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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자의 위기관리/ 마15:21-28/ 여전도회헌신예배설교/ 2008-01-21
가나안 여자의 위기관리 마15:21-28 <서론> 복음서 중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사람은 가버나움의 백부장과(마 8:10) 가나안 여인과 (마15:28), 마지막 주간에 예수님께 비싼 향유를 부은 여자 입니다.(마26:13) 두 사람은 이방인이고 한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오 수로보니게 족속에 속한 이 여자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땅, 두로,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둔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딸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 님은 이 여자를 냉대하실 뿐만 아니라 개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 여자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까지는 어려운 난관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주님을 등지고 돌아 설만 한 위기에 이 여자는 바로 처신했습니다. 이 여자는 위기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오 늘은 \\\"가나안 여자의 위기관리\\\"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면에 가나안 여자는 위기관리를 잘 했습니까? 첫째, 예수님의 무응답에 대한 위기관리입니다. (마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두로 시돈은 다른 말로는 레바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들어가신 확 실한 목적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기 위해 서 가신 것과 같습니다. 1. 가나안 여자의 외침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가나안 이란 원래부터 저주받은 민족였습니다. a. 노아의 아들 중 둘째의 이름이 가나안인데 그와 그 후손이 저주받은 민 족입니다. (창 9: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 하노라 b.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한 땅에 들어갈 때 그 땅에 사는 7족을 멸하라고 했다 그 중에 한 족속이 가나안 족속이다. 신 20: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 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이런 민족도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그 지방에 예수님이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한 가나안 여자의 부르짖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침묵 (마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제자들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태도가 이상하게 보일 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 여자에게 대답을 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a. 그 여자의 이내를 시험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얼마만큼 잘 견딜는지를 시험했습니다. 그 여자는 여러 번 소리쳤 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응답까지 부르짖는 것입니다. (막 10: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 가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 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막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 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막 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b. 그 여자에게 참 믿음이 있는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한 순간은 다 믿음이 있는 척 보일 수 있지만 긴 시간 변함없이 주는 섬기는 믿음은 드뭅니다. 참 믿음은 오래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3 여러분에게 기도 응답이 전연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의 외침을 못들은 채하면서 지나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인들 가운데는 인사를 했는데 모들은 척, 못 본척하고 지나친다 고 분노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성은 말을 마치기 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 이 응답하지 않았을까? 사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이 없어도 계속 기도할 것입니까? 언제까지 견딜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일찍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기도 응답을 못 받은 신자들 중에 신앙의 위기를 맞는 이들이 이외에도 많습니다. 다음과 간은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①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1년에 들어간 어린이 ② 고3들이 맞는 위기. ③ 대학 1년에 들어간 청년들의 신앙 위기 ④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신앙위기 ⑤ 군에 들어간 청년들의 신앙위기 ⑥ 군에서 제대한 청년들의 신앙위기 이런 때를 슬기롭게 넘기지 못하면 주님과 멀어지고 불신자와 같이 되고 맙 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왜 예수님이 나를 냉대하는가?\\\" 라고 반항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둘째, 차별의식에 대한 위기관리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민족차별입니다.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 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 유대인은 민족 차별이 유별난 백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백성의 풍습을 좇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방과 교 제를 금한대서 니왔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 지도 말 것이며 (신 7: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신 7: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신약시대 사도들도 이방백성과 같이 음식 먹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행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 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행 10: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갈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 하였노라 (갈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 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2. 주님은 본래 민족을 차별하지 않은 주님이었다. (마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요 4: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 니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예수님 자신이 두로와 시돈에 들어오셨는데 무엇 때문에 민족 차별하는 말 씀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 해 그곳에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여인의 믿음은 유대인 중에도 드문 믿음 을 보셨습니다. 3. 예수님은 복음의 우선권이 유대인들에게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마 10: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마 10: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0: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 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로다 4.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민족 차별을 의미하는 발언 때문에 주님의 인격 을 의심하지 아니 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복음의 우선권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이 모두 사실을 말했 는데 기분이 나쁘다고 하거나 돌아설 이유가 없었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오직 한 목표인 딸을 고치려는 일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민족차별을 개의치 않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요즘은 남녀 성차별을 따지는 세상입니다. 사람 차별 받으면 못 견딘다고 말 합니다. 다른 신자들이 자신을 차별 대우한다고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습니 다. 만일 예수님이 당신을 차별한다면 그래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과 이방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가나안 여 인의 목표는 딸의 병을 고침 받는 것이상으로 우리의 참 목표는 예수님의 인정 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 나 아가는데 장애되는 모든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셋째, 심한 모독하는 말에 대한 위기관리입니다. 갈수록 더 큰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1. 이 여자에게 주님은 모독적인 말을 했습니다. (마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 니하니라 너 같은 여자는 개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이방인들 은 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욕을 먹을 만하다고 인정해야 합니 다. 원인은 내게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는데 남을 탓할 것 없습니다. 다 \\\"내 탓 이오\\\"라고 해야 합니다. 모든 잘못된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차라리 \\\"주님 제게 욕을 퍼부어 주십시 오\\\" 라고 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불렸습니다. 신 23:1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 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 이니라 삼하 9:8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 아보시나이까 2. 예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멸시하지 않은 분이다. 예수님은 왜 모독하는 말을 사용했을까? 이방인들이 \\\"네 자신의 위치를 알라\\\" 는 것입니다. 3. 여자의 믿음입니다. a. 복음의 우선권이 유대인에게 있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마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 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자의 믿음은 모든 예수 믿는 이방백성들을 대변하는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하는 개와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 다. b. 유대인이 버린 복음을 이방인이 믿을 것 믿는 믿음 입니다.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님을 이방 백성들이 믿을 것을 이미 암시하는 믿음입 니다. 우리는 부스러기 같은 은혜로도 큰 축복을 받습니다. 눅 20:17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 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벧전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유대인들이 버린 복음을 이방인들이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 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4. 당신은 어떤 모독에도 예수님과 멀어지면 안됩니다. 주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는 요소가 많이 있지만 이런 위기를 잘 대처해야 한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이보다 10배나 더 많은 시련이 있어도 멸시가 있어도, 주 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태도가 나를 바로 알고 주님을 찾 는 자의 태도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악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관계없이 악한 것 입니다. 남을 탓하거나 이유를 대든지 관계없이 이것은 악한 일입니다. 그러므 로 주님으로부터 우리는 멀어지게 하려는 것은 악한 마귀의 계획적인 수단입니 다. 절대로 이런 꾀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 아가는 선을 힘써야 합니다. 가나안 여자의 끈질긴 요구로 마침내 그 여자의 딸 이 고침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여자는 크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넷째, 최고의 칭찬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 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1. 네 믿음이 크도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 노라 주님을 미리 내다보고 믿는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유대인들이 버린 예수님 을 구주 믿는 이방인은 더 큰 믿음입니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 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 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2.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 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지금도 주님은 이런 큰 축복을 이방인이 우리에게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그 여자를 사랑하라/ 호3:1-5/ 2007-01-18
그 여자를 사랑하라 호3:1-5 견원지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는 개와 원숭이의 관계라는 뜻인데 우리에게는 개와 고양이의 관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기만 하는 관계입니다. 여러분 왜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서 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기만 할까요. 그것은 이유가 간단합니다. 싸인이 안 맞아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개는 반갑고 좋은 때면 꼬리 올립니다. 그리고 화나고 싸우고 싶을 때는 꼬리를 내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정반 대입니다. 반갑고 좋으면 꼬리를 내리고, 화나고 싸우고 싶을 때는 꼬리를 올립니다. 그러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 오. 만나면 서로가 으르렁거리며 싸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개가 반갑고 기분 좋다고 꼬리를 올리면서 고양이 앞에 다가옵니다. 그러면 고양이란 놈은 화가 나서 싸우러 오는 줄 알고 임전태세를 갖춘다 그 말입니다. 또 고양이 가 반갑고 기분 좋다고 꼬리를 내리고 개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면 개는 고양이가 자기와 싸우러 오는 줄 알고 또 싸 울 태세를 갖춘다 그 말입니다. 이러다 보니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대고 싸웁니다. 싸인이 안 맞 아서 그래요. 사람도 그렇습니다. 서로 싸인이 안 맞으면 아무리 사랑을 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받아들이지 못합 니다. 그리고 이게 비극입니다. 오래 전 입니다마는 제가 결혼주례 한 부부가 신혼 초부터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아주 심각한 싸움이어서 결혼한지 일년도 못되어서 이혼지경에 까지 이르게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싸우고 이혼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둘이서는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사랑을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뿐입니다. 왜 이들 부부가 서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까요? 그것도 역시 싸인 문제였습니다. 사랑의 싸인이 서로 달라서 그렇습니다. 이들 부부의 성장 배경이 달랐습니다. 남 편은 엄격한 예절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내는 대단히 자유로운 가정에서 막내딸로 응석을 부리며 자 랐거든요. 그렇기에 사랑의 싸인이 안 맞아요.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의 표현은 아주 근엄하고 정중합니다. 마치 사극에 나오는 이 대감 부부와 같습니다. 반면에 아내는 불평이 많습니다. 사랑도 없고 감정도 없고 목석 같은 사나 이라고 불평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내의 버릇없는 응석 앞에 남편도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남편을 얕보고 무시한 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자기의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혀서 상대방의 사랑을 이해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 니다. 그래서 싸웁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이것 때문에 이혼직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듣고 그 부부를 불러모았습니다. 따로 따로 불러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싸인을 조정해 주었습니다. 먼 저 남편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이제 아내가 버릇없이 응석을 부릴 때에는 그게 바로 사랑의 싸인인줄 알고 자네도 잘 받아주게. 좀 간지럽기 하지만 자네도 그렇게 응수하면 되지 않겠는가. 또 아내를 불러서 또 말해주었습니다. 이 제 자네는 이제부터 TV에 나오는 사극을 많이 보아야 하겠네. 앞으로 남편이 근엄 정중한 태도로 다가올 때는 그것 이 나에 대한 사랑의 싸인으로 알고 잘 받아주게. 좀 징그럽지만, 그러나 자신도 그렇게 응수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 둘 부부는 별문제 없이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고 아직까지 이혼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일까요? 무엇이 비극일까요? 서로 사랑의 이해와 수용을 못하는데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못하면 문제가 생겨요. 여러분 믿음이 뭐예요? 참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의 믿음의 깊이도 더합니다. 그리소 삶의 기쁨과 행복도 더합 니다. 그러기에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비나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 으로 너희도 충만하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한 번 깊이 생각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깨닫고 믿는 것과 어떤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 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틀린 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훨씬 귀하고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 사랑은 저절로 되어집니다. 하 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고, 바로 믿기만 하면은 우리의 삶에 기쁨도 행복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바로 믿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할 줄 모르고 또 우리의 삶에 고독과 허무가 불안 과 공포가 깃들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원하십니다. 성경이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의 대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의 대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고 그 사랑을 깨 닫고 믿게 하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시도록 권하시는 것입니다. 성경가운데 유독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두 개의 사랑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약의 요한1서입니 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역설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거 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 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 참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멋진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의 사랑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구약의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서야 말로 참으로 격조 높은 사랑의 복음서입 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호세아의 아내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불러서 말씀하십니다. \\\"얘, 호세아야, 너 장가들거라\\\" 호세아가 대답합니다. \\\"네, 그것 좋지요\\\" 그런데 신 부감이 있어야지요. 그때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그건 걱정말라. 내가 준비하마. 내가 네 신부감을 골라 놨느 니라\\\" 호세아는 매우 기뻤습니다. 하나님이 고르신 신부라면은 얼마나 이상적인 신부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일을 어 찌하면 좋습니까? 하나님이 골라오신 신부는 기대했던 대로 요조숙녀가 아니었습니다. 음녀였습니다. 그렇기에 호세 아는 분노하며 거절합니다. 안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하나님은 강경하셨습니다. 잔말 말 고 가서 네 아내감을 데려와서 결혼하고 함께 살라고 했습니다. 호세아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지엄 하신 명령대로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거리로 나왔습니다. 음녀 고멜을 데려다가 결혼식을 올리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도 고멜은 정신을 아직도 못 차렸습니다. 호세아와 결혼한 후에도 계속 음행을 저지르곤 합니다. 그러기에 고 멜이 낳은 2남 1녀가 다 호세아의 핏줄이 아니었어요. 친자확인도 어려울 만큼 이 남자 저 남자와 관계해서 나은 자 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것까지도 용서합니다. 덮어주고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이만하면 호세아는 참을 대로 참은 것입니다. 아내를 버린다 해도 이제 누가 시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원수 같은 여자 때문에 인생 망쳤 으니 이제 깨끗이 단념하고 새 장가 들어도 별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지겨운 여자 제발로 걸어 나갔 으니 시원하게 잘 되었다고 좋아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십 니다. \\\"호세아야, 너는 그 여자를 사랑하라\\\" 세상에 이렇게 야박한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고멜이 몸만 더럽혀와도 말도 안습니다. 그러나 몸과 함께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다 더러워진 만신창이입니다. 어떻 게 그 여자를 더 이상 사랑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호세아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요. 거리로 나갔습니다. 창녀 가 되고 노예가 된 고멜을 찾아냅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찾아서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몸값을 지불하 고 고멜을 속량합니다. 당시 노예 몸값이 그것이었습니다. 남자의 몸값은 은 30개, 여자의 몸값은 그 절반입니다. 그 래서 예수님도 은 30세겔에 팔린 것입니다. 호세아는 아내 고멜을 속량해 집으로 데려옵니다. 여러분 호세아가 그 아 내를 데리고 오면서 뭐라고 말했을까요? \\\"이 더러운 여자야\\\" 하면서 욕하고 저주했을까요? 이 원수 같은 여자야, 너 때문에 내 신세 망쳤다고 미워하고 원망했을까요? 놀랍게도 호세아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이르기를 너 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여러분 이게 무슨 뜻일까요. 너무도 기막힌 사랑의 고백이 아닙니까? 과거는 묻지 않을 테니 이제 내게서 제발 떠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너만 사랑할테니 제발 너도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과거 다 잊어버리고 오래오래 죽 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는 때까지 서로 사랑만 하며 살자고 말합니다. 너무도 눈물 겨운 사랑의 환타제 아닙니까? 너무도 참되고 거룩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입니다. 호세아의 사랑이야기야 말로 더러 운 것을 거룩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못쓰게 망가진 것을 새로운 가치로 창조해 낸 그런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또한 우리가 베풀어야 할 참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복음서 를 통해서 두 가지 사랑을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먼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지난날 우리를 향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사랑하시고, 영원히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우리 모두 영적으로 고멜같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자주자주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고멜같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사랑으로 길이 참고 용서하지 않았습니까?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여기에 나와서 하나님 께 예배하는 것 아닙니까? 진실로 호세아와 고멜의 사랑이야기야 말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은 호세아와 고멜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되고 광대무변 하신 사랑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사랑의 복음서를 통해서 배울게 있습니다. 우리가 베풀어야 할 참 사랑입니다. 사도요한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 하도다\\\" 지금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사랑이라는 말이 안 들어간 데가 없 습니다. 저속한 유행가의 가사에도 수없이 사랑이라는 말이 오르내리고 있잖아요? 그러나 또한 우리는 지금 사랑이 라는 불모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참사랑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랑에는 말이 흔하면 흔할수록 헤프면 헤풀 수록 참사랑은 더욱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거짓되고 가장 가짜가 많은 것이 바 로 이 사랑입니다. 남편을 사랑한다. 아내를 사랑한다. 부모를 사랑한다. 자식을 사랑한다. 이웃을 사랑한다. 친구 를 사랑한다. 그 말이 얼마나 거짓되고 얼마나 가짜가 많습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착 각하며 우겨댑니다. 집착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욕정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아집과 독선 과 위선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아집과 독선과 위선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절대 그것은 사 랑이 아닙니다. 사랑했기에 미워한다는 아리송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절대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했기에 미워할 수가 없고 사랑은 눈물의 씨앗일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변질된 사랑이고 거짓된 사이비 사랑입니다. 이같이 변질된 사이비 사랑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 다.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랑의 중생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 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생각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새천년, 21세기. 가장 필요한 그리스도 인상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랑의 중생 아닙니까? 사랑으로 거듭난 참사랑의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사 랑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새 천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합당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쓰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야 합니다. 참 사랑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여기 호세아의 사랑에서 찾아야 합니다. 여기 호세아의 사랑이 우리의 거짓된 사랑이 여지없이 폭로합니다. 참으로 거듭난 참사랑이 무엇인 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사랑의 대상을 고르지 않고 만드는 창조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여자가 누굽니까? 잘못되고 부정한 여자 아닙니까? 몸도 마음도, 영도 다 더럽혀진 정말 만 신창이 쓸모 없는 여자 아닙니까? 사랑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여자 아닙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호세아는 그 여자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참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을 고르지 않고 만들어서 하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사랑 받을 자격자를 찾지 않고 만들어서 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에 언제나 문제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언제나 사랑의 대상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고르기만 하기 때 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자격자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따지고 찾기만 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그 말 입니다. 한 율법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때 율법사가 다시 묻지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누가 내 사랑 을 받을만한 자격자가 있습니까?\\\"하는 오만불손한 질문입니다. 이 율법사의 질문이 바로 종종 이런 질문을 저는 받 습니다. 아무개하고는 도저히 일할 수 없으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내 파트너를 좀 바꿔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해가 되요. 얼마나 힘들고 답답하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 것이 바로 사랑의 대상을 고르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만들지 않고 고르는 태도, 이게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랑하는데 자격, 무자격을 따지면 안됩니다. 그것은 참사랑이 아니예요. 전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사랑하 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한 번은 어떤 가정을 심방 했습니다. 마침 그 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어요. \\\"얘, 너 인형 좋아하는구나?\\\" \\\" 네, 인형 좋아해요. 목사님은 인형 안 좋아하세요?\\\" \\\"나도 인형 좋아하지.\\\" 그 때 그 아이가 신이 나서 많은 인형을 꺼내들고 말합니다. \\\"목사님, 이 가운데서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세요? 저는요,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해요.\\\"하고 그 인형을 드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인형은요,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갔습니다. 다리가 한 쪽 떨어져 나갔습니다. 옷이 갈기갈기 찢겨 있습니다. 아주 보기 흉한 인형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그 인형을 좋아하지?\\\" 그때 이 아이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목사님, 이 인형은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거든요. 얼마나 외롭겠어요. 그래 서 제가 이 인형을 사랑하는 거예요.\\\" 이 아이의 사랑,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사랑할 이유가 없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의로움과 성화가 함께 겹쳐진 온전한 사랑입니다. 또 호세아의 사랑은 그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은 사랑입니다.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사랑이란 말입니다. 사실 음녀 고멜을 사랑해 봤댔자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배신감과 고통밖에는 그에게 다가올 것이 없습니다. 그 여자를 사랑해서 무슨 보상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합니다. 이게 참 사랑이란 말입니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 타산적이 아닌 사랑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때때로 우리의 사랑, 너무 타산적인 사랑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를 사랑하면 어 떤 이득이 올 것인가를 계산하고 따지면서 사랑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 것도,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 것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 것도 그렇습니다. 친구지간의 사랑도, 교우지간의 사랑도 말입니다. 요사이는 연애를 해도 순애보가 없는 연애입니다. 너무 타산적으로 연애하고 결혼한다 그 말입니 다. 돈, 학벌, 무슨 사회적인 지위 등등. 이것이 참 사랑일수가 없습니다. 여기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그 말입니다. 이건 불행한 사랑입니다. 참사랑이란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단 한 시간만 아니 일초라도 좋으니 그를 사랑하다가 죽겠노라고 덤벼드는 그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게 진짜 행복입니다. 이런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참 불행 한 사람입니다. 진짜 아름답고 멋있는 사람은요, 바보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미친다는 것, 다른 사람에게는 따하고 흉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미친 사람들은 참 행복합니다. 호세아의 사랑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결코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보 같 은 사랑입니다. 미국의 한 신혼부부가 결혼하자마자 싸웁니다. 꼭 싸우기 위해서 결혼한 것 같습니다. 드디어 결혼 파국이 왔습니 다. 이들 부부는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자기들이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어떻게 헤어지지 않고 살아갈 비결이 없습니까?\\\" 그 때 목사님은 여덟 개의 단어를 일러주면서 그대로 한번 실천해 보라고 했습니다. So I love him, though I love him. 그래서 사랑하고 그래도 사랑하고. 그들 부부는 이 여덟 개의 단어를 날마다 외우면서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싸움을 멈추고 행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도 사랑하고 그렇지 않아도 사랑하고. 사랑할 이유가 있어도 사랑하고, 없어도 사 랑합니다. 이것이 호세아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호세아의 사랑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기분이나 감정으로 생각한다면 호세아는 결코 아 내 고멜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주 역겨운 여자입니다. 그러나 사랑할 기분이 아니어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 이 것이 그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는 크게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 은 너무도 기분과 감정에 치우치지 않습니까? 너무 의지적이 아니잖습니까? 그렇기에 기분 안내키면 사랑도, 가정 도, 교회도 무엇도 다 집어치우고 말아요.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은 좀더 의 지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해서 서로 사랑하면 안됩니다. 사랑해서 행복해져야 합니다. 순결해서 서로 사랑하 면 안되요. 사랑해서 서로 순결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아름다워서 사랑하면 안되요. 사랑하므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또 호세아의 사랑은 무한히 참고 기다리는 사랑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아내 고멜에 대해서 얼마나 참고 기다렸습니 까? 계속적인 배신과 가출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절망하지 않습니다. 참고 기다리고 희 망을 가지고 바라다봅니다. 흔히 우리는 살아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 너한테 실망했다.\\\" 여러 분,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제까지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실망이 없어요. 끝까지 참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호세아의 사랑은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아내를 속량하기 위해서 은 15개, 보리 한 호멜 반을 지불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입술만의 사랑이 아니라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사랑입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가짜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 동안 우 리는 누구를 얼마나 사랑해봤다고 생각합니까? 그를 위해서 무엇을 지불했는가,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값이 지불 되지 않은 사랑은 참된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의 사랑은 과거를 묻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호세 아가 고멜을 속량해가지고 데려다 놓고 한 말을 다시금 반추해 봐야 합니다. 너무도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이기 때문 입니다. \\\"너는 이제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하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무슨 말 이예요? 이제 우리 과거를 묻지 말고 지금부터 새로운 신혼기분 가지고 새롭게 사랑을 싹틔워 보자는 거예요. 이제 부터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기 전에는 서로 나누지 말고 오래 오래 사랑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참 사랑 은 과거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더럽고 악했다면 사랑으로 그것을 정결 케 해야 합니다. 의롭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를 잊지 못하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 잡혀 산다면 피차 불행합 니다. 과거는 깨끗이 잊어줘야 합니다. 전경리가 쓴 \\\"내 생애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이 참 귀해요. 아주 순결한 여자가 아주 깨끗한 결혼을 해서 깨끗한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이상에 맞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남편이 실수를 저지릅니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습니다. 결코 용 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눌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낍니다.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고 이 여자는 생각합니다. 그 리고 우울증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던 어느날 너무 답답해서 바람을 쐬러 외출을 했습니다. 거기서 중대한 일 을 저지릅니다. 어떤 근사한 남자를 만나서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 버립니다. 그리고 이 여자는 거기서 깜짝 놀랍니 다. \\\'아! 내 안에도 이런 타락성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남편을 용서해 줍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비록 이성문제에만 국한시키지 마십시오. 인간의 밑바닥에는 추하고 부끄럽고 허물진 것들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완전한 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거예요.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가 없습니 다. 과거는 깨끗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1968년에 유태인 학살의 원흉이었던 아이만이 체포됩니다.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때 유태인 꼴란스라는 사람이 이 아이만을 구명하는 데모를 벌였습니다. 있을 수 없는 데모 아닙니까? 아이만이 누군데요. 그렇기에 유태인들은 꼴란 스를 향해서 미친놈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꼴란스는 사람들의 빗발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 를 밝히면서 데모를 합니다. 첫번째는 아이만을 죽인다고 해서 이미 죽어버린 우리 처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두번째는 아이만 을 죽이지 않고 내벼려 둬도 이미 죽은 인생이다. 역사가 그를 심판했는데 우리가 다시 죽일 것 뭐 있는가. 또 하나 의 이유가 있습니다. 너무도 가슴 뜨거운 이유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 보복의 악순환을 되풀이할 것인가. 그 누 군가가 먼저 원수를 사랑하는 이 참사랑을 보여줘야 하지 않느냐. 그래야 이 삭막한 세상에 미래가 보이지 않겠는 가. 진실로 그렇습니다. 참 사랑을 할 때 두려움이 없습니다. 참 사랑을 믿을 때에 마음의 평안이 있습니다. 참 사 랑을 실천할 때에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밝은 미래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 그 여자를 사랑하라.\\\"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염광교회 성도들아! 그 여자를 사랑하라.\\\" 오늘 우리의 그 여 자가 누굽니까? 그 여자를 사랑하십시오. 지금, 지금 하십시오.
남녀가 함께 섬기는 교회/ 고전14:26-40/ 이수영 목사/ 여전도회주일설교/ 2001-01-21
남녀가 함께 섬기는 교회 고전14:26-40 오늘은 우리 교단총회가 여전도회주일로 지키기로 정한 주일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교회 안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하여 갖고있는 편견과 그릇된 우월주의를 상기시키고, 교회 안에 고착된 남존여비사상과 제도적 불평등을 타파하며, 대부분의 교회에서 교인의 ⅔를 차지하고있는 여성들이 그 수에 상응하는 역할을 각 교회 안에서 보다 더 잘 담당할 수 있도록 의식을 일깨우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이론적 근거로서 제시하는 성경구절들 중에서 주되고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의 하나가 오늘 본문말씀 34-35절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여전도회주일로 지키는 오늘 그런 구절을 본문으로 삼을 것이 무어냐고 생각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말씀이 결코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을 반대하는 이들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말씀이 아님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들을 그렇게 피상적이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글은 사도 바울이 특정한 지역교회에서 특정한 시기에 발생한 특정한 상황에 구체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급박한 목회적 동기에서 특정한 대상에게 써보낸 것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말을 해야 했던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그 바로 앞 구절인 33절에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힘주어 말한 것으로 보아 무질서와 불화로 요약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상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내용이 보여주는 대로 당시 고린도교회는 방언을 위시한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무분별한 발언으로 인해 매우 시끄러웠고 분란이 일어나 교회의 덕이 무너지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여성들이 많이 있었고, 그 여성들이 제각기 받은 방언·예언을 무분별하게 말하게 되자 고린도교회의 무질서와 불화는 한층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어찌됐든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었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해야 할 것은 모두가 그들이 받은 바 은사들을 \\\"교회의 덕 세움\\\"이라는 상위가치에 복속시키고 자제함으로써 교회 내의 질서와 화평을 회복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14장 안에서만도 수차례 \\\"교회의 덕 세우기\\\"를 반복하여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4-5절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했고,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했으며, 26절에서는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같은 고린도전서 14장 안에서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절제와 질서를 강조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를 들면 19절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한 것이나, 27절에서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한 것이나, 29-31절에서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한 것이나, 40절에서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고린도교회의 교인 모두가 자제하고 매사를 적당히 하며 언제나 질서를 지킴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우라는 일반적 명령의 한 부분으로서 주어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실상 14장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여성들을 향해서만 주어진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한 것임을 보아야 합니다. 28절의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한 말이나, 30절의 \\\"만일 곁에 앉아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30) 한 말은 교회의 덕과 질서와 화평을 위해서는 누구든지 필요할 때에는 잠잠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고린도교회라는 특정한 공동체가 특정한 시기에 처했던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특정한 처방이었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여자는 무조건 교회에서는 일절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명령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의 \\\"여자는\\\" 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여자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시도 때도 없이 자제할 줄 모르고 떠들면서 교회의 덕과 질서와 화평을 깨뜨리던 여자들\\\"을 지칭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오직 복종할 것이요\\\" 한 말도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복종하라 한 것입니다.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대하여 제기되는 반론을 알고 있습니다. 그 반론인즉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 기록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할 상황적 메시지뿐 아니라 동시에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영원히 변치않는 보편적 메시지를 지니고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매 구절의 의미를 오늘날 우리와는 상관없는 과거 특정 시대의 특정 대상만을 위한 것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성경해석의 오류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문제는 과연 무엇이 옛날에나 오늘 우리를 향해서나 앞으로도 각 성경구절이 지니는 보편적 메시지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이 우리가 문법적으로 이해하는 그대로 무조건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반해, 저는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젊은이든 그 누구든 아무리 할 말이 있고 말할 능력이 있더라도, 또 말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라도, 교회의 덕과 유익을 위해 필요할 때에는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 말씀이 지닌 영원하고 보편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느 시대 어느 교회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나 지켜야 할 그 말씀의 진정한 교훈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결코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을 반대하기 위한 근거로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을 해석 없이 문자 그대로 모든 일과 모든 상황에 적용하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같은 고린도전서 11장 5절 말씀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고 함으로써 여인들이 교회에서 기도도 하고 예언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는 여인들이 기도나 예언을 할 때 머리에 쓴 것을 벗는 것을 금하고 있지, 기도나 예언을 하도록 입을 열고 말하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여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 중 여자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 모든 여자는 언제 어디서도 교회 안에서 책임있는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논거나 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왜 예수님께서 가장 가깝게 3년간 숙식 등 동고동락의 삶 전체를 같이 할 제자들을 남자들로만 택하셨는가 하는 이유를 성경의 증거 자체로 분명히 알기 전에는 그런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오늘날 같이 남녀평등화가 많이 이루어지고 개방적인 시대의 사회라 할지라도 만일 예수님이 열두 제자 중에 여자를 포함시켜 동숙식의 삶을 산다면 온갖 오해와 비판의 대상이 될 터인데, 그 옛날 시대에 그러한 오해를 자초할 어리석은 선택을 하실 리가 있었겠는가?\\\" 반문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자들만으로 열두 제자를 택하신 것은 그가 사셨던 시대와 사회의 관습과 사조에 적응하시는 지혜의 문제이지, 영원한 그의 나라 일을 위한 남녀의 차별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전체 속에서 남성위주의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어 오시고 인간세계의 상황을 활용하시면서 그의 뜻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적 선택의 지혜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의 계시를 인간들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때 그때의 남성 위주의 인간 세계의 현실에 적응하심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인간세계의 현실에 적응하셨다는 사실이 이 모든 인간세계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시고 정당화하시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크나큰 과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인간을 그가 원하시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하루 아침에가 아니라 꾸준히 변화시켜 가시며, 그 동안은 인간의 모든 상황을 활용하시는 자유를 가지신 분입니다. 비록 그 인간의 현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는 폐하여질 그것을 잠정적으로 그의 일에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남녀가 하나님께서 은혜 속에 주신 복된 구별은 있으나 아무런 존재적 차등은 없는 하나님의 같은 피조물이며 하나님나라의 동등한 식구요 일꾼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사역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남녀의 성차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구별하시지 않는 모든 인간적 성차별은 폐하여 질 것입니다. 다만 죄된 인간과 세상일지라도 사랑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의 온갖 잘못들을 일시에 다 멸하지 않으시고 그의 깊고 비밀한 섭리를 따라 때로는 일시적으로 내버려두시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남성중심의 하나님사역은 이러한 하나님의 잠정적 지혜로 볼 것이며, 영원한 의지로 볼 것이 아닙니다. 성차별의 궁극적 폐기가 하나님나라에 속한 진리라면,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향해 사는 변화와 갱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남성위주의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 속에 여성들을 동참시키시고 중요하게 들어 쓰신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그 역사,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인류구원사역의 전개 속에서 중요한 대목마다 숱한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전 과정 속에 언제나 여성들이 함께했음을 우리는 봅니다. 자기의 몸을 내어놓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도록 한 이는 여인이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이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네 명의 여인이 그 십자가 곁에 서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뵌 이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에 복음의 전파와 확산을 위한 사도들의 사역에도 어김없이 여성들의 협력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습니다. 로마서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숱하게 많은 여인들을 자신의 귀한 동역자들로 천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여성동역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훌륭한 선생들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행18:26에 따르면 브리스길라는 이미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행18:24)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친 여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2-3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며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행21:8-9에 따르면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네 딸은 모두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딛2:3에서는 나이든 여성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 자신이 갈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말한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이것이 어디서나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남자와 여자\\\", 이것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에 앞서며 또 그 말의 참 의미를 밝히는 상위개념인 것입니다. 지금은 여성이 사람으로 온전히 취급받지 못하며 여성이 공개적인 자리에 나타나거나 발언하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던 유대나 헬라의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새 시대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남녀가 함께 대등하게 교회를 섬기며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껏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도적 역할과 남녀의 대등한 책임분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여성들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에 대한 선입관·편견·불신을 보다 일찍 말끔히 해소시킬 수 있을 만큼 지혜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결집하며 증명해내지 못한 과오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책임은 남성들에게 있습니다. 신앙적 안목에서보다는 인습적이고 세상적인 안목으로 문제를 취급하고 처리해 왔으며 여성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 천년과 새 세기를 맞은 우리는 이제 진정 남녀가 함께 섬기는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이수영 목사(서울 새문안교회)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6:14-18/ 여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02-03-13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6:14-18 오늘은 여선교회 헌신예배로 주일 예배에 참석하게 됨에 따라 우리 모두 기쁨을 갖습니다. 사실, \\\"주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헌신하는 삶은 하나님께 축복된 삶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선교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더욱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아침, 본문 말씀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후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흔적\\\'이란 말은, 특별한 단어입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서 한번만 사용되는 문구입니다. \\\"흔적\\\"이란, 헬라어로 \\\"스티그마\\\"로서, 고대 사회에서 주인이 노예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 노예의 몸에 낙인을 찍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예는 \\\"일생 동안 주인의 것이다!\\\" 라는 의미로서 쇠를 달궈 가지고 노예의 등에 화인을 찍는 것입니다. 결국, 노예의 몸에 화인이 있으면 그는 일생 동안 노예로서 자기 주인을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헬라어의 흔적이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28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시기를,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몸에 무늬를 놓는 것을 문신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Tattoo Marks\\\"라고 함.) 문신은 피부, 살갗에 바늘로 찔러서 먹물이나 색깔 있는 물감으로 글씨나 무늬를 만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악귀(귀신)들로 몸을 보호해 주는 역할로 믿고, 몸에 무늬를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남성들은 문신을 \\\"힘의 상징\\\"으로, 여성은 \\\"아름다운의 상징\\\"으로 문신을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이러한 문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남자들은 목이나 팔뚝에 용, 호랑이 같은 짐승을 문신하고, 여자들은 다리, 종아리, 또는 배꼽 근처에 나비, 꽃 등을 문신합니다. 그런데, 저만 봤나요? 여러분은 아무런 반응이 없이 가만히 있으시네요!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문신을 금하셨습니다. \\\"너희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직접 맹세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들은 문신을 금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나는 일평생 예수의 종이요, 예수를 위해 일생을 바칠 노예다. 그러니까 이제 누구도 나를 괴롭게 마라. 나는 예수의 것이다!\\\" 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한번은 돌에 맞아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내다 버렸는데,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 또 전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수도 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죽음의 위협을 수도 없이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끝내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사형을 당했는데, 돌기둥에다 목을 내밀고, 위에서 칼이 내려치는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했는데, 그의 머리가 떨어지면서 3번 튀어서 굴렀는데 바울의 머리가 구른 데마다 샘물이 솟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 사도 바울을 위한 순교 기념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는 우리를 향한 흔적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우리를 위해 쓰신 가시관의 흔적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못 박힌 흔적이, 예수님의 가슴에는 일곱 번 넘어진 십자가의 흔적이, 예수님의 등허리에는 채찍에 맞은 흔적이, 예수님의 이마에는 땀흘린 흔적이, 예수님의 눈에는 우리를 위해 흘린 눈물의 흔적이, 예수님의 무릎에는 우리를 위해 기도한 흔적이 있습니다. 이건 모두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지신 흔적입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이와 같은 흔적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지은 죄를 위해 가시관 쓰셨고,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죄를 위해 못 손과 발목에 못 박히셨으며,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죄를 위해 창을 받으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몸에는 조금이라도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예수의 흔적이 있는지요?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이 몸을 가지고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일하므로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내게도 뭔가 주님을 위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의 흔적이 없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보답하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대체로, 몸에 나타난 흔적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떠한 일을 열심히 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의 손바닥은 굳은살이 굳게 배겨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그 손가락에 연필 자국으로 굳은살이 배겨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을 한 사람은 손과 발에 굳은살이 배겨 있습니다. 옛날에 당수하는 선수들을 보니까, 손과 발이 단단하였습니다. 레슬링 선수들을 보니까, 양쪽 귀가 모두 찌그러져 있었습니다. 매사에 헌신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들의 몸에는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디에 흔적이 있는가 하면, 손과 발에는 없고, 입으로만 한 몫 하니까 입에만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야구경기장에 가보시면, 경기하는 선수들과 관중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라운드에서 열심을 다해서 뛴 선수들에게는 상이 있는데, 관중들은 아무리 목이 터저라고 응원을 해도 아무 상을 받지 못합니다. 땀과 눈물과 시간과 몸을 바쳐서 뛰고, 달려야 상이 있지, 앉아서 입으로만 잘한다고 떠들어 보았자 상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서울 같은 큰 도시 교회에 가면 철새교인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교인이 철새인고 하니, 어느 교회에 가서 등록도 안하고 왔다 갔다 다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다니다가 자기 맘에 드는 얘기하면 고개 끄덕이고 좋아하다가 이제 자기에게 좀 힘들고 귀에 거슬리면 그냥 “교회가 여기 뿐이냐(?)”하고 다른 데로 가버립니다. 또 거기서도 몇 달 동안 다니다가 \\\"복 받으라!\\\" 하면 좋아서 \\\"아멘, 아멘\\\" 그러다가, \\\"주님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이웃을 위해 사랑의 손을 펴야 합니다!\\\" 라고 소리하면 \\\"시시하게 저런 소리 하냐!\\\" 하고 또 다른 교회로 날라가 버리는 이런 철새교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는 여러분을 향한 흔적이 가득 차 있습니다. 다시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우리를 위해 가시관 쓰신 흔적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못 박힌 흔적이, 예수님의 가슴에는 일곱 번 넘어진 십자가의 흔적이, 예수님의 등허리에는 채찍에 맞은 흔적이, 예수님의 이마에는 땀흘린 흔적이 예수님의 눈에는 우리를 위해 흘린 눈물의 흔적이, 예수님의 무릎에는 우리를 위해 기도한 주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이건 모두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지신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이 몸을 가지고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일하므로 아름다운 흔적을 가져야 됩니다. 아멘. 분명히, 예수님의 몸에는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못 박힌 흔적, 가시관 쓰신 흔적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 지은 죄를 위해 가시관을 쓰셨고요, 손으로 지은 죄를 위해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죄를 위해 창을 받고 주님은 흔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말하기를 \\\"내 몸에도 예수의 흔적이 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정말로, 바울의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몸에는 조금이라도 주님 앞에 “이겁니다!”라고 내놓을 수 있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예수의 흔적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부끄러운 사람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흔적이 있는가 하면, 손과 발에는 없고 입으로만 한몫 하니까 입에만 흔적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현대의 그리스도인을 \\\"앉은뱅이\\\"라 말했습니다. 앉아 있을 때는 성한 사람이나 똑같지만 \\\"일하자!\\\" 하면 앉은뱅이 처럼 앉아서 일하지 않고 의자만 뭉갠다고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이 그렇다는 거예요. 일을 전혀 안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토요일이 되면 참 반가운 사람들을 만납니다. 오후 3시가 되면 청소하는 분들이 교회에 옵니다. 그분들이 1-2시간 동안 땀흘려 쓸고 걸레질하고 열심히 청소합니다. 이래서 우리가 賁끗한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앤아버 감리교회를 수년, 수십년 다녀도 한번도 걸레를 손에 안 잡은 분들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서울 압구정동에 가면 5-6만명 모이는 아주 큰 교회가 있는데 그것은 광림교회이지요. 10년 전에 교역자 수련회가 있어서 그 교회를 방문하신 목사님이 소개했습니다. 하루는 월요일 저녁 시간에 교회 아래층에 내려가니까 풍채가 근사한 남자들이 밥과 반찬을 날르더랍니다. 그 다음날 아침은 부티 나고 금테안경 낀 여자들이 밥을 날르구요. 그런데, 김선도 목사님 말씀이 월요일 저녁은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한 부인들은 사장님 부인들이라고 소개해서 알았다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손끝에 물 한 방울 안대는 사장님 부인들만 모아다가 일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김 목사님이 계속하여 말하시기를 이분들이 이런 기회에 봉사하지 않으면, 일생 교회 와서 봉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한번은 서울 온누리 교회에서 개최하는 교역자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층계를 이용하여 예배실로 올라가는데 층계마다 여자들이 예쁜 한복을 입고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면서 정중히 인사하였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는데 그들 중에는 대학교 총장 부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제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므로 여러분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의 흔적을 가지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14절 말씀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만 못해서, 세상에 자랑할 것이 없어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바울에게는 자랑거리가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그의 높은 학문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의 학문은 나라가 모두 알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에 보면, 로마 총독 베스도가 바울에게 말하기를 \\\"네게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총독이 알아주는 학문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는 가문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는 로마인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소위 하늘을 날라 다니는 새도 떨어드릴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과연, 은혜를 깨닫고 나면, 세상의 명예와 권세가 하찮은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에게 세상적인 학문과 명예, 부귀와 영화에 대한 미련과 욕심이 남아있다면, 온전한 은혜를 받지 못한 까닭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4장 16절에서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세상적으로 자랑했던 것은 이제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시인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 내 머리에 새기소서. 주님만 생각 할 수 있도록. 주여! 주의 이름, 내 가슴에 새기소서. 주님만 뜨겁게 사랑할수 있도록. 주여! 주의 이름, 내 손과 발에 새기소서. 오직 주님을 위해서만 일할 수 있도록\\\" 얼마나 은혜스러운 시입니까? 예수의 흔적을 가집시다! 예수의 흔적을 내 몸에 갖는 것은 하나님의 훈장입니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여전도회회장, 임원 모두, 그 직책이 훈장이 아닙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하나님의 훈장입니다. 할렐루야! 어떤 게으른 교인 하나가 꿈에 천국에 갔다합니다. 천국에 갔더니 천국공사가 한창이더래요. 으리으리하게 집 하나를 짓는데, 이제 다 짓고 문패만 달면 되겠더래요. 그래서 \\\"누구네 집이냐(?)\\\"고 천사에게 물으니까, 아무 교회 김 집사의 집이라고요. 가만 보니까, 자기 교회 김 집사네 집이더래요. 그래서 꿈을 꾼 교인이 생각하기를, \\\"가난뱅이 판잣집에 사는 교인이 이런 정도니 내 집은 엄청나게 크겠다!\\\" 생각하고 천사에게 가서 자기의 거처할 집을 물어보니까 터도 안 닦아 놨더래요. 이유를 물으니까,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일할 때만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난뱅이 김 집사는 늘 이웃을 돌보고, 사랑을 베풀고, 교회에서도 열심이고, 사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소금과 빛된 생활하니까 하늘나라 목수들이 쉴 새가 없어서 다 지었는데, 꿈을 꾼 사람은 날마다 입으로 떠들기만 하고 \\\"뭐 했냐?\\\"고 묻기만 하니까 \\\"터만 닦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원리입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구경꾼은 재미는 있어도 상급은 없습니다. 땀과 눈물과 시간과 몸을 바쳐서 내가 뛰고, 달려야 상이 있지, 앉아서 입으로만 잘한다 떠들면 상이 결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몸에도 예수의 흔적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뭔가 이거 하나만은 내가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로부터 심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 괴로움과 아픔이 너무도 커서 \\\"이후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라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이와 같은 아픔이나 고민, 그리고 괴로움이 있음으로 인하여 더 밝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그것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반대자들이 없었다면 이 갈라디아서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갈라디아서를 가르켜 \\\"기독교인의 자유헌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힘을 얻어 부패한 중세의 교회를 개혁하는데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은 그를 위대한 사도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으며 우리의 잔을 항상 넘치게 하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관련된 어떤 흔적을 가지고 계십니까? 예수의 흔적을 우리의 몸에 지닌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직접 우리 몸으로 감당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이나 믿음 생활의 경험에서 그 어떠한 예수의 흔적을 가지신다면, 그것은 신령한 면에 있어서 영광스러운 표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종이라는 표시요, 하나님께서 소유한 백성이라는 싸인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인(印)치심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아무도 나를 괴롭게 하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몸에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다가, 무엇인가 작아도 예수님의 흔적을 하나씩 가져야 합니다. 먼저, 여러분의 얼굴에 예수의 흔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얼굴 외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밝은 마음의 미소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20대가 미모를 꾸미는 것은 화장이고, 30대가 하는 것은 분장이고, 40대가 하는 것은 변장이다. 그러나 50대가 하는 것은 환장이다\\\" 이미 벌써 피부가 후퇴기에 들어선 것을 모르고, 아직도 20대인 것처럼 꾸미려고 하면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흔적,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세계적인 부흥사, 스펄전 목사님은 외치기를,“눈물 없이는 천국에 갈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내 일생 주님을 위해서 나의 얼굴에 한 방울의 눈물도 흘려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주님 앞에 설 수가 있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주님이 닦아주는 눈물은 믿음의 눈물, 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흘린 눈물입니다. 정말 눈물은 귀합니다. 새벽기도를 할 때면 어떤 성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합니다. 그들의 눈물이 아름답습니다. 아침 이슬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그들의 눈물 방울이 바닥을 적시고, 눈물의 흔적이 있습니다. 정말, 내 인생을 주님께 의지하면서, 힘들어도 참고, 진리 안에 발걸음을 걷기 위해서 흘린 그 눈물이 있다면, 우리 주님은 그 눈물을 보석처럼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뿐아니라, 여러분의 몸에, 여러분의 손과 발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많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는 드보라, 훌다, 안나 모두가 훌륭한 여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사르밧 땅의 과부는 물질로 엘리야 선지자를 도왔고,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도왔으며, 라합은 유대 정텀군들을 도왔고, 에스더는 삼촌 모르드개를 도와서 자기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많은 여인들이 소개되었습니다. 루디아, 순두게, 유오디아는 바울을 도왔고, 뵈뵈 집사는 많은 성도들을 도왔습니다. 근대 역사에도 훌륭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탈선하여 방황하는 생활을 보고 10년을 하루같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여 탕자를 성어거스틴으로 만든 모니카, 또한 많은 아들들 중에서 17째 아들 요한 웨슬레를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만들기 위하여 한가지 일을 20번씩이나 반복하여 가르치고 또 가르쳐서 결국 감리교회를 창설케 한 수잔나 여사가 있었습니다. 한가지 공통된 점은, 이 모든 여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신앙의 여인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예수의 흔적을 가진 여인들이었습니다. 참된 기독교의 본질은 외적인 할례의 흔적이 아니라, 내적이요, 영적인 할례, 곧 세례요, 중생, 거듭남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장 8절).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 몸에 영광의 마크를 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우리들의 몸에서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는 것이라\\\"(빌립보서 1장 20절). 이 후로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시간과 공간, 어떤 장소에서도 여러분을 괴롭힐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여러분의 몸에는 예수의 흔적으로 인 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값진 몸으로 하나님께 크신 영광을 돌리시며, 이제 여러분의 헌신의 삶으로 더욱 주님의 흔적을 갖고 이 세상을 승리하시는 축복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내가 가져 가리이다/ 요20:11-18/ 여전도회헌신예배설교/ 부활주일설교/ 2008-04-03
내가 가져 가리이다 요20:11-18 오늘 본 교회 마리아 여선교회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마리아가 한 말 “내가 가져 가리이다.” 이 말씀을 제목으로 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사건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첫 새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무덤에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무덤 밖에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울고 있는 마리아를 향해서 물었습니다. “왜 우느냐?” 마리아는 울먹이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가 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여 울고 있습니다.” 이 말을 끝내고 되돌아서는 순간 마리아 앞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 앞에 서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빨리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으며 또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곳을 지키는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주여 당신이 우리 주님을 옮겨 놨으면 어디 두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고 간곡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내가 가져 가리이다” 이 말이 간단한 말 같지만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 속에는 주님께 대한 마리아의 진실한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죽어 있는 시체를 가지고 간다는 것은 진실 된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특별히 예수님께 남다른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시체라도 보살피려고 했는데 그것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시신을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마리아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며, 마리아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와 같은 마음과 자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1.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 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가져가겠다는 말입니까? 무섭고 떨리는 일이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넘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 무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4:18에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면 고통도 수고도 잊어버립니다. 어느 아이가 자기만큼이나 큰 아기를 업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야! 그 아이가 무겁지 않니?” 그때 그 아이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내 동생인 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자기 힘에 부치는 벅찬 일을 하면서도 피로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제가 안질을 앓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내 눈을 당신 의 혀로 닦아 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자식 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뜨거운 관심을 일으킵니다. 교호를 사랑하는 자는 교회의 물건 하나하나를 아끼고 성전을 정성껏 보살핍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런 관심도 나타내지 않습니다. 교회를 사랑 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충성합니다.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은 그 태도가 다릅니다. 목숨을 겁니다. 우리 주님은 베드로에게 두 가지의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첫 번째는 믿음의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마 16:13이하). 두 번째는 사랑의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요 21:15이하). 신앙의 고백은 단 한번으로 족했지만 사랑의 고백은 세 번이나 확인하셨습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고 주님의 일을 하려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를 지고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물으신 질문이 오늘을 사는 나이게 던 져지는 질문이라고 믿고 우리도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선행되어야 합니다. 2. 주님의 시신에 대한 마리아의 “책임감”이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묻혀 있던 곳으로 가서 자기가 책임지고 정성을 다해서 잘 모셔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주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주님의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그 책임감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생명의 위험도 무릅쓰게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는 것인데 지금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친히 모시겠다는 것이니 마리아의 사랑하는 자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영광을 얻는 일이나 칭찬을 받을 일에는 서로가 앞장서려고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일에서는 서로가 회피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조국에 전쟁이 발발하면 먼 외국에 있는 젊은이들이 제일 먼저 귀국하여 입대를 자원한다고 합니다. 그런 저력이 있기 때문에 많은 강대국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가 이길 수 있었고 나라를 지탱시켜 가 는 정신적인 국력이 되어준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지고 존귀 영광은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거기서 기적이 일어나고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널 때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쳐도 갈라지지 아니했으나 세 사람의 젊은이가 죽기를 각오하고 바다에 뛰어 들 때 홍해가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자기의 백성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용감한 청년들의 행동이 기적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새벽을 깨우기 위해서 누군가가 먼저 깨우는 역사의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전도를 위해서 내가 먼저 전도지를 들고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아름다 운 발걸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을 향하여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 때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주님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3. 마리아의 “솔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어려운 일을 먼저 제자들에게 가서 보고하는 대신에 자신이 먼저 모셔야 되겠다는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다. 남이 하고자 하니까, 또는 남이 안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자기의 일로여기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누가 자기에게 맡 겨 주거나 말거나 당연히 자기가 할 일로 알았습니다. 옆 사람의 눈치를 볼 것도 없었습니다.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온전한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는 안 됩니다. 남이야 어떻게 하든 개의할 바 아닙니다. 그저 솔선수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헌금하는 일, 전도하는 일, 기도하는 일, 봉사하는 일, 시간 전에 교회에 출석하는 일 등 솔선수범하는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신앙과 성령 충만한 뜨거운 열정은 우리를 가만히 앉아 있도록 내 버려두지 아니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첫 열심히 앞을 다투어 봉 사하고 일했습니다. 솔선하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널 때 제사장들로 먼저 법궤를 메고 앞장서서 요단강에 들어서게 할 때 물이 갈라졌습니다. 솔선하는 사람이 있을 때 장애물은 제거되고 길이 열립니다. 교회는 솔선수범하는 성도들이 많아질 때 밝은 미래가 열리고 어떤 큰일도 감당해 낼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됩니다. 마리아가 이런 심정으로 “내가 가져 가리이다”라고 했을 때 그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주님을 첫번째로 뵙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을 오늘 다같이 기억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마리아 여선 교회 헌신 예배를 드리면서 함께 배우고 깨닫는 그런 은혜가 같이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부활의 영광이 있는 교회,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는 교회,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또한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에 늘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중에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감사는 기적을 만드는 동력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마음에 기쁨과 함께 힘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감사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감사가 넘치게 될 때 의욕이 생깁니다. 일하고 싶어집니다. 봉사하고 싶어집니다. 헌신하고 싶어집니다. 생동감이 넘치게 됩니다. 감사가 있으면 살맛이 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주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며, 주님 앞에서 충실히 책임감을 다하며, 솔선수범의 신앙생활을 살아서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될 은혜를 모두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네 귀를 뚫어라/ 신15:12-18/ 여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06-12-03
네 귀를 뚫어라 신15:12-18 강교자 부회장(대한 YWCA 연합회)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의 주역이었던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오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손발이 사슬에 묶인 채 노예시장에 애처롭게 서 있는 한 소녀를 보게 된 링컨은 그 소녀가 너무 불쌍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값은 지불하고 그 노예소녀를 샀습니다. 그를 집에 데려와 목욕을 하게하고 새 옷을 입히고, 따뜻한 음식을 먹이며 며칠을 쉬게 한 후에,약간의 용돈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산 것은 우리 집의 노예로 삼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너를 자유케 해 주려고 한 것이다. 이제 너는 더 이상 팔려온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다.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 돈을 가지고 나가서 과거는 잊어버리고 자유로운 몸으로 새 출발을 시작하여 잘 살아라.” 이 말을 들은 이 소녀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노예의 딸로 태어났고 지금까지 노예로 이곳저곳으로 팔려 다니면서 사람대접을 받아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서 따뜻한 관심이나 보살핌을 받아 본 적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주인님이 나타나셔서 값을 나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아 보았으며 주인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나를 그 지긋지긋한 노예시장에서 사 주시고 나를 이렇게 대접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주인님을 떠나 내가 어디로 갑니까? 나는 일평생을 주인님 곁에서 주인님을 섬기면서 내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며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이것이 내 삶을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며 기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내 보내지 마시고 주인님 집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이 소녀는 평생을 링컨의 집에서 그와 같이 살면서 그를 섬겼고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백악관에 까지 같이 갔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 봉독한 신명기와 출애굽기에 있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히브리 노예법에 따르면 어떤 이유로 종이 되었던지 주인을 섬긴지 6년이 지나면, 7년 째 되는 해에 종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종들이 새 삶을 어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도록 저들을 빈손으로 내어 보내지 말고 곡식과 양들을 충분하게 주어 보내도록 했습니다. 이 법은 애급의 속박에서 종노릇하던 저들을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며 또한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나타나 있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감격스러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제 종의 신분에서 풀려나서 어깨를 펴고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맞은 종이 그동안 자기를 사랑해 준 주인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자유롭게 되기를 포기하고 자진하여 그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기로 결단하며, 그 귀에 구멍을 뚫으며 서약하는 종의 모습입니다 빚으로 팔려온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 가족이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분량의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예 청년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자비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주인은 무시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이 어린 종을 사랑하고 보살펴주었습니다. 때가 되니 결혼도 시켜주었고, 자녀도 낳았습니다. 빚으로 팔려온 종의 신분이었지만 주인의 어질고 자비한 마음과 아껴주는 사랑의 큰 빚을 지며 주인의 집에서 주인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6년이란 세월이 이렇게 흘렀고, 이제 히브리 율법의 노예규정에 따라 주인은 이 종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 젊은 종은 지난 6년을 되돌아봅니다. 이 주인을 만나기 전, 그는 이 집 저 집으로 팔려 다니면서 절망스럽고 무거운 삶을 살아왔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 주인을 만나 후, 세상과 자신을 향한 저주, 원망, 불평이 사라졌음을 봅니다. 사랑으로 보살펴주고 자비로 끌어 안아주고 사람대접 받으며 살게 해 준 주인의 은혜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격려와 위로를 받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맞이하게 해 준 은혜, 태어나는 자녀들을 기쁘게 받아 준 사랑을 기억합니다. 지난 6년 동안 이 주인에게서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 종은 이 주인을 떠날 수 없다는, 떠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말 합니다 “나는 주인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아니 떠날 수 없습니다. 주인의 그 큰 사랑을 받은 나, 주인님을 진심으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주인님을 떠나 사는 것보다 주인을 모시고, 이 집에서 사는 것이 나에게 더 큰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내가 주인을 떠나 어디에서 이 감사, 이 사랑, 이 감격, 이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므로 주인님을, 이 집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하고 고백하는 종이 있거든 그의 귀를 문기둥에 대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뚫으라! 그리하면 영원한 종이 되리라. 신명기 15:17, 출애굽기 21:6의 말씀은 주인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영원한 종이 되기를 원하는 종에게 행해졌던 의식이며, 또한 죄와 죽음의 노예였던 우리들을 당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루시며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참 헌신의 귀한 원리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1. 자발적이고 자의적인 섬김입니다. 억지로의 섬김이나, 목적을 가진 섬김은 무거운 짐이요, 고통이며, 또한 복 받기를 원하는 목적의 섬김은 투자입니다. 억지로 종을 잡아두거나 사정하여 머물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네 종이 너와 네 집을 사랑하여 너와 동거하기를 원하거든’이 유일한 조건이며 또한 영원히 주인을 섬길 수 있는 자격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너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다 받았은즉’, 내 삶, 생명, 가정, 재능, 물질, 기회, 성취… 특히 구원의 은총, 구속함을 통한 자유함….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받은 것임을 깨닫고 더 이상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며 내 삶의 주권을 내 자신에서 하나님으로 옮겨서 내가 주인이 된 삶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삶으로 나 제일주위에서 하나님 제일주의 원칙으로 주인이 아닌 종의 삶을 살겠다는 자발적이며 자의적인 결단이 헌신입니다. 어떻게 이런 결단이 가능할까요? 이런 결단을 할 수 있는 동기가 무엇일까요? 2. 사랑이 그 동기입니다 라헬을 사랑하므로 7년을 하루 같이, 그리고 그 다음 7년을 또 하루 같이 야곱은 머슴으로 일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하늘의 영광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영광의 왕관대신 고통과 수치의 가시관을 쓰시고 화려한 깃발대신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시고 경배와 높임대신 침 뱉음과 회초리를 받으시며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모두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허락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이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세주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 왕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며 부활의 영광을 맛보려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거짓과 더러움, 욕심과 교만, 어리석음과 악함으로 멸망의 길에서 헤매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기에, 우리들을 죄 중에서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며 우리 인간들을 죽음에서 살리시려고 이 수치와 억울한 고난을 자진하여 받으신 것 아닙니까? 사랑은 사랑으로 답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답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사랑 이외엔 없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돈으로 답하고, 열심으로 답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데 헌신한다고 착각합니다. 또는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에 헌신해야 한다고도 착각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지 남편을 위한 일에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랑하면, 그의 뜻에 맞추게 되고 그를 위한 일에 모든 것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니”,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하신 물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박한 지식이나 세상적인 똑똑함이 아닙니다. 큰일을 해 낼 수 있는 능력이나 자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 하늘나라 일꾼들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인 지식이나 교리에 따른 종교생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적으로 배우고 깨달은 진리를 받아들이며 가슴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감격하여 그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감사의 사랑운동입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정죄함과 교만으로, 사랑 없는 진리는 독선으로 이어지며, 사랑 없는 평화는 거짓된 속임수임을 우리는 압니다. 사랑은 감성적인 느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희생의 원동력이며, 상대방의 뜻에 온전히 일치시킬 수 있는 순종의 비결이며,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자기부인의 원천적인 힘이며, 상대를 닮아가는 변화의 기본적인 힘입니다. Christian은 Christ-like, 즉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의 뜻 아닌가요?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그리스도 닮은 모습은,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함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문설주에 귀를 대고 구멍을 뚫어야 합니다. 여기에 피로 붉게 물들여진 기둥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흘리신 예수의 보혈로 붉게 물들여진 십자가 기둥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한 그의 사랑을 알게 된 우리는 이 십자가를 떠날 수 없으며 또한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피 묻은 기둥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께서 저를 그토록 사랑하셨으니, 나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영원토록 주님만을 섬기며 살기를 원합니다. 내 귀에 영원한 종의 표시인 구멍을 뚫어 주십시오.” 이렇게 다짐하는 것이 귀를 뚫는 것이요, 헌신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영원한 종의 표시인 이 구멍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어리석고 미련한 실패자의 표시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그 영광의 날,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을 대하는 날, 우리 귀에 뚫린 그 상처 난 구멍에 하늘의 귀한 보화들로 찬란하고 아름다운 귀 거리를 만들어 장식해 주실 것입니다. 추한 상처자국이 아닌 빛나는 훈장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 나는 하나님께 향한 더 뜨겁고 더 큰 사랑을 느끼고 싶다 나는 하나님을 향한 더 뜨거운 정열을 가지고 싶다 이 시대의 죄와 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내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통해서만 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아! 나는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 주님께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영국국민을 사랑하여 영국의 운명을 바꾸어 낸 요한 웨슬레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기쁨이 되어드리는 것도,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힘도, 나를 이길 수 있는 힘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사랑의 선물로 인류에게 보내주신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째 주일에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의 고백과 결단으로 우리 귀에 구멍을 뚫으십시다. 혹시 이미 오래 전에 뚫었던 구멍이 점점 작아지고 막혀져서 그 흔적이 흐려지지는 않았는지, 또는 영원한 종이 되겠다는 결단으로 뚫었던 귀 구멍에 세상을 더 사랑하고, 나를 더 사랑하는 귀걸이가 걸려있지는 않는지 살피십시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생명까지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어린 양, 아기 예수께 뜨거운 고백을 드립시다. “주님, 우리는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누가 참 신앙인인가?/ 바리새인 남자와 죄인 여자/ 눅8:1-8/ 2012-02-21
누가 참 신앙인인가?/ 바리새인 남자와 죄인 여자 눅8:1-8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자타가 공인하는 신앙인이며 율법 선생님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을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적인 행위의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당시 유명해진 예수님을 초청하는 일은 누가 보기에도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타당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쫒아내는 선지자 같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분위기 속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동네에서 잘 알려진 죄인인 여자였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경직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의 눈길이 이 여인의 움직임에 쏠렸습니다. 이 여인은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예수님의 발을 적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구부려 앉아서 자신의 머리털로 너무도 소중하게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발에 온 마음을 담아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전 재산인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천천히 정성을 다 해 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전혀 기대치 않았던 이 장면을 불편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죄인인 여자가 예수님을 만지는 모습, 그리고 그의 만지는 것을 허용하는 예수님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 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을 진자와 오십 데나리온을 빚 진자가 있는데 빚 주는 사람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는가? ”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이 질문에 마음이 찔려 대답하였습니다. “많이 탕감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1. 많이 탕감 받는 자가 되자. 우리는 죄를 탕감 받은 자가 되어 감사함으로 예수님께 나아 가야합니다. 죄는 빚입니다. 빚진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진정한 감사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은 겸손함으로 진정한 사랑을 표현할 줄 알게 됩니다. 탕감 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늘 죄에 대한 인정함이 있어야합니다. 계속해서 겸손함으로 우리의 모습을 살피고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깨지기 쉬우며, 늘 옳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인지 우리의 모습을 인정해야합니다. 이 이야기 속의 바리새인 남자와 죄인 여자는 당시에 살던 두 사람의 모습을 극명하게 비교해 줍니다. 바리새인 남자는 자신을 의인이라 여기며, 죄를 가리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인 여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며, 죄를 드러내며, 항상 자신은 문제가 있으며, 하나님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 남자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겨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율법을 지켜내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살고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소통하기 가장 힘든 사람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많은 죄가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이는 외부로 드러나거나 다른 사람이 지적할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한 외적 차원을 벗어나 나의 깊은 내면 속에 틀어 박혀있는 죄를 보아야 알 수 있는 죄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태도에서 나오는 죄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모습은 그 곳에서 결정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나의 마음을 감찰하여 주소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합니다. 그러할 때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부족한 존재이며 죄 가운데 헤메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한 태도를 갖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나의 은밀한 죄들을 드러내시고 느끼게 해주십니다. 내가 느끼는 그 많은 죄를 예수님은 기꺼이 사해주십니다. 많은 죄가 사하여 졌다는 사실을 알면, 감사함으로 가득해 몸 둘 바를 모르게 됩니다. 이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무엇이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진정한 죄인의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신앙인의 모습을 가진 사람입니다. 2.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자. 바리새인은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킬 것은 다 지키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명하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 지키려하고, 경건의 생활을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더럽다 여겨지는 것은 피하고 거룩함을 유지하느라 애를 씁니다. 그는 외부에서 볼 때 완벽하며 누구의 지적도 받을 필요 없이 온전하게 종교적인 행사들을 감당해 냅니다. 그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별반 필요 없습니다. 여기에 등장한 여인은 늘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같은 사람을 용납해주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께 깊은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 앞에 서있는 것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겸손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깨닫는 많은 죄를 용서함 받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에서 우러나오는 최대한의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예수가 없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소망이 없는 사람이 되고, 결국에는 생명을 잃고 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3. 많이 사랑하는 자가 되자.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세 가지 면을 지적하면서 이 죄 많은 여인과 비교하셨습니다. “첫째, 너는 내가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으며, 둘째,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지만, 이 여인은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고, 셋째,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무엇이 바리새인과 이 여인의 행동을 다르게 하였습니까? 그것은 죄를 용서함 받은 감사한 마음 때문입니다. 받은 구원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죄를 깨달아 알면 더 큰 은혜가 임합니다. 더 큰 감사가 넘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주님께 많이 표현하고, 많이 감사하고 많이 사랑하길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라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표현하고 사랑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적용과 나눔 ◎ 지금 내게 있는 죄를 얼마나 깊이 인정할 수 있습니까? ◎ 나의 삶에서도 예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눈물로 기도했던 일들을 나누어 봅시다.
롯의 아내를 보라/ 여자 하기 나름이다/ 창19:24-38/ 2002-09-06
롯의 아내를 보라/ 여자 하기 나름이다 창19:24-38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 모두 4명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무사히 빠져 나왔지만 뒤를 돌아보지 마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그만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멸망의 성에서 구원은 받았지만 뒤이어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죄에서 구원받고,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온갖 좋은 축복들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과 같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삶에 실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롯의 아내는 애석하게도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지만 남은 롯과 그의 두 딸은 항상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자식의 자식을 보았는데 그 후손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무개였더라\"고 해핀엔딩으로 끝이 났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그 반대였습니다. 롯의 아내만 삶에 실패자가 된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던 그의 남편 롯과 두 딸까지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그 원인이 롯의 아내에게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된 이후에 롯과 두 딸의 삶을 살펴보면! 1.그들은 피신했던 소알성에서 거처를 산 위에 있는 토굴로 옮겼습니다.(30) 소알성은 어떤 성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가자 가까운 성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때 함께 멸망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는데, 롯의 가족들이 멀리 도망가기 힘드니 소알성으로 피신하게 해 달라는 요청에 의해 멸망되지 않은 성입니다. 그런데 롯이 두 딸과 함께 그 성에 피신을 하였는데, 그곳에 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장 큰 원인은 마누라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누라 잃어버리고 두 딸과 함께 사는 것이 막막합니다. 마누라도 하나 지키지 못한 남편이라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도ㅓ히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속 굴속으로 들어 가 살았습니다. 남편 없는 아내는 살아도 마누라 없는 남편은 못삽니다. 마누라한데 남편들이 큰 소리 뻥뻥 쳐도 없어봐요. 꾀재재해 가지고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니 아내들은 나 없으면 저 남자 불쌍하게 되는 줄 알고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남편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나 없으면 사는가 두고봐라.\" 하면서 독을 품고 문 걸어 잠그고 들어 않았지 마십시오. \"아니구 나, 나 없으면 불쌍하지\"하면서 측은하게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롯을 보라. 마누라 없으니까? 사는 것이 겁이 나서 굴속으로 기어 들어갑니다. 그만! 뒤돌아 봐 가지고 남자하나 완전히 신세 망쳐놓았습니다. 굴속으로 들어가는 롯의 어깨가 얼마나 작아 보입니까? 2.두 딸의 신세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31-36) 소알성에 살았다면 총각 만나 결혼해소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것이고 롯은 손주 안아주면 서 살 것인데 토굴 속에 있으니, 남자라고는 아버지 롯 밖에 없으니 두 딸이 생각하니 \'가만히 있다가 몽달귀신 되겠다\' \'대가 끊기겠다\'등등으로 고민하다가 아버지에게 술을 잔뜩 먹여 가지고 동침하여 자식을 낳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집안에 엄마가 없으니까! 엄마 없으면 베지밀(콩가루) 가족이 됩니다. 고마! 뒤돌아 봐 가지고 멀쩡한 두 딸을 완전히 버려 놓았습니다. 아내 없는 남편 불쌍합니다. 엄마 없는 자식 불쌍합니다. 엄마들이여! 그대들은 위대한 여인들입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사십시오. 3.자손 대대로 저주받은 집안이 되었습니다.(37-38) 이 두 딸이 낳은 아들이 각각 모압자손의 원조가 되고 암몬자손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모압과 암몬자손은 자손대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족속의 대표주자가 되었습니다. 그 엄청난 재앙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는데, 어찌 그들의 후손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손이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한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한 여자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도 이렇게 철저히 망가지지 않았습니다.(물론 남편 롯도 잘한 것 하나 없지만!) 오늘 여전도회 헌신예배이기에 이 말씀을 드립니다. 어떻게 살면 될까요? 1.아내들이여, 엄마들이여 세상에 헛된 욕심부리지 말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신명기 28장에 복을 받습니다. 들어가도 복, 나가도 복, 네 자식들이 복을 받고, 집안에 가축도 복 받고, 내 집에 오는 손님도 복 받고, 네 집 창고, 네 손으로 하는 일에 복 내리시고,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리니 오직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라 2.하나님께서 포기하라시는 것에 미련을 가지지 마십시오. 소돔과 고모라성에는 사람들도 있고, 짐승들도 있고, 온갖 좋은 보화도 있고, 화려한 집도 좋은 옷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고 폐기 처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롯의 가족들에게 그런것에 미련을 갖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다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아이구 아까운 것하며 뒤돌아보는 순간 그녀는 Nacl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는 포기할 것 포기하세요. 먼저 하나님나라를 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안에 다 있습니다. 3.앞만 보고 달려가세요. 사무엘상6장에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았다가, 온갖 재앙을 만나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려보낼 때에 수레를 만들고 아직 젖먹이는 송아지가 딸린 두 암소를 선택하여 송아지 떼어 가두고 수레를 끌게 하였는데, 두 마리의 암소는 블레셋지방에서 벳세메스라는 이스라엘 지방으로 가면서 젖이 퉁퉁 부어오르고 송아지가 생각이 나 울며 울며 갔지만, 두 마리의 소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벧세메스를 향해서만 갔습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 기웃거리고 저것 기웃거리고,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언제 기도하고 언제 헌신합니까?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예수 안에 다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녹아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롯의 아내를 생각하십시오. 가정이 잘 되는 것 여자하기 나름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자가 되세요. 아내가 아무리 뺀지리해도 남자가 어리하면 빛이 나지 않습니다. 엄마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자식들이 신앙에서 떠나 있으면 빛이 나지 않습니다. 엉뚱한 일에 에너지 쏟지 마시고 말씀듣고, 말씀보고. 기도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으십시오. 기도하는 아내가 있는 남편, 실패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자식, 망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포기할 것 포기할 줄 알고, 푯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자가 되셔서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루디아처럼/ 잠31:11-31, 행16:11-15/ 여전도회헌신예배설교/ 2010-01-23
루디아처럼 잠31:11-31, 행16:11-15 오늘은 제1여전도회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여전도회가 한국교회 속에 조직된 것은 꼭 백년 전의 일입니다. 1898년 평양 장대현 교회(널다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오늘날 이같은 한국교회의 성장 발전이 각 교회 속의 여전도회의 눈부신 활동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각 교회의 여전도회는 은밀하게 전도와 기도 그리고 봉사활동에 힘을 썼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맞이해서 오전 예배 빌립보서 본문의 배경이 되기도 하지만, 구라파의 최초의 신자요, 최초의 교회를 세웠던 루디아의 신앙을 생각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발전, 신일교회의 부흥은 루디아와 같은 신앙을 가진 수 많은 여신도들에 의해서 비 롯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제1여전도회 성경공부반 이름은 \\\\\\\'루디아\\\\\\\'입니다. 그렇다면 루디아의 신앙은 어떤 것인가? 오늘 우리들의 본문(행16:11-15)의 13절-15절을 보면, 거기에서 루디아의 신앙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행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 들에게 말하더니 (행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 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 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바울이 복음을 마게도냐에서 전하는데,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서 기도하려고 문 밖 강가에 나 가보니 모인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아디라 성에서 온 자색 옷감 장수 루디아라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공경해 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그래서 루디아가 귀를 기울이고 들었는데, 주께서 그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바울이 말하는 것을 다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루디아가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말하기를 \\\\\\\"만일 저를 주님의 충실한 신도로 여기신다면 제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무척 간곡하게 청하였으므로 바울의 일행은 그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루디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루디아는 이방여인인데,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개종을 한 것입니 다. 어떤 연유로 인하여 이방신을 섬기던 자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란 ? ①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인(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란 말이 고, ②\\\\\\\"경건한 여인\\\\\\\"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한 여인은 하나님께 대하여도 순종하는 믿 음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이 경건한 사람은 함부로 지껄이지 않고 몸과 마음가짐이 단정하고 매 사에 규모가 있고 절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경건치 못한 여인은 하나님께 대하여 방자하고, 게으르기 쉽고 이집저집 돌아다 니며 수다를 떠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을 합니다.(딤전 5:13) 오늘 또 다른 성경말씀인 잠언 31장 11-31절에 보면, 현숙한 여인, 경건한 여인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잠31:1) 르무엘 왕의 그 어머니가 르무엘을 훈계한 잠언입니다. 어떤 여인이 현숙 한 여인입니까? (잠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현숙한 여인이란, (1)선을 행하는 여인 (2)부지런한 여인 (3)집안 식구들을 잘 보살피는 여인 (4)빈궁한 자에게 넉 넉함으로 베푸는 여인 (5)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여인 (6)입을 잘 다스려 지혜와 인애의 법을 말하 는 여인 (7)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 (8)그리하여 동네에서 칭찬을 받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여인은 사람들에게도 함부로 말하거나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여인은 하나님에게도 인정을 받으며, 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무시를 당하지 않습 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남편에게 자식들에게 업수이 여김을 당하지 않고 칭찬과 존경 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루디아처럼 하나님을 공경하는 현숙한 여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잠31:28-30 \\\\\\\"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을 칭찬하기를 덕행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 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고운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둘째는, 루디아는 하나님의 말씀(부름)에 경청하여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 아드린 여인입니다. (1)귀가 열린 여인 (2)마음이 열린 여인 (3)복음을 받아 들인 여인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드리는 과정-한 인격이 말씀으로 변화를 받는 과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①말씀에 청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 건성으로 듣지 않는 참으로 진지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세상의 본것이 많고, 들은 것이 많고, 우리를 혼란스럽게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 에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기가 힘듭니다. 우리들의 일에 분주해서 바빠서 시 간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듣기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긴장하고 집중해서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귀가 열리지 않고 마음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②루디아는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셔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다 받아 들이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을 열게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받으려면 우리가 해야할 일로는 준비하는 일=경청하는 일, 들으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겸손한 마음입니다. 빈 마음입니다. 집중하는 마음입니다. 진지한 태 도,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말씀을 사모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럴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게하시고, 귀문을 열어 말씀을 듣게하며 그 말씀을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설교를 들을 때 루디아처럼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 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루디아는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자신 뿐만 아 니라 온 집안 식구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이가 이방인으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믿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라고 고백하고서 그 즉시로 세례를 받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는, 공 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온 식구를 예수 믿게 하고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셋째로, 루디아는 가지고 있는 부를 가지고 이웃 사랑을 실천한 여인입니다. 행16장 15절에 \\\\\\\"만일 나를 주 믿는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구라파에서는 귀한 손님이거나, 아주 가까운 손님은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함께 나누고, 집에 서 손님을 흡족하게 합니다.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여관방으로 손님을 모시지 않습니다. 루디아는 전도자들를 참으로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루디아는 많은 부를 가고 있는 자로 생각됩 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주장사였습니다. 그 당시 자주장사라고 하면 많은 자금이 있어야만 했습니 다. 그러므로 그는 부한 여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이 결코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선용할 때 돈은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루디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를 가지고 자랑하고 교만히 행하지 ㅇ낳고, 선교를 위해서 이웃 사랑을 위해서 사용한 모범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경건한 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를 가지고 사치하거나, 과소비하거나, 허세를 부리 며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잠언 31편의 현숙한 여인 같이 절제하며, 규모있게 단정하게 살아갑니 다. 루디아는 그 대표적인 여인이라 생각합니다. 이같은 루디아의 이웃사랑의 실천을 본 받아서 우리 여전도회가 이웃사랑실천을 더욱 잘해야 겠 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루디아 반 여러분, 여러분들이 현숙하고 경건한 여인 루디아의 믿음을 본 받으시기를 축원합니 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여인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온 가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을 하며, 내가 가지고 있는 귀한 것들로 복음을 위해 사용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여전도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여인의 가치는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잠31:21) 그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집 사람을 위하여 두려 워하지 아니하며 이런 현숙한 여인이 있는 그 자녀와 남편은 그 어머니와 아내로 인하여 복될 것입니다. 또 이런 성도가 있는 그 교회도 참으로 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전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잠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잠31:30) 고운 것 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 31:31)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 리라.
마르다야, 마르다야!/ 눅10:38-42/ 강순욱 목사/ 일광감리교회/ 부산동지방회 여선교회 계삭회 설교/ 2010-09-29
마르다야, 마르다야! 눅10:38-42 오늘은 참으로 큰 기쁨의 좋은 날입니다. 이렇게 귀한 날을 저희 교회가 섬기게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오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오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1. 이 자리는 무엇보다 역사적 자리입니다. 125년 감리교 선교에 있어서 감리교 여성들은 이러한 계삭회를 통하여, 한국사회의 수많은 질곡들을 이겨내고 나라와 교단, 교회를 올 곧게 세우는 일에 귀하게 쓰임받는 자리였습니다. 2. 연합의 자리입니다. 한국교회는 점점 개교회 중심주의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영적폐해들을 양산해놓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수평이동, 무한한 경쟁들은 하나님 선교에 있어서 법과 질서를 어긋나게 하고 있습니다. 계삭회는 지방의 여선교회가 순수한 마음으로 모여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임을 확인하고 하나되는 사랑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남자인 제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여자들 만 있는 자리에 선 것은 처음입니다. 참 떨립니다. 지방의 많은 목사님, 남자평신도들도 안 오셨지만 여선교회의 계삭회가 차지하는 역사성, 연합성을 다 아시기 때문에 모두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귀한 자리를 저희교회가 섬기게 되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마르다라는 여인은 참으로 현숙한 여인입니다. 현숙하다, 이해가 되실줄 모르겠지만 성경적으로 볼때 분명 현숙한 여인임은 분명합니다. 현숙한 여인을 찾으려면 잠언서를 찾으면 됩니다. 잠언은 인생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총 31장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찾으려는 자들이 한 달동안 한 장씩 묵상합니다. 거기서 맨끝 31장은 르무엘이라는 왕에게 그의 어머니가 훈계한 내용인데 술마시지 마라, 가난한자의 재판을 신원하라. 그러다가 네 아내는 현숙한 여인을 얻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숙한 여인의 대명사하면 잠언 31장입니다. 현숙한 여인이란 무엇일까? 행동이 조신한 여인일까? 아니면 요즘 말하는 미시족처럼 예쁘고 갸날프지만 지혜가 충만한 여인일까? 잠언 31:15에 보면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주며, 밭을 살피고, 포도원을 일구고 등등” 힘있게 허리를 묶고 밤늦게까지 장사를 하는 여인을 말합니다. 여기서 현숙한 여인 히브리어로 에세트 하일인데 이는 튼튼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농경사회이다. 여기서 주식은 당연히 밀가루로 만든 빵. 이 빵을 만들어서 가족에게 식사를 해주어야 합니다. 성경시대에 유일하게 밀가루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맺돌질이다. 집집마다 있는 손 맷돌을 가지고 있어서 여인들은 빵을 해주기 위해서 이 손맷돌을 돌려야 합니다. 한 시간에 땀흘리고 갈면 800g이 나옵니다. 하루 한사람이 먹는 밀가루의 양이 500g이었다. 그러니까 보통 6인 이상의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을 다 해먹이려면 하루 최소한 4시간을 밀을 갈아서 밀가루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현숙한 여인은 식구들이 모두 자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야만 가족들에게 밥을 해줄수 있었습니다. 확신컨대 하루에 최소 4시간 이상 맷돌질로 단련한 여인들.... 이들은 하루하루가 고되고 힘들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믿고 날마다 성실히 맷돌질을 하는 정말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집집마다 새벽이 오기전부터 맷돌질 소리가 삭삭 나는 것. 이것은 여인들의 고통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나라가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전쟁때에는 지독한 흉년 때에는 맷돌질할 밀조차 구경하기 힘든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일상의 평안과 행복과 안정을 간구하는 여인들의 마음이 담겨져있는 기도입니다. 또 그렇게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육체적 건강과 힘을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여인의 수고를 통해서 양식을 먹게 되는데, 고대근동에서는 무엇보다 손님접대를 또 가장 큰 축복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손님을 잘 접대하여 믿음의 기업을 이루었지요.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은 지금도 손님을 대접할 차와 과자는 항상 준비해놓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그 집에 나그네로 손님으로 왔으니 영광중에 영광이요, 마르다는 분명 복 받을 기회 찬스를 얻은 것입니다.(38절) 보통 유대인이 다 그러듯, 마르다도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강한 팔로 맷돌질을 하며 빵을 준비했습니다. 문제는 동생 마리아가 있었는데 이 여자가 안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좋다고 남자들이나 듣는 예수님 앞에 가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마르다가 그만 실수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나그네, 예수님을 영접하여 복을 받을 자리인데 그만 그 복을 발로 차고 말았습니다. 1. 마르다가 예수께 탄원하였습니다. 마리아의 잘못을 지적하면서(40절) “나를 도와주라 명하소서.” 마르다는 지금 힘들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잘못이 있으니 1)사람을 비판함이요 2)힘들다고 예수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결국 예수 믿는 것에 시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복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시험거리가 되고 만것입니다. 여선교회 여러분 혹시 이런 일 없으십니까?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기분에 굴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분>입니다. 하나님 나 기분 나쁜데요, 기분이 별로 인데요. 이거 어쩌라는 것입니까? 기분이란 솔직히 말해서 기도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반복하면 더 기분이 나빠질수도 있습니다. 기분은 발로 차버려야 떠납니다. 기분은 언제나 물리적인 조건과 깊은 관계가 있지 도덕적, 영적 내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기분에 말려들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결코 한순간이라도 기분에 굴복되어서는 안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기분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대부분의 불행은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 때문에 옵니다. 각 교회마다 여선교회가 많은 사업을 하고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니까 그 원조가 1919년 이후 애국부인회 사건이더라구요. 삼일운동이후 어떻게 하면 한국의 독립을 도울까해서 여선교회는 금은가락지와 비녀를 뽑고 머리를 자르고, 뜨개질해서 점조직으로 돈을 모아서 독립운동에 보내주었습니다. 당시 2원에 쌀한가마니할 때 독립자금으로 1년동안 감리교 여선교회가 모은 것이 무려 2,400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여선교회 사업을 한다고 시험에 들고, 봉사를 하면서 시험에 들고, 헌신을 하면서 시험에 듭니다. 왜? 이 자리가 복을 받을 자리인데 우리가 기분에 굴복해버리는 것입니다. 그 기분을 영적인 결단력, 담력을 가지고 발로 차버리시기 바랍니다. 끝없는 섬김. 본질로 자꾸 돌아가야 합니다. 2. 원인은 마음이 분주한 것이다.(41절) 대접의 원리는 무엇보다 항상 깨끗한 마음, 투명한 마음으로 대접해야 합니다. 아니면 순수성이 사라진 접대용 멘트나 날리는 형식이 되거나, 어떤 이기적 목적을 가진 뇌물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복받는 길이 나그네 대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에서 대접해야지 마음에서부터 이미 지저분하다. 왜? 사람이 끼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마리아가 없었더라면... 혼자 신나게 했을 것이다. 그럼 나 혼자만의 세상은 아니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끝까지 남은 섬기고 나를 깨끗하게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일에 인생을 거는 사람, 세상에 매이지 아니하고 오로지 오직 예수, 오직 은혜 거기에 인생을 투자하는 사람, 여호와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늘의 영적인 파워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복음의 탕자가 너무 많은 시대다.(42절) 원인은 사명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마음보다 내 마음에 드는 것에 집중하는 시대입니다. 탕자가 집을 떠나야만 탕자가 아니지요. 이미 마음이 떠나면 그게 탕자입니다. 마음의 집중. 한가지 일이라도 충실히 합시다. 대접하는 것이 복 그러면 그거하나, 나는 말씀듣는 이 최고다. 그러면 거기에 충실합시다. 여기까지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 모셔놓고 마르다가 마음에서 갈등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마르다야! 마르다야! 제가 실수할 때 주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 순욱아 순욱아 누가 저보고 강하고 순하고 욱해서 강순욱이라고 하더라구요. 강하구 순하구 욱해서 강순욱이 아니라, 강씨이구요. 제가 강씨집안에서 최초로 예수님 믿은 사람입니다. 순자 돌림집안인데 넓은 순 빛날 욱 해서 순욱입니다. 넓게 빛나라 그래서 빛마을 일광에 온 것 같습니다. 목회하면서 늘 실수할 때, 순욱아! 순욱아! 그 음성을 듣습니다.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하지만 또한 따뜻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사랑의 주님을 만나고 다시 한번 주님께 집중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부르신 주님의 음성을 들은 마르다는 이제 주님만 바라봅니다. 봉사를 하던 예배를 드리던, 세상에서 일을 하던 그의 삶의 자리는 늘 주님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7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은 고백. 주님만을 집중하는 여선교회위에 진정 소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마리아의 눈물/ 눅1:46-56/ 여전도회헌신예배설교/ 2007-01-18
마리아의 눈물 눅1:46-56 세상에는 주님을 위해 산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주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생명도 드리고 재산도 드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누구보다도 주님의 모친이셨던 마리아 보다 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이 시간 우리들이 마리아의 헌신이나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너무 많이 있지만 마리아의 헌신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헌신 생활에 가일층 진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예배에 제목을 「마리아의 눈물」이라고 한 것은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 마리아 하면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 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눅1:38) 가브리엘의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소식을 점하고 한 이 말은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주의 계집종의 순종’이였습니다. 이 순종은 절대적인 순종이요 영원한 순종이며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무한대의 순종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 말로 자기 마음을 표시한 후에 마리아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습니까? 남자를 알지 못하는 결혼을 앞둔 순결한 처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을 하고 드디어 아기를 해산했습니다. 주님께서 잉태하셨을 때 마리아는 언니를 찾아 간 일이 있었습니다. 자매가 오랜만에 만나 그 동안 되어진 일들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언니를 찾아 간 일을 성경은 보통 여인들이 할 수 잇는 일로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에 의심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사도 아니오 완전한 사람도 아닐진대 어찌 아기를 잉태하여 고민과 염려가 없었을 것이며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지라 언니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리아를 위해 놀라운 확신을 주셨습니다. 제사장의 부인이요 믿음의 사람인 언니에게는 이미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세례 요한이 잉태 되여 있었는데 그 세례 요한을 통해 마리아가 잉태하고 있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심으로써 마리아의 염려와 근심을 덜어 주시고 넘치는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맡은 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따라 올 수 있는 희생과 헌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고독이요, 외로움이요, 오해며, 어떻게 보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청년처럼 오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름에 있어 있을 수 있는 ‘버리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주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버리는 고통’을 각오해야 참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2. 마리아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를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기도, 약속의 기도, 묻는 기도, 소원의 기도가 아니라 찬양의 기도, 순종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 고백적인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죄인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큰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너무 크고 찬란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오는 고통이나 괴로움은 생각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쉬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당하는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일들을 나열하면서 피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 틀린 기도들입니다. 그런 기도는 자기 과신과 불 신앙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종됨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넉넉하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며, 우리가 자격이 있어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뜻을 이루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른 막대기를 쓰시기도 하시고 당나귀를 쓰시기도 하시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쓰시기도 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지랭이 같은 자기를 불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을 하게 하신 일에 대해 “주님의 계집 종”의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연구하지 말고 핑개하지 말고 주님의 일군 되였다는 그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정말 겸손하고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3. 지혜로운 어머니입니다.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 가니라.”(눅1:56) 그것은 언니인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로서 마리아는 하나님에게 3개월 간 헌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언니와의 신령한 교제 생활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가장 지혜롭고 총명한 처신이 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일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아기가 잉태하면 대부분 엄마들은 책을 서서 보고, 태아 교육을 한다고 하는데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 일을 한 것입니다. 4. 자식을 하나님에게 바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8일 되던 날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모시고 성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위해 결례를 행했습니다. 그 때 시므온이라는 노인 선지자를 만났는데 그 분이 예수님에 대해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 2:35]” 그렇게 하나님에게 되도록 바칩니다. 이 예언의 말 가운데 효도한다. 이 아이 때문에 부모가 영광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에게 바친 제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들의 지식을 하나님에게 바친 제물이 되게 하십시오. 5. 마리아는 사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늘 생각하는 소위 호강이라는 것을 해 보지 못했습니다. 늘 슬프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가난하게 자라신 예수님, 핍박당하신 예수님, 죽으신 예수님, 딱 한 번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 그 모습을 보시고 기뻐 하셨겠으나 그 때 예수님은 이미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이셨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서도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슬픔이나 고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오직 말없이 애타 하시고, 떨어지지 않는 눈물을 깊이 삼킬 뿐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제자들의 음식 시중, 빨래 시중등 온갖 시중을 들면서 혹시나 자기 때문에 주님의 일에 지장 될까 염려하는 계집종이요, 어머니요, 헌신된 한 여인의 길을 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바랍니다. 주님의 종된 것만으로도 찬송을 해야 하는데 작은 일을 하고 큰 것을 바라고, 적은 봉사를 하고많은 것을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시험에 들고 불평이 생기고 터부니 없는 자기 평가와 보상 심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이 하나님의 일을 잘 하는 것만 바라시도록 하십시오. 자식이 부모님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합니다만 더욱 은혜가 깊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자식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해 줘야 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계집종으로 살뿐입니다. 물른 자식은 부모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자식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예수님을 대하시고 예수님은 죽으시면 서도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시고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효도를 하셨습니다. 6.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은 마리아의 기쁨이요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어머니의 생명이 하나였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 하니라[눅 2:19]”.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하여 모든 것을 마음에 생겼느냐 가 중요합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의 생명과 하나 된 어머니의 생명에서는 여러분들도 마리아 못지 않은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고 왔습니다. 아이는 그 일을 잊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복수를 했습니다. 그런 것을 마음에 두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라나는 예수님의 믿음과 사랑과 기도와 은혜들을 기억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자식을 보는 기쁨이 어디에 있으며, 슬픔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들에 대한 애정 깊은 존경심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자식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놀랍게도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들의 세속적인 일들로 인해 희로애락하고 자식들의 장래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썩어질 것에 두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못하는 자식을 보는 두려움이 있어야 자식의 신앙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될 것이요,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식에 대한 슬픔 때문에 울며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것, 건강치 못한 것, 다른 아이들 보다 잘 생기지 못한 것, 심지어 어떤 어머니들은 어린 자식의 생일 파티를 일류 식당에서 못해 준 것 때문에 좌절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하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자식을 기른 그 어머니나 그런 어머니에게서 자란 자식들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입니까? 마리아 같은 어머니, 예수님 같은 아들들이 우리 교회에서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눈물/ 눅1:46-56/ 여전도회헌신예배설교/ 2010-01-23
마리아의 눈물 눅1:46-56 세상에는 주님을 위해 산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주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생명도 드리고 재산도 드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누구보다도 주님의 모친이셨던 마리아 보다 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이 시간 우리들이 마리아의 헌신이나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너무 많이 있지만 마리아의 헌신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헌신 생활에 가일층 진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예배에 제목을 얛마리아의 눈물얝이라고 한 것은 주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1. 마리아 하면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 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눅 1:38]\\\\\\\" 가브리엘의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소식을 점하고 한 이 말은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것주의 계집종의 순종겄이였습니다. 이 순종은 절대적인 순종이요 영원한 순종이며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무한대의 순종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 말로 자기 마음을 표시한 후에 마리아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습니까? 남자를 알지 못하는 결혼을 앞둔 순결한 처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을 하고 드디어 아기를 해산했습니다. 주님께서 잉태하셨을 때 마리아는 언니를 찾아 간 일이 있었습니다. 자매가 오랜만에 만나 그 동안 되어진 일들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언니를 찾아 간 일을 성경은 보통 여인들이 할 수 잇는 일로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믿음에 의심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사도 아니오 완전한 사람도 아닐진대 어찌 아기를 잉태하여 고민과 염려가 없었을 것이며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지라 언니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리아를 위해 놀라운 확신을 주셨습니다. 제사장의 부인이요 믿음의 사람인 언니에게는 이미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세례 요한이 잉태 되여 있었는데 그 세례 요한을 통해 마리아가 잉태하고 있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심으로써 마리아의 염려와 근심을 덜어 주시고 넘치는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맡은 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따라 올 수 있는 희생과 헌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고독이요, 외로움이요, 오해며, 어떻게 보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겁나를 따르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라겂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청년처럼 오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름에 있어 있을 수 있는 것버리는 고통겄을 감당하지 못해 주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버리는 고통겄을 각오해야 참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2. 마리아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를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기도, 약속의 기도, 묻는 기도, 소원의 기도가 아니라 찬양의 기도, 순종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 고백적인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죄인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큰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너무 크고 찬란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오는 고통이나 괴로움은 생각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쉬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당하는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일들을 나열하면서 피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 틀린 기도들입니다. 그런 기도는 자기 과신과 불 신앙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종됨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넉넉하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며, 우리가 자격이 있어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뜻을 이루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른 막대기를 쓰시기도 하시고 당나귀를 쓰시기도 하시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쓰시기도 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점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지랭이 같은 자기를 불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을 하게 하신 일에 대해 겁주님의 계집 종겂의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연구하지 말고 핑개하지 말고 주님의 일군 되였다는 그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정말 겸손하고 아름다운 헌신입니다. 3. 지혜로운 어머니입니다.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 가니라[눅 1:56]\\\\\\\" 그것은 언니인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로서 마리아는 하나님에게 3개월 간 헌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언니와의 신령한 교제 생활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가장 지혜롭고 총명한 처신이 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일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아기가 잉태하면 대부분 엄마들은 책을 서서 보고, 태아 교육을 한다고 하는데 마리아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 일을 한 것입니다. 4. 자식을 하나님에게 바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8일 되던 날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모시고 성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위해 결례를 행했습니다. 그 때 시므온이라는 노인 선지자를 만났는데 그 분이 예수님에 대해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 2:35]\\\\\\\" 그렇게 하나님에게 되도록 바칩니다. 이 예언의 말 가운데 효도한다. 이 아이 때문에 부모가 영광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에게 바친 제물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들의 지식을 하나님에게 바친 제물이 되게 하십시오. 5. 마리아는 사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늘 생각하는 소위 호강이라는 것을 해 보지 못했습니다. 늘 슬프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가난하게 자라신 예수님, 핍박당하신 예수님, 죽으신 예수님, 딱 한 번 예수님 부활하셨을 때 그 모습을 보시고 기뻐 하셨겠으나 그 때 예수님은 이미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이셨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서도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슬픔이나 고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오직 말없이 애타 하시고, 떨어지지 않는 눈물을 깊이 삼킬 뿐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제자들의 음식 시중, 빨래 시중등 온갖 시중을 들면서 혹시나 자기 때문에 주님의 일에 지장 될까 염려하는 계집종이요, 어머니요, 헌신된 한 여인의 길을 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바랍니다. 주님의 종된 것만으로도 찬송을 해야 하는데 작은 일을 하고 큰 것을 바라고, 적은 봉사를 하고많은 것을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시험에 들고 불평이 생기고 터부니 없는 자기 평가와 보상 심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이 하나님의 일을 잘 하는 것만 바라시도록 하십시오. 자식이 부모님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합니다만 더욱 은혜가 깊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자식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해 줘야 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계집종으로 살뿐입니다. 물른 자식은 부모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자식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예수님을 대하시고 예수님은 죽으시면 서도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시고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효도를 하셨습니다. 6.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은 마리아의 기쁨이요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어머니의 생명이 하나였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 하니라[눅 2:19]\\\\\\\".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하여 모든 것을 마음에 생겼느냐 가 중요합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의 생명과 하나 된 어머니의 생명에서는 여러분들도 마리아 못지 않은 것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고 왔습니다. 아이는 그 일을 잊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복수를 했습니다. 그런 것을 마음에 두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라나는 예수님의 믿음과 사랑과 기도와 은혜들을 기억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자식을 보는 기쁨이 어디에 있으며, 슬픔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들에 대한 애정 깊은 존경심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자식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놀랍게도 많은 어머니들이 자식들의 세속적인 일들로 인해 희로애락하고 자식들의 장래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썩어질 것에 두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못하는 자식을 보는 두려움이 있어야 자식의 신앙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될 것이요,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식에 대한 슬픔 때문에 울며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것, 건강치 못한 것, 다른 아이들 보다 잘 생기지 못한 것, 심지어 어떤 어머니들은 어린 자식의 생일 파티를 일류 식당에서 못해 준 것 때문에 좌절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하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자식을 기른 그 어머니나 그런 어머니에게서 자란 자식들이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입니까? 마리아 같은 어머니, 예수님 같은 아들들이 우리 교회에서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민족을 구한 에스더의 기도/ 에4:13-16/ 여선교회연합헌신예배/ 우국기도의달설교/ 2002-03-23
민족을 구한 에스더의 기도 에4:13-16 「우국기도의 달」”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 (에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4:15)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에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시대적 배경: 주전 722년경 이스라엘은 앗수르 왕에 의해 메대의 여러 고을로 잡혀갔다(왕하17:6). 이 고을들이 다시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하자(주전539)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주전605-562)은 일부 유대인들을 수산 동편의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아마도 이때 모르드개와 본 서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옮겨진 듯하다(2:5,6). 그러나 바벨론이 바사에 의해 멸망하고(주전539) 바사제국이 근동 전역을 지배하게 되자 이곳에 이주해 온 백성들은 다시 바사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당시 근동의 각지에 흩어졌던 수백만의 유대인들 가운데 약 5만명 정도는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따라 주전537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스2장). 귀환한 유대 백성들은 신정 왕국의 기틀이 될 뿐만 아니라 여호와 신앙의 교두보가 되는 성전, 즉 제2의 성전(스룹바벨 성전)을 주전516년에 재건했다(스6:15) 본 서는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첫 번째 귀환과 두 번째 귀환 사이)에 일어난 일이 기록된 것이다. <내용의 전개> 와스디 왕후가 페위되고 에스더가 대신 왕후의 자리에 오른다.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음모를 사전에 저지시키는 장면이 나오고 유대인 핍박을 주도한 하만이 등장. 모르드개와 하만 사이에 벌어지는 개인적 갈등(절하는 문제)으로 야기되는 하만의 유대인몰살 계획, 왕의 조서,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민족 구원의 노력, 유대인의 승리. 모르드개와 에스더: 에스더(=별을 의미하는 페르시야어 ’스타라’의 히브리어 음역인 듯)는 바사의 왕후가 된 유대인 고아. 그의 히브리 이름은 하닷사(=신부, 화석류 혹은 도금양(桃金孃) 나무 *어떤 유대학자는 사55ㅣ13을 해석하기를 잣나무는 모르드개, 가시나무는 하만, 화석류는 에스더, 질려(질藜)는 와스디를 상징한다고 해석함으로써 사55:13을 에스더가 유대민족을 하만의 음모에서 구출할 것을 예언하는 구절로 보았다.)였다. 바사 제국의 수도 수산에 살았는데, 그의 四寸 모르드개(말둑<마르투카>=바벨론의 主神)는 왕궁의 낮은 관리로서 에스더를 자신의 딸처럼 양육한 사람이었다(모르드개는 자기 3촌 아비하일의 딸(2:15) 에스더를 자기의 딸처럼(양녀로) 양육). 바사와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가 왕후 와스디를 페위하고 왕국내의 처녀들 중에서 새 왕비를 찾고 있을 때, 에스더가 간택되었다.--- (에2:7) 저의 (에2:5)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저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에2:6) 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에2:7)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더라 모르드개의 민족 구원운동: 재를 무릅쓰고 성중에 나아가 대성통곡함으로 동족 유대인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고, 왕후 에스더를 감동시켰다. 에스더의 민족을 구원을 위한 기도: 바사제국(페르시아제국) 내의 모든 유대인들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에스더는 동족을 구하는 역사를 이뤘다. *부림절(=제비): 아달월(2-3월)의 14,15일에 거행된 유대인의 절기. 사악한 하만의 음모에서 히브리인들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에3:7, 9:26). 이 날 에스더서 전부가 낭독되며 오락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선물증정을 행했다. 에스더의 민족 구원을 위한 기도운동: (에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의 시녀들도 에스더의 신앙적 지도에 따라 여호와 신앙을 갖게 되었다. 에스더는 왕궁에서 시녀들과 더불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왕의 부름없이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갈 때 용납될 수 있어서 왕에게 동족 구원을 호소할 수 있게 되기를 위해 금식기도를 전개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은 ①동족을 위해 희생을 각오 ②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리라는 결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본 서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으나 본 서 전체의 내용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전개’라는 주제가 진행된다. 본 서의 상징적 의미 ①에스더와 그리스도 : 에스더는 그리스도처럼 중보자적 역할을 감당함. ②하만과 적그리스도 : 하만은 적그리스도의 本色과 종말을 나타냄. <사단의 상징이 된 하만> *에7:6, ’이 악한 하만’= 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자음이 나타내는 숫자를 환산하면 ’666’이 된다. 이는 곧 짐승, 또는 적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수자다(계13:18). *또한 하만이 왕으로부터 큰 권세를 받고, 권세를 남용한 것은 바다에서 나온 한 짐승, 곧 적그리스도가 용에게서 큰 권세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계13:2).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숭배를 받으려는 것처럼(계13:4) 하만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절받기를 원함. *하만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함 *하만은 결국 모든 권세를 잃고 파멸당함. <본 서의 교훈> ①민족의 위기로 인해 애통하는 모르드개(4:1-3) *성경적인 위기 관리 ㉠신앙적인 호소와 간구가 있어야 (하나님께) 무디: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가진 무서운 무기다” -필립 멜랑크톤: ”환난과 곤고가 나를 골방으로 몰아 넣어 기도하게 하고, 기도는 그 환난과 곤고를 주변에서 떠나게 한다.” ㉡합리적인 타개책을 강구해야 (자신이)--- 내시 하닥과 에스더에게 진상을 알림. ㉢올바른 사람들의 협력을 구해야 (타인과)--- 하닥, 에스더, 유대의 지도자들과 백성. ②사태의 해결을 위한 치밀한 노력(사건의 전모를 전달)(4:4-7). ③에스더를 통해 하만의 음모 전모를 폭로(8-17). ④모르드개의 하나님의 통상적 구원 섭리에 대한 신앙과 자신의 책임 인식과 노력. ㉠굵은 베를 입고 금식기도(4:1) ㉡당면 과제해결의 試圖(4:7-8 (에4:7) 모르드개가 자기의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대인을 멸하려고 왕의 府庫(=왕의 개인재산 보관창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하닥에게 말하고 (에4: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오늘의 성도들도 당면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선봉에 서서 에스더나 모르드개 같이 민족 구원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만 한다. ◈민족을 구한 에스더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1.현숙한 아내, 가장을 위해 격려, 위로, 기도를... 2.근검 절약의 귀감이... 규모있는 살림, 재사용의 미덕을... 3.신앙의 모범을... 기도의 모범을... 아멘.
받은 은혜, 잘 지키기/ 딤전4:7-8/ 여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10-01-23
받은 은혜, 잘 지키기 딤전4:7-8 큰 은혜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받은 은혜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적게 주셔서 문제가 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여전히 은혜가 부족함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받은 은혜를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을 때는,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고, 모든 죄악에서 이긴 것 같고, 어떤 시험도 이길 것 같고,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이 상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죄는 다시 살아나고, 오래된 성질과 교만과 질투가 다시 찾아오고. 성경 읽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전과 같지 않고, 전도의 열심도 식고, 사랑도 식고, 갈수록 냉냉해 집니다. 승리의 순간은 짧고, 실패는 깁니다. \\\\\\\"죄가 다시 찾아 올줄이야! 시험에 무력하게 쓰러질 줄이야!\\\\\\\" 이런저런 문제들과 시험 앞에서 영적 메마름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은혜 안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첫째, 매일 매일, 말씀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이 날마나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게 막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때마다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해야 할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완악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한 번 완악해지면 다시 은혜의 삶을 회복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인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마 18:20]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은혜 안의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혼자만의 결심이나 의지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라 역사하는 악한 영의 역사를 이기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예배와 성례전에 참여하고, 성경공부와 각종 기도회에 참여함으로 개인적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는 얻을 수 없는 많은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됩니다. 한 몸인 교회 지체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기도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 정상적인 은혜 안의 삶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성령의 인도를 따라 봉사하고 섬기는 생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묵상과 교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는 봉사와 섬김의 삶을 통하여 더욱 큰 은혜를 받습니다. [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주님을 위하여 드리고, 교회와 성도와 세상을 향하여 섬기며 봉사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물론 가장 귀한 봉사는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봉사와 구제는 결국 온 땅에 복음을 전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명령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의 성장하는 과정이요, 성화되는 성도의 길을 가는 여행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배우는 것과 성장하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번 은혜를 체험했다 하지만, 그 은혜를 유지하는 생활이 없으면, 계속해서 은혜 안의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엡6:4/ 여선교회헌신예배/ 2007-11-18
사랑의 이름으로 엡6:4 지난 10월, 구역 예배 때, 요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자녀 교육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고, 요즘 아이들, 부모 노릇도 선생님 노릇도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들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날의 결정타는 김기동 자매가 전한 자매님의 딸이 한 말이었습니다. “엄마, 교수라면 모를까 교사가 되는 건 싫어. 어휴, 요즘 애들을 내가 어떻게 가르쳐?” 네, 그렇습니다. 초등학생인 자기들이 생각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요즘 애들, 그것도 사춘기를 맞아 제일 무섭다는 중학생을 맡아 가르치고 있는 교사, 저는 바로 그런 교사입니다. 제가 처음 아이들을 가르친 곳은 전라북도 장수군 면단위 중학교였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지도책을 찾아보니 전라북도 남원, 경상남도 함양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청산별곡의 ‘머루랑 다래랑 먹고’를 노래 부르며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정작 다래는 이곳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만큼 이곳은 시골이었고 빈한한 산촌이었습니다. 쌍둥이가 있으면 입학금 때문에 둘을 함께 보내지 못하고 한 아이는 다음 해에 학교를 보내던 곳, 전교 1,2등 하는 아이인데도 수업이 없는 소풍 날 같은 때는 농사일을 돕느라 학교를 오지 못하던 곳, 여자 아이들은 오빠나 남동생에 밀려 고등학교에 보내지 않던 곳, 그런 곳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이 곳 만큼 제게 교사로서 많은 걸 느끼게 한 곳은 없습니다. 물론 첫 직장이어서 마치 첫사랑 같은 열정을 가진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것이 음식을 만들어 내듯 당장 그 결과를 내 보이는 것이 아닌 만큼 깨달음 또한 오랜 후였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라도 더 많이 전해줘야 한다는 마음에 아이들을 늦게까지 붙잡아 두고 가르쳤고, 전교 10학급의 작은 학교에서 체육대회 때 무용 전공 친구의 도움을 받아 마스게임도 하고, 베니어판을 잘라 종이를 붙이고 그림을 그려 시화전도 하며 시끌벅적 요란하고 즐거웠습니다. 전공 외에 한문과 도덕을 함께 가르치면서 도덕시간마다 정말 힘들고 난감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래도 그 학교에서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 열심히 배우며 따라 주었던 것과 학부모들이 학교를 믿고 자녀를 맡기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대학생 티도 벗지 못한 저를 선생님이라고 제 말과 행동을 신뢰해 주었던 그곳의 학부모님들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3년을 보내고 열다섯, 열여섯 나이로 중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과 함께 저도 그곳을 떠났고, 몇 년 후 결혼을 하여 경기도로 학교를 옮겼습니다. 아이들과 헤어진 지 20년도 더 지난 2000년, 아이들은 황송하게도 망년회 모임에 저를 초대하였습니다. 이미 아이들은 자녀 한둘씩은 거느린 가장이었습니다. 생활이 어려웠던 만큼 대학을 다니지 못한 이가 많은 제자들의 직업은 다양했습니다. 저와 악수를 나누는 그들의 손은 정직하게 그들의 삶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매끈한 손에서부터 손톱 밑에 까맣게 기름때가 낀 거친 손을 마주 잡으며 그들의 삶이 그대로 전해져 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한 얼굴로 수줍게 웃는 한 친구의 손을 잡으며 저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유난히 작은 키에, 어른용 자전거 페달이 발에 닿지 않아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서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 친구였습니다. 성적이 3년 내내 꼴찌에 가깝던 그 친구는 서울 변두리에서 자그마한 제과점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먹고 살 만하다고 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님’을 보여준 친구였습니다. 저렇게 공부를 못해서 어떡할꼬? 나중에 제대로 밥이나 먹고 살까? 걱정스러웠던 친구였기에 제게는 이 친구의 작은 제과점이 어느 재벌의 대기업체 못지않은 큰 성공으로 느껴졌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비록 공부는 못했지만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내던 그의 성실함과 부드러운 성격이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고, 그는 지금도 그 성실함과 부드러움으로 분명 맛있는 빵을 구워 내리라 생각됩니다. 제자들의 생활 모습은 그들의 성적보다는 생활태도와 성격이 더 많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마음이 선하고 정직했던 친구들, 자신의 일을 성심껏 하던 친구들, 남을 배려하고 마음 따뜻했던 친구들이 IMF 직후 어려운 시절에도 직장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 학교를 떠나 대부분 시 단위의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지금까지 저는 제 나름으로는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생활했다고 생각합니다. 잘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싶었고, 아이들에게 제 욕심껏 신경을 쓰고 성적관리, 생활태도 지도 등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제가 마음을 준 만큼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주는 사랑과 관심이 오히려 아이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어 관계가 어색해지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됩니다. 나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내 아이가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부모는 자녀를 위해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주지만 이것이 꼭 자녀들에게 감사와 사랑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틱낫한의 말처럼 사랑한다고 말하며 상대방이 무엇을 소망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힘들어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는 자녀들을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가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요즘 아이들 힘들다고, 아이 하나 둘 키우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고 불평하고, 자녀들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들과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과의 마음의 교류입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들을 위한다고 생각했어도,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분쟁의 씨앗이 되고 맙니다. 서로 서운하고 서로 멀어지고 심하면 대립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이러한 생활을 30년 쯤 반복하며 저는 아이들과의 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하느님도 나를 보며 때때로 서글프고 배신감도 느끼시겠구나. 안진희,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그런데 너는 네 입장만 내세우는구나. 그래, 내 생각과 너의 생각이 다를 때도 있겠지. 그렇다고 그렇게 매몰차게 비판하고 등 돌리느냐. 내 말을 입으로는 시인하면서도 너의 행동은 내 말과 다를 때가 너무 많구나. 아마 하느님은 저를 보며 이런 서운한 생각을 하시고, 저를 참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마치 제가 초임 때, 제자를 보며 저 애가 커서 어찌 살꼬? 하며 걱정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의젓하게 자란 제자들을 보며 제가 흐뭇해 하듯 하느님도 제가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리라 기대하고, 믿고,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들을 만드시고 “보기에 참 좋았더라.” 하셨듯이 저를 보시고 “그래, 안진희, 참 보기 좋구나.” 하실 날을 기다리시며 저를 지켜주시고, 제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것을 바라고 계심을 압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자녀들을 믿고 기다리며, 가슴 따뜻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성적은 뒤떨어졌으나 성실하고 마음 따뜻하던 친구들이 행복한 삶을 살듯이, 비록 성경적 지식은 부족하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참된 신앙생활이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간도 진정한 사랑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도록 힘 주심을 믿으며 감사드립니다. -------------------------------------------------------------------------------- \\\'새길\\\'이 세상에 내놓을 신앙공동체 모습을 꿈꾸며 [고린도전서 12:4-7] 박유희 자매 2001년 봄, 서울의 대형교회에서 교인 투표로 남편은 안수집사가 되었습니다. 뽑히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고, 우리의 마음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런 승진과 탈락을 반복하는 상황을 수용하면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기를 기대하며 관습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갈 일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늦은 봄, 어느 상갓집을 찾았는데 그 자리에서 정선자 자매 부부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기 전,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내면서 쌓아온 우리들의 신뢰와 양쪽 집 아버님들의 신앙적인 교류를 잘 알고 있는 바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러나 우리로서는 의미 있는 물음을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지금 서울에서 어느 교회를 다니시는가?” “새길교회” “!!! … ” 머릿속에서는 번갯불이 번쩍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그 며칠 전에 우리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궁금해 했던 교회가 바로 새길교회였기 때문입니다. “한번 그 교회에 나가보겠다.”고 한 우리. 그러나 정선자 자매 부부는 그리 귀담아 듣지 않은 듯 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들러보겠지..”하는 반응정도였습니다. 바로 다음 주 주일날, 우리는 새길교회에 첫 출석을 하였습니다. “아니, 정말 왔네, 그것도 이렇게 당장.” 정선자 자매와 김이수 형제 부부가 우리 가족을 반겨주는 것이 고맙고 따뜻했습니다. 처음 찾아온 낯선 교회 같지가 않았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교회의 형제자매님들 중에 낯익은 분들이 많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몇 단계의 시민단체 활동을 거쳐, 지금은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라는 교육시민운동단체의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70년대부터 청년여성회, 크리스챤아카데미 여성사회, 여성의 전화, 여성신문… 신문창간 이전 불법간행물 시절부터 참여했으니 저에게는 사업이 아니라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새길교회에는 시민사회 운동단체를 통해서 알게 된 분들이 여러분 계셨습니다. 볼룬티어21의 이강현 형제님, 정교협의 최현섭 형제님, 청소년 활동 쪽의 최윤진 자매님과 최충옥 형제님 부부, 여신학자 협의회의 최만자 자매님, 교육토론회에서 가끔씩 뵙던 천세영 형제님..등 저에게 새길교회의 첫 인상은 마치 ‘시민단체협의회’와도 같았습니다. 왜 새길교회는 시민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모여 있게 된 것일까요? 저는 곧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 예배 때마다 함께 다짐하는 ‘새길 신앙고백과 결단’에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규정해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새길 신앙고백과 결단’은 ‘창조의 보전과 완성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치는 생명운동과,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치는 인권운동과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치는 평화운동과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나눔운동으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바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신앙공동체로서의 예수따르미의 삶임을 선명하게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위 다섯 가지의 삶의 방식은 이 지구상에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고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고 계신 행동 명령일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영적인 각성이 앞선 사람들이 먼저 시작하고 있는 지구촌 시민운동의 중요한 영역이자 과제이기도 합니다. ‘새길 신앙고백과 결단’에 그것이 정확하게 포함된 것은 20년 전에 우리 새길교회가 태동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간절히 원하고 계신 소망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듣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잘 알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새길교회에는 형제자매들의 개개인의 삶에서 ‘새길의 신앙고백과 결단’을 담아내고 있는 분 들이 많은 것 이라고 이해합니다. 그 힘으로 2004년 대광고등학교 강의석군 사태가 우리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을 때, 새길교회의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신속하게 ‘학자연’(학교종교자유를 위한 시민연합)을 출범시켜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새길 신앙공동체의 저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조리한 사회, 반인권적인 관습, 허례허식, 영성이 상실된 교회, 사랑이 없는 인간관계에 저항하셨던 예수님도 선구적인 운동가셨습니다. 오늘은 여전도회의 헌신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생명, 존엄, 정의, 평화, 나눔, 헌신, 회복… 모두 전통적인 여성성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단어들입니다. 그것은 예수따르미로서의 삶에 구체적인 지침을 주는 동사 즉 명령어로 보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며 예수따르미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여성성을 부여하는 이미지에 동의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고, 믿음의 공동체답기 위해서 우리가 놓치지 말고 함께 붙들고 가야할 끈이 여성성임을 이번 말씀을 준비하며 다시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믿음의 공동체-새길 공동체다운 삶의 세상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각자의 영역에서 각각 일구어내는 삶의 모습을 새길의 이름으로 모아보면 어떤 모습을 드러내게 될까요? 새길교회 안에서 만나는 자매들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어 보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자매님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지금의 나이며, 예전의 나일 수도 있고, 미래의 나일 수도 있는 모습들입니다. 한 분 한 분의 개성이 확연히 다른 모두 다 소중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각자의 개성이 모두 달라 여러 가지 색깔이 어우러진 무지개 같지만 ‘새길’이라는 공동 브랜드 안에서 서로 닮아가는 우리가 만들어 낼 공동체의 모습을 꿈꾸어 봅니다. 그것은 새길의 향기로 우리가 함께 디자인하여 세상 속에 애드벌룬처럼 띄워낼 새로운 터전일 수도 있고, 우리끼리 구순하게 오손 도손 평안하게 사는 모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주년을 맞았던 2007년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 우리가 함께 새롭게 피워낼 그 꿈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기 도 문 - 주님, 20년 전에 예수 따르미의 삶을 갈구하는 심령 불러보아, 이 땅에 작은 샘물 하나 마련하시고 사람들 눈에 띄는 푯대 하나 꽂아 놓으셨습니다. 이곳에 한국교회에서 상처 받고 저항하는 갈급한 심령들 푯대를 향하여 깃들게 하셔서 치유 받게 하시고, 성장시키시며 교회사회에 도전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뜻, 지금의 저희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라고 일어나 응답할 수 있는지요? 우리가 함께 가고 있는 새길은 지금쯤에도 아직 새길인지요? 지난 20년을 보내고, 새 세대를 맞는 오늘, 없던 길 찾아 여기까지 오느라 지친 믿음의 선배들... 그 심령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그 연약한 육신을 강건케 회복시켜 주시오며, 깊은 지혜의 샘물 길어 올려 새길 위에 적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믿음의 새 소망을 품고 왕성한 기운으로 새길에 동참하는 심령들의 눈을 밝히 뜨게 하옵소서. 새 세대를 향하여 주께서 소망하시는 새길의 비전을 형제자매들이 품게 하시고, 화합하여 선을 이루는 하늘나라의 모습 일구어내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새 시대 새 여성/ 잠31:28-31, 행18:24-28/ 여전도회헌신예배설교/ 2003-03-26
새 시대 새 여성 잠31:28-31, 행18:24-28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는 특히 그의 서신과 역사서인 사도행전에서 여성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비교적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여인의 복음이란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도 여인의 행전처럼 여성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성지수는 건강 상태와 피임 여부, 문맹률, 정치참여 등 여성관련 6개 항목을 지표로 삼아 여성의 지위를 가늠하는 수치입니다. 얼마 전 한국은 여성지수에서는 세계 27위로 나왔습니다 . 그러나 한국 여성들의 현 위치와 역할은 그 지수보다는 높다고 봅니다. 잘 보시면 요즘은 남자가 괄시받는 시대입니다. 이사갈 때 혹시 안 데려 갈까봐 남편들이 미리 차에 타고 있다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강아지를 안고 있답니다. 왜냐하면 강아지 때문에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또 아예 농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남편이 이사를 하는데 혹시 안 데려 갈까봐 농 안에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도 소식이 없습니다. 살그머니 나와보니 붙박이장이더랍니다. 여전도회와 남선교회를 비교해 보세요. 여전도회는 대체로 활발합니다 . 남선교회는 여러 가지 여건상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여전도회관은 있지만 남선교회관은 없습니다. 남선교회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임원들이 모였습니다. 헌금을 해야 하는데 임원들이 먼저 작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씩 슬그머니 나가더랍니다. 모두들 공중전화 앞에 서서 “여보, 나 얼마 하면 돼?”하고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못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적어도 여성지수가 훨씬 높습니다. 여성의 활동이 훨씬 우월합니다.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여성의 한을 치유하신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여성이 되었다는 자체가 고통이었고 한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통을 해소하셨고 그 딸을 귀신에게 놓이게 하셨습니다 .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억울할지 모릅니다. 간음은 했지만 남자는 잡아오지 않고 여자만 잡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이 일곱이나 들렸지만 낫게 하시고 사랑을 받아 주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도 허물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시고 허물을 탓하지 않으시고 놀랍게 변신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한 여인이 재판관에게 “내 한을 풀어주소서”라고 호소합니다 . 성경은 여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그리스도를 적고 있습니다. 융은 여성에게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animus)라고 하였고, 남성에게 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anima)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아니무스와 아니마에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인간은 서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없어도 되는 척하며 배척하고 괄시하며 살지만 서로를 업신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존귀한 인격체로 만드셨습니다. 여전도회 주일에 성경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의 한 사람인 브리스길라를 누가의 기록인 사도행전을 통하여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첫째, 가정과 일을 잘 다스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브리스길라는 가정과 일에 충실한 굉장히 가정적인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좋은 아내이며 가정에 충실한 주부였을 것입니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더라면 교회 일도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봐서 아굴라는 브리스길라에게 좋은 협력자였을 것입니다. 아굴라의 외조와 협력 없이 브리스길라가 좋은 성도가 되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브리스길라가 가정적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의 눈에 벗어났다면 교회의 좋은 일꾼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11에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여성 직분자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모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일만 아니라 가정의 일, 직장의 일 등 이 모든 일을 잘 하는 자가 좋은 일꾼이란 말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장막 깁는 일을 하였습니다 . 그들 가정의 직업은 천막사입니다. 그들은 이 일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이 일을 하여 돈을 벌어 전도에 쓸 만큼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전도하였습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 최고의 성도입니다. 자기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동시에 자기 일만 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라고 합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노동의 질이 높습니다. 섬세하고, 끈기 있고, 복합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노동의 효과를 높이는데 중요합니다. 가정의 경제를 이끌어 가는 것은 여성의 몫입니다. 가정 경제는 부도가 없습니다. 공자가 한번은 제자들과 산으로 산보를 갔습니다. 산중턱쯤 올라가니 어떤 여인이 묘 앞에서 땅을 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하도 애처로워서 공자는 우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이 묘는 남편의 묘인데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옆에 산소 둘이 또 있는 것을 본 공자는 그 묘는 누구의 묘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는 시아버지 산소이며 다른 하나는 시조부의 산소라고 여인은 대답했습니다. 시아버지도 시할아버지도 모두 호랑이한테 물려죽었다면 저 산 아래에 가서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자 이 여인은 “비록 호랑이한테 물려 죽을 망정 이 산에서 살지 마을로 내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마을이야말로 얼마나 추잡하고 불의가 판을 치는 곳인지 모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은 하늘의 나라와 땅의 나라 두 나라에 걸쳐서 삽니다. 어느 나라에 관심이 더 많으냐에 따라서 신앙의 정도가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발은 땅을 딛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생각은 하늘에 두고 땅에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상징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십니다. 장사를 해도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똑같은 일을 해도 그 목적이 다릅니다. 21세기는 가정중심주의가 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가정 중심으로 되어 갑니다. 그래서 “홈”이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가정중심주의는 어머니 중심입니다. 자연히 여성의 역할이 증대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여전도회의 역할은 가정에서 좋은 주부,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를 잘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 교회 설립 당시 바울을 협조한 부부입니다(행 18:1-4). 로마에서 난 유대인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41-54년)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고린도에 와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에 동행하여 에베소로 갔습니다(행 18:18). 그리고 글라우디오가 죽음으로 다시 로마로 갔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편지를 보낼 때에 로마에 있었던 흔적이 로마서에 나타납니다. 로마서 16:3에는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후 목회서신 저작 당시에는 에베소에 거주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19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는 말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9에는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은 교회였습니다. 그 집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학자들은 한결같이 브리스길라를 교회에서 남편보다 더 유력한 여인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이름이 성경에 5번 같이 나옵니다. 그 중에 4번은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것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발자크는 말하기를 “여자는 훌륭한 남편을 만드는 천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굴라는 부인 덕에 그 정도가 됐을 것입니다. 훌륭한 아내가 훌륭한 남편을 만듭니다. 현대의 유대인 랍비 마빈 토케어의 이야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착한 부부가 어쩌다 이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곧 재혼하였습니다. 그는 불운하게도 악한 여자를 만나 악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여자도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악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은 곧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에 의하여 조종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더욱 그러합니다. 좋은 신앙의 부인이 좋은 남편을 만듭니다. 초대교회는 가정이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루디아의 집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눔바의 집입니다.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가이오라는 사람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틴 대왕이 기독교를 공인하여 국교화하기 이전에는 교회당이 없이 가정이 교회였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정 같아야 되고, 가정이 교회 같아야 합니다. 실제로 기독교의 부흥 운동은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 미국의 북맨의 부흥 운동 등이 모두 가정적 기도회에서 시작된 교회의 부흥 운동입니다. 이런 운동에는 반드시 여성들의 역할이 돋보이게 마련입니다. 영국의 윌리엄 4세가 죽던 날 밤 궁중에 있던 한 처녀가 이튿날 왕으로 간택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빅토리아는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였습니다. 영국의 역사 상 빅토리아만큼 위대한 일을 많이 한 왕은 없을 것입니다. 영국의 번영은 이 때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흔히 ‘빅토리아 풍’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여왕의 치적은 다른 어떤 왕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국의 국기를 ‘유니언 잭’이라고 하는데 “유니언 잭은 해질 날이 없다”는 말이 이 때에 나온 말입니다. 영국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빅토리아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편 채로 “주여, 내가 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왕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결했고 기도로 정치를 했습니다. 여왕이 세상을 떠날 때도 모든 신하들을 다 물리고 부군 알버트 공과 둘이서 찬송을 하면서 운명하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인도의 한 왕자가 여왕을 알현하고 여왕께 “정치를 잘 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왕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성경을 펴들고 “바로 이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세상을 섬기고 다스리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대로 다르시고 섬기고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의 선택이 물질이 아니라 보람이어야 합니다. 셋째, 잘 가르치는 여인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더 자세히 가르쳤습니다.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앞에 나온 것으로 봐서 브리스길라가 주로 가르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볼로는 당대에 최고의 목회자입니다. 당시에 가장 인텔리이고 가장 박식한 목회자였습니다. 당시에 고린도교회에는 아볼로 파가 있을 만큼 그는 힘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에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6에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이만큼 아볼로는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2에는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 합니다. 당시에 가장 헬라문화가 번성하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인 고린도의 교회가 아볼로를 청빙하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교회가 청빙할만큼 유능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당시의 최고의 목회자를 브리스길라가 데려다가 가르쳤습니다. 그는 학식은 많았지만 영적 지식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은 많았지만 영적으로는 모자랐던 것입니다. 이것을 브리스길라가 보충해 준 것입니다. 성경은 여성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합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물으라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당시의 고린도 지방의 환경이 젊은 여성들이 지나치게 나서면 오해를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신전에는 젊은 여 제사장들이 음란하고 부도덕한 일을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받지 않게 하려고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디도서 2:3에는 “늙은 여자로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라고 합니다. 늙은 여자는 가르치고 젊은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늙은 여자는 여자가 아닙니까? 연세 드신 분들에게 물어보세요. 아마 섭섭해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여자들에게 무조건 가르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는 당대 최고의 목회자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는 지적으로 유식하지만 영적으로 무식한 사람이 어떠한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영으로만 알 수 있는 하늘나라의 비밀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도 하십니다. 아무리 선생이라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영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육적으로 무지해도 거듭난 사람은 영의 세계를 압니다. 육적 무지를 영적 유식으로 보충하세요. 성경의 제자들 가운데 글을 읽을 줄 아는 자는 마태와 가룟유다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후에 성경을 기록하였고, 영적 풍성함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브리스길라는 영적 지식이 있었습니다. 훌륭한 교회의 여성은 영적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풍성함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 막달라 마리아가 왜 제일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지 아십니까? 여자들은 말이 많으니까 금방 예수님의 부활이 전파될게 아닙니까? 그래서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보게 되었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말이 많은 것도 좋은 일입니다. 여성들의 약한 것도 예수님께는 장점이 됩니다. 여성들의 단점과 모든 점들이 예수님을 위한 장점이 되게 하세요. 가정을 잘 다스리세요. 가정을 못 다스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전도회 회원으로서 가정을 잘 다스려서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새 시대를 위한 여성들/ 삿4:4-7, 롬16:3-9/ 이성희 목사/ 여전도회헌신예배설교/ 2006-01-28
새 시대를 위한 여성들 삿4:4-7, 롬16:3~9 요즘 ‘왕의 남자’가 인기랍니다. 여러 가지 인기몰이의 요인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현대인에게 관심이 많은 ‘크로스 섹슈얼’(Cross-sexsual)을 정밀하게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크로스 섹슈얼이란 외모를 여성처럼 꾸미는 남자를 말합니다. 극 중에서 공길이로 분한 이준기가 그래서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위버 섹슈얼’(uebersexual)도 흥미를 가집니다. 자신감과 지도력과 정열과 너그러움이란 긍정적인 남성상을 갖추고 여성경멸과 문화적 소양 결핍 등 보통 남자의 약점을 극복한 남자를 말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 다니엘 헤니를 꼽습니다. ‘메트로 섹슈얼’(metrosexual)이란 말도 있습니다. 외모 꾸미기와 여가 생활에 많은 돈을 쓰는 도시 남자를 말하는데 권상우와 같은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남자를 뜻하는 ‘레트로 섹슈얼’(retrosexual), 기존의 성 역할 및 관념에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여성을 뜻하는 콘트라 섹슈얼(contrasexual)등이 있습니다. 점점 남성은 여성화되고, 여성은 남성화되는 시대적 추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그루밍 샵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루밍이란 마부가 말을 관리한다는 말인데 자기 관리가 극대화되고 따라서 남성전용미용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 정리하는 데는 10분, 밥 먹는 데는 10분, 세수하고 화장하는 데 2시간 걸리는 남자도 있다고 하네요. 참 이상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여성은 점점 남성화 되어 갑니다. 여성이지만 개성이 뚜렷한 여성을 좋아합니다. 확실한 직업을 가진 여성을 선호합니다. 나아가서 근육질의 여성을 흠모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조금은 혼란스러울 것 같은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은 동반자의 시대라는 의식입니다. 종속보다 동반이 강조되고, 동역과 협력과 상호보충이 앞서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돕는 것도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협력이 되어야 합니다.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이의 대사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시각장애인 놀이를 하다 말합니다. “나 여기 있고 자네 거기 있나?” “나 여기 있고 자네가 거기 있지.” “나는 여기 있고 자네가 거기 있잖나.”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 장면엔 더 기막힌 대사가 나옵니다. “나 여깄고 너 거기 있지” “아니다. 내가 여기 있고 너 거깄다”, “나도 너도 여기 없다”, “아니다. 우리 다 여기 있다.” 이 대사는 나를 넘어서는 융합의 경지가 있습니다. 초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관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더 인기라고 합니다. 로마서 16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26명에게 문안을 보냅니다. 그 가운데 여성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율리아, 올름바가 다 여성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동역자라고 하고, 수고 많이 한 자라고 합니다. 바울의 사역에 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여성입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혼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에게는 밀란의 교부 암브로스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혼자 만들어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도 서로를 동역자로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여전도회 주일에 다시 한 번 동역자로서의 여성을 생각하고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1. 첫째, 새 시대를 위하여 동역자의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로마서 16:3에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브리스가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이 시대의 여성은 남성의 동역자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성을 남성의 갈빗대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남녀가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동질적 관계인 것을 의미합니다. 하와는 아담이 밖에 나갔다 올 때마다 아담의 갈비뼈를 세어 보았답니다. 혹시나 하나 더 뽑아서 또 만들었나 싶어서 그랬답니다. 한 번은 하와가 아담에게 “당신, 나 사랑해?”라고 했더니 아담은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랬다고 합니다. 에덴에서부터 사랑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돕는 배필이란 종속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입니다. 성경에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도 대표성이지 종속성이 아닙니다. 만일 돕는 이란 말이 종속적 개념이라면 시편 54:4에서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는 말은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종속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머리라는 말이 종속적 개념으로 해석해도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1:3에는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종속적 관계일까요?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종속되었을까요? 이건 삼위일체 신학에 어긋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7에서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입니다. 함께 받는다는 것은 동반자이며 동역자란 말입니다. 부부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녀가 동반자의 성격입니다. 교회에서도 동반자이며 동역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동반자로서의 관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상호 보충하여 하나를 이루는 시대입니다. 세계화시대는 세계가 동반자입니다. 어느 한 쪽을 소외시키고 무엇을 할 수 없는 시대가 아닙니다. 모두가 조화를 이루고 협력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서로가 다른 쪽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가 이해해야 합니다. 서로 질시하고, 평가 절하하는 자세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사고가 아닙니다. 보수는 진보를 필요로 합니다. 부자는 빈자를 필요로 합니다. 식자는 무식자를 필요로 합니다. 남성은 여성을 필요로 합니다. 노인은 어린이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간격과 장벽을 모두 초월하여 동반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상생상극(相生相剋)이란 말이 있습니다. 원래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말입니다. 오행의 순환은 상생합니다. 목(木)은 화(火)를 낳고, 화(火)는 토(土)를 낳고, 토(土)는 금(金)을 낳고, 금(金)은 수(水)를 낳고, 수(水)는 목(木)을 낳습니다. 이 오행은 상생하는 동시에 상극합니다. 수(水)는 화(火)와 상극하고, 화(火)는 금(金)과 상극하고, 금(金)은 목(木)과 상극하고, 목(木)은 토(土)와 상극하고, 토(土)는 수(水)와 상극합니다. 인간의 장기의 간과 쓸개도 그렇습니다. 간과 쓸개는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역할이 전혀 다르지만 서로가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장기도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남녀는 서로 상극입니다. 그러나 상생합니다. 남자와 남자는 서로 같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남자가 하나 되면 안 됩니다. 여자와 여자는 절대 하나 되지 못합니다.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서로가 다른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순리이고, 좋은 것입니다. 미래사회는 남녀의 차별이 극소화 될 것입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 될 것입니다. 전업주부가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직업여성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여성의 커리어가 중요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남녀는 서로 극단화할 것이 아니라 서로 빈틈을 메우고, 서로 보충하고,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남녀의 차별은 없애야 하지만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서로를 위해 빈틈을 메우려고 이 세상에 부름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신 삼종지도’를 아십니까? “어려선 아비와 어미의 뜻을 함께 따르고, 시집가면 지아비를 가르쳐서 평등한 가정을 만들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에 연연하지 말며 나의 길을 간다”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동역자요, 가정에서도 동역자입니다. 안과 밖의 개념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안 사람, 바깥양반이란 말이 이제는 어색하게 들립니다. 이제는 안 양반, 바깥사람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여 장로님을 여섯 분을 세웠고 현재로 네 분의 여 장로를 가진 앞선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조화를 이루고 역할이 동역자의 역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둘째, 교회를 위하여 많이 수고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16:6에는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12절에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수고한다는 말은 여성들에게만 쓰고 있습니다. 수고는 문자적으로 손이 고생하는 것입니다. 수고란 사전적으로 일을 하는데 애를 쓰고 힘을 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시 손이 발달한 것은 여성입니다. 손이 고생하는 것도 남성보다 여성입니다. 우리 민족을 손이 발달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여성들, 한국 여성들의 손재주는 대단합니다. 인간을 정의할 때 “손쓴 사람”(homo habilis)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손을 쓰므로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창조되었습니다. 손은 중요한 인간의 신체입니다. 손이 쉬고 있을 때는 얼굴도 쉬고 있으며, 마음이 활발하면 손도 활발합니다. 손의 숙련은 두뇌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솜씨와 손재주가 비롯되는 곳도 바로 두뇌입니다. 손은 두뇌의 거울입니다. 손은 마음의 대행자입니다. 머리와 손은 짝을 이루어 일합니다. 손을 많이 쓰면 머리도 좋아집니다. 부지런함은 우리의 고래의 미덕입니다. 특히 여성의 부지런함은 소중한 미덕입니다. 여성의 손은 소중한 재산입니다. 우리 민족의 여성들은 손이 발달한 여성입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은 지식은 없어도 지혜는 풍성했습니다. 잠언 31;10 이하에 보시면 ‘현숙한 아내’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13절에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라고 합니다. 16절에는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라고 합니다. 19절에는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라고 합니다. 20절에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라고 합니다. 결론으로 31절에는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잠언의 제일 마지막 절은 현숙한 여인에 대한 칭찬이 잠언의 결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칭찬도 손으로 수고한 열매에 대한 칭찬입니다. 여성은 굉장히 강합니다. 복제 동물이 모두 암컷인 것을 아시지요? 체세포에 전기 자극을 가할 때에 혹독한 시련을 겪습니다. 이 때 생존력이 강한 여성 세포만이 착상이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해산의 수고를 말합니다. 여성은 낳고 또 낳습니다. 아마 남성은 하나 낳고나면 죽어도 안 낳을 것입니다. 수고는 강한 자의 몫입니다. 전도서 5:19에는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수고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헨리 포드는 “자신이 팬 장작을 때면 남이 팬 장작보다 두 배의 따뜻함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수고하므로 얻는 행복입니다. 잠언 10:6에는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잭 하일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라는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수고할 때에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동역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므로 주님을 알아갑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을 보세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합니다. 여성들의 수고는 하나님께 기억이 됩니다. 우리 모두의 수고가 하나님께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결론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고 남자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없어보세요. 편할지는 모르지만 사는 맛이 없고 삭막할 것입니다. 여자 없이는 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남성에게 여성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 남성과 그리고 여성에게 다시 확인되기를 바랍니다. 여성 여러분, 남편에게 사라 되세요. 주님을 섬김에 마르다가 되세요. 주님의 말씀에 마리아가 되세요. 주님을 사랑하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되세요. 남을 섬기는 데 다비다가 되세요. 기도에 한나가 되세요. 나라를 위한 일에 드보라가 되세요. 그리고 포스트모던시대, 여성시대를 맞이하여 여성의 역할이 극대화되는 시대에 좋은 여성, 훌륭한 일꾼, 좋은 여전도회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서울 연동교회)
세우는 여인과 허무는 여인/ 잠14:1/ 여선교회헌신예배/ 2008-06-20
세우는 여인과 허무는 여인 잠14:1 미국의 하딩 목사는 매우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어느 조그마한 회사에 근무하였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급여인상을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하딩은 매우 흥분해 사장에게 급여인상을 강력히 요구한 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표를 쓸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출근했습니다. 하딩은 그날 일에 파묻혀 사장을 면담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지친 몸으로 귀가한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장의 카드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준비한 카드였습니다. “여보, 봉급인상을 축하해요.” “봉급은 인상되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의 능력을 믿어요. 여보, 힘내세요.” 아내는 역경과 순경의 대비책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 후 하딩은 아내의 격려에 힘을 얻어 가장 유능한 직원으로 부상했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최고의 보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좋은 아내를 얻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인 잠언의 말씀을 보면 세상에 여자가 많이 있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우는 여인이요, 다른 하나는 허무는 여인입니다. 건설적인 여인과 파괴적인 여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건설적인 여인을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파괴적인 여인은 미련한 여인입니다. 오늘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맞이하여 “세우는 여인과 허무는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에 비추어볼 때 어느 편에 속하십니까? 건설적인 여인입니까? 아니면 파괴적인 여인입니까? 다른 말로 말하면 지혜로운 여인입니까? 미련한 여인입니까? 잠언에 보면 어진 아내와 악한 아내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잠11:22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금고리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돼지 코에 걸려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코걸이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보니까 젊은이들 가운데 코에 구멍을 뚫어 코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습디다. 여인이 지혜롭다 하는 것은 그 몸가짐을 삼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못한 여인은 아무리 외모가 아름답고 멋을 부려도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가 된다는 말입니다. 잠12:4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아내를 잘 얻으면 평생에 행복이요, 영광이지만 잘못 얻는 사람은 평생을 두고 뼈가 썩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제가 전에 있었던 서울 삼일교회 수석 장로님이 계셨는데 박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은 이북 사람이신데 얼마나 부지런하시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부인이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장로님이 되셨는지는 모르지만 항상 혼자 교회 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측은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요, 심지어 성인으로 손꼽히는 소크라테스의 부인은 3대 악처(惡妻)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을 하는 사람이 돈을 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늘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인생의 깊은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무슨 돈이 나오겠습니까? 물론 요즘에는 인기 있는 철학 교수들이 TV 출연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합니다만, 옛날에는 가장 가난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남편을 두고 사는 아내는 어떠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여전히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는데 부인이 저녁을 끓일 것이 준비되지 않아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아 그런가?” 하고는 계속해서 강의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아내가 신세타령을 하면서 구시렁구시렁 하는 겁니다. “철학을 하면 밥이 나와, 쌀이 나와?” 그러면서 하도 화가 나니까 부엌살림을 막 내던졌습니다. 양푼이며 냄비며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이 계속해서 강의만 하고 있으니까 바케쓰에 물을 하나 가득 담아 가지고 와서 문을 열고 남편과 제자들에게 확 끼얹어버렸습니다.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이 때 소크라테스가 젖은 옷을 툭툭 털면서 하는 말이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소나기가 쏟아지는군.” 하더랍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습니까? 그래서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우리도 앞으로 결혼을 해야 할까요? 선생님을 뵈오니 결혼하는 데 대한 회의가 듭니다.” 그 때 소크라테스가 눈을 크게 뜨며 하는 말이 “암, 결혼을 해야지. 결혼은 반드시 해야 돼. 어진 아내 만나면 행복할 것이고, 나처럼 저런 아내를 만나면 적어도 철학자는 될 걸세.”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창조의 원칙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인을 만드셨습니까? 아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돕는 배필을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돕는 배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배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고 자기의 필요 때문에 지어진 배필임을 알고 나중에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면서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내를 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필요를 못 느끼는데 잘해 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 조병례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재혼하신 분이신 데 할아버지가 얼마나 시집살이를 시키시는지 교회도 제대로 못나가게 하고 핍박이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사님이 할아버지 버릇 고치려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부인이 없이 할아버지가 살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할아버지가 집사님을 찾아가서 사정을 했답니다. “당신이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교회도 나가고 새벽기도회까지 따라가겠다.”라고 약속하였답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못 이긴 척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교회는 물론이요, 새벽기도회까지 같이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여자의 맛이란 돕는 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참 맛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곱고, 탄력 있고, 아름답고, 유연성이 있으며 상냥하게 정결하게 만드셨습니다. 남자는 흙으로 빚었다면 여자는 완성된 인간을 다시 한 번 정제하여 이중적인 상태에서 완전하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자의 의무가 있다면 남편을 잘 도와 가정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소크라테스처럼 뼈가 썩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그 집이 흥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어제 한 20년 만에 군대 동기 친구를 익산에서 만났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친구는 익산 남중교회 집사님이더라구요. 부인 집사님과 함께 만나서 저녁을 먹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집안은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디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남자는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남자는 위로를 받을 때 양 같이 순한 사람이 됩니다. 자동차에는 엔진오일이라는 것을 넣습니다. 그래야 엔진이 무리가 생기지 않고 잘 움직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손길이 닿아야 윤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활력이 솟습니다. 이것은 남자의 권리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남자는 위로 받지 못하면 이리가 됩니다. 받아야 할 위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도움이 없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① 무능력해집니다. 여자가 활동적이고 그래서 돈을 잘 버는 여인들을 보십시오. 이런 여인들은 때로는 남편을 무시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아내를 둔 남자들은 일손을 놓고 여자를 의지하게 됩니다. 남자로 하여금 가정을 책임지게 만드는 여인이 진정한 돕는 배필입니다. ②독선적이 됩니다. 이런 형태는 부정적인 여자일 경우입니다. 만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거기에서 오는 남편의 능력을 무시하고 남편에게 도전적인 태도로 나오는 여자에게 남자의 반응은 여자를 무시하고 독선적인 무서운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수다스러운 여자일수록 남자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며 그럴수록 남자의 성품은 더욱 난폭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③ 구타를 잘하게 됩니다. 아무리 완악하고 성격이 나쁜 사람이라도 자기 마음에 들게 하는 여자에게는 노예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남편에게 구타를 당할 때 뭐라고 말합니까?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그 말 그대로 얻어맞은 것입니다. “남자의 자존심은 고압선과 같다.”라는 프랑스 격언이 있습니다. 고압선은 잘 사용하면 엄청난 생산을 할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다루게 되면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저와 신학교 같이 다닌 동기 가운데 한 사람이 옛날에 한전에 근무하다가 고압선에 감전되어 온 몸이 화상을 입고 죽으려다가 살아나서 신학교에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압선은 잘 사용하는 유익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무서운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튼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 무엇을 가장 우선시 합니까? 여자들은 “직장”(경제력)을 우선시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자들은 여자의 외모를 가장 먼저 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옛날 여자들은 16세가 되면 이팔청춘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즘은 20대가 되면 여자들이 아름답게 화장을 합니다. 20대가 얼굴에 바르는 것은 화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30대가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을 뭐라고 할까요? 분장이라고 합니다. 탤런트들이 분장을 하지 않습니까? 40대가 되면 얼굴에 잡티가 생기고 기미가 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때는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짓게 발라야 합니다. 그래서 변장이라고 합니다. 50대가 되면 주름살이 깊어집니다. 그러므로 위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60대가 넘으면 어떻게 될까요? 60대가 화장하는 것은 포장이라고 한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포장하신 분들이 꽤나 많으신 것 같습니다. 사람의 외모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아름다움도 지나가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벧전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중요한 것은 지혜로운 여인을 만나서 결혼을 해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잠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지혜로운 여인은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여인입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물어버립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집을 세운 여인이 있는가 하면 그 가문을 망하게 하는 여인도 있습니다. 1.집을 허문 대표적인 여인들 1) 하와 모든 후손들에게 죄의 짐을 물려준 여인입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뱀의 음성에 더 귀를 기울인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을 죄 짓는 일에 끌어들이고 결국에는 모든 인류에 파멸을 안겨준 여인이 되었습니다. 2) 이세벨 남편 아합 왕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조종하였던 여인이었고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며 핍박한 여인이었습니다. 유약한 남편을 위하여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주었던 악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최후가 어떠하였습니까? 열왕기하 9장에 보면 이세벨이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거들먹거렸습니다. 그러다가 두 내시가 그를 창에서 내어 던져 그의 몸이 박살이 나서 죽었습니다. 장사하려고 시체를 찾으니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로 예언하신 말씀대로 그가 죽은 것입니다. 3) 아달랴 아하시야 왕의 모친인 아달랴는 왕인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왕의 씨를 진멸하려고 하였습니다. 오로지 요아스만 목숨을 부지하여 성전에서 숨어 자라고 있을 때 그녀는 6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여왕 행세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악독한 여인입니까? 아달랴는 제사장 여호야다와 혁명군들에 의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2. 집을 세운 대표적인 여인들 1) 라합-여리고성의 기생이었으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자기와 가정을 구원하고 살몬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룻의 남편인 보아스를 낳아 주님의 족보에 당당하게 올라가는 영광을 차지한 여인입니다. 집을 세운 대표적인 여인이 된 것입니다. 2) 룻-모압 여인으로 남편은 죽었으나 시어머니를 따라 고국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베들레헴으로 따라왔던 이방 여인으로, 그는 후일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여인입니다. 3) 브리스길라-바울의 동역자였으며 아굴라의 아내였던 초대교회 평신도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항상 그의 이름이 먼저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그가 그 가정의 믿음의 기둥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집을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요? 1. 장점에 초점을 두고 단점은 주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잘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자꾸 아뢰십시오. 왜냐하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므로 야단을 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잘못하는 것은 머리의 머리 되신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그리고 그분이 그 머리를 눌러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목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장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조건 없다고 하지 마시고 찬찬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한두 가지 이상 장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의 좋은 점은 자꾸 생각하시고, 내 마음에 근심 걱정이 되는 단점은 하나님께 아뢰어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을 다스리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2. 만족(자족)하십시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우리가 자족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3. 남편은 아내의 사는 목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내는 남편을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의 사는 목표가 됩니다. 인생은 운동 경기와 같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경기를 승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경기가 언제 끝납니까? 하나님께서 둘 중에 하나를 먼저 데려 가시는 날, 그날 하나님께서 호루라기를 불으시면 끝이 나는 것입니다. 결혼식 때 뭐라고 서약합니까? “죽음으로 우리가 나뉠 때까지”라고 서약을 합니다. 끝까지 함께 뛰어야 하는 파트너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왜 가정을 세워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전도 회원 여러분! 여러분도 집을 세우는 자가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우리가 아무리 집을 세우기를 원하고 성을 지키기를 원하여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야 가능하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때 가능합니다. 매일 매일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구하고, 주님의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여러분의 가정을 바르게 세워나가셔서 하나님께로 칭찬과 존귀를 받아 누리시는 여전도 회원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믿음/ 마15:/ 여전도회헌신예배설교/ 2007-04-23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믿음 마15: 할렐루야!! 오늘 저녁에도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가 헌신예배를 드리는 마리아선교회 회원 들과 성도들에게 넘치도록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소원이 있습니다. 좋은 직장, 좋은 학교, 생활의 윤택 함, 좋은 배필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 사업이 번창하는 것,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 받는 것, 온 가정이 인가귀도 되는 것, 등등 수많은 소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 게 하시는도다\\\\\\\" (시145:19)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마음의 바라는 소원 즉 희망이 없으면 진보가 없습니다. 마음에 간절한 소망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목표를 가지고 힘있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가나안 출신의 여인이 간절하고도 절박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 아왔습니다. 그것은 무남독녀 외동딸이 귀신이 들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백 약이 무효라 마지막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에 없이 냉정하게 여인을 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간구하여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우여곡절 끝에 에수님의 몇번의 테스트를 거쳐서 그의 믿음 이 인정되고 결국 그의 소원대로 딸이 고침 받는 소원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것은 절대로 값없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 다. 반드시 상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가나안 여 인도 바로 그의 믿음이 인정이 되어서 소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면 이 가나안 여인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 고자 합니다. 이 시간도 말씀을 들을 때 신령한 귀가 열려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같은 소리를 들어도 듣는이의 믿음에 따라서 달리 들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들기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 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였는데 다른 사람들 은 우뢰가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환경을 탈출하여야 합니다. 본문 (마15:21-22)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 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이 여인이 살고 있는 지역은 가나안 지역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이스라엘 민족 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점령된 곳으로 이 지역은 유대인들 에게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곳입니다. 이방인의 구역입니다. 거기다가 이 여인은 생활도 가난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딸까지 흉악한 귀신이 들 렸습니다. 있는 재산은 모두다 딸을 고쳐보려고 모두 허비를 하였습니다. 이제는 소망이 없습니다.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환경은 너무나도 비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 이 여인은 그 환경에서 탈출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지경에서 나와서…\\\\\\\"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주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환경과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소원을 이루는 첫 번째 믿음의 단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이 여인과 같이 \\\\\\\"그 지경에서 나오는 믿음\\\\\\\" 을 소유하시기 바 랍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을 때 여러분의 바라는 소원도 이루어 질 줄로 믿습 니다. 여러분이 지금 처해 있는 환경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억매고 있 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예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에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애물들은 외적 환경에서 오는 것도 있지만 내부적인 것이 더 많이 있습니다. 망설임, 체면, 자존심 때문에 위선 때문에 망서립니다. 이와 같은 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도, 12년간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도,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도, 아람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도, 모두 장애물을 극복할때에 소원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문제속에서 방황하지 말고 그 지경에서 나오 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환경에서 탈출하여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소원 을 이루는 첫 번째 믿음의 단계입니다. 2. 확실한 주관과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마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이 여인의 부르짖음 속에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네 가지의 큰 믿음과 확신이 있습니다. (1) 큰 소리로 주님을 불렀습니다. 가만히 조용히 체면 생각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 질러 불렀습니다. 여리고성에 예수님이 가셨을 때에 길가에서 구걸하던 소경 바다매오가 예수님 이 지나 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가시던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할 렐루야!!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렘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도 이시간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이순간을 기다렸습니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2) 예수님을 구세주 메시야로 믿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는 주님을 올바로 알고 믿었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내 딸의 귀신을 쫏아내고 병을 고쳐 줄 줄로 믿는 확실한 믿음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의 대상을 바로 알고 간구했다는 것은 당시 이방여자로서는 참 으로 훌륭한 신앙고백입니다. (3)\\\\\\\"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는 것입니다. 이것은 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식하고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자기가 회개하는 심정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이 믿음이야 말로 주님을 능히 감 동시키기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4)\\\\\\\"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이것은 자기의 사정을 숨김없이 진실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기도가 응답되기를 원하신다면 이 가나안 여 인의 기도의 자세를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리지 말고 주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응답을 받을 때까지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큰 소리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열정적 인 기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더잘 들쬽î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은 믿음으로 기도한다면 반드시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 질 줄로 믿습니다. <아 멘> 3. 시험을 참고 이기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간절히 부르짖어 간 구하였는데도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 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나는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말 씀하신 것임) 26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 니라\\\\\\\" (개 취급을 하였음) 여인은 그토록 절박하게 간구하는데 비하여 주님의 태도는 너무나 냉정합니다. 여기서 그 여인이 당한 시험은 ①구하여도 응답이 없는 시험입니다. ②무시당하고 거절당하는 시험입니다. ③멸시당하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더 욱 열심히 소리질러 간구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매달렸습니다. 25절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이 자기를 개 취급을 하여도 화를 내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 라고 주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무슨 심한 말을 하여도 반드시 주님께 서 들어 주실 것을 믿고 낙심치 않았습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그토록 큰 믿음이 마침내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으로 보시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렇지 못 하고 은혜받기는 원하고 축복받기는 원하면서, 소원이 이루어 지기를 원하면서도 왜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시험만 와도 그 시험에 빠집니까?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시험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시험의 함정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툭하면 교회도 안나오고 자기 마음에 무 엇이 맞지 않으면 교회도 책임도 모두 등한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믿음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소원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어떤 시험과 고난을 당하여도 \\\\\\\"아 멘, 옳소이다\\\\\\\" 하는 사람을 축 복하십니다. 아무쪼록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은 큰 믿음을 가지고, 무슨 일을 당하여도, 어떤 시험을 당하여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여 소원 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소원을 이루려면/ 시37:1-11/ 여선교회헌신예배설교/ 2008-01-12
소원을 이루려면. 시37:1-11 새해 들어 첫 번째 여선교회 헌신예배를 드리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들의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원을 가지고 있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소원의 가치와 목적이 다르고 그 소원을 기원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정한수를 떠놓고 목욕재계한 후 손이 닳도록 비는 사람이 있기도 하며, 되지머리를 상에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소원을 빌기도하고 무당을 불러다 놓고 굿을 하며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 믿는 성도들은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악한 사람이 잘되고 악한 사람이 횡포를 부려도 하나님께 불만을 품거나 시샘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불만을 품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시샘하는 것은 부정적인 마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성공하고 잘되려면 이 부정적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은 모든 일에 비판적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무슨 일이든지 열심으로 하지 않으려 하게 만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우리보다 잘 살 수 있고 하는 사업이 잘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 사업은 더 잘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할 수 있으며 적당히 법도 어길 수 있고 뇌물을 주고 일을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평과 투기하지 말라 라는 말씀은 부정적으로 생각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노력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작은 일도 불평 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시골에서 어렵게 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무슨 일을 앞에 두고 생각할 때 먼저 안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해보지도 않고 잘될 까 염려하다가 중단해 버리는 것이 저의 약점입니다. 제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하게 되어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버려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사람들이 사업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저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셔서 사업이 잘되게 하시고 나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아서 어렵게 살게 하십니까?” 이것이 불평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지혜롭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노력하여 일하지 않고 복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만 한다고 해서 사업이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력도 없이 하나님께 불평스러운 기도만 한다고 하면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페니는 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취직을 했는데 그들에게 처음으로 맡겨진 일은 엘리베이터에서 손님을 맞아하고 인도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백화점에 취직을 한줄아느냐? 손님에게 인사나 하고 손님을 안내하는 일을 하려고 이곳에 들어온 줄 아느냐? 내 능력을 뭘로 보고 그러느냐?” 하며 불평만 하다가 며칠 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도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기도했는데 나에게 좋은 자리를 주시지 않고 왜 손님이나 안내하는 천한 일을 주셨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페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오고 가는 손님들을 보면서 손님들이 무엇을 원하는가 손님들의 취향을 파악했습니다. 그는 후에 사장에 눈에 들어 최고의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들이 작은 물건을 파는 세일즈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한달 동안 판매한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한달 목표 액을 이렇게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셔서 그 목표를 이루게 하소서!” 그리고 열심히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해 주시겠지 라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찾아다니고 일을 해야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왜 안됩니까?” “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은 잘되는데 나는 왜 안됩니까?” 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2절을 보시겠습니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하셨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말로는 쇠잔해지기 때문에 그들이 잘되는 것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은 멸망을 당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잘되고 형통하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께 불평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시37:28에서보면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본문 2절에서는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하셨습니다. 그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 끝이 길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잠10: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하셨습니다. 악인의 끝은 길지 못하고 단명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아야 하며 도리어 선을 행하고 진실 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좀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들에게서는 불평을 버려야 합니다. 이 불평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우리들에게 해만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원망만 하는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불평만 하는 사람들, 직장에서 불평이 많은 사람들, 교회에서 불평이 가득한 사람들, 가정에서 불평과 원망 속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성공하지 못하고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행운이 찾아오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40년간 살고 있을 때 늘 불평과 원망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고기가 먹고 싶다, 춥다, 덥다, 안된다, 할 수 없다. 모두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어려우니 애굽 땅으로 돌아가서 노예생활을 계속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너무나 부정적이었고 불평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한번도 애굽에서 구원해내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았고,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불평분자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은 두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평분자들은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계획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입에서 원망과 불평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도 감사와 소망의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2. 하나님을 위뢰하고 선을 행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을 행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악한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볼 때 낙심하기 쉽고 우리도 악한 사람들과 같이 성실한 삶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본문 3절에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 지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청년 요셉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형들에 의하여 비정하게도 애굽으로 팔려 가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였지만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음을 믿고 성실하게 일하였고 선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주인을 속이지 않았고 자기가 맡은 일에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그를 믿고 집안의 모든 일을 맡긴 것입니다. 보디발의 젊은 아내의 음란한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무고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그는 거기서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도 성실하게 살았고 선을 베풀었습니다. 그 결과 30세에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는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잠22:29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성실로 일하는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성공하고 우리가 존귀하게 되는 비결은 하나님 안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실로 무장하여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 존귀하게 될 것이고 성공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소원을 이루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셨습니다. 즉 여호와를 기쁘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고 도박과 스포츠, 좋은 옷, 맛있는 음식, 화려한 주택, 황금과 직위를 사랑하고 세상의 향락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은 신명이 나고 즐겁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는 소극적이고 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11장에서는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전도하고 헌신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기 원하신다면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의 옛 행실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여리고에 사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과거의 삶을 벗어버렸습니다. 뽕나무 위에서 주님을 만난 삭개오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변화를 받고 남에 것을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고 자신의 재산 중에 절반은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삭개오의 삶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 나누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라는 직책을 벗어 던지고 믿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하시며 칭찬해 주셨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4.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노먼 필 목사님을 찾아와서 질문하기를 “목사님 이 땅에서 근심 걱정없이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였을 때 필목사님께서 대답하기를 “공동묘지에 가면 근심과 걱정이 없다” 고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근심과 걱정 염려는 늘 따라다니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수없이 밀려오는 근심과 걱정 염려를 어떻게 물리치고 이기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염려라는 말은 마음을 갈기갈기 쪼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염려는 오늘도 우리에게 수없이 밀려오고 있고 이것을 이기고 사는 것이 바로 복을 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염려를 이기는 비결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하셨습니다. 시편63:19에서는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 가난과 질병의 문제, 슬픔과 고통의 문제를 담당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 치료하시고 온전케하시며 복을 부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하루 하루를 주님께 맡기고 사십시요. 내일 일은 주님께 맡기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승리하고 성공할 것입니다. 5. 끝가지 참고 인내하는 사람이 소원을 이루고 성공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고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기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25년이나 기다리고 기다려서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중간에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얻기도 하였지만 그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리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무릎사이에 머리를 넣고 7번 기도하였을 때 응답을 받아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 아람왕 나아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목욕을 했을 때 문둥병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이 있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기다리며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이 때를 참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않고는 열매를 딸 수 없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나지 않을 까 염려하여 자꾸만 땅을 파보면 그 씨는 썩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씨를 뿌렸으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며 헨리대통령시절에 체신부장관을 지낸 와나메커씨는 국민학교 2학년밖에 다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세계에서 헌금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세계에서 헌금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라는 소원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봉독한 시편 37편 말씀을 가슴 속에 품고 그 말씀대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시기를 바라십니까?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며 성실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으로 사십시요. 우리의 짐을 져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고 힘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소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