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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성결교회/ 2016-09-21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基督敎大韓聖潔敎會·Korea Evangelical Holiness Church)는 대한민국의 성결교 신앙을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이다. 목차 1 역사 1.1 역대 총회장 및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2 같이 보기 3 바깥 고리 4 각주 역사 만국성결교회는 1900년 찰스 카우만을 파송할 때 한국선교를 목표하였고, 1902년 한국에 대표를 두어 한국선교와 실제 연관을 두었고, 1905년 5월 29일 만국성결교회 총회 해외선교국은 찰스 카우만 부부를 한국 총리로 킬보른부부를 한국 부총리로 임명하였다. 이와 연관하여 만국성결교회 극동 본부 동경성서학원과 선교 컴파운드는 한국성결교회의 산실이 되었다. 만국성결교회는 1903년부터 한국신학생을 모집하였고 1904년부터 도쿄 컴파운드에 건너가기 시작하여 1907년 3월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김상준과 정빈 두 사람이 카우만, 길보른과 함께 동경에서 귀국하여 본부 후보지를 찾고, 전도활동을 준비하였다. 만국성결교회 선교사들과 한국 전도자들은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 염곡 또는 염동이라 불리는 종로 1가에서 예수교 복음전도관 (Jesus Doctrine Mission Hall)이란 간판을 붙이고 번화한 길거리에 나가 큰 소리로 복음을 외치며 전도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시작이다. 1933년 4월 5일에는 제1회 창립총회를 열고 발전하던 중, 1943년 12월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 특히, 그리스도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종말론적 교리인 재림교리가 일본 국체(國體)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령에 의하여 교단이 강제 해산되고 많은 교역자와 신도들이 순교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6년 교단을 재건하여 총회를 재조직하고 교단명을 ‘기독교조선성결교회’로 변경하였다. 이후 1949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교단명을 변경하였다. 1961년 세계 교회 협의회(WCC) 가입문제로 예수교대한성결교회가 분열되어 이탈하였다. 신학교육기관으로는 경기도 부천시에 소재하는 서울신학대학교가 있으며, 성결교의 모교회인 중앙성결교회가 있다. 언론기관으로는 신학잡지인《활천》, 교회신문인《한국성결신문》이 있다. 중생(重生, regneration), 성결(聖潔, Sanctification), 신유(神癒, Divine Healing), 재림(再臨, Second Coming)이라는 사중복음으로 교단의 신학적인 성격을 설명한다. 역대 총회장 및 서울신학대학교 총장 복음전도관 김상준, 정빈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초대 총회장은 박현명 목사이다., 현재는 여성삼 목사 (110년차/천호동교회)가 맡고 있다. - 복음전도관 창시자: 정빈, 김상준 - 동양선교회 설립자: 카우만 선교사 1대 감독: 토마스 목사 / 2대 감독: 길보른 선교사 / 1~3대 총회장: 박현명 목사 / 4대 총회장: 최석모 목사 / 5대 총회장: 박현명 목사 / 6~7대 총회장: 이명직 목사 / 8~9대 총회장: 김창근 목사 / 10대 총회장: 강송수 목사 11대 총회장: 김응조 목사 / 12대 총회장: 배문준 목사 / 13~14대 총회장: 오영필 목사 / 15~16대 총회장: 김정호 목사 17대 총회장: 배문준 목사 / 18대 총회장: 오영필 목사 / 19대 총회장: 김창환 목사 / 20대 총회장: 이진우 목사 21대 총회장: 김홍순 목사 / 22대 총회장: 황성주 목사 / 23대 총회장: 안창기 목사 / 24대 총회장: 박석근 목사 25대 총회장: 최학철 목사 / 26대 총회장: 김용은 목사 / 27대 총회장: 김신근 목사 / 28대 총회장: 정승일 목사 29대 총회장: 황경찬 목사 / 30대 총회장: 한명우 목사 / 31대 총회장: 이대준 목사 / 32대 총회장: 임사순 목사 33대 총회장: 박명원 목사 / 34대 총회장: 홍순균 목사 / 35대 총회장: 김희택 목사 / 36대 총회장: 정진경 목사 (신촌교회) * 37대 총회장: 박종만 목사 / 38대 총회장: 차몽구 목사 / 39대 총회장: 이만신 목사 (중앙교회) / 40대 총회장: 이중태 목사 41대 총회장: 홍순우 목사 (장충단교회) / 42대 총회장: 김현명 목사 / 43대 총회장: 송인구 목사 (조치원교회) 44대 총회장: 황대식 목사 (상도교회) / 45대 총회장: 홍종현 목사 / 46대 총회장: 김용칠 목사 / 47대 총회장: 여진헌 목사 48대 총회장: 박태희 목사 (성락교회) / 49대 총회장: 최건호 목사 (충무교회) / 50대 총회장: 장자천 목사 51대 총회장: 이만성 목사 / 52대 총회장: 이병돈 목사 (은평교회) / 53대 총회장: 손덕용 목사 (청주서원교회) 54대 총회장: 강신찬 목사 / 55대 총회장: 윤철중 목사 (춘천중앙교회) * / 56대 총회장: 이정복 목사 57대 총회장: 김필수 목사 / 58대 총회장: 이용규 목사 (성남교회) / 59대 총회장: 강선영 목사 60대 총회장: 이재완 목사 (영도교회) / 61대 총회장 이정익 목사 (신촌교회) * / 62대 총회장: 백장흠 목사 (한우리교회) 63대 총회장: 전병일 목사 (정읍교회) / 64대 총회장: 권석원 목사 (천안교회) / 65대 총회장: 원팔연 목사 (전주바울교회) 66대 총회장: 주남석 목사 (세한교회) / 67대 총회장: 박현모 목사 (대신교회) / 68대 총회장: 조일래 목사 (수정교회) 69대 총회장: 이신웅 목사 (신길교회) / 70대 총회장: 유동선 목사 (춘천중앙교회) * / 71대 총회장: 여성삼 목사 (천호동교회) (36대 총회장 정진경 목사, 61대 총회장 이정익 목사, 55대 총회장 윤철중 목사, 70대 총회장 유동선 목사는 모두 한 교회에서 두 번의 총회장을 배출한 교회이다.) ▶다음은 서울신학대학교의 역대 총장 명단이다. 이명직(01대) 에드윈 길보른(02대) 조종남(03-06대) 이상훈(07-08대) 조종남(09대) 강근환(10대 최희범(11대) 한영태(12대) 최종진(13대) 목창균(14-15대) 유석성(16-17대) 현재 제110년차 총회"를 통해 "성결교회 민족의 희망, 사중복음 우리의 사명" 이라는 표어를 갖고 활동중이다. -------------------------------------------------------------------------------- ▲상기 내용은 20151005 추가 수정본 '한국 내 복음주의 교단'으로, 역사, 사역 내용, 로고 설명 및 사중복음에 관한 해설 등은 교단 사이트에 접할 수 있다. 동 교단의 교역자 양상 기관으로 세워진 현 서울신학대학교 는 '진리와 성결'을 교육의 이념 삼아 지성. 덕성. 영성이 조화된 글로벌 인재 양성이라는 확대된 교육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 더불어 동 교단이 복음주의 교회로써 각 교단에 모범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음은 큰 물의가 없는 현실이자 주지하는 바이다. 같이 보기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 한국성결신문 바깥 고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 한국성결신문 서울신학대학교 중앙성결교회 한우리교회 한우리선교교회 각주 분류: 대한민국의 개신교 1949년 설립
내가 본 이성봉 목사/ 정진경 목사/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강연회 기조강연/ 2000-04-07
내가 본 이성봉 목사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강연회 기조강) 정진경 목사(신촌성결교회 목사) 영적각성과 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하신 이성봉 목사 (1900-1965)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분의 신앙과 사상 부흥운동을 재 조명함으로써 그의 크신 업적을 기리고 미래의 바람직한 부흥운동의 모델을 개발해보려는 이 신촌포럼에서 나는 이성봉 목사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토대로 이목사님의 살아오신 면모를 회상해보고저 한다. 내가 처음으로 이목사님을 뵙게된 것은 그가 신의주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신 때였다. 그 때 저는 소년시절이었다. 그때의 저의 기억으로는 우선 이목사님의 풍채가 뛰어났고 성대가 좋아서 찬송을 부르면 모든 성도가 매혹될 정도였다. 비록 일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성도들에게 그분처럼 인기가 높은 목사님은 처음이었다. 이목사님은 성격이 쾌활하고 마음이 넓어 포용력이 크신 분이었다. 이목사님은 개교회 목회 보다는 전국교회를 목회의 대상으로 전도사역을 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물론 가는 교회마다 부흥시키고 큰 역사를 일으켰으나 그의 전도의 꿈은 개교회가 아니라 전국교회였다. 1937년 이목사님은 성결교단 총회에서 전국교회 순회 부흥목사로 임명받은 이후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부흥사로 헌신하신 분이시다. 이목사님은 일년이란 짧은 기간 계시다 떠나셨지만 신의주교회에 남긴 그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지금 회고해 보면 이목사님은 그때 이미 개교회나 교파의 울타리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를 내 다보는 비젼을 갖고 계셨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된 후에도 그가 집회하시는곳이면 자주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고 저에 대한 기대도 있어서 한번은 조용히 집회가 끝난후 개인적으로 불려서 장차 부흥사가 되라고 권고 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은사를 주시지 않으셨다. 내가 오랜 세월 그의 주변을 돌면서 받은 첫 번째 인상은 그의 철두철미한 소명의식이었다. 그는 소명감에서 살았고 불타는 소명감에서 일했고 소명을 위해서 죽은분이다. 이목사님은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회고록 에 의하면 그는 어릴 때부터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받아 어린 마음에 나도 김익두 같은 위대한 부흥사가 됐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교회를 멀리하고 세상에서 방황하기 시작했 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환경이 그가 바라는 앞길을 막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시기는 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전환이기도 했다. 그는 18세로부터 21세까지 자포자기하는 탈선의 길을 걸었다. 그가 21세되던 1920년 6월 24일 주일에 중화읍에 있는 과수원에서 실과를 따서 싣고 평양에 가서 팔아 그 돈으로 그날 밤새 술을 마시고 밤늦게 마차를 타고 돌아오던 중 갑자기 이름모를 병으로 쓰러졌다. 6개원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다리에 골수염으로 판명되었다. 이 목사님은 6개월 동안이나 웅직이지 못하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기간은 그가 죽음과 싸우는 기간이였다. 이 때의 심경을 그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 했다. \\\\\\\\\\\\\\\"죽음 앞에는 모든 것이 매장을 당한다. 돈도 전답도 고대광실 같은 집도 지식도 권세도 죽음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때부터 이목사님의 가치관은 변하기 시작했다. 염세적인 인생관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은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그는 자기가 지은 죄를 자각 하게 되었고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무서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통찰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 기간은 약 3년 걸렸다. 죽을병에서 해방된 그는 장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 었다. 이 때부터 이목사님은 자신의 여생을 하나님께 바쳐 자신과 같이 병든 불쌍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25년 그가 26세 때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딴 세계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병상에서 얻은 중생의 체험 죽음에서 해방된 치유의 은총은 하나님을 위해 인류를 위해 살겠다는 헌신의 동 기가 되었으며 이 때부터 전도 사역에 생을 바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이목사님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자기의 정체성과 사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야 의식을 갖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확신과 능력을 갖고 사명을 완수하신 것처럼 이목사님은 사명의식에 불타기 시작했다. 이목사님이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된 것은 자천에 의함도 아니요 사람에 의함도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 세운 소명의식이 헌신의 기초가 되었다. 하나님의 소명없이 전도자가 될 수 없고 부흥사가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명을 사양할 수도 없고 어떤 방해가 있어도 중단할 수 없다. 이것이 세상 직업과 다른 점이다. 이목사님은 일생을 이 소명의식에 의해 살았고 그 소명의식을 과거 어느때의 한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고 매일 매일 새로운 사건으로, 오늘의 사건으로 재현하면서 사셨다. 마치 바울이 다른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원의 확신을 상 실할까봐 두려워하면서 산 것처럼 이 목사님은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 하곤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목사님은 저에게 가끔 소명감을 상실하지 않았는지 생각하라고 물으실 때가 있었다. 두 번째로 이성봉 목사님은 철저한 복음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 세계의 모든 불행은 죄 문제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인간은 먼저 죄에서 구원받는 일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설교할 때마다 \\\\\\\\\\\\\\\"죄는 문둥병\\\\\\\\\\\\\\\" 같은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원죄와 자범죄에 대한 보수적인 죄관을 천명하셨 다. 그는 모든 인간의 고통은 범죄의 결과라고 하면서 설교때마다 죄에 대한 지적과 비판을 강조한 것은 죄의 속성과 무서운 결과를 직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중생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고 거듭나는데 필수적인 요건은 회개와 신앙이라고 말했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며 저주와 멸망을 막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입술의 사건이 아니라 반드시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가서 회개는 행위적인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다. 소극적으로는 변상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적극적으로는 삶의 변화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로 이목사님이 설교에 강조하신 것은 중생 후에는 반드시 성별된 삶을 살 아야 한다는 성결이다. 성결은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인간 자신의 삶 즉 모든 불의한 습관에서까지 깨끗하여질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목사님이 세 번째 강조한 것은 \\\\\\\\\\\\\\\'신유\\\\\\\\\\\\\\\'의 복음이다. 그가 부흥집회에서 자주 주장한 것은 신유 즉 치유의 복음이다. 이 신유는 이목사님께서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전한 복음이다. 그러나 이목사님은 신유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비주의 로 흐르기 쉽고 이단으로 변질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는 이런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신앙이 감정과 기분에 좌우되지 말고 말씀에 굳게 서야 될 것이며, 기사와 이적에 지나친 관심을 두지말고 말씀의 지식으로 이단과 사설을 퇴 치해야 한다.\\\\\\\\\\\\\\\" 이목사님은 다른 부흥사들에 비해 재림을 자주 강조했다. 재림 사상은 이목사님 의 모든 사고와 삶의 기반이였다. 예수의 재림을 구원의 완성으로 본 이목사님은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체험하고 그대로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 이런 구원의 과정 설정은 전인구원의 방법을 제시한 훌륭한 신학적 접근이라고 생각된다. 이목사님은 이렇게 사중복음을 부흥설교의 핵심으로 전하면서도 이것이 성결교회 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천명한 것은 그의 부흥사역이 교파를 초월한 초교파적이었던 것을 입증한다. 이렇게 그의 복음 선포의 핵심인 사중복음을 강조하면서도 이목사님은 민족사적으 로 절망 빈곤 질병 등으로 좌절 속에 있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조금만 참으면 새 아침이 올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의 복음을 주었다. 세번째로 내가 본 이목사님은 흠잡을 수 없는 깨끗한 삶을 사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나 신분에 어긋남이 없는 \\\\\\\\\\\\\\\'깨끗한 삶의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먼저 인기 관리에 성공한 분이었다. 내가 알기에는 이목사님 같이 어디를 가나 인기가 높은 목사를 보지 못했다.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의 설교와 찬송을 듣기 위해 원근 각지에서 모여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목사님은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거나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재물 관리에 성공하신분이시다. 그 당시 어떤 부흥사 보다도 부흥회를 인도 한 후에 사례비를 많이 받은분이다. 그러나 그는 물질을 초월했다. 그는 물질 관리에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도에 첫 목회지인 공주 교회에서 시무할 때 이목사님이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다. 집회가 끝나고 얼마 안되는 사례비를 드렸더니 그 봉투에서 돈을 꺼내들고 몇번이나 반복해서 세어본다. 그래서 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중에서 반을 꺼내서 주면서 이것은 정전도사의 몫이야 하시고는 다시 반을 봉투에 집어넣더니 전부를 정전도사에게 주고싶은데 어떤 가난한 전도사를 돕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반만 준다며 미안해 하셨다. 그분은 물질에 청렴하신 분이었다. 많이 벌어서 다 주고 가신 분이다 내가 아는대로는 사모님과 따님들에게는 지극히 인색한 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목사님이 그렇게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기도와 말씀 중심의 생활을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쉬지않고 순간 순간 기도로 모든 일을 처리하셨다. 모든 문제를 기도로 풀어가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셨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나 인간적인 지혜나 방법을 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생활을 했다. 또한 이목사님은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대화를 하는 중에도 자기 의견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풀어주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 중심 의 생활이 그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고 유혹을 이기고 승리로 생애를 마친 비결 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이목사님의 부흥운동은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거두었다. 그가 사역한 교회마다 수 많은 영혼이 구원의 열매를 거두었다. 그의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 병에서 치유받은 사람들, 절망에서 소망을 얻은 사람들, 특히 그의 말씀과 깨끗한 삶에 감동되어 헌신한 목회자 부흥사 선교사의 수도 교파를 초월해서 수 없이 많다. 이성봉 목사님은 파란만장한 한 세기를 살면서 후회 없이 사명을 완수하신 분이시다. 연구논문 1. 내가 본 이성봉 목사 2.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 재조명 3.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해석 4.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5.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6. 이야기 신학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7.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8. 이성봉 설교의 수사학 9. 이성봉의 성서해석학 수립을 위한 하나의 전진 10.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좌 담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
두암교회 순교 이야기/ 성결교회 역사/ 2014-04-04
두암교회 순교 이야기/ 성결교회 역사 두암교회23인 순교자이야기 (두암교회의 전경 ,오른쪽에 순교자 탑이 보인다)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두암 마을에 위치한 두암교회의 순교이야기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동족상잔의 끔찍한 비극이 빚어졌던 순교의 현장에는 지금 23명의 순교자 합장묘와 기념탑이 세워져 있어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두암교회는 해방과 함께 전북 정읍 천원교회의 지원으로 김용은 전도사가 1949년 1월 7일 그의 모친 윤임례 집사 가정을 중심으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기와를 엊은 집 가정에서 단촐하게 이웃사촌들끼리 모여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된 두암교회는 그 이후 김용은 전도사와 그 가족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마을 사람들을 하나 둘 변화시켜 점차 마을 전체를 예수 믿는 신자들로 채워 갔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아 숨죽이며 살아왔던 이 땅의 백성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두암교회는 6. 25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임동선 목사를 초청해 부흥회를 열었다. 그런데 부흥회 설교 중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이 많았다. 이 일이 발단이 되어 전쟁 발발 후 마을에 들이닥친 공산당은 마을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잔혹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 공산당은 두암교회가 자신들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판단하고 윤임례 집사의 가족들은 물론 교인들을 위협하면서 예배를 방해하다가 마침내 예배중지 령을 내렸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런 탄압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켜냈다. 하지만 1950년 9월 하순경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은 더욱 거세졌고 이 과정에서 김용은 전도사의 동생 김용채 집사가 총을 맞고 고부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그곳에서 다시 그들의 총칼에 우익인사들과 함께 희생됨으로 마을의 첫 희생자가 되고 만다. 교회를 지키려는 교인들과 악랄한 공산당 사이의 피로 얼룩진 접전은 그 해 10월 19일 그 막을 내리고 만다. 여기저기에서 몽둥이와 식칼을 들고 몰려온 공산당 패거리들은 아이들까지 모아놓고 ‘예수쟁이는 미 제국주의 앞잡이’라며 미친개처럼 날뛰다가 끔찍한 살생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결국 그 때 윤임례 집사와 그의 가족들 모두가 참혹하게 살해된다. 그리고 살기가 등등한 공산주의자들은 마침내 교회와 교인들의 집 4채에 모두 짚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불타는 재와 연기 때문에 며칠 동안 동네에서 우물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날 윤임례 집사와 둘째 아들 김용채, 또한 며느리 조선환 집사 등 일가족이 모두 학살되었고 정읍농업고등학교 학생회장이었던 김용술과 김용은전도사의 친구 박호준 씨 등 두암교회 성도들 23명이 처참하게 순교를 당했다. 윤임례 집사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아 마지막 순간 죽음 앞에서도 기도하다가 칼에 찔려 희생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처럼 두암교회 순교자들의 피는 하늘에 상달되었다. 처참하게 짓밟히고 폐허로 버려졌던 곳에는 새로운 예배당이 세워졌고 23명 순교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순교탑이 건립되었다. 이로써 두암교회는 한국기독교 역사유적지를 찾는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순례지가 된 것이다. 한편 순교자 윤임례 집사의 아들인 김용은 목사와 그의 동생 김용칠 목사 형제는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장까지 역임하는 등 성결교회 부흥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서명선 목사를 비롯해 20여 명의 목회자가 두암교회에서 배출된 것은 모두 23명 순교자의 피 값으로 맺혀진 아름다운 열매라 할 것이다. 당시 두암교회는 전소 되었고 성도들도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쉽게 복구되지 못하다가 1964년 두암마을 출신인 김태곤 전도사의 집에서 학생들의 주일예배하면서 주일학교가 먼저 재건의 빛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불타버린 교회는 1966년에 비로소 재건되기 시작했는데 이 때 가매장했던 순교자들의 무덤을 두암교회 동산으로 이장하면서 23인 순교자들의 유해가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합장묘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이들 순교자들의 신앙과 그 희생의 정신을 기리자며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총회차원에서 뜻을 모아 “23인의 순교자기념탑” 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 탑은 4각 십자가 모양으로 건립되었는데 4각은 성결교회의 4중 복음을 상징하며, 그 아래 쌓은 돌은 23인의 순교자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 성령의 불을 상징하는 횃불이 조각되어 있다. 하단 정면에 봉헌하는 문헌이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예수이름으로 죽어간 23인의 순교자 명단이 조각되어 있어서 순례자들에게 강한 감동을 전한다.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316 두암성결교회(담임:홍용휘 목사) 박경진(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수원성결교회 개척 목회를 중심으로/ 송기식 목사/ 2000-04-07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수원성결교회 개척 목회를 중심으로 송기식 목사(수원성결교회) 이성봉 목사의 목회는 수원교회, 목포 북교동교회, 신의주 교회에서 전개되었다. 그후 전국 순회부흥사로 임명받아 잠시 봉천교회, 아현교회, 신촌교회를 목회한 일이 있다 하나, 이때에는 전국교회의 부흥회 인도가 주사역이고 목회는 잠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성봉 목사를 성결교회뿐 아니라 한국교계에 크나큰 영적 각성과 부흥을 선도한 부흥사의 모범으로 인정하는 데는 그 누구도 인색하지 않고, 따라서 부흥사로서의 이성봉, 설교가로서의 이성봉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어느 정도 이루어 가고 있다고 하겠으나, 정작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에 관하여는 별로 연구된 바가 없다. 다만 정인교의 논문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이 목회자로서의 이성봉을 개괄적으로 언급한 것(구령열에 불타는 복음전도 목회, 철저히 영적인 체험이 동반된 목회, 철저히 기도로 풀어 가는 목회, 풍성한 결실을 맺는 목회 등. 정인교,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신덕교회70주년 학술논문집, 149-152)이 보일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이 한 교회 담임목회자로서의 이성봉과 그 목회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성봉 목사(당시는 전도사)가 28세의 젊은 전도자로서 수원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던 짧은 시기(1928년 3월∼1931년 3월)는 사실 다음의 몇 가지 제약 아래서 이루어진 목회였음을 전제하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① 아직 목사안수를 받지 못한 젊은 전도사로서 교단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② 기존교회를 목회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거부적 반응을 보이는 수원에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③ 일제가 신사참배의 압력과 가혹한 황민화정책을 실시하던 시기였다. 수원교회 개척 이성봉 전도사는 이혜숙 전도부인과 함께 1928년 3월 28일자로 수원에 파송되었고, 수원으로 이사온 몇몇 성결인과 함께 그해 4월 8일 부활주일에 신풍리의 16평 셋집에서 감격적인 창립예배를 드렸다. 그가 교회창립일을 부활주일로 택한 까닭은 이 교회가 부활의 주님을 선포하는 교회로서, 주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따라, 죽으면 살리라는 의지를 다지는 뜻이리라고 짐작된다. 개척자 일행은 이 전도사의 인솔하에 거의 날마다 수원 역전과 장터를 비롯하여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언제나 나타나서 복음을 전했다. 이 전도사가 코넷이라는 나팔을 신나게 불고 다른 이들은 북을 치면 동네 아이들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젊고 훤출한 미남 전도자의 우렁찬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어서 삽시간에 수원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또 설교 중간 중간에 장쾌한 바리톤 음성으로 복음성가를 부르면 산만하던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모여온 무리들 앞에서 성령이 충만한 청년전도자 이성봉 전도사가 말씀을 전하고 병자에게 안수기도할 때 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가 하면, 전도행렬을 방해하려고 나온 사람들이 어느새 전도행렬의 뒤를 따르는 기적이 연출되고 있었다. 전도 지향적 목회 교회를 개척한 후 이성봉 전도사의 목회는 전술한 대로 당연히 전도 중심의 목회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타는 심정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개인전도와 가정집회, 노방전도를 쉬지 않았다. 그 열매는 매우 빠르게 나타났다. 성결교회 연회 제1회 의사록은 당시 수원교회 교세보고를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수원교회는 설립된 지 불과 10개월이지만 주께서 특별히 같이하신 결과 신자의 평균출석이 60명에 달하였으며 제1회로 학습받은 신자가 남녀 11명 남녀 집사가 4명, 월정헌금이 20원에 달하였사오며…” 16평 셋집 예배당은 차고 넘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어린이 전도에 힘쓴 결과 165명으로 보고되었다. 이것은 개척한지 1년이 안되어 장년 60명, 어린이 165명 도합 225명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 1931년 제3회 연회의사록의 보고에 따르면 수원교회 장년부 신자는 142명 주일학생 230명이니 도합 372명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대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회개를 강조하는 목회 이성봉 전도사는 사람을 모으는 것만으로 교회가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죄를 회개하고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됨으로 거듭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한 목회철학일 뿐 아니라 성서학원 시절의 이명직 교수에게서 받은 영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수원교회 설교에서 회개를 수없이 강조했다. 지난날의 죄를 덮어두고서는 새사람이 될 수 없고 죄의 세력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회개와 관련한 한 가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마치자,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가 지은 7가지 죄목을 써서 내놓고 해결 방안을 물었다. 군청 농회의 김기사였다. 그는 황해도 국무농장 사무원으로 있을 때 공문서 위조를 해서 공금 벼 나락 열 가마를 횡령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그 금액을 교회에 헌금하려고 했으나 이성봉은 교회가 도둑질한 돈을 받는 곳이 아니라고 하며 횡령한 그 기관의 기관장에게 사과 편지를 하도록 했다. 김기사는 고민하다가 벌받을 각오를 하고 자신이 지은 죄를 솔직히 회개하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후 황해도 국무농장 책임자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네 편지를 보고 감사했다. 너는 어떤 종교를 가졌기에 이런 어려운 죄를 회개할 수 있는지 놀랍다. 네 편지를 보니 내 죄도 생각난다. 상관에게 보고했더니 용서하라 했다”는 내용이었다. 김기사는 감사하여 온 교회 앞에서 간증하니 온 성도들이 은혜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목표 지향적 목회 성도의 수효가 늘고 교회가 부흥되자 예배처소가 좁아서 성전건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여 1929년 8월부터 성전건축을 위한 청신기도단을 조직하였다. 사실상 새벽기도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지만 이 전도사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기도단을 조직하여 성전건축을 목적으로 기도하도록 지도하였던 것이다. 감리목사 이문현의 연회보고에 의하면 청신기도단을 조직하고 항상 새벽마다 기도하는 아이가 45인이나 된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어린이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어린아이들 45명을 성전건축을 위한 새벽기도에 동원하게 하였는데, 기도만이 아니라 남자는 매일 1전 이상, 부인은 성미(誠米)를 성의껏 떠서 하나님께 드리면서 기도하도록 지도하였다. 또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가난한 신자들에게도 성전건축을 위하여 헌금을 하면서 기도하되 그들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분량을 요구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벳세다 광야의 오병이어 기적에서처럼, 각기 매일 1전 이상, 성미를 한줌 이상 드리면서 주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성전건축이라는 기적이 온다고 하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확신이 1929년 12월 25일 성전헌당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창립한 지 불과 1년 3개월 만의 쾌거였다. 무릎 목회 성전 건축을 위하여 성도들의 기도의 불씨를 모았다고 했거니와 이성봉 전도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친히 기도하여 응답받고 해결받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의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가는 곳마다 큰 능력을 나타내셨다. 노방전도에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의 가정을 심방하여 병자를 위해 안수하고 기도할 때 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관운장의 그림을 걸어놓고 점을 치는 무당이 병들어 7년간 누워 있었는데 이성봉 전도사가 찾아가서 우상을 버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였더니 무당의 병이 나았고, 그는 그시로 모든 제구(祭具)와 우상과 관운장 상을 불살라 버렸다. 다음주일부터 교회에 나와 열심 있는 신자가 되었다. 청년 전도사의 이러한 활약에 마귀가 잠자코 있을 리 만무였다. 이성봉과 함께 파송된 전도부인이 돌연 음독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모든 의혹과 비난이 이성봉에게 쏟아졌고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다. 그는 억울하였으나 일체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께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다. 인내와 기도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가운데 하나님은 모든 진상을 밝혀주셨다. 그녀에게는 우울증과 정신질환이 있었고, 그 때문에 음독했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떠나갔던 신자들이 다 돌아오게 되었다. 전보다 더 열심히 믿고 교회는 일익 왕성하니 기도의 승리였다. 뿐만 아니라 이 전도사는 불철주야 과로함으로 온몸이 쇠약하여 앓게 되었다. 신유를 믿기 때문에 의약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나 그 자신은 의약을 쓰지 않고 견디었다. 주일오후였다. 너무 열이 심하여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공중에서 마귀의 소리가 들린다. 너는 죽을 것이고, 회개하여도 소용없다고 한다. 그는 십자가를 보여달라고 간구했다. 예수 없는 검은 십자가가 나타나기에 “사탄아 물러가라” 외치고 결사적으로 기도하니 주님 달리신 참 십자가를 보았다. 감격하여 그 십자가 붙들고 기도하니 갑자기 정신이 회복되고 정신과 육체가 깨끗하게 나아서, 네 시간을 혼수상태에서 고생한 후에 일어나, 주일저녁 예배에 나아가 간증설교를 했다. 결국 이성봉 전도사의 수원교회 목회는 무릎으로 기도하여 응답받은 목회라고 할 것이다. 그는 기도로써 한 가지 한 가지 난제를 풀어가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현장을 경험하고, 목회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깨달아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성도들을 돌보았던 것이다. 홍보 감각이 있는 목회 교회가 한참 부흥 중이었던 1929년, 이성봉 전도사는 활천 1월호에 ‘축성탄하신년’(祝聖誕賀新年) 광고란에 수원교회 광고를 실었다. 거기에는 교회 개척 일꾼들의 명단(33명)이 실려 있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단 다른 교회 광고에 비해 큰 지면을 차지했고, 시각 효과를 내기 위하여 남자는 한문으로, 여자는 한글로 쓴 것을 볼 수 있다. 이뿐 아니다. 이 전도사는 부활주일에 개척예배를 드렸고, 성탄절에 헌당식을 거행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성탄절은 불신자들도 축절인지라 이날에 교회당을 헌당하고 교단본부의 내빈들과 동리 주민들까지 초청하여 큰 잔치가 되게 함으로 전도와 교회홍보의 기회를 삼은 것이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의 부속품을 기부하는 일도 있었으니, 그는 지역사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글을 맺으며 한 가지 더. 수원교회에서 계속 목회하기를 원했으나 목사안수에 실격되고, 약한 목포교회로 파송되었을 때 섭섭한 마음이 있었으나 교단본부의 명(命)에 순종함으로 교단에 속한 목사로서의 정조를 결코 이탈하지 않았던 점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송기식 목사(수원성결교회)
병촌교회 순교 이야기/ 성결교회 역사/ 2014-04-04
병촌교회 순교 이야기/ 성결교회 역사 병촌교회66인,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충청남도 논산지역은 본래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배를타고 서해안을 답사하다가 선교후보지로 선정하고 선교하던 지역이다. 병촌리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으며 병촌교회는 1935년 5월에 설립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핍밥속에서 계속 부흥 성장하고 있었으나 일본이 1943년 교단을 일본 기독교 조선교도연맹으로 강제 통합하면서 교회를 폐쇄 시키고 교역자와 교회대표들을 구속시키므로 큰 아픔을 겪었다. 이때 박해를 받고 흩어지면서 숨어들어간 성도들은 가정교회 형태로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었다. 광복과 함께 정부가 수립되고 있었으나 예배당도 없이 신앙을 지켜오던 병촌교회는 우제학 집사, 노미종 권사, 김주옥 집사 등이 주축이 되어 교회를 재건하면서 힘차게 부흥의 역사를 세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재건과 부흥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일어난 김일성의 불법남침으로 평화로운 강산이 초토화되는 불행이 닥쳤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공산당의 군홧발에 교회가 짓밟히면서 이 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전국 각처에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는 참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 해방 후 남로당 좌익 세력이 강성하던 논산 지역 성동면 일대에서는 우익 진영과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행위와 박해가 시작 되었다. 공산당은 기독교인들만 보면 기제국주의 앞잡이 반동분자로 규정하고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그래서 우제학, 김주옥 집사를 잡아 가두고, 기독교신앙을 버리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고 고문했다.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고,결국 논산의 상급기관으로 호송되어 더욱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병촌리 일대에서 공산당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가 처참히 죽어간 병촌교회 순교자들을 보면 남자가 27명(신약),여자가 39(구약)이다. 모두 66명(성경66권)이 신앙을 지키다. 순교를 당했는데 이는 성경적으로도 큰 의미를 느끼게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공산당은 병촌교회 성도들이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도록 겁박하며 잔혹하게 고문하고 강경한 회유책을 썼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맞섰다. 무자비하게 살생을 벌이던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미군 비행기가 폭격하는 틈을 타서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주옥 집사가 다행히 산 증인이 되어 지금까지 그들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며 증언하고 있다. 병촌교회 66명 순교자의 생명을 앗아간 상황을 돌아보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불법 남침으로 물 밀 듯이 밀어닥친 공산군들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고, 지방 적색분자들과 합세하여 각처에서 양민 학살을 일삼았다. 하치만 마침내 유엔군의 9.28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서울이 탈환되었고, 마침내 전국적으로 구군이 우세하게 되었다. 반면에 힘을 잃은 공산군은 퇴각하면서 최후 발악으로 병촌교회 교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몽둥이와 삽, 괭이, 죽창 등 갖가지 농기구들까지 동원하여 원시적인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성도들을 뒷산 계곡의 구덩이에 한꺼번에 파묻었다. 당시 우제학 집사의 부인 정수일 집사(당시 31세)는 시부모, 시동생, 아들, 딸, 조카 등 일가족 10명과 함께 둘러앉아 기도하고 찬송하며, 오히려 공산군들에게 "공산군은 패전하니 이제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 바으라."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자의 거룩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사실은 공산당에게 체포되었다가 극적으로 타출한 김주옥 집사와, 붙잡히기 직전 어린 동생을 업고 도망친 김주옥 집사의 딸 김명호(당시 15세)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명호 사모는 "공산군은 한옥 대청집인 우리 집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으며, 아버지를 비롯해 교회에 다니는 남자들을 잡아다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미군기가 폭격할 때 도망쳤지만 작은아버지는 마을에서 다시 붙잡혀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산당은 어머니를 잡아다가 대청에 묶은 채로 높이 올렸다 바닥으로 내리치면서 '천당에 가는 기분이 어떠냐?' 이렇게 조롱까지 했습니다. 살상이 끝난 후 나중에 남은 사람들이 시신을 찾아 나섰는데, 온 몸에 피멍과 상처가 가득한 시신들, 눈과 팔이 빠진 시신 등이 이산 저산 구덩이에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차마 끔찍해 두 눈으로 볼 수 가 없었습니다."라고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진술 하였다 . 병촌리 집단순교사건은 성결교단 내에서는 6.25 당시 단일교회 순교사건으로는 가장 큰 규모이다.'면류관'모양의 순교기념교회 앞에는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66인 순교기념탑'(성결교회 순교사적 제1호)이 서 있는데, 그 4개의 탑 날개는 성결교회의 4중복음을 상징하며 탑의 받침대에는 66명의 순교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현재 순교기념교회와 순교기념탑은 순교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인근 마을에 위치하고 있지만 순교자들이 처참하게 순교당해 뭍혔던 마을 뒷산과 골짜기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어, 열아홉 가정 66명의 평신도 순교자가 보여준 존귀한 순교신앙과 정신을 생생히 느끼게 하고 있다. 병촌교회는 매년 9월 마지막 주일을 '순교기념주일'로 지키고 있다. 이로 인해 신앙을 지키면서 목숨 바쳐 희생한 66명의 고귀한 순교정신을 되새기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사진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아쉽지만, 이 순교의 진실은 한편의 드라마로 후세들에게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을 만한 역사의 한 페이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소 충남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228 (병촌교회 담임목사 : 임용한)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이성봉의 회개의 인식론과 은총의 존재론/ 2000-04-07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이성봉의 회개의 인식론과 은총의 존재론 I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1); 이것은 이 성봉 목사의 자서전의 서명이다. 그 책의 이름처럼 그분은 자신의 온 삶을 다하여서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비록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겪었으며2) 한 때 방탕한 세월을 지내기도 하였지만 병을 통하여 깨닫고3)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입었다고 전한다. 그 후 그분의 삶은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리만큼 우리 한국의 대표적 부흥강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신 것이다. 흔한 신학 서적하나 남기지 않으셨으며 그 어떤 철학적 업적으로 특출한 것은 없었지만 가난하고 절망적이었던 당시의 한국사회에 희망의 복음4)을 증거 하였으니 그의 공로는 가히 독일의 철인 G. Fichte의 그것에 못 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 교파의 지도자 일 뿐만이 아니라 어둠과 절망 중에 있던 한국사회의 빛으로서 이 민족의 정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지하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이 목사님의 설교는 그들의 절박한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현실적인 “부흥”5)을 주제로 한 것일 수 밖 에 없었다. 정인교 박사에 의하면 이성봉 목사의 설교는 전형적인 부흥설교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1)구원의 복음, 2)변화의 복음, 3)중생-성결-신유-재림의 성결 교회적 특성 4)위로와 희망의 복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6) 정박사의 분류에서 분명해 지듯이 그의 부흥설교는 그만큼 어려운 현실에 사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며 부흥의 기대 역시 간절하게 만든다. 그의 설교 안에 들어있는 찬양의 가사와 예화들은 구구 절절히 어렵고 힘든 시절 부흥을 바라던 우리의 심령에 직접적인 호소를 하고 있는 것들이다. 당시 사회의 간절한 소원과도 일치하던 그의 설교의 주제가 실로 時宜適切하기도 하였지만 도탄에 빠져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설교가 그토록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던 것은 어떤 특별한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설교 안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는 하나님의 현실을 증거 할 수 있었으며 많은 사람이 이를 체험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부흥집회에는 신유와 같은 기적적 사건이 있었는가 하면 동시에 고통받고 하나님 없이 시름하던 형제와 자매들의 해방의 사건이 있었고 영적 도덕적 갱신과 회복의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7) 이 일차적이며 실제적인 사건은 성서의 말씀이 현실화되면서 주어진 것이었다. 성서에서 증거 된 그 하나님의 말씀이 당시 고통받던 형제와 자매들의 현실을 뚫고 자신들의 삶을 섭리 하에 있는 축복된 삶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을 때 이 치유의 사실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 변환을 우리는 하나님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한 사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이 대 변환이야말로 기실 그 어떤 철학적 인식론8)보다도 더 놀라운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설교의 주제인 부흥의 특성을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 약한 자를 치유하고 강하게 하는 것인 동시에 깨닫지 못하는 자를 각성케 하는 것이며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시 참 부흥과 거짓 부흥을 나누고 거짓 부흥은 감상적인 부흥으로서 성결에 대한 아무런 관심과 죄에 대한 통회가 없는 것을 지적한 반면9) 참 부흥은 죄와 허물을 깨닫고 심령이 변화되는 것10)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부흥의 현실은 교회에 피를 부어주는 대 동맥과 같은 것으로서 사람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모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도록 만드는 현실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이성봉 목사의 부흥을 단순히 우리가 우리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사건으로 볼 뿐 아니라 우리를 규정하는 모든 세력들을 스스로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존재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게 한다. 이성봉 목사에 의하면 그 부흥의 첫 관문에 회개와 각성이 있는 것이며 이 전환은 인식론적 전환을 내포한 더 크고 놀라운 것이다. 이성봉 목사 그가 비록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반성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초 역사적 현실을 지칭하거나 해석하여 담아 낼만한 “언어-사건”11)을 주도 면밀하게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부흥과 회개을 강조한 설교의 언어들을 통하여 이 전환을 성취하였다. 이성봉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구현된 신학적 실존의 공동적 체험은 이 세계, 비록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반적 경험의 객관적 대상으로 인정되지는 못하지만 가장 구체적이며 중요한 현실인 것이다. 그의 설교와 그의 언어는 직접적이고 사건적 이지만 우리는 경험의 일차적 차원에서 사용되고 이해된 이성봉 목사의 언어를 반성적인 해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즉, 이 새로운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성봉 목사가 말씀해석과 설교의 수사학적 기교를 통하여 수행한 인식론적 전환과 하나님 말씀의 현실화는 분명한 신학적 반성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 분석과 해석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성봉 목사만이 아니라 많은 목회자들의 설교가 이 하나님의 현실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사람들이 필연적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인식론적 전환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인신론적 전환은 존재론적 지평에서 구체화되고 결국 우리는 새로운 현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여진 세계 앞에 서 있게 되며 간접적으로 사건적 특성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현실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의미를 규명 할 수 있는 것이다. II 신학적 작업 안에서 우리가 해명하여야 할 중대한 과제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며 동시에 이 세계이다. 이 두 대상은 상이한 각 각의 대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나의 현실을 형성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현실이란 개념을 우선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오늘 만나고 있는 현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어떤 새로운 형이상학적 연구가 필요한 것인가? 현실이란 개념은 실은 고대의 존재나 중세의 실재(realitas)라는 개념을 통하여 사유되었던 것이다. 현실이란 개념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현실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2) 오늘의 우리는 현재 실재하는 것이 그 실존의 모습 그대로 우리의 사고의 대상으로서 이해되는 사고의 대상13)이며 그 실재들은 우리의 사고의 대상의 범위와 영역을 넘어서 그 스스로 존재하면서 우리의 사고의 의미14)를 구성한다고 믿고 있지 않는가? 현대의 주관적 사유는 이렇게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적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대 정신과학의 기본 방법론으로 인정받는 해석학적 객관이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관성의 전 이해를 통하여서 구성된 것을 말한다.15) 어떤 객관적 대상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기 보다 이미 우리 주관적 사고와 협동적 영향아래 놓여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현대의 공헌은 이 현상이 개인의 실존적인 범주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범주이기도 한 것을 밝힌 것이다. 즉 더 깊숙이 에는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사고의 대상이 아니며 하나의 “생기”, 혹은 “발생”이라는 절대적 범주에서 통일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현실이해는 이러한 “생성”으로서의 현실이해를 전제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양한 언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에서 사건으로 일어났던 변혁적 현실은 실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일상성을 뛰어넘는 미래적 현실16)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신학적인 개념을 통해 서술하고자 한다면 아마 몰트만이 특징적으로 사용하였던 “종말론적 현실”이란 개념과 가장 가까울 것이다.17)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미래적 존재이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 현존의 근원이라고 실존적이며 존재론적으로 설명되기보다는 우리가 장차 되어져야 할 현존의 모습과 연관되어 있는 존재이며 그 미래를 결정짓는 존재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의 비밀은 십자가에서 이 세계의 모순을 지양하는 변증법적 운동의 근원적 존재라는 데에 있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계의 질서와 그 어떤 공통성을 가진 유비적 존재가 아니라 모순과 갈등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차이의 존재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세계 섭리의 계획은 다름 아니라 세계와 하나님의 존재사이의 차이와 모순의 지양이라는 변증법적 승화의 과정에서 드러나게 된다. 비록 이 하나님의 존재의 현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 그 구체적 계시의 현실에 대해서는 몰트만과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몰트만은 자기 나름대로 역사적 시간의 범주에서 이 구체성을 찾아보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몰트만이 생각한 변증법적 모순 지향의 특출한 역사는 전형적으로 신학적인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성봉 목사의 설교에서 구형화된 현실개념은 그 당시 한국의 사회가 당면하고 있던 모순과 비 존재의 갈등을 파괴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역설적으로 가져오게 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18). 이성봉 목사에게도 십자가는 대속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내를 수반하는 변화의 외침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19) 심지어 개인적인 치욕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까지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20)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계를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21)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이성봉 목사의 이 변화의 요구가 과연 세계사적 고난의 현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뚫고 극복하고자 하는 현실적 언어인가 하는 점이다. 즉 거꾸로 그의 언어는 현실도피의 이중성을 보이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속 시원하게 대답하여야 한다. 이성봉 목사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설교가운데 이 질문을 대답 할 수 있도록 하는 귀중한 설교가 있다. 다름아니라 천국에 대한 설교이다.22) 이 설교에서 그는 먼저 천국을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째는 심령의 천국이요 둘째는 교회라는 천국, 그리고 세 번째로 천년 왕국을 믿는 지상 천국을 지칭하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누릴 영생복락의 천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천국의 시민으로서 우리 성도들은 이 세계에서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별히 지상왕국의 천국을 믿는 관점은 전통주의가 그리스도의 삼대직무를 설명함에 있어서 그의 왕국을 영적인 현재의 교회와 장차 임할 영원복락의 나라의 왕권으로 상정하고 이를 다시 제사장과 예언자적 직무와 연관시켜서 그 연속성에서 생각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23)을 넘어서 현재 존재하는 영적 실재의 변증법적 현존을 더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지금 현재 영적 다스림의 영역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한 다스림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장차 성취될 것이라는 해석에 대하여 이미 천년운동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모순 지양의 변증법적 실체가 주장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을 포함한 전통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통하여 우리의 현실을 해석하는 과정보다도 이성봉 목사의 부흥설교에는 이 현존이 실재적인 사건으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 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체험하였던 영적 임재의 현실은 현실을 수용하고 그것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게 만드는 동인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 몰트만의 종말론적 현실이라는 특정한 이해는 형이상학의 전통을 배후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현실과 이상사이의 역설의 계기를 존재의 원형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특별히 역사 안에서 존재의 근원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긴 철학적 이념의 발전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헬라철학에서는 현실이라는 개념을 주로 “존재”라는 개념으로 대치하여 생각하였고 이때 존재란 주로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한정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변화하거나”, “운동하는 것”은 비 존재 혹은 비 실재로서 각인 되었다. 일찍이 서양사상의 뿌리로 인식되는 플라톤 사상의 초자연적인 실체로서 이데아에 대한 이론은 이와 같은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이 제시한 그 이데아 이론은 정치적이며 도덕적 가치를 확고하게 하고자 하는 소위 정신과학적 탐구의 방법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그 범위를 넓혀 나에게 참된 것으로 인정되는 모든 사상(事狀)의 대상을 탐구하는 존재론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게 이 이데아는 모든 경험적인 것을 초월한 절대적인 존재의 성격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Parmenides의 사고의 법칙에 깊히 연관되어 있다는 구체적 증거이기도 하지만 더 깊숙이는 고대 동방 종교의 신학적 지식의 관철을 보여주는 것이다.24) 이와 같이 초월을 중심으로 지금 현재의 존재자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 플라톤적 사유가 있었는가 하면 이를 대신하여 존재의 내재성 중심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현실이란 개념을 “한 개체 안에 놓여져 있는 가능성을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즉 현실이란 개념은 “각 개체 안에 질료적 성격과 구분된 형상”으로서의 “개체의 완전성의 원리(das Prinzip der Vollendung)”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그 존재는 구체적인 각 개별자와 구분되지 않은 채 그 개별자 자체 안에서 내포된 영원한 내적 동인이요 동시에 그 개별자가 되어야 할 내적 목적으로 사유된 것이며 동시에 이 세계자체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미래의 발전을 위하여 개방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존재론의 특성은 모든 역사의 내적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서 초월을 향한 암호가 될 수 있는 특별한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모든 존재의 기본 성격은 경험적이며 서술적이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본래적 지평을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인식의 전환에 의하여 서구 형이상학의 탄생은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 두 사상가들의 터 닦음 위에 서구의 정신은 모순과 갈등, 그리고 무와 같은 부정적 계기들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기 시작하였고 이 작업을 근대에 이르러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상가는 다름아니라 헤겔인 것이다: 자신의 법철학에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25)라고 선명하게 이 존재의 역동적 계기를 모순의 변증법적 지양이라는 법칙으로서 설명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정신 현상학의 구체적 완성을 국가라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의 현실 개념을 관념적인 것으로 비판하였던 맑스와 엥겔스는 대 부분의 사람들이 이제는 상식의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중심의 존재개념을 형성하였던 것이며 이 유물론의 기본 전제에 다시 성서적 종말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유대 묵시문학의 최후의 것에 대한 대망을 불어넣어 관념주의적 메시야주의로 변모시킨 에른스트 불로흐26)의 통찰을 통하여 이 모순과 갈등의 변증법적 지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안에서 신학화 함으로써 몰트만은 우리에게 신학적 현실개념을 눈에 띄게 명료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된 것처럼 서구 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적 중심은 언제나 인간 지식의 회의와 질문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참된 지식은 무엇인가?27) 라는 인식론적 탐구의 결실을 현실의 세계를 넘어선 새로운 사유의 범주가운데 찾게 된 것이다. 특별히 플라톤의 초월적28) 동기에서 분명하게 보이듯이 현재의 경험적 세계를 넘어서는 실제적인 세계를 인식할 수 있기 위해서 모든 철학적 인식은 나름대로의 변증법과 가설을 통한 사유의 법칙을 찾게 되었던 것이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이다.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반성하며 인식론적으로 바르게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철학적 사유는 언제나 현존하는 경험세계의 인식적, 존재적 특성을 넘어서 반성적 차원에서 해석된 새로운 차원의 실제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몰트만의 신학적 현실 개념이 형이상학적 전통의 신학적 변형이라고 보아서는 안되고 거꾸로 신학적 개념이 형이상학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는 면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몰트만의 “신학적 현실”이라는 그 신학적 개념자체가 폭발적 위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개념의 올바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가능하여진 부흥과 해방의 새로운 현실을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이성봉 목사의 현실 개념은 이와 같은 철학적 배경을 전제로 사유하고 설교하지는 못하였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에서 현실화된 변혁의 사건은 나름대로 존재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나름대로 존재의 형이상학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성봉 목사가 부르짖었던 설교와 그 설교를 잉태하고 현실화 한 성령의 능력가운데 그 원초적 기원을 찾아야 하지만 크게 보아 그의 설교는 당시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어 한국의 평양 장대현 교회에 있었던 부흥운동의 연장선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현실개념이 20세기 초 미국에서 번져나갔던 자유주의 신학의 천년왕국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낙관적이며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가운데 성장한 자유주의의 역사에 이해를 대신하여 묵시적 천년 왕국의 동기29) 안에서 이성봉의 부흥운동을 본다면 이성봉의 설교에서 구체화된 현실개념들은 몰트만의 그것과 같이 새로운 역동적 형이상학적 모델 하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성령의 현실로서 가능하여 진 이 현실과 실재의 개념은 그럼으로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현실개념을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는 존재 그 자체의 근본 성격에 더 접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성의 철학적 반성의 언어로서 존재가 아니라 새로움의 창조로서 존재의 언어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보편적 지평에서 사유하는 철학적 존재개념보다 더 철저한 현실과 존재의 비판이 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역사는 다름아니라 존재를 받아들이고 수용한 형이상학의 역사이기도 한 바 우리는 이성봉 목사가 촉구하고 있는 회개의 현실 개념이 철학과의 존재론적 논쟁을 통하여 여타 다른 철학적 개념들 속에서 오히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초월의 영역을 드러내는 인식론적 전환의 계기들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그 작업을 통하여 긴 형이상학의 역사를 자신의 설교 속에서 내재시키면서 절대 초월을 향한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현실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III 우리는 형이상학의 여정의 한 현대적 시도를 통하여 이성봉 목사의 현실개념이 그의 부흥설교의 텍스트이해와 연관이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이성봉 목사의 현실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서 리꾀르와의 만남이 중요하다. 그 까닭은 첫째 이성봉 목사가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은 그 해당본문과 독자(청자)인 나의 주체적 삶의 두 이중성에서 그 둘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통하여 하나의 독특한 현실개념을 형성하게 하였기 때문이며30) 둘째, 리꾀르의 공헌 중 가장 큰 것이 다름아니라 성서 본문의 독자성의 확립과 더불어 성서와 나의 독자의 현실의 상황이라는 두 상이한 본문들이 서로 하나로 융합하며 통합되는 그 구체적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현실화의 과정을 해석학적 현실로서 표명 할 수 있도록 한 점에 있으며 이는 성서적 이해가 우리에게 구체화되는 가장 적절한 길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리꾀르에게 해석학적 반성을 통하여 명료하게 표현되었던 해석학적 현실의 구체적인 예로서 우리는 이성봉 목사의 “천로역정 강화”31)를 들을 수 있다. 그의 부흥회에 참여하여 이 천로역정 강화를 들었던 분들의 한결같은 보고는 그 이야기를 통하여 이성봉 목사는 먼저 성서 본문의 지평을 그 천로역정의 이야기와 연합하여 하나의 동일한 지평으로 내 세우는 가 하면 동시에 그 청취자나 독자에게 다시 한번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현실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기독자의 현실에 투사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자의 삶이 자신의 삶의 규범적 기능을 하도록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향한 결단을 통하여 지금의 현실을 새롭게 구성하도록 한 것이다.32) 이는 단지 가다머의 지평융합의 차원을 떠나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지도적인 이념으로 등장하도록 양자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줌으로서 이루어진 결단인 것이다. 즉 이성봉 목사의 설교의 이해의 성취 여부는 다름 아니라 이 간 본문중심의 현실의 구성여부에 따라 결정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리꾀르의 해석학적 반성을 살펴보면서 암시적으로 이성봉 목사에게 있었던 해석학적 반성의 결과를 추론해 보고자 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요 그 해석학적 현실의 한 단면을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리꾀르33)는 본인의 해석학적 통찰을 진행시키면서 암시적으로 새로운 현실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게 된다. 리꾀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지금까지 철학계를 양분하다시피 한 해석학과 비판학의 통찰을 하나로 연관시키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단 그는 이 양자를 묵을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meta-thorie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의 특성과 개성을 새로운 의미에서 조명할 수 있는 어떤 개념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34) 이러한 그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해석학과 비판학이 전제로 하고 있을 실체의 정의를 다시 정립하고 이를 새롭게 이해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리꾀르의 실재개념은 그가 먼저 가다머의 해석학을 비평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해석학적 대상의 보편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리꾀르에 의하면 가다머가 갖고 있는 해석학적 통찰은 두 전통의 극복의 형태로 주어진다: 낭만주의적 해석학은 자신의 특징대로 언제나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진 채 과거와 현대의 연속성의 개념을 발전시켰으며35) 이에 반해서 계몽주의는 이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 위에서만 가능한 모든 인간의 판단의 전제를 무시하고 그저 바름의 일면만을 강조한 것이다.36) 가다머가 이 두 전통의 굴절된 모습을 극복하는 것은 리꾀르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통찰, 즉 이해의 시간적 구조를 해명하는 것을 통하여서 가능하여졌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에서의 “현(Da)”의 문제와 현존재의 전체성의 개념을 시간성(Zeitlichkeit)37)의 개념에서 분석하고 난 뒤 오해의 존재론과 전승사 그리고 그 전승의 올바른 비평의 이론을 차례로 다루었고38) 그를 통하여 자신을 기존의 해석학과 구분할 수 있었다. 즉 기존의 이성과는 색다른 모습을 가진 “오해(Vorurteile)” 내지 “이해의 선행적 구조(Vorstructure des Verstehens)”의 존재론적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재확인하고 그것의 인식론적 의미를 개별 과학적 특성인 ”비판의 정신“ 속에서 재해석하려고 한 점에서 가다머의 해석학적 통찰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오해는 그 어떤 범주보다도 더 사실적으로 한 개별적 존재자의 역사적 실재를 형성하는 것이다.39) 그런데 리꾀르가 보기에 가다머는 이 과정에서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철학의 동기를 수정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그의 초기저서인 “존재와 시간”에서 모든 해석학적 근본 문제로서 제기한 이해의 존재론은 인식론적 질문을 존재론적 근거에서 풀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통찰(존재-그자체, 행재로서의 존재, 혹은 존재라는 단어의 생략적 행위등)이 어떻게 인식론적으로 다시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 해설을 소홀히 하였으며40) 가다머는 바로 그 점을 수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선-이해적 규정(Vor-Verständnis)”인 “오해(Vorurteile)”는 다름 아니라 이 기본적 존재론적 구조가 인식론적 진리로 환원될 때 사용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와 상관이 있는 것이다: 가다머는 자신의 철학의 특징적 범주인 ”오해“, 혹은 “전이해“를 방법론적 반성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해의 범주가 드러내는 현실은 무엇인가? 리꾀르에 의하면 가다머는 더 이상 낭만주의자들과 같이 그 본문 안에 숨어 있는 어떤 신비한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이 독자와의 상관관계에서 펼쳐지고 새롭게 개방되면서 주어지는 세계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41) 리꾀르는 이러한 그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다머를 비판한 베티42)와는 달리 리꾀르는 가다머의 해석학이 존재론적 지평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증한 편이며 그를 통하여 해석학적 이해의 지평이 존재지평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리꾀르가 추구하는 현실은 독자의 현실의 역사와 더불어서 그 본문이 새롭게 열어주는 의미의 개방적 현실이다. 그것도 원문의 해석을 위한 비판적 적용을 통하여 원 본문의 상황과 독자의 상황사이의 차이가 의미획득을 위한 구체성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해석학적 차이가 중요한 과정인 것이다. 특별히 가다머와 달리 리꾀르에게 있어서 이 차이의 과정은 원 본문이 우리 독자의 극단적 한계상황을 나타나게 함으로서 본래적 초월성을 새롭게 얻게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그에 의하면 이 새롭게 얻어지는 해석학적 현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해 온 지금까지의 경험을 폭발적으로 뚫고 새로움으로 채우는 하나님의 현실인 것이다.43) 둘째로 리꼬르가 제시하고자 하는 이해의 특징은 간 주관적 구성의 요소를 상호간의 차이가운데서 찾는 것이다. 가다머의 철학사적 위치가 하이데거 철학의 주요관점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극복하려는 연장선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꾀르가 보기에 가다머는 아직도 독일의 낭만주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과거와 역사의 전통의 권위가 적극적으로 인정되고 이해되는 관점으로부터만 소위 “영양사(Wirkungsgeschichte)” 와 ”지평융합 (Horizont-Verschmelzung)“이라는 범주가 이해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보다 폭넓은 그의 우주론적 지평설정에도 불구하고 리꾀르에 의하면 가다머의 핵심적 사유의 단초는 여전히 개인의 주관적 범주와 깊히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은 역사성인 것이다. 그럼으로 리꾀르는 가다머의 철학을 그 핵심개념들이 가질수 있던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으로부터 그 개념들을 새롭게 이해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일찍이 가다머는 이 개인의 역사성의 범주를 통하여 자신의 해석학을 유한성의 철학의 특징을 갖도록 하였다.44) 즉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존재의 이해는 언제나 특정한 역사의 영향아래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통찰을 유지하면서 이 유한성이 단순히 우리의 이해의 제한적 역할을 하는 어떤 것만이 아니라 일종의 영향사적 특성을 띈 채 그 역사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초월적 지평으로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꾀르는 이 지평을 한 역사의 구체적 사실들이 타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개방적인 의식의 세계“로서 이해한다. 이 개방성이란 타자의 타자성이 인정되는 개방성이고 그 개방성이 의식된 의식의 존재는 “영향사(Wirkungsgeschichte)”의 구체적 모습이며 그를 통하여 역사적 유한성의 현실을 이어주는 근본적 일치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리꾀르가 보기에 가다머의 해석학이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유한성을 넘어서는 근본적 일치의 특성45)은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는 완성된 입장이 아니라 그것의 구체적 전개과정을 통하여서 더 과학적으로 분석되어야 할 과정 중에 있는 대상이다. 즉 관념론적 입장에서 초-역사적 지평을 구성해서는 안되고 그 대신 개별 과학에서 요구되는 정교성을 갖고 새로운 의미를 각 개체적 현실 속에서 구성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평융합은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적 거리(Historische Distanz)라는 한 살아 있는 역사의 현실내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46) 이 차이의 의식이 뚜렷할수록 그 역사의 의미는 풍성하여 지는 것이다. 리꾀르는 이러한 관점에서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그 전체성 배후에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된 구조주의적 한계47)를 극복하고 살아 있는 역동적 현실을 추구하고자 한다. 즉 역사주의의 현실적 개념을 반대하는 동시에 구조주의가 여전히 어떤 초-구조로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 붙혀 리꾀르는 가다머의 지평융합의 일치성은 해석학의 참된 본성을 단절시킬 수도 있음을 고발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본문의 세계는 나에 대한 타자로서 그 본문 안에서 특별히 성서의 초월적 동기인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적 타자성은 나의 현실의 구성적 지평을 제어하는 기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리꾀르가 보고자 하는 이 본문들 간의 융합을 통한 현실은 해석하여야 할 본문의 결정적 내용에 의한 현실인 것이다.48) 세 번째로 리꾀르가 보기에 가다머가 자신의 사유의 근본적 원천으로 삼았던 보편성의 최후의 근거는 “언어”였다. 가다머가 이 언어의 지평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의 구체적인 모습을 발견하였듯이 리꾀르는 담화(Discourse)라는 언어의 본래적 지평에서 이해의 근원을 찾는다; 그리고 담화가 구체적으로 풀어야 할 해석학적 현실개념은 본문의 상황49)과 깊은 연관관계에 있다. 리꾀르는 자신의 해석학적 보편성이 추구하는 실재가 낭만주의와 구조주의적 개념으로서는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본문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50). 즉 구조나 한 주관적 개인의 실존적 역사성이 아닌 실체적 경험을 구성하는 범주는 “본문”과 “본문의 주석”이어야 했던 것이다51). 리꾀르가 언어와 연관된 세계를 이 본문의 세계에서 이해함으로써 지금까지의 해석학은 전혀 새로운 사유의 원천을 이어받게 된다: 그것은 “차이와 타자성의 인식”에서 해석학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특질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리꾀르에게는 언어-행동이론의 Searle 52)이 모범적인 대화상대자로 있었으며 적극적인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즉 그의 해석행위는 철저하게 언어적 활용의 상황이었으며 우리가 구체적으로 직면하는 현실에서의 진리인식의 구성적 측면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다머의 해석학과의 차이를 통하여 암시적으로 리꾀르의 해석학적 현실이해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우리는 이런 현실의 구체적 사건이 이성봉 목사의 설교의 현장이었으며 그가 추구하는 부흥신학의 존재론적 현실이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밝혀지는 것은 비록 이성봉 목사가 구체화시키지는 않았지만 리꾀르가 말하는 새로운 현실이 그의 이해의 과정에서 드러난 하나의 구체적 현실인 것처럼 이성봉 목사에게서는 그 설교의 현실을 구현하는 힘과 해석의 지평이 현실을 극복하는 현실 구성적 요소임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V 이성봉 목사의 설교 안에 나타난 현실과 그 인식의 방도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철두철미하게 변증법적인 역동성과 함께 본문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는 해석학적 철저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이해가 비록 암시적이나마 하나의 방법적이며 구체적인 통로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여 생각하여 왔다: 철학적이며 반성적인 언어로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신앙의 현실적 언어 속에서 회개와 더불어 주어지는 새로움의 현실의 역동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성봉의 현실개념은 철저하게 먼저 회개의 대 각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각성의 신학적 의미를 앞에서 이미 강조한 바 있지만 우리의 과제는 그가 과연 이 각성이 현존하는 세계를 변혁의 기회로 보기까지 어떤 투철한 신학적 반성을 거쳤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이 세계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동시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회개의 인식론은 일반적 이해의 근원인 역사의 안으로부터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 바깥으로부터 사유하는 새로운 관점이다. 이 유한성의 인식은 무한성이 유한한 것에 접근하면서 생기는 감정의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며 일상성의 허무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그는 이 세속적인 세계의 이중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회개의 철저한 변화의 사건이 지금까지의 세계를 무상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53)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 변화된 세계는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 회개의 실현의 기회이며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의 새로운 변혁의 장소로 변모된 것이다54). 이성봉 목사의 현실이해의 또 하나의 특징은 회개의 순간 주어지는 인간의 자기이해와 더불어서 회개한 성도가 만나는 현실의 구성적 성격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변화될 수 있는 것이며 미래의 새로움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열려있는 것이다. 회개와 더불어 주어지는 현실은 돌연한 새로움의 현실로서 하나님의 현실이 규범적 역할을 하는 참여의 허락이었다. 사실 세계의 이중성에 대한 이성봉 목사의 표현은 종말론적 음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당시 한국의 성결교회에서 이해하던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교리적 현실을 넘어서 성서적 천년왕국의 희망을 현실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 뒤에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참여의 길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미 그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참여는 우리에게 현실의 개방성과 구성력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참여가 다름 아니라 리꾀르가 밝히고자 한 간-본문의 새로운 현실구성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실로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나게 됨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우리가 요구하는 부흥은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현실을 체험하는 데에 있으며 모든 신학의 사명은 이 체험을 반성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각주 1) 이성봉,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이것은 그분이 지으신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의 좌우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여러 곳에서 살아서 다 말로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복음을 전하여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2) 이성봉,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23쪽이하 3) 이성봉,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29쪽이하 4) 이성봉,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69쪽이하, 그의 전국 부흥목사 시대에 대한 보고를 보라. 한결같이 이 불쌍하고 가난한 나라에 의가 세워지고 사랑이 회복되는 인간성 회복의 시간이었다. 특히 107쪽. 그는 민족의 양심을 바로 잡는 것을 사명의 첫째로 삼고 있는 것이다. 5) 이성봉, 부흥의 비결,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3 6) 정인교,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서울:성결신학 연구소, 1998, 109쪽이하; 78쪽이하. 특별히 정인교는 정성구 교수가 이성봉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하였다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극복하는 힘을 발견하였는 바 진실한 부흥은 이 냉소적이며 허무한 현실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현실의 실현인 것이다. 7) 이봉성,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69쪽이하. 8) 이성봉 목사의 설교의 한 중요한 축은 다름아니라 바로 회개였다. 여기서 회개란 단순히 인간의 사역이 아니며 하늘의 신령한 새 몸을 입는 것이다. 즉 거룩하여 지고 성결하여 지는 과정이다. 그는 초신자만이 아니라 믿는자 역시 지속적으로 그 과정을 밟아 나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 새롭게 되는 것은 하지만 인간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사건이다. 참고: J.Calvin, Institutio, III-1, 3; Francis Pieper, Christian Dogmatics, Bd II, Missouri, 1951, 454쪽이하. 이러한 사건의 체험이 해명되는 지평은 다름 아니라 인간존재 전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성봉에게 있어 이는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할 구체적 사건인 것이다. 참고: 이성봉, 부흥의 비결, in: 부흥의 비결,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19-21쪽 9) 이성봉, 부흥의 비결, 21쪽. 참고: 동 저자, 주님을 사랑하자, in: 사랑의 강단,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3, 19쪽이하 10) 이성봉, 부흥의 비결, 21쪽 11) E. Fuchs, Hermeneutik, Stuttgart, 1963 ; E.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Tübingen, 1977; 또한 좀더 다른 전통에서 G.Ebeling, Introduction to a theological Theory of Language, R.A. Wilson역, Tübingen, 1971 12) 이의 개념사적 연구로서 J.F. Courtine, Art: Wirklichkeit, in: RGG, Bd. 1734쪽이하; Art: Wirklichkeit, Peter Kruse와 Michael Stadler,in: EEzPW. Vol 883쪽이하; Art: Realitas, J.F. Courtine, in: HWdP, Bd .8. 178쪽이하; 흥미있는 것은 근래 동양학의 새로운 기운으로 일어나고 있는 신유가의 부흥을 주도하였던 씨웅쓰리(熊十力)의 주된 사고는 이 본체론적 사유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신학과 철학의 공통의 과제는 결국 이 실체와 현실개념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사리에 적합한 사상의 개발인 것이다. 참고: 鄭家棟, 현대 신 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 역, 서울: 예문서원, 1994, 192쪽이하 13) Art.: Realität Idealität, J.F. Courtine,in: HWdP, Bd.8, 185이하 14) 사실 이 문제는 I.Kant 이후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문제이며 현대적인 해석학의 노력들은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고: Art.: Realität der außen Welt, K. Grünepütt, in: HWdP, Bd .8. 206쪽 이하 15) Alwin Diemer, 철학적 해석학, 백승균 역, 서울: 경문사, 1982 158쪽. 16) 여기에서 미래적 현실이란 “초월적 새로움”의 현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아래 아무것도 새로운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새로움은 피조된 세계의 연륜만큼이나 오래된 창조의 경륜과 연관이 있으며 창조시의 원 상태와 연관이 있다. 창조질서를 계시적 새로움에서 해석한 논문으로, E.Jüngel, Das Entsthehen von Neuen, in: Wertlose Wahrheit, München, 1990, 132-150. 이성봉목사의 설교에서 일어난 해방의 사건과 경험은 하나님 섭리의 전적인 새로움으로서 그 자체로 옛 질서의 복귀내지 원 질서의 회복의 사건이었다. 17) J.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München, Tübingen, 1968 18) 이성봉 목사는 자신의 간증적 수기중 한 부분을 전투적 언어를 사용하여 남겨놓고 있다. 이는 단지 치기가 아니라 그만큼 절실한 마음의 표현이리라. 우리는 그가 1955년 1월 2일에서 4일사이에 마산에서 경험하였던 순간중 한 부분을 인용함으로서 이 모순과 갈등을 십자가의 사건으로 극복하고자 한 변증법적 계기를 알수 있다: 이성봉,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147쪽. “...사랑하는 한국 교회가 자아 중심으로 대교회주의에 흐르지 말고 백만 개병 신도되고 십만 가정 교회 되면 이 강산에 제반 문제 즉시 해결되리라.” 19) 이성봉, 날로 새로워지는 생활, in: 임마누엘 강단,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50쪽이하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의 구체적 경험의 장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20) 이성봉, 천로역정 강화,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61,62쪽 21) 이성봉, 십자가의 도, in: 사랑의 강단, 특히 97쪽이하 22) 이성봉, 천국, in: 임마누엘 강단, 89쪽이하; 이 네가지 천국에 대한 그의 생각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 질수 있는지에 대하여, 이성봉,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107-108쪽;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그의 천국에 대한 설교에서 현실극복의 에너지를 찾게된다: 이성봉, 천국민의 사명, in: 부흥의 비결, 82-84; 천국민의 심성, 같은 책, 81-82; 천국 복음의 정신, 같은책, 79쪽이하 특별히 그의 천국복음이 현실 변혁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근거로서, 기도의 방법, in: 부흥의 비결, 90쪽이하 이에 의하면 이성봉 목사는 하나님의 능력의 실천적 실현으로 말미암아 현실의 모습, 자연계까지도 변화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23) 특별히 삼대직무론은 칼빈에 의하여 발전되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J.Calvin, Institutio, II, 15,3이하 우리가 중요시 하여야 하는 것은 칼빈은 이곳에서 매우 강력하게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인 면을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24) 이 동방종교의 영향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점은 그가 영혼의 개념에서 전형적인 희랍적 사고가 아닌 영혼의 실체성을 확신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참고. Johannes Hirschberg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Freiburg, 1976,116쪽이하 25) F. G.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oder Naturrecht und Staatswissenschaft im Grundrisse, 법의 철학, 이동춘 역, 서울: 박영문고, 1976, 42쪽이하 26) Ernst Bloch, Das Prinzip der Hoffnung, 1959. 참고로 몰트만과 블로흐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몰트만 스스로 자신의 저서 뒤에서 비교적 상세히 밝히고 있다: J.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313쪽이하 27) 특별히 플라톤과 연관해서, G. Mattews, Plato’s Epistemology, London, 1972, 하나님의 현실을 인식하여야 하는 우리의 본래적인 신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이 참된 지식을 지각(perception)과 구분하고 그 지식을 보다 복잡한 변증법적이며 반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점이 중요하다. 비록 지식의 참된 의미를 플라톤이 지속적으로 “지적인 감각 내지 경험”의 메타퍼를 사용하여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지만 그 지식은 해석학적 특성을 가진 것일 수 밖 에 없다. 이와 연관해서 특별히 Plato, Phaedo 95e 28) 특별히 대표적으로 Plato, Republic, 514a-518d, 523a-534b ;Sophist, 232b-264b 29) 특별히, 이성봉, 천로역정 강화,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104쪽 30) 이성봉이 이루어 놓은 설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특이점을 주고 있다: 1) 그가 구성하는 세계는 철저하게 텍스트 그 자체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2) 텍스트와의 연관이 의미하는 바는 그의 설교에서 주어진 간증적 현실들과 설교의 본문이 서로 짝져서 독자나 그 설교의 청취자에게 하나의 현실을 구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3) 그의 현실성은 성령의 현실성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객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주관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것인가? 31) 이성봉, 천로역정 강화, 특별히 그의 찬송시는 모든 듣는이로 하여금 기독도의 상황을 본문의 말씀과 연관되어 하나의 새로운 현실을 현재화 시키는 강력한 도구였으며 그의 찬송시의 가사는 현재와 본문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가 주로 음악으로 사용하였던 찬송 456장은 그 곡조자체가 우리의 현재와 주의 동행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가사 곳곳에 또한 “나” 혹은“우리”라는 주체개념을 통하여 주앞에 서 있는 우리로 우리자신의 주체개념을 변화시켜서 결국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위한 실존 중심의 공동체성의 개념이 표현된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32) 그의 천로역정주해 곳곳에서 보이는 회개와 연관된 주제에서 이성봉목사는 철저하게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마지막 장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귀결지으며 성도의 회개와 열심을 촉구한 대목은 사실은 천국의 현실가운데 살으라는 강력한 요청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33) 리꾀르의 철학에 대한 일반적 해명을 위해서, Pierre Gisel, Paul Ricoeur, Eine Einführung in sein Denken, in: Metapher, Paul Ricoeur, E.Jüngel, München, 1974, 5쪽이하; 또한 M.I. Wallace, Introduction, in: Figuring the Sacred Religion, Narrative, and Imagination, Dacid Pellauer역, Minneapolis, 1995 34) Paul Ricoeur, Hermeneutics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in: Hermeneutics and the Human Science, John B. Thompson편, Cambridge, 1981, 88쪽. 35) H.G.Gadamer, Wahrheit und Methode, Tübingen, 1975, 162쪽 이하 36) H.G.Gadamer, Wahrheit und Methode, 205쪽이하: 그 결과 마지막에는 딜타이가 역사의 이해를 역사적 현상으로 해석학적으로 성취하지 못하고 “과거 역사의 해독(Entzifferung)”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37) H.G.Gadamer, Wahrheit und Methode, 243쪽이하 38) H.G.Gadamer, Wahrheit und Methode, 250쪽이하 39) Paul Ricoeur, Hermeneutics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1981, 68쪽이하. 40) P.Ricouer, Hermeneutics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89쪽이하; 계속하여서 리꾀르는 하이데거가 보여준 이 존재론적 통찰의 인식론적 의미부여의 태만의 이유를 다른 데에서 찾고 있다. 즉 하이데거는 “과거의 상이한 형이상학의 전통들을 파괴”함으로서 존재의 해석학이 갖고 있는 인식론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과거와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존재의 해석학은 그 존재의 의미가 이미 규정되어 왔던 과거 형이상학 안에서 그 존재의 구체적인 인식적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하이데거에게는 형이상학은 존재의 인식론적 전제를 구성하는 것이었으며 그 형이상학의 세계 속에서 구체적 존재론의 개별과학의 대상으로 전이를 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한계였다는 것이다. 41) Paul Ricoeur, Hermeneutics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93쪽 42) 참고: R.Palmer, Hermeneutics, Northwestern University, 1969, 46쪽이하 43) P.Ricoeur, Manifestation and Proclamation, in: Figuring the Sacred, 60쪽; 이와 연관해서 이성봉의 설교, 갑절의 신을 주소서, in: 사랑의 강단, 53쪽 이하 44) Paul Ricoeur, Philosophische und theologische Hermeneutik, in: Metapher, 25쪽 45) Paul Ricouer, Hermeneutics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75쪽 46) P.Ricoeur, Hermeneutics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74쪽; 비교: 이 성봉, 그리스도의 영, in: 사랑의 강단, 74쪽이하 47) P.Ricouer, Interpretation Theory: Discourse and the Surplus of Meaning, 83쪽이하 48) P.Ricoeur, The Bible and the Imagination, in: Figuring the Sacred, 149쪽이하;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통한 리꾀르의 해석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성봉, 은혜받는 비결, in: 임마누엘 강단,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13쪽이하 49) Paul Ricoeur, Philosophische und theologische Hermeneutik, 27쪽; 본문의 해석학적 상황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들은 다름아니라 1)말하기(담화)와 문자와의 관계이며 또한 2)본문을 구성적 전체로 보는 것이며 3) 한 세계를 형성하는 본문, 마지막으로 4) 본문은 인간의 자기이해의 중보자이다. 50) P.Ricoeur, philosophische und theologische Hermeneutik, 31쪽이하. 51) P.Ricoeur, Hermeneutics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68쪽 52) John R.Searle, Speech Act: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 Cambridge, 1969 53) 이성봉, 사랑의 강단,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3, 23쪽이하 54) 이성봉, 깨달으라. in: 사랑의 강단, 186쪽이하; 3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늙어 죽는다. 사람이 죽음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첫째는 우리의 현재를 보아서 그것을 알 수 있다. 현재가 있으면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다. 육신은 죽는다: 죽음은 이편 세상에서 저편세상으로 들어가는 터널인 것이다. 결론으로 돌아가서 너는 왜 사느냐? 나의 근본 조물주 하나님을 찾아 공경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요 ... 이 세상은 예과이며 내세 본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196). 또한 참고: 천국민의 생활, in: 사랑의 강단, 197쪽 이하.
서울신학대학교/ 2016-07-05
서울신학대학교 좌표: 북위 37° 28′ 45.9″ 동경 126° 47′ 20.4″ 서울신학대학교(Seoul Theological University) 종류 사립 국가 대한민국 위치 경기도 부천시 호현로489번길 52 학교법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웹 사이트 http://www.stu.ac.kr/ 서울신학대학교(서울神學大學校, Seoul Theological University)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의 개신교 신학대학교로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교역자를 양성하는 중심 기관이다. 서울신학대학교는 1911년 3월 서울 무교동에서 경성성서학원으로 설립되었다. 제1대 원장에는 존 토마스 목사가 취임하였다. 철저한 성경공부와 현장중심의 교육, 온전한 복음을 강조한 경성성서학원은 1921년 교사를 신축하여 충정로 아현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 해 9월에 이명직 목사의 회개와 간증이 도화선이 되어, 경성성서학원은 15일 동안 수업을 전폐하고 부흥집회를 갖게 되었고 이 부흥의 불길은 모든 성결교회 부흥운동으로 퍼져나갔다. 1930년 이명직 목사는 제5대 원장에 취임하였고 경성성서학원은 1940년 4년제 경성신학교로 개칭, 이명직 목사가 제1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3년 일제에 의한 폐교와 6.25 전쟁으로 인한 부산 임시교사 시절, 1959년부터 시작된 서울신학대학(제1대 학장 이명직 목사) 시기를 거쳐 1974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의 애오개(현 아현성결교회 자리)에 위치하였다가 현재는 경기도 부천시 소사본동에 위치하고 있다. 학과 신학과 기독교교육과 교회음악과 영어과 사회복지학과 보육학과 유아교육과 중국어과 일본어과 실용음악과 관광경영학과 같이 보기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성결교 한국성결신문 바깥 고리 서울신학대학교 - 공식 웹사이트 [보이기] v • d • e • h 경기도의 대학 분류: 서울신학대학교 경기도의 대학교 부천시의 학교
성결론(1) 1-4강의
성결론(1) 1-4강의 성결론 1강의 영원한 생명 1.네차원의 생명 2.오직 유일의 생명 3.그리스도의 생명 4.생명의 성령 5.성도의 생명 성결론 1강의 영원한 생명 󰠏󰠏󰠏󰠏󰠏󰠏󰠏󰠏󰠏󰠏󰠏󰠏󰠏󰠏󰠏󰠏 암 송 성 구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요일 1: 1-2 󰠏󰠏󰠏󰠏󰠏󰠏󰠏 서 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물이 세례요한의 사역의 중심이 되는 표적인 것처럼 영은 사람을 새창조안으로 태어나게 하는 예수의 사역의 중심이된다. 요한의 사역은 죄로써 점철된 옛창조를 물로써 끝내고 예수의 사역은 영으로서 새창조에 들어가게된다. 칭의의 교리가 심판과 저주에 속한 옛창종에 속한 것을 마무리하는 회개와 용서의 교리라면 중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생명으로 새창조에 속한 것으로 출발하는 신성한 생명,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교리다. 이제부터 우리는 여러시간에 걸쳐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어떻게 우리의 속된 본성에 부합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공부하려 한다.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셨느니라(벧전1:16) 」 1.네차원의 생명 󰠆󰠏󰠏󰠏󰠏󰠏󰠏󰠏󰠏󰠏󰠏󰠏󰠏󰠏󰠏󰠏󰠏󰠏󰠏󰠏󰠏󰠏󰠏󰠏󰠏󰠏󰠏󰠏󰠏󰠏󰠏󰠏󰠏󰠏󰠏󰠏󰠏󰠏󰠏󰠏󰠏󰠏󰠏󰠏󰠏󰠏󰠏󰠏󰠏󰠏󰠈 󰠐 생명은 여러 단계의 생명으로 존재한다. 󰠐 󰠌󰠏󰠏󰠏󰠏󰠏󰠏󰠏󰠏󰠏󰠏󰠏󰠏󰠏󰠏󰠏󰠏󰠏󰠏󰠏󰠏󰠏󰠏󰠏󰠏󰠏󰠏󰠏󰠏󰠏󰠏󰠏󰠏󰠏󰠏󰠏󰠏󰠏󰠏󰠏󰠏󰠏󰠏󰠏󰠏󰠏󰠏󰠏󰠏󰠏󰠎 생명의 신비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어느 누구도 생명이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못한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 걸쳐 생명의 출처와 출발과 그리고 각기 다른 차원의 생명이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계시록 2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과 생명수강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생명수와 생명나무는 둘 다 생명을 의미하며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명백히 볼 수 있다. 우주 만물 가운데 생명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생명은 동일한 것이 아니고 각기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으로 존재한다. 첫째 식물의 생명이다. 가장 낮은 생명의 존재양식은 식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창1:11-12) 둘째 동물의 생명이다. 식물의 생명보다 높은 수준의 생명은 동물의 생명이다(창1:21-24) 세째 인간의 생명이다. 인간의 생명은 창조하실 때마다 특별한 배려가 있으셨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셨고(창1:26)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창2:7)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 생명은 낮은 생명으로부터 보다 높은 생명으로 각기 수준이 다르고 표현이 다른 생명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피조물에 불과하다. 성경에 나타난 생명가운데 가장 높은 피조되지 아니한 생명이 있는데 이생명은 하나님의 생명뿐이다창세기에는 생명나무로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고 있다(창2:9 요15:5) 2.오직 유일의 생명 󰠆󰠏󰠏󰠏󰠏󰠏󰠏󰠏󰠏󰠏󰠏󰠏󰠏󰠏󰠏󰠏󰠏󰠏󰠏󰠏󰠏󰠏󰠏󰠏󰠏󰠏󰠏󰠏󰠏󰠏󰠏󰠏󰠏󰠏󰠏󰠏󰠏󰠈 󰠐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생명이다. 󰠐 󰠌󰠏󰠏󰠏󰠏󰠏󰠏󰠏󰠏󰠏󰠏󰠏󰠏󰠏󰠏󰠏󰠏󰠏󰠏󰠏󰠏󰠏󰠏󰠏󰠏󰠏󰠏󰠏󰠏󰠏󰠏󰠏󰠏󰠏󰠏󰠏󰠏󰠎 성경은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고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이심을 증거한다.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생명이란 살아움직이는 것이어야하고 생명으로 간주되는 것은 죽지 아니한 것이어야하며 거룩하고 영원한 생명만이 생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요1:4 10:10 11:25 14:6)하나님의 생명만이 유일하기 때문에 헬라어 원문으로된 신약성경에는 이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을 말할때마다 가장 높은 생명을 말하는 조오에(Zo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요1:4 요일1:2 요일5:12). 신약원전에 생명이란 말을 사용할 때 육신의 생명을 비오스(bios)(눅8:43 21:4), 사람의 혼적생명이나 천역적인 생명을 프슈케(psuche)(마16:25-26 눅9:24)라하여 유일하고 영원한 생명 조오에와 구별한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생명이심을 계시할 뿐이다(요일1:1)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은 하나님과 다르지 않다. 만일 다르다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그러기때문에 하나님이 유일하신 것처럼 생명이 유일한 것이다. 3.그리스도의 생명 󰠆󰠏󰠏󰠏󰠏󰠏󰠏󰠏󰠏󰠏󰠏󰠏󰠏󰠏󰠏󰠏󰠏󰠏󰠏󰠏󰠏󰠏󰠏󰠏󰠏󰠏󰠏󰠏󰠏󰠏󰠏󰠏󰠏󰠏󰠏󰠏󰠈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 󰠌󰠏󰠏󰠏󰠏󰠏󰠏󰠏󰠏󰠏󰠏󰠏󰠏󰠏󰠏󰠏󰠏󰠏󰠏󰠏󰠏󰠏󰠏󰠏󰠏󰠏󰠏󰠏󰠏󰠏󰠏󰠏󰠏󰠏󰠏󰠏󰠎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더나아가서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이 그리스도이심을 더 많이 보여준다. 생명이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신 곧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요일5:12). 하나님이셨던 그생명 하나님이신 그생명이 그분안에 계신다(요1:14)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자신이 생명인 것(요14:6 11:25)과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것(요10:10)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있는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그분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요일5:12). 그러므로 우리안에 계신 그분은 우리의 생명(골3:4)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하나님이시듯 생명이 또한 그리스도다(골3:3). 생명이 하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듯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명이고 생명은 곧 그리스도다. 4.생명의 성령 󰠆󰠏󰠏󰠏󰠏󰠏󰠏󰠏󰠏󰠏󰠏󰠏󰠏󰠏󰠏󰠏󰠏󰠏󰠏󰠏󰠏󰠏󰠏󰠏󰠏󰠏󰠏󰠏󰠏󰠏󰠏󰠏󰠏󰠏󰠈 󰠐 성령은 생명을 주는 영이다. 󰠐 󰠌󰠏󰠏󰠏󰠏󰠏󰠏󰠏󰠏󰠏󰠏󰠏󰠏󰠏󰠏󰠏󰠏󰠏󰠏󰠏󰠏󰠏󰠏󰠏󰠏󰠏󰠏󰠏󰠏󰠏󰠏󰠏󰠏󰠏󰠎 예수께서는 그분이 생명이심을 말씀하신 후에(요14:6) 그분과 하나님이 하나일 뿐 아니라(요14:7-11) 성령과 그분이 또한 하나임을 말씀하셨다(요14:16-20). 신약은 하나님이 영이심을 분명히 말해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 영이심을 말씀한다(요4:24) 고린도전도 15장 45절에서 육신안에서 그리스도 셨던 마지막 아담이 그리스도 생명주는 성령이 되셨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인생이 되셨고 그는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서 구속주 곧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분 자신을 우리안으로 부어주신다(요20:22) 그러므로 주님이 가시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마 약속하시었고(요16:7) 드디어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성령은 초대교회위에 생명으로 부어졌다(행2:17-21) 오늘 교회는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구속된 성도들로 구성된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생명이요, 생명주는 그리스도의 영이라. 5.성도의 생명 󰠆󰠏󰠏󰠏󰠏󰠏󰠏󰠏󰠏󰠏󰠏󰠏󰠏󰠏󰠏󰠏󰠏󰠏󰠏󰠏󰠏󰠏󰠏󰠏󰠏󰠏󰠏󰠏󰠏󰠏󰠏󰠏󰠏󰠏󰠏󰠏󰠏󰠏󰠏󰠏󰠏󰠏󰠏󰠏󰠏󰠏󰠏󰠏󰠏󰠏󰠏󰠏󰠏󰠏󰠏󰠏󰠏󰠏󰠏󰠏󰠏󰠏󰠏󰠏󰠏󰠏󰠏󰠈 󰠐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 󰠐 󰠌󰠏󰠏󰠏󰠏󰠏󰠏󰠏󰠏󰠏󰠏󰠏󰠏󰠏󰠏󰠏󰠏󰠏󰠏󰠏󰠏󰠏󰠏󰠏󰠏󰠏󰠏󰠏󰠏󰠏󰠏󰠏󰠏󰠏󰠏󰠏󰠏󰠏󰠏󰠏󰠏󰠏󰠏󰠏󰠏󰠏󰠏󰠏󰠏󰠏󰠏󰠏󰠏󰠏󰠏󰠏󰠏󰠏󰠏󰠏󰠏󰠏󰠏󰠏󰠏󰠏󰠏󰠎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생기로 만들어진 높은 생명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어디까지나 피조된 생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창조되었을 때 우리는 단지 피조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생명인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분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고 실제로 닮은 그분의 형상으로 그분의 영원한 본성으로 되기를 원하셨다. 비록 우리 조상 아담이 타락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아담은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만 했다. 처음 사람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지라도 그의 생명은 피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요, 창조된 생명이었고 하나님의 생명이 아닌 인간의 생명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분 자신의 신성한 생명을 사람속에 넣으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여 그분의 의지를 받아드리는 선택을 원하셨던 것이다(창2:16-17)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원래의 생명 선한 생명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지않으면 안된다.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된다. 결 론 하나님의 생명은 피조되지 않은 가장 높고 유일한 생명이시며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사람에게 임하셔서 영생을 주신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생명뿐이며 하나님의 자녀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요일5:13). 창조된 아담의 생명이 높은 생명이고 선한 생명이긴 했으나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은 아니었다. 그들은 생명과를 먹음으로 영생을 선택하거나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망을 선택할 자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성결론2강의 타락한 인간 1.하나님의 심판 아래 2.사망의 그늘 아래 3.육체의 제한 아래 4.사탄의 권세 아래 5.세상의 쾌락 아래 성결론2강의 타락한 인간 󰠏󰠏󰠏󰠏󰠏󰠏󰠏󰠏󰠏󰠏󰠏󰠏󰠏󰠏󰠏󰠏 암 송 성 구 󰠏󰠏󰠏󰠏󰠏󰠏󰠏󰠏󰠏󰠏󰠏󰠏󰠏󰠏󰠏󰠏󰠏󰠏󰠏󰠏󰠏󰠏󰠏󰠏󰠏󰠏󰠏󰠏󰠏󰠏󰠏󰠏󰠏󰠏󰠏󰠏󰠏󰠏󰠏󰠏󰠏󰠏󰠏󰠏󰠏󰠏󰠏󰠏󰠏󰠏 여호와 하나님이 그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하시니라. 󰠏󰠏󰠏󰠏󰠏󰠏󰠏󰠏󰠏󰠏󰠏󰠏󰠏󰠏󰠏󰠏󰠏󰠏󰠏󰠏󰠏󰠏󰠏󰠏󰠏󰠏󰠏󰠏󰠏󰠏󰠏󰠏󰠏󰠏󰠏󰠏󰠏󰠏󰠏󰠏󰠏󰠏󰠏󰠏󰠏󰠏󰠏󰠏󰠏󰠏󰠏󰠏󰠏󰠏󰠏󰠏󰠏󰠏󰠏󰠏󰠏󰠏 창 3: 16-17 󰠏󰠏󰠏󰠏󰠏 서 론 「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7-49)」 처음 사람 아담이 불사성을 지닌 생령으로 창조되었을지라도(창2:7) 피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에는 미치지 못하였다(요일1:2)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시려고(롬6:23) 그를 생명나무 곁에 두셨고 선택할 자유를 주셨다(창2:16-17). 아담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을 생육하고 번성케하여 (창1:28) 그들로 하여금 새예루살렘을 이룩하시고자 하는 최종목표를 갖고 계셨다(갈4:26 히12:23 계21:2).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창3:6) 모든 아담의 후예들은 죄인이 되었다(롬5:18) 오늘은 타락한 인간이 처하여 있는 현실에 대하여 공부하려 한다. 1.하나님의 심판아래 󰠆󰠏󰠏󰠏󰠏󰠏󰠏󰠏󰠏󰠏󰠏󰠏󰠏󰠏󰠏󰠏󰠏󰠏󰠏󰠏󰠏󰠏󰠏󰠏󰠏󰠏󰠏󰠏󰠏󰠏󰠏󰠏󰠏󰠏󰠏󰠏󰠏󰠏󰠏󰠏󰠏󰠏󰠏󰠏󰠏󰠏󰠏󰠏󰠏󰠏󰠏󰠈 󰠐 모든 자연인은 정죄받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 󰠌󰠏󰠏󰠏󰠏󰠏󰠏󰠏󰠏󰠏󰠏󰠏󰠏󰠏󰠏󰠏󰠏󰠏󰠏󰠏󰠏󰠏󰠏󰠏󰠏󰠏󰠏󰠏󰠏󰠏󰠏󰠏󰠏󰠏󰠏󰠏󰠏󰠏󰠏󰠏󰠏󰠏󰠏󰠏󰠏󰠏󰠏󰠏󰠏󰠏󰠏󰠎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창2:17) 」 「 여자가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여자가 그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 첫사람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심판받았으며(롬3:19) 아담안에 태어난 모든 그의 후손은 정죄받게 된 것이다(롬5:18) 그러므로 이지구상에 살고있는 모든 아담의 후예들은 한사람도 예외없이 죄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정죄받은 죄인임을 계시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을 뿐 아니라 벌써 정죄를 받은 것이다. 사람들이 마지막 종말의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으로 정죄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다. 오늘날 모든 자연인은 정죄받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2.사망의 그늘아래 󰠆󰠏󰠏󰠏󰠏󰠏󰠏󰠏󰠏󰠏󰠏󰠏󰠏󰠏󰠏󰠏󰠏󰠏󰠏󰠏󰠏󰠏󰠏󰠏󰠏󰠏󰠏󰠏󰠏󰠏󰠏󰠏󰠏󰠏󰠏󰠏󰠏󰠏󰠏󰠏󰠏󰠏󰠏󰠏󰠏󰠏󰠏󰠏󰠏󰠏󰠏󰠏󰠏󰠏󰠏󰠏󰠏󰠏󰠏󰠏󰠏󰠏󰠏󰠏󰠏󰠏󰠏󰠏󰠏󰠈 󰠐 죄의 형벌은 사망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형언도를 받고 태어난다. 󰠐 󰠌󰠏󰠏󰠏󰠏󰠏󰠏󰠏󰠏󰠏󰠏󰠏󰠏󰠏󰠏󰠏󰠏󰠏󰠏󰠏󰠏󰠏󰠏󰠏󰠏󰠏󰠏󰠏󰠏󰠏󰠏󰠏󰠏󰠏󰠏󰠏󰠏󰠏󰠏󰠏󰠏󰠏󰠏󰠏󰠏󰠏󰠏󰠏󰠏󰠏󰠏󰠏󰠏󰠏󰠏󰠏󰠏󰠏󰠏󰠏󰠏󰠏󰠏󰠏󰠏󰠏󰠏󰠏󰠏󰠎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를 따라 정죄하셨을 뿐 아니라 아담의 죄, 인간의 죄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함으로(렘17:9) 죄의 형벌인 사형(사망)을 언도하신 것이다(창2:17 히9:27) 그러므로 아담의 후예들은 모두 사망에 이르는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요일5:16) 그러므로 엄격히 말해서 인류는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미 아담안에서 사망(사형언도)을 받은 죄인이며 단지 사형집행시간만을 기다리며 사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 」 인간은 범죄 즉시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끊어졌고(영적 죽음) 이제 시간이 흐르면서 육체는 뿌리 잘린 나무처럼 시들어서 죄가운데 죽도록 사망의 그늘아래 놓여진 것이다. 아담은 범죄 즉시 그영의 생명의 죽었고 930년을 지난 후 육신의 생명마저 죄가운데 죽게 된 것이다(눅9:60). 하와의 태는 계속 사령을 생산할 뿐 생령을 생산하지 못하였다. 3.육체의 제한아래 󰠆󰠏󰠏󰠏󰠏󰠏󰠏󰠏󰠏󰠏󰠏󰠏󰠏󰠏󰠏󰠏󰠏󰠏󰠏󰠏󰠏󰠏󰠏󰠏󰠏󰠏󰠏󰠏󰠏󰠏󰠏󰠏󰠏󰠏󰠏󰠏󰠏󰠏󰠏󰠏󰠏󰠏󰠏󰠏󰠏󰠏󰠏󰠏󰠏󰠏󰠏󰠏󰠏󰠏󰠏󰠏󰠏󰠈 󰠐 타락한 후 인간은 모든것을 육체에 묶이고 말았다. 󰠐 󰠌󰠏󰠏󰠏󰠏󰠏󰠏󰠏󰠏󰠏󰠏󰠏󰠏󰠏󰠏󰠏󰠏󰠏󰠏󰠏󰠏󰠏󰠏󰠏󰠏󰠏󰠏󰠏󰠏󰠏󰠏󰠏󰠏󰠏󰠏󰠏󰠏󰠏󰠏󰠏󰠏󰠏󰠏󰠏󰠏󰠏󰠏󰠏󰠏󰠏󰠏󰠏󰠏󰠏󰠏󰠏󰠏󰠎 타락하기 전 인간은 생령으로 존재했다(창2:7)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에 그는 육체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3)」 인간 창조시 인간은 생령으로 존재했음으로 인간의 능력은 광범했다. 그의 지적 능력은 탁월하여 동물의 모든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의 이름이었다(창2:19) 그리고 아담은 거대한 에덴은 비손강, 기혼강, 힛데겔과 유브라데에 이르기까지 네강에 둘러싸인 땅을 다스리고 관리할 만큼 큰 능력을 가진 존재였다(창2:10-15) 더나가서 당시 아담의 능력은 미물 짐승과도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초능력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창3:1-3) 이처럼 생령으로 존재했던 인간의 기능은 위대한 것이었으나 범죄하고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신(성령)은 그들에게서 떠났고 그들의 혼적기능(생령)은 은 생리적 힘(육체)에 의해 제한되고 통제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혼적 능력은 인간의 육체에 유폐되어서 무력하고 허약한 존재로 잠식해 버렸고 영이나 혼이 중심적 역할을 하기 보다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육체에 묶이고 예속된 존재 즉 육체가 중심이 되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모든 것을 육체에 집착하고 육체만을 섬기고 우상화하며 살아가지만 육신에 선한 것이 없다(롬7:14-18)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인 것이다(롬8:5-9) 타락한 후 인간은 모든 것을 육체에 묶이고 말았다. 4.사탄의 권세아래 󰠆󰠏󰠏󰠏󰠏󰠏󰠏󰠏󰠏󰠏󰠏󰠏󰠏󰠏󰠏󰠏󰠏󰠏󰠏󰠏󰠏󰠏󰠏󰠏󰠏󰠏󰠏󰠏󰠏󰠏󰠏󰠏󰠏󰠏󰠏󰠏󰠏󰠏󰠏󰠏󰠏󰠏󰠏󰠏󰠏󰠏󰠏󰠏󰠏󰠏󰠏󰠏󰠏󰠏󰠏󰠏󰠏󰠏󰠏󰠏󰠏󰠏󰠏󰠏󰠏󰠏󰠏󰠏󰠈 󰠐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사탄의 지배 아래 속하였다. 󰠐 󰠌󰠏󰠏󰠏󰠏󰠏󰠏󰠏󰠏󰠏󰠏󰠏󰠏󰠏󰠏󰠏󰠏󰠏󰠏󰠏󰠏󰠏󰠏󰠏󰠏󰠏󰠏󰠏󰠏󰠏󰠏󰠏󰠏󰠏󰠏󰠏󰠏󰠏󰠏󰠏󰠏󰠏󰠏󰠏󰠏󰠏󰠏󰠏󰠏󰠏󰠏󰠏󰠏󰠏󰠏󰠏󰠏󰠏󰠏󰠏󰠏󰠏󰠏󰠏󰠏󰠏󰠏󰠏󰠎 처음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권위아래서 있었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후 그의 위치는 사탄의 권위아래 맹신하는 존재가 되어진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그때에 너희가 그가운데서 행하여 이세상 풍습을 쫓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영사하는 영이라(엡2:2)」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세상은 악한자안에 처한 것이며(요일5:19)」 인간의 처음 위치는 하나님 아래 있었지만 타락한 후 인간의 위치는 사탄아래로 옮겨진 것이다(골1:13 엡6:12 ) 죄된 인간은 모두 사탄의 권위아래 예속되어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는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더나아가서 사탄의 나라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마12:26-28). 5.세상의 쾌락아래 󰠆󰠏󰠏󰠏󰠏󰠏󰠏󰠏󰠏󰠏󰠏󰠏󰠏󰠏󰠏󰠏󰠏󰠏󰠏󰠏󰠏󰠏󰠏󰠏󰠏󰠏󰠏󰠏󰠏󰠏󰠏󰠏󰠏󰠏󰠏󰠏󰠏󰠏󰠏󰠏󰠏󰠏󰠏󰠏󰠏󰠏󰠏󰠏󰠏󰠏󰠏󰠏󰠏󰠏󰠏󰠈 󰠐 죄는 타락의 첫단계로 세상은 타락의 마지막 단계다. 󰠐 󰠌󰠏󰠏󰠏󰠏󰠏󰠏󰠏󰠏󰠏󰠏󰠏󰠏󰠏󰠏󰠏󰠏󰠏󰠏󰠏󰠏󰠏󰠏󰠏󰠏󰠏󰠏󰠏󰠏󰠏󰠏󰠏󰠏󰠏󰠏󰠏󰠏󰠏󰠏󰠏󰠏󰠏󰠏󰠏󰠏󰠏󰠏󰠏󰠏󰠏󰠏󰠏󰠏󰠏󰠏󰠎 죄가 원시적이고 타락의 첫단계라면 세상은 최종적이고 타락의 마지막 단계다. 많은 사람이 죄에 대한 문제를 심각히 생각하지만 세상에 대해서 소홀히 알고 있다 창세기 4장에 가서 하나님을 등진 인간이 문화를 발명하고 세상조직을 형성한 후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께 속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창조시에는 천지만물이 있었을뿐 세상(세속)이 존재하지 않았다. 타락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보살핌을 거절하고 독립하여 방어를 위한 무기, 향락을 위한 오락, 생계를 위한 산업등에 집착하였다(창4:16-24) 그것은 가인이 하나님앞을 떠나서 시작된 일이다(창4:16) 「이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온 것이다(요일2:15-16)」 「간음하는 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지못하느뇨, 그러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사탄은 세상을 조직하여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에 사로잡히게 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헬라어로 세상을 코스모스라 한다. 체계나 조직을 의미한다. 세상은 여러가지 체계를 조직하여 사람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세상은 사람속에서 하나님의 지위를 빼앗고 마침내 사람을 완전히 소유하기 위한 대적의 체계요, 조직인 것이다. 결 론 성경에는 세종류의 인간이 나온다. 무죄한 인간, 타락한 인간, 중생한 인간이다. 타락하기전 아담과 하와는 무죄한 시대를 경험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모든 인류는 타락한 인간(즉 자연인)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현주소다. 정(죄에서 칭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육체의 무능력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세상을 이기어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으로) 성결론3강의 누가 죄인인가 ? 1.범죄(sins)와 죄(sin) 2.양심의 범위와 생명의 범위 3.용서와 해방 4.용서받은 죄인 5.죄의 세 방면 성결론3강의 누가 죄인인가? 󰠏󰠏󰠏󰠏󰠏󰠏󰠏󰠏󰠏󰠏󰠏󰠏󰠏󰠏󰠏󰠏󰠏󰠏 암 송 성 구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 롬 7:18-20 󰠏󰠏󰠏󰠏󰠏󰠏󰠏󰠏󰠏󰠏󰠏 서 론 성경은 죄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혹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 이론적으로나 체계적으로 모른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는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볼때만 구원이 무엇인가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려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어떻게 죄가 우리를 만졌고 우리가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가? 죄가 무엇이고 죄들이 무엇인가? 나는 왜 죄인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1.범죄와 죄 󰠆󰠏󰠏󰠏󰠏󰠏󰠏󰠏󰠏󰠏󰠏󰠏󰠏󰠏󰠏󰠏󰠏󰠏󰠏󰠏󰠏󰠏󰠏󰠏󰠏󰠏󰠏󰠏󰠏󰠏󰠏󰠏󰠏󰠏󰠏󰠏󰠏󰠏󰠏󰠏󰠏󰠏󰠏󰠏󰠏󰠏󰠏󰠏󰠏󰠏󰠏󰠏󰠏󰠏󰠏󰠏󰠏󰠏󰠏󰠏󰠏󰠏󰠏󰠏󰠏󰠏󰠏󰠏󰠏󰠏󰠏󰠏󰠈 󰠐 모든 죄는 한통속이지만 범죄와 죄의 이중적 모습으로 표현된다. 󰠐 󰠌󰠏󰠏󰠏󰠏󰠏󰠏󰠏󰠏󰠏󰠏󰠏󰠏󰠏󰠏󰠏󰠏󰠏󰠏󰠏󰠏󰠏󰠏󰠏󰠏󰠏󰠏󰠏󰠏󰠏󰠏󰠏󰠏󰠏󰠏󰠏󰠏󰠏󰠏󰠏󰠏󰠏󰠏󰠏󰠏󰠏󰠏󰠏󰠏󰠏󰠏󰠏󰠏󰠏󰠏󰠏󰠏󰠏󰠏󰠏󰠏󰠏󰠏󰠏󰠏󰠏󰠏󰠏󰠏󰠏󰠏󰠏󰠎 범죄(sin)와 죄(sins)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설사 그가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구원 여부에 대하여 불분명하게 된다. 로마서 1장 - 8장은 죄에 대한 계시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처음 부분(1:1-5:11)- 범죄(sins), 둘째 부분 (5:11-8; ) - 죄 처음 부분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많은 죄들을 낱낱이 열거하여 보여준다. 살인,도적질, 거짓말, 간음,도박, 우상숭배등 범죄의 나타남, 죄의 행위들을 보여준다(롬2:28-32). 우리 행위에 나타나는 많은 죄의 열매들을 범죄(sins)라고 한다. 둘째 부분에서는 이처럼 많은 범죄(sins)를 생산해 내는데는 범죄의 배후에 죄를 짓게하는 죄의 생명, 즉 죄의 근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를 가르쳐 죄(sin)이라 한다(롬7:15-20) 그러므로 죄는 범죄(sins)와 죄(sin)로 나타나게 된다. 2.양심의 범위와 생명의 범위 󰠆󰠏󰠏󰠏󰠏󰠏󰠏󰠏󰠏󰠏󰠏󰠏󰠏󰠏󰠏󰠏󰠏󰠏󰠏󰠏󰠏󰠏󰠏󰠏󰠏󰠏󰠏󰠏󰠏󰠏󰠏󰠏󰠏󰠏󰠏󰠏󰠏󰠏󰠏󰠏󰠏󰠏󰠏󰠏󰠏󰠏󰠏󰠏󰠏󰠏󰠏󰠏󰠏󰠏󰠏󰠏󰠏󰠏󰠏󰠏󰠏󰠏󰠏󰠏󰠏󰠏󰠏󰠏󰠏󰠏󰠏󰠏󰠈 󰠐 범죄(sins)의 범위는 양심의 범위고 죄(sin)의 범위는 생명의 범위다. 󰠐 󰠌󰠏󰠏󰠏󰠏󰠏󰠏󰠏󰠏󰠏󰠏󰠏󰠏󰠏󰠏󰠏󰠏󰠏󰠏󰠏󰠏󰠏󰠏󰠏󰠏󰠏󰠏󰠏󰠏󰠏󰠏󰠏󰠏󰠏󰠏󰠏󰠏󰠏󰠏󰠏󰠏󰠏󰠏󰠏󰠏󰠏󰠏󰠏󰠏󰠏󰠏󰠏󰠏󰠏󰠏󰠏󰠏󰠏󰠏󰠏󰠏󰠏󰠏󰠏󰠏󰠏󰠏󰠏󰠏󰠏󰠏󰠏󰠎 하나님의 빛이 나의 마음을 비출 때 나의 외마디 외침은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sins)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거짓말,살인,도적질,도박등 무수한 범죄들을 발견하게 되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내가 일단 범한 죄 , 즉 범죄를 용서받았을 때 나는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죄(sin)의 발견인 것이다. 그때 내가 하나님앞에 범죄했을 뿐 아니라 용서를 받아도 계속 죄를 짓게 하는 죄의 근성이 깊숙히 뿌리 박고있고 죄의 근성에 발동이 걸릴 때마다 내가 다시 범죄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범죄(sins)가 나의 양심을 찌르는 것이라면(계2:11) 죄(sin)는 내 생명을 찌른다(고전15:55-56). 내가 나의 범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는다 하더라도 나의 죄 때문에 여전히 마음에 평안을 찾지 못한다. 범죄(sins)의 범위는 양심의 범위이기 때문에 쉽게 발견되지만 죄(sin)의 범위는 생명의 범위 생명의 한 율로 존재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민감성이 없는 이는 깨닫지 못한다. 3.용서와 해방 󰠆󰠏󰠏󰠏󰠏󰠏󰠏󰠏󰠏󰠏󰠏󰠏󰠏󰠏󰠏󰠏󰠏󰠏󰠏󰠏󰠏󰠏󰠏󰠏󰠏󰠏󰠏󰠏󰠏󰠏󰠏󰠏󰠏󰠏󰠏󰠏󰠏󰠏󰠏󰠏󰠏󰠏󰠏󰠏󰠏󰠏󰠏󰠏󰠏󰠏󰠏󰠏󰠏󰠏󰠏󰠏󰠏󰠏󰠏󰠏󰠏󰠏󰠏󰠏󰠏󰠏󰠏󰠏󰠏󰠏󰠏󰠏󰠈 󰠐 범죄(sins)는 용서(사죄)받아야 하고 죄(sin)는 해방받아야 한다. 󰠐 󰠌󰠏󰠏󰠏󰠏󰠏󰠏󰠏󰠏󰠏󰠏󰠏󰠏󰠏󰠏󰠏󰠏󰠏󰠏󰠏󰠏󰠏󰠏󰠏󰠏󰠏󰠏󰠏󰠏󰠏󰠏󰠏󰠏󰠏󰠏󰠏󰠏󰠏󰠏󰠏󰠏󰠏󰠏󰠏󰠏󰠏󰠏󰠏󰠏󰠏󰠏󰠏󰠏󰠏󰠏󰠏󰠏󰠏󰠏󰠏󰠏󰠏󰠏󰠏󰠏󰠏󰠏󰠏󰠏󰠏󰠏󰠏󰠎 범죄(sins)가 우리의 양심을 찌를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 하였다. 우리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범죄(sins)들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서 자백함으로 용서 받고 처리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범죄(sins)를 용서받은 후 우리가 죄를 안지으려고 결심하지만 여전히 범죄(sins)를 거듭한다. 그래서 용서받고 범죄하고 용서받고 범죄하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데 이때 우리는 바울처럼 한탄의 소리를 말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7:15)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sin)니라 (롬 7:20) 」 통회나 용서로 처리될 수 없는 “ 내 속에 거하는 죄(sin)\"가 있음을 알게 되는데 내 속에 생명의 한 율로 살아있는 죄성(sin)은 어떻게 처리 받을 수 있을까? 죄성은 용서받아 처리될 수 없고 죄의 율에서 석방되지 않으면 안된다. 아담안의 모든 생명은 죄(sin) 가운데 있음으로 아담의 생명에서 벗어나야 죄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함이 있다. 그러므로 범죄(sins)는 용서받음으로 양심의 불안에서 해제되지만 죄성(sins)은 아담의 죄된 생명안에서 석방됨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범죄는 사함이 필요하고 죄(sin)는 해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죄사함이란 말은 없다. 죄들 사함이란 말이 있을 뿐이다. 4.용서받은 죄인 󰠆󰠏󰠏󰠏󰠏󰠏󰠏󰠏󰠏󰠏󰠏󰠏󰠏󰠏󰠏󰠏󰠏󰠏󰠏󰠏󰠏󰠏󰠏󰠏󰠏󰠏󰠏󰠏󰠏󰠏󰠏󰠏󰠏󰠏󰠏󰠏󰠏󰠏󰠏󰠏󰠏󰠏󰠏󰠏󰠏󰠏󰠏󰠏󰠏󰠏󰠏󰠏󰠏󰠏󰠏󰠏󰠏󰠏󰠏󰠏󰠏󰠏󰠏󰠏󰠏󰠏󰠏󰠏󰠈 󰠐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았지만 여전히 죄인으로 존재한다. 󰠐 󰠌󰠏󰠏󰠏󰠏󰠏󰠏󰠏󰠏󰠏󰠏󰠏󰠏󰠏󰠏󰠏󰠏󰠏󰠏󰠏󰠏󰠏󰠏󰠏󰠏󰠏󰠏󰠏󰠏󰠏󰠏󰠏󰠏󰠏󰠏󰠏󰠏󰠏󰠏󰠏󰠏󰠏󰠏󰠏󰠏󰠏󰠏󰠏󰠏󰠏󰠏󰠏󰠏󰠏󰠏󰠏󰠏󰠏󰠏󰠏󰠏󰠏󰠏󰠏󰠏󰠏󰠏󰠏󰠎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마음에 괴로움을 느끼게 한 것은 범죄(sins)들이었지 죄(sin)가 아니었다. 처음 우리는 양심의 거리끼는 범죄(sins)들 때문에 몹시 괴로워했고 자신의 죄된 행동들(죄행)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몇년이 지났을 때 나를 계속 범죄케하고 계속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범죄(sins)가 아닌 내속에 거하는 죄(sin)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서 내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일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고 나라는 인간 자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행한 일 」이 문제가 아니고 「나라는 사람」 자체의 인간성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쳐 놀라게 된다. 내가 아담의 후예로 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여전히 죄를 생산하는 죄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양심에 거리낌이 되는 죄를 백번 자백하고 용서와 처리받아도 여전히 나는 죄인이로 남아있다. 또 죄를 생산하고 또 죄를 산출하는 아담안의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우리의 실제적 경험을 따라 처음 부분에서 양심에 거리끼는 낱낱의 죄들을 보여주고 두번째 부분에서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당신을 죄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살인,간음,도박,거짓등 더러운 범죄(sins)를 저질렀기 때문에 죄인이라기 보다는 당신이 하나님께 대해서 어떤 사람인가 당신이 하나님앞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함을 지적한다. 바울은 자신의 죄가 사함받지 않았다고 말한 적은 없으나 여전히 자신은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우리는 모두 용서받은 죄인들이다. 5.죄의 세방면 󰠆󰠏󰠏󰠏󰠏󰠏󰠏󰠏󰠏󰠏󰠏󰠏󰠏󰠏󰠏󰠏󰠏󰠏󰠏󰠏󰠏󰠏󰠏󰠏󰠏󰠏󰠏󰠏󰠏󰠏󰠏󰠏󰠏󰠏󰠏󰠏󰠏󰠏󰠏󰠏󰠏󰠏󰠏󰠏󰠏󰠏󰠏󰠏󰠏󰠏󰠏󰠏󰠏󰠏󰠏󰠏󰠏󰠏󰠏󰠏󰠏󰠏󰠏󰠏󰠏󰠏󰠈 󰠐 1.하나님앞에 2. 양심앞에 3. 육체 안에 󰠐 󰠌󰠏󰠏󰠏󰠏󰠏󰠏󰠏󰠏󰠏󰠏󰠏󰠏󰠏󰠏󰠏󰠏󰠏󰠏󰠏󰠏󰠏󰠏󰠏󰠏󰠏󰠏󰠏󰠏󰠏󰠏󰠏󰠏󰠏󰠏󰠏󰠏󰠏󰠏󰠏󰠏󰠏󰠏󰠏󰠏󰠏󰠏󰠏󰠏󰠏󰠏󰠏󰠏󰠏󰠏󰠏󰠏󰠏󰠏󰠏󰠏󰠏󰠏󰠏󰠏󰠏󰠎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죄가 세방면으로 혹은 죄의 세범주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생활속에 죄가 발생했을 때 첫째 : 하나님 앞에 둘째 :나의 양심앞에 , 셋째 : 육체안에 각 각 세 방면으로 죄가 구성된다. 첫째 : 죄지을 때마다 하나님앞에 득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죄의 안건이 교통부에 교통 위반건수를 올리듯 하나님앞에 죄의 안건이 있게된다. 그러므로 구약에는 「내가 여호와앞에 득죄하였나이다(창39:9 욥8:4)하였다. 둘재 : 죄의 안건이 하나님앞에 올라가면 율법은 이를 가르쳐준다. 그때 이사실은 우리 양심에 거리낌이 되고 불안의 요인이 된다. 주차위반을 모를 때 주인은 즐겁게 식사한다. 그러나 식사 후 주차 위반인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의 양심에 문제가 생긴다. 괴롭고 불안하다. 사람들은 양심을 없애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죄가 율로 남아 있듯이 (롬7:18) 양심도 우리 생명율로 존재하기 때문에 양심이 잠잘 수는 있으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없어지지 않는다(롬7:22) 지금 양심이 흐려져서 죄의 감각이 없이 행해진 것들도 어느날 양심이 깨어나면 반듯이 양심의 관문을 통과시켜야 한다. 사람은 양심이 깨어나 유죄를 알면 자기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선행을 쌓아보려한다. 「내가 비록 잘못은 많지만 선한 일도 많이 했다」라고 맞서본다. 사람이 선행을 하려는 목적은 양심의 참소를 막고 양심을 달래보려는 의도다. 이것이 사람이 스스로 생각해낸 구원의 방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의 문제는 처리하지 않고 양심에 거리끼는 문제만 처리하려고 애쓴다. 하나님 앞에 득죄한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양심의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세째 죄의 방면은 육신안에 죄의 권능과 죄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죄가 좌정하는 자리는 우리의 육체안이다(롬7:23 7:17). 첫째와 둘째는 죄에 대한 우리의 확실한 인식이요, 세째 것은 죄에 대한 사실의 존재양식이다. 결 론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된다. 죄는 모두가 한 통속이지만 죄성(sins)과 죄행(sin)으로 나타나며 죄의 범주는 하나님앞과 양심앞에서와 그리고 우리의 육신안에 있다. 하나님앞과 양심안의 죄는 우리의 인식과 관련이 있고 지체에 거하는 죄는 우리의 사실과 관련이 있다. 성결론4강의 하나님의 의 1.하나님의 율법 2.하나님의 고민 3.예수님이 오신 이유 4.율법외에 한 의 5.하나님의 의의 표본 성결론4강의 하나님의 의 󰠏󰠏󰠏󰠏󰠏󰠏󰠏󰠏󰠏󰠏󰠏󰠏󰠏󰠏󰠏󰠏󰠏󰠏󰠏󰠏󰠏󰠏 암 송 성 구 󰠏󰠏󰠏󰠏󰠏󰠏󰠏󰠏󰠏󰠏󰠏󰠏󰠏󰠏󰠏󰠏󰠏󰠏󰠏󰠏󰠏󰠏󰠏󰠏󰠏󰠏󰠏󰠏󰠏󰠏󰠏󰠏󰠏󰠏󰠏󰠏󰠏󰠏󰠏󰠏󰠏󰠏󰠏󰠏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 롬 3 : 21-22 󰠏󰠏󰠏 서 론 하나님은 자기가 창조한 최고 걸작품인 사람은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한 후 사람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고 싶으셔도 즉시 구원하기가 용의치 않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입증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롬3:20) 율법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줄 몰랐다(롬5:13) 본래 사람에게는 죄(sin)가 있었을 뿐 범죄(sins)는 없었다. 율법이 온 후에만 사람에게 죄가 있을 뿐 아니라 범죄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사람들이 율법이 오기 전 자신이 죄인인지 모르고 살던 그시대에도 사람들에게는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노릇했고 율법이 온 후에는 죄로인하여 사망이 왕노릇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죄는 생명을 찌르고 범죄는 양심을 찔러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죄에 대해서 인간으로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를 세우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 한 것이다. 1.하나님의 율법 󰠆󰠏󰠏󰠏󰠏󰠏󰠏󰠏󰠏󰠏󰠏󰠏󰠏󰠏󰠏󰠏󰠏󰠏󰠏󰠏󰠏󰠏󰠏󰠏󰠏󰠏󰠏󰠏󰠏󰠏󰠏󰠏󰠏󰠏󰠏󰠏󰠏󰠏󰠏󰠏󰠏󰠏󰠏󰠏󰠏󰠏󰠏󰠏󰠏󰠏󰠏󰠏󰠏󰠏󰠏󰠏󰠏󰠏󰠏󰠏󰠏󰠏󰠏󰠏󰠏󰠏󰠏󰠏󰠏󰠏󰠏󰠏󰠏󰠏󰠏󰠏󰠏󰠏󰠈 󰠐 율법이란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이요, 율법안에는 하나님의 한 의가 󰠐 󰠐 있다. 󰠐 󰠌󰠏󰠏󰠏󰠏󰠏󰠏󰠏󰠏󰠏󰠏󰠏󰠏󰠏󰠏󰠏󰠏󰠏󰠏󰠏󰠏󰠏󰠏󰠏󰠏󰠏󰠏󰠏󰠏󰠏󰠏󰠏󰠏󰠏󰠏󰠏󰠏󰠏󰠏󰠏󰠏󰠏󰠏󰠏󰠏󰠏󰠏󰠏󰠏󰠏󰠏󰠏󰠏󰠏󰠏󰠏󰠏󰠏󰠏󰠏󰠏󰠏󰠏󰠏󰠏󰠏󰠏󰠏󰠏󰠏󰠏󰠏󰠏󰠏󰠏󰠏󰠏󰠏󰠎 우리는 율법이 오기전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본성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에 와서야 비로서 하나님이 무엇을 미워하시고 무엇을 기뻐하시는 분인지 그분의 본성을 알 수 있게 된것이다(출6:2)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리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다. 그뿐아니라 매우 공의로우신 분임을 알게된다. 우리가 율법이 무엇이지 알려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다(롬5:14) 그러나 율법은 구약에 기록된 율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관사(The)가 붙은 율법은 구약에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율법을 말하며 정관사가 없이 그냥 율법이라고 쓰여진 것은 모세의 율법외에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을 율법이라 한다. 율법안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 있다. 따라서 공의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절차요,방법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율법으로 나타난다(롬7:14) 율법은 천지가 없어져도 없어져서는 안될만큼 온전한 하나님의 의다(마5:17-18) 율법은 하나님의 법으로 존재한다(롬7:22) 따라서 율법을 정말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에 부합되기 때문에 의로 살 수 있다(롬10:5) 그러나 불행하게도 타락한 인가니은 누구 하나도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될만큼 율법을 실천할 자가 없다. 율법이란 인간의 수준이 아니고 하나님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낮은 수준으로 어찌 높으신 하나님의 수준을 맞출 수 있을까? 그러므로 율법앞에 모든 인류는 예외없이 죄인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공의앞에 자격미달로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롬3:10-18) 2.하나님의 고민 󰠆󰠏󰠏󰠏󰠏󰠏󰠏󰠏󰠏󰠏󰠏󰠏󰠏󰠏󰠏󰠏󰠏󰠏󰠏󰠏󰠏󰠏󰠏󰠏󰠏󰠏󰠏󰠏󰠏󰠏󰠏󰠏󰠏󰠏󰠏󰠏󰠏󰠏󰠏󰠏󰠏󰠏󰠏󰠏󰠏󰠏󰠏󰠏󰠏󰠏󰠏󰠏󰠏󰠏󰠏󰠏󰠏󰠏󰠏󰠏󰠏󰠏󰠏󰠏󰠏󰠏󰠏󰠏󰠏󰠏󰠏󰠏󰠏󰠏󰠏󰠏󰠏󰠏󰠏󰠈 󰠐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지만 공의를 따라 구원하시려는 원칙이 󰠐 󰠐 있다. 󰠐 󰠌󰠏󰠏󰠏󰠏󰠏󰠏󰠏󰠏󰠏󰠏󰠏󰠏󰠏󰠏󰠏󰠏󰠏󰠏󰠏󰠏󰠏󰠏󰠏󰠏󰠏󰠏󰠏󰠏󰠏󰠏󰠏󰠏󰠏󰠏󰠏󰠏󰠏󰠏󰠏󰠏󰠏󰠏󰠏󰠏󰠏󰠏󰠏󰠏󰠏󰠏󰠏󰠏󰠏󰠏󰠏󰠏󰠏󰠏󰠏󰠏󰠏󰠏󰠏󰠏󰠏󰠏󰠏󰠏󰠏󰠏󰠏󰠏󰠏󰠏󰠏󰠏󰠏󰠏󰠎 하나님이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주실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즉시 은혜주시고 영생을 주실 수 없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그분앞에 구원받을 자격은 반듯이 그분의 율법의 수준에 도달하고 그분의 공의에 부합되며 그분의 거룩에 합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율법의 자격에 미달되는 사람, 그의 공의에 부적격한 사람을 그분의 성품이나 방법이나 공의를 위배하면서까지 구원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이지 그의 수준을 타락한 인간 수준으로 낮추시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율법을 행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즉시 영생을 주실 수 있다(롬10:5)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요, 범죄로 가득하기 때문에 이처럼 구원에 부적격자로 그대로 구원하실 수 없다는것이 하나님의 고민이다. 우리 욕심은 구원받기만 하면 그만이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우리를 구원하시되 올바르게 정당하게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게 구하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공의에 상관없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면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공의를 따라 죄있는 인간을 구원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고 인심이 후하셔서 죄인을 심판하지 않고 우리 죄를 율법대로 처리하지 않고 마구 구원하신다면 인심좋은 영감님이 될지 몰라도 정의가 하수같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되실 수 없다.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하시는 무골호인이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의”는 설 곳이 없다. 이 우주에 어디 편벽됨과 굽은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죄인을 구원하시되 반드시 공의를 따라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고민이다. 3.주님이 오신 이유 󰠆󰠏󰠏󰠏󰠏󰠏󰠏󰠏󰠏󰠏󰠏󰠏󰠏󰠏󰠏󰠏󰠏󰠏󰠏󰠏󰠏󰠏󰠏󰠏󰠏󰠏󰠏󰠏󰠏󰠏󰠏󰠏󰠏󰠏󰠏󰠏󰠏󰠏󰠏󰠏󰠏󰠏󰠏󰠏󰠏󰠏󰠏󰠏󰠏󰠏󰠏󰠏󰠏󰠏󰠏󰠏󰠏󰠏󰠏󰠈 󰠐 주님이 오신 이유는 사랑보다 공의의 실현을 위해서다. 󰠐 󰠌󰠏󰠏󰠏󰠏󰠏󰠏󰠏󰠏󰠏󰠏󰠏󰠏󰠏󰠏󰠏󰠏󰠏󰠏󰠏󰠏󰠏󰠏󰠏󰠏󰠏󰠏󰠏󰠏󰠏󰠏󰠏󰠏󰠏󰠏󰠏󰠏󰠏󰠏󰠏󰠏󰠏󰠏󰠏󰠏󰠏󰠏󰠏󰠏󰠏󰠏󰠏󰠏󰠏󰠏󰠏󰠏󰠏󰠏󰠎 하나님은 비록 인간이 타락했을지라도 긍휼히 여기시고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의 대상이라도 공의없이 구하실 수 없기 때문에 공의의 실현을 우해서 예수 그릿도를 보내셨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에서였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만 있고 공의가 없으시다면 예수님이 땅에 오실 필요없다. 그분의 십자가도 불필요하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만은 추호도 용서치 아니하신다(눅12:59)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심판하지 않으실 수 없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 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죄의 댓가를 지불하기위해 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을찌언정 하나님의 공의를 포기하지 아니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셨다. 우리들 중에는 댓가없는 죄사함이 불의라고 생각하는 이가 돌리셨다. 우리들 중에는 댓가없는 죄사함이 불의라고 생각하는 이가 적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댓가없이 용서하셨다면 그분은 불의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의 댓가로 지불되었고 십자가에 흘린 피가 바로 우리대신 심판을 받았다는 근거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갈때 그의 피를 가지고 나가는 것은 바로 그근거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법적으로 석방되어 나온것 아니다. 정당하게 죄의 값을 치루고 받을 심판을 받고 나올 것이다. 주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보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4.율법외에 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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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론(2) 5-8강의
성결론(2) 5강의 성결론 5강의 네 가지 법 1.네가지 법의 정의 2.네가지 법의 기원 3.네가지 법의 위치 4.네가지 법의 기능 5.네가지 법의 결과 성결론 5강의 네 가지 법 󰠏󰠏󰠏󰠏󰠏󰠏󰠏󰠏󰠏󰠏󰠏󰠏󰠏󰠏󰠏󰠏󰠏󰠏󰠏󰠏󰠏󰠏 암 송 성 구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으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 롬 7:21-23 󰠏󰠏󰠏󰠏 서 론 지난 시간 인간이 타락한 후 죄(sin)가 있었을 뿐 범죄(sins)는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율법을 주셨으며 이 율법의 의외에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의의 표본이 된다. 오늘은 죄와 혼선이 되어있는 네가지 법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사람의 힘이 제한되어서 인간의 의지로 선을 지키려 버티지만 지치고 고갈되어 죄의 법에 밟힘을 알리기 위해 네가지 법과 그기능에 대하여 공부하려 한다. 1.네가지 법의 정의 󰠆󰠏󰠏󰠏󰠏󰠏󰠏󰠏󰠏󰠏󰠏󰠏󰠏󰠏󰠏󰠏󰠏󰠏󰠏󰠏󰠏󰠏󰠏󰠏󰠏󰠏󰠏󰠏󰠏󰠏󰠏󰠏󰠏󰠏󰠏󰠏󰠏󰠏󰠏󰠏󰠏󰠏󰠏󰠏󰠏󰠏󰠏󰠏󰠏󰠏󰠏󰠏󰠏󰠏󰠏󰠈 󰠐 하나님의 법,생각의 법, 죄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 󰠐 󰠌󰠏󰠏󰠏󰠏󰠏󰠏󰠏󰠏󰠏󰠏󰠏󰠏󰠏󰠏󰠏󰠏󰠏󰠏󰠏󰠏󰠏󰠏󰠏󰠏󰠏󰠏󰠏󰠏󰠏󰠏󰠏󰠏󰠏󰠏󰠏󰠏󰠏󰠏󰠏󰠏󰠏󰠏󰠏󰠏󰠏󰠏󰠏󰠏󰠏󰠏󰠏󰠏󰠏󰠏󰠎 첫째는 하나님의 법이다(롬7:22,25). 하나님의 법이라 함은 구약의 율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밖으로 나타내고있다. 둘째로는 생각의 법이다(롬7:23). 생각의 법은 우리 생각안에 있으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 싶어하게 한다. 이 법은 우리 생각안에 있는 선의 법이라 불리기도 한다. 세째로는 죄의 법이다(롬7:23). 죄의 법은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몸의 지체들속에 있는 죄의 법이다. 네째로는 생명의 영의 법이다(롬8:2). 이 영의 법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안에 살게하는 법이다. 이 법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의 영으로 조화된 생명의 영이다. 그래서 생명의 영의 법이라 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인 하나님의 법, 사람의 생각안에 있는 선의 법, 지체안에 있는 죄의 법, 영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있다. 2.네가지 법의 기원 󰠆󰠏󰠏󰠏󰠏󰠏󰠏󰠏󰠏󰠏󰠏󰠏󰠏󰠏󰠏󰠏󰠏󰠏󰠏󰠏󰠏󰠏󰠏󰠏󰠏󰠏󰠏󰠏󰠏󰠏󰠏󰠏󰠏󰠏󰠏󰠏󰠏󰠏󰠏󰠏󰠏󰠏󰠏󰠏󰠏󰠏󰠏󰠏󰠏󰠏󰠏󰠏󰠏󰠏󰠏󰠏󰠏󰠏󰠏󰠏󰠏󰠏󰠏󰠈 󰠐 시내산에서,인간창조시,인간타락시,구원받고 거듭나는 때 󰠐 󰠌󰠏󰠏󰠏󰠏󰠏󰠏󰠏󰠏󰠏󰠏󰠏󰠏󰠏󰠏󰠏󰠏󰠏󰠏󰠏󰠏󰠏󰠏󰠏󰠏󰠏󰠏󰠏󰠏󰠏󰠏󰠏󰠏󰠏󰠏󰠏󰠏󰠏󰠏󰠏󰠏󰠏󰠏󰠏󰠏󰠏󰠏󰠏󰠏󰠏󰠏󰠏󰠏󰠏󰠏󰠏󰠏󰠏󰠏󰠏󰠏󰠏󰠏󰠎 이 네가지 법은 각 기관이 다르다. 하나님의 법인 율법은 돌비에 쓰여져 모세를 통하여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사람에게 주셨다. 생각의 법은 아담창조시 생기를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셨는데 이때 아담은 피조된 사람의 생명을 얻었다. 그래서 사람은 산혼이 되었다(창2:7). 이것은 창조를 통해 얻은 사람의 생명이 사람의 혼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생각의 법은 인간창조시에 얻은 인간생명안에 있는 선의 법이다. 이 생각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그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얻어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로인한 자연적 증여물이지 구원으로 인한 선물은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 우리 생각과 사고안에는 타고난 기호, 부모공경, 사람에게 호의적인 마음, 양심의 가책,선행하고 진보하려는 생각들, 이 모든것은 우리 생각안에 있는 선의 법으로부터 나온다. 로마서7:18절 「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아노니」하는 말을 어떤 이는 창조된 선한 생명이 타락을 통해 부패하였으므로 선함의 요소를 전적으로 상실했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나 이말은 우리안에 아무런 선도 없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육신안의 상태가 어떤것임을 가르치는 말이다. 세째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은(롬7:23)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하는 법으로 사람이 사탄에게 유혹되어 타락했을 때 우리 몸에 섭취된 사탄의 생명율이며, 이 죄의 법은 사람의 몸안에 있다. 지체들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악한 생명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영안에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 생긴 것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우리 영안으로 들어와 우리 영과 더불어 조화된 생명의 영의 법이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얻은 것은 선의 법이 아니라, 생명의 법으로 우리 안에 두신 것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이지 선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하나님께 속하며 생각안에 있는 선의 법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람에게 속하며 지체들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탄에 속하며 생명의 영의 법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부터 나와 영에 속한다. 3.네가지 법의 위치 󰠆󰠏󰠏󰠏󰠏󰠏󰠏󰠏󰠏󰠏󰠏󰠏󰠏󰠏󰠏󰠏󰠏󰠏󰠏󰠏󰠏󰠏󰠏󰠏󰠏󰠏󰠏󰠏󰠏󰠏󰠏󰠏󰠏󰠏󰠏󰠏󰠏󰠏󰠏󰠏󰠏󰠏󰠏󰠏󰠏󰠏󰠏󰠏󰠏󰠏󰠏󰠏󰠏󰠈 󰠐 사람밖에, 사람의 생각에, 인간지체에, 인간 영안에 󰠐 󰠌󰠏󰠏󰠏󰠏󰠏󰠏󰠏󰠏󰠏󰠏󰠏󰠏󰠏󰠏󰠏󰠏󰠏󰠏󰠏󰠏󰠏󰠏󰠏󰠏󰠏󰠏󰠏󰠏󰠏󰠏󰠏󰠏󰠏󰠏󰠏󰠏󰠏󰠏󰠏󰠏󰠏󰠏󰠏󰠏󰠏󰠏󰠏󰠏󰠏󰠏󰠏󰠏󰠎 네가지 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으려면 우리는 그들 각각의 위치를 분명히 해야한다. 하나님의 법은 돌비에 새겨져 있으며 그것은 우리 밖에 있다. 선의 법은 우리의 생각, 우리의 혼안에 있으며 이법의 기능은 혼의 생각안에서 선으로 표현된다. 이 선의 법은 선하게 창조된 인간본성안에 사람자신의 생명안에 위치한다. 죄의 법은 우리의 지체들인 우리 몸안에 위치한다. 인간이 타락할 때 그 몸안에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탄의 악한 생명이 들어왔다. 따라서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가 중생하고 거듭났을 때 우리 영안에 성령이 좌정하신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영안에 거함으로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온 법으로 역시 우리 영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 법은 우리 영안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몸이나 혼에 위치하지 않고 영에 속하는 것이다. 4.네가지 법의 기능 󰠆󰠏󰠏󰠏󰠏󰠏󰠏󰠏󰠏󰠏󰠏󰠏󰠏󰠏󰠏󰠏󰠏󰠏󰠏󰠏󰠏󰠏󰠏󰠏󰠏󰠏󰠏󰠏󰠏󰠏󰠏󰠏󰠏󰠏󰠏󰠏󰠏󰠏󰠏󰠏󰠈 󰠐 네가지 법은 각기 기능을 달리 한다. 󰠐 󰠌󰠏󰠏󰠏󰠏󰠏󰠏󰠏󰠏󰠏󰠏󰠏󰠏󰠏󰠏󰠏󰠏󰠏󰠏󰠏󰠏󰠏󰠏󰠏󰠏󰠏󰠏󰠏󰠏󰠏󰠏󰠏󰠏󰠏󰠏󰠏󰠏󰠏󰠏󰠏󰠎 하나님의 법인 율법은 하나님의 신성에서 나온 것이며, 그 본성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롬7:12-14). 율법은 하나님의 표준이요, 인간의 표준이 아니다. 칭의는 사람의 표준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의 표준을 근거로 하므로 인간 의는 칭의를 받을 수 없다. 우리 생각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사람(창1:31)의 생명에서부터 나왔으며 사람의 본성을 내포하며 하나님의 본성에 적합하다. 이러한 본성적인 선의 법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안에 선을 행하려는 원함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우리에게 선을 요구할 때 우리안에 있는 선을 행하려는 경향과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우리안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을 복종하고 싶어하고 또 그일을 기쁘게 여긴다(롬7:25). 그러나 지체들속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육신안에 있는 사단의 생명으로부터 왔으며 사탄의 악한 본성을 담고 있다. 사탄의 악한 생명은 우리 육신안에 현존하는 악이고, 우리안에 거하는 죄이다(롬7:20-21). 이 죄의 법이 곧 죄를 짓게하고 선의 법을 거스려 싸운다(롬7:23). 그래서 하나님의 법의 선한 요구를 만족케하려는 갈망을 막을 뿐 아니라 도리어 지체들속에 있는 죄의 법에 복종하여 온갖 종류의 죄를 범해 사망을 얻는다(롬7:21-24). 우리의 선택이나 의지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내부로부터 우리를 자극하는 죄의 법에 의해서 죄를 짓는다. 이것을 불신자드른 이성과 정욕의 싸움이라 부르기도 한다. 5.네법의 결과 󰠆󰠏󰠏󰠏󰠏󰠏󰠏󰠏󰠏󰠏󰠏󰠏󰠏󰠏󰠏󰠏󰠏󰠏󰠏󰠏󰠏󰠏󰠏󰠏󰠏󰠏󰠏󰠏󰠏󰠏󰠏󰠏󰠏󰠏󰠏󰠏󰠏󰠏󰠏󰠏󰠏󰠏󰠏󰠏󰠏󰠏󰠏󰠏󰠏󰠏󰠏󰠏󰠏󰠏󰠏󰠏󰠏󰠏󰠏󰠏󰠏󰠏󰠏󰠈 󰠐 죄의 법의 최대 강적이라도 생명의 영의 법에는 삼킴을 당한다. 󰠐 󰠌󰠏󰠏󰠏󰠏󰠏󰠏󰠏󰠏󰠏󰠏󰠏󰠏󰠏󰠏󰠏󰠏󰠏󰠏󰠏󰠏󰠏󰠏󰠏󰠏󰠏󰠏󰠏󰠏󰠏󰠏󰠏󰠏󰠏󰠏󰠏󰠏󰠏󰠏󰠏󰠏󰠏󰠏󰠏󰠏󰠏󰠏󰠏󰠏󰠏󰠏󰠏󰠏󰠏󰠏󰠏󰠏󰠏󰠏󰠏󰠏󰠏󰠏󰠎 사람들은 생명과 선을 혼돈하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인 반면 선함은 피조된 사람이 생명의 본성이다. 생명은 선한 것이긴 하지만 선한 것이 반드시 생명인 것은 아니다. 에덴 동산의 생명의 나무와 선악의 나무는 생명과 선이 명백히 다름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생명, 선, 악은 서로 독립된 것들이다. 생명과 선이 다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선과 인간이 선이 전혀 다른 것도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을 담고 있다. 사람의 선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단지 사람의 선한 본성만 담고 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살아내는 선이요(엡2:10,딤후2:21), 인간의 선은 우리 고유의 생명을 쫓아 살아낸 것이다(마12:35, 롬7:18,19,21, 롬 9:21). 그러므로 인간의 선은 하나님의 요소가 없는 단지 사람의 선일 뿐이다. 따라서 사람의 생명은 연약하다. 죄의 법은 사탄의 생명으로 부터 나왔으므로 선의 법보다 강하다. 인간은 선행에 무력할 뿐 아니라 죄의 법에 말려들어 죄를 범한다그러나 생명의 영의 법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왔기때문에 죄의 법에서 우리를 지킬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생명을 살게한다. 사람의 힘은 제하되어 있지만 법의 힘은 지속적이다. 사람의 애쓰는 것은 자기 노력인 반면 법의 힘은 자동적이며 인간의지로 선을 버티지만 언젠가 지치고 고갈되어 결국 죄의 법에 짓밟힌다. 그러나 죄의 법이 강해도 하나님의 생명인 생명의 영의 법에는 삼킴을 당한다. 결 론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처녀에게 구애하는 총각과 같다. 우리 생각안에 있는 선의 법은 구애에 응하려는 처녀와 같다. 지체안에 있는 죄의 법은 처녀,총각의 연애을 방해하는 불량배와 같다. 처녀와 총각의 구애는 응하려 할때마다 불량배는 이를 방해하고 처녀늘 납치하곤 한다. 그러나 경찰이 나타나 악한에게 납치된 처녀를 구하고 두 남녀의 연애를 실행케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단지 도덕적인 선한 사람으로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납치되어 사망에 이른 사람을 생명의 사람으로 구하려는 것이다. 성결론6강의 십 자 가 1.십자가의 의미 2.인간의 견적서 3.구속의 십자가 4.대속의 체험 5.두개의 십자가 성결론6강의 십 자 가 󰠏󰠏󰠏󰠏󰠏󰠏󰠏󰠏󰠏󰠏󰠏󰠏󰠏󰠏󰠏󰠏 암 송 성 구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마태복음 16:24-25󰠏󰠏󰠏󰠏 서 론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는 옛사람과 새사람의 분기점이며, 구원얻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인간실존은 하나님의 법(롬7:25)인 율법과 마음의 법인(롬7:23) 선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롬8:2)과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롬8:2)에 갇혀있다. 이 네가지 법칙들은 인간안에 근절할 수 없는 생명의 율로 남아서 서로 부조화와 갈등을 계속하고 있다(롬7:24).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고 이룩하고자 하면서도 죄의법 때문에 극복하지도 이기지도 못하여 사망아래 놓여있음으로 이를 해방시키고자 하나님은 성육신하였고(요1:14) 십자가를 지시게 된 것이다. 오늘은 십자가의 계시에 대하여 공부하려 한다. 1.십자가의 의미 󰠆󰠏󰠏󰠏󰠏󰠏󰠏󰠏󰠏󰠏󰠏󰠏󰠏󰠏󰠏󰠏󰠏󰠏󰠏󰠏󰠏󰠏󰠏󰠏󰠏󰠏󰠏󰠏󰠏󰠏󰠏󰠏󰠏󰠏󰠏󰠏󰠏󰠏󰠏󰠏󰠏󰠏󰠏󰠏󰠏󰠏󰠏󰠏󰠏󰠏󰠏󰠏󰠏󰠏󰠏󰠏󰠈 󰠐 십자가는 수고나 고난이 아니고 죽음을 의미한다. 󰠐 󰠌󰠏󰠏󰠏󰠏󰠏󰠏󰠏󰠏󰠏󰠏󰠏󰠏󰠏󰠏󰠏󰠏󰠏󰠏󰠏󰠏󰠏󰠏󰠏󰠏󰠏󰠏󰠏󰠏󰠏󰠏󰠏󰠏󰠏󰠏󰠏󰠏󰠏󰠏󰠏󰠏󰠏󰠏󰠏󰠏󰠏󰠏󰠏󰠏󰠏󰠏󰠏󰠏󰠏󰠏󰠏󰠎 십자가란 무엇인가? 왜 십자가는 우리에게 그처럼 중요한 것인가? 2천년전 갈보리 언덕에는 전무후무한 십자가가 세워졌다. 그것은 인류의 죄의 역사를 차단시키고, 새역사를 이룩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로마인의 사형틀에 관심하지 않는다. 오직 인류의 구속을 위해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의 처형에 대해서만 십자가의 의미를 찾는다. 15세기 토마스 아 캠퍼스라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그 책에서 십자가는 고난이라 정의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는 가설을 전제로 놓았음으로 성경의 계시인 십자가를 왜곡시켰다. 우리는 흔히 희생적이거나 고난받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관념에 붙들려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는 고난과 수고따위를 십자가라 한 것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수고와 고난이 아니고, 사람자체가 처형되고 제거되는 죽음임을 기억해야 한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첫번째 사람임을 보여준다(요3:14). 사람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그분은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고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져야 한단 말은 고난에 처해야 된단 말이 아니고, 죽음에 처해야 된단 말이다(마16:21). 2.인간의 견적서 󰠆󰠏󰠏󰠏󰠏󰠏󰠏󰠏󰠏󰠏󰠏󰠏󰠏󰠏󰠏󰠏󰠏󰠏󰠏󰠏󰠏󰠏󰠏󰠏󰠏󰠏󰠏󰠏󰠏󰠏󰠏󰠏󰠏󰠏󰠏󰠏󰠏󰠏󰠏󰠏󰠏󰠏󰠈 󰠐 십자가는 인간의 죄에 대한 견적서다. 󰠐 󰠌󰠏󰠏󰠏󰠏󰠏󰠏󰠏󰠏󰠏󰠏󰠏󰠏󰠏󰠏󰠏󰠏󰠏󰠏󰠏󰠏󰠏󰠏󰠏󰠏󰠏󰠏󰠏󰠏󰠏󰠏󰠏󰠏󰠏󰠏󰠏󰠏󰠏󰠏󰠏󰠏󰠏󰠎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왜 생긴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견적서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당신의 죄의 중량은 어는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벌금형이면 처리될 수 있는 정도인가? 아니면 금고형에 해당하는 정도인가? 우리는 우리의 죄를 너무 과소평가하기 쉽다. 율법의 기준에 의하면 우리 죄의 견적서는 사형감이다(롬1:32).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7:23」라는 단정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다. 만일 우리들이 십자가가 우리 죄에 대한 견적서임을 안다면 우리 육신안에 조금도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함을 안다면 (롬7:18) 「나는 쓸모없다. 나는 죽기에 합당하다십자가에 처형되어야 마땅한 존재입니다.」라고 시인하고 고백해야 한다. 십자가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요, 달리 방도가 없을 만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이다. 「내가 너희를 고쳐도 개선해봐도 별 수 없다. 도리없이 십자가에 처형할 수 밖에 없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아담안에 출생함으로 들어왔다. 그러므로 죽음로서만 나갈 수 있다. 인간의 죄악성이 부분적이라면 도려낼 수 있겠으나, 전체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죄악성을 근절하려면 도리없이 목숨도 함께 끊어야 한다. 십자가에 처형해 버려야 한다. 아담안에 태어난 인류는 모두 죄의 율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롬5:15). 그러므로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죽음으로만 해결할 수 있음이 해방의 비결이다. 3. 구속의 십자가 󰠆󰠏󰠏󰠏󰠏󰠏󰠏󰠏󰠏󰠏󰠏󰠏󰠏󰠏󰠏󰠏󰠏󰠏󰠏󰠏󰠏󰠏󰠏󰠏󰠏󰠏󰠏󰠏󰠏󰠏󰠏󰠏󰠏󰠏󰠏󰠏󰠏󰠏󰠏󰠏󰠏󰠏󰠏󰠏󰠏󰠏󰠏󰠏󰠏󰠏󰠏󰠏󰠏󰠏󰠏󰠏󰠏󰠏󰠏󰠏󰠏󰠏󰠈 󰠐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속전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단 말씀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후5:14).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속량하실 때 그분의 속죄는 하나님과 죄사이의 문제였다. 죄의 댓가를 속전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리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의 속죄사업은 완성된 것이다(요19:30).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문설주 좌우와 인방에 발라졌다. 이피는 장자들이 보기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피를 본즉 내가 지나가니라」 양의 피흘림은 장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속죄는 구원받은 자만 위한 것이 아니고 구원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까지 위한 것이다. 온세상을 위한 것이다(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을 위하심이니」 원문에는 「온세상의 죄」란 말이 없다 「온세상을 위하여」란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구속의 십자가를 지셨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해결하신 것은 아니다. 오직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속의 십자가를 지셨을 뿐이다. 4.대속의 체험 󰠆󰠏󰠏󰠏󰠏󰠏󰠏󰠏󰠏󰠏󰠏󰠏󰠏󰠏󰠏󰠏󰠏󰠏󰠏󰠏󰠏󰠏󰠏󰠏󰠏󰠏󰠏󰠏󰠏󰠏󰠏󰠏󰠏󰠏󰠏󰠏󰠏󰠏󰠏󰠏󰠏󰠏󰠏󰠏󰠏󰠏󰠏󰠏󰠏󰠏󰠏󰠏󰠏󰠏󰠏󰠏󰠏󰠏󰠏󰠏󰠏󰠏󰠏󰠏󰠏󰠏󰠏󰠏󰠏󰠏󰠏󰠏󰠏󰠈 󰠐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 󰠐 󰠌󰠏󰠏󰠏󰠏󰠏󰠏󰠏󰠏󰠏󰠏󰠏󰠏󰠏󰠏󰠏󰠏󰠏󰠏󰠏󰠏󰠏󰠏󰠏󰠏󰠏󰠏󰠏󰠏󰠏󰠏󰠏󰠏󰠏󰠏󰠏󰠏󰠏󰠏󰠏󰠏󰠏󰠏󰠏󰠏󰠏󰠏󰠏󰠏󰠏󰠏󰠏󰠏󰠏󰠏󰠏󰠏󰠏󰠏󰠏󰠏󰠏󰠏󰠏󰠏󰠏󰠏󰠏󰠏󰠏󰠏󰠏󰠏󰠎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는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요3:16)” 구속의 십자가를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세상 모든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도 충분할만큼 그 범위가 우주적이다. 그러나, 이 속죄를 위하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분안으로 들어갈 때만 그분의 속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마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하셨다. 속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 즉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될 많은 성도들이다. 롬5:18-19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니라」 18절은 모든 사람을 말하고 19절은 많은 사람을 말한다. “모든 사람은 세상 전체를 포함하고 , 많은 사람은 구원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또한 롬5:8에는 “우리위해” 죽으셨다고 한다. 우리는 예비적 구원이고, 우리 죄는 실제적인 구원이다. 오직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간증 할 수 있다. 만일 예수님이 온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면 모든 사람의 죄가 일제히 다 제하여졌음으로 복음전파가 필요치 않게 되리라. 5.두개의 십자가 󰠆󰠏󰠏󰠏󰠏󰠏󰠏󰠏󰠏󰠏󰠏󰠏󰠏󰠏󰠏󰠏󰠏󰠏󰠏󰠏󰠏󰠏󰠏󰠏󰠏󰠏󰠏󰠏󰠏󰠏󰠏󰠏󰠏󰠏󰠏󰠏󰠏󰠏󰠏󰠏󰠏󰠏󰠏󰠏󰠏󰠏󰠏󰠏󰠏󰠏󰠏󰠏󰠏󰠏󰠏󰠏󰠏󰠏󰠏󰠏󰠏󰠏󰠏󰠏󰠏󰠏󰠏󰠏󰠏󰠏󰠏󰠏󰠏󰠏󰠏󰠏󰠏󰠈 󰠐 구속의 십자가는 주님이 성취하시고 대속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성취된 것이다. 󰠐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16:24) 」 성경에는 두개의 십자가가 있다. 하나는 2000년전 갈보리 언덕에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들이 지지않으면 안되는 십자가다. 예수님이 세상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가 십자가를 지실 때 세계 모든 인류의 죄가 처리된 것은 아니다. 전체 인류의 죄의 속전을 하나님께 지불하긴 했지만 우리가 그안에 들어가지 않는 한 대속을 누리지는 못한다. 만일 그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대신함의 분깃은 우리의 죄를 처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예비이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대속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구속은 2000년전 갈보리 언덕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대속은 1900? 몇년전에 내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취되었다. 속죄는 2000년전 갈보리 언덕에서 발생했고 구원은 몇년전에 내게 이루어졌다. 속죄는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이고 대속(우리의 구원)은 우리 몸에서 성취된 것이다(롬6:6).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3)」하신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다(갈2:20)」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마16:24)하고 , 그리스도의 대치된 생명이다. 결 론 십자가는 고난이 아니라 죽음이며 구속의 십자가는 예비된 구원이요, 대속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자신을 죽음에 넘긴 것처럼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넘겨야 한다. 성결론 7강의 두 개의 생명 1.칭의와 중생 2.사법적 처리 3.위치적 전환 4.새로운 생명 5.성분적 전환 성결론 7강의 두 개의 생명 󰠏󰠏󰠏󰠏󰠏󰠏󰠏󰠏󰠏󰠏󰠏󰠏󰠏󰠏󰠏󰠏󰠏󰠏󰠏 암 송 성 구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롬 5 : 8-10 󰠏󰠏󰠏󰠏󰠏󰠏󰠏󰠏󰠏 서 론 우리는 이제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두개의 분수령이 갈리는 분기점에 도달하였다. 「만일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면 화목된 우리는 더욱 그분의 생명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로마서 5장 10절을 중심으로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면이 있고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음을 본다. 첫 단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두째 단락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속하고 의롭다하며 하나님과 화목케 한다. 이것은 완전한 구속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새사람이 되게하고 중생케한다. 오늘 우리는 이 두부분인 칭의와 중생의 문제를 공부하려 한다. 1. 칭의와 중생 󰠆󰠏󰠏󰠏󰠏󰠏󰠏󰠏󰠏󰠏󰠏󰠏󰠏󰠏󰠏󰠏󰠏󰠏󰠏󰠏󰠏󰠏󰠏󰠏󰠏󰠏󰠏󰠏󰠏󰠏󰠏󰠏󰠏󰠏󰠏󰠏󰠏󰠏󰠏󰠏󰠏󰠏󰠏󰠏󰠏󰠏󰠏󰠏󰠏󰠏󰠏󰠏󰠏󰠏󰠏󰠏󰠏󰠏󰠏󰠏󰠏󰠏󰠏󰠏󰠏󰠏󰠏󰠏󰠏󰠏󰠏󰠏󰠏󰠏󰠏󰠏󰠏󰠏󰠏󰠈 󰠐 칭의는 아담의 생명을 끝내는 것이요, 중생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출발하는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드려지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오직 믿은(sola fides)뿐이다(롬4:3-5). 우리가 칭의받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죄들(sins)뿐 아니라 우리의 죄(sin)를 하나님께로부터 처리받게 된다. 따라서 거듭나는 (중생)체험을 갖게 될 것이다. 칭의와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동시적 사건으로 이 두개의 사건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이 두개의 체험은 분리될 수 없는 철저히 결합된 동시적 사건이지만 이 두가지 진리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개념을 갖게된다. 칭의의 필요성은 우리의 죄책과 형벌의 사실에 근거하며 칭의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죄인이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완전히 제거하고 말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사법적인 형벌의 사실에 대한 처리와는 달리 새생명, 신성한 하나님의 생명의 출발을 말하는 것이다. 칭의가(Justification) 정죄된 아담으로부터의 탈출이라면 중생(Regeneration)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의 진입을 말한다. 칭의는 정죄된 아담의 혈대를 끝내는 것이요, 중생은 그리스도의 새생명으로 영대를 잇는 것이다. 전자는 죄의 처리에 대한 원리요, 후자는 새생명의 더함에 대한 원리다. 칭의와 중생은 구원을 위한 계속적인 사건이면서도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한 문제이다. 2. 사법적 처리 󰠆󰠏󰠏󰠏󰠏󰠏󰠏󰠏󰠏󰠏󰠏󰠏󰠏󰠏󰠏󰠏󰠏󰠏󰠏󰠏󰠏󰠏󰠏󰠏󰠏󰠏󰠏󰠏󰠏󰠏󰠏󰠏󰠏󰠏󰠏󰠏󰠏󰠏󰠏󰠏󰠏󰠏󰠏󰠏󰠏󰠏󰠏󰠏󰠏󰠏󰠏󰠏󰠏󰠏󰠏󰠏󰠏󰠏󰠏󰠏󰠏󰠏󰠏󰠏󰠏󰠏󰠏󰠏󰠏󰠏󰠏󰠏󰠏󰠏󰠏󰠏󰠏󰠏󰠏󰠈 󰠐 칭의는 율법의 출처로 이루어진 소극적인 의가 아니고 율법을 만족시킴으로 󰠐 󰠐얻게된 적극적인 의다. 󰠐 󰠌󰠏󰠏󰠏󰠏󰠏󰠏󰠏󰠏󰠏󰠏󰠏󰠏󰠏󰠏󰠏󰠏󰠏󰠏󰠏󰠏󰠏󰠏󰠏󰠏󰠏󰠏󰠏󰠏󰠏󰠏󰠏󰠏󰠏󰠏󰠏󰠏󰠏󰠏󰠏󰠏󰠏󰠏󰠏󰠏󰠏󰠏󰠏󰠏󰠏󰠏󰠏󰠏󰠏󰠏󰠏󰠏󰠏󰠏󰠏󰠏󰠏󰠏󰠏󰠏󰠏󰠏󰠏󰠏󰠏󰠏󰠏󰠏󰠏󰠏󰠏󰠏󰠏󰠏󰠎 히브리어의 「히츠띠크」, 헬라어의 「디카이오」라는 말은 사법적 의미를 가진 용어로 재판의 판결에 따라 “무죄를 선언하는 것”,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가르쳐 칭의라 말한다.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 이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라(행13:38-39) 」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5-26)」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에 사하심을 받고 그죄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하심 같으니라 (롬4:5-8)” 칭의란 용서이상의 것이다. 용서가 곧 칭의라면 굳이 칭의라는 용어를 써야 할 이유가 없다. 용서란 주권을 행사하여 법의 형집행을 철회한다는 것이지만 칭의는 율법을 철회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율법을 만족시켰다는 적극적이고 법적인 선언으로 하나님의 의로 의인이 되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3. 위치적 전환 󰠆󰠏󰠏󰠏󰠏󰠏󰠏󰠏󰠏󰠏󰠏󰠏󰠏󰠏󰠏󰠏󰠏󰠏󰠏󰠏󰠏󰠏󰠏󰠏󰠏󰠏󰠏󰠏󰠏󰠏󰠏󰠏󰠏󰠏󰠏󰠏󰠏󰠏󰠏󰠏󰠏󰠏󰠏󰠏󰠏󰠏󰠏󰠏󰠏󰠏󰠏󰠏󰠏󰠏󰠏󰠏󰠏󰠏󰠏󰠏󰠈 󰠐 칭의는 아담안에서 그리스도안으로의 위치적 전환이다. 󰠐 󰠌󰠏󰠏󰠏󰠏󰠏󰠏󰠏󰠏󰠏󰠏󰠏󰠏󰠏󰠏󰠏󰠏󰠏󰠏󰠏󰠏󰠏󰠏󰠏󰠏󰠏󰠏󰠏󰠏󰠏󰠏󰠏󰠏󰠏󰠏󰠏󰠏󰠏󰠏󰠏󰠏󰠏󰠏󰠏󰠏󰠏󰠏󰠏󰠏󰠏󰠏󰠏󰠏󰠏󰠏󰠏󰠏󰠏󰠏󰠏󰠎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그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4:3)」하셨다. 이 원리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롬4:5)」 하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드릴때 우리를 죄로부터 전폭적으로 용서하시고 우리를 칭의하신다. 임금님은 어느날 거지 아이를 불쌍히 여겨 자기의 자식으로 받아드리게 되었다. 그는 문무백관 앞에서 거지 아이를 자기의 아들(왕자)로 선언한 것이다. 이제 그 아이는 거지의 신분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전환한 것이다. 지성이 모자라도 거지 근성이 남아있어도 임금님을 닮은데가 없어도 그의 신분은 거지에서 왕자의 자리로 그위치가 전환된 것이다. 「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아담안에서 태어난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롬1:17) , 그리스도안으로 위치를 바꾸게 된다. 위치적 전환을 가르쳐 칭의라 한다. 4. 새로운 생명 󰠆󰠏󰠏󰠏󰠏󰠏󰠏󰠏󰠏󰠏󰠏󰠏󰠏󰠏󰠏󰠏󰠏󰠏󰠏󰠏󰠏󰠏󰠏󰠏󰠏󰠏󰠏󰠏󰠏󰠏󰠏󰠏󰠏󰠏󰠏󰠏󰠏󰠏󰠏󰠏󰠏󰠏󰠏󰠏󰠏󰠏󰠏󰠏󰠏󰠏󰠏󰠏󰠏󰠏󰠈 󰠐 중생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 󰠌󰠏󰠏󰠏󰠏󰠏󰠏󰠏󰠏󰠏󰠏󰠏󰠏󰠏󰠏󰠏󰠏󰠏󰠏󰠏󰠏󰠏󰠏󰠏󰠏󰠏󰠏󰠏󰠏󰠏󰠏󰠏󰠏󰠏󰠏󰠏󰠏󰠏󰠏󰠏󰠏󰠏󰠏󰠏󰠏󰠏󰠏󰠏󰠏󰠏󰠏󰠏󰠏󰠏󰠎 거듭남(중생)이란 인간생명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외에 하나님의 생명을 더 얻는 것이다. 우주가운데 모든 생명의 종류는 천사의 생명이든 사람의 생명이든 동물의 생명이든 식물의 생명이든 모두 필연적으로 죽고 변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신성하지도 않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거룩하고 영원하다. 성경은 오직 온우주가운데 하나님의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간주한다(요일5:12)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이다(요일 1:2 3:36) 하나님은 우리가 거듭날 때 이영원한 생명을 주신다(요10:28-29). 아담의 생명이 처음 창조시 순결하고 선한 생명이었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선한 생명을 소유했더라도 아담의 생명은 여전히 사람의 생명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거듭나야 할 필요를 인정하셨다. 그래서 그를 생명과를 먹고 영생을 얻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신성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전에 거듭나기전에 타락하고 말았다.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6). 거듭남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다. 우리는 거듭날 때 하나님의 생명을 더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박씨 아들은 박씨 생명 받아야 하고 김씨 아들은 김씨 생명받아야 하듯이 한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나님씨가 된다. 새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다. 5. 성분적 전환 󰠆󰠏󰠏󰠏󰠏󰠏󰠏󰠏󰠏󰠏󰠏󰠏󰠏󰠏󰠏󰠏󰠏󰠏󰠏󰠏󰠏󰠏󰠏󰠏󰠏󰠏󰠏󰠏󰠏󰠏󰠏󰠏󰠏󰠏󰠏󰠏󰠏󰠏󰠏󰠏󰠏󰠏󰠏󰠏󰠏󰠈 󰠐 중생은 생명의 성분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 󰠌󰠏󰠏󰠏󰠏󰠏󰠏󰠏󰠏󰠏󰠏󰠏󰠏󰠏󰠏󰠏󰠏󰠏󰠏󰠏󰠏󰠏󰠏󰠏󰠏󰠏󰠏󰠏󰠏󰠏󰠏󰠏󰠏󰠏󰠏󰠏󰠏󰠏󰠏󰠏󰠏󰠏󰠏󰠏󰠏󰠎 W.T.Purkiser 는 “중생은 하나님의 신적 출생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우리는 중생 이 인간생명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됨을 알게되었다. 아담안에 태어난 모든 죄인들은 내적 본성에 있어서 세상의 요소로 적셔져 있다. 그러므로 외면상의 위치적 전환이 필요할 뿐 아니라(칭의뿐 아니라), 내적인 성분상의 변화(성화)가 필요하다. 이처럼 주관적인 성분상의 변화 과정을 성화(Sanctification)이라 한다. 칭의가 법적으로 무죄선언된 것이라면 중생은 생명의 성분적 전환을 말한다. 중생 한 생명은 성분상의 변화를 통하여 세상적 요소, 죄의 습관으로 적셔진 옛사람을 성분상 변화시켜 나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중생할 때 옛죄의 습관들, 세상적 요소들이 성분상 처리되지 않은체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이 주어지는 것임으로 거듭난 생명은 죄의 성분과 습성으로 가득한 혼의 포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중생으로 영이 생명되면 점진적으로 혼이 생명되고 몸이 생명되는 성분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결 론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처리하여 법적으로 칭의하여 무죄를 선언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새생명을 얻게한다. 칭의는 우리를 아담안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안의 위치로 전환시키고 중생은 우리를 사망권세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성분적 전환을 시킨다. 칭의와 중생은 구원의 과정이긴 하지만 칭의는 죄의 처리요, 중생은 새생명의 시작이란 면에서 두개는 동시적 사건이면서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결론 8강의 그리스도안의 삶 1.구원의 중심 2.생명의 상태 3.옛것의 처리 4.처리의 근거 5.처리의 정도 성결론 8강의 그리스도안의 삶 󰠏󰠏󰠏󰠏󰠏󰠏󰠏󰠏󰠏󰠏󰠏󰠏󰠏 암 송 성 구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17 󰠏󰠏󰠏󰠏󰠏󰠏󰠏󰠏󰠏󰠏󰠏󰠏 서 론 우리가 구원받기전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으며 아담안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거듭났을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안으로 옮기셨다(고후5:17). 우리는 이런 체험을 가리켜 구원의 단계 혹은 거듭남의 단계라고 부른다. 구원의 첫 단계는 우리가 그리스도안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즉 아담안에서 그리스도안으로 위치를 바꾸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를 「그리스도안」의 단계라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안은 곧 생명안으로인데 사망안에 있는 아담안에서 생명이신 그리스도안으로 위치적 전환을 가리켜 그리스도안의 삶을 구원의 단계라 한다. 1. 구원의 중심 󰠆󰠏󰠏󰠏󰠏󰠏󰠏󰠏󰠏󰠏󰠏󰠏󰠏󰠏󰠏󰠏󰠏󰠏󰠏󰠏󰠏󰠏󰠏󰠏󰠏󰠏󰠏󰠏󰠏󰠏󰠏󰠏󰠏󰠏󰠏󰠏󰠏󰠏󰠏󰠏󰠏󰠏󰠏󰠏󰠏󰠏󰠏󰠏󰠏󰠈 󰠐 거듭남만이 구원의 중심이요, 생명의 부분이다. 󰠐 󰠌󰠏󰠏󰠏󰠏󰠏󰠏󰠏󰠏󰠏󰠏󰠏󰠏󰠏󰠏󰠏󰠏󰠏󰠏󰠏󰠏󰠏󰠏󰠏󰠏󰠏󰠏󰠏󰠏󰠏󰠏󰠏󰠏󰠏󰠏󰠏󰠏󰠏󰠏󰠏󰠏󰠏󰠏󰠏󰠏󰠏󰠏󰠏󰠏󰠎 하나님의 구원은 지극히 완전하다. 죄사함, 정결케함, 칭의, 해방, 거듭남, 거룩케함등. 구원은 모든 것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은 구원의 한부분들이요, 구원의 한과정의 표현들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들중 거듭남만이 생명의 부분이다. 죄사함은 생명의 문제에 속하지 않는다. 깨끗케함도,우리를 의롭다함도 생명의 문제는 아니다. 죄로부터의 속박과 해방도 결코 생명의 문제는 아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전혀 생명에 속하지 않는다. 거듭남만이 생명의 부분이며 구원체험의 중심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하려는데 중심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죄사함도 죄씻음도 의롭다고 칭의하심도 필경 그분의 하나의 목적 「거듭남」을 위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거듭남이 구원체험의 중심부분이 되는 것이다. 거듭나기전 우리는 타락한 아담안에 죄인으로 있었으며 우리는 옛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날 때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의 원래의 생명외에 하나님의 생명을 더 얻은 것이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는 이중적 체험을 한다. 한편은 아담안에 타락한 옛사람이요, 다른 한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구원받은 새사람을 체험한다. 즉 옛사람이 우리속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새사람은 우리가 거듭남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2. 생명의 상태 󰠆󰠏󰠏󰠏󰠏󰠏󰠏󰠏󰠏󰠏󰠏󰠏󰠏󰠏󰠏󰠏󰠏󰠏󰠏󰠏󰠏󰠏󰠏󰠏󰠏󰠏󰠏󰠏󰠏󰠏󰠏󰠏󰠏󰠏󰠏󰠏󰠏󰠏󰠏󰠏󰠏󰠏󰠏󰠏󰠏󰠏󰠏󰠏󰠏󰠏󰠏󰠏󰠈 󰠐 거듭남으로 영과 혼과 몸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 󰠌󰠏󰠏󰠏󰠏󰠏󰠏󰠏󰠏󰠏󰠏󰠏󰠏󰠏󰠏󰠏󰠏󰠏󰠏󰠏󰠏󰠏󰠏󰠏󰠏󰠏󰠏󰠏󰠏󰠏󰠏󰠏󰠏󰠏󰠏󰠏󰠏󰠏󰠏󰠏󰠏󰠏󰠏󰠏󰠏󰠏󰠏󰠏󰠏󰠏󰠏󰠏󰠎 우리가 거듭나게되면 하나님의 생명은 3가지 영역에 관계가 된다. 우리의 영에, 우리의 혼에, 우리의 몸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아담이 범죄할 때 아담의 영은 죽고, 아담의 혼은 타락했으며 그의 몸은 부패하였다. 1. 인간의 영은 죄로인하여 하나님을 향해 죽어있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엡2:1) 」 우리 영은 죄로 인하여 죽었고 하나님을 접촉하는 기능을 상실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고 영적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듭났을 때 속의 영이 통회하며 참으로 상하고 깨어져서 상한 심령 되어진다(시51:17). 2. 인간의 혼은 거듭나기전 돌같이 굳어져 있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드럽지 못하고 경직된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속에 두고 새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것이며(겔 36:26)」 우리 혼이 죄악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알려고도 알지도 못한다. 우리가 거듭난 후 우리 혼은 하나님께 대해서 부드럽게 변하고 하나님을 향하고 자신을 규탄하고 책하게 된다(롬7:24). 3. 인간의 몸에 뿌리박은 본성은 거듭나기전 하나님의 본성과 상합할 수 없는 심히 부패한 상태에 있다(렘17:9 롬7:18). 그러나 거듭난 후 성령의 조명아래서 속의 본성도 밖의 행위도 부패했음을 알고 고치려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한다. 3. 옛것의 처리 󰠆󰠏󰠏󰠏󰠏󰠏󰠏󰠏󰠏󰠏󰠏󰠏󰠏󰠏󰠏󰠏󰠏󰠏󰠏󰠏󰠏󰠏󰠏󰠏󰠏󰠏󰠏󰠏󰠏󰠏󰠏󰠏󰠏󰠏󰠏󰠏󰠏󰠏󰠏󰠏󰠏󰠏󰠏󰠏󰠏󰠏󰠏󰠏󰠏󰠏󰠈 󰠐 거듭나면 옛것(불의, 부당, 부정)을 처리한다. 󰠐 󰠌󰠏󰠏󰠏󰠏󰠏󰠏󰠏󰠏󰠏󰠏󰠏󰠏󰠏󰠏󰠏󰠏󰠏󰠏󰠏󰠏󰠏󰠏󰠏󰠏󰠏󰠏󰠏󰠏󰠏󰠏󰠏󰠏󰠏󰠏󰠏󰠏󰠏󰠏󰠏󰠏󰠏󰠏󰠏󰠏󰠏󰠏󰠏󰠏󰠏󰠎 우리가 아담안에서 그리스도안으로 옮겨지고 새생명으로 거듭날 때 우리의 옛것은 일소해야 한다. 이것이 새생의 과정에 있어서 필수적인 두번째 체험이다. 그러나 엄미한 의미에서 과거 일소는 본래 새생명의 체험, 거듭남의 체험일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거듭남의 체험에 대한 하나의 부록이요, 찌꺼기 일 뿐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거듭나고 구원받은 사람은 당연히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끝내야 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거듭났다면 과거는 분명히 끝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도 과거는 즉시 청산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으로인해 한 번 소생을 얻은 후에라도 과거를 처리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과거청산이 새생명이전에 되어야 하지만 실제적으로 새생명이 들어옴으로 옛것이 처리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체험하는 면에서 두가지 면으로 분리 생각해야 한다. 성경에 과거 청산을 분명히 가르친 예를 본다. 눅19:1-10의 구원받은 삭개오가 불의로 모은 재산을 네배로 갚고 그의 재산의 절반을 잘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사실이다. 옛것을 청산하는 사실을 보게된다. 사도행전 19:18-19에서 에베소 성도들이 구원얻게 되자 자원하여 마술에 관한 책들을 불사르는 사실이다. 여기 불의한 것(불법적인 것), 부당한 것(합당하지 못한것 :흡연,도박,음주,상스러움등), 부정한 것(우상숭배, 점, 관상, 마법 등)등을 청산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듭나면 불의,부당,부정등의 옛습관에 대한 청산을 하게 된다. 4. 처리의 근거 󰠆󰠏󰠏󰠏󰠏󰠏󰠏󰠏󰠏󰠏󰠏󰠏󰠏󰠏󰠏󰠏󰠏󰠏󰠏󰠏󰠏󰠏󰠏󰠏󰠏󰠏󰠏󰠏󰠏󰠏󰠏󰠏󰠏󰠏󰠏󰠏󰠏󰠏󰠏󰠏󰠏󰠏󰠏󰠏󰠏󰠏󰠏󰠏󰠏󰠏󰠏󰠏󰠏󰠏󰠏󰠏󰠏󰠏󰠏󰠈 󰠐 우리
성결론(3) 9-12강의
성결론(3) 9-12강의 성결론 9강의 죄 의 처 리 1.죄들을 처리해야 할 이유 2.죄들의 처리 대상 3.죄들 처리의 근거 4.죄들 처리의 한계 5.죄처리와 생명 성장 성결론 9강의 죄들의 처 리 󰠏󰠏󰠏󰠏󰠏󰠏󰠏󰠏󰠏󰠏󰠏 암 송 성 구 󰠏󰠏󰠏󰠏󰠏󰠏󰠏󰠏󰠏󰠏󰠏󰠏󰠏󰠏󰠏󰠏󰠏󰠏󰠏󰠏󰠏󰠏󰠏󰠏󰠏󰠏󰠏󰠏󰠏󰠏󰠏󰠏󰠏󰠏󰠏󰠏󰠏󰠏󰠏󰠏󰠏󰠏󰠏󰠏󰠏󰠏󰠏󰠏󰠏󰠏󰠏󰠏󰠏󰠏󰠏 그로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와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마 5:23 - 26 󰠏󰠏󰠏󰠏󰠏󰠏󰠏󰠏󰠏󰠏 서 론 구원의 처음 단계는 아담안에 속했던 내가 그리스도안으로 위치적인 전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위치를 전환하여 새사람이 되기는 하였지만 온전한 새사람이 되지는 못하였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죄의 성분을 다 처리하지 못한체 옮겨졌기 때문에 죄의 성분을 계속 처리하여야 온전에 도달할 수 있다. 미국사람이 한국으로 국적을 옮겼다고 가정해보자. 국적이 옮겨진 날부터 한국시민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주 미숙한 한국사람이다. 언어의 장애를 받는다. 사회질서에도 전통문화에도 장애를 받는다. 한국시민이긴 하지만 온전한 한국인이 못된다. 한국시민이긴 하지만 여전히 미국인의 성분으로 남아있다. 온전한 한국사람이 되기위해서 미국인의 성분이 처리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옛미국인의 성분은 하나 하나 제거하고 한국인으로 변화를 받아야 하듯이 불신자가 신자로 구원받은 후에도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거쳐야 될 과정들이 남아있다. 1.죄들을 처리해야 할 이유 󰠆󰠏󰠏󰠏󰠏󰠏󰠏󰠏󰠏󰠏󰠏󰠏󰠏󰠏󰠏󰠏󰠏󰠏󰠏󰠏󰠏󰠏󰠏󰠏󰠏󰠏󰠏󰠏󰠏󰠏󰠏󰠏󰠏󰠏󰠏󰠏󰠏󰠏󰠏󰠏󰠏󰠏󰠏󰠏󰠏󰠈 󰠐 죄의 처리는 새생명의 성장을 위해서다. 󰠐 󰠌󰠏󰠏󰠏󰠏󰠏󰠏󰠏󰠏󰠏󰠏󰠏󰠏󰠏󰠏󰠏󰠏󰠏󰠏󰠏󰠏󰠏󰠏󰠏󰠏󰠏󰠏󰠏󰠏󰠏󰠏󰠏󰠏󰠏󰠏󰠏󰠏󰠏󰠏󰠏󰠏󰠏󰠏󰠏󰠏󰠎 우리가 죄들을 처리해야하는 이유는 새생명의 성장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장애물을 많이 처리할수록 우리 생명은 더욱 더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자랄수록 죄의 잡초는 더 처리된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장과 죄의 처리는 정비례한다. 우리안에 장애물이 온전히 처리된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게되며 온전한 헌신, 온전한 제물이 될 수 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들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여기 깨끗케 하자 하는 말이 곧 죄의 처리를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여기 자백하면 하는 말 역시 죄의 처리를 말한다.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여기 자백하다, 버리다 하는 말 역시 죄의 처리를 의미한다. 우리 지은 죄로 인해 불화한 이웃이 있다면 사과하여 죄를 제거해야 되고 하나님과 죄로 인하여 막힌 담이 있다면 숨김없이 자백하여 용서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웃과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한다. 2.죄들의 처리 대상 󰠆󰠏󰠏󰠏󰠏󰠏󰠏󰠏󰠏󰠏󰠏󰠏󰠏󰠏󰠏󰠏󰠏󰠏󰠏󰠏󰠏󰠏󰠏󰠏󰠏󰠏󰠏󰠏󰠏󰠏󰠏󰠏󰠏󰠏󰠏󰠏󰠏󰠏󰠏󰠏󰠏󰠏󰠏󰠏󰠏󰠏󰠏󰠏󰠏󰠏󰠈 󰠐 죄들의 처리는 죄행에 관련된 온갖 불법들이다. 󰠐 󰠌󰠏󰠏󰠏󰠏󰠏󰠏󰠏󰠏󰠏󰠏󰠏󰠏󰠏󰠏󰠏󰠏󰠏󰠏󰠏󰠏󰠏󰠏󰠏󰠏󰠏󰠏󰠏󰠏󰠏󰠏󰠏󰠏󰠏󰠏󰠏󰠏󰠏󰠏󰠏󰠏󰠏󰠏󰠏󰠏󰠏󰠏󰠏󰠏󰠏󰠎 죄는 우리 속,죄의 본성으로 밖의 죄의 행위며 죄성(Sin)과 죄행(sins)으로 존재한다. 죄성은 사탄의 생명으로 우리 속에 사망의 율로 남아있어서 쉽게 처리할 방법이 없다. 위리가 말하는 죄의 처리는 죄행에 관련된 죄들이다. 죄행이란 무엇인가? 「모든 불의가 죄다(요일5:17)」 「죄는 불법이다(요일3:4)」 불법과 불의가 모두 죄행에 속한다. 그러므로 불의와 불법이 우리가 처리해야 할 죄의 대상들이다. 죄행은 신자에게만 있지 않다. 율법없는 이방인들도 양심이 그들안에 증거하는 율법이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송사하고 변명하며 양심의 정죄를 받기 때문에 양심에 거스리는 모든 행위가 죄들을 범한 것이다(롬2:14-15). 인간의 외적인 죄행은 하나님께와 사람에게 동시에 죄를 범한다. 예를들면 훔치는 것은 범죄다. 훔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2중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앞에는 죄안을 갖게되고 사람에게는 피해를 입힌다 그러므로 죄는 양면을 다 처리해야 한다. 하나님앞과 사람앞에 용서를 받아야 한다. 3.죄들 처리의 근거 󰠆󰠏󰠏󰠏󰠏󰠏󰠏󰠏󰠏󰠏󰠏󰠏󰠏󰠏󰠏󰠏󰠏󰠏󰠏󰠏󰠏󰠏󰠏󰠏󰠏󰠏󰠏󰠏󰠏󰠏󰠏󰠏󰠏󰠏󰠏󰠏󰠏󰠏󰠏󰠏󰠏󰠏󰠏󰠏󰠏󰠏󰠏󰠏󰠏󰠏󰠏󰠏󰠏󰠏󰠏󰠏󰠏󰠏󰠏󰠏󰠏󰠏󰠏󰠏󰠏󰠏󰠏󰠏󰠏󰠏󰠏󰠏󰠈 󰠐 죄의 처리 근거는 의식에 떠오르는 죄와 주님의 빛에 드러난 죄들이다. 󰠐 󰠌󰠏󰠏󰠏󰠏󰠏󰠏󰠏󰠏󰠏󰠏󰠏󰠏󰠏󰠏󰠏󰠏󰠏󰠏󰠏󰠏󰠏󰠏󰠏󰠏󰠏󰠏󰠏󰠏󰠏󰠏󰠏󰠏󰠏󰠏󰠏󰠏󰠏󰠏󰠏󰠏󰠏󰠏󰠏󰠏󰠏󰠏󰠏󰠏󰠏󰠏󰠏󰠏󰠏󰠏󰠏󰠏󰠏󰠏󰠏󰠏󰠏󰠏󰠏󰠏󰠏󰠏󰠏󰠏󰠏󰠏󰠏󰠎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마5:23)」 즉 생각나는 것 , 의식에 떠오르는것은 처리해야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살 때 죄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빛가운데서 발견된 죄들을 자백하여 처리해야 한다(요일1:7-9) 마태복음 5장은 제단곁에서 우리의 생각에 떠오른 의식의 문제고,요한일서 1장은 하나님의 빛가운데서 밝혀지는 죄의 모습이다. 전자는 사람과 처리해야 할 일이고, 후자는 하나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두가지 문제는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갖는데 교제를 막는 것들이다. 하나님과 지속적인 영적 교제를 가지려면 의식에 떠오른 죄와 빛의 조명으로 나타난 죄를 계속 처리해야 한다. 만일 깨닫지 못하는 죄들이 있다면 어찌될까? 너무 염려할 것 없다. 하나님과 교제중에 깨닫는 때까지 당분간 미루어 두어도 하나님과의 교제는 장애요인이 되지 않는다. 죄의 처리는 율법의 명령에 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필요한 조건일 뿐이다. 어떤 이가 불법을 행하고도 자신이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기도하고 하나님 섬기고 영적인 생활하고 전도하는 일에 장애받지 않는다. 그러나 죄를 의식하면서도 처리하지 않으면 그는 당장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주님과의 교제가 막히며 영적생활에 균열이 온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에게 처리되지 않은 죄가 얼마나 되는지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고 , 우리의식에 떠오르는 죄들중 처리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죄를 처리하는 근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각자가 갖는 죄의식의 깊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 따라 정도가 일정하지 않을 수 있다. 4.죄들처리의 한계 󰠆󰠏󰠏󰠏󰠏󰠏󰠏󰠏󰠏󰠏󰠏󰠏󰠏󰠏󰠏󰠏󰠏󰠏󰠏󰠏󰠏󰠏󰠏󰠏󰠏󰠏󰠏󰠏󰠏󰠏󰠏󰠏󰠏󰠏󰠏󰠏󰠏󰠏󰠏󰠏󰠏󰠏󰠏󰠏󰠏󰠏󰠏󰠏󰠏󰠏󰠏󰠏󰠏󰠏󰠏󰠏󰠏󰠏󰠏󰠏󰠏󰠏󰠈 󰠐 죄들의 처리의 한계는 의식의 한계와 속생명의 평안까지다. 󰠐 󰠌󰠏󰠏󰠏󰠏󰠏󰠏󰠏󰠏󰠏󰠏󰠏󰠏󰠏󰠏󰠏󰠏󰠏󰠏󰠏󰠏󰠏󰠏󰠏󰠏󰠏󰠏󰠏󰠏󰠏󰠏󰠏󰠏󰠏󰠏󰠏󰠏󰠏󰠏󰠏󰠏󰠏󰠏󰠏󰠏󰠏󰠏󰠏󰠏󰠏󰠏󰠏󰠏󰠏󰠏󰠏󰠏󰠏󰠏󰠏󰠏󰠏󰠎 우리가 설사 우리 의식에 떠오른 모든 죄들을 남김없이 처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죄들을 완전히 처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죄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좀 더 철저히 처리하려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하나님과 교제가 강화될수록 죄에 대한 의식이 확대되기 때문에 죄의 처리가 심화되며 성결의 체험은 보다 깊어진다. 그러면 우리 죄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하나? 생명과 평강의 정도다(롬8:6). 우리가 죄를 처리할 때 속생명과 평강이 있을 때까지 처리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 속생명에 평강이 따른다면 내적인 만족과, 안식과, 활력, 신선함과, 소생을 더욱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기도도 능력이 있고 담대해진다. 의식에 떠오르는 모든 죄를 처리하되 생명과 평강의 정도까지만 처리하면 우리는 늘 영적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5.죄의 처리와 생명의 성장 󰠆󰠏󰠏󰠏󰠏󰠏󰠏󰠏󰠏󰠏󰠏󰠏󰠏󰠏󰠏󰠏󰠏󰠏󰠏󰠏󰠏󰠏󰠏󰠏󰠏󰠏󰠏󰠏󰠏󰠏󰠏󰠏󰠏󰠏󰠏󰠏󰠏󰠏󰠏󰠏󰠏󰠏󰠏󰠏󰠏󰠏󰠏󰠏󰠏󰠏󰠏󰠏󰠏󰠏󰠏󰠏󰠏󰠏󰠏󰠏󰠏󰠏󰠏󰠏󰠏󰠏󰠏󰠏󰠏󰠏󰠏󰠏󰠏󰠏󰠏󰠈 󰠐 구원받기 전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 자백함으로 각각 죄의 처리를 받는다. 󰠐 󰠌󰠏󰠏󰠏󰠏󰠏󰠏󰠏󰠏󰠏󰠏󰠏󰠏󰠏󰠏󰠏󰠏󰠏󰠏󰠏󰠏󰠏󰠏󰠏󰠏󰠏󰠏󰠏󰠏󰠏󰠏󰠏󰠏󰠏󰠏󰠏󰠏󰠏󰠏󰠏󰠏󰠏󰠏󰠏󰠏󰠏󰠏󰠏󰠏󰠏󰠏󰠏󰠏󰠏󰠏󰠏󰠏󰠏󰠏󰠏󰠏󰠏󰠏󰠏󰠏󰠏󰠏󰠏󰠏󰠏󰠏󰠏󰠏󰠏󰠏󰠎 「나는 더 이상 처리할 죄가 없다」 할 만큼 그렇게 영적인 사람은 없다. 우리의 영적 생명이 계속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계속 하나님과 교제를 강화하고 드러나는 죄들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가 죄를 처리할 때 두 방면이 처리되어야 한다. 하나님앞에 죄안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실제적 범죄 사실의 처리다. 하나님앞에 죄안이 폐기된 것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역사에 기인한다. 우리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받았다(요3:18). 주님의 피는 우리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드릴 때 우리의 온갖 죄안은 말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객관적 사실이 내자신에게 주관적 사실이 되려면 십자가는 계속 적용되어야한다. 1)구원받기 전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죄사함을 받는다(행10:43)」 우리들이 구원받기전 지은 온 갖 죄들은 단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안을 말소시키신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 가지고 있던 죄안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폐기 처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신자가 될 때 죄사함 받은 적용은 오직 믿음뿐이다. 이를 가르쳐 일회적 회개라 한다. 2)구원받은 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 우리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 우리가 구원받은 후 범한 온갖 죄들에 대해서 언급한 말씀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빛가운데서 이런 것들을 의식한다면 하나님앞에 자백해야만 사함과 정결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후 저지른 죄들에 대하여는 하나님앞에 죄안을 없게하려면 진정으로 자백하는 길 뿐이다. 신자가 참신자로 사는 길은 매일 매일 일상적인 회개, 즉 자백을 통해서다. 구원받기전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후 자백을 통해서 각각 죄를 처리받을 수 있지만 이 모든것은 반듯이 십자가가 적용되어져야만 한다. 만일 우리들이 사람앞에 지은 죄가 도덕적이라면 그사람에게 용서받으면 된다. 만일 금전적으로 문제라면 손해를 끼친만큼 변상해야 한다. 만일 변상받을 대상이 없어져 버렸다면 하나님께나 가난한 이웃에게라도 변상해야 한다. 우리의 영적 생명의 성장은 죄의 처리된 만큼에 정비례 하기 때문이다. 결 론 우리는 우리속에 생명의 성숙을 위해서 의식에 떠오르는 모든 죄를 순간 순간 처리하여 하나님과 교제가 끊이지 않도록 성결을 유지하여야 한다. 우리는 좀 더 깊은 성화를 위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화해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앞에 우리의 죄안을 폐기시키는 유일의 근거이며 ,믿음으로, 자백함으로 적용할 때 우리의 주관적인 죄들은 체험적으로 처리된다. 그러므로 순간 순간 의식에 떠오른 죄는 십자가로 처리하여 성결한 삶을 유지하여야 한다. 성결론 10강의 세상의 처리 1.죄와 세상의 처리 2.세상의 조직과 형성 3.세상의 발전과 과정 4.세상으로부터의 구원 5.세상처리의 실제와 대상 성결론 10강의 세상의 처리 󰠏󰠏󰠏󰠏󰠏󰠏󰠏󰠏󰠏󰠏󰠏󰠏󰠏󰠏 암 송 성 구 󰠏󰠏󰠏󰠏󰠏󰠏󰠏󰠏󰠏󰠏󰠏󰠏󰠏󰠏󰠏󰠏󰠏󰠏󰠏󰠏󰠏󰠏󰠏󰠏󰠏󰠏󰠏󰠏󰠏󰠏󰠏󰠏󰠏󰠏󰠏󰠏󰠏󰠏󰠏󰠏󰠏󰠏󰠏󰠏󰠏󰠏󰠏󰠏󰠏󰠏󰠏󰠏󰠏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요1 2:15-17 󰠏󰠏󰠏󰠏 서 론 중생하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미워하고 죄를 경계할줄 안다(요일5:18).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경계할줄 모르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죄를 미워할줄 아는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처리할줄 몰라 성장하지 못하고 곁길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약4:4)」 죄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을 잘 아는 그리스도인들도 세상과 벗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식별하지 못한다. 서구의 기독교가 수천년동안 죄를 규명하고 경계하고 미워해 왔지만 세상을 경계할줄 몰라 세속하하고, 타락의 길로 전락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이 세상을 짝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된다는 사실을 너무 소홀히 알고 간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는 이세대(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하였다. 1.죄와 세상의 처리 󰠆󰠏󰠏󰠏󰠏󰠏󰠏󰠏󰠏󰠏󰠏󰠏󰠏󰠏󰠏󰠏󰠏󰠏󰠏󰠏󰠏󰠏󰠏󰠏󰠏󰠏󰠏󰠏󰠏󰠏󰠏󰠏󰠏󰠏󰠏󰠏󰠏󰠏󰠏󰠏󰠏󰠏󰠏󰠏󰠏󰠏󰠏󰠏󰠏󰠏󰠏󰠏󰠏󰠏󰠏󰠏󰠏󰠏󰠏󰠏󰠏󰠏󰠏󰠏󰠏󰠏󰠏󰠏󰠏󰠏󰠏󰠏󰠏󰠏󰠏󰠏󰠏󰠏󰠏󰠈 󰠐 죄를 짓는 것은 타락의 첫 단계이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죄의 마지막 단계 󰠐 󰠐 이다. 󰠐 󰠌󰠏󰠏󰠏󰠏󰠏󰠏󰠏󰠏󰠏󰠏󰠏󰠏󰠏󰠏󰠏󰠏󰠏󰠏󰠏󰠏󰠏󰠏󰠏󰠏󰠏󰠏󰠏󰠏󰠏󰠏󰠏󰠏󰠏󰠏󰠏󰠏󰠏󰠏󰠏󰠏󰠏󰠏󰠏󰠏󰠏󰠏󰠏󰠏󰠏󰠏󰠏󰠏󰠏󰠏󰠏󰠏󰠏󰠏󰠏󰠏󰠏󰠏󰠏󰠏󰠏󰠏󰠏󰠏󰠏󰠏󰠏󰠏󰠏󰠏󰠏󰠏󰠏󰠏󰠎 죄는 거칠고 잔인하고 추하고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얼른 원수임을 식별해 내기 쉽다. 그러나 세상이란 멋있고 세련되고 화려하고 교양적이기 때문에 얼른 보아서 원수로 식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세상성을 미워하신다(약4:4). 죄는 사람을 못되고 더럽고 사망의 길로 이끄는 반면 세상은 사람을 매력있고 멋있어 보이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도 쉽게 접근하고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스도인 부모님들이 자기 아이가 훔치거나 싸우거나 거짓말 하는것은 엄격히 다루고 나무랠줄 안다. 그러나 자기의 자녀들이 오락과 사치와 오락을 따라 유흥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고 젊은이들의 멋이라고 쉽게 방심해 버린다. 사람은 대개 부도덕하고 방탕한 것은 죄인줄 얼른 식별해 내는데 세상적인 학문이나 취미나 향락에 묶이는 것은 멋이고 시대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착각한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의를 거스린다면, 세상은 인간의 경건과 하나님의 거룩성을 파괴한다. 죄를 짓는 것은 타락의 첫단계이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타락의 마지막 단계이다. 우리의 생명은 죄를 처리함으로 하나님이 성분으로 충만해가지만 영적싸움의 승리는 세상성이 처리되어야 맛보고 성장을 경험한다. 2.세상의 조직과 형성 󰠆󰠏󰠏󰠏󰠏󰠏󰠏󰠏󰠏󰠏󰠏󰠏󰠏󰠏󰠏󰠏󰠏󰠏󰠏󰠏󰠏󰠏󰠏󰠏󰠏󰠏󰠏󰠏󰠏󰠏󰠏󰠏󰠏󰠏󰠏󰠏󰠏󰠏󰠏󰠏󰠏󰠏󰠏󰠏󰠏󰠏󰠏󰠈 󰠐 하나님을 등진 삶은 세상으로 나가게 만든다. 󰠐 󰠌󰠏󰠏󰠏󰠏󰠏󰠏󰠏󰠏󰠏󰠏󰠏󰠏󰠏󰠏󰠏󰠏󰠏󰠏󰠏󰠏󰠏󰠏󰠏󰠏󰠏󰠏󰠏󰠏󰠏󰠏󰠏󰠏󰠏󰠏󰠏󰠏󰠏󰠏󰠏󰠏󰠏󰠏󰠏󰠏󰠏󰠏󰠎 인간이 타락하기 전 세상(세속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타락이후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면서부터 하나님과 격리되면서부터 세상성이 싹트기 시작했고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산 놋땅에 거하였더니... (창4:16-22)」 인간이 하나님 앞을 떠나 독자적인 삶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없는 삶이 시작되면서 세상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없는 문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세상의 4가지 본질을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 가인이 성을 쌓고 그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성이라 하였다(창4:17)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으니 인간은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성은 오늘의 세속도시 건설의 출발점이다. 둘째 :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창4:20)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을 때 사람은 자연히 생계문제의 염려에 직면했다.그는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을 일으킨 것이다. 셋째 : 그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창4:21) 인간의 삶에 보장이 없을 때 인간은 허무를 경험했다. 인생을 보람있게 만들기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 향락산업을 만들기 시작했다. 넷째 :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든자요(창4:22) 인간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을 때 자기를 지키기 위한 날카로운 기계(무기)를 만들어 자기 생존의 위협을 방어할 무기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무기의 발달은 오늘날 원자탄 수소탄을 만드는데까지 이르렀다. 세속도시의 건설, 경제대국읙 건설, 향락산업의 발달, 전쟁무기의 축적 ,이런 것들이 발전한 나라를 문명국이나, 선진국이라 일컫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모두가 이것을 위해 투자하고 연구하고 목숨 걸고 뛴다. 대학도 국가도 사회도 모두 세상노예로 만들어 바쁘게 뛴다. 세상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인간의 일에 골몰하도록 구조되고 형성되어진 것이다. 3.세상의 발전과 과정 󰠆󰠏󰠏󰠏󰠏󰠏󰠏󰠏󰠏󰠏󰠏󰠏󰠏󰠏󰠏󰠏󰠏󰠏󰠏󰠏󰠏󰠏󰠏󰠏󰠏󰠏󰠏󰠏󰠏󰠏󰠏󰠏󰠏󰠏󰠏󰠏󰠏󰠏󰠏󰠏󰠏󰠏󰠏󰠏󰠏󰠏󰠏󰠏󰠏󰠏󰠏󰠏󰠏󰠏󰠏󰠏󰠏󰠏󰠏󰠏󰠏󰠏󰠈 󰠐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가운데서 언제나 불러내셨다. 󰠐 󰠌󰠏󰠏󰠏󰠏󰠏󰠏󰠏󰠏󰠏󰠏󰠏󰠏󰠏󰠏󰠏󰠏󰠏󰠏󰠏󰠏󰠏󰠏󰠏󰠏󰠏󰠏󰠏󰠏󰠏󰠏󰠏󰠏󰠏󰠏󰠏󰠏󰠏󰠏󰠏󰠏󰠏󰠏󰠏󰠏󰠏󰠏󰠏󰠏󰠏󰠏󰠏󰠏󰠏󰠏󰠏󰠏󰠏󰠏󰠏󰠏󰠏󰠎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앞을 떠났을 때 하나님이 없는 문화를 조직화하고 체계화하여 발전시켜 나갔으며 이것이 거대한 세상을 형성했던 것이다. 세상의 본질은 그 바탕이 인문주의요, 하나님을 배제한 세속성이다. 첫째, 인류가 제일 먼저 만든 세상은 바벨 문명이다. 바벨은 하나님대신 우상을 섬기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 귀신이 우글거리고 하나님을 등진 세상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 둘째, 인류가 만든 세상은 애굽의 문명이다. 나일강의 풍요와 산업의 발전은 인간을 매혹시켰다. 생계의 노예로 붙들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애굽에서 불러내셨다. 세째, 인류가 만든 세상은 소돔의 문명이다. 소돔은 쾌락과 방종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롯의 가족을 불러내셨다. 하나님없이 우상을 만들고 위로를 받는 바벨론과 하나님대신 물질문명의 풍요로 힘을 발휘했던 애굽 그리고 소돔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불러내셨다. 세상은 하나님을 등지고 끝없이 발전하고 끝없이 성장해 나가고 있다. 하나님을 등지고 반대방향으로 인류를 교육하고 지시하고 추진해 가고 있는 것이다. 4.세상으로부터의 구원 󰠆󰠏󰠏󰠏󰠏󰠏󰠏󰠏󰠏󰠏󰠏󰠏󰠏󰠏󰠏󰠏󰠏󰠏󰠏󰠏󰠏󰠏󰠏󰠏󰠏󰠏󰠏󰠏󰠏󰠏󰠏󰠏󰠏󰠏󰠏󰠏󰠏󰠏󰠏󰠏󰠏󰠏󰠏󰠏󰠏󰠏󰠏󰠏󰠏󰠏󰠏󰠏󰠏󰠏󰠏󰠏󰠏󰠏󰠏󰠏󰠏󰠏󰠏󰠏󰠏󰠏󰠏󰠏󰠏󰠏󰠏󰠈 󰠐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아야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 󰠌󰠏󰠏󰠏󰠏󰠏󰠏󰠏󰠏󰠏󰠏󰠏󰠏󰠏󰠏󰠏󰠏󰠏󰠏󰠏󰠏󰠏󰠏󰠏󰠏󰠏󰠏󰠏󰠏󰠏󰠏󰠏󰠏󰠏󰠏󰠏󰠏󰠏󰠏󰠏󰠏󰠏󰠏󰠏󰠏󰠏󰠏󰠏󰠏󰠏󰠏󰠏󰠏󰠏󰠏󰠏󰠏󰠏󰠏󰠏󰠏󰠏󰠏󰠏󰠏󰠏󰠏󰠏󰠏󰠏󰠏󰠎 우리는 인간의 구원이 여러 차원에 놓여있음을 보지 못한다. 첫째는 죄로부터의 구원의 문제요, 둘째는 이 거대하게 짜여지고 체계화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노아시대를 보아도 구원은 두차원에 놓여있음을 볼 수 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으로부터 방주로 들어간 자들의 구원이다. 그들이 방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는 물로 침몰한 홍수속에서 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방주는 죄로부터 노아의 8식구를 건지려는 그리스도안의 삶을 계시한다면 홍수(물)은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높이 떠오른 승리의 삶을 가리친다. 출애굽의 사건이 또한 세상의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았다. 이스라엘 장자들이 다 죽던 날 양의 피를 문설주 좌우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집은 심판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구원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유월절에 심판을 모면했더라도 그들이 홍해를 건너지 않는한 여전히 애굽(세상)의 노예다. 그들은 유월절에 구원받았지만 홍해를 건너서야 비로서 애굽을 떠날 수 있었다. 우리는 죄로부터의 구원이 있은 후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다(요일5:5-7)」 물(세례)은 세상과의 격리요, 피(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중요하듯이 애굽이란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기위해 물(홍해)가 필요한다. 우리는 죄를 처리하고 세상을 처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죄의 처리는 우리 사탄의 문제지만 세상의 처리는 환경의 문제다. 5.세상처리의 실제와 대상 󰠆󰠏󰠏󰠏󰠏󰠏󰠏󰠏󰠏󰠏󰠏󰠏󰠏󰠏󰠏󰠏󰠏󰠏󰠏󰠏󰠏󰠏󰠏󰠏󰠏󰠏󰠏󰠏󰠏󰠏󰠏󰠏󰠏󰠏󰠏󰠏󰠏󰠏󰠏󰠏󰠏󰠏󰠏󰠏󰠏󰠏󰠏󰠏󰠏󰠏󰠏󰠈 󰠐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우선하면 세상이 된다. 󰠐 󰠌󰠏󰠏󰠏󰠏󰠏󰠏󰠏󰠏󰠏󰠏󰠏󰠏󰠏󰠏󰠏󰠏󰠏󰠏󰠏󰠏󰠏󰠏󰠏󰠏󰠏󰠏󰠏󰠏󰠏󰠏󰠏󰠏󰠏󰠏󰠏󰠏󰠏󰠏󰠏󰠏󰠏󰠏󰠏󰠏󰠏󰠏󰠏󰠏󰠏󰠏󰠎 우리들이 비록 거듭났다 할지라도 의식된 죄를 남김없이 처리했다 할지라도 상당한 부분의 죄성이 우리안에 잠식해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장성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죄는 우리 안에 거한다. 그러나 세상은 환경적이고 외적인 것이다. 세상은 내면으로부터 출발하기 보다는 대상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데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시편기자는 세상처리에 대하여 이와같이 시사한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3)」 세상은 외적이고 환경적인 것에 기인한다. 세상적인 장소, 세상작인 친구, 세상적인 오락, 세상적인 학문, 세상적인 생각, 이런것들을 단호히 거절하고 문빗장을 질러야 한다. 악인의 모의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자연히 세상성이 나타난다. 세상적인 친구들과 어울리고 짝하게 되면 자연히 세상성에 발동이 걸리게 마련이다. 남을 헐뜯고 험담하는 이들과 어울리면 세상성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적인 오락과 학문에 매력을 느껴 관여하면 자연히 기울어 진다. 우리에게 친구, 학문, 오락이 다 필요하다. 부모와 남편 가족 모두 소중하다. 음시과 주택 의상 모두가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직장과 권력 학문과 자가용 어느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 모든것들 중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 나라에 이바지하는데 필요치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런것들이 하나님보다 그의 의보다 앞서거나 더 귀중히 여기게 되면 세상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6-39)」 하나님앞에서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대치된다(사43:7) 결 론 구원받은 우리에게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타락하기 전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타락한 후 하나님 영광의 기능을 저버리고 자기 위주로 세상것들을 추구하고 세상것들로 만족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죄를 처리해야 하지만 끈임없이 유혹과 도전을 받고있는 세상성을 처리해야만 한다. 성결론 11강의 양심의 처리 1.양심의 기원 2.양심의 기능 3.양심의 화인 4.양심의 회복 5.양심의 처리 성결론 11강의 양심의 처리 󰠏󰠏󰠏󰠏󰠏󰠏󰠏󰠏󰠏󰠏󰠏󰠏󰠏󰠏󰠏󰠏 암 송 성 구 󰠏󰠏󰠏󰠏󰠏󰠏󰠏󰠏󰠏󰠏󰠏󰠏󰠏󰠏󰠏󰠏󰠏󰠏󰠏󰠏󰠏󰠏󰠏󰠏󰠏󰠏󰠏󰠏󰠏󰠏󰠏󰠏󰠏󰠏󰠏󰠏󰠏󰠏󰠏󰠏󰠏󰠏󰠏󰠏󰠏󰠏󰠏󰠏󰠏󰠏󰠏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양심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 딤전 1: 18 -19 󰠏󰠏󰠏󰠏󰠏󰠏 서 론 그리스도인이 죄를 처리받은 후 의롭다 인정받게되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처리한 후 세상과 분리되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그의 양심을 처리한 후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영의 기능이 강해지고 부요해지며 생명의 성장이 점점 더 촉진되어 나아간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처리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 오늘날 영의 기능은 타락하기전과 같지 않으며 타락하기 전과 유사하지도 않다. 양심은 하느님 만큼이나 의롭고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양심이란 것도 인간타락후 오염될 만큼 오염되어 있어서 이양심조차도 안심할만큼 신뢰할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앞에서 양심이 처리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1.양심의 기원 󰠆󰠏󰠏󰠏󰠏󰠏󰠏󰠏󰠏󰠏󰠏󰠏󰠏󰠏󰠏󰠏󰠏󰠏󰠏󰠏󰠏󰠏󰠏󰠏󰠏󰠏󰠏󰠏󰠏󰠏󰠏󰠏󰠏󰠏󰠏󰠏󰠏󰠏󰠏󰠏󰠏󰠏󰠏󰠏󰠏󰠏󰠏󰠏󰠏󰠏󰠏󰠏󰠏󰠏󰠏󰠏󰠏󰠏󰠏󰠏󰠏󰠏󰠏󰠏󰠏󰠏󰠏󰠏󰠏󰠏󰠏󰠏󰠏󰠏󰠏󰠈 󰠐 양심의 기원은 인간창조시 부터이고 양심의 작동은 인간타락시 부터이다. 󰠐 󰠌󰠏󰠏󰠏󰠏󰠏󰠏󰠏󰠏󰠏󰠏󰠏󰠏󰠏󰠏󰠏󰠏󰠏󰠏󰠏󰠏󰠏󰠏󰠏󰠏󰠏󰠏󰠏󰠏󰠏󰠏󰠏󰠏󰠏󰠏󰠏󰠏󰠏󰠏󰠏󰠏󰠏󰠏󰠏󰠏󰠏󰠏󰠏󰠏󰠏󰠏󰠏󰠏󰠏󰠏󰠏󰠏󰠏󰠏󰠏󰠏󰠏󰠏󰠏󰠏󰠏󰠏󰠏󰠏󰠏󰠏󰠏󰠏󰠏󰠏󰠎 양심이란 무엇인가? 양심의 존재와 그기원은 어디 있는가? 어떤이들은 「양심은 문화적인 요인으로 형성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와 우리들의 체험에 의하면 양심이란 기관은 문화적 요인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때부터 인간안에 있게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양심의 존재가 드러나고 작동을 시작한 것은 사람이 선악을 알게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후부터이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7-9)」 하였다. 타락전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 아니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 필요가 없었다. 즉 사람에게 선악에 관한 시비의 관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의 나무 과실을 먹은 후 자신들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알게되고 하나님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양심의 기능이 최초로 나타난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속에 양심을 두신 것은 악을 거절하고 선을 받아드리는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양심의 기원은 인간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2.양심의 기능 󰠆󰠏󰠏󰠏󰠏󰠏󰠏󰠏󰠏󰠏󰠏󰠏󰠏󰠏󰠏󰠏󰠏󰠏󰠏󰠏󰠏󰠏󰠏󰠏󰠏󰠏󰠏󰠏󰠏󰠏󰠏󰠏󰠏󰠏󰠏󰠏󰠏󰠏󰠏󰠏󰠏󰠏󰠏󰠏󰠏󰠏󰠏󰠏󰠏󰠏󰠏󰠏󰠏󰠏󰠏󰠏󰠏󰠏󰠏󰠏󰠏󰠏󰠏󰠏󰠏󰠈 󰠐 양심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표한다. 󰠐 󰠌󰠏󰠏󰠏󰠏󰠏󰠏󰠏󰠏󰠏󰠏󰠏󰠏󰠏󰠏󰠏󰠏󰠏󰠏󰠏󰠏󰠏󰠏󰠏󰠏󰠏󰠏󰠏󰠏󰠏󰠏󰠏󰠏󰠏󰠏󰠏󰠏󰠏󰠏󰠏󰠏󰠏󰠏󰠏󰠏󰠏󰠏󰠏󰠏󰠏󰠏󰠏󰠏󰠏󰠏󰠏󰠏󰠏󰠏󰠏󰠏󰠏󰠏󰠏󰠏󰠎 인간의 영은 영교, 직관, 양심의 세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영적교제를 가질 수 있는 영교,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인 직관 ,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는 양심이다. 타락전 인간의 영적기능은 영교와 직관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 후 하나님의 면전을 벗아나게 되자 양심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죄의 침투와 활동을 막기위해서 양심은 온갖 삶의 방면에서 사람으로 선악시비를 느끼고 분별할 수 있게된 것이다. 양심은 마치 큰 건물에 설치된 자동경보기와 같다. 건물에 아무런 사고가 없을 때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난 경보기는 도둑이 들면 벨을 울리고 개스경보기는 개스가 새면 곧바로 작동을 한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인간속에 양심이 있었지만 죄가 인간에게 침투되기 전까지는 기능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죄가 발생했을 때 양심은 그본래의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심은 세방면으로 기능을 발휘한다. 1. 선악을 식별한다. 2. 무죄와 정죄를 알게한다(롬2:15) 3. 양심은 하나님을 대표한다. 양심은 인간의 범죄를 막기위한 통제기관으로 선과악을 통제하는 출입구요, 무죄와 유죄를 식별케하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책망하는 경보를 울린다. 이것이 양심의 주요기능이다. 3.양심의 화인 󰠆󰠏󰠏󰠏󰠏󰠏󰠏󰠏󰠏󰠏󰠏󰠏󰠏󰠏󰠏󰠏󰠏󰠏󰠏󰠏󰠏󰠏󰠏󰠏󰠏󰠏󰠏󰠏󰠏󰠏󰠏󰠏󰠏󰠏󰠏󰠏󰠏󰠏󰠏󰠏󰠏󰠏󰠏󰠏󰠏󰠏󰠏󰠏󰠏󰠏󰠏󰠏󰠏󰠏󰠏󰠏󰠏󰠏󰠏󰠏󰠏󰠏󰠏󰠏󰠏󰠏󰠏󰠏󰠏󰠏󰠏󰠏󰠏󰠏󰠏󰠏󰠏󰠈 󰠐 하나님떠난 인간은 양심의 통제를 받고 살지만 양심조차 화인맞고 말았다. 󰠐 󰠌󰠏󰠏󰠏󰠏󰠏󰠏󰠏󰠏󰠏󰠏󰠏󰠏󰠏󰠏󰠏󰠏󰠏󰠏󰠏󰠏󰠏󰠏󰠏󰠏󰠏󰠏󰠏󰠏󰠏󰠏󰠏󰠏󰠏󰠏󰠏󰠏󰠏󰠏󰠏󰠏󰠏󰠏󰠏󰠏󰠏󰠏󰠏󰠏󰠏󰠏󰠏󰠏󰠏󰠏󰠏󰠏󰠏󰠏󰠏󰠏󰠏󰠏󰠏󰠏󰠏󰠏󰠏󰠏󰠏󰠏󰠏󰠏󰠏󰠏󰠏󰠏󰠎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타락한 후 인간은 자기통치 아래 놓여졌다. 이때 양심이 자기를 통제하는 주된 임무를 맡게된 것이다. 그러나 양심조차 통제할 수 없을만큼 타락의 심도가 깊어졌을 때 인간은 인간 통치아래 놓여졌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자기 통치로 자기 통치에서 인간통치로 이처럼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욱 천해지고 비참해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통제를 거절함으로서 자기 양심에 의해 통제받게 되기는 하였지만 양심조차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양심조차 믿을만한 것이 못되게 되었다(딤전4:2). 모든 자연인은 양심을 최고로 알고 양심의 통치를 높이 평가하지만 양심이 온전한 양심이 되지 못해서 결국 양심조차 화인맞을때(창4:9) 인간을 인간통치아래 두신 것이다(창9:6). 인간을 인간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회복시켜야 한다. 인간통치아래 있는 이들은 항상 사람의 눈치앞에 살며 그들의 주목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무슨 짓이라도 한다. 그러나 양심의 통치를 받는 이들은 양심에 따라 자주적으로 행동한다.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람의 주목에 구애받지 않고 양심의 자유를 누리고 산다. 그들은 양심에만 주의할 뿐 하나님께는 주의하지 않는다. 인간의 화인맞은 양심이 처리되면 인간통치 상태에서 구출되어 양심의 통치를 받게된다. 그러나 양심을 처리하는 최종목적은 자기통치로 복귀하는데 있지않고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복귀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4.양심의 회복 󰠆󰠏󰠏󰠏󰠏󰠏󰠏󰠏󰠏󰠏󰠏󰠏󰠏󰠏󰠏󰠏󰠏󰠏󰠏󰠏󰠏󰠏󰠏󰠏󰠏󰠏󰠏󰠏󰠏󰠏󰠏󰠏󰠏󰠏󰠏󰠏󰠏󰠏󰠏󰠏󰠏󰠏󰠏󰠏󰠏󰠏󰠏󰠏󰠏󰠏󰠏󰠏󰠏󰠏󰠏󰠏󰠏󰠏󰠏󰠏󰠏󰠏󰠏󰠏󰠏󰠏󰠏󰠏󰠏󰠏󰠏󰠏󰠏󰠏󰠏󰠏󰠏󰠏󰠏󰠈 󰠐 양심의 회복은 자기 통치아래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이르려는 것이다.󰠐 󰠌󰠏󰠏󰠏󰠏󰠏󰠏󰠏󰠏󰠏󰠏󰠏󰠏󰠏󰠏󰠏󰠏󰠏󰠏󰠏󰠏󰠏󰠏󰠏󰠏󰠏󰠏󰠏󰠏󰠏󰠏󰠏󰠏󰠏󰠏󰠏󰠏󰠏󰠏󰠏󰠏󰠏󰠏󰠏󰠏󰠏󰠏󰠏󰠏󰠏󰠏󰠏󰠏󰠏󰠏󰠏󰠏󰠏󰠏󰠏󰠏󰠏󰠏󰠏󰠏󰠏󰠏󰠏󰠏󰠏󰠏󰠏󰠏󰠏󰠏󰠏󰠏󰠏󰠏󰠎 화인맞은 양심을 처리해야하는 최종목적은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나 양심의 시야로 돌아가자는데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이르려는데 목표가 있다. 양심을 소중히 여기는 자기 통치와 하나님 통치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사람이 양심만 지키면 하나님뜻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 통치에 묶여 사는 이들은 자기 양심만 믿고 산다. 양심만 바르면 하나님앞에도 거리낌이 없다고 생각한다. 양심을 믿고 사는 이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이에겐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자기 통치하에 놓여있는 이는 양심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통치하에 놓여있는 이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 양심가는 선악의 시비에 연연해 있고 늘 흑백의 논리에 묶여산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자기의 옳고 그른 판단에 의존하기보다 양심에 의존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 그의 거룩에 속한 것 그의 생명에 속한 것을 순종하고 따를 뿐이다. 양심의 지배원리는 악을 비판하고 선을 내세운다. 그러나 성령의 지배원리는 악을 거절할 뿐 아니라 우리의 선도 내세우지 않는다. 이것이 선이건 악이건 하나님께 속한것인지 내게 속한 것인지 우리가 악한 사람이 되는 것도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원치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께 속하고 생명에 속하기를 원한다. 옳고 그른 것을 찾아내려고 곰곰히 생각하는 것은 양심의 과제요, 생각을 멈추고 무릎끓고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회복되기 위한 조건이다. 5.양심의 처리 󰠆󰠏󰠏󰠏󰠏󰠏󰠏󰠏󰠏󰠏󰠏󰠏󰠏󰠏󰠏󰠏󰠏󰠏󰠏󰠏󰠏󰠏󰠏󰠏󰠏󰠏󰠏󰠏󰠏󰠏󰠏󰠏󰠏󰠏󰠏󰠏󰠏󰠏󰠏󰠏󰠏󰠏󰠏󰠏󰠏󰠏󰠏󰠏󰠏󰠏󰠏󰠏󰠏󰠏󰠏󰠏󰠏󰠏󰠏󰠏󰠏󰠏󰠏󰠏󰠏󰠏󰠏󰠏󰠏󰠏󰠏󰠏󰠏󰠏󰠈 󰠐 양심의 처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순종을 위한 것이다. 󰠐 󰠌󰠏󰠏󰠏󰠏󰠏󰠏󰠏󰠏󰠏󰠏󰠏󰠏󰠏󰠏󰠏󰠏󰠏󰠏󰠏󰠏󰠏󰠏󰠏󰠏󰠏󰠏󰠏󰠏󰠏󰠏󰠏󰠏󰠏󰠏󰠏󰠏󰠏󰠏󰠏󰠏󰠏󰠏󰠏󰠏󰠏󰠏󰠏󰠏󰠏󰠏󰠏󰠏󰠏󰠏󰠏󰠏󰠏󰠏󰠏󰠏󰠏󰠏󰠏󰠏󰠏󰠏󰠏󰠏󰠏󰠏󰠏󰠏󰠏󰠎 양심처리의 대상은 양심 그 자체가 아니고 양심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오물들이다. 그리고 양심의 결재를 득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통치아래 양심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1.딤전 1:19 「선한 양심을 갖으라. 어떤 이들은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 파산하였느니라」 누구도 그의 양심안에 사탄의 공격할 요소를 남겨서는 안된다. 2.딤전 1: 5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으로」 3.행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 기를 힘쓰노라」 4.행전 23:1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결 론 우리가 양심을 어디까지 처리해야 하는가? 처리하는 정도는 죄와 세상을 처리하는 정도다. 「생명과 평강」이 있기까지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처리한 후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되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처리한 후 하나님께 거룩하다 인정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그의 양심을 처리한 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성결론 12강의 기름 부음 1.기름부음의 의미 2.기름부음과 구원 3.기름부음과 생명 4.기름부음과 보혈 5.기름부음과 인도 성결론 12강의 기름 부음 󰠏󰠏󰠏󰠏󰠏󰠏󰠏󰠏󰠏󰠏󰠏󰠏󰠏󰠏󰠏󰠏󰠏󰠏 암 송 성 구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 요한일서 2 : 27 󰠏󰠏󰠏󰠏󰠏󰠏󰠏󰠏󰠏󰠏 서 론 우리가 그리스도안의 사람이 되기위하여 처리되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그 첫째가 죄의 처리다. 두 번째가 세상의 처리다. 그리고 세번째가 양심의 처리다. 죄와 세상과 양심이 처리될 뿐 아니라, 기름부음이 필요한데 기름부음이란 성령의 세례를 의미한다. 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부으심이 되셨을 때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눅4:18) 」하는 예언의 성취에 대해서 증거하셨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은 기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가 그분께 받은 성령을 가르친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어 그 직임과 사역을 감당케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적인 것이고, 위치적인 것이었을 뿐 진정으로 영적이고 성분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우리안에 운행하신다. 오늘은 이러한 기름부음에 대해서 공부하려 한다. 1.기름부음의 의미 󰠆󰠏󰠏󰠏󰠏󰠏󰠏󰠏󰠏󰠏󰠏󰠏󰠏󰠏󰠏󰠏󰠏󰠏󰠏󰠏󰠏󰠏󰠏󰠏󰠏󰠏󰠏󰠏󰠏󰠏󰠏󰠏󰠏󰠏󰠏󰠏󰠏󰠏󰠏󰠏󰠏󰠏󰠏󰠏󰠏󰠈 󰠐 기름부음이란 성령의 부으심을 의미한다. 󰠐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요일2:27)」 하였다. 기름부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기름부음이 왜 그처럼 중요한가? 기름부음이란 멀리 구약적인 용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따라 광야에서 성막을 세웠을때 그들은 성막의 온갖 기구에 거룩한 기름(관유)를 발라 세상적인 것과 성별하였다(출40:9-16, 레8:10-11). 그뿐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제사장 대제사장들에게도 기름(관유)를 부어 성별하였다(출29:7-9 레8:12-13). 그리고 그후 왕들과 선지자들을 세울때 반드시 기름을 부었다(삼상10:1, 16:12-13). 하나님께서 사람과 기구에 기름을 바른 목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만드시기 위한 성결의식이었다.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은 모두 의식적이고 위치적인 면에서 성별된 얕은 지식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신성을 부어 위치에서뿐 아니라 인간본성을 바꾸시려는 성결케 하시는 성령의 부으심이다. 모세가 장막에 기름을 바르자 하나님의 성막이 되고 제단은 하나님의 제단이 되며, 제사장은 성직자가 되었다. 즉 기름(관유)를 적용함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과 사물을 거룩하게 성별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결법에 중요한 예표였던 것이다. 2.기름부음과 구원 󰠆󰠏󰠏󰠏󰠏󰠏󰠏󰠏󰠏󰠏󰠏󰠏󰠏󰠏󰠏󰠏󰠏󰠏󰠏󰠏󰠏󰠏󰠏󰠏󰠏󰠏󰠏󰠏󰠏󰠏󰠏󰠏󰠏󰠏󰠏󰠏󰠏󰠏󰠏󰠏󰠏󰠏󰠏󰠏󰠏󰠏󰠏󰠏󰠏󰠏󰠏󰠏󰠏󰠏󰠏󰠏󰠏󰠏󰠏󰠏󰠏󰠏󰠏󰠏󰠏󰠏󰠏󰠏󰠏󰠏󰠏󰠏󰠏󰠏󰠏󰠏󰠏󰠏󰠏󰠈 󰠐 인류구원의 목표는 기름부음(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하는 것이다. 󰠐 󰠌󰠏󰠏󰠏󰠏󰠏󰠏󰠏󰠏󰠏󰠏󰠏󰠏󰠏󰠏󰠏󰠏󰠏󰠏󰠏󰠏󰠏󰠏󰠏󰠏󰠏󰠏󰠏󰠏󰠏󰠏󰠏󰠏󰠏󰠏󰠏󰠏󰠏󰠏󰠏󰠏󰠏󰠏󰠏󰠏󰠏󰠏󰠏󰠏󰠏󰠏󰠏󰠏󰠏󰠏󰠏󰠏󰠏󰠏󰠏󰠏󰠏󰠏󰠏󰠏󰠏󰠏󰠏󰠏󰠏󰠏󰠏󰠏󰠏󰠏󰠏󰠏󰠏󰠏󰠎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가운데 하나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부어 아담의 인성에 하나님의 신성을 연합하시려는 의도를 인간창조
성결론(4) 13-15강의
성결론(4) 13-15강의 성결론 13강의 하나님의 뜻 1.하나님뜻이 의미하는것 2.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3.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 4.성령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 5.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 성결론 13강의 하나님의 뜻 󰠏󰠏󰠏󰠏󰠏󰠏󰠏󰠏󰠏󰠏󰠏󰠏󰠏󰠏󰠏󰠏 암 송 성 구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거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롬 12 : 1 - 2 󰠏󰠏󰠏󰠏󰠏󰠏󰠏 서 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성분을 우리안에 부어 하나님과 사람을 연합하시려는데 목적이 있다. 더욱 기름부음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향한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인도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이다. 주님 생각과 주님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기름부음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된다. 많은이들이 거듭났다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이 우주가운데 하시고자 하는 일 그리고 이땅위에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얼른 감지하지 못한다. 이유는 기름부음을 체험으로 순종할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성령의 내적운행에 따르기를 주저하기 때문에 현재 하나님께서 어떻게 움직이시고 역사하시는가에 대해서 무지하며 소홀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게 되는 문제에 대하여 공부하려 한다. 1.하나님의 뜻이 의미하는 것 󰠆󰠏󰠏󰠏󰠏󰠏󰠏󰠏󰠏󰠏󰠏󰠏󰠏󰠏󰠏󰠏󰠏󰠏󰠏󰠏󰠏󰠏󰠏󰠏󰠏󰠏󰠏󰠏󰠏󰠏󰠏󰠏󰠏󰠏󰠏󰠏󰠏󰠏󰠏󰠏󰠏󰠏󰠏󰠏󰠏󰠏󰠏󰠏󰠏󰠏󰠏󰠏󰠏󰠏󰠏󰠏󰠏󰠏󰠏󰠏󰠏󰠏󰠏󰠏󰠏󰠏󰠏󰠏󰠏󰠈 󰠐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갈망이 아니고 하나님의 갈망이요, 계획이다. 󰠐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도록 하라(엡5:17) 」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직장이나 결혼같은 사소한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언급한다. 그들은 이러한 표현을 아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데 이렇게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낮추고 과소평가하기 쉽다. 우리가 성경을 주의깊게 관찰해 볼 때 하나님의 뜻은 그처럼 통속적이고 평범한 문제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에베소서 1장엔 하나님 뜻의 비밀을 말한다(엡1:9) 에베소3장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하신 뜻(엡3:11)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에베소5장에는 우리에게 이처럼 보다 높고 크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자가 되라(엡5:17)는 것이다. 엡1:5-12에는 영원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심을 따라 한 계획을 가지셨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고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계셨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의 뜻을 따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모두를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하셨고(엡1:10)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시고 장래의 기업을 보증하셨다(엡1:13-15).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갈망이 아니고 하나님의 갈망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집행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2.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 󰠐 만물의 창조안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들어있다. 󰠐 󰠌󰠏󰠏󰠏󰠏󰠏󰠏󰠏󰠏󰠏󰠏󰠏󰠏󰠏󰠏󰠏󰠏󰠏󰠏󰠏󰠏󰠏󰠏󰠏󰠏󰠏󰠏󰠏󰠏󰠏󰠏󰠏󰠏󰠏󰠏󰠏󰠏󰠏󰠏󰠏󰠏󰠏󰠏󰠏󰠏󰠏󰠏󰠏󰠏󰠏󰠏󰠏󰠏󰠎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 만물은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졌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서는 하나님이 우주가운데 창조하신 만물을 깊이 관찰하고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물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위한 위대한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시편에 보면 구약시대 사람들은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일부를 배울 수 있었다. 시편의 기자는 영감을 받아 하늘과 땅을 관찰하면서 시편을 기록하였다. 「여호와 우리 주여 ! 주의 이름이 온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편8편) 」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늘과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말하는 땅을 보았던 것이다. 창조주의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과 온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것이다.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그 소리가 온땅에 통하고 그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며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하나님의 솜씨를 보여주도다(시19:3) 」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자 추구할 때마다 그들의 조그만 자아가 그들의 유일한 출발점과 근거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완전히 자신들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내가 어느 학교에 가야합니까? 내가 어느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가? 내가 어느 비행기를 타야 합니까? 」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많은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하늘도 땅도 보지 못하고 오직 자기에게만 사로잡혀있다. 그들이 보는 것이라곤 땅에 속한 자신의 유익에만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도 결코 자신을 잊을 수도 자신의 이익을 넘어설 수도 없다. 먼저 자신에게 와서야 영원하고 높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3.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 󰠆󰠏󰠏󰠏󰠏󰠏󰠏󰠏󰠏󰠏󰠏󰠏󰠏󰠏󰠏󰠏󰠏󰠏󰠏󰠏󰠏󰠏󰠏󰠏󰠏󰠏󰠏󰠏󰠏󰠏󰠏󰠏󰠏󰠏󰠏󰠏󰠏󰠏󰠏󰠏󰠏󰠏󰠏󰠏󰠏󰠏󰠏󰠏󰠏󰠏󰠏󰠈 󰠐 성경만이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다. 󰠐 󰠌󰠏󰠏󰠏󰠏󰠏󰠏󰠏󰠏󰠏󰠏󰠏󰠏󰠏󰠏󰠏󰠏󰠏󰠏󰠏󰠏󰠏󰠏󰠏󰠏󰠏󰠏󰠏󰠏󰠏󰠏󰠏󰠏󰠏󰠏󰠏󰠏󰠏󰠏󰠏󰠏󰠏󰠏󰠏󰠏󰠏󰠏󰠏󰠏󰠏󰠏󰠎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 모든 우주만물이 장엄하고 위대하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 역사의 단편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데 충분할만큼 분명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하나님이 이 우주가운데 계시하고자 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철저하고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러므로 성경만이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는 계시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읽으면서도 하나님의 계획 그리스도의 비밀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해서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작은문제에 몰두해 있고 사람의 낮은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물밑바닥에서 하늘을 보는 것 같아서 자아의 좁은 범위로 제한받는 이해를 갖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속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완전하게 계시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창조와 성경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창세기에서 천지창조의 기사를 읽게되며 계시록에서 새하늘과 새땅을 읽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함축하는 계시다. 성경을 보아야 비로서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게 된다. 4.성령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 󰠆󰠏󰠏󰠏󰠏󰠏󰠏󰠏󰠏󰠏󰠏󰠏󰠏󰠏󰠏󰠏󰠏󰠏󰠏󰠏󰠏󰠏󰠏󰠏󰠏󰠏󰠏󰠏󰠏󰠏󰠏󰠏󰠏󰠏󰠏󰠏󰠏󰠏󰠏󰠏󰠏󰠏󰠏󰠏󰠏󰠏󰠏󰠏󰠏󰠏󰠏󰠏󰠏󰠏󰠏󰠏󰠏󰠈 󰠐 성경이 객관적 계시라면 성령은 계시의 주인이시다. 󰠐 󰠌󰠏󰠏󰠏󰠏󰠏󰠏󰠏󰠏󰠏󰠏󰠏󰠏󰠏󰠏󰠏󰠏󰠏󰠏󰠏󰠏󰠏󰠏󰠏󰠏󰠏󰠏󰠏󰠏󰠏󰠏󰠏󰠏󰠏󰠏󰠏󰠏󰠏󰠏󰠏󰠏󰠏󰠏󰠏󰠏󰠏󰠏󰠏󰠏󰠏󰠏󰠏󰠏󰠏󰠏󰠏󰠏󰠎 우주의 창조는 우리밖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상당히 제한된 지식을 제공한다. 따라서 명확하지 못하며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아주 구체적이다. 하지만 성경이 구체적이라도 여전히 성경은 객관적 계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방법으로 문자화되고 누구나 읽도록 기호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안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기 위해 들어오심으로 실제적이고 주관적이다. 우리가 앞의 두가지 (창조와 성경)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는 성령의 역사에 달려있다. 만일 성령이 내면으로부터 우리에게 빛을 주지 아니하고 영감을 주지 않는다면 비록 우리 마음과 영과 생각이 건전한 상태에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깊으신 사정도 잘알고 있다(고전2:10-13).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안에 성령의 움직이심을 따라 순종하며 성령이 계시하시도록 우리자신을 맡겨야 한다. 5.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 󰠆󰠏󰠏󰠏󰠏󰠏󰠏󰠏󰠏󰠏󰠏󰠏󰠏󰠏󰠏󰠏󰠏󰠏󰠏󰠏󰠏󰠏󰠏󰠏󰠏󰠏󰠏󰠏󰠏󰠏󰠏󰠏󰠏󰠏󰠏󰠏󰠏󰠏󰠏󰠏󰠏󰠏󰠏󰠏󰠏󰠏󰠏󰠏󰠏󰠏󰠏󰠏󰠏󰠏󰠏󰠈 󰠐 몸을 산제사로 드릴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된다. 󰠐 󰠌󰠏󰠏󰠏󰠏󰠏󰠏󰠏󰠏󰠏󰠏󰠏󰠏󰠏󰠏󰠏󰠏󰠏󰠏󰠏󰠏󰠏󰠏󰠏󰠏󰠏󰠏󰠏󰠏󰠏󰠏󰠏󰠏󰠏󰠏󰠏󰠏󰠏󰠏󰠏󰠏󰠏󰠏󰠏󰠏󰠏󰠏󰠏󰠏󰠏󰠏󰠏󰠏󰠏󰠏󰠎 로마서 12장 처음 두구절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가장 분명한 길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에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여기서 우리 몸을 드리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한구절로 결합되어있는데 이는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한 선결조건이다. 우리는 몸안에 살고있기 때문에 전체가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해서는 몸을 드려야 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헌신할 마음은 있지만 자신의 몸을 드리지 않기 때문에 헌신은 쓸모가 없다. 참된 헌신은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으로서 그것을 단순한 갈망이나 말뿐인 복종이 아니라 자신을 전적으로 또한 실제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산제물이 됨은 자신의 활동을 끊고 자신의 입장을 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는 때 그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사람안에 즐겨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게 된다. 결 론 기름부음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영적인 체험은 점차 높은데로 전진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체험에 이르게될 때 영적인 성장에 대한 요구와 자아를 철저히 처리하는 공과를 배우게 된다. 만일 사람이 아직도 자아속에 살며 자아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높고 영원하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조그만 한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크신 한계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믿는 이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자신이 그뜻의 일부가 된 것을 보는 것은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크신 한계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결론 14강의 육신의 처리 1.육신의 정의 2.육신의 세방면 3.육신의 위치 4.육신의 처리 5.처리의 적용 성결론 14강의 육신의 처리 󰠏󰠏󰠏󰠏󰠏󰠏󰠏󰠏󰠏󰠏󰠏󰠏󰠏󰠏󰠏󰠏 암 송 성 구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 롬 8 : 7 - 8 󰠏󰠏󰠏󰠏󰠏󰠏󰠏󰠏 서 론 성경은 아담안에 태어난 모든 사람을 옛사람이라 하며 그리스도안에 태어난 사람(거듭난 사람)을 새사람이라 한다(고후5:17) 모든 사람이 아담안에 죄인으로(옛사람)태어났지만 그리스도안으로 태어남으로 의인이라 불리우게 된다(롬1:17) 아담안에서 그리스도안으로 옮기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정죄가 처리되고 칭의를 받게되며 세상(세속성)을 처리받고 거룩(성결)에 예속되어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따라서 과거 자신의 총명과 양심을 의지하던 단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된다(잠3:5) 이것이 아담안에서 그리스도안으로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위치적 전환을 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앞에서 죄가 처리되고 세상이 처리되고 양심이 처리될 때 죄인의 위치에서 의인의 지위로 칭의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담안에서 그리스도안으로 이사(위치적 전환)하였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안에 들어와 살면서도 옛사람의 성분을 그대로 지닌체 살아간다. 육신이 죄의 율로 남아있고 자아가 하나님의 지배를 거부하며 인간의 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구원의 첫 단계는 아담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이다. 구원의 두번째 단계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단계다. 두번째 단계의 구원이 이루어지려면 육신이 처리되고 자아가 처리되고 우리 영이 처리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온전한 주인이 되신다. 1.육신의 정의 󰠆󰠏󰠏󰠏󰠏󰠏󰠏󰠏󰠏󰠏󰠏󰠏󰠏󰠏󰠏󰠏󰠏󰠏󰠏󰠏󰠏󰠏󰠏󰠏󰠏󰠏󰠏󰠏󰠏󰠏󰠏󰠏󰠏󰠏󰠏󰠏󰠏󰠏󰠏󰠏󰠏󰠏󰠏󰠏󰠏󰠏󰠏󰠏󰠏󰠏󰠏󰠏󰠏󰠏󰠏󰠏󰠏󰠏󰠏󰠈 󰠐 육신이란 아담안에서 생래적으로 타고난 본성을 말한다. 󰠐 󰠌󰠏󰠏󰠏󰠏󰠏󰠏󰠏󰠏󰠏󰠏󰠏󰠏󰠏󰠏󰠏󰠏󰠏󰠏󰠏󰠏󰠏󰠏󰠏󰠏󰠏󰠏󰠏󰠏󰠏󰠏󰠏󰠏󰠏󰠏󰠏󰠏󰠏󰠏󰠏󰠏󰠏󰠏󰠏󰠏󰠏󰠏󰠏󰠏󰠏󰠏󰠏󰠏󰠏󰠏󰠏󰠏󰠏󰠏󰠎 우리는 육신이란 말의 성경적 개념이 불투명하며 육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이라는 3분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최초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을 때 그에겐 몸이 있었다(창2:7) 그러나 인간이 육신이 된 것은 창세기 6장 3절에 와서다 인간이 육신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신은 같이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먼저 성경에 나타난 몇가지 용어의 개념부터 정의하자. 옛사람이란 아담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새사람이란 그리스도안에 살고있는 사람이다. 육신에 속한 자란 위치적으로 그리스도안에 살면서도 옛사람의 본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옛사람이 새사람의 반대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육신에 속한 자란 옛사람의 성분, 즉 옛사람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이 아닌 우리의 타고난 생명(육신)으로 살며 성령안에 살지않고 자신안에 산다. 그러므로 영적이지 않고 육신적이다 성경에서 육신을 말할때 1. 육신은 부패한 몸으로 표현된다. 몸이 육신이 아니라 부패한 몸이 육신이다(롬7:23) 따라서 부패한 몸이 육신으로 나타날때 정욕으로 나타난다. 2. 육신은 부패한 혼으로 나타난다. 혼이 육신이 아니라 부패한 혼이 육신으로 표현되는데 옛사람으로 나타난다(롬6:6) 3. 육신이 죄의 율로 남아서 몸에 적용되면 정욕으로 혼에 적용되면 옛사람으로 영에 적용되면 악으로 나타난다(롬6:6-11) 죄와 육신과 옛사람은 모두 한 통속이요, 타락한 인간의 전 존재와 관련되며 영과 혼과 몸으로 나타날때 다르게 표현된 용어들이다. 2.육신의 세방면 󰠆󰠏󰠏󰠏󰠏󰠏󰠏󰠏󰠏󰠏󰠏󰠏󰠏󰠏󰠏󰠏󰠏󰠏󰠏󰠏󰠏󰠏󰠏󰠏󰠏󰠏󰠏󰠏󰠏󰠏󰠏󰠏󰠏󰠏󰠏󰠏󰠏󰠏󰠏󰠏󰠏󰠏󰠏󰠏󰠏󰠏󰠏󰠏󰠏󰠈 󰠐 사악함으로 , 타고난 선으로, 인간전존재로 󰠐 󰠌󰠏󰠏󰠏󰠏󰠏󰠏󰠏󰠏󰠏󰠏󰠏󰠏󰠏󰠏󰠏󰠏󰠏󰠏󰠏󰠏󰠏󰠏󰠏󰠏󰠏󰠏󰠏󰠏󰠏󰠏󰠏󰠏󰠏󰠏󰠏󰠏󰠏󰠏󰠏󰠏󰠏󰠏󰠏󰠏󰠏󰠏󰠏󰠏󰠎 우리는 육신이 세방면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첫째 : 육신은 온갖 더럽고 사악한 성분들로 나타난다. 정욕,이기심,경멸,탐욕,시기심등 육신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본성들이다. 야곱의 타고난 성분은 출생전에도 표현되어 있다 . 태중에서 형과 다투고 발뒤금치 잡고 나온다. 자랄때 그의 타고난 성분은 영리한 묘안을 꾸며 항상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벧엘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에 흥정한다. 「자기를 돌봐주시면 십일조 드리고 성전 짓겠다」고 야곱이 이처럼 묘안을 꾸미는 것은 타고난 성분이 강했기 때문이다(갈5:19) 타고난 능력은 모두 이기적이고 모든 고안은 모두 자기 위한 것 뿐이다. 따라서 성령의 통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와 무관한 기질이다. 둘째 : 육신의 성격은 사악하고 이기적 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타고난 선과 출생으로 말미암은 장점도 가진다. 선한 육신은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고 갈망하기조차 한다(빌3:3-6) 인간이 타락하였다 하여도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부분이 존재한다(롬7:18,23) 우리에게 비롯된 온유 사랑 섬김등의 선한 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육신이 사람의 선한 면을 나타내어도 우리에게 비롯된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께 유해할 뿐이다. 셋째 : 육신의 사악한 부분이나 선한 부분의 문제보다 바로 인간자체가 육신으로 떨어져 육신에 의해 속박되고 통제받게 되는 것으로 우리 전존재가 육신이 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육신은 사악한 부분, 선한 부분뿐 아니라 우리 존재의 기반으로 놓여져 있다는 것이다. 3.육신의 위치 󰠆󰠏󰠏󰠏󰠏󰠏󰠏󰠏󰠏󰠏󰠏󰠏󰠏󰠏󰠏󰠏󰠏󰠏󰠏󰠏󰠏󰠏󰠏󰠏󰠏󰠏󰠏󰠏󰠏󰠏󰠏󰠏󰠏󰠏󰠏󰠏󰠏󰠏󰠏󰠏󰠏󰠏󰠏󰠏󰠏󰠏󰠏󰠏󰠏󰠏󰠏󰠏󰠏󰠏󰠏󰠏󰠏󰠏󰠏󰠏󰠏󰠏󰠏󰠏󰠏󰠏󰠏󰠏󰠏󰠏󰠏󰠏󰠏󰠈 󰠐 육신은 하나님과 원수요, 하나님과 육신은 공존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 󰠌󰠏󰠏󰠏󰠏󰠏󰠏󰠏󰠏󰠏󰠏󰠏󰠏󰠏󰠏󰠏󰠏󰠏󰠏󰠏󰠏󰠏󰠏󰠏󰠏󰠏󰠏󰠏󰠏󰠏󰠏󰠏󰠏󰠏󰠏󰠏󰠏󰠏󰠏󰠏󰠏󰠏󰠏󰠏󰠏󰠏󰠏󰠏󰠏󰠏󰠏󰠏󰠏󰠏󰠏󰠏󰠏󰠏󰠏󰠏󰠏󰠏󰠏󰠏󰠏󰠏󰠏󰠏󰠏󰠏󰠏󰠏󰠏󰠎 육신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하나님앞에서 육신의 위치가 어디인가 살펴보자 노아당시 인간이 육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3)」하셨다. 하나님은 육신과 공존하실 수 없다. 영원히 육신과는 함께 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의 제사법에도 「 사람의 몸에 그것(거룩한 관유)를 붓지말라 (출30:31-32) 거룩한 관유는 하나님의 성령을 예표한다. 거룩한 관유을 못붓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육신과 혼합하시거나 연합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육신과는 원수가 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 기억됨이 없게하라..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느니라(출17:14-16)」 왜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는가 왜 동정의 여지없이 진멸하시는가? 성경에 아말렉은 육신을 예표한다(롬9:10 창36:12) 1.창세기 17장 육신의 제거를 위해 정하신 것이 곧 할례다 아브라함이 육신의 힘을 이용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할례를 통해 아브라함의 육신을 제거하신 후 약속의 자손 이삭을 주셨다(창17:24) 2.출애굽기 4장 모세의 두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후 모세의 사명을 수행케 하신다 3.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민족적 할례를 집행한다(수5:2) 이스라엘은 유월절에 그들의 죄를 처리받고 홍해를 건너며 세상 처리하고 요단에서 옛창조에 속한 이스라엘의 육신을 처리한다(골2:11)」 할례의 영적 의미는 육신을 벗는 것이다 육신의 위치는 어디 있어야 하는가? 십자가위다(갈5:24) 하나님앞에서 육신의 최종결과는 죽음이다. 육신이 죽음에 넘겨질 때 하나님께서 사람안에 처소를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4.육신의 처리 󰠆󰠏󰠏󰠏󰠏󰠏󰠏󰠏󰠏󰠏󰠏󰠏󰠏󰠏󰠏󰠏󰠏󰠏󰠏󰠏󰠏󰠏󰠏󰠏󰠏󰠏󰠏󰠏󰠏󰠏󰠏󰠏󰠏󰠏󰠏󰠏󰠏󰠏󰠏󰠏󰠏󰠏󰠏󰠏󰠏󰠏󰠏󰠏󰠏󰠏󰠏󰠏󰠏󰠏󰠏󰠏󰠏󰠏󰠏󰠏󰠏󰠏󰠏󰠏󰠏󰠏󰠏󰠏󰠏󰠏󰠏󰠏󰠏󰠏󰠈 󰠐 옛사람의 처리는 객관적인 죽음이요, 육신의 처리는 주관적인 죽음이다. 󰠐 󰠌󰠏󰠏󰠏󰠏󰠏󰠏󰠏󰠏󰠏󰠏󰠏󰠏󰠏󰠏󰠏󰠏󰠏󰠏󰠏󰠏󰠏󰠏󰠏󰠏󰠏󰠏󰠏󰠏󰠏󰠏󰠏󰠏󰠏󰠏󰠏󰠏󰠏󰠏󰠏󰠏󰠏󰠏󰠏󰠏󰠏󰠏󰠏󰠏󰠏󰠏󰠏󰠏󰠏󰠏󰠏󰠏󰠏󰠏󰠏󰠏󰠏󰠏󰠏󰠏󰠏󰠏󰠏󰠏󰠏󰠏󰠏󰠏󰠏󰠎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죽음을 말하고 로마서 8장의 죽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행된 죽음을 말한다. 6장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보이시는 말씀이고 8장은 영으로서 우리 행실을 죽여야 함을 말한다. 6장은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8장은 우리를 죽음에 넘겨야함을 말한다 두장의 죽음이 서로 다르다 6장의 죽음은 그리스도가 이미 성취하신 죽음인반면 8장의 죽음은 성령안에서 수행해야할 죽음이다. 6장은 함께 죽는 사실을 말하고 8장에서는 함께 죽는 체험을 말한다. 6장에선 옛사람의 죽음을 말하고 8장에서는 육신의 죽음을 말한다. 6장에선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고 8장에선 성령의 교제를 요구한다. 우리는 죽음의 두 방면이 필요하다. 우리는 죽음의 문제가 오래전에 해결되었으므로 이사실만 믿고 진리를 받아드리기만 하면 시간을 드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육신의 처리는 우리가 책임져야할 부분이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은 일은 하나님의 책임이다(롬6:6) 그러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은 우리의 책임이다(갈5:24) 로마서 6장은 하나님의 주도적 행사고 갈5:24은 우리가 주도해야 할 책임이다. 삼상15장 아말렉의 진멸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러나 그를 진멸할 능력을 받은 사무엘이 진멸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육신을 처리하시지는 않는다. 육신을 처리할 능력(성령)을 주시면 육신을 십자가에 넘기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그리스도가 성취하셨다. 육신을 십자가에 넘기는 것은 성령의 능력안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갈5:24 롬8:13 골3:5) 5.처리의 적용 󰠆󰠏󰠏󰠏󰠏󰠏󰠏󰠏󰠏󰠏󰠏󰠏󰠏󰠏󰠏󰠏󰠏󰠏󰠏󰠏󰠏󰠏󰠏󰠏󰠏󰠏󰠏󰠏󰠏󰠏󰠏󰠏󰠏󰠏󰠏󰠏󰠏󰠏󰠏󰠏󰠏󰠏󰠏󰠏󰠏󰠏󰠏󰠏󰠏󰠏󰠏󰠏󰠏󰠏󰠏󰠏󰠈 󰠐 성령의 교통안에서 , 십자가에서, 성령의 능력안에서 󰠐 󰠌󰠏󰠏󰠏󰠏󰠏󰠏󰠏󰠏󰠏󰠏󰠏󰠏󰠏󰠏󰠏󰠏󰠏󰠏󰠏󰠏󰠏󰠏󰠏󰠏󰠏󰠏󰠏󰠏󰠏󰠏󰠏󰠏󰠏󰠏󰠏󰠏󰠏󰠏󰠏󰠏󰠏󰠏󰠏󰠏󰠏󰠏󰠏󰠏󰠏󰠏󰠏󰠏󰠏󰠏󰠏󰠎 위의 과정을 통과한 후 육신처리의 적용이 시작된다. 첫째 : 성령의 교통안에서 살아야 한다. 교통안에서 주님의 생명을 접촉한다. 성령이 우리안에서 움직일수록 주님의 능력이 우리안에 죽이는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둘째 : 처음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안에 죽음을 수행하시도록 할 때 몇 몇 행동에 제한되거나 이따금씩 이루어진다. 그러나 체험이 깊어질수록 죽음의 모든 행동이 수행된다. 그리하여 타고난 성분이 죽어가고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난다. 육신은 십자가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만나면 곧 죽기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옛창조와 새창조의 분계선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전혀 통과한 일 없다면 옛창조에서 새창조를 육신에서 성령을 타고난 생명에서 부활생명을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새창조와 옛창조가 분리된다. 셋째 : 우리가 온갖 행동에 육신처리를 적용하면 우리는 점진적으로 생명과 그영의 법을 따라 행한다. 로마서 8장은 육신의 이기는 길이 성령의 순종하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전적으로 생명과 그영의 법을 순종할 때 우리 생각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게된다. 언제든지 몸의 행실을 죽이고 육신에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결 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하시었다. 아담안에 사는 이는 옛사람이요, 그리스도안에 사는 이는 새사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살면서도 옛사람의 본성으로 사는 이는 육신에 거하는 이요, 그리스도안에 살면서 새사람의 생명으로 사는 이는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이다. 성결론 15강의 자아의 죽음 1.자아의 정의 2.사탄과 의견 3.옛사람과 관계 4.자아 처리 과정 5.자아의 죽음 성결론 15강의 자아의 죽음 󰠏󰠏󰠏󰠏󰠏󰠏󰠏󰠏󰠏󰠏󰠏󰠏󰠏󰠏 암 송 성 구 󰠏󰠏󰠏󰠏󰠏󰠏󰠏󰠏󰠏󰠏󰠏󰠏󰠏󰠏󰠏󰠏󰠏󰠏󰠏󰠏󰠏󰠏󰠏󰠏󰠏󰠏󰠏󰠏󰠏󰠏󰠏󰠏󰠏󰠏󰠏󰠏󰠏󰠏󰠏󰠏󰠏󰠏󰠏󰠏󰠏󰠏󰠏󰠏󰠏󰠏󰠏󰠏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마 16 : 23 - 25 󰠏󰠏󰠏 서 론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이 우리안에 내주하셔야 한다(고전3:16) 그리스도가 내안에 들어오시면 나의 육신, 나의 자아가 점진적으로 기세를 잃고 성령이 점유하실 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지난 시간 육신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옛사람의 본성이 살아서 인간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면 이를 육신이라 한다. 따라서 옛사람의 본성이 살아서 인간의 의견으로 나타나면 이를 자아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능력이 처리되어야 할 뿐 아니라 옛사람의 의견이 처리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옛사람의 본성이 살아서 의견으로 나타나는 자아에 대하여 공부하려 한다. 1.자아의 정의 󰠆󰠏󰠏󰠏󰠏󰠏󰠏󰠏󰠏󰠏󰠏󰠏󰠏󰠏󰠏󰠏󰠏󰠏󰠏󰠏󰠏󰠏󰠏󰠏󰠏󰠏󰠏󰠏󰠏󰠏󰠏󰠏󰠏󰠏󰠏󰠏󰠏󰠏󰠏󰠏󰠏󰠏󰠏󰠏󰠏󰠏󰠏󰠏󰠏󰠏󰠏󰠏󰠏󰠏󰠏󰠏󰠏󰠏󰠏󰠏󰠏󰠏󰠏󰠏󰠏󰠈 󰠐 자아란 인간의 생각과 의견에 강조점을 둔 혼적인 생명이다. 󰠐 󰠌󰠏󰠏󰠏󰠏󰠏󰠏󰠏󰠏󰠏󰠏󰠏󰠏󰠏󰠏󰠏󰠏󰠏󰠏󰠏󰠏󰠏󰠏󰠏󰠏󰠏󰠏󰠏󰠏󰠏󰠏󰠏󰠏󰠏󰠏󰠏󰠏󰠏󰠏󰠏󰠏󰠏󰠏󰠏󰠏󰠏󰠏󰠏󰠏󰠏󰠏󰠏󰠏󰠏󰠏󰠏󰠏󰠏󰠏󰠏󰠏󰠏󰠏󰠏󰠏󰠎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인간에겐 영과 혼과 몸이라는 세가지 기관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라한 이후 각기관은 비정상적인 운동을 진행해 왔다. 죄의 성분을 담은 몸은 육신으로, 죄의 성분을 담은 혼은 자아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아란 인간의 생각과 의견에 강조점을 둔 혼적인 생명」을 말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자아가 무엇인지 언급한 곳을 찾아볼 수 있다. 마16:21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만에 부활해야 함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는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4-25)」 여기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영원가운데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다(21) 「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는 말은 베드로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23절에서 주님은 베드로가「하나님의 뜻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꾸짖으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뜻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지만 사람의 일은 자기를 동정하고 십자가를 받아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다. 여기 주님이 베드로에게 부인하라 하신 자아는 곧 그의 인간적인 생각과 의견임을 알 수 있다. 즉 자아란 인간적인 생각과 의견에 관련되어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생각이 자아는 아니며 자아가 곧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25절에 가면 좀 더 구체적으로 자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하신다 목숨이란 말은 곧 혼의 생명을 가르친다. 앞구절에 자기를 부인하란 말은 혼의 생명(목숨)을 잃어버리라는 말로 이어진다.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혼의 생명이 죽음에 넘기워지는 것으로 더 이상 하나님앞에서 자기의 주의 주장 자기 의견이 있어서는 안된단 말이다 그러므로 본질상 자아는 혼의 생명이며 자아의 표현은 생각과 의견이다. 2.사탄과 의견 󰠆󰠏󰠏󰠏󰠏󰠏󰠏󰠏󰠏󰠏󰠏󰠏󰠏󰠏󰠏󰠏󰠏󰠏󰠏󰠏󰠏󰠏󰠏󰠏󰠏󰠏󰠏󰠏󰠏󰠏󰠏󰠏󰠏󰠏󰠏󰠏󰠏󰠏󰠏󰠏󰠏󰠏󰠏󰠏󰠏󰠏󰠏󰠏󰠏󰠏󰠏󰠏󰠏󰠏󰠏󰠏󰠏󰠏󰠏󰠏󰠏󰠏󰠏󰠏󰠏󰠏󰠏󰠏󰠏󰠏󰠏󰠏󰠏󰠏󰠏󰠏󰠏󰠏󰠏󰠈 󰠐 육신안에 사탄이 자리잡고 있듯이 자아와 의견속에 사탄이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 있다 󰠐 󰠌󰠏󰠏󰠏󰠏󰠏󰠏󰠏󰠏󰠏󰠏󰠏󰠏󰠏󰠏󰠏󰠏󰠏󰠏󰠏󰠏󰠏󰠏󰠏󰠏󰠏󰠏󰠏󰠏󰠏󰠏󰠏󰠏󰠏󰠏󰠏󰠏󰠏󰠏󰠏󰠏󰠏󰠏󰠏󰠏󰠏󰠏󰠏󰠏󰠏󰠏󰠏󰠏󰠏󰠏󰠏󰠏󰠏󰠏󰠏󰠏󰠏󰠏󰠏󰠏󰠏󰠏󰠏󰠏󰠏󰠏󰠏󰠏󰠏󰠏󰠏󰠏󰠏󰠏󰠎 우리는 인간적인 의견이 옛사람의 표현중의 하나임을 안다 그러나 자아를 처리하는 체험에 있어서 우리는 그이상의 문제인 자아와 사탄의 관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인간의 몸속에 사탄의 성분인 죄가 확고히 자리잡고 있어서 육신이 되었듯이(롬7:18,23) 사탄이 인간의 혼 속에 즉 자아와 의견속에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어렵다 사탄은 우리 몸안에 죄일 뿐 아니라 인간의 자아속에 숨어서 생각으로, 의견으로 역사한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의견이 타인의 의견보다 나으며 자신의 의견이 하나님의 의견보다 더 좋다고 생각한다(욥38:2) 우리중에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미워하는 이는 없다 우리 모두 자기의견을 내세우며 칭찬받을 만한 선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는 죄가 사단에게 속한 것 뿐 아니라 인간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의견조차 사탄에 속하 것임을 시사해준다 우리 혼안에 있는 의견은 몸안에 있는 죄와 마찬가지로 사탄의 체현이다 사탄은 우리 몸의 지체의 정욕을 자극하며 한편으로는 생각안에서 의견으로 일어난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할 때 언제나 혼안에 생각을 품게하고 몸으로 죄짓게 한다 주님은 베드로의 의견뒤에 있는 사탄을 분별하신다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베드로의 의견은 주님을 동정하는 선한 동기에서 나온 뛰어난 것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치된다 우리는 보통 나쁜 의견만이 사탄에게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만 주님보시기엔 좋던 나쁘던 그것이 자아로 부터 출발된 것이라면 사탄에 속한 것에 불과하다 최상의 의견이라도 그 출처가 자기로부터라면 사탄의 체현에 불과하다 오늘날 모든 인류가 그들안에 사탄의 영의 역사에 따르고 있다(엡2:2-3) 사람들은 육체의 욕심으로 가득하며 한편으로 생각의 욕망으로 가득하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 부딪힐때 자기 안에 표명하고픈 의견을 표현안하면 좀이 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의견을 정죄 하는 자는 극소수다 모두 자기 의견을 높이 평가하고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 말씀보다는 자기 의견을 명상하며 만족해한다 대적을 대항하려면 죄를 대항해야 하지만 한층 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견을 부인해야 한다 3.옛사람과의 관계 󰠆󰠏󰠏󰠏󰠏󰠏󰠏󰠏󰠏󰠏󰠏󰠏󰠏󰠏󰠏󰠏󰠏󰠏󰠏󰠏󰠏󰠏󰠏󰠏󰠏󰠏󰠏󰠏󰠏󰠏󰠏󰠏󰠏󰠏󰠏󰠏󰠏󰠏󰠏󰠏󰠏󰠏󰠏󰠏󰠏󰠏󰠏󰠏󰠏󰠏󰠏󰠏󰠏󰠏󰠏󰠏󰠏󰠏󰠏󰠏󰠏󰠏󰠏󰠏󰠏󰠏󰠏󰠏󰠏󰠏󰠏󰠏󰠏󰠈 󰠐 육신은 옛사람의 능력과 성분이요, 자아는 옛사람의 생각과의 의견이다 󰠐 󰠌󰠏󰠏󰠏󰠏󰠏󰠏󰠏󰠏󰠏󰠏󰠏󰠏󰠏󰠏󰠏󰠏󰠏󰠏󰠏󰠏󰠏󰠏󰠏󰠏󰠏󰠏󰠏󰠏󰠏󰠏󰠏󰠏󰠏󰠏󰠏󰠏󰠏󰠏󰠏󰠏󰠏󰠏󰠏󰠏󰠏󰠏󰠏󰠏󰠏󰠏󰠏󰠏󰠏󰠏󰠏󰠏󰠏󰠏󰠏󰠏󰠏󰠏󰠏󰠏󰠏󰠏󰠏󰠏󰠏󰠏󰠏󰠏󰠎 옛사람은 옛창조의 타락한 아담안에 태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옛사람의 본성이 살아서 타고난 능력과 성분으로 몸으로 표현될 때 육신으로 나타나듯이 옛사람의 본성이 살아서 인간적인 생각과 의견으로 혼 안에 표현될 때 자아로 나타난다 󰠞󰠧󰠧󰠧󰠧󰠧󰠧󰠧󰠧󰠧󰠧󰠧󰠧󰠧󰠧󰠧󰠧󰠧󰠧󰠧󰠧󰠧󰠧󰠧󰠧󰠧󰠧󰠧󰠧󰠧󰠧󰠧󰠧󰠧󰠧󰠧󰠧󰠧󰠧󰠧󰠧󰠧󰠧󰠧󰠧󰠧󰠧󰠧󰠧󰠧󰠧󰠧󰠧󰠧󰠧󰠧󰠧󰠧󰠧󰠧󰠧󰠧󰠧󰠧󰠧󰠠 󰠨 옛 사람 󰠆󰠏󰠏 타고난 능력과 성분 - 육신으로 󰠨 󰠨 󰠐 󰠨 󰠨 󰠌󰠏󰠏󰠏타고난 생각과 의견 - 자아로 󰠨 󰠤󰠧󰠧󰠧󰠧󰠧󰠧󰠧󰠧󰠧󰠧󰠧󰠧󰠧󰠧󰠧󰠧󰠧󰠧󰠧󰠧󰠧󰠧󰠧󰠧󰠧󰠧󰠧󰠧󰠧󰠧󰠧󰠧󰠧󰠧󰠧󰠧󰠧󰠧󰠧󰠧󰠧󰠧󰠧󰠧󰠧󰠧󰠧󰠧󰠧󰠧󰠧󰠧󰠧󰠧󰠧󰠧󰠧󰠧󰠧󰠧󰠧󰠧󰠧󰠧󰠦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아담에게서 끝내시려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이루신 사실이다 우리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처리된 것을 인식하고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된다(갈2:20) 그러나 육신과 자아는 부활의 영이 되신 그리스도가(고전15:45) 우리안에 오셔서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육신과 자아를 드러낼때마다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다 육신의 처리를 성령께서 주도하시듯 자아의 처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넘기게 된다 우리 힘으론 안되지만 성령은 자아를 십자가에 능히 넘기실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기만 하면된다 성경에는 두개의 십자가가 있다 하나는 2000년전 옛사람의 처리를 위해 하나님이 주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하나는 오늘 현재 성령이 주도하셔서 내가 순종함으로 져야할 십자가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16 :24) 하셨다 4.자아 처리 과정 󰠆󰠏󰠏󰠏󰠏󰠏󰠏󰠏󰠏󰠏󰠏󰠏󰠏󰠏󰠏󰠏󰠏󰠏󰠏󰠏󰠏󰠏󰠏󰠏󰠏󰠏󰠏󰠏󰠏󰠏󰠏󰠏󰠏󰠏󰠏󰠏󰠏󰠏󰠏󰠏󰠏󰠏󰠏󰠏󰠏󰠏󰠏󰠏󰠏󰠏󰠏󰠏󰠏󰠏󰠏󰠏󰠏󰠏󰠏󰠏󰠏󰠏󰠏󰠏󰠏󰠏󰠏󰠏󰠏󰠈 󰠐 옛사람은 믿음으로 처리되고 자아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리된다 󰠐 󰠌󰠏󰠏󰠏󰠏󰠏󰠏󰠏󰠏󰠏󰠏󰠏󰠏󰠏󰠏󰠏󰠏󰠏󰠏󰠏󰠏󰠏󰠏󰠏󰠏󰠏󰠏󰠏󰠏󰠏󰠏󰠏󰠏󰠏󰠏󰠏󰠏󰠏󰠏󰠏󰠏󰠏󰠏󰠏󰠏󰠏󰠏󰠏󰠏󰠏󰠏󰠏󰠏󰠏󰠏󰠏󰠏󰠏󰠏󰠏󰠏󰠏󰠏󰠏󰠏󰠏󰠏󰠏󰠏󰠎 그러면 자아처리는 어떤 단계로 그과정을 체험하게 되는가? 1.첫째 우리 옛사람을 처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이미 2000년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옛사람을 처리하셨다(롬6:6) 우리는 이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기만 하면 된다 2.따라서 우리가 이사실을 깨닫고 받아드리면 「저와 함께」 못박히게 된다(갈2:20) 3.이와같은 사실을 성경에 의지하여 계속 체험적으로 타고난 성분을 처리하면 육신이 처리되고 자아가 처리가 된다 이일은 성령이 주도적으로 하시고 우리가 순종함으로 순간 순간 이루어진다 성경은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계시하고 계시다 우리 자아나 육신이 이미 못박혔다고는 계시하지 않았다 우리 자아나 육신은 필경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넘겨져야 할 운명에 놓여있다 옛사람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해결되었음으로 옛사람에 속한 육신이나 자아도 이미 뿌리가 잘린 상태다 객관적 측면에서 유일한 사실은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옛사람의 처리지만 우리 체험에선 육신으로 자아로 다양하게 구체적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옛사람의 처리는 이미 이루어놓은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이고 육신과 자아는 일상생활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죽음(십자가)에 넘기는 것이다. 5.자아의 죽음 󰠆󰠏󰠏󰠏󰠏󰠏󰠏󰠏󰠏󰠏󰠏󰠏󰠏󰠏󰠏󰠏󰠏󰠏󰠏󰠏󰠏󰠏󰠏󰠏󰠏󰠏󰠏󰠏󰠏󰠏󰠏󰠏󰠏󰠏󰠏󰠏󰠏󰠏󰠏󰠏󰠏󰠏󰠏󰠏󰠏󰠏󰠏󰠏󰠏󰠏󰠏󰠏󰠏󰠏󰠏󰠏󰠏󰠏󰠏󰠏󰠈 󰠐 자아가 파괴되어야 주님이 우리안에 주인이 되실 수 있다 󰠐 󰠌󰠏󰠏󰠏󰠏󰠏󰠏󰠏󰠏󰠏󰠏󰠏󰠏󰠏󰠏󰠏󰠏󰠏󰠏󰠏󰠏󰠏󰠏󰠏󰠏󰠏󰠏󰠏󰠏󰠏󰠏󰠏󰠏󰠏󰠏󰠏󰠏󰠏󰠏󰠏󰠏󰠏󰠏󰠏󰠏󰠏󰠏󰠏󰠏󰠏󰠏󰠏󰠏󰠏󰠏󰠏󰠏󰠏󰠏󰠏󰠎 자아가 무엇인지 알아야 영과 혼의 기능적 차이를 알 수 있게된다. 영과 혼의 분리를 알지 못하고 어찌 영적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겠는가? 우리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줄 알고 우리 의견이 자아의 표현임을 알아도 우리가 성령과의 교제안에 있지 않으면 공허한 교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성령과 교제가 없다면 불교도나 힌두교나 도덕가들의 노력과 다를 바 없다. 자아의 처리는 성령께 의지하여 성령께서 처리하시도록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다. 욥 3-37장 까지는 인간적인 말과 의견으로 가득 차있다. 기나긴 논쟁 후, 하나님께서 꾸짖기를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하셨다. 처음의 욥은 무지한 말로 자기 의견을 표명했으나 마지막에 가서 그의 자아를 혐오하고 띠끌가운데 앉아 회개했다. 여기서 볼때 욥의 의견은 자신이 혐오하는 자아임을 알 수 있다. 성경가운데 가장 자아가 강한자, 말이 많은자는 욥이다. 욥은 자기 자신의 의견과 관념을 가지고서 타인의 관점에 굴복하지 않았다. 욥은 자신이 그릇행하지 않았으며 죄와 세상과 양심에 처리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욥은 자기 가슴을 치며 의로우신 분과 따지고자 했다. 진정 욥에게 있어서 어려움은 그의 죄나 세속성이나 양심의 문제는 아니고 자신의 자아였다. 마지막까지 부서지지 않는 자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사실 교회안에서 죄짓는 자나 세상적인 사람들은 할말이 없다. 이는 자신의 실수와 결점을 알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은 양심의 가책때문에 머리도 들지 못한다. 그들은 할 말이 많지 않으며 쉽게 도움도 받는다. 그러나 욥처럼 죄도 세상에도 관여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의를 내세워 항상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회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 까지 많은 의견과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온종일 이것 저것에 대해 비판하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것까지 간섭한다. 이런 이들은 도움받기도 어렵고 도울 수도 없게 만든다. 자아로 충만되어 있는 사람은 항상 교회안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 온다. 루터는 「 로마에 있는 교황보다 더 큰 교황이 자아다 」 했다. 욥이 자아로 가득찬 사람이라면 베드로도 자아로 가득찬 이다. 주님은 우리의 자아를 죽음에 넘겨야 우리의 주인이 되실 수 있다. 결 론 아담안의 옛사람이 그리스도 안의 새사람이 되려면 죄와 세상과 양심이 처리되고 용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셔서 주인이 되려면 육신과 자아와 우리 영이 처리되어야 한다. 자아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긴요한 부분의 하나이며 성령이 주인되시는 마지막 전투다.
성결론(5) 16-19강의
성결론(5) 16-19강의 성결론 16강의 성 령 의 충 만 1.신구약시대 성령 2.성령체험의 양면 3.머리와 몸과 지체 4.생명으로서 성령 5.능력으로서 성령 성결론 16 강의 성령의 충만 󰠏󰠏󰠏󰠏󰠏󰠏󰠏󰠏󰠏󰠏󰠏󰠏󰠏󰠏󰠏󰠏󰠏󰠏󰠏󰠏󰠏󰠏 암 송 성 구 󰠏󰠏󰠏󰠏󰠏󰠏󰠏󰠏󰠏󰠏󰠏󰠏󰠏󰠏󰠏󰠏󰠏󰠏󰠏󰠏󰠏󰠏󰠏󰠏󰠏󰠏󰠏󰠏󰠏󰠏󰠏󰠏󰠏󰠏󰠏󰠏󰠏󰠏󰠏󰠏󰠏󰠏󰠏󰠏 사도들과 같이 보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행 1 : 4 - 5 󰠏󰠏󰠏󰠏󰠏󰠏󰠏󰠏󰠏 서 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려면 육신이 처리되고 자아가 처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성령으로 충만되어야 한다. 성령충만한 삶은 하나님의 요구요, 또한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열망이기도 하다. 성령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몸은 죄로 인하여 육신으로 충만하며, 혼은 자기의견으로 인하여 자아로 충만되어 있다. 그들의 영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혼돈상태에 놓여있어 자기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활의 영이 되신 그리스도의 영(고전15:45)이 사람의 영안에 들어와 연합하게 될 때 (롬8:9) 사람의 영은 소생(부활)되고 새 능력을 가지게 되며 영에의해 살 수 있는 새사람이 된다(롬8:10) 그리하여 성령은 사람의 영과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롬8:14),사람의 영과 운명을 같이 하는 분이 되신다(롬8:26-27) 그러므로 성령과 사람의 영이 연합됨으로 사람은 영생을 획득하게 되며 성령충만한 삶으로 변화를 받게된다. 1.신,구약시대의 성령 󰠆󰠏󰠏󰠏󰠏󰠏󰠏󰠏󰠏󰠏󰠏󰠏󰠏󰠏󰠏󰠏󰠏󰠏󰠏󰠏󰠏󰠏󰠏󰠏󰠏󰠏󰠏󰠏󰠏󰠏󰠏󰠏󰠏󰠏󰠏󰠏󰠏󰠏󰠏󰠏󰠏󰠏󰠏󰠏󰠏󰠏󰠏󰠏󰠏󰠏󰠏󰠏󰠏󰠏󰠏󰠏󰠏󰠏󰠏󰠏󰠏󰠏󰠏󰠏󰠏󰠏󰠏󰠏󰠏󰠏󰠈 󰠐 구약시대는 사역의 능력을 부으셨고, 신약시대는 중생의 영이 되셨다. 󰠐 󰠌󰠏󰠏󰠏󰠏󰠏󰠏󰠏󰠏󰠏󰠏󰠏󰠏󰠏󰠏󰠏󰠏󰠏󰠏󰠏󰠏󰠏󰠏󰠏󰠏󰠏󰠏󰠏󰠏󰠏󰠏󰠏󰠏󰠏󰠏󰠏󰠏󰠏󰠏󰠏󰠏󰠏󰠏󰠏󰠏󰠏󰠏󰠏󰠏󰠏󰠏󰠏󰠏󰠏󰠏󰠏󰠏󰠏󰠏󰠏󰠏󰠏󰠏󰠏󰠏󰠏󰠏󰠏󰠏󰠏󰠎 구약시대는 흔히 「하나님의 영(주의 영)이 에게 임하셨으니」하고 기록하였다. 구약시대에도 성령은 역사하시었다(창1:2) 그러나 구약시대 하나님의 신(성령)은 특수한 사명자들을 감동시키시고 사역의 능력을 주시어 역사하시기는 했지만 성령이 사람안에 들어와 중생시키거나 내주하시거나 사람의 영과 연합하지는 아니하셨다(창6:3)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속죄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 성령은 믿는 이들 안에 들어와서 거듭나게 하시고 사람과 연합하실 뿐 아니라 영원히 사람안에 내주하시게 되었다(히8:10-12) 구약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의 능력과 지혜를 받아 하나님의 사역에 기능을 발휘하기는 하였으나 사람속에 들어와 내주하시는 부활의 영 생명의 영이 되시지는 않는다 오직 구약시대 성령은 능력을 부여하였을 뿐 거룩한 하나님의 본성(신성)을 사람의 생명안에 분배하시지는 않으셨다 삼손이란 인물을 보자(사14: - 16: ) 삼손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은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생명안에 하나님의 본성(중생의 영)은 조금도 가지지 못했다 삼손이 능력은 충만했지만 생명으로서의 성령이 충만하지는 않았다 사울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삼10:10,15:1)임금이 되기는 했지만 중생의 경험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우리 영이 거듭나고(요3:6)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시며(롬8:9)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요일1:2, 5:13) 2.성령체험의 양면 󰠆󰠏󰠏󰠏󰠏󰠏󰠏󰠏󰠏󰠏󰠏󰠏󰠏󰠏󰠏󰠏󰠏󰠏󰠏󰠏󰠏󰠏󰠏󰠏󰠏󰠏󰠏󰠏󰠏󰠏󰠏󰠏󰠏󰠏󰠏󰠏󰠏󰠏󰠏󰠏󰠏󰠏󰠏󰠏󰠏󰠏󰠏󰠏󰠏󰠏󰠏󰠈 󰠐 내적인 생명의 체험과 외적인 능력의 체험이 있다 󰠐 󰠌󰠏󰠏󰠏󰠏󰠏󰠏󰠏󰠏󰠏󰠏󰠏󰠏󰠏󰠏󰠏󰠏󰠏󰠏󰠏󰠏󰠏󰠏󰠏󰠏󰠏󰠏󰠏󰠏󰠏󰠏󰠏󰠏󰠏󰠏󰠏󰠏󰠏󰠏󰠏󰠏󰠏󰠏󰠏󰠏󰠏󰠏󰠏󰠏󰠏󰠏󰠎 구약시대의 성령의 사역이 외적능력일 뿐이며 단면적이라면, 신약시대의 성령의 사역은 우리의 능력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의 본질이 되시는 양면적 역사를 완성하신다 구약시대는 선지자나 제사장 왕들에게 기름을 부어 사역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였다 그들은 선지자로서의 기능-예언이나 병고치는 일, 왕으로서의 기능-다스리고 지배하는 일, 제상장으로서의 기능-제사를 집례하고 하나님앞에 백성을 대신하는 일 등 그 은사적 기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은사적 기능뿐 아니라 내적인 생명으로도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새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는 내적인 체험이 먼저 오고 외적인 능력이 온다. 거듭남은 내적인 생명의 체험이고 각가지 은사들은 외적인 능력의 체험이다(고전12:4-11)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실 뿐 아니라 각가지 은사와 능력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뿐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분쇄하신다 3.머리와 몸과 지체 󰠆󰠏󰠏󰠏󰠏󰠏󰠏󰠏󰠏󰠏󰠏󰠏󰠏󰠏󰠏󰠏󰠏󰠏󰠏󰠏󰠏󰠏󰠏󰠏󰠏󰠏󰠏󰠏󰠏󰠏󰠏󰠏󰠏󰠏󰠏󰠏󰠏󰠏󰠏󰠏󰠏󰠏󰠏󰠏󰠏󰠏󰠏󰠏󰠏󰠏󰠏󰠏󰠏󰠏󰠏󰠏󰠏󰠏󰠏󰠏󰠏󰠏󰠈 󰠐 머리는 그리스도요 몸은 교회요 지체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 󰠌󰠏󰠏󰠏󰠏󰠏󰠏󰠏󰠏󰠏󰠏󰠏󰠏󰠏󰠏󰠏󰠏󰠏󰠏󰠏󰠏󰠏󰠏󰠏󰠏󰠏󰠏󰠏󰠏󰠏󰠏󰠏󰠏󰠏󰠏󰠏󰠏󰠏󰠏󰠏󰠏󰠏󰠏󰠏󰠏󰠏󰠏󰠏󰠏󰠏󰠏󰠏󰠏󰠏󰠏󰠏󰠏󰠏󰠏󰠏󰠏󰠏󰠎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으니 곧 영생이로다 」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머리로부터 지체에 이르기까지 충만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신약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첫번째 체험한 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 영안에 성령이 내주하시고 연합하시고 그의 본성이 되셨다 그가 세례받음으로 성령의 외적능력을 체험하셨고(마3:16) 그가 속생명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게 되셨다(눅4:18)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된 최초의 사람이셨다(엡4:15) 뒤이어 사도들이 성령을 속생명으로 누리게 되고 체험하였다(요14:16-20 요20:22) 이로써 주님은 성령을 제자들속에 부어 생명이 되게 하셨고 사도들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터를 삼으셨다(엡2:20) 그리고 오순절을 중심으로 성령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산되어 모든 지체들에게 임하셨다(행2:1-4, 10:44, 고전12:27). 머리와 몸과 지체는 분리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생명의 유기체요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에 흐르고 옷깃까지 내리어 생명으로 흐른다 머리의 체험은 지체의 체험이다 이것이 생명의 유기체인 교회다 4.생명으로서 성령 󰠆󰠏󰠏󰠏󰠏󰠏󰠏󰠏󰠏󰠏󰠏󰠏󰠏󰠏󰠏󰠏󰠏󰠏󰠏󰠏󰠏󰠏󰠏󰠏󰠏󰠏󰠏󰠏󰠏󰠏󰠏󰠏󰠏󰠏󰠏󰠏󰠏󰠏󰠏󰠏󰠏󰠏󰠏󰠏󰠏󰠏󰠏󰠏󰠏󰠏󰠏󰠏󰠏󰠏󰠏󰠏󰠏󰠏󰠏󰠏󰠏󰠏󰠏󰠏󰠏󰠏󰠏󰠏󰠏󰠏󰠏󰠏󰠏󰠏󰠏󰠏󰠏󰠏󰠏󰠈 󰠐 창조시 불어넣으신 생명은 인간수준의 생명이요, 부활하신 후 불어넣으신 생명은󰠐 󰠐 하나님의 생명이다. 󰠐 󰠌󰠏󰠏󰠏󰠏󰠏󰠏󰠏󰠏󰠏󰠏󰠏󰠏󰠏󰠏󰠏󰠏󰠏󰠏󰠏󰠏󰠏󰠏󰠏󰠏󰠏󰠏󰠏󰠏󰠏󰠏󰠏󰠏󰠏󰠏󰠏󰠏󰠏󰠏󰠏󰠏󰠏󰠏󰠏󰠏󰠏󰠏󰠏󰠏󰠏󰠏󰠏󰠏󰠏󰠏󰠏󰠏󰠏󰠏󰠏󰠏󰠏󰠏󰠏󰠏󰠏󰠏󰠏󰠏󰠏󰠏󰠏󰠏󰠏󰠏󰠏󰠏󰠏󰠏󰠎 인간창조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호흡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닌 피조된 인간의 생명이었다(창2:7)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시던 날 저녁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신 호흡은 창조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생명 즉 성령이었다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그러므로 사도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 하나님의 생명인 성령을 얻어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에 이르러 권능을 받게된다(행1:8, 2:1-4) 오늘날 모든 성도들은 거듭나는 체험 뿐 아니라 권능을 체험한다. 먼저 우리는 어떻게 생명으로서의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가 생명으로서의 성령체험을 할 수 있는가? 생명으로서의 성령체험에 대해서 생각하자 첫째 :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한다 거듭남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죄와 세상, 육신과 자아를 처리하는 일이다. 자백하고 회개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는 사실을 받아드리고 육신과 자아를 십자가에 넘겨야 한다 둘째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자신을 비우는 일 뿐 아니라 자신을 채우는 일도 의심없이 받아드리는 일이다. 우리자신이 충만케 되었는지 느끼려하지 말고 오직 성령충만을 믿어야 한다. 참된 믿음은 느낌에 좌우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면 실제적으로 누리게 된다. 당신의 기질이나 인간성을 관심하지 말라 다만 당신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관심하라 그래야만 당신은 신성한 분배를 누릴 수 있고 충만할 수 있다 5.능력으로서 성령 󰠆󰠏󰠏󰠏󰠏󰠏󰠏󰠏󰠏󰠏󰠏󰠏󰠏󰠏󰠏󰠏󰠏󰠏󰠏󰠏󰠏󰠏󰠏󰠏󰠏󰠏󰠏󰠏󰠏󰠏󰠏󰠏󰠏󰠏󰠏󰠏󰠏󰠏󰠏󰠏󰠏󰠏󰠏󰠏󰠏󰠏󰠏󰠏󰠏󰠏󰠏󰠏󰠏󰠏󰠏󰠏󰠏󰠏󰠏󰠏󰠏󰠏󰠏󰠏󰠏󰠏󰠏󰠏󰠏󰠏󰠏󰠏󰠏󰠏󰠏󰠏󰠏󰠈 󰠐 우리는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자진해서 그의 능력의 손길에 붙들려야 한다 󰠐 󰠌󰠏󰠏󰠏󰠏󰠏󰠏󰠏󰠏󰠏󰠏󰠏󰠏󰠏󰠏󰠏󰠏󰠏󰠏󰠏󰠏󰠏󰠏󰠏󰠏󰠏󰠏󰠏󰠏󰠏󰠏󰠏󰠏󰠏󰠏󰠏󰠏󰠏󰠏󰠏󰠏󰠏󰠏󰠏󰠏󰠏󰠏󰠏󰠏󰠏󰠏󰠏󰠏󰠏󰠏󰠏󰠏󰠏󰠏󰠏󰠏󰠏󰠏󰠏󰠏󰠏󰠏󰠏󰠏󰠏󰠏󰠏󰠏󰠏󰠏󰠏󰠏󰠎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누구든지 자진해서 하나님께 쓰임받고자 하는 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능력으로 임하심을 얻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나서 자진하여 하나님께 쓰임받고자 하는 자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영생을 얻고 멸망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거나 헌신하려고 능력얻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구원얻은 이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 성령의 운행과 사역의 갈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자진해서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쓰임받고자 하지 않음으로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억눌러 버린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기를 거부한다. 성령의 외적능력이 내적생명보다 더 얻기어렵다거나 더 귀한 것은 아니지만 유일한 조건은 우리가 자신해서 그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고자 하는 결단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어느만큼 열심히 구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자진해서 그에게 쓰임받고자 하느냐가 문제다 우리는 대개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은 하나님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인간이성의 한계에 제한해 버린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주예수의 이름으로 순종하고 주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각자지 능력과 은사를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대적을 처리하고 다스리며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게 하신다 결 론 구약시대 죄된 아담안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같이 하실 수 없다(창6:3) 그러나 오순절이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령)은 우리안에 내주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게 되었다. 부활하신 날 저녁 제자들은 내적생명인 거듭남의 체험을 하게 되었고 오순절에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았다(행1:8)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거듭나는 일 뿐 아니라 권능을 받아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죄를 이기는 내적 변화뿐 아니라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외적 능력이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성결론 17강의 그리스도의 몸 1.감취어진 비밀 2.그리스도의 몸 3.몸의 대표 권위 4.권위와 생명율 5.몸의 단계로 오름 성결론 17강의 그리스도의 몸 󰠏󰠏󰠏󰠏󰠏󰠏󰠏󰠏󰠏󰠏󰠏󰠏󰠏󰠏 암 송 성 구 󰠏󰠏󰠏󰠏󰠏󰠏󰠏󰠏󰠏󰠏󰠏󰠏󰠏󰠏󰠏󰠏󰠏󰠏󰠏󰠏󰠏󰠏󰠏󰠏󰠏󰠏󰠏󰠏󰠏󰠏󰠏󰠏󰠏󰠏󰠏󰠏󰠏󰠏󰠏󰠏󰠏󰠏󰠏󰠏󰠏󰠏󰠏󰠏󰠏󰠏󰠏󰠏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 7)」 󰠏󰠏󰠏󰠏󰠏󰠏󰠏󰠏󰠏󰠏󰠏󰠏󰠏󰠏󰠏󰠏󰠏󰠏󰠏󰠏󰠏󰠏󰠏󰠏󰠏󰠏󰠏󰠏󰠏󰠏󰠏󰠏󰠏󰠏󰠏󰠏󰠏󰠏󰠏󰠏󰠏󰠏󰠏󰠏󰠏󰠏󰠏󰠏󰠏󰠏󰠏󰠏󰠏󰠏󰠏󰠏󰠏󰠏󰠏󰠏󰠏󰠏󰠏󰠏 고전 12:12-14󰠏󰠏 서 론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크게 이중적인 목표를 가진다. 첫째 :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고 나아가 부활의 자리에까지 이르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 개인구원의 완성에 도달하는 일이라면 그후에 우리는 다시 할 일이 없는 것인가? 아니다 둘째 : 개인의 구원을 성취하여 성령이 충만한 이들 속에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날부터 이제 능력있는 십자가의 군병들이 되어 영전에 참여하는 일이다. 우리는 주의 능력을 힘입어 죄악세상을 정복하며 하나님의 대적을 처리하며 모든 악의 영들과 영적인 싸움을 전개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방황하던 시절을 마치고 그들이 요단강으로 인도되어 길갈(걷히다)에서 육신이 완전히 걷힌후(골2:11),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모든 구원이 완성된 최종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가나안 7족속과 더불어 전쟁(영전)을 피할 수 없게되었다. 우리가 영적인 광야에서 시험받는 날이 차고 우리 육신이 길갈에서 걷히고 처리된 후 요단강을 건너 안식의 땅, 영적인 충만인 가나안에 들어서는 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해 영적전쟁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홍해는 바로의 군대를 장사하기 위한 곳이었고 요단강은 이스라엘 자손을 장사하기 위한 곳이다. 요단강 건너 12개의 돌과 요단강 바닥의 12개의 돌은 옛열두지파를 요단강에 끝내고 새열두지파가 강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감을 계시한다. 영적생활의 첫 단계는 홍해를 건넌후 일어난 것이라면(갈5:17) 영적생활의 두번째 단계는 요단강 건넌후 일어난 것이다(엡6:12) 1.감취어진 비밀 󰠆󰠏󰠏󰠏󰠏󰠏󰠏󰠏󰠏󰠏󰠏󰠏󰠏󰠏󰠏󰠏󰠏󰠏󰠏󰠏󰠏󰠏󰠏󰠏󰠏󰠏󰠏󰠏󰠏󰠏󰠏󰠏󰠏󰠏󰠏󰠏󰠏󰠏󰠏󰠏󰠏󰠏󰠏󰠏󰠏󰠏󰠏󰠏󰠏󰠏󰠏󰠏󰠏󰠏󰠏󰠏󰠏󰠏󰠏󰠏󰠏󰠏󰠏󰠏󰠏󰠏󰠏󰠏󰠏󰠏󰠏󰠏󰠏󰠏󰠏󰠏󰠏󰠏󰠏󰠈 󰠐 우주의 비밀은 하나님,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이다. 󰠐 󰠌󰠏󰠏󰠏󰠏󰠏󰠏󰠏󰠏󰠏󰠏󰠏󰠏󰠏󰠏󰠏󰠏󰠏󰠏󰠏󰠏󰠏󰠏󰠏󰠏󰠏󰠏󰠏󰠏󰠏󰠏󰠏󰠏󰠏󰠏󰠏󰠏󰠏󰠏󰠏󰠏󰠏󰠏󰠏󰠏󰠏󰠏󰠏󰠏󰠏󰠏󰠏󰠏󰠏󰠏󰠏󰠏󰠏󰠏󰠏󰠏󰠏󰠏󰠏󰠏󰠏󰠏󰠏󰠏󰠏󰠏󰠏󰠏󰠏󰠏󰠏󰠏󰠏󰠏󰠎 인간은 누구나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평생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영적인 삶에도 중생, 성화, 영화와 같은 개인구원의 차원에 속한 구원의 과정이 있듯이 교회, 왕국, 새예루살렘같은 역사의 경륜적 차원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고려해야될 첫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안에 감추어진 비밀이란 것이다. 우주안에 하나님의 경륜안에 감추어진 비밀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만세전에 세우신 목적의 성취를 위해 영원한 경륜안에 걸친 세부항목중의 핵심부분이다. 우주의 비밀은 하나님이고(창1:1)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다(골2:2)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다(엡3:4) 이 비밀은 한 비밀의 3단계일 뿐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며 그리스도는 교회안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하나님은 우주의 비밀이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다른 세대에는 알게하지 아니하였다(엡3:5) 다른세대에 감추어졌으나 새언약의 시대에 계시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비밀 곧 그분의 몸인 교회는 구약시대에는 감추어져 있었다.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아무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확실히 알지못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이 어느날 이사실을 보고 기뻐했다(요3:29) 그리고 신약시대 사도들에게 비로서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를 알게하셨다(롬16:25-26 엡1:17) 이것이 바로 그분의 충만을 표현하기 위한 그분의 몸인 교회였다(엡1:22-23) 그리스도와 교회 이것은 세계인류를 구원하기위한 큰비밀이었다(엡5:32) 2.그리스도의 몸 󰠆󰠏󰠏󰠏󰠏󰠏󰠏󰠏󰠏󰠏󰠏󰠏󰠏󰠏󰠏󰠏󰠏󰠏󰠏󰠏󰠏󰠏󰠏󰠏󰠏󰠏󰠏󰠏󰠏󰠏󰠏󰠏󰠏󰠏󰠏󰠏󰠏󰠏󰠏󰠏󰠏󰠏󰠏󰠏󰠏󰠏󰠏󰠏󰠏󰠏󰠏󰠏󰠏󰠏󰠏󰠏󰠏󰠏󰠏󰠏󰠏󰠏󰠏󰠏󰠏󰠏󰠏󰠏󰠏󰠏󰠏󰠏󰠏󰠏󰠏󰠏󰠈 󰠐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그분의 몸이며,성도들은 그분의 지체이다. 󰠐 󰠌󰠏󰠏󰠏󰠏󰠏󰠏󰠏󰠏󰠏󰠏󰠏󰠏󰠏󰠏󰠏󰠏󰠏󰠏󰠏󰠏󰠏󰠏󰠏󰠏󰠏󰠏󰠏󰠏󰠏󰠏󰠏󰠏󰠏󰠏󰠏󰠏󰠏󰠏󰠏󰠏󰠏󰠏󰠏󰠏󰠏󰠏󰠏󰠏󰠏󰠏󰠏󰠏󰠏󰠏󰠏󰠏󰠏󰠏󰠏󰠏󰠏󰠏󰠏󰠏󰠏󰠏󰠏󰠏󰠏󰠏󰠏󰠏󰠏󰠏󰠏󰠎 첫번째 성령체험을 한 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가 오셨을 때 그영안에 성령이 연합하시고 내주하시고 그의 본성이 되셨다 그가 세례받음으로 외적 능력을 체험하셨고(마3:16) 속생명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셨다(눅4:18)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실뿐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된 최초의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엡4:15) 두번째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다. 예수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속생명을 누리게 되었다(요14:16-20 요20:22) 따라서 외적능력을 체험하여 사역하게 하셨다(행1:5 1:8)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터를 삼으셨다(엡2:20) 세번째 성령체험을 한 사람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산되는 지체들에게다(행2:1-4 10:44 고전12:27) 오순절을 중심으로 성령의 시대가 열리며 성령은 이땅에 온전한 교회를 출생시킨 것이다(행2:17-21) 교회는 외형적 형태로는 믿는이들의 모임이지만 내적인 구성성분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형성된다. 머리와 몸과 지체는 셋이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한 영으로 충만된 생명이요, 한 몸이다(고전12:12-14). 3.몸의 대표 권위 󰠆󰠏󰠏󰠏󰠏󰠏󰠏󰠏󰠏󰠏󰠏󰠏󰠏󰠏󰠏󰠏󰠏󰠏󰠏󰠏󰠏󰠏󰠏󰠏󰠏󰠏󰠏󰠏󰠏󰠏󰠏󰠏󰠏󰠏󰠏󰠏󰠏󰠏󰠏󰠏󰠏󰠏󰠏󰠏󰠏󰠏󰠏󰠏󰠏󰠏󰠏󰠏󰠏󰠏󰠏󰠏󰠏󰠏󰠏󰠏󰠏󰠏󰠏󰠏󰠏󰠏󰠏󰠏󰠏󰠈 󰠐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만이 권위와 순복의 최고 표현이 될 수 있다. 󰠐 󰠌󰠏󰠏󰠏󰠏󰠏󰠏󰠏󰠏󰠏󰠏󰠏󰠏󰠏󰠏󰠏󰠏󰠏󰠏󰠏󰠏󰠏󰠏󰠏󰠏󰠏󰠏󰠏󰠏󰠏󰠏󰠏󰠏󰠏󰠏󰠏󰠏󰠏󰠏󰠏󰠏󰠏󰠏󰠏󰠏󰠏󰠏󰠏󰠏󰠏󰠏󰠏󰠏󰠏󰠏󰠏󰠏󰠏󰠏󰠏󰠏󰠏󰠏󰠏󰠏󰠏󰠏󰠏󰠏󰠎 하나님의 권위의 최고 표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다(고전12:12-14) 하나님은 이세상에 권위제도를 세우셨고 모든 인류를 그권위아래 두셨다. 행정부나 노사제도나 부모자식간의 관계나, 사제지간의 관계에도 모두 권위가 작용하는데 이런 관계속에서는 권위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나타내기 어렵다. 하나님은 이땅에 많은 권위제도를 세우셨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에 불과함으로 얼마든지 외면적으로 순종하면서도 내면적으로 저항할 수도 있다. 정부의 명령을 따르는 국민이 얼마나 진정 마음속으로 순종하는지, 사장의 명령을 따르는 사원들이 진정 마음속으로 순종하는지 아니면 외적으로만 순종하는지 구별할 수 없다. 종이 상전에게 순종하는 것은 대표권위로 삼을 수 없고 국민이 정부에 순종하는 것을 권위의 모델로 삼을 수 없다. 외면적으로 순종하면서도 중심에 진정한 순종이 없다면 하나님의 권위는 결코 세워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 완전한 권위와 순종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만이 권위와 순복의 최고표현이 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교회를 조직이나 기관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혈연으로 연결된 부자관계라 해도 아무리 의리가 있는 상하관계라해도 모두 나누어질 수 있다 그러나 머리와 몸은 영원히 나누어질 수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영원히 나누어질 수 없는 뛰어나고 완전한 권위와 순복의 최고 표현이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지만 과오를 범할 수 있고 부모가 자식에게 얼마든지 권위를 오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자관계의 권위와 순종조차도 불완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의 완전한 권위와 순종인 그리스도와 교회 즉 머리와 몸을 세우고자 하신다. 부모도 자녀에게 해를 입힐 수 있고 주인도 하인을 해할 수 있지만 자기 몸을 해하는 머리는 없다. 때문에 머리의 권위는 틀리지 않으며 가장 완전한 대표권위가 될 수 있다 또한 머리에 대한 몸의 순종도 완전하다 머리의 명령을 억지로 따르는 지체는 없다 몸이 머리에게 순종하는 정도까지 우리가 지체로써 머리를 순종할 때 하나님은 만족해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시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머리와 몸의 관계가 될 때까지 다루신다. 4.권위와 생명율 󰠆󰠏󰠏󰠏󰠏󰠏󰠏󰠏󰠏󰠏󰠏󰠏󰠏󰠏󰠏󰠏󰠏󰠏󰠏󰠏󰠏󰠏󰠏󰠏󰠏󰠏󰠏󰠏󰠏󰠏󰠏󰠏󰠏󰠏󰠏󰠏󰠏󰠏󰠏󰠏󰠏󰠏󰠏󰠏󰠏󰠏󰠏󰠏󰠏󰠏󰠏󰠏󰠏󰠏󰠏󰠏󰠏󰠏󰠏󰠏󰠏󰠏󰠏󰠏󰠏󰠏󰠏󰠏󰠏󰠏󰠏󰠏󰠏󰠏󰠈 󰠐 머리, 몸,지체는 같은 생명이기 때문에 혼란과 불순종이 있을 수 없다 󰠐 󰠌󰠏󰠏󰠏󰠏󰠏󰠏󰠏󰠏󰠏󰠏󰠏󰠏󰠏󰠏󰠏󰠏󰠏󰠏󰠏󰠏󰠏󰠏󰠏󰠏󰠏󰠏󰠏󰠏󰠏󰠏󰠏󰠏󰠏󰠏󰠏󰠏󰠏󰠏󰠏󰠏󰠏󰠏󰠏󰠏󰠏󰠏󰠏󰠏󰠏󰠏󰠏󰠏󰠏󰠏󰠏󰠏󰠏󰠏󰠏󰠏󰠏󰠏󰠏󰠏󰠏󰠏󰠏󰠏󰠏󰠏󰠏󰠏󰠏󰠎 어째서 하나님은 머리와 몸을 대표권위로 삼으셨을까? 그리고 몸이 머리에 어떻게 온전하게 순종하는것일까? 몸은 머리와 동일한 생명과 성분을 가졌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생명의 율을 따라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머리를 불순종하는 지체가 있다면 그치제는 이상한 지체고 잘못된 지체다 가령 손이 머리의 뜻을 순종하여 올려진다면 그것은 정상이지만 만일 손이 머리의 뜻을 따라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된다. 그손은 문제가 있는 손이다. 마비증세로 몸으로부터 신경계통에 장애를 받거나 감각기관이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생명 즉 영의 성분은 머리나 몸이나 지체가 모두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혼란과 불순종이 있을 수 없다. 머리와 몸이 합일하는 것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반듯이 머리의 명령을 몸이 기꺼이 자연스럽게 순종하게 마련이다. 가령 호흡은 의식적으로 할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심장이 뛰는 것은 의식적인 명령이 없더라도 쉬지않고 운동하는데 이는 생명율에 따라 머리가 순종하고 있는 것 뿐이다. 머리는 몸에게 아무 소리 없고 억지나 마찰이나 갈등도 없다 몸은 서로 지체들이 완전한 균형과 조화있는 순종을 통하여 유연하게 작동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명령이나 강요에따라 순종하는데 이것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몸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증거다 아직 몸처럼 생명의 권위로 움직여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이 머리를 순종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순종치 못하는 것은 온전한 순종일 수 없다 주께서 우리를 그의 몸안에 두셨음으로 연합과 순종은 완전하며 성령의 뜻이 지체를 통제함으로 놀라울만큼 완전한 것이다. 교회는 형제 자매들이 영적교제를 갖는 장소일 뿐 아니라 또한 생명의 권위가 최고로 표현되는 장소이다. 5.몸의 단계로 오름 󰠆󰠏󰠏󰠏󰠏󰠏󰠏󰠏󰠏󰠏󰠏󰠏󰠏󰠏󰠏󰠏󰠏󰠏󰠏󰠏󰠏󰠏󰠏󰠏󰠏󰠏󰠏󰠏󰠏󰠏󰠏󰠏󰠏󰠏󰠏󰠏󰠏󰠏󰠏󰠏󰠏󰠏󰠏󰠏󰠏󰠏󰠏󰠏󰠏󰠏󰠏󰠏󰠏󰠏󰠏󰠏󰠏󰠏󰠏󰠏󰠏󰠏󰠏󰠏󰠏󰠏󰠏󰠈 󰠐 권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 󰠌󰠏󰠏󰠏󰠏󰠏󰠏󰠏󰠏󰠏󰠏󰠏󰠏󰠏󰠏󰠏󰠏󰠏󰠏󰠏󰠏󰠏󰠏󰠏󰠏󰠏󰠏󰠏󰠏󰠏󰠏󰠏󰠏󰠏󰠏󰠏󰠏󰠏󰠏󰠏󰠏󰠏󰠏󰠏󰠏󰠏󰠏󰠏󰠏󰠏󰠏󰠏󰠏󰠏󰠏󰠏󰠏󰠏󰠏󰠏󰠏󰠏󰠏󰠏󰠏󰠏󰠏󰠎 로마서 8장에서 육신을 죽음에 넘기는 사실을 통과한다 그리고나서 로마서 12장에 을 아는데 이르게 되며(롬12:1-2) 드디어 로마서 13장에 가서야 개인주의가 처리되 머리의 권위를 인식하고 따르게 된다(롬13:1-2) 사람이 몸을 알고 있는지 여부는 사람이 권위를 인식하고 있는지 여부를 보면 된다. 권위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몸을 아는 일과 권위를 인식하는 일은 분리될 수 없다. 권위를 알게되면 그때부터 사람은 혼자의 힘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알게되고 그때부터 개인주의적 자아는 처리된다. 그리스도만이 머리이며 온몸의 권위이며 권위아래 놓여져 있음을 알게되며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올바른 지위와 순서를 갖게 됨을 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육신과 자아와 그리고 타고난 성분들을 분쇄하게 되면 우리는 즉시 형제자매들 가운데 놓여진 자신의 지위와 순서를 알게되며 하나님이 지체의 각부분을 평등하게 구조하지 않으셨음을 불평하지 않게 된다. 권위란 떠맡거나 선출되거나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의 지체들에게 나타내는 성령의 순리적 순서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머리의 권위를 인정하고 지체에 대한 지체의 권위를 존중하며 아주 만족하게 자신의 순서를 따라 생명의 안식을 누리기 시작한다 권위아래 있음은 자신을 억지로 복종시키는 것과 거리가 먼 너무나 자연스러운 절차다. 누군가 몸안의 순서를 모르고 권위를 따를줄 모른다면 그는 아직 생명체험에 있어서 몸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다 결 론 개인의 성결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싸워 이기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우주적 성결이 또한 요구된다 개인의 온전성결은 곧 우주적인 성결의 시작이며 우주안의 영적전쟁의 시작이다. 성결론 18강의 승 천 의 식 1.그리스도의 구속 2.구원의 위치 3.영적인 기능 4.전략적 기지 5.승천의 체험 성결론 18 강의 승 천 의 식 󰠏󰠏󰠏󰠏󰠏󰠏󰠏󰠏󰠏󰠏󰠏󰠏󰠏 암 송 성 구 󰠏󰠏󰠏󰠏󰠏󰠏󰠏󰠏󰠏󰠏󰠏󰠏󰠏󰠏󰠏󰠏󰠏󰠏󰠏󰠏󰠏󰠏󰠏󰠏󰠏󰠏󰠏󰠏󰠏󰠏󰠏󰠏󰠏󰠏󰠏󰠏󰠏󰠏󰠏󰠏󰠏󰠏󰠏󰠏󰠏󰠏󰠏󰠏󰠏󰠏󰠏󰠏󰠏󰠏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 엡 2 : 5 - 7 󰠏󰠏󰠏󰠏󰠏󰠏󰠏󰠏󰠏󰠏󰠏 서 론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성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요, 지체임을 알게된다. 그리하여 개인주의가 처리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머리의 명령을 순응하게 되며 갈등이나 부조화없이 그 은사와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은 승천의 위치를 알게되며 우리 위치가 이땅이 아니고 하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적싸움의 전략적 기지는 땅이 아니고 하늘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싸움은 하늘과 땅의 싸움이요 그리스도와 사탄의 싸움이요 영과 육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1.그리스도의 구속 󰠆󰠏󰠏󰠏󰠏󰠏󰠏󰠏󰠏󰠏󰠏󰠏󰠏󰠏󰠏󰠏󰠏󰠏󰠏󰠏󰠏󰠏󰠏󰠏󰠏󰠏󰠏󰠏󰠏󰠏󰠏󰠏󰠏󰠏󰠏󰠏󰠏󰠏󰠏󰠏󰠏󰠏󰠏󰠏󰠏󰠏󰠏󰠏󰠏󰠏󰠏󰠏󰠏󰠏󰠏󰠏󰠏󰠏󰠏󰠏󰠏󰠏󰠏󰠏󰠏󰠏󰠏󰠏󰠏󰠏󰠏󰠏󰠏󰠈 󰠐 그리스도의 구속은 죽음, 부활, 승천의 세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 󰠌󰠏󰠏󰠏󰠏󰠏󰠏󰠏󰠏󰠏󰠏󰠏󰠏󰠏󰠏󰠏󰠏󰠏󰠏󰠏󰠏󰠏󰠏󰠏󰠏󰠏󰠏󰠏󰠏󰠏󰠏󰠏󰠏󰠏󰠏󰠏󰠏󰠏󰠏󰠏󰠏󰠏󰠏󰠏󰠏󰠏󰠏󰠏󰠏󰠏󰠏󰠏󰠏󰠏󰠏󰠏󰠏󰠏󰠏󰠏󰠏󰠏󰠏󰠏󰠏󰠏󰠏󰠏󰠏󰠏󰠏󰠏󰠏󰠎 그리스도의 구속은 죽음, 부활, 승천 이세가지 단계로 이루어진다. 만일 이들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불완전하다. 1)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세상에서 육신에서 타고난 성분에서 하나님과 일치할 수 없는 온갖 것으로부터 구원한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깨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으로 새창조의 모든 풍성을 가져온다. 3)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천국시민으로 모든 구속의 종결을 가져온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때 모든 구속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안에서 안식하신 것이 아니고 승천하심으로 비로서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고 안식하시게 된 것이다(엡 2 : 6) 앉으셨다는 말은 모든 전쟁이 끝나고 안식이 이루어 졌음을 나타낸다 죽음과 부활은 다만 주님 구속의 점진적 과정일뿐 승천에 와서야 주님 구속의 최종 단계가 됨을 알린다. 죽음 부활 승천 이처럼 3단계를 거쳐 구속의 종결로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 그분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것을 하늘로 이끄신다. 주님이 인류를 위한 구속은 십자가상에서 온전하게 이루어 놓으셨어도(요19:30) 그분자신의 구속을 적용하는 것은 승천의 위치에 와서다 승천에 와서야 주님은 사람에게 구원과 안식을 온전하게 하신다. 2.구원의 위치 󰠆󰠏󰠏󰠏󰠏󰠏󰠏󰠏󰠏󰠏󰠏󰠏󰠏󰠏󰠏󰠏󰠏󰠏󰠏󰠏󰠏󰠏󰠏󰠏󰠏󰠏󰠏󰠏󰠏󰠏󰠏󰠏󰠏󰠏󰠏󰠏󰠏󰠏󰠈 󰠐 승천이 우리 구원의 최종 위치다 󰠐 󰠌󰠏󰠏󰠏󰠏󰠏󰠏󰠏󰠏󰠏󰠏󰠏󰠏󰠏󰠏󰠏󰠏󰠏󰠏󰠏󰠏󰠏󰠏󰠏󰠏󰠏󰠏󰠏󰠏󰠏󰠏󰠏󰠏󰠏󰠏󰠏󰠏󰠏󰠎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심판으로부터 죄사함받아 죄가 말소되고 죽은 상태에서 새생명 얻게되고 부활했다 하더라도 온전한 구원의 위치에 와있다 말할 수 없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라고 말한다. 구원얻은 자란 죄사함받은 자며 죽음에서 살아난 자이며 하늘에 올라 승천하여 앉은 자 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우리를 자신과 함께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히셨다 그렇기때문에 승천은 우리 구원의 최종위치가 된다. 우리가 얻은 승천의 위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승천의 사실에 입각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안에 얻은 생명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 우릭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삼았기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와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져있다 이 생명은 하늘에 이르는 생명이다. 이생명을 얻을 자는 하늘과 교통하고 하늘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의 상태는 여전히 지상에 살지만 내적 생명은 이미 하늘에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왔을지라도 여전히 하늘에 있다 말씀하셨다(요3:13) 그 이유는 그분의 생명이 본래 하늘에 속해있으며 하늘과 통했기 때문이다. 전구의 빛나는 전등빛은 현장에 있지만 전구속의 전류의 위치는 발전소이다. 하늘과 땅이 발전소와 전구처럼 끊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3.영적인 기능 󰠆󰠏󰠏󰠏󰠏󰠏󰠏󰠏󰠏󰠏󰠏󰠏󰠏󰠏󰠏󰠏󰠏󰠏󰠏󰠏󰠏󰠏󰠏󰠏󰠏󰠏󰠏󰠏󰠏󰠏󰠏󰠏󰠏󰠏󰠏󰠏󰠏󰠏󰠏󰠏󰠏󰠏󰠏󰠏󰠏󰠏󰠏󰠏󰠏󰠏󰠏󰠏󰠏󰠏󰠏󰠏󰠏󰠏󰠏󰠏󰠈 󰠐 그리스도 안의 모든 영적기능은 주님의 승천안에서 주신다. 󰠐 󰠌󰠏󰠏󰠏󰠏󰠏󰠏󰠏󰠏󰠏󰠏󰠏󰠏󰠏󰠏󰠏󰠏󰠏󰠏󰠏󰠏󰠏󰠏󰠏󰠏󰠏󰠏󰠏󰠏󰠏󰠏󰠏󰠏󰠏󰠏󰠏󰠏󰠏󰠏󰠏󰠏󰠏󰠏󰠏󰠏󰠏󰠏󰠏󰠏󰠏󰠏󰠏󰠏󰠏󰠏󰠏󰠏󰠏󰠏󰠏󰠎 창세기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을 때 이들의 모든 기능은 땅을 비추게 하신 것이다(창1:17) 만일 별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면 별빛은 그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비추는 기능은 전적으로 하늘의 위치에 달려있다 이와같이 우리가 복음을 전하든 심방하든 성경을 가르치든 교회를 다스리든 그실제적 기능은 전적으로 승천의 위치를 지키느냐에 달려있다 만일 우리가 승천의 위치를 잃어버리면 틀림없이 영적기능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승천의 위치를 유지하고 계속 하늘위에서 사람을 접촉하며 천국시민의 상태에 산다면 하늘의 분위기가 그들로 하여금 하늘에 속한 공급을 얻게 할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열심히 소리질러도 공허하고 낡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이미 기도자가 승천의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설교가 매력적이고 미사여구로 장식되어도 영적 감동을 주지못하는 이유는 하늘보좌의 안식을 만지지 못하고 승천의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적 기능은 승천위치에서 공급되어야 한다. 4.전략적 기지 󰠆󰠏󰠏󰠏󰠏󰠏󰠏󰠏󰠏󰠏󰠏󰠏󰠏󰠏󰠏󰠏󰠏󰠏󰠏󰠏󰠏󰠏󰠏󰠏󰠏󰠏󰠏󰠏󰠏󰠏󰠏󰠏󰠏󰠏󰠏󰠏󰠏󰠏󰠏󰠏󰠏󰠏󰠏󰠏󰠏󰠏󰠏󰠏󰠏󰠏󰠏󰠏󰠏󰠏󰠏󰠏󰠏󰠏󰠏󰠏󰠈 󰠐 영적싸움의 승리를 하려면 승천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 󰠌󰠏󰠏󰠏󰠏󰠏󰠏󰠏󰠏󰠏󰠏󰠏󰠏󰠏󰠏󰠏󰠏󰠏󰠏󰠏󰠏󰠏󰠏󰠏󰠏󰠏󰠏󰠏󰠏󰠏󰠏󰠏󰠏󰠏󰠏󰠏󰠏󰠏󰠏󰠏󰠏󰠏󰠏󰠏󰠏󰠏󰠏󰠏󰠏󰠏󰠏󰠏󰠏󰠏󰠏󰠏󰠏󰠏󰠏󰠏󰠎 우리가 승천의 위치를 잃어버리면 어떤 영적 전쟁도 수행할 수 없게된다. 전선에서 모든 군사전략가들은 전략적 기지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전쟁의 승리는 언제나 저지대보다 고지대를 차지하는 것이 전쟁을 이기는 비결이다 이원칙은 영적전쟁에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가 영적싸움에 이기기를 원한다면 승천의 위치를 반듯이 알아야한다 에베소서 6장의 언급은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승천의 위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있다고 선포한다 그리고는 계속 악의 영들에게 대하여 싸우게 되는것을 말한다(엡6:10-17) 만일 우리가 땅에 속한 사람이고 승천의 위치에 있지않다면 대적과 맞서 싸워이기기 어렵다 땅에 속한 생명으로 사는한 강한자가 될 수 없다(고전15:47-48) 우리가 승천에서 얻은 권세는 사탄을 처리하고 사탄을 이기는 근거다(눅10:19) 권위란 위치에 따른다 위치를 벗어나면 권위도 없다 제복을 벗어버린 경관, 지정된 근무처소에 있지않은 경관은 차량을 통제할 권위가 없다 임무를 떠난 장군, 계급장을 떼어낸 장군은 통솔권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하늘에 속한 권위도 승천의 위치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5.승천의 체험 󰠆󰠏󰠏󰠏󰠏󰠏󰠏󰠏󰠏󰠏󰠏󰠏󰠏󰠏󰠏󰠏󰠏󰠏󰠏󰠏󰠏󰠏󰠏󰠏󰠏󰠏󰠏󰠏󰠏󰠏󰠏󰠏󰠏󰠏󰠏󰠏󰠏󰠏󰠏󰠏󰠏󰠏󰠏󰠏󰠏󰠏󰠏󰠏󰠏󰠏󰠏󰠏󰠏󰠏󰠏󰠏󰠏󰠏󰠏󰠏󰠏󰠏󰠏󰠏󰠏󰠏󰠏󰠏󰠏󰠏󰠏󰠏󰠈 󰠐 승천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먼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기를 구해야 한다 󰠐 󰠌󰠏󰠏󰠏󰠏󰠏󰠏󰠏󰠏󰠏󰠏󰠏󰠏󰠏󰠏󰠏󰠏󰠏󰠏󰠏󰠏󰠏󰠏󰠏󰠏󰠏󰠏󰠏󰠏󰠏󰠏󰠏󰠏󰠏󰠏󰠏󰠏󰠏󰠏󰠏󰠏󰠏󰠏󰠏󰠏󰠏󰠏󰠏󰠏󰠏󰠏󰠏󰠏󰠏󰠏󰠏󰠏󰠏󰠏󰠏󰠏󰠏󰠏󰠏󰠏󰠏󰠏󰠏󰠏󰠏󰠏󰠏󰠎 우리는 구원을 받는 순간 승천의 위치를 얻게된다 그러나 승천은 어렵게 체험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승천의 체험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을 체험한 결과다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거쳐 하늘에 오르심같이 우리도 죽음과 부활을 거쳐 승천을 체험하게 된다 승천은 죽음과 부활의 결과다 만약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에 들어가게 되면 결국 승천의 영역에 이르게된다 이와같이 만일 우리가 승천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먼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기를 구해야한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세상,육신,자아,타고난 성분의 모든 것을 엄격하게 죽음에 넘기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부활에 가면 그때에 승천을 체험하고 승천의 영역안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될 수 있다 결 론 우리가 영적싸움에 승리하려면 그리스도의 몸이란 의식, 현실을 초월하는 승천의식이 있어야 영적싸움에 승리할 수 있다 성결론 19강의 다 스 림 1.다스림의 정의 2.다스림의 예표 3.다스림의 위치 4.다스림의 갈망 5.다스림의 실제 성결론 19강의 다 스 림 󰠏󰠏󰠏󰠏󰠏󰠏󰠏󰠏󰠏󰠏󰠏󰠏󰠏󰠏󰠏󰠏 암 송 성 구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1 : 28 󰠏󰠏󰠏󰠏󰠏󰠏󰠏󰠏 서 론 우리는 지난 시간 승천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우리가 승천의 위치에 있게되면 이제 우리는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해야할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다스리는 근거는 승천의 위치에 달려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다음에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얻었으며(마28:18) , 만유를 다스리시게 되었다(엡1:20-22) . 그러므로 우리가 다스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승천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오늘은 성도들이 죄와 사탄을 다스리고 만물을 다스림에 대하여 공부하려 한다. 1.다스림의 정의 󰠆󰠏󰠏󰠏󰠏󰠏󰠏󰠏󰠏󰠏󰠏󰠏󰠏󰠏󰠏󰠏󰠏󰠏󰠏󰠏󰠏󰠏󰠏󰠏󰠏󰠏󰠏󰠏󰠏󰠏󰠏󰠏󰠏󰠏󰠏󰠏󰠏󰠏󰠏󰠏󰠏󰠏󰠈 󰠐 인간을 만물을 다스리도록 창조하셨다 󰠐 󰠌󰠏󰠏󰠏󰠏󰠏󰠏󰠏󰠏󰠏󰠏󰠏󰠏󰠏󰠏󰠏󰠏󰠏󰠏󰠏󰠏󰠏󰠏󰠏󰠏󰠏󰠏󰠏󰠏󰠏󰠏󰠏󰠏󰠏󰠏󰠏󰠏󰠏󰠏󰠏󰠏󰠏󰠎 창세기에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크게 두가지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어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제사장적 사명을 다하게 하시기 위해서이고(창1:26 사43:7),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위임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도록 왕적인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다(창1:28 계22:5)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그리고 밑으로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왕으로서의 인간이 되기를 목표하셨다(벧전2:9). 이 사실은 성경의 마지막 결론의 책인 요한계시록에 잘 나타난다. 이기는 자들이 최후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제사장으로, 왕으로 있게되는 모습속에서 창조시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공과는 다스림(왕적지위)의 부분에 대해서 공부하려는 것이다. 다스린다는 말은 인간창조시 하나님이 가지셨던 의도대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림의 지위에 오르기를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짐을 말한다. 2.다스림의 예표 󰠆󰠏󰠏󰠏󰠏󰠏󰠏󰠏󰠏󰠏󰠏󰠏󰠏󰠏󰠏󰠏󰠏󰠏󰠏󰠏󰠏󰠏󰠏󰠏󰠏󰠏󰠏󰠏󰠏󰠏󰠏󰠏󰠏󰠏󰠏󰠏󰠏󰠏󰠏󰠏󰠏󰠏󰠏󰠏󰠏󰠏󰠏󰠏󰠏󰠏󰠏󰠏󰠏󰠏󰠏󰠏󰠏󰠏󰠏󰠏󰠏󰠏󰠏󰠏󰠏󰠏󰠏󰠏󰠏󰠏󰠏󰠏󰠏󰠏󰠈 󰠐 신약성경에 사탄과 마귀를 다스리는 권세가 인간에게 있음을 볼 수 있다. 󰠐 󰠌󰠏󰠏󰠏󰠏󰠏󰠏󰠏󰠏󰠏󰠏󰠏󰠏󰠏󰠏󰠏󰠏󰠏󰠏󰠏󰠏󰠏󰠏󰠏󰠏󰠏󰠏󰠏󰠏󰠏󰠏󰠏󰠏󰠏󰠏󰠏󰠏󰠏󰠏󰠏󰠏󰠏󰠏󰠏󰠏󰠏󰠏󰠏󰠏󰠏󰠏󰠏󰠏󰠏󰠏󰠏󰠏󰠏󰠏󰠏󰠏󰠏󰠏󰠏󰠏󰠏󰠏󰠏󰠏󰠏󰠏󰠏󰠏󰠏󰠎 과연 인간이 만물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위치에서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관리자요, 지배자다. 그리고 나가서 사탄의 세력도 다스리고 지배하여야 한다. 구약성경 여러곳에서 우리는 다스림의 예표를 본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는 일을 할 수 있었다(출14:16). 여호수아는 해가 중천에 머무르는 일을 시도했다(수 10:12-14). 엘리야 선지자는 강우를 통제할 수 있었다(왕상17,18장). 다니엘은 사자굴에서도 사자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단6장). 수세대에 걸쳐 하나님의 사람들은 권위를 가지고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본을 보여주셨다. 신약의 첫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병을 퇴치하셨고(마8:8-9), 더러운 영을 쫓아냈고(막1:27), 폭풍과 바다도 잠잠케 하셨다(마8:26-27). 이런 사례들은 모두 자연과 사단을 지배함과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들도 그러했다(창3:6-7 14:8-10 19:12 16:18) 또한 오늘날에도 이런 체험은 교회안에 흔히 거듭되고 있다. 장차 왕국에서 이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며 열국을 통치할 것이다(계2:26-27)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모든자들이 왕으로서 영원 무궁토록 다스릴 것이다(계22:5).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다스리는 축복을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릴 정도까지 이르지못한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이 될 수 없다. 오늘이 천년왕국이나 새하늘 새땅은 아니더라도 지
성결론(6) 20강의
성결론(6) 20강의 성결론 20강의 영 전 의 투 사 1.하나님의 나라 2.사탄의 나라 3.영적인 전쟁 4.전투의 원칙 5.전쟁의 목표 성결론 20강의 영전의 투사 󰠏󰠏󰠏󰠏󰠏󰠏󰠏󰠏󰠏󰠏󰠏󰠏󰠏󰠏󰠏󰠏 암 송 성 구 󰠏󰠏󰠏󰠏󰠏󰠏󰠏󰠏󰠏󰠏󰠏󰠏󰠏󰠏󰠏󰠏󰠏󰠏󰠏󰠏󰠏󰠏󰠏󰠏󰠏󰠏󰠏󰠏󰠏󰠏󰠏󰠏󰠏󰠏󰠏󰠏󰠏󰠏󰠏󰠏󰠏󰠏󰠏󰠏󰠏󰠏󰠏󰠏󰠏󰠏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희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 마 12 : 26 - 28 󰠏󰠏󰠏󰠏󰠏󰠏 서 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알고 승천을 알고 다스림을 알게 되면 이제 영적인 전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전의 투사인 것을 알게된다(출 12 : 17, 출 7 : 4, 엡 6 : 10-17). 우리가 중생하고 성화하여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온전한 성결에 도달해야 할 이유는 죄와 사탄을 이기기 위해서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이땅위에 회복하기 위해서다. 이 우주 가운데는 하나님 나라도 있고(마12:28), 사단의 나라도 있다(마12:26).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영적인 싸움이며, 모든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이땅의 회복을 위하여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는 영적인 투사가 되는 일이다. 오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날까지 성도가 해야하는 영적인 전투에 대하여 공부하려 한다. 1. 하나님의 나라 󰠆󰠏󰠏󰠏󰠏󰠏󰠏󰠏󰠏󰠏󰠏󰠏󰠏󰠏󰠏󰠏󰠏󰠏󰠏󰠏󰠏󰠏󰠏󰠏󰠏󰠏󰠏󰠏󰠏󰠏󰠏󰠏󰠏󰠏󰠏󰠏󰠏󰠏󰠏󰠏󰠏󰠏󰠏󰠏󰠏󰠏󰠏󰠏󰠏󰠏󰠏󰠏󰠏󰠏󰠏󰠏󰠏󰠏󰠏󰠏󰠏󰠏󰠏󰠏󰠏󰠏󰠏󰠏󰠏󰠏󰠏󰠏󰠏󰠈 󰠐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복안을 가지고 계셨다. 󰠐 󰠌󰠏󰠏󰠏󰠏󰠏󰠏󰠏󰠏󰠏󰠏󰠏󰠏󰠏󰠏󰠏󰠏󰠏󰠏󰠏󰠏󰠏󰠏󰠏󰠏󰠏󰠏󰠏󰠏󰠏󰠏󰠏󰠏󰠏󰠏󰠏󰠏󰠏󰠏󰠏󰠏󰠏󰠏󰠏󰠏󰠏󰠏󰠏󰠏󰠏󰠏󰠏󰠏󰠏󰠏󰠏󰠏󰠏󰠏󰠏󰠏󰠏󰠏󰠏󰠏󰠏󰠏󰠏󰠏󰠏󰠏󰠏󰠏󰠎 창세기 11장과 12장은 창세기의 중요한 분계선이다. 인류의 타락에 극한점은 창세기 11장이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이땅에 거대한 인간의 왕국을 세우려는 인간적인 시도이며, 타락한 인간을 선동하여 하나님을 모반한 사탄의 모의이다(창11:9). 그러나 창세기 12장은 인간왕국과 대조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시도다(창12:1-3). 하나님은 사탄의 모의인 인간왕국을 해체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의 후손(씨)을 통하여 이일을 성취하시려는 약속을 가지고 계셨다(갈3:16). 그의 후손 그리스도가 왔을때 그의 첫 일성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마4:17)」고 하셨고, 그는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왕국)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였고(창12:1-3),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신 이유도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이며(출19:4-6),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신 이유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이다(마4:17, 마10:5-7) 그렇기때문에 하나님 왕국의 복음(마24:14, 행8:12, 28:31)을 선포하셨으며,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통치의 모형을 보이시고 사탄을 묶어 깨뜨리는 일을 하신 것이다. 우리 구원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 나라다.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땅위에도 이루어지는 것이다(마6:10, 6:13).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하늘과 새땅(계21:1)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2.사단의 나라 󰠆󰠏󰠏󰠏󰠏󰠏󰠏󰠏󰠏󰠏󰠏󰠏󰠏󰠏󰠏󰠏󰠏󰠏󰠏󰠏󰠏󰠏󰠏󰠏󰠏󰠏󰠏󰠏󰠏󰠏󰠏󰠏󰠏󰠏󰠏󰠏󰠏󰠏󰠏󰠏󰠏󰠏󰠏󰠏󰠏󰠏󰠏󰠏󰠏󰠏󰠏󰠏󰠏󰠏󰠏󰠏󰠈 󰠐 사단의 왕국은 과도기적이요 영원한 나라가 아니다 󰠐 󰠌󰠏󰠏󰠏󰠏󰠏󰠏󰠏󰠏󰠏󰠏󰠏󰠏󰠏󰠏󰠏󰠏󰠏󰠏󰠏󰠏󰠏󰠏󰠏󰠏󰠏󰠏󰠏󰠏󰠏󰠏󰠏󰠏󰠏󰠏󰠏󰠏󰠏󰠏󰠏󰠏󰠏󰠏󰠏󰠏󰠏󰠏󰠏󰠏󰠏󰠏󰠏󰠏󰠏󰠏󰠏󰠎 하나님나라는 시간에 있어서나 공간에 있어서나 영원한 나라다. 그러나 사탄의 나라는 영원하지 않다(계11:15).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다(벧후3:10) 하나님 나라는 합법적인데(마28:18), 사탄의 나라는 불법적이다(사14:12-15, 겔 28:11-17). 사탄은 이땅의 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눅4:5-6), 그는 세상의 임금이었다(요14:30 욥1:6-7) 사탄의 나라는 세종류의 다스림이었다(계16:13-14). 1. 사탄왕국의 머리의 다스림이다(계12:7-9), 2. 공중권세잡은 악한 천사들이다(엡6:12) , 3. 이땅에 귀신과 악령들이다(마7:22, 막1:25, 눅11:20) 일곱째 나팔이 울려퍼질 때 세상왕국은 끝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이 된다(계11:5)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 초림시부터 재림시까지 영적인 전쟁을 지속하게 된다. 이영적전쟁은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를 구원하고 사탄에게 탈취당한 땅의 회복을 위한 구출과 회복의 전쟁이다(마12:26-28). 3.영적인 전쟁 󰠆󰠏󰠏󰠏󰠏󰠏󰠏󰠏󰠏󰠏󰠏󰠏󰠏󰠏󰠏󰠏󰠏󰠏󰠏󰠏󰠏󰠏󰠏󰠏󰠏󰠏󰠏󰠏󰠏󰠏󰠏󰠏󰠏󰠏󰠏󰠏󰠏󰠏󰠏󰠏󰠏󰠏󰠏󰠏󰠏󰠏󰠏󰠏󰠏󰠏󰠏󰠏󰠏󰠏󰠏󰠏󰠈 󰠐 영적인 영역의 모든 일은 본질상 영적 전쟁에 속한다. 󰠐 󰠌󰠏󰠏󰠏󰠏󰠏󰠏󰠏󰠏󰠏󰠏󰠏󰠏󰠏󰠏󰠏󰠏󰠏󰠏󰠏󰠏󰠏󰠏󰠏󰠏󰠏󰠏󰠏󰠏󰠏󰠏󰠏󰠏󰠏󰠏󰠏󰠏󰠏󰠏󰠏󰠏󰠏󰠏󰠏󰠏󰠏󰠏󰠏󰠏󰠏󰠏󰠏󰠏󰠏󰠏󰠏󰠎 하나님이 성도들의 온전한 성결(벧전1:16)을 원하시는 이유는 죄를 이기고 세상을이기고 사탄을 이기는 자들을 만드시기 위함이다. 영적인 일들의 모든 일은 본질상 영적전쟁에 속하는 것들이다. 1) 복음전파가 곧 영적 전쟁이다(행26:18) 사탄의 권세에 묶인 사람을 풀고 구원하는 일이다(골1:13) 복음전파는 전적으로 사람안에 있는 사탄의 권세를 몰아내고 하나님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영적전쟁인 것이다. 2) 성도를 가르치는 일도 영적전쟁이다. 성도들이 구원받은 후에도 그의 사고와 행동의 대부분이 사탄의 진지에 남아있으며 그의 세계관이 사단에게 접령되어 있어서 언제나 사탄에게 이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를 가르치는 일은 죄와 세상과 육신과 옛창조에 관계된 사탄의 진지를 파하고 점차적으로 성도의 사고와 행동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3) 교회의 행정도 모두 영적인 전쟁이다. 흑암의 권세와 지배아래서 구출해서 하나님의 권세 아래 다스림을 받게하고 세상의 치밀한 조직에 묶여사는 이를 하나님의 통치아래로 궤도를 수정하는 것이 교회행정의 목적이다. 4) 모든 기도생활이 영적인 싸움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가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든, 세상에서 건져내든, 질병에서 건져내든 하나님이 사람을 얻으시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영광을 나태내기 위한 영적인 투쟁이다. 4.전투의 원칙 󰠆󰠏󰠏󰠏󰠏󰠏󰠏󰠏󰠏󰠏󰠏󰠏󰠏󰠏󰠏󰠏󰠏󰠏󰠏󰠏󰠏󰠏󰠏󰠏󰠏󰠏󰠏󰠏󰠏󰠏󰠏󰠏󰠏󰠏󰠏󰠏󰠏󰠏󰠏󰠏󰠏󰠏󰠏󰠏󰠏󰠈 󰠐 영적인 병기 기도의 능력 십자가의 증거 󰠐 󰠌󰠏󰠏󰠏󰠏󰠏󰠏󰠏󰠏󰠏󰠏󰠏󰠏󰠏󰠏󰠏󰠏󰠏󰠏󰠏󰠏󰠏󰠏󰠏󰠏󰠏󰠏󰠏󰠏󰠏󰠏󰠏󰠏󰠏󰠏󰠏󰠏󰠏󰠏󰠏󰠏󰠏󰠏󰠏󰠏󰠎 영적인 전투에는 몇가지 원칙이 있다 1. 육체에 속한 병기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고후10:3-5). 폭력, 책략, 수완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적인 병기를 사용한다(엡6:10-17) 오로지 주의 성령만이 힘이요, 능력이 되신다. 2. 대부분의 영적 전투는 기도로 한다. 다니엘 처럼,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며 이러한 기도로 동역하고 그분위해 싸우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3. 주님의 보혈로 한다(계12:11) 주의 피로 우리를 가리고 사탄의 공격과 송사를 막는다. 우리는 오늘도 육신을 입고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연약성이있고, 여전히 실수를 범할 수 있다 . 사탄은 우리 허물과 연약성을 지적하고 송사하고 공격한다. 그때 우리는 피의 효능을 선포해야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허물을 가지고 살지만 주께서 피흘리심으로 하나님이 만족하시었다」고 해야 한다. 우리자신의 연민에 빠지거나 사탄의 참소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혼의 생명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한다. 5. 영전의 목표 󰠆󰠏󰠏󰠏󰠏󰠏󰠏󰠏󰠏󰠏󰠏󰠏󰠏󰠏󰠏󰠏󰠏󰠏󰠏󰠏󰠏󰠏󰠏󰠏󰠏󰠏󰠏󰠏󰠏󰠏󰠏󰠏󰠏󰠏󰠏󰠏󰠏󰠏󰠏󰠏󰠏󰠏󰠏󰠏󰠏󰠏󰠏󰠏󰠏󰠏󰠏󰠏󰠏󰠏󰠏󰠏󰠏󰠏󰠏󰠏󰠏󰠏󰠏󰠏󰠈 󰠐 영전의 목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데 있다. 󰠐 󰠌󰠏󰠏󰠏󰠏󰠏󰠏󰠏󰠏󰠏󰠏󰠏󰠏󰠏󰠏󰠏󰠏󰠏󰠏󰠏󰠏󰠏󰠏󰠏󰠏󰠏󰠏󰠏󰠏󰠏󰠏󰠏󰠏󰠏󰠏󰠏󰠏󰠏󰠏󰠏󰠏󰠏󰠏󰠏󰠏󰠏󰠏󰠏󰠏󰠏󰠏󰠏󰠏󰠏󰠏󰠏󰠏󰠏󰠏󰠏󰠏󰠏󰠏󰠏󰠎 하나님은 우리가 이기는 자로서 대적을 처리하기를 원하신다(계2:26-27). 복음전파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것 뿐 아니라, 더욱 더 마귀를 쫓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성도를 권면하고 교회를 다스리는 것도 마귀를 몰아내고 왕적 지위를 찾기위함이다. 우리는 흔히 복음전파를 막는 것이 외부환경인줄 알기 쉬우나, 사실은 사탄의 방해임을 볼 수 있게 된다. 사람을 탈취하고, 주님사랑을 방해하며, 육신이나 세상으로 인간을 몰아넣는 것은 사탄과 흑암의 권세다. 계시록에 이기는 자가 하늘에 올라가 하늘에 전쟁이 일어남을 본다(계12:5-6). 이기는 자들은 하늘에 올라 가자 마자 사탄과 전쟁하여 사탄을 하늘에서 땅으로 쫓아내게 된다. 그런후 주님은 그들을 데리고 지상에 강림하시어 사탄을 내어 쫓아 무저갱에 보낸다(계20:1-3). 그때에 공중과 지상에 있는 흑암의 권세가 완전히 내어쫓기고 하늘과 땅에서 사탄의 자취를 볼 수 없게되며 이로써 하나님의 왕국이 이땅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이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게 된다(계20:4-6). 영전의 목표는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데 있다. 결 론 우리의 구속과 영적성장과 온전한 성결은 모두 이기는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가운데 들어있는 과정이다 개개인의 구원은 중생과 성결을 통하여 부활도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탈취당한 이땅을 회복하여 하나님나랄로 바쳐질 때 까지(고전15:24-28) 성도의 영적전쟁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니다(마6:13)」하는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가 성취될 것이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 2015-12-02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Jesus Korea Holiness Church)는 대한민국의 성결교 신앙을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이다. 본래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동일한 공동체였으나, 세계 교회 협의회 가입에 반대한 세력들을 주축으로 분열되었다. 역사 1907년 5월 2일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김상준과 정빈 두 사람이 카우만, 길보른과 함께 동경에서 귀국하여 전도활동을 준비하였다. 동양선교회 (OMS)의 지원으로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 염곡 또는 염동이라 불리는 종로 1가에서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 (Oriental Missionary Society Jesus Doctrine Mission Hall)이란 간판을 붙이고 번화한 길거리에 나가 큰 소리로 복음을 외치며 전도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시작이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12월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 특히, 그리스도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종말론적 교리인 재림교리가 일본국체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령에 의하여 교단이 강제 해산되고 많은 교역자와 신도들이 순교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1946년 교단을 재건하여 총회를 재조직하고 교단명을 ‘기독교조선성결교회’로 변경하였다. 이후 1949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교단명을 변경하였다. 하지만 1961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16대 교단총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세계 교회 협의회 (WCC) 가입 안건과 관련하여, 가입에 반대하는 교단 인사들이 총회에서 퇴장하여 “복음진리수호동지회”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부터 탈퇴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설립하게 되므로써 교단이 분열되었다. 신학교육기관으로는 경기도 안양시에 소재하는 성결대학교가 있으며, 교회신문인《성결신문》이 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라는 사중복음으로 교단의 신학적인 성격을 설명한다. 같이 보기 성결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성결대학교 성결신문 바깥 고리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 성결신문 성결대학교 분류: 대한민국의 개신교 1961년 설립
이명직 목사/ 2016-06-28
이명직 (목사) 이명직(李明稙, 일본식 이름: 牧野明稙, 1890년 12월 2일 ~ 1973년)은 1890년 경성부 죽첨정 삼정목에서 아버지 이승원(李承源)과 어머니 박계원(朴啓源)사이에서 2남중 장남으로 출생한 한국의 성결교 목사이다. 본관은 한산, 고려의 학자 이색의 18대손이다[1]. 목차 1 생애 2 사후 3 같이 보기 4 참고자료 5 각주 생애 한성부 출신으로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주전원 전무과 주사로 근무하던 숙부 이승태(李承泰)에게서 키워졌다. 이명직은 황성기독청년회(서울 Y.M.C.A.)에서 공부하며 집안 문중의 할아버지벌 월남 이상재선생과 또 같은 항열에 같은 이름을 쓰는 구한말과 대한제국시절 내장원경과 궁내부특진관을 지낸 성우 이명직 대감과 직․간접적인 만남과 교류가 있었다. 월남 이상재선생에게서는 개신교 사상을 배웠고 이명직 대감에게서는 해외유학의 필요성을 감화받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성서학원에서 수학했다.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유교 가문이었으나 월남 이상재선생과 같은 선각자의 인도로 청년 시절 자발적으로 개신교에 입문했다. 1922년 도쿄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전도사로 일했고, 1924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3년 조선성결교회 총회가 조직되면서 초대와 이듬해 제2회, 1938년과 1939년 제6회,제7회 등 네차례에 걸쳐 총회장을 역임했다.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에는 신사참배 강요에 협조한 일을 비롯하여 친일 행적이 있다. 이명직은 마태복음의 포도원 비유를 들어 일본의 조선 합병을 정당화하였으며, 1940년 활천에 실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이상(大理想)〉이라는 글에서는 일본 건국이념인 팔굉일우가 성서의 가르침과 부합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2] 1938년 개신교에서 각 교단 대표들이 솔선해 신사참배를 할 때, 성결교에서는 이명직이 대표로서 감리교의 양주삼, 장로교의 홍택기 등과 함께 일본 신사를 방문해 신사참배를 했다. 1943년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르러 일제는 강압적으로 성결교단을 해산하도록 했는데, 이때 이명직을 필두로 한 성결교 지도자 7인이 성서가 그 기본을 유대 사상에 두어 국체에 반하는 치명적 결함이 있으므로 성서 자체로부터 이탈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내용의 성결교회 해체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명직은 교단 행정 외에도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 교수(1916년)와 원장(1935년), 경성신학교 교장(1940년), 서울신학교 교장(1951년), 서울신학대학 초대학장(1959년), 성결교신학교 명예교장(1962년)을 역임하면서 후진을 많이 양성했다. 1965년 서울신학대학 명예학장에 추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1922년부터 교단 기관지인 《활천》 주간을 맡았으며, 성결신학의 핵심인 사중복음과 성결론을 체계화하고 많은 저술도 남겨 성결교단의 신학적 토대를 놓았다는 평을 듣는다. 사후 이명직은 '성결의 아버지', '성결교회의 사부'로 불릴 만큼 대한민국 성결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며 존경을 받고 있다. '성결교회의 사도 바울'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3]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2005년 예비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개신교 인물 47명 중 성결교단에서는 이명직과 박현명 두 사람이 선정되어 오랫동안 잠복해 왔던 신사참배 및 친일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이에 대해 교단 측은 국가보다 신을 중심으로 삼는 이명직의 "신중심적 국가관"을 이유로 들거나 그의 내면에 "하나님만 아시는 심적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교단을 이끌다 보니 신사참배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동정론 등을 내놓은 적이 있다. 같이 보기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서울신학대학교 참고자료 최인식 (2002년 10월 28일). “이명직 목사의 생애: 해방 이전까지”. 성결신학연구소 최인식 자료실. 2008년 1월 6일에 확인함. 김근혜 기자 (2006년 4월 26일). ““이명직 목사의 윤리는 곧 성결교회의 윤리” - 친일 논란 가운데, 서울신대 박문수 교수 이명직 목사 윤리연구 발표”. 크리스천투데이. 2008년 1월 27일에 확인함. 김형근 (2002년 4월 6일). “이명직목사의 삶과 신학 - 교단 신학적 기틀 정립한 ‘큰 스승’”. 디지털성결. 2008년 1월 27일에 확인함. 허명섭 (2005년 10월 1일). “특집::이명직 박현명 바로 세우기 - 특집 1 이명직 순응과 저항의 두 얼굴”. 활천. 2008년 1월 27일에 확인함. 각주 1. 성결교 이명직 목사에 대한 연구 2. 임종국 (편) (1987년 8월). 《친일논설선집》. 서울: 실천문학사. 3. 임운규 (2007년 5월 3일). “한국 성결교회의 사부(師父) 이명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2008년 1월 27일에 확인함. 분류: 1890년 태어남 1973년 죽음 일제 강점기의 목회자 일제 강점기의 신학자 대한민국의 목회자 대한민국의 개신교 신학자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서울특별시 출신 서울신학대학교
이명직 목사의 윤리는 곧 성결교회의 윤리/ 2006-04-26
이명직 목사의 윤리는 곧 성결교회의 윤리 친일 논란 가운데, 서울신대 박문수 교수 이명직 목사 윤리연구 발표 성결의 아버지 故 이명직 목사 성결의 아버지 故 이명직 목사의 윤리사상에 대한 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성결교를 한국에 확산시켰고 성결교회 초대총회장, 서울신대 초대학장을 지낸 그는 이른바 성결교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의 생애와 신학사상에 대한 연구는 무궁한 반면, 그의 윤리사상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 때문이다. 지난 25일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서울신대 박문수 교수는 그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이명직 목사의 윤리사상’이라는 논문을 발표, 교계와 신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박 교수는 “이명직 목사의 윤리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 성결교회의 윤리사상을 정립하는 것과 같다”며 “물론 그에게 친일이라는 부끄러운 과오가 있지만, 그의 윤리사상을 연구해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비판할 점은 비판, 바른 성결교의 윤리적 전통을 확립해 나가길 원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박 교수는 “이명직 목사는 외적 성결보다는 내적 성결에, 곧 사회적 성결보다는 개인적 성결에 초점을 두어 그의 윤리사상을 전개했다”며 “그는 참된 경건이란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에 가능한 일이며, 더 나아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신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고 보았다”고 발제했다. 또한 이명직 목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완전한 생활인 금욕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유행이나 지나친 사치, 경쟁의식을 국가적인 도덕성의 위기로 보았다. 이명직 목사의 윤리사상에 있어서 독특한 점은 바로 유교의 윤리규범, 즉 삼강오륜을 기독교신앙에 접목했다는 것이다. 그 까닭에 그의 윤리사상에는 청교도적이고 유교적인 윤리의 엄격성이 존재한다. 이와 함께 이명직 목사는 성경말씀에 근거해 부정적인 재물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의 설교 ‘롯의 처를 생각하라’에서는 물질만능주의 신앙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경제윤리, 혹은 기업윤리에 있어서 정직이 기초가 되야함을 역설했다. 또한 성에 대해 금욕적이고 부정적이다. 그는 모든 도덕적 불의가 인간의 본능적이고 육체적인 정욕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한편, 박 교수는 “이명직 목사는 국가에 대해서는 신중심적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히며 “따라서 이명직 목사는 일제의 강점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신자는 황국신민의 일원이요, 동시에 기독교인이라는 이중적 신분에 대해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조심스럽게 발제했다. 마지막으로 박 교수는 “그가 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토설하지 못하고, 친일행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의 연약함에 기인한다고 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가 그의 내면에 들어가 묻지 않고는 평가할 수 없는, 하나님만 아시는 심적 고통이 그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이명직 목사를 변호했다. 김근혜 기자(크리스천투데이)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강근환 교수목사/ 2000-04-07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강근환 목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이성봉 목사는 총회로부터 전국 부흥사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된 1938년부터 1일 1교회 순회 집회를 마치게 된 1963년까지 30년에 가까운 긴 세월에 걸쳐 국내외적으로 방방곡곡을 누비며 전천후적인 수많은 대소 부흥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러면 이와 같은 그의 위대한 부흥사역의 특징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를 대중적 보편성, 구원의 확신성, 희생적 헌신성 등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대중적 보편성 이성봉 목사 부흥 사역의 특징의 하나는 어느 특정적인 제한이 없는 대중적 보편성이다. 그의 부흥사역은 그 대상에 있어서 양적, 지역적, 교파적, 국가적, 그리고 성적, 연령적, 심지어 시기적인 면에서 전혀 차별이나 제한됨이 없다. 다시 말해서 양적으로 집회의 규모가 크고 작든, 지역적으로 시골, 도시, 산촌, 도서 어디든, 교파적으로 장, 감, 성 어느 교회든, 국가적으로 우리 한국, 만주, 일본, 미국 어느 나라든, 성적으로나 연령적으로 또한 계급적으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그리고 시기적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이나 낮이나 밤이나, 대우가 좋든 나쁘든 아무런 관계없이 그는 부흥사역을 하였던 것이다. 그를 대하였던 모든 사람은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그의 말씨는 쉽고 편하고 친근감이 있다. 그리고 서민적이고 대중적이다. 그는 설교할 때 예화를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그 예화가 옛날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쉽고 편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건들이다. 그가 부흥집회를 할 때 주로 사용하였던 설교나 성경공부의 자료는 성경을 제외하고는 『천로역정 강화』와 『요나서 강화』 그리고 『명심도 강화』였다. 그는 이러한 강화들을 아주 평이한 서민적인 용어와 예화, 그리고 그림들을 통하여 설명함으로써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무리 없이 접근시켰다. 그는 또한 자신이 친히 작사한 노래를 비롯하여 많은 찬송가를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나팔을 불며 일찍이 시청각 교육방법을 다 동원하여 오늘의 코미디언 못지 않은 온갖 제스처를 다 써가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필자에게도 그분의 그러한 영상이 오늘까지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한결같이 대하고 사랑하였다. 그는 서민 대중들의 생활 사정을 잘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인생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동참하여 애환을 같이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때로는 위로도 하고 때로는 호되게 꾸짖기도 하였다. 일제치하, 6.25 동란 시절 혹은 국내에서 혹은 이국 땅 만주에서, 혹은 일선 군인들에게 혹은 버림받은 문둥이촌 나병환자들에게 그는 외치고 어루만지고 꾸짖고 위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가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좋은 때나 어려운 때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구원의 확신성 이성봉 목사가 외쳤던 메시지의 주 내용은 죄와 구원이요, 죄의 결과는 무서운 형벌이고 구원의 결과는 기쁨과 평안이라는 확신이다. 그는 구원의 확신에 철저하였다. 그 확신은 그의 철저한 회개의 체험에 기인하였다. 그는 갑작스런 병(골막염)으로 고통당하던 21세 때 회개를 하느라고 했지만 미흡했던 것을 신학교에서 부흥회를 할 때 철두철미하게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한 결과 한없이 기쁘고 즐거웠던 체험을 하였다. 수원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굳은 믿음에 의지하여 열병에서 치유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의 신유의 은사에 대한 믿음도 구원의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철두철미한 회개를 통한 구원의 확신에 그의 메시지의 중점을 두고 부흥사역을 이끌어 갔다. 이러한 점이 요즈음의 ‘무조건 복 받으라’는 축복 위주의 집회와 구별되는 점이라 할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부흥집회가 마친 다음에는 회개의 열매로 말미암은 개개인의 변화와 함께 그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변화하게 되었다. 정인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정인교,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69).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맹렬히 타올랐던 집회, 회개의 눈물이 바다를 이루는 집회, 문제가 해결되어 기쁨과 희망, 평강의 강이 넘쳐나는 집회, 삶의 변화가 가시적으로 증거되는 집회, 심령을 쪼개는 능력의 말씀과 불치의 환자들이 고침받는 신유가 동반된 집회! 이것이 부흥 사역의 거장 이성봉 목사가 이끈 부흥의 특징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이성봉 목사가 부흥집회를 할 때 많이 사용하였던 천로역정 강화와 명심도 강화 그리고 요나서 강화 등이 모두 죄로부터의 구원의 확신에 초점을 두고 있다. 천로역정 강화에서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가는 과정, 요나서 강화에서 요나의 불순종의 결과와 회개의 결과, 그리고 그 변화 과정, 명심도 강화에서 구원받기 전후의 인간 심정의 변화 과정 등등을 통하여 일관되게 외치는 메시지는 “죄의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영생의 복락”(롬 6:23)이요, 그러므로 “회개하라, 죄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다”라는 확신이다. 희생적인 헌신성 이성봉 목사의 부흥 사역은 일생 동안 희생적인 헌신의 삶이었다. 그의 이러한 희생적인 삶은 부흥 사역에 들어가기에 앞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사역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는 감독제하의 파송제가 되어 초임지부터 수원교회 개척에 임명되었다. 부임 후 열심히 섬긴 결과, 교인도 모으고 성전도 건축하였는데 총회에서 목사 안수는 주지 않고, 대신 멀리 목포교회로 가라는 전임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목사는 이에 묵묵히 순종하였다. 그때의 심경을 이 목사는 다음과 같이 그의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다(이성봉,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42). “그리고 막상 수원교회를 떠나자니 수년간 갖은 어려움을 다 겪어가면서 세워 놓은 아름다운 성전을 남에게 맡기고, 약하고 어려운 셋방살이 교회로 가야 하니 육정으로 생각할 때 기가 막혀 안 가려고 많이 발버둥도 쳤다. 그렇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곧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든 교회를 떠났다.” 그 후 목포교회에서도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롭게 6년간을 목회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좋았는데, 신의주로 파송받게 되었고, 신의주교회에서도 목회에 크게 승리하여 대성전까지 건축하였다. 그런데 1937년도 총회에서 갑작스럽게 전국 부흥사로 임명을 받게 되자 그는 아쉬움을 머금은 채 새 예배당 헌당식을 한 지 사흘 만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헌신한 후 부모처자를 불고(不顧)한 희생적인 생활을 하였다. 1941년에 만주 봉천중앙교회에 부임하였다가 얼마 후에 가족들을 모두 고향으로 보내고 단독으로 남아 해방될 때까지 5년간을 동만, 남만, 북만 방방곡곡에 교회를 찾아 유리하는 우리 동포를 찾아 전도하였다. 만주에서 전도집회를 인도하던 중 고국에 계신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도 가지 못하여, 그에게는 특별한 존재인 어머님의 임종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순회 집회 중에 병이 나서 움직이지 못할 지경에도 들것에 들려 다니면서 집회하였다. “돌아가셔도 우리 교회에 가서 돌아가셔야 한다”, “우리 교회 집회는 조금도 연기할 수 없다”는 교회들의 반강제적인 성화에 못 이겨 끌려다녔다. 아울러 대우나 보상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그의 부흥 사역이 오늘날의 부흥회와 구별되는 점이다. 오로지 영혼 구원만을 위한 복음 선포였다. 교통 수단도 불편하여 때로는 걷기도 하고, 때로는 달구지를 타기도 하고, 때로는 들것에 실리기도 하였고, 잠자리, 식사 가리지 않고 가정을 떠나 동서남북 국내외를 떠돌며 순회하였다. 참으로 그에게는 가정 생활다운 생활이 전연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의 부흥 사역은 자신만의 희생이 아니라 가정의 희생이요, 온 가족의 희생이었다. 그의 일평생을 통한 부흥 사역은 한마디로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라는 자서전의 제목처럼 참으로 희생적이고도 헌신적 삶이었다.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특집 좌담회/ 2000-04-07
특집 좌담회 일 시 : 2000년 4월 7일 장 소 : 성결회관 회의실 참석자 : 정운상 목사, 이봉성 목사, 이만신 목사, 송기식 목사, 이정익 목사 사 회 : 백수복 목사 기 록 : 홍준수 목사 사회 : 바쁘신 가운데서도 귀한 시간 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모여 함께 나누려고 하는 얘기는 이성봉 목사님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금년 7월 4일이면 이 목사님의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를 기념하면서, 이성봉 목사님과 관련된 얘기들, 즉 한 성결인으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생활을 비롯하여, 모범 목회자로서, 그리고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의 무디 같은 부흥강사로서 모습에 관한 얘기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직접 경험하신 얘기를 중심으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결인의 본이 된 생활 정운상 : 이성봉 목사님이 휴전 직후 제주 집회에 가셨을 때, 주위 사람들이, 목사님이 배를 타고 오시다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가실 때는 좀 편하게 가시라고, 수소문 끝에 군용기를 대절했습니다. 그 때 군관계자들이 이성봉 목사님에게 군복 착용을 요구했습니다. 민간복으로는 군용기를 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죠. 그런데 목사님은 극구 민간복을 고집하셨습니다. 비행기를 못 타는 한이 있어도 목사가 군인처럼 위장하는 편법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군용기 이용은 무산되었고, 목사님은 아무런 불평없이, 아주 기쁜 마음으로 16시간의 배를 타고 돌아오셨다는 얘기가 기억이 납니다. 또 기차를 타실 때, 표가 매진되어 입석밖에 없었는데, 어느 분이 암표를 하나 구해 왔습니다. 목사님은 이를 끝내 사양하시고 입석표로 출발하셨습니다. 목사가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편리를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이정익 : 딸 이의숙 권사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버지는 정말 가정에 등한시한다 할 정도로 인색하셨답니다. 옷을 제대로 사 입어 본 기억이 없다 할 정도였는데, 반면 신학생과 어려운 교회를 돕는 일에는 돈을 뭉턱뭉턱 내놓으셨다 합니다. 그래서 이 권사는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가겠다’(?)고 결심을 했다더군요. 그런 아쉬움을 가지고 자란 이 권사이지만, 지금은 그 아버님이 하시던 대로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을 돕는 줄로 압니다. 이만신 : 증동리교회에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당시 치리목사이셨던 이성봉 목사님이 어머니에게 “예수 믿으려면 그런 고난을 참아야 한다”며 격려하시고, 또 많은 신자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도 조동례(어머니) 성도처럼 믿어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또 제가 목포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이성봉 목사님과 가까이 살았는데, 가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목사님은 저를 부르시고는, “어이, 이군 내가 반주할 테니 찬송 불러. 쓰면 호랑이고 안 쓰면 쥐새끼가 되는 법이야” 하셨습니다. 이봉성 : 이 목사님은 난치의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믿음으로 치유받고 회심을 경험한 후에, 철저한 체험을 토대로 한 진실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렵지만, 한마디로 정열적인 사고, 깊은 헌신, 남을 포용하는 관용이 남다르셨던 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정운상 : 옳습니다. 남에게는 관용을 베푸셨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목사가 다방에 가면 “목회하다 보면 사람 만나야 되니, 그럴 수도 있지” 하시면서도, 정작 당신은 출입을 안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뿐 아니라, 목사님은 평생을 주먹을 쥐고 다니셨습니다. 주님의 손을 붙들고 말입니다. 그리고 강단에서 인사하실 때 세 손가락을 내 세우시면서 인사하십니다. ‘하나님 제일, 예수 중심, 성령충만’이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송기식 : 이봉성 목사님은 28세 때 수원교회를 개척하셨는데, 1년이 조금 지나자 400명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같이 사역하던 이혜숙 전도사가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교단이 오해를 하고, 신자들도 많이 떨어졌는데, 목사님은 이에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 목사님은 그 때 참기 어려운 것을 기도하면서 견디셨다더군요. 이후 결국 오해가 풀렸고, 신자들도 다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당시로서는 큰 교회가 된 수원교회를 전도사가 주임할 수 있느냐, 목사가 파송돼야 한다는 교단의 입장이 정해지고, 이 목사님은 목포 북교동으로 가야만 했을 때도 목사님은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정운상 : 목사님이 소천되실 때의 얘깁니다. “목사님!” “정 목사가 왔습니다.”그래도 목사님은 아무 반응이 없으시다가, 제가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목사님 운상이가 왔습니다” 그랬더니 “어! 운상이가 왔어” 하시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 몇 말씀하시다, “말로써 못하면 죽음으로!”라고 외치시면서 자리에서 쓰러지시기에 부축해 드리니 그 시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사모님께서 “목사님 임종이신가 보다. 정 목사가 기도하라” 하시어 저는 임종기도를 드렸습니다. 1965년 8월 2일 오전 11시였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유가족들(사모님, 세 따님과 사위)은, 목사님이 혼수상태에서, 특별히 “운상이가 왔습니다”에 깨어나신 것은 평소에 목사님이 정 목사를 ‘아들로 생각하신 것이다’로 결론지어, 이씨(李氏) 가문에 정씨(鄭氏)가 아들 되어 아내와 함께 상복이 입혀지고 출상 때에 상여 뒤에 따님, 사위들보다 앞자리(상제자리)에서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삶 자체가 귀감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그 어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며 결정해 왔습니다. 목회자로서 이봉성 : 이 목사님이 목포에서 목회하실 때, 하루는 최병인이라는 자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그 일대에서 알아주는 ‘주먹’이었는데, 그가 그날 설교를 듣고 가더니 다음에 또 올 때 친구를 데려오기까지 하더라구요. 그리고 설교 후 결신 초청시에 본인 스스로 앞으로 나왔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집사가 되었고, 교회를 지을 때 자기 집을 내놓기까지(이것이 동명교회의 시작) 헌신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목회는 사람을 바꾸어놓는 목회였습니다. 송기식 : 수원교회가 한참 부흥 중이었던 1929년, 이성봉 목사님(당시 전도사)은 활천 1월호 ‘축성탄하신년’(祝聖誕賀新年) 광고란에 교회 광고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교회를 개척한 일꾼들의 명단(33명)이 실려 있습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일단 다른 교회 광고에 비해 큰 지면을 차지했고, 시각 효과를 내기 위하여 남자는 한문으로, 여자는 한글로 쓴 것을 볼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목사님은 부활주일에 개척예배를 드렸고, 성탄절에 헌당식을 거행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성탄절은 불신자들도 축절(祝節)인지라 이날에 교회당을 헌당하고, 교단 본부의 내빈들과 동리 주민들까지 초청하여 큰 잔치가 되게 함으로, 전도와 교회홍보의 기회를 삼은 것이죠.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교회의 부속품을 기부하는 일도 있었으니, 그는 지역사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홍보감각이 있는 목회였습니다. 이봉성 : 제가 개인적으로 목사님께 “목회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여쭈었더니, 목사님이 “돈, 여자, 겸손”이라고 짧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돈과 여자를 멀리하고, 끝까지 겸손한 자가 승리한다는 말씀이겠지요. 반대로 이 부분에서 실패하면 그 동안 쌓아놓은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이 목사님 당신이 스스로 그 얘기에 걸맞는 본이 되어 사셨다는 점입니다. 부흥강사로서 이만신 : 이 목사님이 부흥회 때마다 빼놓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흠과 티와 주름잡힘 없는 수정같이 맑은 마음 예수의 마음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 유명한 기도입니다. 송기식 : 목사님의 부흥 설교를 가만히 보면, 그 핵심은 회개에 있습니다. 이는 그 분의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설교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내용뿐 아니라, 천로역정을 주제로 설교하실 때 목사님은 제스처라든가 시청각적인 자료를 총동원하여, 당시 성도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는 설교를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운상 : 결혼식장 부흥회도 빼놓을 수 없는 집회였습니다. 1960년 3월 20일 막내따님 의숙 양과 신랑 김동수 군(현 신촌교회 장로, 한국도자기 회장)의 결혼식이 청주 서문교회에서 배문준 목사님 주례로 거행되었는데, 양가 대표 인사시간에 이 목사님이 나오셔서, “바쁘신 중 왕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일단 인사하신 후, 장장 40분 동안 전도 강연을 펼치셨습니다. “아무리 부흥목사님이시지만 딸 결혼식에서 그러시다니 너무 하신 것 아니냐”고 했더니, “물실호기(勿失好機)! 그 충북도지사, 청주시장, 청주 출신 국회의원, 은행가, 기업가 등 수백 명이 내 부흥회에 참석할 기회가 없을 것이고, 나 또한 한 분씩 찾아가 말씀 전할 기회도 없을 것이고 하니, 기회는 바로 이때이다 싶어 그랬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만신 : 그 어르신의 부흥강사로서의 자질을 보면, 첫째 인품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성대가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노래도 많이 지으셨습니다. 또 시적인 소질도 있으셨구요. 허사가를 부르실 때 보면, 구구절절 감정이 그렇게 탁월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제스처, 다른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운 부흥사적인 연출 등을 생각해 보면, 목사님은 당시 하나님이 내신 부흥사로 생각됩니다. 이봉성 : 군목시절, 사병 정신교육 시간에 제가 목사님을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장시간에 걸친 설교 후, 목사님은 허사가로 마지막을 장식하셨는데, 그 분의 독특한 제스처와 음성은 모든 장병을 사로잡았습니다.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더라구요. 목사님은 기회를 놓칠 새라 바로 구원 초청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3,000명이나 되는 모든 장병이 한 손도 아니고 두 손을 번쩍 들더군요. 그 때 그 감동적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송기식 : 가는 곳마다 그렇게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성봉 목사님이 신비주의로 가지 않은 것은 또 하나의 대단한 면모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높아지다 보면 교만해지기 십상인데 말입니다. 사회 : 장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활 천 / 2000년 7월호 / (통권 제560호) / 발행일/2000.7.1 연구논문 1. 내가 본 이성봉 목사 2. 이성봉 목사의 부흥운동 재조명 3.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해석 4. 이성봉 목사 부흥사역의 특징 5. 목회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6. 이야기 신학자로서의 이성봉 목사 7. 이성봉 목사의 생애와 설교 8. 이성봉 설교의 수사학 9. 이성봉의 성서해석학 수립을 위한 하나의 전진 10. 부흥의 희망과 해석학적 현실이해 좌 담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 기념 좌담회
이성봉 목사의 부흥 운동 재조명(李聖鳳 牧師의 復興運動 再照明)/ 민경배 교수/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강연회 / 2000-04-07
이성봉 목사의 부흥 운동 재조명(李聖鳳 牧師의 復興運動 再照明)/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강연회 기조강연)   민경배(閔庚培)(전 연세대 교수) 1. 서론 이성봉목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훌륭한 부흥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연구가 그 어간 많이 있었지만 이번 기회에 초교파적인 공개 강연의 성격으로 그의 신학과 부흥운동을 다시 밝히게 된 것은 한국교회 전체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 치가 그만큼 뚜렷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설교나 부흥운동에 대한 자료가 총서 형식으로 다섯 권 간행된 것 이 있으나, 자신의 원고에서 정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육성 전달에 미비가 눈에 띄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만한 정도의 자료 보관은 한국교회에서는 손꼽힐 만한 것이라 여긴다. 그는 한국이 일제 치하 그리고 다시 6·25 전란의 가시밭길을 가던 시련기에 이 민족의 구원과 교회의 사역 그리고 위로와 소망을 선포하기 위하여서 보내어진 하 나님의 사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 날의 아픔을 견딜 수 있는 복음의 사역을 다하고 간 것이었다. 2. 이성봉목사의 역사적 위치 이성봉목사는 한국교회 부흥사(復興史)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시련기 곧 일제 말기의 고난과 해방, 6·25를 잇는 형극(荊棘)의 시대에 주로 활동한 점이 그 하나요, 교회부흥운동을 전국적으로 수행 하면서도 주로 작은 교회들, 그리고 특수 집단, 곧 군진(軍陳)이나 경찰서, 구치소 및 한센병원이나 양로원과 같은 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이 그 다른 하나이다. 사 실 그는 한센병원 교회에는 전국 어디나 가보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메시지는 회개(悔改)와 거기서 얻는 깊은 감격에 중점을 둔 아주 소 박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그의 삶의 골수에서 솟아난 산 경험의 감격으로 차 있어 서 그의 설교에 자작 찬송이 그렇게 많이 불려져 있었다는 것이 달리 눈에 띄인다. 그에게서 그 시대적 배경의 살벌함에도 불구하고 말세론적 비관이나 그 신경과민의 징후가 전혀 없이 경세적(經世的) 일상 생활의 정상을 전제로 수행된 곳에, 한국교 회 전체를 망라하는 민족 신앙의 한 현상을 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런 것이 그 에게 높이 빛나는 건전한 신앙 부흥의 요소로 회고된다. 그는 가난과 압제의 민족 교회를 골방과 은둔의 개인주의적 신앙에로 인도하는 모든 가능한 시험을 이기게 하였으며, 오히려 청청 백일의 광명한 신앙으로 이끈, 보기 드문 한국교회 전진 신 학의 위대한 전위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는 한국교회가 부흥의 물결에 휩 쌓이던 시대의 큰 흐름 안에 있으면서도, 묘 하게도 그의 소속교회인 성결교회나 다른 교단 인사들과의 접촉이 그 자신의 글에 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그런 비교적 외로운 길을 간 것이 눈 뜨인다. 그것은 그가 달리 이들과의 신앙적 격리를 의식하였다든가, 아니면 기존 교회에 대한 신령주의 적 비판의식 때문에 그렇다는, 그런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는 다만 스스로 한 국교회의 부흥을 위하여서 따로이 하나님이 사역하신다는 확신에 따라 외로운 길을 달려간 것이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긴 부흥운동의 커다란 산맥에 합류하여 있어서 우리 교회 전체 부흥운동과의 공통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길선주(吉善宙), 김익두(金 益斗), 이용도(李龍道), 정남수(鄭南洙), 그리고 이성봉목사로 이어지는, 거봉(巨峰)의 하나로 우뚝 솟아 있다. 그것은 바로 성서 중심성, 기도의 능력에 대한 소박한 신 뢰, 그리고 능력의 복음 전파 언어들, 이런 것들이었다.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언어 에는 조리(條理)가 그 자랑이 아니었다. 그 날카롭고도 때로 위협적인 예언자적 선 포, 일반 백성들의 거리의 구수한 토속적인 언어, 그리고 찬송과 기도를 설교 도중 에 엇섞는 굴곡과 상하의 리듬 편성, 그런 것들이 넘쳤다. 이런 요소들이 한국교회 목회에 그 예배 형식으로 굳혀진 사실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한국교회 신앙 형태 구성에서 이들이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였다. 한국 교회가 부흥회적인 교회 형태로 굳혀진 까닭이 여기 있었다. 3. 이성봉의 생애와 그 신학의 형성 3.1. 인간의 신학 이성봉목사는 스스로 그 가문과 그 집안에 대하여 솔직하게 그 어려웠던 일들과 아팠던 일들을 그대로 털어놓아 숨김이 하나도 없다. 그 가문도 \\\"이렇다 할 가문이 못된다\\\"는 회고를 한다. 그리고 그 가정의 불행이 부모님들에게 있었고, 그들 사이 에 애정 없어 정이나 의가 없이 산 날들을 글로 써서 천하에 알린다. 그래 그 어머 니의 자살 기도 두 번이 가져다 준 마음의 상처를 그는 일생 가슴에 삭이고 살게 된다. 더구나 그 집안의 경제적 궁핍은 \\\"너무 빈곤하여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 을 하였다\\\"고 밝힌다. 그런 질고와 불행 그리고 환난의 집안에서 그는 1900년 7월 4일의 평안남도 강동(江東)에서 태어난다. 그가 이러한 가정의 불행을 대서특필하는 까닭이 있었다. 1906년부터 그의 집안 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리고 거기 일대 변화가 일어나 그 가정에 \\\"기 쁨이 충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를 그 가문에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평양 근처의 중화(中和) 에 이사하고, 그리고 거기서 40리(里 -약 1,600 킬로 메타) 떨어져 있는 평양의 선 교리 감리교회에 주일이면 새벽부터 걸어서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곤 하였 다. 주일이면 우리 어머니는 닭 울기 전에 일어나서 새벽 조반을 지어 우리를 먹 이고, 동생은 업고 나는 걸어서 혹은 아버지의 등에 업히기도 하며 그 머나먼 40 리 길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 집안은 평화가 깃들고 아주 단란한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기독 교 신앙의 거대한 변화의 힘을 그는 이렇게 실제로 몸소 경험하고 그 변혁력에 대 한 믿음을 확고히 가질 수가 있었다. 이런 실존적 체험의 길을 거치지 아니한 신앙 의 호소력은 그에게서 일생을 한 순간도 예외 없이 복음의 압도하는 힘을 선포하는 강력한 복음의 선포자로 살아가게 한 근원과 배경이 되었고, 따라서 그의 부흥운동 은 실로 자발적인, 멈출 수 없는 생의 길이 된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간곡한 권고와 교육으로 기도 생활에 몸을 던지고 아울러 성경 읽기에 전심하여 여섯 살의 나이에 신약성서 일독(一讀)의 기록을 세운다. 7세 때 에는 교회에서 공중 기도도 하고, 성탄절 같은 때에는 독창이나 연설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였지만, 신앙과 인간의 문제는 경화된 것이 아니다. 그는 어린이로서의 어린이다움을 왜곡하고 과장하여 신앙의 완벽을 말한 일이 없었 다. 그는 어린이로서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이다운 장난기라든 가 자유분망 그리고 유아 소년기의 활달함을 그대로 기록에 남겼다. 아버지의 돈지 갑을 엿보았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그는 기록에 남긴다. 이렇게 해서 그의 소박한 진실이 들어 나게 하여, 신앙이 우리 일상의 생활이나 인간성의 표현과 격 리된, 그래서 범상한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실체로 저 멀리 세워두는 잘못을 저지르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그의 복음의 핵심은 완전과 성결의 결백이 아니었다. 죄 없이 맑은 것, 그것이 그의 관심이 아니었다 진실, 그 회개의 자세가 중요하였다. 그의 한국교회 사상의 특이하교도 고귀한 공헌이 바로 여기 있었다. 그는 죄의 회개의 축복과 기 독교성을 대서특필 계속 반복한다. 심지어 죄 없음을 외치지 아니한다. 죄의 참된 회개, 그것을 그는 일관되게 외치다가 간 것이다. 회개가 천국 가는 길인 것이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 가는 것입 니다. 그의 이러한 신학에는 인류가 본래 원죄(原罪)에 얽매어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 다.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아담이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로 양심이 무뎌지고 죄로써 품성이 나빠져서 그대로 하나님을 떠났으며,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좋은 의식을 잊어 버렸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고, 이것은 타락이전설(Supra-lapsarianism)의 오류를 극복하는 그의 웅대한 신학이다. 이런 신학은 성결교의 가능한 신학적 완전 주의를 사전 격리하는 그의 자생적 확신인데, 물론 그것은 그의 철저한 성서적 신 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성봉목사의 모친은 김익두(金益斗) 목사와의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 천(信川)에서 목회하던 김익두 목사의 청빙으로 그 곳 경신소학교의 교원으로 가서 3년 가량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사뭇 지적(知的)이고도 신실한 여자였던 것으로 믿 어진다. 이성봉목사 역시 그 학교를 1914년에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그는 몹시 몸이 약하였고 폐지스토마오 고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김익두목사와의 신앙적 인연이 굳혀진 것이다. 김익두목사는 대단한 설교 가로 이성봉목사가 어린 나이인데도 그와 같은 설교가가 되었으면 하는 꿈을 가지 게 한 분이었다. 한국교회는 당시 김익두목사의 부흥운동에 다들 크게 감동을 받고 있었는데, 김익두목사는 실로 한국교회의 세기적 발전을 실현시킨 놀라운 성령 역 사의 부흥 목사였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이성봉목사에게서 그 부흥운동의 골격 과 메시지가 한국교회 전통을 이룬 김익두목사의 부흥운동과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이성봉목사에게 영향을 미친 다른 한 분은 이명직(李明稙)목사님이다. 성서학원 에 입하고 나서는 줄곳 그의 강의와 설교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 집의 가난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실로 형언하기 힘든 것이었는데 한국 인구 거반이 반영구적인 기아상태에서 헤매던 날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의 인구 구도는 농민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다만 21%만이 자작농이었다. 하지만 가난은 그 자신의 것이었다. 나는 자살하려는 결심까지 가지고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진 목숨이라 죽지 못하고 다시 살아나 할 수 없이 산곡에 틀어 박혀 일을 하며, 나무를 해서 30리 되는 평양에 가져다가 팔기도 하고 실과를 달구지에 싣고 밤새워 평양에 들어가 팔기도 하였습니다. 점심을 굶고 저녁 굶기는 일쑤였습니다. 실과 판 동 으로 좁쌀을 사 가지고 와서 죽을 쑤어 먹는, 말할 수 없이 가난한 생활을 하였 던 것입니다. 그의 아픔이 폐부에 배여 움솟는 그의 메시지에 동감과 공명으로 가슴을 연 겨 레가 얼마나 많았으랴 하는 생각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그의 청년 시절은 스스로도 회고하고 싶지 아니하는 일들로 얼룩지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죄인의 괴수\\\", \\\"알 부랑자\\\", \\\"말할 수 없이 타락한 인간\\\", \\\"마귀 의 꾐에 빠진 난봉생활\\\"이라 고백하고 있었다. \\\"젊은 놈이 어떻게 자유 없는 종교 생활의 구속에서 살 것이냐\\\" 하면서 신앙은 40새 이후에 해도 된다는 말로 그 어머 니를 괴롭히고 있었다. 우리는 이성봉목사의 자서전에서 그의 젊은 날의 방황을 어거스틴에게서 보는 듯하다. 19세 때의 결혼이 그를 돌이키지를 못하였다. \\\"결혼생활이 즐겁지가 아니하 였다.\\\" 아내도 처음에는 참다가 \\\"과격한 성격이 생겨\\\"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나는 평생 달콤한 부부의 애정을 모르고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라는 그의 회고에 그의 장차의 전국 순회의 한 가닥 분명한 단서가 잡힌다. 나도 또한 가정에 쾌락이 있었다면 지금같이 이렇게 널리 돌아다니면서 주의 일을 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후에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그의 나이 스물 한 살에 엄청난 변화가 있게 된다. 1920년 6월 24일의 일이 다. 주일날인데도 평양에 가서 장사한다고 실과를 따 가지고 간 때의 일이다. 그 날 밤 갑자기 오른쪽 넓적 다리가 쑤시기 시작하고 그것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3 년간을 고생하게 된다. 없는 살림에 논밭 다 팔게 되고 죽음의 공포가 무섭게 그에 게 닥쳐 들었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 주십시오. 이제야 깨달았나이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이 몸을 주께 마치고 이 사실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또한 나의 뒤로 오는 후 배 청년들에게, 이것을 증거하겠나이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섭리를 전하겠 나이다. 예수를 증거하겠나이다. 그는 이제 성경이 그렇게 꿀보다 단 것을 알기 시작한다. 한데 그 병이 3년을 끌 었다. 그는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그는 가냘프지만 독립운동 단체 에 가담하여 조국을 위해 싸울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발각되어서 여 럿이 연행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한데 이 긴 와병(臥病)으로 그는 이 옥고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3.2. 회개의 신학 그는 이러한 긴 세월을 신앙과 삶의 구조적 긴장 관계 안에서 살다가 이제 회개 의 격변을 거쳐 몸 바쳐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결단으로 새로운 생의 길목에 들어 선다. 회개, 그것이 그의 신학이 핵심으로 등장한다. 신앙의 길을 여섯 살의 나이에 들 어서 눈에 띄일 만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알 부랑자로 지나던 날의 회한이 사무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신학교에 다니면서 섬기던 청량리교회의 어린이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애통하며 회개 자복하는 것을 목도하고서는 회개에는 반드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한다든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는 1928년 신학을 졸업하면서 \\\"점점 사명감에 불타 어서 속히 나아가 전도할 마음이 간절\\\"하게 된다. 그것은 예레미야 1 장을 읽으면서 받은 계시와 같은 것이었다. 성서학원을 다닐 때는 1925년대였다. 그 연대는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좌절의 위기였다. 3.1운동의 현실적인 좌절도 겹친 데다가, 공산 사화주의의 의 만연과 기 독교적이 아닌 서양 세속문명의 확산으로 기독교의 한국 근대사에서의 위상이 전과 같지 않고 비판과 경시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었던 때였다. 황망한 허무주의적 기 상이 감돌던 때였다. 이런 위기는 1920년대 중반에 한국의 유명지(有名紙)들이 주로 사회주의계 기자 (記者)들의 교회 반격과 반제(反帝) 운동의 일환으로 미국 선교사들을 중상 모략하 는 일대 조직적인 기사가 연일 일간 신문지들을 뒤덮으면서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 화할 만큼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위기가 성결교회의 성서 신학원에도 닥쳐오고 있었다. 1926년 1월의 성서 학원 자퇴사건이 그것이다. 이성봉목사는 당시 학생으로 2 학년이었다. 눈으로 다 목격한 것이다. 이성봉목사는 그 학생들 전체의 자퇴 소동을 일으킨 학생들의 주장 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고 적어 놓았다. 곧, 1. 선교사들이 금전의 권세를 가지고 민족적 차별을 한다는 것 2. 학생들을 잘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 3. 교수진이 약하다는 것 그는 이 사태가 불평 불만에서 온 것으로, 그것은 사탄의 씨요 불행의 초보라고 간파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꿰뚫어 보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문제 가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는 금식 기도를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도생활에 의 사명을 확신하고 그 길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였다. 그의 회개의 신학은 수원교회에 부임하여 놀라운 신유의 역사로 부흥하던 교회 에 1929년 여전도사의 갑작스러운 운명으로 시련을 겪을 때에 다시 정련(精鍊)된다. 그는 이로 인하여 인신(人身)의 윤리성까지 의심받는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때 그 는 어느 날 4시간에 걸친 사투의 시간을 거쳐 회개의 참된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앞에서 그의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그의 신앙생활 철저를 기하 던 시간에도 계속 노출되었던 사실을 본 일이 있다. 회개의 신학은 바로 이 문제와 구조적으로 연결된다. 그는 획기적인 신앙의 격변을 겪고 나서도 여전히 자연인 그 인간성의 실체를 외면하거나 멀리 두고 초연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뉘우치고 회 개한다. 하지만 다시 인간적 시험이 닥친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지긋한 힘으로 공 세를 편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악마의 속삭임을 듣는다. 악마는 차라리 그의 회개의 불철저를 냉소하는 형태로 임한다. 그는 이 사탄이 그를 괴롭히고 그의 신앙을 위 협하는 존재로 보는데, 계속 주님의 모습은 보이지 아니하고 사탄과의 외로운 싸움 이 계속된 경험을 쓰라리게 회고한다. 여기 사탄은 유혹의 존재로서보다는 확신과 신앙을 동요시키는 존재로 등장한다. 회개의 불가능성의 확인자로 역할 한다. 악마는 이성봉목사에게 있어서 저기 서 있 는 실체가 아니다. 살아서 안과 밖, 부드러움과 단단함, 밝기와 어둠을 함께 가진 탄력과 융통과 여유의 사신(邪神)인 것이다. 그는 회개의 어려움을 이렇게 희곡화(戱曲化)한 것이다. 마침내 그는 땀을 흠벅 이 흘리면서 긴 시간의 사투 끝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철십자가를 보게 된다. 승리 의 시간이었다 회개가 이루어진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천국의 환희. 열복(悅服)을 누리게 된다. 나 위하여 흘리신 십자가밖에 붙들 것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부 활하신 예수여, 살아 계신 주님의 위로를 주시옵소서 하며 애 쓸 때, 그는 나를 어루만져 주시며 천국으로 가자고 올라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한없이 한없 이 갔습니다. 한참 가다 보니 수정 같이 맑은 요단강 물이 흐르고 저편에서 화 려하고 찬란한 천성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깨끗이 씻겨진 모습, 그는 그것이 회개의 참된 열매로 본 것이다. 회개, 그것이 죄된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의 구원의 길, 바로 그 길이라는 것을 그는 이 렇게 실존적으로 겪고 그리고 그 사실을 전파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것이었다. 이러한 회개의 신학은 필경 인간의 중생(重生)을 통한 거대한 변화의 사건으로, 인간이 달고도 유위(有爲)한 하나님의 종으로, 사회적 인재로, 사역을 다하는 훌륭 한 인간으로 서게 되는, 인간 개조의 강력한 계기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의 남다른 메시지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성결의 복음이다. 그는 인간의 성화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완전 히 한 순간에 완벽하게 도달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보지 아니하였다. 단번에 된다 는 것은 사탄의 꾀임이라는 것을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조금씩\\\" 잘 믿어 나가 는 일, 그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서 그의 시간(時間)의 신학(神學)을 들 수 있다. 그는 시간이 카이 로스(kairos)라는 점을 강조한다. 회개는 어떤 기회가 있는 것이다. 기회는 한번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그런 의미에서 시간의 총체 개념과는 판이(判異)한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오랜 시간 계속되는 동안에 쌓아 올린 어떤 총계가 우리의 신 앙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 현재, 그 순간이 문제인 것이다. 그는 아주 유머로스하게 이 시간의 신학을 전개한다. 곧 마귀들이 인간을 타락하 게 하고 멸망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던 중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 인 간으로 하여금 \\\"내일\\\" \\\"요다음\\\" \\\"차차\\\"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의 풍조 중에 시간의 장구성이나 여 유를 빙자하여 언젠가는 잘 믿을 때가 있을 것이라는, 유보적(留保的) 자세를 비판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역시 회개의 열매에서도 당장에 완결하려는 의도가 신앙적 이 아니라고 해서 한 말이었다. 그것은 신앙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다른 하나의 그 의 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지옥이라는 것이 기회를 잃은 자들이 가는 곳이 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시간의 신학, 순간의 신학, 신앙이 언제나 \\\"도적 같이 오시는 주님\\\"을 맞을, 그런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긴박성과 현재성, 그것을 그는 주기철(朱基徹)과 함께 체계화 한 한국교회의 신앙인이었다. 이 \\\"도적\\\"의 개념은 갑작스러운 주님의 오심이라는 것 말고도 따른 또 하나의 중요한 뜻을 가진다. 도적은 좋은 물건을 가지려 온다는, 그런 주님의 신앙 확인의 기회로도 포착한다. 미천하고 값없는 물건 같은 것을 얻으려고 도적이 몰래 혹은 밤에 숨어 들어오지는 않는다. 이 비유는 우리의 준비된, 하나님 보시기에 가져가고 싶은, 그런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어야 한다는 신앙으로 인도된다. 이처럼 이성봉목사에게 있어서 회개는 그의 메시지의 중심이오 그 핵심이었다. 무죄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죄를 한번도 범한 일이 없다고 자랑하는 자의 깨끗함이 아니라, 차라리 자기가 죄를 누구보다도 많이 지은 죄인의 괴수로 알아서, 예수 십자가 앞에 가 서 자기 죄를 통회(痛悔)하는 순간에서 얻는 깨끗함,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논리이다. 한국 기독교회에서 부흥운동이 남긴 가장 커다란 공헌 가 운데 하나가 바로 이 이성봉목사의 이 엄청난 논리이다. 지옥 가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자가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강단 메시지의 드라마틱한 구조의 역동성을 보여 주는 소중한 공헌이다. 회개의 강조가 이런 구도로 전달되었을 때의 말의 영 향력이란 대단한 것이다. 4. 그의 부흥운동 4.1. 그의 부흥운동의 사역의식 그의 교회 부흥의 발길은 실로 험난하였지만, 거기 온 생애를 바친 그런 것이었 다. 그는 모친상에도 임종(臨終)하지 못하였을 정도였으며, 그 후에 하로 그것도 겨우 몇 시간을 겨우 내서 들려 보았을 뿐, 다시 만주교회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 여서 떠난다. 그리고 평양에 가서는 남의 집에서 살고 있는 두 어린 딸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들의 정경에 기가 막혔다. 그런데도 또 곧 떠난다. 마침 어린 두 딸은 저희들끼리 배급 쌀로 죽을 끓여 놓고 찬바람이 휭휭 도는 냉방에 앉아서 서 떠먹고 있었습니다. … 아버지는 만주교회에 집회 약속을 했으 니 불가불 가야 되겠다 하고, 차마 일어서지 못할 사정을 이기고 벌떡 일어섰습 니다. 차시간에 데려고 바쁜 걸음을 재촉하다가 뒤돌아보니 아이들이 아비를 전 송한다고 추운 겨울날에도 불구하고 따라나섰습니다. 뒤축이 다 떨어진 운동화를 끌고 양말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붉은 살이 나 오고, 털 자 하나 쓰지 못하고 떨어진 수건으로 귀를 싸매고 따라온 보습을 볼 때에 마음이 동요되었으나 다시 결심하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가 떠날 때까 지 가라고 하여도 돌아가지 않고 떠나는 아비를 전송하려고 떨고 서 있는 어린 딸들을 보니 자연히 흐르는 눈물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이성봉목사는 계속 울고 있었다고 한다. 주의 정병(精兵)은 사사로운 일에 매이지 아니합니다. 그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사역에의 절대적인 순종 의 자세는 6.25를 겪으면서 수많은 이들이 순교와 납치 그리고 숙청(肅淸)으로 얼룩 진 곤경을 헤치도 나오면서 스스로도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시련에서 아직 은 할 일이 있어서 살아남았다는 확신을 굳히면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그의 자세는 그의 병약한 몸으로 계속 당면하여야할 일로 여러 차 례 겪는다. 황해도 송화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갑자기 온 몸에 고열이 나면서 운신 을 못해 강단 위에 쓸어져 앉고 한 시간 반을 설교한 일이 있는데, 그 때 그는 그 의 유명한 말 곧 \\\"입으로 설교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남해교회에서 설교하다가 맹장염으로 고통을 당해 설교를 \\\"결사적\\\"으로 계 속한 일도 있었다. 그런 일들이 그에게는 비일비재하여서 들것에 실려 누워서 이 교회에서 저 지방으로 가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고, 걷지 못해 사람들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걸어가 주의 말씀을 외친 일이 허다하였다. 이러다가 나 죽으면 하나님 손해 나지 나 손해 나겠습니까. 그의 이 유머 섞인 장담에 그의 하나님 주신 사명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앙이 깊 이 뿌리 박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일본, 만주, 한국의 전역, 농촌, 도시, 산촌, 섬, 여러 곳을 다닐 수 있었고, 그의 \\\"전도를 받아 목사 된 사람이 부지기수요, 장로, 집사 전도사가 된 사람이 이로 헤아릴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모모한 교단 교회들을 다 망라하여 찾아 다녔고, 대중집회 때에는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 리기도 하여 하로 5, 6 차의 집회를 인도하는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주로 작은 교회들 미약한 교회들을 향해서 더 많이 발걸음을 옮겨 그 부흥과 발전에 힘 썼다. 더구나 그는 1954년부터는 자신의 부흥운동을 크게 몇 시기로 나누어 집중적으 로 순회 부흥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대단히 체계적인 활동이요, 스스로 그런 신앙의 구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첫 시기가 1954년 5월부터 1955년 4월말까지의 임마누엘 특공대 시기이다. 그 때 그는 대대적인 공세적 부흥운동을 진행하였는데, 그는 그 일정과 사건들 그리고 거기서 일어난 은사들을 일일이 기록하였다가 이를 공간한 일이 있다. 다음은 성결교회의 희년(禧年) 준비 성회기(1955, 4. 27 - 1956. 3. 18), 그 다음 이 희년 전도대(1957. 5.15 - 1957. 12. 29), 그 다음이 제주다 하기 전도기, 그리고 미국 전도 순회기이다. 특히 희년 전도대 당시에는 수천 명이 회개하였고 수십만 군중에게 70여 회에 걸쳐 복음의 씨앗을 파종하고 있었다. 본래 계획은 년간 50회였던 것이 70회로 늘 어났던 것이다. 그의 부흥회는 새벽기도, 유년주일학교, 장년주일학교, 대예배, 오후 성별회, 밤 집회, 이렇게 꽉 짜여져 있었다. 이렇게 보낸 그의 장구한 부흥운동의 역정(歷程)을 돌아보면서 그는 이런 글을 남긴다. 나의 갈 길은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일을 내가 알지 못하고 내 할 말을 내 가 알지 못하고 내먹을 것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오직 주님께 바친 몸, 그의 능력의 손에 붙잡혀 신앙생활 40년간에 부흥 사명 임한 지 23년 동안 … 지난 자취를 회고해 보면 신기하고 오묘하신 주님의 섭리 와 경륜을 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이나 계획으로 된 것이 아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적 소 명에 따랐을 뿐이라는 단언이었다.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사역이었다는 것인데, 이것 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커다란 경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민족구원의 꿈을 그의 부흥운동과 연결해서 말한다. 한국 기 독교회의 역사적 사명은 교회의 부흥에 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순회전도 여행을 끝마치고는 민족을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사역과 그 위상을 골똘히 생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 민족이 복을 받으려면 우리 민족의 양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성봉목사의 부흥운동이 마침내 민족구원의 대역으로 한국교회의 눈길을 돌리 게 하고 간 것이다. 4.2. 해방이후의 한국교회의 재건 부흥운동 우리는 여기에서 특히 이성봉목사의 해방이후의 한국교회 부흥과 재건에 끼친 커다란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는 한국교회가 오랜 일제의 압제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방을 얻은 데에도 불구하고 우리 찬송가 안에 당시의 감격을 찬양하는 찬송가 하나 없다는 사 실에 놀란다. 한데 이성봉목사는 당시 만주 무순(撫順)에서 해방을 맞고는 해방의 찬송가를 하나 불렀다. 1. 할렐루야 우리 동포들아 하나님 찬양해 오묘하신 섭리로 우라 나라 해방돼 대한 독립되었네 만세 만세 만만세 만민들아 함께 모여 와서 주의 영광 보이라 2. 할렐루야 세계 만민들아 여호와 찬양해 신실하신 그대로 공의의 칼을 가지고 권세 위엄 베푸사 교만한 자 물리고 이방신을 때려 부쉈으니 할렐루야 즐겁다. 3. 할렐루야 우리 성도들아 우리 주 찬양해 말씀하신 그대로 무한 자비 베푸사 크신 능력 가지고 원수 마귀 박멸코 자유 평화 내려 주셨으니 할렐루야 즐겁다 4. 할렐루야 백의 동포들아 네 사명 중하다 주신 은혜 감사해 분골 쇄신되도록 몸과 맘을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같이 사람 사랑함을 잊지 말지어다. 우리는 이 찬송이 만민과 함께 온 세계의 역사 구도 안에서의 한국 해방이라는 사건으로 이해한 그의 사안(史眼)에 우선 끌린다.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 사명 받 아 세계로의 사역을 확인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당시 1945년 8월의 신앙이었 다. 그런 역사적 소명을 위하여서는 한국교회의 재건이 우선 필수 과제였다. 그는 1945년 9월 15일에 귀국하여 북한에 머물렀다. 한데 그의 눈에는 교회 목사들의 정 치 운동이 눈에 거슬렸다. 이제 이성봉목사는 교회 재건만이 한국의 미래를 약속한다고 확신하고 교역자들 과 함께 이 재건운동을 힘써 펴나갔다. 곳곳에 성령의 불길이 치솟았다. 하지만 주 의의 발호(跋扈)를 보고는 마침내 1946년 3월에 월남(越南)하게 된다. 그는 성결교 신학교의 이사장 일을 1년으로 마감하고, 악전고투로 일제 때 매도 (賣渡)해 버렸던 교회들을 다시 찾아 복구하면서 신학생 임동선과 이성민 두 사람 과 함께 재건 집회를 도처 열었다. 이렇게 하면서 그는 실로 1년에 최고 82 군데 의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었고, 그리고 때로 5일간을 밤낮 없이 강행한 일이 부지기수였다. 4.3. 임마누엘 특공대 전도 그는 1954년 5월에 임마누엘 특공대라는 부흥운동을 통하여서 특히 교회가 부진 하기로 이름 난 강원도(江原道) 지방을 집중 공략한다는 결심으로 단신 임하였다. 그리고 대교회 집회는 일체 사절하기로 한다. 그는 스스로 이제 그의 사역의 마지 막이 가까운 것으로 알고, 그의 심중에 가장 보람있는 사역의 전선에 헌신하기로 한 것이었다. 농촌과 산촌, 도시 등지에서 부흥사를 못 청하는 곳에 이끌리어 갑니다. 그는 스스로가 베드로의 노년기 곧 \\\"윈치 않는 곳으로 잡아가리라\\\"한 일이 자신 의 길이 된 것을 알게 된다. 세태의 동향과 교회의 형편을 보고, 이제는 환영보다 배척의 길, 평안한 길보다 괴로운 길, 원치 않는 곳으로 잡혀간다고 확신하였다. 그 리고 그런 길에 들어 선 것을 감사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게 도니 이유를 이렇게 천명한다. 1. 주님은 약한 자와 가난한 자의 친구 되시기 때문이다. 2. 시대가 너무 자유주의로 흘러 교회조차 법적 질서가 없고 혼란 무질서하여 이단과 속화를 방지하기 어려워, 이제는 내부 결속이 시급히 요청되기 때문 이다. 3. 내가 나를 쳐서 복종시키기 위함이다. 4. 타인을 대교회에 가기 바라고, 자기를 위하여는 소(小)를 구하는 뜻에서 그 렇다. 5. 약소 교회를 동정하져 은혜를 고루고루 나누기 위하여서이다. 6. 새 시대 남북 통일을 위한 전도 훈련과 작전 계획 때문이다. 7. 환영하는 헬라로 가지를 아니하고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신 주님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밟아 보려는 심정에서이다. 그의 부흥운동의 진실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약한 교회를 우선 돕자는 것, 내부 결속이 긴급한데 그런 것이 가장 필요한데도 가서 도울 사람 없는 곳에 간다는 것, 나 자신의 참된 신앙의 삶을 위하여서, 십자가 지신 주님의 길을 좇기 위하여서, 그 리고 남북 통일의 준비를 위해 전도 전략의 계획을 위해서, 이런 곳을 택하여 간다 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참된 부흥운동의 실체요 그 목적이 아니던가. 그는 이것을 가르치고 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 특공대 전도에서 유난히 전투적인 표현을 많이 쓴다. 출전, 토벌, 접전, 백병전, 빨치산 토벌, 무혈 점령, 산악전, 산발전, 돌격, 탈환, 시가전, 혈전, 전 격전, 야습, 협동대전, 대봉전, 접수, 결전, 야전, 수륙작전, 맹훈련, 상륙전, 열전, 병 고전, 결사전, 소탕전,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특공대 1년 전과(戰果)로 포로 석방 8천 여명, 헌금 1천 만환 이상. 이제 특공 대는 만기 제대되어 민병으로 돌아가 … 이런 전투적 자세는 그만한 필사의 각오가 있었다는 말일 터인데,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나 그 전파 그리고 부흥운동이라는 것이 모름지기 이런 자세를 기본적으로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4.4. 그의 부흥운동의 현실적 役事 그의 부흥회는 194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전형적인 형태 구형(構形) 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일들을 역사(役事)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교회 건축의 물리적 활성화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그의 부흥회가 교회당 건축이나 증축의 현저한 성과를 올린 기사를 경탄으로 읽는다. 그리고 그는 그런 사실을 예의 주시하고 기록에 남긴다. 가령 인천 중앙교회는 천막집회 1년만에 벽 돌 2층 백여평의 성전이 건축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그의 부흥사경회 일정 기 록에 대거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교회 안의 어지럽고 불화하였던 일들이 깨끗하게 해결되었다는 결실이다. 그는 이런 일의 성사를 자신이 이끈 부흥회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그 결실로 자랑하 기를 마지아니한다. 그 다음은 그의 부흥회의 결과로 신앙의 현상적인 고양(高揚)과 감격의 폭발이 다. 은혜가 넘치고 감사의 찬송이 실제 그 이전의 교회와 엄청난 대조를 이루는 것 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헌금(獻金)의 증가이다. 때로는 금지환이 밭쳐진다. 감격과 감사 때문이었다. 다음은 실제로 신유의 은총이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가령 잉태 못하던 여인이 잉태한 사실은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신유(神癒)의 기적도 많았다. 하지만 회 개하고 새 사람이 된 기적이 더 큰 이적이 아니겠는가. 아편(阿片)하던 사람의 회개 와 목사된 일, 한센병 환자들이 오히려 감사하게 된 일, 이런 목전의 열매들이 그 의 부흥운동의 경이와 영향력이 된 것이다. 그래 결신자(決信者)의 현저한 증가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의 결신자의 숫자(數 字)를 정확히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부흥운동의 가시적 성과 기대 는 그의 특공대 이미지만큼 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4.5. 그의 부흥회 言語 문제 이성봉목사는 그의 부흥회를 시종 열기와 경청(傾聽)으로 일관되게 끌고 갔다. 오랜 기도에서 용솟음 치는 생명의 활천(活泉), 은혜에 넘치는 메시지, 적시적의(適 時適宜)의 주제, 그의 확실한 메시지의 주제 전달, 그리고 온 몸으로 하는 열정의 메시지 전파, 가끔 터지는 그의 감격 찬 자작 찬송가의 영창, 이런 것들이 그 견인 력(牽引力)이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조고 싶은 것이 그의 언어 구사력(驅使力)이다. 그는 중학교와 신학교 교육 이외에는 많은 교육을 받은 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는 가끔 당돌하고 적시의 한문(漢文)을 구사하여 한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상황 설명이나 비유를 적절히 조화하는 묘한 전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일단식 일 표음(一簞食 一瓢飮)근근호구(僅僅糊口), 위지사경(危地死境), 이천(易遷), 우울니(憂 鬱尼), 오불관언(吾不關焉), 영고성쇠(榮枯盛衰), 장중보옥(掌中寶玉), 일승우일진(日 勝又日進), 우몽(愚蒙), 해타(懈惰), 자시(自恃), 유방백세(流芳百世), 유취만년(遺臭萬 年), 무가내(無可奈), 숭로반(崇露盤), 애곡절치(哀哭切齒), 이런 것들이었다. 당시로 서는 한문을 쓰는 풍조가 지금보다 더했다는 사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이 러한 유식한 한문의 사용은 그의 설교의 맛을 더해 주고, 메시지 전달의 힘을 돋구 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다른 하나는 적절한 유머의 구사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든다. 한번은 수원에 있을 때 아주 더운 날 어떤 집에 심방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때 마침 여름이라 시어머니, 며느리, 딸 모두가 웃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벗고 홀바지 바람으로 마루에서 발을 치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우리가 여보세요 하면서 들어가니) 모두 일어나서면서 \\\"애 내 치마, 내 적삼\\\" 하며 떠드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먼저 치마를 입고, 치마끈을 매면서 \\\"들어오세 요\\\" 한다. 나는 다 입은 줄 알고 따라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아직 적삼을 못 입고 헤매다가 내가 들어가니까 \\\"에구머니\\\" 하더니 뒷문으로 벌거숭이로 뛰어나간다. 나는 모르는 척하고 앉아서 기도하는데, 며느리는 저의 딸 이름을 부르면서 \\\"영 자야, 영자야, 내 적삼 내 적삼\\\"하니 영자는 아무리 보아도 적삼이 없다. 더구나 그의 언어는 때로 토속적이고 또 백성들이 늘 쓰는 구수한 말들을 자연 스럽게 쓴다. \\\"놈\\\", \\\"볼 사납게 군다\\\", \\\"팬티까지 발가벗겨\\\", \\\"도둑질해 먹는 물이 더 달다\\\", \\\"60배 자리만도 본전까지 네 알이 썩어 가지고도 56개가 남는다\\\", \\\"새빨간 거짓말 하얀 거짓말\\\", \\\"교회는 천국의 지상 지점(支店)\\\", 이런 것들이었다. 이러한 그의 소박한 언어의 구사는 청중과의 언어 소통의 채널을 확실하게 설정 하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복음이 먼 나라의 일이거나 접근이 난감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일상의 소박한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엉켜 있다는 사실을 시위하는 대단한 성 육신적(成肉身的) 사크라멘트 신학의 모뉴멘트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한국교회 부흥운동사에서 이런 언어문제를 길선주나 김익두 그리고 정남 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어떤 유기적 연관이나 계보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 독자의 입장에서의 메시지 전파 방법에 자생적 형태로 보는 것이 좋 고, 따라서 기독교의 일상화 특히 그 언어에서의 가장 정확한 통로가운데 한국교회 부흥운동이 차지하는 무게가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4.6. 그의 부흥운동의 自己省察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성봉목사가 \\\"신학생, 전도자, 교역자를 위한 부흥 지침서\\\"로서 [부흥의 비결]이라는 저서를 낸 사실이다. 여기에는 부흥의 의미와 필 요성 그리고 전도자의 자질이나 사명과 같은 것을 마무린 말하자면 부흥신학이 있 고, 그리고는 부흥회 때 하는 여러 형태의 부흥 설교 여러 가지를 대지(大旨), 소지 (小旨)등의 형태로 성서의 말씀 그대로 따라서 체계화 한 것들이 있다. 그 설교들은 대개가 다 아주 명확한 체계적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성서의 말씀 으로 연결해 가면서 한 단위의 어떤 완전한 구도를 가지게 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 를 그가 분석적으로 읽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더구나 그는 이런 구도에서 항상 현실 교회의 문제를 차출해서 거기 해당한 교회의 부족과 흠을 책망하는 형태로 구 성하고 있다. 후배 사명자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하여, 신구약의 모든 선지 사도들을 통하여 또는 교회 유사(有史)이래 각국 부흥사들을 통해서 나타내신 부흥 설교의 말씀과, 나에게 직접 계시하시고 체험시켜 주신 모든 말씀이 유익한 참고 자료가 될까하여 여지껏 전하던 순복음의 골자와 진수를 엮어 내놓게 되었다.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외치던 이성봉목사의 발자국이 우리 한국교회의 역사에 남겨지는 다른 하나의 경우이다. 부흥목사들의 설교가 힘에 넘치지만 대개 현장에서의 자발성과 그 영감이 압도하는 것이기 때문 에 그것이 반성되고 글로 씌워졌을 때의 감도(感度)는 사뭇 다르다. 한데 이성봉목 사는 이 위험을 무릅쓰고 훌륭한 부흥신학의 글을 남긴 것이다. 부흥복사 자신이 이런 글을 쓴 것은 과문(寡聞)의 탓일지 모르나 그가 처음인 것이다. 더구나 그의 설교집 간행자는 이 [부흥의 비결]의 간행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 곧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말씀을 전하겠다는 결사적인 각오로 나아가다가, 그것 으로도 감당 못해서 책으로 내어 외친다. 이제 죽은 후에도 그의 말씀 선포를 계속한다는 그런 뜻일 것이다. 그의 사후에 도 계속 그의 음성을 들리게 한다는 의도라는 것이었다. 4.7. 그의 부흥운동과 再臨 사상 그는 재림이 임박하였다는 생각에 늘 잡혀 있었다. 우리가 도적의 갑작스러운 침 입을 말하는 곳에서 이미 그의 재림사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림의 날짜를 계산해 내는 따위의 재림사상에는 그것이 \\\"마귀의 소리\\\"라고 해서 이를 철저히 이단시한다. 그 날짜는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이 아 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재림의 확실성을 말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약성서에만도 재림 에 관한 말씀이 3백 번 이상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성서의 말씀이니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의 도덕적 애매성, 불공정하게 묻혀진 수많은 과거의 한(恨)들이 세상 끝 날에 엄밀한 조사와 공정한 판단을 받아야할 때가 있다 는 것이 공의의 하나님을 말하는 기독교의 마지막 복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재림의 사상은 우리들 신자들에게는 한 윤리적 삶의 중추가 되기도 한다. 심 판의 도래라는 확실한 사실 앞에서라면 절제와 근신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불가피해 진다.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말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그런 삶의 자세가 요구된다. 인생을 든든히 붙드는 유일한 힘은 천국에 대한 희망 (곧 재림의 희망)인 것이 다. 이성봉목사는 이처럼 신앙과 윤리의 차원 연결을 이 심판의 교리로 깨끗하게 맺 아 주고 있었다. 한데 심판은 또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비합리성과 부조리 그리고 모순을 말하는 직접적인 명제가 된다. 이 세상의 역사는 그 자체의 심판력과 교정력(矯正力)이 없 다. 그러기에 주님이 오신 것이고 복음으로 심판을 하시되 마지막에 가서 최후의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본래적 진리가 없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 세 상과는 역리(逆理)의 관계에 서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 다 살 아져 간다. 따라서 그 때 그 때의 이(利) 만이 장단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선악 이 엉켜 그 판별이 불가능하다. 그는 특히 교회 안의 비리와 냉정과 갈등의 심각함을 걱정하였다. 그의 비판적 교회론은 이 재림론의 다른 하나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나그네의 심정으로 잠시 있다가 떠날 곳으로 이 세상을 보 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 귀향의식이 강하다. 그 하늘 나라의 도래가 바로 재 림인 것이다. 이런 재림론이라 해서 그가 세상을 비관하고 포기한 자세로 산 것은 물론 아니 다. 아름다운 세상을 그는 노래하였다. 우리 신체의 오묘함을 감탄하였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그런 세상이 아니던가. 여기에서 우리는 준비하고 가꾸고 연단 하여서 재림의 주를 맞을 만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훈련하는 장소, 회개하는 곳으 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5. 결론 이성봉목사는 한국교회 수난과 혼란의 일제말기와 해방이후의 남북 분단 그리고 6.25전란의 한 복판을 살다 간 한국교회 유수의 부흥목사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 대적 사역은 그가 바로 그런 시대에 보내어졌다는 사명감으로 불타게 하였다. 그는 말로 다 못하면 죽음으로 한다는 결의로 국내외를 편력하였으며, 몸을 가누 지 못할 정도의 병약에도 들것에 실려 다니고, 걷지 못해 달구지나 지게 위에 몸을 맡겨 이동하면서 쉬지 않고 말씀을 선포하노라 가진 기력을 다 썼다. 그는 회개의 신학으로 요약되는 신앙으로 그의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다녔다. 그 의 신앙은 그가 실제 몸으로 겪고 그 체험이 살아서 그의 체질이 되는 그런 신앙과 삶의 실존 속에서 살아간 모습 그대로의 실존이다. 설교할 때의 예화들도 대개는 다 그 스스로 겪거나 목격한 산 증언들이요 육성이었다. 회개의 메시지가 가지는 호소력은 역시 그가 인간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계 속 시험과 유혹에 노출되는 인간성의 어쩔 수 없는 바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무 치는 회한의 심정으로 그런 메시지를 전파할 수 밖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설교에 다들 끌리고 그의 호소력에 모두가 공감해서 다투어 회개와 회심(回心)에 이르게 된 까닭이 여기 있었다. 그는 고고한 성자의 풍채를 지닌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의 설교에는 우리가 일상 겪는 기본적인 사건들이 그렇게 소박하게 엉켜, 복음의 메시지가 그런 데에서 그런 강렬한 말발을 세우는 것인가 하는 감동을 일으 키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는 타락이후설(Infra-lapsarianism)의 한국적 모델이었다. 한국 근대사의 시련기에 그 만이 던질 수 있는 메시지가 있었다. 왼통 불확실하 고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때였다. 그리고 그런 것이 인간의 죄와 회개하지 아니한 인간의 안주(安住) 때문이라는 선포는 가 닿을 귀가 많았다. 그런 시대일수록 현세 적 안주(安住)보다는 임박한 재림을 준비하는 심정이 오히려 희망과 안위를 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성서적 소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탄핵하고 비관하지를 아니하였다. 주님 맞으려 간곡히 준비 하는 여정(旅程)으로 받아 드려 감사하였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그 독생자를 보 내신 그 세상아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허물이나 죄 때문에 구세주가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세상, 여기 은총이나 축복의 무대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는 감사하였다. 한데 그는 1959년에서 1960년초 까지의 미국 순회 전도를 하고 나서부터는, 한국 의 기독교회라는 의식보다는, 민족구원의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회개 의 기독교적 신앙을 민족의 양심의 각성으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피력한 일 이 있다. 그의 서거 4년 전의 일이었다. 그가 비젼으로 보았던 민족교회론의 형성은 그가 가고 난 다음의 경륜으로 넘겨졌다.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강연회 기조강연/ 2000-04-07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강연회 기조강연 I. 머리말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부흥사 이성봉 목사(1900-1965)가 우리 곁을 떠나 주님의 품으로 간 지 어언 35여 년이 지났지만 그분이 한국교회와 우리들의 가슴에 남기고 간 주님 사랑의 뜨거움은 아직도 냉랭해진 우리들의 가슴에 모닥불을 피우는 영원한 불꽃이 되고 있다. 그 분은 한평생을 편안하게 살지 않았으므로 장수하지 못하고 66세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위하여 다른 사역자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 값진 삶을 산 것이었다. 금년은 하나님께서 이성봉 목사를 이 땅에 보내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하나님은 한 세기에 십여 명씩 당신이 크게 쓰시는 마음에 합한 종들을 이 땅에 보내시곤 한다. 하나님께서 황폐해진 이 땅을 긍휼히 여기사 길선주, 김익두, 이성봉, 주기철, 손양원, 박윤선, 한경직 목사들과 같은 충성된 종들을 다시 보내 주시기를 기원한다. 나는 중학생 시절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때 이성봉 목사님이 인도하 시는 부흥회에 자주 참석하며 은혜를 받곤 했다. 사실 나는 그때 이성봉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신다고 하면 어느 곳이나 찾아가서 부흥회에 참석하곤 했다. 그분의 설교는 중학생인 나에게 너무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고 은혜로웠다. 나는 부흥회 도중 이성봉 목사님이 찾아서 읽으라는 성경 구 절을 미리 암송했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성경 1을 찾지 않고 즉시 암송함으로 이 목사님의 칭찬 을 받곤 했다. 그때 이 목사님이 자주 찾아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 중에는 시편 50:15과 시편 37:4 -6과 시편 81:10, 예레미야 33:3 등이 있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으며 목사가 될 것을 굳게 다짐하곤 했다. \\\\\\\\\\\\\\\\\\\\\\\\\\\\\\\\\\\\\\\\\\\\\\\\\\\\\\\\\\\\\\\"나도 이성봉 목사님 같은 부흥사가 될 수는 없을까?\\\\\\\\\\\\\\\\\\\\\\\\\\\\\\\\\\\\\\\\\\\\\\\\\\\\\\\\\\\\\\\" 이와 같은 생각과 소원을 품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서울로 돌아와 서 공부할 때 종로 거리 악기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저 스피커에서 유행 가 대신 이성봉 목사님의 재미있고 은혜로운 천로역정 강화가 흘러나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 을 하면서 지나가곤 했다. 그만큼 나는 이성봉 목사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 목사님의 팬이었다. 나는 여기서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 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II. 이성봉 목사의 삶은 은혜 체험적 삶이었다 한 사람의 삶은 교육과 지식과 기술 습득에 의해 형성되는 면도 없지 않으나 청소년 시절에 받았던 신앙적 감화와 은혜 체험들에 의해서 형성되며 한평생 계속되는 영적 체험에 의해서 완성된다. 기독교적 삶은 교육과 지식에 의해 형성되는 삶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신앙적 감화와 은혜 체험, 즉 영적 체험들에 의해 형성되고 완성되는 삶이다. 이성봉 목사의 삶은 신앙적 감화와 은혜 체험에 의해서 형성되고 완성된 삶이었다. 소년 시 절 이성봉은 어머니로부터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았다.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이인실씨와 김진실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성봉은 복음이 간리에 전해진 해인 1905년 (6살 때)부터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평양 근교 중화읍으로 이사한 후 온 가족은 평양 선교리감리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기쁘게 했고 어머니는 아들 성봉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성경을 읽게 했다. 성봉은 6살 때 이미 신약을 일독했고 예배당 에서 \\\\\\\\\\\\\\\\\\\\\\\\\\\\\\\\\\\\\\\\\\\\\\\\\\\\\\\\\\\\\\\"누구든지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시오\\\\\\\\\\\\\\\\\\\\\\\\\\\\\\\\\\\\\\\\\\\\\\\\\\\\\\\\\\\\\\\" 하면 즉시 기도를 해서 칭찬을 받기도 했다. 소년 이성봉은 어머니를 따라서 김익두 목사가 운영하던 황해도 신천의 경신소학교 에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 김익두 목사의 신앙적 감화를 받으며 김익두 목사를 존경하게 되 었다. 청년 시절 이성봉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손길을 체험했다. 청년 이 성봉은 17세경부터 한동안 반항과 타락의 생활을 했다.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 못했다. 1920년 6월 24일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대신 과수원에서 과일을 싣고 평양에 가서 팔아 가지고 그날 밤 술집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 밤늦게 \\\\\\\\\\\\\\\\\\\\\\\\\\\\\\\\\\\\\\\\\\\\\\\\\\\\\\\\\\\\\\\"노자 노자\\\\\\\\\\\\\\\\\\\\\\\\\\\\\\\\\\\\\\\\\\\\\\\\\\\\\\\\\\\\\\\"를 부르며 돌아오던 중 기자묘 앞길에서 오른쪽 넓적 다리에 통증을 느끼고 쓰러졌다. 골막염으로 다리를 절단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3년 동안의 투병 생활은 청년 이성봉 으로 하여금 기도와 말씀에 사로잡히게 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에 붙잡히게 만들었다. 그 후 이성봉은 1925년 동양선교회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앙 훈련을 받았는데 그 곳에서 깊은 회개와 은혜를 체험했다. 14살 때 기차를 타면서 12살이 라고 속인 죄까지 회개했다. 당시의 성서학원에서 회개를 철두철미하게 강조했기 때문이었 다. 신학교 시절에 가진 은혜의 체험은 한평생 이어진다. 성서학원을 졸업하자 이성봉 전도사는 목회와 부흥사역에 투신했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계속한 수원에서의 목회사역과 부 흥사역에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고 이성봉 전도사 자신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다. 수원 목회 기간 중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과로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영적 체험을 했다. \\\\\\\\\\\\\\\\\\\\\\\\\\\\\\\\\\\\\\\\\\\\\\\\\\\\\\\\\\\\\\\"그때 하늘로부터 참 십자가가 나타났다. 나는 분명히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를 보았다. 감격 하여 붙들고 애통하며 나의 모든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나를 어루만져 주시며 천국으로 가자고 올 라가시는 것이었다. 어디로 한없이 한없이 갔다. 한참 가다 보니 수정같이 맑은 요단 강물이 흐르고 저편에서 화려하고 찬란한 천성이 보였다. 그런데 어디서 찬송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정신이 회복 되며 온몸에서 식은 땀이 쭉 쏟아졌다. 아프던 내 몸이 거짓말같이 완전히 나았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고 한 것같이 그 후로 항상 그 환상이 나의 신앙생활을 격려하여 주고 소망 중에 살게 하고, 현실보다 영원한 내세를 더욱 그리워하게 했다.\\\\\\\\\\\\\\\\\\\\\\\\\\\\\\\\\\\\\\\\\\\\\\\\\\\\\\\\\\\\\\\" 1931년부터 6년 동안 계속한 목포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도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 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가(1932년에 목사 안수) 신비주의를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목포교회에서 목회할 때 신비주의로 나가는 여신도를 책벌한 일이 있는데 앙심을 품은 그 여신도의 아들에게 폭행과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 1936년 신의주 동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부흥사로 활동하게 되는 데, 1937년 서울에서 모인 성결교 총회 기간 동안 이성봉 목사는 성령의 뜨거운 불세례를 체험했다. 총회 기간 동안 피곤한 몸을 잠깐 쉬고 있는데 당시 유명한 부흥목사인 김익두 목사가 다가와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는데 그의 손이 닿자마자 너무나 뜨거워 깜짝 놀라 침대에서 뛰 어 올랐다가 떨어지니 꿈이었다.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심령은 매우 상쾌했다. 그런데 그 날 밤 총회 회의에서 그는 전국 부흥사로 임명되었다. 이성봉 목사는 \\\\\\\\\\\\\\\\\\\\\\\\\\\\\\\\\\\\\\\\\\\\\\\\\\\\\\\\\\\\\\\"때때로 그때의 체험을 생각하 여 새 힘을 얻곤 했다\\\\\\\\\\\\\\\\\\\\\\\\\\\\\\\\\\\\\\\\\\\\\\\\\\\\\\\\\\\\\\\"고 기술했다. 1937년부터 이성봉 목사는 능력의 사자로, 가는 곳마다 강한 성 령의 역사를 일으켰다. 1937년 용정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2,000여 명이 회개하여 자복하는 운동 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한해 동안에 50여 회 이상 부흥회를 인도하며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이성봉 목사는 1928년 수원에서 목회와 부흥사역을 시작한 후 1965년 7월 23일 성결교 합동총회에서 \\\\\\\\\\\\\\\\\\\\\\\\\\\\\\\\\\\\\\\\\\\\\\\\\\\\\\\\\\\\\\\"주를 사랑하자\\\\\\\\\\\\\\\\\\\\\\\\\\\\\\\\\\\\\\\\\\\\\\\\\\\\\\\\\\\\\\\"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설교를 하고 8월 2일 주님 품으로 돌아가기까지 37년 동안 한국과 만 주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수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 수많은 영적 체험을 계속하 며 기사와 이적을 동반하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많이 일으켰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항상 경계했다. 가슴은 뜨거워야 하지만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안 된다고 항상 경고했다. 지식과 기술과 경영 및 정보 습득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 어 볼 때 은혜 체험과 성령의 역사에 붙잡혀서 한평생을 살며 사역한 이성봉 목사의 삶은 우리들에게 뜨거운 도전을 주고 있다. III. 이성봉 목사의 삶은 구령과 교회 부흥에 헌신한 삶이었다 이성봉 목사의 삶은 구령의 열정에 불타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방방곡곡을 찾아다 니며 복음을 전파한 복음 전도자의 삶이요, 잠자는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 농어촌 교회까지 찾아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부흥사의 삶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심지어 청주에서 있었던 셋째 딸의 결혼식에 인사하러 올라가서도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많이 모인 호기를 놓칠세라\\\\\\\\\\\\\\\\\\\\\\\\\\\\\\\\\\\\\\\\\\\\\\\\\\\\\\\\\\\\\\\" 생각하며 곧 이어 전도 강연을 했다는 것이 다. 이성봉 목사는 복음 전파와 교회 부흥 이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세상의 부귀 영화는 아랑곳없었고 명예, 지위도 거들떠볼 새도 없이 다만 한 영혼에게라도 더 많이 전도 구령하겠다는 일념에 붙잡힌 사람이었다. 그는 지방회나 총회를 무시하지 않 았지만 전도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사명인 줄 알고 평생 감찰장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명 완수를 위해서 그의 온 정력, 그의 모든 시간과 물질과 심지어 가족까지 다 희생 제 물로 주님께 바쳤다. 순회집회 하는 부흥목사로 불가피하게 가족을 위해서 작은 집 한 채를 준비했던 일이 있는데 얼마 안 가서 어떤 교회의 건축 상황이 딱하다는 소식을 듣고 근근히 장만한 그 집을 선 뜻 팔아 전도사의 손에 들려주고 가족은 셋방으로 옮겨 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만주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어머니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 목사는 고민하며 기도하다 가 결국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집회를 계속했다. \\\\\\\\\\\\\\\\\\\\\\\\\\\\\\\\\\\\\\\\\\\\\\\\\\\\\\\\\\\\\\\"생전의 어머니를 뵈오려 가자니 불일듯 일어나 는 집회를 내버리고, 굶주리고 목말라 허덕이는 양떼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아니 가자니 불효 막 심하고 어떻게 할까? 그러나 전쟁에 나간 사람이 부모 병들었다고 돌아갈 수 있느냐? 할 수 없다 는 판단을 내렸다. 그저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집회를 계속했다.\\\\\\\\\\\\\\\\\\\\\\\\\\\\\\\\\\\\\\\\\\\\\\\\\\\\\\\\\\\\\\\" 이성봉 목사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고 한 교회라도 더 부흥시키기 위해서 그의 한평생을 모두 불사르고 말았다. 이성봉 목사는 6·25 동란 이후에는 무너진 성결교회 제단 하나하나 를 다시 세우는 교회 재건 운동을 일으켰고 1961년부터 1년 5개월간 \\\\\\\\\\\\\\\\\\\\\\\\\\\\\\\\\\\\\\\\\\\\\\\\\\\\\\\\\\\\\\\"1일 1교회\\\\\\\\\\\\\\\\\\\\\\\\\\\\\\\\\\\\\\\\\\\\\\\\\\\\\\\\\\\\\\\" 운동에 나 서서 500여 교회를 순회하며 교회 재건과 교단 합동에 전념했다. 마지막에는 일체의 큰 집 회나 외부 집회를 단절하고 매일 수십리씩 걸어 다니며 농어촌 교회들을 돌아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소 구루마로 덜커덩 덜커덩 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리어카를 가지고 와 서 타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전거를 타라고 하여 자전거 꽁무니에 타고 가다가 험한 길 에 넘어져서 한참 동안 버드럭거리기도 하고 어떤 데서는 잘 곳이 없어서 소 외양간에서 한 밤을 지내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때로는 트럭 신세도 졌습니다. 장마통에 지게로 전도 기구 를 짊어지고 걷기도 했습니다. 고장 난 차를 떠밀고 대관령에서 비를 흠뻑 맞아가며 넘기도 했습니다. 새벽 차를 타고 종일 차 속에서 시달려 정신을 못 차리고 허덕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밤낮 침식을 잊고 하루에 천여 리를 차 속에서 산 때도 드문드문 있는 일이 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는 때로는 1년에 82곳의 집회를 인도했고 때로는 하루에 5, 6회의 집회를 인도 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1959년 12월 8개월간의 미국 순회 전도집회를 마치고 귀국 하고 나서 이성봉 목사는 이렇게 그의 심정을 술회했다. \\\\\\\\\\\\\\\\\\\\\\\\\\\\\\\\\\\\\\\\\\\\\\\\\\\\\\\\\\\\\\\"기회를 민첩하게 사용하여 영혼 구원하는 일밖에는 나에게는 아무 취미가 없었다.\\\\\\\\\\\\\\\\\\\\\\\\\\\\\\\\\\\\\\\\\\\\\\\\\\\\\\\\\\\\\\\"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의 복음적 열정 이 그의 전생애를 불태운 것이었다. 복음 전파보다는 \\\\\\\\\\\\\\\\\\\\\\\\\\\\\\\\\\\\\\\\\\\\\\\\\\\\\\\\\\\\\\\"사업\\\\\\\\\\\\\\\\\\\\\\\\\\\\\\\\\\\\\\\\\\\\\\\\\\\\\\\\\\\\\\\" 확장에, 희생보다는 대우받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 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에 사로잡혀 복음전파에 한평생을 다 바친 이성봉 목사의 삶은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 IV. 이성봉 목사의 삶은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청년 시절부터 철저한 회개에 기초를 둔 성결하고 깨끗한 청빈의 삶을 살았 다. 그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아무런 애착을 두지 않고 살았다. 이성의 정욕과 물질의 탐 욕을 항상 경계하는 금욕적 삶을 살았다. 돈과 이성의 유혹에 빠지면 목회자의 삶은 끝장이 란 말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었다. 이성봉 목사는 부흥회 때마다 \\\\\\\\\\\\\\\\\\\\\\\\\\\\\\\\\\\\\\\\\\\\\\\\\\\\\\\\\\\\\\\"허사가\\\\\\\\\\\\\\\\\\\\\\\\\\\\\\\\\\\\\\\\\\\\\\\\\\\\\\\\\\\\\\\"를 즐겨 부르곤 했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영화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 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꿈결 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 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 가느냐 그래서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설교에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고 평 가하며 \\\\\\\\\\\\\\\\\\\\\\\\\\\\\\\\\\\\\\\\\\\\\\\\\\\\\\\\\\\\\\\"성경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라고 혹평했다. \\\\\\\\\\\\\\\\\\\\\\\\\\\\\\\\\\\\\\\\\\\\\\\\\\\\\\\\\\\\\\\"복음으로 시작 해서 율법으로 끝맺음하는 느낌이다. 성경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성봉 목사의 \\\\\\\\\\\\\\\\\\\\\\\\\\\\\\\\\\\\\\\\\\\\\\\\\\\\\\\\\\\\\\\"허무주의적 정서\\\\\\\\\\\\\\\\\\\\\\\\\\\\\\\\\\\\\\\\\\\\\\\\\\\\\\\\\\\\\\\"를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 고 싶다. 우선 기독교 신앙은 현세 부정을 통한 현세 긍정적 신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세 부정을 통한 내세 긍정적 신앙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현세 부정적 요소가 나타나 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 3:7 -8).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 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 라\\\\\\\\\\\\\\\\\\\\\\\\\\\\\\\\\\\\\\\\\\\\\\\\\\\\\\\\\\\\\\\"(요일 2:15-16). \\\\\\\\\\\\\\\\\\\\\\\\\\\\\\\\\\\\\\\\\\\\\\\\\\\\\\\\\\\\\\\"그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타지리라)\\\\\\\\\\\\\\\\\\\\\\\\\\\\\\\\\\\\\\\\\\\\\\\\\\\\\\\\\\\\\\\"(벧후 3:10). 이성봉 목사의 신앙과 설교에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기는 했지 만 그렇다고 현실 교회와 사회에 대해 아주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 개혁을 외쳤으며 일제의 만용과 무지를 공격하면서 일제의 멸망을 외치다가 체포되고 구속 되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 또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영안이 밝은 사람은 인생의 존귀를 발견하는 한편 또한 세상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세상을 비관하는 염세주의도 아니요, 세상을 무시하는 허무주의도 아니다. 아브라 함이 자기 땅에 있으면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한 것은 더욱 아름다운 본향을 사모함이 니 이 말은 천국에 목적을 두고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는 건전한 인생관을 말한다.\\\\\\\\\\\\\\\\\\\\\\\\\\\\\\\\\\\\\\\\\\\\\\\\\\\\\\\\\\\\\\\" 그는 세상에 대한 애착을 부정한 것이지 세상 안에서의 믿음의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물론 어거스틴과 칼빈의 문화 변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 사회, 문화 참여적 삶을 제창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과거의 교회도 마찬가지였지만, 말로는 문화 변혁주의 적 개혁주의 신학이나 순교적 신앙을 주창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과 돈을 너무 좋아하는 세 속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더욱더 그렇다. 필자는 중 세의 금욕주의의 잘못도 잘 알고 존 번연의 현세 부정주의의 잘못도 잘 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차라리 그들로부터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죽고 자신을 비우는 청빈과 순결의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겸허하게 배워야 할 것이다. 세상과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성봉 목사의 \\\\\\\\\\\\\\\\\\\\\\\\\\\\\\\\\\\\\\\\\\\\\\\\\\\\\\\\\\\\\\\"허무주의적 정서\\\\\\\\\\\\\\\\\\\\\\\\\\\\\\\\\\\\\\\\\\\\\\\\\\\\\\\\\\\\\\\"가 깃들여 있는 현세 초월적 청 빈의 삶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고 있다. V.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았다. 임마누엘 하나님 제일주의 예수 중심주의 성결과 사랑 순간순간 주로 호흡하고 일보일보 주와 동행하라. 이성봉 목사는 이와 같은 좌우명을 1962년 5월 8일 친필로 써서 남겼다.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동기 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고, 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었 다.\\\\\\\\\\\\\\\\\\\\\\\\\\\\\\\\\\\\\\\\\\\\\\\\\\\\\\\\\\\\\\\" 수원교회를 사임하고 목포로 내려가라는 교단의 지시를 받았을 때 이성봉 전도사는 정신이 아뜩함을 느끼며 안 가려고 많이 발버둥도 쳤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곧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든 교회를 떠났다.\\\\\\\\\\\\\\\\\\\\\\\\\\\\\\\\\\\\\\\\\\\\\\\\\\\\\\\\\\\\\\\" 신의주교회가 1,000여 명의 신 자를 가진 대교회로 부흥하던 때 갑자기 총회로부터 전국 부흥사로 임명받았다. 신의주 목 회는 이 목사에게 있어서 \\\\\\\\\\\\\\\\\\\\\\\\\\\\\\\\\\\\\\\\\\\\\\\\\\\\\\\\\\\\\\\"제일 부흥되고 제일 재미있게 일한\\\\\\\\\\\\\\\\\\\\\\\\\\\\\\\\\\\\\\\\\\\\\\\\\\\\\\\\\\\\\\\" 목회였다. \\\\\\\\\\\\\\\\\\\\\\\\\\\\\\\\\\\\\\\\\\\\\\\\\\\\\\\\\\\\\\\"정으로 생각하면 차마 떠나기 힘든 곳\\\\\\\\\\\\\\\\\\\\\\\\\\\\\\\\\\\\\\\\\\\\\\\\\\\\\\\\\\\\\\\"이었다. 헌당식을 한 지 사흘 만에 떠나려고 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 았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목양지를 떠나 우리 밖의 양들을 찾아 험하고 먼 길을 떠났다. 전국 부흥사로 임명을 받고 이성봉 목사는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하나님의 주 권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헌신의 글이었다. 일을 일으키시는 이도 여호와요 일을 그대로 이루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시니라……창세 전에 나를 아시고 모태로부터 나를 택하시고 출생 후 지금까지 거룩하신 품안에 영육을 보존하시고 전지전능의 손에 붙잡으사 작은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만사 합동하여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게 하심을 감사할 뿐이로소이다. 금번에 귀중한 사명은 벌써 만세 전에 예정하신 주님의 계획이요, 4년 전에 보여 주신 이상의 감동이 오늘에 성취될 때 일희일비의 정을 금할 길 어렵도다. 주님의 거룩한 뜻은 언제든지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한번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중대한 책임을 생각할 때 황송하고 떨리지 않을 수 없노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자신을 돌아볼 때 이 사명의 말씀이 참으로 어려워 미디안 광야의 모세가 내게 거울이 되도다……오, 주의 권능으로 없던 내가 이 시대에 생겨나서 주의 영광 다 뵈옵고, 필요한 일을 알리어 주시는 그 사랑의 품에 있는 것은 웬일인가. 물질이나 정신이나 영이나 육이나 우리 전부가 주께로 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도상에 순간순간 최후 숨결까지 그 안에서 사라짐을 나타내겠노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불타는 주님의 사랑, 그의 가슴을 내가 알고 나를 불러 세우신 그 뜻을 알려 주시는 힘, 임하는 말씀, 인도하시는 성령에 끌리어 순종하고 복종하리니 그 앞길에 장애와 사탄의 오묘도 무수할 터이나 그 염려와 불신앙의 죄악을 다 태워버리고 힘써 매진하겠도다. 각처에 한 핏줄 한몸으로 지음 받은 형제 자매여, 한순간이라도 이 그림자, 이 질그릇을 기억하시사 합심 동정의 기도를 드려 주소서……주여 나의 믿음의 부족함을 도우소서. 우리는 이 글에서 이성봉 목사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분명하게 접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에 전 적으로 순복하는 칼빈주의적 신앙과 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과 품을 친밀하게 체험하고 의지하며 그 사랑의 품에 안기면서 고난의 길을 흔쾌히 그리고 겸허하게 걸어가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생생하게 접 한다. 이성봉 목사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 순종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손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성봉 목사가 행한 수많은 설교, 특히 미국 순회전도 집회 때 행한 수많은 설교의 주제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성봉 목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정인교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기 술했다. \\\\\\\\\\\\\\\\\\\\\\\\\\\\\\\\\\\\\\\\\\\\\\\\\\\\\\\\\\\\\\\"여기서 우리는 철저히 사업의 논리와 사업가의 계산으로 오염된 현대 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한 진정한 광야의 소리를 듣게 된다.\\\\\\\\\\\\\\\\\\\\\\\\\\\\\\\\\\\\\\\\\\\\\\\\\\\\\\\\\\\\\\\" VI.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예수 중심주의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의 설교의 본문과 주제와 내용을 분석한 정인교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설교가 신약 중심적이고 복음서 중심적이며 예수 중심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성봉 목사는 \\\\\\\\\\\\\\\\\\\\\\\\\\\\\\\\\\\\\\\\\\\\\\\\\\\\\\\\\\\\\\\"신본주의 적,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갖고서 모든 본문을 풀어간다.\\\\\\\\\\\\\\\\\\\\\\\\\\\\\\\\\\\\\\\\\\\\\\\\\\\\\\\\\\\\\\\" 이성봉 목사의 사명이 하나님 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기 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성봉 목사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뜨겁게 부어져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대부분의 설교에서 설교의 목표를 패역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 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설적 사랑에 두고 있다. 이성봉 목사가 자주 사용하던 예 화 중 하나는 \\\\\\\\\\\\\\\\\\\\\\\\\\\\\\\\\\\\\\\\\\\\\\\\\\\\\\\\\\\\\\\"어떤 술주정뱅이가 만취하여 기차 레일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는 예화였 다. 필자가 중학생 때 여러 번 들은 예화이다. 급행열차가 고동을 틀면서 달려왔을 때 한 자비로운 사람이 고함을 치면서 일어나라고 외쳤 지만 그 술주정뱅이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결국 그 자비로운 사람이 달려가서 그 술주정뱅 이의 다리를 끌어 철둑 아래로 내동댕이쳤고, 그 대신 그는 목이 잘리고 다리가 끊어지고 팔이 잘리고 창자가 나와서 즉사했다는 것이다. 기차가 정거를 한 후 술주정뱅이는 그제야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즉사한 사람이 조심하지 않다가 변을 당했다고 중얼거리다가 따귀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 자식아! 이 사람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 이 이야기는 패역한 죄인 대신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성봉 목사는 역설했다. \\\\\\\\\\\\\\\\\\\\\\\\\\\\\\\\\\\\\\\\\\\\\\\\\\\\\\\\\\\\\\\"기차 레일을 베고 잠자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이 설교를 하는 사람부터 온 세상 사람들 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멸망의 기적은 고동을 틀면서 오는데 죄악의 술을 마시고 취생몽사 로 허영의 꿈만 꾸는 것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자가 33년간 외치시다 못하여 우리가 죽을 대신, 멸망받을 대신에 죽으신 십자가의 대속을 말하는 것이다. \\\\\\\\\\\\\\\\\\\\\\\\\\\\\\\\\\\\\\\\\\\\\\\\\\\\\\\\\\\\\\\"성자 예수 그 머리에 가시관 쓰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셨네 이와 같이 넓고 크신 사랑에 아직 감복 않는 자야 사람이랄까.\\\\\\\\\\\\\\\\\\\\\\\\\\\\\\\\\\\\\\\\\\\\\\\\\\\\\\\\\\\\\\\" 이성봉 목사는 또다시 아기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모스크바 에 흉년이 들어 어떤 아기 어머니가 며칠을 굶고 풀뿌리라도 캐어 먹으려고 들에 나왔는데 등에 업힌 어린 애기가 젖을 먹겠다고 졸랐다. 그러나 삼 일간을 굶은 어머니 가슴에서 젖 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만 그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장도를 꺼내어 젖꼭지를 찢어 피를 내 어 어린아이에게 물리니 어린것은 피를 빨고 있고 어머니는 기절을 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비참한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대신 희생의 피를 흘리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성봉 목사는 지적했다. \\\\\\\\\\\\\\\\\\\\\\\\\\\\\\\\\\\\\\\\\\\\\\\\\\\\\\\\\\\\\\\"우리 주님은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들을 위해 희생의 피를 흘려 주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 를 지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희생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패역하여 비참하게 된 죄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 것도 없 다고 거듭해서 강조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고 좇는 데서만 가능하 다. \\\\\\\\\\\\\\\\\\\\\\\\\\\\\\\\\\\\\\\\\\\\\\\\\\\\\\\\\\\\\\\"참 신앙은 예수를 통하여 신구약의 3만여 가지의 약속을 그 피로 인쳐 우리에게 주시고 성 신으로 알게 하시는 지각으로 이 말씀 전부를 다 나 위하여 주신 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 지하며 그대로 바라고 그대로 좇고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예수란 뜻이 구원이란 뜻이다. 사람에게 제일 급선무는 구원이 다.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환난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에서 구원하신다. 주 예수 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이 구원받으리라 한 것은 예수는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본체요, 생 명의 자본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 생명을 받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 다.\\\\\\\\\\\\\\\\\\\\\\\\\\\\\\\\\\\\\\\\\\\\\\\\\\\\\\\\\\\\\\\" 그리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사랑하자고 호소했다. \\\\\\\\\\\\\\\\\\\\\\\\\\\\\\\\\\\\\\\\\\\\\\\\\\\\\\\\\\\\\\\"대속의 십자가의 참된 사랑에 녹아져서 항상 감사 찬송으로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날마다 그가 가신 자취를 따라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때까지 십자가를 사랑할 것이다.\\\\\\\\\\\\\\\\\\\\\\\\\\\\\\\\\\\\\\\\\\\\\\\\\\\\\\\\\\\\\\\" 예수 사랑에 녹아진 가슴, 그리고 그 예수 사랑만을 전하는 입술과 몸을 가졌던 이성봉 목 사의 신앙은 갖가지 불순한 것으로 오염되고 변질된 신앙을 붙잡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 에게 참신한 도전을 주고 있다. VII.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회개와 중생의 복음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교파를 초월한 넓은 시야와 안목을 가진 폭 넓은 신앙과 신학을 가진 분이었 지만 성결교의 사중복음인 중생과 성결과 신유와 재림의 복음을 충실하게 신종했다. 이성봉 목사의 신앙과 설교와 사역은 무엇보다 먼저 회개를 통한 중생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새벽기도회의 시간은 추상같은 권위로 죄를 책망하는 시간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며 회개했다. 자신의 삶이 철저한 회개에 기초한 삶이었기 때문에 이 성봉 목사는 항상 죄를 무섭게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 의 메시지와 사역의 기초와 출발점이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이었고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성봉 목사에게는 대중들에게 아부하는 설교는 있을 수 없었다. 철저한 회개를 강조했다. 이성봉 목사 자신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살려는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평생토록 스스로 크고 작은 일들을 회개하면 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였다. 12월 마지막 토요일, 임신한 사모님이 목사님께 닭을 좀 잡아 달 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 목사는 거절했다. 그러고는 때마침 집에 찾아온 박동형 군에게 닭 을 좀 잡아 달라고 말했다. 그도 싫다고 하다가 할 수 없이 닭을 잡아 주었다. 이 목사는 닭 은 잡지 않았지만 닭고기 국은 잘 먹었다. 그 이튿날 주일 아침 이 목사가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모님이 \\\\\\\\\\\\\\\\\\\\\\\\\\\\\\\\\\\\\\\\\\\\\\\\\\\\\\\\\\\\\\\"저 수탉을 좀 잡아매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이 목사는 마지못해 나가서 수탉을 잡다가 그만 엄지손가락이 찢어 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사모님을 실컷 원망했다. 손가락도 아프고 머리까지 아팠다. \\\\\\\\\\\\\\\\\\\\\\\\\\\\\\\\\\\\\\\\\\\\\\\\\\\\\\\\\\\\\\\"주일 날 아침 이거 무슨 일입니까?\\\\\\\\\\\\\\\\\\\\\\\\\\\\\\\\\\\\\\\\\\\\\\\\\\\\\\\\\\\\\\\" 하고 기도하던 중 마태복음 23장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여. 무거운 짐은 남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어하는 자여. 어제 일을 생각해 보라. 닭 죽이기 싫다고 아 내에게 미루고 박군에게 미루고 그러면서도 닭국은 잘 먹었지. 바리새인 손가락 같은 것 찍 어 버려 마땅하겠지만 그만큼 둔 것도 감사해라. 너 그런 심보 가지고 강단에서 무슨 설교 를 할 작정이냐? 바로 너를 잘 알아 회개하고 설교하라.\\\\\\\\\\\\\\\\\\\\\\\\\\\\\\\\\\\\\\\\\\\\\\\\\\\\\\\\\\\\\\\" 이성봉 목사는 그날 아침 하나님과 온 교우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설교했다. \\\\\\\\\\\\\\\\\\\\\\\\\\\\\\\\\\\\\\\\\\\\\\\\\\\\\\\\\\\\\\\"주여 감사합니다. 만 번 죽어 마땅한 자식, 이만큼 징계하여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 시는 나 하기 싫은 일 남에게 마루지 않겠습니다. 사랑의 채찍 감사합니다.\\\\\\\\\\\\\\\\\\\\\\\\\\\\\\\\\\\\\\\\\\\\\\\\\\\\\\\\\\\\\\\" 이 목사의 회 개의 간증에 온 교우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이성봉 목사는 설교 때마다 회개를 강조했다. 회개를 통해서만 죄인이 중생하고 구원 얻어 천국 간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과 실제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한 이야기들을 항상 소개 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삭개오는 철저한 회개를 했다. 회개는 천국 가는 길이요 제이(第二)의 무죄라고 하였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사회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 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회개는 또한 숨은 부끄러움, 곧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다 들추어내는 것이니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를 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사람과 관련된 것은 또한 사람과 해결지어야 한다.\\\\\\\\\\\\\\\\\\\\\\\\\\\\\\\\\\\\\\\\\\\\\\\\\\\\\\\\\\\\\\\" 이성봉 목사는 \\\\\\\\\\\\\\\\\\\\\\\\\\\\\\\\\\\\\\\\\\\\\\\\\\\\\\\\\\\\\\\"회개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회개는 주님의 명령이요 소원이며 회개란 지·정·의·행(知情意行)의 전폭적인 변화라고 폭 넓게 설명했다. \\\\\\\\\\\\\\\\\\\\\\\\\\\\\\\\\\\\\\\\\\\\\\\\\\\\\\\\\\\\\\\"회개는 주님의 지상 명 령이요 주의 소원이며 뜻이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니, 복음의 대지(大旨)가 회개 요, 저주와 멸망을 막는 요새가 되는 것이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회개는 제이의 무죄요 향상(向上)의 별명이라 하였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 이 지옥에 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그것은 지·정·의·행으로 나타낼 수 있다. 1) 회개는 지적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다. 2) 회개는 정적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3) 회개는 의지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4) 회개는 행위적으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철두철미하게 회개하라.\\\\\\\\\\\\\\\\\\\\\\\\\\\\\\\\\\\\\\\\\\\\\\\\\\\\\\\\\\\\\\\" 이성봉 목사는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생이 구원의 첫 단계요 현재적 단계라고 설명하 며 중생이 기독교의 기초임을 강조한다. 중생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구원이란 말을 중생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곤 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사람에게 제일 급선무는 구원이다. 정치가도 먼저 구원을 받아 야 하고, 과학자도, 철학가도, 예술가도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한다. 모든 인물들의 급선무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오늘날 이 세계, 이 사회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지배하여 멸망의 구덩이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사람이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는 말씀과 다음 말 씀들에 근거하여 중생을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람이 거듭나서 중생하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 1:12), 천국을 보고(요 3:3),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 못하고(요일 5:18), 의를 행하고(요일 2:29), 죄를 범치 않고(요일 3:9), 서로 사랑하고(요일 4:7), 세상을 이기고(요일 5:4), 산 소망을 가지고(벧전 1:3),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천국에 들어가서 후사가 된다(요 3:5). 그리고 물과 성 령으로 중생한 성도는 흑암에서 나아와 광명으로(요일 2:8), 죽음에서 나아와 생명으로(요일 5:24), 슬픔에서 나아와 기쁨으로(롬 14:17), 자기 중심에서 떠나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고 했다. 회개와 중생의 메시지가 점점 사라져 가는 오늘에 비추어 볼 때 회개와 중생의 복음을 강조 한 이성봉 목사의 신앙과 메시지는 우리들에게 심각한 경종이 되고 있다. VIII.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성결의 복음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평생 성결을 추구하며 성결의 메시지를 전했다. 성결은 구원의 둘째 단계, 즉 현재적 단 계이다. 이성봉 목사는 \\\\\\\\\\\\\\\\\\\\\\\\\\\\\\\\\\\\\\\\\\\\\\\\\\\\\\\\\\\\\\\"성결의 복음\\\\\\\\\\\\\\\\\\\\\\\\\\\\\\\\\\\\\\\\\\\\\\\\\\\\\\\\\\\\\\\"이란 설교에서 이렇게 외쳤다. \\\\\\\\\\\\\\\\\\\\\\\\\\\\\\\\\\\\\\\\\\\\\\\\\\\\\\\\\\\\\\\"성결은 성결교회의 전매 특허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복음을 그대로 받아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 없으면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히 12:14). 성결은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벧전 1:16). 이 하나님의 말씀은 결정적이다. 이 말씀 들어야 살고 듣지 않으면 죽는다. 이 말씀 들 어야 복 받고 듣지 않으면 화 받는다. 이 말씀은 시금석이다. 성결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거룩하 여 음란을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성결은 천국민의 자격이다. 성결은 그리스도 신부의 단장이다. 성결한 사람은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 이 중대하고 귀한 성결은 무엇으로 되는가? 말씀과 성신과 그리스도의 피와 징계의 채찍으로 된다. 하나님은 이 강산을 다 불태우고 이 강산을 온통 피바 다로 만들고라도 당신의 택한 민족, 택한 종들, 택한 신도들 한 사람이라도 깨달아 성결해지면 그것으 로 위로받으신다. 왜 그런가?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한 까닭이다.\\\\\\\\\\\\\\\\\\\\\\\\\\\\\\\\\\\\\\\\\\\\\\\\\\\\\\\\\\\\\\\" 이성봉 목사는 \\\\\\\\\\\\\\\\\\\\\\\\\\\\\\\\\\\\\\\\\\\\\\\\\\\\\\\\\\\\\\\"거룩하고 깨끗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성도들이 성결해야 하는 이유는 성 부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거룩하시고 성신이 거룩하시고 천국이 거룩한 곳이 기 때문이라고 설명했고, 손과 마음과 사상과 입술과 눈동자와 감정과 몸과 영과 혼이 정결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성결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순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결의 필요\\\\\\\\\\\\\\\\\\\\\\\\\\\\\\\\\\\\\\\\\\\\\\\\\\\\\\\\\\\\\\\"라는 설교에서는 성결할 때 하나님을 보게 되고, 재림 주를 보 게 되고, 귀히 쓰는 그릇이 되고, 그리스도와 혼연 일체가 되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순종하 는 능력을 얻고 환난 고통에서 승리한다고 지적했다.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가 전한 성결의 복음을 오직 은혜와 오직 신앙의 복음을 전하지 못한 율법주의적인 복음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성결에다 그의 메시지를 매달아 놓고 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복음, 즉 오직 은혜만(Sola Gratia)의 복음보다는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순결해 은혜와 구원과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기서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의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성결하지 않으면 징계를 면할 길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정성구 교수의 비판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성봉 목사는 중생한 신자와 사역자 의 현재적 삶에서 성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삶이 깨끗하고 순결해야 은혜와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고, 또한 그가 오직 믿음의 진리를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 문이다. 신자와 복음 사역자가 성결을 상실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떠나게 되고 하나님 의 징계의 채찍이 임한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율법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성결 을 상실한 다윗을 징계하여 회복하셨다. 성결이 천국 시민의 자격이 된다는 말도 오직 믿음 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와 결코 상치되지 않는다. 요한 웨슬레뿐 아니라 존 칼빈도 경건과 성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평생 칼빈만을 신봉해 오던 한철하 박사가 최근 수년 동안 \\\\\\\\\\\\\\\\\\\\\\\\\\\\\\\\\\\\\\\\\\\\\\\\\\\\\\\\\\\\\\\'경건\\\\\\\\\\\\\\\\\\\\\\\\\\\\\\\\\\\\\\\\\\\\\\\\\\\\\\\\\\\\\\\'보 다는 \\\\\\\\\\\\\\\\\\\\\\\\\\\\\\\\\\\\\\\\\\\\\\\\\\\\\\\\\\\\\\\'성결\\\\\\\\\\\\\\\\\\\\\\\\\\\\\\\\\\\\\\\\\\\\\\\\\\\\\\\\\\\\\\\'이란 단어를 선호하고 있으며 칼빈과 아울러 웨슬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적 책임을 간과하다가 이중적이고 모 순된 신자의 허상을 드러내 보이게 된 한국교회에 대한 자성의 결과로 나타난 소리가 아닌 가 생각해 본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성결을 상실하고 있다. \\\\\\\\\\\\\\\\\\\\\\\\\\\\\\\\\\\\\\\\\\\\\\\\\\\\\\\\\\\\\\\"오직 믿음\\\\\\\\\\\\\\\\\\\\\\\\\\\\\\\\\\\\\\\\\\\\\\\\\\\\\\\\\\\\\\\"은 있는지 모르겠지 만 분명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순결을 유지하고 나타내는 삶은 사라 지고 있다. 평생 성결을 추구하고 실천하면서 성결의 메시지를 전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 앙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 IX.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신유의 복음 신앙이었다 신유는 이성봉 목사가 23세 청년 시절부터 한평생 친히 체험한 은혜요 그의 목회 및 부흥사 역에서 수없이 많이 나타난 은혜였다. 이성봉 목사는 의약을 쓰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 았지만 질병의 어려움을 많이 겪으면서도 한평생 의약을 쓰지 않고 신유의 신앙으로 살았 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 때문이 었다. 이성봉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신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성결교회 사중복음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지하고, 그대로 체험하고, 그대로 전함을 나의 사명으로 알았다. 그래서 신유의 체험을 많이 하였다. 본시 나 자신이 폐디스토마로 오래 고 생하여 어릴 때 별명이 깔다귀였다. 신학 공부할 때에도 심히 쇠약하고 수원서 교역할 때에 도 쇠약하여 몇 달 휴양하는 중 주야에 기도로 나음을 얻고 복막염에서도 나음을 얻었는데 나의 몸은 22관까지 나가는 뚱뚱보가 되었다. 특별히 황해도 송화읍 무초교회 부흥회를 인 도하다가 화단이 일어나 머리부터 전신이 붓고 열이 과하여 집회를 중지하게 되었으나……참 고 기도할 때에 신기한 이적이 나타나 그 밤으로 거짓말같이 나아서 그 집회를 승리로 마쳤 다……나는 또 맹장염에서도 구원받았다. 그 후 해남에서 부흥회 하다가 맹장염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집회를 결사적으로 하였다. 너무나 고통을 당하니 송의사가 와 보고는 급성 맹장염인데 24시간 안에 수술을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다……나는 결사적으로 기도만 했는데 그날 밤 너무도 고통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침에 이상하게 씻은 듯 나음을 주시었다.\\\\\\\\\\\\\\\\\\\\\\\\\\\\\\\\\\\\\\\\\\\\\\\\\\\\\\\\\\\\\\\" 이성봉 목사는 그의 신유에 대한 소신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기 때문에 오늘도 그 권능, 그 사랑으로 치료하시는 여호와시니 라. 그래서 나는 신유의 신앙으로 30년간 의약을 의지하지 않고 그의 손에 치료를 받아 오 늘까지 나왔다. 물론 의약을 쓰는 것이 죄가 되거나 구원 문제는 아니다. 의약으로 치료하는 것은 자연의 요법이요 신유로 구원받는 것은 초자연의 요법이다.\\\\\\\\\\\\\\\\\\\\\\\\\\\\\\\\\\\\\\\\\\\\\\\\\\\\\\\\\\\\\\\"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가 무분별하게 기사와 이적을 예찬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신비주 의를 경계하며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성경은 천국을 바라보는 망원경이요, 나의 진상을 살피는 거울이다. 이 말씀은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꿀보다 더 달고 꿀 송이보다 더욱 달게 여겨야겠는데, 많은 신자들이 이 말 씀을 등한히 하여 은혜를 저버린다. 성신 충만은 말씀 충만이다. 우리의 신앙이 감정과 기분 으로 좌우되지 말고 이 말씀에 건전히 굳게 서야 될 것이요, 기사와 이적에 관심을 두지 말고 말씀의 지식으로 이단과 사설을 퇴치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성봉 목사가 한평생 의약을 쓰지 않고 신유의 은사만 의지한 것은 독특한 입장이지만 그것은 그분 개인의 신앙적 소신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의 신앙을 다만 존중할 뿐이다. 이 목사는 신유의 복음을 믿는 자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신유의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하라 고 권면했다.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란 말씀(출 15:26)을 보시라. 질병으로 신음하는 교우들이여, 죄 를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사이다. 환난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 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신유의 복음을 믿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도다.\\\\\\\\\\\\\\\\\\\\\\\\\\\\\\\\\\\\\\\\\\\\\\\\\\\\\\\\\\\\\\\" 이성봉 목사뿐 아니라 한국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회개와 기도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 는 치유의 은사를 인정하며 신유의 은사를 통해 많은 전도와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 면서도 신유와 이적 중심으로 나가는 신비주의와 이단을 경계했다. 오늘날 한편에서는 성령 의 현재적 은사들을 모조리 부인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유와 이적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 하는 양극화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성봉 목사의 균형잡힌 신유 복음 신앙은 우리들에게 신중한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든다. X.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재림의 복음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재림 신앙을 가지고 한평생 을 살았다. 이성봉 목사는 밤에 자다가 옆 집 방앗간에서 방아 찧는 소리만 들어도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는 간증을 나는 중학생 때 직접 들었 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는 허무한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한 재림 신앙을 가져야 하 며, 재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상하고 허무한 이 세상에서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신약 성도들의 신앙이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었다. 이성봉 목사에게 있어서 재림은 구원의 셋째 단계, 즉 미래적 단계이다. 재림은 기독교 신앙 의 목적이다. \\\\\\\\\\\\\\\\\\\\\\\\\\\\\\\\\\\\\\\\\\\\\\\\\\\\\\\\\\\\\\\"예수의 재림은 하나님의 최대 계획이요, 성도의 최대 소망이다. 만물이 고대 하는 소망이요 마귀를 진멸하고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당신의 신부들 을 영접하시는 주의 날이다.\\\\\\\\\\\\\\\\\\\\\\\\\\\\\\\\\\\\\\\\\\\\\\\\\\\\\\\\\\\\\\\" 그리고 재림의 날이 임박했음을 지적했다. \\\\\\\\\\\\\\\\\\\\\\\\\\\\\\\\\\\\\\\\\\\\\\\\\\\\\\\\\\\\\\\"오리라, 도적같이 오리라는 약속을 굳게 잡고 요제인가 고제인가 눈물로 기다리는 주의 재림, 천지는 변하여 도 그 약속은 변치 않으시리라. 아무리 보아도 시대는 점점 절박하여 간다. 자연의 징조를 보든지, 국제 사회의 징조를 보든지, 교회와 인심의 징조를 보든지, 유대나라 독립하는 무화 과 잎이 나는 것을 보면 재림의 복음을 믿는 자들의 가슴은 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깨어서 재림을 준비하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