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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31일)간 새벽 기도 설교 시리즈(26)/ 민족을 위한 회개 기도-영적 지도자, 에스라/ 스9:1-7
1개월(31일)간 새벽 기도 설교 시리즈(26)/ 민족을 위한 회개 기도-영적 지도자, 에스라 스9:1-7 1. 본문설명: 2. 에스라의 특징: 3. 그의 기도의 특징: 4. 기도의 응답: 5.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6. 우리가 적용해야 할 점: -계속되는 기도 (8-15절) -백성이 회개함(10:1), 민족 회개 운동이 일어남(10:2-14)
6.25와 애국자 예레미야/ 애1:1-4/ 2002-06-25
6.25와 애국자 예레미야 애1:1-4 저는 6.25의 산 증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레미야도 역시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함으로 고통 당한, ’고통의 산 증인’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그는 참다운 애국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중국에 갈 기회가 있어서 상해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과거 우리 나라의 임시정부가 있습니다. 지금은 수리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지만, 그곳에서 저는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일제 식민시절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항일 투쟁을 벌렸던 애국자들의 발자취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이야기도 그런 ’애국의 발자취’입니다. 一. 진정한 애국자는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자이다. 요즘 골프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수뇌부들이 북한에서는 배가 넘어오는데, 그 시간에 골프를 치고 있었다고 해서 많은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뇌물을 받으며, 정직한 정치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정직한 일꾼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가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제가 중국에서 사업을 하시는 어떤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일하시는 곳을 둘러보다가 페인트가 잔뜩 쌓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페인트 어느 나라 것입니까?’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의 말이 ’전부 우리나라, 대한 민국 것입니다.’대답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애국자입니다. 외국에 나가 있어도 자신의 나라 물품을 사용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가 애국자입니다. 요즘 야구로 유명한 박찬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볼 하나를 잘 던져서 애국하는 사람입니다. L.A는 그 사람이 거의 우상처럼 인기가 좋습니다. 박세리는 골프를 잘 쳐서 애국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다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가 나라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고, 애국자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직업에 귀천이 없는 나라입니다. 자신의 맡은 일에 충실하면, 인정되는 나라입니다. 이렇듯 우리도 차별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인정해 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참 애국자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4:2에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한 그 사람이 참 애국자입니다. 二. 진정한 애국자는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자이다. 사람은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이번에 중국에 가서 한 장로님을 만나 제가 ’이곳에도 탈북자가 있는가?’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곳도 많은 탈북자들이 있고, 그들이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 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을 도와주다가 탄로가 나면, 그들도 죽고, 도와준 사람도 큰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공산당이면서도 서로에 대해 잔인하기가 그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렘33:2-3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6-7절에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9절에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에 찬송과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안타까운 상황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될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 1장을 보면 그의 동생 하나니가 느헤미야를 찾아오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동생 하나니가 느헤미야에게 본국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가 금식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가 하루는 왕에게 나아갑니다.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색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에게 안부를 물어봅니다. 그러니 느헤미야가 자기 고국의 형편을 왕에게 전하고, 왕은 느헤미야의 말에 감동을 받고 그를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성벽을 쌓을 수 있는 모든 재료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느헤미야의 금식의 기도로 시작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됩니다. 기도로 시작된 그의 일이 고국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힘이었던 것입니다. 과거 우리의 기독교는 기도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 하면, 모두 애국자라 생각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기독교인, 진실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三. 진정한 애국자는 전도하여 복음화시키는 자이다. 국민일보 보도된 내용인데, 연길에서 교회를 공안들이 덮쳐 탈북자들을 색출하고, 모두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바람에 그들이 다 처형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일보에는 북한의 지하교회가 발각이 되어서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습니다. 북한은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가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나라의 통일은 복음화 밖에 없다고 믿습니다. 복음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는 그가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그 복음이 이 나라를 회복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맡은 일에 충실함으로, 기도함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애국하는 이 땅의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6월이 오면/ 삼상17:47-48/ 나라를 위한 기도주일설교/ 현충일설교/ 2008-06-07
6월이 오면 삼상17:47-47 지난 6월 6일은 제 51회 현충일이었습니다. \\\"주인 잃은 국민훈장 9만 여개 노병을 찾습니다.\\\"라는 모 일간지 헤드라인이 눈길을 끌고 있는 가운데 남북 제 12차 경제 협력 추진위원회 회의가 닷새 만에 극적 합의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선 육로를 통한 북한 방문, 후 경공업 원자재 제공이라는 해법이 또 최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북 대화는 항상 본질적인 논의는 뒷전이고 이면적인 경제지원이 없이는 일보의 진척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이 중대한 싸움에서 성경의 기록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 성경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쟁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왕 여호사밧과 모압과의 싸움에서 야하시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 역시 전쟁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20장 15절에서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68편 30절에도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동족상잔의 6ㆍ25는 이 땅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가운데서도 최악의 수식어를 몰고 다니기에 충분합니다. 그것은 바로 동족상잔이라는 것이 그 첫째 이유입니다. 둘째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대립이었습니다. 셋째가 막스와 레닌의 사상을 신봉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Ⅰ. 전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의 역사(work)라는 말입니다. 첫째 하나님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말합니다. 둘째 하나님 자신의 의지적용의 자유를 말합니다. 셋째 하나님 자신의 의지적용의 결과 성취의 자유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소유주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시고 보존하십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심판하시기도 하시며 그 만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을 자신의 목적을 두고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의 범위는 피조세계 전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토기장이의 비유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2-4절에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9장 19-21절에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신앙에 도전하여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불신한다면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요즘 방송을 타고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져야할 동량(棟梁)들에게 이른바 저명한 교수가 공공연하게 무신론을 강의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결코 목적론적이 아니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는 노자의 天地不 사상을 청소년들에게 강의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싸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 철학을 강의 하면서 동서양의 무신론주의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는 내세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목적론적 창조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의 영향을 받아 중세 종교가 모든 사람을 억압하고 강금시켰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목적론적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중세적 강압과 탄압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철학자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사상을 공공연하게 대중매체를 통해서 주장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세상의 모든 피조세계를 자신의 선하신 목적대로 창조하시고 진행하시고 통치하시고 마지막에 심판하십니다. Ⅱ. 6ㆍ25 전쟁은 회개를 촉구하는 하 나님의 징계입니다. 1) 마땅히 회개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1938년 9월 1일에 평양 서문의 예배당에 모인 조선 예수교 장로회 27회 총회는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의 압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가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소하 13년 9월 10일에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 진리에 위반하지 않은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어 신사참배를 솔선이해하고 따라서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함…\\\"이라고 가결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악이자 범죄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주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은 민족사적인 차원에서나 교회사적인 차원에서나 그 어느 편으로 보더라도 일대 역사적인 전환기였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한국교회는 적어도 두 가지 과제가 불가피했습니다. 먼저는 일제 통치하에서의 기독교 탄압 특히 신사참배 강요로 말미암은 한국교회의 공죄를 청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교회재건운동을 통한 갱신운동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에 신학적 기초를 확립하는 일이었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신사참배의 과오 앞에 온갖 괴설로 자신의 입장들을 정당화 시키는데 바빴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연약하여 넘어졌던 일로 인하여 회개할 기회를 여러 모양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기회를 오히려 악용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던 출옥 성도들을 중심하고 한국교회 재건을 위하여 기본 원칙을 정하였습니다. ① 교회의 목사 장로들은 모두 신사참배 하였으므로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한 후 교역에 나올 것 ②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강단에서지 말고 휴직하고 통회자복 할 것 ③ 목사와 장로 휴직기간에는 집사가 예배 인도 할 것 ④ 위와 같은 교회 재건의 기본원칙을 전 한국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⑤ 교역자 양성기관과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이와 같은 주장과는 달리 교권주의 자들의 입장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①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고생은 마찬가지였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섬기면서 일제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 되어야 한다. ② 신사참배 회개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체결될 성질의 것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참으로 불신자들이 들어도 부끄러운 억지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말할 수 없이 어지러웠습니다. 교회 재건운동은 고사하고 친일적 교권주의자들의 방해로 말미암아 영적 갱신 운동마저 힘들게 되었습니다. 1945년 6월 12일부터 4일간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남부 총회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27회 총회가 범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신학원을 조선신학교로 개칭하여 남부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신사참배 가결과 맞먹는 오류를 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조선신학원은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 서울에서 신사참배에 앞장선 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신학교 입니다. 저들은 일본의 보호와 감독아래 성장해 온 학교를 남한 전역에서 유일한 목사 양성소로 인증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1945년 9월 20일 부산에서 명실공히 평양신학교 사상을 계승하는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초대학장에 박형룡 박사, 박윤선 박사로 이어지는 정통계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고려신학 운동을 분열주의자로 낙인을 찍어 결국 총회로부터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안고 고려파는 태동되었습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싸움은 교권적 야욕에서 출발한 분파운동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싸움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고려파가 태동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원인은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에 대한 항거와 그리고 장로교 안에 자리잡은 신신학운동 즉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한 투쟁이었습니다. 고려파 운동은 신앙양심에서 볼 때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신학사상으로 볼 때는 개혁주의 신학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평신도까지 가담하는 저항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2) 회개하지 않을 때 오는 징벌이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이데올로기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그때마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ㆍ25전쟁으로 임했습니다. 6ㆍ25전쟁은 3백만 동족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었습니다. 물적 자원, 인적 자원, 공간 자원은 말할 것도 없고 조국의 산하가 송두리째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한 것은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의 찢겨진 애통함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우리 민족의 아픔으로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우리 민족의 뼈아픈 통한의 역사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까지 체험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전쟁 비용이 로마 제국당시 적군 한 사람을 죽이는데 75센트가 들었다고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15,000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30,000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6ㆍ25 동란에는 한사람 죽이는데 50,000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 때는 800,000달러가 들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물적 자원을 허공에 날려 보내는 것이 현대 전쟁입니다. Ⅲ. 실패한 역사는 복고되어야 합니다. 최근세사에서 볼 때 일제 강점기는 실패한 역사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복고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일제 청산과 함께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야 합니다. 6ㆍ25동족상잔의 비극 또한 실패한 역사이고 보면 이것 역시 복고 되어야 합니다. 실패한 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까. 그러나 역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6ㆍ25역사는 남북통일로 복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통일의 과정과 결과입니다. 과정이야 어찌되던지 꿩 잡는 것이 매라고 하는 결과주의는 지양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주장대로 통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공한 역사를 만들기 위해 피 흘려 목숨 바친 자들은 결코 부끄러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들은 실패한 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 희생된 자들입니다. 마땅히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실패한 역사를 복고해야 합니다. 오늘날 공산주의가 인류에게 갖다 준 것은 계급의 증오, 살인, 약탈, 테러, 숙청 외에 과연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노동자, 농민의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음의 노동, 절대 빈곤으로 떼거지 죽음, 바로 그와 같은 삶이 공산주의 세상이 아닙니까! 공산주의 이름으로 스탈린이 2,200만 명을, 모택동은 6700만 명을, 베트남은 100만 명을, 캄보디아에서는 450만 명을, 그리고 1956년 헝가리에서 수만 명, 한국동란에서 300만 명, 1918년 볼세비키 혁명 이래 68년 동안 무려 이 지구상에서 1억 5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공산주의는 이 세계 면적의 39%, 세계인구의 42%를 적화시켰습니다. 오늘날 그 어떠한 나라도 공산주의 지배 하에서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그러한 공산주의에 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자유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든 압제가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6ㆍ25 남침이 종식되고 휴전이 된 후 전란의 상처를 씻기도 전에 반공을 악용하여 참다운 민주 세력을 탄압했습니다. 이 땅에 참다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세력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차원 높은 반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독재와 부정, 부패를 먹고 자라는 이상한 체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반민주 독재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가 서식할 수 있는 온상을 제공하는 이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는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 인권, 경제, 지적 재산 면에서 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세계에서 120여개 국가는 한국처럼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파키스탄, 미얀마, 캄보디아등의 국가사람들 특히 그 나라들의 청년들은 한국에 한번 가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6ㆍ25 폐허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시 미국을 들어 한국을 구하기로 섭리하신 것입니다. 미군은 한국전쟁에 179만 명을 파병했습니다. 그 중에 4만여 명(실종 3,000여명 포함)이 목숨을 바쳤고 9만여 명이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미군은 독일에 7만 명, 일본에 4만 3천명, 영국에 1만 명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는 전략적 요충지뿐만 아니라 강대국들이 대부분입니다. 미국의 주둔은 자유, 인권, 복지(시장경제)라는 미합중국의 기독교적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일차적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미군이 그 지역에 주둔한 결과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미군의 주둔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미군은 독일과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영토나 전리품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폐허가 된 그 나라에 성의를 다하여 경제성장을 도왔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한데 대해서 소위 민족주의자들은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김정일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한 말이지 북한의 우리 민족이 악의 축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 민족정신 함양지수가 22위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히 미국과 관계될 때는 민족주의 의식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6ㆍ25전쟁은 동족상잔이라는 참람한 수사, 그 이름처럼 비극입니다. 6ㆍ25전쟁이 통일전쟁이라고 한 K 교수의 말은 김정일 부자와 그 추종자들의 한결 같이 주장하는 말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6ㆍ25가 실패한 통일시도라고 해서 언론이 문제 삼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 차원에서 이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공산당의 상투적인 주장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북한 정권을 고무 찬양하는 행위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155마일 휴전선에는 우리의 아들들이 날씨에 따라 A형, B형, C형 근무를 초긴장 가운데 서고 있습니다. 단지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경계하기위해서 입니다.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독도에 수위대를 파견한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는 우리의 경계대상이 누구인가를 쉽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6ㆍ25전쟁에 대한 체험세대는 자꾸 줄어만 가고 역사세대는 늘어나는 것은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6ㆍ25의 체험세대가 살아 있다는 것이 다행 중의 다행입니다. 우리는 친북 좌경세력들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친북좌경 세력들이 얼마나 되는 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급하게 숫자를 말하는 것도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참고할 일은 있습니다.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동독에서 서독에 숨겨놓은 첩자가 3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 사실을 감안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정부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수종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자이기 때문에 심판을 자초한다고 했습니다. 6월에 있는 월드컵은 한국전을 포함한 세계대전이라고들 합니다. 전쟁에 대한 단어 선택에 문제가 없다면 의미선택이라도 잘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5천 5백만을 죽인 세계 제 2차대전이나 300만을 죽인 6·25동족상잔의 비극과는 월드컵은 다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토고 전을 앞두고 전국에서 200만의 거리 응원단이 밤을 지새웠다고 합니다. 월드컵의 승리도 좋지만 우리 사회에 시급한 문제도 이렇게 힘을 모아 한 목소리로 나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참혹한 전쟁이 환희와 축제의 의미로 대신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세월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아 멘 -
民族の基本、憲法(トーラー)の価値(민족의 기본, 헌법(토라)의 가치)/ 出エジプト記20:1-17(출20:1-17)/ 2007-07-28
民族の基本、憲法(トーラー)の価値(민족의 기본, 헌법(토라)의 가치) 出エジプト記20:1-17(출20:1-17) 神様は人間を創造なさる時、人間の心の中に御自分に似た心を入れて下さいました。 それで、人間は、心の中には神様の心に似た人間性を持つようになりました。人間性の中にある神性とも言えるかもしれません。アダムの原罪以後、人間の中にある神性が汚れ、暗くなり、弱くなり、現在のように堕落してしまいました。 そのような人間に、モーセを通して神様は御自分の教えを記録(啓示)するよう命じました。旧約聖書の創世記から申命記までの5巻を「モーセ五書」と言い、ヘブライ語で「トーラー」とも呼びます。 1.トーラーは、神御御自身が民に教えた律法・憲法でした。 ヘブライ語の「トーラー」には、「投げる」「教の導き」「教え示す」「範囲」の意味があります。 神様は御自分の民達を正しく教え導くため、トーラーをモーセに教え、モーセはイスラエル民族に教え、石の板に書いて契約の箱に入れて保管するよう命じられました。 神の民は、神様のトーラーを心の真ん中に入れて保管する必要があります。 人間の命の基は、その心にあるからです。(箴言4:23) 2.トーラーの中心は祭祀法 モーセの律法・トーラーは、次のよう分解できます。 ① 神様と人間の間の契約法 ② 祭祀法 ③ 清潔法 ⑤ 倫理道徳的社会的規範法 トーラーの主な戒律は十戒でしょう。しかし十戒も第一は神様に対しての戒律です。 神に対する祭祀が先ず正しく行われるのことは人間が守る第一の法律です。 3.トーラーの祭祀法の中身は贖罪祭 祭祀法典であるレビ記には5つの祭祀があります。 ① 焼き尽くす献祭 ② 穀物の献祭 ③ 和解の献祭 ④ 贖罪の献祭 ⑤ 賠償の献祭 5つの祭祀全てが贖罪祭を伴なう祭祀になっています。 命の血を流す(死亡)贖罪を伴う精神で神を礼拝するのがトーラーの中心思想です。トーラーは救われるための法律ではなく、救われた神の民、神の子供が守るべきト-ラ-で、それは祝福の道を指し示しています。(ローマ7:7,12) 4.トーラーとハムラビ法典等との違い ハムラビ法典の方がトーラーより先に人間社会にありました。しかしハムラビ法は農耕法、物権法等、人間関係の法律でした。トーラーは民法、刑法、訴訟法、物権法等は勿論、それ以上に、神に対しての祭祀法を基にしています。人の価値は其の人の頭と重心に何の価値観ガあるかが問題です。憲法は其の国其の民族の価値観を決めると言って過言では無いでしょう。 5.トーラーは現代立憲国家の法律の基礎にもなりました ドイツのヴァイマル(ワイマール)憲法は、最も現代民主的な憲法として公布され、その後に制定された諸外国の憲法の模範となりました。ドイツを始めアメリカ。韓国・日本もそうです。我らキリスト者は、心の真ん中に模範としてトーラーを置きましょう。そうすれば、神様の前で立派な人間になれるでしょう。神様から召され、選ばれたヘブライ人、イスラエル民に与えられた法律・トーラーは、人間が人間らしくなれるように、神が人類世界に与えられた、神の導きの教えだったのです。 「主の戒めは正しくて、人の心を喜ばせ、主の仰せはきよくて、人の目を明るくする。 主への恐れはきよく、とこしえまでも変わらない。主のさばきはまことであり、ことごとく正しい。(詩篇19:8~9) 「あなたのみことばは、私の足のともしび、私の道の光です。」(詩篇119:105) 日本聖徒の祈祷。 金応守先生 韓国キリスト者医療伝道チームのアフガニスタンでの遭難は、 日本でも良く報道されています。(下をご覧ください) 殺された牧師先生のご家族の上に、神様の豊かな慰めがありますように祈ります。 依然人質の身で、心身ともに大変な状況下にあるキリスト者たちの上に、神様のお守りがありますように祈ります。特に、神様が彼らの伝道の精神を覚えて下さり、 彼らに魂の平安をお与え下さるように祈ります。 殺された韓国人牧師の妻が会見 アフガン人質事件 2007年07月28日10時41分  アフガニスタンの武装勢力タリバーンに25日、殺害された炯奎(ペ・ヒョンギュ)牧師(42)の妻キム・ヒヨンさん(36)が27日午後、   ソウル近郊の城南市内で記者団の取材に応じた。黒いワンピース姿のキムさんは、   牧師の殺害について「信じられないニュースだった。もう一度だけでも会いたい」   と話したが、しばしば涙で言葉を失った。   「これ以上、犠牲者が出ないでほしい」とも語った。
가정, 교회 그리고 국가/ 막3:25/ 2008-06-06
가정, 교회 그리고 국가 막3:25 가정, 그곳은 작은 천국이며 교회이며 그리고 국가이다.「벳솔」은 ’현대가정은 사단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가정을 파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총 동원하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기둥으로 세운 가정을 만드셨다. 그러나 사단은 최초의 가정을 깨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럴싸한 선악과 유혹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부부간의 신뢰까지 망가뜨렸다. 이러한 사단의 회유와 파괴공작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유히 그 맥을 이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에로 발돋움하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중산층 가정의 부모가 하룻동안 주고받는 대화의 80%는 돈과 얽힌 것들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복권, 부동산, 사업 등 돈에 얽힌 이야기들이 대화의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가정은 멋도 맛도 없는 가시넝쿨, 사막과 흡사하다. 거기다 가족 구성원간의 갈등은 필설로는 그 설명이 모자란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자식간의 갈등, 형제간의 갈등 등 마치 시한폭탄과 같다. 문화수준과 가족갈등은 비례한다. 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30년대나 40년대의 가족갈등의 유형과 현대 가정의 유형은 그 궤를 달리한다. 현대가정의 갈등은 그 폭과 골이 넓고 깊다. 미국이나 스칸디나비아와 같은 선진국가의 경우 가족 갈등은 더욱 심각하다. 소위 핵가족 제도의 탄생은 가족갈등의 사회적 표출이며 임시 방편인 셈이다. 그러나 핵가족 제도야말로 보다 더 심각한 정신적 공허감과 갈등의 무게를 더해 주고 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하여 성숙한다. 인간관계를 통하여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배우고, 성공과 실패의 크고 작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람다움을 일구어 나간다. 딱딱한 플라스틱 우윳병을 움켜쥔 채 저 혼자 우유를 먹고 자란 신생아와 엄마의 살 냄새를 맡으며 모유를 먹고 자란 아이의 성격형성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인고도에는 인격이나 품위가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더불어 사는 세상에는 갖추어야 할 인격과 지켜야 할 품위가 있는 것이다. 신앙교육이나 기독교교육의 위기론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기독교 대학이나 기독교 재단이 세운 중·고등학교의 경우 예수는 교정 밖으로 쫓겨나고 신앙교육이 설자리가 없다. 그러나 설립자도 책임자도 속수무책이다. 채플 무용론이 교수회의나 학생들간에 오고간다면 벼랑에 선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독교교육이나 신앙교육의 위기는 미션스쿨이나 기독교 대학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도 문제가 있고, 가정 안에는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장지향의 목표 때문에 다분히 성장지표가 성인중심에 있었다. 그 탓으로 기독교교육 전문인 양성에도 소홀했고, 시설투자에도 소극적이었다. 교육이 백년대계라면 신앙교육은 만년대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결정적 문제는 가정에 있다. 가정은 인생과 신앙의 위대한 교실이며, 부모는 스승이며,가족은 급우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성공, 치부, 행복, 출세라는 울타리에 갇힌 채 세뇌되어 나왔기 때문에 그들이 지니는 가치관이라는 게 고작 일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가정에서 인격과 신앙을 다듬으며 자란 사람들은 사회적응에 있어서 인격적이며 신앙적일 수밖에 없다. 보고 듣고 배운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가정은 보고 듣고 배우기에 가장 적절한 교육의 현장이며 요람이다. 흔히 미성년 자녀의 흡연이나 음주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소스라쳐 놀라는 부모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네들이 그것들을 첫 경험한 것은 또래와의 어울림 때문이지만 그것을 보고 듣고 배운 것은 가정에서였기 때문이다. 일상적 반복을 통하여 술, 담배가 자연스러운 것이며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라는 자기주관을 정립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정윤리와 신앙의 파괴 내지 붕괴는 교회와 국가의 지반을 흔들고 허약하게 만든다. 인도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는 ”만일 종교가 가정에 머무를 수 없다면 성전에 제아무리 많은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가정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건전한 가정이 건전한 교회를 만들고, 건전한 교회가 건전한 국가를 만든다. 그리고 건전한 가정은 건전한 부모와 자녀들이 엮어내는 종합예술이다. 가정의 달 5월에 멋진 예술이 빚어지기를 열망한다.
가정, 교회 그리고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잠22:6/ 2003-03-26
가정, 교회 그리고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잠22:6 여러분의 가정이 지금이 좋은 가정입니까? 아니면 5년이나 10년 후에 더 좋은 가정이 될까요? 지금은 그런 대로 괜찮은데, 살만한데, 큰 문제 거리 없는데, 자녀들에게 소망이 없다면 갈수록 좋아지는 가정되기는 어렵습니다. 5년 후 10년 후가 더 좋아지는 가정되어진다면 지금 좀 불편해도, 지금 좀 어려워도, 지금 좀 고달파도 넉넉히 견디고 이길 수 있지 않겠어요? 5년 후, 10년 후가 더 좋아지는 복된 가정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 할 수 있어요. 5년 후 10년 후 가 더 좋아지는 복된 교회로 만들어 나가는 일에 우리 모두가, 교역자는 교역자대로, 직분자는 직분자대로,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주님이 세워주신 그 위치에서 제물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이 정체 아니면 퇴보의 길을 걷고 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이유가 있어요. 우리 한국 교회에 그 동안 많은 직분자들이, 앞서 간 많은 교역자들이 너무 거두는 일에만 치중을 했어요. 속히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에만 치중을 했다는 말입니다. 요즈음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조직을 바꾸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해서 속히 교회를 부풀릴 프로그램이 없을까? 그래서 이곳 저곳 기웃거립니다. 몰려다닙니다 .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고, 획기적인 것을 찾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도, 충실하게 밭 갈고 씨 뿌리는 일을 소홀히 하더라는 거예요. 잠시 되는 것 같지만 안 되는 거예요.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본질이고, 원리입니다. 프로그램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 아니에요. 교회의 열매는 그렇게 해서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미나도 필요합니다. 배울 것 배워야지요. 본질을 소홀히 하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배우고 프로그램을 따오는 것으로 가정도, 교회도 성장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없어요. 우리 가정을 위하여, 우리 시민제단을 위하여 열심히 밭 갈고 씨를 뿌리는 일에 우리 모두가 먼저 제물되기를 축원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요. 서울지법 2층 로비에서 다섯 살 난 한 소년이 울고 있는데, 부모를 찾을 수 없어서 결국 근처 파출소로 보내졌는데,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이냐? 부부가 별거하는 동안 두 살 난 딸과 다섯 살 난 아들을 각각 데리고 있다가, 이혼하면서 서로 아이를 안 맡겠다고 팽개쳐 버린 거예요. 아내는 아내대로 새 직장을 얻어야 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새 출발을 해야 하니까 자녀들이 부담이 돼서 아이를 법원 로비에 버려 놓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다섯 살 난 아이가 “엄마, 아빠,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이 어린아이가 받는 정신적 충격과 고통은 어디서 보상을 받겠습니까? 돈이 많든, 적든 간에 자녀를 사랑으로 잘 양육하고 보살피는 부모를 만나는 것이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내가 좋은 부모되어서 자녀에게 축복의 존재가 되거니와 주님께 칭찬받는 부모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녀처럼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 자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고 축복임을 느낍니다. 그런데 자녀가 자라나면서 보기만 해도 기쁘고, 안아주기만 해도 즐거움이던 자녀가 점점 부담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되지만 먼저는 다른 아이들 못지 아니하게 잘 길러야 한다는 부담도 있고 더욱이 믿음의 부모는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중직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고 목회자에게도 이런 부담은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자식 농사를 짓는 일일 거예요. 세상 농사는 한 해 잘 못 지으면 다음해에 잘 지으면 됩니다. 그러나 자식농사는 그럴 수 없어요. 한번 실패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 자녀 교육입니다. 후회 할 때는 이미 늦는 경우가 많더라는 거예요.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이 자녀 교육입니다. 사람의 인격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는 6세까지인데, 이때 이미 인생의 태도가 85%는 결정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유아, 소년, 어린이, 청년”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잘 먹고 잘입고 삽니다. 그러나 차세대에 희망이 없다면 불행한 것이요, 헛된 인생사는 거예요. 우리 가정에 자녀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자녀교육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무엇보다 순종하는 자녀로 길러야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윗 사람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로 기르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에요. 오늘날 이 시대의 교육은 권리를 주로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권리, 여성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 그러나 이런 권리회복의 수단으로 은근히 저항과 반역을 부추기게 되는 경향이 있더라는 거예요. 권리나 참여 못지 않게 순종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귀의 기원이 무엇입니까? 천사장이었던 루시퍼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천사와 마귀의 근본은 같았어요. 그런데 불순종과 순종의 차이가 천사와 마귀의 차이로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로 길러야 합니다. 어릴 때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나중에는 바로 세우기가 어렵습니다. 흔히 자녀들 “기를 꺽지 말아야 한다” 젊은 부부들 지나치게 방임적으로 기르는 것을 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부패성, 죄성을 몰라서 그래요. 방치하면 자연스럽게 자라나면 죄의 열매, 잘못된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말씀에 순종하기 싫어하고, 부모에게 순종하기 싫어하고, 윗사람에게 순종하지 않으려 하는 부패성이 어려서부터 있습니다. 이것을 잘 다듬어주어야 쓸모있는 사람, 유용한 사람,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며 사는 사람됩니다. 송아지를 어릴 때 코를 뚫고 기를 꺽지 아니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가 되어버리고, 어릴 때 방임해 버리면 나중에는 다른 사람 속 썩이고, 옆의 사람 괴롭게 만드는, 사회가 원치 않는, 가정이 원치 않는,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이 이미 굳어진 다음에는 교육이 별 효과가 없어요. 모양만 변하지 근본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교육에 있어서 지나치게 간섭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흘러가는 대로, 되는대로 방임하는 것은 가장 위험합니다. 당장 좋은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함께 죽는 거예요.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제시가 없는 방임적인 교육, 가정, 목회는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더딘 것 같아도 말씀으로 자녀를 기르는 것은 자녀들의 근본을 바꾸어줍니다. 속 사람을 바꾸어주고, 인격을 바꾸어주고, 장래를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망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을 잘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제1의 사명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기르느냐에 가정의 장래가 달려있고, 교회의 장래가 달려있고, 이 민족의 장래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도 중요하고, 사회적 분위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결국은 부모입니다. 자녀들은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안 가르친 것도 배워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합니다. 그런데 후에 아들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에 대해 똑 같은 거짓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살은 겨누는 방향대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과녁에 맞고 안 맞고는 누구의 책임이에요? 겨누는 자의 책임입니다. 자녀들이 어떤 인격을 형성하고, 어떤 생활관을 갖고, 어떤 가치관과 습관을 갖게 되느냐 하는 인생의 방향이 부모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아이들을 위해서 장난감과 놀이 기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야 너희들은 참 행복하다. 이렇게 많은 장난감과 놀이 기구들이 있으니 얼마나 좋겠냐?” 그랬더니 애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아빠 엄마가 우리 떼어놓고 자기들 놀러가느라고 사다준 거예요” 그러더라는 거예요. 고마워하지를 않아요. 자신은 불편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아는 아이가 부모에게 사랑을 느낄 리가 없어요. 자녀를 많이 만져 주세요. 안아 주세요. 축복해 주세요. 그러나 꼭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잘못된 것까지 무조건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이 자기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을 심각하게 책망하십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자신이 제사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 결과 불량자가 된 거예요. 가정에 욕을 돌리고 민족에 욕을 돌리고 죽은 것입니다. 성경에 양육하라는 말씀은 “훈련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마치 군대에서 신병을 훈련시키는 것처럼,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훈련시키는 것처럼,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훈련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들·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시키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어떻게 해야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바른 길 가도록 인도하는 복된 부모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녀를 부지런히 훈련하십시오. 그러나 부려먹지는 마십시오. 부모가 하기 싫은 것 자녀에게 시키는 것은 훈련이 아니라 부려먹는 것입니다. “야! 신문 가져와” 그럴 때 아이의 마음속에는 “아빠가 일어나기 싫어서 그렇지” 교육 효과가 전혀 없습니다. 자녀에게 할 수 있으면 일을 많이 시키십시오. 청소년 교도소에서 나온 통계에 의하면 소년 범죄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가장 결여된 습관이 뭐냐하면 일을 하는 습관이라는 거예요. 공통적으로 일을 안 하려는 습관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 일하는 훈련 꼭 필요합니다. 특별히 어머니의 영향이 자녀들에게는 절대적인데 어머니가 자녀의 첫 번째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로부터 희망적이고 사랑스런 말을 듣고 자란 자녀는 성격이 밝아집니다. 생각이 깊어집니다. 히브리인들은 자녀들을 징계하고 고치는 데 대표적으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말로 하는 훈계와 하나는 채찍으로 훈계하는 것입니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녀가 정말 잘 되기를 원하십니까?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물질을 물려주는 것보다 지식을 물려주는 부모가 위대하고 지식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복된 부모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녀에게 재산 많이 물려주면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간수 잘 못해요. 오히려 형제들끼리 싸우며 삽니다. 물질 풍족하기에 오히려 방탕하고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록펠러는 가난하여 9살부터 남의 집 점원으로 일을 했는데 어머니가 물려준 신앙을 물려받아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록펠러 어머니가 10가지 유언을 하였는데,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잘 섬겨라. 3. 주일 예배를 본 교회에서 드려라. 4.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아라.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7.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성하며 기도하라. 8. 아침에는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와라. 10. 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에 앉아라. 주의 전에 나오는 시간 시간마다 은혜를 받고, 주님 주시는 능력 받아 여러분의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자녀를 잘 양육하는 길은, 잘 인도하는 길은 다른 길은 없는 거 같습니다. 부모가 몸소 그 길을 가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가르치려고 하면서도 행하지 않으려 하는 시대이기에 영향력이 없고,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오늘 믿음의 길로 인도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자가 될 수도 있고 나중에는 영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자리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자녀 공부시키고, 먹을 것, 입을 것 뒷바라지 잘 했다고 부모로서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 교육 잘 시켜 보겠다고 뉴욕으로 이민을 간 가정이 있었습니다. 5년 동안 부인과 함께 하루에 14시간씩 주말도 없이 부지런히 일하여 가게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고, 돈도 제법 벌었어요. 주변 사람들은 다 그를 성공했다며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딸은 가출을 해서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도 학교를 자주 결석합니다. 자신도 불면증과 관절염으로 시달리게 되니, 벌어 놓은 돈도 서서히 다 까먹기 시작합니다. 아이들 잘 길러 보겠다고 이민가서 열심히,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교육도 망치고 자신의 건강도 망치고 남는 것은 병밖에 없더라는 거예요. 돈만 번다고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에요. 환경 좋다고 자녀교육 잘 되는 것도 아니에요.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축복입니다. 시편 112:1-2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후대가 복이 있는 복된 길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헛 인생 사는 거예요. 수고하고 애썼는데, 염려와 근심만 남게 되는 거예요. 말씀대로 살 때, 말씀 안에 형통한 길이 있습니다.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는 길이 주님 안에 있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헛 수고가 되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반드시 보상하여 주시고 축복하시고 좋은 결말을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통계적으로도 교회 나오는 사람의 55퍼센트가 20살 이전에 신앙을 가졌고, 20대가 33퍼센트, 30대는 11퍼센트, 그리고 60이 넘어서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은 얼마 안 되더라는 거예요. 연세가 많아지면 생각이 굳어서 바뀌기가 어려워요. 연세 많아서 믿음 가진 분들은 참으로 큰 축복을 받은 거예요. 어려운 길을 통과 한 거예요. 자녀들이 어릴 때 교회에 데리고 나와서 함께 예배드리고, 말씀듣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나이가 들고, 늙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존경받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나의 최고의 교사는 어머니였으며, 나에게 믿음의 아버지는 담임 선생님이었다” 어머니와 선생님을 통해서 훌륭하게 양육을 받았습니다. 영국의 처칠(Winston Churchill)도 “나라가 잘되기를 원하면 가정 교육을 잘하여 자녀를 잘 키우면 된다” 미국의 링컨(Abraham Lincoln)은 “가난하나 믿음의 유산을 남겨 준 부모가 수많은 재물을 자식에게 물려준 부모보다 낫다” 눈물의 자녀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당장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복된 부모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모가 무심코 한 말 때문에 큰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다섯 살 짜리 어린아이가 어느 날 죽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 죽고 싶으냐고 물어 보니 ”아빠, 엄마가 나를 귀찮게 여겨요. 내가 우리 집에 세 번째 아이인데, 늘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까, 가족계획 실패해서 내가 태어났대요” 안 낳아야 될 것을 낳아서 저 놈 때문에 말썽이라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다섯 살 난 아이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끔찍한 이야기 아니에요. “나는 너 때문에 행복하다” 자녀를 향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기왕이면 공부 잘하면 좋지요. 건강하면 좋지요. 갖추면 좋습니다. 그러나 “너를 보면서 행복하고, 너를 생각하면서 행복하고, 너희들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고, 지켜보며 나는 행복하다. 너희들로 인해서 나는 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느끼고 이렇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고, 기쁨이에요. 만족스럽지 못한 자녀라도 그 속에있는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고등학교 때 얼마나 공부를 못했는지 공부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뭐냐? 그 어머니의 한 마디의 격려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남과 같아지려고 하면 결코 남보다 나아질 수가 없는 법이다. 하지만 너는 남과 다르기 때문에 기필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너무 많이 욕심 부리지 마세요. 약속의 자녀로 믿음의 자녀로만 잘 기르면 앞날은 주님께서 맡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잘 믿는 것 이상의 복이 없습니다. 우리 사람을 축복하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품에 안기면 모든 것이 다 있어요. 안기면 사랑 받고 능력 받습니다. 안겨야 은혜 받아요. 안기면 축복 받습니다. 안기면 변화 받습니다. 주님의 품에 안겨 사는 복된 체험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린이 주일을 지키면서 사무엘을 기른 한나처럼, 모세를 길러 낸 요게벳처럼,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처럼, 방탕한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 되게 한 모니카처럼 우리 모두가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것들로 많이 남기는 좋은 부모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녀가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이 되고, 감사의 제목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정에서 어른은, 부모도 그러하고, 교회에서 특별히 지도자나 중직자는, 어른은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에도 정신이 없으리만큼 바쁘고 복잡한 힘겨운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을 위해서, 우리 시민 제단을 위하여 5년 후 10년 후를 내다 볼 수 있는 어른들이 된다면 분명 후회하지 않는 열매를 거둘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좋은 결말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모판 역할을 감당하는 복된 가정, 복된 교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나라/ 골3:15-17/ 2001-09-25
감사하는 사람의 나라 골3:15-17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는 말은 사람자체가 감사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체질이 감사의 체질이 되고, 우리 성품이 감사의 성품의 되고, 우리 인격 자체가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인격으로, 사람으로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발명왕 에디슨 은 1300여 개의 발명을 해서 모든 인류가 그의 발명으로 혜택을 누리며 잘 삽니다. 전구나 영화를 보는 영사기의 전신인 활동사진도 있고 전축의 전신인 축음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저능아라 하여 학교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 실험실이 없어서 기차에서 실험을 하다가 불이 나서 승무원에게 한대 얻어맞아 귀먹어리가 되었는데도 발명왕이 된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당해본 사람만이 아는것 처럼 귀먹어리가 되었으니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인생말년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저는 귀먹어리가 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깁니다. 귀먹어리가 되어서 답답하기는 했지만 저는 귀먹어리가 되어서 연구하는 일에만 몰두 할 수 있었습니다. 잡음이 들리지 않고 어떠한 소음도 들리지 않아서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하나님 제게 귀먹어리가 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게 어떤 불행이 닥쳤고 병들든지 가난하든지 실패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이며 얻은 것은 무엇인지 그 소중한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감사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됨은 감사할줄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과 인격이 어느정도인가는 감사의 깊이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눅17장에 보면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았지만 그 열 명중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병 고침 받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아홉 명은 어디 가고 한 명만이 온 것을 보시고 예수님 은 “너희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이 감사하러 온 사람 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그는 감사를 위해서 예물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특별한 예의를 갖춘 것도 아니고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꿇어 엎드려 감사한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편으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아홉 명의 사람들이 안왔을까 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병이 낳았다”과거는 그렇다고 해도 그 병이 나은 그 순간부터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옛말에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놓으니 내 보따리 달라고 하는 것처럼 죽는다는 그 순간에는 살아야 겠다는 그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살고 보니 살 길이 막막하여 보따리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홉 명의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았지만 앞으로 살 일이 막막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와서 감사하기 보다는 앞으로 살 일을 생각하지 끔직했던 것입니다. 사실 문둥병이 나았지만 누가 믿어줍니까? 누가 이런 사람과 결혼하고 이런 사람을 고용하여 일을 시키겠습니까? 요즘도 문둥병자들은 문제가 많습니다. 부모가 문둥병자 이기는 해도 자식은 문둥병자가 아닙니다. 의사가 자녀는 문둥병자가 아니라는 확증을 해 주어도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이감아’라는 이름이 즉 아직 감염되지 않았다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두운 가운데 일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나았어도 미래를 생각하면 암담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것은 이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제 결혼식에 참석하여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한편생각으로는‘우리교회에 있는 노총각, 노처녀들도 빨리 결혼을 했으면’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른 넘은 딸을 가진 집사님이 “목사님 제 딸이 시집만 가면 저는 죽어도 한이 없겠어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 이제 죽어도 한이 없으시겠네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네 그래요 목사님!”하고 대답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집사님은 “왠걸요 걱정이 태산입니다. 시집가서 밥이나 제대로 해 먹을런지, 빨래는 제대로 하며 살런지... 목사님 제 딸이 애를 낳을 수 있을까요? ”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기쁜 것 보다 걱정이 더 많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아이가 얼마나 똑똑하고 영리한지 무엇이든지 척척 잘 해내는 아이에게 제가 “얘 너는 이제 학교 가니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아이는“예 목사님 참 좋아요”라고 대답하기는커녕 “목사님 무슨 말씀이세요 고생문이 훤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어떤 얘기를 했기에 아이가 그런 얘기를 하겠습니까. 여러분 농부가 감자 농사를 지어 풍년인데도 걱정이 태산입니다. “풍년이 들어서 참 좋으시겠습니다.”라고 말했더니 농부는 “무슨 소리입니까? 작년에는 흉년이 들어 감자들이 다 못생겨서 돼지를 주었는데 요번 감자는 너무나 예뻐서 돼지 줄 것이 없어 걱정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문제이고 그 아홉 사람이 바로 나의 문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감사하지 않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죄라고 했고 그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벌하는 법을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사를 모르는 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벌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 감사하지 않는다고 벌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 직접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민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모든 과정을 마치고 광야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 쪼이는지 하나님께 많은 원망과 불평을 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한쪽 진영을 불로 태웠습니다. 모세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불은 꺼졌지만 그곳이 이름을“다베”즉 하나님이 불을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11장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만 먹는다고 불평을 하니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불리 먹고도 남았고 그 남은 메추라기를 볕에 말리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 바로 그 자리를‘탐욕의 자리’라고 이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도 할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빌4:13에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병든자가 건강해 지고 가난한 자가 부요해 지기때문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매일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싼 많은 문제와 환경은 계속해서 우리를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안타까움과 신앙적인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의 말씀은 그런 뜻 만이 아닙니다. 그 뜻은 어떠한 환경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능력 있는 사람을 만드는데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게 만들고 병든 자를 건강하게 만드는 능력만이 아닌 것입니다. 빌4:13의 바로 전 구절인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모든 환경 속에서도 적응 할 수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배가 부를 때에도 교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배가 고플 때에는 원망과 불평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또한 빌4:12의 바로 전 구절인 11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자족은 스스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환경이 어떠하든지 내 마음속에는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내 속에는 만족한 환경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자족함입니다. 더 나아가 평안함으로 통제 되어 있는 상태가 자족함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 괜찮다’하지 않고 “내 어찌 하나님 앞에서 득죄 하리요”하며 그 일로 요셉은 감옥에 갇힙니다. 하나님앞에서 바른 신앙의 도를 보이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한 결과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실 것은 감옥은 요셉으로 하여금 국무총리가 되게하는 길이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에게 감옥은 오히려 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행한 믿음을 잃지 않고 자족하고 감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빌1:12-13“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사도바울은 전도하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일로 낙심하거나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전도하다가 이렇게 되었구나, 내 인생도 이제 끝이구나, 하나님 어떻게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실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저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압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바울은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께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찾아오는 로마의 귀족들에게 예수의 복음과 사랑을 알려주고 예수님의 사랑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중에 로마황제 가이사의 집의 사람들도 예수를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바울의 신앙은 자족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체의 비결을 배우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승리자의 외침을 외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외침이 바로 여러분들의 외침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찌모라 간조’라고 하는 일본의 목사님의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적이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면 나는 거만하고 인정 없고 못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것은 파괴 시키시고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주셔서 결국은 선을 이루셨다. 욕심대로 원하는 대로 기도응답이 된다면 그것은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고, 우리 모두가 망하는 것이다.” 기도응답이 되지 않는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내 뜻대로 안 된 것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참 신앙인의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이들의 이야기 가운데 마이러스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은 금 덩어리가 되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만지는 대로 금 덩어리가 되니 얼마나 값이 나가겠으며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요즘같이 어려운 때에는 그렇게 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에게 사랑하는 딸이 달려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딸을 덥석 잡는 순간 사랑하는 딸도 금 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왜 내게 금이 필요한 것인가?’사랑하는 자식을 금으로 만들어 놓은 임금은 후회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응답이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오히려 주어진 환경을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성도인줄로 믿습니다. 서울대학 못 가서 그렇게 안타까워하던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는커녕 대학도 못갔습니다.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들이 기술을 배워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유학까지 가서 그리고 지금은 회사에서 대학 나온 사람 이상으로 훌륭한 대접을 받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 부모님은 제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목사님 뭐든지 두고 볼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오늘 이 순간 당하는 문제를 가지고 안타까워 하고 괴로워 하고 원망불평 하지 말고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감사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사모님은 피아노도 잘 치고, 상냥하고 남편을 잘 위하는 사모님인데 그분에게 혈압이 좀 있었습니다. 그런데 혈압으로 그만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얼마나 속상하고 그 목회하시는데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러나 목사님은 목회를 하면서도 살림을 감당하고 아이들도 키우고 17년 동안 가정생활과 목회생활을 힘써 왔습니다. 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내가 나를 위해서 희생하고 고생하고 애쓴 것이 얼마나 큰것인지.. 내가 신학교 다닐 때 피아노 학원을 다니면서 나를 가르쳐 목사가 되게 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목회 하면서 아내가 쓰러졌다고 아내를 박대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아내를 내게 주셔서 내게 빚을 갚게 하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은 감사한 마음으로 17년 동안 헌신, 봉사하여 사모님은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목회의 길에서 무엇보다 가정목회를 승리했다는 것이 그의 목회를 더 빛나게 하고 복되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국에 유명한 해군 제독 가운데 ‘웰링톤’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제독으로 일하는 가운데 골치 아픈 병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군대가 싫다고 자꾸 탈영을 하는 것입니다. 전시에 탈영하는 것은 사형감이므로 제독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병사를 고쳐보려고 야단도 치고, 매도 때리고, 노동도 시키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고뭉치였습니다. 그래서 제독은 더 이상 그 병사를 놔두면 군대의 기강도 해이해 지고 어지러워 지니 마지막으로 사형을 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웰링톤 제독은 그 병사를 불러 마지막으로 얘기했습니다. “내가 너를 사람 만들고 싶어서 가르치기도 하고 야단도 치고 매도 때리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지만 너는 안됐다. 그러므로 이제 네게 남은 것은 사형밖에 없다. 다른 병사들도 그간의 일을 본다면 내가 이 병사를 사형시키는데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그러나 혹시라도 할말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아라” 아무도 손을 든 사람이 없었는데 한쪽에서 한 병사가 손을 들었습니다. “제독님 한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독님은 사고뭉치 병사를 위해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 볼 때 하지 않으신 일이 딱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죄를 지었을 때마다 그에 때를 죄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매도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노동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탁 드리는 것은 이번에는 그의 과거를 용서해 주시기 바라며 그의 죄도 묻지 마시고 그를 새 사람으로 살게 내버려 두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던 것처럼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독이 그 병사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게 언제든 죄 값을 치뤘습니다. 그래서 그 사고뭉치 병사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병사가 그때부터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청년이 되고 성실한 군인이 되어서 나라에 충성하고 제독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용서하는 일, 용서 받는 일은 참으로 귀한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용서 받을 때에, 사랑을 느낄 때에 건강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용서 받은 것에 대하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에 창의력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능력도 생겨서 우리가 기쁨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베드로는 말씀했습니다. 벧후 3: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성도가 살아갈 때에 무엇으로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 지겠습니까?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로 인해서 죽을 수 밖에 없고 지옥에 가야하고 천국은 상상도 못하고 마귀의 종노릇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었다는 그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되게하고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새 사람이 되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이 감사는 마땅히 범사에 감사로 나타나야 될줄로 믿습니다. 기도할 때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망이나 불평의 기도를 드리면 안됩니다.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지난 부활절때 성가대축제에 참여했습니다. 참가한 교회들은 모두가 큰 교회들 뿐이었고 유니폼은 평상시에 입던 것, 즉 얼마나 합창제를 많이 참석하였는지 평상시에 입는 유니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만 유독히 일부러 유니폼을 만든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른 교회는 보통 150여명을 뽑아서 나왔지만 우리교회는 100여명을 겨우 만들어서 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합창제에 나가려는 마음은 있어도 어떻게 인원을 동원할까, 어떻게 연습할까 등 걱정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성가대원들을 만날 때 마다, 그 당일 날 기도할 때도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세상의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있지만 한남제일교회에 이렇게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일생에 이러한 기회는 또다시 오지 않을 줄로 믿고 감사함으로 이 일에 참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받으시고 우리를 세워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힘을 달라고, 사람을 모아 달라고 기도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기도보다는 감사의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니 성가대원들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똑같은 기도를 해도 감사의 기로를 할때에 그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그저 달라, 달라고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성숙된 기도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은혜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감사의 조건들을 찾는 기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감사의 기도속에 참 기쁨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골 3: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가 중에서도 4/4박자 찬송을 참 좋아합니다. 느린 찬송보다 기쁨과 힘이 넘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찬송 부를 때 여러분의 얼굴을 쳐다보면 그 찬송부를때의 얼굴은 각자 가진 신앙의 경력과는, 성가대에 앉은 사람과는 상관이 없는것 같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찬송하면 그것이 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물질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즉시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엡 5: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사람을 기쁘게하고 그의 인격을 높이는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는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못사는 나라는 감사하다는 말이 없습니다. 북한에 소떼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안합니다. 오늘도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감사할 줄 아는 것이 복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을 감사의 터 위에 심으면 믿음이 올바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령을 감사의 터 위에 세우면 성령도 크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부자이며 재산이며 그것이 보약이며 그것이 우리를 젊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빛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와 민족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그런 백성, 그런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느 일본사람이 쓴 책 가운데 이러한 글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기술을 배워 한국으로 돌아오면 몇해 지나지 않아 똑같은 기술을 배우러 다른 사람들이 오고 또 몇해 지나지 않아 똑 같은 기술을 배우러 또 다른 사람들이 오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이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나라에서는 왜 똑 같은 기술을 자꾸 배우러 옵니까?” 그랬더니 한 사람이 “이전에 기술을 배운 사람을 다른 회사로 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회사가 주는 돈으로 외국에 나가서 기술을 습득하면 그것을 가지고 그 회사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봉급을 더 준다고 다른 회사로 옮겨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감사할줄 아는 사람, 그런 민족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다 은혜 받고 살고 있습니까? 그런 가정이 복이 있고 그런 교회가 복이 있고 그런 직장이 잘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 반도체를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합니까 ? 그런데 그 사람들이 회사의 기밀을 뽑아서 경쟁국 대만에 팔았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감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그것이 나를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감사하게 될 때에 그것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고 그것이 우리의 재산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나라의 백성, 그 백성이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인 나라 소인 나라/ 민13:30-민14:10/ 2009-09-01
거인 나라 소인 나라 민13:30-민14:10 흔히 이 시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비교적 안정된 사회에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문제로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질병, 사건, 사고, 노후, 그리고 죽음 등 매사에 불안감을 느끼며 삽니다. 「대한불안의학회」의 연구자료(주간동아 2006년 3월)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꼴로 불안과 관련된 증상으로 시달린다고 합니다. 서울과 5대 광역시 성인남녀 1천명 대상으로 면접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중 25%가 불안 관련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6%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심한 불안감을 느껴 상담이나 치료 필요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며 사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경제 위기와 여러 가지 사회 불안으로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인생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세계대공황 당시였던 1930년대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현실보다 과도한 두려움의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 불행해지고 쉽게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결해야 될 중요한 문제가 바로 ‘두려움의 문제’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고 늘 행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를 통과할 때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부근에 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을 실시합니다. 지파별로 1명씩 대표를 뽑아서 12명의 정탐꾼이 40일간 정탐을 다녀옵니다. 그런데 정탐꾼 12명의 의견이 두 패로 갈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나머지 10명으로 갈린 겁니다. 그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두려움 : 실패로 가는 지름길 본문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먼저 두려움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나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두려움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승리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뭐라고 보고합니까? 그 땅이 좋기는 한데 거주민들이 워낙 강해서 ‘정복 불가능’이라는 겁니다. 13:31절을 보시죠.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 그들은 이미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의식에 움츠러든 겁니다. 13:33절.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아낙 자손은 네피림의 후손인데 거인족입니다. 자기들보다 덩치도 크고 무장 상태가 만만치 않아서, 자기들은 마치 메뚜기 같이 보였다는 겁니다. 난쟁이나 소인만도 못하니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보나 마나 실패할 게 뻔했습니다.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내리십니까? 14장 후반부를 읽어보면, 먼저 10명 정탐꾼을 즉결 처단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 제1세대는 몽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정탐 기간 40일을 하루 당 1년으로 환산해서 40년 동안 광야를 뱅글뱅글 돌게 만드셨는데, 그러는 동안 기성세대는 모두 시체가 됩니다 . 구약 신학자 레온 우드에 의하면, 하루 평균 80명 시간 당 7명꼴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성인 남녀 12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서 애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가나안 땅의 축복에서 제외된 것도 비참한데, 날마다 슬픔과 고통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이처럼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다 망가뜨립니다. 그리고 결국은 멸망으로 끌고 갑니다. 예를 들어 질병의 문제만 해도 두려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요즘 의학이 많이 발달되어 웬만한 병은 다 고칩니다. 중병으로 인식되는 암도 완치율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치료 과정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치병(治病) 이전에 치심(治心)해야 된다는 겁니다. 한 영국인 의사가 질병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임상 실험을 해보았답니다. 암환자들에게 항암제 대신 소금물을 투여했더니, 환자들 중 30%에게 탈모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겁니다. 여러분, 서울의대 명예교수이며 대통령 주치의를 역임한 고창순 박사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분은 본인이 의사이면서 대장암, 십이지장암, 간암 등 암을 달고 살았던 분입니다. 다행히 암을 잘 이겨내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바가 바로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하라는 겁니다. 그의 책 제목「암에게 절대 기죽지 말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는 대신 웃으라고 충고합니다. 웃음은 부작용 없는 항암제라는 겁니다. 이처럼 두려움이 얼마나 우리 인생에 나쁜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두려워할수록 현실의 문제가 더 커 보이고 그 문제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인간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100전 100패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고양이 앞의 쥐걸음”이라는 말이 있죠. 쥐는 본래 뒷다리가 길어서 얼마나 빠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일단 고양이를 보면 부들부들 떨면서 맥을 못 추고 기어갑니다. 결국 잡혀 먹고 맙니다. 어떤 문제든지 그 앞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2]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 불신앙 그러면, 이렇게 나쁜 ‘두려움’이 왜 생기는 걸까요?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본문 14:1절을 보시면, 10명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두려워 떠는 백성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그들은 철야 통곡을 했습니다. 이럴 때 신앙이 있다면 당연히 무엇을 해야 마땅합니까? 철야 기도를 했겠죠. 그런데 밤새 두려움에 사로잡혀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또 14:3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그들은 두려움에 이미 죽은 것 같았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야단입니다. 그들의 안중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불렀지만, 단지 원망을 위해서였습니다. 불신앙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인간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마침내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신앙으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한없이 큰 거인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그들 앞에서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거인 나라’가 된다.” 그러니 불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요즘 세월이 갈수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리 험한 세상에서 신앙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간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간이 큰 게 아니라, 반대로 간이 콩알만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무슨 짓을 하나요? 두려움을 극복한답시고 세상의 다른 것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엇으로 인간의 마음 속을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지! 재력? 권력? 학력? 그 어느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3]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 : 신앙 그러면 어떻게 하죠? 그냥 그러다 망하고 그러다 죽어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즉효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노만 V. 필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은 두려움의 치료제이다.” 잘 아시는 대로, 다윗은 구약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용맹스런 사람입니다. 물론 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때로는 두려워 떤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가 담대한 용기를 갖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시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또 시27:1을 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의 담대한 모습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때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인생의 적수인 두려움을 이기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그 신앙을 크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① 영적인 안목 키우기 : 첫째는, 영적인 안목을 키우면 우리의 신앙 커집니다. 신앙은 눈을 달라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든 사물이나 문제를 육신적으로 보고 판단합니다. 10명 정탐꾼들이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단지 육신적인 안목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능력과 가나안 원주민들과 비교하면서 두려워 떨었던 겁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습니까? 가나안 원주민의 모습을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거인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14:7절~9절 보시죠. “7 ...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 ” 그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은 분명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아무리 거인족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먹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먹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NASB)을 보니까, prey 즉 사냥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먹이라”는 말은 다른 영어성경(NIV)을 보니까, swallow up 즉 ‘꿀꺽 삼켜버리다’ ‘먹어치우다’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의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작아 보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안목이 없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이 세상의 문제가 한없이 커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소인 나라’가 된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 있으실 겁니다. 어른이 된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 보면 얼마나 작은지 “애걔~”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운동장이 줄어들었나요? 아니죠. 내가 커진 겁니다. 마찬가지 영적인 안목이 생기고 신앙이 커지면 세상이 작아 보입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별 게 아닙니다. 왕하6:14~27을 보면, 엘리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람은 당시 이스라엘의 적대국가로 이스라엘의 국경을 수시로 침범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때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방비함으로 위기를 넘깁니다. 약이 오른 아람 왕이 엘리사를 제거하고자 야밤에 군대를 보내 도단 성을 완전 포위합니다. 아침 일찍 밖에 나간 사환이 그 광경을 보고 절망합니다. “아! 이젠 죽었구나!” 그러나 엘리사는 태연합니다. 왜 그랬나요? 왕하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불말과 불병거는 천국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엘리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두려워할 수 있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대거 호위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큰 게 아니라 내 신앙이 작은 겁니다. 부디 영적인 안목을 키움으로 세상을 소인 나라로 보고 넉넉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임마누엘 신앙 키우기 : 둘째로, 임마누엘 신앙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뜻이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14:9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이 어떤 모습인지! “ ...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넘칩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또 시3:5~6을 보십시오. 역시 다윗의 시편입니다.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는데 뭐가 두렵냐? 이겁니다. 어린아이가 아빠 어깨 위에 무동을 탑니다. 그러면 세상이 다 아래로 보입니다. 어른들도 작아 보이고,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죠. 우리도 마치 하나님 어깨 위에 무동 탄 아이와 같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나요? 탕 중의 최고는? ‘돌탕’입니다. 탕자는 나쁘지만, 돌아온 탕자 ‘돌탕’은 좋습니다. 라면 중의 최고는? ‘주님과 함께’라면입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를 잘 아실 겁니다. 다리를 놓은 때가 1930년대였으니까 옛날 이야기이죠. 공사를 하는데 다리가 너무 높고 위험해서 기술자들의 마음이 늘 불안했습니다.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5명이 추락해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고심 끝에 철망으로 안전그물을 설치했습니다. 요즘은 공사 기술이 발달해서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안전그물을 설치한 후 신기하게도 아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안전그물에 떨어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안도감 때문에 실족하지 않은 겁니다. 안전그물 정도만 해도 그렇게 안도감을 주고 일이 잘 되게 해 준다면,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얼마나 일이 잘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은 우리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부디 임마누엘 신앙으로 세상을 소인 나라로 보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하나님의 약속 붙들기 : 세번째, 하나님의 약속을 꼭 붙드시면 신앙이 커집니다. 13:30절을 보시죠.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 ”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무조건 가자는 겁니다. 이어서 14:8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직접 가보니까 정말 약속하신 그대로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정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출애굽 1세대 중 그 두 사람만 가나안 땅의 축복을 차지하고 신앙의 영웅으로 성경에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얼마나 많은 약속의 말씀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향한 약속이 됩니다. 그 말씀을 붙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예를 들어 요16:33도 예수님이 직접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신학교 동기생 중에 박종민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동기생인데, 나이는 저보다 15살 더 많습니다. 옛날 전매청에 다니다 신학을 늦게 하셨죠. 이분이 목회하시다 60세나 넘어가면서 조기은퇴를 결심하셨습니다. 젊었을 때 선교를 위해 기도하셨는데, 실천하려고 필리핀으로 떠나신 겁니다. 한 2년 하시더니 연락이 왔어요. 그곳에는 선교사도 많고 편해서 아프리카로 가려고 하는데, 선교지를 소개해 달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저도 아직 아프리카에 가보지 않았는데, 소개해 준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자꾸 말씀하셔서 차드의 양승훈 선교사님을 소개해 줬습니다. 그랬더니 좋다고 가시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한번 답사해 보고 가시라고 하니까, 비용도 많이 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냥 가면 되지 무슨 답사냐며 그냥 떠났습니다. 하기는 천국 답사해 보고 가나요? 그냥 믿음으로 가지. 그로부터 2년 후 제가 차드에 가보고 얼마나 죄송했는지! 정말 너무 열악한 나라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그곳에서 기쁨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양승훈 선교사님과 협력해서 차드선교센타와 현지인 교회 여러 군데 건축 공사 감독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 후 안식년을 보내신 후에는 이제 차드에 선교사들이 여럿 들어갔으니 또 다른 데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직 저도 가보지 않은 가봉에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좋다며 그곳에 가셨습니다. 역시 답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가셨습니다. 지금까지 사역하고 계신데 만70세까지 채우시겠다고 합니다. 가끔 전화 통화하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목사님 부부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아프리카에, 말만 듣고, 그것도 가보지도 않은 사람의 말만 듣고 가는 분들이 어디 있습니까? 무모하다는 생각을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게 어디 인간의 말을 듣고 간 겁니까? 당신들 나름대로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꼭 붙드신 것이죠. 여러분!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거인 나라로 보입니까? 소인 나라로 보입니까? 그게 바로 내 신앙의 수준입니다. 세상이 거인 나라로 보이면 내 신앙이 ‘소인 신앙’인 겁니다. 반대로 세상이 소인 나라로 보이면 내 신앙이 ‘거인 신앙’인 겁니다. 아무쪼록 여호수아와 갈렙 같이 거인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 말고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거인 나라 소인 나라/ 민13:30-민14:10/ 2009-09-01
거인 나라 소인 나라 민13:30-14:10 흔히 이 시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비교적 안정된 사회에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문제로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질병, 사건, 사고, 노후, 그리고 죽음 등 매사에 불안감을 느끼며 삽니다. 「대한불안의학회」의 연구자료(주간동아 2006년 3월)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꼴로 불안과 관련된 증상으로 시달린다고 합니다. 서울과 5대 광역시 성인남녀 1천명 대상으로 면접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중 25%가 불안 관련 증상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6%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심한 불안감을 느껴 상담이나 치료 필요한 케이스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며 사는지 놀라울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경제 위기와 여러 가지 사회 불안으로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결코 행복할 수 없고 인생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세계대공황 당시였던 1930년대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현실보다 과도한 두려움의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 불행해지고 쉽게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결해야 될 중요한 문제가 바로 ‘두려움의 문제’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고 늘 행복하고 승리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를 통과할 때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 부근에 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을 실시합니다. 지파별로 1명씩 대표를 뽑아서 12명의 정탐꾼이 40일간 정탐을 다녀옵니다. 그런데 정탐꾼 12명의 의견이 두 패로 갈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나머지 10명으로 갈린 겁니다. 그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두려움 : 실패로 가는 지름길 본문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먼저 두려움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나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두려움은 실패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승리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뭐라고 보고합니까? 그 땅이 좋기는 한데 거주민들이 워낙 강해서 ‘정복 불가능’이라는 겁니다. 13:31절을 보시죠.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 그들은 이미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의식에 움츠러든 겁니다. 13:33절.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아낙 자손은 네피림의 후손인데 거인족입니다. 자기들보다 덩치도 크고 무장 상태가 만만치 않아서, 자기들은 마치 메뚜기 같이 보였다는 겁니다. 난쟁이나 소인만도 못하니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보나 마나 실패할 게 뻔했습니다.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내리십니까? 14장 후반부를 읽어보면, 먼저 10명 정탐꾼을 즉결 처단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 제1세대는 몽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정탐 기간 40일을 하루 당 1년으로 환산해서 40년 동안 광야를 뱅글뱅글 돌게 만드셨는데, 그러는 동안 기성세대는 모두 시체가 됩니다 . 구약 신학자 레온 우드에 의하면, 하루 평균 80명 시간 당 7명꼴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성인 남녀 12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서 애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가나안 땅의 축복에서 제외된 것도 비참한데, 날마다 슬픔과 고통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으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이처럼 두려움은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다 망가뜨립니다. 그리고 결국은 멸망으로 끌고 갑니다. 예를 들어 질병의 문제만 해도 두려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요즘 의학이 많이 발달되어 웬만한 병은 다 고칩니다. 중병으로 인식되는 암도 완치율이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치료 과정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치병(治病) 이전에 치심(治心)해야 된다는 겁니다. 한 영국인 의사가 질병과 마음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임상 실험을 해보았답니다. 암환자들에게 항암제 대신 소금물을 투여했더니, 환자들 중 30%에게 탈모 현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겁니다. 여러분, 서울의대 명예교수이며 대통령 주치의를 역임한 고창순 박사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분은 본인이 의사이면서 대장암, 십이지장암, 간암 등 암을 달고 살았던 분입니다. 다행히 암을 잘 이겨내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바가 바로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하라는 겁니다. 그의 책 제목「암에게 절대 기죽지 말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는 대신 웃으라고 충고합니다. 웃음은 부작용 없는 항암제라는 겁니다. 이처럼 두려움이 얼마나 우리 인생에 나쁜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두려워할수록 현실의 문제가 더 커 보이고 그 문제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인간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100전 100패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고양이 앞의 쥐걸음”이라는 말이 있죠. 쥐는 본래 뒷다리가 길어서 얼마나 빠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일단 고양이를 보면 부들부들 떨면서 맥을 못 추고 기어갑니다. 결국 잡혀 먹고 맙니다. 어떤 문제든지 그 앞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실패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2]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 : 불신앙 그러면, 이렇게 나쁜 ‘두려움’이 왜 생기는 걸까요?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신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본문 14:1절을 보시면, 10명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두려워 떠는 백성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그들은 철야 통곡을 했습니다. 이럴 때 신앙이 있다면 당연히 무엇을 해야 마땅합니까? 철야 기도를 했겠죠. 그런데 밤새 두려움에 사로잡혀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또 14:3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그들은 두려움에 이미 죽은 것 같았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야단입니다. 그들의 안중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불렀지만, 단지 원망을 위해서였습니다. 불신앙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인간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마침내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신앙으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한없이 큰 거인으로 보였습니다. 결국 그들 앞에서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거인 나라’가 된다.” 그러니 불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요즘 세월이 갈수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리 험한 세상에서 신앙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간이 크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간이 큰 게 아니라, 반대로 간이 콩알만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무슨 짓을 하나요? 두려움을 극복한답시고 세상의 다른 것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엇으로 인간의 마음 속을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을지! 재력? 권력? 학력? 그 어느 것으로도 불가능합니다. [3]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 : 신앙 그러면 어떻게 하죠? 그냥 그러다 망하고 그러다 죽어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즉효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노만 V. 필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은 두려움의 치료제이다.” 잘 아시는 대로, 다윗은 구약 인물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용맹스런 사람입니다. 물론 그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때로는 두려워 떤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가 담대한 용기를 갖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시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또 시27:1을 보면,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그의 담대한 모습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때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인생의 적수인 두려움을 이기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그 신앙을 크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① 영적인 안목 키우기 : 첫째는, 영적인 안목을 키우면 우리의 신앙 커집니다. 신앙은 눈을 달라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든 사물이나 문제를 육신적으로 보고 판단합니다. 10명 정탐꾼들이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단지 육신적인 안목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능력과 가나안 원주민들과 비교하면서 두려워 떨었던 겁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땠습니까? 가나안 원주민의 모습을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들이 거인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14:7절~9절 보시죠. “7 ...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 ” 그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은 분명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아무리 거인족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먹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여기서 ‘먹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NASB)을 보니까, prey 즉 사냥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먹이라”는 말은 다른 영어성경(NIV)을 보니까, swallow up 즉 ‘꿀꺽 삼켜버리다’ ‘먹어치우다’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의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주 작아 보입니다. 반대로 영적인 안목이 없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이 세상의 문제가 한없이 커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소인 나라’가 된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 있으실 겁니다. 어른이 된 후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 보면 얼마나 작은지 “애걔~”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운동장이 줄어들었나요? 아니죠. 내가 커진 겁니다. 마찬가지 영적인 안목이 생기고 신앙이 커지면 세상이 작아 보입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별 게 아닙니다. 왕하6:14~27을 보면, 엘리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람은 당시 이스라엘의 적대국가로 이스라엘의 국경을 수시로 침범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때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방비함으로 위기를 넘깁니다. 약이 오른 아람 왕이 엘리사를 제거하고자 야밤에 군대를 보내 도단 성을 완전 포위합니다. 아침 일찍 밖에 나간 사환이 그 광경을 보고 절망합니다. “아! 이젠 죽었구나!” 그러나 엘리사는 태연합니다. 왜 그랬나요? 왕하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불말과 불병거는 천국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엘리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두려워할 수 있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 대거 호위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큰 게 아니라 내 신앙이 작은 겁니다. 부디 영적인 안목을 키움으로 세상을 소인 나라로 보고 넉넉히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임마누엘 신앙 키우기 : 둘째로, 임마누엘 신앙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뜻이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14:9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이 어떤 모습인지! “ ...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넘칩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또 시3:5~6을 보십시오. 역시 다윗의 시편입니다.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고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는데 뭐가 두렵냐? 이겁니다. 어린아이가 아빠 어깨 위에 무동을 탑니다. 그러면 세상이 다 아래로 보입니다. 어른들도 작아 보이고,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죠. 우리도 마치 하나님 어깨 위에 무동 탄 아이와 같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나요? 탕 중의 최고는? ‘돌탕’입니다. 탕자는 나쁘지만, 돌아온 탕자 ‘돌탕’은 좋습니다. 라면 중의 최고는? ‘주님과 함께’라면입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Golden Gate Bridge)를 잘 아실 겁니다. 다리를 놓은 때가 1930년대였으니까 옛날 이야기이죠. 공사를 하는데 다리가 너무 높고 위험해서 기술자들의 마음이 늘 불안했습니다.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5명이 추락해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고심 끝에 철망으로 안전그물을 설치했습니다. 요즘은 공사 기술이 발달해서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안전그물을 설치한 후 신기하게도 아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안전그물에 떨어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안도감 때문에 실족하지 않은 겁니다. 안전그물 정도만 해도 그렇게 안도감을 주고 일이 잘 되게 해 준다면,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얼마나 일이 잘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은 우리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부디 임마누엘 신앙으로 세상을 소인 나라로 보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하나님의 약속 붙들기 : 세번째, 하나님의 약속을 꼭 붙드시면 신앙이 커집니다. 13:30절을 보시죠.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 ” 갈렙은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무조건 가자는 겁니다. 이어서 14:8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직접 가보니까 정말 약속하신 그대로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정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출애굽 1세대 중 그 두 사람만 가나안 땅의 축복을 차지하고 신앙의 영웅으로 성경에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얼마나 많은 약속의 말씀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향한 약속이 됩니다. 그 말씀을 붙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예를 들어 요16:33도 예수님이 직접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신학교 동기생 중에 박종민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동기생인데, 나이는 저보다 15살 더 많습니다. 옛날 전매청에 다니다 신학을 늦게 하셨죠. 이분이 목회하시다 60세나 넘어가면서 조기은퇴를 결심하셨습니다. 젊었을 때 선교를 위해 기도하셨는데, 실천하려고 필리핀으로 떠나신 겁니다. 한 2년 하시더니 연락이 왔어요. 그곳에는 선교사도 많고 편해서 아프리카로 가려고 하는데, 선교지를 소개해 달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는 저도 아직 아프리카에 가보지 않았는데, 소개해 준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자꾸 말씀하셔서 차드의 양승훈 선교사님을 소개해 줬습니다. 그랬더니 좋다고 가시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한번 답사해 보고 가시라고 하니까, 비용도 많이 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냥 가면 되지 무슨 답사냐며 그냥 떠났습니다. 하기는 천국 답사해 보고 가나요? 그냥 믿음으로 가지. 그로부터 2년 후 제가 차드에 가보고 얼마나 죄송했는지! 정말 너무 열악한 나라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그곳에서 기쁨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양승훈 선교사님과 협력해서 차드선교센타와 현지인 교회 여러 군데 건축 공사 감독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 후 안식년을 보내신 후에는 이제 차드에 선교사들이 여럿 들어갔으니 또 다른 데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직 저도 가보지 않은 가봉에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좋다며 그곳에 가셨습니다. 역시 답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가셨습니다. 지금까지 사역하고 계신데 만70세까지 채우시겠다고 합니다. 가끔 전화 통화하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목사님 부부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른 데도 아니고 아프리카에, 말만 듣고, 그것도 가보지도 않은 사람의 말만 듣고 가는 분들이 어디 있습니까? 무모하다는 생각을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게 어디 인간의 말을 듣고 간 겁니까? 당신들 나름대로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꼭 붙드신 것이죠. 여러분!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거인 나라로 보입니까? 소인 나라로 보입니까? 그게 바로 내 신앙의 수준입니다. 세상이 거인 나라로 보이면 내 신앙이 ‘소인 신앙’인 겁니다. 반대로 세상이 소인 나라로 보이면 내 신앙이 ‘거인 신앙’인 겁니다. 아무쪼록 여호수아와 갈렙 같이 거인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두려워 말고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거지가 없는 나라/ 막10:46-52
거지가 없는 나라 막10:46-52 오늘 본문에는 거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지도 등급이 있답니다. 본문에 나오는 거지는 아주 상거지입니다. 눈도 멀고, 가족에게도 버림받았습니다. 모든 삶이 피곤하고 지치며,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며 자지 못한 이 불쌍한 거지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뜨고 새로운 삶에 구원을 얻으며, 은혜를 받아 인류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 풍성한 은혜 아래 살아가는 복된 생애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돈은 주는지 몰라도 눈을 뜨게 할 수 없는데, 예수님께서는 눈도 뜨게 하시고 거지의 겉옷을 벗어버리며, 의의 옷을 입고 믿음의 옷을 입히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축복된 삶을 살 수가 있게 하십니다. 잘 사는 것을 죄악시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잘 사는 것을 공격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많은 분들이 물질의 축복을 아주 그릇되게 이해하는 극히 부분적인 부작용만 가지고 말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도, 열 두 지파들이 모두 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엄청난 축복을, 물질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물질의 복을 받아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잘못된 일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고 주의 영광을 드러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 거지 바디매오와 같은 가난에서 건지시고 멸망에서 건지시며, 모든 저주에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가난보다 더 비극은 없습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가정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의식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먹을 수도 없고 입을 수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난하면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지식이, 과학이 발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이렇게 지식이 발달해도 가난한 나라는 그런 일에 전혀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들은 모두 다 장수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염병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전염병을 막을 수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아 사망률이 많습니다. 저희들도 가난했을 때 병원이나 약국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이가 아파도 이를 실로 감아서 빼고 손으로 잡아당기지 치과에 가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 동생은 아 파서 창자가 보였습니다. 그러나 창자가 보여도 병원에 갈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김치를 빨아서 된장과 말아서 붙였는데 그래도 얘가 안 죽고 살았습니다. 창자를 제 눈으로 봤습니다. 여러분! 가난한데 병원을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가난하면 장애인들이 더 비극입니다. 건강한 사람도 못사는데 장애인들을 어떻게 대접할 수 있습니까? 수많은 장애인들이 전혀 혜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가난하면 부모에게도 효도할 수 없습니다. 자식도 잘 기를 수 없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데 무엇을 드린단 말입니까? 그래서 부모님들이 굶어 돌아가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가난하면 윤리 도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가난해서 몸까지 파는데 뭐든지 안 팔게 어디 있습니까? 모두 옛날이 아닙니다. 내려오는 이야기 보십시오. 사랑하는 딸도 칠십 노인에게 그냥 시집을 보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먹고 살아야 하는데... 가난은 개인에게도 비극, 국가에도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지 바디매오 같은 이 나라를 120년 전에 주의 복음으로 이 나라는 이렇게 엄청나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잘못 사용해서 오늘 문제인 것이지 물질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축복 받아 이제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물질 관리를 잘 해서 자손만대 축복받는 민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북한도 너무 가난합니다. 온 나라가 가난합니다. 온 민족이 모두 다 가난합니다.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나라는 100% 가난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는 가난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영국, 스웨덴, 스페인, 독일 다 잘 삽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오스트리아도 모두 다 잘 삽니다. 하나님 잘 믿는 나라들은 모든 일이 잘 됩니다. 우리 하나님을 잘 믿어 햇빛과 비를 주시니 추수할 곡식 많도다. 귀한 열매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주님을 잘 믿어 바디매오의 겉옷을 벗고 믿음의 옷을 입으며, 하나님을 잘 믿어 구원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 이번 4월 초파일에 불교에서 큰 전국 행사를 하며 거기에 주 욱 내용을 적었는데, 마지막에 그런게 나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고 도를 닦으려면 불교를 믿어라.’ 그래서 제가 그 말을 듣고 ‘정말 바로 말했구나.’ 그랬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이 세상에서 정말 깨끗하게 정결하게 살려면 거기를 가야 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말이 얼마나 의미가 넓은지 아십니까? 전체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자유는 부분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모든 자유를 말합니다. 죄에서 자유, 구원입니다. 저주, 멸망에서 구원입니다. 질병, 가난, 불행, 이 세상의 어두움에서, 모든 악에서 다 건짐을 말하는 것이지 기독교는 천국만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구원, 자유, 은혜, 축복이 여러분과 저와 이 민족위에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 북한에 병원을 세워도 병원 운영을 못합니다. 그래서 병원 세워줄까 그러면 ‘여보세요, 멀쩡한 사람도 굶어죽는데 병든 사람 돌볼 여가가 어디 있습니까?’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조금만 아파도 병원이고 머리만 따끔따끔해도 병원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나라입니까? 자손만대 이 축복이 이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햇빛도 위로부터 비취 지듯이 우리 하나님은 위로부터 우리를 축복하여 주십니다. 세계 국제 보건기구인 WHO에서는 건강을 세 가지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건강은 첫째 신체적인 건강, 그 다음에는 정신적인 건강, 셋째 사회적인 건강이 있어야 이 사람을 가리켜서 건강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물론 몸이 건강해야 합니다. 정신도 건강해야 합니다. 마음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관계, 사회에서 우리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이런 건강이 또한 있어야 이걸 건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건강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간은 이 건강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WHO에서 는 21세기 들어와서 몇 년 전에 건강을 새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여기에 추가한 것은 영적인 건강입니다. 오늘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발달한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는 길, 잘 살 수 있는 길은 육체적인 정신적인 건강만으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영적인 건강,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믿음의 건강, 임마누엘의 건강이 있을 때 오히려 전자의 문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 연약함도, 신체의 연약함도, 영적인 건강이 있으면 모두 다 극복할 수 있고, 이 시대를 건강하게 사명을 감당하며 나라와 민족과 인류를 구원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강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건강입니다. 인간의 부요함도 세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물질의 부요함, 하나는 지식의 부요함, 하나는 정신적인 부요함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가 모두 다 있어도 영적인 부요함이 없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세 가지를 가지고도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우울증에 걸리고 답답하며, 노이로제에 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고 자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를 더 합니다. 영적인 건강,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설령 지식이, 물질이 남들만큼 부요하지 못할지라도 부요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은 내 영혼에 한없는 부요함으로 궁궐같이 살아가는 축복이 같이 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축복을 우리 안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행복이 밖에 있는 줄 알지만 행복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하나님께서 석류를 새기게 하셨습니다. 석류는 무엇입니까? 겉모양은 별로입니다. 인물은 별로입니다. 그러나 석류 안에는 모든 이 세상의 과일의 좋은 맛이 다 있다고 합니다. 열면 색깔도 너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먹으면 달콤하고 화하며, 사과 맛, 귤 맛, 오렌지 맛, 포도 맛 모든 좋은 맛이 다 있는 것이 석류입니다. 무슨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 맛이 석류 안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좋은 석류 같은 것이 사람 속에 하나님이 심어주셨습니다. 사랑, 기쁨, 소망, 열심, 의, 진실함, 꿈 등 우리 사람 속에는 너무 석류같이 좋은 것을 하나님이 심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이것을 개발합니다. 내 안에 있는 내 것을 개발해서 그로인하여 내가 행복하고 그것을 심어서 기쁨을 거두며, 그 안에서 살면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 석류같이 이 귀한 창고는 어떤 인간도 개발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야 이 문이 열립니다. 내 안에 있는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때 어두움에서 벗어나서, 굳게 닫힌 철문에서 나와, 주님을 모시고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은 석류 같은 인생이 되며, 석류 같은 가정이 되고 석류 속에 있는 온갖 축복의 보화가 낱낱이 알알이 열매를 맺어 이 세상을 천국같이 살아가게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나오신 모든 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으로 말미암아 석류 같은 은총의 문이 열려서,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잘 산다고 하는 것은 하늘에서 물질이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걸 개발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부지런함을 개발하고, 긍정적이고 열심 있으며 지혜와 성실한 삶을 개발해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잘 살 수 있습니다. 가난이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이 없는데서 옵니다. 잠언에 보면 가난이 어디서 오느냐? 첫째로 게으름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잠언 24장 33절 34절에 보면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오리로다” 잠언 12장 27절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게으른 사람은 손을 넣고도 입에 들어가기도 귀찮아하느니라.”는 것이 나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서 가서 배우라.” 이런 말도 나옵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섬겨야할 우리 마음에 사람이 불행할 요소를 가득 심어 놓았습니다. 석류가 아닙니다. 저주의 씨앗을 우리 안에 가득 심어서 그걸 가지고 우리 인간을 파멸과 불행으로 가져갑니다. 게으름은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부지런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부지런함으로 살아야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지런합니다. 예수 믿는 나라는 부지런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1부에 비가 많이 와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목회자는 날씨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눈이 와도, 걱정, 비가 와도 걱정, 또 일 년 카렌다를 보고 주일이 추석이라든지 주일이 무슨 국경일하고 끼어도 너무 걱정합니다. ‘아유~ 우리 교인들이 또 놀러 가겠구나. 오늘 비가 와서 안 오겠구나.’ 1부 예배가 7시니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보니 1부가 꽉 차게 나온 것입니다. 본당에 모두 다 못 들어가고... ‘아~ 우리 성도들이 참 부지런하구나.’ 그랬습니 다. ‘아이고~ 오늘 집에서 떼어먹자.’ 이런 마음도 생기고, ‘주님이 아시겠지.’ 하고 이불을 덮어 쓸 수도 있는데 모두 다 나온 것입니다. 1부 성가대는 몇 시에 나오는 줄 아십니까? 집에서 모두 다 4시 전에 나와야 됩니다. 일찍 일어납니다. 화장은 3시부터 해야 됩니다. 그리고 차 타도 그 다음 나와서 두 시간 연습하고 7시에 앉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일찍 나와야 됩니까? 그런데도 1부 성가대가 6 백 명 모두 다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야~ 우리 성도들 참 부지런하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지런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곧 부지런함이 잘 사는 길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보면 놀라운 비밀을 발견합니다. 논도 한 번 매는 것 하고 두 번 매는 것 하고 벼 모양이 달라집니다. 한 번 가서 비료 더 주고 한 번 가서 김 한 번 더 매주는 것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모릅니다. 열매를 많이 거두는 것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지런함에서 옵니다. 여러분이 조금만 더 열심을 내면 여러분의 인생의 열매가 더 많아지고 더 풍성하며, 더 충만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집에서도 부지런하고 들에서도 부지런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보면 건강도 부지런함에서 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축복도 부지런함에서 옵니다. 행복도 부지런함에서 옵니다. 열심히 뛰어다니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모두 다 길이 있습니다. 가만히 누워있으면 답답함이 오고 나쁜 생각만 찾아옵니다. 사람은 5분만 시간이 있어도 나쁜 생각이 찾아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지런한 사람은, 바쁜 벌은 근심할 틈이 없다고 한 것처럼, 부지런함으로 여러분의 인생에 열매를 많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이 넓은 땅에서 복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왜 가난합니까? 연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난해진다고 했습니다. 잠언 21편 17절에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또한 옷만 잘 입으려고 그럽니다. 한탕주의에 빠집니다. 이 세상에 좋은 것만 자꾸 탐냅니다. 연락을 즐깁니다. 그런 사람은 가난해 집니다. 젊을 때 특별히 어디 가서 좋은 것만 먹으려고 하고, 좋은 옷만 입고 다니고, 좋은 차만 타고 다니려고 하면 아예 그 집은 망조가 들어간 것입니다. 치료하는 약이 없습니다. 억만금을 물려줄지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몸은 게으른데다가 삶은 사치하게 살아가니까 모두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게으르고 연락을 즐기면서 잘 먹고 잘 입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삶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모두 다 강에다 쏟아 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나라들은 절대로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왜 가난하게 됩니까? 술을 즐기는 사람은 가난하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를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게 되면 탐식하게 되고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이니라.” 이 세 가지가 대체로 같이 다닙니다. 술 많이 먹는 사람은 밤새도록 술 먹고 그 다음에는 머리가 아파서 일도 안 나가며 많이 먹어 놓으니까 그 다음에는 몸이 또 약해집니다. 술 먹는 사람은 힘도 없습니다. 일 못합니다. 술 먹는 사람은 밀면 넘어집니다. 술 먹는 사람하고 싸우지 마십시오. 건드리면 넘어집니다. 그래서 집에 와가지고 자기 부인한테 휘두르지만 공연히 보이지 않는 것을 쳐서 자기 손만 부러지게 됩니다. 술 먹으면 가난하여진다고 그랬습니다. 돈 들어가고 건강 잃고 모두 다 잃습니다. 가난한 3요소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술을 많이 먹습니다. 러시아에 가보십시오. 제가 20년 전에 가보니까 얼마나 술을 많이 먹는지, 그래서 가난합니다. 먹을 것도 없는데 길거리에 술 취해서 돌아다니고, 가난한 사람이 술을 지독하게도 많이 먹습니다. 예수 잘 믿는 나라들은 길거리에서 술 먹고 흥청거리는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나오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물질의 축복은 내 안에 있는 석류 같은 이 안에 있는 것을 개발해서 감사하게 하고 부지런하게 하여 근신하게 하고, 오늘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면서 잘 살도록 만들어주시고 개발해서 세계적인 영육의 부요함이 주어지길 바랍니다. 요사이 온 나라가 바다이야기에 빠졌습니다. Sea Story에 온 나라가 멍들고 병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Sea Story를 벗어나서 Heavenly Story, Holly Story, Spirit Story, Bible Story, 영적인 스토리로 바다에 빠지지 말고 바다에서 구원 얻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9월 새벽집회 주제를 벌써 바다이야기 나오기 전에 만들었는데 정해 놓고 나니 너무 잘 한 것입니다. ‘아~이거 바다에 노아가 여덟 식구가 구원 받듯이 우리 모두 9월 새벽집회에 바다에 빠진 우리를 건져야 되겠다. 우리 온 가족이 구원을 얻어야 되겠다.’ 오늘 우리나라는 도박의 바다, 음란의 바다, 죄악의 바다, 술 취함의 바다, 온갖 악한 죄악의 바다에 빠져있습니다. 마약도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침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온 나라가 모두 다 빠졌습니다. 농촌까지 모두 다 들어가 있는 이때에, 이 나라를 건져내는 것은 노아와 같은 믿음, 노아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해서 빠지지 말고 나와 민족을 구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죄의 밤은 깊어가고 성난 물결 설렌다 어디 불빛 없는 가고 찾는 무리 많구나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 노아의 여덟 식구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해서 믿음으로 사는 길만이 바다에 빠지지 않고 건짐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믿어보면, 교회 다녀보면 알지 않습니까? 저도 우리 집이 도박에 전통이 있지만 제가 딱 끊었습니다. 치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제 친구가 저보고 그럽니다. ‘형님, 이 세상에 고스톱보다 더 좋은 건 나는 못 봤습니다.’ 빠지면 그렇게 됩니다. 어제 뉴스에도 보셨지 않습니까? 여수에 있는 30대 아주머니는 자기 병, 불치의 병 치료하려고 모아 놓은 돈을 바다이야기에 가서 모두 다 털어버렸습니다. 털리고는 너무 속상해서 칼을 갖고 와서 종업원을 막 찔렀습니다. 몇 천 만원을 잃으니 미칠 지경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경찰에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뻔히 그런걸 알면서 그런데 갔습니까?’ 하니까 ‘다 빠지는데 나라고해서 안 빠질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 모두 다 가는데, 여자란 여자는 모두 다 가는데 나 혼자 안가고 견딜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박 같은 잘못된 퇴폐문화는 국가에서 막아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민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얼마나 약합니까? 더구나 청소년들은 얼마나 약합니까? 하나님 없는 사람은 뭔가에 빠지려고 그럽니다. 좋은 데에 빠지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쁜 데로 들어가는 것을 누가 막아야 합니까? 정부가 철저하게 막아야 하는데, 세상에 문화관광부가 이 온 나라를 바다로 만들어버리니 뭐가 되느냐 말입니까? 이 도박은 모든 다른 범죄로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20%가 도박해서 자살을 한답니다. 그러니 막아야 합니다. 모든 폭력 이런 범죄도 40%가 도박하고 연관이 되어 있으며, 또한 34%가 소매치기라든지 절도범도 도박하고 연결되어 있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잃었으니까 이걸 어디 가서 또한 빌릴 데는 없으니까 훔쳐다가 이걸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훔쳐가지고 먹는데 쓰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6시간 10시간을 거기 앉아가지고 본전 찾으려고 하는데 여러분! 거기는 들어가면 모두 다 잃게 되도록 기계가 만들어졌는데 들어간다는게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모든 게 다 유혹입니다. 그래서 유혹을 받지 않는 길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도박판이 없어야 합니다. 내 안에 음란판, 도박판, 별의별 DNA가 다 있는데 이걸 가지고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셔야 여러분이 바다에 빠지지 않고 구원 받으며, 승리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거지 바디매오는 주님에게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오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영적으로 건강하고 구원을 얻으며, 새 생명을 얻고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사모함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주님에게 부르짖어야 됩니다. 죄악을 향하여 나가는 그 열심의 백분의 일만 사용하면 여러분은 모두 다 거지 바디매오 같이 승리할 것입니다. 잘 될 것입니다. 바다에 빠지는데는 돈을 몇 조원이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내 영혼의 건강, 영적인 축복을 위해서는 모두 인색해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 주님 앞에 부르짖는 길이 승리하는 길인 줄로 믿습니다. 저도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고, 저희 집안에 동장 하나도 없고 그러니까 부르짖을 데가 없습니다. 있었더라면 제가 부르짖었을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26년 전 명성교회를 개척할 때도 쫓겨나서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제 겉옷을 벗겨 주셨습니다. 저주와 가난과 멸시와 온갖 불행의 내 겉옷을 벗고 하나님께서 저를 거룩한 옷으로 승리의 옷으로 영광스러운 옷으로 갈아 입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 나오는 분은 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26년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교회도 돈 많은 사람 끊임없이 많았지만 제가 도와달라는 말을 한 번 한 일이 없습니다. 큰 건축하니까 ‘얼마 하시 지요.’ 그런 말 한 번도 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교회 장로님 되는 것은 쉽습니다. 제가 그런데 부담 안주니깐 일절 그러지 않습니다. 부요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지 교인이 뭐 있다고, 부자인들 하나님 부자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다 갖고 계신 부요하신 분에게 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계의 최고 빌 게이츠도 가난한 집 아들이었습니다. 대학도 못 들어간 아들이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성경 공부하고 하나님 말씀 배워서 지금 세계에 1등 가는 부자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 록펠러같이 만들어 주시고 빌 게이츠같이 만들어 주시며, 카네기같이 만들어 주시고 다윗같이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믿고 기도하시며,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기도하시고, 능력이 부족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시면 여러분은 정말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21세기 지도자가 되고 기업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훈련을 철저하게 몇 십 년을 받았기 때문에 높은 사람에게 부탁을 안 합니다. 많은 친한 사람 별의별 사람이 있어도 제가 아쉬운 소리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높은 분은 하나님이신데 뭘 부탁을 합니까? 부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주님에게 부르짖을 것입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몇 년 전에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가보니까 대통령이 마지막 하는 말이 국민에게 말을 안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God! Help me.’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제가 그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역시 미국 대통령도 국민에게 도움 받아봐야 얼마나 도움 받겠습니까? 좋을 때 모두 다 도와주는 것이지,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바디매오와 같이 일찍이 부르짖어서 여러분의 인생에, 슬픔 저주 많은 세상에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거지 바디매오는 끝까지 따라 붙였습니다. 사모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많이 제지했지만 ‘주여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은혜주시는 그날까지, 주님이 응답하는 그날까지 주님을 바짝 따라 붙였습니다. 주님께서 ‘너 소원이 뭐냐?’ ‘예, 눈을 뜨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지에게 ‘소원이 뭐냐’하면 돈을 달라고 할 텐데 예수님 앞에 아예 큰 걸 근본적인 것을 구했습니다. ‘눈 뜨게 해 주십시오.’ 주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는 분은 큰 소원이 없어서 못합니다. 자기 힘으로 살 수 있으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나와서 할 수 없는 큰 기대와 큰 믿음을 가지고 구하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일을 사모하십시오. 지위가 높아도 영적인 걸 사모하는 사람이 있고, 아주 낮고 가난해도 끊임없이 아래를 향하여 바다이야기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목회를 해 보면 저 분은 기도를 안 받아도 될 분 같은데 그렇게 기도를 사모하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검장, 고검장, 이 두 분이 저를 찾아와서 식사대접을 하겠다고 해서 너무 몇 달 동안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사대접이 그렇게 급합니까?’하며 같이 식사를 하는데 ‘목사님! 사실은 목사님 기도 한 번 받고 싶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식기도 합시다.’ 그러니까 ‘아닙니다. 제가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엎드릴 테니까 안수기도 한 번 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 양반은 세상에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권력 능력을 가졌는데 뭘 이렇게까지 사모하고 엎드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런 분이 많습니다. 서울 시장하고 국정원장 이런 높은 분도 와서 엎드리는 분이 있는가 하면, 꼭 기도해야 할 분이 경홀히 여기는 분도 있습니다. 기도하면 은혜주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호수가 있는 공원에 갔는데 누가 그럽니다. 젊은 부부가 와서 다리를 붙잡고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그럽니다. ‘아~ 무슨 일이 있느냐?’고 하니까 ‘결혼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직 아기가 없습니다.’ 애기 없는 분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별의별 방법 다 하니 너무 지친 것입니다. 손을 얹고 기도했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금방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기쁨의 소식을 전해오고...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학이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어 있지 지나 갈 때라도 잡아야 됩니다. 붙잡고 ‘주여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우리나라 지도자들도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저 미국 대통령은 억 만 배 더 큰 힘을 가지고도 매일 부르짖는데 우리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우리나라 문제는 한 순간에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시면, 하나님이 은혜주시면 내 겉옷을 벗기시고 내 가난을 해결하시며, 영원히 뜰 수 없는 눈까지 뜨게 하시는 능력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늘도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제를 해결하시며, 이 나라 이 민족의 문제도 해결하여 주시고, 이번 9월 새벽집회에 우리 모두 거지 바디매오 같이 은혜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견고한 나라/ 대하9:1-12
견고한 나라 대하9:1-12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당신의 지혜가 크다 한 말이 그 절반도 못 되니 당신은 내가 들은 소문보다 지나도다... 역대하 9:1-12 이제 두 주 후면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5년 동안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미래의 5-10년은 우리나라에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 영적으로나 선교적으로 상향적 전진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하향적 후퇴를 할 것인지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지도자들로 인한 불행한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수십 년 동안 독립운동을 해오신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첫 대통령이 되었을 때 국민들은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집권 시도와 부정선거로 4.19사태가 일어났고, 우리 대통령이 남의 나라 하와이로 망명을 가서 인생을 마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후 몇 분의 대통령은 짧은 기간 집권하여 이렇다할 영향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 장군이 총과 탱크로 국민의 동의 없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 분은 경제적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시동은 걸었지만 그 분도 장기집권을 하려다가 시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집권한 두 분은 군인 대통령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부패로 인해 투옥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부정축재로 감옥에 다녀와서도 여전히 숨겨둔 돈을 내놓지 않고 있어 우리나라에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고 국제적 망신거리를 만든 분들입니다. 드디어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나라는 경제적으로 거덜이 나고 대통령의 아들은 부패해서 감옥에 갔지요. 그것만으로도 부끄러운데 그 다음 대통령은 아들 두 명이 또 부정부패로 감옥에 갔습니다. 또 그 대통령 때문에 국민의 일부는 나라의 안보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걱정은 다음 대통령에게까지 이어졌고 온 국민이 현 대통령 때문에 걱정과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요. 임기가 한두 달 남은 지금은 남은 임기가 빨리 지나가라는 말을 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지도자의 복이 너무 없었어요. 앞으로는 우리나라에 좋은 지도자가 나와야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을 보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나쁜 사람들만 모아서 나온 것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짝퉁 대통령” “위장의 명수” “실정의 책임을 안 지려고 당명을 네 번씩이나 세탁” “자기가 섬기는 대통령을 뿌리치고 나와서 자기 목숨 살리려고 배반한” “반 기업 정서” “친북좌파세력” “위선자” “거짓말쟁이” “새치기한 사람” “자기 당을 단숨에 배반한 사람” 차떼기 명수“ “실패한 기업인” “악덕 기업인” “말 바꾸기와 거짓말에는 거의 병적인 수준” 이런 말을 하고 또 듣는 사람들이 나왔으니 이것 참 나라가 큰일입니다. 이들 중에 누구를 뽑아야겠습니까? 그동안 하지 않았던 벼라별 욕을 지난 2-3개월에 서로 몰아서 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줄 몰랐는데 어디서 찾아냈는지 약점들을 찾아내서 서로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뽑을 대통령은 먹칠이 된 사람들입니다. 당선이 되어도 존경 받기 힘든, 부끄럽고 창피한 사람이 우리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총리나 시장, 당 의장, 장관, 국회의원 등을 오래 했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지금 서로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제일 나쁜 사람들만 뽑아서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도 존경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모두 진흙 속에 처박아 놓았습니다.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난 때문에 힘들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 문화가 너무 저질입니다. 이렇게까지 해서는 안 되지요. 앞으로 우리의 대통령이 될 사람인데 이렇게 모질게 비난하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면 안 됩니다. 후보들이 어떠하든지 국민들은 정말 똑똑해야 합니다. 기도가 너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상향적 전진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아 달라고, 선거일까지 두 주 동안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들에게 판단력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이 혼탁한 공기를 뚫고 누가 이 나라를 제일 잘 이끌어갈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 국민에게 허락하여주옵소서.” 오늘 읽은 역대하 9장 내용은 좋은 지도자 솔로몬에 관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첫째, “존경받는 지혜로운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지혜가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명성이 하도 자자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솔로몬을 한 번 만나보기를 원했습니다. 솔로몬이 제일 바란 것은 권력도, 돈도, 인기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지혜로운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1절에 보니까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에 대한 소문이 났습니다.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에게 질문을 했는데 하나도 대답을 못한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지도자가 있어서 나라와 민족과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지혜로운 대답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에는 1대 조지 워싱턴과 15대 에이브람 링컨, 43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들입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대단히 가난한 집에 태어났지만 특별히 존경받는 분으로 꼽히는데, 그는 예수 믿는 어머니, 기도하는 어머니, 성경 읽는 어머니, 하나님을 신뢰하는 어머니, 겸손한 어머니, 불쌍한 사람들은 잘 섬기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고,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고는 대통령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인 자기만의 능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날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는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했고, 중보기도팀을 만들어 8년 동안 매주 한 번씩 백악관에서 같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우리도 겸손하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국민과 많은 전문가들을 통해 지혜를 구하며 이 어려운 나라를 이끌어갈 존경 받는 지도자가 나오도록 마음모아 기도하십시다. 국민의 존경은 커녕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는 지도자가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나라의 어려운 문제들을 하늘의 지혜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존경받는 지도자를 허락하시고,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그런 지도자가 되도록 도우소서.” 둘째,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성취의 능력이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이분은 무엇을 해도 탁월하게 합니다. 무엇이든 하는 일을 잘 했습니다. 그가 건축한 성전과 궁과 그 밖의 많은 일들과 나라의 조직, 관료들을 보니까 놀랄 지경입니다. 그 분의 손이 만지는 것을 다 잘 되고, 뛰어나게 할 수 있는 지도자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3절) 심지어 밥상의 음식들도 훌륭했습니다. 그 부하들이 앉는 의자,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들만 보아도 얼마나 탁월한 실력과 자질을 가지고 했는지 스바 여왕이 와서 보고 “정신이 현란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국민을 축복하시고 다음 지도자를 축복하셔서 무엇을 하든 놀라운 결과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십시다. 6절에는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당신의 지혜가 크다 한 말이 그 절반도 못 되니 당신은 내가 들은 소문보다 지나도다”고 했습니다. 소문보다 실체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소문은 말(言)입니다. 들리는 말보다 실체가 훨씬 낫다는 것이지요. 지금 대통령 후보들은 듣기 좋은 선거공약을 쏟아 내놓고 있습니다. 그저 말들이지요. 말만이 아니고 결과가 말보다 배나 되도록 통치할 수 있는 지도자를 구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왕이었습니다. 그 탁월한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우리에게는 모두 타고난 능력들이 있습니다. 탁월성은 인간의 선천적 능력에 하나님의 역사가 합해 질 때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울 때, 탁월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교회의 이 아름다운 성전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건축대상을 두개나 받았습니다. 우리 자신만의 능력으로는 보통 정도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성령의 능력이 합칠 때 초인간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다음 지도자도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 합해져야 합니다. 하나닌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런 지도자가 선출되도록, 또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제가 함께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탁월하게 하고, 자연이 초자연적으로, 평범한 것이 비범하게 변하는 역사가 다음 지도자를 통해서 앞으로 5년-10년, 우리나라에 일어나기를 기도 합니다. 셋째, 솔로몬은 “국민에게 자부심을 준 지도자”입니다. 솔로몬 왕 때문에 국민들의 자긍심이 높아졌습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복 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7절)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야말로 이렇게 훌륭한 지도자를 만났으니 얼마나 축복인가! 앞으로 우리 국민도 “한국 사람들 정말 복 받았다!”는 말을 듣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역사하시기를 기도하십시다. “복되도다. 당신의 백성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부하들이여!” 지도자 때문에 국민이 복 받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라의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씩 풀어가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그 나라와 그 땅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이 분은 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지도자”입니다. 8절을 보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 “당신이 믿는 그 하나님이 참 위대하고 훌륭하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는군요!” 우리나라의 다음 정부도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드높여지는 정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고”(8절) 무슨 말 입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을 좋아하시고 한국 백성을 사랑하시는구나!” 우리가 이런 말을 듣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가 날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고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나라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나라가 되도록 앞으로 두 주 동안 계속 열심히 기도를 하십시다. 다섯째, 솔로몬은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영원히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셨을 때 그 나라를 탄탄한 나라로, 견고한 나라로, 힘 있는 나라로, 평화가 있는 나라로, 복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당신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가 왕으로서 공의와 의로 행하게 하셨도다.” 나라에는 언제나 정의가 있어야 됩니다. 편견과 불평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서로 경쟁을 하더라도 대통령이 되고 나면 온 국민을 끌어안아야 됩니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모든 종교인들이든지 다 끌어안아야만 합니다. 대통령은 한 정당의 대통령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국민의 대통령입니다. 나를 비판하고 나에게 표를 안 준 사람까지 품고 하나를 만들 수 있는 통합적 대통령이 나오도록 기도하십시다. 정의와 진실이, 공평과 정직이 있어야 됩니다. 불의와 부정과 나쁜 것들이 지금 우리들 삶 속에 아직도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꽃을 피우는 사회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다음 지도자를 사용해주시고 이 민족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고, 정의를 왜곡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정의와 진리임을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은 훌륭한 왕으로서 찬란한 문화와 융성한 경제력을 갖추었습니다. 무역이 활발해 넘치는 금, 백단목, 보석들이 가득했고 놀라운 건축과 음악활동도 활발했고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문화와 경제가 왕성한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국민과 지도자가 합하여 크게 도약하여 전 세계에 명성이 나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사랑하시고 같이 계심을 만민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 땅을 축복해주시길 원합니다. 솔로몬의 시대는 과거에 보지 못한 시대라고 했습니다. “왕이 백단목으로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층대를 만들고 또 노래하는 자를 위하여 수금과 비파를 만들었으니 이 같은 것들은 유다 땅에서 전에는 보지 못하였더라”(11절). 한국에도 과거 역사에서 본 적이 없는 새롭고 찬란한 문화와 강력한 경제, 백성을 섬기는 정부와 효율성이 높은 조직을 갖춘 새로운 세계가 앞으로 5년 동안 우리 눈앞에 나타나기를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들 간에 서로 비난하는 내용을 보면 후보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이 나라에서 뼈가 굵었고, 모두 자기 분야에서 성취하고 성공한 사람들인데 이렇게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면 안 됩니다. 당선되고도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면 안 되지요. 우리의 금식기도가 필요합니다. 열심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나라를 계속 전진시킬 지도자와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존경 받을 수 있는 다음 세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한 지도자와 국민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각자 타고난 능력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국민이 되고, 최고의 경제와 문화를 일으켜 복된 국가가 될 뿐 아니라 좋은 지도자와 자긍심이 있는 국민이 되어 나라의 발전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만약 지도자가 약하다면 국민이라도 강해야 합니다. 이 나라를 한 사람이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국민이 솔로몬과 같은 자질을 길러서 작은 솔로몬들이 합하여 큰 솔로몬의 능력을 만들고,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번영과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하고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판단력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는 선거 때 투표율이 높은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지난 대선 때는 97.5%가 참여했습니다. 어느 공동체가 이렇게 투표율이 높겠습니까? 여자들이 97%, 남자들이 98%로 남자들이 1% 높습니다. 매번 우리 교인들의 선거 참여율을 조사해보면 여자들이 남자보다 높았습니다. 몇 년 전의 일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투표율을 공개하면서 여자 성도들 보다 투표율이 낮은 남자 성도들을 모두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 선거에서는 남자들이 분발해서 여자들보다 1% 더 나아졌습니다. 제일 투표율이 낮은 20대와 50대도 모두 일어나게 했는데, 그들의 다음 투표율도 97%로 올랐습니다. 그 결과 97.5%의 투표율이 우리 교회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일도 공휴일입니다. 그날은 쉬십시오. 그러나 반드시 투표하고 쉬세요. 할렐루야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투표권의 책임을 완수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도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기 원합니다. 여러분의 한 표 때문에 누가 이길지 몰라요.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단 몇 표 차이로 이겼습니다. 재판에 넘겨져서 겨우 부시의 당선이 확정되었지요. 민주주의 국가는 한 표만 더 많아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로 다음 세대는 우리가 기다리는 솔로몬의 영광의 시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견고한 나라/ 대하9:1-12/ 2007-12-20
견고한 나라 대하9:1-12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당신의 지혜가 크다 한 말이 그 절반도 못 되니 당신은 내가 들은 소문보다 지나도다... 역대하 9:1-12 이제 두 주 후면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5년 동안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미래의 5-10년은 우리나라에 결정적인 시기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 영적으로나 선교적으로 상향적 전진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하향적 후퇴를 할 것인지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지도자들로 인한 불행한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수십 년 동안 독립운동을 해오신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첫 대통령이 되었을 때 국민들은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집권 시도와 부정선거로 4.19사태가 일어났고, 우리 대통령이 남의 나라 하와이로 망명을 가서 인생을 마감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후 몇 분의 대통령은 짧은 기간 집권하여 이렇다할 영향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 장군이 총과 탱크로 국민의 동의 없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 분은 경제적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시동은 걸었지만 그 분도 장기집권을 하려다가 시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집권한 두 분은 군인 대통령으로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부패로 인해 투옥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부정축재로 감옥에 다녀와서도 여전히 숨겨둔 돈을 내놓지 않고 있어 우리나라에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고 국제적 망신거리를 만든 분들입니다. 드디어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나라는 경제적으로 거덜이 나고 대통령의 아들은 부패해서 감옥에 갔지요. 그것만으로도 부끄러운데 그 다음 대통령은 아들 두 명이 또 부정부패로 감옥에 갔습니다. 또 그 대통령 때문에 국민의 일부는 나라의 안보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걱정은 다음 대통령에게까지 이어졌고 온 국민이 현 대통령 때문에 걱정과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요. 임기가 한두 달 남은 지금은 남은 임기가 빨리 지나가라는 말을 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지도자의 복이 너무 없었어요. 앞으로는 우리나라에 좋은 지도자가 나와야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을 보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나쁜 사람들만 모아서 나온 것 같습니다. 서로 상대방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짝퉁 대통령” “위장의 명수” “실정의 책임을 안 지려고 당명을 네 번씩이나 세탁” “자기가 섬기는 대통령을 뿌리치고 나와서 자기 목숨 살리려고 배반한” “반 기업 정서” “친북좌파세력” “위선자” “거짓말쟁이” “새치기한 사람” “자기 당을 단숨에 배반한 사람” 차떼기 명수“ “실패한 기업인” “악덕 기업인” “말 바꾸기와 거짓말에는 거의 병적인 수준” 이런 말을 하고 또 듣는 사람들이 나왔으니 이것 참 나라가 큰일입니다. 이들 중에 누구를 뽑아야겠습니까? 그동안 하지 않았던 벼라별 욕을 지난 2-3개월에 서로 몰아서 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줄 몰랐는데 어디서 찾아냈는지 약점들을 찾아내서 서로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뽑을 대통령은 먹칠이 된 사람들입니다. 당선이 되어도 존경 받기 힘든, 부끄럽고 창피한 사람이 우리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은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총리나 시장, 당 의장, 장관, 국회의원 등을 오래 했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지금 서로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제일 나쁜 사람들만 뽑아서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도 존경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모두 진흙 속에 처박아 놓았습니다.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난 때문에 힘들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 문화가 너무 저질입니다. 이렇게까지 해서는 안 되지요. 앞으로 우리의 대통령이 될 사람인데 이렇게 모질게 비난하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면 안 됩니다. 후보들이 어떠하든지 국민들은 정말 똑똑해야 합니다. 기도가 너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상향적 전진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아 달라고, 선거일까지 두 주 동안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들에게 판단력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이 혼탁한 공기를 뚫고 누가 이 나라를 제일 잘 이끌어갈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 국민에게 허락하여주옵소서.” 오늘 읽은 역대하 9장 내용은 좋은 지도자 솔로몬에 관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첫째, “존경받는 지혜로운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지혜가 있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명성이 하도 자자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솔로몬을 한 번 만나보기를 원했습니다. 솔로몬이 제일 바란 것은 권력도, 돈도, 인기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지혜로운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1절에 보니까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에 대한 소문이 났습니다. 어려운 문제로 솔로몬에게 질문을 했는데 하나도 대답을 못한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지도자가 있어서 나라와 민족과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지혜로운 대답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에는 1대 조지 워싱턴과 15대 에이브람 링컨, 43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들입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대단히 가난한 집에 태어났지만 특별히 존경받는 분으로 꼽히는데, 그는 예수 믿는 어머니, 기도하는 어머니, 성경 읽는 어머니, 하나님을 신뢰하는 어머니, 겸손한 어머니, 불쌍한 사람들은 잘 섬기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고,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고는 대통령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인 자기만의 능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날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는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했고, 중보기도팀을 만들어 8년 동안 매주 한 번씩 백악관에서 같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우리도 겸손하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국민과 많은 전문가들을 통해 지혜를 구하며 이 어려운 나라를 이끌어갈 존경 받는 지도자가 나오도록 마음모아 기도하십시다. 국민의 존경은 커녕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는 지도자가 나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나라의 어려운 문제들을 하늘의 지혜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존경받는 지도자를 허락하시고,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그런 지도자가 되도록 도우소서.” 둘째,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성취의 능력이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이분은 무엇을 해도 탁월하게 합니다. 무엇이든 하는 일을 잘 했습니다. 그가 건축한 성전과 궁과 그 밖의 많은 일들과 나라의 조직, 관료들을 보니까 놀랄 지경입니다. 그 분의 손이 만지는 것을 다 잘 되고, 뛰어나게 할 수 있는 지도자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3절) 심지어 밥상의 음식들도 훌륭했습니다. 그 부하들이 앉는 의자,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들만 보아도 얼마나 탁월한 실력과 자질을 가지고 했는지 스바 여왕이 와서 보고 “정신이 현란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국민을 축복하시고 다음 지도자를 축복하셔서 무엇을 하든 놀라운 결과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선출되도록 기도하십시다. 6절에는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당신의 지혜가 크다 한 말이 그 절반도 못 되니 당신은 내가 들은 소문보다 지나도다”고 했습니다. 소문보다 실체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소문은 말(言)입니다. 들리는 말보다 실체가 훨씬 낫다는 것이지요. 지금 대통령 후보들은 듣기 좋은 선거공약을 쏟아 내놓고 있습니다. 그저 말들이지요. 말만이 아니고 결과가 말보다 배나 되도록 통치할 수 있는 지도자를 구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왕이었습니다. 그 탁월한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우리에게는 모두 타고난 능력들이 있습니다. 탁월성은 인간의 선천적 능력에 하나님의 역사가 합해 질 때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울 때, 탁월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교회의 이 아름다운 성전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건축대상을 두개나 받았습니다. 우리 자신만의 능력으로는 보통 정도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성령의 능력이 합칠 때 초인간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다음 지도자도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 합해져야 합니다. 하나닌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런 지도자가 선출되도록, 또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제가 함께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탁월하게 하고, 자연이 초자연적으로, 평범한 것이 비범하게 변하는 역사가 다음 지도자를 통해서 앞으로 5년-10년, 우리나라에 일어나기를 기도 합니다. 셋째, 솔로몬은 “국민에게 자부심을 준 지도자”입니다. 솔로몬 왕 때문에 국민들의 자긍심이 높아졌습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복 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7절)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야말로 이렇게 훌륭한 지도자를 만났으니 얼마나 축복인가! 앞으로 우리 국민도 “한국 사람들 정말 복 받았다!”는 말을 듣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역사하시기를 기도하십시다. “복되도다. 당신의 백성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부하들이여!” 지도자 때문에 국민이 복 받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라의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씩 풀어가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그 나라와 그 땅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이 분은 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지도자”입니다. 8절을 보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 “당신이 믿는 그 하나님이 참 위대하고 훌륭하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는군요!” 우리나라의 다음 정부도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드높여지는 정부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고”(8절) 무슨 말 입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을 좋아하시고 한국 백성을 사랑하시는구나!” 우리가 이런 말을 듣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가 날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고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나라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나라가 되도록 앞으로 두 주 동안 계속 열심히 기도를 하십시다. 다섯째, 솔로몬은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지도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영원히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세우셨을 때 그 나라를 탄탄한 나라로, 견고한 나라로, 힘 있는 나라로, 평화가 있는 나라로, 복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당신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가 왕으로서 공의와 의로 행하게 하셨도다.” 나라에는 언제나 정의가 있어야 됩니다. 편견과 불평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서로 경쟁을 하더라도 대통령이 되고 나면 온 국민을 끌어안아야 됩니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모든 종교인들이든지 다 끌어안아야만 합니다. 대통령은 한 정당의 대통령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국민의 대통령입니다. 나를 비판하고 나에게 표를 안 준 사람까지 품고 하나를 만들 수 있는 통합적 대통령이 나오도록 기도하십시다. 정의와 진실이, 공평과 정직이 있어야 됩니다. 불의와 부정과 나쁜 것들이 지금 우리들 삶 속에 아직도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꽃을 피우는 사회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다음 지도자를 사용해주시고 이 민족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고, 정의를 왜곡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정의와 진리임을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은 훌륭한 왕으로서 찬란한 문화와 융성한 경제력을 갖추었습니다. 무역이 활발해 넘치는 금, 백단목, 보석들이 가득했고 놀라운 건축과 음악활동도 활발했고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문화와 경제가 왕성한 시대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국민과 지도자가 합하여 크게 도약하여 전 세계에 명성이 나고,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사랑하시고 같이 계심을 만민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 땅을 축복해주시길 원합니다. 솔로몬의 시대는 과거에 보지 못한 시대라고 했습니다. “왕이 백단목으로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층대를 만들고 또 노래하는 자를 위하여 수금과 비파를 만들었으니 이 같은 것들은 유다 땅에서 전에는 보지 못하였더라”(11절). 한국에도 과거 역사에서 본 적이 없는 새롭고 찬란한 문화와 강력한 경제, 백성을 섬기는 정부와 효율성이 높은 조직을 갖춘 새로운 세계가 앞으로 5년 동안 우리 눈앞에 나타나기를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들 간에 서로 비난하는 내용을 보면 후보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이 나라에서 뼈가 굵었고, 모두 자기 분야에서 성취하고 성공한 사람들인데 이렇게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면 안 됩니다. 당선되고도 존경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면 안 되지요. 우리의 금식기도가 필요합니다. 열심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나라를 계속 전진시킬 지도자와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존경 받을 수 있는 다음 세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한 지도자와 국민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각자 타고난 능력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국민이 되고, 최고의 경제와 문화를 일으켜 복된 국가가 될 뿐 아니라 좋은 지도자와 자긍심이 있는 국민이 되어 나라의 발전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만약 지도자가 약하다면 국민이라도 강해야 합니다. 이 나라를 한 사람이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국민이 솔로몬과 같은 자질을 길러서 작은 솔로몬들이 합하여 큰 솔로몬의 능력을 만들고,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번영과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하고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판단력과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는 선거 때 투표율이 높은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지난 대선 때는 97.5%가 참여했습니다. 어느 공동체가 이렇게 투표율이 높겠습니까? 여자들이 97%, 남자들이 98%로 남자들이 1% 높습니다. 매번 우리 교인들의 선거 참여율을 조사해보면 여자들이 남자보다 높았습니다. 몇 년 전의 일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투표율을 공개하면서 여자 성도들 보다 투표율이 낮은 남자 성도들을 모두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 선거에서는 남자들이 분발해서 여자들보다 1% 더 나아졌습니다. 제일 투표율이 낮은 20대와 50대도 모두 일어나게 했는데, 그들의 다음 투표율도 97%로 올랐습니다. 그 결과 97.5%의 투표율이 우리 교회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일도 공휴일입니다. 그날은 쉬십시오. 그러나 반드시 투표하고 쉬세요. 할렐루야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투표권의 책임을 완수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도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기 원합니다. 여러분의 한 표 때문에 누가 이길지 몰라요. 미국의 부시 대통령도 단 몇 표 차이로 이겼습니다. 재판에 넘겨져서 겨우 부시의 당선이 확정되었지요. 민주주의 국가는 한 표만 더 많아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로 다음 세대는 우리가 기다리는 솔로몬의 영광의 시대가 되기를 원합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삼하8:13-18/ 서해원 목사/ 2006-07-21
고요한 아침의 나라 삼하8:13-18 이 세상에는 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우리 한민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민족이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습니다만 우리 민족은 독특한 특징과 뛰어난 장점을 가진 민족임이 틀림없습니다. 한국인의 장점 가운데 몇 가지를 꼽는다면 먼저, 근면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사람처럼 부지런하고 성실한 민족이 없습니다. 미국의 새벽을 여는 모든 현장에 한국인이 있습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이런 면에서 남미의 사람들과 비교가 되는데, 그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릅니다. 삶의 리듬이 없고 긴장감도 없이 그냥 되는대로 삽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다릅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머리가 뛰어납니다. 보통 유대인들이 머리가 좋다고 하는데, 우리도 아주 우수합니다. 세계의 유명한 대학에 소수민족가운데 인구비례로 보면 한국인이 가장 많습니다. 그 비상한 머리로 한국인의 우수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뛰어남을 사람들은 속도감으로 봅니다. 빠르다는 것이 물론 약점도 되지만, 21세기에는 속도감이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빠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빨리빨리’가 입에 붙어 있고 행동도 무척 빠릅니다. ‘빨리빨리문화, hurry hurry culture\'라는 말이 세계인에게 인식될 만큼 빠릅니다. 남들은 10년 걸리는 공사를 우리는 1, 2년에 다 끝냅니다. 이런 장점을 가진 우리 민족이 이제 세계의 주역이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그리고 한국크리스천임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이 시대에 사용하시리라 믿습니다. 일찍이 인도의 시인이었던 타고르는 이런 한국인의 우수함을 ‘동방의 등불’이란 시를 지어 잘 나타냈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 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곳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동방의 등불, 고요한 아침의 나라, 바로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한 우리의 소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의 크리스천으로서, 교회공동체를 넘어 민족공동체를 향한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민족을 향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민족, 이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할까요? 민족을 위해 우리가 어떤 소원을 품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까요? 오늘 그것을 본문을 통해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선, 탁월한 지도자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통일왕국시대에 번영을 이루었던 다윗의 통치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등극하여 40년간 이스라엘 다스리면서 역사상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든 위대한 왕입니다. 다윗 이후에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은 다윗 시대를 꿈꾸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도, 옛날 사람만이 아니라 지금 현대인도 존경하고 인정하는 지도자입니다. 제가 얼마 전 귀한 책을 하나 선물로 받았습니다. 제목이 ‘다윗대통령’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부터, 그가 통치하는 모든 과정과 마무리를 성경을 근거로 이 시대와 조명하여 잘 보여준 아주 귀한 책입니다. 다윗 대통령, 바로 이 시대에 우리가 꿈꾸는 지도자입니다. 모두가 흠모하는 다윗과 같은 뛰어난 대통령을 이 시대와 이 나라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다윗이 당시 이스라엘의 뛰어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에게서 돋보이는 지도자로서 뛰어난 면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겸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다윗의 기록에서 교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초대 왕이던 사울과 대조를 이룹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겸손했고, 왕이 된 뒤에도 교만하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거드름피우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그의 겸손함이 그를 훌륭한 인격자로 세웠고, 존경받는 지도자로 만든 것입니다. 본문 13절, 14절의 말씀에서 그의 겸손이 섬세하게 배어 나오는 것을 한눈에 엿봅니다. 전쟁의 승리 때에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높여도 그는 결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가 탁월한 지도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자기 사람만 옆에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최고의 지도자가 되면 자기 사람을 가까이 두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신세진 사람들에게 자리를 하나씩 두어 보답을 하려는 것이 보통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까 자기 사람으로 주변을 둘러 진쳐 자기 세력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기 사람만 옆에 두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뜻이 맞는 사람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본문에 나오는 다윗 시대의 관료들입니다. 여기 사람들을 다 자세하게 소개할 수 없지만, 이들은 한마디로 다윗의 자기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뜻이 맞거나, 자기에게 평생 충성만 다짐하는 예스맨만을 두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기도 잘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에게도 약점이 있고, 허점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오직 나라의 평화를 위해, 민족의 번영을 위해, 골고루 인재를 등용시킨 것이 다윗 내각의 특징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이 탁월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잘 믿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신앙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잘 믿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자기 인생에 최고의 왕으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다윗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했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맡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셨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신앙이 결국 당대와 후대에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나라가 잘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탁월한 지도자입니다. 지도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리더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고 결과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탁월한 지도자를 위하여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고, 포용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지도자가 되도록, 세워지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 훌륭한 인재입니다. 다윗 시대의 번영은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지만, 그와 함께 나라를 세워 가는 귀한 인재들이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 시대의 각료들을 보십시오. 요압, 여호사밧, 사독, 아히멜렉, 스라야, 브나야 그리고 여기에 나오지 않는 또 다른 사람들 모두가 아주 뛰어난 인재들입니다. 결국 통일왕국의 번영은 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이들은 다윗이 인정한 사람이고, 백성들이 인정한 사람입니다. 인정되고 검증된 사람이 그들의 위치에서 수고할 때 결국 나라의 번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어떤 목사님의 설교테이프를 듣던 중에 우리 나라와 일본을 비교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비슷한 한국과 일본의 사회구조가운데 일본과 우리가 다른 게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어떤 단체나 어떤 조직에 최고와 일등을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회도 일등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피 터지는 싸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도 누군가 최고가 되면 더 이상 그 조직의 싸움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최고를 중심으로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사회는 일등은 일등으로 언제나 존재하고, 최고를 최고로 높이고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일등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별로 싸우지 않는데 일등만 되면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자리에 올라가 있는 꼴을 못 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약점을 잡아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결국 일등이 기를 한번 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깊이 새겨야 할 부분입니다. 일등을 일등으로 인정하여 일할 때 나라는 잘되는 것입니다. 그 길로 가기까지 선의의 경쟁을 하고 그 자리에 서면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습니다. 여기 인재들이 바로 그런 일꾼이요, 그 분야에 최고의 사람들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여기 인재들은 모두가 준비되고 훈련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냥 하늘에서 낙하산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이 그 자리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것은 그만큼 훈련받고 잘 준비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열거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위 ‘아둘람 출신들’입니다. 다윗의 역사와 생애에 잊지 못할 곳이 바로 ‘아둘람’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망명생활을 할 때 당시 사울의 폭정을 피해 다윗에게로 찾아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고, 사회와 공동체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이들과 함께 공동체의 생활을 하면서 먼 장래 이들을 나라의 주역들로 만들기 위한 훈련을 시켰습니다. 강인한 체력, 총검술, 창 쏘기를 비롯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상처받고 거친 이들의 정서를 순화시키기 위해 노래를 가르쳤고, 무엇보다도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그 컴컴한 굴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 장차 통일왕국시대를 준비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이들이 나중에 다윗 시대의 핵심인물이 됩니다. 다윗은 바로 이들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워 승리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처럼 겸손한 인격적이 사람이 되었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훈련과 준비의 과정을 통해 훌륭한 인재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인재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을 무조건 그 자리에 최고로 세운다고 그 기관이나 공동체가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인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듬고 만들어집니다. 얼마큼 훈련받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초점을 맞출 것은 인재를 훈련시키는 일입니다. 인재를 발굴하고, 키우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아니더라도 다음 세대를 위해 인재를 키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나라만이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교회가 이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기성세대와 나라의 어른들도 이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키우고, 인재를 키우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또 많은 것을 투자하면서 공동체의 번영을 꿈꾸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공과 의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가 가장 큰 소원을 품어야 할 비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공과 의입니다. 공의가 실현되는 나라, 부정부패가 없고, 정직하고 거짓이 없는 나라, 바로 이런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요, 이런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나라입니다. 공의가 무너지는 순간, 비전도, 꿈도 소원도 무너집니다. 우리가 이 민족공동체를 위해 끊임없이 소원을 품고 기도하면서 고쳐나가야 할 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강조합니다.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할새...” 바로 여기에서부터 다윗 시대가 출발된 것입니다. 훌륭한 인재도 이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고, 탁월한 지도자도 이것이 밑바탕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의 번영을 이루는 초석이었고, 다윗 왕조의 건국이념입니다. 이런 다윗 시대를 보면서 우리 나라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앞서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리 민족은 많은 강점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아마 가장 큰 약점중의 하나가 바로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습성이 되었고, 관행과 문화가 되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부정부패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사회의 현장에서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사회생활을 해보지 못해 잘 모릅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고민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 지 잘 압니다. 그래도 요즘 많이 나아졌다고 합니다. 옛날처럼 그렇게 했다가는 이젠 큰 코 다치는 시대입니다.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공의가 신앙이고, 정직이 믿음의 잣대임을 새겨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감당해야 합니다. 지금 은 손해처럼 보여도 결국 영원한 이익을 얻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 황우석 교수의 사건은 우리 민족의 최대 약점을 여실히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번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정직하지 못한 것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니고, 노력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정직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우리의 약점이 온 천하에 드러났지만, 그것이 결코 망신이 아닙니다. 세계인들은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을 밝힌 것도 용기이고, 국민이 다시 정직과 공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면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한한 잠재력과 능력이 있기에 다시 일어납니다. 정직하기만 하면, 부패를 없애고 바르게만 하면,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라, 이런 공동체를 꿈꾸어야 합니다. 다윗 시대의 공의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은 공의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가 왕위에 오른 뒤,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법궤를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이라는 결과에 오기까지 앞장에서 주목할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래 동안 법궤를 방치했습니다. 사울 시대는 물론, 그 이전 시대에도 결코 법궤가 중심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행음하는 일, 매매하는 일, 뇌물을 받는 공의롭지 못한 것이 행해졌습니다. 당시 성전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곳은 볼 것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가 왕이 된 뒤에 하나님의 공의가 그 땅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법궤를 한 복판에 모셔오는 일이라 판단하고, 삼만명이라는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법궤를 모셔옵니다. 법궤가 중심에 선 그 순간부터 다윗이 달라졌고, 백성도 달라졌습니다. 공의는 바로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공의는 어떤 구호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 의해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공의의 출발은 바로 하나님의 법궤, 그 법궤가 있는 곳, 그 법궤를 모시고 있는 성전부터, 그러니까 교회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그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천들, 마음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사는 바로 우리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지 않고 사회를 탓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이 하지 않고 남을 비판만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우리부터, 교회부터 시작해야 나라와 민족에 공의가 실현됩니다. 이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부터 정직하겠다고 다짐해 보십시오. 그것이 나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교회에서 사회와 나라로 점점 흘러갈 것입니다. 한해동안 목표로 삼고 실천하시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동방의 등불과 같은 이 민족 위에 찬란한 해가 떠오릅니다. 이 지구상에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하는 극동의 한국을 향한 우리의 꿈과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탁월한 지도자를 위해, 훌륭한 인재를 위해, 그리고 공의가 실현되기를 위해 소원을 품고 기도하면서, 우리 몫을 감당해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공의로운 큰 나라/ 신4:1-8
공의로운 큰 나라 신4:1-8 국가의 평안과 발전은 곧 우리 자신들과 가정에 평안이요 큰 자랑입니다. 나라와 민족은 어느곳 언제라도 우리 자신들의 근본입니다. 세계 각처를 여행하다가 보면 동양인이기에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고 물을때에 “KOREA”라고 하면 아하 하고 금방 알아주는 것이 기쁘기도 합니다. 대개는 여러 개의 부족이나 종족들이 합하여 한 나라를 세우고 있기에 복잡하여 언어도 일이 되지 아니한데 우리는 단일민족에다가 단일언어로 의사소통이 쉽기에 다들 놀라기도 합니다. 이렇게 좋은 한 민족이 6.25 사변의 동족상쟁의 아픔을 겪으면서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되었고 보고싶은 부모형제도 볼 수 없고 가고싶은 고향을 눈앞에고도 볼 수 없는 분단의 고통이 시작된지 50년이 되는 달에 남북정상회담이 있다고 하니 어두움에서 보는 한 줄기의 빛을 보는것과 같고 평양의 곡예단이다 학생예술단이다 하여 선전하고 있으니 금방 통일이라도 된듯하여 내심 못내 반갑고 좋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많이 당해왓던 것을 기억해 봅니다. 회담하는 척 하면서 간첩선, 잠수함 내보내 얼마나 우리를 괴롭게 했습니까? 그러기에 이러한 때에 정신 바짝 차리시고 민족과 나라의 앞일을 바라보며 더욱 기도해야 될 때 입니다. 세계 만방에서 높여 자랑할 만한 “공의로운 큰 나라”를 세우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큰 나라라고 하는 것이 영토가 넓어서도 아니요, 무력이 막강하여서 큰 나라가 아닙니다. 살기가 좋은 나라 즉, 살고싶은 곳이 큰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부름받아 애굽에서 400년이 넘도록 종살이 한 민족을 이끌고 광야 40년의 수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하고 있는 모세의 심정은 자식보다 더 사랑했던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죄를 토하는 듯한 외침과 권면입니다. 지난날에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큰 나라를 세워 줄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탁인줄 알고 큰 나라를 세우는 요건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 있는 나라입니다. (5-6절) 참된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입니다. 지하자원도 별로 없고 기술도 변변치 못하면서도 세계수출에서 10위권으로 급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세계적인 교육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교육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야 함은 올바른 지혜와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초대한국 교회가 80%가 넘는 한국사회를 깨우치려고 한글학교를 했고 정신구조개혁도 했기에 한국근대사에 기독교의 영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에 미치는 기독교의 영향을 묻는다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양심의 소리에 부끄럽지 않은 지식인이 되고 사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혜롭고 지식이 있음을 나타내는 큰 나라를 세워갑시다. 2.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가까이 하는 나라입니다. (7절)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라고 하시니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민족과 나라를 보십시오. 영국이 그러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찾아가 북미에 세계 1등 국가 미국이 되었습니다. 해적들로 이루어 졌으나 기독교의 영향으로 GNP 3만 8천불이 되고 감옥은 있으나 죄수가 없는 지상낙원 덴마크를 이루었습니다. 1950년 6.25사변후 폐허된 땅에 미국 천막 얻어다 교회를 세우고 밤을 지세우며 기도하던 모습, 60년대 새마을 운동가에도 “새벽종이 울렸다” 는 가사대로 기도하던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계인들이 IMF를 일찍 탈출한 우리나라의 저력에 놀랐습니다. 그 어려움에서도 1998년 6월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기도대성회를 주도한 삼락교회가 아니었습니까? 이제도 기도하여 하나님 가까이 하여 살만한 큰 나라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대로 공의가 집행되는 나라입니다. (8절) 율법은 어느 법보다 공의성이 완전합니다. 공의가 집행되어 투명한 사회 그 나라가 살만한 큰 나라입니다. 정의사회 구현이란 간판은 있으나 사회가 어두워 가고 있음은 공의보다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지 않은 관계입니다. 초등학생의 70%정도가 질서지키면 나만 손해본다고 생각하고 어른들도 정직하면 손해본다는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적당하게 속이고 탈법하니 투명한 사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장에 손해보고 조금 바보 취급당해도 우리부터 공의를 이루며 살아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짐승을 잡으면 안된다 하여 헤치지 아니하니 야생 멧돼지가 사람이 있는2-3m앞에서도 풀을 뜯고 있고 사람이 곁에 있어도 도망가지 아니하는 것을 짐바브에서 체험해 보았습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살고싶고 살만한 큰 나라를 세웁시다. 지난주에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 드릴 때 하나님이 계시고 다스리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지듯 이땅에서도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이다 하는 주기도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살아서 참된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 되어 큰 나라 세우시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큰 나라요, 하나님의 말씀따라 공의가 실행되는 나라가 큰 나라라 했으니 6.25가 있는 국가적 수치의 달, 남북정상이 만나는 때에 나라와 민족의 역사가 이루게 기도함으로 공의로운 큰 나라가 되는 일에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와 국가/ 딛3:1-8/ 2001-12-04
교회와 국가 딛3:1-8 그때 저는 군중 틈에 밀려, 함께 나온 후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서울역에 있었던 제 몸은 어느 틈엔가 시청 앞을 지나,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앞의 큰 도로에 다달았습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앞에 나서더니, 그곳에 모인 수많은 군중을 리드했습니다. 우선 모두들 자리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등을 두드렸습니다. ”강훈아, 니가 여긴 왠 일이니?” 정현이였습니다. ”응, 그냥 구경나왔어. 그런데 너 참 오랜만이다.” ”그래, 오랜만이다. 너 누구하고 같이 왔어?” ”응, 그런데 잃어버렸어.” 그래서 정현이는 제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한참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뭔가 무거운 공기가 흘렀습니다. 데모 진압 차량이 점점 모여들더니, 갑자기 데모 군중을 향해 체류탄을 마구 쏘아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체류탄을 데모 군중 깊숙한 곳에 먼저 쏘는 것이었습니다. 정현이는 제 팔을 잡더니, ”강훈아, 빨리 뛰어! 이건 데모 군중을 해산시키자는 게 아니라, 다 잡자는 거야.” 오랜 데모 경력을 갖고 있는 정현이의 말이 옳았습니다. 청바지에 청자킷을 입은 사복조는 몽둥이를 들고 달려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내리치고, 쓰러진 사람은 모조리, ”닭장”이라 불리우는 경찰차로 끌고 갔습니다. 체류탄을 얼마나 쏘아대는지, 체류탄 연기에 가려, 앞을 분간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넘어진 사람, 깔린 사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그 박달나무 방망이에 머리를 얻어맞아 죽지 않으려고, 죽어라고 내뺐습니다. ”강훈아, 내 신발...” 정현이가 외쳤습니다. 하지만 사람과 연기 틈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고, 쫓아오는 사복조를 피해 달아나자면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선 여길 빠져나간 뒤에, 다시 오자.” 큰 길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걸음이 너무 느렸습니다. 그래서 호텔 골목으로 빠졌습니다. 그 골목은 앞이 막혀 있었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길이 나 있었습니다. ”어딜로 가야지?” 망설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거긴 막다른 골목이야. 이쪽으로 와!” 그쪽으로 달려가보니, 그리 높지 않은 담이 있었습니다. 담을 넘으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반대편 골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은, 모두 몽둥이로 얻어맞고, 개처럼 끌려갔습니다. 담을 넘은 우리들은 주택가 골목으로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정현이는 한쪽 신발만 신고 걸을 수가 없어, 아예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습니다. 한참 후에 신발을 찾으러 그때 그 장소로 가보았습니다. 거리 미화원 아저씨가 주인 잃은 신발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한 리어카도 더 되어 보였습니다. ”정현아, 무슨 색깔이니?” ”응, 빨간색.” 나와 정현이는 그 많은 신발을 다 뒤져보았지만, 끝내 잃어버린 빨간색 하이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6월 한달 동안, 저는 거의 매일 데모 군중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 같이 데모 한 번 해보지 않은 학생들도, 교수님들도, 아저씨도, 아줌마도, 거리로 뛰쳐나와, 더 이상 전두환씨가 헌법을 바꿔가면서까지 재집권할 수 없다 외치며 항거했습니다. 결국 6-29선언이 나오고,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많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울 때에도, 많은 교회들은 침묵했습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조찬기도회를 찾아가, 불의한 집권자를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겐, ”대통령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정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크리스천은 이 세상의 어떤 죄인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니까, 전두환씨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왜 교회는 불의에 저항하고 항거해야 할 것은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젊은 저로서는, 그것이 용기 없는 행위로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성서해석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성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믿고,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를 오늘날 현대인의 눈으로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서가 본래 말하려는 취지에서 벗어나기 쉽습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해설 1-2절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1그대는 신도들을 일깨워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를 갖추며, 2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을 베풀며,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온유함으로 대하게 하십시오. 이 본문을 정당하게 취급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꼭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첫째로, 로마는 고대세계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로마가 세계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육로에서는 산적이 들끓었고, 바다에서는 해적이 들끓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이 혼란한 세계에 로마는 도로와 법과 치안과 질서를 가져왔습니다. 바울이 수많은 곳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로마의 태평성대 (Pax Romana)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세계에서 권력자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군단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아 몰살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둘째로,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는 복음전파를 최우선의 과제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제도나 질서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항하거나 대항하기보다는,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난주에 읽은 디도서 2장을 보면, 크리스천 아내한테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그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딛 2:5). 또 종들한테는 ”주인에게 복종하여서 하나님의 교훈을 빛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딛 2:10). 오늘 읽은 3:1-2절의 말씀도 이런 구절들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즉, 권력자들에게 복종하여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어려움을 초래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크레타 사람들에게 특별히 내린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크레타 사람들은 돈을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기고, 탐욕적으로 사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거짓이나 사기나 폭력이나 온갖 나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란스럽고, 싸우기 좋아하고, 권력자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레타 크리스천들에게 좋은 시민이 되라고 권고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는 고대 세계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는 복음 전파를 최우선의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권력자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크레타 크리스천에게 특별히 내려진 명령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은, 고대의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적 (敵)이, 1987년도 6월의 서울과는 달랐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기보다는, 먼저 무질서한 세상 문화와, 헐뜯으려는 교회 밖의 무리들과, 아직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자기 자신과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의 증언을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해서, ”권력자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성서의 본뜻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저항과 대항을 통해서 로마제국을 정복하는 방법보다, 복종과 자기 개혁을 통해서 로마제국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는 로마가 제국의 힘이 너무 강했고, 그 방법이 옳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여건에서 살기 때문에, 좋은 시민이 되는 전략은 필요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나태한 정신 때문에, 자유 세계에서는 복음이 환영을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좋은 시민이 되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시민의 도리를 다섯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로,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병 가운데 하나가 권태입니다. 인간은 왜 지루하다고 느낄까? 한샘이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반면에 하늘이는 게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시간이 되면, 하늘이가 ”아구, 지루해 (I’m boring)”하고 말합니다. 또 하늘이가 게임을 하고 있으면, 한샘이가 ”아구, 지루해 (I’m boring)”하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왜 저마다 지루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권태는 이기심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남을 즐겁게 해 주고, 편안하게 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은 권태를 모릅니다. 둘째로, 말조심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고, 다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방한다는 말은 남을 헐뜯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악마”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남을 헐뜯는 것은 마귀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남 얘기하는 것처럼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LA를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친구 목사님 두 분과 함께 셋이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A 목사님이 B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K 목사 만나면, CPA하는 C권사님에게 돈 갚으라고 그래!” 그러자 A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그 친구, 폐가 나빠져서, 지금 아주 어려워. 권사님 만나면, 잘 좀 말씀드려.”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이보게 B, 그런 일은 당사자끼리 처리하게 하고, 자네는 빠지는 게 좋겠네. 혹시 C 권사님과 친한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건 자네가 개입할 권리는 없지. 목사는 그런 악역을 맡아서는 안 돼.” 그 이후로도 B 목사님이 입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이 더 나왔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틀린 것도 아니고,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듣기에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크리스천은 내가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관용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희랍어로 ”아마쵸”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싸움꾼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공격적이지 (aggressive)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원칙 없이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꼭 수호할 필요가 없는 것을 고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인지 무엇이 양보해야 할 일인지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관용을 베푸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식견을 넓히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넷째로, 친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에는 이 표현이 빠져 있지만, 희랍어 성경과 영어 성경에는 있습니다. 이 말은 희랍어로 ”에피에이케스”입니다. 이것은 법이 명한 것 이상으로 행하려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친절이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넘어설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달라스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휴식 시간에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제가 모르는 낯선 얼굴이 눈에 띄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제게 찾아와 인사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이도 많으시고, 은퇴를 하신, 아주 오랜 선배 목사님이셨습니다. 제가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분이 먼저 와 인사를 하신 것입니다. 다섯째로, 온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유는 희랍어로 ”프라우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마땅히 화를 내야 할 때 화를 낼 줄 알고, 마땅히 참아야 할 때 참을 줄 아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온유란, 바보처럼 항상 헤헤거리는 것도, 무조건 화 안내는 것도 아닙니다. 온유란,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다섯가지가 있어야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서, 복음이 방해를 받지 않고 잘 전해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가지 덕목을 소유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마음 안에서 다스리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3-8a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3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하지 않고, 미혹을 당하고, 온갖 정욕과 향락에 종노릇 하고, 악의와 시기심을 가지고 살고, 남에게 미움을 받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4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인류를 사랑하심이 나타났을 때에, 5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 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6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7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a이 말은 참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과정을 네 단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죄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 살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살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겸손해집니다. 자기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의롭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방하고, 공격하는 것은, 자기가 뭔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 가운데 머무는 것은, 자기 의를 바탕으로 서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았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 위에 서기 때문에,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을 용서하시고, 죄인을 의롭게 봐주시는 은혜의 배후에는 바로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쓰면 쓸수록 더욱 채워지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참된 것을 소망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와지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네 개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받으면,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자기 의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위에 서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면, 성령의 능력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되고,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게 되면, 참된 것을 소망하는 존재가 되어서, 하늘 나라를 온통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이 걸어가야 할 길인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권력자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한 뒤에, 왜 이처럼 길게 크리스천이 걸어야 할 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당시의 현실을 볼 때, 지상의 나라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자기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가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 판단은 그 당시 상황으로선 옳았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 언제나 권력자에게 복종해야 하고, 그 명령에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권력이 부패하고 사회가 불의할 때, 크리스천은 그 부당함에 항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지만, 그러지 말라고 한 적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의 정신이 무엇인지 추론해야 하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흔적을 가지고 예수님의 정신을 재건해야 합니다. 성서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평등을 언급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람 취급받지 못하던 사람들, 세리, 창녀, 문둥병자, 여인, 어린이를 받아들이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낮고 천한 사람, 억눌리고 대접 못 받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더 아름답게 입히고 존귀히 대접하는 것, 이것이 곧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사람을 구조적으로 차별하는 사회는 악한 사회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을 개인적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그분께서 이 세상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수직적 신분질서를 바탕으로 한 평등치 못한 사회 현실 속에서,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한 분파 (sect)였던 그리스도교가, 복음 전파를 제일의 사명으로 내세우고 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에 크리스천 노예더러, 좋은 노예가 되라 그러고, 크리스천 아내더러, 좋은 아내가 되라고 한 것은, 적절한 가르침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바울이 오늘 우리 시대에 다시 온다면, 아마 다르게 말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 같은 분이, 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사사로운 삶 속에서나 거대한 국가 조직 안에서나,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와 국가/ 롬13:1-7/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1982-04-25
교회와 국가 롬13:1-7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교회와 국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나라에 복음을 전하고 계실 때 유대인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님과 로마 정부와 대결되게 하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증거하고 계시는데 원수들이 예수께 나와서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우리들이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로마사람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야말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유대나라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습니다. 로마는 유대민족들에게 무서운 세금을 물리면서 빼앗아 갔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이 이 로마 사람들에게 원한에 사무쳐있었습니다. 이러므로 유대인 애국자들은 로마인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암암리에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판국에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앞에 로마 사람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옳지 않은 일입니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말하면 즉시로 로마 관원에 고발해서 이는 로마 정부를 비방하고 반대하는 운동을 한다고 예수님을 체포해서 사형 당하게 하려고 하는 짓이요 세금을 내라고 하면 이는 유대민족의 배반자다 유대 민족의 메시아로 와서 로마의 주군 노릇을 하니 우리가 따라갈 수 없다. 이렇게 올무에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해도 잡히고 저렇게 해도 잡힐 수밖에 없도록 올무를 놓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에게 동전이 있거든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내놓으니까 예수님께서 그 동전을 보여 주면서 이 화상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가이샤의 화상이라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러면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드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예수님을 올무에 넣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그만 망연자실해서 무엇을 질문할지 모르고 말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국가에 드릴 것은 국가에 드리고 하나님께 드릴 것은 하나님께 드려서 국가와 하나님을 분명하게 분리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삼년 반 동안 복음을 증거할 동안에 그는 군중들을 선동해서 로마정부를 대적하는 그러한 결사를 한 적도 없고 사회에서 밀란을 일으킨 적도 없으며 사람들에게 불평과 불만을 심어준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늘나라의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고 죄인을 용서해주며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며 불안과 절망에 처한 자에게 평안을 주시고 주님은 다가올 하늘나라에 관해서 복음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로마정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조금도 위협적인 인물이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유대인 종교가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예수님을 포박해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주어 사형하려고 했지마는 빌라도는 도무지 예수에게서 조금도 위험성을 발견할 수가 없고 예수를 죽일만한 죄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를 놓아주려고 군중에게 나가서 세 번이나 발버둥을 치고 애를 쓴 사항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러므로 로마 정부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은 하늘나라의 복된 소식을 증거하는 것이고 이 세상 정치나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소요를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우리에게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럼 오늘 이 시간에 저는 국가와 교회간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한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직자의 양심과 국민적인 양심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고자 합니다. 요사이 심심찮게 매스컴을 통해서 성직자의 양심과 국민의 양심에 관한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국가에 반역한 죄를 짓든지 살인죄를 짓고 방화죄를 지은 사람이 성당이나 교회에 뛰어와서 은신처를 구한다면 성직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어떤 성직자는 성직자의 양심에 따라서 국가의 반역죄를 짓든지 살인죄를 짓더라도 교회에서는 이 사람을 감추어 주고 숨기어 줘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이 국가에 반역죄를 짓고 살인죄를 짓고 방화죄를 지었으면 이 사람은 반드시 국가에 범죄한 이상 성직자도 이 사람은 국가의 공평한 심판을 받기 위해서 사직 당국에 내 줘야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토의상황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성직자의 야심과 국가의 국민적인 양심.... 이 두 갈래 길에서 어떻게 해야할 것이냐!!! 저는 이것에 대해서 제 개인의 소신을 여러분에게 말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성직자는 성직자의 양심이 있습니다. 성직자의 양심이란 불의와 죄를 책망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불의와 죄를 보고 난 다음에 그것을 두둔하고 감추어준다면 이것은 성직자로서의 양심에 위배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직자는 죄와 불의 속에 있는 사람을 회개시켜야 될 마땅한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어떠한 범법자가 성당이나 교회에 찾아 온다해도 성직자는 그 사람을 데리고 기도해 주고 말씀을 증거해서 그 양심에 거리끼는 죄를 회개하고 통회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대변해서 그 영혼의 죄와 그 행위의 죄를 용서해 주고 나아가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서 용기를 가지고서 인생을 새 출발하게 만들어 주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범죄자가 진실로 마음속에 참회하고 개과천선해서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 앞에 사랑과 용서를 받고 그리고 자비와 긍휼을 받았으면 그는 반드시 이제는 그 회개의 열매로서 자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됩니다. 그 고백행위야 말로 국가에 죄를 지었으면 국가 사직당국에 나가서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행위로 나타나지 않은 고백은 진실한 고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성직자는 영적인 직분으로서 범죄자에게 죄와 불의를 깨닫게 해서 회개시키고 하나님을 대변해서 사랑과 용서를 베풀어주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서 용기와 격려를 줄 수 있지마는 그 사람이 개과천선했으면 그 회개한 열매로서 그가 나아가서 국법을 어겼으면 국가 사직당국에 살인했으면 살인한 죄, 방화를 했으면 방화한 죄를 국가 앞에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직자는 국민적인 직분도 시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국과 민족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민족에 착취와 지배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들은 한 성직자일뿐 아니라 나아가 한 국민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국경이 없지마는 기독교인이나 성직자는 국가가 있고 민족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성직자가 그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서 자기의 양심법대로 해서 모든 범죄자들을 성당이나 교회에 다 숨겨주고 전부 보호해주면 교회당이라는 곳은 범죄자의 도피성이 될 것이요 교회는 범죄자의 소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모든 살인자, 간음자, 방탕자, 모든 범법자들이 교회에 와서 숨어 있어서 그 아지트로 삼고 교회에서 마음대로 밖으로 나가서 범법행위를 하고 난 다음 뛰어 들어와서 교회를 아지트로 알고 들어온 다면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범법자를 회개시키고 자복시키고 변화된 인간을 만들어서 나아가 국가와 사회에 무리를 일으킨 것을 그 나라와 민족 앞에서 세운 통치권 앞에 정당한 심판을 받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직자와 교회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영적 직분과 함께 국민적인 직분을 가지고 있으며 성직자의 영적인 양심과 함께 국민적인 양심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혼돈해서 교회를 범법자의 도피성과 아지트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외국 민족의 압박아래 있어서 애국하고 민족주의자가 그 이방 민족에게 쫓겨서 교회로 온다면 그는 끝까지 우리 민족으로서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아니고 우리 조국과 민족이 자주독립국가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그 국민 대다수의 유익과 그 국가의 안녕과 복지와 질서를 위해서 성직자라도 국가법을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기고 난 다음에 우리가 성직자로서의 마땅한 행위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목사와 신부는 성직자로서 모든 죄인들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환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이 불법과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도록 해야 하고 그들을 용서하시는 만군의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를 소개하고 그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해주고 나아가서 스스로 걸어나가서 국가와 민족 앞에 지은 죄는 달게 그 벌을 받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교회요 성직자의 국민 된 양심이라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둘째로, 국가 권세와 신자에 관해서 우리는 또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국가에 살고 있으며 한 정부의 통치권 하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두 나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속해 살고 있으면서 지상 나라에 속해 있고 하늘나라 정권에 속해 있으면서 지상나라 정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두 나라에 두 정권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어떠한 태도로서 살아야 할 것인가? 국가 권세와 신자는 어떠한 관계 속에서 살아야 될 것인가? 이 문제를 우리가 분명히 분별하고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까요. 성경에는 그 문제를 조금도 서슴지 않고 밝히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13;1-2절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우주의 대 주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주적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이요 시작과 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그 주권자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며 그 주권자를 보좌에서 내려오게도 하고 나라를 망하게도 하는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악한 자는 악한 때에 적당하게 만들어 놓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악간에 이 세상을 주장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지마는 그러나 최후의 주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할 때에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나를 절대 주권자가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을 때도 있고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권자에게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라를 세우시고 정부를 세우신 것은 주님께서 허락해야 그 국가와 권세자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성경은 말하기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선생이 유대민족이나 이방민족들에게 이 글을 쓸 당시의 사도바울 선생의 정황을 우리가 깨달아 알아야 됩니다. 그 당시는 로마의 가혹한 착취 하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속박과 식민지 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선생은 로마 정부의 국가 권세에 굴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섭리하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하물며 로마 정권 하에 있는 사람들까지라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주 독립국가로서 자기의 조국과 민족이 이것을 다스리는 정권과 권세에 관해서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 신자들에게 명령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가서 우리는 국민으로서 의무를 준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3;7절에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하였으며 또 베드로전서 2;13-14절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를 보낸 방백에게 하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기에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국민으로서 국가에서 부과되는 의무를 착실히 준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교육의 의무를 다 하지 아니한다. 혹은 납세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한다. 병력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한다.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우리는 의무를 다할 필요 없다. 우리는 곧 천당 갈 것이니까 천국의 시민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할 필요 없다.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위험이 우리로 하여금 국민적인 의무,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마땅히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존경할 자는 존경해서 왕을 존경하고 대통령을 존경하고 방백들을 존경하여 세금 낼 것은 세금 내고 관세 낼 것은 내고 이렇게 해서 국가의 법을 준수하고 의무를 다하라는 것을 여기 신자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라고 해서 그 나라에 무리하게 행동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서 또 우리 신자들에게는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무거운 임무를 부과한 것입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다스리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저는 우리 교회에서 반드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대통령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왜? 저는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제가 누구보다 애국자가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요 친 정부인사가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우리 주님께서 나보고 이 땅에 사는 이상 이 나라의 지배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 나라 정부를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므로 저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제가 그렇게 하고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부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무조건하고 다 순복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받치라고 했는데 정부가 정부의 권한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일에 관여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목숨을 걸고 그 일에 대해서 저항하고 순종 안합니다. 만일 우리 대한민국 정부도 정부가 하는 일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일이 따로 있는데 하나님의 일에 간섭해서 이것을 저지하면 저는 목숨을 바치고 그 점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순복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국가 권세에 불복종할 일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4;18-20에 보면 사도들이 그 당시에 국가 권력에 잡혀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지 못하도록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서 정부가 개입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와 예배를 방해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은 단호하게 이 일에 관해서는 타협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 그 당시 정부권력에 대해서는 순복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하나님의 일에 관여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전도를 못하게 할 때 그때는 사생결단하고 우리는 순종 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서 또 정부가 범죄 행위를 강요할 때 순복할 수 없습니다. 일제 36년 동안에 일본의 태양신 아미데라스 오미가미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목숨을 걸고 일어나서 태양신에게 대해서 반대했습니다. 정부가 신사참배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북 공산주의 사회에서 김일성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처럼 섬기라고 할 때 이럴 때는 절대로 반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이외 섬기지 않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정부가 범죄행위에 우리를 가담시키려 할 때는 우리는 목숨을 바치고 그것을 시행하지 않습니다.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야 하는데 정부가 그 권한 속에 있는 것을 행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절대로 복종하고 우리의 의무를 준행하고 정부를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나 정부가 하나님의 것에 관여해서 교회에 대해서 전도나 예배에 대해 방해하고 범죄행위를 우리에게 강요할 때는 교회는 일어나서 순교하고 목숨을 받쳐서라도 절대로 추호도 양보하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면 교회와 사회 참여에 관해서 저는 말씀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종종 교회는 사회에 참여해서 정치적으로 억압된 자 그리고 사회적으로 불평등을 당한 자, 가난한 자, 헐벗은 자, 굶주린 자를 위해서 사회개혁과 혁명에 폭력을 행해서라도 일선에 나서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교회가 할 사명일까요? 이것이 사회, 정치단체가 할 일이 아니고 성직자와 교회가 그 거룩한 성직의 직분을 뛰어넘어서 사회 일선에 혁명적인 그러한 정치운동에 참여해야 될까요?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은 복음 증거의 명령인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이 세상이 유토피아가 된다고 증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점점 전쟁과 전쟁 소문이 나며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나고 악이 성해져서 사랑이 식어지고 종국에 가서는 이 세상이 멸망할 세상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과 이 나라에 우리는 소망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고 있는 나라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와서 세우실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소속한 나라에 우리는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점점 살기 좋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위배되고 거짓된 소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세우실 천년 왕국 때야 이 세상에 지상평화와 낙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때까지 우리가 해야할 일은 교회는 영혼구원에 주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큰 자나 작은 자할 것 없이 모두다 회개하고 주를 믿도록 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고 우리는 사람들과 하나님과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게 하는데 전심전력을 해야 되면 나아가서 우리는 구제 사업에 전심을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0-21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 화목케하는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하고 그리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서 우리는 구제활동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구원과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증거하시고 나아가서 주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먹여 주시는 영적인 구제사업을 하셨고 정치,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순복음중앙교회도 우리는 개인 영혼의 구원에 적극적으로 나아가며 하나님과 세상 사람과 화목을 이루는 이 복음의 역사를 계속하고 그리고 일어나서 구제활동에 전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다방면에 구제활동을 해왔지마는 앞으로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데로 적극적으로 국가와 민족에 기여할 수 있는 거대한 구제활동에 참여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발표하거니와 우리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데로 우리 한국에서 처음 있는 성인병 환자를 치료하는 가장 좋은 병원을 설립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드셔서 성인이 되면은 대게 고혈압, 심장병, 당뇨병 같이 치료할 수 없는 성인병에 걸려서 고생하는 분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적극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성인병을 전문으로 하는 가장 초현대식 최고의 좋은 병원을 시설하기로 우리 당회에서 결정을 내리고 이미 우리는 준비 단계에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구제활동에 참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이 말하는 해방신학은 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18-19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나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을 선언하시고 난 다음 친히 이 복음 선언을 시행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가난한 자에게 주님께서 가난과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속 할 것을 약속하셨고 주님은 가는 곳마다 죄와 마귀에 눌린 자를 놓아 주셨고 죄의 눈이 어두운 자는 영의 눈을 띄워주셨고 육신의 눈도 기적으로 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눌린 자, 병에 눌려서 고생하는 사람을 놓아주셨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한 복음 선언은 영적인 사역을 말하는데 오늘날 이것을 육신적으로 해석해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막스 레닌주의적으로 혁명을 일으켜야 된다. 또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개혁과 혁명을 해야 된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육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해방신학이니, 정치신학이니, 혁명신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가 할 직분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할 직분은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사람에게 하나님과 화평을 가져오게 하며 구제를 하는 영적인 직분이 교회에 주워진 것이요 교회가 세상 모든 직분을 도맡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인의 인경에 심어줌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인격이 변화되고 그리고 이 변화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면 변화된 사람이 변화된 가정을 가져오고 변화된 가정이 변화된 사회를 가져오고 이 변화된 사회인들이 모여 가지고서 진실로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자유가 넘치고 정의가 충만하여 평등한 사회가 되도록 나아가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인격을 양성하는 자리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교회는 여당도 참석할 수 있고 야당도 참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무식한 자도 참석할 수 있고 유식한 자도 참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 가계 각층의 인사가 참여하여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을 얻고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변화된 인격이 되어서 나아가 이 사람들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다방면에 참여할 때 변화된 그 사상을 가지고서 그들이 참 자유와 정의와 평등과 복지가 넘치는 아름답고 축복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근원적인 사명에 충실해야 되고 일선에 나가서 정치와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이와 같은 일에 뛰어 들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 가는 길을 자멸로 이끌어가고 말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멸망의 세상 가운데 교회를 둔 것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죽음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불러내어 다가올 천국에 참여시키는 것이 우리 교회가 세상의 사명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불난 집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면 덜 태우게 할까 그것이 아니라 지금 불이 나서 활활 타고 있는 속수무책인 집에 있는 사람들을 빨리 끌어내어 구출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이옵니다. 아버지, 우리는 이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을 압니다. 역사가 불타고 있습니다. 온 지구가 멸망으로 향하여 굴러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필요한 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 한사람이라도 신속히 예수의 복음으로 구출하는 것이 우리의 중대 의무이옵나이다. 복음으로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과 화목케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구제를 하고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것이 교회의 본 사명인즉 아버지여, 교회는 이 사명을 저버리고 세상의 쟁투 속에 들어가서 교회의 본연의 사명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원하옵나이다. 아멘.
교회와 국가의 사랑과 미움/ 출1:8-10
교회와 국가의 사랑과 미움/ 출1:8-10 2008-03-25 16:16:56 read : 64 지난 10월 서울노회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주제는 ‘교회와 국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현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점검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사회적 경향인 정부(government)의 통치가 아니라 가브넌스(governance) 즉 협치의 시대로 변하고 있는 것을 착안하여 비정부기구(NGO)에 대한 논의도 있었습니다. 비정부기구는 국민의 단합과 국민의 여론을 이끌어내는데 정부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이 가브넌스의 부상 요인이기도 합니다. 국가와 교회는 상호 보족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유기적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는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포괄적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국가는 교회의 도움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국가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교회가 설립하였거나, 교인이 설립한 NGO가 국가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국가와 교회의 존재이유와 지향하는 가치는 각각 다릅니다. 국가는 개인의 신앙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입니다. 교회는 국가의 정치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고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국가와 교회는 배타적일 수 없는 도의적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와 교회가 함께 건전하게 발전하는 중요한 초석이 됩니다. 국가는 권력을 이용하여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 되며, 교회는 국가를 교권 치하에 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와 교회 그 어느 쪽도 지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모두 발전하고 평화가 유지됩니다.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의 종탑 조각에는 천당문이 있고 28명의 유대 왕이 있습니다. 옆에는 노틀담의 곱추와 노동자의 임금 주지 않고 잘난 척 하는 신부는 기둥을 받치고 힘겹게 서 있는 조각이 있습니다. 이 조각들에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왕은 상호 존중의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선한 양심의 높은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의 주제는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제자 중 첫 순교를 합니다. 이를 기화로 베드로가 투옥이 되었지만 기적으로 풀려납니다. 헤롯은 그리스도인에게 보복합니다. 시돈과 두로 지방에 식량 공급을 중단한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헤롯과 화해하기를 원합니다. 시돈과 두로에서 온 사절단이 평화 조약의 체결을 발표하는 날은 축제일이었습니다. 이 날을 기해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이 헤롯을 방문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은으로 만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창문을 통해 햇빛이 빛나자 아첨꾼은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라고 합니다. 헤롯은 자신이 거절해야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무리에게 옷을 찢으며 만류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주의 사자가 곧 치니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5일 후에 죽게 됐는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교회를 핍박하던 헤롯은 죽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합니다. 첫째, 정상적인 관계에서 교회와 국가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교회와 국가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초대 신정주의에서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공동체인 광야는 교회입니다. 광야 공동체는 거대한 민족국가입니다. 60만 명이 함께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생활한 공동체입니다. 남자만 60만 명이란 전체가 300만 명가량 된다는 말입니다. 제법 큰 국가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사도행전 7:38에는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라고 합니다. 광야를 교회라고 합니다. 광야는 모세의 지도력으로 해방을 맞은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이며 동시에 교회의 원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가와 교회는 하나입니다. 신앙은 곧 애국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교회도 애국적 기관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국가의 협력 기관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국가의 영적 지도 기관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왕은 다같이 기름부음 받은 직분입니다. 선지자는 왕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지자였던 사무엘은 왕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왕을 지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단과 같은 선지자는 왕을 질책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왕을 위해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왕과 선지자는 사랑과 조화의 관계였습니다. 실제로 교회만큼 국가를 사랑하는 기관이 없습니다. 누가 국가를 위해서 이렇게 염려하고 기도합니까? 국가를 위한 쓴 소리도 국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민족과 국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국가 없이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가 없이 국가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국기를 게양하는 일은 그래서 좋은 일입니다. 마태복음 6:33에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의 조화를 가르치십니다. 종교와 현실의 조화를 가르치십니다. 교회와 국가의 조화를 가르치십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봐도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불교는 화랑도가 정신적 주초를 낳았습니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할 당시에는 청교도의 신앙이 뒷받침하였습니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갈등이나 모순이나 대치 관계가 아니라 조화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서로가 함께 발전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교회와 국가가 사랑과 조화의 관계를 유지할 때 국가가 발전하고 교회가 성장한 것을 근대 유럽의 국가들을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여왕은 좋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기도하며 국정을 잘 살피는 국왕이었습니다. 여왕이 좋은 기도의 사람인 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여왕의 신하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답니다. “여와 폐하께서는 하루에 몇 번이나 기도하십니까?” 그런데 여왕은 “나는 한번만 기도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알았던 신하는 실망이 되었습니다. 잠시 후 여왕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면 기도를 시작합니다. 나의 그 기도는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왕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신하들을 다 자리에서 내어 보내고 남편인 알버트공과 둘이서 손을 잡고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찬송하면서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유니언잭’은 영국 국기를 뜻합니다. 영국 국기가 세계를 제패하여 ‘유니언잭은 해질 날이 없다’고 한 때는 바로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지명 등에 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국가, 주, 산, 호수, 길 등 가장 많은 이름을 딴 이름이 빅토리아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집이나 패션도 빅토리아풍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빅토리아만큼 많은 영향을 준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국가와 교회가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국가도 교회도 강성한 것입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워싱턴이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도 좋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링컨 곁에는 헨리 비처 목사님이 있어서 링컨의 정치를 신앙적으로 도왔습니다. 링컨대통령과과 비처목사님도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와 국가는 조화를 이루어야 서로가 다 잘 됩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둘째,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교회와 국가는 미움의 관계입니다. 비정상적인 시대,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교회와 국가는 미움과 갈등의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줍니다. 구약의 왕들은 솔로몬 후 나라가 분열하여 왕들도 남과 북이 분열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에는 19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왕 중에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 유다는 20왕 중에 8왕이 선한 왕입니다. 성경의 기록, 특히 역대기의 기록에 보면 두 종류의 왕이 있습니다. 39왕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지만 성경은 간략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선한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악한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합니다. 왕들의 사적들이 많이 있지만 마지막 평가는 아주 간단합니다. 정직과 악입니다. 정직한 왕은 호교의 왕입니다. 종교를 잘 지키려고 애쓴 왕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선지자를 존경한 왕입니다. 악한 왕은 종교를 말살하려고 한 왕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왕입니다. 선지자를 박해한 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나 개인이 똑같이 이렇게 분류될 것입니다. 정직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자와 하나님을 미워한 자입니다. 교회를 섬긴 자와 교회를 미워한 자입니다. 우리나라의 정권을 빗댄 얘기가 많습니다. 김치를 가지고 빗댄 얘기도 있고, 소를 가지고 빗댄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솥을 가지고 빗댄 얘기는 이렇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솥을 샀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은 밥을 지어 나누어주었습니다. 전두환대통령은 밥을 지어 자기가 먹었습니다. 노태우대통령은 밥을 지어 누룽지까지 긁어 먹었습니다. 김영삼대통령은 솥을 팔아먹었습니다. 김대중대통령은 빚을 지고 솥을 다시 사왔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은 100볼트짜리 전기밥솥에 200볼트를 꽂아 완전히 고장을 냈습니다. 얘기도 잘 만들어내지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밥솥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의 정권이 과연 하나님과의 정상적 관계를 가진 정권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권이 교회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정권이 교회와 미움의 관계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 하나님께 정직히 행한 대통령인가 아니면 악을 행한 대통령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훗날 판단할 것이지만 참 두려운 일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요 과학 없는 종교는 맹목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과학뿐만 아니라 정치, 산업, 교육등 모든 분야의 공통의 원리입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없는 국가는 불구요, 국가 없는 교회는 맹목입니다. 교회와 국가는 잘못하면 불구가 되고 맹목이 되기 쉽습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3가지라고 봅니다. 첫째는 정권이 교회를 탄압한 형태입니다. 히틀러나 일본의 군국주의나 공산정권이나 현대의 독재 정권들 가운데 이런 정권이 있습니다. 이런 때는 교회가 내적으로 정화되고 성장하지만 정권은 멸망했습니다. 둘째는 종교가 정권을 지배한 형태입니다. 중세는 교권이 왕권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셋째는 교회와 국가가 협조와 조화를 이룬 형태입니다. 이런 때에 종교는 신성하고 국가는 번영하였습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와 같은 정권을 보세요. 교회를 탄압하고 말살하였습니다. 이런 정권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2:1-4에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비웃으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비웃음꺼리에 불과합니다. 국가가 교회를 대적하는 일,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일, 이 모두가 하나님의 비웃으심의 대상입니다. 이 모두가 비정상입니다. 사무엘상 13장에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전쟁에 나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선지자 사무엘이 더디 옵니다. 사울은 기다리다 못해 자신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을 왕이 대신 한 것입니다. 뒤에 그 곳에 온 사무엘은 사울왕을 책망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왕이 제사장의 일을 얏보고 대신 할 때에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국가가 교회를 얏보고 한 결과가 어떤지 아십니까? 그 나라가 길지 못할 것입니다. 갈등의 70%는 인식에 근거(perception-based)하고, 30%는 사실에 근거(fact-based)한다고 합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슬러 올라가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보세요. 네로의 기독교 박해는 인식에 근거한 박해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려고 거짓으로 꾸몄습니다. 로마시를 불 지르고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벌써 다 밝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현재 우리나라에도 굉장히 많은 반기독교 세력이 있습니다. 소위 안티 기독교 세력들의 이론을 보세요. 사실에 근거하는 것보다 인식에 근거한 것이 더 많습니다. 국가는 교회에 대하여 언제나 사실을 보고 판단하여야 합니다. 서해안 태안반도 인근의 원유 유출사고는 국가적 재앙이며 특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지난주에 ‘서해안 살리기 한국교회 봉사단’을 결성하여 내일 기독교 지도자들이 함께 태안으로 갑니다. 저도 이 일에 총무를 맡아 함께 갑니다.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교회가 총력을 기울여 가서 몸으로 봉사하려고 합니다. 현재 보고로는 하루에 만 명이 일년은 일해야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겨우 회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 봉사단은 하루에 5천 명씩 일년을 섬기자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 외에 누가 이렇게 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다 한 두 번씩을 다 가서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세말과 20세기 초의 세계 4대 정치가는 영국의 빅토리아여왕, 독일의 비스마르크, 청나라의 이홍장, 그리고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라고 합니다. 동방의 비스마르크라고 불리던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을 방문하였습니다. 기세등등한 독일군의 사열을 받게 되었을 때에 비스마르크가 이토에게 “우리 군대는 하나님 외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에게 지기 싫어서 “일본 군대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측은한 듯이 이토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자랑인줄 압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군대가 진정 강한 군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개인이 그러하고, 군대가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합니다. 결론 왕이나 대통령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나라가 강하고 오래 동안 지속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외면하며 약하고 망합니다. 이제 대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내년에는 총선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상대의 흠집을 캐내어 반사이익이나 볼까 하는 이런 어리석은 꾀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정책 대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흔히 말하면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삼연에 따라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잘 조화할 수 있는 사람이 국가를 경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빅토리아와 같은, 링컨과 같은 국민에게 존경받고 국가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지도자가 꼭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것은 절대로 빠지지 말고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라도 좋은 정책 대결이 되어 대선이나 총선이 국가적 잔치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옛날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유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한국의 평화’(Pax Koreana)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를 유지할 때에 이 땅에 평화가 오고 잘 될 것입니다. 대선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한국의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국가와 교회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좋은 관계를 이루어 국가와 교회가 함께 평화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와 교회가 사랑의 관계로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여 나라가 강성하고 교회가 번영하여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는 이런 좋은 나라, 좋은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와 국가의 사랑과 미움/ 출1:8-10/ 2008-03-25
교회와 국가의 사랑과 미움 출1:8-10 지난 10월 서울노회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주제는 ‘교회와 국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현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점검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사회적 경향인 정부(government)의 통치가 아니라 가브넌스(governance) 즉 협치의 시대로 변하고 있는 것을 착안하여 비정부기구(NGO)에 대한 논의도 있었습니다. 비정부기구는 국민의 단합과 국민의 여론을 이끌어내는데 정부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이 가브넌스의 부상 요인이기도 합니다. 국가와 교회는 상호 보족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유기적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는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포괄적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국가는 교회의 도움이 되어야 하며, 교회는 국가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합니다. 교회가 설립하였거나, 교인이 설립한 NGO가 국가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국가와 교회의 존재이유와 지향하는 가치는 각각 다릅니다. 국가는 개인의 신앙에 대하여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입니다. 교회는 국가의 정치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고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국가와 교회는 배타적일 수 없는 도의적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와 교회가 함께 건전하게 발전하는 중요한 초석이 됩니다. 국가는 권력을 이용하여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 되며, 교회는 국가를 교권 치하에 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와 교회 그 어느 쪽도 지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국가와 교회는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모두 발전하고 평화가 유지됩니다.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의 종탑 조각에는 천당문이 있고 28명의 유대 왕이 있습니다. 옆에는 노틀담의 곱추와 노동자의 임금 주지 않고 잘난 척 하는 신부는 기둥을 받치고 힘겹게 서 있는 조각이 있습니다. 이 조각들에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의 왕은 상호 존중의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선한 양심의 높은 도덕적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의 주제는 ‘헤롯의 교회 핍박과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제자 중 첫 순교를 합니다. 이를 기화로 베드로가 투옥이 되었지만 기적으로 풀려납니다. 헤롯은 그리스도인에게 보복합니다. 시돈과 두로 지방에 식량 공급을 중단한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헤롯과 화해하기를 원합니다. 시돈과 두로에서 온 사절단이 평화 조약의 체결을 발표하는 날은 축제일이었습니다. 이 날을 기해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이 헤롯을 방문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은으로 만든 빛나는 옷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창문을 통해 햇빛이 빛나자 아첨꾼은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라고 합니다. 헤롯은 자신이 거절해야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무리에게 옷을 찢으며 만류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주의 사자가 곧 치니 헤롯이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5일 후에 죽게 됐는데 몸이 썩어 벌레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교회를 핍박하던 헤롯은 죽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고 합니다. 첫째, 정상적인 관계에서 교회와 국가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교회와 국가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초대 신정주의에서는 교회와 국가는 하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공동체인 광야는 교회입니다. 광야 공동체는 거대한 민족국가입니다. 60만 명이 함께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생활한 공동체입니다. 남자만 60만 명이란 전체가 300만 명가량 된다는 말입니다. 제법 큰 국가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사도행전 7:38에는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라고 합니다. 광야를 교회라고 합니다. 광야는 모세의 지도력으로 해방을 맞은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이며 동시에 교회의 원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가와 교회는 하나입니다. 신앙은 곧 애국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교회도 애국적 기관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국가의 협력 기관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국가의 영적 지도 기관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와 왕은 다같이 기름부음 받은 직분입니다. 선지자는 왕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지자였던 사무엘은 왕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왕을 지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단과 같은 선지자는 왕을 질책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왕을 위해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왕과 선지자는 사랑과 조화의 관계였습니다. 실제로 교회만큼 국가를 사랑하는 기관이 없습니다. 누가 국가를 위해서 이렇게 염려하고 기도합니까? 국가를 위한 쓴 소리도 국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민족과 국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국가 없이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가 없이 국가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국기를 게양하는 일은 그래서 좋은 일입니다. 마태복음 6:33에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의 조화를 가르치십니다. 종교와 현실의 조화를 가르치십니다. 교회와 국가의 조화를 가르치십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봐도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불교는 화랑도가 정신적 주초를 낳았습니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할 당시에는 청교도의 신앙이 뒷받침하였습니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갈등이나 모순이나 대치 관계가 아니라 조화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서로가 함께 발전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교회와 국가가 사랑과 조화의 관계를 유지할 때 국가가 발전하고 교회가 성장한 것을 근대 유럽의 국가들을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여왕은 좋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기도하며 국정을 잘 살피는 국왕이었습니다. 여왕이 좋은 기도의 사람인 것이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여왕의 신하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답니다. “여와 폐하께서는 하루에 몇 번이나 기도하십니까?” 그런데 여왕은 “나는 한번만 기도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알았던 신하는 실망이 되었습니다. 잠시 후 여왕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면 기도를 시작합니다. 나의 그 기도는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왕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신하들을 다 자리에서 내어 보내고 남편인 알버트공과 둘이서 손을 잡고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찬송하면서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유니언잭’은 영국 국기를 뜻합니다. 영국 국기가 세계를 제패하여 ‘유니언잭은 해질 날이 없다’고 한 때는 바로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지명 등에 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국가, 주, 산, 호수, 길 등 가장 많은 이름을 딴 이름이 빅토리아일 것입니다. 그 외에도 집이나 패션도 빅토리아풍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빅토리아만큼 많은 영향을 준 인물도 없을 것입니다. 국가와 교회가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국가도 교회도 강성한 것입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워싱턴이나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도 좋은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링컨 곁에는 헨리 비처 목사님이 있어서 링컨의 정치를 신앙적으로 도왔습니다. 링컨대통령과과 비처목사님도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와 국가는 조화를 이루어야 서로가 다 잘 됩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둘째,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교회와 국가는 미움의 관계입니다. 비정상적인 시대,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교회와 국가는 미움과 갈등의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고통을 줍니다. 구약의 왕들은 솔로몬 후 나라가 분열하여 왕들도 남과 북이 분열하였습니다. 북 이스라엘에는 19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왕 중에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 유다는 20왕 중에 8왕이 선한 왕입니다. 성경의 기록, 특히 역대기의 기록에 보면 두 종류의 왕이 있습니다. 39왕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지만 성경은 간략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선한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악한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합니다. 왕들의 사적들이 많이 있지만 마지막 평가는 아주 간단합니다. 정직과 악입니다. 정직한 왕은 호교의 왕입니다. 종교를 잘 지키려고 애쓴 왕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선지자를 존경한 왕입니다. 악한 왕은 종교를 말살하려고 한 왕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왕입니다. 선지자를 박해한 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나 개인이 똑같이 이렇게 분류될 것입니다. 정직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자와 하나님을 미워한 자입니다. 교회를 섬긴 자와 교회를 미워한 자입니다. 우리나라의 정권을 빗댄 얘기가 많습니다. 김치를 가지고 빗댄 얘기도 있고, 소를 가지고 빗댄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솥을 가지고 빗댄 얘기는 이렇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솥을 샀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은 밥을 지어 나누어주었습니다. 전두환대통령은 밥을 지어 자기가 먹었습니다. 노태우대통령은 밥을 지어 누룽지까지 긁어 먹었습니다. 김영삼대통령은 솥을 팔아먹었습니다. 김대중대통령은 빚을 지고 솥을 다시 사왔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은 100볼트짜리 전기밥솥에 200볼트를 꽂아 완전히 고장을 냈습니다. 얘기도 잘 만들어내지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밥솥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의 정권이 과연 하나님과의 정상적 관계를 가진 정권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권이 교회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정권이 교회와 미움의 관계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 하나님께 정직히 행한 대통령인가 아니면 악을 행한 대통령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훗날 판단할 것이지만 참 두려운 일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불구요 과학 없는 종교는 맹목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과학뿐만 아니라 정치, 산업, 교육등 모든 분야의 공통의 원리입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없는 국가는 불구요, 국가 없는 교회는 맹목입니다. 교회와 국가는 잘못하면 불구가 되고 맹목이 되기 쉽습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3가지라고 봅니다. 첫째는 정권이 교회를 탄압한 형태입니다. 히틀러나 일본의 군국주의나 공산정권이나 현대의 독재 정권들 가운데 이런 정권이 있습니다. 이런 때는 교회가 내적으로 정화되고 성장하지만 정권은 멸망했습니다. 둘째는 종교가 정권을 지배한 형태입니다. 중세는 교권이 왕권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셋째는 교회와 국가가 협조와 조화를 이룬 형태입니다. 이런 때에 종교는 신성하고 국가는 번영하였습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와 같은 정권을 보세요. 교회를 탄압하고 말살하였습니다. 이런 정권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2:1-4에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을 대적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비웃으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비웃음꺼리에 불과합니다. 국가가 교회를 대적하는 일,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는 일, 이 모두가 하나님의 비웃으심의 대상입니다. 이 모두가 비정상입니다. 사무엘상 13장에는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전쟁에 나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선지자 사무엘이 더디 옵니다. 사울은 기다리다 못해 자신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선지자가 해야 할 일을 왕이 대신 한 것입니다. 뒤에 그 곳에 온 사무엘은 사울왕을 책망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왕이 제사장의 일을 얏보고 대신 할 때에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국가가 교회를 얏보고 한 결과가 어떤지 아십니까? 그 나라가 길지 못할 것입니다. 갈등의 70%는 인식에 근거(perception-based)하고, 30%는 사실에 근거(fact-based)한다고 합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슬러 올라가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보세요. 네로의 기독교 박해는 인식에 근거한 박해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려고 거짓으로 꾸몄습니다. 로마시를 불 지르고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벌써 다 밝혀 알고 있지 않습니까? 현재 우리나라에도 굉장히 많은 반기독교 세력이 있습니다. 소위 안티 기독교 세력들의 이론을 보세요. 사실에 근거하는 것보다 인식에 근거한 것이 더 많습니다. 국가는 교회에 대하여 언제나 사실을 보고 판단하여야 합니다. 서해안 태안반도 인근의 원유 유출사고는 국가적 재앙이며 특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지난주에 ‘서해안 살리기 한국교회 봉사단’을 결성하여 내일 기독교 지도자들이 함께 태안으로 갑니다. 저도 이 일에 총무를 맡아 함께 갑니다.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교회가 총력을 기울여 가서 몸으로 봉사하려고 합니다. 현재 보고로는 하루에 만 명이 일년은 일해야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겨우 회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 봉사단은 하루에 5천 명씩 일년을 섬기자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 외에 누가 이렇게 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다 한 두 번씩을 다 가서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세말과 20세기 초의 세계 4대 정치가는 영국의 빅토리아여왕, 독일의 비스마르크, 청나라의 이홍장, 그리고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라고 합니다. 동방의 비스마르크라고 불리던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을 방문하였습니다. 기세등등한 독일군의 사열을 받게 되었을 때에 비스마르크가 이토에게 “우리 군대는 하나님 외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에게 지기 싫어서 “일본 군대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측은한 듯이 이토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자랑인줄 압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군대가 진정 강한 군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개인이 그러하고, 군대가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합니다. 결론 왕이나 대통령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나라가 강하고 오래 동안 지속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외면하며 약하고 망합니다. 이제 대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내년에는 총선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상대의 흠집을 캐내어 반사이익이나 볼까 하는 이런 어리석은 꾀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정책 대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흔히 말하면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삼연에 따라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잘 조화할 수 있는 사람이 국가를 경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빅토리아와 같은, 링컨과 같은 국민에게 존경받고 국가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지도자가 꼭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것은 절대로 빠지지 말고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라도 좋은 정책 대결이 되어 대선이나 총선이 국가적 잔치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옛날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유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한국의 평화’(Pax Koreana)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를 유지할 때에 이 땅에 평화가 오고 잘 될 것입니다. 대선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한국의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국가와 교회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좋은 관계를 이루어 국가와 교회가 함께 평화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와 교회가 사랑의 관계로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여 나라가 강성하고 교회가 번영하여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는 이런 좋은 나라, 좋은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가 흥망의 원리/겔36:24-31
국가 흥망의 원리/겔36:24-31 2001-09-05 22:12:37 read : 127 1. 한 나라가 세워지려면 3가지 기본요소가 주어져야 합니다. ①①국토(國土), ②국민(國民),③ 주권(主權)입니다. 그런데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나라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땅만 있어도 안되고, 사람만 있어도 안되고, 주권도 있어야 합니다.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도 없으면 안되지만, 주권이 없으면 나라는 망(亡)합니다. 그런데 그 \'주권(主權)\'이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국토(國土)도 가시(可視)적이고, 국민(國民)도 가시(可視)적인 것이지만, 주권 은 불가시(不可視)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권이 없으면 그것은 살았으나 죽은 삶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주권\'은 곧 그 나라의 힘(力)입니다. 나라가 강하고 약한 것은 바로 그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주권이 강하면 강대국이 되고, 주권이 약하면 그 나라는 힘이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과거 뼈저리게 느꼈던 것은 금수강산 땅 덩어리도 있었고, 백의민족이란 사람도 그대로 있었으나,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기에 일본의 식민지생활을 하였던 것이 우리의 과거사(過去史)입니다.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주권이 강해야 세계 앞에서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주권(主權)은 어디에서 생겨나옵니까? 그것은 그 나라의 국민의 정신(精神)에서 나옵니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정신 상태가 <올바르고> <정의롭고> <애국의 정신>으로 뭉쳐있으면 주권은 강해집니다. 반면에 국민의 정신이 정의롭지 못하고, 구심점이 없고 오로지 개인주의적인 향락주의로 빠지면, 나라는 불을 보듯 뻔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로마가 망한 것은 군대와 법이 없어 망한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의 정신 상태가 부패해져서 망했습니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목욕탕 문화가 로마를 망하게 하였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국민정신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주권국으로서의 강(强),약(弱)을 평가하게 됩니다. 그렇게 볼 때,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국민 정신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더욱이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 그 안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신이 어떠한가에 따라 승패가 달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서 속에서 잘 나타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희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알처럼 번성하 여 큰 나라를 이루게 하리니, 저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였습니 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저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출하여 약속했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저들에게 땅을 주었습니다. 즉 영토를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땅으로 들어가 살도록 백성들이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뜻이 실현되도록 저들에게 10계명을 주었습니다. 즉 법을 제정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영토와, 백성과, 법을 주어서 나라를 이룩하려고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법은 그들의 주권을 강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준행 할 때는 주권이 강했고, 율법을 준행치 않고 율법을 떠날 때는 저들은 다른 나라들에게 침략을 받았거나 재난이나 병으로 죽음과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된 역사이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서를 읽어보면, 반복되는 말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정로(正路)로 행하였더라\"는 말과, 그 반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망령된 길로 행하여 우상을 섬겼더라\"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왕과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정로로 행할 때는 나라가 흥했고, 그 반대일 경우에는 쇠하기도 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수없이 반복된 반역의 길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은 저들과의 언약에서 변함이 없이, 때린 후에는 다시 싸매주었고, 저들이 다시 고통 중에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회복하여 주곤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의 교훈이었습니다. 2. 오늘 본문도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회복의 예언입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 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아 야 하겠습니다. <새 마음을 주겠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즉 <새 마음>(New Heart)이란 <새 영>(New Spirit)을 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 니다. 여기서 새 영이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Spirit)을 의미합니다. 죄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남을 의미합니다. 그 영이 들어가야 마음이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의 영이 들어가지 않고는 아무리 새 사람이 되려고 해도 새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과거에 경험해 보았습니다. 혁명을 일으켜 국민의 정신을 개혁해 보려고, <의식 개혁>이니, <정신 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면서 <국민 재건 운동>을 일으켜 보았고, 총칼로 <순화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신 혁명>, <의식 개혁>, <새 마을 운동> 등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보려고 많 이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무슨 <운동>(Movement)으로 새 사람 되게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 마음이 되려면 새 영이 들어와야 함을 절실하게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모두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의 영이 저들 에게 임하였을 때 담대해졌습니다. 새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주의 영이 함께 할 때 새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겁이 없어졌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아니했습니다. 용감해졌습니다. 관헌의 말 보다 주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주권은 땅이 크고 백성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백성들 마음 속에 새로운 영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새 영을 누구에게 채워주겠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채워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너희 속에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채워 주겠다\"고 하였습니 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의 마음 속에 굳은 마음들을 제하여버리는 성령운동이 하나님께로부터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 속에 굳은 마음을 제하여버리겠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굳어진 어떤 이념(理念)과 사상(思想)의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 운 마음>으로 채워주겠다는 뜻입니다. 오늘에 일어나는 한반도의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 판도를 보면서 하나님은 과연 살아계셔서 역사를 섭리해 감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제 금년 6월이면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지 꼭 50년이 됩니다. 그 동안 우리 나라의 형편을 되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한 핏줄의 민족이 이렇게 <사상>(思想)으로 갈라져 그렇게 지독하게 싸운 것도 다 정상적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사상이 무엇이기에 부모를 죽이고, 처자식을 버리고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적개심에 불타올랐는지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의 우리 형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된 크리스천들도 함께 편승하여 굳은 마음으로 살 아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미워했고, 서로를 불신했고, 서로를 편을 들어 갈라졌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도 흥왕하게 됩니다. 아직도 믿는 성도들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으로 채워지지 못한다면 여전히 죄의 지배하에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새 영을 받는 일입니다. 3. 나라가 번영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더러움> 과 <우상 숭배>입니다. 이것을 먼저 버려야 새 영이 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더러움이란 <육체적 향락>이요, 우상이란 <물질 숭배>의 사상 입니다. 우리 사회에 향락의 풍조와, 그리고 돈이면 다 해결된다는 그런 생각, 그것이 더렵혀진 마음이요 그것이 오늘의 우상들입니다. 이것에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맑은 물로 씻겨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재벌들에게 가해지는 일련의 개혁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 의 씻어내는 작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역사(歷史)섭리(攝理)는 인간의 생각 위에서 이루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편 127편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 호와께서 성(城)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부강하려면 먼저 위에서 내리는 새로운 영음(靈音)을 듣고 돌같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는 백성들이 될 때 땅에 소산을 풍성히 먹을 수 있습니다. 구 소련과 공산권의 모든 나라들! 특별히 북한을 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영음을 거역한 결과가 어떻게 나 타났습니까? 땅에 소산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복지사회를 건설하겠다던 저들이 왜 이렇게 거지꼴이 되었습니까? 왜 나라 전체가 거덜나게 되었는가 말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거역한 결과입니다. 이것은 개인과 가정에서도 꼭 같은 원리입니다. 잠언 22:1-4절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 욱 택할 것이니라.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면 <재물>도, <명예>도, <건강>도 다 지켜 주신다는 말 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삶의 법칙입니다. 나라나 개인이나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강해진 나라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풍요로움은 그 자체가 심판입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매우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고 봅니다. 나라의 영원한 번영과 통일의 물꼬를 하나님 손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보 면서 남북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우리 안에 있는 굳은 마음과 우상을 제거하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번에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것을 계기로 무엇인가 새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때가 차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해 긍휼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우리 민족이 그러한 영적 회복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시아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도구로 쓸 나라는 우리 나라뿐입니다. 일본은 우상의 나라요, 하나님 없는 풍요로움의 나라였기에 그 자체가 심판입니 다. 일본의 청소년들과 우리 나라 청소년들의 의식을 비교해 보았더니, 일본의 청소년들에게는 앞으로 행복해질 자신이 없다는 퍼센테이지가 우리 나라보다 훨씬 높았다는 보고를 들어보았습니다. 그 대신 우리 나라 청소년들은 앞으로 자신이 행복해 질 자신이 있다는 수치가 훨씬 높게 나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젊은이들에게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없는 젊은이들은 벌써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 안에 젊은이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들을 위한 기도가 더욱 필요합니다. 저들의 마음속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 을 넣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교육을 생활 교육으로 펄쳐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우리 나라는 기도로 헌법을 제정한 나라였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우(保佑)하는 나라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국가관 /롬13:1-7
국가관 /롬13:1-7 2008-01-18 19:12:41 read : 134 13장도 12장의 연속입니다. 도를 다 배웠으면 이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기독교는 도를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되 섞이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에 동화되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12장에서 쭉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3장에서는 국가에 대한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13장부터는 여러분들이 잘못 생각할 수 있는 기독교의 원리 중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장 1절부터 7절까지의 가르침은 잘 기억해야 합니다. 나름대로 생각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많고 또 한편으로는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13장을 보면서 기독교가 이런 것도 가르치는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3장에서 가르치는 말씀은 그 당시의 상황, 기독교인들이 아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로마 정권에게 큰 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우선 기독교인들이 죽지 않고 안전해야 합니다. 무조건 순교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순교할 때에 순교하고 터질 때 터지고 깨어질 때 깨어져야 하고 돈도 쓸 때 써야합니다. 함부로 죽고 난 뒤에 순교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13장의 이 말씀은 기독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전체적인 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는 너무 정권에 유착되어 갈 것도 아니지만 너무 반대해서도 안 됩니다. 꿋꿋하게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그냥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 로마 정권이 어떻게 했는지 보면 로마 정권은 사도 바울을 억울하게 대하지 않고 상당히 공정하게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역사에 있어서 로마 정권이 기독교를 무조건적으로 어렵게 하거나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네로 황제나 도미치안 황제와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어렵게 했을 뿐 모든 로마 정권이 기독교를 어렵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상당히 많은 정권이 기독교에 대해서 정당하게 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콘스탄틴 대제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공인되고 난 뒤에는 바뀌었지만 그 전에는 로마가 그렇게 불공정하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요한계시록이나 베드로서에 나오는 로마는 한 시대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역사 밖 일반 세계 역사에서 많은 기독교의 위인들이 로마 정부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발언한 기록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원론적으로 무조건 적이고 무조건 아군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적이 어느 날 아군이 되고 아군이 적이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다 내 적일 수 없고 모두가 아군일 수 없습니다. 이는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만 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기본적으로 흐르는 사상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아닙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로 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13장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여기에 뼈가 많습니다. 무조건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주라는 말씀입니다. 세금도 바치고 관세도 바치고 두려워하고 존경도 하라는 것입니다. 단, 줄 사람에게 주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줄 것을 주고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되 아무나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전체의 흐름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전체의 흐름, 국가에 대한 흐름은 어디에 있을까요?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디도서 3장 1절에서는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라고 교인들을 가르치는 목사들에게 목회서신을 주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과 순종을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3~15절에서도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는 로마 정권 하에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제 그 배경을 간단하게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난 후 마지막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하나, 이런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은 유대인들은 지독한 반골 기질이 있기 때문에 반대를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반골기질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지만 너무 많으면 안 됩니다. 말마다 끝마다 토를 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사랑받지 못합니다. 이런 남자는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과 존경을 받지 못하고 아내들은 좋은 친구가 없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유대의 열심당은 유대인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왕을 허락하셨는데도 왕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조공을 받쳐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닙니다. 수동적인 반항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유대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폭력적인 행위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활동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싸워야지만 그때서야 하나님께서 나서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열심당원들은 칼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여러분, 칼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그냥 자기 자리에 서 있을 뿐 칼을 품고 있으면 안 됩니다. 자꾸 다른 사람을 찌르면 안 됩니다. 유대의 열심당원들은 살인과 암살을 직업적으로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정부도 용납하지 않았던 광신적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광신적인 사람이 마치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당원들은 로마 정부에 폭력적으로 저항했고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집을 부수고 그 가족들을 죽이고 암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이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어 버린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 당국은 이것을 대단히 걱정했습니다. 특별히 갈릴리 지역은 늘 폭동이 일어나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런 폭력들은 기독교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 하지 않습니다. 이런 폭력은 비기독교적인 것을 넘어서 반 기독교적입니다. 이런 폭력적인 모습은 기독교에서 어떻게 하든 제거되어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신자들을 선량한 시민으로 지도하는 종교입니다. 또 하나의 배경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생각해 보면 세상 사람들과 똑 같습니다. 우리라고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여성주의자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것이 좀 있습니다. 그동안 눌려져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은 좋습니다. 흑인들의 경우도 흑백의 발란스를 위해서 그동안 워낙 눌러져 있었기 때문에 백인과 똑같이 해서는 자기들의 권리를 찾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워낙 처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백인들보다 더 우위로 올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더 평등을 찾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간접적인 경험만을 통하고 흑인들에 대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제가 걱정스러운 것은 그렇기 때문에 흑인들의 정당한 권리 찾기가 오히려 더 늦추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게 되면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을 더 저해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려면 내 의무를 같이 해나가면서 해야 되는데 그동안 많이 당했으니까 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순환만 계속됩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들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사회는 권리만 누리고 의무를 거절하는 이기주의는 어떤 경우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회사의 신우회의 예를 들면 근무시간을 빼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좀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의무를 거절하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종교이며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이런 의무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 것입니다. 하나 더 나가서 기독교인들은 이타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국가에 권리를 덜 주장하고 의무는 더 담당하는 종교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더 손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고용하면 한 푼이라도 월급을 더 주어야 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회사를 경영하게 되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국가를 보겠습니다. 국가는 어떤 단체입니까? 어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 법을 준수해야 하고 우리는 법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강하고 힘 있는 사람들만의 세상이 될 것이므로 소위 정글의 법칙만 존재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든 모든 국가의 시민들은 국가로부터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국방을 지켜주고 악한 사람들로부터 보호받는 치안을 해주는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혜택을 다 받고 있습니다. 나라라는 큰 권력으로부터 이런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 더는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옷은 다른 사람들이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나 전기, 하수도나 재해방지 시설같은 것은 서로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서로서로 돕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국가입니다. 그런데 이 국가라는 구심점을 통해서 서로 돕고 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일에 가담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마을에서 마을회관에 단지를 갖다놓고는 모두 포도주를 한 사발씩 가져와서 잔치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포도주를 한 사발씩 가져와서 단지에 부었는데 마지막에 모두 모여서 퍼 마셔봤더니 완전한 맹물이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 하나쯤이야 괜찮겠지 하면서 맹물을 가져와서 완전한 맹물이 되었다고 하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는 국가라는 것이 존재하지 못하고 우리는 맹물만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더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 사발 가져오면 기독교인들은 두 사발 가져와야 합니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세계는 항상 약육강식이 가득합니다. 뉴스에 의하면 미국과 일본이 완전한 군사동맹을 한다고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이 들으면 좀 섭섭하겠지만 독일보다 반성을 덜 하는 민족들이기 때문에 언젠가 악한 것이 살아날지 모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덜 계시지 않습니까? 증보기도하시는 분이 이것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전체적인 영적인 것을 봐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선합니다. 그러나 사회악, 국가악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섭습니다. 언제 되살아날지 모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렇게 착합니다. 미안할 정도로 인사도 잘합니다. 그런데 언제 무슨 사회악으로 나올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평회를 누릴 수 있는가? 작은 사회나 큰 사회나 모두 세계적인 평화를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아프리카에 에이즈를 팔아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빈곤을 팔아먹는 나라나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계에 전쟁을 팔아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무섭습니다. 계속해서 빈곤을 만들어 내고 계속해서 전쟁을 만들어 내고 계속해서 병을 만들어 냅니다.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이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만들고 안정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만드는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상당히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국가라는 도구를 쓰십니다. 한국이나 미국뿐만 아니라 로마라는 도구도 쓴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악한 일을 많이 하지만 선한 일도 많이 합니다. 이 도구로 쓰시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국가의 위정자들을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시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로마 시대에는 로마를, 그리고 네로나 도미치안까지도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가 로마 때문에 얼마나 번창해 나갔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의 도로가 기독교가 번창해 나가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주었습니까? 참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국가가 하는 일을, 기독교 교회는 나라가 하는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국가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복종과 순종, 그리고 국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무조건적이거나 무비판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을 때, 신앙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봐야 합니다. 다시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무조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빼앗아 가는 것은 못준다는 것입니다. 당하고만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이유가 있을 때는 두려워해야겠지만 이유없이 두려움을 줄 때에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의 마지막에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는데 아무나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황제라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황제가 존경받을만할 때 존경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라고 무조건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을만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존경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해서 이것을 더 넓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어떤 지도자든 가치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의 가치, 장로는 장로의 가치, 권사나 안수집사가 나름대로의 가치를 만들어 갈 때에 우리는 존경받을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당사자로서 두려움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국가에 대해서 기독교인과 교회는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는 협조를 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야 할 마땅할 이유가 있을 때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