 분명 복입니다. 그러나 장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건강입니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 지만 건강하게 사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건강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지만 건강하지 못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건강합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건강합 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신앙생활, 오래 한것만 자랑하지 마시고 건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몸이나 신앙이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 유 때문입니다. 영양부족과 영양과다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먹는 것은 적고 일하는 것은 많았습니다. 그들은 늘 영양실조에 시달렸습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서 건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정반대입니다. 잘먹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몸이 비대해지고 온 갖 질병이 찾아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먹지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여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혜만 잔뜩 받아놓고 아무 일도 하 지 않아 비만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이 원리는 각 방면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습니 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영양과 공급과 지출을 이룰 것인 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누구보다도 사람을 위 하여 걱정하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사람 이 그 욕망의 절제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욕망의 절제를 포기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즉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하는 치명적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비만과 동맥경화와 심장질환에 걸리게 되고 술을 즐기는데 절제하지 못하면 폐와 간과 골수에 손상을 입게 됩니다. 성욕을 절제합지 못하면 결국 퇴폐의 골짜기에 떨어지제 되어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심각한 문제들로부터 사람을 조금이라도 보호할 수 있을까 고심하시 던 하나님은 결국 몇가지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곧 여자에게는 잉태하는 고통과 해산의 수고를 주신 것입니다. 남자에게는 종신토록 수고하여 얼굴에 땀 이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도록 하신 일입니다. 즉 여자에게는 한달에 한번씩 경도 의 기간과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필요한 시간을 부과함으로써 끝없는 욕망의 분 출을 견제하셨고, 남자는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게 하심으로 콜레스테롤의 축적을 최대한 방지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그 정욕을 억제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 때문에 그 징계로써 사람에게 닥쳐올 신 속한 종말로부터 그의 사랑하는 사람을 건져 내시려는 하나님의 비상조치였던 것 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에게는 기회만 있으면 일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이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걷는 사람은 서고 싶어하고, 서있는 사람은 자꾸만 앉으려 하 고, 앉아 있는 사람은 또 눕고 싶어합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누우면 그는 죽음에 그는 죽음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은 아이 낳기를 싫어합니다. 아이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신 만을 위하여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남자가 일하기 싫아하고 여자가 아이낳기 를 싫어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향해 가는 지름길입니다. 역사상 모든 나라의 멸 망들은 한결같이 일하지 않으려는 남자들과 아이 낳기를 싫어하는 여자들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여자들이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함으로 매년 인구가 감 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말세를 향하여 가는 징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로부터 오랫 전쟁과 가난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려 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존적에너지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모 멸과 치욕 속에서 살 수 없다는 자각이 우리의 생존의지를 불타게 했고 우리는 참으로 지독하게 일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나 수십 달러 밖에 안되던 1인당 GNP가 6000달러를 넘어섰고 무역거래액이 세계 10위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은 1천 4백만의 대도시가 되었고 160개국이 참가하는 올림픽도 훌륭하게 치뤄냈습니다. 온세계사람들이 한국을 부러워하게 되었고 아 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식량원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불러지면서 모세의 경고가 적중하기 시작했던 것입 니다. 광야에서 40년이나 고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진입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모세는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 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 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 8:12-14)\\\" 모세의 걱정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큰 나라를 건설하고 그 소유가 풍부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의 신전을 기웃거렸습니 다. 그러다가 결국 이방의 여인들과 음행에 빠지고 우상숭배에 끼어들더니 마침 내 멸망의 길을 걷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비해 놀랄만큼의 생활의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를 쌓았든 더 큰 목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당신도 지금 이와 같은 죽음의 대열에 빠져들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와 같은 영적비만에 걸려있지 않습니까? 2.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과거 우리나라 산업구조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열악한 조건 속 에서 생계비도 안되는 저임금을 받으며 선진국들과의 경쟁을 위해 노동자들은 쉼 없이 일했습니다. 땀흘려 지은 양식을 말도 안되는 가격에 공급하여 농민들은 그 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역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사용자들이 뼈빠지게 일시키고 돈 안줄려고 했다면, 요즘은 일안하고 돈받 겠다는 식이 되었습니다. 옛날 로마가 가장 강대했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사람들의 공휴일은 76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새황제가 즉위하면서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휴일을 늘려주면서 로마가 멸망하게 되었을 때 쯤에는 공휴일이 175일이나 되었습니다. 우리의 휴일은 법정일수가 96일입니다. 여기에다 노조와의 단체협약에서 덧붙 여준 휴일과 휴가, 연월차, 각종 노조행사에 필요한 휴일, 그리고 예비군 교육까 지 합하면 147일입니다. 거기에다 일부에서는 토요일 휴무를 검토 중인데 토요일 휴무를 0.5일로 계산하여 26일을 보태면 결국 173일이 됩니다. 물론 재충전을 위 해 휴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하루 를 쉬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의 멸망은 일주일에서 이틀을 쉬는데서 왔습니다. 서구 교회의 쇠퇴와 타락은 주 오일 근무에서 왔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오일을 근무하고 하루는 야외에 나고 놀고 주일만 교회에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가 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이틀을 쉬면 그나마 나오던 주일도 못지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연휴가 되면 놀러갈 계획부터 세우지 않습니까? \\\"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9-10)\\\" 엿새는 세상에서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엿새동안 최선을 다 한 사람만이 일곱째날 안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놀아야 되겠다는 생각 이 전국을 휩쓸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들마저 놀러다니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 니다. 이제 일하는 모범을 보이는 일에 교회가 앞장설 때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 로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게도 하지말라(살후 3:10)\\\"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걱정을 그대로 나타낸 말이었습니다. 일하지 않고 땀을 흘 리지 않으려면 차라리 먹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멸망하지 않고 천국에 도착하려 면 성도들은 땀을 흘리는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일하지 않아서 비만증에 걸린 성도들은 천국에 이르기도 전에 헐떡거리며 쓰러져 버릴 게 틀림이 없습니다. 3.주 안에서 휴일을 보냅시다. 위에서 예시한 부분들이 일하지 않고 먹고 즐기는 일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제는 정반대로 일에만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얼 마 전 일간지 신문의 해외토픽란에 어느 폴란드인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등 기소의 직원인 한 사람은 27년 동안 하루도 쉬지않고 일만해 왔습니다. 그사람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에 미쳐서 쉬는 것을 아예 잊어버리고 살았 습니다. 하도 딱하게 보이니까 상부에서 강제로 일주일간 휴가를 주어 일을 떠나 도록 했는데 그는 오히려 일할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낙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두 사람이 열심히 도끼로 나무를 찍어 내고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한시간 일하고 잠시 쉬고 또 일하고 또 쉬곤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사함은 쉼없이 일 을 했습니다. 저녁이 되어 각자가 찍어낸 나무를 보니 오히려 쉬엄쉬엄 일한 사 람의 것이 더 많았습니다. 어이가 없어 그가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자ㄴ네는 어 떻게 이렇게 많은 나무를 찍어낼 수 있었는가?\\\" \\\"나는 쉴 때마다 내 도끼날을 갈 았다네.\\\" 그렇습니다. 휴식도 사실은 일입니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재충전인 것입니다. 성도의 휴일은 일주일간 살아갈 수 있는 내 영적 삶을 위한 재충전인 것입니다. 이 충전이 없으면 무력합니다. 주일날 차량운행을 하면 다른날보다는 훨씬 수월합니다. 주일이 휴일이라서 차 가 운행하지 않는 차량이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주된 이유는 야외로 빠져 나간 차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도심은 한가하고 야외로 빠져나가는 도로는 차들 들로 인하여 아예 주차장이 되어 버립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갑니다. 나의 모든 날들을 주님을 위하여 살아갑시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여 주님 앞에 충성된 모습으로 섭시다. 열심히 벌어서 옳바르게 지출합시다. 주님 앞에 신령과 진정의 참된 예배를 드립시다. 주님이 주신 말씀 들로 영적 삶을 재충전하고 그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갑시다. 늘 이기며 살아갑시다.
노동은 창조질서의 하나이다/ 시104:14-23/ 2003-02-14
노동은 창조질서의 하나이다 시104:14-23 시편 104편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이 시는 우주와 만물을 창 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산문으로 기록했다면 시편 104편은 하나님 의 천지창조를 운문으로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104편을 잘 읽으면 \'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 셨구나!\' 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느낌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산문은 알아서 깨닫게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것으로 끝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창 조하신 천지와 만물이 질서 있게 운행되도록 지금도 돌보시고 계십니다. 특히 피조물 가운데 으뜸인 사람들을 세심하게 보살피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 깨닫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금도 많은 수고를 하고 계시는 구나!\" 우리는 시편 104편에서 하나님의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하고 따라서 이 세 상 곳곳에서 하나님의 땀방울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노사분쟁이 일어나서 근로자들이 파업하는 일을 매스컴을 통해 듣기도 하고 겪기도 합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택시 같은 대중교통수단 근로자들이 파업하면 교통대란이 일 어납니다.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을 하면 쓰레기 대란이 일어납니다. 파업을 하는 것이 아 니라 명절 연휴 같은 때 그들이 며칠만 일손을 놓아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 다. 지난 주간 설 연휴 때 제가 사는 아파트 곳곳에 \"연휴기간에는 쓰레기 배출 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하는 글들이 붙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파업을 하시거나 일손을 잠시, 아니 한순간이라도 멈추시면 어 떻게 될까요? 천하대란, 나가서 우주대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어지러워집니다. 그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은 여러 분이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6절에서 9절까지를 보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 강과 바다 가 일정한 경계를 유지하면서 넘치지 않는 것, 다 하나님께서 힘써 그렇게 하 시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일손을 놓아버리면 이것도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 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질책하자 예수님은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한복음 5장17절의 말씀입니다. 시편 104편은 이 말을 실감나게 느끼게 해 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 덧붙여 말하면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일과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일하는 것 은 중요하다\'\'사람은 일해야 한다\'라는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의 제일 앞부분인 창세기의 3장 19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천지창조 때부터 사 람은 노동과 불가분의 숙명적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레위기 23장 3절은 안식일을 제외한 엿새는 일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욥기 7장 1절은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는 힘든 노동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14장 23절은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다고 하였고 전도서 9장 10절은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은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일 대표적인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후반절의 가르침입니다. \"누구 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일하지 않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먹으려는 사랑을 불한당(不汗黨)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불한당이라는 말의 원래 뜻을 아십니까? \'한\'은 땀을 말합니다. \'땀흘리지 않고 먹으려는 무리들\' 이런 뜻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의 이 말씀은 \'불한당이 되지 말아라, 땀 흘리는 사람들이 되어 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달게 자기를 원합니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것은 고통 가운 데에서도 큰 고통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단잠은 노동에서 오는 것이라고 전도서 5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두 부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러나 소유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5장 10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서 노동의 신성함과 함께 지 나침 소유욕에 대한 훈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은은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 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 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 지 못하느니라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당할 때 없어지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그 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 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큰 불행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는 수고가 그에게 무엇이 유익하야 일평생 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자신도 공생애에 나가기 이전까지는 목수 의 일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노동을 체험하신 분입니다. 교회는 노동은 중요한 것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사람은 일해야 한다, 이런 가르침 위에 서 있습니다. 일본에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1888∼1960))이라는 기독교 사회운동가가 있 었습니다. 우리 나라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은 노동의 신성함, 노동자의 존귀함을 누구보다도 강조하였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선생은 \"노동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새 창조의 기회이 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노동을 싫어하는 것은 새 창조의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일입니 다. 이 분은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땅 갈고 베 짜고 배를 만들고 땅 속 깊이 들어가 쇠를 캐고 땀으로 반죽하여 얻어진 빵 노동자여 네 이름은 존귀하도다 요즘 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도단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서 이런 수도단체들에 대해서 더 많은 관 심을 갖고 있는 것을 봅니다. 세상이 너무 혼탁해지고 물질주의에 흐르니까 해 법이 여기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즘 「중앙일보」에 이런 영성수도단체들을 소개하는 내용이 연재되는데 그것 을 통해 전혀 모르던 단체들도 여럿 알게 됩니다. 이런 영성수도단체들의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묵상에 힘쓴다, 그 안에서는 평등 하다, 이런 것들과 함께 노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 다. 이 가운데 강원도에 있는 예수원을 방문해 본 일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 다. 예수원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노동입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방문하 는 사람들도 일을 해야합니다. 영성 수도단체들이 노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이 수도원을 유지하기 위 한 수단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동이 영성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성이란 성경의 말씀대로 살면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 힘쓰는 것인데 성경은 노동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예수님은 그 모범을 보였습니다. 얼마 전에 크리스천 문학가들이 목포 부근에 있는 이런 영성 수도단체를 하나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동그란 건물 안에 일정한 시간에 수도하는 분들이 둘러앉아 기도 시간을 갖습니다. 수도단체에서는 평등하다고 했는데 사회석이 따로 없습니다.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는데 그 탁자를 돌아가며 수도하는 사람 앞에 놓습니다.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탁자를 옮깁니다. 탁자가 앞에 놓인 사람 이 그 기도회의 사회를 봅니다. 방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시인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의 독들이 다 빠진 얼굴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네요\' 노동과 묵상에 힘쓰면 세상의 독이 다 빠지게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직업을 소명이라고 가르칩니다. 당신이 하는 일, 그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노동을 그저 생계의 수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먹기 위해 일한다고 가르치 지 않습니다. 먹기 위해 일한다고 하면 한없이 비참해집니다. 하나님이 맡기셨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느 구둣방 주인이 자기가 하는 일이 싫증이 났습니다 이 분은 집사님이었습 니다.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제가 아무래도 직업을 바꾸어야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은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이 일하는 구둣방을 교회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집사님은 그 교회의 목사님이라고 생각하세요. 교회에서는 비품들을 성물, 거룩한 물품이라 고 부르는데 구두 만들고 수선하는데 사용하는 도구들을 성물이라고 여기세요. 그리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집사님은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서 \'무슨 구둣방 주인은 참 친 절하다\' \'그 구둣방에서 만드는 구두는 튼튼하다\' \'그 구둣방에서는 약속한 날짜 를 꼭 지킨다\' 하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좀 흐르자 \'무슨 구둣방 주인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즐거워진다\' 하는 소문도 났습니다. 여러분, 그 구둣방 주인이 직업을 바꾸었겠습니까? 안 바꾸었겠습니까? 크리스천을 그런 자세로 일해야합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본회퍼 목사님 이야 기를 했는데 본회퍼 목사님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사람은 노동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봉사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야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해야 하며 보 람을 느껴야합니다. 여기 연세 많은 분들. \'나는 나이가 많아 일할 수 없으니 따라서 즐거움도 없고 보람도 느끼지 못하겠네\' 하시기 쉬울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기도를 노동으로 여기세요. 더 기쁘고 더 보람있습니다. 세상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 문명을 건설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는데 공헌을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기독교입니다. 이와 같이 일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하고 있 는 것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 더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하는 것은 창조질서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밤과 낮을 지으셨습니다. 밤과 낮은 이 세상의 모든 리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23절 보세요. 낮은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 라\"(요9:4)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 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시편 104편을 염두에 두셨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찬송가 370장 \"어둔 밤 쉬 되리니\"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가의 가 사를 지은 분은 애니 루이스 워커 코그힐(Annie Louise Walker Coghill 1836∼ 1907)이라는 영국의 여성 크리스천입니다. 이 찬송은 이 분이 열여덟 살이던 1854년에 작사했습니다. 원래의 찬송시에는 각 절 끝에 \'우리의 일을 마치면 밤이다\'라는 말이 붙어 있 었습니다. \'그러니까 낮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라는 뜻인데 작곡할 때 운율을 맞추기 위해 뺐다고 합니다. 여러분, 일을 싫어하는 것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리듬을 깨 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환경오염을 꼽았습니 다. 환경보존운동을 하는 분들은 \'창조의 선하심을 회복하자\' \'창조질서를 회복 하자\'는 구호를 많이 외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생명복제입니다. 이거 참 조심해야합니다. 지금, 특별히 한국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요행을 바라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지금 생산현장, 공사현장마다 일꾼이 없다고 야단입니다. 저희도 이 성전을 지 을 때 그것 때문에 겪고 공사가 지연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성전 재 착 공을 계획하는데 벌써 문제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외국인 근로자들이 생산현장에 많이 투입되었는데 그 가운데 불 법체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원래는 다음달 말까지 그 사람들을 다 출 국시키게 되어 있는데 지금 그 조치를 보류한다는 보도가 자주 나오고 있습니 다. 다 출국시키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무엇보다도 생산현장이 마 비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동과 휴식과 예배는 삶의 중요한 삼박자입니다. 이 삼박자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삶이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요즘은 휴식이라는 리듬이 너무 기승을 부리면서 조화를 깨뜨리는 것 같습니 다. 로또 복권은 또 무엇입니까? 신문에서 로또 복권에 관련된 제목을 달 때 처음에는 \'로또 열풍\'이라고 했습니 다. 지금은 대개 \'로또 광풍\'이라고 합니다. 신문사들끼리 좋은 제목을 먼저 쓰는 것도 경쟁을 하는데 저는 어느 신문사가 \'로또 망풍(亡風)\'이라는 제목을 먼저 쓰나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망풍\', 나라를 망하게 하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현대판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닷가를 산책하다가 이상하게 생긴 등잔을 하나 주었습니다. \'어 떻게 된 등잔인가?\' 생각하면서 이리저리 보기도 하고 문질러 보기도 했습니다. \'펑\'하고 연기가 나더니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이 요정이 하는 말이 \'나는 저 등 잔 속에 갇혀 있었는데 누구든지 이 등잔을 문지르면 내가 등잔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나를 나오게 했으니 내가 선생님 소원을 한 가지만 들어드리겠습니다. 꼭 한가지입니다\'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럴 때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잠시 생각하다가 \'앞으로 일년 치 신문을 미리 갖다 주시오\' 했습니 다. 이 사람은 주식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신문을 미리 보 면서 주식시세를 알아 주식을 사고 팔아 큰 부자가 되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요정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원하는 대로 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 은 미래의 신문을 열심히 봅니다.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 몇 월 며칠, 이 때 이 주식이 엄청나게 올랐네 이 때 내다 팔면 큰 이익을 보겠구나!\' 메모를 합니다. 그런데 신문 한 구석에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아무개 원인 불명의 사망\' 죽은 사람의 사진이 낯익은 것 같아서 기사 내용을 보았습 니다. 어디 사는 몇 살 아무개가 주식투자로 갑자기 거부가 되었는데 원인 모 르게 사망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잘 보니까 사망한 사람이 바로 자기입니다. 그 며칠 뒤 신문을 보니까 얼마 전에 발생한 주식투자로 거부된 사람이 사망한 사건은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서 영구미제로 처리되었다는 경찰발표가 실려 있 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실제 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잠언서 13장 11절은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 느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104편의 끝절인 35절은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죄인들, 악인들, 시편 104편의 흐름으로 불 때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일확천 금을 바라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벌하십니다. 요즘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머리 속에서 가물가물 감도는 노래가 있었습니 다. 예전에는 방송사들이 거의 의무적으로 방송하게 되어 있는 노래들이 있었 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새마을 노래\'였었죠. 그 때 그런 성격의 노래 가운데 \'조국찬가\'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양명문 작 사, 김동진 작곡인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1) 동방에 아름다운 대한민국 나의 조국 반만년 역사 위에 찬란하다 우리 문화 오곡백과 풍성한 금수강산 옥토낙원 완전 통일 이루어 영원한 자유평화 후렴) 태극기 휘날리며 벅차게 노래 불러 자유대한 나의 조국 길이 빛내리 라 2) 꽃피어 마을마다 고기 잡는 해변마다 공장에서 광산에서 생산경쟁 높은 기세 푸르른 저 거리엔 재건부흥 노랫소리 늠름하게 나가는 새 세기의 젊은 세 대 그 때는 부담이 되는 노래였는데 지금은 그리워지는 노래입니다. 특히 2절 앞 부분 가사가 그립습니다. 꽃피어 마을마다 고기 잡는 해변마다 공장에서 광산에서 생산경쟁 높은 기 세 우리 나라에 이런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야합니다. \'노풍\'(盧風)이 아닌 \'노풍\' (勞風)이 다시 불어야합니다.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채소를 주시고 땅에서 먹 을 것이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채소와 먹을 것을 거두어들이는 수고는 해야 합니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새들도 백향목에 깃들이기 위해 집을 짓는 수고를 하 고 학도 잣나무에 집을 짓는 수고를 합니다. 사람은 더 많은 수고를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동물에게는 손을 주지 않고 인간 에게만 손을 준 것은 일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 다. 그 하나님, 그 예수님을 본받아 일하는 데 모범을 보이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힘써 일하시는 모범을 보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노동자 예수/ 마6:1-3
노동자 예수 마6:1-3 예수님께서 자라신 나사렛 회당에서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듣던 무리들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어찌됨인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이 형제가 아니냐 !\\\" 하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말한 대로 목수였습니다. 육체 노동을 하신 노동자 였습니다. 목수라고 하는 원어를 보면 반드시 목 수만은 아닙니다. 돌을 깎아 만드는 석공(石工), 또는 쇠를 다루는 철공(鐵工), 나무를 다루는 목수의 일을 모두 합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일이나 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나가 고기도 잘 잡으셨고 소 멍에도 잘 만드셨고 양치는 목동 일도 잘 하셨고 농사도 잘 지으셨습니다. 또 빵을 굽는 일, 가르치는 일 모두를 다 잘하시는 일꾼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세상에 오실 때는 이런 노동자로 오셨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모범이 되십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노동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인간들은 본래적으로 노동을 싫어합니다. 노동 기피증이 있습니다. 노동하는 사람을 천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 마 제국은 특별히 노동을 싫어했습니다. 로마는 노예들에 의해서 건설된 나라였습니다. 역사를 보면 로마의 독재자, 루스에스 코 젤르에스, 쌀라 펠릭스 장군 같은 이는 소아시아로 노예 사냥을 가서 하루에 이만 수천 명씩이나 잡아 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입니다. 전성기의 로마에는 자유 시민이 육십만 정도 였는데 비해 노예는 240만 명도 넘었다고 합니다. 모두 패전국에서 붙잡혀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시민, 심지어 어린 꼬마 하나에게까지 노예 4명이 돌아갔다는 얘기입니다. 힘있는 로마는 전쟁만 일삼았습니다. 약한 나라를 점령 약탈했습니다. 전쟁으로 생긴 노예들에게 노동을 시켰고 자유민들이 날 마다 하는 일은 방탕과 나태와 죄 짓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예들에 의해 건설된 로마 제국은 마침내 노예들에 의해서 멸 망된 것은 역사의 증명하는 바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과 사회에 예수님은 직접 노동하시면서 노동을 중요시하고 노동이 신성하다는 사회관을 심어 주셨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 \\\"내 아버지께서 지금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일 \\\"하시는 분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사업이십니다. 그리고 속죄의 주로 오신 예수님 역시 친히 노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실 때도 갈릴리 해변에서 노동하는 어부들과 또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세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노동을 떠 날 수 없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세계는 노동의 세계입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기쁨으로 일하는 노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 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바울을 위시한 초기 전도자들은 노동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노동하면서 세상을 개조해 가는 것입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그 수많은 발명을 할 때, 하루에 불과 몇 시간씩 자지 않았다는 것이고 전구를 발명하던 마지막 두 주 간에는 거의 잠을 자지 아니하고 연구한 끝에 전등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참으로 좋은 모습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모 습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믿음직스럽습니다. 감동이 될 만큼 거룩합니다. 뜻이 있습니다. 어떤 문인이 말하기를 \\\"남을 위하 여 일하는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박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축복하시고 문둥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죽은 사 람을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전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자진해서 십자가를 져 주셨습니다. 옛날에 예루살렘에 한 랍비가 있 었습니다. 랍비는 세상 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비관만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서 생각만 하다 보니까 극단의 비관론자 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천사가 찾아 와서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이 종이를 이웃 빈민 환자에게 전해주라고 명했습니다. 랍 비는 불쾌했습니다. 빈민에게 내가 왜 이런 심부름을 해야 하는가, 내가 그런 천한 사람에게 천한 심부름을 할 것이냐고 투덜댔 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천사의 명을 어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결심을 하고 그 종이를 들고 빈민에게 가서 전해 주었습니다. 빈 민의 병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빈민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빈민이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랍비의 이 비관 철학은 곧 사라지고 남을 위해 하는 일과 생의 의미를 찾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둘째로 노동자 예수님은 평등 애(平等愛)를 실천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노동자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신관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언제나 이민족의 침략과 압제로 살아오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관은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자 이스라엘만의 하나님, 물질의 축복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정치적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 온 세계의 하나님, 영적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죄에서 해방을 주시는 하나 님, 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로서 의로우십니다. 세계 와 우주의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주시는 아버지시기 때문에 물질적 인 은혜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에서 해방을 내리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정치적 해방도 자유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아버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평등 애를 분명히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해 주시고 섭리해 주 시되 골고루 사랑하십니다. 평등하게 사랑하십니다. 사람이 공기를 호흡하는 것도,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꼭 같은 공기를 꼭 같은 분량대로 같은 방법대로 사용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먹는 음식 칼로리도 같은 분량대로 같은 방법대로 먹 게, 입는 옷, 밤에 꿈도 마찬 가지입니다. 부자의 꿈이 따로 있고 가난한 사람의 꿈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다 꼭 같은 꿈꿉니다 . 잠도 빈부귀천이, 계급이 없습니다. 다같이 잠을 자게 해 주셨습니다. 도리어 가난한 사람의 잠이 더 잠을 잘 자게 하는 은혜 가 있습니다. 젊음도 귀족 왕궁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빈민굴 속에 더 젊음이 넘쳐흐릅니다. 젊음의 아름다움이 문명 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 문명지대일수록 더 싱싱한 아름다움이 많습니다. 재능도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다 똑같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두뇌도 계급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수재가 더 많습니다. 우리의 영육의 힘도 시간도 다 똑같이 하루에 24시간, 낮도 태양도 밤도 달도 푸른 하늘도 이른 비도 늦은 비도 똑같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가난한 어머니의 사랑이 덜하고 부자 어머니의 사랑이 더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본성은 평등입니다. 죽음도 다 평등합니다. 영웅호걸이라 하더라 도 꼭 같이 죽고 마지막 묘지 사용도 일곱 자, 여덟 자 그저 한두 평 다 같이 쓰도록 해 주셨습니다. 인간들이 평등 애를 잊어버 리고 할 수 있으면 더 많이 벌어서 나만이 잘 살겠다고 생각하게 될 때부터 세상은 복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노동 을 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힘써 노동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쌓아 놓기 위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돈을 벌 생각을 하셨다고 하면 병 고치는 일, 귀신 내어쫓는 일,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 폭풍과 파도를 잠잠 케 하시는 일로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 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하여 노동하신 것입니까 ? 하나님의 평등 애를 실천하기 위해 노동하셨습니다. 남을 사랑하기 위해 노동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유를 누리게 해 주기 위해서, 평화를 세우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생산적인 노동, 그리고 새로운 가정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 타락한 세상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새로 운 건설의 노동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살리는 노동입니다. 뜻있는 노동입니다. 하나님의 평등 애를 실천하는 노동만이 행복한 인생과 사회를 만듭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노동이 가치가 없어집니다. 아니, 모든 것이 해롭게 됩니다. 과학도 사랑이 없어지면 위험스럽고 세상을 해치는 수단이 됩니다. 헌법 율법도 정치도 경제도 사랑이 없으면 지옥을 만드는 요인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랑으로 노동하여야 합니다. 사랑의 활동이 이 우주 생명의 본능입니다. 노동에는 세 가지의 원수가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기욕(利己慾)일 때 노동은 계급투쟁의 방법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폭력 화되어질 때 사회 파괴밖에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 상 폭력 혁명이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러시아 혁명, 프랑스 혁명을 위시해서 이 폭력 혁명은 더 나쁜 사회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또 목적이 없는 노동은 타락의 재료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가정을 위해, 자식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노동합니다마는 가장 높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면 가정도 위 하게 되고 자식도 위하게 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것이 되어집니다. 근간, 우리 사회의 노사 문제가 복잡해지고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등애가 없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노사 간에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도록 주력해야 합니다. 대략 노동자들이 가난하게 된 요인을 다섯 가지로 잡습니다. 과로 때문입니다.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술로 풀어 보려고 하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고 경제적 빈곤이 옵니다. 둘째는 질병 때문입니다. 예방 의학이라든지 위생 시설이나 치료 부족 때문에, 감옥 이나 군대보다도 발병률이 더 높은 것입니다. 또 셋째는 부상이 많아진 것입니다. 기계를 사용하다가 손가락, 발가락, 눈을 상하 게 되고 심지어는 정신 장애까지 생깁니다. 넷째는 경기가 나빠지고 새로운 기계가 발명되고 실직이 되고 노후 대책이 잘 안되고 그래서 가난해지고 불안해진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제도적 모순으로 해서 가난이 올 수 있습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 통령이 흑인 노예 해방을 시켜 준 다음 해에 빈민굴이 가장 차고 넘쳤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 제도의 모순이 있으면 노동 의 자유가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평등 애를 실천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기도하는 노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시시각각 범사에 기도하며 행하셨습니다. 기도가 아니고서는 행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면서도 인간의 몸을 쓰고 오셔서 기도하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 생 활 속에 인격의 향상이 있습니다. 영성의 능력이 생깁니다. 새로운 창안 력이 옵니다. 생활에 경건이 발생합니다. 이념의 실현 력이 생겨납니다. 위대한 사명감이 생겨납니다. 매일 기도를 통해서 이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오늘은 혼란하지마는 내일은 질서와 명랑한 사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은 모순 투성이지마는 내일은 합리적인 사회가 되어져야 합니다. 오늘은 미숙해도 내일은 성숙해져야 합니다. 오늘은 미개발일지라도 내일은 개발 사회가 되어져야 합니다. 오늘은 암흑적인 죄악이 많지마는 내 일은 성스러운 거룩한 사회가 되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지려고 하면 우리 모두 노동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도 기도하면서, 교육가도 경제인도 예술인도 각 분야에서 기도하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희망이 많습니다. 재능이 뛰어납니다. 지식 수준이 높습니다. 근면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 대로 우리 노동을 중요시하되, 모두 다 하나님의 평등 애를 주목적으 로 애써야 할 것이고 기도하면서 날마다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우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노동자들의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제일의 신앙 안에서 사랑을 실천 하는 노동자들이 되십시다. 그 때 민주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참된 인류 봉사가 실천될 것입니다.
노동자 예수/ 마6:1-3/ 2005-03-25
노동자 예수 마6:1-3 예수님께서 자라신 나사렛 회당에서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듣던 무리들이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이 어찌됨인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이 형제가 아니냐 !” 하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말한 대로 목수였습니다. 육체 노동을 하신 노동자 였습니다. 목수라고 하는 원어를 보면 반드시 목 수만은 아닙니다. 돌을 깎아 만드는 석공(石工), 또는 쇠를 다루는 철공(鐵工), 나무를 다루는 목수의 일을 모두 합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일이나 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나가 고기도 잘 잡으셨고 소 멍에도 잘 만드셨고 양치는 목동 일도 잘 하셨고 농사도 잘 지으셨습니다. 또 빵을 굽는 일, 가르치는 일 모두를 다 잘하시는 일꾼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세상에 오실 때는 이런 노동자로 오셨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모범이 되십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노동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인간들은 본래적으로 노동을 싫어합니다. 노동 기피증이 있습니다. 노동하는 사람을 천시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 마 제국은 특별히 노동을 싫어했습니다. 로마는 노예들에 의해서 건설된 나라였습니다. 역사를 보면 로마의 독재자, 루스에스 코 젤르에스, 쌀라 펠릭스 장군 같은 이는 소아시아로 노예 사냥을 가서 하루에 이만 수천 명씩이나 잡아 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입니다. 전성기의 로마에는 자유 시민이 육십만 정도 였는데 비해 노예는 240만 명도 넘었다고 합니다. 모두 패전국에서 붙잡혀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시민, 심지어 어린 꼬마 하나에게까지 노예 4명이 돌아갔다는 얘기입니다. 힘있는 로마는 전쟁만 일삼았습니다. 약한 나라를 점령 약탈했습니다. 전쟁으로 생긴 노예들에게 노동을 시켰고 자유민들이 날 마다 하는 일은 방탕과 나태와 죄 짓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예들에 의해 건설된 로마 제국은 마침내 노예들에 의해서 멸 망된 것은 역사의 증명하는 바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과 사회에 예수님은 직접 노동하시면서 노동을 중요시하고 노동이 신성하다는 사회관을 심어 주셨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 ”내 아버지께서 지금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일 ”하시는 분입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사업이십니다. 그리고 속죄의 주로 오신 예수님 역시 친히 노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택하실 때도 갈릴리 해변에서 노동하는 어부들과 또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세리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노동을 떠 날 수 없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세계는 노동의 세계입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기쁨으로 일하는 노동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 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바울을 위시한 초기 전도자들은 노동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노동하면서 세상을 개조해 가는 것입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그 수많은 발명을 할 때, 하루에 불과 몇 시간씩 자지 않았다는 것이고 전구를 발명하던 마지막 두 주 간에는 거의 잠을 자지 아니하고 연구한 끝에 전등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참으로 좋은 모습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모 습입니다. 일하는 사람은 믿음직스럽습니다. 감동이 될 만큼 거룩합니다. 뜻이 있습니다. 어떤 문인이 말하기를 ”남을 위하 여 일하는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박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축복하시고 문둥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죽은 사 람을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전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자진해서 십자가를 져 주셨습니다. 옛날에 예루살렘에 한 랍비가 있 었습니다. 랍비는 세상 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비관만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서 생각만 하다 보니까 극단의 비관론자 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천사가 찾아 와서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이 종이를 이웃 빈민 환자에게 전해주라고 명했습니다. 랍 비는 불쾌했습니다. 빈민에게 내가 왜 이런 심부름을 해야 하는가, 내가 그런 천한 사람에게 천한 심부름을 할 것이냐고 투덜댔 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천사의 명을 어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결심을 하고 그 종이를 들고 빈민에게 가서 전해 주었습니다. 빈 민의 병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빈민이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빈민이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랍비의 이 비관 철학은 곧 사라지고 남을 위해 하는 일과 생의 의미를 찾았다고 하는 말입니다. 둘째로 노동자 예수님은 평등 애(平等愛)를 실천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노동자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신관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언제나 이민족의 침략과 압제로 살아오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관은 하나님의 공의의 하나님이자 이스라엘만의 하나님, 물질의 축복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정치적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 온 세계의 하나님, 영적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죄에서 해방을 주시는 하나 님, 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로서 의로우십니다. 세계 와 우주의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주시는 아버지시기 때문에 물질적 인 은혜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에서 해방을 내리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정치적 해방도 자유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아버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평등 애를 분명히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해 주시고 섭리해 주 시되 골고루 사랑하십니다. 평등하게 사랑하십니다. 사람이 공기를 호흡하는 것도,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꼭 같은 공기를 꼭 같은 분량대로 같은 방법대로 사용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먹는 음식 칼로리도 같은 분량대로 같은 방법대로 먹 게, 입는 옷, 밤에 꿈도 마찬 가지입니다. 부자의 꿈이 따로 있고 가난한 사람의 꿈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다 꼭 같은 꿈꿉니다 . 잠도 빈부귀천이, 계급이 없습니다. 다같이 잠을 자게 해 주셨습니다. 도리어 가난한 사람의 잠이 더 잠을 잘 자게 하는 은혜 가 있습니다. 젊음도 귀족 왕궁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빈민굴 속에 더 젊음이 넘쳐흐릅니다. 젊음의 아름다움이 문명 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 문명지대일수록 더 싱싱한 아름다움이 많습니다. 재능도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다 똑같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두뇌도 계급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수재가 더 많습니다. 우리의 영육의 힘도 시간도 다 똑같이 하루에 24시간, 낮도 태양도 밤도 달도 푸른 하늘도 이른 비도 늦은 비도 똑같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가난한 어머니의 사랑이 덜하고 부자 어머니의 사랑이 더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본성은 평등입니다. 죽음도 다 평등합니다. 영웅호걸이라 하더라 도 꼭 같이 죽고 마지막 묘지 사용도 일곱 자, 여덟 자 그저 한두 평 다 같이 쓰도록 해 주셨습니다. 인간들이 평등 애를 잊어버 리고 할 수 있으면 더 많이 벌어서 나만이 잘 살겠다고 생각하게 될 때부터 세상은 복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노동 을 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힘써 노동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쌓아 놓기 위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돈을 벌 생각을 하셨다고 하면 병 고치는 일, 귀신 내어쫓는 일,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 폭풍과 파도를 잠잠 케 하시는 일로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 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하여 노동하신 것입니까 ? 하나님의 평등 애를 실천하기 위해 노동하셨습니다. 남을 사랑하기 위해 노동하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유를 누리게 해 주기 위해서, 평화를 세우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생산적인 노동, 그리고 새로운 가정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 타락한 세상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새로 운 건설의 노동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살리는 노동입니다. 뜻있는 노동입니다. 하나님의 평등 애를 실천하는 노동만이 행복한 인생과 사회를 만듭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노동이 가치가 없어집니다. 아니, 모든 것이 해롭게 됩니다. 과학도 사랑이 없어지면 위험스럽고 세상을 해치는 수단이 됩니다. 헌법 율법도 정치도 경제도 사랑이 없으면 지옥을 만드는 요인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랑으로 노동하여야 합니다. 사랑의 활동이 이 우주 생명의 본능입니다. 노동에는 세 가지의 원수가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기욕(利己慾)일 때 노동은 계급투쟁의 방법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폭력 화되어질 때 사회 파괴밖에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 상 폭력 혁명이 성공한 예가 없습니다. 러시아 혁명, 프랑스 혁명을 위시해서 이 폭력 혁명은 더 나쁜 사회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또 목적이 없는 노동은 타락의 재료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가정을 위해, 자식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노동합니다마는 가장 높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면 가정도 위 하게 되고 자식도 위하게 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것이 되어집니다. 근간, 우리 사회의 노사 문제가 복잡해지고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등애가 없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노사 간에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도록 주력해야 합니다. 대략 노동자들이 가난하게 된 요인을 다섯 가지로 잡습니다. 과로 때문입니다.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술로 풀어 보려고 하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고 경제적 빈곤이 옵니다. 둘째는 질병 때문입니다. 예방 의학이라든지 위생 시설이나 치료 부족 때문에, 감옥 이나 군대보다도 발병률이 더 높은 것입니다. 또 셋째는 부상이 많아진 것입니다. 기계를 사용하다가 손가락, 발가락, 눈을 상하 게 되고 심지어는 정신 장애까지 생깁니다. 넷째는 경기가 나빠지고 새로운 기계가 발명되고 실직이 되고 노후 대책이 잘 안되고 그래서 가난해지고 불안해진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제도적 모순으로 해서 가난이 올 수 있습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 통령이 흑인 노예 해방을 시켜 준 다음 해에 빈민굴이 가장 차고 넘쳤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 제도의 모순이 있으면 노동 의 자유가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평등 애를 실천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기도하는 노동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시시각각 범사에 기도하며 행하셨습니다. 기도가 아니고서는 행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면서도 인간의 몸을 쓰고 오셔서 기도하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 생 활 속에 인격의 향상이 있습니다. 영성의 능력이 생깁니다. 새로운 창안 력이 옵니다. 생활에 경건이 발생합니다. 이념의 실현 력이 생겨납니다. 위대한 사명감이 생겨납니다. 매일 기도를 통해서 이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오늘은 혼란하지마는 내일은 질서와 명랑한 사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은 모순 투성이지마는 내일은 합리적인 사회가 되어져야 합니다. 오늘은 미숙해도 내일은 성숙해져야 합니다. 오늘은 미개발일지라도 내일은 개발 사회가 되어져야 합니다. 오늘은 암흑적인 죄악이 많지마는 내 일은 성스러운 거룩한 사회가 되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지려고 하면 우리 모두 노동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도 기도하면서, 교육가도 경제인도 예술인도 각 분야에서 기도하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희망이 많습니다. 재능이 뛰어납니다. 지식 수준이 높습니다. 근면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 대로 우리 노동을 중요시하되, 모두 다 하나님의 평등 애를 주목적으 로 애써야 할 것이고 기도하면서 날마다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우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노동자들의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세계 제일의 신앙 안에서 사랑을 실천 하는 노동자들이 되십시다. 그 때 민주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참된 인류 봉사가 실천될 것입니다.
노동자들의 하나님/ 행2:22-28/ 2001-11-20
노동자들의 하나님 행2:22-28 지난 주 발행된 향린지 35호를 보면 한 사진이 있습니다. 이 잡지를 철저히 보신 분은 아마도 ”이 분은 누구일까?” 라는 제목 하의 한 사진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사진 옆에 소개된 짧은 설명에 의하면, 영국인 리쳐드 니브 씨가 영국 BBC 방송 프로그램에 방영될 ”신의 아들” 시리즈에 사용하기 위해 1 세기의 유대인을 토대로 복원한 ’예수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은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소개되었던 그 어떤 것 보다 더욱 더 ’인간적인 얼굴’이라고 한 설명이었습니다. 과연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인간적인 예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가 많이 신문과 잡지에 소개되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많은 한국인들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적인 예수에 관한 소개도 되었습니다. 우리는 물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예수님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는 그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인간적인 예수를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예수를 추구하고 믿고 있는 것은 하필 우리 교회의 문서선교위원들 몇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향린교회의 교인들 모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저는 재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가 목사인 것을 감안하여 제 기분을 건드리지 않기 위한 특별한 배려에서 그렇겠지만, 기독교인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나 비방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저를 두고 ’홍 목사는 진짜 목사다’ 라고 칭찬하고 있는 것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을 뭐 그리 대단하게 평가하는 같아서 좀 계면쩍게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만, 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마도 다른 목사들에게서, 일반 기독교들에게서 그런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 아마도 그들에 대하여는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다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는 있는데 그들 주위의 기독교인들이 별로 매력이나 흥미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기독교인들을 좋아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문제는 오늘 예배 후에 오후에 있을 통일선교위원회 주관의 NMD TMD 강연도 있습니다만, 당연히 NMD TMD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 한반도에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현 미국 대통령인 공화당 출신의 죠지 부시 대통령이 NMD TMD 무기체제를 강행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어 그것이 반평화적인 것은 물론 한반도의 모처럼의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큰 고민입니다. 그 다음으로 국내 정치면에서 가장 큰 이슈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살인적 폭력 탄압 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이에 대하여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공장에서 쫓겨나서 그 근방에 있는 부평의 상암동 성당의 좁은 마당에 천막을 쳐 놓고 여러 날을 싸우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성당은 쾌히 그들 노동자들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천막을 치도록 허용하여 때려부수고 쫓아내는 성당과 매우 대조적인 입장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실 그 성당에 제가 가 보았습니다만, 우리 교회 근처의 성당 같이 그렇게 긴 입구나 넓은 마당이 있는 성당은 아니었습니다. 그 좁은 마당에 노동자들이 천막을 여러 개 치고 있도록 허용한 것입니다. 제가 하도 기특하고 감사하여 그 성당의 신부님을 찾아가서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곳에 천막을 치고 투쟁하고 있던 이들 부평 노동자들은 지난 4월 10일에 노동조합원들은 노조 사무실에 출입할 권리가 있다는 인천 법원의 판결문을 가지고 변호사를 앞세워 노조사무실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제지를 받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가로막고 서 있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리다가 방법이 없어 노동자들은 웃통일 벗은 채 그곳에 연와 또는 연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경이 맨손의 노동자들에게 들이닥쳐 그들을 개 패듯이 두들겨 패고 방패로 찍어 중태에 빠진 노동자들이 속출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전국민중연대에서는 이를 ’살인적인 폭력’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정말 그러했습니다. 저는 그 비디오를 보면서 ’광주학살의 폭력과 다름없구나!’ 하면서 한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경찰 진압 책임자가 우리 기장의 어떤 원로목사의 조카이고 그도 기장 기독교인이라 했습니다. 더 위의 책임자인 부평경찰서장인가 하는 사람은 독실한 기독교인(천주교 신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고 고위층인 경찰청장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가장 최고위층인 김대중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 기독교인들 경찰 간부들과 이 정권이 노동자들을 그렇게 살인적 폭력으로 탄압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그 문제를 생각하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다; 특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기독교인들 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이웃(민족)을 사랑하고 있다. 억압적인 기독교인들은 무방비의 비기독교인들에게 살인적인 폭력을 일삼고 있다.’ 는 등의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이 사실에 동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동자들에게 불법적인 살인적 폭력을 감행한 불행한 사태를 만나서 놀라고 있을 때 우리는 한 시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전날 1,750명의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당하여 천막에서 눈물로 뒤범벅된 모습에 관한 이현우 씨의 ”退出 예수”란 시였습니다. 그것이 마침내 우리 교회의 통신에도 올라왔습니다. 컴퓨터 통신을 하지 않거나 아직 보시지 못한 교우들을 위하여 그것을 소개하려 합니다: === 退出 예수 오늘은 당신께 두 무릎 고이 모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만큼은 성호를 긋지 않으렵니다. 당신의 거처에서 내 쫓긴 당신 당신의 아들, 딸 또한 자신의 일터에서 쫓긴 오늘 오늘만큼은 기도하지 않으렵니다. 눈물로 범벅이 된 당신의 얼굴 나 오늘 껴안지 못하고 뒤돌아 섭니다. 한없이 숨죽여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거처에서 나처럼 내 쫓긴 당신이기에 오늘 밤 부평의 한 천막 당신과 나 껴안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린 오늘 밤 부평의 한 천막 눈물로 범벅이 된 당신이기에 나 오늘 만족할 뿐입니다. 눈물로 가득 메운 당신의 얼굴 맑다 못해 이제는 투명해져 버린 당신의 얼굴 이제는 더 쏟아 부을 눈물이 없어 해골이 된 당신 그저 그거 하나일 따름입니다. 여기에 보면 처음에는 대우 자동차 노동자들이 퇴출당하여 천막 신세가 된 이 마당에 예수님에게 기도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저자는 공장에서 천막으로 쫓겨가서 밤을 새우며 그저 눈물만 흘리다 눈물로 범벅이 된 있는 노동자의 얼굴에서 예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 역시 퇴출된 예수님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저자는 그것 때문에 ’나 오늘 만족할 뿐입니다; 그저 그거 하나일 따름입니다.’ 라고 위로를 받았음을 썼습니다. 저는 그 시를 읽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퇴출된 이 나라의 서러운 노동자의 모습에서 퇴출된 예수님의 억울하고 서러운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예수님은 바로 퇴출된 예수님이라는 것, 그 퇴출된 예수님이 바로 퇴출된 노동자라는 것, 이것은 정말 위대한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퇴출된 노동자가 곧 퇴출된 예수님이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이고 인간적인 예수님 이해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다 사회에서 퇴출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에 관해 말하기를 ’나자렛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었으나 여러분들이 악인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세계 최강대국인 로마라는 외세에 의해 완전히 종속 지배되던 유다국, 정치나 종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제 이익 집단에 의해 예속되어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던 사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했던 인간의 나라와 인간의 뜻에 의해 왜곡되었던 사회, 그런 사회에서 예수님은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사회로부터 퇴출당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 이에 관하여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는 최초의 기독교 설교를 하는 사도 베드로가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주님을 가까이 뵈오며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 것입니다. 당신은 내 영혼을 죽음의 세계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사도 2,25-26) 베드로는 오늘 본문 바로 뒤인 31절에서 역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세계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의 몸을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언급한 것입니다. 퇴출 예수님을 죽음의 세계에 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퇴출 노동자들도 죽음의 세계에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예수님은 퇴출당한 노동자들을 그냥 죽음의 세계에 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현우 씨는 읊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노동절 주일입니다. 그리고 내일 모래 5월 1일은 111번째의 노동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노동자와 노동에 대하여 바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 문제들을 우리의 신앙 문제와 관련하여 바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노동절은 ’노동자들이 계급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투쟁을 확인하고, 열정과 희망을 나누며 ’자유의 왕국’을 전망하는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축제의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89년까지는 우리 한국에서는 ’3월 1일’을 ’근로자의 날’이라 하여 지켰습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강력한 투쟁을 한 결과 3월 1일을 5월 1일로 바꾸는 데에는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의 날로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IMF 관리 경제체제 하의 이 땅의 노동자들의 형편은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비참한 것일 뿐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에 의한 구조조정을 당하여 이 땅의 노동자의 형편은 더욱 어려운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이번 노동절을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 분쇄와 김대중 정권 퇴진’을 주제로 하면서 간고하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 노동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사회모순의 해결주체로 당당하게 나서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그 발전을 위해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김대중 정권이 노동자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이들의 어려움과 호소하는 요구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느끼고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며 이들의 전진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발전의 동력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촉구하는 바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이것을 신앙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기독교의 하나님은 노동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언제나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는 힘없는 노동자들 편을 들고 있는 분이라는 뜻에서, 가난이 그들의 운명인 것처럼 되어 늘 가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란 의미에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정말 인간적인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노동자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여는 찬송으로 부른 백창우 님의 찬송가의 1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당신은 하늘의 아들 맑은 눈물을 가진 이 당신은 땅의 사람 슬픈 것들을 감싸는 이 갈라진 것들을 잇고 대동세상을 여는 이 새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계시는 이” ”당신은 하늘의 아들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이 당신은 땅의 사람 죽은 것들을 살리는 이 분단의 사슬을 끊고 통일 세상을 여는 이 새 날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계시는 이”
노동자의 잠과 부자의 잠/ 전도서전5:10-12/ 2012-02-12
노동자의 잠과 부자의 잠 전5:10-12 수면에 대하여 요즘 지나치게 일에 매달려 살다가 중년에 쓰러지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제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면 뭘합니까? 쓰러지면 헛것입니다. 그래서 일도 중요하지만 잠과 휴식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동물원에 가서 맹수들을 보세요. 대개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동물원에서 맹수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사자도 호랑이도 다 잠만 잡니다. 맹수들은 사냥하고 먹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잠으로 보냅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은 땅 속이나 동굴에서 겨우내 잠을 잡니다. 일생동안 그 많은 시간을 잠으로 보낸다고 생각하면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제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밤에는 자야만 합니다. 잠이 없는 사람이라도 생애의 3분의 1은 잠으로 보내야 합니다. 만일 누가 75세까지 산다면 25년은 잠으로 보내야 합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까? 그러나 잠자는 것은 모든 생물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잠을 주셨을까요? 창조 원리에서 본다면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간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피곤하셔서 쉬신 것은 아닙니다. 활동이 있으면 쉼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일할 때가 있으면 쉴 때가 있습니다. 하루의 밤은 쉬는 시간입니다. 일주일의 하루는 안식일이고, 7년중 1년은 안식년입니다. 잠은 활동의 반대편에 있는 안식입니다. 저는 잠에 대해서 또 다른 생각을 가끔 합니다. 잠은 이 세상에서 죽음과 부활을 연습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뭡니까?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는 것이 죽음입니다. 잠자는 동안은 마치 영혼이 떠난 듯이 활동을 정지합니다. 잠 잘 때는 시체와 같습니다. 누가 떠메어 가도 모르고, 욕을 하든지 별 일을 해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다음날 다시 정신활동이 시작되면 일어납니다. 마치 부활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새로운 육체에게 영혼을 보내셔서 일으키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잠을 통해서 죽음과 부활의 연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잠에는 두 종류의 잠이 있습니다. 첫째는 단잠이요, 둘째는 쓴 잠입니다. 단잠은 하나님이 주신 잠이고, 쓴 잠은 악인들이 자는 잠입니다. 첫째로, 단잠이란 하나님이 주신 잠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다윗은 전쟁터에서 쫓겨다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단잠을 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3:5) 야곱은 집을 떠나 먼 타향으로 가는 도중 길에서도 잠을 잘 잤습니다. 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그는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 삼손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수였던 블레셋 사람들의 마을에 가서도 어디서나 단잠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잠을 깊이 들었는지 온 몸을 밧줄로 묶어 매어도 모르게 잠을 잤습니다.(삼상16:14,20)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일어나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는데도 쿨쿨 잠을 주무셨습니다.(눅8:23-24) 둘째로, 쓴 잠은 악인들이 자는 잠입니다. 사울은 惡神이 들려 단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독재자 아하수에로 왕은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신하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에6:1) 잠언에 보면 게으른 자 역시 단잠을 자지 못합니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잠6:9)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잠26:14)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6:11) 악인들은 침상에 있는 시간이 많지만 결코 단잠은 아닙니다. 아무리 자도 피곤합니다. 엎어져 취침, 자빠져 취침, 옆으로 취침 뒹굴어도 피곤합니다. 그래서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침상에서 헤맵니다. 사람들에게 잠자는 시간은 희망의 시간입니다. 만일 잠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일하는 사람들은 쉬는 시간을 기대하면서 일을 합니다. 우리 집 둘째 아이가 지금 군대에 가 있습니다. 입대 후에 그놈 방을 정리하면서 옛날 일기책을 발견했습니다. 그 애가 고등학교 1학년 때쯤인가 방학동안 기숙학원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워낙 공부하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고 절도가 없어서 일부러 보냈었는데 그 때에 억지로 쓴 일기책입니다. 입소한 날부터 거의 매일 쓴 말이 졸려서 자야겠다는 겁니다. 사흘쯤 된 날 일기를 보니까 \\\"이제 27일 남았다. 주일날 집에 가면 실컷 자야지!\\\" 그 다음 날도, 다음 날도 매일 하는 말은 \\\"아 졸리다. 자야겠다!\\\" \\\"오늘은 별로 할 말도 없다. 졸리다. 자야겠다!\\\" 그놈의 유일한 희망은 집에 가서 자는 거였습니다. 잠자는 것은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입니다. 이제 조만간 정부에서는 주5일 근무제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간 일하라고 하셨는데 5일만 일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아침 6시부터 출근해서 저녁 9시가 넘도록 일에 혹사당하는 것을 보면 주 5일을 근무한다 해도 절대 노동시간은 6일 일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나마 주 5일 근무니 뭐니 하는 것은 월급쟁이들 얘기고,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죽어라 하고 일하다가 정말로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희망의 시간으로 잠을 주셨습니다. 잠을 달게 자는 것은 안식의 증표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다는 증거요, 육체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단잠을 자는 사람은 사회 생활이나, 가정 생활이나 건전하게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단잠을 자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충실한 노동자가 되라 첫째로 충실한 노동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전5:12) 노동자는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소화가 잘 됩니다. 뱃속이 편합니다. 몸이 고단하기 때문에 잠이 잘 옵니다. 육체 노동을 해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육체가 피곤하면 잠은 저절로 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적 활동이 없기 때문에 소화 불량에 걸립니다. 재산 관리 문제로 신경 쓰느라 밤에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단잠을 자고 싶으시면 육체 노동을 하십시오. 노동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흔히 말씀하기를 노동은 인간이 타락한 댓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놀고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산을 관리하고 지키도록 일거리를 주셨습니다. 자연을 보호하고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 아담의 사명이었습니다. 타락 후에는 물론 노동의 절대 명령을 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창3:17,19) 십계명 중에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하루를 쉬라는 명령만 있지 않습니다. 엿새를 힘써 일하라는 명령이 함께 있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20:8-9)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일에 열중하셨는지 식사하실 시간도 없으셨습니다.(막3:20) 사도 바울은 노동에 대해서 아주 강력한 말씀을 했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노동은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노동보다는 쉽게 머리 굴려서 먹고사는 것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빌게이츠는 소프트웨어 개발로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어서 호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운동 선수는 공 하나 잘 던져서 연봉 몇 백억 원을 받습니다. 어떤 연예인은 텔레비전 드라마 하나가 뜨는 바람에 돈 방석 위에 올라 않습니다. 그러나 농촌에서 일년 내내 농사에 매달렸던 농부들은 지금 빚더미 위에 올라 앉아서 정부 청사 앞에서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1차 산업이나 2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농업, 어업, 목축업, 임업, 광공업...다 고생이 많은 업종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비공식적으로 4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 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40만 명의 청소년 실업자들이 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위 말하는 3D 업종에 종사하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놀고 먹는 한이 있어도 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일은 않겠다! 이런 썩어빠진 정신 상태를 가지고는 나라 장래가 걱정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썩어빠진 것이 있습니다. 사회 전체를 복권, 경마, 카지노, 경륜, 소싸움, 개싸움, 화투....온갖 사행심으로 도배질 하고 있는 사회 풍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노동 가치가 너무 왜곡되어 있습니다. 사실 빌게이츠가 만든 소프트웨어는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생존에 지장이 없어요. 야구 축구 못한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안 본다고 죽지 않아요. 그러나 식량과 의복은 없으면 죽습니다. 그런데도 없어서는 안될 식량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은 천한 대접을 받고, 머리 잘 굴린 사람, 운동 선수, 연예인은 천문학적인 보수를 받습니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겁니다. 이 세상은 노동 가치를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노동하지 않고 수익을 올리려는 것은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일하지 않고 수익을 기대한 사람에게 게으르고 악한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25:26) 사도 바울은 불로소득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도적질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자선 사업을 하려거든 제 손으로 벌어서 하라고 했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요즘 연말이 되니까 교회에 도와달라는 편지들이 수북하게 쌓입니다. 그 중에는 정직한 자선가들도 많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고 예수님 빙자하고, 장애인 빙자하고, 복음 사업 빙자해서 물건을 강매해서 자선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어떤 것이든지 노동하지 않고 대가를 얻으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입니다. 저는 평소 정신 노동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육체 노동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자동차에 여러 가지 공구와 농기구를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육체 노동을 하면 몸이 개운하고 밥이 맛있고 잠이 잘 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육체 노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특히 이미 부자가 된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부자들 가운데는 성실하게 땀을 흘려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자가 된 이후입니다. 부자가 되기까지 열심히 땀흘리던 습관을 멈춰버립니다. 결코 노동을 멈추지 마십시오. 땀흘리는 것을 멈추면 단잠이 사라집니다. 건강을 잃습니다. 마음에 보람을 잃어버립니다. 노동은 돈 버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 그 자체가 바로 삶의 활력이요 생명력입니다. 그러므로 땀흘리는 노동을 즐겨 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단잠을 자고, 생명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過慾을 버리고 바르게 살라 둘째로, 과욕을 버리고 바르게 사십시오. 욕심을 부리면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불안하면 단잠을 잘 수 없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그리하면...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잠3:21-24) 먼저 욕심을 버리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양식이 없어서 불행했나요? 의복이 없어서 불행했나요? 하나님께서 다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였습니까? 그들이 필요 이상의 것에 욕심을 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시106:14)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약4:2) 멀쩡하던 사람이 욕심을 품으면 부모도 형제도 이웃도 안중에 없어집니다. 마귀의 하수인이 따로 없습니다.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바로 마귀의 하수인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 특히 돈에 욕심부리지 말고, 돈 때문에 죄 짓지 마세요. 요즘 사람들은 돈의 정의를 너무 무시합니다. 돈에 관한 한 不義해야만 잘 번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래서 남의 돈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교인들 중에도,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만, 다른 교회에 보면, 남의 돈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 돈은 내 돈이고 네 돈도 내 돈이고, 꾼 돈도 내 돈이고, 안 갚으면 그만이고! 그런 배짱으로 잠이 잘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마귀의 자식이 아닌지 금식하고 기도해 보세요. 바르지 못한 삶에는 안식이 없고 단잠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창고만 터지도록 채워 놓고 단잠을 자려고 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9) 그러나 그는 원하는 평안을 단 하루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안식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른 삶을 사세요. 바르게 사는 사람은 힘들기는 해도 영혼이 평안합니다. 늘 단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저는 남의 돈을 무척 무서워합니다. 남에게 꿔주는 것은 부담이 없는데 남에게 꿔달라 소리는 거의 못합니다. 언젠가 교회 교육관 보증금 몇 천만 원을 수표로 갖고 집에 왔는데 그날 하루 종일 어디 가지도 못하고 집을 지켰습니다. 밤에도 몇 번이나 돈을 둔 장롱 속을 확인해 보고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돈을 넘겨주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해졌는지 모릅니다. 돈의 정의를 지킨다고 해서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100% 보장하시기 때문에 항상 넉넉합니다. 저는 목회자가 되고 나서 지금까지 양식이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거처 때문에 고민한 적도 없습니다.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문제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채워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가 섬기는 교회를 그만큼 축복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성덕중앙교회는 창립 이후 지금까지 항상 재정의 풍성함 속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땅을 사든지 건물을 확장하든지 항상 플러스로 채워 주셨습니다. 2002년도에는 교회 예산의 25% 정도를 선교, 구제, 사회, 장학 사업에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나님은 돈의 정의에 대해서 충분한 축복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정말 평안과 안식을 원한다면 욕심내지 말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됩니다. 우리 교회의 불변하는 목회 방침은 바른 신앙 바른 생활입니다. 여러분, 주보 표지에 보세요. \\\"바른 신앙, 바른 생활\\\"이 우리의 생활 지표입니다. 바른 삶이 없는 신앙은 허구의 신앙입니다. 바르지 못한 삶에는 평안이 없고, 안식이 없고, 단잠이 없습니다. 정말 달게 자는 생활을 원한다면 욕심 내지 말고 바르게 사십시오. 주님 품에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일입니다. 참 평안은 인간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품안에 있을 때에만 얻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찬송가 458장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 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찬송가 464장에는 이런 가사도 나옵니다.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풍랑 일어도 안전한 포구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의 영원한 팔 의지해. 주의 영원하신 팔 함께 하사 항상 나를 붙드시니, 어느 곳에 있든지 요동하지 않음은 주의 팔을 의지함이라.\\\"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3:15)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들이세요. 그리고 모든 삶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참 평안과 참 휴식을 얻습니다. 주님 품안에서 항상 단 잠을 이루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입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 단잠을 자야 됩니다. 단잠은 충실한 노동에서 옵니다. 단잠은 욕심 없는 바른 삶에서 옵니다. 단잠은 주님 품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단잠을 통해서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건강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노동하는 손은 아름답다/ 출23:1-13
노동하는 손은 아름답다 출23:1-13 요즈음 불로소득으로 재산을 모은 사회지도층 사람들을 향한 지탄의 소리가 높습니다. 땀흘려 일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깨끗한 사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잇습니다. 이것은 땀흘려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래된 기대입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땀흘려 일하는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노동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면서 높은 도덕성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계약법전이라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의 법전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먼저, 행정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재판에 있어서 공정할 것은 촉구하고 있습니다. 부자나 강자에게 편향적인 판결을 하여 가난한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라는 명령입니다. 그 다음은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규정입니다. 이것은 이집트의 압제 아래에서 고역에 찬 노예노동을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 야훼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땀흘려 노동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1. 땀흘려 일합시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엿세 동안의 활발한 창조활동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만들어 내는 활동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땀흘려 일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 인간에게 전수되어 우리 인간들은 땀흘려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시면서 사역의 기쁨을 표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안식일 규정에도 \"너는 육일동안에 네 일을 하고\"(출23:12)라고 했습니다. 같은 안식일 규정인 신명기 법전에는 \"엿세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신5:13)라고 했습니다. 엿세 동안 땀흘려 힘써 일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먼저된 명령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다. 쉼은 땀흘려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땀흘려 일하는 노동 없이 쉼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입니다. 땀흘려 일하는 노동 없는 열매도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요즈음 공직자 재산등록으로 온 나라안이 떠들썩합니다. 특히,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땀흘려 일한 결과가 아닌,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엄청난 불로소득을 보면서 지탄의 소리가 높습니다.이것은 상대적으로 땀흘려 일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허탈감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는 지금까지 이런 풍토와 관성에 대해서는 도덕적 불감증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 신앙인 들이 앞장서서 땀흘려 일하면서 얻은 열매로 살아가는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또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도 높은 도덕성으로 우리 신앙인들이 앞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더럽고,어렵고,위험한 일을 피하는 3D 현상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작업환경의 개선이 시급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땀흘려 일하여 대가를 구하기 보다 손 쉬운 열매를 찾아가는 풍조는 또 다른 노동 경시 풍조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발바닥 처럼 가장 힘들고 냄새나는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열심히 해 내는 사람들이 되도록 합시다. 손쉬운 소득을 추구하고 땀흘려 일하는 작은 소득을 비웃는 사회풍조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은 열심히 땀흘려서 거둬 들이는 열매만을 구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달란트 비유는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땀흘려 일해서 열매를 거둬들이는 것을 하나님은 칭찬하고 있습니다. 2,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듭시다. 오늘 본문에 안식일 규정을 제정하시면서 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안식일 규정을 언급하면서, 다른 동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소,나귀,계집종의 자식, 나그네를 언급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은 고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쉼도 없고 휴식도 없이 육체적 노동에 시달리는 소나 나귀 같은 짐승, 또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종과 나그네로서 육체적 노동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사람들을 쉬게 하라. 이것이 안식일 규정의 근본 정신중의 하나였습니다. 안식일의 쉼 규정을 어기는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출35:2) 이것은 하나님의 단호한 명령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육체적 노동으로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 아끼셨고, 그들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땀흘려 일하는 손과 몰두하여 일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일은 그 결과나 성과물 보다도 과정이 소중합니다. 일하는 과정이 존중되는 사회는 따뜻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일의 결과를 존중하는 사회는 비인간적인 사회입니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땀흘려 일하는 가치를 얼마나 강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노동하는 손이 부끄러운 사회가 아니라, 아름답고 존중을 받는 사회가 되도록 합시다. 기층(基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계층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계층, 모든 것의 근본 터가 되는 계층이라는 말입니다. 이 기층은 손 노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손노동, 육체적 노동을 하는 계층이야말로 이 사회의 터요 기본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출신이기도 했거니와 나무일뿐 아니라, 바다어부일, 농부일, 목자의일 등을 환하게 꿰뚫고 계셨으며 그 일을 자주 말씀의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만큼 일하는 자, 노동하는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셨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또 그일 가까이 계셨습니다. 사회가 비록 천대하고 소홀히 대한다 할 지라도,우리 신앙인과 교회는 노동하는 사람들을 가장 존중히 여기도록 합시다. 선교정책에도 가장 우선이 되도록 합시다. 3. 땀흘려 일하다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돌봅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 중 누차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집트 종살이 하던 것을 기억하여 공동체의 가난한자와 소외되어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돌보라는 명령입니다. 1) 건강과 일터를 잃은 형제들을 돌봅시다. 아직도 우리의 노동현실은 개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매년 15만 명의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이 있고 그 중 1700여명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또 아직도 한국은 장시간 노동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노동자의 노동.생활조건 개선이나 지위향상을 위해 활동하다가 구속,해고,수배를 당하면서 일터 바깥으로 내몰린 형제들이 있습니다. 88년 3월 부터 92년 10월 까지 6공화국 기간에 노조활동과 관련하여 해고된 노동자 수는 해직교사를 빼고도 3천3백29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구속된 노동자는 1천8백49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건국이래 최대사면이라는 새 정부의 지난 3,6 대사면 때는 1백25명의 구속노동자중 15명만이 석방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고용불안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경기침체의 여파로 해고,실직되어 길거리를 헤매는 형제들이 많아졌습니다. 2) 나그네된 형제들을 돌 봅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 중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에굽땅에서 나그네 되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출23:9)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23:12)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를 압제하지 않고, 나그네에게까지 쉼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시대의 나그네는, 남의 씨족 천막 아래 은신처를 구하는 흔히 추방된 자, 망명한자, 자연의 참변이나 전쟁등으로 자기부족이 전멸한 후에 생존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부족에 가서 살게 되므로 쉽게 착취와 압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작년 법무부에 자진 신고된 외국인 노동자는 6만1천1백26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미신고자 까지 포함하면 12만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12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개 동남아나 파키스탄 등지의 사람들입니다. 불안한 신분적 위치에 저임금 열악한 환경에 일부에서는 구타까지 당한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이 보내는 따가운 눈총에 더해 근로현장에서 각종 따돌림과 멸시를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는 도움의 손길을 펼쳐야 합니다. 한국 교회협의회 산하에 외국인 노동자 선교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이들을 교회가 돌봐야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역사의 중요한 고비를 넘어가는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땀흘려 일하는 노동의 중요성과,고통당하는 노동형제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도록 합시다. 특별히, 외면했던 선교과제를 발굴하고 힘써 노력하여 사회의 등불과 사표가 되는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노동주일을 당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에게 , 오늘 내리신 말씀을 순종하여 복되고 기쁜 삶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노동하는 손은 아름답다/ 출23:1-13/ 2010-02-12
노동하는 손은 아름답다 출23:1-13 요즈음 불로소득으로 재산을 모은 사회지도층 사람들을 향한 지탄의 소리가 높습니다. 땀흘려 일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깨끗한 사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잇습니다. 이것은 땀흘려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래된 기대입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땀흘려 일하는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노동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면서 높은 도덕성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계약법전이라 일컬어지는 이스라엘의 법전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먼저, 행정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재판에 있어서 공정할 것은 촉구하고 있습니다. 부자나 강자에게 편향적인 판결을 하여 가난한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라는 명령입니다. 그 다음은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규정입니다. 이것은 이집트의 압제 아래에서 고역에 찬 노예노동을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 야훼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땀흘려 노동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1. 땀흘려 일합시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엿세 동안의 활발한 창조활동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만들어 내는 활동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땀흘려 일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 인간에게 전수되어 우리 인간들은 땀흘려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시면서 사역의 기쁨을 표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안식일 규정에도 \\\\\\\"너는 육일동안에 네 일을 하고\\\\\\\"(출23:12)라고 했습니다. 같은 안식일 규정인 신명기 법전에는 \\\\\\\"엿세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신5:13)라고 했습니다. 엿세 동안 땀흘려 힘써 일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먼저된 명령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다. 쉼은 땀흘려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땀흘려 일하는 노동 없이 쉼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입니다. 땀흘려 일하는 노동 없는 열매도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요즈음 공직자 재산등록으로 온 나라안이 떠들썩합니다. 특히,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땀흘려 일한 결과가 아닌, 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엄청난 불로소득을 보면서 지탄의 소리가 높습니다.이것은 상대적으로 땀흘려 일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허탈감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에는 지금까지 이런 풍토와 관성에 대해서는 도덕적 불감증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 신앙인 들이 앞장서서 땀흘려 일하면서 얻은 열매로 살아가는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또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도 높은 도덕성으로 우리 신앙인들이 앞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더럽고,어렵고,위험한 일을 피하는 3D 현상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작업환경의 개선이 시급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땀흘려 일하여 대가를 구하기 보다 손 쉬운 열매를 찾아가는 풍조는 또 다른 노동 경시 풍조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발바닥 처럼 가장 힘들고 냄새나는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열심히 해 내는 사람들이 되도록 합시다. 손쉬운 소득을 추구하고 땀흘려 일하는 작은 소득을 비웃는 사회풍조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은 열심히 땀흘려서 거둬 들이는 열매만을 구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달란트 비유는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땀흘려 일해서 열매를 거둬들이는 것을 하나님은 칭찬하고 있습니다. 2,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듭시다. 오늘 본문에 안식일 규정을 제정하시면서 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안식일 규정을 언급하면서, 다른 동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소,나귀,계집종의 자식, 나그네를 언급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은 고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쉼도 없고 휴식도 없이 육체적 노동에 시달리는 소나 나귀 같은 짐승, 또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종과 나그네로서 육체적 노동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사람들을 쉬게 하라. 이것이 안식일 규정의 근본 정신중의 하나였습니다. 안식일의 쉼 규정을 어기는 자는 죽이라고 했습니다.(출35:2) 이것은 하나님의 단호한 명령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육체적 노동으로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 아끼셨고, 그들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아름답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땀흘려 일하는 손과 몰두하여 일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일은 그 결과나 성과물 보다도 과정이 소중합니다. 일하는 과정이 존중되는 사회는 따뜻한 사회입니다. 그러나 일의 결과를 존중하는 사회는 비인간적인 사회입니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땀흘려 일하는 가치를 얼마나 강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노동하는 손이 부끄러운 사회가 아니라, 아름답고 존중을 받는 사회가 되도록 합시다. 기층(基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계층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계층, 모든 것의 근본 터가 되는 계층이라는 말입니다. 이 기층은 손 노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손노동, 육체적 노동을 하는 계층이야말로 이 사회의 터요 기본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출신이기도 했거니와 나무일뿐 아니라, 바다어부일, 농부일, 목자의일 등을 환하게 꿰뚫고 계셨으며 그 일을 자주 말씀의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만큼 일하는 자, 노동하는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셨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또 그일 가까이 계셨습니다. 사회가 비록 천대하고 소홀히 대한다 할 지라도,우리 신앙인과 교회는 노동하는 사람들을 가장 존중히 여기도록 합시다. 선교정책에도 가장 우선이 되도록 합시다. 3. 땀흘려 일하다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돌봅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 중 누차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집트 종살이 하던 것을 기억하여 공동체의 가난한자와 소외되어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돌보라는 명령입니다. 1) 건강과 일터를 잃은 형제들을 돌봅시다. 아직도 우리의 노동현실은 개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매년 15만 명의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이 있고 그 중 1700여명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또 아직도 한국은 장시간 노동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노동자의 노동.생활조건 개선이나 지위향상을 위해 활동하다가 구속,해고,수배를 당하면서 일터 바깥으로 내몰린 형제들이 있습니다. 88년 3월 부터 92년 10월 까지 6공화국 기간에 노조활동과 관련하여 해고된 노동자 수는 해직교사를 빼고도 3천3백29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기간에 구속된 노동자는 1천8백49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건국이래 최대사면이라는 새 정부의 지난 3,6 대사면 때는 1백25명의 구속노동자중 15명만이 석방되었습니다. 최근에는 고용불안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경기침체의 여파로 해고,실직되어 길거리를 헤매는 형제들이 많아졌습니다. 2) 나그네된 형제들을 돌 봅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 중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에굽땅에서 나그네 되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출23:9)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23:12)라고 했습니다. 나그네를 압제하지 않고, 나그네에게까지 쉼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구약시대의 나그네는, 남의 씨족 천막 아래 은신처를 구하는 흔히 추방된 자, 망명한자, 자연의 참변이나 전쟁등으로 자기부족이 전멸한 후에 생존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부족에 가서 살게 되므로 쉽게 착취와 압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작년 법무부에 자진 신고된 외국인 노동자는 6만1천1백26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미신고자 까지 포함하면 12만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12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개 동남아나 파키스탄 등지의 사람들입니다. 불안한 신분적 위치에 저임금 열악한 환경에 일부에서는 구타까지 당한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이 보내는 따가운 눈총에 더해 근로현장에서 각종 따돌림과 멸시를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는 도움의 손길을 펼쳐야 합니다. 한국 교회협의회 산하에 외국인 노동자 선교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이들을 교회가 돌봐야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역사의 중요한 고비를 넘어가는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땀흘려 일하는 노동의 중요성과,고통당하는 노동형제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도록 합시다. 특별히, 외면했던 선교과제를 발굴하고 힘써 노력하여 사회의 등불과 사표가 되는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노동주일을 당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에게 , 오늘 내리신 말씀을 순종하여 복되고 기쁜 삶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노동하는 인간(1)/ 정창3:8-19/ 정용섭 목사/ 2004-05-02
노동하는 인간(1) 창3:8-19 창세기 3장만큼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있는 성서 본문도 드물 것입니다. 그 본문은 외면상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벌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인간의 본질이 죄라 는 주장의 증거 자료로 인용되곤 했는데,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여자가 뱀의 유혹에 더 욱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남녀 차별의 성서적 근거로 삼기도 했습니 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3장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를 매우 부정적으로 각인시키 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는 타당한 주장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 만연한 모순과 부조리의 원인을 일단 인간의 죄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간의 죄를 숙명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의 생명 의지를 송두리째 박멸시킨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 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오용되기도 하는 창세기 3장을, 주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다가 하나님에게 들켰습니 다. 그 당시는 하나님과 사람이 직접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 산을 거니신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니까 이런 성서의 보도는 사실적이기보다는 전형적인 설화적 이야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추궁을 받고 결국 죄를 자백 합니다. 아담은 이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브는 뱀에게 책임을 미루었습니다. 하나님 은 뱀이 변명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배로 기어다녀야 한다 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어서 여자에게는 세 가지 벌을 내리셨습니다. 임신과 분만의 고통, 남자에 대한 그리움, 남자에게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지배당함. 전통적 신학자 들은 이런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남자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고 주 장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그렇게 읽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문제의 원인을 따져서 그런 일을 야기한 사람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통찰 을 그런 설화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성들의 임신과 산고, 사회 적인 불이익 같은 문제들은 이브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니까 \\\'끽\\\' 소리 내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가는 그 현실을 설명하는 것뿐 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이에 못지 않은 징벌을 내리십니다. 17-19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기울인 노력만큼의 결실을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아담은 평생 고생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절은 약간 다른 전승이지만, 여기서도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에덴 동 산을 쫓겨난 후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지며\\\"(23)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해 졌다는 점에서 앞 단락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인간의 노동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그렇게 적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의 묘사 자체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보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 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17, 18a).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전승되는 그 \\\'삶의 자리\\\'를 약간 들여다보면 이들의 주장 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런 민담이 형성된 시대는 짧게 잡아도 3천년 전입니다. 혹은 4천년 전쯤으로 올려 잡아도 될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이 이 땅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노동의 대가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요즘처럼 영농기 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농사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닌데 3,4천년 전 시대에는 그 야말로 몸으로 때우는 방식의 농사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던 팔레스틴 지역은 일부만 제외하고는 척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땅은 한 마디로 그들에게 저주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나일강을 중심으로 상당히 풍요를 일구던 이집트로 이민 갔습니다. 그곳에서 대충 4백년쯤 살다가 돌아오면서 팔레 스틴 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만 인간이 더불어 먹고살기에 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그런 삶의 조건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을 우리는 나무랄 수 없습니다. 노동의 문제는 척박한 땅에서 생존의 위기를 겪었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3 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인 유인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형태의 사회 구조를 발전시켜 온 인류 전체가 씨름한 문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노획한 노예의 노동력 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 문명의 꽃을 빛낼 수 있었는데, 로마 귀족들이야 그런 방식으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노예와 그 이외의 식민지 주민들은 훨씬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 축성에 강제 동원된 사람들은 오늘 본문 의 표현처럼 땅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잉카 문명의 특징은 돌이라고 합 니다. 안데스산맥 고지대에 정교하고 엄청난 거석 문화를 건설한 그들의 그 역사에는 노 동을 신의 저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규가 베어 있습니다. 고대 문명 치고 이런 노동 의 혹사가 없이 이루어진 문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고대 문헌을 연구해야만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분명합니다.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가장 깊이 들어다본 근대 학자는 당연히 칼 마르크스입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피치를 올리고 있던 그 시대에 마르크스가 본 노동의 현실은 고대 제 국의 노예들이 감당했던 상태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지요? 고대 사회는 기술 문명이 발전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 고, 생존에도 부족했던 노동력을 전쟁과 건축 등에 쏟아 붓게 되니까 인간이 노동으로부 터 소외되기 마련입니다만, 산업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런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게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시대에 비해 오 늘 우리는 그 이전의 전체 인류 역사가 이룩한 발전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루었지만 이 런 노동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빈곤으로 인해서 학대받고 버려지는 아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다는 현실을 보면 지금 우리가 21세기를 사는지 아니면 19세기를 사는지 착각할 정도입니다. 최저임금이 여전히 5,60만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이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는 말씀이 딱 들어맞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느냐, 하면 상대적으로 양호할 뿐이지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괜찮은 부분은 우리가 가능한 빨리 배워서 따라가는 게 좋습니다. 임금 격차가 우리보다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게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컨대 의사나 변호사들의 수입이 다른 직종보다 높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큰 차이가 나지는 않 습니다. 그리고 수입이 많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세금으로 내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삶의 수준에서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즉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서 그것으로 교육과 의료를 완전히 정부가 책임지는 형태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으니까 노동으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우리보다는 덜 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여전히 노동시간과 임금 문제로 인해서 불평도 많이 하고, 시위와 폐업의 악순환도 여전합니다. 여러분이 뉴스를 통해서 잘 알다시피 복지 문제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잘 짜여진 독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실업 문제로 인해서 사회적 갈등이 적지 않습니다. 4월29일자로 유럽 연합 가입국수가 25개국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차원에서 미국에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연합체를 만들었겠지요. 이것은 곧 옛날에 비 해서 현대인들이 아무리 잘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노동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 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반증입니다. 과연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우리 인간 이 영원히 짊어져야 할 숙명인가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약간 다른 시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창 2:17절에 의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반드시 죽어야\\\'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실제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음을 모면한 것은 큰 행운이며 은 총입니다. 물론 본문에 \\\'흙으로 돌아간다\\\'거나 \\\'먼지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죽음을 가리 키는지 아닌지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일단 그것이 인간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이 범죄한 아 담과 이브를 당장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도 역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죽는 것과는, 즉 무화 (無化)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흙으로 돌아간다 는 것은 죽는다기보다는 생명 형식이 달라진다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심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총입니다. 따라서 땀을 흘려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는 이 진술도 역시 하나님의 징벌이라기 보다는 은총의 구도에서 읽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는 대신 좀더 심한 노동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한편으로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기 이전에도 이들은 에덴 동산을 돌보는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보면(창 2:15) 노동이 단순히 죄의 징벌은 결코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빌려서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죄를 짓기 이전에 에덴 동산을 돌보는 책임이 너무 한가했기 때문에 아담이 결국 이브와 더불어서 뱀의 유혹에 넘어갔 다고 말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으려면 노동 조건이 열악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생산성이 바닥으로 떨어진 고된 현실에 내맡겨진 아담이 이제는 엉뚱한 데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생존을 위해서 최선으로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 입니다. 저는 오늘 성서 본문을 읽으면서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생존 조건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노동 문제를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 바르 게 해석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해석은 노동을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살기 위해서 노동한다기보다는 노동함으로써 인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노동하 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수도사들이 종교적 명상 훈련과 육체 노동 을 한 이유도 노동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서구와 그 서 구를 따라잡으려는 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노동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노동을 늘 돈과 연결키는 데 있다고 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경우에도 노동자, 기업가, 정부가 노동을 거의 소유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즉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노동을 연봉과 직결시키고, 기업가는 노동을 통해서 기업을 확장시키고, 정부에서는 그 런 관계를 적절하게 운용함으로써 개인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야심만 드러내기 때문에 사안마다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 조조정과 일자리 창출은 서로 모순되는 행위인데도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 여지고 있습니다. 경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는 내가 이런 국가 경제에 대해서 이러 쿵저러쿵 시비를 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노동 문제를 단지 생산성 제고와 연 봉 높이기 차원에서만 생각하다가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입니 다. 노동의 존재론적 해석이라는 말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 분이 있을 것 같아서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 지만,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오래된 미래>는 티베트 라다크 마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야크를 키우며 살 아갑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건강만 허락하면 모두가 일합니 다. 그들 마을 공동체에는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모두가 일하고 함께 축제를 즐기면서,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매우 지루하게 일상을 살아갑니다. 땅의 임자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처럼 사유재산의 의미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지을 능력만큼만 자기 땅으로 삼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노동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 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오늘 우리의 삶은 매우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면은 별로 풍요롭지 못합니다. 가능한대로 불로소득을 기웃거리고, 노동의 능력이 단지 연봉 으로만 평가되는 이런 시스템에서는 결코 우리가 노동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할 수 없습니 다. 흡사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사람들처럼 영혼이 시들어갑니다. 노동에 대한 존재론적인 접근은 한 개인을 인간답게 만들뿐만 아니라 사회구조를 정 의롭게 만드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서 생존을 보장받는 것으 로 만족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사는 나라가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서 벌어들인 것을 자신들의 생존 차원에서만 사용 한다고 한다면 가난하기 때문에 굶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데 오늘의 현실에서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또는 거기서 벗어나 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 힘을 보존시켜나가려고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선 진국에서 그렇게 열을 올리면서 자유무역협정을 밀고 나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 다. 오늘의 인류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미래를 내다보십니까? 매일 먹고 놀면서 취미 생활이나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을까요? 만약 그런 때가 오 면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세 상은 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며, 인간이 가야 할 길도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노동이라 는 게 반드시 육체를 쓰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 사람의 병 을 고치는 사람, 설교하는 사람도 역시 노동하는 사람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어 떤 방식으로 일을 하든 우리의 노동에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참여한다면 노동은 바로 우 리가 구원받는 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궁 극적인 차원에서는 이 현실에서의 생존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노동하는 인간(1)/ 창3:8-19/ 정용섭 목사/ 2004-05-02
노동하는 인간(1) 창3:8-19 창세기 3장만큼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있는 성서 본문도 드물 것입니다. 그 본문은 외면상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벌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인간의 본질이 죄라 는 주장의 증거 자료로 인용되곤 했는데,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여자가 뱀의 유혹에 더 욱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남녀 차별의 성서적 근거로 삼기도 했습니 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3장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를 매우 부정적으로 각인시키 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는 타당한 주장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 만연한 모순과 부조리의 원인을 일단 인간의 죄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간의 죄를 숙명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의 생명 의지를 송두리째 박멸시킨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 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오용되기도 하는 창세기 3장을, 주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다가 하나님에게 들켰습니 다. 그 당시는 하나님과 사람이 직접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 산을 거니신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니까 이런 성서의 보도는 사실적이기보다는 전형적인 설화적 이야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추궁을 받고 결국 죄를 자백 합니다. 아담은 이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브는 뱀에게 책임을 미루었습니다. 하나님 은 뱀이 변명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배로 기어다녀야 한다 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어서 여자에게는 세 가지 벌을 내리셨습니다. 임신과 분만의 고통, 남자에 대한 그리움, 남자에게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지배당함. 전통적 신학자 들은 이런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남자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고 주 장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그렇게 읽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문제의 원인을 따져서 그런 일을 야기한 사람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통찰 을 그런 설화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성들의 임신과 산고, 사회 적인 불이익 같은 문제들은 이브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니까 \\\'끽\\\' 소리 내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가는 그 현실을 설명하는 것뿐 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이에 못지 않은 징벌을 내리십니다. 17-19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기울인 노력만큼의 결실을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아담은 평생 고생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절은 약간 다른 전승이지만, 여기서도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에덴 동 산을 쫓겨난 후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지며\\\"(23)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해 졌다는 점에서 앞 단락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인간의 노동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그렇게 적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의 묘사 자체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보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 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17, 18a).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전승되는 그 \\\'삶의 자리\\\'를 약간 들여다보면 이들의 주장 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런 민담이 형성된 시대는 짧게 잡아도 3천년 전입니다. 혹은 4천년 전쯤으로 올려 잡아도 될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이 이 땅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노동의 대가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요즘처럼 영농기 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농사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닌데 3,4천년 전 시대에는 그 야말로 몸으로 때우는 방식의 농사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던 팔레스틴 지역은 일부만 제외하고는 척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땅은 한 마디로 그들에게 저주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나일강을 중심으로 상당히 풍요를 일구던 이집트로 이민 갔습니다. 그곳에서 대충 4백년쯤 살다가 돌아오면서 팔레 스틴 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만 인간이 더불어 먹고살기에 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그런 삶의 조건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을 우리는 나무랄 수 없습니다. 노동의 문제는 척박한 땅에서 생존의 위기를 겪었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3 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인 유인원으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형태의 사회 구조를 발전시켜 온 인류 전체가 씨름한 문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노획한 노예의 노동력 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 문명의 꽃을 빛낼 수 있었는데, 로마 귀족들이야 그런 방식으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노예와 그 이외의 식민지 주민들은 훨씬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 축성에 강제 동원된 사람들은 오늘 본문 의 표현처럼 땅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잉카 문명의 특징은 돌이라고 합 니다. 안데스산맥 고지대에 정교하고 엄청난 거석 문화를 건설한 그들의 그 역사에는 노 동을 신의 저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규가 베어 있습니다. 고대 문명 치고 이런 노동 의 혹사가 없이 이루어진 문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고대 문헌을 연구해야만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분명합니다.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가장 깊이 들어다본 근대 학자는 당연히 칼 마르크스입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피치를 올리고 있던 그 시대에 마르크스가 본 노동의 현실은 고대 제 국의 노예들이 감당했던 상태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지요? 고대 사회는 기술 문명이 발전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 고, 생존에도 부족했던 노동력을 전쟁과 건축 등에 쏟아 붓게 되니까 인간이 노동으로부 터 소외되기 마련입니다만, 산업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런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게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시대에 비해 오 늘 우리는 그 이전의 전체 인류 역사가 이룩한 발전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루었지만 이 런 노동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빈곤으로 인해서 학대받고 버려지는 아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다는 현실을 보면 지금 우리가 21세기를 사는지 아니면 19세기를 사는지 착각할 정도입니다. 최저임금이 여전히 5,60만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이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는 말씀이 딱 들어맞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느냐, 하면 상대적으로 양호할 뿐이지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괜찮은 부분은 우리가 가능한 빨리 배워서 따라가는 게 좋습니다. 임금 격차가 우리보다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게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컨대 의사나 변호사들의 수입이 다른 직종보다 높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큰 차이가 나지는 않 습니다. 그리고 수입이 많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세금으로 내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삶의 수준에서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즉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서 그것으로 교육과 의료를 완전히 정부가 책임지는 형태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으니까 노동으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우리보다는 덜 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여전히 노동시간과 임금 문제로 인해서 불평도 많이 하고, 시위와 폐업의 악순환도 여전합니다. 여러분이 뉴스를 통해서 잘 알다시피 복지 문제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잘 짜여진 독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실업 문제로 인해서 사회적 갈등이 적지 않습니다. 4월29일자로 유럽 연합 가입국수가 25개국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차원에서 미국에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연합체를 만들었겠지요. 이것은 곧 옛날에 비 해서 현대인들이 아무리 잘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노동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 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반증입니다. 과연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우리 인간 이 영원히 짊어져야 할 숙명인가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약간 다른 시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창 2:17절에 의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반드시 죽어야\\\'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실제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음을 모면한 것은 큰 행운이며 은 총입니다. 물론 본문에 \\\'흙으로 돌아간다\\\'거나 \\\'먼지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죽음을 가리 키는지 아닌지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일단 그것이 인간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이 범죄한 아 담과 이브를 당장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도 역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죽는 것과는, 즉 무화 (無化)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흙으로 돌아간다 는 것은 죽는다기보다는 생명 형식이 달라진다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심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총입니다. 따라서 땀을 흘려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는 이 진술도 역시 하나님의 징벌이라기 보다는 은총의 구도에서 읽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는 대신 좀더 심한 노동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한편으로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기 이전에도 이들은 에덴 동산을 돌보는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보면(창 2:15) 노동이 단순히 죄의 징벌은 결코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빌려서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죄를 짓기 이전에 에덴 동산을 돌보는 책임이 너무 한가했기 때문에 아담이 결국 이브와 더불어서 뱀의 유혹에 넘어갔 다고 말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으려면 노동 조건이 열악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생산성이 바닥으로 떨어진 고된 현실에 내맡겨진 아담이 이제는 엉뚱한 데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생존을 위해서 최선으로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 입니다. 저는 오늘 성서 본문을 읽으면서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생존 조건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노동 문제를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 바르 게 해석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해석은 노동을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살기 위해서 노동한다기보다는 노동함으로써 인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노동하 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수도사들이 종교적 명상 훈련과 육체 노동 을 한 이유도 노동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서구와 그 서 구를 따라잡으려는 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노동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노동을 늘 돈과 연결키는 데 있다고 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경우에도 노동자, 기업가, 정부가 노동을 거의 소유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즉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노동을 연봉과 직결시키고, 기업가는 노동을 통해서 기업을 확장시키고, 정부에서는 그 런 관계를 적절하게 운용함으로써 개인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야심만 드러내기 때문에 사안마다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 조조정과 일자리 창출은 서로 모순되는 행위인데도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 여지고 있습니다. 경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는 내가 이런 국가 경제에 대해서 이러 쿵저러쿵 시비를 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노동 문제를 단지 생산성 제고와 연 봉 높이기 차원에서만 생각하다가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입니 다. 노동의 존재론적 해석이라는 말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 분이 있을 것 같아서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 지만,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오래된 미래>는 티베트 라다크 마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야크를 키우며 살 아갑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건강만 허락하면 모두가 일합니 다. 그들 마을 공동체에는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모두가 일하고 함께 축제를 즐기면서,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매우 지루하게 일상을 살아갑니다. 땅의 임자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 처럼 사유재산의 의미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지을 능력만큼만 자기 땅으로 삼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노동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 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오늘 우리의 삶은 매우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면은 별로 풍요롭지 못합니다. 가능한대로 불로소득을 기웃거리고, 노동의 능력이 단지 연봉 으로만 평가되는 이런 시스템에서는 결코 우리가 노동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할 수 없습니 다. 흡사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사람들처럼 영혼이 시들어갑니다. 노동에 대한 존재론적인 접근은 한 개인을 인간답게 만들뿐만 아니라 사회구조를 정 의롭게 만드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서 생존을 보장받는 것으 로 만족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사는 나라가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서 벌어들인 것을 자신들의 생존 차원에서만 사용 한다고 한다면 가난하기 때문에 굶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데 오늘의 현실에서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또는 거기서 벗어나 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 힘을 보존시켜나가려고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선 진국에서 그렇게 열을 올리면서 자유무역협정을 밀고 나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 다. 오늘의 인류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미래를 내다보십니까? 매일 먹고 놀면서 취미 생활이나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을까요? 만약 그런 때가 오 면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세 상은 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며, 인간이 가야 할 길도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노동이라 는 게 반드시 육체를 쓰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 사람의 병 을 고치는 사람, 설교하는 사람도 역시 노동하는 사람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어 떤 방식으로 일을 하든 우리의 노동에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참여한다면 노동은 바로 우 리가 구원받는 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궁 극적인 차원에서는 이 현실에서의 생존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노동하는 인간(2)/ 창3:8-19/ 정용섭 목사/ 2004-05-23
노동하는 인간(2) 창3:8-19 출산과 노동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에게 징벌을 내렸습니다. 먼저 이브 에게는 출산의 고생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에는 출산의 고생이 없었다는 말이 되는데, 약간 이상하긴 합니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한다면 타락 이전 에는 출산 행위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간 복제 기술을 통해서 출산의 고통을 받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것은 곧 새 땅과 새 하늘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일까요? 이브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징벌은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오히려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미 아내들이 남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 을 뿐만 아니라 훨씬 큰 힘을 행사한다는 것을 보면, 타락 이후의 이 현실이 시나브로 정리되어 가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매우 혹독한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 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17,18절).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죽어야만 했 던 아담이 비록 노동의 강도는 높아졌지만 그래도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하나님 의 은총이긴 합니다만, 에덴 동산의 삶과 비교할 때 이제 아담의 삶은 견뎌내기 힘들 정 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쨌든지 이브와 아담에게 내린 야훼 하나님의 징벌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내용적 인 면에서는 결국 똑같습니다. 출산이나 노동이나 모두 생명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는 점 에서 그렇습니다. 출산이 없으면 지구상에 있다가 사라진 수많은 동물들처럼 인간도 사 라질 것이며,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설화 형식을 빌려서 이 문제를 해명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이브와 아담은 여전히 출산과 노동을 통해서 생명을 지속해나갈 수 있었습니 다. 다만 그 두 행위에는 엄청난 수고가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출산과 노동 을 포기하거나 또는 그것에 따르는 고생을 감내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자신의 본질을 외 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창세기와 같은 고대 문서의 이러한 가르침을 가볍 게 여기고 자신들이 생산해내는 기술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볼 때 과학적인 지식이 짧았던 고대인들의 통찰은 우리에게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걸까 요? 땅의 저주 창세기 기자는 아담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땅은 원래 아름답습니다. 모세의 전승에 의하면 땅은 거룩합니다. 그 땅은 하나님에게 속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기자는 이 땅이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고발합니다. 창세기 4 장으로 넘어가면서 아벨의 피로 얼룩진 땅은 또 다시 저주를 받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카인을 이렇게 다그치십니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창 4:12). 3천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창세기 기자는 땅이 저 주를 받았다고 연달아서 고발하고 있습니까? 어떤 엄청난 사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아 무런 영농 기술도 없이 순전히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던 그들에게 이 땅 은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가시덤불과 엉겅퀴 를 내는 땅과의 싸움에서 그들이 감당해야할 생존의 무게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보장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땅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 연스럽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땅은 어떻게 보입니까? 그냥 우리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여전히 꽃이 피고, 논밭 농사가 되고, 과일이 열리니까 풍요로운 땅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심층 적으로 이 땅은 또다시 저주받은 곳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땅의 산성화라든가, 갯벌의 훼손이라든가, 고속도로 및 고속철 공사로 인한 산과 강의 맥이 끊기는 일, 인간 의 몸에 축적되는 독성, 그로 인한 정자 수의 감소 등등, 먹고살며 소비하고 즐기는 일 에 마음을 빼앗긴 현대인들이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이 땅은 신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혹은 우리가 모르는 사시에 더 큰 일들이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문 가들의 경고대로 이 생태계는 어느 상태까지는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고비에 이 르게 되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체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가 그 고 비일지, 아니면 20년 후일지 모르지만 이 땅은 그렇게 병들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 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존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저주받은 땅을 생각하게 됩니다. 끼니를 걱정하는 분들이 아니라면 땅 이 저주받았다는 창세기 기자의 증언이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 칠 전 밤 열 한시가 넘어 교회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천호 아파트를 나서고 있는데, 허 름한 옷을 입은 어떤 여자가 아파트의 분리 수거대 앞에서 종이를 챙겨 리어카에 싣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부슬비가 약간 뿌리는 그 늦은 시각에 폐지를 수집하고 있는 사람이 라면 끼니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겠지요. 이 늦은 시간에 이걸 모아서 어디로 갖고 가느냐고 물으니까 귀찮다는 듯이 아무 대답이 없더군요. 하양 시내에는 그렇게 살 아가는 사람이 남녀 각각 두 명씩 4명 정도 됩니다. 북한 주민들이나 동남 아시아, 그리 고 아프리카까지 지역을 넓혀서 본다면 땅은 여전히 저주받은 상태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담 죄는? 성서 기자는 땅이 저주받는 것은 \\\'아담 때문\\\'이라고 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먹지 말 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토대인 땅까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성서 기자의 직관은 아주 정확합니다. 인간이 자연보다 잘난 척 하지만 실 제로는 인간 때문에 땅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없었다면 땅이 저주받을 일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아담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진지하게 생 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성서의 진술을 상투적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핵심을 놓치고 변 죽만 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읽고 흡사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생각하 고 맙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주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여깁니 다. 아니면 그것을 실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원죄와 연결시킬 뿐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죄가 우리에게까지 전달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늘 이런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 니다. 이 사건이 바로 그런 것일까요? 우리를 숙명적으로 죄에 묶어두기 위해서 창세기 기자는 아담의 죄와 하나님의 징벌과 땅의 저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담 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말씀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해야만 합 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생명 의 영이신 성령이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은 곧 아담이 생명의 길을 따르지 않고 역행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땅이 저주를 받 게 된 이유는 곧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이 생명의 목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노장 식으로 표현한다면 도와 자연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인간 중 심적으로 판단하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이 창세기 기자의 진술을 조금 더 구체적 으로 이해하려면 생명이 무엇인지, 또는 생명의 영에게 불순종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아야 하는데, 여기서 우리의 어려움은 하나님을 생명의 영이라고 표현할 때의 그 \\\'생 명\\\'이 무엇인지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어쩌면 생명을 아는 것이 곧 하나 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생명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 다. 저는 그것을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거꾸로 반생명적 현상의 하나를 통해서 간접적으 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반(反)생명적인 현상은 곧 소비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이 생명 을 누리려고 하는 모든 소비 행위들이 결국은 생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이긴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이 육신을 갖고 살고 있으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상 소비는 어쩔 수 없습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다시 배설해야하고, 학 교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소비는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오늘 현대의 도시 사회가 저지 르고 있는 소비는 약간의 과소비를 지나서 근본적으로 소비 지향적 특성을 보이고 있습 니다. 어쩌면 \\\"누가 누가 소비를 잘하나?\\\" 경쟁을 벌이듯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화장품과 양주 소비가 제일 심하다거나, 고급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내장재를 몽땅 갈아치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돈들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교육의 과소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식에게 만은 특별 교육을 제공하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교육 마저 소비 의 수단으로 변하고 있는 이 시대 정신의 반생명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설 교를 작성하고 있는 이 시간에(5월21일, 밤 10시 반쯤) 가톨릭 대학교 학생들이 축제 마 지막 이벤트로 불꽃놀이를 하는지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하양을 흔들어 놓습니다. 예 비 지성인들인 대학생들이 한 순간의 불꽃놀이를 위해서, 또는 유명 사회자를 초청하면 서 수백 만원 씩 소비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젊은이 들의 낭만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성들의 심리를 그렇게 빈정대려 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몇 가지 현상 자체보다는 이 시대가 날이 갈수록 소비 중심적 패 러다임으로 빠져드는 것을 쓸데없이 걱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대의 소비 지향적 삶은 결코 생명을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라 병들게 하고, 더 나아가서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의 목소리를 거역한 아담의 죄는 오늘날 우리에게 소비 지향적 삶의 태도와 똑같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 중에서 소비 지향성이 죄라는 사 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의 시대가 얼마나 소비 지향적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마디만 덧 붙이겠습니다. 지상 목표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 소비의 극대화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집단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진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민주노동당마저 이런 틀 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 때 권영길 씨는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멘트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번 총선을 즈음해서도 그들은 노동 자들의 수입이 많아져야 소비가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나면 공장이 잘 돌아간다는 논리 를 폈습니다. 부의 재분배라는 미시적 구조에서는 이들의 말이 타당하지만 결국 이들도 이 시대의 소비 지향적 구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총으로서의 노동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땅이 곧 인간이 살아가야 할 현실이라고 성서는 말합니 다. 고대 사회는 말 그대로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았습니다.\\\" 땅은 인간이 먹을 수 없 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의 흔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노예처럼 평생 중노동을 하면서 살지 않기 위해서, 그리 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상상 부분에서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소와 말의 힘을 빌려서 고생을 약간은 면하게 되었고, 경우에 따 라서는 노예를 이용하거나 머슴을 두고 편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한 이후에는 기계의 힘에 의해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습니다. 더 구나 자본의 축적되는 과정에서 자본과 부가 인간을 먹여 살리는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 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산다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이 바꾸어놓은 이 세계 질서가 과연 구원의 길입니까? 오히려 고대 와는 다른 방식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노동의 소외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 니다. 저는 지금 전문가도 아니면서 인간과 경제와 노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 서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죽도록 노동해야 먹고산다는 말씀이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징벌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 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데카르트의 표현처럼 인간은 사유함 으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표현대로 인간은 사랑하고 노동 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노동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노동함으로 인간이 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니, 본질이니, 하는 말은 귀에 와 닿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집에서 온갖 것을 갖추어놓고 마음껏 소비하며 사는 게 소원이라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 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소비 지향적인 삶의 구조에서 벗어 나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먹고사는 길밖에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이 너무 비관적으로 들리십니까? 숙명주의입니까? 이 풍요와 소비의 시대 와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외침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산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은 매우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구에서 다른 사람과 더 불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소비 지향성으로부터 존재 지향성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고생해서 먹고사는 데 만족하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이 지구는 충분한 먹거리와 입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좀 가난해지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서 생존해야 한 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국가 간의 분쟁은 대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에서 벌 어지는 야만스러운 폭력의 뿌리는 자신들만 풍요롭게 살아야겠다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인류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국가 와 국가 사이에서 이렇게 살다가 모두 망하는 길을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속에서 삶의 의미를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만들어내고, 계속해서 땅을 저주받게 만드는 이 야만스러운 문명의 시 대에서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맡은 선교적 사명은 명백합니다. 더 이상 경제 발전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가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사는 것이 징벌이 아니라 은총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소비가 아니라 노동이 야말로 인간이 되는 길이며, 더구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교회의 선교적 구조 안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작은 교회와 자연학교가 모범적이라고 생각 됩니다. 작고 가난하기 때문에 과소비 할 여력도 없습니다. 실제로 노동의 구원론적 지 평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주받은 땅을 살려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 지향적 선교 공동체로서 \\\'딱\\\'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고단한 길인지 모르지만 이미 이런 길에서 종말론적 구원의 신비를 발견한 분들의 공동체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이 길을 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노동하는 인간(2)/ 창3:8-19/ 정용섭 목사/ 2004-05-23
노동하는 인간(2) 창3:8-19 출산과 노동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에게 징벌을 내렸습니다. 먼저 이브 에게는 출산의 고생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에는 출산의 고생이 없었다는 말이 되는데, 약간 이상하긴 합니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한다면 타락 이전 에는 출산 행위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간 복제 기술을 통해서 출산의 고통을 받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것은 곧 새 땅과 새 하늘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일까요? 이브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징벌은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오히려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미 아내들이 남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 을 뿐만 아니라 훨씬 큰 힘을 행사한다는 것을 보면, 타락 이후의 이 현실이 시나브로 정리되어 가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매우 혹독한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 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17,18절).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죽어야만 했 던 아담이 비록 노동의 강도는 높아졌지만 그래도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하나님 의 은총이긴 합니다만, 에덴 동산의 삶과 비교할 때 이제 아담의 삶은 견뎌내기 힘들 정 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쨌든지 이브와 아담에게 내린 야훼 하나님의 징벌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내용적 인 면에서는 결국 똑같습니다. 출산이나 노동이나 모두 생명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는 점 에서 그렇습니다. 출산이 없으면 지구상에 있다가 사라진 수많은 동물들처럼 인간도 사 라질 것이며,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설화 형식을 빌려서 이 문제를 해명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이브와 아담은 여전히 출산과 노동을 통해서 생명을 지속해나갈 수 있었습니 다. 다만 그 두 행위에는 엄청난 수고가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출산과 노동 을 포기하거나 또는 그것에 따르는 고생을 감내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자신의 본질을 외 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창세기와 같은 고대 문서의 이러한 가르침을 가볍 게 여기고 자신들이 생산해내는 기술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볼 때 과학적인 지식이 짧았던 고대인들의 통찰은 우리에게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걸까 요? 땅의 저주 창세기 기자는 아담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땅은 원래 아름답습니다. 모세의 전승에 의하면 땅은 거룩합니다. 그 땅은 하나님에게 속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기자는 이 땅이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고발합니다. 창세기 4 장으로 넘어가면서 아벨의 피로 얼룩진 땅은 또 다시 저주를 받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카인을 이렇게 다그치십니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창 4:12). 3천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창세기 기자는 땅이 저 주를 받았다고 연달아서 고발하고 있습니까? 어떤 엄청난 사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아 무런 영농 기술도 없이 순전히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던 그들에게 이 땅 은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가시덤불과 엉겅퀴 를 내는 땅과의 싸움에서 그들이 감당해야할 생존의 무게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보장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땅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 연스럽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땅은 어떻게 보입니까? 그냥 우리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여전히 꽃이 피고, 논밭 농사가 되고, 과일이 열리니까 풍요로운 땅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심층 적으로 이 땅은 또다시 저주받은 곳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땅의 산성화라든가, 갯벌의 훼손이라든가, 고속도로 및 고속철 공사로 인한 산과 강의 맥이 끊기는 일, 인간 의 몸에 축적되는 독성, 그로 인한 정자 수의 감소 등등, 먹고살며 소비하고 즐기는 일 에 마음을 빼앗긴 현대인들이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이 땅은 신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혹은 우리가 모르는 사시에 더 큰 일들이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문 가들의 경고대로 이 생태계는 어느 상태까지는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고비에 이 르게 되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체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가 그 고 비일지, 아니면 20년 후일지 모르지만 이 땅은 그렇게 병들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 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존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저주받은 땅을 생각하게 됩니다. 끼니를 걱정하는 분들이 아니라면 땅 이 저주받았다는 창세기 기자의 증언이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 칠 전 밤 열 한시가 넘어 교회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천호 아파트를 나서고 있는데, 허 름한 옷을 입은 어떤 여자가 아파트의 분리 수거대 앞에서 종이를 챙겨 리어카에 싣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부슬비가 약간 뿌리는 그 늦은 시각에 폐지를 수집하고 있는 사람이 라면 끼니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겠지요. 이 늦은 시간에 이걸 모아서 어디로 갖고 가느냐고 물으니까 귀찮다는 듯이 아무 대답이 없더군요. 하양 시내에는 그렇게 살 아가는 사람이 남녀 각각 두 명씩 4명 정도 됩니다. 북한 주민들이나 동남 아시아, 그리 고 아프리카까지 지역을 넓혀서 본다면 땅은 여전히 저주받은 상태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담 죄는? 성서 기자는 땅이 저주받는 것은 \\\'아담 때문\\\'이라고 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먹지 말 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토대인 땅까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성서 기자의 직관은 아주 정확합니다. 인간이 자연보다 잘난 척 하지만 실 제로는 인간 때문에 땅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없었다면 땅이 저주받을 일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아담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진지하게 생 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성서의 진술을 상투적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핵심을 놓치고 변 죽만 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읽고 흡사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생각하 고 맙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주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여깁니 다. 아니면 그것을 실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원죄와 연결시킬 뿐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죄가 우리에게까지 전달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늘 이런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 니다. 이 사건이 바로 그런 것일까요? 우리를 숙명적으로 죄에 묶어두기 위해서 창세기 기자는 아담의 죄와 하나님의 징벌과 땅의 저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담 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말씀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해야만 합 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생명 의 영이신 성령이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은 곧 아담이 생명의 길을 따르지 않고 역행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땅이 저주를 받 게 된 이유는 곧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이 생명의 목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노장 식으로 표현한다면 도와 자연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인간 중 심적으로 판단하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이 창세기 기자의 진술을 조금 더 구체적 으로 이해하려면 생명이 무엇인지, 또는 생명의 영에게 불순종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아야 하는데, 여기서 우리의 어려움은 하나님을 생명의 영이라고 표현할 때의 그 \\\'생 명\\\'이 무엇인지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어쩌면 생명을 아는 것이 곧 하나 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생명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 다. 저는 그것을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거꾸로 반생명적 현상의 하나를 통해서 간접적으 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반(反)생명적인 현상은 곧 소비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이 생명 을 누리려고 하는 모든 소비 행위들이 결국은 생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이긴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이 육신을 갖고 살고 있으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상 소비는 어쩔 수 없습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다시 배설해야하고, 학 교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소비는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오늘 현대의 도시 사회가 저지 르고 있는 소비는 약간의 과소비를 지나서 근본적으로 소비 지향적 특성을 보이고 있습 니다. 어쩌면 \\\"누가 누가 소비를 잘하나?\\\" 경쟁을 벌이듯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화장품과 양주 소비가 제일 심하다거나, 고급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내장재를 몽땅 갈아치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돈들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교육의 과소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식에게 만은 특별 교육을 제공하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교육 마저 소비 의 수단으로 변하고 있는 이 시대 정신의 반생명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설 교를 작성하고 있는 이 시간에(5월21일, 밤 10시 반쯤) 가톨릭 대학교 학생들이 축제 마 지막 이벤트로 불꽃놀이를 하는지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하양을 흔들어 놓습니다. 예 비 지성인들인 대학생들이 한 순간의 불꽃놀이를 위해서, 또는 유명 사회자를 초청하면 서 수백 만원 씩 소비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젊은이 들의 낭만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성들의 심리를 그렇게 빈정대려 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몇 가지 현상 자체보다는 이 시대가 날이 갈수록 소비 중심적 패 러다임으로 빠져드는 것을 쓸데없이 걱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대의 소비 지향적 삶은 결코 생명을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라 병들게 하고, 더 나아가서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의 목소리를 거역한 아담의 죄는 오늘날 우리에게 소비 지향적 삶의 태도와 똑같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 중에서 소비 지향성이 죄라는 사 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의 시대가 얼마나 소비 지향적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마디만 덧 붙이겠습니다. 지상 목표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 소비의 극대화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집단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진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민주노동당마저 이런 틀 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 때 권영길 씨는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멘트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번 총선을 즈음해서도 그들은 노동 자들의 수입이 많아져야 소비가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나면 공장이 잘 돌아간다는 논리 를 폈습니다. 부의 재분배라는 미시적 구조에서는 이들의 말이 타당하지만 결국 이들도 이 시대의 소비 지향적 구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총으로서의 노동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땅이 곧 인간이 살아가야 할 현실이라고 성서는 말합니 다. 고대 사회는 말 그대로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았습니다.\\\" 땅은 인간이 먹을 수 없 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의 흔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노예처럼 평생 중노동을 하면서 살지 않기 위해서, 그리 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상상 부분에서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소와 말의 힘을 빌려서 고생을 약간은 면하게 되었고, 경우에 따 라서는 노예를 이용하거나 머슴을 두고 편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한 이후에는 기계의 힘에 의해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습니다. 더 구나 자본의 축적되는 과정에서 자본과 부가 인간을 먹여 살리는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 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산다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이 바꾸어놓은 이 세계 질서가 과연 구원의 길입니까? 오히려 고대 와는 다른 방식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노동의 소외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 니다. 저는 지금 전문가도 아니면서 인간과 경제와 노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 서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죽도록 노동해야 먹고산다는 말씀이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징벌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 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데카르트의 표현처럼 인간은 사유함 으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표현대로 인간은 사랑하고 노동 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노동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노동함으로 인간이 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니, 본질이니, 하는 말은 귀에 와 닿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집에서 온갖 것을 갖추어놓고 마음껏 소비하며 사는 게 소원이라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 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소비 지향적인 삶의 구조에서 벗어 나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먹고사는 길밖에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이 너무 비관적으로 들리십니까? 숙명주의입니까? 이 풍요와 소비의 시대 와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외침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산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은 매우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구에서 다른 사람과 더 불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소비 지향성으로부터 존재 지향성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고생해서 먹고사는 데 만족하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이 지구는 충분한 먹거리와 입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좀 가난해지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서 생존해야 한 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국가 간의 분쟁은 대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에서 벌 어지는 야만스러운 폭력의 뿌리는 자신들만 풍요롭게 살아야겠다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인류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국가 와 국가 사이에서 이렇게 살다가 모두 망하는 길을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속에서 삶의 의미를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만들어내고, 계속해서 땅을 저주받게 만드는 이 야만스러운 문명의 시 대에서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맡은 선교적 사명은 명백합니다. 더 이상 경제 발전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가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사는 것이 징벌이 아니라 은총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소비가 아니라 노동이 야말로 인간이 되는 길이며, 더구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교회의 선교적 구조 안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작은 교회와 자연학교가 모범적이라고 생각 됩니다. 작고 가난하기 때문에 과소비 할 여력도 없습니다. 실제로 노동의 구원론적 지 평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주받은 땅을 살려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 지향적 선교 공동체로서 \\\'딱\\\'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고단한 길인지 모르지만 이미 이런 길에서 종말론적 구원의 신비를 발견한 분들의 공동체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이 길을 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살후3:7-15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살후3:7-15 베네딕튀스 더 스피노자 (Benedictus de Spinoza, 1632년 11월 25일 - 1677년 2월 21일)는 암스테르담 태생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내일 지구에 종말이 와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새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실 ‘사과나무’라는 말만 빼면, 그 말은 17세기 이전부터 알려진, 아주 오래 된 지혜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아니라 누가 했든, 그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대개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면, 오늘 “먹고 죽자!” 할 사람이 많습니다. 지구까지는 몰라도, 개인의 삶에 위기가 닥쳤다고 해도, 자포자기하고 말 사람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If I fought wild beasts in Ephesus for merely human reasons, what have I gained? If the dead are not raised, \\\"Let us eat and drink, for tomorrow we die.\\\" 고전 15:32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면, 밥을 주지 말라!” 어디서 들어 본 말입니까? 공산주의자의 선동 같은 말입니다. 무서운 말이지요. 놀랍게도 이것은 성경말씀입니다. 나는 중학교 때 이 말씀을 처음 들었습니다. 그때의 무서움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구나! 나는 이 말씀을 정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당장 내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해를 피합시다. 이것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직장이 없거나, 몸에 장애가 생겨서 부득이하게 일을 할 수가 없거나 한 사람들을 겨냥한 말은 아닙니다. 게으른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니, 그 준비를 하며 살라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을 읽고 “핑계거리”로 삼는 모든 부정적인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들을 겨냥한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제2차 전도 여행중이던 A.D. 51-53년경, 바울이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써 보낸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기록 연대는, 바울이 고린도에 있었을 때 갈리오 총독의 법정에 끌려갔다는 사실에서 그 정확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행 18:12-17). 본서의 저작 연대를 A.D.51-53년으로 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후서는 최초의 바울 서신이며, 신약 성경 중에 최초의 기록입니다. 사람에게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세상사람 누구나 다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도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진 것은, 우리의 삶에 ‘일상성’ 그리고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결정적인 믿음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다면, 상황에 따라 흔들립니다. 일정한 모습은 없어집니다. 어차피 죽으면 “끝”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죽음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불신자들도 성경을 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으로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항상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안이숙 사모님의 찬송시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주옵소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른 삶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는 “부활과 재림”입니다. 그렇게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냈더니, 부활의 신앙에 소망이 생겼고, 재림의 신앙에 믿음을 더욱 굳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문제도 생겼습니다. 그냥 놀고먹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내일 주님께서 오실 텐데 일은 무슨 일이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 번째 편지, 곧 <데살로니가후서>를 쓴 것입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 온 ‘오해’를 시정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1장을 요약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인내와 믿음 이 뛰어납니다. 자랑할 만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 니다. 2장 1-4절을 요약, 정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에 대하여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기를 당부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미혹되지 말아야 합니 다.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탄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2장 13-17절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여러분을 택하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으로써 우리를 부르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굳게 서서 우리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십시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행동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 기를 원합니다. 이어서 3장입니다. “게으르게 행하고 가르침을 거역하는 모든 형제들”(살후 3:6)에게서 떠나십시오. 그들 은 무질서하게 행동하며, 음식을 값없이 먹으며, 수고하지 않습니다. 나는 스스로 일하 는 사람이며, 음식 값을 지불하며, 다른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나는 목회자로서 음식 값을 내지 않고 먹을 권리가 있지만, 본을 보이기 위 함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도 게을러서 일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형제들에게 권면합니다: “묵묵 히 자기 일을 하며, 자기 양식을 먹으라!” 그런데도 계속해서 순종하지 않거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십시오. 그러나 ‘원수’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십시 오(살후 3:15). 그러니까, 일하지 않는다고 밥을 굶기는 것은 너무한 일이겠습니다. 일을 하면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직장을 소개해 준다거나, 일거리를 직접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미국의 외삼촌에게서 초청장이 온 것은 1977년이었습니다. 정작 비자가 나온 것은 1985년이니까, 꼭 8년 걸렸습니다. 오늘내일 하던 것이 8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1977년은 내가 고3 때였습니다. 나는 그 초청장 받은 이후 11년 만에 미국에 입국했습니다. 형제초청이었으므로, 어머니가 당시 19세 미만이었던 막내와 함께 미국에 들어오시고, 나머지 자녀들을 재초청해야 했던 것입니다. 대입을 준비하던 고3 때, 긴장이 풀렸습니다. 대학 다닐 때도 몇 번인가 교수들에게 물었습니다. “졸업하고 갈까요, 바로 갈까요?” 비자를 손에 쥔 것처럼 물었습니다. 교수들은 “여기서 뭘 배울게 있다고 머뭇거리냐? 웬만하면 그냥 가라”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와 대학 때 공부를 제대로 못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군대 생활할 때도, “제대하기 전에 미국 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같이 훈련 뛰면서도 다른 동료 병사들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잘 있으시오. 나는 갑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11년은 어떤 의미에서 공중에 뜬 세월이었습니다. 초청장이 왔을 때 아래 세 명의 동생들은 초-중-고에 걸쳐 있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내일 미국 갈 텐데 무슨 공부냐?” “공부를 처음부터 새로 해야 한다더라.” 그랬습니다. 미국 간다고 해서 공부를 못했다고 했습니다. 미국 비자가 여러 아이들 공부를 망쳤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1990년대 초반, 소위 “재림신앙”이 미주 지역을 강타했습니다. 구약 4천년, 신약 2천년, 그래서 6천년이 지났으니, 이제 안식천년, 즉 “천년왕국”의 때가 임했다는 세대주의적 발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흔들렸’습니다. 직장을 그만 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학교공부도 그만두고 기도원에 가서 사는 젊은이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조금 더 극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인생은 9회 말 투 아웃부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소위 “막판 뒤집기”가 있습니다. 위기에서 위기로 치닫다가, 마지막 순간에 상황을 뒤집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언제 나옵니까? ‘요행수’가 아닙니다. 평소에 하던 식으로 하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평소에 하던 식’이란 ‘본래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연스러움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을 때, 십자가의 강도 한 사람이 그 자연스러움을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One of the criminals who hung there hurled insults at him: \\\"Aren\\\'t you the Christ? Save yourself and us!\\\"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But the other criminal rebuked him. \\\"Don\\\'t you fear God,\\\" he said, \\\"since you are under the same sentence?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We are punished justly, for we are getting what our deeds deserve. But this man has done nothing wrong.\\\"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Then he said,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Jesus answered him,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눅 23:49-43 이 사람이 성령에 충만하게 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 그는 성령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알아보았습니다. [개역](고전2: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NIV](1co2:10)but God has revealed it to us by his Spirit. The Spirit searches all things, even the deep things of God. [개역](고전2:11)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NIV](1co2:11)For who among men knows the thoughts of a man except the man\\\'s spirit within him? In the same way no one knows the thoughts of God except the Spirit of God. 고전 2:10-11 2. 그는 성령으로써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Therefore I tell you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고전 12:3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한 강도가 보여준 막판 회개는 그의 결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은 막판 뒤집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사람들은 재림을 핑계 삼아 저들의 게으름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때는 사도바울의 선교 초기입니다. 교회가 여기저기 서기 시작했지만, 신학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때로부터 시대는 2천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런 현상이 그대로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어떤 핑계라도 댑니다. 거룩한 핑계라도 댑니다. 즉 “재림이라도” 핑계거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때는 이 세상의 모든 질서가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왕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이라고 ‘특별히’ 달라져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 생활하던 방식으로 가야 합니다. ‘항상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 삶은 ‘부지런’하고 ‘생산적’입니다. 지난 주중에 어떤 집사님의 도움을 받아 교회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제 곧 파킹장과 교육관 공사가 있을 예정인데, 그때 모두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 생각 때문에 교회의 화단정리를 미루어왔습니다.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3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주인 없는 집처럼’ 그렇게 잡초가 우거진 화단이었고 정원이었습니다. 잔디밭만 해도 그렇습니다. 잡초가 많습니다. 쪼그려 앉아서 민들레를 뽑다가, “이거 공사하면 소용이 없는데!” 하면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민들레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설계사무소에 들렀더니 앞으로 짧아야 2개월 후에야 첫 삽을 뜰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때가 오더라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안 정리도 그렇습니다. 곧 이사 간다고 생각하면 청소도 잘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병폐가 생깁니다. 먼지가 끼고, 그래서 탁한 공기를 마셔야 합니다. 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가구와 옷가지 때문에 마음이 맑지 않습니다. 이사를 갈 때 가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습니다. 미국을 떠나 한국이나 타 지역으로 떠나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대개는 마지막 주일까지 교회에 나왔을 뿐 아니라, 디자인이나 그 밖의 봉사를 마지막 순간까지 했습니다. 마치 앞으로도 10년은 더 교회 나올 것처럼 하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싫어합니다. 공부 좋아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핑계를 대는 데 비상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부모가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큰 병에 걸렸을 때, 그래서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어차피 죽을 텐데,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이런 사람은 ‘자살적인 충동’으로 살아갑니다. 죽음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2.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자매가 목회자를 찾아왔습니다. 자살하기 전에 죽어도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을 상의하러 온 것입니다. 목회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 와서 잔디를 깎고 일 좀 해 주세요. 섬기는 일에 손이 필요합니다.” 그 자매는 교회에서 할 일을 발견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교회로 오십시오. 그리고 물어주십시오. “목사님. 사모님. 제가 할 일이 없을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1. 교회는 할 일이 쌓여있습니다. 2.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문제 자체가 사라집니다. 3. 그리고 ‘여유’를 회복할 수가 있게 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의 때, 오히려 주님과 함께 천천히 걷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참된 모습은 이런 ‘위기’의 때 드러납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하루하루는 늘 ‘위기’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사람들입니다. 놀고먹는 사람들! 눈총을 주는 사람들은, “오뉴월 DOG 팔자야!” 하면서 비아냥거리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놀고먹는 그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세상에 눈칫밥처럼 맛없는 밥이 또 있습니까? 그러니까, ‘재림’을 빙자해서 놀고먹는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계속 조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조장된 위기가 ‘병’이라면 병에서 낫지 않으려는 이상한 충동까지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경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환자는 환자인데 ‘낫지 않으려는’ 환자입니다. 의사나 약품이 도울 수가 없습니다. “뮌하우젠”이라는 정신병입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식까지도 고통에 머물게 함으로써 동정을 유발하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림” 때문에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재림”을 핑계 삼아 놀고먹는 행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지적한 것입니다.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은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그런 법(法)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질병이 찾아와도, 그것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되지를 않습니다. 지식이 부족해도, 그것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절망’이나 ‘위기’가 왔을 때, 당황하고 허둥대는 사람은 ‘훈련미숙’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평소처럼 기도하고, 그렇게 성경 읽고, 평상심을 잃지 않으면, 위기는 지나갑니다!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사방이 막혀 있을 때, 그럴 때도 허둥대지 않고 하던 일 계속 할 수 있는 ‘여유’와 ‘자연스러움’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다면, 이제부터 그것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영으로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으로 회복된 사람은, 언제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일보에 칼럼을 쓰던 때 일입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위기에 닥쳤을 때, 그 때는 큰 일을 생각하지 말라. 작은 일에 몰두하라. 화분에 물을 주거나, 청소를 하라. 찌개를 끓이고, 식구들과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하라. 큰 일이 닥쳤을 때 오히려 작은 일을 하라. 다른 주에 산다는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기는 말기 암 환자로, 앞으로 두 달 정도 생명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힘들어 절망하다가 이 칼럼을 읽고, 소망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전화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칼럼의 제목은 “위기의 때는 작은 일을!”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인생의 마지막을 사는 사람에게 소망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 말라!”입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일하라. 그러면 식욕이 돋우어질 것이다. 일을 찾아 구하라. 그러면 삶의 의미가 생길 것이다.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성경읽기입니다. 그것이 시시해 보일 때, 그때가 정말 위기입니다. 큰일이 난 것입니다. 정말 위기여서 큰 일 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기도가 생각조차 나지 않으니까 위기입니다.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정말 큰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봉사입니다. 성전에 와서 청소하고, 민들레 뽑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문제가 해결됩니다. 자동차 타고 와서, 주중에라도 언제나 풀 뽑고 가십시오. 가까운 꽃집에서 꽃 한 포기 사다가 정원 한 구석에 심어놓고 가십시오. 저도 모르게 무슨 희망이 꿈틀거리고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은 마귀가 가져다 준 것입니다. 마귀는 속삭입니다. 큰 거 한 방이어야 해. 그래야 뒤집기를 할 수 있어! 이게 도박의 심리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잃은 것 다 갚고, 막판 뒤집기를 하겠다는 계획. 그런 생각으로 사람들은 골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진정한 뒤집기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는 “평소에” 훈련을 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9회 말 투 아웃이 되었어도 평상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잘 하던 사람이 위기 때 강합니다. 평소에 항상성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위기의 때도 극복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항상성”과 함께 갑니다. 기억하십니까? 항상 기뻐하라 Be joyful always; 쉬지 말고 기도하라 pray continually;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God\\\'s will for you in Christ Jesus. 성령을 소멸치 말며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살전 5:16-19 같은 막판 뒤집기인데, 하나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항상성’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를 의지하는 ‘도박’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다릅니까? 재림의 핑계를 대는 사람은 어떤 핑계도 댈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다른 핑계를 대는 데 익숙한 사람은 재림 같은 거룩한 말씀도 핑계거리도 삼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태도가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냐, 마귀의 속삭임이냐? 굉장히 얇은 차이입니다.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나이가 많습니까?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지금 9회 말 투아웃 상황입니까? “이미 버린 몸”이라는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심정입니까? 너는 이미 버린 몸이다! 그 말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때다! 나에게 구하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고후 6:2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할 일을 하는 자세입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사과는 몇 년이 지나야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단 하루만 살아도 악몽(惡夢)입니다. 소망으로 살면 단 하루에도 천국의 은혜입니다. 지구의 종말은 예수님의 재림보다 먼저 올 수 없습니다. 성경말씀은 주님께서 택한 성도들을 데리고 올라가신 다음에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지구의 종말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만 우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십시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이제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희들과 함께하옵소서. 위기의 때 오히려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게 하시옵소서. 주님과 늘 함께 동행 하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천국 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때가 아직 낮이매 일하자/ 요9:1-12/ 오관석 목사
때가 아직 낮이매 일하자 요9:1-12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9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역사적으로 98년을 맞는 새해 첫주일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9장의 말씀은 예수님이 유다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예루살렘에 상경하시기 위해서 북문이 있는 고개턱에 올라와서 제자들과 더불어서 나무밑에서 땀을 씻고 조금 앉아서 쉴려고 할 때에 그 어떤 제자 하나가 \"선생님, 이 옆에 앉아있는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맹인으로 나온 것이 그 부모의 죄입니까? 본인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맹인은 귀가 번쩍 띠어서 \'아니 내가 맹인으로 난 것이 부모의 죄라고? 내 죄라고? 내가 뱃속에서 무슨 죄를 지어서 내가 맹인으로 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였습니다. 선생님이 입을 열어 하시는 말씀이 \"부모의 죄도 본인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이 저를 향하여 하시려고 하는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맹인은 속으로 \'아니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려고 나에게 맹인으로 나게해서 일을 하신단 말인가?\' 그러면서 불만스럽게 선생님 쪽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으니까, 예수님이 흙을 손바닥에 놓고 침에다가 흙을 개더니 그 맹인의 눈에다 흙을 발라주고는 그에게 \"너는 실로암 연못을 아느냐?\" \"알지요, 이 고개 밑으로 죽 가다가 비탈길로 조금만 내려가면 실로암 연못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자주 거리를 가는걸요.\" \"그래, 거기가서 네 눈을 씻어라, 그러면 네 눈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을 듣더니 벌떡 일어나서는 지팡이를 짚고 허겁지겁 이렇게 실로암 연못을 향하여 내려갑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서 내려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맹인은 실로암 연못에 도착해서 물을 떠서 눈을 씻으며 \"뜰 줄로 믿습니다.\"하고 나니 눈이 떠져서 할렐루야를 불러가며 맹인이 춤추는 광경에 제자들이 다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내용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가 됩니다. 우리는 금년 97년의 I.M.F.라는 금융구제시대를 선언하고 이제 치욕적인 도움을 받는 구제받는 나라로 전락을 했습니다. 이것은 구제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빚을 갚아야할 빚덩이 위에 앉아서 아이나 어른이나 할것없이 적어도 300만원에서 350만원정도가 우리 국민들이 다 외채를 짊어지고 있는 빚쟁이들입니다. 그가 부자로 살던 가난하게 살던 제 집도 없이 거지로 구걸하러 다니던 80평, 90평, 120평이나 되는 맨션아파트에 살아도 빚쟁이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98년을 맞아서는 I.M.F 시대가 피부로 와 닫습니다. 아마 금년 3.4월에 가면 금융계 회사들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많이 생기고, 이렇게 되다보면 이제까지는 귀로만 듣던 것이 이제 우리의 피부로 와 닿아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사람들은 \'이런 불행을 누가 만들었느냐? 대통령이냐, 경제인들이냐, 재경원이냐, 기업인들이냐, 백성들이냐, 노무자들이냐\' 그래서 사람마다 이 불행을 누가 만든 것이냐고 해서 입에서 불평들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지금 맹인을 바라보고 하는 태도와 같습니다. 부모의 죄값이냐? 자신의 죄값이냐? 귀신이 같다준 것이냐? 자신의 부주의로 왔느냐?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행하게 되었느냐?고 질문합니다. 아마 우리나라가 금년 3, 4월에 가면 피부로 와 닫는 곤욕스러운 일 때문에 \"이 불행을 누가 만들었느냐?\"고 하면서 사람마다 그 사람을 죽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본인의 죄도 아니고, 마귀가 던져 준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을 위해서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민족이 이 모양으로 그냥 GNP 2만불, 3만불이 되면 꼴 사나와 질까봐, 이 민족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때에 \"너희들은 할 일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흙을 손바닥위에 놓고 거기다 침을 뱉아 개서 맹인의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일의 방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눈을 떠서 둥실둥실 춤을 추는 새세상을 만들었습니다. 할렐루야! 분명히 우리는 여기서 I.M.F. 구제금융 경제시대를 맞이해서 우리들이 어떤 방법으로 일해야 될 것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첫째는 이것은 누가 만든 것이냐?는 추궁을 해봐야 유익이 없습니다. 이런 치욕적인 경제위기를 만들어 놓은 장본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자녀교육을 바로 세워서 흥청망청 자녀들에게 돈을 주어서 그냥 아무렇게나 키워 놓으면 안되고 이 때에 돈이 무엇인가를, 세상이 무엇인가를, 사는게 무엇인가를, 바로 교육을 시켜야하고, 우리의 삶속에서 근면하고 성실하고 허황된 모습을 다 허물어서 정말로 사람다운 사람을 나 자신부터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교육장에서 이 민족이 새로운 교육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가족을 아끼고, 돈의 소중함을 알고, 하나님앞에 바로서서 돈의 종이 되지말고, 돈의 주인이 되어서, 바로 돈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이 민족이 탈바꿈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래서 이 민족이 새로운 눈을 뜨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두번째는 일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에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는 방법은 침을 뱉는 것입니다. 진액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얼렁뚱땅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전력을 기울여서 돈을 버는 것만이 내돈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라 돈을 얼렁뚱땅해서 돈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 감옥살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합니다. 땀흘리지 않고 번 돈은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침을 뱉아야 합니다. 그것은 뭐냐? 진액을 쏟으라는 말입니다. 또한 자원은 멀리가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얼마든지 많은 자원들이 있습니다. 실로암 연못은 물이 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나온 것이 모여진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은 한 마디로 연합을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연합을 하고, 부모와 자식이 연합을 하고, 사장과 사원이 연합을 하고, 대통령과 백성이 연합을 하고, 목사와 교인이 연합을 하는 한 덩어리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지금은 낮이다. 이제 곧 밤이온다. 밤이 오면 일할 수 없다. 낮에 일하자.\"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건강한 몸이 평생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병들기 전에 일해야 합니다. 눈밝은 것이 항상 밝은 것이 아닙니다. 눈 밝을 때 성경 봐야 합니다. 건강할 때 일해야 합니다. 돈 있을 때 값있게 써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낮에 일해야 합니다. 밤이 오면 일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누구의 죄냐?를 따질 때가 아니다. 현하게 일의 방법을 구해라, 일은 진액을 쏟아야 된다. 자원을 멀리에서 찾지말고 가까운데서 자원을 찾아야 된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과 연합을 해야된다. 밤이 오기전에 낮에 일하라. 밤이 오면 일할 수 없다. 할렐루야! 오늘 분명히 98년도를 맞이해서 이 예수님의 생활철학을 내것으로 삼고 I.M.F구제금융 시대에 슬기롭게 대처해서 여러분 모두 삶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미쳐야 일이 된다/ 행26:24-29
미쳐야 일이 된다 행26:24-29 어느 한 정신 병원에서 어느 목사님이 방문을 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산만하고 분위기가 좀 안 좋았겠죠, 그래도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비교적 나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도중에 한 사람이 키득거리며 웃습니다. 옆 사람이 목사님께 말합니다. “목사님 이 사람이 미쳐서 그래요, 신경 쓰시지 마시고 그냥 설교 하세요!”목사님께서 생각해 보니 그 사람도 미친 사람, 미친 사람이 미친 사람보고 미쳤다고 생각해 보니 우습잖아요, 그래서 목사님도 같이 웃었답니다. 이들 지켜본 다른 사람이 “어! 목사님도 미쳤네!”그러더랍니다. 그 때 그 목사님도 자기가 미친 것을 처음 알았답니다. 세계적인 음료수가 있습니다. 코카콜라 입니다. 그 사장이 그랬다지요. “내 몸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만든 제품에 열정을 쏟고 집중을 하다보니까 그 회사가 잘 되어서 코카콜라가 세계적인 음료수가 된 것입니다. 엊그제 행정고시 최종합격자 발표가 있었습니다. 고시하면 얼마나 어려운 시험입니까 말 그대로 고시거든요 정말 고시에 합격을 하려면 공부에 미쳐야 합니다. 정말 세상일 다 끊어버리고 거기에 미칠 정도로 공부를 해야 그 고시에 합격을 하고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분야는 안 그렇습니까? 운동을 하는 운동선수도 그저 노는 것처럼 해서는 우수한 스타가 될 수 없어요. 남들 잠자는 시간에 나가서 달밤에 체조하듯이 열심히 뛰어야 해요 아 저사람 미쳤네, 그 정도 소리 들어야 그 분야에서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일이 그러합니다. ‘그냥 밥 먹고 살지’ 그렇지요 밥 먹고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분야에서 성공적이고 정말 이름 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려면 미쳐야합니다. 미친다고 하는 얘기가 좀 듣기는 거북스럽습니다마는 열정을 쏟아 붓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 정신 나간사람 같아 그거 하나 밖에 몰라’ 그 정도 들어야 미친 사람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누구 입니까! 주먹 쓰는 사람이 무서울까요? 권력을 잡은 사람이 무서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은 미친 사람이예요. 지금은 가진 것 없지만 보잘 것 없지만, 자기의 일에 집중하고 불타오르는 열정의 사람 뭔가 일을 낼 사람 무서운 사람이예요. 여러분! 소유 자랑하시지 마시고 힘자랑 하시지 마시고 우리에게 열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열정. 사실 성경에 우리에게 소개 되는 수많은 사람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영광 돌렸던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미친 사람들이예요. 평범한 사람의 수준에서는 그렇게 쓰임 바랄수 없어요. 그 수많은 열정의 사람 그 사람들 중 열정이 지나쳐서 미쳤다 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을 뽑으라면 사도바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점점 유대 나라와 아시아를 퍼져 세계 각국으로 복음이 흩어져 갈 때, 사도 바울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류를 합니다. 그때는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났어요. 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제 정신 가지고는 이러한 필사각오 ‘예수를 위하여 내 사명 감당하다가 죽겠노라’ 바울은 오늘 말씀처럼 미친 사람취급을 받았습니다. 유대 베스도 총독이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사도 바울은 익히 학문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너무 바울이 똑똑하다 보니까 ‘그 학문 때문에 네가 미쳤구나.’ 유대총독 베스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겠지요.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다가 가두고 때리고 죽이려 하다가 예수 만났다.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체험이 있었다. 그 후로부터 내가 새사람 되었다.” 간증을 했습니다. 베스도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얘기에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사람이 변해도 어떻게 저렇게 변화가 될 수 있을까. 조금 변하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완전히 변했어요.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무 공부를 많이 하다 보니까 미친것이 아닌가.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면 변화 됩니다. 예수 만난 사람은 새 사람 됩니다. 변화가 다릅니다. 행동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불신자 땅의 것, 썩을 것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하고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볼 때에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창세기에 노아를 보십시오. 멀쩡한 산꼭대기에 엄청난 배를 만듭니다. 물로 심판 받을 것이니 준비하라는 거예요. 온 동네 사람들이 노아는 미쳤다, 망령들었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조롱합니다. 그들뿐 입니까. 예수님도 그런 소릴 들으셨어요. 요한복음 10장 20절 말씀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서 ‘귀신들려 미쳤구나.’ 이처럼 세상의 눈으로 예수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이해 못합니다. 조롱합니다,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아마 지금 이 자리만 하더라고 전혀 신앙이 없고, 믿음 없는 사람이 와서 앉아 있으면, 도대체 저 사람들이 뭐하는 건가 뭔 아멘 아멘을 하고 있으며, 찬송은 무슨 찬송이며, 뭔 박수는 박수며, 저 사람들 앉아서 바보짓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해 못 합니다, 받은 사람만 아는 거예요 마태복음 25장 10절 말씀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여’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가 불신자들로 인하여서 신앙에 이러한 의미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로 인하여 소리 듣지 않습니까. ‘너 왜 바보 같으냐!’ 핍박을 받습니다. 박해를 합니다. 여러분 그때에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말씀했습니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어떨 때 보면 정말 더럽게 미친 경우가 있습니다. 어제 밤늦게 SBS방송에 \'JMS\' 보셨습니까? 저는 그 방송을 한다기에 봐야 되겠다, 하고 시간 맞춰서 봤습니다. 전에도 몇 번 나왔지만 또 이번엔 뭔 얘긴가. 여전히 그 얘깁디다. 정명석이란 이 양반이 자기 교를 만들어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설교에 아멘을 하고 그 사람을 추종하면서 메시아라고 합니다. 미친 거예요, 제 정신이 아니예요, 자기를 따르는 여자들을 성 농락합니다. 어제 얘기는 그겁니다. 이제는 나가가지고 지금 수배를 당하고 기소자인데, 들어오지 않고 여권도 빼앗겨 가지고 홍콩에 머물고 있는데 대만에서, 말레이시아에서, 외국에 다니면서 그 짓을 한다고 합니다. 똑같이 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예요. 그놈도 미쳤지만은 그놈을 따르는 사람들도 미친거예요.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엊그제는 그 방송을 하면 안 된다고 SBS 방송국 주변에 만 여명의 신도들이 모여 가지고 피켓 들고 시위를 하고, 그 사람들도 다 제 정신이 아니예요. 여러분 사단의 술수가 그렇게 무섭습니다,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하면 그것이 옳다고 여겨지는 거예요 무섭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더러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미친 것이 아니고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여러분 지금 누가 미쳤습니까? 세상이 미쳤습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13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바울은 학문에 미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종교에 미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버릴 만큼 예수님에게 붙잡힌바 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완전히 푹 빠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남 이후에 예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노예가 되었어요. 사명에 붙잡힌바 되어서 죽음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복음을 전하고 생명 살리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미쳐도 좀 이렇게 미쳐야 하지 않겠냔 말이지요. 그 누구도 사도 바울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은파가족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미쳤습니까? 죄송하지마는 미쳤다고 하니까, 표현이 그렇습니다마는 내 마음이 지금 어디에 쏠려 있냔 말 이예요. 혹시 내 마음을 세상 것에 빼앗기지 않고 있냐 말이지요. 내 시간을 어디에다 많이 씁니까. 내 몸이 어디로 많이 향합니까. 내 물질을 어디에다 쏟아 붓고 있습니까. 나를 지배하고 나를 다스리는 존재가 무엇이냔 말이예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고 물질 좋아 돈을 사랑하면 돈에 미친것이고, 이 세상에 정말 돈에 미친 사람 많아요. 몇 푼 돈 때문에 사람 죽이는 것을 예사로 알아요. 며칠 전에도 아들이 아버지를 죽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어요, 미치면 그렇게 됩니다. 돈에 미쳤어요, 아버지가 든 생명 보험 타내려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에 미칩니다. 그 자리 한번 꼭 해 봐야 그 병이 나아요. 어떤 사람은 도박에 미칩니다. 노름에 미쳐 가지고 땅 팔고 집 팔고 전세금 빼가지고 사글세로 가고 가정 파탄 나고 그건 누구도 못 말려요. 음란에 빠지고, 마약에 빠지고 미쳐 버리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이 세상에 안 미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십대는 사랑에 미치고, 이십대는 인기와 야망에 미치고, 삼십대는 사업과 일에 미치고, 사십대는 소유와 정욕에 미치고, 오십대는 권세에 미치고 육십대는 명예에 미친다. 여러분 세상에 그 좋은 것이 많이 있어도 내 생명 내 목숨을 걸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돈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어요, 돈 좋잖아요, 자 누가 100억을 준다 합니다. 조건은 ‘네 생명 나한테 줄 수 있느냐.’ 목숨과 이 세상과 바꿀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 것이 좋아도. 그러니 우리의 생명 하나 밖에 없는 이 생명 세상 그 어떤 것이 나를 유혹한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처럼 영원한 생명 영생 천국의 소망에 여러분의 인생을 거시기를 바랍니다. 아깝지 않습니다. 이것은 투자해도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오늘 27절입니다.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이제 벳도 총독을 넘어서 아그립바왕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야,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는구나.” 이 아그립바왕은 바울의 도전에 화를 냅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은 듣는 사람도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내가 붙잡혀 있지만은 내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된 사람, 예수 만나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왕도 무섭지 않습니다. 왕의 권세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 왕 앞에 담대하게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치면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뭐 어떤 목사님은 낚시가 그렇게 좋아 이제 미칠 정도가 된 모양이예요. 그래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저녁때가 다 되도록 낚시를 하다가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데, 이게 왠 종소린가 했더니, 수요예배를 알리는 자기 교회 종소리였다 하지 않습니까. 그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낚시대를 확 부러뜨려야 해요. ‘이거 내가 미쳤구나’ 세상일에 미쳐서 하나님의 일을. 낚시대 부러뜨리지 아니하면 자기도 죽고 교회도 죽고, 오늘 우리가 어디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세상일에 취미에 미쳐가지고 예배를 멀리하고 사명을 잃어버리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엊그제 목욕탕 사우나탕에 들어갔더니, 초등학생 아이가 하나 있어요, 몸이 통통하니 저랑 체격이 비슷해요. “야 너랑 나랑 좀 비슷한 거 같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씨익 웃어요. 그래 제가 물었습니다. “몇 학년이냐?” 5학년이래요, “예수 믿니? 교회 다니니?” 안 다닌데요, “어디사니?”, “4단지 살아요.”, “자 11단지 앞에 가면 은파교회 라고 있는데 은파교회 아니?” 모른답니다. “그러면 과천교회 아니” 안대요. “새서울교회 아니?” 모른대요, “중신교회 아니?” 모른대요, “약수교회 아니?” 알지요, 집앞에 있으니까요. 저는 그 아이의 얘기를 듣고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 어린아이가 우리교회의 존재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전도를 게을리 했구나. 예수복음을 전하는 일에 우리가 너무나 나태해 있구나. 지금 내가 목사가 어디에 마음에 빼앗기고 지금 무슨 일 하고 있냔 말이예요. ‘주여 식어진 전도의 열정이 다시금 불타오르게 하옵소서.’ 사도행전 24장 5절에 보면 더둘로 라고 하는 사람이 사도 바울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니까 이 사람은 염병이라.” 우리 어르신들은 염병이라고 하는 것을 아시지요? 전염병, 콜레라, 페스트 무서운 전염병 아닙니까. 사도 바울더러 염병이라고 했습니다.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세상에 별 소리를 다 듣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이. 염병이라,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그래도 그 말을 듣고도 이 사도바울의 영향력이 대단하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이 전염병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가이사를 지나서 안디옥, 안디옥을 지나서 마게도냐, 아시아, 유럽과 오늘날 미국을 거쳐서 한국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예수의 영향력 있는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썩어져 가는 세상 것에 목숨 걸지 마시고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일에 열정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구원 전도에 미친 듯이 뛰어 들어 열정을 쏟아 내는 분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선교목사님이 쓰신 책 중 가운데 ‘예수에 미친 사람’ 그 제목의 책이 있었고, 그 메시지가 있었어요. 그 내용이 보니까 어떤 사람이 모자를 쓰고 지나가는데 그 앞에다가 ‘나는 미쳤다.’하고 지나가요. ‘아 세상에 별 미친놈 다 있네.’ 하도 이상해가지고 그 지나가는 걸 뒤돌아보니까 모자 뒤에다가는 ‘너는 뭐에 미쳤니?’, 이렇게 쓰여 있더래요, 넌 누구에게 미쳤냐. 여러분! 세상 탓 하시지 마시고 세상의 불신자들, 영생 모르고 천국 모르는 사람들은 썩어질 것에 미쳐있지 않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늘의 신령한 영생과 천국을 바라보시면서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되시고, 복음과 전도와 선교하는 일에 열정을 품으시기를 바라고, 정말 세상으로부터 조롱받고 핍박받는 것 두려워하시지 마시고, 예수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영광 돌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일하라/ 요14:12-17/ 2012-03-13
믿음으로 일하라 요14:12-17 서론:지난주 본문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을 근심하지 말라고 격려하시면서 도마와 빌립의 질문을 통해서 주님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 하신것과 또 세상에 남겨 두시고 홀로 승천하신 것은 그들에게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일이었다. 제자들에게 하라고 하셨던 그 일은 제자들이 떠난 오늘날 우리가 계속 해야할 일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세가지 요소를 말씀해 주고 있다. Ⅰ.믿음으로 주의 일을 하라. 1.오늘 본문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과 주의 일을 하는 것과 어느것이 우선돼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다. 2.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봉사하다 보면 믿음도 생긴다고 말하기도 한다. 3.물론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부작용의 위험성이 있다. 4.믿음이 없는 열심은 상처 받기 쉽고 사단에게 이용당할 위험이 있다. 5.예수님은 나의 일을 하면 믿어질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것이라했다. 6.더 놀라운 것은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보다 더 큰것\'은 앞에 \'나의 하는 일\'이다. 7.그렇다면 예수님의 하시던 일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이라고 한다. 8.그렇다면 한계에 부딪힌다. 예수님의 행하신 능력 중에 가장 큰 능력은 바다를 걸어가신 것이나 죽은자를 살리신 것인데 그보다 더 큰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9.더구나 믿는자는 예수님의 하시던 일을 한다고 했는데 믿으면서도 능력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10.그렇게 볼 때 여기서 말하는 그 일은 병자를 치유하거나 바다를 잔잔케 하는 능력이 아니다. 11.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말씀하신 그 일을 복음 전하는 일로 해석한다. 가장 정확한 해석이다. 12.왜냐하면 전도하는 일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고 있고 또 할 수 있기 때문이다.(강경환 집사) 13.또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 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베드로, 바울, 조용기) 14.물론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능력을 행하셨으나 그 모든 것의 핵심은 복음이다. 15.복음을 믿게하기 위해 치유나 능력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16.오늘날도 우리가 봉사하고 받은 은사를 활용하는 근본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17.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은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Ⅱ.하나님 영광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이름으로 구하라. 1.주님의 일을 하는 두 번째 방법은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 2.이 말씀은 우리가 대부분 잘 알고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있다. 3.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말씀은 무엇이든지에 대한 해석이다. 4.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구해서 다 얻으셨는가? 5.무엇이든지는 모든 것이라는 뜻인데 모든 것에는 두가지의미가 있다. 6.하나는 제한이 없는 모든 것이라는 뜻이 있고 또하나는 어떤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모든 것이다. 7.ex:식당에서 주문할 때 뭐든지 시키세요는 그 식당에서 취급하는 메뉴 중에서라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8.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든지는 바로 제한된 범위에서의 무엇이든지를 말한다. 9.그 제한된 범위를 알려면 13절 끝부부에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를 기억해야 한다. 10.재언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무엇이든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하는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다는 말씀이다. 11.하나님 영광을 위해 이루어 달라고 하는데도 응답이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잡것이 섞여서 그렇다. 12.그래서 야고보사도는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함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1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Ⅲ.성령을 받으라. 1.주님의 일을 하는 세 번째 방법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2.주님은 먼저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다. 3.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계명은 무엇인가?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4.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왜 주님은 성령받으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나? 5.성령받으면 사랑할 능력도 생길텐데..... 그러나 미움은 성령의 통로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6.주님은 성령을 가리켜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주님 자신도 보혜사라는 말씀이 된다. 7.보혜사는 옆에서 돕는자라는 뜻이다. 지금까지는 주님이 제자들 옆에서 도와 주셨다. 8.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나라로 가셔야 했기에 제자들을 도와주실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말씀이다. 9.그분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세상은 볼수도 알수도 받을수도 없지만 믿는 사람은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10.그분은 우리와 함께 있을 뿐아니라, 우리속에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1.성령님은 우리 옆에서 함께 사시면서 도와주시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마음을 열어 영접하면 우리안에, 마음 중심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12.우리가 자기의 힘으로도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13.그러나 자기의 힘으로 하는 일은 주의 일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의 일이 아니라 자기의 종교생활에 불과. 14.그러기에 그렇게 하는일은 열심히 해도 자기의 만족과 기쁨은 될수 있지만 주님께 영광은 되지 않는다. 15.성령받고 그 기쁨, 감격, 능력 안에서 일할 때 그것이 주의 일이 되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16.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7.자신의 일도 하기 힘겨운 것이 인생의 삶인데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어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결론: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일을 하는 원리와 방법을 연구하고 숙지하고 해야 성공 할 수 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말씀해 주신 것이다. 믿음으로 일하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 성령받아 일하라.
벧세메스로 가는 소/ 이렇게 일하자/ 삼상6:6-15
벧세메스로 가는 소(이렇게 일하자) 삼상6:6-15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어떻게 일할 것인가? 그 모델은 본문에 나오는 벧세메스로 가느 소 처럼 일하라는 것입니다. 본몬 =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았던 법궤를 다시 돌려보내는 내용입니 다. 방법 =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암소 두 마리로 하여금 끌고가게 함. 목적지는 벧세메스 벧세메스는 예루살렘 서남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곳. 두 암소가 법궤를 끌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 암소 두 마리를 잡아서 번제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소 =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리는데 가장 중요한 동물입니다. * 본문의 역사적인 사실 = 교회 일꾼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것인가? 의 측면에서 깊은 영적 진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전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고전9:10)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 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곡식을 밟아 떠는 소 = 주의 일꾼을 의미함. 교회의 일꾼, 사역자를 의미함. 본문의 벧세메스로 가는 소를 통해서 교회의 일군의 3가지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수레를 메야 한다. (삼상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 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1) 관 찰 소 = 수레를 메었음. 벧세메스로 법궤를 운반하기 위하여 수레를 새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젖나는 소 두 마리를 수레에 메었다. 이 두 마리 소 = 젖나는 소 두 마리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 새끼 송아지를 떼어 집으로 보냄. 2) 해 석 이 내용의 복음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새 수레 = 참교회를 상징하고 주닙의 몸된 아름다운 교회를 상징한다. 수레를 소가 메었다는 것 =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짊어진 것을 의미함. 교회의 직분자들이 교회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일하라는 의미. 이 수레를 법궤에 실었음. 법궤 =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 새 수레 =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상징함. 3) 적 용 교회 = 법궤를 메는 곳. 소 같은 일꾼이 많이 있는 곳. 장로,집사,권사 교사, 찬양대.등 소 = 새 수레를 끌 둣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소 같은 일꾼들이 끌어옴. * 본문의 포인트는? 가장 중요한 것 = 소가 멍에를 멤. 수레는 손으로 끌거나 말로 끄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목에 멍 에를 메고 끌고 감. 멍에 = 소의 멍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기로 소의 행동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함. 소를 억누르고 고통을 줌. 자기의 의지대로 가지 못하도록 옆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함. 교회의 일꾼들 = 교회 모든 일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교회의 멍에는 고통 스러움. 결코 낭만이 아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교회 직분자들이 짊어져야 한다. 초기의 신앙 = 교회 나오면 축복을 받고 잘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신앙 생활함. 신앙이 성장하면 = 내가 교회에 어떻게 일할 것인가? 어떻게 섬길 것인가? 내가 소의 멍에를 어떻게 멜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신앙 생활하라. 행6:1-7 = 초대 교회가 일곱 집사를 세움. 사도들이 교회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 때문에 기도하는 일, 말씀 준비하는 일을 할수 없게 됨 에 따라 집사를 세워서 대신 일하게 하심. 목적 = 교회의 여러 어려운 문제들의 멍에를 메게함.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기 위해서 입니다. 결과 = 초대 교회가 점점 성장하게 됨. 사도 바울은 (빌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오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바울이 성공적으로 복음 사역을 잘 감당할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 그 멍에를 함께 진 사람들이 있었다 ( 루디아,브리스길라,아굴라,실라 등) 예수님은 마 11:21-31:\"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고 하시면서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멍에를 지셨다. 예수님의 멍에는 \"할수만 있다면 이 짐을 내게서 멀리 해달라\"고 하나 님께 부탁도 하셨고 운명하실 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는 말할수 없는 멍 에의 아품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 교회의 멍에이다. 우리가 져야할 것 = 주님의 멍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법궤를 지고 벧세메스로 가는 소의 눈물 - 새끼를 집에 떼어 놓은 아품이 있었다. 멩에를 메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주님은 \"나의 멍에를 같이 메라\"고 지금 우리에게 요구 하고 계신다. 소의 일생 = 일평생 일만 한다. 농부가 시키는데로 일만 한다. 소가 힘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할때는 주인을 위해 고기,가죽, 등 모든 것을 주인을 위해서 드린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 일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 같은 일꾼으로 살때의 결과 = 영생과 천국의 엄청난 축복이 있는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우 리가 영생을 얻고,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도록 하나님은 예비해 주셨다. * 성도들의 자세 = 하나님께 무엇을 받을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어떻게 일 할것인 가? 어떻게 충성할 것인가? 직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교회의 아품을 교회의 멍에를 어떻게 질 것인가?을 먼저 생각할수 있는 일꾼을 하나님은 요구하신다. 본문의 벧세메스로 가는 소를 생각해야 합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이 두 마리의 소가 새 수레의 멍에를 메는 것 처럼 귀한 고난의 멍에를 메고 힘 차게 일하는 일꾼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 소가 갈 때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함 (삼상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 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1) 관 찰 벧세메스로 가는 소의 두 번째 특징 =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함. 불레셋 사람들은 법궤가 있을 때 큰 재앙을 받아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려보내고 있는 모습. *구약의 법궤 =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바 법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 원의 복음이 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재앙이 내림. 불레셋 사람들 = 소 두 마리를 묶어서 벧세메스로 보낼 때 만일 새끼에게 가지 아니하고 독바로 가면 자기에게 내린 재앙이 하나님의 재앙이요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재앙이 아니라고 색각을 하고 보냄. * 이 소는 = 새끼 쪽으로 가지 아니함. 대로로 감.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함. 결국 블레셋에 내린 재앙이 하나님이 내린 재앙임을 보여주는 것이였다. 2) 해 석 두 소의 모습 = 교회 일꾼들의 자세를 보여준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똑바로 갔다 - 교회 일꾼들의 아름다운 일편단심의 모습. 새끼 송아지를 집에 두었다는 것의 의미 = 교회의 일꾼들은 자녀 문제나, 가정의 문제에 얽메여 하나님 일에 등한시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소가 만일 새끼 송아지를 데리고 가면 이 수레는 끌수가 없다. 이 수레는 지금 법궤가 있기에 잘못 다루면 큰일난다. 교회의 일꾼도 자녀나,생업도 귀하지만 그것에 메이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눅18: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 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눅18: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육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되고 단지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고, 주의 일 하는데 있어서 그 일에 메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버릴 때 = 이 땅에서 여러배를 받는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교회의 일을 감당할 때 = 자녀나,육의 문제로 메이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소가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함은 큰 길로만 갔다는 것이고 옳은 길, 바른 길로 간 것 처럼, 길 이 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가라는 말씀이다. 3) 적 용 교회의 일꾼들 = 세상일에 메이거나 치우치면 안된다. 삶의 우선 순위가 무엇부터인가?를 바로 알라는 것입니다. 교회 일군의 본업은 주의 일이고, 자기 일은 부업이 되어야 한다. 일하는 소 = 코 뚜레를 걸고 잡아 당김. 목에 멍에를 메고 잡아 당김. 왜? 교회의 직분을 감당함 에 있어서 절대 옆길로 뒤돌아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 광야에서 똑바로 가지 아니하고 뒤(애굽)를 돌아보다가 40일 걸려서 갈 길을 40년이 걸렸습니다. 두 마리 암소로 끌게 하는 의미 = 서로 힘든 일을 힘을 합쳐서 일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 =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교회를 이끌어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꾼들이 이 땅에서 잘되고 성공하길 원하신다. 복음이 들어간 곳에서는 반드시 물질을 주시고 그 민족들이 성장하는 것을 교회사를 통하여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벧세메스로 가는 소 처럼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전진하는 사람을 쓰신다. 하나님이 직분을 주고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그 직분을 감당하는데만 최선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지금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도록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벧세메스의 두 마리 암소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번제물이 된 암소 (삼상6:13-14)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 을 기뻐 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 관 찰 드디어 수레를 멘 두 암소 = 목적지인 벧세메스까지 와서 번제물이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수레를 보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기뻐함. 법궤는 내려 돌 위에 두고 수레를 메고 온 두 암소를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림. 2) 해 석 목적지에 도착함은 두 암소의 사명 완수를 보여 줌. 하나님의 일꾼들이 귀한 직분을 맡아 충성 스럽게 감당하는 것을 의미함. 법궤를 다시 찾음은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첫 사랑을 찾는 것을 의미함.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을 안으로 모셔 드리는 아름다운 모습. 법궤를 보고 기뻐함은 벧세메스로 오는 두 마리의 소와 같은 충성스런 청지기를 보고 온 교회 성도들이 기뻐하는 것과 같음. 초대 교회가 7집사를 뽑을 때 = 그들은 칭찬을 받는 일곱 사람이였다 (행6:3) 온 교회 성도들이 기뻐함. 두 암소를 번제물오 드림 = 하나님의 직분자들이 최후에는 자기의 생명까지 하나님께 드려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3) 적 용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 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의 달려갈길 = 법궤를 메고 가는 벧세메스의 길입니다. 달려갔다 =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계속 전진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함 = 로마에서 순교함. 벧세메스에 도착한 두 마리의 소가 생명을 바쳐 희생제물이 되었듯이 바울은 벧세메스의 두 마리 소 처럼 주님을 위해 제물이 된 것입니다. 바울의 생애는 벧세메스의 두 마리 소의 생애였다고 볼수 있다. **** 결 론 ****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남은 기쁨이 있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맡겨주신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내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 뿐입니다. 본문의 시기는 밀을 베는 추수의 시기입니다. 성경에서 추수의 시기는 종말을 상징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마치 밀을 베는 시대처럼 역사의 추수의 시기이며, 주님 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위지는 시기입니다. 두 마리 소의 목적지는 벧세메스인데 \"벧세메스\"의 뜻은 \"태양의 집\" 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천국을 상징합니다. (계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그 성= 천국을 의미함.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된다고 함. 두 암소 = 천국을 향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갔음. 힘들고 고생이 되어도 열심히 갔음. 최후에 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두 마리 = 온 교회 일꾼들이 하나로 힘을 합쳐서 천국 가는 그 순간까지 일하는것입니다. 금년 한해도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일할수 있도록 직분을 맡겨 주심에 감사하면서 마지막 주일까지 최선을 다하여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주님께 칭찬듣는 성도들이 되시길 다시오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